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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 80-90

80화

[ 특별한 보상 ]

…쿠웅!

…쿵!

아무런 전조도 없이 터져 나온 북소리.

"뭐, 뭐야?"

"아, 뭔데 갑자기."

"몰라. 근데 실제로 들으니까 개시끄럽네."

"칼리야스식 기상나팔인가?"

성곽을 중심으로 세상을 뒤흔드는 울림에 하나둘 밖으로 나오는 생환자들.

한창 달콤한 수면에 빠져 있다 강제로 깨어난 터라 다들 하나 같이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다만 소란스럽게 구는 것도 잠시였다.

저벅―

저벅―

저벅―

"비키시오, 죄인의 호송이요."

중요 부위만 간신히 가려 발가벗겨진 것이나 다름없는, 인간으로 추정되는 일곱 개의 덩어리를 질질 끌며 걸어 오는 기사들과 발견한 탓이었다.

햇빛을 머금어 휘광을 뿌리는 풀 플레이트 아머부터 날이 시퍼렇게 선 레이피어와 할버드까지 완전 무장을 갖춘 채 붉은 뱀이 그려진 깃발을 높이 들고 전고의 진동에 맞춰 일직선으로 대로를 가로지르며 성문을 향해 다가가는 기사단의 위용은 실로 전차와 같았다.

차갑다 못해 시린 한기를 내뿜으며 내딛는 걸음걸이.

단지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영혼이 물어뜯기는 듯한 무지막지한 위압감에 너도나도 슬그머니 옆으로 피하기 바빴다.

가만히 버티고 있다가는.

"끄아아아아아!!"

"으으읍, 읍!!"

"아으으어어!"

"…뭐, 뭐야, 저건!"

"일단 비켜!"

"이, 이쪽으로 와!"

모래에 쓸리고 바위가 박혀 찢겨진 살갗에서 흐른 핏물로 혈로(血路)를 새기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죄인과 같은 꼴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처절하고도 냉정한 행로의 중심에 선 엑세르가의 장남 엑스케트가 어느 순간 발걸음을 우뚝 멈추며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인다.

후우욱!

척―

"세르펜스 기사단의 엑스케트 폰 엑세르. 도시 글라디아르의 주인이자 대밀레스 제국의 백작 엑세르 각하께 보고드립니다."

"허락한다."

절도 있는 자세로 앉은 그의 눈앞엔 새빨간 머리칼을 휘날리는 붉은 뱀들의 군주, 루데오 폰 엑세르가 서 있었다.

"금일 새벽, 도시 내 대장간 '붉은 칼날'에서 강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범인은 총 일곱 명. 전원 '용병'들로 이루어진 그들의 목적은 대장간 내의 무구들로,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검거가 늦었더라면 자칫 군량 물자 수급에 크나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심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범죄 사실은 누가 파악했으며, 검거는 누가 했는가."

"최초 목격자는 세르레퀴로의 3조 조장 오휘윤 경으로, 때마침 병사 제임스의 부탁을 받아 어머니 레프라인에게 편지를 전달하러 가던 와중에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 현장으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범죄 행각을 목도한 휘윤 경은 연기를 피워 치안대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한편, 사태가 더욱 심각해지기 전에 몸소 나서서 죄인들을 진압하셨습니다."

마치 마이크라도 댄 것처럼 빌어먹을 언데드 놈들의 하울링에도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두 남자의 음성. 사적인 감정을 완벽하게 배제한 왕과 신하의 대화에 저마다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지금의 사달이 벌어진 원인을. 더불어, 어째서 엑스케트가 '용병'이란 단어에서 강조를 주었는지를.

"엑스케트 폰 엑세르, 그대에게 묻겠다."

"충."

"도시 글라디아르, 아니. 엑세르 백작령 내에서 강도 행위는 어찌 처벌받는가."

"죄질에 따라 작게는 손목에서 크게는 팔을 베어 다시는 죄악을 저지를 수 없도록 합니다. 이는 대상이 귀족이든 평민이든 구분하지 않습니다."

"엑스케트 폰 엑세르, 그대에게 또 묻겠다."

"충."

"전시에 군수품을 편취하는 등의 죄악을 벌인 자는 어찌 처벌하는가."

"군령에 이르길 이는 반역에 해당하는 바.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즉시 참형으로 다스립니다."

"엑스케트 폰 엑세르, 그대에게 명하겠다."

"충."

그것은 선고에서 한층 명확해졌다.

"작게는 근면 성실하게 생업에 종사하던 영지민에게 피해를, 크게는 하루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영지 전체의 패망을 가져왔을지도 모를 '용병'들의 목을 베어라. 스스로 얼마나 증대한 잘못을 저질렀는지 자각할 수 있도록 먼저 손목과 양팔을 자르고 마지막으로 수급을 갈라라. 시체는 영혼마저 구원받지 못하게 성밖에 버려 저 검은 재앙들의 먹이로 주어라."

"충."

"만약 누군가 이에 불만을 품는다면 나 루데오 폰 엑세르가 명하건대 또 다른 반역자라 여기고 동일한 형벌로 다스리리라. 알겠느냐."

"충!!"

한 사람을 벌주어 백 사람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결심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처분이었으니까.

* * *

"던져라!'

"충!"

지휘관의 선창에 너덧 명의 병사들이 포대기에 대강 쌓여 있던 일곱 구의 사체를 성벽 밖으로 버린다. 좌우에서 계속해서 쏘아 대는 화살이 천 자락을 꿰뚫고 펄펄 끓는 기름이 시체를 뒤덮었으나 걱정하기는커녕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자업자득.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었다.

이는 같은 생환자들도 비슷했다.

"이래도 되는 거야? 용병이면 우리 같은 생환자라는 건데."

"그러게. 뭔 도둑질 한 번 했다고 사형을 해버리냐."

고작 몇몇 생환자들만이 인상을 찡그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대다수는 속내야 어떻든 엑세르 백작의 엄포를 떠올리며 괜히 휘말리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신경을 꺼버렸다.

스쳐 가는 인연에 불과했던 데다가.

"가져온 보급품들을 나눠줘라!"

"충!"

"응? 보급품?"

"뭔 보급품이래?"

"장비다! 장비야!"

노련한 사령관의 민심을 달래는 후속 조치가 어긋날 수도 있었던 생환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까닭이었다.

"엑세르군의 병사용 갑옷이오! 자신의 무장에 부족한 부분이 있는 이들은 예서 갑옷을 챙겨 가시오!"

비록 아이템 판정은 받지 못할지언정 당장 이마저도 없어 빌빌대는 생환자들에게는 감지덕지인 실질적 장비부터.

"이것은 기본적인 지급품에 지나지 않소! 향후의 전공에 따라 더 질 좋은 무구를 보상으로 내어줄 것이오!"

열과 성을 다해 전쟁에 임한다면 보다 뛰어난… 아이템이 될 수도 있는 장비의 지급 '가능성'을 운운하며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던 공기를 환기시키는 백작의 노림수에 참혹한 처형식을 보여주었음에도 오히려 지지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이런 게 정치인가?

"전쟁 시작도 전에 분위기 조지나 했더니만, 이래저래 잘 풀렸네."

엑세르 백작과 엑스케트의 퍼포먼스를 지켜보던 나는 예상과 다른 결말에 혀를 내두르며 몸을 돌렸다.

상황이 이리됐으니 홀가분한 심정으로 내 할 일을 하러 가도―

"휘윤 경."

"응?"

아침도 됐겠다.

세르레퀴로(serrequíro) 전체 회동까지 시간도 넉넉하니, 슬슬 리하인과의 최종 대련을 치르려던 차에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

동그란 바탕에 창을 감싼 붉은 뱀이 양각된 견장을 달고 있는 걸로 보아 엑세르 백작가의 기사이기는 한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애당초 아는 인물이라고는 대여섯 명이 전부지만.

"세르펜스 기사단 2조 조장 펠란이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오휘윤입니다."

여하간 얼떨결에 통성명을 하고 대치 아닌 대치가 펼쳐지던 직후.

스스로를 펠란이라고 밝힌 기사가 품 안에 있던 무언가를 내게 건넸다. 표면이 몹시 부드러운 고급스러운 두루마리.

"이건."

"백작님께서 전하시라 명한 '3등급 보고 입장권'입니다."

"아."

"시기는 언제든 상관없다. 하나 입장 기회는 단 한 번이며, 가지고 나올 수 있는 물건 역시 한 개에 국한되니 이 점을 참고하라. 백작님께서 그리 전달하라 하셨습니다."

대엑세르 백작 가문의 창고를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이었다.

* * *

"이쪽입니다."

"영주 관저 방향이군요."

"그렇습니다."

2등급 보고 입장권.

나는 백작의 직인이 찍힌 그 권리를 인계받자마자 지체 않고 즉각 사용했다. 짧게는 몇 시간, 길어도 내일이면 밖에서 생활하게 될 텐데 구태여 뒤로 미룰 연유가 없었다.

생존율을 조금이라도 올리려면 여유 있을 때 후딱 써야지.

미적거리다 메인 퀘스트가 종료되기라도 하면 상장 폐지 된 주식마냥 종이 쪼가리가 될 뿐이었다.

아끼다 똥 된다.

'그나저나 3등급이라.'

"펠란 경."

"예."

"보고는 몇 등급까지 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요. 백작님의 보고는 총 네 등급으로 구분됩니다. 3등급, 2등급, 1등급, 그리고 엑세르 등급."

"으흠."

"그중 휘윤 경께 하사하신 3등급 보고는 보통 영물의 영혼석이 박힌 무구들로 채워진 공간입니다. 저도 예전에 한번 들어가 봤었지요."

"영물의 영혼석이라면, 2등급이나 1등급에는 마수 이상의 영혼석 장비들이 있는 겁니까?"

"저도 윗 등급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알지 못합니디만, 듣기로는 일전에 사냥했던 마수의 영혼석으로 제작한 레이피어가 2등급 보고에 진열돼 있다 하더군요. 그 외에 1등급이나 엑세르 등급 보고에는 상상도 못 할 보물들이 가득하다고 하지요."

"호. 보물이라...."

펠란의 말에 진한 호기심이 불쑥 치솟았다.

상상도 못 할 보물들이라니, 가슴 저편에 잠들어 있던 모험심을 자극하는 한마디에 눈동자가 절로 반짝였다. 아주 잠깐이지만, '강제 귀환권'을 믿고 창고를 털어 볼까 하는 욕망이 꿈틀거릴 정도로 흥미가 돋았다.

물론.

시도할 의향은 전혀 없었다.

보고에 입장에 선택을 마치고 나오기까지 전 과정이 펠란의 입회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르펜스 기사단 내에서도 조장을 맡을 만큼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 리하인보다도 최소한 몇 수는 앞설진대 저 괴물을 상대로 도박을 한다?

'아쉽지만 하나로 만족하자고. 애초에 추가로 얻은 건데.'

과욕은 화를 부른다는 걸 똑똑히 봤다. 손목에, 대가리에… 어휴. 나는 그런 식으로 인생을 말아먹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보상하니까 생각났네. 특수 퀘스트 보상으로 나온 스킬, 아직도 확인 안 해봤네.'

쓸데없는 야욕을 털어 버린 난 문득 주머니를 뒤져 자그마한 책 한 권을 끄집어냈다.

〈기술 서적: 추적/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기술 '추적' 습득

└추적: 한 번 특정한 대상을 추적한다. 단, 대상이 추적 방지 기술 등을 사용할 경우 효과가 상쇄되어 소멸한다.

'오, 괜찮네.'

책자를 손에 쥐자 푸른 빛을 내며 출력되는 홀로그램 화면.

짤막하지만 명확한 내용을 읽어 본 나는 꽤나 기꺼운 미소를 지었다. '망가진 패잔병'과 같은 특수 퀘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습득한 탐지와는 달리 '지구 내에서만…'이라는 제한적 문구가 없었으니까.

안 그래도 마땅한 추적 기술을 배우지 못해 감에 의존하던 처지라.

'효과야 따로 실험을 해봐야겠지만 어쨌든 이걸로 추격전에서 써먹을 만한 무기가 생겼네.'

좋다.

필시 칼리야스 대륙에서 분탕질을 치고 도망치는 빌런들을 잡아 족치라고 내준 느낌인데. 그 요청, 물심양면으로 들어줄 수 있을 듯했다.

내가 열정을 다하면 다할수록 떨어지는 콩고물도 많아질 테니 말이다.

81화

드디어 도착한 영주 관저.

"정지. 무슨 일이십니까."

"세르펜스 기사단 2조 조장 펠란 랜드럴이다. 백작님의 명으로 3등급 보고에 들어가기 위해 왔다."

거진 반나절만에 되돌아온 으리으리한 저택에 발을 들이려 하자 문 앞을 지키던 병사 하나가 창을 내세우며 우리 앞을 막는다.

방문자가 기사든 아니든 전혀 개의치 않고 단호하게 저지하는 그에게 서류 한 장을 내미는 펠란.

내게 전해 준 '3등급 보고 입장권'과 입회자임을 증명하는 확약서였다.

그러자.

"잠시만 대기해 주십시오."

마법과 신학이 살아 숨 쉬는 세계답게 확약서 하단에 찍힌 영주의 인장을 눈이 아닌 손가락으로 살펴보는 병사.

그 검지에는 금빛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탁―

우우우우웅!!

"직인 확인용 마도구입니다. 백작님의 직인과 연계되어 혹 위조된 상태라면 저 반지에 깃든 빛이 사라집니다."

"아."

이른바.

칼리야스식 스캐너였다.

"음… 확인됐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수고하도록."

"충!"

과학을 대체하는 마법의 실용성에 기염을 토하는 사이 검열이 완료되었는지 옆으로 비켜서는 병사들 경례를 받으며 출입문을 지난 우린 마당을 쭉 통과해 본관으로 이동했다.

"정지. 무슨 일이십니까."

"세르펜스 기사단 2조 조장 펠란 랜드럴이다. 백작님의 명으로 3등급 보고에 들어가기 위해 왔다."

그곳에서 2차 검문을 거쳐 1층에 들어선 펠란은 나를 계단으로 이끌었다.

지상 4층에 지하 2층으로 구성된 본관.

개중 내가 갈 장소는 지하 1층에서도 계단을 기준으로 좌측에 위치한, 거의 2m 크기의 황동색 철문이 세워진 방이었다.

특이하게도 복도를 두는 대신 곧장 문이 기다리고 있는 공간.

슬쩍 반대편을 돌아보니 우측에는 은색으로 색칠된 철문이 보였다. 이를 보아하니 등급별 구분을 '동색 → 은색 → 금색' 문으로 해둔 모양이었다.

엑세르 등급 보고는 가문의 명칭을 썼으니 빨간색이 아닐까 싶은데, 여하간 단순한 구분 법만치 개폐 방법도 단순했다.

"문 중앙에 홈이 보이십니까."

"예."

"아까 받으신 입장권을 크기에 맞게 펴서 가져다 대면 문이 열릴 겁니다."

"알겠습니다."

펠란의 설명에 맞춰 짱짱하게 편 입장권을 홈에 부착해 주면 끝.

흡사 비어 있던 칸에 퍼즐을 끼워 넣듯 종이를 붙여 놓고 물러서자, 서로의 짝에 반응한 두 개의 술식이 동시에 빛을 발하며 황동 문을 반으로 가르기 시작했다.

쿠웅―

쿠구구구궁!!

과연.

이 안에는 어떤 것들이 숨어 있을까.

"들어가시죠."

짙은 기대감이 깔린 시선으로 서서히 개방되는 안쪽을 응시하던 나는 펠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일보를 크게 내디뎠다.

