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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 100-110

100화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

투입된 생환자만 수백 명에 달하는 이 초대형 퀘스트의 난이도는 결코 쉽지 않은 편이었다.

역행의 제단과 콥스 골렘에 세이렌 등.

3차 진화체가 최초로 출현하는 구간이기도 했거니와 뭐니 뭐니 해도 적병의 숫자가 물경 일만을 넘어가는 전대미문의 전쟁인 까닭이었다.

더군다나.

콥스 골렘의 경우에는 단 하나만으로도 생사가 요동치는 판국인데, 판세에 따라서는 최대 세 마리 이상으로 늘어나는 패턴이었기에 거짓말 한 점 안 보태고 순수하게 팩트로 이제껏 겪어 본 그 어떤 퀘스트보다 빡센 임무였다…만, 사실 진정으로 생환자들을 힘들게 하는 건 아예 다른 곳에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칼리야스인'이었다.

제 손으로 도시를 수호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한목숨 바치러 전장에 나선 엑세르(exér) 백작가의 수장과 혈족들과 가문의 최정예 병력이라는 세르펜스 기사단이 이끄는 현역이고 예비군이고 가릴 거 없이 싹싹 긁어모아 편성된 천오백여 명의 군대. 여기에 그들을 지원하겠다고 나선 일반 시민들과 언데드에겐 사신이나 마찬가지인 폴람마(flamma) 수도원의 사제들까지.

오직 활약도로만 성적이 책정되는 생환자들의 입장에선 전투에 참여하는 '경쟁자'가 많아도 너무 많은 것이다.

게다가 공격 범위도 상당히 한정적인 필드였다.

성벽 왼쪽에 있거나 오른쪽에 있거나 중앙에 있거나.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더욱 부딪치게 되고, 공적치 획득은 더더욱 어려워진다.

내가 세르레퀴로(serrequíro)에 입단하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딱히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추천 형식으로 조장 자리를 내어 준 데다 거절하면 엑세르 가문 사람들과의 호감도가 하락한다는 조건도 분명 영향은 있었지만, 뭣보다 한정적인 자원을 갖고 싸우느니 다소 불안한 요소들이 존재 하더라도 확실하게 전공이 쌓일 야생으로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필시 하극상 파벌이나 한용국도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으리라.

이렇듯 자발적으로 도시를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길 만큼 포화 상태에 이른 실정에서 한눈에 봐도 황금빛이 줄줄 흐르는 특수 몬스터가 소환된다면 생환자들은 어찌 대응할까.

굳이 물어볼 것도 없다.

"저건 내 거다!"

"좋아, 저걸로 복구하는 거다!"

"이봐요, 우리 보상 나누기로 하고 같이 공략하는 거 어때요?"

안 봐도 비디오.

생환자들은 콥스 골렘이 나타난 시점부터 바윗덩어리가 날아와 병사들이 맞아 죽든 말든 벌게진 눈으로 시체 거인이 제발 성벽에 다가와 주기만을 바랐을 거다.

사정거리 내로 들어오기만 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수급을 베어 자신의 공적치로 만들고자.

그렇기에 나는 컨디션이 엉망인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조사단을 두 그룹으로 쪼개 가면서까지 일을 벌였다.

독기가 바짝 오른 아귀들에게 살이 오동통하게 오른 먹잇감이 다가가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빼앗기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무척이나 리스크 있는 결정이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전략대로만 된다면, 십 수명의 수호사제들이 한꺼번에 나선 이상 3차 진화체급 개체라도 버티지 못할 거란 믿음 때문이었다.

나아가.

이 계획의 교집합이 되어주는 리하인 폰 엑세르를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도시 글라디아르(gládĭár) 수성군 총사령관의 딸이자, 세르레퀴로(serrequíro) 조사단 단장의 동생.

그녀라면 징검다리 역할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수행해 주리라고.

해당 과정에서 엑스케트 몰래 그의 이름을 파는 등 추가적인 신사답지 못한 행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내 선택은 옳았다."

단언할 수 있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이번 퀘스트에서 행한 모든 시도들은 결국 정답으로 가는 경로였을 뿐이라고.

그리고 이제.

"그워어어어어어!!"

이 길었던 스토리에 방점을 찍을 차례였다.

스으으윽―

"잘 보이시나 모르겠습니다."

신성력의 심판을 받아 온몸이 불타 버린, 겁화의 지옥 끝에서 면상만 겨우 건진 채로 연신 비통한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콥스 골렘.

나는 놈을 바라보다 문득 리하인과 농담 섞인 약속을 가졌던 게 기억나 슬그머니 성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아아아악―

화아아악 ―

일대를 가득 메운 새하얀 불길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성벽 중앙에 기사의 형상은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저게 리하인이려나?

"뭐, 아님 어쩔 수 없지."

기왕이면 직관 약속을 지키고 싶지만.

"그워어어억… 그워어어억!"

더 놔뒀다간 '빛의 방패'로도 커버가 안 될 거 같아서 말이야.

좋은 구경시켜 주겠다고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칠 순 없으니.

파직―

파지지직―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다음에 직접 잡아 보슈.

"하아!"

후우우우욱―

콰직!

[썩은 것들로 빚어낸 거짓 생명, '콥스 골렘(corpse golem)'을 처치했습니다.]

[축하합니다!]

[〈10인 한정 업적: 최초의 콥스 골렘 사냥꾼〉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많은 경험치' 및 '기술 서적: 프레셔', '마력 전이석: 대형', '거인의 심장'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 * *

누군가 말했다.

흐르는 강물의 방향을 바꾸는 데엔 자그마한 변수 하나면 충분하다고. 우리는 그걸 두고 보통 물꼬라고 부른다.

그래.

콥스 골렘의 사망이라는 물꼬가 트인 도시 글라디아르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한순간에 180도 변해 버렸다.

생환자들이 참전한 이래로 가장 탐내던 상품마저 웬 뚱딴지같은 놈에게 탈취당한 탓이었다. 애당초 주인 없는 물건이라 잡는 사람이 임자인 게임이었지만, 자세한 내막이야 별로 중요치 않았다.

현재의 생환자들에게 있어서 제일 중대한 포인트는 오로지 딱 두 가지.

1. 공적치가 부족하다.

2. 악령도 골렘도 잃은 언데드 무리가 면전에서 어슬렁거리는 중이다.

자, 지금 필요한 건?

"비, 비켜어어어!!"

"저건 내가 먼저 찜했다고!"

"화살! 화살 가져다준다며!"

"나와! 나오라고!"

속도.

막판 스퍼트였다.

공적치를 단 1포인트라도 더 챙겨보겠다고 동료고 뭐고 안중에도 없이 창칼을 뿌리는 생환자들.

심지어.

"백작! 백작님! 성문을 열어 주십쇼!"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성문을 열어 주십쇼!"

몇몇 이들은 성문 개방을 외치기까지 했다.

대체로 검이나 도를 쓰는, 제한적인 사거리로 인해 물자 운반 따위의 잡다한 업무나 보고 있던 근접 딜러들.

그들은 지난 며칠 내내 몸을 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현장을 비판하며 루데오 백작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성문만 열어 주면 남은 언데들은 모조리 쓸어 버릴 테니, 우리 같이 날카로운 명검 보도를 아끼지 말라고.

이에.

"허, 반격의 때가 돌아왔는가."

루데오 백작은 군말 없이 생환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 역시도 될 수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재난을 하루라도 빨리 청산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마침 병사용 보급품 외에는 크게 바라는 것도 없던 용병들이 몸소 나서 준다고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

외려.

"이르네아스."

"예."

"성문을 개방하고 기사단을 소집하라."

"충!"

이참에 전쟁을 끝내 버릴 작정으로 대종전군을 창설하고 기사들을 대거 포함해 생환자들과 나란히 출병시켰다.

밖으로 나간다는 것.

이는 '전염'이라는 재앙과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위험천만한 행위였으나 루데오 백작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칼리야스의 빛이 어둠을 몰아내리라!"

"칼리야스의 빛이 어둠을 몰아내리라!"

"칼리야스의 빛이 어둠을 몰아내리라!"

그동안 악령의 저주를 막아 내느라 매번 뒤로 물러나 있어야만 했던 사제들이 본격적으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 준 덕분이었다.

사제라고 만능은 아니지만.

장장 십여 일 만에 철창을 벗어난 인간 연합군은 자유를 잃은 채 갇혀 지내야 했던 설움을 해소하기라도 하듯 파죽지세로 언데드 군단을 짓밟으며 삽시간에 전쟁의 승기를 가져오는 중이었다.

* * *

- 우와아아아아아아!!

- 다 쓸어버려!!

- 뒤져라, 이 새끼들아!

"어후, 다들 발성도 좋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같은 시각 성문 근처.

종전군의 호위를 받으며 콥스 골렘의 수급을 들고 당당히 도시로 복귀한 우린 열정 넘치는 함성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벽에 기대앉거나 바닥에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미 한 번 극한으로 치달았던 육체를, 꼴랑 절반가량 회복되었다고 정양을 멈추고 다시금 탈진 직전까지 밀어붙인 탓인지 크라덴을 빼고는 저 엑스케트마저 한계에 도달한 듯 안전이 확보되자마자 그대로 뻗어 버렸을 정도.

이 지옥 같았던 여정의 끝자락에서도 변함없이 활동적인 인물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쉬시지 않고 어딜...."

"제가 우연찮게 받아 놓은 서브 퀘스트가 남아 있어서 말이죠."

"허, 정말 대단하십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서브 퀘스트가 낳은 괴물, 인간 오휘윤이었다.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의 서브 퀘스트를 열람합니다.]

1. 직급 쟁탈 / 부분 달성

2. 용맹한 조사단 / 완료

3. 가장 높은 전공 / 자동 진행 ⊂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 성공 시 자동 완료

4. 편지 전달 / 진행 중

5. 성벽 보수 / 경쟁 ⊂ 타 지원자가 현재 진행 중

6. 주민용 식량 및 물자 배급 / 경쟁 ⊂ 타 지원자가 현재 진행 중

7. 청혼 / 삭제

8. 소소한 사냥 내기 / 삭제

9. 소소한 사냥 내기(2) / 소소한 사냥 내기(1) 달성 시 진행 가능 ⊂ 퀘스트 제공자의 '사망'으로 삭제 처리됨

10. 아이들의 웃음소리 / 종료 ⊂ 타 지원자에 의해 완료됨

11. 예비군 훈련 교관 / 경쟁 ⊂ 타 지원자가 현재 진행 중

12. 징발 / 경쟁 ⊂ 타 지원자가 현재 진행 중

13. 도제 찾기

* 수행 가능한 서브 퀘스트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리하인과의 대련부터 도시 대장간의 도제 찾아주기까지.

내 손길이 닿기를 고대 중인 미션들이 한가득이었다. 이런데 어떻게 쉴 수 있겠는가. 돌아가는 전황으로 보건대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인 퀘가 종료될 듯 보였기에 지치고 피곤해도 움직여야만 했다.

"스콰."

"히이이잉!"

"잘 좀 부탁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으라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대신해 스콰의 안정에 오른 나는 미니맵을 따라 도심을 활보하며 차근차근하게 남은 퀘스트들을 클리어해 나갔다.

"…누, 누구시라구요?"

"아드님 성함이 제임스 맞으시죠? 제임스의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본인은 잘 있다고, 곧 돌아갈 테니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달라며 말입니다."

"예? 대장간에 가서 도제가 되라구요?"

"하루만 해주시면 이 금액을 드리겠습니다."

"타, 탈렌(talén, 금화)?"

"어쩌시겠습니까?"

"하죠! 당장 하겠습니다!"

때로는 정공법으로, 때로는 편법으로.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편지 전달〉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서브 퀘스트: 도제 찾기〉의 과제를―]

주어진 과제들을 하나둘 달성해 갈 즈음 나는 이 기나긴 여정의 출발점이자 종착지가 될 한 여인의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어디 갔나 했더니, 잠이라도 자고 왔나?"

리하인 폰 엑세르.

분홍 머리칼이 인상적인 여기사였다.

101화

[ Hero ]

무언가의 처음과 끝이 같을 때 그걸 '수미상관'이라고 하던가?

"어디 갔나 했더니, 잠이라도 자고 왔나?"

"푸르르릉."

"그 말은, 그때 그 녀석이군."

나는 투구를 옆구리에 끼고서 스콰에게 아는 체를 하며 걸어오는 리하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어버렸다.

공간, 분위기, 태도.

같은 거라고는 사람이 전부였지만, 왜인지 우리의 첫 만남이 오버 랩 된 까닭이었다.

당시에 어땠더라.

'그대는 누구인가.'

열심히 도와줬더니만 보답은커녕 칼날부터 들이밀고는 신원을 밝히라며 예비 암살자 취급을 받았었던 게 기억난다.

이후에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라는 타이틀과 교단의 의뢰서를 통해 약간이나마 오해를 해소했지만.

'저기.'

'...?'

'이그니스 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과 검을 겨뤄 보고 싶다. 응해 주겠는가?'

다짜고짜 대련 신청이 들어왔었지.

아직도 그날의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반짝이는 눈동자와 단단히 쥔 주먹, 호쾌한 승낙에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장난감을 갖게 된 아이처럼 즐거워하던 리하인의 전체적인 그림은 가히 투쟁의 화신 그 자체였다.

승낙해주지 않으면 떼를 써서라도, 귀족의 지위를 악용해서라도 반드시 결투장으로 데려갈 것 같은 승부욕이 이글거렸다.

해서 이래저래 눈치 볼 거 없이 곧장 받아들였다.

나로서도 손해 볼 게 없었으니까.

궁금하기도 했었다. 과연 내 무력은 어디까지 올라왔는가.

정규 기사라면 테스트로는 최고의 실험 재료였기에 당차게 수락했고.

'대차게 깨졌지.'

정신을 차려 보니 피를 줄줄 흘리며 마차에 누워 사람들의 동정 섞인 눈빛을 견뎌야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맛본 쓰라린 패배였다.

내 나름대로 최고의 한 수를 꺼내 놓았음에도 비등한 무위를 선보이기는 무슨 흡사 운동으로 단련된 무도인에게 대드는 일진 양아치가 된 듯 무기력하게 옆구리를 내주며 바닥을 굴러다녔던 것만 생각하면 창피하다 못해 비참했다.

랍티오 놈에게 두들겨 맞을 때도 그리 치욕적이진 않았던 느낌인데.

"내 얼굴에 뭐 묻었나?"

리하인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가슴 깊이 묻어 둔 허리춤의 통증이 되살아나는 듯해서 무심결에 골반에 손을 가져가다 멈춘 나는, 이내 의아한 기색으로 묻는 질문에 머쓱하게 머리를 저으며 스콰의 등에서 내려왔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준비는 되셨습니까?"

"준비? 허, 그 단어는 내가 아니라 자네에게 필요할 듯 싶다만."

"자신 있으신가 봅니다. 제가 알기로 최근 대련의 승자는 남자였는데 말이죠."

