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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 40-50

40화

감정이라곤 1도 실리지 않은 A.I의 냉정한 부고(訃告)에 혼란했던 정신이 확 깨어났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여전히 확신은 없지만, 또다시 고심하는 일이 있더라도 일단은 가야 한다.

"어디라고 했습니까."

"예?"

"앞장서시죠. 출발해야겠습니다."

포기를 할 때 하더라도.

발만 동동 구르다 타의에 의해 끝나는 것보단 내가 원해서, 내 자의적인 결정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 * *

"조심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리고… 꼭 부탁 드리곘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죠."

"칼리야스의 축복이 있기를."

요하네스의 진심 어린 기도를 마지막으로 나는 크린 리벳을 위시한 자경대 간부 넷과 함께 말에 올라 황혼을 가르며 프로미카 굴로의 원정을 떠났다.

마을에서 토성까지는 약 30km 남짓.

부지런히 이동한다면 자정 전에는 도착 가능한 거리였다. 말들을 다그친다면 훨씬 빨리 다다르겠지만, 굳이 무리는 하지 않았다.

본 구출 작전의 중점은 '야습'.

야습(夜襲)이란, 문자 그대로 밤에 하는 공격. 그러므로 이 전술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최소한 자정은 지나야 했다.

끓어오르는 수면 욕구로 인해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새벽이야말로 최적의 타이밍이었으니까.

하여 체력도 아낄 겸 척후병이나 경계병에게 발각될 확률도 줄일 겸. 불안한 심정과는 달리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며 침착하고 또 은밀하게 진군하길 세 시간여.

"이쯤에서 내리시죠."

스타팅 포인트였던 언덕배기를 거치며 세상이 깜깜해질 무렵, 길잡이 역할을 맡아 선두에서 달리던 크린 리벳이 우리를 멈춰 세웠다.

온통 초록빛이던 대지 한쪽으로 생뚱맞게 갈색 빛깔의 토양이 드러나던 지점이었다.

"저게 프로미카 영역의 특징입니다."

크린 리벳은 듬성듬성 펼쳐지는 황토를 보고 그리 얘기했다.

평균 사이즈가 1m에 이르는 체구에 무얼 하든 수십, 수백 마리가 떼 지어 다니는 공동체 생활로 설사 인간이라 하더라도 무참히 찢어발기는 프로미카들.

그 덕택에 한 번 들고 일어나면 엄청난 공격력을 자랑하나 장점이 있다면 단점도 있나니, 그들을 위대한 사냥꾼으로 만들어 주었던 커다란 덩치와 바글바글 몰려다니는 집단성이 이따금씩은 도리어 피식자들의 눈에 너무 잘 띈다는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특수한 용액을 분비해 주변의 토양을 바꿔 버린다고 한다. 검붉은 외피를 숨길 만한 적갈색의 황토로. 예컨대 보호색의 자체 발현이었다.

더불어.

"또한 이 황토를 물에 섞은 뒤에 불로 가열하면 금세 딱딱한 돌처럼 변합니다. 건축에 쓰기 좋죠. 생명의 샘에서 퍼낸 물을 사용하면 몇 배로 단단해진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랍티오 용병단이 이곳을 콕 집어 거점화한 곡절도 여기에 있었다.

짤막하게 이야기를 마친 크린 리벳은, 요새 건설 노역에 투입된 마을 주민들이 떠올랐는지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 곧 감정을 추스르곤 우거진 수풀 안쪽에 말들을 숨겨두고서 재차 우리를 이끌었다.

얼마나 자주 왔다 갔는지, 어두컴컴한 환경 속에서도 그와 자경대 간부진의 발걸음은 쾌속하기 그지없었다.

익숙한 것도 있겠지만.

애초에 태어날 적부터 들판을 구르고 말을 타며 수렵으로 먹고사는 사람들답게 몸놀림 자체가 나 못지않게 재빨랐다.

인간의 신체는 문명이 발전될수록 약해진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폰스 마을의 주민들도, 페루스 마을의 주민들도 하나같이 어지간한 생환자들보다 뛰어난 실력자들이었다.

* * *

"…저깁니다."

길을 나선 지 세 시간 반.

앞서가던 크린 리벳의 말에 나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 멀리.

아슬아슬한 시야의 끄트머리로 시뻘건 불빛 밑으로 흐릿한 성곽의 형태가 보였다. 좀 더 접근하니 차차 선명해지는 성채의 규모는 크린 리벳 등이 알려 준 대로 굉장했다.

성벽의 추정 높이만 5m 이상.

넓이도 상당한 듯 좌우 끝자락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토성(土城)이라길래 작달막한 크기를 상상했는데.

'성은 성이라는 건가.'

하기야.

용병단만 해도 적게는 80에서 많게는 100여 명에, 페루스 마을을 비롯해 체르바 백작령의 여러 곳곳에서 납치한 이들도 물경 수백에 이른다고 했으니 웬만한 마을보단 커야 마땅하다.

그러나 저 요새의 진면목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오면서 말씀드렸다시피, 입구에는 문이 없습니다."

출입문(出入門)의 부재였다.

모르는 이가 듣는다면 그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겠지만, 크린 리벳의 말처럼 실제로 저 요새에는 문이 존재하질 않았다.

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드나드는가? 정답은 '사다리'였다. 성벽 한 면을 일부러 낮게 시공한 뒤 기다랗게 제작한 사다리를 걸쳐 안팎을 오고 갔다.

편하게 문을 달면 될 것을 구태여 어렵게 돌아가는 원인은 추측하건대 좀비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언데드의 약점은 낮은 지능.

2차 진화체인 듀라한조차 굽어보는 최상위 언데드는 어떨지 알 수 없으나, 그 미만의 언데드들은 사다리같이 특수한 도구는 다루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다소 번거로운 면이 있더라도 안전을 택한 듯싶었다.

혹은.

현시점에선 건축 재료라고 해봐야 황토밖에 없으니, 추후에 솜씨 좋은 기술자와 다양한 재료를 구해 재정비하려는 계획일 수도 있다.

뭐.

그거야 중요한 게 아니니 패스.

"해서 성내로 진입하려면 저 사다리를 타야 하는지라 경계병들도 사다리 쪽을 집중적으로 관리합니다.

"무작정 들어갔다간 걸릴 공산이 크겠군요."

"맞습니다."

"흐음."

나는 크린 리벳의 대답에 턱에 손을 괴고 고심에 잠겼다.

천운이 따르지 않는 한 100명 중 99명은 들킬 거라는 저 출입구를 어찌 뚫어야 할까.

첫 번째로 드는 공략법은 '저격'이었다.

두 시간마다 교체되는 열 명의 경비병들을 한꺼번에 저격해 암살한다면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을 테니…라고 중얼거리다가도 해당 방법은 즉각 폐기해 버렸다.

크린 리벳이나 자경대가 훌륭한 궁사인 건 맞지만, 일 수에 화살 두 발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려 정확하게 적의 목숨을 빼앗을 신기는 대륙 전체에 위명을 떨쳐 울리는 명사수에게나 허락되는 재능이었으니까.

흐음.

뭔가 마땅한 방안이 없을까?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한참을 골몰하던 참이었다.

"…아."

문득.

괜찮은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 * *

어슴푸레한 시각.

"흐으으으읏, 하. 졸려 뒈지겠네."

"그러게나 말이야. 이때가 제일 힘들 다니까?"

타닥타닥 횃불 타들어 가는 백색 소음만이 아스라이 흘러나오고 있는 성벽 위.

따듯한 온기를 맞으려 화로를 삥 둘러선 남자들이 늘어지는 하품을 손끝으로 쳐내며 투덜거렸다.

어찌나 졸려 보이는지, 영혼을 짓누르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 연신 눈을 껌뻑이는 게 금방이라도 쓰러져 잠을 청할 듯했다.

아니.

"으읍! 아...."

"인마, 그만 자. 그러다 걸리면 나까지 욕 먹는다고."

"나 안 잤어."

"뭐라는 거야, 이 새끼는. 잠꼬대 그만하고 일어나라고."

이미 몇몇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군기가 바짝 선 군대였다면 곧장 경을 칠 노릇이지만. 이들은 용병. 개중에서도 남 등이나 쳐 먹고 사는 도적 떼였다. 더구나 이들에게는 흑야의 주인들, 산 자들을 찾아 떠도는 언데드들에게서 육신을 보호할 드높은 성벽도 있는 바.

"에스 다섯 닢."

"열 닢."

"아, 돈 없다고."

"지랄하지 마. 어제 크록스 놈이랑 패 돌리는 걸 내가 뻔히 봤는데 뭔 돈이 없어. 어디 한번 주머니 까볼까?"

"하, 쓰벌. 알겠다. 일곱 닢. 그 이상은 진짜 힘들어."

"콜. 코 골지 마라."

"날 뭘로 보고. 그럼 부탁한다."

느슨해질 대로 느슨해진 경계병들은 아예 파트너에게 돈을 쥐여 주며 대놓고 숙면을 취하기도 했다.

그렇게 각자만의 방식으로 따분한 시간을 보내던 와중 은은하게 부는 바람결에 난데없는 불협화음이 끼어들었다.

- 그어어어어어....

- 으어어어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지겹게 들었던 언데드의 하울링이었다.

"뭐야, 또 왔어?"

막 동료의 수면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동화를 일곱 닢이나 챙겨 희희덕거리던 찰리는 이걸로 무얼 할까 즐거운 망상의 나래를 펼치다 말고 잔뜩 짜증 난 표정으로 몸을 홱 돌렸다.

자신이 알기론 레그나토르(regnátor: 군주) 성 일대에는 괴물들이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프로미카들을 처리하는 단계에서 몇 차례.

그 이후로도 인근 마을 약탈을 일삼으며 수시로 쓸어 버렸으니까.

그런데 또 괴물이 나타났다.

"놓친 게 있었나? 아님 이틀 전에 턴 거기서 따라왔나?"

대관절 저놈들은 어디서 이렇게 계속 나타나는 건지.

- 그어어어어!

- 으어어어!

"씁, 내사 신경 쓸 바는 아니지."

"크흐흐으음, 크흠. 크흐흐흐흠."

"이 새끼는 코 골지 말라니까."

아주 진절머리난다는 눈치로 바깥을 쓱 둘러보던 찰리는, 이내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았다.

수백은커녕 수십도 안 되는 너덧 마리였다.

상부에 알려 봐야 보상은커녕 욕만 먹을 숫자였거니와 위에서는 분명 '발견한 놈이 처리하고 오도록' 따위의 귀찮은 명령을 내길 게 뻔했다.

"크흐으으으음."

"이놈의 새끼는 잘도 자네. 나도 잠이나 때릴까."

이럴 때는 외면이 답이었다.

* * *

- 뭐야, 또 왔어?

포복한 채로 땅바닥을 기며 1m, 1m 간극을 좁혀 가는 내 머리 위로 누군가의 혼잣말이 스쳐 지나갔다.

- 놓친 게 있었나? 아님 이틀 전에 턴 거기서 따라왔나?

사다리 쪽에서 완전히 시선을 팔렸는지.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말투로 연신 뇌까리는 남자.

- 내사 신경 쓸 바는 아니지.

- 크흐흐으음, 크흠. 크흐흐흐흠.

- 이 새끼는 코 골지 말라니까.

그 옆으로 태평하게 코를 고는 소리도 나부꼈다.

크린 리벳에게 듣기는 했다.

언데드도 감히 무장을 갖춘 용병단에게 항거할 배짱 있는 마을도 없어 기강이라는 게 사라지진 지 오래라고.

하지만 그래도 선이 있는 법인데.

'취했나.'

계속되는 성공과 전공에 취해도 제대로 취한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감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경계에 소홀해도, 어차피 사다리만 잘 지키면 상관없지 않겠냐는.

그거 다른 말로는 '오만'이라고 부르는 건데 말이지.

우우우웅―

'흐읍, 후.'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탁!

후우우우욱―

검은 형체가 하늘을 날았다.

* * *

- 크흐으으으음.

- 이놈의 새끼는 잘도 자네. 나도 잠이나 때릴까.

"후."

까만 그림자 밑으로 숨어 들어가는 내 등으로 경계병들의 속삭임이 붙었다 떨어졌다.

나는 그 변함없이 차분한 말투로 내 도약에 한 치의 실수도 없었음을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믿고 있기는 했다.

최근에 새롭게 익힌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이 스킬의 강점은 '유령에 홀린 듯하다'는 문구처럼 한순간 상대의 인지력을 흩트리는 보법.

준기사급 정도면 몰라도.

일반 병들의 감각쯤은, 더욱이 방심할 대로 방심한 병사를 속이는 것쯤은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것보다 쉽다 여겼으니까.

…만.

실전에서는 처음이라 걱정했는데.

'좋아.'

흡족한 얼굴로 슬쩍 주억거린 나는 다시금 자세를 수그렸다.

41화

안과 밖을 구분 짓는다면 대충〈Stage 2: 토성 내부〉가 될 안쪽에 입성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는 '장난감 세계'였다.

눈앞의 풍경이 온통 사각형으로 되어 있어 흡사 거인들이 끼워 맞춰 놓은 조립식 장난감 나라에 방문한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언데드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알 수 없어 최대한 빠르게 시공을 해야 하다 보니 황토를 가져와 주구장창 벽돌만 찍어 낸 모양이었다.

이거야 원 다양성이라고는 1도 없는 국가였다.

더군다나.

인질들이 잡혀 올 때마다 끌고 온 인원수에 맞춰 마구잡이로 건설했는지 늘어선 벽돌집들을 자세히 보면, 먹고 살기 위해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빈민가처럼 들쑥날쑥하게 지어진 상태.

그 덕에.

타닷―

후우욱!

훅!

"응?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소리? 소리는 뭔 헛소리야. 졸았냐? 이 새끼는 저번에도 쳐 자다가 걸려서 두들겨 맞았는데도 정신을 안 차리네."

"잠이 많은 걸 어떡 하냐고. 까놓고 말해서 노예들이 탈출하는 거 봤냐? 일전에 몇 놈 조져 놓은 이후로 한 놈도 없었다고. 한 놈도."

"하긴. 자쿠였나, 차쿠였나. 그놈 아내가 꽤 예뻤는데."

"진짜?"

단 한 명의 치안대와도 맞닥뜨리지 않고 얼추 30여 분 만에 성내 중앙 지점에 도달한 나는 광장에 발을 딛자마자 작게 감탄했다.

"…이야."

여기가 왕이 사는 곳이오.

대놓고 광고라도 하듯 능히 수백 평은 될 법한 초대형 가옥이 떡 하니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물론.

내부 정보가 없는 만큼 함부로 단정 짓는 건 금물이다만.

'확실해.'

나는 웅장하다 못해 광대한 궁궐을 보며 단언했다.

커도 좀 커야지.

다른 집들에 비해 열 배, 스무 배나 거대한 대궐에 거주할 수 있는 사람이 수괴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이건 암만 따져 봐도 틀림이 없었다.

저곳이.

나의 최종 목적지가 분명했다.

* * *

- 어후, 쌀쌀하네.

- 공감. 이제 불 없으면 추워서 경비도 못 서겠다.

- 그러게나 말이야. 이쯤 됐으면 슬슬 노예들 데려와서 세워도 되는 거 아녀?

- 노예들을 뭘 믿고.

- 뭘 믿기는. 인질을 믿는 거지.

- 하기야. 애들만 꽉 붙잡아 두면 부모들은 꼼짝도 못 하니까.

정문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나를 더욱 확신에 차게 만드는 경비들의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총 두 명으로.