이윽고.

보물들로 가득한 세계가 나를 반겨 주었다.

* * *

〈내리찍는 흑곰의 양손 도끼/Magic〉

* 실력 있는 대장장이가 뒷산에서 마주한 흑곰을 상상하며 제련한 양손 도끼. 자루만 족히 1.5m에 달하는 데다 도끼날 자체도 웬만한 성인 남성의 상체만 한 크기인 탓에 다루기가 쉽지 않지만, 사용할 수만 있다면 일격에 바윗덩어리마저 박살 낼 듯한 파괴력을 선사할 것이다.

* 베기 공격 시 추가 피해량 +10%/착용 시 근력 최대치 7% 향상

〈추격하는 볼투르의 각궁/Magic〉

* 대초원의 전사들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각궁. 제련 과정에서 능히 창공의 재앙이라 불리는 '추격하는 볼투르의 영혼석'을 장착하여 단지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더 멀리 보고, 더 빠르게 들으며, 더 세밀하게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인지력을 갖게 해준다.

* 명중률 +15%/착용 시 인지력 최대치 7% 향상

〈딘딘힌 나우틸루스의 방패/Magic〉

* 심해에서 생활한다는 나우틸루스의 껍질로 제작한 방패. 심해의 수압도 거뜬히 견뎌내는 그들의 갑주를 압축시킴으로써 밀도를 높이고 끝으로 '단단한 나우탈루스의 영혼석'을 장착해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흠집조차 내지 못할 강도를 지니게 되었다.

* 물리 방어력 +15%/착용 시 내구력 최대치 7% 향상

"이게 다 매직 등급 아이템이라고?"

무려 수백 년간 일대를 호령한 백작 가문의 보물 창고.

설령 네 곳의 중 최하 레벨인 '3등급 보고'라고 해도 주인의 격이 있었기에 결코 범상치 않으리라 예상은 했다.

…만.

이렇게나 어마어마할 줄이야.

〈독을 품은 아라네아의 단도/Magic〉

〈어두운 루푸스의 흉갑/Magic〉

〈소생하는 솔리타니아의 목걸이/Magic〉

"허."

도합 백여 개에 달하는 숫자, 무기부터 장신구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구비된 다양성, 그리고 등급.

문자 그대로 하모니를 이룬 삼박자에 도저히 감탄이 멈추질 않았다.

"아니, 여기가 이러면 도대체 더 높은 등급의 보고는 어떻다는 거야."

나는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은색 철문에 연신 침을 삼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거 아무래도 정신 줄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할 듯싶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직접 보고 나니 까딱하다간 본능에 집어삼켜질 거 같았으니까.

짐작건대.

찌릿―

찌릿―

등 뒤에 서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지하며 살기를 피워 올리는 펠란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벌써 돌아 버렸으리라.

"후우… 침착하자, 오휘윤."

그 덕에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한 나는 자꾸만 들썩이는 욕망을 억지로 짓누르며 최대한 냉정하게 주변을 돌아봤다.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은 단 한 개.

그러므로 절대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차분하게 임해야 한다. 실수하지도, 후회하지도 않게끔.

"역시 고를 만한 건 장신구 쪽인가."

무얼 가져가야 할지 대략적인 틀은 확고했다.

무기나 방어구야 어차피 동급이라면 손에 익은 것들을 포기할 이유는 없으니 장신구, 그중에서도 여전히 빈칸이 많은 '반지' 쪽으로 결정하는 게 최선이겠지.

"고로 중점은 옵션인데… 체력을 올려? 아님 재생력이나 속성력에 투자를 하는 게 나으려나?"

점심 전까지 시간이야 한참 있으니 나는 가급적 차분하고 차근차근하게 고민하며 보고 내부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뺑뺑이를 자처하며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활개 치던 참이었다.

"요건 근력이고, 이건 내구… 음?"

수십 점의 액세서리가 모여 있는 장신구 구획을 중점적으로 혹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아이템이 있나 살펴보던 난 한 지점에서 돌연 정지했다.

푹신한 감촉의 쿠션 위에 꽂혀 있는 밋밋한 디자인의 반지를 발견한 까닭이었다.

이 녀석.

평범한 외견과는 어울리지 않게.

〈마도구: 블레이즈 자벨린/Magic〉

* 칼리야스 대륙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파괴하는 사령관」 '팔마 트로파이움'은 참가한 모든 전장에서 승리를 거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가 무패의 전설로 기록될 수 있었던 데에는 '투창(投槍)'이 있었다. 빠른 속도로 달라붙어 한꺼번에 투척 해내는 수천 발의 창살은 그야말로 무자비함의 대명사였다. 이에 감명을 받은 한 마법사는 과거의 전술을 마법적으로 재현하고자 노력했고, 그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반지였다.

* 착용 시 마력 회복 속도 20% 상승/1일 3회 마법 '블레이즈 자벨린' 사용 가능

└블레이즈 자벨린(blaze javelin): 일정량의 마력을 소모해 화(火) 속성 창을 소환한다. 사용자에게는 열기가 적용되지 않으며, 피격 즉시 폭발하여 2차 피해를 입힌다.

"와우."

용암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지의 옵션을 봄과 동시에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현시점에서 내 단점을 꼽으라면 단연 두드러지는 것이 원거리 공격 수단의 부재 아니던가?

겨우겨우 목창으로 커바하고 있었으나, 결국 날붙이가 없는 병기로는 구울 이상만 가도 유효타를 먹이기 힘들었기에 차라리 이참에 매직 등급 활이라도 가져가야 하나 고심했었다.

하지만 막상 손을 뻗지는 못했다.

활(弓)이라는 도구가 가진 난이도가 문제였다. 예로부터 궁병이란 기사와 맞먹을 정도로 양성이 어려운 병과 활이라는 게 그저 베고 찌르면 되는 도검과 달라서 정유림처럼 능숙하게 다루려거든 적어도 몇 년은 필요했다.

그러한 연유로 벨류를 낮추더라도 비교적 숙달이 빠른 석궁을 구해 봐야 하나 머리가 아팠었는데.

"이거면 됐네."

나는 더 미룰 거 없이 반지를 집어 들었다.

'생명이 깃든 반지'와 다르게 쿨타임도 없거니와 속성 대미지에 폭발이 주는 2차 타격까지 더해진 일석삼조짜리 아이템이었다.

아니.

새로운 장비를 장착했을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중량의 증가나 부피의 압박도 제해야 하니 실상 일석오조(一石吳鳥)였다.

"저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 * *

우우웅!

쿠구구구궁―

육중한 선율을 내뱉으며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황동 문.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기사란 주어진 명령에 따르는 법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그보다 세르레퀴로의 조장이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이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무사, 무탈, 승리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저 또한 펠란 경의 무사, 무탈, 승리를 기원하겠습니다."

척―

영주 관저를 빠져나온 우리는 서로의 안녕을 빌며 각자의 길로 떠나갔다.

펠란은 자신의 근무지로.

나는.

"이거 연습해 볼 만한 공간이 있으려나."

마법 수련하러.

리하인과의 대련이 급하기는 하다만, 새로 얻은 무기에 적응하는 것도 꽤나 중요한 미션이었다.

제아무리 천지를 요동시키는 신병이기라도 써먹지 못한다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일 따름이니까.

"여기 골목에서 돌면 나온다고 했었지?"

따라서.

무의식중에도 발현해 낼 수 있도록 조사단 단체 회동 전까지 바짝 훈련하고자 서둘러 걸음을 옮겨 나름 익숙해진 건물에 발을 들였다.

"음? 오휘윤 형제님 아니십니까. 이 오전에 여긴 어인 일로."

"부탁드릴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베네딕티오 사제님."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의 발부처 폴람마(flamma) 수도원이었다.

"부탁…이라면?"

"혹시 수호사제님들이 이용하시던 훈련장을 빌릴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아아."

"점심쯤까지 대실이 가능할는지요. 금액은 따로 지불하겠습니다."

폴람마 수도원은 성기사들을 육성할 만큼 규모가 무척이나 거대한 곳.

더더군다나 수호사제들은 도검류 외에도 신성 마법을 배우고 익혀 나가는 이들. 그런 면에서 트레이닝에 이보다 적합한 공간이 없었다.

"허허, 들어오시지요. 비용은 괜찮습니다. 수호사제들이 파견 나간 관계로 며칠째 비어 있는지라 누구든 편히 쓰고 나가도록 열어 두었으니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베네딕티오는 나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여기서 거절을 당하면 어디로 가야 하나 골머리를 썩을 뻔했는데, 이러면 꼭 오늘만이 아니더라도 메인 퀘스트가 진행되는 동안은 종종 애용해도 될 듯싶었다.

82화

텅 빈 실내 수련장 중심부.

나는 곳곳에 세워진 철제 허수아비들을 노려보며 천천히 반지 속으로 마력을 불어 넣었다.

일반 마법(一般 魔法).

블레이즈 자벨린(blaze javelin)

우우우우우웅!!

화르르륵―

"어우."

활활 타오르는 창.

블레이즈 자벨린은 자신을 수식하는 표현대로 창두, 창대, 자루 등 모든 게 화염으로 이루어진 불꽃 그 자체였다.

길이는 2m 남짓.

무게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전체적으로 딱딱한 촉감이었으며 끝자락의 날 부분은 제법 예리했다.

사각―

"이만하면 유사시에는 무기 대용으로 찔러도 되겠는데?"

무조건 투창에 집중하기보다는 처한 환경에 맞게 다른 방식으로 활용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

하나.

화륵―

"아."

콰아아아앙!

[블레이즈 자벨린(blaze javelin): …'피격 즉시' 폭발하여 2차 피해를 입힌다.]

착각은 금물이었다.

"케헥, 켁― 어후, 씁."

피륙을 베이자마자 가차 없이 터져 버린 불길에 나는 황급히 안면부를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버스트의 위력은 뜻밖에도 매우 강력했다.

기본적으로 투척이 메인인 스킬이었기에 추가 딜링에 불과한 폭발은 솔직히 큰 기대를 않고 있었는데. 정확한 수치는 자세히 따져 봐야겠지만 못해도 섬광(閃光)의 4~50%는 되는 것 같았다.

"예상보다 훨씬 좋네."

여기에 내 근력으로 투사한 창격이 더해진다면 구울을 넘어 듀라한이나 레드 구울 같은 2차 진화체라 하더라도 분명 위협적으로 작용하리라.

확신에 찬 내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지어졌다.

일반 마법(一般 魔法).

블레이즈 자벨린(blaze javelin).

"흣 차!"

후우우우욱―

콰아앙!

* * *

오전 11시경.

"그대의 앞길에 언제나 칼리야스의 축복이 있기를."

"다음에 오게 될 땐 맛있는 거라고 사 오겠습니다."

"허허, 그저 행운이 따르길 빌겠습니다."

명상과 마법 시전을 반복하며 원 없이 팔 근육을 혹사시킨 나는 성호를 취하는 베네딕티오에게 작별을 고하곤 수도원을 나와 개인 막사로 향했다.

본래는 점심나절까지 창질을 이어 갈 예정이었으나, 이게 뭐 의지로 조종해서 발사하는 형식이라면 모를까.

순전히 육체 의존적인 타입이라, 예전 목창 사냥꾼의 감을 회복하고 나니 그 뒤로는 특별한 노력 없이도 웬만해서는 명중이었다. 하여 쿨하게 조기 종료를 외친 나는 곧장 귀환해 천막 안에서 대기 중이던 최창조와 만나 정유환을 찾았다.

정유림 등이 조사단 합류에 동의했는지 확답을 듣기 위함이었다.

"저기 7번 숙소입니다."

"꽤 크네요?"

"20인용입니다. 일반 생환자들은 계열과 성별만 구분해서 단체로 숙소를 배정받은 탓에 밤에는 아주 난리도 아니죠. 코 골고 이 갈고, 어휴. 전역한 지도 10년 다 돼가는데 훈련소를 다시 온 기분이라 개인 막사인 휘윤 씨가 얼마나 부러운지."

"말만 들어도 끔찍하네요."

최창조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걷길 3분여.

다들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해 성곽으로 출근을 실시했는지 나가거나, 나가는 중이거나 하는 그사이를 가로지르며 당도한 대형 막사.

[७]

숫자보다는 그림에 가까운 문자가 새겨진 팻말에 다다르자 활짝 열린 천 자락 너머로 여러 사람의 인형이 보였다.

"포션, 있고. 연기 신호탄도, 있고. 오케이. 저는 끝났습니다. 유림이 너도― 아, 휘윤 씨!"

커다란 배낭에 짐을 꽉꽉 눌러 담다 날 발견하곤 손을 흔드는 정유환과.

"아… 안녕하세요."

그의 옆에서 팽팽하게 조여진 활시위를 당겨보던 정유림.

"오랜만입니다."

"또 보게 됐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약간씩 장비가 바뀐 송주완, 강태성으로.

셋 모두 정유환의 따라가는 쪽으로 결론이 났는지, '복수와 평안' 파티 전원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전부 하기로 한 겁니까?"

"다들 기회만 된다면 꼭 하고 싶다더군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반려될 수도 있습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겠죠. 하하! 무슨 일이건 도전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일단 한번 가보시죠!"

피식―

나는 정유환의 긍정적인 마인드에 웃으며 주억거리곤 몸을 돌렸다.

* * *

"조장님, 오셨군요."

"지금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예. 리하인 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하대하시지요."

"그게― 알겠다."

"충."

다섯 명을 이끌고 리하인의 막사로 가자 날 맞아 주는 젠슨.

어젯밤에 이야기했던 대로 존대를 고수하는 그의 태도에 어깨를 으쓱이며 안으로 들어가자 투구를 제외하곤 무장을 끝낸 분홍 머리칼의 여기사 탁자에 몇 가지 물품을 올려놓는 중이었다.

"리하인 경. 저 왔습니다."

"티그리스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 말대로군. 더 늦으면 사람을 보내려 했더니만."

"백작님께서 보고 입장권을 주셔서 말입니다."

"들었네. 뭐 괜찮은 걸로 건졌나?"

"나름 만족스러웠습니다."

"기대되는군."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내 얼굴을 보자 대련이 떠올랐는지 눈동자를 빛내는 리하인과 투기가 물씬 풍기는 담소를 주고받으며 다가가자, 그녀가 탁자 위에 있던 물건들을 내 쪽으로 쓱 밀어 보냈다.

돌돌 말린 종이 한 장과 용도를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형상 서너 개.

마지막으로.

'포션?'

〈상급 회복 물약/Rare〉

* 신성력이 상당량 가미된 물약. 복용 또는 뿌려 흡수시키는 것으로 대부분의 내·외상을 치료한다.

* 급속 상처 재생 및 10분간 자연 치유력 70% 상승

"…상급?!"

"바로 알아보는군."

무드등 만치로 선명한 빛을 뿌리는 상급 포션이었다.

"아버님께서 조사단 조장들에게 내리신 하사품일세. 조장은 상급과 중급 한 병씩, 조원들은 중급에 하급 세 병씩. 이걸 구입하느라고 수도원에 헌금을 무지막지하게 내고 오셨다더군."

"허."

나는 리하인의 얘기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귀한 걸 예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짐작도 못 했다.

안 그래도 초창기 시절 폰스 마을에서 고작 구울들 막겠다고 성역화 제물로 날려 먹었을 때 진짜 눈물이 났었는데.

"많이 기쁜가 보군. 잘 가지고 있게. 쓸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인생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핀잔 같은 농담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혹여라도 줬다 빼앗아 갈까 황급히 검대에 상·중급 포션을 욱여넣은 난, 주머니 끈을 꽉 동여매고 나서야 울컥 흥분했던 감정을 추스르며 나머지 보급품에 눈길을 주었다.

