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프로미카(Formica) 황토를 찾는 일은 의외로 간단했다.
클라크가 방향을 얼추 알고 있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내가 일전의 경험을 토대로 감촉도, 재질도, 색과 냄새까지도 전부 알고 있었으니까.
"아, 저깄네."
그 자료를 바탕으로 단박에 목적지에 도달한 나는.
"…끄어어어어어!!"
"끄아아아아!!"
"으아아아!"
"여기도 그득하네."
황토를 가져가기에 앞서 칼부터 휘둘러야 했다.
어째서인지 황토 지대에 온갖 언데드들이 득실거린 탓이었다.
좀비나 구울은 기본이요.
레드 구울이나 듀라한 등 2차 진화체들까지 심심찮게 출현하는 등 기껏해야 마을 하나 딸린 것치고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수준의 웨이브가 일대에 일렁거리고 있었다.
대체 왜.
여기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이리도 붐비는 걸까?
그 이유는 뜻밖에도 31공병전대 때문이었다.
500여 명.
게다가 12수색전대까지 더해 도합 1,000여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 이 근방을 당당하게 활보하고 다녔으니, 그 풍부한 생명력이 풍기는 유혹적인 향기에 저놈들이 반응하지 않을 리가 있나.
아마 이 주위를 떠돌던 언데드들은 죄다 모여들었을 터.
그로 인해 나는 한바탕 살풀이를 통해 장내를 먼저 정리하고 난 후에야 〈서브 퀘스트: 수색〉을 끝마칠 수 있었다.
"물 붓고 가열해 주면."
쪼르르르르르륵―
화르륵!
띠링!
"오케이."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수색〉의 과제를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적당한 경험치' 및 '다회용 무기 수리 키트: Magic'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서브 퀘스트: 수색〉의 과제를 완료함에 따라 〈서브 퀘스트: 자재 수급〉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요새 건설: 프로도무스 마을〉에 〈서브 퀘스트: 자재 수급〉이 추가됩니다.]
〈서브 퀘스트: 자재 수급〉
* 기나긴 노력 끝에 찾아낸 프로미카(Formica) 황토. 이제 남은 것은 이것들을 안전하고 신속하게 옮겨 두터운 성벽과 높게 솟은 첨탑,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요새를 건축하는 것.
아서 돌아가 31공병전대 지휘관 클라크 팔트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를 도와 자재들을 함께 옮겨준다면 반드시 상응하는 보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0/~)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종료 시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 특이 사항 2: 건축된 요새가 최소 달성 기준(상세 열기▼)에서 가로 '10cm', 세로 '50cm'씩 확장될 때마다 최종 보상의 품질이 향상됩니다.
* 특이 사항 3: 단, 최종 보상의 등급은 'Magic'을 초과할 수 없습니다.
"오케이, 가자."
"푸르르릉!"
* * *
"…금방 구해오셨군요."
"클라크 경이 알려주신 방면이 모조리 프로미카 황토였습니다."
"다행입니다. 혹시 잘못된 정보면 어쩌나 싶었는데."
"인근이 모두 프로미카 굴이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황토 지대가 굉장히 넓었습니다. 가서 챙겨오기만 하면 될 듯한데, 인원 편성은 다 되셨습니까?"
"언제든 출발할 수 있게 바깥에서 대기 중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바로 갔다 오시지요."
프로미카 황토 필드를 확보하고 난 다음부터는 캐고 배달하고의 반복이었다.
실력이 아닌 아이템이라는 기물의 힘을 빌려 발현한 마법이라 성역(聖域)의 지속 시간은 상당히 짧은 편이었다.
그래서 주문의 효과가 끝나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수레 한 대라도 싹싹 긁어모아 황토 확보에 투입했다.
덕분에 벽돌은 무지막지한 속도로 쌓이기 시작했고, 그 물량이 수천 장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공병전대장 클라크가 본격적으로 요새 건설에 뛰어들었다.
"3구역은 이런 식으로 짓는다! 콜튼, 네가 감독이다."
"충!"
"1구역과 2구역은 바레트니안과 헤이쿱이 맡아라."
"충!"
"충!"
"언제나 말하지만 정밀함을 놓치지 마라! 잘못 쌓아 올린 벽돌 하나가 성을 무너뜨리고, 무심코 지나친 흠집 하나가 댐을 붕괴시키는 법이다. 알겠나!"
"예!"
"예!"
....
채찍이라도 꺼낼 기세로 병사들을 닦달하며 요새 축조에 박차를 가하는 클라크.
여유가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기에 500여 명의 공병대원을 단 한 사람도 놀리지 않으며 호통을 쏟아내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호랑이가 따로 없었다.
그 덕택에 원래 계획과 다르게 프로도무스 마을의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고 맨땅에 헤딩하는 격으로 세워 올리고 있음에도 요새는 빠르게 구축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 나도 가볼까."
그 모습을 구경하며 한동안 자리를 지켰던 나는 성역(聖域) 마법의 유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체크하곤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기왕에 가동한 방어벽이 효력을 다하기 전에 프로도무스 마을에 다녀올 요량이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패퇴해 버린 12수색전대.
아니.
단순 패배를 넘어 500여 명에 달하는 병력이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역행의 제단이 끼어 있는 데다 수천, 수만 단위까지 불어나기도 하는 짐승형 언데드들의 웨이브라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긴 한데.
뭔가 찜찜했다.
이 꺼림칙한 기분의 원인은 뭘까.
"시신이겠지."
마을 내부에 버려져 있다는 시신들.
그래.
이게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언데드에게 공격받았다면 감염이 되었을 터이니, 두개골이 함몰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금쯤 '끄어어억' 거리며 사방팔방 생명체를 쫓아 뛰어다녔어야 한다.
내가 아는 상식은 그러한데 척후조원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시신이 널브러져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게 다였다.
그래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왜 빨랫감마냥 가지런히 놓여 있는 거냐고."
이 찜찜함의 결말이 그저 기우였는지.
아니면 본능의 경고였는지.
* * *
저벅―
저벅―
조용한 가운데 모래 밟히는 소리만이 나풀거리는 오후 햇살 아래.
나는 드디어 척후조원들이 머물렀었다는, 마을을 내부까지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언덕에 당도했다.
프로도무스 마을의 전체적인 외관은 여느 촌 동네와 비슷했다.
짐승의 침임을 막기 위해 설치해 놓은 울타리 안쪽으로 수십여 채의 가옥들이 늘어서 있는 평범한 구조.
이곳만의 특색을 굳이 뽑아본다면 프로미카들이 뚫어 놓은 땅굴 위에 건물을 올린 영향인지 지반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U자로 내려앉은 느낌?
내 첫 평가는 딱 그 정도였다.
애당초 부동산을 보러 온 것도 아니라서 그쪽엔 별로 관심도 없었고.
"어디 있냐, 어디 있냐."
내가 궁금한 건 오직 한 가지.
마을 중앙 공터에 주르륵 누워 있다는 4~50여 구의 시체들.
그 기묘한 시체들을 찾아 시선을 옮기며 마을 전체를 훑어보던 나는 이내 한 지점에서 우뚝 멈췄다.
여러 갈래의 길들이 모이고 모여 큰 원을 이루는 광장.
"어."
그 원형의 공터를 차지한 채.
누군가 일부러 전시해 놓은 것처럼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50여 구의 시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척후조원들의 얘기…와는 다르게.
- 으읍!
- 읍!
- 으으으읍!
"…살아, 있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그들을.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멀쩡하지는 않았다.
최대한 안력을 돋궈 살펴본 그들의 육체에는 무언가가 빼곡하게 박혀 있었고, 그로 인해 발생한 고통에 짓눌린 이들이 간헐적으로 발작 증세를 보였으니까.
나아가 그 발작이 심해질 때마다.
사아아아악―
사아아아아악―
저들의 전신에 서린 붉은 기류가 점차 진해지고 있었다.
생존해 있되 죽어가는 이들.
그 기괴한 장면을 목도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사케르 이테르(săcer ĭter).
전장의 갖은 변수에도 성자가 안전하게 교단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수십, 수백 곳에 요새와 장벽을 건설하겠다는 대업에 참여하게 된 나를 시스템이 왜 하필이면 여기 프로도우스 마을 건설 현장으로 보냈는지.
"막으라는 거였나."
대륙 전체를 검은 물결로 뒤덮어버린 신원 미상의 흉수.
그인지 그들인지가 무슨 목적으로 일을 벌였으며, 어떻게 이런 재앙을 만들어냈는지.
아무것도 밝혀진 바 없지만.
저들이 원하는 건 세상의 침몰이고, 그렇기에 방주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교단의 행사를 방해하려 들 것이니.
"가서 막으라는 거였어."
이게.
에픽 퀘스트의 진짜 목표였다.
띠링!
[스스로 비밀의 문을 열고 그 너머에 발을 들였습니다.]
[축하합니다!]
[〈1인 한정 업적: 진실을 보는 눈〉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엄청난 경험치' 및 '기술: 진실을 보는 눈'이 주어집니다.]
〈진실을 보는 눈/Passive〉
* 가려진 비밀을 꿰뚫어 보는 눈.
* '에픽 퀘스트'의 진명(眞名) 개방
['진실을 보는 눈'의 효과로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요새 건설: 프로도무스 마을〉의 진명(眞名)이 개방됩니다.]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요새 건설: 프로도무스 마을〉이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세멘티스 〉로 변경됩니다.]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세멘티스〉
* 칼리야스 교단이 내린 단호한 결단.
성자의 희생.
그것만이 재앙에 뒤덮인 이 세상에서 모두를 구원할 단 하나의 선택지라고 여겼다. 허나 이 중대한 결정에는 한 가지 장애물이 존재했다.
바로 '성자의 귀환'이었다.
현재 성자의 위치는 대륙의 중심이라 불리는 대디움 산맥에서도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넥시오 봉우리 정상에 세워진 '디위누스(dīvínus)' 신전.
칼리야스 교단의 교인들뿐만 아니라 대륙민 모두가 신성하게 여기는, 당대 교황과 성자 혹은 성녀만이 발을 들일 수 있는 공간인 탓에 초기에 대동했던 호위단을 제외하고는 마땅한 안전장치도 없이 총단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에 교단에서는 크게 두 가지 대책을 세웠다.
첫째, 교단의 인정을 받은 원정군을 추가 파견할 것.
그리고 두 번째.
성자의 이동 경로에 있는 주요 길목마다 임시 요새와 장벽을 설치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길, '사케르 이테르(săcer ĭter)'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라는 교단의 원대한 계획을 전해 들은 농부들은 생각했다.
그들의 결단이 성공리에 이루어진다면, 지금껏 파종하고 재배해온 모든 노력이 수확도 보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어버린다는 걸.
그러니 나서야 했다.
뿌려 놓은 씨가, 무럭무럭 자라나 수확하는 그 날까지 자라날 수 있도록. 이 모든 과업의 마지막 날 웃으며 떠나갈 수 있도록.
우리는 지저에서 나오기로 결심했다.
(0/1)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종료 시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 특이 사항 2: 본 퀘스트는 '실패'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특이 사항 3: 본 퀘스트는 '강제 귀환권'의 사용이 제한됩니다.
* 서브 퀘스트 목록 확인 적용자: 서브 퀘스트 목록 열람▼
111화
선명한 깨달음과 함께 모든 게 바뀌어 버린 퀘스트.
평화롭기 그지없던 '요새 건설'이란 임무를 밀어내고 새겨진 '세멘티스(seméntis)'라는 단어.
저게 무얼 의미하는진 아직 아리송하다. 계속해서 '정보 서적'을 획득하다 보면 알게 될까? 아마 그럴 것이다.
연구 일지에는 '비올로기아 독투스'라는 이름도, '언데드 연구소: 전염력 전담부'라는 기관과 부서 명칭도 명확하게 명시됐었으니까.
고로.
세멘티스인지 시멘트인지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내 눈길이 고정된 곳은 퀘스트 화면의 최하단.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종료 시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 특이 사항 2: 본 퀘스트는 '실패'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특이 사항 3: 본 퀘스트는 '강제 귀환권'의 사용이 제한됩니다.
"이게… 뭐야."
종료 시점도, 실패도, 하다못해 강제 귀환도 불가능한 퀘스트.
그 말인즉슨.
'성공'이란 글자를 보기 전까지는 본 임무에서 벗어날 수… 아니, 이 칼리야스라는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 어처구니없는 선언에 당황과 충격으로 입안에서 욕설이 맴돌았다.
물론.
자식도 아내도 없는 홀몸, 내 명의로 돼 있는 거라곤 차 한 대가 끝인 사람이었기에 이곳에 평생 눌러산다고 해도 실상 큰 문제는 아니었다.
21세기 현대 문명의 이기를 쓰지 못한다는 점을 빼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연인이 된 셈 치면 여차저차 넘어갈 만도 했다.
이 땅이 지옥으로 변하지만 않았다면.
"하, 돌아버리겠네."
자칫하면 칼리야스 대륙인들과 같이 매일 이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는 경고에 반사적으로 환두대도의 손잡이를 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해야 하나?
원래도 설렁설렁 임했던 적은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더더욱 긴장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지옥은 출퇴근만으로도 족했다.
* * *
'기회는 딱 한 번이다.'
각오를 다진 이후.
햇빛에 반사되는 빛마저 감추기 위해 도신을 상반신으로 가리며 바닥에 주저앉듯이 수그린 나는 12수색전대 사람들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따로 바라는 게 있으니 저리도 열과 성을 다해 병사들의 몸에 바늘 따위를 꽂아뒀겠지.
그러니.
기다려 볼 심산이었다.
세멘티스란 놈을 추적할 단서라곤 저게 유일했기에 도와주고는 싶었지만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이제 와서 손을 쓴다 한들 관련 지식도, 사제들의 신성력도 없는 내가 저들을 구원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니.
어설프게 영웅 행세를 하느니 모두의 의견이 일치할 복수에 모든 걸 걸었고, 그때부터는 인내심과의 싸움이었다.
이따금 클라크와 31공병전대 쪽에 변고가 생기진 않았나 후방을 돌아보는 찰나를 빼고는 단 한 순간도 저쪽의 동태를 놓치지 않고 눈동자에 담았다.
불현듯.
최근 특수 개체를 베면서 달성된 〈100인 한정 업적_지구: 최초의 레드 구울 사냥꾼〉의 보상으로 주어진 기술 임의 습득권을 사용해 '오오라: 추살자의 원념'이라도 배워볼까 하는 고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나 금세 포기했다.
마력 양이 늘어난 현재도 상시 적용이라는 취약점이 부담됐거니와 결정적으로 세컨들리의 안장에 넣어둔 상태였다.
펫이 소환, 역 소환될 때의 빛무리에 녀석이 바깥으로 빠져나오면서 내뱉을 투레질 등으로 내 위치가 발각된다면… 상정하기도 싫은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도 몰랐다.
'퍼져 나갈 마력 파장도 마음에 걸리고.'
순수한 육체의 감각을, 인지력을 믿는다.
딱 그리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삐그덕―
"...!"
12수색전대 병사들의 신음만이 간간이 울려 퍼지던 차에 처음으로 낯선 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기름칠이 덜 된 문짝이 열릴 때나 들을 수 있는 소음에 홱 하고 돌아가는 얼굴.
