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 10-20

고위험군 마법을 선택할 수 있음.

하얀 초승달이 빛나는 밤, 깊은 숲의 공터에 불청객이 셋 찾아왔다.

-크르르...

-그르릉...

그들은 늑대였다.

하나하나 크기가 호랑이만 했는데, 보링턴 영지에서 가끔 마주치던 것들이랑은 급이 달랐다.

'왜... 저렇게 커?'

몸무게가 딱 봐도 백 킬로그램을 넘어 보였다. 

또한 시뻘겋게 충혈된 눈, 머리에 돋아 있는 종양, 눈에서 흘러내리는 진물 등을 보니 평범한 짐승이 아닌 마수.

한 마리도 이기기 힘든 상황인데 세 마리를 보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마수가 나올 확률은 5푼도 안 된다며...?'

하여간 운이 없었다.

보링턴 영지가 첫 스타트인 건 운이 좋았지만... 거기까지.

중세 시대에 일이 평온하게 돌아갈 확률은 거의 없어 보였다.

계획을 짜며 숨을 고르려는 순간.

늑대가 갑자기 뛰어올랐다.

-크르르릉!

'무슨 도약력이...'

난 하늘을 바라보고 입을 떡 벌렸다.

달을 가린 늑대. 도약한 높이는 대략 3m 정도.

각력이 너무 강해 주체를 못 하는 모습이었는데, 평범한 남자라면 저 무게의 돌진조차 버티지 못했을 것이었다.

"새끼야!"

하지만 마력으로 강화된 몸은 달랐다. 

무게중심을 낮춘 채 늑대의 체중을 그대로 받아냈다. 

-깡!

-크르르륵!

내 몸도 뒤쪽으로 밀렸지만, 놈의 머리도 내 방패에 부딪힌 상황. 난 당황한 놈을 향해 씨익 웃어준 다음,

"체급 믿고 깝치면 안 되지."

그것의 이빨을 4kg 방패로 거세게 후려쳤다.

-끄륵!

늑대가 몸을 움츠리고 후퇴하려는 찰나, 한쪽 손에 든 메이스가 공기를 찢었다. 힘밖에 들어있지 않은 무식한 일격이나 결과는 적중. 

놈의 튀어나온 머리뼈에 정확히 메이스가 들어갔다.

-빠악!

-깨갱!

늑대의 머리뼈 일부가 터지며 한쪽 눈알이 튀어나왔다. 

내가 늑대의 삶을 시마이하려던 순간,

-컹컹!

-크르르르!

팀플레이를 하는 것처럼 늑대들이 달려들었다. 포위되면 답이 없었기에 반격하지 않고 재빠르게 빠졌다.

'내가 영지전 짬이 몇 년인데. 니들 협공 타이밍을 모를 것 같냐.'

그나저나 마수의 생명력은 인간과 달랐다.

보통 인간은 내게 메이스를 맞으면 일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저 늑대는 한쪽 머리가 깨진 상태에서도 내게 으르렁거렸다.

힘으로 세 마리를 다 때려죽이려면 밤을 지새워야 할 게 뻔한 상황.

허나 야생에서 그렇게 싸우면 결과는 공멸이었다. 저 늑대들을 상처 없이 다 죽이는 건 불가능했고, 그 경우 내가 살아남지 못할 확률이 컸다.

-크르릉!

이를 드러내고 위협하는 늑대.

그러나 내게도 비장의 수가 하나 있었다.

늑대 중 하나가 방향을 바꾸며 쇄도하는 순간, 나는 검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촤르륵.

검은 마력은 본래 에너지.

일반인들이 볼 수조차 없고, 공기에 노출되면 쉽사리 흩어지고 만다.

다만 사령술은 그것을 형태로 옭아매는 기술인지라.

심상을 떠올리자, 혈관에서 흘러나온 검은 마력은 순식간에 섬전의 형상을 취했다.

끝은 뾰족하고, 굵기는 엄지손가락만큼 굵고, 뒷부분엔 깃이 달린, 타오르는 화살의 형상.

이게 사령의 화살이었다.

난 검은 책이 알려준 구결을 마음속으로 외웠다.

'영은 삶을 강요하는 폭군이라.'

이는 영이 끊임없이 몸을 채찍질함을 의미했다. 

설령 그 삶이 무의미함을 알아도.

점점 의식이 흐려지는 고통이 비참해도.

피가 빠져나가 손과 발이 차가워져도.

영은 1초라도 더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라며 혼백을 압박하니...

그 압력은 평범한 정신이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닌 바.

공포는 다른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저 새끼는 나보다 못난 데 왜 살아있지?

-너도 나랑 똑같은 인간이잖아...

-난 분명 특별한 인간인데,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지?

그것은 고통이었다.

그렇기에 혼백들은 언제나 물어뜯을 대상을 찾아 헤맸다. 내가 할 일은 '무엇에 달려들지' 정해주는 것뿐.

'가라.'

명령하자 나머진 화살들이 알아서 했다.

검붉은 화살이 공기를 찢고 늑대를 향해 쇄도하였다.

-푹!

-크르륵?!

석궁에 가까운 충격량.

검게 불타오르는 화살이 늑대의 목을 뚫고 뒤쪽으로 빠져나오자, 그는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다 볼품없이 떨어졌다. 바닥에 머리를 비비며 피거품을 뿜는 꼴이 안 좋아 보였다.

-끄르르르륵!

다른 늑대들이 원거리 공격에 놀라 주춤할 때, 난 머리가 깨진 늑대를 향해 달려갔다.

방향 감각이 망가진 녀석은 앞발로 날 후려치려 했다.

그러나 머리가 움푹 들어가서 그런지 몸을 가누지 못했고,

"늦었다, 이 새끼야."

-콰직!

두 번의 기회는 없었다.

아무리 싸구려라고 한들 메이스는 메이스.

녀석의 머리통이 움푹 파이면서 정상화되었다.

-크르릉!

이제 남은 건 한 놈이었다.

머리에 주먹만큼 커다란 종양을 단 녀석.

내가 순식간에 방향을 돌려 달려오는 놈의 머리를 찍었지만,

-퍽!

-끄르르륵!

'아니...'

놀랍게도 놈의 종양이 내 메이스를 튕겨냈다. 보통 종양이면 살보다 물러 으스러지기 마련인데, 저것은 단단하면서도 탄력이 있어 내 공격을 흡수했다.

