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80화
"이게 대체...."
급한 일이라는 로하스의 말에 따라왔던 이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드디어 족장님이 의식을 되찾았단 것에 놀랄 틈은 없었다. 그보다 충격적인 소식들이 연이어 들려왔으니.
"소크란님이 독을 썼다고? 그보다 아버지라니."
"그대들은 알고 있었소?"
루드의 신분을 몰랐던 이들은 토벌대 속했던 이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노스가 깨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괜히 루드의 신분을 밝혀 좋을 게 없었기에 침묵하던 그들이었다.
만에 하나 제노스가 깨어나지 못한다면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었으니, 그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마음이었다.
"허, 부족이 소란스러워지겠군."
새로운 후계권자의 등장은 부족을 시끄럽게 하기 충분했다.
하나 루드의 신분보다 중요한 대목이 남아 있었다.
"그보다 소크란 님, 이자의 말이 사실입니까? 정말 족장님이 드실 탕약에 독을 탄 겁니까?"
"그럴 리가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건 모함입니다."
소크란은 극렬하게 반발했다. 독을 탔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끝장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부정한들 예정된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소크란을 가둬라."
"당신!"
"그녀의 죄는 명백하다. 내게 독을 썼으며 감히 까마귀 부족을 농락하려 했다. 그 죄는 죽음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다."
"...진심이십니까?"
"내가 허언을 뱉는 걸로 보이나?"
제 아내를 죽이겠다는 충격적인 말에 자리에 있는 이들이 물었으나 제노스의 의사는 확고했다.
'예상은 했다만, 생각보다 더 악랄한 여자였다.'
소크란은 황혼 부족에서 입수한 비전을 따라 독을 만들었지만, 그 비전은 루드가 바꿔치기한 비전이었다.
황혼의 비명이라고 생각해 제조한 독도 황혼의 비명이 아닌 다른 독이었고.
천일야화라는 이름의 독은 신체활동을 제한하며 의식을 각성시키는 독으로, 정신을 고문할 때 주로 사용되는 독이었다.
다만 이번의 경우에는 그 쓰임새가 달랐다.
소드마스터의 정신은 일반적인 범주론 가늠할 수 없는 것.
제노스는 가사 상태에서도 천일야화를 통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소크란이 했던 말과 행동 전부를 포함해서.
"뭣들 하나, 끌고 가지 않고."
"알겠습니다."
결국 소크란이 끌려갔다. 마지막 순간까지 혐의를 부인했지만, 제노스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렇게 소크란이 사라진 뒤, 제노스는 흘깃 루드란테를 바라봤다.
자신과 헤나의 아들... 아직은 조금 멀게 느껴지는 존재였다. 간간이 얼굴에서 헤나의 흔적이 보일 때면 흠칫하기도 했고.
'여기까지 내다봤다는 건가.'
녀석은 황혼 부족에서 비전을 지켜 내며 여기까지 내다본 것일까. 그렇다면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과연 자신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계산이 가능했을까?
'좋아해야 하는 건가 두려워해야 하는 건가.'
퓨렐 협곡의 오우거를 상대로 보여 줬던 무력.
황혼 부족에서부터 지금까지, 소크란의 심계를 짐작하고 역으로 이용하는 지략.
문무를 겸비했다는 말이 어울렸다. 그것도 둘 모두 천재적인 재능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읽히지 않으니.'
그럼에도 마냥 좋아할 수 없는 건 루드란테의 생각을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까마귀 부족에 위해를 끼칠 것 같진 않으나, 심중에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
"고생했다."
"아버지야말로 고생하셨습니다. 몸은 어떠십니까."
"좋지는 않다. 정말 지독한 냉기구나."
"한동안 계속될 겁니다. 꾸준히 냉기를 해소시키긴 하겠지만, 머물러 있던 시간도 시간이고, 몸 상태도 좋지 않으셨으니."
제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이 정도 피해로 소크란을 축출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다들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군. 안 그래도 설명하려 했다."
아직 남아 있는 이들은 제노스의 말에 귀 기울였다.
"이번 일의 시작은 오우거 토벌이 막 끝났을 때부터다."
오우거를 토벌하고 토벌대가 정신을 차리기까지의 시간. 그 사이 제노스와 루드는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 중심엔 소크란과 뱀 부족이 있었다.
"나는 예전부터 소크란을 비롯한 뱀 부족의 세력을 축출하고 싶었다. 그들과의 동맹으로 부족이 성세를 맞이한 건 맞으나... 그들이 너무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서서히 퍼지는 뱀독처럼, 까마귀 부족 내에서 뱀 부족의 영향력은 알게 모르게 커져 가는 중이었다.
어찌나 은밀한지 족장인 제노스와 실무의 최전선에 있는 몇몇 이들만이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혼인 동맹 이후 뱀 부족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 자신들의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우리 부족을 위했다. 소크란 또한 마찬가지로 헌신하는 모습이었고."
초반에 존재하던 뱀 부족에 대한 경계가 누그러진 게 이때부터였다.
"부족의 모두가 혼인 동맹을 통해 더 많은 이득을 본 게 우리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자신들 부족보다 까마귀 부족을 더 위하는 모습. 까마귀 부족 사람들은 여기에 큰 감동을 받았지만, 진짜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동맹이었다면 불가능한 모습이었다.
동맹은 어디까지나 서로의 이익을 위해 함께하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럼에도 뱀 부족이 그런 모습을 취한 이유는 간단했다.
"결국 그 모든 게 자신들의 것이 되리라 믿었으니까."
까마귀 부족을 집어삼키겠다는 야욕. 아니, 까마귀 부족뿐만이 아니라 바깥대륙의 모든 부족을 잡아먹겠다는 욕망.
"그런 와중 루드란테가 제안했다. 그들이 본모습을 드러내게끔 유도하면 어떻겠냐고."
제노스의 시선을 받은 루드는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아버지, 족장님의 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토벌대에 속했던 이들이라면 모두 알 겁니다. 오우거가 내뿜던 한기가 얼마나 지독한지, 해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 어떤 이보다 가까이서 오우거를 상대한 제노스의 내부엔 한기가 가득했다. 당장 해소하지 않으면 신체의 모든 기능이 얼어붙을 정도로.
하나 루드는 그것을 곧장 해소하는 대신 제안했다. 최소한의 조치만 취하고 이대로 부족으로 복귀하자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제노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루드의 계획에서 가능성을 본 까닭이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소크란은 전생과 마찬가지로 독을 사용했고, 황혼 부족에서 만들었던 가짜 비전이란 덫은 훌륭히 기대에 부응했다.
"소크란만이 아니다. 순차적으로 뱀 부족과 관련된 세력을 몰아낼 생각이다. 그러고 나면... 전쟁이 터지겠지."
"!!!"
동맹의 증표였던 소크란을 죽이고 부족 내 남은 뱀 부족의 흔적을 없앤다면... 남은 건 뱀 부족과의 전쟁이었다.
"난 기꺼이 응할 생각이다."
근 십수 년간 전쟁이 없던 바깥대륙. 그렇기에 제노스의 선언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하여 너희를 불러 모았다. 뱀 부족과 관련돼 있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영향력을 갖췄으며, 믿을 수 있는 자들."
"이 자리에 저희가 모인 게 우연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내가 그리 허술해 보이나?"
제노스 내부에 자리한 한기는 자칫 시간을 더 끌었다간 루드도 손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최고의 기회를 노리기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소크란을 잡기 위해 목숨을 건 것이다.
그렇게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일을, 아무 생각도 없이 처리할까?
"로하스에게 명단을 꾸려 준 것이 나다."
지난밤, 루드는 누구도 몰래 제노스를 찾아갔다. 더 이상은 시간을 미룰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제노스라 해도 아무런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정수의 한기를 이토록 오래 품고 있는 건 무리였다.
심지어 전투의 여파로 내상까지 있었으니 자칫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때마침 제노스도 준비가 됐다 여긴 상황. 오우거의 한기를 일부 몰아냄과 동시에 깨어난 제노스는 소크란을 축출할 계획을 완성했다.
"지금부터 너희에게 임무를 내릴 거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쇼."
오랜 세월 조사를 통해 검증된 이들이 무릎 꿇었다. 뱀 부족과 전혀 관련돼 있지 않고, 까마귀 부족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이들. 이들로 하여금 뱀 부족의 세력을 몰아낼 생각이었다.
"내가 깨어났음과 소크란이 암살을 시도했음을 알려라. 더불어 내 아들, 루드란테의 존재도."
"명을 받들겠습니다."
"부족 내의 모두가 알게 해라. 우리 부족을 넘어 모든 부족에서도 알 수 있도록."
명을 받은 이들이 일어났다. 명을 수행하기 위해 떠나려는 그들의 뒤를 향해 제노스가 말을 덧붙였다.
"소크란의 처형이 열흘 뒤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소크란이 제노스를 암살하려 했고 현장에서 붙잡혔다. 열흘 뒤 처형이 집행된다.
이 말도 안 되는 내용의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미친 소리라 욕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었다. 소문의 근원지로 지목된 이들이 하나같이 명망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신뢰도와는 별개로 사람들은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소크란이 어떤 인물인가. 제노스의 아내이며 부족의 여러 분야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 아닌가.
심지어는 며칠에 불과했지만 제노스 대신 족장 대행을 맡기도 했었다.
그런 이가 처형당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개 석상에 나타난 제노스는 못 박았다.
소크란의 처형이 사실이라고.
"사실이다. 소크란은 열흘, 이젠 아흐레겠군. 아흐레 뒤 처형한다."
"아버지!"
카이예스는 믿을 수 없었다. 어머니를 처형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가 안 좋은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이가 좋고 안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제노스의 검은 눈동자가 카이예스를 응시했다. 한동안 빤히 카이예스를 바라보던 시선은 곧 서류로 옮겨 갔다.
"죄와 처벌의 문제지."
암살 미수, 그것도 족장을 대상으로 한 암살 미수다. 즉결 처형이 원칙이었다.
그럼에도 열흘이란 시간을 준 건 정치적 이유였다.
'뱀 부족에선 아직 반응이 없다.'
그들도 까마귀 부족 내에서 대대적인 축출이 시작됐음을 알았을 것이다. 하물며 뱀 공주 출신인 소크란까지 처형당할 상황이니 모를 수가 없을 터.
그럼에도 뱀 부족은 여태까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고요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방관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뭐, 그건 그것대로 괜찮겠지.'
당장 외부의 전력이 개입해도 골치가 아팠다. 일단은 내부를 다지는 것이 우선.
그럼에도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건 뱀 부족이 반발하면 모든 상황을 한 번에 정리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노스의 생각은 이윽고 자신의 아들, 루드란테에게로 뻗쳤다.
'소드마스터인가.'
루드란테는 오우거와의 싸움을 기점으로 소드마스터에 오른 게 분명했다.
이전까지는 조금씩 읽히던 기도가 이젠 전혀 읽히지 않았다. 자신의 몸 상태가 아무리 정상이 아니라지만 루드란테가 소드마스터에 오르지 않고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분간 힘을 쓸 수 없는 자신이지만 루드란테라면 자신의 빈자리를 메꾸고도 남을 터.
하지만 상황을 보니 당장 그 힘을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물러가 보겠습니다."
"카이예스."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는 태도에 물러가려던 찰나. 카이예스는 자신을 부른 제노스를 바라봤다.
"네 마음과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안다."
어머니를 잃게 생긴데다 새로운 경쟁자가 생겼다. 좋을 수가 없는 상황.
하나 제노스는 카이예스가 그 모든 상황을 잘 이겨 내길 바랐다.
녀석은... 예전의 자신을 많이 닮았으니까.
"가 봐라."
"...예."
특별한 말은 없었다. 잠시간의 부름과 눈 맞춤, 그 정도가 지금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카이예스가 그것을 알아 주길 바랐다.
아들이 떠나간 자리, 제노스는 조용히 서류를 검토했다.
사락, 사락. 한동안 서류가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 시각.
"어머니."
"잘 왔어요, 내 아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소크란은 태연한 기색으로 레이예스를 반겼다. 처형이 확정됐음에도 태연한 기색이었다.
"뭐든 말씀만 하세요."
레이예스를 가까이 부른 소크란은 조용히 이야기를 전했다. 품속에서 꺼낸 무언가를 건넨 건 덤이었다.
"...알겠어요. 해 볼게요."
죄인에게 허락된 짧은 면회가 끝나고. 다시 홀로 남은 소크란은 작은 미소를 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곤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81화
까마귀 부족의 감옥은 외곽 지역에 있었다. 인적이 드물고 접근이 까다로워 외부와의 접촉이 어려운 위치로, 오가는 이를 파악하기 쉽고 혹 범죄자들이 난동을 부려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감옥은 죄의 경중에 따라 지상과 지하로 구분됐다. 비교적 죄가 가벼운 이들은 지상의 감옥에, 죄가 무거운 이들은 햇빛 한 점 없는 지하에 수감됐다.
소크란이 수감된 곳은 당연히도 지하였다. 지하 감옥 중에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감옥.
족장을 암살하려 했단 죄는 그 어떤 죄보다도 무거웠다. 또 드러난 것 외에 까마귀 부족을 찬탈하려 한 죄도 있었으니, 여타의 죄인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입구에서부터 한참을 들어가야 그녀가 수감된 곳이 나왔는데, 지면과의 거리가 먼 까닭인지 조금의 온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신은."
물 한 잔 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제 앞에 나타난 이를 확인하고 입을 연 소크란의 목소리는 갈라진 채였다. 윤기가 나던 피부도 수분을 잃고 푸석해져 있었다.
소크란은 제 앞에 선 사내를 보았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이는 오랜 세월 준비한 대계를 망친 원흉이었다.
"물어볼 것이 있어 왔다."
"물어볼 거라... 그게 뭘지 궁금하네요."
루드는 품 안에서 작은 함을 꺼냈다. 함 안에는 작은 구슬 같은 결정이 들어 있었는데 지독한 기운을 풍겼다.
"이게 뭔지 알고 있겠지?"
모치란의 시체에서 나온 결정은 어마어마한 독성을 품고 있었다. 독도 독 나름인지라 정순한 느낌을 주는 것도 있었는데, 이 결정에서 느껴지는 독성은 끔찍할 정도로 기분 나쁜 성질이었다.
성질만이 문제가 아니라, 독인의 경지에 오른 모치란도 끝내 온전히 흡수하지 못하고 잠식될 정도로 강력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그렇게 강력함에도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 근원이라도 알아야 대비책을 세울 수 있었다.
하나 소크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글쎄요. 그게 뭘까요."
"모르는 척할 셈인가. 뱀 부족이 모치란에게 건넸단 걸 알고 있다."
"어머, 저희 부족이요? 그렇군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부족을 떠난 지 오래라 부족이 무얼 하고 있는지는 저도 모른답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하군요."
그 대답에 루드는 한동안 소크란을 바라봤다. 출가외인이란 소크란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비록 동맹의 증거로 부족을 떠나왔지만, 그녀는 여전히 뱀 공주였다. 지금 뱀 부족에 있는 허울뿐인 뱀 공주가 아니라, 뱀 여왕이 자신의 후계로 생각하는 진짜배기 뱀 공주.
"죽을 때까지도 가면을 벗지 않을 생각인가?"
"가면이라뇨. 그보다 제노스를 보거든 모든 게 오해라고 전해 주세요. 전부 설명할 수 있다고. 이건 말도 안 되는 모함이라고요."