발원지는 어디인가.
데구르르 굴러가는 눈동자를 따라 변해가던 풍경의 끝자락은 프로도무스 마을의 공터로 진입하기 직전에 자리한 목조 주택.
그 안에서.
'사람.'
새하얀 백의를 입은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확신했다.
저놈이 세멘티스 혹은 세멘티스와 관련된 인물이란 걸.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인 언데드라면, 정상적인 사고가 박힌 인간이라면.
탁―
탁―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이 공간 속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지는 않았을 테니.
'바로… 아니다.'
이에 무의식적으로 마력을 끌어모으며 도약하려던 나는 상체를 세우다 말고 다시금 지면에 몸을 붙였다.
시스템은 말했다.
(0/1)
목표는 하나뿐이라고.
그러나 '적'이 하나라는 얘기는 없었다.
저놈이 세멘티스라면 다행이지만, 하수인이나 그에 준하는 엑스트라라면 도리어 타깃의 주의를 사는 악수로 연결될 터였기에 뛰어나가고 싶은 욕망을 꾹 눌렀다.
저벅―
저벅―
그러는 사이 벌써 저만치 이동한 놈은 쭉 공터로 나아가 어느새 가장자리에 누워있던 병사의 육신에 손을 대고 있었다.
"...."
이적을 부르는 주문인가, 실험 경위에 대한 독백인가.
거리가 먼 탓인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혼잣말에 감청은 그만두고 주변으로 관심을 돌렸다.
'저놈이 전부인 건가.'
문이 열려 있는 집과 그 외에 건물들을 돌아보며 공범이 더 있지는 않은지 관찰하는데 몰두했다.
그렇게 5분 여가 흘러 50여 명의 병사들 중 마지막 대여섯 명만을 남겨둔 시점.
스윽―
'가자.'
먼지 한 톨 빠트리지 않고 샅샅이 살펴보던 나는 마침내 작게 주억거리고 땅을 밀어내며 언덕 아래로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없다.
겨우 몇 분만으로 믿음을 갖기엔 섣부른 단정일지도 모르지만, 5분 여를 지켜보며 동조자가 없다고 판단을 내린 나는 최선을 다해 발소리를 죽이며 마을로 향했다.
신중해야 할 시기가 있듯이 과감해야 할 때도 있는 법.
더구나.
설사 동조자가 존재한다면, 따로따로 떨어져 있을 때 공략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세웠고.
우우우웅―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탁―
휘우우욱!
그 작심을 근거로 참고 참아왔던 마력을 일거에 개방했다.
놈과의 간격은 기껏 해야 1km 내외.
힘을 아낄 필요가 없었고, 내 진격에 밀려난 바람이 가라앉기도 전에.
"…이놈은 성숙이 덜― 지상인가."
후욱―
촤좌좌좍!!
반격이 날아들었다.
병사를 진찰하듯 어루만지던 손길에서 그대로 뻗어 나온 '침'. 거의 10cm에 달하는 장침 네댓 개가 내 인중, 심장, 명치를 노리고 일직선으로 비산하는 중이었다.
중원 사천에서라도 오셨나.
무협지를 떠올리게 하는 손놀림에 나는 잠시 제동을 가하…지는 않았다.
투두둑―
"...!"
매서운 솜씨와 달리 명중률이 영 개판인 까닭이었다.
인지력이.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휘익!
오감이 불안정했으니까.
'흐읍!'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파직―
꽈르르르릉!!
* * *
'정보 서적: ???에 대하여'를 읽게 되면서 칼리야스 대륙에 뿌려진 재앙이 철저한 인재(人災)였음을 알게 됐을 때.
그들의 목적이고 나발이고 다 떠나서 한 세상을 망가뜨릴 정도인 놈들 개개인의 실력에 관한 궁금증이 생겼었다.
의구심이랄까?
보통 흑막이라고 하면 태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르는 무위를 가졌던데.
저놈들은 본인 손 한 번 까딱이지 않고 언데드란 일종의 생화학 병기를 동원했으니, 혹 놈들 하나하나의 무력은 별 볼 일 없는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오판이었다.
카앙――!
"큭."
'막았, 다?'
입술 밖으로 비명이 새어 나왔을지언정 죽일 작정으로 내리친 환두대도를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카각―
카가각―
놈이 꺼내든 방패는 검은빛으로 물든 건틀릿(gauntlet).
부들부들 떨리는 왼팔을 감싼 흑색 완갑을 오른손으로 받치며 칼날을 방어해낸 놈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 면상은 참으로 무난했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칼에 칼리야스 대륙에서는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푸른 눈동자, 상처라곤 1도 없는 매끈한 안면까지.
수백, 수천만 명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시체로 만들어버린 집단의 조직원이라곤 상상도 못 할 마스크였다.
"오, 라...!"
그 범생이 같은 낯짝으로 어렵사리 읊조리는 놈.
한 자, 한 자 이를 악물고 내뱉는 문장의 끄트머리에서 피어난 것은.
…사아아아!
죽은 자만이 다루는 '사기(死氣)'였다.
핏물을 연상케 하는 그 시뻘건 기운은 순식간에 크기를 불리며 치솟았고 우리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며 마땅한 대응을 하기도 전에 돌연 폭발을 단행했다.
후우욱
콰아아아앙!
"크읍!"
급작스럽게 일어난 폭발의 위력은 강력했다.
어떻게 생자가 사자의 전유물을 다루는진 알 수 없으나, 무시하기 어려운 데미지에 칼날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난 나는 서둘러 무릎을 굽혔다.
부득이하게 밀려나긴 했지만.
승기는 여전히 이쪽에 있었고, 그 고지에서 내려올 생각도 없었다.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2 연격.
일반 마법(一般 魔法).
블레이즈 자벨린(blaze javelin).
파직―
화르르륵!
"흐읍, 하!"
밀려나면서 살짝 들린 환두대도를 복부의 코어 힘으로 버텨내며 재차 삼차 내리찍는 동시에 던져낸 화염의 창.
흔히들 말하는 실력의 3할을 숨겨라 라는 격언.
아니.
나한텐 그런 거 없다.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오오라: 검은 망령의 파문.
화아아아악!
['오오라: 검은 망령의 파문'이 발동되었습니다.]
[10분간 주변 30m 내에 존재하는 모든 적들 신체 능력치가 5% 하락합니다.]
공격기, 이동기, CC기.
초장부터 아낌없이 털어냈다.
호랑이도 토끼를 사냥할 때 최선을 다하는데, 내가 뭐라고 설설 상대를 봐줄까.
더군다나 여긴 죽고 죽이는 실전이었다.
"이게 무슨...!"
"이제 시작이야."
일반 마법(一般 魔法).
천상의 사슬.
우우우웅―
촤르르르르르륵!
난 살고 싶었다.
"흐읍, 하아아아아!"
이중 스킬 결합.
오휘윤 류: 뇌령 돌파.
타닷―
…콰아아아앙!
* * *
후우우우욱―
털썩!
몰아쳤다.
그래, 폭풍이 몰아치듯 한 호흡에 쏟아부은 온갖 기예가 놈의 전신을 사납게 물어뜯고 사라진 직후.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사라지는 자욱한 흙먼지 너머로 쓰러지는 물체.
놈이었다.
화려한 부딪침은 고사하고 고작 침 몇 대 날린 걸 끝으로 비참하게 허물어지며 죽음을―
"…일어, 나라."
맞이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에픽 퀘스트.
그 화려한 타이틀로 장식된 임무는 이렇게 허무한 종료를 원치 않은 모양이었다.
…쿠웅!
…쿠웅!
…쿠웅!
"이런."
내가 서 있던 땅이 난데없이 춤을 추듯 들썩거리는 걸 보니 말이다.
이 진동의 정체는 무엇인가.
콰아아앙―!
…콰과과광――!
"키에에에에에엑!!"
"키에에에엑!"
"키에에엑!"
단숨에 대지를 부수며 대가리를 쳐들고 포효하는 괴물.
1m라는 어마어마한 체구, 검붉은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닮은 견고한 외피, 각진 턱과 날카로운 이빨이 유난히 도드라진 짐승.
내게는 무척이나 익숙하면서도 또 낯선 수백 마리의 '프로미카(Formica)'들이었다.
'프로미카?'
'예. 프로도무스. 마을 이름의 유래부터가 주변에 프로미카들이 많이 살아 붙여진 이름이지요.'
"거, 언데드가 됐단 얘기는 안 했잖아요."
112화
500여 명의 인원, 1~2인의 수호 사제, 준기사급에 해당하는 은위계급 에스콰이어에서 정식 기사 서임을 받은 금위계급 기사를 지휘관으로 둔 부대.
졸속으로 꾸려졌다는 오명을 탈피하기 위해 고된 훈련과 막대한 자본을 들여 정예화시킨 만큼 그들의 전투력은…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단정 짓긴 어렵지만, 언데드가 득실거리는 외부를 활보하고 다니는 부대니 약할 리야 있을까.
해서 의아했다.
리하인을 위시한 기사 3인방이나 도시 글라디아르(gládĭár)를 수호하던 세르펜스 기사단이 그러했듯 언데드라는 종족에 관한 데이터가 부족하다면 예상치 못한 일격을 맞고 패퇴할 수도 있었다.
단지 내가 가진 의문은 '교전의 흔적'이었다.
전투는 굉장히 활동적인 행위.
따라서 충돌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그 흔적이 남아야 한다. 아니, 꼭 치고받는 상황이 없었다고 해도 일정 규모 이상의 병력이 움직였다면 그 족적이라도 존재해야 하는데, 프로도무스 마을은 마치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처럼 누가 청소라도 하고 간 듯 깨끗했다.
「본래 이 임무를 담당해주기로 약속했던 12수색전대가 사라져버린 탓이다.」
애당초 퀘스트 창에서도 이리 설명할 정도니 이게 얼마나 기이한 현상인가.
"그래서 뭐가 있긴 있겠구나 싶었더니만."
"키에에에에에엑!!"
"키에에에엑!"
"키에에엑!"
"이거였네."
프로미카들을 보고 나니 채 1초도 걸리지 않아 여태껏 가슴 한쪽에서 꿈틀거리던 의구심들이 말끔하게 해소됐다.
대충.
12수색전대가 마을 내부로 들어왔을 때 기습적으로 튀어나와 죄다 잡아먹고 저 개미 놈들의 특성을 이용해 땅거죽을 갈아엎어 인적을 지워버린 거 같았다. 이 일대가 프로미카들의 서식지였기에 지표면이 황토로 뒤덮여 있다고 한들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없었으니까.
만약 내 추측이 맞는다면 또 하나의 가능성이 생긴다.
대단친 않더라도 척후조를 운용하는 31공병전대가 12수색전대의 변고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신속하게 사건을 은폐했다는 건 습격부터 사후 처리까지의 과정 전체가 사전에 계획되었다는 뜻.
즉.
이들의 진군 경로와 도착 시간 등 세세한 정보를 넘겨준 내부 공모자가―
"키에에에에에엑!!"
투두두두두두!!
"그래, 이건 나중에 따져보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물음표 고리에 빠져있던 나는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온 언데드 프로미카들을 보며 상념을 멈추고 환두대도를 들었다.
기본적으로 구울 급 언데드는 되는지 언뜻언뜻 붉은 기류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고 있는 괴수들.
그 숫자는 대략 수백 구.
워낙에 체구가 커서 뒤편은 보이지도 않아 정확히 몇 마리인가 세기도 힘들었으나, 이런 요소들과 직면하고도 크게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주의 기운이 겹쳐서 탄생한 공교로운 우연의 일치인지, 이 또한 시스템의 배려와 기획이 더해진 운명인지.
파직―
파지직―
"잘 됐다."
마침 수적 열세를 뒤집을 만한 스킬을 배워둔 덕분이었다.
이그니스(ignis) 류(流).
연쇄(連鎖).
후우우우욱―
…콰과과과과광!!
벼락의 주인이라 불리던 작자가 어째서 광역 살상용 초식을 창안하게 되었을까. 그 의도와 감정은 1도 이해 못하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가 꿈꿨던 광경이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것.
"키에에에엑!!"
"키에에엑!"
....
"잘 타는구나."
비스듬한 대각선의 궤적을 그리며 떨어진 낙뢰가 날 중심으로 휘몰아치며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는 장면은 가히 아름다웠다.
한 폭의 장관이랄까.
파사(破邪)의 공능을 지닌 푸른 물결에 휩쓸려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개미들과 선두의 빈 자리를 채우려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다 번진 뇌류에 불타오르는 그림이 반복되는데, 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흡사 천둥의 신이라도 된 듯한 고양감이 온몸을 달궜다.
"이럴 리가...."
이 화려하고도 실전적인 폭풍 앞에 세멘티스로 추정되는 놈의 주둥이에선 연신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수백 명의 수색전대조차 부지불식간에 먹어 치운 괴수들이 너무 손쉽게 쓸려나간 탓에 당혹스러운지, 다음 수를 구상 중인지 황급히 일어나면서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씨익―
그 얼빠진 표정에 절로 미소를 띤 나는 발치로 치우쳐져 있던 환두대도의 칼날을 우상단으로 끌어 올리며 발끝에 마력을 모았다.
저놈이 지금 뭘 궁리하는진 몰라도 수작질을 가만 놔둘 수는 없는바.
휘우우우웅―
파직―
"같이 가 인마."
이중 스킬 결합.
오휘윤 류: 뇌령 돌파.
탓―
콰아아아앙!!
바람과 벼락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펼치며 지체하지 않고 하늘로 나를 던졌다.
"키에에에에엑!!"
"키에엑!"
후우욱―
촤아아악!
촤아악!
무방비하게 뛰어든 내 발목을 낚아채려는 듯 발밑에서 무수히 많은 언데드 프로미카들이 이빨을 들이댔으나 괘념치 않았다.
신성 마법(神聖 魔法).
빛의 방패.
우우우우웅―
물리적인 타격을 넘어 마법적인 공격까지 막아줄 갑옷이 있었거니와.
카칵―
카가각―
…콰직!
설령 그 갑옷에 구멍이 좀 난다고 해도 사실 본체는 장비빨, 스킬빨, 영약빨로 강철 못지않게 강화된 몸뚱아리였으니까.
"키에에에에엑!!"
텁―
터덥―
"간지럽다."
다시 말해.
저놈이 여기서 도망칠 수 있는 확률은 제로라는 소리였다.
"아무 데도."
"...!"
"못 간다, 이 새끼야."
슈우우욱―
서걱!
그 필살의 의지가 가득 담긴 도신이 상대의 등판을 시원하게 베어냈다.
양손의 건틀릿과 동일한 색상의 갑주가 등딱지처럼 살점을 보호해주려 애썼으나 방금 전과 다르게 결말은 참담했다.
촤아아아악!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종 마법과 스킬에 난타당한 여파가 결코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듯 붉은 기류는 산산이 부서졌고, 두터운 철판은 기어이 종잇장처럼 갈라져 그 틈새로 파고든 칼날에 의해 살점이고 근육이고 모조리 썰려나갔기 때문이었다.
아주 묵직한 손맛과.
"…크아아악!"
고통으로 뒤범벅된 괴성을 선사하며.
세멘티스인지 단순 하수인인지 그 구분은 아직 알 수 없으나 이건 분명했다.
적어도.
