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 50-60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50화

루드가 보인 건 반지였다.

길러 주신 아버지가 어머니의 유품이라며 주었던 것이었다.

전생에서 자신의 태생을 찾아갈 수 있게 한 단초이자 까마귀 부족과의, 제노스와의 연을 증명하는 증표이기도 했다.

로하스는 루드와 반지를 번갈아 봤다. 시선이 오가길 여러 번. 마침내 인정한 로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래서였군. 어쩐지, 음, 역시."

이러면 자신이 뒤를 잡힌 것도, 어린 나이에 이처럼 뛰어난 실력을 갖춘 것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무려 족장님의 피가 흐르는 이 아닌가.

족장님의 위용을 생각하면 자식이 응당 이 정도는 되어야 했다.

"다행히 알아본 모양이군."

"당연하지. 내가 못 알아보면 누가 알아보... 겠습니까...?"

부대의 다른 이들에 비해 어린 나이지만, 로하스도 어엿한 '까마귀의 눈'이었다.

가장 가까이서 족장을 보좌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

현 족장인 제노스의 직계 혈통에 대대로 내려온 문양을 모를 수 없었다.

그 문양이 새겨진 반지를 갖고 있는 건 제노스의 피가 흐른다는 의미.

로하스가 존댓말을 고민하는 이유였다.

"이전처럼 대해라."

"큼, 그럼 편하게 하지."

로하스는 흘깃 루드를 바라봤다. 얼굴을 보면 족장님의 자식뻘, 외모도 족장님을 빼닮았다.

'혼외자식...?'

제노스는 슬하에 세 명의 자식을 두었다. 소크란의 배에서 나온 세 남매는 때론 합심하고 때론 경쟁하며 자라는 중이었다.

로하스는 그들 셋의 얼굴을 전부 알았다.

하지만 앞의 녀석은 그 셋 중 누구도 아니었다.

혼외자식이라면 제노스를 상징하는 반지를 갖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됐다. 훗날 출신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줬을 수 있었다.

'족장님께 혼외자식이 있다는 게 믿겨지진 않지만...'

냉혈한으로 알려진 제노스였다. 소크란과의 슬하에 자식을 셋 두었지만 그건 결코 소크란을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족장으로서의 의무를 지기 위해서였다.

그런 제노스가 바깥의 여자와 정을 통하는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하물며 자식을 낳고 반지까지 건넸다?

'잠깐만, 이 녀석 설마.'

그때 갑자기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나이가 몇인지 물어도 되나?"

"열여섯이다."

"열여섯... 그렇군."

그렇다면 가설이 맞을지도 몰랐다.

'족장님의 아들들이 올해 갓 성년이 되었다.'

성년의 기준은 열다섯.

앞의 녀석은 그보다 한 살 더 많았다. 다르게 말하면, 녀석이 태어난 게 제노스와 소크란의 결혼과 비슷한 시기거나 더 이를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소문이 있었지. 과거의 제노스 님은 지금처럼 차갑지 않았다는 소문이.'

따뜻한 제노스 님이라니, 믿기지 않지만 마냥 헛소문으로 치부할 순 없었다.

그 소문을 퍼트린 건 다름 아닌 선배들이었으니까.

선대 족장 때부터 까마귀의 눈으로 활약해 온 선배들은 과거의 제노스는 지금처럼 차갑지 않다 말했다.

'그리고 알게 됐지. 제노스 님이 변한 이유를 제공했을 만한 사건을.'

누구보다 열렬히 제노스를 추앙한다 자부하는 로하스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알아봤다.

어쩌면 앞의 녀석은, 그 사건의 관계자일지도 몰랐다.

"갑자기 눈빛이 불쾌하게 변했군."

"크흠. 그럴 리가. 그보다 이름을 못 들었군. 나는 아까 말했듯 로하스다."

"루드다."

통성명을 마친 둘은 본격적인 대화를 나눴다. 로하스는 목적이 같은 데다 신원도 확실하니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움직이기 좋았다.

루드가 정체를 밝힌 이유였다.

"뱀 부족이 황혼 부족의 비전을 훔치려 한다. 그간 둘을 미행했으니 알고 있을 테지."

"그래. 헤슬리라는 뱀년이 모지리 하나를 물어서 작업을 치더군."

"그 모지리가 현 족장의 하나뿐인 아들이고."

끄덕.

"그게 문제지. 족장을 찾아가 상황을 공유한다 한들 그가 믿어 줄 확률이 적으니."

"맞다. 실제로 헤슬리에 관해 언질을 해 봤을 때 그 아이는 그럴 아이가 아니라고 확언하더군."

"큰일 났군."

턱을 매만지며 고심하던 로하스는 어느 순간 의문을 품었다.

'근데 왜 자연스럽게 정보를 공유하고 있지?'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전개.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맞대고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는 중이었다.

'제노스 님의 자식이란 것 외에 알고 있는 건 하나도 없다.'

루드의 연원을 짐작한다지만, 그건 말 그대로 짐작일 뿐 확신이 아니다. 막말로 밖에서 나고 자랐을 루드가 제노스의 편이란 보장도 없었고.

애초에 이곳에 있는 것도 이상했다. 자신에게 반지를 보였단 건 반지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소리. 그런데도 제노스를 찾아가지 않고 이런 곳에 있었다.

"날 믿을 수 없겠지."

루드는 생각에 빠진 로하스를 일깨웠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당신이란 인물을 마냥 믿을 수도, 믿을 생각도 없다."

로하스가 루드를 경계하는 것처럼, 루드 또한 로하스를 경계했다.

"내게 생각이 있다. 일이 잘 풀리면 뱀 부족에게 황혼 부족의 비전 대신 큰 엿을 선물할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를 밝히고 공조하고자 함은 한 가지 이유였다.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건 딱 하나다."

로하스에게 바라는 하나.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부 보고 제노스에게 정확히 전달해라. 하나도 빠짐없이."

까마귀의 눈으로서 맡은 임무를 완수하는 것.

그리하여 지금부터 일어날 일들의 증인이 되는 것뿐이었다.

* * *

로하스와 헤어진 루드는 휴이와 접선했다.

휴이는 부탁받았던 바를 충실히 수행한 상태였다.

"관리자라고?"

"어. 네가 말했지. 황혼 부족의 부지는 사람들이 사는 곳만 있는 게 아니라고. 바치렌이 그런 곳들의 관리자래. 사실 관리자란 건 금방 알아냈는데,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독의 재료가 되는 동식물이 자라거나, 이미 만들어 둔 독을 보관하는 곳. 혹은 그에 준하는 기밀들을 관리하는 곳.

바치렌은 그러한 비고 전체를 총괄하는 관리자였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바치렌은 그 부지 내의 숙소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간신히 알아냈어."

바치렌의 거처를 찾는 건 고역이었다.

자칫하면 관리자를 피해 독을 훔치려는 도둑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 끝에, 휴이는 결국 바치렌이 묵는 곳을 알아냈다.

똑똑-

"계십니까. 바치렌 님을 뵙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안에 계시다면 잠시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기다리시오."

살짝 열린 문틈.

그 사이로 루드와 휴이를 확인한 바치렌은 잠시 고민하더니 문을 닫았다.

문이 다시 열린 건 5분 정도가 지나서였다.

"들어오시오. 지저분하더라도 양해 부탁드리겠소. 누가 찾아오리라곤 생각하지 않아서 편할 대로 놓은 것이니. 아, 그렇다고 괜히 치운답시고 건드리지는 마시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 괜히 헤집어 놓으면 곤란하오."

"알겠습니다."

긴 경고의 말대로 내부는 지저분했다.

이곳저곳에 종이 뭉치가 널브러져 있었고, 실험 중이었는지 책상에선 보라색의 액체가 보글보글 끓는 중이었다.

"와우...."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은 휴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군.'

루드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휴이가 그러했듯, 바치렌도 전생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단순히 외양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품고 있는 뜻, 이루고자 하는 목표,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

지금의 바치렌에게도 전생에서 만났던 바치렌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온 거요."

"우선 저희는 루드와 휴이라고 합니다. 다른 곳을 향해 가던 중 인연이 닿아 황혼 부족을 찾았습니다."

"알고 왔겠지만 바치렌이오."

알고 있었다.

현 황혼 부족 족장 모치란의 동생이자 부족 비고의 관리인. 동시에 전생에서 루드의 뜻에 함께했던 황혼 부족의 족장.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진 모르겠으나, 얼른 용건을 말하고 가줬으면 좋겠소. 실험 중이었던지라."

"좋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바치렌은 전생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대화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떠들 시간에 연구라도 하나 더 하자는 느낌이었다.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단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그가 사람에게서 정과 재미를 못 느낀다 말했다.

천생 연구자라는 말은 덤이었다.

하지만 루드는 알았다. 사람들의 말이 틀렸다는 걸.

바치렌이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이번 생에서도 바치렌을 움직이는 건, 결국 그 이유일 것이었다.

"황혼 부족의 족장이 되십쇼."

"...잘못 들었소만."

"제대로 들으셨다는 거 압니다. 황혼 부족의 족장이 돼 주십시오."

"밤중에 헛소리를 하러 온 미친놈이었단 걸 알았다면 들이지 않았을 텐데."

미친놈의 잠꼬대를 듣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바치렌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족장이 되셔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황혼 부족은 망할 테니까요."

미친놈이 뱉는 미친 소리가, 그의 몸을 붙잡았다.

분명 미친 소리였다.

한데 그 말을 내뱉는 이는 너무나 확신에 차 보였다.

"우리 부족이 망한다... 미친 소리도 작작 해야 하는 법이오."

모치란이 족장이 된 후 황혼 부족은 계속 세를 넓혀 갔다. 경제도, 생활 환경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발전했다.

모치란은 부족을 위해 헌신했고, 부족원들은 모두 모치란을 존경했다.

그런데 황혼 부족이 망한다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루드는 단호했다.

"얼마 안 가 모탄이 헤슬리에게 부족의 비전을 넘길 겁니다."

"...."

"족장님께 먼저 헤슬리에 관해 말씀드렸지만 믿지 않으시더군요."

루드는 바치렌을 살폈다.

예상대로 바치렌도 헤슬리를 신뢰하지 않는 듯했다.

"형님은 뛰어난 분이시오. 황혼 부족을 이만큼 발전시켰지."

독을 다룬다는 특성 때문에 다른 부족에게 배척받곤 하던 황혼 부족이었다.

그런 부족이 이만큼 번영하고, 다른 부족과 교류하게 된 것은 모두 모치란의 수완 때문이었다.

"나보다는 형님께서 내리신 판단이 더 알맞을 거요."

"그 판단 한 번에 부족의 운명이 달려있대도, 그렇게 물러서만 계실 겁니까?"

"...."

"모치란님이 뛰어나단 건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모탄은요?"

모치란의 장남이자 하나뿐인 아들.

모탄은 모치란에게도 황혼 부족에게도 아픈 손가락이었다.

모치란의 아들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급한 성정. 흥분하면 나타나는 폭력적인 성향. 아버지의 위세를 믿고 벌인 크고 작은 사건들까지.

"모탄은 확실히 불안정한 아이지."

어렸을 적 오냐오냐한 까닭일까. 모탄은 나이를 먹은 지금에도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가져야 했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야만 했다.

"그대 말처럼 헤슬리가 부족의 비전을 노린다면 모탄을 만나는 게 이해가 되오."

바치렌은 모치란과 달리 헤슬리를 믿지 않았다.

그녀가 만나는 이가 모탄이 아니었다면 의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탄의 옆자리를 차지한 헤슬리였다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뱀 부족의 여자가 황혼 부족에 와 우연히 만난 연인이 족장의 아들이란 건 분명 미심쩍은 일이었다.

"부족의 일도 그러하지만, 모탄의 일은 더욱 형님께서 하실 일이오."

"부족의 비전이 뱀 부족에게 넘어간 뒤에 말씀입니까."

바치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걱정하는 바는 알겠소. 비록 방법은 무례했으나 그 마음이 진심이란 것도. 하지만 그대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요. 모탄은 비전에 접근할 자격이 없소. 헤슬리가 그 아이를 통해 비전을 취하고자 해도 모탄부터가 비전을 가질 수 없으니, 그대의 걱정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

부족의 비전은 엄중한 관리 아래 보호됐다.

당장 비전에 접근하기 위해선 형님이나 자신의 재가를 받아야 했다.

'곧 갱신 시기이긴 하지만 형님께서 어련히 잘하실 터.'

모탄이 비전에 접근할 수 있는 확률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극히 드문 확률이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낼 가치도 없었다.

"그 말 믿어도 되겠습니까."

바치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없이 축객령을 내릴 뿐이었다.

"또 찾아뵙겠습니다."

루드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배웅하는 인사는 없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51화

해가 중천에 뜬 오후. 루드는 휴이와 함께 거리에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 황혼 부족의 비전이 뱀 부족 손에 넘어가면 큰일 나는 거 아냐?"

"그러니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지."

지난밤 바치렌을 만났으나 소득은 없었다.

바치렌은 모탄이 비전을 훔치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 했지만, 루드의 생각은 달랐다.

'분명 모탄의 손에 비전이 들어갈 거다. 그럼 그게 언제냐가 중요한데.'

모탄이 비전을 입수하는 타이밍. 그 순간만 알면 비전을 빼돌리거나 바꿔치는 게 가능했다.

비전을 뺏기지 않으면서, 뱀 부족에게 피해까지 입힐 수 있는 방법이었다.

"어? 저 녀석."

"모탄이군. 헤슬리도 함께이고."

모탄과 헤슬리가 보였다.

모탄은 오늘도 헤슬리의 곁에서 실실대고 있었다. 중간중간 헤슬리를 흘깃대는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표정을 짓는 건 덤이었다.

'잘하면 이용할 수 있겠군.'

좋은 생각이 났다.

모탄이 비전을 훔치는 시기의 범위를 특정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 순간을 비약적으로 당길 수 있음은 분명했다.

"또 보는군."

"어머. 그러게요. 또 뵙네요."

"넌 그때 우리 자기를 위협하던 기생오라비?"

루드가 접근하자 모탄이 뚜둑 목을 풀었다.

마침 잘 걸렸다 싶었다. 안 그래도 헤슬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들던 찰나였다.

남의 여자를 넘보면 어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 줄 심산이었다.

"위협이라니. 그런 적 없다."

어깨를 으쓱이며 모탄의 말을 부정한 루드는 헤슬리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저 아름다운 여인이 있어 나도 모르게 물었던 것이지. 당신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 왜 이곳에 있나. 왜 이제야 나타난 것이냐. 그랬던 것뿐이다."

"어머."

"그런 감정을 느꼈던 적은 처음이라 전달에 실수가 있었던 것 같군. 그 점은 사죄드리겠습니다. 아가씨."

루드는 허리를 숙이며 헤슬리의 손을 잡고는, 그 위로 입을 맞췄다.

"그런 거였군요. 하마터면 멋진 남성분을 오해할 뻔했어요."

"자기!"

그 광경을 코앞에서 지켜본 모탄은 분에 겨워 덜덜 몸을 떨었다.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자신의 아내 될 이를 이리 욕보이다니!

그리고 감히, 감히, 감히...!

자신의 앞에서 헤슬리와 정겹게 대화를 나누고 손등에 입까지 맞춰?

어찌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모탄의 손에선 피가 흘렀다.

모탄은 헤슬리를 바라봤다.

어느새 불그스름해진 헤슬리의 볼.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기생오라비의 무례하고 난폭한 행위에 겁에 질린 게 분명했다.

"결투다. 결투를 신청한다!"

"예?"

"모탄 님!"

자신의 연인을 두려움에 떨게 한 죄는 매우 크다.

원하지 않는 상대에게 손등을 내줄 수밖에 없던 헤슬리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 것인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무뢰배의 행동이었다. 마땅한 처벌을 내려야 했다.

"결투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모탄 님, 이분들은 그저 지난번의 오해를 풀고자..."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우리 자기를 위협했지."

생각해 보니 이번만이 아니었다. 이 녀석들은 지난번에도 헤슬리를 겁박하지 않았나.

"이걸 어째...."

살벌한 분위기에 헤슬리가 동동 발을 굴렀다.

"어, 얼른 도망가세요. 얼른요!"

"그럴 순 없습니다. 이미 결투 신청을 받았으니 물러날 수 없는 일이죠. 특히 당신같이 아름다운 분 앞에서라면 더더욱요."

