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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30-40

30화

칼끝이 춤춘다.

오른발을 강하게 내디디며 허공에 반원을 새긴 도신의 궤적이 걸리적거리던 모든 것들을 베여 나간다.

폰스 마을에서의 격전을 끝으로 내가 과연 어디까지 성장했는가.

"하아!"

휘우우우우우욱―

촤아아아악!!

지금 이 순간.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새까맣게 밀려오는 검은 파도를 오로지 무력으로 찢어발기며 명확하게 해소할 수 있었다.

괴물들의 뱃가죽을 두부처럼 썰어 버리는 칼날, 허우적거리는 손톱 따위로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 피부.

어쩌면 굳이 좀비화 작전을 활용하지 않았더라도 좀비 1~200쯤은 순수 신체 능력만으로 해결했겠구나 싶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단지.

끓어오르는 자신감과는 별개로 좀비화 작전 자체는 계속해서 애용할 예정이었다. 별다른 이변이 발생하지 않는 한 이처럼 안정적이고 편리한 사냥법을 구태여 멀리할 필요는 없었다.

* * *

꿀꺽!

['생명의 샘물'을 복용했습니다.]

[모든 해로운 효과가 소멸합니다.]

[10분간 자연 치유력 및 피로 회복 속도가 200% 상승합니다.]

['상태 이상: 좀비화'가 해제됩니다.]

"후우."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샘물.

투구와 갑옷에 묻은 각종 오물을 닦아 내려 온몸에 물을 끼얹으며 주위를 힐끗 돌아봤다.

시산혈해(屍山血海).

수두룩하게 쌓인 사체와 넘쳐흐르는 핏물로 세상은 온통 시뻘겠다.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노을빛이 반사되어 더더욱 섬뜩한 천지를 한동안 관망하던 나는 벗어 두었던 투구를 재차 눌러 쓰며 바닥을 기고 있던 좀비 한 마리의 입가로 팔목을 가져갔다.

"으어어어어!!"

"그어어어!"

대략 30여 분의 난투극을 벌였으나, 쌓아 올린 전과가 무색하게 새로운 언데드 병력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끝이 없구나, 끝이 없어."

이름 모를 마을, 이곳은 종점이 보이지 않는 지옥 같았다.

나는 그리 감상평을 뇌까리며 도병을 꽉 붙잡았다.

좀비의 이빨에서 전해진 바이러스가 체내를 들쑤시기 시작했는지, 서서히 감각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자.

다시 일어나 싸울 시간이었―

띠링!

띠링!

띠링!

…는데.

"뭐지?"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면을 주시하던 나는 평소와 다른 알림 세례에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흡사 노래라도 틀어 놓은 것마냥 떠들썩한 핸드폰.

도대체 뭔 일이 벌어진 건지, 갑작스러운 사태에 인상을 찡그리다 결국 쭉 물러나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끄집어냈다.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등장한 이상 전투에 앞서 원인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고, 판단은 옳았다.

[반복되는 감염으로 인해 '면역력'에 영구적인 장애가 우려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이 계속될 시 앞으로 진행률이 가파르게 상승하며,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해제가 불가능해집니다.]

[현재 '중독:' 미약한 감염' 상태입니다.]

[빠른 시간 내에 치료하지 않을 시 '상태 이상: 좀비화'가 진행됩니다.]

[좀비화 진행률: 1%]

"영구적인… 장애?"

두 눈을 의심케 하는 두 줄의 경고 문구가 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영구 장애.

거기다 샘물로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행위가 금지된다니.

설마 '좀비화'와 관련해서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전혀 상정해 둔 적 없었던 터라, 무의식에 가깝게 핏줄을 내주었던 나로서는 매우 매우 곤혹스러웠다.

이는 단순히 전술적 제약에서 그치지 않고 향후 언데드와의 교전에서 피치 못할 사고를 당했을 떄에… 자칫 인간으로 되돌아오지 못할 수 있음을 암시했기 때문이었다.

언데드로 가득한 칼리야스 대륙을 오가는 생환자 입장에선 가히 최악의 상황.

"허."

그로 인해 굳게 닫힌 입술을 비집고 탄식이 흘러나왔다.

당장 이번 퀘스트부터 발등에 불이 떨어진 탓이었다.

골치가 아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럴 경우를 대비해 도움이 될 만한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기에. 다만 우선은 머리를 비웠다.

"그어어어어어!!"

"으어어어!"

좀비들이 코앞으로 다가왔거니와.

[좀비화 진행률: 5%]

여전히 바이러스가 내 몸속을 활보하고 있다.

척!

"가자."

그러니 뭉그적거릴 때가 아니었다. 마지막이 될지 모를 버프의 뽕을 뽑으려면 못해도 100구는 쓸어 버려야 한다.

탓―

쿠웅!

"흐아아아아아!!"

* * *

[남은 시간: 3시간 42분 31초]

[남은 시간: 3시간 42분 30초]

[남은 시간: 3시간 42분 29초]

이름 모를 마을.

부르기 편하게 '폐허'라 명명한 장소에 당도하고 나서 어언 한 시간여가 흘렀다. 그동안 두 차례의 '좀비화' 작전으로 폐허 입구 안팎을 깔끔하게 정리한 나는 샘물로 가볍게 입 안을 헹구곤 안전한 위치로 향했다.

폐허 심층부로 입성하기 전에 따로 준비할 것도 있고.

뭣보다.

촤라락―

샘물을 대체할 대체품.

〈영웅의 목걸이/Magic〉

* 오직 '영웅(英雄)'이라 불리는 자들만이 착용할 수 있다는 목걸이. 전설이 실제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벼락의 주인: 이그니스(ignis)」, 「물결치는 마도사: 운다(unda)」 등 많은 영웅들에게서 목격되었다고 전해진다.

* 착용 시 지정된 능력 최대치(선택 1, 선택 2) 7% 향상/마법 '귀속' 부여

'Rank: Hero_Village'에 딸린 보상이 하도 무지막지했던 덕에 추후 처한 환경에 따라 맞춰서 써먹으려 남겨 둔 '영웅의 목걸이'의 빈칸을 채워 놓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물론.

묵혀 두면 묵혀 둘수록 무탈하다는 소리이니만큼 가급적이면 최대한 아껴 두길 바랐기에 목걸이를 쥔 손길엔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아끼다 똥 된다는 말도 있으니.

['영웅의 목걸이'에 적용될 옵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Y/N]

[주의, 결정 시 되돌리기가 불가합니다.]

"후딱후딱 해치워 버리자."

곧게 세운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카테고리가 개방됩니다.]

〈옵션 카테고리〉

* 육체: 근력/체력/속력/재생력....

* 정신: 집중력/인내력/저항력/친화력....

* 기타: 마력/속성력(화)/속성력(수)....

과거 '영혼석 교환권'을 사용했을 적과 비슷한 화면이 열리자 나는 즉시 육체 항목의 스크롤을 움직여 한 곳을 터치했다.

탁―

탁―

* 육체: …면역력

['면역력'을 선택하시겠습니까?]

[Y/N]

딸깍!

['면역력'이 선택되었습니다.]

['영웅의 목걸이'의 첫 번째 옵션이 변경됩니다.]

['영웅의 목걸이'의 두 번째 옵션이 변경됩니다.]

[일시적으로 신체 능력 '면역력'이 개방되었습니다.]

추가 면역력 14%.

실제로 얼마나 효과적인지 실험해 보기 어려운 처지인 데다가 애당초 근력이나 인지력이 향상될 때처럼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으나, 면역력이란 스탯이 개방되었다는 문장을 직접 목도한 것만으로도 개인적으로 크게 안심이 됐다.

공식적으로 시스템의 보정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차이는 엄청났으니까.

단적인 예로 모든 신체 능력치를 일정량 향상 시 큰 '경험치'와 달리 패시브 스킬 '위대한 발걸음'은 스탯이 반드시 개방되어 있어야만 적용받는다.

"14에 9, 합쳐서 23퍼센트. 좋아. 이쯤이면 좀비 정도는 막아 주겠지."

완성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다 흡족하게 끄덕거린 나는 엉덩이를 털며 몸을 일으켜 어딘가로 이동했다.

전장을 뒤에 두고 도착한 목적지는, 두 시간 전 즈음 들렸던, 굵직굵직한 나뭇가지들이 서로 엉키고 설켜 천혜의 장벽을 이룬 모노케로스 숲이었다.

여길 재방문한 이유야 간단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50대만 제작해 볼까? 혹시 모르니 넉넉잡아 100자루는 쟁여 둬야 하나?"

목창.

원거리 공격 수단을 챙겨 가기 위해서였다. 좀비화 작전이 무용지물이 돼버렸으니, 의지할 친구는 투창뿐이었다.

* * *

"흐읍, 차!"

기어이 무려 일백 자루나 되는 목창 더미를 이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전진하며 폐허에 다다를 무렵.

- 으, 으앗!

- 예은 씨! 찔러요! 어서!

- 저, 저는 도저히…!

- 꺄아악!

- 정신 차리― 희연 씨! 서준아! 희연 씨를 도와!

- 네, 넷!

낯선 음성들이 바람에 실려 날아왔다.

스타팅 포인트에 남겨 두고 왔던 생환자들이 저마다 창칼로 무장한 채 시신으로 그득한 입구에서 좀비들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이제 온 건가?"

나는 그들을 목격하자마자 박수를 쳤다.

메인 퀘스트가 실시되고 장장 세 시간 여 만에 낯짝을 비췄다는 게 참으로 놀라워서.

여태 뭘 했길래?

"됐다."

알고 싶지도 않다.

끽해 봐야 하하호호 자기소개나 하며 어떻게 도망칠지 그 궁리나 하고 있었겠지.

안 봐도 뻔한 결말에 잠시 내려놓았던 목창 더미의 끈을 붙들고 폐허 옆을 빙 둘러 가며 자리를 옮겼다.

애써 입구를 비워 두었으니 그리로 들어가는 게 낫겠지만, 괜히 모습을 보였다가 엉겨 붙을까, 인연이 성사될 건덕지를 없애 버릴 심산이었다.

실력이야 모자라도 된다.

하나.

의지와 태도가 부족한 사람들과의 동행은 바라지 않았다.

"한산하네."

평야에 세워진 마을의 특성상 농사나 수렵보단 교통에 중점을 두었는지 반대쪽에도 커다란 대문이 세워져 있었는데, 살며시 들여다보니 한창 입구쪽에서 어그로가 끌린 덕분에 이쪽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어슬렁거리는 좀비의 숫자는 약 30여 마리가 끝.

"빠르게 처리하자."

스윽―

한 묶음의 목창 더미를 풀어 바닥에 일렬로 세우고.

셋, 둘, 하나....

'흐읍!'

탁―

후우우우우욱!

짧은 심호흡을 배경 삼아 거침없이 창을 투척했다.

당연히.

콰직!

명중(命中)이었다.

* * *

"가방은… 여기가 두고."

한바탕 투창을 퍼부은 나는 편의상 후문이라 지정한 근처가 잠잠해지자 타이밍도 생겼겠다 타깃이 어디쯤 있나 수색이나 해볼까 싶어 짐 가방을 한쪽에 고이 모셔두고 환두대도와 여분의 목창을 챙겨 폐허 내부로 몸을 들이밀었다.

폰스 마을과 비교해 조금 더 큰 크기를 자랑하는 폐허는. '폐허(廢墟)'라는 이명에 걸맞게 대부분의 건물들이 허물어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도처에 까만 잿더미가 흩뿌려져 있는 걸로 보아 아마 습격 당시 어영부영하다 누군가 실수로 화재를 낸 듯했다.

굳이 평가를 내리자면 나로서는 영 껄끄러운 필드였다.

엄폐물이 거의 없어 적들의 관심을 한데 받는 구조라, 그 때문에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려 폐허 곳곳을 탐색해 가던 즈음.

"…응?"

막 골목길 구석을 통과하던 내 눈에 특이한 물체가 아른거렸다.

폐허 중앙.

마차나 수레 등이 드나드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원래부터 텅 비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공터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검고 빨간 무언가.

거리가 있어 제대로 살펴볼 수는 없었으나.

"아."

나는 저것들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저릿!

저릿!

살기(殺氣).

마치 갓난아이가 웅크린 듯한 외형을 중심으로 지독한 살의의 파동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숙성기에 접어든 구울이었다.

31화

목표물을 포착함과 동시에 불쑥 한 가지 고민이 뇌리를 휘감았다.

나와 타깃 사이의 간격은 겨우 5~600m. 뻥 뚫린 대로임을 감안했을 때 작심하고 달린다면 능히 1분 안에 주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가서 죽여?'

칼자루를 움켜쥔 나는 발 앞꿈치를 세워 뛰쳐나갈 듯 열을 올렸다.

…만.

단숨에 튀어 나가지 못하고 멈칫했다.

보상.

혹여 〈메인 퀘스트: 저지(1)〉을 일부러 실패하고 나서 〈메인 퀘스트: 저지(2)〉로 넘어가 마침내 여러 갈래의 길의 종착지에 도달해 상위 개체로 거듭난 언데드들을 처치한다면 더 다양하고 질 좋은 보상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나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예컨대.

[축하합니다!]

[〈100인 한정 업적: 최초의 구울 사냥꾼〉을 달성했습니다.]

경험치를 비롯해 네 피스의 방어구와 내구력 증진용 영혼석에 기술 임의 습득권 등, 튜토리얼에서 마주했던 이런 한정 업적 말이다.

그래서 머뭇거린 것이다.

이로 인해 S 랭크에 영향을 끼칠지도 몰랐지만, 한정 업적 역시 놓쳐서는 안 될 귀하디귀한 보물이었으니까.

'어쩌…지?'

상위 언데드.

가늠하지 못할 만큼 난이도가 높을 것임은 알지만서도 자꾸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이란 격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Go&Stop.

어느 쪽을 골라야 하는가.

꽈아아아악―

짧되 긴박했던 고심 끝에 나는 고개를 작게 주억거리며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탁―

쿠우웅!

…타다다다다다다!!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내가 고른 답은 '한 마리쯤은'이었다. 감당을 할 수 있을는지 확신은 서지 않지만, 최소한 정보 습득을 위해서라도 한 마리쯤은 부딪쳐 보고 싶었다.

멋모르고 덤볐다가 구울에게 한번 제대로 덴 경험이 있는 탓에 2차 진화체와의 결전이 두려운 건 사실이었으나.

"…강제 귀환권이 있으니까."

여차하면 퀘스트고 뭐고 다 내던지고 도망치면 된다.

하나뿐인 귀중한 동아줄을 이리 써버리는 게 맞나 싶다가도 아끼면 똥 된다는 진리를 되새긴 나는 품 안에 넣어둔 '강제 귀환권'을 떠올리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어어어어!!"

"으어어어!"

"끄아아아아아!!"

은밀함을 버리고 신속 기동으로 전면에 나서자 급속도로 모여드는 언데드들.

개중에는 구울도 한 마리 섞여 있어 만만찮게 볼 병력은 아니었지만, 일괄적으로 무시하고 오직 목표만을 바라보며 환두대도를 허리춤으로 끌어당겼다.

이대로, 적진을 가로지른다.

"흐아아아아아!!"

휘우우우우욱―

꼬리에 꼬리를 물며 불어나는 검은 파도의 선두에 서서 석양을 머금어 반짝거리는 칼날을 휘둘렀다.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내리치는 정석적이면서도 위력적인 사선 베기.

이윽고.

대기를 반으로 가른 환두대도가.

촤아아아아아악!!

캉!

"...?!"

강한 반동을 선사하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 * *

아이템 명 '사나운 호랑이의 양손 환두대도'.