랍티오 용병단의 일원인지 무장이 잘 된 병사들이 화롯가 옆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음.'

나는 그들의 장비 수준을 체크하다 불현듯 안색을 굳혔다.

어디서 구해 왔을까 싶은 큼지막한 대문 주변으로 장승처럼 세워 놓은 장대에… 도합 일곱 개의 인두(人頭)가 걸려 있던 탓이었다.

아까 흘려 듣기로 탈출 주동자를 포함해 몇 사람을 본보기로 처형했다고 하더니, 단순히 목을 베는 걸로도 모자라 인질들에게 경고하듯 피가 마르고 닳아 없어질 때까지 효수(梟首)를 해뒀다.

…문제는.

개중에 겨우 열 살도 안 됐을 꼬마 아이도 포함됐다는 점이었다.

애다, 애.

한국으로 치면 기껏해야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을. 그 처참한 비극에 뜨겁게 달아오르던 피가 확 하고 차게 식었다.

"...."

우득―

개인적으로 애들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선호도와는 별개로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하는 법이었다.

설사.

지구와는 생판 다른 이세계라 할지라도. 결국 애들은 애들이고, 상식은 상식이었다. 혹 누군가 그 기본적인 진리마저 내버렸다면.

스릉―

나도 그들을 동등한 인격체로서 대우해 줄 이유가 없다.

'…인두겁을 쓴 괴물, 언데드와 다를 바 없다.'

흔들리던 의지가 바로 서는 순간이었다.

* * *

칼날이 목을 치자 시뻘겋고 뜨거운 선혈이 치솟았고, 기력을 잃은 덩어리가 맥없이 풀썩 쓰러진다.

하나의 괴물이 대가리를 잃고 고꾸라지는 일련의 이야기는 참으로 단출하고 초라했다. 근사한 미사여구를 붙일 틈도 없었다.

베었고, 죽는다.

단지 그게 전부였다.

첫 번째도.

"날 밝으면 수용소 가서 한 판―"

서걱!

쿠웅―

두 번째도.

썩은 짚단 베어 버리듯 무심하고도 무성의하게 죽음을 선사한 나는 토악질을 하지도, 손을 벌벌 떨지도 않은 냉담한 얼굴로 땅바닥에 나뒹구는 두 구의 사체를 지나쳐 대문을 열었다.

첫 살인.

의외로 별 감흥이 없다. 놈들을 '괴물'이라고 간주한 덕분일까? 아님 이 또한 퀘스트, 즉 시스템의 영향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패시브 스킬 '위대한 발걸음'에 달린 정신 및 의지 강화의 효능인가?

어쩌면 내 생각과 달리 수많은 언데드를 바스러뜨리며 이미 죽음에 적응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짧으면 며칠에 한 번, 길어도 일주일이면 전장에 소환돼 시산혈해를 뒹굴어야 했으니 뭐가 됐든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정신적인 쇼크로 계획이 꼬일 일은 없었으니까.

끼이이이이이익!!

"응? 벌써 교대 시간인가?"

"한참은 더 남았는데?"

"근데 문이 왜 열려?"

"카르티지 자식, 또 농땡이 피우려고 하는 거 아녀?"

기름칠이 덜 됐는지 삐그덕거리는 소음을 내며 활짝 벌어지는 마경의 입구.

그 뒤편으로 건장한 괴물들의 그르릉거리는 소리에 나는 더 지체할 거 없이 곧장 땅을 박차며 환두대도를 찔러 넣었다.

후우우우욱―

콰직!

"커헉!"

"펠, 드?"

칼끝을 타고 전해지는 묵직한 촉감과 단말마의 비명을 통해 또 하나의 괴물이 바스러졌음을 인지한 나는 움켜쥔 도병을 가슴에서 뽑으며 벼락같이 좌측을 갈랐다.

제 동족의 죽음을 목격하고서도 어리둥절한 낯짝으로 벙쪄 있던 괴물의 목덜미를 파고드는 환두대도.

이윽고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사위가 고요해졌다.

코를 찌르는 비릿한 피 냄새에 미간을 찌푸린 나는, 이내 칼끝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주저 없이 대궐의 중심으로 발을 내디뎠다.

대궐 내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을 향해.

마음 같아서는 랍티오 용병단 소속 괴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끝장을 보고 싶었으나,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했다.

내가 가진 체력은, 내가 가진 마력은 무한하지 않다. 소란이 커져서 괴물들이 한데 뭉치기라도 할 경우 제아무리 나라고 해도 감당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머리를 친다.'

현재 내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는.

왕(王).

이 마경을 다스리는 킹을 잡는 것이었다.

타닷―

쿠우웅!

* * *

달린다.

대문 안팎으로 버려진 네 구의 사체가 발각되어 난리가 나기 전에 당도하고자, 은밀함은 버리고 오로지 스피드에 치중하며 온 힘을 다해 200여 미터에 달하던 간격을 다섯 호흡만에 주파했다.

급격하게 가까워지는 왕의 침실 앞으로.

"저, 저거 뭐냐?"

"그러…게?"

또다시 두 마리의 경비가 눈에 들어왔다.

최후방 수비라고 나름 신경을 썼는지 전신에 방어구를 두르고 양손에도 칼과 방패가 한 자루씩 쥐고 있는 정예병이었다.

다만.

공들여 키웠을 것치고 나를 대하는 반응이 영 어정쩡했다.

설마 제 왕을 노리는 자객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본인들에게 닥친 사태를 파악하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그게.

후우우욱!

타닷―

"아?"

"어."

놈들이 사인(死因)이 되었다.

슈우우욱―

서걱!

촤아아아아악!!

발바닥에 힘을 주며 좌에서 우로 올려치는 역 대각선 베기가 두 놈의 목덜미를 쓸었다.

나는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핏물을 백스탭으로 피하곤 바닥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주워들며 가만히 서서 침실 문을 응시했다.

저 문만 열면 왕이 나올 터.

준기사급 괴물.

과연 듀라한보다 강할까, 약할까.

'붙어 보면 알겠지.'

흐트러졌던 숨을 고른 나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침실의 문을 열었―

슈우욱!

고, 부지불식간에 퍼런 서슬이 솟구쳤다.

막 개방되던 문틈 사이로 랍티오 용병단의 단장이자 괴물들의 우두머리가 몰래 찾아온 불청객의 심장을 찢어발기려 제 이빨을 내밀고 있었다.

그야말로.

불의의 일격이자 완벽한 기습이었다.

내가.

…커엉!

'방패'를 줍지 않았더라면.

* * *

"후."

나는 방패 정중앙을 때리고 돌아간 검의 궤적을 뒤쫓으며 짤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팔뚝을 타고 오르는 검력에 뼈가 다 시큰거렸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만약 방패를 챙기지 않았더라면, 가슴팍이 꿰뚫렸을 테니까.

적을 나와 비슷한 레벨이라고 상정했을 때, 어쩌면 습격을 깨닫고 역습을 노릴지도 모른다고 계산했는데, 그 판단이 완벽하게 들어 맞았다.

"제법 운이 좋은 쥐새끼로구나."

저놈은 단지 재수가 좋았다고 믿고 싶은 거 같지만 말이다. 나는 열리다 만 문짝을 부수듯 당기며 바깥으로 나온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족히 2m는 될 듯한 신장.

찌릿!

찌릿!

근육으로 뒤덮인 몸과 맹수를 닮은 눈동자와 마주하자 요란하게 경종을 울리는 육감.

의심할 여지 없이 랍티오 본인이었다.

놈은.

불시의 일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내 모습에 검을 늘어뜨린 채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슬그머니 살펴본 1m 남짓한 길의 검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 용병에 걸맞게 날 한쪽이 톱의 형태를 띤 기형 무기였다.

저런 걸 '소드 브레이커(Sword Breaker)'라고 하던가.

잘못 걸린다면 두터운 도신을 가진 환두대도라도 부러뜨릴 듯한 기세라 주의를 요해야 할 성 싶었다.

"처음 보는 도를 쓰는군. 쥐새끼치곤 무장도 훌륭하고. 어디서 온 거냐."

랍티오가 환두대도에 관심을 보이는 동안 조심해야 할 부분들을 정리한 나는.

"네 엄마가 보냈다. 집 나간 개새끼 좀 데려와 달라고."

"이런 미친―"

탁―

콰아아앙!

한마디 도발을 내뱉으며 왼손에 걸쳤던 방패를 미련없이 투척하고서 발을 굴렀다.

친구가 될 것도, 명예를 두고 다투는 사이도 아니다.

괴물을 상대할 땐.

우우우우웅!!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칼침 한 방이면 족했다.

당연히.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파직―

콰끄르르르릉!!

초장부터 풀 파워였다.

"크읍! 이 새끼가!"

날아오는 방패를 쳐내느라 뒤늦게 대응에 나섰던 랍티오는 별안간 휘몰아친 뇌기에 기겁해 검을 일자로 휘둘렀다.

준기사급이라더니.

아른헬의 평가가 옳았음을 증명하듯 그 짧은 새에 마력을 끌어모았는지, 놈의 검신에서도 푸른 빛무리가 일렁이는 중이었다.

후우웅―

콰아아아아앙!!

일순간에 벌어진 마력과 마력의 격돌은 무지막지한 충격파를 형성하며 주위를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다.

듀려한과의 전투 당시 비스무리한 장면이 연출 됐었지만, 그때와는 또 달랐다.

마치.

잘못 밟은 지뢰가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폭발하는 기분이었다.

"크아아악!!"

"크읍!"

그 반발력으로 서너 걸음이나 밀려난 나는 서둘러 자세를 고쳐 잡으며 전방을 노려보았다.

서서히 걷혀 가는 먼지 구름 너머로 헝클어진 옷가지에 살갗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를 뒤집어쓴 랍티오의 형상이 보였다.

나보다 더한 대미지를 받았음을 방증하듯 무척이나 추레한 몰골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은 본인이 그런 처지에 놓였다는 게 화가 나는지 이를 벅벅 갈며 검을 치켜세웠다.

그러자.

화륵―

기름 먹인 불꽃을 연상케 하듯 검신을 휘감는 푸른 마력.

어둠마저 밀어내는 에너지의 발현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분노로 잔뜩 일그러진 눈빛을 보건대 딱히 묻지 않더라도 놈이 지금부터 전력을 다할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흐아아아아아아!!"

바야흐로.

괴물의 왕과 괴물 사냥꾼 간의 본격적인 결전을 알리는 신호탄의 점화되던 순간이었다.

42화

진심을 다하기로 작정한 준기사급의 진정한 실력은 어느 정도일 것인가.

"흐아아아아아아!!"

화아아아악―

콰아앙!

나는 채 1분도 가지 않아 인정해야만 했다.

그가.

나보다 강하다는 것을.

가진 마력을 죄다 끌어모아도 스킬 네 번이면 오링이 나는 나와 달리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검을 연속으로 휘두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짐작이야 했다.

무술은 동영상으로, 나머지도 시스템의 보정을 받아 몸집을 불린 지구인과 최소 몇 년에서 길게는 십수 년에 달하는 단련으로 작금의 실력을 이룬 칼리야스인.

둘이 붙는다면 후자가 유리할 것임은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었으니까.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체 능력 자체는 거의 대등했다.

그간 차곡차곡 축적해 왔던 수많은 경험치와 영혼석, 거기에 다수의 아이템까지. 이것들은 결단코 준기사급의 괴물이라 하더라도 마냥 승리를 낙관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렇다면.

"흐하하하하!!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치는구나!"

후우우우웅!

콰앙―

쾅―

"크읍!"

저 괴물이 나를 이토록 쉽게 밀어붙일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거야 뻔하다.

대륙 곳곳을 활보하며 치러 왔던 무수한 실전과 그 실전에서 살아남으며 체득한 감각… 이른바 직접 보고 듣고 접하며 쌓인 '진짜 경험치'가 놈과 나 사이의 격차를 벌린 원인이었다.

후우우우웅―

카앙!

"크흡!"

"푸흐흐흐,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크흡, 크흡이 전부인 게냐? 기세 좋게 달려들더니만, 역시나 쥐새끼는 쥐새끼였군."

반원을 그리며 그어진 검.

그 궤적을 읽고 도를 좌하단에서 역대각선으로 비껴 올리며 막아내기 무섭게 조롱 섞인 말투로 도발하며 오른팔을 잡아당기는 랍티오.

일반적이라면 본인의 검을 회수하기 위한 동작이었을 테지만 이번엔 달랐다.

카각―

소드 브레이커의 톱날이 내 도신과 맞물린 까닭이었다.

우연찮게?

아니다.

오랜 시간 기형검을 사용하며 완성된 완벽한 노림수였고, 그 움직임에 중심이 갸우뚱거리던 이후에.

후우우욱―

콰직!

"큭!"

랍티오의 발끝이 내 복부를 후려쳤다.

구척장신(九尺長身)의 몸으로 차내는 로우 킥의 각력은 상당했다. 피격 즉시 숨이 턱 막혔고, 목구멍에선 피 맛이 느껴졌다.

그나마 매직 등급 방어구 세트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초보자용 장비였거나 맨몸이었다면 갈비뼈가 나가든 내장이 상하든 치명상을 입었을 법한 타격이었―

카각!

"크흐흐, 어딜 빠져나가려고 하느냐! 뱃가죽이 꽤나 단단한가 본데, 몇 방이나 버틸 수 있는지 보자꾸나!"

후우우웅―

쾅!

복부에서 올라오는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도를 비틀어 빼내려던 차에 역방향으로 검을 뒤튼 랍티오의 발차기가 다시금 하단을 직격했다.

올가미에 걸린 새처럼 스스로 놓기 전까진 절대 풀어 줄 일이 없을 거라 얘기하듯 집요하게 도신을 붙들고 연신 갈겨 대는 하체.

그 연타에 멘탈이 혼미해졌다.

좀비와 구울, 듀라한에게서는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획기적이고 기이한 전투 스타일.

"어디 버텨 봐라! 뼈째로 박살 내주마!!"

후우우욱!

콰앙―

"크으읍!"

그로 인해 나는 질질 끌려다녀야만 했다.

이럴 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아무리 뇌를 다그쳐 봐도 이미 사고 회로가 정지된 양 새하얘진 머릿속은 채색될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어설프게 다리를 들어 방어하는 게 고작.

"언제까지!"

퍽!

"버티나!"

퍼억!

"보겠다! 이 쥐새끼야!!"

쿠우우웅!

광기 어린 포효와 뒤엉켜 연달아 울려 퍼지는 격타음에 파묻혀 가까스로 부여잡던 이성마저 꺾여 가는 타이밍이었다.

…땡땡땡땡떙!

느닷없는 비상종 소리가 잠잠하던 일대를 일깨운 것은.

무슨 일이지?

"으응?"

갑작스러운 소동에 날 걷어차다 말고 북쪽으로 향하는 랍티오의 시선. 누구에게 있을 법한 무의식의 발로였다.

혹은.

나를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며 생긴 여유일지도 몰랐다.

뭐가 되었든.

'...!'

철저히 짓밟히던 나는 그 잠깐의 틈에 눈을 번뜩였다.

기회였다.

개미지옥 같은 구속에서 해방시켜 줄 유일한.

우우우우우웅!!

이 찬스를 놓칠 생각이 없던 나는, 순식간에 마력을 회전시키며 왼손을 떼어 허리춤을 더듬었다.

여기까지 1초가 걸렸다.

"…감히!"

초침이 2를 가리키는 찰나에 이상함을 감지하고서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살짝 느슨해졌던 검에 재차 힘을 가하는 랍티오.

그 직후 왼손이 빠진 탓에 힘의 균형이 망가지며 놈이 크게 휘청거렸다.