초장부터 너무나도 자극적인 걸 맛봤기 때문인지 하나하나를 살피는 동공엔 짙은 설렘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이건 지도일세. 글라디아르 근방의 지형이 세밀하게 표시된 군사 지도니 잃어버리거나 상부의 허가 없이 외부에 공개할 경우 반역 법으로 다스려질 거야. 조심하면서 외우도록."

"후딱 외우고 불태워 버리죠."

"불태울 필요까지야. 이것들은 표지석이야. 붉은색은 위험, 푸른색은 구조 요청, 초록색은 수색이 끝난 지역, 흰색은 해당 위치에서 대기, 보라색은 회군. 이해했나?"

"위험, 구조 요청, 확인 지역, 대기, 회군."

"염료를 굳혀 만든 것들이라 나무나 바위에 표식을 남기면 된다."

"예."

아쉽게도 포션 외에 대단한 건 없었다.

하기야 수도원에서도 챙기고 여기서도 한 건 챙겼으니 이 이상 꿈꾸는 건 욕심이겠지.

암.

스멀스멀 피어나던 식탐을 말끔히 떨쳐낸 나는 리하인의 교육 사항을 되새기며 정리를 마치곤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리하인 경."

"응?"

"제가 건의드렸던 건 어찌 되었습니까."

"건의? 아아, 자네가 조원들을 선발하겠다던 제안?"

"그렇습니다."

과연 엑스케트는 내 요구를 들어줬을 것인가.

긴장된 심정으로 물음표를 그린 직후.

"오라버니께서 승인하셨네. 아홉 자리까지 자네가 뽑아와도 괜찮으시다는 군."

되돌아온 대답은 예스였다.

거절당해도 별수 없다 여겼는데, 시원스런 낭보에 치켜 올라가는 입꼬리 틈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원하는 사람이 있나?"

"다섯 명입니다."

"그새 많이도 골랐군. 오라버니께서 거부했으면 어쩌려고."

"되든 안 되든 시도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옳은 말이야.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지. 설령 적이 더 길다면 부딪쳐 허리를 접어 버리면 되는 거고. 여하간 오라버니께는 내가 전해 두지. 더 충원할 계획은?"

"없습니다."

"알겠네. 하면 이따 보지. 대련부터 해야 하는데 시간 내기가 쉽지 않군."

"오늘만 날이 아니잖습니까."

"어떡해서든 자리를 만들 테니 늘 준비해 두도록."

"언제든지."

* * *

리하인과의 호기로운 대담 이후.

정유환을 위시한 4인과 최창조가 간략한 통성명과 함께 각자의 장단점을 공유하며 합을 맞춰 보길 30여 분.

슬슬 어색함을 몰아내고 적극적으로 부대껴 갈 무렵.

"충, 세르레퀴로 1조 소속 마그리트입니다. 단장님께서 부르십니다."

"가지."

"모시겠습니다."

마침내 전체 회동의 시간이 되었는지 호출 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나를 데리러 온 기사를 쫓아 엑스케트의 막사로 가니, 제 아비와 마찬가지로 최전선에 거처를 꾸린 그의 천막에 이미 수십 명이 대기 중이었다.

하나 같이 풀 플레이트 아머로 전신을 감싼 기사들.

"충! 3조 조장 오휘윤 경께서 오셨습니다."

"이쪽으로 뫼셔라."

"충."

나는 그들이 내뿜는 살벌한 기세를 몸으로 받으며 천막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확실히.

충성심이 강한 자들 위주로 꾸렸다던 리하인의 말처럼 레이피어와 할버드로 중무장한 기사들은 저와 비슷하거나 못한 내가 조장 배지를 달고 상석에 앉았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엄숙히 대기 자세를 취했다.

물론.

속내를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 표정만 봐서는 단지 추측일 뿐이었지만, 최소한 저쪽에서 불만이 나오지는 않을 듯했다. '저쪽'에서는 말이지.

"왔다, 왔어."

"생각보다 젊은데?"

"그러게요. 한 20대 중반? 아무튼, 다들 아시죠?"

"얘기합시다."

말썽꾸러기들은 따로 있었다.

"엑스케트 조사단장님. 혹시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보도록."

"저희는 저자를 조장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백작님께서 뽑으셨다고 하니 능력이 있다는 건 알겠지만, 저희도 결코 부족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니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기회라."

"허락해 주신다면 정정당당하게 조장의 자리를 두고 겨뤄 보고 싶습니다."

엑세르군의 재량으로 선택된 세 명의 조원. 그놈들이 감히 기사단도 가만히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날 제 상관으로 모실 수 없다고 선언한 탓이었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서브 퀘스트: 직급 쟁탈〉의 조건을 달성한 상태입니다.]

└현재 직급 : 세르레퀴로(serrequíro) 3조 조장

└획득 보상: Magic 1종

네기 칼리야스 대륙인이었다면 몰라도 동일한 생환자인 이상 우리는 경쟁자였으니까.

협동이 베이스로 깔려 있지만서도 남들보다 높게 올라가야만 하는 괴상한 퀘스트. 그러니 반발한다고 의아해할 거 없다.

오히려 저들처럼 적극적으로 외쳤겠지.

그렇기에 나는 도발적인 언사에도 한 점의 흔들림 없이 엑스케트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말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도전한다면 받아 주면 그만이었다.

83화

"좋다. 3조 조장이 승낙한다면 허가하도록 하지."

내 시선에 담긴 감정을 이해했는지, 잠깐의 침묵 끝에 동의하듯 끄덕이는 엑스케트.

그의 재가가 떨어지자 세 남성의 낯빛이 확연히 밝아졌다. 상관의 입장에서는 최고 사령관이 지시한 사항에 반하는 행동이었기에 재고는커녕 무시로 일관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터라 내심 불안했나 보다.

위에서 막으면 그대로 끝이니까.

고로 본인들에게 기세가 넘어왔다고 여겼는지.

"단장님께서 우리의 경쟁을 인정해 주셨네. 자네 의견은 어떤가."

싱글벙글.

따스한 햇살을 맞아 만개한 봄꽃마냥 활짝 핀 면면으로 아주 당당하게 반토막 난 혓바닥을 굴리는 셋.

'…응?'

잠깐만.

왜 세 명이지?

20대 초중반 두 명에 30대 초반 한 명으로 이루어진 반항아들을 쳐다보던 나는 문득 기이한 괴리감을 느꼈다.

3조 조원은 총 열 명.

즉.

나를 포함해 최창조, 정유환, 정유림, 송주완, 강태성을 빼면 네 개의 의자가 비어야 한다. 따라서 넷이 덤벼야 맞을진대, 어째서 숫자가 틀린 거지?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께서 승인하셨네. 아홉 자리까지 자네가 뽑아 와도 괜찮으시다는군."

리하인도 '10'이 아니라 '9'라고 했었던 거 같았다.

당시에는 내 제안이 수락되었다는 사실에 뒷말은 한 귀로 흘려보냈던 지라 그냥 넘겼는데, 이제 와 돌이켜 보니 분명 아홉 석이었다.

'뭐지?'

"…공정하게 결투로, 내 말을 전혀 안 듣고 있군. 겁이라도 먹은 건가?"

"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생각에 괴리감을 느끼던 나는 목전에서 들린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남은 한 명은 조장이 누가 되든 승복하기로 결정한 건지 아직 구하지를 못한 건지.

대문짝만한 물음표가 뇌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주위의 이목이 퍽 뜨거운 관계로 우선 이 상황을 먼저 정리해야 될 성싶었다.

"나도 굳이 피를 보고픈―"

"나가자."

"…뭐?"

"나가자고. 다들 기다리시는데 빨리빨리 해야지."

한시적으로 머리를 비운 나는 상대의 말을 끊고 무리를 이룬 셋에게 손짓했다. 꽤나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딱히 개의치 않았다.

일종의 하극상.

게다가 대충 액면가만 보고 대뜸 반말지거리를 싸재끼는 놈들인데, 나라고 예의 차릴 거 있나. 똑같이 굴면 똑같은 인간이 될 따름이지만, 나서야 할 때도 참으면 그때는 호구가 되는 게 인생이었다.

강강약약.

매번 강약약약이던 회사원 오휘윤 씨는 사라진 지 오래다.

"하. 자신감이 넘치는 친구야."

"엑스케트 단장님. 공증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지."

"감사합니다."

나는 적잖게 당황한 남자를 무시하고 심판을 맡아준다는 엑스케트에게 목례하며 천막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성큼성큼 뻗는 발걸음에 실리는 수십 쌍의 눈동자.

슬쩍 확인해 본 기사들의 얼굴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자고로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지 않던가? 더군다나 1년 365일 중 300일은 대련으로 치고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다만 광대가 될 마음은 없었거니와 잡을 때 확 잡아 놔야 기강이 서는 만큼 확고한 실력 격차를 각인시키 위해서라도 후딱 끝낼 작정이었다.

'3분.'

1인당 최대 1분.

그게 내 결심이었다.

* * *

"거기 조금만 넓혀라."

"사람들 지나가는 길은 놔두고."

"장외 선 다 그렸습니다."

엑스케트의 막사이자 조사단의 임시 회의장이기도 한 대형 천막 뒤편.

이따금씩 병사나 생환자들이 돌아다니는 공터를 수십 명의 인파가 둘러싸며 간이 경기장을 제작하는 동안.

나는 가볍게 손목을 돌리며 눈앞에 사내의 온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30대 초반에 허리에 찬 멋들어진 흑색 검, 방어구도 나름 매직 등급으로 맞춘 듯한데… 눈여겨볼 점은 장갑과 신발의 색깔이 진갈색의 상하의와 달리 퍼렇거나 까무잡잡 하다는 것.

이 말인즉슨.

세트 아이템도 구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덤빈다는 건 둘 중 하나겠지. 제 주제도 모르고 그저 욕심에 미쳐 날뛰는 머저리거나 무언가 믿는 수가 있거나.

'일단… 눈에 보이는 위험 요소는 귀걸이가 한 쌍.'

방심해서 좋을 게 전혀 없는 바.

나는 최대한 세밀하게 적을 탐구하며 환두대도의 도집 위에 왼손을 올렸다. 이런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이름 모를 도전자.

노려보는 검은 안구엔 흉흉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아까 말 좀 끊었다고 약이 바짝 올랐나 보다.

"결투의 주의 사항은 세 가지다. 첫째, 단검이 땅에 떨어지는 동시에 전투가 개시된다. 둘째, 그어진 선 밖으로 밀려나거나 항복 선언을 받을 경우 패배한 것으로 간주한다. 셋째, 상대를 죽이는 것은 금지되며 위급할 시엔 내가 간섭한다. 알겠나?"

"예."

"예."

"좋아. 셋을 세고 던지겠다."

서로 간의 관찰이 끝날 때쯤 간단하게 경기 규칙을 알리며 지체하지 않고 하늘로 칼을 던지는 엑스케트.

지지부진하게 끌 거 없단 스탠스에 양측의 전신에서 확 하고 투기가 치솟았다.

이윽고.

…휘육휘욱휘욱휘욱!

퍽!

허공을 비행하던 칼날이 대지에 틀어박힌 순간.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후욱―

"으아앗!"

빠악!

…콰앙!

전투가 끝났다.

* * *

해피 엔딩이든 새드 엔딩이든 어떤 이유에서건 기대하던 일이 싱겁게 끝났을 때 우리는 보통 '허무하다', 혹은 '허탈하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털썩―

현재의 흐름이 딱 그랬다.

"...."

"뭐지?"

"끝난 거냐?"

단 1초.

겨우 눈 한 번 깜빡하기도 전에 게임이 끝나 버렸으니까.

원인은 장외 패.

나는 도갑에 복부를 얻어맞고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힌 사내를 지켜보다 엑스케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승패를 선언해 달라는 무언의 제스처였다.

"현 조장 오휘윤 승리. 마그리트, 안델 사제에게 데려가라."

"충."

나는 깔끔하게 내려진 판정에 슬쩍 웃으며 하극상 파벌의 남은 둘에게 턱을 까딱이며 물었다.

다음은 누구냐고.

아님.

지금이라도 얌전히 머리 박고 아래로 들어올 거냐고.

스윽―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대신해 주는 엑스케트.

"오휘윤 조장, 그대로 이어서 할 수 있겠나."

"당연히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진행하지. 두 번째로는 누가 나오겠는가."

손잡이에 남은 온기가 식지도 않은 단검을 뽑아 들며 나지막하게 읊는 엑스케트. 그러나 그의 물음에 달아온 응답은 단호한 포기였다.

반격은 고사하고 반응조차 하지 못한 1번.

만약 자신들이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 고민해 보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더, 더는 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맞습니다. 저는 저분을 조장으로 인정하겠습니다."

당장은 곱게 수그리기로.

참, 깡 없는 놈들이었다.

* * *

"짧게 말하겠다. 내 이름은 엑스케트. 어제부로 세르레퀴로의 단장 역을 일임하게 됐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 악령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 이를 위해 일차적으로 3일간 외부를 떠돌며 수색에 들어갈 것이다."

강렬했다기보단 다소 밍숭맹숭하게 일단락된 사건을 뒤로 하고 본격적으로 전체 회동을 개최한 엑스케트는 긴 탁자에 군사 지도를 펼쳐 놓고 간결하게 조사단의 일정에 관해 설명했다.

개중 크게 주목할 부분은 대략 세 가지.

1. 점심 식사 이후를 기점으로 3일간 야생을 떠돈다.

2. 진형은 대체로 1조가 선두, 3조가 중앙, 2조가 후방을 맡는다.

3. 불침번은 1조가 선번, 3조가 중번, 2조가 말번을 선다.

그 외에 조사단용 표시석 색깔 구분 공식 등은 리하인을 통해 선행 학습을 해뒀기에 복습 정도로만 넘기고 대신 인물에 집중했다.

"…끝으로, 이쪽은 칼리야스 교단 폴람마 수도원 소속 수호사제 안델 쿠스트다. 3조의 일원으로 동행하며 악령의 저주를 파훼하는 데 힘 써줄 것이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델 쿠스트입니다."

내내 수수께끼 같던 비밀이 드디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아, 그런 거였나."

나는 엑스케트의 소개에 일어나 성호를 취하며 인사하는 사제를 목도하고서야 무릎을 쳤다.

저주에 대한 저항력이 제로나 다름없는 기사와 생환자들만으로 어찌 탐사에 나서려는 건지 궁금했는데.

'해서 성물이라도 챙겼나 싶었더니, 아예 사제를 데려가는 거였네.'

"악령의 저주를 방어하기 위해 상당량의 신성력을 보존해야 하는 탓에 여러분들께 많은 도움을 드리긴 어렵겠지만,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해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3조 조장은 안델의 보호에 주력하도록."

"알겠습니다."

이로써 서른한 명의 총원이 모두 채워진 조사단.

"마그리트, 보급은?"

"관저 정돈해 두었다고 합니다."

"알겠다. 취사병들에게 들라 이르라."

"충."

끝으로 보급품 현황까지 확인을 마친 엑스케트의 손짓에 천막 안으로 들어와 잘 구워진 고기와 빵을 내려놓는 병사들.

이른바 최후의 만찬이었다.

* * *

"자, 조금 전의 일은 잊고, 자기소개들 한 번씩 하죠. 전체를 다 알진 못할지언정 조원끼리는 알고 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 이름은 오휘윤입니다. 주무기로는 이 도를 쓰고, 보조 무기는 투창을 씁니다."

