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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20-30

20화

황혼이 진다.

서서히 저물어 가는 날을 뒤로한 나는 불룩한 보따리와 두툼한 고깃덩어리, 끝으로 바지 주머니에 붉은색과 황금색이 조화롭게 섞여 있는 꽃 한 송이를 넣고서 마을로 귀환했다.

숲을 한바탕 휘젓고 다닌 영향일까?

우리가 도착하기 직전까지도 좀비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마을이 금일은 하루 종일 고요했다.

물론.

감시는 여전히 철저하게 서는 중이라 함부로 접근하면 전날처럼 화살 세례를 받게 될 것이기에 일정 부근에서 멈춰 선 나는 출발하기 전에 지정해 두었던 대로 목창을 쥐고 힘껏 던졌다.

후우우우욱―

쿵!

정확하게 날아가 목책 밑단을 두들기는 창.

그렇게 연달아 두 번을 던지자.

화륵!

화르르르르륵!

난데없는 충격에 놀랐던 사람들은 내가 보내는 신호임을 깨닫고, 이내 활활 타오르는 횃불로 원을 그렸다.

들어와도 좋다, 문을 열겠다는 대답이었다.

"읏차."

일종의 봉화에 몸을 일으킨 나는 등에 좀비들의 수급이 든 보따리를 이고, 왼손으론 묵직한 사슴 사체를 전리품처럼 들고서 목책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후다닥 내려와 나를 맞아 주는 마을 사람들. 개중에는 라이트도 끼어 있었는데, 난 그에게 사슴을 건네주고 경비대장인 모트레코 아저씨의 지시에 맞춰 어제와 마찬가지로 검사소에 들어가 옷을 벗었다.

띠링!

[〈서브 퀘스트: 식량 확보〉를 부분 완료했습니다.]

[적립된 공적치: 사슴]

[종료 일자: 〈메인 퀘스트: 보호〉와 동시 종료]

외부에 나갔다 왔으니 외관이 멀쩡하든 말든 상처 유무 체크는 필수였다. 이는 친분과는 상관없이 꼼꼼하게 이루어졌고, 속옷만 걸친 맨몸으로 검증을 마치고 나서야 장비를 재착용한 나는.

"없네, 됐어. 입어도 좋아. 그리고 수고했네."

"수고는요. 그보다 사슴을 잡아 왔으니까 가서 구워 드세요. 좀 더 잡아 보려고 했는데, 경험이 없어서 한 마리도 겨우 잡았네요."

"아, 페루스?! 안 그래도 비축한 식량이 거의 다 떨어져서 요즘엔 하루에 한 끼라도 고기를 먹었으면 하는 중이었는데, 쿠나쿨루스였어도 감지덕지했을걸세."

"쿠나쿨루스라면...?"

"모르나? 털이 복슬복슬한 짐승인데, 귀가 뾰족하고 재빠른 게 특징이지. 기회가 되면 한번 먹어 보게. 맛이 제법 괜찮아."

"흐음, 알겠습니다."

모노케로스에 이어 칼리야스 대륙에서만 나고 자라는 동물의 정보를 머릿속에 새겨 넣으며 검사소 바깥으로 나왔다.

딱 그러던 참이었다.

"저기요."

"…예?"

휘장을 걷고 나오던 나를 누군가 붙잡아 세웠다.

고개만 살짝 돌리자 마을 주민들 곁에서 경계를 서던 정유림이 뭐가 그리도 불만스러운지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서 있었다.

음.

눈빛을 보아하니 설명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어째서 외출했는지, 왜 단독 행동을 하는지 등등.

다만.

"왜 그러시죠?"

나는 구태여 구구절절하게 사연을 늘어놓을 당위성을 못 느꼈다.

저들과 내가 돈독한 동료도 아니고, 단지 퀘스트로 얽혀 당분간 동행하게 된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했다.

결정적으로.

저들은 눈앞에 닥친 싸움을 제외하면 칼을 뽑기 보단 현실에 안주하려 드는 나와는 아예 갈 길이 다른 부류였다.

그러니 살갑게 대할 필요도, 묻는 것에 곧이곧대로 답변해 줄 의무도 없었다. 인연이라는 게 훗날 어떤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지 모르니 살갑게 대해 줘도 되기는 하지만, 첫날부터 심적으로 크게 틀어졌기 때문인지 저들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이러한 내 마음이 전해졌을까?

"...."

정유림은 날 불러 놓고도 막상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고진수야.

한창 공을 들이던 여성이 엄한 놈에게로 가 버렸다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나는지 안면을 구기고 있었고.

"할 말 없으면 가 보겠습니다. 보다시피 피곤해서 말이죠."

나는 마지막까지 입술만 깨무는 정유림을 남겨 두고, 좀비에게 남편과 자식을 잃은 여인과 태어날 아이에게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안겨 주고 싶다는 예비 아빠의 집으로 향했다.

각각.

'서브 퀘스트: 열 개의 수급'과 '서브 퀘스트: 아모르의 꽃'의 의뢰인들이었다.

* * *

띠링!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열 개의 수급〉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서브 퀘스트: 아모르의 꽃〉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적은 경험치' 및 '손때 묻은 단검', '질 좋은 숫돌'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손때 묻은 단검/Normal〉

* 아콰 남작령 폰스(fons) 마을에 살던 어느 사냥꾼의 단검. 때로는 짐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데, 때로는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도축하는 데 사용했던 칼이다.

* 대상 '짐승'을 공격할 때 추가 피해량 + 5%

〈질 좋은 숫돌 /Normal〉

* 칼이나 도와 같은 무기를 갈아 날을 세우는 데 쓰는 돌. 품질이 꽤 좋다.

* 마도 작업에 소모되는 시간: 10%

스르릉.

착!

"나쁘지 않네."

복수를 이뤄 주어 고맙다며 물기 어린 눈망울로 내어 주던 단검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던 나는 무게감이나 길이나 적당하구나 싶어, 예비 아빠에게 받은 숫돌로 날을 세운 뒤 검대에 걸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산 멀티툴이 있지만, 제아무리 노멀 등급이라도 아이템은 아이템이다. 특히 옵션으로 붙은 짐승 대상 추가 피해량은 앞으로 계속해서 사냥하게 될 '영물(靈物)'들에게 효과적으로 활용될 터였다.

여차하면 싸게 팔아도 되고.

"그러고 보니 여기 샘에는 영물이 없었지. 리젠이 안 된 건가? 아니면 원래 없는 곳도 있는 건가? 이것도 내일 협곡에 다녀와서 물어봐야겠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들을 정리하며 음식거리를 뜯으려던 찰나.

―땡땡땡땡땡!!

"...?!"

잠잠하던 사위가 요란한 종소리로 금세 시끄러워졌다. 원인이야 따로 전해 듣지 않아도 바로 인지했다.

침공.

좀비들의 습격이었다.

"오늘은 안 오나 했더니만, 그냥 늦은 건가."

쯧.

하필이면 밥시간에 나타난 불청객 소식에 혀를 찬 나는 얼른 환두대도를 패용하고 숙소를 나섰다. 굶주림이야 나중에라도 해결할 수 있지만, 미적거리다 빼앗긴 공적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172명의 마을 사람을 모두 지켜야 하는 입장이기에 식사 따위는 잠깐 미뤄 두고 황급히 목책으로 달려갔다.

"―쏴! 머리만 쏘라고!!"

"화살! 화살 더 없어?!"

"돌멩이 가져와!"

그어어어어어!!

으어어어!

최대한 빨리 움직였는데도 목책 부근은 이미 격전이 벌어진 상태,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가니 그늘져 가는 어둠 아래로 족히 1~2백 단위의 좀비들이 괴성을 지르며 해일처럼 맹렬하게 밀려오는 중이었다.

놈들이 내뿜는 살의에 살갗이 저릿저릿할 지경.

흡사 아포칼립스물 영화를 연상케 하는 전장에 혀를 내두른 나는 별안간 강한 의문이 들었다.

"저 많은 놈들이 다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거지?"

내가 숲을 누비며 맞닥뜨린 좀비라고 해 봐야 수십 마리가 전부였다.

그 말인즉슨.

고작 몇 시간 만에 물경 수백에 이르는 대규모 군세가 규합되었다는 소리인데, 이게 너무 이상했다.

멍하니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다니기만 하던 놈들이 대관절 무슨 연유로 뭉치게 되었는지.

더불어.

내비게이션도 없이 어떻게 여길 찾아온 건지.

혹 내가 남긴 흔적을 추격해 왔나 하는 의구심이 뇌리를 스쳤으나, 내 알기로 좀비 놈들에게 그만한 지능은 없었다.

게다가 라이트가 말하길 애당초 폰스 마을이 현재에 이르게 된 것도 벌써 한 달이나 되었다고 들었다. 그 기나긴 기간 동안 꾸준히 사투를 벌였다면 사람 한둘의 책임일 리가 없었다.

'뭔가 있다.'

분명하다.

무언가 있다.

좀비들을 끌어모으는 무언가가.

"―휘윤! 휘윤!! 왔으면 어서 도와주게!"

"아, 예. 혹시 제가 맡겨 놓은 목창 꾸러미 어디에 두셨습니까?"

"그거라면 저기 있네!"

순간 사색에 빠져 있던 나를 현실로 불러오는 모트레코 아저씨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나는 이럴 때를 대비해 신호용 외에도 수성용으로 제작해 두었던 목창 더미를 돌려받았다.

투창술에 일가견이 있다, 그러니 이쪽은 내가 쓰도록 놔둬 달라.

이면에는 '내 안전한 공적치 수급 수단을 아무도 건드리지 말아 줬으면 한다.'라고 속내를 감춘 약속을 잘 지켜 주어 정말 처음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총 서른 자루.

충분한 양은 아니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초보자용 방어구 세트를 믿고 저길 뛰어들 수는 없다.

"생명의 샘이 있기는 한데.... 살점이 찢기는 건 못 막아 주니까."

암.

작게 주억거리며 목창 꾸러미를 옆에 풀어놓고 다리를 벌렸다.

이윽고.

"하아아아아!!"

후우우욱―

콰앙!

나무로 된 유성이 낙하했다.

* * *

길거리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부터 물자가 부족해 몇 번이고 수거해 재사용하다 보니 툭 치기만 해도 부러질 듯 간당간당한 화살까지.

보통 기마병을 막기 위해 설치해 두는 바리케이드를 쫙 깔아 두고 근접전은 절대 불허한다는 의지를 여실히 보여 주며 원거리 공격을 퍼붓길 꼬박 한 시간여.

컨베이어 벨트인 양 쳇바퀴 돌듯 쉴 틈 없이 치른 혈전 끝에 드디어 일대에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어찌나 격렬했었는지 승리의 환호성이 비집고 나올 수도 없게 거칠어진 호흡만이 투쟁의 폭풍이 떠나간 자리를 대신했다.

이는 나도 다르지 않았다.

"후우, 후, 후우우우.... 죽겠네."

S 랭크를 따내기 위한 열망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붙였던 탓에 생명수를 들이켰음에도 체력이 회복되질 않았다.

하나.

"끄으으으읏차. 가자, 가야지."

나는 가만히 있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치는 사람처럼 휴식을 거부하고 굽혔던 무릎을 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으으으으으.

으어으으으으.

불사에 가까운 몸뚱어리를 지녀 땅바닥에 대가리를 처박았음에도 끝까지 숨을 쉬고 있는 괴물들에게 진정한 사망 선고를 내려 줘야 했다.

일명 '확인 사살'.

"두게! 우리가 할 테니, 자네는 가서 쉬어. 제일 열심히 싸우던 거 다들 봤어.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으니까―"

"아닙니다. 제가 또 한 체력 합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계십쇼."

원래는 나중에 불을 질러 깡그리 태워 버리거나 한다는데, 저 토실토실한 경험치들을 그리 둘 수 있나.

반드시.

"갔다 오겠습니다."

"어휴, 할리스! 문 좀 열어 줘!"

"예에에에엡."

내가 손수 멱을 따야 했다.

* * *

하루가 지나갔다.

폰스 마을에 머무른 지도 어느새 사흘 차.

"지금 가시는 겁니까?"

"예."

나는 새벽 일찍 짐을 꾸리고 목책으로 이동했다.

이제 슬슬 동이 트는 시각이라 보초병들 말고는 한산한 그곳에는 라이트가 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제 부탁을 들어주러 가는 길이라 졸음도 무릅쓰고 배웅을 나온 모양이었다.

"이건 제 아내가 싸 준 도시락입니다. 훈제 고기와 후모르입니다."

"후모르...?"

"이쪽 지방에서만 나는 과일입니다. 단맛은 강하지 않지만, 과즙이 많아 식수 대용으로도 쓰지요. 목이 마르실 때 드시면 갈증 해결에 도움이 될 겁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다치지만 말고 돌아오십시오."

"그러죠. 하면 다녀오겠습니다."

"에. 부디 당신의 걸음에 평화가 있기를."

나는 내 앞길에 안녕을 빌어 주는 라이트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곤 훌쩍 목책을 넘어 엘루비에스 협곡으로 출발했다.

21화

[ 영웅 ]

라이트가 전해 준 조악한 지도와 그보다는 신뢰감 있지만 상세함은 없는 미니맵을 교차로 번갈아 보며 가고 있는 엘루비에스(ēlúvĭes) 협곡은 폰스 마을에서 동쪽으로 대략 10k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여태 해 왔던 산악 구보 덕분에 10km라는 거리가 딱히 멀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생각과는 별개로 시간이 꽤 지체됐다.

"그만 좀―"

그어어어어억!

서걱!

툭―

데구루루루루―

"와라."

가는 도중에 맞닥뜨리는 좀비들을 죄다 처리하며 전진한 까닭이었다.

협곡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점점 험준해지는 산세를 주파하며 교전을 치러야 했기에 체력 소모가 적지 않았지만.

어쩔 수 있나.

당장 좀 편해지자고 후방에 적을 남겼다가 자칫 앞뒤로 싸 먹히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거니와 이를 둘째치고서라도 서브 퀘스트가 아무리 중하다 한들 결국엔 메인 콘텐츠의 장벽을 넘을 수 없었다.

놈들을 살려둬 봐야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만 줄 것이기에 다소 귀찮고 피곤하더라도 차근차근 제거해 가며 여정을 이어 갔다.

그런 탓에 협곡에 다다랐을 때는 두 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이야."

어슴푸레하던 배경이 완전히 걷히고, 창공에 떠오른 태양 빛을 받아 천지 만물이 본연의 색을 드러내는 오전.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내 입에서 진한 감탄사가 치솟았다.

직전까지만 해도 주변을 빽빽하게 채우던 초목이 사라지더니 한순간에 탁 트인 풍경 아래로 깎아지르는 낭떠러지가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최소 20~30m 이상은 될 법한 높이라 단지 고개를 내미는 것만으로도 불쑥 차오르는 아찔함에 소름이 돋았다.

약 20~30m.

수치만 들으면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실제로는 아파트 10층에 달하는 수준이라 고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의 바지를 축축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난 지금부터.

"여길.... 내려가야 한다는 거지?"

저 천장단애와 정면으로 부딪쳐야 했다.

미니맵에 표시된 빨간 점이 무저갱 같은 절벽의 밑바닥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왠지.

내 바지도 축축해지는 기분이었다.

* * *

꽈아아아아아악―

"니미럴, 니미럴, 니미럴...!"

쉬지 않고 새어 나오는 육두문자.

나는 누가 설치했는지 모를 난간에 몸을 의지하며 연신 욕설을 내뱉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계단, 안전장치라고는 난간의 틈새를 메꾸려 묶어 둔 헐렁헐렁한 밧줄이 전부인 데다가 폭은 또 왜 이리 좁은지 도저히.... 진짜 도저히 불안해서 욕이라도 내뱉지 않고선 맨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극한에 이른 두려움으로 잠깐이었을지언정 이번만 퀘스트 포기를 선언해 버릴까 하는 부정적인 유혹에 사로잡힐 뻔했으니 말 다 했지.

