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2조 진입 완료!"
"3조 진입!"
"3조 진입!"
…
…
스콰가 미끼가 되어 필드를 누비는 동안.
통로 쪽에서 3조, 즉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독촉하고 다그친 게 도움이 되었는지, 2조의 최종 순번이었던 레른마저 자취를 감추고 3조 1번 병사가 호령에 맞춰 안으로 몸을 들이밀고 있었다.
나아가 확실히 잘 훈련된 정예병들의 이동은 일반인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우리나라 특수군만 해도 단 10여 초 만에 버스 창문 틈으로 분대원 전원이 돌입하는 것처럼, 이들도 훈련 과정 중에 비스무리한 트레이닝이 있기라도 하는가.
"2번!"
"3번!"
"4번!"
…
…
차례가 되는 이는 제 순서가 되면 머뭇거리지 않고 빠져 통로로 달려가고, 대기 병력은 좌우로 생겨나는 빈 공간만큼 방진의 크기를 줄여 가며 릴레이 마라톤을 착실하게 진행해 나갔다.
"크아아아아아!!"
"키에에에엑!"
…
…
"2차 둘에 나머지는 사백쯤 되려나."
스콰의 강인한 생명력 덕택에 천여 마리에 달하던 2차 원정군의 숫자가 거의 절반 이하로 줄어든 데다 1차로 파견되었던 500여 마리도 대부분 정리가 끝난 시점이었기에 불안한 요소는 없었다.
그 말인즉슨.
저 웨이브만 견뎌 낼 수 있다면 전원 무사 귀환도 꿈은 아니란 의미였다.
리하인도 이를 캐치했는지.
"젠슨, 카르켈."
"예, 아가씨."
"충!"
두 부관을 곁으로 불러 모으는 그녀.
그리고는.
사아아아아아아―
서서히 끌어내는 마력. 한데 무얼 보여주려 하는 건지 옆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영 심상치 않았다.
쿠웅!
쿠우우웅!
그저 기운을 응축하는 것만으로도 옅은 아지랑이가 주변을 일그러뜨리고 대지를 진동시키며 리하인의 육체를 휘감은 채 무언가를 구현해 냈다.
묵직하면서도 날렵하고, 뭉툭하면서도 날카로운 기묘한 형상의 정체는 레이피어의 낭창낭창한 특성과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매치되는 동물.
'…뱀.'
뱀이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을지언정 생생하게 느껴지는 존재감을 만천하에 과시하며 그녀의 레이피어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거대한 이무기.
나는 그 격렬한 파동에 입을 다물었다.
이게 진짜 기사의 진심인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두 번의 대련.
특히나 개중 한 번은 약은 수를 쓰긴 했더라도 어쨌든 패배를 안겨 줬던 적도 있었기에 이만하면 나도 리하인의 절반 수준은 쫓아가지 않았을까 기대했는데, 오판이자 오만이라는 걸 절실히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나 아직 많이 모자라네."
근래 들어 이중 결합 스킬도 만들어 내면서 어찌저찌 근접한 레벨까진 도달했겠구나 자신했던 게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적어도 한 단계, 많으면 두 단계 이상의 격차가 나는 듯했다.
심지어.
"흐읍."
"음."
쿠웅―
쿵―
리하인에 이어 할버드에 푸른 마력을 덧씌우는 젠슨에게조차도 한 수에서 한 수 반은 뒤처지고 있단 직감이 들 정도였다.
그나마 셋 중 가장 약한 카르겔과는 반 수 이내로 좁힌 것 같은데, 이걸 위안 거리로 삼아야 하나?
"후, 멀었구나, 멀었어."
괜스레 차오르는 허무함에 쯧 하고 혀를 차길 잠시.
탁―
마침내 리하인이 전방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등 뒤로 잡아당겼던 오른팔로 반원을 그리며 레이피어를 휘두른다.
사교계 모임에 나간 레이디가 춤을 청한 귀공자에게 안시를 올리듯 우아하되 동시에 마운드 위의 투수가 공을 던지듯 단호하게.
사아아아아―
그 순간.
"으음!"
나는 똑똑히 보았다.
옅은 봄바람처럼 살랑이는 공기 너머로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를. 수천 년간의 수련에도 끝끝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한과 분노를.
이윽고.
세상이 뒤집혔다.
툭―
…콰과과과과광!!
* * *
전력(全力)을 다한 리하인의 검격.
"…와우."
그 무지막지한 초식이 일대를 휩쓸고 간 이후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어 버렸다. 땅바닥 위로 새겨진 선명한 흔적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 뭐.
파멸적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현장이었다.
리하인의 손에서 떠나간 이무기가 세계를 유영하며 물경 2~30m에 이르는 구역를 문자 그대로 초토화시켰으니까.
남은 거라고는 뱀 특유의 S자 형태로 새겨진 굴곡뿐이었다.
좀비도, 구울도, 선봉을 자처하던 레드 구울마저도 신음 한 번 내지 못하고 소멸해 버렸다.
만약 범위가 조금만 더 넓고 길었다면.
"크아아아악!! 크아아아아악!!"
저기 겨우 목숨을 건진 주제에 동족들을 잃었다고 노발대발하는 듀라한과 기타 좀비들까지 싸그리 쓸어 버렸으리라.
하.
나는 언제 저런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으려나.
"젠슨! 카르켈!"
약간의 질시와 상당한 부러움을 한숨을 내쉬는 사이 리하인의 신호를 받은 두 기사가 각자의 할버드를 하늘로 높게 쳐들며 수레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두 사람의 자세는 쌍둥이마냥 똑 닮아 있었다.
엑세르 가문의 봉신 기사가 되면서 동일한 창부술(槍斧術)을 배워 구사하는 모양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실력에 고하는 있을지언정 둘의 손에서 탄생한 결과물 역시 멋들어지게 일치했다.
후우우욱―
쿵―
촤아아아아악!!
천지를 잇는 궤적을 따라 초승달처럼 뻗어 나가는 마력.
정면으로 부딪쳤던 듀라한의 팔다리를 단박에 끊어 버리는 압도적인 면모는 저들도 리하인과 같은 정식 서임을 받은 기사라는 사실을 재차 상기시켜 주었다.
그렇게 연달아 펼쳐진 세 기사의 공세를 구경하고 있자니 문득 초전부터 저런 신위를 선보였다면 좋았을 텐데 왜 아끼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좀 더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더라면 내 아까운 포션들도 최소 두어 개는 아꼈을―
"큭."
"흐읍."
털썩!
털썩!
"아, 그런 건가."
불쑥 찾아온 의구심에 갸웃했던 나는 곧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 불꽃을 피워 내고 쓰러지듯 주저앉은 젠슨과 카르켈을 보며 함부로 남발할 만한 기예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내가 한 턴에 가진 마력을 전부 털어 넣고서 그 반동으로 탈력감에 빠지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무력해진 상태.
시시각각 변수가 난무하는 전장에서 이는 나 죽여줍쇼 하는 것과 진배없으니 마구잡이로 꺼내 들기가 꺼려지겠지.
하여.
덥썩―
"뭐, 하는 겁니까."
"내려놓으시오. 내가 알아서."
"들어서는 못 옮기겠고, 부축해 줄 테니 빨리 갑시다."
얼른 달려간 나는 두 사람의 왼팔, 오른팔을 내 어깨에 걸치며 수레벽을 치우고 통로로 이동했다.
자존심 강한 남정네들이라 땀내 나는 수컷의 보조를 받는 게 썩 기분 좋진 않았는지 계속해서 날 밀어내려 했지만.
"이러다 언데드 놈들이 쫓아오면 리하인 경이 위험해집니다."
절대 반지가 있기에 순종적으로 만드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 * *
"14번 진입!"
"15번 대기!"
두 기사를 통로 근처에 전해 주고 돌아가 리하인을 데려올 무렵 드디어 3조 말번 병사가 자신의 방패를 가지런히 정리하며 계단에 발을 걸쳤다.
탈출 스피드를 높이기 위해 중량이 나가는 장비들은 죄다 벗어두고 가기로 약속한지라 달랑 갑옷 한 벌 걸친 병사는 무척 홀가분해진 몸놀림으로 '15번 진입'을 크게 외치며 지하 계단을 주파해 나갔다.
"먼저 가겠습니다, 아가씨."
"빨리 출발하도록."
"충. 가자, 카르켈."
"예, 형님."
그 뒤로 젠슨과 카르켈이 바통을 넘겨 받아 들어가고, 두 남자의 머리카락이 안 보일 즈음 최후에 최후까지 기다리던 나와 리하인도 비도에 몸을 실었다.
탁!
리하인은 비좁은 통로에 진입하자마자 또다시 피를 내며 한쪽 벽에 손바닥을 얹었다.
레이피어와 할버드 그림이 교차되어 있는 지점으로, 그 중심에는 활짝 개방된 비도의 입구를 닫아주는 장치가 숨겨져 있었다.
쿵―
쿠구구구궁―
예의 그 진동과 함께.
"크아아아아아!!"
"키에에에엑!!"
…
…
"이놈의 진동만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초대 가주님이 이곳을 봉토로 하사받던 시절에 친구분과 설치한 곳이라고 한다. 벌써 수백 년도 더 된 과거니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이게 한계였을 것이다. 그 후로는 보수를 시도하다 위치가 발각될까 우려해 그대로 두었지. 어차피 여길 쓰게 된다면 그때는 가문의 존폐가 달린 상황이니까. 더구나 진동이 있다면 오히려 좋을 거라 판단했다. 혹 우리 뒤를 쫓아올 추격자들 입장에선 통로가 무너지는 것인가 무서워 섣불리 다가오지 못할 테니."
"음. 그렇군요."
자신도 민망한지 내 혼잣말에 작게나마 변명 아닌 변명을 중얼거리는 리하인. 그녀를 탓하려던 의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괜시리 헛기침을 뱉으며 체내의 마력을 끄집어냈다.
파직―
파지직―
복부의 회전과 동시에 자연스레 피어오르는 뇌류로 인해 어두컴컴하던 비도 내부가 훤히 밝아질 때쯤.
"키에에에에엑!!"
"크르륵! 크륵!"
"끄어어어어!"
…
…
스콰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다 뒤늦게 정신 차린 언데드 놈들의 후미가 눈앞에 얼굴을 드러냈다.
농락당했던 게 굉장히 분했는지 더없이 흉측하게 구겨진 면상들.
고생 꽤나 한 듯 몇 놈의 안면엔 잡초나 모래 따위가 묻어 안 그래도 흉물스러운 마스크가 몇 배는 더 더러워 보이는 터라 그게 참 미안해서 손대신 칼날을 휘휘 저으며 사과의 한마디를 전했다.
"술래잡기 2차전, 지금 시작합니다."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2연격.
파직―
꽈르르르릉!!
꽈르르릉!
* * *
"…아가씨!"
검대에 걸려 있던 헤드 랜턴을 켜 안전하게 계단을 내려가 복도에 다다르자 낯익은 음성이 들렸다.
젠슨과 카르켈…과.
"어이구, 아가씨!"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아가씨!"
"누나 왔다! 누나!"
"벨! 아가씨께 누나라니, 그럼 못 써."
"왜?"
…
…
어차피 리하인이 없으면 가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인지, 저 혼자 살겠다고 비도까지 내어준 리하인을 두고 도망치는 게 양심에 걸렸는지 일찌감치 떠났던 코마토르 마을 사람들이 복두에 일자로 우두커니 서서 우리를 반겨주는 중이었다.
다들 뭉그적거리지 말고 반대편 출구에 가 있으라고 고지해 뒀건만.
"다들 여기서 이럴 시간 없다. 입구는 봉해 두었지만 강제로 뚫고 들어올 가능성도 있다. 젠슨, 그대가 후방 경계를 담당한다."
"예, 아가씨."
주민들과 병사들, 두 명의 부관과 눈을 맞추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긋방긋 웃는 사람들을 지나 앞장서는 리하인.
따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투구에 가려진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띠링!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호위〉의 과제를 완료하셨습니다.]
* 생존 인원: 76/76
[당신의 활약도를 종합하여 보상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현재 〈서브 퀘스트: 소집령〉을 진행 중입니다.]
[귀환이 보류됩니다.]
[〈서브 퀘스트: 소집령〉을 위한 '계속 진행' 또는 '귀환'을 선택해 주십시오.]
['계속 진행'을 선택하더라도 언제든 '주문: 귀환'을 통해 자의적으로 퀘스트를 종료할 수 있으나, 두 가지 조건에 의해 '강제 귀환'이 발동될 수 있습니다.]
* 조건 1: 최대 10km 내에 수도원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 조건 2: 퀘스트 진행까지 24시간 이상 소모될 경우
71화
[ 도시 글라디아르 ]
툭―
투둑―
철컥!
…쿠구구구궁!
기계 태엽 돌아가는 사운드와 함께 울려 퍼지는 예의 그 진동.
추격자들에게 혼동을 주기 위한 장치로써 이용 중이라는 일종의 블러핑용 땅울림은 안쪽에서 듣는 게 언덕에서보다 몇 배는 심했다.
더군다나 단순히 흔들림에서 지나지 않고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사방이 진짜로 덜덜 떨리고 조각이 부서지며 파편이 튀는 등 시각, 청각, 촉각 모든 면에서 침입자를 위협하고 있어 사전 정보 없이 무작정 따라 들어온다면 안 속으려야 안 속을 수가 없는 구조였다.
"알고도 당황스러울 지경이니."
"됐다. 경사가 가파르니 조심해서 올라오도록."
흡사 지진 체험관 같은 현장이 지속되길 얼마간.
주위를 신기한 눈으로 감상하던 나는 리하인의 얘기에 위쪽을 바라봤다. 저 멀리, 사방에 가득하던 어둠을 뚫고 스며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이 보였다.
꼭 치열했던 탈출 레이스 성공을 축하해 주는 듯한 은은하게 반짝이는 서광 덕택에 힘들어도 웃으며 기분 좋게 계단을 올랐을 때.
"…리하인!"
"오라버니?!"
"무사히 돌아왔구나."
우리는 훤칠하게 생긴 한 남자와 대면하게 되었다.
인상적인 날렵한 눈매와 선홍색 머리칼, 전신을 둘러싼 은빛 갑주의 허리춤에 걸린 레이피어 한 자루.
엑세르 백작의 장남이자 리하인의 친오빠 '엑스케트 폰 엑세르'였다.
"그런데 저들은 누구냐."
그가 무탈하게 집으로 돌아온 동생에게 안부를 묻다 말고 이쪽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 *
"…이렇게 돼서 저들을 이리로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서서 대화를 나누는 리하인과 엑스케트 남매.
바깥에 나서게 된 경위와 귀환 도중에 벌어진 사건 등등 여태껏 겪었던 자초지종을 차근차근하게 설명하는 줄곧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초고위층인 백작가의 저택답게 부지는 총 다섯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무려 지상 4층에 지하 2층으로 구성된 중앙의 본채를 기점으로 동남부에는 사용인(使用人, 고용된 이들을 통칭하는 단어)들이 머무는 숙소가 서남부에는 꽃과 작은 나무 및 인공 호수가 자리 잡은 산책로, 동북부에는 기사 가문의 필수 요건인 커다란 훈련장이, 서북부쪽에는 수십 필의 전마(戰馬)를 관리하는 마장과 여타 식자재 창고 등으로 이루어진 상태였다.
한마디로 무진장 넓었다.
단지, 외부인인 우리가 관람 가능한 부분은 본채 정문으로 나오면 바로 정면에 있는 동남과 서남 구역으로 극히 한정적이었다.
