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스물한 명의 기사와 아홉 명의 생환자.
여기에 수호사제라는 특수 직업군까지 포함된 소대급 타격대가 투입되고 나서야 비등비등하게 겨루었던 대상이었거니와 마침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의 프리퀄 격인 〈메인 퀘스트: 호위〉에서 마수(魔獸) 스콜로펜드라를 사냥하며 소모품이기는 해도 레어 등급 아이템을 구해 본 전적도 쌓는 등 여러 요소들을 근거로 내심 희망은 품기는 했었다.
재수만 따라주면.
일반적인 보상안 이상의 대박이 터질 수도 있겠다고, 상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고 연신 긍정 회로를 돌렸는데.
〈성역: 신성한 결계/Rare〉
* 칼리야스 대륙 내에서도 교단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역을 찾아 수도원을 세우고 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는 '개척 사제'에게만 지급되던 제작형 성물 중 하나. 대체로 험지와 오지로 길을 떠나는 탓에 수도원장급의 신성력을 품었다 하더라도 생존 및 전투 경험이 부족해 위기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 최소한 변고가 발생하는 것만이라도 방지하도록 방어에 치중된 신성 마법들이 각인된 반지다.
* 신성 마법 '성역' 사용 가능(재사용 대기시간: 72시간)/신성 마법 '빛의 방패' 사용 가능/신성 마법 '보살핌' 상시 발현
└성역(聖域): 일정 공간을 신성력이 가득한 환경으로 변경하며 성역 내에 진입한 '아군'은 모든 종류의 사악한 힘에 대항력을 지닌다. 단, 일정 수준 이상의 공격은 해당 필드를 무시 또는 파괴할 수 있다.
└빛의 방패: 신성력(또는 마력)을 소모해 물리 및 마법 공격을 방어하는 방패를 생성한다.
└보살핌: 착용자의 물리적, 마법적, 정신적 공격에 대한 저항력을 향상시킨다. 추가적인 신성력(또는 마력)의 소모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거, 맞아?"
설마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진짜로 뜰 줄이야.
광택이라고는 전혀 없는, 해서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공산품에 지나지 않는 반지에 감춰진 진면목을 들여다본 난, 도합 세 가지나 각인된 내장 스킬에 그대로 입을 벌린 채 감탄 어린 비명을 토해 냈다.
방어 위주로 세팅 해두었다는 내용처럼.
쿨타임형 엑티브 스킬, 코스트형 엑티브 스킬, 지속형 패시브 스킬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소유자를 지키는 마법들은 숫제 여벌의 목숨이 추가된 듯한 짙은 고양감을 선사했다. 그러한 까닭에 따로 스탯 상승 옵션이 붙어 있지 않은 장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에 깃드는 활기.
스윽―
나는 누가 볼 새라 얼른 빈 손가락에 반지를 채워 넣고서 벗어 두었던 장갑을 씌웠다.
생긴 게 워낙 무난해 이목을 끌만한 편은 아니었지만,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괜히 눈에 띄었다가 어떤 식으로 스노우볼이 굴러갈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고로.
"크음, 흠."
입가에 번졌던 미소마저 얼른 지우며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평소 같은 텐션으로 주변을 쓱 훑으며 두 번째 전리품을 꺼냈다.
〈기술 서적: 철저한 파괴자/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기술 '철저한 파괴자' 습득
└철저한 파괴자: 일정 규격 이상의 생물 및 무생물 타격 시 물리 공격 상승. 무기 '둔기' 사용 시 위력 향상 폭 증가
"대형 몹 전용인가?"
반지에 이어 등장한 녀석은 출현을 예고한 거인형 언데드를 딱 저격하는 패시브 스킬이었다.
일정 규격.
[해당 기술과 관련된 지식을 전이합니다.]
"큽!"
입까지 막으며 몸소 습득해 본 바, 5m 이상의 개체부터 적용되는 이 기술은 꼭 언데드가 아니더라도 특별한 방법이 없는 한 공략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제단 따위의 건축물을 박살 내는 데에도 적잖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효율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려거든 둔기류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기는 한데....
"이건 나중에 구해 봐야겠네."
아이템 캐리어와 정유환.
두 쪽에 죄다 의뢰를 발주해 두면 시일은 좀 걸리더라도 적당한 놈으로다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님 수도원 상점을 이용하거나.
"아, 서브 퀘스트도 있지?"
잘만하면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이 종료되기 이전에 마련할지도 모르겠다.
음.
의외로 다양한 수급 루트에 만족스럽게 끄덕인 나는 마지막으로 '마력 전이석: 중형'을 흡수하다 불현듯 품을 뒤져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두툼한 두께감에 고급스러운 양식으로 마감된 두 권의 책자.
〈기술 임의 습득권: 베놈 데드/Magic〉
"요걸 잊고 있었네."
이래저래 바쁜 일정으로 얻어 놓고도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던 이것의 정체는 창졸지간에 소멸된 베놈 데드가 남긴 유산이었다.
〈기술 임의 습득권: 베놈 데드/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베놈 데드가 지닌 기술 중 한 가지 획득
* 목록: 포이즌 이레이저(상세 보기▼)/오오라_죽음을 품은 안개(상세 보기▼)/안티 포이즌(상세 보기▼)
└포이즌 이레이저(A): 체내에 축적된 독액을 한순간에 강하게 뿜어낸다. 기본 효과 '산성(酸性)'이 적용된다.
└오오라_세상을 더럽히는 시취(A): 체내에 축적된 독액을 사방으로 흩뿌려 일정 공간 내의 모든 적을 중독시킨다.
└안티 포이즌(P): 본인 및 외부에서 발산되는 독기에 대한 저항력이 상승한다.
과거.
루데오 백작과의 첫 만남을 대비해 급히〈서브 퀘스트: 영혼석 세공사(1)〉를 클리어하기 위해 '기술 서적: 분리'와 '마력 전이석: 중형'은 먹어 둔 상태였으나, 보상으로 주어진 마수급 영혼석을 복용하고 상향된 신체에 적응하는데 만도 시간이 촉박해 이놈까지는 손을 대지 못했다.
그 후로도 공사가 다망해 겨를이 없었고.
여하간.
"여기서 가져갈 만한 건 안티 포이즌인가?"
손아귀에 책을 쥔 채로 정면을 바라보며 설명창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똑똑하게 각인한 나는 정독과 고심 끝에 3번을 터치했다.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기술 '안티 포이즌(P)'의 지식을 전이합니다.]
산성독을 내뱉는다는 '포이즌 이레이져(poison eraser)'나 광역기인 '오오라: 세상을 더럽히는 시취'도 좋기는 했지만.
역시 방독(防毒) 스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유한한 해독제와 미약할지언정 영구적인 기본 체급 상향을 두고 어찌 전자를 선택하겠는가.
"3조 조장님, 단장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 * *
"충."
"왔나."
"부르셨습니까."
두 개의 스킬과 한 개의 장신구를 추가하며 스펙을 늘리고서 휴식을 취하길 30분여, 명상에 집중하며 마력을 회복하던 차에 엑스케트가 조상들을 불러 모았다.
그가 우리를 소집한 연유야 명확했다.
"역행의 제단이라고 했던가. 그것의 파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니 본래 목적인 악령 수색에 전념하려 하나 보다시피 크뤼글라디 호수가 영기를 잃어버려 계획에 수정이 필요할 듯하여 그대들을 불렀다."
언데드 종족과 대적함에 있어 포션과 사제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생명의 샘'을 대신할 대체품의 확보 때문.
나처럼 내성이 생긴 이에게는 최상급 피로 회복제의 노릇을, 나와 다르게 내성이 없는 이에게는 그야말로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인 샘물의 유무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조사단의 존폐까지도 결정지을 수 있는 요인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채 한 시간도 전에 엄청난 전공을 세웠음에도 엑스케트의 안색은 썩 어두웠다.
가문에 소속된 한 명의 기사로서든, 붉은 뱀들의 군주라 불리는 아비의 뒤를 이을 자식으로서든 이대로 물러나긴 싫을 테니까.
참....
내게는 아주 '행복'한 실정이었다.
"제가."
"응?"
"또 다른 샘물의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게 흠이지만, 무대책으로 전장에 뛰어드는 것보단 백 배 낫지.
"그게 정말인가?"
"예. 제단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지 않았으리라고는 확신하기 힘들지만, 거리도 꽤 멀거니와 사나흘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으니 아마 별 이상은 없을 겁니다."
"신께 기도해야겠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안델 사제에게 더 아는 곳이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그러게. 다른 조상들은 조언해 줄 말이 있는가."
"죄송합니다. 창과 칼 말고는 아는 게 없는 무부들이라."
"죄송할 게 무언가. 나도 같은 처지인데. 하면 3조 조장은 안델 사제에게 다녀오도록 하고, 두 사람은 푹 쉬어 두게."
"충."
* * *
"…음. 크뤼글라디 호수를 제외하고 제가 아는 장소는 블리타(blíta) 마을 쪽이 전부군요."
"블리타 마을?"
"엑세트 백작령의 최서단에 자리 잡은 축산 마을입니다."
"가볼 만합니까?"
"작정을 한다면 못 갈 건 없지만, 이동 거리를 계산한다면 휘윤 경께서 말씀하신 곳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예서 블리타까진 마차로 가도 사흘은 훌쩍 걸리니 말입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보다 호수는 어떻게, 진전이 좀 있을는지요?"
곧장 쉬고 있단 안델을 찾아와 '간단히' 대화를 끝내고 돌아가려던 나는 문득 호수에 대해 물었다.
엑스케트가 휴식을 명한 시점부터 줄곧 크뤼글라디 호수의 소실된 영기를 복원하려 머리를 싸매고 있던 그.
몇 가지 신성 마법을 써보기도 하고, 성물로 추정되는 물건들을 가져다 대보기도 하는 등 열심이길래 〈서브 퀘스트: 한계 돌파〉가 걸려 있는 입장이라 열렬히 응원했다만.
"제 신실함이 부족한 탓인지 아쉽게도 현재까진 소식이 없습니다."
"흠."
내 바람이 무색하게 딱히 소득은 얻지 못한 모양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스콜로펜드라의 동굴이 괜찮을지 아닐지 모호한 탓에 기왕이면 먼 길 돌아갈 거 없이 이쪽이 복구되는 방향이 내게도 베스트인데.
"고안하신 방도는 다 동원해 보셨습니까?"
"두어 개가 남긴 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한다면 제 능력으로는 어렵겠지요."
"두어 개라면...."
"제가 구사할 수 있는 최상위 주문인 성역과 '소생의 바람'이라는 마법입니다. 교리사제가 아닌 터라 제가 배운 것들은 전투에 연관된 것들이라...."
음.
성역과 소생의 바람이라.
"…잠깐만, 성역?"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성역이 효과가 있겠습니까?"
"저도 실험을 해봐야 알겠지만, 부정한 것들을 지워 낼 뿐 아니라 근방을 칼리야스 님의 은혜로 에워싸게 되니 그 온기에 만물을 되살리는 소생의 바람이 더해진다면 뭔가 변화가 있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원이지만요."
"두 가지 마법을 혼자서 감당하실 수 있으신지요."
"그 또한 해봐야 할 듯합니다."
아하.
안델과 대담을 나눈 나는 일단 해봐야겠다는 대답에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제단 파괴 업적 보상으로 드랍된 반지의 첫 사용처가 어디인지를.
"제가 도와드려야겠군요."
"하하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하나 신성 마법은―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이게 있으니까."
91화
우리가 손바닥을 마주쳤을 때 과연 크뤼글라디(chrȳgládĭ) 호수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누군가 내게 그리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리라.
애매하다고.
만약 메인 퀘스트를 진행함에 있어 무조건적으로 거쳐 가야 하는 스테이지라든가 명확하게 미션으로 주어지는 서브 퀘스트라면 모를까, 애당초 이 방면의 전문가라고 볼법한 안델조차 확답을 망설인, 성공 확률이 희박한 트라이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만.
그럼에도 성물의 존재를 숨기지 않고 과감하게 드러냈다.
[사제의 조사단 합류 ▶ 제단과 망가진 생명의 샘 발견 ▶ 제단의 파괴 및 '성역' 마법이 각인된 반지 획득]
첫 단추부터 마무리까지 딱딱 맞아떨어지는 퍼즐 조각들이 아무리 봐도 그냥 늘어놓은, 연속된 우연은 아니라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이건!"
"알아보시겠습니까?"
"당연히! 개척 사제님들게 지급되는 쿠스토디아(custódĭa)가 아닙니까?! 베네딕티오 사제님께서도 한번 보여주신 적이 있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조장께서 이걸...."
반지의 명칭이 '쿠스토디아(custódĭa)'였구만.
아무튼, 이 행동의 여파로 교단이 제작한 보급형이라지만 개척 사제에게만 주어지는 교단의 성물을 어째서 외부인인 당신이 갖고 있느냐는 안델의 의아한 눈초리가 날아들었으나 이에 관해서는 한 가지 진실과 적당한 거짓말로 대처했다.
"예전 체르바 백작령을 여행하던 시기 도적놈들에게 붙잡혀 계시던 아른헬이란 사제분을 구해 주면서 보답으로 받게 된 물건입니다."
"아."
실제 지명과 사건을 베이스로 꾸며낸 이야기에 더하여 결정적으로 꼭꼭 감춰 뒀어도 됐을 사실을 굳이 내 입으로 꺼냈다는 점이 제법 설득력 있게 들렸는지 서서히 의문을 털어내는 안델.
덕분에 무난하게 물음표를 해소한 우리는 서둘러 엑스케트에게 접견을 신청했다.
"…하여 정화를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단체 생활 특히 상명하복을 원칙으로 삼는 군대에선 그 어떤 사소한 일이라도 상부의 허락이 선행되어야 하는 법.
더군다나 나야 아이템의 힘을 빌린다지만, 안델은 조사단의 핵심 전력 중 한 명인 사제였기에 그의 신성력이 대량으로 요구되는 업무라면 사령관의 재가가 필수였다.
"성패와 상관없이 시도할 경우 신성력을 회복하는 데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가."
"쿠스토디아의 효력이 어떠한지 겪어 보지 못해 명확하진 않으나, 성역 마법의 효과가 동일하게 발현된다면 이를 활용해 해가 지기 전까지 정상 궤도에 올라설 것으로 짐작됩니다."
"변수가 발생할 시엔 그보다 더 적어진다는 소리군."
"그렇습니다."
"흐음."
안델의 답변에 잠시 턱을 괴고 고민에 잠긴 엑스케트.
신성력을 아끼면서 내가 말한 스콜로펜드라의 동굴로 가는 것과 신성력을 투자하더라도 이곳에 손을 대는 것.
사령관으로서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을 고르는 게 부대에 이득이 될는지 따져 보는 듯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곧 우리 눈을 마주 보며 강하게 주억거렸다.
"3조 조장의 요청을 승인하겠다."
"감사합니다."
반나절 이상 사제가 무력화되는 최악의 상황과 크뤼글라디 호수가 태고 시절의 풍경으로 회귀하는 최고의 상황.
내가 봐도 후자가 압도적으로 끌렸다.
'생명의 샘'이 향후 일정에 무척이나 귀중한 물품이라는 이유도 한몫했겠지만, 엑세르 가문의 일족이니 영지의 미래도 크게 작용했을 거다. 후모르(hūmor)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과수원만 해도 수만 평에 달했거니와 그 밖에도 어업과 수렵 및 채집 등 글라디아르 도시민들의 생계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곳이었으니까.
"단원들에겐 내가 알릴 테니 두 사람은 바로 가서 마법을 준비하도록."
"충."
뭐가 됐든 당당히 결재를 받아낸 나는 안델과 여전히 거무튀튀한 색깔로 물든 호수변으로 발을 뻗쳤다.
그렇게.
주신 칼리야스가 선물해 준 은총을 반드시 되살리겠다는 숭고한 신념을 품은 젊은 사제와.