뻔뻔한 여자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현장에서 잡힌 주제에 무죄를 주장하고, 모든 게 끝났음에도 끝까지 가면을 벗지 않다니.
"뱀 공주 소크란. 내가 당신에 대해 모를 거라 생각하나?"
낮은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루드의 눈이, 소드마스터의 정신이 소크란을 응시했다.
"...."
그제야 소크란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무고를 주장하던 뻔뻔한 낯짝이 일그러지고, 기품을 가장했던 본색이 드러났다.
"소드마스터에 오른 건가?"
"잘 아는군."
"십수 년을 소드마스터와 함께 했는데 그 정도도 모를까."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어딘가 모르게 음험했다.
"나한테 궁금한 게 있다 했지."
"그래."
"그걸 알려 주면 넌 내게 뭘 해 줄 거지?"
루드의 생각대로 소크란은 모치란이 품었던 독성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그러나 쉽게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아니,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오랜 시간 공들인 대계를 무너트린 녀석이 무어 예쁘다고 알려 준단 말인가.
하지만.
'무언가 받을 수 있다면 이야긴 또 달라지지.'
고작 독의 정수가 무엇인지 알려 주는 걸로 받아 갈 수 있는 게 생긴다면... 그녀는 충분히 그것의 정체를 말해 줄 의사가 있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 간단하군."
구미가 당길 보상을 제시하라는 역제안이었으나 루드는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이 소크란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한정돼 있었고, 그중 가장 확실한 건 하나였으니.
"고통스럽지 않게 편히 죽여 주마."
까득.
"거래는 없던 걸로 하지."
저도 모르게 이를 간 소크란은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 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루드의 입장은 달랐다. 아직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다.
"하나 더, 네 아들의 목숨을 살려 주마."
"...진심인가?"
"원한다면 검에 대고 맹세할 수도 있다. 그걸 믿는 건 네게 달렸겠지만."
속을 긁는 말 이후 나온 제안은 소크란으로서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흔들리는 기색을 읽은 루드는 곧장 몰아붙였다. 틈이 보일 때 몰아칠 필요가 있었다.
"내 검에 대고 맹세하지. 어떤 상황에서든 한 번, 네 아들의 목숨을 지켜 주겠다."
"...좋아, 믿어 보겠어. 어떤 상황에서든 한 번 살려 주기로 한 거 명심해."
어쩌면 말뿐일 수도 있는 맹세. 하나 소크란은 소드마스터란 게 어떤 존재인지 알았다.
일평생 검을 갈고닦으며 지고의 경지에 오른 이들이 검에 대고 한 맹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모치란에게 건넨 건 '독의 정수'야. 알겠지만 엄청난 독성을 품었고, 그보다 더한 악의가 깃들어 있지."
"악의인가."
"그래, 고작 독성인 주제에 의지가 있는 것처럼 움직이니까."
확실히 독의 정수는 의지를 갖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괴물이 된 모치란이 점차 이지를 잃고 폭주한 것도 설명이 됐다.
"어떻게 만든 거지? 아니, 생겨난 건가?"
"그건 첫 번째 질문에 포함되지 않은 거 같은데."
소크란은 금세 입을 다물었다. 더 궁금한 게 있거든 자신의 입을 열 무언가를 더 제공하란 의미였다.
하지만 루드는 더 이상 소크란에게 무언가를 줄 생각이 없었다.
'굳이 독의 정수라 꼽은 건 독 말고도 그와 비슷한 다른 정수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독의 정수에 대해 명확한 정보가 있는 걸 봐선 자연 발생인지 인위적인 생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주기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 같고.'
대신 소크란과의 짧은 대화를 반추하며 정보를 조합해 냈다.
'결국 직접 뱀 부족을 만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겠네.'
결론을 내린 루드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수확이었다.
"...가는 건가? 더 물어보지 않아도 괜찮겠어? 더 이상은 물어볼 기회가 없을 텐데."
그 망설임 없는 태도에 소크란이 발을 붙잡았으나.
"더 궁금한 게 생기면 네 영혼에게 물어보지."
루드의 걸음을 멈추기엔 역부족이었다.
* * *
가장 먼저 이변을 느낀 건 루드였다. 침대에서 일어난 루드는 곧장 무장을 챙겼다.
"무슨 일이야?"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 로하스를 찾아서 모두에게 알려. 아버지에겐 내가 말하지."
휴이에게 소식을 전파할 것을 부탁한 뒤, 곧장 제노스를 찾아갔다.
"아버지!"
"왔느냐, 올 줄 알았다."
몸 상태가 완전하지 않다지만 소드마스터란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다.
루드와 마찬가지로 이변을 느낀 제노스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끄우어어어어-
카라랑! 카라라랑!
츠흥! 츠흥! 츠흥!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정체를 파악하는 건 간단했다.
"몬스터군."
"한두 마리가 아닙니다."
"그래, 웨이브인가."
구태여 기감을 확장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압도적인 숫자의 기척. 파도처럼 몰려드는 몬스터는 몬스터 웨이브의 증거였다.
퓨렐 협곡에서 겪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훨씬 많은 숫자의 몬스터가 보다 역동적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뎅-! 뎅-! 뎅-!
부족 전체에 위급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발 빠른 대처, 하나 그것이 모두의 안전을 보장하진 않았다. 아무리 빨리 대처한다 한들 사상자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을 터. 다만 그 숫자의 크고 작음에는 관여할 수 있었다.
"바로 움직여야겠군."
"조심하세요. 뭔가 이상합니다."
"알고 있다. 이번 웨이브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쯤은."
몬스터 웨이브가 흔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희소한 것도 아니었다. 제노스는 이미 세 번의 웨이브를 겪었다.
다만 이번 웨이브는 명백히 이상했다. 보통의 웨이브에서 보이는 전조 현상이 하나도 없이 갑작스레 일어났다.
"너도 조심해라."
오우거와의 전투에서 내상을 입은 데다 제때 한기를 몰아내지 않아 아직 후유증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큭! 밀어! 찔러!"
"밀어! 찔러! 밀어! 찔러!"
부족 바깥에선 이미 전투가 한창이었다. 빠른 대처 덕에 몬스터가 부족 내로 들어오는 건 막아 냈지만, 이대로라면 뚫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죽이고 또 죽여도 끊임없이 몰려드는 몬스터. 죽은 몬스터로 이루어진 산을 넘으며 다가오는 몬스터들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죽는다.'
모두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서거걱-!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여긴 우리 까마귀의 발톱이 막겠다. 서쪽으로 백 미터쯤 가다 보면 다른 전선이 있다. 부상자들은 뒤로 빠지고, 싸울 수 있는 녀석들은 거기에 합류해라."
"여긴 우리 창공 부대가 막겠다! 힘이 남은 녀석들은 몬스터 시체를 쌓아 벽을 만들어라!"
까마귀 부족을 대표하는 무력 부대들이 전선에 합류하고.
"다들 비켜! 내가 처리할 테니까!"
"전사의 자격을 얻었으니,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야겠지."
전사의 시험 때문에 모여들었던 참가자들이 힘을 보탰다.
어느덧 전선이 정비되어 가는 상황. 쐐기를 박은 건 변신 신비로 외관을 바꾼 루드였다.
"솟아라, 꿰뚫어라, 얼려라."
정수의 힘에서 비롯된 흑마력이 순식간에 마법을 완성했다. 그렇게 완성된 마법은 루드의 의지에 따라 빠르게 몬스터들을 섬멸했다.
땅에서, 허공에서, 몬스터의 시체에서 생겨난 얼음들은 곧 근방의 몬스터들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그리 꿰뚫린 몬스터에게서 또 얼음이 생기고, 다른 몬스터를 꿰뚫고....
그러한 과정의 반복. 그 효과는 확실했다.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몬스터 무리.
'속전속결로 끝낸다.'
대규모 몬스터 소탕에서 뛰어난 마법사 하나가 갖는 가치가 얼마나 큰지, 그것을 몸소 증명하고 있는 루드였다.
"이게 뭐야!"
"요술쟁이다!"
"겁먹지 마라! 요술쟁이도 우리 편이다!"
물밀 듯 밀려오던 몬스터가 한 차례 정리되자 숨통이 트였다. 호흡을 가다듬은 전사들은 보다 힘을 내 몬스터를 상대했다.
"루드란테다!"
"족장님도 계신다!"
어느새 변신 신비를 해제하고 본 모습으로 돌아온 루드도 전사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몬스터 웨이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
몬스터 웨이브로 한창 시끄러운 와중 레이예스는 카이예스를 찾았다.
"잘 왔다. 너도 얼른 준비해라."
카이예스는 몬스터에 맞서기 위해 준비하며 레이예스에게도 준비할 것을 채근했다.
하나 레이예스가 카이예스를 찾아온 목적은 함께 몬스터를 처리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형님. 아니, 형. 어머니를 탈출시키자."
"뭐?"
"어머니가 이대로 죽게 둘 순 없어. 형은 괜찮아? 나는 안 괜찮아. 레지스도 마찬가지고. 우리야 성인이라지만 레지스는 아직 어린아이잖아. 난 레지스한테 어머니가 죽었다는 말은 할 수 없어."
"안 된다."
카이예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레이예스의 마음이 어떨지 안다. 자신 또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었다. 죄인인 어머니를 탈출시키는 건 분명 안 되는 것에 속했다.
"...그럼 하다못해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기라도 하자. 어머니가 계신 곳도 몬스터 웨이브의 영향권인데 아무도 거기를 지킬 생각을 안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더라도 몬스터한테 돌아가시게 둘 수는 없잖아."
눈물이 맺힌 채 울부짖는 동생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카이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다. 최소한 그런 식으로 돌아가시게 해선 안 되는 거지."
"형!"
"준비해라. 바로 출발할 거니까."
"고마워. 정말 고마워, 형님."
두 형제는 곧장 소크란이 갇힌 감옥으로 향했다. 레이예스의 말처럼 감옥이 있는 외곽 지역은 몬스터 웨이브의 영향권이었지만, 아무 병력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바깥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예, 설명은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하시죠."
카이예스는 서둘러 감옥의 문을 열었다. 급한 대로 자신의 거처에 모셔 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크허…억...."
"고마워요, 형님."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너… 레이…예...."
가슴을 뚫고 튀어나온 검이 보였다. 레이예스가 자신의 등에 검을 꽂은 것이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84화
고개 숙인 사절단은 총 열 명이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숫자.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숫자가 아닌 구성원이었다.
"그대가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사르한."
사절의 대표를 맡은 사르한은 뱀 여왕의 칼이었다. 까마귀 부족에 제노스가 있다면 뱀 부족엔 사르한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명성 높은 그였다. 일전에 소크란의 탈출을 위해 파견된 무리를 이끌던 이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못 뵌 새 더 헌앙해지셨습니다."
"입에 발린 말은 필요 없다. 그대가 왔다는 건 뱀 여왕 또한 이번 사건의 무게를 잘 느끼고 있다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제노스의 앞에 선 사르한은 새삼 많은 시간이 흘렀단 걸 느꼈다. 앳됐던 청년은 어느새 족장의 자리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간은 모두에게 동일했다. 청년이 중년이 되는 동안, 중년은 장년이 되었다. 희끗하게 세기 시작한 머리가 그 세월을 표현했다. 콧잔등에 있는 흉터도 이제는 흉터인지 주름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였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고생 많았다. 이제는 그만 쉬려무나.'
연고도 없는 먼 타지에서 홀로 싸웠던 소크란.
얼마나 힘들었을지, 고통스러웠을지. 감히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아이를 추모하는 마음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드러낼 순 없었다.
일련의 모든 일은 전부 그 아이가 안고 가야 했다. 그것이 부족을 위한 일. 아울러 그 아이도 바랄 일이었다.
"소크란이 벌인 일은 모두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 하나 그녀가 벌인 일은 모두 저희 부족과 무관한 일이란 걸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여왕님께선 혹 이번 일로 양 부족 간의 동맹이 흔들릴까 염려하고 계십니다."
"소크란의 독단이었다는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건가?"
족장을 독살하려 했고, 까마귀 부족 내에 뱀 부족의 영향력을 넓혀 부족을 빼앗으려 했다.
하나만 해도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인데, 그 모두를 하려 했다. 심지어 거의 성공까지 가지 않았나.
그만한 일을 개인이 독단적으로 생각하고 실행했다고? 바보도 믿지 않을 내용이었다.
"그렇습니다. 믿기지 않으실 겁니다. 상황이 반대였다면 저희 또한 마찬가지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니 무작정 믿어 달란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번 일로 그간 쌓아온 의와 연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할 뿐입니다. 그러기 위해 이리 찾아온 것이고요."
뱀 부족도 그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거짓임을 알면서도 거부하기 어려운 선물들을 준비했다.
사르한이 신호를 보내자 뒤에 있던 사절단이 짐을 풀어 냈다. 짐엔 온갖 재화가 가득했다. 어찌나 많은지 그 가치를 한 번에 계산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약소하지만 여왕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여왕님께선 까마귀 부족의 화를 풀 수 있다면 더한 것도 가능하다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더한 것이라면...."
"이를테면, 사람이라든가 땅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입니다."
"!!!"
사절단을 맞이한 까마귀 부족은 크게 놀랐다.
안 그래도 인적, 물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사절단이 갖고 온 재화라면 피해를 수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거기다 사르한이 한 말이 진심이라면 소크란이 입힌 피해를 무마하고도 남을 정도로 배상받을 수도 있었다.
"여왕님께선 그 정도로 이 사안을 중히 보고 계십니다."
"...그대들의 생각은 잘 알았다. 먼 길을 와 피곤할 테니 이만 돌아가 쉬어라."
"하면 제가 여왕님께 어떻게 말을 전할 수 있을지요."
"내일 다시 부르겠다. 그때가 되면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었기 때문일까. 사르한은 사절단을 데리고 물러났다.
"어떻게 생각하지?"
"저들이 당장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당장 전쟁을 하지 않는 이유는 파악해야겠죠."
사절단이 빠져나가고, 제노스는 루드에게 의견을 물었다. 루드의 답은 제노스의 생각과 일치했다.
"뱀 부족과 전쟁을 준비하려 했던 건 그들이 당장 이빨을 드러낼 거라 생각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꼬리를 말고 덤비지 않는다면, 굳이 지금 전쟁을 치를 필요는 없죠."
이미 퓨렐 협곡의 오우거와 몬스터 웨이브로 병력에 과부하가 걸린 상태였다. 거기에 재산 피해도 무시할 수 없었으니 지금 전쟁을 치르는 건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전쟁을 준비하던 건 뱀 부족이 지금의 기회를 노릴 거란 생각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선 당장의 피해를 감수하기도 해야 한단 계산 때문이었다.
"당장 전쟁을 치르지 않는 건 우리에게 이득입니다. 받을 수 있는 걸 최대한 받아 내고 부족을 정비하시죠. 시간이 지나면 부상으로 빠져 있는 병력이 회복될 겁니다. 뱀 부족은 우리와 달리 시간이 지난다 한들 전력에 큰 변화가 없을 테니, 당장의 시간을 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나오는 이유가 궁금한데."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땅까지 내주겠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당장 전쟁을 치르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뱀 부족은 계속 감시해야 했다. 분명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그들이었다.
다만 그들이 무언가를 꾸미고 그것을 위해 시간을 번다 해도, 그 또한 까마귀 부족에겐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시간이 확보되면 아버지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
급히 전쟁 준비를 했던 이유 중에는 제노스의 컨디션도 있었다.