"이야."
하나 감탄사는 끊이지 않고 튀어나왔다.
가끔 TV나 영화에서나 봤지, 28년 인생 살면서 이토록 거대한 장원에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정유환의 별장도 굳이 갖다 붙인다면 비슷한 부류이기는 하나, 달이 아무리 밝아도 태양은 되지 못하는 법이었다.
다만 필요하다면 수십억이라도 팍팍 쓰는 사람이니 그가 작심하고 짓는다면 태양을 잡아먹는 블랙홀급으로 건설될 거다.
한 국가에서 손가락 내에 꼽히는, 지구 전체를 무대로 삼아도 결코 꿇리지 않는 거대 그룹 총수의 혈족이자 돈독한 신임을 바탕으로 어쩌면 장차 청성의 가장 높은 별이 될지도 모를 '확률'을 지닌 회사의 대표가 된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군. 알겠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버님과 얘기를 해봐야겠다. 내 선에서 해결할 수준은 아니니."
"알겠습니다."
시답잖은 상념이 점점 산으로 흘러갈 즈음 해후를 마친 엑스케트가 리하인을 뒤로 물리고 우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길이 사람들을 하나둘 훑은 찰나.
스윽―
탁!
"...."
나는 불현듯 도병을 움켜쥐었다.
성곽을 포위하고 반나절이 넘도록 공성 중인 언데드 놈들과의 전투가 원인인지 피곤함이 잔뜩 묻어 나오는 눈동자와 마주한 직후 머릿속을 강타한 불길한 상상 때문이었다.
전해지는 낭설일 뿐이나, 중국의 초대 황제였던 진의 시황제는 자신의 무덤을 건축한 후 도굴을 방지하고자 인부들을 생매장했다는 풍문은 거의 기정사실처럼 나돌았으며, 그 밖에 이집트의 무수한 파라오들을 비롯해 여러 왕과 귀족들이 본인의 재산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이들의 생명을 짓밟아왔다.
리하인 폰 엑세르.
그녀는 귀족답지 않게 기사도 정신에 푹 빠진, 약자들을 돕는 '특별한' 캐릭터였지만… 이런 타입이 있다면 저런 타입도 있기 마련. 나를 포함한 70여 명이란 분명 많은 숫자였지만, 저 높은 곳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위정자들에겐 벌레나 다름없었다.
다시 말해, 저 남자가 '보안 유지'를 명목으로 이곳에 모인 전원을 살인멸구(殺人滅口)하려 들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멍청한 새끼.'
나는 그 중대한 생리를 이제야 자각한 스스로를 욕하며 호흡조차 죽인 채 엑스케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이상 행동을 보이는 즉시 도망칠 작정이었다.
리하인에게 듣기로 엑스케트의 실력은 백작가 내에서 선두를 다툰다고 했다.
가문 기사단인 '세르펜스(serpens)'의 단장과 부단장 및 일부를 제외하곤 전부 무릎을 꿇렸다는 괴물이라 맞붙어봐야 끔찍하게 살해당할 게 뻔한 바.
메인 퀘도 끝냈겠다.
마력이 아슬아슬하긴 한데 어찌어찌 '유령 걸음' 한 발은 쓸 수 있을 듯하니 죽어라 튈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발뒤꿈치에 힘을 주려던 그때.
스윽―
"그럴 필요 없다. 그대들을 해칠 뜻은 전혀 없으니."
엑스케트의 잔잔한 음성이 발목을 붙잡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정확히 내 두 눈을 응시하며. 그러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불안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우선 아버님께로 가자. 네가 온 걸 아시면 좋아하실 게다. 네 걱정을 많이 하셨으니."
현시점 최종 보스인 가주(家主)가 이 길의 끝에 놓여 있었으니까.
'백두산 다음은 에베레스트인가.'
…그냥 바쁜 일 있다고 구라치고 빠질까?
* * *
띠링!
['계속 진행'을 선택하셨습니다.]
['강제 귀환 조건 1'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강제 귀환 조건 2'가 활성화됩니다.]
[남은 시간: 23시간 59분 69초]
[남은 시간: 23시간 59분 68초]
[남은 시간: 23시간 59분 67초]
…
…
[당신의 성적을 등급화합니다.]
[주어진 임무를 더없이 훌륭하고 완벽하게 해결한 당신의 등급은 'Rank: S'입니다.]
[등급에 따른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으로 '상당한 경험치' 및 '저항의 반지', '영혼석 교환권(×2)', '다회용 장비 수리 키트'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 * *
'저항의 반지?'
최종 보스를 목전에 두고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지급받은 보상을 확인하던 나는 흥미를 끄는 아이템 목록에 눈빛을 번뜩였다.
'저항의 반지'라.
거기다 두 개의 영혼석. 아마도 스콜로펜드라와의 전투와 '서브 퀘스트: 영혼석 세공사(1)〉'의 영향이 크게 작용된 결과 같은데, 내막이야 차치하고서 일단 저항과 관련된 아이템이 드랍됐다는 사실 자체가 썩 기분이 좋았다.
〈저항의 반지/Magic〉
* 정신적인 면, 자연의 수많은 속성과 관련된 사항은 노력만으로는 성장이 불가한 영역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민했다. 신(神)이 정해 놓은 생물적 한계를 뛰어넘을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이 반지는 그 고뇌로부터 탄생했다.
* 착용 시 모든 정신 및 속성 저항력 9% 상승
"호."
옵션도 매직 등급치고 비교적 대단했다.
속성에 정신 계열까지 커버 되는 아이템이라니. 향상되는 수치도 9%면 웬만한 동급 아이템보다 높았기에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 외에 나머지 보상안도 전체적으로 괜찮은 편이었다.
〈다회용 무구 수리 키트/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l book). 찢는 것으로 지정된 무기와 방어구를 신상품에 준할 정도로 수리한다. 단, 키트보다 상위의 무구는 효과가 적용되지 않으며 50% 이상 파괴된 상태 역시 사용이 불가능하다.
* 마법 '무구 수리'
* 0/10
환두대도나 라우타우루스의 가죽 방어구 세트가 망가졌을 때 원상복귀시킬 수 있는 대비책이라든가.
영혼석이야 두말할 거 없고.
'내친김에 지금 써볼까.'
찌이익―
['다회용 무구 수리 키트'를 사용합니다.]
[수리할 무구를 지정해 주십시오.]
*지닌 아이템 목록 열기▼
['사나운 호랑이의 양손 환두대도' 및 다섯 개 아이템의 복원을 시도합니다.]
우우우웅!
만전을 기한다.
나는 그 취지에 맞게 소형 책자에서 여섯 장의 스크롤을 한꺼번에 찢어 냈다. 코마토르 마을의 재봉사 루카스 덕에 방어구 쪽을 얼추 손을 봤었지만, 표현대로 약간 조정한 것에 불과했기에 싹 다 뜯어고쳤다.
그 과정에서 뿜어져 나온 불빛이 내 예상보다 강렬해 조금 당혹스러웠으나, 있는 집 자식들에겐 익숙한 광경인지 근처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놀라는 거 말고는 스무스하게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딱 하나....
'이건 어쩐다.'
두 장의 영혼석 교환권만 빼고.
엑세르 백작과의 만남을 앞둔 탓에 근력이든 속력이든 곧장 바꿔 먹어야 하는 게 맞지만, 그러자니 최근에 개방된 〈서브 퀘스트: 영혼석 세공사(1)〉이 걸렸다.
다소 쉽게 베놈 데드를 처치하면서 '분리'도 얻었겠다.
'장착'과 '조합'도 있겠다.
의자만 선다면 당장에라도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는 마당이라 과감하게 투자를 해야 할지, 안정적인 쪽으로 가야 할지 뚜렷한 확신이 서질 않았다.
'두 장이면 10%긴 한데, 이게 또 보상으로 마수급 영혼석이라도 뜨면 최대 24%란 말이지.'
흐음.
이걸 해, 말어.
마수급 영혼석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경험까지 있었기에 심각하게 고심하던 나는 앞쪽에서 들려온 엑스케트의 말에 결단을 내렸다.
"이제 곧 아버님, 엑세르 백작님을 뵙게 될 거다. 다들 알다시피 현재는 전시 상황이다. 백작님께서는 영지민들을 함부로 대하시는 분이 아니지만,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몸가짐을 똑바로 할 수 있도록."
과감함과 안정감.
서로 간의 장단점을 설명하며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이어 가던 싸움의 승리자는 전자였다.
'장착.'
띠링!
['기술: 장작'이 발동됩니다.]
[장비에 장착될 영혼석과 영혼석을 장착할 장비를 선택해 주십시오.]
['사나운 호랑이의 영혼석'과 '저항의 반지'가 지정되었습니다.]
[영혼석 장착을 시도합니다.]
['기술: 분리'가 발동―]
[아이템 '사나운 호랑이의 저항의 반지'가―]
['기술: 조합'이―]
…
…
이유는 명확했다.
스킬 '조합'의 최소 발동 요건을 충족시켜 주는 2장의 교환권, 이걸 그냥 내주진 않았을 거라는 게 내 결정의 근거였다.
띠링!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영혼석 세공사(1)〉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적당한 경험치' 및 '정순한 영혼석 교환권: 육체'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72화
"아."
최초의 레어 등급 아이템 '마수 스콜로펜드라의 정순한 영혼석'.
운이 좋게, 운도 실력이라면 실력을 통해 손에 거머쥔 이 특별한 보물은 나를 한 단계… 아니, 적어도 몇 단계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야말로 복용자를 신세계로 데려다주는 기적의 산물.
〈정순한 영혼석 교환권: 육체/Rare〉
"미쳤네."
나는 채 하루가 가기도 전에 또다시 손에 넣은 그 마법의 비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걸음마저 멈췄다.
"왜… 그러시는지요, 휘윤 경?"
옆에서 따라 걷던 레른이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으나, 바람에 실려 온 질문이 귓가를 파고들지도 못할 만큼 난 지금 당혹스러웠다.
하이 리스크를 짊어져야 하이 리턴을 거머쥔다.
오랜 투자계의 격언대로 판단을 실행에 옮긴 건 맞지만, 무작정 엄청난 기대감을 품기보단 최악의 경우에 직면하더라도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데 쓰인 영물급 영혼석 교환권 두 어장쯤은 되돌려 주지 않을까 싶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게만 돼도 결국 손해 없이 경험치만 꿀꺽하는 셈이니 결과적으로는 이득이었으니까.
한데.
"이게 뜨네."
설마 그렸던 최상의 시나리오가 그대로 이뤄질 줄이야.
물론, 엄밀히 따지면 약간의 오차가 있기는 했다. 일반적인 교환권과 다르게 '육체'라는 접두사가 붙어 있는 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가에 피어난 미소는 사라질 줄을 몰랐다. 마력이었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생존율을 높이는 데에 있어선 베이스가 되는 신체 능력치도 당연히 너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겪어 본 바에 의하면 마수급 영혼석은 두 개 스탯이 동시에 상승하는 시스템.
"바로 까자."
적잖게 흥분한 나는 지체하지 않고 스크롤을 반으로 갈랐다. 엑스케트의 말에 따르면 보스 존이 코앞이었다.
미적거리다간 괜한 오해나 살 터.
마침 '무구 수리 키트'로 밑밥도 깔아뒀으니 후딱 마무리 짓는다.
촤작―
['정순한 영혼석 교환권: 육체'를 사용합니다.]
[카테고리가 개방됩니다.]
〈정순한 영혼석 육체 카테고리〉
* 근력: 근력, 속력/근력, 체력/근력, 내구력/근력, 인지력....
* 속력: 속력, 근력/속력, 체력/속력, 내구력/속력, 인지력....
* 인지력: 인지력, 근력/인지력, 체력/인지력, 내구력....
…
…
'이런 식이구만.'
찬찬히 출력되는 목록 창.
교환 방식은 간단했다.
1번: 일차적으로 13%가 될 스탯을 정한다.
2번: 가령 근력을 골랐다면, 그 뒤에 붙을 11%짜리 스탯 항목을 추가한다. 단, '근력 13%/근력 11%'와 같이 동일하게는 지정할 수 없다.
3번: 설정이 완료된 영혼석을 받는다.
4번: 먹는다.
어린아이도 이해하기 쉬운 간편한 형식이라 덕분에 1번에서 4번까지 넘어가는 데엔 10초면 충분했다.
내가 처한 상황에서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선택지는 대강 정해져 있는 까닭이었다.
그것은.
['근력/속력'을 선택했습니다.]
['사납고도 쾌속한 호랑이의 정순한 영혼석'을 획득했습니다.]
〈사납고도 쾌속한 마수 호랑이의 정순한 영혼석/Rare〉
*'생명의 샘'이 지닌 신비로운 생명력을 통해 정해진 한계를 이겨 내고 영물(靈物)을 넘어 마수(魔獸)의 경지에 오른 호랑이의 영혼석이다. 진화 과정에서 범한 삿된 방법으로 인해 한때는 서로 다른 영혼이 뒤섞여 근원의 그릇마저 오염되어 있었으나, 특별한 가공을 거쳐 불순물이 제거된 상태로 복용 또는 장비 제작 시 내재된 영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 복용 시 근력 13% 영구 강화/복용 시 속력 11% 영구 강화/장비 제작 시 착용자의 근력 및 속력 15% 상승 효과 적용
기본에 충실한 '근력+속력' 조합으로.
즉각적으로 전력을 끌어올리려면 역시 이게 최선이었다.
으적―
"오랜만이다. 호랑아."
['사납고도 쾌속한 마수 호랑이의 정순한 영혼석'을 복용했습니다.]
[속력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11% 향상됩니다.]
[근력의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13% 향상됩니다.]
* * *
"크아아아아아아!!"
"키에에에엑!!"
"끄어어어!"
"화살! 화살 가져와!"
"기름이 다 끓었습니다!"
"신호 기다리지 말고 바로바로 쏟아부어!"
"충!"
검게 짓눌린 하늘.
사라진 일광을 대신하기 위한 수십 개의 화로와 수백 개의 횃불로 낮보다 더욱 밝게 느껴지는 도시 글라디아르(gládĭár)의 성벽이 드디어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엑세트 가의 저택에서 걸어오는 동안 사오십 분이 흘렀으나 여전히 치열한 이곳은 언데드 놈들의 하울링과 평화를 갈구하는 인간들의 함성이 겹쳐 귀가 다 먹먹할 지경이었다.
특히 성문 인근은 소음 데시벨이 상상을 초월했다.
"자재 가져왔습니다!"
"철판은? 철판 못 구했어?!"
"지, 지금 이송 중이랍니다!"
"이 새끼들아! 나랑 장난해? 마차든 수레든 징발해서 빨리 가져와!"
"충!!"
"저 그럼 이것들은...."
"일단 가져다 붙여!"
나무로 된 초대형 문짝에 철창을 연상케 하는 철문이 적군의 진입을 저지 중임에도 두 겹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는지 각종 목판에 철판을 덧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나다니지 못하게끔 봉쇄하느라, 연신 반복되는 망치질이 일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중이었다.
그 바람에 인상을 찡그리던 나는.
"엑스케트 님!"
"가서 아버님께 리하인을 데려왔다 알리게."
"옛!"
돌연 엑스케트의 전언을 받고 성벽 계단을 뛰어오르는 건장한 체격의 기사의 뒷모습을 쫓아 머리를 들었다.