요 레벨의 흑막으로서는 내 도를 받아내지 못한다는 것.
앞으로 꾸준히 에픽 퀘스트를 치러야 하는 나로서는 매우 기꺼운 소식이었다.
그나저나....
사기(死氣)와 언데드(Undead)를 제멋대로 다루는 능력자라 통증에서도 자유로운 줄 알았더니만 그런 절대적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나, 인간임을 증명하는 시뻘건 선혈을 쏟아내며 땅바닥을 구르는 놈의 몰골은 참혹 그 자체.
참.
대화하기 좋은 모양새였다.
"긴말 안 한다. 몇 가지 물어볼 거고, 대답 잘하면 물약을 주겠다. 살고 싶으면 대답만 잘해. 거부하면 타협은 없어."
이그니스(ignis) 류(流).
연쇄(連鎖).
후욱―
…촤좌조좍!
나는 한참이나 굴러가 건물 외벽에 부딪혀 멈춘 놈 앞에 서서 대꾸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주위를 뇌기로 감싸며 칼끝을 목젖에 가져다 대고는 질문을 내뱉었다.
"첫째, 수색전대 병사들을 저리 만들어둔 이유는?"
언제든 널 죽일 수 있단 감정이 실린 무미건조한 물음.
답변은.
"...."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자존심을 챙기는 걸까? 아님, 기밀을 누설했다간 뇌가 터지는 제약이라도 걸린 걸까?
나로서는 알 길이 없으니 굳이 목맬 거 없이 두 번째로 넘어갔다.
"둘째, 저들을 구할 방법은?"
"...."
우득―
이번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놈.
외려 어금니를 꽉 깨물며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여차하면 한 대 후려칠 기세다. 뭐 그래봐야 시종일관 두들겨 맞다 쓰러진 머저리에 불과했기에 장미 가시보다 무뎌진 살기는 가볍게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 셋째."
"...."
"어째서 세멘티스가 여기 있는 거지?"
라고.
누구나 충분히 짐작할 법한 영역을 지나쳐, 네놈의 보잘것없는 정체 따윈 파악한 지 오래니 쓰레기 같은 정보 대신 그 뒤에 숨겨진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캐물었다.
어차피 입을 꾹 다물기로 했다면 답을 해줄 리가 없겠지만, 애초에 나도 그런 중대사를 알려줄 거란 기대감은 갖지 않았다.
그저.
반응을 보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넘겨짚기에 놀란다면 세멘티스가 맞을 것이고, 비웃거나 그에 준하는 모습이 연출 된다면 세멘티스가 아닌 거겠지.
내 나름대로 심리전을 걸었고, 효과는 썩 괜찮았다.
최소한.
"…그 이름을 어찌."
"네놈들만 쁘락지를 들여보낸 건 아니거든."
"설마."
"아니었으면 내가 네놈이 여기 있을 걸 어떻게 알았겠냐. 대어가 낚이길 기대하고 던진 미끼에 고작 세멘티스가 물렸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이거라도 어디야. 한 놈, 한 놈 천천히 족쳐가다 보면 결국 윗대가리까지 도달하겠지. 그래서 묻잖아. 아직 거기까진 전달을 못 받아서 그러는데 세멘티스가 예서 뭘 하고 있던 거냐고."
"지하는 모든 것의 뿌리요, 근본일지니. 나는 비록 수확의 날을 보지 못하나, 내가 뿌린 씨앗은 그날 제단 앞에 놓이리라!"
후우우욱―
콰직!
다 틀렸다고 생각한 듯 느닷없이 제 목을 잡아 뜯어준 덕에.
띠링!
[재앙의 씨앗을 뿌리는 첫 번째 농부, '세멘티스(seméntis)'을 처치했습니다.]
[축하합니다!]
[〈1인 한정 업적: 최초의 세멘티스 처형인〉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엄청난 경험치' 및 '정보 서적: 세멘티스에 대하여', '마력 전이석: 대형', '기술 서적: 신성 가호'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놈이 감추고 싶어 했던 진명이 만천하에 까발려졌으니까.
비록.
띠링!
[축하합니다.]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세멘티스〉의 과제를 완료하셨습니다.]
[당신의 활약도를 종합하여 보상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이렇게 끝인가."
밝혀낸 거라고는 그것뿐이라는 점이, 결국 12수색전대의 생존자들에게는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이 안타까운 부분이었지만.
내 선에서 이만하면―
[현재 〈서브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요새 건설: 프로도무스 마을〉이 진행 중입니다.]
[해당 퀘스트를 계속해서 진행하고자 할 경우 '계속 진행'을 선택해주십시오.]
"응?"
내 잘못은 없더라도 기왕지사 구하고 갔다면 더 좋았으리라 아쉬워하던 나는 말만 하면 추가 시간을 넣어주겠다는 메시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에픽 퀘스트에 자리를 빼앗기긴 했지만, 이 또한 중차대한 임무니 끝마칠 기회를 주겠다는 건가?
그러고 보면 변경된 퀘스트 창에도 '서브 퀘스트 목록 열람' 기능이 활성화되어 있기는 했었다.
"진행하겠다."
['계속 진행' 선택되었습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변수로 칼리야스에 머무르게 된 나는 잘됐다는 기색으로 뒤를 돌아왔다.
쭉 회전하는 시야를 통해 보이는 12수색전대 병사들.
이전보다 아픔이 심해진 듯 훨씬 파리해진 안색을 보건대 과연 내가 남는다고 저들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으려나 고개가 갸웃거려졌지만, 일단은 뭔가를 시도해 볼 찬스를 얻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부정적인 사고보단 긍정적으로.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뭐든 해보자고."
나지막한 한마디를 곱씹으며 가볍게 주억거린 나는 환두대도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며 첫발을 떼었다.
우선은.
"키에에에에엑!!"
"키에에에엑!"
"키에에에에엑!!"
저기 달려오는 프로미카들부터 처리할 요량이었다.
113화
"키에에에에엑!"
콰직―
털썩!
"후, 드디어 다 잡았네."
10분? 20분?
세멘티스의 수급을 베어내고 한참이 지나서야 마지막 언데드 프로미카의 대가리를 날린 나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허리를 쭉 폈다.
정말이지 체력이고 마력이고 탈탈 털어 쓴 기분이었다.
세멘티스와 프로미카.
각 개체를 따로따로 보면 무난한 적수들이었지만, 이걸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하니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쉽지 않았다.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을 겪기 전의 나였더라면 고전을 면치 못했을 터.
이게 Lv.8짜리 퀘스트, '칼리야스 구원'의 난이도인가? 그럴 것이다…라고 무조건 확신하긴 어렵겠지만, 대충 오늘을 기준으로 추후 접하게 될 에픽 퀘스트들의 수준을 가늠하면 대응책이나 계획을 구상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자, 그러면… 저쪽은 별일 없는 듯하니."
스윽―
머릿속으로 간단하게 정리를 마친 나는 끝으로 오감에 집중해 살아남은 프로미카나 그 외의 언데드가 있는지 쓱 체크하곤 무릎을 굽혀 피를 덮어쓴 사체에 손을 댔다.
"가져갈 게 있으려나."
아이템 루팅(Item Looting)을 할 작정이었다.
그래도 흑막의 조직원이었으니, 레어 등급의 칼날을 막았던 건틀릿을 비롯해 뭐 가져갈 게 있지 않을까 하고 속옷 한 점마저도 철저하게 아이템 유무를 검사했다.
시신이라고 해서 크게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내장을 질질 끌며 달려드는 좀비, 뼈가 살갗을 찢고 나온 구울 등 지난 몇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온갖 언데드와 마주하며 살아왔다.
'생존'이란 키워드만 되새기면 적정선을 지키는 한에서는 훨씬 심한 짓도 웃으며 행할 자신이 있었다.
"읏, 차!"
철컥―
그 단호한 각오로 하나둘 뜯어낸 물건들.
그중 아이템 판정을 받은 건 총 3가지였다.
〈단단한 콜레옵테라의 건틀릿/Magic〉
* 평생을 동굴 속에서만 살아가는 곤충 '콜레옵테라(Coleoptera)'의 껍질 수백 장을 압축하고 또 압축해 제작한 건틀릿. 특수한 공정을 거쳐 철제 장비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방호력을 갖게 되었으며, 추가로 '단단한 콜레옵테라의 영혼석'을 장착해 부드러운 소재로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이라는 삼박자를 모두 갖춘 완갑이 되었다.
* 모든 물리 공격에 대한 방어력 +18%/착용 시 내구력 최대치 7% 향상
* 사기(死氣)에 물든 상태
* 정화 작업을 거치지 않고 사용 시 소유자에게 부정적인 효과 적용
〈세밀하게 가공된 침 세트/Magic〉
*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한 침 세트. 얇고 긴 것부터 두껍고 긴 것까지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어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 효용성을 보인다. 특히나 품질 좋은 '카파키타스(capácĭtas)' 광석을 혼합해 마력 전도율이 크게 상향되었다.
* 마력 전도율 18% 향상
* 사기(死氣)에 물든 상태
* 정화 작업을 거치지 않고 사용 시 소유자에게 부정적인 효과 적용
〈가면을 대신하는 반지/Magic〉
* 천변만화의 특성으로 주변 자연환경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는 '동화되는 아시물라티오(assĭmŭlátĭo)의 영혼석'을 장착하여 착용자의 생명력을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가려주는 반지.
* 착용 시 사용자의 지정된 기운(생명력) 감지 방해/착용 시 적응력 최대치 7% 향상
* 사기(死氣)에 물든 상태
* 정화 작업을 거치지 않고 사용 시 소유자에게 부정적인 효과 적용
장갑과 침, 그리고 반지.
전부 매직 등급이라 파밍해서 구한 것치고는 꽤 훌륭한 결과였다.
평상시라면 흡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겠으나, 지금은 달랐다.
"뭔 죄다 사기에 물들어 있냐."
단 하나도 빠짐없이 제약이 걸려 있는 까닭이었다.
「사기(死氣)에 물든 상태」
「정화 작업을 거치지 않고 사용 시 착용자에게 부정적인 효과 적용」
저주에 걸린다든가 스탯이 하락한다든가.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상당히 께름칙한 문구에 제대로 손에 쥐어보지도 않고 내려둔 채 물끄러미 아이템들을 응시하던 나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공들여 찾은 이 녀석들을 버리기로.
'가면을 대신하는 반지'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쓸만한 물건도 없는데, 구태여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가져갈 필요가 있나,
잘 봉인해서 스콰나 세컨들리의 안장 깊숙한 곳에 처박아 두면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했으나 그것 역시 가정이었다.
그러다 사고라도 터지면 끝장이니 쿨하게 포기하자고.
물론.
"분리."
[기술 '분리'를 발동합니다.]
['영혼석'과 분리할 아이템을 선택해주십시오.]
껍데기만.
알맹이는 챙겨가야지.
['단단한 콜레옵테라의 건틀릿'이 선택되었습니다.]
['가면을 대신하는 반지'가 선택되었습니다.]
[해당 아이템에서 '영혼석'을 분리합니다.]
정유환에게 팔아넘겼던 무구들은 관계성이라는 가치를 우위에 두었기에 건드리지 않았지만, 이건 그런 식으로 활용할 게 아니었기에 무척이나 오랜만에 영혼석 세공사로서의 기예를 발휘했다.
문득.
영혼석도 오염돼있으면 어쩌나 걱정됐는데.
〈단단한 콜레옵테라의 영혼석/Magic〉
* '생명의 샘'이 지닌 신비로운 힘을 통해 정해진 한계를 이겨 내고 영물(靈物)로 거듭난 샘지기 콜레옵테라의 영혼석이다. 복용 또는 장비 제작 시 내재된 영력을 사용할 수 있다.
* 복용 시 내구력 5% 영구 강화/장비 제작 시 착용자의 내구력 7% 상승 효과 적용
〈동화되는 아시물라티오의 영혼석/Magic〉
* '생명의 샘'이 지닌 신비로운 힘을 통해 정해진 한계를 이겨 내고 영물(靈物)로 거듭난 샘지기 아시물라티오의 영혼석이다. 복용 또는 장비 제작 시 내재된 영력을 사용할 수 있다.
* 복용 시 적응력 5% 영구 강화/장비 제작 시 착용자의 적응력 7% 상승 효과 적용
다행히 내용물에는 이상이 없었다.
"오케이."
나는 두 개의 영혼석을 품속에 넣으며 볼일도 다 봤겠다 일말의 미련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챙길 건 다 챙겼으니, 슬슬 12수색전대 병사들의 병환을 진찰할 차례였다.
"끄으읍, 끕...."
"아으어으."
여전히 끙끙대는 신음만이 울려 퍼지는 공터로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본 그들의 외관은 처참했다.
고슴도치인 양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 빼곡하게 박힌 침들과 세세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발견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옅게 일렁이는 붉은 기류.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건.
"…부풀어 올랐네."
위 두 가지 요인 때문인지 툭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버릴 듯 병사들의 육체 곳곳이 바람을 억지로 밀어 넣은 풍선처럼 빵빵하게 팽창해 있다는 점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이걸 어쩐다."
의학적인 지식도, 마법적인 개념도 모자란 탓에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고 미간만 찌푸린 나는 잠깐 고민하다 뒤로 돌았다.
몇 가지 방안이 떠오르긴 했지만 무작정 일을 벌였다간 외려 더한 절망감으로 바뀔 수도 있는바.
"저택 먼저 뒤져보자."
치료법에 관한 힌트라도 얻어볼까 하여 세멘티스가 들락거렸던 목조 건물을 뒤져볼 심산이었다.
끼이이이익―
닫히다가 만 문을 밀며 들어선 집은 누군가 사용했던 공간답지 않게 집기란 집기는 모조리 부서지고 깨져 나뒹굴고 있었다.
세멘티스 놈이 마을을 점령하면서 이리된 건가?
원인이야 알 수 없지만, 일부러 방치해 놓은 게 명백했다.
그래야 변수가 발생하더라도 예서 무얼 했었는지 들키지 않을 테니까.
"철두철미하게도 숨겨뒀네."
콰직―
콰드득―
내가 예정에도 없던 숨바꼭질을 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어찌나 꽁꽁 감춰뒀는지.
천장, 벽, 가구 사이사이 등 약간이라도 미심쩍거나 의심스럽다 싶으면 손과 발로 산산조각을 내며 수색을 거듭하고 있음에도 도통 성과가 나오질 않았다.
"음...."
어딜까.
어디다 뭘 꿍쳐뒀을까.
쿵―
쿠웅―
팔이 닿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도집을 찔러 넣어 가며 조사를 지속하길 30분.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침상 아래와 천장을 떠받치는 기둥 내부까지도 꼼꼼하게 들여다본 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
집안이 아예 걸레짝이 될 지경으로 파헤쳤는데도 감감무소식이라니.
하다못해 '프로미카의 굴'을 염두해 바닥조차 죄다 뜯어낸 상태였다.
이럼에도 변화가 없다면.
"천년 목의 터."
그거뿐이다.
엑세르 가문이 비도를 은폐하고자 마법을 활용했듯이, 여기도 그와 비슷한 결계 같은 게 설치된 거다.
"허면."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안 되겠지.
기획자가 설정해 둔 특정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응답하는 마도구를 나 같은 머글이 찾아내려면.
