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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10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화

두 개의 세력이 대치했다.

평야를 반으로 나눠 거리를 벌린 두 진영은 마치 바다처럼 넘실거렸다.

하나 자세히 보면, 병사들 사이로 후끈한 열기가 불고 있었다.

흥분, 두려움, 기대, 분노, 적의, 희망, 살심, 생존욕구.

인간이 전장에서 느끼는 감정은 꽤나 공통적인 성질의 것이었고, 따라서 두 진영의 병사들이 느끼는 감정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바라보는 것만큼은 명백히 달랐다.

제국군과 대항군.

변방의 땅을 정복하기 위해 나선 군대와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일어선 군대.

서로의 목적은 극명했다.

아무 말과 행동도 없이 그저 대치 중인 두 세력은 고요히, 알지 못할 불안감을 자아냈다.

약간의 자극에도 터져 버릴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검은색 일색에 흉신악살의 가면을 쓴 남자는 산책 나온 듯 느긋한 걸음이었다.

'저자가 마왕...!'

창을 쥔 젊은 제국군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민족의 대표적인 특징인 검은색 머리에 흉신악살의 형상을 담은 가면. 분명했다.

무수히 많은 제국군을 죽여 그들의 육신으로 허기를 달래고 피로 목을 축이는 악마.

대항군의 선봉이자 수장, 이 전쟁의 가장 큰 적!

"마, 마왕이다."

"지, 진짜로 마왕이 여기 있어...!"

제국군에 동요가 일었다.

악명은 원한과 함께하고, 원한은 곧 분노를 일으킨다.

분노야말로 전쟁에서 가장 좋은 자양분이라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의 이야기.

범인의 범주를 뛰어넘는 악명은 곧 위업이 되고, 두려움을 몰고 왔다. 적군으로서 반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마왕의 등장과 동시에 푸르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대항군의 뒤에서부터 서서히 검어지던 하늘은 어느새 전장에 어둠을 드리웠다.

그때.

제국 진영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화아아악-!!!

섬광처럼 터진 빛은 몇 번인가 점멸하더니 삽시간에 그 몸집을 불렸다.

"오오오오오오!!"

"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용사님이시다. 함성을 질러라!!"

직전까지 고요하던 전장의 모습은 꽤나 상서로웠다.

어느새 제 머리 위의 어둠을 몰아낸 빛 덕분에 서로의 진영을 중심으로 어둠과 빛이 대립한 모습이었다.

대항군의 수장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빛을 휘감은 이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제 진영을 가로질러 나왔다.

"용사님이다!"

제국군에 드리운 암운을 물리치고 분위기를 반전시킨 주인공.

대항군의 마왕에 대항하는 제국의 검이자 제국군의 방패.

제국은 그를 용사라 불렀다.

"마왕 루드란테."

용사의 시선에 마왕이 담겼다.

같은 전장에 섰던 적은 몇 번 있었으나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일대일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가면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왕이 젊은 남자란 건 알 수 있었다.

수십, 수백 년 간 갈라져 있던 이민족들을 통합하고 제국에 대항하는 인물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수많은 제국인의 피를 흘리게 한 죄. 넓은 아량으로 내민 제국의 손을 거절하고 물어뜯은 죄."

그러나 놀라움은 놀라움일 뿐. 해야 하는 일에 변함은 없었다.

상대는 무려 마왕이라 불리는 대항군의 대표. 그를 꺾는 것만으로 대항군 전력의 반을 깎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죄를 물어 처단하겠다."

한편, 용사가 마왕을 눈에 담은 것처럼 마왕 또한 용사를 눈에 담고 있었다.

그 또한 이 정도 거리에서 용사와 마주하는 건 처음.

여러 감정이 오갔다.

'여자였나. 심지어 어리군.'

투구와 갑주로 얼굴과 몸을 가렸지만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용사가 남자든 여자든, 늙은이든 꼬맹이든. 그런 건 상관없다.

'제국 전력의 정수.'

온갖 물적, 인적 지원에 신성의 대리인이란 명분까지 등에 업은 제국의 검.

원래부터 용사란 이름으로 준비된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붙은 마왕이란 이름 때문에 용사의 칭호를 부여한 것인지.

그것까진 알 수 없었지만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

용사를 꺾는 것이 제국의 야욕을 꺾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따라서 상반된 목적의 전장에 선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여기서.

'마왕을.'

'용사를.'

꺾는다.

그것이 곧 이 전쟁의 승리로 이어질 테니.

약속이라도 한 듯, 제국군과 대항군이 서로 물러나며 공간을 크게 벌렸다.

둘의 생각은 여기서도 일치했다.

'대장만 잡으면 끝날 일이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커다란 피해를 막을 수 없다.

특히 평야에서의 전면전은 난전으로 이어져 수많은 피가 흐를 테니.

대장전.

각 대표가 일대일로 겨뤄 결판을 내는 것만으로 한쪽의 사기를 완전히 꺾을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콰앙!

선공은 용사의 몫이었다. 땅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도약한 용사의 검이 마왕의 머리를 노리며 맹렬한 기세로 떨어졌다.

마왕은 구태여 공격을 받아 내지 않았다.

비스듬히 세운 검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태반의 힘을 흘려 낸 뒤.

검을 제쳐 올리며 용사의 목을 노렸다.

"빠르군."

검을 포기하고 허리를 젖혀 공격을 피해 낸 용사의 모습에 마왕은 감탄했다.

공격을 흘리며 용사의 검을 아래로 눌러 놓은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최단거리, 최고속도로 목을 노렸건만.

태반의 이들은 이 한 수에 죽음을 맞이했다. 혹은 검을 포기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면 치명상을 입었다.

한데 용사는 조금의 머뭇거림 없이 공격을 피하는 걸 선택했다.

'맹탕은 아니란 거지.'

비록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으나 검을 뺏었으니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하나 마왕은 곧 용사란 이름에 담긴 의미를 다시금 깨달았다.

제국이 용사란 이름 아래 용사에게 부여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귀환, 노바 소드."

용사가 커맨드를 읊자 마왕의 발아래 꽂혀 있던 검이 그녀의 손에 나타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의 가호."

"대지의 가호."

"바다의 가호."

연이은 커맨드가 중첩되며 용사의 기세가 일변했다.

"번개의 가호."

"폭풍의 가호."

근력, 속력, 체력, 회복력, 순발력, 반사 신경, 사고 속도.

모든 게 커맨드 몇 번으로 삽시간에 증폭된 것이다.

사아아아아아아-.

갖가지 가호가 쌓여 가며 찬란한 빛이 용사를 휘감았다.

빛이 사라졌을 땐 한층 더 날카로워진 기운의 용사가 매서운 기세를 흘리고 있었다.

쾅!

용사는 일전과 마찬가지로 도약해 검을 내려쳤다.

똑같은 행위였으나 결과는 다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은 행동이었다.

온갖 축성을 몸에 두른 채였다. 기본적인 신체 능력뿐만이 아니라 마력에 관한 능력도 기존의 배 이상 뛴 상태였으니.

생각대로 결과는 똑같지 않았다.

푸욱-

마왕의 검이 용사의 복부를 꿰뚫은 것이다.

"크윽...!"

"얕보였나 보군."

아무리 전반적인 능력치가 향상됐다지만 똑같은 수, 똑같은 궤적에 당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상대해 본 공격. 눈에 익은 움직임은 역습하기 딱 좋은 약점이었다.

마왕은 검을 맞대는 게 아니라 달려드는 용사에게 파고들어 찌르는 걸 선택했다.

내려치기, 그것도 일점에 힘을 집중시킨 일격은 동작이 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가까이 접근했을 때 먼저 닿는 건 마왕의 검이었다.

"고작 이 정도인가."

마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맹탕이 아니라 했던 건 취소한다.

재빨리 검을 포기했던 건 검을 회수할 방법이 있기에 취한 선택이었을 뿐, 뛰어난 상황 판단에 의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용사는.

"기본조차 안 돼 있어."

주제에 맞지 않는 힘을 가진 어린아이였다.

가호를 통해 남들과 비할 바 없는 압도적인 신체 능력과 마력을 갖췄으나, 그뿐.

숱하게 역경을 넘은 강자라 볼 수는 없었다.

화아악-

마왕은 묵묵히 용사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검에 관통됐었던 용사의 배는 어느새 말끔하게 치유되어 있었다.

"방금 전의 격돌로 알았겠지. 넌 내 상대가 못 된다."

용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마왕의 무위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력하며, 자신과 엄청난 격차가 있다는 것을.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마왕이 대항군을 대표하는 것처럼, 그녀는 제국군... 나아가 수많은 제국민을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달려들었다.

자신에겐 주어진 여러 가호와 완전회복의 축성을 믿고 즉사의 위험성이 있는 공격만 막아 내며 마왕과 거리를 좁혔다.

근육이 찢어지고 내장이 꿰뚫려도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살을 내주고 거리를 좁혔고, 뼈를 내주며 검을 뻗었다.

하나 검은 닿지 않았다.

용사의 검이 마왕에 닿으려 할 때면 여지없이 마왕의 검과 마법으로 이뤄진 빙벽이 검로를 막아섰다.

'어째서...!'

어째서 닿지 않는 거냐!

전투는 시종일관 일방적이었다.

결코 닿지 않는 공격에 반해 계속되는 피해. 전투가 지속될 수 있었던 건 몸에 숱하게 두른 가호 덕이었다.

"이제야 끝났나 보군."

하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흐르며 사라졌다.

일찍이 둘렀던 가호들이 풀렸고 완전회복의 축성 또한 모든 횟수를 소모했다.

'이럴, 수가.'

용사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천재란 소리를 듣지 않은 적이 없었고, 노력을 게을리 한 적도 없었다.

절대적인 시간의 부족은 제국이 메워 줬다. 내로라하는 영약들을 섭취했고 여러 가호와 축성을 등에 업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담고도 눈앞의 인물에게 닿지 못했다.

'안 돼. 안 돼.'

마음을 파고드는 초조와 불안, 그것들을 양분 삼아 자라는 무력감.

이내 용사의 무릎이 꺾이며 제국군에서부터 탄식이 쏟아졌다.

"쿨럭...."

호흡이 끊긴 자리를 끈적거리는 핏물이 채웠다.

명치가 타는 듯 뜨거웠다.

무릎 꿇은 용사는 고개를 들었다.

반으로 갈라진 투구가 떨어지며 얼굴이 드러났다.

금발에 벽안, 새하얀 피부.

마왕은 이 얼굴을 알고 있었다.

오랜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너였군.'

입맛이 썼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이 자리에 선 건 대항군과 제국군을 대표하는 마왕과 용사였으니.

고민은 짧았다.

그대로 목을 베어 그래도 제국군을 쓸어 버리려던 찰나.

"이게 끝이라 생각하나?"

"...!"

힘겹게 입을 연 용사가 의미 모를 말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 낌새를 느낀 마왕은 재빨리 검을 내려쳤지만.

이변이 일어났다.

두근―!!

느닷없이 찾아온 엄청난 고통.

차갑고 음산한 기운이 심장을 옥죄는 통증은 익숙했으나 결코 적응할 수 없던 격통이었다.

'하필 이때!'

어떻게든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얼어붙은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 용사에게서 무언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환한 빛이 용사를 휘감았다.

가호와는 다른 느낌의 신비로운 빛은 용사를 집어삼키고도 모자라 점점 범위를 확장해 갔다.

"내 이름은 아이리우스 에이나우디, 제국의 검이자 방패. 기억해라. 다음은... 다음은 다를 테니까."

세상을 물들인 빛이 사라졌을 때. 마왕과 용사가 있던 공간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동시에, 세계의 시간이 거꾸로 뒤집혔다.

일 초, 일 분, 한 시간.

하루, 한 달, 일 년, 삼 년.

오 년, 칠 년, 십 년.

...십오 년.

마침내 반대로 돌아가던 시계태엽이 멈췄을 때.

용사는 15년의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갔다.

하지만 용사는 몰랐다.

회귀한 게 자신만이 아니란 사실을.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가."

마왕도 용사와 함께 회귀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2화

마을에 들어선 추레한 옷차림의 소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이 달라붙었다.

머리와 눈동자, 자세히 살피면 피부색까지 다른 소년은 마을에 올 때마다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용케도 살아 있네요.'

'이젠 제 아비도 없는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칼럼 씨가 도와주고 있대요.'

'...칼럼이?'

소년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걸음을 계속했다.

"아저씨, 저 왔어요!"

"오, 루드 왔냐."

루드를 반긴 이는 건장한 체격에 선이 굵은 중년의 사내였다.

칼럼이란 이름의 사내는 죽은 아버지의 친구였다.

"잠깐만 기다려라. 식량을 준비해 주마."

"항상 감사합니다."

루드는 감사를 표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이자 마을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배척하지 않는 진짜 어른.

자기 가족이 먹기에도 불충분한 식량을 나눠 주는 은인.

칼럼 아저씨가 없었다면 아버지를 여읜 자신은 아마 굶어 죽었을지도 몰랐다.

"자, 여기 감자랑 옥수수다. 얼마 안 돼서 미안하구나. 삼 일 뒤에 오면 조금 더 챙겨 주마."

"이 정도면 충분해요. 일주일은 먹겠는걸요?"

루드는 가지고 온 보자기에 작물을 담았다.

칼럼의 말마따나 적은 양이었지만, 양만으로 재단할 수 없는 가치의 식량이었다.

아버지의 사후 식량을 구할 길이 없어진 자신에게 먼저 손 내밀어 준 걸로도 모자라 이렇듯 몇 번이고 챙겨주기까지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염치가 있다면 계속 받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저 한동안은 못 올 것 같아요."

"왜 그러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루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에 아저씨가 말씀하신 산에 가 보려고요. 버섯이랑 열매도 따고 토끼 같은 동물이 있으면 잡아 볼 생각이에요."

"그래? 잘 생각했다. 이젠 그 친구도 없으니 너도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거라."

"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감자랑 옥수수는 잘 먹겠습니다."

칼럼의 집 마당을 나와 마을 입구로 향한 루드는 발걸음을 빨리 했다. 집까지 갈 길이 멀었다.

따스한 눈으로 멀어지는 루드의 뒷모습을 보던 칼럼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애새끼... 드디어 움직이네. 산에서 괜찮은 것들 좀 가져와야 할 텐데. 아니면 수지가 안 맞는단 말이지. 투자한 게 얼만데 말이야."