〈서브 퀘스트: 한계 돌파〉
* 본디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어던질 수 없는 평범한 생물에게 '특별한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른바 '한계 돌파의 기회'라고 부르는 기적적인 기회입니다.
그러니 한번 도전해 보십시오.
평범했던 생물(生物)이 영험한 능력을 지닌 영물(靈物)로 거듭날 수 있도록.
(2/10)
* 특이 사항 1: 각기 다른 열 곳의 '생명의 샘'을 찾아갈 것
'스콰야, 조금만 기다려라. 선물 가지러 간다.'
짤막한 예고도 없이 발판 신세로 전락해 버렸던 망아지를 위한 결의를 다진 주인은 서로 다르지만 같은 각오로 잔잔하게 밀려오는 물결 앞에 서서 양손을 내밀었다.
이윽고.
스으으윽―
우우우우우우웅!!
신성 마법(神聖 魔法).
성역(聖域).
한 줄기의 휘광과 따사로운 바람이 세상을 휘감았다.
['성역'이 전개되었습니다.]
[공간 내에 진입하는 모든 아군에게 씌워진 각종 저주가 소멸됩니다.]
[공간 내로 접근하는 모든 종류의 사악한 힘을 파훼합니다.]
['소생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따스한 온풍이 당신을 감싸 안습니다.]
[바람이 지속되는 동안 회복과 관련된 모든 행위에 긍정적인 효과가 적용됩니다.]
…
…
* * *
그 어떤 오염 물질보다 지독하고 더러운 죽음이란 괴물이 다녀간 이후 자정 활동마저 정지돼 버린 자연.
한때는 호수의 정령(精靈) 니수스가 연호 될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했으나, 이제 와 남은 것이라고는 말라비틀어지고 흉물스러워진 황폐함만이 전부인 이 땅에 변화가 일어난 건 누군가의 신발 형태를 따라 그대로 짓눌린 대지에서부터였다.
툭―
투둑―
아주 자그마한 두드림.
창칼이 난무하는 난전 중에도 뒤통수를 노리는 화살을 낚아채는 날카로운 감각의 기사, 육감의 영역에 발을 들인 지구의 이방인, 신의 은총을 빌려 전쟁에 나서는 사제… 하나하나가 괴물이나 다름없는 서른한 명의 초인 중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며 꽉 틀어 막혀 있던 지면을 뚫고 자라난 이름 모를 들풀.
그것을 신호탄 삼아 삽시간에 온 천지가 들썩였고, 마치 20여 일의 인내 끝에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처럼 사방을 뒤덮고 있던 잿더미의 장막을 깨부수며 저마다 꽃송이를 피워 낸 초목(草木)들은 무서운 속도로 검게 물들었던 일대를 오색찬란하게 뒤바꿔 놓았다.
"아아."
"이게 신의 기적인가?"
…
…
그 눈부신 이적을 직관하고 감탄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
하지만.
놀라긴 일러도 한참 일렀다.
"저, 저길 보십시오! 호수가!"
본론은 미처 개시도 안 했기 때문.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을 쫓아 우르르 쏠리는 시선 너머로 조사단원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물이… 맑아진다?"
각종 오물로 더러워진 하수 처리장의 폐수를 연상케 하던 크뤼글라디 호수가 차츰차츰 정화되어 가는 장면을.
소생(蘇生).
살아 있기만 한다면 설령 죽음 직전에 내몰렸을지라도 완벽하게 치유시킨다는 이 무지막지한 의지가 인근을 가득 채운 신성력과 시너지를 내며 이룩한 광경은 가히 경이로웠으며, 동시에 깨닫게 해주었다.
"호수가… 아직 버텨 주고 있었군요."
멀쩡한 동물들을 강제로 언데드화 시켜 버릴 만큼 매서운 사기(死氣)의 압박 속에서도 '생명의 샘'이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는 것을.
'부활'이 아닌 '소생'은 위력적인 마법일지언정 결국 체력이 남아 있어야만 효험이 발휘되는 주문이었으니까.
제단이 세워지고 최소 며칠이 지났을 터라 그간 꼼짝 없이 짓밟히며 완전히 사멸했으리라 여겼는데, 일반적인 범주를 아득히 초월하는 규모에서 비롯된 막대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의 끈을 붙들고 늘어진 거 같았다.
오늘날.
우우우우우웅!
"물, 물에 광채가!"
"이게 대체...."
"이게 신의 힘인가."
…
…
띠링!
[수호자를 잃은 채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에 의해 파괴되어 가던 '생명의 샘'을 복원해 냈습니다.]
[축하합니다!]
[〈1인 한정 업적: 샘지기를 대신하는 자〉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상당한 경험치' 및 '기술 서적: 나수스의 두 가지 축복', '재생하는 도마뱀의 영혼석', '질주하는 말의 영혼석', '마법 스크롤: 역행의 모래시계(×3)'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빛을 발할 이 순간을 위하여.
* * *
〈기술 서적: 니수스의 두 가지 축복/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기술 '니수스의 두 가지 축복' 습득
└니수스의 둑 가지 축복: 노력하는 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호수의 정령 니수스(nīsus)의 축복. '물'과 관련된 모든 활동에서 피로 누적 속도가 대폭 감소하며, 1km 반경 내에 '생명의 샘'이 존재할 시 그 위치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재생하는 도마뱀의 영혼석/Magic〉
* '생명의 샘'이 지닌 신비로운 힘을 통해 정해진 한계를 이겨 내고 영물(靈物)로 거듭난 샘지기 도마뱀의 영혼석이다. 복용 또는 장비 제작 시 내재된 영력을 사용할 수 있다.
* 복용 시 재생력 5% 영구 강화/장비 제작 시 착용자의 재생력 7% 상승 효과 적용
〈질주하는 말의 영혼석/Magic〉
* '생명의 샘'이 지닌 신비로운 힘을 통해 정해진 한계를 이겨 내고 영물(靈物)로 거듭난 샘지기 말의 영혼석이다. 복용 또는 장비 제작 시 내재된 영력을 사용할 수 있다.
* 복용 시 체력 5% 영구 강화/장비 제작 시 착용자의 체력 7% 상승 효과 적용
〈마법 스크롤: 역행의 모래시계/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크롤(scroll). 찢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마법 '역행의 모래시계' 사용
└역행의 모래시계: 아이템의 재사용 대기시간을 0으로 만든다.
* * *
붉은 태양이 중천을 스치며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6시경.
"화살! 화살 더 가져와!"
"기름! 기름 어딨어!"
"이 새끼들아, 빨리빨리 움직여!"
…
…
후우우우웅―
콰아앙!
콰아아아앙!
악에 받친 괴성과 석벽을 타고 전해지는 폭음이 불협화음을 이루어 내는 도시 글라디아르(gládĭár)의 성문.
수백 명의 생환자가 합류함으로써 조금씩 숨통이 트여가는 전장의 중심에 서서 여느 때처럼 레이피어를 휘두르던 루데오 백작은 다시금 마력을 끌어올리다 말고 우뚝 선 채로 주위를 쓱 돌아봤다.
"백작 각하! 물을 가져 왔… 각하?"
때마침 목을 축일 식수와 수건 따위를 챙겨오다 그런 루데오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부관.
그러거나 말거나 몇 차례 더 훑어보던 백작은 이내 손끝에 모인 마력이 흐트러지는 데에도 개의치 않고 곁으로 다가온 부관에게 물었다.
"자네, 뭔가 달라진 게 느껴지는가."
"예?"
꼭 현자의 선문답 같은 얘기에 당황스런 기색으로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다 돌연 성벽 한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막 활시위를 손가락에서 놓는 병사, 보다 정확하게는 그 병사가 쏘아 보낸 '화살'을 향해.
투웅―
휘우우우욱!
맹렬한 기세로 대기를 가르며 내리꽂혀 한 괴물의 미간을 꿰뚫는 화살이.
"…이상하군요."
이상했다.
무엇이?
기사도 아닌 병사의 손에서 날아간 화살이 매우 쉽게 이마를 관통한 탓이었다. 분명 오전까지만 해도 흠집 내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전쟁이었으니.
도대체 이게―
"맡겨 달라고 사정사정하더니, 놀고만 있진 않았나 보군."
"아."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연신 좌우만 둘러보던 부관은 혼잣말인 척 중얼거리는 루데오 백작의 말에 탄성을 내뱉었다.
옅게 미소 띤 입가.
특정인을 지칭하는 명사가 빠져 있지만 누굴 떠올리고 있는지 알 듯싶었다.
"그런가 봅니다."
"하니 우리도 힘을 내줘야겠지."
"실력적으로는 몰라도 경력으로는 선배지 않겠습니까. 분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믿고 있겠네."
자신에게도 상당히 친숙한 한 인물을 머릿속에 그리며 기꺼운 표정을 지은 부관은 힘차게 검 손잡이를 움켜쥐고서 전방을 응시했다.
흡사 원정군의 승전보 소식을 전해 들은 듯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느낌.
나아가 이곳의 전투 또한 승리로 장식할 수 있을 듯한 자신감도 붙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르네아스."
"예, 각하."
"내 한 가지만 물어보겠네."
"하문하십시오."
"정녕, 신은 우릴 버린 것일까."
이튿날 오후까지는 말이다.
92화
[ 악령을 찾아서 ]
['재생하는 도마뱀의 영혼석'을 복용했습니다.]
[재생력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5% 향상됩니다.]
['질주하는 말의 영혼석'을 복용했습니다.]
[체력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5% 향상됩니다.]
보상으로 주어진 두 개의 영혼석을 싸그리 먹어 치우며 육체 강화를 마친 나는 저녁노을이 겹쳐진 야경을 등 뒤로 하고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감각에 몰두하길 10여 초를 차분하게 호흡을 고르며 내면을 관조하던 찰나,
…촤르르륵!
부지불식간에 뇌리를 파고드는 한 줌의 물줄기.
우주 한 가운데 흩뿌려 놓은 듯 중력의 영향 따윈 가볍게 무시하며 심상의 세계 속 허공을 자유롭게 누비는 푸른 빛깔의 물줄기는 자길 봐 달라는 양 빙빙 떠돌다 한 바퀴 크게 회전하고는 어딘가로 쭉 뻗어 나간다.
방향은 북서쪽.
그 궤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내게 따라와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후다닥 돌아와 면전에서 노닐다 재차 동일한 루트로 활공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물줄기.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
느닷없이 나타난 주제에 제멋대로 구는 녀석을 한참 동안 구경하다 마침내 한 발을 떼었다.
시야가 차단된 탓에 걸음을 옮기기가 여간 쉽지 않았으나, 왠지 몰입이 풀리면 여태까지의 노력이 허사가 돼버릴 듯 해 빛을 향한 욕망을 꾹꾹 눌러 담으며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5m, 10m, 15m....
그렇게 계속해서 직진하며 대략 30m를 걸어갔을 즈음.
촤르륵!
무어가 그리도 흥겨운지 이리저리 곡선을 그리며 앞장서던 물줄기가 불쑥 움직임을 멈춘다.
다소 갑작스러운 행동이었으나, 녀석에게 갑자기 왜 그러는 거냐고 따로 질문하지 않았다.
날 이곳으로 인도한 물줄기의 정체가 '니수스(nīsus)'였기 때문이었다.
번쩍!
"제대로 왔네."
스킬 소유주를 '생명의 샘'으로 이끄는 정령.
그 요정의 축복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 알아보고자 일련의 과정을 진행했던 나는 살포시 눈을 뜨자마자 보인 호수의 정경에 만족스러운 얼굴로 끄덕였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 집중에 집중을 더해야만 능력이 발동되는 형식이라 크게 쓸모가 없어 보이나, 점차 적응이 되면 추후 전자동 레이더마냥 24시간 내내 탐지기를 돌리며 날 '생명의 샘'으로 데려가 줄 터.
더욱이.
방금 경험해 보았듯이 시력이 봉인 당한 와중에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라, 이래저래 환경만 맞아떨어진다면 밤을 포함해 시각적 혼란을 유발하는 결계 따위에서도 길을 찾는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해줄 것이다.
"바다든 강이든 물에 빠졌을 때도 큰 도움이 될 거고."
좋다.
설마 이번 호수 복구 대작전을 업적으로 인정해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영혼석만 내줬어도 대단히 흡족했을진대, 본인이 메인임을 증명하듯 꽤나 훌륭하게 세팅된 스킬 옵션에 기분 좋게 웃은 나는 몸을 돌려 천막으로 향했다.
점심 전에 전투가 끝나 휴식이 길어지면서 다음 날 일정이 쭉 앞당겨진 새벽부터 이어지는지라 불침번을 제외하고는 다들 이미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막사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복귀인가?"
경계를 나가는 이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침상에 드러누우니 어느새 조사단 1차 원정의 세 번째 아침이 되돌아오는구나 싶었다.
조사단에게 있어서 '세 번째 아침'은 미션 종료를 뜻하는 바.
실상 수색 임무는 진전이 1도 없어서 이대로 귀환하는 게 맞나 의구심이 들긴 하다만, 그거야 사령관이 결정할 사항이니 내가 고민할 영역은 아니지.
다 떠나서 개인 물자를 3일 치밖에 챙겨오지 않아 바깥을 더 활보하기도 어렵고.
참.
"제단도 부서졌는데, 도시는 어떠려나 궁금하네."
수십 킬로미터짜리 광역 버프가 사라졌으니 이거 어쩌면 엑세르군이 승기를 잡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왕이면 팽팽하길 기원하는데 말이지.
혹여라도 저쪽에서 승리를 전과를 거두었다가는 서브 퀘스트 깨겠다고 야생만 죽어라 떠돌다 정작 메인 퀘스트는 손도 못 대고 끝장날지도 몰랐으니까.
"이거 내일 더 빡세게 탐사를 나서야겠네."
전장의 판세를 뒤집는 레벨의 공적을 세웠으니 B랭크 밑으로는 추락하지 않을 터이나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데다가 S랭크가 아니면 의미가 없으니 엑스케트를 닦달해서라도 스퍼트를 높여야겠다.
일개 조장에 불과하나 현재까지 쌓아둔 공적이 적지 않다 보니 내 의견을 아예 무시하지는 못하리라.
꿀꺽―
['생명의 샘물'을 복용했습니다.]
[모든 해로운 효과가 소멸합니다.]
[10분간 자연 치유력 및 피로 회복 속도가 200% 상승합니다.]
의지를 불태운 나는 컨디션 관리 차 샘물을 들이켜며 베개 대용으로 깔아둔 보따리에 머리를 뉘었다.
* * *
"…정비가 끝났다면 출발하겠다. 전위는 1조, 2조가 후방을 담당한다."
"충!"
동이 막 터오는 어슴푸레한 시각.
전날 자정 여지없이 몰아친 저주를 막아 내고자 여느 때처럼 성역 마법을 시전했던 안델의 신성력이 절반 이상 회복되었을 무렵 출전 명령을 내린 엑스케트의 외침을 따라 세르레퀴로 조사단은 크뤼글라디 호수를 뒤로 하고 긴 여행을 떠났다.
우리의 2차 행선지는 언데드 군단의 뒤쪽에 자리한 '스테레노(sterno) 들판'.
나와 엑스케트 등 네 명의 간부진은 최종 도착지이기도 한 그 지점 언저리에 악령이 있을 것으로 추정 중이었다.
글라디아르의 드높은 성벽에서도 실체를 목격할 수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역행의 제단'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 위치해 있을 확률도 무시 못 하나 놈의 포지션이 적군을 혼란케 하는 디버프가 주력기인 캐릭터라는 것에 주목했다.
놈이 생물일지 사물일지는 직접 만나 봐야 알겠지만, 만일 생물형이라면 마법사로 분류되는 인사를 외딴곳에 방치해 두진 않았겠지.
그나저나.
