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70화
루드는 주변을 훑으며 이동했다. 지급된 팸플릿에는 각 포인트의 위치가 표시돼 있었지만 정확히 알아보기엔 어려웠다.
딱 대략적인 파악만 가능한 수준.
물론 포인트를 찾는 것 외에도 주변을 세심하게 확인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혹시 정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설산 트롤이 탄생하게 되는 이유.
정수는 막대한 힘을 품고 있었다. 그것을 취하면 순식간에 엄청난 힘을 얻게 됐다. 비록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멸할지라도.
그건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몬스터 또한 마찬가지.
정수를 획득한 몬스터의 운명은 둘 중 하나였다. 정수에 잡아먹히거나, 정수의 힘으로 주변 일대를 모조리 잡아먹거나.
'녀석이 이미 먹었다 해도 상관없다. 지금 시기의 녀석이라면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해볼 만하다.'
자만이 아닌 자신.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경지, 준비된 상태 등을 종합적으로 따졌을 때 내린 결론이었다.
루드는 골짜기로 내려갔다.
몬스터든 정수든, 바깥으로 노출된 위쪽보단 골짜기 안에 있을 확률이 더 높았다.
"생각보다 조용한걸."
협곡 안으로 꽤나 들어온 상황. 그러나 주변에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이상한데. 이 당시의 퓨렐 협곡은 대규모 몬스터 서식지라 들었는데.'
전생에야 설산 트롤이 전부 장악했다지만 아직은 눈 한 송이 내리지 않은 시기.
그럼에도 아직까지 몬스터를 마주치지 못했다.
과거의 기억이나 로하스를 통해 얻은 정보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일단은 포인트를 찾아야겠네."
설산 트롤로 의심되는 녀석은커녕 몬스터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니, 당장은 포인트를 찾는 게 나아 보였다.
'이쪽인가.'
조약하게 표기된 포인트의 위치. 하지만 협곡에서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슬슬 감이 왔다. 여기 표시된 포인트가 어디쯤인지 알 것 같았다.
골짜기를 타고 가던 루드는 다시 능선을 타고 위쪽으로 올라왔다.
예상대로라면 이곳을 넘으면 포인트까지 금방이었다.
그 순간.
크어어어어엉-!!!!!!!
허공을 터뜨리고 대지를 뒤흔드는 하울링.
가파른 절벽을 오르던 루드의 몸이 흔들렸다.
'무슨...!!'
간신히 중심을 잡은 루드는 굳은 표정이었다. 방금 전의 하울링은 일순간이나마 뇌가 흔들릴 정도였다.
하울링을 토하는 몬스터는 여럿 있었다. 대형 몬스터들의 경우 대다수가 그랬고, 작은 몬스터도 특성에 따라 하울링을 하는 개체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하울링은 차원이 달랐다.
"몬스터가 안 보인 건 이것 때문이었나."
여전히 몬스터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 말인즉, 방금 전의 하울링 역시 먼 곳에서 시작됐다는 것. 그럼에도 이 정도의 충격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몬스터는 녀석을 피해 먼 곳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지도 모르겠군.'
하울링의 근원지는 보다 깊은 쪽.
'확인해야 한다.'
어쩌면 설산 트롤의 것일지도 몰랐다.
손에 땀이 흘렀다. 조금 전까지 설산 트롤과의 승부를 자신했으나, 방금 전의 하울링이 녀석의 것이라면... 계산을 다시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물러설 순 없었다. 당장 결착을 내지 않더라도 확인은 해야 했다.
그 전에 루드는 제1포인트의 일을 해결하기로 했다. 제1포인트는 예상했던 대로의 위치에 있었다.
주변과 생뚱맞게 설치된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조각. 자신이 가진 조각과 반응하는 걸 확인한 루드는 조각을 품에 챙겼다.
이것으로 다른 조에 포인트와 관련된 점수를 뺏길 일은 없었다. 여유가 있으면 다른 포인트들도 확인해볼까 했지만, 그럴 시간은 없을 것 같았다.
루드의 시선이 협곡 심처를 향했다.
어마어마한 기파를 뿜어냈던 하울링, 그것을 토해 낸 주인이 안쪽에 있을 터였다.
녀석의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설산 트롤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루드는 천천히 이동했다.
녀석이 어디 있는지, 녀석의 영역이 어디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니 조심히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조심스런 움직임, 날카롭게 세운 감각.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도중 서서히 해가 저물자 밤을 보낼 곳을 찾기로 했다.
'괜히 무리했나.'
상황이 이리 되자 제노스와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아쉬웠다.
완전하지 못한 몸 상태. 다친 왼팔이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일주일은 있어야 했다.
그마저도 정수의 힘으로 얻은 뛰어난 재생력 덕분이었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한 달은 요양했어야 할 상처였다.
"응?"
어느새 내려앉은 어둠에 쉴 곳을 찾던 루드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여기에... 있었다고?"
퓨렐 협곡에 있을 거라곤, 또 이런 식으로 발견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신비의 흔적이었다.
* * *
"오른쪽이다!"
"예. 형님."
레이예스의 창이 허리를 숙인 카이예스의 위를 훑고 지나갔다.
사각에서 들어온 창날에 목이 갈라진 리자드맨.
레이예스의 옆구리를 노리던 다른 녀석들은 카이예스의 검에 양단됐다.
"후우. 후...."
"몬스터가 꽤나 많군요."
"아니. 이 정도면 없는 편이다."
호흡을 정돈한 카이예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리자드맨의 시체만 스물이 넘어가는 상황.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단 턱없이 적은 숫자였다.
'협곡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리자드맨이 이십에서 오십 정도 무리를 지어 다니는 걸 생각하면 딱 맞는 숫자다.
하지만 적다.
방금 상대한 녀석들이 적다기보단, 전체적인 몬스터의 숫자나 조우하는 빈도가 적었다.
일찍이 제노스를 따라 퓨렐 협곡을 방문한 적 있는 카이예스였다.
당시 끝없이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모습에 학을 떼지 않았던가.
다만 벌써 일 년 전의 이야기였으니 그사이 퓨렐 협곡의 환경에 변화가 생겼다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레이예스는 그때 따라오지 않았으니 모르겠지만.'
수행의 일환으로 아버지를 따라나섰던 자신과 달리, 부족에 머물렀던 레이예스였다.
"자세한 설명은 수거 이후에 해 주마."
검에 묻은 피와 살점을 닦아 낸 카이예스는 비수를 꺼내 리자드맨의 왼쪽 귀를 잘랐다.
몬스터 사냥을 입증하고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증거였다.
"레이예스. 뭐하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멍해졌었나 봅니다."
"조심해라. 이곳은 부족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위험이 도래할지 모르니 항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한소리를 들은 레이예스는 카이예스를 따라 리자드맨의 귀를 수거했다.
잠시 후 모든 리자드맨의 귀를 수거한 둘은 다음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퓨렐 협곡엔 몬스터가 많다. 단순히 많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
다양한 생태를 보유한 퓨렐 협곡엔 많은 동식물이 살았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퓨렐 협곡에는 엄청나게 많은 몬스터도 서식하고 있었다.
"협곡 내에서 생태계의 순환이 작용하는지 대체로 개체 수가 적절히 유지되지만 가끔 급증하는 경우도 있다."
급증한 몬스터는 협곡을 빠져나와 주변을 노렸다.
그 모습은 말 그대로 파도와 같아 몬스터 웨이브란 말이 잘 어울렸다.
"이번 시험에 몬스터 사냥 점수가 포함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거다. 몬스터 웨이브를 방지하기 위한 방책 중 하나겠지. 참가자의 용맹을 확인하며 몬스터 개체 수를 줄일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라 생각했을 거다."
설명하던 카이예스가 오른손을 들었다. 뒤따르던 레이예스는 숨죽인 채 따라붙었다.
"트롤이다."
루드와 갈라지고 3일이 지났다.
내일이면 합류하기로 약속한 날.
끊임없이 몬스터를 사냥했지만 카이예스는 스스로의 성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생각보다 몬스터가 적다.'
처음 생각했던 것에 반절밖에 못 미치는 소득. 협곡 내의 몬스터 자체가 줄어든 것이라면 다른 조도 마찬가지겠지만....
"사냥하실 생각입니까?"
"고민 중이다."
본래라면 하지 않았을 고민이었다.
트롤은 대형 몬스터인 데다 특유의 재생력이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인원이 충분하다면 모르겠지만 자신들은 고작 둘. 녀석에게 배정된 점수와 녀석을 상대하는 데 드는 품을 따지면 피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몬스터 자체가 적은 지금 상황에선 효율만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잡을 수 있으면 잡아야 했다.
그럼에도 이리 고민하는 건.
'문제없이 잡을 수 있을 것인가.'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한 걱정 때문.
녀석의 위치를 확인했으니 루드와 합류해서 함께 사냥하는 게 더 안전했다.
하지만 그래선 면이 서지 않았다.
'혼자인가.'
트롤은 무리 생활을 하는 몬스터는 아니었다.
보통 하나, 많아야 셋 정도가 같은 영역에 존재했다.
근처에서 다른 트롤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고, 특별히 느껴지는 기척도 없었으니 녀석은 혼자일 터였다.
"사냥하자."
카이예스는 결단을 내렸다. 녀석을 사냥하기로.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는 법은 기억하지?"
"물론입니다."
레이예스는 카이예스의 결정을 군말 없이 따랐다.
검을 든 카이예스는 당장이라도 트롤에게 달려들 모양새였다.
레이예스는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어느새 창을 세운 레이예스의 눈은 고요했다.
"가자."
트롤의 시선이 반대를 향한 순간. 준비를 마쳤던 카이예스가 벼락같이 튀어나갔다.
크럵?
트롤의 발뒤꿈치를 길게 가르고 지나간 카이예스.
약간의 차이를 두고 따라붙은 레이예스의 창이 갈라진 아킬레스건에 꽂혔다.
크러러럭!!!
난데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트롤.
하지만 둘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몰아쳐야 한다!'
트롤 사냥이 처음은 아니지만, 둘이서 잡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자신들의 협공이라면 충분히 통할 터!
비록 제노스에게는 어림도 없었지만 상대는 제노스가 아닌 트롤이었다.
무엇보다 머릿속에 이미 트롤을 상대하는 방법도 들어 있었고.
'기동력은 뺏었다.'
기습으로 입힌 상처. 이제 녀석은 도망치지도, 빠른 움직임을 보이지도 못한다.
남은 건 상처 입은 녀석을 사냥하는 일뿐.
물론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녀석의 힘과 재생력은 여전히 위력적이었으니.
"피해라!"
파리를 잡듯 내리친 손바닥.
카이예스의 경고에 손바닥을 피한 레이예스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곳을 바라봤다.
'무지막지한 힘...!'
분명 메마른 땅이었건만, 진흙에 손바닥을 찍은 듯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이 보였다.
저런 것에 잘못 맞았다간 즉사다.
"정신 차려!"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쇼. 형님."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은 각자의 역할에 맡게 움직였다.
"하압!"
현란하게 뻗어간 창날이 트롤의 몸 곳곳에 상처를 냈다.
조금 지나면 없어질 수준의 상처이지만, 원래 귀에서 앵앵 거리는 날벌레가 더 신경 쓰이는 법이었다. 성난 트롤이 레이예스를 잡기 위해 날뛰었다.
'한 방에 처리한다.'
트롤의 정신이 레이예스에게 집중된 사이. 뒤를 잡은 카이예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트롤이 까다로운 가장 큰 이유는 재생력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재생력을 무용지물로 만들면?
불이나 독을 쓰면 간단하겠지만 둘 중 무엇도 없으니 선택지는 하나였다.
"비류검 사식. 매의 발톱."
재생이 불가능할 정도의 큰 상처를 내는 것.
카이예스의 검이 트롤의 등을 난자했다.
트롤은 등에 세 갈래의 구멍이 난 채로 쓰러졌다. 마치 매가 발톱으로 긁고 간 것 같은 상처였다.
"후...."
"성공했군요. 형님."
"그래. 잡았다."
생각보다 쉽게 끝낸 싸움.
그에 긴장이 풀리려 할 때.
"!!!!"
카이예스의 안색이 굳어졌다.
재빠르게 검을 쥔 그의 손이 잘게 떨렸다.
"왜 그러십니까."
"도망쳐야 한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전까지 느껴지지 않던 기척들이 느껴졌다.
열, 스물, 서른....
대체 몇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늘어나는 기척.
전부 몬스터의 것이었다.
"...몬스터 웨이브다."
그야말로 몬스터들의 파도.
갑작스런 현상에 카이예스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71화
달이 떠오른 한밤중.
루드는 호숫가에 있었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수면이 달빛이 영롱하게 비쳤다.
차박-.
발을 담그자 수면 위로 작은 파장이 일었다.
루드는 호수 중앙을 바라봤다.
고요한 수면. 가장자리에서 발을 담군 것 정도로는 중앙에 파장을 만들 수 없었다.
발목, 정강이, 무릎, 허리....
루드는 점차 호수 안쪽으로 들어갔다. 호수 중앙에 도착하지도 않았건만 이미 발이 닿지 않았다.
'깊다.'
협곡의 일부이기 때문일까. 그 수심은 밖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깊었다.
발이 닿지 않자 루드는 헤엄치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호수의 중앙. 정확히는 그 아래에 있을 무언가였다.
루드의 움직임에 따라 수면이 흔들렸다.
그러나 호수 중앙의 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건 그곳의 빛이 달빛 때문에 생겨난 게 아니란 의미였다.
후웁-.
크게 숨을 들이마신 루드가 잠수했다.
'있다.'
예상대로 빛의 근원지는 호수 아래였다.
호수 중앙의 가장 깊은 곳. 그곳에 빛을 내뿜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런 운이 따를 줄이야.'
어떤 힘을 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신비를 흡수하지 않을 이유가 되진 않았다.
애초에 신비를 발견하는 건 무척이나 희소한 일.
연이 닿았다면 무조건 취해야 했다.
호수 아래 잠들어 있던 신비에 루드의 손이 닿았다. 신비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찬란한 빛과 함께 흡수됐다.
'변신.'
흡수함과 동시에 깨닫게 된 신비의 힘.
듀얼에 이어 두 번째로 얻은 신비는 '변신'이었다.
'최고군.'
생김새나 신체 일부를 바꿀 수 있는 힘.
극단적으로는 성별까지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소득인데 그 쓰임새까지 다양했으니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전투에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여러 군데서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듀얼과 궁합이 좋았다.
백과 흑으로 나눈 마력을 사용할 때에 맞춰 모습을 바꾸면 지금처럼 가면으로 가리거나 위장할 필요가 없었다.
각기 다른 존재를 연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위장에 대한 고민은 덜었군.'
위장에 일가견이 있는 루드였다. 이미 '단테'로서의 위장도 성공적으로 마치지 않았는가.
전생부터 다져진 위장과 거짓 신분을 사용하는 방식은 익숙했다.
하지만 그를 위해선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당장 머리색을 바꾸거나 면구를 제작하는 것만 해도 많은 품을 들여야 했으니.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지. 무엇보다 즉각적인 대처가 가능해졌다.'
변신의 진가는 '즉각성'에 있었다.
막말로 골목을 지날 때마다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옆을 지나가도 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황.
추후 위장 신분을 사용해야 할 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푸하-!!
참았던 숨을 토하며 수면 위로 올라온 루드는 천천히 헤엄쳐 호수를 빠져나왔다.
'왼쪽 허벅지인가.'
