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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BALLERODEMANDODEPELONEG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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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01-10

나는 군대 가기 싫어

하늘이 먹먹한 회색으로 물들었다.

곧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고, 애매한 빗줄기가 낡은 천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땅은 질었다. 

몸은 축축했다.

싸우기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철벅. 철벅.

연녹색 파릇한 새싹들 위로 군홧발이 움직였다. 중무장한 남자 백여 명. 이들이 리듬을 맞춰 땅을 밟을 때마다 소리가 겹쳤다.

곧 전투 장소에 다다를 예정이었다.

"행진 간에 군가한다."

맨 앞에서 말을 타던 기사, 롤랜드 경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좋은 상사였다. 

부하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감정을 이해했으며, 비합리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다.

가끔 떡고물 같은 전리품을 노획할 수 있도록 풀어주기도 했으니 얼마나 좋은가.

"군가는-"

그러자 옆에서 걷던 아저씨 하나가 말했다. 

"기사 나으리. 내가 오늘 죽을 것 같으니, [나는 군대 가기 싫어]로 합시다."

머리에 가죽 두건을 쓴 노병이었다.

겉모습은 추레한 편이었으나 상처 많은 손과 탄탄한 걸음걸이가 그의 짬밥을 증명했다.

-감히 군가를 네가 정해?

민감한 남자들이라면 하극상이라고 여길 수 있겠다. 

하지만 전쟁 이전에 노환으로 죽을 것 같은 양반이라.

듣고 싶은 군가가 있다면 부르게 해주는 것도 예의리라. 롤랜드가 씨익 웃으며 허가했다.

"사실 나도 군대가 싫다네."

우린 사이 좋은 형제들마냥 단체로 웃었다.

"군가는 [나는 군대 가기 싫어]로 한다."

이는 보링턴 영지 병사들이 좋아하는 노래였다. 

멜로디는 명랑하고 밝았으며, 사분의 사 박자 리듬은 어깨를 들썩이며 박자 맞추기에 좋았으니 그랬다.

심벌즈병이 챙! 하고 심벌즈를 치자 노래가 시작되었다. 

-나는 군대 가기 싫-어! 

전투를 앞둔 상황. 

곧 이름도 모르는 남의 아들한테 창칼을 박아 넣어야 했다. 내가 안 하면 그들이 반대로 하겠지. 엥간히 운이 좋지 않다면 자잘한 상처를 입을 것이고, 당연히 죽을 수도 있으리라.

-나는 전쟁하기 싫-어!

그래서 우린 다 같이 노래를 불렀다. 

이거라도 부르면 잠깐이나마 두려움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남작의 정원사나 하면서,

-그 부인의 돈으로 살겠어.

남작 부인의 돈으로 산다는 건 정부가 되었다는 의미다.

귀족들은 정략결혼으로 만난 이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다. 

고로 애인을 두곤 했는데, 그 숫자가 둘이 되기도 했고 셋이 되기도 했다. 

-나는 똥꼬에 창 찔리기 싫어!

-나는 불알 잘리기 싫어!

병사들의 발이 탁! 떨어질 때마다 강세가 붙었다.

-차라리 남작 부인이랑 살겠네.

-그녀의 젖가슴이나 빨며 살겠네.

우리 영지 남작 부인의 경우 애인이 좀 많았다.

어쨌든 그렇게 걷다 보니 비에 젖은 언덕 너머로 군인 집단이 보였다. 

적군이었다.

통일되지 않은 복색과 값싼 옷가지. 

우리만큼 한심한 인생들처럼 보였으나, 들고 있는 무기를 보니 어쨌든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아까 군가를 추천한 노병이 지나가듯 말했다.

"유진. 자네는 먼 동방에서 왔다고 했지."

"그렇죠. 이번이 두 번째 군역입니다."

그렇다.

놀랍게도 난 전역하자마자 이세계로 끌려왔다.

이유는 모른다.

전역하면 기상나팔 소리 없이 늘어지게 자보고 싶었는데, 눈 떠보니 이세계 흙바닥이었다.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다.

노인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거참 개좆같은 인생이구만."

"그렇죠."

"하지만 더 좆같은 것도 하나 있지."

"그게 뭡니까?"

"저기서 심벌즈 치는 병신새끼."

"아."

난 네 박자 심벌즈를 치며 박자를 맞추는 군악병을 바라보았다. 

-챙! 챙! 챙! 챙!

"저 새끼는 대체 왜 여깄는지 모르겠단 말야. 여긴 군악대도 없는데. 악기라곤 저 병신같은 심벌즈밖에 없어. 차라리 깃발이라도 들지..."

노병의 말에 심히 공감했다.

심벌즈 소리는 박자랑 어울리지도 않았다. 저 단순한 악기도 못 치는 걸 보니 지지리도 음악에 소질이 없는 놈이구나 싶었다. 

"저게 뭔 악기인가. 원숭이 새끼를 갖다 놔도 별 차이가 없을 거야. 양손에 쇳조각 들고 부딪히는 걸 누가 못하나. 이런 젠장.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제대로 된 음악이 듣고 싶군. 로커스트 유랑악단은 끝내주던데."

"구구절절 맞는 소리군요."

"죽으면 안 되겠군. 이딴 게 내 마지막 노래라니, 이런 건 있을 수가 없어."

"꼭 살아남으십쇼. 영감님."

"차라리 독전관이 나아."

독전관들은 병사들을 채찍으로 후려쳐 돌격하게 하는 직종으로, 아군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다.

노병과 내가 독전관을 쳐다보자 그가 아주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안녀엉! 안녕!"

수염 사이 누런 이빨에서 침이 질질 떨어졌다. 노병과 난 킬킬거렸다.

"저 병신."

적군과 충분히 가까워지자 롤랜드가 우렁차게 포효했다.

"정지!"

우린 정지했다.

세상엔 여러 전략과 전술이 있으나 이런 촌구석 전투엔 그런 게 없었다. 

백 명 남짓한 남자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대치한 다음, 서로 들이 받는 게 전부.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건 기정사실이라 긴장감이 맴돌았다.

'백 명은 많군.'

작은 숫자가 아니었다. 

인파가 주변 공터를 꽉 채운 것처럼 느껴졌다. 

자연스레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가 떠올랐다.

'살인 운동회.'

"병사들- 멈춰! 병장기 앞으로!"

"""병장기 앞으로!"""

기사의 말에 따라 병사들이 창을 앞으로 겨누고 섰다. 

슬슬 비가 그치고 있었다. 

안개에 감싸인 지평선이 햇살과 함께 미소지었다. 세상이 그 모습을 천천히 드러냈다. 전투만 아니면 참 좋은 날씨였다.

"우리는 오늘! 잘나신 보링턴 남작의 명에 따라 이곳에 나왔다. 아닌가!"

"""맞습니다!"""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롤랜드는 유능한 기사였다.

계약직으로 일하는 주제에 '주군을 모독하지 마라!'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방랑 기사에게 충성심은 없었다.

귀족과 그의 사병들이 호의호식하는 동안, 그의 이득을 위해 목숨을 거는데 어쩌겠는가.

대신 그는 연설, 뒷담, 농담으로 분위기를 푸는 걸 우선했다. 

모범적인 현장 지휘관의 태도였다.

'부럽네...'

전장에서 그를 몇 번 보았는데, 화려했다.

검에 푸른 불길을 일으키며 올림픽 선수처럼 달려 나가 적을 쳐부수는 모습. 거기엔 심장을 울리는 뭔가가 있었다. 나도 이세계 전생까지 했으면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롤랜드가 소리쳤다.

"너흰 남자다! 남자는 애인한테 손댄 놈을 용서치 않아."

"..."

다들 의뭉스럽게 롤랜드를 쳐다보자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걸 못 알아들어? 여기서 남작 부인이랑 안 자본 새끼도 있나!"

-와하하하하하!

놀랍게도 병사 거의 대부분이 웃었다.

웃지 않는 남자들은 '너, 너도...?'라는 표정으로 옆에 있는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우리 모두 남작 부인의 애인들이다. 맞아, 틀려!"

"""맞습니다!"""

"유진!"

그런데 그는 갑자기 날 쳐다봤다.

무대 공포증이 느껴졌다.

이세계에 도착한 직후 피부색 때문에 약간의 차별을 받았다. 물론 185cm에 달하는 현대인의 키와 헬스로 다져진 몸은 그걸 이겨냈지만...

어쨌든 그랬다.

"남작 부인과 '연애'를 해본 적 있는가!"

"없습니다!"

'그건 왜 물어...'

난 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오! 이 가련한 동양인을 보았나! 그럼 여자랑 자본 적은?"

"없습니다!"

"아이고!"

다른 병사들이 킬킬거리며 날 애처롭다는 듯 바라봤다.

"총각 딱지도 못 떼고 뒤지겠구먼!"

'이 씹새끼들이.'

물론 미개한 중세에서 '성적 수치심을 느꼈어요! 사과하세요!' 이 지랄하다간 병신이 된다. 롤랜드가 낄낄거렸다.

"가련한 동양인 유진! 숫총각 유진! 6피트 넘는 키와 그 멋진 몸으로도 관계 한 번 못 가져본 유진을 보라."

"""옳소!"""

사실 성병 때문에 몸을 사린 것에 가까웠다.

여긴 의료보험도 없고, 일부 성병은 치유 마법으로 고칠 수 없으니. 

고추에 버섯이라도 자라는 순간 골로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심해야만 했다.

하지만 놀리는 입장에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하리? 매서운 눈초리로 뒤를 쳐다봤지만 다들 낄낄거릴 뿐이었다.

"이렇게도 혼전순결을 중시하는데, 어찌 아이리스의 축복 없으랴!"

"""옳소!"""

"이삭 줍는 처녀신, 혼전순결의 여신 아이리스여! 우리를 축복하소서!"

"""축복하소서!"""

'에라이, 못난 새끼들.'

어쨌든 군부대의 사기는 올랐다.

누군가 보면 참 못났다고 할 광경이지만 전쟁은 원래 못난 짓. 

'그래. 까짓거 광대 하루 해준다.'

동양인 총각 하나를 광대 삼아 긴장을 해소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내가 웃자 옆에 있는 병사들도 웃으며 내 어깨를 탕탕 두들겼다. 

그들이 말했다.

"안타까워서 어쩌나! 보링턴 남작령엔 창관이 없는데. 전투 후에 50실링을 받아도 쓸 데가 없겠군."

"그게 무슨 문제인가? 남작 부인이 있지 않나!"

"그렇지! 그녀 때문에 창관이 장사가 안되어서 다들 접었지."

이런 하수구 농담이라니. 

경험상 귀족이 아닌 중세인들은, 다들 이리 몰상식하고 야만적인 양반들이었다.

하지만 그 농담이 웃긴 걸 보니 나도 이제 중세인이 다 된 것 같았다.

롤랜드가 고삐를 쥐고 이쪽으로 왔다.

"유진. 내 자넬 유심히 지켜봤는데 열심히 싸우더군."

"음. 감사합니다. 놀린 건 빼고요."

"하하. 마음 풀게나."

그는 품속을 뒤지다 내게 가죽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그래도 미안한 건 아나 보네?'

조심스레 가죽 주머니를 열어보니.

기괴한 문자가 새겨진 나무패가 보였다. 표면은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고, 손으로 쥐니 묘한 따스함이 느껴졌다. 범상한 물건이 아니었다.

"언젠가 로커스트에서 선행을 하고 받은 패다. 로커스트의 귀부인들 사이에선 아주 귀하게 취급되지."

"...왜죠? 장신구 같진 않은데."

"기사의 덕업을 레이디에게 바친다는 의미가 있거든. 예품으로도, 선물로도 쓰인다. 이거 들고 가면 연애는 못 해도 밥은 얻어먹을 수 있을 거다. 무슨 말인지 알지?"

내가 속한 국가는 산맥의 제국, 아틀라스. 

옆 나라는 늪의 연합, 로커스트다.

'로커스트라. 거기엔 이런 문화가 있었군. 그러면 귀한 거 아냐?'

가슴이 쿵쿵거렸다.

각 나라의 문화마다 특별한 혼수 예품이 필요한 경우가 있는데, 이게 그런 종류의 것이라면 막대한 이득이었다.

이 목걸이가 진품이라면 적어도 귀족 여인과 밥은 먹을 수 있을 터.

연애를 못 해도 맛있는 귀족 밥 한끼 얻어먹으면 남는 장사였다.

롤랜드가 내 등을 툭툭 두들기더니 앞으로 나갔다. 그리곤 다시 연설을 시작했다.

"저 앞을 보라! 제군들! 노렌 남작은 보링턴 남작 부인과 불륜한 것도 모자라, 영지를 무단으로 점거했다. 죽일 놈들!"

"""죽일 놈들!"""

"그런 그를 섬기는 무리는 얼마나 사악하고 음탕한 이들인가. 그래, 안 그래!"

"""맞습니다!"""

"무기를 들어라. 다 같이!"

-철컥!

병사들이 바닥을 쾅 구르면서 창날을 앞으로 세웠다.

"보링턴 남작 부인과!"

"""보링턴 남작 부인과!"""

우린 천천히 상대방을 향해 가까워졌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리듬감 있는 군홧발 소리가 사분의 사 박자로 저들에게 가까워졌다.

하늘의 구름이 조금씩 걷혔다.

적군의 모습이 햇빛을 받아 더 자세히 보였다.

적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100보. 90보. 80보.

"처녀신 아이리스와!"

롤랜드가 말을 타고 지껄였다. 

난 혈압이 오르는 걸 느꼈다.

'하지 마라. 하지 말라고.'

하지만 롤랜드는 씨익 미소 지으며 외쳤다. 

재밌어 죽겠단 표정을 보니 한 대 치고 싶었다.

"그의 충실한 종인 유진을 위하여!"

"""유진을 위하여!"""

"애미, 씨발놈."

우리는 일렬로 서서 40보 간격을 앞에 두고 쿵, 하고 멈췄다가,

"돌겨어어억!"

내달렸다.

죽음. 상처. 살인.

현대인에게 냉병기를 들고 적을 죽이라는 건 무리한 요구였으나...

나는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기를 택했다.

'이 전투가 끝나면 50 실링.'

그 돈은, 너끈하게 일주일을 살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

────────────────────────────────────

어머, 동양인이시네요.

"돌겨어어억!"

롤랜드의 갈색 말이 섬광처럼 질주했다.

근육질의 다리가 바닥을 찰 때마다 자갈과 흙모래가 말 그대로 터져나갔다.

-빠악!

사관학교 출신의 방랑 기사와 평민 징집병 사이엔 아득한 차이가 있었다. 

육중한 군마는 어버버- 하던 남자의 턱주가리를 자연스레 날려버렸고, 롤랜드는 경쾌하게 검을 휘둘렀다.

푸른색 화염이 이글거리는 강철의 검격.

난 시선을 뺏기고 말았다. 

'저게 마력이란 거겠지.'

팔을 휘두를 때마다 잔상이 보였는데, 딱 봐도 완력만 무작정 기른다고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휘두르는 검은 푸르게 불타오르니, 그것은 곧 죽음이라.

그가 휘적거리며 돌파할 때마다 적군들의 목은 졸업식 학사모처럼 날았다. 

창날이고 방패고 소용이 없었다. 

그러기엔 장비의 질이 너무 낮았다. 

방패는 반토막나고 창대는 깔끔하게 잘려 힘을 잃었다.

'부럽군.'

반면 내 처지는 좋지 않았다.

손에 든 방패는 무식하게 무거웠고, 온몸은 비에 젖어서 축축했으니. 내 발은 자꾸 진흙탕에 푹푹 빠졌다.

'난 마력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내가 가진 건 몸뚱이뿐. 아마 이번 전투에서도 상처를 입겠지.'

전투 실력이야 쥐꼬리만큼 늘겠다만 상처는 잘 낫지 않았다.

심하게 다치면 치료 마법 받는 데에 돈을 다 탕진하고 빚쟁이가 될 것이었다.

높은 리스크. 

힘든 일. 

낮은 돈.

하지만 지금은 선택지가 없었다.

"히히히! 안녕! 안-녀어엉!"

독전관이 뒤에서 죄 없는 병사들을 후려갈기자, 떠밀린 병사들이 억지로 돌격했다.

"""와아아아!!!"""

올림픽 응원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뒤에서 한 명이 밀어도 그 압력은 파도가 되어 전달되며, 그 때문에 앞쪽에 있던 사람은 튕겨나가거나 압사당하기도 한다.

비슷하게 병사 수십의 체중이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 양측의 군단을 부딪히게 만들었다. 

-쾅!

"으윽!"

적군이 내민 창들이 내 커다란 방패에 막혀 부러지고, 위로 들렸다. 팔에 멍이 들 것 같은 충격. 나는 협소한 공간을 제치고 나아갔다.

"허, 허억!"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유일하게 이득 본 게 있다면, 180cm에 달하는 키와 평소에 해놓은 헬스였다.

중세의 잡병들은 키가 160cm 수준.

하루 한 끼 먹으며 굶는 게 일상인 이들의 체격은 좋지 않아서, 피부에 초록 칠을 해놓으면 고블린으로 보일 정도였다.

-태앵!

그래서 내가 이렇게 큰 방패를 들고 밀어붙이면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것이었다.

난 방패에 박힌 창들을 억지로 밀어내며, 오른손의 메이스로 눈앞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빠악!

그의 두개골이 함몰 유두처럼 들어갔다. 

죽은 것이다.

"잘 싸우는데! 역시 처녀 신의 가호를 받은 남자다!"

"이, 이 새끼가!"

겁쟁이 같은 놈이 검을 들고 튀어나온 다리를 베려 했다. 하지만 난 발을 회수하고 방패로 상대 팔을 구동 범위를 가렸다. 깡! 기아처럼 얇은 팔에 든 무기가 튕겨 나갔다.

"누구는 군대를 두 번 갔는데!"

"어, 어어...!"

굳이 몸통을 노출하지 않고, 방패 위 메이스를 사선으로 때렸다.

-빠악!

그는 재빠르게 몸을 뒤로 뺐지만 내 팔은 길었다.

메이스 끝에 얻어맞은 놈의 골통이 깨지고 눈알이 튀어나왔다. 그는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즉사였다.

그걸 본 아군들이 혀를 내둘렀다.

"역시 유진이야. 잘해."

"끌끌. 다 같이 살아남자고."

"그래야 맥주를 마시지."

비가 갠 후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날.

우린 땀을 흘리며 싸웠다.

"안, 안녕! 앞으로 가세요! 앞으로 가세요옷!"

독전관의 채찍.

밀려나기 싫어 버티는 전열.

죽어가는 병사들.

이 짓거리를 좋아하는 사이코패스는 우리 중 없었다.

하지만 중세의 노동은 가혹하고 벌이도 되지 않는 법.

결국 이것도 돈 때문에 하는 일이었다.

그 와중-

-투두두두.

평원 저편에서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저게 뭐야!"

네 발로 달리는 짐승의 실루엣.

그 팔은 성인 남자의 허리만큼 굵었고, 털은 검었다.

머리 위에는 거대한 뿔이 달려 있었는데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걸 보니 딱히 좋은 의도로 오는 것 같진 않았다.

난생 처음보는 괴물.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며 솜털이 삐죽 섰다. 

여기서도 저렇게 크게 보이는데 가까이서 보면 어떨까? 

앉은키만 해도 3m는 되어 보이는 저 생물들을 우린 보통 마수라고 칭했다.

"마, 마수다!"

"롤랜드 경! 후퇴를!"

지휘관이 번져가는 파란을 알아보고 욕했다.

"제기랄, 일단 적군에 집중해! 밀어붙여!"

"히, 히엑!"

우린 정규군이 아니라 일용직 떨거지 용병들과 민병들의 혼합체. 