꼭 팽팽하게 유지되던 줄다리기에서 한쪽이 말도 없이 줄을 놔버린 것 같은 꼴이랄까? 변수에 능한 노련한 용병답게 밸런스를 되찾는 듯싶었지만, 무너진 것은 무너진 것.

그 덕에 5초를 더 벌었다.

합쳐서 6초가 흘러가는 가운데 어느새 내 손에는 작은 물체가 들려 있었다.

끝에서 끝까지 끽해 봐야 30cm도 안 되는, 아콰 남작령 폰스(fons) 마을에 살던 한 사냥꾼의 부인께서 부탁을 들어 준 보답으로 선물한 '손때 묻은 단검'이었다.

보기엔 아무 쓰잘데기없는.

이 급박한 와중에, 이 귀중한 시간을 대가로 획득하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기 같았지만.

틀렸다.

요 단검이야말로 나를 올가미 바깥의 세상으로 인도해 줄.

파직―

하나뿐인 열쇠였다.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파직―

…콰르르르릉!!

기회를 포착하고 7초가 흐르던 참이었다.

* * *

내가 갓 이그니스(ignis) 류(流)의 첫 초식인 섬광(閃光)을 배우던 시기에 한 가지 다짐한 게 있었다.

일차적으로는 거진 1분 이상 소모되던 스킬 시전 시간을 10초대로 줄이자는 것. 선결 과제를 달성했다면 10초를 다시 절반으로 접어 5초 안팎으로 들어가는 것.

"쓰읍, 후우, 후. 후우...."

나는 단 7초 만에 발현한 섬광(閃光)을 되새기며 호흡을 골랐다.

사람이 죽을 위기에 내몰리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던가?

옛말이 딱 맞았다.

여태껏 10초대도 뚫어본 적 없던 내가 이토록 빠르게 스킬을 시전하게 되다니.

그 덕택에 옴짝달싹 못 하고 엉겨 붙어 있던 환두대도를 수거해 냈거니와.

〈비트는 콜루베르의 한 손 검/Magic〉

역으로 랍티오의 기형검마저 빼앗아 버렸다.

워낙 급작스럽게 발출된 섬광에 당황한 놈이 상반신을 덮쳐 오는 벼락을 가드하려 양팔을 모으며 벌어진 결과였다.

나는 그 검을 힐끗 쳐다보다.

"제엔, 장!"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를 걷어내며 어기적어기적 몸을 일으키는 랍티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적잖은 부상을 입었는지 욕지거리를 내뱉는 놈의 입가에서 시뻘건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긴.

좀 전과 다르게 섬광을 순수 몸뚱이로 받아냈으니, 아마 당분간은 정전기만 봐도 깜짝깜짝 놀라게 될 거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니까.

그래서.

'슬슬 해볼 만한가.'

나는 마침내 완전히 기립한 랍티오를 면밀히 살피며 머릿속으로 양측의 전황을 따져 봤다.

성벽을 넘을 때 한 차례, 놈과의 교전에서 두 차례.

앞으로 남은 마력이라고는 스킬 1회 사용이 최대치인 나와 피를 흘리고 있으며 무기를 빼앗긴 맨몸의 랍티오.

자.

승산은 누구에게 있는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높게 쳐줘도 여전히 6 대 4.'

운이 따라 주어 강제로 해검(解劍)을 시켜 놓기는 했으나, 실력 격차는 변함없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필시.

놈이라면 맨손 박투로도 나를 압도할 거다. 겨뤄 보며 명확하게 체감했다. '진짜 경험치'의 위대함을. 고로 나는 길을 정했다.

"갈가리 찢어발겨 주마!!"

뽕!

휘이이이익!

퍽―

근접전보단 원거리에서 요격하기로.

결정과 동시에 검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며 허리춤에서 두 개의 병을 꺼내 투척했다. 찰랑거리는 검은 액체가 담긴 기름병이었다.

촤아악!

땅바닥과 충돌하며 넓게 펼쳐지는 검은 그물.

쥐새끼라고 부르던 자식에게 얻어터진 탓인가? 랍티오는 제 주변을 적시는 천라지망에도 일말의 머뭇거림 없이 저 들판에 미친 코뿔소처럼 계속해서 돌진을 거듭했다.

고마웠다.

혹시나 위기감이라도 느끼고 달아나면 곤란했는데, 이래서 '준'기사급인 건가 싶었다. 몇 대 좀 처맞았다고 멘탈이 바스라진 걸 보면.

덕분에 한결 편해졌다.

"크아아아아악!!"

딸깍―

화르륵!

물 반 고기 반.

던지기만 하면 대어가 걸릴 판이었으니까.

곧.

은빛 지포라이터가 새빨간 화망(火網)을 일으켰다.

…화르르르륵!!

* * *

솟아오른 화마가 랍티오를 집어삼킨다.

놈은 난데없는 불길에 다급히 물러나려 했으나, 그래 봐야 불씨는 이미 다리로 옮겨붙은 뒤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놈의 동공은 확장될 대로 확장된 실정이었다.

횃불도, 마력도.

이렇다 할 조짐도 없이 그저 손짓 한 번으로 피어오른 불. 현대 과학으로 빚어낸 마법에 경악하다 못해 기겁한 걸까?

"끄아아아아악!!"

놈의 심정이 어떠하든 간에.

철벅철벅 기름 웅덩이를 밟았던 신발을 시점으로 눈 깜짝할 새에 하반신을 먹어치운 불길로 잠시 후 끔찍한 고통에 짓눌려 몸부림치는 아우성이 전장을 에워쌌다.

바지를 벗는다면 살 수 있을까?

본능적으로 안간힘을 쓰며 하의를 끌어 내리는 랍티오. 나는 그 처참한 광경에 인상을 찡그렸다.

21세기 문명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잡아낸 승기.

그 때문인지 이겼음에도 후련하다는 감정보다 찝찝하고 분한 감정이 더 컸다. 만약 내가 S 랭크 스킬을 모두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더라면 중간 과정이 달라졌을까?

'모르겠다.'

솔직하게 그런다 해도 100% 장담은 어려웠다.

"부족하다. 아주 많이."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돌려 봐도 자꾸만 그려지는 암울한 결말에 근래 들어 쑥쑥 자라던 자존감이 심연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이에 입술을 깨문 나는 쯧 하고 혀를 차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다음에 또 이런 유사한 퀘스트를 받게 된다면, 만일 그때 문명의 이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엔딩엔 패배와 죽음만이 웃고 있을 테니까.

"제대로 된 훈련을 해야 돼."

그러므로 더 이상 낙엽과 나무 따위의 무생물과 치르는 수련은 그만둔다.

인간.

높은 지능을 바탕으로 온갖 창의적 플레이를 보여 줄 사람과의 대련―

…타다다다닷!

"그전에, 우선 여기 일부터."

상념에 빠져 있던 나는 귓가를 간지럽히는 달음박질 협주에 머리를 휘휘 저으며 삼 보를 걸었다.

뚜벅, 뚜벅, 뚜벅.

걸음이 멈춘 곳에는.

"끄아아악!! 끄아아아아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랍티오가 있었다.

이제부터.

"…단장님!"

"…단장님! 무사하십니까!"

"…단장님!"

"다들 정지!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는 이가 있다면, 네놈들 단장의 대가리를 잘라 장대에 걸어 주마."

나의 인질이 되어 줄 본 퀘스트의 공략 도구가.

그럼....

"단장―!"

콰직!

"끄아아아아아악!!"

"거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협상을 시작해 볼까?

43화

내가 이 용담호혈(龙潭虎穴)… 준기사급이 최종 보스인 던전을 두고 용담호혈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나?

음.

현재의 기준에서는 매우 높은 난이도임은 분명하니 틀린 말은 아니지.

아무튼.

요하네스 사제의 부탁을 받아 이 레그나토르 성에 발을 들이면서, 어떤 식으로 이 던전을 공략해야 할까 한 시간이 넘도록 머리를 싸매고 고심했다.

준기사급 괴물을 필두로 80여 명이 넘는 수하들을 처리 혹은 저지하며 서른여섯 명의 마을 주민을 구출하라. 아무리 봐도 나 혼자선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그렇다고 페루스 마을의 자경단을 불러 모으는 것도 힘들었다.

자경대라고 해봐야 간부진 다섯을 포함해 열 명 남짓한 소수였거니와 애초에 그들은 페루스 마을의 기둥이었다.

언데드란 재앙이 말끔히 해결되지 않는 한 언제고 좀비들이 쳐들어올 수 있는 이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페루스라는 지역을 보호해 줄 방패. 자칫 사고라도 나서 그들이 다 죽는다면… 주민 일부를 넘어 마을 전체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하여 어쩔 수 없이 혼자서 감당해야 된다고 여겼고, 그에 맞춰 답을 간구했다.

그게 바로.

"단장―!"

콰직!

"끄아아아아아악!!"

"거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협박― 아니, 협상이었다.

대가리를 생포한 뒤 각자의 인질을 교환하는 무척 흔한 방식이었는데, 이 교섭의 관건은 놈들이 제 우두머리를 소중한 인물로 인식하고 있냐는 부분이다.

도적 떼의 특성상.

여차하면 '응, 그냥 죽여. 그놈만 없으면 내가 우두머리야.'라고 대답할 가능성도 있는 탓에 내심 걱정스러웠지만, 나는 속내를 숨기며 아직까지도 랍티오의 아랫도리를 물어뜯고 있던 화마를 제거하려 환두대도를 휘둘렀다.

후우욱!

후욱!

서거걱―

"끄아아악!!"

종이 한 장 차이로 살과 옷을 분리해 원하는 구석만 잘라내는 수준 높은 도법을 구사하지는 못하는지라 칼질이 가해질 때마다 비명이 솟구쳤지만, 개의치 않고 붉게 물든 옷가지를 뜯어냈다.

살갗 조금 잘리면 어떤가?

애당초 인질로 쓰려면 한동안 반항하지 못하게끔 근육을 일정량 끊어 둬야 했다.

물론.

이러다 과다 출혈로 죽어 버린다면 말짱 도루묵이니.

뽕!

"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악!!"

"단장님! 이 무스카만도 못한 새끼가!"

"아예 죽여 버리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멈춰. 그리고 이놈 목숨은 걱정 마라. 포션을 부어 줄 거니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기를 기다렸다가 약을 뿌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촤아아아아악!!

['하급 회복 물약'을 사용합니다.]

[급속 상처 회복 및 3분간 자연 치유력이 30% 상승합니다.]

"이건 화상 치료제다."

뽕!

쪼르르르르륵―

['하급 화상 회복 물약'을 사용합니다.]

[화상과 관련된 급속 상처 회복 및 3분간 화상과 관련된 상처에 한해 자연 치유력이 50% 상승합니다.]

협상만 잘 이루어진다면 무사할 거다.

그 점을 피력하느라 물약을 무려 두 병이나 부어야 했지만, 뚜렷하게 차도가 보이자 당장에라도 달려들 거 같던 용병들도 움찔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의 접근은 없었다.

오케이.

이로써 확실해졌다.

놈들이 수장의 안위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게. 그게 아니었다라면 필시 지금쯤 되레 잘됐다는 표정으로 포션도 갖고 다니는 황금 고블린을 사냥하려고 손에 든 창칼을 내질렀을 터. 나는 들키지 않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목적하는 바를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다. 이곳에 갇혀 있는 모든 마을 사람들을 풀어 주는 것. 그것만 따라 준다면 이자의 목숨은 물론 포션도 추가로 넘겨 주겠다."

일부러 '모든 마을 사람들'이라는 대목에서 말투에 강조를 주었다. 협상이 원만하게 이루어져 사람들을 구출해 간다 하더라도 며칠은 고사하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금세 페루스 마을을 향한 보복이 가해질 터이니, 그 추격을 최대한 늦추려면 적당한 연막작전은 필수였다.

"저, 전부? 노예들을 전부 해방하라고?"

내가 제안을 마치자마자 부단장으로 추정되는 서른 초반의 갈매기 콧수염 사내가 당혹감과 거부감이 물씬 풍기는 말투로 반문했다.

물경 수백에 이르는 인원을 전원 석방하라는 조건이 저들의 입장에선 가진 걸 다 내놓으라는 압박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때문에.

"으음!"

"아, 안 됩니다! 크로트리아 부단장님! 저희가 놈들을 얼마나 힘들게 잡아왔는데...."

"그럼 단장님이 죽도록 내버려 두자는 거냐!"

"그건, 아니지만..."

수장이 먼저다, 노예가 아깝다 등등등 각자의 의견으로 분분했다. 그 시장통 같던 분위기를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목청이 찢어져라 고통을 토해 낸 랍티오였다.

콰직!

"끄아아아악!!"

"단장님!"

"나는 인내심이 대단치 않아. 싫다면 죽어야지 뭐."

"이, 이 무스카만도 못한 새끼들아!! 빨리! 빨리이이이이이!!"

겨우 새살이 돋아나던 허벅지를 훑는 환두대도에 칼리야스 대륙식 욕설을 내뱉으며 제 부하들을 닦달하는 놈의 아우성에 용병들의 낯빛이 싹 바뀐 것이다.

특히.

핏발 선 눈빛으로 이은 뒷말이 결정타였다.

"금고! 나, 나를 돕는다면 금고의 30퍼센트를 풀겠다!!"

금고(金庫).

그 단어가 목구멍을 비집고 튀어나온 순간 부단장이고 뭐고 너나 할 거 없이 경악한 얼굴로 입을 벌렸기 때문이었다.

여기저기 약탈 다니면서 금은보화라도 꿍쳐 둔 걸까?

자세한 내막이야 알 길이 없지만, 용병들이 랍티오를 함부로 내치지 않은 이유도 저기에 있었구나 싶었다.

어쩐지 도적놈들 주제에 무슨 의리인가 했다.

'그건 그렇고 궁금하네. 뭐 얼마나 대단한 걸 감춰 뒀길래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이 이리 말을 잘 듣는 거냐.'

나는 괜스레 꿈틀거리는 욕심에 입맛을 다셨다.

랍티오의 금고를 털어 '찔러 부수는 모노케로스의 한 손 검' 같은 걸 한두 개쯤 더 파밍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초대박일 텐데 싶어서.

다만.

욕망을 현실로 끌고 오지는 않았다. 앞뒤 분간 못 하고 똥오줌 싸지를 나이는 애저녁에 지났다.

서걱!

"끄아아아아악!! 빨리! 빨리이이이!!"

"코, 콜슨!!"

"옛!"

"가서 노예들을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정문으로 모아라!"

"알겠, 알겠습니다!"

뭐가 됐건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고래고래 악을 쓰는 랍티오를… 아니, 금고를 구하기 위해 용병들이 성내를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채 10분여가 흐르기도 전에 총 381명의 인질을 정문 앞에 집합시켰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다, 다 모았다지 않느냐! 이제 나를―"

콰직!

"끄아아아아악!!"

"닥쳐. 내 눈으로 확인하고 여길 뜨기 전까진 이대로 간다."

나는 왼손으로 랍티오의 목덜미를 쥐고, 다른 손으론 환두대도를 놈의 목젖에 가져다 대며 갈매기 수염을 향해 턱을 까딱거렸다.

앞장서라는 제스처.

그러면서도 인지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사주 경계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그 말인즉슨 들어가 나올 때까지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의미다.

하물며 용병이란 뒤통수 치는데 이골이 난 자들.

방심은 금물이었다.

* * *

"이 새벽에 뭔 난리래?"

"나도 몰라. 갑자기 모으라니까 모았지."