접시를 무대 삼아 춤추던 나이프와 포크가 화려하던 공연을 마칠 즈음.

나는 삼삼오오 각각의 소규모 집단으로 나뉜 3조 조원들을 쭉 둘러보며 딱딱하게 굳은 공기를 깨고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승복을 했든 안 했든 어쨌거나 앞으로 사지를 동행하게 될 팀원들이었다.

경쟁 심리를 공감 못 하는 것도 아닌데 협력은 못 할망정 피차 삐딱하게 굴 필요는 없지.

"다음은 제가 할까요? 하하, 저는 정유환이라고 합니다. 주 무기는 검을 쓰지요. 나름 괜찮은 스킬도 몇 개 있으니 동료로서 쓸 만할 겁니다! 하하하하!"

노련한 사업가답게 내 의도를 빠르게 눈치채며 쾌활한 목소리로 바통을 이어받는 정유환.

그리고 그의 이름값은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었다.

"저… 혹시, 청성대륙 대표님 아니십니까?"

"예, 맞습니다. 이거 저도 꽤 유명해졌나 봅니다. 연예인 분들이 이런 느낌일까요? 하하하!"

"아!"

어디 듣도 보도 못한 오휘윤이란 이름과 다르게 수백 명의 생환자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정유환의 명성은 이쪽 업계에서 특히 유명한 까닭이었다.

그 덕분일까?

"만나 뵙게 돼서 영관입니다. 조충수라고 합니다, 대표님. 제 강점은 함정을 파는 건데―"

"하하, 영광이라뇨. 다 똑같은 생환자 아니겠습니까? 정유환입니다."

"저는 김학진입니다! 특, 특기는 버프입니다! 제가 지정한 인물의 모든 능력치를 강화하는―"

서서히 풀어지는 분위기.

나보다는 정유환을 중심으로 뭉쳐지고 있기는 했으나 크게 괘념치는 않았다. 호의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뒤통수 맞을 일은 적어지는 셈이었으니까.

설마.

정유환마저 까려고 하는 놈은 없겠지.

'음… 없는 거 맞겠지?'

그래도 모르니 주의는 해 둬야겠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이니까.

84화

오후 2시경.

비라도 오려는지 거뭇거뭇한 먹구름들이 뜨겁게 내리쬐던 태양을 가려 갈 무렵.

"출발하지."

"선두 전진."

"충!"

"충!"

투구를 풀 눌러 쓴 엑스케트의 지휘 아래 3일 치 물자가 담긴 보따리의 끈이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고정한 세르레퀴로(serrequíro) 조사단이 영주 관저에 설치된 비도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메인 퀘스트: 호위〉에 투입되어 백작 가의 영애 및 30여 명의 인원을 구출하려고 죽어라 도망쳐 왔던 게 채 하루밖에 안 됐는데, 다시 여길 밟게 되다니 왠지 감회가 새롭다.

리하인과 젠슨, 카르켈도 비슷한 심정인지.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셋도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에 문득.

만약 우리가 비밀 통로를 통하지 않고, 가령 〈메인 퀘스트: 호위〉를 진행하다 리하인이 죽기라도 해서 정공법으로 성문을 통과했더라면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은 됐을까 싶은 의문이 뇌리를 스쳐갔다.

비틀린 유니버스에서도 백작이 비도를 공개하며 정상적으로 흘러갔으려나?

아님.

미개방된 채로 사라지려나?

"조장, 갑시다."

"그러죠."

불쑥 떠오른 흥미로운 상상에 턱을 문지르던 나는 정유환의 부름에 피식 웃는 것으로 잡념을 털어내며 계단을 밟았다.

- 마그리트 길을 터라.

- 예, 파이켄, 르완. 따라와라.

- 충!

- 충!

- 키에에에에에엑!!

- 크어어어어!

나를 필두로 2조와 3조가 진입하는 사이.

비도가 빚어내는 특유의 진동과 소음에 언데드 놈들이 몰려왔는지 반대편에서는 벌써 전투가 벌어진 상태였다.

물론.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어어어어억!!"

콰직―

"정리 끝났습니다."

도합 스물한 명의 기사가 포진된 조직.

2차 진화체가 떼로 덤벼든다 해도 우격다짐으로 짓밟을 수 있는 전력이었거니와 세르펜스(serpens) 내에서도 세 손가락에 드는 크라덴 헤일린이 이끄는 1조가 전위였다.

심지어.

전략 회의 당시 각종 언데드에 관한 자세한 데이터를, 직접 부딪치고 구르며 얻은 자료를 아끼지 않고 전수해 준 터라.

"확인 사살."

"확인 사살!"

"확인 사살!"

대응, 반격, 뒤처리.

뭐 하나 부족한 구석이 없었다. 그 덕에 에스코트를 받듯 편안하게 '천년목의 터'에 다다른 조사단.

"2조 전원 도착했습니다."

"3조 전원 도착했습니다."

"좋아. 지금부터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속보를 유지한다. 목표 지점은 크뤼글라디 호수."

"충!"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 부대 정렬을 마친 엑스케트는 여전히 수만 마리의 언데드들에게 둘러싸인 글라디아르를 응시하다 멈췄던 진군을 재개했다.

무어라 말은 안 했지만,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이 말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해결하고 돌아오겠노라고.

* * *

휙―

휘익―

'좌측, 에서 또 좌측.'

선봉에 선 크라덴의 수신호에 맞춰 쾌속하게 전장을 주파하는 조사단.

주변 지리에 능통한 점을 활용해 전력으로 질주하다 보니 대강 30여 분 만에 도시 근방을 완전히 벗어나 '크뤼글라디(chrȳgládĭ) 호수'가 위치한 숲에 들어서게 되었다 .

검사의 재능이 부족해 매일 밤 피눈물 흘리며 수련하는 엑세르 가문의 장자를 가엽게 여긴 정령 니수스가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물속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황금 검을 선물 함으로써 장자는 마침내 재능을 꽃피워 기사의 꿈을 달성하게 됐다는 동화 같은 전설이 있는 이곳은 내가 글라디아르에 들어가기 위해 지나왔던 길목의 반대편… 그러니까 도시의 북동부 지역에 자리한 명소였는데, 여기가 '명소(名所)'라 불리게 된 계기는 정령의 전설 외에도 호숫물을 마시는 이에게 활력을 북돋아 주는 특별한 효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마시는 이에게 활력을 북돋아 준다.]

다시 말해.

크뤼글라디 호수의 진짜 정체는, 무려 직경 수백 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생명의 샘'이었다.

아무리 좋게 쳐줘 봐야 웅덩이에 불과했던 기존의 샘터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무지막지한 크기의 이곳을 일차 행선지로 잡은 연유도 이를 고려한, 언데드 군단과 며칠을 겨루며 '생명의 샘'이 놈들을 상대로 신묘한 효험을 발휘한다는 걸 파악했기 때문.

고로 본격적인 조사 개시 전에 샘물을 수급하려는 계획이었고, 나는 그 참에 스콰를 불러내 〈서브 퀘스트: 한계 돌파〉의 할당량을 채울 요량이었는데.

석―

퍼서석―

"이게 뭐야."

막상 발을 들인 호수 일대는 생명력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문자 그대로 사지(死地)를 방불케 했다.

밟히고 만지는 초목은 살포시 비틀기만 해도 조각조각 바스라졌고, 맑고 투명했던 물은 거무튀튀한 독소 따위로 뒤덮여 끔찍한 악취를 풍기는 등 닷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자연 경관이 기껏해야 며칠 만에 손상되다 못해 철저하게 망가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모두의 눈빛에 의아함이 감돌던 찰나.

"조장님."

"음?"

느닷없이 내 어깨를 두드리는 누군가, 그는 잔뜩 굳은 표정의 안델 사제였다.

뭘까.

뭐가 그를 저리도 심각하게 만든 걸까.

흡사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목도한 듯 경직된 모습에 갸웃거리던 나는 이내 입술을 비집고 나온 한마디 문장에 덩달아 안색을 굳혔다.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서 죽음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여태껏 봐왔던 것들과는 감히 비견할 수 없는 매우 거대한―"

영 좋지 못한 비보를 듣게 된 탓이었다.

* * *

"3조장 안델 사제를 데려오라."

"충."

심상치 않은 소식에 즉각적으로 엑스케트에게 달려가 이야기를 공유하길 잠시.

뒤이어 불려 온 안델이 조사단 전체의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며 자신이 감지한 바를 재차 서술해 나갔다.

"호수 저편, 위치상으로는… 후모르 과수원이 존재하던 곳에서부터 강렬한 죽음의 기운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악령인가?"

"다릅니다. 제 감이 반드시 옳으리라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제가 보기에 다른 개체일 공산이 상당히 큽니다. 흐릿하면서도 유동적인… 안개와 같았던 악령과 달리 이것은 고정적이며 선명하니 말입니다."

"음."

엑스케트와 크라덴 등 세르레퀴로의 핵심 간부들은 안델의 묘사에 미간을 찌푸렸다.

여태껏 겪어본 언데드라고 해봐야 2차 진화체가 전부라 설명을 들어봐야 명확하게 그림이 그려지질 않았으니까.

그래서인지 한순간에 내 쪽으로 쏠리는 관심.

퀘스트를 비롯한 시스템의 보조와 손수 경험하며 쌓은 지식이 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기에, 너라면 알고 있겠지 싶은 기대감을 품은 것 같았다.

…만.

"저도 처음 듣는 형태입니다."

"그런가. 어쩔 수 없군."

고정적이면서도 선명한 무언가?

모르겠다.

몇 번이고 머릿속을 뒤져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결국 이래저래 마땅한 답변을 얻지 못해 더욱 고심이 깊어지는 가운데 크라덴이 두 갈래 길에 엑스케트를 밀어 넣었다.

"단장님. 결정을 하셔야 될 듯합니다."

안델의 감상을 믿고 악령을 찾아 떠나든지,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두고 제대로 탐색을 해보든가.

담담하게 묻는 크라덴의 말에 고뇌를 거듭하던 엑스케트의 대답은 후자였다.

"…확인해 본다."

"알겠습니다."

설령 안델의 단언대로 상이한 개체라 한들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는 쳐 죽여야 하는 대상. 최종적으로 처치 시도를 하냐 마냐는 추후에 재논의하더라도 일단 어떤 놈인지 파악 정도는 해두자는 판단 같았다.

그 단호한 결단에 흐트러졌던 전열을 가다듬는 크라덴.

"1조, 이동 준비."

"충!"

"3조도 이동 준비. 안델 사제는 나를 따라오고, 나머지는 넷씩 나뉘어 좌우 경계에 주력하며 뒤따른다."

"알겠습니다."

"충."

나도 두 사람의 움직임에 발맞춰 3조의 대형을 정비하며 길 안내를 맡아 줄 안델과 일선으로 나왔다. 앞으로 나아가는 보보마다 옅은 긴장감과 짙은 흥분이 실렸다.

신종 언데드의 출현이란, 돌려 말하면 '새로운 업적'이 나타났다는 의미였기에.

과연.

놈의 정체는 무엇일는지.

"저쪽입니다."

"출발한다."

"충!"

엑스케트의 진격 명령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과즙이 풍부해 위급 시엔 식수로도 이용되는 후모르(hūmor) 과수원을 향해 호수 변을 빙 둘러 천천히 좁혀나가는 간격.

사아아아아―

사아아아―

"…사기가 점점 진해지네."

올바르게 전진하고 있음을 알려 주기라도 하듯.

안델이 언급한 후모르 과수원에 가까워지자 묵직한 사기(死氣)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뭐랄까.

바늘 수십 개로 쿡쿡 찌르는 기분? 상당히 거슬리는 감각에 자연스레 도집으로 손이 가던 그때.

스윽―

옆에서 걷던 크라덴이 검지손가락만 편 주먹을 들어 올렸다 내리며 레이피어를 치켜세웠다.

저 동작이 뜻하는 바야 뻔했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전투 준비!"

타다다다다닷―

파아아악!

"키에에에에에엑!!"

"키에에에엑!!"

언데드의 등장.

정확하게는 영혼과 육신 전체가 죽음으로 물들어 버린 '짐승형' 언데드의 등장이었다.

* * *

오래전 본 영화 중에 '나는 전설이다'라는 명작이 있었다.

칼리야스 대륙과 마찬가지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변종 인간, 실상 좀비나 다름없는 괴물들에 의해 인류가 멸망해 버리는 스토리였는데.

그 영화에서 주목할 포인트는 감독판과 극장판의 엔딩이 다르다는 것과… 동물들도 바이러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키에에에에엑!!"

"꾸이이이이익!!"

"크르륵! 크륽!

"미친."

나는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게 도와주는 각종 짐승들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숭이, 멧돼지, 사슴, 산 새....

육식에서 초식까지, 포유류에서 벌레까지 종을 가리지 않고 한데 뭉쳐 닥쳐오는 물결을 보고 있노라면 육두문자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동시에.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지난 몇 달간 칼리야스 대륙을 수도 없이 오고 가며 좀비에서 듀라한에 이르는 수많은 언데드들을 사냥해 왔지만, 개중에 동물의 탈을 쓴 시체는 없었으니까. 이는 단순히 내게 국한된 얘기가 아니었다. 커뮤니티를 뒤져 봐도, 정유환 등과 대화를 나눠 봐도 여태껏 짐승형 언데드를 발견했다는 기록은 단연코―

"1조, 개방!"

"개방!"

"개방!"

"아."

너무나도 당혹스러운 광경에 일순 정신을 놓았던 나는 크라덴의 호통에 황급히 멘탈을 흔들렸던 멘탈을 부여잡으며 뽑아 든 환두대도를 앞세웠다.

한가롭게 잡념이나 쥐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2조! 방진! 최창조와 강태성 방패 세우고 안델 사제도 방어 위주의 마법을 펼친다! 벌레 새끼들도 있으니 발밑을 주의해!"

"예!"

"빛이 있으라."

우우우우우웅!!

서둘러 지시를 내리며 체내의 마력을 양팔과 다리로 전이시킨다.

마력이고 스킬이고 아낄 여유 따윈 없다.

"하아!"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3 연격.

타닷―

후우우욱!

꽈르르르르르릉!!

파티에 사제가 있다지만, 어디 한 쪽이라도 뚫리면 그 피해가 얼마나 클지 짐작도 안 가는 바라.

가속에 가속을 더하며 운신하기 편한 곳으로 빠져나온 직후 무식하리만치 과격하게 벼락을 쏟아냈다.

하나 노력에 비해 성과는 미비했다.

…투두두두두!

…투두두두!

"이런 망할―"

우리 목을 노리는 금수들의 파도가 계속해서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85화

사람이 아닌 생물들의 언데드화는 뜻밖에도 엄청난 난이도를 자랑했다.

대게 160cm에서 180cm 전후로 일정한 신장을 가진 인간형과 달리 크게는 3~4m에 달하는 괴수부터 채 10cm도 안 되는 곤충들이 뒤엉킨 군대는, 평균치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들쑥날쑥한 키 높이로 인해 타격 지점을 잡기가 심히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정상적인 생명체였다면야 간단히 몸통을 베고 발목을 자르는 행위만으로도 적을 무력화시킬 수 있으나, 언데드의 특성상 무조건 대가리를 박살 내야만 하는 바.

더군다나.

어떤 녀석은 공중에서 내리꽂혔고, 어떤 녀석은 지하에서 튀어나왔으며, 어떤 녀석은 물속을 유영하는 등, 안 그래도 주위 환경을 보호색 삼아 둘러쓰고 있는 주제에 종(種)에 따라 기상천외한지라 극도의 긴장으로 피로도 쌓이는 속도가 가히 초월적이었다.