매직 등급답게 기본적으로 근력 최대치를 7%나 끌어 올려주고, 베기 공격 시엔 추가 피해량 플러스 10%나 증가시켜 주는 화려한 옵션들을 지니고 있다.

더군다나.

노말급이긴 해도 '질 좋은 숫돌' 같은 마도(磨刀) 용품도 있겠다. 틈틈이 관리하며 날도 바짝 벼려두었기에 환두대도를 얻은 이후로 좀비도, 심지어 구울의 튼튼하고 질긴 살가죽일지라도 아주 손쉽게 베어 버릴 수 있었다.

분명 그러했는데.

캉?

기대와 확신을 배반하는 몹시 이질적인 소음에 나는 심히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멍하니 아래를 쳐다봤다.

피를 흠뻑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 유난히 빨간 신체를 지닌 구울의 목을 노렸던 칼날이 두 치(약 6cm)가량을 파고들다 제동이 걸려 옴짝달싹못하고 있는 기이한 장면을.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목, 뼈?"

앞서 '좀비화 작전'이 봉쇄되었다는 소식보다 더한 충격에 사로잡힌, 내 눈에 보인 것은 다름 아닌 '경추'였다.

백색과 적색이 묘하게 어우러진 목뼈가, 비록 금이 가긴 했을지언정 내 전력이 담긴 칼날을 튕겨 낸 것이다.

이 사실을 직시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구울의 벽마저 돌파한 2차 진화체는 내가 상정해 둔 레벨 이상의 존재라는 걸. 일 대 일 승부도 승리를 장담하긴 힘들 거라고. 평범하지 않은 방어력을 소유했다는 말은 곧 그에 비례하는 공격력을 지녔다는 말과 일맥상통했으니까.

고로.

일 대 삼 구도는 욕심과 상관없이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놈들이 껍질을 탈피하기 전에 허물과 함께 박살 내버려야 했다.

"하아아!!"

턱―

콰직!

각오를 다진 나는 곧장 빨간 구울의 등판을 발로 누르며 강제로 살을 벌려 도를 뽑았다.

울컥 솟구쳐 오르는 핏물 너머.

"끄아아아아아아!!"

"그어어어!"

"으어어어어어!"

선봉의 구울을 필두로 어느덧 2~30보까지 접근한 언데드들의 살의가 쏘아져 들어온다.

빡!

그 바람에 조급해지기도 했으나, 흥분하면 될 일도 안 된다고 되뇌며.

"하!"

하늘에서 땅으로 일직선을 그었다.

일도양단(一刀兩斷).

사형을 집행하는 망나니의 일격이었다.

후우우욱―

서걱!

(0/3)

삑!

(1/3)

됐다.

방금 전과 달리 완벽하게 뼈를 끊어내는 환두대도. 요번에도 막혔더라면 지체하지 않고 스킬을 퍼부으려 마력을 끌어모았던지라 나는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왼발을 축으로 회전했다.

우우우우우웅!

"잘 쫓아와 준 선물이다."

파직!

기왕에 응축된 마력.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시원하게 방출하고 가리라.

짧은 주문에 호응하듯 가속에 가속을 더하고 있던 뇌기가 지상을 휩쓸었다.

휘우우웅―

꽈르르르르릉!!

* * *

휘황찬란한 뇌류가 지상을 무자비하게 불사르며 언데드들을 진군을 저지하는 사이.

쭉 빨려 나간 마력의 허탈감을 서둘러 털어 낸 나는 쉬지도 않고 빨간 구울 옆에 있던 검보라색 구울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칼을 치켜들었다.

"하!"

후우우욱!

콰직―

간결하게 찍어 누르는 섬격.

길게 갈 거 없이 단 한 수에 절단낼 기세로 살갗을 베고 들어가던 직후, 나는 불현듯 숨을 참으며 두어 걸음을 비켜섰다.

투둑―

…스스스스슷스슷!!

"뭐지?"

빨간 구울과는 또 다르게 부드럽게 짓이겨지는 검보라색 구울의 상처에서 별안간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라 빠른 속도로 주변을 잠식한 까닭이었다.

척 보기에도 불길하기 그지없는 현상에 정체는.

띠링!

['검은 죽음'에 중독되었습니다.]

[흡입한 양과 중독 시간에 따라 '상태 이상: 혼란'과 '상태 이상: 오감 마비' 및 '상태 이상: 출혈', '상태 이상: 부패'가 순차적으로 적용됩니다.]

독(毒).

구울의 전용 스킬인 '구울의 시독'에서 한층 강화된 극독이었다.

"...!"

참는다고 참았는데 몇 모금 들이켰는지 요란해진 핸드폰에 나는 황급히 허리춤을 매만져 샘물 병을 꺼냈다.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은 사라졌지만, 일전에 '구울의 시독'도 치료해 주었던 것처럼 샘물은 독에 대해서도 방호력이 대단했다.

꿀꺽!

['생명의 샘물'을 복용했습니다.]

[모든 해로운 효과가 소멸합니다.]

[10분간 자연 치유력 및 피로 회복 속도가 200% 상승합니다.]

['상태 이상: 검은 죽음'이 해제됩니다.]

"후."

마신 양이 적었던 덕택인지, 샘물로 커버가 가능한 영역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말끔히 해독되었다는 메시지에 안도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 놈은 범상치 않은 내구력을 갖고 있더니, 이놈은 광범위 중독 스킬.

하면....

"저놈도 뭘 써댄다는 소리인데."

빨간색, 검보라색에 이어 자연스레 칠흑 같이 까만 구울로 시선을 돌린 나는 이러다 판타지 세계관 알파이자 오메가인 '오러(aura)'를 갈겨 대는 건 아닐까 중얼거리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중은 나중에 생각하고.

"현재는 현재의 일을 해야지."

스윽―

부지불식간에 사위를 물들이는 보랏빛 안개를 응시하며 나는 등에서 목창 몇 자루를 빼냈다.

이놈의 내구력은 일반 구울과 대동소이하니 가까이 다가가기보다는 멀리서 요격할 심산이었다.

꽈아아아악!

"읏, 차!"

발목, 허벅지, 골반, 허리, 어깨, 손목.

쉬우우우욱!

콰직!

콰드드드득!

온 힘을 다해 내던진 창살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안개를 가르곤 단숨에 검보라색 구울의 안면을 꿰뚫었다.

삑!

(2/3)

비록 두개골 전체를 관통하진 못했으나, 사망 선고를 내리기엔 충분한 대미지였음을 증명하듯 바뀌는 숫자.

그것을 확인하곤 미련 없이 폐허에서 빠져나왔다.

* * *

"무기, 괜찮고. 방어구도… 괜찮고. 목창 오케이. 포션과 샘물도 오케이."

가라앉은 태양의 빈자리를 둥근 보름달이 대신하는 밤.

누군가는 한참 잠을 청할 야심한 시각.

든든하게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가진 나는 장비를 점검하곤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겨 내려 애쓰며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드디어.

[남은 시간: 0시간 5분 3초]

[남은 시간: 0시간 5분 2초]

[남은 시간: 0시간 5분 1초]

기다림의 끝이 도래하고 있었다.

"5분."

카운트다운에 접어든 타이머에 맞춰 쿵쾅쿵쾅 격하게 박동하는 심장.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2차 진화체와의 대면을 앞둔 탓에 긴장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나는 스트레칭으로 뻣뻣해지는 근육을 풀며 지포라이터 뚜껑을 열었다.

팅!

화륵―

바람이 불지 않아 고요하기만 한 적막 속, 맑은 소리를 내며 점화되는 불꽃.

"옜다."

휘익!

그 자그마한 불씨를 지켜보던 나는 방화범이 된 양 폐허의 유일한 건축물이라 봐도 무방한 목책으로 인도했다.

텅―

터덩―

…화르르르륵!!

활활 타오를 수 있게끔 미리 뿌려 놓은 기름을 타고 순식간에 수 미터로 크기를 불리며 치솟는 화염.

야밤에 이런 짓을 하는 연유는 불꽃으로 하여금 어둠을 몰아내기 위함이었다.

밤은 저들의 무대.

그러므로 허락받지 않은 초대 손님인 나 또한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게끔 빛을 비춰 줄 등대를 세워야 했다.

통나무를 가져다 건설한 듯 두꺼운 굵기를 보건대, 우리의 소개팅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훤히 밝혀 주리라.

나는 눈부시게 포효하는 화마에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0분만 버텨 달라 부탁하며 투구를 눌러 쓰곤 천천히 후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남은 시간: 0시간 0분 0초]

띠링!

[경고!]

[〈메인 퀘스트: 저지(1)〉의 과제에 실패하셨습니다.]

[〈메인 퀘스트: 저지 혹은 도주(2)〉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지금부터 〈메인 퀘스트: 저지 혹은 도주(2)〉를 시작합니다.]

…후우우우우우우욱!!

결전의 막이 올랐음을 알리는 메시지를 기점으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잠하던 들판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진원지는 폐허의 심층부.

그곳에서부터 발발한 시리도록 차가운 한풍이 파문처럼 밀려왔다.

* * *

〈메인 퀘스트: 저지 혹은 도주(2)〉

* 칼리야스 대륙 어딘가 이름 모를 마을 안, 마침내 축적된 생명력을 통해 길의 끝자락에 발을 들인 구울이 탄생했다.

끔찍하리만치 생명을 탐하던 아귀의 탈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육체를 거머쥔 괴물(怪物)이.

과연.

그 미지의 존재가 내뿜는 두려움과 공포는 얼마나 거대할 것인가.

다가올 미래가 어떠할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당신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려 한다.

진화된 죽음을 피해 달아나거나 맞서 싸워 잠재우거나.

자.

당신은 결정은 무엇인가?

(0/1)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다수의 지원자가 동시 진행합니다.

* 특이 사항 2: '회피'할 경우 퀘스트는 실패 처리됩니다.

* 특이 사항 3: '회피'를 선택할 경우 진화된 죽음으로부터 최대 10km 이상 멀어져야 합니다.

* 특이 사항 4: '회피'를 선택한 지원자에 한해 '특수 마법: 망령의 눈'이 적용됩니다.

* 특이 사항 5: '회피'를 경우 이제껏 세운 공적과 관계없이 성적은 'Rank: D'로 고정됩니다.

* 시스템: 서브 퀘스트 목록 확인 적용자 ⊂ 서브 퀘스트 목록 열람▼

32화

"…와우."

살갗을 아리는 그 냉기에 입에서 절로 새어 나오는 탄성.

고작 신종 몬스터 한 마리가 출현했을 따름인데 필드 전체가 아우성친다니.

혹.

단순한 진화 축하 이펙트인가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아무래도, 아닌가 보네."

1분이 흘러도, 2분이 흘러도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기를 통해 직감했다.

이건 상위 언데드 종(種)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라고.

광역 패시브 스킬… 아까 그 검보라색 구울도 일정 범위 내를 전부 중독시키는 독 안개를 뿜어내더니만, 2차 진화체쯤 되면 다들 광역기는 필수 교양쯤으로 갖고 다니는 걸까?

그 말인즉, 빨간 구울도?

"…이거 욕심부리다 광역기를 세 개나 뒤집어쓸 뻔했네."

어휴.

잠깐이나마 정말 그리되었더라면 어땠을지 상상했던 나는 혀를 내두르며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메인 퀘스트: 저지 혹은 도주(2)〉

꽈나 독특한 콘셉트의 퀘스트였다.

도망치거나 싸우거나 결정하라니.

여전히 퀘스트 경험이 많은 편이라고 얘기하긴 뭐하지만, 여태 생환자에게 도주해도 좋다고 권유한 적은 없었던 터라 다소 황당한 기분이었다.

꽁지 빠지게 달아나기만 해도 보상을 주겠다니.

D 랭크.

그다지 높지 않은 등급이었으나, 호시탐탐 발을 뺄 궁리 중이던 생존주의자들 입장에선 환영하다 못해 환장할 만한 이야기였다.

"1번을 실패하면 실력이 부족하단 말이나 마찬가지니, 차라리 목숨이라도 보존하라고 이런 식으로 퀘스트를 짜 놓은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좀비나 구울은 스킬 여부와 무관하게 정신만 바짝 차려도 사냥할 수 있는 몬스터였으나, 2차 진화체는… 특별한 방법이 없는 한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꼴이었으니.

"그 사람들만 계 탔네."

정황상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며 주억거린 나는 지금쯤 꽁지가 빠져라 내빼고 있을 생환자들을 향해 농담 섞인 말투로 뇌까리다 가볍게 볼을 툭 치며 흐트러진 집중력을 다잡고 도집을 강하게 움켜쥐곤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화륵―

화르르륵!

점차 냉랭해지는 기온에 대항하듯, 더욱 격렬하게 열기를 발산하는 불길이 슬슬 폐허의 심층부로 확산되어 가는 중이었다.

마치.

영화제에 깔린 레드 카펫처럼.

"가자."

무대 위로 오를 배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 2차 진화체 ]

일 보, 일 보 조심스럽게 나아가길 대략 100m에 다다를 무렵.

찌릿!

찌릿!

"...?!"

극한으로 끌어 올린 인지력의 무언가가 하나둘 걸려들었다.

피부를 따끔거리게 만드는 살기.

두고 볼 것도 없이 구울―

"…그어어어어!"

"…으어어어어어!!"

이었어야 했는데, 무심코 하울링이 울려 퍼진 방향으로 돌아서다 말고 굳어 버렸다.

"좀, 비?"

구울들이 쏟아져 나올 거라 예측했던 길목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좀비'였기 때문이었다.

좀비와 구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단연 피부색이다.

전자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도 인간 본래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아프리카의 흑인들과 비슷하게 전신이 짙은 묵색으로 물들어 있었기에 웬만해선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따라서.

물밀듯이 몰려오는 저 형형색색의 언데드들은 누가 봐도 좀비여야 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어째서.

찌릿!

찌릿!

"그어어어어어!!"

"으어어어어!"

"좀비가 구울처럼 느껴지는 거냐고."

사뭇 납득하지 못할 당혹스러운 광경에 항변하듯 외쳤다.

하나.

욕을 하고 항의해 봐야 변화하는 건 없었다.

탁―

차아앙!

"젠장!"

아차 하는 사이에 물결은 발치에 닿았고, 이를 헤쳐 나오려면 입이 아니라 칼을 놀려야 했다.

"그어어어어어!!"

후우우욱―

금색의 눈동자, 떡진 금발을 휘날리며 손톱을 찔러 넣는 좀비.

기존의 흐느적거림은 온데간데없고, 매서운 예기(銳氣)가 서려 있는 후려치기에 얼른 상체를 뒤로 젖히며 우하단에서 좌상단으로 칼날을 처올렸다.

타닥―

서걱!

헐렁한 옷가지 속에 감춰져 있던 팔뚝을 자르고 빠져나가는 칼날.

실제로 베고 나니 훨씬 명확해졌다.

살점과 가죽, 뼈와 근육의 강도가 적어도 2단계는 상승했다는 게. 구울과 비교하자면, 대충 0.7~0.8쯤 될 듯했다.

이런 좀비들이.

"그아아악!"

"으어어어어!!!"

당장 주위에만 족히 3~40여 마리였다.

아마도 폐허 심층부에 남아있던 놈들이 죄다 이렇게 변한 모양이었다.

그 원인이라면.

"당연히 2차 진화체겠지."

"으어어어어!!"

슈욱!

슉!

콰직!

머리를 옆으로 꺾으며 인접해 있던 좀비의 상체를 벤 나는 두 조각으로 나뉘는 몸뚱이를 발로 걷어차 공간을 만들며 연신 백스탭을 밟았다.

둘러싸이면 제아무리 나라도 큰일이다.