변신 신비로 인한 문신은 왼쪽 엉덩이에서 허벅지를 타고 내려가는 부분에 생겼다.
문신을 확인한 루드는 마저 물기를 짜내며 생각을 정리했다.
'하울링 한 몬스터는 못 찾았지만... 정체는 대충 짐작이 간다.'
위협적인 하울링을 토한 녀석을 찾기 위해 보다 깊은 곳으로 들어왔으나, 녀석을 직접 목격하진 못했다.
쌍둥이와 약속한 시일에 맞추기 위해선 이만 돌아가야 할 때.
다행인 점은 직접 보진 못했지만 녀석의 정체가 짐작이 간다는 것이었다.
'오우거. 어쩌면 트윈헤드일 수도 있다.'
지상 최대, 최악, 최강의 몬스터.
루드는 녀석의 정체가 오우거일 거라 생각했다.
근방에서 발견한 발자국과 변, 동물과 몬스터의 시체를 토대로 종합한 결과였다.
중요한 건 단순히 오우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
오우거 중에도 별개로 취급받는 트윈헤드 오우거라면....
'상황이 심각해질지도 모르겠군.'
당장 오우거만 해도 참가자들 중에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없다.
자신과 휴이도 마찬가지. 일대일로는 승부를 자신할 수 없었다.
괜히 몬스터들의 왕이라 불리는 게 아닌 오우거였다. 녀석들의 수가 많고 무리 생활을 했다면 진즉 대륙을 집어삼키고도 남았을 터였다.
스르르륵-.
대충 말린 옷을 다시 입었을 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 나타났다.
슬쩍 미소 지은 루드는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손을 타고 올라온 무언가가 소리를 냈다.
뀨-!!
* * *
난데없는 몬스터 웨이브.
카이예스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근방에 몬스터들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이래서였나!'
몬스터 웨이브의 영향이라면, 협곡 내부의 환경이 지난번과 달랐던 이유가 설명됐다.
하지만 이유를 분석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레이예스! 따라와라! 절대 내 뒤를 놓쳐선 안 된다."
"예. 형님."
카이예스는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자칫하면 죽을 위기. 긴장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탈출해야 한다.'
당장 몬스터 웨이브의 규모를 파악할 순 없지만, 이곳만 벗어나도 어느 정도 숨이 트일 것이다.
'전사의 시험을 감독하기 위해 심사관들이 배치돼 있을 것이다.'
이상 현상을 감지했다면 분명 조치를 취할 터.
지금으로선 그들과 힘을 합쳐 대처하는 게 최선이었다.
생각하는 사이 몬스터 무리는 어느새 지근거리에까지 닿아 있었다.
카이예스는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몬스터가 쓰러졌다.
레이예스는 초조한 카이예스의 뒤를 따랐다.
카이예스의 말대로 그의 뒤를 놓쳐선 안 됐다.
그랬다간 기껏 불러 모은 몬스터들이 목표를 잃고 흩어질 테니.
'열심이시군.'
쏟아지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카이예스는 분투 중이었다.
발목을 잡히는 순간 치명적인 상황이란 걸 알기에, 한 순간도 정신을 팔지 않고 집중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카이예스는 알 수 없었다.
뒤따르는 레이예스가 어떤 상태인지, 또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세로로 길게 변한 레이예스의 동공은 마치 뱀의 것 같았다.
카이예스를 바라보는 무기질적인 눈은 자색으로 빛나는 중이었다.
'어머니의 부탁은 해결했고.'
이번 시험 직전, 레이예스는 소크란으로부터 은밀한 부탁을 받았다.
루드가 더 이상 시험을 못 보게 해 달라는 부탁.
최소한 우승을 하게 둬선 안 된다는 당부와 함께였다.
지금의 일은 그 부탁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죄송하지만, 잠시 요양하셔야겠습니다. 형님.'
아무리 카이예스라지만 몬스터가 끊임없이 몰려오면 언젠가는 지칠 터.
카이예스의 부상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레이예스는 그걸 빌미로 루드를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카이예스의 부상을 루드가 야기했다고 주장하면서.
'직접 상대하긴 껄끄러우니.'
카이예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식을 잃은 척했지만, 레이예스는 제노스와 루드의 전투를 정확히 기억했다.
소드마스터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던 위용,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부상을 감내하는 결단력.
'그런 녀석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단순히 무력을 넘어 정신력까지 강했다. 굳이 그런 상대와 직접 맞설 필요가 없었다.
그 타이밍에.
"크악!"
막혀 있던 둑이 터졌다.
카이예스가 어깨를 움켜쥐었다. 어깨를 덮은 손 위로 피가 울컥 새 나왔다.
"형님!"
"괜찮다. 그보다 시간이 없다. 몬스터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서둘러야 한다."
다시 몸을 일으킨 카이예스.
'...여기서 죽일까.'
그 모습을 보는 레이예스는 잠시간 고민했다.
카이예스가 죽으면 루드에게 더 큰 누명을 씌울 수 있었다.
겸사겸사 족장 자리의 경쟁자도 제거할 수 있었고.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냐. 아직은 아냐.'
지금은 때가 아니다. 부상과 죽음은 차원이 달랐다. 자칫 카이예스를 죽였다간 루드만이 아니라 자신까지 용의선상에 오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카이예스는 언제고 처리할 수 있었으니, 굳이 급할 이유가 없었다.
'죽지 않게 잘 조절해야겠어.'
코앞까지 다가왔던 몬스터들을 약간 물렸다.
죽지 않을, 그러나 후유증이 남을 정도의 부상이 딱 좋았다.
이번 시험에서도, 나중의 중요한 시험에서도.
사냥감이 죽지 않게 목을 죄던 고삐를 살짝 푼 레이예스는 혀를 찼다.
'벌써 왔나.'
바깥쪽부터 끊기는 몬스터와의 싱크.
"다행히 무사하군."
예상대로, 루드가 나타났다.
* * *
이상함을 느낀 건 조금 전이었다.
근방의 몬스터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 한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몬스터 웨이브의 징조인가 싶었지만, 아니란 걸 깨달음과 동시.
'이건...!'
루드는 달리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이 움직이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였다.
"벌써 본색을 드러냈다고?"
카이예스와 레이예스. 두 쌍둥이는 같지만 달랐다.
비슷한 외모를 지녔지만 머리색이 다르듯, 그 성질 또한 천지차이였다.
'카이예스는 살려야 한다.'
각기 까마귀와 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쌍둥이.
한날한시, 같은 배에서 나온 둘이었지만 성격도, 사고관도, 행동하는 방식도 달랐다.
'아직은 괜찮을 거라 여겼건만.'
그렇기에 두 쌍둥이만 놓고 움직였다. 이때까지 아무 사건이 없었기에 당장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등장이 문제였을까.
둘의 관계에 변화가 생기려 했다.
전생보다 훨씬 이른 시기였다. 몰려드는 몬스터 무리가 그 증거.
"레이예스...!"
소크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레이예스는 뱀 부족의 환혹을 타고났다.
역대 뱀 부족 최고라는 소크란의 핏줄답게 레이예스의 환혹 또한 대단한 힘을 자랑했다.
그것이 세상에 알려졌던 건 뱀 부족과의 전쟁 당시. 전생에서 소크란과 함께 뱀 부족으로 건너간 레이예스는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지금 몰려드는 몬스터들은 전부 레이예스의 환혹에 당한 것이었다.
일전 여명 부족에서 봤던 몬스터들보단 상태가 좋아 보였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정상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레이예스의 무서운 점은 스스로를 감춘다는 점이었다.
카이예스에 필적하는, 혹은 뛰어넘을 무력을 갖추고도 카이예스의 그늘에 숨어 자신이 원하는 상황이 될 때까지 숨죽인 채 기다렸다.
냉철히 상황을 판단하고 긴 시간을 인내할 수 있는 정신.
마침내 레이예스가 본색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일단은 카이예스를 구하는 게 먼저다.'
레이예스에 관한 건 나중으로 미룬다.
지금 생각한다 해서 당장 처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녀석은 아직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자칫하면 역으로 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다만 카이예스는 살려야 했다.
전생의 그에겐 빚이 있었으니.
'늦지 않았다.'
루드는 쌍둥이를 둘러싼 몬스터 무리를 뚫었다.
근방의 몬스터들을 죄다 불렀는지 대규모의 무리였지만, 루드의 일점돌파를 견딜 녀석은 없었다.
"다행히 무사하군."
마침내 도착한 루드.
'최악의 상황은 아닌가.'
카이예스가 부상을 입긴 했지만 심각하지 않았다. 잠시간 레이예스를 노려본 루드는 둘 앞에 섰다.
"길은 내가 뚫지. 레이예스, 넌 카이예스를 보조해라."
"...면목 없군."
레이예스에게 등을 내보이는 게 걸리긴 하지만 카이예스가 있으니 엄한 짓은 못할 터.
만약 미친 척 손을 써도 상관없었다.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고, 그걸 빌미로 역으로 압박할 수도 있을 테니.
하지만 예상대로, 레이예스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완벽한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그였다.
때문에 루드로서는 이번 일이 더욱 의아했다.
"대단하군."
루드의 뒤를 따르는 카이예스는 감탄을 내뱉었다.
쏟아지는 몬스터에도 루드의 검엔 망설임이 없었다. 약간의 멈춤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가 웨이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황.
상황이 급변한 건 그때였다.
크허허허헝-!!!!!!
세 사람의 균형이 동시에 무너졌다.
그 순간, 카이예스는 보았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중심을 잃은 숱한 몬스터들을. 여태 보았던 어떤 표정보다도 심각하게 굳은 루드의 표정을.
"녀석이다."
루드가 이를 악물었다.
카이예스가 죽는 것만큼이나 최악의 상황이었다.
곧, 세 사람의 시야에 오우거가 나타났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72화
"오, 오우거...!"
경악에 찬 외침.
희망이 보이던 찰나에 오우거라니! 정신이 아찔했다.
카이예스는 재빨리 루드를 바라봤다. 그라면 무언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다행히 트윈헤드는 아니다.'
짐작했던 대로 녀석은 오우거였다. 머리가 하나였으니 트윈헤드는 아니었다.
다만, 웬만한 트윈헤드보다 커다란 덩치였다. 일반적인 오우거와 비교하면 머리 두 개는 더 큰 사이즈.
'서둘러야 한다.'
루드는 검을 고쳐 잡았다.
검을 쥔 팔뚝은 어딘가 허전했다. 평상시라면 슬라브가 있었을 자리.
슬라브는 나름의 역할을 맡아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몸 상태는 어떻지?"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니다."
어깨 부상을 당했지만 아프다고 징징댈 때가 아니었다. 팔이 끊어지더라도, 더 이상 검을 잡을 수 없게 되더라도 검을 휘둘러야 할 때였다.
"나 혼자서는 녀석을 못 잡는다."
일대일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다른 몬스터로 가득한 주변이었다.
녀석들을 신경 쓰면서 상대할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휴이가 그립군.'
휴이가 함께였다면 온전히 오우거와의 싸움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합공할 때도 훨씬 편했을 것이고.
그러나 자리에 없는 휴이를 그리워해 봤자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둘이서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겠지?"
"목숨을 걸어서라도 해 보이지."
더 이상 오가는 말은 없었다. 주변의 몬스터를 맡긴 루드는 곧장 오우거에게 달려들었다.
'처음부터 전력이다.'
간격을 재고, 힘을 파악하는 과정을 거칠 만큼 여유로운 상대가 아니다.
한 수 한 수에 전력을 담아야 했다.
쾅!!!
루드의 도약과 함께 내리꽂힌 오우거의 주먹.
거리를 좁히며 주먹을 피하고 검을 휘둘렀다. 마력을 가득 담은 검이 오우거의 무릎을 노렸다.
'녀석을 꿇리는 게 우선이다.'
오우거를 죽이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목을 자르는 것.
말은 간단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방법이었다.
일단 오우거의 목은 높이 있었다. 나무에 올라가야 겨우 닿을 정도의 높이였다.
오우거의 목에 닿는다 해도 질긴 가죽을 찢고 단단한 뼈를 갈라 내야 했는데, 이는 마력이 담긴 검으로도 어려운 과정이었다.
'하지만 해야 한다.'
스걱!
무릎을 길게 베어 낸 검.
"...뭣?"
하나 터져 나온 건 오우거의 피가 아닌 루드의 경악이었다.
상처 하나 없는 오우거의 무릎.
그 순간, 루드는 녀석이 씨익 웃는 것을 느꼈다. 마치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이.
쿵!
오우거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찍은 땅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크흐으으. 무릎을 일으킨 오우거는 입맛을 다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앞에 있었건만, 어느새 보이지 않는 쥐새끼였다.
어디 있을까. 도망간 걸까?
아니, 그렇진 않을 것이다. 어딘지 정확히 알 순 없었으나 자신을 향한 살의가 느껴졌다.
"첫 번째 검, 인간도."
역시나 다시 모습을 드러낸 쥐새끼는 나무에서 뛰어내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목을 노리려는 심산.
'말도 안 돼.'
인간도를 펼침과 동시, 루드는 보았다. 오우거의 입가에 피어난 미소와 자신을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을.
콰아아앙-!!!!!
루드의 검과 오우거의 주먹이 맞부딪쳤다.
팽팽한 힘겨루기. 그 여파로 검을 휘두른 루드는 얼마간이고 공중에 떠 있는 채였다.
'....'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힘겨루기는 루드가 검을 비껴 내며 끝을 고했다.
공격 실패 후 착지한 루드는 계획을 변경했다.
녀석을 잡는 건 무리였다.
'완벽하게 사각을 노리고 들어갔는데도 막혔다. 심지어 그냥 공격도 아니고 인간도의 묘리를 담은 공격이었는데.'
순수 파괴력에 집중되진 않았지만, 현재 루드가 보일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검이 인간도였다.
한데 녀석은 사각을 파고든 인간도를 간단하게 받아 냈다.
'무엇보다 방금 전의 기운.'
그리고 녀석의 주먹과 맞부딪친 검을 타고 흘러 들어온 기운.
알고 있는 기운이었다. 무척이나 익숙한, 절대 모를 수 없는.
"정수."
작은 읊조림이었으나 소리의 크기론 담기지 않을 충격이 들어 있었다.
오우거에게서 느껴진 기운은 분명 정수의 힘이었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설산 트롤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전성기 때의 설산 트롤만큼, 혹은 그보다 까다로운 상대였다. 트롤만큼의 재생력은 없겠지만 몬스터들의 왕으로 꼽히는 오우거였다.
그런 녀석이 정수의 힘까지 품었으니....
'아니, 재생력도 갖췄다고 봐야 하는 건가.'
정수의 힘을 통해 기존엔 없던 재생력도 갖췄을 것이다.
그렇다면 단언할 수 있다.
'지금으로선 무리다.'
튀는 게 상책.
루드는 흘깃 카이예스를 바라봤다. 그도 많이 지친 기색이었다.
때마침 카이예스가 루드를 바라봤다.
눈빛을 교환한 둘은 결정을 내렸다.
일단은 돌아가서 사태를 알리는 게 우선이다.
'몬스터 웨이브야 가짜라지만, 녀석의 존재는 무조건 알려야 한다.'
이곳에 몰린 몬스터야 레이예스 때문이었으니 걱정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우거는 다르다. 어떻게 해서든 바깥에 위기를 알려야 했다.
한편, 두 사람이 도주를 준비할 때. 레이예스는 다른 세계에 빠져들었다.
'대단하다...!!'
막대한 힘. 끊임없는 체력. 마력을 담은 공격에도 상처 하나 나지 않는 내구력.
