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이름: 리하인 삭 검술 동영상_5]
"오케이."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 속.
나는 몰려드는 언데드들을 사냥하면서도 착실하게 리하인의 전투 장면을 하나둘 저장해 나갔다. 벌써 녹화된 영상만 다섯 개에 시간으로 계산해도 20분 분량이 넘었다.
영상당 평균 플레이 타임이 4분 안팎이라는 게 어째 부족해 보이겠지만.
공적치를 챙기고 호위 대상들을 보호하는 등 내 할 일 하면서도 리하인의 손짓 발짓 몸짓을 깔끔하게 추려내려면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하는 바, 난전 중에 이만큼이나 걷어 낸 것도 충분히 대단한 작업이었다.
더군다나.
[이름: 리하인 식 검술 동영상_5]
[이름: 젠슨 식 할버드 동영상_2]
[이름: 카르켈 식 할버드 동영상_3]
…
…
"많이 모았네."
내 갤러리에는 리하인의 것뿐 아니라 젠슨과 카르켈의 할버드 활용법도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다.
신분 고하에 의해 명령을 따르고는 있으나 두 남자도 당당히 정식 기사 서임을 받은 이들.
기록해 둔다면 종래에는 빛을 보리라는 일념으로 최대한 놓치지 않고 기록에 박차를 가했다.
- 차앗!
- 어딜 감히!
- 카르켈! 이쪽은 끝났다!
…
…
나만의 오답 노트가 완성된 이후엔 남는 시간마다 줄기차게 매달리며 분석 또 분석에 열중했다.
어지간한 카메라 성능쯤은 가볍게 씹어 먹는 최신 기종의 역량 덕에 확대와 재생 속도 변경을 반복하며 뜯어 보자 서서히 리하인의 공격 패턴이 눈에 익어 갔다.
그래 봐야 여전히 새 발의 피지만.
저 높은 태산도 결국 티끌 같은 모래알들이 모여야만 완성되는 작품이지 않던가.
'봐라, 보는 거다. 약점이 없을 리가 없다.'
S 랭크 혹은 그 윗줄의 성과를 달성하고자 나는 핸드폰 배터리가 바닥날 때까지 녹화본을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눈알이 빠져라 돌려 보며 열정을 쏟아부었다.
동시에.
"이쯤…일 텐데."
"응? 기사님, 여긴 어쩐 일로―"
"루세블 씨 맞습니까?"
"맞기는 한데, 제 이름은 또 어떻게―"
"어쩌다 루세블 씨에게 걱정거리가 있다는 걸 듣게 됐습니다.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기왕 동행하는 김에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도와주려 하는데 어떻습니까."
"예?"
나머지 서브 퀘스트들도 빠짐없이 개방해 나갔다.
행운이 따라주어 길 가다 주인 잃은 아이템이라도 루팅하는 게 아니고서는 현시점에서 내 능력을 향상시켜 줄 유일한 통로였기에 되도록 리하인과의 두 번째 대련을 치르기 전에 모조리 클리어해 둘 요량이었다.
〈메인 퀘스트: 호위〉에 딸린 서브 퀘스트는 총 네 개.
[〈메인 퀘스트: 호위〉의 서브 퀘스트를 열람합니다.]
1. 끝없는 호승심
2. 치료사를 찾아 줘
3. 이주 걱정
4. 식량 공급
* 수행 가능한 서브 퀘스트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자연스레 오픈된 리히라인의 것을 빼면 각각 젠슨의 '식량 공급', 루세블의 '치료사를 찾아 줘', 루카스의 '이주 걱정'으로 최근 들어 가장 많은 가짓수였다.
하도 두 개를 넘지 못하다 보니 이번에도 한두 개에서 그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혹시 언젠가 찾아올 생환자가 리하인과의 대련에서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일 수 있게끔 내정된 안배인가?
적정 수준만 넘는다면 '끝없는 호승심'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발동하도록 설정된 느낌이었으니까.
뭐, 시스템의 의도야 알 수 없다만, 뭐가 됐든 나는 기꺼운 심정으로 눈앞에 서 있는 여인 루세블의 '치료사를 찾아 줘'를 먼저 받아들였다.
제목이 치료와 관련되어 있는 걸 보면 다른 서브 미션에 비해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낮아 보였다. 경상 이하의 부상이라면 단박에 치유되는 힐링 귀걸이를 필두로 여러 종류의 포션이 담긴 '물약 세트'에 포션보다는 효과가 떨어져도 구급약으론 나무랄 데 없는 폰스(fons) 마을 약초꾼 하르크가 선물해 준 '약품함'까지 보유하고 있는 터라 웬만한 병증은 어렵지 않게 감당할 수 있을 터.
"어, 어찌 아셨는진 모르겠지만… 제게는 리안이라는 자식이 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튼튼하게 잘 뛰어놀던 아이인데 근래 마을을 빠져나오던 중에 다리를 다쳐서...."
그 예상은 제대로 적중했다.
띠링!
['루세블'의 사정을 전해 들었습니다.]
[〈서브 퀘스트: 치료사를 찾아 줘〉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메인 퀘스트: 호위〉에 〈서브 퀘스트: 치료사를 찾아 줘〉가 추가됩니다.]
〈서브 퀘스트: 치료사를 찾아 줘〉
* 코마토르(cómĭtor) 마을의 루세블은 요 며칠 자식 걱정으로 영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촌장의 설득을 받아들여 리하인의 보호 아래 마을을 빠져나오던 와중 아들 리안이 나무뿌리에 발목이 걸려 넘어지면서 발목을 다친 탓이었다.
하필이면 먼 길을 이동해야 하는 루세블 모자로서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부상이었거니와 이대로 방치한다면 장애로 이어질 수도 있는 만큼 그녀는 다방면으로 치료법을 강구했으나 숱한 민간요법도 리안의 다리를 낫게 하진 못했다.
과연 당신은 이 난관을 극복하고 루세블 모자의 웃음을 되찾아 줄 수 있을 것인가?
(0/1)
내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간단한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방도가 있을까요?"
"흐음, 확신할 순 없지만 제 선에서 해결이 될 것도 같습니다. 일단 한번 봐보도록 하죠. 데려오시죠."
"아아! 감사합니다, 기사님!"
"감사 인사는 치료가 끝난 뒤에 해주시죠."
"예예! 리안을 데려오겠습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애정은 지구나 칼리야스나 똑같은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눈물을 흘릴 듯이 반색하며 근처 마차로 달려가 문을 열어젖히는 루세블.
이내 제 어미와 함께 발목을 절뚝이며 내게 다가오는 열 살 내외의 남자아이는 걸을 때마다 통증이 올라오는지 인상을 한껏 찡그리고 있었다.
"너구나, 리안이."
"아, 안녕하세요, 기사님...."
루세블에게 주의를 받기라도 한 듯, 아픈 와중에도 꾸벅 예를 갖춰 허리를 숙이는 리안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준 나는 무릎을 굽혀 녀석의 발목에 손을 가져다 대고 주문을 외웠다.
아프다는데 길게 주절거릴 필요 있나.
"회복."
우우우우웅!
[신성 마법 '회복'을 사용합니다.]
[경상 이하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나지막한 읊조림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빛무리.
그 난데없는 휘광에 주위의 이목이 이쪽으로 쏠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치료에 몰두했고 곧 부어 있던 리안의 발목이 차차 가라앉는 것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운이 좋았는지, 뼈가 부러지거나 하는 위중한 단계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부기가 말끔하게 가라앉는 자리에 후유증 방지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하르크제 상처 연고를 발라 주고서 얼떨떨해하는 리안의 옆으로 비켜섰다.
"자, 됐다. 이제 움직여 봐라."
"지, 진짜요?"
"그래. 살살 돌려 봐."
휘광에 휩싸여 있는 동안 마치 꿈이라도 꾸는 양 멍한 눈빛으로 나와 발목을 바라보던 리안은 내 말에 홀린 듯 발등을 설설 치켜든다.
그리고는.
"어, 엄마! 다리가 안 아파!"
"아아, 칼리야스시여!"
"와!"
"리안이 나았어!"
"클레디 봤어? 빛이 막 번쩍 하더니 리안이―"
무슨 일인가 기웃거리던 코마토르(cómĭtor) 마을 사람들의 입과 손바닥에서 환호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며칠 내내 통증에 힘겨워하던 아이가 단 몇 초 만에 멀쩡히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신기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마법이든 신성력이든, 촌 동네에서 구경할 수 있는 소재는 아닐 테니까.
"아아! 칼리야스 님이 우릴 도우신다!"
"칼리야스시여!!"
"...."
그래서인지 몇몇 이들의 리액션이 살짝 과하다 싶긴 했으나, 그들의 열광적인 경외는 금세 내 관심에서 멀어졌다.
띠링!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치료사를 찾아 줘〉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적은 경험치' 및 '소문의 흔적'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소문의 흔적?"
내 흥미를 잡아끄는 재미난 보상이 지급된 탓이었다.
〈소문의 흔적/Normal〉
* 도시 글라디아르(gládĭár)와 코마토르(cómĭtor) 마을을 잇는 대로는 양쪽에 숲을 낀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당연하게도 직선거리 도로 연결을 위해 원래 숲 일부를 강제로 개통한 까닭인데, 당시 공사 인부들은 영주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르면서도 매일 불안에 떨었다고 전해진다.
"왜요?"
"글쎼, 숲에 악신이 산다나 뭐라나. 함부로 숲을 해치면 악신이 노한다고 무서워 했다더라고."
어느새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는 기억에서 희미해져 버린 소문의 진실은 무엇일지.
* '악신: ???'의 정보 획득
"이게 뭐야?"
빛 가루가 모여 탄생한 손바닥 크기의 자그마한 종이 위로 출력된 화면을 읽어 내려간 나는 하다 하다 소문도 보상으로 주는 거냔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면서도 아이템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악신(惡神).
괴물도, 영물도 아닌 악'신'이라니.
'진짤까?'
나는 내가 빠져나왔던 숲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침을 삼켰다.
이곳은 칼리야스 대륙.
신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세계니 그 대응점에 선 악신이라고 못 존재할 것도 없다.
물론.
계몽이 덜 된 중세 문명 촌 동네 사람들이야 덩치 좀 큰 멧돼지만 봐도 산신이니 뭐니 하며 호들갑을 떨어 대는 통에 그저 헛다리 짚는 것일 수도 있으나.
"뭐가 됐든 들려봐야겠지."
단서.
나를 한 단계 진보시켜 줄 실마리의 등장이었다. 이런 귀중한 자료를 단지 소문이라는 구실만으로 내던질 순 없지. 어차피 본 퀘스트는 시간제한도 없겠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약소하지만...."
"뭘 이런 걸 다. 잘 먹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보다 이 근방에 악신이 산다고 하던데, 아십니까?"
결심이 선 나는 고정 보상 외에 품속에서 꺼낸 동전 주머니를 건네주는 루세블의 호의를 양심껏 반만 받아넘기며 그녀에게 악신에 관해 질문했다.
인근의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적당히 큰 음량으로.
"제가! 제가 압니다!"
효과는 적절했다.
유달리 코가 큰 사냥꾼 차림의 남자가 번쩍 손을 들며 자신이 아는 점들을 기탄없이 설명해 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코흘리개 시절의 이야깁니다. 대대로 약초를 캐고 사냥을 하던 집안이라 저도 아버지를 따라 자주 숲에 들어가고는 했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다 녹슨 칼이 박힌 동굴을 발견하게 됐습죠."
"녹슨 칼?"
"그렇습니다. 고철값도 못 받을 정도로 낡아 그대로 두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께 그 얘기를 하니 대뜸 절 끌어안으시며 살아 돌아와 고맙다고 하시더군요. 해서 대체 왜 그러시느냐고 물으니 아비께선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갔던 동굴이 바로 '악신의 보금자리'였다고. 채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그 주변에서만 일백 명이 넘게 실종되어 전전대 마을 촌장님께서 검을 박아 경계를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위치는, 위치는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근처에 디아라무스(dĭárāmus)가 있기도 하고 또 한창 어릴 때라 어른들이 가지 말라고 하니 괜히 더 가고 싶어져서 몇 번 들락거리면서 경로는 확실하게 외웠습니다. 안쪽은 께름칙해서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요. 하하! 아, 마침 여기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걸어서도 갈 수 있지요."
61화
"좋습니다. 혹시 안내도 가능하시겠습니까?"
"가능하기는 한데… 지금은."
"아, 그건 제가 해결할 테니 걱정 마시죠. 더불어 안내만 해주신다면 보답은 꼭 해드리겠습니다."
"기사님께서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예?"
장소를 잊지 않았다는 사냥꾼 레른의 단언에 짧게 주억거린 나는 그와 대화를 마치고 곧장 선두로 이동했다.
몇 개의 마차와 수레를 거쳐 전위에 다다르니 행렬을 지휘 중인 리하인과 젠슨이 보였다.
두 기사는 무언가를 한창 논의 중이었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더는 가까이 가지 못하게 병사 하나가 창을 비스듬히 세우며 나를 제지했다.
"정지, 멈춰 주십시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외부인의 지휘부 접근을 막아서는 거야 마땅한 자세.
나도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기에 순순히 조치에 따라 정지한 채로 상황을 설명했다.
소문을 접했다.
숲에 악신이 살고 있고, 마을 사람 중에 악신의 거처를 아는 이가 있어 다녀오고 싶다.
…라고는 전혀 아니다.
그랬다간 지금 같은 시급한 시국에 무슨 개소리냐는 시선을 받으며 '가는 건 네 마음이지만 우리는 갈 길이 바빠 기다리지 않을 거니 알아서 해라' 따위의 차가운 대답만 돌아올 테고, 그 후로 나는 언제든 제 멋대로 떠날 수 있는 사람으로 낙인 찍혀 메인 퀘스트 진행에서 철저히 배제 당할 뿐이다.
따라서, 이럴 때엔 저들의 귀를 홀릴 달콤한 주제를 던져야 했고,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여차여차해서 이 대열에 합류하고 보니 코마토르 촌락 주민들이 워낙 급하게 마을을 빠져나온 탓에 식량 사정이 꽤나 부실하다는 걸 알게 됐소. 하여 머지않아 해가 저물 거 같기도 하니 오늘은 이만 숙영지를 설치하고, 그동안 난 식량을 좀 구해 올까 하는데, 리하인 경과 젠슨 경께 이를 전해 줬으면 하오."
폰스 마을에서도 유용하게 써먹었던 '식량 공급'이었다.
과거 〈메인 퀘스트: 보호〉 당시에도 꽁꽁 틀어박혀 있어야만 했던 날 목책 바깥으로 내보내 준 유일한 탈출구는 단순한 우연인지 퀘스트 설계자의 계획된 그림인지 참 공교롭게도 동일한 명칭과 동일한 역할로 내 발목에 걸린 족쇄를 풀 열쇠가 되어 주었다.
['젠슨'이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서브 퀘스트: 식량 공급〉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메인 퀘스트: 호위〉에 〈서브 퀘스트: 식량 공급〉이 추가됩니다.]
* * *
"그럼 부탁하겠소이다."
"최대한 구해 보죠. 레른, 출발합시다."
"예, 기사님. 이쪽입니다!"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여 갈 즈음, 젠슨의 배웅을 받으며 사냥꾼 레른을 대동하고 '악신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그는 내게 호언장담한 대로 길잡이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대로에서 약간만 벗어나도 풀과 나무가 우거진 숲이 사방을 잡아먹어 버리는 탓에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구분하는 것조차 어려운 지형이었으나, 레른은 요 일대에서 나고 자란 토착민답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전진하며 나를 목적지로 인도해 주었으니 말이다.
하기야.