우르르 덮쳐오는 검은 파도의 중앙에 갇히지 않도록 신경 쓰며 착실히 숫자를 줄여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확 그냥 스킬을 발현해 싸그리 불태워 버리고 싶었으나, 함부로 남발했다가 2차 진화체와의 결전에서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기에 마력은 되도록 아껴야 했다.

이곳은 마력이 가미되지 않은 순수 무력을 시험하는 장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그어어어어억!!"

슈우우욱―

투웅!

"그어어억?"

"딴딴, 하지?"

내가 쌓아 둔 스펙은 엄청난 자산감이 되었다.

여차하다 옆구리를 내줘도, 아차 하다 팔다리를 내줘도, 강화된 좀비들이 뭔 짓을 해도 갑옷으로 받아 낼 수만 있다면 털끝조차 다치지 않았으니까.

이는.

"끄어어어어어어!!"

"흐읍!"

쿠우웅!

까득―

까드득―

"침 묻어, 인마."

서걱!

본래 능력에서 대강 두 배 정도 강해진 강화된 구울의 이빨이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올 매직 등급 방어구, 거기에 각종 옵션들이 더해진 결과는 그야말로 철옹성과 같았다.

다만.

자아도취나 하고 있을 겨를은 없었다. 심층부에 입장했음을 각인시키기라도 하듯.

…쿠우웅!

바스라지는 언데드들 너머로 바윗덩어리를 연상케 하는 묵직한 기파가 나를 두들겼기 때문이었다.

일정한 박자, 일정한 주기.

…쿠웅!

…쿠웅

…쿠웅!

흡사 전고(戰鼓, 전쟁터에서 아군의 기세를 돋구거나 여러 전략 전술을 적용하기 위해 치던 북)의 울림처럼 영혼을 자극하는 살기의 덩어리.

그래.

구울의 살기가 갓 발아한 씨앗이라면, 저 미지의 존재가 내뿜는 살기는 한껏 응축되고 뭉쳐진 덩어리마냥 생명체의 본능을 압도하는 기세가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쿠우우웅!!

"크어어어어어어어!!"

[경고!]

[죽음으로 이루어진 작은 파도를 이끄는 목 잃은 기사, '듀라한(Dulachán)'이 당신을 주시했습니다.]

['오오라: 검은 망령의 파문'과 접촉했습니다.]

[10분 간 모든 능력치가 5% 하락합니다.]

검붉은색의 갑주를 걸치고 한 손에는 대검을, 다른 한 손에는 길게 늘어뜨린 사슬로 연결된 본인의 잘린 머리를 쥔 괴물.

목 잃은 기사 듀라한(Dulachán)의 등장이었다.

* * *

기괴하다.

듀라한과의 첫 조우에서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단어는 기괴함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촤르르르륵―

촤르르륵―

제 대가리를 농구공인 양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걸로도 모자라 턱 밑으로는 기다란 쇠사슬이 박혀 있는 형태, 이게 기괴하지 않다면 무엇을 기괴하다 할까?

물론.

그것이 얕잡아 본다는 의미로 귀결되진 않았다.

"으음!"

오히려 굉장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놈은 괴물이다.

괴상하면 괴상할수록 위험하다는 방증이었으니까.

단지 뭣보다 내 눈을 의심케 하는 건 따로 있었으니.

"무장…을 했네."

바로 '무장(武裝)'이었다.

멀리서도 이목을 잡아끄는 대검, 한쪽 어깨에 뿔이 달린 흉갑과 짝을 이루는 철제 하의까지. 놈은 기사라는 이명에 딱 걸맞은 장비를 착용한 상태였다.

"저러면… 스킬을 써도 소용이 없을지도."

그동안 봐왔던 일반적인 언데드와는 궤를 달리하는 외관에, 설령 2차 진화체라도 파사(破邪)의 공능이 담긴 뇌기라면 어찌어찌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 낙관했던 나는 얼굴을 굳혔다.

만에 하나, 진정 만에 하나라도 스킬이 통하지 않는다면.

"혼자 뭐라는 거냐. 개소리 말자, 해보지도 않고 겁부터 먹으면 안 되지."

예상을 넘어서는 상황에 불안감이 차오르는지 자꾸만 흔들리는 멘탈을 확실하게 붙든 나는 이를 악물며 환두대도의 칼끝을 세웠다.

듀라한? 2차 진화체?

두려워 마라.

"나는 할 수 있다."

믿어야 한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법.

"나는 할 수 있다."

기도인지 주문인지 모를 한 마디를 반복해서 읊조리며 허리를 곧게 폈다.

그 순간.

"크어어어어어!!"

콰앙!

놈이 가공할 속력을 선보이며 내게 달려들었다.

촤르르르르르륵!!

…후우웅!

선공은 목에 붙어 있지도 않은 채로도 괴성을 질러대는 두퇴(頭槌, 철공을 머리로 대신한 철퇴)였다.

쇠사슬 대신 7~8m 길이로 늘어난 기형 척추를 세차게 휘둘러 그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대가리를 날려 보냈는데.

콰아아앙!!

"미친!"

기껏해야 두개골 주제에 위력이 무지막지했다. 피격된 땅바닥을 와장창 부숴버렸으니 말이다. 진짜 철퇴 못지않은 어처구니없는 파괴력이었다.

원인은 필시 두피를 감싼 아지랑이 같은 불그스름한 기류.

마력? 마기? 언데드이니 사기(死氣)라고 해야 할지, 겪어 본 적 없는 정체불명의 기운 탓이었다.

휘우우우웅!

휘우우!

놈은 연속해서 두퇴로 내 숨통을 조여왔다.

허공을 유영하다 원심력을 바탕으로 쏘아지는 탄환.

"크어어어어!!"

슈우우우우욱―

콰아아앙!

"뭐 이런!"

육두문자를 내지를 틈도 없었다.

목창을 투척해 원거리 공격을 할 줄만 알았지. 직접 당해 보는 원거리 공격은 끔찍함 그 자체였거니와 막는 것도 쉽지 않았다.

후우욱―

슈우우욱―

"흐으읍!"

"크어어어어어!!"

카아아아앙!

"끄읍!"

신체 조직과 날이 바짝 선 대도가 맞닿을 때마다 전해지는 반탄력은 손바닥을 저릿하게 만들었고.

카각!

칵!

간혹 잘못 부딪치기라도 하면 이가 나갈 듯 환두대도가 비명을 질러 댔다.

도신이 두꺼운 덕에 견뎠지, 얇디얇은 검이나 목재로 이루어진 창대로 맞섰다면 진작에 박살이 나버렸을 터. 이런 위급한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문제는 또 있었으니.

"그어어어어!!"

"그아아아!!"

"이런 씨부럴!"

강화된 언데드들이었다.

하도 들쑤신 덕분에 초기에 비해 수가 현격이 줄었지만, 아직도 스무 마리 남짓의 좀비들이 나를 덮쳐오고 있었다.

듀라한 만으로도 버거운 마당에.

결국.

"쓰벌."

나는 칼을 빼 들었다.

전진.

거리를 좁히지 못하면 처맞기만 할 테니 나아가기로.

그 즉시 틈을 엿보았고.

"크어어어어어!!"

콰아아앙!!

막 허벅지 옆으로 비켜나간 두퇴가 목제 건물의 벽을 무너뜨리던 찰나에.

"흐읍, 흐아아아아!!"

타닷―

쿠우웅!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개 없이도 구름을 쪼갤 듯, 칼날은 어느새 푸른 달빛을 머금은 서슬을 뿌리며 듀라한의 몸과 머리를 잇고 있는 생명선인 척추의 중단을 베어 갔다.

반격.

폭발할 그날을 위하여 꾹 참고 참았던 활화산이 세상 만물을 집어삼킬 붉은 용암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33화

"흐아아아아아!!!!"

후우우욱―

내리긋는다.

목표는 척추.

듀라한이 대지에 처박힌 제 대가리를 회수하려 왼손을 움직이던 그때, 환두대도의 도신이 팽팽해진 뼈마디를 물어뜯었다.

초장부터.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뒤져라, 이 새끼야!"

쉬우욱!

…꽈르르르릉!!

전력을 다해.

진심이 뚝뚝 묻어 나오는 원초적인 욕설과 함께 어둠을 몰아내며 듀라한을 강타한 새하얀 낙뢰.

마치 성난 호랑이처럼 앞발에 짓눌린 사냥감의 전신을 뒤덮으며 날뛰는 뇌류에 포효할 줄만 알던 아가리에서 고통으로 범벅이 된 분노로 가득 찬 귀곡성이 솟구쳤다.

"크어어어억!! 크어억!"

그러나.

"썩을!"

정작 칼침을 놓은 내 미간에 패인 골은 한층 깊어졌다.

짐작했던 대로.

"크어어어어어억!!"

후우우욱―

화악!

놈이 벼락에 직격당하고도 버텼으니까.

이유는 금방 찾아냈다.

두퇴에 아른거리는 붉은 아지랑이가 척추와 더불어 놈의 온몸을 휘감으며 뇌기를 방어해 내고 있었다. 보아 하니 일종의 공방 일체형 패시브 스킬인 것 같았다.

필살기인 '이그니스 류'까지 막아내는 개 같은.

'이대로! 밀어붙여야 한다!'

어찌 되었든 나는 물러서 봐야 좋을 게 없단 판단에 서둘러 스킬의 반동을 털어내며 발끝을 세워 돌격을 감행했다.

후우우욱―

카앙!

일 타, 이 타, 삼 타....

좌상단에서 우하단으로 발출된 사선 베기를 기점으로 발목을 치고 곧장 역대각선으로 올려 치는 연이은 공세에 놈의 육체를 둘러싸고 기류가 부서지며 여기저기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크아아아악!!"

카아앙―

카앙―

…파각!

붉은 기류는 결코 완전무결한 방패가 아니라는 점.

한창 휩쓸고 지나간 뇌류 덕분인진 알 수 없으나, 연달아 가한 참격에 갑옷 곳곳에 실금이 새겨졌다는 게 그 증거였다.

하기야 겨우 2차 진화체 따위가 절대 방어를 갖고 있을리 만무하다.

이어 두 번째는.

"크아아아아악!!"

후우우웅―

콰앙!

콰아아앙!

쾅!

"이 새끼 어딜― 아!"

어쩌면 듀라한이 가진 최대 약점을 찾아냈다는 것.

그건 다름 아닌 '시야'였다.

머리를 철퇴처럼 던져 원거리에서도 적을 격살할 수 있는 다중 공격 패턴은 분명 매력적인 장점이었으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놈이라 해도 안구는 두 짝이 전부라는 부분이었다.

즉.

한 번 대가리를 투사하면, 재차 손아귀로 거둬들이기 전까지는 일시적일지언정 시력을 소실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를 증명하듯 나를 코앞에 두고 애꿎은 땅거죽만 헤집는 듀라한.

그 멍청한 행위 예술을 보고 있자니.

"아아."

왠지.

머릿속이 환해졌다.

"이거구나?"

* * *

"크어어어어어!!"

후우우웅!

맹렬한 속도로 날린 두퇴가 대기를 가르며 다가온다.

3m, 2m, 1m.

순식간에 좁혀지는 간격의 종착지에서 눈을 부릅뜬 나는 냉큼 좌측으로 굴렀다. 뒤쪽에서 '콰아앙!' 하고 심상치 않은 소음이 들렸으나 일절 무시하고 굽혔던 무릎을 펴며 신속하고도 묵직하게 도약한다.

타닷―

쿠우웅!

채 3초 만에 가까워진 듀라한의 몸통.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낚싯대를 되돌리려 왼손을 끌어당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어깨가 뒤로 처지며 훤히 드러난 공간이 보인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일도양단의 각오를 담아 환두대도를 내질렀다.

일방적으로 치고 빠지는 이기적인 딜 교환을 벌써 열댓 번이나 거듭한 탓에.

"크어어어어!!"

스르르릉―

후우욱!

놈에게도 학습 효과라는 게 생겼는지 소리만 듣고도 대검을 휘저어 전면을 방비하려 들었지만, 학습 효과는 혼자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흐으읍―"

스윽―

콰아아앙!

"차아아아!"

세 걸음.

대검의 유효 사거리를 정확하게 재고, 피격 직전에 상체를 비틀며 회피하고 동시에 반격을 이뤄 낸다.

후우우우우욱―

카앙!

변함없이 붉은 기류가 도신을 튕겨 냈으나.

…씨익!

전과 다르게 내 입가에선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계속된 난타전 끝에.

콰직!

"드디어!"

마침내 흉갑 한쪽이 깨지고 큼지막한 파편이 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견고하기 그지없던 성벽의 붕괴를 알리는 조짐이었다.

낭보는 또 있다.

['오오라: 검은 망령의 파문'의 효과가 해제됩니다.]

[하락했던 모든 능력치가 회복됩니다.]

그새 10분이 되었는지, 속속 복구되는 스탯들.

"좋아!"

"크아아아아아!!"

쿠우웅―

카아아앙!

카앙!

계속되는 희소식에 힘을 받은 나는 거칠 게 없단 스탠스로 놈을 분쇄해 나갔다.

언뜻 지루한 작업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전혀.

되레 칼침을 먹이면 먹일수록, 떨어지는 파편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점점 신이 났다.

즐겁다?

맞다.

"아자! 아자! 으자자자자자!!"

나는 지금 칼리야스 대륙, 이 빌어먹을 지옥에 소환된 이래 처음으로 즐거움이란 감정을 느끼는 중이었다.

혹 미치기라도 한 걸까?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웃는다는 건, 이성을 담당하는 뇌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음…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내가 웃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만큼 눈앞의 상대에게 몰두하고 있었다.

"크어어어어!!"

부우우웅―

무아지경(無我之境)이라고 하던가?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를 정리하고 적절한 명령을 내리는 뇌 내 시스템이 극도로 압축된 것마냥 머리카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가는 대검의 궤적을 읽는 즉시 허리를 숙였고, 목덜미를 타고 전달되는 검풍이 희미해지자마자 대쉬해 활짝 열린 측면을 갈랐다.

쉬욱―

카아앙!

날카롭게 치솟는 충격파.

나는 멈추지 않고 환두대도의 특징이자 아이덴티티라 할 수 있는 고리 장식으로 가슴팍을 찍으며 다리를 걸어 놈을 고꾸라뜨렸다.

일순간.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다 싶은 착각 아래.

"크어어어어어!"

허우적거리며 무너지는 듀라한의 형상이 무척이나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과연 2차 진화체인가?

창졸지간에 위험을 감지한 듯 자세가 흐트러지는 와중에도 황급히 머리를 손바닥으로 가리며 대검을 뻗는 놈.

하지만.

"늦었어, 이 새끼야."

문자 그대로 늦었다.

우에서 좌로 그어졌던 대검이 다시금 좌에서 우로 돌아오기도 전에 내 칼날이 놈의 상반신을 쪼개 버린 까닭이었다.

콰아아앙!!

"크어어어억!!"

그 야수와 같았던 연격 끝자락에 보인 것은.

퍼석!

퍼서석!

복부가 반으로 접혀 새우가 된 듀라한의 흉갑이, 붉은 기류와 나란히 산산조각 나며 비산하는 아주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바야흐로 마침표를 찍을 시간.

이를 목도한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체내의 마력을 모조리 회전시켰다.

우우우우우웅!!

이번에 스킬을 사용하고 나면 한동안 마력의 '마'자도 구경하지 못하고 또다시 순수 무력만으로 놈과 겨뤄야 할 테지만.

개의치 않았다.

붉은 기류가 놈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이때야말로 놈을 죽일 유일한 기회라고 여겼고.

"흐읍―"

이그니스(ignis) 류(流).

나는 본능에 몸을 맡겼다.

하아아아아아아아!!"

섬광(閃光).

파직―

…꽈르르르릉!!

* * *

눈부신 광휘가 번뜩인다.