"그 여자도 변명은 안 하더군. 허나 다짐은 했지. 다음에 다시 붙게 된다면 옆구리뿐 아니라 팔뚝이고 종아리고 온갖 곳에 영광의 상처를 각인시켜주겠다고. 경고하는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다 사람 잡겠습니다."

"안 잡히게 잘 해야지."

탁―

시답잖은 말장난을 주고받으며 지면에 발을 디딘 난 널따란 광장 한쪽에 고생한 스콰를 쉬게 두고 손목 발목을 돌리며 스트레칭을 실시했다.

그러자.

빙그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날 따라 몸을 푸는 리하인.

대놓고 조심하라며 경고장을 내뱉었던 게 실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워밍업에 돌입한 그녀의 두 눈에는 승리를 향한 독기가 일렁거렸다.

"이거, 나도 진심으로 임해야겠는데."

두 번째 대련에서의 수치를 반드시 설욕하겠다는 광기에 접어든 호승심에 나는 손아귀에 힘을 바짝 주며 조금은 가벼웠던 마인드를 가다듬었다.

원래도 져줄 마음 따윈 없었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고 비장한 각오로 만전을 기하는 그녀의 파이팅에 육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방심하다간 참사를 면치 못할 거라고.

고로 나도 최선을 다해볼 작정이었다.

이쪽도 그런 수모는 한 번이면 족했다.

"후. 오케이."

그러한 일념으로 철저하게 무장까지 점검한 나는 준비가 다 되었다고 알리듯 말없이 기수식을 취했다.

언제든 시작해도 좋다는 무언의 표현.

이에 슬며시 주억거린 리하인이 투구를 푹 눌러 쓰더니 레이피어를 앞으로 내밀고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그니스 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과 검을 겨뤄 보고 싶다. 응해 주겠는가?"

"좋습니다."

처음과 끝.

수미상관(首尾相關)을 완성시키는 문장이었다.

후우우우욱―

후우우욱―

…카아앙!

* * *

세 번째 대련의 스타트를 끊은 것은 리하인의 손안에서 탄생한 독사.

레이피어라는 학명을 가진 붉은 뱀이 곡선을 그리며 내 옆구리를 노리고 있었다.

걸리기만 하면 살갗이고 근육이고 갈가리 찢어발겨 버리겠다는 살의를 한가득 풍기며.

물론 가만히 앉아서 당해줄 내가 아니었다.

"어딜."

타닷―

휘우우우욱!

수풀에서 기어 나온 독사를 발견하자마자 도신을 역대각선으로 올려 붉은 뱀의 몸통을 가격했고, 그 반동으로 칼날이 초승달처럼 낭창낭창하게 휘어지는 걸 똑똑히 지켜보며 왼발을 축으로 한 바퀴를 돌아 전진했다.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전진'이었다.

레이피어의 단점은 사거리.

환두대도 또한 초근접전에 쓸 법한 무기는 못 되지만, 이보다 몇 치는 더 긴 레이피어는 간격이 좁혀지면 완전히 쓸모가 사라지는 법.

따라서 눈앞까지 당도한 예기(銳氣)에 일순 소름이 돋기도 했으나, 이를 악물고 두려움을 참아내며 브레이크가 고장 난 불도저마냥 도신을 대각선으로 쳐내 칼날이 더 다가오지 못하도록 밀어내고는 꿋꿋하게 직진해 들어가 그대로 팔꿈치를 뻗어 리하인의 복부를 찍어 눌렀다.

후우욱―

쾅!

"큽!"

철판을 때리는 소음 위에 얹히는 고통 어린 숨결.

꽤나 묵직하게 작렬했는지 피부로 전해지는 무게감이 심상치 않았다…만, 그게 끝이었다.

"하아아!!"

통증이 적지 않을 터인데도 허리가 접히는 충격을 이용해 단숨에 검을 회수한 리하인은 아픔 따윈 잊어버린 사람인 양 재차 삼차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엑세르(exér) 류(流).

춤추는 세르펜스.

사아아앗―

촤좌좌좌좍!

채찍인가 검인가.

허공에 잔상이 남을 만큼 쾌속하게 이루어진 공세에 펼쳐지는 붉은 광풍.

제대로 쉬지 못한 건 그녀도 매한가지일 텐데, 내 몸 곳곳을 물어뜯으려 드는 일격 일격을 보고 있노라면 입 밖으로 감히 만만하단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렇기에 나도 바닥까지 긁어모아 마력을 쏟아 부었다.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타닥―

휘우욱!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속력에는 속력이었다.

"젠장!"

"영애께서 입이 이리 걸걸하셔서 되겠습니까?"

불어오던 폭풍이 들이닥치려던 찰나에 환영을 던져 공격을 피한 나는 연신 퇴각하는 리하인의 꼬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가차 없이 벼락을 소환했다.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파직―

"저도 갑니다."

…꽈르르르릉!!

고막을 쩡쩡 울리며 순식간에 전방을 뒤덮는 휘광.

그 푸른 뇌류가 그물을 펼치며 날아들자 리하인은 황급히 백스텝을 밟으며 뇌기의 중심부를 향해 레이피어를 찔러 넣었다.

'유령 걸음'이나 '섬광(閃光)'이야 질리도록 봐둔 스킬들이라 이럴 경우를 얼추 예상하고 있었는지.

엑세르(exér) 류(流).

일점 집중.

마치 콥스 골렘이 일으킨 토사를 분쇄하던 크라덴과 똑 닮은 동작으로 구사해낸 그 신속한 대응에 산산이 부서져 가는 낙뢰.

그 덕택에 훌쩍 기울었던 균형의 추가 다시 맞춰지는 듯 꿈틀거렸으나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메인 퀘스트: 호위〉를 진행하는 와중에도,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을 진행하는 도중에도 리하인과의 세 번째 대련을 위하여 여유가 생길 때마다 핸드폰에 저장된 대 엑세르 가 전용 녹화본을 수십, 수백 번씩 들여다보며 공부했다.

어떻게 하면 승률을 1%라도 높일 수 있을지.

즉.

'끝을 봅시다.'

리하인의 찌르기도, 섬광의 파훼도 모두 계획된 퍼포먼스란 뜻이었다.

그게.

내가 손에서 힘을 뺀 근거였다.

"…아."

찌르기처럼 동작이 큰, 더군다나 작심하고 내지른 탓에 회수하기가 몇 배는 어려워진 상황에서 상대가 일방적으로 힘을 빼버리면 몸이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나는 그 점을 노렸고, 이 전략이 완벽하게 통했음을 알려주듯 시종일관 긴장으로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던 리하인의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아차 하는 사이에 그녀와 내가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크메이트입니다. 리하인 경."

그때 비로소 확신했다.

준기사급 용병 랍티오에게도 휘둘리던 내가, 약은 수를 쓰지 않고서는 정규 기사의 검을 버텨내기도 버거워하던 내가 마침내 벽을 넘어섰다는 걸.

오휘윤.

그는 더 이상 허울뿐인 기사가 아니었다.

띠링!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끝없는 호승심〉의 과제를 완료하셨습니다. ]

[당신의 최종 성적은 '2승 1패: 승리자'입니다.]

[성과에 걸맞은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으로 '상당한 경험치' 및 '승자의 훈장', '펫: 나이트 배철러급 군마'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시스템마저 공인한 한 명의 훌륭한 기사급 전력이었다.

* * *

〈승자의 훈장/Magic〉

* 밀레스 제국의 유구한 역사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검투 대회 「루디우스(lúdĭus)」. 대륙 전역에서 추리고 추린 기사들이 한데 모여 서로의 전력을 겨루는 축제. 이 '승리의 훈장'은 그 투쟁의 중심지에서 무력을 인정받은 자들에게만 지급되는 훈장으로 마도구임과 동시에 명예의 의미로도 통용되었다고 한다.

* 착용 시 모든 신체 능력치 3% 상승/ 밀레스 제국인들과의 관계에서 호감도가 '긍정적'으로 고정

〈펫: 나이트 배철러급 군마/Magic〉

* 자격을 갖춘 전사에게는 응당 그에 합당한 군마가 필요한 법. 투쟁과 용기의 제국 밀레스(mīles)는 나라와 국민을 수호하기 위해 기사가 된 이들에게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군마의 보급'이다. 혹자는 이 정책으로 인해 국가의 재정이 흔들릴 거라 간언하였으나, 역대 황제들은 이 철칙을 고수하며 국력에 치중했고, 오히려 각 기사의 실력 고하에 맞게 지원을 상향 조정하는 결단을 보였다. 이것은 그 위대한 계획의 일환으로 구성된 '나이트 배철러(knight bachelor, 첫발을 뗀 정식 기사)급' 기사에게 수여된 테스티르 산 군마이며,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뛰어난 지능과 철갑을 갖춰도 버티는 강인한 체력을 토대로 몇 가지 기술까지 구사하는 놀라운 전투마라고 한다.

* 마법 '나이트 베철러급 군마 소환'

* 특이 사항 1: 주문 '소환/역 소환'을 통해 관리 가능

* 특이 사항 2: 일정 수준 이하의 피해 및 질병 시 펫 전용 공간에서 치유 가능

* 특이 사항 3: 심각한 피해 시 '사망'할 수 있으니 주의

* 특이 사항 4: 군마 전용 기술 '돌격(상세 보기▼)', '앞 발차기(상세 보기▼)', '도약(상세 보기▼)' 사용 가능

* 특이 사항 5: '에스콰이어급 군마' 소유 시 '해당 개체를 '나이트 배철러급 군마'로 승격 가능. 승격 시 일반 '나이트 배철러급' 군마에 비해 신체 능력치 소폭 상향 조정.

102화

"하, 또 졌네."

승전을 축하하는 메시지가 주르륵 출력되었다 사라지고, 보상으로 주어진 2가지 아이템이 주머니 속에 안착할 즈음.

리하인의 입가에서 진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온 힘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삽시간에 턱밑을 내주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지 몇 번이고 나와 환두대도를 번갈아 보는 그녀.

허나 그도 잠시.

금세 패배를 인정하겠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그런 리하인의 모습에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을 수행하는 지난 사흘 동안 외부 활동을 이어가며 각종 업적부터 다양한 보상품들까지 엄청나게 몰아 먹었던 지라 전보다 두어 단계는 강해졌겠거니 짐작은 하고 있었다.

헌데.

아무리 예습, 복습을 철저히 했다 하더라도 정규 기사를 이리 쉽게 꺾을 줄이야.

이거 아무래도 내 예상보다 훨씬 성장한 거 같았다.

'이러면, 엑스케트랑 붙어볼 만하려나.'

그 고양감에 문득 크라덴은 무리더라도 엑스케트와는 어찌어찌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뇌리를 잠깐 스쳤다.

30대라는 젊은 나이에 기사 몇몇을 제외하곤 모두 꺾었다는 재능의 남자라는 건 알지만, 현시점에서 콥스 골렘의 전리품까지 싸그리 먹어 치운다면 적어도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란 게 내 판단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력 전이석: 대형/Magic〉

〈기술 서적: 프레셔/Magic〉

〈거인의 심장/Rare〉

〈기술 임의 습득권: 콥스 골렘/Rare〉

대형급 마력 전이석에 더불어 레어 등급이 2개나 섞여 있었으니까.

그에 걸맞게 옵션도 무지막지했고.

〈기술 서적: 프레셔/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기술 '프레셔' 습득

└프레셔(pressure): 자연스러운 압박감. 그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긴장을 유발하는 압박감을 선사한다. 동일한 효과를 지닌 기술(또는 그에 준하는 것)과 충돌할 시 서로의 '마력 최대치'를 기준으로 상쇄 및 압도가 결정됩니다.

〈기술 임의 습득권: 콥스 골렘/Rare〉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콥스 골렘이 지닌 기술 중 한 가지를 획득 및 습득한 기술에 부합하는 신체 능력치 소폭 상향.

* 목록: 대륙 던지기(상세 보기▼)/오오라_이승을 떠도는 백귀(상세 보기▼)/고기 방패(상세 보기▼)/태산압정(상세 보기▼)

└대륙 던지기(A): 마력을 활용해 일시적으로 투척력을 극대화한다. 이때 시전자의 손에서 던져진 것은 반드시 '폭발'하여 추가 피해를 입힌다. ⊂ 상승 능력치: 근력

└오오라_이승을 떠도는 백귀(A): 이승을 떠나지 못해 원(怨)과 한(恨)으로 점철된 일백의 귀신을 풀어 일정 공간 내의 모든 대상을 지속적으로 약화한다. ⊂ 상승 능력치: 마력

└고기 방패(P): 육체 방어력을 영구적으로 향상시키며 특히 물리 공격에 관한 저항력이 대폭 강화된다. ⊂ 상승 능력치: 내구력

└태산압정(A): 손끝에 모인 마력을 방출해 대지를 원형으로 뒤집어엎는다. 이때 활용되는 바위, 모래, 물 등의 사물은 마력의 영향을 받아 '성질: 단단함'과 '성질: 무거움'이 부여된다. ⊂ 상승 능력치: 마력

〈거인의 심장/Rare〉

* 아주 오래전, 인류가 칼리야스 대륙의 중심에 서기 이전 시대부터 대륙 곳곳을 오가며 유구한 세월 동안 존재해 왔다는 거인(巨人).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나 고대 시절의 문헌과 사료에 등장하는 그들의 힘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일반적인 인간의 2~3배에 달하는 신장과 전사로써 최고의 가능성을 지닌 골격은 '대륙 최강의 생물'이라는 이명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허나.

과거의 문헌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학자들은 거인들의 진정한 힘의 원천으로 전혀 다른 것을 뽑았으니, 바로 '심장'이었다. 마치 '생명의 샘'을 통해 한계를 벗어던진 영물들처럼 단지 피로가 풀리고 활력을 돋게 해주는 샘물에서 영력을 흡수해내는 그 특별한 심장이 평범했던 종족을 먹이사슬의 최상층으로 끌어 올려준 비밀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학자들은 말했다.

거인의 심장은 또 다른 형태의 영혼석이라고.

* 복용 시 체력 15% 영구 강화/ 복용 시 내구력 13% 영구 강화/복용 시 재생력 11% 영구 강화

* 본 효과는 1회에 한해 적용됩니다.

장비의 변화 없이 신체 스펙만 끌어올려 주는 영구 적용형 소모품이라는 면에서 더욱 가치가 높은 녀석들.

'확실해.'

그 옵션들을 상기해본 나는 확신에 차서 끄덕였다.

이것들을 다 복용하고 적응만 한다면 6대 4까지는 가지 않을까? 실제로는 리하인에게 당했던 것처럼 가루가 되도록 털릴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붙어보고 싶었다.

강자와 겨루는 것만큼 빠르게 발전하는 수련은 없으니 말이다.

그런 시답잖은 상상을 하며 도를 납도하고 자세를 바로 하자 투구에 눌러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한 리하인이 레이피어를 검집에 꽂아 넣고는 돌연 제 가슴에 손을 올리며 목례했다.

"한 수 배웠습니다."

