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FANTASIAAPOCALIPTICA / Chapter 2 - 10-20

Chapter 2 - 10-20

10화

썩 좋지 못한 마무리를 짓고 차를 몰아 달려온 곳은 대형 마트였다.

"전투 식량이요? 저기 음식 코너로 가시면...."

"아, 예. 감사합니다."

다시 끌려갔을 때 내게 필요한 모든 물품이 총망라된 장소. 여기서 구매할 건 우선 대체로 휴대 및 조리가 간편한 식료품과 손전등이나 원터치 텐트 같은 야영 필수품이었다.

아.

소금이나 후추 같은 조미료도 약간이나마 구비했다.

일전에 멧돼지를 잡아먹었던 것처럼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해야 할 경우도 있으니, 중량을 늘리지 않는 선에서 가지고 다닐 심산이었다.

그 밖에.

정수용 키트라든가 로프 등 스스로를 조난당한 사람이라 가정하고서 카드를 긁었다.

최대한 성능 좋은 물품을 구입하느라 통장에서 돈이 줄줄 새어 나갔지만, 아끼면 똥 된다는 말을 떠올리며 잊고 살던 10년 만기 적금까지 깬 마당이라 정말 아낌없이 질렀다.

그로 인해 엄청나게 무거워진 배낭.

"으읍, 어후. 대체 몇 킬로야?"

유사시에는 끌어서 운반할 수 있도록 일부러 바퀴 달린 녀석으로 구입했기에, 웨이트 트레이닝하는 셈 치고 어깨에 이다가 힘들면 캐리어 형태로 전환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복귀한 뒤에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뭘 먼저 해야 하나. 흐음.... 역시 일단 구보가 근본인가?"

튜토리얼을 겪으면서 뼈저리게 체감했다.

내 몸이 진짜 쓰레기였다는 걸.

술과 지방으로 채워진 전형적인 배불뚝이 회사원의 망가진 몸뚱이를 고쳐야 한다. 암만 경험치와 영혼석으로 커버한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사실을 인지했기에 오늘부터 빡세게 수련에 돌입했다.

마음 같아선 검도장에 등록해 도법을 배우고 싶었으나.

그게 어디 등록만 하면 가르쳐 주는 클래스던가?

가 봐야 기본기 운운하며 줄넘기나 시킬 터, 따라서 도법 스승은 유튜브에서 구하는 쪽으로 결론지었다.

요즘은 사격도 영상 매체로 배우는 시대.

원한다면 십팔반병기술을 모조리 익힐 수도 있었다.

"가자!"

* * *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아 당도한 이름 없는 산기슭 주차장에 차를 대 놓고 완전 군장 상태로 산을 오르기 시작하고 고작 3분 만에 깨달았다.

"뒈지, 겠네...!"

완전 군장 차림으로 산악 구보를 한다는 게 얼마나 지옥 같은 일인지를.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단 표현이 왜 나왔는지를 알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좀 과하게 오긴 했다.

언제 소환될지 모른다는 점을 고려해 투구를 비롯해 장비를 풀 착용했거니와 각종 생존 용품으로 가득한 배낭도 멨고, 허리춤에는 천으로 가린 환두대도가 걸려 있는 데다가 이런 기괴한 복장이 사람들 눈에 띄었다가 괜한 일에 휘말릴까 봐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으슥한 산골짜기를 훈련 루트로 골랐으니까.

그래서 걷는 내내 헛구역질이 나왔지만. 꾹 누르며 등반을 이어 갔다.

"으으으으아아아!"

단련만이 살길이다.

* * *

쪼르르르르륵―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약수터를 옆에 두고 도를 뽑은 나는 험한 산길을 오르느라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영상에서 봤던 대로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어색하고 어정쩡한 자세 때문에 전체적으로 영 매가리가 없었지만.

"재생력부터 얻길 잘했네."

휘욱!

훅!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이 회복되며 바람 가르는 소리가 제법 매서워지는 중이었다.

S 랭크 보상으로 받은 '많은 경험치'와 '재생하는 도마뱀의 영혼석'이 내 예상치 이상의 자연 치유력을 선물해 준 건가?

몸이 따라 주니 점점 기세가 붙는 칼질.

"하아!"

휘우우우욱―

서걱!

그렇게 거의 한 시간여를 투자하며 주변에 무성하던 나뭇가지들을 죄다 베어 버린 나는 뒤이어 횡 베기, 종 베기, 좌우 대각선 베기를 250회씩 총 1,000번 베기를 수행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 * *

"벌써 저녁이네."

등산 한 번 하고 내려왔더니 어느새 붉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어쩐지.

꼬르르르륵―

심하게 배가 고프더라.

주린 배를 살살 문지르며 운전대를 잡은 나는 프로틴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자취방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

퇴근 시간에 맞물렸는지 차츰 막혀가는 도로 위에 서서 불쑥 기왕 훈련에 매진할 거라면 아예 산자락 근처로 방을 옮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올 때는 몰랐는데.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되돌아가려고 하니 근육이 질러 대는 비명과 누적된 피로감에 차를 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이 깜깜했다.

적어도 몇 달은 이런 생활을 이어갈 텐데.

"...그래, 옮기자. 산 주변이면 사람도 없을 테니 방값도 싸고 구하기도 쉽겠지."

거듭 생각할수록 이사하는 게 맞다는 판단을 내린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알아보기로 정하고 빨간불에 맞춰 브레이크를 밟아 가던 참이었다.

- 속보입니다.

- 최근 2~3일 전후로 실종되었던 사람들이 새하얀 빛과 함께....

"응?"

무심코 창밖을 쳐다보다 빌딩 높이 걸린 대형 스크린에서 송출 중인 뉴스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장 차림의 기자가 읊는 내용이 매우 매우 낯익었으니까.

- 먼저 이것을 보시죠.

- 화아아아악!

- 쿵!

- 꺄아아악! 뭐, 뭐야 지금?

- 야, 봤어? 막막 빛이 번쩍거리더니 사람이 튀어나왔어! 사람이!!

- 이거 꿈 아니지?

- 근데 저건 뭐냐. 창 아니야?

- 창?

- 이처럼.

- 난데없는 발광 현상이 일고 그 속에서 나타난 24세 정 모 씨는 해당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으로, 사흘 전 출근 기록을 끝으로 사라져 카페 사장 김 모 씨의 실종 신고에 의해 수사 중인 상황이었습니다.

"...."

CCTV에 녹화된 것으로 보이는 짤막한 영상과 이를 토대로 문장 마디마디에 악센트를 주는 기자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모든 지원자.

거기서 나 말고도 또 다른 생환자가 있으리라 짐작은 했었다만, 막상 현실이 되니 굉장히 놀라웠다.

빠아앙!

빠앙!

"아."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클랙슨 소음이 아니었다면 한동안 멍하니 있었을 정도로. 후다닥 액셀을 밟은 나는 갓길에 차를 대고 핸드폰으로 기사를 검색해 봤다.

대형 뉴스 기사부터 종말론자들이 활동하는 인터넷 커뮤니티까지.

3일 전 발생한 대규모 실종과 어제를 기점으로 실시된 송환에 온 세상이 떠들썩했다.

보통 영화에서 보면 이럴 때 엠바고(embargo)니 뭐니 하며 국가가 나서서 정보 통제 같은 걸 하던데, 그런 건 전혀 없었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정보 통제가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SNS.

매일 수십억 명이 이용하는 온라인상의 무지막지한 데이터를 무슨 수로 관리한단 말인가? 지구 전역에 EMP라도 떨어진다면 모를까.

그나저나.

"아주 자세히도 써 놨네."

웹 서핑을 하며 커뮤니티를 들여다보던 나는 누군가 퍼 나른, '눈 떠 보니 숲 한가운데.... 그러다 좀비와 싸워 간신히 생환했다.'라고 적힌 글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틀 간의 과정은 아무리 봐도 정신병 안 걸리면 다행인 끔찍한 기억.

한데도 이리 꿋꿋하게 그날의 감정을 비롯해 모든 장면을 세세히 기술해 놓은 걸 보면 글쓴이의 멘탈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혹은.

이렇게라도 속내를 털어놔야 풀렸던 거려나.

"뭐든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네."

[SNskqi1222: 망상도 이쯤 되면 병이야.]

[배고파고배고파고배: 이거 너무 올드한 어그로 아니냐. 좀 더 심도 있게 고민해 와라.]

[Qooow;axx: 믿는 척이라도 좀 해 줘라. 나름 열심히 썼는데.]

[....]

반응이 썩 별로였으니 말이다.

빛에 휘감겨 사라졌다 빛을 뿌리며 출현한 사람들.

이걸로도 모자라 획득한 아이템을 근거로 설파한 주장이었지만, 원래 본인이 직접 목격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더군다나 가짜 뉴스가 판치는 현대 사회라 신뢰도가 쌓이려면 한참은 지나야 할 거다.

다만.

"정부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네."

개개인과 달리 정부에서는 생환자들의 이야기를 좀 더 심도 있게 다룰 수도 있겠다 싶었다.

조사 몇 번이면 진실 여부 따윈 금방 알아챌 테니.

"…가능하면 숨기는 게 좋겠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념을 지속하던 나는 그 끝에서 '웬만하면 감추자'란 결과를 도출해 냈다.

이래저래 귀찮은 일이 생길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귀찮기만 하면 상관없겠지만, 거기서 빼앗기는 시간이 문제였다.

시간은 곧 수련, 수련은 곧 생존.

살아남기 위해 이사도 고려하는 마당에 살아남기도 바쁜 나로서는 그런 데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 * *

"…해서 수압도 괜찮고, 뷰도 괜찮네요. 계약하시죠."

"아! 잘 생각하셨습니다. 사장님."

귀환 후 나흘 차.

인적이 드물면서도 산세가 험하되 방은 괜찮아야 한단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며 집을 구하던 나는 마침내 월세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현관에서 100m만 걸어도 다다를 수 있는 '인망산(寅亡山)' 기슭에 위치한 원룸으로.

과거엔 호랑이가 살며 거니는 사람을 족족 물어 죽여서, 현대에 들어서는 버섯이나 꿀 등 쓸 만한 채집 거리가 하나도 없어 아무도 찾지 않는 험산이라 딱 적당하단 판단이 섰다.

방도 뭐.

작년에 리모델링을 해 놔서 물도 잘 나오고 전기도 잘 터지는 게 남자 혼자 살기엔 충분했다.

"입주는 언제 할 수 있습니까?"

"청소만 하면 되는 거라 2~3일 내로 들어오셔도 좋습니다."

"옙. 알겠습니다."

집주인과 원만하게 대화를 마친 나는 사흘 뒤에 짐을 싸 들고 새집에 발을 들였다.

…만.

아쉽게도 짜장면은 먹지 못했다.

"네네, 간짜장 하나랑 탕수육 작은 거, 아! 혹시 짬뽕 국물도―"

띠링!

[지원 요청 들어왔습니다.]

[10초 후 칼리야스 대륙으로의 이동을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10초]

"...!"

듣기 싫은 맑은 종소리를 동반한 빛이 날 부른 탓이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퀘스트의 발발이었다.

"아아, 죄송합니다!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뚝!

황급히 전화를 끊고 신발장으로 달렸다.

그곳에는.

빵빵하게 꾸려진 배낭과 매끈한 도집, 평범한 가죽 투구와 신발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남은 시간: 0초]

―번쩍!

* * *

"아!"

한순간에 깜깜해졌다 환해지는 시야.

나는 시력을 되찾자마자.

스르릉!

손을 묶던 짐들을 싹 다 내던지며 맨발 차림으로 환두대도부터 뽑았다.

갑옷이건 매직 등급 무기건 시각을 잃은 몸으로는 좀비 한 마리만으로도 재앙에 가까웠으니까.

"…없나."

후.

긴장감에 달궈진 눈빛을 반짝이며 빠르게 스캔한 공간은 운이 따랐는지 심히 조용했다.

그럼에도 5분여를 더 경계하던 나는 확실히 적이 없음을 체크하고서야 막혔던 숨을 토하며 얼른 투구를 쓰고 신발을 신었다.

띠링!

['세트: 평범한 가죽 방어구'를 완성했습니다.]

[구성: 평범한 가죽 투구, 평범한 가죽 흉갑, 평범한 가죽 바지, 평범한 가죽 장갑, 평범한 가죽 신발]

[세트 아이템 효과가 발동됩니다.]

[현재 장비가 유지되는 동안 '모든 물리 공격에 대한 추가 방어력 +5%'가 지속됩니다.]

갑주 위로 걸쳤던 옷가지를 벗을 즈음 들리는 세트 효과 알림음.

그 뒤에는.

띠링!

[지금부터 〈메인 퀘스트: 섬멸〉이 시작합니다.]

〈메인 퀘스트: 섬멸〉

* 칼리야스 대륙 밀레스 제국 실롸 자작령 내에 위치한 사냥꾼들의 숲 '베나토르(venátor)'. 이제는 죽음의 숲이 되어 버린 이곳을 떠도는 좀비들을 모두 처치하라.

(0/33)

내가 해야 할 임무도 함께 있었다.

11화

[ 내가 해야 할 일 ]

"…이곳을 떠도는 좀비들을 모두 처치하라, 숫자는 서른세 마리."

무심코 별로 없네라고 중얼거리던 나는.

"…뭐라는 거야, 이 미친 새끼가."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스스로에게 육두문자를 한 바가지나 퍼부었다.

아무래도 '튜토리얼: 생존 일지 (6)'에서 구울을 포함해 백 마리의 좀비를 상대했다 보니 승리의 뽕 맛에 취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거 같다.

당시에 내가 그만한 활약을 펼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생명의 샘'이라는 기적의 버프가 받쳐 줬기 때문이었다. 만약 맨몸으로 버티고 승리해야 했다면 생존 일지 (6)은커녕 꼴랑 생존 일지 (3)에서 좀비가 되어 이승을 하직했을 거였다.

"오휘윤, 이 병신 같은 놈아. 뒈지기 싫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자."

짝!

나는 느슨해진 나사를 팽팽하게 조이기 위하여 투구를 살짝 들고 뺨따귀를 세게 후려쳤다.

"쓰읍, 아오. 더럽게 아프네."

빨갛게 달아오른 볼이 얼얼한 만큼 지금의 다짐도 강렬하게 새겨지도록.

고개를 휘휘 저으며 꺼져 가던 전의의 불씨를 되살린 나는 환도대도를 꽉 틀어쥐며 주위를 쓱 훑었다.

7일간의 고행에서 휴식을 가질 때마다 '퀘스트에 끌려갔을 때 필요한 물건'과 더불어 '퀘스트에 끌려갔을 때 반드시 행해야 할 행동'에 관해서도 심도 있게 고심했었다.

그 결과로 대략 세 가지의 큰 줄거리를 잡게 되었는데.

"있으려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개중 1번 수칙은 단연 '생명의 샘 확보'였다.

본격적인 정규 콘텐츠…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적응하기 쉽게끔 난도도 낮고 여러 가지 편의 시설이 갖춰진 튜토리얼이 아닌 메인 퀘스트였기에 확률적으로 '생명의 샘' 같은 안전장치는 없을 공산이 크다.

하나.

이 세상 어디에도 100%라는 건 없으니, 생사의 위기 속에서 구명줄이 될 수도 있는 '생명의 샘 확보'가 일차적으로 선행돼야 했다.

휘우우우욱―

사각!

"오케이, 표식은 됐고. 음… 동쪽부터 수색해 볼까."

전투 시 바로바로 내려놓을 수 있게 쭉 잡아 뺀 가방 손잡이를 붙잡은 나는 계획대로 수풀을 헤치며 발을 내디뎠다.

* * *

그어어어어어.

으어어어, 으어어어.

'셋, 넷, 다섯.... 다섯 마리. 여기서 처리하고 가자.'

나무가 우거진 숲.