산속을 이 잡듯이 헤집고 다니는 사냥꾼이니 적어도 수림에서 미아가 되는 일은 없으리라.
"여기서… 이쪽으로 돌면 디아라무스가 있을― 아! 저깁니다! 저 동굴이 악신의 보금자리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 거침없는 약진에 신뢰가 쌓여갈 즈음, 줄곧 '디아라무스, 디아라무스'라는 단어만 중얼거리던 레른이 불쑥 어딘가를 가리키며 뒤따라오던 나를 불렀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드넓게 치솟은 절벽 아래.
온갖 덩굴에 가려질 듯 말 듯한 입구를 빼꼼 내민 거무튀튀한 동굴이 손님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
드디어 도착인가.
정면에 펼쳐진 풍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니 절로 긴장감 섞인 신음이 튀어나왔다. 악신에 대한 데이터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생김새만이라도 알아냈다면 최소한의 대비책이라도 세웠을 텐데.
아무래도 마지막 목격 시기가 수십 년도 더 된 예전이라 코마토르 주민들도, 이 부근 출신인 병사들 중에도 '소문의 흔적' 이상 가는 정보를 가진 이가 존재하질 않았다.
그러한 까닭에 혹시 내가 감당 못할 레벨의 적이라면 어쩌나 싶은 우려가 알게 모르게 실려 나왔다.
최악의 경우 탈출권을 쓰면 된다지만… 탈출권은 가급적이면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 두는 게 좋았으니까.
"저기 서로 엉켜 있는 나무가 보이십니까? 어르신들은 저걸 악마의 피가 깃든 나무라고 해서 여기가 악신의 터라는 제일 강력한 증거라고들 하셨지요. 그래서 이름도 디아(dĭá) 라무스(rāmus)라고 붙였고요."
잠시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내가 곁으로 다가오자 레른이 전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에게 지목당한 것은 다름 아닌 '연리지(連理枝)'였다.
디아라무스, 디아라무스.
도대체 그게 뭔가 했더니만,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가지가 얽히고설키다 종극에는 완전히 결합되어 버리는 저 신묘한 자연 현상을 여기 사람들은 악마의 간섭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리고… 저게, 그 녹슨 검입니다."
한국에서도 본 적 없는 장관이라 한참을 구경하다 레른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린 동굴의 입구 좌측에는 오랜 세월 영역을 넓힌 넝쿨로 인해 검인지 창인지 도저히 분간이 안 되는 형상의 막대기가 서 있었다.
마치 제 주인과 나란히 전설이 된 명검 엑스칼리버(Excalibur)처럼.
탁―
"음, 가져갈 일은 없겠네."
다만 그 고고한 외견과 달리 아쉽게도 아이템은 아니었다.
레른에게서 녹슨 검이 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던전: 악신의 보금자리를 경고하는 검'이라든가 '경계의 수호자' 같은 보물이 아닐까 나름 기대했는데, 그냥 빛바랜 고철 덩어리였다.
쩝.
"됐다. 그보다 레른 씨."
"예?"
"우선 이걸 받으시죠."
헛된 희망이었음에 입맛을 다신 나는 품에서 칼리야스 대륙 화폐가 든 주머니 안에서 누런 동전을 끄집어내 레른에게 주었다.
금은방에서 현금으로 교환하려다 정유환과의 거래로 통장에 수십억이 쌓이면서 잊고 있었던 금화를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그나저나.
이거 가치는 있는―.
"일 탈렌? 일 탈렌이나 주시겠다구요?!"
거 맞네.
따로 알아본 적이 없어서 긴가민가했는데 레른의 들뜬 반응을 보아하니 금 동전의 값어치가 결코 적지 않은 듯싶었다.
역시 황금은 어딜 가나 대접을 받는 건가.
의외의 지점에서 발견한 이세계와 지구의 공통점에 피식 하고 웃어넘긴 나는 감격한 얼굴로 금화를 소중하게 챙기는 레른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보답한다지 않았습니까."
"그치면 일 탈렌이면...."
"말씀드린 대로 그건 드리겠습니다. 대신."
"대신?"
"저는 이제 동굴에 들어갔다 나올 예정입니다. 안에 뭐가 있든 사냥할 수 있다면 사냥하고, 그게 어렵다면 빠져나오겠지요. 그동안 레른 씨는 식량으로 쓸 만한 것들을 좀 모아와 주십시오."
"저, 저 혼자서요?"
"오면서 보셨다시피 숲은 안전한 듯합니다. 혹 몇 마리쯤 있더라도 레른 씨야 훌륭한 사냥꾼이시니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시겠지요. 그러니 별 무리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정 위험하시다 싶으면 나무 위에 올라가 계십시오. 가면서 땅이나 나무에 표시를 해두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더하여 모아 오는 식량 정보에 따라 추가로 보상을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페루스(fĕrus. 사슴)라도 몇 마리 잡아 오신다면 또다시 탈렌을 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내가 그에게 바란 것은 일종의 하청이었다.
젠슨이 원하는 건 식량 그 자체지, '오휘윤이 구한 식량'이 아니다.
고로, 귀찮은 일은 재능 있는 업자에게 맡겨 두자고.
대언데드 범람의 시대라 혼자라는 점에서 레른이 적잖게 난색을 드러냈으나, 그는 기어이 목전에서 반짝거리는 금화의 유혹을 이겨 내지 못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촌민에게 황금의 무게는 너무나도 무거웠나 보다.
"조,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믿고 가겠습니다."
굳게 결의를 다진 레른은 등에 메고 있던 활을 풀어 시위를 걸며 주먹을 쥐었고,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관우의 기개처럼 지체하지 않고 수풀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때쯤.
뚜벅―
뚜벅―
나도 동굴 안쪽으로 발을 내디디는 중이었다.
* * *
틱!
틱!
파아아아앗!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내부를 밝히려 헤드 랜턴을 켜자 어슴푸레하게나마 확보되는 시야로 동굴의 경관이 눈에 들어왔다.
종유석으로 추정되는 고드름 형태의 돌과 이끼 낀 바위와 지구에 밀리지 않는 이름 모를 벌레....
칼리야스든 지구든 일반적인 구성이야 딱히 다를 게 없었다.
딱 하나.
찌릿―
찌릿―
'음.'
피부를 찌르는 따끔따끔한 살기만 제외한다면.
뭘까.
뭐가 이리도 날카롭게 내 신경을 자극하는 걸까.
동굴에 진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직후부터 스멀스멀 올라와 피부를 뒤덮고 감각을 긁어대는 살기.
스르르―
미지가 주는 공포에 환두대도를 꽉 틀어쥐며 걸어가길 10분여.
족히 500~600m 이상 나아갔을 무렵 나는 오른발을 떼려다 말고 우뚝 행동을 멈췄다.
아니.
정확하게는 멈춘 채로 늘어뜨렸던 도신을 가슴께로 붙으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찌릿―
찌릿―
"으음!"
은은하게 감지되던 살의가 별안간 급격하게 폭증했기 때문.
그것도.
…쿠구구구궁!!
동굴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을 동반하며.
악신(惡神), 그 전대미문의 생명체 제 영역에 불청객이 침입했음을 알아차리고 전력 질주로 마중을 나오는 모양이었다.
자, 뭐냐.
뭐가 오고 있는 거냐.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이냐."
급속도로 거리를 좁혀 오는 놈의 움직임에 맞춰 체내의 마력을 찬찬히 회전시키며 전신의 근육을 팽팽하게 조여 놓은 찰나.
콰아앙!
"키야아아아아아악!!"
거친 폭음이 울려 퍼지며 바스라지는 벽면과 함께 거대한 포효가 나를 덮쳤다.
단지 괴성을 내지르는 것만으로도 세찬 바람이 이는 괴물의 정체는....
아마존 최강의 포식자로 꼽히는 아나콘다와 비교해도 전 뒤지지 않는 7~8m 길이의 신장과 연체동물을 연상케 하듯 흐물거리는 수십 개의 다리, 후미에는 전갈의 꼬리를 떼어온 것마냥 송곳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는 세 개의 꼬리가 인상적인 기형 생물.
절지동물을 논할 때면 단연 첫손가락으로 떠오르는 종(種).
"지네?"
검보라색으로 도색된 '대형 지네'였다.
아.
놈의 위압감 넘치는 형체를 목도한 순간 나는 악신의 진실된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칼리야스 대륙에 올 때마다 찾고 또 찾았던 나의 보물.
"영물이구나!"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영물(靈物)이.
삐익!
[경고!]
[정해진 한계를 깨부수는 진화(進化), 그것이 주는 강렬한 희열에 잠식되어 더 높은 곳, 더 강한 힘을 열망하다 결국 그릇된 길을 밟아 한순간에 타락해 버린 '마수(魔獸): 스콜로펜드라(scolopéndra)'가 당신의 강인한 생명력을 인지하고 수면에서 잠시 깨어났습니다.]
['오오라: 지독한 독기'와 마주했습니다.]
"아?"
아니라 '마수(魔獸)'였다.
62화
"마수…·라고?"
어느덧 몇 달이나 된 칼리야스 대륙 생활 내내 단 한 번도 마주쳐 본 적 없는 신종(新種)의 출현을 알리는 메시지에 밀려오는 짙은 당혹감.
마수, 마수라니.
영물의 상위 단계라는 게 있었다고? 진정 보고도 믿기지 않는 글자의 나열에 나는 반사적으로 도신을 치켜세우면서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나를 현실로 끌어당긴 것은.
사아아아―
"…음?!"
스콜로펜드라(scolopéndra).
그 외우기도 힘든 이름의 마수가 등장함과 동시에 불어닥친 뜨거운 바람, 항시 선선하다 못해 쌀쌀한 기온으로 유지되는 동굴 내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기이한 열기가 주위를 뒤덮고 난 뒤에 살갗 위로 피어오른 검붉은 꽃송이였다.
삐익!
['태워 버리는 죽음'에 중독되었습니다.]
[현재 '중독: 미약한 화열독' 상태입니다.]
[흡입한 양과 중독 시간에 따라 '상태 이상: 상처 없는 통증'과 '상태 이상: 고통 증폭' 및 '상태 이상: 부패'가 순차적으로 적용됩니다.]
"...!"
문신 한 번 받아 본 적 없는 내 육신을 토양 삼아 자라난 이 붉은 꽃들은 내가 독(毒)에 당했음을 알려 주는 사인이었으니까.
이윽고.
화륵!
화륵!
흡사 온몸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나를 휘감았다.
"크읍!"
본디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진안한 형벌이 '화형'이라고 하던가.
독에 당해 비슷하게 느끼는 것과 직접 불태워지는 것 중 무엇이 더 괴로울지에 대해 묻는다면 단연 후자겠지만, 나는 적어도 어째서 화형을 최악의 형벌이라 이야기하는지 알 것 같았다.
칼에 베여도, 두들겨 맞아도, 손톱과 이빨에 살점이 찢겨 나가도 버텨 냈던 멘탈이 화열독에 중독되자마자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이게 마수(魔獸)라는 최상위 포식자가 지닌 힘인가?
"제엔…장!"
뭐가 됐든 정신이 아득해지는 아픔에 절로 욕설을 내뱉은 나는 급히 허리춤을 더듬어 검대에서 포션 한 병을 꺼냈다.
매끈한 유리 표면을 따라 보라색 해골 조각(彫刻)을 양각해 둔 '하급 해독 물약'이었다.
위급 시에 꼭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손가락 터치만으로 어떤 종류의 포션인지 신속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사전에 대비를 해뒀기에 단 몇 초 만에 동아줄을 붙잡은 나는 물약의 위쪽을 엄지로 눌러 부숴 버리며 내용물을 급히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콰직!
촤아아아―
"흐읍, 끄읍!"
평소처럼 한가롭게 코르크 마개를 개봉할 시간이 없었다.
중독에 의한 통증도.
"키야아아아아아아!!"
콰아앙!
쾅!
투다다다다다더―
"이런 썩을!"
그 독기의 주인인 마수도 내가 회복되기를 기다려 주지 않았기에.
['하급 해독 물약'을 복용했습니다.]
[약효가 체내의 독기를 해독합니다.]
[10분간 독 속성 저항력이 150% 상승합니다.]
['상태 이상: 화열독'이 해제되며 3분간 동일한 독성에 면역력이 생성됩니다.]
* * *
"키야아아아악!!"
후우우욱―
후우욱―
콰아아아앙!
거친 하울링 아래에 숨어 부지불식간에 날아든 세 개의 꼬리가 연달아 내가 서 있던 지면을 박살 내며 틀어박힌다. 바위고 뭐고 단박에 파쇄해 버리는 독침의 위력에 나는 도신을 들어막길 포기하고 연신 백스탭을 밟았다.
위기에 몰려 극도로 예민해진 육감이 소리치고 있었다.
듀라한과 레드 구울 등 2차 진화체에게서나 접할 수 있던 오오라를 사용하는 상대. 그러므로 마수의 신체 능력 또한 그에 준하는… 어쩌면 그 괴물들보다 뛰어난 파괴력을 갖고 있을지 모르니 무작정 부딪쳤다가는 내일의 태양을 보지 못할 거라고.
물론 육감의 경고와 다르게 나 스스로는 이 악물고 억지로라도 맞대응한다면 아예 감당하지 못할 수준까진 아니라고 판단 중이었다.
"키야아아악!"
후우욱―
후욱―
놈의 공격은 틀림없이 강력하고 쾌속할지언정 향상된 인지력은 이를 확실하게 포착해 냈고, 근래 들어 훌쩍 상승한 속력은 나를 저 난잡한 공세로부터 안전하게 빠져나오도록 돕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물러나기만 반복할 뿐 이렇다 할 반격은 한 차례도 시도하지 않았다.
동굴.
마수 스콜로펜드라(scolopéndra)의 영토가 지닌 지형적 특성이 문제였다.
섬광(閃光)이나 직뢰(直雷)를 잘못 시전 했다가 뇌류의 충격으로 천장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승리고 자시고 화려한 압살 엔딩을 맞게 되는 터라.
"진짜, 돌아버리겠네."
"키야아아아악!"
후우우욱―
쾅!
당장이라도 칼을 휘두르고픈 욕망을 꾸역꾸역 참으며 바닥을 굴러 등을 돌리곤 꽁지가 빠져라 마수의 던전을 탈출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나마 해독 포션 덕분에 중독 현상도 어찌저찌 해결한 데다가 입구까지 기껏해야 10여 분이면 닿을 수 있었기에 끊임없이 되새겼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고.
그렇게 막 땅을 박차던 차에.
"…끼야아앗!"
"크레엑!"
"스스스스슷!"
"니미럴, 이건 또 뭔데?!"
불룩 튀어나온 돌부리를 밟으며 착지하던 내 발목을 향해 검보랏빛 형체 수십 개가 날아들었다.
스콜로펜드라의 새끼로 의심되는 일반적인 길이의 지네부터 전갈과 풍뎅이에, 한눈에 봐도 심상찮은 가루를 흩뿌리는 나방 등.
본 동굴을 서식지로 삼은 10cm에서 30cm 전후를 왔다 갔다 하는 길이의 각종 벌레들이었다.
좀 전만 하더라도 내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던, 외려 숨거나 도망치기 바빴던 놈들이 갑자기 단체로 왜 이러는 걸까.
원인이 뭐든 간에.
"쓰벌!"
매우 엿 같은 광경에 육두문자가 쉼 없이 흘러나왔다.
저 벌레들이 또 어떤 독을 갖고 있을지 모르는 탓에 함부로 대하기도 어려웠거니와 뭣보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면서 스콜로펜드라의 공격에 노출된 위험도가 급증한 까닭이었다.
결국 칼을 빼 들었다.
우우웅!
"하아!"
