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 20-30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20화

"미친!"

"저 새끼 왜 저래!"

"몰라. 눈이 맛이 갔어."

후보생들 사이로 혼란이 번졌다.

가까이 있던 몇은 멀리 도망갔고, 몇은 신디의 손에 들린 검을 보고 무기를 찾아 들었다.

'미친 새끼.'

흐릿해진 시야 속으로 신디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방금 루시아를 죽이려 했다. 분명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리친 검로가 그 증거였다.

"가이로! 괜찮습니까?"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상처 부위를 스치는 손길도 느껴졌다.

"끄으...."

상처의 통증에 정신이 아찔했다. 머리도 어지러웠다.

가이로는 의식을 부여잡기 위해 최대한 호흡을 정돈했다.

"왜 제 말을 듣지 않는 거죠?"

왜?

왜? 왜?

왜? 왜? 왜?

왜애!!!!!

한차례 울분을 토해 낸 신디의 얼굴에 진한 웃음이 걸렸다.

"뭐 어떻든 좋아. 말을 안 들으면 듣게 만들면 되는 거지. 팔다리가 없으면 대련 못할 거 아냐? 아, 아예 죽이는 것도 좋겠네."

두서없이 뱉는 광기 어린 말.

뱉은 대로 행동할 것 같은 분위기.

그리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살기와 마력.

"뭐라는 거야. 이 미친 새끼가."

그 분위기에 압도됐던 어느 후보생은 자신이 고작 평민 출신 나부랭이한테 쫄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끄아아아아악-!!!!"

"너는 밥 먹을 때 쩝쩝거리지 좀 않았으면 좋겠어. 입이 작아서 그런 거야?"

자신이 쫄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나선 결과는 참혹했다.

후보생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왼쪽 볼부터 오른쪽 볼까지 넓어진 입은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식사 때마다 거슬렸단 말이지. 이젠 소리 안 나겠지?

모든 이가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생전 느껴 보지 못한 살의.

타인을 향한 비틀린 심상.

남을 해침에 거리낌 없는 태도.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성질의 악의가 모두를 멎게 만들었다.

'이상해. 신디의 실력은 이 정도가 아니었어.'

오직 한 명. 자신을 대신해 검에 맞은 가이로를 지키기 위해 정신을 잡고 있는 루시아만이 제대로 된 사고를 이어 가고 있었다.

'페렐로를 벨 때 움직임을 놓쳤어. 심지어 전력도 아닌 것 같았는데.'

신디가 전력으로 검을 휘두른다면,

피할 수 있을까?

"...도망 ...쳐."

가이로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말했다.

루시아를 향했던 첫 공격. 운이 좋아 먼저 반응했지만, 정상적인 상태에서 마주한다 해도 제대로 반응할 자신이 없었다.

루시아의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 비단 루시아뿐만이 아니라 이곳의 누구도 신디의 상대가 아니었다.

"조금 늦었나."

그때,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어딘가 익숙한 것 같으면서, 또 처음 듣는 듯 낯선 목소리.

일말의 떨림도 없는 음성은 지금의 상황과 동떨어진 기색을 풍겼다.

'...누구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시야가 흐릿했다.

"버텨라."

"끄으으윽...!!!"

난데없이 한기가 느껴졌다. 가이로는 턱이 부서져라 이를 악물었다.

"가이로! 가이로!"

신음을 뱉던 가이로는 결국 의식을 잃었다.

루시아는 그를 그리 만든 정체불명의 인물을 표독스럽게 노려봤다.

귀신 같은 가면을 쓰고 검은색 로브를 입은 남자.

로브가 체형을 가렸지만 목소리로 남자란 걸 알 수 있었다.

"상처 부위를 잠시 동결시켰다. 당장 출혈 때문에 죽는 일은 없을 거다. 빠르게 치료를 받는다면 앞으로 살아가는 데도 문제는 없겠지."

루시아의 눈빛을 태연하게 받아넘긴 정체불명의 남자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려 신디를 바라봤다.

"당신은 누구죠?"

"예상은 했다만 결국 타깃이 됐나."

타깃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신디는 결국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되고 말았다.

예상했음에도 막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사람이 물어보면, 대답을 좀 하란 말이야!"

물어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격분했을까. 신디가 달려들었다.

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신디의 뒤로 붉은색 마력이 물줄기처럼 흘렀다.

흘러넘치는 살기와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가 잔뜩 느껴지는 공격.

그것만으로도 후보생들을 꺾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루드는 이곳에 널린 후보생 따위가 아니었다.

'솟아라.'

차분히 뒤로 물러나며 심상에 그려 낸 마법을 일으켰다.

콰드득-!!

얼음 조각들이 솟구치며 신디의 경로와 검로를 방해했다.

그 결과, 검은 루드의 코앞에서 멈췄다.

마법의 발현이 조금만 늦거나 거리 조절에 실패했다면 치명상을 입었을 테지만 루드는 덤덤했다.

신디의 움직임을 제한한 루드는 곧장 다음 패를 뽑아 들었다.

"깨져라."

얼음 조각을 형성한 건 고작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신디를 감싸 안듯 솟구쳤던 얼음 조각들이 그 의지를 따라 산산조각 나며 비산했다.

"크학!"

깨진 얼음 조각들이 스치며 상처가 나고, 상처 난 부위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상처를 타고 들어간 냉기가 서서히 신디의 몸을 옥죄였다. 혈관을 얼리고, 근육을 마비시킨 냉기는 이내 내부 장기에까지 닿았다.

삽시간에 신디의 몸을 장악한 한기는 생명 활동을 정지시켰다.

심장의 박동이 느려지고, 폐를 비롯한 온갖 장기들이 얼어붙는다.

그걸로 끝.

루드는 앞으로 쓰러지는 신디의 몸을 받쳐 들었다.

"말도 안 돼...."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루시아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곳의 모두가 달려들어도 이길 수 있을까 걱정했었다. 한데 어디선가 나타난 정체불명의 마법사가 단숨에 신디를 제압한 것이다.

쓰러진 신디를 어깨에 짊어 멘 마법사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에 모습을 감췄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루시아가 그 행방을 좇았으나 이미 사라진 뒤였다.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

사관학교 인근에 마련해 둔 임시 거처.

'역시나 의식의 유무가 가장 큰 차이인가.'

루드는 신디의 시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일종의 프로토타입이라 볼 수 있는 알렉.

관계자가 완성품이라 단언한 신디.

둘의 가장 큰 차이는 광증이 발현됐을 때 의식의 유무였다.

일전에 상대했던 알렉은 광증이 발현되면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급증한 마력을 바탕으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움직임을 보여 줬다.

하지만 그뿐. 자신이 쌓아 올린 무예나 기사로서의 경지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반면 신디는 어떤가. 신체 능력과 마력이 크게 뛰어오른 건 물론, 광증이 발현됐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자신의 검술을 기반으로 움직였다.

이 말의 의미하는 바는 전생에서 보았던 불사군단이 완성될 뻔했다는 것이었다.

'대상이 된 게 후보생이어서 다행이었군.'

무려 제국의 극비 프로젝트 중 하나.

과거 그 위력을 직접 겪었던 루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신디의 본신 실력이 낮았기에 망정이지 알렉 정도만 됐어도 지금처럼 쉬운 승리는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은 막아 낸 건가.'

프로젝트 관계자는 전부 죽었다. 지하에 있던 정보도 모조리 소거했고 윗선에 보고할 인사도 처리했다.

마지막 남은 프로젝트의 흔적도 눈앞에 있었으니 마무리만 남은 상태였다.

그 전에, 루드는 눈을 감고 신디의 시체 위로 손을 가져갔다.

흑마력을 얻는 방법 중 하나는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이나 기운을 추출하는 것.

신디가 갖고 있던 비틀린 감정과 심상은 프로젝트와 맞물리며 더욱 극화됐고, 그 결과 신디를 통해 흑마력을 얻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많다.'

그렇게 얻은 한 줌의 흑마력. 하루 종일 무덤가를 뒤져도 얻을 수 있는 양이 한 줌도 되지 않는 걸 생각하면 큰 소득이었다.

챙길 수 있는 모든 걸 챙긴 루드는 불씨를 떨어트렸다. 시체에 기름을 부어 둔 덕에 단숨에 불이 붙었다.

신디의 신체는 그 자체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자 자료집. 굳이 시체를 짊어지고 온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소각하는 게 가장 확실했다.

'이로써 불사의 군단은 없다.'

전생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던 무력 집단이 사라졌다.

본격적으로 움직인 첫발부터 커다란 소득을 얻은 셈이다.

루드는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을을 떠나며 목적했던 바를 이뤘으니 또다시 새로운 발걸음을 떼야 할 때였다.

'알브족을 구해야 한다.'

알브족.

대수림을 터전으로 삼은 그들은 원래의 역사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멸족한다.

그러나 이번의 역사에서는 다를 예정이었다. 결코 그들이 패망의 길을 걷게 두지 않을 거니까.

'아직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

시기적으로도 지금이 적기였다.

전생에서 그들을 몰락으로 이끌었던 사건. 그것이 아직 벌어지지 않은 시간대였다.

'오랜만에 보겠는 걸.'

알브족을 생각하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알브족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절친했던 동료.

부족의 멸망에 지옥을 걸었던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알브족을 구해야 했다.

'자유도시 파바르.'

루드의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 * *

칼리텍에 들어서는 세 사람이 있었다.

하얀 로브를 입은 이남일녀의 구성. 흑마법사 요렌테를 쫓던 성국의 일행이었다.

"도시 분위기가 이상하군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보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노년의 성기사가 자리에서 사라졌고.

남은 두 사람은 묵을 곳을 찾아 움직였다.

"이곳이 좋아 보이는군요."

"간만에 편히 쉴 수 있겠네요. 이게 얼마만의 여관인지."

숙소를 잡은 둘은 정보를 수집하러 간 노년의 사내를 기다렸다.

"오셨습니까. 피가로."

"예. 도시가 뒤숭숭한 이유를 알아왔습니다."

피가로라 불린 노년의 사내는 자신이 수집해 온 정보를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

"사관학교에 테러가 있었다고요?"

"예. 그 일로 사관학교장을 포함한 관계자 여럿이 죽은 모양입니다. 생도가 연관됐다는 말도 있는데 이건 좀 더 조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예의 흑마법사가 관여됐을 확률은요?"

"테러범이 마법사였다는 얘기가 있으니 가능성은 있습니다. 다만 혹시 관여했다 하더라도 이미 이곳을 떴을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도시의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빠르게 이동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아뇨. 예정했던 대로 머물다 가겠습니다. 체력도 비축해야 하고, 무엇보다 도시가 혼란에 빠져 있을수록 신의 가르침을 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피가로는 무언가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특무대를 본 것 같습니다."

"특무대 말입니까?"

"에? 특무대? 제가 아는 그 제국 특무대 말씀입니까?"

그 말에 다른 두 사람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제국 특무대.

명칭 그대로 특수 임무를 위해 기용되는 부대로,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이들도 많지 않은 제국의 비밀 부대였다.

"스쳐 지나갔지만 특유의 그 기운. 분명 특무대였습니다."

"특무대가 왜."

"피가로."

"예. 리카엘 님."

피가로가 곧장 고개를 숙였다.

"아까 말한 테러가 일어났다는 사관학교. 그곳에 가 봐야겠습니다."

"처리해 놓겠습니다."

"그리고 로이튼."

"네. 리카엘 님."

젊은 성기사도 고개를 숙였다.

"사관학교에 대한 정보를 구해 오세요. 구할 수 있는 정보는 전부 다. 얼마 전에 있었다던 테러도, 사관학교의 역사나 유명한 졸업생, 이전에 있었던 사건 사고들. 전부요."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명 후 두 사람을 물린 성녀 후보, 리카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제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특무대가 찾아왔다....'

이유 없이 움직일 그들이 아니다.

이곳에 그들을 움직일 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

'운이 좋으면 괜찮은 패가 하나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그게 무엇일지. 조금 기대됐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21화

자유도시 파바르.

제국 동남쪽에 위치한 이 도시는 자유도시란 이름 아래 외국인의 출입이 자유로운 곳이었다.

때문에 여러 문화가 공존했으며 볼거리 놀이거리 먹을거리가 많기로 유명해 유흥과 향락의 도시라 불리기도 했다.

"확실히 사람이 많군."

파바르의 첫인상은 번화함이었다.

칼리텍도 사관학교가 있을 만큼 규모가 있는 도시였지만 파바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곳을 바라봐도, 저곳을 바라봐도 사람. 국가, 신분, 성별, 연령이 다른 무수한 사람들이 자유도시 파바르를 이루고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다.'

루드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동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휴식을 최소화하면서 이동했지만 거리가 거리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알브족을 구하기 위해선 무조건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이곳 파바르에서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휴이 녀석의 술주정이 이리 쓰일 줄이야.'

루드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전생의 동료이자 알브족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휴이는 힘든 전투가 끝날 때면 항상 술에 취해 지난날의 후회를 입에 담았다.

-부족의 외모만 아니었어도.

알브족은 신화 속 엘프의 후손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미색을 자랑했다.

또 보통의 대륙인보다 느린 노화는 남녀 할 것 없이 아름다운 그들의 외모를 오랫동안 보존해 줬는데, 그것이 문제였다.

그러한 특성 때문에 노예 사냥꾼의 표적이 되고 만 것이다.

제국이나 왕국이 아닌 소위 '바깥대륙'이라 일컬어지는 곳에 거주하는 알브족은 누구의 비호도 받지 못한 채 자력으로 노예 사냥꾼을 상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노예사냥꾼만 없었어도!

알브족의 전사는 능히 노예 사냥꾼을 쓰러트릴 수 있었으나 부족의 전부가 전사는 아니었다.

노예 사냥꾼에게 잡히는 이들이 생기는 건 막을 수 없었고, 점차 교묘해지는 노예 사냥꾼의 수법에 그 숫자도 늘어 갔다.

그렇게 잡혀간 이들이 경매품으로 올라올 곳이 바로 이곳, 자유도시 파바르의 비밀 경매장이었다.

-그날 그곳에 그 노친네만 없었어도!

전생의 알브족은 붙잡힌 부족원들을 되찾기 위해 경매장을 습격했다.

그 결과는 전멸.

이유는 간단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 그 노친네가 소드마스터였다는 걸.

미켈레 구르드손.

고르단 왕국의 소드마스터가 그날의 비밀 경매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다.'

비밀 경매장이 열리는 건 앞으로 삼 일 뒤. 그 전에 미켈레 구르드손을 만나 승부를 봐야 했다.

'미켈레 구르드손.'

루드는 그의 이름을 곱씹으며 자신과 견주어 봤다.

'객관적으로 현재 내 실력은 익스퍼트 중급에 4서클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수준.'

회귀 직후부터 끊임없이 움직인 덕분에 루드의 실력은 전생의 이맘때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듀얼을 통해 흑음의 정수로부터 발생하는 부작용을 최소화했고, 검술의 경지도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준비를 마친 상황.

검과 마법. 정수가 주는 힘. 정보의 편차.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에 전생의 숱한 경험들이 맞물리면 경지 이상의 적을 상대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미켈레 구르드손과 정면으로 맞붙는 건 하책이었다.