스타팅 포인트부터 길을 잃거나 헤매지 않으려 5~10m에 한 번씩 마킹을 해 두며 걷길 5분여 즈음 좌측에서 좀비 특유의 하울링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살포시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던 나는 수가 많지 않음을 확인하고서 전투를 준비했다.

단순히 청각을 통한 감지라.

숫자도 숫자거니와 그 안에 구울이 끼어 있을지도 모르는 터라 신중을 기하며 이동하길 20m.

그어어어어!

으어어.

두꺼운 아름드리나무 뒤편으로 어슬렁거리던 좀비들을 목도할 수 있었다.

숫자는 오차 없이 다섯 마리.

구울은… 없는 듯하다.

좀비와 구울, 외견상으로는 거의 흡사하지만, 기본적으로 내뿜는 기세에서 차이가 난다. 이를테면, 맹견(猛犬)과 맹수(猛獸) 간의 좁히기 어려운 간극이랄까?

목숨을 걸고 부딪치며 몸소 깨달은 구분법이었다.

'쓰읍, 하아!'

―타앗!

단박에 베어 버리겠단 각오로 굽혔던 무릎을 펴며 대지를 박차고 뛰어오른 나는 거침없이 환두대도를 휘둘렀다.

휘욱!

매섭게 뻗어 나가는 칼날.

이윽고.

―서걱!

날카로운 단말마를 일으키며 무언가가 잘려 나갔다.

툭.

당연하게도 좀비의 머리통이었다.

기습을 시도하고 목표를 제거하기까지 단 3초.

"하아!"

나는 피딱지가 굳어 흉물스러운 대가리를 걷어차며 다음 좀비를 노렸다.

우렁찬 기합을 바탕으로 내지르는 공격.

터져 나오는 파육음을 통해 동료가 습격당했음을 깨닫고 옆을 쳐다보던 놈의 왼쪽 상반신을 가르고, 쏟아지는 핏물과 내장을 피해 백 스텝을 밟았다 튀어 나가 세 번째 좀비의 허리를 동강 냈다.

척추를 부수고 상체와 하체를 분리하는 칼끝.

그어어억! 그어어어어억!!

으어어어어!

앞다투어 달려오는 남은 두 마리를 힐끔 쳐다본 나는 땅바닥에 떨어진 채로 팔을 허우적거리며 기어 대는 좀비를 무시하고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다.

한 끗만 다쳐도 패배하는 전장.

무리하게 죽이기보다는 무사고 사냥을 택했다.

그어어어억!

휘이이이익―

"어딜!"

서너 보 빠르게 물러나 거무튀튀한 양팔을 허공으로 흘려보내며 발끝을 세운 오른발을 지지대 삼아 좌하단에서 우상단으로 대각선의 궤적을 그리는 도신.

유려하게 그어 낸 1획에 또 하나의 적이 쓰러졌다.

으어어어어억!!

"너 혼자 남았네?"

서걱!

* * *

풀썩―

"후, 이걸로―"

[(12/33)]

"열셋."

처음 다섯 마리 이후에도 차근차근하게 좀비들을 처리하며 전진하기를 어언 한 시간.

슬슬 해가 중천으로 향해 가던 시각.

"음?"

허벅지 언저리까지 자란 이름 모를 들풀을 밟으며 계속해서 동쪽으로 나아가던 나는 번개라도 맞았는지 삐쩍 말라 죽은 나무 근처에서 무척 재미난 걸 포착했다.

다름 아닌.

[→]

"…표지판?"

마치 '튜토리얼: 생존 일지 (3)'에서 지도를 보고 멧돼지의 영역을 찾아가던 시점에 마주했던 빨간색 화살표와 비슷한 외형의 '나무 표지판'이었다.

조금 썩어 있기는 해도 아직은 꿋꿋하게 서서 어딘가를 가리키는.

관리가 잘 안됐나.

중앙에는 지워지고 깨져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이런 데 왜 표지판이.... 아, 그러고 보니 퀘스트에서 여길 사냥꾼들의 숲이라고 했었지?"

잠시 의아한 기색으로 표지판을 두들겨 보던 나는 금세 이유를 납득했다. 인간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곳이니 사람의 흔적이 없는 게 더 이상하지.

하면.

저건 어딜, 또 무얼 알리려 설치해 둔 걸까.

"흐음, 가 봐?"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하던 나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녹빛이 무성한 초목의 안쪽을 바라봤다.

이거.

"일단 가 보자."

들려 봐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반드시 행해야 할 행동 수칙 2번.

될 수 있다면 '여섯 가지 비밀이 담긴 쪽지'를 획득하던 그때처럼, 꼭꼭 감춰져 있는 히든 트리거를 발견해 내 정해진 보상 외의 특별 보상을 받아 두기.

왠지.

육감 레이더가 찌릿찌릿하게 뇌리를 울리고 있었다.

* * *

"…저기도 있네."

표지판의 방향을 따라 한참을 걷던 내 앞에 새로운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

400~500m가량의 일정한 간격으로 꽂혀 있는 표지판들의 종점에는 무엇이 있을까? 예측을 해 보자면 몇 가지가 있다.

1. 생명의 샘.

몹시 개인적인 희망을 담은 추정이다만, 마냥 헛소리는 아니리라.

이 세계에는 지원자들의 적응을 돕기 위함인지는 몰라도 지구에서나 볼 법한 짐승들이 모체가 되는 영물(靈物)이 존재한다.

그런 영물들과, 또는 영물은 못 될지언정 위협적인 이빨과 발톱을 지닌 맹수들과 매일같이 겨루며 돈을 버는 사냥꾼들에게 있어서 '생명의 샘'보다 중요한 게 있을까.

누가 봐도 귀하디귀한 포션을 퍼마시고 다닐 리는 없으니 간격을 맞춰 표지판을 설치하는 등 철저한 관리의 중심에는 '생명의 샘'이 있을 법도 했기에 본래의 목적과 다르게 길을 튼 것이다.

"…라는 게 희망 사항이긴 한데, 역시 확률이 높은 쪽은 산장이겠지."

사냥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숲에서 하루 이틀 야영을 하기도 한다. 그럴 때 다소 위험한 비박 대신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두는 게 산장이다.

고로.

아마 그곳의 위치를 알려 주는 거구나 싶었다.

그마저도 아니라면 앞서 떠올린 대로 히든 트리거의 발원지일 가능성이었고.

"기왕이면 1번이길 바라지만 말이지."

쩝.

가슴 깊숙이 자리한 희망의 불꽃에 기대감이란 장작을 넣으며 아직 모른다는 일념으로 막 다섯 번째 표지판에 도달한 직후였다.

1, 2, 3.

추리한 것 중에 정답이 있으려나 궁금하던 내 눈앞에 보인 커다란 형체는.

"이야."

절로 감탄이 나오게 하는 2층짜리 목조 건물이었다.

* * *

끼이이이이익!

"귀신이라도 나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마지막으로 사람이 머물렀던 게 언제인지.

기름칠은 고사하고 손잡이가 반쯤 박살 난 현관을 열자 거슬리는 소음이 고막을 때린다. 내부는 군데군데 구멍 난 틈 사이로 스며 들어오는 햇살을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했는데.

좀비가 숨어 있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

…그어어어어어!!

쿵쿵쿵쿵!

"진짜로 있었네."

전후좌우.

사방을 꼼꼼하게 경계하던 나는 시끄럽게 울려 퍼졌던 문 여는 소리를 듣고 2층에서 달려 내려오는 좀비를 향해 일격을 가했다.

서걱....

촤아아악!

걸치고 있던 해진 가죽 갑옷째로 찢어발기는 참격에 맥 없이 쓰러지는 좀비 뒤로.

―타다닷!

화아악!

"...!"

자그마한 덩어리가 나를 덮쳤다.

퍽!

다급히 팔뚝으로 얼굴을 가리기 무섭게 묵직한 무게감을 선사하며 부딪치는 그것의 정체는.

아으어으아아아아.

목덜미가 반쯤 뜯겨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러 대는 꼬마 아이.

덜 나가는 체중으로 어른의 포효에 편승해 발소리를 죽이고, 작은 체구로 몸을 가리며, 성대를 잃었으나 그 덕에 좀비 특유의 단점이 사라진 암살 특화형 좀비였다.

"미친!"

상상조차 하지 못한 적의 등장에 나는 욕지거리를 지껄이며 도병으로 놈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빠아악!

목이 잘리지 않는 한 대미지는 입지 않지만, 그게 충격 그 자체가 소멸한다는 뜻은 아니다.

아으으으어어어!

쿵―

전력을 다한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좀비.

놈이 재차 일어나기도 전에 돌진해 이마에 도를 꽂아 넣었다.

"하아아아!"

후우우우우욱―

콰직!

두개골을 뚫고 뇌를 짓이기며 나무 바닥에 박히는 칼날.

아, 으어, 아으으으으....

툭―

"젠장."

최후에 최후까지도 손을 팔을 휘휘거리다 늘어지는 좀비의 모습에 인상을 찡그린 나는 도를 회수하며 왼팔을 살펴봤다.

하도 당황해서 안면부터 보호한답시고 가드를 하느라 그대로 내줬던 손목 언저리.

천만다행으로 옷깃이 뜯어지기만 했지 상처는 없었다.

"후."

아찔했다.

혹.

저게 구울이었다면, 그 윗줄의 상위 언데드였다면 이렇게 무사할 수 있었을까?

장담하건대....

살점이 뜯기고 선혈이 낭자한 몰골로 좀비가 되었을 거다.

"긴장 풀면 안 된다고 그렇게 다짐해 놓고 이게 무슨 꼴이냐."

물론 참작할 부분이 있기는 하다.

저런 우연이 겹친 괴물 따위 상정해 본 적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변명은 변명일 뿐.

"주의 좀 하자."

핑계 대기는 그만두고 이를 악물었다.

* * *

"1층은 뭐가 없네."

걸리적거리는 두 구의 사체를 밖에 치우고 찬찬히 수색해 본 1층은 건질 게 딱히 없어 2층으로 올라갔다.

이 소란에도 남은 좀비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다시는 안일해지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순간을 되새기며 조심스럽게 발을 댄 2층.

1층이 거실 및 주방이라면, 2층은 침실인 듯 여러 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좀비는… 없고, 루팅할 만한 것도 없나? 설마 아무것― 응?"

가지런히 정리된 침상 말고는 휑해도 너무 휑한 광경을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리던 내 눈길이 한쪽에서 우뚝 멈췄다.

가져온 활이나 창을 진열해 두는 거치대 옆에 구비된 책상.

그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책'으로.

띠링!

['마지막 사냥꾼의 일지'를 발견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섬멸〉에 〈서브 퀘스트: 사냥꾼의 절규〉가 추가됩니다.]

"아!"

만나기를 간절히 고대했던 히든 트리거였다.

12화

"처절함이 담긴 사냥꾼의 일지, 죽기 전에 쓴 일기인가."

띠링, 띠링.

요란한 핸드폰을 꺼내며 책상으로 다가가 책을 집어 들었다. 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지 전체적으로 낡고 삭아 바래진 외관.

게다가.

쓰면서 각혈이라도 했나, 여기저기가 핏물로 불그스름하게 변색돼 있어 꼭 저주받은 금서(禁書)처럼 보인다.

이에 혹여라도 책자가 바스러질까 봐 최대한 살포시 첫 장을 넘기던 나는 이내 아주 흥미롭단 표정을 지었다.

[शिकार पत्रिका: उदयमानसूर्यस्य चन्द्रमा]

* हंसः मम पुत्रं दष्टवान्....

"이게 뭔 말이냐."

하나도, 단 한 글자도 해독할 수 없었으니까.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기괴한 문자.

이따금 만화나 소설을 보다 보면 차원 이동을 겪은 사람들에게 그 세계의 언어를 해석하고 구사하는 능력이 패시브 스킬로 주어지곤 하던데.

역시 인생은 냉정했다.

"음, 이런 식이면 대화도 불가능하려나?"

애초에 좀비 말고 뭐가 있을지 감도 안 잡히지만, 예상했던 대로 영물들이 살아남았다면 인간이라고 못 살아남을 이유는 없다.

아니.

오히려 인간이기에 살아남았을 것이다. 바퀴벌레보다 끈질긴 게 인간이니까. 칼리야스 대륙이라고 다를 건 없을 거다.

탁!

"그래서 난 뭘 하면 되는 거냐."

상념을 마치며 덮은 책은 허리춤에 묶어 두었던 비닐봉지를 풀어 그 안에 넣어 두고 핸드폰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처절함이 담긴 사냥꾼의 일지'를 발견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섬멸〉에 〈서브 퀘스트: 사냥꾼의 절규〉가 추가됩니다.]

〈메인 퀘스트: 섬멸〉

* 칼리야스 대륙 밀레스 제국 실롸 자작령 내에 위치한 사냥꾼들의 숲 '베나토르(venátor)'. 이제는 죽음의 숲이 되어 버린 이곳을 떠도는 좀비들을 모두 처치하라.

(15/33)

* 서브 퀘스트: 사냥꾼의 절규 발생

〈서브 퀘스트: 사냥꾼의 절규〉

* 사냥을 끝내고 숲에서 돌아오던 크레타가 본 것은 마을 어귀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자식을, 가장 친한 친구 한스가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빛내며 목덜미를 물어뜯는 장면이었다. 쥐고 있던 칼로 한스를 죽이고 얼른 아들을 구했으나, 살점이 한 움큼 뜯겨 나가 사경을 헤매는 중.

얼른 치료사를 찾았으나.

마을은 이미 서로를 물고 뜯는 사람들로 인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유리아! 이에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자식을 살려야 한단 생각에 괜찮을 거라 자위하며 우선 비상약이 구비된 사냥꾼들의 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여긴 아들이 나를 물었다. 어째서? 라고 물었지만 아들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어억거리는, 한스에게서 들었던 괴성이었다. 아아, 그때 깨달았다. 원인은 알 수 없으나, 내 아들과 한스의 상태가 다르지 않음을."

신이시여.

도대체 왜 저와 제 가족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질문을 던졌으나 신은 대답하지 않았고, 내 정신은 점점 흐려지고 있다."

아내가.

유리아의 미소가 보고 싶었다.

그녀는 어떤 상황일까.

"누군가 이 일기를 보고 있다면, 제발 아내를, 유리아를 구해 주시오."

만약 우리와 같다면.

유리아와 마을 사람들을 포르투나(fortúna)의 곁으로....

(0/1)

"음."

처절함이 담긴.

다소 함축된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연유로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었는지를 단숨에 이해했다.

좀비로 변한 아들과 그런 아들에게 물려 좀비가 되어 가는 자신, 생사가 불명확한 아내까지.

"장난처럼 받아들일 일은 아니야."

내가 처한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비참한 결말에, 서브 퀘스트의 습득으로 들뜨던 마음이 차게 식었다.

남의 비극을 두고 행복해할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었다.

[〈서브 퀘스트: 사냥꾼의 절규〉의 진행을 위해 미니맵이 활성화됩니다.]

['살투스(saltus) 마을: 유리아'의 위치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 * *

"성불하세요."

산장을 떠나기 직전.

아들과 아비의 시신을 한데 모아 작게나마 안녕을 기도한 나는 미니맵을 살피며 살투스란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돌아오기 귀찮으니 메인 퀘스트를 먼저 해결해 놓고 가는 게 어떨까 고려해 보기도 했지만, 혹시라도 '메인 퀘스트의 과제를 완수했습니다. 지구로 귀환합니다.'라는 통보와 함께 서브 퀘스트를 날려 먹으면 어쩌나 싶어 이쪽을 우선 클리어하는 게 낫겠단 판단이었다.

"저기인가."

마을은 산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대략 2km?

오늘 길에 너덧 마리의 좀비를 더 쓰러뜨리며 적당한 구역마다 표식을 해 두길 얼마간 이내 잘 닦인 도로가 나왔고, 그 길의 끝자락에서 드넓은 공터에 지어진 목책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다만.

