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FANTASIAAPOCALIPTICA / Chapter 1 - 1-10

FANTASIAAPOCALIPT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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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10

1화

[ 튜토리얼 ]

옛말에 이르길.

모든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하던가?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래에 응하시겠습니까?]

[신중하십시오.]

[모든 것이 끝나는 날까지 선택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Y/N]

"으아이에수까?"

―툭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10초 후 이동됩니다.]

[남은 시간: 10초]

적어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나는 오늘 밤.

"으잉?"

역사의 반환점을 맞이했다는 것.

* * *

"아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인턴이 새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게 녀석의 탓은 아니다만, 여하간 신입 입사 기념 회식이라는 명목으로 불금도 아닌 수요일날 1차와 2차에서 이미 십수 병을 마시고도 모자라단 팀장 놈의 개소리를 못 이겨 넘어간 3차 호프집에서 겨우 살아남아 자취방에 도착해 침대에 누웠던 마지막은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가 떠오르지 않는 걸로 보아 이번에도 각자 너덧 병 가까이 들이부은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거."

하.

도대체 이게 몇 번째인지 욕이 절로 나온다.

더군다나.

폭음에 곁들이는 안주처럼 중간중간 궁금하지도 않은 팀장 놈의 가정사와 개인사를 주제로 한 푸념을 들어 주고 달래 주는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느라 정신적으로 너무나도 피폐해져서 육두문자를 안 날리려야 안 날릴 수가 없다.

뭐.

제일 빡치는 건 이러고도 출근하고 나면 고과 점수를 위해 웃으면서 팀장 놈 똥꼬를 빨아 줘야 하는 내 비참한 인생이지만.

"하."

두통에 시달려 진한 짜증을 토해 낸 나는 손을 뻗어 물을 찾았다.

언제였더라.

날짜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기상하자마자 물을 마시는 게 건강에 좋다길래 따라 하다 보니 습관이 됐다.

…그런데.

사락―

사락―

침대 옆 책상에 놓여 있어야 할 2L짜리 생수통은 어디 가고, 아까부터 까슬거리는 이 느낌은 뭐지?

팔을 휘적거릴 때마다 살갗을 스쳐 지나가는 낯선 감촉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찡그려졌다. 술김에 이상한 거라도 주워 온 건가 싶어서였다. 한껏 미간을 구긴 채로 눈을 뜨던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게 보인 까닭이었다.

그것은.

파릇파릇하고 싱그러운 '잡초'였다.

초록빛 바탕에 투명한 이슬을 머금은 들풀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중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름 모를 풀떼기 뒤로는 모래와 바위, 심지어 뿌리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성인 남성 팔뚝보다 굵은 거대한 나무 밑동까지 어우러진 광대한 수림이 펼쳐져 있었다.

"이게, 대체...."

그 어처구니없는 풍경에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설마.

나 어제 밖에서 잤나?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다 문득 침대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자취방 인근에 산책용으로 조성되어 있던 공원 잔디에 드러누웠던 건가 싶었다.

하나.

안타깝게도 이것 역시 틀린 추측인 듯했다.

적어도 내가 아는 공원이라면.... 끄트머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초목이 늘어서 있지는 않았으니까.

"...핸드폰, 핸드폰!"

그 기이한 장면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황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구조.

납치를 당한 건지, 실족 사고를 겪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어쨌든 112든 119든 되는대로 전화해서 살려 달라고 빌어야 했다. 다행히 핸드폰은 바지 오른편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충천을 안 해 둬서 배터리가 간당간당하기는 힌데, 어차피 전화 거는 덴 1%면 충분했다.

[통화권 이탈 지역]

"아."

이런 엿 같은 문제만 없었다면 말이다.

화면 상단에 떡하니 자리 잡은 송수신 불가 표시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텅 비어 있는 공터에서 깨어난 뒤로 어느덧 30분여가 훌쩍 흐른 시각.

새벽 다섯 시를 가리키는 핸드폰과 달리 점심나절인 듯 쨍쨍해져만 가는 숲 한가운데에 갇혀 수백 통의 전화를 걸던 나는 비로소 포기라는 단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이잉―

11%였던 배터리가 바닥나도록 붙들고 있었는데도 연결되지 않는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길 원한다면, 스스로 걸어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걸.

하면.

어디로 가야 하지?

흡사 조각배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듯한 형국이라 뭘 어째야 할지 막막해서 도통 올바른 판단이 서질 않았다.

딱.

그러던 참이었다.

띠링!

"…응?"

동서남북.

사방을 이리저리 번갈아 보던 차에 느닷없이 맑은 종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익숙한 음률.

주중이고 주말이고 '업무'라는 명목하에 연락해 대는 팀장 놈으로 인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야만 했던 문자 알림음이었다.

그런데.

핸드폰 배터리 다 쓰지 않았던가? 의아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꺼낸 나는, 이내 검게 물든 화면 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목도할 수 있었다.

글자.

[모든 지원자가 입장했습니다.]

[지금부터 〈튜토리얼: 생존 일지〉를 시작합니다.]

〈튜토리얼: 생존 일지 (1)〉

* 싸워 승리하십시오.

(0/1)

보다 정확하게는 글자와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이었다.

"이, 이게…."

두 눈으로 똑똑히 전파가 안 잡히는 것도 확인했고, 이를 무시하다 기어이 배터리가 방전된 것도 확인했다.

한데.

이건 어떻게 출력된 걸까.

게다가.

이 화면은 미리 설정해 두었던 자동 꺼짐 기능도, 직접 누르는 전원 키도 먹히지 않았다. 아예 박살을 내지 않는 한 영원토록 켜져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한 까닭에 자연스레 가슴 한편에서 싹튼 불안감의 씨앗이 점점 커져만 간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돌이켜 봤을 때.

〈튜토리얼: 생존 일지 (1)〉

* 싸워 승리하십시오.

(0/1)

아주 높은 확률로, 아니 그냥 100% 이 내용대로 흘러가게 될 게 분명했기에.

"개 갵은...."

두려움에 못 이겨 말꼬리를 흐린 나는 홱홱 주변을 돌아보며 경계했다.

신의 장난인지 악마의 농간인지.

내가 뭔 잘못을 했길래 이런 꼴에 처했는지는 이해가 안 되지만,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까지 짓밟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스윽―

급한대로 튼튼해 보이는 나무 막대기도 굵직한 걸로 챙겨 들며 경계하기를 대략 10분여.

긴장된 가운데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릴 무렵.

저벅―

저벅―

"...!"

조용하던 숲속의 침묵을 깨고 정체불명의 존재로부터 발현된 발소리가 바람을 타고 실려 왔다.

조금씩, 조금씩 볼륨을 높이며.

짐승? 사람? 괴물?

미지에 대한 공포에 온갖 망상이 난잡하게 그려졌다 소멸하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스으으윽!

저 멀리 수풀을 헤치며 커다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앞머리가 반쯤 까져 이마가 반짝거리는.

"사, 사람?"

그 미지의 정체는 40대 중후반의 '아저씨'였다.

옷이 약간 해지기는 했어도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에, 극한으로 치솟았던 긴장감이 확 하고 풀렸다. 무의식적으로 상상했던 광기 어린 늑대 무리라든가 침을 질질 흘리는 호랑이 등의 맹수와는 거리가 상당한 탓이었다.

한편으론.

저 아저씨도 나와 같은 부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지원자가 입장했다.'라는 말인즉슨, 최소 2인 이상이라는 뜻. 만약 그런 거라면 저쪽도 비슷한 처지일 터이니 서로 합심해야겠다 싶어 일단 입을 열었다.

내심.

배불뚝이 중년 남성 정도는 돌변해도 이길 수 있다는 안일함도 끼어 있었다.

"아저씨!"

"...."

이런저런 이유가 더해져 별안간 울려 퍼진 외침에 남자의 눈길이 이쪽으로 향했으나, 무어가 마음에 안 드는 지 대답이 없다.

예전 주민 센터 사회 복무 요원 시절에 응대하던 민원인들처럼 공손하게 선생님이라고 불렀어야 했나?

쓸데없는 잡념을 털어 내며 재차 물음표를 던지던 그때였다.

"저, 아저씨?"

번쩍!

난데없이 흐리멍덩하던 동공을 부릅뜬 남자가.

…그어어어어어어!!

"발?"

피범벅이 된 아가리를 들이밀며 돌격해 오기 시작한 것은.

그어어어어!!

"아, 아아...?"

이성을 잃은 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진격해 오는 아저씨의 눈동자에 시린 지독한 살의(殺意)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여태껏 접해 보지 못했던 적대감에 몹시도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불쑥.

누군가 알려주기라도 한 것처럼 저 아저씨가 핸드폰 화면에 떠있던 '싸워 승리해야 할 대상'이란 깨달음이 찾아왔다. 10분 여만에 대면한 유일한 대상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나, 나는 끝끝내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지 못 하고 등을 돌렸다.

차라리 짐승이나 괴물이었다면 모를까.

같은 인간을 때린다는 것은 굉장한 각오를 필요로 했고, 보통의 인생을 살아온 나에겐 아직 그런 각오가 부족했다. 그래서 도주했다. 멀어지고 멀어지다 보면 언젠가는 저 아저씨도 지쳐 그만 쫓아오지 않을까, 부디 제발 그만 쫓아왔으면 하는 안일한 기대를 품고서.

하지만.

3분이 지나고 5분이 흘러도 추격전은 끝나지 않았다.

〈튜토리얼: 생존 일지 (1)〉

* 싸워 승리하십시오.

(0/1)

회피는 불가능했다.

"젠장!!"

결국.

한참을 질주하던 나는 터질 듯 박동하는 심광자 턱 밑까지 찬 호흡에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어어어!!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풀숲을 뚫고 오는 저 남자를 상대하고자.

두렵고 무섭지만, 체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지라 이대로 더 도망쳐봐야 결말은 비극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싸워야 했다. 여전히 모든 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런 건 묻어두고 젖 먹던 힘마저 쫙쫙 끌어모으며 어금니를 꽉 깨물고 나무 막대기를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살아야 했으니까.

'꼭 예쁜 마누라와 결혼해서 토끼 같은 손주 보여드릴 테니까 기다리슈.'

'자식이라고는 아들 밖에 없어서 엄마는 딸이었으면 좋겠더라.'

'에이, 그래도 첫째는 아들이지. 안 그러냐?'

곧.

그어어어어!!

남자…, 아니 눈앞으로 '괴물'의 머리통으로 나무 막대기가 날아들었다.

후우우우욱―

빠악!

그어어어억!!

관자놀이를 후려치자 그대로 땅바닥을 나뒹구는 괴물과 동시에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일순간 온몸이 덜덜 떨렸다.

"흐읍!!"

나는 그 떨림을 억지로 외면하며 심장이 쿵쾅거릴수록 더욱 나무 막대기를 세게 쥐었다.

그어어어어! 그어어어어어!!

저 초원의 사자처럼 날 보며 악을 쓰는 괴물의 악다구니 속엔 '항복'이라는 감정이 없었으니까.

이 싸움.

반드시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하는 결전이었다.

후우우웅!

콰직!

다시금 전력을 다한 공격이 괴물의 관자놀이를 때렸다. 움직임이 느린 덕분에 동일한 부위를 가격하는 건 간단했다.

다만 그럼에도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이제―"

빡!

"좀!"

빠아악!

"쓰러져라!!"

빠아아아아악!!

그어어어어어!!

"이런 썅!"

마치 고통을 모르는 좀비처럼 나무가 부러질 때까지 무아지경으로 두들겨 팼음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일어난 탓이었다

그어어어어어!

"지, 진짜 좀비라고!?"

위쪽이 박살 난 나무를 허망하게 바라보던 나는 불현듯 살점이고 가죽이고 죄다 찢겨 피범벅이 된 괴물을 노려봤다.

확실히.

충혈된 안구, 핏물을 머금은 입, 당장 응급실에 실려 갈 만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비명조차 내지르지 않는 부분 등 세밀하게 살펴보면 좀비로 의심되는 증거가 다분 했다.

이에 목구멍에서는 그럴리 없다는 소리가 흘러나오면서도 부지불식간에 내 눈동자가 스르륵 괴물의 목덜미로 옮겨 갔다.

좀비를 죽이려거든 목을 잘라라.

영화, 만화, 소설 등 많은 곳에서 이야기 하는 공통점이 뇌리를 들쑤신 것이었다.

그로 인해 잠시 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기어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목을."

그어어어억!!

"잘라야 해."

결단이었다.

분명하게 결의를 다진 나는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좀비에게로 뛰어가며 부러진 나무를 역으로 쥐었다.

그러고는.

가슴팍을 밟고 내리찍었다.

"으아아아아아!!"

날 이런 개 같은 상황에 처하게 한 신원 불명의 개새끼에게 보내는 분노를 가득 담아서.

후우우욱―

콰직!

* * *

한 번, 두 번, 세 번....

툭―

투둑―

데구르르르―

몇 번이고 찔러 넣은 끝에 기어이 질기게도 붙어 있던 대가리가 뜯겨 나가 흙바닥을 구른다. 살가죽이 너덜너덜해질 지경으로 헤집고 나서야 끝이 난 혈전에 나는 환호성도 내지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모를 검붉은 핏물에 절은 손과 옷.

부러진 뼛조각과 걸레짝이 된 사체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형용 못 할 피로감에 어깨가 짓눌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27년 인생 동안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더럽고도 혐오스러운 감정이었다.

그런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띠링!

얄밉도록 청명한 선율을 내며 진동하는 핸드폰.

[축하합니다!]

[〈튜토리얼: 생존 일지 (1)〉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및 '무기 임의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맥 빠진 몰골로 어렵사리 주머니를 뒤적거려 빼내 보니 까만 화면 중앙에 새로운 글귀가 적혀 있었다.

2화

화악!

글을 읽음과 동시에 빛무리가 날 휘감는다.

난데없는 현상에 기겁했으나, 옅게 소용돌이치다 체내로 흡수된 기운이 발하는 따스함을 통해 위험한 것이 아님을 인지했다.

오히려.

백이면 백 내게 이득이 되는 요소였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빛이 흡수된 직후, 무척이나 애매모호한 표현이었을지언정 짤막하게 출력된 메시지처럼 알 수 없는 힘 같은 게 체감됐으니까.

물론.

내가 이목을 사로 잡은 건 그 다음에 나열 되어 있던 한 장의 종이였다.

단순했다.

