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40화
도둑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소양은 무엇일까.
물건을 훔쳐 내는 은밀함? 훔친 후 추적을 피하는 교묘함?
물론 그것들도 중요하지만 아셴이 생각하는 답은 아니었다.
도둑에게 가장 중요한 건 눈치.
훔쳐도 되는 물건인지, 물건을 훔쳐도 탈이 나지 않을 상대인지 판단하는 능력이야말로 도둑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소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셴은 대도로서 탈락이었다.
'도망쳐야 한다!'
더스틴이 진면목을 드러내기 전부터, 특유의 예민한 생존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하지만 자신에게서 의뢰품을 훔쳐 간 이를 찾기 위해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까닭에 도망치는 것도 요원했다.
'의뢰를 수락하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은 후회. 그러나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었다.
아셴에게는 의뢰품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훔치는 물건도 중요하지만 더 의미 있는 건 훔치는 과정 그 자체였다.
그래서 받아들인 의뢰였다. 기대대로 물건을 찾는 과정은 근래의 무료함을 달래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게 제 목숨을 앗아 갈 줄이야.
"나에겐 의뢰품이 없...!"
실낱같은 희망을 담아 외치던 아셴의 말은 마무리되지 못하고 끊어졌다.
지난밤, 뒷골목에서 괴한에게 폭행당하고 물건을 빼앗겼음을. 제 식견으로 보아 이곳엔 그 괴한이 없음을 이야기하려던 아셴의 생은 그렇게 마감됐다.
"성실한 학생이니 일찍 귀가시켜 줘야지."
가장 이른 죽음은 더스틴 나름의 배려였다.
대도 아셴은 특급 범죄자긴 했지만 흉악범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오늘 가장 협조적인 모습을 보인 인물.
이곳의 모두는 죽을 운명이었다. 자신이 그러한 뜻을 세웠으니 그것은 변하지 않을 미래.
그렇다면 무섭고 나쁜 꼴을 보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끝내 주는 게 그에게도 좋은 일일 터였다.
"미친...."
"어떻게 한 거야."
엉거주춤하게 선 나머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셴을 죽이는 건 그들에게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은신과 도주에 능할 뿐 아셴의 무력은 대단치 않았으니.
문제는 더스틴이 아셴을 죽인 과정이었다.
'알아차리지 못했다.'
입구에 선 더스틴부터 가장 안쪽 테이블에 있던 아셴까지는 10m가 넘는 거리였다. 무엇보다 그 사이에 자신들이 있지 않은가.
한데 아셴이 쓰러질 때까지 무엇 하나 느끼지 못했다. 아셴의 죽음은 마치 과정은 없고 결과만 있는 것 같았다.
"주, 죽여!"
"한 번에 덮쳐!!"
남은 여섯이 한 번에 달려들었다. 더스틴을 죽여야만 자신들이 사는 상황. 혼자라면 불가능하겠으나 전부가 달려든다면 어떨지 몰랐다.
"불 무서운지 모르는 부나방의 꼴이란."
루텐의 창이 사슬을 늘리며 접근한다.
수없이 신체를 토막 낸 샤크먼의 손도끼가 회전하며 날아든다.
카소테루의 저주가 영혼을 좀먹고자 쏘아진다.
맥긴의 강철 방패가 시야를 틀어막으며 다가온다.
....
하지만 그 모든 건, 불에 달려드는 나방의 모습일 뿐.
'어째서냐.'
'왜지?'
'왜... 닿지 않는 거지?'
'움직여. 움직여. 움직여. 움직여!'
평소라면 순식간에 상대의 목숨을 뺏었을 그들의 공격이, 한없이 굼뜨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목을 꿰뚫기 위해 내지른 창과 회전하며 날아가는 손도끼는 거북이보다 굼떴다.
카소테루가 쏘아 낸 저주는 아직까지도 본인의 앞에 있었다.
강철 방패는 그 무게가 몇만 배 늘어난 것처럼 도통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한없이 느려진 시간.
그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느리지 않은 건 오직 하나.
"날 귀찮게 한 대가는 크다."
아니. 느리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느려진 세계만큼 넓게 확보된 시야로도 움직임을 놓칠 정도의 속도.
'안 돼!!'
뒤늦게 정수의 힘을 끌어올려 보지만, 정수의 힘이 그들의 의지에 반응하는 것보다 더스틴의 검이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 게 훨씬 빨랐다.
그와 동시, 세계의 속도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괴... 물...."
과연 죽음과 밀접한 흑마법사란 걸까.
카소테루는 목이 갈라진 상태로도 마지막 소감을 뱉어내는 데 성공했다.
"흠. 마무리된 건가."
더스틴은 피바다가 된 가게 내부를 바라봤다. 시체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바텐더가 처리할 것이다.
자신의 일은 이걸로 끝.
"고맙네. 제출한 게 하나도 없어서."
제출된 의뢰품이 있었다면 꼼짝없이 배달까지 해야 할 뻔했다.
제거 대상들이 의뢰품을 전부 흡수한 덕분에 추가 업무가 없었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죽기 직전 아셴이 무언가 의뢰품에 관련된 말을 하려는 것도 같았지만....
'들어 줄 이유는 없지.'
아마도 아셴이 하려던 건 의뢰품이 없다는 말일 터.
의뢰품을 찾지 못한 것이든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이든 사정을 들어 줄 이유는 없었다.
괜히 사정을 들었다 추가 업무라도 생기면 곤란했다.
'휴가나 즐기다 갈까.'
저들의 시체에서 의뢰품을 추출하는 건 의회의 심부름꾼들 몫. 그러니 이제부턴 자유 시간이었다.
휴양지에서 쉬는 것도 좋고, 한적한 시골에서 농땡이를 피우는 것도 좋겠지.
수도로 돌아가면 또 일이 생길 게 분명했으니 쉴 수 있을 때 잔뜩 쉬어야 했다.
밖으로 나오자 바텐더가 가볍게 목례했다.
어느새 바텐더의 뒤에는 여럿의 사내가 있었다. 의회의 심부름꾼들이었다.
"고생들 하게."
더스틴과 교대하듯 내부로 들어간 사내들이 시체를 수거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 순식간에 가게 내부가 깨끗해졌다.
"먼저 갈 테니 천천히들 오라고."
"너무 늦지 않게는 돌아와 주십시오."
"내가 할 말이야. 너무 일찍 가지는 말자고. 쉬엄쉬엄 가면 얼마나 좋아."
더스틴은 한 팔을 휘적거리며 대충 인사했다.
저들이 일찍 돌아갈수록 자신이 도착했을 때 받을 잔소리가 늘어날 것은 명확한 사실.
부디 저들이 느긋하고 여유 있게 돌아가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진 않겠지만.'
녀석들의 충성심은 혀를 내두를 정도.
녀석들은 또 다른 임무를 위해 곧장 이곳을 떠날 게 분명했다.
'충성일지 세뇌일지.'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으니.
엄한 데 신경 쓰는 건 무척이나 귀찮은 일.
자기 자신에게 신경 쓰는 것도 귀찮은데 남들에게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걔네는 좀 재밌어 보였는데.'
그러나 때때로 귀찮음을 이겨 내는 것도 있는 법.
더스틴은 이곳으로 오며 만났던 두 명의 청년을 떠올렸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던 두 사람은 귀찮음을 이겨 낼 만큼 흥미가 돋던 대상이었다.
'하겠다던 복수 잘하고. 기회가 되면 다음에 보자고, 청년들.'
두 사람은 어쩐지 또 볼 것만 같았다. 이러한 감은 높은 확률로 적중하곤 했으니, 더스틴은 그때를 기대하기로 했다.
* * *
의회의 심부름꾼들마저 일을 마치고 떠난 뒤. 루드와 휴이는 아무도 없는 술집 캔디슨을 은밀히 찾았다.
"정말 여기서 싸운 거 맞아?"
"그래."
"멀쩡한데?"
부서진 자재도 없고 피비린내도 나지 않았다. 그냥 영업하지 않는 술집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루드는 이곳에 정수 수집 의뢰를 받은 자들이 전부 모였었음을, 그리고 더스틴의 손에 죽었음을 알았다.
"테이블들을 봐라. 무언가 이상한 게 느껴지지 않나."
"이상한 거? 모르겠는데?"
"무늬를 잘 살펴봐라."
휴이는 술집 곳곳에 있는 원목 테이블들을 자세히 살폈다. 확실히 루드의 말대로 조금 다른 게 보였다.
"무늬가 다르네."
"그래."
휴이는 루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곧장 알아들었다. 기존에 있던 테이블이 아니란 의미였다.
물론 술집이니 취객에 의해 테이블이 파손되거나 해서 바꿨을 수도 있지만.
"이쪽 지방의 나무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게 파손된 테이블을 굳이 멀리 있는 곳의 나무를 사들여 와 만들 이유는 없을 터.
이곳에 있는 새로운 테이블이 단순히 가게 주인이 바꾼 테이블이 아니란 뜻이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남아 있는 레몬향에 가까운 이 냄새. 핏자국과 냄새를 지우는 데 쓰는 약품의 흔적이다."
이쪽 지방에서 만들지 않는 나무 테이블. 핏자국과 냄새를 지운 흔적.
이것들 말고도 루드의 눈에는 많은 게 보였다.
'더스틴을 제외한 인원은 일곱.'
의뢰를 받아들이고 이곳에 모인 이들의 숫자.
'안쪽부터 하나, 둘, 하나, 하나, 둘.'
그들이 위치했던 자리.
'하나가 먼저 죽고, 나머지가 동시에 쓰러졌다.'
그들에게 찾아온 죽음의 순서.
"압도적이군."
그리고 더스틴의 압도적인 무력.
이곳에서 더스틴과 마주치지 않은 건 잘한 선택이었다.
'정수도 하나 얻었고.'
소집일 하루 전이던 지난밤. 정수의 기운을 느낀 루드는 몰래 그 뒤를 밟아 정수를 탈취했다.
'더스틴이 그냥 돌아간 걸 봐선 정수를 빼돌린 사실도 모르는 것 같고.'
아셴에게서 정수를 뺏었으나 그를 죽이진 않았다.
알량한 선의 때문은 아니었다.
'더 이상의 불참자가 나와서는 안 됐지.'
소집되지 않은 의뢰수행자는 요렌테 하나로 족하다. 요렌테 말고도 소집에 응하지 않은 이가 생긴다면 그에 관해 추적이 생길 확률이 높았다.
그래선 안 됐다. 요렌테가 죽었단 소식은 머지않아 밝혀지겠지만 그게 지금이어선 큰일이었다.
아셴이 더스틴에게 정수를 빼앗긴 사실을 전달할 리스크를 지면서까지 그를 살려 놓은 이유였다.
다행히 아셴의 말은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을 죽여야 하는 더스틴이 굳이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리란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바로 떠나?"
"이곳에 조금 더 머문다."
"볼일은 끝난 거 아니었어?"
휴이의 말대로 발렌타노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하지만 당장 발렌타노를 떠나는 건 위험했다.
"아직 더스틴과 관련된 눈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일을 마친 후 곧장 발렌타노를 떠난 더스틴이었지만, 그와 관계된 모두가 떠났다 볼 수만은 없었다.
만에 하나 더스틴에게 말을 전할 눈이 남아 있다면....
"더스틴에게 복수를 위해 발렌타노로 향한다 말했으니 최소한 그 흉내는 내는 게 안전하다."
자신들에게 흥미를 보였던 더스틴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말을 전해 놨을 수도 있었다.
하니 며칠은 이곳에서 머무르며 복수나 복수 방법을 찾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사이 정수도 흡수할 생각이다."
루드는 품 안에 넣은 정수를 의식했다. 자신의 마력을 덧씌워 기운이 흘러나오는 걸 차단시켜 놓은 상태였다.
발렌타노를 떠나기 전 이것을 흡수할 생각이었다.
듀얼을 통해 제 안의 정수의 힘을 온전히 감출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 지니고 있는 것보다 흡수하는 게 더 안전할 터.
"정수를 흡수하고, 혹시 모를 더스틴의 이목에서도 완전히 자유로워지면 그때 이동한다."
다음 행선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돼 있었다.
갑작스럽게 수정구가 울리지 않았다면 대수림을 나온 즉시 향했을 곳.
루드 본인의 출생과 관련된 곳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41화
루드는 손에 든 정수를 바라봤다.
회귀 이후 두 번째로 흡수하는 정수.
심호흡을 마친 뒤 정수를 삼켰다.
목을 넘어감과 동시, 작은 구슬 같던 정수는 형체를 잃어버렸다. 그 대신 찾아온 건 끔찍한 한기와 격통.
전생에서도, 회귀 이후 처음으로 정수를 흡수했을 때도 느꼈던 감각이었다.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정수의 기운.
루드는 처음 흡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녀석의 고삐를 강하게 조였다.
'따라와라.'
이미 내면의 검은색 문은 열어 놓은 상태. 그곳까지 정수의 기운을 인도하기만 하면 됐다.
동질의 힘을 느낀 걸까. 새로운 정수의 힘은 자연스럽게 검은색 문으로 향했다.
일전에 흡수했던 정수가 터놓은 길을 고스란히 따라서였다.
기운의 흡수가 간단하게 끝날 것 같은 상황.
그러나 루드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이러다가도 한순간에 돌변하는 게 정수의 힘이란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큽!'
아니나 다를까, 순순히 흡수되나 싶던 정수의 힘이 갑작스레 날뛰었다. 여태까지의 순종은 지금의 반항을 위해서였다는 듯 강렬한 움직임이었다.
심지어 녀석의 반항이 거세지자 이미 검은색 문 내부에 자리 잡은 정수의 힘도 덩달아 난동을 피웠다.
루드는 이럴 때의 대처법을 알고 있었다.
'작작하고, 들어가란... 말이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
어중간하게 어르고 달래 봤자 녀석들의 반항은 끝없을 터. 대들 생각조차 못하게 강하게 짓누르는 게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대처법이었다.
강한 의지가 검은색 문 앞에 멈춰 있던 정수의 힘을 밀어붙였다. 안간힘을 쓰며 버티려는 정수의 힘이었지만, 루드의 의지를 이겨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하-."
긴 숨을 토해 냄과 동시, 루드는 정수의 힘이 제 안에 완전히 자리 잡았음을 느꼈다.
'손톱 크기 정도인가.'
검은색 문 안에 있는 온전한 정수의 힘은 고작 손톱만 한 크기였다.
하지만 작다고 무시할 순 없었다. 손톱만 한 정수의 힘에서 뽑아낼 수 있는 흑마력의 양이 대단했다.
배율을 따지자면 족히 백 배에 이를 정도였다.
'5서클 마법도 한두 개는 사용할 수 있겠군.'
정수를 흡수함으로써 생긴 가장 큰 변화는 5서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단 점이었다.
고작해야 한두 가지 뿐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전력에 큰 보탬이 됐다.
"들어와도 된다."
"이제 끝난 거야?"
흡수가 끝났음을 알리자 휴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방 전체에 마력을 두르고 바깥을 지킨 것이다.
"엄청 쌀쌀하네. 정수의 힘 때문인가?"
"그래. 정수에 담긴 한기의 여파다."
정수의 힘을 온전히 흡수해 냈음에도 한기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휴이는 자신의 숨을 따라 서리는 김을 보고 놀라워했다.
여름에 가까워지고 있는 계절이었다. 지역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두껍던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볍게 바뀌고 있는 날씨였다.
한데 이 방만큼은 아직도 겨울의 복판에 있는 것 같았다.
"...물도 얼었네."