크레타의 일기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오래되었음을 입증하듯 목책이 온통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상태였다.

"사람이… 살지는 않겠네."

그어어어어.

으으으.

으어어어어어!!

몹시도 을씨년스러운 풍경과 간간이 솟구치는 하울링.

크레타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화를 피하지 못하고 좀비 소굴이 된 모양이었다.

내용만 봤을 때는 구출 위주의 퀘스트인 줄 알았는데.

띠링!

[〈서브 퀘스트: 사냥꾼의 절규〉가 갱신되었습니다.]

〈서브 퀘스트: 사냥꾼의 절규〉

* 사냥을 끝내고 숲에서 돌아오던 크레타.... (중략). 이미 죽음의 땅으로 변해 버린 살투스. 크레타의 유언을 들어 유리아와 마을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라.

(0/67)

"섬멸의 연장선이었나."

졸지에 구울이 섞여 있을지도 모를 적의 숫자가 일흔 가까이 늘어 버렸다. 메인 퀘스트 할당량만으로도 쉽지 않은데 저걸 다 잡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지만, 이거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전부 처치....

후, 전부 처치하면 튜토리얼에서 얻었던 'S-Rank'를 또다시 거머쥘 수 있으리라고.

반드시 행해야 할 행동 수칙 3번.

되도록 등급을 높여라.

"해 보자."

도병을 붙든 손에 힘을 준 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슬픈 사연으로 괜스레 약해지려는 결의를 다잡으며 활짝 열려 있는 마을 입구로 은밀히 접근했다.

그어어어어....

으으으....

'입구에 넷, 안쪽에도 당장 보이는 것만 여섯.'

문 앞을 어슬렁거리는 좀비는 무려 열 마리.

구울은 없는 듯 하나 은밀히 처리하기엔 결코 적지 않은 규모였다.

그렇다면.

'끌어내자.'

답은 유인전이다.

휘욱―

쿵!

즉시 멀찍이 후퇴하며 돌멩이를 주워 문을 두들겼다.

한 개, 두 개, 세 개....

쾅!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소음이 십 회를 돌파할 즈음.

그어어어어!

으으으!

드디어 목책 바깥으로 좀비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돌을 던져 녀석들을 수림 속으로 끌어당긴 나는 후미가 숲으로 진입하자마자 습격을 가했다.

타닷―

휘우우우욱!

툭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발판 삼아 도약해 휘두른 칼날.

빛에 반사된 도신이 빛을 번쩍이며 좀비의 목을 쳐냈다.

대각선으로 비스듬하게 썰린 머리가 바닥에 추락하기도 전에 등판을 걷어차 우측에 있던 좀비의 진로를 막으며 좌측 좀비를 역대각선으로 올려 쳤다.

서걱!

칼질도 하다 보면 는다.

튜토리얼에서 이틀, 산에서 행한 이레간의 훈련으로 빚어진 도격은 좀비의 육신을 거침없이 긋고 지나갔다.

섬멸의 막이 올랐다.

* * *

[(24/67)]

"쯧, 쉽게 갈 수는 없다는 건가."

연이은 낚시로 착실하게 수를 줄여 가던 나는 24마리 좀비를 끝으로 투석질을 그만뒀다. 퀘스트를 주최한 양반이 꽁으로 먹고 가길 원치 않는지, 더 이상 돌에 반응하는 좀비가 없었다.

이거.

직접 내부로 돌입해야 될 거 같았다.

"…목창 좀 만들어야겠네."

인근의 나뭇가지를 싸그리 긁어모아 검대에 걸려 있던 맥 나이프로 양 끝을 뾰족하게 다듬었다.

대강 50여 개.

암만 근력이 좋아졌다고 해도 갖고 다닐 양은 아니다. 일단 다섯 자루만 챙기고 나머지는 목책에 세워 두었다. 마을을 휘젓고 다니다 위급해지면 입구로 돌아와 꼬리에 붙은 좀비들을 목창으로 요격할 계획으로.

방금까지가 외부 유인전이었다면, 이제는 내부 유격전이었다.

* * *

슬슬 저물어 가는 날.

노을을 배경 삼아 서서 쏘아 보낸 창이 대기를 가르고 날아가 거리를 배회하던 좀비의 안면을 꿰뚫는다.

그어어어어억!!

후우우욱―

콰직!

"오케이."

이런 원거리전을 대비해 투창도 빠짐없이 연습해 뒀더니 그게 빛을 발하듯 날아간 창은 목표물을 놓치지 않았고....

강화된 근력 덕분에 날붙이 없이도―

…끄어어어어어어어!!

"음?!"

만족스럽게 감상평을 늘어놓던 찰나 공간을 뒤흔드는 고성에 급히 후방을 돌아봤다.

지방 처마 가장자리에 녹색의 깃발이 달려 있는 건물에서 맹수의 기질을 닮은 괴물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구울(Ghoul).

있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없었으면 했던 그놈이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악!

파아앙―

세상이 떠나가라 포효하는 구울을 목도한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목창을 투사하며 환도대도를 부여잡고 앞으로 돌진했다.

'생명의 샘' 없이 구울과 대면했을 시의 공략법이란....

전신 갑주에서 오는 세트 효과와 매직 등급 아이템을 어울려 낸 선수필승(先手必勝)밖에 없었다.

쉬우우우우욱―

빠아악!

창끝이 복부를 때린다.

명치엔 박혀 봐야 아무 소용 없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가 노린 부분은 타격 그 자체였으니까.

보다 정확하게는 타격에서 비롯되는 일수유의 경직.

"흐아아아!!"

휘우우욱―

선공을 성공케 해 줄 한 번의 틈이었다.

서걱!

촤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악!!"

베었다.

전력을 다해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내리긋는 대각선 참수가 무자비하게 구울의 살갗을 썰어 냈다.

골반을 기점으로 하는 오른쪽 다리였다.

쿠웅!

구울은 좀비에 비해 빠르고 강하다.

그런 탓에 현재의 내 실력으론 일도양단(一刀兩斷)이 무리였다.

해서.

고안해 낸 방안이 '기동력의 파괴'였다.

인간형 몬스터의 특성상 하체가 무너지면 가진 힘도 극단적으로 쇠약해지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경우 전투의 여파로 좀비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쉽게 빠져나가기에도 이쪽이 훨씬 좋았고.

"끄아아아아아!!"

파바바바박―

허벅지만 달랑 남은 구울은 바닥에 고꾸라지자 분노를 터트리며 땅을 짚고 기어서 달려왔다. 원체 완력이 발달되어 있다 보니 기고 있음에도 달리는 것처럼 빠르게 느껴지는 속도.

그러나.

결국 기는 건 기는 것이었다.

"어딜!"

아래로 향해 있던 도를 고쳐 쥐며 전방을 크게 휩쓸었다.

목표는 구울의 양 손목.

촤좌좌좌좌좍!!

일필휘지(一筆揮之)라고 하던가? 일보를 강하게 내디디며 뻗어 낸 도세가 땅거죽을 뒤집으며 구울을 짓뭉갠다.

불어오는 바람에 사그라드는 흙먼지 아래로 드러난 대지에는.

툭!

데구루루루루―

끄어어억! 끄어어어어억!!

양손과 오른 다리를 잃은 벌레 한 마리가 버둥대고 있었다.

이거야말로 전술의 승리였다.

"흐읍!"

콰직!

13화

"뭐…가 뜨지는 않네."

튜토리얼 이후로 두 번째 구울 처치.

첫 사냥 당시에 안정 업적이다 뭐다 해서 전공 포상이 와르르 쏟아졌었던지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따로 떨어지는 건 없었다.

영물 외에 몬스터는 아이템을 드롭하지 않는 설정인 걸까?

"쩝."

짧게 입맛을 다신 나는 도에 묻은 피와 오물을 털어 내며 자리를 박찼다.

그어어어어!!

으어어어!

구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댄 통에 길거리로 좀비들이 뛰쳐나오는 중이라 가만히 있다간 둘러싸여 다구리 맞을 판이었기에 미리 구상해 뒀던 대로 입구로 물러나 목창으로 수를 줄여 놓을 작정이었다.

"읏차!"

* * *

셋, 둘, 하나....

"지금!"

휘우우욱―

퍽!

[(49/67)]

마을 입구.

담쟁이덩굴에 가려져 있던 계단을 밟고 목책 위로 올라와 투척 포인트를 바꿔 차근차근하게 추격해 오던 좀비들을 요격했다.

중간중간 빗나가기도 하고, 맞혔다 한들 복부 같은 상체는 아무런 효과가 없어 실제 성과로 이어진 투창은 50발 중 열댓 발이 고작이었지만, 이만하면 충분했다.

어느덧 49마리.

"이제 열여덟, 끝이 보이네."

대인 전부터 유격 작전까지 구사한 모든 전술이 훌륭하게 먹혀들어 흡족하게 미소를 띤 나는 확인 사살을 마치고 가방을 가져와 목책을 올랐다.

기왕이면 칼을 뽑았을 때 마무리를 짓고 싶었으나.

슬슬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해가 지면 시야가 좁아지고, 시야가 좁아지면 목숨이 위험해진다. 아까 산장에서도 당하지 않았던가?

고로.

남은 사냥은 내일 날이 밝으면 재차 이어 가는 걸로 하고.

"이것만―"

콰직!

"부숴 두면 못 올라올 거고."

아마도 몬스터나 맹수가 쫓아오면 여길 성벽처럼 활용해 화살을 쏴 댔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비좁은 통로에 꾸역꾸역 침낭을 펼쳐 놓고, 계단을 끊어 지상으로부터 격리한 뒤에 간단하게 밥을 차려 먹었다.

메뉴는 제육 덮밥과 생수 한 병.

전투 식량이라 맛도 별로 없는 데다가 사방이 식물로 가득한 탓에 벌레도 득실거렸지만, 저물어 가는 석양이 제법 운치가 있어서 그런가 밥은 술술 넘어갔다.

"이야."

이래서 사람들이 뷰를 따지는 건가. 흐아, 나는 언제쯤 그런 경치 좋은 곳에 살아 보려나.

쩝.

중소기업 대리나 전전하는 삶으로는 코인 대박이라도 터지지 않는 한 다음 생을 노리는 게 훨씬 빠를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문제네. 앞으로 뭐로 벌어 먹고살아야 하지."

돈돈돈 주절거리다 자연스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꼬리를 물었다.

다소 변변찮았더라도 직장마저 퇴사한 내가 가진 돈벌이 수단은 제로.

퇴직금으로 받은 금액이 적지 않다지만, 그도 길어야 몇 년이면 동이 날 터. 그렇다고 공부 한 번 안 해 본 주식이나 코인에 꼬라박을 수도 없고.

"펀드 매니저라도 구해 봐야 하나?"

흐으음.

정상적인 일상생활 영위가 어려운 형편이니 거지꼴을 면하려면 마땅한 대안을 모색해 봐야 할 듯했다.

* * *

지이이이잉―

지이잉―

"아, 음...."

잠깐 눈 감았다 뜨니 아침이더라.

정확한 시간대를 알지 못해 알람을 여덟 시간 뒤로 맞춰 놓고 일어나 보니 얼추 오전인 듯 따사로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중이었다.

침낭에서 빠져나와 스트레칭으로 뭉친 근육을 풀어 주며 전투 식량으로 아침을 때웠다.

최근 하루도 빠짐없이 피로에 절어 산 덕택인지, 전날 종일 숲속을 떠돌며 전투를 치렀음에도 적응이 된 듯 그다지 피곤하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할 만하다는 느낌이려나?

여하튼.

당장 격하게 움직여도 좋게끔 정비를 마친 나는 늘어놓았던 짐들을 정리하고 환두대도를 챙겨 내려왔다.

[(49/67)]

서브 퀘스트 열여덟 마리.

[(19/33)]

메인 퀘스트 열네 마리.

"도합 서른둘."

오늘 안에 끝낼 수 있을 듯하다.

한 차례 주억거린 나는 목창을 쉰 자루가량 추가 제작해 개중 열 자루를 옆구리에 끼고 마을 중앙으로 향했다.

중심부 뒤쪽부턴 들러 본 적 없는 미지의 지역.

구울 또는 상위 언데드가 출현할지도 몰라 사주 경계를 철저히 하며 전진하기를 대강 10분여가 될 즈음, 버려진 우물 근처로 보통의 주택 몇 채를 합한 거대한 저택이 나타났다.

'귀족이… 이런 촌구석에 있었을 리는 없으니 촌장 집인가?'

주인이 누군진 몰라도 남 부럽지 않은 재력의 소유자였겠구나, 뭐 그런 쓸데없는 상념을 중얼거리며 활짝 개방된 대문 안쪽을 들여다봤다.

그어어억!

그어어어어!

'여기 다 모여 있었나.'

우글거린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를 만큼 많은 좀비가 마당을 배회하고 있었다.

살투스 마을에 좀비 사태가 발발했을 때 피난처를 찾고 찾던 생존자들이 인근에서 가장 안전해 보이는 이쪽으로 죄다 몰려온 게 아닌가 싶은데.

조금 의아한 게 있다면 몇몇 좀비들의 외견이었다.

하나같이....

몸에 화살이나 창을 달고 있었으니 말이다.

여태껏 군복 쪼가리나 현대 물품을 본 적이 없는 걸로 봐서 밀레스 제국 측 진압군이나 나 말고 다른 생환자의 소행은 아닌 듯하고.

아무래도.

집주인과 그의 사병들이 도망쳐 오는 생존자들을 막는 과정에서 저리된 것으로 추측됐다. 상대가 보균자인지 아닌지 일일이 체크하기 힘들다면, 남은 방법은 원천 차단밖에 없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여길 어떻게 공략해야 좋으려나....'

인과 관계야 어쨌든 간에 일종의 던전(dungeon)이나 다름없어진 이곳의 공략법을 짜 보던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담장을 끼고 좌측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근처에 있던 수레 따위로 발판을 쌓고 담벼락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좀비들이 날 발견하도록.

그래서.

…그어어어억!!

…으어어어!

"안녕?"

미쳐 발광하도록.

일부러 인사까지 해 주니 불같이 달려드는 좀비들. 일견 위태로워 보이는 장면이었으나, 나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타다다다닷―

쿵!

쿠우웅!

그어어어어억!!

으으으으으!

집주인이 설치한 담이 성벽이 되어 내 앞을 지켜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두더지 잡기네."

내가 그리도 반가운지 침을 튀겨 가며 열광하는 좀비들.

그 열렬한 응원에 응답하듯 나는 양손으로 꽉 쥔 환두대도를 거침없이 휘둘렀다.

후우우우욱―

서걱!

* * *

진짜로 여기가 생존자들의 종착지였는지.

[(66/67)]

"딱 하나 남았네."

칼춤이 끝날 무렵 퀘스트 현황판에 찍힌 66이란 숫자.

하면 마지막 한 마리는 어디에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67번째 좀비 또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

저기.

그어어어어어!!

건물 내부였다.

휘익―

탁!

간간이 울려 퍼지는 포효를 따라 담장을 넘어 마당에 발을 들인 나는 산장에서의 사건을 상기하며 조심스럽게 어두컴컴한 실내로 돌입했다.

그어어어어어!!

'3층인가.'

저택답게 널따란 집 안을 둘러보다 계단을 타고 3층으로 향하기 무섭게 복도 끝자락에 위치한 방문이 들썩였다.

쿵!

쿠웅!

끄어어어어어억!!

떨어지는 지능 때문에 문을 직접 열 수는 없고, 먹잇감이 코앞이 있으니 나오고는 싶고.

거리를 좁혀 문 앞에 서자 더더욱 심해지는 발버둥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문을 열어 주는 대신 아예 문째로 공격을 가했다.

"흐읍, 하!"

콰직!

콰드드드드득―

소리를 힌트 삼아 머리통이 있을 지점을 노려 찔러 넣은 칼끝.