녀석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다면, 자신의 발밑에 두고 부릴 수만 있다면....
생각만 해도 황홀했다.
그 순간, 레이예스와 오우거의 눈이 마주쳤다.
어느새 환혹의 힘을 개방한 레이예스의 눈은 세로로 찢어진 동공에 선명한 자색을 띈 채였다.
'이리로 와라. 내 말을 들어라. 내 명령에 복종하고, 내가 원하는 모든 걸 가져와라.'
키이이잉-
레이예스와 오우거 양쪽에서 자색의 실 가닥이 뻗어 나왔다.
오직 레이예스의 눈에만 보이는 광경.
이 실 가닥이 연결돼 견고한 실이 완성되면 녀석은 자신의 것이었다.
실 가닥이 점차 가까워질수록, 연결된 가닥들이 붙으며 두꺼워질수록, 레이예스의 얼굴에 환희가 차올랐다.
크흥-!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오우거가 콧바람을 토함과 동시, 연결된 실이 얼어붙었다.
"쿨럭!!"
실을 얼린 한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레이예스의 내부로 침투했다.
생전 느껴 보지 못한 지독한 한기.
피를 토한 레이예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더듬었다.
환혹의 힘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눈이 보이지 않았다.
"레이예스!"
갑자기 피를 토하는 모습에 깜짝 놀란 카이예스.
'역으로 잡아먹힌 건가.'
루드는 혀를 찼다.
방금 전 레이예스가 무엇을 했는지 짐작됐다.
환혹의 힘으로 눈앞의 오우거를 얻으려 했겠지.
'어림도 없는 일. 녀석은 절대 환혹의 힘에 구속될 급이 아니다.'
일반 오우거만 해도 마법이나 주술에 뛰어난 저항력을 갖고 있다.
루드가 알기로 소크란 또한 오우거를 상대론 심사숙고해서 힘을 펼쳤다.
정신과 신체를 한계치까지 몰아붙이고 나서야 환혹을 시도했는데, 자칫 실패했다간 역으로 데미지를 입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정수의 힘을 품은 오우거야 말할 것도 없다. 안 그래도 강한 녀석이 더욱 더 강해졌으니.
제노스라 하여도 일대일로는 녀석을 이기지 못할 터였다.
그런 녀석에게 환혹의 힘을 건다?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잘됐다.'
이로써 당분간은 요양을 면치 못할 것이다.
까다로운 상대가 알아서 사라져 준 꼴.
그 증거로 환혹의 힘에서 풀려난 몬스터들이 혼비백산 도망치고 있었다.
물론.
"살아 돌아가는 게 먼저겠지만."
주변의 공기가 서서히 차가워지고 있었다.
오우거가 품은 정수의 힘 때문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꼼짝없이 오우거의 영역에 갇힐 판국.
"루드!"
그러나 상황이 꼭 최악만은 아니었다.
"드디어 왔나."
멀리서도 알 수 있는 휴이의 목소리.
그 옆에서 뀨! 하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세상에... 이게 대체."
나타난 건 휴이뿐만이 아니었다. 시험에 참가한 다름 참가자들과 시험을 감독하기 위해 자리했던 심사관들도 함께였다.
"네 말대로 전부 모아 왔어."
"고생했다."
"뭘. 말도 안 통하는데 설명하느라고 슬라브가 고생했지."
루드는 슬라브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었다. 휴이를 찾아서 협곡 내의 모두를 데리고 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몬스터 웨이브를 대비하고자 한 일이었는데, 의도와 다르게 오우거를 상대하게 된 판이었지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로하스, 너도 있었나."
모인 이들 중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심사관들과 함께인 로하스였다.
"오우거다."
"그건 보면 알아."
"문제는 그냥 오우거가 아니란 거지."
녀석은 그냥 오우거가 아니었다. 규격 외의 오우거였다.
"녀석의 존재를 부족에 알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살아남아야겠지."
모두가 모였으니 그 확률이 조금은 높아졌을 것이다.
"한 번에 밀어붙어야 한다. 그래야 도망갈 틈이라도 만들 수 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 소드마스터가 아닌 이상 단독 공격으로 유의미한 데미지를 입히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공격이 하나가 아니라면? 참가자와 심사관들 모두의 전력을 담은 공격이 한시에 쏟아진다면?
'이게 최선이다.'
사실 먹힐지 안 먹힐지 모른다. 그래도 이게 가장 확률 높은 방법이었다.
"모두 준비해라."
일개 참가자의 명령. 그러나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오우거가 내뿜는 존재감. 피부로 느껴지는 한기. 루드의 말에 담긴 무게감.
그 모든게 자연스럽게 루드의 말을 따르게 만들었다.
크흐으으으!!!
늘어난 쥐새끼들을 감상하던 오우거는 콧바람을 뿜었다.
그와 동시.
"지금!"
루드의 신호가 떨어졌다.
"하앗!!"
"철성퇴!"
"바람 가르기!!!"
공격들이 쏟아졌다. 하나같이 각자가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들이었다.
개중에도 눈에 띄는 공격이 있었으니,
'명중, 위치는 심장.'
명중 신비를 활용해 점멸하듯 나타난 휴이가 심장을 타격했다.
일순간 멈춘 오우거의 움직임. 그 틈을, 루드가 비집고 들어갔다.
'도망칠 시간을 벌려면 최대한 큰 타격을 입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 꺼내드는 건 전생에서부터 고안한 세 가지 검 중 두 번째, 지옥도.
세 가지 검 중 가장 뛰어난 파괴력을 지닌 지옥도는 루드가 보고 걸었던 '지옥'이 담긴 검이었다.
다만, 지옥도를 꺼내든 건 모험이었다. 현재의 상태에서 완전히 펼쳐 내기엔 무리인 검.
성공적으로 펼쳐 낸다 하더라도 반동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망설일 여유 따윈 없다.
"두 번째 검. 지옥도."
루드의 손에서, 지옥이 펼쳐졌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73화
지옥.
성국에서 이르길, 죄를 지은 이들이 죽음 이후 구원 받지 못하고 끊임없이 벌받는 곳.
하지만 루드의 생각은 달랐다.
지옥의 모습은 다양했다. 죽어서가 아닌 지금에도, 어느 곳에선 지옥이 펼쳐져 있다.
먹을 것이 없어 태어나자마자 죽임당하는 갓난아기.
길에 서 있는 걸 보았음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은 마차에 치여 죽은 꼬마.
자식의 죽음에 울부짖다 실성한 아낙네.
작게는 한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마을, 도시, 국가를 넘어 대륙까지. 루드는 여러 지옥들을 목격했다.
지옥은 결코 죽음 이후에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웃을 때, 누군가는 피눈물을 흘렸다.
누군가 배불러 음식을 남길 때, 누군가는 음식 찌꺼기 때문에 타인을 살해했다.
누군가 여흥을 즐길 때,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몸을 팔았다.
'쓰으으....'
피눈물 흘리던 이의 회한.
고작 음식 찌꺼기 때문에 살인자가 된 이의 분노.
타인의 여흥에 제 몸을 판 이의 조소.
그 외에도.
시기, 질투, 슬픔, 저주, 살의, 무기력, 미움, 불안, 허무, 초조, 고독, 비참, 불평, 불만, 상심, 시샘, 절망, 침울, 회의, 좌절, 참담, 배신, 경멸, 증오, 열등....
그 모든 부정적인 힘을 검으로 모은다.
지옥에 살던, 살 수밖에 없었던, 그러나 아무 죄도 짓지 않았던 이들의 한.
동시에 그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이들에 대한 적의.
"지옥도."
콰드드드득------!!!!!
인지가 뒤틀린다.
비단 인지만이 아니다. 루드가 펼쳐 낸 지옥을 따라 세계가 뒤틀렸다.
오우거의 가슴팍에 기다란 상처가 생겼다.
슬로우 마법이라도 걸린 듯 느릿하게 확장되는 상처.
하지만 오우거는 검을 막거나 피하는 어떤 대처도 하지 못했다.
...크릉.
기실, 상처의 완성은 순식간이었다.
그저 뒤틀린 세계와 인지의 영향으로 개미가 기어가듯 천천히 벌어지는 상처만이 남았을 뿐.
사람만 한 길이의 상처. 그 깊이도 갈비뼈가 드러날 만큼 깊다.
다만 피가 흐르는 일 따위는 없었다. 상처를 따라 곧바로 환부가 썩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크으어어어어어!!!!
여태 느껴 보지 못한 고통.
단순히 고통만 문제가 아니었다. 상처를 통해 흘러 들어온 마력이 내부를 헤집었다.
모든 상처들을 금방 회복시키던 정수의 힘도 지금만큼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대로 있으면 몸 전부가 좀먹힐 터.
그 순간에 오우거는 결단을 내렸다.
격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기민한 판단을 한 건 오롯이 스스로가 지닌 격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쾅!!
자신의 가슴을 내리친 주먹.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두 번으로 안 되면 세 번. 녀석은 쉴 새 없이 제 가슴을 내리쳤다.
그러자 지옥도로 인한 상처가 얼어붙었다.
겉면의 상처뿐만이 아니었다. 정수의 힘은 몸 안에 남아 있는 지옥도의 기운까지도 모조리 동결시켰다.
크르...!
일련의 과정이 끝난 오우거의 가슴엔 커다란 얼음 결정이 붙어있었다.
마치 흉터 같은 모양새로.
크르르, 크어어어어어엉!!!!!
협곡 전체를 울리는 포효.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외침이었다.
주변에 있던 나무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졌다.
죽인다, 죽인다!
짓뭉개 터뜨려 버리겠다!
생전 느껴 보지 못한 분노.
하나 지금 당장 해소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쥐새끼들은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후였으니.
오우거는 인간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따라가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도 가슴팍에 자리한 얼음 때문. 당장 위급한 상황을 막기 위한 조치였으나 이 또한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쾅! 콰앙! 쾅! 콰아앙!!
오우거는 사정없이 주변을 두들겼다. 나무며 바위며 할 것 없이 오우거의 손에 닿은 모든 것이 터져 나갔다.
압도적인 파괴력.
고작 분풀이에 불과했으나 협곡 전체가 울릴 정도였다.
크흥!
한동안 분노를 표출하던 녀석은 콧바람을 내뿜곤 결국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분명 녀석들이 다시 찾아올 터.
녀석들을 죽이는 건 그때였다.
* * *
로하스는 뒤를 돌아봤다. 벌써 오우거와는 거리가 꽤 벌어졌다. 이대로라면 무사히 탈출이 가능한 상황.
하지만 마음이 편안하진 않았다.
"무슨 저런 괴물이..."
분풀이를 하는 듯 연신 이어지던 굉음.
소리만이 큰 게 아니었다. 도망치는 중간중간 발밑이 흔들릴 정도였다. 녀석이 날뛰어서 일어난 현상이 분명했다.
먼 거리에서도 선명히 느껴지는 존재감은 녀석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괴물인지를 증명했다.
기가 차는 건 지금 느껴지는 존재감이 안도감을 준다는 것.
직접 마주했을 때 느꼈던 압박감과 존재감은 지금과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었으니....
"루드는 좀 어때."
"모르겠어. 얼른 의식을 회복해야 할 텐데."
휴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루드는 정신을 잃고 휴이의 등에 업혀 있는 상태였다.
'도움이 못 됐다.'
도망칠 기회를 만들기 위해 모두가 합공하던 순간.
휴이는 깨달았다. 쏟아지는 공격들이 녀석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다는 걸.
비단 휴이만이 아니었다. 공격을 끝낸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혼신의 일격들이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건 고작 오우거의 시선을 잡아끄는 정도.
그나마 휴이의 공격이 유효했으나, 그것도 한순간의 틈을 만드는 수준에 불과했다.
'루드라면 애초에 그 정도만을 원한 거겠지만.'
최후에 가한 루드의 공격.
지옥도란 이름의 검을 본 순간 확신했다.
모두에게 합공을 요구한 것은 저 공격을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음을.
루드는 자신들론 녀석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무리하게라도 힘을 끌어 쓰려 한 것이고.
'지옥도라고 했나.'
마력에 휩싸여 검을 휘두르는 루드의 모습은 꼭 흉신악살 같았다.
지옥도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
아마 당장 펼쳐 내기엔 무리인 기술이었을 것이다.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마력을 담은 공격으로도 상처 내기 어렵던 녀석의 가죽을 한순간에 찢어 낼 정도의 파괴력이었으니.
'그게 끝인 것 같지도 않았고.'
단순히 파괴적인 걸 넘어 부가적인 효과도 있는 것 같았다. 인간도를 생각해 보면 높은 확률로 그럴 터였다.
어쨌든 무리하게 검을 펼친 결과, 루드는 정신을 잃었다.
깨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휴이는 걸음을 서둘렀다. 얼른 돌아가 루드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 * *
루드는 눈을 떴다.
지옥도를 쓴 여파 때문인지 몸이 무거웠다.
"휴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이 어딘지 감이 오지 않았다.
검은색의 공간... 빛 한 점 없는 공간은 마치 밀실 같았다.
'까마귀 부족으로 돌아온 건가? 휴이는 무사한가? 슬라브는 어디 갔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낄 때쯤, 시야가 변했다. 새까맣던 세계에 빛과 색이 생겨났다.
"...."
새로이 펼쳐진 건 붉은 세계였다.
진하고, 어딘가 끈적이는 느낌의 붉음은 피 같았다. 석양이 지는 듯 붉게 물든 하늘에선 까마귀가 울었다.
아래로 내려온 시선엔 어느새 다른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붉게 물든 대지.
그 위로 가득한 시체들로부터 흐른 피는 땅을 물들이고 강을 만들었다.
이윽고 피에서 생명이 태어났다.
피가 모인 웅덩이에서 태어나는 그것은 작은 아이들이었다.
아장아장 기던 아이들은 어느 순간 걷더니, 이내 성인으로 변했다.
왜? 왜? 왜?
우리가 왜 죽어야 해?
죽기 싫어. 살려줘. 네가 죽어.
똑같은 소리를 뱉으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그들.
'그렇군.'
그제야 루드는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이곳은 내 지옥인가.'
* * *
퓨렐 협곡에서 벗어난 일행들이 까마귀 부족에 도착한 건 아침이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이동한 그들은 복귀하자마자 제노스를 찾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제노스는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찾아온 이들의 행색이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냐?"
"예. 저희 모두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퓨렐 협곡에서 마주했다는 오우거.
협곡에 오우거가 있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퓨렐 협곡은 많은 몬스터가 살아가는 곳이었고 이전에도 오우거가 발견되곤 했으니.
하지만 녀석의 존재는 명백히 이상했다.
아무리 몬스터 중 최강으로 꼽히며 마스터가 아니고서야 상대하기 어려운 오우거라지만, 녀석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그 존재감도 그 힘도 기존에 알던 오우거와는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
"마법을 쓴다고?"
"정확하진 않았지만 그런 것 같았습니다. 한순간에 제 몸에 난 상처를 얼려 버렸습니다."
"오우거가 마법을 쓸 리가...."
얼음을 만들어 내던 녀석.
도망치는 와중이라 정확하게 파악하진 못했지만 갈라진 녀석의 가슴을 메운 건 분명 얼음이었다.
제노스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마법에 해박하진 않았지만 오우거가 마법을 쓴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건 잘 알았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목소리로 얘기하니 헛소리로 치부할 수도 없는 상황.
"신비를 얻었을 확률은 없나?"