심지어는 컵 안의 물엔 살얼음이 껴 있었다. 그것을 본 루드는 컵을 들었다.
"마시려고?"
"실험해 볼 게 있다."
살얼음이 껴 있던 물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루드의 손을 타고 흐른 한기 때문이었다.
'이전보다 빨라졌다.'
내뿜을 수 있는 한기의 양도 많아졌고, 그 속도도 더 빨라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정수 하나를 흡수했을 때와 두 개를 흡수했을 때, 또 세 개를 흡수했을 때는 모두 다른 법.
정수의 힘이 커질수록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질 터였다.
하지만 이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
실험하고자 한 것은 지금부터였다.
"오...?"
꽝꽝 얼었던 물이 서서히 본래의 형태를 찾아 갔다. 물을 얼렸던 한기는 고스란히 루드에게로 되돌아갔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다.'
한기를 흡수하는 건 전생에선 해 보지 않은 활용법.
한기를 방출하는 것처럼 흡수하는 것도 가능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기에 해 보지 않은 시도였다.
이미 갖고 있는 한기만으로도 몸과 정신이 얼어붙기 직전인데, 굳이 흡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전생부터 쌓은 정수에 관한 이해도가 있고, 신비 듀얼의 힘으로 정수의 부작용도 최소화해 놓은 상태였다.
'들어가라.'
루드는 바깥으로 나왔던 한기를 다시 제 안으로 되돌리고자 했다.
스으으으....
한기는 느리지만 멈춤 없이 이동했다. 마침내 검은색 문 앞에 도착한 한기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쏙 들어갔다.
'이게 되는군.'
원하던 바를 이룬 루드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로써 바깥의 한기를 흡수하는 게 가능하단 걸 알았다.
다만 평소에 할 법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한기는 정수로부터 계속 솟았다. 굳이 바깥으로 풀어낸, 혹은 바깥에 존재하는 한기를 흡수할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과정도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내부의 한기를 방사하는 건 쉬웠으나 외부의 한기를 안으로 들여 의지대로 거두는 건 까다로운 일이었다.
'조금 더 연습하면 한기를 거둬 흡수하지 않고 밖으로 흩는 것도 가능하겠군.'
흡수가 처음인 지금은 어렵겠지만, 방출만큼 익숙해진다면 한기를 안으로 갈무리하는 게 아니라 흡수하고 외부로 방출하는 식의 응용도 가능할 것 같았다.
'특정 상황에서는 꽤 쓸 만한 패가 되겠군.'
이런 식의 활용은 언젠간 쓰일 수 있을 터.
만족스러운 실험 결과였다.
"역시 대단한 힘이네. 그래도 갖고 싶진 않지만."
모든 광경을 지켜본 휴이는 짧은 소감을 뱉었다.
확실히 정수의 힘은 대단했다. 소드마스터가 엮일 만 하달까.
하지만 힘을 얻은 대가로 얼어붙는 건 사절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취향은 앞에 놓인 벽을 온몸으로 부딪쳐 허무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마법도 사용한다며. 뭔가 다른 점은 없어?"
"그래. 거기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정수의 힘을 설명한 김에, 루드는 휴이에게 많은 것을 공개했다.
그중엔 흑마력을 통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있었다.
"5서클의 경계에 섰다."
전생의 경지가 7서클이었으니, 엄청난 회복세였다. 정수의 힘을 흡수하며 흑마력이 늘어난 덕분이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마법의 경지를 회복할 줄은 몰랐던 루드였다.
"엄청나네. 익스퍼트 상급에 5서클 마법사라. 이러다 곧 소드마스터에 대마법사까지 하겠어."
"해야지. 늦지 않게."
휴이는 너스레를 떤다고 한 말이었으나 루드는 진지했다.
제국에 맞서기 위해선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일단은 과거의 경지를 되찾는 게 우선이었다.
거기서 중요한 건 시간.
최대한 이른 시일에 전생의 경지를 되찾고 그 너머를 노려야 했다.
"그, 그렇지. 해야지."
검과 마법 두 가지 모두 절대강자의 경지에 오른 이가 있었던가.
휴이는 잠깐 고민했다. 저 옛날, 멀고 먼 신화시대라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루드의 말이 허풍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간 보여 준 루드의 모습대로라면 충분히 이루고도 남았다.
"너도 빨리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그치. 나도 빨리 마스터가 돼야... 뭐?"
무의식적으로 대꾸하던 휴이는 루드의 말에 깜짝 놀랐다.
"왜 그러지?"
"아니. 마스터가 된다는 걸 너무 쉽게 말해서."
"너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전생과 달라진 역사였지만, 루드는 휴이의 가능성과 향상심을 믿었다.
녀석이라면 분명 다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터였다. 어쩌면 전생보다 빠를지도 몰랐다.
'문제는 나다.'
지금까지 엄청난 속도로 전생의 경지를 회복해 왔지만, 이제부턴 이전만큼의 속도를 기대할 수 없었다.
'검의 길은 새로 쌓아 올려야 한다.'
전생의 말미에 고안한 검을 휘두르는 이상, 전생에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과정은 무용지물이 됐다.
모든 것은 만류귀종이라 결국 한곳으로 모인다지만 아직은 검을 더 갈고닦을 때였다.
당장 세 가지 검 중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검이 하나도 없는 판국이 아닌가.
'시간이 필요하다.'
두 번째 검까지만 제대로 다뤄도 마스터의 경지를 넘볼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마법은 더 이상 마력량을 늘리는 것만으론 나아지지 않을 테고.'
엄청난 회복세를 보인 마법의 경지. 검술을 더 신경 썼음에도 회복된 경지의 퍼센티지를 따지면 검술보다 높은 게 마법의 경지였다.
다만 이는 정수를 흡수하며 얻은 흑마력의 영향이 큰 부분.
지금부터의 경지는 단순히 마력량만 많다고 변화하거나 하지 않았으니 정체가 시작될 확률이 높았다.
'마법에도 신경을 써야겠지.'
이를 타파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마법을 수련하면 됐다.
여타 마법사들과 방식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마찬가지로 차근차근 경지를 밟아 올라가면 될 일이었다.
"특별한 낌새는 없었지?"
"어. 근방부터 해서 계속 둘러봤는데 이상한 건 못 느꼈어."
"좋아. 내일 새벽에 떠나자."
더스틴과 관련된 이도 없는 것 같았고, 마음먹었던 정수의 흡수도 마쳤다.
루드는 드디어 발렌타노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바깥대륙으로 가는 거지?"
"그래. 최종적인 목적지는 까마귀 부족이다."
"까마귀 부족. 들어 본 적 있어."
알브족은 바깥대륙의 부족 중 제국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부족.
반대로 말하면 바깥대륙의 다른 부족들과 가장 멀리 떨어진 부족이란 의미였다.
하지만 까마귀 부족은 그런 알브족도 알고 있는 부족이었다.
바깥대륙의 많은 부족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세를 자랑하는 부족, 그것이 까마귀 부족이었다.
"그런데 최종적인 목적지라면 지금 당장은 아니란 뜻인데."
"맞다. 까마귀 부족을 찾아가기 전 들러야 할 곳이 두 군데 있다."
루드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자신이 제 출생의 비밀을 좇아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나중의 시간대였다.
당시의 아버지는 부상과 중독의 여파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족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때의 루드는 그런 어려움들을 해결하며 부족원의 신뢰를 얻었고, 신분을 되찾고 스스로를 증명한 끝에 그들의 수장이 되었다.
'이번에도 까마귀 부족이 중심점이 되어야 한다.'
전생에서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군세를 만들었을 때, 그 시작점은 까마귀 부족이었다.
그건 이번 생에도 같을 예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과거처럼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 같은 과정을 밟을 수 없었다. 당시의 모든 일들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녀석을 대신 잡는다.'
아버지가 입은 부상의 원인, 퓨렐 설산의 트롤.
아버지가 큰 부상을 입기 전에 먼저 녀석을 사냥하고, 그로써 자신을 증명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두 가지 아이템이 필요했다.
'여명의 잿불과 황혼의 비명. 녀석을 상대하려면 그 두 가지가 필요하다.'
전생에서 녀석을 상대해 본 루드였다.
'끔찍한 녀석이었지.'
아버지가 죽이지 못했던 녀석은 시간과 경험이 쌓이며 더욱 강해졌고, 루드가 찾아갔을 땐 설산의 주인이 돼 있었다.
'진짜로 죽을 뻔했었다.'
많은 고비가 있던 전생이었지만, 녀석과의 전투는 그 중에서도 손꼽히게 위험했던 순간들 중 하나였다.
어쩌면 죽지 않은 게 기적일지도 몰랐다. 사실 전생에서 녀석을 죽였다지만 정확한 과정은 기억하지 못했다.
최후의 순간 정수의 힘을 폭주시켰고, 잃었던 의식을 간신히 되찾았을 땐 녀석이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다를 거다.'
강적인 것은 확실하나 전생과는 다르다.
자신 또한 그렇고, 녀석 또한 그랬다.
'예전보다 훨씬 이른 시간대다.'
퓨렐 설산이 아직은 퓨렐 설산이 아니라 퓨렐 협곡일 때다. 녀석도 이전만큼의 위용은 보이지 못할 터.
그럼에도 녀석이 난적인 건 분명했다. 다만 루드는 그 난이도를 낮출 방법을 알았다.
"먼저 여명 부족으로 간다."
다행히 중간 목적지들은 모두 까마귀 부족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었다.
첫 번째 중간 목적지는 여명 부족.
"여명의 잿불을 얻어야 한다."
녀석이 내뿜는 냉기에서 몸을 지켜 줄 잿불을 얻을 곳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42화
대륙 지도를 보면, 중앙에 대륙의 반절을 차지한 카르바나 제국이 위치한다. 그 서쪽으로는 고르단과 하이엔, 신성 왕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
제국의 북쪽으로는 세바니아 왕국이, 고르단과 하이엔 너머의 보다 서쪽에는 무탈란 왕국이 존재했고 남쪽으로는 광활한 바다와 군도가 있었다.
그렇다면, 제국의 동쪽은?
다른 방향의 국가나 지형이 비교적 상세히 그려진 것에 비해, 동쪽에는 황무지 위로 적힌 글자밖에 없었다.
바깥대륙.
대륙의 바깥, 혹은 바깥에 위치한 대륙.
두 가지 의미 모두로 쓰이는 명칭의 그곳은 이민족의 땅이었다.
그곳을 탐방한 조사관에 의하길, 국가도 이루지 못한 야만인들이 저마다 모여 사는 곳. 그곳이 바로 바깥대륙이었다.
처음, 제국은 바깥대륙을 노렸다. 다른 왕국들과 입씨름하며 얻어 내는 자원보다 바깥대륙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을 거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반만 맞은 생각이었다. 제국의 생각대로 바깥대륙에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자원들이 많았다.
하나 그것을 가져가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바깥대륙의 원주민, 제국 사람들이 부르길 이민족 혹은 야만족이라 칭하는 그들은 제국이 자신들의 땅에 들어오는 걸 반기지 않았다. 자신들의 땅에서 무언가를 가져가는 것은 더더욱.
절대적인 머릿수는 적었지만 개개인의 힘이 뛰어나고 지리적 이점까지 안은 이민족들의 극렬한 저항에 제국은 결국 물러났다.
그 후 서로의 존재를 명확히 인식한 두 집단은 때론 싸우고, 때론 교류하며 서로 필요한 부분을 챙겨 갔다.
그리 형성된 관계가 자그마치 백 년이었다.
제국이 갑작스레 전면전을 시작하기 전까지.
발렌타노를 떠난 루드와 휴이는 여명 부족으로 향했다. 그곳까지의 길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은 없었다.
발렌타노로 갈 때와는 달리 여명 부족으로 가는 길은 여유로웠다. 피곤할 땐 쉬고, 생각거리가 생기면 멈춰서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동하길 칠 주야. 마침내 두 사람은 여명 부족에 도착했다.
여명 부족은 산간 지역에 있었다. 부족의 터가 있는 평지를 제외하면 인근의 모든 지형이 산이었다.
다만 대수림 같은 산지가 아닌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산지의 모습이었다.
주변에는 야트막한 산과 산세가 험한 산이 섞여 있었고, 그 산들이 이룬 골의 평지에 여명 부족이 위치했다.
척.
루드와 휴이가 부족의 입구로 다가서자 두 명의 사내가 긴 창을 엑스자로 교차하며 막아섰다.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당신들은."
"누구지?"
두 사내는 쌍둥이였다.
상의를 탈의한 커다란 풍채의 두 사람은 외모를 넘어 생각까지 공유하는 듯했다.
"여명 부족에 볼일이 있어 왔다."
"우리 부족에."
"볼일이 있다고?"
잠시 시선을 교환한 쌍둥이는 루드와 휴이를 지그시 바라봤다.
"어디."
"출신이지?"
둘 모두 바깥대륙 출신인 것 같기는 했다. 다만 어느 부족 출신인지는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앞으로 나선 검은 머리 녀석은 까마귀인 것도 같은데, 뒤에 있는 큰 녀석이 애매했다.
생긴 걸 보면 알브나 뱀 같은데....
'뱀이라면 이상하고.'
'알브족이어도 이상하고.'
가끔이지만 뱀 부족과는 왕래가 있다. 그러나 눈앞의 녀석은 초면이었다.
물론 그간 오지 않은 부족원이 온 것일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런 인물을, 그것도 동행인까지 딸려 보낸다? 쉬이 납득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알브족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것이.
'잘생기긴 했지만.'
'알브족의 몸은 아니다.'
바깥대륙의 원주민 중 가장 중앙 대륙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알브족이다.
때문에 왕래와 교류가 어려웠지만 그들의 특징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타고난 아름다움.
알브족의 사람들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아름다운 외관을 가진 걸로 유명했다.
눈앞의 얼굴은 사내답고 무척이나 잘생긴 것이었지만, 전형적인 알브족의 외관과는 차이가 컸다.
"알아봤겠지만, 일단 난 알브 출신이야."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도무지."
"믿을 수 없군."
그러니 출신지를 밝힌 휴이의 말에 쌍둥이가 보인 반응은 격렬한 것이었다.
차라리 뱀 부족이라 했으면 무슨 일이 있나 보다 생각했을 터. 한데 알브족이라니?
루드와 휴이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눈에 더욱 경계심이 서렸다.
"난 까마귀다."
그 눈초리를 받으며 루드도 제 출신을 밝혔다.
비록 나고 자란 데는 달랐지만 핏줄을 따지자면 까마귀 부족 출신인 루드였다.
"무슨."
"볼일이지?"
쌍둥이는 교차한 창을 거두지 않은 채 물었다.
"여명 부족의 족장님께 부탁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족장님께?"
족장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는 방문자의 말.
쌍둥이는 고민에 잠겼다. 방문자가 어떤 인물인지, 족장에게 하고 싶다는 부탁이 어떤 부탁인지, 족장이 어떤 생각일지.
알 수 있는 게 없었으니 그들로선 판단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동생."
"알겠어."
왼쪽에 있던 쌍둥이가 창을 거두고 앞으로 나서며 루드와 휴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찬가지로 창을 거둔 오른쪽의 쌍둥이는 부족 내부로 들어갔다.
"족장을 부르러 간 건가?"
"그렇다."
루드는 한 발 물러서서 쌍둥이의 복귀를 기다렸다.
'이때도 이런 화법이었군.'
여명 부족의 쌍둥이 반체스와 반니스.
두 사람은 과거 루드의 군에 몸담은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당시에도 독보적인 화법으로 유명했다.