엑세르 백작가의 상징이라는 레이피어를 휘감은 붉은 뱀이 그려진 깃발이 위풍당당하게 휘날리고 있는 성곽의 중심.
찌릿―
찌릿―
"…음."
그곳에서 날아든, 닿기만 해도 베일 듯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같은 무지막지한 기운들이 살갗을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
마치 독사를 면전에 둔 개구리가 된 것마냥 누군가 심장을 틀어쥐는 느낌에 꾹 다문 입술 틈새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게 한껏 예민해진 기사의 살기인가?
탁―
반사적으로 도병에 손을 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봐야 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그저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있는 게 매우 한정적이었으나, 안면이라도 익혀 두는 게 생판 모르는 것보단 백번 나았다.
"백작님께서 행차하신다."
터벅―
터벅―
그러한 일념으로 동공에 힘을 주는 사이.
마침내 네댓 명의 호위 기사들을 앞세운 거한이 성벽을 내려와 우리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피처럼 붉은 머리칼에 어지간한 보디빌더는 가볍게 뭉갤만 한 다부진 몸집으로 소위 '백전노장(百戰老將)'이라는 수식어가 절로 떠오르는 무미건조한 얼굴의 노인.
엑세르 백작이었다.
* * *
"...."
꿀꺽―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장내.
고작 10m만 걸어가도 온갖 괴성이 난무하는 아비규환이 펼쳐져 있었으나, 흡사 단절된 공간인 양 여긴 평소 들리지도 않던 침 삼키는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일반 농민들에겐 평생 가도 한 번을 볼까 말까한 대 귀족의 행차.
황제로부터 임명을 받아 영지민들의 생사여탈권까지 갖게 된 주인의 등장이었으니 굳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게다가.
'무허가 비도 이용자'라는 명분을 내준 처지라 그 어느 때보다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만.
"기사는 정의를 수호하고 국가의 백성을 보호하는 자. 잘했다, 리하인."
호부무견자(虎父無犬子)라던가.
엑세르 백작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 마디는 가슴속에 맺힌 우려를 단숨에 종식시켜 버렸다.
"아, 아버님."
"무사히 돌아왔으니 그걸로 됐다."
백성을 개돼지로 보는, 고혈 빨아먹기에 안달 난 평범한 귀족은 이 자리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참 신기한 광경이었다.
문득 이게 밀레스 제국 귀족들의 통상적인 가치관인가 싶기도 했으나. 그랬다면 하르크 씨가 영주 성을 털라고 조언했을 리가 없지.
즉, 저들이 유독 특별하다는 의미였다.
'다행이네. 이콰인지 아콰인지 하는 남작 놈이었으면 지금쯤 칼부림이 났을 텐데.'
이 또한 시스템의 안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원만하게 해결된 사태에 나는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도집을 붙잡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여차하면 뽑고 휘두르겠단 각오였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얗게 질린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채 닦지도 못했다. 아예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내 딸아이를 도와준 그대들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엑세르 백작의 선언 끝에.
"다만, 보다시피 우리는 전례 없는 위험에 봉착한 실정이다. 우리는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합심해야 하고, 그러한 연유로 모두가 밤낮 가리지 않고 전쟁을 돕고 있지. 그대들이 지난 며칠간 고생했음은 전해 들었으나, 미안하게도 쉬게 내버려 둘 순 없을 것 같군."
띠링!
"응?"
"그대들도 이 땅에서 편히 쉬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러하듯."
[지원 요청 들어왔습니다.]
[30분 후 칼리야스 대륙으로의 이동을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30분 00초]
[지원자 '오휘윤'의 현 위치는 칼리야스 대륙입니다.]
[별도의 과정 없이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이 시작됩니다.]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
* 제국 내 수많은 기사들을 배출하며 당당히 손에 꼽는 명문가로 발전해 온 엑세르(exér) 백작 가문의 도시 글라디아르(gládĭár). 언제나 활발하고 쾌활하던 도시의 일상이 무너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은밀하고도 광포하게 발발한 공습이 채 사흘도 가지 않아 무너진 마을 트리트니(Tritóni)를 기점으로 열흘째 되던 날엔 아라티오(ărátĭo)가, 보름여가 흘러 겨우 소식을 접했을 땐 클투스(cultus)를 위시한 수십 개의 마을이 이미 검은 물결에 뒤덮여 쓸려 버린 이후였다.
엑세르 백작은 이 전대미문의 사건에 대해 황실에 전령을 보내는 한편 원인을 조사할 조사단을 조직하는 등의 노력을 기했다.
하나, 명령을 받아 떠나갔다 돌아온 부하들의 대답은 하나같았다.
"대군이, 괴물들로 이루어진 군단이 도시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대전쟁을 알리는 비보였다.
이에 백작은 심히 당황스러웠으나, 수십 년간 전장을 굴렀던 백전노장답게 금세 침착함을 되찾으며 권좌에서 일어나 외쳤다.
"적군이 쳐들어온다면, 쓰러뜨리면 될 뿐이다."
갑작스런 사태에 모든 것들이 부족했으나, 두려움 따윈 내비치지 않았다. 가문의 저력과 도시의 협력이 더해진다면 무엇이 와도 깨부술 수 있다. 백작은 자신했고, 자신감은 기세가 되었다.
그렇게.
"성문을 봉쇄하고 동원령을 선포한다."
군주의 선언이 떨어졌다.
(0/1)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대다수의 지원자가 동시 진행합니다.
* 특이 사항 2: 본 퀘스트는 '2가지 조건'에 의해 성패가 결정됩니다.
* 성공 조건: 적 언데드 군단 전체 소멸
* 실패 조건: 도시 글라디아르(gládĭár)의 생존자 70% 이상 사망
* 특이 사항 3: 퀘스트 실패 시 다음 퀘스트로 연계됩니다.
* 서브 퀘스트 목록 확인 적용자: 서브 퀘스트 목록 열람▼
"퀘스, 트?"
느닷없이 퀘스트가 발현됐기 때문이었다.
73화
'갑자기?'
나는 난데없이 개방된 홀로그램 화면을 보며 당혹스런 감정을 토해 냈다. 이렇게 뜬금없이, 더군다나 지구로 귀환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연속으로 퀘스트가 하달될 줄이야.
다만 한편으론 납득이 가긴 갔다.
최소 일만 마리 이상의 언데드 군단이 총 집합한 대규모 전장이니만큼 생환자들의 협력은 거의 필수불가결적인 상황이었으니까.
그러한 연유로 얼떨떨했던 마음이 차차 가라앉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 있어 봐. 대다수?'
단연 두드러지는 항목은 특이 사항 1번이었다.
'다수'라고 적혀 있던 기존과 달리 '대(大)'라는 접두사가 붙은 공지.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하다.
늘상 다섯으로 국한되었던 규모가 몇 배 혹은 수십 배로 증폭된다는 뜻.
어쩌면 국내의 모든 생환자가 소환되는 양상으로 전개될지도 몰랐다. 더불어 만약 그 가정대로 된다면.
'1만 마리가 아니라, 10만 마리를 상대할 수도 있겠는데?'
우리는 여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지옥을 맞이할 확률도 낮지 않았다. 생환자의 숫자와 임무 난이도는 정비례하는 법이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째서 기껏해야 단독 퀘스트에 딸린 서브 미션 보상으로 뜬금없이 마수(魔獸)에 관한 정보를 던져 줬는지도 이해가 갔다.
말미에 가서 2차 진화체들이 무더기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스케일에 비해 좀 과하다 싶었는데, 애당초 일종의 대비책으로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앞으로 접하게 될 험난한 난관들을 수월하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장의 발판처럼 리하인과의 대련도 비슷한 의도였으리라.
뻥튀기된 스탯을 온전히 소화하게끔 수련을 시켜 주는 훈련용 NPC랄까?
'이야… 뭐 얼마나 빡세게 굴리려고. 아주 철저하게도 설계해 두셨구만.'
한낱 뇌피셜에 불과했으나 공교롭게도 착착 들어맞는 해석에 등골에 소름이 쫙 돋은 나는 시스템, 혹은 그 너머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퀘스트 개최자의 설계에 혀를 내둘렀다.
왠지 가시밭길을 뒹구는 미래가 그려진 탓이다.
아마도 스스로 자처해서 들어갔겠지만.
"…그래서 자네가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라고 했나."
"음?"
한창 상념에 빠져 있던 차에 옆에서 근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눈치껏 자세를 바로 하며 시선을 옮기니, 코마토르 마을 주민들에게 총동원령이 선포됐음을 공표한 엑세르 백작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리하인이 짧게나마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다 보니 내가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라는 점을 알고 관심이 생긴 모양.
보다 정확하게는 쓸 만한 전력을 발견했구나 싶은 거 같았다. 벼락을 펑펑 불러 대는 준기사급 이상의 실력자라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적잖게 보탬이 될 터이니.
"오휘윤이라고 합니다."
상대의 심리가 어떻든.
나는 예우를 다해 리하인들에게서 배운 기사들의 인사법을 따라 심장 부근에 손을 얹으며 살포시 허리를 숙였다.
신분이 하도 높으신 양반이라 눈인사만 하기엔 조금 부담이 됐다.
적에서 아군으로 관계가 변한 데다 영지 내에서는 황제도 저리 가라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 이런 사람에겐 잘 보여서 나쁠 게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리하인과의 대련이 아직 한 번 남았구나. 현장이 하도 급박하게 돌아가던 여파로 일정을 잡기가 애매해 미뤄 뒀는데, 이참에 설령 무력하게 패배하더라도 나머지 빈칸을 채워 퀘스트를 클리어 해둬야겠다.
약은 수까지 구사해 간신히 1승도 챙겨 놓고 이걸 버리고 갈 순 없지.
그건 그렇고.
"루데오 엑세르라고 하네. 이제는 전설이 된 이름이라 기억하는 이도 많지 않은 무학을 이어 가는 자가 남아 있다니, 무의 길을 걷는 한 명의 기사로서 놀랍고 또 반갑군."
"무학이라고 칭하기엔 많이 모자랍니다."
"때로는 도전하는 것 자체에 박수받는 법이지. 그보다 수도원을 찾아왔다지?"
"그렇습니다."
만나서 즐거웠네, 한동안 잘 부탁하겠네… 정도의 적당한 수준으로 귀결될 줄 알았던 루데오 백작과의 담소에서 나는 꽤나 재미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흐음, 이것이 신의 계획인가."
"예? 그게 무슨...."
"이틀 전 수도원장에게서 연락이 왔었네. 도시의 안녕을 기원하던 기도 중에 계시를 들었다고. 조만간 어둠을 불태울 태양이 뜰 것이니 나보고 크게 걱정하지 말라더군."
예서 다시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예상 못 했던, 과거 아른헬 사제와의 만남을 회상하게 만드는 '신의 계시'라는 단어였다.
"계시, 말씀이십니까?"
"나는 그다지 신실한 편이 아니지만, 자네가 온 걸 보면 수도원장 그 친구의 장담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나를 비롯한 생환자들의 합류를 예지했다는 수도원장과의 에피소드에 나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우연이 거듭되면 운명이라고 하듯 무언가가 연속되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따르기 마련.
그러한 점에서 계속해서 언급되는 신의 계시라는 게, 혹시 칼리야스인들의 입장에서 생환자의 출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둔 시스템의 특수 장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내 추측이 맞다면 적어도 한 가지는 명백해졌다.
시스템으로 통칭하는 퀘스트 주최자의 정체가 '신(神)'이라는 것
'신이라....'
과연 진실은 무엇일는지.
그나저나 하도 신, 신 거리고 있으니 불현듯 칼리야스 대륙에 정말 신이 실존한다면 지구에도 지구를 관장하는 신이 실재할런가 싶은 의문이 머릿속에 감돌았다.
한때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
'됐다. 이제 와서 뭘.'
"계시가 있었다니 더더욱 수도원에 들러 봐야겠군요."
"안내를 붙여주겠네."
"그래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별말을. 대신 한 가지만 부탁하지."
"참전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도원에 다녀오는 대로 가장 위험한 구역에 배치해 주시면 힘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먼저 자진해 주니 고맙군. 그대 같은 기사가 함께해 준다면 병사들도 힘낼 수 있을 걸세."
잡념을 떨쳐내고 루데오 백작의 호감도를 올리는 데 주력했던 나는 서로 만족스럽게 담화를 마무리 짓고 몸을 돌렸다.
새로운 메인 퀘스트가 발동된 덕에 타임 리미트는 사라졌으나, 당장이 아니면 이후로는 여유 시간이 생기지 않을 듯해서 미리미리 다녀올 요량이었다.
〈서브 퀘스트: 소집령〉.
이 녀석은 보통의 서브 미션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무려 '에픽 퀘스트'로 가는 열쇠였으니까.
* * *
"이쪽입니다. 출입은 자유로우며, 저곳의 큰 건물이 본관이니, 그리로 가시면 사제님들을 만나 뵐 수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이건 별거 아니지만."
"예? 아닙―"
"부담 갖지 말고 가져가시죠.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기름칠 좀 해두려는 겁니다."
"크흠. 알겠습니다."
루데오 백작의 지시로 글라디아르 내에 위치한 수도원으로 데려다준 병사에게 은화 두어 개를 안긴 나는 괜한 헛기침으로 감사를 대신하는 그를 뒤로하고 새하얀 석재 문을 넘어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본래 주택이나 상점 등 외부 시설과 동떨어진 지역에 터를 두고 신앙생활에만 몰두하는 지구식 수도원과 달리, 교화나 성당처럼 대로 한복판을 버젓이 차지한 폴람마(flamma) 수도원은 페루스 마을 레푸스 수도원의 서너 배가량 큰 크기를 자랑했다.
단지, 저녁이 훌쩍 지난 밤이거니와 총동원령이 발효된 까닭인지 오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공허해 보일 무렵.
화륵―
방문자가 있음을 인지한 듯 본관으로 보이는 건물에서 불빛이 확 일렁였다.
자연스레 그쪽으로 눈길이 기울길 잠시 저벅저벅 걷는 발소리 곁으로 누군가의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칼리야스의 축복이 있기를."
한 손에 횃불을 쥔 새하얀 성복의 노사제, 폴람마 수도원의 원장 베네딕티오였다.
그의 얼굴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나 동행해 주었던 병사를 통해 생김새나 나이대 등 기본적인 인적 사항은 사전에 숙지해 뒀었기에 나는 얼른 성호를 취하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아, 칼리야스의 축복이 있기를."
"이 늦은 밤에 손님께선 어쩐 일이신지요."
교단의 검.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성기사쯤 되는 '수호사제'로서 활동했다던 전직과는 어울리지 않게 온화한 성격을 지녔다는 병사의 평가대로 약속도 없이 불쑥 방문한 불청객임에도 화를 내기보단 정중한 말투로 부드럽게 목적을 물으며 미소를 보이는 베네딕티오 수도원장.
꼭 고향 집에 계신 할아버지 같은 친근한 웃음에 나는 급작스레 찾아온 것에 대해 사과하며 품 소에서 고이 모셔 두었던 종이를 꺼냈다.
〈교단의 의뢰서/Normal〉
"그건!"
"교단에서 발부한 의뢰서입니다."
교단 지부를 관리하는 수도원장답게 의뢰서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보곤 반색하는 베네딕티오 사제.
띠링!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소집령〉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잠시 후 〈서브 퀘스트: 소집령〉에 필요한 자격 검증이 시작됩니다.]
알림음이 들린 것은 그와 동시였다.
* * *
"이쪽으로 오시지요."
야심한 시각.