"그 경우가 더 가능성 있겠군요. 얼음과 관련된 신비를 얻었다면 녀석이 보여 준 모습도 가능합니다."
제노스의 생각이 미친 건 신비였다. 마법과 달리 신비라면 몬스터도 충분히 다룰 수 있는 힘.
그때 의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마법도 신비도 아닐 수 있어요."
제노스의 것도, 심사관의 것도 아닌 목소리의 주인은 휴이였다.
마법이 아니지만 마법 같은 힘.
순식간에 상처를 동결시킨 힘.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하는 그게 맞다면 규격 외였던 오우거의 힘도 이해가 됐다.
'녀석이 정수의 힘을 얻은 거라면 그렇게 강한 것도 이해가 가.'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취해도 엄청난 힘을 가질 수 있는 정수의 힘이다.
그만큼 엄청난 부작용을 가져온다지만....
오우거가 정수를 먹었고 그 부작용을 이겨 내고 있다면.
'하... 답도 없는 상황이네.'
자신들의 공격이 하나도 안 통한 게 당연했다.
어째서 루드가 그렇게까지 무리한 건지도 알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마법도 신비도 아니라니. 무언가 알고 있나?"
제노스의 눈이 휴이를 응시했다. 휴이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물려 주세요."
"다른 사람에겐 말할 수 없는 정보란 건가."
끄덕.
제노스는 고민에 빠졌다.
남들 앞에서 말하지 못하는 정보가 갖는 신뢰도는 얼마나 될까.
"그의 말을 들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로하스가 휴이를 지지했다.
'황혼 부족에서 함께 움직였다는 녀석들이 저 녀석들이었던 건가.'
제노스의 시선이 로하스에 닿았다.
까마귀의 눈 소속인 녀석은 자신이 아끼는 부하였다. 부족에 대한 충성도도 높고 맡은 바 일에 대한 책임감도 뛰어났다.
얼마 전 자신의 부탁으로 황혼 부족을 다녀왔었는데, 그때 도움을 받았다던 이가 휴이인 듯했다.
타인을 평할 때 박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 저리 말할 정도라.
"좋다. 그 전에, 이번 전사의 시험은 여기서 종료하는 걸로 하지."
결정을 내린 제노스는 모두를 물리기 전에 전사의 시험 종료를 고했다.
상황이 이리된 마당에 전사의 시험을 치를 여유는 없었다.
이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토벌대를 편성해 퓨렐 협곡의 오우거를 잡아야 했다.
녀석이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상황.
만약 협곡 내의 몬스터들과 함께 밖으로 나오기라도 한다면 대참사였다.
"너희들은 전부 전사의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다. 그만한 괴물로부터 살아 돌아와 위기를 알린 이들을 전사가 아니면 뭐라고 할까."
"...."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나 또한 마음이 편치는 않다. 시험이 이리 끝나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하나 더 이상 시험을 이어가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제노스는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췄다.
"...그러면 우승자는 누가 되는 겁니까?"
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이들 또한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심각한 상황에 차마 물어보지 못하던 중이었다.
시험은 이리 끝나더라도, 소원권을 가져갈 우승자는 정했으면 했다.
"그건 내가 물어봐야 할 것 같군."
우승자에 관한 제노스의 답은 간단했다.
자신은 우승자를 가릴 수 없었다.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알지 못했으니 우승자를 판단할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달랐다.
"우승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루드라고 생각합니다."
그 질문에 가장 먼저 답한 건 뜻밖에도 카이예스였다.
"오우거에게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모두 녀석 덕분이었습니다. 녀석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맞네."
"순간이나마 욕심에 눈이 멀어 염치가 없었소."
모두는 순순히 인정했다. 제노스가 정한다면 모를까, 자신들에게 묻는다면 답은 하나였다.
이곳의 모두가 루드에게 목숨을 빚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결론이 났군."
어수선한 가운데, 전사의 시험이 끝났다.
우승자는 루드였다.
여전히 의식을 되찾지 못한.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74화
까마귀 부족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전사의 시험 중단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
심지어 귀환한 참가자들을 목격한 이들의 말이 퍼지며 불안감이 커져갔다.
"토벌대를 소집한다."
제노스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부상을 입은 참가자들을 쉬게 하는 한편, 오우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토벌대를 조직했다.
까마귀 부족을 대표하는 무력 부대들의 최정예와 족장 직속의 정예가 토벌대로 차출됐다.
그렇게 소집된 토벌대는 익스퍼트 상급이 열에 중급이 서른.
소드마스터인 제노스까지 더하면 당장 다른 부족과 전쟁을 치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다른 임무 때문에 외부로 나가 있는 인력을 제외하면 까마귀 부족의 최고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수준.
직접 토벌대를 차출한 제노스는 많은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곧장 출발하지 않았다. 대신 퓨렐 협곡을 다녀왔던 이들을 하나하나 만나며 정보를 모았다.
오우거의 특징부터 힘, 서식지, 전투 방식, 습성... 그날의 분위기와 기분, 날씨까지.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질문들도 있었으나 질문을 받은 모두는 성실히 대답했다.
제노스는 소드마스터. 범인의 범주에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깨달을 수도 있었다.
토벌대의 소집과 오우거에 대한 정보 획득, 그 정보를 토벌대와 공유하고 작전 회의를 마치기까지.
그 모든 과정에 걸린 시간은 고작 이틀이었다.
그리고 삼 일째 되는 날 새벽, 토벌대가 오우거를 사냥하기 위한 길에 나섰다.
* * *
죽기 싫어. 살려 줘.
죽어. 엄마. 죽기 싫어.
죽어. 아빠. 살려 줘.
형아. 왜? 죽어. 죽여 줘.
저주할 테다. 여보. 죽기 싫어.
헤헤헤헤. 왜 나야? 살려 줘. 너도 가자. 싫어. 끔찍해. 구해 줘.
소리가 메아리처럼 귀를 파고들었다. 켜켜이 쌓이는 소리는 어떤 말을 하는지 알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귀를 후벼 파는 듯 끔찍한 이명.
루드는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귀에서 흐른 피가 손에 묻었다.
"끄으...."
하지만 아무리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그들의 소리는 마치 뇌에 대고 직접 외치는 듯했다.
찌이이잉----
귀를 막은 루드의 허리가 구부러졌다. 엄청난 고통에 몸을 가누기도 어려울 지경.
단순한 육체적 통증을 넘어 정신과 신경에 직접 닿는 고통은 숱한 상황을 겪은 루드로서도 감당하기 버거웠다.
그사이, 피 웅덩이에서 태어나 순식간에 어른이 된 존재들은 어느새 루드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수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었다. 피 웅덩이는 핏빛 세계에 널려 있었고, 하나의 웅덩이에서 많게는 수십의 생명이 태어났다.
걸음을 뗄 때마다 빠르게 성장한 생명들은 어느새 무기까지 쥐고 있었다.
쿡. 핏빛 창이 루드의 발을 찔렀다. 혈해를 걸었던 발이었다.
툭. 핏빛 검이 루드의 귀를 잘랐다. 비명과 통곡을 들었던 귀였다.
쿵. 핏빛 해머가 루드의 손을 뭉갰다. 손짓 한 번으로 수백의 목숨을 좌지우지했던 손이었다.
핏빛 생명들의 공격은 계속됐다.
죽음을 외면했던 눈이 베이고.
피 냄새를 맡던 코가 잘렸으며.
싸울 것을 주장하던 입이 꿰매졌다.
루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그들의 무기가, 그들의 마음이 닿은 순간,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찔리고, 난자당하고, 짓밟히고, 뭉개지고....
그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숨만 쉬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프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
시간이 지나며 무감각해질 법도 했지만 하나하나의 고통이 여전히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 거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다.
제국 변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는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죽은 아버지의 친구 덕에 간신히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는 결코 선인이 아니었다. 아이에게서 돈 될 구석을 보았던 그는 기회가 오자 주저하지 않고 아이를 팔아넘겼다.
모든 건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칼럼. 휴고. 요렌테.'
루드를 구매한 상단이 상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상단은 어느 흑마법사를 마주쳤다.
잔혹한 흑마법사는 상단의 모든 이들을 죽이고 루드만을 살려 뒀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무언가가 그의 흥미를 끌지 않았을까 생각할 따름이다.
그렇게 요렌테의 장난감이 되어 다시 마을을 찾았다.
마을은 고블린에 의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우습게도 상단에 팔렸기에 살아남은 꼴이었다.
고블린에게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요렌테의 손에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
'우연히 얻게 된 신비.'
이번 생에서야 알게 됐지만 요렌테는 정수를 찾고 있었다.
혹 마을로 내려왔던 고블린이 정수를 가져갔을지 모른다 생각한 요렌테는 루드에게 고블린 무리를 탐색하고 오게끔 시켰고, 그 덕에 루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수단을 얻게 됐다.
그로부터 수년.
갖은 실험과 고문, 노예만도 못한 취급을 견딘 끝에 루드는 마침내 요렌테를 죽이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 뒤론 안 해 본 것이 없었다.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짧지만 아카데미와 마탑에 소속되기도 했었다.
'아버지, 어머니.'
하지만 루드는 어디서나 이방인이었다.
외모에서 나타나는 바깥대륙의 특징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끄흡...!"
핏빛 생명의 손이 가슴을 관통했다. 녀석의 손아귀가 심장을 잡았다.
두근, 두근. 심장의 박동을 따라 느껴지는 낯선 감각.
고개를 든 루드는 순간 핏빛 생명과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그저 피로 이루어져 아무 모습도 얼굴도 갖추지 못한 존재였음에도, 녀석이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꽈악-!
심장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머리가 새하얘지는 고통, 생전 겪어 보지 못한 고통에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곳에 있는 이들을 안다.
자신으로 인해 죽은 이들,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 자신에게 실망한 이들.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고, 죽이고, 등진 이들.
포기하고 싶다. 쉬고 싶어. 더 이상 고통받고 싶지 않아.
자신이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더 많은 이들의 행복을 위해. 많은 피가 흐를 것을 알면서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기에 그랬다.
하지만 그게 진정 옳은 것이었을까?
간신히 버티던 정신이 서서히 무너져 갈 때.
무언가가 바뀐 건 바로 그때였다.
파삭-!
주먹을 휘두르던 핏빛 생명이 사라졌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바쁘다며. 얼른 끝내고 술 한잔해야지."
휴이가 손목을 꺾으며 미소 지었다.
파삭-!
가슴을 꿰뚫고 심장을 쥐었던 핏빛 생명이 사라졌다.
"따뜻한 가슴이네요."
등에 손을 댄 리카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파삭-!
검을 들고 있던 핏빛 생명이 사라졌다.
"고작 이것밖에 안 된다면 실망이군."
칠흑색 검을 어깨에 올린 이가 고개를 저었다.
파삭-!
창을 내지르던 핏빛 생명이 사라졌다.
"어때. 내 마법의 위대함이."
작은 몸을 쭉 핀 이가 기세등등하게 웃었다.
루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고통 때문은 아니었다. 더 이상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전생의 동료들이 반가워서였다.
'휴이, 리카엘, 페드리, 세일룬.'
오랜 세월 자신의 곁을 지켜 줬던 동료들.
그들만이 아니었다.
"해는 언제나 떠오르지."
"언제나 지고."
"그리고 또 떠오르고 말이야."
여명 부족과 황혼 부족의 족장.
"뭐 궁금한 거 있어요?"
정보조직 도서관의 관장.
전생에서 연을 맺었던 인물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환한 빛과 함께 나타난 그들은 핏빛 생명의 자리를 대신했다.
"감사합니다. 대장."
"저만 믿으십쇼."
"고마워요."
"모두 대장님 덕분입니다."
"설마 우시는 겁니까."
어느덧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러나 잊혀지지 않을 익숙한 얼굴들.
사위를 가득 채운 그들은 하나같이 루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맙다."
마침내 루드는 깨달았다.
"다들 오랜만에 봐서 좋았다. 볼 수 있는 녀석들은 조만간 보는 걸로 하자."
이곳은 지옥이 아니었다.
'내가 걷는 길이 어떨지 모른다.'
'나로 인해 죽는 사람이 생기겠지.'
'반대로 나로 인해 사는 사람도 생길 거다.'
'나로 인해 불행할 수도 있지만.'
'행복할 수도 있다.'
자신이 걷는 길이 어떨지, 그 끝이 무엇일지 모른다.
정확한 미래를, 그 여파를, 그 과정과 결과를 전부 알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닌 신일 것이다.
그러니 모르는 건 당연하다.
그저, 그 길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들이 웃길, 자신이 좋아하는 이들이 보다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마음 정리는 끝났다."
회귀 직후 털어 냈다 생각한 고민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던 모양.
가슴 어딘가, 어느 한구석에는 일말의 불안이 있었다.
전생의 자신이 괜한 짓을 한 건 아닐까. 지금의 자신도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신이 아니다. 신이 되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자신은 그저 인간.
자신의 행복과 주변의 행복을 좇고, 그것을 우선시하는 게 당연한 '인간'이었다.
그러니 이제, 이 지긋지긋한 심마에서 벗어날 때였다.
* * *
"루드!"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휴이의 얼굴이었다. 걱정을 많이 했는지 안색이 평소보다 어두웠다.
"...얼마나 지났지?"
"너 지금 이틀 만에 깨어난 거야."
"이틀인가."
지독한 심마였다. 지옥도의 여파로 지옥을 겪고 있나 생각할 정도였으니.
"상황은 어떻게 됐지? 무사히 벗어난 것 같긴 한데."
몸을 일으킨 루드는 곧장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제노스님이 토벌대를 이끌고 사냥하기로 했어."
"토벌대?"
"어. 듣기로는 최정예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고. 익스퍼트 상급이 열에 중급이 서른이랬어."
"사냥하기로 했다는 건 아직 출발하진 않았다는 건가?"
"내일 새벽에 출정한다는 것 같아."
"내일 새벽이라."
다행이었다.
심마에 빠져 있던 시간이 꽤 길어 이미 떠났으면 어쩌나 했는데 아직 출발 전이었다.
"준비를 서둘러야겠네."
"...너도 가려고?"
"그래. 너도 봤겠지만 녀석에게 익스퍼트급은 아무 의미가 없다. 공격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소드마스터라 할지라도 힘겨운 싸움일 거다. 조금이라도 보태야지."
"그럼 나도 갈래."
"아니."
루드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 말한 익스퍼트급엔 너도 포함이다. 가 봤자 짐만 될 뿐이야."
그리 말한 루드는 곧 다른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넌 여기서 해 줘야 할 게 있어."
제노스도 자신도 없는 부족, 소크란을 감시할 자원이 필요했다.
"...알겠어."
휴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니....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토벌대가 내일 언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어?"
"아니. 근데 로하스에게 물어보면 될 거야. 길잡이 역으로 함께한다고 들었거든."
토벌대에 접촉하는 건 로하스를 통해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보다 몸은 괜찮아?"
"괜찮다."
그리 답한 루드는 왼손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
일전 제노스와의 싸움으로 부상당했던 왼손은 어느새 깔끔하게 아문 상태였다.
"자는 사이에 조금, 일이 있었거든."
무리해서 펼친 지옥도. 그로 인해 빠졌던 심마.
지옥 같았던 심마를 극복한 덕에 루드는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었다.
'마스터의 문턱인가.'
익스퍼트 최상급과 소드마스터 사이의 경계.
달리 말하면 소드마스터의 문턱.
현재 루드가 서 있는 경지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75화
막 동이 트기 시작한 이른 새벽. 준비를 마친 토벌대가 출정에 나섰다.