꾸역꾸역 눌러 놓았던 마력의 개방이었다.
이그니스(ignis) 류(流).
직뢰(直雷).
탁―
슈화아아아!!
해충의 장막을 뚫고 솟구친 한 줄기 벼락.
어느새 수백 마리로 불어났던 벌레들이 모조리 잿더미가 되어 흩날리는 가운데 가까스로 천라지망을 파훼한 나는 발을 놀리며 후방을 힐끔 돌아봤다. 휑해진 공간만큼이나 시원한 쾌감이 심장을 울렸다.
"저것도 다 공적치에 포함이 되려나?"
당연하게도 공적치에 반영되지는 않을 듯하다만, 괜히 쓸데없는 희망 사항을 뇌까리던 내 눈길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키야아악! 키야아아아악!!"
쿵―
쿠구궁―
줄기차게 쫓아오다 말고 제동이 걸린 스콜로펜드라가 있었다.
난데없이 번쩍인 번갯불에 놀란 것인가? 아님 마수마저도 움찔거리게 할 정도로 뇌력의 대미지가 강력했던 건가.
정확한 사정이야 추후에 다시 알아봐야겠지만 나로서는 무척이나 기꺼운 장면이다.
이게 놈의 약점이자 공략법이 될지도 몰랐으니까.
"키야아아아아아악!!"
콰앙!
타다다다다―
새롭게 얻은 정보를 뇌리에 똑똑히 각인해 두는 새에 재차 추격 의지를 끌어 올리며 엄청난 속도로 텅 비어 버린 통로를 주파해 오는 스콜로펜드라.
"어이구야."
한 번 찍은 먹잇감은 절대 놓치지 않는단 기세를 가감 없이 발산하며 돌진해 오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도 장난스레 농담을 던지며 스피드를 높이며 발을 뻗었다.
마침내 얼굴을 비춘 동굴의 입구로.
"읏, 차!"
타닷―
화아아악!
강한 기합성을 토해내며 단숨에 50여 미터를 내달려 밖에 다다르자 냉골의 한기를 씻겨 주는 따스한 공기가 나를 반긴다. 이에 반사적으로 오른발을 축 삼아 반전하자 대략 30m 안팎까지 따라붙은 스콜로펜드라의 더듬이가 보였다.
놈과 나의 간극, 놈의 스피드를 고려하여 계산해 봤을 때, 충돌 예정 시간은 길어야 5초.
"스읍, 후...."
그 짧은 카운트다운을 앞에 두고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여태껏 인내해 왔던 환두대도를 양손으로 움켜쥔다.
철컥!
장전을 마친 총구를 내밀듯, 어깨 위로 칼자루를 견착하자 순식간에 고요해지는 전장, 오로지 적과 나에게 몰두하며 굽혔던 무릎을 펴곤 하늘로 도약했다.
"흐읍, 하!"
"…키야아아아앗!!"
5초라는 짧은 카운트다운을 끝으로 근 수십 년 만에 제 둥지를 버리고 외부로 출타하던 마수 스콜로펜드라를 이마를 노려보며.
곧.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파직―
꽈르르르릉!!
21세기 다윗의 손에서 떠나간 번개가 판타지 세계의 골리앗의 미간을 짓뭉갰다.
"키야아아아아악!!"
푸른 낙뢰에 직격당한 마수의 주둥아리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아까 보았던 대로 뇌기에 취약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속성에서 우위를 점했다고 한들 단 일격으로 전투가 종료되는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키야아악! 키야아아아악!!"
후우웅―
쾅!
촤좌좌좌좍!!
듀라한이 그러했고, 레드 구울이 그러했듯, 순수한 신체 방어력을 통해 뇌기를 떨쳐낸 놈은 충격파의 반동을 활용해 공중제비를 돌며 후퇴하는 나를 노려보며 기차의 화통을 터트리듯 몸통 곳곳에서 보라색 연기를 지속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무려 반경 30m 내의 모든 생물을 죽음으로 물들이는 광역 독무의 발현이었다.
"흐읍!"
실로 어처구니없는 범위 스킬에 땅에 내려선 즉시 코와 입을 닫으며 뒷걸음질 친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칼날을 치켜세웠다.
인근을 자욱하게 에워싼 독연은 근접전이 주를 이루는 내게 가히 절대 방어나 다름없는 기술.
일격을 먹였을 때 여세를 몰아 두들겨 패야 하는 법인데, 연타는 고사하고 돌파도 저지당한 마당이라 이를 어떡해야 할지 답이 서질 않았다.
정유림의 '집중 사격'이나 놈과 마찬가지로 바람 속성 광역기가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걸 바로 구할 수도 없기에 전전긍긍하던 참이었다.
"…아."
문득 괜찮은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이게 될지 안 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기에 나는 곧바로 스콰를 불러내 안장에 걸어 두었던 가방을 뒤져 몇 가지 물품을 챙겼다.
검은 액체가 찰랑이는 휘발유 패트병, 매번 유용하게 써먹는 지포라이터.
끝으로 정유환과의 파티 퀘스트 이후 따로 구비해 놓았던 연기 신호탄 한 묶음이었다.
"되려나 모르겠네."
"푸르르르릉!"
"그래, 그래."
준비물들을 한데 풀어 놓은 나는 왜 이제야 불러주느냔 스콰의 투레질에 무의식적으로 갈기를 쓰다듬어 주며 먼저 휘발유와 지포라이터를 양손에 들었다.
이걸로 무얼 할 거냐고?
아주, 정말 아주 재밌는 실험을 해볼 작정이었다.
실험 제목을 적으라면 대충 이리되겠지.
'휘발유와 지포라이터, 연기 신호탄으로 만드는 불꽃 축제.'
필시 성공한다면 여의도 못지않은 대작이 탄생할 것이다.
그 즐거운 상상을 토대로.
"읏―차!"
후우우우우욱!
후우우욱!
성공과 실패, 단 두 가지 항목만 적혀 있는 주사위가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후미에 도합 서른 개가 넘는 연기 신호탄 다발을 이어 붙인 채.
63화
[ 악신 ]
언젠가 TV 뉴스 방송에서 화산이 폭발하던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웅장하고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배경 음악이 깔리고 이내 분수처럼 용솟음치던 마그마와 푸르렀던 창공을 일순 집어삼키던 검회색의 가스 분출 과정 등.
영상의 전반적인 시나리오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최근 100년 만에 주기가 돌아온 백두산이 머지않아 활화산으로서의 분화를 재개할 것이라든가, 일본의 후지산에서 몇몇 조짐이 보인다든가, 지구 멸망급 화산 지대인 옐로우스톤도 60만 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 사이클이 되돌아왔다는 과학자들의 주장에 최소한 생존 키트라도 구비해 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각종 정보를 찾아봤던 지라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다만, 장담컨대 그 기억은 금일을 기해 머리에서 지워질 거 같았다.
툭―
투두둑―
데구르르르, 탁!
검붉은 화염 중심으로 던져진 한 다발의 신호탄 묶음이.
"파이어."
…콰과과과광!!
3D 대중 매체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생생한 재앙을 재현해 낸 것이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될까.
그래.
대마도사가 펼치는 파이어 스톰(Fire storm)과 대등한 이펙트였다면 이해가 빠를까?
순간적으로 200도 이상 불타오르는 데다가 폭죽형이라 자칫하면 폭발할 수도 있어 주의를 요하길래 짐작은 했지만, 치솟는 불기둥과 둔중한 진동은 내가 짐작하던 것을 훌쩍 뛰어넘는 레벨이었다.
"키야아아아아아아!!"
쿵―
쿵―
쿵―
쿵―
…파아아앗!
독 안개라는 철옹성 안에 꽁꽁 숨어 있던 괴물이 제 손으로 성문을 열고 뛰쳐나올 만큼.
스콜로펜드라는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고작 10초도 되지 않아 괴성을 지르며 튀어나와 풀숲을 굴렀다.
마수의 육체가 결코 만능은 아니었는지, 혹은 생명의 샘물을 기반으로 마수가 되었으나 기본 베이스 자체가 '벌레'였기에 화염 속성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는지.
"후, 이제 끝장을 좀 보자."
씨익―
이유야 뭐가 됐든 내 입가에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놈의 보호막이 깨짐으로써 드디어 칼침을 먹힐 기회가 생겼으니까.
다가가기만 해도 중독되는 '오오라: 지독한 독기'는 여전히 가동 중이었으나, 그거야 하급 해독 물약으로도 커버가 된다는 걸 알게 됐기에 나는 이 찬스를 놓칠 생각이 1도 없었다.
특히나.
"키야아아악!! 키아아아악!!"
콰아앙!
쾅!
몸뚱이에 새겨진 화상의 고통으로 인해 정신 줄마저 놔버린 상태인데 이런 적기를 어떻게 거를까.
설령 마수라는 듣도 보도 못한 대상일지라도.
"할 수 있다. 아니, 해낸다."
나는 조금 전 동굴 속에서 느꼈던 감각을 믿었다. 충분히 겨뤄 볼 만하겠다고 판단했던 그때의 직감을. 이건 자만도 오만도 방심도 아니다. 몸소 겨뤄 보며 내린 '확실한 계산'이다.
고로, 6 대 4든 51 대 49든 간에 단 1%라도 승리할 확률이 높은 싸움이라면 피하지 않는다. 농구계의 전설이 된 마이클 조던은 말했다.
포기는 단 한 번 만으로도 습관이 된다고.
그러니.
"가자."
항상 그러했듯이 나는 이번에도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겁과 두려움을 모른 척 넘기며 걸음을 내디뎠다.
탁―
파아아앙!!
살결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저녁의 차가움과 열화의 뜨거움이 공존하는 대기를 가르며 시선을 정면에 두고 적과 나 사이의 간격을 가늠한다.
"키야아악!! 키야악!"
결단을 내리고 돌격을 실행하기까지 3초나 걸렸음에도 한결같이 지랄 발광 태세의 스콜로펜드라.
거리는 약 50m, 그새 멀리도 갔다만 닿는 건 금방이다.
슬슬.
우우우우우우웅!!
진심으로 '전력(全力)'을 다해 볼 계획이었다.
그 각오를 끝으로.
"가자!"
이그니스(ignis) 류(流).
직뢰(直雷).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늘 따로따로 활동했던 벼락과 폭풍을 '한꺼번에' 육체에 담았다.
* * *
게임을 좀 해본 사람이라면 알듯이 MMORPG 장르의 게임 대부분에는 '조합'이라는 시스템이 내재되어 있다.
보통 조합 시스템은 재료 아이템과 재료 아이템을 결합해 장비를 제작하거나 하위 등급 아이템에 특수 아이템을 합성해 추가 옵션 또는 등급을 업그레이드시키는 형식으로써 유저들은 해당 작업을 통해 NPC 상점에서는 판매하지 않는 특별한 무구를 획득하곤 하는데.
무엇이든 고이면 썩고 변화가 없으면 질리는 법.
따라서 몇몇 게임사는 유저들의 마음을 붙잡기 위하여 기존의 틀을 깨고 이를 좀 더 넓은 범위로 발전시키곤 한다.
그 결과로 가끔 보게 되는 것이 '스킬 조합'이었다.
높은 자유도라는 이름하에 플레이어들이 각자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성장시키며 게임에 훨씬 깊은 애정을 쌓게끔 도와주는 특별한 기능.
…해서 곰곰이 상상해 봤다.
"여기서도 되려나?"
라고.
내가 이러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은 우연찮게도 마침 스킬 조합을 시도해 볼 만한 '직뢰(直雷)'와 '유령 걸음'이란 조각들을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비록 태생과 목적이 완전히 다른 부류였지만, 두 파편에는 크나큰 연관성이 존재하는 까닭이었다.
그것은.
〈이그니스 류: 직뢰_원본(原本)/Active〉
* (전략) …발끝에 힘을 주어 돌진하는 동시에 상대를 베어 냄으로써 흡사 화살 형태의 전류가 쏘아져 나가는 듯한 잔상이 남는다.
〈파스마 류: 유령 걸음_원본(原本)/Active〉
* 이동 시 추가 속력 +33% / 상대의 '인지력' 혼동 효과 부여 / 1회 걷기에 한 해 일시적으로 '풍(風) 속성' 부여
다름 아닌 '이동기'로 분류된다는 점.
내 발상은 여기서 출발했고, 기나긴 고심의 끄트머리에서 비로소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작품이 탄생했다.
이른바, 가속에 가속을 더한 초신속의 일격.
"흐으읍―"
이그니스(ignis) 류(流).
직뢰(直雷).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이중 스킬 결합.
오휘윤 류: 뇌령 돌파.
"하아아아!!"
최초의 오리지널리티 스킬이었다.
* * *
과연 마수는 마수였다.
"…키야아아아아악!!"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한껏 광분한 와중이었음에도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감지한 듯 난동을 멈추고 나를 돌아왔을 뿐 아니라 저 거대한 몸뚱어리를 비틀어 칼날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반응을 보여준 탓이었다.
하나 놈의 대응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아니. 도리어 최악의 한 수였다.
발악하듯 몸부림을 쳐봤으나, 오히려 그 회피의 끝자락엔 변함없이 금빛 섬광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키아아악?!"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스콜로펜드라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필사적으로 온몸을 뒤틀며 살기 위해 안간힘을 써봤지만.
후우우우욱―
콰직!
"…키아아악!"
마치 온 사방에 칼날의 그물이 전개되어 있는 듯 아무리 애를 써봐도 저 섬뜩한 이빨에서 도망칠 수는 없었고, 도신은 기어이 갑옷을 부수고 체내를 헤집었다.
놈은 본인의 옆구리에 꽂힌 환두대도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낱 인간의 공격에 당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벌어진 아가리에선 연방 새어 나오는 당황스러운 신음.
그래서.
"시작은 오오라였고."
친절히 알려 주었다.
['오오라: 검은 망령의 파문'이 발동되었습니다.]
[10분간 주변 30m 내에 존재하는 모든 적들 신체 능력치가 5% 하락합니다.]
"두 번째는 파스마 류의 유령 걸음."
네 놈의 인지 감각을 흔들어 혼동시키는 유령의 현신이었고.
파직―
"피날레는."
대미를 장식한 한 수는 뇌신의 일격이라고.
"이그니스 류의 직뢰, 라는 거다. 알겠냐?"
"키야아아―"
지금이 아니면. 놈의 궁금증은 영영 해결되지 못할 테니.
어차피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이상 알아먹긴 힘들겠지만 말이다.
파직―
꽈르르르르르르릉!!
그 직후.
푸른 휘광이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았다.
* * *
일순 고요해진 전장 속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이 일대를 장악하려 들던 무렵.
후우우욱―
쿠웅!
둔중한 무언가가 추락하며 대지를 강하게 울렸다.
족히 3m는 넘을 듯한 길이의 검보랏빛 살점의 정체는 이중 결합 스킬 '뇌력동파'에 의해 허리가 끊어져 두 조각으로 나뉘어 버린 마수 스콜로펜드라의 상체였다.
"하아."
나는 그 살덩어리를 보며 긴 숨결을 흘려보냈다. 공지 중에 흩어지는 호흡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야심 차게 선보인 이중 결합 스킬의 실전화를 달성해 냈다는 희열과 이 기예의 위력이 승리를 거머쥐는 데 커다란 공헌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점에서 오는 고양감 등.
무어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모쪼록 긍정적인 감정이 심장을 뜨겁게 달궜다.
이러한 내 기분을 더욱 드높여 준 것은.
띠링!
[축하합니다!]
[〈1인 한정 업적: 최초의 마수 사냥꾼〉을 달성했습니다.]
[달성 조건: 최초 마수(魔獸) 처치]
[보상으로 '엄청난 경험치' 및 '기술: 자연 마력 순환', '강제 귀환권', '마력 전이석: 대형'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아!"