왼손으로 도병을 쥐고, 오른손 바닥으로 폼멜을 받치며 가한 환두대도가 관리가 안 돼 부실해진 방문을 뚫고 무언가를 직격했다.

띠링!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사냥꾼의 절규〉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상당한 경험치'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우우우우웅!

"나이스."

우드드득―

종료 휘슬처럼 울린 알림음과 동시에 퀘스트 보상으로 주어진 경험치를 만끽한 나는, 이번에도 상처 없이 임무를 완수했단 사실에 기분 좋게 웃으며 도를 회수했다.

쿵!

도가 꽂혔던 충격으로 한 움큼이나 부서진 문, 그 너머로 미간에 구멍이 난 사체가 맥 없이 축 늘어지는 게 보였다.

더불어.

반짝―

"응?"

햇빛을 반사하며 번쩍이는 물체도.

뭐지?

별안간 눈을 찌르는 불빛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세히 들여다보던 내 눈에 띈 것은.

"…칼?"

한 자루의 '검(劍)'이었다.

용케도 깨지지 않은 유리 진열대에 거치된 은빛 검과 칼과 대비되는 검은 색 검집.

딱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모양새에 문 앞을 가로막고 있던 사체를 밀어 치우고 진열대로 다가가 홀린 듯이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띠링!

마치 처음 '무기 임의 선택권'을 지급 받았을 때처럼 꿈틀거리는 핸드폰 화면.

즉.

아이템이었다.

〈찔러 부수는 모노케로스의 한손검/Magic〉

* '실력이 뛰어난 검장이 에스콰이어 아카데미를 졸업한 아들의 선물로 주고 싶다는 살투스 마을의 촌장 포메니아의 의뢰를 받아 찔러 부수는 모노케로스 영혼석'을 가공 장착하여 제작한 한손검이다. '찔러 부수는 모노케로스의 영혼석'이 장착되어 검력(劍力)을 한층 높였다.

* 찌르기 공격 시 추가 피해량 +10%/착용 시 근력 최대치 7% 향상

"이렇게 아이템을 얻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난데없는 아이템, 그것도 환두대도와 같은 매직 등급 무기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한동안 멍하니 검만 만지작거렸다.

허.

연신 새어 나오는 감탄에 벌어지는 입술을 억지로 닫으며 냉큼 검을 챙겼다.

모노케로스라는 이름 모를 영물의 영혼석이 박힌 무기.

이런 귀한 걸 두고 가는 건 죄악이었다.

옵션이 환두대도와 동일한 추가 근력이라는 점이 단점이기는 한데, 가지고 다니다 예비로 써도 되고.

여차하면 다른 생존자들에게 팔아도―.

"아! 그러네."

내가 왜 이걸 생각 못 했지?

게임, 특히 RPG를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게 있다.

바로.

아이템 거래였다.

얼마나 유행하는가에 비례하여 수백, 수천.... 심지어 억대의 금전이 오갈 정도로 과열되기도 하는 시장.

한낱 게임에도 그만한 금력이 오고 가는데, 이제는 현실이 돼 버린 시국이니 상황만 잘 맞아떨어진다면 제 목숨 또는 가족이나 지인을 살리기 위해 수십억을 지불하는 재력가들도 출현할 게 분명했다.

마침 떠벌이기 좋아하는 생환자들과, 그런 생환자들에게 언론사들이 붙어 한창 관심을 기울여 주고 있는 현시점이라면 구매자를 물색하는 것도 훨씬 수월하겠지.

어쩌면 벌써 시장이 형성돼 있을지도 모른다.

"나가면 알아봐야겠다."

방금 이야기했듯이 예비용으로 써도 되는 무기라 조급하게 팔아 치울 마음은 없다만, 시세를 알아 두거나 구입 희망자를 파악해 두는 것만으로도 향후 일정 수립에 도움이 될 테니.

"그 전에."

마을부터 다시 둘러보자.

어디서 또 이런 물건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구석구석.

지하를 염두에 두고 쥐구멍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철저하게 수색해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는 내 눈동자에 뜨거운 열의가 불타올랐다.

사람도, 좀비도 모두 사라진 무인(無人)의 공간.

거침없고도 대담한 도둑질을 막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14화

"생각보다 별거 없네."

하루를 꼬박 들여 살투스 마을 곳곳을 휘저으며 노획한 전리품을 쭉 나열해 둔 나는 썩 대단치 않은 성과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촌 동네.

사냥으로 먹고사는 촌구석이니 매직 등급을 또 얻는 건 욕심일지니. 노멀 등급이라도 좋다, 그저 현금화가 가능한 아이템이 나와 줬으면 하고 바랐는데, 품었던 희망이 무색하게 건진 거라고는 칼리야스 대륙에서 사용되는 화폐 30여 개가 전부였다.

수확이라 말하기에도 민망하다.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 포인트는.

"이거 진짜 금인가?"

잡화점이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건물 1층에 설치된 판매대에서 습득한 누런 동전 두 개였다.

밀레스 제국에서 발행한 금화인지.

로마에서 발행했던 화폐와 비슷하게 한쪽에는 황제로 추측되는 면류관 같은 걸 쓴 남자의 얼굴이, 다른 한쪽에는 엑스 자로 교차된 쌍검이 양각된 누런 동전.

까득―

이리저리 돌려보다 올림픽에서 우승한 선수들이 부상으로 탄 금메달을 깨물어 보듯이 표면을 닦아 깨물어 봤다.

주워듣기로는 금메달이란 게 실상 은의 표면을 도금한 것에 불과하거니와 그마저도 도쿄 올림픽 당시에는 전자 기기 따위의 폐품에서 추출한 것들로 제작해 절대 입에 가져가지 말라고 하던데.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적어도 이건 순도 높은 금덩어리가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자국이, 남네?"

송곳니와 어금니 자국이 나름 뚜렷하게 새겨졌으니까.

나이스.

요즘 금 시세가 어떻게 되더라? 최근에 심심해서 검색해 봤던 시점만 하더라도 그램당 7만 원인가 8만 원대였던 걸로 알고 있다.

"이 정도면 못해도 5그램은 할 테니까, 환산해 보면 …개당 최소 30만 원? 와우, 미쳤네."

합치면 거진 7~80만 원.

수수료든 뭐든 다 떼도 50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이고 절반으로 줄어도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곧장 팔아 치우기에는 장물이 아니냐고 의심 살 거 같아 망설여지지만, 여하간 위급 시에 현금처럼 쓸 수 있는 자금 확보에 그제야 미소가 지어졌다.

"이만하면 슬슬 돌아가도 되겠어."

짤랑!

만족스럽게 주머니를 열어젖힌 나는 싱그러운 음률을 귀 뒤로 넘기며 짐 가방을 챙겨 마을을 벗어났다.

이제.

메인 퀘스트를 처리할 순서였다.

* * *

그어어어어어어어!!

"흐읍, 하!"

휘우웅―

서걱!

발치에 다다랐던 좀비의 양팔이 대각선으로 휘두른 칼날에 잘려 나간다.

후두둑 솟구치는 핏물을 피해 슬쩍 후퇴했다 하늘로 뻗어 있던 칼날의 방향을 회전해 그대로 상체를 갈랐다.

무척이나 깔끔한 연격.

'서브 퀘스트: 사냥꾼의 절규'를 클리어하며 획득한 '상당한 경험치'로 몸놀림이 한결 가벼워진 덕분에 슬슬 좀비 두셋쯤은 칼질 몇 번이면 쳐 죽일 수 있는 레벨까지 도달했다.

물론.

여전히 한꺼번에 들이닥치면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너덧 마리만 모여도 멀찍이 물러나 목창을 던져 외곽부터 착실하게 깎으며 좀비들을 정리해 갔다.

그러다 보니.

오후로 접어들면서 퀘스트에 할당된 33마리 중 32마리가 시체가 되어 바스러졌다. 참고로 33호도 내 눈앞에 구속된 상태였다.

그으으으으으....

"넌 조금 기다려."

왜 죽이지 않고 묶어 두었느냐.

계획해 두었던 '반드시 행해야 할 행동 수칙'에서 아직 두 가지 과제를 달성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생명의 샘'과 전자에서 연결되는 '영물(靈物)'의 유무 확인하기를.

중도에 서브 퀘스트를 해결하느라 딴 길로 샜던 탓에 탐사는 지지부진한 실정, 하여 뒤늦게라도 필드를 둘러보며 조사를 이어 갔다. 숲이 매우 매우 매우 넓어 며칠이나 걸릴지 감도 안 잡혔지만, 개의치 않고 산장을 기준으로 동서남북을 오갔다.

그 결로.

꽤나 재밌는 점을 알아냈다.

튜토리얼에서는 절벽이 일대를 둘러싸고 있었다면.

퉁―

"응?"

퉁―

"뭐야, 이거."

투명한 막이 메인 퀘스트의 필드를 꽉 틀어막고 있단 기이한 사실이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휘이이이이익―

툭!

"나만, 못 나가는 건가."

나뭇가지, 돌멩이를 포함해 그 밖의 온갖 사물은 특별한 제지 없이 통과되는.... 오로지 나를 가두는 장벽이었다.

"부수지는… 못하겠지?"

사아악―

쾅!

주먹과 칼날로 두들겨 보던 나는 결코 뚫고 지나갈 만한 재질이 아님을 깨닫고 행동을 멈춘 채, 어째서 이런 게 존재하는지 그 원인을 따져 봤다.

대충 짐작 가는 건.

시간제한을 두지 않은 대신 공간적 제약을 두어 생환자들에게 전투 외엔 답이 없음을 명확하게 인지시키고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라도 퀘스트에 임하도록 유도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뭐, 아니면 말고."

내가 눈여겨봐야 할 포인트는 이로써 최악의 경우에도 전장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부분이었으니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했던가?

그러니.

"더 강해져야겠네."

도망칠 필요조차 없는 단계로 성장해야 한다.

무슨 퀘스트가 뜨든, 난이도에 상관없이 모조리 박살 내고도 살아남을 수 있게끔.

* * *

날이 저물다 못해 새벽으로 넘어간 시각.

저녁을 든든히 챙겨 먹고 투구에 랜턴을 끼워 돌아다니길 장장 일곱 시간 만에 나는 드디어 고대하던 소리를 듣게 되었다.

―조르르르르륵!

'물이다!'

시원하진 않을지언정 분명한 물소리였다.

바라고 바라던 '생명의 샘'인지, 산 중 계곡인지, 그도 아니라면 자그마한 실개천인지는 가 봐야 알겠지만.

물을 찾아냈단 것만으로도 심장이 콩닥거렸다.

문제라면.

사위가 너무 깜깜하다는 점.

'내일 다시 오는 게 맞으려나.'

혹시라도 영물(靈物)이 있다면 눈먼 이빨에 물려 뜯길지도 모르는 터라 안전 제일주의자인 나로서는 발걸음이 머뭇거려졌다.

…기.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에 랜턴을 빼내어 줄로 묶은 뒤 밝기를 최대로 높여 휙 하고 던졌다.

툭!

투둑!

데구루루루루―

우거진 나무들을 피해 멀리 날아가 땅바닥을 구르며 번쩍번쩍한 빛으로 사위를 비추는 랜턴.

느닷없는 불빛이 칠흑 같던 암흑을 몰아내던 그때.

―사사삿사!

'...?!'

신경을 거스르는 뭔가가 감각에 잡혔다.

경쾌하면서도 재빠른.

뭐지?

한 걸음, 한 걸음이 스타카토로 탁탁탁 끊기는 걸 보건대.... 뱀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생물의 정체가 뭘까.

정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회색빛 가죽에 검은 선이 또렷한 생명체.

찍! 찌직!

'다람쥐?'

지구에서도 흔하게 목격되는 '다람쥐'였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찌이이익!

―툭.

콰직!

평범한 짐승과 달리 철제 랜턴쯤은 쉽게 우그러뜨리는 날카로운 앞니의 위력이었다.

확실했다.

저 녀석.

"영물이구나?"

씨익―

영력의 힘으로 선천적 한계를 탈피한, 아주 토실토실한 사냥감이었다.

타앗!

확신이 선 찰나에 반사적으로 다리가 꿈틀거렸고, 환두대도가 대기를 가르며 횡으로 뻗어 나갔다.

전력을 다한 기습이 현대 문물에 빠져 있던 다람쥐의 몸통을 노렸다.

하나.

찍?! 찌직!

영물은 영물이라는 듯 안타깝게도 놈은 그냥 당해 주지 않았다.

―휘익!

서걱!

"쯧."

체구가 작아서 그런가 애꿎은 잡초만 자르고 지나가는 칼날.

후다닥 나무를 타고 올라가 버리는 다람쥐를 쳐다보던 나는 미련 없이 백 스텝을 밟았고, 그 판단은 옳았다.

찌이이이익!!

휘우우우우욱―

콰드득!

두어 발 물러나자마자 벼락처럼 낙하한 놈의 이빨이 내가 머물렀던 땅거죽을 헤집어 놓았으니까.

간발의 차로 반격을 회피한 나는 재차 모습을 감추는 다람쥐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다 역시 야간 투시경이라도 쓰지 않는 한 어둠 속에서의 싸움은 무리임을 자각했다.

더군다나 현재는 지형적으로도 불리한 형국.

이른바 홈그라운드에서 어드밴티지를 받고 있는 적과 맞서야 하는 형편이었기에, 이대로라면 밤새 드잡이질을 해야겠구나 싶어 서둘러 검대 우측에 끼워 두었던 소형 페트병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촤아아아아악!!

찍?!

"고약하지?"

생명체의 후각을 자극하는, 흑야를 닮은 새까만 액체가 들어 있었다.

딸깍!

툭―

"불 좀 켜자고."

화르르르르르르륵!!

휘발유였다.

때와 장소에 구분 없이 잠깐이나마라도 불을 켤 수 있게 마련해 두었던 기름이 뒤이어 추락한 라이터와 결합에 온 세상을 환하게 물들였다.

찍! 찌직!

"저기 있었구나?"

보인다.

찌직!

휘우우욱―

나뭇가지 끝자락에서 뛰어내리는 다람쥐의 형상이 선명하게 보인다.

화력을 통해 태생적 약점을 극복한 순간.

이에 호응하듯 상승한 인지력이 놈의 움직임을 캐치했고, 쾌속해진 반응 속도가 이에 대응한다.

각종 영혼석과 계속해서 축적된 경험치로 강화된 육체를 바탕으로 10여 미터 상공에서 내리꽂히는 낙뢰를 감지한 즉시 하단에서 상단으로 환두대도를 올려 쳤다.

그 직후.

―카아앙!

콰지직!

근력 보정 총합 12%에 베기 보정 10%는 제아무리 영물일지라도 쉽사리 파괴하기 어려웠는지, 칼날과 충돌한 이빨이 강렬한 충격파를 동반하며 사정 없이 깨져 나갔다.

찌이이이익!!

핏물로 뒤범벅된 비명이 치솟았다.

나는 비산하는 치아 파편을 몸으로 받아넘기며 힘 없이 튕겨 나가는 다람쥐를 쫓아 발을 굴렀다.

살려 두면 또 어디로 도주할지 모를 놈이었기에, 기회가 왔을 때 결판을 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력을 다해 달려가 아름드리나무 등걸에 부딪혀 떨어지는 놈의 몸뚱어리를 향해 칼날을 내질렀다.

썩어도 준치라고.

찌이이익, 찌이이이이익!!

화아아아악―

까득!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놈이 최후의 발악을 하듯 절반도 채 남지 않은 이빨을 들이밀어 봤지만.

랜턴과 다르게 환두대도에는 자그마한 흠집이 났을 뿐.

"잘 가라."

후우우우우욱―

콰직!

보란 듯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해 냈다.

〈깨부수는 다람쥐의 영혼석/Magic〉

* '생명의 샘'이 지닌 신비로운 힘을 통해 정해진 한계를 이겨 내고 영물(靈物)로 거듭난 샘지기 다람쥐의 영혼석이다. 복용 또는 장비 제작 시 내재된 영력을 사용할 수 있다.