토벌대의 면면은 화려했다.
족장인 제노스를 필두로 각 부대의 얼굴인 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름값만큼이나 대단한 전력. 바깥대륙이 아닌 중앙대륙을 기준으로 해도 놀랄 만한 전력이었다.
소드마스터에 익스퍼트 상급이 열, 중급이 서른. 하나의 성을 함락시키러 가는 길이라 해도 믿길 정도였다.
"잘 해결되겠지?"
이만한 전력이 한 데 모였으니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성도 아니고 고작 몬스터 하나다. 녀석은 곧 초주검이 되리라.
하지만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건 어째서일까.
다른 이들이 전부 두 발 뻗고 자는 와중, 퓨렐 협곡에 있었던 이들만큼은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직접 마주했던 녀석의 위압감.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던 절망감....
그건 직접 마주하지 않고서는 절대 모를 감각이었다.
오우거의 신경 대부분이 다른 이에게 향했음에도 그 정도. 만약 녀석의 시선이, 분노에 찬 살의가 자신에게 향했다면 어땠을까.
"...아직 못 깨어났나?"
"어제 깨어났다고 하긴 했다."
"다행이군."
루드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에 카이예스는 안도했다.
그에겐 큰 빚이 있었다. 이대로 의식을 찾지 못했다면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린 채 살아야 했을 것이다.
"보이진 않는군."
"요양 중이겠지. 난 지금 깨어난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해."
"하긴. 그만한 기술이었으니 반동이 엄청났을 텐데.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못하겠군."
그 말은 진심이었다.
루드와의 경쟁은 완패였으나 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깨어나 다행이란 생각만 들었다.
"녀석에게까지의 안내를 부탁하지."
"맡겨만 주십쇼."
토벌대의 선두에 선 로하스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쳤다.
제노스 님과 함께하는 출정길이라니, 이보다 더한 영광이 있을까.
하물며 제노스 님이 직접 안내를 부탁했으니 무슨 수를 써서든 그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
'2차 시험의 심사관으로 지원하길 잘했다.'
오우거를 마주했을 때만 해도 후회막심이었다. 굳이 심사관에 자원해 위기를 자초한 꼴이었기 때문이었다.
루드의 퍼포먼스가 궁금해 자원했던 터라 루드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하나 지금에 이르러선 잘한 선택이라 생각됐다. 이리 제노스 님의 신임을 받으며 일할 수 있다니.
'고맙다. 루드.'
지난 밤 휴이로부터 루드가 깨어났음을 들었다.
녀석에겐 계속 많은 도움을 받는 것 같았다. 황혼 부족에서도 그랬고, 퓨렐 협곡에서도 또 지금에서도.
물론 자신 또한 그에 상응하는 도움을 주고 답례를 하긴 하지만....
'응?'
토벌대의 선두에 서서 부족의 출입구를 지나치려던 순간. 로하스는 제 눈을 의심했다.
"루드...?"
방금까지 생각하던 루드가 나타난 까닭이었다.
"깨어났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벌써 움직여도 괜찮은 거야?"
"그래. 문제없다."
짧은 해후를 나눈 루드는 곧장 토벌대에 다가갔다. 로하스가 제지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네인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제노스는 루드의 접근에 반응하려는 수하들을 물렸다.
제 앞에 다가온 이를 알고 있었다.
1차 시험 당시 자신에게서 보라색 끈을 뺏어갔고, 2차 시험에선 오우거로부터 모두를 지킨 인물.
"토벌대에 합류하고 싶습니다."
"불허한다."
"어째서입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붙었다. 적을 마주한 듯 강렬한 시선. 둘 중 누구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린 것의 도움을 필요로 할 정도로 우리 부족은 약하지 않다."
"거 옳은 말입니다."
"하하! 맞지. 전사의 시험에서 인상 깊긴 했어도 이건 그것과는 또 다르지!"
토벌대가 맞장구쳤다. 루드의 얼굴을 아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게 루드의 합류에 찬성할 이유는 못 됐다.
"어린 것이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고작 어린 것이라고."
루드는 갈무리해 뒀던 기세를 느슨하게 풀었다. 천천히 퍼져가는 마력의 무게감에 왁자지껄 떠들던 이들이 침묵에 잠겼다.
"고작이라 생각한 적 없다. 그저 어리다고 생각할 뿐."
"성년이 넘은 나이입니다. 전사의 자격도 갖췄고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
제노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루드의 말은 하나같이 틀린 구석이 없었다. 단순히 어린 나이라 불가능하다 말하기엔 이미 성년이었고, 이번 전사의 시험을 통해 전사의 자격까지 얻었다.
'...고민되는군.'
루드의 합류는 분명 도움이 될 터였다. 이미 오우거를 상대해 본 데다 큰 상처까지 입혔다고 했다.
그 실력은 입증된 것이나 마찬가지. 기실 1차 시험에서의 일로 그의 실력은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망설이게 만드는 건 그의 신분과 정체. 토벌대가 편성될 만큼 강대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 불확실성을 넣고 싶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단 말이지.'
하다못해 자신의 눈에 뭐라도 보였다면 모를까. 이만한 사건에 연관된 인물임에도 보이지 않았다.
불확실성을 더 크게 만드는 요소였다.
고민이 깊어지던 그때.
"이번 전사의 시험이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우승자라는 소식도요. 맞습니까?"
"맞다."
"우승 상품으로 얻은 소원권을 쓰겠습니다."
뜻밖의 말에 제노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루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원을 말했다.
"이번 토벌대에 합류하게 해 주십쇼."
설마설마 했던 소원.
"이 소원권의 가치를 알고 있나?"
"예.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말도 안 되는 것이 아닌 정도에서,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는 대단한 가치의 기회죠."
"잘 알고 있군. 그 기회를 여기에 쓰겠다고?"
"예. 잘 알고 있기에, 여기에 쓰려 합니다."
루드의 의사는 확고했다.
소원권을 쓰는 건 휴이에게서 자신이 우승자란 말을 들었을 때부터 생각한 방법이었다.
제노스의 말처럼 가치가 높은 소원권이었으니, 이걸 사용하면 거절하지 못할 거란 계산이었다.
"후회는 없길 바라지."
예상대로 제노스는 더 이상 루드의 합류를 거부하지 못했다.
"그리고 하나 더."
"또 뭐지?"
"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전부 마지막 의식을 치렀다고 들었습니다."
전사의 시험 마지막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의식. 전사의 자격을 얻었음을 공표하며 스스로에 대해 호명하는 이 의식은 본디 루드가 전사의 시험에 참여하려 한 이유였다.
비록 중간에 급히 마무리된 전사의 시험이었지만 이전 시험들과 마찬가지로 전사의 자격을 얻은 참가자들은 동일하게 의식을 마쳤다.
오직 한 명. 정신을 잃은 루드만이 그 과정을 마무리 짓지 못한 상태였다.
"정신을 잃어 치르지 못한 마지막 의식을 지금 치르려 합니다."
루드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좀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막대한 양.
한껏 드러난 마력이 일대의 공간을 장악했다. 실체화된 마력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은 감각.
'이건.'
그 기예에 제노스의 눈이 빛나길 잠시.
루드가 마지막 의식을 시작했다.
"까마귀 부족."
출신 부족을 밝히자 모두가 놀랐고,
"헤나의 아들."
자신을 낳아 기른 어머니의 이름을 외치자 제노스가 반응했다.
"루드란테."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이름을 호명한 순간.
"...뭐?"
제노스는 저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이렇게 뵙습니다. 아버지."
루드가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그의 목에는 먼 과거, 제노스가 일평생 사랑한 유일한 정인에게 주었던 반지가 걸려 있었다.
* * *
출정길은 고요했다. 본래도 말이 많이 오갈 법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루드의 합류 이후 작은 소리도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 중심에는 제노스와 루드가 있었다.
루드가 제 정체를 밝힌 이후 두 사람 사이에선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중이었다.
'진짜 아들은 맞는 거야?'
'나이대를 보면 가능성이 있긴 한데.'
'족장님께서 별 반응 안 하시는 거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각자가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루드가 제노스의 핏줄이 맞는지, 제노스가 그걸 받아들이는지... 어떻게 보면 오우거를 사냥하는 것보다도 중대한 일이었다.
카이예스와 레이예스가 아닌 또 다른 후계 후보의 등장. 심지어 전사의 시험에서 보여 준 퍼포먼스도 엄청났으니 단숨에 후계 구도가 바뀔 수도 있었다.
'헤나... 아이까지 품은 몸으로 대체 왜.'
한편 제노스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른 이들의 생각과 달리 루드가 자신의 아들이란 건 곧장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신의 것이었으나 헤나에게 주었던 반지. 그리고 루드란테라는 이름.
'별로인 것 같다 하더니....'
과거 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면 아들에게 줄 거라 했던 이름이었다.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그녀였으나....
이제야 왠지 모르게 느꼈던 기시감도, 시험장에서 자신을 보던 루드의 눈도 모두 이해가 갔다.
다만 이만한 일이 왜 보이지 않았는가는 의문이었다.
'어쩌면 녀석도...?'
흘깃 루드를 쳐다본 제노스.
루드, 제 아들인 루드란테는 로하스와 함께 앞장서서 걸어가는 중이었다.
잠시 루드를 바라보다 시선을 되돌린 제노스는 옛 연인을 떠올렸다.
"나란 사내는 그리도 믿음을 못 줬던 건가."
갑작스럽게 자신을 떠난 헤나.
심지어 아이까지 품은 채였다니.
그녀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모르진 않았다. 그걸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뱀 부족과의 동맹.
당시 족장이었던 자신의 아버지가 뱀 여왕과 체결한 동맹의 증표는 결혼이었다.
차기 족장인 자신과 뱀 공주 간의.
'더 일찍 움직였어야 했다.'
사랑하는 이가 아닌 이와 혼인하게 된 상황에서 제노스는 결국 정인과 함께 부족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보단 정인의 결심이 더 빨랐다. 편지 하나 남겨 놓지 않고 떠난 헤나.
그녀가 가져간 건 사랑의 증표로 교환했던 반지 하나뿐이었다.
그 마음이 어땠을지, 결심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알기에 더욱 괴로웠다.
하여 제노스는 분노했다. 자신의 여자에게 믿음 하나 주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힘이 부족해 다른 부족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던 부족의 현실에.
뱀 부족과의 혼인 동맹을 통해 까마귀 부족은 바깥대륙 제일의 부족으로, 뱀 부족은 그 다음가는 부족으로 성세를 누렸지만....
그 중심에 서서 부족의 부흥을 이끈 제노스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생각이 많으신가 보군.'
로하스와 함께 걷던 루드는 조심히 제노스를 바라봤다.
살짝 올라간 끝 눈썹과 콧잔등에 진 주름. 생각이 많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당장은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아버지.'
생각이 많아지는 건 당연했다. 갑자기 과거의 연이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된다.
자신도 전생의 경험 덕분에나 차분한 것이었다. 전생에서 처음 제노스를 마주하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땐....
'지금 생각하니 좀 멋쩍군.'
그때의 자신과 비교하면 지금 제노스의 반응은 무덤덤한 편이었다.
"이제 예상 범위입니다."
"지금부터 주의한다. 언제 어느 때 녀석이 나타날지 모른다. 녀석이 나타나면 일전에 설명했던 대로 움직인다."
어느새 퓨렐 협곡에 도착해 초입을 넘어선 상황.
상념에 빠져있던 제노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집중을 되찾고 토벌대의 분위기를 다잡았다.
"예!"
그의 말에 따라 토벌대의 기세가 일변했다.
* * *
크릉.
오우거가 몸을 일으켰다.
붉은 눈이 먼 곳을 바라봤다.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냄새, 상처가 저릿한 통증.
왔다. 기다리던 녀석들이었다. 이번엔 기필코 죽여 버리리라.
몸을 일으킨 오우거는 천천히 걸었다.
녀석이 지나간 길 뒤로, 큼직한 발자국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76화
지금부턴 오우거의 활동 반경으로 추정되는 영역이었다. 일말의 긴장도 늦춰선 안 될 공간. 하나의 방심이 여럿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로하스는 더욱 긴장했다. 길잡이로서 엉뚱한 위치나 타이밍에서 오우거를 만나는 일은 없게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다짐은 허망하게 끝났다.
"아무래도 길잡이는 필요 없었을지도 모르겠군. 전원 전투준비."
처처척!!
순식간에 무장이 끝난 이들이 전방을 노려봤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누구도 되묻지 않았다.
제노스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고, 그의 판단은 틀린 적이 없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서서히 커지는 일정한 박자의 소리. 그것이 오우거의 발소리란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과연, 왜 그렇게들 걱정했는지 알 것 같군."
"…일반적인 오우거가 아니야.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어. 잘못하면 집에 못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하핫!"
녀석의 모습을 확인한 토벌대는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저걸 그냥 오우거라 부를 수 있을까.
가슴팍에 커다란 얼음 결정을 단 녀석은 사방에 살기를 흘리는 중이었다. 어지간한 녀석들이라면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졸도할 정도의 농밀한 살기. 놀라운 건 그 살기에서 마력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쉽지 않겠는데."
전부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절망하진 않았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스스로 쌓아 올린 무예와 시간을 믿었고, 제노스가 함께하는 것도 큰 힘이 되어 줬다.
크어어엉!!!
그 순간 터져 나온 오우거의 피어. 녀석의 외침은 더 이상 단순한 하울링이라 할 수 없었다. 명실상부, 주변 일대를 모조리 장악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는 피어였다.
"크으윽!"
"쿨럭!"
경지가 떨어지는 자들이 신음을 흘렸다.
오우거는 큰 몸만큼이나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어느새 토벌대와 남은 거리는 고작 10여 미터.
녀석은 10m의 거리를 남겨 둔 위치에서 멈춰 섰다. 마치 사냥감을 탐색하고 기회를 노리는 포식자처럼.
"다들 정신 차려라. 우리의 목적은 간단하다. 부족의 평화와 안위를 지키는 것. 그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더 간단하지. 바로 눈앞의 녀석을 죽이는 것."
제노스는 자신의 마력을 끌어 올렸다. 오우거의 등장에 동요하는 토벌대원들을 다독이기 위함이었다.
토벌대 사이로 펼쳐 낸 마력은 오우거의 살기와 정체 모를 마력이 침투하는 걸 막아 줬다.
하지만 아무리 제노스라 할지라도 기후 현상까지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톡, 뺨에서 느껴지는 찬 기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토벌대는 이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눈이 내린다고?"
"지금 계절에?"
지금은 여름이었다. 협곡의 특성과 제노스의 당부로 혹시 몰라 옷을 두껍게 입긴 했지만, 분명한 여름이었다.
한데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하다니. 지대가 높은 곳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만 이곳은 그 정도 높이의 지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토벌대의 시선이 오우거에게 닿았다. 가슴에 커다란 얼음 결정을 달고 있는 오우거. 지금 현상은 녀석과 연관됐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좋지 않아.'
이전보다 더 커진 얼음결정과 싸늘해진 공기. 난데없이 내리는 눈.
루드는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정수의 힘이 더 강해졌다. 나와의 전투로 무언가 변화가 생긴 건가.'
그 전투에서 한 단계 성장한 존재는 자신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지난 전투가 놈에게도 큰 자극으로 와닿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전에 맞섰던 때를 기준으로 상정할 게 아니었다. 한 단계 더 위험 수치를 높여야 했다.
하지만 그건 루드에겐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다.
"로하스와 함께 뒤로 물러나 있어라."
"예?"