실컷 휘몰아치다 차츰차츰 잠잠해져 가는 뇌성벽력(雷聲霹靂)의 영역 안, 나는 시선을 내려 거대한 크레이터 중심에 구겨져 있는 듀라한을 바라봤다.

평소처럼 범위형 타격이 아닌 오로지 타깃 하나에 온 에너지를 쏟아붓는 일점사 형식의 스킬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던 놈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하반신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위쪽도 절반가량 불타 남은 거라고는 왼쪽 어깨 약간과 끊어질 듯 말 듯 간당간당한 척추, 마지막까지 지켜내려 애썼던 대가리뿐이었다.

"크어어어어… 크어어...."

그런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듯, 놈이 안간힘을 쓰며 울부짖었으나, 일대를 짓누르던 위압감이 사라진 하울링은 한낱 초라한 신음에 불과했다.

뭐.

나도 멀쩡한 건 아니었다.

후득―

후드득―

지근거리에서 폭발한 뇌류가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지져 대는 통에 화상이라도 입었는지 안면이 빨갛게 익어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다.

그나마 '하급 화상 회복 물약'이 있어 급한 불은 껐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스킬 시전자가 제 스킬에 맞아 골로 갈 뻔했다.

피식―

쓸데없는 상념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기능이 정지된 신체 조각을 발로 치우곤 꿈틀거리는 듀라한의 대가리 앞에 섰다.

"크어어어어!"

최후에 최후까지 이빨을 박아 넣으려 노력하는 놈.

그 필사적인 분노를 가만히 응시하다 환두대도를 움켜쥐었다.

이제.

스으으으윽―

"잘 가라."

전쟁의 막을 내릴 차례였다.

후우우욱―

콰직!

[죽음으로 이루어진 작은 파도를 이끄는 목 잃은 기사, '듀라한(Dulachán)'을 처치했습니다.]

[축하합니다!]

[〈100인 한정 업적: 최초의 듀라한 사냥꾼〉을 달성했습니다.]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저지 혹은 도주(2)〉의 과제를 완료하셨습니다.]

[당신의 활약도를 종합하여 보상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으아, 많다 많아."

종전을 선언하듯 울리는 알림.

알려 줄 게 상당한지 슬쩍 확인한 핸드폰은 각종 메시지로 도배되어 어지러울 지경이다.

…만.

"아!"

나는 보상으로 무엇이 주어지는지 체크할 새도 없이 등을 홱 돌려 어딘가로 달렸다.

폐허 후문.

"이쯤, 이쯤이었는― 아! 여깄네. 후우."

짐 가방을 숨겨 두었던 장소였다.

비싼 돈 들인 걸 두고 갈 수는 없었다.

* * *

가방끈을 쥐고 몇 초.

화아아아아악!

바스락―

바스락―

순식간에 주변 환경이 변하더니 들풀이 춤을 추던 평야가 가고 걸음걸이마다 밟힌 낙엽들이 합주를 이루는 산비탈의 풍경이 나를 반겼다.

"아슬아슬했네."

조금만 늦었어도 꼼짝없이 새 가방을 구매해야 됐던지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좌우를 둘러봤다.

저녁 즈음이 됐는지.

사방은 어렴풋한 황혼에 어쩔까 하다 그냥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휴, 으아… 아이고야, 죽겠다."

체력이고 마력이고 탈탈 털어 쓰고 온 이후라 산더미처럼 쌓인 피로감에 눌려 좀 쉬고 싶었다.

어차피 좀비가 돌아다니는 세계도 아니니.

띠링!

[당신의 성적을 등급화합니다.]

마침.

성과 관련 메시지가 출력되는 타이밍이겠다, 보상으로 무얼 내줄지 느긋하게 감상하고 복귀할 요량으로 핸드폰 그 작은 화면에 이목을 집중했다.

"자, 보자."

이러나저러나 〈메인 퀘스트: 저지(1)〉을 실패했으니 최악의 경우 S 랭크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어―

[주어진 임무를 더없이 훌륭하고 완벽하게 해결한 당신의 등급은 'Rank: S'입니다.]

[등급에 따른 보상이 주어집니다.]

"아!"

살짝 걱정했는데, 듀라한을 홀로 처리한 게 참작되었나?

매우 다행스럽게도 등급 칸에는 'S Rank'라는 단어가 떡 하니 박혀 있었다.

출발이 좋다.

기대감을 잔뜩 불어넣는 신호탄에 진심으로 안심한 나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다음 문장들을 쭉 살펴보았다.

그리고 5분여.

"…이게 뜨네?"

뭔가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이내 진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현시점의 내게 안성맞춤인 아이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34화

시간을 거슬러 5분 전.

막 지급된 보상을 감상하던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 리액션은 평상시와 비슷했다. 물론 비슷하다고 해서 그것이 나쁘다거나 미지근하단 의미는 아니었다.

도리어 굉장히 만족스러워하는 상태였다.

첫 번째로 들여다본 랭크 보상에서부터 능히 최고의 아이템이라 불러도 좋을 아이템이 드랍됐기 때문이었다.

무려.

[주어진 임무를 더없이 훌륭하고 완벽하게 해결한 당신의 등급은 'Rank: S'입니다.]

[보상으로 '상당한 경험치' 및 '무작위 기술 서적: 원본(原本)', '영혼석 교환권(×2)', '마력 전이석'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이게 뜨네?!"

주력기인 '이그니스 류'를 선물해 준 '무작위 기술 서적'이었다.

무작위 기술 서적.

그 책 한 권이 선사하는 어마어마한 스노우볼을 톡톡히 경험한 터라 황금색으로 빛나는 일곱 글자를 보는 순간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마력 전이석'에 두 장이나 되는 '영혼석 교환권'도 썩 마음에 들었고.

더군다나.

이게 끝이던가?

[죽음으로 이루어진 작은 파도를 이끄는 목 잃은 기사, '듀라한(Dulachán)'을 처치했습니다.]

[축하합니다!]

[〈100인 한정 업적: 최초의 듀라한 사냥꾼〉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상당한 경험치' 및 '기술 서적: 장착', '마력 전이석: 중형', '기술 임의 습득권: 듀라한'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이야… 훌륭하다, 훌륭해."

나에게는, 스킬 북만 두 권에 마력을 보충해 줄 중형급 전이석까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한 업적 보상도 남아 있었다.

이러니 기뻐하지 않을 수 있나.

하나.

내가 감탄사를 내뱉은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까봐?"

행복에 겨워 펼친 책자.

['무작위 기술 서적'의 마법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해당 아이템이 〈메인 퀘스트: 섬멸〉의 보상임을 확인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섬멸〉을 진행하며 보여 주었던 당신의 행동 양식을 근거로 지급될 기술을 결정 중입니다.]

[1%, 2%, 3%....]

그 안에서.

[…100%]

[완료!]

[당신에게 주어질 기술은 '파스마 류: 유령 걸음_원본(原本)'입니다.]

〈파스마 류: 유령 걸음_원본(原本)/Active〉

* 혼자이되 여럿인 자. 내딛는 걸음마다 늘어나는 잔상과 환영을 목격한 모두가 하나 같이 유령에 홀린 듯하다 하여 붙은 이명, '귀신 파스마(phasma)'. 가진 자에게는 도적, 잃은 자에게는 의적이라 불리며 타락한 귀족 가의 재산을 찾아 대륙 곳곳을 활보했다는 그. 한때는 칼리야스 대륙 최악의 현상수배범이 되어 황실에서도 기사단이 파견되었었으나, 끝끝내 파스마의 실체를 잡아낸 자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그가 지닌 '첫 번째 발걸음'에 대한 기록이다.

* 이동 시 추가 속력 +33% / 상대의 '인지력' 혼동 효과 부여 / 1회 걷기에 한 해 일시적으로 '풍(風) 속성' 부여

듀라한과의 전투에서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던 게 영항을 끼친 듯 흔히 얘기하는 보법(步法).

즉.

스탭 스킬이 들어 있었으니까.

[해당 기술과 관련된 지식을 전이합니다.]

* * *

[지식 전이가 완료되었습니다.]

[기술의 효과로 '속성력: 풍(風)'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9% 향상됩니다.]

"아으, 골이야. 어째 더 빡세진 느낌이네."

반가움도 잠시, 여지없는 두통에 시달렸던 나는 기겁한 눈빛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뭇등걸에 기대 누웠다. 그래도 먼젓번에 겪어 봤으니 요번에는 덜 아프지 않을까 싶었는데.

"덜 아프긴 개뿔."

진짜 뇌가 다 저릿저릿했다.

그로 인해 한참을 멍하니 있던 찰나.

띠링!

[원본(原本) 기술을 습득했습니다.]

[〈업적: 최초가 지닌 가치〉의 기 달성자입니다.]

[〈서브 퀘스트: 파스마의 던전〉이 추가됩니다.]

맑은 종소리를 내며 켜지는 핸드폰.

내용은 '이그니스 류'를 배울 당시에 보았던 것처럼 원본 기술 서적을 획득했을 때 자동으로 따라오는 서브 퀘스트의 하달이었다.

단지.

예전과 차이가 있다면.

"경험치는 안 주는 건가?"

부가적으로 딸려 오던 경험치가 삭제되어 있다는 것.

이거, 동일한 업적에 대해서는 별도의 보상을 내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상당량이라 쏠쏠했는데, 아쉽게 됐네."

쩝.

어쩌겠나.

시스템이 안 된다고 하니.

"그건 그렇고...."

파스마의 던전이라.

꽤나 특이한 미션 명에 호기심을 느낀 나는 자연스럽게 스크롤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서브 퀘스트: 파스마의 던전〉

* 귀신(鬼神)이란 이명으로 칼리야스 대륙을 누비던 파스마(phasma).

악을 조롱하는 광대이자, 세상을 농락하는 유령이었던 그는 죽음을 앞둔 시점에야 모두의 눈앞에 나타났다.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수십 년간 모습 한 번 드러낸 적 없었던 그가, 심지어 뭇 귀족들의 성토에 못이여 자신을 추포하려 기사단까지 파견했던 밀레스 제국의 수도에 나타난 의중을.

파스마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의문에 가타부타 이야기하는 대신 딱 한마디를 전했다.

"자! 누구든 원한다면 가져가라. 대륙 각지에 황금 밝히는 유령들을 숨겨 두었으니까."

바야흐로.

대탐험가들의 시대를 알리는 선언이었다.

(1/6)

[진행도: 1단계]

[탐지 거리: 3km]

[현재 위치를 기준으로 3km 범위 내에 '파스마 류의 조각'이 존재할 시 미니맵이 활성화됩니다.]

[진행도에 비례하여 탐지 거리 및 정확도가 상승합니다.]

"으잉? 나 참. 뭐야, 이거."

별 감흥 없이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던 나는 끝내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애들은 알란가 모를 묘한 기시감이 원인이었다.

설마 이세계에서 저 문구를 보게 될 줄이야.

게다가.

던전에 황금 밝히는 유령이라는 건 킬 파편 외에 아이템이나 보석 같은 물적 보물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래저래 재밌는 게 나왔네."

흥미롭다, 흥미로워.

퀘스트 진행권이 없는 이상 연이 닿을지는 알 수 없으나, '던전'이란 워딩이 주는 기분 좋은 흥분에 젖어 언젠가 한 번쯤… 이란 상상을 하며 눈길을 돌렸다.

맛있게 즐긴 메인 디쉬 뒤편.

그에 뒤지지 않는 디저트들이 마련되어 있는 곳으로.

* * *

나는 식탁 위에 늘어놓은 디저트들을 익숙한 순서대로 흡수해 나갔다.

소형과 중형의 '마력 전이석'을 필두로.

['영혼석 교환권'을 사용합니다.]

[카테고리가 개방됩니다.]

〈영혼석 카테고리〉

* 육체: 근력/체력/속력/재생력....

* 정신: 집중력/인내력/저항력/친화력....

* 기타: 마력/속성력(화)/속성력(수)....

"마력이야 넉넉해졌고, 면역력도 챙겼으니 이건… 아, 요것들로 하면 되겠네."

['속성력(뇌)'를 선택했습니다.]

['속성력(풍)'를 선택했습니다.]

['벼락을 품은 보르페도의 영혼석'을 획득했습니다.]

['활공하는 매의 영혼석'을 획득했습니다.]

S급 스킬....

정확하게는 S 랭크 보상으로 나온 어쩌구저쩌구긴 한데, 짧게 줄여서 S급 스킬이라 퉁친 '이그니스 류'와 새롭게 익힌 '파스마 류'의 위력을 배가시켜 줄 영혼석을 소환해 삼켰다.

우우우우우웅!!

"이야! 많다, 많아."

복용을 끝마치고 나니.

속석령이야 나중에 따로 검사해 봐야겠지만, 우선 마력 양은 족히 두 배가량 상승한 듯싶어 배 속이 든든했다.

이게 다 중협급이 끼어 있던 덕택.

S급 스킬의 특성상 강력한 대신 마력 소모량이 막대해서 늘 문제였는데, 앞으로는 훨씬 여유롭게 스킬을 사용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아니.

"스킬 개수도 증가했으니 결국 쌤쌤인가?"

여하튼.

다음은 두 개의 책인데.

〈기술 임의 습득권: 듀라한/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듀라한이 지닌 기술 중 한 가지 획득.

* 목록: 오오라_검은 망령의 파문(상세 보기▼)/망자의 함성(상세 보기▼)/처형된 기사의 발악(상세 보기▼)

└오오라-검은 망령의 파문(A): 시전자를 중심으로 일정 범위 내에 존재하는 모든 적의 신체 능력치를 하락시킨다.

└망자의 함성(A): 일정 범위 내의 모든 언데드의 능력치를 향상시킨다. 단, 이 기술은 종족이 '언데드(Undead)'인 경우에 활성화된다.

└처형된 기사의 발악(A): 마력을 체외로 발산해 피해량의 일부를 흡수한다. 흡수된 1.5배만큼 마력이 소모되며, 모든 마력을 소모할 시 기술이 강제 해제된다.

〈기술 서적: 장착/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기술 '장착' 습득

└장착: 무기 또는 방어구 등 '장비'로 분류된 아이템에 '영혼석'을 장착할 수 있는 기술이다.

전자는 익숙하다면 익숙한 종류고, 후자는 아예 생소하다.

그래서인지.

"장착이라."

조금 더 눈이 가는 쪽은 '기술 서적: 장착'이었다.

아이템에 영혼석을 결합하는 기술이라니. 짤막하게 기술된 설명을 보건대 결합만 가능한지, 해체와 관련된 항목이 없어 일견 반쪽짜리처럼 보였으나 잘 따져 보면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딘가 싶었다.

더욱이.

'장착'이 있다는 건 '해체'도 있다는 말이니, 계속해서 S 랭크를 따내다 보면 부족한 조각이야 알아서 채워질 테니 부정적으로 여길 필요가 없었다.

['기술 임의 습득권: 듀라한'의 마법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당신이 습득할 기술을 선택해 주십시오.]

[1. 오오라: 검은 망령의 파문(A)]

[2. 망자의 함성(A)]

[3. 처형된 기사의 발악(A)]

"그나저나, 놈의 스킬이 이런 것들이었구만."

끝으로 '기술 임의 습득권'을 펼쳐 본 나는 두루뭉술하게 서술된 스킬과 방금 전에 있었던 전투를 대조해 가며 듀라한이라는 종(種)에 관해 기록한 도감을 뇌리에 단단히 입력한 후 심사숙고에 들어갔다. 내친김에 이것까지 마무리할 작정이었다.

다만.

양측 모두 선호하는 스타일이라 고르기가 쉽지는 않았다.

"광역 디버프와 생명줄 연장이라."