그래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개 같네 진짜, 이건 분명 보상이 역대급으로 좋을 거야. 아이템을 주면 무조건 매직 등급일 거고, 경험치도 무조건 상당량일 거야. 무조건, 무조건!"

스스로도 무어라 떠들어 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망상이나 다름없는 희망적이고도 긍정적인 미래를 상상하고 또 상상하며 무서움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시작을 안 했다면 몰라도 이미 발을 들인 마당이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가 봐야 한단 일념으로.

참.

탁―

"후아아아아아아...."

100만 년 같은 10분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땅바닥에 발을 딛자 저절로 밀려 나오는 한숨. 꾹 참았던 숨결을 모조리 토해 내며 환두대도를 뽑아 들었다.

스릉―

손에 착 감기는 도병.

파블로프의 개처럼, 언제나 내 목숨을 지켜 준 그 차가운 감촉에 육체가 반응하듯 신기하게도 벌렁거리던 심장이 차츰차츰 안정되어 간다.

"후, 가 보자."

그 덕에 쿵쾅대던 심장을 다스린 나는 식은땀을 훔치며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올 때 길을 잃지 않으려 불을 크게 피워 놓고 미니맵에 표시된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엘루비에스 협곡에서 처리해야 할 미션은 두 가지.

전 촌장 클린트의 죽음과 상처 연고용 레캡투스 채집.

우선적으로 손대야 할 업무는 전자다.

한가하게 약초나 수색하기엔.

…그어어어어어어어.

…으으으으으으.

'아주 득실득실하네.'

저 자신을 미끼로 내주었던 클린트.

그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인이 성공했던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는지 협곡 내부에 좀비가 매우 매우 매우 많았으니 말이다.

눈에 보이는 숫자만 꼽아도 거진 30여 마리.

구울은 포함되지 않은 무리였지만, 한데 뭉쳐 있는 포메이션이라 나는 초장부터 전력을 다하기로 작심하고 선제공격을 날렸다.

'하아!'

휘우우우우욱―

대기를 가르며 뻗어 나가는 칼날.

태양광을 반사하며 번쩍인 도신이 유려하게 좀비의 대가리를 하늘로 띄운다. 그 흉측한 물건이 곤두박질치기도 전에 새로운 적의 몸통을 벤다.

그제야 손님이 방문했음을 알아차린 좀비들이 우르르 몸을 돌리는 사이 계속해서 파죽지세로 외곽을 깎아 나가던 나는 다섯 마리째를 쓰러뜨리고선 미련 없이 백 스텝을 밟았다.

뭉텅이로 모여 있다면 그에 걸맞은 전술을 취해야 하는바.

우우우우우웅!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하아앗!"

광역기를 시전할 타이밍이었다.

휘우우욱―

콰과과과광!!

찰나 간의 번쩍거림을 동반하며 폭발한 뇌류가 사방 천지를 뒤덮는다.

분수? 폭죽?

그래.

폭죽이라 표현하는 게 적절할 낙뢰 속에서 바스러지는 수십 마리의 좀비들을 주시하며 나는 좌하단으로 치우쳤던 도를 회수하며 제동이 걸렸던 다리 근육을 비틀었다.

마나가 오링났으니 재차 칼춤을 출 차례였다.

…끄어어어어어어어!!

"이런."

저기.

같은 무대에서 놀고 싶어 하는 동참자 양반―

끄아아아아아!!

끄어어어어!

"아."

'들'과 나란히.

"두 분이셨구나."

좀비가 일반 들개라면.

체감상.

치타와 비견되는 속도로 대지를 박차는 두 마리의 괴물.

끄어어어어어!!

끄어어어어!!

타다다다다닷―

"니미럴."

어쩐지 한동안 평화롭게 흘러간다 싶더니만.

무시무시한 기세를 발산하는 구울들의 모습에 이를 악문 나는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10초.

아니 5초만 일찍 등장했다면 스킬을 아꼈을 터인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진정 한 끗 차이로 엇갈린 운명에 골치가 아팠다.

'위로, 위로 올라가자!'

재빨리 머리를 굴려 답을 간구하던 나는 다 차치하고 일단 지상에서의 2 대 1은 무리라 판단에 즉시 타고 내려왔던 계단으로 전력 질주했다.

천지인(天地人).

기상(天)이야 모두에게 공평하니 없는 셈 치고, 제일 중요한 인원(人)에서 밀리고 있으니 이럴 때는 지형적(地) 이점이라도 챙겨야 하니까.

"흐읍!"

가속에 가속을 더하며 한달음에 당도한 계단.

벌벌 떨며 조심스럽게 하산하던 일전과 다르게 거침없이 쭉쭉 밟아 올라가 고지대를 선점하기 무섭게 내 뒤꽁무니를 쫓아온 구울들도 앞다투어 계단에 발을 들였다.

그와 동시에 무척이나 재밌는 광경이 벌어졌다.

오랜만에 발견한 싱싱한 먹잇감에 잔뜩 흥분한 놈들이.

끄어어어억!

끄어어억!

빠각―

빡!

"…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내리는 기괴한 장면이. 나는 그 아귀다툼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세상은 공평하다는 걸 깨달았다.

무한한 체력을 거머쥐었으나 협력을 잃어버린 종족.

역시, 자연은 결코 장점만을 선물해 주지 않는 법이었다.

"하아아아!!"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왼손으로 난간을 움켜쥐며 오른손으로 환도를 뻗었다. 본디 도(刀)는 외날이기에 양날인 검(劍)보다 찌르기가 약하다.

그러나.

약하다는 말이 꼭 무력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후화아아아악―

콰직!

끄어어어어어!!

불안정한 자세에서 오른팔의 완력만으로 가한 일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칼날은 깔끔하게 구울의 쇄골을 짓뭉갰다.

섬뜩하게 울려 퍼지는 파육음.

뼈를 부수고 살갗을 찢은 도신을 억지로 잡아 뽑으니 그 반동으로 목이 반쯤 잘린 구울의 몸뚱어리가 엎어지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꾸라진 경쟁자를 발판인 양 짓밟으며 허겁지겁 진격해 오는 또 다른 구울.

끄어어어어!!

끄르륵― 끄륵!!

살기와 분노가 한데 어우러진 합창을 귓등으로 흘려보내며 환두대도를 대각선으로 내리그었다.

추락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흐아아아아아!!"

'양손'으로 온 힘을 다해.

휘우우우욱―

서걱!

비스듬하게 전면을 휩쓸고 지나가는 칼의 궤적을 따라 거무튀튀한 머리통이 중력을 거스르며 치솟는다.

그 직후 부유감이 나를 감쌌고, 뒤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등판에서 강한 충격이 일었다.

"큽!"

전신을 찌르르하게 울리는 통증.

끽해야 3m.

이만하면 낙하 대미지도 버틸 만하겠다 싶어 구울을 죽이는 데에 중점을 두고 시원하게 내질렀는데, 짐작한 것보다 고통이 심했다. 하기야, 쿠션감이라도는 단 1도 없는 흙바닥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썩을...!"

안면을 찡그리며 환두대도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자 곧 둔탁한 무언가가 눈앞으로 홱 지나갔다.

쿵!

끄르르륵― 끄으으으으!!

덜렁거리는 목덜미로 인해 가래 끓는 신음을 쏟아 내면서도 변함없이 집요한 적의를 쏟아 내는 구울 놈이었다.

녀석은 튜토리얼의 구울이 그러했듯 일어서기도 귀찮은지 드러누운 채로 땅을 기며 내 발목을 향해 팔을 뻗어 왔다.

…만.

안타깝게도 그 옛날의 구울과 달리 내게 조그마한 흉터 한 줄 남기지 못했다.

무지몽매한 뉴비 시절이라면 모를까.

"한 번 당해 봤더니 이젠 당황스럽지도 않은데 어쩌냐."

후우우욱―

완숙의 경지라고 칭하긴 어렵더라도 어리숙한 초보 딱지는 뗀 지 오래였다.

콰직!

* * *

그으으으으, 그어어어어어.

엘루비에스 협곡을 주름잡던 두 마리의 구울을 비롯해 다수의 좀비를 한 마리도 빠짐없이 박살 내며 진군하길 10여 분.

중간중간 생명수를 마셔 가며 나아가던 나는 비로소 홀로 남겨진 좀비 한 구를 목도할 수 있었다....

푸른색 의복에 검은색 신발.

어찌나 심하게 물어 뜯겼는지 안면은 알아볼 수도 없게 망가졌지만.

사락―

"클린트가… 맞네."

라이트가 눈물로 새긴 몽타주상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클린트가 확실했다.

그는.

부러진 나무에 몸통이 꿰뚫려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였다.

그어어억, 그어어어어어!!

아마도.

도망치던 와중에 자살을 결심하고 협곡으로 몸을 던졌지만, 죽음보다 일찍 찾아온 좀비화로 저런 신세가 된 듯했다.

찬양받아야 할 숭고한 희생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참하고도 안타까운 결말에 나는 1분 1초가 아까운 사람처럼 도를 휘둘렀다.

뒤늦게나마 아비의 평안을 빌었던 불효자의 바람을 들어주려.

서걱!

띠링!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뒤늦은 안녕〉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상당한 경험치' 및 '중급 회복 물약(x3)'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는 여느 때와 같이 맑고 고왔다.

22화

무려 구울이 둘에 좀비 수십 마리가 장애물로 주어진 퀘스트답게 '상당한 경험치'와.

"중급 회복 물약, 이게 나오네."

하급 포션의 두 배의 효능을 지닌 중급 포션이 세 병이나 지급되어 잠시나마 머리를 어지럽히던 찝찝함을 털어 내고 만족스럽게 빛무리를 흡수하던 그때.

띠링!

[축하합니다!]

"…응?"

잠잠해지던 핸드폰이 다시금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보상도 다 수리했겠다.

더 나올 게 없을 텐데?

해서 물음표를 띄우며 쳐다본 검은 바탕 안에는.

[다섯 종류의 '서브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1인 한정 업적: 가장 빠른 도움의 손길〉을 달성했습니다.]

"업적?"

또 하나의 업적을, 그것도 '1인 한정'이라는 특수하고도 특별한 업적을 달성했다는 메시지가 출력된 상태였다.

[달성 조건: 다섯 개의 서브 퀘스트 클리어]

[달성 목록: 사냥꾼의 절규, 목책 보수, 열 개의 수급, 아모르의 꽃, 뒤늦은 안녕]

"아."

그동안 빨빨거리면서 수행했던 서브 퀘스트들을 통해 일종의 스피드런에 해당하는 히든 트리거가 발동된 것이었다.

이런 시스템이 있을 거라고는 1도 예상하지 못했던지라 기뻐하기보다 놀라기에 바빴던 나는 곧이어 쓰인 글귀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부상으로, 내게 가장 요긴한 능력이 생성됐기 때문이었다.

[보상으로 '충분한 경험치' 및 '시스템: 서브 퀘스트 목록 확인'이 주어집니다.]

"…유품이라도 챙겨 갈까."

모든 과정을 마무리 지은 나는 슬슬 다음 일정을 위하여 이동하려다, 불현듯 울분을 머금고 부탁하던 라이트가 떠올라 시신의 품을 뒤져 고이 간직되어 있던 반지 하나를 찾아냈다.

[इरिस्]

중앙에 해석이 불가능한 글자가 새겨진 금반지였다. 반지라면 혼수품일 확률이 높다.

"라이트 씨가 좋아하겠네."

나는 칼날 세척용으로 검대에 걸려 있던 천의 일부를 잘라 내 보자기로 만들어 반지를 감싸 주머니에 넣고 쓱 휘발유를 뿌렸다.

이미 죽은 이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짓이지만, 까마귀밥으로 내어 주기보다는 한 줌 재가 되더라도 정화되는 게 나으리라.

영웅이었으니까.

또.

나도 누군가의 아들이었으며까.

유해를 수습하는 건 일부러 피했다.

좀비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휘말려 사망한 자들만 기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라이트에게만 '가족의 장례를 치를 기회'를 줄 경우 겨우겨우 마음을 다스려 가던 주위 사람들은 심히 배신감을 느끼게 될 터.

그러다 보면 마을 자체가 파국으로 치닫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나올지도 몰랐다.

문자 그대로 최악의 시나리오에 불과했거니와 애초에 폰스 마을이 어찌 되든 나와는 딱히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굳이."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괜한 분란거리는 만들고 싶지 않아 불을 붙였다.

…화르르르르륵!!

* * *

"진짜로 절벽에서 자라나네."

클린트의 화장을 마치고 레캡투스 채집에 나선 나는 하르크의 조언대로 협곡 양측의 절벽을 따라 걷다 바위틈을 뚫고 자란 한 무더기의 꽃과 마주할 수 있었다.

분홍색 꽃잎과 피가 맺힌 것처럼 빨간 열매.

"다 가져와 달랬지."

하르크에게 듣기로 꽃잎은 빻아서 즙을 내고, 열매는 말렸다가 부숴서 가루를 낸다고 했다.

나는 당시를 회상하며 '손때 묻은 단검'으로 뿌리 쪽을 잘라 레캡투스들을 약초 수거용 포대기에 넣었다.

〈서브 퀘스트: 레캡투스 채집〉

* 아콰 남작령 폰스(fons) 마을의 약초꾼 하르크 리만은 벌써 한 달간 이어진 좀비들과의 사투 속에서 젊은이들을 살리기 위해 가진 모든 약제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된 고립 생활로 약재 역시 고갈된 실정.

최후의 보루와 같은 '활력의 샘: 위고르'가 있기는 하나 결코 만능은 아니다.

당장 생사가 불분명한 환자에게는 자연 치유력보단 인공적인 수술이 더 효과적인 법이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레캡투스(recéptus)다. 설령 수술까지 가지 않더라도 찢어지고 갈라진 상처가 흉이 남지 않도록 회복시키는 데에 레캡투스만큼 뛰어난 약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부디 넉넉하게 구해다 주게."

(꽃잎: 87/50~)

(열매: 62/50~)

"90여 개에 60여 개, 이만하면 되겠네."

성인 남성 상체와 비슷하다 싶을 지경으로 푸짐하게 수량을 채운 나는 전완근을 긴장케 하는 묵직한 무게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구를 닿고 포대기를 어깨에 이고 허리를 폈다.

적립형이었던 라이트의 '식량 확보'처럼 제한이 없는 퀘스트라 기왕이면 더욱 꽉꽉 눌러 담고 싶었으나.

난 아직 할 게 많았다.

〈동시 수행 가능한 퀘스트 목록〉

[장소별]

[1. 엘루비에스 협곡: 뒤늦은 안녕(완료)/레캡투스 채집(완료)]

[2. 마을 입구 근처: 목책 보수(완료)/식량 확보(부분 완료)/열 개의 수급(완료)/가보를 찾아 주세요.]

[3. 마을 인근: 아모르의 꽃(완료)/친척의 소식/정찰]

식량 확보야 배제하더라도 '가보를 찾아 주세요.', '친척의 소식', '정찰'까지 도합 세 개나 되는 임무가 날 기다리고 있다.

그에 반해.

[남은 시간: 69시간 24분 12초]

[남은 시간: 69시간 24분 11초]

[남은 시간: 69시간 24분 10초]

[....]

"이틀하고 반."

메인 퀘스트는 채 3일도 남지 않았고.

그러니.

여유가 된다면 '식량 확보' 공적치를 좀 더 쌓기로 하고 마을로 복귀했다.

* * *

"…여깄습니다."

"오오! 고맙구먼, 고마워."

검사소에서 검문 겸 짧은 해후를 나누고 곧장 하르크의 집을 방문해 확보한 약재를 건네주었다.

"이 정도 양이라면 서너 달은 너끈하겠어."