"루드. 이 녀석들 꽤 강해 보이는데?"
"그래. 둘 모두 익스퍼트 중급이다."
"여명 부족은 약하다 하지 않았어?"
귓속말을 하며 반체스를 곁눈질하는 휴이였다.
이곳으로 오면서 루드가 했던 말들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중엔 분명 여명 부족의 무력이 약하단 말도 있었다. 비전 심법을 잃어버린 알브족보다도 약하다는 말에 놀랐던 기억이 있으니 확실했다.
한데 눈앞의 경비는 전혀 약해 보이지 않았다. 익스퍼트 중급인 것도 그렇지만 몸부터 잘 단련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이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니.
어쩌면 루드가 알고 있는 정보가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하다."
하지만 루드는 고개 저었다.
단언할 수 있었다. 여명 부족의 무력이 약하다는 것을.
"이 쌍둥이들이 여명 부족 무력의 90%다."
나중에야 달라지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럴 터였다. 전생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여명 부족 전력의 절반 이상이던 둘이었으니.
"그걸 어떻게 알아?"
"아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저들이 경비를 서는 게 이상한가?"
"뭐... 조금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알브에서야 부족원간의 무력 편차가 크지 않았으니 돌아가며 경비를 서도 괜찮았겠지. 하지만 만약 무력 자원이 많지 않다면?"
가라앉은 눈동자가 휴이를 응시했다.
"부족을 지키는 일이다. 강한 자가 맡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바깥대륙의 부족이라고 모두 같은 게 아니다. 각 부족이 처한 상황, 살아가는 환경, 갖고 있는 장단점들이 모두 다르다.
당장 알브와 여명만 비교해 봐도 그랬다.
각 부족은 그러한 차이를 인지하고 그것에 적응하면서 자신들만의 방법을 터득해 살아가고 있었다.
부족에서 가장 강한 자가 경비를 서는 게 이상하단 건, 알브 부족에서만 살아왔던 휴이였기에 가진 의문이었다.
설명이 끝남과 동시, 동생 쌍둥이 반니스가 돌아왔다. 안으로 들이란 족장의 말과 함께였다.
"따라와라."
반니스를 따라 들어간 부족 내부에는 건물들이 곳곳에 있었다.
자연에 융화된 느낌의 알브족 거처와는 달리 인위적인 느낌이 강했고, 간간히 커다란 소음이 들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부의 열기가 후끈했다.
휴이는 손부채질을 했다.
이상했다. 날씨가 여름에 가까워졌다지만 이 정도로 뜨거울 리는 없었다. 더군다나 주변이 산으로 싸여 있지 않은가. 다른 곳보다 시원해야 정상이었다.
"온도가... 낮군."
하지만 루드는 정반대의 말을 뱉었다.
휴이는 진심이냐고 물을 뻔했다. 대충 느껴도 30도가 넘는 기온이었다.
그러나 반니스의 반응은 더 뜻밖의 것이었다.
"...우리 부족에 와 본 적 있나?"
"와 본 적은 없으나 꼭 와 봐야만 아는 건 아니지."
"그것도 그렇군."
루드의 말에 잠시 멈췄던 반니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무슨 상황이야. 그보다 말을 제대로 하네?'
휴이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신 귀에 들어온 건 정상적인 반니스의 말이었다.
반체스 반니스 쌍둥이는 함께 있으면 말을 나눠서 하지만, 따로 있으면 정상적으로 말했다. 독특한 이들이 많았던 루드의 군에서도 유명했던 이유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한편 루드는 부족 내부를 면밀히 살펴봤다.
온도가 너무 낮았다. 바깥에 비하면 충분히 덥고 뜨거운 온도였지만, 여명 부족인 것을 감안하면 이보다 훨씬 더 뜨거워야 옳았다.
'일이 꼬일 수도 있겠군.'
본래는 필요한 물건을 구해 바로 다음 목적지로 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명 부족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어떤 문제가 있는 건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여명 부족도 언젠가 제국에 대항할 힘을 보태야 했다.
"이곳이다."
"안내 고맙다."
"별거 아니다."
두 사람을 족장에게 안내한 반니스는 곧장 입구로 돌아갔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문이 열자 건물 안에는 장년의 사내가 있었다.
쌍둥이와 마찬가지로 상의를 탈의한 채였는데, 몸 또한 쌍둥이처럼 근육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명 부족의 족장 콩파스네."
"루드입니다. 이쪽은 휴이라고 합니다."
"그래 루드, 휴이. 날 찾은 이유가 뭔가?"
질문에 대답하는 건 간단했다. 퓨렐 설산의 트롤을 상대하기 위한 물품을 얻기 위함이었다.
"여명의 잿불을 얻어 가고자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여명의 잿불이라...."
콩파스는 옆에 놓인 시가를 들어 보였다. 루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불을 붙인 뒤 깊게 빨아들인 콩파스가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여명의 잿불을 어떻게 알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일세."
여명의 잿불은 여명 부족의 보물이었다. 물론 유일한 것도 아니고 다시 만들어 낼 수도 있었기에 필요에 따라 외부로 반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가치가 낮거나 가볍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어린 녀석들에게 함부로 내줄 만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 모든 이유를 떠나 여명의 잿불을 줄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미안하지만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처지라네."
"역시 무슨 일이 있군요."
루드는 안색을 굳혔다.
본래는 곧장 여명의 잿불을 얻어 갈 요량이었다. 쉽게 내주진 않겠지만 잘 이야기하면 큰 어려움 없이 가져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여명 부족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말한다고 달라질까 싶다만. 뭐, 말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콩파스는 시가를 한 모금 더 빨아들였다.
"여명의 잿불이 뭔지는 알고 왔나?"
"누군가의 충동질이나 타인의 의사를 대신해서 온 게 아닙니다. 뭔지도 모르는 것을 달라고 떼쓰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군. 미안하네.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군."
루드의 강한 대답에 콩파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도 나이가 들긴 든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여명의 잿불을 줄 수 없는 이유에서 어리다는 이유는 빼야 했다.
세상엔 나이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단 걸 이미 알고 있는 콩파스였다.
"안다니 길게 설명 않겠네. 마을에 있는 여명의 잿불은 줄 수 없고 그대들에게 주려면 새로 만드는 수밖에 없는데... 여명의 잿불을 만들 수가 없네."
"어째서입니까?"
"필수 재료가 없거든."
"살라만더의 눈물 말입니까?"
"그래. 그것 말일세."
살라만더의 눈물은 강한 화기를 머금은 원석이었다. 일전 미켈레 구르드손이 파바르의 경매장에서 사 간 불꽃의 눈물과 비슷했는데, 그것처럼 예쁘지 않고 훨씬 크고 무거운 성질을 가졌다.
다만 품고 있는 화기는 불꽃의 눈물 이상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살라만더의 눈물은 분명 흔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구할 수 있었다.
여태 여명 부족도 꾸준히 살라만더의 눈물을 구해 여명의 잿불을 만들었고.
"구해 오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근방에서 구할 수 있는 걸로 아는데요."
"그랬지."
"그랬다는 건?"
그러한 루드의 의문에 콩파스는 덤덤히 답했다.
"지금은 불가능하단 의미일세."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43화
살라만더의 눈물은 여명의 잿불을 만들기 위한 필수 재료다.
한데 살라만더의 눈물을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니?
"왜죠?"
물론 살라만더의 눈물을 구하는 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과정.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충분히 구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여명의 잿불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자네 말대로 살라만더의 눈물이 묻혀 있을 만한 산이 근방에 있지. 문제는 그 산에 갈 수가 없다는 거네. 몇 달 전부터 몬스터가 늘어났거든."
"몬스터 말입니까?"
"그래. 고블린이나 코볼트까지는 어떻게 한다 해도 놀과 화이트베어까지 있으니 살라만더의 눈물을 찾는 건 불가능이라 봐야지."
살라만더의 눈물을 구하려면 당연하게도 살라만더의 눈물이 묻혀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그 과정에 걸리는 시간과 품은 매번 천차만별.
운이 좋으면 금방 발견할 수 있었지만, 운이 나쁘면 몇 달을 걸려서 겨우 찾아낼 때도 있었다.
그렇게 매장지를 찾고 나면 그것을 꺼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살라만더의 눈물은 최소 바위만 한 크기였고 같은 크기의 쇠보다 훨씬 무거운 까닭에 그 작업에도 꽤나 시간이 걸렸다.
살라만더의 눈물을 구하는 게 불가능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살라만더의 눈물을 찾고 꺼내 오는 데 걸리는 시간.
그 긴 시간 동안 몬스터들을 마주칠 터였다. 무력이 대단치 않은 여명 부족으로서는 위험한 일이었다.
"...원래도 몬스터가 있었습니까?"
"있었지. 다만 지금처럼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네. 끽해야 고블린이나 코볼트가 전부였으니까. 오히려 녀석들의 행동반경을 토대로 살라만더의 눈물이 있을 만한 곳을 추리기까지 했지."
"그렇다면 갑자기 몬스터가 늘어났다는 소리인데."
의아한 일이었다.
일반 동식물과 마찬가지로 몬스터 또한 그들만의 생태계가 있다. 그 생태계가 갑작스레 변한 건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였다.
"시간이 지나 바깥에 있던 녀석들이 안으로 들어온 걸지도 모르지."
"바깥이라면."
"커크 산맥 말일세. 엄밀히 말하자면 이 근방의 산들이 전부 커크 산맥에 속한 것들이니 산을 타고 넘어오지 않았을까 추측 중이네."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의 종류는 확인하셨습니까?"
"확인한 건 화이트베어까지일세. 녀석을 발견한 뒤로는 근처에 얼씬도 안 했지."
화이트베어는 대형 몬스터였다. 반체스와 반니스를 빼면 여명 부족에서 녀석을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은 없으리라.
살라만더의 눈물을 찾고 가져오는 데 걸리는 시간과 인력을 따지면 그들로선 부족의 명운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살라만더의 눈물을 구할 수 없다는 말이 이해됐다.
"그렇다면 저희가 살라만더의 눈물을 구해 온다면, 그때는 여명의 잿불을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까?"
"자네들이?"
콩파스는 눈앞의 청년들을 바라봤다.
두 사람이 살라만더의 눈물을 구해 올 거란 기대는 크지 않았다.
몬스터야 어떻게든 물리친다 하더라도 살라만더의 눈물을 찾고 그것을 꺼내는 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가능하고말고. 만약 자네들이 살라만더의 눈물을 발견하고, 그 근방의 몬스터를 전부 처리할 수 있다 하면 꺼내는 것부터는 도와줄 수도 있네."
그럼에도 이리 답한 건 혹시나 하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정말 이 둘이 살라만더의 눈물을 찾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가능성.
살라만더의 눈물을 찾지 못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근방의 몬스터를 사냥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부족에게는 큰 이득이었다.
몬스터가 줄어들면 광물을 찾는 것도 쉬워지고, 그럼 다시 부족의 장인들도 마음껏 망치질을 할 수 있을 터.
말릴 이유가 없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살라만더의 눈물이 있을 만한 곳을 알려 주십시오. 저희가 가겠습니다."
루드는 콩파스가 말한 사태를 직접 확인하고자 했다. 콩파스는 근방의 산도 커크 산맥의 일부이니 본맥의 몬스터가 흘러들어온 게 아닐까 추측했지만, 루드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전생에서 없던 문제였다. 전생에서 이곳을 찾은 건 지금보다 나중의 시간대.
전생에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라진 문제인지, 아니면 다른 변수 때문에 없던 문제가 생겨난 것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기억에 의하면 커크 산맥의 본맥이 있는 쪽에 위치한 부족은....
"산 너머에 있는 부족이 어딘지 아십니까?"
"알고말고. 자네도 까마귀 부족에서 왔으니 알고 있지 않은가. 커크 산맥을 다스리는 부족이 어디인지."
"뱀 부족."
"역시 잘 알고 있구먼."
기억대로 커크 산맥에 있는 부족은 뱀 부족이었다.
'이건 확인해야 한다.'
살라만더의 눈물을 구하는 것도 구하는 것이지만,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 자연스러운 건지 인위적인 건지 꼭 확인해야만 했다.
'만약 뱀 부족이 술수를 부리는 거라면.'
어떻게든 훼방을 놓고 그 증거를 잡아야 했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르겠군.'
뱀 부족은 언젠가는 처리해야 할 걸림돌이었다. 바깥대륙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욕을 품은 그들은 바깥대륙의 힘을 모음에 있어 가장 큰 방해물이었다.
부족의 힘을 강화하겠다는 건 어느 부족이나 가진 생각이었다.
중앙대륙이 국가 단위로 경쟁하고 견제하는 것처럼, 바깥대륙에선 부족 간에 그러한 다툼이 있었다.
그러나 뱀 부족의 경우는 그 방법이 문제였다.
이간질, 계략, 배신, 협작....
'우리끼리 갉아먹기 전에 처리하는 게 최선이다.'
뱀 부족은 부족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힘을 적극 활용했다.
그 결과, 안 그래도 독자적이던 바깥대륙의 부족들은 점차 고립돼 갔다.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하는 루드에게는 최악의 상황.
더군다나 각 부족을 고립시키는 것만 아니라 부족의 핵심 자원을 암살하거나 내분을 일으키며 전력을 약화시켰으니, 더더욱 그 행보를 막아야만 했다.
'뱀 여왕. 뱀 공주.'
루드는 두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뱀 부족은 다른 부족들과 달리 자신들의 수장을 족장이라 부르지 않았다. 또 여러 부족 중 유일하게 여인만이 족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부족이었다.
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뱀 여왕, 그 후계가 뱀 공주였다.
당대의 뱀 여왕과 전대의 뱀 공주는 역대 최고라 일컬어졌다.
뛰어난 두뇌와 정확한 판단, 미래를 내보는 현명함.
이전의 우두머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단 평이었다.
그중에서도,
'뱀 공주 소크란.'
이제는 전대 뱀 공주가 된 그녀는 까마귀와 뱀 부족이 혼인 동맹을 맺으며 까마귀 부족의 차기 족장과 결혼했다.
자연스레 뱀 공주가 사라진 자리에 뱀 여왕은 새로운 뱀 공주를 선정했다.
하지만 루드는 알고 있었다.
새로이 임명된 뱀 공주는 허울뿐이란 것을. 진짜 뱀 공주는 여전히 소크란이란 사실을.
'어머니.'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자신을 품은 채 먼 길을 떠나, 끝내 제국 변두리의 어느 작은 마을에 도착한 어머니.
까마귀 부족이 최강의 부족이 되기 위해 뱀 부족과 맺은 혼인 동맹.
그 과정에서 한 여인은 제 연인과 부족의 미래를 위해 부족을 떠났다. 배 속에는 새 생명을 품은 채였다.
혼인 동맹 이후 까마귀 부족은 원했던 대로 최강의 부족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모습. 그 내부는 서서히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뱀독은 은밀히, 그러나 확실하게 까마귀 부족에 스며드는 중이었다.
만약 지금 여명 부족의 상황도 뱀 부족이 술수를 부린 것이라면, 꼭 깨부숴야만 했다.
"가자."
"바로 가는 겐가?"
"네. 살라만더의 눈물을 언제 찾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죠."
"잠시 기다리게."
다 태운 시가를 내려놓은 콩파스가 몸을 일으켰다.
"어떤 무기들을 쓰나."
"검을 씁니다."
"저는 요거요."
주먹을 쥐어 올린 휴이에 콩파스가 피식 웃음 지었다.
"일단 따라오게."
콩파스를 따라 도착한 곳은 큰 건물이었다.