* 복용 시 근력 5% 영구 강화/장비 제작 시 착용자의 근력 7% 상승 효과 적용

"근력이 제일 흔한가 보네."

머리가 잘린 다람쥐의 배 속에서 추출해 낸 영혼석의 효능은 이번에도 근력 전용이었다.

멧돼지에 호랑이, 모노케로스라는 정체불명의 생명체까지.

근력 향상용만 어느새 네 개째.

뭐.

딱히 싫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솔직히 치악력(齒握力) 같은 게 뜨면 어쩌나 걱정하던 참이었으니까.

면역력처럼 희귀하면서도 효율적인 옵션이라면 몰라도, 애매한 게 뜰 바에는 차라리 범용성이 뛰어난 근력이 백배 낫다.

꿀꺽―

['깨부수는 다람쥐의 영혼석'을 복용했습니다.]

[근력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5% 향상됩니다.]

꽈아아아악!

나는 배 속에서 효험을 발휘하는 영혼석의 영력을 음미하다 이내 환두대도를 납도하고 산불 진화에 들어갔다.

다람쥐와 치고받는 동안 불길이 천지에 깔린 초목을 집어삼키며 몸집을 불려 가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가만히 놔두면 숲 전체를 태워 먹을 거라 흙을 퍼내 화마를 잠재웠다.

15화

['생명의 샘물'을 복용했습니다.]

[모든 해로운 효과가 소멸합니다.]

[10분간 자연 치유력 및 피로 회복 속도가 200% 상승합니다.]

"아아."

상쾌함을 선사하는 샘물을 연거푸 들이마신 뒤에 감탄사를 내뱉은 나는 갑옷을 잠시 벗어 두고 땀에 절어 있던 몸을 씻어 냈다.

좀비도 없겠다, 샘지기도 없겠다.

며칠 만에 아무 걱정하지 않고 즐기는 목욕 내내 마시고 뒹굴고 부어 대는 샘물에서 발산된 영험한 기운에 전신의 활기가 차올랐다.

그래.

이 맛이지.

"하.... 좋다."

사흘에 걸쳐 쌓였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을 만끽하며 샘터 근처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아예 야영 캠프를 차렸다.

메인 퀘스트, 서브 퀘스트, 생명의 샘, 영물 사냥.

그걸로도 모자라 매직 등급 무기인 '찔러 부수는 모노케로스의 한손검'과 금화까지. 리스트 업 해 두었던 목표를 한참이나 초월한 결실을 거둔 만큼 이대로 돌아가서 묶여 있는 좀비를 죽여 지구로 귀환해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굳이 급하게 굴 이유가 없었기에 샘물도 쟁여 둘 겸.

"또 왔으면 좋겠는데."

기존 샘지기가 사라졌으니.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새로운 영물이나 영물이 될 동물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리젠 가능성을 고려해 넉넉하게 하루쯤은 머물러 볼 작정이었다.

혹여라도 생각대로 된다면 귀환이고 자시고 백날 천날 이 작업만 무한히 반복해서 미친 듯이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라는 바람으로 꼬박 이틀을 지새웠으나 제2의 샘지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체 리젠 타임이 얼마나 길길래 일부러 이틀이나 더 대기했는데도 안 오냐. 설마 리젠이 없는 건가?"

일전에도 느꼈지만, 꽁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시스템 같았다.

쩝.

"집이나 가자."

욕심을 비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공병에 샘물을 담은 후 도처에 마킹해 둔 표식을 따라 좀비 33호를 포박해 둔 곳으로 행했다.

이제.

여기에서의 일을 마무리 지을 차례였다.

그어어어어어!!

콰직!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섬멸〉의 과제를 완료하셨습니다.]

[당신의 활약도를 종합하여 보상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화아아아아악!

목이 잘리는 마지막까지도 공격성을 잃지 않던 좀비의 머리를 떼어 내자마자 알림음이 연신 울려 퍼지더니 곧 강렬한 빛이 나를 휘감는다.

예상했던 대로.

메인 퀘스트가 종료되면 지체 없이 현실로 복귀하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이에.

"어휴."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좀 귀찮더라도 왔다 갔다 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애써 히든 트리거를 발동시키고도 죄다 날려 버릴 뻔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어땠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한 감정이 차올라 부르르 떨리는 몸.

띠링!

주머니 안쪽에서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등급 판정이 완료된 듯했다.

"제발 S가 떠야 할 텐데."

나는 요번 퀘스트에서 쌓은 공적들을 하나하나 되돌아보며 살며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바라봤다.

할 건 다 했으니 충분히 S 랭크가 뜨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리고 그 확신은.

[당신의 성적을 등급화합니다.]

[주어진 임무를 더없이 훌륭하고 완벽하게 해결한 당신의 등급은 'Rank: S'입니다.]

[등급에 따른 보상이 주어집니다.]

"…나이스!"

날 배신하지 않았다.

[보상으로 '많은 경험치' 및 '무작위 기술 서적: 원본(原本)', '장신구 임의 선택권: Magic', '마력 전이석'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꾸우우우욱―

퍼석!

우우우우우우웅!!

꽉 틀어쥔 마력 전이석이 바스러짐과 동시에 심장 부근에서 뜨거운 에너지가 일렁였다.

가슴에 손을 올려 두고 눈을 감으며 집중하자.

쥐꼬리에 불과하던 마력이 미세할지언정 증가했다는 것이 똑똑하게 느껴졌다. 그래 봐야 쥐꼬리인 것은 변함없지만.

이거라도 어딘가.

티끌 모아 태산이다.

"연계할 무기도 생겼고."

〈무작위 기술 서적: 원본(原本)/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소재의 내구성이 약해 불 또는 물 등 외부 요인에 의해 손상될 가능성이 있으니 보관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 마법 '무작위 기술 지식 전이: 원본(原本)'

* 특이 사항: '메인 퀘스트'를 통해 습득한 상태라면, 해당 퀘스트에서의 행동 양식에 영향을 받는다.

무작위 기술 서적.

후미에 원본(原本)이란 단어가 박혀 있는 걸 배제하면 구울 전용 '기술 임의 습득권'과 마찬가지로 스킬을 내어 주는 아이템.

원본이라면 사본도 있다는 뜻일 텐데, 어쨌든 랜덤성을 극복하고 이 안에서 액티브 스킬을 뽑는다면 미약한 마력이라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으리라.

"내친김에 그것도 써야겠다."

고풍스럽게 생긴 책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짐가방 중심부에 쟁여 두었던 '기술 임의 습득권: 구울'도 끄집어냈다.

당장 사용하기보다는 정규 콘텐츠에 돌입했을 때,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이 언데드 말고도 또 있는지 체크하고서 주어진 환경에 맞춰 '구울의 시독'을 배울지 '질긴 피부'를 배울지 결정하려고 일단은 보류해 두었던 아이템.

그렇게 남겨 둔 채로 메인 퀘스트를 겪고 나니 마침내 어떤 녀석을 골라야 할지 결심이 섰다.

촤르르르륵―

['기술 임의 습득권: 구울'의 마법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당신이 습득할 기술을 선택해 주십시오.]

[1. 구울의 시독(A)]

[2. 질긴 피부(P)]

[3. 약한 감염(P)]

내가 익혀야 할 스킬은.

띠링!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기술 '질긴 피부(P)'가 적용됩니다.]

'질긴 피부'였다.

〈질긴 피부/Passive〉

* 기존의 피부 조직이 보다 질겨집니다. 모든 물리 공격에 대한 내성이 향상되며, 일부 마법 공격에 관해서도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 모든 물리 공격에 대한 방어력 +5%/타격계 마법 방어력 5%

꾸우우우우욱―

사각!

"이만하면 좀비 손톱은 거뜬히 막아 내겠는데?"

패시브 기술의 효과를 검증해 보기 위해 직접 칼을 대 본 나는 적잖게 짓누르고 나서야 갈라지는 팔등을 보며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무협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도검불침(刀劍不侵)은 아니더라도 눈먼 할퀴기쯤은 가볍게 방어해 낼 수 있을 듯했다.

"좋아."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주억거린 나는 연달아 두 번째 책도 중앙을 쫙 펼쳤다.

['무작위 기술 서적'의 마법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해당 아이템이 〈메인 퀘스트: 섬멸〉의 보상임을 확인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섬멸〉을 진행하며 보여 주었던 당신의 행동 양식을 근거로 지급될 기술을 결정 중입니다.]

[1%, 2%, 3%....]

"뭐가 뜨려나."

퀘스트 내에서의 행동 양식을 기반으로 내어 준다면 임팩트를 감안해 카테고리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좁혀진다.

필수 동작인 베기, 유인전에서 유용하게 써먹은 투창, 다람쥐와의 결전에서 벌인 화공.

과연.

어떤 스킬을 받게 될까?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던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00%]

[완료!]

[당신에게 주어질 기술은 '이그니스 류: 섬광_원본(原本)'입니다.]

"이그니스, 류?"

굉장히 생소한 명칭과.

[해당 기술과 관련된 지식을 전이합니다.]

우득―

"아?"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무지막지한 두통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지식 전이가 완료되었습니다.]

[기술의 효과로 '속성력: 뇌(雷)'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9% 향상됩니다.]

"켁, 케엑― 끄으으읍."

10초? 10분? 10시간? 10일?

시간의 흐름조차 잊게 만드는 통증이 가시고도 한동안 멍하니 천장만 응시했다.

뇌가 터지고 짓밟혀 곤죽으로 변했다가 복구된 것 같은, 머릿속에 휘몰아친 거대한 태풍을 수습하느라 다른 걸 할 수가 없었다.

"어흐."

해서 족히 10분 이상 망가졌던 멘탈을 회복하는 데 전념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안정을 취한 나는 질질 흘러내리던 침을 쓱 닦으며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정갈하게 정리된 지식이 마치 핸드폰 화면 위로 출력된 정보처럼 주르륵 떠올랐다.

〈이그니스 류: 섬광_원본(原本)/Active〉

* 칼리야스 대륙의 기나긴 역사에서 단 한 자루의 도를 쥐고 하늘을 베었다는 전설적인 도객, 이그니스(ignis)가 창안한 도법의 첫 초식. 체내에 축적된 마력을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이며 뻗어 내는 도격에 새하얀 번개가 깃든다 하여 '섬광(閃光)'이라 불렀다.

* 베기 공격 시 추가 피해량 + 33%/1회 공격에 한 해 일시적으로 '뇌(雷) 속성' 부여

스킬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부가적인 옵션.

거기에 더불어.

"복부에 마력을 모아서.... 좌하단으로 내보내 코어를 중심으로 원심력을 이용해 우측 상단으로 확 잡아 끌어 올려 오른팔로 내보낸다. 그리고, 내리치기."

마력을 어떤 식으로 운용해야 기술이 발현되는지 그 방법까지 모든 게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기억난다.

정말이지.

기적이나 다름없는 광경이었다.

…만.

별로 놀랍다거나 즐겁지는 않았다.

"매번 스킬 배울 때마다 이런 걸 계속 겪어야 한다는 거잖아? 거참, 돌아 버리겠네."

지식 전이 한 번만으로도 초주검이 돼 버리는데, 이런 걸 성장통이랍시고 달고 살아야 한다니, 진짜로 미쳐 버릴 것 같았으니까.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차에.

띠링!

고요함을 뚫고 맑은 종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또 뭔데."

한바탕 지나간 폭풍으로 인해 신경이 날카로워졌는지.

괜스레 퉁명스러운 말투로 주절거리며 핸드폰을 집어 들자 형형색색으로 반짝거리는 커다란 홀로그램 화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느닷없는.

[축하합니다!]

[〈업적: 최초가 지닌 가치〉를 달성했습니다.]

[달성 조건: 원본(原本) 기술 습득]

[보상으로 '상당한 경험치' 및 〈서브 퀘스트: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가 추가됩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서브 퀘스트?"

퀘스트 창이었다.

〈서브 퀘스트: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

* 칼리야스 대륙의 기나긴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위대한 인물 중 도(刀)를 다루는 데 가히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이그니스(ignis). 최하층 계급으로 분류되던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배움의 길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권좌에 올라선 「벼락의 주인」.

아빕와 함께 고기를 손질하던 날.

번뜩 내리친 낙뢰를 보고 깨달음을 얻어 창안된 도법 '이그니스 류'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도객들의 입에서 능히 대륙 십대 도법으로 꼽힐지니.

과연.

당시는 그 광포한 벼락을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제껏 많고 많았던 추종자들처럼 꿈과 희망을 좇다 절망 가운데 쓰러질 것인가.

(1/7)

[진행도: 1단계]

[탐지 거리: 3km]

[현재 위치를 기준으로 3km 범위 내에 '이그니스 류의 조각'이 존재할 시 미니맵이 활성화됩니다.]

[진행도에 비례하여 탐지 거리 및 정확도가 상승합니다.]

16화

[ 남과 나의 차이 ]

"…갑자기 이게 뭐냐."

얼떨떨한 눈빛으로 한참을 핸드폰만 주시하다 툭 하고 중얼거렸다.

날을 세우던 예민함은 이미 사그라든 지 오래.

그저 당황스러운 심정으로 히든 트리거가 구동되었나, 그 대목에 시선이 쏠렸다. 답을 구하는 건 쉬웠다.

[당신에게 주어질 기술은 '이그니스 류: 섬광_원본(原本)'입니다.]

[〈업적: 최초가 지닌 가치〉를 달성했습니다.]

[달성 조건: 원본(原本) 기술 습득]

몹시도 친절하게 나와 있었으니까.

"원본, 업적.... 그리고 서브 퀘스트."

여기에 한 가지 요소를 더한다면.

퀘스트 보상으로 '무작위 기술 서적: 원본(原本)'을 받을 것.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 S 랭크를 따내야만 이번과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는 의미였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네."

하나하나 퍼즐을 맞춰 본 나는, 목전의 성과가 지난 며칠 동안의 노력이 일궈 낸 것임을 깨닫고 웃었다.

적어도.

여태껏 세웠던 계획과 내렸던 판단들이 틀리지 않았단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속성력이 붙었네."

방긋, 활짝 핀 얼굴로 스킬 내용을 되짚어 보던 나는 이그니스 류를 학습함으로써 획득한 속성력에 주목했다.

무려 9%.

영혼석을 두 개나 먹어야 충당되는 분량이라 눈길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만, 내 인상은 금세 찡그려졌다.

"…이건 뭐 먼지야?"

제우스나 토르같이 번개를 갈겨 대는 망상에 빠져 잔뜩 흥분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체내에 쌓인 속성력이 쥐꼬리보다 적은 까닭이었다.

신랄하게 표현해서 좁쌀 한 톨?

"마력보다 적은 건 좀 아니지 않냐."

참나.

진한 허무감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기야.

찬찬히 따져 보면 실상 당연한 결과였다.

전기 뱀장어도 아닌 인간 주제에 가진 생체 전류량이 몇이나 되겠는가. 끽해 봐야 1볼트도 안 되겠지. 그 코딱지만 한 총량에 9%를 더해 봐야 사하라 사막에 모래를 흩뿌린 것과 다르지 않다.

설사 시스템의 보정을 받는다 하더라도 미비할 수 밖에 없었다.

"쩝."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나는 그나마 '이그니스 류: 섬광'을 시전하면 일시적으로 속성 부여가 이뤄지니, 거기서라도 플러스가 적용된다는 점에 만족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메인은 따로 있었다.

'베기 공격 시 추가 피해량 + 33%'.

환두대도에 붙어 있는 10%까지 더하면 도합 43%나 위력이 상향된다.

"미쳤네."

이거라면 설사 구울보다 윗줄의 상위 언데드 종이 출현해도 두부 썰 듯 썰어 버릴 터였다.

게다가.