소드마스터란 절대전력의 부재.
뛰어난 무력 부대들을 갖춘 까마귀 부족이었지만 제노스가 전력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전쟁 같은 상황에선 집단을 대표할 수 있는 절대강자가 꼭 필요한 법이었다.
그러나 현재 부상으로 전력을 낼 수 없는 제노스였다. 다행히 루드란 대체재가 있긴 했으나....
'언제까지고 바깥대륙에만 머물 순 없다.'
루드 또한 계속해서 까마귀 부족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런 가운데 제노스가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까마귀 부족의 무력도 강화되고 루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는 것이었다.
"결론이 났군. 당장의 전쟁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평화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전쟁은 언제고 터질 수밖에 없었다. 한쪽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다만 경계는 계속한다. 전쟁 준비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항시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사절단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숙소 주위로 경비를 놓아라.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움직임이 보인다면 무조건 보고해라."
"예!"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제노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전쟁은 이미 시작됐을지도 몰랐다.
* * *
제노스는 사절단에게 동맹엔 문제가 없을 것을 전달했다. 당장 가능한 배상을 먼저 건넨 사절단은 나머지 배상은 추후 문서를 통해 보다 세밀히 하겠단 말과 함께 돌아갔다.
그렇게 사절단이 떠나가고.
거처로 돌아온 루드를 기다린 건 뜻밖의 상황이었다.
"...떠난다고?"
"응."
"갑자기? 그보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당황한 루드의 모습에 휴이는 살짝 미소 지었다. 루드가 이런 반응도 보일 줄 아는 녀석이었단 걸 알게 된 까닭이었다.
"걱정하는 것 같은 문제가 있는 건 아니야. 그냥, 나 스스로에게 생긴 작은 문제 때문이지."
휴이는 평소와 달리 차분한 느낌이었다.
"생각을 해 봤어. 조금, 어쩌면 아주 많이."
"생각?"
"두 번째 전사의 시험에서나 오우거를 토벌하러 갔을 때, 또 이번 몬스터 웨이브랑... 생각해 보니 황혼 부족에서도 그랬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루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건가? 전생의 동료였다고 너무 아는 듯이 대한 게 문제였던 건가?
"루드, 난 네 동료야?"
"무슨 그런 질문을 해. 당연한 걸."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대답. 진심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그렇기에 휴이는 더욱 떠나기로 결심했다. 루드의 발목을 잡기 전에.
"그렇다면 보내 줘. 난 더 강해지고 싶고 더 강해질 거야."
"...."
"넌 날 동료라고 해 줬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우리는 동료가 아니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루드는 항상 그랬다. 무언가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섰고, 혹여 자신이 다칠 것 같단 판단이 들면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역할을 부여하긴 했지만....
"내가 널 신뢰하듯, 너도 날 신뢰했으면 좋겠어."
"당연히 널 신뢰하...."
"말뿐 만인 신뢰가 아니라 진짜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신뢰."
휴이의 눈은 고요했다. 여태 봤던 어떤 때보다도 차분하고 침착한 눈빛이었다.
"그러기 위해 떠나는 거야. 너와 동등하게 서서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기 위해.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걸어갈 수 있기 위해."
루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휴이에게서 느껴지는 각오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오래 생각했어."
휴이로서도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루드와 함께하는 건 즐거웠고,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 있고 싶지 않았다. 루드라는 주인공에게 도움만 받는 인물이 아닌, 도움을 줄 수 있는 조력자로서 그의 곁에 서고 싶었다.
"일단 세상을 돌아다닐 생각이야. 바깥대륙부터 해서 중앙대륙까지. 어쩌면 미지의 공간을 다닐 수도 있겠지."
생각해 둔 바는 없다. 일단 발길 닿는 대로 걸을 생각이었다. 유일하게 계획된 건 그 여정의 끝에 루드의 옆으로 돌아와 도움이 될 거란 사실. 그것 하나면 족했다.
"본격적으로 세상을 돌아다니기 전에 알브족에 들러서 전해 줄게. 네가 어떤 인물인지, 족장님과 약속했던 증명을 어떻게 해냈는지."
"...뭐라고 할 건지 물어봐도 되나."
"아니, 너한텐 비밀이야."
모든 걸 아는 너라고 해도 이건 모르겠지.
한차례 웃은 휴이는 등을 돌렸다. 시간을 지체해 봤자 미련만 남을 뿐이었다.
"다음에 보자."
"그래, 다음에 보자 휴이. 꼭."
인사를 마친 휴이는 발걸음을 뗐다.
대수림을 벗어나 루드와 함께한 4달.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으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낀 나날들이었다.
'오랜만에 보겠네.'
대수림을 떠올리자 부족원들이 떠올랐다. 돌아온 자신을 반겨 줄까? 너무 일찍 왔다고 욕하지는 않겠지. 뭐 맛있는 거라도 사가야 하나.
여러 생각들이 부유하기를 잠시, 그 끝을 장식한 생각은 족장님의 얼굴이었다.
루드에게 스스로를 증명하라던, 자신에게 그것을 확인하고 오라던 족장님.
'루드는 완벽하게 증명했어요. 이젠 제 차례에요.'
루드에게 비밀로 했던 답을 되새긴 휴이는 알브 부족을 향해 걸었다.
* * *
"...."
휴이가 떠난 뒤, 루드는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갑작스런 이별. 생각도 못한 상황이었다. 휴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과보호였던 건가.'
휴이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믿는다 했지만 말뿐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의 휴이는 전생의 휴이에 비해 약했으니.
혹여 잘못될까 싶어 비교적 안전한 일을 맡겼건만, 그게 휴이에게는 족쇄로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강해져서 만나자."
휴이의 선택처럼, 자신이 없는 게 휴이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나도 이제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겠네."
자신도 다시 목표를 위해 걸음을 떼야 할 때였다.
'일단 뱀 부족은 한차례 눌러 놨다.'
뱀 부족을 완전히 뿌리 뽑지 못한 것은 아쉬우나 섣불리 움직여서 될 게 아니었다. 자칫하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완전한 기회를 노려야 했다.
다행히 가장 큰 문제였던 소크란을 제거했으니 급한 문제는 해결된 상태였다.
남은 문제는 제노스가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을 터.
'슬슬 움직여도 되겠군.'
이젠 굳이 부족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거처로 들어온 루드는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휴이가 떠나며 아무도 없어야 할 거처.
"그래서, 생각은 해 봤나?"
그곳엔 결박돼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
아무 말 없이 루드를 노려보는 여자. 그녀는 아이리우스가 파견했던 사라 아즈문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87화
교정을 걷는 아이리우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벌써 한 달. 생각대로 된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조급해하지 말자. 시간은 아직 충분해.'
마왕 루드란테가 세상에 등장하는 건 앞으로 몇 년 뒤였다. 제국과 바깥대륙의 전면전은 그로부터도 몇 년이 더 지나서였으니 조급해할 이유가 없었다.
쫓기는 심정으로 급히 움직여 봤자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을 터였다. 하나씩 차분하게 이뤄 가는 게 옳았다.
'그래도 저항 신비를 얻었으니까. 시작이 좋아.'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아카데미 내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차근차근 얻어 가는 중이었다.
신비 '저항'도 그중 하나였다. 아카데미 내부에 잠들어 있던 '저항'은 독이나 저주 등으로부터 몸을 지켜 주는 신비였다.
소드마스터쯤 된다면 대부분의 독에 저항할 수 있었지만, 당장 소드마스터가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생에서 밟아 봤던 경지일지라도,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저항 신비는 지금의 상황에 딱 알맞은 능력이었다. 이로써 상정하지 못한 중독이나 저주에 당할 걱정은 덜어도 됐다.
'그보다 생각보다 인재가 없어.'
저항 신비를 얻은 것과는 반대로 잘 안 풀리는 부분도 있었으니, 바로 숨은 인재를 찾고 확보하는 부분이었다.
마왕 루드란테에 맞서기 위한, 또 앞으로 있을 여러 전쟁에서 함께할 만한 동료를 찾아봤으나 성에 차는 이가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전생에도 이곳 카르반 아카데미에 다녔다지만, 잠재력을 깨닫지 못했거나 작정하고 숨기고 있는 이들을 찾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놓지 못하는 건 쿠두스 같은 인물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결격자 쿠두스.'
카르반 아카데미의 교수인 그는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다만 유명세가 받아들여지는 결은 조금 달랐다.
"아이리우스... 결격교수의 수업을 신청했다지?"
"나도 들었어. 괜찮을까, 시간 낭비일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는 거 아냐?"
교정을 걷는 아이리우스의 귀로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부 아이리우스가 쿠두스의 수업을 신청했단 걸 알고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입학 수석으로 시작해 온갖 수업과 시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은 아이리우스였다. 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 더 두고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녀의 재능이 대단하다는 데는 모두 동의했다.
당장 그녀가 자신의 수업을 듣길 희망하는 교수만 여럿이었다. 대륙 최고라 일컬어지는 아카데미의 교수로서 콧대 높은 그들이 몸소 나선 것이다.
그런 그녀가 결격교수의 수업을 신청했다니... 모르고 한 거라면 뜯어말려야 했다.
"다른 애들이 이미 말려 봤대. 심지어는 선배들까지도 찾아왔다는데, 본인의 의사가 확고하대."
"굳이 결격교수의 수업을 들을 이유가 있나...."
모두의 반대. 하나 아이리우스의 의사는 확고했다. 그녀에겐 꼭 쿠두스의 수업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소드마스터의 추천서를 얻으려 한 것도 그의 수업을 듣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쿠두스는 카르반 아카데미를 다니는 이라면 한 번쯤 들어 봤을 정도로 유명한 교수였다.
고위 귀족의 자제와 타국의 왕족, 심지어는 제국의 황족마저 존재하는 아카데미에서 고작해야 교수인 그가 그토록 유명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 녀석은 교수 실격이잖아."
5년 연속 교수 평가 최하위.
5년 연속 연간 수강생 최하위.
본신의 경지는 고작 익스퍼트 중급.
그런 이가 어떻게 아직까지 교수로 남아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기 때문이었다.
혹여 자신들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닐까. 교수로서 남아 있을 수 있는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닐까.
그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쿠두스의 수업을 신청한 학생들이 있었으나, 그들 모두 침을 뱉으며 수강을 취소했다는 전설도 있었다.
그래서 생겨난 게 결격교수란 칭호였다. 동시에 쿠두스가 잘리지 않는 이유는 아카데미 5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었지.'
전생의 아이리우스 또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였다. 저런 자가 어떻게 교수로 남아 있을 수 있는지. 왜 해고당하지 않는 건지 의문이었다.
하나 이제는 안다. 결격교수라 불리던 그가 아카데미에 교수로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를.
'총장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해.'
교수 임용에 있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총장 또한 쿠두스의 진면목을 알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번 반대에 부딪히면서까지 쿠두스를 붙잡아 뒀을 리 없었다.
'절대적인 경지의 차이를 상쇄했던 결격자의 지도라면 한층 강해질 수 있을 거야. 그 비밀도 얻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고.'
익스퍼트 중급, 잘 쳐야 상급의 경계에 있던 쿠두스는 하이엔 왕국과의 전쟁에서 경지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중 백미는 소드마스터와의 결전이었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기적.'
그 누가 그가 소드마스터를 죽이리라 생각했을까.
"이번엔 달라."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전생엔 몰랐던 쿠두스의 진면목을,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니 배우고 이용해야 했다.
"쿠두스의 수업을 들으면 그 녀석을 만나겠네."
"그 녀석? 아, 페드리. 그 녀석도 별종이지. 오라는 교수가 많은데도 쿠두스의 곁을 고집하고 있으니."
"두 사람이 만나는 건 좀 기대가 되는데."
"그러게. 둘 다 천재니까 말이야."
"누가 더 대단하려나."
"당장은 페드리가 더 뛰어날 거 같은데... 아무래도 길게 보면 아이리우스가 더 낫지 않을까?"
"그러려나. 하긴 페드리의 나이가 더 많기도 하고 일단 신분부터 차이가 크니까."
달라진 내용에 아이리우스는 아닌 척 귀를 기울였다.
'페드리?'
자신과 함께 언급된 타인의 이름. 비교하는 게 기분 나쁘다기보단 다른 사람의 이름이 자신과 함께 거론됐다는 데 관심이 갔다.
혹 동료나 수하로 삼을 만한 인재일 수도 있지 않을까.
'들어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곰곰이 떠올려 봐도 페드리란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일단 신경은 쓰였으나,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전까지도 이런 식으로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았지만, 실제로 봤을 때 그녀의 기준에서는 모두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똑똑.
"계세요?"
어느새 쿠두스의 개인사무실에 도착한 아이리우스는 노크를 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문 너머로 느껴지는 인기척도 마찬가지였다.
'자리를 비운 건가?'
잠시 고민하던 아이리우스는 쿠두스가 돌아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다음 수업은 3시간 뒤에나 있었으니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아카데미 측 전산 시스템을 통해 이뤄지는 다른 교수의 수업과 달리 쿠두스의 수업을 듣기 위해선 쿠두스 본인에게 직접 인가를 받아야만 했다.
이렇듯 쿠두스의 수업 신청이 다른 교수의 수업 신청과 다른 덴 이유가 있었다. 본래라면 쿠두스의 수업은 수강 신청자 미달로 개설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업의 특성마다 다르지만 보통 아카데미의 수업은 10명 이상의 수강생을 확보해야만 개설할 수 있었다.
반면 지금 신청하려는 쿠두스의 수업 '검술 논리의 이해와 탐구'의 수강생은 셋뿐. 수업을 개설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하나 총장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쿠두스는 인원과 상관없이 원하는 수업을 개설할 수 있었다.
'그것 때문에 더 결격교수란 말을 듣는 건지도 모르지. 다른 교수들의 입장에선 얼마나 고깝겠어.'
자신보다 못난 교수가 총장의 절대적 지지를 등에 업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모습을 보는 다른 교수의 입장은 어떨까.
'비난의 시선을 견디는 쿠두스도, 비판의 목소리를 감내해야 하는 총장도 안타깝지만,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교수들의 마음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야.'
그렇게 기다린 지 10여 분 정도가 지났을 때. 멀리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민족? 아니, 아니야. 그저 머리 색이 조금 어두울 뿐인가.'
쿠두스의 사무실을 향해 다가오는 청년은 검은색에 가까운 암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순간 이민족인가 싶을 만큼 어두운색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이민족과는 차이가 있었다. 전생의 경험으로 다수의 이민족을 보아 온 아이리우스는 금세 청년이 이민족이 아님을 깨달았다.
"누구지?"
"당신이야말로 누구시죠?"
사무실 앞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
"...."
계속될 것 같던 정적을 깬 건 청년이었다.
"난 페드리다."
"아, 당신이 페드리군요."
"날 아나?"
"아뇨, 이름만 들은 수준입니다."
청년의 정체는 이곳으로 오는 길에 들었던 페드리였다. 아이리우스는 자신과 그를 비교하던 다른 학생들의 말을 떠올렸다.
'흐음... 잘 모르겠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라면 무언가 특별한 게 있기 때문일 터.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게 무엇인지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누구지?"
"아이리우스라고 합니다."
"아."
"절 아십니까?"
"이름만 아는 수준이다."
어디선가 들어 본 대답에 아이리우스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하나 페드리의 말은 진심이었다.
"쿠두스 선생님이 이야기한 걸 들었다."