"그렇습니까?"

띠링!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레캡투스 채집〉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적은 경험치' 및 '품질 좋은 약품함'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단순노동 업무였었기에 보상이 대단치는 않았지만, 하르크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걸 보고 있자니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더군다나.

"받게."

"이건...?"

"레캡투스로 조제한 연고를 포함해서 몇 가지를 가져왔네. 더 주고 싶지만, 사정이 이러니 좀 봐주게."

〈품질 좋은 약품함/Normal〉

* 폰스(fons) 마을의 노련한 약초꾼 하르크가 직접 제조한 약품들이다. 좌측에서부터 각각 '상처 연고', '화상 치료', '마비 해제', '해독'에 효험이 있는 약제가 두 개씩 구비되어 있다.

* 후유증 및 재발 발생 확률 50% 감소

비상시엔 무기로도 활용되는 포션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상비약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약 세트도 노멀 등급치곤 훌륭했다.

나는 방긋 웃으며 매끈한 재질의 목함을 품 안에 넣고 싱글벙글한 하르크에게 그간 궁금했던 점에 대해 물었다.

"저 어르신."

"응?"

"몇 가지 여쭤 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가. 내 자네라면 오줌싸개 시절까지 되짚어서라도 답해 주지."

"다름 아니라 저 위고르의 샘 있잖습니까."

"그게 왜?"

"제가 알기로 생명의 샘은 샘지기라는 영물들이 지키고 있는데, 전에 가 보니 여기는 텅 비어 있더군요."

"아아, 그거 말인가."

다행히 하르크는 '촌구석 주민'이라는 출신에 비해 지식이 굉장히 풍부했다.

"영물이라, 그래, 한때는 위고르의 샘에도 영물이 존재했지. 푸른 갈기와 검은 줄무늬가 인상적인 케르콥스였지."

"케르콥스라면."

"으, 이렇게 생긴 녀석이라네."

슥―

스윽―

'원숭이? 아니, 고릴라 계열인가?'

노인이 그려 준 그림을 보아하니 케르콥스라는 짐승의 외관은 전체적으로 고릴라를 닮아 있었다.

틀린 부분이 있다면 꼬리가 다섯 개나 낭창거리고 있다는 점.

'대충 고릴라라고 기억해 두면 되겠지.'

나는 케르콥스라는 짐승의 이름 옆 칸에 '고릴라'라고 적어 넣으며 그 정보를 뇌에 저장했다.

그간 경험해 본 결과.

생환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함인지 멧돼지나 독수리처럼 지구 동물과 외형이 거의 흡사한 동물들은 아이템 창에서 지구 식으로 번역이 되는 부류가 있는 반면, 마땅한 대응점을 찾지 못해 그냥 칼리야스 대륙 식으로 표기되는 동물이 있는데....

물론 칼리야스 대륙인들은 자신들만의 언어로 지칭하지만, 여하튼 이놈은 아무리 봐도 칼리야스 대륙 식으로 표기될―

"하여간에 케르콥스가 지키고 있었으나, 오래전에 사냥했다고 하네."

"예?"

사냥, 당했다고요?

"나도 어린 나이였으니 적어도 70~80년은 됐을 게야. 전전전 촌장, 그러니까 클린트의 할아버님께서 기사로 활동하시던 시절, 아콰 남작령의 영주로부터 마을을 개척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곳저곳을 떠돌다 이곳에 위고르의 샘이 있음을 알게 되셨는데, 그때 사냥했다고 하더군."

아....

옛날 옛적 동화를 이야기하는 듯한 하르크의 대답에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사냥됐다.

여기까지야 마땅히 예측 가능한 범위 내였지만, 문제는 기간, 70년에서 80년이라니… 여차하면 영물 리젠을 노리던 내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공백이었다.

'이건 뭐, 사실상 리젠이 안 된다는 소리잖아?'

허.

이렇게 되면 신체 성장에 한 축을 담당하는 영혼석 수집의 난도가 확 높아진다.

다른 생환자가 선점했을 시.

동일한 지역에서는 향후 100년간은 영물의 이응 자도 나타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어렵구먼, 어려워.'

쓰으읍.

"영물을 궁금해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영혼석을 노리고 있었나 보군. 아쉽게 됐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죠."

나는 하르크의 위로에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는 두 번째 안건으로 주제를 바꿨다.

중요성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마력 전이석에 관한 질문이었다.

"마력 전이석?"

"예."

"알다마다. 내 예전에 영주에게 진상한 적도 있었으니."

"그게 정말입니까?"

"약초를 캐려면 필시 이 산, 저 산 쏘다니기 마련이지. 그러다 간혹 동굴에서 잠을 자기도 하는데, 거기서 발견했네."

"동굴, 동굴...."

"마법사들의 말로는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장소에서 종종 나온다고 하는군. 돌이켜보면 내가 들렀던 동굴도 몹시 으슥하고 후비진 골짜기였지. 마력석을 구한다면 그런 쪽으로 둘러보게. 행운이 따른다면 한두 개쯤은 얻을 수 있을 게야."

"예, 조언 감사합니다."

"조언은 무슨, 아니면 영주성이라도 털게."

"영주성이요?"

"세상이 이리된 마당인데 그쪽이라고 안전할 리가 있나. 웬만하면 지금쯤 주인 없는 돼지우리가 됐을 터. 애당초 본인들이 땀 흘려 번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가서 몇 개쯤 슬쩍 해도 좋겠지. 안 그런가?"

"으흠."

영물에 비하면 마력 전이석은 제법 소득이 컸다.

약간 이상한 쪽으로 결론 난 것 같기는 한데, 아예 무지하던 형편에서 획득처를 두 곳이나 알아냈으니 이쪽은 오히려 난도가 낮아진 셈이라.

"말씀 감사합니다."

"됐네. 궁금한 게 또 있으면 언제든 오게. 자네라면 환영할 테니."

"그러죠. 하면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게!"

"예."

나는 하르크에게 간단히 목례하고 라이트의 집으로 갔다.

서브 퀘스트는 끝났지만, 그에게도 전해 줄 게 있지 않던가.

똑똑―

"누구십니까?"

"저 오휘윤입니다."

"아! 예, 들어오세요."

오후 두 시경.

라이트는 이 더운 날씨에도 검술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는지, 급하게 나오는 양손엔 첫날 보았던 낡은 철검과 수건 대용의 천 자락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복수와 수호.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의지가 엿보이는 모양새였다.

"이걸 드리려 왔습니다. 그러면 이만."

"예? 잠시, 잠시만―"

다만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몰골은 아니었기에, 게다가 아버지의 유품을 전달받고 나면 혼자 있고 싶을 것이기에 나는 얼른 물건만 쥐여 주고 떠났다.

이런 내 뒷모습에 연신 의아해하던 라이트.

얼마 뒤, 누군가의 울먹거리는 외침이 귓가를 스쳤다.

23화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흐느끼는 라이트를 뒤로하고 나는 숙소에 들러 짐 가방을 뒤적거리며 또다시 외유에 나설 채비를 갖췄다.

언제라도 외부에서 고립될 것을 고려해 전투 식량이나 정수 키트부터 소분해 둔 휘발유 등 검대와 자그마한 백팩을 이용해 필수품들을 담고 마지막으로 여태껏 쓴 적은 없지만, 늘 갖고 다니는 '일회용 무기 & 방어구 수리 키트'를 옷 안쪽 주머니에 욱여넣으며 굽혔던 무릎을 폈다.

현재 시각은 대략 두 시에서 두 시 반.

"가보 수거는 딱 봐도 오래 걸릴 것 같으니.... 플로스 마을? 이쪽을 먼저 들러 봐야겠네. 하면서 정찰도 병행하면 되겠고."

저녁쯤을 기점으로 좀비들이 들이닥치니 그 점을 주의해서 활동하다 다녀오자. 그렇게 플랜을 짜고 굽혔던 무릎을 펴던 찰나였다.

―땡땡땡땡땡!!

"벌써?"

예의 비상종이 울린 것은.

태양광이 쨍쨍한 시간대라 못해도 서너 시간은 잠잠할 줄 알았더니만, 그새를 못 참고 방해꾼들이 등장한 듯했다.

쓰읍.

"꼬였네."

어제 보았던 대로 개미 떼처럼 몰려오고 있을 언데드 군대를 상상한 나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놈들을 처리하고 정리 작업에 들어가면 금방 해가 질 터인데, 그 말인즉 금일은 외출이 어렵다는 뜻과 일맥상통했으니까.

노을 이후는 저들의 무대.

"공적치라도 확실하게 쌓아야겠네."

쯧 하고 어깨를 으쓱인 나는 어쩔 수 없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장비만 착용하고서 목책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영 무거웠다.

대규모 전투에서 사용할 목창 역시 이번에 나갔다 오면서 제작해 두려 했던지라 달랑 칼 한 자루로 어떻게 전공을 세워야 하나 걱정이 된 탓이었다. 그 외에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 구울'들'이야! 구울'들'이라고!!

- 꾸, 꿈 아니지? 진짜 현실이지?

- 신이시여! 어찌하여....

- 가서 촌장님을 모셔 와!

"...?"

울부짖음에 가까운 '절규'로 급변하기 전까지는.

* * *

목책.

그 위에 선 나도, 마을 사람들도.... 모두의 낯빛에는 단 한 가지 감정밖에 서려 있지 않았다.

긴장감.

평소의 수십 배를 능가하는 극도로 응축된 긴장감이었다.

이들이 이토록 긴장한 이유는 단순했다.

끄어어어어어어어!!

으어어어어어!!

쿠우웅!

쿵!

천지를 뒤트는 기괴한 메아리를 토해 내며 목책으로 다가오고 있는 주인공들.

바로, 한 자릿수를 훌쩍 초과한 구울 무리 때문이었다.

구별할 방법이라고는 기괴하다 표현해야 할 수준으로 거무튀튀한 피부와 산 자의 영혼을 자극하는 한층 지독해진 살의가 다였지만, 이 순간 우리는 인지력의 고하와는 관계없이 이 자리에 선 전원이 본능적으로 확신했다.

최소 십여 마리 이상의 구울이 마을 좌측에서 수백 단위의 좀비들을 이끌고 진격 중이라는 사실을.

그야말로 '언데드 웨이브(Undead Wave)', 죽은 자들의 파도가 산 자들의 방파제를 덮치려 하는 중이었다.

"허."

구울들이 단체로 출현했다는 외침에 허겁지겁 뛰어온 나는 빠르게 접근하는 검은 물결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목책과 바리케이드.

여기에 17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전력을 다해 합심한다면 과연 저걸 다 막을 수 있을까? 문득 안 좋은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강한 의문이 솟구쳤다.

지난 한 달간,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구울이 포함된 적은 끽해 봐야 서너 차례에 그마저도 한두 마리가 전부였던 습격이었다는데, 오늘은 대관절 무슨 연유로 이리도 폭증한 규모의 습격이 이루어졌는지를.

'…이것도 좀비들이 지속적으로 마을을 공격해 오는 원인과 같은 건가?'

모르겠다.

천천히 연구해 볼 만한 여력도 없었거니와.

"온다! 와! 화살 장전해!!"

"돌!! 돌 더 가져와!"

일단은 눈앞에 전념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모트레코 아저씨!"

지척에 다다른 군세에 사념을 떨쳐 버린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모트레코를 불렀다.

그는 항시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경비대의 대장답게 공포에 잠식될 만한 와중에도 꿋꿋하게 사람들을 지휘하며 전투를 대비하고 있다가 자신을 찾는 내 음성에 연달아 두 가지 표정을 지었다.

첫 번째는 훌륭한 전사가 곁에 있음을 확인한 데에서 오는 안도감이었고.

"아,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두 번째는 경악이었다.

어째서?

내가.

"이럴 시간 없습니다! 길어 봐야 30초 안에 되돌아올 테니 문을 열어 주세요!"

"그럴 순 없네!"

전쟁을 코앞에 둔 지금 꼭꼭 닫아 놔도 모자랄 방벽을 개방해 달라 요청한 까닭이었다.

그러니 방어선을 담당하는 모트레코의 입장에서는 개소리 중의 개소리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고 명확하게 주장했다. 길게 갈 것도 없다.

"30초, 30초면 됩니다."

라고.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본인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는 내 모습에 모트레코도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드디어 무작정 거부하던 손짓을 멈추고 다소 안정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명해 보게. 들어 보고 아니라 판단되면 설령 자네라 하더라도 더 이상의 대화는 없을 거야."

됐다.

잔잔한 호수 위에 떨어진 돌멩이가 일으킨 파문처럼 미약할지언정 분명한 변화에 속으로 주먹을 쥔 나는 긴말 대신 도를 뽑아 들고는.

우우우우우웅!!

보여 주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

파직!

"...!"

일전에도 경험해 봤듯이 때로는 주절주절 떠드는 것보다 한 번 보여 주는 게 더 빠른 법이었다.

모트레코가 도신을 타고 튄 푸른 전류를 무어라 해석했는진 알 수 없으나, 갈등은 그걸로 종결이 났고.

"문을 열어!!"

그의 일갈이 전장을 울렸다.

* * *

"저, 정말 괜찮은 겁니까?"

"빨리, 빨리 문을 닫아야...."

"저… 저! 저기 사람이!!"

촉박한 현장 사정으로 인해 자세한 설명은커녕 모트레코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대문을 열어젖힌 터라, 경악과 당황, 곤혹스러워하는 마음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귓가를 스친다.

특히.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어서 돌아오세요! 어서!"

뒤늦게 합류한 라이트의 처절하기까지 한 대사는 가히 압권이다.

나 참 누가 죽으러 가는 줄 아나.

아마도 내 등에서 마을을 살리려 희생했던 아버지의 최후가 오버랩된 게 아닐까 싶다만. 나는 영웅이 되고프지도 않을뿐더러 영웅이 될 만한 위인도 못 된다.

그저.

끄어어어어어!!

으어어어어어!!

"후."

저 거대한 파도가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도록.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흐아아아아아아!!"

휘우우욱―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칼질 한 번만 하고 튈 예정이었다.

원래.

물 속성은 전기 속성한테 발리는 게 진리였으니까.

그치?

파직―

꽈르르르르르릉!!

끄어어어어억!!

으어어억!!

끄르르륵―

목책 밖으로 걸음을 내딛기 전부터 한 방울도 빠트리지 않고 모조리 긁어모아 회전시켰던 마력이 전방을 짓밟는다.

찰나 간에 푸르렀다가 새하얗게 번쩍인 낙뢰는, 마치 하늘이 내린 천벌과도 같이 지상에 강림해 지정된 공간을 남김없이 불태웠다.

일격.

내가 가진,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전력(電力)을 전력(全力)으로 펼쳐 낸 한 수에 일순간 세상 전체가 조용해졌다.

인간은 물론 언데드마저 침묵했다.

오로지 한 명.

"후아, 후.... 뒈지겠네."

정적의 중심에서 강력한 탈력감에 빠진 나만이 입술을 달싹일 수 있었다.

그만큼 내가 벌인 행위의 여파는 엄청났다.

…만.

"크읍."

정작 나는 진중한 분위기에 안 맞게 휘청거리며 쓰러질 뻔했다.

거짓 한 점 없이 정말로 사력을 다했더니.

섬광(閃光)을 처음 발현하던 그날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거릴 힘조차 없었다. 그런 탓에 젖 먹던 시절까지 소환해 가까스로 다리를 움직인 난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멍한 눈으로 서 있는 이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곧 주춤했던 격류가 재차 닥쳐올 텐데, 다 죽을 일 있나.

"문! 문 닫아요!"

"아, 아아― 칼슨! 크레테! 문을 닫아라!! 다들 뭐 해! 앞에 집중해!"

"휘윤 씨!"

모기가 앵앵거리는 일갈에 정신 차린 모트레코가 서둘러 마을 사람들을 닦달하는 사이 한 인영이 내게 달려왔다.