하나 루드는 물러서지 않았다.

바라던 상황이 만들어졌는데 도망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워우....'

모든 상황을 한 발 떨어져서 지켜보던 휴이는 속으로 감탄했다.

루드를 걱정하는 헤슬리의 모습.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면 진심으로 자신들을 걱정하는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루드도 헤슬리 못지않았다. 사랑에 빠진 젊은 청춘을 훌륭히 연기하고 있었다.

특히 헤슬리에게 반한 척하며 모탄의 화를 살살 돋우는 연기는 일품이었다.

대뜸 다가갈 때까지만 해도 무슨 생각인가 했었는데, 역시 전부 계획이 있던 루드였다.

"이 자식!"

결국 참지 못한 모탄이 달려들었고.

루드는 피하지 않았다.

쿠당탕!

몸통 박치기를 당한 루드가 크게 구르며 나가떨어졌다. 거리의 가판이 엎어지며 큰소리가 났다.

"싸움 났다!"

"뭣들 해! 경비 불러!"

"저거 모탄 님 아니야?"

순식간에 몰려든 사람들.

"선공은 당신이 날렸으니 이제 내 차례겠지."

보는 눈이 많아진 걸 느끼며 몸을 일으킨 루드는 모탄에게 다가갔다.

"오냐. 덤벼라."

모탄은 주먹으로 제 가슴을 강하게 두드렸다.

저깟 기생오라비의 주먹 따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솜 주먹일 게 분명했다.

몸집도 자신보다 훨씬 작았고 허여멀건 게 딱 보면 알았다.

"컥!"

예상대로 녀석의 주먹은 솜 주먹이었다.

다만, 물을 잔뜩 먹인 1톤 정도 되는 솜 주먹.

"모탄님! 어머 어떡해!"

헤슬리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모탄의 의식이 끊겼다.

* * *

모치란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업무 중이었다. 책상 높이 쌓인 서류들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 많은 게 없어질 날이 있을까? 고민하며 관자놀이를 누를 때였다.

노크와 함께 비서가 들어왔다.

"모치란 님."

"무슨 일인가."

"그게..."

"무슨 일이기에 그리 뜸을 들이나. 괜찮으니 말해 보게."

모치란은 서류를 내려놓고 안경마저 벗었다. 이참에 조금 쉴 생각이었다.

"그게, 그, 모탄 님께서."

"모탄? 그 아이가 왜."

"그...."

"설마 또 싸움을 벌인 건가."

"...예."

하아.

깊은 한숨이 나왔다.

모탄 그 아이는 걸핏하면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거기에 하고 싶은 것은 해야 하고 갖고 싶은 것은 가져야 했으니 최악이었다.

제 아들이었지만 참 문제가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잘 다스렸어야 했건만.'

후회해 봤자 늦은 문제였다. 문제를 자각하고 몇 번인가 꾸짖었으나 도통 들어먹지를 않았다.

싸운 것도 이번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절대 봐주지 말게. 부족의 법에 따라 엄히 다스리게."

더는 안 싸우겠다고 약속한 모탄이었다. 그 말을 믿고 상황을 수습해준 게 고작 두 달 전.

그런데 또 싸움을 벌이다니.... 더 이상 참작의 여지가 없었다.

"한데, 그게."

"또 뭔가. 설마 상대가 심하게 다쳤나? 아님 죽기라도 했어?"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그간 모탄이 큰 처벌을 받지 않았던 건 싸움은 났어도 그 피해가 크지 않았고 상대와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중상을 입거나 사망했다면? 그래서 합의조차 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형벌을 내리는 수밖에.'

아무리 제 아들이라도 법은 지켜져야 했다. 그게 자신을 믿고 따르는 부족원들에 대한 예의였다.

"좀 심하게 다치긴 했으나 죽거나 장애가 생길 정도는 아닙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다행히 최악은 피한 듯했다.

그나저나 심하게 다쳤다니, 모탄을 데리고 문병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데?"

"다친 게 모탄 님입니다."

"...뭐?"

모치란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모탄이 다치게 한 게 아니라, 모탄이 다쳤다고?

"어떻게?"

"예?"

"아니지. 상대는 누구인가."

"그, 일전에 만나 보셨던 이들 있지 않습니까. 여명 부족의 증패를 들고 왔던 둘이요."

"그들인가."

모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모탄의 근골은 대단했다.

황소에 비할 만한 힘과 바위 같은 맷집.

그런 모탄이 쓰러졌다기에 놀랐는데 상대가 그들이라면 이해가 갔다.

여명 부족의 증패를 들고 온 이들이다.

어지간한 신뢰를 쌓지 않았다면 여명 부족이 증패를 주었을 리 만무하니, 그들의 실력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잡아 놓긴 했습니다만."

"싸움이 일어난 이유와 상황 등에 문제가 있었나?"

"아뇨. 상대는 결투였다고 주장하고, 헤슬리 님도 모탄님께서 결투를 신청한 게 맞다 증언하셨습니다."

"그럼 문제는 없군. 얼른 풀어주게. 당사자들 간에 결투를 한 거라는 데 뭐 어쩔 건가."

"그래도 아드님께서 다치신 건데...."

"됐네. 모탄이 먼저 시비를 걸었을 게 불 보듯 뻔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군. 이번 일로 모탄 그 아이도 정신을 좀 차렸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족장님이시란 말이지.'

가족의 일이지만 한 치의 치우침 없는 일처리를 명했다.

말이 쉽지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

그럼에도 이리 공명정대한 것은 전부 모치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 금고는 가져왔는가?"

"네. 아래 있습니다."

"가져다주고 자네도 볼일 보게. 남은 업무를 마저 봐야 할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비서는 관계자에게 모치란의 말을 전달하고 금고를 가지러 갔다.

'벌써 그 시기인가.'

모치란은 매년 같은 시기마다 금고를 사용했다. 한여름이 될 때쯤 가져와 가을이 되기 전에 치웠다.

금고에 보관하는 게 무엇인지는 모치란밖에 알지 못했다.

자신들은 그저 모치란의 부탁에 따라 금고를 가져오고 치우기만 할 뿐이었다.

'이게 아티팩트라지.'

금고는 중앙대륙에서 큰돈을 주고 사온 아티팩트라고 했다.

정확히 어떤 효능의 아티팩트인지는 몰랐다. 다만 모치란에게 넌지시 물어봤을 때 금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아티팩트란 답이 돌아왔었다.

"고맙네."

"별말씀을요. 저도 이만 업무 보러 가 보겠습니다."

"그래. 고생하게."

비서가 금고를 놓고 떠난 뒤에도 모치란은 업무에 매진했다.

처리해야 할 게 많았다.

부족 내 경제 상황도 살펴야 했고, 다른 부족이나 중앙대륙의 사람들과 거래할 만한 물품들도 확인해야 했다.

한참을 집중하던 모치란은 해가 질 때가 돼서야 기지개를 켰다.

"후. 간신히 끝냈군."

오늘의 업무는 이걸로 마무리였다.

"이걸 내일 또 해야 한단 말이지."

하.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내일만인가? 모레도, 글피도 해야 했다.

해탈한 듯 헛웃음을 뱉던 모치란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휴. 이제 중요한 일이 남았군."

공식적인 업무는 끝난 게 맞았으나 오늘부터는 추가업무 기간이었다.

품에서 낡은 서책을 꺼냈다. 작고 낡은 서책은 황혼 부족의 비전이었다.

각종 동식물이 어떤 독성을 지녔는지, 독성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무엇을 배합하면 어떤 독이 되는지.

오랜 선조 때부터 갖은 것들을 기록하며 쌓아 온 역사. 그것이 바로 황혼 부족의 비전이었다.

때문에 비전은 하나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부족이 발견하고 발명한 독성은 무수히 많았고, 하나의 책에 담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비전은 여러 개, 정확히는 여러 권이었다.

모치란이 꺼낸 건 그중 마지막 권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마지막 권의 앞 권이 될.

모치란은 펜을 들었다.

내용이 적혀 있지 않은 비전의 뒷부분에 하나둘 글자가 채워졌다.

'사프니아 풀과 배치 벌레의 체액을 특정 비율로 배합하면 방향제로써 사용할 수 있다.'

황혼 부족이 주로 다루는 건 '독'이었지만, 비전에 적힌 게 꼭 독과 관련된 것만인 건 아니었다.

비전은 황혼 부족의 역사서나 다름없는 것. 그들이 알게 된 모든 것들이 적혔다.

'그 방향제를 화란초를 태운 것과 일대일로 섞어 호란독에 넣으면, 호란독의 효과를 강화할 수 있다.'

이리 기록된 것은 언젠가 다른 조합과 배합을 통해 새로운 독이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꾸준히 비전을 갱신하는 건 중요했다. 모치란은 족장이 된 후 년에 한 번씩은 꼭 새로운 내용을 채울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전 세대까지만 해도 십 년에 한 번씩 정보를 기입했던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노력이었다.

펜을 내려놓은 모치란은 금고를 열었다.

새로운 내용을 채우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적어야 할 것 중엔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았다.

지난날들의 서류를 확인하고 정확히 기입할 필요성이 있었다. 약간의 비율만 틀어져도 전혀 다른 결과물이 생기는 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 기간 동안엔 금고에 비전을 보관했다.

"됐군."

펜촉으로 손끝을 찔렀다. 핏방울이 떨어지며 금고가 잠겼다.

부족의 비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금고의 보안도 뛰어났다.

사용자가 잠글 때 사용한 혈액으로 잠금장치가 개폐되는 금고는 무려 중앙대륙의 마탑에서 만든 아티팩트였다.

이렇게 사용하기 위해 비싼 돈을 주고 사 온 녀석이었다.

'더 좋은 게 없는 건 아니지만.'

마력 패턴을 통한 기능이 있는 게 더 뛰어나긴 했으나, 그건 너무 비쌌다. 이것만 해도 허리가 휠 정도였다.

금고가 잠긴 것을 확인한 모치란은 집무실을 나섰다. 따뜻한 저녁이 기다리는 집으로 갈 시간이었다.

"...."

어두워진 집무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시선의 주인은 한동안 집무실에 머물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52화

어둠을 밝히던 조명마저 꺼진 늦은 밤.

모탄은 거리를 걸었다. 자신같이 깜깜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거리였다.

'헤슬리....'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아버지마저 자신을 포기했을지언정 헤슬리만은 여전히 곁에 남아 있었다.

그런 헤슬리를 위해, 또 자신을 위해.

모탄은 그간 미뤄 왔던 결심을 했다.

불을 밝히지 않은 집무실은 어두웠다. 모탄은 미리 준비해 온 성냥에 불을 붙였다. 조금이지만 시야가 확보됐다.

'저기 있다.'

아버지의 업무 책상 아래 숨겨진 작은 금고.

기억 속에 있는 모습과 똑같았다.

책상 위로 금고를 올린 모탄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었다.

어릴 적, 그러니까 자신을 보는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게 한숨이 아니라 웃음일 적의 일이다.

'이것 봐라 모탄. 저 멀리 중앙대륙에서 비싸게 주고 사 온 거란다. 이렇게 찰칵 하고 잠기면 아무도 풀 수 없지. 어떠냐. 신기하지?'

신기한 거라며 보여 줬던 금고는 사용자의 피를 열쇠 삼아 열리는 것이었다.

다른 방법으론 열 수 없고 파괴하기 위해선 5서클 이상의 마법을 필요로 한다 했다.

'정말 아무도 못 풀어요?'

하지만 어린 마음에 아버지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모탄은 알았다.

"열렸다."

아버지의 피로 잠군 금고는 자신의 피로도 열린다는 것을.

혈육이기 때문일까... 정확한 이유는 몰랐지만, 이유보단 열린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금고 안쪽에는 예상대로 책 꾸러미가 있었다. 아마도 비전일 터였다.

'아버지, 미안합니다.'

비전이 사라지면 큰 파장이 일 것이다.

비전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도 책임을 면치 못하겠지.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때쯤이면 자신은 이미 부족을 떠났을 테니.

'이것만 있으면 헤슬리와 함께할 수 있어.'

아버지마저 자신을 저버렸지만 헤슬리는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헤슬리도 이대로라면 곁에 있기 힘들다 했다.

그녀를 잡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가 바라는 걸 이뤄 주기로 했다.

그게 바로 이것이었다.

비전을 훔치는 것!

이건 마냥 자신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비전을 이곳에 보관한다는 걸 들킨 아버지의 잘못도 있었다.

비전을 보관한 금고를 집무실에 두다니. 이건 대놓고 훔쳐 가란 소리와 같지 않은가.

비전을 챙긴 모탄은 금고를 제자리에 놓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비전을 도둑맞았단 건 늦게 알려질수록 좋았다. 그래야 자신과 헤슬리가 더 먼 곳까지 도망갈 수 있을 테니까.

걸음을 서둘렀다. 헤슬리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사랑하는 여인이 늦은 시간에 밖에서 홀로 떨고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헤슬리!"

"쉿. 모탄 님. 사람들이 깨겠어요."

"미안. 너무 반가워서."

"뭐예요. 낮에도 보고 아까 전에도 봤잖아요."

"그래도. 헤슬리는 봐도 봐도 아름답고 좋은걸."

"어머, 참."

부끄러운 듯 모탄의 가슴을 친 헤슬리.

"여기, 이거."

"이거 설마 그거에요?"

"맞아. 그거."

그런 헤슬리에게 모탄은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이것만 있으면 둘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했다.

이제 아무 걱정 없이 둘이서 행복할 날만 남았다.

"...드디어."

"헤슬리?"

"드디어 들어왔네요."

"그렇게 좋아?"

헤슬리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선물을 받고 감정이 북받친 듯했다.

기뻐하는 그녀를 안아주기 위해 다가갈 때였다.

"그럼. 좋지. 이제야 이 못생긴 얼굴을 안 볼 수 있는데."

"뭐?"

모탄의 사고가 일시적으로 멈췄다.

멈춘 건 생각만이 아니었다.

"아...."

가슴이 뜨거웠다. 천천히 고개를 내리자 가느다란 손이 보였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잡고 있던 손이었다.

꼿꼿하게 손끝을 세운 손은 제 가슴을 파고든 상태였다. 피에 젖은 손이 현실감 없었다.

"얼굴도 못생겨, 말도 제대로 못해, 생각도 없어, 입냄새도 심해."

가슴을 관통했던 손이 천천히 빠져나온다.

"정말 최악이었어."

손이 빠짐과 함께 몸의 힘도 빠졌다.

모탄은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마지막에 한 건 해 줬네. 기다린 보람이 있어. 고마워, 머저리."

"아... 아...."

"불쌍한 우리 모탄."

헤슬리는 모탄을 비웃었다.

세상의 전부라 여겼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기분은 어떨까.

사실 별로 궁금하진 않았다. 그런 걸 알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아,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하나 더 말해 줄게."

쓸데없는 걸 궁금해하는 대신, 헤슬리는 재밌는 사실을 공유하기로 했다.

"너,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거, 알고 있니?"

모탄은 사고를 수습해 주지 않은 아버지에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버림받았다보단 계도라는 말이 어울렸다.

하지만 헤슬리는 알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 중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는 사실일 터였다.

모탄이 진짜로 제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을.

"대단한 양반이야. 괜히 황혼 부족을 이 정도 규모까지 키운 인물이 아니었어. 설마 아들의 목숨까지 판돈으로 올릴 줄이야."

"...."

놀라운 정보가 나왔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모탄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으니.

"그럼 마지막 작업을 해 볼까."

헤슬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임무를 완수해 간 자신에게 여왕님이 어떤 포상을 내리실지, 어떤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됐다.

퍽, 퍽, 퍽, 퍽.

헤슬리의 주먹과 발이 모탄의 시체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격한 싸움 끝에 죽은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물론 얕은 수에 불과했다. 자세히 살피면 정확한 사인과 전후과정 등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다만 그럴 일은 없었다.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하겠지.'

범인은 오늘 낮에 모탄과 싸웠던 이가 될 것이다.

그에겐 고마운 점이 많았다. 안 그래도 첫 만남이 신경 쓰였는데 스스로 나타나 모탄을 도발하고 궁지로 몰아넣었다.

모탄이 비전을 훔치는 덴 그의 역할이 지대했다. 거기에 모탄을 살해한 역할도 맡아 줄 것이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인물인가.

'아쉽네. 마음에 드는 얼굴이었는데.'

