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60화
더스틴이 제도에 도착했다.
카르바나 제국의 수도, 카르반. 달리 제도라고도 불리는 이곳에 결국 도착하고야 만 것이다.
"하아... 귀찮아."
소드마스터는 심즉체의 경지. 마음이 곧 몸을 움직이고, 움직임이 곧 마음이었다.
하여 더스틴의 발걸음은 그 마음만큼이나 무겁기 그지없었다.
도심을 지나친 더스틴은 한적한 골목으로 향했다. 뭣 모르고 시비를 거는 불량배들은 넓은 어른의 마음으로 잘 다스려 돌려보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더스틴은 문을 열었다.
내부는 먼지로 가득했다. 천장과 벽 모서리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었고 바닥에는 작은 벌레들이 기어다녔다.
"얼른 처리하고 나가야겠어."
낮잠을 좋아하는 더스틴이었지만 이런 곳에선 그토록 좋아하는 낮잠도 못 잘 것 같았다.
"이건가."
벽으로 다가가 먼지가 내려앉은 벽면을 쓸었다. 먼지를 쓸자 약간의 틈새가 보였다. 그곳을 꾹 눌렀다.
그러자 벽이 돌며 숨겨져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그 과정에선 일체의 소음도 없었다.
'돈을 얼마나 처바른 건지.'
벽은 결코 작지 않은 크기였다. 그만한 크기를 이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썼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굳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비밀 공간은 어두웠으나 소드마스터의 시야엔 한낮의 대로변처럼 잘 보였다.
더스틴은 공간 중앙에 자리한 의자에 앉았다. 그와 동시, 비밀 공간의 벽 전면에 하나 둘 인영人影들이 나타났다.
사방을 가득 채운 인영은 한 면의 벽에 셋씩, 총 열둘의 인원이었다.
빛을 등진 그들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형체도 빛을 따라 그림자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늦었군."
"미안. 돌아오다 길을 잃어버렸지 뭐야. 이런저런 일도 있었고."
"그걸 지금 변명이라 하는가."
"아니? 변명이라니. 내가 변명을 할 이유가 어디 있어."
더스틴은 변명할 생각이 없었다. 변명할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변명이란 실수나 잘못에 대해 그 까닭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
실수를 한 것도 잘못을 한 것도 아닌 데다, 그들에겐 자신의 행동을 규제할 권한도 없었다.
"의뢰했던 일은 전부 마쳤어. 그럼 된 거 아닌가? 당신들의 의뢰는 발렌타노로 가서 그곳에 모인 정수와 관련된 이들을 죽이는 것. 그거였잖아? 언제 어느 때에 돌아와서 어떻게 보고해야 한다 같은 건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건방지구나."
"건방져? 아니지, 건방진 건 의회 당신들이지."
코웃음이 나왔다. 누가 누구 보고 건방지다 하는 건지.
제국의 의사결정 단체 의회.
그들이 가진 권력과 힘이 얼마나 강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저 열둘이 마음먹으면 어떤 일을 벌일 수 있는지도.
하지만 그렇다고 두렵지는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눈감아 주시는 것도 한계가 있음을 알아라."
기세를 드러낸 더스틴은 그리 일변했다.
의회는 본디 존재할 수 없는 단체였다.
카르바나 제국은 황제의 것. 귀족들은 황제를 보좌하고 그 뜻을 대변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하나 오래 전 제국의 황제는 혹 자신의 선택이 그릇된 것일까 염려했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을 마련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의회였다. 신분과 성별에 상관없이 여러 분야에서 전문성과 인망을 두루 갖춘 이들을 모아 제국을 위한 정책을 내고, 때론 황제의 잘못된 의견에 대립하기 위해 만든 단체.
결국 의회의 존재 목적은 더 나은 제국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작금은 어떠한가.
'제국보단 제 잇속을 챙기기 위해 급급한 놈들.'
처음에는 제국을 위해 결성됐을 의회지만,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며 그 본질은 퇴색됐다.
의원이 되면 귀족을 뛰어넘는 권력을 얻을 수 있다!
의회에 소속된 의원은 뭇 귀족을 초월하는 지위를 얻었다.
심지어 공작이라 한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권력.
그런 의회의 의원 선출이 기존 의원들의 추천과 동의로 이루어지는 걸 감안하면, 그들의 부패는 예견된 일이었다.
"이, 이 오만방자한 놈!"
"감히 황제 폐하를 입에 올리다니."
"네놈이 그러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역린을 건드린 것일까. 의원들은 길길이 날뛰었다.
더스틴은 그 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저들은 스스로가 부패했음을 알고 있었다. 툭 건드렸을 뿐인데 이리 격하게 반응하는 건 그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저들은 부패한 지금의 상태를 벗어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만."
소란스러워지던 상황을 한 번에 정리한 건 정면의 벽 가운데 자리한 존재였다.
그는 더스틴을 바라봤다.
어둠에 가려진 얼굴 때문에 시선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가 더스틴을 바라보고 있음은 명확했다.
"더스틴 클라위베르트. 황제 폐하의 검."
"맞아. 내가 바로 제국의 소드마스터다. 당신이 의회의 의장인 것처럼 말이지."
그는 의회의 수장인 의장이었다.
의원 대부분의 신상을 아는 더스틴도 의장의 신상은 알지 못했다.
전대 의장이 의장 자리를 물려줬고, 다른 의원들도 동의하며 의장이 된 인물.
나이가 몇인지, 성별이 어떤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 정체에 대해 아는 건 같은 의원들과 황제 폐하 정도뿐이리라.
"그대 말이 맞네. 황제 폐하께서 우리를 주시하고 계심을 아네."
바보가 아니고서야 황실에서 의회의 부패를 모를 수 없다. 그럼에도 의회를 놔둔 건 부패한 그들도 나름의 쓸모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언제까지고 놔둘 거란 보장은 없었다. 의장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그들도 그들 나름의 노력을 하는 중이었다.
"우리도 나름의 생각이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네. 자네가 우리의 부탁을 들어준 것도 그러한 까닭 때문이 아닌가."
의장과 더스틴의 시선이 마주했다. 아티팩트를 통해 먼 거리에서 이루어진 통신에 불과했지만 두 사람 다 서로가 자신을 면밀히 살피고 있음을 느꼈다.
'역시 불쾌해.'
기세를 누그러뜨린 더스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번 보지는 않았지만 의회와 접촉할 때면 항상 불쾌감이 일었다.
"이걸로 계산은 끝이다. 알고 있겠지?"
"물론이네. 그대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바네."
"먼저 일어나보겠어. 다음에는 양지에서, 보다 좋은 관계로 만나길 바라지."
더스틴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밀실을 빠져나갔다.
더스틴이 사라진 자리.
여전히 그림자로 남아있는 의원들은 불평을 토했다.
"저놈의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칼질 좀 한다고 으스대는 꼴이란. 추잡하고 더러운 종자 같으니."
"자자, 다들 그러지 맙시다. 그래도 그 덕분에 일처리가 쉬웠던 건 사실 아니오."
"그렇긴 하지만 언행이 선을 넘었다 느낍니다."
남녀노소를 구별하기 어려운 목소리 여럿이 공간을 넘나들었다.
"그보다 이 일에 더스틴을 쓴 건 괜찮은 겁니까?"
"저도 걱정이 됩니다. 황제에게 가 쪼르르 자신이 한 일들을 고한다면...."
"에이, 설마 그러겠습니까? 저도 켕기는 게 있을 텐데요. 오고 간 게 있는 이상 그도 황제의 눈에서 자유롭진 못할 겁니다."
여러 말들은 전부 더스틴과 황제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자, 다들 너무 걱정 마세요. 여러분 말씀대로 그도 황제의 눈에서 자유롭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나쁠 건 없지요."
모두의 의견을 정리한 건 역시나 의장이었다. 의장은 불안에 떠는 다른 의원들을 안심시켰다.
"만약의 상황에 대한 준비는 제 쪽에서 하겠습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황제에게 이야기가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 하심은?"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는 법이죠."
그 혹은 그녀일지 모를 존재는 비릿한 웃음을 품었다.
* * *
로하스는 생각보다 말을 잘했다. 까마귀의 눈으로서 보고 들은 걸 잘 전달해야 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덕분에 까마귀 부족의 상황과 정보를 기억하기 쉬웠다.
"그러니까 구 까마귀 부족 사람들과 신 까마귀 부족 사람들이 대립하고 있다는 거지?"
"강한 대립은 아니지만, 따지자면 그렇다."
구 까마귀 부족으로 분류된 이들은 까마귀 부족의 전통적인 면을 따르는 이들이었다.
그 필두로는 제노스를 꼽을 수 있었다.
반면 신 까마귀 부족으로 분류된 이들은 뱀 부족과의 동맹 이후 생겨난 이들로, 뱀 부족을 비롯해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들이었다.
그 대표는 소크란이라 할 수 있었다.
"트롤에 관한 얘기는 없나?"
"트롤? 무슨 트롤?"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곳과 헷갈렸나 보군."
로하스의 반응에 루드는 말을 아꼈다.
'퓨렐 설산의 트롤은 아직인가.'
지금은 전생에서 까마귀 부족을 찾았을 때보다 훨씬 이른 시기였다.
아직 녀석이 활동할 때가 아닐 수도 있었다. 어쩌면 활동하고 있지만 까마귀 부족이 인지하지 못한 걸지도 몰랐고.
"전사의 시험은 끝났나?"
"전사의 시험까지 알고 있어? 혹시... 그분께 들은 거야?"
전사의 시험은 까마귀 부족의 전통적인 문화였다.
매년 진행되며, 부족의 전사가 되길 희망하는 혹은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자웅을 겨루는 장.
여러 미션을 수행하고 서로 맞붙기도 하면서 서로를 인정하고 스스로의 실력을 확인하는 일종의 대회였다.
외부인에게도 열려 있어 다른 부족의 이들도 참가하곤 했다.
루드는 이 전사의 시험에 참가할 계획이었다.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올해 전사의 시험은 끝났나?"
"아니, 아직이야. 곧 진행될 예정이고. 혹시 거기에 참가할 생각이야?"
"그래."
"그게 뭔데. 나도 대화에 좀 껴 줘."
의미 모를 두 사람의 대화에 휴이가 불퉁한 기색을 표했다.
로하스는 간결하게 전사의 시험을 설명했다.
"그거 재밌어 보이네. 나도 나가는 거야?"
"그래 너도 함께할 거다. 너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
전사의 시험은 휴이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지금의 휴이는 경지에 비해 경험이 일천한 상태. 지금의 경지에 오른 게 신기할 정도였다.
타고난 재능과 센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그만큼 오성이 좋다는 거겠지만, 마스터가 되기 위해선 그것만으론 힘들다.'
지금의 휴이에게 가장 필요한 건 많은 경험이었다.
전생의 휴이는 알브 부족이 멸족한 뒤 이곳저곳을 떠돌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것이 마스터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나 이번 생엔 전생과 많은 것이 달라졌으니, 그에 상응하는 다른 경험들을 채워 넣어야 됐다.
까마귀 부족에서 치러지는 전사의 시험도 그중 하나가 될 터였다.
'그건 나한테도 마찬가지.'
휴이와는 조금 상황이 다르지만, 루드 또한 전사의 시험을 통해 얻을 것들이 있었다.
"올해의 시험 장소는 어디지?"
"퓨렐 협곡이야."
"...퓨렐 협곡이라고?"
루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퓨렐 협곡은 바깥 대륙의 협곡 중에도 깊고 긴 협곡에 해당했다.
무엇보다, 설산 트롤이 등장함에 따라 녀석의 홈그라운드로 변할 곳이었다.
'우연인가. 아니면....'
머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건 우연인가 필연인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한 의도인가.
그게 무엇이든, 직접 가 보면 확인할 수 있을 일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61화
"까마귀 부족에 온 걸 환영한다."
로하스가 양팔을 벌렸다. 꾸준히 이동한 끝에 까마귀 부족에 도착한 세 사람이었다.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부족으로 돌아온 로하스는 의기양양했다.
이곳은 까마귀 부족의 영토였고, 로하스는 까마귀의 눈이었으니 자신감을 갖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루드와 휴이는 묵묵히 로하스의 뒤를 따랐다.
까마귀 부족의 영토는 중앙대륙의 대도시에 비할 정도였다.
자그마한 도시 국가라 해도 무방할 크기.
입구를 통과해 도로를 걷던 로하스가 넌지시 물었다.
"어떻게, 바로 족장님께 안내해 줄까?"
루드가 까마귀 부족을 찾은 이유는 십중팔구 제 연원을 찾기 위함일 터. 하여 곧장 제노스에게 안내해 주려던 로하스였다.
"아니. 필요 없다."
그러나 루드는 단칼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왜? 부족에 온 이유가 그것 때문 아니었어?"
"아니라고 할 순 없겠지. 다만 시기와 방법이 다를 뿐이다."
로하스의 생각대로 제노스를 찾아갈 심산인 루드였다. 자신이 그의 아들임을 밝히고, 묵혀 둔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었다.
다만 그것이 지금은 아니었다. 로하스의 안내를 통해서는 더더욱 아니었고.
제노스의 앞에서 정체를 밝히는 건 생각해 둔 때가 있었다.
'혼자서 찾아갈 생각인가.'
로하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존재조차 모르던 부자지간의 만남. 타인의 개입을 원치 않을 수도 있었다.
제노스의 위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으니 루드의 수완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원하는 때에 제노스를 만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호의는 고맙게 생각한다."
"뭐. 알아주니 고맙군."
"그보다 전사의 시험은 언제부터지?"
"안 그래도 그거부터 해결할 생각이었어. 따라오라고."
로하스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전사의 시험은 매년 진행되는 까마귀 부족의 전통이었다.
성인부터 참가 자격이 주어지는 까닭에 부족 내의 몇 가문에선 성인식 대용으로 쓰기도 했다.
시험을 치르는 이들에겐 자신을 증명할 기회의 장.
시험을 구경하는 이들에겐 부족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확인하고, 술과 친목을 나누는 만남의 장.
하여 전사의 시험은 까마귀 부족의 축제나 다름없었다.
매번 그 내용이 바뀌는 전사의 시험이었지만 골자는 똑같았다.
총 세 번의 시험과 그중 한 번의 협동 시험.
유구한 세월 동안 변하지 않은 형식이었다.
"자. 여기다."
"사람이 많네. 이게 다 몇 명이야."
세 사람이 멈춰 선 곳은 광장이었다.