이거, 뭘 골라야 잘 골랐다고 소문이 나려나?

흐으음....

"역시, 이쪽이 낫겠지?"

짧지만 심도 있게 고민을 이어가던 기어이 하나를 결정해 검지를 가져다 댔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대다수의 생환자가 생존주의자들였음을 감안해 추후에도 단독 행동이 잦을 내 입장에서 최고의 효율을 뽑아낼 만한 녀석.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기술 '오오라: 검은 망령의 파문(A)'의 지식을 전이합니다.]

〈오오라: 검은 망령의 파문/Active〉

* 산 자의 생명을 노리는 원념들을 부려 10분간 주변 30m 내에 존재하는 모든 적의 신체 능력치를 5% 하락시킨다.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대상을 지정하여 오오라의 영향권에서 제외할 수 있다.

* 재사용 대기 시간: 세 시간

내가 받아들인 지식은 광역 디버프였다.

35화

"이렇게 쓰면 되려나?"

이튿날 오후.

슬슬 선선해지는 바람에 오랜만에 따듯한 국밥 한 그릇과 수육을 시켜 식사를 끝낸 나는 한창 훈련으로 바빠야 할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와 마우스를 붙잡고 있었다.

수련도 미루고 무얼 하는가.

드디어 오늘.

[Apocalypse: 아이템 판매 / "찔러 부수는 모노케로스의 한손 검(자세한 이미지 아래 참조)" / 매직 등급 한손 검 판매합니다. / 찌르기 추뎀 / 근력 향상 / 선제시]

"이만하면 되겠지."

탁!

생환자 전용 아이템 매매 사이트 '아이템 캐리어'에 글을 작성 중이었다.

때가 되었다.

쓸데없는 무구들은 과감하게 처분하고, 내 삶의 질을 상향하는 데 투자하든 새로운 무언가를 구입하든 자본금을 늘릴 때가.

며칠 전만 해도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으나, 이젠 아니었다.

새벽부터 오전 내내 스킬을 연습 삼아 몸소 시연해 보고 나서 확신했다.

'파스마(phasma) 류: 유령 걸음'.

이 녀석이라면 설사 총구를 들이밀더라도 내 한 몸쯤은 충분히 빼낼 수 있겠노라고.

띠링!

"응? 벌써?"

[쪽지가 도착했습니다.]

확신에 찬 어조로 주억거리며 연달아 '초보자용 방어구 세트'도 가판대에 올리려던 차에 화면 하단이 반짝인다.

[파란별: 게시글 보고 쪽지 드립니다. 구매하고 싶습니다. 금액은 10억. 전부 현찰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개시 후 채 1분도 안 되어 돌아온 입찰 희망 쪽지였다.

깔끔하게 10억.

"…와우."

그 숫자를 보고 놀라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최근 들어 아이템에 낀 거품이 차츰차츰 꺼지며 전체적인 물가는 대략 1억에서 3억 내외로 조정된 실정이었다.

물론.

매직 등급 무기는 매물 자체가 거의 없는 데다, 개중에서도 '검(劍)'은 특출나게 선호도 높은 장비였으니 최소 7~8억은 나오겠지 싶었다만.

"처음부터 제대로 심쿵이네."

가슴이 벌렁거리다.

10억.

평범한 회사원으로 치어 살던 인생에선 꿈조차 꾸지 못했던 액수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이 금액이라면, 한강 뷰도 마냥 망상만으로 그치지 않을 터이니.

동시에.

자그마한 욕심도 생겼다.

이거....

살살 꼬드기면 몇억쯤은―

띠링!

[파란별: 혹 액수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5억, 5억을 얹어 드리겠습니다.]

"더 받겠다 싶었는데… 내 얘기 듣고 있나?"

곧장 계약을 해야 하나 살짝 튕겨야 하나 갈등하던 나는, 마치 예견이라도 했다는 양 추가적으로 날아온 쪽지에 눈만 끔뻑였다.

이 사람.

한두 번 흥정해 본 게 아닌 듯했다.

"여하간, 이만하면 됐다."

[Apocalypse: 좋습니다. 내일 오전 10시에 만나시죠.]

[파란별: 감사합니다.]

잠깐 딴 길로 빠졌던 나는 이내 이리저리 밀고 당길 거 없이 확답을 적었다.

15억.

평균가에 비해 많게는 다섯 배나 훌쩍 뛴 거액이었다.

여기저기서 구매 희망자를 끌어모아 경쟁을 붙이면 30억도 받아 낼 수 있겠지만, 문제는 내가 그리 한가롭지 않다는 점.

해서 적당히 금액만 맞는다면 차라리 빨리 처분하고 그 돈으로 다시금 스노우볼을 굴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었다.

[ 거래 ]

"가면이라도 쓸까?"

저물었던 태양이 잠에서 깨어난 시각.

환두대도와 검을 박스에 담고 겉옷 안쪽에 갑옷을 받쳐 입던 나는 문득 볼을 매만졌다.

수십억짜리 거래이니만큼 훗날 생길 귀찮은 일들을 고려해 정보 노출을 최대한 막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금방 머리를 저었다.

집 주소, 핸드폰 번호, 주민등록번호 등.

아.

주소는 아직 전입 신고를 안 해 둬서 예전 자취방으로 되어 있나?

아무튼, 빠른 매매를 위해 '아이템 캐리어' 사이트에 회원 가입을 하며 기본적인 인적 사항이 죄다 공개되어 있는 마당이었다.

이제 와 얼굴을 가려봐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

사이트 측에서야 아무리 보안에 신경 쓴다고 한들 돈 좀 있는 집안에서 작심하고 뚫어내려 하면 스스륵 열릴 자동문이나 다름없기에.

"그냥 가자."

고심 끝에 언제, 어디서 칼리야스 대륙으로 전송되더라도 괜찮게끔 장비와 짐 가방만 챙겨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부드럽게 엑셀을 밟으며 약속 장소로 나아가는 길.

초록이 무성한 산과 들판만 구경하다 빌딩이 숲을 이룬 시내에 나오니 왠지 다른 세상에 입성한 것 같은 강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아니.

"…어제 그 영화 진짜 재밌지 않았어?"

"다 좋았는데 끝에 갑자기 신파로 빠지네."

"그건 나도 별로."

"3천8백 원입니다."

"오늘 뭐 먹지?"

"...."

이곳은 정말로 칼리야스 대륙처럼 전혀 다른 세계였다.

누구는 하루하루를 죽을 둥 살 둥 필사적으로 보내는 반면, 도심을 활보하는 사람들은 근심 걱정이 있을지언정 두려움과 공포는 엿보이지 않았으니까.

고작.

수십 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을 뿐인데, 불과 두어 달이 지났을 뿐인데… 나와 저들 사이의 간격은 수십억 광년이나 멀어져 있었다.

* * *

영혼 한편에 새겨진 착착함을 억지로 외면하며 약속 장소는 건설 회사 부도로 애물단지가 됐다는 물류창고였다.

긴 시간 방치되어 있었음을 알려 주듯.

너저분하게 굴러다니는 낙엽과 먼지, 담배꽁초 등으로 도시 한복판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살갗을 더듬는다.

"보통 영화 같은 거 보면 이런 데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던데."

"이런, 제가 늦었나 봅니다."

"아."

그 스산함에 쓸데없는 소리를 뇌까리며 검이 든 박스를 내려놓기 무섭게 왼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음성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가벼운 옷차림의 30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는 젊은 남자가 헐레벌떡 이쪽으로 뛰어오는 중이었다.

"반갑습니다. 파란별입니다."

그렇게 약 5m 즈음 되는, 딱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위치에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통성명을 하기엔 영 어색한 간극이었으나.

"예. 아포칼립스라는 아이디를 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도 구태여 다가가지 않고 간극을 유지한 채로 눈인사를 나눴다.

이것이 생환자의 공식적인 인사법이기 때문이었다.

뭐라더라.

부지불식간에 서로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생환자들이니,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점을 제외하고는 3m 이상 접근하지 말 것이 제1 원칙이라던가?

심지어 거래법도 따로 명시되어 있다.

1번, 판매자는 먼저 아이템을 보여준다.

2번, 구매자는 한 손은 하늘에 들고, 나머지 손으로 아이템을 끝자락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3번, 구매자가 구입할 아이템을 터치해 이상이 없는지 체크하고 뒤로 물러나면, 판매자는 물건을 땅에 두고 똑같이 물러난다.

4번, 거래의 성사를 위해 구매자가 대금을 입금 혹은 현금으로 지불하면 판매자는 그대로 떠나가고, 한쪽이라도 거래할 의지가 없다면 각자 가져온 아이템과 돈을 챙겨 헤어진다.

5번, 거래 결과에 관계없이 양측은 헤어지기까지 절대 등을 내보이지 않는다. '생환자 제1 원칙'에 의거하여 가급적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끔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중간에 거짓말을 치거나 무력 분쟁이 발생한다면?

안타깝지만 책임지는 이는 없다. 아이템 캐리어는 엄밀히 말해 '중개 사이트'가 아니라 '정보 공유 사이트'인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나도 상대도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해야 했다.

저 돈이 위조지폐는 아닌지, 매매하는 척 갑자기 공격을 시도해 아이템 혹은 돈만 채가려는 술수는 아닌지, 앞에서는 멀쩡하게 헤어진 후 뒤에서 사람을 동원해 돈이나 아이템을 빼앗으려는 계획은 아닌지.

21세기 현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상당히 야만적인 시장이었지만, 생환자들로서는 별수가 없었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아이템'이라는 매력적이고도 희귀한 상품을 남에 손에 맡기기는 불가능한 탓이었다.

고로.

나는 주의에 주의를 요하며 상자를 개봉했다. 패용하기 편하게 손잡이가 달린 플라스틱 박스 뚜껑을 열어 살짝 끄집어낸 검집.

"오오!"

칠흑을 닮은 검은색 빛깔과 마주한 파란별에게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게시글에 첨부한 이미지를 통해 형태나 외관은 질릴 대로 봐뒀겠지만. 컴퓨터로는 구현이 되지 않는, 진짜가 주는 현실감이 있는 바.

"확인해 보시죠."

나는 중단을 꽉 눌러 무슨 짓을 해도 탈취하지 못하도록 상자를 움켜쥐고 검집 끄트머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생환자 제1 원칙을 유일하게 어겨도 되는 타이밍이 오자 얼른 다가와 검지를 뻗는 파란별.

이윽고.

"아아! 아!"

오지 탐험 끝에 보물이라도 발견한 트레저 헌터마냥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돈, 돈! 바로 입금하겠습니다!"

물건에 하자가 없음을 인지한 그는 1분 1초라도 빨리 가져가고 싶은지 안달이 난 모습으로 서둘러 핸드폰을 켜고 화면을 두들겼다.

우리가 채택한 결제 방식은 계좌 입금.

이미 대부분의 신상이 까발려졌다고 가정한지라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띠링!

[대한은행: 1,500,000,000 입금, 입금자 정유환]

"…."

꿀꺽―

이윽고.

화면에 출력된, 아주 심장을 들끓게 하는 문자와 함께 이른바 '억 소리'나는 숫자의 조합에 무심코 침을 삼켜 버린 나는 혹여라도 0이 빠져 있나 몇 번을 재검토하고 나서야 상자에서 비켜섰다.

명의를 이전하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하핫! 감사합니다!"

파란별.

정유환이라는 본명을 가진 남자는 나이에 맞지 않게 동심에 빠진 소년처럼 후다닥 달려와 상자를 품에 안았다.

입가에 걸린 미소로 짐작건대 무척이나 기꺼워 보였다.

물론 그 점은 나도 다르지 않았다.

'하, 미쳤구나, 미쳤어.'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단 격언을 온전하게 이해한 나는 괜히 아닌 척 광대를 내리며 서둘러 파란별에게 작별을 고했다.

예서 더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으니, 벌어들인 수익으로 새 장비를 마련하든 뭘 하든 시원하게 카드를 긁어 볼 요량이었―

"저, 저기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음?"

정면을 응시하며 천천히 빠지던 그때, 별안간 나를 붙잡는 파란별.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넘겨주었다.

[(주)청성대륙, 대표 이사, 정유환]

"이건?"

"제 명함입니다."

삐까뻔쩍하게 금칠된 명함이었다.

무심코 명함을 훑어보던 나는.

'청성?'

한 가운데에 떡 하고 박혀 있는 '청성(靑星)'이라는 명칭에서 툭 하고 멈칫했다.

"청성…이라면 혹시."

"아마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청성이란, 대한민국 내에서도 능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초대형 그룹이었으니까.

그 속에 '청성대륙'이란 계열사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으나, 15억이란 거금을 아무렇지 않게 내놓는 걸로 보아 대표 이사라는 직함이 사기는 아닐 터.

허.

저렇게 젊은 나이에 청성 계열사의 대표 이사라니.

전생에 나라라도 구하셨나?

비슷한 나이에 밑바닥부터 전전해야 했던 어느 말단 회사원과 달리 창공을 유영하는 그에게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탐탁지 않은 눈동자로 명함을 문지르던 직후.

정유환이 재차 말을 이었다.

"저랑 계약 안 하시겠습니까?"

36화

"정식으로 인사 드리겠습니다. 저는 청성대륙의 대표 이사직을 맡게 될 정유환이라고 합니다."

"오휘윤입니다."

웃음기를 머금었으나, 아까와 달리 사뭇 공손하고 진지한 태도로 본인을 소개하는 정유환. 그 예의를 갖춘 행동에 나도 얼떨결에 본명으로 대답했다.

계좌 이체 과정에서 진명이야 만천하에 드러냈으니 상관은 없었다.

그나저나.

"…맡게 될?"

"맞습니다. 아직 회사가 발족하기 전이라서 말입니다. 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내부 정리가 거의 끝난 상황이라 길어야 한 달, 짧으면 3주 내에 대대적으로 발표할 예정이지요."

"음."

그런 거였나.

어쩐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상호명 같더라니만.

내가 의문을 해소하는 동안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가는 정유환.

그 내용은 대체로 '(주)청성대륙'의 지향점과 관련되어 있었는데, 짧게 축약해 보자면 대충 이러했다.

"…그러니까, 칼리야스 대륙의 자원을 연구하고 활용하려 한다?"

아이템의 상품화.

"아시겠지만, 고작 물 한 병 마시는 것으로 내·외상을 치료할 수 있는 신묘한 비약이 존재하는 세상입니다.. 현실에서 재현할 수만 있다면, 병으로 고생 중인 많은 이들이 구원받을 다른 의미의 신약(神藥)이. 칼리야스 대륙에는 그런 아이템들이 넘쳐 납니다."

포션을 예로 든 정유환의 포부에는 나도 100% 공감했다.

시스템의 영향권 아래 놓인 생환자 외에 일반인들에게도 아이템 효과가 적용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착용 즉시 신체 능력을 상승시켜 주는 장비를 포함해 통증을 동반한다는 단점만 제하면 타 차원의 지식을 습득케 해주는 스킬 북 등 그이 소망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청성 그룹은 한국을 넘어 지구 제일의 그룹이 될 터.

역시 기업은 달랐다.

이 와중에도 돈 벌 궁리를 하는구나. 탄성이 절로 나오는 자세에 속으로 박수를 치는 사이.

"그래서 제의를 드린 겁니다."

한껏 이상을 설명하던 정유환이 열망 어린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가 바라는 소망을 담아.

"저희와 독점 계약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라고.

이거였다.

정유환이 내게 원하는 목적.

"오늘부로 오휘윤 님께서 판매하고자 하는 모든 아이템을 제가, 저희가 전량 매입하고 싶습니다."

아이템의 독점 거래였다.

