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 30-40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30화

선대 알브족의 유산이 있는 곳.

모두는 그곳을 비경이라 칭하기로 했다. 햇빛 한 점 없는 수해에서 빛이 쏟아지고 산뜻한 바람이 부는 곳은 비경이라고밖엔 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그 비경이다. 그곳에서 선대 알브족의 유산을 찾아 복귀한다."

일행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수해에는 땃쥐 말고도 많은 생명체가 존재했다.

몸통의 두께가 사람만한 지네, 제 몸의 두 배 길이의 팔을 가진 원숭이. 그 외에도 다양하고 많은 생명체들....

녀석들은 잊을 만하면 일행의 앞에 나타났는데, 일행의 반응은 제각기 달랐다.

무드리는 인상을 굳히며 경계했고, 휴이는 호기심을 보였으며 리카엘은 주춤하는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루드는 녀석들을 통해 수해 내부의 거리감을 파악하고자 했다.

'슬슬 위험 지역인가.'

어느 곳 하나 안전한 곳이 없는 수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장소는 존재했다.

수해도 엄연히 생명체가 살아가는 하나의 생태계.

본디 자연의 생태계에서는 개체마다의 영역이 있는 법이다.

여태까지 조우한 생명체들의 변화 추이를 살피자면, 이제부터 포식자의 영역이었다.

크릉-

근방에서 들려온 날것의 울음소리.

"전투태세."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루드와 휴이가 앞으로 나서 전위를 맡고, 리카엘이 후방에서 두 사람을 보조. 후방의 리카엘을 무드리가 지키는 포지션이 순식간에 완성됐다.

곧이어 울음소리의 주인이 나타났다.

크르릉. 크르... 크아아아앙!!!

잠시 목을 긁는가 싶더니 터뜨린 커다란 하울링.

포식자의 등장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며, 확장된 감각에 인근의 생명체들이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저거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아마 맞을 거다."

"하. 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이건 좀 아니지."

휴이는 강자와 싸우는 걸 좋아했다.

서로 치고 박으며 한 단계씩 나아가는 그 과정을 즐겼다.

그러나 그건 대등하거나 약간 차이 나는 강자와의 싸움을 반긴다는 것.

뭐 하나 해 보지 못한 채 끝날 싸움을 즐긴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호랑이라니."

호랑이의 모습을 한 그것은 두 발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전설 속 어느 생명체를 연상시켰다.

"웨어타이거."

지상 최강의 수인.

물론 수인은 전설 속에나 있는 존재였다.

웨어울프라는 개체는 실제로 존재했지만 그들은 '수인'이 아니라 '몬스터'였다.

이성이 아닌 야성으로 움직이며 사람을 해치는 괴물.

그러니 수인은 없는 게 맞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앞에 선 호랑이는 전설 속 수인이라 해도 믿을 만한 존재감을 풍기고 있었다.

3미터는 돼 보이는 신장, 여태 마주한 무엇보다도 잘 발달되어 있는 몸. 앞발 밑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력을 다루는 녀석이다."

은연중 드러나는 마력의 흔적.

좀처럼 여유를 잃지 않는 휴이였지만 기가 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반칙이지 않은가.

크릉.

짧은 그르렁거림, 그것이 신호였을까. 곧이어 호랑이가 달려들었다.

"피해라!"

그 쇄도를 정면에서 막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할 수 있는 선택은 회피.

쇄도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호랑이를 중심으로 모두 갈라진 상태가 됐다.

"휴이."

"알았다고."

루드와 휴이는 앞뒤로 호랑이를 포위하듯 섰다.

수해의 생명체는 전부 가죽이나 외피가 질기고 단단했다. 가장 약한 개체인 땃쥐만 해도 오러를 씌우지 않으면 가르기 힘들 정도.

그 생태계의 정점일 호랑이의 가죽은 말할 것도 없었다.

호랑이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루드와 휴이뿐.

리카엘이 신성 마법을 사용한다면 또 모르겠으나 그건 그것대로 위험 부담이 컸다.

근방에 어떤 생명체가 있을지 모르는 상황. 자칫 근처의 생명체들이 끌려오기라도 한다면 낭패였다.

퍼억!

"뭐가 이렇게... 단단해!"

호랑이의 앞발을 피해 물러선 휴이가 주먹을 털었다.

정타가 제대로 들어갔으나 호랑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오히려 타격한 제 손이 아플 정도.

난감하기는 루드도 마찬가지였다.

'날이 많이 상했다.'

검의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

수해의 생명체들을 상대하며 조금씩 소모되던 날이 호랑이의 발톱과 부딪칠 때마다 뭉텅이로 수명이 깎여 나가는 게 보였다.

'결단해야 한다.'

검이 깨지고 나선 늦었다.

지금 선택해야 했다.

"비경에서 합류하자."

"뭣?"

크아앙!

오러를 가득 담은 검이 호랑이의 가죽을 길게 찢었다.

호랑이의 신경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루드는 그대로 도망쳤다.

루드의 의도대로 호랑이는 루드를 쫓았다.

"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셋은 큰 숨을 터뜨렸다. 막혀 있던 호흡이 트이면서 그제야 숨이 편해졌다.

"루드 녀석 괜찮겠지?"

"생각이 있으니 움직인 걸 거다. 그 녀석이 얼마나 주도면밀한지 너도 알지 않느냐."

"그렇겠지?"

부족에 온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소드마스터와 거래하고 구출대에게 도움을 줄 정도로 계획적인 루드였다.

그런 루드라면 전부 생각이 있어서 한 행동일 터.

"그보다 문제는 우리다."

무드리가 살짝 풀린 긴장감을 되잡았다.

"호랑이가 없는 굴엔 이리들이 꼬이기 마련."

그의 말마따나 호랑이의 등장에 도망치고 몸을 숨겼던 피식자들이 포식자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다들 정신 바짝 차려라."

아직 위험은 끝나지 않았다.

* * *

루드는 빠르게 도망쳤다.

주위가 온통 나무가 아니었다면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호랑이는 그보다 더 빨랐다.

'미치겠군.'

나무 사이사이로 길을 내며 도주하는 루드.

반면 호랑이는 길이 보이면 길로 가되, 보이지 않으면 길을 뚫으면서 따라붙었다.

압도적인 체급과 힘은 말도 안 되는 그 일을 가능하게 해줬다.

카앙-!

한순간 모습을 감췄다 튀어나오며 옆구리를 노린 검이 발톱에 막혔다.

기습 실패를 인지함과 동시, 루드는 다시 도주했다.

이동하는 도중 계속해서 빈틈을 노렸지만 공략하기 쉽지 않았다.

일단 지형에서부터 불리했다. 수해의 나무를 신경 써야 하는 루드와 달리 호랑이는 나무가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더군다나 호랑이는 수해의 생명체. 루드보다 더 수해에 익숙했다.

'공간이 확보된 곳은 없나.'

위험을 무릅쓰고 단신으로 호랑이를 유인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행과 함께 상대하는 것보다 일대일로 상대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

휴이의 공격마저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일행은 방해만 될 뿐이었다.

호랑이에게 집중하기도 바쁜 와중에 동선이나 검의 궤적이 일행이 걸리지 않게 조심하는 건 집중력을 갉아먹는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호랑이와 싸울 장소를 바꾸기 위해.

호랑이를 상대하는 건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경지가 상급에 오른 덕분이었다.

하지만 아까나 지금과 같이 주변에 지형지물이 많은 곳은 피하는 게 좋았다.

장애물이 검의 힘과 속도를 깎아 결국 호랑이에게 입힐 수 있는 피해가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가장 좋은 건 검의 궤적을 방해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지형.

'검만 괜찮았어도 바로 승부를 보는 건데.'

이미 일행과는 꽤 멀어진 상황.

오러를 가득 담아 벤다 해도 거리낄 게 없었다.

하지만 검의 수명이 아슬아슬한 현재 함부로 검을 낼 수 없었다.

자칫하다간 호랑이에게 닿기도 전에 검이 깨질 판국이었다.

'한 번. 많으면 두 번.'

그 정도가 한계였다.

그 이상 전력으로 휘둘렀다간 깨지고 말 터였다.

그때. 루드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호수? 아니, 샘인가.'

호수라기엔 작은, 물이 있는 샘이었다.

수해에도 생명이 살고, 생명에게 물은 필수적이었으니 수해의 생명체들이 물을 구하는 곳일지도 몰랐다.

"잘됐군."

중요한 건 샘 주변에 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직 샘 주위로만 나무가 없어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샘에 도착해 등을 돌리자 이윽고 호랑이가 나타났다.

크르릉. 녀석도 정상은 아니었다.

유인하기 직전 길게 갈라 놓은 상처 때문에 털은 피로 젖어있었고, 발톱도 절반가량이 잘린 상태였다.

"더러우니까 침 좀 그만 흘리지."

살짝 벌어진 입 안.

송곳니를 따라 늘어지는 침에 루드가 비아냥거렸다.

뜻을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 안에 담긴 어조를 느낀 호랑이가 낮게 목을 긁었다.

"끝을 내 보자고."

샘을 뒤로하고 검을 세운 루드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호랑이는 머뭇거렸다.

조금 전의 기세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뭐지?'

여기까지 와서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더 이상 도망가지 않는다는 건 호랑이도 느꼈을 터였다.

'샘 때문인가?'

아까와 다른 건 환경뿐이었으니 그럴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건 네 사정이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이 상황은 이용할 수 있었다.

샘물에 발을 담그자 호랑이가 주춤하는 게 느껴졌다. 루드는 조금 더 샘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샘물에 발목이 잠길 정도가 됐을 때. 녀석도 마음을 먹었는지 근육을 긴장시켰다.

당장이라도 덤벼들 기세.

루드도 언제라도 검을 휘두를 수 있도록 준비했다.

"후우...."

기회는 한 번.

녀석이 자신을 죽이고자 덤벼들 때. 그때가 녀석을 죽일 수 있는 기회였다.

크허헝!!!

커다란 포효와 함께 쇄도하는 호랑이.

루드는 처음과는 달리 피하지 않았다. 그저 제자리에 서서 검을 그을 따름이었다.

첫 번째 검.

인간도.

어느새 나타난 사념이 달려드는 호랑이의 몸을 구속했다. 동시에 의지가 담긴 검이 호랑이를 가로로 길게 베었다.

쩌저정-!

일련의 동작이 끝남과 동시에 깨져 나간 검.

'끝났군.'

호랑이는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관성에 의해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승부가 났다.

그러나 그 타이밍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 심장을 절단했음에도 호랑이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낸 것이다.

'!!!'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 발톱이 보였다. 시선에 명확하게 담았으나 반응할 수 없었다.

인간도를 내보이며 컨디션이 저하된 상황.

심지어 검도 산산조각 났다.

호랑이의 마지막 발악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어쩔 수 없군.'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마력으로 보호하는 건 가능했다.

호랑이의 파괴력을 떠올리면 마력으로 보호하더라도 부상을 피할 수 없겠지만, 최후의 발악인 걸 감안하면 작은 피해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때. 또다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울렁울렁.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마력을 둘렀을 때. 샘물이 반응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콰작-!

허공에 떠오른 샘물이 호랑이의 앞발을 막더니, 이내 가시처럼 형태를 바꿔 호랑이의 앞발을 꿰뚫은 것이다.

"...!"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샘물의 형태로 돌아갔다.

루드는 멍하니 발밑의 샘물을 쳐다봤다.

샘물, 아니 샘물이 아닌 다른 무언가일 녀석은 칭찬해달라는 듯 일렁거리고 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31화

'그것'은 자신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알지 못했다.

자신을 낳아 준, 혹은 만들어 준 존재가 누구인지.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어느 순간 의식이 생긴 후부터 그저 멍하니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평소 액체의 형상을 취했다. 에너지 소모가 적은 가장 효율적인 형상이 액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때로 조금, 때때로는 많이 늘어지며 한 자리를 지켰다.

간간이 자신을 샘물로 착각한 녀석들이 찾아올 때면, 녀석들을 잡아먹거나 가지고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것은 지금까지완 전혀 다른 것을 조우했다.

이 녀석은 뭐지?

여태 마주하던 녀석들과 생김새부터 달랐다. 이렇게 생긴 녀석은 처음. 그런데 썩 나쁘지 않았다.

그것은 돌아가는 상황을 관망했다.

처음 보는 녀석은 시끄러운 놈이랑 함께였다. 시끄러운 놈은 일전에 자신에게 혼쭐난 바가 있었는데, 그때를 떠올렸는지 제 쪽으로 다가오는 걸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것은 보았다.

결국 처음 보는 녀석에게 달려든 시끄러운 놈을.

그리고 여태 본 무엇에도 비하지 못할 아름다움을.

그것은 제 몸을 가득 채우는 무언가를 느꼈다.

처음 보는 녀석이 자신에게 닿아 있었기에, 그것은 처음 보는 녀석의 몸 안에서 시작된 무언가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낀 기분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그 순간, 그것은 결정했다. 이 녀석을 따라가자고.

그건 그것이 태어나서 여태까지 내린 결정 중 가장 커다랗고 중요한 결정이었다.

한데 쓰러진 줄 알았던 시끄러운 놈이 처음 보는 녀석을 공격하려 했다.

처음 보는 녀석이 고작 이런 녀석에게 당할 거 같진 않았지만, 그것은 시끄러운 놈을 대신 처리해 주기로 했다.

앞으로 함께할 사이니까 이 정도는 해 줘야 하지 않겠어?

"이게 대체...."

이것이 루드의 발밑에서 칭찬하라는 듯 일렁이고 있는 샘물의 마음이었다.

* * *

살쾡이가 저 멀리 날아갔다.

하나를 처리한 휴이는 곧장 몸을 돌렸다. 어느 새 코앞에 자리한 다른 살쾡이가 발톱을 휘둘렀다.

"제기랄."

팔뚝에 긴 상처가 났다.

깊진 않았으나 전투가 지속되면 언젠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처였다.

아래에서 위로, 주먹을 올려쳐 살쾡이의 턱을 박살 낸 휴이가 주변을 살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드리와 리카엘도 고전 중인 것 같았다.

"뭐 좋은 방법 없어?"

"있었다면 진작 썼겠지!"

달라붙은 원숭이를 떼어 낸 무드리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대로라면 루드보다 자신들을 먼저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마법을 사용할까요?"

등을 맞댄 리카엘이 물었다. 무드리는 생각에 잠겼다.

'비경에서 만나자 한 걸 보면 비경이 멀지 않은 것 같은데.'