놈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 왼쪽 정강이를 물었다.

-콰직!

"끄아악!"

힘이 어찌나 센지 살이 뜯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겐 전장에서 노획한 그리브가 있었다.

녀석의 이빨은 차마 철제 그리브를 더 우그러뜨리지 못하고, 중간에 끼이고 말았다.

내 눈에 절로 핏줄이 올라왔다.

"새끼가...! 감히 사람을 물어?"

녀석의 머리가 고정된 상황.

뇌와 공격 수단이 붙어 있다는 건 개과 동물의 가장 큰 약점이라.

물린 곳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증오와 함께 핏줄 돋은 팔로 메이스를 휘두르자, 메이스가 늑대의 머리를 알루미늄 깡통처럼 우그러뜨렸다.

-빠각!

-끄륵... 끄르륵...

그러나 놈은 끝까지 이빨을 놓지 않았다.

그걸 보니 알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저 표독한 눈이라니?

늑대가 불쌍하기도 했고, 증오스럽기도 했다.

"왜 이렇게 감정적이냐. 넌 이미 죽었다."

그 원망스런 눈.

아무리 금수라고 한들 자기 동료가 죽은 건 분한가 보다. 한쪽 머리가 터지고도 내 다리를 끝까지 물어뜯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나 역시 살아야 했다.

그렇기에 사정없이 메이스를 휘둘렀다.

-빠악!

왼쪽 다리에 어마무시한 통증이 전해졌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가 타격에 정확성을 실었다. 깨진 머리에 다시 한 번 메이스가 적중하자 늑대가 비로소 완전히 무력화됐다.

"하아... 씹."

난 핏발 선 눈으로 늑대의 입을 벌린 다음, 화살 맞은 늑대를 절뚝거리며 찾아갔다.

-깽! 깨갱!

그리고 이미 휘어진 메이스를 들어 놈의 머리를 내리쳤다.

-깡! 깡! 깡!

짐승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약 5초가 걸렸다. 

하지만 동시에 메이스의 수명도 다해버렸다. 보링턴 영지의 대장장이가 땀 흘려가며 만든 그것은, 마수 세 마리의 머리통을 깬 것이 한계였다.

n자로 굽어진 메이스는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젠장... 이제 이 메이스도 못 쓰겠구나.'

거의 꺼져가는 모닥불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늘어진 건 마수의 시체 세 마리. 

나는 쇠와 함께 종아리 살을 파고든 그리브를 벗어 던졌다. 

"끄으으윽!"

그러자 피가 울컥 빠져나가며 엄청난 탈력감이 몰려왔다.

'하아...'

지금 쓸 수 있는 화살은 약 열 발 정도가 한계다. 

한 발만 쏴도 탈력감이 오는 걸 보니, 검은 마력을 지나치게 많이 집어넣은 것 같았다.

그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화살은 정말 쓸만했어. 하지만, 갈 길이 멀군.'

그래도.

그래도 중세에서 작은 마수 세 마리를 죽일 수 있는 인간은 흔치 않았다. 

그 발전에 조금이나마 미소가 나왔다.

"...못 버티겠다. 자자."

바닥에 대자로 누워 하늘을 보니 몹시 아름다웠다.

시리도록 차가운 달이 중앙에 있었고, 동화 같은 은하수가 그 주변을 흘렀다. 왜일까. 은하수의 모양 때문일까. 늑대가 날 바라보던 원망 어린 눈빛이 떠올랐다.

-그렇게 해서까지 살고 싶냐.

아마 늑대가 살았다면 그런 원망을 하지 않았을까...

난 1초도 되지 않아서 대답했다.

'물론! 난 이렇게라도 살고 싶다. 성공해야지.'

아직 할 게 많았다.

대도시에 가서 좋은 잠자리도 구하고 싶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싶고.

예쁜 여자친구도 사귀고 싶다.

강해지고 싶다.

그러자 손톱 같은 달이 날 보며 웃었고, 깊은 잠이 날 찾아왔다.

*

밝은 햇살이 눈을 찌르는 아침.

일어나니 온몸이 뻐근했다.

"끄어! 제길. 늑대한테 잡아먹히는 게 나을 뻔 했군."

이리저리 뒤척이며 잔 결과 머리에는 낙엽과 흙이 붙었고, 어깨와 허리에선 뻐근한 통증이 일었다. 역시 자연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제길. 첫 날 밤부터 늑대야. 이런 게 반복되는 건가?'

검은 마력의 힘일까.

다행히 내 왼쪽 다리의 상처엔 새살이 돋아 있었다. 일어나서 몸을 우두둑 꺾어보니 별 이상은 없었다.

배가 미친 듯 고프고 목이 말랐지만 나쁜 일만 있으란 법은 없었다.

마수의 시체들은 각각 혼백을 남겼고.

이는 에란트리 퀘스트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늑대야. 네 사령은 내가 강해지는 데 잘 써주마.'

늑대의 시체.

벌써 머리 부분의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인간과 완전히 다른, 액체에 가까운 혼백이 온천처럼 끓어오르는 꼴이 보였다.

난 한쪽 손을 뻗고 겁도 없이 그것들의 마력을 빨았다.

"...늑대라."

이들은 숲의 자식들로 태어났다.

흉포한 야성, 두꺼운 가죽, 날카로운 이빨을 지니고 태어난 야생의 사냥꾼.

그들은 언어를 쓸 수 없었으나 동족을 향한 정이 있었으며, 사랑하는 것의 기쁨을 알았다.

허나 그들이 다쳤을 때. 

죽음을 원통해하던 늑대가 썩은 혼백을 부르니, 검은색 에너지는 늑대의 몸으로 강물처럼 밀고 들어왔다.

그 다음부터 늑대는 늑대가 아니었다.

-내가 늑대인가, 인간인가.

마수는 고뇌했다.

늑대의 감정과 인간의 감정은 달랐다.

늑대의 감각과 인간의 감각도 달랐다.

그러나 두 개는 혼란스레 서로를 탐하며 합쳐지기 시작했고, 늑대의 영은 뒤섞인 혼백을 정제하는 데 실패하였다.

결과는 마수화.

정신과 육체의 부조화를 겪으며 끊임없이 괴로움에 시달리는 생물의 완성되었다.

"...마수."

퍼뜩 눈을 뜨니 세상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장례식이 그래서 필요했던 걸까.'

보링턴 영지에서 사람이 죽으면, 아이리스의 사제들이 처리했다.