결과는 아쉽게 마무리되었지만, 승패와 상관없이 좋은 승부였다고 얘기하는 그녀의 태도에 나도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무력함에 당황스러웠고, 이기고도 시원찮았으나 종극에는 만족스럽게 종지부를 찍은 세 번의 결투.

그 길었던 이야기에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꼬르르르륵――

"…내가 아니다, 나 아니다."

"…출출한데 밥이나 한 끼 드시겠습니까?"

* * *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예. 그 줄 당기고 놔두면 알아서 됩니다. 이건 간식으로 드시고."

"아까 그 연기 신호탄이라는 것도 그렇고, 신기한 걸 많이 가지고 다니는군."

"푸르르릉."

"그래, 너도 먹어라."

전시임을 고려해 갑옷을 입은 채로 공터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전투 식량에 불을 올린 나와 리하인은 내용물이 익어가는 동안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임무, 전쟁, 대련.

늘 피 튀기고 험악했던 주제에서 벗어나 보통의 남녀가 되고 나니 어쩐지 어색함이 감돌았지만, 다행히 헤드 랜턴이라든가 지포 라이터 등 21세기 현대 과학의 산물들이 그녀의 눈에 제법 흥미롭게 다가왔는지 내 생존 물품들을 구경하면서 옅게 얼어가던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해동되었다.

특히.

탁―

번쩍!

"허?"

"꽤 강렬하죠? 이걸 이렇게 이마에 고정해두면 야간 전투에 큰 도움이 됩니다."

"굉장하군."

"쓰던 거긴 한데, 괜찮으시다면 드리겠습니다."

"…정말인가?"

"당연히. 그거 말고 더 갖고 싶은 건 없으십니까?"

선물(膳物)이라는 마법의 주문이 크게 도움이 됐다.

꽃, 옷, 장신구, 가방.

이런 보편적인 카테고리에는 포함되지 않는 물건들이었으나, '전투에 도움이 된다'라는 한 줄 평에 리하인의 안광이 반짝거리는 걸로 보아 그녀 한정으로는 퍽 훌륭한 보상이 될 성싶었다.

그래서였을까?

"소중히 간직하겠다."

"계속 안 써 버릇하면 되레 고장이 나기도 하니 시간 되실 때마다 틈틈이 만져주시지요."

"알겠다. 그보다 자, 받아라."

"음?"

"보답이다."

내가 건넨 보따리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느닷없이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풀어 내 손바닥에 올려놓는 리하인.

"굳이 그러실 필요는―"

"빚지고 못 사는 성격까진 아니지만, 받았는데 입 싹 닦는 것도 내 성격은 아니라서 말이지. 네가 가진 것들에 비하면 그리 대단하진 않겠지만, 그대가 위험할 때, 혹 그대가 아끼는 이의 목숨을 한 번은 구해줄 것이다."

그녀의 말투는 어디 방구석에서 굴러다니던 물건을 가져온 것처럼 담담했으나, 그것을 엉겁결에 손에 쥔 나는 손톱만 한 크기의 물방울 장식의 펜던트를 목도하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또 한 번의 기회/Rare〉

귀족 가의 영애.

심지어 대 백작 가문의 딸이 착용하던 목걸이라는 걸 공표하기라도 하듯 '레어(Rare)'라는 글귀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까닭이었다.

이거.

〈또 한 번의 기회/Rare〉

*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 기사를 꿈꾼 자식의 도전과 안녕을 축복하며 어머니가 의뢰해 제작한 목걸이. 특수한 기술을 사용해 고밀도로 압축한 '마력 전이석'에 신성 마법을 각인하여 언제, 어디서든 어떤 위기가 닥치더라도 한 번은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 절실한 마음을 담아 완성되었다.

* 신성 마법 '초재생' 사용 가능

* 소유주의 의식이 온전하지 않을 시 본인에게 자동 발현

* '초재생' 1회 시전 시 목걸이 파괴

└초재생: 중상(重傷)급 이하의 모든 상처를 '재생'시킨다.

"아."

장담하건대.

설사 '강제 귀환권'과 비교하더라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 최고의 동아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게는 과분하기까지 한, 안면몰수하고 넙죽 챙겨갔다간 뒤탈이 생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하지만 리하인은 확고했다.

"이거, 정말로 제가 받아도 되는 겁니까?"

"충분히."

"...."

"그대에게는 자격이 있다. 나를 비롯해 젠슨과 카르켈, 병사 열다섯과 오십여 명의 영지민. 나아가 내 아버지와 오라버니, 또 도시 글라디아르의 시민들. 그대는 이 모든 이들의 은인이지 않은가. 그에 비하면 이건 약소하기 그지없는 보상일 거다."

이 답례품 안에는 단순히 선물에 대한 보답품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거참.

그저 스스로의 이익을 따라 움직였을 따름인데, 나는 영웅이 아닌데, 그러고 싶은 의지도 없고 여력도 없는 사람일 뿐인데.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뭔지 모르겠는 묘한 기분에 나는 멋쩍은 얼굴로 답했다.

"밥, 다 된 듯한데, 밥 먹을까요?"

그거 말고는 더 할 말이 없었다.

* * *

전투 식량과 그 밖의 간식 등으로 허전했던 배가 든든하게 채워질 무렵.

"참, 뭐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든."

"그, 세르펜스 기사단 말입니다."

물 한 잔으로 입가심을 마친 후 신기한 눈으로 후식용 초콜릿 바를 살펴보는 리하인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불현듯 마침 잘 됐다 싶어 그간 물음표로 남아있던 문제에 관해 물었다.

"크라덴 경이 3석이라고 하셨으니, 단장님과 부단장님도 계실 터인데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듯해서 혹 그분들은 어디 계시는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병에 걸렸다거나 가족 등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는 이유로 두문불출하는 것일지도 몰랐기에 실수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건넨 질문지.

그 퀘스천에 대해 돌아온 대답은.

"아이켈릭스 경과 펠런 경께서는 아버지를 대신해 루디우스에 참여하기 위해 황도로 가셨네."

"루디우스, 요?"

"대륙 최강의 기사를 꿈꾸는, 제국 내의 내로라하는 기사들이 모두 모여 겨루는 축제의 장이지. 그러고 보면 벌써 반년이 넘었군. 황도로 향하신 이후 연락이 끊긴 것이."

낯설면서도 낯익은, 모순적인 단어였다.

103화

고생으로 가득했던 한 해를 보내고 다가오는 새해의 행복을 기념하며 매년 초에 열리는 검투 대회 루디우스(lúdĭus).

초대 황제를 따라 대륙을 병합한 열두 기사를 기리며 개최되는 이 축제는 우승자가 황제를 직접 알현하고 상품을 하사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명예에 죽고 사는 기사들에게는 그야말로 신이 주신 영광의 무대였다.

물론.

이 대회에 열광하는 원인이 단지 허울뿐인 명예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승자가 되면 당대 에퀴테스의 자리를 두고 도전할 권리가 생긴다."

"에퀴테스라면...."

1년, 혹은 1년 이상의 기간에 걸쳐 황제가 손수 창설한 황실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까닭이었다.

이른바 다섯 번째 공작으로 불린다는 무상공(武上公) 에퀴테스(Equites)의 작위.

루디우스의 목적은 이 무소불위의 권력자를 선발하는 일종의 오디션이자 서바이벌이었다.

이러니 기사들의 입장에선 환장할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국력을 첫 번째로 꼽는 국가라지만, 고작 대회 우승 한 번으로 제국 내 단 넷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작의 위를 얻을 기회가 생긴다고 하니 욕심이 안 날까.

더군다나.

"그럼 그 두 분도."

"그렇지. 루디우스는 총 3단계로 치러진다. 먼저 기사 견습생인 에스콰이어를 포함해 평민들이 참여하는 펠로(pello). 펠로에서 자격을 얻거나 기사 서임을 받은 배철러(bachelor)급에서 상급 기사로 분류되는 배너렛(banneret)급 기사들이 참가하는 엑세오(éxĕo). 그리고 마침내 에퀴테스의 권좌에 올라설 초인들의 전장 렉스(rex)."

"서임을 받지 않은 평민이라도 실력만 갖춘다면 에퀴테스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겁니까?"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재능을 펼칠 자리를 만들어라. 이것이 대륙 통일의 대업을 가능케 한 밀레스의 근간이지."

"허어."

이 전례 없는 등용문은 귀족, 평민, 설령 농노일지라도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해서 본인의 인생과 혈통을 바꿀 수 있는 기적의 장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루디우스가 개최되기 한 달 전부터 황도는 수백만 명의 도전자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아이켈릭스 경과 펠런 경은 렉스의 참가자로서 황도에 가셨지. 본래라면 나와 오라버니도 가야 했지만, 당시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대련 중에 다치시는 바람에 우리는 한 해를 미룬 상태였다."

주최 목적부터 대회 방식까지.

루디우스 검투 대회에 관한 전반적인 정보를 전해 들으며 나는 품속의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앞발을 들어 올린 말과 그 위에 올라타 검을 빼든 기사의 형상을 양각해 놓은 금판에 형형색색의 끈을 달아 놓은 멋들어진 휘장

〈승자의 훈장/Magic〉

* 밀레스 제국의 유구한 역사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검투 대회 「루디우스(lúdĭus)」. 대륙 전역에서 추리고 추린 기사들이 한데 모여 서로의 전력을 겨루는 축제. 이 '승리의 훈장'은 그 투쟁의 중심지에서 무력을 인정받은 자들에게만 지급되는 훈장으로 마도구임과 동시에 명예의 의미로도 통용되었다고 한다.

* 착용 시 모든 신체 능력치 3% 상승/ 밀레스 제국인들과의 관계에서 호감도가 '긍정적'으로 고정

〈서브 퀘스트: 끝없는 호승심〉을 클리어하는 과정에서 2승 이상을 쌓아야만 지급되는 '승리의 훈장'.

퍼센테이지가 낮기는 해도 올 스탯 상승이란 범용성 높은 아이템인데다 2번째 옵션으로 호감도 고정 걸려있어 앞으로 다른 마을, 도시 어디를 가든 칼리야스인들과 부딪칠 일이 거의 없겠다… 대강 그 정도로만 평가했었는데.

'그냥 내준 게 아니었나.'

이것도 숨겨진 힌트였나 보다.

루디우스에 참가하러 갔다가 행방불명이 된 세르펜스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 하필이면 그 대회와 관련된 아이템.

우연치고는 심히 공교로운 연관성이었으니까.

'유념해둬야겠어.'

시스템을 넘어 리하인의 입으로도 교차 언급되는 걸 보면 뭐가 있는 게 분명하다…라고 결론을 내리던 참이었다.

- 와아아아아아아!!!

띠링!

급작스러운 함성이 우리 귓가를 찌르르 울린 건.

"아."

그 우레와 같은 샤우팅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각기 검과 도를 움켜쥐었던 우린 이내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손아귀에 들어갔던 힘을 풀었다.

세상이 떠나가라 질러 대는 소리 여기저기에서.

- 우리는 또다시 승리했다!

- 밀레스와 글라디아르를 위하여!

- 밀레스와 글라디아르를 위하여!

....

- 와아아아아아!!

온통 긍정적인 감정이 도배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드디어.

띠링!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의 과제를 완료하셨습니다.]

짧지만 길었던 이 여정의 종지부가 찍힌 모양이었다.

* * *

"휘윤 씨!"

"푹 쉬셨습니까?"

"가서 드러누워야지요. 이만한 퀘스트를 끝냈으니 당분간은 핸드폰도 꺼 놓을 작정입니다. 김 비서님이 싫어하시겠지만, 최소한 하루는 온종일 퍼질러 잘 겁니다. 하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증폭되어 가는 포효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도착한 성문 인근.

근처에서 쉬던 정유환과 대화를 나누며 몇 걸음 더 내디뎠을 즈음 돌연 사방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아, 전송되나 봅니다."

귀환에 임박한 생환자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광휘였다.

그 새하얀 빛무리는 특이하게도 검을 쥔 무난한 복장의 여자를 기점으로 천천히 주변을 물들여가는 중이었다.

퀘스트 초기에는 일괄적으로 소환되더니만, 돌아가는 타이밍은 저마다 다르기라도 한 건지.

대기표라도 뽑은 것마냥 차례차례 진행되는 복귀.

"정산량의 차이인가?"

초기 이송자가 죄다 검이나 도, 창 등의 근접전 전용 무기 소지자들인 걸 보면 아마도 내 추측이 맞을 듯싶었다.

저들에게 이번 퀘스트는 상대적으로 불친절한 임무였을 거라 공적치를 계산할 것도 없었을 테니.

다만 별로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나도 환두대도를 쓰고, 정유환도 장검을 썼다.

심지어 강태성은 방패에 한 손 망치를 든 탱커 포지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멀쩡했으니까.

이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우선순위로 이동하는 인원 중 대다수가 노력 부족의 생존주의자라는 소리.

그러니 연민을 가지려야 가질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

"아이, 뭘 고생은."

"다들 조심하십시오!"

본인들도 딱히 슬퍼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며칠간 함께 싸웠던 병사들과 도시 주민들이 보내는 열렬한 환호와 감사에 히어로라도 된 느낌을 받았는지 아주 행복한 면면으로 작별을 고하는데, 저걸 두고 제삼자인 내가 불쌍하다고 중얼거리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고로 저들의 인생은 저들의 인생으로 내버려 두고 나도 인사나 나눌 겸 생환자들에게서 리하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이 지나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어쩌면 평생 못 볼지도 모르니 슬슬―

"그대도 이제 떠나겠군."

"예?"

"생환자? 지원자? 그대 역시 저들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알고 계셨습니까."

"오휘윤, 정유환, 정유림. 칼리야스 대륙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작명법. 더구나 서로 하루 이틀 만에 쌓기 어려운 친분을 가지고 있었지. 이쯤 되면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알아차렸을 거야."

"그렇긴 하네요."

인사를 하려던 나는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듯 선수를 치는 리하인의 말에 겸연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설마 정체를 밝히기도 전에 간파당할 줄이야.

애초에 숨길 의도도 없긴 했지만, 왠지 불의의 일격을 맞은 듯해 어깨를 으쓱인 나는 걸린 김에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뭐지?"

"악수라는 겁니다."

"악수?"

"말씀하신 대로 저도 생환자입니다. 곧 저 사람들처럼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게 되죠. 이 악수는 제가 사는 곳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거나 이별할 때 하는 행동입니다. 듣기로는 본인의 손에 칼이 없음을 보여주며 상대에게 나는 당신을 믿고 있노라 얘기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군."

탁―

차근차근 읊어가는 설명에 핵심이 되는 '믿음'이란 글자가 기꺼웠는지 옅은 미소를 띠며 손을 맞잡는 리하인.

맞잡은 장갑 너머로 전달되는 온기에 나도 빙그레 웃으며 안녕을 고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하지."