* * *

「충분히 고려해 보신 후에 연락 주십시오. 저 또한 생환자인 터라 매번 제가 받지는 못하겠지만, 제게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휘윤 씨 전화는 직통으로 연결되도록 비서실에 일러두겠습니다.」

"...."

폐건물을 빠져나와 집으로 복귀하는 차 안.

바람결에 휙휙 사라지는 바깥 풍경을 보는 둥 마는 둥 넘기며 나는 정유환이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시세보다 최소 30% 이상 쳐 드리겠습니다. 무기, 방어구, 장신구, 포션… 하다못해 재료 아이템까지! 무엇을 가져와도 좋습니다.」

뭐든 사주겠다.

「필요하신 물건이 있다면 판매 및 중개도 가능합니다. 하하하, 당연히 마진은 최저로 받겠습니다. 중개는 아예 무료로 하지요.」

물건을 구하는 데에도 중간 다리 역할일지라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겠다.

호언장담을 하던 그.

「저희 청성 말고도 몇몇 곳에서 비슷한 사업을 실행하려 합니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어느 곳을 가더라도 저희보다 나은 조건을 제시하지는 않을 겁니다.」

정유환의 말대로 아무리 봐도 너무 좋은 조건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이리도 후한 대우를 해주려는 것인지.

그 질문에 정유환은 당치도 않는다는 양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투자입니다."

"투자?"

"아이템 캐리어가 개설된 이래 하루 24시간 단 1초도 빠트리지 않고 집중 관찰해 왔습니다. 혹시 그동안 매직 등급 아이템이 몇 개나 풀렸는지 아십니까?"

"저는 잘...."

"한 개입니다. 이 모노케로스의 한 손 검이었죠."

"음."

"전 세계 추산 생환자는 대략 천만 명. 한데 그 많은 생환자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여태 풀린 매직 등급 아이템이 하나밖에 없다는 게 무얼 의미하겠습니까? 잡아야 한다. 이런 진귀한 매물을 아무렇지 않게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사업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인물일지니."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정유환은 자신의 심정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 여긴 듯, 제 할 일은 다 했다는 표정으로 엄지를 귀에, 계지(季指, 새끼손가락)를 입꼬리 근처에서 흔들었다.

꼭 긍정적인 소식이 있었으면 하는 제스처였다.

"어떡할까나."

나는 그 일련의 장면을 회상하며 입맛을 다셨다.

좋다, 정유환의 말처럼 그의 제안은 더없이 훌륭했다.

…만.

외려 지나치게 훌륭하니 선뜻 수락하기가 꺼려졌다. 미녀의 탈을 쓴 구미호에게 홀려 간을 빼 먹히는 건 아닐까 하고.

특히.

이익 집단으로는 최고를 달리는 청성이었으니 더더욱.

"흐음. 그래."

끼이이익!

해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나는 갑작스레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갓길에 대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끄집어내 번호를 눌렀다.

곧.

뚜르르르르―

철컥!

-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접니다."

- 누구… 휘윤 씨?

"예. 계약하시죠."

- 아아! 그게 정말입니까? 아니, 아니, 제가 지금 그리로 가겠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잔뜩 흥분한 정유환이었다.

* * *

딸랑!

고즈넉한 인테리어를 한 카페 문이 열리며 맑은 종소리가 울린다.

손잡이 위에 '미시오'라 적혀 있는 유리문을 잡아당기며 열어젖힌 손님은, 수행원으로 추측되는 양복 차림의 남성을 뒤에 둔 정유환이었다.

그는 내부에 들어서자 일순 주위를 휙휙 둘러 보더니.

"휘윤 씨!"

홀로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곤 후다닥 다가왔다.

마치 대형견이 간식을 포착하곤 뛰어오는 것처럼 한걸음에 내 곁에 다다른 정유환은. 고별하고 끽해야 30분도 안 됐건만, 흡사 10년 만에 재회한 듯 반가운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 정도로 내 답변이 만족스러운 거 같았다.

"앉으시죠."

"예예! 앉아야죠. 하하하!"

"커피 좀 드시겠습니까?"

"좋습니다. 제가 사죠. 김 비서님. 커피 두 잔과 간단한 디저트 좀 부탁드릴게요. 김 비서님과 최 기사님 것도 사서 드시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비서에게 카드를 내어 주며 요깃거리의 준비를 맡긴 정유환은 내가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에 탁자에 갈색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다름 아닌.

"이건."

"계약서입니다."

독점 공급 계약서였다.

그 정체를 확인한 나는 꽤나 놀란 눈치로 탁자와 정유환을 번갈아 바라봤다. 통화를 끝낸 게 겨우 10분 전 즈음인데, 이걸 그새 이걸 만들어 왔다니.

"이걸 이렇게 빨리 받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업무 처리 속도가 얼마나 빠르길래 이걸 벌써? 하는 기색으로 운을 떼자, 고개를 휘휘 저은 정유환이 볼펜을 추가로 올려놓으며 사실을 이야기했다.

"계약을 제의드린 분은 휘윤 씨 말고도 몇 분 더 계십니다. 정확하게는… 서른일곱 분이군요. 협상 중인 분들까지 더하면 세 배는 더 될 겁니다."

"그렇게나 많습니까?"

"이게 다 직원분들이 열심히 일해 주신 덕분이죠. 더불어 앞으로도 쭉쭉 늘어날 겁니다. 물자는 확보하면 확보할수록 좋은 법이니. 저희도, 휘윤 씨에게도."

알고 보니 나 말고도 거진 100여 명에 달하는 생환자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매일 같이 새로운 판매 글이 등록되고 있으니, 자본이 빵빵한 청성으로서는 물 반 고기 반인 낚시터와 같았으리라.

"뭐,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이만 하면 될 듯하고."

"커피입니다."

"감사합니다, 김 비서님."

"아닙니다."

탁!

때마침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정유환은 휴지로 입가를 닦은 뒤 손수 봉투에서 빼내더니, 내가 보는 앞에서 펜을 들곤 계약서 곳곳의 공백을 거침없이 채워 나갔다.

그중.

주목해야 할 항목은 두 부분으로.

[1. 을(청성대륙)은 갑(오휘윤)이 판매하는 모든 아이템을 시세 평균 가의 '30%' 인상된 가격으로 구입한다. 이때 평균가는 거래 당일을 시점으로 계산하며, 동일 등급 및 동일 분류된 상품과 비교한다. 비교 대상이 존재하지 아니할 경우 최종 판매가는 양측의 협상에 의해 조정한다.

2. 을(청성대륙)은 갑(오휘윤)이 구매하고자 하는 상품에 대하여 최대 마진 '5%'를 넘기지 않는다.]

정유환이 최상의 예우라며 못을 박았던 매매 시의 금액 조정란이었다.

일필휘지로 빈칸을 메꾼 그는 이 외에도 몇 가지를 수정 또는 보완해 완성된 계약서를 내게 넘겨주었다.

"가계약서입니다. 읽어 보시고 원하시는 게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최대한 반영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자신만만한 정유환의 어투에 피식 웃으며 서류를 꼼꼼하게 정독해 나갔다.

독소 조항의 유무를 비롯해 세세하게 따져 본 결과, 그의 말대로 내게 불리한 규정은 단 하나도 적혀 있질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했다.

국내도, 해외도.

생환좌와 관련하여 어떠한 제도도 마련되지 않은 탓에 이 계약서의 효력을 마냥 맹신할 순 없거니와 또 다른 생환자와 비교를 해보지 못해 내가 제일인지는 불분명했으나.

스윽―

슥―

나는 정유환에게서 펜을 받아 서명란에 내 사인을 적어 넣었다.

어차피 우리 관계에 있어서 슈퍼 갑의 위치에 선 사람은 항상 나였다. 이쪽이 뭔 짓을 하든, 저쪽에서는 매직 등급 아이템을 턱턱 내놓는 나라는 거물을 포기하지 못한다.

따라서 주도권은 늘 내게 있는 바.

당장 정상을 다해 비싸게 사고 싸게 팔아 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아!"

* * *

띠링!

[대한은행: 850,000,000 입금, 입금자 정유환]

"좋은 거래 감사합니다. 동생이 많이 좋아하겠네요. 안 그래도 요즘 심경에 변화라도 생겼는지 꽤 적극적으로 수련에 임하던데."

"동생? 동생분도 생환자이십니까?"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튜토리얼이 시작되던 그날 같이 있었던 게 원인인―"

"저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슬슬 미팅을 가져야 할 시간입니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바로 가시죠, 김 비서님. 휘윤 씨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래저래 바쁜 몸이라."

"아닙니다. 다음에 또 연락 드리죠."

"하하! 휘윤 씨 전화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오후 2시.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해결한 정유환은 내게 '초보자용 방어구 세트' 판매 계획이 있음을 듣고 그대로 자취방까지 찾아와 물건을 받아 갔다.

결제 금액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깔끔하게 8억5천만 원.

한 부위도 빠지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 가격이었는데, 보통 피스 당 1억에서 2억을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나로서는 무조건 이득이었다.

그 덕에 돈 백에도 벌벌 떨던 회사원의 곳간은 대풍년을 맞이한 상태였다.

"24억, 24억, 24억… 이거 쓰벌, 진짜 꿈 아니지?"

반나절 만에 24억이라니.

계좌를 몇 번이나 다시 봐도 변함없는 숫자에 온몸이 후들거렸다.

동시에.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거실, 저녁노을을 감상하며 와인 한 잔을 따라 마시는 부유한 삶부터 스포츠카를 한 대 뽑아 도로를 질주하는 라이더의 삶까지.

흔히 금수저니 다이아수저니 하던 작자들의 일상에 내가 스며드는 상상이 머릿속을 채웠다.

'이렇게만 계속 벌어들인다면….'

고작 20억 남짓으로 그들과 똑 같은 인생을 살긴 한참이나 부족하지만, 퀘스트는 아직 끝을 모르고 펼쳐져 있었다.

그 말인 즉슨.

내가 하기에 따라 수백 억도, 수천 억도 꿈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아."

불현 듯 누군가의 한 마디가 뇌리에 번뜩였다.

위기를 곧 기회로.

모두가 다 아는 흔하디 흔한, 그러나 아무나 성공하지 못하는 어려운 그 문장을 떠올린 직후 나는 직감했다. 밑바닥만 전전하던 내 인생을 뒤바꿀 찬스가 찾아왔다는 걸.

무작정 생존에만 몰두하던 삶에 진정한 목표가 자리잡던 순간이었다.

37화

띠링!

[지원 요청 들어왔습니다.]

[10초 후 칼리야스 대륙으로의 이동을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10초]

귀한 이틀 만 차.

"왔나."

오늘내일 중으로 뜨겠다 싶었던 '지원 요청' 메시지에 나는 부지불식간에 짐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곤, 환두대도를 한팔로 안으며 검대를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네모 반듯하게 접혀 있는 종이.

그것은 'Rank: Hero_Village'를 달성하며 받은 보상 중에서도 단연 최상의 가치를 지녔다 자부해도 무방한 아이템.

으득―

촤아아아악!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 퀘스트 진행권'을 사용합니다.]

[아이템 효과에 의거하여 메인 퀘스트가 변경됩니다.]

[위치 조정을 위해 이동 시간이 초기화됩니다.]

[남은 시간: 10초]

'퀘스트 진행권'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종이를 이빨로 물어 찢자 단숨에 깜깜해졌다 환해지는 시야.

후각을 통해 공기가 달라졌음을 깨닫고 짐 가방을 땅에 내던지며 환두대도를 도집 채로 크게 휘두르며 견제구를 날렸다.

〈메인 퀘스트: 저지〉에서 스타팅 포인트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님을 인지한 바.

혹여라도 근처에 좀비나 구울 따위가 있다면 단박에 대가리를 박살 낼 기세로 강맹하게 내지른 중단세에 부우웅 하는 소음이 일었으나, 딱히 손에 걸리는 게 없었다.

"아무것도… 없나?"

차츰차츰 회복된 눈으로 인근을 훑어 보니 야트막한 동산 꼭대기에 나 홀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그니스(ignis) 류(流)의 두 번째 파편을 얻을 전장이라 꽤나 긴장하고 들어왔는데, 왠지 김이 빠지는 스타트에 괜히 뒷머리를 긁어지고 있자니 곧 알림음이 들렸다.

띠링!

[지금부터 〈메인 퀘스트: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2)〉가 시작합니다.]

〈메인 퀘스트: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2)〉

* 칼리야스 대륙의 기나긴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위대한 인물 중 도(刀)를 다루는 데 가히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이그니스(ignis). 그가 남긴 일곱 개의 파편 중 하나가 잠들어 있는 이 장소.

밀레스 제국 체르바 백작령 내의 작은 마을 페루스(fĕrus)의 한 수도원.

그 안에 모셔둔 안배를 찾아 회수하라.

(0/1)

[〈메인 퀘스트: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2)〉의 진행을 위해 미니맵이 활성화됩니다.]

['페루스(fĕrus) 마을: 수도원'의 위치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수도원 어딘가에 박혀 있을 파편의 수거… 시나리오 자체는 단순하네."

다섯 줄짜리 길지 않은 분량의 임무는 퍽 단조로웠다.

뭐.

나로서는 상당히 달가운 포인트였다.

S 랭크 스킬에서 파생된 퀘스트이니 진행 방식이 엄청나게 복잡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건 생존 확률과 성공 확률이 동시에 올라간다는 소리였으니.

물론 안심하기는 일렀다.

'복잡하지 않다'와 '쉽다'가 동의어는 아니니까.

"가볼까?"

하여.

방심, 자만심 등 부정적이고 마이너스한 감정들을 모조리 떨쳐내고 미니맵을 체크하며 수도원으로 가는 방향을 가늠한 나는 내려놓았던 가방을 메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소환."

우우우우우웅!

나지막한 주문에 휘몰아치는 빛무리.

그 화려한 이펙트 속에서 늠름한 말 한 마리가 걸어 나왔다.

펫.

"잘 있었냐."

에스콰이어급 군마였다.

이래저래 바쁜 나날에 치여 따로 연습할 여유가 없어 획득했던 이래 현재까지 소환 한 번 해주지 못한....

"그러고 보니까 이름도 안 지어 줬네."

"푸르르르릉."

이참에 승마 훈련이나 겸해 볼까 해서 불러냈던 나는 녀석에게 마땅한 애칭도 붙여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인상을 찡그렸다.

명색이 펫인데.

적토마니 로시난테니 하는 그럴듯한 별칭을 붙여 주며 친밀감을 형성해도 모자란 판국에 이 녀석, 저 녀석이라니.

주인이라는 작자가 이리 무심해도 되는 거냐 스스로 자책한 나는 미안하다는 뜻으로 갈기를 슥 쓰다듬어 주곤 머리를 굴려 적당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작명 센스가 좀 구리긴 하다만.

"가자, 스콰야."

"푸르르릉."

투레질이 심하지 않은 걸 보면 저도 괜찮은 거겠지.

"이럇!"

* * *

막 해가 떴는지 쨍쨍한 햇볕을 쬐며 나아가는 행군.

언덕배기를 하산하며 문득 원래 내게 주어지려던 퀘스트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할 일 없는 생환자를 무작위로 선발해 넘겼으려나?

본래 내 것이어야 할 게 남의 손에 들어갔다고 하니 내심 아까웠다.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는 어쨌거나 서브 퀘스트.

잘만 풀렸다면 메인은 메인대로 클리어하면서도 서브 퀘 보상까지 취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었을 텐데.

"쩝."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던 찰나.

- …가! 어서!

- …이럇! 이랴앗!

- 이히히히히힝!

좌측에서 상념을 깨는 호통과 말 특유의 하울링이 귀를 스쳤다.

이에 시선을 돌리기 무섭게 저 멀리 건장한 체격의 남성을 필두로 창칼에 갑주를 걸친 너덧 마리의 인마(人馬)가 무언가에 쫓기듯 뿌연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다급히 내달리는 게 보였다.