게다가 생긴 건 또 좀 다양한가?

이쪽에서 긴 팔이 날아들면 저쪽에서는 가시를 세워 돌진했고, 우측에서 내뿜는 체액에 뒷걸음질을 치면 좌측에서 토해 낸 실뭉치가 발목을 붙잡으며 혼을 쏙 빼놓았다.

그러한 까닭에.

"한슨! 발밑을 봐라!"

"예?"

"…케에에엑!"

콰직―

잠깐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순간 느닷없이 솟구친 이빨과 발톱이 여지 없이 살갗을 찢어발긴다. 이는 백전불패의 노련한 기사들이라도 쉽사리 당해 내지 못했다.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방식인 탓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크에에에엑, 크엑!"

카각―

카가가각―

"한슨!"

"저는 괜찮습니다!"

"이 새끼야! 사람 놀래키지 말라고!"

"죄송합니다!"

"파이켄! 옆을 막아라!"

"충!"

기사들의 복장이 풀 플레이트 아머(Full plate armor)로 보호되고 있다는 대목이었다.

보통 전신 갑옷이라고 하면 어마무시하게 두껍고 무거운 쇳덩이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상은 두께가 1cm도 되지 않는 얇은 철판에 불과해 무슨 절대 방어를 기대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강철은 강철이었다.

놈들이 가한 충격에 패이고 찌그러질지언정 어지간한 공세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으며.

우우우우우웅―

"칼리야스의 빛이 어둠을 몰아내리라!"

화아아아악!

결정적으로 우리에겐 '사제(priest)'가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탁상공론이나 할 줄 아는 문관이 아니라, 실제 전장에 나가 칼을 쥐고 싸우는 잘 훈련된 수호사제가.

화르르르륵!

화르르륵!

안델 쿠스트.

그의 양 팔에서 뻗어 나온 신성력은 진정 신(神)의 힘(力)이 가진 위력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신성 마법 '정화하는 빛'이 당신의 육체를 치유합니다.]

[모든 해로운 효과가 소멸합니다.]

"와우."

적아를 구분 짓지 않고 온갖 삿된 것들을 말끔히 박멸시켜 버리는 새하얀 빛줄기.

신성력은 곧 언데드의 천적이다.

포션으로 이미 증명했듯이 여러 게임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그 불변의 이론은 여기 칼리야스 대륙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그게 참 신기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대륙 전체를 죽음으로 물들여 버린 이 검은 파도의 정체는 무엇이며 또 목적은 무엇인가. 모른다…(후략)]

대륙 각지의 영물과 마수 등이 판타지 하면 흔히 따라붙는 '몬스터(Monster)'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처럼 〈서브 퀘스트: 소집령〉에도 기술되어 있듯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평민들이야 제하더라도 소위 지식 계층이라 불리는 귀족은 물론 수도원까지도 언데드에 대해 무지했기에… 솔직히 사제와 언데드의 상관관계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 한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한데.

이리도 찬란하게 빛날 줄이야.

파사의 공능을 지닌 이그니스(ignis) 류(流)도 분명 대단했지만.

"저건 그냥 비교 불가네."

인정해야 했다.

그가 가진 검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날카롭다는 걸.

단지 문제는 예서 신성력을 마구 낭비했다가는 자칫 '저주의 목소리'를 막아 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부분들을 의식했는지.

"전속 퇴각한다! 1차 집결지로 물러난다!"

엑스케트의 입에서 회군을 알리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안델의 컨디션 관리 및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이 이상 돌파하는 건 위험하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철수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신성 마법 '정화하는 빛'의 여파로 언데드 놈들이 다가오지 못하는 틈을 노려 2조와 3조가 일차적으로 발을 뺐고, 최전방에 있던 1조 역시 가진 마력을 탈탈 털어 뒤늦게 쫓아오는 적들을 저지하려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으나… 붉은 마력이 넘실거리는 레이피어와 할버드를 휘두를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키에에에엑!"

"키에에엑!"

턱―

터덕―

"따라오는 것들은 1조가… 음?"

"뭐지?"

"다, 단장님! 놈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인간 냄새를 맡으면 설사 지옥 불구덩이라도 쫓아오는 일반적인 언데드들과 다르게 후모르 과수원 지대를 벗어나자마자 한 마리도 빠짐없이 돌연 '브레이크'를 밟았으니까.

마치 투명한 벽에 전면이 가로막힌 듯.

보이지 않는 선을 기점으로 우뚝 정지해서는 우리가 달아나든 말든 그저 우두커니 서서 주시하다 아예 몸을 홱 돌려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놈들. 그 기이한 현상에 혹 신성 마법이 지닌 추가적인 효능인가 싶기도 했으나, 안델이 고개를 젓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고정적이고도 선명한 무언가'가 원인인 거 같았다.

하면.

답은 하나.

"제어를, 받고 있다는 건데."

거참.

짐승형 언데드를 만들어 내는 걸로도 모자라 중앙 관리 시스템이라니. 이놈 진정 알면 알수록 여러모로 기괴한 타입이었다.

* * *

"…오휘윤 조장님, 안델 사제님. 단장님께서 부르십니다."

"가지."

"충."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크뤼글라디(chrȳgládĭ) 호수 초입 부근에서도 사면이 탁 트인 개활지까지 빠져나온 단원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각 조의 조장과 안델을 호출하는 엑스케트.

그의 부름에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간부진이 모인 임시 회의장으로 향하자 먼저 와서 기다리던 리하인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이쪽으로 앉아."

"예."

탁자도 의자도 없이 널찍한 바윗덩어리 위에 지도를 올려놓은 조촐한 공간. 엑스케트가 우리를 소집한 원인이야 단순했다.

뭐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

아직 그는 '고정적이고도 선명한 무언가'를 포기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유격전이 어떨까 합니다."

엑스케트의 질문에 이미 생각해 둔 공략법이 있는지 지체하지 않고 대안을 내놓는 크라덴. 그의 떠올린 전략은 치고 빠지기.

일명 게릴라전이었다.

"다들 보았듯이 놈들은 일정한 영역 바깥으로는 나오지 않은 듯, 혹은 못 하는 듯합니다. 정확한 범위와 상황별 반응을 연구해 봐야겠지만… 숫자가 무한하지는 않을 터이니 차근차근 머릿수를 줄여나가는 것이 최선이라 사료 됩니다."

"음."

크라덴의 제안은 현시점에서 낼 수 있는 최선의, 딱히 흠잡을 데 없는 정공법이었다. 나와 리하인의 견해도 대동소이했고. 안델은 일종의 객장(客將) 신분이라 상관의 선택을 따라가겠다는 의향을 피력했다.

해서 별다른 반발 없이 토론을 마무리 지으려던 직후.

휘익―

"저기."

"음?"

"응?"

회의에서 채택된 사항을 조원들에게 알려 주려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며 일어나던 네 사람을 내가 잡아 세웠다.

유격전이고 회전이고 다 좋은데.

"그 전에, 이것부터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오후 5시경.

정말로 한바탕 쏟아지려는지 선홍빛 노을 사이사이로 점점 더 진한 암운이 드리워지는 시각.

전투를 치르며 소모했던 체력과 마력을 대부분 회복한 서른한 명의 남녀가 다시금 전장에 발을 들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장이라기보단 '전장 바로 앞'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 짐승형 언데드들이 추격을 멈췄던 지점에서 대략 50m 남짓 떨어진 곳에 길게 늘어서서는....

후우우욱―

콰직!

"읏, 차!"

"판 모래는 앞쪽에 버려라."

"알겠습니다."

뭉툭한 나뭇가지로 논두렁에 수로를 이어 주듯 너비 2m에 깊이 50cm쯤 되는 '일자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칼을 휘둘러 땀을 흘려야 할 인재들이 왜 이러는 것인가.

"연결합니다!"

"연결!"

퍼억―

쏴아아아아아!!

"연결 완료!"

"조장님, 완료했습니다."

"좋아. 던져."

"충!"

겹겹이 쌓여 가는 의문 속에서 조원들이 내 지휘에 따라 물길 바깥, 즉 후모르 과수원 쪽으로 검은 액체를 들이부었다.

코끝에 묘한 중독감을 선사하는 향기를 가진 이것의 정체는.

"이거 기름이었어?"

"그러네. 기름 냄새 엄청나네."

띵―

휘이이익!

"슬슬 물러서십쇼."

태산조차 집어삼키는 검붉은 재앙, 그 이름하여 '화마(火魔)'를 소환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제물.

…화르르르르륵!!

휘발유(揮發油)였다.

* * *

뜨겁다.

"굉장하군."

엑스케트의 말처럼.

지포라이터와 휘발유의 조합은 코앞에 호수라는 지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근 전체를 이글거리는 아지랑이로 휘감을 만큼 강력했다. 고작 1L도 안 되는 기름으로 이토록 거센 화력을 창조해 낼 수 있었던 비결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방을 에워싼 지독한 사기(死氣)의 공이 컸다.

생기를 잃어 말라비틀어진 초목이 잘 건조된 장작 역할을 해준 것이다.

덕분에.

큰 힘 들이지 않고도 자그맣던 불꽃은 순식간에 산불이 되었고, 매서운 스피드를 자랑하며 부지불식간에 세상을 먹어 치워나갔다.

"잘 탄다."

난 아주 활활 타오르는 새빨간 청소기를 구경하며 예상을 뛰어넘는 성능에 진한 탄성을 내질렀다.

불쏘시개가 넘쳐나서 그런지.

이대로만 간다면 바라는 대로 짐승형 언데드들의 천연 방패가 되어 주는 '자연'을 일거에 소탕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으니까.

[작전명: 보호색 없애기]

이게 내가 전쟁에 앞서 불을 지르게 된 이유였다.

"이걸로 한결 편해지겠군."

"저 선을 기준으로 차근차근하게 잿더미를 쓸어 버리며 전진한다면 적어도 아까보다는 사각을 잡히는 일이 줄어들 겁니다."

"자네의 공로는 잊지 않겠다."

"별말씀을. 해야 할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고 날씨가 꾸물꾸물한 걸 보니 곧 비가 올 듯합니다. 소나기가 내리고 나면 불길이 사그라들 테니 그때를 노려 진입하시죠."

"기상학에도 조예가 있나?"

"대단한 기술은 아니고, 비 냄새를 잘 맡습니다."

"비 냄새?"

"비가 오기 전에만 나는 특유의 향이 있습니다. 저 하늘의 먹구름도 먹구름이지만, 아까부터 비 냄새가 풀풀 나고 있는 게 이르면 저녁, 늦어도 자정에는 뭐든 내릴 겁니다."

"천막을 쳐야겠군."

타닥타닥 기세 좋게 날뛰는 화마를 관망하며 의견을 교환한 엑스케트는 잠정 휴식을 선언하곤 보급 물자를 감싸고 있는 총 세 겹의 보자기 중 외피를 풀어 막사를 세우도록 지시했다.

새벽이슬이나 예견하지 못한 악천후에도 거뜬하게끔 방수 처리가 된 천이었기에 금세 튼튼한 천막을 완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툭―

투두둑―

"비 온다."

"얼마나 오려나."

"자, 경계조. 눈 똑바로 뜹시다."

예측했던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 방울, 두 방울… 그러다 삽시간에 폭우로 발전해 천지를 적시는 빗줄기. 시간이 지날수록 후끈해졌던 열기가 점차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ASMR처럼 귓가를 간질이던 빗발은 새벽 동이 틀 즈음 서서히 자취를 감췄고, 아침을 맞이했을 땐 맑게 갠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덤으로.

"휑 하군."

"깔끔하게 지워졌군요. 이 전쟁이 끝나더라도 당분간은 허허벌판이겠습니다."

밤사이 황량해진 경관도.

"니수스가 봤다면 울고불고 난리를 쳤겠어."

엑스케트를 포함해 엑세르 백작령 인사들은 가문과 관련된 앙상해진 풍경이 썩 달갑지 않은지 인상을 찡그렸으나, 정작 방화범인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곳곳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저들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구는 아니니까.

"너무 T발놈 같은가?"

됐고.

집중이나 하자.

이제부터가 진짜다. 최소 2차 진화체, 최대 3차 진화체로 추정되는 '고정적이고도 선명한 무언가'에게로 향하는 길이 뚫렸으니 상황이 잘 풀린다면 금일 안에 놈의 실체를 마주하게 될 터.

따라서 방심은 금물이었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든,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든.

'정신 똑띠 챙겨라, 오휘윤.'

나는 눈을 부릅뜨며 호흡을 크게 들이마셨다.

86화

"출발한다."

"1조 앞으로!"

"1조 앞으로!"

과격한 활동을 대비해 육포와 말린 과일이 들어간 빵 조각으로 간단히 식사를 마친 후 재개된 조사단 활동.

엑스케트의 중후한 호령을 신호로 만반의 무장을 갖춘 스물한 명의 기사와 한 명의 사제, 아홉 명의 생환자들이 수북하게 쌓인 잿더미 위로 발을 내디뎠다.

누군가는 사명감을, 누군가는 처절하게 부서진 자연을 되살리고픈 정화의 의지를, 누군가는 생에 대한 갈망과 최초 업적 달성이라는 욕망을 내비치며 나아가는 길.

불바다가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탓인가.

"경계를 늦추지 마라."

"잿더미 아래를 잘 살피도록."

엑스케트와 크라덴이 번갈아 가며 주의를 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따금씩 두 사람의 경고가 언급되어야 할 만큼 사위가 조용했다.

꼭 종전을 맞은 전쟁터를 거니는 기분.

죄다 쓸려 나가기라도 한 건가? 설마 불장난 한 번에 이렇게까지 사달이 날 줄이야.

"이거 비가 안 왔으면 여태 불타고 있었겠는데."

"그러게요. 괜히 건조주의보에 산불 조심하라는 게 아닌가 봅니다."

재수가 좋으면 일반 좀비들은 싹 섬멸됐으리라.

정유환과 그런 담소를 나누던 그때.

…척!

최선두에서 길을 트던 기사 하나가 다급히 주먹을 들며 진군에 제동을 걸었다.

이에 주르륵 쏠리는 시선.

검지손가락을 펴지 않았으니 적군의 출현은 아닌데 뭘까. 궁금증이 증폭되던 차에 기사와 무어라 말을 주고받은 엑스케트가 어딘가를 잠시 바라보다 곧 나와 안델을 불렀다.

이윽고.

"부르셨습니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불렀다. 우선 저길 보도록."

우리가 곁으로 다가오자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키는 엑스케트.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팔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리던 나는 반쯤 타다 만 나무들 너머로 슬쩍 드러난 뭔가를 발견하곤 그대로 소리 없는 경악을 내뱉었다.

"...!"

저기 멀리.

고정적이면서도 선명한 것.

안델의 얘기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창공의 구름을 뚫고 우뚝 솟아 있는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전체적으로 검은 빛깔에 흡사 수십, 수백 개의 팔들이 한데 얽히고설키며 무척이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첨탑―

"…제단?"

아니.

낯설고도 익숙한 '제단'이 곧게 서 있었다.

* * *

제단(祭壇).

내가 그것과 처음 대면했던 시기는 바야흐로 〈튜토리얼: 생존 일지 (6)〉의 중반부를 진행하는 와중이었다.

[좀비 '50' 마리를 처치했습니다.]

[보상으로 '여섯 가지 비밀이 담긴 쪽지'가 주어집니다.]

'탈출'을 메인으로 하는 퀘스트에서 장애물로 등장하는 99마리의 좀비들 중 50마리를 사냥하면 주어지는 '여섯 가지 비밀이 담긴 쪽지'.