그의 얼굴을 떠올린 헤슬리는 모탄의 얼굴을 짓이긴 뒤 자리를 떠났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게 뒤처리를 돕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자리.

"...잔악한 년."

"결국 이렇게 됐군."

모든 사태를 지켜본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떡할 거냐. 이대로라면 뱀 부족의 손에 황혼 부족의 비전이 넘어가고 만다."

헤슬리의 잔인함에 치를 떤 로하스가 루드를 바라봤다.

지켜보자 해서 가만히 있었지만 이대로 가단 큰일 날 판이었다.

"괜찮다. 그럴 일은 없으니."

"뭐?"

"따라와라. 함께 갈 곳이 있다."

하지만 루드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의 손에 들어간 건 황혼 부족의 비전이 아니었으니, 로하스가 걱정할 일은 없었다.

루드는 긴 설명을 하는 대신 로하스를 이끌고 이동했다.

상대보다 먼저 움직여야 했다. 자칫하다간 알고도 당할 수 있었다.

"뉘시오."

루드가 로하스를 데리고 간 곳은 바치렌의 거처였다. 노크를 하자 퉁명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접니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볼일 없네. 돌아가게."

닫힌 문 너머로 축객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저번처럼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 가단 황혼 부족이 망한다는 말."

"또 그 소리인가."

"그 증거를 갖고 왔습니다. 촌각을 다투는 일입니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결국 바치렌은 속는 셈 치고 문을 열었다.

"그때랑은 다른 이로군."

로하스의 얼굴을 확인한 바치렌이 의문을 표했다. 두 명의 인기척이기에 지난번과 같은 조합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까마귀 부족의 로하스라 합니다. 미력하나마 까마귀의 눈 중 하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로하스는 눈치껏 자신을 소개했다.

"...일단 앉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루드는 조금 전 말한 증거를 꺼내 놓았다. 헤슬리를 쫓지 않았던 이유가 담긴 증거였다.

"이건!!"

"예. 비전입니다."

그것을 확인한 바치렌은 깜짝 놀랐다. 로하스도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여유롭더만. 남몰래 이런 짓을 해 놨단 말이지.'

뱀 부족의 손에 넘어간 비전은 미리 바꿔치기 한 가짜였다. 내용도 그럴듯하게 꾸며 놓았으니 가짜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언젠가 그 가짜가 그들의 숨통을 옭아맬 그물이 되겠지.'

뱀 부족이 자신들의 손에 들어온 비전이 진짜라고 믿을수록, 또 실재하는 비전을 갖고 있을수록. 그들을 옭아맬 그물은 더 튼튼해질 것이었다.

"비전을 입수하는 게 불가능하다 하셨죠. 그 말에 대한 제 대답입니다."

"...어디서 구했나. 아니, 모탄은 괜찮은가."

"...."

침묵하는 두 사람에 바치렌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비전이 여기 있다는 건 결국 모탄이 일을 벌였다는 뜻이고, 그 끝이 어떠할지는 뻔했다.

"기어코... 그리 되었나."

"헤슬리가 곧장 손을 쓸 줄은 몰랐습니다. 때문에 대처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상황이 되면 모탄을 살려보려 했다.

그의 죄라곤 정신력이 약하다는 것밖에 없었다. 환혹의 힘은 대상자를 시전자의 꼭두각시로 만들었으니, 비전을 훔친 것은 모탄의 죄가 아니었다.

"두 번째 증거는, 여기 이 사람입니다."

루드가 준비한 첫 번째 증거는 모탄이 빼돌렸던 비전이었다.

훔칠 수 없을 거란 바치렌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거.

그리고 두 번째 증거는 바로 로하스였다.

"그가 제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증명해 줄 겁니다."

로하스를 죽이지 않고 공조한 이유였다.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보고, 그 진위여부를 가려 줄 존재.

"위대하신 저희 족장님의 이름을 걸고 앞으로 할 말에 거짓이 없음을 맹세하죠."

자신의 역할을 이해한 로하스는 맹세부터 했다.

'대단한 수완이야. 과연 족장님의 피를 이었단 건가.'

비록 첫 만남은 좋지 않았지만 루드가 보여 주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 깊었다.

자신을 이리 사용할 줄이야.

자신에게 바라는 게 까마귀의 눈으로서의 역할뿐이라던 말이 떠올랐다.

"저는 오늘 저녁부터 모탄을 따라다녔습니다."

로하스는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모탄과 루드가 결투를 벌일 때도, 루드에게 박살 난 모탄이 병실로 실려 갈 때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덕분에 헤슬리가 벌이는 수작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볼 수 있었다.

"헤슬리는 실의에 빠진 모탄을 자극해 비전을 빼돌려 자신에게 갖고 오도록 유도했습니다."

모탄이 움직일 거란 사실을 깨달은 즉시 루드에게 공유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루드가 손을 보태면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후는 간단했다. 깊은 밤이 되자 모탄이 움직였고, 루드와 로하스가 그 뒤를 조용히 따라붙었다.

"비전을 건네자 헤슬리가 모탄을 죽였습니다."

바치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자코 로하스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긴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 바치렌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들 말은 잘 알았네. 우리 부족이 위험하다는 것도. 하지만 결국 이 또한 전과 같은 결론일 뿐일세. 형님께서 맡으실 일이야. 내가 나설 일이 아니지."

"말씀하신 형님에 관한 얘기도 있습니다."

바치렌을 찾은 건 지난 번 대화에 반박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을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휴이가 함께하지 못한 것도 이와 관련돼 있었다.

"현 황혼 부족 족장 모치란."

모탄의 아버지이자 바치렌의 형.

현재 휴이가 감시 중인 그는.

"뱀 부족과 내통해 비전을 빼돌린 주범이 바로 그입니다."

부족을 등진 배신자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53화

모치란이 뱀 부족과 내통했다.

그 말의 무게는 엄청났다. 비전이 뱀 부족에게 넘어갔다는 것보다도 중요한 문제였다.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겠는가."

바치렌은 루드를 노려보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모치란이다. 부족원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는 족장이 뱀 부족과 내통했다고?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러나 모탄이 비전을 훔쳐 낸 것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순간 의심했고, 어느 순간 확신했다. 모치란은 뱀 부족과 손을 잡았다.

'전생에서 헤슬리는 로하스가 막았을 거다.'

자신이 없었더라도 뱀 부족이 비전을 손에 넣진 못했을 거다. 로하스가 헤슬리를 막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 간의 실력 차가 있는 바, 헤슬리에게 숨겨 둔 수가 있더라도 로하스와 동귀어진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제노스는 결국 독에 당했지.'

그럼에도 제노스는 끝내 독에 당했다. 소크란이 주입한 황혼 부족의 비독이었다.

이는 한 가지를 의미했다. 헤슬리를 저지해도 황혼 부족의 비독이 뱀 부족에게 넘어간다는 것.

루드는 그 용의자로 한 명을 특정했다.

'족장 모치란. 그자가 범인이다.'

전생의 황혼 족장은 바치렌이었다. 둘의 나이 차가 얼마 안 난다는 걸 고려하면, 족장이 바뀐 건 무언가 일이 있었던 걸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비전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모치란과 바치렌에게 집중돼 있다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물론 심증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걸 봐 주십쇼."

루드는 품에 남겨 뒀던 나머지 것들을 꺼냈다. 바치렌은 처음 비전을 꺼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놀란 반응이었다.

"비전의 다른 권들이군."

모치란 대에 이르러 년에 한 번 비전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모탄이 비전을 훔친 과정도 짐작했다.

모탄이 그나마 비전에 접근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여러 권의 비전은 이야기가 달랐다.

"마찬가지로 금고에 있던 겁니다."

비전에 내용을 추가하기 위함이었다면 마지막 권만 필요했을 거다. 여태까지도 그렇게 해 온 걸로 알았고.

하나 눈앞엔 보란 듯이 여러 권의 비전이 있었다.

이것을 부족 비고에서 빼 왔을 리는 만무하니 결론은 하나였다.

모치란의 금고 여러 권의 비전이 있었다는 것.

'혹시나 하고 준비하길 잘했지.'

바꿔치기 할 가짜 비전을 만들 당시 몇 개나 만들어야 할지 고민했다. 내용물도 그럴듯하게 꾸며 놔야 했기에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여러 개의 더미 비전을 만들었던 게 신의 한 수였다.

"직접 확인해 봐야겠네."

바치렌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정황상 형님이 부족을 배신한 게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쉽사리 인정할 수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형님이다. 일평생 부족의 번영을 위해 노력하고 안과 밖으로 내실을 다지는 데 전념하는 이였다.

그런 형님이 뱀 부족과 내통했다니... 심지어 그리 아끼던 모탄을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직접 만나 묻고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진정하시죠."

"...흥분했군. 미안하오."

루드의 만류에 바치렌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직 해도 안 뜬 시간이었다. 모두가 자고 있을 시간. 바치렌은 차마 형수님도 계시는 자택으로 가 물어볼 자신이 없었다.

결국 모치란에게 직접 확인하기 위해선 그가 집무실로 출근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거 받으십쇼."

"이게 뭔가."

"호각입니다. 쥐고 있다가 약간 튀어나온 부분을 누르면 특수한 음역의 소리가 퍼질 겁니다. 혹 무슨 일이 생기신다면, 호각을 누르십쇼."

입술을 깨무는 바치렌에게 건넨 건 특수 호각이었다. 까마귀의 눈 부대에 지급되는 신호용 호각으로 범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높은 영역의 소리를 냈다.

해당 영역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훈련된 이들, 이곳에선 루드와 로하스만 들을 수 있는 영역의 소리였다.

"고맙소."

호각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정리하던 바치렌은 해가 뜨자 즉지 거처를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는 로하스는 착잡한 마음이었다.

"우리도 바로 움직이지."

"하, 매정한 녀석."

형제간에 피바람이 불 지경인데도 제 할 일만 좇다니. ...그러나 그렇기에 더 믿음직스러웠다.

"이제 뭘 해야 하는 거지?"

"당연한 걸 묻는군. 싸울 준비다."

* * *

"바치렌 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비키시오. 형님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업무를 보던 모치란은 밖에서 들리는 소란에 안경을 벗었다.

"무슨 일인가."

"바치렌 님께서 막무가내로."

"들여보내게."

모치란은 제 동생을 바라봤다.

자신과 닮은 구석이 많은 녀석이었다. 똑똑하고 재능도 탁월했다. 연구와 개발의 측면에선 자신 이상의 실력자였다. 어린 시절에는 녀석에게 족장의 자리를 양보할까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족장이 되기로 마음먹은 건, 동생에게 있는 결정적인 약점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냐. 아침부터 소란을 피우고."

"확인할 게 있어서 왔소이다. 형님."

"흠."

바치렌의 안색이 안 좋았다.

"자네는 나가있게. 사람들도 물려 주고. 형제간에 잠시 이야기가 있는 듯하니."

비서를 물린 모치란은 바치렌의 안색을 살폈다.

묘하게 붉은 얼굴과 흔들리는 눈동자, 조금씩 떨리는 몸.

그것들은 무언가를 깨닫게 했다.

"그래. 할 말이란 게 뭐냐."

"정말이오?"

"무어 말이냐."

"형님이 뱀 부족과 손을 잡은 게, 사실이냔 말이오."

"아침부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뱀 부족과 교류를 시작한 게 언제 적 일인데."

"형님!"

쿵! 바치렌이 탁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모치란이 바치렌의 상태를 보고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바치렌도 모치란의 대답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를 형님이 아니다.

정말 무고했다면... 이렇게 답하지 않았을 형님이다.

"정말... 형님께서 우리 부족을 뱀 부족에게 팔아넘긴 게 맞았구려."

"그래. 내가 그러했다."

모치란은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았다. 모든 걸 알고 온 동생에게 거짓말을 해 봤자 추한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자신의 결정에는 이유가 있었고 뜻이 있었다. 결코 추한 모습처럼 보일 생각이 없었다.

"어째서 부족을 팔아넘긴 거요. 아니, 그 전에 모탄이 죽었소. 형님 아들이 죽었단 말이오."

"그리 됐겠지."

"뭐, 뭐요...?"

책상에 팔을 얹은 채 손깍지를 낀 모치란은 턱을 괬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하나하나 설명하자니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았지만 자신의 형제를 위해 그 정도 수고쯤은 들일 수 있었다.

"어느 날 모탄의 곁에 헤슬리란 아이가 있더구나."

모치란은 헤슬리의 목적이 모탄을 통해 황혼 부족에 균열을 내고자 함이란 걸 바로 깨달았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놀랍게도 괘씸하거나 불쾌하다 따위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감탄과 탄복이었다.

뱀 부족의 야욕은 익히 들었다. 그래서 알고 있다 생각했다.

까마귀 부족과 혼인 동맹을 맺고, 그 결실이 빛을 보는 지금에 이르러 까마귀 부족 다음가는 성세를 맞이한 부족.

그럼에도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탐하는 부족.

하지만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과, 실제 피부로 느끼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뱀 부족의 욕망과 야욕을 알고 있다 여겼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조차 되지 않는 작은 부분이었다.

"이전보다 조금 나아졌다고 깔깔 웃고 만족하는 우리와는 달랐지."

이제야 겨우 살 만해진 황혼 부족이다. 한데도 부족원들은 과거보다 낫다는 이유 하나에 만족하고 안주했다.

"답이 없어."

자신들보다 훨씬 대단한 뱀 부족도 저러는데, 자신들은 어떠한가.

고개가 저어졌다. 그래서 헤슬리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과, 자신이 그리는 미래에 대해.

"하여 그랬다."

헤슬리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뱀 여왕과 소통하게 된 모치란은 그들의 손을 잡았다.

바깥대륙을 집어삼키겠다는 뱀 부족의 욕망은 모치란이 지향하는 삶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었다.

해서 모치란은 황혼 부족을 넘기기로 했다. 뱀 부족은 그런 모치란에게 미래, 자신들의 옆자리를 약속했고.

"그래. 이해할 수는 없으나 납득해 보겠소. 형님이 나와 다른 사람이란 건 진작 알고 있었으니."

어린 시절부터 느끼던 바였다.

형님과 나는 다르구나.

남들은 두 형제가 쏙 빼닮았다 했지만, 정작 두 사람은 서로가 자신과 다르단 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모탄은. 그 아이는 어째서 죽어야만 했던 거요. 형님의 아들이지 않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아이가 적임자였으니."

"뭐요?"

"만약의 경우 족장이 부족을 팔아먹으려 했다는 게 들켜서야 되겠느냐. 아직 황혼 부족의 족장으로서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말이다. 그러니 모탄을 내세웠다. 자연스럽게 비전을 넘기기엔 그만한 녀석이 없었거든."

모탄은 비전을 넘기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포장하는 데 최적의 인물이었다.

비전을 넘긴 게 걸려도 괜찮을 인물.

그러면서 비전을 빼돌릴 수 있을 법한 인물.

그 마지막을 죽음으로 장식해도 손해가 없을 인물.

아무리 생각해도 모탄밖에는 없었다.

그래서였다. 모탄이 죽은 건.

"그 끝에 죽을 걸 알면서도... 그러했단 말이오?"

"그래. 일평생 속 썩이고 한심하게 살던 녀석이다. 마지막 순간이라도 아비에게 도움이 됐다면 그 녀석도 만족하겠지."

모탄은 죽어야만 했다. 헤슬리가 죽이지 않았다면 자신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부족의 비전을 외부로 빼돌린 죄는 컸다. 사형은 확정이었다.

"헤슬리 덕에 직접 손을 쓰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지."

아무리 버린 자식이라지만 자신의 핏줄을 제 손으로 죽이는 건 입맛이 썼다.

"할 이야기는 끝났나?"

"...끝났소."

"그러냐."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대치했다.

"난 항상 네 녀석을 뛰어나다 생각했다."

침묵을 깨고 나온 건 칭찬의 말이었다.

"사람들은 항상 내게 족장감이라 말했지만 나는 너 또한 족장이 될 만한 자질을 지녔다 생각했다. 내가 아니라 네가 장자였다면 족장이 되는 건 너였을 거다. 나는 그만큼 너를 고평가했다. 안 그랬으면 너에게 족장의 자리를 넘겨줄까 고민하지도 않았겠지."

그러나 족장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일전에 한 번 말했었지. 기억하느냐?"

"...."

"기억하나 보구나. 그때도 말했다만, 넌 정이 너무 많다. 쓸데없이."