* * *

한편 집에 돌아온 루드는 빙긋 웃었다.

칼럼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고.

그러니 언젠가 꼭 보답해야 하는 은인이다.

토끼를 잡으면 꼭 가죽이라도 갖다 드려야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칼럼에게만큼은 보답해야지. 받은 게 얼만데. 갚아야하고말고."

회귀한 날로부터 벌써 여러 날이 흘렀다.

루드는 회귀 이후 며칠이 지나서야 자신이 회귀했음을 온전히 인정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었지만 몇 날이 지나도 상황이 계속되자 제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였다.

15년의 회귀. 제국과 새외 이민족의 전쟁도, 대항군의 수장인 마왕 루드란테도 없는 시점.

그러나 회귀했다 해서 그 모든 일들을 없는 일로 치부할 생각은 없었다.

제국이 야욕을 드러내는 건 늦든 빠르든 일어날 일이었고, 그것을 보고만 있을 마음은 없었으니.

"과거와는 다르다."

회귀 덕분에 지난 삶과는 선택의 폭 자체가 달라졌다.

과거처럼 닥친 일에 급급해 흐름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흐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지난 삶에 미처 이루지 못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그래야만 했다.

"제국의 야욕을 저지하고, 모든 이민족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든다."

지난 생부터 품었던 바람.

대항군을 만들어 제국군에 대항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던 소원.

이를 위해 해야 할 것은 명확했다.

더 빠른 시일에 더 강한 힘을 마련하고 만반의 준비를 마쳐 대항군의 힘을 기른다.

동시에 언젠가 칼을 휘두를 제국의 힘을 약화시킨다.

'상상조차 못했던 기회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수많은 계획이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억하고 있는 이전 삶을 토대로 여러 계획을 검증하고 반려하길 여러 번.

이제야 어느 정도의 계획이 보이는 것 같았다.

'황제와 의회. 그들이 핵심이다.'

대륙 최대이자 최강국인 카르바나 제국.

단연 제국의 정점인 황제와 특정 상황과 안건에서만큼은 황제의 권한을 넘어서기도 한다는 제국 의회.

제국과 이민족 간의 전쟁이 벌어진 데는 이들의 영향이 지대했다.

그들이 갑자기 중앙 대륙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 이유는 무엇인가.

그간 꺼려 오던 전면전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민족을 저들 아래 놓으려 했던 까닭은 어째서인가.

그 모든 답이 그들에게 있었다.

'그 지난한 전쟁을 다시 반복할 순 없지.'

이전 생보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았으니 과거를 반복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자만해선 안 됐다.

황제와 의회는 누가 뭐래도 대륙 권력의 최고봉. 앞으로의 행보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한다.'

회귀의 이점을 적극 활용해야 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과 특정 세력의 흥망성쇠, 여러 인물의 미래 모습을 알고 있다는 점은 무엇보다도 큰 이점이었다.

다만 과거의 일을 너무 맹신해서도 안 됐다.

'내가 달라진 만큼 세계의 미래도 달라진다.'

앞으로 자신이 걸을 길은 과거의 자신이 걸었던 길과 다를 것이었다. 출발선과 첫 발자국부터 다를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 생의 루드는 대륙 전반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 이민족을 통합하고 대항군을 결성해 제국에 맞섰다.

용사와의 일전 이전에는 제국 편에 섰던 왕국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시작이 늦고 미약했음에도 그러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떨까.

이미 길을 걸어 보고, 첫발조차 더 빠르고 확실하게 밟을 수 있는 지금이었다.

과거와 비슷하나 결코 같지 않을 루드의 걸음에 주변 풍경도 분명 달라질 터였다.

'주의 깊게 확인해야 하는 건 세 가지.'

자신에 의해 바뀔 미래.

용사에 의해 바뀔 미래.

제국에 의해 바뀔 미래.

'아마 용사 또한 회귀했겠지.'

애초에 회귀의 주체가 용사였다. 같은 시간대인지까진 몰라도 그녀 또한 회귀했으리란 건 짐작이 가능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자면 확실했다.

'아이리우스 에이나우디.'

루드는 용사의 이름을 곱씹었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알고 있는 얼굴이기도 했고.

가면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겠지만, 어쩌면 그녀 또한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떤 경위로 용사로서 제국군의 선봉에 선 건진 모르겠지만 요주의 인물인 건 확실하다.'

중요한 건 자신의 행적이 달라지며 바뀔 일들이 있듯, 그녀의 행적이 달라지며 바뀔 일 또한 분명 있을 것이었다.

그녀의 신분과 명성을 고려하자면 초반부터 급격한 변화가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제국의 변화는 항상 염두에 둬야 했다.

자신이나 용사에 의해 여러 미래가 바뀐다 해도 결국 중점은 제국이었다.

이전 생과 마찬가지로 중앙 대륙 바깥에 욕심을 드러내는가. 그 시기와 방법에 변함은 없는가.

상시 확인해야 할 사항이었다.

'계속 동태를 살피면서 변화에 맞춰 움직인다.'

행동 방침은 자신의 일을 하면서 제국과 용사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상황에 맞춰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지금 고민해 봤자 계속해서 바뀔 미래였다. 가져갈 수 있는 이점은 가져가되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 게 중요했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하는 건."

과거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그 사건'에 대비하는 것.

겸사겸사 칼럼과 마을 사람들에게 '보답'을 준비해야 했다.

루드는 지난 생을 가볍게 회고했다.

핍박받던 고아 소년이 이민족을 이끌고 제국과 맞서기까지. 많은 일과 숱한 위기가 있었다.

그 모든 일의 시작은 제국 변방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부터였다.

이민족과 눈이 맞았다는 이유로 주민이었던 청년을 쫓아낸 마을은 청년의 아내가 죽고 이후 병든 청년마저 죽자 그 아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의 연속이었지.'

믿던 인물에 의해 노예로 팔린 소년은 마을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을로 돌아오게 됐다.

그런 소년을 맞이한 건...

"중요한 건 지금이지."

고개를 저으며 과거의 일을 털어 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한 계획은 세웠다. 남은 건 잘 준비하고 이행하는 것뿐.

까악! 까악―!

나뭇가지에 앉은 까마귀가 불길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산의 초입에 선 루드는 한동안 그 시선을 마주하고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산에는 딱히 이름이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산에 이름이 있는 건 아니기도 했고, 이름엔 힘이 있기 때문에 일부러 붙이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사람을 허락하지 않은 산은 거칠고 사나운 기세를 풍겼다. 사람을 타지 않았기에 길이라 부를 만한 것도 없었다.

루드는 수풀을 헤치고 바위틈을 비집으며 힘겹게 위로 향했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단순히 정상에 오르는 게 목적이 아니었기에 몇 번이고 발을 멈췄다 떼기를 반복했다.

"하나 찾았고."

수풀에서 나온 루드의 손아귀엔 무언가 가득 쥐어져 있었다.

도토리처럼 보이는 열매였는데, 손에서 굴리니 까드득까드득 소리가 났다.

속이 잘 여물었단 뜻이었다.

루드는 이후로도 돌무더기 틈이나 나무뿌리 아래, 덩굴 근처에서 무언가를 찾아 챙겼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험해지던 산세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완만해졌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가득했던 수풀도, 햇빛을 가리던 커다란 나무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 펼쳐진 건 암석 지대였다.

"거의 다 왔군."

목적지가 가까웠다.

루드는 숲과 암석의 경계에서 잠시 위를 바라보더니 여태 걸었던 숲으로 되돌아갔다.

다시 경계로 돌아온 루드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온몸은 진흙투성이였고 군데군데 동물의 변도 묻어 있어 걸을 때마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럼에도 루드는 인상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그저 굳은 눈으로 목적하는 방향을 응시할 뿐.

'역시 지금도 있나.'

이 산을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회귀 이전의 삶에서 지금보다 반 년 정도 뒤의 시기에 산을 올랐고 몬스터를 마주쳤었다.

"고블린."

대표적인 하급 몬스터.

일대일이라면 일반 성인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무시해선 안 됐다. 하급 몬스터라지만 민간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히는 게 녀석들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루드의 몸은 일반 성인만도 못했다.

몸에 진흙이나 변 따위를 바른 것도 녀석들의 주의를 피하기 위해 냄새를 지운 것이다.

"달라질 건 없다."

녀석들이 있을 거란 사실은 예상했다. 그에 맞춰 계획을 짰으니 문제될 건 없었다.

다시 위로 향하자 얼마 안 가 고블린이 내는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녀석들이 눈치 채지 못할 거리까지 접근한 루드는 암석에 몸을 숨긴 채 녀석들의 동태를 확인했다.

'과거와 바뀌지 않았다.'

고블린들은 암석을 깨며 산 내부에 길을 내는 중이었다.

드문 일은 아니었다. 고블린은 반짝이는 종류를 좋아해서 종종 굴을 파곤 했으니.

그러나.

'녀석들이 찾는 건 다르지.'

눈앞의 고블린들이 굴을 파는 목적은 고작 금이나 보석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이 안에 신비가 있다.'

신비, 흔히들 표현하길 섭리에서 벗어난 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세월과 노력을 무참히 짓밟는 불합리한 힘.

연원이 어디인지, 어떻게 그런 힘을 품고 있는 건지. 어디 숨겨져 있는지.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게 없는 그야말로 '신비한 힘'.

그것이 바로 신비였다.

'아마 회귀도 신비의 일종이겠지.'

회귀란 기적을 일으킬 힘은 신비가 유일했다. 8서클의 마법으로도 잠시 시간을 유예시키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용사가 어떻게 그런 신비를 갖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조심스레 추측하자면 어쩌다 개인적으로 얻게 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처음부터 제국의 손에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소모하진 않았을 터이니.

'잠깐, 그렇다면 그 신비도 아직 존재하는 게 아닌가?'

정확한 메커니즘은 모르지만 과거로 돌아왔으니 어딘가 회귀의 신비가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일단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신비가 흘리는 기운이라도 있는 건지, 용케 신비가 산 내부에 묻혀 있다는 걸 깨달은 고블린들은 산에 묻힌 신비를 노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 신비는 내가 가져가마."

이곳에 묻힌 신비는 루드의 것이었다.

지난 생 모든 일의 출발점이 노예로 팔린 것이었다면, 무력을 구축할 기반을 마련해 준 출발점은 바로 이곳에서 얻은 신비였다.

보이지 않던 살길을 찾아 주고 후일을 도모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기회.

이번 생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루드의 머릿속에 계획된 모든 일의 첫 단추가 이 신비, '듀얼'을 얻는 것이었다.

* * *

한동안 고블린들의 동태를 살피던 루드는 녀석들의 움직임이 과거와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고 자리를 옮겼다.

녀석들은 반년 뒤에도 굴을 파고 있었다. 지금과 다른 것이라면 반년 뒤엔 신비의 코앞까지 굴을 파 냈다는 것.

과거 루드가 신비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이 어디쯤일 텐데.'

녀석들이 굴을 파는 곳의 반대편에 도착한 루드는 고개를 들어 암벽을 훑었다.

회귀 이전 녀석들이 파 놓은 길을 따라 신비를 얻었던 루드는 안쪽에 또 다른 길이 있음을 확인했었다.

땅굴 반대편으로 이어진 길은 공간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그곳이 진짜 출입구임을 알 수 있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 입구는 고블린들에겐 아쉽게도

"찾았다."

녀석들의 시야엔 닿지 않는 높이의 암벽 상단에 위치했다.

"진짜 출입구."

암석 상단의 어느 곳, 암석들 사이의 좁은 틈새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3화

빛이 흘러나오는 위치는 상당히 높았다. 입구가 위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루드도 한껏 고개를 들고서야 보일 정도였으니 고블린들이 못 찾을 만도 했다.

"확실히 높군."

입구로 들어가려면 암벽을 올라야만 했다.

문제는 지금 몸으로 저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올라선다 한들 입구를 막은 암석을 치울 힘이 남아 있을지 하는 것들이었다.

"고민해도 달라질 건 없지."

해야만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하면 좋은 일 등.

회귀 이후 몇 번이고 정리했던 계획에서 신비-듀얼을 얻는 것은 무조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선택의 영역이 아니니 고민해 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암벽에 매달린 루드는 차근차근 위로 올라갔다. 단순히 표현하자면 간단한 반복 행위.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찢어진 손아귀에선 피가 흘렀고 연신 미끄러진 발은 허공을 차기 일쑤였다.

한 순간이라도 실수하면 곧장 아래로 떨어지는 상황.

높이를 고려하면 어디 하나 부러지는 건 당연, 운이 나쁘면 허리나 목이 꺾여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체력적인 어려움도, 높이에서 오는 두려움도 루드의 발목을 잡지 못했다.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역시 닫혀 있다.'

예상대로 커다란 암석이 입구를 막고 있었다. 밖으로 새 나온 빛줄기가 약했던 이유였다.

암석 사이로 벌어진 틈새에 손을 넣고 힘을 주자 공간이 조금씩 벌어졌다. 몇 번인가 반복한 끝에 몸을 넣을 공간이 생겼다.

"...!!"

벌어진 공간을 통해 간신히 입구를 통과한 루드는 그대로 쓰러져 호흡을 골랐다.

숨을 몰아쉬며 살펴보니, 내부는 낮은 높이와 좁은 폭으로 길게 뻗은 통로가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앞으로 30분.'

루드는 포복한 채 안쪽으로 향했다. 지금 속도면 30분 뒤 신비가 있는 곳에 도착할 것이다.

신비에 가까워짐에 따라 통로를 밝힌 빛의 세기가 점점 강해졌다.

처음에는 은은한 불빛 같았던 게 지금은 강렬한 햇빛 같았다.

"도착했다."

긴 통로 끝에 나타난 건 공동이었다.

통로와 마찬가지로 사람 대여섯 명만 들어가도 꽉 찰 크기의 작은 공간.

신비는 그 중심에 존재했다.

신비의 모습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웠다.

세간에서 흔히 보이는 큐브의 형태인 것도 같으면서, 총천연색 빛에 휘감겨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나 싶기도 했다.

아래를 받친 것도, 위에 매달린 것도 없이 허공에 떠있는 모습은 목격한 누구라도 범상치 않다고 생각할 모습이었다.