"근처에 오게 된다면 무조건 들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다. 그대라면 항상 귀빈 대우를 해주지. 상황이 이러니 산해진미를 맛 보게 해줄 순 없겠지만, 그대도 대련을 즐기는 듯 하니 내 오라버니는 물론 크라덴 경께도 부탁해 주지.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이들이니 실력을 높이는 데 무조건 도움이 될 터. 내 보장하지."

"예. 엑스케트 님이나 젠슨, 카르켈에게도 안부 전해 주십시오."

"그러지."

"참, 여력이 된다면 블리타 마을과 스콜로펜드라의 동굴은 빠른 시일 내에 확인해 보시죠. 그곳에서 제단이나 새로운 시체 거인이 생산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명심하겠다. 그보다 아쉽군. 그대가 행한 모든 일에 대한 보상을 아버님께 간청드릴 예정이었는데."

"저도 바라긴 합니다만, 사망자들도 생겼고 하니 이 사안들을 처리하는 데만 꼬박 며칠은 걸리겠지요."

"그러니 꼭 들리게. 내 빠짐없이 받아서 보관하고 있겠네."

"알겠습니다. 기대하지요. 하하."

아쉬움 섞인 약속과 당부.

우리는 짤막한 기약을 마지막으로 손을 놓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심장을 중심으로 순백의 빛 가루가 솟구쳐 올랐다.

그게.

"부디 다음...."

내가 기억하는 최후의 장면이었다.

번쩍――!

* * *

"아, 예. 다 처리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십쇼."

깜깜해졌던 세상이 제 색을 찾은 이후.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유료 주차장으로 달려가 연체된 요금을 청산하는 작업이었다.

넉넉하게 나흘 치를 선불로 결제해뒀었는데도 시간이 초과돼 곤욕을 치를 뻔했던 나는 얼른 계산을 마치고 차를 몰고 나와… 갓길에 세웠다.

글라디아르에 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곧장 별장으로 향할 계획이었으나, 짜 놓은 일정과 천근만근인 눈꺼풀의 공세를 잊어버릴 만큼의 이벤트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다름 아닌.

띠링!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직급 쟁탈〉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서브 퀘스트: 가장 높은 공적〉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모든 '서브 퀘스트' 정산이 종료되었습니다.]

[종합 활약도를 기준으로 성적을 등급화합니다.]

[믿기지 않는 역사적인 위업 달성!]

[주어진 임무를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완벽하게 해결한 당신의 등급은 'Rank: Hero_city'입니다.]

[보상으로 '엄청난 경험치' 및 '기술: 위대한 발걸음_Lv.2', '정순한 영혼석 교환권', '무기 임의 선택권: Rare', '기술 임의 선택권: 원본(原本)', '중급 물약 세트'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두 번째 영웅(英雄)의 출현이었다.

104화

"아."

무지갯빛으로 오색찬란하게 반짝거리는 단어 'Hero'.

이목을 사로잡는 그 단순하지만 강렬한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솔직히 짐작은 했다.

기본 수백, 수천 단위에서 많게는 수만 단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스케일인 데다 3차 진화체 혹은 그에 준하는 오브젝트가 다수 등장했었기에 이를 독차지한 나로서는 내심 영웅 등급이 뜨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정도는 가슴 한쪽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 모든 상상이 실제로 구현되지는 않는 법.

그렇기에 'Rank: Hero_city'란 글자가 주는 울림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를 불허할 만큼 진한 흥분을 선사했다.

보상이.

[보상으로 '엄청난 경험치' 및 '기술: 위대한 발걸음_Lv.2', '정순한 영혼석 교환권', '무기 임의 선택권: Rare', '기술 임의 선택권: 원본(原本)', '중급 물약 세트'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문자 그대로 미쳤으니까.

['기술: 위대한 발걸음'이 '기술: 위대한 발걸음_Lv.2'로 격상됩니다.]

〈위대한 발걸음_Lv.2/Passive〉

* 칼리야스 대륙의 기나긴 역사를 장식한 위대한 존재들과 같은 길을 걷는 그대에게 세계가 호응합니다. 갓 출발선을 벗어나 성장의 단계로 접어든 당신. 꿈과 희망으로 가득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기대와 달리 눈 앞에 펼쳐진 길은 온통 시련과 고난의 혈로(血路)였음을 분명 깨달았음에도 포기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꿋꿋하게 한 발 한 발을 내딛는 그 여정이 계속될 수 있도록.

* 개방된 모든 신체 능력 최대치 +15%/체력 및 마력 회복 속도 +7%/정신 및 의지 강화

"…이게 맞아?"

지금까지도 그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냈던 '위대한 발걸음'.

특히 랍티오 용병단과의 결전에서 살인이라는 중대한 사건으로 자칫 흔들리거나 아예 무너질 법도 했던 멘탈을 단단하게 붙잡아 준 최후의 보루 같은 스킬이라 이대로 고정된다 해도 만족이었는데.

"진짜 돌았네."

한층 진일보된 옵션은 가히 초월적으로 변해버렸다.

올 스탯 15%에 체, 마젠 7%라니.

거의 마수급 영혼석을 대량으로 섭취한 수준의 상승량에 벌써 온몸이 근질거렸다.

아릿한 통증과 시원한 쾌감이 한데 섞인 기묘한 기운이 전신 곳곳에서 느껴지는 게 제대로 환골탈태를 시켜줄 모양.

부서지고 회복되기를 반복하며 점차 업그레이드되어가는 감각을 한동안 넋 놓고 즐기던 나는 기왕에 아플 거 한 번에 아프자는 심정으로 몇 가지를 더 입에 넣었다.

"신기하게 생겼네."

으적―

['거인의 심장'을 복용합니다.]

[체력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15% 향상됩니다.]

[내구력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13% 향상....]

[재생력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11%....]

스타트는 생긴 게 꼭 용과처럼 울긋불긋한 외형을 가진 '거인의 심장'.

마수급 영혼석 못지않은, 오히려 증가 폭도 훨씬 높았으며 조정되는 가짓수도 세 가지로 늘어나는 현시점 최상급 도핑 약은 그 위용을 증명하듯 입으로 들어가자마자 부드럽게 녹아들며 육신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그 열기에 휩싸인 채로 열어젖힌 두 권의 책자.

['기술 서적: 프레셔'의 마법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해당 기술과 관련된 지식을 전이합니다.]

하나는 무난하고 평범한 패시브 기술 '프레셔(pressure)' 획득 책자.

그다음은.

['기술 임의 습득권: 콥스 골렘'의 마법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당신이 습득할 기술을 선택해 주십시오.]

[1. 대륙 던지기(A)]

[1. 오오라: 이승을 떠도는 백귀(A)]

[2. 고기 방패(P)]

[3. 태산압정(A)]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3차 진화체 전용 기술 임의 습득권.

콥스 골렘에게서 복사할 스킬은 정해두었다.

"이건… 고기 방패."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기술 '고기 방패(P)'의 지식을 전이합니다.]

[내구력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9% 향상됩니다.]

'거인의 심장'과 시너지를 내는 '고기 방패'.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히어로 랭크로 주어진 '무기 임의 선택권: Rare' 때문이었다.

〈무기 임의 선택권/Rare〉

* 마법으로 제작된 스크롤(scroll). 찢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소재의 내구성이 약해 불 또는 물 등 외부 요인에 의해 손상될 가능성이 있으니 보관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 마법 '레어 등급 무기 소환'

방어구 선택권까지 나왔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뽑을 수 있는 게 무기뿐이라 어차피 공격 스킬이야 많으니 맷집을 강화하는 루트로 가닥을 잡았다.

['정순한 영혼석 교환권'을 사용합니다.]

['속성력: 뇌(雷)/속성력: 풍(風)'을 선택했습니다.]

['천둥과 폭풍을 이끄는 지즈의 정순한 영혼석'을 획득했습니다.]

"이야."

요것도 위와 비슷한 의미로 비교적 스펙 업이 덜 된 속성력에 올인했다.

전체적인 밸런스를 맞추면서도.

〈기술 임의 선택권: 원본(原本)/Rare〉

아 녀석과 연계가 되도록 고려한 판단이었다.

"이걸 이렇게 얻네."

관련된 진행권 같은 게 없다면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오직 전승자 퀘스트에 딸린 레이더에 의지해 대륙 전체를 떠돌아야 하는 원본(原本)급 파편 모으기.

그러한 까닭에 영 진전이 없었던 '이그니스(ignis) 류(流)'와 '파스마(phasma) 류(流)'를 특별한 노력도 없이…는 아니지만, 여하간 손가락 터치 한 번으로 추가 조각을 내준다고 하는데 속성력에 투자를 안 할 수가 없었다.

단지.

고민은 좀 됐다.

"뭘 골라야 잘 골랐다고 소문이 날까."

공격기인 이그니스 류, 회피 및 이동기인 파스마 류.

전자든 후자든 무얼 택해도 남는 장사라 완성에 중점을 둬야 할지 좌우 균형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지는 곰곰이 따져보고 답을 정해야 할 거 같았다.

그러므로.

"일단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천천히 하자고.

* * *

부르르르릉―

부드럽게 시동이 걸린 자동차의 운전대를 잡으며 라디오를 켰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북적북적한 서울 도심을 달리며 이럴 바엔 차라리 뛰어가는 게 더 빠르지 않으려나 하는 차량정체에 한숨을 달래려 아무 채널이나 소리 나오는 대로 주파수를 맞춰 놓고 청취하길 잠시.

- 나들이하기 좋은 화창한 오후입니다. 다만, 일교차가 심하니 옷차림에 유의하시고....

날씨를 알리는 기상캐스터의 소풍 이야기에 문득 창밖으로 눈길을 돌린 나는 따스함과 선선함이 공존하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별장에 도착하면 스콰를 풀어 놓아야겠다 싶었다.

마침 친구도 생겼으니 두 마리를 같이 방목해두면 참 좋아할 듯싶었다.

둘 다 수컷이라면 쌈박질로 서열 놀이를, 새로운 친구가 암컷이라면… 알아서 더 재밌게 뒹굴 테니.

"참, 아이템 합체가 되던데, 그건 해도 괜찮나 모르겠네."

스콰를 떠올리니 자연스레 '펫: 나이트 배철러급 군마'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

'돌격', '앞 발차기', '도약'이었던가?

영물도 아닌 일반 동물 주제에 스킬까지 쓰는 펫이라니.

키울 때 물 대신 '생명의 샘'이라도 먹인 건진 몰라도 마갑(馬甲)을 씌워도 버틴다니, 언데드 놈들과의 교전에서도 큰 활약을 할 터인데.

하나 문제가 있다면 승격을 진행했을 때 어렵게 쌓은 '한계 돌파: 3/10' 스택이 초기화될까 걱정된다는 것.

따로 이에 대한 안내가 적혀 있지 않은 탓에 혹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위력이야 체크해 봐야겠지만, 아무리 봐도 고작 스킬 몇 개 배워보겠답시고 난리 치다 한계 돌파 스탯 리셋으로 그간의 공이 허사가 된다면 실상 돈 몇 푼에 눈이 멀어 황금알을 낳는 암탉의 배를 가르는 격이었으니까.

최상의 시나리오는 2마리를 전부 영물화시키는 건데.

"차라리 맘 편하게 그걸 노려?"

- 속보입니다. 현재 파주역 일대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응?"

이런저런 망상의 나래를 그리며 신호등 빨간불에 맞춰 브레이크를 밟아가던 나는 귓가를 사로잡는 보도에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동시에 급히 높여보는 라디오 볼륨.

- 경찰에 따르면 파주역 인근 식당 앞에서 30대 남성과 다툼을 벌이던 세 명의 남녀 중 두 명이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정확한 사건 경위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으나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실랑이 끝에 너클 등으로 추정되는 흉기에 의해 피해자들의 안면과 두개골이 심각하게 손상되었으며 용의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리를 벗어난 마지막 피해자의 뒤를 쫓아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 이에 경찰은 조속히 용의자를 추적 중에 있으며....

"연쇄 살인?"

어이구야.

한동안 좀 잠잠하다 싶더니만, 어디서 또 사이코패스 새끼가 튀어나왔나.

지옥에서도 거부할 버러지가 나타났다는 비보에 절로 인상을 찡그린 나는 물끄러미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주역이면 경의 중앙선 라인에서도 파주 방면 거의 끝자락에 자리한 역사.

차로 달리면 3~40분, 늦어도 50분 내로 끊을―

"…아니다, 됐다."

딱히 멀지도 않으니 이대로 핸들을 꺾어 파주로 향할까 고심하던 나는 금방 마음을 접었다.

내가 지금 밟고 있는 땅은 지구지 칼리야스가 아니다.

함부로 힘을 휘둘렀다가 일이 어떻게 꼬일지 감히 예측도 안 되는 세상.

자칫하면 감옥에서 퀘스트를 오고 가게 되는 파국 엔딩으로 치달을 확률을 무시할 수 없으니.

"경찰분들이 잡겠지."

쓸데없이 나대지 말자.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굴 도울까.

…빠앙!

"갑니다, 가요."

뒤쪽에서 들려오는 경적 소음에 억지로 관심을 접은 나는 오른발에 힘을 주며―

"젠장."

북쪽으로 바퀴를 돌렸다.

파주역을 향해.

그냥 다 내팽개치고 집으로 직진하고픈 욕망이 그득했으나, 부지불식간에 내 의지와 관계없는 사건이 됐기 때문이었다.

삐이익!

[경고!]

['???'의 존재가 감지되었습니다.]

[〈특수 퀘스트: 괴물〉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달성 조건 : '???'의 인지]

[〈특수 퀘스트: 괴물〉이 추가됩니다.]

[미니맵이 활성화됩니다.]

['???'의 위치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특수 퀘스트: 괴물〉

* 그는 패배했으나 돌아왔다. 하나, 돌아왔음에도 환영받지 못했다. 패퇴했기 때문에? 아니다. 그저 패배였더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면 누구도 질책하지 않았을 것이다. 범죄와 위법이 아닌 이상 도전하는 자는 언제나 찬양받아야 하는 법이니.

하면 어째서?

원인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그의 육신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으니까.

나아가 그의 존재가 '대륙: 지구'에 칼리야스 못지않은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으니까.

하기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러므로 막아야 했다. 패잔병에게도, '대륙: 지구'에도 비참한 결말이 발발하지 않도록.

허나.

결국 저지하지 못했고, 패잔병은 기어이 경계를 넘어버렸다.

이제 남은 과제는 단 하나. 괴물(怪物), 그 최악의 생명체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에 사살하는 것.

가라.

가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모든 수를 총동원해 추살하라. 당신의 머뭇거림으로 인해 이 대륙마저 무너지지 않길 바란다면.

(0/1)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오직 '대륙: 지구'에서만 수행 가능합니다.

* 특이 사항 2: 특수 퀘스트는 다수의 지원자가 동시 진행하되 '경쟁' 구도입니다.

* 특이 사항 3: 최초 달성자가 탄생할 경우 그 이외의 지원자는 퀘스트가 강제 삭제되며, 그에 따른 패널티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105화

삑!

삑!

삑!

"가까워지고 있다."