모치란이 족장의 자리를 넘기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사람들은 바치렌이 무정하다고, 인간의 정을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몇몇은 바치렌이 홀로 지내는 진짜 이유를 알았다.

사람들이 많은 모임에 나가지 않는 것도, 사람들과 친분을 쌓고 교류하는 걸 피하는 것도. 모두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정이 많아서.

혹여 그들에게 너무 많은 정을 내줄까. 그로 인해 나중에 문제가 생길까.

"언젠가 그러한 마음이 문제가 될 거라 말했지. 그게 오늘인 것 같구나."

바치렌은 모탄과 달랐다. 똑똑하고 쓰임새가 많았다. 하여 가능한 최대한 써먹으려 했다.

만약 바치렌이 모든 걸 알아차렸더라도 지금처럼 자신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다면 모른 척 넘어가 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리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바치렌도 처분해야 했다.

"크흡!"

바치렌의 목을 움켜쥐었다. 숨통을 조인 손에 바치렌이 발버둥 쳤다. 하루 종일 업무만 보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는 엄청난 악력이었다.

끅, 끄윽....

숨이 막히며 신음이 흘렀다. 아니, 이 신음은 정말 숨이 막혀서 때문인가?

언젠가 자신이 지닌 따뜻한 마음이 독이 될 거라 했던 말을 기억한다. 지금처럼 살아온 건 그 말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치란의 마음이 이러한 것이라면....

'황혼 부족의 족장이 되십쇼.'

자신을 찾아왔던 젊은 청년의 말이 떠오른다.

황혼 부족의 족장이 되라던. 그래야만 한다던.

그의 말이 맞았다. 이대로 가면 황혼 부족은 망한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마침내 바치렌은 족장이 되기로 결심했다.

삐이이이익-

범인에겐 들리지 않을 영역의 소리가 길고 빠르게 퍼졌다.

그와 거의 동시, 세 사람이 난입했다.

"그대들은."

그 면면을 확인한 모치란이 인상을 찡그렸다.

"결심은 하셨습니까."

"그래. 자네의 말대로야. 내가, 족장이 되겠네."

"좋은 생각입니다."

루드는 바치렌을 부축했다.

대답을 들었으니,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였다.

루드가 모치란을 바라봤다.

"이놈들 봐라."

그 시선을 받으며, 모치란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54화

여명 부족의 증패를 들고 왔던 두 녀석에 처음 보는 놈까지.

바치렌이 모든 상황을 깨닫고 찾아온 게 빠르다 싶었는데 경위를 알 것 같았다. 저 녀석들이 정보를 제공했으리라.

"걸리적거리는군."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시끄럽고 냄새나는 녀석들의 증패를 갖고 있는 것만 해도 짜증나는데 자신의 일까지 방해했다. 심히 거슬렸다.

'결국 문제가 됐나.'

길에서 마주친 자신을 경계했다는 헤슬리의 말에 두 사람을 직접 만났던 모치란이었다. 제 발로 찾아온 녀석들 덕분에 만남도 자연스러웠다.

당시의 만남에서 헤슬리의 출신과 속셈을 간파하고 경고하는 모습에 놀라긴 했으나 그뿐. 결국 자신에겐 닿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오판이었군.'

하지만 아니었다. 녀석들은 자신이 뱀 부족과 손을 잡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심지어 바치렌을 통해 자신을 압박하기까지.

놀라운 수완이었다. 바치렌을 창구로 사용한 건 타 부족의 일에 관여하기 위함이었을 터.

"오히려 잘됐군."

그러나 그들은 알까.

그것이 그들의 발목을 잡는 자충수가 되리란 걸.

"경비!"

"무슨 일입니까!!"

순식간에 경비병들이 도착했다. 평소와 다른 바치렌의 분위기에 비서가 미리 대기시켜놨던 이들이었다.

"반역일세. 바치렌이 여명 부족과 손잡고 족장이 되기 위해 내 목숨을 노리고 있네. 저들을 구속하게나. 반항하면 죽여도 좋네."

경비병들은 당황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건 알았다. 집무실에서 큰 소리가 났고 자신들을 부른 모치란의 외침이 있었으니.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일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반역이라니!

심지어 다른 부족의 이름까지 나왔다.

"정말입니까?"

"뭣들 하오."

경비병들이 망설였다. 모치란이 허언을 뱉을 사람이 아니란 걸 안다.

하지만 바치렌도 반역을 할 인물이 아니었다.

많은 교류는 아니었지만 때때로 오갈 때 바치렌이 보여 준 모습은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그때였다.

경비병들을 대기시키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비서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 얼굴을 확인한 모치란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비서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모, 모탄 님이 살해당하셨습니다!"

예상대로 비서가 가져온 정보는 모탄의 죽음이었다.

분위기를 단숨에 반전시키는 내용. 타이밍도 실로 절묘했다. 죽어서야 도움이 되기 시작한 아들놈이었다.

"그게 정말인가...."

모치란은 순식간에 몰입했다. 바치렌을 죽일 듯이 쳐다봤다.

"내 아들이기도 하지만 네 조카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작 족장 자리를 위해 그 아이를 죽인 게냐! 이깟 족장 자리 하나 때문에!"

"그게 무슨...!"

"그래. 네가 한 짓이 아니라 하겠지. 허나 저들의 손을 빌렸더라도 모탄을 죽인 건 네놈이다. 바치렌!"

눈물이 떨어졌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눈물은 피눈물인 법이었다. 격하게 감정을 터뜨린 모치란의 눈에서 붉은색 눈물이 흘렀다.

"당장 저들을 제압하시오."

크지 않은 목소리. 집중하지 않으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힘과 분노는, 결코 작지 않았다. 들끓는 분노와 격양된 감정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반역자들을 잡아라.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경비대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비병들이 달려들었다.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보기 좋게 당했군.'

루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모탄의 죽음이 하필 이 타이밍에 알려질 줄이야. 곧장 그걸 이용한 모치란의 기지도 대단했다.

자식을 잃고 피눈물 흘리는 아비의 말을 믿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될까. 적어도 이곳엔 아무도 없었다.

머뭇거리던 경비병들을 단숨에 제 편으로 만든 한 수였다.

"죽이면 안 된다."

상대가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지라도 자신들은 그럴 수 없었다.

최대한 충돌을 피해야 했다. 그들을 해하는 순간 명분 싸움에서 순식간에 밀릴 터였다.

로하스와 휴이는 달려드는 경비병들을 제압했다. 기절한 경비병들이 발밑에 쌓여 갔다.

문제는 발밑에 쌓이는 수보다 들이닥치는 경비들의 수가 많다는 점이었다.

소식이 알려지며 모여든 병사들은 집무실을 가득 채운 걸로도 모자라 건물 밖을 둘러싼 상태였다.

'이제 어떡할 거냐.'

병사들 뒤로 물러선 모치란은 미소를 지었다. 루드 일행에게만 보이는 각도에서였다.

'명분도 힘도 전부 나에게 있다.'

제 자리를 노린 동생에게 아들을 잃었다. 슬픔은 사람들의 동정을 불렀고, 동정은 곧 분노를 야기했다.

다른 게 명분이 아니었다.

타인이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명분이었다.

더군다나 족장으로서의 권한도 전부 제게 있었다. 병사를 움직이는 것. 적을 규정하고 상대하는 것. 전부 바치렌에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치란이 모르는 점이 있었다.

바치렌에게는 있지만 모치란에겐 없는 것도 있다는 점이었다.

'슬슬 움직여도 되겠군.'

씨익.

루드는 병사들 뒤에서 미소 짓는 모치란에게 똑같이 미소 지어 보였다.

집무실에 가득한 경비병. 그들의 모습에 모인 숱한 군중들.

준비는 끝났다. 상황을 역전시킬 순간이었다.

"금고는 여전히 같은 곳들에 있나?"

"뭐...?"

이해할 수 없는 말. 하지만 그 뜻을 알아듣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첫 번째 금고는 여기였지."

순식간에 도약해 검을 휘두른다. 집무용 책상 뒤쪽의 벽을 향해서였다.

서걱-!!

벽의 일부를 대처하던 금고가 갈라지며 내부를 드러냈다.

금고가 갈라지는 충격에 보관돼 있던 서류가 날아다녔다.

"업무에 관련된 중요 서류들을 보관하는 금고더군."

족장으로서 처리한 중요 서류들. 부족의 경제나 다른 부족과의 교류, 거래 등에 관한 기밀 문서들을 보관한 금고였다.

루드는 멈추지 않았다. 다음은 책상 아래였다. 책상이 두 동강 나며 아래 숨겨진 작은 금고가 나타났다.

비전을 담아 두었던 금고였다.

"여기에는 비전을 보관했지."

어느새 주위는 조용해진 상태. 단숨에 벽을 가르고 책상을 쪼개는 모습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모두는 저도 모르게 루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

"이쯤 되면 이 다음이 무엇일지 느낌이 오나."

집무실의 금고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마지막 남은 하나. 모치란을 제외하면 누구도 모르는 진짜 비밀 금고가 남아 있었다.

"족장이 아닌, 개인 모치란으로서 사용하는 비밀 금고."

그것의 위치는.

루드와 모치란의 시선이 동시에 위로 향했다.

"정답이야."

검도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오러를 머금은 검이 천장을 쪼갰다.

"웁쓰. 다들 조심."

"이런 걸 할 거면 미리 얘기하고 하라고."

휴이와 로하스가 바로 반응했다. 산산조각 난 천장과 금고의 파편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멀리 쳐낸 것이다.

"족장으로서의 금고에는 부족의 중요 서류를. 아티팩트형 금고에는 부족의 비전을. 그렇다면 인간 모치란으로서의 금고에는 무엇을 넣어놨을까."

"모치란 님. 이게 대체... 뭡니까?"

천장의 비밀 금고에 보관된 건 여러 가지였지만,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건 첫 번째 금고와 마찬가지로 서류더미였다.

다만, 공적인 것이 아니라 모치란 개인의 비밀이 담긴 것이란 차이가 있었다.

바치렌은 동요가 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떨어진 서류에 담긴 내용을 짐작하는 건 쉬웠다.

타인을 믿지 않는 모치란의 성정상 뱀 부족과의 거래에서도 증거물을 만들어 놨을 게 분명했다.

"다들 헤슬리를 기억할 거요."

"그러고 보니 그녀가 안 보여."

바치렌의 말에 사람들은 수긍했다. 모탄과 한몸처럼 붙어 다니던 헤슬리다.

지금쯤이라면 그녀에게도 모탄의 소식이 들어갔을 시각. 하지만 헤슬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헤슬리는 뱀 부족의 첩자였소. 그녀의 임무는 모탄을 홀려 우리 부족의 비전을 빼돌리는 것이었지."

"그렇다면...."

"모탄을 죽인 건 헤슬리요. 그리고 그걸 알면서도 묵인해 준 게 모치란이고."

루드는 떨어진 서류 하나를 바치렌에게 건넸다. 그것을 확인한 바치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코프레이 비서. 괜찮다면 읽어 보시겠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담긴 서류 같은데. 그대가 읽고 판단하시오."

조심스레 팔을 뻗어 서류를 인도받은 비서는 천천히 내용을 읽었다.

"황혼 부족의 족장 모치란은 뱀 부족에게 황혼 부족을 넘긴다. 단, 그 기한은 오 년을 넘지 않도록 한다."

"뱀 여왕 아리스테는 모치란이 황혼 부족을 넘길 시 뱀 부족의 원로 자리를 제공한다. 반역에 준하는 죄가 아닌 이상 제공한 원로 자리는 박탈하지 않는다."

"황혼 부족을 넘기는 일은 다음과 같은 절차를 따른다."

비서는 더 이상 읽지 못하고 서류를 내렸다. 힘없이 늘어진 팔이 그의 심경을 대변했다.

"바치렌 님의 말이 사실이었군요."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이들도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주워 읽기 시작했다. 문서의 세세한 내용들은 달랐지만 말하는 바는 같았다.

"부족을 팔아넘겼어."

"족장님이 어떻게... 아니 왜...."

모치란은 족장이었다. 황혼 부족의 일인자인 그가 무엇이 아쉬워 부족을 팔아넘긴단 말인가.

모두의 시선이 모치란에게 향했다.

지금이라도 아니란 대답이 나오길. 오해라는 말을 하길. 전부 설명해주겠다고 얘기하길 바랐다.

"...난감하군."

모치란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난감했다. 상대를 구석에 몰았다 생각하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던 게 되려 스스로 자충수를 두는 꼴이었다니.

'비밀 금고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일반적이라면 금고형 아티팩트를 발견한 시점에서 더 이상 금고가 없다 생각했을 것이다.

공무용으로 사용되는 집무실의 메인 금고와 개인용으로 사용되는 아티팩트 금고. 공과 사의 금고를 모두 찾았기 때문이다.

일부러 금고들을 찾기 쉬운 곳에 위치시킨 이유도 여기 있었다. 더 이상 금고가 없다는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한 장치였다.

한데 천장의 비밀 금고까지 간파했을 줄이야.

'아쉽군.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중용했으련만.'

이 정도로 완벽하게 당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적이 아니었다면 수하로 두고 오래오래 써먹었을 만한 인재였다.

여명 부족의 증패를 갖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능력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봐줄 수 있었다.

천장의 비밀 금고는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도 어렵지만 여는 게 훨씬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사용자의 마력패턴을 통해 개폐되는 최상급의 금고.

'마스터급이 아닌 이상 쉽게 열 수 없을 거라 했었는데.'

금고를 제작할 당시 마이스터에게 들었던 말을 기억했다. 강제로 열려면 소드마스터 정도는 와야 할 거라 했었다.

그렇다는 말은

'저 녀석이 소드마스터라는 건가.'

그렇지 않더라도 소드마스터에 준하는 능력을 갖췄다는 얘기.

사실 소드마스터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안 그래도 궁금했지. 마스터에게도 내 독이 통할지.'

모치란은 눈을 감았다.

"모치란 님!"

해명을 요구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웠다.

"말하면, 믿어 주는가?"

이곳의 모두는 이미 자신에 대한 의혹을 가졌다. 뱀 부족과 나눈 서류도 보았고, 자신이 모탄의 죽음을 눈감았다는 사실도 들었다.

해명한다 해도, 설령 이들이 믿겠다고 해도, 이는 언젠가 화로 돌아올 게 분명했다.

그러니 모치란은 해명하고 설득하는 대신 다른 수를 쓰기로 했다. 아직 상황을 반전시킬 방법이 하나 남아있었다.

"바깥의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겠지."

이곳의 모두를 죽이면 진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결국 바치렌을 죽여 입을 막으려던 것과 같았다. 그저 그 수가 늘어났을 뿐이다.

"사람들을 데리고 빠져라. 특히 비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려야 한다."

모치란의 속셈을 눈치 챈 루드가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모치란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이미 늦었음을 모르고 발버둥치는 꼴이란, 하찮은 벌레 같았다.

"어리석은 시도다. 모든 건 진즉 시작됐으니."

그 말이 신호란 듯, 경비병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55화

무색무취의 독이 퍼졌다. 환각과 착란을 동반한 신경계통의 독이었다.

퍼지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은밀하단 장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모치란만의 독이었다. 독자적인 배합으로 만들어 비전에도 남기지 않은 독. 시중의 해독제로는 해독할 수 없었다.

그런 독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피부를 가리고 호흡을 억제해라."

루드는 즉시 대처에 나섰다.

'아마도 연기 형태의 독.'

호흡기나 피부접촉을 통해 작용할 것이다. 그 침투를 완전히 막는 건 불가능. 그렇다면 상황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모치란을 제압해야 했다.

빠른 속도로 쇄도하는 루드. 모치란도 곧장 반응하며 거리를 벌리려 했다.

독술사는 마법사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거리 유지가 중요하단 점도 그중 하나였다.

독과 마법이 공격 수단이자 방어 수단인 그들. 하여 상대의 접근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저지하느냐는 그들의 실력을 판단하는 잣대였다.

"어딜!"

루드가 접근하자 모치란은 준비해 뒀던 독을 뿌렸다. 안 그래도 다가오길 기다리던 차였다.

가루 형태의 독이 흩날리고, 독에 닿은 사물이 모조리 녹아내렸다. 인체에 닿으면 피부는 물론 뼈까지 녹일 정도의 독성이었다.