물론 비경의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했다. 하지만 그 정도 되는 인물의 직감은 무시할 수 없는 것.

무엇보다 이동하면서 점차 강한 생명체가 나타났고, 조금 전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건 비경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마법을 쓰면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나?"

"근처에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재정비할 시간은 벌 수 있을 겁니다."

"좋아. 우리가 알아 둬야 할 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절 보호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신호하면 눈을 감아 주시고요."

"...알겠다."

무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시야가 불명확하다 하지만 눈을 뜨고 있는 것과 감고 있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달리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는 상황.

지금은 리카엘을 믿고 그녀의 마법에 맞춰 눈을 감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입니다!"

파앗-!

곧, 하얀 섬광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된 건가?"

"예. 이제 눈 뜨셔도 됩니다."

무드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

"허. 대단하군."

"그분께서 미천한 종께 힘을 빌려주신 덕분이죠."

마법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은 대단했다.

근방의 거대한 나무들이 죄다 꺾여 있었고, 좀 전까지 사투를 벌이던 생명체들은 전부 어느 한 곳이 부러지거나 움푹 파인 채 나뒹굴고 있었다.

"그보다 빨리 자리를 벗어나지."

빛을 동반한 강력한 마법.

덕분에 급한 불은 껐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빛에 자극받아 달려온 다른 녀석들을 상대해야 했다.

"어디로 가죠?"

수해 중반부터는 루드가 길잡이 역할을 하던 상황.

루드가 없는 지금 그들은 스스로 어디로 향할지 정해야 했다.

그때.

"저쪽."

휴이가 입을 열었다.

다시 찾아온 어둠 때문에 다른 둘의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눈엔 눈물 자국이 말라 있었다.

"저쪽이다."

확신에 찬 말투.

그럴 수밖에 없었다.

휴이는 눈을 감으라는 신호를 받았으나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부릅뜨고 사방을 바라봤다.

어둠과 사방을 가득 채운 지형지물 때문에 길을 찾기 어려운 상황.

마법에 의한 강렬한 빛은 짧지만 그 모든 걸 몰아내고 길을 제시했다.

"저쪽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강렬한 빛이 사그라지며 점차 어둠이 찾아올 때.

휴이는 희미하게 어둠에 저항하던 빛줄기를 확인했다.

루드가 말하길, 비경은 빛과 바람 그리고 꽃이 있는 곳.

비경의 빛일 확률이 높았다.

신성력으로 상처를 모두 치유한 셋은 빠르게 이동했다.

근방의 모든 생명체들이 조금 전의 마법에 휩쓸렸는지 더 이상 수해의 생명체를 마주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이동하던 그들의 앞에 빛줄기가 보였다. 미약하지만 분명한 빛줄기였다. 어둠 속의 빛줄기는 아무리 약한들 눈에 띄는 것이었다.

"빛이에요."

"정말이군. 정말 빛이야."

빛줄기를 이정표 삼아 이동한 지 조금.

모두의 눈앞에 어느 광경이 펼쳐졌다.

이곳이 비경이라고, 모두에게 확신을 주는 광경이었다.

"도착했군."

그들은 아래를 쳐다봤다.

루드의 말대로였다.

비경은 분지처럼 생성된 지형이었다.

분지 내부의 공간은 다른 곳처럼 나무가 빽빽하지 않았다. 드문드문 나무가 자라 있었고 꽃들이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공간을 햇빛이 환히 비췄다.

"루드는 아직인 것 같군."

"금방 오겠지."

루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먼저 비경에 도착한 것이었다.

휴이는 루드를 믿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다.

호랑이는 분명 강했으나, 루드가 지는 그림은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걱정이라면 이곳에 도착하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이야 비경 근처에 있었고 연유야 어찌 됐든 탁 트인 시야를 확보했었기에 빠르게 비경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루드는?

호랑이를 유인하는 과정에서 돌아오는 길까지 생각할 여유가 있었을까?

돌아온다 한들 그곳에서 이곳까지 빠르게 찾아 낼 수 있을까?

"쓸데없는 걱정 마라."

"그렇겠지? 녀석이 어떤 녀석인데."

휴이의 상념이 깊어지는 걸 간파한 무드리가 그 흐름을 끊었다.

"미리 비경을 살펴보자. 루드가 도착하면 바로 떠날 수 있게 말이야."

"알겠어."

"성직자 아가씨는...."

"이곳에서 루드 님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편히 확인하시죠."

"고맙군."

"별말씀을요."

무드리와 휴이는 리카엘을 믿고 비경을 탐색하기로 했다.

함께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며칠간의 동행으로 유대를 형성한 그들이었다.

위에서 비경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피던 휴이와 무드리가 비경으로 내려갔다.

"처음 보는 식물들이군."

비경의 바닥을 가득 채운 꽃들은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무드리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샘플을 가져가야겠어. 부족에서도 재배가 가능하면 좋겠는데 말이지.'

무드리는 조심스레 식물들을 채집했다.

선대가 남긴 유산도 유산이지만 이런 것들도 부족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어쩌면 생활의 측면에선 이것이 더 큰 가치가 있을지도 몰랐다.

무드리가 새로운 식물을 채집하는 사이, 휴이는 비경 곳곳을 둘러봤다.

바닥의 꽃을 보기도 하고, 군데군데 서 있는 나무를 살피기도 했다.

그러던 중 무언가가 보였다.

"동굴?"

벽 한 구석이 파여 있었다. 휴이는 홀린 듯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밖에서 봤을 때보다 넓었다. 입구는 작았지만 내부의 폭은 사람 서넛이 나란히 서도 될 정도였고 높이는 4m 정도 되어 보였다.

내부의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두 갈래로 나뉜 갈림길이 나왔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휴이는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어차피 시간은 충분했다. 양쪽 길 모두 확인할 수 있었으니 깊게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오른쪽 길은 금세 끝을 보였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막다른 길이 나타난 것이다.

"...이게 끝이라고?"

동굴을 발견했을 때 느낌이 왔었다. 이곳에 선대의 유산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하지만 휴이를 맞이한 건 선대의 유산이 아닌 딱딱한 벽이었다.

'괜찮아. 왼쪽 길도 있었어.'

그러나 실망하기엔 일렀다. 아직 왼쪽 길을 확인하지 않았다.

빠르게 갈림길로 돌아온 휴이는 곧장 왼쪽 길로 들어갔다.

왼쪽 길은 길었다.

오른쪽 길의 몇 배는 되는 길이었다. 길을 걸을수록 느낌이 왔다.

이곳이다. 이곳이 분명하다. 분명히 이곳에 있다.

"여기 있다... 아?"

왼쪽 길의 끝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휴이가 찾던 건 아니었다.

"이거, 그거잖아."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는 무언가는 큐브의 형태를 오가며 이리저리 모습을 변형하고 있었다.

휴이는 이것의 이름을 알았다.

"신비."

선대의 유산을 찾으러 왔건만 엉뚱한 신비를 마주쳤다.

휴이는 빤히 신비를 바라봤다. 이 안에 담긴 힘이 어떤 것일지는 모르지만, 뭐가 됐든 얻는다면 큰 힘이 될 터였다.

하지만.

'내가 갖는 게 맞나?'

이곳을 가장 먼저 찾은 건 자신이었지만 그게 이 힘을 취할 자격은 아니었다.

루드가 없었다면 수해에 올 생각도 안 했을 것이고, 리카엘이 없었다면 이곳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아가씨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 게 조건이었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말한 대로만 되는 것이던가.

휴이는 고심했다. 그 둘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취해야 한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취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족의 누군가가 취하는 게 부족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여기가 아니었나."

아쉬움을 안고 돌아서려던 그때.

휴이는 발광하는 신비를 보고 무언가를 깨달았다.

"혹시."

휴이는 다시 갈림길로 돌아가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자신의 생각이 맞으면 선대의 유산은 이곳에 있는 게 맞았다.

이윽고 다시 마주한 막다른 길.

길을 막아선 커다란 벽 앞에 도착한 휴이는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그렇게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을 때.

"보인다."

이전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역시 이곳에 있었어.'

휴이의 앞에 선조의 유산이 나타났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32화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 자세히 보자 벽에 새겨진 것들이 보였다.

그것들은 때론 글자였고 때론 그림이었다.

음각된 것들을 살핀 휴이는 희열을 느꼈다.

분명했다. 이것이 잃어버렸다는 선대의 유산, 온전한 알브족의 비전 심법이었다.

"설마 이렇게 큰 벽에 새겨져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냐고."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 커다란 벽을 종이처럼 썼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부족에서 보고 익힌 심법은 책의 형태였다. 지금의 장로들도 그것을 보고 익혔다는 아주 낡고 오래된 책.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대가 익혔다는 온전한 심법도 책의 형태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막상 마주하게 된 건 온전한 심법은 커다란 벽에 빼곡하게 음각돼 있었다.

잠시 헛웃음을 내뱉던 휴이는 삽시간에 벽에 새겨진 내용에 빠져들었다.

벽에 새겨진 내용은 현재의 알브족이 익히는 심법과 유사했지만, 분명 달랐다.

가장 중요한 기본 골자는 현재의 알브족이 익힌 심법과 똑같았지만 그것에 더해지고, 변화시키는 세세적인 내용이 추가돼 있었다.

틀만 있느냐 그 안까지 채워져 있느냐의 차이였다.

휴이는 쉴 새 없이 온전한 심법을 탐닉했다.

선대의 유산을 발견했단 사실을 빨리 알려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미 물이 가득 차 있던 휴이란 그릇에 온전한 알브족의 심법이라는 물방울이 떨어졌다.

단순한 물방울이 아니었다. 잉크처럼 진한 색을 품은 물방울이었다.

그것이 떨어지자 가득 차 있던 물의 색깔이 물들기 시작했다.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점차 퍼져나간 색은 이내 가장 먼 곳까지 물들였다.

마침내 모든 물을 물들인 물방울이 제 역할을 다하고, 가득 차 있던 그릇 밖으로 물방울 하나가 흘러내린 순간.

"아."

휴이는 자신이 변화했음을 느꼈다.

이전보다 빠르게 반응하는 마력 수급과 더 촘촘해진 몸의 밀도.

"상급이 된 건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느껴지는 감각과 힘은 분명 자신이 한 단계 위의 경지에 올랐음을 이야기 했지만 정말 자신이 상급이 된 건가 하는 기분이었다.

현재의 알브족에 익스퍼트 상급은 없었다. 경비대장을 맡고 있는 해리슨도 중급의 끝자락일 뿐, 부족의 누구도 상급에 오르지 못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그들이 익힌 심법이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신이야 몰랐다지만 족장과 장로들은 알고 있었다. 해리슨도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다른 심법을 익히지 않은 건 하나의 이유였다.

그들이 알브족이니까.

알브족의 심법이 아닌 외부의 심법을 익히는 게 그들 스스로에게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완전한 우리의 것이 돌아왔다."

이제 시작이었다. 짧은 시간 보았지만 그렇기에 더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심법에 담긴 오묘함과 가능성을.

자신만 해도 곧장 상급에 오르지 않았나.

해리슨과 족장을 비롯한 부족의 인원들도 금방 상급에 오를 수 있을 터였다.

"무드리에게 알려야 해."

무언가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건 자신의 적성이 아니었다.

휴이는 곧장 동굴 밖으로 나가 무드리를 찾았다. 때마침 식물 채집을 마친 무드리가 허리를 펴고 있었다.

"무드리! 찾았어! 찾았다고! 선조의 유산이 여기 있어!"

"뭐?! 정말이냐!"

휴이는 무드리를 선조의 유산이 적힌 벽으로 안내했다.

"반대편 길에는 신비가 있어."

"신비라고? 내가 아는 그 신비가 맞아?"

"아마도 맞을 거야. 다른 걸 본 적이 없어서 확신은 못하겠지만 그게 신비가 아니라면 말이 안 돼."

순간 무드리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혹시 그 신비가 루드의 목적이었던 건가?"

"그럴 수도 있겠네."

알브족을 돕겠다는 루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들도 그것을 알았기에 루드를 믿고 함께 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알브족을 돕겠다는 진심과는 별개로 필요한 것을 찾아가겠다는 마음도 있을 수 있었다. 신비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으니.

"루드가 돌아오면 물어보면 되겠지. 루드가 갖겠다면 루드가 갖는 거지. 안 그래?"

"네 말이 맞다. 선조의 유산을 찾은 것만으로도 큰 성과다. 그 이상 바라는 건 욕심이지."

둘은 신비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했다. 루드가 가겠다 하면 갖게 두기로.

"뭐 좀 알아낸 거 있어?"

"식물들을 채집하긴 했는데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이라 부족으로 돌아가 여러 가지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지도 같은 걸 만드는 건 힘들겠지?"

"무리다. 무언가 특징적인 구조물이나 지형이 있었다면 모를까, 길을 찾는 데 지표로 쓸 게 없었으니 불가능하다."

그래도 아예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경에 가까워질수록 나타나는 생명체의 급이 달라진다는 것과 이곳의 풍경은 나중에 다시 이곳을 찾을 때 분명 도움이 될 거다."

결국 다시 이곳을 찾아올 때도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찾아야 할 터였다.

'그때도 루드가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아니, 아마 높은 확률로 없겠지.'

다만 걱정되는 것은 지금과 그때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거란 사실.

바로 루드의 존재 여부였다.

무력도 무력이지만, 수해란 환경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루드만한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 어지간한 이들론 어림도 없었다.

금세 벽에 도착한 무드리는 벽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그 내용을 따라 적기 시작했다.

"암기할 수 있으면 최대한 암기해라."

"노력은 해 볼게."

휴이의 능력이 그쪽으로 특화돼 있지 않음을 알았기에 무드리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조용히 시간이 흐르던 때.

콰쾅!

갑자기 커다란 소음이 들렸다.

"성직자 아가씨?"

휴이의 고개가 빠르게 밖을 바라봤다.

밖에는 리카엘 혼자 남아 있었다.

"가 봐라. 마무리 짓는 대로 합류하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려간 까닭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버티고 있어라. 나도 최대한 속도를 내 보마.'

방금 전의 소음은 아마 마법에 의한 것일 터.

여기서도 들릴 정도란 건 꽤나 강력한 마법이란 것이고, 상대가 그만한 마법을 사용해야만 하는 상대란 의미였다.

'큰일은 아니었으면 하지만.'

이곳은 수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었다.

"아가씨!!"

동굴 밖으로 나온 휴이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마법의 흔적이었다.

빠르게 주변을 훑은 휴이는 금방 리카엘을 발견했다.

