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0화
흑마법사 요렌테가 마을을 찾는 이유는 흑음의 정수를 가져가기 위함이었다.
생각해 보면 요렌테가 흑음의 정수로 실험을 시작했던 것도 마을을 방문한 뒤였다.
'흑음의 정수, 이건 대체.'
강대한 힘과 부작용을 동시에 선사하는 기이한 힘. 연원을 알 수 없고 섭리를 벗어난 힘을 선사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신비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흑음의 정수에 대한 의문은 지난 생부터 이어지는 것이었다.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알게 된 것은 고작 두 가지.
하나는 흑음의 정수가 하나이되, 하나가 아니란 사실.
설산의 눈물이나 비명의 결정 등 흑음의 정수는 대륙 곳곳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얼핏 신비와 비슷하지만 신비가 신비라는 이름 아래 제각기 다른 힘을 품은 것에 반해, 흑음의 정수는 여러 이름으로 불렸지만 같은 힘을 품고 있었다.
또 하나는 제국이 흑음의 정수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
제국이 정수를 모으는 구체적인 이유는 알지 못했으나 정수가 선사하는 힘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루드는 새로이 얻은 정보들을 조합해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설. 전설에서 금기시한 산. 그 안에 존재한 신비와 의미심장한 벽화. 마찬가지로 벽화가 그려진 전설이 이어진 우물. 그 아래 깊은 곳에 묻혀있던 정수.'
이 연관성을 단순한 우연이라 봐야 할까.
그러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과거엔 벽화를 발견하지 못했고 요렌테가 정수를 얻은 과정도 몰랐기에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의 전설과 산, 신비와 정수, 이 모든 게 사슬처럼 연결돼 있다는 인상이 너무나 강렬했다.
'신비와 정수. 이 두 가지가 연관돼 있다....'
비약적인 생각인가?
아니, 그렇지 않았다. 모든 부분까지는 아닐지라도 어느 한 구석은 분명 연관돼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아니다."
정수에 대한 고찰, 나아가 신비와의 연결성을 찾는 건 흥미로운 일이었으나 당장은 다른 일이 우선이었다.
우물 밖으로 나온 루드는 내부에 자리 잡은 흑마력을 느끼며 마을 입구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휴고의 이름으로 부탁한 것들이 마련돼 있을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남겨 둘 이유가 없어졌군.'
본디 마을 사람들을 남겨 두려 했던 건 혹 그들의 존재가 요렌테의 방문에 변수로 작용할까 우려해서였다.
상단을 상대할 때 구태여 귀찮은 방법을 취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요렌테가 마을을 찾는 이유가 확실해진 이 순간, 더 이상 마을 사람들은 변수가 아니었다.
'죽일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살인멸구였다.
루드는 자신의 정보가 바깥으로 새 나가는 걸 원치 않았고,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을 사람들이 꼭 죽어야만 하나 싶기도 했다.
그들의 행태는 분명 어린 자신에게 잔인하고 잔혹했지만 무조건적인 악행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물론 칼럼은 예외지만.'
그에겐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몰라도 칼럼의 처우만큼은 단언할 수 있었다.
칼럼은 죽는다. 그 과정도 좋지는 않을 것이다.
"왔구나! 어서 가자꾸나. 늦어서 좋을 게 없잖니."
마을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상행단의 보급을 위해 여러 물품들을 짊어진 채였다.
'...그게 좋겠네.'
때마침 생각 정리가 끝났다. 마을 사람들을 어떻게 할지 결정한 것이다.
칼럼의 채근에 루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서 가요."
* * *
일주일이 지났다. 마을 사람들은 상행단의 보급을 위해 첫날 이후로도 두 차례 루드의 집을 방문했다.
"루드야! 아저씨 왔다. 물 좀 줄래?"
짐을 내려놓은 칼럼이 큰 소리로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으니 아직 산에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결국 칼럼은 직접 물을 찾아 안쪽으로 들어섰다.
'저번에 보니까 이쯤 있을 거 같던데.'
마당에 들어선 칼럼이 물을 찾아 시선을 옮겼을 때였다.
"으하아악!!"
"왜 소리를 지르, 으... 으으아아아!!! 이게 뭐야!"
비명과 함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칼럼의 비명 소리에 따라 들어온 아소바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앞에 펼쳐진 건 시체였다.
한 눈에 봐도 끔찍한 일을 당한 시체의 밑에는 피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루드?"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은 칼럼이 조심스레 시체에 다가섰다.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 정도가 심했다. 키가 다르지 않았다면 가까이에서도 못 알아봤을 것이었다.
시체에 다가서서 알게 된 건 시체의 신원만이 아니었다. 미처 보지 못했던 시체 너머의 핏자국, 그 끝에도 몇 개의 시체가 더 있었다.
"이게 도대체...."
"모, 몬스터야."
크게 숨을 삼킨 칼럼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블린보다 더한 몬스터가 있었던 거라고!!"
고블린은 분명 영악하고 잔인한 존재였으나 시체를 이렇게 만들기엔 힘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작정하고 나선 상행단이 고작 고블린 따위에게 당했을 리도 없었다.
따라서 결론은 하나였다. 상행단과 루드는 고블린이 아닌 무언가에 당한 것이다.
전혀 상정하지 못했던 무언가에!
"다, 당장 마을을 떠나야 해."
칼럼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산'에 고블린보다 위험한 무언가가 있다. 심지어 산을 내려와 이곳까지 왔었다.
'한시라도 빨리 흔적을 지워야 한다.'
몬스터의 생태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녀석들도 생물이다.
동물과 비슷한 선상에 놓고 본다면 후각이 뛰어날 확률이 높았다. 어떻게든 마을로 이어진 냄새와 흔적을 지워야 했다.
"아소바. 불을 구해야 돼!"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보다 이건 대체 무슨 일이고!"
보급을 위해 칼럼과 함께 루드의 집을 찾은 아소바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예고 없이 맞닥뜨린 끔찍한 모습은 자꾸만 다리의 힘을 앗아 갔다.
움직이는 법을 잊은 아소바를 대신해 불을 구해 온 칼럼은 거침없이 집 곳곳에 불을 놨다. 건조한 날씨와 목재로 만들어진 집은 곧 큰 불을 이뤄 냈다.
불이 붙은 걸 확인한 칼럼은 아소바의 뺨을 때려 그의 정신을 일깨운 뒤 함께 루드의 집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가끔 놀랍다니까."
불타는 집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 위. 루드는 칼럼과 아소바의 모습을 지켜보다 감탄했다.
확실히 칼럼은 비상한 면이 있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빠르게 손익을 계산하고 정확히 판단하며,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력까지 갖췄다.
...그러니 자신을 상행단에 팔아넘긴 것이겠지만.
"미리 빼 두길 잘했네."
집에 불을 지르는 상황을 대비해 필요한 짐은 전부 빼놓은 상태였다.
불을 지른다는 판단을 할 수 있을까도 싶었으나 칼럼은 보란 듯이 불을 지르고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집을 보며 루드는 작은 상념에 잠겼다.
"슬슬 정리할 때가 됐지."
아버지가 지은 집이 불타며 가족의 삶이 담겼던 공간이 재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기억 한 구석에 좋았던 어느 한때 정도로 추억될 정도에 불과해졌으니까.
중요한 건 앞으로 자신이 갈 길과 그 길을 지나가는 걸음.
'마을 사람들과의 묵은 연을 정리한다.'
죽이기엔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고, 마냥 살려 두기엔 더 찜찜한 상황.
루드는 그 상황에서 정보를 통제하며 그간 받은 것에 대해 적절히 보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냈다. 지금 이것이 바로 그 방안이었다.
상행단과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고 사람들을 마을에서 쫓아낸다.
자신이 죽은 줄 알 테니 정보가 유출될 일도 없고, 마을 사람들도 죽음을 피하게 됐다.
일평생 일궈온 기반과 고향을 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땅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삶. 그들에겐 그 정도가 딱 맞았다.
"하지만 당신만은 다르지."
루드의 시선이 칼럼에게 고정됐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자신을 팔아넘기고 앞에서는 호인인 척하는 위선자. 죽은 아버지와의 거짓 친분을 제시하며 호시탐탐 이용할 궁리만 하던 비겁자.
그간 얼마나 속이 부대꼈던가.
칼럼의 앞에서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가면을 쓰는 건 쉬운 일이었으나, 아무리 쉬워도 하기 싫은 일이 있는 법이었다.
'전령은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
칼럼이 상황 설명도 마친 모양이었으니 살려 보낼 이유가 없었다.
나무에서 뛰어내린 루드는 거리를 좁혔다.
루드의 시야에 다급하게 마을로 향하는 칼럼과 아소바의 등이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얼음 가시.'
머릿속의 이미지와 가슴에 품은 뜻에 흑마력이 반응했다.
곧 루드의 오른손 끝에 가시 형태의 얼음 창이 솟아났다.
영창과 캐스팅 과정의 생략.
흑음의 정수로 쌓아올린 흑마력으로 마법을 사용할 때 생기는 특별함이었다.
정수의 마력을 기반으로 마법을 사용하면 영창과 캐스팅의 간략이 가능했다. 익숙한 마법은 그 과정을 생략할 수 있을 정도로.
이는 다시 말해 몸에 익은 마법이라면 언제 어느 순간이든 은밀하고 기습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언젠가 숨겨 둔 비수가 되어 상대의 허점을 찌를 무기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얼음 가시가 칼럼의 등을 꿰뚫었다.
"꺽...!"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진 칼럼의 몸은 순식간에 꿰뚫린 등을 중심으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흐악!!"
칼럼이 쓰러지자 아소바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으나 어차피 저 상태론 마을까지 살아서 도착할 수 없었다.
자신이라도 살아야 했다. 그래야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달을 알릴 것이 아닌가!
아소바와 칼럼과의 거리는 시시각각 벌어졌다. 이내 아소바가 보이지 않게 됐을 때 쓰러진 칼럼의 앞에 루드가 나타났다.
"5분 정도 남았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강도를 조절하고 급소를 빗맞혀 의식을 남겨 놓은 상태였다.
마법의 속성 때문에 피도 얼어붙을 테니 과다 출혈을 걱정할 이유도 없다.
몸을 파고든 냉기가 심장을 집어삼킬 때까지, 칼럼은 정신을 유지한 채 서서히 죽어 갈 것이었다.
"정말 빌어먹게도 오래 걸렸네."
지난 생엔 보답할 수 없었다. 고블린 손에 죽었는지 요렌테 손에 죽었는지는 몰라도 이미 죽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것이 칼럼에게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보답이다.
루드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초첨을 잃어 가는 칼럼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의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루드가 이런 힘을 갖고 있는지, 이 모든 게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묻고 싶은 게 많은 칼럼이었으나 무엇 하나 물을 수 없었다.
졸리다....
성대는 진즉 얼어붙었고 몸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서히 장기를 집어삼킨 냉기가 곧 심장마저 잡아먹자, 칼럼은 긴긴 잠에 빠졌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1화
마을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어린아이처럼 우는 이도, 큰 소리로 욕설을 뱉는 이도 있었다.
한순간에 터전을 잃게 된 사람들은 저들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루드는 내내 차분한 표정이었다.
'당신들에게도, 나에게도, 이게 최선이야.'
아소바가 상황을 잘 전달했는지 피난은 신속했다.
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 마을이 텅텅 비었다.
루드는 고요해진 마을을 걸었다. 경멸 어린 시선도, 혀를 차는 소리도 없는 마을을 걷는 건 생소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생경한 경험이나 하려고 텅 빈 마을을 걷는 건 아니었다.
"찾았다."
주인 잃은 집들에는 미처 챙겨가지 못한 식자재나 생필품, 금속재 등이 남아 있었다.
루드는 쓸 만한 물건들을 골라 챙겼다. 특히 단검이나 도끼 등의 날붙이는 쓸모가 많아 식량만큼이나 반가운 물품이었다.
"생각보다 소득이 많은데."
가장 많은 소득을 얻은 건 역시나 칼럼의 집이었다. 무얼 챙겨서 피난 갈 집주인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여러 군데도 숨겨 놨군."
집안 곳곳의 기물이나 바닥, 천장 등을 깨고 찢자 칼럼이 숨겨 둔 돈이 나왔다. 남은 가족이 챙겨가지 않은 걸로 봐선 가족에게도 비밀로 숨겨 두었던 것 같았다.
'과연 칼럼이랄까. 뭐,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돈은 꽤나 많았다. 마을을 벗어나 본격적인 여정에 오를 때 경비로 쓰면 되겠다 싶었다.
모든 집을 확인한 루드는 마을의 한 집에 짐을 풀었다.
이젠 예전의 자신을 연기하거나 산이나 옛집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이곳으로 올 요렌테를 맞이할 준비를 마치는 것뿐이었다.
* * *
강한 바람에 흙먼지가 파도처럼 날렸다.
검은 로브로 온몸을 가렸던 이는 바람이 휩쓸고 가자 후드를 벗으며 먼지를 털었다. 후드 아래로 하얗게 센 머리와 흉터가 가득한 얼굴이 드러났다.
"이런 변방까지 오게 하다니. 망할 것들, 실험할 시간도 부족해 죽겠는데 말이야."
걸쭉한 침을 뱉으며 입안에 들어간 흙을 토해 낸 남자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도 목적지인 마을이 코앞이었다. 마을은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고 을씨년스러운 기운만을 풍기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 전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떠난 마을이었으니까.
"저주받은 산과 몬스터라. 토벌하러 갔던 놈들은 전멸했다 했지."
토벌대의 수준은 높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변방까지 오는 상단이야 그 규모가 뻔하고, 그런 놈들이 데리고 다닐 녀석들은 더욱 뻔한 수준이었다.
끽해야 갓 마력의 세계에 발을 들인 녀석이나 대동했을 게 분명했다.
"까딱하면 또 귀찮아지겠구먼."
저주받은 산이란 단어는 분명 흥미로웠으나 그뿐이었다. 당장은 밀린 실험을 마치는 게 더 급했다.
"시간이 더 지체되면 안 되는데 말이지."
요렌테는 부디 찾는 물건이 마을에 있길 바랐다.
만약 없다면 저주받은 산의 몬스터가 가져갔다는 골치 아픈 상황까지 생각해 봐야 했다. 그럼 또 몬스터를 찾아서 죽여야 하고....
'몬스터를 찾고 죽이고 물건을 찾는 시간까지 하면... 끔찍하구먼.'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일단 움직여야겠군. 정보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 운이 좋다면 금방 찾겠지."
그리 결심하고 막 움직일 때였다.
로브 안쪽에서 느껴진 진동에 요렌테는 인상을 찡그리며 수정구를 꺼냈다.