하나 모치란이 루드의 쇄도를 예상했던 것처럼, 루드 또한 모치란의 행동을 예상하고 있었다.

독에 닿기 직전 제동을 건 루드는 곧장 측면으로 선회했다.

뛰어난 독술사라면 거리 유지를 위한 다양한 수단을 갖고 있는 바. 이 싸움의 관건은 누가 먼저 서로의 패를 털어 내고 유리한 거리를 만드느냐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열렸다.'

족장답게 대단한 독을 보유한 모치란이었다.

하지만 족장이란 위치 때문일까, 전투에 있어선 어딘가 아쉬운 판단들이 보였다.

루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독을 뿌린 모치란이 또 다른 독을 준비하는 사이, 찰나에 열린 공간을 비집고 들어갔다.

"됐다!"

"조심하게!"

그러나 그 모습을 본 휴이와 바치렌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정보의 차이 때문이었다.

휴이는 거리를 좁혔으니 루드의 승리를 확신했지만, 바치렌은 모치란이 평범한 독술사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형님은 독인일세!"

"!!"

거리 유지가 중요하다는 것 외에도 독술사와 마법사 간엔 공통점이 더 존재했다.

거리 유지가 중요하지만, 몇몇에겐 거리가 갖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

상대와의 거리가 멀든 가깝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펼치며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자들에겐 거리의 의미가 없었다.

모치란도, 그러한 이들 중 하나였다.

독을 다루는 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독인의 경지.

독을 제조하고 사용하는 걸 넘어, 본인 스스로의 몸에 독성을 부여해 스스로가 곧 독과 마찬가지인 경지였다.

"걸렸구나."

독인의 가장 큰 특성이라면 본인이 곧 독과 같다는 점.

모치란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유인하기 위해 열었던 통로는 닫은 지 오래. 사방도 이제까지 뿌려 놓은 독의 영향권이었다. 퇴로는 없었다.

상대를 가뒀단 걸 확신하자, 모치란은 본색을 드러냈다.

이전까지의 어설프던 모습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간결한 동작과 하나하나 위협적인 움직임. 루드의 숨통을 끊기 위해 서서히 포위망을 조여 가는 모치란이었다.

'....'

루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얼굴을 노린 주먹을 피했는데도 뺨이 화끈했다. 슬쩍 만져 보니 녹아내린 걸 알 수 있었다. 스치지도 않았건만 가까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피부가 녹아내린 것이다.

'모치란이 독인일 줄이야. 보기 좋게 당했군.'

이대로는 안 좋았다. 그가 파놓은 덫에서 근접 박투를 벌일수록 손해 보는 건 자신이었다. 안 그래도 몸이 둔해지는 게 느껴졌다.

"알아서들 피해라."

판을 바꾸겠다는 결심과 함께 나지막이 경고했다.

"...다들 튀어."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휴이였다. 비서와 경비병들을 들쳐 멘 휴이는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로하스도 눈치껏 바치렌을 챙겨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탈출과 함께 검을 휘두른 루드.

서걱-, 콰가가가가가각!!!!

그 여파는 엄청났다. 벽에 아로새겨진 검흔은 곧 벽을 갈라내고 새로운 출입구를 만들었다.

건물 바깥과 직통하는 문이었다.

"이런 미친 작자를 보았나."

일검에 건물을 무너트린 위용에 모치란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짓을 할 거라고, 이런 짓이 가능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집무실이 넓어졌다고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이죽거린 루드는 호흡을 골랐다.

이걸로 모치란이 설계한 판은 깨부쉈다. 집무실에 가득했던 독도 대부분 날아가 효과를 잃었을 것이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모치란 님! 괜찮으십니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외벽이 붕괴하며 드러난 내부의 모습.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질겁했다.

그 소리를 들은 모치란은 조소했다. 자신이 만든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물을 무너트렸으나, 외려 상황을 악화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족장과 정체불명의 인물. 이 모습이 대중들에게 어찌 보일지, 뻔하지 않는가.

"역적들이네. 바치렌이 여명 부족에서 보낸 암살자와 합심해 나를 죽이려 했네."

집무실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변명. 하지만 상황이 달랐다.

이들은 자신이 뱀 부족과 내통한 걸 몰랐다. 그들에게 보이는 건 공격받고 있는 자신과, 자신을 공격하는 정체 모를 괴한.

이용하는 건 누워서 떡을 먹는 것보다 쉬웠다.

"이런 씹어 죽일."

"감히 족장님을 해하려 해?"

모두가 분개했다. 그러나 루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저들 모두를 신경 쓰는 것보다 모치란 하나를 신경 쓰는 게 더 중요했다.

'동급의 강자다.'

직전까지의 과정을 복기한다.

모치란이 보였던 움직임, 수싸움, 전투 방식...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무武를 발산하고 다루는 방식은 달랐지만 자신과 동급의 강자란 결론이 나왔다.

'독인인데다 오러량도 대단하다.'

아까 전 손을 섞었을 때 느꼈다. 활용은 떨어질지 몰라도 품고 있는 오러량만큼은 대단했다. 양만 따지면 마스터라 해도 믿길 정도였다.

간간히 들어간 자신의 공격도 오러를 기반으로 한 신체 능력으로 버텨 낸 모치란이었다.

'까다롭군.'

독인이라는 점도 어려웠다. 독이나 다름없는 경지. 전투 과정이 길어질수록 불리해졌다.

접근해서 공방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독을 들이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루드!"

"사람들을 막아 줘라. 알고 있겠지만 절대 죽이거나 큰 부상을 입혀선 안 된다."

"맡겨 둬."

어느새 돌아온 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성난 군중. 모치란의 간사한 혓바닥에 놀아난 이들일 터였다.

저들이 루드의 싸움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이제 2차전인가?"

모치란은 자신만만한 기색이었다. 루드가 보여 준 모습은 분명 위력적이었으나 자신도 여력을 남겨 둔 상태였다. 주변 상황도 유리했으니 불안에 떨 이유가 없었다.

"이쯤에서 물러나면 목숨을 살려 주지. 쫓지도 않겠어. 바치렌만 넘기게."

"왜. 그러면 수습할 수 있을 것 같나?"

"물론이지."

모치란은 상황을 일단락 짓고자 했다. 전투를 지속해봤자 득 볼 게 없었다.

괜히 녀석들에 의해 자신이 부족을 팔아넘겼다는 사실이 드러나거나 의혹이라도 생긴다면 낭패. 녀석들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지금의 상황을 빠르게 수습할 수 있다면 그게 이득이었다.

"글쎄."

하지만 그건 모치란의 입장.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나?"

루드의 입장은 달랐다.

애초에 목숨을 살려 주겠다는 조건은 강자가 약자에게 쓸 수 있는 말.

"반대로 제안하지. 순순히 죄를 자백한다면 깔끔하게 죽여 주겠다."

그러니 그런 제안을 하는 건 모치란이 아니라 자신이어야 했다.

"어리석은 놈."

"두고 보자고. 누가 어리석은 놈인지."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이 재차 격돌했다.

서로의 패를 어느 정도 확인한 상황. 전투의 양상이 이전과는 달랐다.

모치란은 숨김없이 자신의 능력과 독을 활용했다.

퉤!

눈을 노리고 뱉은 침이 루드의 팔뚝에 막혔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팔뚝의 살점이 타들어 갔다.

생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도 루드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그 대신 검을 뻗었다.

모치란의 옆구리가 가로로 찢어졌다.

"!!"

후속타를 넣을 기회였음에도 루드는 물러서는 걸 택했다. 검을 살피자 매캐한 연기가 보였다.

"흐... 아깝군."

찢어진 모치란의 옆구리에서 피가 흘렀다. 피가 떨어진 땅은 거멓게 죽은 상태였다.

새삼 독인이란 경지가 실감됐다. 스스로가 곧 독이라더니, 침과 피에도 대단한 독성이 녹아 있었다.

'피부를 녹이고 살점을 태우는 침에, 검을 부식시키고 땅을 죽게 만드는 피라.'

결국 루드는 미뤄 뒀던 패를 꺼내들기로 결심했다.

"어쩔 수 없군. 녀석과의 싸움까지 최대한 아껴 두고 싶었건만."

목에 걸린 여명의 잿불에 마력을 불어넣는다.

존재만으로 일대의 기온을 높일 정도로 강한 화기火氣를 품은 여명의 잿불.

거기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단순히 화기가 강해지는 것 말고도 다른 효과가 있었다.

"그건! 그게 왜 네놈 손에 있는 것이냐!"

모치란이 기함했다.

예로부터 불꽃은 정화의 기운을 담은 힘.

마력을 머금은 여명의 잿불은 삿된 것들을 막아 주었다.

독 또한 마찬가지. 여명의 잿불 앞에서 일반적인 독은 독성을 잃고, 극독은 일반적인 수준의 독으로 전락했다.

황혼 부족과 여명 부족의 사이가 안 좋았던 것도 이러한 힘의 영향 때문이었다.

'속전속결이다.'

다만 여명의 잿불이 품은 힘은 무한하지 않았다.

사용을 망설인 이유였다.

"빠르게 가지."

여명의 잿불을 꺼내든 이상 속도를 내야 했다.

잿불의 힘 아래 주변의 온도가 높아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여태까지 모치란이 하독했던 독이 힘을 잃어갔다. 타들어 갔던 팔뚝에선 새 살점이 돋았고 검게 죽은 땅엔 다시 생기가 돌았다.

'위험하다.'

모치란의 본능이 소리쳤다.

지금 상태의 녀석은 위험하다.

자칫하면 죽는다!

그 대목에서, 모치란 또한 하나의 결심을 했다.

숨겨 두었던 비장의 수.

본인을 제외하곤 누구도 본 적 없는 그 모습을 꺼내들기로 한 것이다.

상황을 수습하고 뒷일을 도모할 때가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 뭐든 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해방. 만독지화 萬毒之化."

커맨드와 함께 모치란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흰자가 사라진 검은 눈은 곧 붉은 빛을 발광했다.

신체 전반도 변형됐다. 크게 보면 사람의 형태였지만 자세히 보면 슬라임처럼 흘러내리는 반물질의 모양새였다.

'...!!'

그러한 변화를 느낌과 동시, 루드는 모치란을 베었다.

상대가 수를 쓰기 전에 죽이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시도는 허사로 돌아갔다.

루드는 모치란을 보았다.

걸음을 딛을 때마다 흘러내리는 점액질. 내딛는 발걸음에 녹아내리는 대지. 몸 주위로 피어나는 검은 연기와 숨결에마저 담긴 독성.

모치란은 독인을 넘어 독 자체가 된 모습이었다.

"이 꼴을 보이게 만들다니. 죽여 버리겠다!"

여명의 잿불이 잠재웠던 독성이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돋아나던 살점은 그대로 문드러졌고, 땅이 썩어 갈라졌다.

뿐만 아니었다. 모치란의 존재가 주변을 죽음의 영역으로 바꾸고 있었다.

"저게 뭐야..."

"허으, ...허억."

그 범위는 근방의 일대 전체.

소란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신음을 토하며 쓰러졌다.

휴이와 로하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름의 경지를 쌓은 그들이었으나 근방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자칫 정신을 놨다간 금방이라도 기절할 위기였다.

그 가운데, 오직 루드만이 여전히 모치란과 마주하고 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56화

둘 모두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건 나다.'

괴이한 형태로 변한 모치란이 내뿜는 독은 지독했다. 내딛는 걸음에도, 내뱉는 호흡에도, 전부 극독이 섞여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독성이 짙어질 게 당연한 상황.

독을 견딜 수 있는 지금 처리해야만 했다.

"죽어라!"

모치란 또한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만독지화의 힘을 유지하는 건 그에게도 부담이었다.

또 지금 모습을 본 사람이 늘어서 좋을 것도 없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은 두 사람이 격돌했다.

위에서 아래로 찍힌 모치란의 주먹.

콰앙! 주먹이 꽂힌 땅에 작은 크레이터가 생겼다.

어마어마한 근력이었다. 모습이 변하며 독 외에도 여러 힘이 생긴 듯했다.

다만, 갑자기 생긴 힘을 제어하는 게 어려워 보였다.

몸을 틀어 피해 낸 루드는 사각을 파고들었다.

목표는 방금 내지른 오른팔.

서걱-!!

잘린 팔이 떨어진 땅에서 엄청난 악취가 풍겼다.

'큭.'

단순한 악취가 아니었다. 조금만 흡입해도 폐를 굳게 할 정도로 유독했다.

루드는 호흡을 멈추고 없어진 팔 안쪽을 파고들었다. 거리가 줄어들며 루드의 안색이 보랏빛으로 변했다.

여명의 잿불이 실시간으로 독성을 해소했지만, 사라지는 것보다 쌓이는 독성이 더 많았다.

'그만 끝내자.'

끝내 모치란과의 거리를 0으로 만든 루드. 허전해진 모치란의 팔 안쪽으로 길게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쿨럭!"

루드는 피를 토했다. 격한 기침을 따라 파묻혔던 건물의 잔해가 떨어졌다.

'어떻게 된 거지....'

엄청난 충격에 일순간 시야가 점멸했다.

분명 확실한 기회였다.

괴물처럼 변한 모치란의 독과 신체능력은 분명 대단했지만 갑자기 얻은 힘이기 때문인지 컨트롤이 미숙했다.

그것을 노려 팔을 잘랐고 그 안을 파고들었다. 마무리만 남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직전, 무언가가 자신을 날려 버렸다.

"끄으...."

아직까지도 골이 울렸다. 뇌가 흔들린 까닭인지 속도 메스꺼웠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루드는 그것이 단순히 머리를 맞았기 때문만은 아니란 걸 깨달았다.

퉤. 뱉어 낸 피의 색이 새까맸다.

"...이건 좀 사기 같은데."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모치란의 모습이 보였다.

어이없게도, 잘렸던 오른팔이 보란 듯이 붙어 있었다.

'아니, 붙인 게 아니다.'

잘라 낸 오른팔은 여전히 땅에 떨어져 있었다. 오른팔이 잘린 자리에 새로운 오른팔이 생겨났다는 의미였다.

"인간이 아니군."

인간을 뛰어넘은 재생력.

재생의 대명사인 트롤이라 할지라도 잘린 팔을 수복하는 능력은 없었다. 잘리자마자 붙인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모치란은 당연하다는 듯 오른팔을 재생시켰다.

"당했군."

오른팔을 내준 건 모치란의 의도였으리라.

모치란이 자신의 의도에 걸렸다 생각했건만 역으로 자신이 모치란의 의도에 걸렸던 것이었다.

조금 전 자신을 공격한 건 새로 생긴 오른팔일 터.

방금 같은 공격을 위해 오른팔을 내주고 그곳으로 유인한 게 분명했다.

"루드. 괜찮아?"

휴이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루드의 앞에 섰다. 당장이라도 모치란과 공방을 나눌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물러나라. 내가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루드는 휴이를 만류했다.

상성이 너무 안 좋았다. 단순한 독인이었어도 상성에서 밀리는 휴이였다. 지금 상태의 모치란은 더 그랬다. 다가서자마자 죽을 뿐이었다.

"자네들!"

어느 순간 사라져 보이지 않던 바치렌이 돌아왔다. 무언가를 가득 들고 있는 상태였다.

"중화제일세. 해독까지는 불가능하겠지만 시간을 벌어 줄 수는 있을 걸세."

바치렌도 모치란처럼 독자적으로 실험한 것들이 있었다.

각종 독에 대한 해독제와 중화제, 독성을 제거하고 긍정적인 효과만을 올린 강화제 등이 그러했다.

바치렌은 자신이 만든 약물을 모조리 싸들고 왔다. 조금이라도 이 싸움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크흐...."

"모... 치란 님...?"

괴물처럼 변한 모치란이 만든 죽음의 영역.

범인이라면 진즉 한 줌의 흙으로 변했을 만한 독에 노출됐음에도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소란을 듣고 모였던 부족의 무력 부대였다.

전투 상황에서 다룬 다양한 독의 내성 덕분에 가까스로 정신을 잡고 있었지만,

콰직-

그들의 목소리는 모치란에게 닿지 않았다.

'기분 좋아.'

뱀 여왕의 말이 맞았다.

만독의 경지에 닿으면 세계가 다르게 보일 거라던 말. 그 말 그대로였다. 눈앞에 펼쳐진 건 이전까지완 다른 세계였다.

모치란은 바닥에 엎어진 부족원의 머리를 밟았다.