의뢰서를 건네받자마자 나를 어디론가로 이끄는 베네딕티오 사제. 그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본관의 3층 복도 끝에 자리한 작은 방이었다.
철컥―
자물쇠도 걸려 있지 않은 철문을 열고 들어간 내부에는 1m쯤 되는 선반 하나와 그 위에 덩그러니 올려놓은 구슬이 전부였다.
베네딕티오 사제는 나를 구슬 앞쪽으로 안내하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검증의 돌이라고 부르는 성물의 한 종류입니다."
"검증의 돌?"
"돌 안에 내재된 신성력이 응시자의 체내를 살피며 시험자가 지닌 그릇의 크기를 확인하고, 이를 색으로 보여주지요. 본래는 교단의 사제들 중 수호사제가 되길 원하는 이들의 기본 수준을 알아보기 위한 첫 번째 시험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구슬을 훑었다.
가져가서 쓸 곳도 없지만, 하도 아이템 루팅을 해댄 통에 무의식적으로 저걸 챙겨갈 방법이 없을까 하는 마구니가 이성을 간지럽혔기 때문이었다.
〈교단의 성물: 검증의 돌/Magic〉
* 칼리야스 교단 내의 장인들이 제작한, 제작형 성물로 피부와 접촉하면 내부에 담긴 신성력이 접촉자의 신체로 들어가 '그릇'을 살피고, 체크 된 크기에 따라 다른 색을 비춰 실력을 시각적으로 가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 주문 '검증' 자동 발동
원래 이런 쓸모없는 아이템이 더 잘 팔리는 거 아니겠나.
컬렉션이라는 명칭으로 아이템 캐리어에 올리면 못 해도 수천은 챙길 테니, 그럼 내 인생 역전에도―
"…하여 지금부터 휘윤 님의 그릇을 확인해 보려 합니다. 이에 응하신다면 손을 얹어 주시지요."
"아, 아, 예."
점차 차오르는 욕심에 잠식되다 베네딕티오의 말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그의 지도에 따라 구슬 위로 손을 얹었다.
턱―
우우우우우우웅!
투명하던 구슬에 빛이 휘몰아친 건 그 직후였다.
74화
['검증의 돌'이 대상 '오휘윤'의 자격 검증을 실시합니다.]
언제였더라.
한창 연애에 관심 많던 20대 초반에 친구와 유명하다는 타로집에 들러 점을 봤었다.
당시 어떤 점괘가 나왔는진 기억이 나질 않지만, 실내의 풍경은 언뜻언뜻 떠오르는데 개중 제일 인상적인 부분이 탁자 위에 장식되어 있던 커다란 플라즈마 볼이었다. 타로 가게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기 위한 컨셉츄얼한 인테리어 소품.
지금 그게 머릿속을 스친 것은 진동을 동반하며 광휘를 내뿜는 눈앞의 구슬이 딱 그것과 닮았기 때문.
하나 어린 날의 향수를 느끼기도 전에 나는 다급히 손바닥으로 이목을 집중했다.
스으으윽―
"으음!"
베네딕티오의 말처럼, 짤막한 메시지를 기점으로 따뜻하면서도 차갑고, 부드러우면서도 딱딱한… 무어라 콕 집어 정의하기 어려운 기운이 장심을 통해 빨려 들어온 것이다.
그동안 제법 많은 종류와 등급의 포션을 마시고 구경해 본 결과 대체적으로 포근한 이미지와는 판이한 감각에 눈을 동그랗게 뜨길 10여 초.
팔뚝과 어깨를 지나 심장에 도달한 신성력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가며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세세하게 훑고는 재차 심장에서 모여 구슬로 되돌아간다.
그 순간.
우우우웅!!
오색찬란하던 빛깔이 조금씩 하나로 좁혀지기 시작했다.
보라색, 남색, 파란색, 초록색.
무척이나 익숙한 조합을 선보이며 마침내 주황색을 지나 빨간색으로 향하는 빛깔.
"오!"
검증의 돌이 선명한 붉은색으로 물들 즈음엔 베네딕티오의 얼굴에도 환희가 감돌았다. 대충 빨강으로 갈수록 실력이 좋다는 의미인가.
해서 저리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우우우웅!!
그러던 참이었다.
"빨간색이라니, 이만하면― 으음?!"
얼마 즐기지도 못하고 붉은색마저 통과해 버린 검증의 돌이 '은색'으로 바뀐 것은.
띠링!
[검증이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의 위계는 'Lv.8-은색'입니다.]
[단계별 판단 근거 및 색상 분류에 대해 알고 싶다면 아래 '예시'를 참고해 주십시오.]
└ex) 'F-rank' 이상 취득자 'Lv.1-보라색' / 'S-rank' 이상 취득자 'Lv.7-빨간색' / 'Hero-rank' 이상 취득자 'Lv.8-은색' / ???
* * *
"이것을 받으시지요!"
은색.
생환자 기준 'Hero-rank' 달성자만이 거머쥘 수 있는 은빛 물결을 목도한 뒤로 베네딕티오 사제의 얼굴에선 내내 화색이 가시질 않았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준기사급에 해당하는 무력의 소유자가 교단의 의뢰를 돕겠다고 나섰으니 기꺼운 듯했다.
교단 전체로 따지면 은위계 급이야 발에 챌 만큼 남아돌겠지만.
작금의 현실은 다섯 살짜리 꼬마 아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대재앙의 시대였다. 설사 보라 등급, 그러니까 1레벨 생환자의 투신에도 손뼉을 마주쳐야 하는 터라 베네딕티오의 입장에선 기뻐하는 게 당연했다.
물론 즐거운 것은 나도 매한가지였다.
왜?
"이건."
"은위계 용병 전용 의뢰서와 의뢰 체결 시 주어지는 선수금 및 의뢰 관련 물품들입니다."
"아아!"
가진 재화를 깡그리 풀어서라도 의뢰를 발주하겠다던 의지가 진심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용병 계약 서류 좌우로 '잔뜩' 깔린 아이템들로 인해서.
〈중급 물약 세트/Magic〉
* 칼리야스 교단에서 배포한 중급 물약이 종류별로 담겨 있는 목함. 복용 또는 뿌려 흡수시키는 것으로 각 물약별 효과를 사용할 수 있다.
* 종류 ⊂ 회복 / 해독 / 마비 / 화상 / 동상
스타트는 예전에도 한 번 획득해 보았던 물약 세트였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하급'이었고, 오늘은 '중급'이 도합 열 병이나 된다는 점.
안 그래도 〈메인 퀘스트: 호위〉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가진 걸 탈탈 떨어 썼던 탓에 주머니가 홀쭉해졌었는데, 그 공허하던 창고를 매우 든든하게 채워 주는 포션 꾸러미에 입꼬리가 주체를 못 하고 치솟았다.
심지어.
"필요하다면 같은 등급의 다른 물약으로 교환해드리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커스터마이징도 허용됐다.
제조부터 유통까지 모두 담당하는 기업이기에 가능한 선택인지 자세한 내막이야 알 순 없지만, 상태 이상 포션은 한 병씩만 남기고 죄다 회복으로 교체했다. 여차하면 성역화로도 활용되는지라 벨류를 따졌을 땐 이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주머니가 묵직해졌다면.
"이건."
"교단의 수호사제들에게 수여하는 제작형 성물입니다. 은위계 용병에게는 총 두 개가 지급되지요."
다음은 놀랍게도 '장비'였다.
귀걸이, 목걸이, 반지, 팔찌, 발찌로 구성된 장신구 세트.
무기나 방어구야 대개 완벽하게 구비해 놓지만, 이런 보조 장비는 미흡한 공산이 높기에 이를 선불로 내어 주는 건가 싶었다.
"저는 팔찌와 귀걸이로 하겠습니다."
덕분에 나도 허전하던 왼쪽 귀와 왼쪽 손목을 보강할 수 있었다.
〈성서를 보는 눈/Magic〉
* 칼리야스 교단 소속 대장간에서 제작한 귀걸이. 중앙에 양각된 눈동자의 형상처럼, 언제나 칼리야스의 말씀을 보길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았다.
* 착용 시 인지력 최대치 5% 향상
〈공손히 듣는 자/Magic〉
* 칼리야스 교단 소속 대장간에서 제작한 팔찌. 중앙에 양각된 귀의 형상처럼, 언제나 칼리야스의 말씀을 듣길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았다.
* 착용 시 인지력 최대치 5% 향상
수호사제들에게 보급하는 장비임을 강조하듯 오로지 근력이나 속력 등 육체 강화에 국한된 옵션만 붙어 있는 장신구들 중에서 내가 채택한 건 '인지력'이었다.
근력과 속력은 마수 영혼석으로, 내구는 라우타우루스 갑옷 세트가 있으니 커버가 되는 바.
따라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인지력과 체력에서 고민하다 과감하게 전자로 몰아 버렸다.
끝끝내 채택되지 않은 체력은 포션으로 때우겠다는 마인드였다.
화아아악―
"으음!"
흡족한 심정으로 착용을 마치자 단숨에 확 넓어지는 시야.
간단하게 손발을 움직이며 적응을 끝내자, 내 손에 펜을 쥐여주며 책상을 가리키는 베네딕티오.
그곳에는 교단이 결코 호구가 아님을 분명하게 알려 주는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칼리야스 교단의 의뢰서/Magic〉
* 칼리야스 교단에서 발부한 의뢰서. 피를 내어 찍는 것으로 의뢰가 성사된다. 한 번 성립된 계약은 단순 변심에 의해서는 절대 끊을 수 없으니 서명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 혈액 각인 시 주문 '영혼 계약' 발동
* 영혼 계약 파기 방법: 1. 의뢰 완료 시/2. 중상 이상의 상해를 입었을 시/3. 의뢰인(성자 또는 교단)의 사망 시
[चर्च अनुरोध प्रपत्र]
कलियासचर्चस्य (पूर्वम्) भाडेकर्तुः ओह ह्वि-यून (क्षण) च मध्ये अनुबन्धः आसीत् इति सिद्धं दस्तावेजम् ....
독소 조항이 있는지 없는지, 의뢰하고자 하는 내용은커녕 의뢰인의 이름도 읽을 수 없는 문서.
한국이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사각―
"여기다가 하면 되는 건가요?"
툭―
꾸우우욱!
나는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서명란에 핏물로 범벅된 엄지손가락을 힘껏 눌렀다. 께름칙한 구석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저하지 않는 것은.
탁―
[주문 '영혼 계약'이 발동합니다.]
[교단의 의뢰를 수락했습니다.]
[자격 검증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현재 위계: Lv.8/은색
[당신의 자격에 걸맞는 의뢰가 배당됩니다.]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구원_Lv.8〉이 추가되며, 해당 퀘스트 진행을 위한 '칼리야스의 구원_LV.8 퀘스트 진행권'이 주어집니다.]
"아."
이 길만이 내 앞에 펼쳐진 지옥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였으니까.
〈칼리야스의 구원_LV.8 퀘스트 진행권/Rare〉
* '에픽 퀘스트: 칼랴이스의 구원' 습득자에게 주어지는 마법 스크롤(scroll). 지원 요청이 접수되었을 때 자동으로 주문이 발동된다.
* 지급된 메인 퀘스트 변경
* * *
"이걸 가져가시지요. 교단의 의뢰를 수행 중이라는 표식입니다."
모든 과정을 수료하고 떠나려는 내게 베네딕티오 사제가 자그마한 패를 하나 내밀었다.
〈교단 소속 용병패_은위계/Normal〉
* 칼리야스 교단의 의뢰를 수행 중인 용병임을 증명하는 카드. 등록된 위계에 따라 다양한 활용 범위가 달라진다.
* 교단 물품 구매 시 5% 할인/교단 소속 인물들의 호감도 상승
"위계가 올라갈 때마다 새로 발급받을 수 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자주자주 검증의 돌을 이용해 보시길 추전드립니다."
"알겠습니다."
특이하게도 호감도 상승 옵션이 달린 아이템이었다. 나는 그 손바닥만 한 철패를 검대에 잘 수납하고는 슬슬 떠날 채비를 갖췄다.
에픽 퀘스트도 받았겠다.
예서 더 할 일은 딱히―
"더불어."
"...?"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차에 말을 덧붙이는 베네딕티오 사제.
그는 떠나가려는 내게 한 장의 종이를 더 내주었다.
"이건."
"본단에서 의뢰서를 발부하며 대륙 각지의 수도원에 용병분들께서 오실 경우 규정에 맞게 계약을 진행하라 알렸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전령이 당도하지 못해 소식이 전달되지 않은 수도원들이 있을 겁니다. 저희는 감사하게도 그 손길이 닿았으나 만일 사방이 고립되어 눈과 귀가 막힌 수도원들을 보신다면 이걸 전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아."
바로 서브 퀘스트였다.
띠링!
['교단의 부탁'을 받아냈습니다.]
[〈서브 퀘스트: 전령〉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에픽 퀘스트: 칼리야스의 군원〉에 〈서브 퀘스트: 전령〉이 추가됩니다.]
"이를 전해 주시면, 어느 수도원이든 그에 상승하는 보답을 해줄 터이니 휘윤 님께도 그다지 어려운 제안은 아닐 듯한데… 어떠신지요?"
"당연히, 당연히 하겠습니다."
찬란히 빛나는 문장의 출현에 나는 재빨리 끄덕이며 대답했다.
임무를 얹어 준다는데 생환자된 입장에서 거절할 리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하면 밤도 늦었고 하니 더 이상 붙잡지 않겠습니다. 언제나 칼리야스의 축복이 있기를."
"이건 잘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제님께도 칼리야스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제안을 단숨에 수락했기 때문인지 허허 웃는 베네딕티오 사제를 마주 보며 성호를 취한 나는, 연신 걱정 말라는 인사를 남기고 기분 좋게 수도원을 나와 스콰를 불러냈다.
"푸르르릉!"
"읏, 차. 저쪽으로 가자."
어느새 자정으로 기운 시각.
모든 일정을 최상의 결과로 마무리 지었겠다, 슬금슬금 밀려오는 피로에 한숨 자고 싶단 생각이 간절했지만, 잠이야 나중에 자도 되는 일. 우선은 성벽으로 복귀해 돌아가는 현장을 좀 지켜볼 심산이었다.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이 개시되고 벌써 한 시간여는 흘렀다. 그 말은 곧 생환자들의 소환도 완료되었다는 소리일 테니 전황에도 큰 변화가 있었을 터. 그걸 체크해 보기 전까지는 눈을 붙일 수 없다.
나 없는 사이에 나가서 쓸어 버리겠다고 성문이라도 열면 '전 퀘스트 S 랭크 달성'이라는 원대한 목표가 어그러질 텐데 그 꼴을 어찌 참나.
내 사전에 공적치 제로는 없다.
나폴레옹의 위대한 명언을 되새긴 나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세우며 새로운 창을 열어젖혔다.
메인 퀘스트가 발발하면 꼭 실행해야 하는 행동.
"서브 퀘스트 목록 열람."
서브 퀘스트 조회였다.
[〈메인 퀘스트: 동원령〉의 서브 퀘스트를 열람합니다.]
1. 직급 쟁탈
2. 용맹한 조사단
3. 가장 높은 전공
4. 편지 전달
…
…
13. 도제 찾기
* 수행 가능한 서브 퀘스트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어이구야."
이게 바로 도시급 스케일인가?
메인 퀘 규모에 걸맞게 미친 듯이 늘어나는 리스트.