-상황을 보고해라, 요렌테.
수정구를 타고 넘어온 목소리가 건조한 투로 용건을 뱉었다. 요렌테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지금 뭐라 했나?"
-못 들었나? 늙더니 귀가 멀었나 보군. 상황을 보고하라 했다.
어이가 없었다. 저들의 의뢰로 이런 변방까지 오느라 시간을 버린 것도 짜증 나던 참이었다.
그래도 서로 도움이 되는 일이 많으니 참고 의뢰를 수행 중이었는데, 마치 자신이 상관이란 투의 명령조를 들은 순간 여태까지 유지되던 인내가 끊어졌다.
"자네, 이름이 뭐지?"
요렌테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여태까지 투덜대던 가벼운 분위기가 사라지고 적막한 냉기가 대신 자리를 채웠다.
분노하면 이성을 잃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극도로 냉정해지는 부류가 있었다.
요렌테는 명백히 후자였다.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린데 말이지, 자네가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지 궁금하군. 아니지 이것부터 물어봐야겠어. 자네들과 내 관계가 어떤 것 같나? 자네들이 움직이라는 대로 움직이고, 쓰고 싶을 때 언제든 쓸 수 있는 꼭두각시? 그쯤으로 생각하고 있으려나?"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요렌테도 대답을 받기 위해 한 질문이 아니었기에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수정구 너머에 있는 인간의 생각 따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흑마법사와 긴 이야기를 섞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혐오하는 감정이 혼재해 있겠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우매한 것들이 자신의 높은 뜻을 모르는 거야 예전부터 익숙했고, 저들이 자신을 혐오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도 저들을 혐오했으니까.
그래도 알려 줘야 할 건 제대로 알려 줘야겠지.
"흑마법사를 혐오할 수 있지. 뭐, 나도 그대들을 혐오하니 피차 마찬가지야. 그러나 선은 넘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비즈니스 파트너인데 말이야. 안 그런가? 막말로 내가 물건을 찾고 안 돌려주면 어쩌려고 그러나?"
-지금 그 말, 감당할 수 있나?
"하하. 감당?"
조소한 요렌테의 주변이 요동쳤다. 주변의 땅이 거무죽죽하게 죽어 갔다.
"감당이라 했는가? 반대로 묻지. 그럼 자네는 나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경지에 오른, 심지어 사령술의 대가인 흑마법사를 적으로 돌렸을 때 생길 일들과 그 여파.
요렌테는 궁금했다.
그것이 고작 제 혈기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관료 하나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인지.
"궁금하구먼. 내가 그대 윗선에게 자네와 나 둘 중 누구와 함께하겠는가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들려올지."
-....
"아니지 아니야.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물어볼 것도 없지. 그래, 이러면 되겠군."
한 템포 숨을 죽인 요렌테가 빙그레 웃었다.
수정구 너머의 상대에겐 보이지 않을 모습이었지만, 그 또한 요렌테에게서 풍기는 미묘한 기류는 느낄 수 있었다.
"물건과 자네의 목을 교환하겠다고 하면. 과연 그때 내 손에 들려 있는 건 물건일까 자네의 목일까."
-...미, 아니 죄송합니다.
수정구 너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처음의 오만한 태도는 사라지고 꼬리 내린 개의 목소리. 그 변화에 요렌테의 눈이 천천히 휘어졌다.
어느새 눈동자에 맴돌던 서늘함이 사라진 상태였다.
"하하! 무얼 그리 위축되고 그러나. 농담이었네, 농담. 자네가 그리 반응하면 내가 자네를 협박한 거 같잖나."
그리 말한 요렌테가 아! 하며 한 가지 말을 덧붙였다.
"오늘 내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게. 아니었으면 아까의 말이 농담이 아니었을 테니. 다음 통신은 내가 먼저 걸도록 하지. 내가 연락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고 있게나."
통신을 끊은 요렌테는 수정구를 품에 넣었다.
이걸로 당분간 연락이 올 일은 없을 터. 귀찮은 일을 한껏 밀어 놓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마을로 들어서자 휑한 바람이 불었다.
몬스터의 출물로 생기를 잃어버린 마을. 요렌테는 이 마을에 활기가 도는 것을 상상하며 감상에 젖었다.
조용하던 마을이 사람들로 인해 다시 생기를 찾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감동적인 것이었다. 하물며 그 사람들이 일평생 마을에서 살던 사람들이라면 더 말할 게 있을까!
"자. 그대들의 고향에 도착했네.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네. 나도 그대들의 마을에 볼일이 있어 가던 길이었으니 말이야, 겸사겸사라는 거지. 하하!"
비록 생전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그보단 떠나야만 했던 고향에 돌아왔다는 게 더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말이지."
실없던 혼잣말이 멈추고 그 자리를 진지한 고찰이 메웠다.
'왜 이런 의뢰를 한 거지?'
굳이 자신을 통하지 않더라도 물건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변방까지 와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수고로움일 뿐. 의뢰자 정도라면, 아니 의뢰자가 아니라 그냥 돈이 많거나 칼밥만 조금 먹었어도 어렵지 않은 의뢰였다.
한데 여러 편의를 약속하면서 자신에게 의뢰했다. 심지어는 통신용 수정구까지 건네며.
'녀석들의 속셈은 알 수 없다만 그래도 알아낸 정보가 없는 건 아니니 나중에 더 생각해 보면 되겠지.'
확실한 건 의뢰를 받은 게 자신만이 아니고, 물건도 하나가 아니란 것이었다.
수정구로 연락한 이가 이전과 다르단 걸로 의뢰를 받은 게 자신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또 물건이 하나였다면 의뢰받은 다른 이들과 몇 번이고 마주쳐야 했는데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의뢰품이 하나였다면 그들이 직접 움직였을 것이다.
"비밀리에 찾아야 하는 게 많다는 소린데."
굳이 의뢰의 형식으로 물건을 찾는 건 그런 이유일 터였다.
뭐, 그러니 숱한 편의를 제공하면서까지 자신과 같은 흑마법사에게 의뢰했겠지.
어디 말할 데도 없고, 말한다 해도 흑마법사의 말이니 거짓이라 치부하기 쉬웠으니.
"의뢰를 완수해야지."
의뢰는 물건을 찾아 의뢰자의 하수인에게 전달하는 것까지였다.
요렌테는 의뢰를 완수할 셈이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마음대로 의뢰를 파기하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다만.
"넘기기 전에 살펴보는 것 정돈 괜찮잖아?"
시간이 있으면 간단한 실험까지도 괜찮지 않을까?
요렌테는 입술을 핥았다.
갑자기 막 흥미가 샘솟았다. 그들이 비밀리에 찾는 물건의 정체가 무엇인지. 벌써부터 몸이 찌릿찌릿했다.
* * *
"왔구나."
명상에 잠겨 있던 루드가 천천히 눈을 떴다.
"준비는 끝났다."
공간 가득히 발산하던 마력을 안으로 갈무리했다. 마력은 역동적이었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닥도 새 나가지 않은 채로 돌아왔다.
"슬슬 움직여 볼까."
그러나 말과는 달리 밖으로 나가지 않은 루드였다. 그 대신 몸을 세운 상태로 기감을 넓고 얇게 펼쳐 나갔다.
요렌테의 기척과 행동을 읽을 수 있도록 넓게.
요렌테가 기감의 흔적을 느끼지 못하도록 얇게.
거미줄처럼 뻗어 나간 기감이 요렌테에게 닿았다. 느릿한 속도로 마을을 걷는 요렌테의 위치가 점점 가까워졌다.
'후....'
루드는 심호흡하며 더욱 더 기척을 가라앉혔다.
기습의 기회는 단 한 번.
그 한 번으로 최대한 많은 이점을 가져가야만 했다.
그러니 결정은 신중하게, 행동은 은밀하되 신속하게.
단단히 닫혀있던 하얀색 문이 열리며 마력이 넓은 길을 따라 움직였다.
작고 느리게 시작한 움직임은 곧 박차를 가하며 크고 빠르게 흘렀다.
'아직 더 담아 낼 수 있다.'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아 타인이 인지할 수 없는 마력이 한 순간에 터져나갈 순간.
그때가 기습의 순간이었다.
후우-.
작게 열린 입으로 긴 숨이 빠져나왔다.
그것이 신호였다.
콰아아아앙-!!!
한계까지 마력을 머금은 검이, 몸을 숨겼던 집과 함께 요렌테를 갈랐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2화
부지불식간에 찾아든 공격이 요렌테의 상체를 갈랐다.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골반까지 길게 이어진 상처는 한 눈에 봐도 치명적이었다.
그나마 찰나의 순간 반응한 덕에 피해가 적은 것이었지, 아니었다면 즉사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첫 걸음은 잘 뗐다.'
대각으로 갈라져 너덜거리는 상체는 보통이라면 목숨을 위협할 정도였다.
그러나 상대는 경지에 오른 흑마법사. 고작 이 정도로는 죽일 수 없었다.
하나 지금의 기습은 큰 의미가 있었다.
요렌테의 몸에 붉은색 촉수들이 돋아났다. 갈라진 살 안쪽에서 튀어나온 촉수들은 서로 엉겨 붙더니 이내 내장이 드러났던 상체를 원래의 형태로 되돌렸다.
"크아...!!!"
잠시 끊겼던 의식이 돌아옴과 동시, 요렌테는 주변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발밑에서 튀어나온 촉수가 사방을 헤집었다.
"도대체 뭐냐."
그 공격을 예상하고 물러서 있던 루드는 촉수의 움직임이 멎자 다시 검을 겨눴다.
'이것으로 공방에 백업된 생명은 소모시켰다.'
흑마법사는 다들 미쳤다지만 요렌테는 그들 중에서도 별종으로 불리는 이였다.
사령술을 주력으로 함에도 많은 시체를 모으기보단 특수한 몇 개의 시체로 실험하는 걸 선호했고, 그런 경향은 흑마법이 경지에 오르고 자신의 공방이 완전히 구축된 이후 더욱 도드라졌다.
요렌테는 뛰어난 연구자이자 의학자였고, 그 능력을 자신의 흑마법에 녹여 내는 데 거침이 없었다.
'가장 큰 골칫거리가 해결됐으니. 도주하는 것만 신경 쓰면 된다.'
공방에 백업된 생명이 그런 일환의 대표였다.
요렌테는 자신의 공방에 생자와 사자에게서 추출한 생명의 원기를 가공해 놨다.
이 원기는 요렌테의 원기가 손상되면 그 자리를 대신 채우는 역할로, 여벌의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의 기습은 그 목숨을 지워 내기 위한 것이었다.
'어지간한 상처만 입혀서는 어렵다. 한 번에 목을 치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요렌테가 가진 패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갈라졌던 몸뚱이를 붙이고 공격 수단으로 사용되는 촉수도 요렌테의 특징적인 힘이었다. 촉수가 활동하는 이상 자상이나 신체 일부의 절단은 요렌테에게 큰 피해가 못 됐다.
루드는 무작위로 주변을 휩쓸던 촉수가 잠잠해지자 다시 움직였다.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 요렌테의 목을 치려는 것이다.
그 순간.
"흐."
비웃듯 입술을 비집고 나온 요렌테의 웃음과 함께 바닥이 터져 나갔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네."
"아니, 제대로 고른 게 맞아."
"무엇...?!"
폭발로 인해 흐려진 시야 속에서 루드의 검이 나타났다.
연기를 가르며 나타난 검은 요렌테의 목에도 긴 상처를 냈다.
"이놈!"
그러나 완전히 갈라 내지 못한 목의 상처는 촉수로 인해 금세 복구됐다.
"혈액 폭발. 몰랐다면 큰 피해를 입었겠지."
요렌테의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무기였다.
피는 폭발물이었으며 침과 눈물은 독극물.
"어디 내가 알고 있는 게 그뿐일까?"
루드는 공격의 고삐를 당겼다.
주도권을 잡은 이상 놔줄 생각은 없었다. 정신 차리지 못하게, 더욱 매섭게 몰아붙여야 했다.
루드의 검이 여러 차례 요렌테의 몸을 지나갔다.
요렌테의 전투 방식. 움직이는 패턴과 습관, 심지어는 특정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루드는 요렌테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고 그 모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대체 무슨 날벼락이냐...!'
요렌테는 입술을 씹었다.
공방이 교차하는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머리가 차갑게 식어 갔다.
여러 의문들이 떠올랐다.
눈앞의 앳된 놈은 무엇인지. 왜 자신을 공격하는 건지. 어린 외양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은 어떻게 쌓아 올렸는지.
무엇보다 어째서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지.
'뭐, 천천히 물어보면 될 일이지.'
초반의 기세가 매섭기는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소년에게는 자신을 죽일 필살의 공격이 없었다.
처음의 기습 정도가 아닌 이상 소년의 공격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이미 모습을 드러낸 소년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것이었다.
'빨리 물어보고 싶군. 궁금한 게 아주 많단 말이지.'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게 최선이나 피치 못하면 죽이더라도 상관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으니.
생각을 마무리한 요렌테는 품속에서 뼛조각들을 꺼냈다.
이곳에 오다 얻은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다.
"자, 그리운 고향에 도착했으니 그만 일어들나게."
바닥에 던진 뼛조각들은 요렌테의 마력을 양분 삼아 스켈레톤의 형상을 갖췄다.
그렇게 일어선 숫자는 열이었다.
"...설마."
"응? 아 이곳으로 오다 마주친 이들이라네. 고향을 떠나는 걸 어찌나 아쉬워하던지, 보는 내가 마음이 아파서 말일세. 그들에게 다시 고향 땅을 밟게 해 주겠다고 약속해 버렸지 뭔가. 이렇게 약속을 지켰으니 잘된 일이 아닌가. 하하!!"
과장된 웃음을 터뜨린 요렌테는 이내 차분한 눈으로 루드를 바라봤다.
"한데, 이들을 알고 있나?"
씨익, 요렌테의 입 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반가운 재회의 순간이었구먼."
루드는 검을 쥔 손에 약간의 힘을 뺐다.
"얼마 전까지 함께 웃고 떠들었을 이들인데, 설마 두 번 죽이려는 셈은 아니겠지?"
껄껄 웃는 요렌테의 말은 늙은 혓바닥답게 상대의 속을 긁는 게 제법이었다.
친인을 잃고 이리 다시 마주한 이들이라면 대부분 이성을 잃을 법한 도발이었다.
"착각하고 있는 게 있군."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루드의 친인이 아니었다.
콰직!
마력을 머금은 검에 스켈레톤의 머리가 부서졌다.
검을 휘둘렀건만 검이 아닌 둔기로 내리친 것 같은 형상이었다.
"애초에 내가 그들에게 정이 있었다면 그들이 마을을 떠나는 일은 없었겠지."