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가 덮쳐 왔다.
세 사람은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꽤나 깊었다.
계단이 끝나갈 무렵, 콩파스가 경고했다.
"뭘 잘못 만지지 않게 조심하게. 다쳐도 모르니. 그리고 좀 시끄러울걸세."
"뭐라고요?"
"이런. 벌써 그런가 보군."
경고가 무색하게 돌아온 큰 목소리에 콩파스는 큭큭댔다. 휴이는 귀를 파고드는 큰 소리에 인상을 찡그린 채였다.
"이게 무슨 소리야!"
주기적으로 들리는 큰 소리에 큰 목소리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콩파스는 계단 끝에 자리한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그제야 휴이는 소리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대장간?"
"우리 부족의 심장이라 할 수 있지."
건물 여러 개의 지하를 합쳐놓은 건지 지하 공간은 무척이나 넓었다.
어쩌면 부족이 위치한 부지의 지하 전체가 이렇게 돼 있을지도 몰랐다.
"사람이 안 보인다 생각했더니... 다들 여기 있어서 그랬던 거구나."
부지 크기에 비해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던 여명 부족이었다. 그 이유가 여기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망치를 두드리고 있었다.
"아! 그래서!"
휴이는 여러 가지를 깨달았다.
부족 내부의 온도가 뜨거웠던 것도. 부족의 무력이 강하지 않은 것도.
부족이 가진 특성이 장인에 가깝다면 이해가 됐다.
"이렇게 보여 주셔도 되는 겁니까?"
"안 될 건 뭔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루드는 덤덤한 반응이었다. 다만 콩파스가 지하에 숨겨진 공방을 보여 준 것에 대해서는 루드 또한 놀란 상태였다.
여명 부족 지하에 숨겨진 공방은 여명 부족의 핵심 공간이었다.
알브족에게 대수림과 선대의 잃어버린 유산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에겐 이곳 지하 공방이 그러했다.
그런 곳을 일면식도 없는 자신들에게 공개하다니.
심지어 까마귀 부족과 알브족이라는 것도 자신들의 말만 있을 뿐 아니었는가.
하지만 콩파스의 이어진 말은 루드에게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아버지는 잘 계시는가."
"예?"
"얼굴이 제노스를 똑 닮았구먼. 까마귀 부족에겐 늘 신세를 지는 것 같군."
그 순간, 루드는 콩파스가 제게 보이는 신뢰와 호의의 이유를 깨달았다.
'아버지를 알고 있군.'
자신의 아버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콩파스는 여명 부족의 족장. 다른 부족의 족장들을 아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
"그래, 답하기 곤란하겠지. 소크란이 두 눈 부릅뜨고 있을 테니. 이리 도와주려 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야."
루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가 착각한다면, 그 착각이 제게 이득이 된다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나았다.
'다행히 휴이도 별 반응 없이 넘어갔다.'
혹여 휴이가 반응을 보일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아무 말 않고 가만히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참 고개를 끄덕이던 콩파스는 스스로 결론을 내린 후, 두 사람을 이곳까지 데려온 목적을 꺼냈다.
"필요한 무기를 고르게. 못 고르겠다면 골라 줄 수도 있네."
루드와 휴이의 앞으로, 많은 무기들이 펼쳐졌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44화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
이는 반만 맞는 말이었다.
'무기는 좋을수록 좋다.'
어차피 사용할 거라면 당연히 뛰어난 걸 사용하는 게 좋았다.
명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그건 한 수 아래의 이들을 상대할 때나 그런 법.
비슷한 경지 혹은 그 이상과 견주려면 좋은 무기는 필수였다.
'그렇다고 무기에 휘둘려서는 안 되겠지만.'
자신이나 휴이나 그럴 인물은 아니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안 그래도 마땅한 무기가 없던 차였다.
알브족에서 구한 검은 뛰어났으나 일반적인 양품의 수준.
부족원 하나하나가 명인이라 불릴 만한 여명 부족의 검에 비할 바는 못 됐다.
슬라브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슬라브를 무기로 활용할 생각도 했었으나, 대수림을 벗어나며 힘을 잃은 슬라브였기에 그마저도 요원했다.
그런 와중 무구를 바꿀 기회가 생긴 것이다.
루드는 천천히 진열된 무구들을 둘러봤다. 이렇게 다양한 질 좋은 무구를 살피는 건 흔치 않은 기회였다.
'기형검도 있군. 저 가드도 쓸 만해 보이고.'
대중적인 무구들부터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싶은 특색 강한 무구들까지. 굉장히 다채로웠다.
"여러 개 골라도 되는 겁니까?"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몇 개든 상관없네."
대답을 들은 루드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이 검과 저기 있는 가드, 저기의 소검으로 부탁드립니다."
"좋은 선택일세."
루드가 말한 물품들을 가져오던 콩파스는 내심 감탄했다.
'과연 피는 못 속인다는 건가.'
선택한 무구들이 하나같이 상등품인 까닭이었다.
진열된 무구들은 전부 뛰어난 품질이었지만 루드가 고른 건 그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품질을 자랑했다.
'미묘한 차이들을 한눈에 간파하다니.'
같은 형태와 같은 소재로 만들더라도 무구 간에 미묘한 차이는 있는 법.
그 차이를 느끼고 원하는 무구들을 콕 짚어 말한 것이 분명했다.
'한평생 망치를 두들긴 녀석들도 눈으로만 보아선 모르는 것을.'
놀라운 일이었다.
좋은 무구를 골라 낸 것도 그랬지만 그 과정이 더욱 놀라웠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그 차이를 간파하는 건 여명 부족의 장인들 가운데도 소수만 할 수 있는 기예였다.
"자네는 아직인가?"
"네. 사실 무기에 친숙하진 않아서요."
"내가 추천해 줘도 되겠나?"
"물론이죠."
루드에게 무구를 건넨 콩파스는 휴이에게 어울리는 무구를 생각했다.
몸이 발달된 모양새, 언행에서 느껴지는 성격, 걸음걸이....
계산을 끝낸 콩파스는 망설임 없이 무구를 골라 휴이에게 건넸다.
"괜찮은 것 같네요."
휴이의 앞에 놓인 무구들을 확인한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역시 부족을 이끄는 족장이라 해야 하나.
무력은 약하더라도 장인으로서의 능력은 대단한 콩파스였다. 관찰만으로 휴이의 전투 방식을 파악한 것 같았다.
"이건 가죽과 금속이 섞인 갑옷이네. 심장이 있는 부분에 금속을 덧댔지. 그리고 이건 건틀렛인데. 한번 껴 보겠나?"
"손에 딱 맞네요."
"좋군. 사이즈도 딱 맞아. 손목을 한번 꺾어 보게."
"이렇게요?"
콩파스의 말에 휴이가 손목을 꺾었다.
"와...."
"어떤가."
"좋은데요?"
휴이는 감탄했다. 손목을 꺾자 건틀렛 내부에 숨겨져 있던 보호대가 튀어나오며 팔뚝을 보호했다.
다시 한번 손목을 꺾자 보호대는 언제 있었냐는 듯 건틀렛 안으로 수납됐다.
"진짜 좋네."
초근접전을 치르다 보면 상대의 공격을 전부 막아 내더라도 팔뚝에 상처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능을 갖췄다면 더 과감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무얼. 잘 쓸 수 있고, 필요한 사람에게 갔다면 그걸로 된 거지."
무구를 정비한 뒤, 루드와 휴이는 곧장 여명 부족 밖으로 향했다.
살라만더의 눈물도 찾아야 했고 근방에 나타난다던 몬스터도 확인해야 했다.
갈 길이 바빴다.
"벌써."
"가는 건가."
밖에서는 여전히 반체스 반니스 쌍둥이가 경계를 서는 중이었다.
그들에게 간략히 사정을 설명한 뒤, 루드는 이전에 살라만더의 눈물을 발견했다는 산으로 향했다.
"살라만더의 눈물이 묻혀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어디 있는지 알아?"
그간 모든 걸 아는 사람처럼 움직이던 루드였다. 휴이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루드 또한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였다.
전생에선 겪지 않았던 일이고, 관련된 얘기 또한 듣지 못했다.
다만 살라만더의 눈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으니, 그걸 토대로 찾으면 될 것 같았다.
"이제부터 찾아봐야지. 살라만더의 눈물은 강한 화기를 품고 있다. 그러니 살라만더의 눈물이 있는 곳은 주변보다 온도가 높겠지."
"...그게 전부야?"
"고블린이나 코볼트들 근처에 있을 수도 있다. 살라만더의 눈물도 일단은 광물이고, 살라만더의 눈물 주변에는 이상하게 다른 광물들도 많이 나오는 편이니까."
"음. 알았어. 아무 정보도 없다는 말이지."
가만히 얘기를 듣던 휴이가 결론을 내렸다. 맨땅에 헤딩인 상황이었다.
살라만더의 눈물이 가진 특징적인 단서를 제외하면 어떠한 정보도 전무.
콩파스가 일전에 살라만더의 눈물이 있었던 곳들을 알려 주긴 했으나, 그곳에 살라만더의 눈물이 묻혀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그때.
뀨- 뀨우우-
슬라브가 루드를 불렀다. 숲에 들어오자 정신을 차렸는지 열정적인 몸부림이었다.
"왜 그러냐."
어째선지 평소보다 기운찬 슬라브는 두 가닥의 촉수를 뻗어 휘적거렸다.
"지금은 놀아 줄 시간 없다."
예전에도 그랬듯 그 움직임을 춤추는 걸로 받아들인 루드.
하지만 슬라브의 애처로운 동작을 바라보던 휴이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슬라브가 뭐 할 말 있는 거 아니야?"
"뭐?"
"평소보다 더 열심히 움직이는 거 같아서."
뀨-
그에 화답하듯 슬라브의 촉수가 위아래로 끄덕였다.
-내가 찾아 줄게.
의념을 통해 전달된 슬라브의 말은 뜻밖의 내용이었다.
"혹시 자기가 찾아 주겠다는 거 아닐까? 수해에서 나올 때도 길을 찾아 줬었잖아."
"정말이냐?"
여전히 촉수를 흔드는 슬라브가 루드의 물음에 대답했다.
-맞아. 내가 찾을래.
'정말 살라만더의 눈물을 찾을 수 있어?'
-땅이 따뜻한 곳을 찾으면 되는 거 아냐?
'땅의 온도를 확인할 수 있어?'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휴이에게 말했듯 살라만더의 눈물은 화기를 품고 있고, 그 때문에 주변의 온도가 다른 곳보다 높을 터.
땅의 온도를 확인하는 건 자신들에겐 무리였지만 슬라브에게는 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땅에 묻혀 있는 걸 감안하면 대기의 온도보다 땅의 온도를 토대로 움직이는 게 훨씬 확률도 높았다.
-대신 맛있는 거!
촉수를 흔들며 그렇다 대꾸한 슬라브는 거래를 제안했다.
'좋다. 거래하지. 단, 지급은 찾고 나서다.'
-좋아.
루드가 그것을 받아들이며, 둘 간의 은밀한 거래가 성사됐다.
"슬라브가 뭐래?"
"네 말이 맞다는군."
"진짜?"
휴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비록 '수액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는 데는 실패했으나 슬라브의 의사를 읽어 냈다는 게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면 슬라브 나한테 와야 하는 거 아니야? 말도 못 듣는데 이렇게 뜻을 잘 알아듣다니. 역시 슬라브랑은 뭔가 통하는 게 분명해"
"그건 아니라는군. 불쾌하니까 그만하라고 한다."
휴이의 설레발에 루드를 통해 얼른 의사를 전달한 슬라브였다.
한편, 루드는 휴이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고 보니 더스틴과 함께 있었을 때도 별 반응이 없었다.'
제국의 소드마스터, 더스틴 클라위베르트.
슬라브는 그와 하룻밤을 보내는 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옆에서 숨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에게만 반응한다 생각해도 되겠군.'
슬라브와의 동행에서 가장 큰 위험 요소로 생각했던 건 슬라브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이 위험 요소는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만약 강한 마력에 반응하는 것이었다면 더스틴 클라위베르트를 따라갔을 터.
현재의 자신보다 훨씬 많은 양의 마력을 보유했을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는 건 슬라브가 자신에게만 반응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루드 뭐해? 가자. 슬라브가 방향 가리키고 있어."
"그래."
휴이의 말처럼 슬라브는 어느새 촉수를 뻗어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미 수해를 빠져나올 때 슬라브의 안내를 받아 본 적 있는 두 사람은 슬라브가 안내하는 대로 빠르게 이동했다.
"여긴 아닌 것 같군."
그렇게 도착한 첫 번째 후보지.
아쉽게도 살라만더의 눈물은 묻혀있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헷갈렸나보군."
그 대신 발견한 건 살라만더의 눈물과 비슷한 특성을 가진 불꽃의 눈물.
불꽃의 눈물을 챙긴 루드는 슬라브에게 물었다.
"다른 곳은 더 없나?"
-아직 두 곳 더 있어!
"좋아. 바로 가지."
그 두 곳 중엔 살라만더의 눈물이 있기를 바랐다.
불꽃의 눈물을 챙기고 찾은 두 번째 후보지.
이곳 또한 살라만더의 눈물은 없었다.
불꽃의 눈물이 나왔던 첫 번째 후보지와 달리 땅을 파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상황.
아무것도 없는데 어째서 슬라브는 이곳으로 안내한 걸까.
그 이유는 슬라브의 말 때문에 밝혀졌다.
-여긴 따뜻한 게 흘러가는데?
아마도 온천수 혹은 땅 깊은 곳에 용암이 흐르는 모양.
이곳 또한 아님을 깨달은 루드는 슬라브가 찾은 마지막 후보지로 향했다.
"...."
마지막 후보지에 도착한 루드는 어쩐지 이곳에 살라만더의 눈물이 묻혀 있을 거란 느낌을 받았다.
"루드, 고블린의 흔적이야."
다른 곳보다 높은 대기의 온도, 주변에 보이는 고블린의 흔적.
그리고.
크르르르르-
"화이트베어인가."
어느새 등장해 존재감을 나타내는 몬스터.
화이트베어는 곰의 모습을 한 몬스터였다.
곰보다 몇 배나 큰 몸집의 녀석은 순수 완력만으론 트롤도 이길 정도였고,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까지 가졌으니 숲의 포식자로 군림할 만 했다.
"상태가 이상하군."
루드는 녀석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여명 부족은 녀석과 마주친 즉시 도망가는데 급급해 몰랐겠지만, 녀석의 상태가 이상했다.
붉게 물든 눈과 벌어진 입으로 질질 새는 침.
이지를 상실한 모습이었다.
'환혹인가.'
뱀 부족이 사용하는 환혹에 당한 몬스터나 동물들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현상.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역시 뱀 부족의 술수였나.'
근방에 없던 몬스터가 넘어온 것도, 그로 인해 살라만더의 눈물을 구할 수 없게 된 것도.
모두 뱀 부족의 술수였다는 사실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45화
나타난 몬스터는 화이트베어만이 아니었다. 커다란 덩치의 녀석 뒤로 성인 남성보다 조금 더 큰 놀들이 무리지어 모습을 드러냈다.
"저 녀석들...."
"그래.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대수림 바깥의 몬스터를 상대한 경험이 일천한 휴이였지만 녀석들의 상태가 이상하단 건 금방 깨달았다.
모든 녀석들의 눈가에 붉은 기가 흘렀고 벌어진 입에선 침이 새고 있었다.
"자세한 확인은 나중에 해도 된다. 일단은 처리가 우선이다."
"좋아. 내가 놀을 맡을게."