어제까지 농사짓다 급전 필요해서 나온 놈들이 싸움을 잘할 리 없었다. 이들이 할 줄 아는 유일한 것은 오로지 박자를 맞춰 앞으로 가는 것 뿐이었다.

"""하나! 둘! 하나! 둘!"""

그렇게 오합지졸 민병대는 구호를 넣으며, 방패 벽을 조금씩 앞으로 옮겼다. 상대가 하나씩 나와 부딪힐 때마다 우리 편이건 상대편이건 하나씩 죽어 나갔다.

"도, 동양인!"

"덩치 큰 동양인을 죽여!"

상당히 아시안 차별적인 발언과 함께 날아오는 공격. 

한 명의 공격을 깡! 막고 한 명의 머리통을 메이스로 부수는데, 뒤에서 새된 비명이 들렸다.

"죽어라, 동양인!"

"제길, 유진, 조심!"

-퍽!

뭔가가 머리에 부딪혔다.

짱돌이 내 눈앞에 0.1초 정도 보이더니 머리가 휙 돌아갔다. 열감과 함께 하늘이 뒤집혔다. 점점 의식이 멀어져갔다.

"씨발, 이 새끼 뒤로 빼!"

남자들이 내 몸을 뒤로 질질 끌었다.

'염병.'

슬링샷. 

돌 던지기의 재주였다.

끌려가는 와중에도 치료비 걱정이 들었다.

*

-끼익! 까악! 까악!

석양을 알리는 까마귀 소리. 의식이 돌아오자 주변이 새삼 조용했다.

"우욱. 씹."

일어나니 온몸이 쑤셨다.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체온이 좀 떨어진 걸까? 

몸이 으슬으슬했고, 머리에 짱돌을 맞고 기절했다는 현실이 데자뷰처럼 떠올랐다. 만져보니 다행히 두개골이 정상이었다.

'젠장, 내가 토익 900점인데. 방금 걸로 영단어를 오백 개 정도 까먹었겠군.'

물론 여기서 쓰는 건 영어가 아니었다.

내가 학창 시절 죽어라 외운 영단어는 내 불알처럼 쓸모가 없었다.

갈라진 목소리로 생존자를 찾았다.

"거기, 누구 없소!"

시체들이 많았다. 더운 냄새와 부패하는 피 냄새가 풍겼다. 까마귀들이 하늘을 빙빙 돌았다.

살아남은 건 나뿐인가? 

문득 외로움이 느껴졌다.

"젠장. 로레알 씨? 죽은 거요?"

몇십 걸음을 걷던 난 노병의 얼굴을 발견했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가셨네."

입맛이 씁쓸했다.

그의 허리띠에 묶인 수통을 꺼내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내 허리에 걸었다. 트레이드마크인 가죽 모자도 수습한 다음 손수 눈을 감겼다.

"...그래도 잘 대해줬는데, 그리울 거요. 영감."

슬펐다. 

하지만 감정에 매몰되는 건 삶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의 시체를 뒤져 지갑을 챙긴 후 일어섰다.

돌아다니며 유심히 살펴보니 내장이 파먹힌 시체가 많았다.

'마수가 왔었지.'

평원 뒤편에서 쾅쾅거리며 달려오던 마수. 

그것이 병사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내장을 포식했으리라. 난 크게 외쳤다.

"살아남은 이들은 대답하시오!"

딱 보니 살아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 죽었거나, 기절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이미 도망갔다.

난 전우들과 꽤 친했던 사람이라 잠깐 동안 외로움을 느꼈지만...

'...기회군.'

그 감정을 정리하기로 했다.

중세 민병대란 사망률이 높은 곳.

어제 봤던 남자가 오늘은 없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어제 술 한잔했던 친구가 사라지고, 새로운 얼굴이 푼돈 때문에 들어오고. 이는 만나고 헤어지고의 반복이니...

그런 일은 앞으로도 흔할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실리를 챙길 때였다.

'너희를 위해 울겠다. 나중에.'

본래 아틀라스의 귀족법상 전리품은 모조리 귀족의 것. 

하지만 보는 사람이 없다면 누가 법을 지키겠는가? 아무리 평민 징집병일지라도, 가끔 아버지가 물려준 갑주를 차고 전장에 나오는 경우가 있었으며, 휘적휘적 휘두르는 검이 명검일 때도 있었다.

시체를 터는 건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줬고, 난 이 기회를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땀내 나는 중세 남자들의 옷을 벗겼다.

'씨발. 초등학생 때 옷벗기기 게임을 그리도 열심히 했는데.'

병신같은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병신같은 마린.

병신같은 메딕.

병신같은... 

이세계.

뒤지다 보니 질 좋은 철제 그리브가 보였다. 순식간에 혈류가 빨라졌다.

'...좋은 물건이다.'

좋은 품질은 아니지만 무려 철제다.

철제 보호대는 화살을 몇 번이고 막아줄 것이었고, 대장간에서 이걸 사려면 200실링 가까운 거금이 들었다. 내가 4주 동안 숨도 못 쉬고 싸워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좋아...!'

들뜬 마음으로 전장을 휘젓고 돌아다니는데, 뭔가 이질적인 것이 보였다.

"어...?"

묵빛으로 도색된 마차.

흑마 넷이 끌어야 하는 거대한 마차로, 딱 봐도 튼튼했으며 온갖 주술적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보통 마차가 아닌 걸로 보아 근처에 귀족이 있었다.

'...안 보였는데?'

문제는,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지 그들을 아예 인식하지 못했단 것에 있었다.

퍽 당황스러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십 피트 간격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이들이, 석상처럼 우뚝 서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요술을 부린 건진 몰라도 마법이 분명하였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

그들은 외국인들이었다.

남자들은 상체를 탈의한 채 검은색 치마를 입고 있었고, 어깨엔 휘장을, 허리엔 칼을 차고 있었다. 정규군이었다. 그 외에도 헐벗은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갑옷 안 입나?'

하지만...

아까 전투할 때 나타났던 검은색 마수가 도축된 고기 마냥 마차 옆에 흩어져 있는 걸 보니 이해가 갔다. 

저들은 마수를 도축할 만큼의 실력자.

갑옷을 입던 말던 내가 상관할 바 아니었다.

그들은 입을 일자로 다문 채, 신기한 동물 바라보듯 날 쳐다봤다.

'좆됐다. 게다가 딱 봐도 높은 사람이 포함되어 있어.'

높아 보이는 여인이 전장터에서 고고하게 서 있었다.

조각품 같은 몸매를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검은색 드레스는 몸매를 다 드러내는 물건이었으며, 중간중간에 한 황금 액세서리들이 흰 살결을 강조했다. 

그녀는 호위들을 대동한 채 땅바닥에 누운 시체들을 살피다, 손을 뻗고 입을 달싹였다. 그러자-

-으드득. 으득.

병사의 시체가 일어설 것처럼 들썩거리더니, 검은색 물방울 같은 액체가 꿀렁꿀렁 가슴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중력을 무시한 듯 공중에 떠서 꿈틀거리다가- 

-사아아아...

물길처럼 변해 여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제야 저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로커스트 코벤Coven.'

로커스트의 마녀들은 사령술을 다룬다.

이들은 귀족 집단이며, 코벤은 이들을 호위하는 소규모 전투 부대였다.

그녀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바닥에 살짝 무릎을 대었다.

상당히 높으신 분인 걸까. 

옆에서 견습생처럼 보이는 헐벗은 자들이 달려와 무릎 아래 비싼 천을 깔아주었다. 나는 약간의 주의가 팔린 틈을 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어머, 병사님?"

공포 영화 속 존재를 마주한 것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부른 건 나였다. 그런 건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제길..."

"부디, 이쪽으로 와 주시겠어요?"

물론 동물적으론 그 제안이 맘에 들었다.

멀리서 봐도 그녀는 예뻤기 때문이다.

이곳에 와서 본 어떤 여자들도 범접하지 못할 만큼 태도에서 여유가 느껴졌고, 몸가짐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그녀의 말을 들을 정도로 굶주리진 않았다.

'가긴 개뿔!'

죽기 살기로 땅을 박찼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리려고 했건만,

"...어?"

어느새 발이 공중에 붕 떴다.

"신기하군요. 애초에 저희 모습이 보인다는 것도 그렇고."

'뭔...?'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았다.

공중 부양.

80kg이 넘는, 군장을 찬 성인 남성이 공중에 붕 떴다. 발끝이 바닥에서 1피트 정도 떠올라 부양하였다.

'무슨 미친...'

"이쪽으로 와 주시겠어요?"

그녀가 손짓 한 번 하자 몸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아니.'

가끔에 마을에 오는 마법사 수련생들이 있었는데, 이 정도 레벨이 되는 인간은 본 적이 없었다.

어느새 전장터를 지나 코벤 앞으로 끌려갔다.

-꿀꺽.

우아한 자태.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

황금빛의 눈동자. 

온몸에 넘실거리는 마력.

그녀는 좀 피곤한 듯 이마에 난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더니 사무적으로 말했다.

"어머. 동양인이시네요. 이 먼 땅까지 어쩐 일로 오셨나요...?"

그건 나도 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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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게 흡수구나. [[2024.09.12 수정]]

산맥의 제국 아틀라스.

늪의 부족 연합 로커스트.

두 나라 사이에 상인들이 가끔 오갔으니 적대 관계는 아니었다. 로커스트의 유랑극단은 보링턴 영지에도 가끔 들렸다.

하지만 군인들은 얘기가 달랐다.

군인이 타국의 영토를 침범하는 건 아무리 좋게 봐도 정탐 활동이었고, 저들은 사악해 보이는 마법까지 행했으니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딱 봐도 사령술이다...'

그리고 일곱 신을 믿는 아틀라스 제국은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허락 없이 이런 짓을 했다면 당연히 분쟁이 생길 터.

저들이 입막음을 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내 죽음이겠지.'

그리고 지금 난 그 집단의 수장 같은 여자한테 붙잡혀 공중에 매달렸다.

죽기 딱 좋은 상황. 

근데 이런 상황에서도 시선은 왜 자꾸 아래로 가는 걸까?

'아니... 왜 이렇게 예쁜 건데?'

날카로운 눈매. 

긴 속눈썹 아래 빛나는 금색 눈동자. 

몸매를 숨기지 않는 고혹적인 옷차림.

금색 목걸이의 체인이 풍만한 가슴골 사이로 들어가 있는 게 너무 신경 쓰였다.

'신경 쓰이게 하잖아.'

남중, 남고, 공대, 군대를 거쳐 전역하자마자 이세계로 떨어진 좆같은 케이스가 바로 나였다.

여기서 시선 처리를 완벽하게 하라는 건 불가능한 요청이었다.

그러자 마녀가 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병사님..."

"예."

"시선이 너무 강렬하시네요. 제 복색이 조금 과하게 느껴지시나요?"

새초롬한 표정으로 날 쏘아보는 그녀.

좀 억울했다.

'좀... 여미고 다니던가.'

하지만 뭐라 하기에도 그랬다.

옆에 있는 수행원들도 반쯤 헐벗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외눈박이 나라에선 두눈박이가 비정상인이기 마련. 그들의 입장에선 꽁꽁 싸맨 내가 신기해 보였겠지.

-와. 저거 봐. 동양인이야.

-진주의 바다 건너편에서 온 건가? 키가 엄청 큰데? 영양 상태도 좋고.

-노예로 팔면 얼마 벌릴까?

변명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무례를 저지른 상황. 

난 머리를 좀 굴려보다가, 살아남을 확률이 가장 높은 답을 말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아름다우셔서 자제력을 잃었습니다."

"어머, 고마워요. 말씀은 참 예쁘게 하시네요."

역시 예쁘단 말은 어디나 통하는 걸까?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지만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스쳤다. 희망이 보였다.

"병사님의 이름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보링턴 영지의 유진이라고 합니다."

"보링턴, 영지의, 유진."

그녀는 새하얀 손가락을 내 목에 대더니, 쇄골을 지나 명치 아래까지 부드럽게 훑었다.

처음엔 뭘 하는 건가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체가 시원했다. 상의가 통째로 찢어져 아래로 떨어졌다.

'아니...'

흉갑을 살 만한 돈이 없는 평민들은 나무판자나 가죽 따위를 묶어 가슴을 보호했다. 나 역시 돈 없는 거지나 마찬가지라 단단한 나무를 붙이고 다녔는데...

판자가 매끄럽게 절단되어 아래쪽에 떨어져 버렸고, 잘린 셔츠 안쪽에선 자그마한 핏방울 몇 개가 새어 나왔다. 

"그 말이 진심인지 한 번 볼까요?"

"아... 예."

"묘하게 긴장감이 없으시군요."

그녀가 검지를 세워 핏방울을 콕 찍자, 짜릿한 느낌이 퍼져나갔다. 찌릿한 느낌. 마력이 심장을 훑자...

그녀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흥. 예쁘단 건 아부였군요? 살아남기 위한."

소름이 돋았다.

방금 한 말의 진위를 확인하는 마법인 걸까?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하지만 진심이기도 했으니 봐 드리겠어요. 보링턴 영지의 유진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호기심 많은 짐승처럼 내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유진님이 이미 저희를 보셨단 문제가 있어요."

"그 말씀은?"

"여긴 로커스트의 영토가 아니라 아틀라스의 영토. 외교적 일로 오긴 했지만, 사령술은 저쪽 교단에서 반기는 일이 아니지요."

물론 나도 할 말이 있었다.

"저는 동양인입니다. 마녀님. 외지인이 하는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흐음. 말씀은 진짜 잘하시는데."

그녀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저희 입장에선 당신을 죽이는 게 훨씬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그건 그랬다.

로커스트의 사령술사들은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들은 전장을 돌아다니며 시체에서 힘을 뽑아내는 존재. 일곱 신 교단과 교리가 달라 분쟁 사유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애초에 날 죽일 심산이라면 진작에 죽였으리라. 

아직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

'보패.'

롤랜드 경에게 받은 보패가 떠올랐다.

감사패라고 했으니 같이 밥 한 끼는 못 하더라도, 목숨 한 번은 살려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로커스트의 보패를 갖고 있습니다."

"흐응. 알고 있어요. 이렇게 강렬한 마법의 기운은 흔치 않죠."

그녀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롤랜드 경이 준 보패가 하늘을 날아 손아귀에 착- 하고 들어갔다.

마녀가 골몰한 표정으로 보패의 앞면을 쓰다듬었다.

"귀한 물건이네요."

"..."

"'로커스트 카운실의 대마녀 카산드라 헤롯이, 아틀라스의 방랑 기사 롤랜드 아스토니아에게'."

준 사람까지 알 수 있는 걸까? 

그녀는 재밌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유진 님은 이 보패를 어디서 구하셨나요?"

"롤랜드 경에게 받았습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진 아시고요?"

"마음에 드는 레이디에게 주는 물건이라 하시더군요."

"어머나."

왜일까. 눈앞의 마녀는 즐겁다는 듯 웃곤 말했다.

"유진 님, 정말..." 

"...네?"

"귀엽네요."

기분이 한결 나아졌는지 그녀의 마법이 풀렸다. 내 몸은 천천히 내려와 땅에 닿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했다.

"사실 당신을 죽일 마음은 아주 조금밖에 없었답니다."

"..."

"로커스트에 선행을 베풀고 받으신 보패가 뻔히 있는데, 어떻게 당신에게 손을 대겠어요."

죽일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는 거구나.

"뭐. 눈치 없이 본 일을 떠들고 다니시거나 하셨다면,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주셨으면 하는... 그런 거죠."

"그렇군요."

"그런데 유진 님. 그 보패는 귀부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물건이랍니다."

"예?"

얇은, 초승달 같은 눈웃음.

"당신이 가져온 건 추천패."

"..."

"로커스트의 기사 후보생들에게 주어지는 추천장입니다. '대마녀 카산드라가 신뢰하는 방랑 기사 롤랜드에게. 그대의 무예가 마물을 양단하고, 선행으로 대마녀의 목숨을 구했으니, 영예로운 기사 후보생 추천권을 수여한다.' 이게 패에 써진 전문이에요."

'롤랜드...'

이걸 들고 데이트 신청을 하면 얼마나 쪽팔렸을까.

"원래 그렇게 가볍게 주어져선 안 될 물건이지만, 그래도 롤랜드 경은 당신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을 테죠."

-우리 유진. 내가 널 오래 지켜봤는데, 열심히 싸우더군.

날 엿 먹이려는 건 좀 그랬지만, 그래도 롤랜드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기사가 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물자가 귀한 이 시대에, 말과 갑옷을 공짜로 준다는 것부터 특혜. 그 후보생이 되는 과정만 해도 지난함의 연속이었다.

'종자로 10년을 굴러야 후보생이 될 수 있어.'

근데 그 과정을 보패 하나로 패스하게 해준다면 이는 행운이었다.

'와...'

가슴이 벅차올랐다.

평야에서 적군을 학살하던 롤랜드 경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것은 힘. 힘은 그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권리였으니...

강해질 기회가 온 건 인생을 바꿀 날이 왔단 것이었다.

'드디어 기회가 오는구나!'

똥 치우기, 하수도 공사, 비료 나르기를 하던 시간이 떠올랐다. 인생에 답이 없다 생각해 영지전에 목숨을 걸었지만...

그렇게 싸워서 얻은 돈이 장비 대여료 정도였으니 중세는 참 팍팍했다.

'그런데 내가 기사가 된다고.'

가능성만으로도 가슴은 터질 것처럼 벅차올랐다. 

"대마녀님."

그런데 견습생처럼 보이는 하얀 피부의 남자가 호다닥 튀어와 말했다.

"저녁 전까지 보링턴 남작령에 도달하셔야 합니다. 출발 시간이 되어 부득이하게 말씀을 끊었습니다. 부디 저를 죽여주십시오."

"어머,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군요."

"예. 별의 마법을 사용해 측정했습니다. 물방울이 천 번 떨어진 다음엔 검문소 통과가 힘들 겁니다."

"이런."

'대, 대마녀...?'

그게 얼마나 높은 지위인지 난 모른다.

하지만 저 하인의 태도로 보았을 때, 보링턴 남작과는 아득한 차이가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절로 등에 땀이 고였다.

"원래는 잔치를 베풀어 성대하게 대접해야 하는데, 상황이 급박한 점을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아닙니다."

"손을 주세요."

그녀가 무심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촉감. 

서늘한 체온이 맞닿자 그녀의 맥박이 느껴졌다.

"여기 다른 마녀가 없으니 제가 약식으로 입문식을 치르겠습니다."

그러자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어떻게 당신처럼 귀한 분이 이런 일을 하시겠습니까! 같은 느낌이었다.

"대마녀님! 아닙니다! 아까 무리도 하셨는데. 제게 맡겨주십시오!"

"견습생."

"예."

"당신이 정식 마녀인가요?"

"죄송합니다. 부디 사형을..."

"물러나세요."

그러자 견습생은 다시 조아리며 뒤로 물러났다.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니...

저 마녀가 직접 하기엔 격이 낮은 의식인데, 그래도 안 할 순 없는 일 같았다.

가슴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뭔가 대단한 걸 받는 느낌이 물씬 들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입문식은 좀 더 길지만, 약식이니 본질만 행하겠습니다. 당신은 '흡수'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녀가 시체의 검은 구슬을 뽑아내던 장면이 떠올랐다. 

힘을 흡수하는 기술인 걸까? 

그렇다면 정말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녀가 내 손을 잡고 침착하게 말했다.

"아래를 보세요."

"예."

내 아래에 있는 건 적군의 시체. 

그는 입을 허- 벌린 채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는데, 지금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 같았다. 

대마녀가 노래하듯 읊조렸다.

"사람이 죽으면, 가벼운 영은 때를 벗고 하늘로 올라가지요. 때를 벗고 솟아오른 것은 신령神靈이라 부르니 영이고, 무거워 버려진 것들은 사령邪靈이라 부르니 혼백입니다."