땅을 기는 꼴이 꼭 벌레 같았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짓뭉개진 머리를 넘어 발걸음을 옮겼다.

'녀석'들에게 다가가는 길. 발에 치이고 걸리는 것들이 많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개미를 피하려고 땅만 보며 걷는 이는 없지 않은가. 그것과 마찬가지였다.

끄으윽... 컥... 크헉....

한 걸음 한 걸음에 죽음이 함께했다.

이동하는 길을 따라 카펫이 깔렸다. 독으로 가득 차고 피로 물든 새빨간 카펫이었다.

"온다."

루드는 전력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고오오오오-

마력이 의지를 따라 강렬하게 반응했다.

여명의 잿불 또한 마찬가지. 세찬 마력의 흐름을 따라 불꽃의 크기를 키워 갔다.

'단순히 베는 걸론 죽일 수 없다.'

재생력을 감안하면 사지를 찢는다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저 손 놓고 죽음을 기다려야 하나?

아니. 루드에겐 모치란을 죽일 방법이 있었다.

사지가 찢기고 목이 잘려도 죽지 않는 존재에게도, 죽음을 선사할 수 있는 검이 있었다.

'존재 자체를 베야 한다.'

모치란을 죽이기 위해선 끊임없이 재생하는 신체가 아니라 '모치란'이라는 존재, 그 자체의 개념을 베어야 했다.

'첫 번째 검, 인간도.'

전생에서부터 마주한 숱한 인간의 역사가 담긴 검.

인간도의 오의는 베고 싶은 것을 베고, 베고 싶지 않은 것을 베지 않는 것에 있었다.

그것이라면, 모치란의 존재를 벨 수 있었다.

콰앙! 콰아앙!

공격을 퍼붓는 모치란은 어느새 인간의 형체를 벗어던졌다.

거대하게 변한 팔이 늘어나며 루드를 노렸다.

10미터가 넘는 거리를 좁혀 한 번에 도달하는 공격. 속도도, 그 안에 담긴 위력도 대단했다.

'집중하자.'

세 번째 검 중 첫 번째 검인 인간도.

하지만 첫 번째 검이라 해서 결코 쉬운 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미 성공시킨 전례가 있다는 점.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은 아니었을지언정,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과 해 봤던 것을 실현하는 데는 큰 차이가 있었다.

모치란의 주먹이 왼쪽 어깨를 스쳤다.

순식간에 변색된 팔이 축 늘어졌다.

괜찮다. 검을 펼칠 손은 오른손이다.

모치란의 주먹에서 튀어나온 송곳이 오른쪽 종아리를 꿰뚫었다. 잘린 것마냥 감각이 사라졌다.

괜찮다. 도약은 한 다리만으로도 충분하다.

바다만큼 커진 독성이 해일처럼 덮쳐 왔다. 휩쓸린다면 흔적도 없이 녹아내릴 공격이었다.

이 또한 괜찮다.

녀석의 존재를 베어 가를 검이 완성됐으니까.

'인간도.'

모든 걸 집어삼키기 위해 몸을 펼친 독성에 검을 휘두른다.

"가소롭구나."

모치란은 루드를 비웃었다.

초라한 뗏목으로 폭풍우 치는 바다를 이겨 보겠다 덤비는 꼴이 아닌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하찮았다. 가능할 리 없는 일이다.

"글쎄."

하지만 모든 신화는 불가능에서 시작하는 법.

먼 옛날 대륙을 통일했다는 통일대륙의 황제도 그랬고, 신의 뜻을 받아 기적을 행했다는 성녀도 그랬다.

모두가 불가능하다 말하는 걸 이뤄 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부 역사가 되었다.

콰가가가각. 독의 파도가 잘려 나간다. 여명의 기운을 품은 검은 파도가 몰고 온 어둠을 갈라 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파도의 파편이 튀었지만 괘념치 않았다.

마침내 파도를 갈라 낸 검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모치란의 몸에서 튀어나온 송곳들이 먼지가 돼 사라졌다.

거대하게 변했던 팔은 점점 작아지고, 결국 말라 비틀어진 나뭇가지처럼 변했다.

그 끝에 모치란에게 닿은 검은.

"이럴 순 없다. 이럴 순 없어...!"

모든 상황을 부정하는 외침을 무시하고 제 의지를 관철시켰다.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모치란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 안에 존재하는 모치란이란 존재의 개념 또한 다르지 않았다.

"후우...."

모치란을 베어 낸 루드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전투가 끝나자 그간의 여파가 한 번에 몰려왔다.

인간도의 오의를 펼치기엔 완전한 준비가 되지 않았던 걸까. 전신세맥도 찢어진 느낌이었다.

"루드!"

"이봐 괜찮아?"

"어서 중화제를 먹이게."

쓰러진 루드에게 휴이 일행이 달려왔다. 그들은 서둘러 중화제를 먹이려했으나 루드는 손을 내밀어 저지했다.

"괜찮아.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다른 이들부터 살펴. 특히 비서와 집무실에 있었던 이들은 꼭 살려야 한다."

전투에 휩쓸려 사라진 증거물을 본 이들.

모치란이 뱀 부족과 내통해 부족을 팔아넘기려 했다는 걸 증명해 줄 증인들이었다. 절대 죽어선 안 됐다.

"안전한 곳에 잘 두었네. 이미 중화제도 처방했고."

바치렌 또한 그 점을 알았다. 중화제를 들고 오는 길에 미리 처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 말고 다른 이들도 전부 처방했네."

"갖고 있던 양이 그 정도였습니까?"

바치렌이 갖고 있던 약물이 얼마나 됐는지 모르지만 이 일에 휩쓸린 모두를 치료하려면 엄청난 양이 필요했을 거다.

그 질문에 바치렌은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만들어둔 중화제는 그만한 양이 아니었다. 다만 중화제가 남은 건 이곳의 모두에게 중화제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대부분이 가망이 없었네."

모치란 가까이 있던 이들은 이미 독수가 되어 흘러내렸고, 그나마 형태를 유지한 이들도 살 가망이 없었다.

결국 중화제를 사용한 건 미리 옮긴 집무실의 경비들과 휴이와 로하스 정도였다.

"그러니 어서 받게."

그제야 루드는 중화제를 받았다.

중화제 덕분에 한결 편안해진 안색의 루드는 바치렌을 바라봤다.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수습해야지."

모치란의 죄를 공표하고 그 뒷수습을 해야 했다.

"족장, 하실 겁니까."

"해야지. 부족을 위해서. 다만 부족이 안정되면 물러날 거네."

"마음대로 하십쇼."

바치렌은 족장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비단 루드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단의 사건을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자신밖에 없었다. 상황의 수습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족장이 되는 게 가장 나았다.

대신 모든 상황을 수습하고, 부족이 안정을 찾고 나면, 그때는 다른 적임자를 찾을 생각이었다.

자신은 부족을 잘 이끌 자신도, 그럴 자격도 없었다.

부족을 팔아넘기려 했던 모치란의 동생이 아닌가.

"뱀 부족의 일에 관해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면 찾아뵙겠습니다."

어느새 상황이 끝난 걸 느낀 이들이 점차 모여들고 있었다.

일대에 퍼진 독 때문에 가까이 오진 못했지만 독의 경계 바깥쪽으로 모두 모여든 상태였다.

사람들이 모를 수 없는 소란이었다.

일단은 이곳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수습은 그 다음에서야 할 수 있으리라.

"로하스, 떠나지 말고 기다려라. 너한테도 할 말이 있으니까."

루드는 로하스에게도 말을 전했다. 먼저 까마귀 부족으로 떠날까 염려한 까닭이었다.

마지막으로 루드는 휴이를 불렀다.

"휴이."

"엉?"

"뒤를 부탁한다."

휴이가 그 뜻을 헤아리는 사이, 루드의 몸이 쓰러졌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57화

바치렌은 모치란이 부족을 배신하려 했음과 그의 죽음을 부족 전체에 알렸다.

사람들은 모치란의 배신을 쉽게 믿지 못했다.

그간 모치란이 보여 준 헌신과 노력 때문이었다.

다만 증언해 줄 이가 여럿 있던 덕에 문제는 없었다.

살아남은 비서와 경비병들은 모치란과 뱀 부족의 거래를 증언했고, 멀리서나마 모치란의 최후를 목격한 이들도 그 끔찍했던 모습을 언급했다.

"힘들군...."

임시 집무실로 돌아온 바치렌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죽은 이들의 영결식에 다녀왔는데, 유족의 울음소리가 아직까지 귀에 선명했다.

독에 녹아내린 탓에 시신의 대부분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유족들은 제 가족의 마지막 모습도 확인하지 못한 채 그들을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한숨 돌리고 있을 때였다.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가실 시간입니다."

"벌써?"

"예. 사람들도 다 모였습니다."

찾아온 이는 모치란의 비서였던 코프레이였다.

모치란의 곁에서 업무를 보조하던 그는 바치렌이 가장 먼저 등용한 이이기도 했다.

족장으로서의 업무를 보조하는 데 있어 그보다 뛰어난 인물은 없으리라.

"가지."

코프레이는 이전과 다른 분위기였다. 조금은 통통 튀던 언행이 차분해졌고, 때론 가벼워 보이던 인상도 진중해졌다.

'그럴 만하지.'

가장 가까이서 모치란을 모신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던 코프레이였다.

모치란을 신뢰하고 존경했기에 비서직을 자처했었고.

한데 모치란의 진면모를 보게 된 것이다. 충격받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광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모두 모여 달라 미리 공지한 까닭이었다.

부족원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이번 사건이었지만 전후사정이 어떠한지 정확히 알고 있는 이는 극소수였다.

그것을 알리고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바치렌입니다. 전대 족장 모치란은 뱀 부족과 거래를 했습니다. 우리 황혼 부족을 팔아넘기는 대신 뱀 부족에서 높은 자리를 보장받기로 말이죠."

단순히 높은 자리만 약속받은 건 아니었을 것이다. 모치란은 고작 그 정도에 부족을 팔아넘길 인물이 아니었다.

뱀 부족이 그리는 미래에서의 높은 자리. 그 정도는 되어야 모치란의 마음이 동했을 거다.

'시체에서 나온 그 끔찍한 결정도 연관돼 있을지 모르고.'

무엇보다 모치란의 시체에서 결정을 발견했다. 이제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종류의 결정이었다.

거기에 담긴 끔찍한 독 기운은 가까이하는 것만으로도 심각한 중독 증세를 일으킬 정도였다.

"모치란은 그 일환으로 우리의 비전을 그들에게 넘겼습니다. 아들 모탄의 목숨과 함께요."

영결식에는 모탄의 이름도 있었다. 모치란의 아내이자 모탄의 어머니는 한참을 울다 기절했다.

"저는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모치란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됐죠."

바치렌은 군중을 바라봤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이걸 보십쇼."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손에 들린 것에 집중됐다. 곧 그것을 확인한 이들이 웅성거렸다.

"저게 뭐야."

"...얼굴 아니야?"

"모치란의 얼굴이랑 똑같이 생겼어."

"그럼 설마...."

의식을 되찾고 찾아온 루드가 말했었다.

모치란을 적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대로는 황혼 부족이 위태로울 거라고.

'무려 족장이 벌인 일입니다. 조직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가 조직을 팔아먹으려 했습니다. 그 조직의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바치렌도 동의했다.

사람들은 이미 족장이란 자리에 신뢰를 잃었다. 새로운 족장이 선출돼도 또 자신들을 팔아넘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을 터였다.

'...가짜여야겠군.'

'예. 부족을 팔아넘긴 모치란은 가짜여야 합니다.'

그러니 황혼 부족을 팔아넘긴 게 황혼 부족의 족장이어선 안 된다.

"우리가 모치란이라 알고 있던 이는 모치란이, 제 형님이 아니었습니다."

손에 들린 얼굴 가죽이 바람에 나부꼈다.

루드가 만든 인피면구였다. 가까이서 봐도 모치란의 얼굴과 똑같이 보일 정도로 완성도 높았다.

"모치란, 헷갈릴 수 있으니 이제부턴 범인이라 하겠습니다. 범인을 죽이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사실입니다. 범인은 형님과 똑같이 생긴 얼굴 가죽을 쓰고 형님의 행세를 했습니다. 아마 형님을 죽인 뒤... 형님의 행세를 한 것이겠죠. 뒤바뀐 게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바치렌의 설명에 사람들은 제 옆의 사람들을 흘깃댔다.

어쩌면 내 옆의 사람도 저런 가짜 얼굴을 뒤집어쓴 가짜가 아닐까?

하지만 이에 대한 해결책도 준비해 놨다.

"주변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가죽은 보통 티가 나는 법입니다. 범인이 사용한 가죽은 특수한 방법으로 제조된 가죽이라 가족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이만한 가죽을 만드는 데 드는 돈은 엄청나죠. 부족의 족장 정도 되는 위치의 인물을 연기할 때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요."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범인이 형님을 연기하고 있었단 걸 알게 되니 모든 게 명료해지더군요."

면구를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범인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모탄을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야욕을 위해 아들을 제물로 바친 모치란.

하지만 대중은 그 사실을 모른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피붙이를 죽음으로 내모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상황.

그러니 이용할 수 있다. 모치란이 면피용으로 만들었던 모탄의 죽음을, 다른 의미의 면피용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네."

"모치란이 아니었으니까 그럴 수 있는 거였어."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제 아들을 죽이겠어."

쾅!

바치렌은 발을 강하게 구르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애석하게도! 이미 우리의 비전은 뱀 부족에게 넘어갔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라도 그것이 우리의 혼이나 다름없다는 건 모두가 인정할 겁니다."

"옳소."

"그게 어떤 건데."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부터 쌓고 쌓아 만들어진 비전이다.

대부분은 실물을 본 적조차 없었지만 그 존재만큼은 어려서부터 들어 왔다.

그런 비전을 도둑맞았다. 그것도 자신들의 족장을 해하고 족장 행세를 한 가짜로 인해.

"저는 뱀 부족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공적으로는 부족의 비전을 도둑맞았다.

사적으로는 형과 조카를 잃었다.

"결코 뱀 부족이 벌인 일을 잊지 않을 겁니다. 언젠가 꼭 그들을 징치하고 마땅한 죄를 받게 할 겁니다."

와아아-!! 바치렌! 바치렌!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다. 가슴에 있던 불안은 어느새 분노로 바뀌어 타올랐다. 언제고 뱀 부족을 불태울 불꽃이었다.

* * *

"이것으로 되었나."

"예. 감사합니다."

루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바치렌에겐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생각보다 더 잘해 주었다.

"한데 뱀 부족을 언급한 게 너무 직설적이진 않았나?"

"부족의 비전을 훔쳐 간 이들입니다. 당장 전쟁을 치러도 무방한 일 아닌가요?"

"실제로 훔쳐 냈다면 말이지. 하지만 결국 그들이 가져간 건 가짜이지 않은가."

"아뇨."

루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가져간 건 진짜입니다. 진짜여야만 하죠."

"...그건 그렇지만."

뱀 부족이 훔쳐간 비전은 진짜여야 했다. 그들이 그걸 진짜로 믿을수록 언젠가 더 큰 타격으로 돌아올 터.

그러기 위해선 진짜를 도둑맞은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걱정하시는 건 압니다. 뱀 부족과 전면전의 양상이 될까 두려우시겠죠."

"현실적으로 맞붙는다면 결국 패하는 건 우리일 테니."

바치렌이 걱정하는 건 그것이었다.

독으로 뱀 부족을 괴롭힐 수는 있겠지만 전쟁에 돌입하면 자신들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전면전이 생길 일은 없습니다. 당장 뱀 부족에겐 그럴 여유가 없고, 설령 그들이 미쳐서 전면전을 감수한다 해도 까마귀 부족이 가만 있을 리 없으니까요."

이곳만이 아니라 여명 부족에도 수작을 벌여 놨던 뱀 부족이다.

다른 부족에서도 수작을 벌이고 있을 게 분명한 상황. 전면전을 벌이게 되면 그들의 계획이 전부 꼬이게 될 터니 섣불리 움직일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움직인다 해도 까마귀 부족이 그들을 막아설 것이었다.

"맞습니다. 이미 족장님께 이곳의 상황을 전달했으니 걱정을 조금 덜어 내셔도 됩니다."

로하스가 루드의 말을 거들었다.

"알겠네. 그보다 자네가 부탁했던 것을 가져왔네."

"정말입니까?"