'서브 퀘스트: 이그니스 류의 전승자'에 의하면 이게 겨우 첫 번째 조각으로 확보한 보정치였다....

"지금도 이런데 일곱 개를 다 모으기라도 하면...."

단순 계산만 해 봐도 최소 230%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 어마무시한 수치에 난 즉시 가상의 메모장을 켜고 새로운 목표를 적어 내려갔다.

반드시 행해야 할 행동 수칙 4번.

이그니스 류 완성하기, 라고.

〈장신구 카테고리〉

* 귀걸이

* 목걸이

* 반지

* 팔찌

* 발찌

"뭐가 좋으려나."

사태가 일단락된 이후 '장신구 임의 선택권: Magic' 종이를 찢자 등장한 다섯 개의 장신구를 살펴보던 나는 고민 끝에 팔찌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언제나 그러하듯 세부 옵션이 비공개로 고정돼 있는 이상 내가 중요하게 봐야 할 부분은 활동성밖에 없다.

이를 포인트로 잡는다면.

무기를 잡을 때마다 걸리적거릴 반지나 작은 충격에도 떨어져 나가는 귀걸이, 헐렁거릴 목걸이는 제외되는 바라 남은 팔찌와 발찌 중 차고 다니는 데 조금이라도 더 편할 팔찌를 고른 것이다.

우우우웅―

"괜찮은 옵션이 붙어야 할 텐데."

제일은 면역력이고.

그 외에는―

띠링!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있던 날 일깨우는 알림음과 함께 빛이 모여 자그마한 물체를 만들어 냈다.

['집요한 뱀의 팔찌'를 선택했습니다.]

[해당 장신구가 소환됩니다.]

"응?"

튜토리얼에서 사냥한 적 있는 '집요한 뱀'의 영혼석이 박힌 팔찌였다.

〈집요한 뱀의 팔찌/Magic〉

* '집요한 뱀의 영혼석'과 솜씨 좋은 제작자의 손길이 더해져 탄생한 은팔찌. 착용자의 신체에 맞게 늘어나고 줄어드는 자동 조정 마법이 부여되어 있어 누구라도 쉽게 끼고 뺄 수 있다. 10초간 잡고 있으면 '자동 조정' 마법이 해제되며 최대 크기로 전환된다.

* 착용 시 인지력 최대치 7% 향상/마법 '자동 조정' 부여

"인지력도 땡큐지."

솔직히 말해서 소화력 같은 괴상망측한 부류만 아니라면야 무엇이든 딱히 상관없는 편이었다.

철컥―

상대적으로 덜 불편할 왼손 손목에 팔찌를 끼우자 흡사 기계가 가동되는 듯한 소음이 들리며 서서히 조여지며 조절되는 사이즈.

확 하고 인지 범위가 넓어지는 느낌이 감각을 타고 전해진다.

'메인 퀘스트: 섬멸'을 비롯해 여러 방면으로 대량의 경험치를 축적한 터라 그런지 동일한 7%라도 변화의 차이가 상당했다.

"아, 음.... 오케이."

하여 간단하게 적응 훈련을 하고 나서야 정상 컨디션을 되찾은 나는 비로소 정리가 끝났음에 무장을 해제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신적인 후유증인가.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회복과는 별개로 오늘은 이만 늘어져서 쉬고 싶었다.

이래저래 할 일은 많았지만, 남은 건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그대로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짓눌려 어둠 속에 나를 묻었다.

* * *

"아오, 배고파."

몇 시간이나 곯아떨어져 있었는지, 주위가 새카매질 무렵에야 일어난 나는 강한 허기에 아랫배를 살살 문지르며 주방으로 향하다가 문득 물끄러미 복부를 쳐다봤다.

"...."

사회 생활이란 명목으로 술에 찌들어 툭 튀어나왔던 전형적인 직장인의 똥배가 제법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내 배 맞아?"

힘을 주면 선명해지는 조각난 복근을 필두로 무척이나 딱딱했다.

시간적으로 다 합쳐 봐야 보름여에 불과했지만, 고된 강행군이란 단어로도 부족한 단련과 실전을 거치면서 엄청난 속도로 다이어트가 된 모양이었다.

"엄마 아빠가 보면 깜짝 놀라겠다야."

가장 목 좋은 장소에 걸어 둔 액자를 바라보며 피식거린 나는 밥 달라고 아우성치는 위장을 위해 냉장고에 모셔 두었던 삼겹살을 꺼내 불판에 올렸다.

집에도 돌아왔겠다.

오랜만에 아주 포식할 각오로 비빔면까지 끓여 와 한 상 푸짐하게 차려 놓고 TV 앞에 앉았다.

- 오늘도 연일 국회에서는 속칭 '생환자'로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오호, 마침 딱 뉴스 나오네."

먹으면서 볼만한 프로그램 없나 채널을 돌리다 뉴스에서 멈춘 나는, 안 그래도 퀘스트로 떠나 있었던 세상이 또 어떻게 변했나 궁금해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단지.

- 정경우 국회 의원: 조금 더 확실한 교차 검증을 진행한 뒤에....

- 최성룡 국회 의원: 아직도 그런 때늦은 이야기뿐입니까?

- 정경우 국회 의원: 때늦은 이야기? 지금 말 다 했습니까!

"어휴."

딱히 건질 만한 구석은 없었다.

열 명이 모이면 열 명 다, 백 명이 모이면 구십 구 명이 반대를 위한 반대표를 던지며 무지성으로 헛소리를 떠들어 대는 게 작금의 국회지 않던가.

못해도 1~2달은 지나야 들어줄만 한 안건을 내놓으리라.

혀를 차며 고기 한 판을 더 구워 목구멍에 기름이 끼도록 식사를 한 나는 싱크대에 설거짓거리를 던져 넣고서 컴퓨터를 켰다.

슬슬 커뮤니티를 뒤져 보며 아이템 시장을 찾아볼 요량이었다.

"있긴 하려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주요 키워드로 생환자, 아이템, 시장 등을 교차해 가며 키보드를 두드리길 약 10분. 정보의 바다에서 헤엄치던 나는 얼마 걸리지 않아 원하던 페이지를 발견했다.

[아이템 캐리어/생환자의, 생환자에 의한, 생환자를 위한 전문 거래소]

대놓고 링크가 걸려 있어 못 찾으려야 못 찾을 수가 없었다.

딸깍―

바로 접속해 보니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은 기사와 스태프에 로브를 걸친 마법사의 이미지 아래로 무기, 방어구, 장신구, 기타 등 각 카테고리에 맞게 등급별로 분류된 항목과 해당 아이템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선 첫째.

[노멀/Normal]

[매직/Magic]

"나 말고도 매직 등급 아이템을 얻은 사람이 꽤 있나 보네."

등급 구분 표나 요청 사항란에 넘쳐 나는 매직급 아이템 구매 글들로 보아 '매직 등급'에 관한 자료 자체는 상세하게 풀려 있다는 것.

첫 번째에서 연계되는 두 번째.

그래서인지 매직 등급 아이템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구치고 있단 점이었다.

[매직 등급 검 삽니다: 금액 50,000,000/옵션에 따라 상향 조정 가능]

[매직 등급 방어구 있나요: 부위 상관없이 무조건 3천에 맞춰 드리겠습니다.]

[....]

기본 단가만 수천만 원.

어떤 사람은 무기든 방어구든 장비라면 모조리 1억부터라며 매물만 넘겨 달라는 매입 의사를 개시한 상태였다.

즉.

교섭만 잘한다면 거래 한 건으로 족히 십수 억도 받을 만하다는 소리였다.

"이야, 이거라면 굶어 죽을 일은 없겠다."

아니.

굶어 죽는 게 뭐야.

시기만 잘 맞추면 아이템 몇 개로 백만장자가 되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지난 날 어렴풋이 그려 보았던 한강 뷰 주택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이게 다 생명 수당이라고 봐야 하니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겠지만서도 확실한 돈벌이 수단이 생겼음에 나는 다행스럽단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튀어나온 뱃살만큼이나 마음이 든든해졌다.

* * *

다음 날 오전.

'움직여라, 움직여...!'

새벽 일찍 기상해 인망산(寅亡山) 정상을 찍으며 아침 운동을 마친 나는 마당에 서서 환두대도를 뽑아 들고 체내에 잠들어 있는 마력을 일깨우는 데 몰두했다.

고대하던 액티브 스킬도 마련됐겠다.

마력량이 워낙 미미해서 한두 번에 그칠지언정 필요하다면 자다가도 쓸 수 있도록 연습할 각오로 제멋대로 퍼져 있던 마력들에 내 의지를 전달했다.

'모여라!'

우우우우우웅―

입으로 외치지만 않았을 따름이지.

전심을 다해 부르짖는 명령에 어느 순간 체온이 올라간 듯 뜨거운 열기를 동반하며 잠잠하던 마력이 꿈틀거린다 싶자 그것들을 흔히 단전이라 부르는 배꼽 밑으로 모아 규합하고, 덩어리가 지면 한꺼번에 좌하단으로 끌어내 코어를 중심으로 원을 그린다.

사아아악―

사악―

수건 돌리기를 하듯이 두 번, 세 번, 네 번.... 몇 번이고 에너지를 돌린다.

그러다.

원하는 수준까지 가속이 붙었을 때.

'…지금!'

우상단으로.

우우우우우웅!!

태양보다 뜨겁게 타오르는 열기를 급격히 반전시켜 우측 어깨로 쳐올렸다.

동시에 일보를 내디디며 칼날을 곧게 세우고는.

"흐음, 하아아아아!!"

폭주 기관차가 되어 오른팔로, 오른팔에서 칼날로 전달된 응축된 마력을 양손으로 꽉 틀어쥔 환두대도로 쏟아부으며 재차 발을 뻗어 왼발로 대지를 굳건하게 밟아 지지대를 박아 넣고서 허공을 내리그었다.

그 직후.

파직―

…꽈르르르릉!!

마른하늘에 천둥이 울려 퍼졌다.

17화

"어...."

번갯불이 튄다 싶은 찰나에 휘몰아친 폭발은 대략 1m 가까이 되는 길이에 50cm 이상 파인 흉터를 새겼고, 진정 낙뢰가 할퀴고 지나간 양 변해 버린 현장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멍한 눈으로 전면을 응시했다.

이 정도로 강력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 했다.

광포한 벼락이니, 대륙 십대 도법이니 뭐니 하길래 한가락 하겠다는 기대감은 있었지만....

"실전에서 써먹을 수만 있으면 구울은 한 방 컷이네."

굳이 기동력을 제거하고 말 것도 없다.

당당하게 다가가서 슥 도 뽑고, 탁 휘둘러서, 펑 터트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동작이면 끝이었다. 아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겨 나갈 테니까.

물론.

상상을 현실에서 실현하기란 아직 요원한 일이다. 무력감이라고 해야 할지, 탈력감이라고 해야 할지는 몰라도 한순간에 모든 마력을 소모하면서 되돌아온 반동이 제법 컸거니와 고작 스킬 한 번 발동하는 데 걸린 시간이 얼추 1분이 넘는다.

이런 실력으로 스킬을 쓰겠다고 나댔다간 구울은커녕 좀비가 달려와도 못 막고 잡아먹힐 거다.

그러니.

"…수련이 많이, 아주 많이 필요하겠네."

끽해야 칼질 한 번으로 쓰러지는 어처구니없는 장면도 없애야 하고.

뭣보다 1분은 너무 길다.

10초.

이것도 맥시멈으로 잡은 것일 뿐.

"어떡해서든 5초 안쪽으로 줄여야 해. 그래야 실전에서 활용하지."

꽈아아아악―

다짐을 읊조리는 내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 * *

달력이 떨어져 나가고 어느새 귀환 후로 나흘, 뜨거웠던 여름의 빈자리를 선선한 가을이 채워 간다.

하나.

내 일과는 변함없었다.

기상하자마자 산악 구보로 체력을 기르고, 이어서 다양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육체를 강건하게 키운 후에 인망산 나무들을 베어 넘기며 도법을 갈고닦는 중이었다.

최근에는 무협지의 한 장면을 따 와 바람결에 밀려 떨어지는 나뭇잎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요격하는 훈련도 겸하고 있다. 팔찌 덕분에 상승한 인지력을 온전하게 갈무리하기 위함이었다.

스킬은.

"이제, 스쾃만― 아, 마력 찼네."

흐읍―

콰아아앙!

그냥 마력이 회복되면 시도 때도 없이 밥을 먹다가도, 똥을 싸다가도, 휴식을 하다가도 곧장 뛰쳐나가 뇌류를 토해 냈다.

어찌나 매달렸는지.

훈련장으로 쓰는 산기슭 한편이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쑥대밭이 됐다. 그 탓인지 요즘은 벌레들도 안 찾아온다. 괜히 놀러 왔다 휘말린 놈들이 갈려 나가자 소문이라도 난 듯했다.

딸깍―

딸깍―

"오늘은 뭐가 올라왔나."

침대 매트에 숨겨 둔 '찔러 부수는 모노케로스의 한손검'을 언제쯤 팔아야 좋을지 시기를 조율하고자, 자기 전에 아이템 캐리어 사이트를 들어가 장비 시세를 알아보는 것도 일과 중 하나였다.

시세는 한결같이 치솟고 있다.

천만 단위를 아득히 초월해 대부분 억대가 수두룩했고, 스크롤바를 내리다 보면 심심치 않게 수십억에 거래하자는 이들도 나타났다.

"어디 청성 그룹 회장님 아들이라도 되시나."

뭉게뭉게 끼어 가는 거품에 싱긋 미소를 지은 나는 전원을 끄고 일어섰다.

여덟 개에서 아홉 개씩 찍히는 0을 보고 있노라면, 기다리긴 뭘 기다리냐 당장 가서 팔아 치우고 오잔 악마의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혔으나.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야."

난 필사적으로 욕망을 가라앉혔다.

이 사이트가 겉만 번지르르한 개살구인지, 진짜 쓸 만한 매매처인지도 알 수 없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구매자에 대한 신뢰도가 딸렸다.

막말로 물건 팔러 나갔다가 칼에 찔릴지 누가 아는가.

만약을 고려해 일단은 최악의 경우에도 스스로를 지킬 무력부터 보유해야 했다. 그 전까지는 설령 거품이 꺼져 물가가 바닥을 치더라도 나서지 않을 작정이었다.

돈이 아무리 귀해 봐야 목숨이 먼저―

띠링!

[지원 요청 들어왔습니다.]

[10초 후 칼리야스 대륙으로의 이동을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10초]

"이런 썅."

이놈의 퀘스트는 왜 꼭 놀고 있을 때 뜨는 거냐.

생각을 마무리 지을 틈도 없이 공지로 빼곡한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나는 침대 머리맡에 벗어 두었던 투구를 눌러 쓰며 신발을 신었다.

['세트: 평범한 가죽 방어구'를 완성했습니다.]

[세트 아이템 효과가 발동됩니다.]

[현재 장비가 유지되는 동안 '모든 물리 공격에 대한 추가 방어력 +5%'가 지속됩니다.]

투구는 베개 옆, 신발은 침대 곁.

방어구 상·하의는 잠옷 대용에 무기는 죽부인처럼 끌어안고 잔다.

짐 가방은 늘 최상의 컨디션으로 맞춰 놓아 저번과 달리 불평불만을 투덜거리면서도 늦지 않게 무장할 수 있었다.

[남은 시간: 0초]

―번쩍!

* * *

팟!

스르르릉―

깜깜해졌다 밝아지는 시야.

나는 반사적으로 환두대도를 상체로 끌어당겨 출수할 준비를 마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주위를 돌아봤다.

필드는 널찍한 공터.

주변은 조용했―

번쩍!

번쩍!

'빛?!'

고요한 적막이 이르는 가운데 사방에서 느닷없이 새하얀 빛무리가 일렁거렸다.

숫자는 네 개.

혹시 마법적인 공격인가 싶어 방어 태세를 취하기 무섭게 완전한 형상을 갖춰 가는 휘광의 정체는.