〈무기 임의 선택권/Normal〉

* 마법으로 제작된 스크롤(scroll). 찢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소재의 내구성이 약해 불 또는 물 등 외부 요인에 의해 손상될 가능성이 있으니 보관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 마법 '일반 무기 소환'

"무기를, 준다고?"

낡고 허름한 양피지 쪼가리 따위로 칼이나 창을 내어 준다는 신비에 놀란 건 절대 아니었다.

그저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리도 쉽게 내줄 수 있는 것이었더라면, 왜 진작 지급해 주지 않았는지. 괴물과 싸워 승리하라더니 실은 죽기를 바란 게 아니었을까?

전후가 바뀐 현실에 어이가 없다 못해 짙은 허탈감이 치밀어 올라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띠링!

[잠시 후 〈튜토리얼: 생존 일지 (2)〉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남은 시간: 60분]

"니미럴."

푸념하듯 욕설을 뇌까린 나는 울분을 속으로 삼키며 두루마리 중간을 잡고 거칠게 반으로 갈랐다.

60분.

한 시간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으나, 본능적으로 방금의 전투와 무관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취해야 할 태도는 짜증을 낼 게 아니라 현실을 받아 들이고 이용하는 것일 터였다.

찌이이익!

―화르르륵!

"으읍!"

종이의 중간을 찢는 순간 갑자기 튀어 오른 불꽃에 놀라 놓아 버리자 단숨에 재가 되어 버린 두루마리에 맞춰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다.

얼른 손을 뻗자 방금 사용한 두루마리 형상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고, 그 아래로 수십 개에 달하는 새로운 이미지들이 출력된 상태였다.

〈무기 카테고리〉

* 검: 양손 장검/한손검/쌍수 단검

* 도: 양손 직도/한손 직도/쌍수 단도

* 창: 장창/삼지창

총 여덟 종.

하위 분류로 나누면 도합 서른 개가량의 무기가 각 종류에 맞게 나열된 카테고리였다.

* * *

[남은 시간: 48분 24초]

[남은 시간: 48분 23초]

[남은 시간: 48분 22초]

[남은 시간: 48분 21초]

[....]

카운트 다운이 어느새 40분대로 접어드는 동안에도 난 여전히 카테고리를 정독하고 또 정독하는 중이었다.

"으음."

1에서 2, 그렇다면 2에서 3, 3에서 4도 있을지 모르는데.

다음 퀘스트, 다다음 퀘스트… 앞으로 계속해서 접하게 될 퀘스트를 감안했을 때 내가 무얼 골라야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 감이 오질 않아 결정을 망설였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소거법으로 서너 가지는 솎아 냈다.

대표적으로 고도의 훈련이 요구되는 '활' 카테고리의 장궁 류나 두툼하기만 하지 실상 나무 몽둥이에 불과한 '둔기' 카테고리의 곤봉, 위력은 강해 보여도 사거리가 극도로 짧은 '도끼' 카테고리의 손도끼 등이었다.

그렇게 제하고 제한 결과.

숙련의 난이도, 거리가 주는 안정성, 좀비의 목을 단박에 날릴 절단력 등의 장단점을 고려한 종합 평가를 실시해 최종 후보가 결정됐다.

"가장 적합한 쪽은 역시 도나 창인가?"

일격에 대가리를 잘라낼 '도(刀)'와 중장거리에서 견제 및 훈련 기간이 비교적 짧다는 '창(槍)'이었다.

"음…."

어느 쪽이 좋을까.

생존과 직결된 선택이었기에 고민은 점점 더 깊어졌지만, 익숙해질 시간도 필요한 터라 시계가 30분을 가리킬 즈음 결단을 내리고는 스크린을 터치해 원하는 아이콘을 누르자 곧 화면을 중심으로 휘황찬란한 빛 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폭죽을 연상케 하듯 위로 솟구치며 흩어지고 뭉치기를 거듭하다 아래에서부터 무구를 빚어내는 섬광.

우우우우우웅!

['양손 직도'를 선택했습니다.]

[해당 무기가 소환됩니다.]

내 결정은 한 자루의 직도(直刀)였다.

〈평범한 양손 직도/Normal〉

* 무난함이 장점이자 단점인 일반 양손 직도(直刀)다. 손잡이가 긴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베기 공격 시 추가 피해량 +5%

스르릉―

도집을 잡고 조심스럽게 뽑아 보는 칼날.

설명에서는 무난함의 극치라고 적혀 있었으나, 실제로는 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산이고 바다고 모조리 베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이 예리하게 다가왔다.

더불어 무게 또한 내 예측보다 훨씬 무거웠다.

무협지에서 보면 어린 꼬마애들도 도법 훈련한답시고 이런 걸 하루에 천 번 만 번씩 휘두른다던데....

"천 번은 고사하고 백 번도 못 하겠다."

어후.

방구석 홈트 근육으로 다져진 직장인 몸뚱아리에 혀를 찬 나는 도집을 바닥에 내려놓고 자세를 잡아 봤다.

오른발은 살짝 앞에 왼발은 살짝 뒤에.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과 정보를 총동원해 어설프게나마 실시한 수련은 도움이 될까 싶을 정도로 엉성하게 마무리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몇 날 며칠 매달리고팠으나.

[남은 시간: 0분 0초]

[〈튜토리얼: 생존 일지 (2)〉가 시작됩니다.]

〈튜토리얼: 생존 일지 (2)〉

* 싸워 승리하십시오.

(0/5)

만족감을 채우기엔 시간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이번엔 뭐냐....'

생존 일지 (2)의 신호탄이 발포된 뒤, 난 공기의 흐름조차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주위를 노려봤다.

무려 다섯이었다.

다섯.

홀로 다섯 마리나 되는 좀비를, 혹은 좀비 이외의 또 다른 괴물을 상대해야 할지도 몰랐기에 한낱 풀벌레 하나도 소홀히 넘기지 못했다.

그러다.

돌연 이대로 공터에 있어도 괜찮은가 싶었다.

전략 전술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른다만, 뻥 뚫린 공간이 적의 출현을 감지하는 데는 유리할지언정 반대로 한꺼번에 몰려오는 다수의 적을 방어하기 까다롭단 약점이 강하단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면.

이 장단점을 바탕으로 내가 가져가야 할 스탠스는 무엇인가?

"움직이자."

두말할 거 없이 '이동'이었다.

날붙이를 얻었다고 해도 현재의 무력으론 두 마리도 버겁다. 따라서 시야의 이점을 내려놓고서라도 장소를 바꿔 가급적 1 대 1 매치업을 만들어야 했다.

결론을 내린 나는 일말의 머뭇거림 없이 곧장 전방으로 발을 굴렀다.

* * *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 노력하며 전진하고 있던 차에 대강 10m 남짓 떨어진 아름드리나무 옆에서 일견 거무튀튀한 형상이 포착됐다.

속도를 줄여 가며 서서히 접근해 가자 점차 명확해지는 윤곽, 느릿한 보폭에 넝마가 된 옷자락과 주둥이에서 뚝뚝 흐르는 선혈까지 영락없는 좀비였다.

찾아다니던 목표물을 발견한 나는 놈의 양옆을 샅샅이 관찰한 후.

'흐읍!'

단독 행동 중임을 체크하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렸다.

선수필승(先手必勝) 혹은 선공필승(先攻必勝).

공격만이 살길이라는 강렬한 의지, 그것이 발끝에서부터 직도의 칼날로 이어지며 좀비의 목젖을 노렸다.

바람을 가르는 일직선의 궤적.

슈우우우우욱!

―촤아아아악!!

"아."

그걸로 끝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방.

나무 작대기로 수십 번을 찌르고서야 간신히 뜯어낼 수 있었던 좀비의 머리통이 고작 한 칼에 하늘을 날아 흙바닥을 굴렀다.

"…후우!"

나는 쿵 하고 굉음을 동반하며 대자로 드러누운 좀비를 보고 참았던 호흡을 내뱉었다.

운이 좋게도 깔끔하게 베어 냈다.

뼈라는 게 의외로 매우 단단해서 자칫하면 날이 걸려 부러지기도 한다길래 최악의 경우엔 경추에 도가 박혀 무기는 무기대로 뺏기고 좀비는 좀비대로 못 죽이는 그림도 상정해 두었었는데,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었다.

어쩌면.

경험치 획득으로 신체 능력이 향상된 덕일지도 몰랐다. 아님 아이템에 붙은 추가 피해량의 효과이려나?

"다음은."

[(1/5)]

* * *

안정적으로 퀘스트를 진행하는 게 아니꼬웠을까?

차근차근 머릿수를 줄여 나가겠다던 계획은 고작 두 마리 만에 강제 중단되었다.

그어어어어!!

그어어억!

그어어어어어!!

'젠장.... 왜 다 모여 있는 건데?'

나머지 셋이 한자리에 뭉쳐 날 기다리고 있던 탓이다.

1 대 3.

'전면전은 절대 안 돼.'

무기를 믿고 겨뤄 볼 수는 있지만.

그러다 전투 중에 재수 없이 상처라도 입으면 일이 심각해진다. 혹시라도 저놈들이 '전염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기껏 이겨 놓고도 말짱 도루묵이 될 테니.

하여.

'유인, 이라도 해 봐야겠네.'

어떡해야 좋을지 방법을 강구하던 나는 유인전으로 가닥을 잡고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를 주워 가장 덩치가 큼지막한 좀비를 타깃 삼아 던졌다.

후우욱―

빡!

날개도 없이 매섭게 비상해 뻗어 나간 돌멩이는 바라던 대로 몸통에 명중했다.

실린 힘도 대단치 않은 데다 애초에 좀비라 대미지는 0에 수렴했지만.

상관없었다.

본인의 역할은 완벽하게 수행해 냈으니까.

…그어어어어!!

피습 당한 놈이 고개를 쳐들곤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어억? 그어어억!

그어어억!

뒤늦게 반응한 두 마리가 서둘러 뒤를 쫓았으나 세 마리 간의 간격은 벌써 4~5m 이상 벌어졌다.

'할 수 있다, 아니 해낸다!'

나뭇등걸에 숨은 채로 해당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도병을 꽉 틀어쥐었다.

길어야 몇 초.

짧으면 단 1초 만에 억지로 나뉜 무리가 다시 한데 뭉칠 거다.

그러니.

'이번에도 한 방이다.'

일격에 베어 버려야 한다.

속으로 주문을 외운 난 기도를 마친 즉시 회전하듯 허리를 틀며 칼날을 휘둘렀다.

그어어어어어!!

막.

사아아악!

좀비가 내 옆을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서걱!

완만한 대각선 궤도를 그린 도에 잘린 물체가 허공을 유영하다 툭 하고 힘없이 추락한다.

좀비의 목.

…그어어어어!!

이 아닌 '팔'이었다.

'아!'

타이밍을 계산해서 불시에 행한 기습이었으나 이상과 현실은 큰 차이가 있었고, 그 작고도 큰 차이는 내 목숨을 위태롭게 했다.

그어어어억!!

화아아악!

오른팔이 잘렸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괴성을 지른 좀비가 그대로 날 덮쳤기 때문이었다.

겨우 뒤로 물러나 깔리는 건 피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어억!

그어어어억!

그새 도착한 두 마리가 좌우에서 이빨을 들이밀고 있었다.

"...!"

비명을 지를 틈도 없다.

마구잡이로 백 스텝을 밟은 나는 어떻게든 도를 내질러 한 놈을 공략했다. 왜소한 체격의 좀비였다.

"하아아아!!"

촤아악!

피가 튄다.

행운이 따랐는지, 경황 중에 내지른 칼날이 체구가 작은 좀비의 목을 쇄골에서부터 깔끔하게 갈라 버렸다.

이로써 남은―

사각!

"큭!"

시선을 돌리던 찰나 뭔가가 내 얼굴을 긁고 지나갔다.

좌측에 있던 정상 좀비의 손톱이었다.

동물처럼 날카롭진 않아 살가죽이 까지는 수준이었지만, 중요한 건 통증이 아니라 놈이 '좀비'라는 점이었다.

이제.

나는 어찌 되는가.

주르륵―

3화

채 5cm도 안 되는 상처로 인해 좀비가 되는 건 아닌지 미치도록 불안한 탓에, 방울방울 맺혔던 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가 볼의 곡선을 따라 달팽이가 기어가듯 천천히 흘러내리는 그 모든 과정이 눈으로 지켜보는 것처럼 또렷했다.

하지만.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그어어어어억!!

그어어어!!

"썩을...!"

아직 전투는 종료되지 않았으니까.

각오를 다지며 마음의 동요를 짧은 욕설로 억지로 잠재우고 칼을 들어 올리기 무섭게 외팔이 좀비가 정상 좀비를 밀치며 뛰어왔다.

이성을 상실한 놈들답게 누구에게도 먹잇감을 빼앗기지 않겠단 본능이 반영된 움직임이었다.

그어어어어어!!

외팔이는 거리가 가까워지자 남은 팔을 휘저으며 내 얼굴을 노렸다.

왜일까.

팔을 앗아 간 내게 보복하겠다는 의지가 내재된 것인지 울부짖는 포효가 유달리 처절했다.

"쓰읍― 으아아아아!!!"

속사정이야 어쨌든 나도 기합으로 대응했다.

2 대 1이라면 몰라도....

1 대 1이라면, 더군다나 외팔이라면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게 맞았다.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도 이 정도 판단은 할 수 있었다.

타닷―

"하아아앗!!"

왼쪽으로 한 걸음 이동해 공격을 피하며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전력을 다해 내려치는 베기가 외팔이의 목덜미를 노렸다.

촤아아악!

서슬 퍼런 칼날은 망나니가 사형수의 목을 베듯 단번에 어깻죽지를 파고들어 가 대가리를 잘라 냈다.

다친 건 나일 뿐.

칼날은 변함없이 날카로웠다.

쿵!

격렬하게 흙먼지를 발생시키며 나뒹구는 외팔이.

최후의 최후에 달해서도 남은 팔을 꿈틀거리며 발악하다 끝내 미동을 멈추는 놈에게서 눈길을 거둔 나는 무릎을 곧게 펴며 일어섰다.

저기.

그어어어어!

복수의 대상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후, 흐아아아아아아아!!"

* * *

띠링!

[축하합니다!]

[〈튜토리얼: 생존 일지 (2)〉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및 '방어구 임의 선택권'과 '특별한 약도'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하아, 하.... 흐으...."

우우우웅―

퀘스트 종료를 알리는 휘슬에 맞춰 힘겹게 몰아쉬는 들숨을 타고 떠올랐던 빛무리가 빨려 들어온다.