'아무리 잘 쳐줘야 동귀어진이 한계다.'

소드마스터란 이름은 허울이 아니다.

'오러는 금방 고갈될 테고 마법으로 의표를 찌를 수는 있겠지만 그 정도가 한계겠지. 결국 정수의 힘을 끌어다 써야 할 거고.'

이토록 사람이 많은 곳에서 흑마법과 정수의 힘을 드러내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여기 흑마법사가 있으니 잡아가라고 온 대륙에 외치는 꼴.

그러나 정수의 힘을 꺼내지 않고는 발을 묶는 것도 벅찬 게 현실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시간을 가져야겠어.'

회귀 직후부터 계속해서 달려왔다.

덕분에 흑마법사 요렌테를 죽이고 제국의 프로젝트도 막아 낼 수 있었으나 스스로를 정비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 결과 검의 경지가 생각보다 더뎠다.

베이스가 되는 마력이 바뀌었다지만 이미 한 번 걸었던 길. 빠르게 경지를 회복하고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상황이 마음 같지 않았다.

'마왕으로 불릴 때의 나였다면.'

장담할 수 있다. 손쉽게 미켈레 구르드손을 쓰러트렸을 거라고.

소드마스터라고 다 같은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 지고한 경지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 안에서의 격차가 심한 존재가 소드마스터였다.

"말도 안 돼! 이건 다 사기야!"

파바르 곳곳을 돌아다니며 미켈레를 찾아나선 지 며칠.

마침내 도박장에서 판을 엎는 미켈레 구르드손을 발견했다.

* * *

미켈레 구르드손을 지칭하는 이름은 많다.

소드마스터.

고르단 왕국의 왕족.

말 많은 노친네.

도박광.

그리고....

'똥손.'

근처 테이블에 앉아 게임을 즐기는 척 미켈레를 관찰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이 늙은이. 똥손이다.

그건 비단 루드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게임을 진행하는 딜러도, 미켈레의 옆에 앉은 다른 참가자들도 전부 같은 눈빛으로 미켈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또다시 테이블을 엎는 미켈레.

처음 본 것까지 포함하면 벌써 세 번째였다.

"허허. 노인장께서 못하시는 걸 갖고 왜 성질이시오."

벌써 수차례 판을 엎은 미켈레였지만 다른 이들의 표정은 싱글벙글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어르신께서 흥분하셔서. 서로 재밌자고 하는 게임이니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미켈레가 판을 엎을 때마다 소정의 위로금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미켈레의 뒤에 선 차가운 인상의 여자는 미켈레가 판을 엎을 때마다 같은 말과 함께 약간의 돈을 건넸는데, 그 약간이 범인과는 다른 기준이었다.

그 액수가 판돈의 몇 배나 되는 상황.

이쯤 되자 사람들로서는 미켈레가 판을 엎는 걸 기대할 정도였다.

"난 이쯤 일어나겠네. 슬슬 가게를 열어야 하거든."

"제가 껴도 될까요?"

테이블에 자리가 나자 루드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 자리를 노리던 이들은 입맛을 다시며 부러운 눈빛으로 루드를 바라봤다.

"뭐야? 이 꼬맹이는. 노름 맛을 보기엔 너무 이른 나이 아니냐?"

흘깃 루드를 바라본 미켈레가 루드의 어린 외양에 툴툴 대며 비아냥거렸다.

그 뒤에 선 여자의 손은 어느새 돈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언제라도 위로금을 건넬 준비가 끝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건네는 일은 없었다.

"그런 꼬맹이보다 노름을 못하시는 거 같아서 들어온 거 아니겠습니까. 노인장께서는 노름 맛을 너무 많이 보셔서 미각을 잃으셨나 봅니다?"

와하하하하!!!

가볍게 던진 말에 배로 받은 상황.

미켈레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그래. 어디 한번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딜러가 패를 돌리고 게임이 이어졌다.

"이이익...!!"

수차례 이어진 게임의 결과는 역시나 미켈레의 패배.

중간에 몇 번인가 딴 루드에 반해 미켈레는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역시 미각을 잃은 게 맞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들어오는 비아냥.

새파랗게 어린놈이 눈앞에서 실실대는 꼴을 보던 미켈레는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걸 느꼈다.

그 순간이 바로 루드가 노리던 때였다.

"저랑 내기 하실래요?"

"지금 하고 있잖느냐."

"이런 거 말고요. 저랑 일대일로요."

"내가 응해야 하는 이유는?"

탐탁잖아 보이는 미켈레의 모습.

이에 루드는 내기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못 배길 필살기를 꺼냈다.

"쫄았습니까?"

"...."

세상 모든 남자들의 가슴을 진탕시키는 마법의 단어.

삐뚜름하게 올라간 미켈레의 입 꼬리가 잘게 떨렸다.

"좋다. 그런데 내기라면 마땅히 걸게 필요하겠지."

살기를 머금은 성난 눈동자가 루드를 바라봤다.

"내가 이기면 네 혀를 자르겠다. 그래도 할 테냐?"

"좀 무섭긴 한데 이기면 되니까... 좋아요. 대신 제가 이기면 소원 하나를 들어주세요."

"오냐 좋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 주마. 내기 주제는 네가 골라라."

삽시간에 정해진 살벌한 내기.

함께 도박을 하던 이들은 급변한 분위기에 식은땀과 함께 하나둘 사라졌다.

"인디언 포커 어떠세요?"

"룰은?"

"세 번 해서 칩을 많이 딴 사람이 이기는 걸로."

"딜러는... 이 아이가 해야겠군. 괜찮겠느냐?"

"좋아요. 혹시 속임수를 쓰거나 그러진 않겠죠?"

"미켈레 구르드손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마. 그럴 일은 없을 게다."

딜러까지 도망간 까닭에 딜러 역할은 미켈레의 뒤에 있던 여자가 맡았다.

"패를 섞겠습니다."

빠르게 뒤섞인 패가 각자의 앞에 뒤집힌 상태로 놓였다.

인디언 포커는 뒤집어진 패 중 하나를 골라 자신의 머리 위로 올려 상대에게 공개한 뒤, 그렇게 공개된 상대의 패를 보고 배팅을 하는 게임이었다.

"열 개."

"열 개 받고 열 개 더요."

각자가 가진 칩의 개수는 백 개.

세 판이 끝난 뒤 갖고 있는 칩의 개수로 내기의 결과를 판가름할 수 있었다.

"콜이다."

배팅이 끝나고 머리 위에 올렸던 패를 확인한 두 사람.

"내가 이겼구나."

루드의 머리에 있던 숫자는 3, 미켈레의 머리에 있던 숫자는 4였다.

미켈레의 승리로 끝난 첫판.

"이걸 어쩌냐. 벌써 스무 개나 잃고 말이다."

"괜찮아요. 아직 두 판 남았으니까요."

게임이 속행됐다.

"죽을게요."

두 번째 판도 미켈레의 승리였다.

가장 높은 숫자가 나온 미켈레의 패에 루드는 기본 배팅만 한 후 게임을 포기했다.

"혓바닥과 작별 인사를 해야겠구나."

"그런 끔찍한 말 마세요. 아직 이길 기회는 남아 있다고요."

"내가 기본 배팅만 하고 죽으면 어쩌려고?"

"에이. 그럴 소인배라 생각하지는 않는데 말이죠."

"크흐흐흐. 맞지. 이 미켈레가 소인배는 아니지. 좋다 원하는 대로 끝까지 어울려 주마."

두 사람이 가진 칩의 개수는 130개와 70개.

루드에게 남은 수는 올 인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이마 위로 카드가 오픈됐다.

"겁주려고 하는 말은 아니다만 지금 많이 말해 두는 게 좋을 게다."

"말이 너무 안 맞는 거 아니에요? 그런 말을 하면서 겁주려고 하는 말은 아니라니."

내기의 마지막 순간.

자세를 바로 한 미켈레가 루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 없던 일로 해 주마. 혓바닥을 가져가는 대신 미켈레 님은 대륙 제일의 실력자라는 말 열 번으로 봐주지."

"하하."

미켈레로서는 아량을 베푸는 말.

그러나 루드는 답하지 않았다.

아직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

"곧 죽어도 고죠."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

사아아아-

그 말과 함께 분위기가 달라졌다.

몸을 짓누르듯 압박해 오는 공기와, 숨통을 죄여 오는 날카로운 눈빛.

"후회할 거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덤덤히 받아낸 루드가 베팅했다.

"올 인."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22화

도박장을 나오는 사람은 대개 둘 중 하나다. 얼굴 만면에 차오른 미소를 숨기지 못하거나, 근심 걱정이 가득 차 한숨을 참지 못하거나.

하지만 미켈레는 둘 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터덜터덜한 발걸음은 힘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표정을 보면 비쭉비쭉 웃음이 새 나오는 걸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잘 봐주셨습니다."

미켈레의 옆으로 수행비서 로렐리아가 따라붙었다.

"봐줬다고? 그게 아니란다. 로렐리아."

"예?"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는데 그랬을 리가 없잖느냐."

미켈레는 내기의 마지막 상황을 떠올렸다.

그는 결코 져 줄 마음이 없었다. 받지 않아도 될 올 인을 받아 주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 꼬맹이.'

마지막에 서로가 들고 있던 패는 3과 7. 단순히 패만 따지자면 자신의 패배가 맞았다. 꼬맹이의 올 인을 받아 준 까닭에 전체 결과에서도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고.

하지만 중요한 건 각자가 들고 있던 패가 아니었다.

당시의 그 상황.

혓바닥이 걸린 내기였고, 심지어 승부의 추가 기울어있었다는 게 중요했다.

'무엇보다 상대가 이 몸이었고 말이지.'

패배 직전에 몰려 있는 상대에게 기세를 통해 압박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냥저냥 수준의 압박이 아니었다. 작정한 마스터의 기세는 그 자체로 웬만한 이들에게 사형 선고와 마찬가지.

물론 죽지 않게 조절은 했다만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길 줄은 몰랐다.

'도망갈 구멍까지 만들어 줬는데 그걸 정면에서 들이박아?'

꽤나 높았던 꼬맹이의 패.

하여 미켈레는 꼼수를 부렸었다.

지금이라면 혓바닥 대신 싹싹 비는 걸로 퉁 쳐주겠다고.

그러나 상대는 물러서지 않고 덤벼들었다.

"쳇. 고약한 녀석. 괘씸한 녀석. 마음에 안 드는 녀석. 어린 주제에 귀여운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녀석."

지금 생각해 보면 작정하고 자신을 찾아온 게 분명했다.

자신의 정체와 곧 있을 경매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틀림없었다.

돌아가면 어디서 정보가 샜는지 확인해 볼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정당한 내기였고 자신이 진 것도 사실이었으니.

'뭐하는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재밌어 보이던데.'

내기의 결과를 되짚던 생각은 이내 내기 상대에게까지 미쳤다.

꼬맹이.

사실 꼬맹이라 부르기엔 청년에 가깝지만 자신이 꼬맹이라 부르기로 했으니 꼬맹이인 그 녀석.

자신의 기세를 받아넘기고 눈을 마주하던 모습은 퍽 흥미가 생기는 것이었다.

평소였다면 당장이라도 꼬맹이에게 따라붙었을 상황.

하지만 지금은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꼼짝없이 그것만 사서 돌아가야겠구먼.'

미켈레는 투덜거리는 어린아이처럼 발치에 걸린 돌을 멀리 걷어찼다.

* * *

'됐다.'

미켈레가 떠나간 도박장.

아직 그곳에 남아 있던 루드는 주먹을 쥐었다. 가장 큰 난관이었던 소드마스터를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미켈레 구르드손. 위대한 소드마스터시여. 이틀 뒤 열릴 경매장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게 제 소원입니다.'

'...의도적인 접근이었구먼.'

'본의 아니게 그리 된 점은 사죄드리겠습니다.'

직전까지의 가벼운 모습이 아니라 예를 갖춘 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경매품을 사는 것도 포함이냐?'

'예.'

'흠. 그럼 이리 하자꾸나. 딱 하나. 경매품 하나만 사 가마.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대신 네가 의도적으로 접근한 걸 봐주마.'

그와 동시에 서서히 피어오르는 기운은 마스터의 존재감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구매하시려는 물품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불꽃의 눈물이다.'

'알겠습니다. 불꽃의 눈물을 사는 걸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분명 약속하셨습니다.'

'좋다. 이만 일어나 보지.'

그렇게 떠나간 미켈레.

의도적으로 접근했단 사실에 심기가 불편해 보였지만 소드마스터이자 일국의 왕족인 그의 말에는 천금의 무게가 실린 법이었다.

경매품 하나를 사는 대신 봐주겠다고 했으니 큰 문제가 되진 않을 터였다.

'급한 불은 껐다.'

미켈레를 해결했으니 동족을 구하러 온 알브족이 전멸하는 일은 없어졌다.

소드마스터라는 규격 외의 괴물이 없다면 충분히 동족을 구하고 탈출할 수 있을 터.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직접 나서서 도와줄 수도 있었다.

'말석이라곤 하나 역시 소드마스터란 건가.'

깊게 들이마신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드마스터란 이름을 도박으로 딴 게 아니란 걸 증명하듯 인상적인 모습을 남기고 사라진 미켈레였다.

그가 내뿜은 기운의 여파로 아직까지도 몸이 저릿했다.

'역시 빠르게 경지를 되찾아야겠어.'

전생보다 높은 경지를 바라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지만 아직 전생의 경지도 따라잡지 못한 상태.

당장 검의 경지만 수복했어도 이런 복잡한 수로 미켈레의 발을 묶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래의 제국에 대항할 기틀을 마련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이 힘을 갖추는 것도 중요했다.

"일단 움직이자."

일단은 알브족의 패망을 막는 게 우선.

시간을 갖고 경지를 되찾자면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도박장에서 나온 루드는 파바르 곳곳을 돌아다니며 경매가 열릴 날을 대비했다.

구출대가 붙잡힌 동족을 구해 도시를 빠져나가는 건 과거에는 없었던 일.

미켈레가 개입하지 않는 순간부터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몰랐다.

최대한 여러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놔야 했다.

그렇게 이틀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 * *

파바르의 밤은 화려하다. 낮의 번화함만큼이나 찬란한 밤의 풍경은 자유도시 파바르의 또 다른 이름을 잘 나타내는 모습이었다.

유흥과 향락의 도시.

자유도시라는 이름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친숙하고 많이 알려진 이름은 도시의 밤 풍경에서 기인했다.

검은색 배경을 수놓은 색색의 불빛.

곳곳에서 들리는 술 취한 목소리와 교태 어린 신음 소리.

도박장에서 보이는 절망과 환희.

그러나 그것들은 파바르의 껍데기에 불과했다.

"들어가십시오."

가면을 쓴 이들이 하나둘 지하로 향한다. 도시에 가득한 불빛과 시끄러운 소리는 그들의 움직임을 가려 줬다.

경매가 열리는 지하로 통하는 입구는 여러 개. 그러나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었다. 초청받은 자 혹은 신분이 확실한 자만이 경매장 출입을 허락받았다.

그렇지 않은 이들의 경우는.

"쫓아내."

"살려 주세요!"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들에 의해 나쁜 꼴을 면치 못했다.