넓은 공간이었음에도 트인 느낌을 받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저 앞에 있는 서류를 작성하면 전사의 시험에 참가할 수 있다."
"잠깐만. 그럼 설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래. 모두 전사의 시험에 참가하러 온 이들이다."
광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수는 못해도 수십.
휴이는 혀를 내둘렀다. 까마귀 부족이 괜히 바깥 대륙 최고의 부족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았나."
"좋은 질문이야.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전사의 시험이 유명하긴 했지만 부상, 심지어는 죽음의 위험까지 있으니 정말 자신 있거나 스스로를 시험하고 싶은 이들만 신청했지."
"원래라면 지금은 다르단 말 같은데."
"그래. 다르지. 최소한 올해 시험만큼은."
루드는 주변을 둘러봤다. 꽤 쓸 만한 기세를 풍기는 이부터 한눈에 봐도 어중이떠중이인 이까지, 다양하게도 모여 있었다.
"이유가 뭐지?"
"이번 시험에 걸린 상품 때문이지."
"상품?"
루드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전사의 시험에 상품 같은 게 걸렸었던가.'
축제 형식을 띤다지만 참가자들의 긍지와 목숨이 걸린 전사의 시험이었다. 결코 상품 따위로 폄하될 게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전사의 시험에 상품이 걸렸던 적은 없었다.
'시기가 다르니 예전에는 있었던 걸 수도 있지만.'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또 이번만 그런 것 같았다.
"이번 전사의 시험에 소원권이 상품으로 걸렸어. 마지막 시험을 통과한 이들 중 가장 높은 성적을 기록한 한 명. 우승자에게 소원권이 부여될 거야."
"소원권?"
"원하는 걸 말하면 뭐든 들어줘야 하는 그런 소원권?"
"그래. 그 범위와 한계를 정해 놓긴 했지만 원하는 대부분의 것을 이룰 수 있음은 분명하지."
확실히 그 정도 상품이라면 사람이 몰리는 것도 이해가 됐다.
한순간에 인생역전이 가능한 상품.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어 볼 법했다.
"한데 이유가 뭐지?"
"무슨 이유?"
"갑자기 상품이 걸린 이유 말이다. 얘기를 들어 보니 이전까진 상품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은데."
예리한 질문이었다. 동시에 기다리던 질문이기도 했다.
"표면상으로는 참가자가 점점 줄어드는 전사의 시험을 활성화하기 위해서인데."
"표면적인 이유 말고."
"아무래도 과시하기 위해서란 의견이 정론이지. 이만한 상품을 거는 까마귀 부족의 배포와 그 상품을 가져갈 이를."
"마치 우승자가 정해져 있다는 식으로 들리는데."
휴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로하스의 말은 꼭 우승할 이가 정해져 있고, 그를 위해 이런 상품을 걸었단 것 같았다.
그 해석은 틀리지 않았다.
"맞아. 완전히 정해져 있다고 할 수는 없어도, 높은 확률로 가져갈 사람은 있지."
그것이 소원권이란 말도 안 되는 상품이 걸린 이유였다. 생색을 낼 수 있으면서도, 결국 상품은 예정된 자에게 넘어갈 테니 부담도 적었다.
"누구지?"
"카이예스, 그리고 레이예스."
루드도 아는 이름이었다. 루드만이 아니라 까마귀 부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이름이었다.
"족장 제노스 님의 아들들이지."
제노스와 소크란 사이에서 난 쌍둥이 형제.
다시 말해, 루드의 배다른 형제들이었다.
* * *
"여기서 머물면 돼. 주기적으로 관리하던 곳이니 크게 불편할 건 없을 거야. 문제가 생기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나를 찾아오면 되고."
"고맙다. 이 정도까지 해 줄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뭘. 같이 목숨 걸고 싸우기도 했고, 별장으로 쓰려고 갖고 있던 데니까 부담 갖지 말고 편히 있어."
인사를 마친 로하스는 열쇠를 건넸다.
처음엔 여관에서 머물려 한 두 사람이었지만 로하스가 자신이 거처를 제공해 주겠다며 끌고 왔다.
여관보다 훨씬 나을 거란 호언장담처럼 넓고 쾌적한 환경이었다.
'꿍꿍이가 있는 건가.'
루드는 의구심을 품었다. 물론 단순한 호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 의심 않고 있다 뒤통수를 맞는 것보단 의심하던 것이 헛수고가 되는 게 나았다.
'좋아. 계획대로야.'
그리고 루드의 의심처럼, 로하스는 작은 꿍꿍이를 숨기고 있었다.
'녀석에게 좋은 인상도 심어 주고, 운이 좋으면 정체가 밝혀진 뒤 제노스님께서 찾아오실 수도 있겠지. 제노스님께서 내 집에 방문하신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야. 그렇게 되면 지금 집은 정리하고 저 집으로 살림을 옮겨야겠어.'
루드로서는 상상도 못할 꿍꿍이였다.
"근데 카이예스랑 레이예스란 놈들이 그렇게 대단한 녀석들이야?"
그렇게 로하스가 떠난 뒤, 짐을 풀던 휴이는 슬쩍 운을 띄웠다.
로하스의 말에 의하면 이번 전사의 시험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라고 했다.
"단순히 실력만 놓고 볼 문제가 아니다."
빈 의자에 앉은 루드는 눈을 감았다. 팔걸이에 올린 손끝이 가볍게 까딱였다.
"실력 외에도 정치적, 외부적 요소가 개입하겠지."
두 쌍둥이의 지금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다만 전생에서 겪었던 두 쌍둥이의 실력을 생각해 보면 마냥 무시할 수준은 아닐 터였다.
'물론 지금의 나와 휴이에 비하면 모자라겠지만.'
문제는 전사의 시험이 단순 실력만으론 논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알게 모르게 그들을 돕는 이들이 있을 거다."
"그렇겠지. 일단 족장의 아들들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소원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품이 다른 부족의 손에 넘어가게 두진 않겠지. 그게 참가자든 심사관이든."
역대 최대를 경신한 참가자 수였다. 그들 중 두 사람을 돕고자 하는 참가자가 있을 게 분명했다.
직접적으로 돕진 않더라도, 다른 이들이 상품을 가질 바엔 그들이 갖는 게 낫다 생각하는 이는 더 많을 거고.
'유의해야 할 건 이미 전사의 시험을 겪어 본 이들.'
전사의 시험은 매년 있었고, 시험에 참가했던 이들이 다시 참가하는 것도 가능했다.
다만 모두가 가능한 건 아니었다.
'수료한 이들은 참가 불가능. 반대로 말하면 수료하지 못한 이들은 몇 번이고 참가할 수 있다.'
그 조건은 전사의 시험을 완전히 수료했는가.
세 번의 시험을 모두 통과한 참가자는 자신의 이름을 직접 호명할 기회를 가졌다. 호명을 마치면 수료를 인정받고 전사로서 대우받았다.
반대로 말하면, 전사의 시험을 끝까지 통과하지 못했던 이들은 몇 번이고 전사의 시험에 도전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특히 이번 시험엔 그런 이들이 부지기수로 참여했을 것이다.
'원래의 목적은 전사의 시험을 수료하는 거였지.'
루드가 전사의 시험에서 목적했던 것은 마지막 과정의 호명 기회였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를 통해 제노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힐 생각이었다.
하나 상황이 바뀌었다. 단순히 시험을 수료해 호명하는 것만이 아니라, '소원권'이란 말도 안 되는 상품을 얻을 기회까지 생겼다.
'얻을 수 있는 건 전부 얻는다.'
당장 소원권을 어떻게 쓰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갖고 있어 나쁠 건 없고, 언젠가 예기치 못한 패로 쓰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갖는다.
가로막으면 넘어서고, 방해하면 뚫고 지나간다.
'카이예스, 레이예스.'
배다른 형제들의 이름을 읊조려 봤다. 두 사람과 그 뒤에 있을 여러 조력자들을 상상했다.
그 끝에 나타난 건 한 여자의 모습.
붉은 머리칼에 고아한 인상의 여자는 쌍둥이의 어미이자 제노스의 아내, 소크란이었다.
까마귀 부족의 안주인인 그녀는 까마귀 부족 내에서 높은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것도 네 짓이냐. 소크란.'
전사의 시험에 걸린 '소원권'이란 상품.
이번 전사의 시험에 성인이 된 그녀의 아들들이 처음으로 참가한다는 걸 생각하면, 의심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본모습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오히려 잘됐다.
소크란은 당연히 제 아들 중 하나가 우승할 거라 생각했겠지만, 루드는 그 생각을 깨부술 예정이었다.
"휴이. 따라 나와라."
"엉? 왜?"
의자에서 일어난 루드는 휴이를 불렀다.
로하스가 제공해 준 이 집은 마당이 있는 데다 높은 담장이 마당을 둘러싼 형태였다.
안에서 몸을 풀어도 바깥에선 보이지 않는 구조.
"간만에 대련 한 판 어떠냐."
"오! 좋지!"
오랜만의 대련에 안성맞춤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62화
전사의 시험 시작일.
참가 신청서를 작성했던 광장에 도착하자 엄청난 인파가 보였다.
광장 외곽에는 먹거리를 파는 가판이 섰고, 안쪽으로는 준비를 마친 참가자들이 자리했다.
루드와 휴이는 내부의 인파에 섞여 들어갔다.
"사람이 엄청 많은데? 이거 시험을 제대로 치를 순 있는 거야?"
"매년 진행되는 행사다. 어수룩하게 진행하진 않을 거다."
"그래도 사람이 너무 많은데. 옆에서 말하는 것도 잘 안 들릴 정도라고."
광장 안쪽의 참가자들은 조용한 편이었다. 시험을 앞두고 긴장한 그들은 대화를 나눠도 자그마한 소리로 나누는 정도였다.
문제는 광장 바깥의 군중들. 전사의 시험이란 축제를 만끽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그들은 큰소리로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휴이는 그들이 시험에 영향을 미칠까 걱정했다.
하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광장 맨 앞, 지난날 신청서를 썼던 위치에 마련된 단상 위로 누군가 올라왔다.
단상 위에 선 그가 입을 열었다.
"정숙."
그와 동시에 이는 정적.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장통을 방불케 했던 광장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조용히 해 주어 고맙군. 즐기는 건 조금 이따 시작해주게. 이 자리는 단순히 즐기기만 위해 만들어진 자리는 아니니."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분명한 힘을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단숨에 소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는 광장에 모인 숱한 참가자들을 바라봤다. 전사의 시험에 참가해 타인과 경쟁하고 자신을 증명할 이들. 추후 부족의 미래가 되어야 할 전사들이었다.
그 맨 앞, 두 명의 청년이 보였다. 각기 검은 머리와 붉은 머리의 청년들은 비슷한 외모였으나 머리색 때문에 구별이 간단했다.
카이예스와 레이예스, 호사가들이 이르길 이번 시험의 잠재적인 우승자. 동시에, 그의 자식들이었다.
'어디 한번 잘해 봐라.'
두 사람의 실력은 참가자들 중 수위에 들었다. 각기 익스퍼트 중급. 힘을 합친다면 능히 익스퍼트 상급을 상대하고도 남을 정도의 정도다.
부족의 진짜 강자들은 이미 전사의 시험을 수료했단 걸 감안하면 참가자들 중 둘을 막을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소원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품을 걸 수 있는 것도 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했다.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맞지도 않았다.
'다른 이가 우승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 일이지.'
설령 소원권을 외부인에게 뺏긴다 해도 그를 통해 저 둘, 나아가 부족원들이 무언가 깨닫고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이득이었다.
'그게 쉽지는 않겠다만.'
다만 그 과정이 쉽지는 않을 터다.
호사가들의 말처럼 십중팔구의 확률로 우승하는 건 카이예스나 레이예스일 것이었다.
두 사람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소크란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두 사람의 우승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사의 시험은 총 세 단계로 나뉘며 각 단계의 시험을 통과한 이들만이 다음 단계의 시험에 도전하게 된다. 시험 중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으며, 본 부족은 그에 관해 일절 책임지지 않는다. 실력이 안 된다 싶으면 중간에 포기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제 실력을 과신하다 죽는 이보다, 제 실력을 정확히 알고 물러설 줄 아는 이가 훨씬 현명한 이다."
간략한 시험 안내와 당부의 말을 전한 제노스는 마지막으로 군중을 살펴보았다.
흥분한 이들, 긴장한 이들, 의연한 이들... 각양각색의 참가자들이 보였다.
'흐음.'
개중 한 참가자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이들과 미묘하게 다른 기색이 느껴지는 인물.
잠시 그를 바라보다 눈을 뗀 제노스는 준비한 마지막 말을 외쳤다.
"지금부터 전사의 시험을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전사의 시험이 막을 올렸다.
* * *
"...방금 널 본 거 아냐?"
"그럴지도."
긴장한 기색으로 묻는 휴이에 루드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루드도 제노스가 자신을 바라봤음을 느꼈다. 하지만 특별한 의미 부여는 하지 않으려 했다.
제노스는 소드마스터. 자신의 경지를 눈치 채고 흥미를 보인 걸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다 해도 눈을 마주친 게 자신만은 아닐 테고.
"여기 모인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시선을 돌리는 방향에 있는 모두가 그와 눈이 마주친 것과 마찬가지란 소리지."
"뭘 그렇게까지 말하냐."
휴이는 더 이상 제노스를 언급하지 않았다.
제노스가 루드의 아버지란 사실을 알았지만, 딱 거기까지의 일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속사정이나 상황에 대해선 몰랐으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때가 되면 언제고 루드가 말해 줄 일. 만약 말해 주지 않으면 알 필요 없는 일인 것 뿐이니 구태여 물을 이유도 없었다.
"그보다 시험이나 신경 써라."
로하스가 알려 준 대로라면 이번 시험에 참가한 이는 대략 삼백 명 정도. 역대급 참가자 수라고 했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이만한 숫자의 참가자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새삼 소원권이란 상품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걸 과감히 내건 까마귀 부족과 카이예스, 레이예스 형제에 대한 그들의 믿음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하게도 그 믿음은 부서질 테지만.'
카이예스 레이예스 형제는 참가자들 맨 앞쪽에 있었다.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는 사이, 심사관이 첫 번째 시험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시험은 색깔놀이다. 앞에 색깔 끈들이 보이나? 각 색깔별로 점수가 매겨져 있지. 이 끈들을 가져오는 게 첫 번째 시험이다. 몇 개를 가져오든, 어떤 색을 가져오든 상관없다. 가져온 끈들에 매겨진 점수를 전부 합산해 가장 높은 점수의 서른 명만 다음 단계의 시험에 도전할 수 있다."