그와 더불어 소환되는 두 장의 종이.

투구, 상의, 하의, 신발, 장갑으로 이루어진 방어구 중 한 부위를 골라 가질 수 있는 '방어구 임의 선택권'과.

〈특별한 약도/Normal〉

* '생명의 샘'의 위치가 표시된 약도

* 옵션 없음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 몇 개와 주요 지형 및 종착지로 추정되는 장소에 우물 비슷한 그림이 새겨진 지도였다.

딱 이를 확인했을 때.

띠링!

띠링!

연이어 두 번의 휘슬이 울렸다.

[지금부터 〈튜토리얼: 생존 일지 (3)〉이 진행됩니다.]

〈튜토리얼: 생존 일지 (3)〉

* 약도를 따라 이동하십시오.

1차는 '생존 일지 (3)'의 전달.

2차는.

[현재 '중독: 미약한 감염' 상태입니다.]

[빠른 시간 내에 치료하지 않을 시 '상태 이상: 좀비화'가 진행됩니다.]

[좀비화 진행률: 34%]

"...!!"

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음을 알리는 경고장이었다. 안 그래도 격동 중이던 심장이 쿵쾅쿵쾅 폭발할 것처럼 달아 올랐다.

34%.

아주 높다고 말하긴 어려우나, 그렇다고 결코 낮지도 않은 수치가 화살처럼 뇌리에 박히길 잠시.

불현듯 나는 황급히 약도를 펼쳤다.

'새, 생명의 샘!'

생명의 샘.

매우 흔해 빠진 명칭이었기에 게임 한번 해 본 적 없는 사람일지라도 손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칭.

저곳으로 가야 했다.

그게 정답일지 아닐지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이것 외에는 시도할 만한 방안이 없었으니까.

눈을 부릅뜬 나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생명의 샘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사주 경계?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다면 지금은 오로지 전진, 전진만이 살길이었다.

타다다다닷!

"여, 여기서 왼쪽―"

정말 다행스럽게도 길을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꺾이는 지점마다 나무나 바위에 약도와 똑같은 화살표가 선명한 빨간색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아까는 왜 못 봤을까.

만약 일전에 미리 알아 두었더라면 몇 분이라도 일찍 도착했을 텐데.

하기야.

'튜토리얼: 생존 일지 (2)'만 하더라도 지형지물에 관심 줄 여유가 전혀 없었다. 쓸데없는 후회 따윈 집어치우고 한 걸음이라도 더 빨리, 더 멀리 가자.

까드드득!

어금니가 부서져라 꽉 깨문 나는 폐가 터질 듯이 아우성치는 걸 철저히 무시했다.

[좀비화 진행률: 34%]

[....]

[좀비화 진행률: 40%]

[경고!]

[감각 기관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통각, 촉각, 미각이 일부 손상되었습니다.]

* * *

띠리링!

띠링!

감염 상태가 지속될수록 진행률에 가속도가 붙는지 40%를 찍었던 게 3분이 되지 않았는데, 금세 60%에 도달한 진행률.

[좀비화 진행률: 60%]

[경고!]

[감각 기관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통각, 촉각, 미각이 대부분 손상되었습니다.]

[시각이 일부 손상되었습니다.]

[조속히 치료하지 않을 시 영구적인 장애가 우려됩니다.]

주의를 요하는 메시지 내용대로.

입 안에서 느껴지던 피 맛이 사라졌고, 살결에 부딪히는 바람과 나뭇잎도 직접 보지 않으면 그런 게 있었나 싶을 만큼 무감각해지는 등 시시각각으로 신체가 망가지는 게 체감이 됐다.

다만.

이런 성황에서도 한 가지 장점이 있으니, 바로 '통각(痛覺)의 마비'였다.

'오른쪽!'

마라톤에 버금가는 오랜 속보로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던 육체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덕분에 오히려 달리는 게 한결 수월해졌다.

실핏줄이 터진 양 동공이 빨갛게 물들어 시야가 흐려졌다는 게 거슬리긴 했으나, 표식들이 원체 커다랗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아이, 악!"

약도에 나온 마지막 화살표가 등 뒤로 지나가고 마침내.

―쏴아아아아아아!!

저 멀리.

세찬 물줄기를 쏟아 내는 폭포 아래, 요정이 노닐 것만 같이 아름답게 조성된 샘터를 목도할 수 있었다.

[축하합니다!]

[〈튜토리얼: 생존 일지 (3)〉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생명의 샘이었다.

…꾸이이이이이이익!!

[지금부터 〈튜토리얼: 생존 일지 (4)〉가 진행됩니다.]

〈튜토리얼: 생존 일지 (4)〉

* 샘지기와 겨뤄 샘의 권리를 가져오십시오.

거대 멧돼지가 지키고 있는.

* * *

전체 길이만 약 2m.

20cm는 될 법한 송곳니와 근육으로 뒤덮인 몸뚱어리.

맞나?

[좀비화 진행률: 75%]

[경고!]

[감각 기관에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통각, 촉각, 미각이 극심하게 손상되었습니다.]

[시각이 대부분 손상되었습니다.]

[조속히 치료하지 않을 시 영구적인 장애가 우려됩니다.]

안구에 뿌연 안개가 낀 듯 온전하지 않아 제대로 봤는지는 알 수 없으나.

…꾸이이이익!!

쿠웅!

공간이 쩡쩡 울리는 하울링만 봐도 만만치 않음이 짐작됐다.

그러나.

꽈아아악!

"으어어어어어!!"

도병을 꼬나 쥔 나는 재고 말고 할 거 없이 맹렬하게 내달렸다.

1분 1초가 급박했다.

꾸이이이익!!

쿵!

쿠웅!

쿵!

나를 발견한 멧돼지가 마주 달려온다.

대지를 짓누를 때마다 땅울림을 선사하는 육중한 발굽과 칼날 부럽지 않은 송곳니를 앞세운 돌격으로 순식간에 간극을 좁힌 놈은 내 하반신을 노리고 박치기를 시도했다.

저 공격에 걸린다면 인간의 육신쯤은 송두리째 뜯겨 나갈 터.

그럼에도 나는 제동 없이 정면만 주시하며 돌진했다.

15m, 10m, 5m....

서로의 숨소리마저 들을 수 있는 지점까지 최대한 들러붙었다.

놈이 '멧돼지'인 까닭이었다.

자고로 멧돼지는 급속 선회가 불가능한 생물.

꾸이이이이익!!

"…흐아!"

타다닷―

후욱!

나는 그 취약점을 노렸다.

달랑 칼 한 자루 들고 바윗덩어리만 한 괴수와 싸워 승리하는 법 따윈 몰랐으니까.

꾸이이익!

쾅―

예상은 여지 없이 들어 맞았다.

목전에서 사냥감을 놓친 멧돼지는 근처 바위를 들이 받았고, 놈이 토해내는 고함을 배경음 삼아 땅을 구른 난 등허리가 돌에 찢겨 피가 흐름에도 꾸역꾸역 일어서서 주머니에 욱여넣었던 두루마리를 버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읍!"

타닷!

그 끝에는.

―촤아아악!

['생명의 샘물'을 복용했습니다.]

[모든 해로운 효과가 소멸합니다.]

[10분간 자연 치유력 및 피로 회복 속도가 200% 상승합니다.]

생명의 샘이 있었다.

'아...!'

상쾌하다.

물속에 입수하자마자 시원하면서도 따스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기운과 함께 전신에 활기가 돌았고, 망가져 있던 부분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회복되어 갔다.

['상태 이상: 좀비화'가 해제됩니다.]

이 빌어먹을 저주까지도.

잔잔하던 샘물에 파문을 일으키며 경이로운 신비에 힘 입어 목을 옥죄던 사슬을 풀어헤친 나는, 짜릿한 해방감에 기염을 토하며 수면 위로 솟구쳐 올렸다.

물살을 가르며 빠져나오자.

꾸이이이익!!

한껏 흥분한 멧돼지가 보였다.

이마에 핏줄기가 흐르는 걸로 보건대 적잖게 충격 받은 모양이었는데, 뇌진탕 증세라도 왔는지 콧김을 내쉬면서도 이리저리 머리를 젓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 저런 걸 상대로 곡예 짓을 했다는 게 세삼 미친 짓이었구나 싶었다. 자칫 발이라도 절었더라면 생명의 샘은커녕 뼈도 못 추리고 산산조각 났을 테니 말이다.

"저런 괴수를 어떻게 잡으라는 거냐고 대체...."

샘물을 빠져나온 나는 멧돼지가 발산하는 압박감에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총이라도 쥐지 않는 한 도저히 칼만으로는―.

꾸이이이이익!!

"젠장!"

막막하다 푸념하는 것도 싫단 뜻인가?

정신을 차린 멧돼지가 다시는 놓치지 않겠단 살기를 울컥 쏟아내며 재차 발을 굴렀다.

인상을 찌푸린 나는 도를 틀어쥐고 섰다가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역시 좀비처럼 맞서는 건 무리다.

하면.

"으아아아아앗― 차!"

파바밧―

후욱!

답은 하나 뿐.

꾸이이이이이이익!

―콰아앙!!

투우(鬪牛), 보다 정확하게는 투저(鬪猪)였다.

[ 영혼석 ]

생존 일지 (1), 생존 일지 (2), 생존 일지 (3).

어느덧 세 번의 퀘스트를 클리어했고, 그로 인해 세 번의 경험치를 축적했다.

0과 3.

아니.

0 '에서' 3.

누군가에게는 미비해 보일 갭이었으나,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그 짤막한 조사보다 튼튼한 동아줄은 없었노라고.

꾸이익, 꾸익―!

"지친.... 허윽, 후.... 거냐? 후으으...."

인근의 나무란 나무는 죄다 박살 낸 뒤에야 지쳐 주저앉는 놈보다 오래 서 있을 수 있던 이유라고는 그거밖에 없었다.

생명의 샘 덕에 풀 컨디션이 된 점도 크겠지만.

아무튼 간에 나는 일어설 힘도 없다는 듯 부들거리는 놈을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우람하던 송곳니는 깨져 조각만 남아 흉물스럽게 변했고, 마빡은 거죽이 다 벗겨져 두 개골이 훤히 들여다보일 지경인 산송장.

스으으윽―

"하아!"

후우우우욱!

―서걱!

이제 사망 선고를 내릴 시간이었다.

[축하합니다!]

[〈튜토리얼: 생존 일지 (4)〉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4화

"으아...."

죽었다.

그리고 죽겠다.

겨우겨우 멧돼지의 대가리를 잘라 낸 나는 바닥을 치는 체력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근처 나뭇등걸에 몸을 기댔다.

띠링!

띠링!

연신 울어 대는 핸드폰.

칼날에 묻은 혈액을 비롯한 이물질을 닦아 낼 기력도 없어 도집에 대충 걸쳐 놓고 화면을 체크했다. 도대체 뭣 때문에 이리도 시끄러운 것인지.

[축하합니다!]

[〈튜토리얼: 생존 일지 (4)〉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및 '일회용 무기 수리 키트', '일회용 방어구 수리 키트', '하급 회복 물약', '초보자용 야영 세트'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그럴 만하네."

경험치를 제외하고 소모품이거나 소모품에 준할지언정 아이템만 도합 네 개나 있었다.

좀비에 비해 비교적 높은 난도였기에 이러한 결과물로 이어진 듯싶었는데, 나는 일전보다 진한 고양감을 느끼며 하나하나 차례대로 설명을 읽어 내려갔다.

〈일회용 무기 수리 키트/Normal〉

* 마법으로 제작된 스크롤(scroll). 찢는 것으로 지정된 무기의 떨어진 내구도 및 예리함이 회복된다. 단, 키트보다 상위의 무기는 효과가 적용되지 않는다.

* 마법 '무기 수리'

〈일회용 방어구 수리 키트/Normal〉

* 마법으로 제작된 스크롤(scroll). 찢는 것으로 지정된 방어구의 떨어진 내구도 및 견고함이 회복된다. 단, 키트보다 상위의 방어구는 효과가 적용되지 않는다.

* 마법 '방어구 수리'

〈하급 회복 물약/Normal〉

* 신성력이 가미된 물약. 복용 또는 뿌려 흡수시키는 것으로 내·외상을 치료한다.

* 급속 상처 회복 및 3분간 자연 치유력 30% 상승

〈초보자용 야영 세트/Normal〉

* 침낭, 파이어 스틸, 2L 물병, 벌레 퇴치용 아고(ago) 잎이 동봉된 야영 세트.

* 피로 회복 속도 5% 상승

많기도 하다.

두루마리 두 개와 커다란 짐 보따리, 붉은빛이 감도는 액체가 담긴 물병까지.

"아, 한 개 더 있지."

생명의 샘에 뛰어들기 직전에 젖으면 그대로 똥 될까 봐 무작정 내팽개쳤던 '방어구 임의 선택권'.

습득 당시에는 좀비화를 해결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고, 샘물의 샘에서 바이러스를 소멸시킨 뒤에는 곧장 멧돼지와 투저판을 벌이느라 챙길 겨를이 없었다.

사실.

돌이켜 보면 외려 갑옷을 걸치지 않았던 게 도움이 된 것 같기도 했다. 투저의 핵심은 회피였고, 회피의 베이스는 경량이니까.

…라고 긍정적으로 결론지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는 좋았다는 데 의의를 두고.

"말 나온 김에 바로 까 볼까."

샘터 근처에서 '방어구 임의 선택권'을 회수한 나는 고심하다 흉갑을 뽑았다.

무기와 다르게 세분화되지 않고 딱 다섯 종류만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제일 효율이 좋을 상의를 고르게 되었다.

〈평범한 가죽 흉갑/Normal〉

* 무두질이 잘된 가죽을 가공해 제작한 흉갑. 가죽 아래 여러 겹의 천을 덧대 관통성 공격에 대한 방호력을 높였다.

* 관통 공격에 대한 추가 방어력 +5%

"이렇게 입는 건가...?"

TV 같은 매체로나마 대충 구경했지, 실제로는 처음 접해 보는 물건이라 착용하는 데 약간 애를 먹었다만, 입고 나니 어색하기는 해도 상당히 든든했다.

이만하면 좀비들의 손톱 따위로는 뚫리지 않겠지.

띠링!

[〈튜토리얼: 생존 일지 (5)〉가 시작됩니다.]

〈튜토리얼: 생존 일지 (5)〉

* 야영 준비를 시작하십시오.

(0/1)

"이렇게 연결되는 건가."

