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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50-60

50화

찌릿!

찌릿!

"…휘윤 씨!"

점점 심해지는 살의에 후다닥 뛰어 올라가기 무섭게 적잖게 긴장한 정유환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덩달아 고개를 돌리는 송주완 등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있다.

저기.

"키에에에에에엑!!"

선착장 한가운데에 서서 건널 판자가 걷어진 선복(船腹, 배의 중단 부분)을 노려보며 세상을 향해 분노를 토해 내고 있는 괴물.

전장 전체를 짓누르는 압박감을 가진 추살자 레드 구울(Red Ghoul) 때문이었다.

과거 폐허에서 처치했던 덜 숙성된 개체보다 족히 몇 배는 진한 진홍색 피부에 흰자위 없이 공허와도 같은 검은 빛으로만 채색된 안구.

무엇보다.

사아아아아아아아―

전신을 휘감고서 일렁거리는 사기(死氣)는 굳이 붙어 보지 않아도 놈의 위험성을 여실히 표출하고 있었다.

'듀라한보다, 강하다.'

나는 놈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단일 전투력만 놓고 따진다면 못해도 한 수, 많게는 두 수 이상의 격차가 있을 거라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듀라한은 지휘관 역할군의 기사였고, 레드 구울은 추살자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오로지 적을 쫓아가 물어뜯는 데 특화된 사냥개였으니까.

추가로 지능도 나쁘지 않았다.

통상적인 좀비나 구울이라면 물이고 뭐고 인간을 발견한 즉시 뛰어 들어 배에 달라 붙었을 터인데, 레드 구울의 영행력인지 놈들은 딱 부두 끄트머리에서 그르렁 울어대기만 할 뿐, 더 이상 달려들 기미가 없는 걸 보면 최소한 '선'의 개념은 아는 듯하다.

"최대한 다 꺼내 놓아야겠네."

거기까지 관찰을 마친 나는 여태껏 등에 메고 있던 짐 가방을 풀어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2차 진화체와의 혈전을 앞뒀다면 움직임을 방해하는 건 모두 치워야 한다. 고로 검대와 인지력 증강용 '비트는 콜루베루의 한 손 검' 외에 싹 다 벗어던지며 한결 홀가분하게 육신을 바로 한 뒤.

"하나씩 처리하시죠."

"예?"

여태껏 얼어 있던 일행을 데리고 레드 구울이 잘 보이는 선박 가장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이에 2차 진화체의 위압감을 처음 체감해 본 정유환 등이 몹시 당황한 음성으로 반문했으나.

나는 시종일관 차분한 스탠스를 취하며 그들에게 현 상황에 대하여, 더불어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저희가 배를 점령한 이유가 뭡니까? 쉬고 싶을 때 쉬고, 싸우고 싶을 때 싸울 수 있는 요새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닙니까?"

"마, 맞긴 합니다만…."

"덕분에, 보시는 대로 저놈들은 일종의 해자가 된 강물을 넘지 못하고 그저 멀뚱멀뚱하게 이쪽을 응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낚싯대를 던져 보자고요. "

어부님들.

던지는 족족 월척일 테니.

* * *

슈우우우우욱―

콰직!

바람을 가르며 쏘아진 화살 한 대가 좀비의 머리통을 꿰뜛는다.

빈자리는 금세 새로운 좀비가, 새로운 구울이 채워 갔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다른 점이 있기는 했다.

"흐읏, 차!"

후우우우웅―

쾅!

새롭게 나타난 개체의 대가리 위로는 화살 대신 웬만한 성인 남성 팔뚝 굵기의 목창이 날아들었으니 말이다.

가끔은 공성전의 충차를 연상케 하듯 팔뚝이 아니라 몸통 굵기의 통나무, 천 자락이 모두 제거된 돛 기둥이 포탄처럼 떨어져 일대를 휩쓸기도 했다.

그렇다.

우린 지금.

"또 하나 완성입니다!"

"태성 씨! 좀만 더 빨리!"

배의 모든 구조물을 무기화하는 중이었다.

더는 운행할 일이 없는 선박.

억울하게 눈을 감은 고인 되신 분들께는 미안하지만, 해양 쓰레기가 될 바에야 이런 식으로라도 활용되는 게 이 배에는 훨씬 나은 결말이었―

"키에에에엑!!"

"조심!"

후화아악!

콰앙!

"꺄아아악!"

"유림아!"

갑판을 뜯어내던 찰나, 불현듯 솟구친 감각의 파동에 무의식적으로 바닥을 박차고 도약해 정유림을 끌어안고 옆으로 굴렀다.

연달아 난무하는 폭음과 비명.

소음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리니 익숙한 물체가 갑판 외벽에 틀어박힌 채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검붉은 핏물이 잔뜩 밴 '목창'이었다.

"목창, 이라고?"

"말도 안 돼!"

우리가 던졌던 게 되돌아온 것이다.

그 말인즉.

지성이 존재하지 않는 언데드 놈들이 목창이라는 '도구'를 사용했다는 의미였다. 이 경악스러운 사실에 누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정유환 등이 아는 언데드란 손발톱에 이빨이 고작인 맹수 정도의 생물. 그런 본능에 충실한 개체가 하루아침에 도구를 이용했으니 당혹스러울 만도 하지.

그렇지만 나는 분명 이야기했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2차 진화체부터는 무기를 다룬다고."

듀라한에겐 대검과 두퇴라는 무구가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

듀라한급쯤 되면 기본적으로 초등학생과 동등한 지능을 갖추고 있단 얘기였다. 아마 이건 상위 개체로 성장할수록 더욱 발전해 향후에는 성인과도 대등한… 어쩌면 인간을 가지고 노는 수준의 책략을 구사하게 될지도 몰랐다.

"저기, 그...."

"아,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혹시 또 날아올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죠."

"네...."

정유환 등에게 충고를 남기며 밑에 깔려 있던 정유림을 일으켜 주었다. 그녀는 창졸지간에 벌어진 습격에 많이 놀랐는지 호흡이 가팔라진 상태였다.

그나마 눈동자가 또렷한 것으로 보아 겁을 먹지는 않은 듯했다.

다행이었다.

이런 소소한 사건 따위로 도로 생존주의자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됐는데.

'그나저나.'

"키에에에에에엑!!"

후우우욱―

콰아앙!

쾅!

슬슬 투척 작전을 접어야 할 성싶었다.

거진 10여 분간 꽤나 쏠쏠하게 재미를 봤으나, 더 했다가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배가 박살 날 처지라.

스릉―

"유환 씨. 이것 좀 해주셨으면 하는데, 어떠신지요."

나지막하게 정유환을 부른 나는 그에게 이제부터는 나가서 싸워 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며 한 가지를 요청했고, 급작스런 내 요구에 잠시 고심하던 정유환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칼을 쥐고 일어섰다.

옆에서 대화 내용을 들은 송주완과 강태성이 사뭇 불안한 눈빛을 보였으나, 그럼에도 정유환은 단호하게 나를 돕기로 결단을 내렸고.

촤르르르르르륵―

올려 두었던 건널 판자가 풀려나가는 도르래에 맞춰 선착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 * *

"…키에에에에엑!!"

가진 무력에도 불구하고 세차게 몰아치는 강물로 인해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그저 인간들이 내던진 나뭇가지나 주워 반격해야 했던 레드 구울의 목구멍에서 승리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인간 놈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마련됐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공고하게 닫아 두었던 길목이 개방되었는지 그 내막은 알 수 없다. 아니,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길이 생겼다는 게 중요했다.

게다가.

"하아!"

무슨 일인지 꼭꼭 숨어만 있던 인간 놈들 중 하나가 배짱도 좋게 감히 자신을 상대로 칼을 들고 달려 나오고 있었다.

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른 건장한 수컷.

넘실거리는 생명력의 향기만 맡아도 침샘이 폭발할 듯 꿀렁거리게 만드는 먹잇감의 등장에 레드 구울은 이것저것 다 제쳐 두고 10cm에 달하는 손톱을 쭉 뽑았다.

단 일격에 먹잇감의 심장을 도려내고 흘러나오는 피와 죽음을 마시리라.

그 즐거운 상상과 함께 마침내 인간 수컷의 몸뚱어리가 코앞으로 다가온 순간.

"키에에에엑!!"

타닷―

쿠우웅!

레드 구울은 하늘로 뛰어올랐다. 강물? 다른 인간 놈들의 공격? 그런 건 이미 잊혀진 지 오래였다.

오직 먹잇감.

먹잇감만이 눈에 들어올 따름―

"지금!"

"흐으읍!"

"키에에에에엑?!"

투웅!

슈우우우욱―

이었는데, 날카롭게 벼려진 손톱이 먹잇감의 가슴팍에 틀어박히기 직전에 코앞까지 인접했던 먹잇감의 육체가 공중에서 갑작스럽게 멀어져 버렸다.

레드 구울은 이게 너무나도 의아했다.

날개도 없는 인간이 공중을 날다니? 하늘은 새만 나는 거 아니었나? 그러한 의문에 물음표를 띄우던 차에 수컷의 허리춤에서 뭔가 팽팽해지는 게 보였다.

줄.

기다란 밧줄이었다.

"키에에에엑?"

인간에게도 꼬리가 있던가?

레드 구울은 밧줄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그게.

"집중. 후."

끼이이이익―

투우웅―

...콰아아앙!!

"키에에에엑!"

레드 구울이 남긴 마지막 혼잣말이었다.

* * *

정유환을 미끼로 던진다.

미끼에 홀린 레드 구울이 앞뒤 분간 못 하고 날아올랐을 때, 허리에 묶어 둔 밧줄로 정유환은 안전하게 뒤로 보낸 후 사각을 노려 정유림이 스킬을 한 대 먹인다.

슈우우욱―

쾅!

나는 화살의 위력을 아득히 벗어난 정유림의 일격을 구경하며 대레드 구울 공략법이 통했음을 깨닫고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어설픈 지능과 변함없이 이성보단 본능에 충실한 특성을 기반으로 한 전략의 성공도 성공이었지만, 정유환 등의 도움 덕택에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으로 남들이 노력해 HP가 떨어진 보스 몬스터를 꿀꺽할 찬스가 생긴 까닭이었다.

물론 보스 몬스터는 보스 몬스터. 피가 깎였다고 만만하게 봤다간 목덜미를 물어뜯길 터였다.

따라서.

우우우우우우웅!!

"가자!"

초전부터 전력을 다해야 했다.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휘우우욱―

콰과과과광!!

정유림의 화살에 맞고 선착장 대로변에 처박히던 레드 구울의 몸뚱이 위로 낙뢰가 내리쳤다. 그 이름대로 번쩍거리는 섬광에 눈이 아플 지경.

하나 '죽었나?' 따위의 진부한 대사는 집어치우고 죽어라 벼락을 소환했다.

"흐읍―"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차아아!"

파지지직―

콰아앙!

콰앙!

정면에서 섬광(閃光)에 두들겨 맞고도 멀쩡했던 듀라한.

이놈 역시 안 그러리라는 법이 없으니, 방심과 안심은 금물이었고.

"…키에에에에엑!!"

"이거 봐."

타닷―

쉬우우욱!

그 예측이 들어 맞았음을 방증하듯 연이은 뇌류에 휩싸여 불타오르면서도 발버둥 치며 손톱을 휘두르는 놈.

하지만 칼날 못지않던 손톱은 끝끝내 나를 맞추지 못했다.

'인지력 7퍼센트가 확실히 차이가 있네.'

한층 강화된 감각이 놈의 공세를 정확하게 캐치해 냈으니까.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고생을 했겠지만, 삐꾸가 돼버린 작금의 괴물은 결코 날 어찌할 수 없었다.

이윽고.

"키에에에에에엑!!"

"잘 가라."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파직―

꽈르르르르릉!!

네 번째 뇌격이 놈의 몸통을 불살랐다.

* * *

"저는 이쪽을 돌아보겠습니다."

"전 여길 가보겠습니다!"

붉은 노을이 저물어 가는 저녁,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위데오 마을 수색에 돌입했다.

남은 적이라곤 선착장에 묶어둔 좀비 한 마리가 끝이라 현관을 열어젖히는 손길이 거침없었다.

"미니맵이… 아 여기네."

그렇게 모두가 떠난 사이 나도 선착장 끝자락에 정박된 선박으로 향했다.

[द्रुततमः प्रकाशः]

변함없이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새겨진 흰색과 푸른색의 배는 각종 피와 살점으로 덕지덕지 도배되어 과거 격렬했던 재앙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 흉물스런 갑판을 걸으며 핸드폰 화면을 살펴보던 나는 미니맵의 안내에 따라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터덜터덜, 지도와 현실을 비교하며 거닐던 눈앞에 곧 등장한 커다란 방.

끼이이이익―

삐걱대는 문을 열며 안으로 진입하자 관리가 안 돼 쌓인 먼지로 퀴퀴한 냄새가 나를 반겼다.

허나.

나는 코를 찌르는 악취에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मम नाम चरिस् फोर्टन् इति, सः कलियास् चर्चस्य अनेकदूतेषु अन्यतमः अस्ति । यद्यपि सः केवलं असफलः अस्ति यः महाद्वीपस्य पूर्वान्तं प्राप्तुं स्वस्य कार्यं सम्यक् सम्पन्नं कर्तुं असफलः अभवत् तथापि एषा अपि कालियासस्य इच्छा अस्ति, यदि कोऽपि अस्ति यः एतत् अनुरोधं प्राप्नोति तर्हि ईश्वरस्य स्पर्शः एव भविष्यति। आशासे यत् एषः सम्बन्धः महाद्वीपस्य हिताय प्रयुक्तः भविष्यति।]

벽 전체에 휘갈겨 쓴 붉은 글씨 밑 책상에 올려놓은 편지 봉투를 발견한 직후.

띠링!

['교단의 의뢰서'를 발견했습니다.]

[축하합니다!]

[기나긴 칼리야스 대륙의 역사를 뒤흔들 위업의 출발점,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의 단초를 찾아냈습니다.]

[단, 그 길은 너무나도 지난하고 험난하여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는 걸을 수 없으리니…. 가까운 수도원에서 〈서브 퀘스트: 소집령〉에 필요한 자격 검증을 진행해 보십시오.]

"에픽, 퀘스트?"

전례 없던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51화

[ 에픽 퀘스트 ]

메인 퀘스트와 서브 퀘스트.

튜토리얼을 클리어한 이후로 짧으면 사나흘, 길어도 일주일간 계속되는 투쟁과 귀환에 생환자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이 지옥 같은 삶을 견뎌야 하는 걸까?

그러나 돌아오는 응답은 없었다.

지원 요청이라는 명목하에 생환자들을 납치해 가듯 끌고 온 퀘스트는 할당량을 채우는 즉시 몇 가지 보상을 끝으로 입을 싹 닫아 버렸고, 생환자들은 이에 불만과 분노를 표하면서도 결국 주어진 현실에 만족한 채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갑갑한 심정을 달래 보겠다고 울분을 터트려 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랬는데.

['교단의 의뢰서'를 발견했습니다.]

[축하합니다!]

[기나긴 칼리야스 대륙의 역사를 뒤흔들 위업의 출발점,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의 단초를 찾아냈습니다.]

[단, 그 길은 너무나도 지난하고 험난하여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는 걸을 수 없습니다.]

[가까운 수도원에서 〈서브 퀘스트: 소집령〉에 필요한 자격 검증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에픽, 퀘스트?"

태양마저 비추지 않아 심연 속 무저갱 같던 통로에 처음으로 빛이 나타났다. 설령 아주 작고 희미한 반딧불에 불과할지언정 그 크기와 세기는 일절 상관없었다.