'신비란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야.'

가히 '신비롭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광경.

짧은 감상에서 빠져나온 루드는 신비에 다가섰다.

손을 내밀어 신비와 접촉한 순간, 큐브 형태의 신비가 손을 통과하는가 싶더니 큐브의 형태를 구성한 입자 하나하나가 제각각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리곤 입자마다 빛을 뿜으며 진동하더니, 소용돌이에 빠진 것처럼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좋아."

성공적으로 신비를 얻었다. 신비의 힘이 내부에 자리 잡은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루드는 상의를 벗고 제 몸을 살펴봤다. 왼쪽 가슴에 문신 같은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신비를 지닌 이라면 누구나 이런 흔적을 갖고 있었다.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신비 보유자의 특징이기도 했다.

다만 흔적마다 그 위치나 모양새가 달랐고, 일반적인 문신과 구별하기 어려워서 이것만으로 신비 보유 여부를 판단할 순 없었다.

"일전이랑 똑같은 부위인가."

흔적은 회귀 이전과 똑같았다. 상의를 입고 있는 한 노출되지 않는 위치. 혹 이전과 달리 엉뚱한 곳에 새겨질까 걱정했었는데 다행이었다.

"첫 단추는 잘 꿰었군."

루드는 신비를 얻었다는 기쁨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기색으로 공간을 훑었다.

'과거와 다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좁은 공간.

과거와 마찬가지로 공동 가운데 위치했던 신비.

보이는 모든 게 예전과 동일했다.

하나 분명 달랐다.

'마나의 질과 양이....'

통로에서부터 어렴풋하게 느꼈지만 확실했다. 공동 내부의 마나가 바깥의 마나와 달랐다.

'어째서지?'

공동 내부에 있는 마나의 양도 엄청났고, 담고 있는 순수함과 밀도는 말도 안 될 수준이었다.

루드는 차분히 이유를 추측했다.

마나의 양과 질이 외부와 다른 건 신비의 영향일 터였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문제는 과거에는 이렇지 않았단 건데....

"시간대의 문제?"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시간대밖에 없었다.

자연 상태의 마나는 근방의 정기를 흡수한다.

흑마법사들이 전장의 마나에 환장하는 이유다.

'과거에는 고블린들의 땅굴이 코앞까지 왔었지.'

반대로, 마나는 반대로 정기를 훼손당하기도 한다.

과거 이곳의 마나가 고블린들로 인해 훼손됐다면, 그래서 바깥의 마나와 다를 게 없어진 거라면?

'가장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결국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만든 건 바른 길을 이용했냐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군."

루드는 공간을 가득 채운 마나를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본래는 곧장 돌아가 신비를 점검하고 날을 잡아 마나를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기회가 생겼다.

놓쳐선 안 될 기회, 이런 변수로 인한 계획 변경은 환영할 일이었다.

'후... 집중하자.'

들떠있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먼저 해야 할 건 신비-듀얼을 통한 기초 공사였다.

듀얼은 이름 그대로 무언가를 두 부분으로 나눠주는 힘.

사용 방향성에 따라 생각을 두 개로 나눌 수도, 과거의 루드처럼 하나의 마력을 오러와 써클로 나눌 수도 있었다.

전생의 루드는 흑마력을 바탕으로 오러와 써클로 나가는 두 개의 길을 만들어, 소드마스터이면서도 7서클 흑마법사의 위용을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방향으로 가 보고자 했다.

'처음부터 두 개의 공간을 만든다.'

루드의 의지를 따라 심상에 두 개의 방이 생겨났다.

'첫 번째 방은 백의 마나를 담아 오러의 길로 연결시킨다.'

방 앞에 하얀색 문이 생겨났다.

'두 번째 방은 흑의 마나를 담아 써클의 길로 연결시킨다.'

다른 하나의 방 앞엔 검은색 문이 생겨났다.

"후우...."

시작부터 받아들이고 쌓는 마나와 마력의 성질을 '백'과 '흑'으로 나누어 버리는 것.

루드가 고안한 새로운 듀얼의 사용법이었다.

이렇게 '백'과 '흑'으로 구분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장점은 다양했다.

일단 전생보다 강한 무력을 꾀할 수 있었다.

전생에선 소드마스터가 되긴 했으나 흑마력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인지 그 너머의 경지가 보임에도 오를 수 없었다.

백의 마나로 검을 닦는다면 이전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었다.

흑마력을 이용해 과거 흑마법의 경지를 빠르게 되찾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었다.

마법은 검과 다르게 명확한 한계를 느꼈었다. 정통 마법을 익힌다 한들 이전과 다를 것 같지 않아 익숙한 길을 토대로 이전의 수준을 빠르게 회복해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백과 흑을 나누면 이중 신분으로의 활용도 가능했다.

경지에 이른 마검사도 드문 세상, 각각의 경지에 오른 검사와 흑마법사를 동일 인물로 생각할 이는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 '그것'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전생보다 강한 무력을 확보하는 것만큼 중요한 이유.

'그것'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것도 듀얼을 통해 흑과 백을 나누는 이유였다.

용사를 마무리하려 했을 때 찾아온 부작용은 비단 그때만의 일이 아니었다.

그전에도 때때로 몸이 얼어붙고 움직이기 힘든 격통이 몰아치는 등의 일이 있던 것이다.

강대한 힘만큼이나 커다란 부작용을 동반했던 '그것'

하지만 이번 생엔 그 부작용을 극복할 방법이 생겼다.

'더 강한 무력을 갖출 기회와.'

소드마스터 너머의 경지에 오르고

'양지와 음지 모두에서 활동할 수 있는 수단의 확보.'

흑마법사란 또 하나의 신분으로 음지를 활보한다.

'그러니 이게 최선의 방향이다.'

이 모든 것들이 모여 결국 목표를 이룰 것이었다.

'문은 활짝 열려 있다. 들어와라.'

성공적으로 두 개의 방을 만든 루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공동을 가득 채운 순정한 마나.

저들끼리 뭉쳐 있던 마나가 루드의 의지에 반응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움직임은 미미했다. 티끌만큼 딸려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움직임.

그러나 티끌이 하나둘 늘어 감에 따라 마나가 움직이는 기세는 곧 걷잡을 수 없이 격해졌다.

'끄읍...!'

범람하는 마나의 흐름에 온몸의 핏줄이 곤두섰다.

삽시간에 충혈된 눈에선 핏물이 흘렀고, 꽉 쥔 손아귀에서도 피가 새 나왔다.

누군가 녹슨 칼로 몸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지만.

'아직, 아직이다. 더, 더, 더, 더!'

그렇다고 그만둘 순 없었다.

듀얼을 통해 백과 흑을 분리한 것에는 여러 장점이 있었지만, 단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백과 흑을 나눠 제각기 마나를 받아들여야 하는 만큼 축적해야 하는 마나의 양은 최소한 일반의 두 배였다.

지금 조금이라도 많은 마나를 쌓으려는 이유였다.

'아직 감당할 수 있다.'

하얀색 문이 거칠게 요동쳤다. 흔들림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격한 모습이었다.

반면 검은색 문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받아들이는 모든 마나는 하얀색 문의 방에 밀어 넣고 있었으니.

'...됐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하얀색 문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거칠었던 호흡이 진정되며 잔뜩 솟았던 핏줄도 피부 아래로 몸을 숨겼다.

시야 가득히 찼던 핏물을 닦아 내고 천천히 눈을 떴다.

"60 정도인가."

본래 공동에 있던 마나의 수치를 100이라 했을 때 흡수한 건 60 정도였다. 아직도 많은 양의 마나가 남아 있었으나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이 이상 흡수하는 건 당장엔 무리였다.

지금만 해도 엄청난 성과였으니.

"남은 건 다음에 와야겠군."

어차피 기회는 또 있었다.

들어왔던 통로를 거슬러 입구로 향했다.

분명 똑같은 길이었는데도 들어올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입구에 도착했다.

"피 냄새를 맡고 왔나."

아래를 내다보니 고블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암벽을 오르면서 난 상처 때문에 알아차린 것 같았다.

"기껏 냄새를 지우는 게 쓸모없는 일이 됐군."

한동안 녀석들을 바라보던 루드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조금 줄여 놔야겠군."

쓸 데가 있으니 어느 정도는 남겨 놔야 했다. 하지만 너무 많아도 땅굴을 파서 남은 마나의 정기를 훼손시킬 터니 개체 수 조절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일단 셋."

콰르릉!

루드는 입구를 가리고 있던 암석을 떨어트렸다.

멀뚱히 위만 쳐다보던 고블린 셋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암석에 깔려 죽었다.

"징그럽게 많기도 하군."

고블린들은 여전히 살기를 띤 채 대기 중이었다. 녀석들에게서 느껴지는 적의에 루드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말하면 너희에게 악감정은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좋은 감정이 아닐까.

지난 생에서 신비를 선물해 주고 자기 대신 마을 사람들에게 보답까지 해 줬던 녀석들이었으니.

"그래도 공과 사는 구별해야겠지."

루드가 고블린 무리 사이로 몸을 던졌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4화

아래로 떨어짐과 동시에 달려드는 루드의 모습에 고블린들이 듣기 싫은 웃음을 터뜨렸다.

위에 있을 때야 손 쓸 방법이 없었다지만 이젠 아니었다. 작은 인간이 제 발로 죽으러 오지 않는가.

하지만.

어떻게 죽일까 하던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퍽-!

주먹만 한 돌이 눈을 넘어 뇌까지 찍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고블린을 처리한 루드는 계속해서 고블린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일대다수에 익숙한 만큼 어떻게 움직이는 게 좋은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거듭 혼전 상황을 만들며 목표한 녀석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허리를 숙여 한 녀석의 발등을 찍고 곧이어 뒤쪽에서 접근하던 녀석의 관자놀이를 뭉갰다.

손에 쥔 돌에서 고블린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

'여기까지 할까.'

처음의 기세를 잃은 고블린들이 주춤거렸다. 대충 수를 훑은 루드는 다음 계획을 위해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이 정도 숫자면 다시 마나를 흡수하러 올 때까지 마나가 훼손될 일은 없어보였다.

"한 마리. 딱 한 마리만 더 데려가마."

* * *

마을은 작고 낡았으며 폐쇄적이었다. 제국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그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가장 바깥다운 마을이었다.

루드의 기억은 이 마을에서부터였다.

아버지의 고향이자 자신이 태어난 마을.

비록 태어나기도 전에 마을 밖으로 쫓겨났다지만.

"오! 루드 왔구나."

"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마을에 들어선 루드는 칼럼을 찾아갔다. 일전과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과 달리 환한 모습으로 루드를 반기는 칼럼이었다.

"통 안 와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 뭐냐. 그런데 다친 게냐?"

"아... 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에요. 토끼를 쫓다가 조금 구르는 바람에. 하하."

"이런. 조심하지 그랬어. 그래 몸은 괜찮고?"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곳저곳 어설프게 감은 붕대를 바라보던 칼럼의 시선이 이내 한곳에서 멈췄다. 루드의 옆구리에 못 보던 가죽이 있었다.

"그건 뭐냐?"

"아! 토끼를 잡아서 가죽을 가져왔어요. 상태가 별로긴 한데 괜찮으시다면 드리고 싶어서요."

칼럼의 눈이 커졌다.

지난 번 얘기에 기대감을 갖긴 했지만 못 잡을 거라 생각했는데 용케 잡은 모양이었다.

"내가 이런 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구나."

"받아 주세요. 그간 많이 도와주셨잖아요."

"네가 그렇다면 내 사양하진 않으마."

토끼 가죽은 루드의 말처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여기저기 상처가 많았고 무두질이 제대로 되지 않아 냄새도 났다.

그렇지만 칼럼은 무척이나 만족했다. 이런 상태라도 가죽은 마을에서 구하기 어려운 거였고, 곧 방문할 상단과 잘 이야기하면 괜찮은 물건과 바꿀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이제 시작이 아닌가.

'역시 좋은 생각이었어. 이대로 잘 구슬려서 계속 가죽을 갖고 오게 하면....'

조금 아쉬운 건 상단의 방문이 금방이란 거였지만 앞으로도 기회는 있을 테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데 마을에 무슨 일이 있나요? 평소랑 조금 다른 거 같아서요."

"며칠 뒤에 상단이 올 예정이라 그래."

"상단이요?"

"그래. 큰 규모의 상행은 아니지만 몇 년 만의 방문이라 마을의 기대가 크단다."

워낙 작아 일반적인 상행도 드문 마을이었다. 한데 무려 상단이 오다니.

마을의 분위기가 들뜰 만했다.

"그렇군요. 전 이만 가 볼게요. 다음에 봬요."

"벌써 가는 게냐? 그래. 조심히 가고 가죽은 내 잘 쓰마."

"가능하면 다음에 또 가져올게요."

용건을 마치고 마을을 빠져나온 루드는 시선이 사라지자 어설프게 감았던 붕대를 벗었다.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탄탄해진 몸이 드러났다.

"귀찮지만 당분간은 마을에 자주 가야겠는걸."

상단의 방문이 가까워졌다는 건 두 번째 단계를 밟을 날이 다가왔다는 의미였다.

다만 상단이 도착하는 일자를 정확히 알지 못했으니 발품을 팔아야만 했다.

"고블린을 준비해야겠네."

마을을 자주 찾는 것 말고도 계획에 필요한 소품 준비도 해야 했다.

어렵지는 않았다. 고블린들 중 한 마리만 포획해 오면 되는 일이었으니.

그 뒤로 루드는 토끼 가죽을 전달하거나 먹을 걸 받는 모양새로 매일 마을을 드나들었다.

여전히 따가운 눈초리와 함께 수군거리는 마을 사람들이었으나, 상관없었다.

루드가 찾아가는 건 칼럼 하나였고 그는 루드를 반겼다.

칼럼은 마을에서 꽤나 영향력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대놓고 루드를 겁박하거나 쫓아내지는 않았다.

"오늘도 고맙구나."

"아니에요. 저도 아저씨 덕에 먹을 걸 얻어 가는걸요."

토끼 가죽을 넘기고 옥수수와 감자를 받은 루드가 꾸벅 인사했다.

'내일인가.'

마을에 오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루드를 기피하는 만큼이나 루드 또한 그들을 싫어했다.

하지만 마을을 찾는 것도 내일이면 끝일 듯했다.