"씨불, 졸려 죽겠는데."

"아흐으으으으으,어후, 나도 눈이 막 감긴다."

랍티오를 위시한 일단의 용병 무리를 이끌고 정문으로 향하는 길.

저 멀리 듬성듬성 켜진 모닥불 안쪽으로 수백 명이 다닥다닥 뭉쳐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381명이라던가?

일견 하기에도 기백이 넘는 규모에 눈대중으로 숫자를 가늠해 본 나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흐읍!"

"쉿! 조용히 해!"

"누, 누구지?"

어슴푸레한 달빛을 등지며 뜬금없이 나타난 날 향해 사방에서 두려움 가득한 눈초리…가 쏟아질 줄 알았으나.

"와, 왔다!"

"진짜 왔어!"

"아아, 칼리야스여! 하겐, 됐다. 된 거야!"

"...?"

어째 반응이 좀 이상하다.

40대 중년의 아저씨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듯 두 손을 맞잡았고, 20대 청년은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엎드렸으며, 한 아이의 엄마는 제 자식을 부둥켜안고서 기뻐 울었다.

뭐지?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 광경에 멈칫한 나는 물끄러미 뒤를 돌아봤다. 혹시 이게 용병들의 함정은 아닌지 의심한 것이다. 하나 당혹스럽기는 놈들도 마찬가지인 듯 다들 어안이 벙벙한 기색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점점 더 기이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눈살이 찌푸려질 무렵.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청년이 부축을 받으며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고문을 당했는지 왼쪽 다리를 쩔뚝이는 그는 마치 나를 잘 아는 사람처럼 대했는데, 나는 오래지 않아 그의 정체를 알아챘다.

스윽―

슥―

성호(聖號).

요하네스가 보여준 성호와 똑같은 손동작을 취한 까닭이었다.

그래.

"…아른헬 사제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아른헬이라고 합니다."

이 청년이 요하네스가 그토록 신신당부했던 당사자 아른헬 사제였다.

그 점에 제법 놀랐다.

선입견인지는 몰라도 아른헬 사제님, 아른헬 사제님 하며 높여 부르길래 무의식적으로 나이 지긋하게 드신 백발의 노인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나저나.

나는 하도 의아해서 그에게 물었다.

"제가 오실 걸 알고 계셨습니까?"

사람들의 반응과 당신의 태도에 대하여 도저히 묻지 않고 넘길 수가 없었다.

불현듯.

아까의 비상종 소리가 떠올라 설마 좀비 역할을 맡았던 크린 리벳과 자경대가 몰래 침입해 이들에게 나의 존재를 알렸나 싶은 추측을 하기도 했지만.

'없다.'

주위를 둘러봐도 익숙한 면면은 보이질 않았다.

음.

그들도 아니라면 대체―

"오늘 밤 벼락이 내리치리니, 너는 천둥이 울려 퍼질 때 구름을 모아 우레의 선율에 화답하라."

"예?"

"계시가 있었습니다."

"아."

더욱 의문스러워지던 난 아른헬의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계시(啓示)가 있었다.... 신이 직접 알려 주었다는데 더 할 말이 있나.

칼리야스 대륙은 신의 흔적이 버젓이 살아 숨 쉬는 세상이었다.

마법도 있는 마당에 계시쯤이야.

것보다 나는 아른헬 사제의 답변으로 어지럽게 늘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찌 그리 절묘한 시기에 비상종이 울렸나 싶더니만, 다 신의 계획이었구나.

여하간.

"좋습니다."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 나는 작게 주억거리며 아른할에게 플랜의 마지막에 관해 속삭였다.

서걱!

"하면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 잘 들으십시오."

"끄아아아아아악!!'

"운이 좋아 이놈을 사로잡았지만, 제힘으로는 이게 한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이놈을 교환하기로 했고, 여러분들이 빠져나가는 대로 저도 도망칠 겁니다. 그러니, 탈출하게 되면 최대한 빨리 각자의 마을로 돌아가되 보복이 있을 것을 감안해 마을을 떠나든 숨든 하시죠. 바깥에 크린 리벳 님과 페루스 자경대원들이 와 계시니 박수 여섯 번이면 합류하실 겁니다. "

본 퀘스트의 목표는, 요하네스의 부탁은 어디까지나 '구출'.

그러므로 저들이 탈출하고 나면 나는 지구로 되돌아가게 될 공산이 컸다.

구출과 귀환 호위는 엄연히 다른 문제였으니까.

따라서 이 지옥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면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숨어 버리든, 바다 저편으로 도망을 치든 뭐라도 해야 한다.

랍티오의 괴성을 도청 방해 장치 삼아 그 점들을 명확히 이야기하자 내 말뜻을 온전히 이해한 듯 살며시 끄덕거리는 아른헬.

그 응답에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나는.

띠링!

어울리지 않는 상쾌한 음률을 곁들여 작별을 고하고는 몸을 홱 돌리며 크게 외쳤다.

본 퀘스트의 마침표를 찍어 보자고.

44화

금고.

그 강력한 마법 스펠의 힘으로 일시적인 평화를 이룩한 가운데.

"고맙습니다."

"평생 기억하겠습니다."

"오, 칼리야스시여."

레그나토르 성을 빠져나가는 400여 명의 인질을.

다들 고된 노예 생활로 지치고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일념으로 어떡해서든 몸을 이끌고 감사 인사를 남기며 밖으로 사라져 갔다.

음.

슬슬 성을 탈출한 아른헬 사제가 자경대와 만났으려나?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슬쩍 주머니로 시선을 옮겼다. 아른헬 사제도 그렇고, 벌써 인질의 반절이 넘게 지옥에서 벗어나는 동안 페루스 마을 출신들도 적잖게 구조되었는지 핸드폰이 요란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띠링!

띠링!

상황이 상황인 터라 내용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대충 이런 문구가 출력되는 중이겠거니 싶었다.

['페루스 마을 주민 1'이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패루스 마을 주민 2'가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부정적인 메시지였다면 '삑!' 하는 냉정하고도 간결한 소음이 치솟았을 테니, 예견했던 대로 메인 퀘스트가 완료되고 있을 거라 짐작한 나는 어느새 스무 번을 넘긴 알림음 횟수를 체크하곤 양손에 힘을 주며 갈매기 수염을 비롯한 용병들에게로 발을 뻗었다.

"오오!"

"드디어!"

내가 랍티오를 질질 끌며 걸음을 내딛자 안 그래도 탐욕으로 뜨겁게 불타오르던 용병들의 동공이 더할 나위 없이 밝게 반짝인다.

이대로 별 탈 없이 거래가 진행된다면 우두머리의 금고를 3할이나 털 수… 어쩌면 이번 기회를 틈타 3할이 아니라 3할도 남기지 않고 죄다 털어버릴지도 모를 이벤트가 코앞이라 안달이 나는지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놈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는 사이 몇 미터를 더 전진해 대략 30m 안팎에 도달할 즈음.

툭―

나는 별안간 우뚝 멈춰서 버렸다.

그러고는.

스릉!

서슬 퍼런 예기가 번뜩이는 환두대도를 들어 랍티오의 목에 살포시 얹었다.

"…뭐, 뭐 하는 거냐! 네놈이 바라던 대로 노예들을 풀어 주고 있지 않느냐!!"

느닷없는 행동에 기겁한 랍티오가 부러진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바둥거렸고, 망상의 나래를 펼치던 용병들의 안면도 딱딱하게 굳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칼날을 더욱 가까이 대었다.

기어코.

…스각!

연한 살결이 갈라질 때까지.

* * *

톡!

송글송글 맺혀 있던 핏방울이 지상으로 이끄는 중력을 버티지 못하고 또르륵 굴러 대지 위로 추락한 직후 흥분으로 달아올랐던 일대의 공기가 차갑게 식어 버렸다.

다들.

피를 보고 나서야 깨달은 것 같았다. 내가 이 거래를 아름답게 마무리할 마음이 없다는 걸.

"왜, 왜 그러는 거냐! 너도 재물을 원하는 거라면 주겠다! 뭘 원하나?! 내 금고 안엔 없는 게 없다! 금화! 보석! 아, 아니 무기! 무기를 주겠다!"

그 살의를 누구보다 절실하게 인지한 랍티오가 발악하듯 울먹거렸으나, 가볍게 무시한 채 용병들을 쭉 훑었다. 시종일관 희희낙락하던 웃음기는 온데간데없고 온통 물음표로 범벅이 된 낯짝들이 눈에 보인다.

순조롭게 이행되던 거래를 난데없이 깨버린 의도를 파악하느라 수십 쌍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당연했다.

랍티오는 저들만큼이나 나에게도 중요한 귀중한 인물이었으니까.

용병들이 엄청난 수적 우세에도 날 건드리지 않는 건 순전히 내가 랍티오의 명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랍티오가 사망하면 내 목숨도 위험해지는 것인데, 왜 이런 미친 짓을 벌이는 건지 도저히 해석이 안 될 거다.

그래서.

"스물넷."

풀어볼 수 있으면 풀어 보라고 신사답게 힌트를 줬다.

"스물, 넷?"

"아른헬."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냐!"

한 개의 숫자와 한 명의 이름.

끝으로.

"서브 퀘스트."

라고.

아마 개풀 뜯어먹는 소리처럼 들릴 테지만 말이다.

* * *

['아른헬 사제의 소망'을 전해 들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2-2)〉에 〈서브 퀘스트: 악의 처단〉이 추가됩니다.]

〈서브 퀘스트: 악의 처단〉

* 밀레스 제국 체르바 백작령 내의 작은 마을 페루스(fĕrus)의 한 수도원을 관리하며 살아가던 사제 아른헬.

칼리야스 교단의 신실한 사제답게 신의 계시를 허투루 듣지 않고 '벼락의 기사'를 도운 덕분에 마침내 노예가 된 사람들을 구출해내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도 그의 심중엔 불안의 불씨가 남아 있었으니.

당장이야 신과 벼락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할지라도 랍티오 용병단이라는 악의 근원이 남아 있는 한 언제고 재차 끌려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그는 탈출 직전 벼락에게 간청했다.

내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무리한 요구인 건 알지만… 가능하다면 저 악의 근원을 소멸시켜 줄 수 있느냐고.

(0/84)

(0/9)

(0/1)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처단된 악의 등금(상세 보기▼)'에 따라 보상이 증가합니다.

* * *

피식―

나는 핸드폰 한편에 기술되어 있을 퀘스트 화면을 상상하며 옅게 웃었다. 아른헬과의 마지막 대화를 통해 부여된 〈서브 퀘스트: 악의 처단〉.

〈메인 퀘스트: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2)〉가 요하네스의 부탁에 의해 〈메인 퀘스트: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2-2)〉로 변경되며 생겨난 이 임무는 용병이란 가면을 쓴 괴물들 처치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한 연유로 레그나토르성에 당도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살인을 꺼리던 당시의 나에게는 꽤나 꺼려지는 미션이었으나, 장대를 기점으로 생각이 확 바뀐 나는 아른헬 사제가 떠나가기 직전에 손수 트리거를 발동시켰다.

미천한 내 실력으론 기껏해야 랍티오와 더불어 괴물 몇 마리를 추가로 조지는 게 고작이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한 마리라도 더 이 땅에서 지워 버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으니까.

띠링!

"30."

"자, 잠깐―"

서걱!

…촤아아아아악!!

고로 서른 번째 탈출 성공 메시지를 신호탄 삼아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오른손을 잡아당겼다.

단칼에 맥없이 잘려 나가는 괴물 왕의 머리통.

말끔하게 잘린 단면 위쪽으로 분수마냥 솟아오르는 체액을 피해 고꾸라지던 몸뚱어리를 발로 걷어차 흙 바닥에 처박을 때쯤.

"아, 아아악!"

"단장님!!"

"단장님!!"

앞서 죽어 나갔던 몇 마리의 괴물들처럼 허무하고도 비참하게 바스라진 우두마리의 수급을 목도한 괴물들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기어이.

정말 기어이 제 왕의 목을 베어 버린 나를 향한 충격과 분노가 한데 어우러진 합창, 현실을 부정하는 듯한 하모니에 나는 환두대도라는 지휘봉을 들고 현시점에 제일 잘 어울릴 만한 답가를 불러 주었다.

앨범 명은 '이그니스(ignis) 류(流)'.

파직―

타이틀 곡은 '섬광(閃光)'이었다.

꽈르르르릉!!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진 벼락이 무채색의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번쩍거리는 빛무리 아래로 드러난 풍경인 굉장히 끔찍했다.

휘몰아치는 뇌류에 휩싸여 불타고 찢겨 비산하는 괴물들의 육신.

아쉽게도 거리가 거리인 탓에 무지막지한 위력과 달리 대 여섯 정도 쓰러트린 게 전부였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대지를 박찼다.

어차피 첫 타는 눈속임에 불과했다.

저기.

급작스레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따라잡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괴물 왕의 군신, 랍티오 용병단의 부단장의 시야를 가려 줄.

후우욱―

촤아아아악!

"흐으읍!"

단숨에 간극을 좁혀 휘두른 환두대도가 매서운 속도로 갈매기 수염의 몸통을 가른다.

뒤늦게 살기를 감지한 놈이 다급하게 상체를 비틀었으나, 전력을 다한 칼날은 진작 갑옷을 부수고 피부를 갈라버린 이후였다.

서걱!

"…끄아아아아악!!"

칼끝을 타고 전달되는 묵직한 손맛.

고통에 울부짖는 놈의 아우성을 받아넘기며 재차 횡으로 도를 그었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죽을 중상이었으나,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일 보를 더 나아가 너덜너덜하던 상반신을 완전히 갈라 버렸다. 페루스 마을에 있던 수도원을 털었으니 여분의 포션을 소지하고 있을 거다.

그러니.

콰직!

"커헉―"

살아남을 확률을 0.01%도 내주고 싶지 않았다. 심장이 쪼개진 채로 경련하다 축 늘어지는 사체.

우득―

가슴에 박혀 있던 환두대도를 뽑아낸 나는 느릿하게 좌측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 어어...."

그곳에는 볼과 이마가 흉터로 뒤덮인 덩치 큰 용병이 어울리지 않게 당황한 눈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호랑이 앞의 토끼, 뱀 앞의 개구리같이 항거 불능의 포식자를 마주한 초식 동물인 양 허리춤의 도끼조차 빼 들지 못하고 굳어 버린 망부석.

후우우우우욱―

서걱!

나는 가차 없이 목을 내리쳤다.

* * *

한 군대를 무너뜨리는 데에 있어서 썩 좋은 방법은 단연 지휘관을 암살하는 것이라던가?

랍티오에 이어 갈매기 수염까지 비명횡사하며 지휘부를 잃어버린 용병단은 격언이 틀리지 않았음을 몸소 증명하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와해되기 시작했다.

구태여 별도의 위력을 가할 필요도 없었다.

"사, 살려 줘!!"

"으아아아아악!!"

"빨리 비키라고, 이 새끼야!!"

준기사급의 단장을 무력화시킨 무위, 인간의 육체로 뇌기를 다루는 기예, 부단장이 반항 한 번 못해 보고 박살 난 현장.

보고, 듣고, 접한 단편적이되 굵직한 사건들이 일종의 허장성세가 되었는지, 단합력과 통제력을 상실한 놈들은 꼬리를 만 개처럼 오로지 살고자 하는 욕망 하나로 나에게서 멀어지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해 달아났다.

참으로 재밌는 장면이었다.

서로 합심했다면, 활성화된 '즉시 종료' 커맨드를 사용하지 않는단 전제하에 피해는 좀 입었더라도 끝끝내 날 사로잡다 못해 오체분시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터인데.