화려한 장식이 잔뜩 달린 다리 밑.

눈가를 가리는 반가면을 쓴 루드가 지하 통로의 입구로 다가갔다.

경비 둘이 그 걸음을 멈춰 세웠다.

"잠시 확인이 있겠습니다."

초청받은 자나 VIP는 미리 인상착의와 가면의 모습을 전달받은 바, 이외의 모두는 전부 신분 확인을 거쳐야 했다.

재미있는 건 파바르의 비밀 경매장이 불법이 아니란 것이었다.

그럼에도 참여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비밀리에 경매를 진행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경매장의 분위기와 그 수준 때문이었다.

"비니시우스 랑데자 님."

루드가 건넨 신분패는 칼리텍 사관학교장의 것이었다.

프로젝트 관계자였던 그를 죽이고 챙겨 놨던 것이 이리 쓰였다.

'역시 아직까지도 소문이 퍼지지 않았어. 정보를 통제하고 있는 건가?'

정보가 퍼지는 속도를 고려해 보면 누군가 칼리텍 사관학교에서 벌어진 일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환영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덕분에 비밀 경매장에 들어가는 건 간단했다.

"...제 얼굴에 뭐라도?"

"아무것도요."

경비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무언가 문제가 있나 싶어 물었지만 루드는 고개를 내젓고는 입구로 들어갔다.

"신입. 아는 사람이야?"

"처음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 근데 눈빛이 꼭. 아 혹시 그건가? 남색?"

"으... 그런 말 마십쇼."

입구를 통과해 곧장 내려가지 않고 문 뒤에 서서 대화를 엿듣던 루드는 피식 웃었다.

다른 알브족과 달리 커다란 근육질의 몸.

마찬가지로 알브족 같지 않은 선이 굵고 진한 생김새.

그러나 누구보다 알브족을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녀석.

과거, 알브족의 마지막 남은 생존자.

"오랜만이야. 휴이."

오랜 동료와 재회한 순간이었다.

"일단은 경매장에 있어야겠지."

휴이가 경비로 서 있는 이유는 궁금하지 않았다. 이유야 뻔했다.

루드는 일단 경매가 진행되는 곳으로 내려갔다.

알브족 전사들이 나타나는 시점은 둘 중 하나일 거로 예상됐다.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빼돌리거나, 경매가 진행 중일 때 급습하거나.'

휴이가 아직 경비로 서 있고 과거 미켈레에게 전멸했던 걸 떠올리면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

경매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아는 사람들끼리는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미켈레는 어디지?'

움직이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았으나 위치 정도는 확인해 두는 게 좋았다.

'저기군.'

미켈레는 생각보다 금방 발견됐다. 수행원으로 보이던 여자도 함께였다.

그 뒤로도 루드는 경매장 곳곳을 둘러보며 동선과 출입로를 확인했다.

그러던 때.

화악-

장내를 은은하게 비추던 빛이 사라지더니 경매장 중앙의 무대로 강한 빛이 떨어졌다.

"반갑습니다! 파바르 비밀 경매장을 찾아 주신 모든 분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오늘 경매의 진행을 맡은 이솝입니다."

짝짝짝짝.

진행자의 인삿말에 박수가 쏟아졌다.

광대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동작으로 박수에 화답한 이솝은 곧장 경매의 시작을 알렸다.

"첫 번째 경매품입니다. 유명 보석 세공사 데오르디오의 역작이자 무려 핑크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목걸이, 사랑의 이름. 금화 백 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경매품은 다양했다.

보석류의 사치품부터, 마력을 크게 증진시켜 주는 비약과 정체 모를 골동품 등까지.

심지어는 몰락한 귀족가의 비전 심법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루드는 어느 것 하나에도 관심이 없었다.

오직 알브족의 등장에만 온 신경과 촉각을 곤두세우는 중이었다.

"다음 물품은 자연 속성, 그것도 불의 마력을 품은 불꽃의 눈물입니다."

어느새 경매는 후반부.

이번 경매품은 미켈레가 얘기했던 불꽃의 눈물이었다.

언뜻 보기에 보석처럼 생긴 불꽃의 눈물은 불 속성의 마력을 품고 있어 화염계 마법을 쓰는 마법사에게 최고의 영약으로 꼽히는 비약이었다.

꼭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몸에 지니고 있으면 몸을 따뜻하게 하고 마력 순환을 도와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이기도 했다.

"백금화 200개."

그러나 경매는 시작하자마자 허무하게 그 끝을 알렸다.

범인은 역시나 미켈레였다.

"2, 200! 시작부터 무려 백금화 200개가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백금화 하나는 금화 5개의 가치와 맞먹었다. 미켈레가 제시한 금액이 금화 1,000개와 같다는 의미였다.

"낙찰됐습니다."

불꽃의 눈물을 낙찰받겠다고 덤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숨에 백금화 200개를 지불하는 이다. 낙찰받겠다는 마음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 덤벼봤자 결국 낙찰받긴 힘들 테니 괜히 힘 뺄 이유가 없었다.

'곧인가.'

서서히 마무리되어 가는 경매장의 분위기.

동시에 루드는 구석에서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꼈다.

"많은 분들이 기다리셨을 겁니다."

상품을 소개하는 이솝의 멘트가 시작됐다.

"신화 속 엘프의 후손이라고 불리는 이들이죠. 아름다운 미색을 갖춘 데다 잘 늙지도 않으니 오래오래 곁에 두고 즐길 수 있는 이들입니다."

기대감에 장내가 술렁였다. 알브족 노예를 갖는 건 숱한 귀족들의 바람이었다.

"오늘 소개드릴 이들은 총 열. 하나같이 미색이 대단하고 대부분 나이도 어리답니다. 오늘이 지나면 또 언제 수급할 수 있을지는 저도 모르고, 여러분도 모르고, 아마 그들도 모를 거랍니다?"

하하하하.

이솝의 멘트에 사람들이 웃었다.

알브족 노예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과 흥분은 별 거 아닌 것에도 즐겁게 웃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소개합니다! 알브족입니...."

마무리 짓지 못하고 끊긴 멘트.

이솝은 무슨 일이 생겨도 경매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베테랑 진행자였지만, 목에 구멍이 뚫려서 소리를 못 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알브족 전사들이 붙잡힌 동족을 구하기 위해 경매장을 습격했다.

하하호호 웃던 경매는 끝났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23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된 장내.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출구를 찾아 도망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무기를 들어 습격범을 상대하려는 이도 있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도 있었다.

미켈레는 명백히 후자에 해당했다.

"가만히 있어라. 그런 소원이지 않았느냐."

"예?"

검을 들고 나서려는 로렐리아의 행동을 제지한 미켈레는 돌아가는 상황을 살폈다.

"고약한 녀석. 이래서 그런 소원을 빌었구먼."

"그럼 설마...."

고개를 끄덕여 로렐리아의 추측을 긍정해 준 미켈레는 습격범들을 바라봤다.

죄다 두건을 둘러 모습을 감췄지만 그 정도론 소드마스터의 눈을 속일 수 없다.

두건 아래로 숨겨진 아름다운 외모. 진행자의 목을 꿰뚫은 날카로운 활솜씨.

분명했다. 습격범들은 알브족이었다.

아마 경매에 나온 동족들을 구하기 위해 나타난 것일 터.

'이것 때문이었나.'

경매장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 달라던 소원.

녀석이 알브족의 습격을 알고 있었다면 이해가 됐다. 자신에게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소원이었으리라.

'한데 알브족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도박장에서 만난 꼬맹이의 외모는 분명 뛰어났지만 알브족의 것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미켈레는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재미난 게 많아 보이는 녀석을 두고 그냥 돌아가야 한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미켈레가 약속을 지키며 방관하는 사이.

알브족 전사들은 붙잡힌 동족을 구출하며 경매장의 병력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상품이 제 발로 찾아왔구나."

붙잡혔던 동족들의 구속을 전부 풀어 냈으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완전 무장을 갖춘 경매장의 병력이 포위망을 좁혀 왔다.

팅-.

매섭게 쏘아 낸 화살이 갑옷을 맞고 튕겨 나갔다. 마력이 담기지 않은 화살로는 갑옷을 착용한 적을 상대하기 어려웠다.

"윽!"

그 와중에도 갑옷의 이음새를 정확히 노리며 한두 명을 쓰러트렸지만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되지 못했다.

무대 위로 몰린 알브족이 위기에 빠진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하아앗!!"

"꺽!"

"배신자다. 배신자가 있어!"

경매장의 병사 하나가 갑자기 동료들을 공격한 것이다.

"저거 누구야! 어느 조 소속이야!"

병사 모두가 투구를 쓴 까닭에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 순식간에 병력을 헤집은 병사는 알브족이 빠져나갈 길을 만들었다.

"끅!"

무거운 갑옷을 입었다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빠르고 간결한 움직임.

탈출로를 튼 병사는 제게 달려드는 이들을 하나하나 확실하게 처리했다.

"다 같이 덤벼!"

결국 남은 병사들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한 명씩 덤벼서는 승산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뼈아픈 판단이었다.

그들이 입은 갑옷은 모두 같은 것이었고, 그들 병력은 시각적 통일성을 위해 체형이 비슷한 이들로 구성돼 있었다.

다 같이 덤벼들어 얽히고설켜서야 배신자를 구별할 방법이 없었다.

'끝났군.'

루드는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할까 싶어 대기했지만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정말 별종이라니까.'

배신자의 모습을 떠올린 루드는 피식 웃었다.

알브족은 수려한 외모만큼이나 민첩함과 활솜씨로 유명했는데, 홀로 다른 길을 걷는 알브족이 있었다.

활보다는 주먹을 선호하고, 민첩하기보단 근력이 뛰어났던 녀석.

전생의 동료였던 휴이였다.

그는 지금 경비로 잠입했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저 병신 머저리들.'

한편 루드와 다른 방향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누군가는 욕을 내뱉었다. 비밀 경매장의 주인이었다.

저들끼리 뒤엉켜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병력의 모습에 턱이 부서져라 이를 악문 그는 결국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당신은?"

"이곳 비밀 경매장의 주인 파르네리라고 합니다."

파르네리는 경매에 참석한 한 사람을 찾았다. 이 상황을 타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비밀 경매장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다. 그 오랜 역사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찾아온 적이 없을까?

그렇지 않았다.

상품을 노려서든 사람을 노려서든, 비밀 경매장의 탄생 이후 경매장을 노리는 이들은 끊임없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 경매장이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

사건 사고들이 생겨도 신용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송구하지만 습격범들을 처리해 주실 수 있을런지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리 해 주신다면 답례로 원하시는 상품 하나를 드리죠."

파격적인 제안.

파르네리가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카드였다.

"무엇이든?"

"무엇이든요."

"이미 다른 사람에게 낙찰된 상품일지라도?"

"같은 상품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일처리가 끝난 후 당장 받고 싶다면?"

"...좋습니다. 어떻게든 원하시는 상품을 마련해 드리죠."

그가 원하는 물품이 뭐든, 어떻게든 상품을 구해다 줄 자신이 있었다.

'상품을 낙찰받았던 자에게는 상황을 설명하고 추후 혜택을 약속하면 된다.'

파르네리의 약조에 여태껏 상황을 관망하던 남자가 씨익 웃었다. 곧 2m가 넘는 커다란 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약속 잘 지키도록."

"누구와 한 약속인데요. 당연히 지켜야죠. 대신 빠른 처리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도 질질 끌 생각은 없어. 빠르게 처리하고 불꽃의 눈물을 받을 생각이니까."

남자의 말에 파르네리는 잠시 인상을 구겼지만 금방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불꽃의 눈물.

예상은 했지만 역시 남자가 원하는 건 그것이었다.

낙찰금이었던 백금화 200개가 아른거렸지만 당장 급한 건 돈이 아니라 상황을 깔끔히 정리하는 것이었다.

신용만 유지한다면 돈은 언제든지 벌 수 있다. 대대로 이어져온 가문의 가르침이었다.

"다들 정지."

크지 않게 뱉어낸 말. 그러나 중후한 마력이 담긴 목소리에 소란스럽던 장내가 일순간 멈춰 섰다.

"침입자가 아닌 이들은 전부 물러서도록."

슬금슬금 움직인 사람들에 금세 알브족으로 이어지는 길이 생겼다.

"목에 문신이 있어."

"저자, 혹시...."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얼굴부터 목을 타고 이어진 문신이 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까닭이었다.

"테무스다."

새로운 얼굴의 등장에 장내를 빠져나가던 루드는 걸음을 멈췄다.

'테무스?'

들어 본 적 있는 인물이었다.

'저자도 이곳에 있었나.'

전생의 휴이에게서 들은 적 없는 바로 보아선 그가 나서기 전에 미켈레가 나섰던 것 같았다.

꿀꺽. 알브족 전사들이 긴장했다. 가볍게 뱉어 낸 목소리만으로도 테무스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먼저 가시죠."

뒤섞인 병사들 사이에 숨어있던 휴이가 테무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알브족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휴이의 의지를 느끼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용기가 가상하군. 저런 머저리들과 나를 같은 급으로 생각한 건 아니길 바라마."

병사들을 비웃은 테무스에게 누군가 커다란 도끼를 건넸다. 도끼를 움켜쥐고 이리저리 휘둘러 본 테무스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

대치 상황에서 먼저 움직인 건 테무스였다.

천천히 걸어가 거리를 좁힌 테무스가 커다란 움직임으로 도끼를 내리찍었다.

콰앙-!!!

공기를 찢어발기며 내리꽂힌 도끼가 굉음과 함께 바닥을 쪼갰다.

'미친!'

도끼를 피한 휴이는 욕을 내뱉었다.

곧장 카운터를 먹이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도끼질의 풍압에 밀렸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었다.

'내 몸이 밀린다고?'

190cm에 달하는 키와 근육이 가득 차 있는 휴이의 몸이었다. 하지만 테무스는 그보다도 더 커다란 몸과 존재감을 과시했다.

'파고들어서 연타를 먹인다. 맷집이 약하기를 기대해야겠군.'

테무스의 도끼는 그의 몸만큼이나 거대했다. 거리를 좁히면 제대로 휘두르기 어려울 터.

쿵-!!!

사선으로 휘두른 도끼를 피해 낸 휴이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됐다.'

테무스의 품에 파고든 그가 주먹을 내지르려던 그때.

콰앙!

무언가 그의 몸을 강하게 타격했다.

그대로 날아가 벽에 처박힌 휴이는 자신을 공격한 이를 확인했다.

"사관학교장?"

아는 얼굴이었다. 출입검문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사관학교장이란 인물이었다.

"네 상대가 아니다. 이곳을 벗어나서 다른 이들에게 합류해."

"무슨!"

"너."

부서진 벽면에서 빠져나온 휴이에게 루드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가라앉은 눈동자가 휴이를 응시했다.

"방금 죽을 뻔했다."

천천히 검을 빼내며 하는 말은 진심이었다.

방금 전, 휴이는 죽을 뻔했다.

"불꽃의 처형인 테무스."

"나를 아나?"

"아마도."

전생에서도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다. 다만 소문으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그가 가진 힘과 즐겨 사용하는 수법 같은 걸.

"신비를 가졌다지."

테무스는 신비 보유자였다.

이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가진 신비는 불꽃이었다.