〈여섯 가지 비밀이 담긴 쪽지/Normal〉

* '튜토리얼: 생존 일지' 곳곳에 감춰져 있던 여섯 가지 비밀을 적어 놓은 쪽지다.

* 첫 번째 비밀: 최초의 공터에서 북동 방향으로 직진하면 '샘지기: 저돌적인 멧돼지'를 만날 수 있다.

* 두 번째 비밀: 최초의 공터에서 북서 방향으로 직진하면 '샘지기: 날카로운 독수리'를 만날 수 있다.

* 세 번째 비밀: 최초의 공터에서 남쪽 방향으로 직진하면 '샘지기: 집요한 뱀'을 만날 수 있다.

* 네 번째 비밀: '무기 임의 선택권'에서 선택한 무기를 통해 조우하는 샘지기가 달라진다.

* 다섯 번째 비밀: '여섯 가지 비밀이 담긴 쪽지'를 찢는 것으로 숨겨진 장소 및 샘지기들의 위치를 얻을 수 있다.

* 여섯 번째 비밀: 99마리의 좀비를 모두 해치울 시 '???'가 등장한다.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만 활성화시킬 수 있는 히든 트리거들과 희귀한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는 이 쪽지를 쥐고 최초 소환 장소였던 공터 중앙에 입성하면 자동으로 개방되는 지하 계단.

[조건이 충족된 상태입니다.]

[달성 조건: 여섯 가지 비밀이 담긴 쪽지 습득]

[가려져 있던 입구가 개방됩니다.]

이러한 메시지들과 함께 한 발, 두 발 내려가다 보면 볼 수 있는 것이 '질주하는 말의 영혼석'을 품은 채 내가 방문하기만을 고대하던 제단이었다.

그날을 결코 잊지 못한다.

칼리야스 대륙에 끌려온 첫날이기도 했지만, 이모저모 다 떠나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까닭이었다.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포기하라.]

영혼석을 확인하곤 기뻐하던 나를 당황케 한 현판의 문구를 기점으로.

[봉인석이 소실되어 제단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제단이 활성됨에 따라 영향권 내의 '생명의 샘'이 지니고 있던 영기를 잃습니다.]

무려 세 곳이나 되는 '생명의 샘'이 단숨에 망가져 버렸으니까.

한창 일부러 물리고 치료하기를 반복하는 무한 포션전으로 좀비들을 때려잡고 있었던 내게는 몹시 치명적인.

"…잠시만, 생명의 샘?"

과거의 것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거대한 제단을 멍하니 응시하며 예전 기억을 더듬어 가다 나는 불현듯 좌측으로 고개를 꺾었다.

그곳에는 제 빛을 잃고 혼탁해질 대로 혼탁해진 크뤼글라디 호수가 있었다.

"아아."

머릿속을 떠돌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 * *

"3조 조장 오휘윤."

"예."

"저것이 무엇인지 아는 모양이군."

"반은 알고, 반은 모릅니다."

"반만 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반은커녕 극히 미비한 수준입니다."

"그래도 설명해 보게."

깨달음 혹은 개안(開眼).

겨우 첫 삽을 뗀 정도에 불과하지만, 나는 눈앞에 놓인 자료들을 종합해 알아낸 자료를 되도록 쉽게 설명해 주었다.

"일단 저 건축물은 소위 제단이라고 불립니다."

"제단…이라."

"어째서 그와 같은 명칭이 붙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저것이 어떤 의도로 설치되었는가겠죠. 대강 짐작하셨다시피 제단이 가진 최악의 기능은 주변에 존재하는 생명의 샘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역시 그랬나."

"그 범위가 얼마나 되는지, 크기가 커질수록 넓어지는 형식인지는 모릅니다. 단지 제가 보았던 성인 남자 키만 한 제단의 경우 저 호수의 두세 배가량 되는 땅의 영기를 봉인했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고려한다면 도시의 첨탑과 비슷한 높이의 저것은 못 해도 열 배 이상은 되겠지요."

내 담담한 마침표에 착 가라앉는 장내의 공기.

기사들이나 안델은 당연하거니와 '생명의 샘'에 더욱 밀접한 영향을 받는 생환자들마저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 와중에 하나 재밌는 점은 3조 조원들 중에 제단에 관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생존주의자였던 정유림과 최창조는 제하더라도 몇몇은 S 랭크를 받아 본 이력도 있는 자들인데, 기껏해야 좀비 50마리를 사냥 못 하고 도망치다니. 꽤나 희한한 일이었다.

음.

제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을 참아가면서 악착같이 칼질을 했던 내가 특별한 거려나? 하기야 돌이켜 봐도 그때의 나는 악에 받칠 대로 받쳐 정상적인 레벨은 아니었지. 그 뒤로도 죽음 직전까지 내몰리면서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 매번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외치며 죽음을 불사하는 면모를 보였을 지경이니.

그나저나.

과거를 되집어 가다 보니 문득 제단이 지닌 능력 중에는 '강화'도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추측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강화?"

"예."

"자세히 말해 보게."

"이틀 전 저녁, 2조 조장이신 리하인 경과 글라디아르에 입성하려 천년목의 터에 들렸을 당시 저희는 성문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덕을 채 절반도 오르기 전에 듀라한 놈들에게 발각당해 공격을 받게 됐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절대 감지될 법한 거리가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흐음."

참 공교롭게도 하필이면 제단이 설치된 지역에서 기존의 능력치를 아득히 초월한 특이 개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뭐 여기까지도 악령의 영향력일 확률 또한 무시 못 하지만, 그 반대일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지.

만약 후자라면.

"이쪽을 먼저 처리해야 되겠군."

"그래야 할 거 같습니다."

엑스케트와 크라덴의 대화처럼 오히려 악령의 정체를 파악하기보다 제단 공략이 선행돼야 했다.

가정이 맞다면 작금의 악령도 강화되었다는 뜻인 터라, 그걸 알면서도 굳이 수색을 감행한다는 건 향후 주사단의 피해를 가중시킬 수도 있는 판단이었으니까.

고로.

"예서 끝장을 본다."

엑스케트는 고민의 끄트머리에서 제단으로의 진격을, 제단의 파괴를 공표했다. 그편이 조사단에게도 도시 측에도 도움이 되리라 결론지은 것 같았다.

상당히 기꺼운 이야기였다.

몰랐다면 모를까.

신종 개체를 확인하고도 그냥 지나쳤다면 내가 놓친 걸 남이 채 가지는 않을까 걱정과 불안으로 밤새 잠 못 이뤘으리라.

어쨌거나 나를 비롯해 3조는 안정적으로 공적치 수급이 가능한 성을 버리면서까지 리스크를 짊어지고 바깥을 싸돌아다니는 처지라 이런 데에서 리턴 값을 획득하지 못하면 외부로 나온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제단 같은 추가 이벤트가 있었으니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을 구현해 둔 거겠지만 말이다.

"1조, 앞으로. 2조는 절반으로 나눠 리하인과 젠슨이 좌우를 맡고 3조는 중앙에서 지원을 한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니 3조 조장과 안델 사제는 1조와 같이 움직이도록."

"충!"

"충!!"

* * *

추형진(錐形陣).

전방이 뾰족한 삼각형 형태의 공격적인 태세로 전진할수록 명확해지는 흉물스러운 형상에 맞춰 재차 강렬해지는 사기.

아니.

사아아아아아!!

"음!'

거리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인가 여태껏 느껴왔던 레벨을 훌쩍 뛰어넘는 압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더불어.

찌릿―

찌릿―

초고온의 화염을 버티지 못하고 궤멸된 줄 알았던 짐승형 언데드들의 살기도 슬금슬금 욕감을 자극한다.

전투가 벌어진 건 그와 동시였다.

티디디딧!

퍼억!

"…키에에에엑!"

"…케에엑!"

검게 그을린 나무 뒤, 잿가루로 가려진 모래 밑, 먹을 푼 듯 검게 물든 수면 등 어제와 마찬가지로 온갖 군데에서 출몰하는 놈들.

다만.

"안델!"

우리는 어제와 달랐다.

"칼리야스의 빛이 어둠을 몰아내리라!"

우우우우웅―

화아아악!

가슴께에서 합장했던 양손을 전면으로 펼치며 뻗어내는 백염(白炎).

이 타이밍만을 노리고 미리 신성력을 모아두었던 안델의 일격은 달려들던 모든 것을 불태우며 일직선으로 길을 터줬고, 그 속에서 우린 침착하게 걸음을 옮겼다.

본디 이번 전투의 핵심은 유격전.

백색 광휘가 잠잠해질 즈음엔 나머지 서른 명이 나서서 순차적으로 마력을 발산해 냈고, 서른한 번째 턴에서 다시 안델의 성화가 불을 뿜었다. 때에 따라서는 뒤로 물러나기도 하며 최대한 안전하게 일보, 일보를 좁혀 간다.

그러한 방식으로 약 1km 가까이 되는 간극을 점령한 끝에.

"아."

"저것이, 제단."

"으음."

마침내 우리는 족히 15m에 다다르는, 대강 아파트 6~7층 높이의―

"저게 뭐야...."

"시체, 덩어리?"

"우읍!"

인간과 짐승.

종(種)을 가리지 않는 수백 구의 사체가 어거지로 뭉쳐 쌓아 올린 제단과 대면할 수 있었다.

[썩은 것들로 빚어낸 탑, '역행의 제단'의 영역에 들어섰습니다.]

[지속적으로 체력 및 마력이 소실됩니다.]

[체력을 전부 상실한 대상은 그 즉시 '종족_언데드(Undead): 좀비(Zombie)'로 전환됩니다.]

['역행의 제단'이 흡수한 체력 및 마력은 영역 내에 존재하는 모든 언데드(Undaed)의 능력치로 전환됩니다.]

87화

오염된 물이나 땅 따위가 저절로 깨끗해지는 현상을 자정 작용(自淨作用)이라고 부른다.

역행의 제단.

비로소 진명이 공개된 이놈의 역할은 자정 작용과 180도 배치되는 역순환의 포지션이었다.

[썩은 것들로 빚어낸 탑, '역행의 제단'의 영역에 들어섰습니다.]

[지속적으로 체력 및 마력이 소실됩니다.]

천지 만물이 지닌 생기(生氣)를 빼앗으려 세워진 블랙홀이자.

[체력을 전부 소실한 대상은 그 즉시 '종족_언데드(Undead): 좀비(Zombie)'로 전환됩니다.]

['역행의 제단'이 흡수한 체력 및 마력은 영역 내에 존재하는 모든 언데드(Undaed)의 능력치로 전환됩니다.]

예상했던 것처럼 언데드 군단의 능력을 반영구적으로 뻥튀기 시켜주는 화이트홀.

더군다나.

[현재 단계: 3]

'…3등급?'

이게 끝이 아니다.

현재 단계라는 말은 그러니까 다음 단계, 다다음 단계도 준비되어 있다는 뜻이자, 저걸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이후에 또 어떤 괴상망측한 옵션이 추가될지 모른다는 소리.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쿠우웅!

"음!"

작심을 하던 참에 거대한 땅울림이 근방을 뒤흔들었다.

콰아앙!

콰앙!

"팔이!"

"조심해!"

느닷없이 벌어진 재해의 실체는 제단을 구상하고 있던 수십 개의 팔이 일으킨 인공 지진이었다.

각종 살점과 뼛조각 따위가 뒤섞인 3~4m 크기의 덩어리들은 마치 거인의 육탄 공세마냥 손바닥과 주먹으로 온 천지를 죄 부수고 있었다.

후우우우욱―

쿠우웅!

쿠구구구궁!!

"미친!"

부피와 위력은 비례한다 했던가.

고작 썩어 빠진 피륙일 뿐이었으나, 인간 한 명쯤은 가볍게 웃도는 중량은 가히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자랑했다.

아마도.

사아아아아아―

팔 전체를 휘감은 붉은 기류, 듀라한의 두퇴(頭槌)가 그러했듯 사기(死氣)의 효력의 힘인 거 같았다.

그 탓에 피하는 것도 피하는 것이지만.

"비켜라!"

후우우우욱―

카아앙!

막고 튕겨 내는 것 또한 녹록지 않았다.

세르펜스 기사단이 대단한 실력자들인 건 맞지만, 하나하나가 듀라한 대여섯 마리의 철퇴질과 맞먹는 괴력이었다.

"어딜!"

후우욱―

촤좌좌좌좌작!

그나마 엑스케트의 레이피어는 저 얇은 검신으로도 수월하게 구멍을 꿰뚫고 상처를 새기는 증이었으나, 크라덴을 제외하면 그의 무위를 따라 할 수 있는 인원은 두셋에 지나지 않은 데다가 실상 칼질을 성공해도 달라지는 부분은 딱히 없었다.

젠슨이나 카르켈이 사용하는, 적장의 두개골을 투구째로 박살 낼 용도로 제작되었다는 기원을 가진 할버드라면 두껍든 뭐든 단박에 잘라 버렸겠지만… 레이피어는 전설의 보검을 가져와도 결국 레이피어.

구멍을 몇 번이고 뚫어봐야 움직이는 데엔 전혀 곤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최악의 상성.

절삭력이 아닌 관통력에 치우친 무기로는 한계가 명백했다.

게다가.

"…키에에에엑!"

"…꾸이이이익!"

"좌우 적 출현! 숫자는 대략 오백 이상!"

"후방! 후방에서도 적 출현!"

"안델!"

"칼리야스의 빛이 어둠을 몰아내리라!"

이 전장에는 아직 짐승형 언데드들이 남아 있었다.

똥개도 제 집 앞마당에서는 먹고 들어간다더니, 놈들은 신성 마법이 발현됐음에도 일절 개의치 않고 오직 중심에 선 안델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비록 이성은 마비되었을지언정 이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려거든 자신들의 천적부터 처리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한 듯했다.

"젠장."

그러한 연유로 전황은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나 다름없었다.

이거 새로운 업적 좀 달성해 보려고 했더니만, 역시 이번에도 쉽게 가기는 그른 듯싶었다. 뭐, 이러면 어쩔 수 없지.

"단장님!"

나도 수단과 방법을 모조리 동원하리라.

실력과 인맥.

"투척!"

재력으로.

…뽕!

촤아아아아아악―

* * *

비가 내린다.

새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빗방울이 삽시간에 사나운 소나기가 되어 세상을 뒤덮는다.

그 직후.

"케에에엑!"

"끼아아아아아!!"

도처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짐승형 언데드 놈들의 머리 위로 물줄기가 빗발칠 때면, 피부부터 뼈에 이르기까지 한 줌 묵수(墨水)가 되어 녹아 버렸으니까.

['중급 회복 물약'을 사용합니다.]

['하급 회복 물약'을 사용합니다.]

[급속 상처 회복 및 5분간 자연 치유력이 50% 상승합니다.]

[급속 상처 회복 및 3분간―]

무려 서른 병에 달하는 포션 세례로 인해.

그래.

이것은 진정 만악을 불사르는 '세례'였다.

물을 좀 타서 농도는 좀 부족할지라도 좀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설사 구울이라고 한들 단 1초도 버티지 못할 성스러운 의식.

"이야."

한꺼번에 서른 병을 넘게 던져 그려낸 장관은 그 정도로 걸작이었고,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되는 과정은 숫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물론 이런다고 사정이 나아지느냐 하면 그건 또 확답하기 힘들었다.

크뤼글라디 호수는 수만 마리의 짐승과 벌레들이 서식하는 동물의 왕국. 몇백 단위의 언데드들이 괴멸됨으로써 당장은 한숨을 돌리겠지만, 냉철하게 평가한다면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수치였다.