스켈레톤의 머리통이 연달아 깨져 나갔다. 요렌테의 마력을 기반으로 일어선 스켈레톤이었지만 그것만으론 루드의 공격을 버티기 무리였다.
"음. 그것도 그렇군."
요렌테는 제 실수를 인정했다.
그들이 마을을 떠난 것은 몬스터 때문이었는데, 소년의 무위는 웬만한 몬스터는 찜 쪄 먹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만약 소년이 마을을 지키고자 했다면 그들이 마을을 떠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 참 어쩔 수 없구먼. 최대한 깔끔하게 보존하고 싶었는데 말일세."
죽어서도 알아낼 수 있는 게 많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살아 있는 상태보다는 못했다.
때문에 적당한 수준을 유지했는데, 이러다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두근.
요렌테에게서 느껴지는 생소한 마력의 흐름에 스켈레톤을 부수던 루드가 멈칫했다.
'모르는 패턴이다.'
어떤 마법인지 모르니 섣불리 다가설 수 없었다. 자칫 마력의 흐름에 잘못 얽히면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사자강림.
지정 사자 - 아우쿠스, 바로쿠스
지정 대상 - 해골병, 요렌테 마샬데우츠
그사이, 요렌테는 목적했던 마법을 완성했다. 땅울림과 함께 하늘로 솟아오른 요렌테의 마력이 하늘을 진동시키더니 벼락처럼 떨어졌다.
마력의 벼락은 정확히 요렌테와 스켈레톤에게 내리꽂혔다.
"크흐...!!!"
신음처럼 터진 요렌테의 탄성. 동시에 루드는 변화한 무언가를 느꼈다.
'달라졌다.'
눈앞의 스켈레톤부터가 그랬다.
방금 전까지의 스켈레톤은 처리 방식이 까다로울 뿐이지 귀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한데 지금은 견고한 방패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 느낌은 실제와 다르지 않았다.
카앙-!
직전까지만 해도 일격에 부서지던 몸이, 금조차 가지 않게 된 것이다.
"큭."
전진하며 몸을 부닥쳐 올 때의 충격도 상당했다. 촉수가 발밑을 파고들어 중심을 흐트러트리는 순간을 절묘하게 노린 까닭에 흘려보내는 것도 어려웠다.
'안 좋군.'
가장 곤란한 건 후방의 요렌테였다.
여태까지 쉴 새 없이 몰아붙이며 캐스팅이 필요한 마법을 견제해 왔으나 상황이 이리 되면 강한 마법이 나올 수 있었다.
'간단하지만 확실한 수군.'
믿음직한 전위와 후위에서 화력을 담당하는 마법사.
간단하지만 가장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구성이었다.
하물며 후위에서 전위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대단위 마법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면?
화력이라는 마법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요렌테가 자신할 만했다.
'부상을 입었던 전투에서 소모했었던 건가.'
전생에서 요렌테를 죽이고 탈출할 땐 보지 못했던 패였다.
당시의 요렌테가 큰 부상을 입고 공방으로 돌아왔단 점과 요렌테의 패 중 몇 가지가 소모성인 점을 고려하면 부상을 입은 전투에서 소모했었을 확률이 높았다.
"어쩐지 너무 쉬운 것 같더라니."
아무리 오랫동안 준비하고 여러 차례 이미지를 그렸다지만 너무 쉽게 흘러갔다.
'아낄 수 있나 했지만 역시 무리였군.'
요렌테가 새로운 패를 보였으니 자신도 새로운 패를 보일 때였다.
스확- 쩌저적!
순식간에 형성된 얼음 가시가 해골병과 요렌테를 노렸다.
"마법? 점점 더 궁금해지는구나. 대체 어떤 비밀을 품고 있는 게냐!"
흥분 섞인 외침이 들렸지만 무시한 채 전투에 집중했다.
요렌테를 노린 얼음 가시의 경로를 틀어막은 스켈레톤은 얼음 가시에 맞으며 우직하게 전진했다.
"마법까지 갖춘 건 놀라우나 그 재능에 비해 식견을 갖추진 못했구나. 네놈의 마법과 내 마법의 상성이 최악인 걸 느끼지 못하겠더냐."
스켈레톤은 생명체가 아니었다.
때문에 빙결계 마법의 특징인 한기의 영향에서 자유로웠고, 빙결계 마법의 대척점이라 해도 무방했다.
"슬슬 얼어붙었겠군."
계속해서 마법을 난사하던 루드가 멈춰 섰다. 요렌테는 루드가 빙결계 마법과 스켈레톤의 상성을 모른다고 확신하며 조소를 머금었다.
여전히 자신과 루드의 직선 경로에 스켈레톤을 세운 요렌테는 마법의 완성을 위해 마지막 영창을 준비했다.
그리고.
"뭣?"
이변을 알아차린 건 그때였다.
'마력이!'
마력이 얼어붙은 것마냥 꼼짝하지 않았다. 동시에 자신과 스켈레톤에게 연결됐던 사자강림의 링크가 끊어진 게 느껴졌다.
그제야 요렌테는 루드가 말한 얼어붙었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단순히 물질적인 걸 말한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루드가 노렸던 건 마력의 동결이었다!
퍽!
그간 숱한 공격을 견뎌 낸 스켈레톤의 머리가 간단히 터졌다.
"하아...."
루드의 숨결을 따라 옅은 김이 서렸다. 얼음 가시의 흔적이 가득한 주변에는 어느새 서리가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단순한 마법이 아니었어. 흑마법이었던 건가... 아니, 애초에 이런 것을 마법이라 칭할 수 있는 건가?"
요렌테는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타인의 마력 현상 자체를 동결시키다니. 이런 게 존재하리라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적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마법사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힘!
'설마. 물건과 관련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아귀가 들어맞았다.
신비 혹은 그에 준하는 힘을 품은 물건이 있고, 그것을 저 소년이 취한 것이라면. 그래서 이런 힘을 얻은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한 요렌테의 눈에 열망이 서렸다.
저 녀석을 죽이면. 죽이고 물건을 찾으면 나도...!!
서걱-!
그러나 그 열망의 끝은 허무했다.
요렌테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툭, 바닥을 구른 머리를 따라 시야가 뒤집혔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3화
목을 날렸음에도 루드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숨겨 둔 수가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요렌테의 시체에 다가간 루드는 소지품을 뒤졌다.
누군가 그랬다.
마법사의 로브 안쪽은 노다지라고.
'예상은 했다만 횡재했군.'
아니나 다를까, 요렌테의 로브 안쪽에서 공간 확장 주머니가 나왔다.
작은 부피의 주머니지만 내부에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들어가는 주머니였다.
심지어 무게 감소 마법까지 적용된 고급품. 내부를 확인해보니 흑마법에 필요한 재료가 대부분이었다.
'내부는 비워야겠군.'
루드도 흑마법을 사용하긴 했으나 요렌테와는 결이 달랐다. 확장 주머니의 내용물은 비우기로 했다.
비록 내용물에선 소득이 없었다지만 공간 확장 주머니는 그 자체로 귀중품이고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는 물건이다.
이것만 해도 큰 소득이었다.
그러나 요렌테의 선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확장 주머니 외에도 쓸 만한 것들이 잔뜩 나왔다.
금화가 가득한 주머니와 비상시에 쓸 수 있는 포션, 근방에선 자라지 않는 희귀한 약초들까지.
"수정구?"
개중 가장 눈에 띄는 건 통신용 수정구였다.
다른 소지품들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구성이었지만 통신용 수정구는 그렇지 않았다.
값비싼 거야 둘째 치더라도 그 목적이 타인과의 통신에 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통신용 수정구를?'
요렌테는 흑마법사였고, 흑마법사는 기본적으로 고립된 존재다.
같은 흑마법사끼리도 서로 챙기거나 하지 않았으니 흑마법사들은 말 그대로 독립적인 개체라 봐야 했다.
한데 그런 존재가, 심지어는 타인의 도움도 필요 없는 수준의 흑마법사가 통신용 수정구를 들고 다닌다?
무언가 냄새가 났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이 마을을 찾아온 거지?"
요렌테의 목적이 흑음의 정수였단 건 명확하다. 다만 어떤 경위로 정수에 관해 알게 됐는지, 또 그것이 이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의문이었다.
'흑음의 정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도 않았다.'
더욱 이상한 건 흑음의 정수를 찾아 이런 변방까지 온 주제에 정수의 정확한 힘을 몰랐다는 점이다.
전생에서 요렌테는 흑음의 정수를 여러 방면으로 실험했었다.
정수의 힘을 제대로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실험들이었고 심지어는 그 실험의 끝에 루드에게 정수를 심기까지 했다.
'때마침 듀얼을 얻지 않았다면 곧장 죽을 뻔했었지.'
듀얼의 힘으로 정수가 준 힘을 감출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곧장 요렌테의 손에 죽을 뻔한 경험이었다.
"누군가 정보를 제공했다."
정수가 가진 힘과 효용을 누락한 채로.
그러나 이 가정도 완전하진 않았다.
요렌테 정도의 인물이 정수의 가치도 모르는 상태로 이런 변방까지 왔단 게 이해되지 않았다.
'정수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 요렌테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존재.'
몇몇 후보가 떠올랐지만 확신하거나 특정할 순 없었다. 함부로 그래서도 안 됐고.
루드는 빤히 수정구를 바라봤다.
상황을 파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수정구 너머의 이들과 직접 대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통신을 보내기 위해선 먼저 마력 패턴을 입력해야 하는 수정구다.'
통신을 보내기 위해선 특정한 마력 패턴과 파장을 맞춰야 한다는 것.
요렌테가 어떤 패턴과 파장을 설정해 놨는지 모르니 이쪽에서 통신을 보내기는 요원했다.
'영락없이 기다려야겠군.'
추측컨대 아주 오래 걸리진 않을 터였다.
중간중간 진척도를 확인했다면 정수에 근접했다는 걸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들이 누구든, 원하는 게 무엇이든 정수의 가치를 알고 있는 이상 빠른 시일 내에 연락이 올 게 분명했다.
소지품을 전부 확인한 루드는 시체에 불을 붙였다. 목을 자르고 확인 사살까지 했지만 불태우는 것만큼 깔끔한 뒤처리는 없었다.
"큰 산을 하나 넘은 건가."
시체를 집어삼킨 불이 활활 타올랐다.
루드는 가만히 그 불길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회귀 직후 가장 걱정하던 고비를 넘었다.
한동안 요양할 각오까지 하며 준비한 요렌테와의 일전이었는데, 큰 피해 없이 끝나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과거의 내가 아니니 당연했던 건가.'
어쩌면 너무 겁먹었던 걸지도 몰랐다. 전생에서 요렌테를 상대했던 건 아무 경험도 없을 때였다.
반면 지금은 어떤가. 숱한 전투와 죽음의 경계를 오갔던 경험들을 지니고 오직 요렌테를 상정한 수많은 준비를 마친 상태였지 않나.
지금의 승리는 예견돼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자만해선 안 됐다. 이후 루드가 마주하고 맞설 이들은 요렌테와 비교할 수 없었다.
요렌테는 수준급의 흑마법사였지만 대륙 최강자의 반열에 들기엔 무리가 있었고, 루드가 상대해야 할 적은 그런 이들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제국이었다.
"일단 도시로 가서 알렉의 출신 사관학교를 알아내는 게 우선이겠군."
제국과 정면으로 맞서는 건 아직은 먼 훗날의 이야기. 오랜 시간을 들여 치밀하게 준비해야 했다.
그러니 지금은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 걸음을 떼야 할 때.
이제는 돌아올 이 없는 마을에 불을 지른 루드는 망설임 없이 마을을 떠났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재만 남은 마을에 일단의 무리가 도착했다.
"이건...."
"이미 늦었군요."
"요렌테 그 미치광이가 또!!"
새하얀 로브를 입은 무리는 2남 1녀의 구성이었다.
남자 둘은 각기 노인과 청년이었고 여자는 후드로 모습을 가렸지만 얼핏 드러나는 모습에 앳됨이 묻어 있었다.
"흔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살펴보시죠."
"네.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망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다."
세 사람은 마을 내부로 들어섰다.
죄다 불타 흔적만 남은 마을은 더 이상 마을이라 부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전투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격렬한."
노인이 땅에 남은 흔적을 읽어 냈다. 재에 묻혀 지나치기 쉬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땅 곳곳에 파인 자국과 날카로운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요렌테와 맞붙기라도 했단 말씀입니까?"
"늙은이의 소견으로는 그러하네."
"이런 변방에 그 정도 인물이 있었다고요?"
청년은 믿지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노인의 판단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런 변방에 요렌테와 맞설 정도의 실력자가 있다는 게 이해되지 않은 것이다.
요렌테가 누구인가.
미치광이라 불리는 흑마법사로 연구자적 기질이 강해 경지에 비해 무력이 쳐진다는 평을 받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경지에 오른 거물이었다.
"세상은 넓고 사연 가진 이는 어디에도 있는 법이지."
지면을 살피던 노인은 폐허가 된 한 구석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노인의 손에 들린 메이스가 땅을 훑듯이 쓸고 지나가자, 잔해에 묻혀 있던 무언가가 드러났다.
"이건."
"시체로군."
노인은 굳이 그 시체의 신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시체의 정체를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불탄 잔해에서도 지워지지 않고 풍기는 짙은 흑마력의 냄새.
요렌테였다.
"요렌테가 죽다니. 그것도 이런 변방에서."
청년이 중얼거렸다. 도통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요렌테를 추적한 게 얼마인가.
장장 반년 가까이 쫓은 끝에야 겨우 꼬리를 잡았는데 죽은 상태로 마주하다니.
"허탈하군요."
"그래도 홍복 아니겠는가. 세상을 좀먹던 거악이 죽은 것이네.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되긴 했어도 좋은 일이니 감사한 마음을 담자고."
노인이 청년을 다독였다. 청년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명성과 업적에 관심 가질 때이지 않은가.
"그저 감사하기엔 이른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여자의 말에 사내들이 의문을 표했다.
여태까지의 수고가 물거품이 됐지만 요렌테의 죽음은 분명 반길 만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흑마법의 잔향... 하나가 아닙니다."
"예?"
여자의 말에 사내들이 안색을 굳히고 정신을 집중했다.
"과연, 미묘한 마력 하나가 느껴집니다."
요렌테의 마력에 가려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집중하니 확실히 다른 마력이 느껴졌다.
묘한 마력이 하나 더 있었다.
"그렇다는 건...."
"예. 요렌테를 죽인 건 또 다른 흑마법사입니다."
여자의 음성은 단호했다.
사내들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사악한 흑마법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새로운 흑마법사가 대신했다?