"크크. 그래, 신비를 가졌지. 부러운가? 어떻게 신비를 구했는지 궁금하다면 알려 줄 수도 있는데."

"관심 없다."

검을 겨눈 루드는 차분히 상대를 탐색했다.

엄청난 크기의 체구와 거기서 나오는 압도적인 힘과 속도. 그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거대 도끼.

"아쉬운 일이군. 신비가 없었다면 더 강해질 수 있었을 텐데."

"뭐?"

테무스는 분명 강자였다.

타고난 육체가 대단한 데다 익스퍼트 중급의 실력자로 마력 활용도 수준급이었다. 무엇보다 불꽃이라는 강력한 신비의 힘까지 보유하고 있었고.

기사는 아니었지만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뛰어난 실력자로 평가받으며 여러 곳에서 모셔 가려는 이가 바로 테무스였다.

그래서 그에겐 더 아쉬운 일이었다. 일찍이 신비를 가진 것이.

"애송이가 뭐라 지껄이는 거냐. 죽여주마."

테무스가 도끼를 휘둘렀다. 거친 궤적을 그리는 도끼는 빠르고 매서웠으나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루드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체를 숙이고 재빠르게 도약하며 머리 위로 검을 휘둘렀다.

자루에서 분리된 도끼날이 떨어지며 테무스의 바로 앞에 도달한 루드.

"바보 녀석. 자기 입으로 말해 놓고 그새 까먹은 거냐."

코앞으로 다가온 루드에 테무스는 비웃으며 신비의 힘을 끌어올렸다.

화르륵-

테무스의 몸에 불이 붙었다. 화형당하는 죄인처럼 거센 불길에 휩싸인 모습이었지만 테무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불길이 살라 먹는 건 오직 적뿐. 그가 가진 신비의 힘은 이토록 대단한 것이었다.

서걱-

아...?

"그래서 문제야. 애매하게 강력해서."

루드의 검이 불길과 함께 테무스의 목을 갈라 냈다.

노력 없이 얻은 힘에 의지해서는 결코 진짜 강자를 이길 수 없었다.

'일단락됐나.'

불꽃이 피어남과 동시에 몸을 보호하기 위해 휘감은 오러를 거두어들이고 마지막으로 주변을 확인했다.

더 이상 움직이는 병력도, 위험의 소지가 될 만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휴이도 모습을 감춘 상황.

루드는 지체 없이 자리를 떠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단 말이지."

그들이 떠나간 자리를 어느 노인의 넋두리가 메웠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24화

휴이는 혼란스러움을 안고 달렸다.

제국의 귀족이 자신을 도운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가 자신을 살렸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일부러 거리를 내주고 접근을 유도했을 줄이야.

사관학교장이 자신을 밀쳐 내지 않았다면 갑옷째로 타죽을 뻔 했다. 설령 죽지 않았더라도 끔찍한 꼴을 면치 못했겠지.

'진짜로 죽을 뻔했다.'

구출대에 자원하면서 죽음을 각오했지만, 막상 죽을 뻔했다는 걸 인지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죽을 각오는 했지만 역시 살고 싶었다.

'다들 잘 빠져나갔겠지.'

파바르의 밤은 화려했다. 밤늦게까지 환한 곳이 많고 길거리엔 사람들이 가득하다.

밝은 데다가 보는 눈이 많아 도망치기 힘들어 보이는 조건.

그러나 파바르엔 화려함만큼이나 어두운 이면도 존재했다. 그곳이 정해 둔 탈출 루트였다.

불이 꺼지지 않는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난 구역. 개발이 진행되다 만 까닭에 불빛도 사람도 없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 모여 있던 알브족은 달려오는 휴이를 보고 반색했다.

"휴이!"

"다들 괜찮아요?"

"덕분에 다들 무사하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예."

크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들은 곧장 파바르를 빠져나가기 위해 움직였다.

동족들을 전부 구했고 휴이도 왔으니 탈출만 남은 상황이었다.

"다들 정지."

몸을 숨겼던 미개발 지역을 벗어나 약간 이동했을 무렵. 구출대의 대장을 맡고 있는 해리슨이 활을 들어 전방을 겨눴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당신은?"

모습을 드러낸 인물에 휴이가 반응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인물은 조금 전 자신을 대신해 테무스를 상대했던 사관학교장이었다.

"...사관학교장? 어떻게 여기에."

"사관학교장이라고?"

휴이의 중얼거림에 해리슨은 혀를 찼다. 사관학교장이라면 제국에서도 높은 영향력을 가진 인물. 그런 자가 앞을 가로막은 건 결코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해리슨의 반응에 조금 전 그가 자신을 도와줬음을 얘기하려 한 휴이였지만 그보다 상대의 입이 열리는 게 더 빨랐다.

"틀렸다."

"뭐?"

"나는 사관학교장이 아니다."

"그럴 리가. 신분패가 분명 사관학교...!"

거기까지 말한 휴이는 깨달았다.

"사칭이었구나."

자신은 사관학교장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건 함께 경비를 섰던 이도 마찬가지일 터.

그들이 눈앞의 인물을 사관학교장이라 인식한 것은 그가 사관학교장의 신분패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정체가 뭐지?"

"알브족의 조력자라고 해 두지."

"조력자라고?"

알브족 모두가 루드를 경계했다.

"존재조차 모르던 조력자라.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믿지 못하겠다면 저 녀석에게 물어봐라."

루드의 손가락이 휴이를 가리켰다. 구출대의 시선이 휴이에게 향했다.

"...도와준 것은 맞아. 그가 아니었다면 아마 난 합류하지 못했을 거야."

정체는 모르나 그가 자신을 구해 준 것은 사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믿을 수 없다. 도와준 것은 고마우나 거기까지다. 더 이상 따라온다면 죽이겠다."

알브족으로서는 갑자기 나타나 조력자를 자처한 루드의 속셈도, 의도도 알 수 없는 상황.

하여 그들은 루드의 접근을 차단하는 걸 선택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대수림과 그곳의 알브족에게 볼 일이 있다. 해서 동행하고 싶다."

"그게 목적이었나? 우리 부족에 가는 것?"

"설마. 그건 곁다리다."

루드는 단언했다.

대수림에 가고, 그곳의 알브족을 만나고.

그런 건 전부 일부분에 불과했다.

루드의 목적은 하나였다.

"내 목적은 오직 하나. 알브족이 살아남는 것이다."

그 말에서 휴이는 정체 모를 감정을 느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저 말이 진심으로 들렸다.

"흥! 믿을 성싶으냐. 부족의 위치를 알아내서 노예사냥꾼을 끌어들이려는 건 아니고?!"

"그게 목적이라면 이런 귀찮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겠지."

"뭐?"

"당장 너희들만 없으면 남은 알브족은 노예인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대수림 안에 숨겨져 있다지만 스스로를 지킬 힘 하나 없는 부족을 찾아내서 해코지하는 건 쉬운 일이지."

루드의 말은 고저가 없었으나 날카로웠고 확신을 담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으로 한순간에 무력 자원을 잃은 알브족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신랄한 평가에 알브족의 눈에 핏발이 섰다.

"너희가 경매장에서 살아 나올 수 있게 도운 것. 또 지금 너희를 공격하지 않는 것. 이것들만 봐도 알브족을 돕고자 한다는 내 진심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 너희들의 말처럼 부족에 남은 알브족들을 노예로 삼고자 하는 거였다면."

잠시 숨을 고른 루드가 남은 말을 천천히 뱉어 냈다.

"너흰 지금 죽었을 거다."

"네놈! 오만방자하구나!"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는 법.

지금의 알브족이 그러했다.

루드의 말이 부족에 대한 능멸로 들렸던 걸까. 아니면 자신들에 대한 멸시로 들렸던 걸까.

참지 못한 그들이 루드를 공격하려는 순간이었다.

"저 녀석의 말이 진심임은 내 보증하지."

언제 어느새 나타났는지 모를 노인이 그들 사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놈이 마음먹었다면 자네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었음이야. 경매장에서든, 이곳에서든."

"당신은?"

해리슨은 긴장해 물었다.

눈앞에 나타났음에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예사 노인이 아니었다.

"미켈레 구르드손."

노인은 질문에 답하며 씨익 웃었다.

"지나가던 소드마스터일세."

"소드마스터!"

난데없던 등장만큼이나 충격적인 정체.

'소드마스터가 왜 이곳에?'

해리슨은 혼란에 빠졌다. 사칭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노인이 슬쩍 드러낸 기세만 봐도 노인의 말이 진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저 녀석이 너희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 무언가 알고 계시는 게 있으십니까?"

루드를 바라보고 피식 웃은 미켈레가 입을 열었다.

"뭘 알고 있냐고? 알고말고. 모를 수가 없지. 저 녀석이 내게 걸어 둔 소원이 아니었다면 자네들은 전부 내 손에 죽었을 테니까 말일세."

순간. 모든 알브족이 얼어붙었다.

살기를 피워 낸 것도 위협의 목적을 담은 것도 아니고 그저 그럴 뻔했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소드마스터의 입에서 '죽음'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모두 자신의 목이 잘 붙어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맘 졸이지 말고 편히 가게. 내 조치해 놨으니 경매장에서 그대들을 쫓는 일은 없을 걸세."

"어찌 그런 은혜를... 아니, 감사하게 잘 받겠습니다."

"고맙다면 저 녀석이 원하는 대로 같이 가게 해 주게. 자네들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게야."

"...알겠습니다."

혹여 숨은 목적이 있지 않을까 했던 해리슨은 이내 감사 인사를 건넸다.

상대는 소드마스터. 목적을 숨길 이유가 없고 숨긴다 하더라도 자신들로선 어쩔 도리가 없는 규격 외의 존재였다.

"당신께서 왜."

하지만 루드는 달랐다.

전생에서 알브족을 전멸시켰던 미켈레가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 의문이었고, 하여 물었다.

"별거 아니다. 경매장 그 고얀 녀석들이 감히 내 것을 갖고 장난치려 했지 뭐냐. 체무슨가 돼무슨가 하는 이상한 녀석한테 부탁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그래서 한바탕 뒤집어놓고 왔지. 그 결과 중 하나가 이놈들을 쫓지 않는 거다.

그리 말하며 낄낄대는 미켈레의 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할아범의 것이었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

해리슨과 미켈레, 루드를 번갈아 쳐다보던 휴이가 눈치를 봤다.

소드마스터의 등장 이후 순식간에 오간 여러 이야기. 반응을 살펴보면 자신들에게 나쁜 방향은 아닌 것 같았는데,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지는 나중에 물어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내게 빚을 졌다는 거, 인정하느냐?"

"...인정하죠."

단숨에 상황을 정리한 미켈레가 루드를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원해서 진 빚은 아니지만 말이죠."

"크흐흐흐. 꼬우냐? 꼬우면 너도 소드마스터 하지 그러냐."

"안 그래도 그러려고 합니다. 빨리 되려고요. 소드마스터."

자신이 소드마스터가 되는 건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당돌한 말.

소드마스터가 무엇인가.

검을 든 자라면 모두 꿈꾸는 경지이자 범인은 일평생 검을 갈고닦아도 오르지 못하는 존재였다.

다른 녀석들이 저리 말했다면 곧장 주먹으로 머리를 박았겠지.

하지만 미켈레는 루드의 말이 허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 녀석에게는 남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이리 나선 게 아닌가.

마스터도 아닌 주제에 능숙하게 오러로 전신을 휘감아 불길에 대처하던 모습이란.

안 그래도 가득한 흥미를 흘러넘치게 만든 모습이었다.

"꼬맹이. 이름은?"

"루드. 아니, 루드란테. 루드란테입니다."

원했든 아니든 미켈레가 호의를 베풀었고 그 혜택을 봤음은 분명했다.

그 답례로 루드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어렸을 때 사용하던 이름이 아니라, 친부에게서 받았던 자신의 본명을.

"좋은 이름이군."

그리 평한 미켈레는 이곳을 찾은 진짜 이유를 말했다.

"오늘의 빚은 나중에 갚아라. 네가 직접 나를 찾아와서 말이다."

"좋습니다."

"그럼 그때 보지. 너무 늦지 않게는 찾아와야 할 거야.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는 나이라 말이야. 크흐흐흐."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린 미켈레는 루드와 알브족을 번갈아 보고는 등을 돌렸다.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얕은 관계는 아닌 것 같군.'

비록 일방적이지만 그 시선에 담긴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었어.'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을 엮어서 저놈에게 빚을 지워 놓은 데다 나중에 찾아오게까지 만들었다.

'역시 난 천재란 말이지. 크흐흐.'

당장 따라붙어서 함께 다니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못했으니, 이게 최선이었다.

나중에 빚을 청산하겠다고 찾아올 루드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있을지, 어느 정도 경지를 이뤘을지, 또 어떤 재미있는 일들을 갖고 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돼 미칠 지경이었다.

"함께 가지."

"해리슨!"

"소드마스터의 말 못 들었나?"

미켈레가 떠난 자리.

해리슨이 루드의 동행을 허락하자 다른 이들이 반발했다.

하지만 반발은 길지 않았다. 해리슨의 말대로 이곳의 모두가 미켈레를 보았고 그의 말을 들었다.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소드마스터가 제 이름을 걸고 보증했다. 이자가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걸."

루드에게 다가간 해리슨은 손을 내밀었다.

"알브족의 경비대장 해리슨이다. 이번 구출대를 이끌었지."

"루드란테다. 루드라고 불러라."

"정확한 상황은 모르지만 네가 우리 모두를 살렸다는 건 알겠군. 고맙다."

서로 악수하는 두 사람.

"하지만 고마움과 별개로 너를 완전히 신용하진 않는다. 대수림까지 가는 길에서, 또 대수림에 도착해서도 불온한 움직임이 느껴진다면 곧장 널 죽일 거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마주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둘 중 누구도 시선을 돌리거나 힘을 빼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지켜야 할 것과 이뤄야 할 것이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루드."

"나야말로."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25화

대수림은 제국 동남부의 외곽에 있다.

제국 동남부에 위치한 파바르에서 보다 동남쪽으로, 그렇게 제국의 영역을 빠져나가면 머지않아 나오는 거대한 삼림이 바로 대수림이었다.

구출대는 빠르게 대수림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올랐다. 추격자에 대한 부담은 사라졌지만 부족의 무력 자원 대다수가 구출대에 포함된 바 늦장 부릴 여유는 없었다.

"녀석은?"

"마차 안에 있어."

"아직도?"

"아직도. 잠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야."

해리슨은 루드가 탄 마차를 바라봤다.

같은 동남 방향이라고는 하나 파바르와 대수림 간의 거리는 꽤나 멀었다.

두 곳 사이에 존재하는 마을과 도시만 해도 여럿.

대수림을 떠난 구출대가 파바르에 도착하기까지도 열흘이 걸린 거리였다.

돌아가는 길은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 터였다.

하여 그들은 마차를 구했다.

원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추격자가 쫓아오는 와중에 마차로 이동할 수는 없는 데다 마차를 구할 돈도 없기 때문이었다.

'무슨 속셈이냐.'

그랬던 그들에게 마차란 선택지를 제시한 건 다름 아닌 루드였다.

소드마스터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받아들인 불청객.