심사관 옆에 세워진 큰 판에는 각 색깔들과 점수가 기입돼 있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이네."
"그래. 빨간색 10점으로 시작해 다음 색으로 갈 때마다 10점씩 늘어나는군."
간단한 규칙.
하지만 세세하게 따져 보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을 게 분명했다.
'높은 점수의 색깔일수록 수량이 한정적이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끈을 얻는 방식이 문제였다.
"이 같은 색깔 끈들을 곳곳에 배치해 놓았다. 사람에게 있을 수도 있고 지형지물에 있을 수도 있지. 어떤 방법으로든 그걸 가져와 제출해야 한다."
심사관은 씨익 웃었다. 지금부터 얘기할 게 하이라이트였다.
"그리고 모든 참가자들에겐 기본적으로 검은색 끈이 지급될 예정이다."
심사관 옆으로 검은색 끈들이 쌓였다. 조금 뒤 모든 참가자들에게 지급될 끈이었다.
"검은색 끈은 한 개를 갖고 있든, 백 개를 갖고 있든 0점이다."
무지개색의 끈에 반해 점수를 쌓을 수 없는 색.
그러나 그 진가는 점수를 쌓는 데 있는 게 아니다.
"단, 검은색 끈이 없는 이는 마이너스 100점이다."
색깔 끈 중 가장 높은 배점이 70점인 걸 감안하면, 색깔 끈을 얻는 것보다 검은색 끈을 지키는 게 중요할 수도 있었다.
"제출 일자는 이틀 뒤 정오까지. 제출 방법은 이곳 광장에 마련해 둘 심사관석에 직접 제출이다. 우리에게 제출하고 우리가 점수를 산출할 때까지 개인의 시험은 끝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하도록. 누가 훔쳐 갔다고, 뺏어 갔다고 징징대도 봐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은 색깔 끈은 이틀 뒤까지 이곳으로 가져와 제출한다. 심사관은 그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상황에도 개입하지 않는다.
"재밌네."
참가자들 간에 경쟁을 장려하겠단 소리였다. 검은색 끈부터 그랬지만 참가자들 간에 끈을 뺏는 걸 대놓고 유도하고 있었다.
첫 번째 시험의 규칙은 단순했고, 목표도 명확했다. 상위 30명에 들 점수를 쌓아 올려야 한다.
하나 그 과정에 이르는 방식은 하나가 아닐 터였다.
착실히 곳곳에 숨겨진 색깔 끈을 모을 수도 있었고, 다른 참가자의 검은색 끈을 뺏어 점수를 깎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는 다른 참가자가 힘들게 모은 끈을 한 번에 강탈할 수도 있었다.
'죽치는 녀석도 생길 수 있겠군.'
실력에 자신 있다면 광장에서 제출하러 오는 이를 기다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질문 있습니다."
"뭐냐."
"끈이 있는 곳의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부족 내부입니까? 아니면... 부족 바깥까지입니까?"
손을 든 누군가.
질문을 받은 심사관은 눈썹을 찡그렸다. 참가자 수가 역대급이라더니, 수준도 역대급인 게 분명했다.
"당연히... 그걸 알아내는 것도 실력이지 않겠냐. 이 반푼이 녀석아."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을 쳐낸 심사관은 눈을 부라렸다.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다들 검은색 끈을 받아 가라! 나중에 못 받았다고 징징댔다간 그 목을 졸라 주마."
앞다퉈 줄 선 참가자들은 누가 뭐랄 것 없이 전부 끈을 받자마자 광장을 떠났다. 부족 내부 혹은 외부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색깔 끈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쭉정이만 있는 건 아니군.'
검은색 끈을 받아 가는 참가자들을 살피던 심사관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 병신 같은 질문을 한 녀석 같은 새끼들만 가득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그런 걱정은 접어 두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카이예스 레이예스 쌍둥이랑 바르카 놈과 투란토 녀석의 자식까지 참가했군. 벌써 그만한 나이가 된 건가.'
까마귀 부족의 부흥을 이끌었던 세대가 중년이 된 지금은 그들의 자식들이 막 성년이 되는 시기였다.
그들 중 나이가 되는 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번 전사의 시험에 참가했다.
'...베오 부족의 기대주까지.'
부족에서 한 가닥 하는 이들의 자식 외에도 타 부족의 인물들도 있었다.
각 부족의 기대주거나 이미 이름을 날리는 이들까지.
그들의 목적이 '소원권'임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저 녀석들도 재밌어 보이는군.'
마지막으로 눈길을 끈 건 일행으로 보이는 둘이었는데, 어째선지 시선을 뗄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전부 나눠줬습니다."
"고생했네."
"별말씀을요. 부스도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고맙군. 덕분에 몸이 편해."
어느새 검은색 끈을 전부 배부한 광장은 텅텅 빈 상태였다. 조금 전까지 인파가 가득하던 곳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참가자들의 면면을 확인하기 위해 나왔던 사람들과, 그들을 노리고 섰던 가판도 하나둘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 가운데 심사관을 비롯해 시험 진행자들은 단상을 치우고 부스를 차렸다. 참가자들이 색깔 끈을 제출할 부스였다.
"어떤 놈들이 머리가 좀 돌아가려나."
부스에 자리 잡은 심사관은 턱을 괬다.
첫 번째 시험 종료까지 이틀. 그동안은 철야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63화
마지막 순번으로 검은색 끈을 받은 루드는 느긋하게 움직였다. 어찌나 여유로운지 휴이가 조급함을 느낄 정도였다.
"빨리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니야? 딴 놈들이 먼저 끈을 찾으면 귀찮아지잖아."
끈의 색깔마다 달린 배점은 제각각. 당연히 높은 배점이 달린 색깔을 먼저 찾는 게 유리했다.
다른 이들이 찾은 걸 강탈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건 품이 많이 들었다.
그러기 보다는 먼저 끈을 찾아 갖고 있는 게 나았다.
하지만 루드는 고개를 저었다. 발걸음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어차피 뺏고 뺏기는 싸움이 될 거다. 지금부터 힘 뺄 필요는 없어."
단순히 색깔 끈을 찾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다.
'색깔 끈과 상관없이 다른 참가자를 공격하는 놈들이 있을 거다.'
모든 참가자에게 나누어 준 검은색 끈. 몇 개를 지니고 있든 점수에 가산은 안 됐지만, 지니고 있지 않다면 무려 100점의 점수를 잃었다.
상대 평가로 치러지는 이번 시험의 특성 상 자신의 점수를 쌓는 것만큼이나 타인의 점수를 낮추는 것도 중요했다.
'하나 둘 검은색 끈을 잃는다면 연쇄 작용이 시작되겠지.'
검은색 끈을 잃는다 해도 바로 탈락하는 게 아니다.
제출하는 색깔 끈의 점수가 잃어버린 검은색 끈을 보완할 만큼 높다면 다음 시험 자격을 얻는 것도 가능했다.
무엇보다 끈을 제출할 때만 검은색 끈이 있다면, 중간에 검은색 끈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그러니까... 저런 놈들이 한가득일 거란 말이지?"
광장을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세 명의 사내가 길을 가로막았다.
단순히 골목이 좁아서 마주 선 것 같진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루드와 휴이의 허리춤에 걸린 검은색 끈에 고정돼 있었다.
"그래."
그들의 허리에도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검은색 끈이 매달려 있었다.
첫 시험의 몇 안 되는 절대 조건.
끈은 눈에 보이는 곳에 두어야 한다.
모든 참가자에게 해당했고, 참가자만이 아니라 색깔 끈을 갖고 있는 관계자들에게도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순순히 끈을 내놓는다면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다."
세 명의 사내가 눈을 번들거렸다. 기존에 친분이 있던 사이인지 공격을 준비하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일단 두 놈은 제쳐 놓는다.'
빠른 순번으로 끈을 배부받은 그들은 광장 인근에 잠복했다. 다른 참가자를 노리기 위해서였다.
무리 지어 이동하는 참가자들은 패스. 이름이 알려졌거나 한가락 해 보이는 이들도 당연히 패스였다.
'사람이 머리를 굴릴 줄 알아야지.'
이번 시험은 단순히 강한 자가 올라가는 시스템이 아니다.
타인보다 높은 점수를 얻어 상위 30위 안에 들어가야 하는 시스템.
거기서 중요한 건 무력이 아닌 지력이었다.
한 놈 한 놈. 확실하게 제칠 수 있는 녀석들을 제치고, 감당 불가능한 녀석들은 건드리지 않고, 야금야금 점수를 쌓아 30위의 말석에라도 이름을 올리면 되는 일.
그런 의미에서 앞의 두 놈은 최적의 사냥감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들. 마지막 차례로 끈을 받고도 느긋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아무 생각도 없는 게 분명했다.
십중팔구 하수일 테니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처리해라."
하지만 그들에겐 애석하게도, 루드와 휴이는 열 중 하나에 속했다.
"거참. 말 좀 예쁘게 하지."
투덜댄 휴이가 손목을 풀었다.
"순순히 끈을 내놓는다면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야."
주먹이 번쩍였다.
* * *
뭣 모르고 덤빈 셋을 처리한 둘은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는 거야?"
"색깔 끈을 찾으러 간다."
"오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정확하진 않지만 짐작 가는 건 있다."
루드는 광장으로 향하던 길을 떠올렸다.
거리와 건물 곳곳에서 느껴지던 기척들. 당시엔 인파가 몰릴 상황에 대비해 병력을 배치한 건가 싶었지만 시험 내용을 듣자마자 깨달았다.
그들이 색깔 끈을 갖고 있으리라.
아마 실력의 고하에 따라 갖고 있는 끈의 색깔이 다를 터였다.
"휴이. 난 전사의 시험에서 우승할 거다."
"당연한 거 아니야? 뭘 새삼스레."
"단순한 우승이 아니다. 압도적으로 다른 참가자들을 찍어 누르고 우승할 거다."
힘을 숨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힘이 부족하더라도 과장되어 보이게 해야 했다.
그래야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고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소크란의 이목까지 끄는 게 염려되긴 하지만, 어차피 내 신분이 밝혀지면 날 주시할 여자다.'
그렇다면 차라리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켜 자신을 드러내는 게 나았다.
감히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도록.
"뒤처지지 않게 잘 따라와라."
"승부욕 돋는 말인데. 아예 따로 움직일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나한테 지고 한 번만 물러 달라느니 하는 말은 없는 거다."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자극을 받은 걸까, 휴이도 의욕을 보였다.
각자 시험에 임하기로 한 두 사람은 곧장 갈라졌다.
'일단 탐색부터 해 볼까.'
휴이가 떠난 뒤.
루드는 걸음을 멈추고 얇고 넓게 마력을 방사했다.
거미줄처럼 퍼져 나가는 마력은 루드의 의식을 따라 점점 더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일단은 여기까지.'
반경 50미터의 거리.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행동이 전부 느껴졌다.
경지에 달한 마력 컨트롤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행위.
마력을 다루는 데 능하더라도 자칫하다간 뇌에 충격을 받고 쓰러질 정도였다.
이렇듯 영역을 펼쳐 그 안의 것을 감지하는 건 소드마스터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기예.
이미 그 경지를 밟아 봤던 루드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셋.'
영역 내에서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 주인들의 모습도 선명히 그려졌다.
그 숫자는 셋. 전부 주변을 살피며 경계하는 모양새였다.
'참가자는 아니다.'
그렇다는 건, 참가자가 아니지만 참가자처럼 움직여야 하는 이들이라는 뜻.
'시험의 관계자.'
색깔 끈을 갖고 있을 심사관일 확률이 높았다.
그들 간의 간격이 적당히 벌어져있다는 것도 심증을 더했다.
루드는 그들 중 가장 가까이 위치한 이를 찾아 움직였다.
그는 어느 건물 안쪽에 있었는데, 창을 통해 연신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빙고.'
밖을 내다보는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노란색의 색깔 끈.
예상대로 시험 관계자가 맞았다.
느껴지는 수준은 익스퍼트 초급. 참가자 대부분의 경지였다.
'이 정도가 노란색인가.'
루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빨간색은 지형지물에 걸려 있을 수도 있겠군.'
시험을 안내한 심사관은 지형지물에도 끈이 있음을 알려 줬다. 그곳에 걸려 있을 끈의 색은 가장 낮은 등급인 빨간색일 확률이 컸다.
'중요한 건 나머지 색.'
특히 마지막 색인 보라색이 궁금했다.
'일단은 노란색 하나.'
호기심을 잠시 접어 둔 루드는 눈앞의 목표를 노렸다.
자신의 위치가 특정됐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상대는 빈 건물에 숨어 있었다.
루드는 조용히 건물로 들어섰다. 상대가 다른 곳을 보는 사이를 틈탄 움직임.
"컥!"
상대의 뒤를 잡아 기절시킨 뒤 노란색 끈을 거뒀다. 허리춤에 노란색 끈이 추가됐다.
"머리를 잘 썼군."
끈을 보이게 두란 규칙.
참가자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끈의 합산 점수가 얼마인지 계산할 것이다. 동시에 눈에 보이는 다른 참가자들의 점수도 계산하겠지.
'제출기한이 다가올수록 참가자 간의 싸움이 많아질 거다.'
자신의 순위가 밀린다는 생각이 들면 어떻게든 상대의 끈을 훼손하거나 뺏으려 들 것이었다.
시험이 참가자 간의 경쟁을 종용했으니, 색깔 끈을 얻는 것만큼 지키는 것도 중요했다.
제출에 관한 작은 함정도 있었고.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누군가 자신의 끈을 뺏기 위해 덤벼든다면 환영할 일이다.
끈을 찾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됐으니.
상대가 누가 됐건 끈을 얻어 점수를 쌓는다. 그리고 1등으로 2차 시험에 올라간다.
그러기 위한 방법은 이미 생각해 뒀다.
가장 간단한 건 역시 다른 참가자가 모은 색깔 끈을 한 번에 강탈하는 것.
카이예스나 레이예스의 것을 뺏어도 재밌는 그림이 그려질 터였다.
하나 그 방법은 제외했다.
'소크란이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
시작부터 그 둘을 건드리는 건 소크란의 화를 부를 행위. 분노한 그녀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 지양하는 게 좋았다.
"정공법이 제일 좋겠지."
결국 루드의 선택은 정공법이었다.
압도적으로 전사의 시험을 우승하려는 건 부족의 인정을 받기 위함.
그러기 위해선 좋은 이미지를 쌓을 필요가 있었고, 그에 가장 걸맞은 방법이 정공법이었다.