어째서 흑마법사끼리 싸우고 끝내 한 명의 흑마법사가 죽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중요한 것은, 아직 살아 있는 흑마법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
"저희들은 다음 목표는 이 흑마법사입니다."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녀의 의사에 따라 일행의 목적이 정해졌다.
사내들은 더 이상 묻거나 토 달지 않았다.
대륙에서 제국 다음 간다는 성국의 성녀 후보.
그녀에겐 그 정도의 권위가 있었다.
* * *
마을을 떠난 루드는 계속해서 걸었다.
해가 떠있을 땐 움직이고, 졌을 땐 자는 단순한 일과의 반복이 열흘 정도 이어진 끝에 도시라 부를 수 있는 곳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도시의 정경은 꽤 새로웠다.
회귀 이후로는 당연히 처음이었고 회귀 이전에도 마지막 2년간은 도시에서 제대로 머문 적이 없었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오랫동안 바깥 생활을 한 까닭에 휴식을 필요로 한 루드는 곧장 여관을 잡았다.
"제일 안쪽 방으로 가면 되오. 목욕은 따로요."
그렇게 하루를 온전히 쉬는 데 소비하고, 날이 밝자 곧장 여관을 나섰다.
어제 여관을 찾으면서 봐 뒀던 곳이 있었다.
딸랑-
"어서 오시오."
가게 문을 열자 낡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안쪽 책상에선 외눈 안경을 쓴 노인이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루드를 반겼다.
"자유롭게 둘러보고 찾는 책이 있으면 물어보시오."
노인의 시선이 다시 들고 있던 책으로 향했다.
서점은 조용했다. 노인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서점의 유일한 소음일 정도였다.
한동안 책들을 살피던 루드가 노인에게 물었다.
"찾는 책이 안 보이는데. 혹시 있는지 확인해 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책을 찾는데 그러시오?"
외눈 안경을 고쳐 쓴 노인이 루드를 바라봤다.
"책벌레에 관한 동화책과 사서를 다룬 책 한 권씩. 그리고 도서관에 대한 책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있다면 어디 있는지도 부탁드립니다."
"흠. 책벌레와 사서, 도서관이라."
기억을 더듬는 듯 한참을 신음하던 노인이 마침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인기 있는 소재는 아니어서 말일세. 이곳에 없다면 아마 창고에나 있을 걸세. 한데 내 몸이 이래서 혼자 찾기는 무리인데, 어떻게 내 아들이 올 때까지 기다릴 텐가, 아니면 좀 도와줄 텐가?"
"아드님을 기다릴 시간은 없으니 도와드리겠습니다."
외눈 안경을 벗은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드는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창고는 가장 안쪽 책장 뒤편에 있었는데 노인의 말처럼 늙은 몸으론 꺼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책이 쌓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책 위를 쓸자 먼지가 묻어났다.
"창고 관리가 잘 안 돼 있나요?"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다 보니 말일세. 무엇보다 책을 찾는 사람도 많지 않으니 창고까지 오는 일이 드물기도 하고."
노인이 허허 웃었다.
"그래도 원하는 책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아마도 있을 걸세. 창고가 꽤나 넓거든. 그래, 찾는 책이 뭐라 했었지?"
루드는 다시금 자신이 찾는 책을 말했다.
"일대의 상단들이 고용한 자유 기사들의 인적 사항 전부와 대수림과 관련된 최신 동향."
루드의 시선이 노인을 바라봤다.
"창고의 책 중에 있습니까?"
그 시선의 끝에 선 노인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말했지 않나. 창고가 꽤나 넓다고."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4화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어느 책장 앞에 선 노인은 책장을 가늠하더니 두 권의 책을 꺼냈다.
각기 검은색과 초록색 표지의 두껍고 얇은 책이었다.
"자네 책 좀 읽었는가? 조금 난해할 수도 있는 책이어서 말일세."
"적어도 제 마을에선 가장 많이 읽어 봤다 자부합니다."
"그런가?"
"다만 제 출신이 변방의 작은 마을이란 점과 현재 어르신께서 들고 계신 책의 수준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도 맞구먼."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검은색 책을 펼쳤다.
"이 도시를 중심으로 근방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에서 운영하는 상단 열셋의 정보가 들어 있네. 당연히 자네가 가장 궁금해하는 정보도 들어 있지."
검은색 책을 덮은 노인은 이어서 초록색 책을 폈다.
"이 책은 사실 별 내용이 없다네. 며칠 귀만 열심히 열고 살아도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밖에 적혀 있지 않지. 하니 만약 검은색 책을 산다면 이 책은 공짜로 내주겠네."
초록색 책이 검은색 책 위로 엎어졌다.
"자 어떤가."
"어르신의 안목을 믿겠습니다. 책값은 얼마일까요?"
노인은 말없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루드는 군말 없이 금화 세 개를 꺼냈다.
마땅한 가치의 정보를 사는 데 돈을 아껴선 안 됐다. 적어도 이곳은 가치에 합당한 정보를 내놓는 곳이었다.
"화끈하군. 말한 대로 이건 덤일세."
포개진 두 권의 책을 받아 든 루드는 단골이 되어 달란 노인의 말을 뒤로하고 가게를 나왔다.
"흐음...."
멀어지는 루드의 뒷모습을 보며, 노인은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단 말이지.'
방금 전 손님의 외양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갓 세상에 나온 청년의 것이었다.
한데 암호를 읊고 문답을 이어 가는 모습 하며 정보를 거래하는 태도가 익숙했다.
마치 이런 거래를 몇 번이고 해본 이처럼.
무엇보다 가장 의아한 점은 청년이 꺼낸 암호가 '관장님'이 직접 발급하는 코드였다는 점이었다.
'관장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셨겠지만.'
노인은 다시 책을 읽던 테이블로 가 자리를 잡았다. 느긋한 기색으로 책을 훑는 얼굴 아래로 테이블 밑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제국 동북부 도시 알칸타, 시크릿 코드 A, 어린 염소.]
조직의 매뉴얼에 따라, 관장님에게 향하는 직통 보고였다.
노인이 보낸 보고는 곧장 관장의 눈앞에 나타났다.
드르륵-
관장의 집무실. 책상에 놓인 활판이 글자를 찍어 냈다.
"젊은 남자가 내 전용 코드를 사용했다고?"
종이에 새겨진 내용을 확인한 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직접 코드를 발행해 준 이가 몇 안 되는 만큼 그들 전부를 기억하는 관장이었다.
그중 젊은 남자는 존재하지 않았고.
'누군가 코드를 넘겨준 건가?'
여러 상황 중 가장 확률이 높은 건 코드를 발급해 줬던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코드를 양도하거나 알려 준 경우였다.
이 경우라면 상관없었다. 여태껏 자신이 발급한 전용코드는 모두 그럴 만한 인물에게 돌아갔으니.
다만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꽤나 곤란했다.
어디선가 코드가 샜다는 것이었고, 이는 언젠가 조직을 찌를 비수가 될 수 있었다.
확인이 필요한 상황. 관장의 집무실 속 활판이 다시 글자를 찍어 냈다.
"미행 요망."
어딘지 모를 심처에서 적은 글자는 곧 제국 변방의 도시 알칸타의 작은 서점에 똑같이 적혀졌다.
내용을 확인한 노인은 종이를 불태웠다.
타오르는 종이 사이로 가라앉은 눈빛이 드러났다.
* * *
노인의 자신대로 검은색 책에는 루드가 원하던 정보가 있었다.
"칼리텍 사관학교."
알렉이 나온 기사 사관학교이자 제국의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었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발걸음을 재촉하면 말을 타지 않아도 나흘이면 도착하는 거리.
'대수림은 아직 여유가 있고.'
덤이라며 안겨 준 정보도 만족스러웠다. 노인은 며칠 귀동냥 하면 알아낼 수 있는 수준이라 했지만 그마저도 지금의 루드에겐 요원한 일이었다.
애초에 이런 북부에서 남부의 대수림과 관련한 이야기가 오갈 일은 드물었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정보를 확인한 루드는 책을 불태우고 여관을 나섰다.
마을에서 머문 지 벌써 사흘째. 몸에 쌓인 피로를 풀고 다음 길을 위한 정비의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들이 마을에 체류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역시나 붙었군.'
여관을 나섬과 동시에 따라붙는 눈동자들.
서점에 들렀던 날부터 느껴진 시선들이었으니 정체를 짐작하는 건 간단했다.
'당연한 일이겠지.'
'도서관'.
정보를 책에, 근거지를 서점이나 도서관에 비유하는 정보 조직.
아직은 세가 그리 크지 않지만 곧 대륙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는 정보 조직으로 발돋움하는 곳이었다.
전생의 루드는 도서관과 연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서관과의 인연이라기보다는 그 수장이었던 도서관장과의 연이었다.
'전용 코드를 사용했으니 도서관장의 귀에 이야기가 들어갔겠지.'
다만 그건 전생의 일.
지금의 루드와 도서관장 사이에는 티끌만큼의 접점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 도서관장만이 발급하는 전용코드를 사용했으니 도서관장이 경계할 것은 당연한 수순.
'언젠가는 만나야 할 인물이지만.'
도서관장은 루드의 계획에 포함되는 인물이었다.
도서관의 정보력은 다른 정보 조직을 상회했고, 그런 조직을 만들고 관리하는 도서관장 개인의 능력도 출중했다.
'그 순간이 당장은 아니지.'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도서관이 몸집을 키우며 내실을 다져야 할 때.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도서관이었고, 루드가 원하는 수준까지 도달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내 경로를 노출시킬 이유가 없다.'
미래의 도서관장은 확실한 루드의 편이었다지만, 현재의 도서관장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일면식조차 없는 상대가 전용 코드를 사용했으니 경계의 시선을 보낼 게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도서관장과 접촉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었다. 신분과 경로의 노출은 언제고 위협이 되어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루드가 굳이 도서관장의 코드를 이용해 도서관에서 정보를 찾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제국의 프로젝트를 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찾아내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도서관장에게 경고하기 위해.'
"헛?!"
도서관 소속 3급 사서의 고개가 바삐 돌아갔다.
분명 골목으로 들어서는 것까지 확인했는데, 골목 어디에도 목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누굴 그렇게 찾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사서의 몸이 얼어붙었다.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강자!'
비록 3급이라지만 도서관의 정규 교육을 이수한 정식 사서였다.
그런데도 상대가 말하기 전까지 뒤를 잡혔단 걸 몰랐다는 사실은 상대가 실력을 가늠할 수 없는 강자란 의미였다.
"고개 돌리지 말고 들어라. 그리고 도서관장에게 전해."
루드의 손끝이 사서의 목을 가볍게 눌렀다.
그저 손끝에 불과했지만 언제라도 목을 꿰뚫을 것만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책을 보니 일부 글자가 지워진 책이 몇 개 있더군."
도서관장에게 전해야 하는 경고.
"책 관리에 유의해 줬으면 좋겠어. 앞으로 도서관을 자주 찾을 예정인데 책 상태가 별로면 기분이 나쁠 것 같거든."
그리고 메시지.
"그리고 조심해. 그들은 아직 당신을 잊지 않았어."
꿀꺽.
"...."
말소리가 사라지고 한참.
그제야 움츠렸던 목을 편 3급 사서는 노트를 꺼내 잊기 전에 들은 것을 메모했다.
"지워진 글자, 책 관리, 경고, 그들...."
고작 3급에 불과한 그로서는 의미 모를 말들.
그래도 괜찮았다. 그의 임무는 윗분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면 족했으니.
"미안하구나."
하지만 그에게 말을 전할 기회는 없었다.
어느새 나타난 노인의 단검이 사서의 심장을 꿰뚫었다.
"대체 뭐 하는 자인지."
바닥에 쓰러진 사서를 바라보는 노인의 시선에 조금 전의 모습이 투영됐다.
사서의 뒤를 잡고 말했지만 분명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자신이 숨어 있던 위치를 정확히 바라보며 말을 전했으니 명확했다.
'빨리 관장님께 알려야겠군.'
안 그래도 최근 도서관 내에서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아니겠지 싶었지만, 방금 전의 일로 그게 단순한 착각만은 아니란 걸 깨달았다. 한시바삐 관장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일전에 찾아온 손님은 어느새 사라진 후였다.
이 정도 실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며칠간 미행을 허락한 건 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을 터.
노인은 정체 모를 손님을 궁금해하면서도 해야 할 일을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 * *
노인에게 메시지를 전달한 루드는 곧장 마을을 빠져나왔다.
여정을 떠날 준비는 진작 끝나 있었기에 어려울 건 없었다.
'도서관장에게 말을 전하느라 늦어졌군.'
나중을 생각한 투자였지만 며칠의 시간을 소모한 건 틀림없는 사실.
지금부턴 다시 속도를 올려야 할 때였다.
목적지는 칼리텍 사관학교.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도시 칼리텍에 위치한 기관이었다.
사관학교는 아카데미와 유사했지만 그 목적과 분위기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즉시 전력으로 삼을 수 있는 군인 혹은 행정가를 키우는 것, 그게 사관학교의 목적이었다.
특정 사관학교에서는 기사를 키우는 데 목적을 두기도 했는데, 칼리텍이 그러한 경우였다.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만약 그렇다면....'
당연히 프로젝트를 분쇄해야 했다.
제국은 많은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대외적인 것도 극비리인 것도 있었는데, 모든 프로젝트의 공통점은 성공했을 때 제국이 큰 힘을 얻었다는 점이었다.
민심, 식량, 발달된 기술... 전쟁 병기까지.
극비리의 프로젝트는 대부분 반인륜적이었고 그에 비례해 성공했을 때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정도의 힘을 줬었다.
대항군을 이끌고 제국과 맞섰을 때 절실히 느낀 사실이었다.
'적어도 이 프로젝트는 없어져야 한다.'
어두운 감정을 토대로 광증을 유발해 전쟁 병기로 만드는 프로젝트.
해당 프로젝트에 사용된 이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걸 파괴하는 괴물이 됐다.
더욱 끔찍한 건 그들이 스스로가 그리 된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칼리텍 사관학교라."
루드는 칼리텍으로 향하며 사관학교에 출입할 방법을 모색했다.
만약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면 관계자 역시 사관학교 내에 숨어 있을 확률이 높았는데, 사관학교는 그 특성상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었다.
프로젝트의 흔적을 바로 찾으면 좋겠지만, 제국의 기밀 프로젝트가 그리 쉽게 드러나진 않을 터였다.
사관학교를 자유롭게 드나들 방법을 찾는 이유였다.
'기사 사관학교.'
루드의 입안에서 칼리텍 사관학교의 이름이 맴돌았다.
기사를 지망하는 기사 후보생들이 수학하는 곳.