"하기야."

도적 떼가 괜히 도적 떼인가.

기강이 잘 잡힌 정규군이라도 붕괴될 판에 원래부터 결속력이라곤 개나 줘 버린 놈들 따위가 멀쩡할 리 만무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버러지들, 그게 저들의 실체였다.

내가 그리 중얼거리던 찰나.

띠링!

띠링!

잠잠해졌던 핸드폰이 다시금 떠들썩해졌다.

그와 동시에.

화아아아아아악!

부지불식간에 나타나 서서히 내 전신을 휘감는 빛무리.

"...!"

퀘스트 진행 현황을 확인하려 주머니로 손을 가져가던 나는 종료를 알리는 이펙트에 급히 몸을 돌렸다.

지구로 귀환하기 전에 챙겨야 될 게 있다.

전투 중에 거슬릴까 싶어 버려두었던, 비록 주인은 쓰레기였을지언정 물건의 가치는 결코 낮지 않은 무구. 내게 씻기 힘든 치욕과 한 단계 진일보 할 계기를 선사해 준 '비트는 콜루베르의 한 손 검'을 이런 똥통에 내버려 두고 갈 순 없었다.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2-2)〉의 과제를 완료하셨습니다.]

[당신의 활약도를 종합하여 보상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번쩍!

45화

서서히 갈무리 되는 휘광 뒤편으로 눈에 익은 풍경들이 보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집 앞이었다.

"후아. 아슬아슬했네."

허우적거리던 몸을 일으킨 나는 양손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만다행으로 '비트는 콜루베르의 한 손 검'을 회수한 까닭이었다.

이걸 가져가겠다고 남은 마력마저 탈탈 털어 '직뢰(直雷)'를 사용했던 게 주효했다.

여전히 제어를 하지 못해 땅바닥을 굴러야 했으나, 매직 등급 아이템을 위해서라면 백 번 천 번도 구를 수 있었다.

〈비트는 콜루베르의 한 손 검/Magic〉

* 특이하게도 기형 무구만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대장장이 길드 '프리우스(prīvus)의 검장에게 주문 제작한 톱날 검. 질 좋은 재료와 '비트는 콜루베르의 영혼석'을 장착하여 그야말로 소드 브레이커(Sword Breaker)라는 이명에 완벽히 부합하는 무기가 탄생하였다. 단, 이상과 현실이 다르듯이 익숙하게 다루려거든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기에 초급자에게는 추천하지 않는 형태이기도 하다.

* 잡기 성공 시 추가 검의 내구도 +33%/착용 시 인지력 최대치 7% 향상

검집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던 나는 자연스레 공개된 아이템 정보를 쓱 읽어 본 뒤 검대에 녀석을 걸었다.

설명에도 나와 있듯이 랍티오 놈같이 자유자재로 다루기엔 그 난이도가 매우 높아 보여 예상컨대 팔게 될 거 같지만....

"인지력은 좀 아깝단 말이지."

하필이면 옵션으로 감각 증폭이 걸려 있어 좀 거치적거리더라도 우선은 들고 있을 요량이었다.

운동으로 극복할 수 있는 여타 신체 능력과 달리 감각은 '경험치' 등의 특별한 과정이 없다면 따로 수련이 불가능한 천부적인 재능의 영역이었으니 짐 가방에 내용물이 한 줌 더해졌다고―

"아! 짐 가방!"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가던 나는 불현듯 등이 허전하다는 걸 자각했다.

가방.

품질이 좋으면 생존율도 올라가지 않을까 싶어 최상급으로 꾹꾹 눌러 담겠다고 적금까지 깨며 애지중지했던 가방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이걸 어디다 뒀더라?

"…그때."

통장에 수십억이나 생긴 이상 다시 구매하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나름대로 애정을 두었던 물건이라 미련이 남아 과거를 돌이켜보던 나는, 구프로미카의 영토 경계 지점에서 기습 작전에 용이하게끔 중량을 줄이고자 스콰의 안장에 메어 두곤 까맣게 잊어버렸었지.

음.

관자놀이를 누르며 그 순간을 회상하다.

"소환."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스콰를 불렀다.

안장도 차고 있고, 고삐도, 발굽도 늘 차고 있지 않던가? 거기서 가방 한 개쯤 더해졌을 따름이니 충분히 갖고 있을 공산이 컸다.

제발.

그래 주었으면 했다.

"푸르르르릉!"

"아!"

곧.

미소가 지어졌다.

* * *

"역소환, 소환."

"푸르르릉!"

"그래그래, 수고 많다."

번쩍!

울려 퍼지는 영창에 따라 사라졌다 나타나는 스콰의 늠름한 육체를 바라보는 내 입가엔 내내 웃음기가 떠나가질 않았다. 자기도 가서 쉬게 그만 좀 놔 달라는 양 투레질 하는 녀석의 등 위에 걸린 '손때 묻은 단검' 때문이었다.

칼리야스 대륙에 놓고 올 뻔했던 짐 가방이 안장 한쪽에 별문제 없이 걸려 있는 걸 보고 시도한 실험.

과연.

일반 생필품처럼 아이템 또한 안장에 고이 매달려 있을 것인지, 포션 등의 소모품부터 각종 무기에 방어구까지 내놓은 결과 확실해졌다.

이 세계의 펫에 주어진 진정한 존재 의의.

그것은 바로 생환자의 '인벤토리(inventory)'였다.

어느 게임이든 반드시 구축되어 있는 인벤 기능이, 게임을 표방하는 생환자 시스템에는 어째서 보이지 않는가 매번 궁금했는데 다 사정이 있었다.

"수고했다. 추울 테니 들어가 있어라. 나중에 부를게."

"푸르르릉!"

"역소환."

파앗―

감춰져 있던 성능을 발견한 덕택에 기분이 확 좋아진 나는 당근 몇 개를 가져와 스콰의 주둥이에 물려 주며 갈기를 쓰다듬어 주곤 집으로 돌아왔다.

인벤토리 실험에 빠져 있는 새에 정산이 모두 끝난 상태였다.

[당신의 성적을 등급화합니다.]

[주어진 임무를 더없이 훌륭하고 완벽하게 해결한 당신의 등급은 'Rank: S'입니다.]

[등급에 따른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으로 '많은 경험치' 및 '마력 전이석: 중형', '기술 서적: 다 대 일', '기술 서적: 은밀 기동', '생명이 깃든 귀걸이'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아, S 랭크네."

일차적으로 출력된 메인 퀘스트 성적은 조금 아쉽게도 S 랭크였다.

S 랭크.

B도 A도 아니고 S가 떴는데 아쉽다니, 남들이 봤다면 배가 불러도 단단히 부른 미친놈이라고 욕하겠지만....

"이게 안 뜨네."

서른여섯 명 중 서른다섯 명.

단순 계산으로만 봐도 97%에 달하는 귀환율인 데다가 페루스 마을 출신들을 넘어 그 밖에 350여 명의 비관련자들도 구조해 낸 실정이라.

개인적으로 웬만하면 폰스 마을에서 마주했던 'Rank: Hero_Village'를 또 한 번 보게 되겠거니 기대하던 중이었다.

한데 결국은 S랭크라고 하니 내심 마뜩잖다 여길 수밖에.

해서 살짝 입맛을 다셨으나.

"뭐, 그래도 스킬이 두 개나 떴으니 이걸로 퉁 쳐준다."

전리품이 나쁘지 않아 가슴에 남은 실망감을 훌훌 털어 보냈다.

원본이었다면 더 좋았을 터이나 이 역시도 어디 가서 꿀릴 게 없는 아이템이었거니와.

〈기술 서적: 다 대 일/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기술 '다 대 일' 습득

〈기술 서적: 은밀 기동/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기술 '은밀 기동' 습득

〈생명이 깃든 귀걸이/Magic〉

* '칼리야스 교단 소속 대장간에서 제작한 귀걸이. 신성력을 덧입혀 착용한 자의 생명력을 북돋워 줄 뿐 아니라 위급 시에 '신성 마법 주문: 회복'을 사용할 수 있다.

* 착용 시 모든 육체적 정신적 결함 회복 속도 30% 상승/신성 마법 '회복' 사용 가능(재사용 대기시간: 24시간)

"힐? 힐이라고?"

다른 것보다 다섯 번째로 지급된 귀걸이가 무려 힐링 팩터였기 때문이었다.

하루에 1회라는 조건만 가린다면 이른바 무한 포션이라고 봐도 무방한 장신구가 뜬 것이다.

칼리야스 교단과 관련된 퀘스트를 수행한 영향인가?

정확한 내막이야 알 수는 없으나, 나로서는 무조건 만족스러운 장비였다. 위급 시에 내 목숨줄을 구해 줄 수단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으니까.

더군다나.

연구는 해 봐야겠지만 일단 포션과 같은 신성(神聖)을 띈 마법이니 여차하면 공격적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 터.

"대박이구나."

박수가 절로 나왔다.

* * *

〈다 대 일/Passive〉

* 전투 상황 발생 시, 주변 50m 내외에 아군보다 적이 많을 경우 수적 열세에 비례하여 모든 신체 능력치가 최대 5% 증가한다.

└산정 비율: 적 열 명당 1%

〈은밀 기동/Passive〉

* '적'으로 규정된 모든 대상에게서 들키지 않고 이동할 확률이 5% 상승한다.

[〈메인 퀘스트: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2-2)〉가 종료됨에 따라 〈서브 퀘스트: 악의 처단〉이 강제 종료됩니다.]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악의 처단〉의 과제를 완료하셨습니다.]

[당신이 처단한 악의 등급은 아래와 같습니다.]

└수괴: 1/1

└간부: 2/9

└일반: 0/84

[보상으로 '적당한 경험치' 및 '무기 임의 선택권: Magic'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 * *

- 예, 휘윤 씨. 전화하셨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어제까지 퀘스트를 하느라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무탈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요? 혹시?!

"예, 짐작하신 대로 판매할 아이템이 생겨서 말입니다. 추가로 여쭤 보고 싶은 것도 있고.

- 오오오! 역시! 제가 줄 하나는 제대로 잡았습니다. 하하하! 이렇게 된 거 한번 보시죠. 오후…에 시간 어떠십니까? 근사한 곳으로 예약해 두겠습니다. 바쁘시면 내일도 좋습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그럼 저녁에 뵙죠."

- 알겠습니다. 6시쯤, 최 기사님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러시죠. 하면 이따 뵙겠습니다."

뚝―

오후 4시.

오후 훈련을 나갔다가 들어와 쉬던 중에 정유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날 획득한 '무기 임의 선택권: Magic'도 판매할 겸 물어볼 게 있어서 연락하니 퀘스트를 수행하러 자리를 비웠다고 들었었는데, 목소리가 쾌활한 것으로 보아 잘 마무리 짓고 돌아온 듯했다.

그냥 아이템을 판다니까 좋아하는 건가?

아무튼.

깔끔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 옷을 갈아입은 뒤, 세척이 끝나 잘 마른 장비들을 스콰의 안장에 넣어 두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모시러 왔습니다."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일전에 만났던 최 기사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차에 올라 벨트를 매자 부드럽게 나아가는 차량.

목적지는 1인분에 50만 원이나 하는 고깃집이었다.

하루하루가 돈에 쪼들리던 회사원 시절에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가게에 도착하니 김 비서가 바통을 받아 나를 안내했는데, 안쪽으로 쭉 들어가니 수수함과 화려함이 한데 공존하는 방에서 날 기다리던 정유환이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휘윤 씨! 오셨습니까! 하하하."

"오랜만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실제로는 사나흘밖에 안 됐는데, 대륙을 갔다 와서 그런가. 꼭 일주일도 넘은 느낌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김 비서님은 쉬고 계세요. 끝나면 연락하겠습니다."

짧게 해후를 나누고 들어간 내부에는 이미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화려한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수십만 원짜리 가격대답게 맛도 퍽 훌륭했다.

전직 5성급 호텔 주방장이 직접 구워 준다나 뭐라나. 졸부의 귀로는 들어도 뭔 소린지 제대로 이해가 되질 않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돈값은 분명하게 하는 가게였다.

그렇게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을 즈음.

"그나저나, 물어보고 싶으신 게 있으시다고 하셨는데 그게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슬그머니 본론을 꺼내는 정유환.

때마침 식사를 마치고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인 나는 빙빙 돌릴 거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도움을 청했다.

협상 테이블에서의 밀고 당기기?

그런 거 할 줄도 모르고, 딱히 하고 싶지도 않았다. 생환자에게 있어서 여유는 사치고 죄악이다. 필요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구하고, 어떻게든 구했다면 최대한 빨리 적용하는 것만이 명줄을 유지하는 가장 올바른 판단이었다.

"혹 실전 같은 대련을 도와주실 분들을 소개받을 수 있겠습니까?"

46화

"실전…같은 대련 말씀이십니까?"

정유환은 내 질문이 의외라고 여겼는지 신기하단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필요한 아이템 구매 대행 등을 문의하려는 줄 알았나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해서 바라는 사항 등을 열거해 나갔다.

"예. 무기를 사용할 줄 알아도 좋고, 아니어도 좋습니다만 각 분야에서 최소 10년 이상 배웠던 사람. 파병이든 용병이든 실전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더 좋습니다. 대련 중에 부상을 당한다면 치료비는 제가 전액 부담하겠습니다. 그에 따른 추가 보수도 지급할 예정이고."

최고의 대우를 해줄 작정이니, 랍티오와의 결전에서 절실하게 체감한 '진짜 무력'을 채워 줄 인력을 소개해 줄 수 있겠느냐고.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을 놔두고 굳이 빚을 지면서까지 그에게 부탁하는 연유는 효율 탓이었다.

이런 방면으로 일자무식인 내가 일일이 수소문하는 것과 정·재계 각지로 선이 닿아 있는 청성 그룹 계열사의 대표 이사가 힘을 발휘하는 것. 누가 봐도 후자가 압승이었기에 정유환의 손을 빌리기로 결심했다.

실례를 무릅쓰건 머리를 숙이건 사는 게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흐음. 10년 이상 된 실전 경험 있는 무술인들이라. 찾아보긴 해보겠으나 조건에 딱 맞는 분을 섭외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아무래도 요즘은 총탄이 난무하는 시대니 말입니다. 실전 경험이 있더라도 대체로 총기 전문가들이라. 그래도 최선을 다해 수배해 보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저 소개 정도인데요, 뭘. 하하하."

정유환은 내게 빚을 지워 둔다는 게 마음에 드는 듯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불만을 내비치기보단 되레 환한 미소와 열정 어린 눈빛으로 화답해 주었다.

덕분에 상황은 한층 밝게 진행되었고, 그 영향인지 이후의 거래도 꽤나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매직 등급 무기 임의 선택권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직접 보시죠."

"아아!"

며칠 전에 구입해 간 '찔러 부수는 모노케로스의 한 손 검'이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신상 장난감을 목격한 어린아이처럼 한껏 격양된 어조로 조심스럽게 스크롤을 받아 가고는 핸드폰으로 아이템 정보 창을 확인하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리 외쳤으니 말이다.

"20억, 20억에 구매하겠습니다."

20억.

변함없이 화통한 남자였다.

[ 의뢰 ]

「하하, 안 그래도 동생에게 꼭 필요한 무기가 있었는데 이걸로 한시름 놓았습니다.」

「선물이었군요.」

「저는 이놈이 있으니까요. 하핫, 그러고 보면 오빠나 동생이나 모두 휘윤 씨에게 도움을 받게 됐습니다.」

「도움은요.」

「말 나온 김에 언제 시간 되시면 셋이서 밥 한 끼 하시죠. 근사한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사양하지 않고 가겠습니다.」

「약속하신 겁니다?! 하하하!」

한바탕 시끌벅쩍했던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대한은행: 2,000,000,000 입금, 입금자 정유환]

[현재 계좌 내 잔액: 4,421,672,953]

"...."