'마을 단위에서 음식과 숙소를 마련하고 있다.'

먼 길을 왔을 상단이니 사람을 보내 음식과 쉴 곳을 준비하게 한 것이 분명했다.

집으로 돌아온 루드는 마당으로 향했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된 고블린 사체가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보겠지."

사체 일부를 잘라 내 볕이 잘 드는 곳에 던졌다. 내일 마을에 갈 때쯤이면 딱 알맞게 변해 있을 것이었다.

'기대되네.'

생각 이상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별 감흥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내일 벌어질 일들이 기대됐다.

이곳은 어쩌면 제국보다 더 큰 한이 맺힌 마을이었다.

인간의 악의를 알려 주고, 자신을 의지하던 소년을 팔아넘긴 어른이 사는 곳.

어렸었기에, 믿었었기에 더 큰 아픔으로 남은 기억이었다.

'이제 그럴 일은 없겠지만.'

과거의 일이 아직까지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는 까닭은 그들과 제대로 끝맺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과거 루드를 상단에 팔아넘긴 마을은 얼마 되지 않아 산을 내려온 고블린들에게 변을 당했다.

그렇게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고.

다음 날 해가 중천에 걸리자 루드는 마을로 향했다.

루드는 칼럼의 집으로 향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큰 길에는 커다란 마차 위로 매대가 서 있었고, 매대 외에도 집 앞이나 거리에서 거래가 이어지고 있었다.

칼럼의 집 또한 마찬가지였다. 루드가 도착했을 때 칼럼은 어느 상인과 거래 중이었다.

"저 왔어요. 상단이 도착하는 게 오늘이었나 보네요."

"어... 어, 그래. 루드가 왔구나."

루드의 인사에 칼럼이 움찔하며 손을 뒤로 숨겼다. 칼럼과 거래 중이던 상인은 의아한 눈으로 칼럼이 뒤로 숨긴 토끼 가죽을 좇았다.

"웬일이니? 최근 마을에 자주 오는 것 같구나. 혹시 또 토끼 가죽이라도 구한 게냐?"

칼럼의 어색한 눈짓에 상인은 상황을 이해했다. 제게 파려는 토끼 가죽을 소년에게서 헐값에 산 게 분명했다. 그러니 소년의 앞에서 토끼 가죽을 팔 수 없는 것이었다.

상인의 입장에서야 어떻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런 변방에 또 올 것도 아니고, 괜한 오지랖을 떨어 거래자의 기분을 망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지금의 거래만 잘 마치면 될 일.

하여 약간의 도움을 주기로 했다.

"큼큼. 토끼 가죽은 돈이 안 된다니까. 다른 거라도 더 얹어서 줘야지."

"하하! 역시 그렇지요? 내 금방 다른 걸 더 갖고 오리다. 잠시만 기다려 주소."

상인의 말에 칼럼이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눈빛을 교환한 둘은 서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어설픈 연극을 감상하던 루드는 이내 용건을 꺼냈다.

"다른 게 아니고 이상한 걸 발견해서요. 혹시 아실까 해서 가져왔어요."

"이상한 거?"

루드가 내민 손에는 조각난 무언가가 있었다.

"...이건."

"사체의 일부에서 떼 왔는데 맹수가 파먹기라도 했는지 형체가 너무 끔찍해서요. 도무지 어떤 동물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아저씨라면 어떤 동물인지 알고 계실 거 같아서요. 너무 자주 찾아와서 번거로웠다면 죄송합니다."

목을 넣고 어깨를 움츠린 루드는 누가 봐도 의기소침한 소년의 모습이었다.

"아니, 아니다. 번거롭다니! 그럴 리가 있겠니."

칼럼이 손사래 쳤다. 당황한 탓에 자신도 모르게 공격적으로 말하고 말았지만 루드와의 관계는 앞으로도 좋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흠. 이건 몬스터의 사체 같구나."

그사이 상인이 루드의 질문에 답을 내놓았다.

"몬스터요?"

"그래. 고블린이나 코볼트 같은데 말이지. 이걸 어디서 발견한 게냐?"

"집 근방의 산에서요."

"산? 어느 정도 크기지?"

"엄청 커요. 위험한 동물들이 있을까 봐 깊게 못 넘어가는데도 올라가는 데 한참 걸리니까요."

"그렇단 말이지."

상인은 생각에 잠겼다. 그 정도 크기의 산에 고블린 혹은 코볼트가 있다라....

'돈이 되겠는데?'

고블린과 코볼트는 귀금속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었다. 때문에 상황에 따라 돈이 되곤 했는데, 지금도 그런 상황이 아닐까 생각했다.

소년이 말한 대로라면 녀석들이 있는 산은 무척이나 커다랬다.

광물이 있을 수도 있었다. 소년이 녀석들이 있는 산에서 무사히 돌아온 것도 녀석들이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더욱 그럴 듯해졌다.

최악의 경우 광산이 없더라도, 고블린과 코볼트의 사체만으로도 돈이 됐으니 괜찮은 소식이었다.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사체라.'

다만 걸리는 건 사체의 상태였다. 아무리 촌구석의 소년이라도 몬스터와 동물은 구별할 터.

그런데도 판단을 못하고 사체 일부를 잘라 가져왔다는 건 사체의 상태가 정말 심각했단 뜻이었다.

'설마 마수인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돈이 되기는 마수도 매한가지니까.'

평범한 상행을 운영 중이었다면 피할 일이었다.

고블린이나 코볼트는 그렇다 쳐도 마수는 가벼이 여길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때마침 이번 상행은 일반적이지 않았고, 덕분에 검으로 쓸 수 있는 인사가 하나 있었다.

기회는 잡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상인이라면 더더욱!

무엇보다 이번 상행에서 생각지도 않던 이문을 남기면 '그 아이'도 제 아비 앞에서 가슴을 펼 수 있을 터였다.

"고블린? 코볼트? 정말입니까? 루드 녀석이 갖고 온 게 정말 몬스터의 사체입니까?"

"그렇소."

"마을 주변에 몬스터가 있다니..."

칼럼의 안색이 굳었다. 루드에게 산을 알려 준 이가 그였으니 칼럼 또한 산이 어디쯤인지 알고 있었다.

마을에서 도보로 몇 시간. 고작 그 정도 거리에 몬스터가 도사리고 있다니 실로 기겁할 일이었다.

"음. 소년의 궁금증은 풀린 듯하고, 잠시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가능하겠소?"

루드를 돌려보낸 상인은 칼럼과 자리를 옮겼다.

"안색이 안 좋으시군. 아무래도 몬스터 얘기에 놀랐나보오."

"예... 아무래도."

"그 걱정 우리가 덜어 주고 싶은데."

"어떻게 말입니까?"

"상행에는 으레 병력이 붙지. 몬스터나 도적 떼를 마주칠 수 있으니 말이오. 특히 장거리 상행인 경우엔 더 그러하고."

"그렇단 말씀은?"

"몬스터를 처리해 드리지. 길 안내만 해 주면 좋겠는데."

칼럼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들이 몬스터를 처리해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대대로 마을에 내려온, '그 산' 근처에 다가서지 말라는 규율이었다.

고민 끝에 칼럼이 입을 열었다.

"마을에 대대로 내려오는 규율이 있습니다. 절대로 산에 오르지 마라. 가능하면 근처에도 다가서지 마라. 하여...."

"하여 길 안내조차 못하겠다는 건가? 그대들 마을을 위해 큰 수고를 들이는 우리를 위해?"

상인의 낯빛이 일변했다. 푸근하고 사람 좋던 인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냉정한 장사치의 얼굴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쯧. 좋은 마음으로 베풀려 했건만. 이 얘긴 없던 일로 하지."

"그, 그게 아니고!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놓고 하대를 하는 상인이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어떻게든 상인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루드. 루드가 있었구나!'

바보 같으니라고! 칼럼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멍청이 같이 루드를 잊고 있었다.

"있습니다. 안내에 딱 맞는 적임자가!"

"그런가?"

"예! 예! 나리께서도 아까 보신 녀석입니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산에 드나드는 게 그 녀석입니다. 종종 토끼 가죽을 갖고 오는 걸 봐선 산길을 잘 아는 게 분명합니다. 안내역으로 필히 도움이 될 겁니다."

상인의 눈이 곡선으로 휘었다.

아까 전 마주친 소년을 떠올렸다. 변방의 주민답게 관리라곤 하나도 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꽤나 곱상한 외모였다.

잘 씻기고 관리한다면 귀족 부인들께 선물로 드려도 괜찮을 상품 같았다.

"이민족의 피가 섞여 있나?"

"예, 예! 그렇지만 그리 거슬릴 정돈 아닐 겁니다."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럼의 말대로 루드에게 있는 이민족의 특색은 이색적으로 여겨지는 정도였고,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 특정 부인들의 수요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그 소년으로 하지. 한데 그 소년은 마을에 살지 않는 겐가?"

"예. 마을 밖에서 생활합니다."

가벼운 문답으로 상인은 어느 정도의 사정을 파악했다.

변방이고 고립된 마을일수록 구성원 간의 유대가 강한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말하면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에 대한 배척이 심하단 의미.

그런 곳에서 이민족의 피가 섞인 소년이 멸시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소년, 우리가 데려가고 싶은데."

"물론 데려가셔야죠."

"안내역만 말하는 게 아닐세."

상인이 칼럼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고스란히 눈빛을 받아 내던 칼럼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녀석의 아비가 저와 친우였습니다. 그 녀석이 죽은 후엔 제가 녀석을 거두다시피 했고요. 하니...."

"하니?"

"...거저 드리는 건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뭐? 하하핫!! 하하하핫!!!!"

상인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친우의 아들이라더니, 제가 거둔 것이나 다름없다더니. 결국 하는 말이 돈을 달라는 것 아닌가.

"자네. 상인의 재목이 있구먼."

"하하... 그렇습니까?"

"그래. 얼마를 주면 되겠나."

"큰 욕심 부리지 않겠습니다. 이 정도만 주십쇼."

칼럼이 손가락을 펴 보였다. 상인은 뜻 모를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되겠나. 친우의 아들이고 자식 같은 아이인데. 그것의 두 배 주지."

두 사람의 거래가 성사됐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5화

칼럼은 황급히 루드를 찾았다. 그새 돌아갔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거리의 매대 앞에서 루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이렇게 다급히 무슨 일이세요?"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단다. 잠시 괜찮겠니?"

"물론이죠. 아저씨가 필요하다면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 수 있는 걸요."

루드를 제 집으로 데려간 칼럼은 상인과 나눈 대화를 설명했다. 당연히 향후 루드의 거취에 관한 이야기는 쏙 뺀 채였다.

"마을을 위해서요?"

"그래. 마을 사람들을 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지만 이렇게 부탁한다. 아저씨 얼굴을 봐서라도 도와주렴. 아저씨도 마을 사람들에게 네가 마을을 위해 힘썼다고 얘기하마."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칼럼의 속도 함께 타들어 갔다.

이미 루드를 안내역으로 확정한 상황, 거기에 더한 것도 약속하지 않았는가.

이런 상황에서 루드가 거부하면 참으로 곤란했다. 여차하면 힘을 써서라도....

"할게요."

"...정말이냐! 정말 고맙구나."

"다만 이번 일은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저씨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칼럼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 하니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마을로 오려무나."

칼럼은 루드가 할 일에 대해 설명했다.

고블린 사체를 찾은 곳까지 안내하는 것이 핵심이고, 이후에는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하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혹시 모르니 호신 용품을 챙기라는 조언까지 건넨 칼럼은 내일 늦지 않게 올 것을 강조하고 돌아갔다.

"발걸음이 가볍군."

뒷모습만 봐도 그의 앞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골칫거리도 해결하고 생각지 않던 수입까지 생겼으니 신날 수밖에 없겠지.'

상인과 칼럼 간에 오간 얘기는 몰랐지만 때론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래도 일이 잘 풀렸어.'

때마침 칼럼의 집에 있던 상인이 돈줄을 볼 줄 알고 상행에 영향력 있는 상인이었던 게 컸다.

단편적으로 주어진 정보를 상업적 이문으로까지 연결할 수 있는 역량은 상인이라고 전부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잊고 있었는데, 보답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군.'

오래된 기억 속에서 그 상인이 이번 상행의 책임자란 정보가 떠올랐다.

과거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을 팔 것을 종용했던 인물이란 사실과 함께.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칼럼의 신난 걸음걸이를 보면 확실했다.

* * *

다음 날 아침.

루드는 칼럼의 말대로 필요한 것들을 챙겨 집을 나섰다. 단도 하나와 화살 여러 개, 산에서 채집한 갖은 열매들까지.

필요한 것들을 보자기에 싼 뒤 뒤로 교차해 맸다.

마을에 도착하자 준비를 마친 상행이 루드를 맞이했다. 칼럼을 비롯해 몇몇 마을 사람들도 나와 있는 상태였다.

"루드 왔구나. 오늘 안내 잘 부탁한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칼럼 뒤쪽으로 선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불퉁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복잡 미묘한 것 같기도 했다. 여태 배척하던 소년이 마을을 위한 일에 앞장선다 하니 앞으로 소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새랄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시선을 옮겨 상행의 일원들을 확인했다.

총 스물의 인원이었는데, 전부 무기를 갖고 있었다.

'무기를 다뤄 본 적 있는 이들은 열.'

패용한 모양새와 움직임만 봐도 실질적으로 쓸 수 있는 전력인지 아닌지가 보였다.

'그중 능숙한 건 일곱.'

아마 용병들일 터였다.

그런데.

'저자는....'

이질적인 존재가 하나 있었다.

기도를 갈무리했으나 은연중 드러나는 존재감, 엑스퍼트급 인물이었다.

"출발한다!"

상행단은 머뭇거림 없이 출발했다. 마을에서 산까지는 4시간 정도의 거리였는데, 계절과 산의 특성을 고려하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이름이 루드라고?"

"예. 상인님께선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계속 상인님이라고 부르기엔 다른 상인님들도 계셔서요. 상행의 책임자이신 것 같은데."

"눈썰미가 좋구나. 나는 휴고라고 한다. 이번 상행에서 최선임이지."

산으로 가는 길 내내 루드는 휴고와 대화를 나눴다.