스윽―
슥―
'앞쪽에 적 출현, 숫자는 50여.'
우회로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전장에 뛰어들자 선두에 선 1조 조원들의 손가락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7주야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백작령 각지에서 군단에 합류하기 위해 숨 가쁘게 발을 놀려 몰려오고 있는 소규모의 언데드 놈들이 원인이었다.
대체로 수십 단위의 무리를 꾸려 이동하고 있는 죽음의 파도들. 저것들이 뭉치고 뭉쳐 글라디아르를 붕괴시킬 해일이 되는 거겠지.
하여 다들 교전을 대비했으나 엑스케트는 싸움 대신 회피를 택했다.
'역행의 제단'이야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커 칼을 빼 들었으나, 조사단의 주 업무는 전투가 아닌 수색. 게다가 예서 분쟁이 벌어지면 그 소음이 주변으로 퍼져 나가며 다른 언데드들을 불러올 거고, 이는 안 그래도 지체된 일정을 더더욱 지연시킬 따름이라 부득이한 경우를 빼고는 되도록 신속 기동을 유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백작이라는 최상위 귀족의 영지답게 영지민들이 많아도 너무 많아 밀려오는 검은 물결 역시 넘쳐났지만....
"좌측으로 가야겠습니다. 반대편에서 묵직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빠르게 돌파하지 않으면 발각될 겁니다."
우리에게는 마약 탐지견 못지않은 개코 사제가 함께였다.
백이면 백.
단순히 감지하는 걸 넘어 어렴풋하게나마도 상대의 사이즈까지 캐치해 내는 안델의 가공할 인지력은 과장 좀 보태서 십 리 밖에서도 언데드의 접근을 알아채곤 부대를 안전한 경로로 이끌어 주었고, 그 덕에 적진에 레드 구울이 끼어 있었을 텐데도 용케 놈들과 부딪치지 않고 순식간에 드넓게 펼쳐진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나.
"음...."
"허."
"오, 신이시여!"
…
…
목적지에 당도했음에도 우리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탄식'과 '경악'의 하모니였다.
스테레노(sterno).
엑세르 가문이 자작 위에 머무르던 시절 제 분수도 모르고 영지전을 걸어온 라피나 자작을 붙잡아 목을 벤 위업을 기리며 지명을 붙였다는 스테레노 평야를… 물경 수천에 이르는 언데드들이 들판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으니까.
1,000? 2,000?
"아무리 적게 봐도 일천은 넘는 듯하군."
질서 정연이란 표현 따윈 개나 줘버린 무질서함으로 인해 노련한 기사들도 적군의 규모를 똑 부러지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엑스케트의 독백처럼 천여 마리는 가뿐하게 넘겼으리라 추측되는 또 다른 군단의 출현에 모두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단 한 사람.
'거기 있냐?'
나만 빼고.
언데드 놈들이 수백 마리건 수천 마리건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탓이었다. 우리가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며 성 밖으로 나온 연유는 오로지 악령(惡靈)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함 아니었는가?
따라서 군집의 크기는 잠깐 논외로 두고 오직 악령의 유무를 확인하는 데에 온 신경을 쏟았고.
'어디냐, 어디… 아!'
씨익―
그 검증의 장에서 내 입술은 금세 치켜 올라갔다.
더 볼 것도 없이 저 무리의 중심에 검거나 붉은 통상적인 언데드와는 궤를 달리하는 새하얀 육신을 가진, 하늘로 대가리를 쳐든 채 아가리를 떡 벌리고 있는 괴물을 목도한 까닭이었다.
저놈이 바로.
띠링!
[귀곡성을 부르는 죽은 자들의 소리꾼, '세이렌(Seiren)'의 속삭임이 당신의 귓가에 닿았습니다.]
['오오라: 영혼을 갉아먹는 운율'의 청음을 시작합니다.]
[현 시간부로 지속적인 정신 피해가 적용되며, 누적 시간에 따라 '상태 이상: 정신 붕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의 최소 목표가 충족되었습니다.]
[조사단 단장 '엑스케트 폰 엑세트'의 결정에 따라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2)〉가 개방 또는 지연됩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타깃이자 새로운 2차 혹은 2차마저 뛰어넘은 3차 진화체 '세이렌(Seiren)'이었다.
- আমার কাছে এসো!! আমার কাছে এসো!!!! আমার কাছে এসো!!
* * *
"조장님, 단장님께서 부르십니다."
"가지."
"충."
세이렌.
죽은 자들의 소리꾼이란 이명을 지닌 신종 괴물과 대면한 즉시 엑스케트의 다급한 호출로 간이 회의가 열렸다.
당연했다.
- আমার কাছে এসো!!
"조장들도 봤다시피 드디어, 더불어 우리가 예측했던 대로 악령을 찾아낸 것 같군."
생환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시스템'이라는 도우미가 보조해 주지 않더라도 저 허여멀건한 놈의 주둥아리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하울링을,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고막을 찢어발기는 귀곡성과 직면한다면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필연적으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벌써 일주일째.
매일 정해진 시간, 정해진 방식으로 자신들을 괴롭힌 저주 섞인 목소리를 어찌 잊으랴.
그래서인지 말을 꺼낸 엑스케트도.
"이 빌어먹을, 확실하군요. 그놈입니다.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말을 받는 크라덴의 안광에도 진한 살기가 번뜩였다.
한 명의 사령관이기 이전에, 한 명의 기사이기 이전에 한 명의 '피해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죽이고플까?
더구나 저들은 늘상 먹이사슬의 최상층에서 군림하던 포식자였다.
칼 한 자루만 있어도 수백을 베던 찬란한 영광의 주인공들이 손 하나 까딱여 보지 못하고 빌빌거리며 사제의 도움만을 바란다는 건… 그저 고통스러웠다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으리라.
필시.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 그들로선 자존심에 엄청나게 스크래치가 나는 사건이었을 거고, 이를 방증하듯 내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살벌하게 피워 내는 살의에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이스.'
93화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은 1과 2가 구분된 연계 퀘스트.
한데.
[* 특이 사항 4: 조사단장 '엑스케트 폰 엑세트'의 선택 여하에 따라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2)〉로 연계됩니다.]
요 4번 항목에 기술돼 있는 것처럼 생환자들과는 상관없이 철저하게 조사단장의 의지에 의해 다음으로 넘어가느냐 마느냐가 정해지는 독특한 구조라 혹시나 세이렌을 둘러싼 수호병단의 등장으로 기가 죽으면 어쩌나 걱정했더니만.
'기우였네, 기우였어.'
괜한 고심이었다.
엑스케트의 현 심정? 슬쩍 불만 붙여주면 폭발할 듯 으르렁거리는 기세로 보아 어지간해서는 물러날 기미는 1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면.
내가 할 일은 한 가지.
"이에 조장들의 조언을 듣길 원해 이리 부르게 되었다. 이로써 조사단의 임무는 완수되었으니 이대로 귀환하는 게 맞겠지만...."
"감히 제가 한 말씀 드리자면, 저는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시도라."
"수천 마리, 단순히 숫자만 놓고 본다면 어려운 형국임은 명백합니다만."
"그걸 알면서도 시도해 보자?"
"충분히 겨뤄볼 만하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사령관으로서의 이성과 자존심에 상처가 난 호랑이로서의 본능이 부딪치고 있는 심상의 세계에, 점화를 기다리는 도화선에 불씨를 떨어뜨려 주는 것이었다.
어떻게?
척―
"제게 이것이 있으니 말입니다."
〈마법 스크롤: 역행의 모래시계/Magic〉
딱 봐도 이러라고 준 아이템을 통해서.
* * *
마법 스크롤 '역행의 모래시계'.
소위 쿨타임이라고 부르는 아이템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0으로 만드는 이 두루마리는 표기만 매직 등급으로 나와 있을 뿐.
소유자의 장비와 그때그때의 처치에 따라서는 레어, 나아가 그 이상의 활약도 노려볼 만한 특수한 녀석이었다.
고로 아끼는 게 더 나은 판단일지도 몰랐으나.
"마법 스크롤인가 보군."
"맞습니다. 장비에 각인된 능력을 연속으로 시전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역행의 모래시계라는 주문이 내장되어 있지요."
나는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었다.
성공한 사업가들의 공통적인 특징.
그것은 과감함이었다.
어차피 성패는 동전의 양면이며, 확률은 50 대 50일지니 스스로에게 확신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투자하라.
축약하자면 아끼다 똥 된다.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통장에 입금된 수십억 원도 갖다 쓰는 마당에 아이템에 목맬 리 없지.
그러므로 나는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고, 곧 엑스케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눈앞에 놓인 이 세 장의 종이가 가진 힘에 대한 설명을 전해 듣자마자 깨달은 모양이었다. 인간 오휘윤과 마법 역행의 모래시계가 합쳐졌을 때 어떤 시너지 효과가 발휘되는지를.
비로소.
"어떠십니까?"
"…이거,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친구군. 좀 더 자세한 계획을 듣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띠링!
[축하합니다.]
[대상 '엑스케트 폰 엑세르'가 투지를 피력했습니다.]
[정해진 조건이 충족되어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1)〉이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2)〉로 변경됩니다.]
다이너마이트의 심지에 화염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어둠을 밀어낸 태양이 완연하게 창공을 장악한 오전.
짤막하게 조장 회의를 끝낸 엑스케트는 홀로그램 화면을 장식한 메시지 내용대로 곧장 세르레퀴로 조사단 전원을 소집해 복수를 천명했다.
최저로 계산해도 30배에 달하는 수적 열세에도 정면으로 들이받겠다는 주장을 말이다.
혹 미친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비정상적인 선언.
그러나 불만을 표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크라덴을 위시한 20명의 기사들은 충성심을 빼면 시체나 마찬가지인, 엑세르의 명령이라면 설사 지옥 불구덩이 속이라도 웃으면서 달려드는 가장 충직한 검. 주인이 원한다면 300배가 차이 나는 전장일지라도 영광을 외치며 참전할 위인들이니 비판이 나오려야 나올 리가 있나.
그럼 생환자들은?
"오빠,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지?"
"걸어볼 만해. 너도 봤잖아. 레어 아이템."
"보긴 했는데...."
"더군다나 제단이 붕괴된 이상 도시 쪽은 슬슬 승기를 잡아 가고 있을 텐데, 그런 와중에 우리가 귀환이라도 했다가 혹여 그날로 메인 퀘스트가 종료되기라도 하면… 제단에 세이렌이라고 하는 신종 개체까지 줄줄이 등장하는 초대형 스케일의 퀘스트가 물거품이 돼버리는 거야. 이런 기회를 놓쳐선 안 돼."
"하, 모르겠다."
저들 또한 대다수가 낙관적으로 반응했다.
어젯밤의 나처럼, 서브 퀘스트의 진행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사이에 메인 퀘스트가 끝나 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승선이 목전인데 멈추고 싶은 선수가 있을까.
애초에.
길잡이이자 보호막이었던 기사들이 죄다 엑스케트의 본부대로 이곳에 남아 전쟁을 단행하겠다는데 홀로 '나는 복귀하렵니다!' 하고 등 돌릴 수도 없었고.
뭐가 됐든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성역은 결코 만능이 아니다. 단지 매우 잘 드는 날카로운 칼날에 지나지 않았기에 세이렌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변수 창출에 능한 생환자들의 참여가 필수였으니까. 엑스케트의 가슴에 불을 붙일 수 있던 전술부터가 3조 조원들의 스킬적 협력이 이뤄줘야만 실현 가능한 아이디어였고.
당장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위험 부담을 감안해 가급적 감춰 두려던 반지를 공개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동료의 적극성을 끌어내는 데 있어서 안전장치의 유무만큼 분명한 게 없거든.
이런 노력 덕분인지 자의든 타의든 조사단원 전체가 한데 뭉쳐졌고, 나는 적잖게 흡족한 표정으로 이들을 응시하며 간부진들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수립한 작전을 천천히 읊어 나갔다.
전쟁의 포문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대강 30여 분이 흐른 이후였다.
* * *
"유림 씨, 준비되셨습니까."
"후우, 네."
내 물음에 짧게 호흡을 가다듬고는 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정유림.
그 모습을 보며 엑스케트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작게 주억거린다. 언제든지 신호만 달라는 무언의 응답.
오케이.
스으윽―
사령관의 승인에 손바닥을 쫙 펼친 오른팔을 들어 올린다.
끼이이이이이익―
투웅!
발사되기만을 고대하던 화살이 대기를 갈랐고.
…콰아아아앙!!
그 직후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이 일었다.
전신을 휘감고 있던 마력을 방출하며 발한 굉음의 여파는 스킬의 위력과 별개로 가히 무지막지했다.
언데드 군단에게 제2의 본진이나 다름없는, 절대적으로 안전해야 할 공간에서 벌어진 테러였으니 난리가 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따름.
"…끼에에에에에엑!!"
"…그어어어어어!"
"으아아아아아!"
…
…
듀라한에서부터 좀비에 이르기까지 방진을 구성하던 놈들이 한꺼번에 대가리를 돌려 소음의 근원지를 쫓았고, 흥분한 물소 떼를 연상케 하듯 삽시간에 우르르르 떨어져 나와 질주하는 광경은 꿈에 나올까 무서운 행진이었다.
만약.
[기본 스킬: 은신처 생성]
우우우우우웅―
[투명한 장막이 당신의 주위를 차단합니다.]
['은신처' 내에 머무르는 동안 이동 속도가 50% 하락합니다.]
[생물 및 사물과의 부딪침 등 특이 상황 발생 시 '은신처'가 즉각 해제됩니다.]
[현재 '순간 증폭(발현자: 김학진)'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은신처'의 최대 범위가 15% 증가하며 이동 속도 하락율이 30%로 고정됩니다.]
저놈들의 목표가 우리였다면.
스윽―
슥 ―
'이동한다!'
정유림의 스킬로 이목을 끌고 곧바로 최창조의 은신으로 자취를 감춘 우린 서로를 바짝 끌어당기며 은밀하게 행군을 실시했다.
김학진의 버프로 약점들이 일부 해소됐다고 한들 노말 스킬이라 덕지덕지 붙은 제한 요소로 도통 스피드가 나오지 않았으나 여유롭게 일보 일보를 내디뎠다.
저벅―
저벅―
3km, 2.5km, 2km....
느리든 빠르든 상대와의 간격은 착실하게 좁혀지고 있었거니와 애당초 이 조잡한 발상으로 세이렌에게 닿을 리 만무한 터라.
"으어어어어어어어어!!"
타다다다다닷―
쿠웅!
"으어어어?"
[충격이 발생했습니다.]
['은신처'가 해제됩니다.]
"딱 좋네."
기어이 눈먼 좀비와 충돌해 스킬이 파훼되었음에도 나는 미소를 금치 못했다. 언덕에서 출발한 것치고 세이렌과의 거리를 무려 3분의 1이나 줄였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2페이즈로 건너가 볼까?
"전원!! 전속 돌진!"
이그니스(ignis) 류(流).
직뢰(直雷).
파직―
콰아아아앙!!
* * *
대세이렌 공략전의 1페이즈가 '잠입 액션'이었다면 2페이즈의 테마는 전력을 다한 '중앙 돌파'.
마치 가속에 가속을 더한 기병대가 보병 부대의 중심을 반으로 가르듯.
서른한 명의 전사들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필사의 각오로 창칼을 앞세우며 진격을 거듭했다.
삐이이익!
[경고!]
[죽음으로 이루어진 작은 파도를 이끄는 목 잃은 기사, '듀라한(Dulachán)'이 당신을 주시했습니다.]
[피와 죽음을 쫓는 추살자, '레드 구울(Red Ghoul)'이 당신의 생명력을 포착했습니다.]
[썩어 문드러진 부패한 망자, '베놈 데드(Venom Dead)'가 당신의 생생한 체취를 맡았습니다.]
['오오라: 검은 망령의 파문'과 접촉했습니다.]