희망.

희망이 피어났다는 것 그 자체가 포인트였다.

"에픽 퀘스트...."

나는 그 스타트가 될 단어를 몇 번이고 곱씹으며 핸드폰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부터 〈서브 퀘스트: 소집령〉에 필요한 자격 검증을 실시합니다.]

〈서브 퀘스트: 소집령〉

*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탐욕과 오만에 찌들어 버린 인간을 향한 신의 진노인가, 그저 인간을 한낱 장난감으로 취급하는 악마의 농간인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대륙 전체를 죽음으로 물들여 버린 이 검은 파도의 정체는 무엇이며 또 목적은 무엇인가.

모른다.

이미 재앙에 짓눌려 버린 지금까지도 우리는 단 하나의 진실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하여, 더는 진실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미처 피어나지도 못한, 이대로 바스러져선 안 될 무수히 많은 생명들을 위하여 해야 할 것은 의문의 해결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일지니.

우리는 마지막 방법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희생(犧牲).

성자의 목숨을 내어놓기로.

기일은 금일로부터 1년 뒤, 성자의 수행이 끝나고 그가 총단으로 귀환하는 날. 가장 강렬한 빛을 통해 「방주」를 구축하려 한다.

하나, 이 대업은 결코 우리만의 힘으로 할 수 없으니.

대륙의 모든 뜻있는 자들에게 부탁하오니, 부디 우리를 도와 절망 앞에 놓인 미약한 생명들을 구하는 데 도움을 주길 바란다.

물론 무조건적인 원조를 얘기하지는 않겠다.

이는 정당한 의뢰.

누구든 우리를 돕는 만큼 교단의 재화를 가져갈 것이다.

전설상의 명검, 대마법도 뚫지 못하는 갑주, 태초의 자연을 담은 마력석과 속성석 등....

수백, 수천 년간 잠들어 있던 보물들을 남김없이 풀겠다.

어떤가?

그대들의 가슴을 움직이기에는 충분한 보상인가?

만일 마음이 동한다면 이 의뢰서를 지니고 근처 어떤 수도원으로든 찾아와 주길 바란다. 그곳에서 당신에게 합당한 의뢰를 할 터이니.

(0/1)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 달성 시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이 진행됩니다.

[〈서브 퀘스트: 소집령〉의 진행을 위해 미니맵이 활성화됩니다.]

[해당 퀘스트와 관련된 '가장 가까운 수도원'의 위치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이에 따라 메인 퀘스트 완료 후에도 〈서브 퀘스트: 소집령〉의 진행을 위해 귀환이 보류되며, 지원자의 판단에 의거하여 '귀환' 및 '계속 진행'이 결정됩니다.]

"소집령, 가장 가까운 수도원으로 가라. 이 의뢰서를 가져가면 된다는 거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고 진지하게 문장 한 줄, 한 줄을 정독한 나는 떨리는 손으로 '의뢰서'를 쥐어 보았다.

모서리에 묻은 약간의 붉은 색 액체를 제외한다면 대체적으로 깨끗한 외관.

언뜻 하기엔 평범한 종이처럼 보이나.

〈교단의 의뢰서/Normal〉

실제로는 시스템의 영향권 내에 있는 '아이템' 취급을 받는 녀석이었다. 필시 그 원인은 옵션에 있지 않나 싶었다.

〈교단의 의뢰서/Normal〉

* 전 대륙민을 대상으로 칼리야스 교단에서 발행된 의뢰서. 가까운 수도원으로 가져갈 시 '자격'에 따른 의뢰를 수임받을 수 있다.

* '자격'에 따른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 습득

* * *

['붉은 단검'을 발견했습니다.]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복수와 평안〉에 〈서브 퀘스트: 피눈물로 새긴 원한〉이 추가됩니다.]

〈서브 퀘스트: 피눈물로 새긴 원한〉

* 밀레스 제국 아라티오 자작령 내에 세워진 항구 마을 위데오(vírĕo)의 당대 촌장 아가스트 레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생각했다.

귀족이라는 계급, 평민이라는 계급.

이 빌어먹을 신분으로 인해 마을이 송두리째 짓밟히는 걸 보면서도 촌장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의 멍청함을.

그저 똑같은 인간일 뿐인데.

아아, 비통하고도 원통하도다. 신이시여, 정말 그대가 있고 교단 사제들의 말처럼 우리를 굽어살피는 분이시라면 내 영혼을 바쳐서라도 기원하노니.

"나의 영혼은 아스트록(astrúc)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좋습니다. 그저, 놈의 심장에 칼날을 박아 넣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0/1)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의 핵심은 이 '붉은 단검'입니다.

* 특이 사항 2: '아라타오 자작자의 망나니: 카인델 드 아라티오'의 심장을 붉은 단검으로 찌른 후 사지 육신을 분리에 위데오 마을 곳곳에 흩뿌려 주십시오.

[미니맵이 활성화됩니다.]

['아라티오 자작가의 망나니: 카인델 드 아라티오'의 위치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혹시 구겨져서 문제가 생길까 의뢰서를 조심스럽게 접어 품 안에 넣은 뒤 수색에 나섰던 나는 유난히 핏질이 심각한 이름 모를 선박 내에서 또 다른 서브 퀘스트를 획득했다.

"오체분시를 해달라? 꽤나 잔혹한 퀘스트네."

신성하기까지 했던 앞선 퀘스트와 달리 이쪽은 과정 없이 문자 그대로 갈가리 찢어발겨야 하는 무척이나 독한 임무였다.

멘탈이 약한 이는 시도하는 데만도 토악질을 하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멘탈이 약했다면 아예 튜토리얼도 못 버텼으려나."

시답잖은 소리를 나불거리며 타깃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래저래 필요한 것은 다 찾았으니.

"이쪽은 아무도 안 갔던가?"

나도 파밍 전선에 뛰어들 시간이었다.

겸가겸사 퀘스트도 클리어하고.

* * *

번쩍―

번쩍―

"음?"

석양의 자리를 달이 채웠고, 다시금 달의 자리를 여명이 채워 갈 무렵.

한창 누군가의 터전이었을 주택 내부를 거닐던 차에 창밖이 환해진다 싶더니 공중으로 녹색 구슬이 치솟았다.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흰색, 검은색.

도합 다섯 가지 색깔로 구별해 둔 원거리 통신용 신호탄이었다.

빨강은 위험 및 지원을, 파랑은 안전함을, 흰색은 동의와 자기 위치 표시를, 검은색은 지연 및 거절을.

그리고 초록은.

"저게 아마 집합이었지?"

일반적으로 단체 활동을 지향하는 생환자들 사이에서 빠르게 소통하기 위해 정해 놓은 법칙이라는데, 아무튼 슬슬 뒤질 만한 부근은 다 뒤진 모양이었다.

하기야 사바나 초원의 하이에나 떼마냥 밤이 새도록 멀쩡한 집이라면 빠지지 않고 들락날락거렸으니, 위데오 마을이 제아무리 넓다 해도 남아나질 않았을 터.

펑!

펑!

구역을 나눠 제각기 동서남으로 갈라졌던 지역에서 흰색 신호탄이 솟아오르는 걸로 보아 틀림없었다.

"흐음, 나도 슬 돌아갈까?"

위데오 마을의 동쪽 구역을 뒤적거리던 나는 잠깐 허리를 펴 주변을 둘러보다 가방에서 흰색 신호탄을 꺼내 불을 붙이곤 선착장으로 발을 내디뎠다.

건진 게 거의 없어서 돌아가는 내내 입맛이 좀 썼다.

폐허 퀘스트 당시에는 듀라한을 벰과 동시에 전송이 돼버렸고, 레그나토르 성에서도 '비트는 콜루베루의 한 손 검'을 겨우 건졌던 터라 이번에야말로 한몫 단단히 잡으리라 고대하고 있었는데, 멀쩡한 물건이 이게 전부라니.

〈붉은 단검/Normal〉

* 소량의 적철석이 더해져 붉은 빛깔을 띠는 단검. 적당히 날카로워 짐승의 가죽도 무리 없이 베어 낼 수 있다.

* 찌르기 공격 시 추가 피해량 +5%

"찌르기 추가타라. 씁. 꽝이네, 꽝이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던가?

공짜 밥이 없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딱 그 말 대로였다.

"…설마 저쪽에서 다 털어 갔나?"

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서브 퀘스트 공유 건이 그러했듯 임무 외 보상은 각자가 알아서 처리하기로 사전에 약속을 해뒀기에 다들 눈이 벌게져서 돌아다녔기 때문이었다.

혹여라도 그런 거라면 감수해야지.

대신 나는 '에픽 퀘스트'라는 무지막지한 보상을 얻은 데다가.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피눈물로 새긴 원한〉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적당한 경험치' 및 '잘 잊는 힙푸리스의 영혼석'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여기서 영혼석이 뜰 줄이야."

예상에도 없던 영혼석을 구했으니까.

더군다나 정유환 등에게는 입을 싹 닦았으나, 나는 메인 퀘스트급의 추가 보상도 따 놓은 실정이었다.

그 이름하여.

[피와 죽음을 쫓는 추살자, '레드 구울(Red Ghoul)'을 처치했습니다.]

[축하합니다!]

[〈100인 한정 업적: 최초의 레드 구울 사냥꾼〉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상당한 경험치' 및 '기술 서적: 조합', '마력 전이석: 중형', '기술 임의 습득권: 레드 구울'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이야, 암만 봐도 아름답다, 아름다워."

구울과 듀라한에 이은 세 번째 100인 한정 업적!

실상 이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주어진 지형과 레드 구울의 부족한 지능을 적절히 역이용해 손쉽게 사냥하긴 했지만, 앞으로는 도로 나 혼자 감당하게 될 적들이라 다 놓치더라도 스킬북과 마력 전이석만큼은 반드시 건져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휘윤 씨! 여깁니다!"

"아, 벌써 다 모여계셨네요."

"하하 저희도 방금 막 왔습니다. 그나저나 괜찮은 아이템 좀 찾으셨습니까? 이거 운이 좋았는지 저희 쪽은 나름 성과가 있었습니다. 하하하!"

"어쩐지, 제가 갔던 곳은 텅 비어 있더군요. 행운의 여신이 유환 씨에게 갔나 봅니다."

"그런가요? 하하. 하여간, 주완 씨와 태성 씨도 오셨으니 이만 퀘스트를 종료할까 하는데 다들 어떠십니까?"

제일 늦게 도착한 나를 끝으로 파티원이 전원 집결하자 정유환이 퀘스트 종료 의사를 내비쳤다.

마땅히 거절하는 이는 없었다.

레드 구울을 처리한 이후 저마다 공적치를 수급하려 몇 시간이고 언데드 사냥을 나선 데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잠도 못 자고 파밍을 다녔으니 무진장 피곤할 거다.

"좋습니다. 다들 동의하시는 듯하니 그럼 이것으로 저희의 첫 번째 파티 퀘스트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유환은 무언의 긍정을 표한 우리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쳐다보며 일일이 고개를 숙이고는 방긋 웃으며 여태껏 선착장 대로에 구속되어 있던 좀비의 목을 쳤다.

띠링!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복수와 평안〉의 과제를 완료하셨습니다.]

[당신의 활약도를 종합하여 보상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52화

후우우우욱―

쾅!

"오, 괜찮은데?"

가볍게 내민 주먹에 아름드리나무가 흔들리며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심지어 나뭇등걸은 철퇴에 맞은 양 박살 나 움푹 파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기는커녕 빨갛게 변색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 손.

무기를 비롯해 방어구와 장신구 등 장비를 모조리 해제한 채 순전히 육체 능력만으로 주위 널려 있는 나무들을 상대로 주먹질부터 발길질에 어깨치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몸을 부딪쳐 본 나는 금세 흡족하게 웃었다.

새로 얻은 패시브 스킬의 효과가 무척이나 좋았기 때문이었다.

〈추살자의 강화된 육신/Passive〉

* 현시점의 당신의 육체를 한 번 지정한 대상을 끝까지 따라 사냥하는 추살자(椎殺者)의 육신으로 탈바꿈시킵니다.

* 육체 최적화

육체 최적화.

무협 식으로 표현한다면 대충 환골탈태(換骨奪胎)가 되지 않을까 싶어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인데, 그 예측이 보기 좋게 들어맞은 거 같아 기분이 퍽 좋았다.

〈기술 임의 습득권: 레드 구울/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레드 구울이 지닌 기술 중 한 가지 획득

* 목록: 추살자의 강화된 육신(상세 보기▼)/오오라_추살자의 원념(상세 보기▼)/사후경직(상세 보기▼)

└추살자의 강화된 육신(P): 추살자의 어울리는 육체로 거듭난다.

└오오라_추살자의 원념(A): 상시로 마력을 퍼트려 은신 및 특수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은 '적'이 일정 범위 내로 진입 시 위치를 특정한다.

└사후경직(P): 죽음 판정이 내려진 직후에도 공격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화면을 봤을 때만 하더라도 듀라한의 고유 스킬이었던 '오오라: 검은 망령의 파문'처럼 레드 구울의 전용 오오라인 '추살자의 원념' 또한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와 '추살자의 강화된 육신'을 택하면서도 적잖게 미련이 남았었다.

만약 '추살자의 원념'이 마력 소모가 없는 패시브 스킬이거나 내가 제어할 수 있는 형식이었다면 아직도 결정 장애가 와서 손가락만 까딱거리고 있었을 거다.

적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데 엄청난 영향을 끼치니 말이다.

하여간에 마력이 웬수였다. 이그니스(ignis) 류(流)고 파스마(phasma) 류(流)고 명검보도를 차고 있어도 뭐만 하면 MP가 오링나 버리니 쓸 수가―

띠링!

"음?"

머릿속으로 레드 구울의 스킬들을 떠올리던 나는 난데없는 알림음에 서둘러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입금 알림]

[대한은행 : 1,300,000,000 입금, 입금자 정유환]

[현재 계좌 내 잔액 : 5,721,672,953]

혹시 귀환 이틀 만에 또 새로운 퀘스트인가 했더니만, 다행히 금융사에서 온 입금 안내 문자였다.

어제 정유환과 헤어지면서 내게는 쓸모없는 아이템들을 판매하고 벌어들인 수익으로, 하나는 노말 등급일지언정 옵션은 절대 나쁘지 않은 '붉은 단검'이 3억이었고.

"신발 가격이 쏠쏠하네?"

나머지 하나는 〈메인 퀘스트: 복수와 평안〉의 보상으로 주어진 방어구 '도약하는 라나의 가죽 신발'의 매각 대금이었다.

참고로 요번 〈메인 퀘스트: 복수와 평안〉의 보상은 총 네 가지.

〈도약하는 라나의 가죽 신발/Magic〉

* 무두질이 잘 된 가죽을 토대로 제작된 가죽 신발. 어디 한 군데 모난 구석 없이 깔끔하고 실용적으로 완성되었으며, 무엇보다 한 걸음으로 동산을 뛰어넘는다던 '도약하는 라나의 영혼석'을 장착하여 특히 이동과 관련된 부분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 상시 이동 속도 +15%/최대 도약력 10%/착용 시 속력 최대치 7% 향상.

이미 '질긴 라우타우루스의 가죽 방어구' 세트를 착용 중이기에 구태여 세트 보정을 깨뜨릴 게 아니라면 가지고 있어 봐야 애물단지밖에 안 되는 신발과 오랜만이라 반갑기까지 한 속령 증강용 영혼석 두 개에 소형 마력 전이석으로 죄다 이동에 치중된 걸 보면 구름다리 지형을 돌파하던 장면과 배를 탈취하려 움직이던 장면을 핵심으로 두고 보상안이 구성된 듯했다.