길이 보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5화
"하으아아암~."
늘어져라 나온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켠 청년이 밖을 바라봤다.
건물 위에 떠있는 해를 보아하니 아침은 아닌 게 확실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어느새 도착한 세숫물에 청년의 얼굴이 비쳤다.
붉은 머리에 주근깨를 가진 청년의 이름은 가이로, 근방에선 모르는 이가 없는 블라디 자작가의 한량이었다.
"등교 시간이 한참 넘었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요."
"알아. 알아. 말 안 해도 돼."
가이로가 손사래 쳤다. 집사는 항상 잔소리가 많았다.
"그보다 단테는?"
"진즉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지요."
"그렇단 말이지?"
느긋하게 일어난 가이로는 집사가 준비한 의복을 입고 나왔다.
집사의 말마따나 단테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갈까?"
가이로는 단테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내려서 걷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천천히 달렸다. 이왕 늦은 거 바깥 경치도 구경하며 느긋하게 가자는 가이로의 의사였다.
"사관학교는 처음이겠네. 기대되지? 아 그래도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고. 후보생이 아닌 이들에겐 허용된 공간이 많지 않거든."
"사관학교에 들어가 보는 게 어디입니까. 다 도련님 덕분입니다."
"후보생."
"예?"
"저택에서는 상관없지만 사관학교 내에선 모두 후보생이야. 명문가의 귀족이든 밭을 일구던 평민이든 전부."
머리색만큼 붉은 눈동자가 단테를 응시했다.
단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좀 의외였다. 구색뿐인 걸로 아는 학교 내에서의 평등을 귀족가의 일원이 입에 담으니 새로운 느낌이었다.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텐데 우리 대화나 할까? 아직 서로 모르는 게 많잖아?"
"궁금한 걸 여쭤보시면 성심성의껏 답하겠습니다."
"아니 그래서야 대화가 아니잖아. 나는 대화가 하고 싶은 거지 심문을 하려는 게 아니라고."
그리 말하며 어깨를 으쓱한 가이로였다.
마차는 여전히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오후 훈련이 시작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 의문일 수준.
그러나 가이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늦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그보다 중요한 건 눈앞의 새로운 스콰이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괜찮은 녀석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여태까지의 스콰이어들과는 달리 느낌이 좋았다. 오래오래 볼 수 있을 것 같달까.
이전의 스콰이어들을 떠올린 가이로는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배울 게 없어서 따르지 못하겠다니.'
스콰이어들의 절박함을 생각하면 이해되는 한편, 동시에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문무겸비, 재색겸비의 자신을 두고 배울 게 없어 떠나겠다니.
"스콰이어가 처음이라 했지?"
"넵. 모시게 된 게 가이로 님이라 영광입니다!"
가이로의 만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이전의 스콰이어들에게선 보지 못한 태도였다.
애당초 스콰이어가 처음이란 말도 이상한 말이었다. 대개의 스콰이어는 죽든 살든 저들이 선택한 기사나 후보생과 함께했으니.
하지만 가이로와 단테 누구도 구태여 그 부분을 짚지 않았다.
"근데 꽤나 늦은 나인데 스콰이어가 된 이유가 있나?"
"꿈은 항상 꾸었지요. 감히 제가 이런 꿈을 꿔도 될까 싶기도 하고 꿈을 이룰 방법도 모르던 차에 때마침 기회가 생긴 거 아니겠습니까. 다 가이로 님과 블라디 가의 은총 덕택이지요!"
"내가 뭐 한 게 있나. 그래도 꿈을 잊지 않는 건 멋지군. 앞으로도 꿈을 위해 정진하도록."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후로도 둘은 꽤나 많은 대화를 나눴다. 주로 가이로가 묻고 단테가 대답하는 형식이었는데, 마차가 사관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이야기가 멈추지 않았다.
"여기가 바로 칼리텍 사관학교다."
제국 북동부의 도시 칼리텍에 위치한 동명의 사관학교.
대다수의 사관학교에는 없는 기사학부를 운영하는 사관학교 중 하나로, 때문에 칼리텍 기사 사관학교라고 불리기도 했다.
"부지가 꽤 넓으니 길 잃지 않도록 조심해. 특히 개발부와 연구부 쪽 부지는 얼씬도 하지 않는 걸 추천하지."
칼리텍 사관학교는 기사 사관학교로 유명했지만 기사학부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여타의 사관학교와 마찬가지로 여러 학부가 존재했다.
기사학부 외에도 장교를 키우는 군사학부와 군사 행정 인재를 키우는 행정학부, 군사 물자와 시설 등의 개발자를 키우는 개발 연구학부가 있었다.
기사, 군사, 행정, 개발 연구의 네 학부가 부지를 나눠 쓰는데 서로간의 왕래는 드물다고 했다.
가이로는 특히 개발 연구학부의 경우 그 특성 때문에 더욱 외부의 출입에 민감하며 온갖 괴담들이 쏟아지는 곳이란 말을 덧붙였다.
"가이로 녀석, 이제 온 거야?"
"옆에 있는 건 누구야?"
"행색을 보아하니 스콰이어 같은데, 또 바뀌었나 본데."
기사학부로 들어서자 숱한 시선이 쏟아졌다.
이미 오전 훈련을 마치고 식사 중이던 후보생들의 것이었는데,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은 단테에게 꽤나 익숙한 것들이었다.
'경멸.'
가이로는 익숙한 기색으로 시선들을 받아넘기곤 단테에게 손짓했다.
"알아서 배울 거 배우고 가져갈 거 가져가. 돌아가기 전까지만 내 앞에 와 있으면 돼."
단테는 고개를 끄덕이고 스콰이어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갔다.
스콰이어들은 저들끼리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반가워요."
"...."
식사 중이어서 인사를 못 받는 것 같진 않았다.
갈 곳 잃은 손을 내린 단테는 조용히 그들 옆에 앉아 분위기를 살폈다.
'기싸움? 배척? 아니면 다른 이유?'
저들이 모시는 주인 간의 사이 때문이든, 아니면 그저 새로운 인물을 경계하는 것이든, 혹은 아예 다른 이유 때문이든.
사실 큰 상관은 없었다. 그들과 교류하지 못한다 해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했지만 그건 어렵겠고.'
아쉬운 건 빠르게 정보를 획득할 수단 하나가 시작도 전에 차단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말이 스콰이어지, 제대로 된 스콰이어는 없다.'
일선의 기사도 아니고 고작 기사 후보생의 스콰이어.
명목상 스콰이어라 불렀지만 귀족가 후보생의 스콰이어는 태반이 가문의 사용인 출신이었고,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경우는 백이면 백 후보생의 편의를 위해 가문에서 붙인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과 친분을 쌓으면 후보생의 정보를 빼 오는 것이 가능했다.
학교 내에서의 일만이 아닌 가문 내의 일과 과거의 일까지.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일찌감치 경로를 트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확실히 가이로 블라디는 독특한 케이스다. 스콰이어를 직접 구하다니.'
블라디 자작가의 차남. 제멋대로의 성격과 자유분방한 행적 때문에 블라디가의 망나니로 불리는 인물.
다만 그 실력만큼은 사관학교 내에서도 수위로 꼽히는 천재로, 소위 말하는 '게으른 천재'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게 가이로 블라디란 인물이었다.
'잘못 짚은 건가.'
루드가 단테란 이름의 스콰이어 신분으로 칼리텍 사관학교에 들어온 건 여러 이유 때문이었다.
합법적으로 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고, 비교적 행동이 자유로운 신분이라는 점.
무엇보다 프로젝트가 실재할 때 예상 표적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점.
'망나니라 해서 결함이 보일 줄 알았는데.'
아직까진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망나니라 알려진 것에 비해 성정이나 언행이 바르단 느낌이었다.
...시간 개념은 확실히 없는 듯했지만.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내 탓이지.'
스콰이어의 신분을 사용한다는 아이디어는 좋았다.
문제는 보통 후보생의 스콰이어를 외부에서 구하지 않으며, 피치 못해 구한다 해도 그 빈도가 잦지 않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루드는 블라디 가에서 스콰이어를 구한다는 소식에 곧장 지원했다. 정보 수집은 조금 천천히 해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지원 후 스콰이어가 되는 과정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빨랐다.
점심 식사 이후 후보생들은 오후 훈련에 참석했다. 스콰이어들은 훈련이 이루어지는 연무장 한 구석에서 저들끼리 잡담을 이어 나갔다.
'기사 후보생은 이 정도인가.'
루드는 그들에게서 한 발 떨어져 연무장을 바라봤다.
기대 이하의 실력들이었다. 하기야 정식 기사도 아닌 후보생들이었다.
'게으른 천재라더니, 확실히.'
그래도 싹수가 보이는 이들은 있었다.
가이로 블라디와 청록색 머리의 남자, 푸른색 머리의 여자는 꽤나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다.
한동안 훈련을 지켜보던 루드는 천천히 기척을 지웠다. 이윽고 주변의 시선에서 사라진 루드는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일단 기사학부를 둘러보자.'
프로젝트에 관한 증거는 하나도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곳 어딘가에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영혼에 새겨진 본능이랄까.
사관학교에 들어서자마자 느낀 꺼림칙한 기분이 그리 말했다.
프로젝트가 있다면 프로젝트 팀이 있을 터.
그들의 본거지를 찾아야 했다.
일단은 기사학부부터였다.
프로젝트의 표적은 알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사 후보생일 확률이 높았고, 따라서 표적들을 관찰하기 편한 기사학부 내에 몸을 숨겼을 가능성이 있었다.
'별다른 소득은 없군.'
기사학부 부지 곳곳을 확인한 루드는 시간을 확인하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달리 감각에 걸려드는 건 없었다. 제국의 극비 프로젝트였으니 이 정도 어려움은 예상한 바였다.
'후보생들도 자주 확인해야겠군.'
프로젝트의 근거지를 찾는 것과 병행해야 할 일이었다. 특히 표적이 될 수 있을 만한 '강렬한 감정'을 가진 인물을 꾸준히 체크하는 게 중요했다.
알렉의 경우는 죽음의 순간에서야 광증이 나타났지만, 전생에서 봤던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특정 상황이나 인물에 대한 격한 감정을 기반으로 광증이 발현됐다.
그것을 감안하면 감정적 동요가 강하게 일어날 인물이 프로젝트의 표적이 될 터였다.
'가이로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었는데.'
소문만 들었을 땐 가장 높은 확률로 표적이 될 수 있겠다 생각했다.
망나니가 된 이유나 망나니짓을 하는 이유에 그러한 감정적 동요가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가이로와 대화를 나눠 보니 알려진 것이 전부인 인물은 아니었다.
웅성웅성.
생각을 정리하며 돌아온 연무장은 소란스러웠다.
루드는 처음부터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스콰이어들 사이에 녹아들어 상황을 확인했다.
'가이로?'
소란스러움의 중심에 선 건 가이로였다.
그가 칼리텍 최고의 문제아인 걸 감안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맞은편에 선 상대는 달랐다.
'저 여자는....'
루드의 기억에 있는 얼굴.
아까 전 가이로와 마찬가지로 괜찮은 움직임을 보였던 푸른색 머리의 후보생이었다.
두 사람은 연무장 중앙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검을 드세요. 가이로."
"...그러기 싫은데."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검을 드세요."
"그러기 싫다면?"
푸른색 머리의 후보생은 자신의 말대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수평으로 세운 검을 자신의 시선과 같은 높이로 올릴 뿐이었다.
"루시아.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이야?"
루시아는 가이로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결국 가이로도 검을 들어 몸 앞에 위치시켰다.
"하아... 네가 자초한 거니까 안 봐줄 거다. 어디 가서 맞았다고 울지 말라고."
둘의 기세가 점차 날카로워졌다.
다른 후보생과 스콰이어들은 숨죽인 채 두 사람의 대치를 바라봤다.
숨죽인 건 루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상치 못했던 좋은 기회에, 루드는 차분히 내려앉은 눈으로 가이로와 루시아, 그리고 연무장에 있는 모두를 관찰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6화
루시아의 검이 가이로의 목을 노렸다.
진검이 아니라지만 자칫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급소.
그러나 가벼운 몸놀림으로 검의 궤도에서 벗어난 가이로는 손쉽게 검을 쳐냈다.
"타핫!"
공격이 실패했지만 루시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이로는 칼리텍 사관학교 최고의 실력자. 좋지 않은 행실이 평판을 갉아먹지만 실력만큼은 모두가 인정하는 강자였다.
미간. 목. 명치.
거듭 급소를 노리는 루시아의 공격.
그 속도는 공격이 거듭될수록 빨라졌다.
"단순해. 그리고 느려."
하지만 루시아는 단 하나의 유효타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찌르기 중심의 공격은 목표 지점이 명확한 만큼 단순했고, 공격 속도는 빨랐으나 순차적으로 가속된 까닭에 눈에 익어 제 장점을 살리지 못했다.
터엉-!
가이로는 재차 목을 노리고 들어온 검을 감아 챘다.
한순간에 검을 잃은 루시아의 목에 가이로의 검끝이 닿았다.
승부는 그것으로 끝.
"더 할 거야?"
"...졌습니다."
질끈 깨문 입술에선 여러 감정이 느껴졌다.
가이로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몸을 돌려 연무장 밖으로 사라졌다.
"가이로는 가이로네."
"망할 재능 같으니라고. 누군 수련에만 몰두하는데도 매일 노는 놈 하나를 못 이기다니."
"어디 재능 차이만 있겠어? 가문 차이도 있지. 가이로가 먹었을 영약만 몇 개겠어. 반면 루시아는 평민 출신이잖아."
루드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새로운 정보들을 수집했다.
루시아란 후보생이 칼리텍 사관학교에서 수위에 드는 실력을 갖췄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평민 출신이란 건 새로운 정보였다.
"근데 갑자기 왜 싸운 거야?"
새로운 정보에는 대련의 이유도 있었다. 대련 직전까지 자리를 비웠던 루드는 귀를 기울였다.
망나니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본 가이로는 이유 없이 싸움을 걸 성정이 아닌 바.
상대인 루시아도 주변의 신뢰가 두텁고 차분한 성정으로 보였으니 대련의 이유가 궁금했다.
"가이로 녀석이 신디한테 딴지를 걸었거든."
"뭐라고 했는데? 그보다 루시아가 신디랑 친했던가."
"검의 경로가 그게 맞냐고 했던가? 몰라. 어쨌든 먼저 시비를 건 건 확실했어."
같은 검을 익히고 실력의 고하가 확실하다면 모를까.
타인의 검을 함부로 평가하는 건 상대와 검술을 동시에 모욕하는 것과 같았다.
'흐음.'