['오오라: 추살자의 원념'이 육체에 들러붙습니다.]
['오오라: 세상을 더럽히는 시취'가 불어닥칩니다.]
…
…
언데드 놈들이 우리를 가로막으려 온갖 스킬을 남발하며 들러붙었으나, 선봉으로 나선 엑스케트의 크라덴의 진심을 저지하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नीचे गिर जाओ, गिर जाओ, नीचे गिर जाओ!!"
['세이렌의 속삭임: 쇠약'이 울려 퍼집니다.]
[저항력이 부족한 모든 대상의 육체 능력이 20% 하락합니다.]
매번 똑같은 주문을 읆던 세이렌이 몸소 나서서 저주를 걸었으나.
투둑―
촤아아아악!
"어딜."
['마법 스크롤: 역행의 모래시계'가 발동되었습니다]
[효과가 적용될 아이템을 지정해 주십시오.]
['성역: 신성한 결계'에 내장된 모든 마법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됩니다.]
그마저도 소용없었다.
우리의 곁에는 쿠스토디아(custódĭa)라는 수호신이 함께였기에.
신성 마법(神聖 魔法).
성역(聖域).
우우우우우우웅!!
['성역'이 전개되었습니다.]
[공간 내에 진입하는 모든 아군에게 씌워진 각종 저주가 소멸됩니다.]
[공간 내로 접근하는 모든 종류의 사악한 힘을 파훼합니다.]
['세이렌의 속삭임: 쇠약'이 해주 및 차단됩니다.]
잡귀의 귀엣말 따위는 단숨에 박살 내는 철퇴.
['성역'의 지속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비록 인간이 제작한 성물의 한계로 채 5분도 가지 못했지만.
"…पागल हो, पागल हो, पागल हो जाओ!!"
['세이렌의 속삭임: 혼란'이 울려 퍼집니다.]
[저항력이 부족한 모든 대상의 정신이 붕괴됩니다.]
"응, 안 들려."
촤아아아아악!
또 찢으면 그만.
이 미친 연계 덕에 우린 바람을 탄 쾌속선처럼 순식간에 3분의 2지점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일견하기에는 3장의 마법 스크롤을 모조리 동원해 놓고도 '겨우?'라는 의구심이 드는 성과였으나 전황 자체는 의외로 평탄했다.
사리 분별하지 않고 일단 적이 나타나면 마구잡이로 퍼붓고 보는 언데드 특유의 특성에 걸맞게 소환된 성역을 깨부수느라 막대한 양의 사기(死氣)를 남발한 반동으로 세이렌의 저주도 오오라 같은 기초적인 단계까지 전락한 실정이라.
"안델!"
"칼리야스의 빛이 어둠을 몰아내리라!"
안델 혼자서도 커버가 되는 수준이었으니까.
다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좋아라 할 처지는 아니다. 세이렌의 사기가 바닥났듯 우리의 마력도 가파르게 소진되어 가는 추세라 이대로 가다간 악령의 멱을 따기는커녕 가다가 지쳐 쓰러질지도 몰랐기에 체력을 아낄 필요가 있다.
이 말인즉슨.
"젠슨! 카르켈! 가져와라!"
"충!"
"충!"
3페이즈로 전환할 시기라는 이야기였다.
참고로.
3페이즈의 테마는 '시신'이었다.
"그어어어어어!"
94화
대세이렌 공략전의 3페이즈.
그 이름하여.
"조장님! 잡아 왔습니다!"
"선두로!"
"충!"
"그으어어억! 그어어억!"
"내가 먼저 받지."
후우우우우욱―
콰직!
[현재 '중독: 미약한 감염' 상태입니다.]
[빠른 시간 내에 치료하지 않을 시 '상태 이상: 좀비화'가 진행됩니다.]
[좀비화 진행률: 1%]
동기화(同期化).
"다음은 내가 받겠다."
"충! 카르켈, 너는 가서 한 마리를 더 잡아 와라."
"알겠습니다, 형님."
언데드 군과의 전쟁에서 체력적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아주아주 특별한 방법.
시간이 지날수록 감각에 문제가 생기고, 그대로 방치할 시 최악에는 진정 썩은 시체 덩어리가 될지도 모르는 심히 불안정한 전술이었으나.
"음, 이런 느낌인가. 썩 달갑진 않군."
"그러게 말입니다."
최초의 감염자가 된 엑스케트도, 그 뒤를 이어 손목을 내준 크라덴과 리하인을 비롯한 스물아홉 명의 단원들은 께름칙한 표정과는 달리 순순히 바이러스를 받아들였다.
누군가는 흠집이 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누군가는 생존과 공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보기 위하여.
"다시 한번 강조했지만, 다들 명심하십시오. 시야가 흐려지는 즉시 마시는 겁니다."
사전에 전파한 경고를 되새긴 이들은 품 안에 물주머니를 툭툭 쳐보고는 잠시 멈췄던 창칼을 재차 휘둘러나갔고, 나도 그 대열에 동참하고자 서둘러 좀비의 아가리에 팔목을 물렸다.
정확히.
"그어어어어어!!"
"옳지, 거기 물어라."
후우우욱―
카각!
"…그어어억?"
갑옷으로 가려진 부분을.
이 기이한 행동에 계속해서 피 맛을 즐기던 좀비가 일순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으나, 나는 꿋꿋하게 완갑을 내주며 슬그머니 소매에 핏물을 묻혔다.
앞서서 살점을 내준 단원들이 봤다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욕을 했겠지만 딱히 방도가 없었다.
'내성의 영역'에 도달한 사람은 내가 전부였고, 인간이란 제 눈으로 본 것만 믿는 족속이었으니까. 따라서 이러저러해 부득이하게도 전 빠져야 합니다… 하고 말해 봐야 저들에겐 그저 몸 사리는 쓰레기로만 비칠 터이니 괜한 오해를 피하려거든 연기라도 해야지.
여하간.
우득―
털썩
"안델! 우리도 갑시다!"
"그러시지요!"
바닥에서 푼 혈액으로 손목이 흥건해질 즈음 이빨을 내줬던 좀비의 대가리를 깨며 몸을 일으킨 나는 안델을 데리고 얼른 조사단원들의 뒤를 쫓았다.
좀비화라는 건 단순히 스태미나가 무한대로 조정되는 걸 넘어 언데드 종족과의 싸움에서 제일 거슬리고 위협적인 '감염'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의미했기에, 공격 일변도의 자세로 변모한 30여 기의 인간 전차는 살갗이 찢어지든 말든 일절 개의치 않고 오직 목표만을 향해 시선을 고정해 둔 채로 앞을 가로막는 모든 걸 짓뭉개며 밀고 나가는 중이었다.
파죽지세(破竹之勢)라는 표현을 쏙 빼다 박은 맹렬한 돌진.
"ना आओ ना! आओ!!"
이런 우리의 열의가 전달됐는지 알아먹지도 못할 언어로 나불거리며 몸을 부르르 떠는 세이렌.
그러는 동안에도 놈과의 간격은 더더욱 줄어 어느새 3분의 1이 약간 못 되는, 길이로 환산하자면 대략 1km 안팎으로 접어든 상태였다.
지금처럼 무난하게만 진행된다면 길어야 10분에서 속도만 붙으면 5분 내로도 끊을 수 있을 만큼 인접한 위치라 전체적인 판도를 볼 때 우리 쪽으로 승기가 기울었다 말해도 과언―
"됐다! 던져!"
"지, 진짜 나누는 거다?!"
"맏으라니까!"
…이 아니었으나 오늘도 내 인생은 그다지 평탄치 않았다.
"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순조롭던 흐름을 깨는 반동분자들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하극상 파벌.
조충수와 김학진이었다.
슬슬 타깃이 눈에 들어오니 욕심이 동한 건지, 좀비화가 되면서 사고 회로가 마비라도 된 건지.
이미 한 번의 빨간 줄이 그어졌음에도 다시금 제멋대로 진열을 이탈해 독자적으로 진형을 꾸리는 두 양아치. 기사들의 도움도 없이 꼴랑 둘이서 뭘 어쩌겠다고 나대는 걸까 싶었지만, 기생충들에게도 계획이 다 있었다.
"더, 던질게!"
"빨리!"
두 양아치가 세운 전략은 나도 꽤나 자주 애용한.
뽕―
스으으윽!
…촤아아아아악!!
땅바닥에 포션 뿌리기.
일명 '임시 성역화(聖域化)'였다.
"끄어어어어어!!"
"그어어어어!"
…
…
세이렌 업적 달성을 위하여 하급에 중급 포션조차 싹 다 털어 넣기로 작정했는가.
선홍빛 소나기가 필드를 뒤덮을 때마다 좀비고 구울이고 심지어 레드 구울 등 2차 진화체들까지 살의를 잊고 좌우로 물러나기 바빴고, 그 덕택에 두 양아치는 흡사 모세의 지팡이가 가른 홍해를 지나듯 굉장히 매서운 속도로 전장을 주파하며 세이렌과의 간극을 줄여나갔다.
저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간 기껏 공들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판국.
"…저, 저!"
"오빠! 뭐 해! 우리도―"
…
…
그런 탓에 선수를 빼앗긴 3조의 조원들이 당혹스러운 음성을 토해 냈으나.
"음."
나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당황? 초조? 불안?
전혀.
도리어 싱긋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환두대도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당면한 상황과는 완전히 상반된 스탠스에 외려 추이를 지켜보던 안델이 더욱 놀라 옆을 돌아볼 지경.
확실히 일반적인 대응이라고 하긴 힘들었지만, 이러는 데에는 그만한 사유가 존재했다.
"가만히… 놔두시는 겁니까?"
"제가 사는 지역엔 이러한 속담이 있습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쥐? 고양이?"
"쉽게 설명해서 누구든 죽음과 같은 위기에 내몰리면 설사 눈앞의 적이 엑스케트 님에 비견되는 기사라 할지라도 이 악물고 덤벼든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은...."
"당장은 산송장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게 아닐지도 있지요. 그런 점에서 방어 마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방어 마법, 이해했습니다. 바로 시전 하지요. 칼리야스의 견고한 빛이여."
궁서설묘(窮鼠齧猫).
한낱 짐승도 살고자 하거든 천적 관계 따윈 무시하기 마련인데, 하물며 상대는 최소 수백 명의 생명을 씹어 삼켜 탄생한 악귀 아니던가.
"돼, 됐다!"
"으아아아아아아!!"
방심은.
"मैं हां, मैं हां! मैं ना मरना!!"
후우우욱―
사아아아아아아아!!
절대 금물이었다.
['분노의 아리아'가 울려 퍼집니다.]
[저항력이 부족한 모든 대상에게 '중상급 병증: 뇌진탕' 및 '상태 이상: 강한 발작'이 적용됩니다.]
* * *
반투명한 메시지가 출력되는 것과 내가 대지를 박차고 도약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타닷―
휘우우우욱!
99%.
실상 100% 사고가 발생하리라 예상하고 있었기에 대처가 신속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
풍력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단 나는 새하얀 신성력이 안델의 손끝에서 빛을 발하자마자 돌부리를 발판 삼아 날아올랐고, 단숨에 최전방에서 질주하던 엑스케트와 크라덴의 옆으로 다가가 지체하지 않고 손가락에 모인 마력을 외부로 방출했다.
신성 마법(神聖 魔法).
빛의 방패.
우우우웅―
부지불식간에 전면을 에워싸며 전개되는 푸른색 베일.
손발로 빚어내는 물리력은 물론 마법적인 공격까지 싸그리 튕겨 내는 이 천상의 무구가 강림한 찰나 세이렌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 붉은 기류가 유리를 덮쳤다.
…콰아아아앙!
"큽!"
안델이 한 겹, 그 위로 내가 또 한 겹을 더해 총 두 겹의 방어막이 투하된 대미지를 온전히 상쇄해 냈음에도 불구하고 뒤쪽으로 밀려오는 강렬한 충격파.
엄연히 광역기인 데다 뇌진탕에 발작을 유발하는 CC기적 요소마저 갖춘 스킬인 주제에 대체 무슨 파괴력인지.
뭐.
이로써 한 가지는 확고해진 것 같았다.
'틀림없어. 저놈 3차다.'
여태껏 최상위 개체로 군림하던 듀라한, 레드 구울, 베놈 데드의 시절은 끝이 났고… 바야흐로 이제는 제단의 은둔자 거인형 언데드와 전장의 악령 세이렌을 필두로 하는 대3차 진화체들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
안 그래도 에픽 퀘스트 열려 향후의 임무 난이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할 터인데, 참으로 절망적인 소식에 절로 일그러지는 미간.
하나.
금세 머리를 휘휘 저으며 뇌리를 잠식해 가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털어냈다. 언젠가는 닥치게 될 운명. 지레 겁먹고 벌벌 떨어 봐야 좋을 게 없기에 나는 늘 그래 왔듯 하나만 명심하면 될 일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암.
이 만고불변의 진리만 꽉 붙들어 매고 가보자고.
"끄읍!!"
"커헉!"
그렇게 각오를 다지는 사이 멀지 않은 곳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치솟았다.
한순간의 욕망을 이겨 내지 못하고 눈이 멀어 날뛰던 두 남자, 조충수와 김학진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신음이었다.
포션으로 이룩한 성역은 기본적으로 '임시'라는 꼬리표가 달린 불완전한 형태라 언데드 놈들의 접근을 제한하기에는 용이했을지 몰라도 세이렌의 음파를 피해 가기에는 너무나도 무력했다.
그러게 왜 마땅한 대비책도 없으면서 남들이 하지 말라는 것만 족족 골라 함부로 설쳐 대냐고.
…진짜 고맙게.
제단을 파괴할 때도 정유환의 반대를 무릅쓰고 물심양면으로 날 도와주더니만, 이번에도 손수 나서서 세이렌이 지닌 비장의 한 수를 밝히는 걸로도 모자라.
"단장님! 제가 저 괴물의 공세가 재개되지 못하게 막겠습니다! 두 사람을 구해 주십시오!"
"내가 가겠―"
"창피하지만 저 혼자서는 동료들을 둘이나 이고 후방으로 이송할 수 없습니다!"
"젠장, 크라덴! 따라와라!"
"충!"
여기에 엑스케트와 크라덴이라는 강력한 경쟁자들을 떼어 낼 명분도 손수 만들어 주다니.
설령 규율 따위는 밥 먹듯이 어기는 부하들일지라도 동료라면 꼭 구해 내는 의리남 이미지 획득은 덤까지 얹어서.
정말이지.
남들이 뭐라든 간에 내게 있어서 너희는 천사다, 천사야. 평생 갚아도 부족할 은혜를 선사해 준 은인.
그러니 꼭 살아남길 바랄게.
꽈아아아악―
"자, 그러면 단독 무대도 세팅됐겠다. 메인 콘텐츠를 즐겨볼까?"
"की! क्यों न गिर जाओ!"
"그래, 그래. 나도 이때만을 기다려 왔단다."
반드시 생존해서 향후에도 날 위한 밥상을 차려 줘.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이그니스(ignis) 류(流).
직뢰(直雷).
휘우우웅―
파직―
양손에 나눠 쥘 숟가락과 젓가락은 항상 최고급으로 구비해 둘 테니까.
"후, 하아!"
이중 스킬 결합.
오휘윤 류: 뇌령 돌파.
툭―
촤아아아아아아악!!
* * *
띠링!
[귀곡성을 부르는 죽은 자들의 소리꾼, '세이렌(Seiren)'을 처치했습니다.]
[축하합니다!]
[〈10인 한정 업적: 최초의 세이렌 사냥꾼〉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많은 경험치' 및 '끈질긴 추적자', '기술 서적: 멘탈리티 가드', '마력 전이석: 대형', '기술 임의 습득권: 세이렌'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95화
[ 거인 ]
대기가 둘로 나뉘고 그 틈으로 스며든 벼락이 공간을 부순다.