그러므로 예서 주구장창 포션을 소모할 마음이 없다면 가야 했다.

저놈의 제단을 붕괴시키러.

누가?

"단장님! 크라덴 경! 시선을 끌어 주십시오!"

내가.

중급 한 병에 하급도 몇 병 까 던졌으니 깽값은 챙겨야지. 더욱이 여태 그 누구도 거머쥐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업이었다. 정유환 등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걸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는 일.

"가장 강력한 일격으로 저것의 시야를 가려 주시면 제가 틈을 엿보겠습니다!"

이 보물 제가 먹겠습니다.

"정유환 씨!"

"예! 예? 저요?"

"잠시 3조 지휘권을 양도하겠습니다! 엑스케트 단장의 공격에 맞춰 자신이 가진 기술을 싹 다 쏟아부으세요!"

"아, 알겠습니다!"

나는 엑스케트와 크라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3조 조원들을 정유환에게 맡기며 우측으로 몸을 뺐다. 다분히 무례한 월권행위였으나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엑스케트는 내 선택에 호응해 주리라는 걸.

실제로.

"크라덴! 준비해라! 1조 지휘는 마그리트가 맡는다."

"충!"

그는 나라면 뭔가 좋은 수라도 있을 거라 여겼는지 반문은커녕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 호응하려 일시적으로 인선까지 비트는 과감함을 보여주었다.

나라면 뭐라도 해낼 거라 여긴 걸까?

속내야 알 수 없지만,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으니 이쪽도 화답해 줘야지.

"셋을 세겠다!"

"알겠습니다!"

"크라덴! 좌측으로 가라!"

"충!"

고오오오오오오―

내 다짐이 가슴에 새겨지기 무섭게 휘몰아치는 마력.

각기 양 사이트로 흩어진 엑스케트와 크라덴의 레이피어에서 제단의 붉은 기류와 비견 될 만큼 시뻘건 기운이 용솟음치며 하나의 작품을 빚어내고 있었다.

대엑세르(exér) 백작가를 대표하는 기사들의 진심 어린 칼날의 끄트머리에서 탄생한 그것은 내게도 나름 친숙한… 천 년의 기다림에도 끝끝내 승천하지 못한 분노로 점철된 이무기였다.

"지금이다!"

"하아!!"

후우욱―

끼에에에엑!!

끼에엑!

"우리도 갑시다!"

확실히.

가문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임을 증명하듯 형상을 구현하는 데 그쳤던 리하인과 달리 포효까지 내지르는 두 마리의 이무기가 발출되자마자 서둘러 돌격을 명령하는 정유환.

양손에 쥔 포션으로 무너져 가던 장벽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며 달려가는 그의 옆으로 3조 조원들이 따라붙는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웅―

저마다 꼭꼭 숨겨 두었던 비기를 꺼내 들었는지 각자의 장비에 깃든 마력과 신성력의 일렁거림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그 무지막지한 폭풍 속에서 환두대도를 가슴께로 끌어 올리며 살포시 무릎을 굽혔다.

그렇게.

엑스케트를 위시한 11인의 공격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제단과 부딪쳐 주는 순간.

쿠웅―

콰과과과과광!!

'가자!'

나도 걸음을 떼었다.

인간과 언데드.

양측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발산하는 무지막지한 소음과 진동에 나의 존재감이 완벽히 묻혀버리는 찰나였다.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스윽―

후우욱!

* * *

역행의 제단은 여러모로 특이하다.

아무리 봐도 생긴 건 무생물인 주제에 팔을 휘두르질 않나, 언데드 군단의 지휘관으로 불리는 듀라한처럼 영혼이 종속된 짐승형 언데드들을 통솔해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질 않나.

어느 쪽으로든 평범한 레벨은 아득히 초월한 놈이었다.

그래서 생각을 좀 해봤다.

특징이나 고유 능력이야 어찌 되었건, 다른 건 다 차치하고서 과연 이 괴생명체의 약점은 어디일지.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선 타입.

만일 일반적인 생명체 판정을 받는 개체라면 응당 대가리를 노려야 할 텐데, 건물에 대가리가 있을 리 만무하다. 하면 아예 무생물로 확정 짓고 기둥뿌리까지 뽑아버리는 식으로 완파시켜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곰곰이 정답을 간구하던 나는 돌연 옛날을 떠올렸다.

정확하게는.

투둑―

콰직!

['질주하는 말의 영혼석'을 획득했습니다.]

[봉인석이 소실되어 제단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제단 상층부에 박혀 있던 영혼석을 빼내던 시점을.

하필이면 중단도, 하단도 아닌 구태여 '최상층 중심부'에 영혼석이 끼워져 있었는가. 난 이게 분명 일종의 히든 피스라고 확신했다.

옛말에 이르길 모든 일에는 다 그 이유가 있다지 않던가.

그게.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탁―

'읏, 차!'

파아아아앙!

제단을 등반하게 된 근거였다.

나는 스스로 내린 결론을 기반으로 대지를 박차며 공중으로 도약했다.

마력을 발바닥으로 보내 거미처럼 벽에 착 달라붙는… 그런 특별한 기술은 없지만, 상관없었다.

체력 단련 차 인망산(寅亡山) 산골짜기를 쏘다니던 시절부터 나무 타기와 절벽 오르기를 틈틈이 연습해 왔으며.

- 끼에에에에엑!!

- 끼에에엑!

콰직―

콰드드득―

애당초 머리 위에서 발판들이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이무기들이 물어뜯어 분쇄된 살점들 말이다. 나는 지면으로 추락하던 큼지막한 육편을 밟고 연속해서 뛰어올랐다.

3m, 5m, 10m.

'유령 걸음'이 지닌 극한의 속도 버프를 통해 중력을 무시하며 15m에 달하는 높이를 수직으로 주파하자 순식간에 드러난 꼭대기.

그 평평한 옥상의 중앙에는.

"면상?"

인간이라면 모두가 갖고 있는 '눈'과 '입'이 떡 하니 붙어 있는 안면이―

"…휘윤 씨! 조심하십쇼!"

"음?!"

'파묻혀 있구나'라고 인식하던 차에 날카로운 한마디가 고막을 찔렀다.

하나.

무얼 조심해야 하느냐고, 그보다 여긴 어련히 알아서 할 터이니 그쪽이나 잘 부탁한다는 너스레를 떨 여유는 없었다.

…슈우우욱!

…슈우욱!

"아."

무모하게도 날개 없이 천상을 탐한 인간을 벌하기 위해 십수 개에 달하는 거인의 손바닥이 내 목덜미를 노리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럴까 봐 '유령 걸음'으로 인지력에 혼동을 주며 이동한 것인데, 이 새끼 필요할 때는 또 무생물이 되는 모양이었다.

"썩을."

콰아아아아앙!!

88화

[ 크뤼글라디 호수 ]

인간은 날지 못한다.

이건 코흘리개 어린아이도 아는 불변의 진리.

신비의 학문이라 불리는 마법 혹은 극한으로 단련된 신체를 앞세워 조금 오래 떠 있을 수는 있으나, 만유인력의 법칙은 반드시 발목을 움켜쥐고 인류를 지상으로 끌어 내렸다.

따라서.

후우우우욱!

콰아아아아앙!!

"…휘윤 씨!"

상공에서 발생한 폭음에 정유환의 목구멍을 비집고 경악스러운 숨결이 터져 나온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역행의 제단이라는 것.

도저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감도 안 잡혔으나, 무언가 기발한 수가 있는지 홀로 달려 나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2차 진화체마저 손쉽게 갖고 노는 등 수차례 봐온 괴물 같은 실력을 가진 오휘윤이라면 당연히 승전보를 울리며 금의환향하리라 단정 지은 상태였으니까.

그러했는데.

"...."

정유환은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참극을 관망하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 쌍, 두 쌍, 세 쌍.

밤새 귓가에서 앵앵거리던 모기를 쳐 죽이듯 한데 모아 움켜쥔 거인의 손바닥. 틈새로 핏물이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을 만큼 촘촘하게 결속된 다섯 쌍의 수인(手印)은 명확하게 선언하는 중이었다.

설령 풀 플레이트 아머로 육체를 감싼 기사라 할지라도 이 안에 갇힌다면 온전히 살아 나올 수 없으리라고. 그러한 점에서 제아무리 오휘윤 씨라고 한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비극적인 상상에 정유환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어어...."

"저, 저거."

자신과 비슷한 미래를 그렸는지, 기사고 생환자고 가릴 거 없이 곳곳에서 깊은 탄식이 메아리쳤다.

모두가 인지한 것이다.

그의 죽ㅇ―

"저, 저게 뭐야?!"

응?

안타까움과 애도를 담아 짧게라도 묵념을 하려던 그때 누군가의 당황스러운 음성이 밑으로 숙여지던 정유환의 고개를 붙들었다.

또 뭔가 새로운 언데드라도 나타난 걸까? 뾰족한 외침에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옆을 쳐다보니, 활시위에 화살을 재다 말고 넋을 잃은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동생 정유림이 보였다.

이에 덩달아 그녀를 따라 올라가는 시선의 끝자락에는.

"…유니콘?"

전래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주인공처럼 한 남자가 찬란한 빛을 뿌리며 창공을 누비고 있었다.

오휘윤.

그가 살아 있었다.

* * *

인간은 날지 못한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던가?

특히나 온갖 변수가 난무하는 퀘스트와 그로 인해 연동되는 대륙 각지의 전쟁터에 내동댕이쳐지는 생환자들은 원치 않더라도 낙하산 없이 스카이다이빙을 해야 하고 뗏목 없이 대양에서 헤엄쳐 와야 했기에, 틈틈이 여력이 될 때마다 이를 대비해 최대한 다양한 난관들을 상정해 두고 각 상황에 맞는 파훼 및 탈출 방안을 고안해 왔다.

자, 그럼 여기서 질문.

사방이 뻥 뚫린 공중에서 핀치에 몰렸을 때 내가 취할 행동은?

"휘윤 씨! 조심하십쇼!"

슈우우욱!

슈우욱!

아래쪽에서 들린 경고를 신호 삼아 전후좌우에서 좁혀오는 살덩어리를 마주한 나는 그간 연습해 왔던 여러 대처 방법들을 상기하며 주저하지 않고 소리 질렀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부르면 달려오는… 유일하게 100% 믿고 등을 내줄 수 있는 동료.

"스콰!"

녀석에게 여길 와 달라고.

화아아아악―

번쩍!

"히이이이잉!"

그러곤.

"어, 그래, 미안하다."

진심을 가득 담은 사과와 함께 빛의 문을 열고 등장한 스콰의 안장을 '밟고' 힘을 주었다.

이게 바로.

"이따 당근 많이 챙겨 줄게."

"푸르릉?"

마법이라는 신묘한 방식으로 출퇴근하는 펫의 특성을 이용한 '공중 마상 발판'이었다.

꾸우우우욱―

타앗!

휘우우우욱!

"역소환."

콰아아아아앙!!

굉음이 울려 퍼지는 것과 스콰의 귀환은 실로 간발의 차이였다.

몇 초만 늦었어도 눈앞에 '펫이 심각한 피해를 입어 사망합니다.' 따위의 문구가 아른거렸을 터.

그리고 그 말인즉슨.

"어후! 진짜 뒈질 뻔했네!!"

주인도 반려동물도 둘 다 멀쩡히 숨 쉬고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턱 밑까지 쫓아왔던 죽음이라는 사냥꾼의 칼날을 회피했다는 사실에 환호의 의미로 육두문자를 토해 내며 환두대도를 왼손으로 옮겨 쥐고는 오른팔을 높게 쳐들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손바닥의 그물에서 빠져나오기는 했으나, 처지가 위태롭다는 건 자명한 바.

고로 한가롭게 떠드는 건 그만두고 단숨에 마력을 끌어모았다.

이걸 이렇게 빨리 실전에서 개시하게 될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지만, 마침 기회가 왔으니 시원하게 날려 줘야지.

우우우우우웅!!

화르르륵―

"스읍, 하!"

목표는 누가 봐도 수상쩍게 옥상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안면.

저게 약점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단언할 수 없으나 난 철저하게 과거론에 입각하여 어깨를 당겼고, 비틀었던 허리의 원심력을 십분 이용하며 미련 없이 손목을 놓았다.

일반 마법(一般 魔法).

블레이즈 자벨린(blaze javelin).

투우웅―

화르르르르륵!

* * *

마른하늘에 날벼락.

아니, 햇살이 쨍쨍한 오전임에도 칠흑 같은 밤보다 훨씬 선명하고 또렷하게 발광하는 마른하늘의 유성이 붉은 꼬리로 궤적을 그리며 맹렬하게 내리꽂혔다.

이윽고 발발한 충격파는 그 색깔에 걸맞게 굉장히 강렬했다.

…콰아아아아앙!!

초고밀도로 압축된 근육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력이 더해진 창탄은 본래 정해져 있던 마법의 대미지 리미트를 강제로 해제하며 눈알을 스타트로 면상 전체를 화끈하게 불살랐다.

그 여파로 확 하고 솟구치는 열기.

다만.

"이런."

정작 투창을 가한 내게서 새어 나온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화려한 이펙트와 달리 아무런 메시지도 출력되지 않았으니까.

반지에 각인된 '블레이즈 자벨린(blaze javelin)'이 강력한 마법임은 틀림없었으나, S 랭크 스킬의 반절을 겨우 넘는 수준으로는 역행의 제단이라는 괴이한 놈의 목숨을 끝장내기에는 부족한 듯싶었다.

다시 말해.

내 위기는 변함없는 현재 진행형이었―

"우, 움직임이 멈췄다!"

"지, 지금 가야 해!!"

"거기 서십시오!"

"…응?"

이제는 뭘 어째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세 사람의 다급한 대화가 내 고막을 강타했다.

조충수와 김학진.

이른바 '하극상 파벌'로 이름 붙였던 두 명과 정유환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지막 한 마디로 추측하건대 조충수와 김학진이 무리를 이탈한 것 같았는데.

뭐.

저들이 도주를 했든 미쳐 돌진을 했든 딱히 나무랄 계획은 없었다. 외려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칭찬을 해주고팠다.

"움직임을, 멈췄다?"

덕분에 뭘 해야 될지 아이디어가 번뜩인 까닭이었다.

그 번뜩임을 바탕으로 무력하게 곤두박질치기만 하던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라는 문장을 거듭 되새기며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신속하게 주변을 스캔해 가는 눈동자 너머 정말로 딱딱하게 굳어 버린 살덩어리 하나가 보였다.

거리는 2m.

공교롭게도 직전까지 나를 죽이려 들었다가 그대로 제동이 걸리면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고정된 그것을 향해 황급히 팔을 뻗었다.

슈우우욱―

턱!

'됐다!'

아슬아슬하게 걸린 손가락.

어떤 동물의 것인지 사람의 대퇴골마냥 길쭉하고 두꺼운 뼈를 단단히 틀어쥐고 악력만으로 살덩어리에 매달린 나는 흡사 서커스를 하듯 위로 기어오르며 곧장 비교적 평평한 곳에 우뚝 섰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공포를 선사한다는 높이가 11m라던가? 그보다 몇 미터는 더 높은 위치에 자리하니 고소공포증이 없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불어오는 바람과 멀게만 느껴지는 지상과의 간격에 정신이 아찔하다 못해 어지러웠으나,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내는 등 필사의 의지로 멘탈을 붙잡으며 정면을 주시했다.

곡예는.

탓―

"…하아!"

끝나지 않은 탓이었다.