"쿠두스 교수님께서요? 뭐라 하셨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잠시 고민한 페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또 뭐 하는 놈인데 수강 신청을 한대. 귀찮게시리... 어떻게 해야 떨궈지려나."
"...."
"...진짜다."
"그…렇군요."
확실히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아니다. 하지만 쿠두스가 진짜 그렇게 말했다고 믿기도 어려웠다.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는 교수가 수업을 신청한 학생을 귀찮아한다니. 심지어는 수강을 거부할 생각까지 있어 보이지 않는가.
'잘못 들은 거겠지. 결격자 쿠두스가 그랬을 리 없어.'
무려 전쟁 영웅이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였지만, 제 모든 걸 불살라 상대국의 소드마스터를 쓰러트리던 모습은 분명 영웅의 칭호가 아깝지 않았다.
그러나 시기가 너무 이른 것일까. 아니면 그에 대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
"음? 이건 뭐냐."
"선생님을 찾아왔던데요."
"나를? 왜?"
"아이리우스래요."
"그게 누군... 아, 이 녀석이 그 녀석인가."
"네, 이 녀석이 그 녀석이래요."
이쑤시개를 물고 나타난 쿠두스의 모습은 전쟁 영웅이 아닌, 영락없는 아카데미의 결격교수였다.
'...괜찮아.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가 내게 필요한 걸 갖고 있다는 덴 변함이 없어.'
당황하길 잠시, 아이리우스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수업을 듣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교수님의 수업은 직접 인가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요."
"그렇지. 그래야 조금이라도 덜 오니까."
"네?"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수업을 듣고 싶다고? 검술 원리의 이해 및 탐구 말이냐?"
"...그새 수업명이 바뀌지 않았다면 검술 논리의 이해와 탐구요."
"그래, 그거."
이빨 사이에 낀 이쑤시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던 이쑤시개가 멈췄을 때. 쿠두스가 답을 내놨다.
"싫은데."
"예?"
예상외의 답. 설마 수강 신청을 거부하다니. 심지어 수강생도 부족한 상황이 아닌가!
"어째서죠?"
"그러게 말이다."
"예?"
쿠두스는 빤히 아이리우스를 바라봤다.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확인하고 있는 눈.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검을 잡은 흔적. 신발이 닳은 모양새.
어디서 이런 녀석이 튀어나왔을까. 어째서 자신의 수업을 들으려 하는 걸까.
'에이나우디 공작가였나.'
학생부를 통해 열람한 그녀의 가문은 무려 공작가였다. 원한다면 어떤 종류든 양질의 수업을 들을 수 있을 그녀가 굳이 자신의 수업을 원한다니.
먼저 떠오르는 건 왜? 라는 의문. 그다음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나 하는 의심이었다.
"잘나신 공작가의 영애께서 왜 내 수업을 들으려 하냐는 말이다."
"교수님께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가문의 이름은 무용한 걸로 압니다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면 순진하기 짝이 없다고 말하고 싶군."
평등과 동등을 내세우는 아카데미지만, 그게 가능할 리 없다. 엄연히 신분이 존재하는 세계. 당장 아카데미 밖으로만 나가면 어제의 친구였던 이가 오늘의 상관이 될 수도 있는 세상이었다. 과연 아카데미에서 신분과 가문의 이름이 무용할까.
"...교수님의 수업을 듣는 것과는 상관없을 걸로 생각됩니다만."
"너한텐 상관없겠지. 하지만 다른 녀석들 생각은 어떤지도 들어 봐야 하지 않겠어?"
현재 쿠두스의 수강생으로 등록된 건 셋이었다. 셋 중 둘은 이름만 올려놓고 수업도 듣지 않는다지만, 남은 하나는 달랐다.
"네 생각은 어떠냐. 이 녀석과 같이 수업을 들어도 되겠냐?"
물음을 받은 건 실질적으로 쿠두스의 수업을 듣는 한 명. 쿠두스의 수제자인 페드리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86화
제노스는 업무 중이었다. 내상을 생각하면 쉬는 게 좋았지만, 족장으로서 부족을 안정시켜야 했기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업무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냐."
"소개시켜 드릴 사람이 있어서요. 말씀드릴 것도 있고요."
"소개시켜 줄 사람이란 건 뒤에 있는 여자를 말하는 거냐?"
"네."
흠. 제노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결혼 상대는 아니겠지?"
"설마요."
루드의 대답에 인상을 푼 제노스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마침 좀 쉴까 하던 때였다.
"그래, 무슨 일이냐. 소개시켜 준다는 건 또 무슨 말이고."
"앞으로 일 년 동안 아버지를 보좌해 줄 사람이에요. 이름은 사라 아즈문. 미행, 추적, 암살에 특화된 인재입니다."
"그거 꽤나 흥미로운 분야군."
자신을 바라보는 제노스의 시선에 사라는 경악했다. 고작 자신을 보고 있을 뿐이건만, 무언가가 몸을 옭아매는 기분.
'이 자도 소드마스터. 이곳은 대체...!'
엄청난 기세가 발산되거나 하진 않았으나, 어렴풋이 시선에 담긴 힘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루드로 인해 이미 한차례 충격받았던 사라는, 이 자리에서 또 한 번 크게 경악했다,
중앙대륙 전체를 뒤져도 한 세대에 복수의 소드마스터를 보유한 가문이 있을까 의문이었다.
하물며 이 둘의 관계는 부자지간이었으니. 중앙대륙이었다면 단숨에 귀족가의 판도를 뒤흔들었을 것이다.
'무슨 괴물 소굴도 아니고.'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바깥대륙에 관심을 갖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마 중앙대륙에 비해 발전도가 떨어지고 미개하단 세간의 평을 그대로 받아들였겠지.
하지만 막상 직접 보고 겪은 바깥대륙은 알고 있던 것과 달랐다.
'이곳은 위험하다.'
중앙대륙만큼 시설이 발달하지도 인구가 많지도 않았지만, 결코 무시 못 할 저력이 있었다.
당장 이곳에만도 두 명의 소드마스터가 있지 않은가. 중앙대륙의 국가 중에도 다수의 소드마스터를 보유한 건 제국을 포함한 몇 국가뿐이었다.
특히 목표물이었던 루드란테는 아이리우스와 비슷해 보이는 나이에 벌써 절대의 경지에 오른 괴물이었다.
아이리우스를 보고 천재라 생각했는데, 격이 다른 천재가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아이리우스님은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부탁을 받아 루드란테를 찾아오긴 했으나 의문스러운 점이 많았다.
아이리우스가 목표의 이름과 생김새, 특징 등의 정보를 갖고 있던 덕에 목표물을 찾는 건 간단했다.
다만 그녀가 그러한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는 의문이었다. 이름이나 생김새야 더스틴을 통해 들었다 쳐도 목표물의 특징 같은 건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무언가 있다. 둘이 만난 적이 있었던 건가? 아니, 그녀는 여태까지 가문을 벗어난 적이 없다.'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태까지 한 조사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아이리우스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에이나우디가의 영역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하물며 목표물은 바깥대륙의 존재였으니, 두 사람 사이에 접점이 있는 건 불가능했다.
목표물도 자신을 보낸 게 아이리우스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모양새지 않았는가.
'하지만....'
하지만 아이리우스는 분명 루드란테에 대해 알고 있었다.
"사라 아즈문이라 했나."
"예."
"잘 부탁하지. 마침 손이 부족하던 차였는데 잘 됐군."
제노스는 군말 없이 사라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음지에 속하는 사람이긴 했으나, 순수한 것보단 까맣게 물들어 있는 게 다루기 편했다. 무엇보다 루드의 보증이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것 말고도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네."
"마침 잘 됐구나. 나도 얘기하고 싶은 게 있었다."
짧은 인사 후 사라를 물린 둘은 남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부족을 떠나려 합니다."
"차기 족장으로 널 세우려 한다는 건 알고 하는 말이겠지?"
"네, 아예 떠나겠다는 건 아니에요. 해야 할 걸 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겠단 소리입니다. 일을 마치면 부족으로 돌아올 거고요."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 있느냐."
루드는 그 말에 고민했으나, 결론은 금방 나왔다. 어차피 까마귀 부족을 중심으로 바깥대륙의 힘을 모아야 했다. 전생과 달리 제노스가 건재했으니 그 또한 일련의 상황을 알 필요가 있었다.
"제국이 바깥대륙을 노릴 겁니다."
"제국이? 정확한 정보냐?"
끄덕.
"부족을 떠나는 건 그에 대한 대비를 하기 위함이고?"
"네."
제국이 바깥대륙을 노릴 거란 말을 하는 루드는 확신에 차 있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어날 것을 의심하지 않는 태도.
'역시 루드란테 이 아이에게도....'
그 모습은 마침 제노스가 꺼내려던 이야기와도 접점이 있었다.
"궁금한 게 있다."
"말씀하세요."
"미래를 알고 있는 것이냐."
"!!"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놀란 루드. 제노스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예상대로 루드는 미래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소크란을 단숨에 몰아세울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덕이었을 것이다.
"너도 예지안을 각성한 것이냐."
"...예지안이요?"
하지만 이어지는 반응은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당연히 자신과 마찬가지로 예지안을 각성해 그것을 토대로 앞날의 편린을 보았을 거라 생각한 제노스였지만....
"아버지께선 갖고 계신가 보군요."
고개를 저은 루드였다.
"예지안을 각성하지 않았다고?"
"네,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것도 지금 알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루드는 분명 미래를 아는 듯이 움직였다. 여태까지의 모습이 그랬고 부족을 떠나려는 지금 모습도 그랬다. 조금 전 자신의 물음에 반응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예지안을 통해 미래를 느낀 게 아니라니....
'소드마스터로서의 감? 아니, 그것과는 성질이 다르다.'
소드마스터쯤 되면 극에 달한 감각으로 미래를 예지한 것 같은 행동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실제 미래를 예지한 것이 아니라 흉내 내기에 불과한 것.
루드가 보여 줬던 모습은 고작 흉내나 내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에 관해선... 나중에 준비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보다 예지안이란 것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제노스와 마찬가지로 루드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예지안이란 게 있다고?'
예지안이라니... 전생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힘이었다.
다만,
'아버지가 예지안을 가졌고 그걸 통해 미래를 봤다면... 이상하게 느껴졌던 모든 게 설명된다.'
전생에서 제노스가 뱀 부족의 술수를 막아 냈던 것도, 황혼 부족에 로하스를 파견해 비전이 도둑맞는 걸 막으려 했던 것도.
미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자연스러워졌다.
"틀림없이 예지안을 각성한 거라 생각했건만... 일단 예지안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마."
뱀 부족에 환혹의 힘이 있듯, 까마귀 부족엔 예지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잊힌 능력. 오직 제노스만이 그러한 힘이 있다는 걸 아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예지안을 각성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지."
한 세대에 한 명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희박한 확률.
역대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도 예지안을 가진 이는 한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렇게 까마귀 부족에서 잊혀 가던 예지안은, 제노스를 통해 다시금 세상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나 또한 몰랐다. 이런 힘이 있다는 걸 들어 본 적도 없었으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지나가는 소리로 했던 것도 같지만."
막 족장의 자리에 올랐던 제노스는 부족의 고문서들을 살펴봤다. 혹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이가 있는지, 관련된 기록이 없는지 찾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각성한 게 무엇인지, 어떻게 다뤄야 하며 어떤 식으로 쓸 수 있는지 알게 됐다.
"예지안은 미래의 편린을 보여 준다. 다만 그것이 무조건적인 미래라 확신할 수는 없지. 게다가 원하는 시간이나 장소를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신을 모시는 이들이 받는다는 계시와 비슷할지도 몰랐다.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것도, 보기 싫다고 보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 극도로 집중한 전투 상황에선 상대의 수가 한차례 먼저 나타나기도 한다."
그 탓에 소드마스터가 된 초반엔 여러 고비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인지 능력의 변화와 예지안을 통한 선견이 뒤엉키며 순간적으로 혼선이 나타나기도 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적응을 마치고 날카로운 무기로 다룰 수 있게 됐지만....
"그래서 네가 예지안을 각성했다 생각하고 말해 주려 했던 거다."
루드가 예지안을 각성했다면 자신과 비슷한 과정을 거칠 거라 생각했다. 하여 혹여나 있을 사태에 대비해 주의를 주려 했건만....
"예지안을 각성하지 않았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애초에 부족 전체에서 잊힐 만큼 드문 힘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만한 힘이 연이어 나타나는 것도 이상하죠."
"그렇긴 하지만...."
이성적으론 루드의 말이 맞았다. 발현이 워낙 드물어 부족에서도 잊힌 힘이었다. 자신에 이어 루드에게까지 나타나는 건 무척이나 희박한 확률. 그럼에도 예지안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유는 그 대상이 루드였기 때문이었다.
갓 약관이 넘은 나이에 소드마스터에 오른 천재성. 예지에 닿은 직관과 판단력.
'거기에 마법까지 다뤘지.'
또 어떤 걸 숨기고 있는지 모르나 지금까지 보여 준 것들만 해도 대단한 것들이었다.
"저는 예지안이 없습니다. 그건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루드는 예지안을 갖고 있지 않았다.
'회귀 때문에 내가 예지안을 갖고 있다 생각하신 모양이지만, 내겐 예지안의 힘이 없다.'
그저 회귀를 통해 알게 된 정보를 선점하고 활용한 것에 불과했다.
예지안의 힘을 각성한 적도, 비슷한 걸 느껴본 적도 없었다.
'예지안이 있었으면 무언가 바뀌었으려나.'
만약 전생의 자신에게 예지안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전생의 결과가 바뀌었을까.
하나 쓸데없는 가정이었다. 루드는 곧 잡념을 털어 냈다. 갖고 있지 않은 걸 가진 상황을 상상하느니 지금 가진 걸 어떻게 사용할지를 생각하는 게 더 생산적이었다.
"예지안을 통해 보이는 게 있으면 공유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다. 그보다 언제쯤 부족을 떠나려 하느냐."
"준비는 다 끝났으니, 내일 떠날까 해요."
떠날 준비는 이미 마친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게 있었다.
"오늘 저녁에 일정 있으신가요?"
"특별한 건 없는데, 무슨 일이냐."
"가족끼리 밥이나 먹자고요."
"...좋은 생각이구나."
시간이 지나며 조금 자연스러워졌지만, 아직도 가끔은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카이예스는...."
"그 아이까지 생각해 주니 고맙다만, 참석은 힘들 거다. 아무래도 벌을 받고 있는 입장이니. 대신 레지스는 가능할 거다."
"불편해하지 않을까요?"
막내인 레지스는 이제 열 살이 된 여자아이였다.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지만 특별한 대화는 나눠 본 적 없는 사이.
카이예스와는 전사의 시험과 모든 사태가 끝난 이후 꽤 대화를 나눴었지만....
"모르겠구나. 일단 물어보마."
"네,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불편해하면 강요하진 마시고요."
"물론이다."
소크란의 피가 섞여 있긴 하지만 제노스의 피도 흐르는 카이예스와 레지스였다. 어떻게든 끌고 가야 하는 상황. 혹 자신이 없는 새 그들이 분란을 일으키기라도 하면 그것만큼 곤란한 일은 없었다.
'카이예스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전생과 현생 모두에서 확인한 카이예스는 분란을 일으킬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레지스는 아직 모든 게 불확실했다. 전생에서 부족을 찾아왔을 때 레지스는 이미 죽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전생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
'이참에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지.'