내가 직접 본 적은 없으나 영지전이 끝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장례. 종교의식. 사령술사.

이 모든게 마수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아마 그렇겠군.'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수통을 쿰척이며 검은 책을 들여다보니 내용이 상당수 바뀌어 있었다.

[이름] 유진

[등급] 견습생 - 6개월 추정

[마력 총량] 약 88 다르마 

[신체 능력] 키 6피트, 몸무게 180파운드

마력 총량이 30 다르마 정도 늘었고, 뭣보다 아래쪽 설명문이 바뀌었다.

[하급 사령 기사 / 성적 : D]

[사령의 화살을 쏠 수 있음. 그러나 타격술도, 방패술도 많이 모자라며 마력 효율도 처참함. 그래도 마력 총량은 높음.]

[기사 시험 합격 확률 : 불가능할 것 같음.]

'에라, 이 새끼야.'

평가 진짜 박하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페이지가 아니었다.

다음으로 종이를 넘기자 마음을 보듬어 줄 만한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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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란트리 퀘스트 수행 현황]

기사 시험을 위해 달성해야 할 점수 : 50

현재 점수 : 4 (+2)

-보링턴 영지의 나술 처치 : 

귀속자 유진은 횡령을 저지르던 악적 나술을 결투를 통해 단죄했다. (하급, +2점)

-아인베르트 통행로의 세 늑대 처치 :

귀속자 유진은 아인베르트 통행로 인근 숲에 잠복한 마수 셋을 처치했다. (하급,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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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이구만.'

이렇게 점수를 쌓아 기사 시험을 보는 게 골자. 기사가 되는 게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 새삼 느껴졌다. 나야 검은 책이 있으니 별도로 증거물을 모을 필요가 없겠으나...

다른 기사들은 열심히 증거나 증인을 모아야 하겠지.

[현재 귀속자의 수준은 10점 이하임.]

[따라서 원래는 하급 사령 기사를 위한 커리큘럼이 추천되어야 하나...]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책과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 못 봤기 때문이었다.

[귀속자의 영혼에서 특이한 점들을 발견함.]

[이는 정신 이상에 해당.]

-나 정신병 없다.

[귀속자는, 1년 이전의 기억이 아예 없음.]

1년 이전.

이세계에 오기 전의 기억들은 책이 해석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난 조금 당황했지만...

책이 굳이 설명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넘어갔다.

[또한 마수의 혼백을 흡수한 건 매우 이레귤러한 일임. 정상적인 사령술사라면 이런 선택을 할 이유가 없는데, 더 황당한 건 그 일을 치루고도 부작용이 없다는 거임.]

"쩝."

이에 대해 난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도 그런 평가를 들었던 사람이니까.

[이에 따라 본 서는 귀속자의 커리큘럼을 전면 수정함.]

'그 말은...?'

[귀속자는, 고위험군 마법을 선택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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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본 서는 귀속자가 최고의 효율을 내길 원함.]

-최고 효율이라고...?

[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

검은 책이 말을 이어갔다.

[억울한 약자에게 자비를 베풀 수 없고, 죽어가는 동료를 지킬 수 없으며, 사랑하는 이들에게 안심을 줄 수 없음.]

기사도 이야기는 조금 의외였다.

사령 기사한테도 덕목이 있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란트리 퀘스트의 내용 역시 도덕적인 것을 보면... 이상할 건 없었다.

[또한 본 서가 가르칠 수 있는 마법은 최대 15개이므로.]

[본 서는 귀속자에게 최고 효율의 선택지를 제공 해야함.]

책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이해했다.

그리고 책이 제시한 커리큘럼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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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법 - 침수형] 

[위험][전공 : 인퀴지터]

[귀속자는 자신의 내면세계로 침수해 명상할 수 있음. 사령의 기억을 토대로, 죽은 자가 가지고 있던 기술을 흡수함.]

[주의 : 꿈속에서 깨지 못하면 영원히 그 안에 갇히거나, 영혼이 파괴될 수 있음.]

[포식 - 육체 변형] 

[위험][전공 : 뮤테이터]

[귀속자는 마수의 신체, 타인의 신체를 흡수해 그 특징을 일부 적용할 수 있음.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음]

[주의 : 마수화가 가속될 가능성 있음]

[마수화] 

[위험][전공 : 아바타]

['승천'의 하위 마법임. 이를 통달해야만 '승천'을 배울 수 있음.]

[자신의 혼백을 전부 육신에 주입하여 마수의 형태로 변화함. 그 효능은 영혼의 격에 비례하며, 후유증 역시 마찬가지임.]

[주의 : 변신 해제에 실패할 경우 영혼이 변질되어 마수화됨.]

* 주의 : 

이번 선택은, 귀속자의 전공을 결정함.

따라서 검은 책은 위 세 개의 마법 중 하나만 가르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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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무슨.'

살벌한 부작용과 리턴을 가진 것들이 보였다.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흡수한 혼백의 기술을 뺏어와...? 이딴 게 교육자료에 실린 '공식적인' 기술이라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양자물리학이 있는 느낌이었다.

일단 [명상법-침수형] 같은 경우.

흡수한 혼백의 기술을 뺏는 말도 안 되는 특징이 있었다. 

예컨데 소드마스터의 혼백을 얻으면 그의 검술을 뺏어올 수 있고, 대마법사의 혼백을 얻으면 마법을 뺏어올 수 있다는 의미였다.

책이 부연했다.

[물론 모든 기억과 마법을 다 뺏을 순 없다. 이 길을 선택하면 너의 세부 전공은 인퀴지터가 되고, 기억 소거, 기억 조작 등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전공 선택이라. 2차 전직 개념이구나.'

포식 역시 좋은 마법이었다.

'일단 힐이 된단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

시체의 세포를 뜯어 몸에 융화시키는 강화 시술이었지만... 

이는 동시에 치료술이기도 했다.

몸에 영구적인 변화를 동반한단 점만 빼면, 부상 상황에서 이만큼 절실한 놈이 없겠다.

[마수를 포식할 때마다 근력은 무조건 상승하는 경향을 보임.]

난 좀 아연해졌다.

'심장이 떨리네. 대체 얼마나 강해지는 거야? 아니. 다른 사령기사들도 이런 걸 배운다는 건가?'

그리고 마지막 선택지는...

'마수화.'