짤막한 기합을 내지르며 발을 뗀 나는 불규칙한 살덩어리 위를 직선으로 주파하며 옥상의 중앙으로 내달렸다.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한다면 최소 반신불수행으로 이어질 위험천만한 고공 질주.

그렇기에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어금니를 악물면서도 제단이 본래의 활력을 되찾기 전에 가속에 가속을 더하며 일보 일보를 내디뎠다.

두렵다고 멈출 수 없었다.

정체불명의 안면이 공격당해 제단 전체가 일시적으로 상태 이상에 빠진 듯한데, 따라서 이 찬스를 놓쳤다가는 기껏 공들인 공략에 실패할지도 몰랐다.

아니.

공략이야 추후 재도전하면 되겠지만, 핵심은 '최초 업적'이었다. 가정대로 다른 도시 쪽에서도 비슷한 규모의 퀘스트가 진행되고 있다면 이번 트라이가 실패했을 때 내 업적을 빼앗길 공산이 컸다.

그러니.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이그니스(ignis) 류(流).

직뢰(直雷).

휘우우우웅―

파직―

왔을 때 잡아야 했다.

"흐아아아아아!!"

이중 스킬 결합.

오휘윤 류: 뇌령 돌파.

…후우욱!

촤아아아악!

일도양단(一刀兩斷).

칼로 적을 대번에 쳐서 두 토막 낸다는 그 일격필살의 기세로 내리그은 환두대도가 불꽃에 휘감긴 안면부를 사납게 찢어발긴다.

그와 동시에 나는 왜 갑자기 제단이 뚝딱거리게 된 건지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붉은 기류.

즉 언데드의 무기이자 방어구인 사기(死氣)가 블레이즈 자벨린의 화력으로부터 면상을 보호하고자 이쪽에 집중됐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설명하는 바는 지극히 단순했다.

예측했던 대로 저 제단의 약점은 최상층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과 추가로 건축물이란 무생물을 생물화시킨 근원이라는 이야기였다.

"…끼에에에에엑!!"

이를 방증하듯 언데드인 주제에 한껏 비명을 질러 대는 놈.

성인 남녀 두셋은 단박에 삼켜 버릴 큼지막한 아가리를 활짝 벌린 채 울부짖는 광경에 확신을 가진 난 도신이 부러져도 좋다는 각오로 온 힘을 다하며 상체를 도병에 바짝 붙였다.

체중을 실음으로써.

스윽―

왼팔을 빼내더라도 파괴력을 유지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래야.

철컥!

오른쪽에는 주 무기인 '사나운 호랑이의 양손 환두대도'가, 왼쪽에는 보조 무기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손때 묻은 단검'이 조합된 '쌍검술(雙劍術)'이 완성됐으니까.

개인적으로 나는 이도류에 1도 조예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현시점에서 재능의 유무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너 혹시."

"끼에에에에에엑!!"

"쌍스킬이라고 들어봤냐?"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파직―

좌수검이 맡은 임무는 그저 S 랭크 스킬 발사대일 뿐이었다.

"응, 맞아. 나도 오늘 처음 들어봐."

…꽈르르르릉!!

* * *

띠링!

[썩은 것들로 빚어낸 탑, '역행의 제단'을 파괴했습니다.]

[축하합니다!]

[〈10인 한정 업적: 최초의 제단 파괴자〉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많은 경험치' 및 '기술 서적: 철저한 파괴자', '마력 전이석: 중형', '성역: 신성한 결계'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89화

쿠우웅―

쿠구구구궁―

15m에 이르는 거대한 역행의 제단이 와해되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그야말로 촌각에 불과했다.

얼굴만 내놓은 괴생명체가 사멸됐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허공을 수놓는 직후부터 거미줄 같은 형태로 실금이 생겼고, 눈 깜짝할 새에 하단으로 퍼진 균열은 삽시간에 건물 전체를 집어삼키며 드높았던 첨탑을 허물어뜨렸다.

그 매서운 붕괴에 급히 환두대도와 단검을 회수한 나는 전리품을 살펴볼 새도 없이 좌측으로 몸을 던지며 조각난 살덩어리들 중 제일 큼지막한 놈을 찾아 올라타 자세를 낮췄다.

추락 직전에 낙법이라도 행할 예정이었다.

사범들과 단련을 하면서 나름 열심히 배워 둔 터라 충격이야 당연하겠지만, 부상을 낮출 방법이 있는데 굳이―

"…칼리야스의 빛은 생명을 보호하리라!"

우우우우웅!

"아."

정유환의 별장 수련장에서 수련해 왔던 기억을 되새기던 차에 내 몸을 뒤덮는 우윳빛 장막.

[신성 마법 '보호의 성막'이 당신의 육체를 휘감습니다.]

['보호의 성막'이 정신계 공격을 제외한 대부분 유형의 위력을 대신 흡수합니다.]

[최대 흡수량은 최초 마법 발동 시에 소모된 신성력에 비례합니다.]

제 상관이자 동료가 위급하다는 걸 캐치하자마자 방어 계열 마법을 발현한 안델의 솜씨였다.

이것이 수호사제의 센스인가?

후우우욱―

쿵!

눈치 빠른 안델 덕에 안전하게 바닥에 착지하게 된 난 속으로 그에게 감사를 표하며 납도했던 칼을 다시금 빼 들며 제단으로 눈길을 돌렸다. 사망 선고는 내려졌으나 이후에 또 뭐가 튀어나올지, 혹은 챙기지 못하고 놓친 게 있진 않은지 경험이 없으니 재차 삼차 체크는 필수였다.

그 과정에서.

"…몸통?"

역행의 제단 안쪽을 보게 된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벌렸다.

한 꺼풀, 두 꺼풀 벗겨지는 내부 구조물 틈새로, 십수 미터 크기의 상·하체와 팔·다리가 달린 사지 멀쩡한 '거인(巨人)'이 보였으니까.

저게 무엇인가.

묻지 않아도 알 거 같았다.

[현재 단계: 3]

다음이 있음을 대놓고 예고한 시스템.

그랬다.

역행의 제단이란 언데드들의 능력치를 강화시키는 발전기(發展期)이자 한 생명체를 잉태하고 부화시키는 배양기(培養器)였다.

그 끔찍한 실체에 절로 튀어나오는 욕설.

"미친."

안 그래도 꼭대기에 안면이 매립돼 있는 이유가 뭔지 내내 의아했는데, 저것의 대가리였나?

허.

만일, 정말 만에 하나 우리가 조사단의 본분에 충실해 악령 수색에 몰두했더라면, 그래서 저게 깨어났더라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무심코 떠올린 장면이 무척이나 심각하게 그려진 탓이었다.

15m짜리, 심지어 목을 베지 않으면 영원토록 살아 숨 쉬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초대형 언데드라니....

예상컨대 엑스케트고 세르펜스 기사단 소속 기사들이고 참극을 면치 못했으리라.

"어후."

소름이 돋는 가상의 시나리오에 소름이 돋아 몸서리친 나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은 여차저차 넘겼지만, 결국에는 저 거인과 부딪쳐야 할 터이니 미리미리 상대법을 세워 놓으려면 머리가 꽤나 아플 듯했기에.

"조류 영물이라도 포획해 둬야 하나."

타조과는 비행을 못 하니 제하더라도 독수리나 엘버트로스(albatross) 같은 녀석들이 영물이 된다면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효과적인 수송기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베스트는 공중부양 류 스킬이 내장된 아이템을 구하든 아예 직접 배우는 것인데, 것도 쉬울 리는 없으니.

"아, 루데오 백작의 보고에는 있으려나?"

그래.

갖가지 레어 등급 보물들을 모아두었다는 2등급 보고나 1등급 보고라면 내가 원하는 물품들을 갖추고 있을 확률이 제법 크다.

물론 입장권을 하사받으려거든 그에 걸맞은 혁혁한 전공을 세워야 하는지라 저번처럼-빌런의 출현으로 특수 퀘스트를 따냈던- 행운이 따라주지 않고선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이 종료되기 전에 그곳을 한 번 더 들릴 수 있을지 미지수지만.

"영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지."

백작이 손수 창설한 조사단 세르레퀴로(serrequíro).

그러한 만큼 임무를 성공했을 시에 돌아올 보상도 절대 작을 리 없다. 악령을 발견하고 처치한다는 일련의 행위는 무려 전장의 판도를 뒤바꿀 중차대한 미션이기 때문. 애초에 사비를 털어 포션까지 지급해 주는 양반이니 적당한 전과만 달성해도 3등급 보고 입장권 정도는 쥐여줄 여지가 높았다.

예컨대 '제단의 파괴'와 같은.

이 점을 고려했을 때 만약 최종 목표인 악령 공적치를 차지한다면?

"…2등급, 어쩌면 1등급도 노려볼 만하다."

단순히 수고했다는 엔딩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상벌이 분명한 성격상 좌시할 리 없었다.

되레 더 챙겨 주면 챙겨 줬지.

하여간 이리된 이상 악령의 수급도 내가 가져야 할 성싶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독점이라는 게 썩 유쾌한 행동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어쩌겠나. 판매하는 한이 있더라도 1차 소유권은 무조건 선점해야 했다.

3차 진화체인지, 4차 진화체인지 그 레벨조차 분간이 안 되는 거인형 언데드의 등장으로 나의 생존에도 적신호가 켜진 지금은 타인보다 스스로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영웅이 아니니까, 나는."

* * *

['역행의 제단'이 파괴됨으로 인해 영역 내의 모든 언데드(Undead)의 능력치가 초기 모습으로 조정됩니다.]

[지속형 기술 '오오라: 만물역천'이 해제됩니다.]

['오오라: 만물역천'의 영향으로 되살아났던 모든 생물이 진정한 안식을 맞이합니다.]

마침내 꽃을 피워 내지 못하고 미생의 형태로 종지부를 찍은 거인형 언데드마저 산산조각 난 순간 일대를 가득 채웠던 사기(死氣)가 소멸되는가 싶더니 몇 줄의 메시지를 기점으로 제단에 의해 죽어서도 고통받던 짐승과 벌레들이 하나둘 바스라져 흩날리기 시작했다.

마치 검은 잿가루가 휘날리듯.

불어오는 바람결에 실려 스르륵 먼지처럼 사라지는 녀석들의 최후에 정녕 전투가 마침표를 찍었구나 싶어 눈을 돌리니 무너지는 제단을 피해 물러섰던 조사단원들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혹여라도 잔당 세력이 남아 있을까.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걸어오는 그들과 합류해 확인 사살 차 인근을 싹 훑으며 나는 손수 발견한 '언데드 사전: 제단 편'을 읊어 주었다.

"거인…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현재는 이런 꼴이 돼 버려 알아보기가 쉽지 않으나, 제가 본 바에 따르면 어지간한 성벽 높이에 맞먹는 신장을 가진 거인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생명의 샘을 비롯해 각종 생물과 자연에서 뽑아낸 영력을 양분 삼아 자라나는 듯했습니다."

"으음."

"아직 부딪쳐 보지 못했기에 확실치는 않지만, 제 추측상 적어도 3차 진화체… 최악의 경우 4차 진화체에 달하는 힘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 중입니다."

"하마터면 재앙을 맞이할 뻔했군."

"그저 예측일 뿐, 실제로는 몸이 커진 좀비에 준할지도 모릅니다."

"기왕이면 그러길 바라야겠지."

"맞습니다."

정보를 공개하는 데 거리낌은 없었다.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얻었다면 모를까. 모두가 합심해 준 덕택에 파악한 데이터였기에 나는 가급적 상세하게, 때때로 흙바닥에 그림까지 새겨 가며 기사와 생환자들 전원이 거인형 언데드와 제단에 관해 이해하고 숙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꼭대기에 얼굴이 있다?"

"예. 중앙을 보면 성인 남성 상체만 한 크기의 안면만 툭 튀어나온 게 보일 겁니다. 그것이 제단의 약점입니다. 자신이 위험하다 판단되면 검붉은 막을 씌우며, 그 방패의 방어력이 상당하니 전력으로 공략해야 함을 명심하십시오."

"알겠네. 그 외에 또 기억해 둬야 할 점은?"

"당장은 여기까지입니다."

"좋아. 하면 일단 회군하도록 하지. 리하인! 2조가 전위를 맡는다."

"충!"

두런두런 강의를 마치고 난 뒤.

언데드 전용 인간 레이더인 안델을 주축으로 주위 한 바퀴를 싹 돌며 실시한 수색 결과를 보고 받은 엑스케트의 철군 명령을 끝으로 우리는 크뤼글라디 호수 초입으로 되돌아왔다.

넘실거리던 죽음의 기운이 말끔히 지워지긴 했지만, 그런다고 황폐해진 환경이 회복되는 게 아니었기에 변함없이 을씨년스러운 풍경.

하나, 골칫거리였던 강화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직후라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의 표정엔 성취감이 엿보였다.

조충수와 김학진.

이 하극상 파벌을 제외하고는.

"쳐, 쳐다보는데?"

"쉿, 조용히 해요. 괜히 나대면 일 커져요. 이럴 땐 닥치고 있는 게 낫습니다."

"먼저 가서 사과하면...."

"사과든 뭐든 말 꺼내면 하자고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느낌이니까."

정유환의 말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굴었던 게 계속 찔리는지 불안한 기색으로 연신 내 눈치를 보는 둘.

참고로 원래 하극상 파벌은 세 명이었으나, 나와 조장 자리를 두고 겨뤘다가 대차게 깨졌던 남자 한용국은 자기가 패배하자마자 등을 돌린 조충수 등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정신을 차린 뒤로는 서로 내외하는 중이었다.

아무튼.

"유환 씨 생각은 어떠십니까."

"군대라는 걸 감안하면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벌을 주는 게 맞지만, 생환자들끼리 군법 운운하면서 목을 베기도 애매하니."

"그럼 이건 추후에 제가 따로 징계를 주겠습니다."

"저야 뭐, 휘윤 씨 말대로 하겠습니다. 어차피 다시 볼 사람들은 아니니."

정유환의 기분도 풀어줄 겸 그와 하극상 파벌의 처벌을 논의한 나는 벌써 마음의 명부에서 이름을 지워 버렸다는 답변에 작게 주억거리며 땅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교전 중에 스킬을 아끼지 않고 남발한 탓에 텅 빈 것처럼 허전한 체내의 마력 통.

짬이 생겼을 때 명상으로 회복을 좀 시켜 둬야 오후 일정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을 듯싶었다.

그 이전에.

[축하합니다!]

[〈10인 한정 업적: 최초의 제단 파괴자〉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상당한 경험치' 및 '기술 서적: 철저한 파괴', '마력 전이석: 중형', '성역: 신성한 결계'가 주어집니다.]

"난이도가 빡세서 그런가. 이건 100인이 아니라 10인 한정이네."

대충 품속에 짱 박아 둔 이것들부터 제대로 읽어 봐야지.

얼마나 대단한 걸 주려는 지 수령 가능한 인원이 평소의 10분지 1로 대폭 줄어들었기에 외려 더욱 기대가 갔다.

원래 명품은 수요보다 공급이 적은 편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성역, 성역...."

이모저모 다 차치하고서라도 우선 명칭이 미쳤다.

성역(聖域)이라니.

여태껏 획득해 왔던 그 어떤 아이템과 비교해도 단연 돋보이는 범상치 않은 네이밍에 불현듯 한 단어가 뇌리를 스친다.

다름 아닌.

〈성역: 신성한 결계/Rare〉.

"아!"

전방에 펼쳐진 홀로그램 화면의 끄트머리에서 오색 찬란하게 빛나는 '레어(Rare)'라는 글자였다.

9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