특별할 것 없는 대화였다. 몇 살인지, 부모는 어찌 됐는지, 왜 마을 밖에서 사는지, 할 줄 아는 건 뭔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생면부지의 사람들 사이에 낀 소년의 불안을 덜어 주려는 어른의 배려로 보일 내용이었다.

'호구 조사인가.'

하지만 실상은 구매한 상품에 하자가 없는지, 혹 위험요소는 없는지 판단하는 점검에 불과했다.

루드는 휴고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다. 대화가 오갈수록 휴고의 얼굴에 만족한 기색이 나타났다.

루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 이런 변방까지 상행을 왔나 했더니 이런 이유였군.'

이들은 왜 돈도 안 되는 변두리의 마을까지 상행을 왔을까 하는 의문이 휴고와 대화를 나누며 해소됐다.

'저자가 상단주의 아들.'

중요한 거래를 실패한 벌로 유배에 가까운 상행을 명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한 호위.'

아까 전의 엑스퍼트급은 자유 기사 출신으로 그의 호위 역할이었다.

휴고는 상단주의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그를 귀여워했고, 그를 위해 기꺼이 이번 상행의 대표를 맡았다고 했다.

몬스터나 마수를 토벌해 부산물을 가져가면 그에게 도움이 될 거란 말도 덧붙였다. 굳이 수고를 들여 몬스터 토벌에 나선 이유였다.

정보가 추가되며 루드의 머릿속에서 판이 다시 짜이기 시작했다.

상단의 책임자 휴고와 가장 경계해야 할 자유 기사. 이 둘을 흔들 수 있는 상단주의 아들.

"저기로 올라가면 금방이에요."

어느덧 일행은 산의 초입을 지나쳤다.

루드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고블린 사체를 발견한 산의 중턱까지 일행을 안내했다.

"분명 이 근처인 것 같은데 흔적이 없어져서 잘 모르겠어요. 여기 어디였는데...."

"알렉 공. 한번 봐주실 수 있겠소?"

휴고의 말에 예의 자유 기사가 느지막이 고개를 끄덕이곤 앞으로 나섰다.

알렉은 주변을 살폈다. 사방을 막은 나무의 흠집과 땅의 자국, 옅지만 분명한 피 냄새.

여러 흔적들이 이곳에 고블린의 시체가 있었음을 말했다.

"맞네. 지금 시체가 없는 건 동물들이 물어 갔거나 다른 고블린들이 가져갔기 때문이겠지."

"...마수의 가능성은 없소이까?"

"마수의 흔적은 안 보이네. 애초에 마수가 한 일이었다면 저 꼬마가 살아 있는 게 이상한 일이지. 마수가 제 영역에 들어온 손쉬운 먹잇감을 놔줄 리 없잖은가."

알렉의 단언에 휴고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

아쉬움과 안도라는 상반된 감정이 뒤섞인 숨이었다.

"이상한 건 고블린을 죽인 게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건데."

알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주변에 새겨진 흔적은 분명 이곳에서 고블린이 죽었다는 걸 말하고 있었지만 그 외의 다른 것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뭐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맹수라도 마주친 거 아니겠소."

알렉 대신 어느 용병이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고블린은 몬스터라지만 약했고 맹수라면 충분히 고블린을 죽일 수 있었다.

"혼자 떨어진 난쟁이들이 짐승에게 죽는 건 꽤나 흔한 일이지."

다른 용병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중요한 건 이 산에 고블린이 있다는 것이네. 녀석들의 부산물은 돈이 되고. 이 정도면 산을 오를 이유는 충분하겠지?"

휴고가 상황을 정리하며 핵심을 짚었다.

발견된 고블린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에 고블린이 있다는 것과 돈이 된다는 게 중요했지.

"위쪽 길을 알고 있니?"

"한 번 가 보긴 했는데 길은 몰라요. 위쪽엔 바위가 많은데 자칫하면 크게 다칠 거 같아서 그 뒤론 다시 가 볼 생각도 못했어요."

"알겠다."

휴고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고블린이 있는 곳까지 안내할 수 있다면 제일이었겠지만 모르는 길을 안내할 수는 없는 법. 이제부턴 발품을 팔아야 했다.

휴고의 눈짓에 용병들이 두셋씩 짝을 지어 흩어졌고, 남은 상인들은 체력 보충과 정비 시간을 가졌다.

"샘프턴, 아무래도 오늘은 산에서 묵어야지 싶다."

곧 있으면 해가 질 시간이었는데 산을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기엔 시간과 체력 소모가 상당했다.

야영 준비를 해왔으니 여기서 쉬고 내일 일을 마치는 게 상책이었다.

"알겠어요. 숙부의 판단을 믿으니까 앞으론 제게 일일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상단주의 아들 샘프턴이 작은 목소리와 몸짓으로 대꾸했다.

의기소침한 그 모습에 휴고는 안쓰러움을 느꼈다.

'불쌍한 녀석.'

원래도 소심한 성격이었던 샘프턴은 중요한 거래를 실패하고 벌로 이런 변방까지 오게 되니 더욱 소심해진 모습이었다.

"나만 믿어라. 네가 아버지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도록 도우마."

"...감사해요."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루드가 휴고에게 다가갔다.

"혹시 이곳에서 야영하나요?"

"그래. 마침 주변도 나무들이 가려 주니 괜찮겠다 싶구나. 왜 그러느냐?"

"그럼 불 피울 준비를 하려고요. 마른 나뭇가지도 좀 주워 오고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있나 보고 와도 될까요?"

"그래 주면 고맙다만 지금은 붙여 줄 수 있는 용병들이 없는데. 괜찮겠니?"

"평소에도 혼자 다니던 곳인데요. 괜찮습니다."

자리를 빠져나온 루드는 기척을 죽이고 움직였다. 은밀하고 신속한 몸놀림이었다.

얼마 안 가 정찰 나간 용병들이 보였다. 그들의 동선을 확인해 보니 올바른 방향이었기에 고블린들을 유인해야 하나 했던 걱정은 넣어 두기로 했다.

루드가 나뭇가지들을 들고 돌아온 건 용병들이 복귀해 보고하던 즈음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확실합니다. 위에서 암벽에 구멍을 내고 굴을 뚫고 있었습니다."

용병의 말에 휴고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고블린들이 굴을 뚫고 있다는 건 둘도 없는 호재였다.

본디 고블린은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에 환장하는 녀석들. 그들이 합심해 굴을 파고 있다는 건 안쪽에 반짝이고 아름다운 무언가가 있단 의미와 같았다.

'광맥을 발견한 건가!'

자신의 생각이 맞으면 이 산엔 광물이 묻혀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건 된다. 이건 돼!'

고블린의 부산물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주인 없는 광산을 발견한다? 사실상 후계 구도에서 탈락한 샘프턴을 순식간에 상위 경쟁자로 올릴 수 있는 일이었다.

휴고가 행복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루드는 사람들을 도와 저녁을 만드는 중이었다. 커다란 솥에 여러 가지를 넣은 스튜가 몽글몽글 끓어올랐다.

"냄새가 기가 막히는구먼."

"오늘따라 유독 잘된 거 같은데?"

"그래 봤자 다 때려 넣은 건 똑같잖아."

저들끼리 낄낄댄 상인들이 곧 스튜를 배분했다.

그릇 넉넉히 채운 스튜를 하나씩 받아 든 이들은 배를 채우며 몸을 녹였다.

야영은 순조로웠다.

밤 내내 불이 꺼지지 않았고, 불침번이 잠드는 일도 없었다.

휴고를 비롯한 모두의 표정이 좋았다.

몸은 고됐지만 내일이면 얻게 될 것들을 생각하니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샘프턴의 안색도 한결 밝아진 상태였다.

고블린들의 위치를 알아냈으니 날이 밝으면 처리하고 광산을 확보하면 됐다.

광산의 가치가 이루 말할 것 없이 크단 건 이곳의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날이 밝았다.

여전히 모두의 표정은 밝았다.

오직 두 사람, 루드와 알렉만을 제외하고.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6화

날이 밝자 상행단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정찰 때 길을 확인해 둔 덕에 막힘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음. 배가 살살 아픈데.'

3년차 상인 수베로가 인상을 찡그렸다. 어제 먹은 게 잘못됐는지 밤부터 불편하던 배가 본격적으로 말썽을 부리는 중이었다.

'줄 한번 잘못 서서 이게 뭔 고생인지.'

상단주의 아들이란 말만 듣고 냉큼 샘프턴에게 붙었던 게 문제였다. 샘프턴이 이토록 소심하고 상재가 없는 줄 알았다면 다른 후계자에게 줄을 댔을 텐데....

더 큰 문제는 다른 후계 후보들의 눈 밖에 난 탓에 출셋길도 막혔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편히 있어야 할 시기에 이런 변방으로의 상행에나 딸려왔으니... 앞날이 막막했다.

'하지만 그것도 지난 말이지.'

유배당하듯 온 이 변방에 기회가 있었다.

광산은 큰돈이 되고, 큰돈은 곧 큰 힘이었다.

'조금만 참자. 괜찮아지겠지.'

배가 아렸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괜히 자신 때문에 속도가 늦어지기라도 하면 쏟아질 시선과 원성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본인도 빨리 광산을 확인하고 싶었다.

불편함을 안고 움직여서일까, 수베로는 자신만 배가 아픈 게 아니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빨리 광산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

자신 때문에 속도를 늦출 수 없다는 책임감, 혹은 책망에 대한 두려움.

그것들이 오직 산 정상만을 바라보게끔 만들었다.

'효과가 잘 도는 것 같네.'

반면 루드는 넓은 시야로 전체를 바라봤다.

산의 정상부는 물론 정상부에서 벌어질 일, 그리고 눈앞의 사람들까지.

사람들의 안색을 보니 스튜에 넣은 재료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발견했을 땐 놀랐지.'

루드가 지난 저녁과 오늘 아침 식사에 넣은 재료들은 신비를 찾기 위해 준비하다 발견한 열매들로, 전생에서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도토리를 닮은 '톳토'와 버섯처럼 생긴 '팡푸'는 복통을 유발하고 신경계 전반에 영향을 미쳐 감각을 떨어트리는 효과를 지녔다.

죽거나 쓰러지는 등의 극적인 효과는 없지만 몸의 이상을 알아차리는 게 어렵고,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영락없는 도토리와 버섯이었기에 몰래 넣을 필요도 없었다.

'진짜 중요한 건 고작 그런 효과가 아니지만.'

구를 대로 구른 용병들 가운덴 톳토와 팡푸에 대해 알고 있는 경우가 꽤나 있었다.

하지만 그들조차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어쩌면 이 시기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효과.

'일정한 공정을 거친 두 재료를 함께 섭취하면 마력을 운용하는 순간 마력이 반발하며 기혈이 꼬인다.'

물론 폐인이 되거나 할 정도로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순간적으로 기혈이 꼬일 뿐.

기혈이 꼬였을 때 마력 운용을 멈추면 얼마 지난 후 마력과 기혈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때문에 요양도 필요 없는 수준이었다.

'준비는 끝났다.'

하지만 루드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마력 사용자라곤 하나 고작 중소 상단에서 고용한 용병.

얼추 손을 써 놨으니 고블린들이 선전해 준다면 목표한 바를 이루는 게 훨씬 쉬워질 터였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알렉이란 자.'

샘프턴을 호위하는 자유 기사.

톳토와 팡푸는 만능이 아니다. 녀석들로 인한 마력 반발은 반발한 마력보다 강한 마력 제어 능력으로 찍어 누르면 곧장 해소됐다.

즉 마력 운용을 제대로 익힌 기사에게는 잠깐의 멈칫거림에 불과하단 의미였다.

'그 잠깐만으로도 많은 게 바뀌지만, 아예 스튜를 먹지 않았단 말이지.'

무언가를 느낀 걸까, 아니면 원래 배급되는 식사를 먹지 않는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장으로는 5대5.'

시간의 여유가 조금만 있다면 10대0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게 아쉬웠다.

'기초 공사만 아니었어도.'

루드의 내부는 지금 순간에도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두 개의 방에서부터 시작된 길은 때론 교차하고 때론 하나였다 다시 갈라지기도 하면서 촘촘한 그물의 형상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어렵고,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었다.

길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마력의 수발이 어렵다. 당장 알렉과의 싸움을 자신할 수 없는 이유였다.

마력을 쓰지 않고 마력 사용자를 상대하는 건 까다로운 일이었으니.

다행인 건 기초 공사 과정이 거의 다 끝나간다는 사실이랄까.

'이 정도라면 앞으로....'

시간을 가늠하던 도중, 선두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선봉이 어깨 위로 손을 올려 주먹을 쥠과 동시에 모든 일행이 제자리에 멈춰 숨죽였다.

커다란 바위 너머로 고블린과 굴이 보였다.

'진짜다. 진짜 광산이 있었어!'

굴을 확인한 사람들의 눈이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콩고물만 떨어져도 한동안 돈 걱정은 안 해도 되리라.

끄덕.

휴고가 고개를 끄덕이자 용병들이 움직였다.

켁! 케륵!

바위를 빠져나간 용병들이 고블린을 공격했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고블린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용병의 숫자는 고블린들보다 현저히 적었다.

용병이라면 고블린을 상대하는 게 어렵지 않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대일의 이야기였다.

많은 숫자의 고블린을 상대로 전투가 길어지면 불리해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일행 전부가 이곳까지 올라온 건 그 때문이었다.

"다들 합세하지."

휴고의 말에 상인들이 가세했다.

용병처럼 싸우진 못해도, 숫자를 채워 시간을 벌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의 존재가 용병들의 발목을 잡을 정도가 아니라면.

'몸이 이상해!'

수베로가 멈칫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시야가 어지러운 게 자꾸만 헛구역질이 나왔다.

고블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돌과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도끼가 수베로의 옆구리를 찍었다.

꺽 하는 소리와 함께 수베로가 쓰러졌다.

"이런 젠장! 올슨! 어떻게든 해 봐!"

"나도 그렇고 싶은데 마력이 이상해...! 쿨럭!!"

모두가 이상함을 느꼈다.

몸의 반응이 평소보다 늦고 움직일 때마다 속이 메스꺼웠다.

처음엔 컨디션이 별로인가 했지만 마력을 끌어올리던 올슨이 각혈과 함께 주저앉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난전 상황이었다. 상인들이 고블린과 엉켜 붙은 까닭에 물러나서 재정비하는 것도 어려웠다.