제노스와의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 마련한 자리지만, 꼭 그것만을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루드는 레지스도 저녁 자리에 나오길 바랐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83화
깊숙이 가라앉았던 의식이 서서히 부유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림과 동시에 스쳐 가는 기억이 있었다.
레이예스와 함께 어머니를 찾았고, 감옥의 문을 열자....
"으윽."
등에서 아찔한 통증이 느껴졌다. 레이예스가 찌른 부위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많은 것이 의문이었다.
레이예스가 갑자기 자신을 찌른 이유며, 그 후 어머니와 동생이 어디로 사라졌을지, 자신이 어떻게 살아 있는지....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던 건가....'
무자비하게 자신의 등을 찌른 레이예스와 그걸 보고도 놀라지 않았던 어머니.
어쩌면 두 사람에게 자신은, 자신이 두 사람을 여기는 것과는 다른 의미일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렸나."
"누구시죠?"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그는 능숙하게 병상 옆에 놓인 도구들을 손질하는가 싶더니 카이예스의 몸을 돌려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음, 덧나지도 않았고 크게 문제 될 건 없겠군. 회복력이 좋아."
레이예스가 찌른 칼은 심장 바로 옆을 비껴 갔다. 아마 바로 심장을 찌르지 않은 건 그가 발견됐을 때 최대한 시간을 지연하기 위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죽은 자보다는 중상을 입은 자를 발견했을 때 고려해야 하는 게 많아지는 법이었으니.
"오, 일어난 거야?"
"너는... 휴이라고 했던가."
"내 이름 기억하고 있었네."
추가로 병실에 들어온 이는 기억에 있는 이였다. 비록 직접적으로 연을 맺진 않았지만, 자신의 배다른 형제인 루드의 동행이었고, 일전 퓨렐 협곡에서 오우거를 상대로 보여 줬던 모습도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내가 어떻게 이곳에 있지? 그보다 어머니와 레이예스는 어떻게 됐나."
"다 말해 줄 테니까 천천히 말해. 괜히 흥분했다가 상처가 터지기라도 하면 바치렌 님한테 호되게 혼날 테니까 말이야."
그제야 카이예스는 제 앞에 있는 사내의 정체를 깨달았다. 어머니가 독을 썼음을 입증하기 위해 아버지가 모셔 온 황혼 부족의 족장이었다.
"몰라뵀습니다. 까마귀 부족의 카이예스가 황혼 부족의 족장을 뵙습니다."
"예는 됐으니 낫는 것에 집중하게. 휴이의 말대로 상처가 덧났다간 가만있지 않을 테니."
예를 갖춘 카이예스에 툴툴댄 바치렌은 카이예스를 치료하는 데 썼던 도구들을 정리했다.
지난밤은 정말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었다. 뱀 부족을 옭아맬 증인으로서 참석만 해 주면 된다는 루드의 말에 까마귀 부족을 찾았으나, 갑자기 몬스터 웨이브가 터지는 바람에 꼼짝없이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의료 활동은 당연했다.
당장 카이예스만이 아니라 그의 손길이 필요한 부상자들이 한가득이었다. 이미 치료를 마친 이들도 마찬가지였고.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겠지. 설명해 줄게."
혼란스러워 보이는 카이예스를 향해 휴이가 입을 열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터짐과 동시, 휴이는 루드로부터 사람들에게 상황을 알릴 것을 부탁받았다. 그리고 그것 외에도 부탁 받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감옥으로 가서 소크란의 행태를 확인해 줘. 만약 탈출한다면 동선을 파악해서 알려 주고. 혹시 모르니까 바치렌님과 함께 가.'
일반적이지 않은 몬스터 웨이브와 소크란과의 대담에서 느껴졌던 미묘한 여유.
루드는 곧장 그 둘을 연결 지었다.
바깥이 이리 소란스러워졌으니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탈출하는 것도 쉬울 터.
예상대로 소크란은 혼란을 틈타 탈출을 시도했다.
"굳이 내가 따라갈 이유가 있나 싶었으나... 있더군. 루드의 안배가 아니었다면 자네는 죽었을 거야."
붕대를 새로 갈며, 바치렌은 당시를 회상했다.
무력 충돌이 일어난다면 자신의 존재는 분명한 마이너스였다. 하나 루드는 카이예스가 쓰러져 있을 걸 예상이라도 한 듯 휴이로 하여금 자신과 동행하게 만들었다.
'내가 따라가지 않았다면 이 청년은 죽었겠지.'
인적이 드문데다 바깥의 상황이 상황이었으니, 카이예스는 소리 없이 죽었을 것이다. 운 좋게 누군가에게 발견됐다 하더라도 어쩌지 못한 채 죽었을 거고.
오직 하나. 자신이 현장에 있는 것만이 그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수였다.
'다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심계다.'
일련의 상황이 끝난 후 루드에게 직접 물어봤었다.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냐고. 돌아온 대답은 가관이었다.
'무조건적 확신은 아니지만, 높은 확률로 그럴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상대의 심리를 읽고 어떻게 행동할 건지 미리 예상한다. 또 거기에 맞춰 대응책을 갖춰 놓았으니....
'그보다 더 웃긴 건 이 녀석.'
그런 괴물 같은 판단을 보이는 것보다도 어이없는 건 전적으로 루드를 따르던 휴이의 반응이었다.
'역시 루드는 모르는 게 없어... 인가.'
루드를 향한 절대적 신뢰.
그만한 신뢰를 쌓은 루드도,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보이는 휴이도, 바치렌으로선 모두 대단하다고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아무 생각 없이 실실대며 루드의 말을 따르는 것 같지만, 휴이 개인의 능력도 대단했다.
'도망자들의 흔적을 곧장 찾아내 추적했을 뿐 아니라 근방의 몬스터들도 모조리 섬멸했으니.'
자신들이 감옥에 도착했을 땐 카이예스만이 쓰러진 채 남아 있었다.
하나 휴이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침착하게 남은 흔적을 확인하고 그들의 동선을 파악했다.
눈에 보이는 몬스터들을 처리한 건 덤이었다.
"더 궁금한 건 없는가? 없다면 이만 가 보겠네. 봐야 할 환자들이 많아서."
"어머니와 레이예스는 어떻게 됐습니까."
"...루드가 탈출한 그들을 쫓아갔네."
"그렇군요."
더 이상의 문답은 없었다. 바치렌과 휴이는 조용히 병실을 떠났다. 혼자만의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홀로 남은 카이예스는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게 부질없이 느껴졌다.
'나는 여태 뭘 했던 건가.'
어머니와 동생의 배신. 심지어 하루 이틀로 결심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다른 마음을 품고 있던 게 분명했다.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어머니와, 자신을 죽이려 한 동생.
족장이 되어 가족과 부족을 지키고자 했던 마음은 대체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
화가 나는 건, 그럼에도 그들을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했던 시간, 어린 날의 추억, 온화한 말투로 자신을 부르던 어머니의 말과 형님! 하며 자신을 따라오던 어린 동생의 모습....
어느새 맺힌 눈물이 아래로 흘렀다.
"뭘 두고 가셨습니까?"
"그런 것 같구나."
"...아버지."
갑자기 열린 병실 문. 바치렌일 거라 생각하며 서둘러 눈물을 닦은 카이예스는 문을 연 이를 확인하곤 놀랐다.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있었다.
"할 말이 있어서 왔다."
"말씀하십시오."
여전히 문 앞에 서 있는 채로, 제노스는 카이예스를 찾은 이유를 말했다.
"상황이 어찌 됐든 네가 소크란을 탈출시켰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것이 큰 죄라는 것도."
"...."
"하여 문책과 처벌은 피할 수 없다."
카이예스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제노스의 말을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후계 자격이 박탈될 거다. 또 3년간 형벌 부대에 소속돼 근무할 것을 명할 생각이고."
형벌 부대는 죄를 지었으나 썩히긴 아까운 능력을 지닌 이들을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였다. 부대라곤 하나 그들끼리 묶여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엔 죄인으로 지내며 필요에 따라 각 부대로 차출돼 쓰이는 형식이었다.
그 취급은 각 부대의 말단보다도 안 좋았다. 부대의 소속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부품같이 여겨졌으니.
"어떤 처분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죄지은 이 한 몸, 부족을 위해 쓸 수 있다면 무엇이든요."
"그래. 미리 말해 주려고 왔다."
이것으로 공적인 용무는 끝. 문 앞에 서서 카이예스를 바라보던 제노스는 천천히 발을 뗐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던 아들. 자신의 모자람과 상대의 뛰어남을 수용할 줄 아는 아들. 냉정을 가장하나 숨길 수 없는 다정함을 품고 있는 아들.
"...고생했다, 아들아."
족장이 아닌 아버지로서, 카이예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턱… 턱….
고작 두 번의 두드림. 하나 고작이라 치부할 수 없는 울림이 있었다.
"끄윽… 끄흐윽...!!"
결국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울음. 제노스는 아들의 울음이 그치길 가만히 기다렸다.
그가 아비로서 해 줄 수 있는 건, 고작 그 정도가 전부였다.
* * *
제노스는 어수선한 부족을 빠르게 수습했다.
몬스터 웨이브, 레이예스의 배신, 소크란의 탈출, 그리고 그들의 죽음.
정리해야 할 게 많았다. 있는 그대로 공개하기도 어려운 사안이었다.
"몬스터 웨이브로 인한 혼란을 틈타 소크란이 도망쳤고, 추격대에 의해 사살됐다."
"이번 몬스터 웨이브를 막는 과정에서 레이예스가 목숨을 잃었다."
결국 공식적으로 발표된 건 이 정도였다. 소크란의 죽음은 알리되 레이예스의 배신은 밝히지 않았다.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났으니 굳이 혼란을 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추가적인 발표도 있었다.
"소크란의 탈출을 도운 카이예스의 후계 자격을 박탈하고, 루드란테를 후계자로 삼겠다."
다음 대 족장이 될 후계자에 관한 발표.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카이예스의 후계 자격 박탈은 레이예스의 죽음만큼이나 놀라운 것이었다. 차기 족장에 가장 가까웠던 존재의 자격 박탈.
더군다나 소크란을 탈출시키려 했던 죄로 형벌 부대 복역이란 벌까지 받았으니 충격이 두 배였다.
'저분이 새로운 후계자.'
'족장님의 숨겨 뒀던 아들이라지?'
급작스러운 변화였으나 생각 외로 큰 반발은 없었다. 이미 전사의 시험과 오우거 토벌, 몬스터 웨이브를 겪으며 루드의 존재가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 덕분이었다.
모두가 루드의 자격을 인정하는 분위기. 그것을 확인한 제노스는 곧장 다음 단계를 밟았다.
"뱀 부족과의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족장님!"
"진심이십니까?"
뱀 부족과의 전쟁 준비.
"늦든 빠르든 뱀 부족과는 싸울 수밖에 없다. 동맹은 이미 깨졌다."
혼인 동맹으로 맺어진 관계였으나, 그 증표였던 소크란이 죽었다. 대외적으론 사정이 달랐으나 레이예스마저 죽었으니 뱀 부족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었다.
루드 또한 제노스와 생각이 같았다. 뱀 부족이 바깥대륙을 집어삼키겠단 야욕을 품고 있는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이루려고 하는 이상. 그들과의 충돌은 예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뱀 부족의 사절이 찾아왔습니다."
뱀 부족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까마귀 부족의 족장이자, 위대한 소드마스터를 뵙습니다. 뱀 부족의 사절단 대표를 맡은 사르한입니다."
또한, 그 방향도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근래 일어난 모든 일은 소크란의 독단이었습니다. 저희 뱀 여왕님께서도 이번에야 그 사실을 확인하셨고, 그녀가 몰래 빼돌렸던 황혼 부족의 비전도 곧장 반환 조치를 취했습니다. 저희 뱀 부족은 이번 일에 깊은 유감을 표하는 바이며, 이와 관련해 배상을 할 용의도 충분히 있습니다."
뱀 부족 사절의 대표인 사르한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적대 의사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낮은 태도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85화
사라 아즈문은 방에 들어온 루드를 노려보았다.
'아이리우스님의 경고를 새겨들었어야 했어.'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라붙으라던 말. 추적과 미행 임무였으니 상투적으로 한 말이라 생각했다.
그리 여겼던 결과가 지금이었다.
목표가 자리를 비운 새 탈출하려 했지만, 구속구를 풀 수 없었다. 힘을 쓸수록 속박이 강해지는 구속구는 마력에 대한 저항력도 갖춘 것 같았다.
'그래도 보고는 마쳤어.'
그나마 다행인 건 목표가 이곳에 있다는 것과 그의 현 상황에 대한 정보를 이미 보낸 후라는 것.
자신이 죽더라도 목표에 대한 정보는 아이리우스의 귀에 들어갈 것이었다.
"고생했어. 그만 풀어 줘도 돼."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의미 모를 말. 하지만 사라는 곧 그것이 누구에게 한 말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대체...?'
온갖 시도에도 풀리지 않던 구속구가 한순간에 느슨해졌다.
동시에 꼬물거리는 무언가, 슬라임처럼 움직이는 그것이 방금 전까지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것임을 깨닫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생했어."
보금자리인 루드의 팔뚝으로 돌아온 슬라브가 칭얼댔다. 루드는 보상으로 마력을 전달했다.
한편 사라는 넋이 나간 상태였다.
저게... 뭐지? 저런 생물은 듣도 보도 못했다. 산전수전 겪으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지만, 이런 생물은 난생 처음인 것이었다.
제 맘대로 형태를 바꾸고 마력을 통한 물리력까지 견디다니. 심지어는 의사소통까지 되는 것 같았다.
만약 직접 마주하고 느끼지 않았다면 결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날 미행한 이유가 뭐지?"
"...."
"말하지 않을 셈인가."
루드는 입을 다문 사라를 바라봤다.
그녀의 존재를 처음 느낀 건 오우거를 토벌하고 돌아와서 이틀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처음엔 소드마스터가 되며 감각이 흔들린 탓인가 싶었지.'
소드마스터가 되기 이전과 소드마스터가 된 이후의 감각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여 처음엔 그 간극에서 오는 착각인가 여겼다. 그녀의 기척이 워낙 희미한데다 느껴지는 것도 들쭉날쭉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감각의 차이가 사라지자, 착각이 아니란 걸 확신했다.
'이 여자를 이렇게 만날 줄이야.'
루드는 사라를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이름 날렸던 중앙대륙의 어쌔신.
전생에서 연이 있었던 것도 아닌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건 그녀의 행적이 꽤 인상 깊었기 때문이었다.
'에이나우디 공작가를 표적으로 삼았지.'
그녀의 손에 죽은 공작가의 사람만 열이 넘었다. 제국의 상황에 촉각을 세우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분명히 기억했다.
그리고 그녀의 최후는…
'끝내 붙잡혀 죽고 말았었다.'
무엇 때문에 공작가를 상대로 살행을 벌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제국이 시끄러울 정도로 유명한 살행이었고, 끝내 붙잡힌 그녀는 공개 처형으로 그 생을 마감 했었다.
'그런데 생뚱맞게 이렇게 조우한다는 건....'
그녀의 전생과 관련된 몇 가지 키워드를 떠올려 보면 그려지는 그림이 있었다.
'아이리우스의 회귀로 생긴 변화인가.'
사라 아즈문이 바깥대륙을 방문한 건 본래의 역사엔 없었던 이야기. 중앙대륙에서만 활동하다 끝내 처형당해야 할 그녀의 행적이 바뀐 덴 이유가 있을 터였다. 루드는 그 이유가 아이리우스의 회귀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로써 그녀도 회귀했음이 확실해졌다.'