"저것들은 뭐야."

리카엘은 일단의 무리와 대치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수해의 생명체들이 나타난 건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사람? 어떻게 들어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맞춰 입은 다섯.

녀석들은 분명 사람이었다.

"피해!"

중요한 건 녀석들이 수해의 생명체냐 사람이냐 하는 게 아니었다.

녀석들은 적이고, 리카엘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재빠르게 리카엘의 앞을 가로막은 휴이가 상대의 공격을 막아 냈다.

"한 놈 찾았군."

검이 팔뚝에 막혔지만 검을 휘두른 이는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휴이의 힘을 역이용해 검을 회수하며 뒤로 거리를 벌렸다.

"이 녀석들은 뭐야."

"제국 특무대입니다."

"제국 특무대?"

"예."

리카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특무대가 따라붙었을 줄은 몰랐다.

그들이 대수림을 찾은 이유가 이곳 때문이었을까.

"이곳을 어떻게 찾았죠?"

"글쎄. 대답해 줄 의무가 있나?"

입을 연 사내를 중심으로 그 뒤에 남은 넷이 자리 잡았다.

"반대로 묻지. 왜 우릴 따라왔지? 성녀 후보 리카엘."

"...알고 있었던 겁니까."

"그 정도로 끈질기게 따라오면 알 수밖에 없지."

사내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오히려 잘됐어. 누구도 모르게 처리할 수 있게 됐으니까 말이지. 갑자기 움직일 때는 뭔가 싶었는데 이런 기회가 생기다니 말이야."

그제야 리카엘은 특무대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저를 쫓아왔던 거군요."

"빙고. 이런 거지 같은 곳으로 들어올 줄은 몰랐지만."

가볍게 말하긴 했으나 특무대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준비 없이 수해에 들어온 결과 그들은 다섯의 동료를 잃었다.

"그래도 무려 성녀 후보를 죽일 기회를 잡았으니 손해는 아니지."

다섯 개의 검이 리카엘을 겨눴다.

"뭐야. 아가씨 성녀 후보였어?"

그 사이를 휴이의 물음이 파고들었다.

"어쩐지 범상치 않아 보이더라니. 대단한 아가씨였잖아."

검을 앞에 두고도 여유로워 보이는 작태.

그 모습에 특무대도 경계심을 품었다.

방금 전 맨팔로 검을 막아 내던 모습만 봐도 쉬운 상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 붙어있는 리카엘에게는 휴이의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들, 강해?"

"강합니다. 하나하나가 정예 기사에 필적합니다."

"하. 이거 조졌네."

서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정보를 공유한 둘은 결단을 내렸다.

"튀자."

"예?"

"내가 있던 곳 알지."

"알긴 합니다."

"신호하면 거기로 튀는 거야."

하나. 둘. 셋!

신호와 함께 리카엘이 동굴로 달렸다.

"쫓아라."

"어딜 가려고. 댁들은 조금 이따 가야지!"

명성에 걸맞게 곧장 반응한 특무대였지만 그들을 가만히 둘 휴이가 아니었다.

한껏 오러를 담은 주먹이 지면을 강하게 쳤다.

콰앙-!!

일대의 땅이 부서지며 특무대의 중심을 흩뜨렸다. 그와 동시에 생겨난 연기는 짧지만 시야를 가려 주기에 충분했다.

소기의 목적을 마친 휴이는 재빠르게 동굴로 향했다. 먼저 도착한 리카엘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금방 올 거야. 준비해."

"신성력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럼 마법 같은 건 못 쓰는 거야?"

끄덕-.

리카엘의 고개가 천천히 떨어졌다.

"...돌겠네."

휴이는 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의 계획은 간단했다. 동굴 입구를 지키며 자신이 버티는 동안 리카엘이 마법으로 한 방 먹이는 것.

그러나 시작부터 계획이 어긋났다.

"빠르게 회복은 안 돼? 포션 같은 거 없어? 성녀 후보라며."

"신성력은 마력과 다릅니다. 자연스레 시간이 지나야만 합니다."

그리 말하는 리카엘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특무대가 이곳까지 온 것은 전부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특무대를 통해 공을 쌓으려 했듯 특무대 또한 자신을 통해 공을 쌓으려고 함이 분명했다.

설마 자신들이 쫓는 걸 알고도 내버려 뒀었을 줄이야.

'죄송하게 된 일이네요.'

순순히 목을 내놓는 대가로 이들을 살려 달라 해 볼까도 했지만 저들이 들어줄 거란 믿음이 들지 않았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항전.

하지만 자신 때문에 다른 이들이 피를 봐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걸렸다.

"버티자."

그때 덤덤한 음성이 들렸다.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소리였다.

"루드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돼."

"올 수 있을까요."

그러나 상황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호랑이는 강력한 적이었다. 설령 호랑이를 쓰러트렸다 해도 이곳을 찾아올 수 있을까, 찾아왔을 때 상태가 정상일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정신 차려. 아가씨."

그런 리카엘에게 휴이가 단호하게 일갈했다.

"하나만 생각해. 루드가 올 때까지 버틴다. 그거 하나면 돼."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33화

루드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리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상황이 안 좋다는 건 휴이도 잘 알고 있었다.

루드가 오냐 안 오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루드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냐 없냐의 문제였다.

"크윽."

양팔을 교차해 검을 막아 낸 휴이의 몸이 뒤로 밀렸다. 검을 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힘을 전부 해소하지는 못한 까닭이었다.

"오질라게 무겁구만! 크합!"

기합과 함께 검을 밀어낸 휴이가 상대와의 거리를 좁혔다.

리카엘의 말처럼 녀석들은 정예 기사와 맞먹는 실력자들. 하지만 상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초근접 거리에서의 박투는 휴이의 우세였다.

"비켜라."

하지만 특무대도 휴이가 만만치 않은 실력자란 걸 인지하고 있는 바, 휴이가 원하는 대로 두지 않았다.

누구 하나에게 달려들어 일대일 구도를 노리는 순간 리더로 보이는 자가 끼어들며 재차 틈을 벌렸고, 그 틈을 나머지가 노리며 들어왔다.

"제기랄. 이대로는 안 좋은데."

특무대가 노리는 건 하나, 휴이의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분한 건 그것을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상황이었다.

특무대는 무리하지 않았다.

신성력을 소진한 성녀 후보는 위협적인 적이 못 됐고, 무투계열의 강자 하나가 그 곁을 지키고 있었으나 고작 하나였다.

마력과 체력은 무한하지 않았으니, 시간은 그들의 편이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특무대는 차륜의 형태로 휴이를 압박했다.

동굴의 입구가 작다는 지형의 이점을 살려 어떻게든 공격을 버텨 내고 있는 휴이였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힘이 다하는 순간 끝이었다.

"외부의 적이었나."

"마무리는 다한 거야?"

"그래. 안에 있는 건 전부 챙겼다. 근데 그걸 들고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때마침 무드리가 합류했다. 벽에 새겨진 유산을 전부 수습하고 온 그는 곧장 상황을 파악했다.

"아가씨. 그 신성력이란 거 회복되려면 오래 걸리는 거지?"

"...네. 죄송합니다."

"이것 참 어렵구만."

휴이는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슬슬 한계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몸에 들어가는 힘도 빠졌고 무엇보다 남은 마력도 아슬아슬했다.

"뭐 좋은 방법 없을까?"

"좋은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도해 볼 법한 방법이 하나 있긴 하지."

화살을 쏘아 낸 무드리가 재차 화살을 겨누며 말했다.

"휴이. 신비를 흡수해라."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하지만 그건...."

"일단은 살고 봐야 할 거 아니냐."

무드리의 말에도 휴이는 거듭 망설였다.

그 신비는 루드의 것이라 생각했다. 루드가 갖지 않더라도 부족의 다른 누군가가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데 마음대로 흡수해도 되는 걸까.

"시간이 없다."

"무드리가 흡수하는 건."

"휴이!"

무드리가 호통을 질렀다.

알브족에서 가장 사납게 생긴 주제에 가장 따뜻한 마음을 지닌 휴이였다.

하지만 지금 휴이가 보이는 건 배려 때문만은 아니었다.

"뭘 두려워하는 게냐."

"...돌아올 때까지 버틸 수 있겠어?"

뜻밖에도 그 물음에 답한 건 리카엘이었다.

"남은 수가 있다면 거기에 걸어야겠죠. 어떻게든 버티고 있을 테니 빨리 다녀오세요."

"알겠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조금만 버텨 줘."

마침내 결심한 휴이가 신비를 흡수하기 위해 사라지자 특무대도 덩달아 움직였다.

동굴 입구로 접근하는 특무대의 발밑에 화살이 꽂혔다.

하지만 특무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장 큰 걸림돌이던 사내가 사라진 상황. 지금이 기회였다.

"당신의 힘으로 어린 양을 보호하소서."

콰직-!

그러나 그들의 전진은 금세 멈추고 말았다.

"아직도 이 정도 힘이 남아 있었던가."

특무대 리더의 시선이 리카엘을 향했다.

과연 성녀 후보라는 것일까. 분명 모든 힘을 소진시켰다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이런 방어 마법을 펼칠 힘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저들의 접근을 최대한 막아 주세요."

반투명한 방벽을 만들어 낸 리카엘의 안색은 창백했다.

얼마 남지 않은 성력을 긁어모아 만들어 낸 방벽이었다. 강한 충격이 계속되면 금방 깨지고 말 터였다.

"조금만 더 버텨 주시오."

재차 화살을 메긴 무드리가 특무대를 응시했다.

* * *

휴이는 달리고 또 달렸다. 끝없이 달린 끝에 얼마 안 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헉, 헉."

숨을 고를 틈도 없다. 휴이는 여전히 신비롭게 존재하는 신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신비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반응했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무언가 낯선 힘이 제 안으로 타고 들어오는 감각.

그러면서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드는 기분은 뭐라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깥에선 적을 상대하는 중일 것이다.

휴이는 다시 달렸다. 동굴 입구로 달리며 휴이는 제게 주어지 새로운 힘을 깨달았다.

'명중.'

그가 흡수한 신비의 힘은 '명중'이었다.

알브족에게 잘 어울리는 신비.

하지만 그건 보통의 알브족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막상 신비를 획득한 휴이는 알브족에서 유일하게 화살을 쏘지 않는 인물이었다.

'어떻게든 해야 해.'

그런데 어떻게?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기껏 신비까지 흡수했는데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니.

신비를 흡수하란 무드리의 말에 망설였던 건 어쩌면 이리 될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안 돼. 다들 나를 믿고 있다고.'

휴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상념 대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방법을 떠올려야 했다.

"왔느냐."

"응...."

입구로 돌아온 휴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명중의 신비였어."

주변에 떨어진 돌 부스러기를 주운 휴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신비 명중의 힘은 간단했다.

이름 그대로, 목표하는 것에 '명중'하는 힘.

휴이의 손을 떠나간 돌이 공기를 찢으며 목표에 명중했다.

"크아악!!!"

특무대 하나가 한쪽 눈을 감싼 채 비명을 질렀다.

터진 눈동자 아래로 진한 핏물이 흘렀다.

"나로서는 이런 식으로밖에 쓰지 못하는 힘이야."

특무대 하나의 전력을 깎아냈으나 침울한 기색이었다. 신비의 힘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지만, 그 결과는 고작 이 정도였다.

"죽여 버리겠어."

한쪽 눈을 잃은 특무대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무드리의 화살이 일차, 리카엘의 방벽이 이차로 저지했으나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특무대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콰작-!

균열이 가있던 방벽이 결국 무너졌다.

휴이는 쥐고 있던 나머지 돌들을 던진 후 빠르게 앞 선에 자리 잡았다.

리카엘과 무드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패색이 짙어진 그 순간.

"커흑!"

이변이 발생했다.

맨 뒤에 서 있던 특무대 하나가 고꾸라졌다.

그 뒤로 낯선 검을 든 이의 모습이 보였다.

하염없이 기다리던 루드의 복귀였다.

"루드!"

"네놈은 뭐냐."

그 등장에 극명하게 갈린 양측의 반응.

"오랜만이군. 제국 특무대."

"...우리를 아나?"

특무대 리더는 루드를 경계했다.

이자,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성녀 후보가 말해줘서 안 게 아니었다. 한눈에 자신들의 신분을 파악했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정체를 알면서도 놀라거나 긴장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루드는 말없이 검을 겨눴다.

제국 특무대는 익숙했다. 전생에 수도 없이 상대해 봤던 녀석들.

제국의 힘치고 강하진 않았으나 다른 면에서 귀찮은 녀석들이었다.

그들이 맡은 역할과 임무의 특성을 고려하면 수를 줄여 놓을수록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눈감아 준 것이 아니었던가. 그들의 미행과 리카엘의 동행을.

이 자리에서 그들을 죽이기 위해.

'중간에 흩어지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잘 버텨 줬군.'

제국의 힘 중엔 약하다지만, 그건 전생에서 제국의 전력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나하나가 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전력인 특무대는 지금의 휴이 일행으로선 상대하기 벅찬 전력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국 버텨 냈다.

"휴이. 명중 신비를 얻었나?"

"...미안해.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잘했다."

"뭐?"

휴이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이곳에 있던 신비의 힘까지 알고 있다는 건 루드가 노리던 게 신비란 의미였다.

한데 잘했다니?

"너에게 잘 어울리는 신비다."

그 다음 말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알브족도 아니고 자신에게 명중의 신비가 잘 어울린다니.

하지만 루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 생각한 건 루드만이 아니었다.

전생의 휴이도 명중의 신비가 제게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물론 그건 자신에게 알맞는 명중 신비의 사용법을 깨닫고 나서부터였지만.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번 생엔 곧장 그 사용법을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명중이라고 꼭 공격 수단이 원거리일 필요가 있을까?"

휴이의 표정이 멍해졌다.

"네 주먹이 적의 급소에 '명중'할 수도 있는 거고."

루드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적의 몸이 네 주먹에 '명중'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전생에서 그리 말하며 웃던 휴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명중하는 게 꼭 투척물일 필요는 없다. 또 꼭 자신에서 적으로의 방향일 필요도 없다.

이걸 깨달은 순간부터, 휴이는 거리에 상관없이 무시 못할 강자가 됐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걸 깨달았던 전생의 휴이와 지금의 휴이는 결국 똑같은 휴이.

휴이는 곧장 루드의 말을 이해했다.

사고관이 확장된다.

루드의 말을 따라 넓어지던 사고가 마침내 안정적인 틀까지 형성했을 때.

콰앙-!!