설명문도 다른 기술들에 비해 좀 단순했는데, 리스크도 커 보였다. 검은 책에게 물어보았다.

-이걸 배워야 승천을 쓸 수 있다고? 승천이 뭔데.

[말 그대로임.]

[스스로의 영혼을 현실 세계에 물질로 강림시키는 것. 육신과 영혼의 완전한 합일. 그로써 사령기사는 일시적으로 준신의 지위를 얻음.]

-그래서 뭐가 되는데.

검은 책의 답변은 구체적이고 확실했다.

[신이 됨.]

['영'자체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것 외엔 어떤 타격도 입지 않음. 의지만으로 시선 이내의 물리 정보를 왜곡하고, 법칙을 바꿈. 이를 일컬어 화신Avatar이라고 함.]

-아니, 그럼 마수화가 제일 좋은 거 아냐?

[맨 마지막으로 '승천' 할 수 있던 사령 기사는 200년 전에 죽었음.]

-음...

밸런스 게임이 너무 심했다. 

마음으로는 남의 기억을 흡수하는 기능이 탐나긴 하지만...

지금 목적은 살아남는 것.

어쩌면 치유의 효능이 붙은 [포식]이 가장 나은 선택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근데 그것도 아냐.'

두 기술 모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지금 당장 힘이 안 돼.'

내일 나보다 열 배 강한 마수를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지금 당장 근본적인 힘을 주는 건 마수화 하나밖엔 없었다.

하지만 당장 마수화를 배우기엔 다른 두 선택지가 모두 탐났다.

-셋 다 배우고 싶은데.

[어리석음. 하나만 대성하는 것도 어려움. 아무리 귀속자의 영혼이 이레귤러라도, 두 가지 이상의 길을 걸은 인간들은 예외 없이 단명하였음.]

-그래?

검은 책이 갑자기 한 문장을 툭 던졌다.

[단 한 명 빼고.]

-한 명...?

[그건 기밀임.]

책은 그 얘길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다른 얘기를 했다.

[또한 귀속자는 저 마법들을 다 배워도 '하급' 사령 기사 수준임.]

[사령기사 시험 응시생들의 상대가 아예 안 됨.]

-뭐라고...?

그건 좀 어이가 없었다.

지금 나도 성인 남자 열 명은 그냥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령기사 '시험 응시생'의 상대가 안 된다니?

'아니, 대체 파워 인플레가 어떻게 되먹은 거야? 이 세상은?'

그리고 카밀라는 대체 얼마나 강했던 걸까.

[초인끼리의 싸움에선 숙련도가 가장 중요함.]

[귀속자가 사령의 화살을 '배우자마자' 사용할 수 있었던 건 상당히 희귀한 케이스에 속하나, 다른 기술은 그렇게 못 할 것임.]

[방심하지 말고 몇 기술의 숙련도를 높이는 데 집중하길 바람.]

'숙련도라...'

[애초에 사령의 화살도 숙련되면 수십 개를 한 번에 날릴 수 있음.]

바로 이해했다.

이쯤 토론했으면 더 이상 고민할 게 없었기에, 난 선택지를 골랐다.

[그대의 선택을 확신하는가?]

고개를 끄덕이자 책에서 검은 마력이 흘러나왔다.

'하아... 이걸로 고민 하나는 해결했군.'

검은 책을 덮고, 쨍한 햇살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좋았다.

지금 당장 배가 몹시 고프고, 목이 마르다는 걸 제외하면.

내가 조난을 당했단 사소한 문제만 제외하면 아주 좋은 날이었다. 

'가보자.'

나는 비틀비틀 일어서 물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걸었다. 일단 마셔야 할 건 물.

언젠가 마차가 올 테니, 그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

오늘은 비가 내렸다.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 날씨. 

난 나뭇가지에 매달아 놨던 옷들을 전부 동굴 안으로 옮겼다.

동굴 속에 앉아 비를 보고 있으니...

문득 허무해졌다.

'늦네에... 마차...'

촤르르륵. 

거칠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세상을 회색으로 칠하는 중. 

숲은 진흙투성이가 되었고, 동굴 안으로도 물이 들어왔다. 난 비가 쏟아지는 세상을 보며 생각했다.

'저, 이러다간 할아버지가 되어 버린다구요?'

조난을 당한 지 벌써 14일이 지났다.

무두질도 안 한 마수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오랜 시간 동안 수염도 깎지 못한 내 모습은 사령 기사보다는 드루이드나 야만인 같았다.

"...이걸 이렇게 억까해?"

지난 14일.

나는 소형 마수들과 두 번 더 싸웠고, 동물들을 사냥하며 살았더란다.

그 결과 사령 화살을 쏘는 솜씨가 비약적으로 늘었다. 

[사령 화살은 기본적이면서도 강력한 원거리 공격 수단임.]

[숙련도에 따라 화살을 여러 개로 만드는 것도, 충격을 강하게 하는 것도, 유도 기능을 부착하는 것도 가능함.]

그 이유는 바로 토끼들 때문이었다.

토끼들.

초식동물 주제에 얼마나 잽싸던지.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해도 이들보다 반사신경이 밀렸고, 최고 속도로 사령 화살을 날려도 놈들은 쫑긋하고 피했다.

그 덕에 한동안 밥을 굶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에 맞춰 내 사령 화살은 더 정교하고 매서워졌다.

처음엔 20m 정도가 한계였던 화살은 이제 50m 멀리 있는 사과를 정확히 꿰뚫었고.

집중해도 0.5초 이상 걸리던 시전 시간은, 집중하지 않는 0.3초의 찰나로 발전했다.

게다가 토끼만 사냥해 본 것도 아니라.

다람쥐, 이름 모를 설치류, 곰 비슷한 생물, 늑대, 지네, 마수 등의 고기를 다 먹었고, 냄새 차이를 블라인드 테스트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물론 90%는 검은 마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나...

나도 이제 어딜 가서 사냥꾼이라고 자부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지경이 되는 동안, 마차는 한 대도 안 왔지.'

보링턴 영지와 아인베르트 백작령을 잇는 고갯길. 

비록 준마로 5일이 걸리고, 중간에 마을이 적지만 꽤 자주 마차가 오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2주가 지나도 마차가 오지 않았으니...

'뭔가 좆됐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한 1년 동안 여기 죽치고 있는 게 제일 좋은 선택이겠다.

하지만 언제 마수가 나올지 모르고, 내 인내심도 바닥나고 있었다.