자신의 회귀가 그녀가 발휘한 힘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그녀도 회귀하는 건 당연할지 몰랐다. 하지만 추측과 확신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었다.
그리고 지금, 루드는 그녀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회귀했음을 확신했다.
"...제국에서 보냈나."
"...."
"우리 바깥대륙의 동향을 알아보기 위해 파견된 건가. 무언가 흘러들어간 이야기라도 있는지 궁금하군."
하나 루드는 아이리우스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제국의 이름을 꺼냈다.
높은 확률로 아이리우스가 보냈을 거라 생각했기에, 더욱이 그 이름을 언급해선 안 됐다.
'내가 그녀를 알고 있단 걸 들키는 순간 그녀가 내 회귀를 알아차릴 수도 있다.'
아이리우스가 자신의 회귀를 알고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낮은 확률이지만 자신이 그녀의 회귀를 짐작한 것처럼 그녀 또한 자신의 회귀를 짐작하고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회귀를 짐작하지 못했다면,
'써먹을 수 있다.'
언제 어느 때고 그 정보의 차이는 역전의 비수가 될 게 분명했다.
"제국의 누가 보낸 거지? 황실? 의회? 무엇을 명하며 이곳으로 보낸 거냐."
사라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잘 훈련된 살수답게 외부에서 행해지는 어떤 자극에도, 유도 심문에도 반응하거나 걸려들지 않았다.
'귀찮게 됐군.'
한참을 윽박지르고 질문하길 반복하던 루드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아마 자신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아이리우스가 파견했을 인물. 그녀를 통해 역으로 아이리우스 쪽의 정보를 얻고자 했으나 어려울 듯싶었다.
아이리우스가 보냈단 걸 알지만 티 낼 수 없기에 더욱 그랬다. 자칫하다간 이쪽이 아이리우스를 알고 있단 걸 역으로 들킬 수도 있었다.
'최소한 아이리우스가 내 회귀를 알고 있는지만 파악해도 좋을 텐데.'
그녀가 자신의 회귀를 아는지 유무의 차이는 컸다. 상황에 따라 여태까지 이점으로 생각했던 정보의 편차가 사실은 이점이 아닐 수도 있었다.
잠시간 고민하던 루드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놓아줄 테니 돌아가라."
"...죽이지 않는 건가?"
그건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사라로선 뜻밖의 상황이었다.
"그래, 너 또한 날 죽이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으니."
"...."
"단, 또다시 눈에 띈다면 그땐 죽일 생각이다."
그녀를 살려 주기로 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이 훨씬 이득이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서 죽여 봤자 아무 득도 안 된다. 괜히 상대에게 경각심만 심어 주는 꼴이지.'
사라의 죽음은 그 자체로 정보가 됐다. 현재의 자신이 그녀의 미행을 간파하고 죽일 수 있는 수준임을 알게 되면 아이리우스는 자신에 대한 촉각을 더욱 곤두세울 게 분명했다. 그건 반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반면, 그녀를 살려 준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졌다.
'내 수준이 뛰어나단 건 똑같이 알려지겠지만 용사측의 정보를 교란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사라가 살아 있으면 아이리우스 쪽에 여러 정보를 흘리는 게 가능했다. 사실과 거짓이 교묘히 섞여 무엇이 진실된 건지 알 수 없는 정보를.
"살려 주겠단 말, 진심이냐."
"그래, 마음이 바뀌기 전에 꺼져라."
그러나 막상 살려 주겠다는 얘기를 들은 사라의 반응은 어딘가 이상했다.
"살고 싶지 않은 건가?"
"그럴 리가.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다만...."
"다만?"
"죽는 것보다 꺼려지는 게 있기도 한 법이지."
탐탁지 않은 표정과 영문을 모를 말.
이해할 수 없는 사라의 태도에 루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살겠다는 건가, 죽겠다는 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겠다는 거야. 아직 죽어선 안 되니까."
사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죽기보다도 얽매이기 싫은 규율이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죽을 순 없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을 마치지 못했다. 그때까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나 사라 아즈문은 아즈문가의 율법에 따라 그대의 부탁을 세 가지 들어주겠다. 이는 내 목숨과 자유를 대가로 한 약속이며, 세 가지 부탁을 모두 완수하면 은혜를 청산한 걸로 간주한다. 동의하는가?"
사라는 가문의 율법에 따라 고했다.
이것은 살수 가문 아즈문에 내려오는 절대 법칙.
살행에 실패해 붙잡혔음에도 죽임 당하지 않고 은혜를 입는다면 행해야만 하는 법칙이었다.
"...당혹스럽군."
"나 또한 마찬가지야. 이런 곳에서 율법에 얽매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으니까."
"율법이라, 금제라도 걸린 건가... 아즈문이란 가문은 생소한데."
이만한 율법이 있다면, 또 그것이 절대성을 띨 정도로 강력하다면 꽤나 큰 가문일 확률이 높았다.
하나 루드는 아즈문이란 가문을 처음 들었다. 아무리 중앙대륙의 가문이라 하지만 웬만한 유력 가문의 이름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우리 가문은 나 혼자 남았으니까."
그러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아즈문가는 이미 멸문한 가문. 사라 아즈문만이 유일하게 남은 아즈문가의 혈통이었다.
"멸문한 가문의 율법을 지키겠다는 건가?"
"그래."
멀쩡한 가문의 율법도 지키는 이가 드문 세상이다. 하물며 멸문한 가문이야 말할 것도 없다. 애초에 율법을 뒷받침할 가문 자체가 없는 상황 아닌가.
하지만 사라 아즈문은 단호했다. 율법을 지키지 않고선 안 된다는 강경한 태도였다.
"이해할 수 없군."
루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정말 금제인 건가.'
가문의 율법이란 게 무언가 금제와 비슷한 작용을 한다는 추측에 무게가 실렸다.
그런 거라면 이런 태도도 이해가 됐다.
"좋아. 그 맹세를 믿어 보지."
고민 끝에 루드는 사라의 맹세를 믿어 보기로 했다.
다만 궁금한 점이 있었다.
"한데 이렇게 율법에 제약을 받게 된다면 기존에 수행하던 임무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차가운 사라의 반응에 루드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혹시 아이리우스와도 율법으로 맺어진 관계인 건가.'
질문하진 않았으나 어쩐지 루드는 그 답을 알 것도 같았다.
'전생에선 에이나우디가의 사람들을 암살했던 여자다.'
이번 생에선 어땠을지 몰라도 전생에선 에이나우디 가문을 적대했던 사라였다.
회귀한 아이리우스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만약 사라가 이번 생에도 비슷한 일을 벌이려 했고, 그 과정에서 아이리우스가 먼저 선수를 친 거라면... 그래서 지금 자신에게 벌어진 것과 비슷한 상황을 마주한 것이라면....
'어쩌면 기회가 있을 수도 있겠군.'
아이리우스의 사람이 됐다 생각했던 사라 아즈문이, 사실은 누구의 사람도 아닐지 몰랐다.
'활용 가치가 높은 존재야.'
전생에서 들었던 소문의 반만 해 줘도 쓸 수 있는 구석이 많았다. 실제로 마주한 그녀의 추적과 미행도 일품이었고.
무엇보다 이유는 몰라도 제국의 기둥 중 하나인 공작가를 상대로 살행을 벌였던 인물이었다.
만약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다면, 또 그 이유가 자신의 목적과 부합한다면, 서로 힘을 보탤 수도 있었다.
"부탁의 범주는 어디까지지? 평생 내 명령을 들어라, 같은 말도 안 되는 부탁은 듣지 않을 테고."
"당연한 소리를. 부탁은 서로 간에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이뤄진다. 말도 안 되는 부탁은 받아들일 수 없고 그런 부탁을 요청할 시엔 들어줘야 할 부탁이 하나 사라진 걸로 간주한다."
"결국 자기 마음대로 들어주겠단 소리군."
"...."
이죽거린 루드였으나 사라가 편협하게 굴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럴 거였다면 애초에 율법을 얘기하지도 않았을 터.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율법이 금제와 닿아 있다면 부탁의 정도를 판단하는 것도 금제의 영향 아래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 첫 번째 부탁을 하지."
"좋아, 말해라."
루드는 새로 생긴 패를 아끼지 않았다. 마침 인력이 궁하던 차였다.
"우리 부족의 상황은 알고 있나?"
"대강은 알고 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이미 까마귀 부족의 상황과 분위기를 파악한 사라 덕에 부연 설명은 필요 없었다.
"앞으로 일 년, 까마귀 부족의 족장을 보좌해 줘라."
"…일 년은 과하다. 반년으로 하지."
"아니, 일 년. 대신 부탁을 두 개 사용하는 걸로 하지."
"...좋다."
사라는 루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 년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았으나, 목숨 값이라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아이리우스 님에겐 따로 연락해야겠군.'
다만 걱정되는 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이리우스였다.
이곳에서 발이 묶였으니 어떤 식으로든 소식을 전해야 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 함께 그녀가 부탁했던 것에 관한 내용도 전달할 생각이었다.
"따라와라."
"어딜 가는 거지?"
그리 묻는 사라에 루드는 씨익 웃어 보였다.
"새로운 일꾼이 생겼다고 알려야 되지 않겠나."
쓸모 있는 인력이 생겼으니, 최대한 써먹어야 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82화
쓰러진 카이예스를 보는 소크란과 레이예스의 눈은 한없이 차가웠다. 분명 자신의 아들, 자신의 형이었지만 일말의 온기도 찾아볼 수 없는 눈이었다.
"가시죠."
"그래."
모두 제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이었건만, 소크란은 레이예스만이 진짜 자신의 혈육이라 생각했다.
까마귀 부족의 특성을 진하게 물려받은 카이예스도, 까마귀와 뱀 부족의 특성을 반반 물려받은 레지스도. 자신이 낳긴 했으나 어딘가 아쉬운 면들이 많은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레이예스는 달랐다.
냉철한 마음과 흔들리지 않는 심지, 스스로를 감출 줄 아는 인내심, 기회를 포착하면 놓치지 않는 집념.
이 아이야말로 자신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진짜 제 핏줄이었다.
카이예스가 연 문을 통해 소크란이 감옥에서 빠져나왔다. 쓰러진 카이예스의 등을 밟고 선 소크란의 발치에 레이예스가 준비한 신발을 꺼내 놓았다.
"고마워요."
싱긋 웃으며 신발을 신은 소크란은 천천히 위로 향했다. 바깥이 가까워지며 여러 소리가 들려왔다.
고함치는 소리, 병장기가 부딪치며 나는 금속음, 고통에 찬 비명, 몬스터들이 내는 괴성....
다른 이들에겐 어떨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 소크란에게만큼은 그 어떤 하모니보다도 아름답게 들리는 소리들이었다.
"이쪽으로."
미리 준비한 로브로 소크란의 모습을 가린 레이예스는 앞장서서 걸었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누군가 알아차리기 전에 집결지까지 가야 했다.
다행히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몬스터 웨이브로 향해 있었다. 이동 중 마주친다 해도 피난민을 보호하며 움직이는 중이라 둘러대면 그만. 탈주에 최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리 몬스터 웨이브를 만든 게 아닌가.
"고생이 많았겠어요."
"아닙니다. 어머니가 해 놓으신 것에 마무리만 했을 뿐인데요. 아,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레이예스가 꺼낸 건 '우로보로스의 눈'이라는 기물이었다. 뱀 부족의 보물 중 하나로 환혹의 힘을 강화해 줬다.
본디 소크란이 지녔으나 옥에 갇히며 레이예스에게 잠시 건넸던 것이었다.
모든 작업이 끝났으니 본 주인에게 돌려주려는 상황.
하나 소크란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그건 레이예스의 것입니다."
"이만한 기물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지금 상황을 보니, 레이예스에겐 충분히 우로보로스의 눈을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현재 까마귀 부족을 덮친 몬스터 웨이브는 소크란이 준비했던 패 중 하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우로보로스의 눈을 통해 강화한 환혹의 힘으로 주변의 몬스터들을 하나둘 잠식해 놨었다.
그 과정은 마치 세뇌와 같았다. 평소엔 아무렇지 않게 지내다가도 특정 키워드나 상황에 반응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엄청나다고밖에 할 수 없는 환혹의 힘.
일반적인 환혹의 힘으론 불가능했으나, 역대 뱀 부족 중 가장 강력한 환혹의 힘을 타고난 소크란이 우로보로스의 눈까지 사용해 이뤄 낸 결과물이었다.
"훌륭히 해내 주었습니다."
본디 몬스터 웨이브는 이리 사용하려 했던 패는 아니었다. 보다 확실한 때, 혹은 까마귀와 뱀 부족이 전면전을 벌였을 때 판을 뒤흔들 생각으로 준비해 뒀던 패였다.
그러나 자신의 처형이 확정되고 까마귀 부족에 자리 잡은 뱀 부족 세력이 밀려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쓰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어머니에 비하면 미력한 힘이라 눈을 어지럽히지 않았을까 걱정됩니다."
레이예스는 겸양을 보였다. 예정대로였다면 소크란이 직접 우로보로스의 눈을 통해 몬스터 웨이브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크란이 감옥에 갇혀 있던 상황. 이 웨이브를 완성한 건 소크란에게서 우로보로스의 눈을 건네받은 레이예스였다.
"순조롭군요."
"예, 어머니가 사라진 걸 깨달았다 해도 곧장 추적대를 보내진 못할 겁니다."
일부러 카이예스를 끌어들인 건 그래서였다. 단숨에 죽이지 않고 큰 부상을 입혀 놓음으로써 소크란이 탈출한 걸 알아채도 바로 추적대를 보낼 수 없게끔, 카이예스를 치료하며 시간을 소모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너무 순조로워서 외려 불안하군요.'
탈출 성공이 목전이었다. 이대로 까마귀 부족을 벗어나면 대기시켜 놓은 뱀 부족 전사들이 있을 터.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무리 몬스터 웨이브로 정신이 없다지만, 탈출이 이렇게 쉽다고?
소매치기 같은 잡범도 아니고 무려 제노스를 죽이려 했던 자신이다.
심지어 제노스는 자신과 뱀 부족의 속셈을 모조리 알고 있는 듯했으니 쉽게 놔줄 리가 없다.
'무엇보다 그때와 지금의 간극이 너무 크다.'
자신을 잡기 위해 내상이 심해지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함정을 팠던 제노스다.
자신이 독을 타는 현장을 잡기 위해 타이밍에 맞춰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그 신뢰도를 위해 황혼 부족의 족장까지 초청했다.
그런데... 이렇게 탈출이 쉽다고?
"이 밤중에 어딜 가는 거지?"
역시나 그럴 리가 없었다.
소크란은 제 앞에 나타난 인물을 바라봤다. 자신의 탈출을 막기 위해 등장한 건 고작 한 명이었다.
하지만 한 명이라고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 한 명이 다른 백 명보다도 강력했으니.
"몬스터 웨이브가 한창인데 도망치는 건가? 레이예스."
루드의 이죽거림에 레이예스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로브로 모습을 가린 소크란을 제 뒤로 보낼 뿐이었다.
"답답할 텐데 로브는 벗는 게 어때? 로브 속이 소크란이란 걸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후, 잘 풀린다 했더니 이렇게 되는군."
"어머니."
"괜찮습니다. 보아하니 다 알고 온 듯하니,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지요."
로브를 벗은 소크란은 덤덤히 루드를 마주 봤다.