특무대 하나가 저 멀리 날아갔다.

부지불식간의 일이었다.

특무대의 누구도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방법이 있었네."

씨익. 휴이가 미소 지었다.

입가에 걸린 그 웃음이 너무나도 익숙한 까닭에 루드도 따라 웃었다.

"2차전, 할 준비는 됐겠지? 제국 특무대."

전황이 단숨에 뒤집어졌다.

"검사에게 한 번에 달려든다."

순식간에 두 명이 쓰러지고 어느덧 남은 특무대의 수는 셋.

리더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뒤에 둔 무투가도 강자이긴 하나 제 앞에 선 이 남자에게 비할 바는 못됐다.

합공해서 단숨에 처리한 후 나머지를 처리한다.

"누구한테 말하는 거지?"

그러나 그 계획은 이뤄질 수 없었다.

"뭐...?"

혼자여서야 함께 달려든다는 말은 쓸 수 없었으니까.

'과연 무시무시한 재능이야.'

특무대 리더가 자신을 보고 있는 사이, 루드는 그의 뒤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부 목도했다.

명중 신비의 활용법을 터득한 휴이는 무지막지했다.

체력과 마력이 거의 바닥난 상황이었음에도 명중 신비를 통해 거리감을 조절하며 순식간에 특무대를 격파했다.

'명중 신비로 제 주먹 앞에 상대를 갖다 놓고 한 방. 뒤이어 접근하는 상대의 검을 목표점으로 명중을 사용해서 검로를 흩어놓고 재차 상대를 타격해서 한 방.'

실로 깔끔한 과정이었다.

"이제 남은 건 너 하나군."

그리하여 남은 건 루드의 앞에 선 리더뿐.

일순간 특무대 리더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가 다시 나타난 건 루드의 발밑.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목표물의 코앞에서 나타나는 움직임은 은밀하고 신속했다.

그러나

"역시나 유령 걸음으로 접근하는군."

루드에겐 너무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아무리 은밀하고 신속한 움직임이라도 미리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서걱-!

발밑에서 튀어 오르며 루드의 목을 노렸던 리더는 역으로 제 목을 내놓은 꼴이 되었다.

"일단락됐군. 정리하지."

가볍게 피를 털어 낸 루드가 무심히 말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34화

죽은 특무대를 한 곳에 모은 루드는 그들의 품을 뒤졌다. 생각대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것들이 나왔다.

"술래잡기 가루! 이곳을 찾을 수 있었던 건 그것 때문이었군요."

그중 하나를 확인한 리카엘이 소리쳤다. 자신을 쫓아왔다곤 하나 어떻게 수해의 환경을 뚫고 이곳까지 왔는지 의문이었던 것이 단번에 해소됐다.

술래잡기 가루는 귀족들이 사냥에 나설 때 사냥감에 미리 묻혀 놓는 가루였다.

입자가 고와 잘 보이지 않고 무취에 가까운 것이 특징이었는데, 특정 동물이나 특수한 훈련을 받은 이는 그 향을 맡을 수 있어 사냥감을 찾는 이정표 역할을 했다.

특무대 정도면 전원 술래잡기 가루의 향을 맡을 수 있었을 터였다.

남은 술래잡기 가루를 챙긴 루드는 그 외에도 필요한 것들을 골라 챙겼다.

"유산은 찾았나?"

"응. 온전한 심법을 찾았어. 덕분에 상급에도 올랐고."

휴이는 루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신비도 발견했는데, 내가 흡수해 버렸어. 미안해."

루드는 그런 휴이를 빤히 바라봤다.

"아니, 잘했어. 어차피 그건 네 것이었다."

자리를 비운 시간이 꽤 길었던 터라 혹여 엄한 사람이 신비를 흡수하진 않을까 걱정했었던 루드였다.

다행히 휴이가 명중의 신비를 흡수했고, 전생에선 나중에야 깨달았을 사용법도 익혔으니 이제 휴이에 관한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찾아온 거야?"

"염치없지만 저도 궁금합니다."

리카엘이 휴이의 말을 거들었다.

자신들은 마법의 여파로 빛에 휩싸였을 때, 휴이가 기지를 발휘한 덕에 비경을 찾았다.

특무대는 제게 묻혀 놓았던 술래잡기 가루를 쫓아 비경에 도착했다.

하지만 루드는 빛과 술래잡기 가루 둘 중 무엇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심지어 호랑이와의 추격전으로 방향 감각 또한 잃었을 터.

그가 비경을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이곳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나에게도 알려줬으면 좋겠군."

루드의 답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건 무드리였다.

휴이와 리카엘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라면 무드리는 필요성을 느낀 질문이었다.

이곳 비경의 생태는 조사할 가치가 있었다. 수해에서도 유독 이곳만 다른 환경이었고,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식물들이 자랐다.

그 이유를 밝혀낸다면 수해는 더 이상 두려운 미지의 공간이 아닐 수도 있었다.

"모른다."

그러나 루드의 답은 그 기대를 졌다.

"모른다고요? 하지만."

"이곳을 찾아온 건 전부 이 녀석 덕분이다."

이해할 수 없다는 리카엘의 반응에 루드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길을 모르는데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비경을 찾았다면 의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자신은 비경의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다만 그 위치와 길을 아는 녀석과 동행했을 뿐이었다.

툭툭.

팔뚝을 가볍게 두드리자 팔에 감겨있던 각반이 꿈틀거렸다.

"어...?"

루드를 제외한 모두의 사고가 멈췄다.

저게, 왜 움직여?

아니 그보다 저런 게 있었나?

생각해보면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루드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보이지 않았다. 검을 수납하거나 어딘가에 보관하는 모습도 못 봤고, 일단 검의 흔적이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아까 전의 검은 원래 루드가 쥐고 있던 검이 아니었다.

"떨어졌을 때 발견했다."

각반의 형태가 흐물흐물해지더니 팔처럼 돋아난 두 개의 촉수가 좌우로 흔들렸다.

"반갑다고 인사하는군."

"그거... 뭐야?"

"나도 모른다."

휴이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알브족이면서 무투를 고집하는 자신도 이상하다면 이상한 놈이었는데, 지금 보니 루드는 자신을 뛰어넘는 이상한 놈이었다.

"그거 괜찮은 거 맞아?"

"아마도."

루드도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정확한 이유는 몰랐지만 이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자신에게 호의적이란 것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정신 감응처럼 느껴지는 녀석의 의사는 확고했다.

-나 너 좋아. 너랑 같이 갈래. 나 데리고 가.

'처음엔 내가 미쳤나 싶었지.'

샘물인 줄 알았던 것이 호랑이의 공격을 막아 낸 직후, 갑자기 들린 말에 환청인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게 긴장 상황이었던 데다, 녀석의 말이 육성을 통한 것이 아닌 정신을 통해 전달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샘물의 형태를 하고 있던 것은 당연하게도 샘물이 아니었고, 환청이라 생각했던 건 녀석의 의사였다.

"어쨌든 이 녀석이 길을 알려 줬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알고 있더군."

으쓱으쓱.

각반 위로 돋아난 두 개의 촉수가 휘적휘적 움직였다. 자랑스러움과 쑥스러움이 뒤섞인 동작이었다.

그 모습을 리카엘이 빤히 쳐다봤다.

"혹시 뭔가 아는 게 있나? 이런 녀석에 대해 성국에서 들은 거라든지."

"아뇨. 애석하달까 아니면 당연하달까. 이런 생물에 대해선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습니다. 다만 사특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으니 마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녀는 의견을 덧붙였다.

"아마 수해의 다른 동물들처럼 수해의 영향을 받은 무언가일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정확한 건 모르겠으나 그것을 맹신하는 건 지양하길 권해 드립니다."

"그래."

루드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지금은 확실한 호의와 함께 도움을 준다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지켜보며 변화의 추이를 살필 필요가 있었다.

다만 녀석은 효용가치가 높았다. 자의가 있고, 어설프지만 의사소통이 되며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넓었다.

당장 지금처럼 평소엔 보호구의 형태로 지니고 있다가 다른 무구의 형태로 바꿔 사용할 수도 있었고.

몸에 지니지 않더라도 녀석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이점을 취할 수 있었다.

'물론 녀석이 계속 나를 돕는다는 가정 아래에서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괜찮아 보였다.

호랑이가 쓰러지고 나서 보였던 이것의 모습은 자신을 향한 호의가 가득했으니까.

아니, 그걸 호의라고 해야 할까?

'지금 이건 양반이었지.'

각반의 형태에서 더듬이처럼 솟아난 두 개의 촉수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는 녀석.

호랑이 때는 샘물이 솟구치는 형태로 일어나더니 씰룩씰룩 몸을 움직였었다.

그 모습을 다시 생각하면 지금도 기가 찼다.

"근데 그거 이름은 있어?"

"아직 없다."

"하나 지어 줘야 하는 거 아냐?"

휴이의 말에 루드는 제 팔뚝에 감긴 녀석을 바라봤다.

이름이란 말을 알아들었는지 조금 전까지 신나게 춤추던 녀석이 약간 긴장한 것처럼 느껴졌다.

"무릇 생명에는 저마다의 이름이 필요한 법이죠. 모든 것에는 뜻이 담겨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건 모르겠고 걔를 부를 이름은 필요할 거 아냐. 지금 보니까 떨어질 것 같지도 않은데."

루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휴이의 말이 맞았다. 녀석은 자신을 따라가겠다는 의사를 의념으로 밝힌 걸로 모자라 온몸으로 표현했다.

루드로서도 활용가치가 높은 녀석이 자신을 따르겠다는 걸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함께할 터인데 계속해서 이 녀석, 이거, 얘라고 부르기도 뭐했다.

"생각나는 이름 없어?"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음. 그럼 수액이 어때?"

"수액이요? 어떤 의미가 있는 겁니까?"

리카엘이 인상을 찡그렸다.

"보니까 형체가 고정돼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수해에서 살던 녀석이고, 어쩌면 수해의 나무들에서 기인했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수액이."

"안 됩니다."

"그걸 왜 아가씨가 결정해."

"어쨌든 안 됩니다."

리카엘은 단호했다. 그녀에겐 결정권이 없었지만 저것의 이름이 수액이가 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건 나도 아닌 것 같은데."

"무드리마저? 아니 왜? 수액이가 뭐 어때서."

무드리마저 리카엘의 편을 들자 휴이가 울상을 지었다.

"녀석도 싫다군."

어느새 두 개의 촉수도 서로를 교차해 X 자를 그리고 있었다.

풉. 리카엘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어. 뭐 웃는 것도 허락받고 웃어야 돼?"

뭘 그런 걸로 미안해하냐는 투의 말.

이번에는 무드리도 휴이를 지지했다.

"맞지. 웃기면 웃고 슬프면 우는 게 당연한 거지. 그래도 조금 편해진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군."

따뜻한 시선이 리카엘을 바라봤다.

리카엘은 그제야 자신이 이들에게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작 며칠을 함께했을 뿐이건만, 오랜 시간을 함께한 피가로와 로이튼보다도 더.

"슬라브 어떤가요?"

"의미가 있나?"

루드의 시선이 이름을 제시한 리카엘을 바라봤다.

"그, 슬라임처럼 형태가 이리저리 움직여서... 요?"

그리 답한 리카엘은 눈치를 봤다.

막상 지르고 나니 후회가 됐다.

슬라임 같아서 슬라브라니, 그게 뭔가. 이래서야 수액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좋군. 슬라브."

"예?"

"녀석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고."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슬라브란 이름이 채택됐다.

슬라브도 제 이름이 마음에 든 듯 덩실거리고 있었다.

"챙길 건 챙기고 정리할 건 정리해서 돌아가지."

작은 이벤트가 끝난 후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휴이와 무드리는 혹여 놓친 부분이 없을까 꼼꼼하게 비경을 확인했고, 리카엘은 특무대의 명복을 빌었다.

비록 적이었으나 성직자로서의 의무감 때문이었다.

루드는 그 모습들을 지켜보며 슬라브와 소통했다.

"네 목적은 뭐냐."

팔뚝에 감긴 슬라브가 팔을 조였다. 루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슬라브가 팔을 조이면서 흘려 보낸 의념 때문이었다.

-너!

"식사나 수면은 어떻게 하지?"

-필요 없어. 너 하나면 돼.

그리 말한 슬라브는 곧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가끔 그 맛있는 거는 주라.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어느 정도 추측하고 있던 바였다.

슬라브가 말하는 '맛있는 거'는 루드의 마력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비경을 안내받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슬라브의 모습과 말, 행동을 떠올린 루드는 슬라브가 어떤 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내 말을 잘 들으면 맛있는 걸 자주 주지."

좋아! 맛있는 거 좋아! 너 좋아!

슬라브의 답을 들은 루드는 나머지 일행이 다가오자 교감을 멈췄다.

'좋은 수단이 생겼어.'

슬라브의 존재는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전투에서도 쉴 새 없이 변수를 만들 수 있었고,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고 허점을 노리기도 용이했다.

다만 걱정되는 건, 자신을 향한 녀석의 호의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녀석이 나 이외의 존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하겠군.'

적어도 이곳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지만 바깥의 존재들에게도 그러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경지에 오른 이들의 마력을 맛봤을 때가 고비인가.'

슬라브가 제게 매력을 느낀 건 자신의 마력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자신 못지않은, 어쩌면 지금의 자신보다 더 농밀하고 강렬한 마력을 맛봤을 때.

그때에도 자신에게 붙어 있을 것인가.

'그때가 되면 결정 나겠군.'

만약 자신을 벗어난다면 어떤 식으로든 처리해야 했다. 그만큼 슬라브의 가치는 뛰어났으니.

그러나 다른 이들을 마주하고도 자신에게 붙어 있다면, 그때는 진정으로 믿어도 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돌아가자."

"좋아. 가자고."

선대의 유산을 챙긴 일행은 비경을 떠나 부족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길 안내 부탁한다."

일행의 선두에는 촉수로 방향을 가리키는 슬라브가 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35화

슬라브의 안내에 따라 이동하자 일행은 순식간에 수해의 경계에 도착했다. 숱하게 마주쳤던 수해의 생명체도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채로.

삐쭉 튀어나온 두 개의 촉수가 으쓱했다. 내가 이 정도야, 하고 으스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슬라브는 단순한 수해의 생명체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수해에서 길을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았기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의 의미로 두어 번 슬라브를 두드려 준 뒤, 일행은 곧장 알브족의 거처로 복귀했다.

루드의 의념을 전달받은 슬라브도 삐쭉 솟았던 촉수를 거두고 평범한 각반의 형태로 돌아갔다.