"그럼 내가 화이트베어를 맡지."
의사 교환은 신속했다.
놀에 비해 상성이 안 좋은 화이트베어를 루드에게 맡긴 휴이는 놀 무리에게 달려들었다.
크르르!!
놀들은 달려드는 휴이에 반응해 발톱을 휘둘렀다. 짐승의 것보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발톱은 그 끝에 독성까지 흐르는 위험한 물건이었다.
하나, 그에 대한 대비는 충분했다.
손목을 꺾음과 동시에 건틀렛에서 튀어나온 보호대. 놀이 휘두르는 발톱을 팔뚝의 보호대로 막아 낸 휴이는 그대로 주먹을 꽂았다.
콰직!
명중의 신비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적정량의 오러를 담은 주먹 한 방.
놀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몸통에 커다란 바람구멍이 나고 말았다.
캐앵-!!
오른쪽에 한 방, 왼쪽에 한 방, 앞에 한 방, 뒤에 한 방.
휴이의 주먹은 평등했다. 여러 방향으로 골고루 건네되 모두 한 번씩의 맛만 보여 줬다.
'역시 이상하네.'
가볍게 주먹을 흔들어 건틀렛에 묻은 살점들을 털었다. 어느새 발밑에는 몸 어딘가에 구멍이 나 있는 놀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놀랄 점은 도망치다 죽거나, 도망에 성공한 녀석이 없다는 것.
어떻게 보면 사실 놀랄 부분은 아니었다.
'한 놈도 도망치지 않았으니.'
도망치려던 놈이 없었으니 도망치다 죽거나 도망에 성공한 녀석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진짜 놀라운 건 한 놈도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는 것.
아무리 몬스터라 한들 생존 본능을 갖고 있었다. 녀석들의 감각과 생존본능은 오히려 인간보다 더 기민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발밑의 놀들은 죽음을 느끼는 순간조차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런 생각이 제거된 것 마냥.
쿠어어엉-!!!
휴이가 이상한 점을 곱씹던 사이, 루드도 화이트베어를 마무리했다.
"다친 데는 없나?"
"없어. 너는?"
"마찬가지다."
서로의 상태를 확인한 두 사람은 쓰러진 몬스터들을 살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던 것 같군."
"이 녀석들이 이상한 이유를 아는 거야?"
"짐작 가는 게 있다. 아마 높은 확률로 맞을 거라 생각하고."
화이트베어를 상대하는 내내 여러 확인을 거친 루드였다. 때문에 화이트베어를 처리하는 게 늦어졌지만, 대신 분명한 소득이 있었다.
'행동이 설정돼 있었다.'
화이트베어는 주어진 상황에서 주어진 행동만 할 수 있게 설정돼 있었다. 쓰러진 모습을 보니 놀들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고.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이들은 뱀 부족뿐.'
몬스터를 제어하는 건 흑마법사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방금 상대한 녀석들은 흑마법사의 지배를 받는 녀석들과는 달랐다.
행동이 부자연스러운데다 술자의 직접적인 명령을 수행하는 느낌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흑마법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상대했던 녀석들, 전부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지?"
"맞아. 화이트베어처럼 침도 흘렸고."
이지를 잃어버린 모습.
분명했다. 녀석들은 뱀 부족의 환혹에 걸린 것이다.
"일단 살라만더의 눈물을 마저 찾자."
살라만더의 눈물을 찾기 위해 도착하자마자 몬스터 무리를 맞닥뜨린 상황. 아직 살라만더의 눈물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이곳엔 있어야 할 텐데 말이지. 슬라브가 말한 데는 더 없어? 여기가 끝이야?"
"슬라브가 말한 건 이곳이 마지막이다. 잘 찾아보자고. 왠지 여기에 있을 것 같으니까."
이곳이 슬라브가 얘기한 마지막 후보지였다. 여기선 살라만더의 눈물이 나와야 했다.
희망적인 단초는 여러 가지였다.
주변보다 공기가 따뜻한 점. 고블린의 흔적이 보인 점. 적어도 아래에 온천수나 용암이 흐르지는 않는 점. 뱀 부족의 환혹에 걸린 화이트베어와 놀 무리가 습격한 점.
"찾았다."
그것들이 전부 얘기하는 바를, 루드는 놓치지 않았다.
키만큼 땅을 파냈을 때 불그스름한 바위 같은 게 나타났다.
본체의 크기가 워낙 큰 탓에 보이는 건 일부에 불과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살라만더의 눈물이었다.
-찾았어? 찾은 거지? 내가 맞춘 거지?
찾던 걸 찾았단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슬라브가 재잘댔다.
"그래. 네 덕이다. 약속대로 맛있는 걸 주지."
팔뚝에 감긴 슬라브를 쓰다듬은 루드는 마력을 전달했다.
슬라브는 사양 않고 전달되는 마력을 꿀꺽꿀꺽 받아먹었다.
-맛. 있. 어!
평소처럼 촉수를 내밀어 춤을 추진 않았지만, 슬라브의 기분은 최고조였다.
루드의 마력은 특별했다.
다른 녀석들의 마력도 그럭저럭 흥미가 솟는 경우는 있었지만, 루드에 비할 바는 못 됐다. 태양과 반딧불 정도의 차이랄까.
왜 이렇게 맛있을까.
루드가 건넨 마력을 남김없이 핥아먹으면서 생각해봤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루드의 마력이 다른 녀석들의 마력보다 훨씬, 훠어어어얼씬 맛있을 뿐이었다.
맛있는 게 맛있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냥 맛있으니까 맛있는 거였지.
"여명 부족으로 돌아가자."
"이 녀석들은 어떡해? 이대로 둬도 괜찮나?"
바닥엔 몬스터 사체가 널려 있었다. 혹여 다른 몬스터가 사체를 전부 먹는다면 엘리트 몬스터로 진화할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손톱들을 챙기자."
손톱은 몬스터를 처리했다는 증거물이었다. 이걸 가져가 보이면 여명 부족도 한결 마음을 놓을 터.
부산물로는 녀석들의 이빨이 훨씬 더 가치 있었지만, 그건 여명 부족이 직접 와서 수거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근방의 몬스터는 걱정할 필요 없다."
"어째서?"
"근처에 못 오게 만들 거니까."
루드는 화이트베어의 송곳니 하나를 뽑았다. 송곳니의 크기를 확인한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팔뚝보다도 큰 크기. 이 정도면 매개로 쓰기에 충분했다.
"뭐 하는 거야?"
루드는 마력을 담은 송곳니로 주변 일대를 감싸는 큰 원을 그렸다.
휴이가 이유를 물었으나 대답할 정신은 없었다. 루드로서도 오랜만에 만드는 약식 결계였다. 효력을 높이기 위해선 집중해야 했다.
이윽고 원을 완성한 루드는 마력을 담은 송곳니를 원 중앙에 꽂았다.
"...됐군."
"와. 이건 또 뭐야?"
결계는 중앙에 꽂힌 송곳니를 기점으로 효력을 발휘했다. 송곳니로 그려진 원이 결계의 경계였다.
결계의 효과는 간단했다. 중앙에 위치한 송곳니의 마력을 매개로 몬스터와 동물의 접근을 막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결계를 만든 루드에 휴이는 또다시 감탄했다. 이건 또 못 본 기예였다.
역시 루드는 다 알았다 싶어도 항상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는 존재 같았다.
-맛있겠다....
생각지 못한 부분이랄까. 슬라브가 송곳니에 담긴 마력에 관심을 보였으나 조금 전 포식한 덕분인지 몰래 훔쳐 먹는 일은 없었다.
정리를 마친 두 사람은 곧장 여명 부족으로 되돌아갔다.
* * *
열둘의 인원이 산을 올랐다. 그 선두엔 루드와 휴이가 있었다.
"이게 뭔 고생이야."
"그러게 말이야. 이러다 몬스터라도 나타나면 어쩌려고."
"콩파스 님은 왜 저런 애송이들의 말을 믿는지."
"살라만더의 눈물을 하루 만에 찾는 게 말이 되냐고. 심지어 몬스터들도 처리했다며?"
살라만더의 눈물을 채굴하기 위해 산을 오르는 여명 부족의 사람들은 불만으로 가득했다.
애송이들의 말도 안 되는 거짓말 때문에 위험 가득한 산에 오르게 됐으니 불만이 안 나올 수 없었다.
"하... 무구를 지급한 것까지야 그냥 넘어가겠지만 이건 진짜 아닌데. 안 그래, 반체스?"
"족장님의 말씀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불만이면 족장님께 직접 말해라, 토가루. 계집처럼 뒤에서 찡찡대지 말고."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불만을 성토하던 토가루는 반체스의 강건한 태도에 목소리를 줄였다.
항상 느끼지만 반체스 반니스 형제는 상대하기 껄끄러운 이들이었다.
둘이 함께 있을 때 말하는 것과 혼자 있을 때 말하는 게 다른 것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아무튼 가장 어려운 상대였다.
'족장님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있겠지만, 이번 일은 나도 조금 그렇군.'
토가루가 찍소리 못하게 대꾸했지만 반체스 또한 지금 산행에 의문인 건 마찬가지였다.
콩파스를 믿는 것과는 별개로 부족의 안위도 생각해야 했다.
어제 찾아온 두 사람이 뛰어난 강자인 건 알았다. 그들이라면 충분히 산의 몬스터를 상대할 수도 있을 거고.
하지만 살라만더의 눈물을 찾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들은 살라만더의 눈물을 하루 만에 찾아냈다고 했다. 기실 출발한 시간대와 돌아온 시간대를 생각하면 하루도 걸리지 않은 시간이었다.
살라만더의 눈물을 찾는 건 부족의 경험 많은 장인들에게도 어려운 일.
아무 경험도 없는 외부인들이 하루 만에 찾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말을 따라 산을 오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화이트베어와 놀의 손톱은 진짜였다.'
몬스터의 부산물은 때때로 좋은 재료로 쓰인다. 때문에 좋은 장인은 부서진 조각만 봐도 어떤 몬스터의 어떤 부위인지 알 수 있었다.
지난 밤 콩파스가 두 사람이 가져온 것이라 보여 준 손톱들은 화이트베어와 놀의 손톱이 맞았다.
'이전에는 없던 녀석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콩파스야 커크 산맥의 본맥에서 흘러 들어오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반체스는 생각이 달랐다. 이전까지 없던 일이 생긴 데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할 터였다.
이번 산행은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몰랐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
"거의 다 왔습니다."
루드와 함께 일행의 선두에 선 콩파스가 물었다.
산에 들어온 지 꽤나 시간이 지난 상태. 살라만더의 눈물을 채굴할 장비까지 챙겨온 까닭에 시시각각 체력이 빠졌다.
'늙긴 늙었나 보군.'
아무리 장비를 챙겼다지만 겨우 이 정도에 지치다니. 예전에는 이보다도 더한 장비를 챙기고 1박 2일을 걸어도 끄떡없던 자신이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려나.'
콩파스가 세월의 야속함을 느낄 무렵. 마침내 앞장서던 루드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한번 보지."
루드와 휴이가 양옆으로 비켜서자 두 사람이 가렸던 시야가 열렸다.
"이건..."
그 광경을 바라본 콩파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콩파스뿐만이 아니었다. 그 뒤를 따라 차례로 도착한 모두가 반응은 다를지언정 같은 감상을 품었다.
땅에 꽂힌 커다란 송곳니 주위로 널브러진 몬스터의 사체들.
화이트베어는 하얀 털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고, 놀은 온전한 시체가 하나도 없었다.
'허어. 이 정도였나.'
새삼 루드와 휴이가 다시 보였다.
고작 두 사람이다. 심지어 루드는 갓 성년이 된 어린 외양이었다.
하나 두 사람이 만든 결과물은 고작이라 표현할 것이 아니었다.
'과연 제노스의 아들이라는 건가.'
현 까마귀 부족의 족장이자 부족 최고 전사.
콩파스는 제노스의 무력을 직접 목도한 경험이 있었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걸까.
새삼 눈앞의 검은 머리 청년이 다르게 느껴졌다.
'엄청나군.'
반체스의 감상은 콩파스보다 강렬했다. 무를 갈고닦아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콩파스나 다른 장인들에겐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반체스의 눈엔 선명하게 보였다.
'전부 일격이다.'
구멍이 뚫린 놀의 사체.
녀석들은 전부 일격에 즉사했다. 아마 구멍을 뚫은 일격에였을 것이다.
그리고 화이트베어. 본래의 하얀색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은 피를 흘린 녀석은 곳곳이 난도질된 채였다.
대충 보기엔 한 번에 숨통을 끊지 못한 결과물로 보이는 상처.
하지만 반체스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뭘 확인하려 한 거지?'
상처가 있는 부위들은 팔뚝과 발목의 힘줄, 목, 눈… 하나같이 치명적인 부위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릴 정도로 상처를 낸 것은 무언가를 확인하고자 함이었으리라.
'설마.'
어쩌면, 자신이 확인하고자 한 것과 같은 것은 아닐까. 반체스의 시선이 루드를 좇았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46화
살라만더의 눈물을 확인한 장인들은 감탄했다.
"진짜 살라만더의 눈물이잖아."
"심지어 최상품이야."
일부밖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추측되는 크기도 대단했고 경도도 좋았다. 여태껏 보아 온 살라만더의 눈물 중에서도 최상품이었다.
"하루 만에 살라만더의 눈물을 찾다니."
"진짜였구먼."
산을 오르며 했던 불평불만이 무안하게 됐다.
심지어 품질도 최상품 아닌가.
그들의 상식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을 부정하는 건 바보 같은 짓.
장인들은 더 이상 바보짓을 하는 대신 살라만더의 눈물을 채굴하기로 했다.
"여긴 됐어!"
"여기도!"
"좋아. 다들 준비된 거지?"
경험 많은 장인들답게 채굴 준비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어느새 땅을 전부 파내고 살라만더의 눈물을 위로 올리는 일만 남았다.
"콩파스 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살라만더의 눈물을 끌어올리느라 용을 쓰는 사이, 루드는 조용히 콩파스에게 다가갔다.
"할 얘기란 게 뭔가."
"몬스터에 관한 얘깁니다."
두 사람은 작업 현장에서 조금 벗어나 대화를 이었다.
"장인들이 작업하는 사이 근방에 남아 있는 몬스터가 더 있나 확인해 봤습니다."
"안 보인다 싶었더니 그런 이유였군. 그래서 남아 있는 몬스터가 몇이나 되던가?"
"없었습니다."
"음?"
장인들이 작업하는 사이 근방을 수색한 루드와 휴이였다. 둘은 꽤 넓은 반경을 돌아다니며 남은 몬스터를 물색했고, 결론을 내렸다.
"화이트베어나 놀 같은 녀석들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셨죠."
"그렇지. 자네들이 어제 상대한 녀석들도 다 그놈들이고."
"하지만 녀석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확인할 수 있었던 건 고블린과 코볼트... 원래 이곳에서 서식하던 녀석들뿐이었죠."
콩파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루드의 말은 말이 안 됐다. 한참 채굴 중인 현장에서 발견된 사체는 분명 화이트베어와 놀의 것이었다.
녀석들은 무리지어 다니는 몬스터. 주변에 녀석들의 동족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보이는 게 고작 고블린과 코볼트가 전부라고?
"어제 상대한 녀석들은 하나같이 상태가 이상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포를 모르더군요. 작은 짐승이라도 포식자를 보면 도망가는 법인데 말이죠."
"...…."
"전해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판단은 콩파스 님께 맡기겠습니다."