타인의 것을 한 번에 강탈하는 건 간단하나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최대한 관계자들의 색깔 끈을 뺏고 덤벼 오는 녀석들의 끈만 탈취한다.'
자신이 가진 끈이 많아질수록 자신을 노리는 이들도 많아질 터.
그런 이들의 끈을 뺏는 건 이미지와 실리를 동시에 챙길 수 있는 방법이었다.
"보라색 끈을 가진 관계자를 찾아야겠어."
보라색 끈을 얻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단순히 가장 높은 배점이 측정된 걸 넘어, 가장 높은 등급에서 오는 메리트가 있을 터였다.
까마귀 부족은 강자에 환호했고, 그에 맞서는 도전자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았으니.
'지금의 난 도전자다.'
실질적인 무력은 어떨지 몰라도 사람들의 시선에선 그랬다.
까마귀 부족은 아무 정보도 없는 외지인에게 관심 갖지 않았다.
그러니 보여 줘야 했다. 자신이 강자란 것을, 또 우승에 도전할 만한 자란 사실을.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은 역시 첫 번째 시험에서부터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는 것.
그를 위해 루드는 바쁘게 움직였다.
끈의 색깔을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족족 얻어 냈다.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남색.
루드의 허리춤에 다양한 색깔의 끈들이 늘어났다.
오직 하나, 보라색의 끈만이 없었다.
당장 가진 끈들만으로도 상위권은 확실한 상황.
그러나 가장 높은 등급의 끈을 얻고, 모든 색의 끈을 모았다는 상징성을 위해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설마 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보라색 끈을 찾아냈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난이도가 너무 달라지잖아."
루드조차 실소하게 만드는 상황.
보라색 끈은 제노스의 칼자루에 걸려 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64화
제노스의 칼자루에 걸린 보라색 끈.
루드는 생각에 잠겼다. 도전해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안전성을 따지자면 도전하지 않는 게 맞았다. 괜히 보라색 끈을 얻겠다고 덤볐다가 여태까지 모은 모든 끈들을 잃을 수도 있었다.
'위험 부담이 크다. 하지만....'
전사의 시험에서 압도적으로 우승하겠다고 다짐한 상황.
첫 번째 시험에서 제노스의 보라색 끈을 가져가는 것만큼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루드는 주변 상황을 살폈다.
'보라색 끈이 제노스에게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건 나뿐만이 아니다.'
자신 외에도 몇몇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들 또한 제노스의 칼자루에 달린 보라색 끈을 보았을 터.
다만 그들이 그 끈을 얻으려 할 확률은 낮았다.
보라색 끈의 배점은 고작 70점. 모든 색깔 중 가장 높은 점수였지만 바로 아래 배점과 10점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굳이 보라색 끈을 노리기보단 그 시간에 다른 색깔의 끈들을 모으는 게 더 안전한 선택이었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건 카이예스와 레이예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할 이들이 있다면 카이예스 레이예스 쌍둥이 정도.
제노스의 아들인 두 사람만이 그나마 도전 의식을 보일 가능성이 있었다.
'휴이까지 셋이라 봐야 하나.'
추가로 휴이까지.
절대 강자와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녀석이 아니었으니. 만약 제노스에게 보라색 끈이 있다는 걸 안다면 탈락을 각오하고서라도 덤빌 게 뻔했다.
어느새 시간은 밤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첫 번째 시험의 기한은 이튿날 정오까지. 하루 하고도 반 정도가 남은 시간대였다.
"좋아."
결심을 마친 루드는 몸을 숨겼다. 이제부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 * *
제노스는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 자고 있었음에도 또렷한 눈빛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옆에 기대 둔 칼을 챙긴 제노스는 바깥으로 나왔다.
바깥은 한밤중이었다. 밝게 뜬 달만이 주변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끈을 가지러 왔느냐."
가장 높은 배점이 달린 보라색 끈.
다른 색깔 끈들과 달리 보라색 끈은 오직 하나였다.
제노스의 칼자루에 달린 끈.
그러니 보라색 끈은 이벤트성이었다. 시험을 준비한 이들 중 누구도 참가자가 보라색 끈을 가져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노스는 누군가 하나쯤은 보라색 끈을 얻기 위해 자신을 찾아올 거라 여겼다.
그 답이 지금 그의 앞에 있었다.
"역시 대단하세요."
"조심한다 했는데도 바로 들키다니. 할 말이 없네요."
달빛이 비추지 못한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인영은 둘이었다. 제노스가 예상했던 인물들이기도 했다.
"내 기감을 속이기엔 십 년은 이르다."
"십 년밖에 안 된다면 할 만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버지."
카이예스가 자세를 잡았다. 레이예스도 마찬가지였다.
자세를 잡은 두 사람의 몸통에는 여러 색깔 끈이 엮인 채로 묶여있었다.
"그새 많이도 모았구나."
두 형제는 보라색을 제외한 모든 색의 끈을 갖고 있었다. 얻는 게 까다로웠을 남색 끈도 용케 얻어 낸 모양이었다.
"모아 놓은 끈을 뺏지는 않으마. 다만, 끈이 훼손되는 건 알아서들 조심해야 할 거다."
훼손된 끈이 점수로 인정되지 않을 건 당연한 사실. 여태껏 모은 끈들을 뺏을 생각은 없지만 그걸 지키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각기 검과 창을 든 형제가 서로 간의 거리를 벌렸다.
"가자."
"예. 형님."
먼저 움직인 건 카이예스였다.
거칠게 달려든 그가 어지럽게 검을 펼쳐냈다.
눈을 현혹하는 움직임. 섣불리 검을 냈다간 일격을 허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도 능사는 아니었다.
타이밍을 흩트리던 검이 제노스의 하단을 노렸다.
그와 동시. 아래를 노리며 몸을 낮춘 카이예스의 머리 위로 창이 나타났다.
암기처럼 튀어나오는 공격은 쇄도하는 카이예스 뒤로 몸을 숨기고 있던 레이예스의 일격이었다.
'언제 이런 걸 준비했는지.'
합을 맞춘 두 사람의 움직임.
아마 자신들보다 강자를 상대하는 걸 상정하고 협공을 준비한 것 같았다.
좋은 선택이었다. 당장 자신이 아니더라도 두 사람보다 강한 자는 많았다. 이번 전사의 시험에서도 한두 명쯤은 그럴 터였고.
'하나 무르다.'
둘이라면 칼자루의 끈 정도는 얻을 수 있다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리고 실전에서 잘못된 판단은, 죽음을 불렀다.
"회풍."
어느새 칼집에서 빠져나온 제노스의 검이 원을 그렸다. 크게 돌며 빠져나가는 검의 모양새는 마치 바람 같았다.
"아까 전의 말은 정정하지. 십 년으론 모자를 것 같군."
어느새 목적했던 지점에서 멀리 벗어난 쌍둥이의 공격. 제노스는 그 사이 공간을 노렸다.
제노스의 검이 텅 빈 둘 사이를 찔렀다.
둘 중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건만 검의 위치를 확인한 두 사람의 눈에는 오히려 당혹감이 서렸다.
"피해라!"
카이예스의 외침.
말하지 않아도 레이예스도 알았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그러나 회풍으로 공격을 쳐낸 건 단순히 방어만을 위한 대처가 아니었다.
공격을 제쳐 낸 바람의 여파로 자세를 흐트러트리고, 자신의 공격에 대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회풍의 진가는 거기에 있었다.
두 사람의 후속 동작이 늦어지는 사이.
"회전결."
곧게 찔렀던 검이 백팔십도 회전했다. 동시에 검을 중심으로 강한 기류가 휘몰아쳤다.
일시적으로 진공으로 변했던 공간을 채우기 위해 움직이는 바람과 그 흐름에 따라 흘려보낸 마력.
두 사람 사이에 작은 태풍이 생겨났다.
쿠당탕!
검으로 만든 태풍에 부딪친 두 사람이 날아갔다.
"무기를 놓치지 않은 건 인정해 주지."
벽에 맞고 떨어진 둘은 무기를 지지해 일어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회전결에 담긴 마력에 내부가 진탕된 탓이었다. 중심을 잡는 것조차 힘들었다.
제노스의 무서움은 여기 있었다.
단순히 소드마스터인 것을 넘어, 상대를 파고들고 괴롭히는 공격을 구사하는 것.
'이 정도나 차이가 나는 건가...!!'
카이예스는 이를 악물었다.
일어날 수만 있다면 이가 부서져도 상관없었다. 일어나야 했다.
아버지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보아 온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상대가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덤볐다.
아버지와 자신 간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 알기 위해. 그 간격을 재기 위해.
그것이 응당 다음 대 부족을 이끌 자신이 해야 할 일일 테니!
하지만 이 정도까지 압도적일 줄이야.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자도 능히 상대했던 레이예스와의 합공이었건만 단번에 파훼되고 말았다.
아니, 이걸 파훼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무엇 하나 제대로 보이지 못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선 합공도, 준비한 계획도 무엇 하나 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휘두른 검 한 번에 모든 상황이 정리된 지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레이예스. 정신 차려라."
"쿨럭."
레이예스는 간신히 의식을 붙잡고 있었다.
창대를 세워 몸을 기대고 있지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첫 번째 시험에서 탈락하지 않으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하겠어."
제노스는 검을 거뒀다. 내부가 진탕된 두 사람은 곧 의식을 잃을 것이었다.
방금 전 회전결의 여파로 몸에 둘렀던 색깔 끈들이 전부 끊어졌으니, 정신을 차리고 나면 바쁘게 움직여야 하겠지.
두 사람을 놓고 돌아가려 할 때였다.
스걱-.
순간적으로 느껴진 살기.
제노스는 몸을 뒤틀며 의문의 습격을 피해 냈다.
다만 완벽하게 피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뺨을 만져 보니 피가 묻어나왔다.
'참가자인가?'
습격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손에 들린 단검에선 옅은 혈흔이 보였다. 자신의 뺨을 훑고 지나간 게 저것이리라.
'어느 틈에.'
제노스는 검에 손을 가져갔다.
아무리 두 아들과 승부를 보고 있었다지만 이 정도로 다가올 때까지 기척을 놓쳤다니.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암살자인가.'
살기를 흘리는 모습을 보면 참가자보단 암살자일 확률이 높았다.
행사를 틈타 다른 부족의 주요 인사를 암살하는 건 이전부터 있었던 일.
당장 배후로 예상되는 부족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건 암살자를 잡은 뒤에 알아봐도 될 일이었다.
다만 걸리는 건 암살자의 뒤에 있는 두 아들들이었다.
자신이 큰 기술을 사용한다면 휘말릴 수도 있었다.
암살자가 두 사람을 인질 삼아 싸운다면 상황은 더욱 까다로워질 테고.
그러나 실력에 자신 있다는 걸까.
암살자는 뒤의 둘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곧장 제노스를 노렸다.
츳-.
어둠 속으로 사라진 암살자의 신형.
제노스는 그 움직임을 눈으로 좇는 대신 영역을 펼쳤다.
넓게 펼칠 필요도 없다. 좁은 공간, 자신이 대처할 수 있는 만큼의 거리면 충분했다.
방금 전엔 방심해서 놓쳤다지만 적의 존재를 인지한 이상 결코 놓칠 수 없었다.
제노스의 영역은 호수와 같았다.
잔잔한 호수 위로 돌멩이가 떨어지면 파장이 이는 것처럼, 영역에 들어온 상대의 움직임을 따라 파장이 느껴졌다.
'거기냐.'
은신했던 상대가 공격을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수면에 인 파장을 느낀 제노스가 정확히 그 지점을 포착했다.
'빠르군.'
자신의 움직임이 읽힐 것을 예상했는지, 상대는 은밀함보다 신속함에 초점을 맞춰 움직였다.
"회류."
위로 세운 검을 비틀었다.
순식간에 회오리가 생겨나며 몸을 감쌌다.
공격을 허용하지 않는 강력한 바람의 기류.
츠츠르츠츠!!!
회류는 요란한 금속음과 함께 암살자의 단검을 튕겨 냈다.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암살자는 뒤로 물러섰다.
아니, 물러서는 듯했다.
콰앙-!!
회류의 빠른 기류 때문에 공격이 불가능하다면, 기류를 끊어 버리면 될 일.
암살자는 그리 말하는 듯 방대한 마력을 담은 공격으로 회류를 강하게 후려쳤다.
예상외의 일격에 뚫린 회류.
그러나 그건 일순간에 불과했다. 구멍 났던 공간을 곧장 다른 기류가 메워 내며 그 속도를 한 단계 올렸다.
'어리석은 짓.'
방금 전 일격으로 암살자의 손은 걸레가 됐을 게 분명했다.
슬슬 마무리를 준비할 때였다.
제노스는 몸을 휘감은 회류를 해제하는 순간에 맞춰 검을 뻗었다. 회전결의 힘이 담긴 검이었다.
"뭐...?"
하지만 상대가 있다 여겼던 위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히는, 아무도.
'검?'
검 하나가 땅에 꽂혀 있었다. 마력을 머금고 있어 암살자라 착각하게 만든 요소였다.
'설마!'
방금 전 회류를 타격한 건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함이었나!
그와 동시에 사선을 파고드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제노스는 곧장 회풍으로 상대를 쳐내려 했지만 무언가를 깨닫고 움직임을 멈췄다.
촤락.
시원한 소리와 함께 칼자루에 걸려 있던 보라색 끈이 풀렸다.
목적을 이룬 상대는 재빠르게 도주했다.
"허. 참...."
제노스는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전까지 진하게 피워 내던 살기는 씻은 듯이 없어진 상태였다. 그 또한 자신의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보기 좋게 당했군."
누군지는 모르지만, 정말이지. 말 그대로 손아귀에서 놀아난 꼴이었다.
'저자는 대체....'
그 모든 상황을, 카이예스는 끊어지려는 의식을 부여잡고 보고 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65화
현장에서 멀찍이 벗어난 루드는 복면을 내렸다.
제노스와 겨룬 시간은 짧았으나 복면 안쪽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카이예스와 레이예스를 미끼 삼고 인지를 방해할 온갖 수를 다 쓴 끝에 겨우 끈을 탈취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정면으로 붙었다면 쌍둥이와 같은 꼴을 면치 못했으리라.
'뺏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목적을 이뤘다는 것이었다.
루드는 제 손을 바라봤다.
오른손에는 방금 전까지 제노스의 칼자루에 매달려 있던 보라색 끈이 있었다.
"크으."