우우우우웅―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무식하게 나가야지."
후우욱―
…꽈르르르르르릉!!
* * *
환하게 튀었던 번갯불이 차츰차츰 소멸해가는 현장.
그 가운데 서서 겨우 회복된 마력을 다시금 방출하며 전후좌우(前後左右) 각 방향으로 전류를 토해낸 나는 강렬하게 반짝이던 빛무리가 가라앉을 즈음.
…씨익!
드디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툭―
후두두두둑―
"어후, 이제야 열렸네."
지난 30분간의 노력이 허탈하게, 단 10여 초 만에 시커먼 땅굴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불과 베개 따위가 차곡차곡 쌓여 있던 장롱 안쪽에서.
역시 내 판단이 맞았다.
이 새끼들, 결계도 만들 줄 알다니.
"하기야. 이러니 그동안 아무한테도 안 걸리고 재앙을 풀고 다녔겠지."
쯧.
참 징글징글한 놈들과 엮였구나 싶어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환두대도를 앞세우곤 동굴 입구로 발을 뻗었다.
온통 검게 물든 동혈.
깊이도, 길이도 헤아리기 힘든 어둠 속.
딸깍―
빛을 뿌리는 헤드 랜턴과 암순응을 끝낸 눈동자가 맹수의 안광처럼 번뜩였다.
* * *
100m? 200m?
하도 깜깜한 탓에 거리 감각이 점차 둔해지는 일방향 통로를 거닐며 나아가길 3분 여쯤 됐을 무렵.
화악――!
조심스레 진입하던 내 눈에 무언가가 아른거렸다.
'…빛?'
안력에 집중해 확인한 그것은 주황색과 빨간색 그 중간 즈음에 있는 광원이었다.
저게 뭘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랜턴을 끄며 자세를 낮춘 나는 칼날을 잡아당기며 몇 걸음을 더 내디뎠다.
그렇게 100m, 80m, 50m....
조급함은 버리고 오로지 안전에 유의하며 간격을 좁혀가던 나는 이윽고 10m 안팎으로 다다랐을 때.
"아."
무심코 입을 벌렸다.
그 바람에 공기를 타고 솟구친 음성이 시끄럽게 메아리를 쳤으나, 나로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 키에에에엑!!
한순간에 확 하고 넓어지는 통로 너머로 드러난 공동의 중앙에 족히 5~6m에 달하는 괴수(魁首)가 도합 여섯 개의 기둥에서 뻗어 나오는 붉은 쇠사슬로 칭칭 묶여 귀족 가의 장식품마냥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으니까.
검붉은 외피에 세 쌍으로 이루어진 턱 이빨이 인상적인 외형.
"…프로미카 킹?"
녀석의 정체는 벌써 10년도 전에 사냥당했다고 알려진 개미들의 군주, 프로미카 킹(Formica King)이었다.
114화
프로미카 킹(Formica King).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페루스 마을의 자경대장 크린 리벳에게 생김새나 외형 등 주요 특징에 대해서는 충분히 들어두었다.
대게 1m 남짓에 불과한 일반 개체보다 2배에서 3배까지 자라난다는 개미 군주는 유일하게 번식 능력이 있는 일종의 돌연변이로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 마리 중 하나꼴로 태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이 왕(王)은 태생부터가 남다른데.
보통 평생 수만 개의 알을 낳고도 멀쩡한 암컷이 프로미카 킹을 산란하는 경우 기력을 다해 폐사해버리는 탓이었다.
이른바 어미의 생명력을 양분 삼아 빛을 보는 생물.
그래서인지 부모의 등골을 빨아 먹으며 빈둥빈둥 노는 칼리야스 백수들을 두고 '프로미카 킹 같은 놈'이라는 욕도 생겨났다고 얼핏 들었다.
또 굉장히 동족 보호 성향이 강해 제 무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불구덩이라도 거침없이 뛰어든다고.
"이게 내가 아는 정보인데."
…저놈은 뭐지?
나는 프로미카 킹의 전신을 훑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린 리벳의 얘기와 다르게 통상적인 신장의 다섯 배가 넘는 체구도 체구지만, 집게 같은 이빨이 세 개나 되는 것도 의아한 포인트였으니까.
자연이 프로미카 킹에게 선물한 건 비대증과 번식력이지, 신체의 변형이 아니다.
고로 이런 경우 답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정해진 한계를 벗어던진 존재.
"영물이네."
영물이다.
그럼 예서 드는 두 번째 의문. 과연 세멘티스 놈은 어째서 이곳에 영물을 구속해 두었을까.
심지어 10년 전에 처치된―
"…잠시만."
궁금증을 해소하려 기억을 더듬던 나는 불현듯 머릿속을 스친 장면을 다시금 복기했다.
'샘지기는 살아 있습니까?'
'사냥당한 지 10년도 더 지났다고 들었습니다.'
짤막하게 나눴던 대화.
헌데.
재차 되감아 보니 클라크는 분명 샘지기가 사냥당했다고 했지, 프로미카 킹이 사냥당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었다.
이 일대가 죄다 개미굴인 터라 으레 페루스 마을에서처럼 '샘지기 = 프로미카 킹'이라는 공식을 성립시켰으나, 어쩌면 프로도무스 샘의 수호자는 전혀 다른 종족이었을지도 몰랐다.
"이건 정확하게 알아봐야겠네."
정보란 도미노 같아서 한쪽이 쓰러지면 반대편까지 와르르 무의미해지는 초정밀 집합체.
그 특성을 고려해 돌아가는 대로 클라크를 붙잡고 공백이 생긴 네모 칸을 채워 넣기로 다짐한 나는 오직 '프로미카 킹을 가둬 둔 이유'를 해석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도처에 12수색전대 것으로 추정되는 갑옷 등의 장비가 굴러다니는 걸로 보아 필시 잡아 온 병사들을 먹이로 주며 사육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진짜로 영물이 테이밍이 되는 건가?"
역행의 제단 공략 당시보다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하여 비행형 영물이라도 잡아다 길러보면 어떨까 농담 섞인 방안을 세웠던 나는 설마 세멘티스가 그 망상을 현실화시켰나 싶어 흥미로운 눈빛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품속에 손을 넣었다.
손가락 끄트머리에 툭 하고 걸리는 물건.
〈정보 서적: 세멘티스에 대하여/Rare〉
* 특정한 정보 제공을 위해 제작된 서적.
* 정보 '세멘티스' 습득
조금 전 〈1인 한정 업적: 최초의 세멘티스 처형인〉의 달성으로 획득한 두 번째 정보 서적이었다.
[새로운 '정보 서적'을 습득했습니다.]
[〈특수 퀘스트: 지식을 탐구하는 자〉의 일부 조건이 자동 달성 됩니다.]
[보상으로 '적은 경험치' 및 '정신력 소폭 강화'가 주어집니다.]
되도록 긴장감을 유지해야 하는 전장임을 감안해 '정보 서적'은 안전이 보장된 장소에서 천천히 감상해보려 했는데, 도저히 감이 안 잡히니 열어 봐야지.
텁!
화아아아아악――!
['정보 서적: 세멘티스에 대하여'를 개방합니다.]
[기록일지: 세멘티스(seméntis)_저자 - 세크레 타리우스]
* * *
1장. 파종하는 자, 세멘티스(seméntis)
* 심연(深淵). 그림자조차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곳. 그 무엇도 살 수 없으리라 짐작되는 깊고도 낮은 수렁 속에서도 꿋꿋하게 삶을 연장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아울러 '???(정보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관련된 '정보 서적'이 필요합니다.)'라고 부른다.
그들이 빛과 희망으로 가득한 지상을 두고 저 지옥 같은 세계를 전전하며 목숨을 연명하는 연유는 단순했다.
믿음.
언젠가 '???(정보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관련된 '정보 서적'이 필요합니다.)'이 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까닭이었다.
세멘티스(seméntis)는 그 광기 어린 집단의 최하층 직책이었다.
2장. 파종하는 자들의 업무란?
* 고대어로 '씨앗을 뿌리는 자'를 의미하는 세멘티스(seméntis)는 명칭에 담긴 뜻 그대로 칼리야스 대륙 곳곳에 심연의 씨앗을 심어 둔, 심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렇다.
현재 대륙을 집어삼키고 있는 검은 물결의 발원자들이 바로 세멘티스였다. 그들은 한 날, 한 시 정해진 규약에 따라 재앙을 풀었고, 자신들의 작품을 관망하며 즐거워했다.
허나.
세멘티스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세상이 망가졌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특별한 사명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 책무를 두고 '???(정보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관련된 '정보 서적'이 필요합니다.)' 내에서는 이리 표현했다.
「인공 흉수(凶獸) 배양」
3장. 흉수(凶獸)란?
*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그릇된 방법을 택한 마수(魔獸). 그로 인해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리고 살육과 광기로 미쳐버린 짐승.
우리는 그들을 '흉수(凶獸)'라고 불렀다.
* * *
"아."
먼젓번의 '정보 서적: ???에 대하여'와 동일하게 그다지 길지 않은 세 페이지로 이루어진 문서.
그 짤막한 문단들을 보고 나니 세멘티스 놈이 12수색전대와 31공병전대를 노린 의도부터 눈앞에 펼쳐진 풍경까지 모든 게 단숨에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새끼.
뭔 꿍꿍이인가 싶었더니만.
"마수도 아니고 흉수?"
허.
놀랍구나 놀라워.
'정보 서적'을 독파함으로써 비로소 진실을 깨닫게 된 나는 싸늘하게 식어있을 시체와 정면의 프로미카 킹을 번갈아 보며 어처구니없는 탄성을 터트렸다.
당연했다.
자칫 '에픽 퀘스트'가 가진 이면을 파악하지 못했더라면… 최악의 시나리오로 제단에서 배출한 콥스 골렘과 인위적으로 창조해낸 '흉수'라는 괴물을 한꺼번에 맞닥뜨릴 뻔했으니까.
아마 그리됐더라면.
"최소 강제 귀환권, 최대 사망이겠지."
어휴, 단지 상상임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그려지는 끔찍한 엔딩에 몸서리가 쳐진 나는 질끈 감았다 뜬 눈으로 프로미카 킹을 주시했다.
흉수라....
저놈에 의해 피떡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절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동시에.
이제는 까마득한 과거인 양 멀게만 느껴지는 '이름 모를 폐허' 섬멸전 시절이 뇌리를 흔들었다.
'최초 업적 달성'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숙성기에 접어든 구울들을 놔둘지 말지 고심하던 그날이.
"가능, 할까?"
도전을 성공으로 마무리 지을 수만 있다면 결국 듀라한의 대가리를 부수며 무수히 많은 전리품을 노획했던 것처럼 한 단계, 아니 정순한 영혼석만으로도 폭발적인 진화를 이룩했으니 적어도 두 단계는 성장할 거다.
그러니.
체력과 마력을 풀로 채우고, 만에 하나 생길 사태는 초재생으로 커버.
거기다 성역까지 동원한다면.
"승률이 3, 40퍼센트쯤 되려나?"
〈메인 퀘스트: 호위〉에서 상대한 마수 스롤로펜드라의 능력치에서 상향 조정하여 이미지 트레이닝을 거친 나는 곧 견적이 영 마뜩잖아 쯧 하고 혀를 찼다.
리셋과 부활이 패시브인 게임이었다면야 단 1%의 확률에도 Go를 불렀겠지만, 여긴 엄연히 현실.
고작 3할에 인생을 걸기는 좀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만.
"자고로 하이 리턴을 꿈 꾸려면, 하이 리스크를 노려야 하는 법이지."
문을 열고자 한다면 두드려야 하는 거 아니겠나.
더군다나.
탁―
['강제 귀환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오케이. 이것도 다시 활성화됐고."
메인 컨텐츠가 종료된 시점이라 그런가.
무적의 탈출기…는 못 될지언정 변함없이 최고의 탈출기 지위는 굳건하게 수성 중인 '강제 귀환권'도 복구됐다.
"좋아."
이러면.
더더욱 물러날 수 없지.
"해보자."
나는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3일 뒤, '성역(聖域)' 마법의 쿨타임이 되돌아오는 날, 그때까지 별다른 이슈가 없다면 시도하리라.
"그전에 제단부터 처리하고."
* * *
탁―
타닷―
"…빨리빨리들 옮겨라! 이러다 날이 새면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
"충!"
프로도무스 마을 배회를 종료하고 복귀한 숙영지.
최우선적으로 500여 명의 31공병전대가 머무를 만한 공간 확보에 매달리고 있는 요새는 그새 더 높고 넓게 확장되어 진정 '성(城)'의 형태를 갖춰 가고 있었다.
확실히 프로미카의 황토가 좋기는 좋은가 보다.
배운 거라곤 칼질과 약탈이 전부인 용병단 놈들도 뚝딱뚝딱 성채를 건설하더니만, 아무리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달라붙었다고 한들 채 반나절도 안 돼서 기틀이 마련될 줄이야.
"이 기세면 며칠 안에 완공되겠습니다."
"졸린 놈들은 죽어서 자라! 뒈지고 나면 깨어나고파도 영원히 못 일어날― 아, 휘윤 씨. 오셨군요. 무탈해 보여 다행입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무지막지한 속도에 혀를 내두르며 다가가니 익숙한 말투로 호통을 치다 말고 언제 그랬냐는 듯 반갑게 맞아주는 클라크.
꼭 학창 시절 선생님들 같은 모습에 슬그머니 웃은 나는 시간을 내달라 부탁하며 지금껏 알아낸 사실들을 간략하게 축약해 알려주었다.
"수색전대 병사들이 살아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다만 치료법은 밝혀내지 못해 따로 손을 쓰지 못했습니다. 예상하건대 이대로 놔둔다면 언데드가 될 겁니다."
"언데드라면."
"괴물이 되는 것이죠. 48명 전원."
"이런...."
클라크의 표정은 내 말이 이어질수록 침울해졌다.
동료들이 죽음보다 더한 처지에 놓여있는데, 기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으음… 방법이 없겠습니까?"
"실력 있는 사제분들이 오지 않는 한 제 선에선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알고 있는 방도라곤 생명의 샘뿐이죠."
"생명의 샘은 역행의 제단에 점령됐다고 하셨던 듯합니다만."
"수백 종의 짐승들이 왔다 갔다 했다는 척후조의 의견을 종합해 제단이 설치되었다 예측했었지요."
하여 내 이야기의 마침표가 찍히고 나면 대강 '더 고통스럽지 않게 이만 칼리야스의 곁으로 보내 주십시오.' 정도의 요청을 받겠구나 싶었다.
그게 현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지였는데.
"사제분들, 사제분들을 모셔 오면 됩니까?"
띠링!
[ 지휘관 클라크가 '병사들의 생존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서브 퀘스트: 구원〉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세멘티스〉에 〈서브 퀘스트: 구원〉이 추가됩니다.]
이게 뭐지?
115화
〈서브 퀘스트: 구원〉
갑작스레 출력된 메시지에 클라크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서둘러 촤르륵 펼쳐진 홀로그램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알기로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요새 건설: 프로도무스 마을〉에 딸린 서브 미션은 '완벽한 청소', '자재 수급', '수색', 이 3가지가 끝이었다.