이만하면 파스마(phasma) 류(流)의 다른 조각이나 그쪽 계열의 S 랭크 스킬이 뜰 수도 있겠다고 여겼던 탓에 조금 아쉽긴 했으나, 다른 스탯에 비해 다소 부족했던 '속력'을 집중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영혼석이 두 개나 나왔다는 점에서 뭐 100점 만점에 80점은 될 법한 구성이었다.

"그나저나 57억이라.... 그새 또 훌쩍 뛰었네."

한동안 상념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린 나는 며칠 전보다 거의 30% 가까이 증가한 통장 잔고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질린 말투로 중얼거렸다.

하도 확확 돈이 불어나니까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 영 현실감이 없다.

때문에 몇 번이고 길게 늘어진 숫자들을 읽다가 문자 탭으로 들어가 정유환에게 몇 줄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내용인즉.

[오휘윤입니다. 전에는 잘 들어가셨나 모르겠습니다. 하하, 그건 그렇고 아이템 추가 매수 의뢰를 할까 하여 이리 연락드립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마력 증강 장신구나 전이석 등의 매입은 그대로 진행해 주시되 추가로 영혼석이 풀리면 가능한 한 전부 구입해 주셨으면 합니다.]

[옵션은 상관없습니다.]

[육체 계열, 정신 계열, 기타 계열.]

[뭐든 가격만 맞는다면 모두 구매할 계획이니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영혼석 구입 대행 의뢰였다.

여기서의 중점은 '모든' 영혼석이라는 것.

여느 생환자에게나 기피 대상이 될 게 뻔한 '소화력'이나 진짜 이건 왜 있나 의아한 '번시력' 같은 영혼석이라도 빠트리지 말고 싹 다 긁어모아 달라고 주문을 넣었다.

정유환의 입장에선 이놈이 대체 왜 이러나 의심스럽겠지만… 아니, 그 작자라면 '또 내가 모르는 뭔가 있군'이라고 바로 확신하려나?

여하간 내게는 더 이상 영혼석 종류에 대한 제한이 사라진 까닭이었다.

〈기술 서적: 조합/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기술 '조합' 습득

└조합: 여러 개의 영혼석을 합쳐 새로운 영혼석으로 변환한다. 조합되는 영혼석의 개수는 아래와 같다.

└조합 방식: 1. 영혼석을 두 개 조합할 경우 전체 카테고리에서 무작위 변환 / 2. 영혼석을 세 개 조합할 경우 첫 번째 슬롯으로 선택된 영혼석과 동일한 계열의 영혼석으로 하위 카테고리가 고정된 상태에서 무작위 변환/ 3. 영혼석을 네 개 조합할 경우 원하는 영혼석으로 지정 변환

'장착'에 이은 두 번째 특수 기능 '조합'을 얻은 덕분이었다.

조합식만 보면 돈 잡아먹는 하마가 따로 없구나 싶지만, 그래도 투자를 해서 내가 원하는 결과물을 받아 볼 수 있다는 부분은 충분히 메리트가 있었다. 당장이야 퀘스트 초장기니 영혼석 매물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어도 시간이 흐르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올 테니까.

그즈음 되면 내 통장도 마르지 않는 셈이 되어 있을 거고.

음.

띠링!

[정유화: 전국, 아니 전 세계를 수소문해서라도 최대한 빠르게 구해다 드리지요. 하하!]

[정유환: 참! 2~3일 후면 무술 사범님들을 만나 보실 수 있을 듯합니다. 현재까지 총 다섯 분께서 수락하셨고, 두 분은 긍정적으로 보고 계십니다. 모두 국내외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자분들이시니 만나 보신다면 휘윤 씨도 만족하실 겁니다. 하하하!]]

대표 이사라는 양반이 업무는 안 보고 내 전화만 기다리고 있는지, 전송 버튼을 누르고 채 10분도 되지 않아 돌아온 답장에 피식한 나는 고맙다는 말을 적고는 홀가분한 차림으로 간만에 인망산에 올랐다.

"스콰."

"푸르릉."

"가보자, 쭉 달려 보는 거야."

오늘은 산속에서의 승마 수련이었다.

"이랴!"

"히이이이잉!!"

* * *

사흘 뒤 이른 아침.

나는 정유환이 보내준 김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도심을 벗어나 외곽 산자락에 마련된 그의 별장으로 향했다.

한눈에 봐도 재벌 가의 소유임을 알 수 있는 큼지막한 크기의 저택은 족히 4~5m 높이의 담벼락에 감싸여 있었는데, 튼튼해 보이는 철문을 넘어 안쪽으로 진입하니 편한 차림의 정유환이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휘윤 씨! 여깁니다. 하하!"

"최근 들어 계속 뵙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마치고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펼쳐지는 고풍스러운 배경.

중세 유럽의 귀족들이 이런 데서 지냈을까 하는 상상이 절로 그려지는 인테리어에 내 옆에 있는 인물이 재벌 3세라는 걸 다시금 자각하게 될 때쯤.

찌릿―

'…음?'

불현듯 강렬한 기운이 내 감각을 건드렸다.

발원지는 2층.

숫자는… 총 여섯 명인 걸로 보아 정체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을 만날 목적으로 이곳에 오게 된 거고.

느닷없는 기운에 대해 머릿속으로 얼추 정리를 끝낸 난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정유환의 뒤를 따라 2층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똑똑―

각종 그림과 조각상이 걸려 있는 복도를 지나 웬만한 아파트 거실보다 넓은 응접실 문을 노크와 함께 열어젖히자, 서서히 벌어지는 틈 너머로 30대에서 40대로 사이의 남성들의 면면이 보였다.

"하하, 잘들 쉬고 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는 제가 말씀드렸던 오휘윤 씨입니다. 휘윤 씨, 이분들이 제가 말씀드린 사범님들입니다."

짐작한 대로 이제부터 나를 가르치게 될지도 모를 아주아주 거친 투기(鬪氣)를 지닌 무도인들이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오휘윤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들의 눈빛, 손짓, 몸짓을 훑으며 짤막한 자기소개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엄밀히 말하면 고용주는 이쪽이고 저쪽은 고용을 당하는 프리랜서에 지나지 않지만, 본디 면접도 면접관이 먼저 입을 여는 법이니.

"서울서 검도장을 운영하는 한원상이라고 합니다."

"김도광입니다. 시골 마을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지요."

자존심 싸움을 하기보다는 선뜻 물꼬를 트며 손을 내밀었다. 하등 쓰잘데기없는 짓으로 시간을 버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 결정의 긍정적으로 작용했는지, 나와 저들 사이의 접점이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의 정유환이 곁에 있어서였는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에 얹혀 두런두런 주고받는 담소의 분위기는 부드럽게 흘러갔다.

내가.

"여러분들도 바쁘실 테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 조건은 단순합니다. 최소 한 달에서 길게는 세 달간 실전 같은 대련을 치를 것. 보수는 기본급 천만 원에 각종 부대 비용 및 부상 시 치료비도 제가 부담합니다. 무기를 써도 좋고, 맨손도 좋습니다. 단지, 대련을 할 땐… 저를 정말 죽일 각오로 해주셔야 합니다."

본격적으로 오늘의 안건에 관해 말이 내뱉어지기 전까지는.

53화

죽일 각오.

그 짧은 한마디가 바람을 타고 울려 퍼진 찰나.

"음."

마치 한겨울에 현관을 열고 나오자마자 찬바람을 맞은 듯 따듯하던 장내의 공기가 급격하게 식어 버렸다.

정유환에게 들었는지 아닌진 알 수 없으나, 뭐가 됐든 기껏해야 20대 초중반으로 밖에 오비지 않은 애송이 따위에게 '최선을 다해 달라'라는 소리를 들으니 심기가 불편한 모양.

저마다 각각의 분야에서 최소 십수 년 이상 배우고 싸우며 달인(達人)이란 칭호를 듣던 양반들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다만 나는 지금의 기조를 바꿀 마음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일부러' 이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유환에게 차를 얻어 타고 오면서 한원상, 김도광 등 예비 사범들의 과거 이력부터 최근 행보까지 모든 정보들을 세밀하게 전달받았다.

그들 중에는 이라크로 파병을 다녀온 이도 있었고, 일명 PMC(Private Military Company)라 통칭하는 민간 군사 기업에서 용병 생활을 하던 이, 심지어 안면에 난 긴 흉터로 특히나 인상적인 조근수라는 남자는 한때 뒷골목의 전설이라 불렸던 조폭이었다.

해서 궁금했다.

과연 이들이 진심으로 나를 공격한다면 그 위력이 어떠할는지.

'랍티오 놈보다 강할까?'

여태까지의 경험상 최고 레벨의 적수는 단연 랍티오였다.

설령 듀라한이나 레드 구울이라고 해도 순수 무력으로는 놈을 넘지 못했다.

직접 구르고 부딪치며 쌓은 진짜 실력.

그걸 저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그러려면 정확한 수준 이상의 힘을 봐야 하고, 그 힘을 끄집어내려거든 분노를 유발해 선을 넘어야 했다.

만약 막상 겨뤄 봤는데 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단칼에 자를 작정이다. 도움도 안 되는데 굳이 피 같은 돈을 쓸 필요가 있나.

이는 정유환에게도 미리 말을 해두었다.

당신의 배려는 감사하나 내 기준에 들지 않을 경우 미안하지만 주저 없이 쳐내겠다고. 나는 그 당시를 회상하며 마지막 멘트를 날렸다.

"그러한 의미로 계약 전에 간단하게라도 테스트를 해봤으면 하는데, 유환 씨에게 듣기로 여섯 분 전부 긍정적인 답변을 주셨다고 합니다만, 혹 부상이 걱정되신다면 저는 괜찮으니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무인이기 전에 수컷들인 남자들의 영혼을 자극하는 도발이었다.

* * *

"…다시 한번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이름은 한원상, 배운 것은 본국검법이며 무기는 이 목검입니다."

도발의 효력은 대단했다.

잔뜩 인상을 구기면서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와 정유환을 따라 별장 우편에 자리한 훈련장으로 발을 내디뎠으니까.

그리고 현재, 나는 본국검법을 30년 가까이 수련했다는 현직 검도관의 관장이자 전직 정보사 출신과 눈을 맞대고 서 있었다.

정유환이 준 자료에 의하면 상세한 임무는 표기되지 않았으나 주로 북파 공작에 투입되었다는 걸로 보아 실전 경험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인 남자.

이를 방증하듯 차분한 말투와 달리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몹시도 사나웠다.

인왕(寅王).

한 산자락을 집어삼킨 호랑이가 연상되는 묵직한 기세에 작게 주억거린 나는 허리춤에 꽂혀 있던 목검을 뽑아 들었다.

휙―

휙―

"좋아."

사전에 아프리카 흑단 나무를 공수해 '사나운 호랑이의 환두대도'와 제일 비슷한 형태로 제작해 둔 나만의 목검.

기왕이면 진정 실전처럼 진검을 쥐고 대련에 들어갔으면 하지만, 그랬다가 한쪽이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기에 살짝 박진감이 떨어지더라도 목검을 쓰기로 룰을 정해 두었다.

포션도 힐링 귀걸이도 만능은 아닌지라 부득이하게 목검으로 대체되었다.

물론 나야 재생력도 있고 하니, 추후에는 사범들에게 만이라도 진검을 내주는 쪽으로 달라질 수도 있다.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실전(實戰)이었으니까.

날붙이 혹은 그에 준하는 무기도 없이 실전을 논할 수는 없었다.

"자, 그럼 대련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양측 모두 준비를 끝내자 심판을 봐주기로 한 정유환의 목소리가 들렸고, 짤막한 대화 직후.

쉬이이익!

퍼억!

순식간에 묵색 목검이 상단부를 가르며 내리꽂혔다.

한원상은 기습에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듯 황급히 물러나며 가드를 취하는 나를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흡!"

간결한 호흡 함께 상단, 중단, 하단에 베기와 찌르기까지 온갖 방식으로 전신을 두들기는 칼날.

부지불식간에 삼십 합을 넘게 겨루고 나니 슬슬 감이 왔다.

이 남자.

'랍티오 놈과 대등하다!'

칼리야스 대륙의 준기사급과 비교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진짜배기였다.

힘과 속도, 체력과 지구력에 기술적인 면까지 무엇도 뒤지지 않았다. 딱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오직 마력 유무뿐, 그 외에는 내가 바라는 사항을 완벽하게 갖춘 상태였다.

이를 깨닫고 나니 정유환에게 감사함과 동시에 가슴 속에선 기대감이 무럭무럭 차올랐다. 첫 순서부터 맛집이라는 소리는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맛집일 가능성이 농후한 까닭이었다.

송주완이나 강태성도 그러더니, 정유환의 인재 발굴 능력이 탁월한 것인지, 아님 청성대륙 사내 시스템이 완벽한 것인진 몰라도 사람과 관련된 일에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해도 될 것 같았다.

"좋아, 좋습니다. 아주!"

* * *

"저 친구… 괴물입니까?"

수건으로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훔친 한원상은 옅게 떨리는 왼팔에 주먹을 쥐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스물일곱? 스물여덟?

인간 남성의 육체적 전성기가 대충 서른 전후라고 하던가. 하나 그것도 한계라는 게 있기 마련이었다.

이는 단련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부분이었다.

한데.

"으아아아아아아!!"

"흐읍!"

무려 여섯 명이 펼치는 차륜전을 상대하면서도 저 청년은 그 한계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한 시간이 넘는 혈전에도 변함없이 목검을 휘두르고 있다.

한원상으로서는 당최 이해가 안 되는 광경에 정녕 인간이 맞기는 한 걸까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짬짬이 휴식이라도 취했다면 모를 텐데, 휴식이라고 해봐야 중간중간 바뀐 상대와의 간략한 통성명 타이밍에 잠깐, 혹은 목검이 부러지는 바람에 교체하는 동안이 끝이었으니까.

"하하, 많이 놀라셨나 봅니다."

정유환은 그런 한원상이 재밌는지 그가 앉아 있던 탁자 위에 이온 음료를 올려놓으며 피식 하고 웃었다.

왠지 그의 표정에서 자신의 얼마 전 과거가 오버랩된 탓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스승님이 보시기엔 저 친구, 어떤 거 같습니까?"

"평가를 하자면 전체적으로 아쉬운 단계입니다. 육체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데 반해 기술적인 면에서는 꽝에 가까운… 또 지나치게 일격 필살에 치중하는 스타일이군요. 꼭 길거리 싸움을 겪으면서 성장한 느낌이니 말이지요. 장담컨대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하나 본인과 대등하거나 강한 이들에겐 고전을 면치 못할 타입일 겁니다."

"흐음."

정유환은 한원상의 비관적인 평가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 비명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던 결론이기 때문이었다.

"다행이군요."

"예?"

"미흡한 문제들은 저희가 채워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서서히 막바지에 다다라가는 여섯 번째 격전을 지켜보며 그리 읊조린 정유환은 곧 스승에게 시선을 돌리며 손을 꼭 잡고 당부했다.

"스승님."

"예."

"저 친구 좀 키워 주세요. 기틀이 워낙 튼튼하고 넓으니 스승님의 가르침이 닿는다면 틀림없이 기량을 만개할 겁니다."

정성을 다해 오휘윤을 성장시켜 주기를.

재물이 필요하다면 재물을, 권력이 필요하다면 권력을 내어 줄 터이니 제 자식처럼 아끼며 적극적으로 꽃을 피워 달라고.

그 간절한 요청에 잠시 당황했던 한원상은 머지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정유환의 손등에 제 손을 포갰다.