악셀과 브레이크를 연달아 밟으며 허공에 출력된 지도 속 붉은 점을 쫓아 북상하는 차량.

도로 주위로 빽빽하게 늘어선 빌딩 숲을 주파하며 순식간에 파주로 접어든 나는 어느덧 10km 안팎으로 좁혀진 간격에 급히 진로를 꺾어 근처 주차장을 찾아 차를 대고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목표물이 느닷없이 골목이나 하천 따위로 도망칠 것을 감안해 슬슬 다른 방식으로 움직일 작정이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며 초월적인 생물로서 거듭나고 있는 나의 진정한 애마(愛馬).

"스콰."

"푸르릉!"

스콰였다.

"가자!"

"히이이이잉!"

타다다닷―

쿠웅웅!

뛰어난 지능과 강인한 체력?

테스토스인지 테스토르인지, 그쪽 품종이 제법 잘 나가는가 본데. 내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다.

스콰도 절대 그에 못지않다고.

이를 방증이라도 하듯 녀석은 외려 오랜만에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었다는 것에 만족스러웠는지 경마장의 경주마들처럼 어마어마한 스피드로 스포츠카 부럽지 않게 쭉쭉 나아갔다.

난데없이 출현한 말과 그 말을 보채는 주인의 기합에 도처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으나, 나는 주변의 반응이 어떻든 싹 무시한 채 스콰의 고삐만 좌우로 흔들어 가속에 가속을 거듭하며 상념에 잠겼다.

살인 사건.

어쩌면 연쇄라는 끔찍한 꼬리표가 달릴 수도 있는, 하지만 그게 끝일 거라 여겼던 범죄가 설마 〈특수 퀘스트: 괴물〉이란 이름으로 확장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 가장 먼저 든 의문은 과연 '???'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망가진 패잔병'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대상을 의미했다.

허면.

저 물음표 덩어리는 좀비가 된 생환자를 뜻하는 문장 부호인가? 만약 그런 거라면 조금 의아하다.

좀비면 좀비고, 인간이면 인간일 터인데 어째서 시스템은 명확하게 표기하지 않고 비워뒀을까.

분명 의도가 있다.

의도가 있으니 모호하게 적어둔 걸 거고, 필시 그게 이 퀘스트의 핵심이 되겠지.

따라서 막는 것도 막는 것이지만, 여력이 된다면 자료 수집에도 열정을 기울여야 될 성싶었다.

저 '???'에 대한 부분을 해결하지 못하고 사태가 마무리된다면 꼭 똥 싸러 가서 진짜 똥만 싸고 엉덩이는 안 닦은 것처럼 찝찝해질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열흘, 너무 빠른데.'

〈특수 퀘스트: 망가진 패잔병〉을 클리어한 이후 정유환과 만나 관련 안건에 대해 논의하고 나서 끽해야 십여 일.

공백기가 그다지 긴 편도 아니었는데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새로운 개체가 등장했다니.

적어도 몇 달의 여유는 있으리라 예견했던 나는 상당히 이른 진전에 적잖게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인구 밀집도가 높은 서울 혹은 그 근교라 특수 개체로 변모하는 생환자들이 많은 게 당연한 건지.

아님 퀘스트 난이도가 도시급 스케일로 격상된 바람에 특수 개체들이 늘어나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속력이라면 재앙의 불씨가 전 세계적으로 퍼지는 데에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작금만 해도 만일 내가 '탐지'를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스노우볼이 어떻게 굴러갔을지.

고로.

'역시, 정유환 씨든 누구든 나서야 한다.'

지구식 2차 진화체.

부르기 쉽게 대충… 특수 개체, 그래. 특수 개체들이 더 많아지기 전에 최소한 대한민국만이라도 관리하고 통제할 단체를 어서 빨리 설립해야 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보다 멍청한 짓은 없으니.

'마침 요번에 얻은 것들이 꽤 있으니, 이걸로 딜을 한다면 충분히 먹혀들겠지.'

나는 이번에야말로 정유환에게 확답을 들어야겠단 각오를 다졌다.

기왕에 만들어질 조직이라면 그래도 잘 알고 지내는 이가 회장직에 앉는 것이 낫다는 지론은 한결같았기 때문.

다만 두 차례나 권했음에도 그가 계속해서 거절 의사를 보이거나 그에 준하는 답변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한다면 그때는 결단을 내릴 요량이었다.

서로 제 갈 길 가는 방향으로.

특수 개체와의 전쟁은 속도전이다.

가드 라인 구축이 선행되느냐, 기어코 인두겁을 쓴 괴물들이 지구를 망쳐버리느냐.

둘 중 하나를 두고 겨루는 스피드 레이싱.

그러니 더는 밍기적댈 수가 없었다.

"이랏!"

"히이이이이잉!!"

* * *

주구장창 달려 5km 남짓으로 줄어든 간극을 확인하고서 괜한 소란 방지를 위해 스콰를 인적이 드문 장소로 몰아 지상으로 내려온 나는.

"수고했다. 이따 보자."

"푸르르릉."

"역소환."

―번쩍!

오랜만에 시원하게 질주했던 게 무척이나 기꺼웠는지 연신 투레질을 하며 머리를 비비는 스콰 녀석을 쓰다듬어주며 빛으로 돌려보내고는 어딘가로 신속하게 내달렸다.

길고 높은 건물들이 한데 뭉쳐져 있는 곳.

대형 아파트 단지였다.

[공릉주공아파트]

경기도 양주시, 고양시, 파주시에 걸쳐 흐르는 천 자락인 '공릉천(恭陵川)'과 인접한 지역적 명칭을 고스란히 따와 건설된 아파트 단지는 이곳 외에도 다른 회사 아파트 단지와 겹쳐 거의 2~3천여 세대가 거주 중인 대규모 거주 구역이었는데.

"사람들 틈바구니에 숨겠다는 건가."

특수 개체가 이리로 오게 된 심리는 대강 이해가 갔다.

마땅한 도주로가 없다면 군중 사이로 들어가는 게 제일 효과적이라고 계산했을 거다.

이렇게 되면 피아 식별도 어려울거니와 CCTV의 장벽을 뚫고 몰래 가택 침입이라도 시도하게 되면 다세대 주택의 특성상 일일이 체크하기도, 수천 가구 전체에 대한 수색 영장을 받아 오기도 난감한 상황에 처할 터.

이런 점들이 모여 천혜의 요새를 꾸리고 나면 당분간은 안전이 보장될 거고, 그 기회를 노려 다시금 살인극이 벌어진다면 우린 결국 최악의 국면을 맞이하리라.

물론.

"…이성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전체 하에 말이지."

이 모든 가정은 특수 개체의 '지능'이 멀쩡하단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괴물, 어떤 한 명사로 특정할 수 없어 시스템조차도 괴물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대체해 둔 특수 개체의 본질은 언데드(Undead).

즉.

지각 능력이 제로에 수렴하는 종족이니만큼 추측과 달리 그냥 살육 본능에 이끌려 인간이 많은 쪽으로 온 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정답일지는 만나보면 알겠지."

삑!

삑!

삑!

3km.

그새 더욱 가까워진 거리.

탁―

언제라도 칼을 뽑을 수 있게끔 환두대도의 손잡이를 살짝 쥐며 한시도 쉬지 않고 남하하는 미니맵의 붉은 점을 따라 연거푸 북진한 끝에 나는 마침내 어느 무인 판매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곳이 바로.

"…끄아아아아아악!!!"

녹색 갑옷을 걸친 젊은 남성의 비명과.

"케에에엑, 케에엑!"

고통에 파묻혀 절규하는 남자의 옆구리를 게걸스럽게 물어뜯으며 포효 중인 괴물의 불협화음이 울려 퍼지고 있는 생지옥의 현장이자 내가 찾던 목적지였기 때문이다.

"이런 미친."

탓―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파아아아아앙!

뱃속에서 솟아오른 핏물로 시뻘겋게 물들어버린 지옥에 발을 들인 나는 지체하지 않고 대지를 밀어내며 도약했다.

"으아아악! 끄아아아아아!!"

목이 찢어져라 울부짖는다는 얘기는, 바꿔 말하면 우선은 살아있다는 얘기.

살점이 왕창 파헤쳐진 탓에 당장 쇼크사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급한 와중이었으나 어쨌든 살아있으니 구해야 했다.

철컥―

"하아!"

촤아아아아아악!

짤막한 호흡과 함께 단숨에 도집에서 빠져나와 전방을 가르는 환두대도의 도신.

그 날카로운 일격이 막 장기를 찍어 누르던 괴물의 오른팔을 사정없이 부수고 파고들어 가며 놈을 저만치 튕겨냈다.

섬광(閃光)이고, 직뢰(直雷)고.

기왕이면 흔적도 남기지 못하게 소멸시켜버리고 싶었으나, 그랬다가 아래에 깔린 남성이 그 여파에 휩쓸려 사망해버릴까 우려해 오로지 순수 무력으로 뒤엉켜있던 인괴를 둘로 떨어뜨리며 쉬지 않고 주문을 외웠다.

신성 마법(神聖 魔法).

회복.

신성 마법(神聖 魔法).

빛의 방패.

우우우우우웅!

한순간에 사방을 따스한 온기로 휘감는 청백색 마력.

뽕―

덥석!

"끄으으으읍!"

"반항하지 맙시다. 도와주려는 거니까."

나는 그 속에서 죽네 사네 발버둥 치는 남자의 턱을 한 손으로 붙잡아 세우며 주머니에서 꺼낸 포션 한 병을 통째로 들이부었다.

아.

복부에 생긴 자상에 직접 뿌려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제 복용시킨 물약과 동일하게 무려 중급에 해당하는 성수는 신성 마법 '회복'의 공능과 더해져 그야말로 기적을 실현해냈다.

치이이이이익―

치이이익―

"으으으읍! 끕!"

처참하게 뜯겨나갔던 환부가 뿌연 연기를 동반하며 깔끔하게 재생되었으니 말이다.

꽤나 드라마틱하게 차도를 보이는 장면에 한숨을 돌린 나는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방패를 설치하며 몸을 일으켰다.

"케에엑! 케에에에에엑!!"

그즈음.

내 기습적인 일격에 당해 오른팔이 잘려 나간 특수 개체 또한 막 남은 한쪽 팔로 땅을 짚으며 꾸역꾸역 일어나고 있었다.

지구나 칼리야스나 언데드가 되면 통각에서 해방되는 건 똑같은지.

외팔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파하기보다는 자신을 패대기친 원흉을 응시하며 분노하기 바쁜 놈.

"성역…으로도 안 되겠지."

시뻘겋게 충혈된 눈동자로 노려보는 그 살기등등한 얼굴에 불현듯 '성역(聖域)' 마법의 힘이라면 저 불쌍한 생명을 마치 크뤼글라디(chrȳgládĭ) 호수처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고심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세이렌과 격전을 벌였던 전장에서 질리도록 봐왔다.

그저 밀어내기만 할 뿐, 그저 불타 잿더미로 변할 뿐 빼앗겨버린 생기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던 것을.

이미 영혼마저 사기(死氣)에 잠식되어버린 이상 저 괴물을 원래 모습으로 돌리는 건 내 역량 밖이었다.

"쯧."

그 암담한 사실에 미간을 구기며 혀를 찬 나는 우비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 쓰고 환두대도를 치켜세웠다.

평안하고도 영원한 안식.

응급의료센터에서도 그러했듯이 그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파직―

"케에에에에엑!!"

"성불하시길."

…꽈르르르릉!!

[축하합니다!]

[〈특수 퀘스트: 괴물〉의 과제를 완료하셨습니다.]

[해당 퀘스트를 진행 중인 모든 지원자의 시스템 화면 내에서 동일한 퀘스트가 삭제 처리됩니다.]

[보상으로 '적당한 경험치' 및 '일회용 백신(x10)', '이동 시간 확장권: 30분', '수호의 조각(x2)', '정보 서적: ???에 대하여'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지원 요청 시 부여되는 이동 시간이 '60분'에서 '90분'으로 자동 확장됩니다.]

['???'가 사냥되었습니다.]

└현재 '???'의 단계: 레드 구울(Red Ghoul)

[축하합니다!]

[당신은 '대륙: 지구'에서 최초로 '레드 구울(Red Ghoul)'을 처치했습니다.]

[〈100인 한정 업적_지구: 최초의 레드 구울 사냥꾼〉을 달성했습니다.]

106화

- 금일 오후, 파주역 인근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과 관련하여 추가 소식 전해드립니다.

- 신고를 받고 즉시 출동한 경찰의 추적 끝에 공릉천 인근 아파트 단지 근방에 위치한 무인 판매점에서 용의자를 발견했으나, 용의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 현재 경찰은 용의자가 어떤 경위로 사망했는지 조사 중이며....

주파수를 맞춰 놓은 라디오에서 연신 흘러나오는 파주역 연쇄 살인에 관한 추가 속보.

이윽고 광고로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를 담담한 표정으로 전해 듣던 나는 곧 시동이 걸린 차량의 악셀을 밟으며 별장으로 향했다.

"물, 물...."

조금 전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던 녹색 갑옷의 남자를 뒷좌석에 실은 채로.

20대 초반.

정확하게는 갓 스물이 됐겠다 싶을 정도로 앳돼 보이는 이 청년을 나는 형사들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이 소란에 생환자가 끼어 있음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대낮에 무기와 방어구를 풀 세팅하고서 대놓고 나 생환자요 광고하고 다녔던 탓에 바람대로 숨겨질지는 미지수지만, 당분간은… 생환자 조합이든 정부와의 소통이든 무언가 대비책을 마련하기 전까지 며칠만이라도 일종의 자체 엠바고(embargo)를 걸어둘 심산이었다.

그래서 납치하듯 데려와 버렸다.

이게 잘하는 짓인진 솔직히 모르겠다.

그러나.

뚜르르르르르―

탁!

- 휘윤 씨, 헤어진 지 얼마나 되셨다고 벌써 전화를 주셨습니다? 하하하!

"귀환하는 대로 주무신다더니, 일하고 계시나 봅니다."

- 김 비서님께서 하도 닦달하셔서 말입니다. 결제할 것들만 처리하고 들어가 볼 예정입니다. 헌데, 무슨 일로?

"긴히 논의할 게 있습니다."

- 논의라면....

"시간이 되신다면 만나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 알겠습니다. 별장으로 가지요.

"감사합니다."

일단 일은 벌어졌으니, 내가 취할 다음 대처는 후회가 아니라 수습을 하거나 이 위기를 바탕으로 상황을 역전시키거나.

둘 중 하나였다.

* * *

"휘윤 씨."

"오셨습니까. 김 비서님도 오랜만입니다."

"저는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 두 분 편히 대화 나누시지요."

쉬지 않고 차를 달려 당도한 집.

간단하게 씻고 차를 내오기 무섭게 정유환이 김 비서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내 연락을 받자마자 즉시 출발했는지 거의 엇비슷하게 도착한 그들에게 차를 내주며 응접실로 자리를 옮긴 나는 이래저래 말 돌릴 거 없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패잔병이 또 출현했습니다. 정확하게는, 기어이 경계를 넘어버린 언데드, 특수 개체가 등장했습니다."