여기서 발을 빼면 상인들이 죽을 터였다.

곳곳에서 피가 튀고 비명이 터졌다. 겨우 고블린이라고, 버티고만 있으면 된다는 말에 용기를 냈던 상인들은 패닉에 빠져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둘렀다.

겁에 질린 상인들은 서로 상처를 입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조심하세요!"

휴고의 뒤를 노린 고블린을 몸을 부딪쳐 밀어 낸 루드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고맙구나. 덕분에 살았다."

휴고는 재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칼밥은 아니지만 상인으로서 갖은 일을 겪으며 경험치를 쌓아 올린 그였다.

'판단 착오다.'

상인들을 전투에 가담시킨 게 패착이었다. 용병들에게 힘을 얹어 주려는 선택이었으나 오히려 용병들의 발목을 잡아 버린 것이다.

"알렉 공. 어찌 돕지 않는 거요!"

휴고가 외쳤다. 기실 용병들이 어떻고 상인들의 가담이 어떻고 할 것 없이 알렉이 두 팔 걷고 나섰으면 벌써 마무리됐을 일이었다.

"기다려라. 생각 중이니."

"이익!"

알렉이 나서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자유 기사로서 콧대 높은데다, 그의 역할은 샘프턴의 호위였지 상행의 용병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상황이 이쯤 됐으면 나서서 도와야하는 것이 아닌가!

제게 주어진 임무만 괜찮다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요량인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알렉에겐 알렉 나름대로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이상하다.'

이번 여정은 이상한 부분이 많았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아무리 근본 없는 용병들이라지만 이곳까지 오며 파악한 그들의 실력은 고작 고블린들 따위에게 밀릴 게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알렉의 시선에 루드가 들어왔다.

가쁜 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피는 모습은 영락없이 겁에 질린 소년의 것이었다.

그러나 한 번 이상함을 인지한 알렉은 계속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소년이 갈가리 찢긴 고블린의 사체를 발견하고도 무사한 것.

그 사체를 가져온 게 때마침 상행이 와 있을 때란 것.

막상 산에 올라오니 사체가 있던 흔적만 있고 흉수나 상황 짐작은 어려웠단 것.

하나같이 이상한 점들이었고, 그 모든 이상함의 중심에 저 소년이 있었다.

그래서였다. 사망자가 나오고 용병들이 수세에 밀려도 상황을 지켜본 것은.

전투에선 순간순간의 대처도 중요하지만 때론 전체의 흐름을 꿰뚫는 게 더 중요할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러한 때였다.

하여 상단주의 아들을 호위하는 것을 우선하며 꿰뚫어야 할 곳을 찾았다.

스릉-

느릿한 속도로 검을 뽑았다. 그리고 꿰뚫고자 한 곳을 향해 검을 찔렀다.

느릿하던 발검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쏘아진 검의 목적지는 고블린과 힘겨루기를 하던 루드의 등이었다.

"알렉!!"

제 목숨을 구해 주고, 어린 나이에도 용감하게 고블린과 항전 중이던 소년을 노리는 공격에 휴고가 기함했다.

하나 이어진 상황에 사고 회로가 멈춰 아무 소리도 이을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았지?"

몸을 비틀어 검을 피한 루드가 물었다.

그리 묻는 루드의 눈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알렉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감이랄까. 솔직히 운이 좋았다고 해 두지. 반반이라 생각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증거도 없고 심증만 있었을 뿐이었으니.

다만 여태까지 느꼈던 이상함의 중심에 소년이 있다는 점과 상행단의 변화라곤 소년이 추가된 것뿐이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소년을 의심하는 게 당연한 상황.

보통은 '소년'이라는 부분에서 의심을 거둘지도 몰랐으나 세상엔 보통의 잣대로 재단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알렉이었다.

"내가 무고했다면 어쩌려고 대뜸 검부터 내지른 건지."

"그래서 무고한가? 설령 무고하다 해도 상단 소속도 아닌 안내역 하나 죽이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지. 반반의 확률이라면 지르는 게 이득이란 소리일세. 아직 어려서 모를 수도 있지만 사람의 목숨은 평등하지 않고 자네 목숨 열 개보단 상단주 아들의 목숨 하나가 귀한 법이지."

알렉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증거였다.

루드는 문답을 나누며 눈동자를 굴렸다.

상행단의 숫자가 많이 줄어 있었다. 특히 용병들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였다.

'좋아. 여기까지 하자.'

순진한 안내역은 이제 끝이었다.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으니 손해 본 장사는 아니었다.

루드의 팔이 호선을 그렸다.

순식간에 날아간 단검에 목이 꿰뚫린 휴고가 피 끓는 소리와 함께 고꾸라졌다.

가장 귀찮은 존재를 해결했으니 지금부턴 숨길 것도 거리낄 것도 없었다.

"흠. 곤란하게 됐군."

알렉은 인상을 찡그렸다.

휴고는 이번 상행의 총책임자인데다 상단에서도 영향력이 높은 인물. 그런 이가 죽었으니 상단으로 돌아가면 문책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그래도 상단주의 아들이 죽는 것보단 나았다. 어차피 자신의 임무는 샘프턴의 호위였으니.

먼저 움직인 건 루드였다. 휴고의 검을 주어든 루드는 몸을 낮추고 빠르게 달려들었다.

아래 대각에서 반대 각의 위로, 알렉의 사각을 파고든 검이 매섭게 휘둘러졌다.

카앙-!

검과 검이 마주치며 불똥이 튀었다. 역수로 파지를 바꾼 루드가 그대로 경로를 역행해 검을 내리찍었다.

한 발자국 물러나며 피한 알렉의 얼굴이 굳었다.

"알고는 있었다만 역시 보통 소년이 아니군. 정체가 뭐지?"

"글쎄. 아까처럼 맞춰 보지 그래?"

이죽거림에도 알렉은 동요하지 않았다.

타탁-!

이번엔 알렉이 먼저 움직였다.

위에서 아래로, 단순하지만 빠르고 위력적인 경로.

검을 피하며 측면으로 돌아 나간 루드는 그대로 알렉의 옆구리를 노렸다.

그러나 공격 직전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공격을 포기하고 보다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호오. 이걸 피할 줄은 몰랐는데."

검이 땅에 찍힘과 동시에 그 반탄력을 이용한 가로 베기.

알렉을 자유 기사로서 이름 날리게 해 준 기술이었다.

땅의 반탄력을 이용해 세로에서 가로로의 전환은 말이 쉽지 신체가 받쳐 주지 못하면 병신이 되기 십상인 기술이었다.

째깍, 째깍, 째깍.

"...."

루드는 시간을 가늠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알렉과 간격을 조정하던 중 시야 끄트머리에 작은 움직임이 들어왔다.

그 움직임을 계속 확인하며, 알렉의 움직임에 맞춰 조금씩 맞서는 각을 조정하던 때.

루드가 도약했다.

알렉의 위치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히익!"

도망가던 자세 그대로 목덜미를 잡힌 샘프턴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

몸을 움츠린 채 연신 손을 비비는 샘프턴의 모습은 꽤나 처절했으나, 루드는 냉정했다.

겁에 질린 샘프턴을 방패처럼 든 루드가 알렉에게 검을 겨눴다. 들어올 테면 들어오란 듯이.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7화

루드는 샘프턴을 인질로 잡은 뒤 차분하게 주변을 살폈다.

알렉을 제외하곤 거의 정리된 상황. 모두가 이 사태의 주범이 루드란 걸 깨달았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고블린을 상대하기도 벅찬 데다 그 숫자도 점점 줄어드는 중이었다.

다시 알렉에게 집중한 루드는 샘프턴을 내밀며 물었다.

"사람의 목숨은 그 가치가 다르다했지. 그렇다면 궁금하군. 당신의 목숨값은 얼마일지, 상단주의 아들보다 높을지 낮을지 말이야."

알렉은 침묵을 고수한 채 루드를 응시했다.

일말의 틈이라도 보이는 순간 도약해 덮칠 준비가 끝난 태세였다.

"이 녀석의 목숨값이 당신 목숨값보다 높은가 보지? 이리 고민하는 걸 보니 말이야."

루드는 샘프턴의 목에 검을 댔다. 날붙이의 서늘함이 느껴지자 샘프턴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알렉 공! 살려 주세요! 아니 다가오지 말고 그냥 이 자를 놔줘요!"

샘프턴의 간절한 비명에 알렉이 검을 내렸다.

"이, 이제 날 살려 줘. 돈이 필요한 거라면 얼마든지 줄게. 아버지께 말하면 원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도 줄 수 있어!"

"도련님."

살 수 있다는 희망에 격양됐던 목소리를 차분한 음색이 끊었다. 어느새 다시 검을 올린 알렉의 목소리였다.

"죄송한 말이지만 도련님은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생각해 보니 이 정도로 일을 벌인 건 바라는 게 없고 다 죽일 거란 의미거든요."

돈이 목적이었다면 이런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샘프턴만 납치해 돈을 요구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으니.

그러나 눈앞의 소년은 굳이 상행단 전부를 이곳으로 유인했고 죽이려 했다.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소년이 원하는 건 자신들의 죽음이었다.

"잡히지 않고 도망쳤다면 살아 돌아갔겠지만. 잡힌 이상 죽음을 피하긴 어려울 겁니다."

샘프턴이 살 수 있던 방법은 하나였다. 자신이 소년을 죽일 때까지 어디 잘 숨어 있는 것.

'내 잘못도 있지만.'

세로 베기에서 가로 베기로의 전환. 차마 기예에 닿은 그 공격을 피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샘프턴의 위치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 결과가 소년의 손에 잡힌 샘프턴이었다.

어찌 됐든 안타까운 일이었다. 샘프턴에게나 자신에게나.

'근신은 확정이겠군.'

후계 구도에서 밀렸다지만 상단주의 직계였다.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 책임은 피하기 어려울 터였다.

"과격한 움직임에 비해 머리 회전이 빠르군."

짧은 평을 내뱉음과 동시에 루드의 검이 샘프턴의 심장을 관통했다.

"이 모든 일들은 죽음으로 감당해야 할 거다."

알렉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의 흐름이 빨라지며 일부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루드는 대꾸하지 않고 내부 시곗바늘의 움직임을 느꼈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뚝.

오랫동안 돌아가던 시곗바늘이 멈췄다.

샘프턴을 인질로 내세운 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자네가 천재란 건 인정하지. 판을 짜는 머리,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력, 일신의 무력까지."

알렉의 검이 루드를 겨눴다.

"하지만 아무리 천재라도 시간을 무시할 순 없는 법. 명가의 천재들도 그런데 마력에 대해 알려줄 이 없는 이런 깡촌의 천재는 어떠할까."

몸 주위로 피어오른 마력이 넘실거리며 그 크기를 키워갔다.

"이게 마력이다. 마력의 유무, 그 실력의 고하로 신분과 대접이 바뀌지."

"...."

"그리고 기사라는 신분은 그 실력의 증명."

루드는 여전히 대꾸하지 않은 채로 검을 들었다. 이 이상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콰앙-!!!

두 사람의 도약과 함께, 검과 검이 닿은 거라곤 믿을 수 없는 굉음이 울렸다.

"뭣?!"

당황에 찬 알렉이 경악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검과 함께 날려 버릴 요량으로 마력을 가득 담은 일격이었으니 풍선 터지듯 터졌어야 했다.

한데 여직 소년이 눈앞에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했다.

"마력을 다루지 못한다고 한 적은 없었는데."

루드의 검이 마력을 품고 있었다.

겉으로 흘러나오는 잔재 하나 없이 온전히 담긴 마력은 알렉의 것보다 단단하고 강건했다.

"그리고 알려 주고 싶은 게 있는데."

마력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마력이 보이는 이야말로 정말 강하다는 착각.

말 그대로, 착각이었다. 눈에 보인다는 건 마력이 줄줄 샌다는 의미였고, 위압감이 느껴진단 건 마력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한다는 증거였다.

"고작 이 정도 실력은 내가 상대한 기사들 중 아무도 없었다."

마력이 담긴 검이 연거푸 휘둘러졌다.

기초 공사가 끝난 마나 로드를 막힘없이 달린 마력은 루드의 의지를 따라 적재적소에서 효율적으로 쓰였다.

알렉은 정신을 못 차렸다. 비처럼 쏟아지는 검에 피부에 붉은 실선이 새겨지고 살점이 뭉텅이 채 떨어졌다. 결국 오래지 않아 한쪽 무릎이 꺾였다.

"...."

싸움을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숨통을 끊기 위해 알렉에게 다가선 순간, 이상함을 느낀 루드가 거리를 벌렸다.

"...아!"

"...아아!!"

"...아아아!!!"

짐승의 울음 같기도, 무언가를 긁는 것 같기도 한 소리.

울부짖듯 흉성을 토해 낸 알렉이 달려들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속도였으나 젖힌 고개와 제각각 움직이는 팔다리는 알렉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려 줬다.

'이건.'

짐승처럼 달려든 알렉을 피해 선 루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한 눈에 봐도 이상했다. 벌겋게 충혈된 눈과 침을 질질 흘리는 입, 얼굴 위로 돋아난 혈관과 그보다 기괴한 인상을 주는 꺾인 목과 이상하게 움직이는 팔다리.

"...아아아아!"

흉성과 함께 마력이 터져 나왔다.

이전보다 진하고 강한 기세의 마력은 어딘가 끈적거리고 기분 나쁜 마력이었다.

알렉은 계속해서 루드를 노렸다.

절제라곤 찾아볼 수 없고 짐승마냥 거친 공격이었지만 하나하나의 공세가 맹렬해 스치기라도 했다간 낭패를 볼 수 있었다.

공격들을 한 끗 차이로 피해 낸 루드는 알렉의 마력에 맞서 자신의 마력을 폭사했다.

고요하던 마력이 주인의 의지를 따라 거칠게 몰아쳤다. 폭풍처럼 쏟아진 마력은 알렉을 압박했고 그 위압에 눌린 알렉의 몸이 일순간 굳었다.

그 순간이었다.

마력이 갈무리된 검이 알렉을 지나쳤다.

단 한 획의 불필요한 움직임도, 한 줌의 마력 손실도 없는 공격이었다.

"...아!"

종으로 떨어진 검에 귀가 잘리고.

"...아아!!"