내가 거둔 성과에 박수를 쳐주는 한 아름의 메시지였다.
화아아아악―
오래전 폰스 마을에서 거뒀던 'Rank: Hero_Village'와 동일한 경험치량을 필두로 쏟아진 보상은 그야말로 무지막지했다.
현시점 최상의 아이템이라 봐도 무방한 '강제 귀환권'의 추가분이 생겼다는 것도 그렇고 S랭크 스킬 시전 횟수를 단번에 4회가량 늘려 준 '마력 전이석: 대형'도 반가웠으나, 뭣보다 나를 기쁘게 하는 보상은 단연 추가 스킬 '자연 마력 순환'이었다.
〈자연 마력 순환/Passive〉
* 「벼락의 주인: 이그니스(ignis)」, 「물결치는 마도사: 운다(unda)」 등 수많은 영웅들의 무한한 마력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학자들의 설에 의하면 일정한 경지에 다다른 이들은 그저 숨을 쉬는 행위만으로 자연 곳곳에 퍼져 있는 마력을 흡수할 수 있다고 전해진다.
* 기본 마력 회복 속도 +30% / '명상' 시 추가 마력 회복 속도 +20%
"미친!"
마력 회복 속도를 최대 50%까지 향상시켜 주는 거의 '위대한 발걸음'급 패시브였기 때문이었다.
역시 칼을 뽑길 잘했다.
최악의 경우 메인 퀘스트를 날려 먹는 한이 있더라도 사직서마냥 갖고 다니는 '강제 귀환권'을 찢을 결심까지 했었는데, 일이 전체적으로 잘 풀렸다.
단지 이걸로 '나는 마수보다 강하다!'라고 단언하기는 다소 이른 느낌이었다.
기발한 아이디어… 즉, 현대 문명의 이기가 없었더라면 순전히 체급에서는 부족한 게 많았으니까.
"리하인이었으면 달랐으려나?"
나를 갖고 놀던 그녀의 무력이라면 왠지 동굴이라는 지형적 불리함을 등에 이고도 결판을 보지 않았을까 싶다.
쩝.
변함없이 아득한 정규 기사라는 네 글자의 압박감에 입맛을 다신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허리를 숙였다.
"자, 슬슬 해체해 볼까?"
부족한 걸 인정했기에 여길 온 게 아니던가.
하면 이제 그 부족함을 채워 줄 보물을 수거할 차례였다. 백 년 묵은 토실토실한 지네의 내단이라니.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였다.
64화
스윽―
이놈의 배때기 어디에 영혼석이 박혀 있을까.
품에서 꺼낸 도축 전용 칼 '손때 묻은 단검'을 오른손에 쥐고 우선 가까이에 있던 스콜로펜드라의 하체로 다가갔다.
편의상 더듬이가 있던 쪽을 상반신, 전갈 꼬리가 있는 쪽을 하반신으로 정의한 나는 아주 거침없이 놈의 외피를 벗겨 나갔다.
벌레.
개중에서도 흉측하기로 소문난 지네인 데다가 크기도 수천 배로 증폭된 괴물이라 역겨울 법도 하건만, 각종 언데드로 다져진 멘탈 덕분인가? 나는 혹 작업 도중에 튄 핏물이 피부에 닿거나 해서 독에 중독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만 조심하며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칼날을 쑤셔 박고는 살점 내부를 휘젓길 5분 여.
하도 덩치가 큰 탓에 전투 때도 멀쩡했던 이마에 진땀이 송글송글 맺힐 지경으로 하체를 짓이긴 끝에.
"이것도 아이템이여?"
적잖게 재미난 물건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마수(魔獸) 스콜로펜드라(scolopéndra)의 독주머니/Magic〉
* 동굴 혹은 그와 비슷한 습하고 어두컴컴한 공간에 영역을 마련하고 살아가는 스콜로펜드라(scolopéndra)의 독은 암살자들에게 있어서 제법 선호 받는 종류 중 하나로 꼽힌다. 농축된 화열독은 마치 전신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을 선사하는 터라 살갗만 스쳐도 암살 대상이 금세 무력화되었으니까.
그러한 까닭에 한때 암살자들의 사이에선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귀한 값어치를 지녔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다루는 방법이 심히 까다로워 숙련되지 않은 이가 잘못 사용했다가는 되레 자멸의 길을 걷게 될 터.
특히 단 한 방울로도 수십 명을 중독시킬 수 있다는 마수급 스콜로펜드라의 독액은 그 위험성이 극도로 높기에 적보다 나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 일정량 이상 투여 시 '상태 이상: 중독_화열독' 발생 / 중독 시간이 3분 이상 지속될 경우 3분을 주기로 '상태 이상: 상처 없는 통증'과 '상태 이상: 고통 증폭' 및 '상태 이상: 부패'가 순차적으로 적용 / 최종 단계에 이를 경우 '중급 해독 물약' 이하의 해독제 및 각종 수단의 효과 무시.
"허, 아니 소모품 주제에 옵션이 몇 개야?"
보통 몸통의 첫 번째 다리로 먹잇감을 중독시킨다고 하던데, 이놈은 엉덩이에도 독침이 붙어 있어서 인지 세 개의 독침이 돋아나는 하반신의 끝자락… 일종의 꼬리뼈 부근을 파헤치다 발견한 독낭을 보자기에 싼 나는 홀로그램 설명 창에 기록되어 있는 위험천만한 옵션들을 머릿속에 똑똑히 각인시키며.
철컥―
"여차하면 이대로 주머니째 던져서 쓰든가 하면 되겠네."
유리로 된 물약 병들이 외부 요인으로 깨지거나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려 구비해 두었던 철제 상자로 한 번 더 밀봉해 안전에 유의하며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었다.
싹둑싹둑 잘라낸 꼬리와 함께.
독낭과 달리 아이템으로 적용받지 않는 순수 신체 조직이라 내게는 가치가 없지만, 칼리야스 대륙의 자원들을 연구하는 정유환에게는 썩 괜찮은 선물이기에 부탁한 것도 하니 접대용으로 전해 줄 요량이었다.
스윽―
"그럼, 머리를 갈라 볼까나."
하도 난도질을 해놓아 걸레짝이 돼버린 하체를 버리고 상체가 널브러져 있던 방향으로 이동해 대가리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나는 상반신 또한 아랫단에서부터 철저하게 절단 내며 위쪽으로 올라갔다.
독낭처럼 뭐가 또 얻어걸릴지도 모르니, 살점 하나하나 껍질 하나하나 섬세하고 세밀하게 관찰해야 했다.
아쉽게도.
"거지구나, 거지야."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재료든 노말 등급이든 다 좋으니 뭐라도 떴으면 하고 바랐는데, 희망이 좀 과했나? 하기야 이미 매직 등급으로 구해 놓고 뭘 또.
욕심은 그만 부리고.
"메인 디쉬나 얼른 캐내자."
콰직!
말과 다르게 사체를 꼼꼼하게 조진 나는 마침내 더듬이 중간, 인간으로 치면 대강 미간쯤 되는 부분을 칼로 찔러 살살 머리통을 쪼갰다.
잘 익은 수박인 양 쩍 소리를 내며 반으로 갈라지는 대가리.
이윽고 내 입가에 번진 웃음기가 그 어느 때보다 진해졌다.
툭―
"아아."
붉은 살점 안쪽에 고이 포장되어 있던 성인 남성 손바닥만 한 부피의 보라색의 구슬을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무려.
〈장악하고 분출하는 마수 스콜로펜드라의 오염된 영혼석/Rare〉
"…레, 어?"
수식어가 두 개나 박혀 있는 '레어 등급'의 아이템을.
* * *
〈분출하고 중독시키는 마수 스콜로펜드라의 오염된 영혼석/Rare〉
* '생명의 샘'이 지닌 신비로운 생명력을 통해 정해진 한계를 이겨 내고 영물(靈物)로 거듭난 샘지기들은 진화를 겪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까마득하게 높아 보이던 산의 정상을 등반했으나, 고개를 들어보면 여전히 머리 위에는 구름이 있고 우주가 있음을.
하나 허물은 벗을수록 질겨지기 마련.
폭발적으로 넓어진 영혼의 그릇으로 인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까마득한 인내가 수반될지니, 이에 수십, 수백 년에 이르는 인고의 세월을 버티지 못한 몇몇 영물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극단적으로 단축시킬 방안을 고안해 냈다.
순도 높은 대량의 생명령을 가진 생물.
즉, 자신과 마찬가지로 생명력의 화신이 된 '또 다른 영물'들을 포식하는 것이었다.
쉽지 않은가?
단지 먹어 치우기만 하면 비어 있는 그릇을 한 움큼씩 채울 수 있으니 유혹은 곧 욕망을 끌어당겼고, 욕망은 결국 이성을 잠식해 버렸다.
이것이 타락의 시작이었다.
…현재 서로 다른 영혼이 뒤섞여 오염된 상태입니다. 적절한 정화를 거치지 않고 복용 또는 장비 제작 시 '부정한 영력'에 의해 복용자의 영혼에 심대한 손상이 가해질 수 있습니다.
* 복용 시 마력 13% 영구 강화/복용 시 속성력(독) 15% 영구 강화/장비 제작 시 착용자의 마력 및 속성력(독) 18% 상승 효과 적용
* 특이 사항 1: 서로 다른 영력이 뒤섞여 오염된 상태
"와우."
눈앞에 출력된 홀로그램 화면을 찬찬히 읽어 내려간 후 목구멍에서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마수의 탄생 비화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꽤나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건 하단에 적힌 '마력 13% 영구 강화' 옵션이었다.
13%라니.
더군다나 독 속성은 15%에 장비 장착 시엔 향상 폭이 맥시멈 18%까지 높아진다.
만약 이걸 마수 처치 업적 보상으로 획득한 대형급 마력 전이석을 흡수하고 나서 추가로 복용한다면?
"적어도 아홉 발, 잘하면 열 발도 연속으로 날릴 수 있다."
낙뢰를 무더기로 뿌려 대면서도 필요할 땐 유령이 되어 움직이는 괴랄한 인간, 다른 의미의 괴물이 되는 것이다.
허.
불현듯 그려지는 미래에 입을 떡 벌린 나는 이내 탐욕 어린 눈빛으로 영혼석을 움켜쥐었다. 당장 씹어 삼키고 싶단 욕구가 침샘을 자극한다.
그러나.
"쓰읍, 참자. 참아."
참아야 했다.
부정한 영력에 의해 복용자의 영혼에 심대한 손상이 가해질 수 있다. '가해진다'가 아니라 '가해질 수 있다'는 건 문자 그대로 확률의 영역이란 얘기였기에 별 탈 없이 무사히 지나갈지도 모르겠으나.
괜한 호기심으로 죽음을 앞당기고프지는 않았다. 리하인과의 두 번의 대련을 앞두고 있는 이상 되도록 그 이전에 섭취를 마치고 상승량을 세밀하게 따져봐야겠지만.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일단은 킵 해두자고.
리하인을 위시한 기사 3인방과 코마토르(cómĭtor) 마을 주민 등 정보원들을 붙잡고 대화를 나눠 본 뒤에 일을 진행해도 늦지 않았다.
"좋아. 그럼 이걸로 여기서 볼일은 끝난 건가."
마음속으로 참을 인 자를 되뇌며 손을 털고 일어선 나는 주위를 뺑 돌아보며 혹 빠트린 게 있나 살펴보았다.
음....
딱히 없다.
이대로 대기하다 레른이 사냥감을 잡아 돌아오면 숙영지로 복귀하면 될 듯싶었―
"아, 잠시만."
무심코 고개를 주억거리던 나는 문득 시선을 돌려 어딘가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를 쓰고 탈출하려 했던 장소. 다름 아닌 스콜로펜드라의 거처였던 동굴이었다. 주인이 사라져 빈집이 돼버린 곳이라 일견 하기엔 쓸모를 다해 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속단하기는 살짝 이르다.
'신성과 마력, 기사와 마법이 살아 숨 쉬는 세계의 마수가 기거하던 심처.'
이걸 한 음절로 축약하면 완성되는 단어가 있지 않은가.
바로 '던전(dungeon)'이었다.
"무조건 가봐야지."
나는 그 매력적인 낱말에 이끌려 발을 떼었다.
집주인도 없겠다, 긴장의 끝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안전이 보장됐다 보니 헤드 랜턴에 보조 랜턴까지 죄다 켜 놓고 거침없이 전진하며 천장부터 벽면과 바닥까지 꼭 상호 작용 키를 연타하는 캐릭터 같은 모양새로 수색을 이어 가던 나는 대략 한 시간여 만에 다다른 동굴의 끝자락에서 원하던 것과 마주할 수 있었다.
7~8m에 달하는 대형 지네조차 너끈히 수용 가능한 거대한 공동.
쪼르르르르륵―
그 안에 조성된 무척이나 맑고 청량한 기운이 담긴 샘물을.
"이거 혹시."
['생명의 샘물'을 복용했습니다.]
[모든 해로운 효과가 소멸합니다.]
[10분간 자연 치유력 및 피로 회복 속도가 200% 상승합니다.]
"맞구나?!"
체감상 거의 백 년 만에 재회한 것 같이 반가운 '생명의 샘'이었다. 정말이지 천만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간식 못 사 들고 와서 내내 미안했는데.
"스콰!"
"푸르르릉."
"이거 봐라. 내가 널 위해 고생 고생해서 찾아뒀다."
이거라면 한동안 무심했던 호감작을 다시금 정상 궤도로 올릴 수 있을 듯싶었다.
['펫'이 '생명의 샘'과 접촉했습니다.]
[〈서브 퀘스트: 한계 돌파〉의 달성 조건이 1회 충족됩니다.]
〈서브 퀘스트: 한계 돌파〉
* 본디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어던질 수 없는 평범한 생물에게 '특별한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른바 '한계 돌파의 기회'라고 부르는 기적적인 기회입니다.
그러니 한번 도전해 보십시오.
평범했던 생물(生物)이 영험한 능력을 지닌 영물(靈物)로 거듭날 수 있도록.
(2/10)
* 특이 사항 1: 각기 다른 열 곳의 '생명의 샘'을 찾아갈 것.
* * *
"…에이, 나머지는 개털이네."
"푸르르릉!"
"너한테 하는 말 아니니까 샘물이나 원 없이 마셔둬. 이 주인님께서 뼈가 빠져라 고생해서 찾은 거니까."
스콰에게 샘물을 내어주고 한 바퀴 돌아본 공동.
그간 악신(惡神) 소리를 들을 정도로 수많은 인명을 해쳤던 놈이기에 죽은 자들의 유품성 아이템이나 하다못해 금붙이라도 주워 갈 수 있으면 하고 바랐지만, 지네 놈이 뼛조각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먹어 치워 버린 건지 내부는 누가 청소라도 한 듯 깨끗했다.
"뱃속이라도 다시 뒤져 봐야 하나."
아쉬운 심정에 혀를 차며 뒤통수를 긁적인 나는 공병에 샘물을 채우는 것으로 미련을 털어 버리곤 동굴을 나왔다.
태양을 몰아내고 자리를 꿰찬 달빛만이 감도는 세상.
"…아! 휘, 휘윤 님!"
언제 도착했는지, 바깥에는 레른이 몇 마리의 사냥감을 넝쿨로 묶은 채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65화
"보, 보셨습니까? 저기에...."
레른이 두려움에 질리게 된 계기야 뻔했다.
저쪽 숲 한편에 널브러져 있는 스콜로펜드라의 사체밖에 없었다.