중간에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세멘티스〉로 변경이 되긴 했어도 기존의 목표 '요새 건설: 프로도무스 마을'이 부임무로 내려가는 것 말고는 변화가 없을 거라 여겼는데.
〈서브 퀘스트: 구원〉
* 척후조가 전해온 12수색전대의 사망 및 실종 소식에 매우 슬퍼하던 31공병전대장 클라크 팔트는 뒤늦게나마 진실을 알게 되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아스트록(astrúc)의 강을 건너버린 동료들은 어쩔 수 없다지만, 적어도 아직 살아있는 48명의 병사는 구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허나.
안심하기는 일렀을까?
은위계급 용병 오휘윤에게 들은 정보대로라면 12수색전대 최후의 생존자들 역시 죽음이 목전까지 당도한, 아니 죽음보다 더한 절망의 늪에 빠져 있었기에 대책이 필요했다. 그들의 영혼을 집어삼키려 드는 악마를 물리치고 그들의 감긴 눈을 뜨게 할 대책이.
"…45보급전대!"
있다.
있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반짝인 불빛처럼, 지금의 암울한 상황을 타파하고 모두를 건강하게 일으켜줄 수단이.
성전군 4보급전단 소속 45보급전대.
식량과 물자뿐만 아니라 칼리야스 교단의 사제들도 동행 중인 45보급전대가 조금만 더 빨리 와준다면 12수색전대 병사들을 충분히 살릴 수 있을 터!
때마침 무려 은위계급 용병도 앞에 있겠다, 프로미카 황토 지대를 비롯해 프로도무스 마을까지 가는 경로 상의 괴물들도 대부분 처리되었겠다, 제단이라는 게 걸리긴 하나 동료들의 목숨이 너무나도 고귀했기에 클라크는 이 중대한 임무를 용병 오휘윤에게 맡기려 한다.
들어 주겠는가?
(48/48)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31공병전대 지휘관 '클라키 팔트'와 12수색전대 병사들이 모두 생존해 있을 경우 발동합니다.
* 특이 사항 2: 본 퀘스트는 12수색전대 병사들이 절반 이상 사망할 경우 자동으로 '실패' 처리됩니다.
* 특이 사항 3: 본 퀘스트를 성공할 경우 성전군 산하 31공병전대, 45보급전대, 12수색전대 소속 인물들의 호감도가 '신뢰'로 고정됩니다.
* 특이 사항 4: 본 퀘스트를 실패할 경우 성전군 산하 31공병전대, 45보급전대 소속 인물들의 호감도가 '평범'으로 하락합니다.
"허."
나는 떡 하니 개방된 퀘스트 창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며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원래 퀘스트가 변경되면 기존에 없던 서브 미션들이 새로 추가 되도록 설정돼 있는 건가?
"현재 이쪽으로 45보급전대가 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점점 커져가는 물음표에 클라크의 부연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속으로 나지막하게 읊는 주문.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세멘티스〉의 서브 퀘스트를 열람합니다.]
1. 완벽한 청소
2. 자재 수급
3. 수색
4. 요새 건설: 프로도무스 마을
5. 구원
6. 생명의 샘 복원
* 수행 가능한 서브 퀘스트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 '요새 건설: 프로도무스 마을'은 '서브 에픽 퀘스트'입니다.
* '서브 에픽 퀘스트'의 경우 '계속 진행' 및 '포기'가 가능합니다.
'늘었다!'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모르는 사이에 신규 과제들이 새롭게 등장했다는 걸.
이거이거, 메인 컨텐츠만 바뀌는 줄 알았는데 아예 싹 다 덧붙여지는 듯싶었다.
아주 기꺼운 낭보였다. 안 그래도 흉수(凶獸)급 괴물과의 결전을 계획하면서 육체든 정신이든 업그레이드시킬 기회가 없으려나 찾아다니는 와중이던 지라.
"…해서 아마 하루에서 이틀거리 내로 들어왔을 겁니다. 그들을 더 빨리 데려올 수 있다면."
"하죠."
"예?"
"하겠습니다."
난 무척이나 밝은 얼굴로 클라크의 손을 맞잡았다. 알아서 팍팍 밀어주겠다는데 당연히 받아야지.
"바로 출발하지요. 오히려 이곳이 걱정입니다."
"여긴 저에게 맡겨주시죠. 비록 무력은 부족할지라도 저희 공병들에게도 나름의 싸움법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러시다면 저도 최선을 다해 45보급전대를,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사제분들이라도 서둘러 모셔 오겠습니다."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걸 가져가시면 45보급전대장도 휘윤 씨의 말을 무시하진 못할 겁니다."
호쾌하고도 신속한 응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를 건네는 클라크.
그가 내 손에 쥐여준 물건은 작은 휘장이었다.
〈지휘관의 인장: 31공병전대장/Magic〉
* 칼리야스 교단의 성전군 소속 지휘관임을 알리는 휘장. 영혼석 등은 장착되어 있지 않으나 신성 주문을 각인해 착용자의 정신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준다.
* 신성 마법 '평정심' 상시 발현
└평정심: 급격한 감정 변화를 진정시키는 주문.
* * *
"스콰, 가자."
"히이이이잉!!"
클라크의 휘장을 받아들고 요새가 보이지 않을 거리까지 멀어진 후에야 스콰를 소환해 안장에 오른 나는 녀석의 고삐를 채며 마음껏 달려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후임이나 다름없는 세컨들리에게 짐 따위도 다 넘겼겠다, 제 장비를 제외하곤 홀가분해진 스콰는 전력으로 달려보겠다는 듯 힘찬 투레질을 기점으로 전속 질주를 개시했다.
간혹.
"그어어억? 그어어어어어!!"
"으어어어어!"
길을 떠돌던 언데드 몇 마리가 나와 스콰의 생명력에 이끌려 팔을 휘적거리기도 했으나, 2차 진화체도 못 된 수준으로 우리를 따라잡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잘 달리네."
한 줄기 돌풍이 된 스콰의 등 위에서 박자를 맞추며 불어오는 바람을 즐긴 나는 딱히 전투가 벌어질 낌새가 보이지 않자 당분간은 괜찮겠지 싶어 검대 주머니로 팔을 뻗었다.
세멘티스 처치 보상으로 드랍된, 내 손길이 닿기만을 기다리던 책을 향해.
〈기술 서적: 신성 가호/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기술 '신성 가호' 습득
└신성 가호: 칼리야스 교단의 수호사제로서 성복을 입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각인. 본인에게 적용되는 신성력과 관련된 모든 행위에 효과가 소폭 향상된다.
"호, 나쁘지 않은데?"
패시브 스킬 '신성 가호'.
코스트도 없는 데다 미약할지언정 마법은 물론 물약 등 아이템의 효력까지 상승한다는 걸 보니 옵션이 꽤 괜찮게 느껴졌다. 실용성과 범용성을 두루 갖춘 기술은 무엇이든 찾기가 쉽지 않으니 말이다.
['기술 서적: 신성 가호'를 사용합니다.]
[해당 아이템의 효과로 당신의 육체에 각인이 새겨질 예정입니다.]
[각인이 새겨질 부위를 결정해 주십시오.]
"등."
['신체: 등'에 '신성 가호'가 각인됩니다.]
[향후 신성력과 관련된 모든 행위의 효과가 5% 향상됩니다.]
파직―
화르르르륵!
"으음. 따끔하네."
괜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등판에 문신을 새겨 넣으며 그 뒤로 얼마나 더 달렸을까. 대략 두어 시간을 쉬지 않고 내달리며 족히 4~50km 가까이 이동했다 싶을 무렵.
- 히이이이잉!
- 히이이잉!
별안간 몇 마리의 말들이 멀리서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섯이 채 안 되는 것으로 보아 본대는 아니고, 45보급전대의 척후조가 아닐까 싶어 고삐를 당겨 스콰의 속도를 줄이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좁혀져 가는 시야 너머로 드러나는 형상들.
"표식 남기겠습니다!"
"이봐 헹크! 이번에는 헷갈리지 말고 제대로 남기라고!"
"에헤이,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해."
"푸흐흐흐흐."
짐작대로 그들의 정체는 대지와 주변 나무 따위에 마킹을 새기며 달리고 멈추기를 반복하는 척후병들이었다.
"다 했으면 어서 가자! 오늘 안에 황토의 끝자락까― 정지!"
"응? 조장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다들 창을 들어라!"
그들은 적진 정찰에 특화된 조직답게 낯선 이의 출현에 경계 어린 눈빛을 보였으나, 이를 해결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 칼리야스 교단의 의뢰를 받아 파견된 은위계급 용병 오휘윤이다. 31공병전대 지휘관 클라크 팔트의 부탁으로 45 보급전대장을 만나러 왔으며 이건 그가 내준 인장과 교단 소속임을 증명하는 증표다."
['승자의 훈장' 효과가 발동합니다.]
[훈장을 확인한 밀레스 제국인들의 호감도가 '긍정적'으로 고정됩니다.]
"아!"
"스, 승자의 훈장!"
이들의 불신과 우려를 종식할 수단이 있기 때문이었다.
* * *
"저쪽입니다."
자신을 45 보급전대 척후조 조장 크리스라 소개한 병사와 통성명을 나누고 안내를 받아 그들의 숙영지로 가는 길.
말에 올라 약 10분 정도를 가자 각종 물자가 실린 마차와 수레로 이루어진 기나긴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12수색전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뚫고, 31공병전대가 몸으로 체크해준 행로라 그런지 45보급전대 병사들의 낯빛은 외부 행사임에도 평온했다.
"전투가 많이 없었습니다. 호위 병력도 적지 않아서 설령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금세 해결됐지요."
"그렇군요."
다행이었다.
최대한 빨리 사제들을 데리고 가야 하는 입장인데, 저들이 불안해하거나 공포에 질린 상태였다면 제아무리 클라크가 요구한 사항이라고 외쳐도 정서적 안정감을 이유로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을 테니까.
이런 내 심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제가 먼저 가서 로멘 대장님께 말씀드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럇!"
적극적으로 나서서 나를 도와주는 크리스.
아무래도 '승자의 훈장'이 가진 효능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듯했다. 그저 적대감만 갖지 않으면 만족이었는데, 이런 식이라면 보급대장을 설득하는 작업도 무난하게 이어질 것 같아 싱긋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뒤를 쫓아 스콰를 몰고 가던 참이었다.
파직―――!
"…응?"
무언가 섬뜩한 '살기(殺氣)'가 내 심장을 관통한 것은.
일순간에 전해진 감각이었으나, 너무나도 선명한 살의에 반사적으로 환두대도에 손을 가져가며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내 한 인간과 시선을 마주치게 되었다.
피처럼 시뻘건 피부에 적안(赤眼).
비정상적으로 긴 양팔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나는 붉은 아지랑이가 유난히 인상적인 존재.
삐이이이익!!
[경고!]
[피와 죽음을 선사하는 선혈의 악마, '레드 이블(Red evil)'이 당신의 생명력을 포착했습니다.]
['오오라: 살육에 취한 악마'의 영향권 안에 삼켜졌습니다.]
[대상 '레드 이블(Red evil)'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도망이 불가능해집니다.]
[대상 '레드 이블(Red evil)'이 추격을 시도할 시 한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10% 하락합니다.]
3차 진화체였다.
116화
귀곡성을 부르는 죽은 자들의 소리꾼 '세이렌(Seiren)'과 썩은 것들로 빚어낸 거짓 생명, '콥스 골렘(corpse golem)'.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당시.
이른바 3차 진화체, 혹은 그에 준하는 현시점 최상위 개체들을 대면했을 때 충분히 예견했다.
앞으로 진행하게 될 퀘스트에서는 저런 놈들을 심심치 않게 상대하게 되겠구나, 하고.
그러니.
삐이이이익!!
[경고!]
[피와 죽음을 선사하는 선혈의 악마, '레드 이블(Red evil)'이 당신의 생명력을....]
['오오라: 살육에 취한 악마'의 영향권 안에....]
....
눈앞을 가득 채우는 메시지와 함께 시끄럽게 울어 대는 사이렌도, 실질적으로 내 이목을 사로잡으며 나타난 신규 3차 진화체 '레드 이블'과의 첫 만남도 솔직히 놀라울 건 없었다.
단지 내가 당황스러운 점은.
"척후조 돌리고 있던 거 아녔어?"
저 괴물이 예까지 오는데 이 많은 인원 중 단 한 사람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보급대란 앞서 출발한 부대들의 생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만큼 1분 1초도 사주 경계를 게을리해선 안 되는 조직.
즉.
최소 5km, 못해도 1km 전에는 미리 발견하고서 합당한 대응책을 마련하든 물자 일부를 포기하더라도 수레와 마차로 방진을 구성하든 마땅한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데.
"누가 왔다고?"
"31공병전대장 님의 전령―"
"로멘 대장! 무언가 다가오고 있소!"
"예? 밀리티오 사제, 느닷없이 그게 무슨 소리요?"
"차갑지만 뜨거운… 저기! 저깁니다!"
"대관절 저기 뭐가 있다― 아!"
....
"난리 났네."
지속된 평화와 일반적으로 500여 명에 불과한 여타 부대와 달리 호위 병력이 포함돼 거의 전력이 2배 가까이 늘어난 탓에 긴장이 풀린 건지.
아님 레드 이블의 능력이 사전에 파견된 척후조가 본대에 신호도 보내지 못하게끔 순식간에 격살해버릴 정도로 강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원인이야 뭐가 됐든 덕분에 우리는 원치도 않았던 축제를 맞이해야만 했다.
후우욱―
"…끼에에에에에에엑!!"
"끄어어어억!"
"끄어어어!"
['붉은 악마의 전쟁 선포'가 울려 퍼집니다.]
[일정 공간 내에 존재하는 모든 언데드(Undead)의 신체에 사기(死氣)가 서립니다.]
['적'으로 규정된 모든 생명체의 자연 치유력 및 회복 속도가 하락합니다.]
[사기(死氣)에 의해 좀비화 속도가 비약적으로 증가합니다.]
* * *
사방이 뻥 뚫린 개활지.
투두두두두두―
"스콰, 들어가라."
"푸르릉."
나는 레드 이블을 필두로 진격을 실시한 빨갱이들을 바라보며 즉각 스콰를 돌려보내고는 환두대도를 뽑아 들며 어딘가로 몸을 던졌다.
"칼리파 경! 어찌, 어찌하면 좋소!"
"방진! 방진부터 짜야 하오!"
"그대 의견에 전적으로 따르리다! 지휘해주시오!"
부산스러움을 넘어 몹시도 혼란스러워하는 45보급전대장 로멘 곁이었다.
그곳에.
"밀리티오 사제! 움보 사제와 방어 마법을 발현해 주시오! 진형을 바꿀 시간이 필요하오!"
"알겠습니다. 움보 형제님."
"칼리야스의 빛이 이 땅을 감싸리라."
우우우우우웅―
화아아악!
개량된 성복을 걸친 사제들이 서 있기 때문이었다.
['성역'에 입장했습니다.]
[각종 삿된 저주가 소멸합니다.]
[신체 컨디션이 정상으로 회복됩니다.]
나는 언데드 군단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두 팔을 벌려 성역을 전개하는 두 사제에게 뛰어가며 주위를 싹 훑었다.
1,000여 명의 45보급전대를 물어뜯으려 돌진 중인 언데드들의 숫자는 5~600 남짓.