"뭐야. 뭔 일 났나?"

"글쎄다. 외부인들이 많았으니 뭔 일이 났어도 이상할 건 없지."

돌아온 부족은 어수선했다.

휴이와 무드리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외부인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난 것이라면 가만 있지 않을 두 사람이었다.

"자세한 건 곧 알 수 있겠지."

"그럼그럼. 뭔 일일지 천 번 고민하는 것보다 한 번 물어보는 게 훨씬 빠르지."

일행이 부족 내부로 들어갔다.

"더는 기다려 줄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확답을 주시지요."

"너무 급한 거 아닌가. 바깥의 큰 국가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도 하나의 공동체일세. 그 운명을 정할 수도 있는 사안을 그리 가볍게 결정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협상 결렬인 것이겠지요."

부족 내부에서는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 반복되는 중이었다.

일전의 사절단이 족장을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리카엘 님!"

"피가로. 로이튼."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그때, 두 명의 성기사가 리카엘을 발견하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둘 다 낯빛이 좋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다행이군요. 걱정했습니다."

두 성기사의 시선이 루드 일행에게 닿았다.

리카엘이 무사히 나타나긴 했으나 여전히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무드리! 휴이!"

작은 소란에 그들의 복귀를 확인한 족장이 반색하며 일행을 맞았다.

짧게나마 족장과 시선이 마주친 그때, 무드리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마시겠습니까. 단, 이번이 다신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 제안임을 알아 두십시오."

"그래. 내 결정하지. 그대들의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겠네. 제안은 없던 걸로 하지."

"뭐라고요?"

사절단의 대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거의 다 넘어왔었다. 사흘에 걸쳐 압박도 하고 바람도 넣으면서 거의 성사 단계까지 끌고 왔다.

한데,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없던 일로 하겠다고?

이건 말이 안 됐다.

"귓구멍이 막혔나. 없던 일로 하신다잖아. 우리 족장님이!"

그런 사절단 대표에게 현실을 확인시켜 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휴이였다.

돌아오자마자 족장을 압박하는 대표의 모습을 본 휴이는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이만 돌아가 주면 좋겠군. 알다시피 우리 부족이 외부인의 방문을 반기지는 않아서 말일세."

손을 들어 휴이의 흥분을 가라앉힌 족장은 나긋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박수도 짝이 맞아야 소리가 나는 법, 너무나 여유로운 그의 태도에 대표는 뭐라 성을 내기도 어려웠다.

'어떻게 된 일이냐.'

대표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갑자기 나타난 이들.

답을 질질 끌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족장.

자신들의 임무를 지원해주러 왔으나 잠시 다른 일을 해결하고 오겠다며 사라진 특무대.

정확한 전후 사정은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건 있었다.

'일이 꼬였군.'

그것도 아주 개같이 꼬였다.

이쯤이면 임무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임무의 대표자로서, 사절단의 대표로서 이리 물러서기만 할 수는 없는 법.

"거절의 답을 이리도 질질 끌었다니. 이건 기만이라고밖에 받아들일 수 없군요. 이 일은 제국에서 간과하지 않을 겁니다."

"이상하군. 그대가 그리 말하면 안 되는 일일 텐데."

협박하기 위한 말을 뱉던 대표는 멈칫했다.

툭, 루드가 던진 무언가가 그의 발밑에 떨어졌다.

'이건!'

자그마한 배지 형태의 엠블럼. 대표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의 대표라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차가운 미소가 대표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게 지금 땅바닥에 나뒹구는 것의 의미도."

꿀꺽. 몸이 굳는 것만 같았다. 이 엠블럼은 특무대의 징표였다.

그것도 단순한 특무대원이 아니라 한 팀을 이끄는 리더에게만 주어지는 징표.

자신도 이번 임무를 맡으면서 알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알 수 없는 인물의 손에서 나왔다. 그 의미는 명백했다.

'다른 일을 해결하러 간다더니 전부 당했구나!'

특무대의 전멸.

어린애라도 알 수 있는 답이었다.

'말도 안 된다.'

상황을 이해했지만 납득되지는 않았다.

특무대가 어떤 이들인가. 제국의 숨은 힘 중 하나로 소속된 이들 하나하나가 기사급 무력을 갖춘 비밀 조직이 아닌가.

하지만 그 리더의 징표가 이리 바닥에 굴러다녀서야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제국에서 간과하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까?"

둘의 대치에 리카엘이 끼어들었다. 대표가 그녀를 바라봤다.

"성국 또한 마찬가지일 겁니다. 불온한 세력이 성국의 사람을 죽이려 하였음을 고할 생각이니까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리고 고작 일개 성직자 따위가 성국을 입에 담아도 되는지도 말이야."

"암. 되지. 되고말고."

순간, 분위기가 급변했다.

리카엘의 입에서 제국의 세력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말이 나옴과 동시, 그녀의 양옆에 서 있던 성기사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은 것이다.

"반대로 묻고 싶군. 성국의 성녀 후보께서 성국을 입에 담을 수 없다면, 고작 사절단에 불과한 그대는 어찌 제국을 입에 담는지."

피가로의 표정은 더 이상 인자한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산전수전을 겪은 끝에 피로 물든 손을 가진 성기사의 얼굴만이 있었다.

'성녀 후보!'

대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일개 성직자인 줄 알았던 이가 성녀 후보였다니.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특무대가 말했던 다른 일은 성녀 후보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다 역으로 당해 지금 상황이 된 거고.

꾸욱-.

대표의 발이 떨어진 엠블럼을 짓이겼다.

"신사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루드를 바라보며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대표.

패배를 시인하는 모습이었다.

"알브족의 뜻은 잘 들었습니다. 이 모리야가 하나의 곡해도 없이 잘 전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곧이어 그는 사절단을 재촉했다.

"다들 짐 싸서 안 일어나고 뭣들 하나? 빨리 가야지. 타이론 자네는 이번에 둘째가 태어났다고 하지 않았나. 얼른 가서 둘째를 봐야 할 거 아닌가. 다들 얼른얼른 가자고!"

그 간절함이 전해졌음일까, 사절단은 순식간에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지난 며칠간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잠깐."

그러나 그 발걸음을 잡는 이가 있었다.

"말 잘했군."

"예?"

"지난 며칠간의 환대. 잘 받았으면 값을 치러야 하지 않겠어? 알브족이 피해를 감수하며 그대들이 먹을 것이며 머물 곳을 마련해 준 건데 말이야."

말은 길었으나 의미는 간단했다.

이대로 가려고?

어림도 없지. 돈 내놔.

"그, 물론이지요. 하하."

대표는 꼼짝없이 돈주머니를 내놓았다.

"이만 가 봐. 다음에 다시 오려면 지금 못 다한 값까지 쳐서 더 큰 돈을 가져와야 할 거야."

"하하, 물론이죠. 하하."

바짝 엎드린 끝에 대표는 간신히 루드의 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사절단이 떠난 뒤. 휴이와 무드리는 비경에서 있었던 일과 그곳에서 찾은 것들을 설명했다.

"그렇구나. 심법 말고 다른 건 없었느냐?"

"다른 건 없었어. 찾지 못한 게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 보이는 건 그게 전부였어."

"그러냐...."

잃어버린 비전심법을 되찾았음에도 족장은 무언가 아쉬워 보이는 기색이었다.

그에 대해 물어보려 한 휴이였지만 다른 이들의 질문이 쇄도하는 바람에 더 이어지지 못했다.

"긴가민가했는데 지금 보니 확실하네. 상급에 올랐구나. 휴이."

"맞아. 비경에서 발견한 유산 덕분이었어."

해리슨은 휴이가 상급의 경지에 올랐음을 바로 알아봤다. 그의 마음속에도 작은 열망이 피어났다.

"이제 전부 해결됐군요."

"그래. 제국의 제안도 물리쳤고 선조의 유산도 찾았으니 말이야."

모두의 목소리는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그러나 루드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의 말은 반만 맞았다.

"아뇨. 전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인가?"

"제국이 제안을 했던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겁니다."

하나는 알브족에게 관심이 있어서.

다른 하나는 대수림에 관심이 있어서.

"어떤 쪽이든 제국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루드는 잠시 숨을 골랐다. 자신이 뱉을 말의 파장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해야만 했다.

"부족의 거주지를 바꾸시죠."

"뭐?"

"대수림을 떠나라는 겐가?"

"예."

잠시 침묵이 돌았다.

"못 들은 걸로 하겠네. 선조 때부터 대대로 대수림에서 살아온 우리들일세. 자네가 아무리 큰 도움을 주었다곤 하나 방금 전의 말은 도를 넘은 발언이었어."

"저 또한 제 말이 어떻게 들렸을지 알고 있습니다."

대대로 살아오던 터전을 버리고 이주해라.

좋게 말해 이주지, 사실상 피난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루드는 진심이었다.

알브족은 이주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미 제국에 부족의 위치가 특정됐고, 마음먹은 제국은 야욕을 드러내는 걸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알브족으론 제국을 상대하기 역부족이었다.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진중한 눈빛이 그곳에 모인 눈을 하나하나 마주했다.

"알브족이 먼저입니까. 대수림이 먼저입니까."

"뭐 그런...."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때, 족장이 입을 열었다.

"자네의 말대로 하지. 단, 자네가 먼저 자네를 증명한다면 말이야."

루드에게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네는 계획이 있겠지. 거기에 우리가 필요한 걸 테고."

"맞습니다."

자칫하면 이용하겠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루드는 부정하지 않았다.

"자네의 계획이란 것. 자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것. 거기에 걸어도 된다는 것. 그것들을 확실하게 보여 주게. 그리하면 자네의 말을 따르겠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반응을 이끌어 낸 것만으로도 성공이었다.

제국이 상황을 파악하고 병력을 보낸다 하더라도 아직 시일이 남아 있었으니, 그사이에 족장이 말한 것을 증명해 내야 했다.

이제 남은 건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 * *

"시벌."

"이제 어떡합니까?"

"뭘 어떡해. 돌아가는 즉시 본보기를 보여야지."

부족을 벗어나 돌아가는 길.

부관의 말에 대표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지금의 수모는 돌아가는 즉시 갚아 줄 것이다. 특무대를 죽인 무력은 무서웠지만 제국에 있는 자신을 죽이러 올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어? 저건 뭐야."

그러나 그는 제국에 돌아갈 수 없었다.

콰직-!

대표의 머리통이 부서졌다.

갑자기 등장했던 정체불명의 생명체는 팔같이 자라난 촉수 두 개를 휘적거리더니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36화

루드는 곧장 떠날 채비를 했다. 알브족은 더 쉬다 갈 것을 권했지만 갈 길이 바빴다.

족장이 말한 것처럼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서도, 제국을 상대하기 위한 대비를 하기 위해서도.

맘 놓고 쉬고만 있을 여유는 없었다.

"떠나시는 건가요?"

리카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루드는 그녀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너는 어떻게 할 거지?"

"일단 본국에 보고할 걸 보고하고, 그 다음엔 원래 하려던 일을 할 예정입니다."

무려 성녀 후보가 제국의 사냥개에게 암살당할 뻔했다. 성국에 보고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성녀 후보가 리카엘 하나인 것도, 이러한 시도가 과거에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사안이었다.

들키지 않았으면 모를까 들킨 데다 증거까지 있었다. 이는 제국과의 외교 관계에서 쓸 만한 패로 쓰일 터.

하여 루드는 그 뒷말에 반응했다.

"원래 하던 일?"

"흑마법사를 쫓고 있었습니다."

본디 그녀 일행의 목적은 흑마법사들을 쫓아 신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었다.

흑마법은 이단 중에도 최악으로 꼽히는 이단.

그들을 청소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흑마법사의 경지와 악명이 높을수록 큰 공을 인정받는 건 당연지사.

때문에 본디 그녀 일행은 흑마법사 요렌테를 쫓았다.

그의 죽음이 확인된 후엔 그를 죽인 흑마법사로 목표가 바뀌었고.

"...그랬군. 흑마법사라."

"예. 무언가 알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까? 아니면 추측되는 거라도 좋습니다."

리카엘이 본 루드는 이성적이면서도 압도적인 직관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에게서 정보를 구할 수 있다면 요렌테를 죽인 흑마법사에게 한 발 다가설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 달리, 루드는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어쩌다 이곳까지 왔는가 싶더니 날 쫓다 이렇게 된 거였나.'

어째서 그녀 일행이 대수림에까지 왔는가. 의문이던 것이 순식간에 풀렸다.

결국 이들이 이곳에 온 건 자신 때문이었다.

'리카엘은 내 흔적을 따라 칼리텍에 도착했을 테고, 특무대는 프로젝트 때문에 왔던 거겠지.'

요렌테를 쫓던 그들은 요렌테를 죽인 흑마법사의 흔적을 쫓았을 것이다.

특무대는 자신이 박살 낸 프로젝트를 확인하고자 칼리텍을 방문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특무대와 리카엘 일행의 동선이 겹쳤고, 특무대가 또 다른 목적지인 대수림으로 향하면서 그들을 쫓던 리카엘 일행까지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미안하지만 모르겠군."

"그렇습니까."

루드의 대답에 리카엘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만 가 보는 게 좋겠군. 일행의 눈이 뜨거워."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피가로와 로이튼이었다. 그들의 눈빛이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

리카엘이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감사하게도 저를 많이 아껴 주시는 분들이어서요."

"그런가."

"네."

그래서 가끔은 힘들기도 하지만요.

리카엘은 이어지는 말을 안으로 삼켰다. 그들이 자신을 아끼고 충성하는 만큼,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때로, 그 기대에 숨이 막힐지라도.

"저 둘 이름이 뭐지?"

"피가로와 로이튼입니다만. 왜 그러시죠?"

"노인이 피가로, 청년이 로이튼인가?"

"맞습니다."

루드는 빤히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들도 질세라 루드를 노려봤다.

"로이튼이란 녀석, 조심하는 게 좋겠군."

"예?"

"믿든 말든 네 자유다. 그저 내 의견일 뿐이니."

거기까지 말한 루드는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대화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눈앞의 리카엘은 성녀 후보. 심지어 흑마법사로서의 자신을 쫓고 있는 존재였다.

지금의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의 동료였던 리카엘이 아니었다.

"다음에 또 볼 수 있겠죠?"

"기회가 된다면."

뒤에서 들려온 물음에 간단히 대답한 루드는 성큼성큼 걸어 리카엘에게서 멀어졌다.