나는 통장에 찍힌 숫자들을 보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44억.

단돈 4만4천 원도 벌벌 떨며 쓰던 사람 잔고에 수십억이라니, 저번에도 그랬지만 한결같이 믿기지 않는 금액이다.

그리고.

금방 사라지게 될 돈이기도 했다.

'훈련장으로 쓸 건물에 각종 훈련 장비와 인건비로 못해도 절반은 써야겠지.'

앞으로 돈 들어갈 구석이 한두 곳이 아니다.

실전 수련도 실전 수련이지만, 그 외에도 아이템 매수 의뢰를 걸어 둔 터라 투자라는 명목 아래 쭉쭉 쓰다 보면 아차 하는 사이에 바닥을 드러낼 테니 당장은 풍족해 보여도 안심은 금물이었다.

이 악물고 모아야 한다.

한강 뷰? 스포츠카?

억만장자의 삶을 살려면 미래가 보장되어야 하는 바, 고로 지금은 안락함보다 처절해야 할 시기.

'후, 당분간만 참자.'

내 목표의 완성을 위하여 욕심을 잠재우며 자취방에 도착해 하루를 보낸 나는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어딘가로 이동했다.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정유환 개인 소유의 '승마장'이었다.

실내와 실외를 합해 거진 5천 평에 이르는 대형 부지에는 기본적인 교육 시절부터 원한다면 수백 미터도 질주 가능한 코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내가 이곳으로 온 사연은 당연하게도 승마 연습을 위해서였다.

엄한 데서 탔다가는 웬 미친놈이 길 한복판에서 말을 타고 돌아다닌단 신고가 들어가 귀찮아질 게 뻔했기에 정유환에게 대가로 '정보'를 지불하고 여길 빌렸다. 말만 잘 한다면 공짜로도 이용할 수 있겠지만, 빚은 한 번으로 족했기에 그에게 두 가지 정보를 넘겼다.

첫째, 퀘스트 중에는 인간과의 전투도 섞여 있다.

둘째, 보상으로 펫도 주어진다.

장담하건대 현시점의 생환자들을 전부 모아 놓고 물어봐도 나 이외에 아는 사람이 1% 안 되리라 확신할 정도로 희귀한 데이터였기에, 정유환도 특히 1번을 두고 현금보다 몇 배는 더 가치 있는 것이라며 굉장히 기꺼워했었다.

그 덕에.

"스콰."

번쩍!

"푸르르르릉!!"

"그래, 그래. 시원하게 달려 보자."

이 드넓은 대지를 홀로 대관하게 된 나는 주변의 눈치 볼 거 없이 자유롭게 스콰를 불러내 홀가분하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페루스 마을 인근을 오가며 타 봤던 당시를 떠올리며 제법 능숙하게 안장에 올라 고삐를 채자 기다렸다는 듯 땅을 박찬 스콰는 오랜만의 전력질주가 즐겁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쉬지 않고 바람을 갈랐다.

평보, 경보, 속도 등.

가급적 다양한 방식으로 동작을 바꾸고 코스를 바꿔가며 거의 서너 시간을 내리 탔던 거 같았다.

"좀만, 좀만 쉬자. 하아."

"푸르르릉!"

허벅지가 터질 듯한 고통에 몸부림칠 때까지 말 등에 올라 있던 나는 해가 중천에 걸리고 나서야 지상으로 내려와 그대로 주저앉았다.

도저히, 정말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내 육체 수준이라면 어지간한 운동은 아무렇지 않게 버틸 터인데도, 이게 자주 쓰던 근육이 아니다 보니 누적되는 피로의 양이 무지막지했다.

스콰....

"푸르르르르릉!!"

"너도 좀, 됐다. 가서 놀아라. 갔다 오면 당근도 주고 할 테니까."

"히이이이잉!"

녀석은 지치지도 않는지 주인이 널브러지든 말든 뒤도 안 돌아보고 마장을 뛰어놀았다. 내 예측보다 '생명의 샘'의 효력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참.

"이번에도 먹였어야 했는데, 그냥 와버렸네."

크린 리벳에게 듣기론 레그나토르성 내부에 '생명의 샘'이 있다고 했었는데, 여력이 되면 가봐야겠다 계획만 세워 두고 지나쳐 버렸다.

하기야.

전황이 하도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다른 쪽을 신경 쓸 수가 없었지. 지금 와서 되짚어 봐도 피가 끓어오르게 만드는 '장대'로 반쯤 눈이 돌아가기도 했었―

"휘윤 씨!"

"...?"

회상 아닌 회상에 빠져 있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날 현실로 되돌려 놨다. 시원시원한 젊은 남성의 음성.

더 볼 것도 없이 정유환이었는데.

내 시선은 그를 지나쳐 더욱 뒤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안녕, 하세요...."

또 한 명의 낯익은 여인이 서 있던 까닭이었다.

허리춤에 걸린 네 대의 전통과 등에 멘 수려한 형태의 장궁이 인상적인 여성.

"정, 유림 씨?"

폰스 마을에서 썩 아름답지 못한 인상을 남겼던 정유림이었다.

* * *

"유림이에게 들었습니다. 퀘스트를 같이 하셨다고. 이거 정말 인연 아닙니까? 하하하!"

"...."

유난히 '인연'이란 단어를 강조하는 정유환과 어쩐지 말이 없는 장유림.

나는 두 남매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람 일 어찌 될지 모른다. 그러니 웬만하면 함부로 악연을 쌓지 말라고 하더니만, 그 말이 딱 맞았다.

설마 예서, 또 이리 정유림과 재회하게 될 줄이야.

사실 조금만 따져 봤어도 금세 알 법한 관계이기는 했다. 생존주의적 성향이 짙은 주제에 방어구를 세 피스나 갖춘 것 하며 뭣보다 정유환과 정유림… 이건 뭐 실상 대놓고 알려 준 것이나 매한가지였으니까.

단지 내가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오랜만입니다."

"아, 네."

턱을 휘휘 흔들며 잡념을 털어 낸 나는 정유림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그녀가 자신의 오빠에게 우리의 만남과 이별을 어떤 식으로 설명했는진 불분명하다만, 구태여 지금의 화목한 무드를 억지로 깰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서로의 친목이 상하지 않도록 낯짝에 뻔뻔함 혹은 하얀 거짓말이란 이름의 가면을 쓰고 최대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안 그래도 유림 씨의 후방 지원으로 저번 퀘스트를 무사히 마치게 되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퀘스트가 갑자기 끝나버려서 이제야 기회가 닿았군요."

"어… 벼, 별말씀을요."

비지니스맨에게 있어서 이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웠다.

그러자 조금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넘기는 정유림.

"하하하, 이럴 게 아니라 우선 앉으시죠. 점심 시간이기도 하고, 경과에 관해 말씀드릴 것도 있고 해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싸웠습니다."

"뭘 이런 걸 다."

"유림아, 가서 수저랑 컵 좀."

"어? 아, 응."

짤막하게 안부를 묻고 정유환의 주도하에 갖게 된 자리.

소소하게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마칠 무렵, 차 한 잔으로 입가심을 끝낸 그가 본격적으로 날 찾아온 목적을 밝히려는 듯 목을 가다듬었다.

뭘까?

사뭇 진지한 제스처에 덩달아 자세를 바로 하자 이윽고 입을 여는 정유환.

"예?"

그 직후

나는 무척이나 놀란 눈이 되었다.

"이렇게 요청드리겠습니다."

정유환이 가져온 이야기가 적잖게 충격적이었니까.

"저와 제 동생과 '파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 * *

수백, 수천 만의 생환자들이 칼리야스 대륙을 오가며 공통적으로 느끼는 특징이 하나 있다.

이 세상이 흡사 '잘 만들어진 게임' 같다는 점이었다.

스탯, 스킬, 아이템에 펫 등.

소위 상태 창으로 불리는 스테이터스가 열리지 않는단 걸 제외하면 이세계는 진정 게임이라 봐도 무방한 곳이었다.

하여 대다수의 생환자들이 숨겨진 기능들은 무엇이 있을지 추측을 했었는데.

개중 매번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게 '파티 플레이'였다.

무작위이긴 해도 여럿이 뭉쳐 미션을 해결하는 단체 퀘스트도 있는 마당이니 가능성 면에서 결코 낮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

실제로 존재할 거라고는, 나아가 그 특수 기능을 개방한 인물이 정유환이라는 데에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한편으로 저 남자라면 이해가 되기는 했다.

재력으로 장비를 깡그리 맞춘 데다가 동생과는 다르게 초기부터 열정적으로 퀘스트에 임했던 타입. 똑같이 필사적으로 부딪친 나도 '장착'이란 카드를 보유 중이었으니 그가 가지고 있는 게 이상한 부분은 아니다.

"S 랭크를 달성하니 주더군요. 아마도 단체 퀘스트에서 전원 A 랭크 이상 달성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정확한 습득 방법은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어쨌든 근래 파티 기능을 개방하며 다음 퀘스트가 단체일 경우에 한해 사전에 구성한 다섯 명의 인원으로 임무를 하달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여 빠르게 수긍하고 정신을 차린 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가지만 물었다.

"…거기까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입니까?"

47화

나와 정유환의 접점이라고 해봐야 오늘을 더한다 한들 겨우 세 번이 전부.

게다가 앞선 두 번의 만남 또한 거래를 위한, 철저한 비지니스적인 미팅이었기에 신뢰감이 쌓이기에는 무리가 있단 소리였다.

그런데도 '파티 시스템'의 실체를 공개하면서까지 나를 영입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의아했다.

이러한 심정이 전해졌을까?

눈동자에 실린 물음표 마크에 정유환이 가볍게 웃으며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남들은 채 하나도 갖지 못한 매직 등급 아이템들을 척척 팔아 치우는 남자. 하면 그의 실력은 어떠할까요? 장담하건대 작금의 생환자 중에는 단연 탑일 겁니다. 다섯 손가락? 세 손가락? 어쩌면 첫손가락에 꼽힐지도 모르죠."

"음...."

"더불어 저는 이제 목숨이 걸린 전장으로 가야 합니다. 이런 처지인데 단순히 '아는 사람'을 동원하는 게 맞을까요? 아님, '강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맞을까요. 이게 제 답입니다. 전 드라마 속 재벌들과는 다르거든요. 자존심은 가지되 결코 매몰되지는 말라. 아버지의 가르침입니다."

잘 짜여진 각본이라도 있는 양 한 점 머뭇거림 없이 주르륵 이어지는 말에 나는 절로 끄덕였다.

그래.

정유환의 말대로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살기 위해 전국 팔도를 뒤져가며 실력자를 수소문해야 하는 판국에 명검보도(名劍寶刀)가 어디 있는지 아는데, 자존심 때문에 이 빠지고 금이 간 낡은 철검을 들고 전쟁터에 나갈 이유가 하등 없었다.

만약 그런 멍청이였다면 애당초 권유를 하지 않았거나, 했더라도 돈으로 찍어 누르는 등의 무례한 스탠스를 취했겠지.

또는 이 역시 잘 봐달라는 의미의 로비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지원으로 경험치 및 여러 아이템들을 획득하게 된다면 나와 친분이 깊어질 거고, 친분이 깊어진다면 그만큼 내가 넘겨 주는 물건의 양과 질도 좋아질 테니까.

거기까지 상념을 잇던 나는 짧은 고민 끝에 순순히 긍정을 표했다.

"하죠."

"예?"

"하겠습니다."

"정말, 이십니까?"

"싫습니까?"

"아뇨, 아뇨! 당연히 저야 환영입니다! 하하핫!"

정유환은 내가 이리도 쉽게 승낙할 거라고는 짐작 못 했는지 잠시 벙찐 얼굴이 되었다가 곧 활짝 핀 미소를 보였다.

뭐.

나로서는 딱히 거절할 껀덕지가 없었다. 퀘스트 이꼴(equal) 성장, 발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출발 날짜는 내일모레 오전 10시입니다."

"10시, 알겠습니다."

"출발 전에 제가 동생과 댁으로 가겠습니다."

"그러죠. 짐은 각자 알아서 준비하는 것으로 하면 되겠고, 혹시 파티원이 더 있습니까?"

"아, 최대 다섯 명까지 동행할 수 있어서 나머지 두 명은 믿을 만한 사람들로 구해 놓겠습니다. 저와 휘윤 씨가 근거리, 유림이가 원거리니 탱커 둘이나 탱커 하나에 원거리 지원 하나면 되겠군요."

"그 부분은 맡기겠습니다."

"최선의 조합을 짜보도록 하죠. 하핫!"

내가 수락할 경우와 실패할 경우를 미리 상정해 두었었는지, 정유환은 계약이 성사되자 마치 짜 놓은 각본을 외우듯 막힘없이 줄줄 계획안을 늘어놓았다.

그중에는.

"계약금으로는 1억을, 추후 랭크에 따라 별도의 완수금도 지급해 드릴 예정입니다."

돈과 관련된 항목도 포함되어 있었다.

"B는 1억, A는 3억, S는 5억을 드릴 예정입니다."

이야.

억 단위로 오고 가는 금액에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예정에 없던 추가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인데, 여기에 6억을 얹어 준다니.

이렇게까지 받아도 되는 걸까?

불현듯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실제로는 정유환이 마냥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나를 영입함으로써 100%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울지언정 적어도 9할 이상 가는 생존율이 보장됐거니와 후에 성적이 잘 나와 S 랭크라도 뜨면 보상으로 지급된 아이템을 통해 수십억의 이익을 터트릴 수도 있었다.

이모저모 다 차치하고서 그냥 S급 스킬만 떠도 그야말로 초대박이었기에 여러모로 충분히 매수해도 좋을 종목이었다.

"이쯤이면 되겠군요. 계약서는 당일 날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럼 내일모레 뵙죠."

"알겠습니다. 참, 만일 중간에 개인적으로 퀘스트를 진행하시게 된다면… 따로 연락하시기 힘드실 테니, 전화를 걸어 보고 받지 않으신다면 그걸 기준으로 떠나셨구나 이해하겠습니다."

"가능하다면 되도록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부재중 통화 유무로 확인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부디 별일 없길 기원합니다. 하하하! 자, 그러면―"

띠링!

"파티 신청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띠링!

[ '지원자: 정유환' 님께서 '대상: 오휘윤' 님에게 파티를 제의했습니다.]

[Y/N]

[수락할 시 '지원자: 정유환' 님께 지원 요청이 전해졌을 때 그와 동행하게 됩니다.]

[탈퇴는 상시 자유롭게 가능하나, 이미 퀘스트가 진행 중일 경우 한시적으로 '탈퇴/강퇴 기능'이 비활성화됩니다.]

[그 밖의 사항 상세보기▼]

└1. 파티장을 비롯한 파티원이 쌓은 공적치는 일차적으로 최초 획득자에게 50%가 배정되며, 나머지 50%를 미 획득자들이 동일한 비율로 분배받는다.

└2. 서브 퀘스트가 발생할 경우 최초 발견자에게 '공유' 선택권이 주어진다.

└3. 서브 퀘스트를 공유할 경우 '경험치'를 제외한 모든 보상은 최초 발견자에게만 지급된다.

[축하합니다!]

['지원자: 정유환' 님의 파티에 가입되었습니다.]