총합 아홉 개나 되던 폰스 마을에서의 기록조차 가볍게 갈아 치우며 나열되는 목록을 보고 있자니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열세 개라니.
웬만한 메인 퀘 1회분과 맞먹는 분량에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하다 황급히 주둥이를 틀어막으며 기쁨을 속으로 삼키던 나는 돌연 이를 악물었다.
쿠웅!
화아아악!
느닷없는 기파가 내 전신을 뒤덮더니.
-وەرە لام، وەرە لام، وەرە لام،!!
-وەرە لام، وەرە لام، وەرە لام،!!
-وەرە لام، وەرە لام، وەرە لام،!!
…
…
"…끄읍!"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괴상한 언어가 고막을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75화
가위에 눌린 장난감을 농락하는 귀곡성이 귓바퀴를 돌아 관자놀이를 파고든다.
폐부를 찌르고 영혼을 짓누르는 악령의 속삭임에 머리가 다 지끈거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대로 한 발자국만 나아가도 토악질이 나올 거 같은 현기증에 무너지듯 스콰의 등에 기댔다.
"히이잉!"
"우읍, 우웨에엑!"
오직 인간에게만 들리는 음파인가? 난데없는 내 돌발 행동에 마치 왜 그러냐는 양 투레질을 하며 똑똑하게 발걸음을 멈춰 주는 녀석.
하나, 고마움을 전할 새도 없이 계속해서 심해지는 두통에 기어이 바닥에 내려와 벽을 붙잡고 위장을 게워 내야만 했다.
-আমার কাছে এসো!
-আমার কাছে এসো!!
-আমার কাছে এসো!!!
그럴수록 점점 커져 가는 괴이한 목소리.
도대체 뭐가 어찌 돌아가는 걸까? 몇 번이고 위액을 토해 내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으나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삐이이익!
[경고!]
[저주 '악령의 장송곡'을 들었습니다.]
['상태 이상: 강한 두통', '상태 이상: 구토', '상태 이상: 혼란'이 적용됩니다.]
[방어 기제가 정신을 보호합니다.]
[저항 수치에 비례하여 상태 이상 효과가 감소합니다.]
한밤중에 울려 퍼진 저 귀곡성이 단순한 착각 따위가 아니라는 점.
이것이 설명하는 바는 명백하다.
전장의 규모가 커지면 자연스레 따라붙는 걱정거리.
"3차, 진화체?!"
바야흐로 신종 개체의 출현이었다.
* * *
"스콰, 조금만 천천히 가자."
"푸르릉."
저주라고 했던가.
처음 접해 보는 유형의 공격은 생각보다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무려 9%나 되는 저항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는 데에도, 그로 인해 증세가 약화되었다는 데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까닭에 차라리 수도원으로 리턴해야 할지 고심했다. 내가 가진 능력 중에는 저주를 파훼하는 방법이 없었기에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축복을 받든 정화를 받든 하는 게 나을까 싶어서.
다만.
결국 결정은 '직진'이었다. 내게 문제가 생겼다면 남에게도 문제가 생겼을 확률이 크다.
이게 늑장을 부릴 수 없는 연유였다.
'성문은, 괜찮겠지.'
보강 공사가 진행되기도 했고 세르펜스 기사단이 떡 버티고 있기는 한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정말 3차 진화체가 나타난 거라면 안심하긴 힘들었으니까.
놈들이 가진 변수.
그게 마음에 걸려 고통을 억지로 참고 성문 방향으로 나아가길 30여 분.
촘촘하게 밀집되어 있던 주택과 상가가 서서히 자취를 감춰갈 무렵 달빛 아래로 드높이 서 있는 성벽이 차츰차츰 눈에 들어왔다.
쿠웅!
콰아아앙!
변함없이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지 간간이 들려오는 폭발음.
그러나 정작 내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근접 계열 더 없으십니까!"
"이쪽은 원거리 속성입니다! 원거리 물리는 왼쪽으로 가주세요!"
"방어 계열은 저쪽일 겁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
…
"와우."
마차와 수레의 원활한 이동을 위해 대로와 공터로만 조성해 두었던 장소를 차지한 수백 명의 생환자들이었다.
여력이 되는 이들은 모조리 투입했는지 얼추 2~3백여 명은 될 법한 규모였―
"…응?"
예상치를 웃도는 장관에 멍하니 일대를 둘러보던 나는 불현듯 기이한 괴리감을 감지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이따금씩 솟구치는 언데드 놈들의 하울링과 격렬하게 교전을 벌이고 있는 엑세르 군, 그들 중간에 껴서 사태를 파악 중인 생환자들....
모든 게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단언컨대 정상적이지 않은 게 하나 존재했다.
"나만, 힘들어?"
저들의 '평범한 안색'이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근거야 명확했다. 당장 내 면상만 봐도 '저주: 악령의 장송곡'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와중이었으니까.
한데 저들은 뭔가.
이래저래 긴장되고 지쳐있을지언정 고통이란 보이지 않는 평온한 낯빛. 스스로 금칠을 하는 듯해서 좀 그렇지만, 어쨌건 나는 전 세계를 두고 경쟁해도 족히 열 손가락에 드는 일종의 랭커였다.
그러니 업적을 줄줄이 따낸 게 아닌가.
따라서 저들 중 저주 파훼에 특화된 몇몇이라면 몰라도 나보다 스펙이 딸릴 대다수는 바닥에 드러누워 헤롱헤롱거리고 있어야 마땅했다.
그래야 하는데.
'대체 어떻게?'
아무리 봐도 일견 납득이 되지 않는 광경에 의아한 눈빛으로 미간을 찡그리던 차에.
자박―
자박―
…우우우웅!
"응?"
부지불식간에 봄날의 햇살 같은 따사로운 공기가 나를 휘감았다.
몹시 친숙하면서도 안락한 에너지.
['성역'에 입장했습니다.]
[각종 삿된 저주가 소멸됩니다.]
[신체 컨디션이 정상으로 회복됩니다.]
신성력으로 만들어지니 필드 마법이었다.
"아."
나는 그제야 저들의 평온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단번에 이해하게 되었다.
동원령으로 참전한 사제들.
앞서서 인연을 맺었던 아른헬이나 요하네스에게서는 이런 식의 버프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보니 완전히 배제했던 그들이 자신들의 저력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역시."
"…휘윤 경!"
"음?"
그 진한 깨달음과 동시에 사제의 힘에 대해 재고하던 그때였다.
누군가 나를 부른 것은.
시선을 돌리자 아까 수도원으로 안내해 주고는 먼저 복귀했던 그 병사가 죽어라 달려오며 나를 찾고 있었다.
그가 허겁지겁 나를 향해 뛰어온 목적은.
"말? 말은 어디서… 아, 아니. 그보다 리하인 영애께서 급한 일이 없으시면 와주시길 바란다고...."
뜻밖에도 리하인의 전언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째서 날 찾는진 알 수 없지만, 최상급자로부터 하달받은 지시임을 강조하듯 간절한 눈동자로 동행해 주길 바라는 병사의 요청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에 해프닝이 있었음에도 상황을 살펴보겠다는 일념으로 저주까지 버티며 나아가던 실정이었다.
지휘부와의 접촉은 이러한 내 계획을 훨씬 효과적으로 이루어 주는 만큼 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리하인이라면 반드시 접촉해야만 하는 개인적인 사유도 있고.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잠시."
"예?"
"수고했다, 스콰."
"푸르르릉!"
"가서 쉬고 있어라. 역소환."
번쩍―
"흐읍!"
"자, 갑시다."
고로 나는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뒤를 따르며, 마침 잘됐다 싶어 방금 전 겪었던 일련의 사건에 관해 물어보았다.
"그보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예?"
"분명 수도원으로 갈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돌아올 때 보니 이 근방에 신성 마법이 펼쳐져 있더군요."
"아, 그 성역 마법 말씀이시군요."
다행히 그는 내 물음표를 어느 정도 해결해 줄 지식을 갖춘 선생님이었다.
"언데드 군단이 침공한 날부터 매일 밤만 되면 같은 시각에 괴상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다문 사제님을 비롯한 수도원 사제분들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는 저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 해서 늦은 밤이 되면 사제님들께서 성문을 시작으로 도시 안쪽으로 저주가 미치는 모든 곳을 뒤덮는 성역 마법을 발현해 주고 계십니다. 다만 범위가 너무 넓어 성역이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유지도 쉽지 않아 한 번 발동하시고 나면 반나절 이상 휴식을 취하셔야 하신다고...."
"정확한 원인은 밝혀 낸 겁니까? 혹시 성역 마법 말고는 저주를 막지 못하는 겁니까? 저주 말고 다른 건...."
"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것까진...."
"아닙니다. 이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
새벽을 깨우는 수탉마냥 동일한 시각에만 울부짖는 언데드라.
게다가 범위는 최소 킬로미터 단위.
비록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막히기는 했으나, 병사라는 직급치고는 꽤나 자세한 답변으로 많은 의문을 해소한 나는 감사를 표하며 머릿속에 정보를 단단히 각인했다.
'감이 온다.'
진짜 3차 진화체인지 아님 여태 발견하지 못한 2차 진화체였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나, 뭐가 됐던 냄새가 풍겼다.
진한 보물의 냄새가.
성역 마법이 없으면 대응이 불가능하다. 일단 이걸 극복할 방법부터 마련해야겠지만. 매번 경험해 봤다시피 공략법은 언제나 곁에 있고, 문은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아."
이를 확신하던 찰나 한 줄기 벼락이 뇌리를 스쳤다.
문득.
'교단 소속 용병패'의 옵션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교단 소속 용병패_은위계/Normal〉
* 칼리야스 교단의 의뢰를 수행 중인 용병임을 증명하는 카드. 등록된 위계에 따라 활용 범위가 달라진다.
* 교단 물품 구매 시 5% 할인/교단 소속 인물들의 효감도 상승
'교단 물품 구매 시 5% 할인!'
칼리야스 대륙에 첫발을 들인 뒤로 어느덧 몇 달이나 되었지만, 그간 금전 거래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럴 시간도, 그럴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거니와 애초에 물품을 사고팔 만한 환경 자체가 조성되어 있지를 않았다.
그런데 다소 뜬금없이 '할인율'이라는 게 등장했다. 이 말인즉슨, 경우에 따라 대륙인들과의 거래나 교환을 통해 퀘스트 수행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을 구할 수도 있다는 소리.
혹 어쩌면....
'설마 스킬도?'
원본(原本), S급 스킬에 해당하는 이그니스(ignis) 류(流)나 파스마(phasma) 류(流)와 같은 원본을 획득하게 될지도 모른다.
"미친."
"예?"
"아닙니다. 어서 가시죠."
꼬리에 꼬리를 물던 마인드 맵의 끝자락에 다다른 직후 인지한 무한한 가능성에 탄식한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병사의 등을 밀며 속도를 높였다.
* * *
"휘윤 경. 어서 오시게. 마튼, 자네도 고생했네. 내 나중에 따로 보상하겠다."
"아닙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충!"
성문 근처에 신설된 리하인의 막사에 도착하자 나를 맞아 주는 젠슨.
여태껏 전령과 길잡이 역할로 수고했던 병사 마튼에게 인사를 전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여전히 무장을 풀지 않은 그녀가 보였다.
"아아, 왔나?!"
촤악―
의자에 앉아 양동이에 떠 놓은 물을 끼얹으며 숫돌로 레이피어를 갈아 날을 세우다 말고 활짝 웃는 기색으로 나를 반겨 주는 리하인.
뭐지?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며칠 못 만난 사람처럼 대하는 태도 갸웃하길 잠시.
"예?"
나는 리하인에게서 아주 재미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님께 제일 위험한 곳으로 보내 달라 자처했다지?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나도 오라버니도 같은 부대에 배정받았거든."
"그게 무슨...."
"안전한 울타리를 버리고 용기를 택한 자만이 기사라 불리는 법. 성벽을 벗어나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그날까지 서로 무사, 무탈, 승리하기를 기원하지. 세르레퀴로(serrequíro) 3조 조장 오휘윤 경."
고생고생해서 들어온 성을 놔두고 다시 야생으로 나가 달라는 어처구니없는 원정 명령을 말이다.
띠링!
[사령관의 인정을 받아냈습니다.]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동원령〉에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가 추가됩니다.]
76화
[ 용맹한 조사단 ]
혹자는 말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 그 인연이 당신을 어떤 미래로 이끌지 알 수 없으니 모든 만남, 모든 관계에 필사적이어야 한다.
띠링!
['사령관의 인정'을 받아냈습니다.]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총동원령〉에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이 추가됩니다.]
"음."
나는 허공에 출력된 메시지들을 보며 그의 격언이 십분 옳았음을 다시금 체감했다.
"참전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도원에 다녀오는 대로 가장 위험한 구역에 배치해 주시면 힘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먼저 자진해 주니 고맙군. 그대 같은 기사가 함께 해준다면 병사들도 힘낼 수 있을 걸세."
호감작이나 할 요량으로 던졌던 공수표.
아니.
실제로도 그러려고 했으니 선거 때나 죽어라 나불대고 입 싹 닫아 버리는 정치인들처럼 아예 거짓말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단지 문제라면, 내가 원하던 그림은 '성벽 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설령 수만 마리의 언데드 군단이 들이닥치더라도 견고한 성채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소위 말하는 꿀 빠는 사냥터. 적당한 밧줄 하나 구해서 허리에 묶어 두고 '섬광(閃光)'을 난사한다면 리스크 대비 엄청난 양의 공적치를 쓸어 담으리라.
그게 계획이었는데.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
* 수도원장 베네딕티오의 계시대로 도시 글라디아르(gládĭár)를 구원하기 위한 수백 명의 용병들이 나타났다. 새하얀 빛을 뿌리며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스스로를 '지구'라는 세계에서 왔다고 소개하며, 이 전쟁을 돕기 위해 찾아왔노라 이야기했다.
계시와 빛, 그리고 다른 세상.
엑세르 백작은 눈앞을 가득 메운 미지의 존재들을 보며 지대한 호기심과 사령관으로서 다양한 의심에 사로잡혔으나 사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모두가 희망하는 승리를 쟁취하는 데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사제들이 공인한 저들을 믿고 맡길 수 있다면, 이 전장에서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딱히 고민할 것도 없었다.
매일 밤 자정만 되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도시 전체를 저주로 에워싸는 정체불명의 목소리. 그것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퇴치하는 게 1번이 되어야 했다.
저주의 목소리만 사라진다면 영지민들을 보호하는 데 온 힘을 들이고 있는 사제들도 더 이상 방어가 아닌 공격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
그래서 조직된 것이 탐색하는 뱀, '세르레퀴로(serrequíro)'였다.
(0/1)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 완료 시 〈서브 퀘스트: 타깃 처치〉가 자동 개방됩니다.
* 특이 사항 2: 현재 '조장' 직위를 제안받은 상태입니다. 본 퀘스트 수락 시 〈서브 퀘스트: 직급 쟁탈〉의 최소 조건이 자동 달성됩니다.
* 특이 사항 3: 본 퀘스트 거절 시 엑세르(exér) 백작 가 소속 인물들과의 호감도가 하락합니다.
* 특이 사항 4: 조사단장 '엑스케트 폰 엑세트'의 선택 여하에 따라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2)〉로 연계됩니다.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을 수락하시겠습니까?]
[Y/N]
[남은 시간: 10분 00초]
[시간 내 미선택 시 자동 거절됩니다.]
"…허."
나는 선택을 기다리는 메시지 창을 보며 턱을 긁적였다. 그 당시의 한마디가 이렇게 흘러갈 줄이야.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영입 제안에 당혹감이 차오른다.