맛 없는 식사.

누린내 나는 고기.

염분 보충을 위한 짐승의 피 마시기(극도로 비위생적).

그 짓을 하다 보니 딱 한 문장이 생각나더라.

'영혼은 삶을 강요하는 폭군이라.'

이렇겐 살 수 없었으므로, 공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진 공격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내 행동반경은 적어도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에 한정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 전략대로 할 순 없었다.

다른 시냇물을 구할 때까지 움직이고, 수분을 보충하면 다시 떠나는 등...

더 공격적인 전략을 택해야 했다.

그리하여 내 나이 스물다섯.

난 청춘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장거리 도보 여행을 시작했다.

*

-탁!

마력으로 강화한 다리가 땅을 박차면, 몸은 바람처럼 공기를 갈랐다. 

일반인보단 빠르고 준마보다는 느린 속도.

그러나 내가 말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험한 숲속을 가로지르면서 짐승처럼 뛰논단 점이었다.

[귀속자의 신체 강화는... 전보다 수준이 한결 나아진 상태다.]

토끼를 사냥하면서 별짓을 다 해본 내게 숲속의 걸림돌이나 나무뿌리, 수풀 등은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탁, 탁, 탁!

그러다 토끼의 귀라도 보이면 바로 사냥을 시작했다.

'영혼은 삶을 강요하는 폭군이라.'

검은색의 섬전이 순식간에 빚어지고.

차마 야생동물이 피할 수 없는 속도까지 개량된 그것은, 죽음처럼 쇄도해 토끼의 경추를 아작냈다.

-퍽!

-끼기긱!

죽어가는 토끼의 목을 비틀어 편안하게 해 준 다음, 그것의 피를 꿀렁꿀렁 마셨다.

-꿀꺽. 꿀꺽.

주변에 시냇물이 있으면 이런 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수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 딱 봐도 주변에 시냇물이 없으면 그냥 피를 마셔야 했다.

비린내가 나지만 뭘 어쩌겠는가? 

수분 섭취를 못하면 사람은 죽고 마는 것을.

'나는 피를 마시는 새다.'

그렇게 산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며칠 지났지?'

해가 떠오르고 달이 떨어지고 하는 것의 반복.

이쯤이면 아인베르트에 도착할 만도 한데, 중간에 길이라도 잃었는지 수염만 자라고 도시라곤 끝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나 진짜 길 잃었나?'

햇살이 지붕처럼, 흙바닥이 침대처럼 느껴질 때 즈음.

슬슬 겨울의 냄새가 날 때 즈음에야, 나는 인간을 만날 수 있었다.

"누, 누구냐!"

"젠장! 산적이야! 전투 준비해!"

속으로 매우 기뻤다.

이게 얼마만에 보는 사람이지, 하고.

하지만 그들은 나만큼 반갑지 않은 것 같았다.

'마차를... 요새의 방벽처럼 세워 놓았군.'

이들은 정규군에 가까운 세력이었다.

흉갑, 헬멧, 타워 쉴드, 장창.

이들은 보링턴 마을 병사들보다 훨씬 강해 보였으며,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훈련도 받은 것 같았다. 그들이 외쳤다.

"산적 놈! 손을 들어라!"

"자, 잠깐. 저거 근데 산적 맞아? 야인 같은데? 어렸을 적에 부모한테 버려진 거 아닐까?"

"일단 보고부터 해!"

사람이랑 대화를 안 하고 살아서 그런가?

입을 열기 어색했다.

그래도 난 그들에게 최대한 똑바르게 말했다.

"저는 산적이 아닙니다!"

"거짓말. 그렇게 말하는 놈치고 산적이 아닌 놈들은 없었다!"

'그건 그래. 본인이 게이인 걸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은... 게이다.'

내가 저들과 싸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와중.

고급스레 장식된 마차에서 귀족스런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튀어나왔다.

"멈춰라!"

"...에스톤 경!"

그는 나를 찌릿, 하고 째려보았다.

"전부 무기를 내려. 놈은 산적 일당이 아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상대하는 놈들은 일정한 곳에 진을 치고 생활하니 씻는 게 용이하다. 옷도 남들에게 약탈하면 되고. 그러나 저 인간을 봐라."

"..."

그들이 날 말똥하게 바라봤다.

"제대로 씻는 것 같나?"

"안 씻은 것 같습니다."

"수염 관리도 안 되어 있고. 옷은 이미 넝마가 되었다."

'왜 폭언을 하고 그래.'

하지만 스스로의 모습을 보니 거짓은 아니었다.

바지는 이미 찢어져 빈티지한 뭔가가 되어버렸고, 셔츠는 바위에 비벼 때를 지운 결과 구멍투성이였다.

"저놈은 산적 무리에서 도망 나왔거나, 그냥 조난 당한 백성이다. 내게 데려와라."

근 한 달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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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실력 좀 볼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

다른 이들과 대화하지 않으면 퍽 심심해지는 게 본능이었다. 그건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기에...

낯선 사람들의 얼굴이 꽤 반가웠다.

'전반적인 복장은 고급스럽군.'

국가의 정규군은 아니다.

하지만 통일된 버건디 계열의 정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한 집단에 소속된 자들이리라.

그리고 이들을 대표하는 건 갈색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남자, 에스톤이었다.

그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동양인! 그대는 누구인가. 도저히 평범하게 보이진 않는군."

"저는 보링턴 영지의 유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산적은 아니겠군. 반갑네. 나는 에스톤 그리브래더라고 하네. 영지는 없지만 황송하게도 남작의 위를 하사받았지."

에스톤 경이 걸어나와 악수를 청했다.

아틀라스 제국엔 남작들이 많았으니, 그들의 특권의식은 심하지 않았다. 손을 맞잡자 굳은 살과 찌릿하는 마력이 느껴졌다.

굳은 살을 보니 실력 있는 검사.

우린 서로를 노려보았다.

"...자네. 사령술사였군. 야만전사나 드루이드인 줄 알았는데."

"사령 기사입니다."

"사령술사나 기사나 그게 그거지."

"...음."

그건 좀 그런데.

"어쨌건 이렇게 곤란할 때 초인 병력이 제 발로 찾아오다니, 운명의 여신께선 참으로 현명하시군. 일단 악취가 나니 몸을 좀 씻고 막사로 오게나."

내 몸에서 냄새가 좀 났던가?

분명 내 코에선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다른 이들은 코를 막는 등 유난을 떨었다.