└현재 파티 구성원: 파티장_정유환/파티원_정유림/파티원_오휘윤/파티원_미등록/파티원_미등록

[진행 중인 퀘스트 목록 상세 보기▼]

└메인 퀘스트: 없음

└서브 퀘스트: 없음

[탈퇴하기]

* * *

시간은 유수와도 같이 빠르게 흘러갔다.

정유환과 계약을 맺은 다음 날 저녁까지 승마 훈련에 매달렸던 나는 어느새 찾아온 모레 아침 햇살을 받으며 무장을 갖춰 나갔다.

흑색 갑주와 두 자루의 도검.

등에는 온갖 생존 물품이 담겨 있는 가방을 멘 기이하고도 강렬한 복장으로 대기하길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차량이 마당에 들어섰다.

"휘윤 씨!"

"아, 안녕하세요."

언제나처럼 밝은 정유환과 여전히 살짝 어색한 티를 내는 정유림.

그리고.

"반갑습니다. 송주완입니다."

"강태성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훤칠한 키와 외모가 인상적인 20대 초중반의 청년과 과거 보디빌더를 했더나 싶은 거구가 더해진 네 명의 파티원들이었다. 나는 앞선 두 사람과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새로운 인물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들도 나를 호기심과 경계심이 반씩 섞인 눈빛으로 훑어보는 중이었다.

'방어구는 둘 다 풀로 장착했고, 저 남자는 장신구도 착용한 건가? 그보다, 저 사람은 방패에 망치도 같이 쓰나 보네.'

정유환이 고르고 고른 인재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두 사람은 일반적인 장비 이외의 것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송주완의 귀에 걸린 보라색 귀걸이, 강태성의 허리춤에 묶여 있는 붉은 빛깔의 망치가 바로 그것.

보조 장비에 보조 무기라....

확실히 무력으로 문제될 일은 없을 듯했다.

"잘해 봅시다."

"저도 잘 부탁합니다."

"전위는 믿고 맡기셔도 될 겁니다."

서로의 속내를 감추고 통성명을 마친 우리는 각자의 전공을 토대로 간단하게나마 포메이션을 짜는 시간을 가졌다.

탱커 1, 근접 딜러 2, 중장거리 딜러 1, 원거리 딜러 1.

최선의 조합을 짜 오겠다던 정유환의 호언장담처럼 힐러나 광역기를 갖춘 마법사가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다 싶을 만치로 완벽한 구성이라 포지션을 나누는 건 쉬웠다.

"태성 씨와 저, 휘윤 씨가 선두. 유림이는 중앙에서 지원해 주고, 주완 씨는 유림이의 호위와 후방 경계를 맡아 주시면 되겠군요."

"예, 사장님."

"그다음은… 이건 약간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살짝 민감한 주제가 나오기는 했으나.

"혹시 스킬 가지신 분 계십니까? 패시브야 그렇다 쳐도 액티브 스킬은 사전에 팀원들이 알고 있어야 위급 시에 꼬이지 않을 듯하니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부터 밝히자면, 전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협동, 다른 하나는 참격입니다. 이 중 엑티브 스킬은 참격으로, 시전 시에 전방 2~3m까지 피해가 가죠."

정유환의 리더십이라고 할까?

자신의 패를 먼저 까 보임으로써 자칫 예민해질 수 있던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 넘긴 것이다.

해서.

"저는 집중 사격이에요. 5초간 집중해 화살을 쏘아 보내면 피격 지점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나죠."

"전 일점사입니다. 창을 찔러 대여섯 마리를 한꺼번에 쓰러뜨리는 스킬입니다."

"제 스킬은 방패 치기입니다. 방패로 앞에 있는 적을 밀어내는 기술입니다.

나도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속이려면 끝까지 속일 수도 있겠으나, 정유환의 말처럼 미증유의 변수로 인해 상황이 틀어질 확률도 고려해야 하는바.

"제가 알려 드릴 건 세 가지입니다."

"예…? 세, 세 가지요?"

"섬광, 직뢰, 오오라입니다."

과감하다면 과감하게 이그니스(ignis) 류(流)와 광역 디버프인 '검은 망령의 파문'에 대하여 공유해 주었다. 하도 이펙트가 크고 또 자주 애용하는 스킬들이라 숨길 수 없다면 시원하게 까발리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다섯 명의 사이가 조금 더 가까워졌을 무렵.

띠링!

['지원자: 정유환' 님에게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대상: 오휘윤' 님은 현재 '지원자: 정유환' 님과 파티 상태입니다.]

[정해진 법칙에 의거하여 '지원자: 정유환' 님과 동일한 퀘스트를 배정합니다.]

[10초 후 칼리야스 대륙으로의 이동을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10초]

"아! 왔군요. 다들 전투 준비해 주세요. 스타팅 포인트에서부터 전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덧 오전 10시를 가리키는 시계에 맞춰 단체 메시지가 출력됐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눈동자에 실리는 전의.

드디어.

번쩍!

[지금부터 〈메인 퀘스트: 복수와 평안〉이 시작합니다.]

〈메인 퀘스트: 복수와 평안〉

* 칼리야스 대륙 동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 우메르(ūber)의 영향으로 농업의 중심지가 되어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하던 밀레스 제국 아라티오 자작령 내에 위치한 항구 마을 위데오(vírĕo).

매일 같이 오고 가는 배와 승객들을 상대로 술과 음식, 인력을 팔며 남 부럽지 않은 풍족한 삶을 즐기던 마을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재물과 사람, 꿈과 희망을 안겨 주었던 배가 재앙의 근원이었다.

그곳에서.

"자작가의 망나니, 그 망할 놈의 새끼가 물린 걸 숨기고 마을에 내렸으니까."

단 한 명 때문이었다.

수백 가구, 수천 명의 무고한 이들이 짓밟힌 이유가.

고작 단 한 놈의....

후, 됐다. 이제 와 후회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나는 단지 기도할 뿐이다. 결국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한 망나니, 아니 무스카만도 못한 버러지를 누구라도 좋으니 꼭 잘게 잘게 찢어 죽여 주기를.

신(神)이 정말 있다면 내 원한을, 나아가 우리 마을의 영원한 안식을 치러 주길 바랄 뿐이다.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다수의 지원자가 동시 진행합니다.

* 특이 사항 2: 본 퀘스트는 '종료 시점'이 존재합니다.

* 특이 사항 3: 본 퀘스트는 종료 시점은 '위데오 마을 내 모든 언데드'의 괴멸입니다.

* 서브 퀘스트 목록 확인 적용자: 서브 퀘스트 목록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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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맵이 활성화됩니다.]

['위데오(vírĕo) 마을'의 위치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48화

"이상 무, 사방 50m 내에 적은 없습니다."

"체크 끝났으면 이쪽으로들 모여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빛이 갈무리되는 즉시 전투태세 및 근방 정찰을 나섰던 우린 주변이 안전함을 인지하곤 정유환의 주도하에 한자리에 모였다.

마주치는 생환자마다 생존주의자들이었기에 단체 퀘스트는 해봤지만, 단체로 활동해 본 적은 없는 터라 일반적인 파티는 어떤 식으로 행동하려나 궁금했는데, 보통은 출발 전에 약식으로라도 전략 회의를 하는 모양이었다.

'신기하네. 그나저나 꽤 까다롭겠는데?'

그간의 내 플레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에 신기한 의미로 어깨를 으쓱이곤 정유환 등의 곁으로 다가가며 임무를 차근차근하게 정독한 결과 본 퀘스트의 핵심 포인트는 두 가지로 좁혀졌다.

첫째는 숫자.

군대(軍隊)라는 명칭에 걸맞게 처리해야 될 언데드의 수가 300을 넘어갔다.

폰스 마을에서의 언데드 웨이브는커녕 폐허에서의 할당량과 비교해도 크게 대단한 규모는 아니지만, 당시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점이 있었다.

'3단계로 구분되어 있는 구조에 괴멸이라… 이럼 마지막은 누가 봐도 2차 진화체라는 소리네.'

두 번째 포인트이자 퀘스트 창 최하단에 표시된 '1'이라는 숫자였다.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기에 섣불리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누가 봐도 '위에서부터 기본형, 1차 진화체, 2차 진화체 순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나열법.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이번 퀘스트 결코 쉽지 않을 터.

예전 기억을 되짚어가며 2차 진화체의 위험성을 떠올린 나는 두런두런 대화 중이던 정유환 등이 볼 수 있게끔 손을 들었다.

저들이 2차 진화체에 대해 아는진 모르겠다만, 혹 아무런 정보가 없다면 명확하게 알려 주어야 했다.

2차 진화체가 껴 있을 경우 기존의 퀘스트에 비해 난이도가 확 높아진다는 걸.

"잠시, 주목해 주시겠습니까?"

장비로 한 번, 스킬 공개로 또 한 번.

생환자 오휘윤의 진면목을 제대로 각인시켜 준 덕분인지 네 명의 남녀는 내 손짓 발짓 하나하나 허투루 대하지 않겠다는 듯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전장에서는 실력이 장땡.

성격이 아주 개차반이 아닌 이상에야 고용주인 정유환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존중해 줘야 하는 법이었다.

그게 살짝 부담스럽게 다가오기도 했으나, 지금처럼 무언가를 설명하기에는 참 편했기에 왠지 모를 어색함은 뒤로 한 채 말을 이었다.

"혹시 2차 진화체를 아십니까?"

"2차, 진화체요?"

"편의상 그리 이름 붙였습니다. 구울이 좀비의 상위 버전이라면, 2차 진화체는 구울의 상위 버전이죠. 종류는 제가 목격한 것만 총 세 가지. 그 이상의 개체가 더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제가 사냥한 놈들에 대해 알려드리자면 우선은 듀라한이라는 게 있습니다."

흡사 교실 맨 앞줄에 앉은 모범생들같이 눈을 반짝이며 내 이야기를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노력하는 일행들.

"…해서 중장거리 공격도 위협적이니 이 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그 외에 두 종은 붉은 피부와 보라색 피부로, 전자는 육체 특화 후자는 광역 중독 스킬 보유로 추정 중입니다."

"흐음, 엄청나군요. 2차 진화체라니."

"제가 보기에 제일 위험한 쪽은 보라색 피부 같습니다."

"듀라한이 더 위험하지 않나요?"

"듀라한의 광역 버프도 버프지만, 저희 쪽에서는 독 안개가 퍼지면 막거나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자칫 전투 중에 역풍이라도 분다면 싸우기도 전에 쓰러질 겁니다."

"저도 주완 씨 의견에 동의합니다."

새로운 정보가 더해지니 전략 회의도 한층 열기를 띄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떠드는 것과 정보를 확보한 상태에서 떠드는 것은 천지 차이였으니 말이다.

그사이 나는 조용히 핸드폰 화면 한쪽을 터치했다.

[〈메인 퀘스트: 복수와 평안〉의 서브 퀘스트를 열람합니다.]

1. 피눈물로 새긴 원한

2. 소집령

* 수행 가능한 서브 퀘스트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서브 퀘스트 목록을 파악해 보기 위함이었는데.

'…딸랑 두 개?'

촤르륵 펼쳐진 내용물을 보아하니 그 양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폐허도, 페루스 마을도 그러더니 요새 서브 퀘스트가 짜도 너무 짜다.

'좀 팍팍 주면 좋으련만.'

쩝.

남몰래 혀를 찬 나는 하단에 첨부된 미니맵을 대강 외우며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간이 전략 회의도 끝나가고 있었다.

서브 퀘스트에 관해서는… 당분간은 숨길 요량이었다.

S 랭크 완수금을 감안하면 정유환의 공적치를 올리기 위해 공유하는 쪽이 나을 테지만, 이게 또 보상으로 경험치 외에 아이템이 드랍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지분을 나누고 싶지가 않았다. 혼자 먹어도 배가 안 찰 텐데 이걸 어떻게 나누냐고.

이 일로 인해 정유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다면?

딱히 상관없었다.

지금이야 다각도로 도움을 받고 있으니 흡사 정유환이 갑이고 내가 을인 듯하나,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내가 슈퍼 갑이었다. 매달려도 저쪽에서 매달려야 하고 참는 것도 저쪽에서 참아야 한다. 그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날 따라잡지 않는 한 이 수직 관계는 계속해서 유지될 테니까.

작금의 나는 더 이상 일개 중소기업 회사원이 아니었다.

"오케이, 그럼 나머지는 현장에 도착해서 다시 얘기 나누기로 하고 출발하겠습니다!'

* * *

지도를 따라 잘 정비된 도로를 걸어가는 길.

강의 특성 탓인지 그냥 기분 탓인지 점점 습해진단 느낌이 들 즈음.

쏴아아아아아아―

"아."

"엄청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우메르강을 마주할 수 있었다.

거대한 강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강 너비만 해도 무려 7~800m는 넘는 강폭을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한강이 1km쯤 된다고 했던가? 그에 비하면 조금 모자랄지언정 확실히 배 없이는 건너기 힘든 수준이라 보는 내내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리는 저쪽으로 가면 될 거 같군요."

그렇게 한동안 감상에 젖어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다리를 발견한 강태성의 말에 다들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서 본 다리는 나무와 밧줄로만 구성된 구름다리 형식이었다.

아마.

짐이나 대량 운송은 배를 통해야 하고, 그 외에 행인들은 이 다리를 이용해 강을 오간 듯싶었다.

"상태는 나쁘지 않은 듯합니다. 혹시 모르니 제가―"

전위를 맡은 강태성은 밧줄을 쭉쭉 잡아 당겨 보기도 하고 나무판자를 주먹이나 방패로 두들겨보며 안전성을 확인한 후 앞장서서 다리에 몸을 실…으려 하던 걸 내가 말렸다.

"잠깐, 멈추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 그러시는지?"

- 끄아아아아아아!!

- 으어어어....

"구울이군요."

"예?"

불어오는 강바람을 타고 날아든 언데드 놈들의 하울링이 귓가를 자극한 까닭이었다.

숫자는 많지 않은 것 같으나, 개중에는 구울 특유의 날카로운 괴성이 끼어 있는 터라 좀 더 면밀하게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수심과 유속이 1도 가늠되지 않는 강을 아래에 둔 구름다리 위에서의 전투는 좀비 한두 마리만으로도 엄청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여.

어리둥절해하는 일행을 데리고 근처 두터운 나무 위로 올랐다. 좌우로 쭉 뻗은 나뭇가지들을 밟으며 꼭대기에 도달한 순간 탁 트이는 시야와 함께 서서히 눈에 들어오는 다리 끝자락의 풍경.

첫 번째로 무너지고 박살 난 마을의 모습이 보였고, 이후 몇 척의 배가 정박 중인 선착장.

그리고.

"끄어어어어어!!"

"끄아아아아!!"

"흐읍!"

"음."

구름다리 반대편을 활보 중인 언데드들의 실체가.

나는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짧은 신음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안구에 힘을 주어 인근 일대를 세밀하게 훑어 보았다.

"저기가 위데오 마을인가."

유난히 눈에 띄는 부분은 위데오 마을의 크기였다.

수백 가구가 기거하던 거주 지역인 만큼 '이름 모를 폐허'를 연상케 하듯 굉장히 넓었거니와 온통 목재로 도배된 보통의 촌 동네와 다르게 곳곳이 벽돌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

그걸 보고 있자니.

'잘 뒤지면,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겠는데?'

불현듯 과거 〈서브 퀘스트: 사냥꾼의 절규〉를 진행했던 살투스(saltus) 마을에서의 파밍이 떠올라 입맛을 다신 나는 기회가 된다면 한번 싹 훑어보기로 하고 다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메인 퀘스트: 복수와 평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다름 아닌 2차 진화체의 위치였다.