반면 왼손은 엉망진창이었다. 제노스의 시선을 유도하고 자신의 기척을 숨기기 위해 무리하게 회류를 타격한 까닭이었다.
덕분에 제노스의 시선을 따돌리고 끈을 얻을 수 있었지만....
'한동안 왼손은 못 쓰겠군.'
회류는 그 끝에만 닿아도 베일 만큼 날카로웠다. 일순간이나마 그것을 뚫어 냈던 주먹은 걸레짝이나 다름없었다.
피부는 당연했고 근육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다. 뼈가 드러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3차 시험까지만 회복하면 된다.'
하지만 괜찮았다. 2차 시험에서 불편함은 있겠지만 제노스에게서 끈을 뺏은 건 그 불편함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으니.
* * *
다음 날. 이틀 차에 접어든 첫 번째 시험은 더욱 격화됐다.
어제까진 곳곳에 존재하는 끈을 찾아 모으기 바빴다면 오늘은 서로가 갖고 있는 끈을 뺏기 위해 바빴다.
각자가 모은 끈이 밖으로 노출되어 있기에 서로의 끈을 노리는 행위는 계속해서 일어났다.
시험 종료까지 대략 하루.
자신의 점수가 부족하다 여긴 참가자들은 끊임없이 다른 참가자를 찾아다녔다.
제출자가 생긴 건 이 즈음이었다.
시험 기한이 끝날 때까지 끈을 갖고 있는 게 오히려 손해라 판단한 어느 참가자는 광장을 찾았다.
"제출하겠습니다."
"좋아. 여기에 이름을 적어라."
첫 번째 시험의 마감 기한은 시험 시작 일자를 기준으로 이틀 뒤 정오. 다만 그 전에 제출하면 안 된다는 말은 없었다.
첫 제출자를 기점으로 기한보다 앞서 제출하는 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끈을 지킬 자신이 없는 이들이었다.
각자가 나름의 계산 아래 가장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 분위기 속, 제출 마감 기한이 다가왔다.
"아직까지 제출하지 않은 건 몇이지?"
"스무 명입니다."
"꽤 되는군. 마지막에 또 재밌어지겠어."
대표 심사관이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제출하는 끈을 받기 위해 마련된 부스에는 그를 비롯해 다른 심사관들도 함께였다.
"슬슬 나타나야 할 것 같은데."
어느덧 시간은 정오까지 삼십 분만을 남겨 둔 상황. 남은 참가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낼 때였다.
"저기 하나 오는군."
"하나가 아니다. 다른 녀석들도 이제 움직이는군."
눈치를 살피던 어느 참가자가 스타트를 끊음과 동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참가자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이건 또 예상외군."
"그러게요. 카이예스와 레이예스가 이런 전략을 쓸 줄은 몰랐습니다."
"아직까지 제출하지 않았다는 게 의문이긴 했습니다. 진작 고득점을 확보해 제출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지금 나타난 건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안심할 만한 점수를 못 얻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
대표 심사관이 눈을 빛냈다.
광장 중앙에 선 카이예스와 레이예스가 지닌 끈들이 보였다.
'적군.'
평균 이상은 됐지만 둘의 실력을 고려하면 무척이나 적은 숫자.
'제노스 님을 찾아갔던 건가.'
염두에 뒀던 상황이었다.
기실 두 사람이 아직까지 제출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예상하던 바였다.
제노스에게 도전하고도 남았을 둘이었고, 자신에게 덤빈 이들을 마냥 편하게만 대하진 않았을 제노스였다.
광장 중앙에 자리 잡은 카이예스와 레이예스는 다른 참가자들의 움직임을 견제했다.
제출을 위해 다가오는 참가자들의 끈을 뺏겠단 심산이었다.
"이런 생각을 한 게 나 혼자일 거라 여기진 않았는데, 그게 두 사람인 건 예상 밖이군."
대머리의 사내가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베오 부족의 기대주로, 개인이 무력을 따졌을 땐 카이예스와 레이예스보다 한 수 위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치미콴."
"내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이야. 이거 영광인걸."
어깨를 으쓱한 치미콴은 제 몸만 한 할버드를 발 옆에 찍었다.
"어때. 같이 사냥하는 건? 둘보단 셋으로 이루어진 포위망이 피라미들을 더 잘 잡지 않겠어?"
"...."
"침묵은 긍정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선 세 사람의 모습에 아직 끈을 제출하지 못한 참가자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카이예스와 레이예스 둘만으로도 어려웠는데 치미콴까지 합류하다니.
자칫하면 힘들게 모은 끈들을 허무하게 뺏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도 껴 줘라."
"거기 내 자리도 있는 거지?"
점입가경으로 포위망은 세 사람에서 끝나지 않았다.
"테르한과 바세르인가. 너희라면 상관없겠지."
뒤늦게 등장한 두 사람은 치미콴과 달리 카이예스의 대답과 함께 대열에 합류했다.
까마귀 부족 중진들의 자식인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 교류한 적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실력도 성격도 모두 알고 있었으니 부담은 없었다.
"쳇. 죽기 살기라고."
"이기는 게 아니라 통과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쪽수는 우리가 더 많아. 한 번에 가자고."
광장 중앙을 차지한 다섯.
광장 테두리를 감싸듯 자리 잡은 나머지.
두 세력이 기묘한 대치를 이뤘다.
재밌는 것은 수가 더 적은 다섯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쪽이란 사실이었다.
"가자!"
이곳에 있는 모두가 나름 한가락 하는 이들.
지금까지 끈을 제출하지 않은 것도 어떻게든 끈을 지켜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방증이었다.
저 다섯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절대적인 머릿수를 간과할 수는 없는 터.
한 번에 몰아붙이면 역으로 저들의 끈을 뺏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리석군."
그들이 달려드는 순간, 작은 목소리가 그 모습을 품평했다.
절대적인 숫자를 무시할 수 없는 건 맞지만, 그것만 믿고 움직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오셨습니까."
제노스의 방문을 확인한 대표 심사관이 곧장 자리를 양보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은 제노스는 무기질적인 눈빛으로 광장을 살폈다.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다시 뵙는 건 세 번째 시험이나 돼서일 거라 생각했는데....."
"나도다."
"예?"
"나도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전사의 시험 개막과 폐막 정도에만 모습을 드러내려 했던 제노스였다.
부족의 큰 행사이긴 했지만 매년 있는 행사였고, 이것 말고도 해야 할 업무가 많았다.
카이예스와 레이예스가 참여한 이상 모습을 많이 드러내는 것도 좋지 않은 모양새란 생각도 있었고.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이번 전사의 시험에 흥미가 생긴 것이다. 정확히는 시험에 참가한 누군가에게.
'녀석은 아직인가.'
감히 자신을 속이고 보라색 끈을 훔쳐 간 당돌한 녀석. 아직 끈을 제출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제출했다면 이미 소란이 나고도 남았을 터였다. 이곳의 심사관들은 보라색 끈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고 있었으니.
'그 얼굴을 한 번 봐야겠어.'
적어도 부족의 인물은 아니었다.
부족의 녀석들 중 자신의 기감을 속이고 그 정도 움직임을 보여 줄 수 있는 녀석은 없었으니.
"끝났군."
생각에 잠긴 사이, 광장은 얼추 정리가 되는 추세였다. 승자는 역시나 중앙에 위치한 다섯 명이었다.
각자의 실력에, 또 서로의 실력에 믿음이 있는 그들은 다른 참가자들을 압도했다.
"제출자 이름은?"
"하악, 하악... 케, 케니스입니다. 하아...."
다섯을 통과해 유일하게 제출에 성공한 이는 우습게도 맨 처음 다른 이들을 선동하던 이였다.
가장 앞장서서 달려드는 척하던 그는 노선을 우회해 다섯에게서 가장 먼 쪽을 노려 제출석에 도착했다.
"케니스. 확인했네."
끈을 뺏긴 참가자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케니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등신들. 누가 믿으래?'
애초에 저 다섯을 상대로 정면에서 붙는 것 자체가 바보짓이었다.
자신들이 무더기로 있어도 저 녀석들을 상대로 이기는 건 어려운 일. 혼자라도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그 계획대로 자신은 살아남는 데 성공하지 않았나.
"흠."
시험이 마무리되어 가는 상황. 제노스는 명부를 훑었다.
'참가자가 아니었나. 상황이 몰리자 참가자인 척 도망간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상대의 노림수가 끈을 얻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등장부터 살기를 잔뜩 피워 낸 것도, 자신의 시야를 현혹한 것도, 사각을 노리고 들어오던 움직임도.
'확실한 건 곧 알 수 있겠지.'
어느덧 시험 종료까지는 고작 10분을 남겨 놓은 상황. 광장 중앙의 다섯도 슬슬 제출석으로 다가오려던 때였다.
"왔군."
"예?"
제노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광장 끄트머리에 나타난 누군가가 보였다.
습격 당시엔 복면을 써서 얼굴로 확인할 순 없었지만 체형과 기척이 똑같았다.
녀석이었다.
'팔의 상태는 많이 안 좋은 건가.'
회류를 강타했던 왼손엔 붕대를 감아 둔 상태였다.
그나마 팔이 찢겨 나가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 녀석이었다. 회류는 방어기인 동시에 상대의 공격을 그 이상의 피해로 돌려주는 일절의 기술이었으니.
"이거 한 놈이 남았었군."
"근데 끈이... 검은색 끈밖에 없는 거야?"
"멍청한 새꺄. 자세히 봐. 검은색 끈들에 가려서 그렇지 안쪽에 색깔 끈들이 있잖냐."
테르한의 뒤통수를 친 바세르가 손을 매만졌다. 무식하게 맷집만 좋아서 때린 자신의 손이 더 아팠다.
"이거 대어가 남아 있었군."
치미콴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바세르의 말대로 검은색 끈들 아래로 가려진 색깔 끈들이 보였다. 대충 봐도 엄청난 수였다.
빨주노초파남... 보까지.
그것을 확인한 대표 심사관의 눈이 커졌다.
그는 제노스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제노스의 허리춤에 걸린 검. 보라색 끈이 있어야 할 칼자루였다.
'없다!'
이제야 제노스가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제게서 보라색 끈을 가져간 이를 확인하고자 온 것이 분명했다.
보라색 끈에 놀란 건 치미콴 또한 마찬가지였다.
'보라색? 있긴 있었던 건가.'
이곳저곳 돌아다녔지만 결국 보라색은 발견하지 못했다.
말만 했지 실제론 없었던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찌됐든 상관없었다. 저 보라색 끈은 결국 자신의 손에 들어올 테니.
"...레이예스."
"예. 형님."
세 사람이 마지막 사냥감을 상대하기 위해 자세를 잡았을 때.
카이예스는 곧장 몸을 돌렸다. 레이예스도 그 뒤를 따랐다.
"빠지는 거냐?"
"점수는 이미 충분하단 거겠지."
"오히려 좋잖아? 저 노다지를 우리끼리 먹을 수 있으니."
세 사람이 떠드는 걸 무시한 채 제출석에 도착한 카이예스는 제출을 완료했다.
그 후 그들에게 말했다.
"같이 싸운 정이 있으니 말해 주지."
카이예스가 광장 중앙에 자리 잡았던 건 어중간한 녀석들의 끈을 뺏기 위함이었다.
머리도 실력도 어중간한 녀석들.
끈을 뺏기지 않을 힘도, 빠르게 결단을 내릴 각오도 없는 놈들.
그가 펼쳤던 건 그런 녀석들을 잡기 위한 그물이었다.
한마디로, 피라미를 잡기 위한 그물.
"그 그물. 찢어질 거다. 분명."
결코 상어를 잡기 위한 그물이 아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66화
모두의 시선이 한 데 모였다. 루드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광장을 가로질렀다.
'그물이 찢어질 거라고?'
그 경로에 선 세 사람은 카이예스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들이 다가오는 녀석의 상대가 안 될 거라 확신하는 말.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카이예스만큼은 아닐지라도 우승 후보로 꼽히는 자신들이다. 이름도 모르는 녀석에게 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겨우 저깟..."
하지만 루드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세 사람은 카이예스의 말을 피부로 느꼈다.
'이게 대체.'
어느새 손에서 흐르는 땀.
입은 바짝 말라서 침을 삼키기도 어려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참가자들을 쓸어버리던 그들은 뱀 앞의 개구리가 된 마냥 바짝 얼어붙었다.
루드는 경직된 세 사람을 무심히 지나쳤다.
뒷모습이 무방비하게 노출됐지만 세 사람은 감히 공격할 마음을 품지 못했다.
'아예 머저리들은 아니군.'
그들의 모습의 루드는 짧은 소감을 품었다.
나름 이번 시험의 기대주들이라 하더니, 옅게 풀어 낸 기세를 읽을 정도는 되는 모양이었다.
"이름은?"
"루드."
제출석에 도착한 루드는 허리춤에 묶어 놓은 끈들을 풀어냈다. 검은색 끈들에 가려져 있던 색깔 끈들이 테이블 위로 놓였다.
"확인했네. ...고생했군."
대표심사관은 이례적으로 인사치레의 말을 건넸다. 여태 어떤 참가자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태도였다.
하나 누구도 그 차이를 꼬집지 않았다. 눈앞의 참가자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음을 증명한 까닭이었다.
'검은색 끈이 대체 몇 개야. 앞선 녀석들 중에 검은색 끈이 없는 녀석들이 많더니… 전부 여기 있었군.'
중요한 건 검은색 끈의 숫자가 아니었다.
이번 전사의 시험은 역대 최대의 참가자가 몰려든 만큼 참가자 간의 실력 차도 역대 최대였으니 어중이떠중이의 끈을 뺏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색깔 끈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다.
빨간색부터 보라색까지 무지개 색으로 이어지는 끈들은 나름의 급이 정해져있었다.
찾기만 하면 아무 힘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부터, 참가자 중 누구도 가져올 거라 생각하지 않은 것까지.
그리고 지금, 테이블 위엔 어떤 참가자도 가져오지 못할 거라 생각한 보라색 끈이 있었다.
대표 심사관은 흘깃 제노스를 바라봤다.
아마 제노스 또한 자신이 끈을 뺏길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한 건가.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테니. 소드마스터의 손에 있는 걸 가져오는 녀석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냐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
"재밌군."
"...그러게 말입니다."
제노스가 예정하지 않았던 이 자리에 나타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의 예상을 깨고, 감히 자신에게서 보라색 끈을 훔쳐간 당돌한 녀석을 보기 위해!
'색깔 끈들이 보이지 않았던 건 검은색 끈들로 가려 놓았기 때문이었나.'