짓궂은 우연의 장난인지, 운명이 정해 놓은 필연이었는지 참 공교롭게도 나와 똑같은 방향을 응시하며.

"저쪽이면… 수도원이구만."

무척이나 재미난 광경에 이 어찌 우연이겠냐 싶은 혼잣말을 중얼거린 나는 스콰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다 허벅지를 조였다.

'펫과 주인'이라는 시스템의 영향이련가?

구태여 말로 풀지 않아도 내 심중을 이해하듯 서서히 속력을 높이는 스콰. 평보와 속보 사이의 어중간한 속도에 맞춰 이따끔씩 유튜브에서 봐뒀던 기초 승마술을 되새기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영 어정쩡한 동작에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몸 여기저기가 삐걱거렸으나, 부족한 구석은 몸으로 때우며 한참을 이동하길 30여 분.

대지에 찍힌 발굽 자국을 따라 전진하던 나는 고삐를 잡아당겨 스콰를 멈춰 세웠다.

"워워."

대략 500미터 남짓한 전방으로 드높은 목책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저기가 바로 1차 목적지 페루스(fĕrus)였다.

* * *

페루스는 폰스와 비슷한 규모의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잘 정비되어 있던 폰스와 달리 여기는 방금 막 몇 사람이 드나들었었음에도 이상하게 곳곳이 파괴되어 있는 것.

아까의 그 인마가 다른 곳으로 빠졌나 싶은 착각이 들 만치로 부서지고 갈라져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현장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우선 안장에서 내려와 스콰를 역소환시켰다.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는 무대.

혹 좀비나 구울이라도 마주쳐 자칫 감염이라도 되면 큰일이라 여분의 생명수를 구하기 전까지는 혼자가 편했다.

"저쪽인가."

마지막으로 미니맵을 점검하며 지도 전체를 머릿속에 각인한 나는 도병을 꽉 쥐며 은밀하게 마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외부에서처럼 내부도 처참했다.

불현듯 이름 모를 폐허가 오버랩 될 만큼 너저분한 풍광에 가슴 한편에 새겨진 의구심은 점점 더 진해졌다.

"설마."

아까 그놈들이 이렇게 만든 건가?

불현 듯 안 좋은 그림이 그려졌다. 폰스 마을 규모라면 주민 숫자는 기껏 해봐야 100여 명 내외.

더군다나.

대다수가 농민이나 사냥꾼이라 가정하고 조금 전의 그자들의 장비 수준과 동료가 있을 경우를 상정한다면 이런 파국을 실현시키는 것도 아주 무리는 아니었다.

...만.

몇 초 만에 결론을 철회했다.

그들과 나의 간격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30분. 수백 단위의 도적 떼가 몰려오지 않는 한 마을 하나를 뒤집어엎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만일 대규모 공습이 벌어졌었더라면 입구에 흔적이 남았을 거고.

"대체 뭐지."

흐으음.

갈수록 진해지는 기묘한 느낌에 연신 턱을 만지작거리며 더욱 안쪽으로 진입했다.

바스락, 바스락.

풀 밟히는 ASMR만이 귓가를 스쳐―.

투웅!

'...!"

가던 참에 울려 퍼진 난데없는 파공성.

부지불식간에 찌릿하고 불꽃이 튀듯 오감과 육감이 보내는 위험 신호에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환두대도를 치켜세웠다.

퍽!

그 직후 땅바닥에 꽂히는 기다란 나무 막대기.

붉은색 깃이 유난히 돋보이는 화살이었다.

아니.

투우웅!

투웅!

화살'들'이었다.

슈우우우욱―

파바바박!!

한 대, 두 대, 세 대....

삽시간에 하늘을 점거하며 소나기처럼 내리꽂히는 화살 세례가 물 밀 듯 밀려오고 있었다.

"흡!"

그 바람에 흙먼지가 입에 들어가는 것도 마다하고 얼른 바닥을 굴러 자리를 피했으나,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타다다닷―

타닷―

족히 십여 명은 될 법한 인원이 커다란 원 형태로 나를 포위한 채 거리를 좁혀 왔으니까. 처음부터 화살은 저들의 포지셔닝을 위한 미끼였다.

"으음."

당했다.

땅을 박차며 몸을 일으켰던 나는 우두커니 서서 주위를 둘러 봤다.

천천히 그물을 조여 오는 이들의 무장은 썩 대단했다. 검, 창, 도끼, 방패 등 꼬나 쥔 무기도 다양한 데다가 몇몇은 상·하의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었을 만큼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집단이었는데.

개중에는 낯익은 인형도 함께였다.

'아까 그 사람들.'

앞서서 마을로 진입했던 너덧 명의 인마, 구둘울 이끌던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포위망의 중심에서 기다란 태도(太刀)의 푸른 서슬을 뿌리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환두대도의 칼끝을 밑으로 꺾으며 외쳤다.

"…항복."

이라고.

이그니스 류, 파스마 류.

그 외에 각종 스킬과 아이템으로 무장한 내가 전력을 다한다면 작금의 위기쯤이야 무난하게 빠져나갈 수 있다.

되레.

역으로 저들을 압박하다 못해 처참하게 짓밟아 버릴 수도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단지 무작정 부딪치기가 꺼려졌다.

저들이 이 페루스 마을의 주민들일 가능성, 더하여 그 일말의 가능성이 추후 이그니스 류의 파편을 회수하는 데 어떤 식으로 스노우볼이 굴러갈지 모르니 일단은 원만하게 풀어나가고자.

"항복하죠."

시원한 주먹질보다는 다소 답답하더라도 대화를 택한 것이었다.

이에 일대의 공기가 확 조용해졌다.

내 신속한 굴복 선언에 김이 빠졌나? 뜨거운 열기가 몰아치던 일대가 냉각기라도 틀어 놓은 양 침묵으로 물든 공간.

이윽고 10여 초 가량 흐를 무렵.

"너는 누구지?"

무뚝뚝한 음성이 바람결에 실려 왔다.

우두머리? 대장?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남성의 질문이었다.

다만.

그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질문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볼을 긁적였다.

내가 누군가.

진실대로 '지구라는 다른 차원에서 온 이방인이요'라고 답변하면 믿어 줄 리가 없으니 이 물음에 뭐라고 응답해야 할지 막막해서.

때문에 잠깐 머뭇거리자 도처에서 살기가 솟구쳤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납득될 만한 변명 거리를 내놓지 못하면 당장 죽여 버리겠다는 듯 타지인에게 내보이기엔 어울리지 않는 무지막지한 적대감이었다. 그런 탓에 이를 어찌해야 고민하던 나는 괜찮은 아이디어가 생각나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그에 대한 정답은 이미 공개되어 있었다.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요."

수백 년 전 홀연히 등장해 칼리야스 대륙의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희대의 도객, '벼락의 주인, 이그니스(ignis)'의 유산을 잇는 자.

이것이 나를 설명하는 신분이었다.

38화

고대로부터 타인의 이목을 잡아끄는 가장 효과적인 기술은 두 가지다.

그 시대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는 충격적인 치장을 하거나.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요."

충격적인 발언을 하거나.

파직―

나는.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후우우욱―

…꽈르르르릉!!

두 가지를 한꺼번에 선보였다.

최소 마력을 충전해 방사한 뇌류가 저 창공의 구름을 찢어 발기며 승천한다.

공격에 의의를 둔 게 아닌, 오로지 보여주기 위한 무력시위인 터라 평상시와는 다른 이펙트였으나 저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에는 충분했다.

"이, 이게 무슨!"

"으아아악!"

"마법! 마법이다!"

흉흉한 살기를 뿌리던 남자, 팽팽해진 활시위를 손가락에 건 여자, 그 밖에 창칼을 지닌 수많은 이들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놀라 뒤로 자빠지기도 하는 등.

유일하게 두 다리를 땅에 박고 버틴 인원은 단 한 명.

내기 물음표를 던졌던 우두머리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도 썩 온전치 않았다.

"…으음!"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고, 동공에는 여전히 벼락이 선명하게 남아 나와 허공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걱정할 일은 없어 보였다.

"이그니스, 이그니스의 전승자가...."

두 번째 파편을 품은 마을이었고, 그곳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이니 스킬을 구경시켜 준다면 신분 증명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여겼었는데.

연신 웅얼대는 말을 들어 보니 아무래도 그 판단이 제대로 먹혀든 것 같아서.

"당신이 정말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십니까?!"

저 남자.

이그니스 류에 대하여, 또 전승자가 방문한 이유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계획이 안 통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던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딴 것보다 한껏 공손해진 말투로 보아 더 이상의 분쟁은 없을 분위기이니.

이제 무난히 파편만 회수하면―

"아아! 신이시여!"

"...?'

되겠구나 싶은데, 반응이 왜 이렇게 격한 거지?

불안하게.

* * *

"이쪽입니다."

여차여차 상황이 일단락된 후.

본인을 크린 리벳이라며, 페루스 마을 자경대의 대장이라 밝힌 남자가 자경대원 하나를 어디론가 보내고는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나를 이끌었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가타부타 말은 없었으나, 미니맵을 꿰고 있었기에 유추는 어렵지 않았다.

수도원.

"요하네스 사제님!"

"오셨습니까, 리벳 대장."

예상대로 내 최종 목적지였다.

당면한 재앙에 맞서느라 부득이하게 관리에 소홀했던 듯 건물 외벽이 누렇게 변색된 수도원 정문엔 호리호리한 체구의 여신관이 먼저 떠났던 자경대원과 나란히 서 있었다. 그녀는 한발 빨리 도착한 전령에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리벳과 인사를 마치며 나를 보는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

저 호수를 닮아 깊고 푸른 눈동자와 마주하고 있노라면 마치 육체를 넘어 영혼까지 파헤쳐지는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휘윤 씨! 군대입니다! 군대라고요! 창과 성배… 칼리야스 교단입니다! 칼리야스 교단의 성군이에요!"

신관 하니까 불쑥 옛날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9차.

아, 10차인가? 아무튼, 초기라면 초기였던 퀘스트치고 끝도 없이 반복되는 언데드 웨이브에 치여 죽어가다 성군의 왕림으로 막을 내렸던 그날.

칼리야스 교단에서 지원군이 왔다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라이트와 폰스 마을 주민들.

다들 잘 살고 있으려나?

"반갑습니다. 칼리야스 교단 지부 레푸스 수도원의 원장 대행을 맡고 있는 요하네스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던 차에 맑은 음성이 나를 일깨웠다. 목소리마저 호수 같은 눈동자에 어울리는 맑은 미성이었다.

"이그니스 류를 전승하기 위해 떠도는 오휘윤이라고 합니다."

"오, 신이시여...."

그 감미로운 통성명에 맞춰 나도 자기소개를 하자, 크린 리벳과 마찬가지로 신을 부르짖으며 가슴 앞섬에 주먹을 대는 요하네스 사제.

접은 네 손가락은 네 손가락끼리 붙이고 편 엄지는 엄지끼리 붙이는(=ба=, 대충 이런 형태) 신기한 손동작이었다.

아마도 칼리야스 교단의 성호로 추정됐는데.

중요한 것은.

"흑! 흐윽.'

"사, 사제님!"

어떠한 전조 현상도 없이 일어난 매우 당황스럽게도 성호를 취한 그녀가 곧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아?"

노발대발 욕을 했거나, 때리기라도 했으면 모를까.

너무나도 갑작스레 눈물을 쏟아내는 여신관의 모습에 나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크린 리벳조차 아연실색해서 발만 동동 굴렀다.

이게 대체 뭐지?

달래주기도, 무시하기도 애매해 그저 황당해하는 동안 장장 1분여를 내리 우는 요하네스.

하나 진짜 황당한 일은 그다음이었다.

뜬금없이.

"부탁을, 부탁을 쓰겠습니다!"

"…예? 뭘 써요?"

"납치된 마을 사람들과 아른헬 사제님을 구해 주세요!"

이리 외쳤기 때문이었다.

* * *

띠링!

[〈메인 퀘스트: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2-2)〉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2)〉가 〈메인 퀘스트: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2-2)〉로 변경됩니다.]

〈메인 퀘스트: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2-2)〉

* 칼리야스 대륙의 기나긴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위대한 인물 중 도(刀)를 다루는 데 가히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이그니스(ignis). 그가 남긴 일곱 개의 파편 중 하나가 잠들어 있는― (중략).

자신만의 도법을 완성시키고자 대륙을 떠돌며 서서히 명성을 얻어 가던 이그니스는 그날도 어김없이 결투를 치러 승리했으나, 상대가 펼친 혼신의 일격에 두 사람 모두 상처 입고 쓰러져야 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며 전전긍긍하던 그때, 홀연히 나타나 그와 상대의 목숨을 구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페루스 수도원의 사제 리타니아였다.

이그니스는 대가 없이 자신을 도와준 사제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도법의 한 줄기를 내어 주고, 훗날 이를 회수하러 올 전승자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해 두겠단 약속을 맺었다.

리타니아는 한사코 거절했으나 맹약은 완성되었고,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 발동되었으니.

후인이여.

「벼락의 주인」이 남겨 둔 안배를 가져가길 원한다면 맹약을 이행하라.

(36/36)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최소 구출 인원'에 따라 성공 혹은 실패로 이어집니다.

* 특이 사항 2: 본 퀘스트의 '최소 구출 인원'은 총 '15명'입니다.

* 특이 사항 3: '구출 인원 숫자'에 따라 성공 시의 보상이 달라집니다.

* 특이 사항 4: '최소 구출 인원'이 달성될 경우 30분의 유예 시간이 주어지며, 최종 보상은 유예 시간 내에 탈출한 인원까지만을 합산하여 결정됩니다. 퀘스트 진행자의 판단하에 '즉시 종료'가 가능합니다.

* 특이 사항 5: 구출 조건은 '용병들의 주둔지에서 3km 이상 멀어지는 것'입니다.

* 특이 사항 6: 본 퀘스트를 '실패'할 경우, 보유한 '이그니스 류' 초식 중 한 가지의 지식이 소멸합니다.

* 서브 퀘스트 목록 확인 적용자: 서브 퀘스트 목록 열람▼

* * *

"…그러니까, 파편을 가져가고 싶다면 부탁을 들어 줘야 한다, 더불어 그 부탁은 도적들이 끌고 간 마을 사람들과 아른헬 사제의 무사 귀환이다.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별안간 벌어졌던 사태에 난처해하던 나는 핸드폰에 뜬 퀘스트 화면을 보고서야 어지럽게 이어지던 전개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대강 이러했다.

1. 약 한 달 전, 자경대와 수도원 사제들이 힘을 합쳐 페루스 마을을 위협하던 언데드들을 모조리 쓸어 버렸다.

2. 이후 농사와 사냥 등의 생업 활동을 재기하고 3주가량 지났을 즈음 군대가 찾아왔다.

3. 본인들을 체르바 백작이 고용한 용병이라 소개한 그들은 영지를 돌며 고립된 마을을 구조 중이라 밝혔다.

4. 하얀 사슴이 그려진 백작군 깃발을 보고 목책을 개방하자 용병단은 도적 떼가 되어 마을을 덮쳤다.

5. 모두가 합심하여 분전했으나 수많은 이들이 끌려갔고, 수도원 지하(파편이 보관되어 있는 곳)에 숨어 겨우 목숨을 건진 이들이 절망에 빠져 있던 와중에 내가 나타났다.

6.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라면 무력이 대단할 테니 네가 좀 가서 구해 달라.

아포칼립스의 흔한 비극과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라는 명칭이 지닌 오해가 겹쳐 발생한 연계 퀘스트였다.

"음."