하나.
그와는 별개로 결정은 빨랐다.
"예, 뭐.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를 수락하셨습니다.]
당황스럽기는 하나, 어차피 저쪽에서 물어봐 주지 않았더라면 손수 건의해서라도 입단했을 터였다. 엑세르 백작 일가와의 신임까지 걸린 이런 굵직한 이벤트를 놓칠 수야 없으니까.
더군다나.
"그런데, 3조 조장이라니요?"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직급 쟁탈〉의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해당 퀘스트의 자세한 현황은 '상세 보기▼'를 눌러 주십시오.]
└현재 직급 : 세르레퀴로(serrequíro) 3조 조장
└획득 보상: Magic 등급 장비 선택권 1종
승낙만 하면 한 큐에 두 개의 미션이 클리어되는 마당이라 거부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주저하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받아들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흡족스러운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물음에 매우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는 리하인.
"총인원은 서른한 명. 조사단의 단장은 오라버니가 맡게 될 걸세. 그 아래로 세 명의 조장이 있으며, 1조 조장은 세르펜스 기사단의 삼석(三席)이신 크라덴 경이, 2조는 내가 맡게 되었지. 남은 건 3조 조장 자리였는데."
"였는데."
"자네가 몸소 나서 준다고 하기도 했고, 오라버니께서도 대련에서 나를 꺾을 정도라면 그 실력이야 믿을 수 있으리라 판단하시곤 자네를 조장으로 임명하셨네. 수도원장의 말씀대로 칼리야스께서 우리를 돕는 것인지 본인들을 생환자라 주장하는 자들이 합류해 주었지만… 그들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직책을 내어 줄 순 없는 노릇이지."
"하나 저에 비해 실력 있는 분들도 많으실 텐데 말입니다."
"조사단의 직무도 분명 시급하지만, 일차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것은 도시의 수성. 때문에 이를 고려해 인선을 짜게 되었지."
"반발은 없겠습니까."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은 없을 걸세. 대체로 충성심이 강한 자들로만 파견했으니까. 다만 숫자가 부족해 3조의 절반은 용병들로 꾸릴 예정이네. 자네에겐 미안하지만, 앞서 말한 연유로 너무 많은 기사들을 파견할 수는 없는 터라 되도록 실력을 보고 뽑을 테니 심려치 말게."
"알겠습니다."
최대한 상세하게 가르쳐 주는 답변에 선선히 주억거리자,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자그마한 견장 두 개를 건네주는 리하인.
"동그란 바탕에 창을 감싼 붉은 뱀이 양각된 이것은 글라디아르의 기사를 뜻하는 표식이며, 똑같은 그림에 레이피어가 빗금 쳐진 이쪽은 그중에서도 조장급을 뜻하는 표식이니 가급적이면 잃어버리지 않게 주의하도록. 아직 인원이 전부 선발되지 않은 탓에 조사단 전체 회동은 내일 점심에 있으니 그때까진 푹 쉬게. 조사단용 막사부터 짓고 있으니 지금쯤이면 자네 개인 막사도 다 지어졌을 거야. 하급이지만 지휘관에 속하는 만큼 혼자 쓸 수 있으니 불편함은 없을 걸세."
"감사합니다."
"감사는 뭘."
"그럼 내일 뵙겠습니― 아."
"음?"
교단의 용병패와 달리 아이템으로서의 기능은 제공되지 않는지, 만져 봐도 별 반응 없는 휘장의 위치를 조정하던 나는 돌연 리하인을 보며 추가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조원은 제가 선발해도 되는 겁니까?"
"자네가?"
전원 이방인.
즉 생환자들만으로 모집할 거라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미 신뢰가 쌓인 정유환 등으로 채우는 것이 손발을 맞출 시간을 절약하기에도 좋은 데다 최악의 사태에도 등을 맡길 수 있으니 여러모로 이득이라.
그들이 와 있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만, 허가만 해준다면 두어 자리는 지인들로 꾸려 놓고 싶었다.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직접 뽑아 봐도 될까 해서 말입니다."
"그 부분은 오라버니께 여쭤봐야 하니 만약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생각만 해두게. 내일 아침에 내가 물어봐 주지."
"알겠습니다."
아쉽게 확답은 듣지 못했지만, 리하인의 긍정적인 스탠스에 만족스럽게 대화를 마무리 지은 나는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련 약속을 잡았다.
"아아, 그렇군. 그랬어.... 대련이 남아 있었지."
우득―
대련. 그 별거 아닌 단어 하나에 삽시간에 분위기가 싹 바뀌는 리하인.
패배로 끝났던 2차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는지, 하하호호 완만하게 대기의 흐름이 일순 뜨겁게 달아오른다. 지는 걸 죽음만큼이나 싫어하는 성격답게 날 쳐다보는 눈매가 사나운 호랑이의 닮아 있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자리를 만들지."
"그러시죠. 하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리하인 경."
"푹 쉬게. 언제든 칼을 부딪칠 수 있도록. 젠슨."
"예, 아가씨."
"오휘윤 조장에게 막사를 안내해 주게."
"알겠습니다."
* * *
"그대의 막사는 저쪽이요."
"꽤 가깝군."
리하인의 막사에서 채 30m도 떨어지지 않은 구역에 신설되어 내 전용 막사.
아무래도 예고 없이 소환된 수백 명의 생환자들을 한꺼번에 수용하려거든 공간을 협소하게 써야 하는 탓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로 지어진 듯했다.
여관이나 도시민들의 주택을 수배해서 임대해 줄 수도 있겠지만, 설령 수도원의 인정을 받았다고 해도 창칼 따위의 날붙이를 소지한 신원 미상자들을 도시 내에 풀어 놓기는 꺼려졌던 게 아닐까.
아마 내가 엑세르 백작이었어도 이리했을 거다.
〈특수 퀘스트: 망가진 패잔병〉.
고작해야 일주일도 안 된 그날의 장면들은 변함없이 생생했다.
"참, 젠슨 경도 조사단에 지원하셨소?"
"나와 카르켈 모두 2조에 배치되었소. 내일부터는 존대를 하리다."
"뭐, 꼭 그럴 필요는 없다만."
"군문에 투신한 이상 위계질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하는 법. 그럼 쉬시오."
"내일 뵙시다."
고지식하다고 해야 할지, 정직하다고 해야 할지.
나는 바르고 곧은 자세로 경례를 취하는 젠슨에게 마주 목례하곤 몸을 돌렸다. 막사가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이젠 정유환 등을 찾아 나설 차례였다.
"저기부터 가볼까."
날이 깜깜해 여기저기 켜진 횃불을 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는 김에 서브 퀘스트 목록도 한번 싹 훑었다.
언제까지 바깥을 떠돌게 될지 알 수 없었기에 잠을 못 자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새벽 내내 클리어를 해두고 가는 게 나을지, 체력 안배 차 이만 퍼질러 자는 게 좋을지 아리까리했다.
〈서브 퀘스트: 편지 전달〉
* 벌써 며칠째 전선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들 제임스. 하나뿐인 자식의 무사 귀환을 고대하며 하루하루를 슬픔으로 지새우는 어머니 레프라인에게 아들의 무사함을 알리자.
(0/1)
〈서브 퀘스트: 도제 찾기〉
* 계속되는 전쟁으로 한 시도 쉴 틈 없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공방. 모든 대장장이들이 달려들어 활과 화살 등 물자를 생산하는 데 주력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한계에 봉착한 상태. 다행히 검장(劍匠)들의 건강이 보장되어야 생산에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단 백작의 명령하에 밤에는 수면을 취할 수 있었으나, 결국 도제(徒弟)가 증원되지 않는 한 검장들의 어깨에 인 부담감은 점차 심해질 터이니.
도시 글라디아르(gládĭár)의 시민들을 만나 도제가 되길 꿈꾸는 이들을 찾아내 대장간의 시름과 백작의 근심을 동시에 해결해 보자.
(0/1~)
* 특이 사항 1: 최대 인원의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퀘스트입니다.
* 특이 사항 2: 최대 인원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요런 것들은 약간의 노력과 약간의 금전만 더해지면 금방―
"어? 휘윤… 씨?"
"음?"
고심을 이어 가던 차에 좌측에서 익숙한 듯 낯선 톤의 중후한 남성의 보이스가 내 발목을 붙들었다.
"당신은...."
놀랍게도 그의 정체는 내 기준 최초의 협력 퀘스트였던 〈메인 퀘스트: 보호〉의 동행인이자 과거의 정유림과 마찬가지로 생존주의자적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던 남자.
바로.
"최… 창조 씨?"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오랜만입니다."
어두운 밤중에 마주친 그는 예전처럼 경찰들이 쓸 법한 진압용 방패에 근력이 제법 늘었는지 성인 남자 상체만한 한 손 도끼를 패용하고 있는 최창조였다.
77화
"아… 예. 오랜만입니다."
설마 최창조를 예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던지라 나는 퍽 어색한 기색으로 그와 인사를 나눴다.
서로의 첫 마디처럼 몇 달만의 재회이기도 하거니와 애당초 이별이라도 아름답게 했다면 모를까.
한쪽은 최소한 차악까진 버텨보자는 각오로 칼을 부딪친 반면 한쪽은 전쟁을 개시하기도 전에 사기를 팍팍 떨어뜨리며 도망을 친, 그야말로 상극 중의 상극인 악연이었다.
그러니 마냥 반갑게만 대해기가 좀 애매했다.
필시.
"그… 저번에는 죄송했습니다."
최창조가 이리 저자세로 나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지나쳐 버렸겠지만, 저리 머리 숙여 사과하는 데 무시할 수야 있나.
나는 정중하게 용서를 구하는 그에게 손을 내저었다. 시간도 한참이나 흘렀고, 어찌 보면 저들이 떠나가 준 덕에 나도 히어로 랭크를 달성하지 않았던가.
무려 '강제 귀환권'이라는 가장 튼튼하고 신속한 구명줄을.
"괜찮습니다. 이미 몇 달이나 지난 일입니다."
"하하… 그리 말씀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꼭 만나 뵙고 싶었으니까요. 미안하고 또 감사해서."
그 점을 상기하며 선뜻 잘못을 덮어 주는 내게 최창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숙였다.
이번에는 '사과'가 아닌 '감사'의 의미를 담아.
그게 조금 신기해서 되물었다.
"예?"
헤어지고 난 뒤에 간접적으로도 엮인 적이 없는데 나한테 무어가 고맙다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당시 휘윤 씨를 남겨 두고 무작정 달리고 또 달리던 저희는 대여섯 시간여를 도망쳐 투명한 벽까지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알았죠. 도주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그 이후로는 별게 없었습니다. 숨고 또 숨어서 며칠을 버텼고 새우잠을 자다 깨보니 F 랭크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죠."
이런 내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 위해 그날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 가는 최창조.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알았죠. 백이면 백 실패할 거라고 여겼던 예상을 뒤집고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끝마치셨다는 걸. 하나 그게 다였습니다. F 랭크를 경험하고 나서도 당장은 인지하지 못했죠. 저희가, 아니 제가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흐음."
"균열이 발생했음을 진정으로 체감하게 된 건 그 이후로 한 번 더 귀환을 하고서 다시 칼리야스 대륙으로 진입한 다음이었습니다. 듀라한이라는 대상을 처리하라는 임무였습니다. 저는… 거기서 죽을 뻔했습니다. 이건 그때 난 상처죠."
스윽―
얘기 중간에 상의를 걷어붙인 최창조의 옆구리엔 족히 15cm가 넘어가는 끔찍한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살점이 떨어져 나가던 고통은 아직도 눈만 감으면 선합니다. 은신 스킬이 없었더라면 저기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을 겁니다. 하하하. 아무튼 대차게 짓밟히고 나니 알겠더군요. 도망치기만 해서는 결국 희망이 없다는 걸. 그래서 감사하다는 겁니다. 휘윤 씨 덕분에 하마터면 나락으로 빠질 뻔했던 인생을 늦게나마라도 건져내 주셔서. 여전히 멀었지만요."
거짓과 가식이라고는 1도 없는 순도 100% 진심에 나는 문득 누군가를 떠올렸다.
"동생이 많이 좋아하겠네요. 안 그래도 요즘 심경에 변화라도 생겼는지 꽤 적극적으로 수련에 임하던데."
가문의 재산을 퍼부어 장비를 맞춰 놓고도 생존주의적인 성향을 버리지 못했던 정유림이 변한 계기도 최창조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이래서 죽을 때가 돼야 사람이 바뀐다는 말이 나오는 거려나?
그녀도, 그도.
나도.
"좋은 변화네요."
"그런가요? 하하하.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아니, 뭐 그럴 것까지야."
"이곳에서나 현실에서나 휘윤 씨에게 보탬이 될지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원한다면 무조건 달려가겠습니다. 이건 제 번호입니다."
고향 집에 내려온 자식에게 억지로 용돈을 쥐여주듯 자신의 연락처가 적힌 명함을 내어 준 최창조는 민망한지 몇 번이고 편하게 전화 달라는 말을 되뇌며 뒷걸음질 쳤다.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전과 다르게 상호 간의 안녕을 빌어주며―
"아. 잠깐만, 최창조 씨."
"…네?
"혹시, 저랑 일 하나 해보시겠습니까?"
* * *
새벽 1시경.
펄럭―
"들어오시죠."
나는 최창조를 개인 막사 안으로 이끌었다.
있는 거라곤 1인용 침상에 작은 물품 몇 개를 올려놓을 수 있는 소형 책상에 의자가 끝이지만, 휘장을 치면 외부와 차단이 된다는 점에서 아득함이 느껴지는 공간.
"개인 막사라니… 이런 걸 어떻게...."
최창조는 이제 막 진입한 생환자가 단독으로 막사를 배정받았다는 게 상당히 신기한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면서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딱히 내드릴 건 없고 이거라도 드시죠."
"아, 감사합니다."
짐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 내어 주며 침상에 걸터앉은 나는 컵에 담긴 물을 들이켜는 그에게 어깨에 달려 있던 견장을 떼어 내 보여주었다.
"이건...."
자연스레 넘어오는 시선.
나는 최창조에게 그간 겪었던 사건들을 간략하게 알려주며 당신을 데려온 이유를 알려 주었다.
"조사단, 이요?"
"예. 엑세르 백작이 직접 지시해 창단된 조직입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사라질 임시직이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저희와는 별 상관없죠. 중요한 건 거기서 얻을 게 네 가지나 된다는 겁니다."
"네 가지?"
"첫째, 서브 퀘스트 '용맹한 조사단'의 습득. 둘째, 서브 퀘스트 '직급 쟁탈'의 달성. 셋째, 엑세르 백작 가문과의 호감도 상승. 넷째 상승한 호감도를 통해 비슷한 상황이 연출 되었을 때 우선권이 주어질 수도 있다는 것."
"잠시, 잠시만요. 서브 퀘스트라뇨?"
진도가 너무 빠른지 주르르륵 쏟아내는 속도에 정신을 못 차리는 얼굴을 보며 나는 차근차근하게 처음부터 기술했다.
"―이라는 겁니다. 여기까진 이해되셨습니까?"
"아, 네네. 그런데 저에게 그걸 왜...."
반복되는 설명에 그제야 외계어 같던 말들이 해석이 좀 되는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이는 최창조.
그러나 의문이 하나둘 해결될수록 그의 안면에 새겨진 의아함은 더더욱 진해진다. 이해는 하되 납득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런 귀중한 정보들을 왜 자신에게 공개하는지.