"그래."

바치렌이 품에서 작은 함을 꺼냈다.

함을 열자 조그만 결정이 보였다. 황혼의 비명이었다.

"감사합니다."

"한데 황혼의 비명이 왜 필요한 건가. 자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이런 것에 기대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상대해야 할 게 보통 놈이 아니어서요."

"...상상이 잘 안 가는군."

괴물이 된 모치란을 무찌르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잘린 팔도 순식간에 재생하던 모치란은 루드가 휘두른 일검에 반으로 갈라져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신화 속 영웅의 것 같은 일격이었다.

그런 신위를 보여 준 루드가 황혼의 비명을 필요로 할 만큼 대단한 상대라....

"뭐, 산이라도 베려는 겐가."

"산이라면 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루드가 상대해야 할 녀석은 설산 트롤.

전생에선 그 자체로 설산이나 다름없던 녀석이었다.

'이걸로 최소한의 준비는 끝난 건가.'

먼 길을 돌았지만 결국 황혼의 비명도 손에 쥐었다.

설산 트롤을 상대할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난 셈.

그때였다.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게."

더 이상 주고받을 게 없다 여겼을 때 바치렌이 작은 함을 하나 더 건넸다.

안을 열어 보니 검은색의 결정이 있었다. 갖가지 부적으로 감싸 놓은 상태였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바치렌의 몸에서 나왔던 결정 아닙니까."

"맞네. 아무래도 자네가 갖고 가는 게 나을 것 같네."

정체 모를 독성을 품은 결정.

연구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고민 끝에 포기했다.

'형님을 괴물로 바꾼 게 이것이라면, 가까이 둬서 좋을 게 없지.'

언젠가 자신도 비슷한 꼴이 되지 말란 법이 없었다. 자신이 아니라 부족의 다른 누군가라도 마찬가지였다.

"알겠습니다."

루드는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바치렌도 고심해서 내린 결정일 터였다. 자신도 결정에 대해 궁금한 게 많기도 했고.

뱀 부족이 건넸을 결정에 어떻게 그만한 힘을 담았는지, 그 결정이 어째서 뱀 부족에게 있었는지. 모두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조심하게."

내용물을 보여 준 바치렌은 결정을 담은 케이스에도 여러 장의 부적을 붙였다. 결정을 감싼 것과 마찬가지의 부적이었다.

부족의 비술로 독성을 잠재워 놨지만 조금만 봉인이 풀린다면 독성이 튀어나올 것이었다.

"저흰 이만 떠나겠습니다. 말씀드린 건 잘 부탁드립니다."

"피차 할 일이 바쁘니 잡지 않겠네. 얘기해 둔 건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말하지 않아도 나부터 그리 할 생각이니."

모든 상황이 마무리 됐다.

헤어짐은 빨랐다. 잡는 사람도 잡힐 사람도 없었으니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루드와 휴이, 로하스까지. 황혼 부족에서 출발한 세 사람은 까마귀 부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말이야. 그거 어떻게 한 거야?"

한참을 걸어가던 도중, 휴이가 문득 물었다.

"뭐 말이냐."

"위에 숨겨졌던 금고를 찾은 것도 그렇고, 비전을 바꿔치기한 것도 그렇고."

설마 천장이 숨겨진 금고일 줄이야 생각도 못했던 휴이였다. 휴이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내부에 강한 마력을 띠는 물건이라도 있었다면 알아차렸겠지만 안에 들어 있던 건 전부 서류 뿐. 루드가 금고의 존재를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궁금했다.

"어쩌다 알게 됐다."

루드는 피식 웃었다.

비밀 금고를 알아낸 건 정말 어쩌다였다.

'바치렌과 차 마시던 시간이 이리 쓰일 줄이야.'

바치렌은 차를 즐겼다. 심신안정에 도움이 된다며 가끔 권하기도 했다. 하여 몇 번인가 그와 다도를 즐긴 적이 있었다.

천천히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건 꽤나 즐거웠다. 바치렌은 아는 게 많았고 그와의 대화로 알아갈 수 있는 것도 많았다.

때론 사사롭게, 때론 공적이게,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눴다.

비밀 금고에 관한 것도 그중 하나였다.

'몰랐는데 집무실 천장이 금고더군. 보수 공사를 하려 확인했다 알게 된 사실이었지.'

'족장님의 집무실에 있는 금고를 족장님께서 몰랐다고요?'

'놀랍게도 말이야. ...전대 족장이 설치한 게 아닐까 생각하네.'

시시콜콜한 대화 중 나왔던 얘기였다. 그 대화를 떠올렸던 루드는 몰래 집무실의 천장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서 모치란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는군.'

전생에서 모치란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없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역시 뱀 부족에게 이용당하다 죽은 건가. 아니면 능력이 폭주했을 수도 있겠군.'

어찌됐든 죽었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다 알게 됐다니. 이해는 잘 안 가지만...."

휴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루드가 한 일을 제대로 이해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냥 루드니까, 루드면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갔던 적이 많았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비전을 바꿔치기한 건?"

"아, 그건."

뺘잇-

슬라브가 두 개의 촉수를 높이 들었다.

금세 힘을 잃고 축 처졌지만 그 뜻을 전달하기엔 충분했다.

"설마 슬라브가 한 거야?"

"그래. 이 녀석이 했다."

사용자의 혈액을 통해 개폐되는 금고.

비전을 미리 바꿔치기하려면 그것을 열어야 했다.

모탄이 의심하면 안 되니 힘으로 자를 수도 없는 상황.

그때 슬라브가 나섰다.

"슬라브가 이리저리 금고를 살펴보더니 딸깍, 하더군."

정확한 방법은 몰랐다. 슬라브가 모종의 수로 혈액의 역할을 대신한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어쨌든 다행인 일이었지. 번거로운 일이 줄었으니."

최악의 경우 모탄의 손에 들린 비전을 바꿔치기하는 방법까지 생각했다.

의심받을 확률이 매우 높았지만 진짜 비전을 뺏기는 것보단 나았다.

다행히 슬라브의 활약으로 그 전에 비전을 바꿔치기할 수 있었고, 헤슬리는 가짜 비전을 진짜 비전이라 확신한 채로 가져갔다.

"그보다 로하스."

설명을 마친 루드는 로하스를 바라봤다. 이제부턴 로하스가 설명할 때였다.

"까마귀 부족의 상황에 대해 말해 줘. 권력 구도가 어떤지, 조심해야 할 게 있는지, 안팎으로 특별한 이슈는 없는지."

"하아...."

로하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어쩌다 이런 질문을 받고 있는지.

'제노스 님의 자식만 아니었다면 진작 놓고 가는 건데. ...도망가다 잡혔을라나.'

이제 와 후회해도 늦었다. 이 또한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는가.

"한 번만 말해 줄 거니까 잘 들어라."

짧게 신세를 한탄했던 로하스가 까마귀 부족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58화

에이나우디 공작가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여느 때라면 이제 막 일어났을 기사들이 이미 훈련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들의 수발을 돕는 이들의 아침도 덩달아 바빠졌다.

연무장에 도열한 기사들은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떡하지? 너무 떨리는데."

"아무 기대도 하지 마. 우리 같은 것들한테 가르침을 주시겠어? 공자님과 공녀님만 뵙고 돌아가시겠지."

"그러는 너도 속으론 기대하고 있잖냐. 밥 먹듯이 지각하던 놈이 오늘은 제일 빨리 나왔더만."

"그야... 소드마스터잖냐."

기사들을 생일을 앞둔 어린아이마냥 기대하게 만드는 건 소드마스터의 존재였다.

위대한 제국의 소드마스터, 더스틴 클라위베르트!

그가 에이나우디 공작가를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운 좋게 한 수 배울 수만 있다면...!'

'공자님과 공녀님께 내리는 가르침을 보기만 해도 이득이다.'

검을 든 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경지.

그 위대한 경지에 도달한 인물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건 검을 든 모든 이가 바라는 일이었다.

설령 직접 받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타인에게 내리는 가르침이더라도 그 안에 분명 배울 게 있을 터.

절대 놓쳐선 안 될 기회였다.

"언제 오시려나. 얼른 뵙고 싶은데."

"오시면 공작님께 먼저 들르시겠지. 이곳은 마지막이 될 거야."

"얼른 오셨으면 좋겠군. 소드마스터께서 내 검을 봐주신다? 아들 녀석에게 말해서 아들의 아들에게, 그 아들의 아들에게, 그렇게 대대로 전하게 할 거야."

"크크크. 너무 큰 기대는 말라고. 그분께서 오신 이유는 공녀님 때문일 테니까. 우리 같은 평기사의 검을 봐주시겠어?"

"닥쳐. 내 희망을 짓밟지 마. 꿈은 크게 갖는 거라 했어."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이랬지."

한참을 투닥거리던 기사들은 훈련을 시작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대였지만 연무장은 이미 기사들로 가득했다. 이곳만이 아니라 가문 내의 모든 연무장이 마찬가지였다.

기사들로 가득 찬 연무장 위로 해가 중천에 걸렸다. 더스틴 클라위베르트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점심 식사 시간에 맞춰 방문할 확률이 가장 높다 생각했던 기사들은 아쉬움을 삼켰다.

그 뒤로도 시간은 계속해서 갔다.

정오를 넘어 한 시, 한 시를 넘어 두 시, 두 시를 넘어 세 시.

기다리던 손님이 찾아온 건 세 시가 약간 넘었을 때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님."

"오랜만이네. 내 청을 들어줘서 고맙네."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그리 말해 주니 더욱 고맙군. 일단 안으로 들지. 식사는 하였나?"

"예. 오면서 간단히 했습니다."

식사를 마쳤다는 더스틴의 말에 카일론은 다과상을 준비시켰다.

"차가 향긋하군요."

"그런가? 어렵게 구한 보람이 있군. 맛있다니 다행일세. 원한다면 떠날 때 챙겨 주겠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더스틴은 차를 홀짝였다. 은은한 향이 천천히 올라오는 게 나쁘지 않았다.

물론 술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 술은 그렇겠지.'

자신도 지킬 건 지킬 줄 알았다.

눈앞의 상대는 제국의 공작 중 하나. 결코 함부로 할 상대가 아니었다.

'쩝. 백작 정도만 됐어도 은근슬쩍 얘기해 보는 건데.'

아쉬움을 삼킨 더스틴은 차를 내려놓았다.

"공사가 다망하실 테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난 허례허식 없는 자네의 이런 모습이 정말 좋다네."

"저도 이런 저를 좋아해 주시는 공작님이 참 좋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미소를 보였다.

"공녀님의 검을 봐 달라고 하셨죠."

"가능하면 아카데미의 추천서까지 원하네. 물론 자네 성에 차지 않는다면 없던 일인 거고."

"좋습니다. 공녀님은 어디 계시죠?"

"연무장에 있을 걸세."

"언제부터 나가 계신 겁니까?"

"점심을 먹은 직후일 걸세."

"오래 기다리셨겠군요. 발걸음을 서두를 걸 그랬습니다."

점심을 늦게 먹었다 쳐도 오랜 시간이 지난 때였다. 공작가의 영애가 그 긴 시간을 기다렸다. 그것도 햇볕이 쏟아지는 연무장에서.

'짜증이 잔뜩 나 있겠군.'

좋지 않았다. 차라리 공작을 상대하는 게 편했다. 그 또래 영애들의 히스테리는 장난이 아니었다.

"괜찮네. 그 아인 딱히 자네를 기다리느라 연무장에 나간 게 아니니."

"예? 그 말씀은."

"자네를 부른 데 어느 정도의 이유가 있다는 말일세."

더스틴은 공작을 바라보며 생각을 다시 했다.

카일론은 허투루 말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또 무작정 제 권위나 위세를 앞세우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런 이가 제 딸아이를 위해 자신을 불렀다. 단순히 딸의 부탁에 못 이겨, 혹은 딸 자랑을 위함이 아니란 의미였다.

"나는 자네만큼 검을 알지 못하네."

카일론의 경지는 익스퍼트 상급. 낮은 경지는 아니었지만 소드마스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자네에게 와 주기를 청한 걸세. 내 딸아이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보다 정확하게 알기 위해."

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바라봤다.

이윽고 더스틴이 미소를 짓자 카일론도 미소를 지었다.

"물론 자네가 추천서를 써 준다면 그걸 이용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네. 동네방네 소문을 내겠지. 소드마스터가 우리 딸아이를 인정했다고. 우리 딸아이가 이 정도라고."

너스레를 떠는 카일론.

더스틴은 카일론의 이런 면을 좋아했다. 대귀족이면서도 고압적인 태도보다는 친밀하게 다가서려 하는 카일론이었다.

그렇다고 카일론이 마냥 무른 인간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더스틴은 몇 년 전 대전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했다. 당시의 카일론은 칼이 아닌 혓바닥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단 걸 보여 줬다.

상황에 따라, 필요에 따라.

친밀할 땐 친밀하게, 냉정할 땐 냉정하게 대처하며 원하는 바를 이루는 카일론의 모습은 뛰어난 정치인이란 이런 이구나 생각하게 만들었다.

"알겠습니다. 더 늦기 전에 가시죠. 공작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따님의 실력이 더욱 궁금하군요."

"좋네. 실망하진 않을 걸세."

두 사람은 연무장으로 향했다.

"다들 열심이군요."

훈련하는 이들로 가득한 연무장.

더스틴은 감탄했다. 과연 제국을 지탱하는 공작가의 기사들이란 걸까.

하지만 막상 카일론은 고개를 저었다.

"평소에도 열심이긴 하지만 늘 이렇지는 않네. 오늘 자네가 온다니 다들 일찍부터 나와 있더군."

더스틴은 연무장에 가득한 기사들을 바라봤다.

저들 전부가 자신을 기다렸다니… 기분이 참.

"솔직히 좋지는 않네요. 시꺼먼 남정네들이 다 같이 모여서 저를 기다렸다니. 심지어 땀에 쩔은 상태로 말이죠. 다음에는 여기사들만 기다리게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알겠네. 한번 노력해 보지."

농담은 거기까지였다.

누군가를 발견한 더스틴이 멈춰 섰다.

'저 녀석이겠군.'

에이나우디 가문의 외적 특색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금발과 벽안.

그러나 더스틴의 눈길을 잡아 끈 건 외관이 아니었다.

'호오. 이건 꽤.'

정갈하게 갈무리된 기도.

검을 맞대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가닥을 알 것 같았다.

"위대한 소드마스터를 뵙습니다!"

"위대한 소드마스터를 뵙습니다!"

더스틴을 발견한 기사들이 제창했다.

검을 하늘로 세워 다 함께 외치는 모습엔 소드마스터를 향한 경외가 담겨 있었다.

"고맙네. 볼일들 보게."

인사를 받아 준 더스틴은 곧장 아이리우스에게로 향했다.

"소드마스터를 뵙습니다."

아이리우스도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예를 표했다.

더스틴은 눈을 빛냈다. 검을 세우는 자세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간단하고 쉬운 자세였지만 그 안에 녹아 있는 기본기가 보였다.

"얘기는 들었네. 아카데미에 입학하려 한다고."

"그렇습니다."

"내 추천서도 원했다고."

"정확히 말하면 소드마스터의 추천서를 원했습니다."

당돌한 태도였다.

굳이 더스틴이 아니어도 소드마스터이기만 하면 상관없었다는 말은 자칫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리 말하는 아이리우스의 눈은 올곧았다. 더스틴 또한 그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고.

아이리우스가 하는 말은 진짜였다.

그녀가 원했던 건 소드마스터에게 자신을 인정받는 것. 그 소드마스터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긴말은 필요 없겠지. 검을 들어라."

어느새 대련을 할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생겨났다. 모두가 두 사람의 대련을 기대하고 있었다.

'과연 소드마스터의 검은 어떨까!'

'공녀님께서 얼마나 버티시려나.'

'십 합만 버텨 내도 대단한 거지만... 공녀님이라면.'

헤이론을 거뒀던 대련부터 시작해 아이리우스는 여러 기사들과 대련했다.

때론 이기고 때론 지며, 아이리우스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 결과, 지금에 이르러선 평기사 중에 그녀를 상대할 존재가 없었다.

검을 잡은 지 일 년도 안 되어 이뤄 낸 성과였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기사들은 모두 그녀의 재능과 노력을 인정했다.

하여 기사들은 기대했다.

과연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몇 합이나 버텨 낼 수 있을 것인가!