생각에 잠긴 콩파스의 표정을 본 루드는 한 발 물러섰다. 이 정도면 이상한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무리지어 다니는 몬스터인데 근방에 보이는 건 죽은 녀석들이 전부란 점.
죽은 녀석들의 상태가 무언가에 홀린 것마냥 이상했다는 점.
녀석들이 원래 서식하는 곳 근처에 뱀 부족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족장 정도라면 알고 있겠지. 뱀 부족의 선택받은 자들이 쓸 수 있는 힘을.'
뱀 부족에게는 '환혹'의 힘이 있다는 점.
이 모든 게 이곳에 녀석들을 풀어놓은 게 뱀 부족이라 말하고 있었다.
아마 콩파스도 그것을 인지했을 터. 여기서 더 말하면 이간질하려는 수작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혼자 깨달았다면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나았다.
루드가 자리를 비킨 뒤. 콩파스는 여전히 같은 곳에 서서 생각을 이어 갔다.
'머리가 복잡하군.'
루드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이해했다. 이번 일에 뱀 부족이 관여되어 있다는 말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말은 된다.'
커크 산맥에 자리 잡은 화이트베어와 놀이 갑작스레 이곳에 나타난 것도 이해가 됐다.
뱀 부족이 가진 환혹의 힘이라면 녀석들을 홀려 이곳으로 보내는 건 간단했으리라.
'하지만 대체 왜?'
그러나 단순히 뱀 부족이 그랬구나! 하고 넘어가기엔 걸리는 게 많았다.
'믿어도 되는 건가.'
루드라는 이름을 가진 제노스의 아들. 젊은 시절 제노스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청년은 아버지의 이름에 걸맞은 위용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과 그를 믿어도 되는가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어제 처음 본 사이가 아닌가. 알게 된 지 고작 하루였다.
그런 이가 사건의 배후로 뱀 부족을 지목했다고 해서 그것을 믿어도 되는가?
'어렵군.'
제노스의 아들이라면 소크란의 아들이란 의미이기도 했다. 소크란은 전대 뱀 공주. 제 어머니의 출신 부족을 의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언가 노리는 바가 있는 심계인가....
뱀 부족과는 교류가 있었다. 잦지는 않지만 잊을 만 하면 한두 번씩 사람이 찾아와 교류하며 지냈다.
어제 처음 본 루드보다는 오래 알고 지낸 뱀 부족을 믿는 게 당연한 일.
그럼에도 루드의 말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이유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타인을 기만할 인물은 아니었다.'
수십 년을 살아오며 기른 안목.
장인으로서의 안목에 자부심을 지닌 콩파스는 공방의 제품만큼이나 인물을 보는 데도 자신이 있었다.
만약 자신이 인물을 잘못 본 거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눈으로 본 루드는 허언을 담을 인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뱀 부족이 야심을 품은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닌가.
혼인 동맹 건만 봐도 그렇고, 각 부족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뱀 부족이 숨기고 있는 야욕을 알고 있었다.
"얘기를 나눠 봐야겠군."
혼자서 결정하기엔 큰 사안이었다. 부족의 다른 이들과도 이야기를 공유하고 생각을 나눌 필요가 있었다.
생각을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오자 채굴이 거의 끝나 있었다. 땅 밖으로 나온 살라만더의 눈물은 과장을 보태 곰만 한 크기였다.
"냉각수 가져와!"
"냉각수 여기 있어. 다들 조심하자고."
강한 화기를 품은 까닭에 살라만더의 눈물을 옮기는 덴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냉각수를 뿌려 일시적으로 열기를 가라앉힌 뒤, 특수 공정 처리가 된 수레에 살라만더의 눈물을 실어야 했다.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잠깐 뭣 좀 하고 왔네."
"뭐라고 하덥니까?"
현장으로 돌아온 콩파스는 그리 묻는 반체스를 바라봤다.
"본 겐가?"
반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몬스터가 나타날까 주위를 경계하던 반체스는 루드와 함께 자리를 옮기는 콩파스를 목격했다.
"별 얘기 아니었네."
"정말입니까?"
대답을 피하려는 한다는 걸 느낀 반체스였지만 콩파스가 루드와 나눴을 대화가 궁금했다.
그가 화이트베어를 통해 확인하려던 게 자신이 확인하고자 하던 것과 같은지도.
잠시 고민하던 반체스가 다시 물었다.
"혹시 뱀 부족에 관한 얘기가 나왔습니까?"
"그걸 네가 어찌...?"
작은 목소리에선 큰 당혹감이 묻어났다.
"추측했습니다."
반체스는 화이트베어의 사체를 바라봤다. 살라만더의 눈물과 마찬가지로 수레에 실린 상태였다.
흰 털이 빨갛게 변할 정도까지 녀석을 상대하며 루드가 확인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
콩파스의 반응으로 그 답을 얻었다. 그 또한 자신과 같은 것을 확인한 게 분명했다.
"뱀 부족의 환혹. 역시 그것이었군요."
바깥대륙의 부족들은 각 부족마다 갖고 있는 특성이 명확했다.
대수림에 거주하는 알브는 숲에 친화돼 있었고 활에 능했다.
자신들 여명 부족은 불과 광물에 친숙했고 망치를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뱀 부족의 경우, 그것이 환혹이었다.
그러나 뱀 부족의 특성은 다른 부족의 특성과는 경우가 달랐다.
대부분의 부족이 특성이 명확히 알려진 데 반해 뱀 부족의 특성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알려지기는 했지만 그 내용이 다르게 알려진 상태였다.
뱀 부족이 가진 특성이 환혹이란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건 소수에 불과했다.
"엿들었을 리는, 없겠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반체스가 그럴 인물이 아니란 건 콩파스가 가장 잘 알았다.
"너도 저 몬스터들이 뱀 부족의 환혹에 걸렸다 생각하는 거냐?"
"예. 녀석들이 쓰러져 있는 위치나 전투 흔적을 보면 그렇게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런가."
전투에 대한 안목은 없는 콩파스였다. 쓰러진 몬스터에서 얻을 수 있는 소재와 그것의 가치는 알아볼 수 있을지언정 어떤 식으로 전투가 벌어졌고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반체스는 다르다. 그의 눈에는 자신에겐 보이지 않는 과정들이 보일 터.
'정말 뱀 부족이 벌인 짓이란 말인가. 대체 무엇 때문에?'
루드의 말에 반체스의 말까지 더해졌다.
이번 일이 뱀 부족의 술수란 사실에 무게가 실렸다.
다만 아직까지도 의문인 건 뱀 부족이 대체 왜 그랬는가였다.
까마귀 부족과 혼인 동맹을 맺으며 최고의 반열에 오른 부족이 아닌가. 이미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그들이 무엇이 아쉬워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콩파스가 고민에 빠진 사이 수레가 출발했다. 부족으로 되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여명의 잿불은 여명 부족의 보물이었으나, 유일하고 절대 잃어버려선 안 되는 종류의 보물은 아니었다.
여명 부족의 보물은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여명의 잿불이라는 것 자체에 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캉! 캉! 캉! 캉!
불꽃이 뜨거운 열기를 품고 타올랐다. 그 가운데는 살라만더의 눈물이 있었다.
여명 부족의 장인들은 몇날 며칠 불길을 살폈다.
때론 강하게, 때론 약하게, 때론 불을 끄고 식히기도 하며 살라만더의 눈물을 알맞은 상태로 조정했다.
그러길 여러 날. 마침내 살라만더의 눈물이 알맞은 상태가 됐을 때. 장인들이 망치를 들었다.
여명의 잿불을 만드는 데는 최소 열 명의 장인이 필요했다.
그들을 보조하는 이들까지 하면 부족의 장인 태반이 작업에 매달렸다.
한 번의 실수도 용납돼선 안 되는 일.
망치를 든 열 명의 장인이 망치질을 시작했다.
캉! 망치질 한 번에 전심전력을 담는다.
캉! 깨진 파편이 튀었다.
캉! 망치질 한 번에 자신의 역사를 담는다.
캉! 뜨거운 열기가 흘렀다.
캉! 망치질 한 번에 바라는 미래를 담는다.
캉! 강렬한 불꽃이 타올랐다.
열 명의 장인과 각 천 번의 휘두름.
마침내 만련萬鍊이 끝났을 때, 여명의 잿불이 완성됐다.
"와..."
곧 여명의 잿불이 완성된다는 소식에 마지막 제련을 지켜보던 휴이는 탄식을 질렀다.
"저게 여명의 잿불이야?"
잿불이라기에 어떤 형태일까 생각했던 휴이였다.
까만 재를 뭉쳐 놓은 형태일까? 아님 타다 남은 나무 조각 같은 걸까?
하지만 막상 만들어진 여명의 잿불은 생각했던 모든 모습들과 달랐다.
"그래. 저게 여명의 잿불이다."
전체에 도는 붉은 기운, 무언가의 조각 혹은 파편 같기도 한 모양.
여명의 잿불은 마치 보석 같았다.
"원하는 형태가 있나?"
"목걸이로 부탁드립니다."
"알겠네."
만 번의 제련으로 깨고 다듬고 압축한 끝에 완성된 여명의 잿불은 손톱만 한 크기였다.
루드는 그것을 목걸이의 형태로 지니고자 했다.
콩파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금세 여명의 잿불을 목걸이로 만들어왔다.
"여기 있네. 공정을 거친 줄이니 잿불의 영향을 받지 않을 걸세. 만약 끊어진다면 다시 찾아와야 할 게야. 일반적인 줄이나 금속은 잿불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
"감사합니다."
"곧장 떠날 겐가?"
"예. 그러려고 합니다."
여명의 잿불을 만드는 동안 떠날 준비를 마쳐 놨다. 곧장 떠나면 됐다.
"그렇군."
콩파스는 품속의 시가를 매만졌다.
"어디로 가나?"
"황혼 부족으로 갑니다."
"황혼 부족으로?"
꺼낼까 말까 하던 시가가 품속에서 부러졌다.
"황혼 부족이라...."
루드의 다음 행선지를 곱씹는 콩파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무언가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그렇군. 뭐, 자네들의 일에 내가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지."
가까스로 찡그린 인상을 풀어낸 콩파스는 악수를 건넸다.
"일단은 경계하기로 했네."
악수하며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콩파스는 둘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경계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뱀 부족에 관한 명확한 증거는 찾기 힘들었으니, 지금은 여명 부족이 그들에 대해 경계하게 된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47화
황혼 부족은 여명 부족과 가까웠다. 그래도 이틀은 꼬박 이동해야 할 거리였지만, 다른 부족들 간의 거리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가깝다 할 수 있었다.
'이때도 앙숙이었나 보군.'
다음 목적지가 황혼 부족이라는 말에 인상을 찡그리고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던 콩파스.
이유는 간단했다. 두 부족의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불호를 넘어 혐오에 가까운 감정.
이는 한쪽의 일방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여명 부족이 황혼 부족을 싫어하는 만큼 황혼 부족도 여명 부족을 싫어했다.
'그때도 간신히 개선했었지.'
전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두 부족은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렸고, 서로를 고까워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두 부족의 관계를 개선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전투와는 또 다르게 피로가 쌓이는 일이었다.
고생 끝에 간신히 관계를 개선해 냈었으나, 회귀한 지금 두 부족의 관계는 다시 원점이었다.
'그 고생을 또 해야 한다니. 아찔하군.'
두 부족이 서로를 싫어하는 이유가 있긴 했다.
부족의 특성, 역사, 성향...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선 그 이유가 희석됐다.
지금 두 부족의 사이가 안 좋은 건 처음의 이유보다 부족 간의 갈등이 쌓인 까닭이었다.
그렇기에 관계를 개선하는 게 더 어려웠다.
특별한 이유나 원인이 있다면 그것을 해결해 주면 되는 일이었지만, 오랜 시간 사소한 것들이 쌓여 생긴 감정의 골은 서서히 메워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당장에 닥친 일부터 해야겠지.'
다행이랄까, 두 부족의 관계를 개선하는 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당장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고.
지금 해야 할 건 황혼의 비명을 얻는 일이었다.
'황혼의 비명이 있으면 녀석의 재생을 지연시킬 수 있다.'
상처의 재생을 차단하는 것 외에도 황혼의 비명에는 온갖 효과들이 있었다.
그 효과들은 소드마스터에게도 통할 정도.
그렇기에 황혼의 비명은 황혼 부족의 독 중에서도 손꼽혔다.
'황혼의 비명을 사용한 즉시 몰아쳐야 한다.'
그런 황혼의 비명조차 설산 트롤에게는 일시적으로 상처 회복을 막는 수준밖에 안 됐다.
녀석의 괴물 같은 재생 능력이 잠시나마 멎었을 때. 그때가 녀석을 죽일 유일한 기회였다.
안 그래도 트롤 특유의 재생력은 껄끄러운 힘이었다. 설산 트롤의 재생력은 일반 트롤의 재생력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 녀석을 죽이기 위해선 일시적이나마 재생을 막아 줄 황혼의 비명이 꼭 필요했다.
"조금 더운 것 같은데."
휴이가 옷깃을 펄럭였다.
작은 바람이 잠시 동안 숨통을 틔워 줬다. 이상하게 더운 기분이었다. 여명 부족에서만큼은 아니지만 계절보다는 더 덥게 느껴졌다.
"잿불의 영향일 거다. 조금 떨어져서 걸어라."
"엉? 어, 진짜네."
루드의 말대로 거리를 벌리자 시원해졌다.
"목걸이 줄과 케이스로 기운이 새 나가는 걸 차단했지만 완전하진 않다. 잿불 주위는 주변보다 뜨거울 거다."
여명의 잿불은 로켓 목걸이 형태였다.
잿불을 감싼 로켓과 목걸이 줄은 특별한 공정을 거쳐 잿불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잿불의 힘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걸 차단했다.
다만 잿불의 힘을 완벽히 가둬 두는 건 어려워 잿불 주위는 다른 곳보다 열기가 있었다.
"넌 안 더워?"
"괜찮다."
"대단하네. 더위를 안 타는 체질인 건가."
"그렇진 않다. 오히려 네가 지나치게 더위를 타는 것 같군."
"그런가."
여명 부족에서도 루드보다 온도에 민감한 모습을 보였던 휴이였다.
"대수림의 영향일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네."
확실히 대수림에선 더위를 몰랐다.
대수림에는 해가 안 들고, 해가 드는 밖으로 나가도 대수림의 영향으로 다른 곳보다 서늘했다. 그곳에서 뜨거움을 느낄 때라곤 불을 피울 때밖에 없었다.
루드는 잿불이 담긴 로켓을 어루만졌다.
뜨거운 기운을 품고 있는 여명의 잿불. 설산 트롤을 상대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지만 다른 쪽에도 쓰임이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미치는 영향도 영향이지만,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열기가 느껴진다.'
로켓을 열어 내부에 자리한 여명의 잿불을 의식했다.
잿불의 기운은 활활 타오르는 화염의 기운이 아니었다.
잿불이란 이름에 걸맞게 은은한, 그러나 강렬한 기운이었다.
잿불에서 비롯된 열기는 외부 환경에 주는 영향 이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어쩌면 정수의 부작용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정수의 힘은 사용자에게 강한 힘을 주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부작용도 함께 주었다.
신체를 넘어 마력과 영혼까지 얼려 버리는 한기.
전생의 루드를 무릎 꿇렸던 건 제국도, 용사도 아닌 바로 이 한기였다.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겠지만 지금 느껴지는 기운이라면 정수의 부작용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듀얼을 지닌 게 다행이군.'
이번 생에 듀얼을 통해 정수의 부작용을 최소화하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리라.