자세한 내막이야 나중에라도 들어봐야겠지만, 정유환을 코흘리개 시절부터 가르쳐 왔던 전담 사범으로서 대강 감이 왔다. 어엿한 어른이 된 제자의 최종 목표에 오휘윤이란 사람이 키포인트가 되었다는 것을.

"전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스승과 제자 사이엔 부탁이란 게 없다고. 그저 훗날 맛있는 술 한 잔 같이 기울여 주면 될 따름입니다."

* * *

당일 오후 4시경.

마침내 예비 사범들과의 대련을 마친 나는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곤 응접실로 되돌아왔다.

응접실 문을 여는 손길은 오전과 다르게 꽤나 가벼웠다.

정유환의 장담대로 6인의 예비 사범 전원 내가 세운 기준선을 무탈하게 통과하며 텐션이 쫙 올라간 여파였다.

"제가 제일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그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비워져 있던 정유환의 옆자리에 앉은 나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먼저 갑작스런 테스트였음에도 진심으로 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불어 여러분들의 실력에 더없이 만족했고, 그렇기에 꼭 계약을 맺고자 합니다. 일정은 개개인마다 주 2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과 오후로 시간대를 나눠 대련을 하게 될 예정입니다."

당신들이 좋다.

앞으로의 일정은 이러하고, 향후에는 2 대 1이나 3 대 1 등 대련 형식이 변경될 수 있다.

흡사 사내 회의에서 잘 만들어진 PPT를 보여주며 사업 아이템을 설명하듯 가급적 세세하고 꼼꼼하게 계획안을 쭉 이야기하고 기다리길 3분여.

"저는 하겠습니다."

"세 달간 잘해 봅시다."

처음의 도발이 좀 과했나 하는 생각이 들 즈음 한원상을 기점으로 사범단 전원이 동봉된 볼펜을 들어 서명란에 사인을 휘갈겼다.

아마도 내가 내건 조건이 어디서도 볼 수 없을 만큼 후했기에 첫인상과는 별개로 마음을 정한 게 아닐까 싶었다.

월 천만 원.

개인 교습 비용치고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으니까. 그 덕에 홀가분해진 나는 여세를 몰아 정유환과도 추가로 계약을 체결했다.

"별장을요?"

"예, 이만한 훈련장을 따로 찾기도 어렵고 해서 세 달간 대여를 했으면 합니다."

오늘 하루 뒹굴어 본 결과 재벌가의 훈련장답게 시설이 예상보다 훨씬 괜찮았다. 고로 이런 데를 또 구하기도 힘들고 하니 이참에 아예 빌려 쓸 요량이었다.

비용이 만만찮을 듯하다만, 아껴봐야 똥만 된다.

나는 돈으로 시간을 섰다.

"뭐, 좋습니다. 어차피 한동안은 제대로 쓰지도 못할 곳이기도 하고 또 휘윤 씨의 일이니 특별히 싸게 해드리지요. 하하!"

"감사합니다."

"에이, 우리 사이에 감사는요. 도움이 됐다면 저로서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하하하!"

정유환은 이게 내게 빚을 얹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는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긍정을 표하며 임대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속셈이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으나 나로서는 훈련 문제를 한 큐에 해결할 수 있었기에 따지자면 서로 윈윈인 결말이었다.

54화

사범단과의 계약이 이루어진 날로부터 내 일과는 극도로 단조로워졌다.

새벽 6시 기상, 구보 및 기초 단련.

오전 9시, 아침 식사 후 오전반 사범과 세 시간의 스파링.

오후 1시, 점심 식사 후 오후반 사범과 세 시간의 스파링

저녁 5시, 구보 및 마무리 단련.

오후 7시, 저녁 식사 후 직뢰(直雷) 정확도 조정 및 마상 전투술 트레이닝.

밤 10시, 아이템 캐리어 사이트와 뉴스 등으로 전반적인 분위기 읽기 후 수면.

지독하리만치 열정적으로 수련에 몰두했고, 그만큼 빠르게 사범단의 기예를 흡수해 나갔다.

하도 빡빡한 스케쥴에 피로는 둘째 치고 새로운 상처와 아물지 못한 흉터가 뒤섞여 온몸이 난장판이 되어 갔지만,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버텨 냈다. 당장의 1분 1초가 미래의 하루 일 년을 만들어 준다는 일념으로.

그럼에도 지치는 날이 올 때면 귀걸이를 이용했다.

"회복."

우우우우우웅!!

[신성 마법 '회복'을 사용합니다.]

[경상 이하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평소에는 자체 치유력을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또 사범단의 부상을 커버할 목적으로 봉인해 두었던 '생명이 깃든 귀걸이'의 효과는 확실했다.

여전히 목검 위주로 대련을 하고 있는 터라 골절상만 피하면 어지간한 부상은 말끔히 치료됐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나는 추진력을 받은 로켓처럼 한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갔고, 이렇듯 죽어라 매달리다 보니 슬슬 이 생활에도 적응되어 가는 중이었다.

애초에 수련으로 점철되어 있던 삶.

단지 수행하는 종목이 달라진 것에 불과했기에 사실 익숙해지는 데 그다지 어려울 게 없었다.

"후아, 여까지만 합시다."

"그러죠. 수고하셨습니다."

"사장도 고생했수다."

그렇게 오늘도 오후 타임인 조근수와의 한바탕 대련을 끝낸 나는 냉장고에서 이온 음료를 꺼내다가 건네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세 시간 내내 풀 타임 스트레이트로 공방을 주고받은 후라 온몸이 땀과 '모래'로 범벅이 돼 있었다.

매트리스와 벽으로 막힌 실내 훈련장에서 먼지도 아니고 모래를 뒤집어쓰다니, 언뜻 듣기엔 어이가 없지만, 옷가지를 털 때마다 흙과 작은 돌 따위가 우수수 떨어졌다.

이는 눈앞에 있는 조근수라는 인간의 직업적 특성 탓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했던 조폭.

그로 인해 흔히 사시미라 부르는 회칼은 기본이요, 자그마한 손도끼나 망치에 박투술도 능했거니와 시시각각 주변 잡동사니를 던지거나 모래를 주머니에 챙겨와 뿌리는데 타이밍이 하도 교묘해 그와 겨루다 보면 아차 하는 순간 세상이 깜깜해지는 게 다반사였다.

내가 원하던 가장 변수가 많은 캐릭터랄까?

훗날 진검을 쥐게 된다면 단연 최고이자 최악의 상대가 되리라 확신했다.

"으후후, 그럼 이만 가보겠수다."

"예. 다음 주에 뵙죠."

서서히 추워지는 날씨.

이젠 오후 대여섯 시만 돼도 어둑어둑해지는 오후에 조근수를 떠나보낸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차에 올랐다.

근처 마트에 들러 스콰 녀석에게 줄 당근이나 각설탕을 좀 사 올 심산이었다.

시스템의 관리를 받는 펫이라는 이유 덕분인지 식사와 잠자리에서 안장이나 편자 등 지속적으로 신경을 써줘야 하는 항목까지 내가 따로 책임지지 않아도 역소환 상태로 두면 자동으로 커버가 되기는 하지만, 매번 궁할 적에만 불러 쓰고 되돌려 보내기가 뭐 해서 오랜만에 지갑을 열 예정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에는 정유환의 별장에 설치된 담벼락을 통해 외부의 이목이 차단되어 신고가 들어올 일도 없어 온종일 마당에 풀어 놓고 사는 중이라 진짜 애완동물 같아서 말이지.

"거기로 가볼까."

조수석에 환두대도와 소드 브레이커를 올려 두고 도심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일전에 흘려듣기로 현대 백화점의 과일 야채 퀄리티가 국내 최상이라고 했던 풍문이 떠올라서 그리로 목적지를 정했다. 금요일 저녁 퇴근 시간에 괜한 돈지랄 같긴 한데, 이왕 쓰는 거 팍팍 써야지.

스콰의 컨디션은 곧 나의 컨디션이기도 하니까.

"가보자."

* * *

빠아앙!

빵!

여기저기서 자동차 클랙슨 협주가 메아리처럼 치솟는다.

역시나 서울 시내의 아스팔트는 고난했다.

"퇴근까지 한 시간은 남았을 텐데 왜 벌써부터 막히는 거냐."

이래서 수도권은 힘들다니까.

영 뚫릴 기미가 없는 도로 상황에 검지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두들기며 창밖을 바라보던 차에 머릿속으로 불현듯 이러다 퀘스트에 끌려가면 어쩌나 하는 이 스쳐 지나갔다.

주인을 잃은 채 덩그러니 버려진 차량.

"이야, 진짜 난리 나겠는데."

방금 전까지 잘만 굴러가던 차인데, 막상 내부를 들여다보니 운전석엔 아무도 없는… 귀신이라도 본 줄 알고 소동이 나지 않을까?

아. 요즘은 일반인들도 생환자에 대해 알고 있으니, 그쪽과 관계된 사고라고 여기려나?

위이잉―

위잉―

위잉―

"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농담을 뇌까리던 와중 뒤쪽에서 구급차 사이렌이 귓가를 찔렀다.

근처에서 사고라도 났나.

점차 볼륨이 커지는 사이렌 음량에 힐끗 사이드미러를 쳐다본 나는 구급차가 가까워지고 있음에 차를 살짝 움직였다.

빡빡하게 밀집된 형편임에도 다들 과태료를 물긴 싫은지 옆으로 비켜주고 있었기에 차츰차츰 공간이 생기자 그 통로를 후다닥 통과하는 구급차의 후미를 무심코 응시하던 직후였다.

띠링!

"음?"

난데없는 알림음과 함께.

[경고!]

[위험 개체와 조우했습니다.]

[〈특수 퀘스트: 망가진 패잔병〉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달성 조건 : '패잔병'과 50m 내 존재할 것]

[〈특수 퀘스트: 망가진 패잔병〉이 추가됩니다.]

메인 퀘스트도, 서브 퀘스트도, 에픽 퀘스트도 아닌 '특수 퀘스트'가 개방된 것은.

"…특수 퀘스트?"

〈특수 퀘스트: 망가진 패잔병〉

* 그는 패배했으나 돌아왔다. 하나, 돌아왔음에도 환영받지 못했다. 패퇴했기 때문에? 아니다. 그저 패배였더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면 누구도 질책하지 않았을 것이다. 범죄와 위법이 아닌 이상 도전하는 자는 언제나 찬양받아야 하는 법이니.

하면 어째서?

원인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그의 육신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으니까.

나아가 그의 존재가 '대륙: 지구'에 칼리야스 못지않은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으니까.

하기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안타깝지만, 패잔병에게 비참한 말로가 오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가라.

가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모든 수를 총동원해 저지하라. 당신의 머뭇거림으로 인해 이 대륙마저 무너지지 않길 바란다면.

(0/1)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오직 '대륙: 지구'에서만 수행 가능합니다.

* 특이 사항 2: 퀘스트 실패 시 '???'가 발동됩니다.

* 특이 사항 3: 특수 퀘스트는 다수의 지원자가 동시 진행하되 '경쟁' 구도입니다.

* 특이 사항 4: 최초 달성자가 탄생할 경우 그 이외의 지원자는 퀘스트가 강제 삭제되며, 그에 따른 패널티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빠아아앙!

빠앙!

"아."

상상도 못 했던 급작스런 전개에 멍하니 있다 고막을 때리는 경적 소음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얼른 기어를 바꾸며 초록빛이 반짝거리는 신호등을 지나 구급차를 쫓았다.

당최 이게 무슨 일인지 아직도 이해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퀘스트였다.

더군다나 잠깐 봤던 퀘스트 창 하단에 박힌 특이 사항 3번, 협력 퀘스트마냥 다수의 지원자가 동시 참여하되 특이 사항 4번, 최초 클리어자 1인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실패 처리되는 일종의 승자 독식 이벤트.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없다.

납득을 하고 정리를 하는 건 가서 해도 되는 일이었다.

부우우우우우웅!

"어디, 아!"

잔상처럼 남은 구급차의 궤적을 되새기며 핸들을 돌리고 엑셀을 밟기 무섭게 저 멀리 흐릿해져 가는 앰뷸런스의 꼬리가 보였다.

더하여.

끼이이익!

끼이익!

"저건!"

잇따라 방향을 뜨는 차량들도.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공교로운 변화에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 차들 중 적어도 3분의 1 이상은 생환자라는 걸.

대략 5만에서 7만 사이로 추정 중이라는 숫자.

그들이 죄다 서울에 몰려있진 않겠지만, 인구 밀집도가 높은 서울이라면 다른 지역보다 생환자가 많을 터였다.

"젠장!"

혹시라도 '내 보상'을 빼앗길까 초조해진 나는 영 속도가 나지 않는 차에 대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안간힘을 다해 추격을 이어 갔다.

재수가 좋았는지, 그러다 차를 버리고 스콰를 소환해야 하나 불안해질 무렵.

구급차가 우측으로 길게 경로를 꺾었다.

"저쪽…이면."

곡선을 그리며 우회전하는 구급차를 노려보다 문득 최종 목적지가 어딜지 알 듯하여 머리를 확 들었다.

그곳에는 수백 미터 밖에서도 십자가 마크가 떡 하니 보이는 대형 병원이 있었다.

"저기다!"

행선지를 알아낸 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아스팔트 위를 날듯이 주파해 병원 주차장으로 차를 밀어 넣었다.

서울 한복판에 박혀 있는 대형 병원답게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탓에 지하까지 내려와 주차 구역을 찾느라 몇 분이 추가로 소모됐지만, 핸드폰에 별도의 메시지가 뜨지 않았다는 것을 위안거리로 삼으며 후다닥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띵!

- 올라갑니다.

[B5]

[B4]

띵!

- 문이 열립니다.

- 문이 닫힙니다.

- 올라갑니다.

지하 5층에서 출발한 여정은 괜히 엘리베이터를 탔구나 하는 자책이 들 정도로 개시부터 삐걱거렸다.

그치면 어쩌랴 이미 타버린 걸.

대신, 나는 흥분으로 물든 감정을 차분하게 다스리며 이송된 환자, 아니 패잔병이 어디로 갔을지 동선을 예측해 나갔다. 일단 타깃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이야 쉬웠다.

'응급 환자라면 당연히 응급실일 거다. 환자 신원 파악에만 못해도 10분은 걸릴 테니, 다른 곳으로 옮겨지진 않았을 거다. 그런데....'

다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어떻게 처리하지?'

대놓고 칼질을 하기엔 사방이 탁 트여 있다는 점이었다.

살인은 고사하고 욕설 난동만 부려도 병원 관계자들과 환자, 환자의 가족과 지인 등 수많은 눈에 띄게 된다.

그러한 환경에서 칼을 뻗는다?

아무리 열을 토하고 성을 다해도 끝끝내 경찰 인계 후 감옥 엔딩으로 연결될 게 뻔했다.

게다가 패잔병이라 함은 곧 인간이라는 의미.

랍티오 놈들마냥 패악질을 벌인 것도 아니고, 외려 이 세계를 구하려다 사고를 당한 피해자일 따름인데… 그런 이를 퀘스트라는 명목 아래 가차 없이 죽여도 되는가.

차라리 범죄자였다면 살려달라 빌고 빌어도 심장을 짓이겼을 테지만.

띵!

- 1층입니다.

- 문이 열립니다.

"거, 나갑시다."

당면한 두 가지 고민거리로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1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

꽉꽉 눌러 담은 고봉밥인 양, 사람들로 가득한 승강기에서 빠져나와 우선 응급실 방향으로 빠르게 걸었다.

답은 가서 고안해도 늦지 않았다.

이윽고.