횡으로 그은 검에 제각각 움직이던 팔이 끊어졌으며.

"...!!!"

유려한 호선을 그린 검에 양쪽 눈마저 잃었다.

'역시 이상해.'

그럼에도 알렉은 여전히 미치광이마냥 날뛰고 있었다.

마력의 운용도, 기사로서의 움직임도 없이 검도 들지 않고 부딪쳐 오는 모습은 영락없이 이지를 상실한 광인의 것이었다.

거친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트는 알렉의 모습을 보고 루드는 확신했다.

단순히 죽음의 공포에 미친 게 아니다. 더 음습하고 음산한 무언가가 더해진 광증이었다.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전생, 시기로 따지자면 지금보다 훨씬 나중에서 겪은 일.

'제국의 비밀 프로젝트.'

푹-.

힘이 빠졌는지 느려진 알렉의 심장을 루드의 검이 꿰뚫었다.

"꺼, 커-억."

부산스럽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이대로 검을 비틀면 즉사.

불쾌한 기억을 털어내고 평안을 주려 할 때였다.

"...고맙다."

죽음의 순간이 돼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알렉이 감사를 전했다.

자세히 기억하진 못했으나 무의식의 저변에서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을 느꼈던 알렉이었다.

"방금 전 상황에 대해 추측 가는 바가 있나?"

"글쎄. 딱히 짐작 가는 곳은 없네."

"상단일 확률은?"

"대륙 십대상단도 아니고 고작 지방에서 입김 날리는 이들일세. 그들이 나에게 무언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네."

"혹시 오랫동안 머문 곳이 있나? 제국과 관련된 곳이라던가."

알렉은 루드의 질문에 의아해하면서도 기억을 더듬었다. 머리가 맑아진 덕에 답을 찾는 건 간단했다.

"제국과 관련되면서 오랫동안 머문 곳이라면 하나 있군."

"어디지?"

"사관학교."

루드는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사관학교라면 프로젝트를 실험하기에 적합하다.'

그때 알렉이 느릿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되는가?"

루드는 말없이 알렉을 바라봤다.

"어째서인가?"

여러 의미가 담긴 질문이었다.

왜 상행단을 몰살시킨 건지. 어째서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사용한 건지.

"...복수였다."

동시에 다음 계획을 위한 밑거름이기도 했다.

자신은 아직 마을에 남아 있어야 했다. 상행단이 존재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들과 함께 떠나서, 마을을 비워선 안 되니까.

고블린의 손을 빌린 건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혹시 누군가 사건을 조사한다면 최대한 혼선을 줘야 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마지막 힘을 짜내 물은 질문이었던 듯 알렉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피니 사방에 인간과 고블린의 시체가 가득했다.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먼 곳부터 훑던 루드의 시선에 휴고와 샘프턴, 알렉의 시체가 차례대로 담겼다.

'솔직히 유쾌하지는 않군.'

착잡한 마음도 들었다.

분명 원한이 있는 이들이었건만,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건만 왜인지 입맛이 썼다.

루드는 살인귀가 아니다.

피로 물든 미치광이는 더더욱 아니다.

'그래도 멈추진 않는다.'

각오는 옛날 옛적에 했다.

자신의 걸음에 뒤따르는 게 피 묻은 발자국일 것을 알지만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많은 피가 흐르고 많은 비명이 들릴 것이다.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은 그런 길이었다.

루드는 그 사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외려 직시하고 계속해서 바라보려 노력했다.

시야 저편에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연기처럼 흐릿한 모습이었지만 단번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회귀 이전, 대항군을 이끌 적의 자신이었다.

그와 마주보고 선 루드는 어깨를 폈다.

자신을 위해서, 어쩌면 모두를 위해서, 힘들지라도 가야하는 길이었다.

자신의 길을 대의를 위한 것으로만 포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조금. 아주 조금은 자신이 걸을 길, 그 길의 끝에 웃고 있는 게 보다 많은 사람이길 바랐다.

"...."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긴 하루가 천천히 저무는 중이었다.

"진짜는 이제부터."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두워진 산의 정상.

루드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들을 이 없는 말을 뇌까렸다.

다음 계획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그러니 쉬지 않고 움직여야 했다. 죽지 않기 위해선.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8화

어둠이 찾아온 시각.

루드는 아직 시체와 피로 엉망이 된 산의 정상에 있었다. 혹시 모를 생존자를 확인하고 챙겨야 할 것을 챙기기 위함이었다.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영원토록 저주할 테다!

살려 줘요. 아무나 좋으니까 살려 줘. 아빠, 엄마!

원념들의 아우성이 들렸다. 하나 같이 한이 맺힌 목소리는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모든 소리는,

'전부 환청이다.'

신체가 처음으로 어둠 속성 마나에 노출되며 나타난 부작용.

물론 원념의 목소리는 실재하는 개념이지만, 이를 듣기 위해선 흑마법사로서 일정 경지 이상에 올라야 했다.

귀에 맴도는 소리를 무시한 루드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눈 감지 못한 상인의 원통함.

머리가 두 쪽이 된 고블린의 두려움.

버림받은 이의 배신감.

이지를 잃었던 기사의 분노.

그들의 시체를 먹고 피를 마신 땅은 온갖 부정적인 기운들을 내뿜었고, 이는 고스란히 자연의 마나에 스며들었다.

검은색 문의 방을 연 루드는 근방의 마나를 모두 받아들였다. 하얀색 문이 수차례 열릴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검은색 문은 열림과 동시에 게걸스럽게 마나를 먹어치웠다.

"이게 끝인가."

그 결과 얻은 건 한 톨의 흑마력.

"예상은 했다만 두 번의 행운은 없었군."

흑마력은 일반적인 마력과 달랐다.

보통 마력을 쌓는다는 건 자연 상태의 마나를 자신의 마력으로 정제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흑마력은 그 궤가 아예 달랐다.

죽음과 고통, 비명.

흑마력을 쌓기 위해선 그런 것들과 함께 해야 했다. 부정적인 감정에서 기인하는 음차원적 에너지를 머금은 마나를 흡수함으로써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본디 자연 상태의 흑마력을 얻는 건 까다로운 일이었다. 꾸준히 흑마력을 쌓기 위해선 전장이나 묘지를 떠도는 수밖에 없었으니.

그러나 몇몇 흑마법사들이 흑마력이 부정적인 감정에서 기인한다는 점에 착안해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으니.

인위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만드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루드라고 그 방법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사용해 흑마력을 쌓을 생각은 없었다.

'일단은 여기서 마무리하자.'

검은색 문 안쪽에 자리 잡은 흑마력을 느낀 루드는 시체가 가득한 정상부를 뒤로 하고 움직였다.

오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이 마무리 되면 알렉이 나온 사관학교를 찾아봐야겠군.'

제국에는 여러 프로젝트들이 존재했다.

일반에 공개된 것도, 극비로 진행되는 것도 있었는데 루드는 전생에서 극비 프로젝트 중 하나의 결과물을 직접 마주했었다.

강화 병사 프로젝트.

대다수의 귀족들도 모르게 극비리에 진행된 해당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끔찍했다.

죽음을 불사하고 맹목적으로 전진하는 적의 모습이란.

지금 시점에서 그 흔적을 발견한 건 예상외의 성과였다.

'조사하면 금방 나오겠지.'

알렉이 어느 사관학교를 나왔는지 정도는 금방이다.

'예상대로 프로젝트에 닿아 있다면 실험실 혹은 연구실로 이용되고 있을 확률이 높다. 프로젝트 관계자가 있을 수도 있겠어. 책임자면 더 좋겠지만 그것까지 바라진 말자.'

큰 기대는 커다란 실망을 동반하는 법이었으니까.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알렉의 출신과 행적을 조사해 그가 나온 사관학교를 찾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마을에 남아 있어야 했다.

'짧으면 보름. 길어야 한 달.'

그 안에 '그'가 마을을 찾아올 것이다.

회귀 후 여러 가지가 변했다지만 회귀 이전에도 스스로 마을을 찾아왔으니, 그가 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을 터.

그 전에 최대한 무력을 확보해 놔야 했다. 그는 알렉과 비교할 수 없는 강자였고 자칫하면 이쪽이 잡힐 수도 있었다.

까득-.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를 떠올리니 이가 갈렸다.

지난 생에 직접 그의 목숨을 끊었지만 고작 그 정도론 분이 풀리지 않았다.

'최대한 대비한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준비해야 했다.

그는 이미 흑마법사로서 일가를 이룬 인물. 과거 그를 죽이긴 했으나 우연에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결과였다.

'객관적으로 현재 내 실력은 엑스퍼트급.'

마력의 운용이야 따를 자가 없지만 절대적인 양이 너무 부족했다.

알렉의 말대로 천재라 하여도 절대적인 시간을 무시할 순 없는 법이었다.

알렉과의 전투만 해도 패가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정보의 이점을 점했기에 쉬웠지, 아니었다면 긴 싸움이 됐을 것이었다.

하여, 곧 마주할 흑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선 마력의 총량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현재 루드가 신비가 잠들어 있던 공동으로 향하는 이유였다.

공동에 도착한 루드는 한가운데 자리 잡고 남아 있는 마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전처럼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대신 완성된 마나 로드를 따라 부드럽게 움직인 마나는 어떤 반발이나 거슬림도 없이 빠른 속도로 흡수됐다.

후우-.

마지막으로 깊은 숨을 뱉어 낸 루드가 소득을 갈무리 했다.

이로써 공동을 가득 채웠던 정기 높은 마나를 전부 받아들였다.

'저건...?'

내부 관조를 위해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이상한 게 보였다.

공동의 벽이 한 꺼풀 벗겨지고 있었다.

사람의 피부가 벗겨지듯 공동 안쪽 한 겹의 벽이 모래가 되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현상.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조차 어려웠다.

조심스레 벽으로 다가선 루드가 남아 있는 모래를 마저 쓸자, 안쪽에 새로운 벽이 나타났다.

'이게 뭐지?'

벽에는 그림이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 커다란 것을 사냥하는 모양새의 그림이었는데, 그 옆으로는 글자로 추정되는 기하학적 문양도 있었다.

한참 동안 바라봤지만 도통 무얼 말하는 그림인지 알 수 없었다.

'원시 벽화인가?'

그렇다면 엄청나게 오래된 그림이 분명했다.

종이나 문서는 오래 전에도 있었으니.

루드는 오랫동안 벽화 앞을 서성였다.

다른 곳이었다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신비가 있는 공동의 벽인데다 벽의 한 계층이 무너지면서 나타난 곳에 벽화가 있다는 게 신경 쓰였다.

혹시나 해서 벽을 건드려 보고 마력도 흘려 봤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신비와 관련된 무언가? 아니면 그냥 우연?'

혼자 고민해 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몇 가지 추측을 마지막으로 벽화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루드는 산을 내려갔다.

* * *

마을엔 불안한 기류가 흘렀다.

상행단이 '그 산'에 있는 몬스터를 토벌하기 위해 떠난 게 벌써 3일 전이었건만,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라도 난 거 아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갔는데 설마 그렇겠어. 칼밥 먹은 용병들도 여럿이었다고."

"그래도 그렇지 벌써 삼 일이나 지났다고.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잖아? 혹시나 괜히 몬스터를 자극한 꼴이 됐으면 어떡해."

"불길한 소리 그만들 혀. 그 산이 어디 예사 산이여? 오래 걸릴 수도 있지. 걱정들 말고 자기 일들이나 잘 혀."

사람이 둘 이상 모이면 꼭 상행단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가 많아질수록 불안감도 덩달아 심해졌다.

"어이! 저기 누가 온다!"

"드디어 왔나 보네! 이제 됐네, 됐어!"

"근데 한 명밖에 없는데?"

"그게 뭔 소리여? 그 많던 사람은 어디 가고 하나밖에 없겠어. 그 뭐시냐 선발대겠지. 고생했으니까 빨리 식사며 쉴 자리며 준비하라고 보내는 거 말이여. 저번에 마을 올 때에도 그랬잖아."

"그런가?"

"그럼. 그렇고말고."

어느새 마을 입구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긴장 반 설렘 반으로 기다리던 사람들의 눈에 마을로 오는 이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그 녀석이잖아."

"왜 혼자 오는 거지?"

홀로 마을에 다가오는 이는 루드였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입구에 서 있던 칼럼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달려갔다.

"루드! 어떻게 된 일이냐. 산에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게냐?"

"일이 생기긴 했는데 걱정하시는 일은 아닐 거예요. 휴고님께서 전달해 달라신 말씀이 있어요."

"그게 뭐냐."

큼큼 목을 가다듬은 루드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몬스터는 성공적으로 토벌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몬스터와 관련해 조사할 게 생겼는데 여러 시일이 소요될 것 같다. 산과 마을을 오가며 조사하기엔 품이 너무 드니 식량과 부탁하는 물품들을 산까지 가져다주면 좋겠다. 값은 산을 내려와 치르겠다.

루드의 입에서 나온 휴고의 부탁.

실상은 강압에 가까운 말에 사람들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장 식량을 구하는 것도 문제지만."

"산까지 가져다 달라고?"

식량을 구하는 건 어려워도, 값을 쳐준다 하니 문제될 게 없었다. 오히려 큰돈을 만질 기회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걸 산까지 가져다달라는 것이었다.

'그 산'은 대대로 접근을 금해 온 산. 이름 붙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곳이었다.

"어떻게 할 건가, 칼럼."

시선이 모이자 칼럼은 입술을 지근 깨물었다.

상행단이 몬스터를 토벌하러 갈 때만 해도 역시 마을의 중심은 자네라 아첨하던 사람들이 이젠 추궁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떡하지....'

요구를 거절하는 건 하책이었다. 고블린이 아니라 상행단의 손에 마을이 쑥대밭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요구를 들어줄 수도 없었다. 힘겨루기의 문제가 아니라 가능과 불가능의 문제였다.

'식량과 물품을 준비해도 가져다줄 이들이 없으니.'

당장 자신만 해도 산 가까이는 가고 싶지 않았다. 조상대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거쳐 내려온 금기를 자신이 함부로 깨선 안 될 일이었다.

'역시 이상해. 어렴풋이 느꼈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산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다.'

반발심을 보이는 사람들과 고민하는 칼럼.

그 모습을 지켜보는 루드는 마을과 산 사이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확신했다.

"혹시 산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런가요?"