남작 역시 악수 이후 열심히 손수건으로 손을 닦는 걸 보니...

다들 깔끔을 떠는 족속들처럼 보였다.

'뭐. 중이 절에 맞추는 것이지.'

하는 수 없이 난 최소한의 예절, '샤워'를 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 동양인에게 옷다운 옷을 주도록."

"예."

인근 냇가에서 목욕재계를 한 나는 깔끔한 모습으로 남작을 찾아갔다.

서커스단처럼 크게 펼쳐놓은 막사 안쪽.

남작은 침대 옆 탁자에서 피곤한 눈빛으로 앉아 있었다. 그가 날 보더니 놀랐다.

"이야. 수염을 깎고 제대로 된 옷을 입으니 다른 사람 같다. 키도 크고, 근육량도 많아. 지금까진 왜 그런 꼬라지로 다닌 건가."

"그야 조난을 당했으니 그렇죠."

"아, 미안하군. 앉게나." 

그의 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혈관에 흐르는 푸른 마력이 은은하게 타올랐다.

검은 마력과 푸른 마력이 어떻게 다른진 모르겠으나... 

쓸 수 있는 기술이 다르단 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나저나 유진. 조난이라니? 요즘은 마수가 많아져 이쪽 길은 막혔을 텐데."

그래서 마차가 오지 않았던 거구나.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이해하고 그에게 말했다.

"딱 마수들이 많아지기 전에 제가 갔었나 봅니다."

"어이쿠. 운이 지지리도 없군."

"제일 큰 마차를 골랐는데, 마부는 마수들에게 습격당해 굴러떨어졌고, 저는 운 좋게 살았죠."

"뭐 마력이 있으니 허무하게 죽진 않았겠지. 그 후로는?"

"조난이었죠. 토끼를 잡아먹고, 그 피를 마시면서 살았습니다."

"아, 그 악취가 피의 냄새였군. 썩은 피와 짐승의 오물 냄새. 사실 산적이 아닌 줄은 이미 알고 있었네. 그렇게 냄새가 나는 놈들은 산적 집단 내부에서도 차별당하거든."

난 꼬운 눈으로 에스톤을 노려보았다.

'이 새끼. 나 멕이는 거 맞지?'

하지만 한 편으론 이해가 갔다.

한 달 동안 이도 제대로 닦지 못한 나였다.

토끼의 피를 마시고 야생동물의 고기를 구워먹고, 온몸에 흙을 묻히며 살았으니...

그 남자의 입에선 무슨 냄새가 났겠는가.

'추한 복장과 냄새 때문에 산적의 오해를 벗다니... 역시 인생은 살고 봐야 한다.'

"어쨌든 잘 왔네. 그럼 본론부터 말하지. 보통 우리는 사령술사를 편제하지 않으나, 지금은 고양이 손 하나가 부족한 시점이라네."

그가 테이블 위의 지도를 가리켰다.

거기엔 커다랗고 빨간 X자 모양의 표식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는 산맥 중앙부의 공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 그리브래더 상단은 아인베르트령에서 보링턴 영지로 가다 산적들을 만났네. 본대가 아닌 정찰 병력이었지."

'상단이었구만.'

어쩐지 태도에서 부티가 난다 했다.

그가 말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10 실버의 통행세를 요구하였으나, 거절했지."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린 그 인간 쓰레기 놈들을 본보기로 효시한 다음, 적합한 곳에 막사를 세워 전투에 대비중이었네. 거기가 여기고."

"예...?"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산적들을 죽이고 그냥 진행하면 될 일이 아닙니까. 왜 여기 계신 겁니까."

"물론 그렇지. 우리가 여기서 시간을 끌수록 뒤에 실은 물건도 썩어갈 것이네."

"..."

"그러나 나는 남작이야."

에스톤은 강렬한 눈빛을 하고 내게 강조했다.

"영토 없는, 땅 없는 귀족이지만 귀족이란 말일세. 사람들은 말하겠지. '에스톤, 그리브래더 가문의 수치. 황제께서 직접 내리신 남작의 위를 받고도 산적에게 겁을 먹었다. 하! 이 얼마나 겁쟁이인가.'"

롤랜드 경의 불충한 모습과 보링턴 남작의 냉혹한 모습이 동시에 생각났다.

중세인들은 신분제에 비판적이면서도, 한 편으로는 수용적이었다.

자신의 의무를 받아들이는 눈앞의 귀족처럼 말이다.

"산적들의 주 수입원은 결국 노예 매매지. 저들은 민간인을 서른 명 정도 나포하고 있는데... 당연히 그들 중엔 여자도 있네. 그들이 어떤 일을 겪을지 상상이 되는가?"

"..."

난 눈살을 찌푸렸다.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얘긴지 알 수 있었다. 남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걸 외면하는 귀족에게 영지를 줄 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네. 아니. 그 전에, 내가 내 아들 앞에서 자랑스럽지 않을 거야."

"..."

"자네도... 본인을 기사로 칭한다면 남작 위를 노리는 것이 아닌가. 혹여라도 나중에 남작이 되면 이 말을 기억하게나. 도움이 많이 될 거야."

그는 씨익 웃으며 윙크했다.

동네 삼촌이나 선배 같은 바이브.

아마 같은 길을 걷는다 생각하여 나오는 거겠지.

어쨌든 그가 하는 말은 명확했다.

"원하시는 건 산적의 소탕이겠군요."

"그렇다네."

에스톤 경의 말에 따르면 산적을 만난 건 삼일 전. 

그들의 거처를 알아낸 건 하루 전이라 했다.

"이런 오지에 산적이 들어온다는 건 이상한 일이야. 이렇게 험준하고 마수가 많은 곳에 게으른 범죄자들이 어찌 살겠나. 그래서 보통 여길 건너는 이들은 산적 걱정을 안 했는데...

놀랍게도 이번엔 산적단의 규모가 꽤 크다네."

"얼마나 큽니까?"

"이백에서 삼백 명일세."

"아니."

이백에서 삼백.

전쟁 영화에 익숙한 이들에겐 낮은 숫자겠지만, 현실에선 절대 그렇지 않았다.

열 명의 성인 남자들은 '집단'으로 인식된다.

그 앞에선 싸움 좀 한다는 이들도 주눅이 들기 마련이니...