뇌성벽력을 일으키며 뻗어 나간 횐두대도의 끝자락이 세이렌의 허연 몸통에 틀어박힌 직후, 나는 굳이 허공에 새겨지는 문장의 파도가 완성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놈의 명줄이 완벽하게 끊어졌다는 것을.
두 번도, 세 번도 필요하지 않았다.
단 일격.
마치 썩은 짚단을 베어 내듯 단칼에 세이렌의 상반신이 통째로 베여 공중으로 치솟았다.
하위 개체인 듀라한과 레드 구울만 하더라도 S 랭크 스킬인 섬광(閃光)을 기본 서너 방은 가해야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과 다르게 이놈의 방어력은 거짓말 좀 보태서 흐물거리는 두부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디버프가 주력인 마법사 타입이고 또 내 나름 최강의 기예인 '뇌령 돌파'에 적중당했다고는 하나, 그걸 고려해도 3차 진화체가 이렇게 허약한 게 말이 되나 싶어 잠시 의아하기도 했지만.
"…아, 그런 건가."
의외로 머릿속에 차올랐던 물음표는 금방 해소되었다.
언데드란 종족이 가진 힘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진화(進化)'였으니까.
현재의 듀라한이 있으려면 과거의 구울이 있어야 하고, 과거의 구울이 있으려면 태초의 좀비가 있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저 세이렌 놈의 육신이 어째서 이리도 물러 터졌는지 대충 추론이 가능했다.
"베놈 데드, 그놈의 진화판이었네."
약골의 몸뚱어리가 모체였기 때문이었다.
순전히 추측이라 틀릴 확률도 있다. 그러나 주요 기술이 광역 피해에 특화된 부류라는 점에서 예측이 맞을 거란 확신을 가졌다.
혹, 아니었다면 2차 진화체가 수십 단위로 출현하는 현시점에서 비슷한 계열의 언데드가 나타났겠지.
데구르르르―
툭―
"안 그래?"
중력의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지면으로 추락한 세이렌의 대가리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나는 도신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손목 스냅으로 떨궈 내며 몸을 일으켰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크라덴! 업어라!"
"충!"
때마침 엑스케트와 크라덴이 피거품을 문 채로 혼절한 조충수와 김학진을 구해 안델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포션의 효과가 남아 있던 덕분에 좀비 놈들에게 목을 물어뜯기는 참사는 면했으나, 워낙 증세가 심각해 치료를 받는다 한들 당분간은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정양해야 할 거 같은 몰골에 묵념으로 애도를 표했다.
저들도 해피 엔딩을 꿈꿨을 텐데.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는 말어."
띠링.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2)〉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상당한 경험치' 및 '굳건한 정신', '영혼석 교환권(×2)', '기술 서적: 일기당천'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노잣돈은 두둑하게 받아 가잖냐.
솔직한 얘기로 만약 내가 진심으로 악독하고 지독하게 굴었다면, 〈특수 퀘스트: 죄악의 단죄〉로 엮었던 죄인들의 최후처럼 군법을 운운하며 목을 베고 가진 물건은 속옷 한 장 안 남기고 모조리 벗겨 갔을 터.
고로 활약도가 거의 0에 수렴하는 것치고 매우 아름다운 마무리였다.
"자, 그럼 남은 공적치를 수확하러 가볼까?"
* * *
"…예서 휴식한다!"
"충!"
아침 9시경.
좀비화와 샘물 복용을 반복하며 세이렌을 포함해 총 이천여 마리의 언데드 군단을 궤멸시킨 우리는 시체 썩은 내로 가득한 전장을 벗어나 적당한 장소에 자리를 잡고 한동안 쉬는 시간을 가졌다.
만병통치제에 가까운 '생명의 샘'으로도 커버되지 않을 만큼 극한으로 몰아붙인 탓에 육체는 육체대로, 멘탈은 멘탈대로 망가진 터라 적어도 점심까지는 쪽잠이라도 청하며 회복에 전념해야 할 성싶었으니까.
"으잇차. 어이고야. 죽겠다."
나도 그랬고.
공적치를 조금이라도 더 높여보겠단 심산으로 난리를 친 까닭에 무릎이고 허리고 온몸이 죄다 삐걱거렸다.
어쨌거나 제단에 세이렌에… 게임으로 치면 희망찬 미래를 주절거리며 레이드 공대를 꾸려 놓고 막상 보스 몬스터는 날름 독식한 쓰레기 공대장 포지션이 된 처지라 일반 몹에 해당하는 나머지 언데드들은 정유환 등에게 몰아줬으나, 애초에 규모 자체가 무지막지하게 큰 전쟁이라 대부분 양보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음에도 누적된 피로감이 상당했다.
꿀꺽―
꿀꺽―
"하."
['생명의 샘물'을 복용했습니다.]
[모든 해로운 효과가 소멸합니다.]
[10분간 자연 치유력 및 피로 회복 속도가 200% 상승합니다.]
하여 물주머니에 챙겨 두었던 샘물을 탈탈 쏟아부으며 도핑을 마친 나는 입가에 묻은 물기를 손등으로 훔치며 슬쩍 주위를 돌아봤다.
다들 퍼지다 못해 기절했는지 경계조를 자처한 안델을 제외하고는 철인 같던 엑스케트나 크라덴마저 나무에 등을 대고 숙면을 취하고 있을 정도로 조용한 일대.
"좋아."
이따금씩 무의미하게 쳐다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도 이쪽에 관심이 없다는 걸 확인한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품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질긴 라우타우루스의 가죽 방어구' 안에 받쳐 입은 내의 주머니로 검지를 가져다 대자 툭 하고 걸리는 묵직한 촉감.
세 권의 책과 두 개의 장신구, 두 장의 종이와 큼지막한 보석이 한데 모여 선사하는 황홀한 무게감이었다.
"허."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발치에 내려둔 나는 연신 새어 나오는 감탄사를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메인 퀘스트도 아니고, 고작 서브 퀘스트 한 번 깬 것으로 이만한 보상을 수거하게 될 줄이야.
더군다나 이건 제단 파괴 업적 전리품이 빠진 구성.
이미 흡수를 끝낸 아이템들까지 감안하면 조사단 원정은 그야말로 초대박이었다. 나는 그 화려한 성과에 방점을 찍어줄 첫 번째 보물을 손에 쥐었다.
〈끈질긴 추적자/Rare〉
세이렌의 허여멀건한 피부를 쏙 빼닮아 순백으로 빛나는 나침반을.
〈끈질긴 추적자/Rare〉
* 수많은 정적들의 암살 시도로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살아가던 한 귀족의 의뢰를 받아 제작하게 된 나침반이다. 각 생물이 지닌 고유한 마력 파장을 기억 및 각인해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역추적해 가는 방식이다. 마수(魔獸) '집요하고 재빠른 우르수스의 정순한 영혼석'을 장착하여 추격전의 핵심 요소인 '속력'과 '인지력'을 큰 폭으로 향상시킨다.
* 마법 '끈질긴 추적자' 사용 가능/마법 '천상의 사슬(재사용 대기 시간: 72시간)' 사용 가능/소지 시 속력 및 인지력 최대치 15% 향상
└끈질긴 추적자: 어떤 식으로든 '접촉'이 발생한 대상의 마력 파장을 기반으로 상대의 위치를 특정한다. 단, 상대와의 거리가 10km 이상 벌어질 시 또는 특별한 상황 및 환경으로 마력 파장을 읽을 수 없는 경우 효력을 상실한다.
└천상의 사슬: 원수를 찾아내도 구속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것. 천지 사방에 마력을 흩뿌려 튼튼하고 질긴 사슬을 소환한다.
딱 세이렌의 광역 어그로를 저격하는 물건.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3번 옵션이었다.
"미친. 속력에 인지력 15퍼센트?"
무려 마수의 영혼석을 박아 넣은 아이템.
'성역: 신성한 결계'에서 얻지 못했던 스탯 증가에 입꼬리가 걸릴 듯 치솟았다. 그래, 이거지. 이래야 레어 등급이라고 할 수 있지.
…화아아아악!
- 하, 매직 등급이라니! 이게 말이 돼? 진짜 휘윤 님께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지.
- 오빠! 영혼석 뭐로 받을 거야?
- 아마 근력이나 체력, 아니다. 속력에 투자해 볼까.
- 필슨, 또 사진 보냐?
- 우리 아들 잘생긴 것 좀 봐.
- 배고픈데.
…
…
'어후.'
나침반 끈을 검대에 걸자마자 순식간에 증폭되는 오감.
도심 한복판에서 내내 켜 두었던 블루투스 이어폰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갑자기 오프한 것처럼 급격하게 귓구멍을 파고드는 온갖 소음으로 잠깐 놀라기도 했지만, 이에 적응하는 순간 내 생존율도 폭발적으로 상승하겠구나 싶은 생각에 귀에 걸린 입꼬리가 영 내려오질 않았다.
만족하기는 아직 한참이나 일렀는데 말이다.
〈기술 서적: 멘탈리티 가드/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기술 '멘탈리티 가드' 습득
└멘탈리티 가드(mentality guard): 도발, 저주, 혼란 등 정신을 파고드는 모든 종류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심상 세계 전용 보호벽을 세운다.
〈기술 서적: 일기당천/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기술 '일기당천' 습득
└일기당천(一騎當千): 반경 3km에 존재하는 적군의 숫자가 '1,000'을 넘어갈 경우 숫자에 비례하여 일시적으로 모든 신체 능력치가 소폭 향상한다.
〈기술 임의 습득권: 세이렌/Rare〉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세이렌이 지닌 기술 중 한 가지 획득 및 습득한 기술에 부합하는 신체 능력치 소폭 상향
* 목록: 세이렌의 세 가지 속삭임(상세 보기▼)/오오라_영혼을 갉아먹는 운율(상세 보기▼)/분노의 아리아(상세 보기▼)/호출하는 자(상세 보기▼)
└세이렌의 세 가지 속삭임(A): 음파를 발산해 다수의 적에게 '쇠약', '혼란', '매혹' 중 한 가지 저주를 부여한다. ⊂ 상승 능력치: 마력
└오오라_영혼을 갉아먹는 운율(A): 특정한 운율을 읊어 상대에게 지속적인 정신적 고통을 가한다. ⊂ 상승 능력치: 마력
└분노의 아리아(A): 기습적으로 포효해 일정 공간 내에 존재하는 모든 적에게 마력으로 이루어진 음파를 뿜어낸다. ⊂ 상승 능력치: 근력
└호출하는 자(A): 자신이 지정한 '아군'에게만 들리는 하울링을 터트린다. ⊂ 상승 능력치: 인지력
요번에도 레어 등급 아이템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스킬을 고르면, 스탯도 오른다고?"
〈10인 한정 업적: 최초의 제단 파괴자〉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열 명의 생환자에게만 소유권이 허락된 3차 진화체의 기술 임의 습득권.
개체의 등급도 올라갔으니 스킬 북의 등급이나 옵션도 그에 맞춰 알맞은 수준으로 올라가겠거니 짐작이야 하고는 있었지만.
"3차 진화체 관련 업적을 절대 놓쳐선 안 되는 이유가 또 생겼네."
애당초 남에게 빼앗길 마음 따윈 눈곱만치도 가져 본 적 없으나, 실체를 마주하고 나니 더더욱 각오가 확고해졌다.
나는 그리 읊조리며 멀지 않은 곳에서 정유림과 보상에 대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정유환에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살짝 사과를 건넸다.
본래는 별거 아니었으면 관계 유지를 위해 그에게 싸게 넘겨줄 예정이었는데 계획을 수정해야 될 모양새였으니까.
"미안합니다. 이것도 제가 먹어야겠네요."
스탯이 얼마나 상향될지는 써 봐야 알겠지만, 훗날 삶의 최종 장에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려면 단 1%라도 싹싹 긁어모아야 했다.
96화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기술 '분노의 아리아(A)'의 지식을 전이합니다.]
[근력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9% 향상됩니다.]
우득―
우드득―
"으음!"
짧지만 신중한 고민을 거쳐 결정을 마치자 강렬한 두통을 기점으로 전신의 근육이 찢어지고 붙기를 거듭하며 점차 질기고 유연하게 바뀌어 간다.
9%.
마수급 영혼석에 비하면 낮게 느껴질지라도 영물급 영혼석 두 개는 합쳐야 비등비등한 레벨의 상승량은 변화라는 걸 명확하게 실감시켜 줄 만한 수치였다.
['비상하는 울루르의 영혼석'을 복용했습니다.
[풍(風) 속성력의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5% 향상됩니다.]
['발전하는 토르페도의 영혼석'을 복용했습니다.]
[뇌(雷) 속성력의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5% 향상됩니다.]
그 과정에서 두 장의 영혼석 교환권도 사용해 속성력을 높였다.
아무래도 새로운 이그니스(ignis) 류(流)와 파스마(phasma) 류(流)의 조각을 찾아내지 않는 한 변동이 거의 없는 스탯들이라.
내구력이 빠지긴 했지만, 대형 전이석으로 마력 통도 키우는 등 이래저래 주요 스펙은 대체로 한 차례씩 강화해 뒀으니 이번에는 속성력에 투자하는 쪽으로 결론을 지었다.
"후, 하면 요건 됐고, 애피타이저는 이 반지인가."
그렇게 흡족한 표정으로 도핑을 마친 나는 마지막으로 순번을 기다리고 있던 반지를 주워 들었다.
〈굳건한 정신/Magic〉
* 칼리야스 교단 소속 대장간에서 제작한 반지. 신성 마법 '무너지지 않는 신념'을 각인하여 착용한 이의 정신 방어력을 북돋워 줄 뿐 아니라 위급 시에 '신성 마법 주문: 영혼의 치유'를 사용할 수 있다.
* 착용 시 모든 정신 방어력 30% 상승/신성 마법 '영혼의 치유' 사용 가능(재사용 대기 시간: 24시간)
└영혼의 치유: 지정한 대상의 '상태 이상(후천적 요인으로 인한 정신 계열)'을 치유한다.
"으흠, 끈질긴 추적자가 창이면 이건 방패인가."
명칭에서부터 대강 예상했던 대로 설계된 반지를 요리조리 살펴보다 빈 손가락에 끼워 넣고서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변경된 몸에 적응하기 위해 천천히 팔다리를 풀어 주며 작은 창 하나를 띄웠다.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의 서브 퀘스트를 열람합니다.]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이 개방되던 시기에 체크했던 서브 미션 목록이었다.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2)〉 일정으로 인해 바깥을 싸돌아다니느라 뭐가 남았는지 기억이 안 나 귀환 전에 빠른 진행 루트를 재정립할 요량으로 스크롤 바를 쭉 내리며 리스트를 읽어 내려갔다.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의 서브 퀘스트를 열람합니다.]
1. 직급 쟁탈 / 부분 달성
2. 용맹한 조사단 / 완료
3. 가장 높은 전공 / 자동 진행 ⊂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 성공 시 자동 완료
4. 편지 전달 / 진행 중
5. 성벽 보수 / 경쟁 ⊂ 타 지원자가 현재 진행 중
6. 주민용 식량 및 물자 배급 / 경쟁 ⊂ 타 지원자가 현재 진행 중
7. 청혼
8. 소소한 사냥 내기
9. 소소한 사냥 내기(2) / 소소한 사냥 내기(1) 달성 시 진행 가능
10. 아이들의 웃음소리 / 종료 ⊂ 타 지원자에 의해 완료됨
11. 예비군 훈련 교관 / 경쟁 ⊂ 타 지원자가 현재 진행 중
12. 징발 / 경쟁 ⊂ 타 지원자가 현재 진행 중
13. 도제 찾기
* 수행 가능한 서브 퀘스트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뭐가 많이 생겼네."
며칠이나 흘러서 다시 열어 본 화면은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부분 달성, 완료, 종료, 경쟁....