벌써 몇 시간 째 마차에서 눈 감고 있는 그는 세 대의 마차를 구해 왔다. 전부 그의 사비로.

크지 않다고 하나 무려 세 대의 마차다. 마차 한 대의 값이 작지 않은 걸 생각하면 큰돈이 나갔을 게 분명했다.

그만한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함께 이동하려는 이유가 뭘까.

다음으로 들었던 생각은 뭐 하는 거지? 하는 의문이었다.

자신들의 귀향길에 어렵사리 합류한 그는 마차를 구해온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마차 안에서 보내는 까닭에 모습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

해리슨이 이러한 생각들에 묻혀 있을 때.

루드도 여러 생각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경비대장 해리슨.'

구출대의 리더이자 현 알브족 제일의 실력자.

'익스퍼트 중급 정도인가.'

부족을 수호하고 부족원을 지켜야 하는 책임자가 고작 익스퍼트 중급이었다.

뛰어난 궁사였기에 대수림에선 한 수 위의 적도 상대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부족을 지켜 내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전생처럼 흘러가는 건 막았지만 이게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루드는 확신했다. 미켈레에게 전멸당하지 않았더라도 전생의 알브족은 머지않아 패망의 길을 걸었으리란 걸.

'비전 심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의 알브족은 약하다. 부족이 가진 힘도, 부족원 개인의 힘도 모두 약했다.

하지만 전생의 휴이는 강했다. 부족을 잃고 삶의 터전을 빼앗겼던 그는 역경과 고난을 극복한 끝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

거기엔 휴이의 피 나는 노력과 여러 위기를 이겨 내며 얻은 깨달음이 큰 역할을 했지만, 알브족의 비전 심법도 빼놓을 수는 없었다.

'비전 심법을 찾아서 돌려준다.'

알브족은 본래 강한 부족이었다. 제국의 영역을 벗어나 존재하는 많은 부족 중에서도 수위에 꼽힐 정도로 강한 힘을 보유했던 부족.

그들이 지금처럼 쇠락한 건 오로지 하나, 선조들의 유산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현재 알브족에게 남아 있는 심법은 반쪽짜리였다. 그것으론 절대강자는 물론이고 익스퍼트 상급에 도달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러기 위해선 이 둘이 꼭 필요하다.'

마차 한 구석에 서로를 의지해 잠든 두 사람이 보였다.

다른 알브족과 확연히 다른 몸의 휴이와,

'저 사람이 무드리겠군.'

그가 아버지처럼 믿고 의지했다던, 그러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던 인물, 무드리.

'저 둘이 있어야 가능성이 있다.'

선대의 유산이 잠든 곳은 수해樹海, 나무의 바다라고 불리는 대수림의 중심부였다.

사방 온 천지가 나무인 대수림은 들어섬과 동시에 방향감각을 잃기 십상이었다.

알브족이 아니고서야 자유롭게 대수림을 활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에 외부인은 대수림을 찾을 때 꼭 안내인을 대동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들어온 길도 나갈 길도 잃은 끝에 죽기 때문이었다.

대수림이 외부인에게 그렇듯, 수해는 알브족에게도 그러한 곳이었다.

대수림에서 나고 자란 그들에게도 위험하고, 들어가선 안 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곳.

'운이 좋았다고 했었지.'

전생의 휴이는 알브족이 망하자 죽음을 각오하고 수해로 향했다. 그곳에 선대의 유산이 잠들어 있다는 걸 무드리를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걸었던 모험은 성공했고, 그곳에서 얻은 것들을 통해 휴이는 절대강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유산을 찾아서 알브족을 되살린다.'

알브족이 약해진 이유가 이젠 강해진 이유가 돼야 할 때였다.

* * *

대수림으로 돌아가는 길 3일 차.

그간 마차 안에서만 있던 루드가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두문불출하던 루드의 등장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받아 낸 루드는 사람들이 야영을 준비하는 사이 한 구석으로 가 검을 들었다.

'이동하는 동안 검술을 정비해야겠어.'

회귀 후 끊임없이 움직였기 때문에.

시급히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느라.

이런 말들은 전부 허울뿐인 핑계였다.

시간이 부족한 것? 당연하다.

여유가 없는 것? 당연하다.

자그마치 제국을 상대하는 일이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자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만들어야 한다. 여유가 없다면 이유를 찾고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처음부터 다시.'

루드의 머리에는 하나의 검술이 들어 있었다.

전생에 마스터의 위치에 올라 고안한 검술.

당시 여러 이유 때문에 익히지 못했지만 회귀한 지금은 달랐다.

머리에 남은 기억과 심상에 맺힌 기억을 토대로 검을 긋는다.

강하게 휘두르거나 날카롭게 내지를 필요는 없다.

제 안에 존재하는 검술을 바깥으로 꺼내며 확인하는 과정.

누군가 본다면 춤이라고 느낄지 모를 움직임이었다.

"...무언가, 다르군."

야영을 준비하던 알브족은 전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정확히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달랐다.

느긋하게 움직이는 검로는 한눈에 보였지만 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했고, 춤사위 같은 동작은 허술해 보이나 다가서면 베일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했다.

"소드마스터의 말이 정말이었던 건가."

누군가 뱉어낸 말은 모두의 공감을 샀다.

파바르에서 탈출하기 직전 마주한 소드마스터는 루드가 마음만 먹으면 이곳의 모두를 죽일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루드의 체면과 그와 자신들의 대치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한 말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모두 진심이었던 모양이었다.

모두가 루드가 보여 주는 광경에 넋을 잃었을 때, 휴이는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루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판 붙고 싶으냐?"

무드리만이 알아챈 시선에 담긴 감정. 그것은 호승심이었다.

"뭘 그리 고민하고 있느냐. 네가 언제부터 생각하고 움직였다고. 하고 싶으면 하는 게 네 녀석 아니었느냐?"

씨익.

역시 그렇지? 하며 대꾸한 휴이는 성큼성큼 루드에게 다가갔다.

"용건이라도?"

"나랑 한판 붙자."

"다쳐도 상관없다면."

"남자들끼리 붙다가 다치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애들처럼 사릴 생각이라면 오히려 실망이라고."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대련에 필요한 공간을 만든 두 사람은 곧장 맞붙었다.

'마침 잘됐다.'

심상에 녹아든 검을 써먹을 기회였다.

상대가 휴이라면 금상첨화였다. 휴이의 재능과 잠재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권갑을 낀 휴이와 몇 차례 합을 섞은 루드가 본격적으로 나섰다.

'첫 번째 검.'

전생의 루드가 만들어 낸 검술에 존재하는 세 가지 검.

그중 첫 번째 검.

'인간도.'

여태까지 보고 마주했던 사람들이 검에 담긴다.

선인과 악인. 신뢰와 불신. 호의와 악의.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쌓인 인간에 대한 역사가 검으로 나타난다.

'뭐야...!'

그 앞에 선 휴이는 얼어붙었다.

단순한 움직임으로 다가오는 검이 보인다. 그 경로에 자신이 있다는 것도, 피하지 않으면 베인다는 것도 뻔히 보이는 그런 검이다.

한데.

'피할 수 없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용을 쓰고 다리를 떼려 해도, 팔을 들어 막으려 해도 몸을 빼앗긴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순간, 그의 시야에 검이 아닌 무언가가 보였다.

땅에서 튀어나온 수십 개의 손이 제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발이 떼어지지 않는 건 이 때문일까.

그것을 인지하자 다른 것도 느껴졌다.

'이게 대체!'

뒤에서 끌어안은 무언가.

어찌나 힘이 좋은지 붙잡힌 양팔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죽는다.'

그사이, 검은 어느새 코앞이었다.

시작했을 때만 해도 충분히 피할 거라 생각했던 검은 절대로 피하지 못하는 검이 되어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서걱-!

짧았던 시간이 수십 수백 배로 늘어났다가 다시 줄어든 순간.

"허억. 허억...!!!"

휴이는 거친 숨을 토해 냈다. 다급히 몸을 더듬는 모습은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살아 있어? 어떻게?"

분명 자신을 깊숙이 베고 지나간 검이다.

마지막에 눈을 감은 까닭에 끝까지 확인은 못했으나 검의 위치나 경로를 생각하면 확실했다.

하지만 그는 무사했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길게 찢어진 앞섬이 나풀대고 있는 것뿐이었다.

"결판은 난 것 같군."

검을 수납한 루드는 방금 전의 한 수를 되짚었다.

인간도. 숱한 사람들이 녹아있는 첫 번째 검은 생각대로의 위력을 보여 줬다.

다만 문제는 현재의 자신이 검을 완전히 펼쳐 낼 준비가 덜 됐다는 것.

'아직은 무리인가.'

태연한 척 서 있지만 팔다리가 잘게 떨렸다.

첫 번째 검만으로도 이러할진대 두 번째, 나아가 세 번째 검을 사용하는 건 무리였다.

스스로를 냉정히 평가한 루드는 이내 마차로 돌아갔다.

"휴이! 괜찮으냐."

루드가 자리를 떠나자 다급히 달려온 무드리가 휴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조금 전의 상황에 놀란 건 휴이뿐만이 아니었다.

루드의 검이 휴이의 몸을 베고 지나가는 걸 모두가 목격하지 않았는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던 무드리였다.

"...괜찮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휴이의 몸엔 상처 하나 없었다. 찢어진 옷이 아니었다면 검에 베였다는 걸 믿지 못할 정도였다.

무드리의 시선이 루드가 탄 마차로 향했다.

'저자는 대체.'

알브족이 살아남는 것이 원하는 전부라던 동행자.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는 무드리의 시선은 한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26화

4일 차에 접어든 여정.

지금 속도를 유지한다면 열흘 뒤 대수림에 도착할 것 같았다.

그 사실을 해리슨에게 전해들은 루드는 생각에 잠겼다.

대수림에 도착해 그곳의 알브족을 만나는 것.

그리고 수해에서 알브족 선조의 유산을 찾는 것.

모두 얼마 남지 않았다.

'그전에 최소 한 단계는 올리고 싶은데.'

현재 루드는 익스퍼트 중급.

사실 익스퍼트 중급이란 것만으론 루드의 경지를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가 가진 마력운용능력이나 경험은 그러한 경지의 구분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먼저 검을 닦은 수많은 사람들이 괜히 경지를 구분해 놓은 게 아니었다.

'휴이와 계속 대련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제의 대련에서 너무 강한 인상을 심어 버렸다.

어지간한 일에 기죽을 휴이가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지금의 휴이는 자신이 알던 휴이가 아니니 또 모른다는 걱정도 들었다.

'너무 들떴어.'

전생에 고안했던 검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

머릿속 이미지로만 존재하던 것이 실체화돼 제 의지를 나타낸 순간은 루드로서도 떨리고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하여 타이밍을 끊는 게 늦고 말았다.

처음에는 인간도에 담긴 사람들의 역사가 제대로 발현되는 것만 확인하려 했는데, 검을 휘두르는 행위까지 이어지고 만 것이다.

"다친 데는 없을 테지만 말이지."

루드가 보고 겪어 온 사람들이 담긴 검, 인간도.

검에 담긴 여러 사람의 의지는 전투 상황에 개입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하지만 루드가 인간도에 담고자 했던 핵심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인간이란 한결같으면서도 이중적인 존재.'

선인이라고 항상 착하지만은 않다.

악인이라고 항상 나쁘지만도 않다.

루드가 인간도에 담고자 했던 것은 검의 이름과 같이 '인간.'

그 뜻이 담긴 인간도는 베고 싶은 것을 베고, 베고 싶지 않은 것을 베지 않는 검이었다.

세상에 선보인 건 처음이었지만 전생에서부터 심상으로 휘두르길 수천, 수만 번.

휴이의 발목을 잡은 '의지'를 확인한 루드는 인간도에 자신이 담고자 했던 모든 게 제대로 담겼음을 확신했다.

그렇기에 더욱 들떴고 결국 끝까지 검을 휘둘러 버렸다.

덕분에 베고 싶은 것을 베고, 베고 싶지 않은 것을 베지 않는 인간도의 진면모를 확인했지만 좋은 대련 상대를 잃어버릴 상황이 됐다.

'고민해 봤자 이미 지난일이다.'

지나간 일을 혼자 곱씹으며 생각해도 바뀔 건 없었다. 이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검을 정비하고 경지를 회복하는 게 더 유익했다.

그렇게 마차에서 나온 루드는 지금까지의 생각이 쓸데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오늘도 한 판 해야지."

휴이가 불타오르는 눈으로 루드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여긴 어디지?

리카엘은 주변을 둘러봤다.

눈앞이 뿌연 데다 안개가 낀 듯 흐린 날씨 때문에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누구?'

앞쪽에 누군가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기척을 인지함과 동시, 세상을 가득 메운 안개의 일부가 걷혔다.

그 사이로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

가장 먼저 보인 건 심한 화상을 입은 얼굴.

피부는 녹아내려 눌어붙었고, 이목구비는 만들다 만 찰흙같이 무너져 있었다.

화상 자국이 목 아래로도 이어진 걸 보아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었으리란 걸 추측할 수 있었다.

'가여워라.'

안타까웠다. 몸의 굴곡을 봤을 때 여인인 것 같아 더욱 그랬다.

마음 같아선 화상을 입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 주고 싶었으나 여인은 화상을 입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상황.

'기적' 정도가 아니고서야 여인의 본모습을 찾아 줄 방도는 없었다.

저런 몸으로 살아가는 삶은 어떠할까.

그녀로선 알 수 없고, 알고 싶지 않은 답이었다.

대신 리카엘은 그녀에게 작은 축복이라도 선물해 주고자 했다.

축복을 내리기 위해 신성력을 끌어올린 순간.

'!!'

여인이 고개를 틀더니 리카엘을 응시했다.

화상 때문에 여인의 눈이 향한 곳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리카엘은 어째선지 여인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리카엘은 마저 축복을 걸어 주고자 했다. 그러나 직전까지만 해도 잘 움직이던 신성력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다.

당혹스러운 상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여인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나지막이 새어 나온 탄식.

리카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온 건지.

왜 여인의 손길에서 생전 느껴 보지 못한 어머니의 손길이 떠오르는지.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여인에게서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인지.

대체 왜....

혼란스러워하는 리카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던 여인은 옅은 미소를 보였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미소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리카엘은 여인이 미소 지었다고 확신했다.

한참이고 서로를 마주하던 와중, 여인이 무언가 말했다.

뻐끔뻐끔.

여인이 말했으나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뭐라고요?"

뻐끔뻐끔.

여인의 입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안 들려요. 다시 말해 주세요."

리카엘은 여인의 말을 들으려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사이, 일부분 걷혔던 안개가 다시 싸이며 리카엘의 시야를 가렸다.

"잠깐...!"

아직 제대로 못 들었는데!

이대로 여인을 보내선 안 됐다.

여인의 정체도, 이곳이 어딘지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게 말로만 들었던 '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여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내야 했다.

하지만 리카엘의 소망을 모르는 듯, 안개는 순식간에 모든 시야를 집어삼켰다.

제국 특무대를 따라 이동하던 첫째 날의 꿈이었다.

* * *

검과 주먹이 부딪쳤다. 날을 죽인 검과 기름 먹인 천으로 감싼 주먹은 충돌할 때마다 강한 소리를 냈다.