사람이 백 명 모여 오와 열을 맞춘 순간, 그들은 개인이 아닌 군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군은 마흔 명밖에 없지."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정확히 40명의 인원을 가진 상단.

이들의 장비가 좋다고 한들 일대 오의 병력 차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이 세상엔 예외가 있긴 했다.

그것은 바로 초인.

마력을 이용할 수 있는 특수 병력의 수였다.

"대신 우리에겐 기사 후보생들이 여섯 있네. 뭐, 아주 처참한 수준이네만 그래도 마력은 다룰 줄 알지. 거기다 내가 있지 않은가."

에스톤의 눈빛을 보니 결의와 두려움이 동시에 보였다.

그 역시 이 싸움의 결말을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달려들 뿐이니... 이는 용기나 만용에 가까운 의무감이었다.

"이백 명을 거느릴 정도면 상대편에도 초인이 있을 텐데요."

"중급의 사령술사라고 들었네."

"그렇군요."

나와 남작은 말없이 몇 초 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자네는 아인베르트에서 새 시작을 하려는 거겠지. 기사로서. 혹은 탐험가로서."

"어찌 아셨습니까."

"자네 가방에서 나는 동전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건장한 남자가 천 실링을 동화로 들고 다니면서, 대도시로 간다면 어떤 부류의 인간이겠나."

"..."

시골에선 은화를 쓸 일이 많이 없다.

상단의 경영자는 그 사실을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러니 나와 함께 싸워주게. 보상은... 내가 지금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많이 줄 수가 없군. 전투 하루당 천 실링씩 지급하겠네."

'아니. 뭐라고?'

천 실링이면 은화 열 개다.

언제부터 내 몸값이 이렇게 올랐단 말인가?

"그리고 아인베르트 남작령까지 데려다주지."

"..."

"지금 옷이랑, 그 거지 같은 장비 대신 제식 장비도 주겠네. 어떤가?"

제식 장비는 대충 풀 세트로 오백 실링이 넘었으니.

그렇다면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우린 악수를 하고 약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해 한 장씩 나눠 가졌다.

*

늦은 밤.

기사 후보생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둥글게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천천히 다가가자 그들의 눈이 아주 커졌다.

"...!"

그럴 만했다. 

이 세상에서 동양인은 진주해 이남으로 가야 볼 수 있는 인종. 

동양인 사령 기사가 얼마나 색다르겠는가. 어쨌든 그들에게 말했다.

"에스톤 경이 여기서 식사하라 하셨는데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이오."

아직 앳되어 보이는 기사 후보생들이 엉덩이를 움직여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타닥, 타닥.

별이 많이 보이는 밤.

모닥불 위에선 향신료를 뿌린 돼지 고기가 기름을 줄줄 흘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산속에서 한 달 정도 살아온 내겐 정말이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갈색으로 익어가는, 윤기가 좔좔 도는 돼지의 몸통 고기.

벌써부터 입에 침이 흥건하게 고이고 동공이 확대됐다. 그걸 본 후보생 하나가 웃었다.

"드시오. 우린 이미 조금 먹었으니."

"배려 고맙소."

난 짧게 인사한 후, 커다란 돼지 갈비뼈 여러개를 잡아다 동시에 뜯었다. 

바짝 구워진 바삭한 껍질.

그에 반해 수분이 있어 촉촉한 육질. 

이빨이 무지하게 뜨거웠지만 한 입 먹으니 절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이야... 거 참 잘도 드시네. 천천히 드시오."

"읍읍."

"근데 당신은 어쩌다가 여기까지 흘러온 거요?"

"읍, 읍읍. 읍읍읍."

"알겠소. 거 참."

어느 정도 고기를 뜯자 천국에 온 기분이 들었다.

한 달 동안 산에 갇혀서 토끼 피를 빨던 나다.

그러다가 먹는 제대로 된 돼지고기의 맛?

이건 어떤 음식과도 비교를 할 수 없었다.

어쨌든 밥을 먹으니 이제 사회적 소통에 대한 욕구가 올라왔다.

보통 이런 아이스 브레이킹의 시작은 자기 소개인 법.

이는 중세에서도 다르지 않아, 붉은색의 머리칼을 가진 기사 후보생이 입을 열었다.

"난 에밀리. 종자 생활 6년 하고 에란트리 퀘스트 중이지. 아틀라스 성전 기사단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모닥불에 비춘 볼살이 하얗고, 속눈썹이 남자보다 길고, 골격이 얄상했다. 무엇보다도 흉곽이 튀어나온 걸 보니 가슴이 커 보였다.

여자였다.

'여기사들도 꽤 수요가 있지.'

원래 기사와 영애 사이엔 로맨스가 많이들 생기는 법. 그런 일을 원치 않는 귀족들은, 주로 여기사들에게 영애의 호위를 맡겼다.

"나도 비슷해. 종자 6년 하다가, 이번에 마력을 인계받았다. 에란트리 퀘스트 중이지."

"난 종자만 10년 했다. 제기랄. 기사 팬티만 10년을 빨래했지. 개좆같은 인생."

"아버지께선 나한텐 물려줄 영지가 없다더군. 그래서 망나니로 살다 정신 차리고 후보생 됐다."

제각각의 사정.

하지만 목적은 비슷했다.

아직 정식 기사 서임을 못 받은 이들은 에란트리 퀘스트를 수행해야 했으니...

이들은 좁게 보면 내 경쟁자요, 넓게 보면 동지들이었다.

"근데 넌 뭐냐?"

"..."

"나이에 비해 마력량이 심상찮은데. 보통 사령술사들은 그 나이가 되면 미쳐버리지 않나?"

'이런 식으로 인식되는구나.'

오랜만에 본 사람들의 얼굴.

이들은 나랑 비슷한 처지인데다, 내 이야기를 호기심 있게 들을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야기 보따리가 술술 풀어져 나왔다.

영지전을 뛰던 일.

롤랜드 경의 눈에 띈 일.

경호 대장과 결투한 일 등을 대충 이야기 해주자, 그들이 놀랍다는 듯 웃었다.

"그런 특혜를 받다니? 아, 사령 기사 쪽은 다를 수 있겠군."

"솔직히 질투가 좀 나려 하는데... 뭐. 저 정도 마력량이면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몇 후보생들은 내가 종자 생활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의 질투를 품었다. 

하지만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다. 

내 나이가 그리 젊지 않았고, 신분도 평민이었기 때문이었다.