라이트였다.

그는 내가 제 아버지처럼 떠나가지 않았음에 감사하다는 듯이 눈물을 글썽이더니.

"위험했습니다! 아십니까? 좀비만 수백이에요! 수백!! 거기다가 구울들이 수두룩한데...."

엄마보다도 심한 잔소리를 쏟아 냈다.

이 사람.

굉장히 감성적이고 격정적인 타입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보이시는 대로 멀쩡하지 않습니까?"

"후, 알겠습니다. 제발 다음부턴 그러지 마십시오."

"하라고 해도 안 할 겁니다."

덕분에 병아리 반 유치원생이라도 된 양 신신당부를 하는 라이트에게 새끼손가락이라도 걸어 줄 기색으로 약속을 해 주고 나서야 시달림에서 벗어나길 1분여, 스스로를 추스른 라이트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슬며시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 손에 올렸다.

붉은빛이 감도는 물병이었다.

"이건."

내게도 낯설지 않은 물건.

"들어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신전에서 조제한 물약입니다. 물약은 보통 등급으로 가치를 구분하는데, 이것은 하급 물약입니다."

하급 회복 물약.

이른바 포션이었다.

그런데.

이 귀한 걸 왜 내게 건네는 걸까.

"다시는 못 뵐 것 같았던 아버지와 만나게 해 주신 보답입니다. 거절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아.

게임으로 치자면 시스템 메시지로는 표기되지 않는 서브 퀘스트 '뒤늦은 안녕'의 추가 보상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는 히든 보상이라고 해야 맞겠지.

퀘스트 수행자가 아버지의 유품을 가져왔을 때만 획득할 수 있는. 결코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나는 꼭 받아 달라는 눈치의 라이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싱긋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넝쿨째 굴러들어 온 호박을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챙길 건 빨리 챙기고.

"고맙습니다. 그러면 가실까요?"

"그러죠."

라이트의 도움으로 벌떡 일어난 나는 황급히 목책 계단을 올라갔다.

조금 전.

온 힘을 다한 공격으로 구울만 세 마리에 좀비도 20마리 남짓 바스러졌으나, 그 화려한 전과가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바글바글한 적군이 아까보다 훨씬 살기등등한 기세로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간격은 고작해야 50m.

끄어어어어어어!!

으어어어어!

쿵!

쿠웅!

쿵!

발을 구를 때마다 울려 퍼지는 둔중한 진동이 가슴을 자극한다.

이제는 유일한 광역기이자 비장의 한 수였던 스킬마저 소모된 시점이라 그런가.

꿀꺽―

한층 배가된 불안감에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키며 세게 움켜쥔 도병 위로 양측에서 발산하는 뜨겁고도 시린 기운이 부딪쳤다 사그라든다.

그 직후.

끄어어어어어어!!

으어어어어어!!

"쏴아아아아아!!"

"던져어어어엇!"

전쟁의 함성이 휘몰아쳤다.

24화

활시위를 박찬 화살이 좀비의 미간을 꿰뚫는다.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돌멩이도 중력의 가속도를 이용해 좀비의 대가리를 짓이긴다.

그러나.

누구도 환호하지 않고,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끄어어어어!!

으어어어어!!

타다다다다다다다―

맞혔고, 못 맞혔고 따위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할 틈도 없이 또 다른 상대를 찾아 빈 활대에 화살을 재고, 빈 손아귀에 돌멩이를 들고 던져야 함이었다.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으어어어어!!

"제발!"

휘우우욱―

콰직!

그어억!

"좀―!"

슈우우욱―

콰드드득!

끄아아아아아아!!

"뒈져라!!"

후우우우우웅―

촤아아악!!

쉴 새 없이 찔러 대는 장창.

라이트에게 빌려 온, 본래는 경비대원들이 쓰던 것을 대여한 나는 바깥으로 튕겨 나가지 않도록 밧줄로 허리를 묶고서 팔이 떨어져 나가라 창질을 이어 갔다.

몇 마리를 죽였지?

지급된 창을 세 대나 부러트리고 나서 네 번째 창으로 갈아탄 게 5분 전이었으니, 이만하면 적어도 쉰 마리는 훌쩍 넘겼으리라.

그럼에도 내 입에서는 연신 욕설만 튀어나왔다.

"끝이 없네, 끝이 없어. 썅!"

다른 사람들의 몫까지 합쳐서 족히 일백가량 쓰러트렸을 텐데, 그럼에도 전면은 변함없이 검게 물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대체 어디서 계속 나타나는 건지,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급류가 둑을 끊임없이 두들겨 댔다.

그 유명한 몸통 박치기.

아니.

기존의 몸통 박치기에서 한층 진화한 '단체 몸통 박치기'였다.

끄어어어어어!!

콰아아앙!

쾅!

콰앙!

고통과 두려움을 잊은 놈들의 무지성 돌진에 지진이라도 인 듯 흔들거리는 목책.

보수를 진행하면서 부실했던 지지대를 싹 걷어 내고 튼튼한 목재로 교체한 데다가 지지대 자체의 수량도 배로 늘렸지만, 충격이 급증할수록 흔들림의 정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심지어.

우득―

우드득―

몇몇 개의 지지대에서는 거미줄 같은 균열의 조짐이 보이는 상황.

"목판! 얼른 목판 가져와!"

"여, 여기요!"

"망치랑 못도!"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해서 밑에서도 난리였다.

과거 농기구를 만들었다는 대장장이의 지휘 아래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여자와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쯤의 어린이들 일부가 공구 통 및 수리용 목재를 이리저리 갖고 다니며 약간이라도 갈라지고 깨지면 곧장 수습에 돌입했다.

아차 하다 잘못 내리친 망치질에 손을 찧고, 장갑 없이 나무를 옮기다 가지에 박혀도 아파하지도 못한다.

내가 살고, 남을 살리기 위해 죽음이 코앞에 닥친 대위기 속에서 170여 명의 생존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만.

진정 신(神)이 이곳을 버리기라도 했는지.

끄어어어어어!!

끄아아아앙!!

"또, 온다.... 또 온다고!!"

한 경비대원의 절망 어린 비명처럼.

저 멀리서 새로운 물결이 대지를 감싸며 진군해 오는 중이었다.

* * *

'메인 퀘스트: 보호'.

희망의 불씨가 꺼져 가던 마을을 도와 172명의 대륙인을 구원하라는 5인 협력 퀘스트.

솔직히 합류 이후 3일 차 오전까지는 단독 퀘스트와 별반 차이 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만큼 난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고로.

남은 이틀도 무난하게 흘러가다 마침표를 찍고 보상을 타 먹을 줄로만 알았다.

정유림 등의 생환자들이 내가 매번 독단적으로 굴고 있음에도 딱히 터치하지 않은 것도 그들 또한 비슷하게 상정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랬는데.

"이걸 진짜 깨라고 만든 건가?"

나는 세차게 밀려오는 2차 웨이브를 쳐다보며 허망하게 읊조렸다.

1차 웨이브 때야 스킬도 보유한 데다가 마을 사람들이 죄다 함께한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못 막아."

2차 웨이브를 마주하고 나니 자신감이 완전히 꺾여 버렸다.

다음이 존재한다는 건 그다음도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3차, 4차, 5차....

내가 단순히 과대망상에 빠져 지나친 비약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한데.

만약에라도 다음이 있다면?

"이대로는 안 돼."

묘수를, 이 지옥 같은 악몽에서 깨어날 획기적인 묘수를 강구해야 한다.

휘우우욱!

콰직―

계산을 마친 나는 기계처럼 창을 내리찍으면서 뇌를 터지도록 굴렸다.

* * *

어느덧.

전투가 개시되고 한 시간여.

완전히 혼합된 두 개의 흐름이 거대한 해일로 변모하며 성벽을 때렸지만, 운이 좋게도 아직 사상자 제로가 유지되고 있었다.

치열한 혈투를 치르면서도 부상자 하나 나오지 않은 배경은 순전히 '생명의 샘' 덕택이었다.

"위고르! 위고르 샘물이요!"

"이쪽으로!"

"예!"

활기와 활력을 되찾아 준다 하여 폰스 마을 사람들은 '위고르의 샘'이라 부르는 이 신묘하고 영험한 샘물을 마시고, 뿌리고, 뒤집어쓰면서 겨우겨우 버텨 낸 것이다.

다만.

이런 식의 편법도 슬슬 한계였다.

복용 즉시 효과가 발휘되는 포션이라면 모를까. 10분에 걸친 자연 치유력 및 피로 회복 속도 200% 증가 옵션은 결국 일정한 시간과 휴식을 요구하는 종류였기에 체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벌써 대다수가 탈진한 실정이었다.

어른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나마 이 와중에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우우우우우우웅!!

'됐다!'

샘물 덕에 마력이 평상시보다 빠르게 회복되었다는 점이었다.

파직!

"내 곁에서 멀어져!"

나는 마력이 준비되자 단숨에 풀 차징으로 스킬을 전개했다.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파지지직!

촤아아아아아악!!

거친 기합성을 신호 삼아 주위를 좌우로 물리며 허리춤에 잠들어 있던 환두대도를 도집에서 끄집어냈다.

이윽고 펼쳐지는 종 베기.

정묘한 타기팅은커녕 아무렇게나 휘젓는 어설픈 몸동작이었으나, 일정 상관없었다. 물 반 고기 반, 아니 오로지 고기만 있는 전장.

그물을 휘적거리는 대로 만선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악!!

끄어어어억!

직경 5m에 이르는 범위가 한꺼번에 재가 되어 흩날린다.

잠시나마 생성된 짤막한 공백.

1분?

채 10초도 안 돼 채워질 빈칸이었지만, 나는 단 1초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자 샘물을 벌컥 들이켜며 라이트를 옆으로 끌어당겼다.

"라이트 씨!"

"무슨― 하, 무슨 일이십니까."

헉헉대며 호흡을 몰아쉬는 그.

검을 쥐는 것도 버거운지 낡은 철검을 바닥에 질질 끄는데, 퍽 안쓰러운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 나는 살살 고개를 저으며 용건을 이야기했다.

"아시겠지만, 이대로는 힘듭니다. 도망쳐야 해요."

빙빙 돌려서 말할 재주도 없고, 그럴 여건도 안 되는바.

요점만 콕 집어서.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피신할 곳이 있습니까?"

여길 버리자고.

곰곰이 고민해 봤다. 3차, 4차로 발전될 수도 있는 재앙을 파훼하고 생존할 방안을. 그 결과로 나온 대책은 두 가지였다.

1. 목책이 버텨 주는 동안 마을을 버리고 안전한 곳으로 떠난다.

2. 더 이상의 웨이브는 없으리라는 가정하에 끝까지 싸운다.

둘 중 확률적으로 따졌을 때 더 나은 선택지는 단연 전자 같았다.

방벽의 내구도는 무한하지 않았으니까.

죽자사자로 고치고 고쳐 간신히 형태를 보존하고 있지만, 예상컨대 5차까지 갈 것도 없이 4차 이내에 붕괴될 듯이 불안불안한 단계였다.

더군다나.

간간이 불을 붙여 시체를 태우고 있으나, 사체 한 구가 채 불살라지기도 전에 서너 구가 새로 쌓이기를 반복하며 자연적으로 언데드들 전용 계단이 형성되고 있었다.

길어야 30분이면 동족의 시산을 밟고 선 놈들이 목책도 넘보게 될 거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안전한 지역으로―

"…없습니다. 절벽을 타고 올라가지 않는 한, 제가 알기로 도주로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도 몸소 희생하신 것이지요."

"…음."

초기 입성 당시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다고 느꼈었기에 적당한 탈출 루트가 있지 않을까 싶었더니만, 클린트 퀘스트를 진행해 놓고도 헛된 기대를 품었구나.

"죄송합니다."

"제게 죄송할 건 없죠."

내 눈동자에 실린 기분을 읽었는지 입술을 깨물며 자책하듯 사과하는 라이트.

애써 위로하며 기운을 북돋아 주기 무섭게 몇 초간 허공을 주시하던 그가, 지팡이 대용으로 세워 두었던 철검을 쓱 뽑아 들더니 별안간 목책 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아.

삽시간에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을 근처에서 지켜보던 나는 금세 라이트가 취한 동작의 속내를 이해했다.

희생.

제 아비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도 마을을 살리려 불구덩이 안으로 몸을 내던지려는 모양이었다.

호부무견자(虎父無犬子)라더니.

아버지와 아들이 하는 짓이 똑같았다.

"그러지 마십시오."

나는 라이트의 결심을 깨달은 즉시 손을 내저었다.

안 그래도 낭떠러지에 내몰린 처지에서 촌장이라는 구심점마저 잃어버리면 마을은 사상누각이 되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터.

뭣보다.

이미 마을 사람들의 생기(生氣)가 만천하에 드러난 마당이라 촌장과 몇몇 이들이 짚단을 이고 불에 뛰어드는 각오로 빠져나간다 한들 일부를 제외하곤 신경도 쓰지 않을 터였다.

그러므로 택하려면 차라리 도박 수가 될지라도 2번에 명운을 거는 게 옳다.

하면.

돌고 돌아 '어떻게'다. 탈출극도, 영웅극도 불가능한 고립지에서 남은 2일을 어찌 버틸 것인가.

뭐 고사리손이라도 빌려 봐야지.

"라이트 씨."

"…예?"

스윽―

"포션 남는 거 더 있습니까?"

* * *

혹자는 말했다.

무릇.

모든 일에는 그에 걸맞은 공략법이 있는 거라고. 그게 게임이든 현실이든 이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이에 나는 100% 동감했다.

뭘 가지고?

"…이게 다 몇 병이야?"

"총 열세 병이군요. 등급별로 구분하면 중급이 세 병에 하급이 열 병입니다. 이건 상급이고. 하르크 님께서 갖고 계신 게 많았습니다. 증조부님께서 마을 건축 성공 보상으로 받으셨던 것도 아직 쓰지 않았었고."

여분의 물약이 있느냐는 내 질문에 닥치는 대로 긁어모아 가져온 열세 병의 포션 세트가 그 증거였다.

이 중에 30%나 되는 양이, 무려 네 병(중급 세 병, 하급 한 병)이나 내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게 포인트긴 하다만.

외부인이 끼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약초꾼(하르크, 하급 세 병)에 자경단에 불과한 경비대장(모트레코, 하급 한 병)과 시골 촌장(상급 한 병, 하급 다섯 병) 세 명이 합친 것만으로 이만한 분량이 모였다는 사실부터가 상식선을 한참이나 벗어난 부분이지 않던가?

하필.

언데드 웨이브 시 예정된 스테이지에 포션 습득용 서브 퀘스트가 숨겨져 있는 것도. 이러니 단호하게 외칠 수 있는 거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바야흐로.

"고생고생해서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느낌이라 좀 허탈하기는 한데, 이참에 기부하는 셈 치고 싹 다 털어 보자고."

반격의 시간이었다.

어디 한번 신나게 즐겨 보자고 이 개자식들아.

아마.

춤추지 않고는 못 배길 거다.

눈이 휘둥그레질 미녀도 없고, 순수하게 수동 조작 방식의 중세판 낙후 버전이긴 해도 최근 들어 한창 잘나갔던 워터밤으로 마련했으니 말이야.

뽕!

코르크 마개가 시원하게 솟구쳤다.

25화

와인드업(windup).

킥킹(kicking).

"하아!"

전력으로 피칭(pitching).

근래 재밌게 보던 야구 예능 속 투수들을 떠올리며 어설프되 온 힘을 다해 오른팔을 휘두르자 대각선으로 뻗어 나가는 궤적을 따라 신성력을 품은 장대비가 세상에 쏟아졌다.

포션을 던져 맞히는 대신 범위를 확장하고자 포션 병을 꽉 쥐고 흩뿌리는 방사 형식의 소나기 세례의 위력은 엄청났다.