여태껏 다른 생환자들과 이틀 이상을 동행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보니, 아예 없나? 아무튼 외부로 나온 나와 달리 도시에 남은 이들도 바보가 아닌지라 각자 동분서주하며 일거리를 확보하고 다니는지 다섯 개 개의 임무가 클리어되거나 선점한 실정.
"이러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절반이 좀 넘는 건가?"
어후.
많이들 채가셨네. 그나마 제일 굵직한 놈은 내가 차지한 듯하니 다행이다만, 아쉬운 한숨이 입 안을 맴돌았다.
만약 내가 그날 다른 길목으로 돌아갔다면, 편지를 전달하러 가던 차에 〈특수 퀘스트: 죄악의 단죄〉에 휘말리지만 않았어도 전부 독점했을 건데.
"쯧, 됐다. 지나간 일에 미련 둬서 뭐 하냐."
그 덕에 루데오 백작의 보고에도 출입해 보고, 매직 등급 무기인 '날카로운 독수리의 장창'을 비롯해서 노말급이긴 해도 이거저거 왕창 땡겼으니 쌤쌤이로 치자.
남은 것들만 잘 해결해도 도합 여덟 개에 이르는 분량이기도 하니 메인 퀘스트 참여율이 약간 부진하더라도 그만하면 S 랭크를 따내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
삑!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의 서브 퀘스트를 열람합니다.]
1. 직급 쟁탈 / 부분 달성
2. 용맹한 조사단 / 완료
…
…
8. 소소한 사냥 내기 / 삭제
9. 소소한 사냥 내기(2) / 소소한 사냥 내기(1) 달성 시 진행 가능 ⊂ 퀘스트 제공자의 '사망'으로 삭제 처리됨
…
…
13. 도제 찾기
* 수행 가능한 서브 퀘스트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아?"
* * *
삭제(削除)하다.
어떠한 원인으로 선택된 대상을 깎아 없애거나 지워 버리는 행위를 우리는 '삭제하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대개 끝까지 방치돼 묻히거나 생환자들과 연이 닿아 성공과 실패 둘 중 한쪽으로 귀결되는 퀘스트 시스템상에서 삭제라는 단어는 결코 쉽게 접할 수 있는 글자가 아니다.
그런데.
[8. 소소한 사냥 내기 / 삭제]
이게 뭐지?
게다가.
[9. 소소한 사냥 내기(2) / 소소한 사냥 내기(1) 달성 시 진행 가능 ⊂ 퀘스트 제공자의 '사망'으로 삭제 처리됨]
"삭제 이유가, 사망이라고?"
난데없는, 뜬금없는, 느닷없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비보에 일순 새하얘지는 머리. 스킬 '위대한 발걸음'의 멘탈 방어로도 막아지지 않는 충격에 한참을 멍하니 정면만 바라보단 찰나.
삐이익―
"…흡!"
정신이 번쩍 드는 경고음이 귓가를 때렸다.
그 사유는.
스스스슥―
[7. 청혼 / 삭제]
앞과 동일했다.
거기까지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단장님!!"
도시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걸.
아주아주 끔찍한 변고가.
* * *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도시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 아니 문제가 생긴 게 확실합니다."
아침 9시 반 무렵.
겨우 30여 분도 안 되는 짧은 휴식에 여독이 미처 풀리지도 않은 시각, 다급한 일갈로 달콤한 꿈속 세상을 유영하며 단잠에 빠져 있던 조사단 전체를 강제 기상시킨 나는 곧장 엑스케트에게로 달려가 글라디아르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 알렸다.
이에 도처에서 당혹스런 눈빛이 날아들었으나 그러든 말든 꿋꿋하게 토해 내는 열변.
"방금 전 최소 두 명이 사망했습니다. 단장님이 훨씬 잘 아시겠지만, 여태 글라디아르 군병의 사망은 거의 없다고 들었습니다. 척후병들 덕택에 미리 성문을 걸어 잠글 수 있었고, 그 후로는 악령의 저주를 미처 알지 못했던 1일 차 외엔 적들의 공격이 닿지 않는 드높은 성벽과 수호사제들의 합류로 사망자는 고사하고 그 흔한 경상 환자도 발견하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렇네. 한데 그게 자네의 주장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하군."
"전쟁이라는 게 언제 어디서 변수가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바, 그러니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기는 합니다만… 다수가, 그것도 동시다발적으로 사망하는 형태라면 뭔가 이상이 생긴 게 틀림없습니다."
설득해야 됐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로 단순 실수에 의한 사건이었을 가능성이야 아득바득 우기려면 우길 수야 있겠으나, 천 명이 넘는 병력 중에서 하필이면 서브 퀘스트 주인공들만 채 1~2분에 불과한 간격을 두고 급사한다?
내 장담하건대 그런 황당무계한 우연이 일어날 여지는 제로에 수렴한다고.
1분 1초가 시급했으니까.
엑스케트나 크라덴, 리하인을 위시한 20명의 기사들이 조사단 업무차 파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작 본인을 포함해 세르펜스 기사단이 버티고 있는 글라디아르 수성군의 전력은 여전히 엄청나다.
그럼에도 사상자가 튀어나왔다 함은, 저 '삭제'라는 한마디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재앙(災殃)의 강림을 뜻하는 다잉 메시지일지도 몰랐다.
'되도록,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육감이란 놈이 계속해서 외쳐대고 있었다.
즉시 복귀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후회하기 싫다면 한시라도 빨리 이들을 데리고 회군을 해야만 했다.
세르펜스 기사단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무언가라면, 여럿이 우르르 몰려가는 게 나 혼자 지원 가는 것보단 백배 나을 테니.
그래서.
"3조 조장의 의견에는 나도 동의한다. 만일 자네 말대로라면 위급해졌을 공산이 크겠지. 하나, 이는 당연히 3조 조장의 말대로 전개되었을 때의 이야기. 지금까지 그대가 쌓아 올린 공헌도가 적지 않음은 인정하는 바이나, 그렇다고 마땅한 증거도 없이 지쳐 쓰러져 있는 부하들을 움직이기는 힘들다."
"알고 있습니다."
강수를 뒀다.
시스템의 존재를 밝혀 봐야 믿을 리 만무하고, 사제도 아니라 신의 계시를 운운하기도 애매하니 담보를 걸어야지.
"군령장을 쓰겠습니다."
"…진심인가?"
"제 목이야 괜찮으실 테고, 좋습니다. 공적을 걸지요. 조사단원으로서 활동하며 세웠던 모든 공을 단장님께 드리지요. 다른 사람이 가져가도 좋습니다."
공(功)을 포기하기로.
군에 종사하는 기사와 군인에게는 목숨을 거는 것만큼 중차대한 선언에 엑스케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내 의지가 어느 정도로 비장한지를 단숨에 이해한 모양.
사실 서브 퀘스트 보상이야 벌써 다 받았겠다, 설령 내 판단에 착오가 있었더라도 루데오 백작이 줄지 안 줄지 모를 보고 입장권으로 퉁친다면 적어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는 계산이었지만, 그 내막이야 어쨌든 효과는 굉장했다.
"3조 조장의 군령장, 받도록 하지. 전원 집합하라!"
엑스케트의 동의를 이끌어 내기에는 충분했기에.
* * *
스윽―
슥―
'우측에 적, 좌측으로 틀어 이동할 것!'
선두에 선 인간 레이더 안델의 수신호에 맞춰 전속력으로 되돌아가는 길.
다들 피로가 제대로 풀리지 않아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죽어라 내달린 조사단은 한국 시계의 시침이 10시를 막 지나쳤을 즈음 저 멀리 화창한 하늘 아래 듬직하게 서 있는 글라디아르의 성채가 시야에 들어왔다.
장장 일주일 여간 수만 마리의 언데드들이 달라붙어 두들겼음에도 한결같이 인간을 지켜 준 회색빛 방패.
그 강직한 자태를 목격함과 동시에 모두의 얼굴에 옅은 안도감이 서렸다.
성벽만 멀쩡하다면 설혹 몇만 마리의 언데드 군단이 추가로 밀려오더라도 보란 듯이 막아 낼 수 있다는 자부심이 차올라서…였지만.
정확히 다섯 걸음을 더 나아간 이후.
뜨겁게 달아오르던 감정은 저 극지방의 빙산처럼 차갑게 식어 버렸다.
분명 웅장하기 그지없던 성곽이.
후우우우우―
콰아아아앙!!
쿠구구구구구구궁!
"저게, 뭐야."
별안간 천지를 떨쳐 울리는 굉음을 동반하며 무너져 버리고 있었으니까.
"후으으으읍… 그워어어어어어어!!"
족히 7~8m에 달하는 '거인'이 던져대는 바윗덩어리에 의해.
97화
아파트 3~4층에 준하는 신장.
고이고 고여 썩어 버린 피를 연상케 하는 검붉은 액체가 전신 모공에서 미친 듯이 흘러내리는 기괴한 형상.
"아."
한 번 보면 평생토록 잊지 못할 그 끔찍한 몰골을 목도하자마자 직감했다.
저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제단...."
역행의 제단 내부에서 오로지 부화의 날을 기다리며 '생명의 샘'으로부터 빼앗은 영기를 꾸역꾸역 흡수하고 있던 그 거인.
[썩은 것들로 빚어낸 거짓 생명, '콥스 골렘(corpse golem)'의 영역에 들어섰습니다.]
['오오라: 이승을 떠도는 백귀'와 접촉했습니다.]
[원한을 품은 망령들이 당신의 몸에 들러붙습니다.]
[일시적으로 신체 능력치가 감소하며, 들러붙는 망령의 숫자 늘어날수록 능력치 감소 폭이 상향 조정됩니다.]
콥스 골렘(corpse golem)이란 진명을 가진 거인형 언데드였다.
"저게 어떻게...."
그 정체를 파악한 직후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크뤼글라디(chrȳgládĭ) 호수에 구축되었던 역행의 제단은 최종 작업이었던 '생명의 샘 되살리기' 프로젝트의 적용된 성역 마법으로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
소멸.
문자 그대로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말끔하게.
고로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에서 콥스 골렘이 출현하는 세계선은 확실히 파괴되었을 텐―
"…아."
잠깐만.
"안델 씨, 혹시 이곳 말고 또 다른 '생명의 샘'의 위치를 알고 계십니까?"
"음. 크뤼글라디 호수를 제외하고 제가 아는 장소는 블리타(blíta) 마을 쪽이 전부군요."
"블리타 마을?"
"엑세트 백작 령의 최서단에 자리 잡은 축산 마을입니다."
"가볼 만합니까?"
"작정을 한다면 못 갈 건 없지만, 이동 거리를 계산한다면 휘윤 경께서 말씀하신 곳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예서 블리타까진...."
콥스 골렘의 근원을 쫓던 차에 불현듯 뇌리를 스쳐 지나간 안델과의 담화.
맞다.
크뤼글라디의 배양기는 확실하게 깨부숴 놓았으나 한 곳이 더 있었다.
평야 지형에 들판이 많아 축산업이 발달했다는 걸 제외하고는 여느 시골 촌 동네와 마찬가지로 따로 특기 해둘 거리가 딱히 없던 지역. 마차로 가도 사나흘 가까이 소모된다기에 아쉽지만 스콰의 네 번째 강화소로는 부적격이겠거니 하고 흘려보냈던… '블리타 마을'.
그곳이었다.
블리타 마을 중앙에 우물의 형태로 마을과 역사를 함께한 '생명의 샘'이 저 괴물을 잉태하고 탄생시킨 부화소의 정체였다.
'허.'
전후 사정을 깨닫고 나니 절로 새어 나오는 탄성.
설마.
그쪽에도 제단이 건설됐을 줄이야. 아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애초에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에도 적혀 있었으니까.
[무너진 마을 트리트니(Tritóni)를 기점으로 열흘째 되던 날엔 아라티오(ărátĭo)가, 보름여가 흘러 겨우 소식을 접했을 땐 클투스(cultus)를 위시한 수십 개의 마을이 이미 검은 물결에 뒤덮여―]
도시 글라디아르가 공습당하기 이전에 수많은 촌락이 짓밟혔다고.
지금 와서 그게 단서였음을 알아차려 봐야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대신 덕분에 한 가지 정보는 챙겼다.
"생명의 샘, 제단. 폰스 마을이 주구장창 공격 받은 동기가 생명의 샘 때문이었네...."
퀘스트 초창기 시절.
첫 단체 퀘스트였던 폰스 마을에서 겪었던 언데드 웨이브. 그 당시에는 겨우 300여 명 남짓 사는 자그마한 땅덩어리에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수천 단위의 좀비 떼가 방문하는가 심히 의아했는데, 그게 다 '생명의 샘'을 망가뜨리고 제단을 짓기 위한 몸부림이었구나.
크뤼글라디 호수에서는 대조군이 긴가민가했다만, 나는 내 짐작이 맞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튜토리얼에다가도 힌트를 감춰 놓는 시스템이 '첫 단체 퀘스트'라는 타이틀을 놓칠 리 없으니 말이다.
딱 거기까지 정리를 마친 난 폭발적으로 굴러가던 사고 회로를 멈추며 현실로 돌아왔다.
"그워어어어어어어!!"
후우우우욱―
콰아앙!
사색에 빠져 있는 도중에도 성벽이 집채만 한 바위에 맞아 박살 나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뇌가 아니라 몸을 써야 할 시점이었다.
거인형 언데드.
아직도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으나 난 환두대도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며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무모하지만 우선 부딪혀 볼 작정이었다.
가서 시선이라도 끌어야 글라디아르의 방벽도, 그 방벽 위에 서서 맥 없이 쓰러져 가는 군병들도, 꼭 S 랭크로 마무리 지어야만 하는 이 퀘스트도 모두 지켜 낼 수 있을 터이니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하여 곧장 달려 나갈 자세를 잡던 그때.
"멈췄으면 하는군."
잔뜩 경직된 낯빛으로 나지막한 탄식을 읊조리며 다가오는 엑스케트.
내 결의를 받아들여 급속 철군을 단행했으나, 이동하는 내내 반신반의한 기색으로 가득했던 그의 눈동자는 이미 180도 달라져 있었다.
당황과 혼란.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을 수행하는 동안 어떤 위기가 닥쳐오든 노련한 기사답게 끊임없이 평정을 유지하려 애쓴 엑스케트도 결국 사람인지라 예측 범위를 아득히 초월해 버린 작금의 사태에선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기가 꽤나 어려운 거 같았다.
하기야.
아마 사령관이라는 직책이 아니었다면, 항상 이성적이고 냉정해져야 하는 직위만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무너졌으리라.
이래서 자리가 중요했다. 때로는 감투가 주는 책임감을 통해 눈앞에 닥친 절망을 버텨내기도 하니 말이다.
그것을 증명키라도 하듯.
"그대가 무얼 하려는지는 알겠다. 다만 우리는 지쳤고 무력하다. 이대로 돌격해 저 괴물의 관심을 돌린다면 도시는 당분간 안전해질지 몰라도 그게 전부다. 적들이 성문에서 비켜서진 않는 한 아군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으니 홀로 저 괴물을 상대해야 될 터. 그리되면 당장 뜀박질조차 버거워진 그대와 우린 단숨에 바위에 짓뭉개져 버릴 거다. 내 말이 틀렸나?"
감정이 동요되는 와중에도 최대한 논리정연하게 상황을 설명해 가는 엑스케트.
나는 그의 물음에 침묵으로 대답했다. 한계를 돌파한 체력적 부담과 글라디아르 수성군과의 단절된 소통 등 어느 하나 반박할 거리가 없는 까닭이었다.
"그대의 의도를 모르는 게 아니나, 희생자가 생길지도 모르는 작전이라면 만류하겠다. 조급해하지 마라. 믿어도 좋다. 글라디아르는 강하다."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인지 수십 년간 축적돼 온 신념과 확신인지 그 속내를 알 수는 없었으나, 서서히 또렷해지는 안광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후우욱―
키아아아아악!!