"생각보다 빨리 쫓아왔습니다."
"그런가? 너흰 생각보다 늦게 움직였군."
짧게 오간 서로 간의 대화.
그것만으로도 둘은 서로의 심리를 꿰뚫어 봤다.
'역시 몬스터 웨이브를 만든 건 소크란이었나. 이 정도 규모까지 가능할 줄이야.'
'우리가 도망칠 걸 알고 있었군요. 언제부터였죠? 처음부터였나?'
바람 소리만 오가는 와중, 레이예스는 창을 든 팔을 늘어트렸다. 창끝이 천천히 땅을 긁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 어떻게든 집결지까지 가야 해.'
까마귀 부족 바깥의 평야에 뱀 부족 전사들이 대기 중일 것이다. 어떤 수를 써서든 그들이 있는 곳까지 가야 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일지라도 그들을 쉽게 처리할 수는 없을 터.
부족 간의 무력 충돌은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었으니 어쩌면 녀석이 스스로 물러날지도 몰랐다.
"어머니, 보조해 주세요."
"조심하세요."
결심을 마친 레이예스가 도약함과 동시, 루드 또한 움직였다.
캉-! 검과 창이 맞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루드는 눈을 빛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힘을 숨기고 있었다. 느껴지는 무력은 카이예스 이상, 최소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였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상황을 바꿀 수 없다.
중간 지점에서 만난 서로의 무기가 순식간에 한쪽으로 기운다. 무게를 실은 검이 순식간에 창대를 짓누르며 레이예스를 압박했다.
그 순간, 창대가 부러졌다.
"!!"
아니, 부러진 게 아니었다. 분절이었다.
여러 조각으로 나뉜 창대는 가느다란 사슬로 연결돼 있었다.
한순간에 모습을 바꾼 창이 루드의 검을 칭칭 감음과 동시, 그 끝에 위치한 창날이 루드의 목을 노렸다.
고개를 숙이며 창날을 피한 루드. 하나 상대해야 할 건 레이예스만이 아니었다.
"어머니!"
"사아아아아-!!!"
인간의 언어로 느껴지지 않는 기묘한 음성과 함께, 소크란이 알 수 없는 기운을 토해 냈다.
'큭.'
몬스터로 따지면 일종의 피어. 상대의 몸을 마비시키는 기운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운을 토하기 전 뱀의 언어로 읊은 것은 주술. 환혹의 힘과 맞물린 주술이 루드의 정신을 현혹했다.
콰앙!!!
그러나,
"지난번에 했던 말을 정정하지."
제노스와 십수 년을 함께 산 소크란이지만.
소드마스터의 아들이자 일평생을 소드마스터의 곁에서 지낸 레이예스지만.
"너희는 소드마스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소드마스터가 어떤 존재인지 몰랐다.
검을 휘감았던 창이 산산조각 났다. 부러진 것도, 분절도 아닌 완전한 파괴였다. 내부를 연결하던 사슬은 날붙이에 닿은 실마냥 툭 끊어졌고, 바깥을 형성했던 창대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고오오-
루드의 눈이 소크란을 바라봤다. 죽이겠다는 의지가 담긴 시선. 소드마스터가 품은 살의는 곧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분명 죽음이란 개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지만, 이 순간 소크란은 실체화된 죽음이 제 앞에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우... 우로보로스의 눈을 다오. 얼른!"
황급히 뺏어 든 우로보로스의 눈으로 어떻게든 살길을 마련해 보려 했지만,
"우로보로스의 눈인가. 그게 통할 성싶으냐."
어떤 반전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우로보로스의 눈은 분명 뛰어난 기물이었으나 그뿐. 강화된 환혹의 힘도 통하지 않는 존재에게는 그것이 존재하는 의미가 없었다.
"아… 아… 아…!!"
숨통을 죄어 오는 살기에 정신이 끊어질 것만 같은 상황에서, 소크란은 마지막 돌파구를 찾아냈다.
"약속! 약속은 기억하겠지?"
"한 번, 아들을 살려 주겠다던 약속 말인가?"
"그래, 그거. 난 죽어도 좋으니 레이예스만큼은 살려 줘. 그런 약속이었잖아."
"어머니!"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었다. 실패한 자의 말로야 죽음인 게 당연했으니.
하지만 제 아들은 달랐다. 어미의 실패가 자식의 실패가 돼선 안 됐다. 레이예스는 자신의 실패에 휘말린 것뿐이었다.
지옥 같더라도 살다 보면 분명 기회가 올 것이다. 영민한 제 아들이라면 견디고 견뎌서 기회를 찾아낼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땐... 자신처럼 실수하지 않겠지.
"약속은 지켜야지."
"아!"
다행히 루드는 약속을 잊지 않았다. 자신의 검에 대고 한 맹세를 또렷하게 기억했다.
"하여 지켰다."
"…아?"
스걱-!
레이예스가 쓰러졌다. 갈라진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아, 아, 아들! 레이예스! 정신 좀 차려 보렴!"
한순간에 자식을 잃은 어미가 울부짖었으나, 루드는 무심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거짓말쟁이. 살려 준다 했잖아. 어떤 상황에서든 한 번 살려 준다 했었잖아!"
그건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레이예스의 목숨만큼은 지킬 수 있게끔.
제노스의 아들이자 소드마스터의 비호를 받는다면 제아무리 죄인이 된다 해도 죽진 않겠구나 하는 계산이었다.
한데 이리도 허무히 스러져 간 죽음이라니!
"나는 약속을 어긴 적 없다. 이미 네 아들을 살리고 오는 길이었으니."
"아아...."
그 말의 의미를 못 알아들을 소크란이 아니었다. 녀석은 카이예스를 살렸다고, 그러니 이미 약속은 완수됐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죽여라."
마지막 희망까지 잃은 소크란은 반항하지 않았다.
루드의 검이 소크란의 목을 베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털썩, 숨이 끊어진 그녀의 몸이 고꾸라졌다.
"편하게 보내 주겠다는 약속도 지켰다."
루드는 아들을 살려 주겠다는 약속 이전에 했던 약속도 기억했다.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 주겠다는 말. 소크란은 죽는 순간까지도 죽음이 닥쳐왔음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쉬웠다.'
모든 상황이 끝났다. 소크란과 레이예스의 죽음으로 까마귀 부족 내에 남은 위험 요소도 사라졌고, 몬스터 웨이브도 서서히 멎어 가는 중이었다.
한데 뒷맛이 찝찝했다.
'레이예스와 소크란이 이렇게 약했던가?'
물론 전생에서 맞섰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시간이 지난 뒤였다. 레이예스도 소크란도 보다 힘을 갖췄던 상황. 당시의 레이예스는 소드마스터에 올랐을 정도였다.
"...일단 돌아가야겠군."
긴 생각은 나중에 해도 충분했다. 아직 몬스터 웨이브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으니, 가서 손을 거들어야 했다.
* * *
까마귀 부족 바깥의 평야 지역.
스무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는 시간을 확인했다. 서서히 동이 트고 있지만 근처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돌아간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는 건 실패했다는 의미다. 아마도 죽었겠지.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을 아이니."
복귀를 명하는 이도 입맛이 썼다. 소크란... 그녀는 전대 뱀 공주이자 부족의 기대를 짊어진 아이라는 사실 외에도 그에게는 자식 같은 존재였다.
하나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다는 건 죽었다는 의미.
하염없이 기다리기보단 돌아가서 상황을 보고해야 했다.
소크란의 탈출을 돕기 위해 파견됐던 이들은 아무 소득 없이 부족으로 복귀하는 길에 올랐다.
돌아가는 길은 숨 막힐 듯 고요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89화
앞과 좌우를 점한 모든 페드리의 검은 전부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리우스는 페드리의 환영 중 하나만이 진짜일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론 그들 모두가 진짜이기 때문이었다.
"!!!"
상대를 현혹하는 움직임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속도의 합은 페드리가 여럿으로 나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하나 그건 환영이라기보단 잔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움직임과 속도, 인지와 비인지의 간극에서 발생한 시각적 오류.
그러니 셋으로 나뉘었다 생각한 건 결국 하나였고, 그들이 휘두르는 검은 모두 실재하는 것이었다.
"...호오. 버텼군."
그러나 쿠두스가 확신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아이리우스는 페드리의 공격을 버텨 냈다.
'마지막 순간에 동작을 수정했다.'
분명 환영에 시선이 뺏겼던 그녀였다. 페드리의 검을 상대했던 대부분의 이들과 마찬가지로 진짜는 하나일 거라 판단하고 대처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 대처를 바꿨다. 하나의 몸이기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조금의 시간차를 간파하고 차례로 다가오는 검에 전부 반응한 것이다.
'근력 훈련이 필요하겠군.'
물론 페드리의 공격을 완벽히 상쇄했다 할 순 없었다. 페드리의 검과 제 몸 사이에 검을 끼어 넣는 데는 성공했으나 제대로 힘을 전달하지 못한 까닭에 무게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거기에 페드리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환영처럼 번진 삼연격이 끝남과 동시 곧장 다음 동작에 돌입한 것이다.
옆으로 비스듬히 든 검에 흉흉한 기운이 맺혔다. 아직 재정비하지 못한 아이리우스의 몸통을 노린 검이 수평으로 쏘아졌다.
"공간 끊어내기."
엄청난 속도로 쏘아진 검로. 잘못하면 즉사할 수도 있는 공격이었다.
생사결이 아닌 대련에선 쓰이지 않을 법한 공격이었으나, 그런 공격을 고민 없이 펼친 덴 이유가 있었다.
"그만, 여기까지."
어느새 페드리와 아이리우스 사이에 개입한 쿠두스가 페드리의 검을 밀어냈다.
이름처럼 공간 자체를 끊어 낼 기세였던 페드리의 검은 쿠두스의 개입과 동시에 힘을 잃고 쭉 밀려났다.
"죽일 셈이냐. 그래도 처음 생긴 후배일 텐데."
"위험하면 선생님이 나설 테니까요."
"그러다 내가 실수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럼 뭐...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리고 저 녀석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페드리의 말이 맞았다.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아이리우스가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 또한 페드리의 공격에 맞춰 무언가를 준비한 상태였다. 검끼리 마주쳤다면 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도 같았으나....
'호기심 때문에 애들을 다치게 할 순 없지.'
준비한 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부상을 입는 건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시간은 많았으니 궁금한 건 천천히 풀어가도 될 일이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로 하자. 다음 수업은 다음 주 월요일이다."
"오늘이 월요일입니다만."
아카데미의 수업은 대부분 최소 주 2회의 커리큘럼이었다. 아이리우스는 그 점을 짚고 넘어갔으나 쿠두스에겐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마음에 안 들면, 수강 신청 취소하든가."
"...아닙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한 아이리우스는 강의실이 위치한 숲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쿠두스는 페드리를 바라봤다.
"어땠냐?"
"뭐가요?"
"알면서 모른 척은. 저 녀석 말이야. 같이 검을 맞대 보니까 어땠냐고."
"음, 재밌었어요. 신기했고요."
"신기했다라...."
환영이라 생각했던 판단을 빠르게 정정해 삼연격에 반응한 것도, 중심이 완전히 흐트러진 상태에서도 공간 끊어내기에 대응할 무언가를 준비한 것도, 페드리로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신기한 경험이었다.
쿠두스 또한 아이리우스가 신기하긴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이유는 달랐다.
'뭔가 어색했단 말이지. 정신과 신체가 약간 어긋난 것도 같고.'
삼연격에 반응하던 모습도, 자세가 흐트러진 상태에서 반격을 준비하던 모습도, 어딘가 정신과 신체에 괴리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뭐, 자세한 건 차차 확인해 보면 알겠지만."
* * *
쿠두스의 수업은 독특했다. 수업이 시작한 지 3주 차가 됐으나, 아직도 쿠두스의 수업 방식을 종잡을 수 없었다.
어떤 날에는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잡고 애들 장난 같은 조잡한 겨루기를 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거나 붙어 있는 나뭇잎이 떨어지면 과정에 상관없이 패배하는 겨루기였다.
또 어떤 날에는 그늘에 앉아서 논검을 펼쳤다. 사실 앉아 있는 건 자신과 페드리 둘뿐이고 쿠두스는 누워 있었지만, 개인적으론 이때가 가장 수업다운 수업이었다고 생각했다.
상황을 설정하고 생각을 공유한 시간은 각자의 성향과 검에 대한 견해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 어떤 날에는 소풍을 갔다. 쿠두스의 말로는 소풍이 아니라 엄연한 수업이라 했는데, 강의실이 있는 숲속을 쏘다니는 건 어떻게 봐도 소풍이었다. 심지어 도시락까지 까먹지 않았던가.
'이게... 결격자의 수업? 이게... 전쟁 영웅의 모습?'
이쯤 되자 어째서 쿠두스가 결격교수라 불렸는지 알 것 같았다. 쿠두스의 진면목을 아는 자신도 이러할 진데 다른 이들은 어땠을 것인가.
쿠두스의 수업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떤 날은 진짜 놀고먹는 것 같은데 어떤 날은 또 수업다운 것 같기도 했다. 근데 그게 또 당장 도움이 되는 거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아이리우스 또한 전생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알게 모르게 전생에서 깨달았던 것들이 녹아 있지 않았더라면, 쿠두스의 수업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쿠두스의 수업이 결코 쓸모없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저 녀석은 무슨 생각이지?'
수업을 빙자한 산책에 나선 길. 아이리우스는 쿠두스의 옆에서 하품을 하는 페드리를 바라봤다.
페드리 또한 쿠두스와 마찬가지로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평소엔 아무 생각 없는 것 같다가도 검만 들면 기세가 돌변했다. 이중인격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또 쿠두스가 뭘 하자 하면 반대하는 것 없이 따랐다. 중간중간 딴지를 걸거나 군말을 하긴 했으나 막상 반대하는 것은 없었다.
'둘은 무슨 사이지?'
쿠두스 또한 페드리를 아끼는 모습이었다. 말로는 아니지만 행동을 통해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저만한 인물이 왜 알려지지 않았던 거지? 알아보니까 이미 아카데미 내에선 유명하던데.'
자신보다 한 학년 위인 페드리는 이미 아카데미의 천재 검사로 알려져 있었다.
다만 문무겸비인 자신과는 달리 실기에 치중된 모양새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실기를 제외한 모든 과목에선 낙제점에 가깝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가 유명한 건 실기에서 보여 주는 모습이 다른 결점을 가릴 정도로 압도적이기 때문이었다.
'그 귀네스를 이길 정도라.'
현재 아카데미 3학년인 귀네스는 미래의 전쟁 영웅 중 하나였다. 하이엔 왕국과의 전쟁 중 적장과 일기토를 벌여 단숨에 승기를 가져왔을 당시, 그의 수준은 익스퍼트 상급. 현재도 익스퍼트 중급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귀네스는 지난 축제에 있었던 최강자전에서 페드리에 의해 탈락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내가 페드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아무래도 죽은 거겠지.'
당장은 평화롭지만, 몇 년만 지나면 대륙 곳곳에서 전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전쟁의 화마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를 휩쓰는 것이었으니, 재능을 만개하기 전에 화마에 휩쓸려 죽었을 확률이 높았다.
슬픈 말이지만 전쟁 중 재능 있는 적국의 유망주를 죽이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전생의 페드리 또한 그러한 표적이 됐던 건 아닐까....
'빨리 강해져야 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한 회귀였고, 그러기 위한 노력이었다.
"교수님."