그간 보여 준 천재성이 소드마스터 앞에서도 보란 듯이 나타날 것인가!

조금 뒤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터였다.

'상대는 소드마스터. 시작부터 전력을 드러내야 한다.'

아이리우스는 호흡을 골랐다.

자칫하다간 뭘 보이기도 전에 대련이 끝날 터.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됐다.

'첫 단계는 넘었다. 이젠 내게 달렸어.'

아버지에게 부탁해 소드마스터를 초청한 덴 이유가 있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선 소드마스터의 추천서가 필요하다.'

아카데미에 있을 그. 전생에선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몰랐다.

아마 누구도 몰랐을 거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테고.

오로지 회귀한 자신만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고 있었다.

'소드마스터도 아니면서 소드마스터를 잡은 존재.'

그 과정에서 비록 큰 부상을 입었지만, 더할 나위 없이 대단한 업적이었다.

소드마스터는 소드마스터로만 상대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부순 인물.

아직도 그가 소드마스터를 잡아 내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마왕을 잡기 위해선 그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경지 이상의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그에게서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회귀한 이상 마왕보다 높은 경지와 실력을 갖출 것이지만 마왕의 경지도 상승했을지 혹시 모르는 일.

만약을 대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준비할 생각이었다.

"와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체내를 순환하던 마력이 의지에 이끌려 한 지점으로 모였다.

그 순간. 아이리우스가 도약과 함께 발검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긋는 횡 베기.

빠른 속도였지만 더스틴은 가볍게 물러나며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진짜는 그 다음이었다. 베기에서 연결된 찌르기가 물러서는 더스틴을 노렸다.

'좋군.'

첫 공격은 회피를 유도하기 위한 동작, 두 번째 공격이 진짜였다.

베기에서 찌르기로의 연계도 물 흐르듯 부드러웠고 동작에 단 하나의 낭비도 없었다.

최단최속으로 들어오는 찌르기.

'망설임도 없어.'

검을 내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이가 많았다. 특히 어릴수록, 검을 잡은 지 얼마 안 됐을수록 그런 경향이 많았다.

상대를 해하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

자신이 다치는 것만큼이나 상대를 해하는 것도 공포를 몰고 오는 행위였다.

하지만 아이리우스에게서는 그런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완숙한 검사처럼 자신의 검을 고스란히 펼쳐 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모자라다.'

아이리우스가 온전히 자신의 검을 보인다 해도, 소드마스터를 상대하기엔 모자랐다.

물러섬을 멈춘 더스틴은 검을 냈다.

아이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찌르기였다.

찌르기에 맞춘 찌르기.

목을 노리고 들어오던 아이리우스의 검 끝이 더스틴의 검 끝과 부딪쳤다.

카앙-!!!

그 결과는 놀라웠다. 조금의 빗겨 감도 없이 정확히 검 끝끼리 격돌한 두 사람의 검은 서로의 중간에 멈춘 상태였다.

아이리우스는 검을 내렸다.

"...졌습니다."

"인정이 빠르군."

"놀리시는 겁니까?"

파고드는 검 끝을 정확히 조준해 찔렀다.

조금이라도 각도가 틀어졌으면 빗겨 간 검이 서로를 찔렀을 거다.

자칫하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더스틴은 굳이 그런 방법을 택했고, 깔끔하게 성공했다.

'심지어 검이 멈춘 지점이 중앙이야.'

자신이 먼저 찌르기를 시작했음에도 검이 멈춘 지점은 중앙이었다.

더스틴의 검이 자신의 검보다 훨씬 빨랐단 뜻이었다.

"놀리다니, 칭찬이다. 가끔 인정을 못하는 녀석들이 있거든."

"그렇다면 그렇게 받아들이죠."

"...독특하군."

더스틴은 아이리우스를 바라봤다.

공작가의 영애 같지 않았다. 카일론도 때때로 공작 같지 않단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추천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카데미 추천서 말이지."

"네."

"어떨 거 같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푸른색 눈이 더스틴을 응시했다.

패배했다지만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아직 익스퍼트 중급에 불과한 자신이다.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소드마스터를 초청해 대련을 한 건 오직 한 가지 이유. 아카데미 입학 추천서를 받아 내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아카데미에 있을 그를 만나게 해 줄 열쇠가 될 테니까.

당당한 눈빛을 확인한 더스틴이 씨익 웃었다.

"추천서를 써 주지."

재밌었다.

무료하던 삶에 새로운 활력소가 생기는 것 같았다.

'갑자기 이런 재능들이 나타난다라.'

한 세대에 동시에 나타나는 재능. 역사적으로 그런 시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기는 대체로....

'대륙이 시끄러워지겠는걸.'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59화

순식간에 끝나 버린 대련. 기다림에 비해 짧은 대련이었지만 그 시간이 짧았다고 실망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짧았기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역시 공녀님은 천재셔."

"소드마스터의 인정을 받으시다니."

"공작가의 복이지."

기사들은 아이리우스를 찬양했다. 카일론도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대련이 끝난 후 세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추천서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추천서를 써 주겠다니 고맙군."

"써 줄 만해서 써 주는 것뿐입니다."

"하하. 그래."

분위기는 시종일관 좋았다. 대련 과정도 깔끔했고 마무리도 서로에게 좋은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추천서는 제도에 돌아가는 대로 작성해 보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인장이 없어서요."

"알겠네. 편하게 보내 주게. 대신 아카데미 입학이 두 달 뒤란 건 알아 줬으면 좋겠네."

"그 전에는 보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카일론도 더스틴이 게으른 이란 걸 알고 있었다.

카일론만이 아니라 제국의 주요 인사 대부분은 알고 있는 사안일 터였다.

오죽하면 황제 폐하의 부름에도 자다 늦을 정도였으니.

그가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면 진작 게으름 때문에 경을 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 딸아이는 어떤가. 가능성이 있는가?"

"가능성이라 함은."

"소드마스터가 될 수 있겠냐는 말일세."

"그건 공녀님에게 달린 문제겠죠."

카일론이 더스틴을 부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소드마스터의 추천서가 필요하다는 아이리우스의 요청. 다른 하나는 아이리우스의 자질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한 마음 때문이었다.

"소드마스터는 단순히 노력만 해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재능만 믿고서 오르기도 힘든 자리고요."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신빙성이 없는 것 같네만."

"알게 모르게 저도 열심히 노력했답니다. 사람들이 몰라줘서 그렇지."

"그런 걸로 하지."

소드마스터가 되기 이전부터 천재로 유명했던 더스틴이었다. 당시에도 지금과 같이 매사에 느긋했던 더스틴은 마흔이 되기 전 소드마스터에 오르며 그 천재성을 입증했다.

그 모습에 숱한 노력가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검을 놨다는 건 유명한 일화였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건, 소드마스터가 되느냐 마느냐는 앞으로의 공녀님에게 달렸다는 겁니다."

더스틴이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한 재능은 갖췄으니 시간과 경험을 잘 채워 넣는다면 큰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을 겁니다."

아이리우스가 소드마스터가 된다는 것에 절대적인 확신은 없다.

다만 그녀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시간과 격에 걸맞은 경험을 쌓았을 때. 그녀는 소드마스터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렇군. 고맙네."

카일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대답만으로도 충분했다. 오히려 무조건 될 수 있다 호언했으면 실망했을 것이다.

카일론 본인 또한 검을 잡은 이.

소드마스터란 경지가 얼마나 위대하고 어려운 것인지 알고 있었다.

아이리우스가 그 자리에 도전할 자격을 갖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마십쇼. 지금처럼 쭉 정진한다면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본 이들 중에도 손에 꼽히는 재능을 가졌으니까요."

"호오. 그 손에 든 다른 이들이 궁금해지는군."

카일론은 더스틴이 본 다른 이들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무려 소드마스터의 공증이다. 그들의 재능이 찬란하게 빛날 것은 당연.

만약 적을 두지 않은 이들이라면 공작가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저도 궁금합니다. 그중에 제가 몇 번째인 지도요."

아이리우스도 관심을 보였다. 뛰어난 재능을 갖춘 이들이 많을수록 마왕을 상대하는 게 쉬웠다.

그들을 자신의 수하로 거둘 수 있다면, 하다못해 동료로 삼을 수만 있어도 마왕과의 결전에서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겸사겸사 자신의 재능이 그들 중 몇 번째에 꼽힐지도 궁금했고.

"음. 세 번째? 아니, 두 번째 정도 되겠군."

아이리우스를 앞에 둔 더스틴은 두 사람을 떠올렸다.

의회의 부탁을 받아 발렌타노로 향하던 길에 마주친 이들이었다.

검은 머리의 청년과 좋은 체격의 청년.

검은 머리의 경우 공녀를 상회하는 재능이었고, 좋은 체격의 청년은 공녀와 엇비슷해 보였으나 그보다는 공녀의 나이가 더 어렸다.

그러니 아이리우스가 두 번째였다.

"두 번째인가요."

내심 첫 번째일 거라 기대했던 아이리우스였다.

십오 년의 경험을 안고 회귀했으니 더 그랬다. 하나 오판이었다.

'괜찮아. 아직 회귀한 지 일 년도 안 됐어.'

하지만 괜찮다. 자신에겐 십오 년간의 경험치가 있었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녹아들 터.

회귀 전의 지금 시간대엔 제대로 검을 잡지 않았었음을 생각하면 초조해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을 영입하는 건 어려울 겁니다."

"어째서인가?"

"두 녀석이 같이 다녔는데 사이가 꽤 끈끈해 보였습니다.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고요."

루드와 휴이를 떠올린 더스틴은 문득 궁금해졌다.

두 녀석은 복수에 성공했을까.

"무엇보다 제가 먼저 침 발라 놔서요. 아무리 공작님이시라 해도 그 녀석들을 양보할 생각은 없습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 보군. 자네가 그리 말할 정도라... 더 관심이 가는데."

더스틴과 카일론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두 사람의 신경전을 끊은 건 아이리우스였다.

"두 분께서 그러셔 봤자 그들이 싫다 하면 땡 아닌가요?"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거둔 더스틴은 아이리우스의 말에 동의했다.

"맞지. 실제로 한 번 거절당했고. 아마 누구의 아래로도 안 들어가려 할 겁니다."

"공작가의 기사단장 자리를 준다 해도?"

"네. 어쩌면 황실 기사단장의 자리를 준다 해도 말입니다."

확언에 가까운 장담.

카일론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더스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녀석 다 제국 출신이 아니어서요."

"확실히 황실 기사단장 자리는 불가능하겠군. 하지만 우리는 다르네. 다른 왕국 출신이어도 검증만 제대로 받으면 가능하지."

"오해의 소지가 있게 말씀드렸군요. 정정하죠. 두 녀석 다 중앙대륙 출신이 아닙니다."

"...이민족이란 말인가?"

"네. 물론 중앙대륙에서 살고 있는 이민족도 있지만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또 그들 정도의 실력이라면 자신들의 고향에서도 높은 신분일 확률이 높은데, 그런 이들이 굳이 중앙대륙에 자리 잡을까 하는 의문도 있고요."

"그도 그렇군."

에이나우디 공작령은 제국 서부에 위치해 있다.

대륙 지도로 따지면 중앙대륙에서도 중앙에 위치한 곳. 때문에 바깥 대륙의 이민족들을 마주칠 일이 적었다.

달리 말하면 이민족 출신이 이곳까지 올 일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민족 출신이라고요?"

두 사람의 얘기를 듣던 아이리우스가 멈칫했다.

"혹시 생김새가 어땠나요? 이름은 아시나요? 어디서 보셨죠?"

폭풍처럼 쏟아진 질문.

갑작스레 흥분한 그녀의 모습에 카일론과 더스틴 모두 당황했다.

하지만 지금 가장 당황한 건 아이리우스였다.

더스틴이 보았다는 최고의 재능이 이민족이라는 사실.

왜인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가 마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녀의 또래로 보였고, 검은 머리에다 잘생겼고, 발렌타노 인근의 산에서 마주쳤지."

더스틴은 기억을 더듬었다.

대답은 어렵지 않았으니 대답해 주기로 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공작 영애의 기세가 대단했다.

"그리고 이름은...."

이름이 뭐였더라.

요즘 애들답지 않게 착한 녀석들이었는데.

개그 코드도 잘 맞고... 맛있는 밥도 줬었는데....

"아. 생각났다."

드디어 이름이 생각났다.

"루드와 휴이. 그런 이름이었네."

마침내 두 사람의 이름을 떠올린 더스틴은 아이리우스의 눈치를 봤다.

심각해진 그녀의 표정은 무언가 사연이 있다는 걸 짐작하게 했다.

"아는 이들인가?"

"...아뇨."

아이리우스는 부정했지만 누가 봐도 아는 모습이었다.

더스틴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일단은 공작 영애인데다 공작의 앞이었다.

'공작님만 없었어도 물어보는 건데.'

그녀가 숨기려는 게 무엇일지 궁금하긴 했지만, 공작의 앞에서 물을 정도까진 아니었다.

"아이리우스. 무슨 일이냐."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저 저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게 조금 충격이었나 봐요. 죄송합니다. 먼저 올라가 봐도 될까요?"

"그래. 올라가 봐라."

카일론은 아이리우스가 떠난 자리를 잠시 바라봤다.

'자신보다 더한 천재가 있다는 게 그리 충격이었던 건가.'

범재는 천재를 보고 좌절한다.

그렇다면 천재는? 천재는 자신보다 더한 천재를 마주했을 때 좌절한다.

카일론은 아이리우스가 걱정됐다.

무릇 자신이 범재란 것을 인정한 이보다 천재로 불리던 이가 벽을 만났을 때 더 쉽게 좌절하는 법이었다.

부디 아이리우스가 그 벽을 잘 넘어서길 바랐다.

한편, 아이리우스는 방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루드. 마왕 루드란테.'

더스틴이 보았다던 사내는 마왕 루드란테가 분명했다.

휴이라는 이름의 동행자는 외관 설명대로라면 제2군단장으로 추정됐다.

"사라. 거기 있지."

"예."

아이리우스의 부름에 시녀복을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첫 번째 부탁이야."

"뭐든 명만 내리십쇼."

"루드란 이름의 사내를 찾아야 해. 검은 머리의 이민족이고 나이는 내 또래쯤 됐어. 옆에는 휴이란 이름의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함께일 거야. 발렌타노에서 머물렀을 테니까 거기서부터 흔적을 찾아. 그리고 찾으면 바로 연락해."

"알겠습니다."

마왕의 흔적을 이렇게 발견할 줄은 몰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아버지와 더스틴의 앞에서 못 보일 꼴을 보였다.

하지만 괜찮았다.

마왕을 찾을 수만 있다면 이 보다 못난 모습일지라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더 보일 수 있었다.

'마왕을 미리 죽일 기회야.'

마왕 또한 아직은 그 힘이 미력할 터.

시간이 흐를수록 회귀 전의 마왕으로서의 위용을 갖출 테니, 그를 가장 쉽게 죽일 수 있는 때는 지금이었다.

"소재를 파악하는 즉시 연락해. 그리고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라붙어. 절대 들켜선 안 돼."

마지막 당부를 마친 아이리우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사라가 빠른 시일 내에 마왕을 발견한다면 큰 힘 들이지 않고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마왕을 죽이고, 제국의 백성을 구한다는 목적을.

* * *

카일론과 대담을 마친 더스틴은 공작가를 빠져나왔다. 이제는 정말 제도로 복귀해야 할 때였다.

'진짜 가기 싫구먼. 가면 또 일해야 할 텐데.'

발걸음이 엄청나게 무거웠다. 카일론의 초청을 받아들인 것도 제도로 복귀하는 순간을 늦추기 위함이었다.

영애와 대련하고 추천서를 써 주는 것도 귀찮긴 했지만 제도로 복귀해 업무에 시달리는 것보단 나았다.

다른 대귀족에 비해 카일론과는 통하는 면도 많았고.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었다. 더 이상 복귀를 미룰 구석이 없었다.

'의회 녀석들도 만나야 하고.'

의회의 의원들이 벼르고 있을 터였다.

발렌타노에서의 일이 끝난 게 언젠데 아직까지 들르지 않았으니 잔뜩 뿔이 나 있을 게 뻔했다.

"하... 귀찮다. 그냥 어디 좋은 데서 잠이나 자고 싶다."

낙심한 더스틴은 털레털레 걸었다. 제도로 향하는 길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6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