전생에서 정수의 부작용에 잡아먹힌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시에도 여명의 잿불을 확인했었지만 한기를 해소할 거란 기대는 하지 못했다.
그때의 부작용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명의 잿불 말고도 더 있을 거다.'
전생과 비교해 부작용 자체를 극도로 억제한 데다 정수의 힘을 사용하는 빈도까지 줄였다.
이 정도 상태에선 정수의 부작용을 억제하거나 해소하는 방법이 더 있을 수 있었다.
'시간이 되면 찾아봐야겠어.'
지금 급한 건 바깥대륙에서의 일이었다. 바깥대륙의 부족들을 통합해 제국에 대항할 군세를 만들어야 했다.
정수의 부작용에 관한 건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 * *
"황혼 부족이다."
여명 부족을 나선 지 사흘째 되는 날. 황혼 부족에 도착했다.
"크네. 여명 부족이랑 비교도 안 되게 큰데?"
입구만 봐도 느껴졌다. 여명 부족도 알브 부족도 상대가 안 될 크기였다.
그들과 황혼 부족의 차이는 크기만이 아니었다. 황혼 부족의 모습은 여태 봤던 바깥대륙의 부족들과 달랐다. 바깥대륙이라기 보단 중앙대륙의 도시 같았다.
"흠. 여명 부족의 증패군. 여명 부족 녀석들처럼 보이진 않는데."
"그래도 증패는 진짜야."
"그 녀석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일단 증패를 갖고 왔으니 문전박대할 수는 없군. 들어가라. 대신 조용히 볼일만 보고 가라. 사고라도 쳤다간 가만 안 둘 테다."
경비가 증패를 돌려줬다. 루드는 증패를 품안에 넣었다. 황혼 부족으로 간다는 말에 콩파스가 도움이 될 거라며 건넨 증패였다.
'중앙대륙 같군.'
황혼 부족은 증패를 통해 외부인을 관리했다. 그 시스템이 꼭 중앙대륙의 관문 검색 같았다.
'어쩌면 외부인이 많을 수도 있겠어.'
그중엔 중앙대륙 출신도 있을지 몰랐다.
"와. 그냥 완전 도시잖아."
부족의 내부는 밖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커다랬다. 중앙대륙의 도시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 빼곡하게 자리한 건물들. 거리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곳이 중앙대륙의 어느 도시라고 생각할 풍경이었다.
"뭐 이렇게 사람이 많아."
"알브나 여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지."
루드와 휴이는 거리를 걸었다.
"황혼 부족은 바깥대륙의 부족들 중에서도 부유하고 번창한 곳에 속한다."
"그래 보여. 내가 여러 곳을 가 본 건 아니지만 중앙대륙의 도시랑 비교해도 될 거 같은데?"
"맞다. 파바르 정도까진 아니어도 발렌타노는 넘어서는 크기와 인구지."
루드는 휴이에게 맞춘 설명을 이어갔다.
"다른 부족들 중에도 커다란 곳이 있다. 대표적으로 까마귀와 뱀 부족이 있지."
현 바깥대륙 최고 부족인 까마귀와 그 다음 가는 뱀 부족의 부지도 커다란 크기를 자랑했다.
두 부족의 부지는 황혼 부족보다도 훨씬 커다랬다. 영토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황혼 부족은 부지의 크기에 비해서 인구 밀집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이쪽은 사람이 사는 곳이니까."
"이쪽은? 그렇다면 아닌 곳도 있단 소리야?"
그 말대로였다. 황혼 부족의 땅은 넓었으나, 그 넓은 땅 모든 곳에 사람이 살아가는 건 아니었다. 이는 그들 부족이 갖고 있는 특성 때문이었다.
"알브가 활을 다루고 여명이 망치를 다루듯, 황혼은 독을 다룬다."
"...독?"
"그래. 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는 독을 보관하는 곳이 있었다.
"독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키우는 곳도 있지."
또 독성을 지닌 동식물, 혹은 배합에 따라 독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여러 재료들을 기르는 곳도 있었다.
모두 일반 부족원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었다.
"독이라니. 무서운 곳이네."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황혼 부족이 독을 다루는 건 맞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전투요원과 학자에 속하는 이들만 독에 밀접했다.
또한, 루드는 그들의 이면을 알았다. 예로부터 독과 약은 한 끗 차이라 했다. 오랜 세월 독과 밀접하게 지내온 황혼 부족은 뛰어난 독술사이면서 뛰어난 의사이기도 했다.
'실력은 확실했지.'
제국군에 맞서 루드가 이끌던 대항군에서 황혼 부족은 의무부대로 활약했다.
여명 부족과 마주칠 때마다 으르렁대고, 그들에게 치료받는 환자들은 항상 곡소리를 질렀지만, 그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오랜만에 보겠군.'
루드는 의무부대의 대장을 맡았던 이를 떠올렸다. 황혼 부족의 족장이던 그는 누구보다 독에 능통했고 뛰어난 의술을 지닌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그에겐 실력만큼 높은 긍지와 결의가 있었다.
"우리 부족의 이름이 어째서 황혼인지 아는가?"
다친 병사들을 돌보던 그가 했던 말이 있었다.
자신들이 왜 황혼 부족인 건지 아냐는 그의 말.
루드는 대꾸하지 못했다. 물음에 대한 답을 알지 못했고, 답을 알았더라도 대답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크게 다친 병사를, 어제까지만 해도 제 옆에서 수발을 들던 부족원을 바라본 그는 나직이 말했다.
"우리의 이름이 황혼인 것은."
의연한 목소리.
하나 루드는 그 안에 담긴 처절한 울부짖음을 기억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황혼을, 생의 마지막을 책임지기 때문이라네."
답을 알려 준 그는 곧장 옆 침상의 환자에게 향했다. 가장 아끼던 부하의 죽음에도 우는 시간을 갖기보다 다른 환자를 돌보려 한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 도착하긴 했는데 너무 넓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네."
"일단 족장을 찾아갈 거다."
황혼의 비명은 황혼 부족이 취급하는 독 중에도 비독이었다.
일반 독도 외부로의 반출은 까다로운 법.
황혼의 비명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만한 독을 얻으려면 족장을 찾아가야만 했다.
다행히 황혼 부족의 족장을, 그의 사람됨을 알고 있는 루드였다.
그때, 루드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검은색의 머리칼과 매혹적인 눈을 가진 미녀.
루드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설핏 미소를 보였다. 유려한 듯 묘한 색기가 흐르는 자태였다.
루드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휴이가 놀란 상태로 그 뒤를 따랐다.
"어머,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분들 같은데."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가 물었다.
"제게 볼일이 있으신 걸까요?"
"어... 그게, 그러니까."
"그래."
어쩔 줄 모른 휴이가 입을 달싹이는 사이, 루드가 대꾸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녀에게 볼 일이 있었다.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
"어머? 무슨 뜻이신지. 멋진 남성분들보다 제가 먼저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요."
루드는 빤히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황혼 부족은 증패를 통해 출입한다.
다른 부족의 사람, 설령 중앙대륙의 사람이라도 증패만 있다면 출입이 가능할 터였다.
그러니 황혼 부족에 다른 부족의 인물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당장 자신들만 해도 황혼 부족이 아니지 않은가.
그건 경계해 마땅한 뱀 부족이라도 마찬가지.
'뱀 부족의 사람이 황혼 부족에 있을 수 있지.'
교류를 위해 찾았을 수도 있고, 누군가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부족원의 이야기.
'이 여자, 환혹을 각성했다.'
뱀 부족에서도 소수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환혹의 힘.
그걸 지닌 이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48화
루드와 여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둘 모두 눈을 피하지 않았다. 대치가 끝난 건 잠시 자리를 비웠던 여자의 동행인이 돌아온 후였다.
"무슨 일이야 헤슬리."
양손 가득 길거리 음식을 든 사내.
민머리에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끼어들며 위협적인 눈빛으로 으르렁거렸다.
"이 녀석들은 뭐야."
"별일 아니에요. 길을 잃으셨나 봐요."
"그래?"
"네. 모탄 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아니에요. 어서 가요."
헤슬리는 팔짱을 끼며 모탄을 이끌었다.
팔에서 느껴지는 촉감에 웃음이 삐져나오는 걸 간신히 참아 낸 모탄은 루드와 휴이를 한 번 더 노려보고 자리를 떠났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깜짝 놀랐네."
"미안하다. 확인할 게 있었다."
루드의 시선이 두 사람의 뒤를 좇았다. 헤슬리라 불린 여자는 분명 뱀 부족 사람이었다.
'분명 환혹의 기운이었다.'
그것도 일반 부족원이 아닌, 환혹의 기운을 갖춘 부족원.
'은은하게 보랏빛이 도는 눈.'
환혹의 힘은 주로 눈을 통해 사용됐다.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환혹의 힘은 사용자의 눈에 영향을 미쳤다.
그 대표적인 예가 눈의 색이 보랏빛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을 꾸미는 거지.'
이미 한 차례 여명 부족의 숨통을 조였던 뱀 부족이다. 황혼 부족이라고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오히려 황혼 부족이 여명 부족보다 위험할지도 몰랐다. 고작 주변의 산에 몬스터를 풀었던 여명 부족과 달리, 황혼 부족엔 환혹의 힘을 사용하는 이가 직접 들어와 있었다.
"족장에게 가지."
"그래. 근데 족장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어?"
알브나 여명과 달리 넓은 부지의 황혼 부족이었다.
족장에게까지 안내해 줄 사람도 없으니 알아서 길을 찾아야 했다.
"아마도."
과거 황혼 부족을 방문한 적 있는 루드였다. 족장의 거처가 쉽사리 바뀌진 않을 테니,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찾으면 될 일.
예상대로 족장의 거처는 전생과 동일했다.
"무슨 볼일이지?"
족장의 집무처 앞에는 경비가 있었다.
앞을 가로막은 그들에 루드가 방문 목적을 설명하려 할 때였다.
"족장님을 뵈러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따라오시죠."
건물에서 누군가 나오더니 경비를 물렸다.
갑작스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안내를 마다하진 않았다. 자신들을 알고 있는지, 이곳을 찾은 이유를 아는지 몰라도 족장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길이었다.
저쪽에서 먼저 만남을 자처한다면 반길 일이었다.
"이곳입니다."
족장의 집무실까지 안내한 비서는 문을 열어 준 뒤 물러났다.
집무실에는 황혼 부족의 족장이 있었다. 업무를 보던 중인지 책상에는 서류가 가득했다.
"반갑습니다. 미흡하지만 황혼 부족을 이끌고 있는 모치란입니다. 본인을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읽던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를 권하는 모치란은 차분한 학자 같았다. 알이 작은 안경까지 쓰고 있어 더 그러한 이미지였다.
'안 좋군.'
루드는 모치란을 바라봤다.
중요한 건 모치란에게서 느껴지는 이미지 따위가 아니었다. 그의 모습이 학자의 것이든, 전사의 것이든, 의사의 것이든, 아무 상관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기억 속 족장이 아니란 건 무척이나 큰 상관이 있는 문제였다.
'설마 지금의 족장이 다른 인물일 줄이야.'
전생에서 황혼 부족의 족장은 모치란이 아니었다.
'상정하지 않은 상황인데.'
전생의 족장과 지금의 족장이 같을 거라 생각했다.
한 부족의 족장이 바뀌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전생의 족장이었던 바치렌의 나이도 적지 않았으니 당연히 지금 시기에도 그가 족장일 거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족장은 일면식도 없는 사내였다.
"제게 하고 싶은 말이란 게 무엇일까요?"
"...바치렌이란 분을 아십니까?"
"바치렌 말입니까?"
모치란은 두 명의 손님을 훑어봤다. 이들은 바치렌을 어떻게 알고 왔을까.
"어려운 질문은 아니군요."
손님의 질문은 어렵지 않았다.
"알고말고요. 동생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아. 족장님의 동생이셨군요."
바치렌은 자신의 동생이었으니까.
황혼 부족의 족장 모치란. 그의 동생 바치렌.
전대 족장의 아들인 둘은 어려서부터 유명했다.
둘 모두 총명하고 영특해 능히 부족을 이끌어 갈 재목이라 평가 받았다.
'형제였나.'
그 사실을 알고 보니 족장의 얼굴과 기억 속 바치렌의 얼굴이 비슷한 것도 같았다.
루드의 머리에서 한 가지 추론이 나왔다.
모치란이 죽자 바치렌이 그 뒤를 이어 족장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바치렌은 왜 찾는 거죠?"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모치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싱긋 웃었다.
"그것도 여명 부족의 증패를 들고 오신 분들께서."
"알고 계셨습니까?"
"네. 증패를 통한 출입이 허술해 보여도 나름 체계적이랍니다. 증패를 통해 출입한 이들이 몇인지, 어떤 증패를 통해 들어왔는지 전부 기록된답니다. 물론 그 기록은 제게 보고되고요."
그 타이밍에서 모치란은 차를 권했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차란 말과 함께였다.
"여명 부족의 증패를 들고 온 이들이 바치렌을 찾는다라... 뭐, 이유는 묻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저는 여명 부족을 싫어하지 않거든요. 아, 이건 다른 부족원들에겐 비밀이랍니다. 이런 말 했다는 걸 들켰다간 혼나거든요."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던 모치란은 다시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말했다.
"그럼 두 분이 저를 찾으신 용건은 끝난 걸까요?"
"아뇨.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게 본 용건입니다."
루드는 주변에 마력의 파장을 덧씌웠다. 소리가 바깥으로 새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그로도 모자라 루드는 모치란을 향해 고개를 가까이 했다. 모치란이 거리를 좁히자 루드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최근 여명 부족이 곤란을 겪은 일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갑자기 주변에 나타나는 몬스터가 늘고, 몬스터의 위험도도 높아졌습니다."
"안타까운 일이군요."
"저희는 그 일의 뒤에 뱀 부족이 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렇군요."
"이것이 저희가 족장님을 찾아온 이유입니다. 여명 부족 족장님께서는 이 사실을 다른 부족들과 공유해야 된다 하셨고, 마침 부족을 방문했던 저희에게 그 일을 부탁하셨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모치란은 콩파스를 떠올렸다.
여명 부족의 족장. 자신들 황혼 부족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리고 이건 이곳에 오다 알게 된 점입니다만. 황혼 부족 내부에 뱀 부족의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 아름다운 여자이고, 험상궂은 사내와 함께 다니던가요?"
"알고 계셨습니까?"
모치란이 미소를 보였다.
"어떤 걱정을 하시는지는 알겠지만, 그 아이는 괜찮습니다. 그건 제가 장담드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이들이 봤다는 뱀 부족의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들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하지만 괜찮았다. 그녀는 자신과 밀접한 사이였으니까.
"헤슬리를 보신 것 같은데 그녀는 제 아들과 결혼할 사이입니다. 이곳에서 지낸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고요. 참고로 그녀 옆에 있던 험상궂은 녀석이 제 아들 놈이죠. 하하, 안 닮았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이건 제 아내에게는 비밀입니다. 이런 소리 했다는 거 들키면 굶어야 하거든요."
실없는 소리와 함께 웃어 보이는 모치란이었다. 그러면서 걱정하는 바는 알겠으나 헤슬리는 괜찮다고 장담했다.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일이 많아서요. 조심히 가세요."
대화를 마친 루드와 휴이는 집무실을 나왔다.
두 사람을 배웅하며 모치란은 콩파스에게 우려의 마음 잘 받았고,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족장의 거처에서 멀어지는 와중, 휴이가 물었다.