가슴 부근을 쓸어내리며 어색함을 달래던 나는 5단계 퀘스트 내용을 정독하고서 나머지 보상품은 잘 정리해 두고 장작부터 구하러 다녔다.

워낙 울창한 터라 풀잎이든 나뭇가지든 구하기는 쉬웠다.

"이쯤이면 울타리도 만들 수 있겠네."

넉넉하게 쓸어 와 샘터를 배후에 두고 어설프게라도 담장을 세웠다.

효과가 있을는지는 미지수지만, 밤사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일단은 이렇게라도 해야 안심이 될 듯했다.

탁!

탁!

탁!

―화륵!

"쓰읍! 후, 후우우, 후...."

작달막한 모닥불을 피울 즈음에는 노을 사이로 어둠이 잔잔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첫 번째 좀비와의 조우 시점이 점심나절이었으니 숲이라는 특성 탓에 밤이 빨리 찾아온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최소 네다섯 시간은 지났다는 말.

과연.

난 언제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음....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겠지?

"됐다, 쓸데없는 생각 말자."

불쑥 치켜드는 부정적인 감정에 혀를 찬 나는 시선을 돌려 멧돼지를 바라봤다.

울타리를 치고 침낭도 깔고, 불까지 피웠음에도 여전히 묵묵부답인 핸드폰, 이에 원인을 따져 보다 떠오른 게 '식사'였다.

야영지에서는 보통 잠도 자지만 밥도 먹으니까.

마침 싱싱한 고깃덩어리도 마련돼 있겠다.

푸우욱―

살갗을 움푹 파고들어 간 칼날을 움직여 배를 가르는 순간.

"으읍...!"

기어이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단순히 목을 치는 것과 안쪽을 찢어발기는 행위는 진정 궤를 달리하는 끔찍한 작업이었다.

손과 발이 비린내 나는 핏물로 뒤덮이는 건 기본이요, 물컹거리는 각종 장기가 피부를 스칠 때면 소름이 쫙 돋았다. 평소 비위가 강한 편이라고 자신했고, 그 덕택에 좀비와의 격전에서도 나름 도움을 받았다고 여겼는데 전혀 아니었다.

해서.

"아으."

되도록 신속하게 마무리 지어야겠단 일념으로 칼질을 이어 가던 차에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무언가 데구루루 굴러떨어져 발치에 닿았다.

내장의 한 조각인가 하고 신경을 끄려던 그때.

반짝―

생존 일지 (5)를 내주고 다시 어두워졌던 핸드폰 화면이 밝게 빛났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저돌적인 멧돼지의 영혼석/Magic〉

* '생명의 샘'이 지닌 신비로운 힘을 통해 정해진 한계를 이겨 내고 영물(靈物)로 거듭난 샘지기 멧돼지의 영혼석이다. 복용 또는 장비 제작 시 내재된 영력을 사용할 수 있다.

* 복용 시 근력 5% 영구 강화/장비 제작 시 착용자의 근력 7% 상승 효과 적용

"아이, 템?"

아이템.

평범한 신체 조직이 아니라 무려 상위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이를 인지하자마자 나는 얼른 샘물을 퍼 와 덕지덕지 붙은 피를 씻어 냈다. 이물질을 깨끗하게 씻어 내자 본모습을 드러낸 영혼석은, 보랏빛이 감도는 구슬로 표면에는 무척이나 정교한 솜씨로 멧돼지의 형상이 각인돼 있었다.

"아아...."

장식장에 진열해 두면 안성맞춤이겠다 싶은 고고한 자태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물론.

이걸 챙겨 가서 관상용으로 둘 또라이는 여기 없었다.

"후, 흐읍!"

으적!

먹으면 근력이 증가한다지 않은가?

간당간당한 명줄을 더 질기고 끈근하게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꾹 참고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저돌적인 멧돼지의 영혼석'을 복용했습니다.]

[근력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5% 향상됩니다.]

꽈아아아악!

"으음."

잘게 으깨지는 영혼석의 젤리 같은 식감이 혀끝을 맴돌고 몇 초 지나지 않아 근육이 쫙 수축되었다가 이완되는 느낌이 온몸을 휘감는다.

얼마나 큰 변화가 생겼을까.

후욱―

훅―

"확실히―"

타닷―

촤아아아악!

"가벼워졌어."

확연하게 느껴지는 변화에 싱긋 미소 지은 나는 내친김에 도를 휘둘러 보며 묵직하던 도의 무게가 가벼워졌음을 실감했다.

당연히 철근 같던 게 이쑤시개가 되는 그런 드라마틱한 수준은 아니었다.

끽해 봐야 몇백 그램?

하나.

이것만 해도 어딘가, 그동안 해 왔던 운동이라고는 홈트가 전부인 회사원에게 있어서는 기적이나 다름없는 발전이었다.

"좋아."

예상외의 소득에 만족스럽게 박수를 친 나는 달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도를 납도하고서 불가로 돌아와 뾰족하게 다듬은 막대기를 체크했다.

두툼하게 잘라 낸 멧돼지 살점이 노릇하게 익어 가고 있었다.

맛이 있을는지는… 확신 못 하겠다.

소금이나 후추 등의 조미료는 일절 없이 오직 굽기로만 요리하는 거라 솔직히 맛이 없을 공산이 크지만, 적당히 익은 고기를 호호 불어 씹었다.

굶주림은 둘째치고.

[축하합니다!]

[〈튜토리얼: 생존 일지 (5)〉의 과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가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원하는 건 이쪽이었기에.

우우우웅!

* * *

눈을 감았다 뜨니 아침이 밝아 왔다.

좀비와 멧돼지에 바이러스 감염까지 쇼킹한 하루를 보냈던지라 자꾸만 졸음이 밀려오더니, 야간 경계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부지불식간에 잠들어 버렸다.

너무나도 안일한 처사였지만, 천근만근한 눈꺼풀을 앞세우며 진군하는 수면 욕구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어거지로 밤을 지새운다고 해서 꼭 좋은 것도 아니었고.

불면은 만병의 근원.

새로운 튜토리얼 퀘스트를 수행하려면 외려 강제로라도 잠을 자야 했다.

"오늘은 뭘 하려나...."

샘물로 간단히 세안을 마치고 비축분으로 구워 두었던 멧돼지 고기를 데워 먹길 한 시간쯤 지났나.

소화도 시킬 겸 훈련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도를 움켜쥐고 이리저리 자세를 잡아 가던 그때.

띠링!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생존 일지 (6).

[지금부터 〈튜토리얼: 생존 일지 (6)〉이 진행됩니다.]

〈튜토리얼: 생존 일지 (6)〉

* 최종 점검을 위한 과제입니다. 이겨낸다면 당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것입니다. 그러니 도전하고 승리하여 숲을 빠져나가십시오.

(0/99)

드디어.

"아!"

종장(終章)이었다.

* * *

"…그러니까, 어디로 가라는 건데?"

마지막이라는 대목에 빠져 있다 차츰차츰 현실로 돌아온 나는 이번 퀘스트가 스타트부터 꽤나 갑갑한 미션임을 깨달았다.

뚜렷한 방향 제시도 없고, 힌트도 없다.

그저 숲을 돌파해서 빠져나가라는 한 줄만 툭 던져 놓고 뭐 어쩌란 건지.

게다가.

"99?"

[(0/99)]

출현하는 적의 숫자만 거진 100마리다.

고작 다섯 마리와 싸우다 좀비가 될 뻔했던 게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한데.

100마리?

"돌아 버리겠네."

희망이라도 주고 절망을 안기든지.

대놓고 죽으라는 이야기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무래도.

방도를 간구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뇌를 열심히 굴려 봐도 마땅한 답이 나오진 않았지만, 포기할 마음은 1도 없었다.

'이겨낸다면 당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것입니다. 그러니 도전하고 승리하여 숲을 빠져나가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바, 집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혀 왔던 불안 요소에 대한 대답이 저기 있었다.

그러니.

해내야, 아니 해낸다.

"반드시!"

…라고 중얼거리던 찰나.

바스락―

"...?!"

풀잎 밟히는 소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자연스레 도병을 움켜쥐는 손길, 울타리에 몸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칼을 뽑았다.

사람이냐, 좀비냐, 짐승이냐.

전날과 똑같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그로부터 대략 10여 초가 흘렀을 즈음 풀숲을 헤치고 등장한 존재는.

으어어어어어....

익숙한 공포의 주역, 좀비였다.

아니.

그어어어어....

그으으으....

좀비 '떼'였다.

총 열두 마리.

남성과 여성, 노인과 아이까지 남녀노소 구분 없는 1개 분대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똑바르게 이쪽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썅.'

그 가혹한 광경에 눈앞이 캄캄해진 나는 밀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찌푸리며 찐한 욕설을 뇌까리다 별안간 든 생각에 슬쩍 후방을 돌아봤다.

'…잠시만.'

그곳에는.

불어오는 바람에 옅은 물결이 이는 마법의 샘물이, 단지 마시는 것만으로도 온갖 이로운 효과를 경험할 수 있는 이적의 집합체가 자리 하고 있었다.

"유레, 카?"

왠지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불쑥하고.

5화

['생명의 샘물'을 복용했습니다.]

[모든 해로운 효과가 소멸합니다.]

[10분간 자연 치유력 및 피로 회복 속도가 200% 상승합니다.]

['상태 이상: 좀비화'가 해제됩니다.]

저 엘릭서(elixir)급의 포션을 마시면서 싸우면 어떨까 하는 전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무한 포션전이었다.

다치든 지치든, 설령 바이러스에 감염된다고 하더라도 샘물만 삼킨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해질 수 있었으니까.

뭐.

설령 생명의 샘이라고 진짜 만능은 아니다.

자연 치유력과 피로 회복 속도가 올라간다 뿐이지, 도마뱀의 잘린 꼬리처럼 쑥쑥 재생되진 않았기에 아예 팔다리가 뜯겨 나가는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된다면 회복하기도 전에 과다 출혈로 죽게 될 거였다.

고로.

'두려워 하지 않되, 최대한 안전하게.'

작게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때를 좀비 부대의 최선두가 울타리 지근거리에 다다르도록 기다렸다.

30초, 20초, 10초.

그러다.

'…지금!'

그어어어어!

타이밍이 왔다 싶은 직후.

"하압!"

후우우욱―

서걱!

칼끝이 번뜩였고, 둥그런 물체 하나가 둥실 솟구쳤다.

좀비의 대가리였다.

5회에 걸친 경험치 획득에 '저돌적인 멧돼지의 영혼석'으로 끌어올린 근력이 합해져 이제 좀비의 목덜미쯤이야 대나무 썰듯 날려 버릴 수 있었다.

그어어어!!

그어어!

"어딜!"

역대각선으로 대가리를 잘라 내고 발로 목 없는 사체의 복부를 걷어차 일시적으로 좀비들의 진군을 저지한 나는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고자 연달아 도를 휘둘렀다.

"쓰읍, 하아!"

간결한 기합을 바탕으로 내리긋는 대각선 베기에 이어지는 횡단.

또 한 개의 수급이 흙바닥을 구르고, 그 위로 매끈하게 잘린 팔꿈치 아래의 손목이 툭 하고 낙하하는 걸 확인하곤 나는 황급히 뒷걸음질 쳐서 거리를 벌렸다.

둘이 죽어도 여전히 열 마리.

어영부영하다 둘러싸이면 위험했기에 마치 게임 속 원거리 캐릭터들의 미세한 간격 조절로 치고 빠지는 카이팅처럼 싸울 필요가 있었다.

타닷!

그렇게 차근차근히 숫자를 줄여 나가다 보니 좀비 열댓 마리쯤은 생명의 샘 없이도 때려잡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멧돼지와 싸울 떄에도 느꼈지만, 경험치와 영혼석의 성장 덕에 압도적이진 않을지언정 적어도 두세 단계 이상의 차이가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99마리, 충분히 처리하겠는데?"

무심코.

사망 플래그를 지껄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젠자아아앙!"

그어어어어어!

으어어어!

힐끔 좌우를 살핀 나는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일일이 세기도 힘들게 떼거리로 온 사방 천지에서 좀비들이 몰려오고 있는 탓이었다.

30? 40?

옛말에 아랫도리와 주둥아리는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하더니만, 이래서였던 건가?

함부로 조잘거렸던 과거를 회상하며 스스로 행한 참사에 자책한 나는 코앞으로 다가왔던 좀비의 팔목을 칼로 쳐내며 다시금 다리를 놀렸다.

그나마.

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추격전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주변 필드가 '숲'인 까닭이었다.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이 천혜의 장애물이 되어 안 그래도 기동력이 떨어지는 좀비들을 더더욱 느리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요행이라도 없었다면 제아무리 생명의 샘이 있었더라도 벌써 황천길을 지났으리라.

"하으, 흐...."

스읍―

꿀꺽!

거칠어진 호흡을 토해 내며 초보자용 야영 세트에서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던 침낭의 가방을 변형해 제작한 두툼한 물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 찰랑이던 액체를 다급히 들이켰다.

['생명의 샘물'을 복용했습니다.]

이러다 세트에 붙은 '피로 회복 속도 5%'를 버리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하면서도 현재는 낮이고, 당장은 전투가 우선이라는 심정으로 퍼 온 샘물이었다.

"크읍, 푸하! 후!"

띠링!

[모든 해로운 효과가 소멸합니다.]

[10분간 자연 치유력 및 피로 회복 속도가 200% 상승합니다.]

따스한 기운과 함께 연달아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지퍼를 올려 물주머니를 허리춤에 매달고 왼발을 축으로 회전해 전면을 좌에서 우로 강하게 갈랐다.

촤아아아악!

팔, 몸통, 머리.

뭘 베어 냈는지 구경할 여유도 없이 손가락에 걸린 둔중한 감촉을 흘려보내며 재회전해서 나무뿌리를 밟고 날아올랐다.

* * *

"흐아! 흐.... 흐으으...."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내뱉는 숨소리.

어둠을 밀어낸 태양이 어느새 중천으로 넘어가는 동안 쌓이고 쌓인 피로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생명의 샘이 지닌 '피로 회복 속도 200% 상승'이란 무지막지한 옵션으로도 버티지 못할 만큼 아주 무겁게.

'젠장...!'

한 발 내딛기도 버거운 실정에 이러다 고꾸라지는 건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그로 인해.

그어어어어!!

으어어어!

후우우욱!

후욱!

맹렬하게 쫓아오는 좀비들의 손톱이 슬쩍슬쩍 흉갑에 닿았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정도로 간격이 줄어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었다.