1m짜리 중형견급 크기의 개미 프로미카를 필두로 지구에서는 상상도 못 할 괴물들이 넘쳐나는 칼리야스 대륙에서 나고 자란 태상이기에 단순히 '덩치 좀 큰 벌레'쯤이야 아무렇지 않겠지만, 저건 스케일이 압도적으로 크니까.
게다가, 처참하다는 묘사가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을 만큼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갈가리 찢어발겨져 있기도 해서 충격을 받는 게 당연한 상황. 고로 어서 돌아가자고 하려다, 혹 더 챙겨야 할 부위나 전리품이 남아 있을까 싶어 레른에게 저 걸레짝의 정체를 설명해 주었다.
"스콜로펜드라라고, 요 손바닥만 한 벌레를 아십니까?"
"스콜로펜드라면… 습하고 축축한 곳에서 서식하는...."
"잘 아시는군요. 저놈은 그 벌레가 영물이 되면서 급격하게 커진 형태입니다, 그 과정에서 넓어진 위장을 채우기 위하여 사람을 잡아먹다 보니 악신으로 불리게 된 케이스죠.
"예에에에에?!"
자초지종을 알게 된 레른의 반응은 상당히 격렬했다.
수십 년 전부터 그를 포함해 코마토르 마을, 나아가 이 근방 전체에 악명을 떨치던 존재의 실체가 영물이었다는 것과 그런 영물을 짓이겨 버린 나에 대한 경악으로 동공은 세차게 흔들렸고, 입에선 연신 괴성이 새어 나왔다.
다만 그게 전부였다.
충분히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언을 구했으나, 겨우 정신을 차린 레른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독낭 말고는 딱히…'였기 때문이었다.
가죽도 물러, 살점은 중독 위험으로 못 먹어, 생긴 건 흉측함의 표상이라 관상용으로도 부적합한 탓에 정녕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쓰레기라고.
"알겠습니다. 참, 이건 의뢰 대금입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그럼 돌아가시죠."
"예!"
해서, 가슴 한편에 남아 있던 미련마저 훌훌 털어 버린 나는 지구의 토끼를 닮은 레푸티르라는 생물 다섯 마리에 각종 과일, 채소 등을 주렁주렁 매달고 레른과 숙영지로 몸을 돌렸다.
* * *
도착을 앞두고 괜한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려 일부러 풀잎과 나뭇가지를 밟아 바스락거리는 소음을 내며 내가 근처에 있음을 알려 주자, 경비를 서던 병사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횃불을 비췄다.
"…정지! 누구냐!"
"접니다, 레른! 코마토르 마을 사냥꾼 레른! 아까 휘윤 님과 사냥을 나갔던! 허가서입니다!"
"음, 확인됐습니다. 들어가시죠."
이미 일전에 안면을 익혀 둔 사이이기도 하고, 젠슨이 내어 준 외출 허가서가 있어 간단하게 검문을 통과해 숙영지로 들어선 나는 레른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고 지휘부 천막으로 향했다.
"리하인 님, 휘윤 경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전하게."
"충."
스윽―
밤이 늦었는데도 무어 그리 논의할 게 많은지.
호롱불 같은 것들로 불을 잔뜩 밝힌 채 간이 탁자 위에 올려 둔 지도를 보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 내가 안으로 들어오자 잠시 회의를 멈추는 세 사람.
"고생했네. 굳이 보고하러 올 필요까진 없었는데."
"보고도 보고지만, 물어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물어볼 것?"
"우선, 이거부터 받으시죠."
"고맙소. 마을 사람들과 병사들에게 좋은 식량이 될 거요."
"생각보다 동물들이 많이 없어 이게 전부요. 기회가 되면 추후에 다시 한번 사냥에 나서 보겠소."
"설령 빈손으로 돌아왔다 한들 우리는 그대에게 감사했을 것이오."
의아해하는 리하인의 시선을 받아넘기며 젠슨에게 수확물을 건네주었다.
띠링!
[〈서브 퀘스트: 식량 공급〉을 부분 완료했습니다.]
[적립된 공적치: 레포타르 5마리/프풀스 및 다수의 과일과 야채 1.7kg ]
[종료 일자: 〈메인 퀘스트: 호위〉와 동시 종료]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이 뚝뚝 묻어 나오는 젠슨의 감사 인사에 마주 미소 지은 나는 훈훈해진 공기를 느끼며 슬며시 본론을 꺼냈다.
"그건 그렇고, 혹시 마수에 대해 아십니까?"
"마수?"
설마 이런 주제로 질문을 던질 거라곤 일절 예상치 못한 듯 느닷없는 마수 이야기에 일순 당혹스러워하는 셋.
하나 데이터가 없는 건 아니었는지.
찻잔의 물을 단번에 들이켠 리하인이 깍지 낀 손을 탁자에 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수라, 알다마다."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대답은 다행스럽게도 '긍정'이었다. 제국 내에서도 몇 없는 백작 가문의 혈통답게 아주 박학다식한 모양이었다.
혹은 리하인의 직업이 꽃꽂이나 자수를 즐기는 '보통의 영애'가 아니라 정식 서임을 받은 '기사'라서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나는 그녀를 통해 바라던 정보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통칭 생명의 샘으로 불리는 칼리야스의 눈물, '라크리마(lácrĭma)'를 마셔 진화를 이룩한 영물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또 다른 영물을 잡아먹음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오염시켜 끝내 타락해 버렸을 때 이를 마수라고 부른다. 이것이 마법사들과 학자들이 정의한 마수라는 생물이지."
"잘 아시는군요."
"비록 난 어려서 참가하지 못했지만,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직접 사냥하신 적도 있지. 덕분에 마수의 영혼석도 보았었다네. 일반적인 영혼석의 두 배에서 세 배가량 커다랬지. 품은 힘은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렬했고. 그래서인지 그저 흘러나오는 기운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기억이 있네."
"...!"
* * *
탁―
탁―
고요한 밤.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오로지 식량 사정을 해결하는 데 힘쓰는 훌륭한 위인…이 된 덕에 개인 막사를 지급받은 나는 누구의 방해도 없는 조용한 가운데 여러 물품들을 차례차례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좌측에서부터 하급 회복 물약, 생명의 샘물.
그리고.
〈분출하고 중독시키는 마수 스콜로펜드라의 오염된 영혼석/Rare〉
대망의 영혼석까지.
지금부터 리하인이 가르쳐 준 공식대로 영혼석을 정화할 작정이었다.
빼는 거 없이 시원시원하게 맞부딪쳐 주었던 대련에 병사들을 도와 호위에 힘써 준 데다가 먼저 나서서 식량을 구해 오는 등 이래저래 호감도 작을 잘해 둔 덕택인지, 리하인은 내게 손쉽게 정보를 넘겨주었다.
굳이 꼽으라면 앞으로도 잘 부탁하겠다는 당부를 덧붙이기는 했지만, 그거야 원래 내 할 일이니까.
여하간. 그렇게 획득한 정화 방법은 의외로 매우 간략했다.
1번.
"첫 번째가 신성수 조합."
준비된 스테인리스 그릇에 포션과 생명의 샘에서 퍼온 샘물을 한데 붓는다.
사용된 포션이 하급이라면 물약 1에 샘물 6, 중급이라면 물약 1에 샘물 2의 비율로 맞춰 준다.
그러면....
우우우우우웅!!
"오케이."
흡사 연금술사가 만든 약품처럼 결합수가 새벽을 닮은 은은한 서광(曙光)을 뿜어낸다.
리하인은 이 현상을 '순간 신성 증폭'이라 말했다. 생명의 샘에 내재된 생명력이 짧게는 1분여 동안 신성력을 증폭시켜 준다나 뭐라나.
두 기운 모두 주신(主神) 칼리야스에게서 비롯된 힘이라 가능한 일이라는데… 자세한 내막이야 별로 중요한 부분은 아니니 패스하고.
결합수가 잘 합성되었다면.
"이제 여기에."
툭―
풍덩!
증폭된 신성력이 약해지기 전에 오염된 영혼석을 담가 주면.
…화아아아악!!
"됐다."
끝이다.
영혼석과 만난 즉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결합수를 보며 나는 나지막하게 환호성을 터트렸다.
완벽하게 수순을 밟아간 직후.
띠링!
[축하합니다!]
['오염된 영혼석'을 완벽히 정화해 내었습니다.]
[〈서브 퀘스트: 영혼석 세공사(2)〉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다만 아직 '영혼석 세공사(1)'이 수행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에 의거하여 〈서브 퀘스트: 영혼석 세공사(1)〉이 추가됩니다.]
〈분출하고 중독시키는 마수 스콜로펜드라의 정순한 영혼석/Rare〉
* '생명의 샘'이 지닌 신비로운 생명력을 통해 정해진 한계를 이겨 내고 영물(靈物)을 넘어 마수(魔獸)의 경지에 오른 스콜로펜드라의 영혼석이다. 진화 과정에서 범한 삿된 방법으로 인해 한때는 서로 다른 영혼이 뒤섞여 근원의 그릇마저 오염되어 있었으나, 특별한 가공을 거쳐 불순물이 제거된 상태로 복용 또는 장비 제작 시 내재된 영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 복용 시 마력 11% 영구 강화/복용 시 속성력(독) 13% 영구 강화/장비 제작 시 착용자의 마력 및 속성력(독) 15% 상승 효과 적용
이런 퀘스트도 있나 싶은 서브 퀘의 발동 메시지 아래로 말끔하게 세탁된 영혼석의 설명 창이 두둥실 떠올랐기 때문이었―
"응? 뭐야, 이거?"
완료와 동시에 영혼석을 쥐고 입속으로 가져가려던 나는 코앞에서 손을 멈춘 채로 눈을 비볐다.
너무나도 이상했으니까.
무엇이? 아이템 설명 창 하단의 옵션 란을 채우고 있는 숫자들이.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13%, 15%, 18%였던 수치들이 각각 11%, 13%, 15%로 2~3%씩 하락돼 있었으니 말이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달라지지 않는 퍼센트에 의문을 품던 찰나, 내 눈에 한 줄의 문장이 보였다.
특별한 가공을 거쳐 불순물이 제거된 상태.
"아."
통상적으로 대장간에서 철 따위의 광석을 제련할 때나 쓰이는 표현을 본 순간 모든 게 단 이해가 갔다.
그러니까, 정화(淨化)라는 건 '더러워진 것을 세척한다'라는 개념이 아니라 더러운 부분은 '떼어낸다'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전체 파워도 줄어들 수밖에 없는 거고.
"하, 이런 게 있으면 특이 사항이라도 좀 만들어 주든가."
잠깐이지만 혹시 리하인이 알려 준 방식에 문제가 있던 건 아닌지 의심했던 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그녀를 향한 미안함에 괜히 뒷머리를 긁적이며 투덜거리고는 순수해진 영혼석을 결합수에서 꺼내 들었다.
너프된 스탯이 아깝기는 해도 아무튼 이젠 먹어도 배 아플 일 없다고 하니 더 지체할 거 있나?
"슬슬 파티를 즐겨 보자고."
퍼석―
우우우우우웅!!
['분출하고 중독시키는 마수 스콜로펜드라의 정순한 영혼석'을 복용했습니다.]
[마력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11% 향상됩니다.]
[독(毒) 속성력의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13% 향상됩니다.]
* * *
하늘을 물들였던 어둠이 가시고 떠오른 태양에 맞춰 분주해진 숙영지.
"아침 드세요!"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대기조 먼저 배급받는다!"
"충!"
피난 길이라 대단치는 않지만 정성이 가득 들어간 훈제 고기와 물 등 최소한 배는 든든히 채울 수 있는 것들로 잘 차려진 밥상에 사람들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아마 기사 3인방과 병사들이 주는 안정감이 모두가 온기를 잃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는 듯했다.
혹은 열기(熱氣)의 발로일지도 몰랐다.
앞으로 몇 분 뒤.
"아빠, 저기서 뭐 하는 거야?"
"기사님들끼리 대련하는 거야, 대련."
"대련?"
"서로 힘을 겨루면서 친해지는 거야."
"와아! 그럼 친구 하는 거야?"
"그렇지. 친구 되는 거란다."
…
…
"위험하니 주민들이 이 이상 넘어가지 않게 주의하도록. 카르켈은 경계를 늦추지 마라. 소음을 듣고 언데드 놈들이 몰려올 수도 있으니."
"충!"
"…알겠습니다, 젠슨 형님."
"아쉬워 마라. 다음엔 내가 설 테니."
강 건너 불구경만큼이나 재미지다는 싸움 직관 경기의 개최 소식이 공표됐기 때문이었다.
66화
스릉―
착!
[마도(磨刀)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칼날의 예리함이 회복됩니다.]
새벽 일찍 기상해 한바탕 기초 단련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질 좋은 숫돌'을 이용해 날을 바짝 세우자 이제 원 없이 휘둘러도 좋다는 문구를 기점으로 햇빛을 머금은 도신에서 서슬 퍼런 예기(銳氣)가 피어올랐다.
그 듬직한 몸체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숫돌을 짐 가방에 넣고 일어나길 얼마.
"준비는 다 끝난 것인가."
숙영지 쪽에서 철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풀 플레이트 아머를 완전하게 갖춰 입은 리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출발 전에 두 번째 대련을 했으면 하는데 어떠냐는 질문에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며 한달음에 무장을 갖춰 입고 분홍 머리칼을 휘날리는 그녀의 모습은 언제 봐도 멋들어졌다.
여기사의 표본이랄까.
나는 성큼성큼 걸어와 대련 장소로 지정한 공터에 선 리하인을 가만히 바라보며 가볍게 숨을 골랐다. 들숨과 날숨을 통해 차분하게 긴장을 풀어 주고 있으니 머릿속으로 그간 보고 익혔던 전투 동영상들이 한 편의 장편 강의가 되어 주르륵 펼쳐졌다. 그래봐야 하루 반나절에 불과한 공부였지만, 그거라도 했다고 또 옅은 자신감이 붙었다.
척―
"후, 저는 다 됐습니다."
1번부터 5번까지 해마(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만드는 기관)에 각인된 영상들을 되감아 본 나는 힘차게 주억거리며 투구를 눌러 쓰고 오른발을 내밀었다.
공격 태세를 갖추자 반사적으로 불쑥 솟구쳐 오르는 흥분.
이 감정이 리하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는지.
피식―
"좋은 눈빛이군."
저 호승심의 화신도 마주 웃으며 투구를 착용하며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인 레이피어를 뽑아 들었다.
그러길 몇 초.
휘이이익!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날아온 뭔가가 우리 둘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대지 위로 뉘엿뉘엿 낙하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작은 천 조각.
툭―
"하아!"
결전의 신호탄이었다.
쉬우우욱!
이그니스(ignis) 류(流).
직뢰(直雷).
촤아아아아악―
벼락이 쳤다.
나는 초장부터 전력을 다해 리하인의 심장을 노렸다.
전날 똑똑히 겪었다.
아쉽지만 내 실력으론 아직 그녀를 이기기 힘들다고. 아니, 단지 힘든 수준 이상의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어제는 그걸 늦게 알아차려 후반부에 가서야 진심을 다했으나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한 법.
후우우우욱―
콰아아아아앙!!
"저돌적이군!"
아끼다 똥 될 바에야 모조리 쏟아내겠다는 일념으로 발한 뇌격에 리하인의 레이피어도 춤을 춘다. 그녀의 검 끝에서도 빛이 일렁거렸다.
엑세르가의 검술 고유의 투로를 밟으며 환두대도의 도신을 타고 올라오는 칼날의 채찍.
곡선의 궤도로 낭창낭창하게 휘어지는 검격에 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좌하단으로 내리치는 손아귀를 더욱 바짝 누르며 아예 몸을 틀어 마치 이 악물고 어깨싸움을 거는 미식축구 선수처럼 오른쪽 어깨로 리하인을 들이받았다.