단순 계산으로는 인간 측이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점한 것처럼 보이나, 절반을 초과하는 비전투인력을 배제한다면 오히려 매우 위험한 형국이었다.
언데드란 종족이 지닌 제1 특성, 전염(傳染).
전열을 가다듬지도 못한 지금 어영부영하다가 어느 한쪽이라도 무너지는 날엔 그 빌어먹을 특성으로 인해 어제의 동료가 피와 살육에 미친 괴물로 다시 태어날 테고, 부지불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파도는 고층 빌딩조차 단박에 삼켜버리는 해일이 되어 삽시간에 모두를 죽음 아래로 묻어버릴 터.
'여차하면....'
나는 최악의 경우 사제들만이라도 살려서 빠져나가야겠단 생각을 머릿속 한편에 단단히 박아둔 채 그대로 칼을 휘둘렀다.
제 천적을 알아본 듯.
전장을 가로지르며 오로지 사제들을 노리고 질주하는 선혈의 악마를 향해.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슈우우우욱―
"끼에에에에에엑!!"
"어딜!"
꽈르르르르르릉!
기습적으로 측면을 강타한 벼락에 직격당해 10여 미터나 튕겨 나가는 레드 이블.
마지막에 마지막 순간 사기(死氣)가 휘감긴 오른팔을 내저어 뇌류 자체는 막아냈으나, 그 반발력까지 해소하진 못했는지 땅바닥을 구르며 날아가는 놈의 모습에 난 발끝에 힘을 주며 대지를 밀어내고 도약했다.
시스템이 명확하게 사망 선고를 내려주지 않는 한 안심은 금물.
파직―
파지직―
이그니스(ignis) 류(流).
직뢰(直雷).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하아!"
나는 아주 작정하고 스킬을 쏟아 부었다.
후우우욱―
콰아앙!
꽈과과과광!
세멘티스 처치 보상으로 '마력 전이석: 대형'도 받았거니와 스콰를 타고 오며 야금야금 휴식도 가졌던 터라 나름대로 여유가 있었기에 망설임 따윈 없었다.
오직 공격 또 공격.
가능하다면 저 악마의 대가리를 이대로 잘라버릴 각오로 쉴 새 없이 찍어 눌렀다.
다만.
놈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끼에에에에에엑!!"
후욱―
촤좌좌좌좌좌좍!!
아스라이 피어오르던 사기를 단숨에 결정화(結晶化)시켜 3m에 달하는 공간 전체를 찔러 부수는 반격을 시작으로, 내가 물러난 틈을 노려 허리를 비틀며 내지르는 오른팔엔 붉은 기류로 조각된 발톱이 자라나 있었다.
"끼에에엥에엑!!"
"네가 뭔."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쉬욱―
촤아아아아아악!
"울버X이냐?!"
아슬아슬하게 자세를 낮추며 클로의 공세를 회피한 나는 처음 겪어보는 패턴에 인상을 팍 찡그리며 후다닥 환두대도를 들어 견제했다.
역대각선으로 올려 치며 손목 스냅으로 손잡이를 회전시켜 다시금 내리긋는 정방향 베기.
필살의 기세로 연달아 후려친 연격에 쩍 하고 갈라지는 레드 이블의 피륙.
그러나 내 입가에는 여전히 못마땅한 감정이 역력했다.
칼날이 살갗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밀집된 사기(死氣)에 의해 환부가 복원된 탓이었다.
"무슨 트롤도 아니고."
그 미친 수준의 자가 복구에 혀를 내두른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재차 환두대도를 내질렀다.
때로는 순수 육체 능력으로, 때로는 섬광(閃光)과 직뢰(直雷)로.
흡사 레드 이블이란 개체의 재생력이 어디까지인지 실험해보는 연구원이 된 양 전신 곳곳을 난도질하며 살점을 찢고 뼈를 부쉈다.
그리고 깨달았다.
"끼에에에엑!!"
"허."
무작정 짓밟기만 해서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한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이 자식.
내가 상상하는 레벨을 아득히 초월한 재생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도저히 나 혼자서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서도 계속해서 썰어댈 수만 있다면 사냥이 불가하진 않겠지만.
"끄아아아아악!!"
"막아! 막으라고!"
"조, 조장! 조장!!"
"또 밀립니다!"
당장 내겐 그럴 여유가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호위 병력과 사제들이 동분서주하며 그 속도를 늦추고는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발, 두 발 밀려나는 45보급전대 병사들.
더군다나 쓰러진 시신들이 하나둘 들썩거리는 게 벌써 언데드화가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끼에에에엑!"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후욱―
꽈르르르르릉!
이대로 지지부진하게 미적거리다간 정말로 사제들만 데리고 도주하는 치욕적인 결말을 맞게 되리라 직감한 나는 죽어라 머리를 굴렸다.
불사신 마냥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저 괴물을 쓰러트릴 공략법을―
"아!"
무얼 해야 할까.
굳어 버린 사고 회로를 억지로 돌리며 방도를 모색하던 나는 불현듯 뇌리를 스쳐 지나간 아이디어에 탄성을 토해내며 재빨리 손가락으로 마력을 집중시켰다.
이게 통할지 안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해보자고."
도전은 언제나 아름다운 법이니까.
이윽고.
우우우우우웅!
신성 마법(神聖 魔法).
회복.
신성한 축복이 새하얀 빛무리를 동반하며 괴물의 육신을 덮쳤다.
화아아아아악!
그 직후.
"…끼에에에에엑!!"
나는 들을 수 있었다.
섬광(閃光)을 두들겨 맞아도 툭툭 털고 일어나던 놈의 주둥아리에서 터져 나온 비명을.
일견 하기에는 아까의 포효나 작금의 하울링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목청이었지만, 숱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져진 본능은 단언했다.
이 새끼.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는 중이라고.
지극히 오래된 과거, 고작 구울을 상대로 핀치에 몰려 아득바득 살길을 찾으려 애쓰다 포션에 담긴 신성력으로 재미를 봤던 게 떠올라 시도한 한 수치고 제법 쏠쏠한 전과에 꼭 악당이 된 거 같은 비릿한 미소를 지은 나는 빠르게 검대 주머니를 훑어 손에 잡히는 '체력 회복 물약'을 왕창 꺼냈다.
찬스가 왔으니.
"선물 또 간다, 이 개자식아."
돈지랄을 해볼 요량이었다.
"하아!"
…촤아아아아악!!
마침.
〈상급 회복 물약/Rare〉
이럴 때 쓸려고 고이고이 간직해 둔 비수가 있었으니까.
* * *
성수(聖水).
칼리야스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세례의 비가 전방을 뒤덮은 찰나 벌어진 광경은 한 편의 광대극이 따로 없었다.
촤아아아악―
촤아악―
…치이이이이익!
"끼에에에엑!! 끼에에에에엑!!"
용암을 끼얹기라도 한 듯 녹아내리는 피부에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악을 쓰며 발버둥 치는 레드 이블.
비록 '상급 체력 회복 물약'이라는 황금 덩어리를 아낌없이 털어 넣은 끝에 얻은 성과였지만, 나는 결코 아까워하지 않았다.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세멘티스 〉의 최종 목표는 흉수(凶獸) 사냥.
이를 달성하는 데 있어 업적이 끼어 있을 게 분명한 신종 3차 진화체는 엄청난 도움을 줄 매개체였다.
고로.
휘우욱―
퍼억!
"끼에에에에엑!!"
과감한 투자를 외치며 체력 포션을 모조리 들이부은 나는 마무리를 위해 환두대도를 치켜세웠다.
성수의 영향으로 재생은커녕 사기의 순환마저 오류가 생겼는지 절세보검 못지않던 클로도,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던 붉은 기류도 자취를 감춰버린 채 흉물스러운 몸뚱아리만 남은 레드 이블.
"잘 가라, 지옥으로."
후우우욱―
…서걱!
대가리를 베기에 딱 좋은 몰골이었다.
띠링!
[피와 죽음을 선사하는 선혈의 악마, '레드 이블(Red evil)'을 처치했습니다.]
[축하합니다!]
[〈10인 한정 업적: 최초의 레드 이블 사냥꾼〉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많은 경험치' 및 '기술 임의 습득권: 레드 이블', '마력 전이석: 대형', '재생하는 도마뱀의 영혼석', '핏물로 제작한 미치광이의 발톱'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117화
[ 쌓고 또 쌓고 ]
사람들이 말하길 전투(戰鬪)와 전쟁(戰爭)은 엄연히 다르다고들 한다.
전자가 1대 1, 혹은 일회성 교전에 국한된 하나하나의 파트라면 후자는 그 한 번, 한 번의 부딪힘을 총망라한 스토리랄까?
나는 그 주장에 100% 동의했다.
일종의 장수전이라 볼 수 있는 레드 이블과의 결투, 그 격전에서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후, 끝났―"
"그어어어어!"
"으어어어!"
"또, 또 뚫립니다! 퇴각, 퇴각해야 합니다!!"
"조장들은 자리를 지켜라! 네놈들이 물러서면 병사들이 위험하다!"
"사, 살려줘!"
"비켜! 난 여기서 죽고 싶지 않다고!"
"…지 않았네."
환호받아야 할 승전보가 무색하게 귓가엔 처절한 절규와 삶을 갈망하는 괴성만이 가득했기 때문.
기어이 전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 공간에서 안전한 장소는 한바탕 휘몰아친 뇌기(雷氣)로 언데드들이 싸그리 불타버린 내 주변과 밀리티오, 움보 사제가 시전한 성역의 비호가 미치는 범위뿐.
그 외 나머지는 죄다 죽음의 물결에 짓눌려 제 빛을 잃어버린 채 검붉은색으로 물들어가는 상태였다.
"몇 명이나 구할 수 있으려나."
심히 참혹한 풍경에 혀를 찬 나는 주르륵 출력되는 메시지들을 확인할 새도 없이 곧장 성역의 중심부로 달려갔다.
레드 이블이 처리된 덕에 '도망 불가'라는 제약도 사라졌으니, 밀리티오와 움보 사제를 데리고 탈출 작전을 감행할 심산이었다.
오면서 보았듯.
31공병전대 쪽으로 향하는 길목은 기껏해야 좀비나 구울 따위가 돌아다니는 실정이라 저들에게 전위를 맡기고 내가 후미에 남아 추격을 저지한다면 물자는 몰라도 이 이상의 인명 피해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따르겠지만, 구더기가 무섭다고 장 못 담글까.
하나라도 더 구해내려면 희생은 불가피했기에 쓸데없는 잡념은 지워버리고 그저 병사들을 구해내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리라.
그리 중얼거리며 막 성역에 몸을 들이밀던 차에.
"…그, 그대가 31공병전대장이 보낸 용병이오?!"
내부로 진입하는 나를 누군가 붙잡았다.
푹 눌러 쓴 투구 아래 두려움과 불안감이 잔뜩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본인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 아우성치는 남자.
갑옷 한쪽 어깨에 클라크가 건네준 '지휘관의 인장: 31공병전대장'과 똑같은 휘장이 달려 있어 그의 정체를 파악하기는 쉬웠다.
"45보급전대장 로멘, 맞습니까?"
"맞소! 내가 로멘이오!"
점점 희망을 잃어가는 군대의 패장(敗將)이었다.
로멘은 내가 자신의 이름을 알자 뭐가 그리 좋은지 한껏 고무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아주 재미난 제안을 내밀었다.
별안간 날 불러 세운 목적.
"나, 나를 이곳에서 빼내 주시오.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소이다! 황금? 보석? 뭐든 말만 하시오. 내 돌아가기만 하면 뭐든 달라는 대로 드리리다! 그러니 날 프레시디움(præsídĭum) 요새로 데려가 주시오!"
다름 아닌 경호 의뢰였다.
그것도.
"혼자, 만?"
"당연하지 않소! 여기서 누굴 데려가 봐야 위험 부담만 커질 뿐이요. 어차피 저들은 다 농노나 평민들이요. 살아있든 죽어있든 하등 상관없는 놈들. 저런 것들은 알아서 살라고 두고 나만 좀 최대한 신속하게 프레시디움 요새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오."
이제껏 봐왔던 수많은 지휘관과 달리 전적으로 제 목숨을 보전하는 데 급급한, 지극히 노골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요청이었다.
설마 대뜸 이런 부탁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까닭에 나는 일순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로멘을 응시했다.
밀레스 제국 내 몇 안 되는 대귀족 루데오 엑세르 백작도, 그의 혈족이자 재벌 2세쯤 되는 엑스케트나 리하인도, 하다못해 폰스 마을의 촌장 라이트나 시골 동네 페루스의 자경대장 크린 리벳 같은 이들도.
지난 몇 달간 마주쳤던 이들은 모두 신분 고하와 상관없이 지인과 동료를 지키려 한낱 외부인에게도 손발이 닳도록 빌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헌데.
처음으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속편을 추잡하고 혐오스러운 문장으로 채워 나가는 작자를 보게 되니 여긴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찌 보면 이게 정상인가?'
그래.
"화, 황금으로 부족하오? 검! 검이 필요한거?! 걱정 마시오. 비록 피난길이라 제대로 챙겨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당신 같은 용병들이 환장할 병기는 잔뜩 있으니까. 명검, 보도, 신창. 말만 하시오. 아아…! 여자도 내주지! 이래 봬도 내 동생이 소싯적 루크룸(lucrum) 자작령 내에서 손꼽히는 미인이었소. 마침 남편을 잃어 과부가 된 몸이니 이 오라비의 부탁이라면...."
욕구를 넘어 욕망으로 치닫는 생존욕이 빚어내는 극한의 이기주의.
이런 것이야 말로 아포칼립스에 어울리는 스탠스였다.
어째 만나는 인물들마다 선하고 신사적인 성격들이었기에 사실 칼리야스 대륙은 지옥을 가장한 천국인가 싶었는데.
"왜 말이 없는 겐가! 아, 알겠네. 돈, 무구, 여자! 전부 안겨 주겠네! 그러니 어서… 이럴 시간이 없어!"
"여기도 똑같은 세상이었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좀.
후우우욱―
콰직!
"크아아아악!"
"닥치라는 소리야."
귀가 썩을 것 같으니까.
"로, 로멘 대장님!"
"로멘 대장님이 피습당하셨다!"
"의무병! 의무병 어딨어!"
....
고막을 더럽히는 짐승만도 못한 헛소리에 가차 없이 따귀를 날린 나는 그래도 대장이라고 우르르 달려가는 병사들을 뒤로 하며 본래 의도대로 사제들에게 다가갔다.
"밀리티오 형제님,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신성력이 버텨주질 못할 겁니다."
"하지만 병사들이...."
"저…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만, 밀리티오, 움보 사제님 맞으십니까."
두 사람은 내가 발치에 다다를 때까지도 45보급전대와 호위 병력을 살리기 위해 갖은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흡사 응급의료센터의 의사들을 연상케 하는 순수한 인간애.
"누구...."
"들으셨는진 모르겠지만, 31공병전대장 클라크 경의 부탁을 받아 이곳으로 오게 된, 은위계급 용병 오휘윤이라고 합니다."
"은위계급 용병? 그럼―"
"예. 교단의 의뢰를 받았지요. 아무튼, 시간이 없으니 간략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제가 길을 막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병사들을 이끌고 클라크 경이 계신 곳으로 가십시오. 제가 방금 지나쳐 온 길목은 안전합니다. 좀비나 구울이 몇 마리 있었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감당되겠지요."