테이블 위에 놓인 수많은 끈들. 그 중 제노스의 눈길을 잡아 끈 건 검은색 끈들이었다.
밤중 이뤄진 격돌에서 처음 상대를 암살자라 생각한 이유.
전사의 시험 참가자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지독했던 살기와, 마찬가지로 시험 참가자라기엔 보이지 않았던 색깔 끈.
이 두 가지 때문이 아니었던가.
'흥미롭군.'
상대의 대처를 떠올리면 모든 상황을 유도한 게 분명했다.
자신을 암살자로 여기게끔 하여 보라색 끈을 노리는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색깔 끈을 가리기 위해 검은색 끈들을 사용한 것일 터였다.
'재밌단 말이지.'
제노스의 눈이 대기석으로 향하는 루드의 뒤를 좇았다.
완벽하게 제 시선을 흐려 놓았던 계책.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계책이 아니었다.
아무리 계책을 잘 짜 놨더라도, 결국 이 계책을 실현하기 위해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필요했다.
소드마스터와 생사결을 펼친대도 버틸 수 있을 거란 믿음이!
"관심이 가시나 봅니다."
"그래. 흥미가 돋는군."
대표 심사관은 깜짝 놀랐다. 제노스가 이번 전사의 시험에 흥미를 보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이전의 시험들에서도 크게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데다, 이번 시험은 제 자식들이 참가하는 터라 더 거리를 두었던 제노스였다.
그런 제노스가 본인의 입으로 흥미가 있다는 말을 하다니.
'끝까지 주목해야겠어.'
2차, 나아가 3차 시험에서도 지금 같은 활약을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1차 시험의 결과만으로도 주목할 이유는 충분했다.
무려 제노스에게서 끈을 훔치고 그의 흥미를 산 참가자였다.
"치미콴."
"테르한과 바세르입니다."
대표심사관이 생각에 빠진 사이,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 사람도 서둘러 시험을 마무리했다.
아슬아슬하게 기한에 맞춘 제출.
그들의 제출이 끝남과 동시에 시험 종료가 선언됐다.
"곧 첫 번째 시험의 결과를 공표하겠다. 점수 합계 상위 삼십 명의 인원이 두 번째 시험에 참가할 자격을 얻게 된다."
참가자들은 조용히 발표를 기다렸다. 모두가 곧 호명될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길 바랐다.
"대체 뭔 짓을 했길래 사람들 반응이 저래?"
그러나 모두가 조용한 건 아니었다. 발표를 앞두고 긴장감이 내려앉은 대기석. 루드에게 다가온 휴이는 궁금증을 표했다.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심사관들이 그렇게 쑥덕였는지, 제노스의 등장에 왜들 그렇게 놀랐는지. 궁금한 게 한가득이었다.
"이따 말해 주마. 그러는 너는, 합격할 수 있는 거겠지?"
각자 시험을 치르기로 했으니 각자의 결과는 스스로가 책임져야 했지만, 이왕이면 마지막까지 함께 마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누구야. 휴이 님 아니시냐."
"그래. 알아서 잘 했으리라고 믿는다."
믿음이 가는 대답은 아니었으나 그와 별개로 휴이란 인물은 믿을만한 했다.
역경과 고난이 닥쳐와도 결국 극복해낼 인물. 그렇기에 전생에도, 지금에도 이렇듯 함께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시험 결과를 발표하겠다."
"시작한다. 과연 몇 등이려나."
모두의 이목이 대표심사관에게 집중됐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의 순서가 곧 이번 시험의 순위였다. 앞에서부터 서른 명. 그 안에 들어가야만 두 번째 시험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졌다.
"루드. 휴이. 카이예스. 레이예스. 치미콴......"
그렇게 시작된 호명.
루드는 놀란 눈으로 휴이를 바라봤다.
"내가 뭐라고 했어. 믿으라고 했잖아."
의기양양한 휴이는 가슴을 쭉 펴며 씨익 웃음을 보였다.
"인정하지. 내 예상을 뛰어넘은 성적이야."
카이예스와 레이예스가 제노스와의 전투로 그간 얻었던 끈들을 전부 잃었다지만, 설마 휴이가 2등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탈락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2등일 줄이야.'
자신을 제외하곤 참가자들 중 가장 강할 휴이였다.
하지만 전사의 시험은 단순히 무력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그 때문에 조금 염려했었는데, 이제 보니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이상 서른 명은 두 번째 시험을 참가할 자격이 주어진다. 혹 참가 자격을 포기할 이가 있는가?"
어느새 마무리된 호명. 당연하게도 합격자 중 두 번째 시험을 포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심사관이 큰 목소리로 공표했다.
"두 번째 시험은 내일 정오 이곳에서 발표하겠다. 오늘은 이만 해산하도록."
전사의 시험, 그 첫 번째 시험이 끝났다.
* * *
촛불 하나가 어두운 공간을 밝혔다. 바람을 따라 일렁거린 빛이 누군가의 얼굴을 비췄다.
갖은 장신구를 차고, 붉은 머리와 화려한 외모를 가진 여자.
그녀는 제노스의 아내이자 까마귀 부족의 안주인인 소크란이었다.
"대단한 실력이었습니다."
"확실히 들은 대로라면 간과할 수 없는 실력이네요."
제약이 있었다지만 제노스와 대등하게 겨뤘다라... 상정하지 못한 변수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제 알게 됐으니 대처할 수 있게 만들면 그만.
이야기를 다 들은 소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만 돌아가서 피로들 푸세요."
"예. 어머니."
대화를 나누던 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소크란은 고개를 숙이고 떠나려던 이를 붙잡았다.
"이 어미는 항상 그대의 편인 걸 잊지 마세요."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요."
옅은 미소와 함께 대꾸한 그는 소크란의 침소를 떠났다.
침소에 홀로 남은 소크란은 생각에 잠겼다.
제노스가 보라색 끈을 뺏겼다는 건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다만 그 과정이 이랬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의 남편인 걸 떠나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제노스였다.
그의 대단함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차일피일 계획을 미루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그이와 대등하게 싸웠다라.'
어쩌면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부르셨습니까."
아들이 떠난 소크란의 침소에 누군가 찾아왔다. 소크란은 여유롭게 자리를 권했다.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어요."
"부탁이라뇨. 어언 말씀이십니까. 소크란 님의 청이라면 무엇이든 해야지요."
"그게 전사의 시험에 관련됐다 하더라도요?"
"...."
맞은편에 앉은 사내는 한참을 망설였다.
소크란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차를 마실 따름이었다.
"...그것이 부족을 위하는 길이라면."
"잘됐군요."
마침내 나온 사내의 대답에 소크란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내일 시험에 있을 조 편성에 약간의 의견이 있어요."
"하명하십시오."
사내는 한껏 자세를 낮췄다.
조를 나눠 진행될 두 번째 시험.
소크란이 원하는 바는 간단했다.
무작위로 추첨될 조 편성에, 약간의 관여를 하고 싶다는 것.
"그렇다 함은."
"아무래도 자식들이 마음에 걸려서요. 어미 된 도리로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여이 봐서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상품으로 걸린 소원권, 다른 이에게 가게 둘 순 없잖아요?"
"...알겠습니다."
확실히, 상품으로 걸린 소원권이 다른 부족의 참가자에게 넘어가게 둘 순 없었다.
낮에 끝난 첫 번째 시험에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녀석들이 선두를 차지하지 않았던가.
'조 편성을 조작하는 건 본디 해선 안 될 짓이나... 그것이 부족을 위한 일이라면.'
제 한 몸에만 오물을 묻힘으로써 대의에 보탬이 된다면, 그것으로 된 일이었다.
"고마워요. 그대만 믿겠습니다."
"아닙니다. 보는 눈이 있어 좋을 건 없으니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멀리 나가지 않을게요."
용건을 모두 마친 소크란은 몸을 일으켰다. 피부를 위해선 슬슬 자야 할 시간이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심기 한구석이 어지러웠다.
'왜죠?'
변수가 될 만한 인물을 파악했고, 그에 대한 조치도 취해 놨다.
오히려 지금 타이밍에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계속해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한번, 직접 볼 필요가 있겠군요.'
결국 그녀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변수를 확인해 보기로 결심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67화
두 번째 시험이 예고된 날.
광장은 첫 번째 시험 때와 마찬가지로 북적였다.
무리 지은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전사의 시험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누가 우승할까."
"역시 카이예스 님 아니겠어?"
"레이예스 님도 카이예스 님에 가려서 그렇지 우승 후보시라고."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지는 전사의 시험.
이전엔 볼 수 없던 어마어마한 상품도 걸려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는 건 당연했다.
"근데 1차 시험의 1등은 다른 사람이라던데...."
"들었어. 2등도 마찬가지라 하더라고."
"괜찮은 걸까? 괜히 엄한 놈이 우승이라도 한다면."
"걱정하지들 마. 결국 중요한 건 세 번째 시험이니까. 지금 잘해봤자 마지막 시험에서 못하면 끝이야. 카이예스님은 힘을 아꼈다 마지막에 터뜨리시려는 걸 거고. 현명하신 거지."
"그렇지?"
그 화제의 중심에 선 건 루드였다.
우승 후보로 꼽히던 카이예스와 레이예스를 누르고 1차 시험의 일등을 거머쥔 인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결과에 사람들은 놀람과 걱정을 동시에 품었다.
'저 녀석....'
'1등과 2등이 같은 일행이라니.'
그건 바깥의 군중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1차 시험을 통과한 서른 명의 참가자. 그들 모두 루드와 휴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던 이들이 우승 후보들을 누르고 1차 시험의 1, 2등을 차지한 순간부터 예고된 모습이었다.
"하암~ 언제 시작하는 거야."
물론, 그 대상인 루드와 휴이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이제 시작하려는 것 같다. 하나둘 등장하는군."
루드는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들을 느꼈다.
'귀빈들인가.'
단상에 마련된 의자는 그들을 위한 자리일 터였다.
예상대로 까마귀 부족의 주요 인사들이 나타났다. 제노스를 필두로 등장한 그들은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놀란 건 그들 중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있다는 점.
루드는 제노스의 옆에 앉은 소크란을 바라봤다.
언젠가 조우할 거라 생각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귀빈들이 착석을 마치자 대표 심사관이 두 번째 시험의 시작을 알렸다.
"전사의 시험. 그 두 번째 시험을 시작하겠다."
대대로 전사의 시험은 세 가지로 구성됐다.
그중 두 번째 시험은 항상 팀을 이뤄 진행하는 시험이었고, 이번 전사의 시험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표 심사관의 옆으로 추첨기가 마련됐다.
"이 안에는 각 참가자들의 이름이 적힌 작은 공들이 들어있다. 추첨기를 돌려 뽑은 공의 순서대로 3인 1조가 되어 시험을 치르게 된다."
개인의 역량만큼이나 중요한 조 편성.
참가자들은 침을 삼켰다. 조가 어떻게 짜여지냐에 따라 합격과 탈락의 결과가 바뀔 수도 있었다.
'제발 괜찮은 녀석이랑!'
뭇 참가자들은 그리 소원했다.
'괜찮은'의 범주는 저마다 달랐지만 이번 시험을 합격하는 데 도움이 될 이와 조를 이루길 바라는 점은 똑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대다수의 참가자는 루드와 같은 조가 되지 않길 소망했다.
'강한 건 알겠지만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루드의 실력은 이미 입증됐다. 시험 막바지 광장을 가로지르던 모습은 아직까지도 뇌리에 선명했다.
무엇보다, 보라색 끈을 얻은 인물이 아닌가!
'미친놈이 분명해.'
시험이 끝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보라색 끈은 무려 제노스에게 있었다.
녀석은 소드마스터에게서 끈을 탈취해 온 것이다. 그 방법은 모르겠으나, 그런 위험한 선택을 하는 녀석과 같은 조가 되고 싶진 않았다.
녀석의 실력은 분명 든든하나, 든든함 이상의 불안감이 있었다.
그보단 차라리 서로 보완할 수 있는 이와 조를 이루는 게 나았다.
"시험 내용을 설명하겠다. 이해가 어려울 수 있으니 잘 듣도록."
모두가 조 편성을 걱정하는 사이, 조 편성에 앞서 두 번째 시험의 내용이 밝혀졌다.
"전사의 시험 두 번째는, 퓨렐 협곡 레이스다."
부족에서 하루 정도 이동하면 나오는 퓨렐 협곡.
두 번째 시험의 장은 바로 그곳이었다.
"시험 합격 기준은 점수다. 각 조가 얻은 점수로 순위를 매겨 상위 다섯 팀만이 마지막 시험에 도전할 자격을 갖춘다."
시험의 결과를 나눌 점수를 얻는 법은 다양했다.
"먼저 협곡 내에 마련된 포인트를 다녀오는 걸 기본으로 한다. 포인트는 여러 개 존재하며, 각 포인트마다 주어진 점수가 다르다. 포인트를 통한 점수 획득은 1회에 한한다."
우선 협곡 내에 미리 마련해 둔 포인트를 다녀오는 것. 그곳에 있는 증표를 가져오는 걸로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다음은 몬스터 처치. 협곡 내에 있는 몬스터를 처치해 왼쪽 귀를 가져오면 점수가 지급될 거다. 각 몬스터에 대한 점수는 이따 나눠줄 표를 참고해라."
또 퓨렐 협곡 내부에 존재하는 몬스터를 처치함으로써도 점수를 얻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론 시간이다. 시험 기간은 총 열흘. 단, 7일차가 넘어가는 시점부터 복귀하는 날짜를 토대로 점수를 차감할 거다."
마지막으론 시간이었다.
앞선 두 가지가 점수를 얻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시간은 점수를 잃지 않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시험은 열흘간 진행하지만, 7일차가 넘는 순간부터 일정 점수가 차감됐다.
'첫 번째 시험도 그렇지만 변수를 만드는 걸 좋아하는군. 각 조마다 선택이 필요하겠어. 7일을 넘기면서 몬스터를 사냥할 건지, 7일에 맞춰 복귀할 건지.'
루드는 시험을 고안한 게 누구일지 궁금했다. 매 시험마다 변수를 창출할 요소가 들어 있었다.
단순히 무력의 강약만이 아니라 기지와 전략적 측면까지 엿볼 수 있는 구성이었다.
"그럼 가장 중요한 조 편성을 실시하지."
설명이 끝남과 동시, 추첨기가 돌아갔다.
드르륵- 데굴.
"첫 번째 조, 첫 번째 사람은 테르한."
우어!
양팔을 든 테르한이 소리를 지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첫 번째 조, 두 번째는... 바세르."