잠깐이라도 쉬는 즉시 아귀들의 주둥이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될 테니까.

때문에 이를 악물고 뛰고 있지만....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지쳐 나뒹굴게 되리란 걸.

하면.

어찌해야 좋은가.

다른 것보다 체력적인 부분만이라도 커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생명의 샘을 향해 질주하던 어제처럼.... 이라고 막 푸념하던 참이었다.

'어제?'

불현듯 기발한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다름 아닌.

그어어어어어!!

"여기다!"

휘우우우욱―

사각!

내 팔을 '일부러' 내주는 것이었다.

왜?

띠링!

[현재 '중독: 미약한 감염' 상태입니다.]

[빠른 시간 내에 치료하지 않을 시 '상태 이상: 좀비화'가 진행됩니다.]

[좀비화 진행률: 1%]

감염이 되려고.

이걸로.

"40%까지만 버티는 거다!!"

좀비 특유의 장점 '통각 손상'을 이루기 위하여.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였다.

음.

이럴 때 쓰는 게 맞던가?

아무튼.

"아자아아아아!!"

나는 남았던 힘을 모조리 끌어모아 달렸다.

달리고 달려서 재도약의 발판이 마련될 때까지.

[좀비화 진행률: 40%]

띠링!

[경고!]

[감각 기관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통각, 촉각, 미각이 일부 손상되었습니다.]

"됐다!"

마침내.

그 시간이 찾아왔다.

서서히 사라지는 감각.

심장 박동이 느려진다 싶더니 곧 목구멍을 조여 오던 호흡도 조금씩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그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해진 육체를 받아들인 나는 발목을 붙들던 족쇄를 풀어헤치며 싱긋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근력과 순발력은 우위.

취약하던 체력은 동등해졌으니 더는 두려울 게 없었다.

"하아아!"

후우우우욱―

서걱!

* * *

〈튜토리얼: 생존 일지 (6)〉

* 최종 점검을 위한 과제입니다. 숲을 돌파하여 빠져나가십시오.

(47/99)

"마흔일곱, 많이도 잡았네."

생명의 샘과 좀비화.

두 가지를 적절히 이용해 개미 떼처럼 들이닥쳤던 수십 마리의 좀비들을 기어이 싹 다 쳐 죽인 나는 샘터로 되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47.

남은 게 대략 50여 마리. 한 부대가량만 더 사냥하고 나면 생존 일지 (6)의 본래 목표인 탈출을 진행해 봐도 될 거 같았다.

그어어어어!!

그어어!

"마침 딱 와 주네."

앞으로의 방향성을 수립하기 무섭게 나타난 좀비들을 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나는 살짝 뜯어낸 겉옷으로 도신을 깔끔하게 훔쳐낸 후 씹던 멧돼지 고기를 삼키며 굽혔던 무릎을 폈다.

둘, 셋, 넷, 다섯.

30~40단위의 대규모 전투를 벌이다 와서 그런가, 너무나도 빈약해 보이는 스쿼드에 내가 먼저 선수를 취했다.

"하!"

타닷―

땅을 박차며 돌진해 뻗어 내는 일격.

단호한 칼날로 선두를 베고 쏟아지는 핏물을 피해 두세 걸음 물러났다가 좌측으로 파고들어 가며 단숨에 세 마리를 벤 그때였다.

띠링!

"응?"

다친 것도 아닌데 난데없이 알림음이 들린 건.

의아한 기색으로 두 마리마저 서둘러 처리하고 핸드폰 화면을 살펴봤다.

그 안에는.

[좀비 '50' 마리를 처치했습니다.]

[보상으로 '여섯 가지 비밀이 담긴 쪽지'가 주어집니다.]

두 줄의 메시지와 휘몰아치는 빛무리 중심에서 종이 한 장이 생성되고 있었다.

〈여섯 가지 비밀이 담긴 쪽지/Normal〉

* '튜토리얼: 생존 일지' 곳곳에 감춰져 있던 여섯 가지 비밀을 적어 놓은 쪽지다.

* 첫 번째 비밀: 최초의 공터에서 북동 방향으로 직진하면 '샘지기: 저돌적인 멧돼지'를 만날 수 있다.

* 두 번째 비밀: 최초의 공터에서 북서 방향으로 직진하면 '샘지기: 날카로운 독수리'를 만날 수 있다.

* 세 번째 비밀: 최초의 공터에서 남쪽 방향으로 직진하면 '샘지기: 집요한 뱀'을 만날 수 있다.

* 네 번째 비밀: '무기 임의 선택권'에서 선택한 무기를 통해 조우하는 샘지기가 달라진다.

* 다섯 번째 비밀: '여섯 가지 비밀이 담긴 쪽지'를 찢는 것으로 숨겨진 장소 및 샘지기들의 위치를 얻을 수 있다.

* 여섯 번째 비밀: 99마리의 좀비를 모두 해치울 시 '???'가 등장한다.

"이건...."

보자마자 깨달았다.

내가 '히든 트리거'를 발동시켰고, 그 덕분에 오로지 돌파에만 목적을 두었더라면, 해서 체력을 아끼고자 전투를 외면하는 회피 기동에 전념했더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엄청난 정보들을 습득하게 됐다는 점을.

좀비화까지 감행하며 이겨 냈던 위기가 기회라는 선물을 가져왔다.

"…가는 게 맞겠지?"

한참을 심사숙고하던 나는 이 쪽지를 활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저돌적인 멧돼지의 영혼석'만으로도 적잖은 이점을 맛봤다. 이러한 시점에서 '날카로운 독수리'와 '집요한 뱀'이 존재함을 알게 됐는데, 이를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튜토리얼.

만약 그 이름의 뜻대로 여기가 단지 기초적인 공간에 불과하다면, 장기적인 미래를 준비해야 했으니까.

꼭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영혼석을 추가로 흡수할 수 있으면 당장 생존 일지 (6)을 깨는 데도 큰 도움이 되리라.

찌이익!

[미니맵이 활성화됩니다.]

[숨겨진 장소와 샘지기들의 위치 정보가 미니맵에 표시됩니다.]

"이렇게 되는구나. 제일 인접한 게 독수리. 오케이."

굳은 결심을 세운 나는 핸드폰에 펼쳐진 지도를 살피며 샘물을 보충해 '날카로운 독수리'의 영역으로 움직였다.

* * *

좀비들의 수도 꽤 줄여 놓았거니와 북동에서 북서로 가는 길이었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바위가 숭숭 박힌 두 번째 샘터에 다다랐―.

"…끼에에에에엑!!"

휘우우우우욱!

"...!"

을 찰나에 한 줄기 바람이 날 덮쳤다.

퍼어억!

"크읍!"

상반신을 할퀴고 지나가는 예리한 발톱의 주인 날카로운 독수리는, 샘터 근처에서 얌전하게 대기하던 멧돼지와 달리 주저 없이 기습을 가하는 '선공 몬스터'였다.

6화

한순간에 시야가 뒤바뀐다.

땅은 하늘이 되고, 하늘은 땅이 되는 기이한 광경 속에서 나는 답답한 신음을 터트렸다.

"커헙!"

느닷없는 충격에 일시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나가 떨어지면서도 나는 모순적으로 진한 '안도감'을 느꼈다.

가격당한 부위가 가슴이었으니까.

몇 센티만 위로 올라갔어도 흉갑의 보호 범위를 벗어나 목 혹은 머리통이 박살 났을 습격이었기에 그야말로 천운(天運)이었다.

"썅…갓, 카아악! 퉤."

"끼에에에엑!!"

욱신거리는 명치 부근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피 맛 섞인 침을 뱉은 난, 다시금 날아오르는 독수리를 응시하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재수 좋은 건 재수 좋은 거고.

뭐가 됐건 내 오늘 반드시 저놈을 잡아 구워 먹으리라.

각오를 다진 채 도병을 들자 우렁차게 울부짖은 독수리가 날개를 퍼덕여 바람을 살포시 밀어내더니 급작스러운 고공 낙하를 시전했다.

저것이구나.

일순간 날개를 접으며 부리를 내세워 찍어 누를 듯 하강하다 최종 단계에서 U 자 형태로 역상승하며 발톱을 휘두르는 공격.

그래도 몇 번 싸움을 겪어 봤다고 약간이나마 눈치가 생긴 나는 빠르게 백 스텝을 밟으며 타이밍에 맞춰 전면을 올려 쳤다.

"하아!"

후우우욱!

―카앙!

"끼에에엑!"

서로 간의 전력이 뒤엉키고, 부딪친 칼날과 발톱 사이에서 파문이 일었다.

'속도'가 더해진 탓일까?

아무래도 체급이란 게 있으니 멧돼지보다는 덜하겠단 판단하에 물러서지 않고 맞선 것인데, 내 예측을 넘어서는 중압감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다만.

"크으읍, 하아!"

후우웅!

"키에에엑?!"

일수 교환의 승패를 나눈다면 힘겨루기의 승자는 두말할 것 없이 나였다. 형상된 근력이 결국 놈을 밀어냈기 때문이었다.

그 여파로 U턴은 고사하고 제대로 날갯짓조차 빌빌 거리는 독수리.

설마 이리 밀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짖어 대는 괴성엔 당혹감이 역력했다.

"흐앗― 차!"

나는 손에 쥔 승기를 놓지 않으려 곧바로 연격을 단행했다.

역대각선 베기.

한껏 치켜들었던 팔을 8자로 회전해 좌하단에서부터 우상단으로 칼날을 쳐올렸다.

휘욱―

서걱!

완벽하게 살갗을 파고드는 도.

두꺼운 지방층으로 덮여 있는 멧돼지와 다르게 비행을 위해 구조적으로 가볍게 진화된 새의 방호력으로는 도저히 칼날을 튕겨 낼 수 없었다.

"키에엑! 키에에엑!!"

촤아아아악!!

처절한 곡소리와 함께 분수처럼 치솟는 시뻘건 선혈.

나는 흩뿌려지는 피를 옆으로 흘리며 쉬지 않고 몰아쳤다. 샘지기인 이상 샘터를 떠나가진 못하겠지만.

일단 도망치면 시간이 지체되고, 시간이 지체되면 모든 일정이 지연되어 자칫 밤중에 좀비와 수마를 한꺼번에 상대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찬스가 왔을 때 끝장을 봐야 했다.

"흐아아아아!!"

후우우웅―

콰직!

〈날카로운 독수리의 영혼석/Magic〉

* '생명의 샘'이 지닌 신비로운 힘을 통해 정해진 한계를 이겨 내고 영물(靈物)로 거듭난 샘지기 독수리의 영혼석이다. 복용 또는 장비 제작 시 내재된 영력을 사용할 수 있다.

* 복용 시 속력 5% 영구 강화/장비 제작 시 착용자의 속력 7% 상승 효과 적용

['날카로운 독수리의 영혼석'을 복용했습니다.]

[속력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5% 향상됩니다.]

"쓰으읍― 하아."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힘을 갈무리했다.

이번에 향상된 것은 '속력(速力)'.

문자 그대로 속도와 관련된 모든 행동에서 플러스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라는데, 근력과 같이 손쉽게 체감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닌 터라 차차 검증해 보기로 하고 샘물로 목을 축인 뒤.

"남쪽, 가 보자."

세 번째 샘지기.

집요한 뱀을 만나러 남하했다.

* * *

가는 길에 마주친 좀비 몇 마리를 쓰러뜨리며 얼마나 행군했을까. 점심을 훌쩍 넘겨 오후로 접어들 무렵.

"절벽?"

족히 수백 미터는 될 법한 절벽 아래에 작게 조성된 샘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찌나 높은지 구름이 걸려 있어 위쪽이 보이질 않는다.

으음.

그 웅장한 절경을 감상하고 있자니.

문득 이 숲 전체가 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게 아닌지, 그런 거라면 탈출구는 성벽처럼 빙 둘러쳐진 절벽 어딘가에 나 있는 길목을 말하는 거겠구나 하는 궁금증이 도졌다.

"뭐, 그거야 나중에 확인해 보면 되겠지."

짧게 상념을 마치고 본론으로 돌아와 주위 지형지물을 집중해서 관찰했다.

세세하게 둘러보니 특이한 점이 보였다.

구멍.

절벽에서부터 대지에 이르기까지 샘터를 중심으로 온갖 곳에 성인 남성 팔뚝만 한 구멍 수십 개가 숭숭 뚫려 있었다.

'저기서 튀어나온 건가?'

멧돼지는 지상, 독수리는 창공에서 침입자를 맞이하더니.

뱀은 지하를 무대로 급습을 가하려는 모양이었다. 대강 그려지는 그림에 어떤 식으로 공략하는 게 좋을지 잠시 턱을 괴고 고민에 잠겼다.

앞선 두 괴수는 '목격 가능한' 대상이었기에 나름대로 대응이 영 어렵지는 않았다.

하나.

땅속에서의 급습이 특기라면 투시 능력이 없는 한 나로서는 대처가 늦어 방어에 실패하게 될 확률이 클 터.

"흐음...."

따라서 고심을 거듭하던 나는 이내 멀찍이 물러나 나뭇가지와 넝쿨을 주우러 다녔다.

그러고는.

"읏차!"

―꽈아아아아악!

하나둘 바지에 대고 묶었다.

마치.

장갑판을 두르듯 목재로 방호구를 만든 것이다.

활동하는 데야 굉장히 불편하겠지만, 뱀을 끌어낼 만한 마땅한 미끼가 없는 마당이니 스스로 미끼를 자처하는 대신 설령 피습을 당하더라도 안전할 수 있게끔 이렇게라도 안전 장비를 갖춰야 했다.

한 겹, 두 겹.

무려 세 겹이나 둘러 촘촘하게 완성한 나는 내친김에 양팔도 쫙 채워 놓고서 샘터로 쭉쭉 나아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인 양 목마른 양이 냇가를 찾듯 허겁지겁 샘물을 향해 정확히 여덟 걸음을 내딛던 찰나.

쉭!

…사아아아!!

검은 그림자가 좌측에서 솟아올랐다.

콰직!

아가리를 잔뜩 벌린 뱀이었다.

맞다.

과거형이다.

"맛있냐?"

슈화아아악―

서걱!

오른쪽 종아리를 물리자마자 휘두른 칼날에 놈의 몸뚱어리가 반 토막 났으니까.

일격.

빨라진 속력과 강력해진 근력이 빚어낸 시너지였다.

〈집요한 뱀의 영혼석/Magic〉

* '생명의 샘'이 지닌 신비로운 힘을 통해 정해진 한계를 이겨 내고 영물(靈物)로 거듭난 샘지기 뱀의 영혼석이다. 복용 또는 장비 제작 시 내재된 영력을 사용할 수 있다.