"네 소원은 토벌대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토벌대와 함께 싸우는 것이 아니라. 틀렸는가?"
"하지만!"
"다수가 함께 움직이는 전투에서 합의되지 않은 움직임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를 것 같지는 않은데."
반박할 수 없는 정론. 결국 루드는 후방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토벌대가 무너지면, 그래서 어떤 변수라도 필요한 때라면, 그때는 개입해도 되는 거겠죠?"
"그것까지 막진 않으마."
대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한 약속을 받아 냈다.
"까마귀 부족의 전사들이여. 무기를 높이 올려라. 함성을 크게 질러라. 심장을 뜨겁게 불태워라. 그것이 부족의 미래를 위한 것일지니!"
일찍이 흘려보낸 마력과 제노스란 개인이 가진 신뢰도는 동요하던 분위기를 한순간에 반전시키는 힘이 있었다.
"가자."
"오아아아아아아!!"
"가자아아!!!"
크허어어어어어어어엉!!!
토벌대와 오우거. 오우거와 토벌대.
대치 중이던 양측의 거리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서로 간의 거리.
첫 충돌은 당연히도 제노스였다. 존재하긴 했었냐는 듯 거리를 좁혀낸 제노스는 회전결을 담은 검을 내질렀다.
그에 맞서는 오우거의 선택은 주먹이었다.
실로 단순한 방법이었으나 한 번 한 번의 위력이 바위가 날아오는 것 이상이었으니,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었다.
콰앙!!
정면으로 부딪친 검과 주먹은 나뭇가지로 바위를 쑤시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제노스의 검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가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미스릴로 만들어진 나뭇가지.
힘겨루기 중이던 바위와 나뭇가지 간의 균형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크르어어!!!
조금씩 밀려나는 오우거의 주먹. 녀석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크게 울음을 토해 냈지만 제노스와의 힘겨루기에만 집중하긴 어려웠다.
"화류오대도!"
"하늘 받들기!"
"비조갈사류!"
"만력 바위 부수기!"
심기일전한 토벌대로부터 쏟아지는 공격들!
결국 주먹을 거둔 오우거는 몸을 크게 흔들었다.
"통하는 건가!"
"익스퍼트 중급 이상으로 이루어진 이만한 인원의 공격이야. 통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데...."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고작 오우거의 신경을 어지럽히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나같이 절기라 부를 수 있는 공격들이었음에도 녀석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고작 가슴팍의 얼음 결정이 조금 부서졌을 뿐이었다.
"멈추지 마라! 출발하기 전에 브리핑에서 언급했던 내용이지 않냐!"
"맞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잖냐. 우린 우리 할 일을 하면 될 뿐이다."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은 건 고참들의 목소리였다. 하나둘 등장하는 큰 목소리에 흔들리던 분위기가 금세 안정됐다.
그 뒤로 특별한 위기나 변화는 없었다. 제노스는 여전히 가장 앞에서 오우거를 상대했고, 나머지는 오우거의 신경이라도 분산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슬슬 움직여야겠다. 준비는 됐지?"
"뭐? 지금 괜찮아 보이는데. 조금씩이지만 제노스님이 우위를 가져오고 있다고."
"맞아. 여태까지는 조금씩 우위를 가져오고 있었지. 하지만 이젠 아닐 거다. 그렇게 가져왔던 것들은 순식간에 녀석의 손에 넘어가겠지. 그것도 큼직하게."
그렇게 말한 루드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선 아직까지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우거의 등장과 함께 내리기 시작한 눈은 점점 거세지는 중이었다. 벌써 바닥에 쌓인 눈이 발목을 뒤덮을 정도였다.
'최악이군. 우리는 점점 더 불리해질 거다.'
눈이 내리고 기온이 낮아질수록 토벌대의 운신은 어려워진다. 몸이 얼어붙고 느려지면 기존에도 대처하기 어려웠던 오우거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게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오우거는 다르다. 애초부터 추위에 대한 내성이 인간보다 뛰어나다. 하물며 정수를 품고 지금의 상황을 야기한 게 녀석이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에게 유리한 환경이 펼쳐질 게 분명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타이밍에, 토벌대원들에게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오른쪽 조심해! 라고 말해야 할 입이 얼어 떨어지지 않는다.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오우거의 발길질을 인지하지 못했던 동료가 발에 치여 멀리 날아갔다.
멀리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듯 다가오는 주먹이 보인다. 아직 거리가 있으니 충분히 피할 수 있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루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개입해 검집 채로 오우거의 주먹을 막아냈다.
"전투 불능인 사람들을 뒤로 빼 줘."
"맡겨만 둬."
전투 불능이 되는 이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터였다. 심지어 그 숫자도 점점 많아지겠지.
하지만 그들을 직접 보호하는 것보단 오우거를 쓰러트리는 게 우선이었다.
로하스에게 그들을 맡긴 루드는 본격적으로 오우거를 사냥하기 위해 움직였다.
* * *
한차례 오우거의 공격을 저지한 제노스는 숨을 돌렸다.
오우거의 공격은 단순했다. 또 단순한 만큼 파괴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방어를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점점 선명해지는 냉기도 아직은 자신에게 큰 피해를 입힐 정도는 아니었고.
문제는 녀석의 공격이 제게 통하지 않듯, 자신의 공격도 녀석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예 안 통하는 건 아니었으나 예상했던 것에 훨씬 못 미쳤다. 창과 방패의 대결이 아니라 방패와 방패의 대결인 셈이었다.
이대로라면 손해를 보는 건 자신이었다. 냉기는 점점 더 강해질 것이었고, 그에 따라 자신의 움직임도 둔해질 터였다.
'큰 게 필요한데.'
일반적인 공격은 거의 안 먹히는 수준. 오러를 담은 공격이 그나마 효과를 보고 있지만 그마저도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고 가죽과 근육을 잘라 내는 데 그칠 뿐이었다. 이대로 무작정 오러를 소모하기도 곤란한 상황.
'저 얼음들이 문젠가.'
생각했던 것보다 공격이 먹히지 않는 이유는 오우거의 피부를 덮은 얇은 얼음 때문이었다.
멀리선 잘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서 보면 녀석의 피부 위로 얇은 서리 같은 게 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고작해야 얇은 얼음 막에 불과했으나... 실상은 고작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오러가 아닌 건 죄다 얼음에 막히고 말 정도니.'
심지어 녀석의 피부를 덮은 얼음은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다. 처음 손을 섞을 때만 해도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얇았던 것이 이제는 조금 떨어져서 봐도 무언가 있단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최악은 아닌가."
다행인 점은 토벌대가 녀석의 움직임에 적응하고 있는듯하다는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자신에게 집중됐던 오우거의 신경이 분산된 게 느껴졌다. 덕분에 움직임이 한결 편해졌다.
이대로 조금만 더 여유가 생긴다면 얼음을 깨부수고 치명상을 입힐 공격을 준비하는 것도 가능할 터.
그러면 녀석을 죽이는 것도 먼일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요. 최악입니다. 생각했던 어떤 상황보다도요."
하나 그 기대는 곧장 부정당했다.
"너... 왜 이곳에 있지?"
"토벌대가 무너져 어떤 변수라도 필요할 때. 그때가 지금이니까요."
어느새 옆에 나타난 루드는 제노스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제야 제노스는 주변을 확인했다.
"신경이 현혹된 건 나였군."
토벌대를 통해 오우거의 신경을 분산시키려 했었다. 그러나 반대로 시야가 좁아진 건 자신이었다.
"언제부터였지?"
"좀 됐습니다.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저와 아버지 정도뿐입니다."
어느새 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였다. 대다수의 토벌대원은 진즉에 로하스에 의해 후방으로 옮겨졌고 남은 몇도 쓰러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편해졌다 싶었던 건 루드란테 덕분이었나.'
어떻게 보면 토벌대 전체보다도 루드 한 사람이 오우거의 신경을 더 잡아끌었다 할 수 있었다.
"할 말이 있습니다. 회류를 펼쳐 주세요."
제노스는 군말 없이 루드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맹렬하게 회전하는 바람이 두 사람을 가둬 보호했다. 오늘 전투에서 오우거가 몇 번이고 뚫으려 했지만 실패했던 기술이었다.
안전 지대를 확보한 루드는 곧장 용건을 말했다.
"최대한 빠르게 끝내야 합니다. 녀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해질 겁니다."
"안다, 그러니 오늘 무슨 수를 써서든 끝장내야지."
눈앞의 오우거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괴물이었다. 살면서 이러한 괴물이 있다는 건 들어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이만한 전력으로도 죽이기 어려운 몬스터라니. 차라리 성을 공략하는 게 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알게 된 걸 다행으로 여겼다. 시간이 지나 녀석이 더 강해졌다면 상대해 볼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테니.
"아뇨, 모릅니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시간과 제가 말하는 시간의 기준은 다릅니다."
그러나 루드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말하는 건 먼 미래의 시간이 아니다.
"당장 일분일초가 흐를수록 녀석은 점점 강해질 겁니다.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요."
지금 이 순간에도 녀석은 강해지고 있다.
그리 말하는 루드의 모습은 확신에 차 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77화
오우거와 토벌대의 전투를 관찰하던 루드는 위화감을 느꼈었다.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꺼림칙하고 불안한 기분. 전투에 개입해 직접 녀석과 손을 섞고 나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이대로 있다간 녀석이 폭주할 겁니다."
지옥도로 입혔던 상처는 치명상이었다. 비록 죽이지는 못했지만, 녀석을 생사의 경계까지 끌고 간 지옥도였다.
정수의 힘으로 상처 부위를 얼리며 간신히 지옥도의 여파를 막았지만, 그건 엄청난 부담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 오우거는 여태까진 느끼지 못했던 정수의 부작용을 느끼게 됐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정수의 부작용 때문에 상태가 악화되고, 상태가 악화되자 정수의 부작용이 더 날뛰는 일의 반복.
반복이 거듭되며 가슴의 얼음은 더 거대하고 단단해졌다. 정수에서 시작된 한기 또한 이제는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갑자기 폭설이 쏟아지는 것도, 녀석의 몸에 얼음 결정이 생겨나는 것도, 일대에 한기가 가득한 것도 전부 그 탓이었다.
'전생의 설산트롤 이상이다.'
지금의 오우거는 전성기 때의 설산트롤과 비교해 전혀 꿀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불태우고 있는 까닭에 더 강력했다.
"아직까지는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지만 전투가 길어질수록 정수의 힘에 잡아먹힐 겁니다. 그러고 나면 끝입니다. 녀석을 죽이는 데 성공하더라도, 우리 또한 결코 무사할 수 없습니다."
"대체 정수의 힘이란 게 뭐기에...."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일단은 최대한 빠르게 녀석을 죽여야 합니다."
맞는 말이었기에 제노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토벌대를 구성하기 전 휴이란 이름의 참가자에게 들었던 얘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정수'란 것의 존재와 그것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오우거가 그것을 흡수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실까지.
혹시 몰라 귀담아듣기는 했지만, 그 신빙성에 무게를 싣고 있지는 않았었다. 하나 직접 마주한 오우거는 정수의 힘이란 걸 수긍하게 만들었다.
"전력으로 가겠다. 알아서 보신해라."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부자간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두 사람을 보호하던 회류가 사라졌다.
그 순간,
콰아앙!!!
기다렸다는 듯 오우거의 주먹이 꽂혔다. 주먹질에 주위의 눈이 허공으로 비산하며 시야를 가렸다.
허공으로 눈이 흩어지며 드러난 공간.
인간이 없다.
그 안에 목표물이 없다는 걸 깨달은 오우거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휙, 재빨리 비튼 목에 얇은 실선이 생겨났다. 동시에 콰자작! 하는 소리와 함께 깨져 나가는 얼음 결정들.
제노스는 혀를 차며 착지했다.
"얕았나."
경동맥을 끊어 버릴 요량으로 극성으로 펼친 회전결이었으나 불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마지막 순간 녀석이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거리가 멀어진데다 피부를 가득 메운 얼음 결정들이 보호막의 역할을 한 까닭이었다.
도통 치명상을 입히는 게 어려웠다.
크아아아!!!
하지만 공격은 이쪽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왼쪽 팔뚝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고통에 오우거가 비명을 질렀다.
"이런 느낌인가."
왼쪽 팔뚝의 힘줄을 잘라 낸 루드는 보다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녀석의 피부를 보호하는 얼음 결정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오우거와의 거리가 좁혀지며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느껴졌지만, 이 정도 한기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며 집중한다.
심상 속 검은색 문을 열고,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정수의 힘을 느낀다.
그다음으로 할 것은 냉기의 흡수.
후, 공기를 뱉음과 동시에 비늘 같은 모양의 얼음 결정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몸을 보호하던 얼음을 잃고 맨살을 노출한 오우거의 옆구리를 루드의 검이 사납게 찢어발겼다.
쿠아아아아아!!!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폭발하는 살기. 오우거는 제게 상처를 낸 이를 똑똑히 기억했다. 지난번 제 가슴을 갈라 놓았던 그놈이었다. 절대 놓쳐선 안 될 녀석. 이번엔 기필코 죽이겠단 일념이 몸에 힘을 불어넣었다.
"조심해라!"
껴안듯 교차되는 오우거의 양팔, 몸 안쪽으로 붙은 루드를 잡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 움직임에 발생한 기파만으로도 주변의 눈이 죄다 날아갈 정도. 어지간한 이라면 기파의 힘에 갇혀 꼼짝도 못 하고 으스러질 상황이었다.
하지만 루드는 침착했다.
'더 이상 조심해야 할 것은 없다.'
자신과 제노스를 제외한 모두는 진작 눈에 파묻힌 상태였다. 그 말은 곧, 이곳에서 일어날 일을 볼 눈이 없다는 의미. 루드는 감춰 두었던 패를 꺼내 들었다.
"쇠약해져라."
"나태해져라."
"무거워져라."
"나약해져라."
"괴로워져라."
쏟아지는 말들은 그저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하나하나에 저주의 의념이 담긴 마법이었다.
저주의 메아리.
발렌타노에서 정수 하나를 흡수하며, 몇 개에 불과하지만 사용할 수 있게 된 5서클 흑마법 중 하나였다.
이 마법의 가장 큰 특징은 시전자의 마력이 허용되는 한 저주가 계속해서 중첩된다는 점이었다.
정수를 통한 흑마력은 충분했으니 전투가 끝날 때까지 녀석에게 걸린 저주는 계속해서 늘어날 터였다.
'그리고-'
바람의 결을 느낀다. 보라색 끈을 뺏기 위해 제노스와 겨뤘을 때를 회상하고, 조금 전 제노스와 이야기를 나눴던 공간을 분석한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전생에서 제노스가 해 줬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의 검이 추구하는 것을 기억해 내고, 지향하던 것을 꿈꾼다.
"뭣-?"
그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때. 제노스는 혀를 내둘렀다.
'말도 안 되는 재능이군.'
스스로를 껴안듯 팔을 감은 오우거였지만, 녀석의 팔은 제 몸에 붙지 못했다. 그 사이에 놓인 작은 회오리 때문이었다.
맹렬하게 회전하며 타의 접근을 불허하는 고유의 공간을 만들어낸 건 분명 자신의 기술인 회류였다.
'대체 어느 틈에.'
차마 거리를 벌리지 못한 위험한 상황이라 생각했는데, 회류라는 수단이 있기에 거리를 벌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차자자자작!!! 회류에 깎여나간 얼음 결정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인간의 몸 정도는 우습게 뚫고 지나갈 속도였다.