"황혼의 비명이란 걸 얻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맞다."
"근데 왜 안 얘기 했어?"
그 답은 간단했다.
"주지 않을 테니까. 굳이 말하지 않았다."
황혼의 비명을 얻는 건 바치렌이 족장이라 생각하고 계획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족장은 모치란이었다. 그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는 지금 황혼의 비명을 달라 요구하는 건 어려웠다.
"황혼의 비명은 극독이다."
황혼의 비명은 소드마스터에게도 통할 정도로 위험하고 대단한 독이었다.
그런 독을 처음 본 외부인에게 줄까?
그럴 리 없었다. 외려 경계나 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바치렌이 족장이었어도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바치렌이 족장이었다면 전생의 정보들로 어떻게든 얻어 낼 요량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족장은 모치란.
이것이 황혼의 비명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이유였다.
"그보다는 헤슬리란 여자가 문제다."
모치란의 호언장담이 있었지만 루드는 안심하지 않았다.
제 아들과 결혼할 여자라 믿을 수 있다?
모르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루드는 뱀 부족에 대해 많은 걸 알았다.
아주 많은 걸.
'녀석들에게 사랑을 가장하는 건 쉬운 일이다. 사람을 유혹하는 건 더더욱 쉽고.'
환혹의 힘을 각성한 이들에게 연인 행세를 하는 건 간단하다.
몬스터를 상대로 환혹의 힘을 사용하면 여명 부족에서의 일처럼 이상한 티가 났지만, 사람을 상대로 사용할 때는 달랐다.
단숨에 제 의지대로 조종하지 못하는 대신, 조금씩 대상의 정신에 스며들어 야금야금 의지를 갉아먹었다.
그 과정은 가족들조차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
그렇게 의지를 뺏긴 대상은 결국 시전자의 의사대로 움직이는 인형으로 변하고 만다.
물론 뛰어난 정신력을 갖춘 이들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모탄이라 했던가."
모치란에겐 미안하지만 정신력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모치란의 아들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휴이. 해 줘야 할 게 있다."
"뭔데?"
"아까 들었던 바치렌이란 사람을 찾아 줘라."
"족장의 동생이라던?"
"그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몰랐다. 다만 그의 소재를 미리 파악해 놓는 게 좋았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만약의 상황에서 도움이 될 터였다.
"너는 어쩌려고?"
"헤슬리의 뒤를 밟을 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심쩍었다. 해서 직접 보고 판단할 생각이었다.
며칠 미행하다 보면 모탄과 헤슬리가 진짜 연인인 건지, 모탄이 헤슬리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건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바치렌을 찾는 대로 연락 부탁한다."
"알겠어. 나만 믿어."
* * *
모탄과 헤슬리를 미행한 지 사흘째. 루드는 결론을 내렸다.
'역시 환혹의 힘이다.'
모탄의 정신력은 불안정했다. 헤슬리는 뱀 부족 특유의 색기 있는 외모에 환혹의 힘까지 갖춘 인물.
모탄이 헤슬리에게 홀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말. 보여 주는 행동. 자그마한 제스처....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상황을 알려 줬다. 헤슬리는 순조롭게 모탄을 자신의 손아귀에 올려놓고 있었다.
지금만 해도 헤슬리의 부탁이라면 대부분의 것을 들어주는 모탄이었다.
다만 문제는 헤슬리가 모탄을 통해 갖고자 하는 것.
그것을 얻기 위해선 부탁을 들어주는 정도론 모자랐다.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 정도는 되어야 했다.
'황혼 부족의 비전을 노리는 거였나.'
황혼 부족의 비전.
그건 황혼 부족이 대대로 쌓아온 독과 약에 대한 역사였다.
독을 만드는 방법, 그 배합, 효과와 해독에 관한 것까지.
역사를 거치며 누적된, 독과 약에 관한 온갖 정보가 총망라돼 있는 비서가 바로 황혼 부족의 비전이었다.
헤슬리는, 뱀 부족은 그 비전을 훔치려 했다.
'막아야 한다. 비전이 녀석들 손에 들어가선 안 돼.'
황혼 부족의 비전이 뱀 부족 손에 들어가면 큰일이었다. 간사한 그들이 독이라는 절호의 무기까지 쥐면 어떤 일을 벌일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 전에, 저 녀석부터 확인해야겠지.'
헤슬리의 목적을 파악한 루드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행하며 계속 거슬리던 게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둘을 미행하던 존재.
처음에는 자신의 말을 듣고 모치란이 붙인 인물일까 생각했지만 며칠 살펴본 결과 아니었다.
루드는 은밀히 움직였다.
루드가 상대의 기척을 파악한 것에 반해, 상대는 루드의 움직임을 전혀 모르는 상태.
"어디서 온 녀석이냐."
상대의 뒤를 잡은 루드가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49화
'족장님 말씀이 맞았어.'
로하스는 전율했다. 처음 황혼 부족으로 파견될 때만 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황혼 부족에서 무언가 일이 생길 것이니 알아보고 오라니. 너무 맥락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황혼 부족에 오니 파견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뱀 부족이 황혼 부족의 비전을 노리고 있다!'
일개 개인이 다른 부족의 비전을 훔친다?
쉽게 상상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의 뒤에 뱀 부족이 있는 게 분명했다.
'역시 족장님은 대단하셔.'
로하스는 뱀 부족의 술수에 놀라는 한편, 제노스의 혜안에 감탄했다.
공사가 다망한 제노스다.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바쁜 삶을 살고 있었다. 까마귀 부족에서 일어나는 일들만 처리해도 대단한 일.
한데 저 멀리 황혼 부족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심지어 외부로 나가지도 못하셨을 텐데.'
다시 한번 제노스의 대단함을 느끼던 때.
'!!'
뒤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서둘러 뒤를 돌며 대처하려 했지만,
"어디서 온 녀석이냐."
이미 완벽히 뒤를 잡힌 상태였다.
"...."
"대답하지 않겠다는 건가?"
목에 닿은 날붙이의 각도가 조금 틀어졌다. 피부 끝이 갈라지며 피가 흘렀다.
"이 상태에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겠지?"
꿀꺽.
'이자는 누구지.'
상대의 접근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뒤를 잡은 것도, 그 다음의 대처도, 한두 번 해 본 모양새가 아니었다.
'암살자인가? 아니, 아니다.'
암살자였다면 뒤를 잡는 게 아니라 바로 죽였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물을 이유도 없고.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것처럼, 로하스 또한 상대의 정체가 궁금했다.
"순순히 협조하지."
양손을 천천히 올렸다.
반항할 의사가 없다는 걸 알아들었는지 목에 닿은 칼날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 순간, 번개같이 돌아서며 칼날을 쳐냈다.
동시에 상대의 턱을 노리며 손바닥을 뻗고, 회피하는 움직임에 맞춰 반대쪽 팔꿈치로 다시 한번 턱을 노렸다.
신속하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상대의 방심을 틈타 순식간에 상황을 반전시킬 역습이었다.
컥!!
* * *
'컥!!'
의식을 되찾은 로하스는 숨을 골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감각이 돌아오며 눈에 안대가 씌워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이런 꼴인 이유를 떠올렸다.
뒤를 잡았던 상대에게 가한 역습.
하나 그 반격은 허무하게 막혔고. 그 결과가 지금 모습이었다.
"정신을 차렸나."
루드는 로하스를 바라봤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모탄과 헤슬리의 뒤를 캐던 사내. 그에겐 궁금한 게 많았다.
'까마귀 부족의 사람이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지.'
사내는 까마귀 부족의 사람이었다.
'부족에서 가르치는 박투였다.'
그것도 단순한 부족원이 아니라 전투원.
"넌 누구지?"
"질문은 내가 한다."
정신을 차린 로하스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질문하고 답을 받는 이는 하나면 족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로하스는 고민했다.
시야는 가려졌고 손발은 결박됐다. 상대 또한 자신을 압도하는 강자.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곳의 일을 전달해야 하는데.'
이곳에서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두렵긴 하지만 일찍이 각오한 바였다.
다만 죽더라도 뱀 부족이 황혼 부족의 비전을 노린다는 사실을 전하고 죽어야 했다.
"생각이 많군. 까마귀."
"!!"
"뭘 그리 놀라나. 설마 아직까지 어디서 왔는지 모를 거라 생각한 건가? 박투술까지 보여 줘 놓고?"
"원하는 게 뭐야."
로하스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곧장 죽이지 않았다는 걸 보면 원하는 게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족장님께 알려야 했다.
"너에게 궁금한 것들이 있다. 사실대로 대답하면 살려 준다고 약속하지."
"믿어도 되는 거겠지...?"
"죽일 거였다면 진작 죽였을 거다. 안대 또한 씌우지 않았을 거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궁금한 게 뭐냐."
사람을 잘못 봤다거나 착각했다거나 하는 변명은 없었다. 조금의 대화였지만 상대가 진짜배기란 걸 알 수 있었다. 어쭙잖은 반항보다는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살아 나갈 확률이 높았다.
"일단 이름을 묻지. 이름이 뭐지?"
"로하스."
루드는 이름을 곱씹었다.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전생에 까마귀 부족의 전투원 명단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한데도 처음 들어 본다는 건 그 당시엔 이미 은퇴했거나 죽었다는 소리였다.
"이곳에 온 목적. 아까 그 둘을 미행한 이유."
"...임무 때문에 왔다. 그 둘을 미행한 것도 임무와 관련됐기 때문이고."
"무슨 임무지?"
"황혼 부족에 특별한 일이 없는지 확인하고 보고하는 거였다."
"그렇다면 알았겠군. 이곳에서 일어날 일을."
"...."
로하스는 침묵을 고수했다.
상대가 어느 편에 선 자인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를 땐 답을 아끼는 게 좋았으니.
"누가 보냈지?"
"말할 수 없다."
"팔라운. 제노스. 소크란."
갑자기 몇 개의 이름을 부른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명한 세 사람은 까마귀 부족의 핵심 인사들이었다.
다른 부족에 누군가를 파견한다면 이들 중 하나일 확률이 높았다.
생각대로, 순간적으로 로하스가 반응한 이름이 있었다.
"제노스. 족장이 보냈군."
"...."
"혹시 까마귀의 눈 소속이냐."
"그걸 어떻게...!!"
로하스는 뒤늦게 아차 했다. 떠보려는 의중일 수도 있었는데 너무 쉽게 실토해 버린 꼴이 되었다.
루드는 로하스를 바라봤다. 까마귀의 눈은 족장의 직속부대 중 하나였다.
각기 눈, 부리, 발톱으로 나뉜 부대는 이름에 맞는 임무를 맡았다.
'다른 이들 몰래 보낸 건가.'
임무를 내준 이를 숨기려 한 걸 보면 다른 이들 모르게 임무를 받은 것 같았다.
'이 시기에 아버지가 황혼 부족에 사람을 보냈었다는 건 처음 듣는다.'
하지만 로하스의 반응은 진짜였다. 그를 보낸 건 제노스가 맞았다.
까마귀의 눈은 다른 부대에 비해 무력이 떨어지지만 잠입과 미행, 추적 등에 최적화된 부대였다.
황혼 부족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하기 위해 보냈다면 딱 맞는 인사.
자신이니 쉽게 간파하고 뒤를 잡았지, 다른 이들이 상대였다면 이리 쉽게 잡히진 않았을 로하스였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계셨다고?'
루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모르고 보냈다 하기에는 절묘한 시기였다.
뱀 부족이 황혼 부족의 비전을 훔치려고 작업 중인 지금이다.
하필 다른 부족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보냈을 때, 딱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우연이라기보다는 알고 보냈다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이상하군.'
제노스는 어떻게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사람을 보낸 걸까.
'설마 아버지도... 아니 그만한 신비가 여러 개일 리 없다.'
순간 제노스도 회귀를 한 게 아닐까 의심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다시 생각해 보자.'
'어떻게 알았는지'가 아니라 '알고 있다'로 초점을 바꾼다.
아버지는 황혼 부족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알고 있었다. 방법은 모르지만 상황을 인지했고 사람까지 보냈다.
'잠깐만, 설마.'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지."
"그 후엔 풀어주는 거겠지?"
"마지막 물음에 성실히 답한다면."
"뭐냐."
"족장이 다른 부족에 자신의 사람을 몰래 보낸 적이 또 있나?"
"...."
때론 침묵이 답이 될 때도 있었다.
지금이 그랬다.
'그랬던 건가.'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는지'가 아니라 '알았다'는 것 자체에 초점을 맞춰 생각하자 몇 개의 퍼즐이 맞춰졌다.
뱀 부족이 여명 부족에게 술수를 부렸었단 걸 자신이 몰랐던 이유.
바깥대륙을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품은 뱀 부족이 전생에서 쉽사리 다른 부족들을 몰락시키지 못한 이유.
'아버지가 막아 낸 거였나.'
제노스는 뱀 부족이 술수를 벌이는 걸 알고 있던 게 분명했다.
여명 부족과 황혼 부족 말고도 뱀 부족의 마수가 미친 곳이 더 있었을 것이다.
전생에서 그 사실을 몰랐던 이유는 간단했다.
제노스가 미리 막아 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루드는 로하스를 바라봤다.
전생에서 뱀 부족은 결국 황혼 부족의 비전을 탈취하는 데 실패했을 것이다.
로하스가 '눈'으로서의 역할을 맡았다지만 황혼 부족의 비전이 뱀 부족에게 넘어가는 걸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거나 죽었다면 로하스의 이름이 낯선 것도 설명이 된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국 황혼 부족의 비독에 당했다.'
제노스를 죽음의 문턱으로 몰고 간 건 소크란이 주입한 독이었다.
설산 트롤과의 전투로 중상을 입은 제노스는 독을 주입당하고 빠르게 상태가 악화됐다.
당시 소크란이 사용한 독은 황혼 부족의 비독 중 하나였다.
전생에선 뱀 부족이 황혼 부족의 비전을 훔치려 했단 사실을 몰랐다. 하여 소크란이 비독을 구한 방법에 관심 갖지 않았다.
소크란이 제노스에게 독을 먹였다는 게 중요했지, 어디서 어떻게 구한 독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의 상황이 다르게 보였다.
'....'
깊은 고민.
루드는 생각을 바꿨다. 로하스를 그냥 놓아줄 수 없었다.
"이건 무슨 뜻이지?"
루드는 로하스의 안대를 풀어 줬다. 로하스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니 살려 달란 의미였다.
"눈 떠라. 죽이지 않을 테니."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믿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
"젠장."
로하스는 짧은 반항 끝에 천천히 눈을 떴다.
빛이 들어오며 서서히 시야가 회복됐다.
부서진 의자가 굴러다니는 바닥, 어두운 조명, 그리고 앞에 서 있는 청년.
'새파랗게 어리잖아.'
자신도 까마귀의 눈에선 어린 축에 속했다. 한데 눈앞의 녀석은 자신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검은색 머리에 검은색 눈동자, 뚜렷한 이목구비....
잘생긴 미남의 모습이었다. 마치 족장님처럼.
'어?'
로하스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불경한 생각을.'
방금 전 자신의 생각은 어찌나 불경한 것인가. 감히 족장님을 떠올리다니.
"까마귀의 눈에서 어느 정도 직위지?"
"그건 알아서 뭐하려고."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레 답하고 말았다.
뒤늦게 아차 한 로하스였지만 루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낼 뿐이었다.
"이것을 알고 있나."
"그건!!!"
로하스의 눈이 커졌다.
"반응을 보아하니 알고 있나 보군. 이야기가 쉽겠어."
그 모습을 본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면 계획 변경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5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