레피이어의 검신이 내 가슴을 훑었으나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얇고 긴 칼의 특성상, 설사 육체를 베인다 하더라도 큰 대미지가 없을뿐더러 '질긴 라우타우루스의 가죽 방어구' 중에서도 가장 견고한 부위가 흉갑이었다.
관통에 치중된 옵션이기는 해도 통증과 피해 정도가 낮아지는 것은 확실한 바.
'버틴다!'
나는 흉부에서 치솟는 고통을 침으로 삼키며 기어이 소위 말하는 어깨빵을 먹이는 데 집중했다.
후우우욱―
콰앙!
"큽!"
피부로 전달되는 철제 갑주 특유의 딱딱한 반동에 목구멍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장비가 그러하듯 리하인의 장비도… 아니 저쪽은 나보다 몇 배는 뛰어난 재료와 대륙 내에서도 손꼽히는 장인의 영혼을 갈아 넣어 제작된 갑옷이었기에 필시 반작용은 내가 훨씬 심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밀어붙인 데에는 그만한 이점이 있기 마련.
저번 대련에서도 그러했듯이 초근접전으로 몰고가 긴 사거리를 필요로 하는 레이피어의 약점을 공략하기 위함이었다.
"허!"
물론 리하인도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내가 달라붙자 외려 밀리는 충격을 발판 삼아 재차 거리를 벌리려 했으나.
어딜.
놓아 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
오오라.
검은 망령의 파문.
['오오라: 검은 망령의 파문'이 발동되었습니다.]
[10분간 주변 30m 내에 존재하는 모든 적들의 신체 능력치가 5% 하락합니다.]
[대마법 저항 주문이 반응합니다.]
[하락되는 능력치 폭이 줄어듭니다.]
사아아아아아아―
"읏?!"
나는 오늘 각오했다.
하룻밤 새에 확 바뀐 변화를 토대로,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내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있을 리하인의 상식을 깨부수고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칠 거라고.
이를 위해 과감하게 밑천도 다 드러냈다.
저 망할 놈의 갑옷에 막혀 반쪽짜리가 되었을지언정 디버프도 걸고.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타닥―
후우우우욱!
내내 꽁꽁 숨겨 왔던 파스마(phasma) 류(流)의 비기도 선보였다.
효과는 굉장했다.
"...!"
늘상 여유롭던 리하인의 표정에 처음으로 당황이라는 글자가 스쳐 지나갔으니까.
그녀의 동공이 마구 떨렸다.
눈앞에 내가 있는데, 육감의 영역에선 상하좌우 온 사방 천지에 또 다른 내가 활개 치고 있을 테니 어리둥절할 거다.
좋다.
씨익―
나는 잔뜩 놀란 리하인의 리액션을 즐기며 연신 새로운 발자국을 찍어갔다.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전속 행진.
탓!
타다닷!
일보, 이 보, 삼 보....
부지불식간에 수십 갈래로 나뉘는 환영들로 그녀의 세계를 장악하며 한 곳으로 몰아세웠다.
쿵―
"...!?"
저 북방 당나라의 침입을 방어하고자 설치했다는 천리장성처럼 굳건하게 등 뒤를 가로막고 있는 아름드리나무 앞.
더 이상 뒷걸음질 칠 수도 없는 막다른 구석이었다.
"…하아!!"
그 함정 속에서.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파직―
꽈르르르릉!!
푸른 벼락을 불렀다.
* * *
"스읍, 후. 스으으읍, 후우."
털썩―
길게 호흡을 내쉬며 마차에 걸터앉았다. 다 합쳐서 채 10분은 했을까 싶은 대련이었음에도 진이 다 빠졌다.
섬광에 직뢰에 오오라도 키고 유령 걸음까지.
쓸 수 있는 기술을 총동원하느라 마력을 미친 듯이 퍼부은 탓에 탈력감이 어마어마했다.
…만.
"킥."
고된 와중에도 내 입술 너머로는 '웃음'이 맴돌았다.
〈서브 퀘스트: 끝없는 호승심〉
(2/3)
* 특이 사항 2: 승/패/무 ⊂ 1/1/0
기어이 '1승'을 챙겼기 때문이었다.
내리 3패를 찍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매치에서 결국 1승을 거둔 것이다.
역시 리하인 같은 강자라면 내 성장을 즉각적으로 감지하고 그에 따른 대비책을 갖추리라 판단해 날이 밝자마자 대련을 신청한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제아무리 노련한 기사라도 하룻밤 만에 달라진 상대와의 전투는 곤혹스럽기 마련이니까.
누군가는 이런 내게 비겁하다 욕하겠지만, 남의 의견이야 무슨 상관이냐.
애당초 체급 차가 있는 대상과 매칭이 잡힌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판국, 나로서는 어떻게든 승수를 거뒀다는데 만족할 따름이었다.
"…나도 실력으로 이기고 싶지만, 현재는 이게 최선이니 어쩌겠어."
쩝.
괜히 심란해진 나는 입맛을 다시며 좌측 상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서브 퀘스트: 영혼석 세공사(1)〉
* '생명의 샘'이 지닌 신비로운 힘을 통해 정해진 한계를 이겨 내고 영물(靈物)로 거듭난 생물에게서 얻을 수 있는 영혼석. 이 특별하고도 희귀한 광석은 사용자의 신체를 강화시켜 주기도 하고 사용자의 장비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기도 한다. 그러한 까닭에 암묵적인 '대체 재화'로 통용될 만큼 현재까지도 그 위상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 덕에 덩달아 바쁘게 사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영혼석 세공사'들이다.
습득한 영혼석을 장착하고 분리하며 조합하는 특수한 능력을 가진 선택 받은 이들.
한때는 웬만한 귀족보다 더 높은 신분을 자랑하기도 했던 그 신비로운 길에 들어선 당신은 과연 끝까지 걸어가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가.
(0/3)
* 특이 사항 1: 각각 '장착', '분리', '조합', 세 가지의 기본 단계를 모두 수료할 것
어젯밤. 영혼석을 정화하는 과정에서 추가된 서브 퀘스트 '영혼석 세공사(1)'가 관심을 갈구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상위 퀘스트인 '영혼석 세공사(2)'의 트리거를 건드리면서 개방된 임무의 난이도는 그다지 어렵지 않아 보였다.
끼고, 빼고, 섞기만 하면 끝 아닌가.
오히려.
"분리… 오히려 스킬 구하는 게 더 힘들겠는데."
세공 관련 기술을 습득이 수백 배는 더 빡세게 다가왔다.
단언하기는 뭐하지만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짐작하건대 '장착'이나 '조합'과 마찬가지로 '분리'를 얻으려거든 남은 2차 진화체, 이름 모를 보라돌이의 처치 업적을 선점해야 되는 듯하니까.
"그러니 이번 여정에서 너를 만나고 싶은데 말이야."
보라돌이야. 넌 어디 있니.
해독 포션도 구비되어 있겠다, 마침 스콜로펜드라의 영혼석으로 독 속성력도 구했겠다. 앞선 두 종류의 2차 진화체들보다 훨씬 쉽게 사냥할 수 있을 텐데.
"기우제라도 지내야 하나."
"기, 기사님!"
독기를 정면으로 맞서며 목을 베는, 그런 상념에 빠져 있던 나를 누군가 불러 깨웠다. 코마토르 마을의 사냥꾼 레른이었다.
"응? 아, 레른 씨."
"쉬고 계셨다면 조금 이따가 다시 올까요?"
"아닙니다. 저도 막 움직이려던 참이었습니다."
"아하, 다행입니다. 하하! 여기, 이쪽이 루카스입니다."
"코마토르 마을의 루카스라고 합니다. 기사님."
그는 한 사람을 대동한 채 나를 찾아왔는데, 레른의 곁에서 내게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는 남자는 〈메인 퀘스트: 호위〉에 딸린 네 개의 서브 퀘스트 중 하나인 주인공 루카스였다.
* * *
"기사님! 다 됐습니다!"
"음, 나쁘지 않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이건 약속드린 10 아르겐입니다."
띠링!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이주 걱정〉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적은 경험치'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받은 게 있으니 드리는 겁니다.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맡겨만 주십시오! 그럼 이만 소인은 돌아가 보겠습니다!"
허겁지겁 피난을 떠나느라 이주 자금을 제대로 챙겨 오지 못해 한동안 자식들이 굶게 될까 걱정하던 코마토르 마을의 재봉사는, 헤진 갑옷을 수선해 오는 조건으로 받은 은화 열 개를 소중히 품에 안고서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떠나갔다.
나는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진심으로 안녕을 빌어 주었다.
적은 경험치.
서브 퀘스트의 보상 자체는 튜토리얼에서나 볼 법한 한미한 수준이었으나.
[모든 방어구의 내구도가 소폭 회복됩니다.]
"은근히 꿀이네, 이거."
그의 땜질은 진짜였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 많이 해져서 어떤 식으로 보수를 해야 되나 고민이었는데,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
"…휘윤 경! 휘윤 경!"
"응?"
흡족한 기색으로 갑옷 곳곳을 만져보던 나는 급작스런 전령의 방문에 눈길을 돌리다 말고 금세 미간을 찌푸렸다.
전언을 가져온 병사의 다급한 말투에 실린 감정에서.
"젠슨 님께서 당장 뵙기를 청하십니다!"
무언가 사고가 발생했음을 직감한 탓이었다.
67화
[ 비도 ]
탁―
"갑시다."
"예, 옛!"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저리도 급박하게 나를 부르는 것일까.
혹, 2차 진화체가 이끄는 언데드 군단이라도 나타난 건가?
기사 3인에 정예병 15인으로 구성된 병력이었기에 어지간한 사건에도 좀처럼 동요하지 않은 이들이 나를 찾을 지경이라면 분명 심상찮은 사건일 텐데....
"충! 명하신 대로 휘윤 경을 데려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안으로 모셔라."
"충!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대강 사이즈를 추측하며 걸어가길 몇 분.
곧 출발을 앞두고 있어 대부분 철거된 일반 막사와 달리 여전히 굳건한 지휘부 막사의 입구 장막을 걷어내자 한창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리하인 등과 또 한 사람, 병사의 복장을 했으되 오른쪽 어깨에 붉은색 휘장이 걸린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 왔나."
내가 등장하자 잠시 회의를 멈춘 그들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했다.
그럴수록 증폭되는 궁금증.
리하인과 대표로 간단하게 눈인사를 나누고 의자에 앉자 물 한 잔을 벌컥 들이켠 젠슨이 탁자에 쫙 펼쳐져 있던 지도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 갑작스런 요청에도 한달음에 달려와 주어 고맙소. 우리가 그대를 부르게 된 까닭은 조금 전 척후병들이 전해 온 소식 때문이요."
그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여러 색깔 별로 채색된 기마 모형 몇 개가 세 군데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었다.
색은 각기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으로.
"이 빨간 기마가 우리, 파란 기마는 도시 글라디아르(gládĭár), 검은 기마는 괴물들을 의미하오."
젠슨은 이 병사 모형들을 움직여 몇 줄의 선을 그어 가며 설명을 도왔는데, 그의 얘기가 귓가를 파고든 직후 나는 어째서 세 사람이 저리도 침울한 낯빛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는 지 100%, 아니 200% 완벽하게 공감하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재 우리는 글라디아르를 대략 하루 정도 앞둔 이곳에 있소. 무리를 한다면 반나절 안으로도 입성할 수 있는 부근이지."
한마디 한마디 씹어 뱉듯이 완성해 가는 문장의 끝자락에서.
"한데, 문제가 생겼소이다. 방금 전 정찰에서 복귀한 척후병들의 보고에 따르면… 족히 1만 마리 이상의 괴물들이 도시를 포위 중이라고 하니 말이요."
무려 다섯 자릿수의 단위가 튀어나왔으니까.
"하."
한순간에 너무 큰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외려 웃는다고 하던가?
무거운 음성으로 마침표를 찍으며 물러나는 젠슨의 상황 설명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1만이라니.
더군다나 이것도 단순 추정치일 뿐. 실제로는 2만, 3만을 아득히 초월할 확률도 농후한 어처구니없는 실정에 멘탈이 세차게 흔들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나서야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난 현시점에서 제일 중요한 물음을 던졌다.
"…그럼 도시로 들어갈 방법이 하나도 없는 겁니까?"
〈메인 퀘스트: 호위〉의 목적은 70여 명의 행렬을 안전하게 도시로 들여보내는 것.
다시 말해, 우회로가 있다면, 무사히 도착하리라는 확신만 있다면 몇 날 며칠이 걸리든 설령 몇 달이 걸린다 한들 나는 그 경로를 밟을 터이니 실상 감당 불가한 군세가 깔려 있더라도 별 상관이 없었다.
해서 물어봤다.
혹시라도 구명줄이 있을지.
이윽고 되돌아온 답변은.
"있다."
"…응?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뜻밖에도 매우 긍정적이었다.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후… 들어가는 길이 있다고 했네."
통로가 있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무척이나 낙관적인 뉴스일진대, 막상 이야기를 꺼내는 리하인의 대답에 한숨이 섞여 있는 등 그녀의 스탠스가 영 시원찮다는 것이었다.
왜지?
거짓말 조금 보태서 나라면 발을 동동 구르고 기뻐서 날뛰었을 이슈 거리이건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태도에 의아해하던 찰나.
"아."
불현듯 한 가지 합성어가 머리에 번뜩였다.
안전한 길과 귀족. 이 두 개의 조건이 한데 결합되었을 때 조합되는 단어, 그것은 다름 아닌 '비도(秘道)'였다.
* * *
초고대 시절부터 21세기 현대에 이르기까지 좀 산다 하는 집안, 특히 권력의 최상층에 선 위정자들은 정적으로부터 혹은 여타 예기치 못한 악재에 대비해 몇몇 개의 비책을 마련해 두곤 했다.
이를 쉬운 언어로 축약하면 보험(保險)이 된다.
하면 이 보험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금전적인 범주는 제하고 생명과 직결되는 방향으로 국한했을 시엔 아마도 이쪽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른바 안가(安家)다.
오로지 본인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은밀한 피난처.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도 기거가 가능한 철통 보안의 안전 가옥.
그다음이 바로… 해당 은신처로 가는, 또는 당장 남모르게 도망칠 때 쓰이는 비도(安家), 즉 '비밀 통로'다.
"비도군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단번에 납득해 버렸다.
도시 내외를 잇는, 어쩌면 단순히 안팎을 넘나드는 걸 넘어 엑세르 가문의 가택과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는 길을 함부로 발설한다는 게 그녀로서는 상당히 꺼려졌을 거다.
자신의 결정으로 일어날 나비 효과가 두렵겠지.
만약 누군가 비도의 정보를 다른 이에게 팔아 치운다면, 단지 '안전한 도주로가 사라졌다'에서 끝나지 않고 역으로 어쌔신들이 손쉽게 집안을 드나들 수 있는 암살 루트로 전락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안 됩니다!"
뒤늦게 깨달음이 찾아온 젠슨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엑세르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로서, 영지민이라고는 하나 일면식도 없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백작가의 동아줄을 소모한다는 게 말이 되냐는 듯.
그러한 충신의 반발에도.
"기사는 정의를 수호하고 국가의 백성을 보호하는 자."
"백작님께서 노하실 겁니다!"
"책임은 내가 지겠다."
분홍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고심에 빠져 있던 리하인은 기어코 젠슨을 물리며 지도에 손을 짚었다.
그녀는 기사였다.