"...예."

"당신이 할 일은 혼백을 마력으로 바꾸어 사역하는 것. 이것이 사령기사가 강해지는 방법입니다."

마녀의 손에서 흘러나온 찌릿한 에너지가 내 혈관을 타고 흘렀다. 

마치 교보재처럼.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는 것처럼.

검은 마력은 일정한 형태를 이루며 내게 '흡수'를 어떻게 하는지 가르쳤다.

'아, 이건 너무 고마운데.'

눈앞의 마녀도 이유가 있어 이런 일을 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특혜는 고마웠다.

"사자의 명치 부분에 심장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검은 구체를 뽑아낸단 생각으로... 의지를 집중하시면."

그녀가 시키는 대로 의지를 집중하자-

-파직!

시체의 가슴팍이 들썩이더니 안에서 검은색 구체 몇 개가 쑤욱-하고 튀어나왔다. 

잘했나요? 하고 대마녀를 쳐다봤는데 그녀의 표정이 가히 좋지 않았다.

"..."

뿐만 아니었다. 

날 지켜보는 견습생이나 호위무사들조차 다들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니... 왜?'

나 뭐 잘못한 건가? 식은땀이 흘렀다.

마녀가 붉은 입술을 달싹거리다 말했다.

"역시 롤랜드 경이 추천한 인재네요. 허나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군.'

고양감이 들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의지만으로 에너지를 구부리니 초능력자가 된 기분이라 들떴다.

'좋아... 의지로 조종하는 거랬지?'

"처음 혼을 흡수하게 되면 이성을 잃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프고 괴로울 겁니다. 침착하시고, 자신을 절대 잃지..."

검은색 구체들을 아까 본 것처럼 액체의 흐름으로 바꾸었다. 

혼백이 흐름이 되고.

피처럼 내 혈관을 타고 흐르자, 몸속을 노도처럼 내달리는 힘의 방향이 느껴졌다.

"잠깐! 유진 님?"

순식간에 내 의식이 침잠했다.

강렬한 슬픔, 그리고 고통.

이 자가 가졌던 영혼의 편린, 기억, 감정들이 순식간에 가슴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 이건.'

혼백이었다.

인간적인 부분이요, 오물이요, 원망이고 비명인 무언가.

다만 사령술사는 이를 마력으로 바꾸어 사역하니, 사람들이 그들을 왜 멀리하는 지 알 것 같았다.

정신세계의 안쪽.

남자의 혼백이 품은 기억이 필름처럼 스쳐갔다.

'아내와 딸이 있었다.'

남자는 그들을 위해 전장에 나갔다.

하지만 싸움이란 건 생각보다 가혹한 법. 그는 어정쩡하게 굴다 심장에 창을 맞았고, 원래 그를 구했어야 할 병사들은 튀어나온 마수에게 도륙당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아아. 살 수 있었는데. 하필 마수 때문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내가 죽으면 아내와 딸은 어떻게 될까.

처음 든 감정은 불안감.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이었다. 하지만 피는 계속 빠졌고,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죽었다.

-내가 죽으면 아내는 다른 남자를 만나야겠지. 그래야 딸을 기를 수 있으니.

죽으면서 그는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지? 

-난 열심히 살았는데.

-나는, 목숨까지 바쳤는데. 아아... 내 아내, 내 딸...

가족은 그의 전부였다.

그래서 모든 걸 바쳤다.

하지만 이번 전투에서 죽었단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아내는 다른 남자에게 안겨야 했다.

그건 정말 고통스러울 정도로-

불합리했다.

-아아, 싫다. 싫어.

가슴을 꽉 조이는 답답한 감정.

억눌린 감정이 점차 살의와 공격성으로 변했다.

그리하여 그 남자는...

-죽이고 싶다.

나는, 그 남자의 아내와 딸을 죽이고 싶었다.

'내가 왜...?'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제야 마녀의 경고가 이해되었다.

'아, 이게 흡수구나. 이래서 흡수라고 한 거였어.'

참으로 못난 감정.

하지만 딱히 이해가 안 가진 않았다.

뭐, 사람이 창에 찔려 죽어가면서 무슨 도덕적인 생각을 할까. 

인간도 한 꺼풀 벗겨보면 동물인지라- 나도 비슷한 상황이면 저런 생각을 할 것 같았다.

내가 이해한다는 의지를 내비치자 혼백이 당황했다.

-나를 이해해? 네까짓 게?

-그렇다면 죽여라, 죽여!

-가서 아내도, 딸도, 아내랑 놀아날 놈팽이까지 전부 죽이란 말이다!

남자의 혼백이 노도와 같이 마음속을 휩쓰는 상황. 내 감정이 오염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진 않았다.

'그건 좀?'

너무나도 무례한 세 글자.

그러자 혼백의 움직임이 굳었다. 

'네 기분이 억울한 것뿐이잖아.'

이 혼백은 그리 못난 존재까진 아니다.

애초에 그가 사랑한 여자고, 그가 기른 딸이다. 지배권을 넘긴다고 한들 결국 아무도 죽지 않을 테니- 

지금 하는 건 그저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네가 뭘 안다고...!

혼백이 발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때 살아있던 것의 찌꺼기일 뿐.

나의 내면이 소용돌이치자 남자의 기억이 사라지고, 혼백은 가루처럼 갈려 나갔다.

-날 무시하는 거냐! 날 무시하는... 

'자라.'

회색의 세상.

내면의 세계에서 거대한 회오리가 일어났고, 그것은 한때 남자를 이루던 형상을 남김없이 갈았다.

기억. 감정. 그의 자아를 구성하던 껍데기들은 완벽히 갈려 나갔다. 그렇게 내 영혼이 보강되었다.

'이런 거구나.'

좀 씁쓸하긴 했다.

노력해도 운 없이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가 세상에 흔하니, 이렇게 죽는 남자가 하루에 몇 백은 되겠다.

하지만 슬픈 건 슬픈 거고 사는 건 사는 것이다.

영원히 슬퍼할 수도 없고, 감정이 격해졌다고 사랑했던 이들을 죽일 순 없는 법이다.

죽은 자의 영은 하늘로 올라가야 했고, 이러한 혼백은 이제 세상에서 없어지는 게 맞는 일이니...

눈을 뜨자 세상이 밝아진 게 보였다.

"실례지만... 이렇게 하는 게 맞습니까?"

대마녀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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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 정돈가.

대마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뭐지...?'

사령술.

그 기본이 되는 건 흡수이며, 이는 죽은 이의 혼백을 존재의 일부로 삼는 일이었다. 

다만 이는 쉽지 않았다.

'나조차도 첫 흡수 땐 죽을 뻔했는데.'

사령술은 타인의 혼백을 자신의 영혼에 섞어 힘으로 사역하는 행위.

비유하자면 시체의 몸을 조각내 혈관에 투입하는 것과 비슷했다.

당연히 흡수의 과정에서 자아가 부서지고 합쳐지는 등 끔찍한 고통을 맛보게 되며, 이는 사령술사에 대한 편견을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그리고 첫 흡수는 더더욱 각별하지.'

첫 흡수를 경험하는 이들 중 절반은 괴로움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오줌과 똥을 지리며, 주변 사람들을 죽이려 들었다.

따라서 입문식은 사령술이란 학문의 입문인 동시에 본인의 재능이 적절한지 판단하는 관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진은 기괴했다.

혼백을 조각내 자신의 존재에 쏟아부은 자 치고 너무나 침착했기 때문이었다.

'...뭐지?'

육체적으로 강한 인간이건, 고통에 익숙한 인간이건 영혼은 비등비등하다. 

가끔 격이 높은 영혼이 있긴 하나, 그것조차 '자기 자신이 뒤섞이는' 고통엔 익숙친 않다.

그런데 사령술 초심자인 유진이 아무런 고통을 겪지 않는다?

그건 기괴할 정도로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유진 님. 타인의 혼백을 흡수하는 건 엄청난 부작용과 고통을 동반해요. 혹시라도 지금 이상한 감각이 느껴진다면 바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유진은 아주 공손한 표정으로 예를 표했지만...

안타깝게도 마녀는 아까 마법 덕에 유진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유진이 속으로 뇌까렸다.

-흠... 그 정돈가...

경악하다 못해 울컥한 감정이 솟았다.

'뭐?'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꽉 쥔 주먹에선 피가 흐를 것 같았다.

흠.

그 정돈가.

다섯 글자가 마녀의 머릿속을 윙윙 떠다녔다.

'제가, 사령술을, 몇 년을 수련했는데...!'

말 그대로 불을 토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남의 생각을 읽는 것도 무례였고, 유진의 바보 같은 표정을 보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라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한숨을 쉬고 그를 만졌다.

"가만히 있어 보세요."

"...예."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왜 그가 혼백 흡수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일까.

그것을 알아보려면 영혼의 형체를 직접 인식하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런 그녀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슴팍에 손이 닿자마자 움찔거리며 부끄러워 하니...

그녀는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무슨, 동정이세요?'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고작 그런 게 신경쓰인다니?

'아니, 장난하시는 것도 아니고... 대체 왜 이렇게 부끄러워 하시는 거에요?'

너무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이가 숫총각처럼 구는 꼴 만큼 답답한 게 없었다.

산맥 사람들은 육신을 죄로 여겨 드러내길 꺼리는 데...

대마녀에겐 오늘따라 그 풍습이 더더욱 미개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유진의 몸은 쓸데없이 좋아서, 만지는 마녀마저도 '이거 부끄러운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짜증스러웠다.

'집중이나 하자.'

어쨌든 마녀가 피를 매개 삼아 유진의 영혼을 바라보자,

'...뭐?'

대마녀는 마치 세상이 멈춘 듯한 충격을 받았다. 유진의 영은 지금까지 봐온 무엇과도 달랐던 것이다.

'유진, 당신.'

마녀의 옆머리에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당신...'

마녀의 호기심은 원초적인 것이었고,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인간이긴 한 건가요...?'

***

첫 흡수.

조금이지만 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괜찮은데.'

차마 영이 되지 못한 혼백. 

삶의 근본적인 에너지가 미세한 단위로 분해되어, 내 영혼에 뒤섞이는 감각은 각별했다.

'핏줄이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어.'

한때 남자의 기억과 감정을 구성하던 요소들.

그것들은 내 핏줄에 녹아들었다.

이것이 전부 용해되는 순간 검은 마력으로 화할 것이며- 그건 내 의지에 복종하는 힘이 될 것이었다.

"유진 님. 진지하게 다시 물어볼게요."

"아, 네."

"흡수할 때 무엇을 느끼셨죠?"

"슬펐습니다."

"그게 다인가요?"

카네기 인간관계론이란 책 내용에 따르면, 감사하는 사람이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했다. 나는 자기계발서에 나온 대로 행했다.

"힘을 주신 마녀님에게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

그러자 마녀가 도끼눈으로 날 노려봤다. 

오답.

순간 죽음의 위기를 느낀 난 빠르게 부연했다.

"그, 남자에겐 딸과 아내가 있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러 전투에 나왔으나 마지막에 느낀 감정은 질투였죠. 음. 그래서, 갈았습니다."

"갈아요? 벌써?"

"아... 예."

뭔가 인간 믹서기가 된 느낌이라 그리 기분이 좋진 않았다. 

마녀는 어이가 없단 표정으로 하늘을 한 번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유진 님, 당신은 재능을 갖고 있군요."

재능이라니.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이내 터질 것처럼 기뻤다.

이세계에 오고 나서 상태창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는데...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 살만 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녀가 한 말은 내 예상과 좀 달랐다.

"당신의 영혼이 가진 격은 인간의 수준을 넘어섰어요. 몇천 년 동안 윤회를 거듭한 동방의 고승처럼."

"예?"

"당신의 영은 격이 높습니다. 저조차 그 단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자 모든 견습생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몇은 덜덜 떨기도 했고, 몇은 날 두려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대단한 것 같았다.

'음...'

다만 난 좀 짜증났다.

솔직히 팍 식었다.

전설적인 소드마스터라거나, 너무 외모가 완벽해서 미녀들이 집착한다거나, 그런 게 좋은데.

영혼의 격이 높다고?

사령술을 하는 데에 영혼이 쓰이는 건 대충 느꼈다. 하지만 직관적이지 않았다.

'쩝. 그냥 상태창 주면 안 되나?'

영혼으로는 미국 주식도 살 수 없었고, 영혼으로는 수프도 끓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영혼을 미원으로 바꾸는 마법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매 식사가 맛있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마녀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타는 눈길로 날 노려보며 경멸하듯 말했다.

"당신, 몸이랑 근육만 커다란 주제에 영적으론 둔감하군요? 왜, 왜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훌륭한 영을 갖고 계신지. 하아... 됐어요."

'너무해.'

그녀가 박수를 짝! 쳤다.

"호위!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물방울이 오백 번 떨어질 만큼 남았습니다."

"...빠듯하네요. 본인의 재능을 잘 못 느끼시는 것 같으니, 쉽게 설명할게요."

그녀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영혼이 강하다는 건 당신 생각보다 훨씬 좋은 일이에요. 유진 님. 당신 같은 영혼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황금빛의 눈동자가 날 바라봤다.

순간 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경애, 욕망, 측은함, 그 모든 게 섞인 복합적인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미칠 수 없어요."

조금 섬찟했다.

분명 정신력이 강하단 장점처럼 들렸지만...

인간성이 결여된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을 몇 년 동안 고문하면 분명 괴로워하고, 세상을 원망하겠죠.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당신의 영혼은 '절대' 깨지지 않아요."

"음..."

"그게 당신의 강점이에요. 당신이 한 흡수. 다른 견습생들은 한 달에 한 번도 힘들어하는 일이에요. 유진 님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빠르게 강해질 수 있겠죠."

'오, 그래?'

잘 이해되진 않았다.

살면서 미칠 일이 그렇게 많진 않으니, 별 이득이 없는 게 아닌가.

마녀가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유진 님. 저길 보세요."

"아."

그제서야 난 알았다.

많은 이들이 땅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평온해 보이기도 했고 극도의 공포에 일그러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전부 죽은 사람들이었다.

지금 이곳은 새삼 전장이었다.

'아... 그래. 나, 사람을 죽였었지.'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현대인이 중세에 와서 냉병기로 사람을 죽인다. 그건 충분히 사람을 미치게 할 일이었다.

그가 정신병 없이 1년을 버틸 수 있나? 

공황장애나 우울증 없이? 

'뭐, 좆같긴 한데...'

사는 게 그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메이스로 처음 사람을 때려죽인 날 밤.

며칠 동안 끔찍하게 뭉개진 머리가 꿈에 등장했다. 

죄책감도 있었지만, 그 이미지 자체가 엄청 흉측해 잊기가 힘들었다. 밥 먹을 때도, 똥 쌀 때도 그것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조차 옆의 병사랑 술 마시고 무용담을 떠들다 보니 희미해졌다. 마취제를 먹은 것처럼.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모르겠다. 진실이야 어떻든 상담받기엔 늦었지. 정상인이라고 떡 하나 더 줄 리도 없고.'

"유진 님..."

그녀는 개탄스럽다는 듯 날 바라봤다.

"지금은 본인의 영이 어떤 형태인지 자각하기 힘드실 겁니다. 나중에 경지가 오르시면 제 심정을 아시겠지요."

"...감사합니다."

"호위! 검은 책을 가져오세요."

"아, 알겠습니다."

견습생 몇이 부리나케 뛰어갔다.

그들의 손엔 검은색 양피지로 된 고급스런 책이 들려 있었는데, 딱 봐도 비싸 보였다.

대마녀가 책한테 뭔가를 속삭이자 가죽 커버는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들썩이더니- 수첩 크기로 자신의 형태를 줄였다.

'아니... 미친. 마법 책이잖아.'

"이 아이는 지금부터 당신, 유진 님의 소유랍니다."

"가, 감사합니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걸 느꼈다.

책은 오질나게 비싼 물건이었다.

금속활자가 상용화되지 않은 대륙의 특성상, 책이란 건 공장에서 찍어낼 수 없는, 장인이 한땀한땀 만들어야 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내가 일 년 동안 저축해도 책을 사기가 힘든데, 심지어 마법 책을 공짜로 준다고?

'고마워, 영혼아!'

난 태어나 처음으로 내 영혼에게 감사하였다.

"지금은 아마 펼쳐도 백지겠지만... 조금 있으면 글자가 드러날 거에요. 초급 사령술은 이 책이 가르쳐 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함이 해일처럼 넘쳐흘렀다.

마법 가르쳐주는 책이라니. 

그야말로 교육용 타블렛의 상위호환. 최고의 교구에 해당하는 물건이었다.

그 값어치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 분명했다. 

절로 입꼬리가 실실 올라갔다.

"오늘 만남은 정말 즐거웠어요, 유진 님. 약식으로 입문식을 치렀고, 이걸로 당신은 로커스트 부족 연합의 사령 기사 후보생이 되었으니... 가슴에 새기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어디의 소속이 되는가는 중요치 않았다.

기사라는 족속은 원래 방랑하는 존재. 

영지를 갖지 않는다면 윗선의 터치를 받지 않았다.

힘을 갖게 된다면 그걸로 이득이었다.

"제 이름은 카밀라 앱 헤롯."

난 대마녀, 카밀라의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작게나마 로커스트 카운슬의 일각을 맡은 자입니다. 초급 사령 기사로서 충분한 공을 쌓으면 책이 알려줄 것입니다. 그때 늪에 찾아오십시오."

"알겠습니다."

너무나도 감지덕지한 상황.

카밀라는 등을 돌린 채 마차에 타려다 덧붙였다.

"아. 그리고 유진. 마법 스승은 오로지 단 한 명만 섬길 수 있답니다."

"알겠습니다."

"다른 스승을 섬긴다면 저에게 엄청난 무례를 저지른단 뜻이에요."

지식이 귀한 시대였다.

카밀라가 순수한 마음으로 날 도왔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그녀의 의무이거나,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하지만 그녀가 은인이란 사실을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나름의 예를 갖춰 감사를 표하자 카밀라가 웃었다.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유진."

마차가 천천히 사라졌다.

아래쪽부터 끓어오른 마력이 투명한 아지랑이처럼 마차를 덮었고, 나긋한 카밀라의 미소를 마지막으로 그들을 지워버렸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그들은 사라졌다.

남은 건 전장, 시체, 불어오는 바람뿐. 

어느새 그들은 날 떠났고, 난 전장에 혼자 남겨져 있었다.

"아."

문득 이 모든 게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뺨을 꼬집을 필요는 없었다.

'보여.'

철학이나 사상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단 소리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안 보이던 게 보였다.

영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 검은색 오물처럼 시체에 늘러붙은 혼백들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것들은 자연스러웠다.

'아아... 드디어!'

이세계 생활 1년 차.

드디어 난 초인에 입문할 자격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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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항상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여기 온 지 약 1년.

굶기 싫었던 난 온갖 험한 일들을 했었다.

똥과 비료를 퍼 나르고, 하수도 공사를 하며 하루 한 끼를 먹었었다.

언제는 사냥꾼 집에서 나무를 팼는데, 그는 열심히 했다며 토끼 고기와 산양유를 줬었다.

굶다 먹은 고기가 얼마나 맛있던지.

그땐 눈물을 줄줄 흘렸더랬지.

사냥꾼은 내가 불쌍하다며 손도끼도 주고, 두꺼운 가죽옷도 줬다. 그게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살았었지.'

중세에 노동자로 사는 건 답이 없었다.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곳저곳 부평초처럼 돌아다니며 일하면 모이는 돈 없이 몸만 축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메이스를 들고 영지전에 나갔다.

'만만한 일이 아니었어.'

목숨 걸고 사람 죽이는 일이 쉽겠는가?

나 역시 평범한 인간. 

남을 다치게 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남이 날 다치게 하면...

그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더 괴로웠다.