대련의 이유를 알게 된 루드는 가이로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훈련이 끝날 때까지 보이지 않던 가이로는 돌아갈 시간이 되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평한 기색으로 나타났다.
"단테! 이만 돌아가지."
사관학교 밖에는 이미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자택으로 돌아오는 길, 가이로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이야기를 꺼냈다.
"스콰이어로서의 첫날이었는데 소감이 어땠나?"
"과연 사관학교는 엄청나구나 싶었습니다. 시설도 커다란데다 후보생님들의 위용이 절로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다른 후보생을 압도하던 가이로 님의 실력이었지만요."
"하하! 그렇게 보였나?"
가이로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 침묵했다. 가만히 밖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여러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정적은 마차가 저택에 다다랐을 때가 돼서야 깨졌다. 가이로가 낮은 음색으로 루드를 불렀다.
"단테."
"예. 도련님."
"오늘 사관학교에서 다른 후보생과 대련한 것은 비밀일세."
"예?"
루드와 눈이 마주치자 진중하던 가이로의 눈빛에 변화가 생겼다. 쓰윽 휘어진 눈매를 따라 낮았던 목소리도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로 변했다.
"집사가 자네한테 오늘 있었던 일들을 물을 텐데, 사관학교에서 싸운 걸 알면 또 한 소리 할 게 분명하거든. 그럼 자네도 질책을 피해 가지 못할 테니 서로 좋게 좋게 가자는 말일세. 그것 외에는 본 대로 들은 대로 다 말해도 좋네."
"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래그래. 이만 내리지."
그리 언질하고 마차에서 내린 가이로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잠시 서 있자니 가이로의 말대로 집사가 다가왔다.
"단테 자네는 잠깐 나 좀 보지."
집무실로 자리를 옮긴 집사는 따뜻한 차를 건넸다.
"별일은 없었는가?"
"별일이라 하심은?"
"없었다면 됐네. 그보다 도련님께서 수업엔 열심히 참여하셨나?"
"하하. 그게 그러니까. 음. 아하하."
"...됐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군."
집사는 착잡한 눈빛이었다.
찻잔을 들다 다시 내려놓은 집사가 루드를 바라봤다.
"단테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부탁 말씀입니까?"
"그래. 이제부터 가이로 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내게 보고해 줬으면 해."
"예?"
"가이로 님께서 수업에 참여는 하시는지, 하시지 않는다면 어디서 무얼 하시면서 시간을 보내시는지, 교우 관계나 대인 관계는 어떠한지. 기회가 닿는다면 어떤 심중을 품고 계신지."
집사의 눈은 무언가를 결심한 이의 것이었다.
"뭐든 좋으니 내게 갖고 오게나. 그것이 블라디 가, 나아가 가이로 님을 위한 일일 터이니."
"알겠습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고맙네. 이만 나가 봐도 좋네."
꾸벅 고개 숙인 루드가 집무실을 나가자 집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녕 그것이 도련님의 뜻이라면, 이 늙은이는 그저 따를 수밖에요.'
어쩌면 오래 전부터 눈치 채고 있던 것이다.
나이가 차면, 시간이 지나면 바뀌시겠지 하며 외면해왔지만 이제는 마주해야 할 때였다.
그만큼 가이로의 뜻은 확고했고, 바뀌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 뜻을 따르는 수밖에.
"흐음. 이런 이유였나."
한편 집무실을 빠져나온 루드는 밀지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밀지에는 블라디 가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스콰이어가 되는 과정이 터무니없이 빨랐던 까닭에 인근 정보 조직에 의뢰했던 내용이 이제야 손에 들어온 것이다.
'꽤 재밌는 녀석이었군.'
이제야 가이로의 행동과 그 평판이 이해됐다.
'천재라 불리는 차남과 가주가 되기 싫은 장남이라.'
커다란 결함이 없는 이상 장자승계가 일반적인 귀족 사회.
별일이 없는 이상 가이로가 블라디 가의 다음 대 주인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완전 꽝이군.'
하여 가이로는 스스로 결함을 만드는 중이었다. 망나니란 오명을 쓰면서까지.
프로젝트의 관계자가 이 정도 연막을 구별하지 못할 리 없었으니 가이로를 미끼로 프로젝트 관계자를 만나는 건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이로의 스콰이어가 된 게 완전히 실패한 전략이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열심히 수업에 빠지고 모습을 숨기기 일쑤인 망나니의 스콰이어. 타인의 방해 없이 활동 폭을 넓게 가져갈 수 있었다.
'도련님을 찾고 있다는 핑곗거리도 괜찮겠군.'
방으로 돌아온 루드는 사관학교를 떠올리며 지도를 그렸다.
사관학교 내 각 학부의 위치. 방향. 유동 인구. 수업 시간....
지도 위에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정보가 쌓였다.
'일단은 이 정도인가.'
아직 가보지 못한 학부의 모습도, 정보도 없는 미완성의 지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지도가 완성될 때, 프로젝트를 마주할 거란 것을.
* * *
"또?"
"예. 또입니다."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쉰 가이로가 두 손을 위로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만 포기해. 어차피 안 된다는 거 너도 알잖아."
"아뇨.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할 순 없습니다."
"해 봤잖아. 엊그제도, 어제도."
"오늘은 아직 안 해 보지 않았습니까."
곧은 눈이 빤히 가이로를 바라봤다. 결국 가이로는 항복을 선언했다.
"좋아. 대신 딱 한 번이야."
"충분합니다."
두 사람이 적당히 거리를 벌렸다.
"뭐야. 또 해?"
"루시아도 대단하다. 저러니까 강한 건가."
"그럼 뭐해. 그래 봤자 가이로한텐 안 되는데."
그 모습을 목격한 후보생들은 저들끼리 잠시 떠들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처음 한두 번이야 재밌는 볼거리였지만 며칠째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련은 더 이상 큰 흥미를 끌지 못했다.
하물며 그 결과가 항상 같아서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끝."
"...고생하셨습니다."
역시나 오늘도 가이로의 승리로 끝난 대련.
언제나와 같이 연무장을 벗어나려는 가이로의 뒤로 루시아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오늘은 어땠습니까."
"응?"
"단순하고 느리다. 노림수가 너무 뻔하고 잘 보인다. 상대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루시아가 뱉은 말들은 전부 대련 중간이나 대련이 끝나고 나서 가이로가 했던 말들이었다.
"오늘은 어땠냐는 말입니다."
"...발이 멈췄어."
그리 대답한 가이로는 빠르게 연무장에서 사라졌다.
"발이 멈췄다."
반면 대답을 들은 루시아는 그 자리에 서서 가이로의 말을 곱씹었다.
'눈이 좋은데.'
둘의 모습을 구석에서 지켜보던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로는 눈이 좋았다.
단순한 시력이나 동체 시력만이 아니라 상대의 장단점, 무게중심의 이동, 움직이는 흐름.... 그런 걸 읽어 내는 눈이 좋았다.
대련을 할 때마다 툭툭 내뱉는 말들은 그런 눈을 바탕으로 내린 피드백이라 할 수 있었다.
'아마 그걸 느꼈기 때문에 계속해서 대련을 요청하는 거겠지.'
찌르기 중심의 검사는 장단점이 명확하다.
목표 지점을 향해 최단거리로 신속하게 내지르는 검격은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지만, 반대로 말해 목표 지점과 최단거리를 정확히 가늠하는 이에겐 역습하기 좋은 공격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속도만큼이나 중요한 게 풋워크.'
그저 빠르기만 해선 강자를 상대할 수 없다.
속도란 상대적인 것. 상대의 타이밍을 빼앗아 공격하고, 역습을 피하며, 재차 공격할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이는 게 중요했다.
방금 전 발이 멈췄다는 가이로의 말은 그런 의미였다.
가이로의 피드백을 곱씹던 루시아가 생각 정리를 마쳤을 때, 그녀의 앞에 한 후보생이 다가왔다.
청록색 머리의 남자 후보생은 일전 루드가 싹수가 있다 평했던 마지막 인물이었다.
"왜 자꾸 그러는 거야?"
"무슨 말씀입니까?"
"가이로와의 대련 말이야. 혹시 나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 없으니까 그만둬."
잠시간 그를 바라보던 루시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분명 첫 대련은 신디 당신 때문이었죠."
가이로와의 첫 대련은 가이로가 신디의 검을 함부로 평가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함께 배우는 검도 아니고 개인의 검술에 대해 타인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정도가 지나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비단 그 말을 한 게 가이로가 아니었어도, 그 말을 들은 게 신디가 아니었어도 루시아는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하여 루시아는 행동했고, 그 결과 참패했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옳은 일이었기 때문에.
대련의 시작은 분명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가이로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서라고, 그리 단언할 수 있을까?
"가이로와 대련하는 네 모습을 보고 있으면 힘들어. 나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고초를 겪는 것 같고. 닿지 않는 찬장에 닿으려고 발버둥 치는 아이 같아 불안해."
어느새 그의 시선은 스스로의 발끝에 닿아 있었다.
"그러니까 그만 둬. 말이 대련이지 일방적인 공방이잖아. 보는 사람이 괴로울 정도인데 당사자인 너는 더 괴로울 거 아니야."
마음이 담긴 부탁.
그러나 루시아는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대련은 계속 할 겁니다."
"어째서?"
"닿지 않는 찬장에 닿으려고 발버둥 치는 아이 같다 했습니까? 예. 그럴지 모릅니다. 그런데 발버둥 치는 게 잘못된 겁니까?"
루시아의 눈이 신디를 응시했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올곧은 시선이었다.
"가만히 있어서 바뀌는 건 없습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계속해서 노력하고 움직이는 겁니다. 지금은 닿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닿기 위해서."
루시아는 등을 돌렸다.
그 뒤로 남겨진 마지막 말이 신디를 찔렀다.
"설령, 그게 누군가에겐 발버둥으로 보일지라도 말이죠."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7화
참 이상한 애다. 독종이라는 얘기를 몇 번인가 들었던 것도 같은데, 이건 독종보다도 별종에 가까운 것 같았다.
'안 힘든가.'
매일 같이 계속되는 대련.
아니, 그걸 정상적인 대련이라 할 수 있을까. 공격하나 닿지 못하고, 움직이나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매일 같이 이어진 대련은 첫날 이후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날 싫어해서인가. 아니면.'
첫 대련에서 느꼈던 적대감을 떠올리자면 아마 싫어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근래에는 그런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 것도 같았다.
그녀의 적대감에 익숙해져서 하는 착각일까, 아니면 정말 적대감이 수그러든 걸까.
어찌됐든 나쁠 건 없었다. 일견했을 때 루시아와 하는 대련은 '괴롭힘'의 모양새에 가까웠고, 그건 망나니로서의 평판을 더 가속시켜 줄 수 터였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미치진 못한다지만 루시아 또한 사관학교의 기대주. 그녀와의 대련에서 알게 모르게 얻어가는 것들도 있었다.
'대단하긴 해.'
본받을 게 많은 여자였다.
멈추지 않는 집념. 포기하지 않고 움직이는 독기. 매번 개선점을 찾는 향상성.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푸른 머리칼. 항상 올곧은 시선을 품은 벽안. 뚜렷한 이목구비와 아름다운 턱선. 그걸 따라 흐르는 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갑자기 떠오른 루시아의 모습을 고개를 내저으며 지워 낸 가이로가 창밖을 보았다.
그를 태운 마차는 오늘도 느지막한 시간이 돼서야 사관학교로 향하는 중이었다.
'오늘도 하려나.'
어느새 가이로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흠흠. 단테 자네 눈엔 그래 보이나?"
가이로는 크게 부정하지 않았다. 근래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루시아와의 대련도 나름 즐겁고, 목적하고 있는 바가 잘 진행되고 있었으니 기분 나쁠 일이 없었다.
거기에는 눈앞의 스콰이어도 한몫했다.
'금방 자르려나 싶었는데, 꽤나 괜찮단 말이지.'
가이로를 거쳐 간 스콰이어만 벌써 셋이었다. 아무리 정식 기사가 아닌 후보생의 스콰이어라지만 스콰이어의 의의를 따져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리 많은 스콰이어가 거쳐 갔던 것은 전부 가이로의 계획 때문이었다.
망나니로서의 자신의 추태를 가문에 전달할 수 있는 연락책이면서, 그 대상을 갈아치우는 것만으로도 평판을 쭉쭉 내릴 수 있는 존재가 스콰이어였으니.
'뭐, 이전의 스콰이어들이 너무 별로인 것도 있었지만.'
망나니란 소문을 듣고 콩고물이 떨어지진 않을까 찾아온 녀석이 하나.
블라디 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이곳저곳 행패를 부린 녀석이 하나.
물론 제대로 된 녀석도 하나 있었지만....
'나한텐 배울 게 없을 것 같다니.'
이래봬도 사관학교 제일의 실력자인데다 나름 실력에 자신 있는 가이로로선 입맛이 쓴 이유였다.
하지만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 보여 줄 수 있는 모습 중에 배울 만한 게 없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단테는 여러모로 안성맞춤이었다.
딱히 호가호위하려는 것 같지도 않고, 너무 열심히 배우려 하지도 않고.
또 자택으로 돌아올 때마다 집사에게 향하는 걸 보면 망나니로서의 모습도 잘 전달하고 있는 것 같고.
'마지막 스콰이어려나.'
가문의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면 아마 지금과 같은 지원은 없을 터.
"도련님?"
"이제 학교 앞이니 후보생이라 부르게. 그리고 기분이 좋아 보인다 했지. 자네 말이 맞네. 요새 기분이 좋거든."
마차에서 내린 가이로는 성큼성큼 사관학교로 들어섰다. 지금 시간이면 다들 연무장에 있을 때였다.
예상대로 모두 연무장에서 자유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구석에 자리 잡은 가이로는 시야를 넓게 펼쳐 연무장의 전체적인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때였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어느 후보생이 대화를 요청한 것은.
"무슨 용건인데?"
"루시아와 관련된 거야."
귀찮다는 투로 대답하며 시선을 돌린 가이로는 그제야 후보생의 얼굴을 확인했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휘두르는 검의 경로가 조금 더 사선이어야 할 것 같은데 수직에 가까웠던, 그래서 뱉었던 말 때문에 루시아와 대련을 하게 됐던 사건의 주인공.
이름이... 신디였나.
"듣고 있으니까 말해."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신디는 곧 가이로를 찾아온 이유를 꺼냈다.
"루시아를 괴롭히는 거, 그만두는 게 어때?"
"뭐?"
"대련이라고 하지만 누가 봐도 정상적인지 않은 대련. 괴롭힘으로밖에 볼 수 없는 대련이지. 블라디 자작가의 후계자가 그런 데서 재미를 느끼는 건 아니겠지?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 안 그래도 평판이 흔들리는 중인데 말이야."