수해로의 여정에 리카엘을 받아들였던 덴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녀 자체가 여정에 도움이 되는 것도, 그녀를 통해 특무대를 처리하려는 것도 그 이유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루드 본인이 그녀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매번 술에 취해 하던 말이 진짜였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휴이가 수해에서의 일을 이야기하듯, 전생의 리카엘도 매번 하던 이야기가 있었다.

-저 정말 예뻤다니까요? 대륙 제일까지는 아니어도 어디 지나다닐 때면 사람들이 다 돌아볼 정도였다고요!

술에 취할 때면 항상 그리 말하던 그녀였지만, 누구도 그 진위여부를 몰랐다.

그녀의 얼굴이 심한 화상을 입어 과거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몸 전체에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아름다운 여자였지.'

기억 속 리카엘의 모습을 떠올린다.

외모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루드가 기억하는 리카엘은 심한 화상 탓에 본래의 모습을 전부 잃어버렸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와 마주칠 때면 길거리에 침을 뱉을 정도였다.

그래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치유하지 않느냐고. 충분히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당시의 리카엘은 이리 대꾸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예전처럼 되돌리려면 기적 정도는 돼야 하는데, 기적은 쓰고 나면 한동안 골골거릴 게 뻔하거든요. 언제 어디서 부상자가 생길지 모르는데 그런 데 낭비할 신성력이 어디 있어요. 가뜩이나 신성력은 포션 같은 걸로 채워지지도 않는데.

당시의 루드는 그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속으로 감탄만 내뱉을 뿐이었다.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지만.'

설마 성녀 후보일 당시의 리카엘을 만날 줄이야.

알브족이란 확실한 이정표가 있는 휴이와 달리, 리카엘은 성녀 후보였다는 것 정도만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만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부디 이번엔 그 입에 후회의 말을 담지 않길.'

성녀후보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었던 전생의 리카엘.

이번엔 부디 지난 생만큼의 후회는 담지 않기를 바랐다.

경고를 했으니 남은 건 그녀의 몫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저들 일행을 찢어 놓고 싶었지만 이 이상 개입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했다.

"가는 겐가."

"예. 이곳에서 할 일은 마쳤으니 다음 일을 하러 가아죠."

마지막으로 족장을 찾은 루드는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그렇구먼."

족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어설프게 나무 뒤에 숨은 휴이가 보였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제대로 숨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 여기 숨었어, 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일행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일행 말입니까?"

"그래. 때론 하나보단 둘, 둘 보단 셋이 좋은 법이지. 그리고 자네가 증명하겠다고 한 것들을 보고 우리에게 전해 줄 눈과 입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족장의 말에 루드는 작게 미소 지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휴이가 일행이라면 재밌을 것 같긴 하군요."

"그렇다는구나."

"흐, 흐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휴이가 다가왔다. 수차례 헛기침을 한 휴이는 슬쩍 눈치를 살피곤 입을 뗐다.

"같이 가도 되는 거야?"

"내 말을 잘 듣는다는 약속을 한다면."

"약속할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돌아온 대답. 루드는 피식 웃고 말았다.

"긴 여정이 될 거야. 마음 편한 여행도 아닐 거고. 부족에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고 때론 목숨을 걸어야 해. 수해에서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도 있을 거고. 그래도 괜찮겠어?"

휴이는 대답 대신 족장을 바라봤다.

온화한 미소를 품은 족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라. 넓은 세상을 보고 많은 것을 겪고 돌아오렴."

더 이상의 문답은 필요 없었다.

족장과의 인사를 마친 루드는 대수림을 떠났다. 휴이가 그 옆을 따랐다.

밖을 향해 걷던 도중, 돌연 루드의 발걸음이 멈췄다.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본 휴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드리와 해리슨, 족장과 장로들.

그들을 위시한 알브족들이 나무 사이사이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나, 둘, 셋....

그들의 숫자를 세는 게 무의미할 지경.

"부족에 있던 인원이 몇인지 알고 있나?"

"어... 아마 일흔넷일 거야."

"그럼 전부 왔군."

말의 의미를 되묻는 일은 없었다. 하나둘씩 나타나는 부족원들의 모습과 그 숫자를 묻는 루드의 말은 오직 하나의 의미였다.

"다들 뭐야."

목이 잠겼다. 물기 묻은 목소리가 가까스로 잠긴 목을 열고 소리를 냈다.

"한동안 못 볼 거다. 후회 없을 정도로 마음껏 인사해라."

루드는 한 발 물러섰다.

눈앞의 휴이에 과거의 휴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부족원들을 전부 잃고 과거를 후회하던 휴이.

지금의 장면은 꼭 그런 휴이에게 괜찮다고 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았다.

잘 다녀와라, 휴이.

올 때 맛있는 거 사 오는 거 잊지 말고!

돌아오면 대련 한 번 정도는 해 줄게.

오다 길 잃으면 안 된다!

온갖 이들에게서 쏟아지는 말.

격려와 걱정, 장난기가 두루 섞인 말들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휴이를 향하는 진심 어린 마음이었다.

"킁. 가자."

"인사는 끝났나?"

"어. 이 정도면 충분해."

쓱 눈가를 훔쳐낸 휴이는 배웅하는 이들을 뒤로한 채 걸었다.

더 이상 뒤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그저 묵묵히 바깥을 향해, 세상을 향해 걸어갈 따름이었다.

알브족은 그런 휴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끊임없이 손을 흔들었다.

"좋은 가족들을 뒀어."

"그렇지. 내겐 과분할 정도로 좋은 가족들이야."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간에도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휴이에게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준 루드는 생각에 잠겼다.

'역시 아버지를 찾아가는 게 맞겠지.'

자신을 길러 준 아버지를 말함이 아니다. 생물학적인 아버지에 관한 얘기였다.

아버지를 찾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찾는다.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선 바깥 대륙의 사람들이 뭉칠 필요성이 있었고, 그러기 위한 첫 단계였다.

-흐에에엥.

그때, 갑자기 상념을 흩어놓는 소리가 있었다.

"슬라브?"

내부를 타고 흘러 들어온 소리의 주인은 슬라브였다.

각반의 형태로 감겨 있던 녀석은 갑자기 칭얼거리더니 힘없이 축 늘어졌다.

각반 형태의 모습이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녀석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게 곧장 느껴졌다.

'무슨 일이야.'

-몰라. 힘없어. 힘 빠져. 흐에에엥.

"무슨 일이야?"

"몰라. 슬라브가 갑자기."

갑자기 멈춰서자 휴이도 가까이 다가왔다.

그 순간 루드는 자신이 햇빛 아래 있음을 깨달았다. 어느새 대수림을 빠져나온 것이다.

'설마.'

휴이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한 루드는 다시 대수림으로 들어갔다. 경계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축 늘어졌던 슬라브가 기운을 차리는 것 같았다.

"대수림을 벗어나서인 건가? 아니면 햇빛?"

둘 중 하나의 영향을 받는 건 분명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고.

루드는 잠시 슬라브를 바라봤다.

대수림에 들어오자 금세 기운을 차린 녀석은 투정부리듯 루드의 팔을 조였다.

"나가기 싫으면 여기 있어도 된다."

슬라브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아이를 키워 본 적은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페이스를 넘겨주면 안 된다는 걸 느낀 루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움찔.

슬라브가 움찔거렸다. 힘이 빠지는 건 싫지만 루드와 떨어지는 건 더 싫었던 슬라브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슬라브를 다독인 루드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대수림을 벗어나서인지 햇빛의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슬라브는 이전만큼의 힘을 내지 못했다. 보다 자세한 건 해가 지면 알 수 있을 터였다.

"생각해야 할 게 늘었군."

그 말이 화근이었을까.

앞으로의 여정.

갑자기 힘들어하는 슬라브.

거기에 또 하나의 고민을 던지는 게 나타났다.

지이잉- 지이잉-

"무슨 소리야?"

어디선가 들려오는 진동음.

루드는 곧 그것이 자신의 품에서 시작됨을 깨달았다.

"그게 뭐야? 웬 구슬이 이렇게 커."

"이건..."

과거 요렌테를 죽이고 취했던 통신구가 옅은 빛과 함께 진동하고 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37화

요렌테의 소지품이었던 수정구.

루드는 이것이 요렌테와 정수의 위치를 전달한 정보원 간의 통신 수단이라 판단했다.

하여 언젠가 통신이 올 것을 기대하며 수중에 간직했는데, 그 결실이 지금 맺히려 하고 있었다.

쉿. 휴이를 바라보며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댄 뒤, 수정구에 미량의 마력을 주입했다.

통신을 보낼 때와는 달리 받을 때는 사용자가 설정한 마력 패턴을 입력할 필요가 없었다. 아주 약간의 마력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긴급 상황에서의 빠른 수신을 위한 그 기능 덕에 곧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 들리십니까?"

긴장감을 머금은 목소리였다. 겁에 질린 것도 같은 음성은 천천히 말을 전달했다.

"먼저 연락하겠다고 하셨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아 부득이하게 먼저 연락드렸습니다."

잠자코 듣던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래서 한참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은 것이었다.

요렌테가 먼저 통신을 보내겠다고 했다면 상대로서도 마냥 무시할 순 없었으리라.

수신자가 침묵하는 와중에도 발신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자가 요렌테가 아닐 거라곤 꿈에도 모를 터였다.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물건은 찾으셨습니까?"

"...."

"요렌테 님?"

그러나 불러도 계속 대답하지 않는다면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거듭되는 침묵에 수정구 너머의 상대가 의심을 싹틔우려던 찰나.

"내가 누군지 몰라서 묻는 겐가?"

"아, 아닙니다. 요렌테 님의 위명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곳에 물건이 있었는지 만이라도 확인을...."

"꽤나 흥미로운 물건이더군.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아! 알겠습니다."

죽은 요렌테와 똑같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휴이는 놀란 눈으로 루드를 바라봤다.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말하고 있는 이가 루드란 걸 믿지 못했을 것이다.

"고작 그게 용건이었나?"

"예? 아, 아닙니다. 이리 통신을 드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집결에 대한 안내 때문입니다."

루드는 대꾸하지 않고 상대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아무리 요렌테의 목소리와 똑같다지만 말을 많이 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조금 전의 대화로 의심을 거뒀음일까, 다행히 의심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보름 뒤에 발렌타노의 술집 캔디슨으로 오시면 됩니다."

"오라고? 오는 게 아니라?"

하지만 말을 아끼는 것과는 별개로 해야 할 말은 해야 하는 법. 요렌테의 흉내를 내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요렌테가 제 발로 찾아오라는 말에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터.

하물며 상대가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상황이다.

요렌테라면 지금처럼 반응했을 것이다.

"송구하지만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찾아뵙고 싶으나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닌지라...."

"...이번 한 번만일세."

잠시 뜸을 들인 대답이 수정구를 타고 흘러갔다.

"감사합니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제 소임을 마친 상대는 곧장 통신을 끊었다. 통신을 하는 내내 가슴을 졸였을 상대였다.

통신이 끊어지자 수정구의 빛도 꺼졌다. 그것을 다시 품안에 넣은 루드는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휴이를 보았다.

"방금 어떻게 한 거야? 완전 다른 사람 같았어."

"별거 아니다. 시시한 잡기일 뿐이야."

잡기라 표현했지만 타인의 목소리와 말투를 그대로 따라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완벽한 제어와 관찰을 통한 대상의 이해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기예. 루드도 과거 우연한 기회로 습득한 기술이었다.

"발렌타노의 캔디슨이라."

수정구의 목소리는 발렌타노의 캔디슨이란 술집으로 오라고 했다.

발렌타노는 알고 있는 곳이었다.

원래 목적지로 생각하던 바깥대륙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작은 도시.

제국의 영토였지만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바깥대륙과도 가까운 까닭에 범죄자나 도망자 등이 많은 곳이었다.

"이제 거기로 가는 거야?"

"그래. 확인할 게 생겼거든."

수정구 너머의 인물.

아마도 요렌테에게 정수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을 그와의 대화로 알아낸 게 많았다.

'정수가 있는 곳을 정확히 특정한 것은 아니다.'

물건을 찾았는지 여부에 대해 묻던 말.

정수가 마을에 있다는 걸 백 퍼센트 확신했다면 물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그들도 정수가 있을 만한 곳을 아는 거지, 정확히 정수가 어디에 있는지 확신하진 못한다는 것.

'요렌테 말고도 정수를 찾아 움직인 이들이 더 있다.'

또 혼자만의 일이 아니란 말과 집결지가 존재한다는 점도 좋은 정보를 제공했다.

요렌테 말고도 정수를 찾는 이들이 존재하며, 그들에게도 방금 전의 인물과 같은 담당자 비스무리한 이들이 붙어 있다는 의미.

'기회다.'

그들이 한 곳에 모인다는 건 그들이 찾은 정수도 한 곳에 모인다는 의미.

찾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 정수를 취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위험 요소도 많다.'

그러나 기회인만큼 위험도도 높았다. 당장 요렌테만 해도 강력한 실력자였다. 발렌타노에 모일 이들이 요렌테 정도의 실력자라고 생각한다면 집결지는 호랑이굴과 같았다.

'그래도 갈 수밖에 없다.'

일단은 발렌타노로는 향할 생각이었다.

집결지에 가는 건 조금 더 생각해 보더라도 발렌타노에 가는 것만으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움직이자."

* * *

아이리우스의 행보는 멈출 줄 몰랐다.

헤이론을 수하로 거둔 뒤에도 그와 비슷한 케이스의 인재들을 영입하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녔다.

공작가의 사람들은 갑작스레 변한 그녀의 모습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연무장을 드나드는 거야 무예를 갈고닦기 위함이라 치부할 수 있었다.

여자라고 검을 들지 말란 법은 없었고, 에이나우디 가에는 여기사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이론을 기점으로 인재를 영입하고 외부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턴 얘기가 달라졌다.

공녀가 후계자 싸움을 시작하려 한다!

사람들은 아이리우스의 행보를 그렇게 받아들였다.

언젠가는 정치적인 이유로 가문을 떠날 거라고만 여겨졌던 아이리우스였다.

하지만 가문을 떠나는 게 아닌, 가문을 갖겠다는 선택을 한다면?

공작가가 소란스러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안팎으로 시끄럽더구나.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이리우스."

식사를 마친 당대 에이나우디 공작, 카일론이 아직 식사 중인 딸을 바라봤다.

우아한 자태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모습은 제 딸이어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무 생각도 없어요."

아이리우스는 느긋하게 입가를 닦았다. 소문으로 시끄러운 공작가의 모습과 상반되는 평온한 기색이었다.