의료보험도 병원도 없는 세상인지라 회복이 더뎠다. 치유 마법은 있지만 비싸서, 한 번 옆구리에 창이라도 맞으면 한 달 동안 번 돈이 날아가곤 했다. 그 경험은 아직도 PTSD였다.

한때는 그런 삶이 반복될 줄 알았건만.

'드디어 보답을 받는구나.'

나는 혼백을 흡수하는 힘을 얻었다.

그것은 곧 내 힘을 늘리는 일.

힘이 곧 질서인 세상에서 위로 올라갈 사다리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고, 운 좋게도 지금 내 주변엔 재료가 많았다.

'전쟁...'

혼백을 흡수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곳이 있을까? 

나는 시체들을 관찰하며 천천히 걸었다. 

'혼백들도 다 모습이 다르군.'

어떤 혼백은 모닥불 아지랑이처럼 투명하게 흔들리다 사라지는 반면, 어떤 혼백은 지상에 붙어있고 싶다는 듯 뭉쳐서 꿈틀댔다.

그런 것들은 냄새가 지독했다.

다른 것보다 빨리 썩는 것 같았다.

'혼백이 부정적인 개념이긴 하구나.'

쓸만해 보이는 시체에 다가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리자-

-들썩.

시체의 가슴이 들썩이며 검은색의 꿀렁거리는 물방울들이 터져 나왔다.

부유하던 검은색 구슬들.

아까 배운 요령대로 행하자, 그것들이 마력의 물길로 변해 손으로 흘러들었다.

-울컥. 울컥. 울컥.

이 시체의 주인은 고아였다. 

동정과 차별을 받고 살아온 꼬마는 돈을 벌고 싶었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싸움질을 하다 골목대장이 되었다.

싸움 좀 잘한다는 소리를 듣던 놈.

그는 방패랑 검 하나 들고 전장에 나섰고, 몇 번 살아남자 자신감을 얻었다.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특별한 인간이야.

-옛날부터 싸움은 잘했잖아?

그는 기사가 될 거란 원대한 꿈을 품었다.

하지만 운명이란 건 변덕스럽기 짝이 없었으니.

세상은 화살 한 발로 그의 목숨을 거뒀고, 소년의 영은 17년 만에 하늘로 돌아갔다.

지금 여기 남은 건 그 혼백 뿐.

그것이 오물처럼 시체를 썩게 했다.

'고생 많았다.'

아까와 동일한 과정을 반복하자, 소년의 흔적은 가루가 되었다.

"자라."

눈을 뜨고 커다랗게 숨을 쉬었다.

그들의 영혼은 다 소화되지 않았다.

잘게 조각난 자의식들이 군데군데 섞여 있는 상태. 그들의 기억도 드문드문 떠오르는 중이었다.

고로 지금 늘어난 마력은 극소량.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몸이 나아진 게 느껴졌다.

'좋아...'

제일 먼저 체감되는 건 장비의 무게였다.

'방패가 들만 한데?'

내 방패는 특대형.

못 쓰는 쇠들을 뭉쳐 만든 이놈의 무게는 현대 기준 7kg 정도로, 사람이 들고 다닐 무게가 아니었다. 

-이야, 유진! 좋겠군! 그 방패는 도둑맞을 일이 없겠어.

판타지 영화를 보면 방패를 들어 눈앞의 적을 후려갈기거나 하는데, 이걸 들고 그 짓을 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말이 7kg지.

상체를 가리기만 해도 팔이 뻐근하고 허리가 아팠다. 더 들고 있으면 무릎 관절까지 상하는 놈인데 어찌 이걸 휘두르겠는가.

본래대로라면 지금처럼 배도 고프고 머리도 핑핑 도는 상황에 들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가벼웠다.

아내를 떠난 아저씨, 특별해지고 싶었던 소년.

그들이 죽어가며 내지른 원초적인 단말마가 내 혈관 속에 있었다.

살고 싶다는 갈망, 욕망, 집착이 원초적인 에너지로 변해 근육, 뼈, 인대에 힘을 공급했다.

'롤랜드 경이 강한 이유가 있었군.'

기대가 됐다.

이렇게 원시적인 방법으로 써도 위력적인데,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배우면 어떨까.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난 멈추지 않고 전쟁터를 돌며, 많은 혼백들을 흡수했다.

죽은 어머니의 장례값을 위해 전장에 나온 남자.

자기 여동생의 몸값을 대려고 돈을 모으던 사람.

그냥 강도짓을 하다 여기까지 흘러 들어온 놈.

많은 영혼들이 꿀렁거리며 내 핏줄 속으로 들어올 때 즈음.

나는 평야 너머에서 내가 알던 사람을 보았다.

"아저씨?"

"...유진?"

주변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석양 속에서 시체를 뒤지던 이.

난 그를 쉽게 알아봤다.

'심벌즈 치던 사람이군.'

하지만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음. 아니, 다가오지 말아 주게나."

한 손을 검 손잡이에 대고, 한 손으론 다가오지 말란 제스쳐를 취했다.

눈이 벌건 걸 보니 심리적으로 지친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유진. 일단 나는 전리품을 훔치지 않았네."

"..."

"그러니까 이건 전부 나의 것-"

"아이, 젠장. 아저씨."

그래도 몇 달 동안 얼굴 본 사이다. 야박하게 굴긴 싫었다.

"우리가 하루 이틀 봅니까. 예?"

그러자 그의 표정이 녹았다.

"하아, 고맙네."

"아저씨도 좀 그래요. 제가 양아치 새끼도 아니고. 서로 살기 힘든 거 빤히 아는데 아저씨 통수치고 얼마 되지도 않는 전리품을 뺏겠어요?"

그러자 심벌즈 아저씨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워낙 험한 시대가 아닌가. 내 사과하지. 의심해서 미안하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롤랜드 경이 퇴각하고 뿔뿔이 흩어졌다네. 난 마수한테 맞아 기절했고."

"빨리 챙기고 튑시다."

비록 검은 책이란 보물을 얻었지만 그렇다고 부자가 된 건 아니다.

난 가난했고, 쟁일 수 있을 때 쟁여놔야 했다.

우린 수박 서리를 공모한 사람들처럼 시체를 뒤졌다. 

결과 난 가죽 벨트 하나, 지갑 몇 개를 건질 수 있었다.

'이야... 마침 벨트가 필요했는데.'

그렇게 몇 십분.

전장터를 돌아다니며 챙길 만한 건 다 챙겼다.

"아저씨. 뭐 좀 건졌어요?"

"그래도 한 달은 살겠군."

"좋네요."

그리하여 우린 의좋은 형제처럼 아주 천천히 걸었다. 

전장터를 빠져나왔다.

해가 지는 숲을 지나, 별이 뜬 밤을 지나, 보링턴 영지의 검문소까지 걸었다.

나른하고 피곤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좀 이상했다.

갈 땐 많이들 옆에 있었는데, 돌아올 땐 두 명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유진. 갑자기 왜 멈추나."

"아녜요."

하지만 새삼 사는 게 그랬다.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고.

전쟁터에선 특히 그런 일이 잦았다.

검문소에 도착하자 경비병이 우리 얼굴을 알아봤다.

"씨바. 이게 누구야. 록스랑 유진 아냐?"

경비병 아저씨가 내게 다가와 먼지를 툭툭 털었다. 술 한 잔 했는지 얼굴이 시뻘갰다.

"니들 왜 이제 들어와. 전리품 털었어? 탈영한 줄 알았잖아. 시끼들아."

그러자 심벌즈 아저씨가 말했다.

"그래. 털었다, 이 새끼야. 문이나 열어."

"문이나 열어? 이 새끼 이거 안 되겠네. 내가 바로 남작님께 일러바쳐서..."

"남작 부인이 내 마누라다 인마. 나중에 술 살 테니 길이나 좀 열어라."

경비병이 킬킬댔다.

"새끼. 너도 유진처럼 좀 살갑게 사람을 좀 대해봐라. 그러니 심벌즈도 병신같이 두들기지. 안 그러냐, 유진?"

"안녕하세요."

그가 말했다.

"우리 집이 무너졌는데, 나중에 집 좀 고쳐줄 수 있냐? 돈 두둑하게 줄게."

"집이 무너져요?"

"저녁에 마수가 몇 마리 들어왔거든."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본 것 같은 놈이 마을로 들어왔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텐데... 

다행히 피해가 크진 않은 것 같았다.

"소형 마수 여러 마리가 들어왔어. 들개처럼 생긴 놈들이 돼지를 물어갔다."

"...음."

마수들이 남하하는 걸까.

"어쨌든 살아 돌아온 걸 환영한다. 록스, 유진."

"문이나 쳐 열어."

"근데 이 새끼가 진짜."

그렇게 우린 보링턴 영지에 돌아올 수 있었다.

'홈 스위트 홈.'

내가 묵는 곳은 푸른 꽃밭 여관이었다.

오래된 간판과 그 위에 걸린 초승달을 보니 몸이 나른해졌다.

전투의 아드레날린, 전리품 수집의 도파민...

그런 것들이 싹 꺼지면서 피로감이 몰려왔다.

헤어지기 전 심벌즈 아저씨에게 말했다.

"근데 아저씨. 보링턴 남작이 돈을 줄까요?"

"음..."

오늘 번 돈은 약 50실링. 

전투에 나온 남자들이 지갑을 들고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었기에, 기대한 만큼 벌진 못했다.

장비를 팔면 좀 더 수익이 나오겠지만 그건 미래를 파는 행위였다. 

할 수 없었다.

결국 전투 참여비 50실링은 받아 내야 했다.

"옘병... 일단 내일 보자고. 오늘은 피곤해."

"들어가세요."

'내일 문제는 내일 확인해 보는 수밖에.'

난 생각들을 지웠다.

그리고, 남편보다 두 배는 커다란 여관 아줌마의 인사를 대충 넘기고 방에 들어가 쓰러졌다.

"아..."

나는 죽은 듯 잠들었다.

*

깊은 꿈을 꾸었다.

내 모습이 자꾸 변하는, 그런 꿈이었다.

나는 멧돼지가 되었다가, 새가 되었다가, 식물이 되었다가, 빗방울이 되기도 하고, 고승이 되어 수행을 하기도 했다.

어떠한 규칙성을 찾기 힘들었다.

포유류, 어류, 식물, 무생물.

그렇게 순환하던 나는 어느새 한국의 20대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 남자는 큰 일없이 남중, 남고, 공대를 나와 군대로 갔다.

'나쁘지 않았지. 여름엔 에어컨이 나왔어.'

그리곤 갑자기 이세계로 떨어지게 되었다.

남자는 괴로웠다.

똥을 퍼 나르고 수로 공사를 하며 진흙을 치우는 등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일했더란다. 

그리곤 마침내 기연을 얻어 혼백을 흡수하니...

나는 딸을 그리워했던 남자가 되었고.

기사가 되고 싶었던 소년이 되었으며.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을 죽이던 강도가 되었었다.

다만 그들은 '내'가 아니었다.

혼백은 살아있던 사람이 가졌던 오물이자 껍데기.

그들은 기억도, 추억도, 감정도 유지할 수 없었다. 덩어리졌던 그것들이 가루처럼 녹아 영혼의 일부가 되었다.

'아아, 곧 잊혀지겠군.'

문득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니.

아무리 많이 사하고, 다시 태어나고, 남의 혼백을 갖다 붙여도 변하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닳고 닳은 하얀색의 둥그런 영.

마노석을 깎아 만든 것처럼 생긴 둥그런 영이었다.

'당신은 내 영이 특이하다 했지.'

확실히 그랬다.

하루 다섯 명의 인격이 영혼과 섞였지만.

그건 저 작은 영이 내뿜는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통째로 갈려 나갔으니.

그제야 마녀가 한 말이 조금 이해되었다.

'당신은 아름다운-'

비인간적인 영을 갖고 있어요.

*

퍼뜩 잠에서 깼다.

악몽인지, 길몽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커튼을 열자 눈 뜨기 힘들 정도의 빛이 들어왔다. 아침. 착한 어린이들은 일어날 시간이었다.

"이야. 날씨 좋다."

백덤블링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재빠르게 나갈 준비를 마치자 온몸에 원기가 넘쳐 흘렀다.

"아니, 몸이 왜 이렇게 가볍지?"

위화감이 들었다.

죽일 각오로 사람이랑 싸웠다.

머리에 짱돌을 맞은 다음 전리품을 털었다.

보통 이렇게 고생하면 열여섯 시간 이상 잠들곤 했는데... 왜 나는 아침에 일어났을까?

혹시 하루 더 자버린 것일까. 

여관 아줌마에게 물어보니 그건 아니었다.

"오늘 몇 번째 날이에요?"

"염소자리의 스무 번째 날."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몸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가벼웠다.

가장 기괴한 건 짱돌을 맞은 머리였는데, 무의식중에 만져보니 새살이 돋아 있었다.

'와... 씨. 이게 뭐야.'

어제 흡수한 다섯 개의 혼백은 전부 마력으로 치환된 게 느껴졌다.

그들의 사정이 거의 잊혀진 대신...

사소한 움직임을 취할 때도 검은 마력이 서포트하는 게 느껴졌다.

'대단하네...'

어제까지만 해도 마력의 마 자도 모르는 인간.

그게 나였다.

오히려 그래서 그런 걸까?

0에서 1로 뭔가가 늘어나니 체감이 확 되었다.

'단순히 마력을 보유하기만 해도 육체 능력이 강해지는군.'

이러니 롤랜드 경이 학살을 하지.

내 컨디션은 전투 후에도 비현실적으로 쾌적했으며, 지금 당장은 1대 5 주먹 싸움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사들은 어떻게 싸우는 것일까. 그들이 쓰는 건 마법일까, 아니면 무공 비슷한 것일까?'

그렇게 마을 분수대 앞까지 나아가니-

약속한 분수대에 가보니 심벌즈 아저씨가 목을 90도로 꺾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설마 누군가에게 당한 걸까? 

위급하게 어깨를 흔들자 그가 정신을 차렸다.

"끄윽. 힘들군."

"아저씨. 여기서 얼마나 잤어요?"

"얼마 안 됐네. 방금 일어났어. 젠장... 자네, 몸은 좀 괜찮은가?"

"그럭저럭요."

그의 인상은 하루 안에 비쩍 말라 있었다. 

다친 다리는 대충 옷으로 꽉 묶여 있었고, 입술은 파래져 죽을 때가 된 사람 같았다. 

'잠을 못 잤구나.'

나도 마력이 없었다면 저랬겠지.

"가지. 유진. 이미... 사람들이 보링턴 저택에 와 있네."

"왜요?"

왜 항상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어제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이 돈을 못 받았다고 하더군."

이세계 임금 체불.

불안하고 짜증스런 감정이 치솟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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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투로 해결해라.

보링턴 영지의 행정관.

이 작은 건물은 내가 호적을 만든 곳이자, 영지전 참여 계약서를 쓴 곳이었으며, 보수를 받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은 평소에 조용했는데, 오늘따라 몹시 시끄러웠다.

"정말 이따위로 일 할 거요! 당장 남작을 불러오시오!"

몰려온 건 네 명. 

그들의 표정에 분노와 짜증이 서려 있었다.

또한 허리에 찬 칼을 보니 보통 각오로 온 게 아니었다. 

"유진! 살아있었군!"

"도노반."

그리고 그들은 다 내가 아는 이들이었다.

어제 같이 전투에 참여한 동년배의 마을 청년, 도노반. 외에도 영지전에 얼굴을 비추던 이들이 있었다.

우린 짧게 포옹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마수가 오자마자 전열이 깨지고, 롤랜드 경이 후퇴 명령을 내렸어. 넌?"

"짱돌 맞고 기절해 있었다."

"살아남은 게 기적이군. 축하한다."

"너도."

"저기 독전관도 살았다."

모자란 독전관도 해맑게 웃었다.

"유진! 안녕! 안녀어어엉!"

'이 사람도 명이 길군.'

그는 신났는지 두 손을 엉덩이 쪽에 붙인 채 자꾸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긴 한 걸까? 난 몹시도 궁금했다.

"근데 여기서 왜 이러고 있냐."

"글쎄. 청지기 아저씨가 우리한테 돈을 못 주시겠다네?"

임금체불의 추억이 오랜 연애담처럼 떠올랐다.

나는 청지기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저씨. 저희가 얼굴 한 두 번 봅니까? 이러시면 안 되죠."

"유진. 자네도 알지 않나. 전투 급여를 지급하는 건 내 관할이 아니네."

"그래도 서류 처리는 아저씨가 하잖아요."

"어제 경호 대장이... 다 줬다고 보고했는데... 내가, 그, 난 모르겠네."

난 한숨을 쉬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딱 봐도 좆같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

나, 도노반, 심벌즈맨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럼 어떡합니까. 저희가 남작님 직접 찾아뵈어요?"

"그게... 그, 경호 대장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 자넨 외지인이잖나."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호적을 여기서 뗐는데."

약간 그런 느낌이었다.

억울한 일을 당해 행정 센터를 찾아갔는데, 공무원이 자꾸 전화를 돌리는 기분.

-아니, 그게 저희 관할이 아니라니까요.

-근데 왜 저희한테 그러세요?

-아몰라! 모른다고 하잖아! 몰라핑! 몰라피잉!

한국에서 당했던 임금체불, 노동청 신고, 재판의 추억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웬만한 일은 그냥 참으면서 살겠다.

하지만 목숨 걸고 일했는데 보수를 안 주는 건 예의가 아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러면 안 된다.

"아, 더는 못 참겠다!"

그때였다.

심벌즈 아저씨가 참지 못하고 기립했다.

난 불안한 느낌에 눈썹을 찌푸렸지만...

"아저씨. 제발. 그거 집어넣으세요."

"더는 못 참아!"

그는 듣지 않았다.

그래. 

음악 하지 말라고 안 하면 그 사람은 음악인이 아니다.

심벌즈 아저씨가 자신의 감정을 악기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챙! 챙! 챙! 챙!

결과는 끔찍한 소음이었다.

'아으... 진짜 개씨발좆같네.'

심벌즈 소리가 내 고막을 학대했다.

영혼 흡수보다 날 더 괴롭히는 게 있다면 바로 이 심벌즈 소리였는데, 한국군 기상나팔보다 혐오스러웠다.

추가로, 뒤에 있는 독전관까지 노래를 시작했다.

"안녕! 안녀엉! 나는, 나는 군대 가기~ 싫어!"

그야말로 소음 공해.

"끄윽...!"

청지기가 귀를 막고 고개를 숙였다.

합주하는 악기가 많아질수록 음악은 제곱으로 좋아진다 했는데, 이 경우엔 제곱으로 좆같아지고 있었다.

그걸 견디지 못했는지 남작이 쳐들어왔다.

"그만! 이게 무슨 소란이냐!"

보링턴 남작.

그는 대머리인 대신 콧수염이 풍부한 땅딸막한 남자로, 의외로 군관 출신인지라 다부진 몸을 갖고 있었다.

그 옆엔 호위하는 사병대와 경호 대장이 있었다. 다들 소음 공해가 싫었는지 오만상을 찌푸린 채였다.

'이래서 시위대가 스피커를 트는 거구나.'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어쨌든 심벌즈맨은 남작을 보자마자 연주를 멈췄지만, 독전관은 남작이 온 걸 눈치채지도 못하고 노래를 불렀다.

"차라리- 남작 부인이랑 살겠네! 남작 부인의!"

"..."

"으히힛! 젖꼭지나! 빨겠네! 남작님! 안녀엉!"

남작이 시뻘개진 얼굴로 칼을 뽑았다.

"저 무도한 놈이..."

"죄, 죄송합니다, 남작님!"

보링턴은 사관학교 출신.

그 말이 허명이 아닌지, 그가 뽑아낸 기병용 세이버에선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도노반이 필사적으로 독전관의 입을 틀어막자, 그제서야 씩씩거리면서 검을 집어넣었다.