마치.

지독한 산성비처럼 구울이고 좀비고 가리지 않고 깡그리 녹여 버렸으니까.

"이야."

나는 그 기가 막힌 장관을 관람하며 감탄성을 내뱉었다.

단 3초 만에 내 몸에도 부어 본 적 없는 고귀한 중급 포션 한 병이 증발해 버렸지만, 애초부터 이렇게 쓰라고 내준 거겠구나 하며 마음을 내려놨더니 아쉽거나 아깝기보단 호쾌한 맛이 훨씬 컸다.

역시 비우면 행복하다.

끄어어어어어!!

으으으으으....

"너네도 그런가 봐?"

한 방울.

단 한 방울만으로도 소멸했던 통각을 되살려 주는 기적의 묘약

나는 고통에 아우성치는 언데드들을 비웃듯 이죽거리며 텅텅 빈 병에는 샘물을 받아 달라 주문하고 멀쩡한 중급 포션을 구울들이 뭉쳐 있는 곳 위주로 흩뿌렸다.

후우욱―

촤아아아아아아악!!

먼지와 오물로 까맣게 더러워진 땅을 청소하듯, 또는 가뭄에 말라 가던 화초에 비를 내려 주듯 하급 포션까지 연달아 세 병을 더 던지자 목책에 달라붙어 바글거리던 구울과 좀비들이 싹 자취를 감췄다.

박멸(撲滅).

문자 그대로 박멸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수류탄과도 같은 포션들을 분사하던 나는 순간 의아한 장면을 포착하고 멈칫했다.

그어어어억! 그어어억!

으어어어어!

"…뭐야, 저놈들 왜 저래?"

몇 초 전만 하더라도 맹렬하게 달려들던 놈들이.

"휘윤 씨? 저 좀비들이… 왜 물러나는 거죠?"

"그러게 말입니다?"

라이트의 얼떨떨한 질문처럼, 느닷없이 '후퇴'한 까닭이었다.

오직 전진.

설사 사지가 박살 나고 목이 잘려도 돌격만을 거듭하던 놈들이 귀신이라도 본 양 뒷걸음질을 친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던 기이한 광경에 나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이들도 나란히 멍한 표정으로 전방을 바라봤다.

딱.

그어어어어어억!!

"여, 여기 좀 도와줘!!"

"화살! 화살 더 없어?!"

좌우만 제외하고는.

이상하게도 전면이 텅텅 비어 버린 것과 달리 목책의 양측 끝단은 여전히 사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이었다.

왜?

'어째서지?'

난데없는 기현상에 머리를 굴리던 나는 불현듯 손을, 정확하게는 손바닥에서 찰랑거리고 있는 포션을 응시했다.

"아."

이거였다.

포션이 머금고 있던 신성력, 그게 일대를 적시며 인근을 일종의 '성역(聖域)'으로 탈바꿈시킨 듯싶었다.

언데드들에게 있어서 성역이란 곧 금역(禁域)이자 사지(死地).

"포션에 이런 옵션도 있을 줄이야...."

우연히 특수 기능을 알게 된 나는 반신반의하다가.

"라이트 씨!"

"예, 예?"

라이트에게도 포션 한 병을 건네고 우측으로 가서 투척해 달라 부탁하곤 반대편 좌측으로 뛰어가 팔을 휘저었다.

내가 찾아낸 이론이 맞는지 검증해 보고 싶었다.

촤아아아아악!!

허공을 뒤덮으며 비산하는 빗줄기.

그 직후.

짐작했던 대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동족들을 버려 두고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상당량의 언데드들.

됐다.

처음으로 내 눈이 반짝였다.

* * *

"지, 진짜 쉬어도 되는 거지?"

"촌장님 말씀 못 들었어! 푹 쉬라고 하시잖아! 어후, 말하시고 힘드니까 어서 눕자고."

"하.... 불안한데."

도처에서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다.

끄어어어어어어!!

으으으으으....

으어어어, 으어어어어!

고작 30m도 되지 않는 거리에 수백 개체의 언데드들을 두고 휴식을 명령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애당초.

지휘관이자 명령 당사자인 라이트마저 우려 섞인 눈빛으로 나와 언데드들을 번갈아 보고 있으니까. 하나 나는 여태껏 쌓아 온 신뢰를 바탕으로 과감하게 쉴 것을 권했다.

언데드들이 성역을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걸 손수 확인하지 않았는가. 이 평화가 몇 분이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생겼을 때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더불어 지금부터는 조를 나눠 교대로 교전에 임할 예정이다. 전체가 동원돼도 어렵던 전쟁을 차륜전으로 치르겠단 이야기다.

무슨 수로?

포션을 적절히 활용해 놈들의 공격로를 한쪽으로 유도할 작정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이참에 상급 포션까지 투입해 싸그리 불사르고 싶지만. 항상 최악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혹시나 있을 3차나 4차 웨이브를 고려해 자원을 아끼면서도 체력을 보충할 수 있는 전술을 기용할 심산이다.

"촌장님! 휘윤! 조를 다 나눴네."

"수고했네."

"고생하셨습니다."

"이 정도로 뭘, 그나저나 이자들이 자네와 할 이야기가 있다는군."

"예? 아, 예."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하며 1조에 배정했다는 대화를 끝으로 모트레코의 손짓을 따라 몸을 돌리자 멀뚱히 서 있는 정유림 등이 보였다.

그런데.

왜인지 정유림 등을 대하는 모트레코의 어투가 꽤 쌀쌀맞다.

첫날만 하더라도 '분'이라고 존칭을 썼었는데 반해 '자'로 호칭을 변경한 것도―

'아.'

살짝 비틀린 관계에 의문을 표하던 나는 금방 그 원인을 눈치챘다. 지독한 생존주의자들답게 다들 본인의 '짐'을 지고 있었다. 이게 뜻하는 바야 명확했다.

도주.

내가 눈앞에 닥친 난관을 부딪쳐 깨뜨릴 결심을 했다면, 이들은 늘 그래 왔듯이 퀘스트를 실패하든 말든 일단 제 명줄 보전에 전념하려는 거 같았다.

날 만나려 한 연유도 그것의 연장선상이었다.

"우린 이곳에서 탈출할걸세. 같이 가는 게 어떻겠나? 자네도 봤겠지만, 이건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어."

삐까뻔쩍한 스킬도 갖고 있겠다.

기본적인 무력도 나쁘지 않은 데다 며칠 새 거듭된 외출로 이쪽 지리에도 익숙해졌을 테니 그걸 바탕으로 자기들 길잡이 겸 고기 방패가 돼 달라고.

자발적으로 경계도 서고 하길래 좀 달라졌나 싶었더니만.

오해였네.

"내게도 스킬이 있네. 자네만큼 대단하진 않지만, 가로세로 5m짜리의 이동식 은신처를 만들 수 있지. 튜토리얼 당시에 나뭇가지와 풀잎으로 소형 위장 텐트를 제작한 덕분에 얻은―"

"됐습니다."

"…뭐?"

"됐습니다. 가시려거든 댁들끼리 가시죠."

쯧.

하고 작게 혀를 찬 나는 최창조의 이야기를 중간에 끊으며 한발 물러났다. 합류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피력한 셈이다.

나라고 목숨보다 퀘스트의 성사를 더욱 귀중하게 여기는 건 아니다.

단지.

이제야 돌파구를 발견했는데, 시도도 안 해 보고 도망치고 싶지 않을 따름이었거니와 결정적으로 현재를 감당해야만 미래도 감당할 수 있었다.

"자네―"

"그냥 갑시다. 구해 주겠다는 데에도 거절하는데 뭐 어찌합니까."

"음."

"좀비들이 뭣 때문에 머뭇거리는진 몰라도 저러고 있을 때 빨리 나갑시다. 길 막히면 아무리 스킬이라도 안전 보장 못 한다면서요."

"후.... 그러지."

내 완곡한 거부에 잠깐 당황했던 최창조는 고진수의 재촉에 끝내 한숨을 내쉬며 일행을 이끌고 목책을 넘었고.

위장 텐트가 어쩌고 하던 게 거짓말은 아닌 듯 일순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끄어어어어어!!

"움직인다! 놈들이 움직여!"

"1조! 1조 모여!"

무척이나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 * *

[남은 시간: 21시간 10분 08초]

[남은 시간: 21시간 10분 07초]

[남은 시간: 21시간 10분 06초]

[....]

어느새 4일 차 중반부.

'메인 퀘스트: 보호'의 종료까지 하루 남짓도 안 남은 오후.

그어어어어어!!

끄어어어!!

"어휴, 징하게 온다. 징하게도 와."

우리는 5차 언데드 웨이브를 맞이하고 있었다.

기어이.

3차, 4차를 거쳐 다섯 번째 파도에 이른 것이다. 그로 인해 포션을 포함한 전략 물자는 모조리 동이 난 지 오래.

마을 어귀는 수두룩하게 쌓인 사체들로 썩은 내가 진동했고, 갈색 빛깔을 자랑하던 목책은 핏물과 살점으로 제 색을 잃었다.

이 엿 같은 뫼비우스의 띠에서 우리가 가진 거라고는 최후의 보루인 '상급 회복 물약'과 개인 장비.

"으아아아아!! 이 무스카만도 못한 새끼들아아아!!"

"일어나! 일어나라고!!"

"니 아들내미 죽는 꼴 보고 싶어?! 창 들어!!"

오기를 아득히 초월한 독기였다.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파직―

꽈르르르릉!!

가까스로 모인 마력이 허무하리만치 순식간에 칼날을 타고 흘러 나간다.

나는 전류의 여파가 사그라지지도 않았건만, 얼룩진 환두대도를 후다닥 내려놓고 목창을 치켜들었다.

라이트네 집 문짝을 쪼개 만든 녀석들이다.

좀처럼 밖을 나갈 수가 없어 내 목창도 조달할 겸 목책도 보강할 겸 촌장댁을 필두로 몇몇 목조 건물을 허물었다. 살아남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는 이토록 강렬했다.

그리고 우린.

"죽― 어어? 어어어, 으아아아아!!"

"재, 잭슨!!"

"잭슨!"

최초의 사망자를 마주했다.

아니.

삑!

[(171/172)]

삑!

삑!

삑!

사망자'들'이었다.

* * *

끄어어어어어!!

으어어어!

아, 음.

이번이 몇 번째였더라?

중도에 세는 걸 포기해 버려서 9차인지 10차인지 헷갈린다.

하긴.

몇 번째인 게 뭐가 중요하냐, 우리가 알아야 할 건 하나뿐이다.

[남은 시간: 0시간 59분 59초]

[남은 시간: 0시간 59분 58초]

[남은 시간: 0시간 59분 57초]

[....]

"한 시간, 한 시간 남았다!!"

밤낮으로 매달렸던 메인 퀘스트의 종료 시점이 60분 안쪽으로 진입했다는 것.

이 타이머가 0에 도달했을 때 과연 폰스 마을은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될까.

'퀘스트 완료!'라는 문구가 출력되며 나만 지구로 이동되려나? 아니면 신이라도 강림해서 이 근방 언데드들을 지워 버리려나?

예지력이 없어 미래는 알 수 없지만.

"한 시간이면 된다고!! 다 왔어!!"

나는 희망의 불씨에 입김을 불어 넣으며 사람들을 독려했다.

"그러니까 끝까지 버텨! 먼저 간 녀석들 목숨이 아깝지도 않냐, 이 머저리들아?!"

가족, 친구, 지인들의 죽음으로 슬픔에 젖어 있던 사람들의 감정을 울분으로 뒤바꾸며.

* * *

언데드가 개 같은 가장 큰 이유는 두말할 거 없이 '전염'이다.

"잭슨...!"

그어어어어어!

"이런 썩을!"

콰직!

아차 하는 찰나에 발을 헛디뎌 추락했던 소년, 구울이 찌른 손톱에 옷깃이 걸려 허무하게 끌려간 중년, 팔뚝을 붙잡혀 당겨지던 청년을 구한답시고 스스로를 내준 노인.

장례는 고사하고 추모도 하지 못한 전우를 반나절도 안 돼서 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잔혹한 전염성은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좀먹었다. 하지만 다들 꾹 참고 창칼을 휘둘렀다.

그래야 했다.

"버티자, 버티는 거다!"

마침내.

[남은 시간: 0시간 1분 03초]

[남은 시간: 0시간 1분 02초]

[남은 시간: 0시간 1분 01초]

[....]

최종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있었으니까.

기껏해야 1분.

골인 지점이 코앞인데 여기서 고꾸라지면 진짜 먼저 간 사람들을 두 번 욕보이는 거다.

그러니.

버텨 보자.

"버텨! 버티는 거다!"

이 악물고 버텨 내서.

―뿌우우우우우우우우!!

"...?!"

"휘, 휘윤 씨 이거...."

―뿌우우우우!!

"전군! 앞으로!!"

"와아아아아아아아!!"

[남은 시간: 0시간 0분 0초]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보호〉의 과제를 완료하셨습니다.]

[당신의 활약도를 종합하여 보상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시리던 겨울을 밀어내고 찾아온 따스한 봄을 만끽하자고.

[당신의 성적을 등급화합니다.]

[믿기지 않는 위업 달성!]

[주어진 임무를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완벽하게 해결한 당신의 등급은 'Rank: Hero_Village'입니다.]

26화

[ Rank: Hero ]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라고 하던가?

그 말이 진정 맞다면.

나는, 나아가 지옥을 극복해 낸 라이트와 폰스 마을 사람들 모두를 일류라 칭해야 될 것이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만큼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활짝 미소 짓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리 시답잖은 소리를 중얼거리며 라이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휘윤 씨! 군대입니다! 군대라고요! 창과 성배… 칼리야스 교단입니다! 칼리야스 교단의 성군이에요!"

"살았다! 우린 살았어!!"

"와아아아!"

"이런 결말이었네."

새하얀 깃대에 메여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거리는, 창과 잔이 교차된 그림이 새겨진 깃발.

화아아아아악!

"응? 아."

저게 이 세계의 신(神)을 믿는 교단이란 곳의 상징인가… 하고 감상평을 뇌까리던 찰나, 내 가슴팍에서 빛이 솟구쳤다.

귀환.

이세계 탐험을 마치고 지구로 돌아갈 시간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에헤이."

그 종료 휘슬 소리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기왕이면 어째서 언데드 웨이브가 발생했는지, 그 이전으로 태엽을 돌려 언데드들이 유독 폰스 마을에 몰려든 동기는 무엇이었는지 등등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듣고 싶었는데.

어쩔 수 있나.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지.

"칼리야스 교단이라면 우리 마을― 휘윤… 씨?"

"잘 있으십쇼. 전쟁 다 끝난 거 아니니까 늘 조심하시고."

"휘윤 씨...."

"아콰 남작령 폰스 마을. 나중에 기회 되면 또 봅시다."

시원섭섭한 심정으로 어깨를 으쓱인 나는 방방 뛰다 말고 어리둥절해하는 라이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는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1도 이해 못 한 얼굴이었지만, 우리의 얘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속사정을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대장정의 마침표가 날 기다려주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전날인가 그제인가 숙소에 내팽개쳐 두었던 짐 가방을 가져와 달라 부탁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돈을 퍼부어 마련한 생필품을 두고 갈 뻔했다.

번쩍!

* * *

탁―

블랙 아웃 이후 맞이한 낯익은 풍경이 보였다.

급하게 떠나느라 보일러는커녕 불도 제대로 끄지 못해 전자시계가 22시 52분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근한 자취방.

그래서인가?

집임을 깨닫자 잔뜩 쌓여 있던 긴장감이 싹 풀리며 꾹꾹 눌러 놓았던 피로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는지, 방바닥도 뜨듯하니 확 하고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졸음이 밀려왔다.

띠링!