[응급 의료 센터]

이번 퀘스트의 전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응급 의료 센터 표지판이 내 머리 위로 나타났다.

55화

[ 패잔병 ]

1년 365일 저마다의 사연과 바람으로 붐비는 응급 의료 센터.

"선생님! 저희 아이가―"

"최 간호사님!"

"아파! 나 아프다고!! 으아아아!!"

아이를 붙들고 울먹이는 어머니, 간호사를 부르는 의사, 겉보기엔 멀쩡한데 곧 죽을 것처럼 울부짖는 아저씨....

내가 알기로 신속하고도 원활한 치료를 위해 환자 외에 보호자는 1인까지만 수용한다는 원칙이 있으나, 출입이 통제되기는커녕 물밀듯이 밀려드는 인파로 정말이지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아."

그 난잡한 광경에 무심코 멈춰 서버렸다.

불쑥.

가슴 한편에 묻어두었던 과거가 오버랩된 까닭이었다.

막 스무 살이 되던 새해 첫날.

즐겁고 행복하기만 해야 할 저녁 술에―

"…저기다!"

한순간 멍하니 서 있던 나를 누군가의 다급한 음성이 일깨웠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응급 의료 센터를 가리키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남자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발목까지 오는 검은 망토에 푹 눌러 쓴 모자, 얼굴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가려져 있었고, 손마저 검은 장갑으로 씌워져 있는 한눈에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인물은 주위에 누가 있건 말건 개의치 않고 빠른 속도로 전진하며 조금씩, 조금씩… '투명'해졌다.

"...!"

스르륵 모습을 감추는 신원미상의 사내를 보자마자 지금 뭘 하고 있었는지 현실을 자각한 나는 얼른 응급 의료 센터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안타깝게도 내겐 투명화 같은 은신 기술이 없는 탓에 도처에서 사람들의 눈길이 날아들었으나, 깔끔하게 무시했다. 원래 인간은 남에게 별 관심이 없다. 한눈에 봐도 입이 떡 벌어질 지경으로 예쁘고 잘생긴 외모거나 나체 바람으로 뛰어다니는 수준이 아니라면 타인은 이동형 지형지물에 지나지 않았기에 나는 자유롭게 응급 의료 센터 안을 활보하며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 올렸다.

스으으으으윽―

찌릿!

서 있던 자리를 기준으로 사방 천지를 향해 쭉 뻗어 나가는 거미줄.

내가 찾는 것은 하나.

'사람이 많이 몰려 있는 곳, 사람이 많이 몰려 있는 곳!'

유난히 북적이는 장소였다.

직접 물려도 봤고 또 실제 '인간의 좀비화'가 이루어졌던 폰스 마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을 때 발현되는 증상들과 어떤 식으로 변이가 되는지 등의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알고 있었다.

개중 제일 특기할 만한 부분이 바로 '경직'이다.

방전이 돼버린 기계처럼 혹은 급속도로 냉각된 고목처럼 빳빳한 자세로 그대로 굳어서 짧게는 10분, 길게는 한 시간까지도 가만히 누워 있는다. 물론 이는 좀비나 구울에게 당했을 시의 반응이기에 혹 2차 진화체나 그 상위의 언데드에게 전염된다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만.

밑도 끝도 없이 전개되는 'IF'라는 가정은 제하고 본다면 현대에서는 심장마비 환자로 오인받고 있을 공산이 컸다.

내지는 상해를 입는 와중에 찢어진 피부에서 다량의 핏물을 쏟아 급성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라고 오해하고 있겠지.

전자든 후자든 매우 위급한 환자 취급을 받고 있을 터이니 다수의 의료진이 동원되었을 게 분명했다.

이러한 정보들을 중점적으로 수색한다면 민간인과 타깃을 금방 구분해 낼 수 있을―

…콰앙!

"꺄아아아악!!"

"뭐, 뭐야!"

"으아아아아!"

있을 거라고 자신 있게 발을 떼던 참에 느닷없는 폭음이 일대를 뒤흔들었다.

곧이어 전후좌우에서 우르르 도망쳐 나오는 사람들.

비명과 고함 난무했고, 바닥에선 굵직한 진동이 발을 타고 전해졌다.

"이게 무슨 개짓거리야."

이 갑작스러운 아수라장에 눈살을 찡그리면서도 의문보단 짜증이 먼저 나왔다. 하필이면 퀘스트가 실시된 이때, 하필이면 목표물이 머무는 병원에서 폭발이 인다?

단언컨대 절대 우연일 리 없는 사건.

즉, 100%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의도적인 테러였으니까. 그러니 육두문자가 절로 튀어나올 수밖에.

아무리 퀘스트가 귀중하다 한들 시민들의 안전 또한 간과해선 안 될 요소였다.

만에 하나 보상이고 뭐고 다 떠나서, 지구에 좀비가 등장하기라도 하면 그 파급력은 흔한 아포칼립스물 영화들을 아득히 초월하는… 진짜 멸망으로 연결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다!

이리 주장한다면 할 말이 없다마는… 테러범에게 그 정도로 숭고한 의지가 있을 거 같진 않았다. 그랬다면 경찰과 부딪치는 한이 있더라도 민간인들이 안전하게 빠져나가도록 주의를 주거나 경고를 했겠지.

이건 그냥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한 파괴 활동일 뿐이었다.

"또라이 같은 새끼."

혹시 앞서 사라졌던 투명화 스킬 보유자일까?

언놈인진 몰라도 어이가 없다 못해 머저리 같은 행위에 얼굴을 찌푸린 나는 서둘러 폭음이 발생한 발원지로 몸을 회전했다.

하나, 일 보를 내딛기도 전이었다.

타닷―

파아앙!

'음?'

응축된 공기가 터지듯 10여 미터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별안간 분출된 낯익은 기운이 내 감각 망에 포착되었다. 무척이나 친숙했지만, 모순적이게도 이 한국을 넘어 지구에서는 결코 감지될 리가 없는 에너지기가.

다름 아닌.

"마력?"

마력(魔力).

뜬금없이 솟구친 마력이 폭발음의 반대편으로 쾌속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뭐지?

얼떨떨한 기색으로 마력의 궤적을 쫓으며 뇌리에 떠오른 물음표를 해소하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고,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놈이 테러범이라는 사실을.

그게 아니고서야 이 타이밍에 사고 현장에서 뛰쳐나왔을 리가 없었다.

아마 막상 폭발이 일자 무서워서 도망을 치는 거든지, 아님 퀘스트가 클리어된 이후의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없거나 아예 감당하려는 마음 자체가 없어 재빨리 달아나는구나 싶었다.

한데 그러기엔 앞뒤가 맞질 않는다.

무엇이?

"퀘스트 때문에 소란을 일으킨 것 아니었나?"

핸드폰이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만일 타깃을 노린 거라면, 일을 벌였으니 그에 따른 마무리가 따라와야 한다. 그게 옳은 수순일 텐데.

근방이 하도 시끄러워 내가 미처 알림음을 듣지 못했나 주머니를 뒤적거렸으나, 화면을 체크해 본 결과 조용했다.

그럼 대체 왜?

'테러범과 동일 인물이 아닌 건가? 아냐, 그렇다고 하기엔 폭발이 일어난 곳에서 빠져나왔다. 설사 동일인이 아니더라도 관계는 있어야 하는―'

"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해석을 거듭하던 찰나.

나는 돌연 찾아온 깨달음에 눈을 부릅뜨며 지면을 박찼다.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전략 전술 용어이자 사자성어, 이른바 '성동격서(聲東擊西)'였다. 군중의 이목을 한쪽으로 집중시켜 놓고 반대편을 친다.

육감의 레이더가 내게 소리를 질렀다.

어서 뒤따라가라고.

"어딜!"

숨겨져 있던 이면을 파헤친 나는 바래지는 마력의 잔향을 틀어쥐고 미친 듯이 질주했다.

이 선택이 잘못된 길일지도 모른단 걱정이 잠깐이나마 발목을 붙들었지만, 머뭇거리지 않고 추격전을 개시했다.

성공과 실패는 어차피 동전의 양면이었다.

이쪽으로 갔는데 틀렸다는 것은 저쪽으로 갔는데도 틀릴 수 있다는 뜻.

이래저래 50 대 50이라면.

내가 취해야 될 스탠스는 '확고한 믿음'이었다.

"하아!"

타닷―

휘우우우우욱!

* * *

이런 걸 연쇄 작용이라고 하던가?

다르르르르르르!!

굉음을 동반한 폭발에 의해 불이라도 났는지, 화재를 알리는 긴급 벨이 응급 의료 센터를 포함해 대형 병원 전체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고.

- 모든 환자 및 보호자 분들께 알립니다. 현재―

-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스피커에서도 연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심지어.

파아앗!

파악!

불꽃이 전선을 건드린 듯 삽시간에 병원이 검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보통 병원은 24시간 내내 케어가 필요한 입원 환자들을 위하여 보조 발전기를 갖추고 있지만, 그거야 외부에서 넘어오는 전류에 이상이 있을 때나 써먹을 수 있는 법.

내부에서부터 비롯된 문제에는 무용지물인지, 암전은 점점 가속화되었고 이내 병원의 전 구역을 집어삼켰다.

재앙.

한 괴물의 손끝에서 발아한 재앙의 씨앗이 급속도로 크기를 불려 나가고 있었다.

'돌아버리겠네.'

나는 근방을 뒤덮어 버린 어둠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도를 넘어도 한참 넘어버린 행동.

대관절 이놈이 랍티오 놈이나 다를 게 뭔가 싶었다. 이곳이나 그곳이나 지옥이긴 매한가지인데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장담하는데 곱게는 못 돌아갈 거다. 개새끼야.'

이젠 퀘스트도 퀘스트지만, 놈을 추적하는 데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단순히 인의애적인 영웅 심리의 발로는 아니었다.

생환자가 테러를 일으켰다.

이 한 줄의 문장으로 인해 추후 '생환자는 테러범이다'라는 공식이 생겨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문명의 이기를 잃어버리고 암흑으로 깜깜해져 버린 세상.

CCTV도 작동되지 않겠다, 작금의 재난이 생환자의 소행이었음을 걸릴 확률이야 극도로 낮겠지만, 중요한 건 테러범이 살아 돌아간 다음이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연쇄 살인마들이 그러하듯 놈은 더욱 과감해질 테고, 예전의 기억을 발판 삼아 특수 퀘스트가 발발했을 때마다 훨씬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겠지.

결국 인류는 최악의 테러리스트… 테러리스트'들'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그러다 보면 기어이 우려하던 일이 벌어질 거고, 그 와중에 내가 생환자라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짐작도 못 할 귀찮은 일들이 내 목을 옥죌 테니.

비약이라 느껴질지언정 어쨌거나 예서 막아야 했다.

좀비도 테러범도.

[응급중환자실]

"여기냐."

그 결단의 끝자락에서 마침내 목표물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 * *

[응급중환자실]

조명이 꺼져 글씨만 겨우 보이는 '응급중환자실'의 열린 문으로 조심스럽게 입장했다.

이곳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응급 환자들 중에서도 중증 환자들에게 제공되는 병실.

안쪽은 대략 스무 명의 중환자들이 병상에 누워 의료진의 손길도 받지 못한 채 방치돼 있었다.

사고가 터진 즉시 근처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모조리 달려왔으나, 그들 앞을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은 탓이었다.

"빠, 빨리 대답 안 해!!"

콰아앙!

"꺄아아아악!!"

"다, 닥쳐! 닥치라고!"

'저 새끼.'

그놈이다.

검은 망토의 투명화 스킬 보유자.

저 짐승만도 못한 새끼가 의료진 전원을 무릎 꿇려 놓고 칼을 휘두르며 무언가를 닦달하는 중이었다.

뭘 원하는지야 굳이 묻지 않아도 알 법했다.

내 생각과 똑같이 놈도 여기에 패잔병이 있을 거라고 추측한 거겠지.

"심장! 심장 마비 당한 놈! 어딨냐고!"

심장 마비를 운운하는 게 좀비화에 관해서도 잘 아는 듯싶었다. 나는 놈의 패악질을 노려보며 최대한 은밀하게 마력을 끌어모았다.

딱히 피 냄새가 나지 않는 걸로 보아, 어째서인진 불명확하나 떼로 죽든 말든 불벼락을 선사해 놓던 바깥과 다르게 여태까진 위협에서 그친 모양이지만, 제3자가 출현하면 인질극으로 넘어갈 수도 있으니 신종 또 신중하게 기회를 엿보았다.

모두를 안전하게 구하면서도 놈을 정확하게 짓밟을 수 있는.

"사, 살려 주세요!"

"말하라고!"

콰아앙!

"꺄아아아아악!!"

'지금.'

우우우우우웅!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스윽―

후우욱!

찬스를.

56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매의 최대 시속은 무려 400km에 육박한다고 한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이 괴랄한 하강 속도에 먹잇감은 미처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발톱에 걸려 죽음을 맞게 된다.

나는.

"아, 아니면 과다 출혈! 과다 출혈 환자는―"

…슈우우욱!

빠악!

그것을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랍티오 놈에게 당한 후로 보조 무기의 필요성을 느껴 항상 품에 챙겨 다니던 '손때 묻은 단검'을 검집째로 쥐고 폼멜로 테러범의 관자놀이를 후려치는 동안.

놈은 급소 방어는 고사하고 내 접근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쿵!

털썩―

그 흔한 단말마의 비명도 없었다.

손끝을 통해 묵직한 촉감이 전달됐을 무렵에 녀석은 이미 땅바닥을 굴렀고, 뒤이어 검을 쥔 내 주먹에 의해 안면을 가격당하느라 주둥아리가 박살 난 이후였다.

후우우욱―

콰직!

인간이길 포기한 놈이었기에 나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마치 사물을 대하는 양 전신을 난타했다.

뭐든 하려면 철저하게 하라던가?

그 말에 부합하듯 상대가 생환자라는 점을 고려해 고통스럽다고 허우적거리길래 팔을, 살려 달라 발버둥 치길래 다리 관절을 부러뜨렸고, 귀가 반짝이는 걸 보고 장신구인가 의심되어 귓불을 찢었으며, 혹여라도 도주와 관련된 스킬이 있을까 정수리를 내리찍어 뇌를 진탕시켰다.

생명을 살리는 병원에서 할 짓은 아니었으나, 어설프게 손댔다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까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심정이 들 만큼 꼼꼼하게 짓이겼다.

기습이란 이름에 걸맞게 습격을 시도하고 대강 10여 초 만에 이루어진 마무리였다.

"…후."

나는 산 송장이 된 테러범을 거칠게 던지며 검대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켰다.

띨끽―

화르륵!

대번에 환해지는 공간.

내부를 전부 밝히기엔 초라한 불꽃이었으나, 벌벌 떨고만 있던 의료진들에게 본인들이 안전해졌음을 알리기엔 충분했다.

"…꺄아아악!!"

"뭐, 뭐야!"

"살려주세요! 제발!"

뭐… 하도 공포에 질린 탓에 잠시 해프닝도 있었지만.

후우욱―

쾅!

"모두 조용!"

"흡!"

"끄으읍."

"이쪽은 더 이상 걱정 안 해도 되니 환자들부터 챙깁시다."

방금 전 도로 위의 레이스를 떠올려 보면 금방 또 새로운 테러범이 칼을 빼 들고 달려들 터라 약간의 무력시위와 본인들의 직업 정신을 되새겨 주며 소동을 일단락시킨 뒤 나는 황급히 병상을 도는 의료진들의 후미를 쫓아 '응급중환자실' 안에 타깃이 있는지를 살폈다.

환자라고 해봐야 20여 명이 전부인 데다가.

"혈액! 혈액 가져와!"