"그렇다기엔 들려오는 이야기가 많던데. 정말 공작의 자리가 탐나는 것이냐?"

카일론은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자애로운 아버지였지만, 제국을 받히는 기둥이기도 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자신의 뒤를 이어 가문을, 나아가 제국을 지탱할 가주를 뽑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글쎄요."

공작위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무수한 정보가 들어오는 자리였다.

그리고 최근 카일론이 전달받은 정보의 상당수에는 아이리우스가 연관돼 있었다.

"헤이론이란 기사를 수하로 거뒀더구나."

"장래가 유망한 기사여서요."

"적어도 여인을 후리는 데 있어서는 그래 보이더구나."

입가를 훔친 냅킨을 내려놓은 아이리우스가 싱긋 웃었다.

"걱정되시는 거라면 걱정만 하시고, 추궁하시는 거라면 추궁만 하세요."

"큼."

"헤이론의 검을 직접 보신 적 있으신가요?"

"글쎄다. 가문에 소속된 기사가 한둘이 아니니."

에이나우디 공작가에 존재하는 기사단만 셋이었다. 각 기사단의 규모가 서른 명 안팎인 걸 고려하면 기사의 수는 백에 달했다.

"장담하건대, 그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거예요."

"...집사를 통해 사라라는 시녀를 차출한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냐?"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크게 보자면 네. 맞아요."

잠시 그들의 면면을 떠올린 아이리우스였다.

에이나우디 가문의 소드마스터, 바람의 기사 헤이론.

살수 조직 밤 깊은 달의 대표 어쌔신, 사라 아즈문.

결은 달랐지만 그들을 휘하로 둔 이유는 같았다.

'그들은 도움이 될 거야.'

과거로 회귀한 그녀만이 알고 있는 정보.

그들이 어떤 실력을 가졌는지, 적성은 무엇인지, 뭘 할 수 있는지.

그들을 거둔 건 모든 걸 종합해 내린 결과였다.

"...그렇다면 이 자리를 빌려 말해 두마. 헤수스 너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니 잘 들어라."

카일론의 진중한 음성에 에이나우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장남 헤수스가 움찔거렸다.

"너희 둘 다 이 자리를 원한다면 기회는 동등해야겠지."

막연하게 생각하던 문제였다. 자신이 은퇴할 때가 되면 당연히 장남인 헤수스가 제 자리를 이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리우스도 가주의 자리를 원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5년 뒤 소가주를 공표할 생각이다. 그동안 가문을 이끌어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해라. 더 자격이 있는 녀석에게 소가주의 자리가 주어질 것이다."

카일론의 입을 통해 후계에 대한 이야기가 공표됐다.

비록 이 자리에 있는 건 공작의 직계와 시중을 드는 몇몇의 사용인뿐이었지만, 이 이야기는 금방 가문 전체에 퍼질 것이었다.

'헤수스한테 미안한걸.'

식탁 아래로 헤수스가 주먹을 움켜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이리우스는 구태여 공작의 자리엔 관심 없다는 진심을 꺼내지 않았다.

'경쟁 구도라면 헤수스도 좀 더 성장할 테지.'

헤수스의 성장은 에이나우디 공작가의 성장과도 상통한다. 가문이 강해지는 걸 막을 이유는 없었다.

"먼저 일어날게요.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요."

헤이론과 사라라는 인재들을 미리 선점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더 빨리, 더 많은 걸 갖춰 놓아야만 했다.

'마왕....'

그녀는 회귀 직전의 적을 떠올렸다. 대항군의 수장이자 제국의 대적 마왕. 그의 강함은 압도적이었다.

그전까진 느껴 보지 못한 커다란 벽. 그것을 뛰어넘기 위한 회귀였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단숨에 뛰어넘어야 했다.

후계 경쟁 구도가 만들어진 건 생각하지 못했지만 반길만한 일이었다. 헤수스와 선의의 경쟁을 통해 가문을 재정비하고 강화할 기회였으니.

이제 가문에서의 준비는 얼추 끝이 보였다.

'기다려. 다음에 만나면 꼭 죽여 줄 테니.'

마왕은 기억 못할 두 번째 대면.

그때는 반드시 죽이겠노라, 아이리우스는 다짐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38화

요렌테의 담당자가 고지한 집결 일자는 당장 보름 뒤. 루드와 휴이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여관은 고사하고 마을도 들르지 않을 정도로 쉼 없이 이동한 지 열흘 째.

두 사람은 발렌타노까지 하루의 거리를 남겨 둔 산에 있었다.

"으아 죽겠다."

"쉬어라. 오늘 야영은 내가 준비할 테니."

대수림을 출발한 날로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된 야박. 체력에 자신 있던 휴이로서도 진이 빠질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루드는 널브러진 휴이를 대신해 야영을 준비했다. 전생에서부터 숱하게 해 온 덕에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잠 잘 자리와 불 피울 터가 마련되고, 구해 온 장작에 불이 붙었다. 그 불 앞엔 언제 잡아왔는지 모를 산짐승이 나뭇가지에 꽂혀 노릇하게 익어 갔다.

"봐도 봐도 놀랍네."

"별거 아니다.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는 것뿐이지."

"그건 그것대로 놀라운데 말이지."

타닥타닥, 불꽃이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루드는 신기한 녀석이었다.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갖춘 무력도. 파바르와 대수림에서 보여 준 심계도. 타인의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 내는 기술도.

하나같이 범상한 게 없었다.

방금 보여 준 모습만 해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늘었다 했지만, 그 나이를 생각하면 놀라운 것이었다.

갓 성년을 넘긴 녀석이 이 정도 속도로 야영 준비를 끝내려면 얼마나 많은 경험이 있어야 할까.

게다가 그런 능력들을 가졌음에도 루드는 만족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때문일까, 가끔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일이면 도착하겠군."

"도착하면 좀 쉴 수 있는 거지?"

"그래."

휴이의 바람에 대꾸한 루드는 제 팔에 감긴 슬라브를 바라봤다. 살 만한지 꼬물꼬물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역시 환경에 영향을 받는 건가.'

이동하는 동안 계속 슬라브의 컨디션을 확인했다.

녀석은 본래 살던 수해와 비슷한 환경일수록 강한 힘을 낼 수 있고, 그렇지 않을수록 힘이 빠지는 듯했다.

산에 어둠이 내리자 기운을 차린 녀석은 루드에게 매달려 칭얼댔다.

바스락-.

식사가 끝나갈 무렵, 인기척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칭얼대던 슬라브도 어느새 잠잠해진 상태였다.

바스락, 바스락.

상대는 기척을 숨길 생각이 없어보였다. 외려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접근하는 중이었다.

이윽고 수풀 사이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인기척의 주인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혹시 불 좀 같이 쓸 수 있겠나?"

사내는 활짝 핀 양손을 어깨 위로 올려 위협의 의사가 없음을 알렸다.

"요깃거리 할 수 있는 것도 준다면 더 고맙고."

말을 덧붙인 사내의 시선이 불가 앞에 남아 있는 고기에 달라붙었다.

"...일단 몸을 녹이시죠."

"고맙네."

허락이 떨어지자 사내는 간격을 유지한 채 빙 돌아 불에 다가갔다.

근처에 다가가지 않을 테니 긴장하지 말라는 의미의 행동이었다.

"젊은이 둘이 이런 시간에 이런 산속에 있다니."

반대편에 앉아 불길을 쐬던 사내는 루드와 휴이를 바라봤다. 두 사람도 사내를 응시했다.

불빛에 비춘 사내의 얼굴은 꽤나 미형이었다. 다만 얼굴에 가득한 나른한 기색이 그 외모의 느낌을 바꿔 놓았다. 독특한 인상이었다.

말문을 열고 한참 동안 두 사람을 보기만 하던 사내의 입이 다시 열렸다.

"혹시 사랑의 야반도주 중인가?"

"에?"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 어처구니없는 말에 저도 모르게 반응한 휴이에게 너털웃음이 돌아왔다.

"뭘 그리 놀라고 그러나. 내가 자네들보다 나이는 먹었지만 아직 신세대라고. 편견 없는 신세대."

"편견을 좀 가져 줬으면 좋겠는데."

"흠. 그런 건 아니었나 보군. 이런, 내 촉도 다 죽었군. 옛날엔 찍었다 하면 다 맞았는데 말이지."

너스레에 분위기가 풀리던 찰나.

"발렌타노로 가는 중인가."

사내가 두 사람의 목적지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맞습니다."

루드는 별다른 말없이 인정했다.

어차피 이런 시간에 이런 곳에 있을 이유는 하나였다. 빠르게 발렌타노로 가기 위해.

그건 아마 사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발렌타노엔 무슨 볼일인가."

그리 묻는 사내를 자세히 살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나른함.

힘없는 눈은 까딱하면 잠길 것 같고 입에선 당장이라도 하품이 나올 것만 같은 기색이다.

다음으로 보이는 건 사내의 소지품.

처음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양손과, 허리춤이나 등에도 보이지 않는 짐. 사내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눈치 채지 못했다.'

사내의 등장과 함께 경계했음에도 방금 전까지 사내의 수중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존재감이 강하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린 이유는 간단했다.

사내에겐 존재감이 있었다. 상대의 이목을 제게만 집중시킬 수 있는 존재감.

제 의지대로 존재감을 조절하는 사내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비치는 이보다도 더 위험한 부류였다.

상대를 제대로 인지하고 나서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복수를 위해."

"음?"

"물으신 발렌타노로 가는 이유 말입니다. 복수를 위해서입니다."

발렌타노로 향하는 것은 결국 복수를 위해서였다. 그곳에 모일 정수를 얻고자 하는 것도 제국에 대항할 힘을 갖추기 위함이었으니.

루드의 답을 들은 사내는 슬며시 턱을 쓰다듬었다.

복수는 인간을 움직이는 강력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 발렌타노에 복수의 대상이 있는 건지, 복수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 건지는 몰라도 그런 이유라면 이런 시간대에 이런 곳에 있는 것도 이해가 됐다.

한시라도 빨리 복수를 이루고 싶겠지.

"당신은요? 이 시간에 이런 곳에 있다는 건 당신도 빨리 발렌타노로 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내 질문에 대답해 줬으니 나도 대답해줘야겠지."

묻긴 했으나 답을 기대하진 않았던 루드였다. 하나 사내는 맥이 빠질 만큼 쉽게 답해줬다.

"네 말대로 볼일이 있어서 발렌타노로 향하는 중이다. 아는 사람에게 부탁받은 게 있거든."

귀찮게도 말이지.

인상에 있는 나른함은 거짓이 아니란 듯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보다도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는데 말이지."

"...뭐죠?"

사내가 천천히 루드와 휴이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굳게 다문 입술이 나른한 인상 너머로 진지한 분위기를 표출했다.

아까 전부터 거슬리던 게 있었다. 야영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걸 느꼈을 때부터 계속 제 감각을 자극하던 것.

사내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저거. 안 먹을 거면 내가 먹어도 되나? 음식 남기면 벌 받는데. 절대 내가 배가 고파서는 아니고."

불 앞에 놓인 고기가 참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드시죠."

* * *

이른 아침에 눈을 뜬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 밤 신세를 진 불 친구들은 아직 자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는 척을 하는 중이었지만.

사내는 먼저 길을 나서기로 했다. 제 몸만 챙기면 되는 까닭에 출발은 즉각적이었다.

"또 볼 수 있음 보자고, 어린 친구들. 어젯밤은 즐거웠네."

떠나기 전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일이 끝난 뒤에도 발렌타노에 있다면 한번 찾아가 볼까.'

썩 마음에 드는 녀석들이었다.

요즘 애들 같지 않은 태도와 행동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여차하면 데리고 가는 것도 괜찮겠는데.'

발렌타노로 가는 이유가 복수라 했다.

진심으로 들렸으니 꼬드기는 것도 쉬우리라.

무릇 목표가 있는 이들은 힘을 원하는 법. 그 점을 어필한다면 되지 않을까.

다만 걸리는 건 '복수' 자체였다.

'문제가 되지 않으면 좋겠는데.'

덩치가 좋은 녀석은 긴가민가하지만 알브족인 것 같았다. 아마 제 동족을 팔아넘긴 노예 사냥꾼을 찾아 발렌타노를 찾는 게 아닐까 추측됐다.

검은 머리 녀석은 바깥대륙의 사람인 건 확실한데, 어디에 소속된 녀석인지는 알 수 없었다.

녀석들의 복수 대상이 단순한 개인이거나 어느 정도 선에 있는 인물이라면 상관없었다. 그 정도는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무마할 수 있었으니.

하지만 묵과하고 넘어갈 수 없을 정도의 인물이나 단체라면....

'그땐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지.'

귀찮을지라도 할 일은 해야 하는 법.

사내는 부디 두 사람이 말한 복수가 자신과 그들 사이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내용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한편으론 어쩐지 다시 만날 땐 이번처럼 웃고 떠들 수는 없을 것 같단 예감도 들었다.

어린 나이에 익스퍼트 상급에 오른 이들이다.

한 놈도 아니고 두 놈 다. 게다가 스스로를 숨기는 것에 익숙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았다면 자신조차 놓쳤을 정도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제대로 알아봐야 하나.'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복수의 대상이 누구인지. 어떠한 원한인지.

'아니다. 무슨 상관이냐. 아직 누굴 죽인 것도, 뭘 한 것도 아닌데. 나중에 일 터지면 그때나 움직이면 되겠지 뭐.'

그러나 그러한 고민은 곧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막말로 지금 당장 녀석들에 대해 알아본다 해도 무언가 바뀌는 건 없었다.

이 자리에서 죽일 것도 아니고.

일단은 발렌타노로 가 의회가 부탁한 일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귀찮지만 약속은 약속.

온 게 있으니 가는 것도 있어야 했다. 그게 오랜 날을 살면서 깨달은 세상의 이치였다.

사내가 그런 생각들과 함께 떠난 뒤.

루드와 휴이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갔지?"

"갔다."

두 사람은 일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긴 숨을 내쉬었다.

"뭐 하는 사람이야 대체."

지난 밤, 휴이는 사내에게 지독하게 시달렸다. 남은 고기를 삽시간에 해치운 사내는 기분이 좋은지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신변잡기부터 시작해 되도 않는 개그까지. 일찌감치 자리를 피한 루드 때문에 사내를 상대하는 건 오롯이 휴이의 몫이었다.

"고생했다."

그 고생을 지켜봤기에 격려의 말을 건넨 루드는 사내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발렌타노로 향하는 방향.