내막이야 뻔했다.
"최창조 씨를 추천할까 해서입니다."
"저를요?"
"예."
그를 조사단 일원에 포함할 심산이었다.
왜?
위험천만한 야생을 무대 삼아 떠돌다 보면 별로 상정하기는 싫지만 언데드 놈들에게 쫓기는 위기도 왕왕 펼쳐질 터였다. 자고로 추격전이란 무지막지한 체력 부담을 선사하는 활동.
특히나 밤낮없이 따라오는 언데드들이라면 그 피로감은 일반적인 수준을 아득히 초월하는 탓에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은 필수적인 부분인데, 그럴 때 최창조가 가진 능력이 앞으로의 행보에 많은 도움이 될 거 같았다.
가로세로 5m짜리 이동식 은신처를 생성하는 스킬, 그다지 넓은 편은 아니나 피곤에 쪄 들었을 때나 목숨이 위급한 시기에 단 몇 분만이라도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다면, 생존 확률이 비약적으로 향상될 터.
그래서 제의한 것이다.
물론.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오히려 심사숙고해서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제아무리 수십 명의 기사들이 커버를 해준다고 해도 늘 죽음이 뒤따를 겁니다. 리턴 값이 크다는 건 리스크 역시 크다는 뜻이니까. 그 누구도 목숨은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뒤늦게 원망한들 목덜미를 물리고 나면 장례는커녕 목부터 베려고 들겠죠."
"...."
주의는 확실하게 주었다.
누구도 목숨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냉정하게 비추어질 수도, 혹은 단물만 빨아먹고 버리겠단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만.
그게 진실이다.
달콤한 미끼 이면에 숨은 경고 문구를 직시할 줄 알아야 했기에 강조에 강조를 거듭해 선을 그었고, 그 후로 한동안 정적이 유지됐다.
최창조의 입이 열린 것은 컵 안에 담긴 한 컵 분량의 물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이었다. 긍정인가 부정인가. 어느 쪽을 택하든 개의치 않고 이런 사람이라면 알고 지내도 되겠구나 싶은 찰나 물컵을 매만지던 그가 결심에 찬 눈빛으로 답했다.
탁―
"…하겠습니다."
시켜 준다면 따르겠다고.
곧게 선 대나무처럼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 * *
"정유환… 씨라면 저도 압니다. 청성 측과 계약도 했습니다."
"아신다니 좋군요. 같이 이송되었을 겁니다. 고되겠지만, 제가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대신 찾아주실 수 있으신지요."
"조장님께서 내리시는 첫 번째 명령입니까?"
"아니, 뭐 그런 건...."
"하하, 알겠습니다. 보게 되면 내일 아침 이곳으로 와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이름을 대면 만나줄 겁니다."
최창조에게서 확답을 받고 난 뒤 그에게 정유환 수색을 맡긴 나는 성곽 인근에 마련된 병사용 숙소로 향했다.
본래는 도시에 막 도착한 여행자들이 짐을 풀고 간단히 술과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주점을 겸하던 여관으로, 〈서브 퀘스트: 편지 전달〉의 주인공인 제임스란 이름의 병사가 묶고 있는 장소였다.
"제임스라면, 아! 제임스! 기사님께서 찾으신다."
"예?"
재수가 좋았는지 제임스와는 곧장 대면할 수 있었다.
현재 엑세르군은 끊임없이 몰려오는 언데드들을 안정적으로 상대하고자 대략 1,500여 명을 병력을 두 부대로 나눠 전투와 휴식을 번갈아 취하는 중이었는데, 시스템의 안배인지 때마침 휴식 조 불침번이었던 덕택에 그와 접선하는 건 순조롭게 이어졌다.
"어머니께서 제 안부를 물으셨다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우연찮게 수도원을 다녀오다가 당신의 어머니와―"
"아아, 어머니. 어머니는 잘 계십니까? 몸이 불편하셔서 거동이 힘드신― 아, 아니 혹시 어머니께 제 편지를 전달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편지요?"
"안 그래도 어머니께 안부를 전하고자 짧게 적어 둔 게 있습니다."
"가져오시죠. 전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띠링!
['제임스의 편지'를 받아냈습니다.]
[〈서브 퀘스트: 편지 전달〉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죠."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 엄청난지 중간에 말까지 끊어 버리며 편지를 넘겨준 제임스를 기점으로 나는 미니맵을 열심히 살피며 도시 곳곳을 싸돌아 다녔다.
최창조의 합류로 여유도 생겼겠다.
이참에 수면을 줄이고 퀘스트에 집중할 요량이었다.
잠도 잠이지만, 이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수(魔獸)라는 거물을 잡게 된 이력이 있다 보니 하나라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하면, 이따가 하면… 하고 미루다 엄한 놈에게 빼앗기기라도 하면 그 손해는 고스란히 내게 돌아오는 법.
꿀꺽!
['생명의 샘물'을 복용했습니다.]
[모든 해로운 효과가 소멸합니다.]
[10분간 자연 치유력 및 피로 회복 속도가 200% 상승합니다.]
"크읍, 하. 시원타."
남은 샘물을 카페인마냥 들이부으며 쉼 없이 걸음을 재촉하던 참이었다.
쨍그랑!
"음?"
느닷없는 굉음과 함께.
삐이익!
[경고!]
[〈특수 퀘스트: 죄악의 단죄〉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달성 조건 : '악업'을 쌓은 지원자가 666m 내 존재할 것]
[〈특수 퀘스트: 죄악의 단죄〉가 추가됩니다.]
'특수'라는 이름의 퀘스트가 발동된 것은.
78화
〈특수 퀘스트: 죄악의 단죄〉
* 제어를 벗어난 화근이 탐욕을 먹고 자라나 재앙이 되기 전에 자신의 본분을 저버리고 욕망에 삼켜진 악(惡)을 멸하라.
(0/7)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오직 '대륙: 칼리야스'에서만 진행 가능합니다.
* 특이 사항 2: 본 퀘스트는 목표물 사냥꾼에게만 개방됩니다.
* 특이 사항 3: 본 퀘스트 실패 시 엑세르(exér) 백작 군의 사기가 급격히 감소합니다.
* 특이 사항 4: 특수 퀘스트는 다수의 지원자가 동시 진행하되 '경쟁' 구도입니다.
* 특이 사항 5: 최초 달성자가 탄생할 경우 그 이외의 지원자는 퀘스트가 강제 삭제되며, 그에 따른 페널티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벼락같이 날아와 경종을 울리는 비상 신호에 나는 일순 벙찐 표정을 지었다.
특수 퀘스트라니.
이건 분명 지구에서만―
"아니, 이럴 때가 아니다."
멍하게 중얼거리다 불현듯 눈을 부릅뜨며 몸을 돌렸다.
경쟁.
뭐가 어쩌고저쩌고 떠들 새가 없는 바.
"어디냐!"
삽시간에 근육을 팽팽하게 조이며 바닥을 박찼다.
밤중이라 유난히 크게 울려 퍼지는 소음을 따라 전력으로 질주하길 채 10여 초 만에 다다른 장소는.
'대장간?'
우연인지 운명인지 공교롭게도 검과 창 등 각종 무기와 방어구부터 괭이와 낫처럼 농업 용품들이 진열대에 쫙 세팅된 '대장간'이었다.
이를 확인한 직후 바로 직감했다.
왜 하필 이곳에서 〈특수 퀘스트: 죄악의 단죄〉라는 살벌한 명칭의 서브 퀘스트가 발동됐는지를.
"야! 존나 많아!"
"개미쳤네. 이게 다 몇 개냐!"
"근데 아이템은 거의 없는데?"
"그러게. 씁. 뭔 쓰레기만 넘쳐나냐."
"좀 잘 뒤져 봐, 이 새끼들아! 경비 오기 전에 털어야 한다고!"
"병신아. 밖에 전투 중인 거 안 보여? 오긴 뭘 와."
…
…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대화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아이템 루팅.
도저히 퀘스트만으로는 충당할 자신이 안 되니 저급한 도둑질을 벌여서라도 장비를 마련하겠다는 짐승만도 못한 욕망의 발로이리라.
'이런 머저리 새끼들.'
그 한심한 작태에 육두문자가 절로 입 안을 맴돌았다.
칼리야스 대륙으로 소환되고 끽해야 반나절도 안 된 시점에서 범죄라니.
게다가 저놈들에겐 그저 소소한 일탈이 나비 효과가 되어 생환자 전체가 '예비 범죄자'로 낙인찍혀 싸잡아 욕을 먹게 될 수도 있기 때문.
최악의 경우.
지원군이고 뭐고 제 집 안방에 후환거리를 내버려 두지 못하겠단 엑세르 백작의 결단 하에 생환자들을 죄다 도심 밖으로 쫓아낼지도 몰랐다. 그러다 보면 당연히 관계가 없는 무고한 생환자들은 나가지 않으려고 버틸 거고, 곧 내보내려는 자와 눌러앉으려는 자들 간의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내 가정에 과도한 비약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존재하겠지만, 지금이 전시(戰時)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온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 전장이기에 감정적으로 대응할 만했다.
만약 저들을 못 잡는다면?
그때는 사태가 더 심각해진다.
뭐든 시작이 어렵다고, 〈특수 퀘스트: 망가진 패잔병〉 당시의 테러범이 그러했듯 이 버러지들의 패악질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수위를 높여 갈 거다.
대장간에서 피어난 죄악의 불씨는 차차 바람을 타고 몸집을 불리며 포목점, 잡화점.... 종극에는 영주 관저를 넘어 도시 전반을 집어삼키는 화마(火魔)로 성장하겠지.
그럼 다 끝나는 거다. 이번 퀘스트뿐 아니라, 우리의 미래까지도.
최창조의 경험처럼 퀘스트의 실패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우리의 발목을 움켜쥐고 지옥으로 끌어당길 터이니.
"하, 왜 미친놈들은 어딜 가나 있는 거냐고."
사람 열 명만 모여도 개중 한둘은 꼭 또라이라더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개되는 끔찍한 엔딩에 탄식을 내뱉은 나는 허리춤을 뒤져가며 검대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가로 71.9mm에 세로 165.2mm의 자그마한 사각 디자인.
다름 아닌 '핸드폰'이었다.
홀로그램 인터페이스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지구에서는 핸드폰 쓸 일이 종종 있는지라 늘 배터리가 빵빵하게 채워져 있는 휴대전화. 칼리야스 대륙으로 넘어온 뒤에는 충전을 못 해 둬서 30%대로 줄어 있긴 하지만.
"있다! 쓰벌 겨우 찾았네!"
"진짜?"
"등급은? 등급 뭔데?!"
CCTV도 블랙박스도 없는 이 세계에서 증거물을 수집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나는 혹여라도 몽타주가 제대로 담기지 않을까, 헤드 랜턴 불빛을 앞세워 보무도 당당하게 카메라를 들이밀며 대장간 안으로 들어섰다.
"자자, 정지. 다들 정지하고 여기 좀 봅시다."
"응?"
"뭐지?"
"왜, 뭔데? 뭐 발견했어?"
"그게 아니라 갑자기 불빛이."
아주 요란하게 손님이 방문했음을 몸소 알려 주고 나서야 현관 쪽을 바라보는 머저리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아! 쓰벌, 눈뽕!"
"저 새끼 뭐야!"
"그러게. 너 뭐냐?"
대놓고 얼굴과 현장을 찍어 대는 내 모습에 황당함을 느꼈는지 헛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리는데,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질 않는다.
한없이 여유로운 자세.
특기할 구석이 있다면 날 목도하자마자 반사적으로 칼날을 끄집어냈다는 점이다.
이거.
평범한 도둑인 줄 알았더니, 살인도 감행해 본 강도 집단이었다.
"보통 협박이 먼저 아닌가?"
"뭐?"
"너 그러다 죽는다. 핸드폰 내려놓고 곱게 꺼져라. 그럼 살려 주마. 위협도 좀 가하고 그러다 무서워서 달아나면 비겁하게 칼로 찌르고, 다음 생에는 꼭 살아주겠다, 뭐 이런 대사라도 쳐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됐다, 인마. 시간 아까우니까 쓸데없는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한 가지만 묻자. 혹시 훔친 물건 내려놓고 여기 어질러진 거 싹 다 치운 후에 자수할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친절하게 쫑알쫑알 말대답하던 놈에게 검지손가락을 펴 닥쳐 달라는 무언의 제스처를 취하며 자수 계획을 물어봐 주었다.
자수를 하나 마나.
전시의 범법 행위는 참형이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억지로 끌려 와 동참하게 된―
"야, 하던 거 마저 해. 이 새끼는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없나 보네."
거라면 어떻게 목이 잘리는 거라도 막아 줘야 하나 고민했는데.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스윽―
후우욱!
맘 놓고 패도 될 것 같았다.
"그럼 집행 시작합니다."
빠악!
피부와 피부가 접촉하는 순간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 그 짜릿한 촉감을 통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뼈가 산산이 박살 났다는 걸.
"…끄아아아아아아!!"
감이 맞았음을 증명하듯 뒤늦게 터져 나오는 비명.
녹화를 종료하는 타이밍에 맞춰 후려친 손날에 왼쪽 어깨가 완전히 바스라진 강도 1. 나는 놈의 안면을 발로 걷어차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환두대도를 도집 채로 손에 쥐었다.
죽일 수는 없으니.
"팔, 다리. 어깨, 무릎, 허리. 골라. 원하는 곳으로."
그 대신 포션으로도 복구되지 않을 정도의, 딱 산 송장으로만 만들어 둘 작정이었다.
처리든 처단이든.
마지막은 백작의 손에서 이루어져야 하니까.
"야! 조져!"
"씨, 쒸이벌!"
…
…
"흐아아아!!"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후우우우욱―
"아?"
잘 벼려진 서슬 퍼런 칼날을 똑똑히 응시하며 내딛는 한 발에 이름 모를 강도의 아가리에서 물음표가 튀어나옴과 동시에.
빠아악!
빡!
두 차례의 격타음이 일대를 울렸다.
"커흡!"
고통에 억눌린 호흡은 덤.
각기 다른 방향으로 꺾인 오른팔과 왼 다리의 뼛조각들이 살갗을 찢고 나와 피를 흩뿌린다.
나는 확 하고 퍼지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다음 목표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흐읍!"
우우우웅!!
촤아아악―
푸른 기운이 감도는 창을 내지르던 여자였다.
꼴에 스킬이라고 제법 강맹한 바람을 동반하며 허공을 가르는 일격필살의 찌르기에 나는 피하기보다 도집을 휘둘러 마주 응수했다.
후우우욱―
빡!
옆구리를 살짝 비틀어 공격을 흘리며 후려친 반격에 손목이 부러졌는지 대번에 나가떨어지는 창을 보며 폼멜(Pommel, 칼 손잡이의 끝자락)로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남자건 여자건, 아이건 노인이건.
범죄자 새끼라면 인정사정 볼 거 없었다.
풀썩―
"자, 다음?"
* * *
정확히 3분.
"케엑, 켁!"
"억지로 움직이지 마. 그러다 갈비뼈에 내장 다 찢긴다."
고작 라면 한 그릇이 끓을 시간 만에 문자 그대로 일곱 명의 범죄자들을 아작낸 나는 연놈들의 품을 뒤여 갖고 있던 아이템들을 모조리 땅바닥에 풀어 놓았다.
현실에서도 생환자들을 상대로 강도짓을 벌이고 다녔는지 포션부터 장비까지 가진 아이템이 굉장히 많았다.