루드의 검이 휴이의 어깻죽지에 떨어진다.

휴이의 주먹이 루드의 배를 때린다.

서로 일격을 나눈 두 사람은 거리를 벌리며 떨어졌다. 둘 모두 호흡이 거칠었다.

"날을 세웠으면 방금 걸로 팔이 잘렸을 거야."

"넌 내장이 다 파열됐을걸."

"오러로 보호했을 테니까 아무렇지도 않았을 거다."

"그럼 나도 그렇게 막았다 치지 뭐."

크흐. 휴이는 웃음기 섞인 숨과 함께 입에 고인 피를 뱉었다.

'루드 이 녀석, 역시 강해.'

매번 느끼는 거지만 역시 강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 대련은 자신 있었다.

마력을 전부 제한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대련.

마력을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선 힘이며 속도며 맷집까지 전부 자신이 우세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녹록지 않았다. 루드는 마력을 쓰지 않아도 강하단 걸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부족한 힘은 기술로 보완했고, 한 차례 빨리 이뤄지는 예측과 자리 선점은 오히려 자신의 속도가 느리다고 느껴지게 만들었다.

'제대로 된 유효타를 먹이기 힘드니 맷집을 물고 늘어지는 것도 어렵고.'

휴이는 정면에 선 루드를 바라봤다.

'여태까지 상대해 본 누구보다도 강하다.'

해리슨도 안 될 테고, 경매장에서 싸웠던 작자도 루드의 손에 죽었으니 분명했다.

'좋아. 좋다고. 아주 좋아.'

그런 상대와 마음껏 싸울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부족에서는 대련 상대가 없었다. 대부분 치고받는 걸 싫어했고, 간간히 무드리가 대련 상대를 자처했으나 어릴 때는 몰라도 지금은 대련 상대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신났군.'

잔뜩 신난 휴이를 바라보며 그리 평했지만 루드 본인도 흥이 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군.'

처음 대련이 있던 날로부터 벌써 일주일째. 두 사람은 시간이 날 때마다 몸을 부딪쳤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판. 점심 먹고 한 판. 야영 전에 한 판. 자기 전에 한 판.

'싸움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라는 명분을 내세운 휴이는 시도 때도 없이 대련을 신청했다.

루드는 당연히 그 모든 대련을 승낙했다. 그에게도 스스로를 정비할 좋은 기회였다.

호흡을 짧게 내뱉었다.

툭툭 끊어 뱉는 호흡을 따라 전신이 고양되는 게 느껴졌다.

"간다."

호흡만큼이나 짧게 땅을 박차고 검을 낸다.

피하거나 막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를 제시한 상황. 두 선택지 모두에 따른 대처법은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하지만 휴이의 선택은 둘 중 무엇도 아니었다.

휴이는 검을 막고 맞서는 것을 선택했다.

교차한 양팔이 검 끝을 버텨 내더니 그대로 루드를 향해 돌진했다.

'예상외의 수군.'

덤벼드는 속도가 빨라 몸을 뒤로 빼며 검을 회수할 여유가 없었다.

검의 날을 죽여 놨기에 가능한 선택지다 싶으면서도 휴이라면 검의 날이 있든 말든 가능했을 것도 같은 방법.

정말이지 휴이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움직임이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휴이에 루드는 재빠르게 다음 동작을 가져갔다.

검을 뒤로 빼서 회수할 수 없다면, 회수하지 않으면 된다.

무게 중심을 옆으로 이동하며 손목을 꺾는다. 자연스럽게 각도가 틀어진 검이 약간의 자유를 되찾음과 동시, 어깨로 휴이의 옆을 밀어 내며 틈을 만들었다.

정말 자그마한 틈.

하지만 루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기엔 공간이 부족해서 칼머리로 팔꿈치를 찍어 자그맣던 틈을 조금 더 열어 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어깨로 명치를 가격. 칼머리로 팔꿈치를 치며 열린 휴이의 가슴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큭!"

여기서 승부가 결판났다.

루드의 검이 휘청거리는 휴이의 몸통과 목, 어깨며 팔을 여러 차례 쓸고 지나갔다.

"졌다."

아무리 오러로 막는다 우겨도, 아무리 얼굴에 철면피를 깔아도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휴이는 넘어지듯이 땅에 주저앉았다. 대련이 끝나자 어마어마한 탈력감이 찾아왔다.

"응?"

반면 루드는 마지막으로 검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돌이라도 된 듯 굳은 모습.

뭐지? 싶은 순간, 휴이의 머리를 벼락같이 스친 생각이 있었다.

'그거구나.'

휴이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대련의 여파로 당장이라도 드러누워 쉬고 싶었지만 지금은 누군가 루드의 시간을 방해하지 못하게 지켜 줘야 했다.

고목나무처럼 루드의 옆에 선 휴이와 멈춰선 채 멍하니 있는 루드.

그 모습을 본 알브족은 루드에게 변화가 일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의 생각대로, 루드는 변화하는 중이었다.

'마력 사용 없이 이렇게 검을 휘둘렀던 게 얼마만이지?'

생각해 본 적 없었고 생각해 봐도 언제인지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회귀 직후에도 곧장 마력을 모으고자 움직이지 않았던가.

그만큼 마력은 중요했다. 마력의 유무와 그 양의 고저에 따라 무력의 차이가 생긴다 해도 무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력만 모으는 게 능사일까? 많은 양의 마력을 담아 사용하는 게 강자일까?

그렇지 않다. 마력은 많을수록 좋긴 하지만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적재적소에 알맞게 풀어내느냐가 더 중요했다.

결국 마력은 강해지기 위한 수단의 하나일 뿐.

검도 마찬가지였다. 검을 갈고닦는 것은 강해지기 위함이다.

더 날카롭게 베고 매섭게 찌르며 상대를 죽인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 검을 수련하는 이유였다.

검뿐만이 아니다. 마법도, 무투술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각기 다르지만 동시에 같았다. 적어도 루드에게는 그랬다.

고효율의 마나로드를 만들어 마력을 쌓는 것도.

검을 닦아 경지에 오르는 것도.

마법으로 진리에 가까워지는 것도.

모두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였다.

강해지고 강해져서, 자신이 품은 뜻을 관철하기 위해.

사락-.

루드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한 꺼풀 벗겨졌다.

'이전에도 이랬었나.'

경지가 오를 때마다 이런 과정을 겪었던가.

전생에서 마스터에 오를 때도 이랬던가.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당시 어떤 깨달음을 얻었었는지, 그때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지금의 깨달음도 그럴지 몰랐다. 어느 순간이 되면 잊혀질 수도 있겠지.

'그러니 적어도 지금은.'

이 깨달음과 생각, 마음가짐을 잘 품자.

짝짝짝짝짝.

짝짝짝짝짝.

내면의 허물을 하나 벗어 낸 루드가 정신을 차렸을 때, 루드는 많은 박수 속에 있었다.

모든 알브족이 루드를 바라보며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여정을 함께 하면서 알게 모르게 루드에게서 진심을 느낀 그들이었다.

지금 이 순간, 모두는 진심으로 루드를 축하하고 있었다.

"이룬 거냐??"

휴이가 물었다.

"그래. 상급이다."

루드는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읽어 냈다.

축하하는 마음과 부러워하는 마음. 그리고 약간의 안타까움.

반쪽짜리인 알브족의 심법으로는 상급에 오르기 요원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느낀 루드는 상급을 뛰어넘어 마스터에 오를 휴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기 위해선 꼭 알브족의 비전이 필요했다.

대수림에 도착하기까지 하루를 남겨 놓은 때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27화

제국의 공신 가문 중 하나이자 삼대 공작가의 일축인 에이나우디 공작가.

가문의 연무장에서는 오늘도 많은 이들이 땀을 흘렸다.

평기사부터 단장급 인사에 이르기까지, 지위의 고하에 상관없이 저마다 어제의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단련에 매진했다.

그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화려한 금발에 푸른빛 눈동자를 지닌 가문의 금지옥엽, 아이리우스였다.

그녀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몇 달 전부터 꾸준히 연무장을 찾는 중이었다.

"오늘도 오셨네."

"이젠 익숙하잖아. 훈련을 방해하시는 것도 아니고 혼자 놀다 가시니 신경 쓰지 마."

아이리우스가 처음 연무장을 찾았을 때 놀라던 기사들도 이제는 덤덤한 반응이었다. 원래 한두 번이나 충격적인 것이지 뭐든 계속된다면 적응하기 마련이었다.

하나 오늘의 아이리우스는 평소와 달랐다.

"뭐야. 대련을 하시는 거야?"

"상대가 누군데."

"헤이론인 것 같은데?"

"헤이론? 그 바람둥이 헤이론?"

여태까지처럼 혼자 시간을 보내는 대신, 아이리우스는 기사 하나를 대동해 연무장을 찾았다.

헤이론이란 이름의 기사는 기사들 사이에서 바람둥이로 유명한 이.

그가 기사단에서 잘린다면 십중십의 확률로 여자 때문일 거란 평가를 받는 이였다.

하지만 아이리우스는 알았다. 바람둥이라는 겉모습 아래 숨겨진 헤이론의 숨겨진 면모를.

"약속하신 겁니다. 아가씨."

"알겠어요. 헤이론 경도 약속 잊지 마세요."

"물론이죠."

두 사람이 대련을 준비했다. 진 사람이 상대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기로 한 내기 대련이었다.

두 사람은 각기 시녀 하나를 소개시켜 줄 것과 자신의 전속 기사가 될 것을 걸었다.

내기 품목간의 균형이 맞지 않았지만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고작 몇 개월 검을 수련한 귀족가의 영애와 정규 기사 간의 대련이었다.

"시작!"

내기가 걸린 대련인 만큼 기사단장이 대련을 감독했다.

그리고.

"...졌습니다."

대련의 결과는 놀라웠다.

아이리우스의 승리. 이견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승리였다. 각자 오러의 제한도 두지 않고 전력을 다해 임했으니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내 전속 기사이니 말을 놓겠어. 이견 있나?"

"없습니다."

이렇게 아이리우스는 미래의 소드마스터를 선점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에이나우디 공작가에 말도 안 되는 천재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 * *

나무로 가득한 세계가 펼쳐졌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빽빽하게 나무가 들어찬 압도적인 초록의 공간.

보통의 초록은 따뜻한 느낌을 주었지만, 이곳의 초록은 달랐다.

무성한 나무가 해를 가리며 초록이 암녹으로 바뀌는 공간.

이곳이 바로 대륙에서 가장 많은 나무가 존재하는 숲, 대수림이었다.

대수림에 도착한 알브족은 그러고도 한참을 걸었다. 루드는 그들의 뒤를 따르며 대수림을 관찰했다.

'이곳이 대수림인가.'

대단한 경관이었다. 나무만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대수림이 이 정도였군.'

전생에서도 대수림을 방문한 적은 없었다. 대수림을 찾을 용무도 딱히 없었고, 나중에 관심이 생겼을 땐 이미 불타 없어진 후였기 때문이다.

"우리 부족에 방문한 걸 환영하지."

한참을 걷던 와중, 해리슨의 인삿말과 함께 시계가 바뀌었다.

"결계인가."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부족의 입구.

방금 전까지의 풍경을 감안하면 마법이나 결계로 모습을 감춰 놓은 것일 텐데, 알브족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남은 건 결계밖에 없었다.

"빙고. 부족 주술사의 작품이지."

생각대로 부족의 모습을 숨긴 건 결계의 힘이었다.

입구의 모습을 감추는 것 외에도 동물을 물리고 사람의 인지를 어렵게 하는 효과를 갖춘 결계였다.

알브족의 부족은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바깥대륙의 다른 부족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는데.

유의미한 차이라면 부족이 있는 공간과 집의 형태가 다르단 정도뿐이었다.

"우리 왔어!"

"해리슨! 드디어 돌아왔구나!"

"잡혀간 사람들은?!"

구출대가 돌아오자 모든 이들이 나와 그들을 환영했다. 개중에는 잡혀갔던 이들이 무사히 돌아온 걸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한데 저자는 누구냐?"

"이따 설명해 줄게. 족장님과 장로님들은?"

"회의실에 계실 거다. 근데... 아니다. 일단 가 봐라."

부족원의 반응이 이상했지만 해리슨은 일단 루드와 함께 회의실을 찾아갔다.

잡혀간 이들을 무사히 구해 왔다는 보고와 루드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야 했다.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라니까요!"

"그들의 말을 어찌 믿고 받아들인단 말이냐!"

"그럼 부족원들이 계속 잡혀가는 꼴을 보고만 있자는 겁니까?!"

회의실에서는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누군가 찾아왔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격렬하게 논쟁 중이었다.

"돌아왔구나. 해리슨."

"예.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뒤늦게 해리슨을 발견한 족장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잠시 의견 충돌이 있었단다. 큰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잠시라기엔 벌써 사흘째지만 말이죠."

루드는 상황을 살폈다.

회의실의 인원은 양쪽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족장과 나이 많은 장로들이 한쪽, 비교적 젊은 장로들이 다른 한쪽을 형성했다.

"제국이 제안을 했다."

"윌슨!"

"해리슨도 경비대장이니 알 건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젊은 장로 하나가 해리슨에게 대립의 이유를 알려 줬다.

"제국에 속하라고 했다고요?"

얼마 전 제국의 사절단이 찾아와 제국민이 될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제국민이 되면 받을 수 있는 혜택과 보상 등을 자세히 설명한 사절단은 다시 찾아올 때 답을 달라며 떠나갔다 했다.

"제국민으로 인정하고 여타 제국민과 같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럼 노예 사냥꾼 문제는 자연스레 해결되지."

국가는 백성을 지킬 의무가 있다. 제국민이 되면 더 이상 노예 사냥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제국민인 알브족을 건드리는 것은 제국을 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 대신 제국의 영토에서 살아가라고 하더구나."

족장이 낮은 음색으로 말을 꺼냈다.

대수림을 벗어나 제국의 영토에서 살아갈 것.

제국이 제시한 조건이었다.

"어차피 대수림에서 살아가는 건 힘들지 않습니까. 자급자족도 한계가 있습니다."

"대수림은 우리 알브족의 혼과 영이 서린 곳일세. 그런 곳을 내팽개치자는 건가? 오랫동안 거래하던 상인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의 도움이 있으면 충분히 버틸 수 있네."

"말씀 잘하셨습니다. 그들은 상인이고, 그들이 하는 것은 거래입니다. 그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게 없어지는 순간 그들은 등 돌릴 겁니다. 설령! 그들이 돕는다 하더라도, 말씀대로 버티는 것에 불과하겠지요."

양측의 대립은 첨예했다.

해리슨은 혼란스러웠다.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고 왔더니 또 다른 난제가 놓여 있었다.

"...그걸 잃어버리지만 않았어도."

기세에서 밀렸음일까.

족장이 탄식하듯 읊조렸다.

과거의 알브족은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강했고, 숲에서는 누구도 따를 자 없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노예 사냥꾼을 걱정 할 이유도, 때문에 제국의 아래로 들어갈 것을 고민할 이유도 없던 과거의 알브족이었다.

그랬던 알브족이 이리 된 것은 모두 선조들의 유산을 잃어버린 탓이었다.