새빨간 마력으로 이루어진 적룡(赤龍)이 창공으로 솟구쳤기 때문이었다.
* * *
"그워어어어어어!!"
…후우우우욱!
사방을 진동시키는 포효를 신호 삼아 사람 따위는 가뿐히 으깨고도 남을 큼지막한 암석이 다시금 허공을 날아 지상으로 낙하한다.
이윽고.
매서운 광풍을 일으키며 목전에 직면한 순간.
"하아!"
짤막한 기합을 내지르며 곧게 뻗은 할버드를 휘두르는 누군가.
투구를 푹 눌러써 정확한 신원은 불명확했으나, 세르펜스 기사단의 일원임을 증명하듯 붉은 마력을 피워 올린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머리 위로 떨어지던 포탄을 향한 창날을 거두지 않았다.
자신 있었으니까.
촤아악―
콰과과과광!
저 우주의 운석이 떨어지더라도 부숴 버릴 자신이.
톤 단위를 넘어서는 기암괴석일지라도 초인의 경지에 들어선 기사의 일격은 버텨 내질 못했다.
이따금씩 순백의 장막이 펼쳐졌다 흩어지는 걸로 보아 폴람마(flamma) 수도원에서 파견 나온 수호사제들도 대공전에 참여시키는 듯싶었다. 세이렌이 사냥당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간혈적인 손길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콥스 골렘이 막 등장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왕좌왕하며 몇 번 공격을 허용했던 방금 전과 달리 시체 거인의 공세를 완벽히 막아 내며 점점 안정세를 갖춰 가는 엑세르 군.
이에.
"…보았듯이 당분간은 괜찮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방안을 찾는 데 주력하도록 한다."
엑스케트의 주도로 열린 간이 회의.
최창조의 은신처에 몸을 숨긴 채 간부진들이 모여 서로의 사견을 주고받으며 벌인 열띤 토론은 금세 세 가지 방향으로 결과를 도출해 냈다.
첫 번째는 누적된 부하로 조사단 전체가 정상적인 형편이 아니니 일단은 본래 일정대로 입성하자는 것. 조원들의 피해 최소화를 최우선 과제로 둔 온건파 엑스케트의 제안이었는데, 그와 반대로 호전적인 성향의 리하인은 길고 짧은 건 붙어 봐야 아는 법이고, 마침 등 뒤도 점했겠다 기습이라도 시도해 보자는 강경파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저는 두 분의 고견을 합쳤으면 합니다."
"우리의 발언을 합친다?"
"예."
"단장님이나 2조 조장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 괴물들과의 전쟁에서 가장 뛰어난 칼날은 단연 사제분들입니다. 이를 감안한다면 저 괴물 역시 저희 같은 칼잡이들보다는 사제분들께서 몇 배는 효과적으로 격파할 수 있을 겁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3조 조장의 말은 틀림없는 현실이지."
"그래서,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부대를 둘로 나누는 겁니다."
"음."
"이쪽은 도시 입성조, 이쪽은 괴물 사냥조입니다."
중도파에 선 내 아이디어였고, 내용이 퍽 괜찮았는지 긴 얘기의 종지부가 찍혔을 때 엑스케트의 입에서 한 마디가 툭 흘러나왔다.
"3조 조장의 제의를 따르겠다."
* * *
한 편의 연설을 마친 뒤.
"…하, 진짜. 이렇게 돌아가면 안 되는데."
"시끄럽다, 리하인."
"예에."
총 스무 명이 조충수와 김학진 등 부상 정도가 심각한 환자 및 모든 짐 가방을 챙기며 떠날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들을 이끄는 리더는 리하인.
콥스 골렘 척살을 주창했던 그녀는 본인의 성격과 정반대되는 퇴각 명령에 울상을 지었으나, 엑스케트는 얄짤없었다.
그걸 알기에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제 가방을 등에 메는 리한인의 태도에 피식 웃은 나는 슬쩍 곁으로 다가가 품에서 무언가를 뭉텅이로 건넸다.
"이게 그거야?"
"예. 혹시 몰라 약속 사항을 쪽지에 적어 넣어 두었으니, 혹여라도 헷갈리신다면 읽어 보시죠."
"쓸데없는 소리 마라. 원치 않게 복귀하게 되어 기분은 썩 별로지만, 이런 걸로 누굴 다치게 하는 멍청이는 아니니까."
"압니다."
"대꾸는 잘하는군. 됐고, 다치지나 말도록. 우린 아직 할 게 남아 있지 않나."
"대련."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
"그러시죠. 가서 구경하고 계시면 저 괴물의 대가리가 잘리는 장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짧긴 했지만 〈메인 퀘스트: 호위〉 때부터 생사고락을 공유했던 영향인지 제법 편해진 그녀와의 장난스러운 농담을 뇌까리길 잠시.
엑스케트에게 조심하란 당부를 전한 도시 입성조의 모습이 차차 사라져 간다.
"바깥에서 보는 은신이 저런 식이구만."
나는 어느새 자연의 일부가 되어 버린 공간을 응시하다 어깨를 으쓱이며 환두대도의 도집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로 적당한 곳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덩달아 엉덩이를 붙이는 사람들.
엑스케트와 크라덴에 마그리트 등 세르레퀴로 조사단 소속 기사들 중에서도 실력적으로 탑을 논하는 일곱과 사냥조를 자처한 정유환, 한용국, 강태성이었다.
나까지 합쳐 열한 명의 거인 사냥꾼들은 언데드들의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못다 한 휴식을 가지며 명상에 전념했다.
콥스 골렘을 공략하기 위하여 잔류를 택한 만큼 HP든 MP든 만땅은 힘들어도, 절반 이상은 채워 두어야 한다.
해서 컨디션을 되돌리는 데에 최선을 다한 끝에 텅텅 비어 있던 마력 통이 슬슬 충만해질 즈음.
"휘윤 씨, 저기."
정유환이 나를 부르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지목한 장소는 변함없이 치열한 대공전이 벌어지고 있는 글라디아르의 성벽 한가운데.
엑세르군의 총사령관 루데오 백작을 상징하는 뱀 깃발 등 이런저런 의미를 담은 여러 가지 깃발이 꼽혀 있는 단상이었다.
정유환이 갑작스레 저길 보라며 외친 이유는 간단했다.
화륵―
치이이이이이익!
"아."
작은 불길이 점화된 막대가 '하얀 연기'를 뱉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98화
지난 몇 달간 퀘스트란 명목으로 칼리야스 대륙을 오간 생환자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운명 속에서 생존율을 1%라도 높여 보려 각종 대비책을 궁리해 나갔다.
개중 제일 유명한 것이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선 탓에 실수 한 번으로 범죄자가 되기 십상인 무력의 소유자들 사이에서 아이템이란 보물의 매매가 별 탈 없이 이행되도록 고안한 '생환자 거래법'.
그다음이 단체 퀘스트에 불려 갔을 시 휴대폰은커녕 무전기 사용도 쉽지 않아 서로 멀어지기라도 하면 철저하게 단절되는 파티원끼리 원거리에서도 원활하게 의견을 교환하게끔 위험 및 지원을 요청하는 빨강, 근방이 안전하다는 파랑, 정찰과 같은 사유로 뿔뿔이 흩어진 팀원들을 한데 모으는 초록, 지연 혹은 거절을 말하는 검정 등… 여러 가지 색에 각각의 뜻을 부여하고 발포한 개수로 전자와 후자의 목적을 구분해 비교적 상세하게 대화할 수 있게 설계한 '생환자 통신법'이었다.
다소 허술한 '생환자 거래법'과 다르게 폭풍우라도 치는 게 아니라면 웬만해서는 기상과 관계 없이 의사 표현이 가능한 통신 방식.
그래서 세르레퀴로 조사단으로 차출된 그날부터 늘상 염두해 두고 있었다.
수색의 특성상 각 조가 따로따로 움직이게 되는 이벤트가 발생할 만도 하니, 그런 때가 오면 스콰의 안장에 왕창 구비해 둔 신호탄을 전술적으로 이용하기로.
이들에게도 이들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기는 하나, 현대 과학의 산물보단 실용성이 모자랐기에 지구의 문물을 가르쳐 주자고.
딱.
"도착했군요."
지금처럼.
나는 뭉게구름을 쏙 빼닮은 백색의 기둥을 보며 작게 주억거렸다.
생환자 통신법에서 하얀색이 서술하는 바는 자기 위치 표시, 이는 곧 리하인과 도시 입성조가 목표를 이뤘다는 소리인 데다가.
화륵―
치이이이이이익!
"하나 더 올라옵니다. 색은… 파란색, 피해도 없었나 보네요."
뒤이어 치솟은 푸른 연기로 보건대 귀환하는 사이 별다른 사고도 없었다는 낭보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었다.
인간 레이더인 안델과 대형 은신 망토인 최창조의 조합이라면 우회로를 타는 것쯤이야 무난하게 해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전장이라는 게 워낙 변수가 넘쳐났기에 내심 불안했는데.
"이러면 마음 놓고 회복에 전념해도 되겠습니다."
전원 무탈하다는 소식에 허벅지에 얹어두었던 환두대도의 도집을 재차 허리춤에 묶으며 일어선 나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천천히 반전되는 시야로 보이는 열 명의 전사들.
포션과 한 모금 어치를 빼고 모조리 복용한 생명의 샘물 덕분에 본래의 기사다운 기세를 되찾은 그들은 지시만 내려 달라는 듯 차분하되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물론 여전히 전체적인 그림은 좋지 않았다. 어딘가 한 짝씩 고장 난 장난감 같은 느낌. 하나 더 이상의 휴식을 원하는 이는 없다.
내가 누차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콥스 골렘과의 전투는 무조건 속도전이라고,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이 없다고.
처음 겪어 보는 개체였기에 상식적인 구도라면 마땅히 신중 또 신중을 기해도 모자랄 판국이었지만, 나는 주변의 숱한 우려 섞인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어째서 이리 서두르는 것인가.
그 근거는 명확했다. 마수 스코롤펜드라의 동굴, 도시 글라이다르에서 고작 반나절도 안 되는 지점에 소형일지언정 분명 '생명의 샘'이 존재함을 알고 있었으니까.
블리타 마을이 시체 거인의 배양기로 전락해 버린 현재, 그곳도 멀쩡하리라 보장할 수 없거니와 만일 전자처럼 점거당한 상태라면 어영부영하는 동안 새로운 시체 거인이 나타날 수도 있단 이야기였다.
크뤼글라디 호수를 기준으로 볼 때 건설이 완공된 제단에서 한 구의 콥스 골렘을 뽑아내는 데에 최소 3~4일은 필요한 듯 보였으니 내가 떠나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 이상이 없었던 걸 감안할 경우 샌드위치를 당할 확률이 엄청나게 큰 건 아니었지만… 방심은 금물인 터라 만에 하나라는 여지를 중점으로 엑스케트의 동의하에 전략을 수립했고, 그 일환으로 안 그래도 부족한 인원을 둘로 나누는 결정을 내렸다.
도시 입성조를 이용해 루데오 백작에게 세이렌이 처치됐음을 알려 수호사제들을 조금이라도 빨리 끌어다 쓰고자.
그렇기에.
"휘윤 씨, 터트리겠습니다."
"예."
탁―
탁―
…화르르르륵!
화르르륵!
첫 단추가 성공적으로 꿰어졌다는, 레이스를 스타트해도 좋다는 리하인의 신호에 우리는 답신으로 두 줄의 붉은 구름을 띄워 보내며 지체하지 않고 적진을 향해 발을 뻗었다.
* * *
글라디아르 성문 중앙.
- 크어어어어어!!
- 키에에에에엑!!
- 그아아아아아!!
…
…
"교대! 교대조 투입해!"
"보급품 가져왔습니다!"
"거기 놓고 가!"
"충!"
장장 세 시간여를 한시도 쉬지 않고 죽어라 내달려 마침내 비도를 통과해 저택에 들어서기 무섭게 하녀장과 사용인들에게 부상자들을 맡겨 두고 마차를 수배해 언데드들의 괴성과 인간의 함성이 절묘한 불협화음을 이루며 쉴 새 없이 고막을 두들기는 성문에 도달한 리하인은 땅에 발을 딛자마자 루데오 백작부터 찾았다.
"아버지!"
"왔느냐."
때마침 부관이 건네준 헝겊으로 땀을 닦으며 투구를 내려놓은 루데오 백작은 꼬리에 불붙은 에쿠울루스(équŭlus, 망아지)마냥 뛰어오는 딸을 보며 반가움에 앞서 인상을 찌푸렸다.
다급한 말투와 표정.
뭣보다.
"어찌 혼자인 것이냐."
저 말괄량이를 잘 챙겨서 다녀오겠다던 장남 엑스케트가 보이지 않는 점들이 내포하는 바를 단숨에 알아차린 까닭이었다.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는 걸.
혹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예견치 못한―
"후읍, 하. 후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오라버니는 아무 일 없으니까."
사고가 터졌나 싶어 미간에 패인 골짜기가 더욱 깊어지던 찰나에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제 아비를 안심시키는 리하인.
평소에는 근엄한 척 진지한 척 무게를 잡다 가도 오라버니와 관련된 얘기만 거론되면 '붉은 세르펜스들의 군주'라는 이명에 어울리지 않게 아들 바보가 되는 루데오 백작의 성격을 알기에 엑스케트의 무사함을 단단히 못 박으며 홀로 복귀한 연유를 밝혔다.
"이럴 때가 아녜요, 아버지. 사제분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느닷없이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지난 삼 일간 조사단으로서 활동하며 어떤 사건들을 겪었는지, 그 과정에서 악령의 정체를 밝혀냈을 뿐 아니라 아예 제거해 버린 성과, 회군하던 길에 저 시체 거인을 보게 되었고, 이에 어떻게 해야 할까 회의를 나누던 와중에.
"네 말은 다음이 있을지도 모른단 것이냐?!"
"예."
이대로 전쟁이 지지부진하게 끌리다 간 최악의 경우 한꺼번에 두 마리의 시체 거인에게 공격받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음을.
그로 인해.
"…그것이 사실이더냐."
"제 신호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허."
고심을 거듭하던 오라버니가 소수 정예를 이끌고 저 시체 거인의 쓰러뜨릴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더는 사제분들을 아끼지 말고 전면에 내세워 달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본인만 일찍 되돌아오게 됐다고.
시간 여유상 무척이나 함축된, 더군다나 이 모든 여정의 중심에 '오휘윤'이라는 사람의 비중이 무지막지하게 크다는 대목이 빠져 있었으나 리하인은 일부러 진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명예만큼이나 타인의 명예를 중요시하는 기사 가문의 혈족으로서 입이 아주 근질근질했지만.
"반드시 엑스케트 님의 판단으로 이끌고 가셔야 합니다."
"어째서지?"
"운이 좋게도 엑스케트 님과 리하인 님은 저를 높게 평가해 주시고, 웬만해서는 제 주장을 받아 들여주시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닐 겁니다. 백작님에게도 저는 일개 조장 나부랭이에 불과하겠지요."
"음."
"따라서 1분 1초가 시급한 이 시기에 저희 계획을 신속히 관철시키려거든 엑스케트 님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이 몇 배는 효율적입니다."
'쓰읍.'
참아야 한다.
전쟁의 승리를, 오라버니의 생환을, 3조 조장의 공로를 소중히 여긴다면 괜한 말은 삼가야 했다.
실제로도.
"허, 네 오라비답구나. 부관."
"충!"
"가서 프네우마 사제를 불러오라."
"알겠습니다!"
오휘윤의 말대로 아비는 '엑스케트의 전언'이라는 한 문장에 이견을 내비치지 않았다. 도리어 기꺼워하는 눈치.
어쩐지 퍽 못마땅한 모양새에 리하인은 몇 번이고 입술을 꿈틀거리다 못내 한숨을 내쉬며 숨결에 감정을 털어냈다.