"...하. 이 똥멍청이랑 함께라니."
곧이어 호명된 바세르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녀의 속내는 보이는 모습과는 달랐다.
'최상의 패야. 테르한 정도면 무력으로 꿀리지도 않고, 말도 잘 들으니까.'
여기에 카이예스나 레이예스 같은 녀석 하나만 들어온다면, 두 번째 시험에서 일등을 노려 볼 수도 있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세 번째는, 케니스."
마지막으로 합류한 것은 케니스였다.
첫 번째 시험 마지막 날 광장에서 대치했던 이들 중 하나로, 그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바세르는 인상을 구겼다.
'쥐새끼랑 같은 조라니. 운도 없지.'
그래도 최악은 아니었다.
오히려 테르한과 같은 조가 됐으니 운이 따르는 편이라 봐야 했다.
'좋게 생각하자. 저 녀석들이랑 같은 조가 되지 않은 게 어디야.'
그녀의 시선 끝엔 루드와 휴이가 있었다.
둘 모두 실력은 확실했으나 같은 조가 됐을 때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멍청이와 쥐새끼가 나았다.
"두 번째 조. 첫 번째는...."
이후로도 조 편성은 계속됐다.
호명된 이들은 하나씩 앞으로 나가 같은 조에 소속된 이들끼리 모였다.
그렇게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마침내, 아홉 번째 조가 편성됐다.
"휴이. 가르소. 치미콴."
광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추첨을 한 대표 심사관도, 이미 조가 완성돼 모여 있는 참가자들도, 추첨을 보기 위해 자리한 귀빈들과 광장 바깥의 군중들도.
그리고 아직 조를 이루지 못한 남아 있는 참가자들도.
"...미친."
첫 번째 조에 필적, 혹은 그 이상의 전력으로 보이는 아홉 번째 조가 완성됐다.
그러나 모두를 침묵시킨 건 그들이 아니었다.
"이거 실화냐."
바세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다.
"...우리가 한 조인 것 같군. 남은 건 우리뿐이니."
무거운 분위기 속 카이예스가 조심히 입을 뗐다.
레이예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열 개의 조 중 아홉 개의 조가 편성을 마쳤으니, 남은 셋이 마지막 조일 터.
"그런 것 같군."
두 형제의 말에, 루드도 동의했다.
* * *
조를 이룬 참가자들은 곧장 퓨렐 협곡으로 향했다.
지금부터 열흘간 치러질 시험에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전사의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도록."
대표 심사관은 아래의 심사관들에게 주의를 줬다.
시험 기간은 총 열흘이었지만 참가자들의 복귀가 언제 이뤄질지는 알 수 없었다.
복귀와 동시에 두 번째 시험은 끝. 그때부턴 획득한 점수를 계산하고 참가자를 보호해야 했다.
'두 번째 시험은 간간이 사망자가 나오곤 했지.'
몬스터나 외부 환경에 의한 것이든, 다른 참가자에 의한 것이든, 두 번째 시험은 세 번의 시험 중 가장 높은 빈도로 사망자가 나왔다.
'시험 도중엔 참가자 간의 경쟁이니 개입할 수 없지만, 시험이 끝난 뒤엔 보호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참가하는 전사의 시험이다. 하지만 그것이 죽어도 될 이유가 되진 못한다.
참가자 하나하나가 모두 미래에 부족을 이끌어 갈 인재였으니, 그들을 잃는 건 최대한 피해야 할 일이었다.
"돌아가십니까?"
"그래. 고생해라."
시험이 시작되자 귀빈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제노스도 마찬가지였다. 대표 심사관의 어깨를 툭 쳐 준 제노스는 자리를 떠났다.
그가 자리를 떠나자 소크란도 일어섰다.
"항상 노고가 많습니다."
"아닙니다. 들어가십시오."
여유로운 미소를 보인 소크란은 몸을 돌렸다. 제노스의 뒤를 따라가는 그녀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 아이....'
지난밤부터 계속 마음에 걸렸던 변수.
소크란은 루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처음 봤건만, 제 아들들과 같은 조가 되어 시험을 치를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확실해. 그 여자의 핏줄이야.'
밤이 사나웠던 이유가 있었다. 지난날에 미처 제거하지 못한 화근이 모르는 새 자신의 앞에 와 있었다.
'제노스는 알고 있을까?'
그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혹시 놀란 티가 났을까 주위를 살폈을 정도였다.
중요한 건 제노스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가.
'모르고 있는 건가?'
제노스의 반응을 봤을 땐 모르는 것 같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노스는 옛 연인이 왜 자신을 떠났는지, 떠날 당시의 몸 상태가 어땠는지 알지 못했으니.
자신이 그의 정체를 깨달은 것도 우연에 가까웠다.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 때문에 계속 주시하지 않았다면 자신 또한 몰랐을 것이다.
무려 십수 년 전의 일이다. 평생을 보고 살았더라도 얼굴이 잊혀질만한 세월이었으니 제노스의 기억 속에 그녀가 남아 있긴 한지도 몰랐다.
'확신하지는 말자. 혹시 모를 일이야.'
그렇다고 마냥 안심하지는 않았다.
한순간의 안일한 생각 때문에 지금까지 해 온 것을 망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자신이 직감적으로 그의 정체를 깨달은 것처럼, 제노스 또한 그러지 말란 법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직접 확인하러 온 보람이 있어.'
단순히 전사의 시험에 등장한 변수라 생각할 뻔했다.
하지만 녀석은 단순히 전사의 시험에 국한되는 변수가 아니었다.
전사의 시험을 넘어 까마귀 부족 전체, 어쩌면 자신의 계획 전체를 흔들 수도 있는 변수.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렸다.
전사의 시험 참가자라는 루드의 현재 신분, 사망자가 나오곤 하는 두 번째 전사의 시험.
그리고 그 장소인 퓨렐 협곡.
'...계획을 변경하는 것도 괜찮겠는데.'
갑작스런 상황인 만큼 쉽지는 않겠지만, 똑똑한 자신의 아들이라면 분명 잘해 낼 수 있을 터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68화
두 번째 시험이 시작됐지만 출발 시점은 조마다 제각각이었다.
미리 대비한 작은 짐만 챙겨 바로 협곡으로 떠나는 조가 있는가 하면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짠 후 출발하려는 조도 있었다.
"필요한 건 준비된 모양이니 바로 출발하지. 계획은 가면서 세우고. 어때?"
루드의 조는 전자였다.
루드가 수긍하자 세 사람은 곧장 퓨렐 협곡으로 향했다.
시험에 대비해 최소한의 준비를 해온 상황.
부족한 식량이나 식수 등은 퓨렐 협곡에서 마련할 생각이었다.
"반갑다. 루드라고 했지. 우리는 카이예스와 레이예스다."
"알고 있다. 같은 조가 됐으니 잘해 보자고."
퓨렐 협곡으로 가는 길에 세 사람은 짧게 대화를 나눴다.
"시험에 관해 좋은 생각이 있나?"
"좋은 생각이랄 건 없다. 그저 다른 조보다 높은 점수를 받고자 한다."
"그럼 역시 제1포인트를 노리려는 거겠지?"
"그래. 너희도 다를 거라 생각하지 않는데."
"그 말대로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간단한 신변잡기로 시작된 대화는 이번 시험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로 이어졌다.
다행히 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포인트는 똑같았다.
제1포인트, 이번 시험에서 가장 어렵고, 높은 점수가 걸린 포인트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루드는 계속해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고자 했고, 남은 둘도 루드에게 밀렸던 1차 시험을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무슨 생각이냐.'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 루드는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세 사람이 한 조가 된 게 우연일까?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둘 중 하나만이라면 모를까, 세 명으로 이루어지는 조에 저 둘과 같은 조가 되었다는 건 명백히 부자연스러웠다.
'누구의 속셈이지.'
누군가 손을 쓴 건 분명했다. 다만 그게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소크란일지, 아니면 지금 옆에 있는 둘 중 하나일지, 혹은 둘 모두일지.
그도 아니면 제삼자일 지도 몰랐다.
'조심해야겠군.'
조 편성에 관여한 자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몰랐으니 더욱 조심해야 했다.
"그보다 이건 어떻게 할 거지?"
한발 앞서서 걷던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발걸음을 멈춘 카이예스가 무언가를 꺼냈다.
옅은 마력이 흐르는 조각이었다. 이번 시험에서 모든 조에게 나누어준 준비물로, 포인트를 다녀왔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장치였다.
각 조에 주어진 세 개, 포인트에 있는 하나. 그렇게 총 네 개의 조각이 모이면 하나의 모형이 되는 식이었다.
"한 사람당 하나씩 갖고 있는 게 무난할 것 같긴 한데."
"그러도록 하지."
셋 모두 이견은 없었다.
조각 중 하나라도 없다면 포인트를 다녀왔음을 증명할 수 없었지만,
'생각보다 합의가 빠르군. 뭐, 시험의 결과로 서로 뒤통수 칠 일은 없으니 당연한 건가.'
루드도 두 쌍둥이도 전사의 시험에 진심으로 임하고 있는 바. 적어도 이번 시험에서 결과로 배신할 가능성은 없었다.
'원하는 게 결과가 아니라면 말은 달라지겠지만.'
이후 루드는 아직 얘기하지 않은 다른 부분을 짚었다.
"복귀 시점과 몬스터 사냥은 어떡할 거지?"
"안 그래도 그거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일단은 최대한 몬스터를 사냥하고 시험 종료 직전에 맞춰 복귀하려는 생각이다."
"어떤 몬스터를 중점으로 사냥할 건지 계획은 있나?"
"아직은 없다. 다만 복귀 시점이 늦어지는 만큼 차감되는 점수보다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게 해야지. 퓨렐 협곡에 가서 상황을 보고 복귀 시점을 당기는 경우도 염두에 두고 있다."
포인트 말고도 몬스터 사냥과 복귀 시점으로 가감되는 점수.
그에 대한 카이예스의 생각을 들은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다.
현재 그들의 수중에는 포인트의 위치와 각 몬스터에 배당된 점수가 적힌 팸플릿이 있었다. 조각과 마찬가지로 모든 조에 배부된 것으로, 이를 통해 복귀 시점에 따른 마이너스와 몬스터 사냥으로 인한 플러스를 계산하는 게 가능했다.
'최대한 고득점을 노린다.'
상위 5개 조에만 들어가면 합격이었지만, 거기서 그칠 생각은 없었다. 1차 시험과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점수로 통과할 생각이었다.
그건 두 쌍둥이도 마찬가지.
루드도 쌍둥이도 시험을 통과하는 건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보다 높은 점수를 갈망할 뿐이었다.
"보이는군. 퓨렐 협곡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앞에 퓨렐 협곡이 나타났다.
* * *
퓨렐 협곡에 들어선 셋은 곧장 포인트를 찾아 움직였다.
그들이 노리는 건 가장 높은 1,000점이 배정된 제1포인트.
협곡 깊은 곳에 위치해 접근 자체도 까다롭고, 숱한 몬스터들을 마주칠 확률이 높은 포인트였다.
어지간한 조는 엄두도 못 낼 난이도.
하지만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빠르게 포인트를 찾고자 했다. 제1포인트를 노리는 게 자신들만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카이예스는 각 조를 떠올렸다.
1조부터 자신들 10조까지.
1차 시험을 통과한 만큼 허수는 없었지만, 그들 가운데도 차이는 존재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조 편성은 유난히 편차가 심했다. 괜찮은 이들끼리 한 조로 묶인 경우가 많았다.
섣부를 수도 있지만 이미 합격조가 가려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른 조도 제1포인트를 노릴 수 있다.'
1조나 9조는 자신들과 1위를 다툴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들에 미치진 못하더라도 4조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고.
순수 전투력은 떨어질지라도 다른 면에선 강세를 보일 4조였다.
'조원끼리의 협동도 생각해야 한다.'
같은 조 내에서의 팀워크, 그리고 다른 조 간의 공동전선.
카이예스는 그것이 이번 시험의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들의 조는 조금 기형적이었다.
서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기에 믿을 수 있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내심 경계심이 들었다.
'조각을 모두가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없었다.'
전력이 약한 조는 가장 강한 이에게 조각을 맡기고 러시 전략을 쓸 수도 있었다.
시험은 완성된 조각과 몬스터 처치의 증거를 제출하면 끝.
굳이 모든 참가자가 도착지에 와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이 꼭 약팀에서만 나오리란 법도 없었다.
'우승 후보를 제거할 기회다.'
높은 점수를 획득해 자신이 속한 조가 3차 시험으로 향할지라도, 개인의 컨디션이 안 좋으면 어떻게 될까.
혹 2차 시험 도중 큰 부상을 입거나, 죽어버렸다면?
'극단적인 생각이지만.'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다.
'그날 본 실력대로라면, 약간의 틈도 보여선 안 된다.'
꺼져 가는 의식을 붙잡고 목도했던 광경. 카이예스는 제노스에게서 보라색 끈을 뺏어 내던 루드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때 그가 보여 준 움직임, 속도, 결단력, 판단, 힘.
전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것들이었다.
"...의견을 하나 말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의견이지?"
포인트를 찾아 이동하던 중, 여태까지 조용하던 레이예스가 조심스럽게 의사를 피력했다.
"효율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요. 굳이 저희 셋이 몰려다닐 필요가 있을까요?"
"음."
"또 같은 조라지만, 완전히 믿을 수도 없는 법이고요. 솔직히 저는 루드 당신이 경계됩니다. 막말로 당신이 죽자고 덤비면 이길 자신도 없고요. 루드 당신도 저와 형님을 경계하고 있을 거 아닙니까."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레이예스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알 것 같았고.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지?"
"특별한 방법은 아니고, 그냥 임무를 분담해 따로 다니자는 겁니다. 포인트에 다녀오는 것과 몬스터 사냥으로 나눠서요."
"그렇게 나뉜다면 난 혼자 다녀야겠군."
"예. 위험 부담을 느끼신다면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만, 효율적인 측면에선 그렇게 움직이는 게 가장 낫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당신이 몬스터나 다른 조에 쉽사리 당할 것 같지도 않고요."
"레이예스 너...."
루드는 두 쌍둥이를 바라봤다. 서로 합의하지 않았던 상황인지 카이예스의 얼굴엔 당혹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또한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한 건지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는 중이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우리끼리 신경 쓰는 것보다는 시험에 집중하는 게 낫겠지."
"포인트에 다녀올 건지 몬스터를 사냥할 건지는 당신이 선택하십쇼."
"배려해 주는 건가."