"특수 개체...."

"그리고 살행을 벌였지요."

"…허면?!"

"다행히 좀비가 창궐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뉴스고 인터넷이고 시끄러웠겠지요. 언데드에 의해 두 명이 살해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두개골이 함몰된 까닭인지 되살아나진 못한 모양입니다."

"으음, 그렇군요."

얘기를 듣는 내내 변화무쌍한 표정을 짓는 정유환.

긴히 논의할 것이 있다.

그 한마디에 얼추 짐작하고 온 거 같았으나, 패잔병에 의한 사건이 발발했다는 대목에서 놀라 반쯤 일어나기도 하는 둥 평소 호쾌하고 유쾌한 성격으로 유명한 그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반응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런 정유환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주며 미리 세팅해 두었던 것들을 응접실 탁자 위에 올렸다.

툭―

〈날카로운 독수리의 장창/Magic〉

빌런 놈들을 베고 얻은 창을 기점으로.

〈엑세르 가의 하사품: 붉은 레이피어/Magic〉

〈지휘관의 용맹한 할버드/Magic〉

〈숙련된 대장장이의 망치/Magic〉

〈질 좋은 약초 꾸러미/Magic〉

....

채 반나절도 안 된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의 각종 서브 퀘스트로 획득한 장비 및 (주)청성대륙의 연구에 도움이 될 소모품들까지.

단순 시가로 따져도 수십억은 가뿐히 벌어들일 초호화 라인업.

갑자기 대담 중에 이게 무어냐는 듯 어리둥절한 눈빛의 정유환에게 나는 마지막 아이템을 탁 얹으며 말했다.

"해서 저는 유환 씨에게 다시 한번 권유드릴 생각입니다."

"...?"

"제 제안, 기억하시겠지요."

나랑 계약할래.

"한 번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아님.

"생환자 단체, 생환자 조합, 생환자 길드. 뭐든 좋습니다. 패잔병과 관련된 단체의 조직화. 해주시겠습니까? 만약 응하신다면, 저도 약속드리지요. 앞으로 매매는 유환 씨와 청성대륙을 통해서만 하겠다고. 또한, 패잔병 혹은 그와 관계된 업무에서 제가 필요하다면 유환 씨의 지휘를 받아 동행 및 참전하겠습니다. 허나, 거절하신다면."

깨질래.

"오늘이 제 이삿날이 될 겁니다."

혹자는 말한다.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마라.

하지만.

나는 반박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고, 일도 해본 놈이 잘한다고. 일개 비즈니스 사원에 불과했던 내가 조직을 꾸려봐야 뭐 얼마나 잘 돌아가겠는가.

전문 경영인(專門 經營人)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할 줄 모르면 놔야 하고, 배워도 안 되면 물러 날 줄 알아야 하는바.

그렇기에 정유환에게 부담을 주는 제안이란 걸 알면서도 밀어붙였다.

"…5분만, 딱 5분만 고민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과연.

GO일지 STOP일지.

째깍째깍 돌아가는 분침이 네 계단을 지나 비로소 다섯 번째 칸에 다다랐을 때, 굳게 닫혀있던 정유환의 입술이 열렸다.

"좋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의 대답은 오케이였다.

"까짓거 뭐 있겠습니까? 회장님께 여쭤봐야겠습니다만, 회사 업무 사항으로 돌린다면 회장님께서도 문제 삼지 않으실 겁니다."

정말 심도 있게 고심했는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진땀을 쓱 닦아낸 그는 한 번 선택한 이상 미련 따윈 가지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끄덕이며 악수를 청했고, 그의 손을 맞잡는 내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럼… 독점 계약서, 가져와도 되겠습니까?"

"그게 지금 있습니까?"

"사업가는 원래 모든 게 준비돼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 * *

서로 기분 좋게 담소를 마무리한 후.

우리는 하하호호 웃으며 헤어지…지는 못했다.

아직 다루지 못한 안건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이군요."

"예. 치료는 잘 끝난 듯한데, 충격이 심했는지 깨어나질 않는군요."

"음."

녹색 갑옷의 청년.

"이쪽은 제게 맡겨 주시지요. 핫라인을 가동한다면 큰일은 없을 겁니다. 이 청년도 저희가 데려가겠습니다. 정밀 검사를 받아보고 특수 개체…라고 하셨던가요. 그것과 무슨 일로 엮였는지도 알아내도록 해보지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공유해주실 게 있다고."

은 아니고.

"특수 개체를 처치하고 보상으로 특이한 아이템을 얻어서 말입니다."

이것.

〈정보 서적: ???에 대하여/Rare〉

* 특정한 정보 제공을 위해 제작된 서적.

* 정보 '???' 습득

설명도, 옵션도 꼴랑 한 줄로 되어 있는 주제에 레어 등급을 받은 이 기이한 아이템에 관해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이게 뭔진 몰라도.

특수 개체와 연관됐다면 무엇이든 전부 공개할 계획이었다.

"레어… 대단하시군요. 놀라지 않는 걸 보면 처음은 아니신 듯하고."

"우연게 마수를 사냥한 적이 있습니다."

"마수요?"

"영물의 진화체입니다. 영물이 다른 영물을 잡아먹고 성장하면 마수가 된다더군요. 운 좋게 그걸 잡고 영혼석을 구했는데, 그것이 제 첫 레어 아이템이었습니다."

"아. 만약 비슷한 루트로 마수의 영혼석을 구하게 되신다면 정화 작업이… 그 부분은 조금 있다가 알려드리기로 하고 우선 보겠습니다."

"예. 그러시죠."

잠깐 딴 길로 새려던 흐름을 원위치로 되돌린 나는 책자의 양 끝을 잡고 천천히 중단을 열었다.

그 직후.

화아아아아악――!

우린 눈 앞에 펼쳐진 커다란 화면을 보며.

"…이게, 무슨."

"휘윤 씨. 제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습니까?"

경악했다.

[연구일지: 언데드 연구소 전염력 전담부_저자 - 비올로기아 독투스]

"연구일지…라고?"

정보 서적이라는 것의 정체가, 시스템 이외에는 칼리야스 대륙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언데드(Undead)'란 종족의 기밀이 담긴 비문(祕文)이었으니까.

* * *

[연구일지: 언데드 연구소 전염력 전담부_저자 - 비올로기아 독투스]

1장. 언데드의 전염력

* 살아있되 죽었으며, 죽었으되 안식을 얻지 못한 자.

좀비(zombie), 구울(Ghoul), 듀라한(Dulachán) 등 사기(死氣)에 의해 생기(生氣)가 잠식되어버려 불행한 생명체를 두고 우리는 그들을 고대 언어에서 따온 '언데드(Undad)'라 명명했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그들이 가진 '전염력(傳染力)' 때문이었다.

물어뜯고, 할퀴는 과정에서 상대에게 흘러 들어간 사기(死氣)가 해당 대상의 생기(生氣)를 조금씩 조금씩 먹어 치우며 기어코 또 하나의 언데드를 만들어내는 이 감염은 특별한 방도를 쓰지 않는 이상 설령 제국 최강의 기사라는 에퀴테스(Equites)든 대륙 제일의 현자라 불리는 대마법사(大魔法師)라 할지라도 막을 수 없었기에 우리 같은 피식자들에게 언데드란 공포의 주인이자 재앙의 화신이었다…만.

그렇기에 더더욱 연구에 힘을 쏟았다. 하나라도 더 알아내야, 놈들에게 붙잡힌 가족들을 생명을 지켜낼 테니.

아무튼 그래서 이 언데드 연구소 전염력 전담부에 소속된 나는 밤낮을 쉬지 않고 실험에 매달린 끝에 매우 신기한 현상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생명력 변동성'이었다.

2장. 생명력 변동성

* 어떠한 생명체가 언데드에 의해 상해를 입었을 때 개시되는 감염.

그런데 이 체계에는 재미난 점이 존재한다.

똑같은 좀비에 의해 감염됐을지라도 생명체마다 전염이 되는 속도와 시간이 다르다는 것이다.

분명 양식장에서 가져온 동일한 성별, 나이의 '레푸스(lĕpus, 토끼)'를 가져와 실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꼭 한두 놈은 더 늦게 내지는 더 빠르게 언데드가 되었다. 이유가 뭘까. 나는 이 변동성의 원인을 파악하고자 매달렸고 결국 답을 알아냈다.

피감염체가 가진 생명력이 변수였다.

힘이 세고, 체력이 좋은… 소위 서열이 높은 개체는 감염을 비교적 오래 버티는 반면 서열이 낮은 개체는 1.5배에서 2배까지 빠르게 변이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에 흥미를 가졌고, 가장 생명력이 뛰어나다는 인간 기사들을 가져와 실험을 이어갔다. 이 실험체들이라면 보다 확실하게 알려줄 거라 확신했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아니.

예상을 초월하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

초인이라 불릴 만큼 극한까지 단련한 기사들의 경우, 그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양분으로 삼는다면 본디 일백구가량의 먹잇감을 먹어 치워야만 '숙성기'에 접어드는 좀비 놈들이 처음부터 그 단계를 초월해 구울 또는 그 상위 개체로 변환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가진 생명력에 따라 누구는 좀비로 시작할 수도, 누구는 듀라한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107화

"...."

대략 2페이지 정도 되는 짧은 글.

허나 그 짤막한 분량의 기록물을 다 보고 난 뒤에 나는 한동안 멍하니 정유환만 바라봤다.

물론 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넋이 나갔다는 표현이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상태.

당연했다.

'에픽 퀘스트(epic quest)'가 이 지옥에서 탈출할 유일한 활로라면, 이 비문(祕文)은 그 길을 걷는 이의 길잡이였으니 말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띠링!

['정보 서적: ???에 대하여'를 정독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특수 퀘스트: 지식을 탐구하는 자〉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달성 조건: 정보 서적 1회 이상 획득]

[〈특수 퀘스트: 지식을 탐구하는 자〉가 추가됩니다.]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출력된 새로운 메시지.

〈특수 퀘스트: 지식을 탐구하는 자〉

* 어느 날 갑자기 시작돼 한순간에 칼리야스 대륙 전체를 검게 물들여버린 죽음의 파도.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원인' 없이는 '결과'도 없다는 걸.

즉.

이 검은 파도 또한 합당한 원인이 존재했고, 그대가 보게 된 일기장은 그 진실의 일각이 새겨진 파편이었다. 하여 묻고 싶다. 궁금하지 않은가? 과연 이 진실의 파편들을 하나둘 모아 마침내 퍼즐을 완성했을 때 무엇이 그대 앞에 모습을 드러낼지.

혹 감춰진 문을 두드리고 싶다면 도전하라.

언제나 그렇듯.

두드리면 열릴 터이니.

(1/?)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총 목표 개수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 특이 사항 2: 특수 퀘스트는 '대륙: 지구'에서만 진행 가능합니다.

* 특이 사항 3: 본 퀘스트는 다수의 지원자가 동시 진행합니다.

* 특이 사항 4: 본 퀘스트는 일반적인 특수 퀘스트와 달리 '경쟁'하지 않습니다.

* 특이 사항 5: 본 퀘스트는 일반적인 특수 퀘스트와 달리 선행 달성자가 나타나도 '삭제'되지 않습니다.

* 특이 사항 6: 본 퀘스트는 타 지원자의 '정보 서적' 열람으로도 과제 달성이 인정됩니다.

* 특이 사항 7: 단, 타 지원자의 '정보 서적' 열람만으로는 〈특수 퀘스트: 지식을 탐구하는 자〉가 개방되지 않습니다.

* 특이 사항 8: 본 퀘스트는 1개의 파편이 모일 때마다 '보상'을 지급합니다.

[〈특수 퀘스트: 지식을 탐구하는 자〉의 최소 조건이 자동 달성됩니다.]

[보상으로 '적은 경험치' 및 '정신력 소폭 강화'가 주어집니다.]

"아."

네가 본 건 단지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더 많은 특수 개체를 사살해 지구를 지키는 동시에 다양하고 밀도 있는 지식을 가져가라.

무척이나 도발적인 유혹이 아른거리는 퀘스트의 개방이었다.

"뭔가, 엄청난 걸 본 기분입니다. 아니, 엄청난 걸 봤군요."

"지식을… 탐구하는 자."

"이걸 뭐라고 표― 휘윤 씨?"

"아, 예. 뭐라고 하셨죠?"

"뭐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만, 무슨 일이라도."

"퀘스트가 나왔습니다."

"예?"

"지식을 탐구하는 자, 라고 하는군요."

나는 이 사실에 관해서도 일절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읊어주었다.

임무의 내용, 수행 방식, 보상.

한 자도 빠트리지 않고 줄줄 낭독해주자 덩달아 바뀌는 그의 표정.

눈치를 보아하니 명확하게 깨달은 것 같았다.

여기서 받아 가는 정보의 가치가 얼마나 고귀한지.

또.

내가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보답해드려야겠군요. 반드시, "

덕분에 나도 원하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결코 손익 계산 따위에 굴복해 내뱉은 들려주기식 사탕발림이 아닌, 진심이 잔뜩 묻어 나오는 약속을.

* * *

- 물건들은 잘 처리해서 빠른 시일 내에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 가능하다면 영혼석으로 대체하고 싶습니다.

- 알겠습니다.

- 아, 그리고 판매 대금의 10%는 투자하겠습니다.

- 예?

- 제 이기심에 유환 씨에게 강제로 일을 떠넘겼으니 저도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겠지요. 모든 수익금의 10%는 항상 투자금으로 사용하겠습니다.

- 하하, 그래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일주일, 늦어도 3주 이내로 결과를 만들어 알려 드리지요. 대주주님.

일명 '파주역 사이코패스 자살 사건'으로 기사화된 이면 세계의 사건이 일단락된 후 며칠이 흘렀다.

어느덧 완연해진 가을.

계절이 무르익어가는 동안 내 일상에도 소소한 변화가 생겼다.

아니.

큰 변화인가?

여하간 그 달라짐의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무기의 격상이었다.

휘우우우우욱―

서걱!

"이야, 등급이 깡패긴 깡패다. 칼 진짜 잘 드네."

퀘스트 초창기부터 내 곁을 지켜왔던 '사나운 호랑이의 양손 환두대도'.

매일 같이 달고 살며 휘둘러 댄 탓에 하루가 멀다 하고 물집과 굳은살이 터져 손잡이 부분만 시뻘게졌던 애병을 역사의 뒤안길로 떠나보낸 내 손아귀에는 새로운 칼이 쥐어져 있었다.

바로.

〈천둥과 폭풍을 이끄는 지즈의 양손 환두대도/Rare〉

이 녀석이었다.

〈천둥과 폭풍을 이끄는 지즈의 양손 환두대도/Rare〉

* 칼리야스 대륙의 수많은 대장장이 중에서도 3대 검장(劍匠)를 꼽으라면 절대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렸던 「영혼의 대장장이: 페스투카」. 실력 있는 장인이자 영혼석 세공사였던 그는 스스로가 지닌 재능의 희소성을 앞세워 엄청난 부를 축적해낸 「돈 귀신」으로도 유명했다.