그로인해 반쪽짜리 심법만을 익혔고, 심법 외에도 여러 가지 비전을 소실하고 말았다.

'전설 속의 그것만 있었다면... 아니, 하다못해 비전심법만 되찾아도 이런 고민 따윈 하지 않았을 것을.'

족장이 무력함을 느끼고 회한에 잠길 무렵.

"백날 싸워 봐야 답이 안 나올 거 같은데."

루드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자는?"

"안 그래도 설명드리려 했는데."

양측의 대립에 끼어든 루드는 자신을 소개하려는 해리슨을 한 손을 들어 저지하고 마저 말을 이었다.

"노예 사냥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대수림 안에서의 생활도 여유롭게 이어 갈 수 있다면, 그땐 어떻게 할 겁니까? 그때도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겁니까?"

젊은 장로들을 바라보며 하는 질문.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루드의 질문에 반감을 드러내면서 대답했다.

"그건 아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제국의 밑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지."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지만 그들도 알브족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부족의 안위를 위해서였지 제국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부족의 장로가 아닌가. 그들 모두 진심으로 부족을 위했다.

"그렇다면 됐습니다."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없다. 계획했던 대로 알브족 선대의 유산을 되찾아 주면 될 일이었다.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해결하겠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자네는 누군가?"

족장은 루드의 정체와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한 방법에 관심을 보였다.

"알브족이 이리 된 이유가 뭡니까."

"이리 된 이유가 무어냐니, 그건."

"선조의 유산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죠."

회의실에 있는 모두의 안색이 굳었다. 어찌 외지인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선조의 유산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이곳에 자리한 이들 정도만 알고 있는 정보였다.

"잃어버린 선조의 유산. 되찾아 드리겠습니다."

루드는 단언했다. 그것을 되찾아 돌려주겠노라고.

"대신 무드리와 휴이, 두 사람만 빌려주시죠."

족장과 장로들은 당황했다.

생전 처음 본 외지인이 부족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도 놀라운데, 그것을 되찾아 주겠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침착하게 대응하고자 했다.

"...일단 나가 주겠나. 지금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일세."

고개를 끄덕인 루드는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혼란스러워하리란 건 예상한 바였다.

루드가 사라진 회의실. 모두의 시선이 해리슨을 향했다. 시선의 의미는 명확했다.

"처음부터 설명해 드리죠."

해리슨은 루드에 관해 설명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 그가 줬던 도움. 소드마스터를 만났던 일과 이곳까지 오며 그에 대해 느낀 점.

자신이 보고 느낀 모든 것을 전달한 해리슨은 족장과 장로들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도움을 받고 소드마스터의 언질이 있었다지만 외부인을 부족에 들인 건 명백한 자신의 독단이었다. 어떠한 처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군."

"그러게 말이야.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도 그렇고, 소드마스터를 해결했다는 것도 그렇고. 꼭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알고 있던 것 같지 않나."

"무드리와 휴이를 콕 집어 말한 것도 의심스럽네."

무드리는 수해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이었다. 휴이는 그런 무드리가 친자식처럼 아끼는 아이였고.

그 사실을 어찌 알았는지 두 사람을 정확히 지목한 것도 의심스러운 대목이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다시금 모두의 시선이 해리슨을 향했다.

그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울 수 없었지만, 보름가량을 그와 함께한 해리슨은 어떤 생각일까.

"솔직히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심중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역시...."

"하지만."

해리슨은 지난 보름을 떠올렸다. 강렬했던 첫 만남부터 대수림으로 이동하며 보여 준 모습이 순차적으로 떠올랐다.

"알브족을 돕고자 한다는 그의 마음은 진심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벌을 각오하면서까지 부족으로 데려온 것이 아닌가.

"그런가."

족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는 해리슨은 누구보다 알브족을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부족원 모두가 그렇다지만 부족원들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특히 강했고, 그를 위해서 언제나 냉정을 유지하는 해리슨이었다.

그런 해리슨이 저리 말하며 그를 믿는다고 한다.

"나는 한번 믿어 봐도 괜찮을 것 같네."

"족장님!"

"물론 무드리와 휴이의 생각을 물어봐야겠지만, 그들이 동의한다면 말릴 생각은 없네."

"나도 마찬가지야. 외지인을 믿지는 않지만 그를 데려온 해리슨은 믿을 수 있지."

"윌슨 자네마저!"

약간의 반발이 있었지만 합의는 빨랐다.

당사자인 무드리와 휴이만 괜찮다면 루드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두자는 것이었다.

"루드와 함께 수해에 들어가라고요?"

"강권이 아니다. 의사를 물어보는 거지."

무드리가 머뭇거렸다.

루드가 믿을 만한 인물이라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수해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갈게요."

반면 휴이는 고민하지 않았다.

루드와 가장 많은 교감을 쌓은 휴이였고, 수해로 가는 목적을 들은 이상 빠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선조의 유산을 찾으면 부족이 다시 강해질 수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갈 이유는 충분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결국 무드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휴이의 모습을 보아하니 루드와 둘이서라도 떠날 기세였다.

둘 다 수해에 대해선 무지할 터. 루드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나 수해는 강함과 약함의 척도만으로 구분 지을 수 없는 곳이었다.

"됐군."

순식간에 모든 일이 결정됐다.

세 사람은 수해에 가기 전, 몸에 쌓인 모든 피로를 해소하는 데 전념했다. 그 기간 동안은 대련도 하지 않았다. 간간히 논검을 펼칠 뿐이었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 무드리는 매일같이 루드와 휴이를 찾아 수해에 관한 정보를 전달했다.

수해는 대수림과도 또 다른 곳. 생태계가 다르고, 자연환경이 달랐으며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수해였다.

매일 같이 모인 세 사람은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수해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여겨졌을 때.

"결정은 하셨습니까?"

제국의 사절단과.

"실례합니다."

성국의 삼인방이 알브족을 찾아왔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28화

극에 달한 것들은 서로 통하는 게 있다 했던가.

끝도 없이 펼쳐진 나무들은 바다를 연상케 했다.

대수림의 중심부는 수해樹海라고 불렸으니 혼자만의 감상은 아닐 터였다.

'특무대가 대수림엔 무슨 볼일일까요.'

대수림에 관한 짧은 감상을 마친 리카엘이 생각했다. 미간에 주름이 졌다.

칼리텍에서 특무대를 마주친 후, 그녀의 일행은 은밀히 특무대를 따라나섰다.

제국 특무대가 맡은 임무는 제국의 중요 임무인 바, 그들의 임무가 무엇인지만 알아내도 큰 소득이었다.

거기에 특무대의 임무 내용과 결과까지 본국에 전달하면 확실하게 공로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제 안위와 평안한 노후를 보장받기 위해선 많은 공로가 필요했다.

리카엘은 성녀 후보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공을 세우고자 노력했다.

성녀가 되지 못한 후보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후보에서 성녀가 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는 리카엘이었다.

'어떡하죠.'

특무대의 목적지가 대수림이란 것만 해도 주요한 정보였다.

하지만 왜 대수림을 찾았는지, 그 안에서 뭘 했는지, 어떻게 됐는지와 비교하자면 가치가 떨어지는 건 분명했다.

칼리텍에서 알아낸 것만으로도 공을 인정받긴 충분하겠지만 기회가 왔을 때 더 큰 공을 세워 두고 싶었다.

고민이 길어졌다.

하나 길어져서 좋을 것 없는 고민이었다.

특무대는 이미 대수림으로 들어갔다. 계속 쫓을 건지 말건지 빨리 결단해야 했다.

결국 리카엘이 결단했다.

"계속 따라가죠."

"리카엘 님."

"여기까지 온 이상 확실한 소득을 가져가야 합니다."

요렌테를 죽인 흑마법사를 포기하고 특무대를 뒤쫓았다. 여기서 멈춘다면 가치의 균형이 맞지 않았다.

"너무 멀어지기 전에 빨리 움직이죠."

리카엘은 대수림의 악명을 들은 적 있었다.

어지간한 이들은 바로 길을 잃고 마는 미로 같은 공간.

물론 자신들이 어지간한 이들은 아니었지만 낯선 환경에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특무대가 망설임 없이 들어간 걸 보면 목적지까지의 루트가 확보돼 있을 터. 그들이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게 가장 확실하고 편한 방법이었다.

대수림에 들어왔음에도 특무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이동한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리카엘 일행은 흔적을 좇아 빠르게 특무대의 뒤를 쫓았다.

"으...."

이동하던 와중, 리카엘이 휘청거렸다. 빠르게 움직이다 발을 잘못 디딘 것이다.

"리카엘 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최근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특무대는 그 특성상 장거리 이동과 야영에 익숙했지만 리카엘 일행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나 거리가 벌어지지 않게 조절하면서 미행을 눈치 채지 못하게 따라붙는 건 체력과 심력을 이중으로 잡아먹는 일.

게다가 최근 리카엘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체력이 떨어진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괜찮습니다."

피가로의 부축을 거절한 리카엘은 다시금 특무대의 흔적을 뒤쫓았다.

'확실히 피곤하긴 하군요.'

괜찮다고 하긴 했으나 사실 괜찮지 않다는 건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잠만 제대로 자도 좀 나을 텐데 말이죠.'

특무대를 쫓아 칼리텍을 벗어난 첫날부터 꾸기 시작한 꿈.

잠에 들 때면 어김없이 꾸는 그 꿈은 내용이 이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심한 화상의 여인만 등장했는데, 이제는 여러 인물이 나타났다.

'정말 계시인 걸까요.'

처음 꿈을 꿨을 때 했던 생각.

혹시 꿈을 통해 계시가 내려온 건 아닐까 했던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꿈이 거듭될수록 그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같은 이들이 나오며 내용이 연속되는 꿈을, 다른 누구도 아닌 성녀 후보가 꾸고 있다면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것이었다.

'그녀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길.'

꿈을 생각하자 자연스레 꿈속의 여인이 떠올랐다.

이유 모를 친애가 느껴지는 여인. 남몰래 그녀의 평안을 소망한 리카엘은 정신을 다잡았다.

대수림을 통해 어디론가 갈 수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었다. 특무대의 목적지는 대수림 내 어딘가가 분명했다.

여정의 종착이 머지않았다.

그 판단은 정확했다. 리카엘 일행은 곧 알브족의 부족에 도착했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아마도 알브족과 제국일 양측이 대화를 나누는 현장.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특무대의 기척도 느껴졌다.

'알브족이 목적이었던 건가요.'

소문이 있기는 했다. 제국이 바깥대륙을 향해 칼을 빼들 날이 머지않았다는.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의 현장은 그 사전 작업이 진행되는 모습일 터였다.

"실례합니다."

리카엘은 양측의 대화에 끼어들며 존재감을 내비쳤다.

"...무기를 치워 주시죠."

그와 거의 동시, 피가로와 로이튼이 리카엘 앞을 가로막았다.

어느새 알브족 전사들이 곳곳에서 활을 겨누고 있었다.

제국의 사절단이 찾아왔을 때부터 경계 태세에 돌입한 그들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은 그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기 충분했다.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적대할 의사는 없으니 무기를 거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리카엘은 얼굴을 가린 후드를 내리며 성력을 내비쳤다.

"성직자인가."

"예. 미천한 몸이지만 신의 가르침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활을 겨눴던 이들이 해리슨을 바라봤다. 잠시 고민하던 해리슨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가 활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기본적으로 성직자는 어디서든 환영받는 존재였다. 성력을 피력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성직자께서 이곳엔 무슨 일로?"

족장과 대화를 나누던 사절단의 대표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냐 말 거냐 하는 와중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그들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이 깨졌다.

"이게 다 신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대수림에서 길을 헤맨 많은 분들을 위해 기도드리고자 찾았는데, 저희도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한데 이리 사람들이 있는 곳에 발이 닿았으니 모두 그분께서 인도하심이지요."

피가로가 허허로이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곳에서 조금 쉬고 바깥으로 나갈 길을 안내받을 수 있을런지요? 꼭 답례하겠습니다. 신분이 신분인지라 물질적인 것은 아닐지라도요."

노년의 성직자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하자 뭐라 더 쏘아붙일 수 없었다.

"흠!"

신경질적으로 콧바람을 뿜어낸 사절단의 대표는 족장과 피가로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통보하듯 말했다.

"쉴 곳을 내주시오. 저들과 용무가 있을 듯하니 자리를 비켜 드리겠소. 대신 이따 찾아왔을 때는 답이 나왔길 바라오."

"그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 아직 우리끼리도 이야기를 다 나누지 못했거든."

"최대한 빨리 부탁드리오. 이래봬도 바쁜 몸인지라."

"노력해 보겠네."

해리슨을 시켜 사절단에게 쉴 곳을 안내하게 한 족장은 피가로를 바라봤다.

"그래. 쉴 곳이 필요하다 했소?"

"예. 베풀어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성직자들과 연을 만들어 나쁠 건 없었다. 이곳까지 찾아올 정도로 실력 있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부족의 위치가 외부인에게 드러난 건 반갑지 않았지만 성직자라면 그나마 나았다.

"따라오시오. 그대들도 쉴 곳을 안내해 주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특무대의 흔적을 살피며 족장의 뒤를 따르던 때. 리카엘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저들은?'

시선을 사로잡은 건 세 명의 남자였다.

여정을 떠나려는 건지 그들 모두 짐 가방을 들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들이 낯익다는 것이었다.

'꿈속의 인물들!'

근래 계속해서 꾸고 있는 꿈. 그 꿈에 나온 이들이었다.

여인만 등장하던 처음의 꿈은 이젠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는 꿈으로 변모해 있었다.

물론 꿈의 초점은 항상 화상을 입은 여인이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 주위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여인이 느낀 감정과 생각 또한 고스란히 리카엘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한데 이곳에서 여인의 주변인과 닮은 이를 본 것이다. 그것도 둘이나!

"리카엘 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갑작스레 굳은 리카엘의 모습에 피가로가 걱정스런 맘을 감추지 못했다.

최근 급격한 컨디션 난조를 보이던 리카엘이 아닌가. 대수림에 들어올 때만 해도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고.

"아, 아닙니다."

서둘러 대답했지만 리카엘의 시선은 여전히 셋에 닿아있었다.

그때, 셋 중 하나의 시선이 리카엘과 마주했다.

'!!!'

리카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 짧은 새.

순간이나마 눈이 마주치고 서로의 시선이 교차한 순간, 리카엘은 확신했다.

저 남자가 꿈속에 나왔던 인물이란 것을.

꿈속에서보다 훨씬 앳된 모습이었지만 분명 그 사람이었다.

머리카락과 눈동자도 그렇고, 무엇보다 분위기가 똑같았다.

꿈에서 받은 느낌 그대로의 분위기. 동일 인물이 확실했다.

'정말 계시였던 걸까요.'

꿈속의 등장인물들이 실존하는 인물들인 거라면, 이건 정말 계시가 아닐까?

자신이 꾼 꿈이 계시라면, 그 꿈을 완전히 해석할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고작해야 성녀 후보가 아니었다. 오롯한 성녀였지.

'성녀....'

거기서 리카엘은 결심했다.

"따라오세요."

"리카엘 님?"

리카엘이 세 사람에게 다가갔다. 두 명의 성기사는 리카엘의 돌발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그 뒤를 따랐다.