핸드폰은 아까부터 자길 좀 봐달라고 요란하게 떠드는데, 온몸에는 지난 5일간 이어진 혈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어 이대로 누우면 안 되는 거 잘 아는데....

'아, 모르겠다.'

이미 무거워진 눈꺼풀은 내 세계를 무섭게 짓누르며 어둠을 강요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을 좀 자야―

…쿵!

* * *

짹짹짹―

짹짹―

쨱짹짹―

"아, 음… 아으, 죽겠다."

고막을 찔러 대는 시끄러운 산새들의 지저귐에 강제로 눈이 떠진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으며 도병에 손을 올렸다. 자다 깨면 싸우고, 자다 깨면 싸웠다 보니 일어나자마자 무기를 쥐는 게 습관이 돼 버렸다.

언제, 어디서 끌려갈지 알 수 없으니 생환자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좋은 버릇이었다.

"…집이네. 아흐흐으음."

오전 8시 반.

나는 정면에 보이는 전자시계를 바라보며 방구석이라는 걸 알아차리곤 칼자루를 내려놓고서 다시 드러누웠다.

종일 잠을 잤는데도 피곤함이 가시질 않았고, 근육이란 근육은 싹 다 뭉친 듯 뻐근하다.

오늘은 그냥 이대로 잠이나 퍼질러―

후두두둑!

"…음?"

만사가 귀찮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옆으로 돌아눕던 차에 상반신을 뒤덮고 있던 무언가가 와르르 굴러떨어졌다.

친숙한 스크롤에서부터 한 번도 본 적 없는 푸른색 액체가 출렁거리는 물약에 더해 추가로 이것저것.

아아.

퀘스트 보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흡사 불이라도 난 것처럼 시끌벅쩍했었지.

이게 다 뭔가 싶어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 가던 나는, 잠들기 전까지 빽빽거리며 떠들썩했던 게 떠올라 서둘러 가방 아래에 깔려있던 녀석을 꺼내 화면을 들처 봤다.

그러곤.

"아아?"

순수하게 놀랐다.

그간 접해왔던 양의 몇 배는 될법한 문장들이 스크린 전체에 빼곡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보호〉의 과제를 완료하셨습니다.]

* 생존 인원: 125/172

[당신이 활약도를 종합하여 보상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당신의 성적을 등급화합니다.]

[믿기지 않는 위업 달성!]

[주어진 임무를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완벽하게 해결한 당신의 등급은 'Rank: Hero_Village'입니다.]

개중.

"…영, 웅?"

단연 돋보이는 것은 두말할 거 없이 제일 하단에 쓰여있는 휘황찬란한 글자 'Hero_Village'였다.

직역하자면 마을의 영웅.

임무를 하달받아 놓고도 제 안위를 챙기기 위해 달아나 버린 네 명의 생존주의자들과 다르게 끝까지 남아 마을을 지켜낸 내게, 시스템이 직접 영웅이란 칭호를 붙여줬다는 사실이 창피하면서도 내심 기꺼운 단어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등바등 발버둥 쳤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고 증명받은 것 같아서.

뭐.

"50여 명, 최대한 살린다고 살렸는데도 이렇게나 많이 쓰러졌었나."

조금 안타까운 부분도 없진 않았지만, 애써 긍정적으로 리마인드하며 분위기를 바꿨다. 부정적이고 마이너스한 기분에 매몰되어 봐야 인생에 해롭기만 할 터.

47명의 희생 대신 125명을 살렸음에 집중했다.

난.

충분히 행복을 누려도 되는 놈이었다.

* * *

[축하합니다!]

[〈1인 한정 업적: 작은 역사를 써 내려가는 자〉를 달성했습니다.]

[달성 조건: 최초 'Rank: Hero_Village' 달성]

[보상으로 '많은 경험치' 및 '기술: 위대한 발걸음', '강제 귀환권'이 주어집니다.]

〈위대한 발걸음/Passive〉

* 칼리야스 대륙의 기나긴 역사를 장식한 위대한 존재들과 같은 길을 걷기 시작한 그대에게 세계가 호응합니다. 과연 이 여정의 끝자락에 무엇이 있을지 기대하고 고대하며.

* 개방된 모든 신체 능력 최대치 +9%/정신 및 의지 강화

"와우."

떨리는 손길로 스크롤 바를 내려보자마자 탄성이 흘러 나왔다. 스타트에서부터 대박이 터진 까닭이었다.

올 스탯 +9%라니.

거진 영혼석 수십 개에 해당하는 수치에 입이 떡 벌어졌다.

안 그래도 요번 퀘스트에서는 영물을 사냥하지 못해 그 점이 계속 걸렸는데,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 주는 보상에 자연스레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개방된'이라는 전제 조건이 붙어 있기는 하더라도 이만하면 가히 최상급 스킬이었다.

더군다나.

정신 및 의지 강화…라는 멘탈리티에도 도움이 될만한 옵션도 붙어 있었다. 이게 정확히 얼마만큼의 효과를 선사해 줄런진 확실치 않으나, 없는 것 보다야 백 배 나았다. 경험치 양도 빵빵해서 살짝 주먹을 쥐어 보자 꽈아아악 하고 조여지는 근력으로 보건대 거짓말 약간 보태 맨손으로 벽도 부술 수 있을 듯했고.

그러니 이것만으로도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꿈인가?"

나는 마지막으로 드랍된 두루마리를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강제… 귀환권?"

눈을 의심케 하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제 귀환권 / Magic〉

* 이 보 전진을 위해서라면 때론 일 보를 후퇴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 사용 시 퀘스트 취소 및 강제 귀환

무려 '비상 탈출권'이라는 초유의 아이템이 말이다.

최초의 히어로 랭크 달성 축하 보상, 눈동자 서린 열기가 한층 뜨거워졌다.

* * *

'강제 귀환권'이라는 월척의 등장으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나는 스스로 뺨을 후려치고 나서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등급에 따른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으로 '엄청난 경험치' 및 '방어구 세트 임의 선택권: Magic', '마력 전이석: 중형', , '하급 물약 세트', '영웅의 목걸이',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 퀘스트 진행권', '강제 귀환권'이 주어집니다.]

"아."

그리고 또다시 입을 벌려야 했다.

이쪽도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방어구 세트 임의 선택권/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크롤(scroll). 찢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소재의 내구성이 약해 불 또는 물 등 외부 요인에 의해 손상될 가능성이 있으니 보관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 마법 '방어구 세트 소환'

〈마력 전이석: 중형/Magic〉

* 오랜 시간 자연의 마력이 축적된 광석 중에서도 크기가 꽤 큰 것. 피부에 접촉한 상태로 10초가 흐르면 내부에 깃든 적지 않은 양의 마력을 흡수할 수 있다.

* 마력 전이(마력이 존재하지 않을 시 개방)

〈하급 물약 세트/Magic〉

* 신성력이 가미된 물약이 종류 별로 담겨 있는 목함. 복용 또는 뿌려 흡수시키는 것으로 각 물약 별 효과를 사용할 수 있다.

* 종류 ⊂ 회복 / 해독 / 마비 / 화상 / 동상

〈영웅의 목걸이/Magic〉

* 오직 '영웅(英雄)'이라 불리는 자들만이 착용할 수 있다는 목걸이. 전설이 실제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벼락의 주인: 이그니스(ignis)」, 「물결치는 마도사: 운다(unda)」 등 많은 영웅들에게서 목격되었다고 전해진다.

* 착용 시 지정된 능력 최대치(선택 1, 선택 2) 7% 향상/마법 '귀속' 부여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 퀘스트 진행권/Magic〉

* 특별하고도 특수한 업적을 이룬 당신에게 가장 적합한 보상을 고안하다 주어진 마법 스크롤(scroll). 퀘스트가 발동했을 때 찢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소재의 내구성이 약해 불 또는 물 등 외부 요인에 의해 손상될 가능성이 있으니 보관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 지급된 메인 퀘스트 변경(단, 협력 임무일 시 사용 불가)

"미쳤구나, 미쳤어."

아이템 확인 기능으로 살펴본 각각의 아이템들이 지닌 무지막지한 옵션에 목구멍을 비집고 연신 탄성이 흘러나왔다.

"허."

이건 뭐 당황스럽기까지 해서 말도 잘 안 나온다.

전부 취한다면 못 해도 두세 배 가까이 전력 증강이 예상되는 보상안인 데다가 특히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 퀘스트 진행권', 이 어처구니없는 아이템이 내 멘탈을 뒤흔들었다.

스킬의 위력이 어떠했는지, 범위가 어떠했고 여파가 어떠했는지 똑똑히 봤으니까.

한데.

그 괴물 같은 기술의 두 번째 조각을 획득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진다? 확정적인 습득도 아니고, 위치가 특정되는 것도 아니라서 무조건 얻는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크기는 상관없었다.

나머지야 내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니 그저 1%. 제로나 다름없던 확률이 1%에 불과할지언정 분명하게 높아졌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아아!"

이게 바로 단체 퀘스트를 혼자 클리어한 결과인가? 서브 퀘스트를 일곱 개나 독점한 결과인가?

달다.

너무 달콤해서 이빨이 썩어 버릴 듯한 이 느낌.

"이거네."

그 달달한 꿀물을 들이켜며 난 재차 각오를 다졌다.

누군가 말했다.

본디 기적이란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나, 설령 준비된 자라도 도전하지 않으면 기적은 발현되지 않을지니. 남들이 기피를 하든 말든 적어도 나는 생명이 경각에 달하지 않는 이상 눈앞에 닥친 고난과 난관을 절대로 회피하지 말자고.

이 다짐을 가슴 깊이, 뼈를 넘어 영혼에 진하게 각인시켰다.

27화

머리를 끄덕이며 아이템 정리를 개시한 나는 우선 '마력 전이석: 중형'에 손을 가져다 댔다.

우우우우우웅!

"…이거, 좋은데?"

적지 않은 양의 마력을 흡수할 수 있다… 라고는 표현이 표현이라 일반과 비교해서 성능적으로 갭이 크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몸소 갈무리하고 보니 최대량이 상상 이상으로 늘었다.

대략 두 배?

스킬 횟수로 치환할 경우 무려 섬광 2회 분량이었다.

한 방에 좀비 20~30마리, 구울도 두엇은 쳐 죽인다는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비약적인 성장이었다.

철기 문명에 총 들고 나다니는 격.

무협지 속 무인들마냥 체내를 관조하던 나는 손가락 세 개만치로 두툼해진 마력 양에 흡족한 기색으로 다음 스크롤을 찢었다.

〈100인 한정 업적: 최초의 구울 사냥꾼〉을 달성하던 시절 지급된 보상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방어구 세트 임의 선택권'이었다.

찌이이익!

화르르륵!

['방어구 세트 임의 선택권'을 사용합니다.]

〈방어구 세트 카테고리〉

* 찔러 부수는 모노케로스의 가죽 방어구 세트 ⊂ 근력

* 질긴 라우타우루스의 가죽 방어구 세트 ⊂ 내구력

* 질주하는 말의 가죽 방어구 세트 ⊂ 체력

* 재빠른 표범의 가죽 방어구 세트 ⊂ 속력

* 메가네우라의 가죽 방어구 세트 ⊂ 인지력

"모노케로스…는 검에 박힌 그 녀석인데, 라우타우루스랑 메가네우라, 이놈들은 또 뭐냐. 처음 보는 이름이네."

마법적 작열 반응을 일으키며 산화되는 스크롤에 호응하듯 쫙 펼쳐진 카테고리엔 익숙함과 생소함이 공존했다.

그 점에 잠시 흥미를 가졌던 나는 이내 고민을 거듭하다 두 번째 항목을 클릭했다.

"이걸로 하자."

['질긴 라우타우루스의 가죽 방어구 세트'를 선택하시겠습니까?]

[Y/N]

새카만 무광 흑갑.

'질긴 라우타우루스의 가죽 방어구 세트'였다. 방어구의 핵심은 결국 뭐니뭐니 해도 '방어력'이었으니까.

흔히 최선의 방어는 공격, 안 맞으면 그만 따위의 명언들이 있기는 한데… 내 활동 무대는 한 대만 잘못 맞아도 골로 가는 전장이라 혹시라도 있을 만일의 사고를 대비해 방어구는 내구가 옳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 * *

띠링!

['세트: 질긴 라우타우루스의 가죽 방어구'를 완성했습니다.]

[세트 아이템 효과가 발동됩니다.]

[현재 장비가 유지되는 동안 '모든 물리 공격에 대한 추가 방어력 +15%' 및 '관통 공격에 대한 추가 방어력 +9%', '내구력 +7%'가 지속됩니다.]

[세부 옵션 1: 투구 ⊂ 관통 9% / 상의 ⊂ 관통 11% / 하의 ⊂ 관통 11% / 신발 관통 7% / 장갑 ⊂ 관통 7%]

[세부 옵션 2: 투구 ⊂ 내구력 7% / 상의 ⊂ 내구력 7% / 하의 ⊂ 내구력 7% / 신발 내구력 7% / 장갑 ⊂ 내구력 7%]

* * *

"내구력이 42퍼센트나 올라가서 그런가, 확실히 튼튼하네."

칵―

카각―

새로운 갑옷으로 무장을 끝내고 방호력 상승폭을 체크하려 단검으로 곳곳을 쑤셔 본 나는 기꺼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각 아이템에 박힌 영혼석.

거기다 세트 효과가 더해지니 웬만해서는 흠집도 안 났기 때문이었다. 이만하면 딴 건 몰라도 같은 생환자를 상대로는 능히 백전백승도 어렵지 않을 듯했다.

적에게 이그니스 류의 스킬이 없다는 가정하에서겠지만.

여하튼.

촤륵―

그 뒤로 '영웅의 목걸이'까지 목에 건 나는 투구와 신발만 벗어둔 채로 해제해 두었던 '평범한 가죽 방어구 세트'를 널따란 보자기에 싸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정산이 끝났으니.

"후, 이걸 어느 세월에 다 하냐."

이젠 청소를 해줄 시간이었다

환두대도를 비롯해 초보자용 방어구 구석구석 낀 이물질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쓰지도 않을 물건들인데 굳이… 하는 마음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앞으로 착용하든 안 하든 장비는 늘상 깨끗해야 했다.

그래야 자본이 딸릴 때 척척 팔아 지급을 채우지.

따라서.

귀찮더라도 미리미리 해두는 게 백번 나았다. 내팽개쳐 뒀다가 관리 부실로 품질 떨어지면 나만 손해였다.

* * *

딸깍―

딸깍―

그날 밤.

간만에 포식이나 해볼까 싶어 치킨을 두 마리나 시켜 든든하게 차려 먹고 침대에 드러누워 '아이템 캐리어'에 접속했다.

이세계에 머무르던 5일 새 시세에 변동이 있었는지 알아볼 겸 각종 영상을 검색해 가며 잘 세탁해서 건조 중인 '평범한 가죽 방어구 세트'와 침대 밑에 잠들어 있는 '찔러 부수는 모노케로스의 한손 검'을 판매해 볼까 하여.

"아이템이 제법 풀렸나 보네."

마우스 휠을 굴리며 쭉 훑어본 시장은 천정부지로 치솟던 가격이 약간씩 가라앉는 중이었다.

거품이 죄다 빠진 거 같지는 않고, 아마도 생환자들이 두어 차례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슬슬 물량이 풀리고 있는 게 아닌가 사료됐다.

한국에만 수만 명이라던가?

전 세계로 풀을 넓히면 족히 수천만은 될 거라 개중 1%만 본인들에게 쓸모없는 물건을 내놔도 기본 십만 단위.

아이템 하나하나가 생명과 직결되는 세상이라 실제 시장에 나오는 매물은 훨씬 적겠지만.

"어쨌든 현 추세라면 조만간 확 깎이겠지."

흐으음.

어떡하는 게 맞을까.

프리미엄이 붙어 있을 때 판매를 해야 되려나? 아님, 원래 플랜대로 몇 푼 손해를 보더라도 무력적인 레벨이 더 보강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으려나?