* 복용 시 인지력 5% 영구 강화/장비 제작 시 착용자의 인지력 7% 상승 효과 적용

['집요한 뱀의 영혼석'을 복용했습니다.]

[인지력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5% 향상됩니다.]

체내로 진입한 영혼석의 영력을 감지함과 동시에 오감의 탐색 범위가 확 넓어졌다.

인지 범위의 증폭.

과장 좀 보태서 몽골인이 된 기분이었다.

"허, 신기하네."

처음 느껴 보는 기묘한 감각에 한동안 감탄을 금치 못하던 나는 잠깐 시간을 내서 가볍게 걷거나 뛰며 달라진 간극에 확실하게 적응하고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샘지기들을 전부 처치했으니 슬슬 '숨겨진 장소'로 갈 차례였다.

따로 순번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명칭부터가 범상치 않아 샘지기 영혼석으로 신체 강화를 먼저 끝내고 가 보기로 계획했었다.

과연 그곳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공포와 기대가 한데 뒤섞인 묘한 마음으로 미니맵을 따라 숲길을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등잔 밑이 어둡다, 뭐 그런 건가."

최초의 공터였다.

* * *

변함없이 텅 비어 있는 공터에 발을 들인 나는 쭉 걸어가 중심부에서 멈춰 섰다. 미니맵에서 가리키는 곳은 딱 이 지점―

띠링!

"음?"

[조건이 충족된 상태입니다.]

[달성 조건: 여섯 가지 비밀이 담긴 쪽지 습득]

[가려져 있던 입구가 개방됩니다.]

쿵―

쿠구구구구구구궁!!

갑작스레 이는 지진.

시선을 옮겨 진원지를 바라보니 공터 한쪽이 굉음을 내며 열리는 중이었다.

안쪽에는 대략 5m 남짓한 길이로 지하 계단이 보였고, 그 끝엔 대강 성인 남자 키만한 높이의 제단 같은 건축물 상부 중앙에 영혼석으로 짐작되는 보랏빛 구슬이 놓여 있었다.

숨겨진 장소라길래 던전(dungeon)이라도 되는가 싶었는데, 십 수 개의 팔이 줄기처렴 엮인 듯한 제단의 형태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기는 하나 그걸 제외하면 몬스터도 함정도 없는 다소 허탈한 마무리에 어깨를 으쓱이며 터벅터벅 제단을 걸어 내려오던 나는 금세 미간을 구겼다.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포기하라.]

제단에 걸려 있는 현판 때문이었다.

"음...."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내용.

대충 등가 교환의 법칙을 이야기하는 듯한데, 무얼 내줘야 한다는 건지 명확하게 적혀 있지 않아 선뜻 손을 뻗기가 망설여졌다.

굳이 히든 트리거를 설정해서 이리로 찾아오게 했으니 목숨을 가져가진 않겠지만.

혹 무기라도 빼앗기게 된다면 상당한 타격이라.

"으으음."

이걸 어쩐다.

먹어, 말아.

독이 든 성배를 마주한 듯한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한참을 생각하던 나는 마침내 결정을 내리곤 주저하지 않고 팔을 뻗었다.

경고 문구까지 적어 둔 걸 보면 좋은 보상임은 분명할 테니.

튜토리얼 이후를 고려해서라도 가져가는 쪽으로 결론을 지었다.

그 전에.

휘이이익―

도랑 흉갑 좀 멀리 던져 놓고.

터엉!

['질주하는 말의 영혼석'을 획득했습니다.]

[봉인석이 소실되어 제단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투우웅―

구슬을 빼내자 빈자리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띠링!

답은 핸드폰 화면에 나와 있었다.

[제단이 활성됨에 따라 영향권 내의 '생명의 샘'이 지니고 있던 영기를 잃습니다.]

짤막한 한 줄.

그러나.

매우 크리티컬한 한 줄이었다.

"허."

하필 생명의 샘이라니.

목숨도, 장비도 아니라는 점에 안심하면서도 더 이상 무한 포션 전략이 불가능해졌다는 소식에 눈살을 찌푸린 나는 얼른 물주머니를 체크했다.

포션도 포션이지만.

샘물은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생명의 샘물'을 복용했습니다.]

다행히.

미리 퍼 둔 샘물의 효과는 살아 있었다.

몇 번이고 마셨던 탓에 넉넉하진 않았으나, 아껴 쓰면 생존 일지 (6)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

"후, 식겁했네. 그나저나 너는 뭐냐."

〈질주하는 말의 영혼석/Magic〉

* '생명의 샘'이 지닌 신비로운 힘을 통해 정해진 한계를 이겨 내고 영물(靈物)로 거듭난 샘지기 말의 영혼석이다. 복용 또는 장비 제작 시 내재된 영력을 사용할 수 있다.

* 복용 시 체력 5% 영구 강화/장비 제작 시 착용자의 체력 7% 상승 효과 적용

근력, 속력, 인지력.

마지막은 체력인가.

생명의 샘을 포기한 대가로 체력 상승용 영혼석이라. 이걸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쓰게 웃은 나는 구슬을 꿀꺽 삼켰다.

['질주하는 말의 영혼석'을 복용했습니다.]

[체력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5% 향상됩니다.]

두근!

두근!

'체력'이라고 적혀 있다만, 실제로는 심폐 지구력에 가까운 듯 거세진 심장 박동을 박자 삼아 제단을 빠져나와 흉갑을 착용하고 도를 쥐었다.

샘지기, 숨겨진 공간.

다 클리어했다.

이제 남은 것은 두 가지.

탈출과.

"물음표 덩어리."

생물일지 사물일지, 사람인지 짐승인지 몬스터인지, 득이 될는지 독이 될는지 모를 미지의 존재였다.

7화

[ 귀환 ]

"...좋아, 해 보자."

10여 분간의 숙고 끝에 결심했다.

이게 옳은 선택인지는 확신은 못 한다만, 물음표 덩어리와 조우해 보자고.

누구나 한번은 들어 봤을 명언이 있지 않던가.

하이 리스크(high risk) 하이 리턴(high return).

이번 도박은 단순히 재산만 탕진하는 게 아니라 여차하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으나.

찰랑―

찰랑―

나는 사전에 확보해 둔 샘물을 근거로 삼았다.

이게 없었더라면 도전은 무슨, 보상도 적절히 얻었으니 됐다 치고 당장 숲을 빠져나갔을 거다.

참.

아직 개봉한 적 없는 신상 물약도 있다.

여하간.

"가 보자고."

도와 흉갑, 물주머니 외에 집요한 뱀과 싸우며 파손됐던 다리의 목재 장갑판까지 보수를 마친 나는 주먹을 쥐며 기세를 끌어 올리곤 숲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좀비들을 향해 이동했다.

넓어진 인지 범위 덕에 수색은 순조로웠다.

엄청난 차이가 있는 건 아닐지언정 최소한 좀비 선에서는 기습당할 일이 완전히 사라졌으니까.

* * *

[(92/99)]

"일곱 마리."

최초의 공터에서 '질주하는 말의 영혼석'을 흡수한 이후로 서너 시간이 흐른 현재.

드디어 생존 일지 (6)에 할당된 좀비의 숫자가 열 마리 안쪽으로 줄어들었다. 퀘스트를 받던 당시만 하더라도 까마득하게 보였는데, 고작 일곱 마리라니.

보람찬 결과물에 미소 지으며 칼날에 묻은 혈액과 살점을 털어 낸 나는 더욱 열심히 숲을 돌아다니며 차근차근하게 남은 좀비들의 목을 갈라 버렸다.

마침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 무난히 끝을―

"잠시만."

그어어어어!!

보려다가 다급히 도를 회수했다.

저 멀리.

저물어 가는 '석양'을 본 까닭이었다.

노을이 진다는 건 곧 날이 저문다는 말.

즉.

내가 여기서 99마리를 채우면 필드가 어두워진 상태로 물음표 덩어리와 대면하게 된다는 이야기.

'그건 안 된다.'

물음표 덩어리의 정체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춰도 부족할 판국에 숫제 본인 손으로 안대를 쓰는 격이었다.

제아무리 인지 범위가 늘어났다 한들 끽해 봐야 5%.

고로.

밤중의 전투는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했다.

"…묶어 두자."

하여 고안한 방법이 포박이었다.

한 마리만 남겨 적당한 위치에 묶어 두고 오늘은 편안하게 잠을 잔 뒤, 컨디션을 회복한 내일 날이 밝으면 물음표 덩어리를 불러내기로.

그어어어어어!!

"네가 좋겠다."

후욱―

훅―

서걱!

세운 방안을 실행하고자 살려 두었던 좀비의 팔다리를 잘라 냈다. 이놈들은 좀비답게 과다 출혈 따윈 가볍게 버티는지라 거리낄 게 없었다.

단지.

막상 사지를 베어 내고 보니 나 자신에게 좀 놀랐다.

어제만 하더라도 나무 막대기 휘두르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나였는데, 단 하루 만에 이리도 단호해질 줄이야. 이래서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는 건가?

그어어억! 그어어억!

"나 참."

피식 입꼬리를 올린 나는 넝쿨을 구해 와 우선 재갈처럼 좀비의 아가리에 물렸다. 반항이 심했지만, 억지로 밀어 넣고서 복부를 칭칭 감아 멧돼지의 샘터에 들렀다.

격전 중에 메고 다니기엔 몹시도 거치적거렸기에 내팽개쳤던 침낭을 챙기러.

여기서 바로 야영지를 꾸리지 않은 건 근처에 시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시신은 부패하며 극심한 악취를 풍긴다.

구태여 썩은 내를 맡으면서 자고 싶지는 않았기에 침낭만 챙겨 비교적 깨끗한 독수리의 영역으로 향했다.

이젠 울타리를 칠 이유도 없겠다.

모닥불만 피워 야영지를 꾸린 나는 멧돼지 고기로 저녁을 해결하고 곧장 드러누웠다. 전날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던 강행군이었던 터라 눈을 감자마자 잠이 찾아왔다.

* * *

결전의 날 아침.

사각―

사각―

사각―

"음, 이만하면 되려나?"

오전 일찍 기상한 나는 샘물로 대충 세안을 마치고 인근을 돌며 한 무더기의 나뭇가지를 모아 와 무언가를 제작했다.

양쪽 끄트머리가 아주 뾰족한 '투척용 목창'이었다.

근접전에 치중된 1차원적인 전술 패턴을 탈피해 중장거리전에서도 적을 사살할 수 있을 방도를 간구하다 고안한 것이 이 투척 목창.

위력에 대해서는 미지수지만.

"하!"

휘우웅―

―뻑!

"오."

지금의 근력이라면 좀비의 머리통을 부수든, 못해도 넉백을 시키든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으리라.

만족스럽게 주억거린 나는 30여 자루의 목창을 줄 세워 정리해 두고, 샘터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 울타리보다 효과적인 장벽을 세팅했다.

좀비 같은 무통 개체에는 화력이 별 쓸모 없을지라도.

통각이 멀쩡한 일반적인 생명체에게 불이란 가히 최강의 무기였다.

"자, 이제 죽을 시간이다."

으으으으! 으으!

할 수 있는 멕시멈으로 만전을 기한 나는 주변을 쓱 돌아보며 점검을 끝내곤 야영지에서 50m가량 떨어진 나무 옆에 결박해 두었던 좀비의 목을 가차 없이 베고 돌아왔다.

[(98/99)]

휘우우욱!

서걱!

띠링!

[경고!]

[〈튜토리얼: 생존 일지 (6)〉에 부여된 모든 적을 처치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쌓이고 쌓인 원념이 죽음 속에서 꽃을 피워 냅니다.]

그에 맞춰 요란하게 진동하는 핸드폰.

무어냐.

어떤 놈이 나타나는 거냐?

긴장감, 호기심, 두려움....

온갖 감정이 뒤섞인 채로 도병을 꽉 틀어쥐고 기다리던 차에 뭔가가 홱 하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칠흑같이 검은 안개였다.

아니.

검은 안개'들'이었다.

후우우욱―

후욱―

후우욱―

사방 천지에서 수십 개의 검은 안개 덩어리가 허공을 유영하다 홱 하고 어디론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머리도, 팔도, 다리도 없이 모래 위를 나뒹굴던 99번째 좀비의 사체로.

그 직후.

들썩!

잔떨림마저 사그라들었던 송장이 꿈틀거렸다.

"...!"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목창을 잡아 온 힘을 다해 던졌다. 이곳은 전체 이용 시청 등급의 동화가 아니다. 악당의 변신을 잠자코 지켜볼 필요는 없었다.

...만.

카아앙!

시스템 보정인가?

전력을 다했음에도 검은 안개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목창. 연거푸 세 개를 던졌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그러는 사이.

들썩!

들썩!

점점 더 과격하게 흔들리다 일순간.

―콰직!

개구리 뒷다리마냥 불쑥하고 사체에서 팔이 튀어나왔다.

오른팔, 왼팔.

콰직!

콰드드득!

다음은 양다리.

순서대로 하나씩 신체를 재생시킨 좀비는 기어이 소실되었던 머리까지 재 창조해냈다.

그리고 내지르는 함성.

…끄어어어어어어어!

[일백의 생명을 물어뜯은 아귀, '구울(Ghoul)'이 깨어납니다.]

물음표 덩어리, 구울의 등장이었다.

'젠장, 나 똥 밟은 건가.'

귀가 쩌렁쩌렁하게 울부짖는 구울을 보며 나는 절로 인상을 찡그렸다.

접해 본 적 없는 몬스터.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모르지만, 솜털이 쫙 곤두서는 걸 보아하니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았다.

이럴 때 필요한 건.

탁―

'선공필승.'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만고 불변의 진리였다.

끄어어어어어!!

슈욱―

파아아앙!

변신을 마친 악당처럼 하울링을 터트리며 땅을 박찬 구울을 향해 목창을 던졌다. 바람을 가르며 놈의 어깨를 파고드는 창끝.

끄어어억― 커억!

충격이 제법 컸는지 달려오다 말고 휘청거리는 놈.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었다.

온 힘을 다한 투척이었음에도 겨우 살갗을 패는 정도에서 그쳤다는 걸. 날붙이가 없는 목재로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단 이야기였다.

구울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살가죽의 방어력이 꽤나 상향된 듯했다.

끄어어어어어어!!

"어쩔 수 없나."