"어? 사람?"

"누구, 세요?"

"흐읍!"

남자 둘에 여자 둘로 구성된 또 다른 '생환자'들이었다.

[지금부터 〈메인 퀘스트: 보호〉가 시작합니다.]

〈메인 퀘스트: 보호〉

* 검은 죽음으로 뒤덮인 칼리야스 대륙. 그러나 여전히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언젠가 찾아올 밀레스 제국의 지원군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으나, 소망이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일지니. 아콰 남작령 폰스(fons) 마을로 가서 꺼져 가는 희망의 불씨가 빛을 잃기 전에 가서 생명을 구하라.

* 특이 사항 1: 본 퀘스트는 다수의 지원자가 동시 진행합니다.

* 특이 사항 2: 본 퀘스트는 '종료 시점'이 존재합니다.

* 특이 사항 3: 살아남은 인원이 많을수록 보상이 올라갑니다.

* 남은 시간: 120시간 00분 00초

(172/172)

[미니맵이 활성화됩니다.]

['폰스(fons) 마을'의 위치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

어색한 공기와 기묘한 적막으로 휩싸인 일대.

나도.

네 명의 생환자도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다. 여럿이서 협력한다는 게 다들 처음인 게 원인이었다.

[남은 시간: 119시간 57분 13초]

[남은 시간: 119시간 57분 12초]

[남은 시간: 119시간 57분 11초]

[....]

그러는 사이 3분여가 지나가 버렸기에 결국 내가 나섰다.

시간제한이 없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지라 하염없이 줄어드는 1분 1초가 매우 매우 아까웠다.

퀘스트 등급을 높이려면 한시라도 빨리 폰스 마을에 도착해야 할 터.

"간단하게 통성명만 하고 슬슬 출발하시죠. 보셨다시피 시간이 없습니다."

특별히 나서는 성향은 아닌데, 물꼬를 틀지 않으면 영원히 침묵하고만 있을 느낌이라 스타트를 끊었다.

능력만 있다면야 이럴 게 아니라 빨리 가서 날름 독식하고프다만.

'내 주제를 알아야지.'

자기 객관화를 철저히 하는 인간의 명줄이 긴 법이었다.

"저는 오휘윤이라고 하고, 주 무기는 도에 투창도 할 줄 압니다."

적당히 공개해도 될 만한 선에서 운을 떼자.

"저는 정유림이에요. 주 무기는 활, 보조 무기는 없지만 양궁을 배워서 발목 잡을 일은 없을 거예요."

"최창조요. 무기는 도끼고."

"고진수, 창입니다."

"조은하라고 해요. 저도 도를 써요."

서서히 경계심을 풀고 자기 소개를 하는 네 사람.

여리여리한 20대 초반의 여성 정유림(활), 조폭이라고 해도 믿을 덩치의 30대 아저씨 최창조(도끼),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마른 체형의 고진수(창), 고양이상의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조은하(도).

정리하자면 원거리 하나에 장거리 하나, 근거리가 셋이라 조합은 나름 괜찮다.

그 외에 특기할 사항은.

'방어구 라인이 부실해.'

전원 빠짐없이 상의와 하의를 착용하긴 했는데, 그게 다라는 점이었다.

세 피스 이상 맞춘 인원은 활을 다루는 정유림이란 여자가 끝이고, 나머지는 어디서 구했는지 바이크 헬멧이나 군화를 신고 있는 상태였다.

파티 퀘스트의 특성상 단독 퀘스트보다 난도가 높을 거라 기왕이면 비슷한 레벨이길 바랐는데.

'쯧.'

어쩔 수 있나.

보강 방법이 없는 한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고 조심하는 수밖에. 나는 억지로라도 못 미더운 감정을 죽이며 미니맵을 쳐다봤다.

[남은 시간: 119시간 51분 33초]

이 와중에도 모래시계 속 모래는 비어 가고 있었다.

가야 한다.

"남은 이야기는 가면서 하시죠."

"대형은 누가...."

"내가 앞장서겠습니다. 이게 있으니까."

"최장조 씨라고 하셨죠? 부탁드릴게요."

"그러면 선두는 됐고, 아가씨는 중앙에. 창 든 분이 옆에서 보호랑 견제해 주시고 거기 두 분은 내 양옆으로 갑시다."

"그러죠."

우리는 금방 포지션을 짜고 지도를 보며 전진을 시작했다.

시원시원한 성격의 최창조가 경찰들이 쓸 법한 진압용 방패를 앞세우며 최선두에 서준 덕에 포메이션으로 말씨름을 할 일은 없었다.

"…쳇."

고진수 저 어린 녀석은 본인이 리더가 되고 싶었는지 최창조가 나서서 진두지휘를 하자 낯빛을 구겼으나, 반발해 봐야 좋을 게 없음을 아는지 한숨을 내쉬면서도 뒤를 쫓아왔다.

* * *

행군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저마다 사나흘 치의 생필품을 등에 지고 있는 데다 언제 좀비가 튀어나올지 몰라 사주 경계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레 보폭이 줄어든 탓이었다.

'30분, 늦을 거 같은데.'

이에. 타이머와 전방을 번갈아 보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남은 시간: 118시간 42분 12초]

[남은 시간: 118시간 42분 11초]

[남은 시간: 118시간 42분 10초]

[....]

벌써 한 시간 하고도 20분이 흘렀다.

총 5일짜리 퀘스트인 걸 감안하면 여전히 넉넉하다고 볼 수 있지만, 요번에도 S 랭크를 노리는 나로서는 영 거북이걸음처럼 느껴졌다.

페이스 조절과 성적.

'어렵네.'

두 선택지에서 고심을 거듭하던 차였다.

―바스락!

―바스락!

"잠시만."

정면을 열두 시로 두었을 때 두 시 방향에서 풀잎 바스러지는 노이즈가 고막을 두들겼다. 더군다나 규모도 꽤 크다.

적게 잡아도 20~30여 마리.

다만 장비 이상으로 인지력에서도 격차가 나는지.

"갑자기 왜 그러는 거요?"

최창조를 포함한 사람들의 반응은 물음표로 가득했다.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까.

아니지.

구태여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이유가 없구나.

"좀비입니다."

"예?"

"제 능력 중 하납니다. 규모가 꽤 커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고 쓸데없는 미사여구 대신 '능력 중 하나'로 질문을 퉁 쳤다.

때론.

"아, 그렇구먼. 방향은?"

"저쪽입니다."

온갖 주절거림보다 짧고 굵직한 한마디가 더욱더 효과적이었다.

오히려 문제는.

"여기서 싸우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장소를 옮겨서 사냥하는 게―"

"뒤로 물러서는 게 어떨까요? 거리가 있으니 쓸데없이 위험하게 싸우지 않아도 되잖아요."

"…예?"

"저도 그 편이 좋아 보이네요. 두 시 방향이라고 하셨으니 반대편으로 경로를 꺾으면 될 것 같아요."

"차라리 확 틀어 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모두를 납득시킨 뒤에 일어났다.

18화

"…예?"

당황스럽고도 황당하다.

그게 저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의 현 심정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다고 해야 할까? 진짜 게임처럼 딱딱 나누기는 뭐하지만, 어쨌든 방패 전사를 필두로 하는 근접 계열부터 원거리 공격수까지 조합도 나쁘지 않으니 지형지물만 잘 이용한다면 20~30마리는 충분히 사냥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한데.

"아니면 뒤로 쭉 물러나서 좀비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까요?"

"음, 그래도 되겠네요. 평소 보폭을 기준으로 하면 대충 30분 정도?"

"퀘스트에 지장이 있진 않겠죠?"

"아아, 맞네. 마을에 도착하는 게 먼저니까 기다리는 건 안 되겠고, 마주치기 전에 더 빨리 움직이는 게 낫겠습니다."

"...."

이 자식들의 머릿속엔 '사냥'이란 개념이 전혀 없었다.

정확하게는, 주어진 퀘스트 말고는 어떤 행동도 일절 하고 싶지 않은 의지가 팍팍 풍겼다. 그야말로 지독한 생존주의랄까.

그게 틀렸다는 소린 아니었다.

단지, 승리할 확률을 따졌을 때 분명 승산이 있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물러나려 한다는 점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저런 식으로 굴다간 현재는 편할지 몰라도 미래는 암울해질 테니.

'젠장.'

그 당혹스러운 결론에 연속 S 랭크를 노리던 나는 즉각 반박과 반론을 제기하고팠으나, 이내 슬그머니 혀를 찼다.

단호한 눈빛과 단호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단호한 말투를 통해 저들의 마음을 돌릴 기미가 1도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단독으로 칼을 뽑을 수도 없었다. 누군가의 말대로 이 퀘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마을 사람들의 생존'이었으니까.

무엇보다 목표 지점 도달에 중점을 둬야 했다.

고로.

'생각을 좀 해 봐야겠어.'

속내를 감추고 입을 다물었다.

홀로 돌아다니면서도 메인 퀘스트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방도를 모색할 때까진 튀지 말자.

난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신 진군 속력을 높이자는 쪽에 힘을 실었다. 타임 리미트도 걸려 있으니, 백이면 백 늦는 것보단 이른 게 나았다.

"좋네요. 그러면 3 대 2, 지금부터 최대한 빠르게 가 보죠."

* * *

타다다다다닷―

나, 정유림, 최창조의 의견을 기반으로 다수결의 원칙을 내세워 느릿하기만 하던 거북이걸음을 탈피해 한 무리의 경주마가 된 우린 전력 질주를 하다시피 하며 미니맵의 화살표를 따라 뛰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사주 경계는 온전히 인지력에서 월등하게 앞서는 내가 전담하게 됐다.

정유림과 예상외로 고진수까지.

튜토리얼 내에 마련된 영물 중 하나인 '집요한 뱀'을 처치한 사람이 둘이나 더 있었지만, 이쪽은 아이템도 아이템이거니와 애당초 경험치 획득량의 갭 차이가 무척 컸다.

여하간 그 덕택에.

"네 시, 열 구 이상."

"썅, 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거냐, 후. 저기로 갑시다!"

우린 단 한 번의 전투 없이 쭉쭉 나아갔고.

"…드디어 나왔네."

"응? 뭐가 또 나왔― 아."

"목책! 목책이야!"

마침내 주 무대가 될 마을 폰스(fons)를 둘러싼 성벽에 다다를 수 있었다.

"빨리 가죠?!"

"칼리야스 대륙이라. 서양 사람들처럼 생겼으려나?"

"그러지 않겠어요?"

"가 보면 알겠죠."

목적지에 당도함과 동시에 긴장이 풀린 사람들이 팽팽하게 조였던 다리 근육을 풀어 주며 두런두런 담소를 나눈다. 타국, 타 대륙을 넘어 타 차원의 인류일지도 모르는 이들과의 만남이라 다들 표정에 기대감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세계인들과의 첫 접촉은 썩 아름답지 않았다. 방문 목적을 설명하기도 전에.

"저기 그 놈들이 또 온다! 공격해!"

"어, 어디?"

"저기! 빨리 공격해! 아직 목책 수리가 덜 끝나서 목책에 붙으면 위험하다!"

"조지! 크루셀린! 따라와!"

투우웅―

퉁―

"미, 미친! 다들 내 뒤로 물러나!"

날카롭게 벼려진 화살이 우리 대가리를 물어뜯으려 했으니까.

아무래도.

"괴, 괴물들이 방패를 쓴다!"

"그게 뭔 개소리야!"

"저기 보라고!"

오해를 산 것 같았다.

* * *

"죄송, 죄송합니다. 저희는 괴물인 줄 알고...."

"시국이 시국이니 그럴 수도 있죠. 다친 사람 없으니까 과거는 잊고 간단하게라도 인사나 합시다."

한동안 화살 세례를 피해 뒷걸음질 치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최창조의 함성으로 우리가 지원군임을 피력하고 나서야 무사하게 입성을 마친 우린 곧 폰스 마을의 촌장과 마주해 통성명을 나눴다.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글은 안 읽히더니 말은 또 통했다.

아무튼.

"아, 예. 제가 이곳의 촌장을 맡고 있는 라이트입니다."

허리춤에 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은 낡은 철검 한 자루를 매어 둔 폰스 마을의 촌장은 겨우 30대 초반의 젊은 남성이었다.

그에게 전해 듣기로 폰스 마을은 상당히 위급한 형편이라고 했다.

생존자 172명 중 대다수가 노인과 여성에 어린아이들인데 반해 전투 기용 인원은 30여 명이 전부에 그마저도 절반가량은 제대로 된 무구 없이 농기구를 들고 있는 터라 실질적으로는 촌장을 비롯한 십여 명이 최선이었다.

이런 조잡한 수준으로 어찌 버틴 걸까.

필시 맹수의 침입을 막고자 설치해 둔 목책이 없었다면 이미 파국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더불어.

뒤쪽이 절벽으로 막혀 있다는 환경적 요인도 컸다. 튜토리얼 스테이지와 동일한 호리병 형태의 필드라 양쪽으로 방벽을 쭉 세워 놓고 정면을 틀어막으면 설령 수백 단위의 좀비가 몰려와도 무리 없이 방어해 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누가 여길 골랐는지 참으로 현명한 인물이었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예. 길지는 않지만, 앞으로 당분간 여러분들을 도와 좀비 놈들을 싹 쓸어버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최창조가 대표로 라이트와 악수하며 향후 있을 방어전에 힘을 보태겠단 의사를 전달했다.

이에.

낯선 방문객으로 여겨 거절하면 어쩌나 우려했는데, 의외로 라이트나 마을 주민들은 우리의 합류를 열렬하게 환대했다. 한 손, 한 손이 모자란 처지라 다소 뜬금없더라도 전체의 안녕을 위해 약간의 의심쯤은 감수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식사,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

"잘됐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호화롭진 않더라도 넉넉하게 차려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야 감사하죠."

"아닙니다. 가는 길에 여러분들이 쓰실 집도 내어 드리겠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비어 있는 집이 꽤 됩니다."

* * *

"이제 어쩐다."

급조된 검사소에서 좀비에게 물린 상처는 없는지 체크받고 난 뒤, 라이트와 주민들이 끓여 준 스튜 비스름한 식사로 배를 채운 저녁.

짐을 점검하며 배정받은 독채에 들어온 나는 본격적으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숙고의 시간을 가졌다.

이대로 마을 안에만 처박혀 있다가는.

"투창질을 아무리 해 봐야 A급은커녕 B급 이상도 받기 힘들겠지."

남들에게는 그거만 해도 어디냐 싶겠지만, 나는 결코 아니었다.

무조건 S.

그 밑으로는 절대 안 된다.

"그러려면 돌고 돌아 생명의 샘부터 찾아야겠지."

흐음.

과연 이번 전장에도 '생명의 샘'이 있을까?

"물어보면 알겠지."

스으윽―

나에게는 자그마한 배경지식조차 없는 미지의 공간이지만, 마침 누대에 걸쳐 이곳을 터전으로 삼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폰스 마을의 주민들.

그들을 통한다면 '생명의 샘'에 관한 직접적인 정보 혹은 작지만 알찬 힌트를 얻을 수 있겠지.

"촌장 집은… 됐고, 어르신들이 어디 있으려나."

짐을 꼭꼭 숨겨 두고 나온 나는 주민 중에서도 특히 오래 살아온 노인들을 수소문했다.

갑작스러운 탐문에 의아해하는 이들도 생겼으나, 내가 '마을 방어를 위한 정보 수집'이란 명분을 앞세우니 손수 안내까지 해 준 덕에 오래지 않아 무려 50년간 약초만 캐 왔다는 노인과 대면할 수 있었다.

"하르크외다."

"오휘윤이라고 합니다."

"특이한 이름이군. 그나저나, 날 보고자 한 이유가 뭔가."

"혹시 생명의 샘을 아십니까?"

"생명의 샘?"