가이로는 기가 찬 표정으로 신디를 바라봤다. 신디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거 웃긴 녀석이었네."
가이로는 눈앞의 후보생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기억하는 게 맞다면 신디는 자신이나 루시아처럼 사관학교의 기대주였다.
사관학교 내에서 신분을 들먹이고 싶진 않지만, 루시아와 마찬가지로 평민 출신이었고.
"이거 뭐 그런 건가? 평민 간의 연대? 귀족들에 맞서기 위해 우리끼리 으쌰으쌰 하자?"
우스운 일이었다.
신디가 말한 것들. 괴롭힘이니 평판이니 하는 것들은 죄다 의도한 모습이었다.
의도한 대로 보였고 그대로 결과가 나왔으니 좋아해야 할 일,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아까 전 단테에게 기분 좋다 말했던 건 취소였다. 지금은 기분이 많이 안 좋았다.
"루시아가 그러던가? 자기 대신 가서 대련을 멈춰 달라고 하라고?"
아니, 그럴 리 없지.
따로 대화하거나 하지 않았지만 근래의 대련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루시아는 그럴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 이 모든 건 눈앞의 신디라는 녀석의 독단.
"내가 루시아를 괴롭히는 것 같이 보여? 그걸로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아? 그렇게 보인다면 네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녀석인 거겠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모습은 주변에 어떻게 보일까. 여태까지처럼 망나니로 보일까, 아니면 다른 모습으로 보일까.
그러나 그런 데 신경 쓸 겨를 따위는 없었다.
하나 확실한 건. 주변에 어떻게 보이든 지금만큼은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는 것.
"루시아와의 대련은 루시아가 직접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계속할 거다. 그녀가 요청한다면 나는 계속 그 요청을 수락할 거라고. 알아들었어?"
언성이 높아진 탓일까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신디를 노려보던 가이로는 이내 자리를 떴다.
"무슨 일이죠?"
가이로가 떠난 자리. 개인 수련을 마치고 뒤늦게 소란스러움을 인지한 루시아가 다가와 물었다.
"아무것도. 아무 일도 없었어."
신디는 그저 그리 답했다.
* * *
'한 곳 남았나.'
기사학부와 군사학부, 행정학부까지 다 둘러봤다. 이제 남은 곳은 한 곳, 개발 연구학부였다.
'거기 근처는 얼씬도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가이로가 말하길 개발과 연구라는 특성 때문에 외부 출입에 민감하고 온갖 괴담이 쏟아지는 곳.
그렇기에 더더욱 확인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이미 조사가 끝난 세 개의 학부에서 프로젝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더더욱!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연구학부를 조사해 볼걸 그랬나.'
아마 프로젝트는 연구학부에 있을 것이다.
이곳 사관학교에 프로젝트가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고, 확인하지 못한 곳이 연구학부 한 곳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설마 대놓고 수상한 분위기가 풍기는 곳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까 했던 심리에 역으로 당한 꼴이 됐다.
연구학부는 그 보안과 기밀 유지를 위해 사관학교 내에서도 가장 넓고 깊숙한 곳을 부지로 사용했다.
부지 내에는 건물들이 여럿이었는데, 어느 건물에서 어떤 연구 개발이 진행되는지는 해당 팀이 아니고서야 알지 못했다.
같은 학부더라도 팀원이 아닌 이상 연구 개발에 대한 기밀이 유지된다는 건 프로젝트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였다.
'최대한 빠르게 찾는다.'
가이로의 스콰이어가 되면서 외부에서 사관학교 내로의 출입이 자유로워졌지만 그건 가이로가 사관학교에 있는 시간대에만 가능한 것.
반대로 말해 가이로가 사관학교를 벗어난다면 루드 또한 행동에 제약이 걸린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사관학교는 본래 기숙사제.'
가이로 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모든 생도들이 훈련이 끝난 시간에도 학교 내에 머물렀고.
'프로젝트 팀이 타깃에 접근한다면 밤일 확률이 높다.'
프로젝트 팀이 수면 위에서 활동하는 시간은 굳이 낮일 이유가 없었다.
그 사이에 일이 벌어진다면 제아무리 루드여도 어쩔 도리가 없었으니, 최선의 방법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프로젝트 팀을 찾아 괴멸시키는 것이었다.
'여긴 아니고.'
건물 하나하나, 층계 하나하나. 어떤 연구 개발이 진행되는지 확인하고 정보를 기억했다.
이리 쌓인 정보는 지도의 완성도를 높여 갔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오늘 A동 건물을 확인했으니 남은 건 B동과 C동, 두 개의 건물이었다.
빠른 시일 내에 프로젝트 팀을 찾는 것만큼이나 일을 그르치지 않는 것도 중요했다.
A동의 확인을 마친 루드는 연무장으로 복귀했다. 주변의 누구도 연무장으로 돌아온 루드에게 신경을 두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무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은 가이로와 루시아의 대련에 향해 있었으니.
'무슨 일이지?'
첫 날의 대련 이후 두 사람의 대련은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졌다.
때문에 흥미롭게 보던 시선들도 점차 수그러들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첫날의 대련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돼 있었다.
"일어나라."
"큭...."
검을 지지대 삼은 루시아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터진 입술에서 나온 피는 입 주위에 말라붙었고 계속해서 얻어맞은 까닭에 몸은 연신 휘청거렸다.
"아직도 단순해. 그리고 느려."
그리 말하는 가이로도 이전까지의 대련에서 보여 주던 깔끔한 모습이 아니었다.
산발이 된 머리와 그 아래로 찢어진 이마에선 피가 흘렀다.
"무슨 일이래. 갑자기 왜 저래?"
"여태까진 안 이랬잖아. 왜 그러는 거래?"
"나야 모르지. 망나니가 이제야 본색을 드러냈나 보지."
주위를 가득 채운 후보생들의 말. 대부분이 지금 상황에 대한 의문과 놀람의 표현이었다.
루드는 주위의 말보다는 그 중심에 선 두 사람에게 집중했다.
망신창이가 되었지만 아직 또렷한 눈빛.
당연하다는 듯 그걸 마주 보는 시선.
"완급을 조절해. 느렸다가 빠르게. 빠른 것 같지만 한 템포 느리게, 그리고 순식간에 최고 속도로."
두 사람은 지금, 여태까지의 대련 중 가장 수준 높은 대련을 하고 있었다.
그걸 알아챈 것은 단둘.
주변의 반응이 아니라 오롯이 가이로와 루시아 두 사람에게 집중하고, 그 대련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준을 갖춘.
루드와 신디뿐이었다.
꽈악-.
신디는 주먹을 꽉 쥐었다.
두 사람의 대련을 바라보는 그의 안에서, 무언가 결심이 섰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8화
루시아는 가이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마에서 흐르는 피와 흐트러진 호흡, 그에 따라 미세하게 들썩이는 상체.
여태까지의 대련에선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어째서?'
그가 갑자기 바뀐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싫지 않은 변화였다.
여태까지처럼 마지못해 받아들이던 대련의 느낌이 아니었다. 지금 순간만큼은 서로가 전심전력을 다해 부딪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게 가이로의 진짜 실력.'
사관학교 제일의 실력자라지만 그 칭호에는 항상 물음표가 따라다녔다. 블라디 가문의 이름으로 얻은 칭호가 아니냐는 소문도 있었으니.
그녀 본인도 직접 검을 맞대고 손을 섞기 전까진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첫 대련 때 느꼈다. 사관학교 제일의 실력자라는 칭호는 가문의 이름으로 따낸 게 아니란 것을.
'블라디 가의 한량, 사관학교의 망나니.'
가이로에게 붙은 멸칭. 사관학교 제일의 실력자란 칭호보다 익숙한 호칭이었다.
그게 진짜 그의 모습일까?
'발이 멈추면 안 돼.'
떨어지지 않는 발을 힘겹게 움직인다.
'속도 변화는 한 번에. 상대를 현혹시키면서.'
직전의 공격까지 꾸준히 떨어트렸던 속도를 단숨에 끌어올리며 검을 찌른다.
자신이 지쳐서 더 이상 속도를 내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의표를 찍는 공격.
가이로를 통해 배운 것들을, 가이로를 이기기 위해 쏟아 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가이로에게는 그 속셈과 움직임을 미리 읽어 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루시아가 찌른 검이 가이로의 몸에 닿기 직전까지.
동시에 그 찌르기를 정확히 눈에 담은 가이로가 몸을 비틀며 궤도를 뒤틀고, 제 검으로 루시아의 복부를 타격하기까지.
수십, 수백의 단위로 쪼개진 그 시간에서 루시아는 깨달았다.
검을 파지한 손 안쪽에 잔뜩 박힌 굳은살.
체력 소모를 유도하며 끌고 왔음에도 여전히 매서운 움직임.
상대를 보고, 분석하고, 그 너머를 바라보는 저 눈.
'가이로는... 망나니 같은 게 아니었어.'
이런 이가 망나니일 리 없지 않은가.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오직 그 앞에 선 가이로에게만 보이는 미소였다.
퍼억-!
* * *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택으로 돌아온 루드는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의 테이블엔 두 개의 찻잔이 놓여 있었다.
"오늘도 루시아 후보생과 대련을 했군요."
"네. 집사님."
집사의 표정은 오묘했다.
가이로가 루시아를 기절시킨 대련이 벌써 삼 일 전이었다.
그 뒤로도 둘은 매일같이 격한 대련을 했고, 그 대련들은 매번 루시아가 움직이지 못할 때가 돼서야 끝났다.
'흐음.'
손에 쥔 찻잔 안에 옅은 파문이 번졌다.
단 한 명의 후보생과 이뤄지는 대련은 벌써 일주일 넘게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아무리 상대가 동의했다지만 그 끝이 너무 과격하다는 것.
심지어 상대 후보생이 여자라 했으니 세간의 시선이 좋지 못할 것은 당연했다.
'여태까지의 일환이라 봐야 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뜻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다면 망나니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 생각했을 터다.
그러나 지금 가이로의 행동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일단 알겠네. 오늘도 고맙네."
"별말씀을요.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도련님의 스콰이어를 물린 집사는 생각했다. 루시아란 후보생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한편 방으로 올라온 루드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사관학교 내부의 모습이 여러 차례 교차하며 점차 구체화됐다.
각 학부의 위치, 학부의 부지와 시설, 학생들이 다니는 길목과 사관학교 관계자들의 동선.
이윽고 모든 이미지의 교차가 끝났을 때 하나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찾았다.'
마침내 프로젝트를 박살 낼 지도가 완성됐다.
* * *
"할 말이란 게 뭐죠?"
달이 떠오른 늦은 밤.
루시아는 기숙사 뒤편을 찾았다. 신디가 할 말이 잇다며 불러냈기 때문이었다.
인적이 드문 데다 밀담을 나누기 좋은 곳이라 고백의 명소로 알려진 곳.
심지어 지금은 대부분의 학생이 잠든 늦은 시각이었다.
하여 대담을 거절하려 했던 루시아였지만 당시 신디의 표정이 결국 그녀를 이 자리에 나오게 만들었다.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닐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너스레를 떨며 루시아의 걱정을 덜어 준 신디는 곧 본론을 꺼냈다.
"저번에도 말했던 건데, 가이로와의 대련, 그만두면 안 돼?"
"...당신의 말처럼 저번에도 대답했던 걸로 압니다만."
"알아. 그래서 참고 견뎌 보려 했는데 도저히 안 되더라고. 그래서 그래. 최근에는 엄청 격하기도 했잖아."
자신의 행동을 규제하려는 말에 루시아는 화를 내며 대꾸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주한 신디의 표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고통스럽지 않아? 나는, 나는 너무 고통스러워. 루시아 네가 가이로에게 지는 걸 보는 게 너무너무 고통스럽다고."
"신디 당신...."
"안 된다는 걸 알잖아. 재능의 차이. 무엇보다도 가문과 환경의 차이. 도전하고 도전해 봤자 깨지고 또 깨지는 것밖에 안 되는데 왜 자꾸 도전하는 거야. 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고? 그럴 수 있지. 근데 하면 변하긴 해? 지금은 닿지 않아도 언젠간 닿을 수 있는 게 확실하냐고!"
울부짖듯 토해 내는 속엣말. 절규와도 같은 그 말들엔 하나같이 진한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미안해 루시아. 그런데 진심이야. 나는 네가 여기서 멈췄으면 좋겠어. 더 나아가다 꺾이지 않았으면 해. 무너지지 않았으면 해. 그러니까 제발 그냥 가만히 있어 줘. 부탁이야."
신디는 그리 소원했다. 오래 전, 백날 노력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아 버린 남자의 고백이었다.
사관학교에 입교하고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낸 적 없는 루시아다. 누구보다 성실히 훈련에 임했고 개인 훈련도 가장 많이 했다.
그건 누구보다 신디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런 루시아가 매일같이 놀기 바쁘던 가이로에게 엉망진창으로 당하는 걸 보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네 번... 그것들이 반복됐다.
더 이상 그 모습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신디. 당신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런 신디의 모습에 루시아는 가이로를 떠올리며 말했다.
"가이로는 망나니 같은 게 아닙니다. 어째서 망나니란 오명 아래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제가 했던 대련들이 그 증거입니다."
생각해보면 망나니라 하지만 가이로가 남에게 행패 부렸던 기억은 없었다.
간혹 다른 후보생들과 시비가 붙긴 했으나 여타의 후보생들 간에도 종종 싸움이 일어나곤 했으니 특별할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신디에게 했던 말도.'
검의 경로에 대한 발언.
어쩌면 조언이었을.
물론 타인의 검술에 대해 함부로 발언하는 것은 위험하고 예의 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가이로는 단순히 '좋은 눈'을 기반으로 제 생각을 말한 것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신디."
후. 루시아는 숨을 골랐다.
지금부터는 조금 날카로운 말이었다.
"당신, 제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제 자리에 당신의 모습이 비쳐 보이는 게 싫은 거 아닙니까?"
이전에 찾아왔을 때도 했던 생각이었다.
단순히 가이로와 대련하고 다치는 자신의 모습이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그 모습에 신디 본인이 투영돼서는 아닐까.
그 생각은 지금의 모습을 보고 더욱 굳어졌다.
"당신은 멈춰 있으세요. 저는 나아갈 테니. 설령 나중에 멈추게 되더라도, 지금이 그때는 아닙니다."
신디의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녀도 여러 번뇌를 겪었고, 그중엔 지금 신디의 마음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말 그대로 번뇌. 딛고 일어서야 할 것들이었다.
"지켜보세요. 제가 보여 드리죠. 발버둥 치는, 그리고 결국 원하는 곳에 닿는 모습을요."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할 말을 마친 루시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
적막이 내려앉은 기숙사 뒤편.