"누구 랜턴 없어요?!"

"핸드폰! 핸드폰을 켜!"

"아!"

개중에서도 과다 출혈 환자는 여섯 명뿐이었기에 금세 그토록 찾아 헤맸던 인물과 대면할 수 있었다.

아마 수술이 시급하다는 판단 아래 일단 이송되다가 테러범의 난입하면서 수혈 팩만 달랑 달아둔 채로 입구 근처에 덩그러니 방치돼야만 했던 20대 초반의 청년이 타깃의 정체였다.

내가 이 환자를 '패잔병'이라 특정한 이유는 두 가지.

구울의 손톱으로 추정되는 가슴팍에 새겨진 다섯 줄기의 상흔과 그 여파로 대량의 피를 흘려 퍼렇게 질린 얼굴이 더해진 외견은, 이따금씩 박동하는 심장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다고 사망 선고를 내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형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버티고 있다는 게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사아아아아아아―

"사기."

그의 전신에서 듀라한이나 레드 구울 따위가 풍길 법한 '사기(死氣)'가 뭉텅이로 새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저 청년이 최소 2차 진화체 이상의 언데드에게 감염되었다는 증거일까?

아님 원래 변인체가 되었을 때 자연적으로 겪는 일반 현상일까.

과연 어느 쪽이 정답일지는 표본이 많지 않아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으나, 검붉은 빛으로 이루어진 미약한 기류가 온몸을 휘감고 있었기에 패잔병임은 확실해졌다.

…만.

"음."

역시나.

막상 마지막에 다다르니 옅은 망설임이 내 팔목을 움켜쥔다. 반드시 죽여야 하는 게 맞을까? 목을 베어 버리는 처형 외엔 방도가 존재하지 않는 걸까?

혹… 생명의 샘물이라면.

'패잔병이라는 타이틀이 주어졌다는 건 바이러스에 완전히 잡아 먹혔다는 의미. 당장은 시험해 볼 수도 없겠지만, 먹히지 않을 확률이 높다. 더는 상태 이상이 아니라 상태 그 자체가 돼버렸을 테니까.'

그럼 또 다른―

"가만… 신성력이라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불현듯 떠오른 방안에 반사적으로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악(惡)을 멸하고 비틀린 역천(逆天)을 본래의 순리(順理)로 이끄는 힘이라면, 꼭 피를 보지 않더라도 〈특수 퀘스트: 망가진 패잔병〉을 클리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딱 봐도 기초나 초급에 불과한 '회복'으로도 가능할는진 미지수였으나,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회복."

우우우우우웅!!

[신성 마법 '회복'을 사용합니다.]

[경상 이하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곧 새하얀 빛무리가 청년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이런...."

안타깝게도 아무 변화도 발현되지 않았다.

회복 마법.

예견한 대로 이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얘기였다.

"젠장."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자는 태도로 최후의 한 수를 시전했던 나는 고요한 침묵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혀를 찼다.

이렇게 되면 더는 어쩔 수 없다.

내 손으로 직접 생명줄을 끊어야만 했다.

문득 포션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포션이라고 해봐야 실상 회복 마법의 물질화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외려 효과는 훨씬 떨어진다.

'신성력이 가미된 물약'.

물 탄 위스키가 일반 위스키보다 독할 리가 있나.

칼을.

"쯧...."

뽑아야만 했다.

"부디, 좋은 데 가길 빕니다."

스릉―

콰직!

"빌어먹을."

날카로운 칼날이 청년의 목을 그었다.

왜인지 갈라진 살점에서 치솟는 핏물이 눈물처럼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띠링!

[축하합니다!]

[〈특수 퀘스트: 망가진 패잔병〉의 과제를 완료하셨습니다.]

[해당 퀘스트를 진행 중인 모든 지원자의 시스템 화면 내에서 동일한 퀘스트가 삭제 처리됩니다.]

[보상으로 '적당한 경험치' 및 '기술 서적: 탐지', '이동 시간 확장권: 30분', '수호의 조각'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지원 요청 시 부여 되는 이동 시간이 '10초'에서 '30분'으로 자동 확장됩니다.]

[이동 시간 확장권의 적용으로 '대상: 오휘윤'에게 추가 기능 '즉시 전송'이 개방됩니다. '대상: 오휘윤'은 남은 이동 시간에 관계 없이 본인의 의지에 따라 즉각 출전 및 귀환이 가능합니다.]

〈기술 서적: 탐지/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기술 '탐지' 습득

└탐지: 지구 내에서만 사용 가능한 상시 발동 기술로 두 가지 상황에 맞춰 자동 활성화된다.

└탐지 1: 대상자를 기준으로 최대 5km 이내에 '패잔병'이 존재할 시 자동으로 특수 퀘스트 및 미니맵 제공.

└탐지 2: 대상자를 기준으로 최대 50km 이내에 '???'의 출현 시 시스템 메시지 제공.

〈수호의 조각/Magic〉

* 기원을 알 수 없는 신비한 종이 조각. 여러 개를 모으면 무언가 신비로운 일이 벌어질 듯하다.

* 다수의 조각이 필요하다.

* 1/9

그 씁쓸한 기분을 알기나 하는지 적막 가운데 연달아 울려 퍼지는 알림음은 오늘도 짜증 나리만치 밝았다.

띠링!

[축하합니다!]

[〈업적: 특수한 이력을 취득한 자〉를 달성했습니다.]

[달성 조건: 특수 퀘스트 1회 달성]

[보상으로 '경험치' 및 '홀로그램 인터페이스'가 추가됩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홀로그램 인터페이스' 습득에 의거하여 앞으로 휴대 기기의 유무와 상관없이 각종 시스템 화면을 열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문 '오픈/클로즈'를 통해 인터페이스를 끄고 닫을 수 있습니다.]

보상은 또 더럽게 달콤했고.

* * *

'후....'

저녁노을마저 자취를 감춰 버린 오후.

나는 소방차와 경찰차로 둘러싸인 대형 병원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병원은 여전히 빨간 불길과 까만 연기로 가득했다.

재수 없게도....

그래.

정말 하늘이 무심하게도 하필 근처에서 귀환한 생환자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패잔병이었고, 그걸 구조한 구급차가 이쪽으로 와버렸고, 그 영향으로 개시된 특수 퀘스트에 사이코패스가 끼어드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불운들이 한데 뒤섞여 탄생한 최악의 비극은 한결같이 기세를 잃지 않고 주변을 불태우는 중이었다.

"엄마! 엄마아아아!!"

"뭣들 해! 가서 막아!"

"오, 오시면 안 됩니다! 물러나세요!"

"구급차! 구급차!"

그로 인해 펼쳐진 아비규환(阿鼻叫喚)을 지켜보고 있을수록 찡그려진 미간의 골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까지도 눈앞의 광경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갔다. 칼리야스 대륙 내에서나 접할 수 있었고, 여태껏 한 번도 그곳을 벗어난 적 없던… 벗어난 적 없다고 여겨 왔던 그들의 재앙에 휘말려 변고가 일어났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질 않았다.

만약… 정녕 만에 하나 생환자들이 패잔병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고 암울한 그림이 그려졌다.

"안 돼."

그 잔혹하고도 선명한 미래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은 나는 이를 악물었다.

마냥 안전하다고만 인식해 왔던 지구의 오염.

이건 생환자들로 구성된 테러 집단의 설립보다도 수천, 수만 배는 더 위험했다.

몇 번이고 보지 않았던가.

검은 물결에 잠식되어 버린 세계의 결말을.

'…정유환에게 전화해야겠네.'

거기까지 상념을 마친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제대로 깨우친 사태의 심각성.

따라서 언제 어디서 나타나게 될지 모를 또 다른 패잔병의 저지를 위한 본격적인 방어 시스템 구축이 급선무 되어야 하는 바, 그 역할을 정유환에게 제안해 볼 작정이었다.

그가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21세기 현대 사회에서의 진정한 무기는 돈과 권력, 아무것도 갖추지 못해 백날 제자리걸음이나 하고 있을 나와 달리 두 개의 무기를 모두 쥔 정유환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위치였으니까.

더군다나, 예상하건대 그도 거절하진 않을 듯했다.

훗날 외딴섬으로 고향을 옮기고 좁아터진 땅덩어리에 처박혀 평생을 갇혀 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고향을 수호하는 게 얼마나 귀중한 임무인지 알 거고, 나아가 정유환쯤 되는 인물이라면 남의 밑에 들어가기보단 남을 밑에 두고 싶어 하겠지.

- 예, 전화 받았습니다.

"유환 씨, 접니다. 오휘윤."

- 아하! 휘윤 씨! 무슨 일이십니까? 하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유환 씨에게도, 더불어 모든 생환자들은 물론 어쩌면 인류 전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할지도 모를."

57화

저녁 8시.

마침 나도 서울이었고, 정유환의 자택과 회사도 서울이었기에 늦은 밤임에도 어렵지 않게 자리를 마련한 우린 적당한 카페에서 만남을 가졌다.

"아! 여깁니다, 휘윤 씨."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늘 똑같죠. 하하."

비슷하게 도착했는지 막 커피를 주문하던 정유환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고 커피를 시킨 뒤 몇 분.

간단히 지난 며칠 간의 안부를 묻고 답하던 나는 찻잔의 무게가 가벼워질 때쯤 마침내 본론을 털어놓았다.

조금 전에 벌어졌던 사건의 개요를 시작으로 내가 느낀 점들을 아주 자세하고도 상세하게.

"으음."

수백여 명의 생환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 또한 '특수 퀘스트'와 '패잔병'에 관해서는 처음 듣는지 이야기를 전하는 내내 정유환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굳어 갔다.

몇 마디 단어와 몇 줄의 문장만으로도 사안의 중대함을 명확하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휘윤 씨께서 전화를 주셨을 때부터 평범한 내용은 아니겠거니 싶었습니다만… 허. 지구에서의 좀비라니.... 스케일이 엄청나군요."

목이 타는지 남은 커피를 한입에 들이켠 정유환이 허리춤에 걸린 검을 움켜쥐며 끙 하고 앓는 신음을 토해 냈다.

현시점에서 내가 제일 걱정하는 부분.

"어딘가에서는 이미 좀비가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군요."

"그게 문제입니다."

벌써 진행 중이라면 어찌해야 되는가.

이 최악의 가정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이야 영토가 하도 조그맣다 보니 오늘처럼 우연찮게라도 패잔병을 마주칠 기회가 생겼지만, 인접 국가인 중국이나 러시아, 하다못해 일본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비해 몇 배는 넓은 국토를 자랑했다.

만일 이런 곳에 패잔병이 탄생했다면?

백이면 백 머리카락도 발견하지 못한 채 똑같은 일상을 보내다 어느 날 갑자기 수천, 수만 마리씩 불어나는 언데드들을 맞이하게 될 터.

"일단은 그런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현재까진 괜찮은 듯하지만."

"한 번이라도 삐끗하는 날, 그것이 중국이나 인도에서 재앙이 발발한다면… 인류는 칼리야스 대륙보다 더한 지옥을 보게 되겠죠."

내 대답을 기반으로 가상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았는지 이내 혀를 내두르는 정유환.

수십억 단위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을 구사하는 불사의 군대라.

어후.

"막아야겠군요."

"막아야죠, 무조건."

독백과도 같은 대화의 끝자락에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무얼 생각하는 걸까.

나는 말없이 찻잔을 톡톡 두들기는 정유환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계획했던 대로.

"좀비쯤이야 일반인들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그랬듯이. 하나 구울이 되고 그 윗줄의 2차 진화체가 되면 군대가 나서지 않는 한 스킬도 없는 일반인들은 그저 학살 대상이 될 겁니다. 설령 군대가 나선다 하더라도 한국같이 인구 밀집도가 높은 지역은 무작정 밀고 들어올 수도 없겠죠. 실수로 비감염자라도 쏴 죽이는 날엔 앞뒤 분간 못 하는 인권 단체가 나설 테니까."

"그렇…겠죠."

"결국 저희가 막아야 합니다. 먼저 감지할 수 있고, 사냥할 능력도 갖춘 생환자들이. 그러나 알려드렸다시피 무작정 맡겼다간 오늘과 같은 재난만 늘어날 뿐입니다. 길어야 두세 번만 더 반복돼도 생환자들의 인식은 바닥을 칠 거고, 자칫하면 전 세계가 단합해 생환자들을 지구에서 추방시켜 버릴지도 모르죠. 그들의 입장에서 저흰 좀비 양성체, 즉 암세포일 뿐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러니?"

"컨트롤 타워가 있어야겠죠. 생환자의 원활한 일 처리를 비롯해 시민들의 신속한 대피와 무력 허가 사용을 승인해 줄… 정부와의 연결 고리가 되어 줄."

"설마...."

"저는 그 중임을 유환 씨가 맡았으면 합니다. 아시다시피 유환 씨는 일찍이 수백 명의 생환자들과 관계를 맺고 일종의 조합을 구성한 실정입니다. 지금까지야 단순히 더 빠른 아이템의 수급과 정보 획득 등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걸 잘만 이용한다면 금방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 낼 겁니다."

당신이 생환자 방어 체계… 명칭이야 뭐가 됐든 '그 역할'을 맡아 달라고. 내 짧지 않은 제의가 마침표를 찍자 정유환의 낯빛에 당황스럽다는 감정이 서렸다.

기껏해야 차 한 잔의 담소가 이렇게 이어질 거라고 짐작도 못 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 모습을 응시하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물꼬는 텄으니 남은 건 정유환의 몫.

받아들여 줬으면 하고 희망하지만, 거절당한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모색해 봐야겠지.

"잘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다음에 뵙죠."

"저기...."

고심에 빠진 정유환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와 차에 올랐다.

원래 목적지를 가긴 힘든 시간대라 아쉽게도 스콰를 위한 최상등품 간식 선물은 내일로 미뤄야 할 거 같고.

당일 훈련도 끝냈겠다.

기왕 온 김에 쓸데없이 왔다 갔다 하지 않게 근처 모텔에서 자고 갈 요량으로 기어를 붙잡던 나는.

띠링!

촤르르르륵―

"…갑자기 뭔, 아."

별안간 허공에 출력된 푸른 화면에 적잖게 놀라 허리춤을 뒤져 칼을 뽑아 들다 말고 허탈함에 피식 웃어 버렸다.

뭔가 했더니만 특수 퀘스트 클리어 업적 보상으로 지급되었던 '홀로그램 인터페이스'였다.

어느덧 복귀한 지도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지라 조만간 이동되겠거니 추측하고 있었는데, 금일이 참전일이었나 보다.

그나저나.

[지원 요청 들어왔습니다.]

[30분 후 칼리야스 대륙으로의 이동을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30분 00초]

"이런 식이구나."

특수 퀘스트 달성 보상으로 습득한 '이동 시간 확장권' 덕에 나는 정면에 아른거리는 반투명한 창을 살펴보며 어색함 반, 신기함 반으로 감탄사를 중얼거렸다.

지난 몇 달간 커뮤니티를 관망한 결과, 시스템 메시지는 절대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꼭 핸드폰이라는 기기를 통해서만 전송이 됐었다.

혹 핸드폰이 없거나 망가진다면?

몇몇 생환자들이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귀환하는 단계에서 이에 대해 실험을 해보았고, 돌아온 답변은 '핸드폰 없인 메시지를 못 읽는다'였다.

못 받는다…가 아니라 못 읽는다.

저 말인즉슨.

부지불식간에 끌려가, 어떤 임무가 주어졌는지도 모른 채 타 대륙을 방랑해야 된다는 뜻이었다.