'제발, 제발.'

기왕이면.

한정 업적 클리어의 제물로 쓸 빨간 피부나 보라색 피부의 2차 진화체가 있기를 기원하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찰나.

찌릿―

심장을 옥죄는 육감의 경고에 내 시선이 어딘가로 돌아갔다. 찐득한 살의가 뭉쳐 솟구쳐 오르는 마을 내부의 중심부로.

- 크에에에에에에엑!!

"거기, 있었구나?"

그곳에서.

나를 부르는 메아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구름다리 건너기가 쉽지 않음을 깨달은 정유환 등이 심각한 표정으로 모여 다시금 회의를 주최했다.

배가 없는 이상 반드시 걸어서 통과해야만 하는데, 언데드들과의 접전으로 빚어질 최악의 사태가 걱정스러운 듯했다.

…만.

난 예외였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저걸 뚫고 갈 수 있겠습니까?"

"예. 제가 먼저 가서 안전지대를 확보한 후에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후에 건너오시죠."

다리 반대쪽에 존재하는 언데드 들의 숫자는 대략 4~50여 마리, 저 정도 숫자는 돌파하는 데에 별 무리가 없다.

나 역시도 다리가 부서졌을 때의 상황이 우려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것도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

"이 근처에도 언데드들이 있을지 모르니 사주 경계하고 계십시오. 금방 신호 보내겠습니다."

머릿속으로 정리를 끝낸 나는 불안해 정유환 등에게 피식 웃어 주곤 발을 내디뎠다.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옅은 출렁거림.

그러나 잦은 왕래객들을 위하여 상당히 팽팽하고 튼튼하게 설계되어 있었기에 달리는 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실제로 몇 번 점프를 해보자 평지에 비해 약간 부족한 감은 있으나 내 몸무게 정도는 너끈하게 감당 가능한 내구도와 탄성이라 왔다 갔다 몸을 움직이며 낯선 반동에 적응해 가던 난 이쯤이면 됐겠다 싶을 무렵 주저하지 않고 다리를 주파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놀라 헛바람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금세 멀어지더니 어느덧 중간을 지나고 끄트머리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더불어.

"…끄어어어어억!!"

"…으어어어어!"

새로운 먹잇감을 포착하곤 발광하는 언데드 놈들의 흉물스런 대가리도 보였다.

놈들은 나를 목격하자마자 잔뜩 흥분한 얼굴로 아가리를 벌리며 서로 앞다투어 다리로 몸을 들이밀었는데.

이거야말로 아비규환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감상평을 뇌까린 나는 달리던 속도를 더욱 높이며 짧은 기합을 발판 삼아 강하게 바닥을 박찼다.

"하앗!"

파스마(phasma) 류(流).

유령 걸음.

이윽고.

무형의 날개가 나를 감쌌다.

탁!

후우우우욱―

49화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길래, 나는 날개 없는 인간들의 대표로 하늘을 날았다.

바람에 저항이 느껴진다 싶더니 어느새 사방의 경관이 물에서 뭍으로 변해 가는 게 눈에 보였다.

그 아래로.

"그어어어억?"

"어어어어, 으어어어...."

먹잇감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망상에 취해 있던 언데드 놈들이 별안간 사라진 날 찾아 얼떨떨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멍청한 자태도.

인지력에 혼동을 주는 '유령 걸음'.

이 귀신의 몸놀림은 설사 언데드들이라고 해도 잡아내지 못했다.

그 덕에.

아무런 분쟁 없이 다리를 건넌 나는 창공을 유영하던 육체가 서서히 중력의 영향을 받아 낙하하고 있음을 감지하곤 자세를 잡으며 착지를 준비했다.

후우우우욱.

탓―

타닷―

"후아."

발끝을 통해 대지의 딱딱한 촉감이 전달됐다.

멀리 뛰기 세계 기록이 8m라던가?

마력과 스킬, 경험치 등 온갖 기스템의 버프로 그 기록을 서너 배나 뛰어넘어 강가에 다다른 나는 낙법을 구사하듯 굴러 추락의 충격을 흡수하며 곧장 환두대도를 좌에서 우로 휘둘렀다.

사아아악―

서걱!

힘에서 밀려 구름다리에 오르지 못한 좀비의 발목이 숭덩 잘려 나간다.

그제야 아래쪽에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차린 몇 마리의 좀비가 바닥을 바라보았으나, 돌아오는 건 차가운 칼날뿐이었다.

아.

"읏―"

감각이 제한된 탓에 한기를 못 느끼지?

후우우우욱!

"차!"

서걱―

촤아아아아악!!

* * *

"도, 도착했어요!"

"아...."

나무 위에 올라 강 저편을 주시하던 정유환은 정유림의 외침에 도저히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30m? 40m?

지면 반발력을 빌릴 수 있는 평지라면 모를까.

아니.

설령 평지라 한들 과연 저만한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는 생환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적어도 자신이 아는 이 중엔 한 사람도 없었다.

단순히 지인 관계를 넘어 회사 차원에서 관리 중인 이들까지 죄다 포함한다 하더라도 제로였다.

'평범하지 않다는 거야 예상은 했지만.'

세세하게 살펴볼 순 없었으나 그저 외형만으로도 특별함을 드러내는 장비와 수십 마리의 언데드를 앞에 두고도 잃지 않는 여유.

오휘윤.

그 석 자를 되뇌면 되뇔수록 가슴 한편에 자리 잡은 사업가의 육감이 끊임없이 속삭였다.

저 남자는 무조건 붙잡아야 할 '귀인(貴人)'이라고.

어찌 다루느냐에 따라 회사를 세계 제일로 우뚝 서게 할 수도, 그룹 전체를 패망의 길로 처박을 수도 있는 유일무이한 카드.

이건 절대 비약이 아니었다.

현재 개발에 들어간 '포션의 현대화'만 봐도 독점만 한다면 잠정 수익이 최소 수천 조에 달하는 상품. 오휘윤은 이런 천문학적인 재화의 원자재를 공급해줄… 정확하게는' 더 뛰어나고 효율 좋은 재화의 원자재를 남들보다 빠르게 공급해 줄' 공급처였으니까.

한데 이 최상급 창구를 다른 쪽에 빼앗긴다?

그로 인해 발생할 상대적 손실액이 얼마나 될지 추정도 되질 않았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꽉 붙어야 한다.'

저런 보물을 다른 쪽에 빼앗길 순 없다.

안 그래도 요즘 돈 좀 있다는 기업들에 이어 각국 정부까지 나서서 손을 뻗치고 있는 형편이라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언젠가 청성의 가장 찬란한 별이 되려면.

'유상이 형, 조금만 기다려. 곧 따라잡아 줄 테니까.'

"…장님, 사장님."

"예?"

"신호가 왔습니다. 넘어가도 될 듯합니다."

"벌써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하, 이것 참. 첫 만남 때부터 느꼈는데, 오휘윤 씨. 확실히 저희하고는 완전히 다른 레벨이시군요."

"태성 씨와 주완 씨도 휘윤 씨 못지않은 실력자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섭외하려고 한 거고요. 활약할 기회는 언제든 올 겁니다. 그때 저와 제 동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걱정 마시지요. 누굴 지키는 일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터이니."

"그럼 가시죠."

강태성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정유환은 오휘윤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릿속에 강태성과 송주완의 이름도 뚜렷하게 새겨 넣으며 나무를 내려왔다.

포커는 원래 여러 장의 카드로 치는 게임이었다.

* * *

"와아...."

조심스럽게 구름다리를 건넌 정유림이 힐끔힐끔 날 쳐다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도처에 널린 시체들로 보아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데 반해 자신들을 기다리던 내 몸에는 겨우 몇 방울의 피가 튄 게 다였기 때문이리라.

이는 뒤늦게 도착한 세 사람의 반응도 비슷했다.

신기함과 부러움.

다행히 고진수…였던가, 고진두였던가? 여하간 그 어린놈처럼 질시 따위의 감정은 없었다. 가려 뽑으면서 성격도 봤나?

"별거 아닙니다. 일단 가시죠."

여하간 손을 내저으며 겸양을 떤 나는 마른 천으로 도신을 마저 닦아 주곤 강태성과 다시 페어를 이뤄 위데오 마을로 일행을 이끌었다.

다만 바로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좌측에 강이 있어 사면초가의 형국은 피했으나, 여전히 삼면이 뻥 뚫린 형국이었다. 이런 지형에서 수백 마리의 언데드 부대와 격돌한다면 생명의 샘도 없는 우리로선 도망치기를 반복하다 체력이 다해 물려 죽을 게 뻔했기에 먼저 안정적으로 전투를 치를 장소 물색에 주력했다.

이 타이밍을 빌어 나는.

"저긴 어떻습니까? 낮기는 해도 언덕은 언덕이니 구덩이를 파거나 나무로 장애물을 세우면...."

"배에 오르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그 안에도 놈들이 있겠지만, 내부만 청소한다면 입구도 좁을뿐더러 저희 쪽에서 출입문을 통제해 아예 못 들어오게 막을 수도 있습니다."

"음, 휘윤 씨 의견이 일리 있어 보입니다."

열정적으로 '배 탈취' 주장에 힘을 쏟았다.

이유야 명백했다.

그쪽에 두 개의 서브 퀘스트가 모조리 모여 있었으니까.

초반에 살짝 훑어봤던 게 전부라 저기 늘어서 있는 십여 척의 배 중 정확히 어느 곳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거야 이따 시간 내서 재차 체크해 보면 될 일.

우선은 배에 오르는 게 선제 되어야 추후 수색 작업을 벌일 적에도 남들 눈에 수상해 보이지 않을 터이니 지속적으로 발언을 밀어붙였다.

뭐 꼭 그게 아니더라도 정유환의 동조처럼 배를 요새화한다는 건 정말 실속 있는 작전이었기에.

"좋습니다. 그럼 휘윤 씨 말대로 선박 중 하나를 점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가까이에 대형 선박이 하나 있으니, 저것으로 하면 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저 갈색 배 말씀이시군요."

종합적인 회의 끝에 결국 내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고지전론을 제의했던 강태성이 다소 아쉬워하는 감이 없잖아 있었으나, 그도 내 의견이 타당하다 여긴 듯 곧 수긍하며 방패와 망치를 양손에 나눠 쥐었다.

오더가 떨어졌으니 움직일 차례였다.

"갑시다."

"예!"

신속하면서도 은밀하게 조경용으로 심어 둔 가로수들을 엄폐물 삼아 전진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

우리가 목표로 잡은 빨간 배와의 거리는 약 500m.

여러 물품을 선적하던 와중에 참사를 당했는지 배와 강가를 연결하는 두터운 판자가 그대로 걸쳐져 있었는데, 아마도 식료품을 조달하는 선박인 듯 군데군데 널브러진 나무통 밖으로 과일 따위가 굴러다녔다.

더하여.

"끄어어어어어!!"

"그어어어!"

"으어어어, 으어어어어...."

선원과 승객, 마을 주민들이었을 언데드들도.

수는 대충 30여 마리.

우리는 놈들을 목도함과 동시에 무기를 치켜들었다. 그동안은 전투 소음으로 언데드들이 몰려오면 앞뒤로 둘러싸이는… 속칭 다구리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조용히 이동했지만, 배를 타려면 좋든 싫든 대로로 나와야 하는바.

여기서부터는.

"다들 조심하시고, 가봅시다."

불가피하더라도 전투를 치러야 했다.

"흐읍!"

짤막하게 호흡을 들이켠 강태성이 방패를 내세우며 달려나간다.

본격적으로 교전에 들어선 그는 왼손의 방패로 좀비를 밀어 쳐내며 오른손의 망치로 대가리를 깨부수는 쌍수 공방전을 구사했는데, 위력이 제법 강력했다.

구울이 아니고서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도 못할 지경.

이참에 자신이 누구이며 왜 뽑혔는지 그 능력을 똑똑히 보여주겠다는 양 거침없이 나아가는 모양새가 마치 전차 같았다.

그 활약은 송주완의 가슴에도 불을 지폈다.

"흡!"

타닷―

후우우웅―

콰직!

본래라면 정유림의 호위와 후방 경계를 담당해야 했을 송주완이 창을 쥐고 전열에 합류한 것이다. 아무래도 눈에 띄지 않으면 잊힌다는 진리가 그를 내심 조급하게 만든 게 아닐까 싶었다.

정유환과 정유림 남매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원체 적극적인 성향의 정유환은 내게서 구매해 간 '찔러 부수는 모노케로스의 한 손 검'을 뽑아들곤 우측에서 밀려오는 언데드들을 아작 냈고.

"흐읍!'

최근 들어 달라졌다는 정유림도 아직 생존주의적인 과거를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해 두려워하는 느낌은 있어도 꿋꿋하게 참으며 활시위를 당겨 좀비들의 대가리에 화살을 박아 넣었다.

나는?

"그어어어어!!"

"옳지."

후우우우욱―

서걱!

나야 당연히 맨 앞줄에서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이 맛있는 공적치를 어찌 나눠 준단 말인가?

특히.

"끄아아아아아!!"

"고맙다, 이쪽으로 와줘서."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공적치 덩어리 구울들은 다른 이들에게 넘겨줄 수 없었기에 누가 볼 새라 쏙쏙 먹어 치우며 진격 중이었다.

이게.

30여 마리였던 언데드들이 단 3분 만에 소멸당한 원인이었다.

"이쪽으로!"

"배 안에 좀비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죠."

"알겠습니다."

한 무리의 적들을 쓰러뜨린 우린 서둘러 빨간 배에 올라 건널 판자부터 치웠다. 끝에 달린 줄을 도르래로 당기고 풀어 설치 및 회수하는 형식이라 정리하는 게 딱히 힘들지는 않았다.

먼저 승선했던 송주완과 강태성이 그쪽에 매달리는 동안.

"여러분들은 여기 계시죠. 배 안에 좀비들이 있는지 수색하고 오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선실이 갑자기 열리거나 해서 기습을 당하면 위험합니다."

"그건 휘윤 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제가 인지력이 좀 높거든요."

"하하, 뭐니뭐니 해도 고용주의 안전이 제일 우선입니다. 그러니 혼자 갔다 오겠습니다."

"후, 알겠습니다."

나는 배 내부 안전 확보…라는 명분 아래 서브 퀘스트 탐색에 나섰다.

하나.

재수가 없었는지 빨간 배에서는 그 어떤 트리거도 찾아낼 수 없었다.

선장실부터 선적실까지.

한 곳도 빠트리지 않고 샅샅이 뒤졌으나 나오는 거라고는 휴게실로 보이는 공간에서 확보한 동전 몇 개와 선장실에 굴러다니던 와인 몇 병이 끝.

"텅 비었네, 텅 비었어."

거지 소굴이 따로 없는 광경에 쯧 하고 혀를 찬 나는 침대 밑까지 구석구석 뒤지느라 난장판이 된 마지막 선실을 뒤로 한 채 갑판으로 몸을 돌렸다.

시작이 반이라던데.

이러다 마을 파밍 때도 아무 성과 없이 귀환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는 시답잖은 소리를 늘어놓으며.

딱 그러던 참이었다.

찌릿―

"...!"

일순간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선 것은. 그 섬뜩한 전류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거야 하나밖에 없었다.

2차 진화체.

띠링!

[경고!]

[피와 죽음을 쫓는 추살자, '레드 구울(Red Ghoul)'이 당신의 생명력을 포착했습니다.]

['오오라: 추살자의 원념'이 육체에 들러붙습니다.]

놈의 등장을 예고하는 신호였다.

5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