고개 숙인 채, 신디는 오래도록 가만히 있었다.
늦은 밤, 그나마 빛이 돼 주던 달이 구름에 가렸을 때.
신디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할게. 그 프로젝트라는 거."
아무도 없는 빈 공간. 보이지 않는 대화 상대.
그러나 신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누군가에게 하는 게 분명한 말이었다.
"그 프로젝트란 것만 하면, 나도 닿을 수 있는 거지?"
그 순간. 분명 아무도 보이지 않던 공간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닿기뿐입니까. 뛰어넘을 것을 약속하죠."
낮지도, 높지도 않은 음색은 약간의 웃음기를 머금은 채 덧붙였다.
"프로젝트에 합류하신 걸 환영합니다."
* * *
"단테. 무슨 일이 있나?"
"예? 아뇨. 일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어찌 그러십니까?"
"아니라면 됐고. 평소와 좀 다른 것 같아서 말이야. 피곤한지 잘못 본 것 같네."
그리 말했으나 가이로는 이상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어쩐지 평소의 단테와 달라 보였다. 조금 더 차분하고 날카롭다 해야 하나.
하지만 막상 또 대화를 나눠 보면 자신이 알고 있는 단테의 모습 그대로인 것도 같았다.
느긋하게 달린 마차는 오늘도 해가 중천에 걸리고서야 사관학교에 도착했다.
"그럼 이따 보지."
오늘도 루시아와 대련을 해야 했다. 따로 약속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몸에 문제가 없으면 하루에 한 번 대련을 하는 게 익숙해진 상태였다.
'음?'
그러다 문득, 가이로는 또다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단테가 인사를 했던가?'
물론 자신이 아랫사람의 행동 하나하나에 꼬투리를 잡거나 속으로 이름을 적어 놓는 소인배는 아니었다.
다만 어쩐지 느껴지는 낯섦이 평소와 다르게 모든 걸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연무장으로 향하다 말고 멈춰 선 가이로는 주위를 둘러봤으나 이미 단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감도 좋군.'
그 모습을 지켜본 루드는 가이로에 대한 정보를 하나 더 추가했다.
가이로는 언제고 다시 활용할 가치와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귀족가의 일원이며, 스스로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일단은 자작가의 후계자.
신분이 높고 재능이 뒷받침되니 언제고 다른 곳에서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좋은 관계로 마주하면 좋겠지만.'
생각보다 정이 쌓인 걸까. 죽여야 하는 입장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적이 제국인 이상, 좋은 재회가 아닐 확률도 높았다.
그럼 어쩔 수 없었다. 명백히 자신의 반대편에 선다면, 그땐....
'일단은 나중 일이다.'
그때의 일을 벌써부터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더군다나 꼭 적대 관계로만 만나리란 법도 없었고.
"드디어 보겠네. 프로젝트."
숱한 정보가 모여 모든 게 명확해졌다.
프로젝트가 있는 곳, 그 내부의 시설과 인력, 무력 자원까지.
남은 건 프로젝트를 박살 내는 것뿐.
완성된 지도는 그 결과까지 가장 빠른 길로 안내해 줄 터였다.
"오늘로 끝을 내자고."
스콰이어 단테로서의 삶도.
지긋지긋한 악연의 프로젝트도.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9화
사관학교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개발연구학부에는 세 개의 건물이 있다. 모두 5층 높이로, 한 층에 서너 개의 연구실이 존재한다.
각각의 연구실에서 이뤄지는 모든 연구는 기본적으로 비밀이었다.
연구 내용과 결과를 도둑맞거나 훔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같은 건물의 같은 층을 쓰는 생도들조차 자신이 소속된 연구실이 아니고서야 어떤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너무 쉽게 봤어.'
연구 내용을 보호하기 위해서라지만 프로젝트의 존재를 아는 이에겐 프로젝트를 숨기기 위한 방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명목.
'그게 이중으로 파 놓은 함정이었을 줄이야.'
그건 프로젝트가 수많은 연구실 중 한 곳에서 진행되고 있을 거란 생각을 심는 장치였다.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곳은 연구실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건 전혀 다른 곳이었다.
'대외적으론 존재하지 않는 지하.'
연구학부의 세 건물은 중앙을 기준으로 삼각형을 그리는 형태였는데, 프로젝트는 이곳 세 건물이 감싸고 있는 중앙에 숨겨져 있었다.
정확히는 그 중앙의 지하.
고작 연구실 하나 정도의 사이즈가 아니었다. 연구학부 부지 전부가 프로젝트에 사용되고 있다 봐도 무방한 크기였다.
C동 건물에 도착한 루드는 1층의 끝에 위치한 연구실에 들어갔다. 아무런 잠금장치도 돼 있지 않은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뭐야?"
"연구실 잘못 찾아왔냐."
열린 문 안쪽에서 맞이해 주는 건 험상궂게 생긴 세 명의 사내.
"컥!"
그러나 험한 건 생김새뿐. 험한 생김새가 무력을 보장하진 않았다.
애초에 사내들은 끽해야 동네 건달 수준 정도였다. 실수로 연구실을 착각한 생도들을 걸러 내기 위한 안전장치랄까.
프로젝트가 프로젝트인 만큼 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지만 사실 관계자들은 누군가 프로젝트를 노릴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프로젝트에 대해 아는 이도 극소수인데다, 설령 알고 있더라도 이곳은 외부인의 출입이 어려운 사관학교 내부였다.
'이쪽이군.'
쓰러진 사내들 뒤로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연구실의 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겁고 단단한 문은 지하로 연결되는 문이었다.
문을 통과한 루드는 길을 따라 쭉 걸었다. 길은 외길이었는데 주변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불을 켜는 장치가 보였지만 그걸 켜서야 누군가 들어왔단 걸 알려 주는 꼴이었으니 어둠 속에서 움직여야 했다.
눈이 어둠에 익어 주위가 또렷이 보이기 시작한 무렵.
'사람.'
인기척이 느껴졌다.
숫자는 셋, 저들끼리 떠들면서 다가오는 중이었다.
"문이 왜 열린 거야. 불도 안 켜져 있는데 오작동한 거 아냐?"
"바보 삼형제가 또 잘못 건드린 거겠죠. 저번에 보니까 누가 더 문을 빨리 여냐 뭐 이런 걸로 싸우던데요."
"그 머저리들을 갈아치우든가 해야지 원."
"그래도 매뉴얼대로 확인은 해야 해."
문이 열리면 내부에 신호가 가는 모양이었다.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속전속결로 가야겠군.'
원래도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지만 빠른 일처리가 필요했다. 신호를 확인하러 간 자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남아 있는 녀석들이 이변을 눈치 챌 터였다.
짧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외길인 까닭에 저들이 자신을 인지하기 직전까지 기다리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게 중요했다.
한 명이라도 도망친다면 곤란했다. 강자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상을 느낀다면 관계자들이 곧장 도주를 택할 확률이 높았다.
루드는 숨죽인 채 그들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거리가 가까워지며 상대가 무언가를 눈치 채려는 순간.
"끅!"
"매머스!"
한 명이 목을 잡고 쓰러졌다.
날카로운 얼음 결정이 관통하고 지나간 목에선 두 손으로도 막지 못할 양의 핏물이 쏟아졌다.
남은 두 사람은 뒤늦게 품 안의 날붙이를 꺼내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처음부터 경계를 했어도 모자란 상황, 아무 준비도 안 돼 있는 두 사람은 뱀 앞의 개구리에 불과했다.
세 사람을 처리한 루드는 속도를 높였다. 앞쪽에서 다수의 기척이 느껴졌다.
'본거지다.'
예상대로 금세 넓은 공간이 나타났고.
루드는 재빨리 보이는 사람의 숫자를 헤아렸다.
'...열하나, 열둘.'
오면서 느꼈던 기척의 수와 일치했다.
지금부턴 정말 속도 싸움이었다.
"침입자다!"
그것이 가장 가까이 있던 관계자의 유언이었다.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며 쓰러진 그의 모습에 남은 관계자들이 혼비백산했다.
자료로 보이는 걸 챙기는 이도, 일단 다른 출구로 뛰는 이도 있었다.
'얼음 가시.'
후자의 경우는 가장 먼저 숨이 끊어졌다.
영창 없이 생겨난 얼음의 창이 도망치던 이들의 등에 꽂혔다.
도망치던 자세 그대로 고꾸라진 그들은 서서히 꺼져 가는 생명을 느껴야만 했다.
"후...."
어느새 차가워진 공기. 호흡을 따라 김이 서렸다.
"움직이면 죽는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도망치다 죽은 이들이 일곱. 남은 이들이 다섯이었다.
"한곳에 모여라. 물을 것이 있으니."
루드는 흑마력을 끌어올렸다.
사용을 자제해야 하는 힘이지만 지금은 철저히 '흑마법사'로서 상황을 끌고 나가야 했다.
제국의 프로젝트를 분쇄하고 탈취한 것은 정체불명의 흑마법사.
추후 존재가 드러나더라도 루드 자신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악한 흑마법사가 말을 듣는다고 살려 줄 성싶으냐! 다들 일어..."
퍼억-!
높아진 목소리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또 있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루드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 초 주지."
지금 남은 이들은 전부 습격을 인지하자마자 자료부터 챙긴 이들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프로젝트에 대한 마음이 남다르거나,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맡았거나.
무엇이 됐든 정보를 얻기엔 충분한 이유였다.
"가장 가치 있는 정보를 뱉은 한 사람을 살려 주겠다."
"정보라 하면?"
"프로젝트에 관한 것도, 너희 개인에 관한 것도, 혹은 흥미 있는 정보도 좋다. 무엇이든 내가 가장 가치 있다 판단한 정보를 말한 이를 살려 주지."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루드는 간단한 말로 고민의 순간을 줄여 줬다.
"전부 살기 싫은가 보군. 뭐 각자의 선택이니 말리진 않겠다. 이곳에 남은 것들만 봐도 충분하니."
네 개의 얼음 창이 루드의 얼굴 옆에 나타났다. 그 결과는 극적이었다.
"프, 프로젝트! 이곳의 프로젝트는 강화 병사를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제가 연구 일지 담당입니다! 살펴보시다가 궁금한 게 생기시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뭐든 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연구 일지에는 별거 없어요! 여태까지의 결과를 백업해 놓은 데이터가 있습니다. 그걸 드릴게요!"
세 사람은 연거푸 정보들을 뱉어 냈다. 쏟아지는 정보들에 루드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은 누구 하나가 말하면 그에 질세라 온갖 것을 이야기했다.
"유독 조용하군."
다만 나이가 지긋한 한 사람만큼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살고 싶지 않은가?"
"살고 싶지. 그런데 정말로 살려 주진 않을 거잖나."
"하하. 그래?"
루드는 고개가 또다시 끄덕였다.
이전보다 훨씬 더 큰 동작으로.
퍼억-!!!
앞다퉈 정보를 말하던 세 사람이 쓰러졌다.
"정답이야. 여기서 들은 것 중 가장 정확한 정보로군."
남자는 천천히 입을 뗐다.
"어떻게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 됐는지, 이곳까지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알겠군. 그대는 결국 원하는 무엇도 얻지 못할 거란 걸."
남자의 말에는 비릿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프로젝트를 막으려 한 거라면 한발 늦었네. 이미 완성작이 나왔거든. 아마 지금쯤 시연 중일 텐데, 그 결과는 다른 이가 위에 보고하기로 했으니 우리들의 할 일은 끝난 거지."
"어째서 프로젝트를 막으려 한다고 생각한 거지? 탈취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크하하! 떠보는 소리 말게. 이곳까지 찾아올 정도면 프로젝트에 대해 알 만큼 안다는 소린데, 프로젝트를 개인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무려 제국의 표적이 되는 건데."
맞는 말이었다.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탈취해서 선보인다면 곧장 제국의 낙인이 찍힐 터였다.
그러나 늙은 남자는 몰랐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제국의 적이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도 있다는 것을.
털썩.
마지막 남았던 늙은 남자의 숨이 끊어졌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거란 건, 오늘 들은 말 중 제일 영양가 없었어."
이미 목적한 바는 90% 이상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늙은 남자는 다른 이가 완성작의 소식을 전해 줄 거라 믿었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관학교 내에 이 정도 시설이 있다는 걸 교장이 모를 리가 없지.'
하물며 지하였으니 사관학교를 지을 때부터 염두에 뒀어야 한다. 이는 곧 사관학교장 혹은 그에 준하는 사관학교의 고위직이 프로젝트와 닿아 있다는 의미였다.
하여 이곳에 오기 전 그들을 먼저 처리하고 온 루드였다. 외부와 자유롭게 연결될 수 있는 그들은 까다로운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남은 건 완성작이라는 거 하나인가."
땅에 떨어진 자료를 들자 붉은색 인주로 찍힌 '성공'이란 글자가 보였다.
자료에 적힌 날짜는 바로 어제.
"쯧."
대충 예상은 갔다. 아쉬운 건 결국 희생자가 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는 것.
그러나 아쉬워하고 있는 것보단 빠르게 대처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 * *
이상한 하루다.
단테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진 것도.
루시아에게서 묘한 색다름이 느껴지는 것도.
대련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도.
모든 게 이상한 하루였다.
'아니면 내가 이상해진 건가.'
짧은 순간, 가이로는 그리 생각했다.
그 상념의 틈새를 비집고 루시아의 검이 명치를 찔렀다.
"컥!"
"...닿았다."
가이로에게서 거둔 첫 승리.
비록 가이로가 방심한 틈을 타 훔치듯 뺏어 낸 승리였지만 승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했던 대련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계속해서 패배하던 기억.
그 일편적인 기억은 지금부터 바뀔 예정이었다.
한 번 닿았으니 두 번이라고 못 닿을 이유가 없었다.
승리의 감상에 빠져 있는 루시아의 모습에 가이로는 피식 웃고 말았다.
명치를 맞아 숨이 안 쉬어지는 상황에서도 어쩐지 마음이 편안했다.
막 대련을 끝난 상황.
두 사람의 곁에 누군가 다가왔다. 얼굴을 확인한 루시아는 상쾌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신디. 봤습니까? 드디어 가이로를 이겼습니다."
"...결국 또 했네. 대련."
"신디?"
신디의 등장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가이로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건 오늘 하루 느낀 이상함 중 가장 큰 이상함이었다.
"피해!"
반사적으로 루시아를 밀쳐 낸 가이로는 신디를 바라봤다.
신디의 손에는 피 묻은 검이 있었다. 검에 묻은 피가 누구의 것인지는 명백했다.
세로로 길게 갈라진 가이로의 가슴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