이를 깨달은 나는 애써 제작했던 목창들을 내팽개치고 도를 들었다.

먹히지도 않는 수로 괜한 오기를 부려 봐야 나만 힘들어질 뿐이니 체력 낭비는 그만두고.

"후, 붙어 보자."

칼을 쓴다.

끄어어어어어어!!

휘우우욱―

카앙!

격렬한 소음을 동반하며 부딪치는 도신과 손톱.

그 즉시 깨달았다.

이놈, 방어력만 높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크읍!"

끄으으으으!

카가가가각!

날을 통해 전달되는 묵직한 압력.

어쩌면.

멧돼지보다도 강할지 모를 구울의 공격력에 어금니를 꽉 깨문 나는 오른발 앞꿈치를 세우며 일보를 내디뎠다.

…가.

슥―

끄억?

부지불식간에 힘을 쫙 빼며 왼발을 축으로 역회전을 걸었다.

팽팽한 힘겨루기 중에 한쪽이 힘을 빼면 자세가 망가진다. 학교 다닐 때 줄다리기 좀 해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상식이었다.

그때 그 당시와 한 치의 오차 없이 팔을 뻗던 자세대로 엎어지는 구울.

후우우욱!

"하아아아!!"

나는 놈의 등판을 노렸다.

서거걱!

촤아아아아악!

철제 칼날의 예리함과 '베기 공격 시 추가 피해량 +3%'가 더해져 기다랗게 그어지는 직선.

이 또한 검은 안개의 영향인지 인간의 것처럼 선홍색을 유지하던 좀비와 달리 검붉은 핏물이 솟구친다.

꺼림칙한 색깔에 피하고 싶었지만.

후두두둑―

띠링!

나아가 볼에 튄 몇 방울의 피가 실제로 말썽을 일으켰지만.

"흐아아아아!!"

물주머니에 든 샘물을 믿고 재차 도를 휘둘렀다.

구울은 기본적으로 좀비를 베이스로 태어난 상위형, 목을 자르기 전까지는 칼질을 멈춰선 안 되는―

끄어어어억!!

휘우욱!

"흡!"

아쉽게도 연타는 허사로 돌아갔다.

등짝이 베이든 말든 대지에 드러누운 채로 내 발등을 노리는 구울의 과격함에 도를 거두고 물러나야 했던 탓이다.

놈은 연신 뒷걸음질 치는 나를 쫓아 지상에서 헤엄을 쳤다.

집요한 뱀?

그 이명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끄어어어어어억!!

"이런 미친―"

―텁!

"...흐읍!!!"

도망치고 도망쳐도 끈덕지게 추격해 기어이 종아리를 감싸던 장갑판 위로 손톱을 걸었다.

물림 사고를 방지하고자 구축한 방패가 되레 족쇄가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난 급히 다리를 빼며 도를 역수로 쥐고 내리찍었다.

큰 효력은 없었다.

팔목이 반쯤 잘렸으나, 이미 악력만으로 장갑판을 부수고 들어온 손아귀가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으니까.

콰득!

"끄으으읍!!"

살점이 뜯기고 근육이 찢어지는 통증에 악다문 치아 틈새로 새어 나오는 신음.

뇌리를 자극하는 찌릿한 신호에 흔들리는 멘탈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너덜거리는 놈의 팔목을 다시 노렸다.

콰직!

섬뜩한 파육음이 흐르고, 뼈째로 끊긴 흉물스러운 살덩어리가 풀숲 너머로 날아간다.

그 와중에 구울 놈의 남은 손이 내 왼 다리를 잡았지만, 늦지 않게 발을 들어 회피하곤 뒤로―

툭―

"아?"

풀썩!

물러나려던 순간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

어째서인지.

'하늘이… 노랗다?'

세상이 빙글빙글 춤추고 있었다.

대체 왜?

원인을 찾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띠링!

띠링!

아까부터 요란하게 아우성치고 있는 핸드폰으로 추측하건대, 볼따구에 닿은 핏물이거나 종아리에 박혔던 손톱이거나 혹은 둘 다겠지.

그렇기에.

중요한 포인트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였다.

끄어어어어어!!

점차 기울어 가는 시야 속에서 쓰러진 나를 비웃듯 천천히 일어나 한껏 포효하곤 달려오는 저 구울 놈에게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이게 내가 풀어야 할 숙제였고.

그 질문에 대해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 안에서 자그마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액체가 유난히 화려하게 보이는 약병.

다름 아닌.

'하급 회복 물약'이었다.

8화

나는 어젯밤부터 물음표 덩어리가 흔히 말하는 보스 몬스터일 경우를 상정해 두고 여러 가지 대비책을 고민해 봤었다.

일명 줄다리기 작전도 그것의 한 부류였고, 이 외에 독수리처럼 공중형이거나 수적인 열세에 놓였을 때 써먹을 투척용 목창 다발이나 멧돼지나 뱀같이 비행력을 갖추지 못한 대상에게 유효한 모닥불 장벽 등.

나름대로 현시점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끌어모아 스테이지에 입장했다.

그 말인즉슨.

상대가 '좀비형'일 확률도 고려했다는 뜻이며, 그러할 때는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하는가에 관해서도 고심했다는 의미였다.

자, 그렇다면.

작금의 내게 있어서 물리력 이외에 좀비류 몬스터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수단이 또 있을까?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획기적인 비책을 궁리하던 차에 관심을 잡아끈 것이 이 녀석, '하급 회복 물약'이었다.

〈하급 회복 물약/Normal〉

* 신성력이 가미된 물약. 복용 또는 뿌려 흡수시키는 것으로 내·외상을 치료한다.

* 급속 상처 회복 및 3분간 자연 치유력 30% 상승

아무리 봐도 구급약품에 지나지 않는 옵션.

그럼에도 내가 주목한 연유는 첫 문장, 개중에서도 첫 단어 때문이었다.

신성력(神聖力).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는 아주 고결하고도 거룩한 힘.

이는.

각종 게임과 소설 등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는 곳에서라면 언제나 죽음을 거부하고 되살아난 '언데드(Undead)'에 천적으로 그려졌었으니까.

물론 이게 여기 숲 세계관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할지는 모른다.

미리 연구를 해 봤으면 좋았겠지만, 보유한 용량이 1회분뿐인 탓에 섣불리 실험에 투자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딸깍―

이거야말로 진짜 생명을 건 겜블링이었다.

통한다면 살 것이요. 통하지 않는다면 ….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

죽으리라.

―촤하아아악!!

나는 숫자와 그림 대신 양면에 생(生)과 사(死)가 새겨진 동전을 튕겼다.

곧이어.

화륵―

불꽃이 일었다.

후화아아아아아악!!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화마(火魔), 그 투명한 불길이 구울의 전신을 짓누르며 놈의 거무튀튀한 육신을 불사르고 있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리 다가왔다.

끄어어어억! 끄어어어억!!

신성력이 가미된 포션을 뒤집어쓴 구울의 고통 어린 비명과 휘적휘적 춤을 추는 춤사위가 마치 지옥 불구덩이에 빠진 악령의 절규처럼 들렸다.

'아아…!'

다행스럽게도 불사와 퇴마의 오랜 천적 관계는 여기서도 동등하게 적용되고 있었는지, 내 비장의 한 수가 아주 멋들어지게 먹혀 든 모양이었다.

단지 문제라면.

끄어어어억! 끄어어어어어억!!

'버티고, 있어...?!'

하급.

등급이 낮은 만큼 함유된 신성력의 양도 적어서일까?

피부가 녹고 뼈가 드러나고는 있었으나.

그게 끝이다.

아픔을 잃어버린 언데드 주제에 괴로워하는 신기한 광경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는 덧없는 수준이었다.

추가 타격.

아니.

결정타를 먹여야 했다.

누가?

당연하게도 그 역할은 내가, 스스로 맡아서 행해야 한다.

"끄으으으읍!"

부들거리는 손으로 물주머니를 끌어 올려 지퍼를 열고 대충 입가에 부었다. 마신다는 행위는 허가되지 않았다.

여전히 하늘이 빙빙 돌고 있었다.

그저.

한 모금이라도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게끔 침낭 가방 안에 있던 샘물을 모조리 얼굴 위로 부어 버렸다.

띠링!

띠링!

잇달아 울리는 알림음.

['생명의 샘물'을 복용했습니다.]

[모든 해로운 효과가 소멸합니다.]

[10분간 자연 치유력 및 피로 회복 속도가 200% 상승합니다.]

['상태 이상: 좀비화'가 해제됩니다.]

['상태 이상: 구울의 시독'이 해제됩니다.]

무슨 내용인지 읽을 시간은 없다.

그저.

'움직…여라!'

누렇던 세계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육체의 활기를 되찾았으니 어서 일어나 도를 쥘 차례였다.

까드드득―

도를 지팡이 삼아 대지를 밟고 굽혔던 무릎을 편다.

차츰차츰 또렷해지는 시야.

서너 개로 나뉘었던 구울의 형체가 하나로 좁혀졌을 때.

"으아아아아아아!!"

햇빛을 머금은 칼날이 공간을 갈랐다.

우상단에서 좌하단.

내가 선보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일도(一刀)였다.

후우우욱―

―촤아아아악!

[일백의 생명을 물어뜯은 아귀, '구울(Ghoul)'을 처치했습니다.]

[축하합니다!]

[〈100인 한정 업적: 최초의 구울 사냥꾼〉을 달성했습니다.]

새하얀 빛무리가 떠올랐다 내 몸을 휘감는 동시에 중력을 이기지 못한 동그란 물체가 툭 하고 힘없이 추락했다.

쿵―

그 뒤를 이어 고꾸라지는 거무스름한 몸뚱이.

구울이었다.

"하아, 하.... 후으으으."

죽음이 확정된 놈의 최후를 지켜보며 나는 거친 호흡을 토해 냈다. 젖 먹던 기운까지 죄다 끌어 쓴 여파인가,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수가 없었다.

이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털썩―

시체 앞에서 쉬는 거야 최근 들어 자주 했었던 일이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피비린내도 나고 구울 놈의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몰라아아아."

일단은 휴식이 급선무였다.

띠링!

띠링!

방금 막 갈무리한 경험치 외에 구울 사냥 보상으로 이래저래 뭐가 많은 것 같기도 했고.

나는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얼른 핸드폰을 빼내 화면을 살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네 번째'로 일백의 생명을 물어뜯은 아귀, '구울(Ghoul)'을 처치했습니다.]

[〈100인 한정 업적: 최초의 구울 사냥꾼〉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및 '방어구 임의 선택권(x4)', '인내하는 거북이의 영혼석', '기술 임의 습득권: 구울'이 주어집니다.]

[신체 능력이 일부 향상됩니다.]

"이야!"

딴 것보다 줄줄이 늘어선 보상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양이 장난 아니었으니까.

100인 한정 업적.

오직 백 명에게만 주어지는 희귀하고 가치 있는 업적의 힘이었고, 그에 걸맞게 '방어구 임의 선택권' 말고도 보라색 구슬과 두툼한 책 한 권같이 처음 보는 아이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인내하는 거북이의 영혼석/Magic〉

* '생명의 샘'이 지닌 신비로운 힘을 통해 정해진 한계를 이겨 내고 영물(靈物)로 거듭난 인내하는 거북이의 영혼석이다. 복용 또는 장비 제작 시 내재된 영력을 사용할 수 있다.

* 복용 시 내구력 5% 영구 강화/장비 제작 시 착용자의 내구력 7% 상승 효과 적용

첫 번째는 '인내하는 거북이의 영혼석'.

게임으로 치자면 맷집을 올리는 유형 같았는데, 냉큼 삼켜 보니 피부 전체가 팽팽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손목…은 좀 무섭고.

아무튼 팔등이나 허벅지에 칼을 대고 살짝 그어 자해라도 해 보면 정확히 얼마나 향상됐는지를 알 수 있겠지만.

뚝―

뚝―

"당장은 안 되겠네."

구울의 핏물로 범벅이 돼 있어 깔끔하게 소독하기 전에는 힘들 거 같았다.

여긴 나중에 체크해 보기로 하고.

"너는 뭐냐."

나는 제일 궁금했던 책을 손에 쥐었다.

기술 임의 습득권, 구울 편.

〈기술 임의 습득권: 구울/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펠 북(spelll book). 펼치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 구울이 지닌 기술 중 한 가지 획득

* 목록: 구울의 시독(상세 보기▼)/질긴 피부(상세 보기▼)/약한 감염(상세 보기▼)

└구울의 시독(A): 상대를 중독시키는 강력한 독을 분비한다. 중독 시 '상태 이상: 혼란'과 '상태 이상: 쇠약'이 발동된다.

└질긴 피부(P): 신체 방어력이 상승한다.

└약한 감염(P): 상대를 감염시켜 좀비로 만든다. 단, 이 기술은 종족이 '언데드(Undead)'인 경우에 활성화된다.

"흐음."

원하는 걸 뽑아 가져가라.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세 번째 항목은 제외해야 하니 사실상 위냐 아래냐의 이지선다. 무얼 고르는 게 좋으려나 잠시 고려해 보던 나는 책을 품에 넣었다.

분위기에 휘둘려 날려 버리기엔 굉장히 값진 아이템이었으니, 이건 좀 더 차분하게 계산해 봐야 할 듯싶었다. 현실로 귀환했을 때 네 장의 '방어구 임의 선택권'과 한꺼번에 처리하면 도겠지.

하면.

이제 할 일은 하나다.

"집에 좀 가 보자!"

탈출이었다.

* * *

독수리의 영역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쭉 걸어가자 예상했듯이 뱀의 영역에서 보았던 것처럼 구름과 맞닿은 그 드높은 절벽이 나왔다.

역시.

이 숲은 절벽에 감싸져 있는 곳이었다.

"왼쪽? 오른쪽?"

여기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탈출구가 나오려나.

왼손의 법칙과 오른손의 법칙의 기로에서 무엇이 더 정답에 가까울지 중얼거리다 그냥 나뭇가지를 던져 잎이 가리키는 우측으로 향했다.

행운이 따르면 한 번에 나가는 거고, 아니면 한 바퀴 삥 둘러서 나가겠지.

주어진 과제를 빠짐없이 클리어했기에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산보하듯 숲을 거닐길 두어 시간쯤 됐을까? 다행히 재수가 좋았는지 저 멀리 길목이 꺾어지기 시작했다.

"거기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단 희망에 저절로 벌어지는 보폭.

한 걸음, 한 걸음.