"됐고. 무슨 일인가?"

"친애하는 보링턴 남작님. 영지전의 급여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난 지금 바빠. 어젯밤에 마수가 출현했단 말일세. 용건을 간단히 말해."

"그, 그것이..."

남작의 말이 빨라 그런 걸까.

아니면 권위가 강해 그런 것일까.

보링턴이 인상을 쓰고 밀어붙이자 도노반이 위축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앞으로 나섰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남작님. 어제 전투에 참전했습니다만 대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유진. 오랜만이군. 내 자네를 아주 좋게 보고 있어."

남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탕탕 쳤다.

포옹이랑 어깨 두들기기는 아틀라스 제국의 풍습이다.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는 어제 안 왔나? 영지전이 끝나면 바로 돌아와 임금을 받는 게 기본이지 않나."

"머리에 돌을 맞고 기절했습니다. 그러다 늦은 밤에야 영지에 도착했습니다. 여기 있는 여섯은 모두 밤에 도착한 이들입니다."

그러자 보링턴 남작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나술! 이들의 말이 사실인가?"

"..."

경호대장 나술.

그는 뒤에서 건들건들 걸어 나오더니, 불만스런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니가 뭔데 내 일에 시비를 걸어?

눈을 치켜뜨는 꼬라지가 맘에 안 들었다.

'쉽게 가자. 새끼야. 고작 50실링 갖고.'

근데... 

갑자기 경호 대장 놈이 돌발 행동을 하는 게 아닌가?

"사실이 아닙니다. 어제 청지기와 함께 임금을 전부 지불했습니다."

행정관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뭐?"

'아, 새끼. 일 어렵게 하네.'

나술의 얼굴 표정이 뚱했다.

네가 꿇으면 돈을 줄 수도 있는데, 왠지 싸가지 없어 보여서 심술 부릴래.

그런 표정이었다.

어쨌든 남작이 이 사실을 들었다면 이제 '좋게좋게'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그는 '지금 씨발 내가 무슨 개좆같은 소리를 들은 거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나와 나술을 번갈아 보았다.

부인의 불륜 사실을 들었을 때보다 더 화난 얼굴이었다.

"나술, 그리고 유진. 내가 지금, 지금 뭘 들은 거지?"

군 부사관 출신의 시골 남작에겐 중대장 같은 친근함이 있었으나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그의 눈빛에서 살기가 흘렀다.

"저는 결백합니다."

"허."

남작이 인상을 찌푸리자 별관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가 교통정리를 시작했다.

"나술, 네 말은. 얘들이 어제 임금을 받고, 안 받았다며 거짓말을 한다. 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청지기의 문서에 인장이 있을 겁니다."

"꺼내."

난 당황해서 청지기를 노려봤다.

그러자 그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후다닥 문서를 꺼냈다. 역겨움이 솟구쳤다.

그제야 그림을 알 것 같았다.

'이런 씹새끼. 다 같이 해 처먹었네.'

그가 내민 문서엔 이미 보수를 대리 수령 했다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난 남작에게 말했다.

"롤랜드 경을 불러주십시오."

"그는 어제 영지를 떠났다."

뭔가가, 좆이 되어가고 있었다.

"...잠깐 대화를 해도 되겠습니까, 남작님."

"해라."

나술이 요청하자 남작이 허락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거구가 사병들을 밀쳐내고 나한테 다가왔다.

"유진. 자네가 올해로 몇 살이지?"

"스물다섯입니다."

"그래. 스물다섯, 젊은 나이지. 남자 역할도 할 수 있을 나이고. 하지만 혈기가 강해 그런지 식견은 좀 부족한 것 같아."

"뭐요?"

난 얼이 빠졌다.

"아무리 사는 게 팍팍해도 그렇지. 임금을 대리 수령하고 굳이 다음 날 아침부터 찾아와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게 사람 사는 도리인가? 우리가 한두 번 볼 사이도 아니고 양심 있게 굴게."

"이야, 웃기네."

"웃어? 이 새끼..."

그는 우리 마을에서 제일 키가 큰 남자로, 나보다 1피트가 더 컸다. 

거인증이 의심되는 놈이었는데... 

그렇다고 쫄 내가 아니었다.

저놈 다음으로 마을에서 제일 큰 게 나였으니 그랬다.

나술이 씨익 웃었다.

"인마. 씨. 너도 어차피 전리품 털었잖아?"

"..."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라."

그가 허리를 굽히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괜히 나대다 뒤지지 말고."

"하."

그러나 물러설 수 없었다.

-아, 유진 씨. 나도 인생이 힘들어. 요즘 한국 경제가 얼마나 힘든지 알지?

-최저시급 다 주는 데가 어딨어! 어? 유진 씨. 그렇게 법대로 하나하나 따지고 그러지 마. 재수 없어.

-한유진 이 새끼. 고작 이런 걸로 노동청에 신고를 해? 너 내가 찾아서 죽인...

한 번 얕보이면 끝까지 얕보이게 된다.

더러운 똥 밟았네,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비리를 저지른 놈이 두 번은 안 할까?

여기서 물러서는 건 나뿐만 아니라 뒤에 있는 다섯 명의 인생까지 조진단 뜻이었다.

머리에 짱돌까지 맞아가며 싸웠는데, 돈을 갈취당할 순 없었다.

"너랑은 말이 안 통하겠다."

"이, 이 새끼야. 뭐?"

난 나술을 제끼고 남작에게 말했다.

"남작님. 일곱 신의 교회에 분쟁 해결을 요구합니다."

하찮은 평민도 교회에 중재를 요청할 수 있었으니, 이는 아틀라스의 황제가 성검으로 세운 법이라. 

황제의 율령을 따르지 않으면 반역.

남작령에서 거부할 수 있는 권위가 아니었다.

보링턴 남작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다가와 말했다.

"나술. 자네가 3년을 이 영지에서 일했지. 마지막으로 묻겠네. 마지막이야."

"예."

"문서 위조는 사형감이야. 유진. 네가 거짓말을 했다면 그 역시 사형감이고."

남작은 영지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존재.

법의 집행은 유도리 있게 하더라도 엄할 땐 엄해야 했다.

"나술. 솔직히 말해라. 채찍 스무 대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을 크게 만들지 말고. 진짜 유진이 거짓말을 한 게 맞나?"

남작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술을 노려봤다.

나술은 끝까지 거짓말을 했다.

"예."

"유진. 그리고 자네는 결백하다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이건 답이 없네."

보링턴이 살벌한 눈빛으로 우릴 노려보며 말했다.

"일곱 신의 권위에 걸고, 이 분쟁을 결투로 해결해라."

도노반이 흥분해서 말했다.

"남작님, 아이리스 교회에 의뢰하셔서 정식 재판을 해 주십시오!"

"도노반. 아이리스 교회 수사관을 이 촌구석까지 불러낼 셈이냐? 아니면 아인베르트 백작령까지 올라가 재판장에 출두해? 백작령까지 가는 데 5일, 오는데 5일이다. 그것도 마차로."

"..."

"그럼 누가 욕을 먹겠나, 도노반. 지금 마수가 나타나고, 대마녀가 직접 영토를 넘었는데 내가 영지를 비우면 누가 욕을 먹겠느냔 말이다."

중세에 경찰, 탐정 같은 인력은 적었다.

보통 시골에서 이런 사건이 생기면 촌장, 귀족, 경비대장, 경호 대장, 사냥꾼 등이 중재했다.

그런데 상대가 경호 대장이고 청지기이면 답이 없었다. 

결투 외에는 말이다.

그걸 듣자 나술이 씨익 웃었다.

"결투라, 그거 좋군요."

정규병은 강했다.

그들은 평소에 사람 죽이는 훈련을 받았고, 일사분란하게 뛰는 게 직업이었다.

평소에 일하고 노는 민병대가 비빌 언덕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마력이 느껴지는 놈들은 하나도 없어.'

저들이 매일 무슨 훈련을 받는진 모르겠지만, 영지전에서 목숨 걸어본 적도 많이 없었고 걷는 폼만 봐도 그리 미덥진 않았다.

고등학교 때 센 척하는 놈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나름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지만, 펀치 한 대 맞으면 고꾸라질 것 같은 말라깽이들 말이다.

"얕보이곤 못 살지. 또 돈을 빼돌릴 거 아닌가."

"싸우는 것 외엔 답이 없겠소."

"유진. 여기서 지면 마을에서 못 살 것 같구만."

"안녕! 안녀엉!"

이들도 싸움에 자신이 있는건지, 다들 찬성의 의견을 내비췄다.

어느새 총대를 멘 내가 말했다.

"결투에 동의합니다."

"그래? 그럼 빨리 끝내자고. 결투는 오늘 밤, 6대 6으로 진행한다. 이상 있나?"

집단 결투는 문제를 해결하는 합리적인 방식이었다.

"없습니다."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리스께서 결백한 이들을 축복하시길. 그럼 간단히 정리하겠다."

"..."

"이는 집단과 집단과의 갈등. 고로 결투는 6대 6으로 진행한다. 이는 제국법상 생사결, 재판 결투에 해당하므로."

"..."

"결투에서 이긴 측의 결백이 인정된다.

진 측은 이긴 측을 모함한 죄까지 포함해 재산을 몰수. 이긴 측에게 '목숨값'을 보상해야 한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나술이 바람처럼 답했다.

그 번들거리는 눈을 보니 속셈이 빤히 보였다.

'이 새끼...'

아틀라스 제국은 평민의 목숨값을 500실링으로 친다.

또한 결투의 승자는 결백을 증명한 것으로 친다.

내가 무죄를 증명하면, 나술이 날 사형시킬 뻔했으니 500실링을 물어내야 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라면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수사 인력이 귀한 여기선 이런 식이었다.

본래라면 내게 돈이 없어 나술이 결투를 피했겠다. 하지만 도노반은 농가의 아들. 그에겐 돈이 많았으니- 집단 결투를 해도 이득이 남았다. 

'아주 뼛속까지 빨아먹으려 하는군.'

다만 나술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마력을 얻었단 사실이었으니...

상황 파악을 끝낸 내가 정중히 청했다.

"남작님, 조건을 하나 달아도 되겠습니까?"

"말하게. 합리적이면 듣겠네."

난 청지기를 바라봤다.

"만약 제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청지기까지 범죄에 가담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청지기 역시 결투에 참여하는 게 마땅한 걸로 압니다."

청지기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말이 됩니까!"

갑자기 목소리가 커진 청지기.

하지만 남작이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보자, 그의 목소리가 개미만 해졌다.

"저, 저, 저는 비전투 인력이고..."

하지만 남작은 자비가 없었다.

"아니, 결투는 싸움 잘하는 이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너 역시 공범일 확률이 있으니 직접 결투에 나서는 것이 옳겠지."

"그렇다면."

눈치 빠른 나술이 끼어들었다.

"저쪽도 독전관을 포함하는 것입니까?"

"그 역시 맞다. 또한 이번 싸움에 대리인 출전은 없다. 너흰 정규군이니 약간 패널티를 줘도 되겠지."

"..."

나술의 눈빛이 살벌해졌고, 청지기의 다리는 오들오들 떨렸다. 

나 역시 나술을 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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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녀엉!

"사병 새끼들이랑 결투를 한다고?"

"그렇게 됐습니다. 영감님."

"에라이."

마을의 유일한 대장장이인 영감. 

그는 비쩍 마른 손으로 연초를 들고 말했다.

"빨리 뒤지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사병들이 그렇게 강합니까? 영지전도 안 나오던데요."

그러자 그가 이죽거렸다.

"정규군이야. 정규군."

"..."

"종일 처먹고, 싸움질하고, 여자들 희롱하고, 강간하고, 경비병 패고 다니는 게 업인 놈들이다.

니들은 팔굽혀펴기도 안 하지만 놈들은 보링턴 남작이 훈련시킨단 미묘한 차이점이 있지. 게다가 일대일 결투도 아니라며."

"6대6 결투입니다."

"이거 누가 하자고 했어?"

그러자 못난 남자들이 나를 바라봤다.

'아니, 왜 그래.'

그러자 영감이 다가와 내 다리를 쇠막대로 후렸다.

-빠악!

"아악! 왜 때려요!"

이 씨발영감탱이!

그래도 험하게 대할 순 없었다. 

그 역시 날 도와준 은인 중 한 명이기 때문이었다.

"또 병신짓해서 목숨을 버리려 하니까 때린다. 왜?"

"이렇게 살아있잖습니까."

이세계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난 한 푼도 저축하기 힘든 빈털터리였고, 당연히 장비를 살 돈도 없었다.

그러니까...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칼도 방패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단 거다.

그러나 이 양반은 내게 외상으로 장비를 빌려줬다. 

'고마운 사람이지.'

중세에선 쇳조각 하나도 재산. 

한 번 전쟁터에 나가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영감이 손해를 봤다. 그렇기에 그의 입장에서 내게 장비를 대여해 줄 이유는 하나도 없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장비를 빌려줬었다.

그가 없었다면 내 이야기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겠지.

"영감님. 장비 좀 빌려주십쇼. 결투에서 이기면 웃돈까지 얹어 갚겠습니다."

"지랄한다."

"그 새끼들도 때리면 죽는 사람 아닙니까. 마력도 못 쓰고."

"마력도 못 쓴다? 너 마력 쓸 줄 아냐?"

뜨끔했다.

영감에겐 진실을 말해줄 수도 있었지만...

사령술사들은 아틀라스 제국에서 그리 좋은 취급을 받지 못했다.

난 말을 돌렸다.

"그리고 승산이 없는 건 아닙니다."

"왜?"

나는 청지기 이야기를 꺼냈다.

"상대편에 청지기도 참전합니다. 그 먹물쟁이 새끼는 남작 부인이랑 싸워도 질 놈입니다. 공식적으론 6대6인데, 실상 6대5인 셈입니다."

"비리냐?"

"바로 그겁니다."

"영지 꼬라지 자알-돌아간다."

그때였다. 뒤쪽에 있던 독전관이 대장장이에게 아주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 안녀엉!"

영감은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봤다.

"저 새끼 네 편 아니지?"

"..."

"젠장. 5대5네."

이쯤에서 분위기를 쇄신할 필요성을 느꼈다.

남자들에게 눈짓하자 그들이 가죽 주머니에 모아온 동전들을 내밀었다.

짤랑거리는 묵직한 주머니. 

우리가 결투를 위해 영혼까지 탈탈 털어 모은 300실링가량의 거금이었다.

"이게 뭐냐?"

"장비 대여료입니다. 영감님. 결투에 쓸 장비를 빌려주십시오. 남는 돈은 이기면 드리겠습니다."

"유진."

대장장이 영감이 연초를 우물거렸다.

"이기면 이 마을을 뜰 거냐?"

"..."

아니라곤 할 수 없다.

이 마을에서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하지만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더 잘 살고 싶었다.

더 많은 힘, 더 많은 돈을 위해선... 

대도시 아인베르트로 떠나야만 했다.

"...예."

날 따라온 남자들은 이해한단 표정으로 바라봤고, 영감은 피식 웃었다.

"새끼. 맨 처음 영지전 뛰겠다고 지랄할 때부터 알아봤다."

-영지전? 뒤지러 가겠단 말이냐?

-영감님. 이렇게 살면 답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사는데 답이 어딨어.

-저는...

-...됐다. 장비 가져가라. 네 목숨보다 귀한 거니 흠집 내지 마라.

대장간 안쪽. 

의자 하나가 비어 있었다. 

원래 다른 사람이 앉아 있어야 정상이었는데, 먼지가 쌓인 걸 보니 몇 년째 안 쓴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영감의 하나뿐인 아들이 전투에서 죽었다고들 했다.

"지랄들을 한다... 지랄들을 해..."

영감이 대장간에 들어가 방패, 창, 도끼 같은 것들을 우리한테 던지기 시작했다.

-쨍그랑. 쨍. 쨍그랑.

썩 훌륭한 품질은 아니었으나, 어디 가서 30실링은 받을 물건들이었다.

그것들이 바닥에 쓰레기처럼 내팽개쳐지자 다들 놀랐다. 

"여, 영감님?"

"네놈 같은 거지들에게 받을 돈은 없다. 니들 목숨보다 비싼 거니 흠집 없이 쓰고 돌려줘라."

"...감사합니다. 영감님."

우린 깡패처럼 각잡고 인사를 했다.

귀족의 사병들은 마을의 일축을 이루는 집단 중 하나.

우리에게 장비를 빌려준단 건 그들과 척을 지겠단 소리였다.

난 큰 결정을 내려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감사합니다. 영감님."

"됐고, 유진. 그 좆병신같은 방패 좀 보자."

"아니.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그래도 제 목숨을 여러 번 구했는데."

내가 좆병신같은 7kg짜리 쓰레기를 내밀자, 영감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걸 작업대로 가져갔다.

"아이고 무거워라... 씹."

-쾅!

그리곤 자기 화로에 그대로 던져버렸다.

생사를 함께한 방패가 불구이가 되는 걸 보자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영감님!"

"쓰레기라서 버렸다. 이거나 써라."

영감은 대장간 안쪽에서 원형으로 다듬어진 철제 방패를 내밀었다.

"영감님, 이건..."

무게는 대략 4kg 정도.

이전 방패보다 가리는 면적은 적었지만, 중간으로 갈수록 쇠가 두꺼워지는 게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특히 가죽이 잘 감긴 손잡인 손에 탁 달라붙었다.

좋은 방패였다.

"이건 빌려주는 게 아니다."

"영감님.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난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거절할 처지도 아니었다.

"나가."

"...감사합니다."

영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 연초를 꺼내 물었다.

우린 장비들을 챙긴 채 천천히 대장간을 나왔다.

*

쌀쌀한 저녁, 남작 저택의 연병장.

보통 결투는 콜로세움에서 진행되었으나, 이 작은 영지엔 투기장이 따로 없었다.

그렇기에 보통 여기서 결투를 치르곤 했는데... 

사병들과 마을 사람들이 미리 도착해 있었다.

"유진."

"아,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좀 자주 찾아오고 그래라."

턱수염이 수북하게 자란 그는 나한테 토끼고기를 먹였던 사냥꾼으로. 

마을에서 꽤 유명한 유지 중 한 명이었다. 

옆쪽을 바라보니 여관 아줌마도 있었다.

남편보다 두 배 무거운 그녀는 인심이 아주 좋았다. 그녀도 깔깔 웃으며 말했다.

"어머, 유진 씨! 아주 그냥 죽여버려요. 저 양아치 새끼. 외상이 백 실링을 넘어요."

"하하. 그러겠습니다."

"아주 척추를 뽑아 버려!"

그렇게 한 쪽엔 내 편들이 있었지만...

반대편엔 내 적들이 있었다.

연병장 구석에 앉은 정규군 여섯 명.

몇은 연초를 물고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살벌하였다.

나술이 날 노려봤다.

'...노려보면 어쩔 건데.'

나술에게선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와 달리 난 마력이 있었다.

주먹을 쥐락펴락하는 동작만으로도 검은 마력이 펌프질하는 게 느껴졌고, 당장 뛰라고 하면 1m 높이도 가뿐하게 점프할 수 있었다.

한 마디 도발이라도 하려던 순간, 경비병 중 하나가 소리 질렀다.

"보링턴 남작 납시오!"

그러자 보링턴 남작과 그 애인이 연병장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리스 교단 사제들도 들어왔다.

그들의 손엔 장례식 때 쓰는 철제 횃불이 들려 있었는데, 오늘 무조건 몇 명은 죽는단 실감이 났다.

보링턴 남작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행사를 시작하겠소. 다들 앉으시오."

그가 말하자 병사를 제외한 사람들이 전부 자리에 앉았다. 남작이 연병장 중앙으로 걸어간 다음 하명했다.

"양측 나와라."

이리하여 두 집단이 만나게 되었다.