전후 사장을 파악하고 내가 처한 처지를 이해하자 연거푸 침음성만 튀어나왔다.

어쩐지 크린 리벳도, 요하네스도 이상할 정도로 과하게 맞아 주더니만, 퀘스트가 복잡하지 않다고 이야기했던 게 고작 하루는커녕 반나절도 안 됐는데.

역시 입이 방정이었다.

"썩을."

"예?"

"아닙니다. 하죠. 해야죠. 해, 보죠. 후...."

스스로로 화근을 불러왔구나 싶어 자책한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요하네스의 부탁을 수락했다.

애당초 예까지 와서 거절할 방도가 없었다. 승낙해야만 하고, 헤쳐 나가야만 한다.

…그러니.

"파편을 먼저 회수할 수 있겠습니까?"

강화부터 하고 싶은데요.

[ 페루스 구출전 ]

"정말, 부탁 들어주시는 거 맞으시죠?"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반드시 갈 테니."

"알겠습니다."

나를 동화 속에 나오는 백마 탄 기사로 봤는지.

어째서 곧장 출발하지 않느냐고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자꾸만 힐끔거리는 요하네스를 몇 번이고 안심시키며 수도원 내부 교단(敎壇) 아래 감춰져 있던 비밀 계단을 내려갔다. 도합 마흔일곱 명의 목숨을 구한 은신처답게 지하실은 굉장히 넓었다.

또한.

처음부터 아예 대피소로 써먹으려 했던 것인지, 여러 구역으로 나뉜 공간 곳곳에 건조식품과 식수로 가득 찬 창고, 생활용품 및 가재도구 창고에 침실 등 거주 가능한 방까지 다섯 곳이나 존재했다.

"파편은, 이쪽이에요."

요하네스는 그런 방들을 전부 지나치며 나를 제일 안쪽으로 인도했다.

횃불 하나 달랑 걸려 있는 최심처.

중앙에 대각선의 긴 상처가 나 있는 두툼한 철문으로 굳게 닫혀 누가 봐도 비밀스럽다고 쓰인 골방이었다.

특이하게 문고리가 없었는데.

"여기서 사용하시면 돼요."

"예?"

개폐 방식은 더욱 특이했다.

"이곳에 이그니스 류를 사용하면 열 수 있을거라 하셨습니다."

"아아."

우우우웅!

파직―

철문에 있는 상처.

그곳에 전류를 흘러 넣어야만 열리도록 설정되어 있었으니까.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후우우욱―

꽈르르르릉!!

현대의 자동문을 연상케하는 개문 방법이었다.

…철컥!

쿵!

그렇게 뇌류를 주입하자 그르릉거리며 옆으로 움직이는 묵빛 철문.

흡수된 뇌기를 바탕으로 개방되는 자동문 너머로 드러난 것은 가로세로 1m짜리 크기의 유리관이었다.

황금빛이 감도는 한 권의 책자를 간직한.

"아아."

오랜 세월 줄곧 제 주인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던 보물.

이그니스 류의 두 번째 파편.

띠링!

['이그니스 류: 직뢰_원본(原本)'을 발견했습니다.]

'직뢰(直雷)'의 지식을 담은 스킬 북이었다.

〈이그니스 류: 직뢰_원본(原本)/Active〉

* 이그니스(ignis)가 창안한 도법의 두 번째 초식. 체내에 축적된 마력을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이며 뻗어 내는 도격. 섬광(閃光)에 이은 연격으로, 발끝에 힘을 주어 돌진하는 동시에 상대를 베어 냄으로써 흡사 화살 형태의 전류가 쏘아져 나가는 듯한 잔상이 남는다.

* 베기 공격 시 추가 피해량 +33%/1회 공격에 한 해 일시적으로 '뇌(雷) 속성' 부여

39화

그것은 꼭 살아 있는 생물 같았다.

내가 제 영역에 들어서자.

파직!

파지직!

이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말해 주듯 푸른 뇌기를 뿜어내며 열렬하게 환호했으니까.

"저, 저게 왜 이러죠?"

그 기묘한 현상에 뒷걸음질 치는 요하네스.

단지 전해지는 전승에 따라 안내역을 맡았던 그녀는 갑작스레 방출된 전류에 몹시 놀란 거 같았다.

무려 '벼락의 주인'과 관련된 물건이라 자칫 휘말렸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고 여긴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인지 은연중에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물러나려 했으나.

"어, 어디 가세요! 위험해요!"

"여기서 기다리시죠."

나는 그녀의 손길을 정중히 거부하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파직!

파지지직!

파직!

거리를 좁힐수록 점점 더 강렬해지는 뇌류.

그러다 어느 순간.

쩌저적―

…콰아앙!

"꺄아악!"

기어이 유리관이 버티지 못하고 수백, 수천 조각으로 박살 나 사방팔방으로 비산하며 주위를 어지럽혔으나 나는 무시하고 계속해서 전진했다.

무수히 많은 비수가 육신을 노렸지만.

툭―

투둑―

이쯤이야 뭐.

나는 적당히 안면부만 보호하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다가섰고, 마침내 손을 뻗어 꼬리에 불 붙은 망아지마냥 미쳐 날뛰던 책자를 쥐었다.

살갗을 타고 전달되는 묵직하면서도 짜릿한 촉감.

기분 좋은 자극에 방긋 미소 지으며 중간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퀘스트의 목표가 '회수'에서 '구출'로 변경된 덕분인지 나를 막아서지 않는 시스템.

이에.

턱!

촤아아아악!

"흐읍!"

[해당 기술과 관련된 지식을 전이합니다.]

나는 더 지체할 거 없이 새로운 지식을, 아니 고통을 받아들였다.

* * *

지식 전이의 영향으로 한바탕 난동을 부렸다가 깨어나 지상으로 올라오는 내내 곁에 착 붙어 우려 섞인 눈빛으로 묻는 요하네스.

"진짜, 괜찮겠어요?"

10여 초도 안 되는 짧은 과정이었지만, 이리저리 뒤틀리며 울부짖는 사람을 본 적은 없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요하네스와 페루스 마을 주민들에게 있어서 나는 영웅이 되어 줘야 하는 인물이다. 싸우기 전까지는 털끝 하나 다치지 말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될 인물이 돌연 죽네마네 울부짖었으니 당혹스러운 걸 넘어 경악했을 터.

"흐음, 우선은 이쪽이 제일 넓어요."

"딱 좋네요. 새로 익힌 초식을 연습해 보고 또 소모된 마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못해도 반나절은 필요합니다. 어차피 기습을 나가려면 밤이 돼야 하니 저녁에 다시 뵙죠."

"저녁, 이요?"

"소수로 다수를 치려면 야습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른헬 사제님과 마을 사람들을 빨리 구하고 싶은 마음은 압니다만, 무작정 가선 죽고 밥도 안 되는 걸 요하네스 님도 아실 겁니다."

"후, 그 말이 맞아요. 쉬고 계시면 간단하게라도 요깃거리를 챙겨 올게요. 쉬고 계세요."

"감사합니다."

그 바람에 불안함이 가시질 않는지 연신 눈치를 살폈으나, 결국 고개를 꾸벅 숙이곤 수도원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허리춤에서 환두대도를 뽑았다.

요하네스와 마을 주민들이 감내해야 됐을 아픔이 얼마나 컸을지, 동일한 입장이 되어 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해도 공감도 하지 못한다.

고로.

이럴 때는 그럴싸한 미사여구로 포장하기보단 조금이라도 냉정하게 따져 보고 만전을 기하는 게 최선의 행동이었다.

우우우웅!

"오케이, 마력은 넉넉하고."

그럼.

화끈하게 개시해 보자고.

이그니스(ignis) 류(流).

직뢰(直雷).

"하아!"

묵직한 기합을 동반하며 의지가 선 찰나. 체내에서 양껏 회전하던 마력이 두 갈래로 쭉 찢어져 각기 상하로 나뉘었다.

한쪽은 섬광(閃光)을 발현할 때처럼 상반신으로.

다른 한쪽은 복부에서 골반, 골반에서 양 허벅지를 타고 발목에서 앞꿈치였다. 직뢰의 핵심은 이 발끝에 모인 마력을 일시에 분출해 그 출력을 바탕으로 최대 5m를 단박에 뛰쳐나가는 것.

즉.

슈퍼맨이 되어야 했다.

"하아!"

파직―

…콰아앙!

음.

아이언맨인가?

* * *

콰아앙!

"끄읍!"

한 번의 굉음과 그 뒤를 잇는 신음이 연달아 울려 퍼진다.

소리의 주인공은 나.

일순간 급증한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수도원 담벼락에 처박히며 낸 단말마였다.

도약 후 공격.

지식 전이로 이론은 빠삭했지만.

"이게 몇 번째냐, 대체."

확실히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섬광이야 초심자도 당장 활용할 수 있게끔 '동작: 휘두르기'에 지나지 않는 무척이나 심플한 스킬이었다면, 직뢰는 폭증한 스피드를 제어하며 적과 나의 간격을 완벽히 계산한 뒤 정확한 타이밍에 칼을 뻗어야 하는… 길어지는 혀만큼이나 난이도가 결코 낮지 않은 기술이었다.

하루 이틀 단련으로는 실전에서 활용하기 어렵다는 의미.

"허, 어떡해야 되지."

피멍이 들고 뼈가 시큰거려도 마력이 바닥나도록 훈련에 매진하던 나는 휴식을 취할 겸 땅바닥에 주저앉아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요하네스에게 개미굴 부탁을 받았을 때.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두 번째 파편을 취하게 된다면 어떤 미션과 부딪쳐도 무난하게 클리어하지 않을까 자신했다.

S 랭크 스킬의 위력이야 손수 체험해보지 않았던가?

한데.

설마 스킬 난이도가 이리도 높을 줄이야.

그러한 연유로 마음 같아서는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다룰 수 있도록 몸에 착 달라붙을 때까지 몇 날 며칠이고 수련에 투자하고 팠지만.

인질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밍기적 댈 틈이 없었다.

서른여섯 명 중 열다섯 명. 절반이 채 안 되는, 절대 많이 않은 숫자였다.

* * *

해가 저문다.

뉘엿뉘엿 기울며 긴 꼬리를 남기는 석양 아래.

"휘윤 씨. 저녁거리 좀 챙겨왔어요."

"감사합니다."

요하네스가 나무 광주리에 말린 과일 몇 가지와 햄으로 짐작되는 훈제 고기 한 덩어리에 큼지막한 빵을 가져왔다.

약탈당한 마을치고는 꽤나 호화로운 식단이었다.

전투를 앞두고 있는지라 밤사이 체력이 모자라지 않게 가능한 최고의 밥상을 차려온 듯 고기와 빵에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거기에 에너지 바를 곁들여 허기를 달랬다.

비교적 만족스럽게 식사가 끝날 무렵.

몇 사람이 더 수련장으로 쓰고 있는 수도원 옆 공터로 찾아왔다. 크린 리벳과 네 명의 남녀로, 자경대의 간부진이자 아까 말을 타고 달렸던 그 조합이었다.

요하네스에게 극진한 태도로 목례한 그들이 이 자리에 모인 까닭은.

"요하네스 님께 들었습니다. 오늘 밤에 출발하실 거라고."

"예. 그래서 여러분들을 불러 달라고 요청드렸습니다. 듣자 하니 나갔다 오신 게 개미굴을 살펴보려 했다고 하던데, 성과는 있었습니까?"

인질들의 위치와 납치범 도적 떼의 정보를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주민들을 구조하러 갈 작정이었는지, 며칠간 동분서주했다는 간부진은 오늘 오전까지도 정찰에 총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 덕에.

쓸모 있는 데이터가 제법 많았다.

단순히 지도와 도적놈들의 전력뿐 아니라.

"먼저 주민분들이 갇혀 있는 장소는, 통상적으로 '프로미카 굴'이라 불리던 지역입니다.'

"프로미카?"

"프로미카는 성인 남성만 한 몸집을 가진 벌레입니다. 검붉은 외피에 크고 작은 두 쌍의 턱 이빨과 갈고리 형태의 발을 가졌으며 군집 생활을 하는 게 특징입니다. 대략 이리 생겼지요."

'개미잖아?'

"안 그래도 성격이 아주 난폭해 움직이는 건 모조리 먹어 치우는 놈들인 데다 근처에 생명의 샘이 있어 무리를 이끄는 프로미카 킹이 영물로 진화하며 인근을 완전히 장악했었습니다."

"영물이요?!"

영물과 생명의 샘에 관한 내용도 포함된 상태였으니까.

다만.

좋아하기는 일렀다.

"아아, 지금은 없습니다."

"예? 그게 무슨."

"랍티오 놈들이 사냥했기 때문입니다. 명확하진 않지만, 프로미카 굴 근방에서 프로미카 킹의 사체가 포착된 점, 또 프로미카 굴에 자리를 잡은 점을 종합해 본다면 높은 확률로 랍티오 용병단에 의해 사냥 되었을 겁니다."

"이런 개 같―'

낭보 뒤에 비보가 따라온 탓이었다.

기뻐할 새도 없이 끼얹어진 찬물에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폰스 마을과 폐허.

그리고 페루스 마을로 벌써 세 번째였다.

내 영물을 놓치거나 빼앗긴 게.

"휘윤, 씨?"

"후. 죄송합니다. 계속 말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보물을 놓쳤다는 사실에 미간을 팍 찌푸리자 본인이 뭘 잘못했나 의아해하던 크린 리벳이 재차 말을 잇는다.

"현재 프로미카 굴은 랍티오 용병단에 의해 점거되었으며, 놈들은 굴 전체를 아우르는 토성을 쌓아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는 중입니다."

"토성이요?"

"네. 저희 마을 외에도 납치된 사람들이 더 있는데, 그 인력을 동원해 생명의 샘을 중심으로 일대를 요새화하려는 듯합니다."

"으음."

"랍티오 용병단의 총원은 80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전원 무장을 갖췄으며, 습격 당시 저희를 피신시키시던 아른헬 사제님께서 단장인 랍티오가 적어도 준기사급의 실력자일 거라고 하셨습니다."

"준기사급?"

"저희 같은 촌 동네 사람들이야 잘 모르지만, 랍티오 놈의 칼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는 걸 보고 사제님께서 마력을 다룰 줄 아는 게 준기사, 최악의 경우엔 평기사일지도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차근차근 읊조리는 본론을 통해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질의 안위도 안위지만, 수적 열세나 불리한 지형 등 고려해야 될 항목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거.

무식하게 힘만 믿고 덤볐다가는 구출은 고사하고 내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더군다나.

'잠시만.'

이제 보니 단점은 또 있었다.

'…사람을 죽여야 하는 건가?'

나는, 살인(殺人) 경험이 전무하다는 부분이었다.

몇 달 전만 하더라도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했던 삶. 요새 좀비들을 때려잡으며 죽음과 죽임에 한결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언데드와 사람은 차원이 다른 개체.

이런 내가 제아무리 범죄자고 도적 떼라고 해도, 과연 퀘스트라는 명분만으로 멀쩡히 살아 숨 쉬는 사람을 살해할 수 있을까?

"...."

불현듯 떠오른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목구멍 밖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내뱉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외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수록 부정적인 응답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어지러운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났을까?

"밤에는 열 명의 인원이 돌아가며 경계를… 휘윤 씨?"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돌연 설명을 멈추곤 나를 쳐다보는 크린 리벳.

그 직후였다.

삑!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느닷없이 비명을 지른 건.

"...!"

평소와는 다른 음률.

한 번만 들어도 뇌리에 깊숙이 박혀 쉬이 잊혀지지 않을 날카로운 신호가 귓가를 파고들자마자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변고.

바라지 않던 사달이 발발했음을.

(35/36)

한 생명의 사망 소식이었다.

4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