"마시면 상처가 빨리 낫고, 또 피로가 사라지는―"

라이트에게 적극 협조하라는 말을 들었다는 약초꾼 하르크는 내 질문에 한동안 관자놀이를 누르더니, 불현듯 무릎을 탁 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음, 인제 보니 그걸 말하는 겐가 보구먼. 우리끼리는 위고르의 샘이라고 불러서 헷갈렸네. 활력을 북돋는 샘물이란 뜻이지. 그게 없었다면 저 망할 것들과의 싸움도 버텨 내지 못했을 게야."

"위고르의 샘...."

"고대어에서 따왔다는데, 내게도 까마득한 예전이라. 아무튼 자네가 궁금해하는 그것과 똑같은지는 확실치 않으니 한번 가 보게. 마을 뒤편의 절벽에 조성된 샘물이 바로 위고르의 샘이니까."

"아!"

원하던 내용을 담고서.

* * *

쏴아아아아아―

"저깁니다."

하르크가 붙여 준 손자를 따라가길 5분여 만에 나는 곧 웅장하게 뻗은 절벽 아래로 졸졸 흐르는 작은 폭포를 목격하게 되었다.

보기만 해도 청명함과 시원함을 선사하는 물줄기.

나는 뭉그적거릴 거 없이 후다닥 달려가 절벽 위에서부터 떨어져 고여 웅덩이를 이룬 약수를 양껏 머금었다.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는 위고르의 샘물.

'제발!'

맞을까 틀릴까.

부디.

맞았으면 좋겠―

꿀꺽!

['생명의 샘물'을 복용했습니다.]

[모든 해로운 효과가 소멸합니다.]

[10분간 자연 치유력 및 피로 회복 속도가 200% 상승합니다.]

"으읍!!"

맞았다.

이놈.

틀림없는 '생명의 샘'이었다.

* * *

똑똑―

"라이트 촌장님, 계십니까."

기적의 포션을 확보하고서 되돌아온 나는 하르크에게 감사를 표하고 라이트의 집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신지...."

"하나 말씀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좀비들이 밤낮 없이 나타나는 탓에 평상시에도 갑옷과 칼을 떼어 놓지 않는 듯 늦은 저녁임에도 무장을 갖춘 그에게 나는 빙빙 돌리지 않고 말했다.

"내일부터 저는 방벽을 나가서 싸울 예정입니다."

라고.

당연하게도 후폭풍은 대단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바깥에는 놈들이 득실거립니다!"

당최 뭔 개소리를 지껄이냐는 듯 불같이 화내는 라이트.

멀쩡한 안전지대를 놔두고 사지로 나간다고 하니 이해가 안 된단 얼굴이었는데, 다른 것보다 급작스레 방문한 5인 중 장비 상태로는 단연 최고인 내가 멀쩡한 안전지대를 놔두고 사지로 나간다고 하니 더더욱 붙잡아 두고픈 기색이었다.

"절대! 절대 안 됩니다!"

뭐.

대강 상정해 두었던 그림이라 나는 물러서지 않고 가져온 비장의 한 수를 꺼내 들었다.

"마을에 식량이 부족하다고 들었습니다."

"예? 갑자기 그건 왜―"

"나간 김에 식량을 구해 오려고 합니다. 밀레스 제국의 지원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이상, 이대로는 모두 굶어 죽을 겁니다."

라이트로서는 쉽사리 거부하지 못할 구실을.

위력은.

"제가 구해 오겠습니다."

"...."

굉장했다.

극구 반대 의사를 표하던 라이트가 일순간 머뭇거리더니.

"후, 좋습니다. 오휘윤 님이라고 하셨죠. 믿겠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그의 음성 사이로.

띠링!

['폰스 마을의 촌장'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메인 퀘스트: 보호〉에 〈서브 퀘스트: 식량 확보〉가 추가됩니다.]

'역시...!'

고대하던 선율이 내 귓가를 간지럽혔으니 말이다.

19화

이거였다.

마을 소속도 아닌 내가, 제멋대로 굴어도 될 사이였음에도 굳이 예의를 지키려 했던 까닭.

촌장쯤 되는 위치라면 꼭 감투를 걸치지 않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대륙인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서브 퀘스트의 발원지가 될 수 있을 거라 여겼으니까.

해서 일부러라도 친절하게 대했는데 추측이 제대로 들어맞았다.

'나이스.'

나는 자꾸만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감추려 억지로라도 들뜨는 감정을 억누르며 라이트에게 짐승들을 잡아 와 보겠노라고 대답하며 대화를 마쳤다.

…가.

문득 이렇게도 되나 싶어 한마디를 더 얹었다.

"혹시, 식량 말고 더 바라시는 일이 있습니까?"

라고.

솔직히 말해서 방금은 그저 '좀비로 인해 고립된 마을'이니 자연스레 '식량이 부족할 공산이 높지 않을까?' 하고 짐작해 찔러 보기식으로 서브 퀘스트를 따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냥 운이 좋아 얻어걸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라이트라는 인물이 가진 고민거리가 또 있다면, 또 다른 추가 임무를 습득하는 것도 가능하리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그리고.

"음.... 바깥에 나가신다면 하나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습니다."

예측은 적중했다.

"제 아버지, 아버지를 죽여주셨으면 합니다."

띠링!

['폰스 마을의 촌장'의 과거를 전해 들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보호〉에 〈서브 퀘스트: 뒤늦은 안녕〉이 추가됩니다.]

〈서브 퀘스트: 뒤늦은 안녕〉

* 아콰 남작령 폰스(fons) 마을의 촌장은 본래 라이트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겨우 50을 바라보는 정정한 아비가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이제 갓 서른에 접어든 라이트가 촌장직을 일임하게 된 데에는 '좀비'가 끼어 있었다.

그렇다.

갑작스레 발생한 재앙에 맞서 마을 사람들을 구하려 동분서주하던 아비 클린트가 결국 좀비에 물려 버린 것이다.

치열한 전투 끝에 팔을 물렸음에도 마을을 위해 미끼가 되겠다며 몰려오는 좀비들을 이끌고 엘루비에스(ēlúvĭes) 협곡으로 사라진 클린트. 지난 노력에 대한 보상은 고사하고 평안한 죽음조차 맞이하지 못한 그런 아비의 눈을 이제라도 감겨 주고픈 자식의 부탁을 들어주자.

(0/1)

[〈서브 퀘스트: 뒤늦은 안녕〉의 진행을 위해 미니맵이 활성화됩니다.]

['폰스(fons) 마을: 전 촌장 클린트'의 위치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알겠습니다. 가급적 빨리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목숨입니다. 절대 무리하지 마십시오."

"그러죠."

짧은 일화.

한껏 축약되었으나 그만큼 응축된 슬픔이 배어 있는 과거사에 나는 웃음기를 싹 지우고 사뭇 진지한 눈으로 요청을 받아들이며 인사를 나누고 그와 헤어져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라이트에게서도 성공했으니.

다른 주민들에게도 일일이 방문해 따로 요구하고 싶은 사항이 있는지 물어보고 다닐 작정이었다.

라이트를 제외하고 남은 171명을 빠짐없이 만나 봐야 하는 작업이라 과연 5일 만에 마무리 지을 수 있을는지는 의문이다만.

"힘닿는 데까지만이라도 해 보자."

설령 중간에 포기하거나 실패할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일단은 적금처럼 적립해 두며 랭크 업의 발판을 늘려 놓는 것이 나아 보였다.

그리 각오를 다진 나는 장장 두 시간여를 활보하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숙소로 복귀해 잠을 청했다.

아까 '생명의 샘'을 들렀던 덕분인가?

스타팅 포인트에서 이곳 폰스 마을까지 이동해 오는 과정을 거치고서 얼마 쉬지도 못하고 발에 땀 나도록 돌아다닌 탓에 피곤할 법도 한데, 어째서인지 피로는커녕 날아갈 듯이 몸이 가뿐했다.

흔히 자라나는 아이를 보며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부모처럼.

[〈메인 퀘스트: 보호〉에 〈서브 퀘스트: 레캡투스 채집〉이 추가됩니다.]

[〈메인 퀘스트: 보호〉에 〈서브 퀘스트: 열 개의 수급〉이 추가됩니다.]

[〈메인 퀘스트: 보호〉에 〈서브 퀘스트: 목책 보수〉가 추가됩니다.]

[....]

보기만 해도 든든해지는 핸드폰 화면 속 메시지들 덕택이었다.

* * *

"저, 저는 마을이 안정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렇군요.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어느덧 점심을 지난 오후.

기상하자마자 뛰쳐나가려던 계획을 잠시 보류하고 집집마다 들르기를 반복한 나는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갈 무렵, 메인 퀘스트에나 집중해 달라는 171번째 주민과의 응답을 끝으로 기어이 모든 이들과의 이야기를 마쳤다.

내가 반나절 안 돼 세워 둔 플랜을 어그러뜨리고 서브 퀘스트 수확에 전념한 사유는, 각각 독립적으로 보였던 임무들을 자세히 살펴보자 의외로 서로 연계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가령.

영원한 안식을 약속한 전 촌장 클린트의 소재지가 엘루비에스(ēlúvĭes) 협곡인데, 약초꾼 하르크가 원하는 상처 연고의 주재료인 레캡투스(recéptus)의 자생지 또한 그곳이라는 식으로.

따라서 좀 늦게 출발하더라도 차라리 이쪽을 먼저 클리어하고자 연결되는 것들끼리 맞춰서 목록화하는 데 열중했다.

그 결과.

〈동시 수행 가능한 퀘스트 목록〉

[장소별]

[1. 엘루비에스 협곡: 뒤늦은 안녕/레캡투스 채집]

[2. 마을 입구 근처: 목책 보수/식량 확보/열 개의 수급/가보를 찾아 주세요.]

[3. 마을 인근: 아모르의 꽃/친척의 소식/정찰]

"하나, 둘, 셋… 여덟, 아홉 개. 메인 퀘스트까지 더하면 총 열 개. 좋아."

이런 형태로 카테고리가 완성됐다.

짐 가방에서 꺼낸 메모장을 토대로 작성한 미션 리스트를 쭉 훑어본 나는 만족스럽게 끄덕이며 환두대도를 허리춤에 맸다.

'생명의 샘'에서 샘물도 넉넉하게 담아 왔겠으니.

곧장 제일 시급하면서도 간단한 '목책 보수'를 시작으로 하달받은 일거리를 완수할 차례였다.

"가자."

* * *

"그것만 옮기면 끝이야!"

"예, 갑니다! 흐읏― 차!"

"어이구, 이 형씨 생긴 거 하고 달리 힘이 대단하구먼."

"한센도 못 당하는 마당이니께 말이여. 뭘 먹고 자랐길래 저런 힘이 나오는 겨?"

"낸들 알겠나? 그보다 수고했네! 자네 덕에 금방 처리했어. 도와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띠링!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목책 보수〉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부서지고 허물어진 목책에 나무를 덧대고 근방에 수두룩하게 널브러져 있던 좀비 사체들을 싸그리 치우는 것으로 첫 번째 서브 퀘스트가 완료되었다.

비록.

"근데 줄 게 이거밖에 없어서 어째."

"괜찮습니다. 목책이 튼튼해야 저도 안전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딱히 무얼 바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래도 내 미안해서 그러지."

"정 미안하시면 이따 돌아올 때 문만 후다닥 열어 주십쇼."

"하하하! 그거야 뭐 당연한 거 아니겠나? 촌장님께 말씀 들었네. 위험하겠다 싶으면 돌아오게."

"예.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주어지는 거라고는 튜토리얼과 대동소이한 소량의 경험치와 노동자들끼리의 친근한 관계가 다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언젠가 생각했었듯이, 모래알 같은 티끌이 모여 장엄한 태산을 이루는 법이었다.

"잘 다녀오게!"

"예, 이따 뵙겠습니다."

나는 땀을 닦으라며 내준 헝겊을 돌려주며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목책 보수'에 이은 다음 퀘스트는 '열 개의 수급'과 '식량 확보'.

기왕이면 시간이 제일 오래 걸릴 듯한 엘루비에스(ēlúvĭes) 협곡행을 우선적으로 수행하고 싶었으나, 소원 수리 및 목책 보수를 끝맺고 나니 두세 시간 뒤면 노을이 질 터였다.

하여.

"좀비 수급을 구하고 사냥을 나서 보자. 되면 아모르의 꽃도 수색해 보고."

오늘은 마을 주변을 돌며 2번 항목부터 진행할 심산으로 열린 문을 나섰다.

- 그러게요. 그 사람은 대체 뭘 하는 건지.

- 원래 어딜 가나 튀는 놈들이 있기 마련이잖습니까? 우리끼리라도 잘해 봅시다, 유림 씨. 그나저나 유림 씨는 서울에 사신다고 그랬죠? 저도 강남에 사는데, 이번 퀘스트 끝나고 나면 밖에서 술이나 한잔할까요?

- 저 남자친구 있다니까요.

- 생사를 오간 전우들끼리 모여서 한잔하는 건데 어떻습니까. 설마 남자친구가 그 정도도 이해 못 하는 사람이라면, 제 생각에는....

"경계라도 서러 나오는 건가."

다시금 육중한 소음을 내며 닫히는 목책 너머로 정유림과 고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음성을 듣고 있자니, 대충 두 명씩 조를 짜서 보초라도 서려는 듯했다.

극한의 생존주의자들치고 꽤나 적극적인 자세였다.

* * *

그어어어어어!!

으어어어어어!

"그래, 나도 반갑다."

수백 명의 산 자들이 풍겨 대는 생기(生氣)를 맡고 마을 주위로 몰려드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왔던 길을 거슬러 오르길 대략 10분여 만에 한 무리의 좀비들과 마주친 나는 팔을 휘저으며 달려드는 놈들을 상대로 선제공격을 가했다.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내리긋는 대각선 베기.

그 안에.

이그니스(ignis) 류(流).

섬광(閃光).

"흐읍― 하아아아아!!"

파직―

벼락을 덧대어.

꽈르르르릉!!

전심전력으로 매달려 캐스팅 타임을 30초대까지 줄인 낙뢰가 우렛소리를 동반하며 칼날을 타고 전방으로 뻗어 나간다.

그 이펙트는 수련마다 과녁으로 삼았던 허수아비나 짚단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비명.

그어어어어어!!

그어어어억!!

공포와 통각을 잊은 언데드(Undead)의 목구멍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으니까.

흔히 벼락에는 파사(破邪)의 공능이 담겨 있다고 한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귀신 퇴치 도구 중 최고로 치는 것도 동일한 의미에서라던가?

그 풍문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털썩―

털썩―

"미쳤네."

확실한 건 열댓 마리에 달하던 좀비들이 단 한 수에 깡그리 쓸려나가는 걸로 보아 '이그니스 류'의 파괴력이 내가 상상하던 것 이상이라는 점이었다.

구울?

인제 보니 구울'들'이 떼로 들이닥쳐도 잘만 하면 일격에 박살 내 버릴 느낌이었다.

문제는 압도적인 대미지에 걸맞게 소모량이 무지막지해서, 현시점의 내 마력량으로는 한 번만 발현해도 바닥이 난다는 것.

"마력 전이석을 수소문해 봐야 하나."

조루도 이런 조루가 없는지라, 마력 전이석이든 여타 방식으로든 총량을 늘릴 방안을 간구해 봐야 할 거 같았다.

이만한 공격기를 '마력 부족'이란 이유로 묻어 둘 수는 없으니.

"약초꾼 어르신이라면 아시려나."

정 안 되면 '아이템 캐리어' 사이트를 이용해서라도 마력을 올려놓겠다 읊조리며 가져온 보따리에 좀비들의 머리를 잘라 담았다.

대부분이 전류에 불타 버려 건진 거라고는 서너 개밖에 없었지만.

"흐으음, 흠, 흠, 흐으으음."

가진 무기의 성능이 엄청나다는 걸 확인했기에 수거하는 내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