우린 거들먹거리며 걸어갔고, 상대 병사들도 건들거리며 걸어와 우릴 노려봤다.

우리와 달리 통일된 장비를 차고 있는 건 살짝 위압적이었으나, 대장장이가 도와준 탓에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 보링턴의 주민 유진 외 5명은 영지전 참여에 대한 대가를 요구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하지만 청지기 모하우스, 경호대장 나술은 이미 지급했다 주장했다."

영지전에서 사람이 죽는 건 흔했다.

병사가 돌아오지 않을 경우 죽은 줄 알고 행정 처리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래도 살아 돌아오면 돈을 주는 게 예의였다.

저들은 그걸 하지 않았고 말이다.

"이는 경호 대장이 영지의 자산을 횡령했거나, 영지민이 남작령의 행정을 우롱한 사건이니 죄질이 무겁다. 

본래 재판이 요구되는 일이다.

허나 영지의 상황이 좋지 않은 바, 두 전사는 명예로운 결투를 하기로 했다.

본 남작과 아이리스 교회의 증인이 이를 공증한다. 유진. 결투에 응할 준비는 되었나."

"예."

"나술. 결투에 응할 준비는 되었나."

"예."

남작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에 일곱 신의 이름에 걸고 결투가 성사되었다. 양측, 40보 뒤로."

-퉤.

나술이 내 발 앞에 침을 뱉고선, 뒤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뒤돌아 걸었다.

"잘합시다. 다들. 작전 기억하죠?"

내가 말하자 그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 용기. 탐욕.

사람이라면 으레 느낄 감정들의 그들의 눈에 충만해졌다. 심벌즈 아저씨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기면 몇천 실링은 돼. 이겨보자."

"잘 하자고요."

목숨을 건 싸움 이전.

자신 있다는 듯 가벼운 웃음이 오갔다. 그 밑에 깔려있는 건 긴장이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보링턴 남작이 외쳤다.

"양측은 결투를 시작하라!"

-저벅. 저벅. 저벅.

여섯 명의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들은 한 손엔 나무 방패를, 한 손엔 근접에서 쓰기 좋은 글라디우스를 들었는데...

보법부터 자신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 역시 민병대 짬밥이 있는 놈들.

싸워보지도 않은 적을 앞에 두고 쫄지는 않았다.

사전에 합의된 대로 대형을 짜려 하는데...

갑자기 돌발행동이 일어났다.

"안녀어어엉!"

흥분한 독전관이 채찍을 들고, 전열을 이탈해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난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니.'

세워놓은 전술이 다 무의미해지는 기분.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내 말 다 알아듣는 것 같았는데!'

독전관은 내 마음도 모르고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후욱! 후웅!

그 손에 들린 건 아군에게 쓰는 채찍이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한 쇳조각이 박힌 채찍이었다. 

-휘익!

인류 역사 최초로 음속을 넘은 무기.

독전관이 섬뜩한 웃음을 흘리며 채찍을 후려갈기자, 방패로 차마 가리지 못한 적군의 다리 살이 통째로 뜯겨나갔다.

"이런 씨발! 아악!"

"안녀엉!"

철철 흐르는 피.

원래 저럴 때는 뒤로 빠지거나 전열을 유지해야 하는데, 너무 예상외의 일인지라 다들 굳었다. 다만 상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나술은 채찍이 가속하기 전에 튀어나와, 방패로 공격을 튕겨냈다.

"아, 안녕?"

채찍은 회수 타이밍이 느린 무기.

그것이 탄력을 잃고 위쪽으로 들린 순간, 경호 대장의 신체가 독전관에게 파고들었다.

"죽어라, 이 장애인!"

"으윽! 안, 녀어엉!"

독전관이 한쪽 손에 들린 방패로 그의 공격을 쳐내려 했지만, 허우적거리는 동작으론 정규병의 숙련된 칼날을 막을 수 없었다.

-깡!

나술은 횡베기로 순식간에 방패를 날려버리고, 갑자기 발을 뻗어 독전관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빠악!

독전관의 입에서 피가 흩뿌려지며 뒤로 날아갔다. 

갈비뼈가 부러진 모양.

채찍은 놓쳐버린 그는 입에서 피를 뱉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 안녀엉..."

'난전이군.'

작전은 엎어졌다.

흥분한 아군이 괴성을 지르며 돌격하는 순간, 난 방향을 전환했다.

확실히 예전과 다른 힘이 느껴졌다.

'뛰는 게 더 가벼워.'

근육의 힘만으로 뛰는 게 아니었다.

검은 마력이 근육에 폭발적 가속을 실었다.

땅을 박찰 때마다 모래가 터져나갔고, 야수처럼 가벼운 몸은 연병장을 순식간에 가로질렀다.

"어!"

서로 일렬로 마주 보던 상황.

내가 갑자기 측면으로 돌자 적군들이 당황했다. 

'...죽어라!'

검은 마력을 실은 일격.

허리를 회전시키며 최고속도로 메이스를 내리찍자, 끔찍한 파공성과 함께 공기가 찢겼다.

-콰직!

메이스가 적의 방패 윗부분을 아예 부숴버렸다. 나뭇조각이 튀고, 적이 물러서다 넘어졌다.

"히익!"

공포의 표정. 

그는 정규군답게 글라디우스로 날 찌르려 했지만, 나도 짬밥이 있었다. 

난 체중으로 방패를 몰아붙이며 마구잡이로 메이스를 내리쳤다.

-까앙!

첫 번째 일격이 그의 흉갑을 찌그러트렸고,

-콰직!

사선으로 내리찍은 두 번째 일격이 그의 골반을 박살냈다. 하반신이 우그러진 남자는 눈물과 침을 질질 흘리며 쓰러졌다.

망치와 모루.

다섯이 다른 병사들을 마크하면, 내가 옆쪽으로 돌아 측면을 부순다는 간단한 전략이었다. 독전관이 변수를 만들었지만 양상은 비슷하게 흘러 다행이었다.

"잭슨? 제길! 잭슨!"

적군 한 명을 무력화하는 데에 대략 3초.

난 쉬지도 않고 땅을 박차며 다른 병사에게 달려들었다.

"크윽!"

병사가 글라디우스를 앞으로 내밀고, 방패를 몸통에 딱 붙인 채 내 돌격을 저지했다. 

일반적인 싸움이라면 상대의 허점을 노리는 양상이 되었겠지만... 

'지금의 난 강해.'

검은 마력으로 무장한 나는, 4kg짜리 무지막지한 쇠 방패를 앞세우고 멧돼지처럼 돌격하는 괴물이었다.

평소에 7kg짜리 방패를 들고 다녀서 그런가?

4kg 방패는 과장 좀 보태어서 깃털만큼 가벼웠다.

내 속도를 보고 놀란 정규병이 주춤거렸다.

"미, 미친 새끼!"

그는 내 배를 쑤시려고 글라디우스를 내밀었지만, 애초에 찌르는 쪽의 검보다 내 방패가 훨씬 면적이 넓었다.

-까앙!

"억."

딱 한 번의 부딪힘. 

상대의 검 끝이 깨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방패를 들어 몸을 가렸지만, 내 공격은 나무 방패 따위로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오냐, 막아봐라.'

검은 마력이 폭주하자 오른팔에 징그러운 핏줄이 돋았고, 빨갛게 팽창한 팔은 벼락같은 속도로 메이스를 내리쳤다.

-빠아악!

두려움 때문일까?

녀석은 방패를 제대로 들지 못했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정규병의 머리가 수박처럼 쪼개졌다. 즉사였다.

적들 사이에 파란이 번져나갔다.

"미, 미친. 저거 뭐야!"

"말도 안 돼. 잭슨이랑 오린이...!"

이로써 5대 3 상황.

하지만 적들 역시 바보는 아니라서, 내가 순식간에 사람을 죽이자 나술이 대응에 나섰다.

"이 새끼가!"

-휘익!

시퍼런 검격이 머리 위쪽을 갈랐다.

휘두르는 폼은 가벼웠지만, 한 번 스치면 살점이 뭉텅뭉텅 회 떠질 파괴력이 있었다. 그의 베기는 끝없이 이어졌기에 백스텝을 밟아가며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놈이 씨익 웃었다.

"싸움도 존나 못하는 새끼가. 덤벼."

나술이 글라디우스로 방패를 깡깡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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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벌었으면 한 턱 내야 하는 게 맞다.

나술은 마을에서 가장 커다란 인간.

그의 키는 무려 7피트로, 현대 한국의 관점에서 봐도 2m 10cm의 거인에 해당했다.

-휘익!

그렇기에 그의 공격은 범위가 매우 넓었다.

분명 남들과 똑같은 제식 글라디우스를 들었는데도, 혼자 장검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그가 소리 질렀다.

"이리 와! 맞서 싸워! 어? 맞서 싸우라고!"

'피지컬을 이용해 안쪽으로 들어갈 순 있어.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런 식으로 굴다간 궤도가 바뀐 칼날에 몸이 베일 거란 사실을 말이다.

그 두려움은 왜 발생한 걸까?

도망치며 고민하던 난 결국 정답을 도출할 수 있었다.

'...기술의 차이.'

나는 중세 무기술을 모르는 데에 반해, 나술의 검법은 뛰어났다.

무게중심을 가운데 두고 팔만 가볍게 휘두르는 모습.

얼핏 보면 그리 화려하진 않았지만 영지전에서 맞고 찔리고 베여본 나는 알았다.

저게 보통 훈련받은 움직임이 아니란 걸 말이다.

나술은 수싸움을 훈련받은 사람이고, 나는 아니니 저런 상대에게 막무가내로 공격하다간 말려들어서 죽을 게 뻔했다.

-휙! 휙! 휙!

그래서 계속 거리만 벌렸다.

내게 필요한 건 계획이었지, 투지나 명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술이 소리 질렀다.

"겁쟁이냐? 도망만 다니게?"

"도망만 다녀도 내가 이길 상황 아닌가?"

"크흐흐. 그렇게 생각하나?"

나는 두 명의 정규병을 5초도 안 되는 사이에 죽였다.

그래서 싸움은 4대 2로 되어버린 상태.

적군 중 한 명은 청지기라 1인분을 못하니, 결국 한 명이 네 명이랑 맞서 싸우는 꼴이 되었다. 하지만 나술은 당당해 보였다.

"저놈들은 언제라도 죽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나술은 갑자기 방향을 돌려 옆쪽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니 나도 선택지가 없었다.

'젠장.'

-까앙!

나술에게 달려들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검을 내질렀다.

대단한 위압감.

보통 병사라면 한 번 내리친 다음 뒤로 빠졌겠으나, 나술은 가벼운 손동작으로 검을 회수하며 빈 곳을 노렸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검이 내 가죽 갑옷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걸 본 나술이 킬킬거렸다.

"네 검술론 날 이길 수 없다!"

그건 사실. 

하지만 말빨에선 나도 밀리지 않았다.

"그럼 3년 배우고 나한테 지면 병신이게?"

"근데 이 새끼가!"

그리고 나술에겐 정말 안타깝게도... 

내 머릿속에 계획이 생겼다. 

그건 우리 편의 희생 없이도 나술을 죽일 수 있는 작전. 전투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는 방식이었다.

내가 방패를 들고 수비적으로 임하자 나술이 덤벼들었다.

"이제 제대로 싸우기로 한 거냐!"

-까앙!

'아니.'

오히려 내 생각은 정 반대.

치명타를 넣을 생각을 아예 버리고, 내가 살아남는 것으로 목적을 바꿨다.

그가 검을 뻗을 때마다, 마치 초등학생들이 칼싸움 흉내를 내듯 방패를 갖다 붙이는 일에만 집중했다.

물론 그것도 참 힘들었지만...

어쨌든 마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까앙!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 

어느새 나술이 나를 완전히 몰아붙이는 것처럼 보였다. 

-까앙! 깡! 까앙!

"유, 유진이 진다! 밀리고 있어!"

"세상에. 그렇게 야수처럼 움직이던 놈이... 일방적으로 방어만 하고 있잖아."

"녀석은 아직 검술 실력이 안 돼."

사람들의 새된 비명이 들려왔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

"...너!"

나술이 멈칫했다.

그의 표정이 당당함에서 궁금증으로, 궁금증에서 두려움으로 변하는 게 보였다. 난 씨익 웃어주었다.

"새끼야. 전쟁에서 사람 죽는 이유가 몇 가지인 줄 아냐."

"..."

"왜 그 방법이 검술밖에 없다고 생각해."

나술이 아무리 검을 잘 다룬다고 한들 장비의 내구도는 별개.

결국 저 글라디우스도 영감이 만든 것인지라, 아무리 제식 장비라 해도 퀄리티가 들쭉날쭉했다.

4kg짜리 쇳덩어리랑 온 힘으로 부딪히면 날이 나가기 마련이고, 그게 내가 메이스를 쓰는 이유였다.

"이 새끼가!"

결국 나술은 최악의 수를 두었다.

한 손에 든 나무 방패를 앞세우고 온몸을 이용해 후려치는 동작. 글라디우스의 날이 나가서 사리는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감정적이었다.

'방패끼리 부딪히고 글라디우스로 베려고? 안되지. 안돼.'

난 물러나는 대신 숨을 들이마셨다.

의지력을 투사해 마력을 끌어올리자, 석유처럼 진득한 에너지가 솟구치며 눈앞을 벌겋게 달궜다. 그렇게 폭발하는 힘으로 허리를 돌리며 방패를 후려치자-

-콰직!

부서진 건 그의 나무 방패였다.

내 팔도 많이 저렸지만, 나술은 더 아플 게 뻔한 상황. 증거로 그의 손목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자, 잠깐."

당연히 멈춰줄 리 없었다.

난 오른발을 디딘 채 체중을 담아 메이스를 내리찍었다.

-콰직!

"끄윽!"

이미 으스러져 있던 나무 방패가 둘로 쪼개졌다. 뿐인가? 무식한 쇳덩이가 달린 메이스는 나무 방패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주먹 뼈를 부쉈다.

나술은 경호대장답게 발악하면서 글라디우스를 휘둘렀다.

'크윽...!'

-깡!

원래대로라면 내 어깨를 도려냈을 일격.

하지만 운 좋게도 그의 글라디우스는 철로 된 구조물에 막혔다.

영감이 오늘 아침 빌려준 철제 견갑이었다.

'칼로는 베기 힘들 거다.'

메이스라면 모를까. 

글라디우스로 철제 견갑을 베는 건 힘들었다. 그가 당황한 틈을 타서, 안쪽으로 들어가 머리로 얼굴을 받아버렸다.

-빠각!

"오우!"

"씹! 코피 터지는 것 좀 봐!"

"유진이 이기는 건가!"

관중들의 흥분.

비틀거리는 나술이 마구잡이로 글라디우스를 휘둘렀지만, 방패로 후려치자 순식간에 칼날이 나갔다.

"항복! 항보옥! 씨발, 멈추라고!"

물론 그런다고 멈추면 호구 새끼겠지.

"네 신세 네가 조진 거야."

난 앞으로 무작정 뛰면서 마지막 일격을 휘둘렀다.

나술의 머리는 꽤 단단한 편이었지만...

그래봐야 강철로 만든 메이스보다 단단하진 않았다.

팔에 힘을 담아서 그의 머리를 후려 갈기자 그의 두개골이 오목 렌즈처럼 함몰되었다.

"크욱!"

그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나술은 무게중심을 잃고 제자리에서 비틀거리다, 땅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그제야 관중석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유, 유진이 이겼어!"

"미친."

"움직이는 거 봤어? 무슨 야수 같았잖아."

"대단하다. 역시 무재가 있다니까."

나에 대한 칭찬도 있었고.

"나술. 이 씹새끼, 잘 뒤졌다."

"외상값만 넘쳐나는 새끼."

"저 새끼 때문에 여동생이 얼마나 울었는데... 잘 뒈졌지. 일곱 신께서 벌을 내린 거야."

나술에 대한 저주도 있었으며.

"나, 나술! 안돼애애애!"

"제길. 형님..."

그에 대한 애도도 간간이 들렸다.

어쨌든 싸움은 끝났다.

4대 2의 상황. 

원래대로라면 청지기가 한 사람 역할을 제대로 해줬어야 했다. 

하지만 항상 책상에만 앉아있던 그는 용감하게 싸울 수 없었다. 오히려 눈물을 질질 짜면서 마구잡이로 병기를 휘두르다 아군의 발목을 잡았다. 그 결과 청지기의 아군은 배가 꿰뚫려 죽었으며, 청지기 역시 죽을 예정이었다.

결국 청지기의 선택은...

"히이익! 죄송합니다아!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 다섯 명을 보더니 눈물을 질질 짜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중 동정심을 느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게 누가 코 묻은 돈 떼어먹으래?"

"히익..."

"난 목숨을 걸었다. 청지기. 너한텐 별것 아닌 돈이었고, 그냥 주면 되는 일이었어. 얼굴 한 두 번 볼 사이도 아닌데 이리도 야박하게 굴었어야 했냐."

"그건... 협박! 협박이었다!"

"협박이라니. 이제와서 그런 소리가 먹힐 리 없잖아."

내가 뚜벅거리며 다가가자.

"그만."

조용히 구경하던 남작이 손을 들어올렸다.

우리의 표정은 구겨졌고, 청지기는 희망을 얻은 듯 연병장 바닥을 무릎으로 긁어가며 남작에게 박박 빌었다.

"나술이, 나술이 저를 협박했습니다! 남작님, 한 번만 용서를..."

"청지기 모하우스. 협박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남작님."

"나술이 널 협박해 공문서를 위조하고, 본래 유진 일당에게 돌아갔어야 했을 군비를 주지 않았단 말이로군."

"...흐윽."

그러자 모하우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습니다."

"청지기. 고개를 들어라."

남작이 말했다.

"이 작은 영토라고 한들 넌 행정을 맡은 관료다."

"그."

"뚝심이 있어야 한단 말이다. 산적이 협박하면 넘어가고, 경호 대장이 겁 좀 주면 넘어가고, 그런 놈이 세금을 관리하고 호적을 관리하는 게 말이나 되나?"

하나같이 맞는 말이었다.

청지기 역시 인맥이 있을 터.

애초에 남작에게 매일 보고하는 직업인 만큼 경호 대장이 불편하다면 충분히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보링턴 남작이 자기 애인의 허리를 옆으로 놓아준 다음 연단으로 나왔다.

"영지민들은 다들 들어라."

"..."

"청지기 모하우스는 경호대장 나술과 내통해 영지의 자금을 빼돌리고, 영지민들의 참전과 그 희생을 욕보였으니 그 죄가 크다. 

앞으로 이와 같은 죄를 짓는 자들은 모두 모하우스와 같은 최후를 맞을 것이다."

"아, 안돼애애애!"

모하우스의 마지막 비명.

하지만 남작의 발은 빨랐다.

'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

어느새 그가 모하우스의 앞까지 가더니, 푸르게 불타오르는 기병용 세이버를 꺼내들었다.

-쉬익.

그걸로 끝이었다.

푸른 궤적은 순식간에 모하우스의 목을 벤 후 납도되었고, 청지기였던 인간의 머리는 자신이 죽은 것도 모른 채 아래로 뚝 떨어졌다.

보링턴 남작. 

그는 새삼스레 사관학교 출신이었다.

"이로써 결투가 끝났다. 유진 외 5명은 약조에 따라 생명 값을 징수할 것이며. 경호 대장의 범죄에 동조한 이들은 태형에 처할 것이다."

"..."

교회에서 나온 아이리스의 사제들이 앞쪽으로 몰려가 시체에 무슨 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저건...'

시체에서 하얀 불꽃이 올라오며 혼백이 사라지는 게 보였다. 남작이 말했다.

"끝났다. 이제 다들 일하러 돌아가. 

아, 그리고 하나 더. 