그래.
아버지를 설득했다면 됐다.
"…하인, 리하인! 뭐 하는 게냐. 어서 엑스케트에게 신호를 보내거라. 녀석의 말대로 해주겠다고."
"예. 저는 저쪽으로 가 있을 테니 소집되는 대로 제게 데려와 주십시오."
"그러마. 더불어 그들의 지휘는 네게 맡기겠다. 오라비와 한번 잘해 보거라."
"충!"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꿔 먹은 그녀는 오직 승전(勝戰)이란 단어만을 몇 번이고 되새기며 성벽에서도 가장 높은 곳, 깃발들이 펄럭이는 단상에 올라 품속에 고이 모셔두었던 신호탄들을 꺼내 불을 붙이길 몇 초 지나지 않아 삽시간에 주위를 휘감으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하얗고 푸른 연기.
"아가씨! 사제분들을― 뭐, 뭐야! 아가씨?"
예상보다 강력한 화력에 뒤쫓아 온 젠슨과 인근의 병사들이 놀라 이쪽 돌아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리하인은 양손에 쥔 불꽃들을 힘차게 휘두르며 불어오는 바람결에 대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이쪽의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그대의 활약뿐. 여기서 지켜보고 있을 터이니 제대로 보여주길 바란다. 그대의 명예가 얼마나 찬란한지."
불어오는 대기에 얹은 기원에 응답하듯 저 멀리 들판의 한 귀퉁이에서 붉은 연기가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젠슨, 사제단은?"
"모두 모였습니다."
"좋다. 녹색 신호탄을 띄워라."
"충!"
* * *
전력 질주.
엑스케트를 전위로 삼은 삼각뿔이 들판을 가로지르며 달려 나간다.
인간의 생기를 감지한 언데드들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우리에겐.
"용국 씨! 좌측! 태성 씨는 우측으로!"
"흐읍, 하!"
"흣차!"
슈우우욱―
슈우욱―
…촤아아아아악!
포션이 있었으니까.
한 병, 두 병.
양 사이드에 선 강태성과 한용국의 손바닥을 타고 마구잡이로 뿌려지는 신성한 빗방울. 때때로 중급 물약까지 섞어 가며 거진 30m 간격으로 쏟아부어 대는 성역 세례에 혼비백산해서 물러나는 언데드 놈들.
이래서 사우디 거부들이 돈지랄을 하는 걸까?
마치 명절 이슈로 꽉꽉 틀어 막혀 정체되어 있던 고속도로가 뻥 뚫리는 듯한 광경에 옅은 쾌감마저 느끼며 그야말로 순식간에 전장을 주파한 우리는 수중에 모아둔 포션의 절반가량을 털어냈을 무렵 드디어 마주할 수 있었다.
후우우욱―
쿠우웅!
쿠구구구구궁!
"…그워어어어어어어!!"
보통 인간의 서버 배에 달하는 체구를 바탕으로 가히 천재지변에 준하는 재앙을 일으키고 있는 거인을.
바야흐로.
진정한 보스 레이드의 개막이었다.
99화
[ 레이드 ]
거인을 상대로 하는 전투.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이 싸움은 방구석에 앉아 코를 후비며 상상하던 이미지를 아득히 초월하는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막막함이 큰 것 같았다.
"그워어어어어!!"
쿠우웅―
쿠쿵―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지진을 연상케 하는 묵직한 진동을 선사하는 발길질.
웬만한 성인 남자 머리통 두세 개는 이어 붙인 것마냥 거대한 크기를 앞세워 닿는 모든 걸 박살 내 버리는 주먹.
이 두 가지만 해도 어지간한 2차 진화체 따윈 명함도 못 내밀 파괴력을 지녔으나 실질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몸뚱어리'였다.
"하아!"
우우우우우웅―
퍼억!
푸화아아악!
인간이 만든 창칼 따위로 과연 뚫을 수는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를 정도로 두터운 육신.
자신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알려 주기라도 하듯 부패하다 만 살점과 정체 모를 뼛조각들이 뭉치고 뭉쳐 구성한 콥스 골렘의 육체는 그 두께만 무려 2m에 달했고, 이 어처구니없는 너비는 레이피어에겐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언데드란 종족의 고유한 특성인 '무통(無痛)'.
이 단순무식한 방어 수단이 일격필살보단 얇고 긴 검신으로 차근차근 피해를 누적시키는 레이피어만의 강점을 완벽하게 상쇄해 버린 탓이었다.
하면 주력 기술인 찌르기는 어떤가.
"흐읍! 차!"
슈우우욱―
촤좌좌좍!
이 또한 전혀 다를 게 없었다.
겹겹이 쌓인 지방층이 일종의 방검복처럼 찔러 들어오는 칼날의 스피드를 극단적으로 감속시키며 대미지를 약화시켰을뿐더러 설사 멋들이지게 틀어박힌다 한들 몸통 자체가 워낙 커 관통이 불가능하다 보니 외려 검이 살집 틈바구니에 끼어 부러질 위기를 맞이할 따름이었다.
유연함이 장기인 레이피어이기에 망정이지 아마 일반적인 병기였다면 벌써 동강 나 버렸을 터.
그런 점에서 할버드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다.
창두에 달린 도끼날을 활용해 찌르기보단 베기에 특화된 장비였기에 거리를 조절하며 후려치는 공세가 제법 위력적으로 작용한 덕택이었다.
뭐 그래 봐야 수십 톤 급에 이르는 콥스 골렘의 살덩어리를 분쇄하기에는 변함없이 역부족이었지만 말이다.
고로.
"마그리트, 그만하면 됐다. 계획대로 간다."
"충!"
"필립과 로튼이 분산을 맡는다! 케네스와 라트넨은 3조와 방어를. 마그리트 너는 우리를 따라와라. 3조 조장은… 자율에 맡기지. 가자!"
"충!"
"충!"
간단하게 방호력을 시험해 본 우린 초장부터 전력으로 임했다.
애초에 체력이고 마력이고 아낄 여력도 없었다. 주머니 속 포션은 유한하고 사방에 늘어선 적군은 무한하단 기분이 들 지경으로 득실거렸으니까.
그러니 엑스케트도 크라덴도.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이그니스(ignis) 류(流).
직뢰(直雷).
휘우우우웅―
파직!
파지직!
"하아!"
이중 스킬 결합.
오휘윤 류: 뇌령 돌파.
그리고 나도 온 힘을 다해 콥스 골렘의 '다리'를 노렸다.
타닷―
촤아아아아악!
…서걱!
"그워어어어어어어!!"
꾸준하게 흡수한 경험치와 영혼석 교환권으로 한층 진일보한 벼락과 폭풍이 시체 거인의 발목을 썰고 지나간다.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2 연격.
파지지직―
꽈르르르르릉!!
연달아 방출된 뇌류 또한 흔히 아킬레스건이라 부르는 복숭아뼈 뒤쪽만을 집요하게 물어뜯으며 근육을 파헤쳤다.
"하아아아!!"
"하압!"
우우우우우우웅―
끼에에에에엑!!
끼에에에엑!!
두 기사의 손에서 빚어진 이무기들도 왼쪽 발모가지를 끊어내는 데 사력을 다했다.
언데드의 약점이라는 대가리? 시종일관 죽음을 코앞으로 끌고 오는 양팔? 그저 깔아뭉개는 것만으로도 철판마저 종잇장처럼 찌그러뜨리는 몸통?
다 무시하고 오로지 다리만, 다리몽둥이를 분지르는 데에만 전념했다.
7~8m.
아파트 3층에 해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이 압도적인 신장 차이로 인해 무릎을 꿇려 놓지 않고서야 급소 공략은 꿈도 못 꿨기 때문.
그 끈질긴 집착에 놈도 진절머리가 났을까?
"그워어어억! 그워어어어어어!!"
휘우욱―
사아아아아아아!!
자꾸만 들러붙는 모기를 쳐내는 양팔을 휘둘러 우리의 접근을 저지하던 수준의 콥스 골렘이 돌연 양팔을 높게 쳐들며 포효를 터트렸다.
저 동작이 무얼 의미하는가.
당연하게도.
시체 거인의 반격이었다.
"그워어어어어!!"
후우우우우우욱―
쿠우웅!
콰과과과과과광!!
한껏 응축된 사기(死氣)는 잔잔한 수면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정적이던 대지를 거칠게 뒤흔들었고, 원형으로 퍼져 나가는 충격파를 따라 출렁이며 생성된 갈색빛 해일은 부지불식간에 온 천지를 뒤덮으며 언데드고 인간이고 가리지 않고 적아를 전부 집어삼키려 들었다.
…만.
우리에게도 카드는 있었다.
"전원 내 뒤로 모여라!"
계급도 경력도 낮은 엑스케트를 모시면서도 단장의 직위를 고려해 언제나 존대와 예우를 지켜왔던 크라덴 헤일린.
그가 선두로 나서며 잠깐의 딜레이도 없이 즉각 레이피어를 내지른 것.
"하!"
우우우우우웅―
촤아아악!
짤막한 기합과 내뱉으며 뒤로 쭉 잡아당겼던 칼날을 찔러 넣으며 내부에 잠들어 있던 마력을 단숨에 쏟아내는 일검.
그 한 수가 선보인 임펙트는 왜 진작 나서지 않았나 싶을 만큼 굉장했다.
기껏해야 평범한 찌르기에 불과한 동작이 시전된 직후.
후우우우욱―
…푸화아아악!
"와류?"
정면의 공간이 일순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며 와류 형태로 구겨지는 게 똑똑히 보였으니까.
세르펜스 기사단의 삼석(三席)이라고 했던가?
엑세르 백작 가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붉은 뱀들 중에서도 단장과 부단장을 제외하고는 감히 막을 자가 없다는 세 번째 검.
그가 지닌 예리함은 순도 100% 진짜였다.
"저 작자가 이러면 단정이랑 부단장은 대체 어느 레벨이란 거야?"
신성 마법(神聖 魔法).
빛의 방패.
우우우웅―
후두두두두둑!
빛의 장막을 펼쳐 우수수 떨어지는 흙더미를 막으며 황당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나는 여태 낯짝은커녕 뒤통수조차 보지 못한 두 명의 괴물을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이쯤 되니 솔직히 어이가 없기도 했다.
수만 마리의 언데드가 위협적인 군대임은 맞지만, 크라덴을 포함한 기사단 삼인방이 순회공연이라도 벌이면 이 전쟁 끝나도 한참 예전에 끝났을 텐데.
아니.
범위를 훌쩍 넓혀서 이런 초인들을 전문적으로 육성하고 사회적으로 우대해 준 밀레스 제국을 주축으로 성장해 가던 칼리야스 대륙이 어떻게 언데드 놈들에게 밀리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퀘스트나 아이템을 통해 간간이 등장하는 마법사들과 적어도 수만 명은 보유했을 기사들에 칼리야스 교단, 이 세 직군만 적절히 합치했어도 검은 파도가 지상에 당도하기도 전에 제방을 세우고 인류를 구원했으리라.
'하지만 그만한 전력을 보유했음에도 결국 신인지 아닌지 모를 시스템까지 나서서 지구인들을 끌어와야 했다. 그 말인즉....'
"휘윤 씨! 물약을 거의 다 소모했습니다!"
"아, 예."
불현듯 뇌리를 치고 가는 의구심에 깊게 빠져들어 가던 나는 정유환의 다급한 목소리에 망상에서 깨어나 축 늘어져 있던 환두대도를 다시금 움켜쥐었다.
뭔가 조금만 더 머리를 굴리면 정답은 아니더라도 얼추 정답에 가까운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을 거 같아 아쉽지만.
"일단은 여기부터."
전쟁터에서 잡념은 나 죽여줍쇼 하고 목을 내미는 것이나 진배없는 자살 행위.
서둘러 느슨해진 나사를 팽팽하게 조인 난 정유환에게 포션이 몇 개나 남았는지 물으며 시선을 골렘 쪽으로 집중했다.
자욱하게 솟구친 흙먼지 너머로 어렴풋하게나마 보이는 실루엣.
그 속의 놈은 스킬의 반동인지 축적해 두었던 사기를 단번에 투하한 여파인지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기회다!'
술에 취한 듯 휘청거리는 자태를 목도한 나는 재고 현황을 읊는 정유환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검대에 매달아 둔 막대기를 날리며 곧장 땅바닥을 밀었다.
"휘, 휘윤 씨?"
이 갑작스런 행동에 뒤쪽에서 당황하는 목소리가 고막을 스쳤으나 망설임은 사치였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기진맥진해 있는 이때보다 노리기 좋은 타이밍은 없었기에, 어떡해서든 눈앞의 찬스를 살려야 하는 바.
뛰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자마자 땅을 박차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사전에 짜 맞추기라도 한 듯.
"흐읍!"
부우우웅―
누구랑 바꿨는지 할버드를 쥐고서 도약한 엑스케트와 함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려 나간 우리 둘은 자연스레 좌우로 갈라지며 허리를 비틀었고.
엑세르(exér) 류(流).
깨물어 부수기.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우우우우우우우우웅!!
"흐아아아아!!"
"하아압!"
슈우우욱―
슈욱―
…콰아아앙!!
동일한 판단 아래 뻗어 나간 두 자루의 무구는 이네 굉음을 동반하며 콥스 골렘의 살집을 찢어발겼다.
그 기습적인 일격의 결과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비록 발모가지를 동강 내는 아름다운 결말은 이루지 못했지만.
콰득―
콰드드득―
"그워어어어어억? 그워어어어어!!"
인고의 시간을 견뎌 바위에 구멍을 내는 물방울처럼, 꾸준하게 새겨 놓았던 칼침들이 연쇄적으로 반응하며 상처를 벌려 준 덕에 놈의 발목이 체중이 주는 부하를 버티지 못하고 꺾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엑스케트 또한 본인이 맡은 왼 다리를 매우 깔끔하게 아작 낸 채 뒤로 물러나고 있는 상황.
됐다.
"…정유환 씨!"
양다리를 망가뜨림으로써 기동력 완전히 봉쇄되었음을 인지한 난 그 즉시 정유환의 이름을 힘껏 소리쳤다.
당장.
당신의 손에 들린 막대기에 불을 붙여 달라고, 빨리 그들에게 알려 달라고. 우리의 봉화를 기다리며 마음 졸이고 있을 리하인에게 '지원'을 요청하라고.
화르륵―
치이이이익!
"됐습니다!"
그 기나긴 문장을 담은 하얀 불길이 차차 흩어지는 먼지구름 속에서 꽃을 피워 낸 순간이었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콥스 골렘과 백연을 뿜어내는 연기 신호탄을 쳐든 정유환이 모습이 겹쳐 보인 동시에.
우우우우웅―
우우웅―
우우우웅―
…
…
"아."
푸르른 창공 위로 수십 줄기의 휘광이 강림한 것은.
이윽고.
현세의 왕림한 신의 광채가 시체 거인의 사지를 불살랐다.
…화아아아아악!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워어어어어어억!!"
신성 마법(神聖 魔法).
빛의 방패.
우우우웅―
화끈하게 불타올라야 할, 최우선적으로 노려져야 할 두툼하고 육덕진 대가리만은 내버려 두고서.
* * *
"이게 그거야?"
"예. 혹시 몰라 약속 사항을 쪽지에 적어 넣어 두었으니, 혹여라도 헷갈리신다면 읽어 보시죠."
"쓸데없는 소리 마라. 원치 않게 복귀하게 되어 기분은 썩 별로지만, 이런 걸로 누굴 다치게 하는 멍청이는 아니니까."
"압니다."
"대꾸는 잘하는군. 됐고, 다치지나 말도록. 우린 아직 할 게 남아 있지 않나."
"대련."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
"그러시죠. 가서 구경하고 계시면 저 괴물의 대가리가 잘리는 장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10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