그렇기에 명예에 살고 죽는 일부 기사들에게선 질타받기도 했으나, 문자 그대로 일부에 불과했다. 그나마 페스투카에게 의뢰하는 것이 대륙 전역을 종횡하며 만나는 게 기적이라는 「떠돌이 마르쿠스」나 천금을 가져다줘도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자에겐 목이 잘릴지언정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는 「시한부 피덴티아」보다는 나았으니까.

아무튼 이 환두대도는 한 방랑자를 제 휘하로 삼고 싶어 했던 영주의 의뢰로 레스투가가 마수(魔獸)급 지즈의 정순한 영혼석을 장착해 제작한 칼이라고 한다.

* 베기 공격 시 추가 피해량 +33%/착용 시 속성력(뇌) 및 속성력(풍) 최대치 15% 향상/마법 '절대 부러지지 않는' 상시 발현/ 마법 '자동 관리' 상시 발현/ 마법 '마력 전도' 상시 발현

└절대 부러지지 않는: 일정 위력 이하의 공격으로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

└자동 관리: 특별한 관리 없이도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한다.

└마력 전도: 마력 전도율이 11% 향상된다.

한 방랑자를 제 휘하로 삼고 싶어 했던 영주의 의뢰라는 부분에서 누군가가 강력하게 떠오르는 이 환두대도는 비록 쿠스토디아(custódĭa)처럼 엑티브 스킬이 줄줄이 내장된 타입은 아닐지언정 오히려 그 덕에 쓸데없는 심력 낭비할 필요 없이 순전히 적을 베어내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병기였다.

뭐.

무구로 분류되는 장비임에도 근력이나 속력 등 육체 능력을 향상시켜주는 옵션이 붙지 않았다는 점에선 약간 아쉽기도 하다만.

"그거야 나머지로 쫙 채웠으니까."

충분히 만족스러운 작품에 나는 언제쯤에나 퀘스트라는 심연 밖으로 탈출할 수 있을까 걱정하던 것도 잊고 얼른 실전에서 활용해 보고프다는 욕망까지 느꼈다.

아마도.

그 이상 심리에는 이놈도 한몫했을 것이다.

우우우우우우웅―

"별 형태로 회전하다가 선명한 오망성이 그려졌을 때 방출!"

이그니스(ignis) 류(流).

연쇄(連鎖).

"하아아아!"

후우욱―

…꽈르르르르릉!!

…콰과과과과광!

벼락의 주인, 이그니스(ignis)가 창안한 세 번째 도격.

연쇄(連鎖)가.

〈이그니스 류: 연쇄_원본(原本)/Active〉

* 이그니스(ignis)가 창안한 도법의 세 번째 초식. 체내에 축적된 마력을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이며 뻗어 내는 도격. 전방에 투하한 전류가 대상과 충돌할 시 뇌기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주변 일대를 휩쓴다.

* 베기 공격 시 추가 피해량 +33%/1회 공격에 한 해 일시적으로 '뇌(雷) 속성' 부여

폭격으로 그치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연속해서 뻗어 나가는 공격이라니.

섬광(閃光)이나 직뢰(直雷)도 나름 범위 타격 스킬이긴 하나 이놈은 아예 광역기임을 써 놓은 만큼 피격 영역이 무지막지했다.

거리로 환산한다면 시전자를 기준으로 대략 30m 내의 공간 전체를 작살내는 형식이었다.

무리 지어 다니는 게 특기인 언데드를 상대로는 최상의 대응책.

단지 효과에 걸맞게 마력 소모도 무진장 늘어났거니와 적아(敵我)를 식별하지 못해 동료들이 있을 경우 사용하기가 껄끄럽다는 단점이 있긴 한데.

"뭐든 장단점이 있는 법이니까."

어차피 주로 혼자 활동하는 실정이니 주의만 한다면 별로 상관은 없을 듯했다.

마력도 근래 대형급 전이석에 더불어 이래저래 버프를 많이 받아 널널해졌고.

참고로 파스마(phasma) 류(流)를 고르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사유가 있었다.

우선 1번.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같은 S급 스킬의 습득 난이도를 고려했을 때 한쪽이라도 빨리 완성해 두는 게 낫다고 판단했으며 2번은 반 장난이다만, 〈서브 퀘스트: 파스마의 던전〉에 걸린 2차 보상 때문이었다.

파스마는 선언했다.

자신의 던전에 보물들을 쌓아 두었다고.

다시 말해.

파스마(phasma) 류(流)를 찾는 모험에서 조각뿐 아니라 별도의 아이템들을 얻을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보물찾기를 다섯 번이나 시도할 수 있는데, 굳이 횟수를 줄일 필요는 없지."

하여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그니스(ignis) 류(流)를 먼저 회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끝으로 대망의 세 번째 변화는.

"…히이이이이잉!!"

슈우우우욱―

콰아앙!

"푸르르릉."

"푸르릉."

저기 자기들끼리 재미나게 놀고 있는 두 마리의 군마였다.

〈서브 퀘스트: 한계 돌파〉의 소멸을 우려해 최후의 최후까지도 고뇌하다 결국 승격을 포기한 스콰와 녀석에게 '앞 발차기' 등의 기술을 전수 중인 스승 세컨들리.

이름 짓기가 귀찮아··서는 아니고.

최대한 부르기 편하게 간단히 작명을 마친 세컨들리는 정규 기사들에게나 지급해주는 품종임을 방증하듯이 확실히 대단한 신위를 보여 주었다.

최대 속력, 근지구력, 지능, 반응 속도 등.

모든 면에서 스콰의 초기 버전과 비교해 몇 수는 앞선 놈이었다…만.

"히이이이이잉!"

"푸르르릉, 푸릉."

두 군마의 첫 대면식에서 벌어진 서열전을 통해 스콰는 보여 주었다.

누가 더 강한 펫인지를. 아주 신명 나게 두들겨 패는데 저만하면 이미 영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 한 수 위의 실력이었다.

이렇듯 적지 않은 변경 사항으로 나는 요근래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오로지 적응 훈련에만 몰두 중이었다.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을 클리어한 이후로 훌쩍 지나가 버린 시간과 비례해 그날 역시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고로 1분 1초도 쉴 수 없었다.

매사에 준비해 둬야만 했다.

당장.

"임마들아. 그만하고 가자. 배고프―"

띠링!

"…응?"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90분 후 칼리야스 대륙으로의 이동을 시작합니다.]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진행권'을 보유한 대상입니다.]

[아이템 효과에 의거하여 메인 퀘스트가 변경됩니다.]

[위치 조정을 위해 이동 시간이 초기화됩니다.]

[남은 시간: 90분 00초]

"아."

전장으로 끌려가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108화

[ 칼리야스의 구원 ]

〈칼리야스의 구원_LV.8 퀘스트 진행권/Rare〉

* '에픽 퀘스트: 칼랴이스의 구원' 습득자에게 주어지는 마법 스크롤(scroll). 지원 요청이 접수되었을 때 자동으로 주문이 발동된다.

* 지급된 메인 퀘스트 변경

나는 이 초대장을 얻은 시점부터 늘 고대해왔다.

하루라도 빨리 이 녀석을 쓸 날이 오기를.

Level 8.

그 말인즉 'Level 9', 'Level 10' 등 상위 퀘스트의 진행권도 구비되어 있다는 의미였기에 8레벨 따윈 후딱 해치우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었다.

단순히 미션을 해결하면 자동으로 등급이 올라가는 것인지.

아니면 다시금 수도원을 방문해 검증을 받고 능력에 맞는 진행권을 재발부받아야 하는 것인진 모르겠다만, 애당초 그걸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단독 퀘스트가 떠야만 했는데.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90분 후 칼리야스 대륙으로의 이동을 시작합니다.]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진행권'을 보유한 대상입니다.]

[아이템 효과에 의거하여 메인 퀘스트가 변경됩니다.]

[위치 조정을 위해 이동 시간이 초기화됩니다.]

[남은 시간: 89분 59초]

[남은 시간: 89분 58초]

[남은 시간: 89분 57초]

....

"스콰! 세컨들리! 따라와라!"

"히이이잉!"

"히이잉!"

그 소망을 이뤄줄 참전 요청에 눈을 반짝인 나는 즉각 두 말들을 불러들이며 별장으로 달렸다.

이송 대기 시간이 90분.

1시간 반까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훈련 중에도 항시 대부분의 짐은 챙겨 놓고 있는지라 곧장 끌려간다 해도 별 상관없다만, 그래도 에픽 퀘스트니 기왕이면 뭐 빠트린 거 없나 철저하게 점검하고 가는 게 여러모로 좋은바.

"식량… 7일 치. 식수 정화 장치도 잘 작동하고, 그 밖에 속옷이나 평상복 여벌도 됐고. 보조 장비도 오케이. 됐다."

설사 오지에 떨어지더라도 일주일쯤은 너끈하게 버틸 수 있는 의식주(衣食住) 꾸러미를 꽉꽉 눌러 채운 난, 전투 용품 보따리는 스콰의 안장에 걸고 생활용품 보따리는 세컨들리의 안장에 거는 것으로 인벤토리 정비를 마친 뒤.

[사범단]

[나: 출장입니다.]

[정유환]

[나: 퀘스트입니다. 연락 남겨주시면 추후 돌아와서 회신 드리겠습니다.]

최종적으로 사범단과 정유환에게 급한 용무가 생겼음을 전하고 신형 환두대도를 뽑아 쥐며 호쾌하게 주문을 외웠다.

"즉시 전송."

[특수 기능 '즉시 전송'이 발동됩니다.]

[남은 시간에 관계없이 칼리야스 대륙으로 이동됩니다.]

번쩍!

그 직후.

"자, 여긴 어디―"

"...크아아아?"

"응?"

"크어어어어어!!"

"끼에에에엑"

"끄아아아!"

....

삐이이익!

[경고!]

[죽음으로 이루어진 작은 파도를 이끄는 목 잃은 기사, '듀라한(Dulachán)'이 당신을 주시했습니다.]

['오오라: 검은 망령의 파문'과 접촉했습니다.]

[10분간 모든 능력치가 5% 하락합니다.]

날 반겨준 건 머리 빠진 기사, 듀라한을 위시한 수백 마리의 언데드 부대와.

"막아! 막아야 한다! 뚫리면 끝장이다!!"

"으아아아아아!"

"방패 똑바로 들어!!"

그놈들에게 둘러싸여 혈전을 치르고 있는 한 무리의 군대였다.

"…이게 뭔 상황이냐."

본디 퀘스트에 들어가면 최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하는 것은 스타팅 포인트의 안전도.

이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시야가 트이자마자 버릇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일순 멈칫했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무릎을 살짝 굽히곤 환두대도를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우우우우우웅―

파직!

"크어어어어어어어!!"

"그쪽은 놔두고 나랑 놀자."

다소 난잡스러운 전황과는 별개로 적군과 아군은 명확하게 구분되어있는 터라 내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는 추후에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고, 지금은 칼질에 전념할 작정이었다.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흣, 차."

꽈르르르릉―

그 반사적인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그어가는 궤적 아래로 추락하는 벼락.

각종 아이템과 스킬로 한층 강력해진 뇌류의 대미지는 굉장했다.

…콰과과과과광!!

귀가 먹먹해질 지경의 시끌벅적한 굉음을 기점으로 물결치듯 전방을 휩쓸며 듀라한이고 구울이고 가리지 않고 단숨에 집어삼키는 푸른 광채.

"뭐, 뭐야?"

"신이 노했다! 칼리야스가 노했어!"

"으아아아악!"

이 난데없는 충격파에 화들짝 놀라다 못해 신(神)을 부르짖기까지 하는 사람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해서 환두대도를 휘두르며 언데드 부대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3차 진화체는 고사하고 2차 진화체조차 듀라한 1구가 고작인 규모.

3~400마리?

이그니스(ignis) 류(流).

연쇄(連鎖).

"아자!"

슈우우욱―

콰앙!

쿠구구구구구궁!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숫자였고, 난 마치 양 떼 사이에 뛰어든 호랑이마냥 날뛰며 언데드 놈들을 바깥에서부터 차분하게 분쇄해나갔다.

"…그어어어어."

콰직!

털썩―

"끝."

파죽지세의 기세로 단숨에 마지막 구울의 대가리를 깔끔히 날려버리고 나자 찾아온 정적.

산 자들의 처절한 절규도, 죽은 자들의 욕망 가득한 아우성도 사라진 전장은 누군가의 침 넘어가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매우 조용했다.

하기야.

갑작스럽게 외부인이 나타난 걸로도 모자라, 심지어 그 외부인의 무력이 언데드 수백 마리쯤은 가볍게 짓이기는 레벨이었으니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았으리라.

나야 좋았다.

그 덕택에 확인할 여유가 생겼으니까.

띠링!

[지금부터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요새 건설: 프로도무스 마을〉이 시작됩니다.]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요새 건설: 프로도무스 마을〉

* 칼리야스 교단이 내린 단호한 결단.

성자의 희생.

그것만이 재앙에 뒤덮인 이 세상에서 모두를 구원할 단 하나의 선택지라고 여겼다. 허나 이 중대한 결정에는 한 가지 장애물이 존재했다.

바로 '성자의 귀환'이었다.

현재 성자의 위치는 대륙의 중심이라 불리는 대디움 산맥에서도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넥시오 봉우리 정상에 세워진 '디위누스(dīvínus)' 신전.

칼리야스 교단의 교인들뿐만 아니라 대륙민 모두가 신성하게 여기는, 당대 교황과 성자 혹은 성녀만이 발을 들일 수 있는 공간인 탓에 초기에 대동했던 호위단을 제외하고는 마땅한 안전장치도 없이 총단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에 교단에서는 크게 두 가지 대책을 세웠다.

첫째, 교단의 인정을 받은 원정군을 추가 파견할 것.

그리고 두 번째.

성자의 이동 경로에 있는 주요 길목마다 임시 요새와 장벽을 설치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길, '사케르 이테르(săcer ĭter)'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종료 시점'이 존재합니다.

* 특이 사항 2: 어떤 방식으로든 '출입구'가 '봉쇄'되는 순간 카운트가 시작됩니다.

* 특이 사항 3: 종료까지 남은 시간(출입구 봉쇄 전) ⊂ 72시간 00분 00초

* 특이 사항 4: '적'에 의한 출입구 파괴, 수성 병력 3분의 1 이상 사망 시 남은 시간과 관계없이 즉시 '실패' 처리됩니다.

* 서브 퀘스트 목록 확인 적용자: 서브 퀘스트 목록 열람▼

(507/507)

눈부신 빛무리를 동반하며 전개된 홀로그램 화면을.

* * *

"으흠."

수백 쌍의 눈동자를 뒤로한 채 처음으로 마주한 에픽 퀘스트.