"무슨 일이냐."
"자신보다 높은 경지의 상대를 죽일 수 있을까요?"
갑작스러운 물음은 느긋하던 산보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리우스로선 분위기를 지키는 것보다 질문의 답을 얻는 게 더 중요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질문에 질문으로 돌아온 대답. 몇 차례의 수업을 통해 쿠두스가 쉽사리 답을 내주기보단 각자의 의견을 먼저 묻는다는 걸 알고 있는 아이리우스는 즉답했다.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질문의 의도는 고작 가능과 불가능을 묻는 게 아니었다.
"문제는 어떻게, 겠죠."
상대의 전력이 약화돼 있다면 쉽다. 중독이나 부상 등의 이유로 전력을 낼 수 없는 상대라면 자신보다 강하더라도 쓰러트릴 수 있다.
아니면 인질 등을 잡아 상대의 행동을 규제하거나 정신을 흔드는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진짜로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 상태에서, 서로가 서로의 전력을 낼 수 있는 상황에서,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 다만 여러 상황이 종합돼야 하겠지. 운도 따라야 할 테고."
서로가 전력을 낼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고려해야 할 건 많다. 상성의 차이, 리치의 차이, 환경의 차이... 여러 가지 조건이 잘 어우러졌을 때 자신보다 높은 경지의 상대를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이 아니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자신보다 강한 자를 쓰러트리며 영웅이 되었고.
"상대가 소드마스터라면요?"
"...."
하지만 그 상대가 소드마스터쯤 된다면, 아무리 많은 상황과 조건이 도와준다 해도 경지의 차이를 뒤집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소드마스터는 소드마스터로만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러나.
"가능하다. 소드마스터가 아니더라도 소드마스터를 죽일 수 있다. 다만 앞서 말했던 것에 더해 모든 걸 내던질 각오도 필요하겠지."
쿠두스는 소드마스터가 아닐지라도 소드마스터를 죽이는 게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아직은 그 혼자만의 생각에 불과한 대답이었지만, 그 답은 틀리지 않았다.
전생에서 실제로 소드마스터를 쓰러트렸던 쿠두스였으니.
"그렇군요."
"오늘 수업 내용은 아니었으나, 마침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보여 주마."
무언가를 결심한 쿠두스는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몇 주간 수업을 진행하며 살펴본 결과 아이리우스에게 보여 줘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페드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지만, 웃으며 괜찮다는 표시를 보냈다.
"잘 봐라. 그리고 느껴라."
쿠두스가 보여 줄 게 무엇일지 기대하던 아이리우스는 경악했다.
'교수님의 마력이, 사라졌다?'
이전까지 존재하던 쿠두스의 마력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기척을 죽이거나 마력을 갈무리한 수준이 아니었다. 모든 마력이 일제히 전소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교수님만이 아니야. 페드리의 마력도, 내 마력도!'
뒤이어 깨달은 건 사라진 게 쿠두스의 마력만이 아니란 사실.
자신의 마력도, 페드리의 마력도, 심지어는 대기 중에 존재해야 할 최소한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대의 마력이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이거... 였구나.'
아이리우스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이야말로 쿠두스가 소드마스터를 죽일 수 있게 만들어 준 수단임을.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88화
페드리는 한참을 생각했다. 쿠두스의 질문은 정말 자신의 의견이 궁금해서일까, 아니면 새로운 수강생을 거절할 명분이 필요해서일까.
그러다 이내, 페드리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진짜 내 의견이 궁금한 거든 거절할 명분이 필요한 거든 그건 내가 신경 쓸 게 아니잖아.'
자신의 의견이 궁금한 거라면 진짜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됐다. 거절할 명분이 필요한 거라면, 그건 자신이 도와줄 필요가 없는 부분이었다. 막말로 선생님이 귀찮아하든 곤란에 빠지든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 아닌가.
"전 아무 상관없는데요."
"아?"
질문의 의도는 후자였는지 쿠두스는 벙찐 표정이었다. 하지만 페드리는 찔리는 게 없었다. 자신은 질문을 받았으니 대답한 것밖에 없었다.
"너, 안 불편하겠어? 무려 공작가의 영애라고. 아카데미에 널리고 널린 게 귀족이라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라 꼽히는 공작가!"
"그거랑 수업이 상관있나요? 혹시 저 녀석이 수업에 들어오면 선생님이 바뀐다거나 수업 내용이 바뀐다거나 하나요?"
"그으…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럼 됐네요."
생각과 다른 페드리의 반응에 쿠두스는 혼란에 빠졌다.
아니, 이게 이러려는 게 아니었는데 네가 날 배신하면 어떡해....
한편으론 페드리가 대견스럽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귀족이란 귀족은 다 죽이겠단 눈을 하고 있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물론 그 때문에 자신이 조금 귀찮아지게 생겼지만.
"크흠, 그럼 결정 났군."
"교수님의 수업 들을 수 있는 건가요?"
"그래, 애석하게도 말이다."
툴툴대며 대꾸한 쿠두스는 사무실 문을 열었다. 멀쩡한 사무실을 두고 문 앞에서 계속 대화할 이유가 없었다.
"생각보다 정상적이네요."
"대체 날 어떻게 생각했기에 생각보다 정상적이란 말이 나오는 거냐?"
"직접 뵙기 전엔 괴짜라 생각했고, 직접 뵙고 나서는 뺀질이?"
"그게 교수한테 할 말이냐?"
시선을 피한 아이리우스는 사무실을 둘러봤다. 쿠두스의 사무실은 다른 교수들의 사무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업무용 탁상과 손님맞이용 공간이 있었고, 그 위로 수업이나 학생에 관한 자료로 보이는 서류들이 늘여져 있었다.
"앉아라. 마실 건 따로 없으니, 다음에 올 때 사 들고 와라."
"참고할게요."
두 사람을 손님용 소파에 앉힌 쿠두스는 맞은편에 앉았다.
"이렇게 이번 학기 내 수업을 들을 학생들이 정해졌군."
"...저희 둘이 끝인가요?"
"그래, 예상했던 것의 두 배나 되는 숫자군."
작년엔 페드리만이 유일한 수강생이었다. 쿠두스는 올해도 다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서류상으로는 페드리 말고도 둘이 더 있지만 그 녀석들은 수업에 나오는 게 드물었으니....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수강생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열정이 아주 높아 보이는.
"아까의 얘기를 다시 해 보지. 어째서 내 수업을 신청한 거지?"
"배울 게 있을 것 같아서요."
"배울 것이라 함은 구체적으로?"
"그건 교수님께서 알려 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무얼 가르쳐 주실 수 있는지, 무얼 얻어 가야 하는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귀찮은 녀석이군. 뭘 알고 있는 건가.'
'교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조금 알 것도 같네.'
만사를 귀찮아하는 게 더스틴과 비슷한 것도 같지만 결이 달랐다.
더스틴이 움직이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는 느낌이라면, 쿠두스는 조금이라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는 걸 싫어하는 기색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자신을 수강생으로 두는 걸 꺼려 하는 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물러날 순 없었다. 그에게서 얻어야 할 게 있었으니까.
"저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죠?"
그를 위한 패도 이미 준비했다.
"에이나우디 공작가의 장녀. 입학시험 수석에 다른 수업에서도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란 것 정도?"
아직 학기 초였지만 그녀의 평판은 대단했다. 신분도 좋은 데다 영민하고 실기 수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외모까지 뛰어났으니 많은 학생들에게서 동경과 연모의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에이나우디는 쿠두스가 가장 중요한 정보를 모르고 있단 걸 알았다.
"제가 추천서를 받고 입학했다는 걸 아시나요?"
"딱히 궁금하진 않아서. 뭐, 대단한 양반들의 추천서였겠지."
쿠두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공작가쯤 되면 추천서를 받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학생들이 누구의 추천서를 받고 들어왔는지 관심도 없었으니, 아이리우스가 누구의 추천서를 받고 왔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하나 이어진 그녀의 말은 쿠두스의 태도를 뒤바꾸기 충분했다.
"소드마스터."
"...."
"제게 추천서를 써 주신 건 제국의 위대한 소드마스터 중 한 분인 더스틴 클라위베르트 님입니다."
"...확실히 자랑할 만하군."
자세를 고쳐 앉은 쿠두스가 아이리우스를 바라봤다.
'더스틴 클라위베르트. 위대한 소드마스터인가.'
쿠두스에게 소드마스터란 애증의 이름이었다. 마력 재능이 없는 자신으로선 평생토록 닿을 수 없을 경지.
소드마스터가 될 수 없다는 건 딱히 억울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같지 않았고, 잘할 수 있는 것과 적성이 있는 것은 모두 달랐으니.
그러나 소드마스터야말로 절대적인 검의 종주라 불리는 것에 있어선 불만이 많았다.
소드마스터만이 검의 끝에 닿은 자인가. 검의 끝에 닿은 자는 모두 소드마스터인 것인가.
젊은 시절 쿠두스를 집어삼켰던 심마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소드마스터가 될 수 없다면 검의 끝을 볼 수 없는지, 검의 끝에 닿는다 해도 마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소드마스터가 될 수 없는 건지.
또, 소드마스터가 아니면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수 없는 건지.
그건 비단 젊은 시절만의 심마가 아니었다. 그때만큼은 아니어도, 지금 또한 그런 생각은 여전히 갖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검의 끝에 닿기 위해, 소드마스터가 아닌 자로서 소드마스터를 상대하기 위한 방법을 완성하기 위해. 갖은 모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아카데미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그 이야길 꺼낸 이유는 뭐지?"
대놓고 귀찮아하던 가벼운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의 쿠두스는 아이리우스의 의중이 궁금했다. 그녀가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그만큼 제가 재능 있다는 소리입니다. 가르칠 맛이 있지 않을까요?"
"가르칠 맛이라."
소드마스터를, 그 중에서도 더스틴을 언급한 게 그 이유 때문 만일까. 분명 아닐 테지만 그녀를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미 자신의 흥미를 끈 그녀였다. 무얼 더 숨기고 있는지는 곁에 두고 지켜볼 생각이었다.
다만 한껏 솟아 있는 저 콧대는 눌러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가르칠 맛이 날 정도로 재능 있는지,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
"시험이요?"
"그래, 마침 가르칠 맛이 날 정도로 재능 있는 녀석이 옆에 있으니 말이야."
아이리우스는 고개를 돌려 페드리를 바라봤다. 페드리는 졸린 눈으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차였는데 잘됐네.'
이곳으로 오는 길에 들었던 게 사실이라면 페드리는 천재였다. 쿠두스가 자신하는 모습도 그를 뒷받침했다. 다만 전생에선 페드리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야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모를 수도 있지만. 졸업하고 나서도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건 죽었거나 기대만큼의 모습을 보이진 못했다는 건데.'
흘깃 쿠두스와 페드리를 번갈아봤다.
'결격자가 장담할 정도의 재능이라....'
전생에서 아이리우스는 쿠두스와 같은 전장에 있었다. 하이엔 왕국과의 전쟁, 쿠두스가 소드마스터를 상대했던 전장이었다.
당시 쿠두스가 보여준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검에 미친 괴물이 있다면 그러한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때까지만 해도 결격교수란 호칭과 함께 멸시받던 쿠두스는 그 전투를 통해 그간의 평가를 뒤집어 냈다.
'결격자 쿠두스.'
결격교수와 상통해 보이는 호칭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전혀 달랐다.
결격이라 함은 필요한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함을 의미하는 말.
결격자는 소드마스터가 될 자격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소드마스터를 죽인 그의 위업을 칭송하기 위한 칭호였다.
"뭘 어떻게 하면 되죠?"
"어려울 것이 있나. 한 판 붙어 보면 되는 거지."
"좋아요. 장소는 마련돼 있을까요?"
"강의실로 가지. 앞으로의 수업도 모두 그곳에서 이뤄질 예정이니 가는 길을 잘 기억하도록."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내용.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페드리는 조용히 눈만 깜빡였다.
'왜 내 의견은 아무도 안 물어보지.'
하지만 대련이 싫진 않았다. 원하지 않는 살생은 싫으나, 검을 휘두르고 상대와 교감하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세 사람은 곧장 강의실로 향했다. 사무실 옆의 숲으로 들어가 십 분 정도 걸으니 넓직한 공터가 나타났다. 이곳이 쿠두스의 강의실이었다.
"강의실이... 색다르네요."
"비웃고 싶으면 비웃어도 된다. 다른 강의실에 비하면 조잡하기 짝이 없는 건 맞으니."
제도의 이름을 단 대륙 최고의 아카데미답게 카르반 아카데미의 시설은 굉장하기로 유명했다.
마법처리가 돼 있어 마력과 마법에 의한 충격에도 파손되지 않는 대련실. 한 번에 1000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강의실. 온갖 실험을 할 수 있는 재료와 첨단 시설이 넘치는 실험실....
이 외에도 각 교수마다 주어진 개인 강의실은 저마다 크기나 특색의 차이는 있지만 실내 냉난방과 파손 방지, 소음 차단 등의 마법이 걸려 있단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쿠두스의 강의실은....
"그냥 공터네요."
"잡초가 많은 공터지."
"페드리 너마저...."
나무를 베어 만든 공터였다. 바닥에선 잡초가 자라고 있고 자세히 살펴보면 개미를 비롯한 벌레와 두더지의 흔적으로 보이는 구멍도 있었다.
"수업만 제대로 이뤄진다면 강의실이야 어떻든 상관없어요."
"수업도 글쎄...."
"페드리, 내가 혹시 너한테 뭐 잘못한 게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페드리의 말에 식은땀을 흘린 쿠두스는 말을 돌렸다.
"어쨌든 앞으로의 수업은 이곳에서 이뤄질 거다. 새로운 수강생이 생겼으니 오늘은 오리엔테이션인 걸로 하고, 가볍게 서로의 실력을 파악하기 위한 대련을 해 보지."
아이리우스와 페드리가 공터의 중앙에 섰다.
'과연 어떤 실력을 갖고 있으려나.'
두 사람이 준비를 마치자 쿠두스의 신호가 떨어졌다.
"시작!"
아이리우스는 곧장 움직였다.
'처음은 신중하게.'
페드리가 어떤 유의 검을 사용하는지 모르는 상황. 슬쩍 건드리며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상대가 자신의 간격에 들어옴과 동시에 팔을 길게 뻗었다.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 반응한 정석적인 찌르기였다. 상대 입장에선 제 발로 검에 다가가는 느낌일 터. 실제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를 의식함과 동시에 속도를 줄이거나 머뭇거리면 그때가 제대로 된 카운터 타이밍이었다.
'상대의 반응에 맞춰 반격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 강력한 반격을 가하는 이중 카운터.'
전생에서도 자주 써먹던 기술이었다. 실전에서의 효율도 좋은 편이었고.
그러나
"다 느껴져."
페드리는 속도를 줄이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자신을 향해 뻗은 아이리우스의 검과 그 안에 담긴 의도를 느끼며 더욱 속도를 끌어 올릴 뿐이었다.
"!!!"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페드리의 신형. 환영처럼 번지는가 싶더니 셋으로 늘어난 페드리는 각기 정면과 양 측면을 파고들었다.
'어차피 진짜는 하나다.'
그 짧은 찰나에 환영을 구별하기 위해 애쓴 아이리우스였으나,
"끝났군."
그 모습을 본 쿠두스는 웃음을 머금었다.
진짜는 하나뿐이라 생각했을 페드리의 환영은, 셋 모두 진짜였으니까.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9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