앞으로 군가 부를 때 내 부인의 순결 운운하는 놈들이 있으면 그 역시 태형으로 다스리겠다. 알아들었나? 독전관?"

"아, 안녕."

난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이긴 게 실감이 났다.

'이겼군.'

이세계에 온 지 1년.

사람이랑 싸운 적은 많았지만, 나술처럼 강한 적은 처음이었다. 키도 컸고 검술도 훌륭했다.

'마력빨로 이기긴 했어.'

하지만...

'순수히 마력 빨은 아니었다. 내 노력이랑 인연도 빛을 발했어.'

그렇게 생각하자 몽글한 기분이 가슴 속을 꽉 채웠다. 성취감. 내가 이세계에 와서, 그나마 사람으로서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확실히 나아지긴 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석양을 보니 매우 예뻤다.

*

그렇게 결투가 마무리된 날.

연병장의 테두리에 앉아 쉬고 있는데, 염소처럼 비쩍 마른 남자가 다가왔다.

"안녕하쇼. 유진. 내가 새로운 청지기요."

"아, 예. 반갑습니다."

"병사들이 나서서 나술 일당이 갖고 있던 재산을 압류했소. 특히 청지기가 숨겨둔 재산이 많더군."

"그게 얼마요?"

"약 이천 실링에 달했소."

'와... 씨.'

이 작은 마을에서 대체 얼마나 해 처먹은 거냐, 모하우스. 

행정이 발달하지 않으니 중간 관리들이 다 해 먹는 세계. 중세의 무서움이 조금이나마 느껴졌다.

"제국법에 따라 평민의 목숨값은 오백 실링이오. 당신들 여섯에겐 각각 오백 실링. 그리고 원래의 대가인 오십 실링. 그리고 그들의 사유 장비 중 일부가 귀속될 것이오."

하인들이 나무로 이뤄진 무거운 돈 상자를 가져왔다. 

해적 만화에서 보던 커다란 보물 상자. 

저 안에 든 게 다 돈이라 생각하니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데, 청지기는 욕심도 나지 않는 듯 낮은 어조로 말했다.

"한 명씩 나와서 받으쇼."

-쩔렁!

무려 오백오십 실링.

지금까지 봐 온 돈지갑이랑 비교도 되지 않는 놈을 보자 이게 현실인가, 싶었는데.

도노반은 돈이 좀 있어서 그런지 이걸 보고서도 툴툴거렸다.

"아니, 은화로 주시지."

"이건 모하우스의 집에서 직접 가져온 물건이고, 여긴 은행이 없소. 매수가 맞나 세어 보고 아인베르트까지 가서 직접 환전하던가 하쇼."

반면 나는 숨이 턱 막히면서 심장이 두근댔다.

'오백 오십 실링이라니?'

목숨 걸고 하루 싸워서 받는 돈이 고작 50실링인데, 이번 싸움으로 받는 돈이 오백 오십 실링이라고?

나는 이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았다.

'점심이 2 실링이지.'

치즈 바른 감자 구이 또는 수프 한 그릇. 

그게 2에서 3실링 정도 했다. 반면 소세지, 계란, 수프 등이 들어간 '제대로 된' 식사는 한 끼에 5실링을 받았으니...

하루에 10실링 쓴다고 치면 거의 55일을 아무것도 안 하고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 보니 두 달이면 그리 많은 액수가 아니긴 했다.

'그렇네. 역시 돈의 단위가 다른가.'

무조건 도시로 나가야겠단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오백 오십 실링. 정확히 오백 오십 실링이군."

"와. 씨. 이러니까 다들 농사를 안 짓는 거야. 남의 목숨 빼앗는 게 이렇게 돈이 된다니."

온몸에 힘이 빠질 정도로 기뻤다. 

"자, 다들 주목."

한 번 세어 본 돈을 세고, 또 세던 와중 심벌즈 아저씨가 말했다.

"솔직히 이번 전투에서 제일 많이 활약한 게 누구지? 유진 아닌가."

"그건 그렇소. 정규군의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나더군."

"나도 동감일세."

"안녀엉!"

도노반, 심벌즈 아저씨, 갈비뼈가 부러진 독전관 등. 모두가 나를 쳐다봤다. 시선이 좀 부담스러웠다.

"유진이 셋을 죽이고 우린 넷이서 한 명만 죽였지. 그러니 우리가 이 돈을 다 받는 건 옳지 않네."

"아이... 아저씨! 그만 하세요."

"가만 있어봐."

난 일어나서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그는 날 보고 씨익 웃을 뿐이었다.

"유진한테 백 오십 실링씩 몰아주자고. 어떻게 생각하나?"

"그 정도면 싸지."

"옳소!"

물론 내가 제일 잘 싸운 건 맞았다.

돈을 더 받고 싶기도 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같이 목숨까지 건 사람들의 돈을 뺏긴 싫어서 뭐라 하려던 순간.

"아..."

석양 속에 빛나는 사람들의 면면. 

이들은 땀에 젖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뭔가를 깨달았다.

'언제부터였지?'

나랑 같이 생사의 위기를 넘었던 사람들은...

내가 마을을 떠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말이다.

"유진. 너."

"..."

"이 마을 떠난다고 했잖냐."

새삼 동료라는 건 그런 존재인가 싶었다.

"우리야 뭐. 계속 여기서 이러고 살면 돼. 근데 너는..."

"확실히 강해지긴 했어."

"좀 비현실적으로 강해졌지. 마력을 배웠나 싶을 정도로 말야."

"그러니 여비 좀 챙겨가라.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아인베르트 물가는 비싸다."

"기사 되면 돌아와야 해. 우릴 잊으면 안 된다?"

"안녕."

'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세계로 떨어진 건 행운이 아니지만.

보링턴 영지에 떨어진 건 행운이었단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난 웃으면서 그들의 말을 넘겼다.

"그러면... 오늘은 내가 크게 한 턱 쏠게요."

"오. 정말인가? 부담스러울 텐데."

"부담은 무슨. 아는 사람들 다 불러와요. 독전관 아저씨 치료비도 주고. 죽을 때까지 마시자고요."

그러자 사람들이 활짝 웃었다.

"좋다, 좋아."

"오늘은 유진이 쏜다고?"

"새끼. 드디어 마을에 받아준 값을 하는군."

"가자! 푸른 꽃밭 여관으로."

원래 크게 벌었으면 한 턱 내야 하는 게 맞으니, 우린 다들 껄껄 웃으며 여관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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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이나 할 걸.

우린 의좋은 형제들마냥 낄낄 웃으며 여관으로 들어갔다. 

푸른 꽃밭 여관. 

음식점도 하고, 숙박업도 하고, 유랑 악단 공연에 결혼식까지 하는... 

뭐든지 되는 국밥 같은 장소였다. 

내가 들어가자 술 마시던 사람들이 다들 좋아하며 잔을 올렸다.

"이야, 유진이다, 유진!"

"동양인 유진!"

"오늘은 아주 짐승처럼 싸우던데."

"그런데 짝은 아직 없다더군."

"하하하."

"아이리스 님의 독실한 신자로구만!"

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중세인들은 기본적으로 몸집이 크고 싸움 잘하는 남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보링턴 영지 같은 시골엔 힘쓰는 남자 인력이 더 필요하다보니, 그 정도가 심했고...

이번에 나술을 때려 죽이니 그 평가가 더 올라갔다.

"잘 들으시오! 여러분!"

갑자기 심벌즈 아저씨가 심벌즈를 크게 치면서 말했다.

"오늘, 그 병신같은 경호 대장 새끼가 유진에게 죽었소! 머리를 메이스로 처맞고 두개골이 깨졌지. 영웅적인 승리였소!"

그러자 다들 흥분된 눈으로 웃으면서 잔을 들었다. 사람들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나술의 평가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씨발. 드디어 죽었군. 내 여동생이 그놈한테 강간당했어! 유진, 고맙네!"

"너는 여동생이라 그나마 다행이지. 우리 엄마한테도 손을 대더라니까?"

"아니... 그 말은 내 여동생이 너네 엄마보다 못하단 말인가? 그나저나 술김에 하는 말인데. 너네 엄마가 좀 예쁘긴 해."

"죽고 싶냐?"

다만 나술이랑 친했던 사람들도 몇 있는 것 같았다.

"에이, 씨발. 술맛 떨어지는군."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 흘겨보며 여관을 나갔다. 

어쨌든 여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심벌즈 아저씨가 재차 말했다.

"게다가 유진이 있어 모하우스를 몰아낼 수 있었소! 그가 갖고 있던 재산만 이천 실링이라더군! 청지기, 그 양반 그렇게 안 봤는데."

"세상에! 이천 실링이라니."

"다 죽일 놈들이었네."

마을 사람들이 끌끌 혀를 찼다. 

나술이 원래 양아치 취급을 받던 놈이었다면.

청지기는 배신감을 줄 만한 사람인 것 같았다.

"오늘 유진이 있어 순식간에 마을의 악종들을 격살할 수 있었으니 이 어찌 경사가 아니오. 유진 혼자 세 명을 죽였으니 이는 유진의 공. 게다가-"

"..."

사람들이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오늘 식사는 유진이 쏘기로 했소! 다들 잔치니 즐기시오!"

"와아아아!"

그러자 여관의 분위기가 말 그대로 폭발했다.

파티. 마을 잔치를 한단 소리에 사람들이 나가서 주변 사람들을 데려왔다.

난 피식하고 웃었다.

딱히 돈이 아깝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유진! 유진! 유진!"""

내 얼굴을 보고 웃으면서 환호하는 보링턴 영지 사람들.

그 안에는 나한테 토끼 고기를 준 사냥꾼 아저씨도 있었고, 

별로 안 기쁜 것처럼 찡그린 표정을 지은 대장간 영감님도 있었으며, 

잡일 좀 시키는 대가로 숙박료를 깎아준 여관 아줌마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운이 좋았어.'

물론 보링턴 영지에도 개차반 같은 인간들은 많았다.

하지만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생 처음 본 동양인에게 그래도 호의와 신뢰를 베풀어줬다.

심지어 보링턴 남작 부인과 그의 애인들도 내게 차별 발언을 한 적이 없었으니.

어찌 내가 운이 나쁘다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을 위해 잔을 들었다.

"건배!"

"""건배!"""

그렇게 광란의 밤이 시작되었다. 

여섯 남자들은 한 테이블에 앉아 떠들었고, 빈 좌석엔 자기 얘기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철새처럼 찾아왔다.

"글쎄. 나술 이 새끼가 내 여동생을 건드려놓고 합의 하에 했다고 하는 거야. 그걸 뭐라 하지? 합의 하에 하는 거?"

"화간이요?"

"그래. 그래서 내가 나술에게 덤볐더니... 놈이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놨지."

남자의 코는 완전히 비뚤어져 있었다. 

그는 자기 얘기를 다 하곤 다시 다른 테이블로 가버렸다. 그러면 그 자리를 또 다른 사람이 채웠다.

"나도 술 좀 줘!"

"여기."

"고맙다. 근데 니들 작년에 세금 얼마나 냈냐? 생각해보니까 모하우스가 나만 더 뜯어간 것 같아서..."

모하우스의 뒷담을 까는 사람들도 있었고.

"근데 너네들. 대마녀님 얼굴을 뵌 적이 있냐?"

"이야... 확실히. 미친 듯 미인이시더군. 그런 여자는 처음 봤어."

"게다가 그 로커스트인들 특유의 복장이란..."

"아, 씨. 난 못 봤는데!"

아예 관련 없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오고 갔다.

와서 술을 얻어먹고, 안주도 좀 뺏어먹다가 집으로 가는 인간도, 다른 테이블로 이사가는 인간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맨 마지막에 남은 건 내 지인들이었다.

나랑 같이 싸운 다섯 명.

그리고 친했던 사냥꾼 아저씨, 대장간 아저씨, 여관 주인 아줌마 등.

"유진. 하아, 그래. 떠난다고?"

"그래야죠. 성공하고 싶으니."

아틀라스 제국엔 계층 사다리가 있었다.

평민이 군공을 세우면 기사가 될 수 있었고.

기사가 군공을 세우면 남작위를 하사받을 수 있었다. 

산맥에 마수들이 많고 귀족끼리 전쟁이 잦기에 이런 구도가 성립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체격 좀 된다는 남자들은 대부분 이 길을 선택했고, 힘 좀 쓴다는 여자들도 군인이 되는 길을 많이들 택했다.

물론 운이 없으면 죽겠지만.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회가 아닌가.

현대에서 에어컨 바람 쐬다 온 나는 누구보다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가 간절했다.

'그럴 만하지.'

지금이야 중세에 익숙하나, 그땐 정말 지옥처럼 느껴졌으니 그랬다. 

"유진. 네가 했던 첫 파티 기억나냐?"

"아, 당연하죠."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우울감이 정점을 찍었다.

난 아무도 만나기 싫어 방 안에 틀어박혔는데, 동료들이 억지로 날 끌고 나왔다. 모든 군인들은 첫 살인 기념 파티를 해야 한다나, 뭐라나.

가보니 나처럼 애송이인 병사 하나가 불안한 얼굴로 앉아있었더란다.

-오늘 유진이 강철 메이스로 적 똘마니의 머리통을 부쉈소! 어찌나 세게 때렸던지 뇌수가 몇 피트는 튀더군.

-이제야 유진 씨가 남자가 되었네요! 아암, 고추에 털만 났다고 남자가 아니지!

놀랍게도 저 고추털 드립은 여관 아줌마가 한 말.

난 혼자 있고 싶다 중얼거렸지만, 그들은 내 머리를 잡고 술통에 처박았다. 

어쩌면 그들도 똑같이 겪었을 수도 있겠다. 

살인의 충격이나 죄책감 같은 것을. 

어쨌든 난 반쯤 죽을 때까지 값싼 술을 퍼마셨고, 다음 날 몸이 ㄷ자로 꺾인 채 변사체처럼 발견되었다.

그게 내 첫 번째 파티였다.

"어쨌든 건배! 이걸로 적어도 몇 년 동안은 청지기들이 비리를 하지 않을 거요."

"유진을 위하여!"

"건배!"

그렇게 우린 광란의 밤을 지냈다.

남작도 친히 여관에 찾아왔다. 

내 입장에선 좀 의외긴 했지만... 의외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제국엔 남작이 많았고, 시골 마을의 귀족은 그리 권위를 차라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진. 떠날 거란 소식을 들었네."

"그렇습니다. 남작님. 일 년 동안 잘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타깝군. 자네가 소작농이라면 법적으로 못 나가게 막았을 텐데."

남작과 난 웃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별안간 그가 제안을 건넸다.

"그런데 유진... 정착할 생각은 없나?"

"..."

"새 경호 대장도 영 미덥지 않고. 무엇보다 자네, 마력을 다룰 줄 알지 않는가?"

순간 몸이 움찔했다.

하지만 남작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씨익- 웃더니 말했다.

"사관학교 나온 사람이 그걸 못 알아볼까. 자네가 행정관에 왔을 때부터 알았네."

"..."

그 말인 즉슨. 

남작이 어깨를 두드릴 때 이미 마력을 느꼈단 소리였다. 

소름이 돋았다.

"애초에 결투를 붙인 건 그 때문이야. 자네한테 마력이 없었다면 나술의 압승이었으니... 나도 누가 이길지 짐작이 가지 않았거든."

"만약 나술이 이겼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셨습니까."

"자네가 죽더라도 영지엔 기강이 잡혔을 거야. 나술도 몇 년 동안은 처세를 바르게 했을 거고."

그건 정말 잔인하지만...

중세의 질서가 그랬다.

진실을 밝힐 만한 행정력이 없다면 누군가 죽어 경고장이 되는 게 합리적이었다.

"자네가 여기서 일한다면 월급만 오백 실링 주겠네. 어떤가? 그리고 내가 친히 타격술 지도도 해주지."

"타격술... 말입니까?"

"그래. 자네 메이스 기술은 정말 끔찍했어."

오백 실링의 월급이라.

'이야... 확실히 여기서도 인맥이 최고구나.'

솔직히 맘이 동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난 더 잘 살고 싶었다. 

내가 이 세계에 도착해서 했던 온갖 고생들.

갑자기 내던져졌단 것에 대한 원망.

에어컨 바람 쐬다 온 현대인은, 이 불편한 중세의 가난한 삶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죄송합니다."

"그렇군. 무운을 빌겠네, 유진. 혹시 나중에 성공하더라도 보링턴 영지를 잊지 말게나."

"아유, 당연하죠."

"자, 건배나 하자고. 그럼."

"건배."

우린 그렇게 잔을 기울였고, 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하루를 보내주었다.

*

다음 날.

누군가의 긴 여행을 축복하려는 것처럼 화창한 날씨였다. 

방 안은 이미 깨끗하게 치워 놓은지 오래였다.

"이제 가는구나."

별로 좋은 방은 아니었다.

침대에선 가끔 작은 벌레가 기어 나왔고,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가 나는 데다, 무엇보다 바닥이 삐걱거려서 잘못 밟으면 꺼질 것 같았다. 만약 무너졌으면 수리비는 내가 물어야 했을 터.

그래도 1년 지낸 방을 떠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도노반. 떠날 땐 인사하는 게 좋을까.

-아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네가 떠난단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안다.

-그래. 고맙다.

어제 떠난단 얘긴 다 했다.

나는 꼭 필요한 짐만 챙겨 바깥으로 나왔다. 새삼 정리하다보니 내 살림살이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돈이랑 무구 정도.

'하아...'

가슴이 뛰었다.

보링턴 영지 바깥으로 벗어나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그랬다.

'나도 이제 도시로 떠나는구나.'

새벽, 아무도 없는 거리를 지나서 역으로 갔다. 마부 여럿이 연초를 피우며 새벽부터 대기중이었다.

"아인베르트 백작령으로 가시는 거요?"

"예."

"가는데 5일은 걸릴 거요. 식사는 내가 줄 거고."

"알겠습니다."

"백 실링이오."

비싼 돈.

하지만 5일 동안 마차를 운전하는 대가로는 오히려 싼 값일지도 몰랐다. 

나는 묵직한 주머니에서 백 개의 동전을 꺼내 마부에게 주었다.

이로써 내가 가진 돈은 구백 실링 정도.

실링은 우리나라의 10원 동전보다 가벼웠으나, 그런 것도 모이니 무거웠다.

백작령에 가면 은행부터 가야 했다.

마부가 돈을 세더니 툭 뱉는 것처럼 말했다.

"잘 생각했소. 당신 이름이 유진이지?"

"절 아십니까?"

마부가 말을 꺼냈다.

"이 마을에 왜 은화가 없는지 아시오."

"대충요."

"은화를 쓸 일이 없기 때문이오. 마을에서 파는 모든 물건들은 고작 몇 실링밖에 안 되지. 오히려 은화를 건네주면 거스름돈이 없어 민망해지는 상인들이 생기니... 청지기가 모아놓은 그 많은 돈도 전부 동전이었던 거요."

"그렇군요..."

"그러니 큰 돈, 큰 공을 세우려면 대도시로 가야지. 어쨌든 타시오. 남자라면 한 번쯤 그럴 필요가 있지."

그렇게 난 마차에 올라탔다.

마을의 다른 마차들과 다르게 바퀴 쪽에 스프링도 달려 있었고, 말들의 털도 윤기가 나는 게 아주 믿음직스러웠다.

그래서 웃돈을 주고 이런 마차를 탄 것인데... 마차 좌석의 촉감을 보니 잘 골랐구나 싶었다.

새벽, 그렇게 마차는 떠났다.

난 마지막으로 보링턴 영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잘 있어라. 보링턴.'

이 사람들이 인심 좋게 대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난 훨씬 더 힘들었겠지.

마지막으로 감사를 남긴 채 보링턴 영지를 가슴에 묻었다.

새벽 안개를 뚫고 달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조금 졸았다.

새로운 삶. 

새로운 도시. 