하지만 깎여나가는 얼음 결정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더 많은 양의 얼음 결정이 생겨나고 있었다.
얼음 결정이 무사했던 기존의 피부엔 더 이상 결정이 아닌 얼음덩이라 부를만한 것들이 생겨나는 중이었다.
"...."
그 모습을 확인한 제노스는 결심을 내렸다.
"루드란테!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네가 마무리 지어라!!"
혹여 들리지 않을까 마력까지 실은 외침.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자신의 검으론 녀석을 죽이는 게 어려웠다. 운이 나쁘면 깨져나가는 얼음 파편에 역으로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엔 루드란테의 검을 믿는 게 나았다. 이미 오우거에게 치명상을 입힌 적이 있으니 파괴력은 증명됐고, 얼음 결정을 해결할 방법도 있는 것 같았으니.
"...좋아, 해 보자고."
회류의 내부,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류를 통한 보호력과 제노스가 벌어다 줄 시간. 이 둘이라면 충분히 오우거를 죽일 검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지옥도를 다시 펼쳐 낸다.'
처음 펼쳤던 지옥도로는 녀석을 죽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그때보다 더 죽이기 어려워진 녀석이지만, 자신에게도 큰 변화가 있었다.
화아아악-!
목에 걸린 여명의 잿불이 발광했다. 회류의 공간에 온기가 돌았다. 공간만이 아니었다. 오우거가 뿜어낸 정수의 힘에 노출됐던 몸도, 얼음 결정의 냉기를 흡수하고 방출하는 데 사용한 정수의 힘으로 차가워지던 내부도, 서서히 온기를 되찾았다.
파스스….
제 역할을 마친 여명의 잿불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와 동시, 회류가 사라지며 준비를 마친 루드의 시야가 확보됐다.
바로 보이는 건 오우거의 발목을 묶어 놓은 제노스의 모습. 제노스는 몸 곳곳에 구멍이 나 있는 상태였다. 아마도 오우거의 얼음 결정에 꿰뚫렸을 터.
오우거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팔꿈치 아래로 오른팔이 없었고 왼쪽 눈부터 귀까지의 얼굴이 난도질돼 있었다. 그 거대한 몸도 제노스가 일으킨 회천에 휘감겨 고정된 상태였다.
"지금이다!!"
제노스의 외침. 공격에 휘말릴 수 있는 상황임에도 제노스는 소리쳤다.
지금이라고, 지금이 기회라고.
루드는 제노스가 만들어 준 그 기회를 날리지 않았다. 다칠 것을 걱정해 검을 내리기엔, 여태까지 겪어 온 일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고 더 큰 피해로 돌아올 뿐. 망설여선 안 됐다.
그러니,
"두 번째 검, 지옥도."
검을 앞으로 뻗는다.
가슴의 상처를 막았던 얼음이 녹아내리고, 벌어진 상처에 루드의 검이 닿았다. 많이 닿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조금, 손가락이 베이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중요한 건, 지옥도에 닿았다는 사실.
크라라아아아아아앍!!!
정수의 힘으로 간신히 멈춰 놨던 지옥도가 다시 열렸다.
기존에 있던 상처 위로 얼음이 피어올랐다 사라지기가 반복됐다.
부작용으로 얼어 죽더라도 당장의 고통을 면하려는 오우거의 몸부림이었다.
하나, 처음과 달리 온전히 완성된 지옥도는 정수가 제 앞길을 막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오우거의 내부를 파고든 지옥도의 힘은 거침없었다.
살을 찢는다.
근육을 썩힌다.
뼈를 불태운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때, 더 이상 오우거의 형체는 남아 있지 않았다. 격한 고통 속에서 사그라진 무언가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끝났군."
오우거의 절명을 확인한 제노스는 무릎을 꿇었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침을 뱉자 핏물이 나왔다.
하지만 불평할 순 없었다. 자신과 루드란테를 제외하곤 모두가 죽었으니… 살아남은 것에 감사해야 했다.
"이런 결과로 끝날 줄이야…. 부족으로 돌아갈 면목이 없군."
"무슨 소리입니까. 녀석을 죽였는데. 아 혹시."
슬픔이 서린 제노스의 눈빛을 확인한 루드는 제노스가 왜 그런지 알아차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토벌대 아직 안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단순히 눈에 파묻힌 이들이라면 구할 수 있습니다."
"뭐?"
"일단 기다려 주시죠."
어디에 어떻게 파묻혔는지도 모르니 영락없이 모두 죽었다 생각한 제노스였다.
하지만 루드는 덤덤히 그들을 살릴 수 있다 말했다.
"어디 있지."
그에 앞서, 루드는 죽은 오우거에게 다가갔다. 부산물을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엉망인 오우거의 사체였으나 가져가야 할 게 있었다.
바로 오우거가 가졌던 정수의 힘이었다. 자칫 다른 몬스터가 흡수했다간 제2의 설산트롤, 제2의 오우거가 탄생할 수도 있었으니 무조건 회수해야만 했다.
"여기 있군."
정수는 오우거의 심장으로 추정되는 것 바로 옆에 있었다. 루드는 곧장 그것을 흡수했다.
본디 몸과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흡수해야 안전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소드마스터에 올랐다.'
온전한 지옥도를 펼쳐 낸 순간, 루드는 자신이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넘었음을 깨달았다.
극적인 깨달음이 있었던 건 아니다. 마스터의 문턱을 밟고 있어서일지, 전생에서 밟아 봤던 경지여서일지, 혹은 또 다른 이유에서일지는 몰랐다. 그저 자연스럽게 경지가 진화했음을 느꼈을 뿐이었다.
다만 변화는 분명했다. 세계가 확장되고 그릇이 넓어졌다. 지금도 엄청난 고양감이 느껴지는 상태였다.
후우---
정수의 힘은 반항하지 않고 흡수됐다. 이전과는 달리 너무 순조로워 놀랄 정도였다.
"이제 슬슬 깨워야겠군."
모든 일을 마쳤으니 집에 돌아가야 할 때였다. 아직까지 자고 있는 녀석들을 깨우기로 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78화
정수의 힘을 통해 일대의 냉기를 인식한다.
공기 중의 냉기, 피부에 닿는 냉기, 쌓인 눈에서 흐르는 냉기.
이 중에서 흡수할 건 눈에 흐르는 냉기였다.
눈에서 흡수한 냉기는 곧장 허공으로 방사했다. 오우거의 피부를 보호하던 얼음결정을 해소한 것도 이 방법을 통해서였다.
정수의 힘을 토대로 외부 냉기에 영향권을 행사하는 건 이전 발렌타노에서 했던 실험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냉기를 뺏긴 눈은 빠르게 녹았다.
"눈이… 녹는군."
오랜 시간이 지나도 녹을까 싶을 정도로 두껍던 눈이 빠르게 녹는 광경은 감탄스러웠다.
눈이 녹자 파묻혀 있던 토벌대가 드러났다. 다들 의식은 없었지만 미약하게 뛰는 심장이 살아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2차 작업.'
오랜 시간 한기에 노출돼 있던 토벌대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이대로는 의식을 되찾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 또한 한기만 해소해 준다면 해결할 수 있었다.
토벌대에게서 냉기를 추출한 루드는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직전보다 얼굴에 혈색이 도는 모습들이었다.
"으... 추워."
"정신이 드냐."
"여기가 어디야. 으... 뭐 하고 있었지."
냉기를 추출하고 한참을 기다리자 토벌대원들이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깨어난 건 로하스였다. 다른 토벌대원보다 오우거가 내뿜은 한기의 영향을 덜 받은 덕분이었다. 로하스를 기점으로 다른 토벌대원들도 속속들이 깨어났다.
"족장님!!"
"쓰러트리신 겁니까!"
"역시 족장님이십니다."
정신을 차린 이들은 상황을 인지하고 곧장 환호했다.
절로 죽음이 떠오르던 강력한 적이었음에도 결국 제노스에겐 안 됐던 모양. 역시 족장님은 대단했다.
하나 제노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 눈짓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루드를 가리켰다.
"내가 아니다. 루드란테, 저 아이지. 일단 모든 이가 깨어나는 대로 부족으로 돌아간다. 각자 최대한 기력을 회복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을 도와주도록."
"아, 알겠습니다."
자신에게 접근하는 이들을 물린 제노스는 숨을 골랐다. 내상의 여파가 생각보다 심했다. 토벌대원들이 깨어나는 걸 기다리며 최대한 다스리려고 해 봤지만, 쉽사리 진정될 기미가 안 보였다.
'한동안 꼼짝없이 정양해야겠군.'
그래도 그 정도로 이만한 결과를 얻은 게 기적이었다.
직접 마주한 오우거의 강함은 상상 이상, 모두가 필사를 각오해야 할 정도였다.
사상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다수의 토벌대원들도 무사했고, 자신도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으니, 이번 토벌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중심에는 역시.
'헤나, 그대가 보내 준 선물인 거요?'
루드란테가 있었다.
토벌대원들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루드란테, 루드와 약간의 이야기를 나눴다.
어떻게 자랐는지, 헤나는 어떻게 됐는지, 여긴 어떻게 알고 왔는지, 그 무력은 어떻게 갖췄는지....
대부분 제노스가 묻고 루드가 답하는 형식이었지만 많은 걸 알게 된 시간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보고 싶군.'
짐작은 했지만, 헤나는 더 이상 세상에 없다고 했다. 원래도 몸이 약했던 여인이었다. 배 속에 아이를 품고 도망치듯 먼 거리를 떠났으니 몸에 많은 무리가 갔을 것이다. 결국 헤나의 죽음은 자신의 책임이었다. 루드는 자책하지 말라 했지만....
"족장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돌아가자."
부족으로 돌아가면 루드의 신분을 공표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적법한 아들로서, 또 부족의 후계자 후보로서.
그 자질은 이미 전사의 시험과 이번 전투에서 확인했으니 망설일 것은 없었다.
소크란을 비롯한 계파의 반발이 예상됐지만, 그 또한 충분히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더 이상 잃지 않는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는 무력감 따위는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든 지킬 생각이었다.
그런 각오와 함께 몸을 일으켰을 때. 제노스의 몸이 얼어붙었다. 순간의 경직이 아니었다. 심장이 얼어붙은 듯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조그마한 움직임도 이어 갈 수 없었다.
"족장님!!!"
"아버지!!"
모두의 외침 속에 제노스가 쓰러졌다.
까마귀 부족에 비상이 걸렸다. 성공적으로 오우거를 사냥하고 복귀한 토벌대였으나, 그를 이끌었던 제노스가 의식을 잃은 채 돌아왔다.
"당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전투가 끝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갑자기... 크흑!"
"이게 다 저희가 불충해서입니다."
"죄송합니다, 소크란님. 죄송합니다, 제노스님."
제노스의 상태를 확인한 소크란은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이 자책할 상황이 아닙니다. 다들 피로할 텐데 돌아가 쉬시지요.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부상을 입었거나 필요한 게 있는 분들은 언제든 말씀하시고요."
"제노스님은…"
"그이는 제가 챙기겠습니다. 거기 너희는 당장 의원을 데려오거라."
"네, 소크란 님."
소크란의 지휘 아래 상황이 순식간에 정리됐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당연한 것인데 무얼요. 부족을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응당 보여야 할 모습일 뿐입니다."
토벌대는 자신들을 대하는 소크란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제노스가 군주로서 존경스럽고 따라 마땅한 이라면, 소크란은 세심히 다른 이들을 챙기는 항상 감사한 인물이었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제노스님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그이가 강한 건 제가 가장 잘 압니다. 그런 그이가 이렇게 돼서 돌아올 정도라면 상대했다던 몬스터가 얼마나 강했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군요. 이리 무사히들 돌아오셨으니 다행입니다."
사력을 다해 최고 속도로 돌아온 토벌대의 상태도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번 더 고개 숙인 그들은 치료를 위해 물러났다.
그리하여 남은 건 루드와 로하스뿐.
"여러분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데... 이분도 토벌대에 함께 하신 건가요?"
"아, 예. 가는 길에 합류해서 모르실 겁니다. 저희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가자 루드."
로하스의 채근에도 루드의 발걸음을 떨어질 줄 몰랐다. 시선은 의식을 잃은 제노스에게 고정된 채였다.
"루드, 이제 가야 해."
한참을 서 있던 루드는 로하스가 팔을 잡아끄는 형국이 돼서야 발걸음을 옮겼다.
"흐음...."
그렇게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는 소크란은 생각에 잠겼다.
'뭔가 달라졌는데.'
뭐라 딱 짚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뭔가가 바뀌었다. 분위기라 해야 하나... 여하튼 묘한 느낌이었다.
제노스의 핏줄로 예상되는 그는 요주의 인물. 언제고 신경을 세우고 있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보다 우선인 게 있었다.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되셨을까. 잘나신 소드마스터님께서."
창백하게 질린 채 의식이 없는 제노스.
소크란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이걸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그리 고민하는 모습은 먹잇감을 앞에 둔 뱀의 모습과 똑같았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와 함께 소크란의 기색이 일변했다. 가면을 바꿔 낀 듯 한순간에 뒤바뀐 표정은 더 이상 냉혹한 뱀의 것이 아니었다. 인자한 대모의 것이었지.
"무슨 일이시죠?"
"드릴 말씀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이리 찾아왔습니다."
직접 찾아왔음에도 무언가 망설이는 듯 한동안 고민하던 방문객은 정신을 잃은 제노스의 얼굴을 보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제노스님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자가 있습니다."
토벌대의 출정길에 있었던 일부터, 토벌이 끝난 직후 그와 제노스 사이에 흐르던 묘한 기류까지.
방문객은 자신이 보았던 것들을 모조리 고했다.
제노스의 의중은 알 수 없지만 딱히 부정하지 않았으며,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는 것도.
모든 이야기를 끝낸 그는 조심히 소크란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군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답니다."
걱정과 달리 소크란의 안색은 평안했다. 자신의 아들들인 카이예스와 레이예스의 후계 구도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그에 대해 걱정하거나 염려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때론 여자의 촉이 소드마스터의 감보다 뛰어날 때가 있는 걸까요? 호호."
외려 너스레를 떨 정도.
그 모습에 방문객은 안도했다. 말하면서도 괜한 것을 말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불필요한 걱정이었던 모양이었다.
하나 그가 떠나간 순간.
까득.
그가 찾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크란의 기색이 일변했다.
'알았단 말이지. 그 녀석이 자신의 핏줄이란 걸. 그년의 아들이란 걸!'
제노스의 연인이었던 헤나를 기억한다. 같은 여자가 봐도 눈길이 갈 정도로 온화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제노스가 그토록 목을 매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압박했다. 제노스의 곁을, 부족을 떠나기를. 그녀가 옆에 있으면 제노스와 결혼할 수 없을 것을 알았기에, 그래선 안 됐기에 그랬다.
생각대로 제노스와 까마귀 부족의 미래를 논하자 헤나는 결국 스스로 제노스의 곁을 떠났다.
오직 그녀와 자신만이 아는 사정이었다.
'그때 확실하게 죽였어야 했는데.'
그때 당시, 자신답지 않던 선택을 한 게 문제였다. 어차피 뒷배도 하나 없는 여인의 몸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싶어 방심했다. 부족을 떠난 헤나에게 암살자를 보내지 않은 건 그런 이유였다.
뒤늦게 그녀가 태중에 아이를 품었음을 깨닫고 암살자를 보냈지만....
"어쩔 수 없네요."
그녀에 대한 생각은 여기까지. 이제부턴 과거가 아닌 현재에 집중할 때였다.