어째서 시스템이 핸드폰에 집착하는 건지 그 내막은 아무도 알 수 없으나, 그 뒤로 생환자들 사이에선 공기계마냥 사고 대비용으로 휴대전화를 기본 두세 개씩 챙겨 두는 풍습이 생기기도 했었는데.

"앞으로는 좀 편해지겠네."

이러려고 제약을 두었던 건진 몰라도 나는 한층, 아니 무지막지하게 편해진 환경에 떨떠름하게 웃었다.

성능이 마음에 들수록 이 편리를 얻게 된 계기가 더욱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으니까.

참.

웃프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쯧, 주차장이나 가자."

어렴풋한 청년의 잔상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나는 시동을 걸고 인근 유료 주차장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여유 시간이 생겨 다급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바.

갓길에 주차해 두었다가 이세계를 활보하는 와중에 차가 견인 당하는 참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30분을 꽉꽉 눌러 쓰다 찾아낸 승강기식 주차장에서 넉넉하게 나흘 치를 선불로 결제하고 두 자루의 도검을 챙겨 인적 없는 곳으로 향했다.

CCTV도 비추지 않는 서울 도심의 으슥한 골목길.

"스콰."

화아악―

"푸르르릉!"

"쉿."

조심스럽게 스콰를 소환해 짐 가방에 걸어 두었던 투구를 빼 착용한 뒤.

['세트: 질긴 라우타우루스의 가죽 방어구'를 완성했습니다.]

[세트 아이템 효과가 발동됩니다.]

[현재 장비가 유지되는 동안 '모든 물리 공격에 대한 추가 방어력 +15%' 및 '관통 공격에 대한 추가 방어력 +9%', '내구력 + 7%'가 지속됩니다.]

세트 효과가 정상적으로 적용되는 걸 확인하곤 서서히 차오르는 긴장감을 느끼며 나지막하게 주문을 외웠다.

운이 따른다면 이번 임무가 '에픽 퀘스트'로 연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내 목덜미에 채워진 사슬을 풀어 줄.

그러한 까닭에 흡사 처음 메인 퀘스트를 하달받던 과거처럼 긴장과 흥분으로 심박수가 높아질 무렵.

"즉시 전송."

[특수 기능 '즉시 전송'이 발동됩니다.]

[남은 시간에 관계없이 칼리야스 대륙으로 이동됩니다.]

우우우우웅―

번쩍!

바람결에 흩어지는 짤막한 언령(言霊)을 끝으로 풍경이 단숨에 뒤바뀌었다.

* * *

탁!

타닷―

대지의 딱딱한 촉감을 기점으로 시야가 트인다 싶은 찰나.

"이런."

나는 숲속 공터 한가운데에 이송되자마자 곧장 환두대도를 뽑아 들며 무릎을 굽혔다.

사방에.

"…끄어어어어어!!"

"…으어어어어어!"

구울을 포함한 수십 마리의 언데드들이 득시글거렸으니까. 이를 체크한 즉시 체내의 마력이 일렁이며 칼날에서 벼락이 쳤다.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파지직―

콰과과과광!!

허리를 숙인 채로 놈들의 사각에서 반원을 그리며 쭉쭉 뻗어 나가는 뇌류.

그 황금빛 물결을 따라 굽혔던 다리를 펴며 도약해 제일 가까이에 있던 좀비를 노렸다. 역대각선으로 올려 그어 상반신을 두 동강 내곤 폼멜을 활용해 대가리를 쳐내 전방을 봉쇄하며 소음에 반응해 달려든 구울을 베어 내는 일련의 동작은 무척이나 깔끔했다.

그렇게 착착 언데드 무리를 지워 버릴 즈음.

"후. 끝났나?"

띠링!

조용해지는 공간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울림에 내 시선이 자연스레 하늘로 옮겨갔다.

자, 이제 뭘 하면 되는 거냐.

익숙하게 묻는 무언의 질문에 화답하듯 커다란 페이지가 전방을 수놓았다.

[지금부터 〈메인 퀘스트: 호위〉가 시작합니다.]

〈메인 퀘스트: 호위〉

* 제국 내 수많은 기사들을 배출하며 당당히 손에 꼽는 명문가로 발전해 온 엑세르(exér) 백작 가문의 영애 리하인. 가문의 일원으로써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기사 수업을 받고자 훈련을 나왔던 그녀는 인근 마을서 휴식을 취하다 밀려오는 검은 물결에 가로막혀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그녀 덕분에 그 흔한 자경대도 갖추지 못했던 마을은 언데드들의 손아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나, 촌락 주민들의 안도에도 리하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아비와 형제자매들이 수호 중인 도시 글라디아르(gládĭár) 역시 동일한 위험이 도래했음을 직감한 탓이었다.

결국 리하인은 마을을 떠나 도시로 복귀하기로 결정했다…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촌락 주민들이었다.

아무 일도 없다면 다행이련만, 혹시라도 다시금 언데드들이 들이닥칠 경우 방어 시설은커녕 울타리도 겨우 갖춘 이곳은 그녀가 떠난다면 채 며칠도 가지 못해 무너질 게 뻔했으니까.

"저, 저희도 데려가 주십시오!"

이를 아는 촌장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리하인에게 간곡히 부탁했고, 정의 수호를 제1 원칙으로 삼는 기사로서 자라온 그녀는 촌민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하나, 고작 세 명의 기사와 열댓 명의 병사들만으로는 수십 명의 주민들을 모두 지킨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한 상황일지니, 가서 그들을 도와 리하인과 마을 사람들이 무사히 도시에 도착하게끔 힘을 보태라.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종료 시점'이 존재합니다.

* 특이 사항 2: 살아남은 인원이 많을수록 보상이 올라갑니다.

* 특이 사항 3: 〈서브 퀘스트: 소집령〉을 진행 중입니다.

* 서브 퀘스트 목록 확인 적용자: 서브 퀘스트 목록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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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자아아아아아아!!

"…응?"

웬 남자의 괴성을 BGM 삼아.

58화

리하인인지 리하임인지.

무려 '백작 가문의 영애를 도와 사람들을 도시까지 호위하라'.

미션 내용을 제대로 정독하기도 전에 울려 퍼진 괴성에 나는 우선 스콰부터 불러내 안장에 올랐다.

뭔 일인진 알 수 없으나 스타팅 포인트 근방에서 발생한 소음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퀘스트 대상과 관련됐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가자!"

"히이이이이잉!!"

등자를 힘껏 차며 의지를 전달하기 무섭게 양껏 들썩였던 앞다리로 흙바닥을 찬 스콰가 전방을 향해 힘찬 질주를 개시했다.

간식이고 나발이고.

그냥 이렇게 원 없이 내달릴 공간만 마련해 달라는 양 거침없이 산길을 주파하는 녀석의 등 위에서 나는 허벅지에 힘을 잔뜩 주고 버텨야 했다.

그래도 틈틈이 승마 연습에 매진했던 게 리턴이 오는지 흔들릴지도, 불안하지도 않은 완벽 자세로 몇 분을 나아갔을까.

주위에 우거졌던 초목이 조금씩 사라져간다 싶은 차에.

"젠슨!! 좌측을!"

"예! 아가씨!"

"물러서지 마라!"

"찔러! 찌르라고!"

숲을 가로지르는 널찍한 대로 한복판을 차지하고서 마차와 짐 따위로 방진을 세운 채 족히 백여 마리에 이르는 언데드와 싸우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목도할 수 있었다.

기사와 병사, 농민들로 이루어진 인파.

앞으로 나와 동행하게 될 호위 대상들이었다.

"이야."

나는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곧 길게 탄성을 내질렀다.

다른 것보다 병사들을 지휘, 감독하며 연신 무력을 뽐내는 세 명의 남녀 때문이었다.

중세 시대 기사들의 전유물이라 불리는 풀 플레이트 아머(Full plate armor)와 펜싱 경기에서나 볼법한 1.5m 길이의 얇고 긴 칼 레이피어(rapier)를 착용한 장발의 여인.

창대에 도끼를 결합시킨 할버드(halberd)를 휘두르는 두 명의 남성이 움직일 때마다 햇살을 머금은 은빛 광채가 천지를 비추는데, 어째서 기사를 두고 중세 서양의 꽃이라 지칭했는지 단번에 납득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볼거리는 또 있다.

"정규군인가? 꽤 괜찮네."

기사들의 지휘를 받으며 언데드들을 베어 넘기는 열댓 명의 병사들.

그들은 여태껏 봐왔던 통상적인 칼리야스 대륙인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무장을 자랑했다.

구울의 손톱마저도 훌륭히 막아 줄 사슬 갑옷에 투박하긴 하더라도 방호력은 확실한 철제 투구, 두터운 가죽 상·하의에 건틀릿과 군화.

특히 잘 빠진 창에 견고한 원형 방패는 저들이 정예병임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터라 정말이지 감상할 맛이 났다…라고 평가를 내뱉던 그때.

"누구냐!"

막 다가오던 좀비의 대가리를 부숴 버린 기사 하나가 내가 서 있는 쪽을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랍티오도 그러더니 전면에 나서지도 않은 데다가 앞쪽을 성인 두셋은 너끈히 들어갈 아름드리나무가 날 가려주고 있는데도 그걸 뚫고 날 포착한 것 같았다.

심지어.

"카르켈!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쓰지 마라!"

"아, 알겠습니다. 아가씨!"

고함을 친 기사는 물론 나머지 두 명도 전부. 역시나 진짜배기들의 인지력은 더할 나위 없이 대단했다.

기습은 꿈도 못 꿀 탐지 범위.

이거 참.

실전만 단련할 게 아니라 훗날 인간과의 교전을 고려해 미리미리 은신 류의 스킬이나 파스마(phasma) 류(流)처럼 상대의 감각을 속이는 장비를 구비해 둬야 할 듯싶었다. 내가 먼저 감지하느냐, 내가 먼저 감지당하느냐.

전쟁의 주도권은 언제나 '정보'에서 비롯되는 법이니까.

음.

꽈아아아악―

"오케이, 그럼 나도 가볼까?"

머릿속에 또 하나의 다짐을 새긴 나는 짧게 주억거리며 환두대도를 움켜쥐고는 땅을 힘차게 박찼다.

감상이 끝났으니 슬슬 참전을 알릴 차례였다.

타앗―

툭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발판 삼아 시원하게 대기를 가르며 전장에 난입한 나는 대로의 가장자리를 중점적으로 노리며 격전을 알렸다.

"우선 한 놈."

추락하던 자세 그대로 내리긋는 일격. 일도양단의 칼날이 좀비의 등판을 부수고 무자비하게 상체를 썰어낸다.

끊겨 나가는 척추 너머로 드러나는 또 다른 좀비의 몸뚱어리.

무심코 마력을 끌어내려다 참고서 백스탭을 밟아 안전거리를 확보하며 차근차근하게 언데드들을 사냥해 나갔다.

마력은 최후의 보루.

정유환들과의 파티 공략처럼 내 뒤를 받쳐 줄 동료가 있다면야 펑펑… 아니 그래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낭비는 금물이지만, 여하간 예상하지 못한 위기를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스킬은 되도록 아껴두고.

"흐읍, 차!"

후우우우우욱―

서걱!

순수한 육체 능력만으로 외곽을 뚫고 전열을 박살 낸다.

뒤늦게 내 개입을 알아차린 언데드 놈들이 연거푸 뒤를 돌아봤으나 전열이 망가지는 게 더 빨랐다.

* * *

"끄어어어어어어!!"

"그래, 그래."

후우우욱―

콰직!

도신에 흐르는 서슬 퍼런 예기(銳氣)가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구울의 목덜미를 끊어 놓던 순간.

"…정지."

스윽―

착!

승전의 환호성이 울려 퍼져야 할 시기에 안도의 한숨은 고사하고 누군가의 단호한 음성이 귓가를 자극하는 동시에 묵직한 바람이 일렁인다 싶더니 검붉은 핏물로 뒤덮인 할버드의 도끼가 어느새 내 목덜미 앞에 닿았다.

마치 한 걸음이라도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단박에 목을 잘라 버리겠단 아주 진득한 살기를 담고서.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일까?

이 난데없는 적대 행위에 이해라는 걸 해보려고 멈칫하는 동안, 할버드의 공격적인 태도에 호응하듯 도처에서 날아와 날 찌를 기세로 전신을 조여 오는 열댓 자루의 창날.

나는 그 모든 적의를 한 몸에 받아내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

무겁지도 않은지 한 손으로 할버드의 무게를 감당하며 말없이 나를 주시하는 기사의 안광이 보였다.

이름이… 카르켈이라고 했던가?

안면부가 투구에 가려져 표면에 실린 감정은 읽을 수 없었으나, 도끼날을 타고 뿜어져 나오는 살의를 보건대 결코 긍정적인 방향은 아님은 분명했다.

"뭐 하는 짓이지?"

이걸 어찌 대응해야 할까.

아무리 좋게 좋게 해석을 해보려고 해도 도저히 웃어넘기기 힘든 상황에 미간을 찌푸리길 잠시.

"그대는 누구인가."

후면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피가 잔뜩 튄 투구를 벗으며 레이피어에 묻은 피를 털어내는 여인, 엑세르 백작 가문의 영애, 리하인이었다.

중세 서양과 비슷한 배경의 칼리야스 대륙에서도 흔치 않은 분홍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걸어오는 그녀의 첫인상은 '귀족' 그 자체였다.

기사 수업의 영향인지.

손짓 발짓 하나하나에 절도가 있는 여기사는 단지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그녀의 신분이 귀족이라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평민의 옷을 빌려 입는다 해도 가려지지 않을 기품이라고 해야 하려나? 미모도 제법 뛰어나 어지간한 이들은 명함조차 못 내밀 만큼 예쁜 편.

다만, 내게는 딱 거기까지였다.

여자 얼굴에 정신 팔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다시 묻겠다. 그대는 누구인가."

기사 집안이라 그런가.

거의 175cm에 달하는 큰 키를 바탕으로 나와 거의 대등한 눈높이에 서서 질문을 던지는 리하인.

담담하되 경계심 어린 그녀의 눈빛을 대면하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내가 불청객이라는 걸.

'그렇네.'

착각하고 있었다.

폰스 마을과 페루스 마을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으레 '칼리야스 대륙인=아군'이라고 인식했다.

하지만 그건 당시 두 마을의 주민들에게 어린아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의 생존 문제에 봉착했기 때문일 뿐.

저들은 달랐다.

백여 마리의 언데드?

위협적이긴 해도 기사와 병사들이 전력을 다한다면 방금처럼 단 하나의 사상자도 없이 승리를 쟁취해 낼 수 있다.

즉, 외부인의 유입이 엄청나게 시급하단 의미가 아니란 얘기. 도리어 손발을 잘 맞췄던 집단에 트러블을 일으킬 껄끄러운 대상일 따름이지. 게다가 이 무리의 중심에는 기사이기 이전에 '귀족 가의 영애'라는 고귀한 계급의 핏줄이 끼어 있는 바.

따라서 느닷없이 등장한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건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이었다.

'좋은 걸 배웠네.'

주어진 정황들을 조합해 정리를 마친 나는 비로소 알게 된 진실에 작게 끄덕였다.

개안을 한 느낌이었다.

'설령 퀘스트상의 아군으로 표기될지라도 실제로는 적대적일 수 있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진리를 가슴 깊이 새기며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돌아가는 사정은 파악이 끝났으니, 오해를 풀고 바로 잡아 줘야지.

내가 누구고, 당신들을 왜 찾아왔는지.

어떻게?

"나는."

방법이야 딱히 어려울 게 없었다.

"당대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요."

스으―

"교단의 소집령에 응하고자 수도원으로 향하는 중이요."