안전과 금액.

가치로 순위를 따지라면 당연히 전자이기는 한데....

"그래. 한 턴 만, 딱 한 턴 만 기다려 보자. 단독 퀘스트로 이그니스 류 2번 조각만 확보해도 수준이 확 높아질 거고, 무엇보다 도주기가 없다. 도주기가."

여긴 지구다.

최근에는 그 위상이 흔들리고 있으나 한때는 '치안'으로 알아주던 대한민국. 자의 건 타의 건 거래 중에 문제가 생겨 실수로 타인을 다치게 하거나 혹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사태는 한순간에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흘러가 버릴 터.

은신이든 급속 기동이든 완벽한 회피기를 갖추기 전엔 눈에 띌 만한 행동은 되도록 자제하자.

나는 그리 읊조리며 아쉬움을 억지로 삼켰고.

띠링!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10초 후 칼리야스 대륙으로의 이동을 시작합니다.]

[본 퀘스트는 다수의 지원자가 동시에 진행합니다.]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 퀘스트 진행권'의 사용이 제한됩니다.]

[남은 시간: 10초]

오래지 않아 빛에 휘감겼다.

번쩍!

* * *

퀘스트 '보호'가 종료되고 대략 사흘 만에 밟게 된 대륙.

스르릉!

척―

폭증한 육체에 적응하느라 진땀을 뻘뻘 흘리며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인망산(寅亡山) 산자락을 뻔질나게 쏘다니던 나는 이세계에서 눈을 뜨는 즉시 환두대도를 치켜세웠다.

마무리 훈련으로 산악 구보를 타고 있던 와중이라 전과 달리 도착과 동시에 깔끔하고 정갈한 자세로 결전 태세를 취한 직후, 옆구리에서 무언가가 치고 들어왔다.

번쩍!

번쩍!

곳곳에 소환되는 다른 생환자들이 발하는 빛무리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어어어어어!"

"으어어어어어!!"

얼추 30마리가량 되는 좀비들이었다.

입장하자마자 교전이라니.

'역시, 스타팅 포인트도 위험 지대였어'

여태껏.

그래 봐야 튜토리얼을 포함해 4회에 지나지 않지만, 아무튼 여태 시작 지점에서부터 전투가 발생한 적은 없었다.

때문에 의례적으로 무기를 쥐긴 해도 자칫 긴장감이 풀어지고 안일해질 수 있었는데, 방심은 절대 금물이라 훈계하는 듯한 현장을 목도한 나는 지금의 상황을 본보기 삼아 늘 조심해야 함을 되새기며 오른 다리로 땅을 박차며 도를 휘둘렀다.

사선 베기.

후우우우우욱―

서걱!

더 없이 훌륭한 일격.

살거죽을 가르고 뼈를 잘라 버리는 일도를 기점으로 단숨에 서너 마리를 썰어 갈 무렵, 주변에서도 싸움이 벌어졌음을 알리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조, 좀비?! 허업!"

"아악!"

"읍―"

"으아아악!"

말투나 음역대로 보건대 남자 한 명에 여자 둘.

마지막은.

'애?'

앳된 목소리의 소년이었다.

중학생? 고등학생?

나이를 정확히 알 순 없으나 혈전을 치르고 생존을 논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꼬마였다. 애당초 남녀노소를 떠나서 이 망할 놈의 퀘스트와 어울릴 만한 사람이 있기나 할까 싶지만.

그나저나....

"음."

일행이 될지도 모를 사람들을 눈여겨보던 나는 금세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남자고, 여자고 하나같이 착용 중인 장비가 매우매우 '부실'했으니까.

생존주의자들의 표본이라 여겼던 장유림 등도 최소 2~3 피스는 맞추고 있었던데 반해, 저들은 많아야 2피스였다.

심지어.

"으아아아아!"

입장 이후 내내 비명을 지르며 쫄랑쫄랑 도망 다니기 바쁜 소년은 석궁과 허리춤의 전통(箭筒, 화살을 담아 두는 통)을 제외하면 상의가 고작이었다.

저 차림새가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

사냥을 거의 하지 않았다.

즉.

정유림 등마저 아득히 초월하는 진정한 생존주의자라는 이야기였다.

"허."

꺠달음과 동시에 입에서 연신 어처구니없단 탄식이 새어 나왔다.

대체 왜 마주치는 생환자마다 생존주의에 찌든 사람들뿐인 걸까.

정유림 등이 생존주의자로 밝혀졌을 당시야 한 번쯤은 그럴 수도 있으리라 넘어갔다만, 연속으로… 아니 더욱 처참한 인간들을 보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답답하고 막막하다.

매번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될까 봐.

설마 정말로 그렇겠냐마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이 떠올라 나는 괜히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핸드폰으로 눈길을 주었다.

미래야 어찌 됐건 일단 이번 퀘스트도 홀로 클리어해야 될 듯했다.

독불장군(獨不將軍), 일인군단(一人軍團)....

위대한 장수들에게나 붙는 그 거창하고 거만한 칭호를 쓰기에 내 실력은 아직 한없이 모자랐으나, 때에 따라서는 짐 덩어리를 안고 싸우는 것보다 단신으로 부딪치는 게 나은 법이었다.

탓―

겪어 봤고 이뤄 봤기에 대지를 박차는 데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다.

* * *

띠링!

[지금부터 〈메인 퀘스트: 저지(1)〉가 시작합니다.]

〈메인 퀘스트: 저지(1)〉

* 좀비가 일백의 생명을 물어뜯고 나면 흡수한 생기를 바탕으로 구울(Ghoul)이 된다. 이는 즉 구울 또한 일정량 이상의 생명을 물어뜯는다면 상위의 개체로 진화됨을 의미한다. 하면 과연 구울의 한계마저 탈피해 버린 언데드는 무엇이 될까?

굳이 알지 않아도 될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보고, 듣고,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대륙 어딘가의 이름 모를 마을을 폐허로 만들며 숙성기에 접어든 세 마리의 구울, 그 굶주린 아귀(餓鬼)들이 '여러 갈래의 길'의 종착지에 닿기 전에 머리를 잘라라.

그것만이.

당신을, 이 일대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 될지니.

(0/3)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다수의 지원자가 동시 진행합니다.

* 특이 사항 2: 본 퀘스트는 '일정 시점의 결과'에 따라 연게 혹은 결말로 이어집니다.

* 남은 시간: 6시간 00분 00초

* 서브 퀘스트 목록 확인 적용자: 서브 퀘스트 목록 열람▼

[미니맵이 활성화됩니다.]

['이름 모를 마을'의 위치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28화

앞길을 가로막는 좀비들을 베어 넘기며 이번 임무 '저지'에 대해 살펴보던 나는 유독 눈에 띄는 한 줄의 문장을 읽으며 약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대륙 어딘가의 이름 모를 마을을 폐허로 만들며 숙성기에 접어든 세 마리의 구울, 그 굶주린 아귀(餓鬼)들이 '여러 갈래의 길'의 종착지에 닿기 전에 머리를 잘라라.]

"이건...."

숙성기와 여러 갈래의 길.

이로 하여금 드디어 '상위 언데드'의 등장이 예고됐으니까.

하.

상위 언데드, 상위 언데드라....

언데드 웨이브(Undead Wave).

구울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그 지옥을 경험한 터라 점진적으로 올라갈 난이도를 고려해 늦어도 다다음 퀘스트 이내에 상위 종이 출현할 수도 있을 거라 짐작은 했다.

그런데. 막상 진짜로 대면하게 될지 모른다고 하니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조여지며 긴장감이 확 솟아올랐다.

물론.

진작부터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여섯 시간 안에 숙성기에 접어든 구울들을 베어 버린다면 우리의 첫 만남은 훨씬 뒤로 밀려날 테니.

단지 걱정될 뿐이었다.

'서브 퀘스트 목록 열람.'

[〈메인 퀘스트: 저지(1)〉의 서브 퀘스트를 열람합니다.]

1. 모성애

2. 터전(잠김) ⊂ '서브 퀘스트: 모성애' 과제 완료 시 개방

* 수행 가능한 서브 퀘스트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두 개.

많진 않았지만, 어쨌든 이걸 먼저 클리어하고 메인 미션으로 넘어가고자 하는 내 계획이 과연 제한 시간 내에 성공할 수 있을는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면 굉장히 타이트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놓칠 수는 없지."

해내야 한다.

반드시.

"S 랭크를, 위하여."

나는 열망 어린 눈빛을 반짝이며 11시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 * *

〈메인 퀘스트: 저지(1)〉의 필드는 '평야'.

그 덕분에 장애물이 거의 없어 전속력으로 질주하던 나는 차츰차츰 변해 가는 주변 지형에 서서히 속력을 줄였다.

정면에 빛 한 점이 겨우 들어올 정도로 빽빽한 수림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가 〈서브 퀘스트: 모성애〉의 무대인가.

"모성애…라."

단순히 명칭만 두고 보면 폰스 마을의 주민들처럼 좀비들을 피하다 막다른 장소에 갇혀 버린 모자(母子) 혹은 모녀(母女)를 구출하는 역할이 아닌가 싶은데.

아.

어쩌면 폐허가 된 마을에 살던 이들이 언데드 대군에 의해 멸망하기 직전에 탈출했다 고립된 걸지도 모르겠다.

그어어어어어어....

으어어....

으으으으....

"...!"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 채 무성하게 자란 수풀을 헤치며 걷던 와중에 언데드 특유의 기괴한 하울링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열 마리, 스무 마리, 서른 마리....

"뭐가 이렇게 많아?"

숲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가파르게 증가하는 숫자에 혹 생존자 마을이라도 근처에 있는 건가 의문을 품은 나는 단단하게 묶어 두었던 가방의 끈을 풀어 옆에 내려놓았다.

각종 생필품과 식량, 식수 등으로 30kg에 다다르던 중량에서 해방돼 한층 가벼워진 몸으로 도병을 꽉 틀어쥐어 언제든 칼을 휘두를 수 있게끔 자세를 잡던 그때.

키에에에에에엑!!

"음?!"

퀘스트의 주인공이 내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날카로운 괴성이 귓가를 두들겼다.

거리는 멀지 않다.

대강 100m 전후.

비명이나 고함 대신 '괴성'이라는 게 살짝 걸리긴 했지만, 꾸물거리다 늦기라도 하면 최악 중의 최악의 결과였기에 좁혔던 보폭을 크게 넓히며 날아올랐다.

파밧―

후우우욱―

작정하고 내디딘 다리가 교차될 때마다 획획 변하는 풍경.

무작정 돌파했다 좀비들에게 둘러싸인다 치더라도 '섬광(閃光)'이 있으니 포위망쯤은 충분히 파훼할 수 있단 계산 하에 매섭게 전진하던 끝에.

"그어어어어!!"

"으어어어!"

"키에에에에엑!!"

쿠우웅!

콰드드득―

나는 마침내 뻥 뚫린 공터 내부에서 최소 두 개 소대급은 될 법한 언데드들과 치고받고 싸우는 커다란 '검은 코뿔소'를 목격할 수 있었다.

"저거...."

보자마자 깨달았다.

"영물이잖아?"

녀석이 '영물(靈物)'의 한 종류라는 것을.

띠링!

['공격받는 중인 영물 모노케로스'를 발견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저지(1)〉에 〈서브 퀘스트: 모성애〉가 추가됩니다.]

〈서브 퀘스트: 모성애〉

* 혹자는 동물을 '본능만으로 살아가는 짐승'이라 주장한다. 틀린 얘기다. 동물이라고 해서 감정이 없는 게 아니다.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울며, 우울하거나 화가 날 때는 말수가 적어지거나 분노를 토해 낸다.

그들도 감정을 느낄 줄 알며, 표출한다.

모성애(母性愛) 역시 마찬가지다.

새끼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 인간과 비교해도 결코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강력할지니.

위기에 빠진 아이를, 아이라도, 아이만큼은 살리기 위해 발버둥 치는 어미 모노케로스(monócĕros)를 도와주십시오.

(0/1)

"미친."

주르륵 출력되는 퀘스트 창을 스캔하던 차에 불쑥 당혹감이 밀려왔다.

모성애라길래.

그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인간'과 관련된 스토리인 줄 알았더니만. 설마 그토록 찾아다녔던 영물을, 성장의 가장 큰 발판이 되어주는 영물을 도우라니.

사냥꾼에게 사냥감을 살려 달라는 아이러니한 부탁에 이걸 수락해야 하나 거절해야 하나 망설이던 찰나.

"그어어어어어!!"

콰득!

기어이 모노케로스의 몸통에 들러붙은 좀비 한 마리가 가죽을 뚫고 이빨을 박아 넣는 게 보였다.

"아."

이를 목도한 순간 나는 분명하게 인지했다.

"끄어어어어어!!"

"키에에에엑!!"

"저 새끼가?"

내가 승낙하든 거부하든 간에 이대로 뒀다가는 좀비 놈들에게 내 먹잇감을 빼앗긴다는 엿 같은 사실을.

이게.

우우우우우우웅!!

"내가 못 먹으면-"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아무도 못 먹는다 이 새끼들아."

휘우우욱―

내가 이 전쟁터에 참전하게 된 이유였다.

콰과과과광!!

"그어어어억―"

"으어억!"

춤을 추듯 휘몰아치는 전류에 쓸려 나가는 언데드들.

패시브 스킬 '위대한 발걸음'은 개방된 모든 스탯을 향상시켜 준다.

그 말인즉슨 이그니스(ignis) 류를 배움으로써 습득한 뇌(雷) 속성에도 증폭이 가해진다는 의미. 나는 한층 강화된 뇌기로 밀집되어 있던 좀비들을 깡그리 지워 버렸다.

놈들은 외곽에서 벌어진 기습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고, 그 여파로 우왕좌왕하는 동안 난 한시도 쉬지 않고 도를 뻗으며 한쪽을 무너뜨렸다.

"흐읍, 하!"

후우우욱―

서걱!

첫 일도에 대가리를 날리고, 허물어지는 육신을 걷어차 우측을 저지하며 빠르게 반대편을 내리긋는다.

피륙을 찢고 뼈와 근육을 끊어내는 도격.

실전을 통해 완성되어 가는 공세에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우수수 나가떨어지는 좀비들 사이로 까만 형체가 훌쩍 뛰쳐나왔다.

"끄어어어어어!!"

피부를 따끔따끔거리게 만드는 살의를 지닌 존재는 여지없이 구울이었다.

"어딜!"

나는 급히 백스탭을 밟으며 간격을 벌리고서 일도양단의 기세로 놈의 상반신을 갈랐다.

힘과 속도 모두 우위에 선 현재.

후우우욱!

"끄어어어어어어―"

서걱―

촤아아아아악!!

구울 한두 마리 따위.

털썩!

데구르르르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단 한 수에 불과했다.

* * *

"으어어어어어!"

서걱!

쿵―

"끝."

어느덧 마지막 좀비의 대가리가 허무하게 추락해 제 동족들의 사체로 쌓아 올린 시체 더미에 부딪친다.

띠링!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모성애〉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적당한 경험치'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그와 동시에 나를 휘감는 빛무리.

스스스스슷―

우우웅!

하나, 나는 경험치를 갈무리하기도 전에 서둘러 몸을 던져야만 했다.

"…키에에에에엑!!"

"아! 기다, 기다려―"

쿵!

쿵!

쿵!

콰아앙!

벌어지고 찢긴 상처로 가득한 전신.

산 자임을 증명하는 시뻘건 선혈과 죽은 자들의 새까만 핏물로 위태롭다 못해 처절하다 싶은 외관의 어미 모노케로스가 날 덮친 탓이었다.

"키에에에엑!!'

"아, 아니, 나는―"

콰앙!

콰아아앙!