알게 모르게 쌓인 기대감을 품고서 꼼꼼하게 읽어 내려간 최초의 서사시를 통해 내가 알아낼 수 있는 포인트는 대략 세 가지.

첫째, 성자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임무를 진행하려면 교단의 인정… 아마 은위계로도 넘보기 힘든 실력자가 돼야 한다.

둘째, 위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모든 용병은 웬만해서는 사케르 이테르(săcer ĭter), 일명 성자 전용 활로 축조 작업에 투입된다.

셋째, 그래서 내가 할 일은 프로도무스라는 마을을 요새화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대충 이 정도인가."

나는 이 데이터를 뇌리에 깊게 박아 넣으며 새로운 화면을 개방했다.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요새 건설: 프로도무스 마을〉의 서브 퀘스트를 열람합니다.]

1. 완벽한 청소

2. 도전

3. 조사

* 수행 가능한 서브 퀘스트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메인이든 에픽이든 퀘스트에 진입했다면 반드시 체크해 줘야 하는 서브 미션 창이었다.

헌데.

"이게 다야?"

필드가 '마을' 단위라 그런가.

에픽 퀘스트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겨우 3개에 그친 서브 퀘스트들.

글라디아르(gládĭár) 때처럼 열댓 개까진 아니더라도 대여섯 개는 내주겠지 싶었는데, 기대에 한참이나 못 미치는 결과물 보고 나니 미간에 골이 패였다.

"한몫 단단히 챙기는 줄 알았더니 원."

3개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 판국.

그로 인해 못내 허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입맛을 다시던 찰나였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타이밍 한번 공교롭게도 필수 절차를 다 마쳐나갈 즈음 누군가 전장 전체에 깔려 있던 침묵을 깨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대체로 가죽 갑옷을 걸친 이들과 달리 전투복 위에 철제 갑옷을 덧댄 30대 초반의 남성.

그는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공격을 감행하겠다는 듯 경계심이 잔뜩 실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얘기를 나누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

그러나 나는 한 점의 걱정도 없었다.

분위기를 뒤바꿀 방법이야 많았으니까.

"나는 칼리야스 교단의 의뢰를 받고 프로도무스 방면으로 오게 된 은위계급 용병 오휘윤이요."

"아!"

칼리야스 교단, 은위계급 용병.

이 두 마디면 없던 신뢰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 * *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칼리야스 성전군 제3 공병전단 소속 31공병전대를 이끌고 있는 클라크 팔트라고 합니다."

"은위계급 용병 오휘윤이요. 의뢰를 이행했을 뿐이니 감사 인사는 이만하면 됐습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에서 벗어나 탁 트인 평야에 31공병전대가 임시 숙영지를 세우는 사이.

나는 공병전대장 클라크와 따로 자리를 가졌다.

"그보다 현재까지의 현황이나 향후 일정에 대해 듣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교단의 의뢰를 받은 용병이라고 하시니,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요. 우리보다 앞서서 출발한 1수색전단 소속 12수색전대의 표식대로라면 곧 프로도무스 마을이 나올 것입니다. 저흰 그곳에서 12수색전대와 합류한 후 그곳을 요새화할 예정입니다."

"생각보다 단순하군요."

이들의 계획이라든가 전력 등.

앞으로 며칠이나 동행하게 될진 몰라도, 함께하는 동안 내 목숨과도 직결될 수 있는 항목들을 알아두기 위해 질문을 이어갔다.

다만.

우리의 담소는 채 5분을 가지 못했다.

"…클라크 님!"

"무슨 일이냐."

"저… 그게."

"괜찮으니 말하도록."

"충! 조금 전 복귀한 척후의 보고에 따르길."

예상치 못한 이변이 발생한 탓이었다.

"프로도무스 마을 내부서 12수색전대로 추정되는 수십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109화

칼리야스 성전군이란.

오로지 대륙을 구원하겠다는 일념으로 칼리야스교 총단에서 수호 사제들을 중심으로 자유 용병과 피난민 등 투쟁과 항전의 의지를 밝힌 이들을 규합해 편성한 군대를 말한다.

그러한 여파로… 사실상 졸속으로 창설된 탓에 처음엔 어딘가 빈구석도 많고 부족한 부분도 더러 있으나 교에서 유구한 세월 내내 축적해 두었던 재산을 탈탈 털어가며 가르치고 훈련시킨 덕에 이제는 정말 '정예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은 대륙의 유일한 불꽃이 되었고, 수색전단은 그 성전군 소속 내에서도 무력으로는 손꼽히는 타격대였다.

애당초 '수색'이라는 것 자체가 적의 위치, 병력, 화력 따위를 알아내기 위하여 적진을 드나드는 행위였으니까.

그러므로 12수색전대는, 구성 인원의 8할이 대장장이나 건축가 등 요새 건설에 특화된 공병들로 꾸려진 31 공병전대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평생 망치나 곡괭이만 잡아 왔던 일반인들로서는 2차 진화체만 출현하더라도 전멸의 위험이 뒤따랐기 때문.

그런데.

"다시 말해 보거라. 무어가 어쨌다고?"

"프로도무스 마을 내부서, 시신으로...."

"허."

검이자 방패이며 수호자가 되어 줘야 하는 500여 명의 병력 중 일부가 시체로 변해버렸다.

아니 뭐.

언데드들이 판치는 세상이니 제아무리 수색전대라도 피해를 보고 패배를 겪을 수는 있다.

단지 걸리는 것은 그들의 이후 행동이었다.

사고가 터졌다면 후발대인 31공병전대 쪽으로 전령을 급파한다던가.

그마저도 어려웠다면 표지석이라도 뿌려 두어야 했다.

그래야 31공병전대가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 테니.

하지만 12수색전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이것이 뜻하는 바는 간단명료했다.

정해진 수칙을 죄다 잊어버릴 만큼, 정신없이 내빼야 했을 정도로 위험하다는 이야기였다.

허면 그 압도적인 위용을 선보인 괴물의 실체는 무엇일까.

'3차 진화체인가?'

클라크와 부하 병사의 대담을 직관하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3차 진화체를 떠올렸다.

세이렌이나 콥스 골렘이라면 설사 기사가 껴 있다 하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패퇴시킬 수 있는 개체들.

수색전대를 비롯해 성전군의 각 타격대마다 수호 사제들이 최소 하나에서 둘은 끼어 있다고 하는데, 사제가 있고 없고와는 별개로 3차 진화체쯤 되면 해당 개체에 관한 정보의 유모로 승패가 갈리곤 한다.

당장 콥스 골렘만 해도 등장 초기에는 기사 수십 명에 수호 사제 한 부대가 대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상자를 내지 않았던가?

그런 놈들이 무더기로―

"다른 흔적은, 다른 흔적은 없었느냐."

"보고에 따르면 마을 곳곳에 엄청난 수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고 합니다."

"발자국?"

"인간의 것이냐."

"그게...."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대답하거라!"

"인간의 것도 있고, 짐승의 것도 있다고 합니다."

"짐승?"

"그렇습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가까이 접근하지는 못해 정확히 어느 짐승의 것인지는 대조해 보지 못했으나, 분명한 것은 한두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적어도 수십 종은 될 거라는 게 척후조장의...."

"잠시만."

"예?"

홀로 상념에 빠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문자답을 이어가던 나는 별안간 손을 들고 클라크와 병사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짐승들의 발자국, 이라고 하셨습니까?"

"아, 예. 맞습니다."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관계의 동물들이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고 한데 모였다.

어째.

꽤나 익숙한 문장이 귀에 들린 까닭이었다.

얼마 전에 아주 시원하게 박살 내 버렸던 자식과.

물론 아직 단정 짓기는 이르다.

해서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고.

"클라크 경."

"예."

"혹 이 주변에 생명의 샘이 있습니까?"

"생명의 샘이라면… 목적지인 프로도무스 마을에서 북문으로 빠져나가기만 해도 볼 수 있습니다."

"샘지기는 살아 있습니까?"

"사냥당한 지 10년도 더 지났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12수색전대를 유린한 놈의 정체에 대해 100% 확신할 수 있었다.

"제단이군요."

"제단…이요?"

생명의 샘이 가진 영기를 흡수하며 성장하는 첨탑.

그 모순덩어리 괴생명체가 범인이었다…만.

나는 정답을 구했음에도 웃지 못했다.

"설명은 나중에 해드리지요. 그보다 혹시 시체 주변에 바윗덩어리가 날아든 형상이라든가 막대한 양의 모래가 담장이나 주택 따위를 덮고 있다든가 하는 광경은 못 봤습니까?"

역행의 제단이 가진 또 다른 명칭은 '시체 거인 배양기'.

그 말인즉슨.

이대로 프로도무스 마을에 진입했다가는 최악의 경우 제단과 콥스 골렘을 동시에 혹은 콥스 골렘'들'과 부딪치게 될 수도 있단 소리였다.

"그러니 정확하게 알아둬야 합니다."

"어 그게...."

"펠락, 가서 척후조를 전원 소집하라. 내 직접 물어보겠다."

"충!"

* * *

상관의 지시에 어디론가 헐레벌떡 뛰어나갔던 펠락이란 병사가 되돌아온 후 나는 클라크의 배려를 받아 도합 열 명이나 되는 병사들과 각각 면담을 가졌다.

20대에서 40대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는 척후조원들은 제각기 다른 나이대처럼 동일한 광경을 보았음에도 저마다 기억하는 장면이 달랐다.

누군가는 시신이 널브러진 자세나 상처의 모양 등을 외웠다면, 누군가는 시신을 위주로 하되 전반적인 풍경이 어땠는지를 보는 둥 개개인의 관점에 따라 겹치기도 했고, 다르기도 했다.

그러한 탓에 약간 중구난방이란 느낌도 들었지만, 뭐가 어쨌든 간에 나는 원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다행히 콥스 골렘은 없는 듯합니다."

시체 거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

과거는 지나갔고, 현재를 살며 미래가 다가오고 있었기에 언제까지고 안심하기는 힘들지만.

"놈들의 특징은 거대한 육체에서 발하는 파괴력입니다. 만약 놈들이 소환된 상태였다면 하다못해 족적이라도 목격했을 겁니다."

척후조원들 모두가 거인의 'ㄱ' 자도 본 적 없다고 하니 당분간은 안심해도 될 성싶었다.

문제는 이게 며칠이나 갈지 모른다는 것.

더불어.

"그렇군요. 솔직히 아직도 믿기진 않습니다. 성벽과 맞먹는 신장이라니."

"가능하다면 평생 보지 않기를 바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마주쳐서 득이 될 게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

"저 역시 그런 만남은 사양입니다. 그나저나 그럼 이제 그 역행의 제단이라는 것만 신경 쓰면 되겠군요."

"보류하거나 아예 다른 지역을 찾는 방향성도 있습니다만."

"그게… 불가능합니다. 12수색전대가 보호해 주지 않는 한 이렇다 할 자생력이 없는 저희로서는 함부로 움직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콥스 골렘이라는 불안 요소를 앞에 두고도 요새화 작전을 꾸역꾸역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울타리가 사라진 가축들은 늑대의 밥이 되는 법.

따라서 성자가 아니라 일단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방벽을 건설해야만 했다.

꼭 정해진 운명처럼,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요새 건설: 프로도무스 마을〉의 지시 사항대로 말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알겠습니다. 저도 돕죠. 그러면 자재 수급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괜한 잡념을 털어낸 나는 곧바로 클라크와 건축 방법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썩 낯익은 단어를 들을 수 있었다.

"이 근처에 프로미카들의 굴이 있습니다."

"프로미카?"

"예. 프로도무스. 마을 이름의 유래부터가 주변에 프로미카들이 많이 살아 붙여진 이름이지요."

"아, 그래서 이쪽을 요새화하려고...."

"프로미카의 특성에 대해 아시나 봅니다. 그럼 얘기가 쉬워지겠군요."

다름 아닌 거대 개미 형태의 괴수 프로미카(Formica)의 이름이었다.

과거.

직뢰(直雷)를 구하기 위해 랍티오 용병단과 싸워야 했던 퀘스트에서, 그 악마 같은 놈들이 자신들의 왕국을 짓겠답시고 활용했던 게 프로미카들의 체내에서 분비된 용액으로 변질된 황토였다.

물에 섞고 일정 온도로 가열만 해주면 어지간한 벽돌 이상의 강도를 지니게 된다는.

설마 그걸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래서 부탁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

"부탁이라면...?"

"이 근처에 프로미카 황토가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것까지가 12수색전대의 담당이었지요."

"그럼."

"예. 황토가 묻힌 장소를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띠링!

['31공병전대 지휘관의 부탁'을 받아냈습니다.]

[〈서브 퀘스트: 수색〉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요새 건설: 프로도무스 마을〉에 〈서브 퀘스트: 수색〉이 추가됩니다.]

〈서브 퀘스트: 수색〉

* 우여곡절 끝에 요새 건설을 시작하기로 결정한 31공병전대. 하지만 의욕과 달리 건축에 가장 중요한 자재인 '프로미카(Formica) 황토'가 정확히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본래 이 임무를 담당해주기로 약속했던 12수색전대가 사라져버린 탓이다.

그렇기에 어찌해야 하나 걱정하던 31공병전대장 클라크 팔트는 12수색전대를 대신하여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적임자를 찾았고, 때마침 그의 눈에 띈 것이 당신이었다.

과연 그대는 클라크의 요청을 훌륭히 완수할 수 있을 것인가.

(0/1)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 완료 시 〈서브 퀘스트: 자재 수급〉이 자동 개방됩니다.

감회에 젖어 있는 사이 출력된 서브 퀘스트.

딱히 특별할 게 없는 임무였기에 나는 지체하지 않고 숙영지를 나섰다. 내가 홀로 움직이는 동안 이들에게 사고가 생기면 어쩌나 하는 우려… 따윈 1도 하지 않았다.

신성 마법(神聖 魔法).

성역(聖域).

우우우우우우웅!!

이럴 때 쓰기 딱 좋은 아이템을 보유 중이었으니까.

성역이라면 3차 진화체가 나타나 두들기지 않는 한 저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터.

이걸로 3일간은 봉인이 된다는 게, 이러다 정작 필요한 순간에 후회하게 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으나.

내 지론은 늘 한결같았다.

"아끼다 똥 된다."

까마득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끙끙 앓다가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요새 건설: 프로도무스 마을〉에 〈서브 퀘스트: 수색〉의 두 번째 실패 조건인 '수성군 3분의 1 사망'이 달성돼버리기라도 하면 성역이고 뭐고 무려 에픽 퀘스트를 날려 먹는 셈이었다.

그러니 쓸 수 있을 때 쓰고.

나중에는… 뭐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그러려고 아득바득 장비를 갈아치우고 스킬을 배우는 거 아닌가.

괜히 폼 잡으려고 레어 장비 구하고, S랭크 기술 익히는 게 아니다.

음.

"스콰! 달려라!"

"히이이이잉!!"

나는 내 선택에 대해 한 점의 후회도 갖지 않으려 끊임없이 긍정적인 마인드를 되새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1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