그쯤에서 루드는 사람들의 고심을 끝내고자 운을 뗐다.

"그럼 제 집에까지만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거기서부턴 제가 상행단 아저씨들이랑 같이 옮길게요."

"그게 정말이냐? 상행단 분들이 화내지 않을까?"

"휴고 아저씨가 제가 마을을 더 잘 알 테니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해도 된다 하셨어요. 그리고 산에서 식량을 다 들고 다닐 수도 없으니까 산에서 가까운 제 집에 놓고 필요한 만큼 옮겨 가면 될 것 같아요."

그 말에 사람들이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식량을 준비하마. 더 필요한 건 없다더냐?"

"일단 식량부터 준비해 달라고 하셨어요. 생각보다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져서 준비해 간 게 다 떨어졌다고."

모여 있던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흩어졌다.

'고새 상행단을 구워삶은 건가?'

칼럼은 휴고를 떠올렸다.

푸근한 인상이지만 실상은 냉정하고 이해득실에 민감한 상인. 그런 그에게 나름의 권한을 받고 이리 심부름까지 오다니, 새삼 루드가 다시 보였다.

한편으론 납득도 갔다. 마을에서야 모두 외면하지만 생김새도 곱상하고 말주변도 좋은 루드였다. 상행단의 사람들은 이민족이 익숙할 수도 있으니 예쁨을 받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 상품성을 봤으니 데려간 거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값을 좀 더 세게 불러 볼 걸 그랬나.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때였다.

문득 시선이 마주친 루드가 의뭉스런 표정으로 칼럼에게 물었다.

"근데 산에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요?"

"으응?"

"다들 꺼려 하는 것 같아서 일단 제 집까지만 옮겨 달라고 하긴 했는데 사실 이유 없이 제 집까지만 옮겼다간 저도 혼나거든요. 휴고 아저씨한테 사정을 잘 설명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모르겠어서요."

칼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을 오르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몇 번이고 산에 올랐으니 그것에 대해 알려 준다 해서 갑자기 산을 피할 것 같지도 않았다.

"아버지에게 듣지 못했나 보구나.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 때문에 그렇단다. 물론 이 아저씨는 하나도 신경 쓰지 않지. 그런 전설은 허황되기 마련이고, 아저씨는 깨어 있는 사람이거든! 하하!"

마을에는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위로 셀 수 없이 까마득한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다.

마을 바깥의 산에 괴물이 잠들어 있고, 절대 그것을 깨워선 안 된다는 이야기.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도 홀릴 수 있으니 다가설 생각조차 하지 말고 경계하란 내용이었다.

칼럼의 말을 전부 들은 루드는 생각에 잠겼다.

이야기 속의 산이 정말 평범했다면 정말 깡촌에나 있을 법한 전설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신비가 묻혀 있었다.'

하지만 신비가 묻혀 있던 것부터 이미 평범함을 벗어났다. 게다가 공동에 숨겨져 있던 벽화도 마음에 걸렸다.

전설에 대해 더 알아볼 필요성이 있었다.

본능이 무언가 더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전설이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건 아니라 하셨죠?"

"그래. 지금은 쓰지 않는 우물가에 전설에 관한 게 적혀 있지."

마을의 시작과 함께 했던 우물이랬다. 세월이 지나며 물이 마르고 마을의 모양이 조금씩 변한 까닭에 이젠 마을 외곽에 위치해 있다고 했다.

'가 봐야겠어.'

마음을 굳힌 루드가 우물을 향해 마을을 가로질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9화

우물은 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우물 곳곳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다.

흙먼지가 잔뜩 내려앉은 우물가를 쓸자 손가락에 거미줄이 걸려 나올 정도로.

우물은 어느 마을에나 하나씩 있는, 특별할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모양새였다. 바라보는 시선의 주인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말이다.

'그림?'

자세히 살펴야 간신히 보일 정도로 희미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한데 그 그림이 익숙했다.

'공동에서 본 그림과 같다.'

다만 그림체와 구성 방식이 똑같은 것과 달리 그림의 내용은 달랐다.

신비가 있던 비동의 그림은 일단의 무리가 커다란 무언가를 사냥하는 내용이었다.

반면 우물의 그림은 커다란 무언가가 여럿의 무리를 압도하는 반대의 내용이었다.

두 그림은 같은 이들로 추정되는 등장인물들이 나오지만,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림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루드는 우물의 그림을 머릿속에 담았다. 그림 근처의 기하학적 문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대어로 추측되는 이것들은 대도시의 고학자에게 가져가면 자세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곧 그림과 문자를 외운 루드가 허리를 폈다.

저릿-.

그와 동시에 경련이 찾아왔다. 누군가 우악스럽게 심장을 쥐고 쥐어짜는 느낌.

이전 삶, 숱하게 느꼈던 통증이었다.

'어째서 이 통증이?'

현재의 몸에선 통증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지난 삶, 일평생 루드를 괴롭혔던 이 족쇄는 곧 마주할 흑마법사, 요렌테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가? 아니. 그랬다면 진작 통증을 느꼈어야 한다.'

루드는 침착하게 관조했다.

"실제가 아니다."

그리고 곧 답을 내렸다.

그것의 부작용으로 인한 통증이었다면 지금 같이 사고하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이었으니.

무엇보다 몸이 얼어붙는 느낌도 없고 호흡도 금세 돌아왔으며 운신이 자유로웠다.

'환상통....'

참과 거짓. 두 개의 항목에서 하나의 항목이 사라졌으니 남은 건 가짜란 결론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또한 의문적인 건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환상통을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 회귀 이후 여태까지 느낀 적 없던 그 힘의 잔재가 지금 시점에서 느껴진 까닭은 무엇인가.

싸아아아-

우물을 짚은 손에 냉기가 느껴졌다. 단순히 우물의 찬 기운 때문이라 하기엔 너무 차갑고 음습한 기운을 품은 냉기였다.

'우물 아래에 무언가 있다.'

기운은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전해졌다.

아마도 우물의 안쪽. 루드는 우물 안으로 돌을 떨어트려 깊이를 쟀다.

후우우우웅-, 툭!

돌이 닿는 시간을 확인했을 때 깊이는 10m 정도인 것 같았다. 약간의 보조만 있다면 안에서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는 높이.

우물가 구석에 널브러진 밧줄로 우물의 주춧돌과 제 몸을 연결한 루드는 우물로 몸을 던졌다.

중간중간 우물의 벽을 긁으면서 속도를 조절하자 곧 우물 바닥에 도착했다.

"축축하군."

발을 딛자마자 느껴졌다. 마치 진흙처럼 물렁한 바닥은 발을 떼면 발자국이 새겨질 것 같았다.

'이상하군.'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우물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더 이상 물이 솟지 않기 때문일 터다. 그렇지 않고서야 귀한 수원지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폐쇄된 우물 바닥에선 습기가 느껴졌다.

단순히 기온 차이나 날씨로 인한 수준이 아니라 아래 수맥이 있다고 여겨질 정도의 축축함이었다.

'벽면은 별다른 건 없고.'

혹시나 우물 안쪽에도 벽화가 있을까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곳곳을 두드려본 결과 돌의 경도도 일반적이었고 안쪽에 빈 공간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이 우물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면, 그건 우물 밑바닥 아래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워낙 축축한 까닭에 바닥을 파내는 건 간단했다.

아니나 다를까, 손끝에 무언가 걸렸다.

혹여 파손될까 조심스레 주변을 파내는 정성 끝에 묻혀있던 걸 꺼낸 루드는 입술을 꾹 닫고 물건을 확인했다.

"...."

우물 밑에 묻혀 있던 건 수정이었다.

구슬을 연상시키는 구체 형태의 커다란 수정 내부에는 작은 보석 같은 게 있었다.

거친 단면과 뾰족한 모서리 가진 결정은 얼핏 보면 깨진 유리 파편 같기도 했다.

'이제야 알았네. 그때 마을에 피가 흘렀던 이유.'

근처에 날카로운 게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신체를 베이는 경우가 많다. 과거 마을 사람들이 죽은 것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지난 생. 고블린들의 침략에서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은 죽은 이들보다 더 끔찍한 지옥을 맛봐야 했다.

흑마법사 요렌테가 마을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요렌테가 어째서 이런 변방 마을을 찾았는지 의문이었는데, 그 의문이 이제야 해소됐다.

'흑음의 정수.'

결정의 정확한 이름은 몰랐다.

다만 루드는 이 결정을 흑음의 정수라 불렀다.

너무나도 어둡고 차가운 기운을 품고 있는 이 결정은 흡수한 이에게 강대한 힘을 선물했다.

지난 생에서 요렌테를 죽이고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요렌테가 실험의 목적으로 루드의 몸에 심었던 흑음의 정수 덕택이었다.

하나 흑음의 정수가 주는 것은 강대한 힘뿐만이 아니었다. 힘 이상으로 강력한 부작용도 함께 줬다.

힘을 사용할수록, 힘이 강해질수록 심장과 온몸이 얼어붙고 마력이 날뛰는 끝에 폭주하게 되는 부작용은 용사와 일기토를 하면서까지 빠르게 전쟁을 끝내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동시에 용사와의 결전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원인이기도 했고.

"...."

루드는 흑음의 정수를 담은 수정을 꽉 움켜쥐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상행단에 팔려 도시로 가던 길에서 마주한 흑마법사 요렌테. 상행단에 죽음을 흩뿌린 그는 자신에게 이유 모를 호기심을 느끼고 자비를 베풀었다.

'자비라니, 웃기는 소리지.'

그 뒤로 펼쳐진 것은 생지옥.

요렌테는 여느 흑마법사들이 그렇듯 미치광이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미친 주제에 학구열이 높다는 점이었는데, 루드에게는 그것이 더 고통이었다.

요렌테는 루드에게 온갖 실험을 했다.

수많은 독에 노출시키기도 했고, 타인의 원념을 주입하거나 본인의 원념을 추출하기도 했다.

아무 무력도 없는 상태에서 고블린 소굴을 뒤져 오란 명령도 있었다. 전생에서 듀얼을 얻게 된 비화였다.

흑음의 정수도 그러한 실험의 일환이었다.

흑음의 정수를 이리저리 분석하던 요렌테는 루드의 몸에 흑음의 정수를 이식했다. 정수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들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 뒤로는 실험과 기록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에서 루드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요렌테를 향한 원한과 언젠가는 탈출할 수 있을 거란 희망 때문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핵심은 듀얼."

전생에서 우연하게 듀얼을 얻지 못했다면 현재의 루드는 없었을 것이다.

요렌테의 실험체로서 삶을 마감하고 말았겠지. 듀얼이 가진 공능으로 흑음의 정수가 주는 힘을 숨길 수 있었기에, 그것이 언젠가는 요렌테를 찌를 비수가 될 것이라 확신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과거였다.

듀얼의 중요성은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이르게 얻게 됐지만."

흑음의 정수를 얻는 건 루드의 계획에 포함된 내용이었다. 요렌테를 죽이고 빼앗겠다는 계획이었는데, 지금 자신의 손에 요렌테가 입수하기 이전의 정수가 있었다.

흑음의 정수가 가진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뼈아팠다.

어떤 영약보다도 강대한 힘을 주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극악한 부작용을 안고 있는 까닭에 흑음의 정수를 포기할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흑음의 정수를 가져가는 것이었다.

부작용을 없앨 수 있다면, 하다못해 줄일 수만 있다 해도 목표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키가 바로 듀얼이었다.

'흑음의 정수로 얻는 모든 힘을 검은색 문의 방에 몰아넣는다.'

듀얼을 통해 내부를 백과 흑의 방으로 나눈 가장 큰 이유였다.

애초부터 흑음의 정수를 얻는 걸 생각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며 다른 이점들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내온 것이 지금 같은 듀얼의 사용법이었다.

흑음의 정수를 쓰면 쓸수록 부작용은 강해진다.

처음에는 그저 서늘하게 느껴지던 것이, 종래에 가선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강해지는 것이다.

과거에는 흑음의 정수로 마력을 각성했기에, 정수를 토대로 쌓아 올린 흑마력이 가진 마력의 전부였기에 부작용을 알면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부작용을 알고 있고, 최소화 할 방법도 생각해 놨다.

'어차피 이번 생의 주력은 흑마력이 아니다.'

흑마력과 흑마법은 특정적인 순간에만 사용할 계획이었다.

흑마법사란 신분과 이미지의 구축, 혹은 무조건 죽여야만 하는 난적을 만났을 때 숨겨 둔 한 수로서의 역할.

이번 생에 흑마력에 기대하는 건 딱 그 정도였다.

그 정도 사용 빈도라면 충분히 부작용을 억제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쌓기 어려운 흑마력을 순식간에 모으고 흑마법사로서의 경지 상승도 도모할 수 있으니 이문이 남는 장사였다.

쩌저적-!

수정에 커다란 금이 가더니 이내 큰 소리와 함께 수정이 깨졌다.

정수를 꺼낸 루드는 작게 심호흡 하고 그것을 삼켰다.

두근-! 두근-!

정수가 목을 타고 넘어가며 냉기가 느껴짐과 동시에, 열기가 내부에서 치솟아올랐다.

정수에서 비롯된 기운이 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가 아니다.'

제멋대로 날뛰는 기운을 관찰하던 루드가 녀석의 목줄을 움켜쥐었다.

천천히 다독여 말을 듣게 할 생각은 없었다. 주도권을 잡고 힘으로 찍어 누른다.

정수는 거세게 반항했다.

난생 처음 혼나는 아이처럼 마구잡이로 날뛰며 제 성질을 드러냈다.

그러나 루드는 이 정수의 기운을 제 의지대로 움직여본 경험이 숱했다.

폭주도 아니고, 그저 망아지처럼 날뛰는 기운을 억제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여기다. 여기가 네 집이다. 그만 반항하고 빨리 들어가.'

말로 해선 안 될 녀석.

강한 힘으로 거칠게 다루며 확실한 우위를 보여 줘야 했다.

이내 잠잠해진 정수의 힘은 루드의 인도를 따라 검은색 문의 방으로 들어갔다.

스으으으으으-

후우....

폐에서부터 나온 숨이 가늘고 길게 입을 빠져나왔다.

서서히 반개한 루드의 눈에 검은색 아지랑이가 피었다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이날.

루드는 흑마법을 되찾았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