"혼자서 저 많은 수를 막으시겠다는 겁니까?!"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설사 은위계급 용병이라고 해도―"
"당장은 괜찮습니다. 여기서 더 불어난다면 저도 힘들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뒤는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병력을 추려 가십시오. 요새가 건설되는 중이니 여러분들을 수용할 공간은 넉넉할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이고 자시고, 얼른 가시죠. 밍기적거리다 모두 죽이실 게 아니라면."
"으음."
나는 두 사람과 통성명을 마치자마자 속사포처럼 상황을 설명하고 등을 떠밀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낯선 외부인이 못 미덥겠지만, 몇 번이고 강조했듯이 정말로 더는 지체할 여력이 없는바.
"그럼… 믿고 가보겠습니다."
"자, 잠깐."
두 사제가 뭐라 대답하든 할 말만 전하곤 홱 몸을 돌려 전황이 가장 심각한 지점을 확인해 좌측의 수레를 발판 삼아 날아올랐다.
이그니스(ignis) 류(流).
연쇄(連鎖).
파직―
파지직―
"하아!"
…꽈르르르르릉!!
* * *
양 떼 사이에 뛰어든 호랑이처럼 언데드들을 불사르는 푸른 벼락.
나는 그 가운데 서서 지겹도록 칼을 휘저었다.
"그어어어어어!"
"으아아아아!"
....
좀비, 구울, 레드 구울, 듀라한.
손에 닿고 발에 치이는 건 뭐든 닥치는 대로 베고 찌르며 부순다.
레드 이블과의 격전으로 마력을 남발했던 탓에 아까와 같은 무지막지한 위력은 선보이지 못했으나.
"한 놈, 두식이, 석―삼."
서걱!
촤아아아악!
차근차근하되 쾌속하게, 죽지도 살지도 못한 자들의 머리통을 날리며 영원한 안식을 선사했다.
그렇게 10분? 20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열정적으로 칼춤을 추다 고개를 들었을 때 비로소 보게 되었다.
"다 갔네."
수백에 달하던 45보급전대의 생존자들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이성을 가진' 생명체라고는 내가 유일했다.
그 말인즉슨.
"어휴, 나도 가자."
이 전장을 떠날 때가 됐다는 의미.
마음 같아선 공적치를 고려해 이 전장을 떠도는 나머지 언데드들까지 깔끔하게 처리하고 싶었으나, 날 무시하고 45보급전대를 쫓아간 추격자들이 있었기에 놈들을 따라잡으려면 슬슬 여길 빠져나가야 했다.
"스콰!"
"히이이이이잉!!"
"이럇!"
결심과 동시에 안장에 올라 고삐를 채자 즉각 높이 들어 올렸던 발굽으로 대지를 찍으며 도약하는 스콰.
허벅지에 힘을 꽉 주며 녀석에게 몸을 맡긴 나는 피부를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잠시 투구를 벗었다.
언제 튀었는지 땀에 섞여 흐르는 핏물.
"아이고, 죽겠다."
그 끈적한 오물을 닦아내며 길게 한숨을 몰아쉬고 나니 과도하게 분비됐던 아드레날린에 가려져 있던 피로가 확 솟구쳤다.
하기야.
아무리 스콰에게 업혀 왔다고 한들 승마는 승마.
그것만 해도 체력 소모가 상당한 데다 애당초 프로도무스 마을에서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온지라 누적된 대미지가 적지 않았다.
…만.
"큭."
기이하게도 내 입가엔 연신 미소가 감돌았다.
[〈10인 한정 업적: 최초의 레드 이블 사냥꾼〉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많은 경험치' 및 '기술 임의 습득권: 레드 이블', '마력 전이석: 대형', '재생하는 도마뱀의 영혼석', '핏물로 제작한 미치광이의 발톱'이 주어집니다.]
어깨를 짓누르는 피곤함을 단박에 떨쳐버릴 보답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3차 진화체 레드 이블, 과연 놈은 죽어서 무얼 남겼는가.
옅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품속으로 밀어 넣는 손길에 반응해 펼쳐지는 2개의 화면.
그 안에는 오색찬란한 색으로 반짝거리는 단어, '레어(Rare)'가 떡 하니 박혀 있었다.
〈기술 임의 습득권: 레드 이블/Rare〉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레드 이블이 지닌 기술 중 한 가지 획득 및 습득한 기술에 부합하는 신체 능력치 소폭 상향
* 목록: 비정상적인 등가교환(상세 보기▼)/오오라_살육에 취한 악마(상세 보기▼)/형태 변환(상세 보기▼)/붉은 악마의 전쟁 선포(상세 보기▼)
└비정상적인 등가교환(A): 마력을 과도하게 소모해 재생력을 극대화한다. ⊂ 상승 능력치: 재생력
└오오라_살육에 취한 악마(A): 일정 공간에 마력을 퍼트려 적으로 규정된 모든 존재를 '도망 불가' 상태로 만든다. 단, 특별한 기술 또는 아이템 등으로 효과를 파훼할 수 있다. ⊂ 상승 능력치: 마력
└형태 변환(A): 체외로 방출한 마력을 특정한 형태로 구체화한다. 단, 기초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 상승 능력치: 마력
└붉은 악마의 전쟁 선포(A): 일정 공간에 마력을 퍼트려 아군으로 규정된 모든 존재의 능력치를 소폭 향상시킨다. ⊂ 상승 능력치: 마력
〈핏물로 제작한 미치광이의 발톱/Rare〉
*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으나 그에 합당한 배경을 갖지 못했던 대장장이가 피에 사무친 원한을 담아 제작한 클로(claw). 수십 년간 자신을 노예처럼 부리고도 모자라 몸이 쇠약해지자 가차 없이 내치려 했던 위정자에게 복수하고자 직접 어쌔신을 찾아가 암살 의뢰 대금으로 선물했다고 전해지며 그 이후로 세상에 출현할 때마다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끝에 대륙 10대 마병(魔兵)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 베기 공격 시 추가 피해량 +33%/착용 시 마력 최대치 19% 향상/마법 '과다 출혈' 상시 발현/ 마법 '상처 부패' 상시 발현/ 마법 '피의 추적자' 상시 발현
└과다 출혈: 공격 성공 시 일정 확률로 특수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는 해제할 수 없는 '상태 이상: 출혈'이 발동한다.
└상처 부패: '핏물로 제작한 미치광이의 발톱'에 의해 생긴 상처의 부패 속도가 상승한다.
└피의 추적자: '핏물로 제작한 미치광이의 발톱'에 묻은 가장 마지막 혈액의 주인을 추적한다.
118화
마상에서 2개의 전리품을 쓱 훑어본 나는 특히 클로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관찰했다.
장갑 위에 덮어쓰는 이 무기는 마치 고양잇과 동물의 발톱처럼 상시 발출이 아닌, 착용 후에 손등 부분을 누르는 것으로 본인이 원할 때 넣다 뺐다 하는 형식이라 확실히 모르는 사람에게는 비장의 한 수가 될 수 있을 거 같았다.
왜 어쌔신 전용으로 제작됐는지 알 거 같은 느낌?
사아악―
사악―
"그래서인지 예기(銳氣)도 상당하고."
'핏물로 제작한 미치광이의 발톱'의 첫인상은 전체적으로 제법 만족스러웠다.
단지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옵션.
레어 등급 아이템답게 내장 스킬이 3가지나 되는 데 반해 이 세계관에서는 써먹을 게 없다는 점이었다.
출혈이 뜨든 상처가 빠르게 부패하든 언데드란 종족에겐 별 타격이 안 갈 테니까.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달아나는 놈들도 아니고.
"체력 흡수라도 박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탁―
스르륵!
그런 부분들이 옥에 티 같긴 하다만, 일단은 레드 이블의 팔과 닮은 클로를 양손에 꼭 끼웠다.
가능하면 판매하기보단 착용하고 다닐 심산이었다.
환두대도가 버티고 있는 한 별로 쓸 일은 없겠지만, 영혼석이 장착되지 않은 대신 마력 전이석이라도 삽입됐는지 무려 19%에 달하는 마력 상승량도 엄청났거니와 인생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 칼을 놓치거나 꺼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보조 무기 겸 비장의 한 수쯤으로 챙겨둬도 괜찮을 듯싶었다.
대충 '손때 묻은 단검'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랄까?
아, 맞네.
그러고 보니 영물과의 교전에서는 요 발톱이 톡톡한 활약을 보여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비록 '손때 묻은 단검'처럼 짐승형 대상에게 추가 피해를 입히는 직접적인 옵션은 없지만, 그보다 큰 카테고리인 '생명체'를 공략하는 데 특화된 아이템인 만큼 핀치에 몰렸을 때 출혈만 띄워 놓고 치고 빠지기를 반복한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지언정 사냥은 성공할 터이니 말이다.
리하인과 대련을 치르며, 마수 스콜로펜드라와 격전을 벌이며 더 이상 야비하게 이기고 싶지 않다고 다짐 아닌 다짐을 했으나....
어쩌겠어.
살기 위해서라면 죽은 척도 할 줄 알아야지.
"그렇지?"
"푸르르르릉!"
손가락을 까딱이며 클로의 무게감과 촉감에 적응한 나는 진득하게 땀이 배어 나오는 스콰의 갈기를 쓰다듬어주곤 칼을 뽑았다.
전력으로 질주한 덕분에 금세 45보급전대를 쫓아 나섰던 언데드들의 꼬리가 시야에 잡히고 있었다.
"한번 해보자."
놈들을 발견한 난 달리는 그대로 환두대도를 우측으로 뺐다.
기마전은 여전히 어설프지만, 정면에 무대도 깔렸겠다.
실전이란 최고의 연습 장비로 훈련을 치를 작정이었다.
이런 기회가 또 어딨겠어.
"후, 가자!"
"히이이이이잉!!"
* * *
"이쪽으로 와 주시오!"
"일곱, 여덟, 아홉… 한 명! 여기 한 명 모자라다!"
"팔슨! 네가 가라!"
"충!"
"칼리야스의 빛이여! 저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스콰와 혼연일체가 되어 미친 듯이 마상 전투를 즐기며 추격대를 완전히 쓸어버리고 드디어 도착한 숙영지.
아니.
이제는 진짜 소형 요새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일대에 다다라 스콰를 돌려보내고 걸어 들어온 나는 수고했단 인사를 듣기도 전에
"노, 놈이 왔다!"
"창 들어!"
"포위하라!"
후욱―
후욱―
촤좌좌좌좌좍!!
"…이게 무슨 짓이지?"
피가 잔뜩 묻어 번들거리는 수십 개의 '창날'과 마주해야 했다.
아무 예고도 없이 창칼을 들이대며 날 둘러싸는 병사들의 태도에 의문과 당황스러움으로 멀뚱히 주위를 돌아봤다.
혹.
도주극에서 생긴 PTSD로 날 언데드라 착각이라도 했나 의아해서.
허나 그랬다면 병기를 바짝 가져다 댈 게 아니라 진작에 살갗을 꿰뚫고 심장을 짓이겼을 터.
그렇다면 왜들 이러는 걸까.
구해줘서 고맙다고, 살려줘서 감사하다고 무릎 꿇고 오체투지 해도 이상하지 않을 판국에―
"…아, 그놈 때문인가."
의아한 기색으로 원인을 따져보던 나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낯짝에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45보급전대장.
제 명줄 챙기기 바빠 되는 대로 지껄이던 면상을 떠올리니 모든 게 한순간에 납득이 됐다.
그놈밖에 없었다.
이런 개짓거리를 꾸밀 인간은.
"하! 낯짝도 뻔뻔하구나. 감히 대 칼리야스 교단의 교황께서 임명하신 성전군의 지휘관이자 밀레스 제국의 자작 위를 승계받을 귀족을 습격하고도 여길 찾아와?!"
짐작이 옳았음을 증명하듯 별 같잖은 수식어들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 로멘.
1대 1로 맞댈 자신은 없는지.
병사들에 의해 포위되고 나서야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놈은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악당 특유의 비릿한 미소로 무장한 채 10m 안팎까지 다가와 허리춤에 매달려있던 칼을 뽑았다.
스르르릉―
서서히 뽑혀 나오는 놈의 검은 선대로부터 귀족 위를 승계'받을' 예정인 고귀한 신분임을 보여주듯이 삐까뻔쩍했다.
전투용으로 쓰겠다는 건지, 관상용으로 쓰겠다는 건지.
크로스 가드(cross guard, 손잡이와 날 사이)와 폼멜(pommel, 손잡이 아랫부분)에 각각 다른 색의 보석을 박아 넣어 다른 의미로 이목을 사로잡는 형태.
로멘은 그 분수진 장검을 내 목덜미 부근에 들이대며 단호하게 외쳤다.
"고작 용병 주제에 대 밀레스 제국의 귀족을 시해하려 한 죄인이여. 지금 와서 구차하게 빈다고 해도 늦었다. 내 너의 목을 베어 무너진 가문의 명예를 회복시킬 것이다."
날 죽이겠다고.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로멘 대장!"
"그만두시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클라크와 밀리티오가 황급히 로멘을 말렸으나, 놈의 입장은 완고했다.
자존심이 꽤 강한 편인지.
"저놈의 무릎을 꿇려라!"
"아니 되오! 병사들은 물러나라!"
"놈의 무릎을 꿇리래도!"
클라크가 말리든 말든 목구멍이 찢어져라 호통친다.
그 바람에 난감해진 것은 병사들이었다.
원소속은 45보급전대니 지휘관인 로멘의 명령을 듣기는 해야겠는데, 동급의 지휘관이 눈을 부라리며 반대를 부르짖고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양측만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등.
여러모로 거시기한 광경이었다.
"하고 싶으면 직접 하든가. 안 그래?"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타닥―
휘우욱!
"아?!"
"어, 없다!"
"분명 여기 있었는데...."
돌아가는 현장을 단번에 이해한 나는 혀를 차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칼리야스 대륙인과 이런 식으로 불미스러운 사고가 발생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안 해봐서 무척이나 당혹스럽지만.
뭐가 됐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대 밀레스 제국의 귀족을 암살하려 한 어쌔신이요! 내가 아니었다면, 실력이 부족한 클라크 경처럼 어리바리한 기사였다면 당해도 벌써 골백번은 더 당했을 거란 말이요! 그러니 이 자리에서 반드시―"
"임마."
"...!"
"살인 미수도 중형이야."
"어, 어떻게."
날 공격하려는 의도가 명백하다는 것.
그럼.
후우우우욱―
빠악!
적(敵)이라는 소리였다.
"…끄아아아아아아!!"
"시끄러우니까 닥쳐봐."
후욱―
콰직!
콰드드득!
나는 살기를 내비친 로멘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갑옷을 관통한 충격에 팔다리 뼈가 부서져 나가고, 주동이에서 선혈이 치솟았으나 무시하고 잘근잘근 뭉갰다.
굳이 봐줄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귀족이고 나발이고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보고 싶어도 다시는 못 볼 자식이었다. 피차 똑같은 놈이 될 순 없으니 죽이진 않겠지만, 가르쳐줘야지.
함부로 살심을 품은 자의 최후가 어떠한지.