그러다 언젠가부터는 거진 질주하다시피 풀숲을 가로질러 마침내 마지막 나무를 지나치던 눈앞에, 황금빛 광채로 일렁거리는 문이 보였다.

포탈(portal).

날 위한 문이 저기 있었다.

"으아아아!"

화아아아악!

* * *

탁―

타다닥―

탓―

"…아."

서서히 사그라드는 빛.

그 속에서 익숙하디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내 방이었다. 매일같이 뒹굴고 머물렀던 방에 발을 딛자마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기껏해야 이틀에 불과했지만.

한 십 년은 타향을 떠돌다 돌아온 기분이랄까.

감회가 새로웠다.

혹시.

정말 혹시나 또 다른 숲이거나 또 다른 전장에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었는데, 아마도 그래서 더 북받쳤던 거 같았다.

한동안 감상에 젖어 있던 나를 깨운 건 여지없는 핸드폰 알림음이었다.

띠링!

[축하합니다.]

[〈튜토리얼: 생존 일지 (6)〉의 과제를 완료하셨습니다.]

[이로써 〈튜토리얼: 생존 일지〉의 모든 과정을 이수했습니다.]

[당신의 활약도를 종합하여 보상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구울 사냥 당시에 출력된 메시지들과 더해져 몇 개인지 세기도 힘들 정도로 연달아 출력되는 화면은 심상치 않음을 암시하듯 휘황찬란한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건 필시.

[당신의 성적을 등급화합니다.]

[주어진 임무를 더없이 훌륭하고 완벽하게 해결한 당신의 등급은 'Rank: S'입니다.]

[등급에 따른 보상이 주어집니다.]

이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S 랭크' 때문이었다.

보다 명확하게는.

S 랭크가 가진 파급력이었다.

[보상으로 '많은 경험치' 및 '마력 전이석', '영혼석 교환권' '무기 임의 선택권: Magic'이 주어집니다.]

보상이.

문자 그대로 와르르 쏟아졌으니까.

다만.

이상하게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또..., 오라는 거겠지?"

쌓이고 쌓이는 보상 더미를 통해 확실해진 까닭이었다.

튜토리얼이 끝이 아니라는 예측이.

9화

"하아, 모르겠다."

그로 인해 괜히 심란해졌던 마음을 진한 한숨으로 추슬렀다.

좀비들이, 어쩌면 앞으로는 구울들이나 그 윗줄의 상위 몬스터들이 득실거릴 세상을 오가야 한다는 거.

진심으로 싫었다.

하나.

지금의 나로서는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애당초 무슨 이유로 숲에 끌려갔는지도 알지 못하는 처지 아니던가. 그러니 엿같더라도 견뎌야지.

"그래, 견디는 거다."

언젠가 기회가 올 때까지.

진정으로 '탈출'할 수 있는 찬스를 손에 넣을 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든 버텨 내리라. 나는 굳은 다짐을 가슴 깊은 곳에 새기며 몸을 똑바로 했다.

띠링!

['세트: 평범한 가죽 방어구'를 완성했습니다.]

[구성: 평범한 가죽 투구, 평범한 가죽 흉갑, 평범한 가죽 바지, 평범한 가죽 장갑, 평범한 가죽 신발]

[세트 아이템 효과가 발동됩니다.]

[현재 장비가 유지되는 동안 '모든 물리 공격에 대한 추가 방어력 +5%'가 지속됩니다.]

"세트 효과도 있었네."

결심을 다지고 나서 비교적 선정 난도가 낮은 방어구부터 먼저 풀로 갖추자, 핸드폰에 흥미로운 글귀가 나타났다.

세트 효과.

아이템 기능이 있으니 세트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실제로 있을 줄이야."

그나저나.

노멀 등급에 초보자용 장비인 것치고 기능이 좋다.

모든 물리 공격에 대한 추가 방어력 +5%.

관통처럼 일부 항목에 국한되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대항력이 생겼으니 추후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될 거 같았다.

퍼센티지가 높지 않아 보여도 이런 게 하나하나 모여 목숨을 구해 주는 거니까.

참고로.

하의나 투구 등도 수치만 다를 뿐 전부 관통 방어력에 치중되어 있었다.

[하의: 관통 5%]

[투구: 관통 3%]

[신발: 관통 3%]

[장갑: 관통 3%]

상의에 붙은 옵션을 합쳐서 도합 관통 방어력 19%.

기본 소재가 가죽에 천을 덧댄 형식이다 보니 이리 구성된 듯했다. 가죽에 천을 덧대면 화살류에 대해서는 튼튼할지 몰라도 검이나 도 같은 베기 류의 예리한 날붙이에는 약한 편이니.

철컥―

철컥―

"어휴, 입기도 힘드네."

나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적응이라도 할 겸 혹여라도 바로 불려 갈 것을 대비해 장비를 모두 착용한 채로 다음 보상들을 확인했다.

두 번째로 손이 간 것은 특히 눈에 띄던 푸르스름한 주먹 크기의 돌.

〈마력 전이석/Magic〉

* 오랜 시간 자연의 마력이 축적된 광석. 피부에 접촉한 상태로 10초가 흐르면 내부에 깃든 마력을 흡수할 수 있다.

* 마력 전이(마력이 존재하지 않을 시 개방)

마력 전이석이었다.

"마력이면.... 마나 뭐 그런 건가?"

그러고 보면 아까 '임의 기술 습득권'으로 본 구울의 기술이 각기 P와 A로 나뉘어져 있었다.

각기 패시브(passive)와 액티브(active)의 약자로 추정되던 문자들이었는데.

"추측이 맞았나 보네."

파각―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푸른빛이 감돌던 돌 전체에 실금이 가더니, 퍽 하고 박살 난 마력 전이석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며 무수한 파편과 함꼐 흘러나온 차가운 아지랑이가 이내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 직후.

띠링!

['신체 능력: 마력'이 개방되었습니다.]

…드라마틱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끝?"

마력이 생겼다는 건 알겠다.

한데.

쥐꼬리보다 작은 극소량인지, 최선을 다해 집중하지 않으면 감지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따로 검사를 해 봐야겠지만, 대강 액티브 스킬 두어 번 쓰고 나면 바닥나지 않을까 의심스러울 만치로 미비했다.

"경험치로 올릴 수 있으려나."

초기 획득량이 이것밖에 안 된다니.

따로 증가시킬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스킬이 드랍되기 시작한 이상 뜰지 안 뜰지 불확시리한 아이템에만 매달릴 수 는 없지.

"그건 그렇고, 이제 하이라이트만 남았네."

소 목표를 가슴에 새긴 나는 슬그머니 메인 디쉬로 눈길을 주었다.

보류해 두었던 '기술 임의 습득권: 구울'과 두 장의 금빛 양피지였다.

〈무기 임의 선택권/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크롤(scroll). 찢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소재의 내구성이 약해 불 또는 물 등 외부 요인에 의해 손상될 가능성이 있으니 보관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 마법 '매직 등급 무기 소환'

〈영혼석 교환권/Magic〉

* 마법으로 제작된 스크롤(scroll). 찢는 것으로 내장된 주문이 발동된다. 소재의 내구성이 약해 불 또는 물 등 외부 요인에 의해 손상될 가능성이 있으니 보관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 마법 '영혼석 소환'

이 중에서도 끌리는 쪽은 단연 '영혼석 교환권'이다.

매직 등급의 무기야 굳이 손에 익은 양손 직도를 버릴 필요가 없으니 옵션을 제하면 비슷하게 느껴질 터.

하여.

다양하게 구경할 수 있을 '영혼석 교환권'으로 이목이 쏠리는 게 당연했다.

찌이이이익―

['영혼석 교환권'을 사용합니다.]

[카테고리가 개방됩니다.]

〈영혼석 카테고리〉

* 육체: 근력/체력/속력/재생력....

* 정신: 집중력/인내력/저항력/친화력....

* 기타: 마력/속성력(화)/속성력(수)....

"와우."

스크롤이 불타 없어지는 즉시 불빛이 아른거리던 핸드폰 화면 속으로 촤르륵 펼쳐지는 목록. 기대는 했지만, 상상을 벗어나는 가짓수에 무의식적으로 입이 벌어졌다.

이게 S 랭크의 위엄인가?

스크롤을 아래위로 올리고 내리며 연신 감탄사를 터트리며 나는 총 20여 개에 달하는 영혼석들을 찬찬히 구경했다.

육체 카테고리만 하더라도 재생, 면역, 적응, 소화같이 아직 접해 보지 못한 것들이 꽤 있었다.

* 육체: 근력/체력/속력/재생력....

└재생력: 자연 회복 속도가 상승한다.

└면역력: 감염에 대한 저항력이 상승한다.

└적응력: 주어진 환경 또는 새로운 상황 등에 좀 더 빨리 적응할 수 있다.

└소화력: 복용한 음식물의 소화 속도가 빨라지며 에너지 흡수율이 증가한다.

"좋은 게 많네."

생뚱맞게 소화력 같은 건 어디다 쓰는 건가 싶기도 한데, 뭐 쓸모가 있으니까 넣어 뒀겠지.

그 외에.

정신에서는 눈빛만으로 상대의 기를 꺾는 '압박력'이라던가 '화수목금토풍뇌'로 이루어진 속성력 부분도 세세하게 정독하고 나서.

"이 중에 고르자."

육체 부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실전에서 즉시 활용 가능한 방면으로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마력도 괜찮은 선택지였으나, 마력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었다. 당장 연계할 스킬이 없다는 것.

속성력도 마찬가지로 친화도와 저항력이 향상돼 봐야 관련 능력이 없고.

"재생력 아니면 면역력인데."

고로.

우선은 신체 강화에 전념한다.

그중에서도.

['재생력'을 선택했습니다.]

['재생하는 도마뱀의 영혼석'을 획득했습니다.]

재생력으로.

좀비나 구울을 비롯해 상위 언데드류의 몬스터와 마주쳤을 시에 빛을 발하는 '면역력'도 몹시 끌렸지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는 형편이니.

심사숙고 끝에 범용성에 초점을 맞췄다.

우득!

['재생하는 도마뱀의 영혼석'을 복용했습니다.]

[재생력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5% 향상됩니다.]

* * *

['사나운 호랑이의 양손 환두대도'를 선택했습니다.]

[해당 무기가 소환됩니다.]

〈사나운 호랑이의 양손 환두대도/Magic〉

*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질 좋은 강철로 제련한 양손 환두대도(環頭大刀). 끝자락의 고리 모양 장식이 특징이며 제작 과정에서 추가로 '사나운 호랑이의 영혼석'을 장착하여 예리함을 한층 높였다.

* 베기 공격 시 추가 피해량 +10%/착용 시 근력 최대치 7% 향상

"이걸 여기서 다 보네."

역사 교과서에서 볼 법한 동그란 고리 달린 직도가 시퍼런 서슬을 뽐내며 하늘로 곧게 뻗는다.

도병이 약 20cm에 도신이 1m에 다다르는, 총길이 1m 20cm에 달하는 칼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상당했다.

무게는 얼추 2kg가량 나갔는데.

장착된 영혼석 덕분에 오히려 '평범한 양손 직도'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거기다가.

"퍼센트가 두 배나 늘었네."

추가 피해량 10%.

이것까지 합치면 구울의 몸뚱어리도 단박에 베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이래저래 노멀 등급 따위완 비교를 불허하는 묵직함에 홀려 몇 차례 휘둘러보던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끈으로 묶기 위해 허리춤으로 가져가다가, 문득 이럴 게 아니라 인터넷에서 제대로 된 검대(劍帶, 칼을 차기 위해 허리에 두르는 가죽 띠)를 하나 사 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튜토리얼 당시에는 헝겊이나 넝쿨을 이용해 벨트 구멍에 매어 뒀었다만.

엄연히 용도가 다른 만큼 주먹구구식으로 때우기엔 바지가 워낙 약해 작은 충격으로도 끊어질 듯 덜렁거리는 바람에 항상 노심초사했었으니까.

휘욱―

착!

말 나온 김에 쇼핑몰을 뒤적거리려 노트북을 가져왔던 나는.

"아...."

앉은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전원이 들어옴에 따라 자동 로그인이 된 메신저를 통해.

[김 부장: 너 이 새끼, 진짜 해고되고 싶어?]

[박 대리: 오휘윤 씨! 어디세요!]

[최 팀장: 회사가 장난이야? 이야~ 요즘 애들 대단하네.]

[....]

그제야 내가 이틀이나 무단으로 결근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다급히 충전기를 찾아 켠 핸드폰도 난리가 나 있었다. 부재중 전화만 수십 통, 여기에 문자를 더하면 빨간색으로 도배가 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순간 머리가 띵했다.

"...."

나는 수십 마리의 좀비와 무지막지한 위압감을 뽐내던 구울을 마주한 것보다 더욱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걸 어찌 수습해야 할지.

벌써 온갖 욕설을 퍼붓는 부장 놈과 팀장 놈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가.

"어차피 못 다닐 회사 아닌가."

불현 듯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돌아봤다.

나는 더 이상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 몸, 직장이라고 다를 게 없다.

어렵사리 들어간 회사고, 별의별 욕을 들으면서도 참고 버텼던 회사지만.

"때려…치우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나는 곧 작게 고개를 저으며 책상 서랍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품고 다닌다는 '사직서'였다.

* * *

옛말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정장을 걸친 나는 곧장 회사로 향해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너 이 새끼, 지금 제정신이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휘윤!!"

아무 소식 없다 갑자기 등장한 주제에 느닷없이 사표를 수리해 달라 외치고 나오는 날 향해 뒤에서 당혹감과 황당함이 섞인 말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지만.

"오 대리님! 오 대리님!"

"저, 저 새끼 잡아!"

"다들 수고하십쇼."

나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일절 무시한 채 건물을 빠져나왔다.

햇수로 5년.

고등학교 졸업 이후 군대를 다녀와 전역하자마자 자격증 몇 개 취득하고서 스물둘에 입사해 20대의 청춘을 바쳤던 회사를 떠나려고 하니 왠지 씁쓸했다.

어디까지나 타의에 의한 퇴사였으니까.

남들이 대학교 가서 CC다 뭐다 하며 하하 호호 웃고 떠들 때 오로지 임원 배지 달고 나가겠단 일념으로 달려든 곳이었는데.

"후, 됐다."

괜스레 울적해진 탓에 슬쩍 뒤를 돌아봤던 나는 긴 한숨과 함께 차에 시동을 걸었다.

감성에 젖기에는 할 게 너무나도 많았기에.

"오 대리님! 오 대리님! 잠시만―"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도 핸들을 꺾어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