사내가 먼저 떠났고, 자신들도 뒤따라야 하는 방향이었다.

"계획 변경이다."

"응?"

본래는 집결지인 발렌타노의 술집 캔디슨에 가려 했다.

집결 시간이 아니더라도 한두 번 들러 상황을 살피고, 가능하면 그곳에 모인 이들의 정수를 빼앗는 게 원래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전면 수정이 필요했다. 캔디슨에 가서는 안 됐다.

"캔디슨에는 가지 않는다."

하룻밤을 같이 보낸 사내.

밤새 생각한 끝에 사내의 정체를 깨달았다.

"집결 시간에 맞춰 집결지에 가면."

나른함과 귀찮음으로 무장한 사내의 이름은 더스틴 클라위베르트.

"죽는다."

제국의 소드마스터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39화

집결 시간에 맞춰 집결지에 가면 죽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단호함을 넘어 확신에 찬 말에 휴이는 의문을 표했다.

"가면서 설명하지. 시간이 없어. 그가 발렌타노를 찾은 이유가 내 추측과 같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발렌타노에 도착해야 한다."

빠르게 채비를 마친 루드는 더스틴이 지나간 길을 뒤따랐다.

"그의 이름은 더스틴 클라위베르트. 카르바나 제국의 소드마스터다."

사내가 처음 나타났을 때는 요렌테와 같이 정수를 찾는 의뢰 수행자라 의심했다.

야밤에 산을 오르면서까지 빨리 발렌타노로 가려는 이는 소집일자에 맞춰 도착해야 하는 인물뿐이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발렌타노가 범죄자들의 도피처로 쓰이는 걸 감안하면 도망치고 있는 범죄자일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테지.'

설령 모습을 드러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목격자를 없애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의뢰 수행자, 범죄자, 여행객, 수련 기사....

사내를 마주한 상태로 다수의 후보를 하나씩 지워 가길 얼마간.

마침내 루드는 사내의 정체를 간파할 수 있었다.

표정에 밴 나른함과 작은 동작에서도 느껴지는 느긋함.

정체를 파악하고 나자 사내의 정체를 알려 주는 부분들이 확연하게 보였다.

왜 이제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설마 사내의 정체가 더스틴 클라위베르트일 줄이야.'

더스틴 클라위베르트는 제국의 소드마스터 중 하나. 명실상부 대륙 최강자의 반열에 드는 인물이었다.

일전 파바르에서 마주한 미켈레 구르드손도 소드마스터였지만 그와 비교하는 게 미안한 진짜배기 강자였다.

간신히 경계를 넘은 소드마스터가 아니라, 경계를 넘고도 더 나아간 완숙한 소드마스터.

'어떤 수를 쓰든 필패다.'

파바르에서 미켈레와 승부를 대중해 봤을 때도 결국 그려지는 결과는 패배였다.

하지만 모든 패를 전부 내보이고 서로 목숨을 건다고 가정한다면 백중지세.

미켈레에게 조금의 우세는 있을지언정 일방적이진 않을 거라 자신했다.

그러나 더스틴은 아니다.

미켈레를 만났을 때보다 더 강해지고 검도 정비했지만, 그 결과가 확실하게 보였다.

흑마법으로 발을 묶고 정수의 힘으로 주변의 마나를 동결시켜도, 결국 패배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건 알겠어. 근데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이유는 뭐야? 발렌타노는 이제 코앞이잖아."

"더스틴 클라위베르트가 이런 곳까지 온 이유. 그가 스스로 말한 아는 사람에게 부탁받아 할 일이 있다던 말."

발렌타노는 제국 변방의 소도시다. 그것도 도망친 범죄자들이 모일 만큼 치안이 좋지 않은 곳.

소드마스터 정도 되는 이가 그런 곳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루드로서는 한 가지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정수를 수집해 온 이들을 전부 죽이려는 거다."

예상대로 정수를 수집하는 의뢰를 한 건 제국이었다.

정수의 위치를 특정할 만한 정보력, 개개인에게 최신형 수정구를 보급할 정도의 자금력, 의뢰 수행자들을 전부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

제국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소드마스터까지 파견할 줄은 몰랐지만."

의뢰를 받았던 이들이 전부 발렌타노로 모이는 상황.

정수를 찾았든 못 찾았든 의뢰에 관련된 이들은 집결지에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곳엔 더스틴 클라위베르트란 이름의 사신이 기다리고 있겠지.

"다행인 건 아직 집결까지 시간이 남아 있다는 거다."

나태함의 대명사인 더스틴이라면 의뢰 수행자를 하나씩 찾아가 죽이는 것보단 전부 모이길 기다렸다 한 번에 처리할 터.

그전에 발렌타노에 도착한 다른 녀석들로부터 정수를 빼돌려야 했다.

"그런데 대체 정수란 게 뭐기에 그러는 거야? 소드마스터까지 등장하고 말이야."

"정확한 건 나도 모른다."

전생에서부터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정확히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취한 이에게 강한 힘을 가져다준다는 것. 하나가 아니란 것. 제국이 노리고 있다는 것."

"힘을 준다고?"

"그래. 잠깐 보여 주지. 놀라지 마라."

정수에 관한 얘기가 나온 김에 루드는 자신이 품은 또 다른 힘을 보이기로 마음먹었다.

휴이와의 동행은 앞으로도 계속될 터. 무엇보다 휴이는 믿을 수 있는 동료였다.

듀얼을 통해 나눴던 두 개의 문 중 하나가 열렸다.

스아아아아-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기운은 여태껏 휴이가 보아 온 루드의 기운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게 정수에서 기인한 힘이다."

어딘가 음산한 느낌이 드는 마력.

공기가 차가워지며 주변이 서늘해지는 감각이었다.

"흑마력...?"

"그래."

정수의 힘을 보여 준 루드는 다시금 마력을 갈무리했다.

"그럼 마력이 두 개야?"

"보통이라면 정수의 힘에 의한 마력만 사용할 수 있을 거다."

본래 마력을 지닌 자더라도 정수를 흡수하면 정수의 마력에 물들 터였다.

처음엔 몰라도 정수의 힘을 사용할수록 정수의 마력이 본래의 마력을 흡수하겠지.

신비 듀얼을 통해 애초부터 마력을 분리해 놓은 루드만이 그러한 여파에서 자유로웠다.

"대단하네. 어째서 그렇게 정수에 목을 매는지 알 것도 같고."

살짝 보여 줬을 뿐이지만, 휴이는 루드가 보여 준 정수의 힘을 절절하게 느꼈다.

공간이 얼어붙는 감각과 마력 자체에서 느껴지는 힘.

제대로 활용한다면 엄청난 일들을 벌일 수 있으리라.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루드는 정수가 가진 힘을 경계했다. 그 강력함만큼이나 무거운 족쇄가 채워지는 게 정수의 힘이었다.

"본래의 마력이 정수의 마력에 완전히 침식되고 나면 그다음은 어떨 것 같나."

"그다음이라니?"

"정신과 신체."

"뭐?"

정수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낀 게 루드였다.

제국에 대항할 힘을 줬지만, 반대로 제국을 넘어설 기회를 앗아 간 것도 정수가 아니었던가.

"정수의 힘을 쓰면 쓸수록 몸이 얼어붙고, 종래에는 심장을 넘어 영혼까지 동결되고 말 거다."

"...무서운 힘이잖아. 괜찮은 거야?"

휴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루드를 바라봤다.

"괜찮다. 적절하게 잘 사용한다면."

끄덕.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루드였기에 휴이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어쨌든 더스틴 클라위베르트가 정수를 전부 수거하기 전에 하나라도 빼내야 한다."

"그런데 정수가 주는 힘이 그렇게 대단하면 모인 녀석들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일대 다수인데다 정수의 힘을 취했을 수도 있잖아."

"확실히 정수를 찾은 녀석들 중 상당수가 정수를 취했을 확률이 높다."

제국이 의뢰한 정수 찾기.

제국이 갖고 있는 정보도 백 퍼센트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요렌테의 케이스를 생각하면 상당한 정확도를 갖고 있다 봐야 했다.

그렇다면 발렌타노로 모일 이들 중 정수를 찾은 이들이 다수 있을 터.

그들의 신분이나 인간으로서의 질을 따지자면 정수를 찾은 순간 그 힘에 홀려 취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죽는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이길 가능성은 없다.

"정수의 힘은 강하지만 그걸 다루는 건 그리 녹록하지 않다. 자칫하다간 역으로 정수의 힘에 잡아먹히겠지."

집결지에 모일 이들은 루드가 아니다.

정수의 힘을 제대로 다루는 법도, 활용하는 방법도 모르는 이들.

그런 이들이 백이며 천이며 있어 봤자.

"결국 더스틴에게 전부 무릎 꿇을 거다."

소드마스터 앞에선 하잘것없는 존재였다.

"코앞이군."

얘기를 나누며 빠르게 이동한 덕택일까. 저 멀리 발렌타노의 입구가 보였다.

* * *

커다란 도시에는 슬럼가가 존재하곤 한다.

중심지를 벗어나 치안이 확보되지 않는 곳부터 형성되는 슬럼가는 화려한 도시의 그림자와 같았다.

하지만 발렌타노는 도시 전체가 슬럼가나 마찬가지였다. 치안이랄 게 없고, 강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곳.

이곳에 살던 일반 시민은 전부 죽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한 지 오래였다.

결국 도시에 남은 건 범죄자나 도망자, 갈 곳 없는 부랑자들과 그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장사치들뿐.

딸랑-

문에 걸어 놓은 작은 종이 울리며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후드로 얼굴을 가린 손님은 주변을 훑어보고는 바bar 테이블 가장 깊숙한 곳에 앉았다.

'톱날바퀴의 샤크먼, 사슬창의 루텐... 저자는 흑마법사인가.'

가게 내부 손님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숱한 사람을 토막 내 죽인 현상 수배범, 돈보다 피를 좇는다는 전쟁 용병, 대륙의 공적인 흑마법사.

그들은 신분을 감출 생각이 없는지 자신들의 외양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어떤 놈이냐....'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사내, 대도大盜 아셴은 아닌 척 연신 주위를 살폈다.

'쳇. 아직도 얼굴이 아리군.'

후드 아래로 숨겨진 아셴의 얼굴은 팅팅 부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수차례 얻어맞은 까닭이었다.

지난 밤, 아셴은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습격당해 잘생긴 얼굴과 의뢰품을 빼앗겼다.

그 범인이 분명 이곳에 있을 것이다.

'다들 한가락 한다 이건가.'

자신이 들어왔을 때의 반응을 살피고자 집결 시간이 다 되어서야 들어왔는데 누구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굳이 반응을 살피자면 상대에 대한 호기심 정도랄까.

하지만 이곳에 범인이 있음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의뢰품만 쏙 빼 가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아셴이 계속 다른 이들을 살피던 때. 약속된 시간이 되자 바텐더가 제 앞에 놓여 있던 종을 흔들었다.

딸랑-

바텐더의 종소리와 함께 문에 걸린 종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고 등장한 사내의 얼굴에는 나른함이 가득했다.

"다 모였나? 출석 한번 불러 보지. 이름이 호명되면 대답해 주게."

마치 아카데미의 교수처럼, 왼손에 출석부를 든 더스틴은 명단에 적힌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샤크먼."

"루텐."

"카소테루."

....

"요렌테."

거듭되는 호명과 돌아오지 않는 대답.

하지만 더스틴은 여전히 나른한 표정으로 호명을 이어갔다.

"아셴."

"...여깁니다."

유일하게 호명에 대답한 사람이 나옴과 동시, 모든 호명을 마친 더스틴은 명단을 쭉 훑고는 이곳에 있는 이들의 숫자를 셌다.

"음. 하나가 부족하군."

명단에 적힌 건 여덟인데 이곳에 있는 건 일곱이었다.

"음. 요렌테가 없군."

흑마법사 요렌테.

명단의 인물 중 가장 거물인 그를 알고 있는 더스틴이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눈치 챈 건가."

그 정도 되는 경험을 갖고 있는 자라면 무언가를 느꼈을 수도 있는 법.

'뭐, 내게 주어진 일은 모인 녀석들을 처리하는 것뿐이었으니까.'

구태여 오지 않은 녀석을 찾아 죽일 필요까진 없겠지.

"당신이 의뢰자요?"

더스틴이 그리 생각하는 사이, 등 뒤로 사슬창을 세워 둔 루텐이 몸을 일으켰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샤크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정 둘이 살기를 띄며 일어난 모습은 꽤나 위협적이었다.

"의뢰자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거랄까."

더스틴이 손짓하자 바텐더가 상자를 가져왔다.

"의뢰품을 가져온 이들은 여기다 제출하도록."

"제출할 수 없겠다면?"

"음. 의뢰품을 못 찾은 건가?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럼 그냥 앉아 있으면 되네."

"그런 거겠냐고. 찾았는데 제출하지 않겠다는 거지. 아니, 못하는 게 맞는 거려나? 키하하하."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은 루텐과 사크먼이 마력을 피워 냈다.

"음. 의뢰품을 취한 건가?"

"아~ 대단한 힘이더군."

"이 좋은 걸 이제야 알았다는 게 억울할 정도로 말이야."

더스틴은 두 사람을 바라봤다. 확실히 녀석들의 마력에서 정수의 힘이 느껴졌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에 더해 하나. 총 셋이 정수를 흡수한 것 같았다.

다른 이들에게선 정수의 힘도, 제출할 기색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아선 정수를 찾은 이들은 전부 어디론가 빼돌린 듯했다.

"이런... 귀찮게 됐군."

"이런 게 더 있는 거지? 순순히 불면 깔끔하게 죽여 주마."

"특별히 열 토막으로 봐줄 테니까 말이야."

손에 든 상자에 들어올 게 없다는 걸 깨달은 더스틴은 짧은 한숨과 함께 상자를 닫았다.

상자를 건네받은 바텐더가 가게 밖으로 나갔다.

"너희 같은 족속들은 매번 똑같다니까."

더스틴은 눈을 감았다. 힘없이 감긴 눈 때문에 꼭 잠을 자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눈이 다시 뜨였을 때. 기존의 나른함과 유들유들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뒤늦게 무언가를 느끼고 몸을 빼려는 이들이 있었지만.

"괜찮은 감을 가진 녀석들도 있군. 그런데 허튼 짓이야."

더스틴의 말대로 허튼짓에 불과했다.

"어차피 너흰 여기서 다 죽을 거거든."

쿠궁-!!!

엄청난 압력이 일대를 짓눌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4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