"당신은 당신의 그 고고한 사랑과 잘난 아들 때문에 죽게 될 거랍니다."
헤나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자신이 제노스의 아들인 걸 밝히지 않았다면 당장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은 준비가 완전하지 않았고 위험부담도 컸으니.
하지만 제노스가 새로운 아들을 부정하지 않았단 걸 알게 된 지금,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대로는 아들들의 후계 구도에 균열이 일어날 게 뻔했다. 그건 막아야 했다. 자칫 대업에 영향이 있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새로운 아들의 등장은 토벌대원들만 알고 있는 상황. 그들의 입만 단속하면 됐다.
제노스가 스스로 아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충분히 성립시킬 수 있는 전제였으니 문제는 없었다.
"그러게 저한테 좀 잘하시지 그랬어요."
함께 살며 느낀 모멸감이 얼마인가.
제노스는 한순간도 헤나를 잊은 적 없었고,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이와 함께 사는 건 비참한 것이었다.
물론, 자신 또한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가 제게 잘했다 한들 바뀌는 건 없었겠지만.
"…이런, 이건 좀 예상 밖의 일인데."
소크란은 제노스의 가슴에 댔던 손을 뗐다. 자신의 마력을 침투시켜 내부를 더 뒤엉키게 할 생각이었는데 마력의 침투가 불가능했다.
'제노스가 이리 된 이유가 이것 때문인 것 같은데.'
어마어마한 한기가 느껴졌다. 몸만이 아니라 마나로드도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제노스를 이리 만든 원흉일 터.
"어쩔 수 없네. 번거로워도 다른 수를 쓸 수밖에."
마력을 침투시키는 게 가장 깔끔한 방법이지만 상황이 이래서야 불가능했다.
그보단 다른 수를 쓰는 게 나았다. 마침 얼마 전 지금 같은 상황에 쓰기 딱 좋은 걸 얻었으니 그걸 사용할 생각이었다.
"오래도록 잠들어 계세요. 모든 준비가 끝날 때까지만요. 그러고 나면 편하게 해 드릴게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소크란은 그것을 제노스의 입으로 흘려보냈다.
황혼 부족에서 탈취한 비전을 토대로 만든, '황혼의 비명'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79화
까마귀 부족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갑작스레 중단된 전사의 시험과 토벌대 모두가 학을 뗄 정도로 고단했던 오우거 토벌, 부상을 입고 일어나지 못하는 제노스까지. 안 좋은 일들이 겹겹이 터졌다.
토벌대가 돌아온 게 벌써 사흘 전이었지만 제노스는 아직까지도 정신을 되찾지 못했다. 함께 출정했던 다른 이들은 모두 병상을 털고 일어났기에 더욱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아냐, 일어날 거야. 제노스 님이시잖아.
사람들의 입을 단속한다고 했으나 소문이 퍼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여러 사람의 노력을 비웃듯, 제노스가 의식을 잃었고 도통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가 온 부족에 퍼졌다.
"소크란 짓이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로하스는 루드의 말에 맞장구쳤다. 자신이 봐도 지금 상황은 소크란이 유도한 게 분명했다. 제노스의 상태를 비밀로 부칠 거였다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이 알 정도로 소문이 났다는 건 누군가 이야기를 퍼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럴 만한, 또 그럴 수 있는 인물은 소크란뿐이었고.
"아버지의 상태를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
"안 그래도 토벌대원들끼리 병문안을 가기로 했으니까 그때 같이 가면 될 거야."
"그래."
외부인의 접촉을 차단하고 있는 소크란이었지만 생사를 함께한 이들의 병문안마저 거절할 수는 없을 터.
'분명 무언가를 했을 거다.'
외부인의 접촉을 차단한 것은 무언가 손을 썼기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그 증거를 잡을 수 있다면, 소크란을 궁지로 몰고 갈 수 있었다.
'전생에서도 딱 이런 상황이었다.'
정상 컨디션의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무언가를 한다는 건 어려웠다. 하나 의식이 없는 상태의 소드마스터는 다르다. 뛰어난 내구성과 저항력의 신체를 가졌으나 그뿐. 의식이 있을 때와 비교하면 그 난이도는 천지차이였다.
전생에서 소크란이 독을 주입한 것도 이런 상황이었다. 설산 트롤에게 큰 부상을 입고 의식이 혼미하던 제노스에게 소크란은 조금씩,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독을 주입했다. 서서히 제노스의 정신과 신체를 갉아먹을 독을.
이번에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전생보다 이른 시기이긴 했지만 '제노스의 또 다른 아들'인 자신의 등장으로 상황이 바뀌었으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아직까지 제노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걸 보면 확실했다.
'이번엔 절대 마음대로 하게 두지 않는다.'
전생에서 제노스가 죽은 것은 소크란이 중독 시킨 독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 생에선 결코 그렇게 하게 둘 수 없었다.
그를 위한 준비는 이미 마쳐 놓았다. 남은 건 때를 기다렸다 한 번에 잡아채는 것뿐.
침상에 누워있는 제노스의 몸은 하얗게 질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냉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건...."
"그래, 우리와 똑같군. 그 망할 괴물의 힘이야."
제노스의 상태를 확인한 토벌대원들은 침음을 흘렸다. 제노스의 몸에서 흐르는 냉기의 근원을 알고 있었다. 퓨렐 협곡에서 토벌한 오우거, 그 괴물의 것이었다.
"우리보다 오랜 시간, 더 가까운 거리에서 녀석을 상대하셨으니 우리가 겪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
"하지만 소드마스터시라고."
"그 괴물은 소드마스터를 죽일 뻔했던 괴물이지. 우리들 전부와."
냉정한 말에는 자조의 감정이 섞여 있었다.
함께 싸웠음에도 제대로 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족장님은 꿈에서 얼마나 괴로운 싸움을 하고 계실까.
그 괴물과 멀리 떨어져 짧은 시간 항전했음에도 온몸이 얼어붙는 두려움을 느꼈다.
괴물의 코앞에서 녀석을 쓰러트릴 때까지 싸웠던 족장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자네의 힘으론 어떻게 안 되나?"
"한 번 봐야 알겠습니다만, 일전에도 말씀드렸듯 여러분들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차가운 제노스의 몸을 부여잡고 흐느끼던 토벌대원들이 몸을 비켰다. 그들 사이로 열린 길을 따라 제노스에게 다가간 루드는 심장 위로 손을 올렸다.
'역시....'
내부에 가득 자리 잡은 차가운 기운. 자신의 손이 닿자 제노스 내부의 한기가 요동치는 게 느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저분에게 그이를 치유할 방법이 있는 건가요? 그게 뭐죠? 그이를 깨울 방법이 있다면 제발 제게도 알려 주세요. 흐흑."
그 과정을 지켜보던 소크란이 울음을 터뜨렸다. 영락없이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모습이었으나, 그 이면에 숨겨진 가증스러움을 아는 루드였다.
"저희도 족장님과 비슷한 증상이 있었습니다만, 그의 도움으로 이겨 낼 수 있었습니다. 분명 족장님도 금세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소망을 품은 말이었으나 루드는 거기에 화답할 수 없었다. 손을 뗀 루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아...."
"협곡에서 처음 쓰러졌을 때도 말씀드렸다시피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지금으로선 한기가 더 퍼지는 걸 막는 게 최선입니다."
"그럼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의원들도 어찌할 도리를 못 찾았다는데."
"일단 최대한 한기를 억제하고 줄이는 게 중요합니다. 조금이라도 체온을 올릴 수 있게 해야겠죠."
"따뜻한 탕약을 내오라고 할게요. 시간에 맞춰 계속해서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방도가 있을까요? 뭐라도 좋으니 알려 주세요."
초조와 걱정으로 덜덜 떨리는 소크란의 손이 루드의 말을 메모했다.
그 안쓰러운 모습에 토벌대원들은 죄책감에 빠졌다. 자신들 때문에 정신을 잃은 족장님과 그 모습을 보며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대모의 모습은 두 번 다신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염치없는 말씀이지만, 족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당연한 말씀을요. 이리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이가 깨어나면 꼭 전달하겠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물러난 자리. 제노스와 단둘이 남은 소크란은 조금 전 메모했던 것을 천천히 읊었다.
"몸은 항상 따뜻하게. 바깥뿐만이 아니라 안쪽도. 따뜻한 탕약 같은 게 좋음. 옷과 이불은 주기적으로 바꿔 줄 것."
입가에 옅은 미소가 배었다.
'따뜻한 탕약이 좋다니 아내 된 도리로서 어쩔 수 없네요.'
마침 조금 전, 시비를 시켜 마련한 탕약이 올라왔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황혼의 비명을 섞었다.
소드마스터에게도 통한다는 황혼 부족의 극독.
티 나지 않게 소량씩만 사용하다 보니 가시적인 효과는 아직이었지만, 그 양이 누적되다 보면 분명 효과가 나타날 터였다.
"따뜻한 탕약 드세요. 얼른 드셔야 얼른 좋아지죠."
길게 찢어진 소크란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제노스가 의식을 잃은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불안에 찬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일어나지 못하시면 어떡하지?
제노스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만이라도 대신할 사람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카이예스와 레이예스님은?
아니 그보단 소크란님이 낫지 않겠어? 두 분은 아직 어리시고, 제노스님이 의식을 찾을 때까지만이니까.
그러한 여론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제노스를 대신해 소크란을 족장 대행으로 세우자.
"본격적으로 나오는군."
"그러게, 이렇게 대놓고 움직일 줄은 몰랐는데."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부족 안에서의 영향력도, 아버지가 깨어나지 않을 거란 것도."
이야기가 퍼지는 건 제노스의 중태가 알려진 것만큼이나 빠른 속도였다. 삽시간에 확산된 여론은 소크란이 족장 대행이 될 수 있게끔 힘을 실었다.
다만 모든 이가 소크란의 족장 대행을 찬성하진 않았다. 제노스를 기반으로 한 보수파가 그랬다. 그들은 혹여 이번 일로 까마귀 부족이 뱀 부족의 영향을 받게 될까 염려했다.
하나 소크란의 족장 대행에 대한 갑론을박은 생각 외로 싱겁게 끝났다.
"본인은 소크란님의 족장 대행을 찬성하네. 충분한 능력을 갖췄고 인망이야 말할 것도 없으니. 모두가 그간 소크란님의 행적을 보아 오지 않았는가. 그대들의 염려가 무엇인지는 아나, 그분은 이미 출가외인. 뱀 부족을 떠난 지 어언 십수 년일세. 본인으로선 그분 외에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네. 자네들 생각은 다른가?"
부족의 원로이자 보수파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장로 팔라운이 소크란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선대 족장 때부터 부족을 위해 일 해온 원로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결국 팔라운의 지지를 등에 업은 소크란은 손쉽게 족장 대행에 올랐다.
'고마워요, 영감님.'
'별말씀을, 약속이나 잘 지키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늙은이의 입이 가벼워질지도 모르니.'
짧은 눈빛 교환이었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이미 이야기가 끝난 상황이었으니, 누군가 배신하지 않는다면 둘 모두에게 좋은 쪽으로 마무리될 터였다.
"휴... 족장의 자리란 건 생각보다 할 일이 많군요. 이 많은 걸 혼자 했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탈이 나죠."
족장 대행으로서의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소크란은 제노스의 옆에 걸터앉았다.
제노스가 의식을 잃은 게 벌써 9일 전, 자신이 족장 대행이 된 지도 이제 이틀째였다.
"자, 아~ 하세요."
침상 머리맡엔 이미 탕약이 준비돼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따뜻하게 데운 탕약은 무언가를 타도 아무런 티도 나지 않았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처음 일을 벌일 때만 해도 조금 이르지 않나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적기였다. 제노스가 무력화된 지금이야말로 까마귀 부족을 잡아먹을 절호의 기회였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생각보다 황혼 부족의 독이 잘 안 듣는다는 것. 벌써 꽤 많은 양을 먹인 것 같은데도 특별한 효과가 보이지 않았다.
'의식을 못 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긴 하지만.'
물론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내부는 독에 좀먹히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게 말이 안 됐다.
'아무리 괴물이 강했다고 한들 말이야.'
같은 기운에 노출됐다던 다른 이들이 멀쩡한 걸 보면 제노스 또한 언제든 털고 일어날 수 있었을 터.
그럼에도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했다는 건 자신이 주입한 독이 효과가 있다는 방증이나 마찬가지였다.
제노스의 입을 타고 탕약이 천천히 흘러들어 갔다.
그 순간.
턱-!
"꺅!!"
차가운 손이 가녀린 손목을 낚아챘다. 부서질 듯한 통증에 소리를 지름과 동시, 소란을 느낀 사람들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헉! 제노스님!"
언제 의식을 잃었냐는 듯 몸을 일으킨 제노스는 땅에 떨어진 탕약 그릇을 들어 입 안에 있던 것을 뱉어 냈다.
"조사해 봐라."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무슨 성분이 들어 있는지, 무엇이 들어갔는지. 하나도 빼지 말고 낱낱이 조사해라. 만약 하나라도 빠졌다간...."
"아, 알겠습니다!"
"이것 좀 놔 줘요. 너무 아파요."
간신히 손목을 빼낸 소크란은 손목을 매만지며 표독스럽게 노려봤다.
"당신,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무슨 짓이지? 우리가 서로에게 뭘 먹여 주던 사이였던가?"
"그게 의식이 없는 사이 내내 간호한 사람에게 할 말인가요?"
"간호가 아니라 감시겠지. 깨어나나 안 깨어나나. 어쩌면 독살을 시도한 걸 수도 있고."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어요?"
침묵이 흘렀다. 부부의 연을 맺었다지만, 정략혼으로 이루어진 관계였다. 애당초 소크란은 뱀 공주 출신. 자칫하면 까마귀 부족과 뱀 부족 간의 갈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보통 때라면 이쯤에서 서로 물러났을 것이다. 확실하지 않으면 서로 피를 볼 상황은 피하는 게 나았으니.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신은 누구죠? 밖에 사람들은 뭘 하기에."
난데없이 문을 열고 나타난 인물. 바치렌의 손엔 방금 전 제노스가 조사를 명한 탕약 그릇이 들려 있었다.
새끼손가락으로 탕약을 찍은 그는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음, 이 맛. 이 향."
어딘지 모르게 시큼한 맛과 퀴퀴한 향.
"분명하군."
지난번 루드가 바꿔치기해 뱀 부족 손에 넘어간 비전에 적혀 있는 독이었다.
황혼의 비명 자리에 대신 새겨 놓은 다른 독의 조합법.
모든 상황이 끝나고 자신에게 이야기했던 것이기에 정확히 기억했다.
"천일야화."
잠에 들어 있어도 정신을 깨워 바깥의 소리와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하는 독이었다.
쓰는 방법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녀석.
그리고 지금은, 까마귀 부족에 퍼진 뱀독을 몰아낼 약으로 쓰이고 있었다.
"잠은 잘 자셨소, 까마귀 족장."
"...족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이리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도 족장이 되어 처음 보는 족장이 침상에 누워 있는 환자일 거라곤 생각 못 했소."
두 사람이 어색한 인사를 나누는 사이, 또 다른 이들이 등장했다.
족장 직속 부대인 까마귀의 눈, 부리, 발톱의 정예들.
퓨렐 협곡 토벌대에 참가했던 몇몇 대원들.
부족 내 정예 부대의 고참급 인사들.
마지막으로, 그들의 뒤로 루드가 나타났다.
"잘 주무셨습니까. 아버지."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8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