"가문 내에서는 '천년목의 터'라 부르는 장소가 있다. 문자 그대로 오랜 세월 내내 수많은 풍랑에도 꺾이지 않고 올곧이 자란 고목의 영역이지. 젠슨과 카르켈 너희도 잘 알 거다. 초대 가주님께서 서임을 받으시던 날, 반드시 기사가 되어 돌아오겠다던 어머니와의 맹세를 지켰다는 증표로 당신의 검을 꽂아 넣으며 대대로 엑세르가의 기사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들려 각자의 맹세를 약속하는 곳이 됐으니까."
"아가씨...."
"우리는 그 고목 아래에 깊고 튼튼한 지하 통로를 설치해 관저와 이어 두었다. 기사 된 자들은 최후까지 남아 싸우되 뿌리는 살려 명맥이 끊기지 않도록. 그곳으로 간다면 커다란 부피를 차지하는 수레나 마차는 버려야겠지만, 목숨은 살 것이다. 내가 장담하지."
* * *
"그대들의 심정은 알지만, 삶보다 귀중한 건 없다. 부디 그 점을 명심하며 짐을 챙기길 바란다. 기회는 한 번밖에 없을 테니."
코마토르 주민들과 병사들을 전부 모아 놓고 간략하게 계획을 밝힌 리하인의 연설에 맞춰 사람들이 가져갈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해 정리에 나섰다.
워낙 가져온 게 없었기에 아쉬움은 클지언정 분리는 빨랐다.
그렇게, 창공에 떠오른 태양이 초록이 무성한 나무에 비스듬히 걸리던 10시경.
"출발하라!"
"충!"
선두에선 카르켈의 선창을 기점으로 극히 단출해진 차림의 무리가 마지막이 될 행진을 단행했다.
도시 글라디아르(gládĭár)의 성벽에서 동쪽으로 1km가량 떨어진 작은 동산에 위치해 있는 '천년목의 터'를 향해.
일반적으로 도시 근처는 대체로 자체 식량 수급 겸 외세의 침략이 발발했을 시 신속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농경지로 개간해 두지만, 가문의 역사가 깃든 곳이니만큼 최대한 원형을 유지해 둔 터라.
"저긴가."
"저곳이네."
우리는 대로 양옆으로 자리 잡은 숲의 끄트머리에 도달함과 동시에 야트막한 동산 위로 홀로 고고하게 서 있는 고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크아아아아아아!!"
"끄어어어어어!"
온 일대를 검게 물들인 죽은 자들의 군단과.
"쏴라!!"
"엑세르의 영광을!!"
"와아아아아!!"
죽은 자들을 상대로 혈전을 치르고 있는 산 자들의 처절한 악전고투도 함께였다.
"음...."
"아."
"흐읍!"
저 비현실적인 광경에 딴 것보다 대관절 저 많은 언데드가 다 어디서 출현한 것일까. 아니, 출현이야 그렇다 쳐도 어떻게 이곳으로 모일 수 있었는지 의구심이 찾아왔다. 통상적으로 한 지역을 점령하고 난 뒤엔 같은 위치를 맴돌기만 하는 놈들인데.
내가 그러한 물음표를 떠올리는 동안 도처에선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다들 상상하고 있는 듯했다.
저 물결을 억지로 거슬러 오르며 도시에 입성하는 미래를. 그러한 점에 있어서 나는 다시금 확신이 생겼다.
생환자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퀘스트에는 다 저마다의 공략법이 존재한다는 걸.
폰스 마을에서도 체감했지만, 아무리 암담하고 암울해도… 언제나처럼 하늘이 무너질 거 같아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그나저나.
"…거리가 약간 애매하네."
고목을 중심으로 한창 공성에 열중하고 있는 언데드들과 간격을 가늠해 보던 나는, 고목에 당도할 즈음이면 놈들과의 간극이 고작 3~400m도 되지 않음에 눈살을 찡그렸다.
구울만 해도 300m는 1분이면 거뜬하게 주파한다.
2차 진화체라면 30초.
그 말인즉슨.
"지형적 이점을 고려하더라도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구만."
탈출 중에 한 번이라도 실수를 범한다면 우리는 떼로 몰려드는 검은 파도에 휩쓸려 버릴 터.
이에 리하인을 응시하자, 그녀도 내 우려를 인지하고 있다는 듯.
"집중! 우리는 저기 보이는 고목까지 쉬지 않고 달릴 것이다. 가급적 소음은 내지 말 것이며 여자와 아이를 우선적으로, 남자와 노인은 후방에서 병사들을 돕는다."
"충!"
"병사들은 목적지에 다다르는 즉시 마차로 벽을 세우고 항전하며 젠슨과 카르켈이 각각 좌우를 맡는다. 중앙은 휘윤 경, 자네가 맡아 주게. 나는 가장 위험한 곳을 돕겠다."
"그러죠."
미리 세워 두었던 플랜을 쭉 읊어 간다.
그닥 대단할 건 없었지만, 딱히 모나지도 않은 정석이라 나를 포함해 모두가 끄덕이자, 말고삐를 잡아당긴 리하인이 카르켈과 나란히 전위에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언데드들의 주의를 끌어서 좋을 게 없었기에 사람도 말도 죄다 입을 꽉 다물고 진격하는 은밀한 질주.
그러나.
삐이익!
[경고!]
[죽음으로 이루어진 작은 파도를 이끄는 목 잃은 기사, '듀라한(Dulachán)'이 당신을 주시했습니다.]
[피와 죽음을 쫓는 추살자, '레드 구울(Red Ghoul)'이 당신의 생명력을 포착했습니다.]
[썩어 문드러진 부패한 망자, '베놈 데드(Venom Dead)'가 당신의 생생한 체취를 맡았습니다.]
['오오라: 검은 망령의 파문'과 접촉했습니다.]
['오오라: 추살자의 원념'이 육체에 들러붙습니다.]
['오오라: 세상을 더럽히는 시취'가 불어닥칩니다.]
…
…
'벌써?!'
세상은 우리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68화
기껏해야 100m.
그마저도 후미는 이제 겨우 숲을 벗어나 언덕에 발을 올리던 차에 출력된 수십 건의 경고 메시지를 본 나는 반사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언데드들, 특히 2차 진화체쯤 되면 인지 범위가 기사들만큼이나 넓어진다는 거야 모르지 않았지만… 이건 일러도 너무 일렀으니까.
적어도 정상에 오를 때까지는 여유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어떻게?
게다가 의문점은 또 있다.
['오오라: 검은 망령의 파문'과 접촉했습니다.]
[10분간 모든 능력치가 5% 하락합니다.]
"무슨 범위가...!"
몇백 미터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오라가 우리의 발목을 움켜쥐었다는 점이다.
직접 배워 봐서 알지만, 듀라한의 오오라는 이렇게까지 멀리 뻗지 않는다.
〈오오라: 검은 망령의 파문/Active〉
* 산 자의 생명을 노리는 원념들을 부려 10분간 주변 30m 내에 존재하는 모든 적의 신체 능력치를 5% 하락시킨다.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대상을 지정하여 오오라의 영향권에서 제외할 수 있다.
* 재사용 대기 시간: 세 시간
인간이 배우면 30m에 불과했거니와 설령 듀라한 본인이 쓰더라도 50m, 종족 보정치와 고유 스킬 보정치를 감안해도 최장 100m를 넘진 않을 터였다.
그런데 이게 뭔가?
차라리, 정말 양보해서 만약 지휘관의 특성으로 주로 중후반 라인에 배치되는 듀라한의 오오라만 닿았던 거라면 '그래, 내 거리 재기가 틀렸었구나' 하고 인정하며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레드 구울도 또 베놈 데드라는 새로운 2차 진화체의 오오라도 싹 다 발동된 상태였다.
확실하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해 상식선이 붕괴되어 있었다.
설마....
듀라한이나 레드 구울마저 초월한 '3차 진화체'가 출현하기라도 한 걸까?
"젠장! 레른!"
"예, 옛?!"
"가서 전해! 언데드들이 곧 몰려올 거라고!"
문득 뇌리를 스친 최악의 시나리오에 아찔해진 나는 뭐가 됐든 이 사실을 리하인에게 알리기 위해 레른을 전열 앞쪽으로 급파했다.
소리를 질러도 전달이야 되겠지만, 소통에 힘을 쓸 여력이 없었다.
이쪽은.
"크아아아아악!!"
"키에에에엑!"
리하인 등이 계획대로 실행하려면 어그로꾼이 필요했기에 저쪽 선봉을 마중 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스콰!"
후우우욱―
번쩍!
"히이이이잉!!"
"이럇!"
"기, 기사님!"
난데없이 호통을 치며 대열에서 이탈하는 내 어깨로 레른의 당황스런 목소리가 귓등을 두드렸으나, 멈추지 않고 발을 구르며 나아가자 성벽 인근에서 서서히 갈라져 나오는 언데드 부대가 시야에 잡혔다.
숫자만 약 400~500여.
규모만 놓고 보면 기껏해야 일개 중대 단위에 지나지 않으나, 결코 얕잡아 볼 수 없었다. 저 안에 2차 진화체만 세 마리나 섞여 있었으니 말이다.
전체 병력이 1만을 넘어서는 군단답게 본디 희귀한 개체에 속하던 2차 진화체가 마치 구울이나 좀비마냥 무더기로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이게 도시급 스케일의 전쟁인가....
'썩을, 그나마 3차 진화체가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어제까지만 해도 기우제가 어쩌고 지랄을 떨던 과거의 내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역시 주둥이가 방정이었다.
우우우우우웅!!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파직―
"하아!"
꽈르르르릉!!
높게 쳐들었던 환두대도가 대각선으로 내리꽂힌다. 그 궤적을 뒤따르며 천지를 휩쓰는 뇌류.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관심 끌기.
"스콰! 돌아라!"
"히이이이잉!!"
전속력으로 돌진해 스킬을 시전한 나는 뇌기가 언데드들을 덮치자마자 핸들을 꺾어 '천년목의 터' 반대편으로 회전했다.
"…크아아아아아악!!"
촤르르르르르륵―
콰아앙!
자리를 뜨기 무섭게 날아든 동그란 물체가 대지를 깨부수며 들이닥쳤다. 듀라한이 자랑하는 생체 병기 두퇴(頭槌)였다.
오랜만에 본 탓인가?
전보다 훨씬 강력했고 쾌속한 놈의 공세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왼손으로 바꿔 쥔 환두대도를 연달아 휘둘렀다.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2 연격.
파직―
꽈르르르릉!!
꽈르르릉!
늘어난 마력통을 발판 삼아 뿌려 대는 뇌성벽력이 되돌아가던 두퇴를 노리며 이빨을 들이밀자 우수수 쏟아져 나오는 수십 개의 형체.
"그어어어어어!!"
"으어어어어!"
구울과 좀비들로 이루어진 진정한 고기 방패였다.
듀라한의 지휘를 받은 것인지, 그저 먹잇감이라면 발 앞에 도산검림(刀山剑林)의 지옥이 펼쳐져 있더라도 직진하는 무식한 직진 본능의 발로였는지는 몰라도 제 육신을 불태우면서까지 겹겹이 세운 가드 덕분에 두퇴는 자그마한 흠집조차 없이 듀라한의 손아귀로 회수되었다.
다만 미련을 남길 겨를은 없었다.
…화아아아악!
콰아앙―
"키에에에에엑!!"
핏물보다 시뻘건 피부색의 레드 구울이 잿더미가 된 사체 더미들을 비집고 나오고 있었으니까.
"읏차!"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타닷―
후우욱!
레드 구울을 발견한 나는 망설이지 않고 지상으로 내려오며 환영보를 밟아 놈의 감각을 농락하고 좌측으로 돌아 옆구리에 칼날을 먹였다.
콰아앙!
"케에엑!"
지근거리에서 솟구친 벼락이 폭발을 일으키며 놈을 날려 버린다.
그 여파로 줄이 끊어진 연처럼 바닥에 처박히는 우스꽝스러운 꼴을 직관하며 이대로 따라가 끝장을 내고픈 욕망이 불쑥 몸을 지배했으나, 억지로 이성의 끈을 붙잡으며 재빨리 스콰를 호출해 안장에 올라 허벅다리를 찼다.
어그로꾼의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랴!"
"히이이이잉!!"
스콜로펜드라의 동굴에서 〈서브 퀘스트: 한계 돌파〉의 두 번째 잠금을 해제한 스콰는 평범한 수준을 뛰어넘는 속도로 거듭 언데드 놈들과의 간극을 벌려 나갔다.
그러면서 언덕으로 시선을 옮기니, 때마침 후미 열의 마차가 '천년목의 터'로 진입하는 것이 보였다.
더불어.
스각―
제 손바닥을 칼로 찢어 고목의 나무껍질에 가져다 대는 것도.
우우우우우웅!!
'마법인가?'
그녀의 피가 나무와 접촉하자 고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묘한 파장.
일견하기엔 들어가는 입구는커녕 문손잡이도 보이지 않았기에 도대체 출입문을 어디에 설치해 둔 걸까 궁금했는데, 마법이 살아 숨 쉬는 세계는 과연 달랐다.
문제는.
쿠웅―
쿠구구구궁―
"크아아악?! 크아아아아아!!"
"키에에에엑!!"
"이런 제기랄."
통로가 개방되며 발생한 땅 울림에 의해 애써 관리해 두었던 풀링(Pulling)이 풀려 버렸다는 점이었다.
"스콰! 최대한 빠르게!"
"히이이잉!!"
지진을 연상케 하는 진동에 내게 쏠렸던 이목이 고목 쪽으로 향하는 걸 보며 나는 스콰를 다그쳐 방진을 갖춰가는 정상으로 달렸다.
"휘, 휘윤 경!"
순식간에 좁혀지는 공간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새 정이 들었나, 내가 복귀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레른이었다.
"수고했다, 스콰. 역소환."
"푸르릉."
스콰를 돌려보내며 완공 직전의 방진 안으로 뛰어들던 그때 리하인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코일! 어서 여자와 아이들은 데리고 가라!"
"충!!"
탈출구가 개방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녀의 우렁찬 일갈에 인솔 대상들을 이끌고 고목 앞쪽에 뚫린 동혈(同穴)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병사.
후방에 동료들을 남겨 두고 떠나는 게 미안한지 힐끔 돌아보다 사라지는 그의 등을 쫓아 스무 명에 달하는 인원이 차례대로 자취를 감췄다.
"저것들이 2차 진화체인가."
그 무렵.
리하인이 레이피어를 뽑아 들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밝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는 수백 마리의 언데드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스피드를 선보이며 언덕을 등반하고 있는 레드 구울에게 가 있었다.
듣기로 아직까지 2차 진화체와는 겨뤄 본 적 없다는 그녀와 엑세르 군.
애당초 폰스 마을 주민들이나 여타 대륙인들처럼 좀비나 구울들을 '언데드(Undead)'가 아닌 '괴물(怪物)'이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이쪽에 관련해 정보가 거의 없는 듯했다.
여하간 그래서인가?
"재밌겠는데."
위급한 와중에도 특유의 호승심이 발휘되는지 리하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밝게 반짝였다.
참으로 대단한 여자였다.
"저건 내가 잡겠다."
"그러시죠."
거의 광적인 레벨의 투지에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정확히.
"크르르륵! 크르륵!"
베놈 데드라는 이름의 신종 언데드가 올라오고 있는 각도였다.
온통 새빨간 레드 구울과 대비되는 보라색 피부에 팔이고 다리고 할 거 없이 전신에서 옅게 뿜어져 나오는 독무(毒霧).
의심할 여지 없이 폐허에서 보았던 세 번째의 진화체, 내 업적 도감을 채워 줄 보라돌이였다.
"마력은… 대충 5회분. 살짝 부족하려나?"