검은 책으로 얻을 새로운 힘. 

그런 것들을 꿈꾸면서 말이다.

*

그렇게 여행 1일 차.

말 두 마리가 끄는 고급 마차는, 보링턴 남작령과 아인베르트 백작령 사이에 있는 산길을 지나고 있었다.

가파르게 깎인 절벽. 

마치 우리나라 대관령의 도로처럼 산길에 꼬불꼬불 길을 내놓은 곳이었는데, 중세 건설 기술 치곤 대단하단 생각도 들었고 여기서 떨어지면 좆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잠깐 눈을 감았는데...

-쾅!

뭔가 좆되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 바퀴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우당탕, 하고 차체가 흔들렸는데, 나른하게 졸던 나는 마차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뭔데.'

뒤늦게 이 마차가 산길을 지나고 있단 사실이 떠올랐고,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난 눈을 번쩍 뜨고 기립했다.

-히히힝!

검은색 말이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내가 말이란 동물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딱 봐도 저건 좆된 소리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숨결이 끊어지면서 뱉는 마지막 비명에 가깝달까.

"씹!"

나는 메이스와 방패, 가방을 하나 들쳐맨 다음 마차 밖으로 튀어 나갔다.

-우당탕!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면 필연적으로 구르기를 하게 되는 법. 등에 구백 실링 상당의 동전들이 들어 있어서 그런지 한 번 구르니 등이 아팠다.

-히히히히힝!

-이히히잉!

상황은 개판이었다. 

개를 닮은 검은색 마수 다섯 마리가 검은색 말들에 달라붙어서 이리저리 물어뜯고 있었다. 말들은 목과 입에서 피를 흘리며 발악했다.

-콰직!

숫말이 기세좋게 뒷발차기로 마수 하나의 갈비뼈를 작살냈으나 그게 끝이었다. 

마부는 정신을 잃은 채 말 위에 매달려 있었고, 마수들에게 둘러싸인 말 두 마리는 발악하다가,

-이히히히힝!

그대로 절벽에 다리를 헛짚고 말았다.

말들이 자신의 무게를 통제하지 못하고 절벽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한 바퀴 구르면서 퉁, 퉁, 퉁 하고 절벽에 튕겼다.

"아, 씨발."

그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마차 전체가 옆으로 뒤집어지더니, 바위로 된 절벽에 쿵, 쿵, 쿵 하고 구르면서 말 그대로 개박살났다.

얼마나 산이 높은지 말들과 함께 마수가 떨어졌는데 그 시체를 찾아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

나는 문득 주변을 둘러 보았다.

아침.

나는 보링턴 남작령과 아인베르트 백작령 사이, 그 즈음 어딘가에 혼자 남게 되었다.

"아이, 씨팔."

보링턴 영지에서 취직이나 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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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땡큐였다.

마부 아저씨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아저씨. 근데...

-응?

-만약에 마수가 나오면 어떡하죠? 우린 둘 뿐인데. 산적이 습격하면요.

-하하하. 유진. 들어보게.

-...

-자네는 산책하면서 벼락 맞을 걸 걱정하나? 마른하늘에 벼락 떨어질 확률 때문에?

-그렇게 확률이 낮은가요?

-확률로 따지자면 거의 5푼도 안 되는 확률이지.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내가 이 짓만 십 년을 했어. 이 사람아.

-아, 무사고 경력 십 년이시군요.

-그래.

그렇게 마차는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난 산속에 조난 당했다.

"음...!"

왼쪽에 있는 건 비탈로 이뤄진 낭떠러지.

꼬불한 동선이 능선을 타고 뱀처럼 이어져 있었는데, 한 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복합골절과 함께 천국에 갈 수 있는 구조였다. 

일단 마부의 명복을 짧게 빌었다.

옆에서 죽었다면 묻었겠지만...

마차가 통째로, 5일치 식량과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져 찾을 수 없었다.

"편히 쉬십시오."

기다리다 보면 마차가 한 대 정도는 지나가겠지. 어떻게든 그걸 히치하이킹해서 대도시 아인베르트까지 가는 게 계획이었다.

'좋았어.'

마차가 진행하던 방향으로 쭉 걸었다.

꼬불꼬불 이어진 오르막길을 따라 위로, 위로.

한국에서 등산하듯 오르다 보니...

'이야... 절경이긴 하네.'

수많은 산과 구릉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옛날 사람들이 그린 수묵화가 이런 모습일까.

봉우리마다 꼬불한 마차길이 이어져 있었는데, 시야에서 멀어질수록 짙은 운해에 가려 그 모습을 감추는 게 신비스러웠다.

새삼 아틀라스가 왜 '산맥의 나라'라고 불리는 지 알 것 같았다.

'절경이긴 해. 여행으로 왔다면 참 좋았을 텐데.'

어쨌든 꽤 높은 곳에서 바라봤음에도 다른 마차가 보이지 않았다.

이 장엄한 광경을 보니 본능적으로 깨닫는 게 있었다.

'오늘 안엔... 절대 못 빠져나가겠군.'

*

손톱달이 하얗게 빛나는 밤.

주변은 어둡고, 숲속은 깊은 암흑처럼 보였다.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내가 만든 보금자리는 형편없었지만 그나마 바람막이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되려나."

마차길 주변에 쓸 만한 공터를 찾았다.

나뭇잎들을 모아 간이침대를 만들고, 주변엔 목책들을 박았다. 

중앙엔 작은 모닥불 하나가 타오르고 있었는데, 어떻게든 몸을 데우는 용도론 쓸 수 있었다.

물론 불을 피우는 마법은 없었다.

마력으로 강화된 신체를 이용해 미친 듯 나무와 나무를 비벼서 겨우 만든 불씨였다.

탁, 탁.

"하, 씨. 힘들었다."

-끼룩. 끼룩. 끼룩.

정체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밤.

쪼그려 앉은 채 튀는 불씨를 보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부상했다.

'한국이었으면 에어컨 틀고 방 안에 있었을 텐데.'

먹은 게 부실해서 그런가.

갑자기 머릿속에 음식 이미지가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가장 땡기는 건 김치찜이었다.

잘 익은, 숙성된 김치와 돼지 삼겹살을 솥에 넣고 푹 끓인 그 요리. 

거기다 공깃밥 한사바리 말아서, 단백질/지방 덩어리인 삼겹살이랑 같이 씹어 먹으면 그만한 게 없는데.

'친구들은 잘 있을까. 또 PC방에 처박혀 있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국에 살 땐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

그런 게 몹시도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쓰읍..."

열심히 하면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이미 사람까지 죽여버렸다.

여기서 성공하면 이쪽의 삶이 더 행복하려나?

예쁜 여자랑 결혼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접었다. 

'그만하자.'

난 아직 부족한 게 많다.

나술과의 전투를 복기했다.

동네에서 힘깨나 쓰던 양아치에 불과한 그였으나, 정규군 훈련을 받아서 그런지 검술이 좋았다.

내가 접근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전투 경험이 없었다면 이기지 못했을 거야.'

상대방의 장비를 파괴하는 것도 물론 전술이지만...

그 승리가 마음에 들었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개념으로 이겨야 이겼다고 할 수 있다.

그저 힘과 장비의 차이로 밀어붙여 승리를 거둔다면 발전이 없을 터였다.

"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하나의 물건이 생각났다.

바로 검은 책.

받을 때까지만 해도 하얀색 종이만 들어있던 마법적인 물건이었다.

'마법을 배울 수 있다고?'

중간에도 책을 확인하고 싶은 순간은 많았지만...

애초에 책이란 것 자체가 시골 마을에선 귀한 물건이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들고 있기만 해도 사람들이 몰려와 무슨 내용인지 물어본단 것이었다.

심지어 까막눈인 놈들까지 말이다.

또한 아틀라스 제국 정서상 사령술에 대한 감정도 안 좋았으니 책을 숨겼었는데...

여기선 봐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난 책을 집어들고 한 페이지를 넘겨 보았다.

"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몸속에 남아있던 검은 마력이 책으로 쭉- 빨려 들어가면서, 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떨리는 책을 보며 감탄했다.

'참 신기해. 비싼 책 같은데.'

로커스트란 나라는 돈이 많은 걸까?

이런 걸 뿌릴 수 있을 정도면 다섯 나라 중에서도 특출난 편이 아닐까. 아니면, 나머지 네 나라도 내가 모르는 저력을 숨기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검은 책의 표지를 넘기자-

'와... 씨.'

검은색 잉크가 혼돈스런 문양을 그렸다.

그것들은 재질을 알 수 없는 백지 위에서 파도처럼 움직였다.

물고기 떼 같기도 했고, 벌레들 같기도 했다. 

그것들이 이룬 질서는 처음엔 무질서한 추상화에 가까웠으나, 단순한 문양이 되더니, 기호가 되고, 문자로 탈바꿈했다.

변해가는 모습이 컴퓨터 그래픽 수준이라, 난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곧 잉크가 글자의 형상을 이뤘다.

[본 서書, '검은 책'의 귀속자는 '유진'이며, 교안 수여자는 '카밀라 앱 헤롯'임.]

[주의 : 타인에게 무단으로 양도할 경우 본 서는 전소되며, 해당 책은 '교육 목적에 한해' 사용자의 행위 정보를 수집/기억할 수 있음.]

이름, 설명, 사소한 주의 사항.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완전 하이테크놀로지잖아.'

아래쪽엔 초등학교 일기장 마냥 내 신상정보가 있었다.

[이름] 유진

[등급] 견습생 - 6개월 추정

[마력 총량] 약 51 다르마 

[신체 능력] 키 6피트, 몸무게 180파운드

특이한 건 내 경력이 6개월로 찍혔단 것이었다.

'6개월이라. 사실 며칠 안 됐는데.'

카밀라가 말하길, 다른 마법사들은 혼백을 흡수하기 엄청 힘들어한다 했다. 내가 빠른 시일 내에 혼백을 흡수해서 그런지 책이 착각한 것 같았다.

[본서의 귀속자는 대략 6개월간 사령술을 수련한 것으로 보이나,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은 '신체 강화' 밖에 없는 것으로 보임.]

[본서의 분석 결과...]

[하급 사령 기사 / 성적 : D]

[흡수에만 신경 쓰고 다른 것엔 신경 쓰지 않은 티가 남. 메이스 기술도 끔찍함. 남들보다 좋은 체격, 마력량 외에 아무런 장점이 없다 할 수 있음. 기본적 타격술, 방어술 수련 및 매우 높은 강도의 노력이 요구됨.]

[기사 시험 합격 확률 : 거의 없음]

'아니, 새끼야. 며칠 안 됐다고.'

성적표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으로서 D학점은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기사 시험 합격 확률이 없다니?

대체 다른 '지망생'들은 얼마나 강한 것인가.

당황하면서 페이지를 넘기려고 하는데, 갑자기 종이 위로 마력이 빨려들어갔다.

-아니, 새끼야. 며칠 안 됐다고.

'...!'

내 생각이 꿈틀거리며 책 위에 문자로 새겨졌다.

출력뿐만 아니라 입력도 되는 걸 보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책이 그 말에 답변을 했다는 것이었다.

[본서의 귀속자는 하급 사령 기사 치고 상당히 높은 마력을 보유하고 있음. 따라서 배운 지 며칠밖에 안 되었단 말은 거짓으로 판단됨.]

[본서의 귀속자는 알량한 자아 때문에 책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음.]

"아니, 이 새끼야!"

난 숲속에서 육성으로 소리 질렀다.

네가 내 말을 안 믿으면 누가 믿는데...?

어쨌든 책의 텍스트는 아주 유창하고 빠르게 출력되었다.

[본서는 귀속자의 교육 방침을 '사령 기사' 방향으로 판정함.]

[이는 귀속자의 성별, 6피트의 키, 180파운드에 달하는 몸무게에 기인함. 또한 주무기가 메이스와 방패인 점 역시 판단의 근거임.]

[또한 성격상 기사도를 지킬 수 있어 최적의 교육 방향이라 판단함.]

마법 책이 진로 상담까지 해주다니...

'카밀라 님, 고마워요.'

정말 땡큐였다.

어쨌든 책은, 노베이스인 나를 배려해서인지 기초 용어부터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사령 기사는 사령술을 사용할 줄 아는 근접 병종임. 또한, 사령술을 사용하면서도 기사도를 지키는 고행자란 의미이기도 함.]

[이들은 주술적인 사령술보다, 에너지를 직접 다루는 수행적 사령술에 집중함.]

뒤이어 이어지는 정보는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그림...?'

책은 설명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잉크로 삽화를 그려주었다.

[사령기사는 혼백으로 몸을 강화하는 것 이상의 기술을 사용 가능할 수 있음.]

삽화가 움직였다.

그림 속 로커스트 남자의 피부 위쪽으로 검은색 기운이 몰캉하게 솟구치더니, 채찍처럼 변해 앞쪽의 적을 말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심지어 애니메이션까지 나오는 걸 보니 울컥하고 감동이 밀려들었다.

'...허어.'

그나저나.

저번에 본 로커스트 코벤도 저런 수준이었을까?

저 기술에 비하면 지금까지 내가 싸워온 것은 야만적인 발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또한 해당 혼백의 상想, 혹은 의미를 이용해 특별한 효과를 부여할 수 있음.]

[특정 인간, 특정 마수 등 업을 쌓은 존재를 흡수할 경우 '특이점'이라 불리는 것을 획득할 수 있음. 이는 특별한 능력을 부여할 수 있음.]

그러니까.

게임으로 치자면, 영웅 몹을 잡을 경우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된다는 소리였다. 

물론 이를 흡수할 경우 많은 부작용이 따를 것 같지만...

내 경우엔 왠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사령기사의 주 전투 수단은 '구현화'로, 특정 사물에 혼백의 상을 주입해 사용하는 것임.]

그림 속 남자가 자신의 혼백을 검에 들러붙게 하더니, 곧 그 검의 모습이 끔찍하게 변했다. 마치 용의 아가리와도 같은 형상. 그것은 눈앞의 적을 물어뜯기도 하고, 검은색의 불길한 안개를 뿜어내기도 했다.

그림으로만 봐도 오금이 저리고 멋이 있는 모습이었다.

'내, 내가 저렇게 강해질 수 있다고?'

이렇게 보니 고작해야 검에서 불꽃이나 뿜어대던 롤랜드 경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마음이 들떠서 책에게 가르쳐달라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책이 거절했다.

[귀속자의 수준으로는 시도하기 어려운 기술로 판단됨. 또한 귀속자의 경우 에란트리 퀘스트를 수행하여 '기사로서의 성실성'을 증명할 의무가 있음.]

'에란트리 퀘스트...'

뭔지 이해는 갔다.

기사가 되려면 10년 정도 전장에서 구른 다음, 입단 시험을 치기 위해 스스로의 공적을 쌓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를 에란트리 퀘스트라 했다.

또한 로커스트 역시 국가. 

강력한 사령술을 인터넷 무료 강의처럼 뿌릴 수 없단 사정은 이해가 갔다.

'근데 이 말투는 좀 바꾸면 안되나...? 뒤에 냥♡ 같은 걸 붙인다거나...'

묘하게 음슴체랑 존댓말이 섞여 불편했다.

하지만 그런 싸가지 없는 말투에도 불구하고 책이 제시한 보상은 몹시 달콤하여 참기로 했다.

[본서는 귀속자가 '경호 대장 나술'을 쓰러뜨린 것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바.]

[하급 사령 기사 전용 가르침 세 가지를 제시함.]

[보상을 선택하고 책에 손을 대면 검은 마력이 길을 알려줄 것임.]

'오...'

난 이 말을 듣고 감탄했다.

'카밀라가 했던 것처럼 나한테 사령술 쓰는 법을 직접 가르쳐준단 말이지?'

이 정도로 파격적인 보상을 준다면, 좀 싸가지없게 말한다고 한들 용서해 줄 수도 있었다. 책이 내게 선택지를 출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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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사령 화살]

[귀속자의 검은 마력을 이용해 날카로운 화살을 구현하고, 그를 고속으로 쏘아내는 기초적 기술임. 장궁 정도의 파괴력. 평균적으로 30피트의 사정거리를 가짐.]

[명상법 - 정제]

[귀속자의 혼백을 더 높은 수준으로 정제할 수 있는 훈련법. 사령술의 강도를 강하게 할 수 있음.]

[신체 강화+]

[귀속자가 현재 사용하는 신체 강화는 매우 저열한 수준으로, 의식보단 무의식적인 감정에 따라 짐승처럼 폭주하는 것에 가까움. 신체 강화란 본래 그런 기술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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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나는 그냥 멈춰버리고 말았다.

'아니, 밸런스 게임이 무슨.'

사령 화살 앞쪽에 추천 마크가 떡하니 박혀있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 세 개의 기술 모두 지금 나에게 절실히 필요했다.

일단 사령 화살.

'이 기술은 그냥 사기다.'

양궁을 해 본 적이 있다면 알겠지만, 활 당기는 건 몹시 어렵다.

헬스 꽤 한다는 남자들도 힘들어할 정도로 팔 힘과 코어 힘을 요구하는데...

전투 상황에 순식간에 장궁 정도의 파괴력을 낸다? 방패와 칼을 든 채로?

'와, 씨.'

이는 정말 엄청난 이점이었다.

'이 세상의 마법사들은 얼마나 강한 걸까.'

내 몸을 들어 옮겨버리던 카밀라의 모습을 생각하자 닭살이 돋았다. 

게다가 이 기술을 배우면 지금 당장 사냥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게 뻔했으니... 

추천할 만한 선택지긴 했다.

근데 다른 것들도 보통이 아니었다.

혼백 정제 명상법.

이는 기술이 아니라 '훈련법'이다.

이걸 고르면 그저 명상하는 것만으로도 계속 강해질 수 있으니, 거의 무협지 수준의 성장을 예상할 수 있었다.

산술적으로 생각하면 이 선택지가 제일 이득이었다.

'신체 강화도 너무 매력적이고.'

신체가 더 세지면 당연히 좋다.

극한상황에서 믿을 건 오로지 육체뿐.

이는 선택해서 손해 볼 일이 전혀 없는 선택지였다.

'아냐. 게임처럼 생각하지 마. 세이브 로드는 없다. 죽으면 끝이야.'

난 선택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검은 책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핏줄을 타고 흐르며, 어떤 방식으로 마법을 쓸지 가르쳐 줬다.

마력을 운용하는 방식.

심상. 어떤 감정과 욕을 이용해 검은 마력을 통제할 것인지 등...

이 마법과 관련된 정보들이 순식간에 몸에 입력되었다.

"후우..."

생각보다 매우 친절한 방식.

무협지 속 진기도인을 받으면 이렇게 되는걸까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검은 책 속 글자들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음... 칭찬이라도 해주려는 걸까?'

[에란트리 퀘스트 갱신]

"...?"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검은 책에 떡하니 박혀 있었다.

[귀속자는 로커스트의 사령기사 후보생임.]

[아직 정식 기사는 아니나, 마수를 처리해 시민을 지키는 것은 기사로서 당연한 의무임.]

[하여 귀속자의 임무는 주변의 마수 세 마리를 소탕하는 것임.]

[보상은 더 높은 형태의 가르침.]

난 눈살을 찌푸리고 검은 책을 바라보다...

'아니. 마수가 어딨는데?'

아주 빠르게 방패를 쥐고 일어나 뒤쪽으로 돌았다. 허리 회전에 동반된 강펀치. 마수의 턱이 돌아가는 게 느껴졌지만-

-쾅!

-크르르르릉!

동시에 커다란 체중에 밀린 내 몸이 공중을 날았다. 뒤로 쓰러졌던 난 바로 흙을 박차고 일어섰다.

"...깜박이 좀 켜고 들어와, 이 새끼들아."

메이스를 들고 눈앞을 바라보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딱 봐도 마수처럼 생긴 늑대 셋이 날 둘러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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