"일단은 혼자이니까요. 당신이 더 큰 부담을 지니 마땅히 먼저 선택할 권리가 있는 거죠."
루드는 레이예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녀석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얼 위해 여태 조용하던 녀석이 이런 방식을 제안하는 걸까.
뭐, 당장 레이예스의 제안은 자신에게 나쁜 선택지가 아니었다.
"만약 내가 포인트에 가겠다고 하면, 너희들에게 있는 조각을 내어 줄 수 있나?"
"아뇨. 그건 무리입니다. 반대 상황을 가정하면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피식. 웃음으로 대꾸한 루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합류할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는 게 좋겠군."
"포인트에 다녀올 건가요?"
"그래. 두 명인 쪽이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는 게 점수를 얻기 유리하겠지."
"그건 그렇군. 그렇다면 4일 뒤 정오까지 이곳에서 모이는 건 어떤가."
카이예스가 상황을 정리했다.
루드는 팸플릿에 적힌 포인트의 위치를 떠올렸다.
4일이라... 괜찮을 것 같았다.
"좋아. 그때 이곳에서 다시 모이기로 하지."
합의가 끝났다.
세 사람은 곧장 둘로 찢어졌다.
루드는 가던 길 그대로 포인트를 찾아 움직였고, 쌍둥이들은 근처에 위치한 몬스터들을 탐색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레이예스."
"네. 형님."
둘만 남은 상황. 카이예스는 레이예스에게 궁금한 것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냐."
"그냥 이게 합리적이라 생각했습니다."
같은 조끼리 견제하며 신경을 갉아먹느니, 차라리 찢어져서 움직이는 게 낫겠다.
각자 제 한 몸 건사할 정도는 되니 그게 최선의 판단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만약 그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상대할 자신도 없었고요."
"...너도 봤던 거냐."
"예. 중간부터지만요."
제노스와의 전투로 정신을 잃었던 레이예스다.
하여 제노스와 루드 간의 전투를 못 봤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레이예스 또한 루드의 무력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여하튼 잘했다. 좋은 판단과 말재주였다."
"감사합니다. 형님께 말씀드리지도 않고 섣불리 나서는 건가 걱정했는데 이렇게 칭찬해 주시니 다행이네요."
레이예스가 고개를 숙였다.
"이제 빨리 몬스터를 사냥하자. 네가 비상한 머리와 말솜씨를 보여 줬으니 나도 무엇 하나는 보여줘야겠지."
카이예스가 앞장서 걸었다. 부담이 하나 사라진 그의 걸음은 퍽 가벼웠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레이예스는 가만히 바라봤다.
조금은 차가운 눈동자로.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69화
혼자가 된 루드는 페이스를 올렸다.
쌍둥이와의 합류 시점은 나흘 뒤 정오. 퓨렐 협곡의 규모를 생각하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지금 시간을 벌어 놔야 한다.'
각 조에 배부된 팸플릿에는 각 포인트들에 대한 간략한 정보가 포함돼 있었다.
제1포인트는 모든 포인트들 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위치했다.
협곡 심부로 들어갈수록 지형이 복잡해지고 서식하는 몬스터의 수준이 높아졌으니, 포인트에 가까워질수록 난이도가 상승할 터였다.
여유가 있을 때 시간을 단축해 놓아야 했다.
'포인트 탐색에만 시간을 쏟기엔 아까우니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포인트에 탐색에만 쓸 생각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좋은 기회다. 확인할 수 있는 건 전부 확인해 봐야겠지.'
전생을 기준으로 앞으로 몇 년 뒤 설산 트롤이 모습을 드러낸다.
협곡을 설산으로 바꾸는 말도 안 되는 존재.
정수를 먹은 녀석은 소드마스터라 할지라도 쉽게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운 좋게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지금은 전생에 비해 몇 년이나 빠른 시간대였다.
녀석을 만난다면 미리 그 싹을 자를 생각이었다.
지금 시간대의 녀석은 전생에서 마주했을 때보다 훨씬 약할 터.
그 또한 쉽지는 않겠지만....
'전생의 경험, 지금의 경지, 여명 부족과 황혼 부족에서 얻어 온 기물들.'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물론, 녀석을 상대하는 것보다 좋은 경우의 수도 있었다.
'미리 정수를 발견할 수 있다면 베스트다.'
설산 트롤이 모습을 드러낸 게 지금으로부터 약 5년 후란 걸 생각하면 아직 트롤이 정수를 얻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주인 없는 정수를 챙기면 됐다. 정수도 얻고 설산 트롤과 드잡이할 이유도 없었으니 가장 좋은 경우였다.
하지만 큰 기대는 않았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 불확실성을 기대하는 대신 루드는 발걸음을 더 빨리했다.
"새롭군."
퓨렐 설산, 아니 퓨렐 협곡엔 와 본 적이 있었다.
설산 트롤을 상대하기 위해 오른 길.
하지만 지금의 풍경과는 퍽 다른 모습이었다.
깎아 지르는 절벽도 끝이 안 보이는 낭떠러지도. 전부 그땐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당시엔 이미 새하얀 눈이 모든 걸 집어삼킨 후였기 때문이었다.
바삐 움직이던 걸음을 멈춰 세운 루드는 잠시간 상념에 잠겼다.
전생과 같은 공간, 그러나 전생과 다른 풍경.
"이렇게 장엄한 곳이었나."
설산 트롤의 죽음 이후, 퓨렐 협곡은 서서히 옛 모습을 찾아갔다.
쉬지 않고 내리던 눈이 그쳤고, 모습을 감췄던 태양이 얼굴을 드러냈다.
켜켜이 쌓여 있던 눈은 한순간에 녹아내리진 않았으나, 분명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다만, 루드가 그것을 볼 수 없었을 뿐.
'굳이 찾을 이유가 없었지. 아니, 찾을 수 없었던 거라 해야 하나.'
설산 트롤을 토벌한 루드는 바빴다. 단순히 바쁘다는 말로 표현하기엔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
제노스의 아들이란 신분을 회복한 루드는 소크란을 필두로 하는 뱀 부족 세력을 까마귀 부족에서 몰아냈다.
그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이미 까마귀 부족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들이었다.
특히 소크란은 당시 의식을 잃은 제노스를 대신해 부족의 대소사에 관여할 정도였다.
스스로의 능력과 여러 이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들을 몰아낼 수 있었으나.
'전쟁이 터졌지.'
그 직후 전쟁이 터졌다.
뱀 부족과의 전쟁이었다.
당시의 뱀 부족은 일개 부족이 아니었다.
여러 부족을 향해 은밀히 뻗었던 손은 각 부족의 핵심을 쥐고 있었고, 뱀 부족은 그것을 마음껏 휘둘렀다.
순식간에 인근의 부족을 잡아먹은 뱀 부족은 다른 부족들이 연합 전선을 이뤄 대응해야 했을 만큼 강력했다.
루드는 그 전쟁의 중심에 섰던 이들을 떠올렸다.
오래된 기억이었지만 어렵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던 이들이었으니.
'그 두 사람... 당장에 별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자신의 존재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랐다.
하여 그들과 동행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으나, 그보단 각기 움직일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일단은 움직이자."
벼랑 끝에 선 루드는 먼 곳을 바라봤다.
안력을 돋워도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먼 거리.
저곳 어딘가에 제1포인트가 있었다.
* * *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침묵이 맴돌길 잠시, 먼저 입을 뗀 건 치미콴이었다.
"나는 치미콴. 베오 부족의 치미콴이다."
"소생은 가르소라고 하오. 하피냐 부족 출신이지. 워낙 작은 부족이라 아마 낯설 거요."
"나는 휴이야. 알브족이고."
치미콴은 1차 시험 때와 똑같은 인상이었다. 여전히 대머리였으며 커다란 무기를 든 채였다.
가르소는 머리에 터번을 쓰고 있었다. 신기한 건 흰색 천으로 눈가를 가렸다는 점이었다.
'앞이 보일까? 아니면 장님인 건가?'
휴이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실례가 될까 묻지 않았다.
통성명이 끝나자 또다시 침묵이 돌았다.
"그... 원래 이런 거야? 다른 조도 다 이렇게 조용하나?"
결국 참지 못한 휴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른 둘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퓨렐 협곡으로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소만."
"좋은 생각이야. 빨리 빨리 움직이자고. 다른 녀석들은 이미 다 떠난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면 남은 건 그들밖에 없었다.
다른 조는 이미 퓨렐 협곡으로 향했거나 준비를 위해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오직 그들만이 갈피를 못 잡고 멍하니 있었다.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하는 게 어떻소?"
"찬성이야. 시간은 아껴서 써야지."
휴이는 가르소의 말에 연신 찬성했다.
하나 치미콴은 생각이 좀 달랐다.
"그 전에, 먼저 팀의 리더를 정하자."
"가면서 정해도 충분하지 않소? 시험기간이 열흘이라지만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만은 않을 거요."
"그러니 더욱 리더를 정해야지. 그래야 의견 분열 없이 빠르게 행동할 수 있을 거 아냐."
"그것도 일리는 있네."
음음. 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없다는 가르소와 그렇기에 더욱 리더를 정하는 게 우선이라는 치미콴의 말 모두 일리가 있었다.
"...후. 좋소. 그럼 어떻게 리더를 정할 거요."
가르소는 한숨을 쉬었다. 이대론 치미콴이 한 발짝도 움직일 것 같지 않은 까닭이었다.
'최소한 치미콴이 리더가 되는 건 막아야 한다.'
팀을 이끌 리더는 중요했다. 리더의 판단 하나로 시험의 당락이 결정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무력과 지력을 고루 겸비하고 상황에 맞는 판단을 할 줄 아는 이를 뽑아야 했다.
그리고 가르소의 눈에 치미콴은 리더감이 아니었다.
일신의 무력이 괜찮고 나름 머리도 굴리는 편이었지만, 성격이 문제였다.
성급함.
자칫 중요한 기로에서 낭패를 볼 수도 있는 성정의 치미콴이었다.
'휴이란 이가 무슨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치미콴을 지지하지만 않으면 됐다.
다행히 짧은 대화였지만 타인의 말을 듣고 의견을 수렴할 줄 아는 인물 같았다.
자신이 그를 지지하든, 그가 자신을 지지하든 상관없었다. 치미콴만 아니면 됐다.
"리더를 정하는 방법이라. 뭐 별 게 있겠어?"
"그 방법이 뭔데?"
"뭐겠어. 전사의 시험이니까, 당연히 가장 강한 녀석이 리더가 되는 거지."
치미콴은 가르소의 생각대로 움직였다. 가장 자신 있는 무력을 앞세워 리더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 것이다.
일견 무식해 보이지만, 자신이 리더가 되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식을 택한 영리한 선택이었다.
'거절해야 한다.'
무력만 따지면 카이예스와 견줄 치미콴이다. 가르소는 당장에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었다. 휴이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 여겼다.
"오. 좋은 방법이네. 간단하고 확실해."
그러나 휴이의 대답은 가르소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크. 역시 뭘 아는군."
"난 반대요. 단순히 무력만으로 따지기엔 이번 시험엔 변수가 너무 많소. 차라리 가장 현명한 자를 뽑는 게 어떻소."
서둘러 수습에 나선 가르소.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변수가 많은 시험이니까 그에 대처할 줄 아는 리더를 뽑을 필요성도 있지."
휴이는 그 의견에도 동조했다.
'이자는 생각이 없는 건가!'
가르소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걸 말해도 좋다, 저걸 말해도 좋다.
의견이 나오는 족족 좋다며 찬성하는 모습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둘의 의견 모두 좋은 것 같아.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그때. 여태까지 찬성만 하던 휴이가 처음으로 의견을 냈다.
"치미콴의 의견대로 가장 강한 사람, 가르소의 의견대로 가장 현명한 사람. 이 둘이 합의를 보면 되는 거지. 어쩌면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잘 못 들었소만?"
저도 모르게 반문한 가르소. 저자는 지금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알까 묻고 싶었다.
"그거 괜찮은 방법이군. 좋아. 나와 합의를 볼 녀석은 누구지?"
반면 치미콴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 있었다.
하나, 치미콴이 간과한 게 있었다.
"응? 뭐야? 네가 가장 현명한 자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 같진 않은데, 너보단 이쪽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뭐?"
"아니, 그렇잖아. 너보단 내가 더 똑똑할 거 같고, 나보단 이쪽이 좀 더 머리를 잘 쓸 것 같지 않아?"
차례로 치미콴과 자신, 가르소를 가리키는 휴이의 손가락.
'!!!'
가르소는 그제야 휴이의 의도를 깨달았다.
동시에 자신이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1등의 임팩트가 워낙 강해 가려졌지만 휴이는 1차 시험의 2등.
자신들 중 가장 좋은 성적으로 시험을 통과한 자였다.
시험 순위가 꼭 강함의 기준으로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닌 것 같으면 확인해 봐. 단,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야. 두 번은 없어. 시험 도중에 덤비면 그땐 죽이거나 반쯤 죽일 거거든."
휴이가 치미콴과 마주섰다.
'꿀꺽.'
가르소는 침을 삼켰다. 갑자기 휴이의 몸이 몇 배는 커 보였다.
"말장난... 하는 것 같지는 않군."
드러냈던 이를 집어넣은 치미콴은 마주선 휴이의 눈을 응시했다.
흔들림 없이 고요한 눈.
정말 자신이 이길 거라 확신하는 이의 눈빛이었다.
씨익.
"하지만 나 또한 그리 생각하니 어쩔 수 없지. 누가 가장 강한지 판가름해 보는 수밖에."
"얼마든지 환영이야."
서로가 자신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니, 방법은 하나였다.
누가 더 강한지 겨뤄 보는 것.
둘 모두 부딪침에 거리낌이 없었으니 간단한 해결책이었다.
쾅-!!
"힘을 더 뺏어야 했나...."
잠시 후, 휴이는 자신의 오른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발밑에는 치미콴이 엎어진 채였다. 제법 맷집이 있어보여서 조금 세게 쳤더니 그만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곤란하네."
당장 시간을 아껴야 하는 상황. 물끄러미 쓰러진 치미콴을 바라보던 휴이가 시선을 돌렸다.
딸꾹.
"왜, 딸꾹, 그러, 딸꾹."
"아니, 그냥. 리더한테 좋은 생각 있나 해서."
예? 딸꾹.
가르소는 연거푸 나오는 딸꾹질 때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휴이의 말을 이해한 건 딸꾹질이 멈출 때쯤이었다.
9조의 조장이 결정됐다.
아마도 가장 현명한, 가르소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7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