대체로 노말 등급이라는 게 문제지만.
"얼씨구, 이건 매직 등급이네?"
〈날카로운 독수리의 장창/Magic〉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질 좋은 강철로 제련한 양손 장창(長槍). 창날 아래에 피를 닮은 붉은 끈이 달린 게 특징이며 제작 과정에서 추가로 '날카로운 독수리의 영혼석'을 장착하여 예리함을 한층 높였다.
* 짜르기 공격 시 추가 피해량 +10%/착용 시 속력 최대치 7% 향상
그중에는 이처럼 매직 등급 아이템도 끼어 있었다.
"팔면 못해도 10억은 나오겠구만."
히야.
이 맛에 털고 다니는 건가?
좋다, 좋다.
"스콰야, 잘 담아라."
"푸르르릉."
나는 놈들에게서 수거한 아이템들 중 80% 이상을 싸그리 챙겨 가방에 담았다.
기왕지사 탈탈 털어먹고는 싶지만, 보여주기식 증거품이 필요하니 아쉽더라도 눈에 확 띄는 무기나 방어구 몇 점은 놔두고, 그 외에 나만 입 싹 닦으면 아무도 모르는 것들을 스콰의 짐가방에 쑤셔 박으며 대장간 안에서 구한 밧줄로 꽁꽁 구속해 놓을 무렵.
띠링!
[축하합니다!]
[〈특수 퀘스트: 죄악의 단죄〉의 최소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해당 퀘스트를 진행 중인 모든 지원자의 시스템 화면 내에서 동일한 퀘스트가 삭제 처리됩니다.]
[보상으로 '적당한 경험치' 및 '기술 서적: 추적', '이동 시간 확장권: 30분', '수호의 조각'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지원 요청 시 부여 되는 이동 시간이 '30분'에서 '60분'으로 자동 확장됩니다.]
완벽한 제압이 체크 되었는지 클리어 메시지를 비롯한 빛무리가 밝게 솟아오른다.
치이이이익―
피융!
붉은색 신호탄이 어둠을 가른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러면, 치안대든 뭐든 올 거고."
하늘 높게 치솟는 연기를 보며 스콰를 역소환시킨 나는 놀라서 달려올 이들을 기다리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특수 퀘스트가 여기서도 떴단 말이지."
내 머릿속을 차지한 주제는 단연 '특수 퀘스트'였다.
〈특수 퀘스트: 망가진 패잔병〉의 특이 사항 1번으로 인해 '특수 퀘스트=지구'라는 공식이 세워졌었는데.
오늘 열린 〈특수 퀘스트: 죄악의 단죄〉를 보아하니 잘못 판단한 듯했다.
하면.
특수 퀘스트의 핵심은 무엇인가.
"…생환자, 인가?"
A와 B의 교집합.
아무리 봐도 생환자밖에 없다.
즉.
특수 퀘스트의 발현 조건은 아무래도 '생환자의 빌런화'가 아닌가 싶었다.
예컨대 신(神)으로 추정되는 시스템 개최자는 자신이 빚어낸 생환자라는 캐릭터가 오로지 칼리야스 대륙을 구원하는 용도로만 쓰이길 바라는 심리랄까?
이 정보가 향후의 항해에 어떤 식으로 작용할진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데이터를 소중하게 뇌리에 각인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리.
언제나 아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79화
신호탄에서 더 이상 연기가 분출되지 않을 때쯤.
"여기다!"
"이쪽입니다!"
"유리가 깨져 있습니다!"
…
…
"아, 왔네."
창 너머로 황급히 뛰어오는 열댓 명가량의 병사들이 보였다.
무슨 상황인진 몰라도 어떤 사건이 벌어졌다는 건 확실하게 인지한 듯 여차하면 공격도 불사할 기세로 살기등등하게 접근하는 모습에 나는 손수 문을 열고 나가 그들을 맞아 주었다.
한순간에 쏠리는 이목.
하나 오해를 살 일은 없었다.
"나는 세르레퀴로 소속 3조 조장 오휘윤이라고 합니다."
신분과 지위가 명확한 사람이었으니까.
"…충!"
문득 신설된 지 얼마 안 된 조직이라 못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긴 했지만, 다행히 볼썽사나운 꼴은 발생하지 않았다.
아마 조사단에 대해 알고 있다기보단 어깨에 걸린 견장들을 보고 평범한 계급은 아니구나 짐작한 듯했다.
"이름이?"
"글라디아르 치안대 소속 2조 조장 포튼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보다 예서 벌어졌던 일들을 설명할 테니 우선 이걸 좀 보시죠."
나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목례하는 포튼에게 긴말할 거 없이 핸드폰부터 들이밀었다. 명백하고 깔끔한 증거가 있는데 굳이 입 아프게 떠들 이유가 있나.
- 자자, 정지. 다들 정지하고 여기 좀 봅시다.
- 응?
- 뭐지?
- 왜, 뭔데? 뭐 발견했어?
- 그게 아니라 갑자기 불빛이.
"마, 마법 도구?!"
"마도구라고?"
"집중들 합시다."
"아, 죄송합니다!"
중간에 마도구니 뭐니 하며 소란스러워졌던 해프닝을 뒤로하고 계속해서 촬영한 영상을 보여주자 급격하게 굳어가는 포튼의 낯빛.
이윽고.
- 야, 하던 거 마저 해. 이 새끼는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 없나 보네.
- 그럼 집행 시작합니다.
- 빠악!
- 끄아아아아아아!!
뼈가 바스라지며 나가떨어지는 강도 놈의 최후를 끝으로 녹화본이 종료되자 한데 집중되는 병사들의 눈초리.
진상을 파악한 그들의 손길은 매우 가차 없었다.
"으으읍!"
"으읍!"
…
…
"전부 끌고 간다. 둘은 남아서 현장을 보존하고, 둘은 이 대장간의 주인이 누구인지 찾아 데려오도록."
"충!"
제 주제도 모르고 대밀레스 제국의 백작이자 이 도시를 포함한 일대의 모든 땅을 다스리는 제후의 재산을 탐한 죄인들이었다.
온몸이 바스라져 성한 곳이 없음에도 일절 아랑곳하지 않고 포승줄을 길게 늘어뜨려 바닥을 질질 끌고 가는데, 옆에서 보는 내가 다 아플 지경.
지구였다면 인권이 어쩌고저쩌고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권리를 부르짖는 인애지사님들께서 언론을 동원해 난리가 났을 야만적인 압송에 혀를 내두르던 차.
"저 혹시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주실 수 있으십니까."
출발하기에 앞서 포튼이 내게 정중히 동행을 요청했다.
직급 자체는 동일한 조장이지만, 이쪽은 백작 군 내에 최고 전력으로 분류되는 세르펜스 기사단과 동등한 단(團) 소속이라 성문 경비대와 같은 하위 기관인 치안대(隊)의 파톤으로서는 예의를 차리지 않을 수 없는 바.
"그럽시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 깍듯한 태도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대장장이도 불러온다고 하니 이 기회에 자연스럽게 '도제 찾기'의 트리거나 발동시켜 놓으면 될 성싶었다.
아수라장이 된 것 외에는 거의 그대로니 퀘스트가 소멸되거나 하진 않겠지.
"출발!"
"출발한다!"
* * *
"―이리된 것입니다."
"허."
기사 가문의 수장답게 본인의 가택이 지근거리에 있음에도 신속한 지휘를 위해 최전선인 성벽 코앞에 막사를 지어둔 엑세르 백작.
도시 한가운데에서 갑작스레 솟구친 붉은 연기에 늦은 새벽임에도 잠 한숨 자지 못하고 파견된 치안대가 돌아오기만을 고대하던 그는, 파톤에게서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후 자신의 주위를 가득 사람들을 보며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합심해도 모자랄 이 시기에 아군의 뒤통수를 치는 작자가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지.
"감히."
엑세르 백작의 눈동자에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짙은 분노가 일렁거렸다.
이건 단순히 재물을 탐했다 수준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곧 배신(背信)이었다.
국가와 국민, 왕가를 향한 충과 의를 첫 번째 미덕으로 여기는 기사도에서 극도로 혐오하는 짓거리. 더군다나 대장간은 현재 외부와 단절된 채 홀로 치열하게 전쟁 중인 엑세르군의 유일한 전략 물자 공급처. 이런 곳에 지장이 생기면 앞으로의 전황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다행히 그 직전에 제압을 마치긴 했지만, 자칫하면 대장장이들이 휘말려 재앙으로 번질 뻔한 사건이었기에 사령관된 입장에선 천인공노할 개자식들로 보일 터.
그로 인해 움켜쥔 손아귀 사이로 찐득한 살기를 뚝뚝 흘려 대던 엑세르 백작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 왔다.
"…그대가 제압했다지?"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
나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 첫 문장에 최대한 담백하면서도 겸손하게 대답했다. 괜히 뭐 주절주절 길게 떠벌려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운.
혹은 할 일을 했을 따름이다.
그거면 족했다.
"이 건에 관해서는 추후에 보상이 따를 것이다."
"감사합니다."
내가 적당한 선을 지키며 눈도장을 찍고 뒤로 물러나자 다시금 눈을 돌려 좌중을 굽어보던 백작.
무얼 고심했는지.
1분, 2분… 침묵으로 일관하던 끝에 천천히 운을 떼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한마디는.
"이놈들은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주지 말고 묶어 두도록. 내일 아침,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목을 벤다."
"충!"
"충!"
…
…
사형.
그것도 '공개 처형식'이었다.
'공개로 한다고?'
사뭇 과감한 그의 결정에 나는 적잖게 놀라 백작을 쳐다보았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니 살아남기 힘들다는 거야 기정사실이었지만, 그걸 아예 공개적으로 거행할 줄이야.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의도인가?
'음,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그저 군법의 지엄함을 보여줄 심산이라면야 별 상관은 없지만, 만일 내 짐작이 맞다면 엑세르 백작의 심중에 생환자들을 의심하는 불신의 씨앗이 자라났다는 말이니 협업을 앞둔 시점에선 썩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결과적으로 내 정체가 드러났을 때 애써 쌓은 호감도마저 작살날 공산이 컸으니까.
그러나.
'뭐, 어쩔 수 없나.'
우려는 거기까지였다.
나로서는 딱히 막을 방법이 없는 탓이었다. 딸자식과 짧은 인연을 맺은 신설 조직 조사단의 3조장, 이런 알량한 감투로 대귀족의 감정을 다스리기엔 한참이나 부족했다.
그러니.
'몸 사리라고 언질이나 해두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나 전념하자.
정유환 등이 조사단에 합류를 하든 안 하든 백작의 심기가 불편하니 거스르지 않게 주의하라고.
* * *
"…휘윤 씨, 저 최창조입니다."
다사다난했던 하루를 보내고 맞이한 이튿날 동 틀 녘.
어제 샘물을 마시고 난 덕분인지 그다지 피곤하진 않아 늘상 하던 습관대로 스트레칭을 마치고 짐 가방에 싸 왔던 식량 중 누룽지를 꺼내던 찰나, 밖에서 최창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 일찍 오겠다더니 진짜였네.
펄럭―
왠지 젠슨이 떠오르는 부지런함에 피식 웃으며 휘장을 걷자 밝은 표정의 최창조가 반가운 인물과 함께 서 있었다.
"휘윤 씨. 금방 뵙게 됐네요. 하하!"
정유환이었다.
"오랜만…은 아닌데, 오랜만인 느낌입니다."
"그런가요? 하하."
"간단하게 식사를 할 참인데, 드시겠습니까? 메뉴는 누룽지탕입니다."
"오, 좋죠."
"잘됐네요. 들어오시죠."
나는 그와 최창조에게 인사를 건네며 막사 안으로 데려와 코펠 그릇에 담긴 누룽지탕을 내주었다.
아쉽게 반찬을 챙겨오지 않아 곁들일 거리라곤 간장이 끝이었지만, 식사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후, 잘 먹었습니다. 요즘엔 전투 식량도 맛이 훌륭하긴 한데, 역시 한국인은 국물인가 봅니다."
"그러게요. 저도 누룽지나 좀 챙겨 다녀야겠습니다. 물만 부으면 되는 걸 왜 잊고 있었는지. 하하하."
정유환과 최창조도 마찬가지인 거 같고.
나는 입가심용으로 물을 한 잔씩 내어 주며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맛있게 드셨다니 좋네요. 그보다 유환 씨께서는 이제부터 어쩌실 계획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계획이라면… 어제 엑세르 백작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각자 원하는 구역으로 배치해 주겠다고. 제 무기 특성상 장거리 공격이 힘들긴 한데 일단은 돌팔매질이라도 할 수 있는 목 좋은 곳을 잡고 공적치를 챙겨 볼 생각입니다만, 여쭤보시는 걸 보니 휘윤 씨는 뭔가 다른 복안이 있나 봅니다?"
"저는 조사단으로 활동할 예정입니다."
"조사단…이요?"
전날.
최창조에게 얘기했던 대로 조사단이 창설되었음을 알리고 공석인 3조에 당신을 추천할 요량인데 그대의 의중은 어떠한지.
질문에 대한 답변은.
"좋습니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오케이였다.
2차 진화체에 이어 3차 진화체와 부딪치게 될 여지도 있다는 대목에서 작게 신음하긴 했으나, 기사단과의 동행 등 여러 요소를 고려했을 때 리스크를 짊어질 만큼 리턴 값이 상당하다고 판단한 듯.
"저, 그런데...."
"정유림 씨도 데려갔으면 하시는 겁니까?"
"하하, 이거 바로 들켰네요."
"추천은 해드릴 수 있습니다. 단지 본인이 원하느냐가 중요하죠. 참고로 원거리 계열도 필요하니 저로서는 환영입니다."
"하하! 휘윤 씨도 찬성이라면 됐습니다. 얼른 가서 물어보고 오지요. 10분이면 됩니다."
"저도 확답을 받아 봐야 하니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점심쯤에 보시죠."
"알겠습니다."
"혹 더 추천하실 분 계십니까?"
"아, 송주완 씨와 강태성 씨도 계시는데, 물어볼까요?"
"손발을 맞춰 본 사람이야 많으면 좋죠."
"그럼 두 분에게도 여쭤보겠습니다."
레드 구울을 사냥하던 그날의 기억을 회상하는지 열기를 띤 눈빛으로 주억거린 정유환이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는 배웅에 나서 떠나가는 그에게 정유림 등이 조금이라도 싫어하거나 꺼려 하는 기미를 보이거든 절대로 강요하지 말기를 신신당부하고는 돌아와 최창조와 담소를, 아니 본격적인 회의를 개시했다.
"제 스킬이요?"
"범위와 지속 시간, 은폐력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숙지해 둬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을 듯한데, 혹시 알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 뭐 어렵지 않죠."
사용하는 무구의 종류, 평상시의 플레이 스타일 등등.
특히 최창조의 스킬 '은신처 생성' 부분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 헷갈리지 않도록 비교적 자세하고 상세하게 데이터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직접 시연까지 해가며 열띤 논의를 이어 가길 대략 한 시간여.
…쿠웅!
"음?"
"응? 이거 북―'
…쿠웅!
한국 시간으로 대충 7시 남짓한 시각.
난데없는 전고(戰鼓, 전쟁터에서 아군의 기세를 돋구거나 여러 전략 전술을 적용하기 위해 치던 북) 소리가 사방 천지를 일깨웠다.
드디어.
공개 처형식을 단행하려는 모양이었다.
8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