〈교단의 의뢰서/Normal〉

적당한 신분과 그럴듯한 증거면 충분했다.

* * *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파지직―

꽈르르르르르릉!!

"꺄아아아악!!"

"으으악!"

"시, 신이시여!"

거대한 포효를 동반하며 창공을 찢어발기는 낙뢰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머리를 싸매며 기겁했다.

나는 격렬한 흔적을 남기며 소멸하는 뇌기를 흡족하게 관망하다 좌측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곳에는 세 남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경악한 기색이 역력한 기사 양반들이 서 있었다.

"지, 진짜였어...."

"젠슨 형님, 제가 똑바로 본 게 맞습니까?"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아가씨."

"이걸로 됐습니까."

"아아! 확인, 확인했다. 그대의 말을 믿겠다. 나는 엑세르가의 리하인 폰 엑세르. 그대를 의심했음에 사과를 청하며 또한 그대의 도움에 감사를 표한다."

"아가씨를 모시는 젠슨 라트리엘이요. 도와주어 고맙소."

"카르켈이요.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교단의 의뢰서로도 끝내 경계를 풀지 않던 셋은 구름 위로 솟구쳐 사라진 벼락을 맞이하고 나니 완전히 의심을 거두었는지, 내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간략한 통성명과 함께 심장 부근에 손을 얹고서 목례를 취했다.

아마도 칼리야스 교단의 성호처럼 기사들 간의 인사 방식인 듯했는데.

"오해할 만한 일이었으니 문제 삼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오휘윤이라고 합니다."

뭐가 댔든 바락바락 자존심을 챙겼다면 모를까.

좋게 좋게 풀린 분위기를 굳이 망가뜨릴 필요는 없기에 나도 눈치껏 비스무리한 제스처를 취하며 마주 목례로 답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유해진 공기.

드디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 나를 신기한 눈으로 힐끔힐끔 쳐다보며 바닥에 주저앉아 쉬거나 마차와 수레를 정비하는 등 제 할 일을 하러 간 사이.

나도 휴식이라는 명목하에 가장자리로 살짝 빠져나와 부득이하게 미뤄 두었던 퀘스트 정독을 위해 시스템 창을 오픈하려던 그때.

저벅―

저벅―

"저기."

"...?"

"혹시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는가."

한 인형이 내게 다가와 발치 앞에 멈춰 섰다.

급작스런 부름에 눈길을 드니, 리하인이 무척이나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띠링!

맑은 종소리와.

['대상: 리하인 폰 엑세르'가 강자를 발견했습니다.]

[〈서브 퀘스트: 끝없는 호승심〉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메인 퀘스트: 호위〉에 〈서브 퀘스트: 끝없는 호승심〉이 추가됩니다.]

반짝이는 메시지를 대동하고서.

59화

[ 대련 ]

〈서브 퀘스트: 끝없는 호승심〉

* 리하인 폰 엑세르.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기사 가문의 영애로 태어난 그녀는 자신의 핏줄이 어디인지 알려 주기라도 하듯 어릴 적부터 검을 다루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선보였다.

다섯 살. 이제 막 뛰어놀 시기에 기본기를 떼었으며, 열 살이 되던 해엔 대련이라는 제한적인 조건이 걸려 있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사병 둘을 쓰러뜨렸으며, 열다섯에는 당당히 에스콰이어 시험을 통과해 준기사의 자격을 취득해 냈다.

그녀가 이토록 빠르고 놀라운 성장을 이뤄 낼 수 있었던 데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호승심'이 주요했다.

자신보다 강한 자라면 무례를 무릅쓰고서라도 대련을 청해 검을 겨뤘고, 패배할 경우엔 삼 일 밤낮을 수련에 매진해 부족한 점을 고쳐 기어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한 과정이 반복되며 귀족 가 여식의 흔한 관례대로 가문의 위세를 드높여 줄 정략 결혼용 상품에 불과했다. 운명에서 한때 칼리야스 대륙을 주름잡았던 여인 '백 년 전쟁의 여왕'의 뒤를 이을 가장 유력한 후보자로 불리게 된 그녀는 오늘도 새로운 강자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오늘 당신을 만났지."

하여 청하건대.

나와 검을 겨뤄 주겠나?

(0/3)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대상: 리하인 폰 엑세르'와의 세 번의 대련 '성적'에 비례하여 보상이 달라집니다.

* 특이 사항 2: 승/패/무 ⊂ 0/0/0

"이그니스 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과 검을 겨뤄 보고 싶다. 응해 주겠는가?"

정중한 대련 신청을 기점으로 촤르륵 펼쳐지는 홀로그램 화면에 나는 리하인과 허공을 번갈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또 어쩐 일인가 했더니만, 설마 서브 퀘스트 때문이었을 줄이야.

타이밍이 참으로 공교로웠다.

때마침 퀘스트와 관련해서 재독(再讀, 다시 읽다)하던 중이었는데 말이지.

'그나저나 대련이라. 특이한 미션이네.'

혹시 알고 찾아온 건가 하는 농담을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제풀에 피식거리며 임무 내용을 확인했다.

리하인이 바라는 소원은 세 번의 대련이며 보상은 성적으로 결정된다.

그다지 불편한 조건은 없었다.

외려 패배하더라도 보상을 준다는 이야기였으니, 대련 중에 다치거나 피로가 과도하게 쌓여 메인 퀘스트에 피해가 가는 주객전도적인 실수만 범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거절할 구석이 전혀 없는 종류였다.

"좋습니다."

해서 미적거릴 거 없이 곧장 승낙했다.

진행 방식이나 보상안, 이모저모 다 차지하고서라도 정식 기사 서임을 받은 실력자와의 대련이었다. 안 그래도 아득바득 돈까지 써가며 트레이닝에 열을 올리는 와중인데, 이런 특급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정말인가?!"

"리하인… 경?"

"그리 부르게."

"그러지요. 아무튼 리하인 경과 같은 실력자와의 대련이라면 저도 환영이니 말입니다."

"좋군. 좋아."

"단."

"단?"

"저는 그저 운이 좋게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가 되었을 뿐, 실력은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그 점을 감안해서 임해 주시길 바랍니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뼈가 박살 나는 지경만 아니라면 잔상처야 상관없지만, 칼리야스 교단의 의뢰를 수행하는 직무 역시 굉장히 중요한 일이니까."

"아아, 그리하겠네."

리하인은 내 시원시원한 응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하단 표정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허리춤으로 손으로 가져갔다.

답변도 들었으니 지체할 거 없이 당장 칼춤을 추고 싶은 모양인데, 다소 급작스럽기는 하나 나도 지금의 컨디션이 그리 나쁘지 않은지라 환두대도를 챙겨 일어났다.

애당초 서브 퀘스트는 반드시 메인 퀘스트가 클리어 되기 전에 선행돼야 하는 법.

고로,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예서 첫 번째 대련을 하고 갑시다."

"그리 해주겠는가?!"

"앞선 약속만 지켜주시면 됩니다."

"알겠네!"

나는 드릉드릉 출발 직전의 스포츠카와 같은 열의를 보이는 라하인을 데리고 대로 후편으로 향했다.

이에 급히 따라붙는 카르켈.

혹여 언데드 놈들이 또 출현할지도 모른다는 판단하에 휴식 장소에서 고작 30m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이라 구태여 수행을 나설 정도는 아니었지만, 잠잘 때와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곤 24시간 밀착 보호하는 것이 보디가드의 숙명.

하물며 대련이라고 해도 생면부지의 외간 남자에게 귀족 영애를 홀로 딸려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만큼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는 우리가 자리를 잡자 10m 남짓한 간격을 두고 언제든 끼어들겠단 자세로 할버드 중단을 쥐었다.

필시 대련 중에 사고가 발생할라치면 즉각적으로 개입해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끔 방지하려는 거 같았다.

'이러면 마음껏 날뛰어도 되겠는데?'

어차피 나보다 뛰어난 실력자인 마당에 안전 요원도 파견 나왔겠다, 최선을 다해도 되겠다는 심정으로 도집을 붙들고 환두대도를 뽑아 들었다.

그에 맞춰 똑같이 검을 빼 드는 리하인.

챙―

레이피어 특유의 낭창거리는 소음이 귀를 스쳐 지나간다.

다시 봐도 신기한 형태의 레이피어.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무기인 탓에 어떤 식으로 맞서야 할지 공략법이 생각나질 않는다. 그나마 떠오르는 라고는… 검면을 쳐내려고 하다가 도리어 휘어지는 칼끝에 당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된다는 것?

그 외에는―

"그럼, 시작하겠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론을 되새기던 나는 리하인의 호령에 상념을 깨고 현실에 집중했다.

서로 죽고 죽이는 혈투도 아닌데, 사전 준비가 좀 덜 되면 어떠냐.

"그럽시다. 모르는 건 붙어 보면서 직접 배워 보자고."

짧게 의지를 다진 직후.

파앙―

슈우우!

"...?!"

무지막지한 속도로 날아든 칼침이 내 볼을 갈랐다.

본디 레이피어는 알려진 것과 다르게 공격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한 손으로 쥐고 싸우는 특성으로 인해 양손 검이 훨씬 쾌속한 편이라 대충 매체에서처럼 가공할 스피드를 보여주기란 힘들다고 하더라.

틈틈이 조사한 바로는 그랬는데.

서걱―

주르르륵!

"…이거 맞아?"

나는 겨우 피한 칼끝을 노려보며 당황스러운 감정을 여지 없이 드러냈다.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새에 치고 빠진 빛줄기.

인지력이 높지 않았다면 반응은커녕 단 일격만에 사망 선고가 내려졌을 거란 사실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이게 진짜 기사의 힘인가?

꽈아아아아악―

"최선…이 아니라 전력을 다해야겠는데."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죽는다. 약간이라도 방심을 하면 죽는다. 살짝이라도 정신을 팔면 죽는다.

이 악물고 눈 부릅떠야 한다.

볼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을 닦아낸 나는 도병이 부서져라 손아귀에 힘을 주며 전신의 근육을 당겼다.

"다시 가겠다."

이런 내게 친절히 공격 신호를 주는 리하인.

강자의 조롱인가?

음.

그건 아닌 듯했다.

"이번에는 그대의 반격을 보고 싶다! 하!"

리하인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이 대결을 온전하게 즐기고 있단 증거였다.

파아아아앙!

슈욱―

경고 이후 1초.

발바닥이 대지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5m가량 벌어졌던 간극을 좁히며 재차 날아드는 칼날.

전과 달리 진심으로 임한 덕분일까?

일순 느릿해진 세계 속에서 육감의 영역을 통해 레이피어의 궤적이 느껴졌다.

목표는 심장.

이를 직한 즉시 늘어뜨려 놓았던 도신이 좌상단으로 솟구쳤다.

카앙!

'막았다!'

묵직한 충격파을 토해 내며 맞부딪치는 두 자루의 칼.

그러나.

좋아하기는 일렀다.

티이잉―

빠악!

"큭!"

우려했던 대로 중단에 가해진 대미지를 이용해 초승달처럼 접힌 칼끝이 내 팔뚝을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질긴 라우타우루스의 가죽 방어구'가 팔뚝을 보호하고 있어 살점이 잘려 나가는 꼴은 면할 수 있었지만, 마이너스 1점이라는 사실은 매한가지였기에 잔뜩 미간을 찌푸린 나는 땅을 박차며 한순간에 공세를 취했다.

'…가만히 있으면 불리하다.'

꾸우우욱―

가마니가 되어 신명 나게 두들겨 맞느니, 질 때 지더라도 한 대는 때리고 지련다.

그게 내 각오였다.

후우우욱!!

"하앗!"

나지막하되 결연한 기합을 내뱉으며 손목 스냅만으로 연격을 시도하던 리하인의 정면을 파고 들어간다.

준기사급 못지않은, 어쩌면 그보다 빠를지도 모를 일자 돌파.

"호오!"

리하인이 보기에도 괜찮았는지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하나 그게 전부였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백스탭을 밟으며 검을 휘두르자 흡사 채찍인 듯 곡선으로 꺾어지며 전방을 가로막는 칼날.

레이피어는 찌르기에 특화되어 있으나 엄연히 '양날' 검. 이는 곧 베기 또한 가능하다는 뜻이었고, 리하인은 그 점을 적절하게 활용해 일종의 검막(劍幕)을 만들어 내 돌진을 가볍게 저지했다.

마력이 가미 되지 않은 까닭인가?

실제로 마주한 검막은 무협지에서 읽던 표현과 다르게 뚫으려고 작정한다면 어게든 뚫을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으나.

'쯧!'

나는 혀를 차며 돌격을 포기하고 서너 걸음을 물러났다. 무작정 억지를 부렸다가 온몸이 베어 핏물을 쏟아내는 미래가 보인 탓이었다.

정식 기사....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 까다롭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파직―

파지직―

민천을 다 끄집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한 방은 먹여 보고 가야지.

"안 그럽니까?"

"기세가 달라졌군. 드디어 보게 되는 건가."

"조심하시죠. 다쳐도 책임 안 집니다."

"오게! 나는 준비 됐네!!"

짤막한 대화의 마침표가 찍힌 찰나에 나는 체내의 마력을 폭발시켰다.

리하인이 원하는 대로 벼락을 불러오기 위하여.

불현듯 이러다 그녀가 다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뇌리를 스쳤으나, 자신감이 철철 흐르는 걸 보니 과감하게도전해도 상관없으리라.

음.

고민은 짧았고, 선택은 신속했다.

파직!

"하아!"

이그니스(ignis) 류(流).

직뢰(直雷).

탁―

콰아아아아앙!!

* * *

"정비가 끝났으면 출발한다!"

"예! 카르켈! 선두로 나서라."

"알겠습니다! 콜먼과 페트릭이 좌우를 맡는다."

"충!"

"충!"

대강 두 시간여를 쉬며 체력을 회복하고 난 후 재기된 전진.

카르켈과 선임 병사로 추정되는 두 명이 전열을 이끄는 행렬이 도시 글라디아르(gládĭár)로의 출발을 시작하는 동안.

"아오, 더럽게 아프네."

나는 공간이 남은 수레에 얹어져 치료에 전념하는 중이었다.

원인은 옆구리에 길게 새겨진 흉물스러운 창상.

갑옷 상·하의의 틈새를 정확하게 비집고 들어와 낙인을 찍고 간 레이피어의 칼날이 빚어낸 상처 때문이다.

아직도 당시만 회상하면 멍했다.

거짓말 좀 보태서 초속 이동에 가까운 직뢰를 발현해 덮쳤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회피 되레 내 몸뚱어리를 찢어내던 리하인의 유려한 동작.

그녀의 움직임은 꼭 한 마리의 '뱀' 같았다.

단순한 착각이었는지 파스마(phasma) 류(流)처럼 환상을 선사하는 엑세르가문 고유 검술의 여파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단언하건대 리하인의 육신을 휘감은 뱀을 깨부수지 못하는 한 그녀를 쓰러뜨리기는 불가능할 성싶었다.

"그러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데...."

"전방! 전방에 적 출현!! 숫자는 일백 이상!"

"음, 마침 잘됐네."

턱을 긁적이며 고심하던 나는 멀리서 울려 퍼진 외침에 환두대도를 쥐고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허리가 완전히 낫지 않아 거동이 편치 않았으나 가야 했다.

"젠슨! 병사들을 지휘하라!"

"예!"

"가자! 카르켈!"

"충!"

"거기냐."

정보 수집.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리니. 승률을 1%라도 높여보기 위해 리하인의 검술을 철저히 분석해 볼 계획이었다.

삑!

[녹화를 시작합니다.]

가방에서 꺼낸 현대 문명의 도움을 받아서.

6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