"안녕하세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여정에 동행해도 될까요?"

"그...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사절단의 압박과 예정에 없던 성직자들의 방문.

혼란스러워진 틈을 노려 조용히 수해로 향하던 일행은 당황했다.

"우리는 근방에 먹을 것과 약초를 채집하러 가는 길이야. 갑자기 입이 늘어서 말이지."

무드리가 빠르게 나서서 대처했지만 리카엘은 단호했다.

"저희 때문에 나서는 것이었군요. 그렇다면 더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작은 손이나마 보태겠습니다."

"괜히 따라오셨다가 길을 잃거나 하는 게 더 피해야. 편히 쉬고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거절의 의사가 강해질수록 리카엘은 이들에게 무언가가 있음을 확신했다.

애당초 인근에서 채집을 할 거라면 저 정도의 짐 가방은 메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무기도 패용하고 있지 않은가.

단순한 채집이 목적이 아니란 의미였다.

완강한 리카엘의 의사에 무드리가 루드를 바라봤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루드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할 수 있는 건?"

"저는 상처와 독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뒤에 두 분은 여러분을 안전하게 지켜 줄 테고요."

"리카엘 님!"

뒤에서 상황을 파악하던 피가로와 로이튼이 기함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신원을 알 수 없는 이들과 함께하려는 모양이었다.

"...좋다. 따라오고 싶다면 따라오도록."

수락의 말에 리카엘이 감사 인사를 표하려던 때. 끝나지 않은 루드의 말이 이어졌다.

"단, 동행할 수 있는 건 너 혼자다."

"예?"

"말도 안 되는! 들을 가치도 없습니다."

"이건 로이튼의 말이 맞습니다. 정체도 신원도 알 수 없는 이들입니다. 리카엘님 혼자만 가능하단 건 불손하게밖에 볼 수 없습니다."

성기사들의 반발은 극렬했다. 리카엘도 그들이 걱정하는 바를 알았다.

자신의 신분은 성녀 후보, 고작 후보라지만 앞에 성녀가 붙는다면 말은 달랐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건 자신만의 일이 아니었다.

"굳이 따라오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리 통보한 루드는 곧장 몸을 돌렸다. 고민할 시간을 기다려 줄 이유는 없었다.

'어떻게 하죠.'

여러 생각이 오갔다.

눈앞의 이를 믿을 수 있는가. 혼자라도 동행하는 게 옳은 일인가. 여태 쫓아온 특무대는 어떻게 되는가.

그러나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이들의 앞에 설 때부터, 그녀의 마음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좋습니다. 혼자라도 따라가겠습니다."

"리카엘 님!"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리카엘은 두 성기사와 차분히 눈을 마주쳤다. 그들의 걱정은 알고 있지만, 그녀에게도 이들을 따라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두 사람을 안심시킨 리카엘이 앞서가는 세 사람에게 따라붙었다.

예정에 없던 동행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29화

일행은 대수림을 걸었다.

"진짜요?"

"네. 정말이랍니다."

겉보기와는 다른 친화력이 있었는지, 리카엘은 어느새 휴이와 한가롭게 떠들고 있었다.

선두에 선 무드리는 은은한 미소를 띠운 채 그녀와 휴이의 대화를 듣고 있었고.

루드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나쁠 건 없지.'

예정엔 없었지만 함께 수해에 가게 된 상황. 가벼운 대화는 긴장을 완화시켜 주니, 어차피 함께라면 최대한 시너지를 내는 게 좋았다.

'그녀는 존재는 확실히 도움이 된다.'

수해는 일반적이지 않은 생태계로 바깥과는 다른 동식물이 존재했다. 언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

그런 곳에서 중독이나 부상에 대한 대처가 되는 건 전력을 보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녀가 해 줘야 할 역할은 그뿐만이 아니지.'

루드는 리카엘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뒀다.

일이 생각대로 풀린다면, 그녀는 마지막 상황에서 중요한 패가 될 것이었다.

다만 리카엘의 합류가 꼭 긍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군.'

자신과 휴이, 무드리. 이렇게 셋으로 상정했던 수해의 여정이었다.

인원이 추가됨에 따라 간단하게는 식량 배급부터 복잡하게는 미리 맞춰 놓은 긴급 상황에서의 동선이나 판단까지, 고려해야 할 것들이 생겼다.

하지만 이 정도는 다시 조율하면 되는 일.

리카엘의 합류로 가장 곤란해진 건 다른 것이었다.

'흑마법은 봉인이다.'

수해에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최악의 경우 무드리와 휴이 앞에선 흑마법까지도 꺼내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리카엘이 합류한 지금, 흑마법은 무조건적으로 봉인이었다.

리카엘은 고위 성직자였다. 소수의 인원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었다.

그 앞에서 흑마법을 꺼내드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그녀를 죽여 입을 막을 게 아니라면 흑마법은 사용하면 안 됐다.

'그래도 잃은 것보다는 얻을 게 많다.'

그럼에도 손해보다는 이득이 많다는 점이 리카엘의 합류를 승낙한 이유였다.

그녀는 분명 도움이 될 부분이 많았고, 그녀를 잘 컨트롤 한다면 생각하고 있는 걸 보다 쉽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수해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풀렸을 무렵. 무드리가 안색을 굳히며 멈춰 섰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수해의 영역이었다.

각오는 했지만 앞에 도착하니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처음 느껴 보는 기운입니다."

리카엘은 수해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느꼈다.

난해한 기운이었다.

성직자인 그녀는 생명의 기운에 익숙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죽음의 기운에도 익숙했다.

본디 두 기운은 혼재할 수 없는 기운이었다. 생명력이 충만할수록 죽음의 기운이 옅었고 죽음의 기운이 강할수록 생명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해에서 느껴지는 이 기운은.

"마치 생명과 죽음이 뒤엉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상식을 깨부수는 것 같았다.

"잘 말했소. 그 말이 맞지. 수해는 그런 곳이거든."

리카엘의 말처럼 수해는 생명과 죽음이 뒤엉킨 곳이었다.

갖은 식생이 자라나는 생명과, 끊임없이 썩고 사라지는 죽음이 공존하는 곳.

수해는 그런 곳이었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게. 서로 거리가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혹시 일행을 잃어버리거든 되도록 그 자리에 가만히 있게나. 괜히 움직였다간 영영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

수해의 대부분엔 빛이 없었다. 대수림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어둠의 질이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무드리의 경고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의 리더는 루드였지만 수해를 가장 잘 아는 건 무드리였다. 누구도 무드리의 발언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미리 말했던 대로 서로 연결하지."

배낭에서 긴 끈을 꺼낸 무드리는 끈으로 모두의 손목을 연결했다.

이동 중 일행이 흩어지는 걸 막기 위한 조치였다.

'끊어지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만.'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해결법이 될 순 없었다.

중요한 건 끈 없이도 서로가 서로의 존재와 거리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끈은 수해에 익숙하기 전까지 그 기능을 보조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은 적응하는 게 우선이겠군."

"자네 말이 맞아."

끈으로 서로를 연결한 네 사람은 본격적인 수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확보되던 시야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앞이 안 보이는데."

"그러니까 빨리 적응해야 한다."

네 사람은 끈을 통해 서로를 의식하며 조금씩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척이나 더딘 속도였다. 바로 앞도 확인하기 어려운 터라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를 이동했을까.

리카엘이 무언가를 떠올렸다. 이걸 왜 이제 떠올렸나 싶은 것이었다.

"빛이 있으면 시야를 확보할 수 있지 않나요?"

"신성 마법을 쓸 생각인가?"

"네. 홀리 라이트라면 근방을 비출 수 있을 겁니다."

"하지 말게."

하지만 루드와 무드리는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빛을 통해 시야를 확보할 거였다면 불을 가져왔을 거다."

"그러지 않았다는 건...."

"그래선 안 될 이유가 있다는 거지."

루드의 말에 무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수해에 들어왔던 적이 있지."

무드리는 과거를 떠올렸다.

당시 뜻이 맞는 친구들과 수해를 찾았었다. 점차 어려워지는 부족의 환경에 수해에서 반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절친한 친구들을 잃었다. 그 대신 얻은 건 수해의 무서움과 일말의 정보뿐이었다.

"이곳에 살아 숨쉬는 게 우리뿐일 것 같나?"

"아!"

리카엘은 곧장 이해했다.

이곳에도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있다면 빛은 위험했다. 수해의 어둠에 익숙한 녀석들은 갑자기 나타난 강렬한 빛을 반기지 않을 터였다.

"결국 아까 루드가 말했듯 빨리 적응하는 게 중요하다. 그 외의 방법은 없어."

아무리 빛이 없다 해도 충분한 암순응을 거치면 어느 정도의 시야 확보는 가능했다. 거기서부턴 상황에 따라 마력으로 안력을 강화하거나 보조하는 형태로 대처해야 했다.

느린 속도로 움직인 일행이 마침내 수해의 어둠에 적응해 끈을 풀었을 무렵.

바스락-.

그들의 것이 아닌 소리가 들렸다. 모두 발걸음을 멈췄다.

빛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수해에는 바람도 없었다. 때문에 수해에서의 모든 소리는 생명체의 움직임에 의한 것.

숨을 죽이고 멈춰 선 일행의 앞에 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땃쥐군.'

땃쥐는 산이나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녀석은 흔한 땃쥐가 아니었다.

체고가 사람만 한 땃쥐는 일반적이지 않을 테니까.

땃쥐가 혼자임을 파악한 루드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끼익-!!

어느새 목 일부가 길게 갈라진 땃쥐가 단말마와 함께 쓰러졌다.

"고생했네."

"가죽이 많이 질기다."

순식간에 땃쥐를 죽이고 복귀한 루드는 짧은 소감을 밝혔다.

간단하게 질기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단순히 질긴 정도가 아니었다.

"오러를 담지 않으면 뚫리지 않을 거다."

"근데 난 검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

"평소 하던 대로 해. 녀석들도 생물이다. 내부를 진탕시키면 쓰러지는 건 마찬가지지."

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드리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없는 친구들이 떠올랐다.

그들도 무기에 오러를 담을 수 있는 실력자였지만 다른 알브족들처럼 활을 썼다. 그게 문제였다. 화살을 통한 관통상으로는 수해의 생물을 상대하기 버거웠다.

하지만 루드와 휴이는 다르다.

검과 주먹. 충분히 수해의 생물을 상대할 수 있었고, 이 둘이라면 충분히 우위를 점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번엔.'

정말 잃어버린 선조의 유산을 찾을지도 몰랐다.

"휴이, 녀석을 뒤집어 봐라."

"응? 왜?"

"이곳에서 질문 하나하나에 대답해 줄 여유는 없다."

"쳇. 알겠다고."

수해라는 위험한 환경 때문일까.

루드는 여태까지 보여 주던 모습과 달랐다. 날카롭고 무엇이든 벨 준비가 돼 있는 모습.

날을 벼린 검 같았다.

뒤집힌 땃쥐의 배가 드러나자 루드는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냈다.

"비상시에 먹을 수 있다. 식량을 챙겨 오긴 했으나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알고들은 있어라."

루드는 설명을 이어갔다. 모두는 의아했으나 잠자코 설명을 들었다.

"수해에 있는 대부분의 생물은 독을 품고 있다. 독은 공격 수단으로도 쓰이지만 동시에 방어 수단이기도 하지."

루드의 검이 땃쥐의 살을 쑤셨다.

"바깥이었다면 충분히 구워먹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이곳의 녀석들은 불가능하다."

전생의 휴이가 알려 준 사실이었다. 뭣 모르고 동물을 잡아먹었다가 몇날 며칠을 고생했다고.

당장 죽을 정도의 극독은 아닐지라도 수해에서는 컨디션이 저하되는 것만으로도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정말 먹을 게 없는 게 아니고서야 먹지 않는 게 좋았다.

휴이가 알려 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해에서 먹을 수 있는 것들도 알려 줬다.

"다만 대부분의 내장에는 독성이 없지."

내장에는 영양소도 풍부하고 열량도 충분했다. 식량으로 쓰기 적합했으니 독성이 있는 고기를 먹을 이유가 없었다.

으적.

루드는 땃쥐의 심장을 그대로 베어 물었다.

"으...."

리카엘이 인상을 찡그리며 신음했다.

방금까지 살아 있던 생물의 심장을 먹다니.

심지어 익히지도 않은 날것의 상태였다.

'꿈에서 나온 게 이런 야만적인 남자가 맞을까요?'

맞단 걸 확신하지만 어쩐지 부정하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지?"

"친구가 알려 줬다."

"그 친구가 누구인지 궁금해지는군. 대체 누구이기에 수해에 대해 그리 잘 알고 있는지 말이야."

무드리가 전생의 휴이에 관심을 드러내는 사이, 정신을 차린 리카엘이 질문을 던졌다.

"독성을 제거하고 먹는 방법은요?"

"가능은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다."

"어째서죠?"

"큐어 마법을 생각한 거겠지?"

"네."

리카엘은 루드를 바라봤다.

아까도 느꼈지만 신성 마법에 대해 꽤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홀리 라이트도 그렇고 큐어도 그렇고, 명칭과 효능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묻지. 신성력은 무한한가?"

"아뇨."

"그게 답이다."

루드의 의사는 확고했다.

"언제 어떤 상황이 생길지 모르는데 고작 그런 데 힘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고작 그런 거라뇨."

리카엘에게 살을 먹냐 내장을 먹냐의 차이는 고작이 아니었다.

하지만 루드는 단호했다.

"살을 먹는다 해도 어차피 구워 먹지 못한다. 눈 감고 먹으면 먹고 있는 게 내장인지 살인지도 구별 못할 거다."

"아."

그러고 보면 그랬다. 이곳에서는 불을 사용할 수 없었다. 불이 없으니 무언가를 익혀 먹을 수도 없었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리카엘의 반발이 마무리됐을 무렵.

"생각보다 먹을 만한데?"

휴이는 어느새 땃쥐의 내장 하나를 들고 맛보고 있었다.

대단한 적응력이었다.

루드도 전생의 기억과 경험 덕분에 먹을 수 있는 거였지, 처음 먹었을 땐 리카엘과 마찬가지로 거부감이 들었었다.

한데 휴이는 전생의 기억도 경험도 없는 상태로 아무렇지 않게 땃쥐의 내장을 먹고 있었다.

"이제 좀 이해가 되는군. 자네가 선조의 유산을 찾아올 것을 자신한 게."

친구가 알려 줬다는 말. 그 말을 들은 무드리는 모든 의문이 풀렸다.

어째서 수해에서 유산을 찾아올 것을 자신했는가.

이유는 간단했다.

"알고 있는 겐가. 유산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나 또한 말로만 전해 들은 거라."

그 자신감의 근원은 명확했다. 정보였다.

"그곳이 어디지?"

"수해 내부에 빛이 들어오는 곳을 알고 있나?"

"빛?"

대수림만 해도 햇빛이 직접적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하물며 수해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루드는 확실히 기억했다. 과거 휴이가 선조의 유산을 발견하고, 나아가 신비를 찾은 곳을 설명하던 말을.

"빛이 쏟아지고 바람이 불며 향긋한 꽃내음이 이는 곳. 그곳에 잃어버린 선대의 유산이 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3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