퍼석―
"…읍!"
"아, 2개 다 깨졌나."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밀리티오 사제님."
"예, 예?"
"치료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기왕이면 적당히 숨만 붙여 놓았으면 합니다. 혹시라도 완쾌됐다가 비슷한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이런 식의 교육으로 끝나진 않을 듯하니 말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허면, 클라크 경."
"예."
"우리는 우리 얘기를 하시죠."
* * *
장내의 사건이 정리된 후.
클라크와 대면한 나는 밀리티오와 움보 사제를 데리고 서둘러 프로도무스 마을로 향했다.
전투 초기에 발현한 성역에, 요새 근처에 당도하자마자 병사들을 일렬로 줄 세워 놓고― 감염 유무를 판단할 수가 없어― 일일이 신성 세례를 퍼부어 주느라 둘의 낯빛은 굉장히 힘겨워 보였으나.
이래저래 시간을 매우 지체한 탓에 휴식까지 취했다간 12수색전대 병사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변고가 생기겠다 싶어 보쌈하듯 끌고 와 치료를 청했고.
"칼리야스의 빛이 있으라!"
"칼리야스의 빛이 있으라!"
우우우우우웅―
우우우웅―
…화아아아악!
[신성 마법 '정화하는 빛'이 당신의 육체를 치유합니다.]
[모든 해로운 효과가 소멸합니다.]
곧 따스한 온기의 손길 아래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올랐던 육체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후, 다행이네."
중급 포션도 통하지 않던 몸.
혹시나 사제들의 힘으로도 고쳐지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띠링!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구원〉의 과제를 완료하셨습니다. ]
[보상으로 '적당한 경험치' 및 '기술 서적: 질주', '중급 체력 회복 물약(x5)'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증세가 완벽하게 해소되었음을 알려주는 메시지에 나는 그제야 안도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 사제가 손수 펼치는 신성 마법은 궤가 다른 모양이었다.
거참.
나도 신성 마법 좀 배워둬야 하나?
"감사합니다. 더는 사기가 감지되지 않는 걸 보니 두 분 덕택에 병사들의 문제가 잘 해결된 듯합니다."
"사기? 아, 그 붉은 아지랑이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예, 바깥 괴물들의 제일 큰 특징이죠."
"하지만 아직 완쾌했다고 말하기엔 이릅니다. 혹시 모르니 저희가 계속 봐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신다면야 저야 고맙지요."
"그것이 저희에게 주어진 소명 아니겠습니까."
시답잖은 혼잣말을 뇌까리며 퀘스트 보상을 품에 넣은 나는 고생했다는 뜻으로 밀리티오와 움보에게 성호를 취했다.
이에 따라서 성호를 취하며 웃어 주는 두 사제.
고된 작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50여 명의 병사들을 살리기도 했고, 또 의뢰를 받았다고는 하나 성전군 소속이라고 보기는 애매한 내가 감투까지 쓴 어떤 놈팡이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병사들을 구하려 노력했던 행동 등이 저들에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는진 알 수 없으나.
'괜찮, 겠는데?'
흐름이 썩 나쁘지 않음을 캐치한 나는 슬쩍 눈치를 보다 크흠, 한차례 목을 가다듬고는 운을 떼었다.
마침.
개인적으로 저들에게 청하고픈 안건이 있었는데, 지금의 분위기라면 내 제의를 받아들여 줄 거 같았다.
"두 분,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음? 무얼…."
"이 마을 위쪽에 생명의 샘이 있다고 합니다."
"정말입니까?"
"예. 북문으로 나가면 바로 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호오, 칼리야스 님의 은총이 그리 가까이 있다니, 기회가 된다면 가보고 싶군요."
"…한 번 가 보시겠습니까?"
119화
에픽 퀘스트가 '요새 건설'에서 '세멘티스 처치'로 변경되며 기존의 메인 퀘스트가 서브 미션으로 격하되는 동시에 신규로 생성된 2개의 임무.
개중 하나가 방금 막 종료된 '구원'이었고, 다른 하나가 망가진 '생명의 샘'을 복원하는 미션.
"…한 번 가 보시겠습니까?"
이를 수행하고자 두 사제를 살살 꼬드겼다.
내가 아는 회복 공식은 성역과 소생의 바람 조합이 전부라, 밀리티오는 움보든 움직여줘야만 첫 삽이라도 뜰 수 있기 때문.
따라서 저들의 마음이 동해야 했다.
이쪽만 클리어되면....
"밀리티오 사제께 전해 들었습니다. 보급대가 공격받았다더군요. 휘윤 경의 합류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그 피해가 얼마나 불어났을지 상상도 못 했을 거라고."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 저희도 그렇고, 45보급전대도 그렇고 이쯤 되면 운명이 이끈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하, 그보다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보답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프레시디움(præsídĭum) 요새였다면 전단장님께 말씀드려 합당한 보상을 내어드리겠으나, 당장은 가진 게 모루와 망치밖에 없는지라."
"딱히 뭘 바라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크 경께서 뭐라도 챙겨주고자 하신다면, 저에게 힘을 좀 실어주셨으면 합니다."
"…힘, 말씀이십니까?"
"예. 프로도무스 마을 북쪽에 위치한 생명의 샘. 제단에 의해 파괴되었으리라 짐작되는 그곳을 복구하고 싶습니다."
"복구가 가능합니까?"
"일전에 비슷한 경험을 해봤었습니다. 사제분들이 도와주신다면 반드시라고 장담은 못 해도 확률은 있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로멘 경…께서는 정상적인 거동이 불가하시니, 호위전대장이신 칼리파 경과 의논하여 답을 가져오지요."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쪽도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자리만 만들어 주시죠."
"예?"
그 외에 나머지는 클라크가 상황만 조성해주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터라, 밀리티오와 움보의 긍정적인 호응이 제일 중요했는데.
"저희야 좋지요. 사제로서 생명의 샘을 방문한다는 건 언제나 기쁜 일입니다."
"저 역시 동감입니다."
저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일차적인 난관은 해결된 듯했다.
"말 나온 김에 복귀하시기 전에 들렀― 아! 이런 이런, 제가 깜빡한 게 있었군요. 루쿠스 숲의 생명의 샘이 저 괴물들에 의해 손상됐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 그게 무슨...?"
"혹시 역행의 제단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 * *
띠링!
[칼리야스 교단의 사제 밀리티오, 움보가 '망가진 생명의 샘'에 관해 전해 들었습니다.]
[〈서브 퀘스트: 생명의 샘 복원〉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 ⊂ 세멘티스〉에 〈서브 퀘스트: 생명의 샘 복원〉이 추가됩니다.]
〈서브 퀘스트: 생명의 샘 복원〉
* 프로도무스(Fordŏmus) 마을 북쪽으로 30분 정도 올라가면 나타나는 작은 숲. 주민들이 수렵 자원과 식물 자원 확보를 위해 울타리를 치고 자경단을 구성해 프로미카들의 침범을 막으며 보존시킨 이곳 루쿠스(lucus)에는 특별한 장소가 존재한다.
숲의 한가운데.
여름이고 겨울이고 계절과 상관없이 항상 청명한 물줄기가 샘솟는, 단지 마시는 것 만으로도 병을 낫게 해주는 기적 그 자체로써 오랜 세월 동안 프로도무스 마을 사람들의 건강과 안녕을 지켜주었던 '사나티오(sanátĭo)의 샘'이 바로 그곳이었다.
…만.
찬란했던 이전 날의 추억은 이제 한때의 역사가 되어버린 지 오래.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언데드들의 침공으로 빼앗긴 사나티오 샘에 썩은 살점과 뼛조각으로 빚어진 '역행의 제단'이 들어선 현재에는 그저 저주와 역병이 휘몰아치는 금지(禁地)로 전락해 점점 망가져 가는 중이었다.
이 위기를 극복할 열쇠는 당신의 참전뿐.
과연 그대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줄 희망의 빛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0/1)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칼리야스 교단의 '직위 사제(職位 司祭)'의 합류 혹은 그에 준하는 아이템 등을 구비했을 때 발동합니다.
* 특이 사항 2: 직위 사제(職位 司祭)란, 직접 전장에 나서서 전투를 치르는 '수호 사제' 혹은 새로운 수도원을 개척하여 교리를 전파하는 '개척 사제' 등을 일컫습니다.
* * *
"…모두 실었습니다!"
"좋아, 1조부터 차례대로 마을을 빠져나간다!"
"충!"
"충!"
밀리티오, 움보 사제의 힘으로 증세가 완치된 12수색전대 병사들을 들것에 올려 루베르(rŭber, 붉은색) 요새로 되돌아오고 나서 맞이한 저녁.
"휘윤 경. 클라크 대장님께서 회의 참석을 요청하셨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갑시다."
"충."
간단히 식사를 챙겨 먹은 나는 휴식을 취하다 클라크가 보낸 전령과 함께 중앙에 마련된 그의 숙소로 향했다.
적당한 시기에 간부들을 모아 달라 부탁했는데, 때가 된 것 같았다.
똑똑―
"31공병전대 4조 조장 맥스입니다. 명하신 대로 휘윤 경을 모셔 왔습니다."
"안으로 모셔라."
"충!"
신속한 증축 및 확장을 위해 지휘관이라고 특별할 거 없이 일률적으로 1층짜리 사각 벽돌집으로 건설된 공간.
전령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니 3명의 면면이 보였다.
밀리티오 사제, 클라크, 칼리파.
12수색전대 병사들을 봐주느라 바쁜 움보 사제와 사경을 헤매다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로멘이 빠진 간부진들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너는 가봐도 좋다."
"충!"
나는 경례를 마치고 사라지는 병사와 교차 되듯 발걸음을 내디뎌 클라크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슬며시 돌아본 셋의 표정은 상당히 어두웠다.
사연이야 뻔했다.
레드 이블이 끌고 온 언데드들의 기습으로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한데다가 그 과정에서 물자까지 잃어버린 실정이었으니까.
현재 이곳 루베르(rŭber, 붉은색) 요새는 12수색전대 일부와 31공병전대, 45보급전대 등 총 3개 부대가 합쳐져 거의 천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상주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소비될 식량 및 식수가 어마어마하다.
헌데 레드 이블에게 당한 기습으로 이들이 먹고 마실 식자재는 물론 각종 장비와 소모품들을 죄다 두고 와버렸으니 막막하고 답답해하는 게 당연했다.
구태여 캐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안이었기에.
"다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필시 비축 물자가 부족한 탓이겠죠."
나는 들으라는 양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일부러 그 점을 콕 집으며 입을 열었다.
"크흠."
이에 보급품을 호위하는 것이 본인의 역할이었던 칼리파가 불편하다는 듯 헛기침으로 응수했으나 일절 개의치 않았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쪽도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자리만 만들어 주시죠.'
클라크에게 했던 호언장담.
"걱정들 붙들어 매시죠."
"…예?"
"멀쩡히 남아있기만 한다면, 싹 다 회수해 올 터이니."
그것을 현실로 실현시키려거든 작금의 대화가 필수인 까닭이었다.
* * *
루쿠스 숲 생명의 샘 복원하기 퀘스트가 추가되었을 때 나름대로 고민을 해봤다.
지난 크뤼글라디 호수 당시와 달리 엑스케트나 크라덴 같은 수십 명의 기사도, 변수 창출에 능한 생환자들도 없이 혼자서 제단을 파괴할 수 있는 방법을.
그리고 바로 포기를 떠올렸다.
제아무리 나라도 수천 마리의 짐승형 언데드들과 살점 덩어리로 이루어진 십수 개의 팔을 휘두르는 제단을 홀로 감당하는 건 사생결단의 각오가 뒤따라야 했으니 말이다.
해서 웬만하면 배제하고 다른 임무들에나 집중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었다.
이미 〈1인 한정 업적: 샘지기를 대신하는 자〉도 깨뒀겠다, 내 입장에선 과도하게 매달릴 건덕지가 전혀 없으니, 추후에 소환될 콥스 골렘이 우려되긴 하더라도 안전 제일을 외치며 요새 건설에 몰두해도 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흉수 사냥'과 'S랭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쟁취하려면 결국에는 빠트리는 것 없이 모조리 받아들여야 하는 법.
고로.
틈틈이 머리를 굴리며 방안을 모색했고, 마침내 그럴싸한 아이디어를 구상해낼 수 있었다.
그 계획의 첫 단추가 사제들의 동참이었으며 이어지는 두 번째 단계가....
"보급품을… 회수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까?"
"멀쩡할 경우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그 전제 조건만 충족된다면 당장 내일부터 수거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린 그대의 농담을 들으려고 부른 게 아닙니다."
"하루 만에 들킬 농담 따위를 해서 제게 돌아올 게 뭐가 있습니까?"
"음."
"대신."
"대신?"
"제 말대로 된다면 저도 한 가지를 약속받아야겠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전폭적인 지원."
"무작정 지원을 바란다 한들―"
"성벽을, 프로도무스 마을 북쪽으로 쌓아주시죠. 제가 원하는 건 그겁니다."
성전군 병사들을 동원한, 일명 '벙커링'였다.
한때 국민 게임으로 불렸던 스X크래프트는 실시간전략게임이라는 RTS 장르에 걸맞게 수많은 전술이 난무했었다.
내가 꺼내든 벙커링 역시 그 수많은 빌드 중 하나로, 적진 입구 또는 주요 요충지에 총병이나 화염방사병 등 보병으로 분류되는 공격형 유닛의 엄폐물 역할을 하는 건축물을 설치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적 유닛을 제거하며 게임 흐름을 거머쥐는 플레이를 말한다.
나는 31공병전대와 2명의 사제를 이용해 이 가상의 전술을 칼리야스 대륙에 구현해볼 요량이었다.
* * *
다음 날 새벽.
동이 틀 무렵 기상해 곧바로 45 보급전대 피습지로 내달린 나는 뒤에서 루베르 요새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무도 당당하게 전장에 들어섰다.
누구의 보조도 없이 달랑 환두대도 한 자루 차고 나아가는 날 두고 도처에서 근심과 불신이 그득한 소리들을 내뱉었으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알고 있었으니까.
인식을 바꿔 놓는 데엔.
"가보자."
우우우우우웅―
이그니스(ignis) 류(流).
연쇄(連鎖).
후우우웅
콰과과과과과광!!!
단 한 수면 충분하다는 걸.
어제는 도망치기 바빠서 다들 제대로 구경하지 못한 듯 한데, 그렇다면 똑똑히 보여주리라.
그래야 이후의 행보에도 태클이 없을 것이니, 나는 아낌없이 쏟아 부으며 포효를 내질렀다.
"스읍, 하아아!!"
후우우욱―
화아아아악!!
['분노의 아리아'가 울려 퍼집니다.]
[저항력이 부족한 모든 대상에게 '경상급 병증: 짧은 혼란'이 적용됩니다.]
그렇게 30여 분이 흘렀을 때.
"...보, 보급품들을 챙겨라!"
"최대한 빨리 수거해서 요새로 복귀한다!"
"충!"
"충!"
우리는 버려지고 쓰러졌던 수백 대 분량의 마차와 수레를 7~80% 가까이 거둬들일 수 있었고, 그날 오후부터 원형으로 크기를 불려 나가던 루베르 요새의 북쪽 방면이 툭 튀어 나오기 시작했다.
1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