나는 놈의 외형적 특징을 찬찬히 뜯어 살피며 도병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남은 마력 잔량으로 저놈의 대가리를 벨 수 있을진 미지수지만, 일단 트라이는 해볼 작정이다.
어차피 내 탈출 순번은 뒤에서 두세 번째였기에, 가기 전까지 손을 써보고 안 되면 후일을 기약하며 통로로 달아날 심산이었다.
각오를 다진 나는 장벽이 된 마차를 밟고 올라갔다.
방진이 짜여 있는데 그걸 내버려 두고 안전장치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서 싸워야 하는 처지가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스콜로펜드라와 마찬가지로 사방팔방에 똥을 싸지르는 광역형+속성형 몬스터를 독 저항력이 제로인 병사들에게 대령할 수는 없으니 바깥에서 처리해야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초장부터 시원하게 갈겨 보자."
우우우우우웅!!
서서히 줄어드는 나와 놈 사이의 틈.
100m, 50m, 30m....
어느덧 10m.
"대밀레스 제국과 나의 뿌리 엑세르를 위하여! 하앗!"
"키에에에에엑!!"
흡사 장군전을 치르듯 최선두에 선 레드 구울을 맞이하러 뛰쳐나가는 리하인.
그녀의 레이피어가 괴물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순간.
이그니스(ignis) 류(流).
직뢰(直雷).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이중 스킬 결합.
오휘윤 류: 뇌령 돌파.
파직―
환두대도의 도신이 포효를 내질렀다.
…후욱!
촤아아아아아아악!
* * *
곧게 뻗은 한 줄기 화살처럼 날아가 타깃을 꿰뚫는 금빛 섬광.
"크르르륵! 크륵!"
푸화하하학―
날 발견한 놈이 무언가 점액질 비스무리한 액체를 구토하듯 쏟아냈으나, 휘몰아치는 전류의 폭풍이 모든 것을 불태우며 끝끝내 복부를 강타해 베놈 데드의 허리를 갈랐고, 상·하체로 분리된 육신을 뒤덮으며 집어삼켰다.
의외로.
띠링!
[썩어 문드러진 부패한 망자, '베놈 데드(Venom Dead)'를 처치했습니다.]
[축하합니다!]
[〈100인 한정 업적: 최초의 베놈 데드 사냥꾼〉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상당한 경험치' 및 '기술 서적: 분리', '마력 전이석: 중형', '기술 임의 습득권: 베놈 데드'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그게 끝이었다.
"응?"
이게 뭐지.
내가 해놓고도 좀 얼떨떨한 승리에 당혹스러울 지경.
마수조차 버티지 못한 오리지널 스킬이라고는 하나 당시야 신호탄이 빚어 낸 불기둥에 당한 이후였던 지라 경황 중에 당할 법도 했다만, 현재는 그야말로 만전의 컨디션이었지 않는가?
원턴 킬을 내기는 어려운 타이밍인데 어째.
'광역기를 선물 받은 대가로 신체 면에서는 별다른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건가?'
다소 허무하기까지 한 결과에 나름대로 추측을 해보지만, 정답을 구할 시간은 없었다.
후우우욱―
콰아앙!
"크읍!"
"막아! 막으라고!"
"창 찔러!"
뒤쪽에서도 백병전이 개시된 까닭이었다.
69화
얼추 300 대 30의 전투.
당장 숫자만 놓고 봐도 열 배에 이르는 수적 열세.
더군다나 주변이 뻥 뚫린 지형적 불리함까지 안고 치르는 혈전은 당연하게도 인간 측에 굉장히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그어어어어!!"
"파헨! 방패 세워!"
"추, 충!"
후우욱―
쾅!
"그어억!! 그어어어어억!!"
"으어어어어!"
"창병 뭐 해! 빨리 찔러!!"
"비켜어어어!"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드는 언데드들을 향해 방패를 들고 창을 찌르고 발로 차내는 등 악다구니를 쓰며 버텨야 했으니까.
그런 탓에 주위를 미친 듯이 종횡무진하는 카르켈의 할버드는 잠깐도 멈추지 않았다.
리하인은 레드 구울을, 젠슨은 듀라한을, 나는 베놈 데드를 맡아 뿔뿔이 흩어져 버려 병사들을 도울 상위 전력은 그가 유일하기 때문이었다. 하여 발등에 불이 떨어진 양 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카르켈의 목구멍에선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지만.
"으어어어어!!"
"끄읍!"
"…칼란! 숙여라!"
후우우우웅―
콰직!
"흡! 흐읍!"
"정신 차려고 방패 들어! 방패 들라고 이 새끼야!!"
"추, 충!"
그가 분전해 준 덕분에 병사들의 사망률은 가까스로 제로를 유지해 나갔다.
단지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그어어어억!!"
후웅―
콰직!
콰드드득!
짐마차와 수레로 구축한 임시 성벽이 압도적인 물량 공세에 눌려 채 3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좀비 한 구당 60g만 잡아도 300마리면 도합 18톤이었다.
무게감이 한꺼번에 전달되진 않겠지만, 한데 뭉친 물결의 밀어내는 파워는 진정 불도저 못지않은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터라 균열은 빠르게 돋아났고 견고하던 성채는 백사장의 모래성처럼 허물어 갔다.
내가 베놈 데드를 불사르고 돌아왔을 땐 이미 한쪽 성곽이 완전히 주저앉아 코마토르 마을 주민들의 방패로 대체되어 있었다.
'2번.'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파지직―
꽈르르릉!!
그 처참한 광경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마력을 개방했다.
10번 중 3번.
방금 막 섬광(閃光)을 발현하며 이젠 고작 2번.
전례 없이 충만하던 마력통이 텅 비어 가고 있었으나, 호위 대상들의 생사가 걸렸는데 아끼고 말고 잴 형편이 아니었다.
"흐읍, 하!"
후우욱―
서걱!
황급히 토해 낸 뇌류로 중간 다리를 꿇고 난입해 무릎을 굽히며 언데드 놈들의 하단부를 반원으로 훑는다.
저들의 약점은 머리통뿐이지만.
이 난전 중에 대가리만 노리기도 힘들거니와 애당초 발목만 잘라 주면 먹잇감에 미친 동족들이 알아서 밟아 죽여 줄 것이기에 성벽을 오르지 못하게끔만 힘을 분배하며 망가졌던 저지선을 복구하는 데 열중했―
우득!
"…끄아아아악!!"
"로, 로반!"
"옆에 보지 말고 방패 내밀어!!"
"하지만 로반이...."
"다 뒈지고 싶어?!"
"아, 아닙니다!"
한숨 돌렸나 중얼거리던 직후에 들린 비명.
오로지 살인 욕구와 식탐으로 가득한 점철된 언데드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공포와 고통으로 뒤범벅된 괴성이 하늘을 갈랐다.
창을 내지르다 팔이라도 물린 듯했다.
하나.
"그어어억!"
"그래, 나도 반갑다."
휘우욱―
서걱!
나는 뒤쪽을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언데드에게 물렸다는 건 똑같이 언데드가 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기에 분명 매우 심각한 사고였지만.
"아이젝!"
"붓겠습니다!"
우리에겐 약(藥)이 있었다.
좀비는 말할 것도 없고 구울의 감염력까지도 깔끔하게 방어해 내는 기적의 묘약이.
그건 바로.
촤아아악―
['생명의 샘물'을 복용했습니다.]
[모든 해로운 효과가 소멸합니다.]
[10분간 자연 치유력 및 피로 회복 속도가 200% 상승합니다.]
['상태 이상: 좀비화'가 해제됩니다.]
스콜로펜드라의 동굴에서 퍼온 샘물이었다.
좀비화 작전을 몇 번이고 재탕했던 부작용으로 나야 내성이 생겨 버렸으나, 저들은 달랐다. 나처럼 나사 한 군데가 빠져 일부러 좀비화 작전을 감행할 정도로 멘탈이 강하진 않을지언정 샘물의 효능을 100% 끌어내는 순수한 육체를 갖고 있는 바.
아프기야 하겠으나 한두 번쯤 물리는 건 괜찮았다.
이 악물고 참으면 참을 만도 하고.
따라서 묵묵히 적병을 베어 넘기길 30여 초, 이번에는 내가 듣고 싶었던 문장이 치솟았다.
"1조 진입 완료!"
"1조 진입 완료!"
"2조 진입!"
"2조 진입!"
"3조 대기!"
"3조 대기!"
여자와 아이들로 구성된 1조가 모두 탈출했다는 희소식이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귓가를 파고드는 또 한 줄의 굿 뉴스.
"키에에에엥엑!!"
"하!"
슈우우욱―
콰직!
촤아아아악!
리하인의 레이피어가 적장 레드 구울의 수급을 베어 버렸다는 낭보였다.
슬쩍 그쪽을 쳐다보니.
총에 맞은 것처럼 놈의 뒤통수에 어린아이 주먹만 한 나선(螺線, 나사 모양의 소용돌이 형상) 구멍이 파여 있었다.
나와의 대련에선 사용하지 않았던 엑세르 류의 초식인가?
자세한 내막이야 추후에 알아보기로 하고 나는 땅바닥에 수북하게 깔린 사체 더미를 밟으며 다시금 방진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남은 2차 진화체는 듀라한 한 마리.
무지성으로 밀고 들어오는 구울과 좀비가 여전히 150마리가량 되었으나 리하인이 합류하면서 급속도로 줄어드는 중이었다.
물론 안심하긴 일렀다.
우리는 계속해서 방어 인원이 감소하는 '후퇴형 방진' 구조. 무기라고는 활이나 농기구밖에 못 쥐어 본 촌민들이라 할지라도 있고 없고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본래라면 그들이 커버해 주는 면적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만 감당하면 되는 실정이었으나, 앞으로는 열아홉 명이서 전체를 막아 내야 하는 탓이었다.
고로.
"휘윤 경!"
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오직 메인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클리어하기 위하여 택한 육참골단(肉斬骨斷)의 전술.
"우측으로 던져!"
"우측으로!"
"충!"
"충!"
후우욱―
후욱―
촤아아아아악!
촤아아악!
포션 투척으로 빚어내는 '성역화(聖域化)'였다.
"끄어어어어어!!"
"기에에에엑!"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상식선이 붕괴된 작금의 전장에서도 성역은 성역이었는지, 아님 구울 이하의 하위 언데드들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놈들은 우리가 그은 세인트 라인을 넘어오지 못했다.
해서 더 아쉬웠다.
징발을 통해 무려 열세 병이나 동원됐던 폰스 마을에서와 달리 엑세르 군은 기사 3인방이 지닌 세 병이 전부였기에 내가 가진 걸 다 합쳐도 360도에서 얼추 100도 남짓한 범위를 장악하는 데에서 그쳤기 때문이었다.
"내가 왼쪽을 맡을 테니 오른쪽으로!"
그렇기에 나는 더욱 열과 성을 다해 환두대도를 휘둘렀다.
회복 물약을 모조리 꼬라박아 놓고도 누가 죽는다면, 숫제 도박으로 패가망신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타닷―
"흐아아!"
서걱!
와아아아아!!
"응?"
그러한 연유로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듯.
발작적으로 좀비들을 쳐 죽이고 있을 즈음 별안간 한 쪽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렸다.
"…형님!"
카르켈의 입에서 형님 소리가 튀어나오는 것으로 보아 젠슨이 듀라한을 쓰러뜨린 거 같았다.
"집중해라, 카르켈."
"옛!"
승리를 거두고 복귀한 것치고 젠슨은 꽤나 지쳐 보였다.
아마 상대가 듀라한이라 그럴 거다.
공방 밸런스도 잘 잡혀 있는 데다 뭣보다 두퇴를 이용한 중장거리 포격은 처음 접해 보는 사람에겐 실력과 별개로 상당히 까다로운 난이도를 선사했으니.
여하간 리하인 다음 가는 실력자인 젠슨까지 귀환했기에 전투는 한결 쉬워졌다.
아니. 쉬워질 거라고 믿었다.
삐익!
"…음?"
[경고!]
[죽음으로 이루어진 작은 파도를 이끄는―]
[피와 죽음을 쫓는 추살자―]
[썩어 문드러진 부패한―]
…
…
"또야?"
새로운 부대가 출현하지만 않았다면.
다급히 수레벽 위로 올라가 아래쪽을 응시하자 어느새 언덕 중반부를 돌파한 언데드 중대가 눈에 들어왔다. 선두엔 레드 구울이, 중단엔 듀라한과 베놈 데드가. 조합도 규모도 전과 비슷하다.
아. 다른 게 있기는 했다.
삐익!
[경고!]
[죽음으로 이루어진 작은 파도를 이끄는―]
[피와 죽음을 쫓는 추살자―]
…
…
판박이 같은 덩어리가 좌우로 '두 짝'이라는 것이었다.
"…니미럴."
* * *
엑세르가의 비도는 언덕 정상과 도시 내부의 가문 저택 지하를 'U'로 연결해 놓은 형태를 띠고 있다.
문이 개방되고 벌써 5분 가까이 흘렀음에도 여태 2조가 진입하고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야트막하기는 해도 언덕은 언덕이라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깎아질 듯 경사진 지하 계단 수백 개를 거쳐야 했기에 속도를 내고 싶어도 도저히 걸음걸이를 빨리할 수가 없었다.
자칫하다간 인간 도미노가 될 판이었으니까.
그러나.
"레른!"
"예, 옛?"
"지상이 위험하니 스피드를 높이라고 전달해!"
나는 주변 수백 미터를 가득 채우는 두 개의 검은 군집체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안전사고?
더 이상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어서!"
"아, 알겠습니다! 호세인!"
…
…
레른의 등을 떠밀며 사람들을 다그치는 한편, 리하인에게도 우리가 처한 사태에 대해 알렸다.
이에 믿을 수 없다는 눈치로 수레벽을 오른 그녀의 입술에서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길어야 100m.
찐득한 살기가 일렁거리는 검은 물결은 금세 턱 밑까지 차올라 있었다.
"...."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리하인이 불현듯 레이피어의 검병을 붙잡은 팔에 힘을 주며 결연한 눈빛을 내비친다.
뭐지.
뭘 생각하는 걸까.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찰나.
탁―
"안 됩니다."
누군가가 리하인의 팔목을 붙들었다.
긴 세월 내내 그녀를 옆에서 보필해 왔던 젠슨이었다. 그는 리하인이 보인 눈빛만으로도 마음을 읽었는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희생을 한다면 제가 합니다. 그게 가문을 모시는 기사의 자세입니다."
'아.'
나는 젠슨의 나지막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리하인이 무얼 결심했는지 깨달았다. 폰스 마을의 전 촌장 클린트처럼, 자기 목숨을 내걸고 유인전을 치르려 했다는 걸.
더하여 그녀의 결단을 젠슨이 이어받으려 한다는 것을.
"둘 다 그만둡시다."
말려야 했다.
둘 중 한 명이 나선다면 어그로야 확실하게 끌어 주겠지만… 나는 한 명의 희생자도 만들고 싶지 않거든.
그러므로… 당신네들의 희생 플레이는 비장의 한 수로 남겨 두고, 우선은 내 방법부터 동원해 보자고요.
"스콰."
번쩍!
"히이이이이잉!!"
"…그 말은 아까."
"자네 혹시, 소환사였나?"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드릴 테니 저쪽부터 정리해 주시죠들. 이쪽은 제가 알아서 해보겠습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두 사람을 무시하고 스콰의 엉덩이를 때렸다.
일전의 경험이 있어서인가?
"잘 부탁한다."
"히이이잉!!"
녀석은 내 말에 짧은 투레질을 끝으로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즉시 발굽을 내리찍으며 일직선으로 내달리며 언덕을 무대로 활동을 개시했다.
나는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다.
"뭣들 합니까. 시간 없습니다."
7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