녀석은 이미 나를 언데드와 동일하게 간주한 듯 연신 팔을 휘휘 저으며 적의가 없음을 피력하든 말든 뿔을 앞세우며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실상.

틀린 말도 아니다.

영물(靈物).

심마니가 산삼을 쫓듯 내게는 둘도 없는 보물이었기에 정말 솔직하게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비정하고 잔인하더라도 퀘스트를 클리어한 뒤 안면에 철판을 깔고 저 모자인지 모녀인지 모를 모노케로스들을 베어 버릴 각오도 했었다.

…만.

[〈서브 퀘스트: 모성애〉의 대상입니다.]

[〈메인 퀘스트: 저지(1)〉를 진행하는 동안 공격이 불가능합니다.]

문제는 이거였다.

자칫하면 명줄이 끊길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칼을 들이댈 수가 없다는 점.

그러한 연유로 나는 거의 10분여를 넘게 모노케로스의 저돌적인 돌격을 피해 줄곧 도망쳐야 했다.

산 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도 잘만 공터를 헤집고 다니는 녀석.

그 원천에는 후방에 조성된 샘물.

쪼르르르르륵―

영물하면 자연스레 뒤따라오는 샘지기의 영역 '생명의 샘'이 있었다.

"끼에에에엑! 끼에에엑!!"

새끼로 추정되는 짐승 한 마리와 함께.

내가 쉬는 사이에 저걸 마시고 기력을 되찾은―

"아?!"

이 술래잡기를 언제까지 해야 하나 골머리를 썩던 나는 불현듯 새끼를 다시금 쳐다봤다. 현 사태를 타개할 아주 괜찮은 방법이 뇌리를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하압!"

타닷―

휘우우우욱!

"끼에에엑?!"

덥썩!

"해칠 마음 없으니 가만히 좀 있어라."

"키에에에에에에엑!!"

"워워, 네 자식 안 지킬 거야?"

바로 '인질극'이었다.

퀘스트에도 대문짝만하게 나와 있듯이 모노케로스는 모성애가 아주 강한 생물. 제 자식을 붙잡고 있다면 절대 경거망동하지 못하리라 예견했고.

"키에에에엑!"

쿵!

쿠웅!

판단은 옳았다.

산이고 바다고 죄다 밟아 부술 기세로 날뛰던 녀석이 코앞까지 다가와 놓고도 차마 창날 부럽지 않은 세 개의 뿔과 맹수를 닮은 발톱을 끝끝내 들이밀지 못하고 머뭇거렸으니까.

살기를 뿜어 대면서도 씩씩 콧김만 뿜어낸다.

"워이, 워이. 자… 봐라. 아무 짓도 안 한다. 나 착한 사람이야."

나는 그 분노로 얼룩진 열기를 받아넘기며 몸부림치던 새끼를 최대한 안전하게 어미 앞에 내려놓았다.

살포시.

털끝 하나라도 다치면 곱게 죽이진 않을 거라 윽박지르듯 울어 대는 녀석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며.

그 정성이 통했을까?

"끼에에엑!!"

납치범에게서 풀려난 새끼가 허둥지둥 어미에게로 달려가 안겼지만, 어미는 더 이상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됐다.

적대 의사가 없음을 확신한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윗덩어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후, 뭐 이런 괴상한 퀘스트가 다 있냐."

지친다.

광분한 상대를 맞닥뜨리고도 반격은커녕 방어조차 불가능한 임무라니. 꼭 양팔이 묶인 채로 호랑이 우리에 던져진 심정이라.

띠링!

[〈서브 퀘스트: 모성애〉의 과제를 완료함에 따라 〈서브 퀘스트: 터전〉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두 번 다신 하고 싶지 않다고 뇌까리며 이마에 흐르던 땀을 닦아 내던 차에 맑은 종소리를 동반하며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29화

달성 공지 아래로 전개된 건 연계 퀘스트 '터전'의 화면이었다.

터전, 터전이라.

이건 또 어떤 미션이려나.

〈서브 퀘스트: 터전〉

* 당신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모노케로스(monócĕros)들. 하지만 여전히 위험하기는 매한가지 일지니.

이들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주십시오.

(0/1)

뭉친 어깨를 살살 돌리며 흥미롭단 표정을 짓던 나는 금세 얼굴을 굳히고 '난색'을 표했다.

"…집이라도 지어 달라는 건가?"

심히 당황스러운 내용이 적혀 있던 까닭이었다.

[남은 시간: 5시간 12분 11초]

[남은 시간: 5시간 12분 10초]

[남은 시간: 5시간 12분 9초]

일종의 스피드 런 형식인 〈메인 퀘스트: 저지(1)〉.

스타팅 포인트에서 여기까지 도달해 위기에 빠진 모노케로스들을 구출하는 데만 벌써 50분 가까이 소모한지라 안 그래도 촉박한 와중인데 망치와 못을 들라니.

1분 1초가 아쉬운 나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라 슬쩍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걸 어째야 하나."

일반적으로는 거절하는 게 맞을 듯하다만, 이대로 포기하자니 보상이 아깝고. 반면에 그대로 수행하자니 앞으로의 일정에서 맞닥뜨릴 변수들을 감안했을 때 메인 퀘스트의 시간제한이 걸리고.

어느 쪽이든 선뜻 선택하기 어려운 난제에 짙은 한숨을 내쉬던 찰나.

"…그게 되려나?"

고민에 잠겨 있던 내 머릿속으로 문득 한 가지 방안이 스쳐 지나갔다.

편법.

그러니까 말해 꼼수이기는 한데.

"해보자."

곰곰이 가능성을 따져보던 나는 이내 옷을 뒤져 병 하나를 꺼냈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아무리 해봐야 실전에 투입되지 못하면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는바. 오직 실천만이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법이니.

된다, 안 된다.

어차피 확률은 반반이기에 일단 저질러 볼 작정이었다.

뽕!

촤와아아아악!!

그 단호한 의지를 담은 손짓에 따라 찰랑거리던 붉은 빛깔의 액체가 모노케로스들의 주변을 뒤덮는다.

내가 떠올린 생각.

이는 다름 아닌 폰스 마을에서 톡톡히 효과를 보았던, 포션을 이용한 '일시적 성역화(聖域化)'였고.

띠링!

"…아!"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터전〉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적당한 경험치' 및 '펫: 에스콰이어급 군마'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이 기가 막힌 묘수는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 여러 갈래의 길 ]

"이게 먹히네."

더 이상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여차하면 포션 한 병을 손해 볼 결심으로 던졌던 한 수.

그 전략적 노림수가 통했음을 알려 주듯, 요란해진 핸드폰을 바라보며 내 입에서 연신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50 대 50이라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내심 허공에 돈 버리는 꼴이 될까 싶었기에 진심으로 안도한 나는 손바닥 위로 눈을 돌렸다가 동그란 패(牌)의 명칭을 확인하곤 눈을 번뜩였다.

"에스콰이어급 군마… 펫? 펫이라고?."

무기, 방어구, 장신구.

그 밖에 여러 아이템을 보았으나 펫은 처음이었으니까.

〈펫: 에스콰이어급 군마/Magic〉

* 자격을 갖춘 전사에게는 응당 그에 합당한 전마가 필요한 법. 투쟁과 용기의 제국 밀레스(mīles)는 나라와 국민을 수호하기 위해 기사가 되려 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군마의 보급'이다. 혹자는 이 정책으로 인해 국가의 재정이 흔들릴 거라 간언하였으나, 역대 황제들은 이 철칙을 고수하며 국력에 치중했고, 이는 곧 유구한 세월 속에서도 제국을 제국이라는 위치에서 단 한 번도 밀려난 적이 없게끔 든든한 기반이 되어 주었다고 전해진다.

* 마법 '에스콰이어급 군마 소환'

* 특이 사항 1: 주문 '소환/역소환'을 통해 관리 가능

* 특이 사항 2: 일정 수준 이하의 피해 및 질병 시 펫 전용 공간에서 치유 가능

* 특이 사항 3: 심각한 피해 시 '사망'할 수 있으니 주의

"이야, 여기서 펫이 뜨네."

펫(pet)이라니.

예상치 못한 아이템에 신기하단 기색으로 말 형상이 각인된 마패를 이리저리 관찰하던 나는 앞 뒷면을 구경하다 팔을 살짝 뻗으며 나지막하게 주문을 외웠다.

"소환."

승마라곤 고등학생 시절에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서 말을 타봤던 게 전부. 전문적으로는 배워 본 적이 없어서 곧장 타고 다니기는 어렵고.

그냥 어떻게 생겼나 한 번 볼 겸.

우우우우욱―

"푸르르릉."

"아!'

이러한 염원을 담은 목소리에 반응하듯 부지불식간에 번뜩인 빛의 기둥을 가로지르며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한 마리의 말.

군마(軍馬) 혹은 전마(戰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만큼 근육이 꿈틀거리는 갈색 몸체는 보자마자 단단하단 인상을 안겨 주었다.

에스콰이어면 보통 잘 쳐줘야 준기사.

국가관에 따라서는 종자나 아예 기사 지원자쯤으로 치부하기도 했다는데, 밀레스 제국에서의 에스콰이어는 그 신분이 결코 낮지 않았는지 말을 볼 줄 모르는 나로서도 꽤나 훌륭한 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를 제일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이.

"키에에에엑!!"

"끼에엑! 끼엑!"

"푸르르릉!"

"워이, 워이."

성체 모노케로스를 마주하고도 겁을 먹거나 밀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투쟁심.

설사 영물이라 하더라도 주인의 명령만 짓밟아 버리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엿보였다. 생명체의 천적이라 불리는 언데드를 앞에 두고도 이러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하는 거 보니까 꼬랑지 말고 도망치진 않겠네."

"푸르르르르."

나는 기꺼운 눈치로 주억거리며 몸을 홱 돌려 샘터로 향했다. 이래저래 볼일이 끝났으니 떠나기 전에 공병에 샘물만 좀 담아 갈 요량이었다.

샘지기가 버젓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으나, 녀석들도 은혜를 아는지 내가 무얼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역시.

영물이라 지능이 뛰어나서―

"아? 잠시만. 영물…?"

차라리 저런 걸 펫으로 줬다면 어땠을까 하고 중얼거리던 나는 일순간 차오른 이질감에 뒤로 돌아 말과 어미 모노케로스를 나란히 번갈아 봤다.

"푸르르르릉."

"키에에엑."

말과 모노케로스.

아니.

'일반 동물'과 '영물'.

그리고.

"생명의 샘."

별안간 영혼석을 취할 때마다 보았던 칼리야스의 진화 공식이 눈앞에 그려졌다.

[생명의 샘이 지닌 신비로운 힘을 통해 정해진 한계를 이겨 내고 영물(靈物)로 거듭난 샘지기―]

즉.

'일반 동물+생명의 샘=영물'.

그렇다면.

"혹시."

너도?

* * *

띠링!

['펫'이 '생명의 샘'과 접촉했습니다.]

[〈서브 퀘스트: 한계 돌파〉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서브 퀘스트: 한계 돌파〉가 추가됩니다.]

〈서브 퀘스트: 한계 돌파〉

* 본디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어던질 수 없는 평범한 생물에게 '특별한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른바 '한계 돌파의 기회'라고 부르는 기적적인 기회입니다.

그러니.

한번 도전해 보십시오.

평범했던 생물(生物)이 영험한 능력을 지닌 영물(靈物)로 거듭날 수 있도록.

(1/10)

* 특이 사항 1: 각기 다른 열 곳의 '생명의 샘'을 찾아갈 것.

* * *

"각기 다른 열 곳이라. 빡세네, 빡세."

펫을 영물화시킨다.

난데없이 떠오른 아이디어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시도한 것치고 몹시 만족스러운 결과에 난 입으로 부정적인 말들을 읊조리면서도 싱긋 미소를 지으며 홀가분하게 등을 돌렸다.

성공리에 서브 퀘스트를 마쳤으니 슬슬 메인 퀘스트를 진행할 차례였다.

"키에에엑."

"끼에엑! 끼엑!"

그런 내게 잘 가라는 건지 작게 울어 주는 모노케로스들. 나는 녀석들에게 다신 보지 말자는 의미로 손을 휘휘 저어 주었다.

좋게 좋게 마무리된 인연, 기왕이면 끝까지 가져가고 싶었다.

하여튼.

숲에서 빠져나와 몇 분이나 걸었을까.

[남은 시간: 4시간 51분 33초]

[남은 시간: 4시간 51분 32초]

[남은 시간: 4시간 51분 31초]

그새 4자로 접어든 시계를 체크하며 걷던 나는 잘 정비된 도로가 나오는 지점에서 우뚝 서서 전방을 응시했다.

척―

저 멀리 〈메인 퀘스트: 저지(1)〉의 진정한 무대, 폐허가 된 마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어어어어어."

"으으으으."

득실득실하게 모여든 좀비들과 함께.

"어이구야."

당최 몇 마리인지 세기도 힘들었다.

대강....

"백? 적어도 그 이상인가?"

최소 한도로 추산되는 게 100구. 미쳤구나, 미쳤어. 외곽부터 세 자릿수를 넘어가는 스테이지라니. 스타트부터 이러면 마을 안쪽에는 대체 몇 구나 존재한다는 뜻인 거냐.

"아주 징글징글 하구만."

스윽―

단체 퀘스트다운 스케일에 혀를 내두른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환두대도를 쥐었다.

4시간 50분.

언데드로 이루어진 저 인의 장벽을 뚫고 꼭꼭 숨어 있는 타깃들의 목을 치려면 얼른얼른 움직여야 했다.

타닷―

쿵!

"그어어억?"

대지를 박차는 소음에 외곽에 있던 좀비 한 마리가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놈의 궁금증은 영원토록 풀리지 않을 모양이었다.

휘우욱―

서걱!

"하나."

어느샌가 하늘로 치솟은 대가리가 사선으로 갈라진 몸뚱어리에 파묻혀 땅바닥에 처박혀 버렸으니까.

전장에 난입하자마자 어슬렁거리던 좀비를 벤 나는 쉬지 않고 도를 휘둘러 연달아 다섯 구를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사방을 적시는 검붉은 핏물.

"그어억? 그어어어어억!!"

"으어어어어!"

그제야 불청객이 방문했음을 알아차리고 후다닥 몰려드는 좀비들. 삽시간에 오십여 마리가 넘게 뭉쳤으나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되려.

"와라! 와 보라고 이 새끼들아!"

고래고래 괴성을 지르며 놈들의 관심을 끌고자 애를 썼다.

흩어지면 살고.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파직―

"흐읍― 하아아아아!!"

꽈르르르릉!!

뭉치면 죽는 스킬이었으니 말이다.

그러한 일념으로 전면을 시원하게 휩쓸던 직후였다.

"그아아아아아아아!!"

"으어어어어!!"

"그아아아아아아!"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내리그은 칼날을 회수하는데 귓가로 수십 줄기의 괴성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좀비 떼.

물경 수백에 이르는 언데드들이 연거푸 하울링을 터트리며 100여 미터가량 떨어진 폐허 마을에서 뛰쳐나오고 있었다.

"와우."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걸 다 무슨 수로 잡으라는 건지, 당혹스러운 심정을 대변하듯 파르르 떨리는 도신. 아무래도 요번 퀘스트 또한 이곳만의 공략법을 찾아봐야 할 거 같았다.

혼자서도 백만 대군을 상대할 수 있는 공략법을.

가령.

"그어어어어!"

"그래, 일로 와서 팔 좀 물어 봐라."

"그어억!"

콰직―

띠링!

[현재 '중독: 미약한 감염' 상태입니다.]

[빠른 시간 내에 치료하지 않을 시 '상태 이상: 좀비화'가 진행됩니다.]

[좀비화 진행률: 1%]

"그어어억!! 그어어어억!

"아으, 더럽게 아프네."

튜토리얼 당시 유용하게 써먹었던 '좀비화' 작전처럼.

3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