"파란만장하군. 그나저나 시골은 다 그런가? 관리가 제대로 비리를 해 처먹었네."

"경호 대장이 마력을 못 다루는 것도 이상해. 시골 가면 대우받고 살긴 편하겠다."

"하. 대우를 받으면 뭐 해. 그래봐야 남작의 첩이나 될 텐데."

"하기야 에밀리... 넌 얼굴이 못생겼으니 잘 해봐야 첩이지."

"진짜 뒤지고 싶어?"

"아니. 그러니까 같은 기사 후보생 중에 신랑감을 찾으라고."

"누구? 너? 꺼져. 줘도 안 가져."

"브랜드 이 새낀 맨날 차이네..."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의 앞.

그 잡담을 듣자 마음이 따스해졌다.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곳은 비슷비슷하단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그러던 중 브랜드라는 후보생이 말했다.

"그나저나 사령 술사는 어떻게 싸우나? 내가 실력을 좀 보고 싶은데."

"사령 기사야."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우린 맨 처음에 너 야만인인 줄 알았어. 드루이드거나."

"아니라니까."

"일어나. 약식으로 대련하자. 마력을 쓰지 말고."

브랜드가 일어나 검과 방패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 내가 메이스가 없다 하자, 수행 인력이 철제 메이스를 가져왔다.

놀랍게도 대장장이 영감이 만든 것보다 품질이 더 좋았다.

'역시 상단은 경제 규모가 다르구나.'

그렇게 들어오라고 방패와 메이스를 들고 서 있는데, 갑자기 브랜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너 뭐하는 거야?"

"왜? 들어와."

"너 타격술 안 배웠냐?"

"제대로 배운 적은 없어. 다 막싸움이지."

"이 새끼... 진짜 야만인이잖아."

그러자 브랜드가 자리에 앉는 게 아닌가.

그 태도가 약간 무례해 쏘아붙였다.

"이렇게 사람 무시해도 되냐?"

"넌 내일 아침이 되면 타격술부터 배워라. 그리고 작전에 참여할 순 없어."

"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라 에스톤 경이 정하는 거지."

갑자기 얼어붙은 분위기.

-타닥, 타닥.

브랜드의 의도가 사악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를 이렇게 무시하는 건 좀 그랬다. 오히려 이들이 전우였기에 그랬다.

"그럼 넌 뭘 할 수 있는데?"

"이런 거."

난 손가락 끝에 검은 마력을 모아 사령 화살을 만들어냈다.

그 수는 무려 두 개.

사령 화살의 끝은 몹시도 날카로웠고, 두께는 엄지만 했으며, 검붉은 마력으로 타오르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그걸 발사하자...

-퍽! 팍!

브랜드 뒤쪽에 있던 죽은 나무가 퍽! 하고 갈라졌다. 석궁보다 조금 강한 위력. 더 수련하면 발리스타 수준의 충격력을 낼 수 있었다.

"..."

그걸 본 기사 후보생들의 눈이 등잔만하게 커졌다.

"아직도 내가 쓸모 없는 거 같냐?"

"음. 미안하다. 내가 잘못 생각했군."

브랜드가 꼬리를 내리자 다시 분위기가 유해졌다.

"신기하네. 너도 사령 '기사'라며? 근데 장거리 공격을 처음부터 배운다고? 우린 저런 거 못 하잖아."

"못 하긴 왜 못해. 우리도 활 쏘는 법 배우는데."

"근데 이럴 거면 사령 기사가 아니라 사령 레인저 아니냐? 유진?"

"..."

"야. 유진이 화났다. 푸흐흡. 아니,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그렇게 밤을 지새우던 와중.

갑자기 한쪽에서 우다다다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렸다.

-적습! 적습이다! 적습!

-뿌우우우우!

뿔피리 소리.

우린 모닥불 근처에 앉아 있다가 거의 동시에 일어섰다. 

비록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동료들과 함께 어깨를 맞대고 싸우는 건, 영지전 시절의 데자뷰를 떠올리게 했다.

"미구엘. 너는 적습을 알리러 가라. 그리고 사령술사..."

"사령 기사라니까."

"어디 실력 좀 볼까?"

브랜드가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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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에 소질이 있군?

적습. 

공터에 불길한 뿔나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기사 후보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본대 방향으로 달렸다.

캠프의 인원들은 남작까지 포함해 사십.

단 몇십 초도 지나지 않았으나, 군인들은 완전무장을 한 채 캠프에서 분주하게 뛰어나왔다.

-휘리릭!

어두운 숲의 저편에서 수십 발의 화살이 비처럼 날아왔다. 

"화살이다! 막아!"

창병들이 자기 키만 한 타워쉴드를 들어 하늘을 가렸다.

-퍼버버벅!

나를 비롯한 기사 후보생들은 그저 반사신경만으로 빈틈을 찾았으나, 이들은 그럴 수 없었다.

에스톤 경이 직접 나와 말했다.

"부상 인원은?"

"셋입니다."

"적들은."

"근접 교전을 피하고 숲으로 도망갔습니다."

"유인책이군. 숲으로 불러 상대하려는 계략이다."

화살의 품질은 조잡했다.

맞아도 죽을 것 같진 않았지만 병사들에게 두려움을 주긴 충분하리라. 

후보생 브랜드가 말했다.

"그럼 어떡합니까? 여기 있으면 계속 갉아 먹힐 겁니다."

"우리도 똑같이 해줘야지. 병력을 나눠 숲으로 간다. 최대한 많은 사상자를 내고 돌아와라."

에스톤 경 역시 초인.

귀족들은 지휘관이란 상식이 있으나, 아틀라스 제국의 경우 좀 달랐다. 이들은 훌륭한 부사관이자 전투원이기도 했다.

"미구엘. 제임스. 볼튼. 너희는 나와 함께 여기 남는다. 적의 양동작전을 대비한다."

"알겠습니다."

"유진. 브랜드. 에밀리. 콜트. 너희는 산적의 유인대를 추격해라. 최대한 많은 사상자를 내. 다만 다칠 것 같으면 바로 퇴각해라. 너희 다치면 내가 힘들다."

"예."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기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땅을 박찼다. 

초인 네 명의 그림자가 희미한 윤곽만을 남긴 채 짐승처럼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중세의 밤은 어두웠다.

특히 조명도 없는 깊은 숲속이라면 더.

허나 이미 달빛에 익숙해진 내 몸은 한 마리 동물처럼 숲을 달렸다.

-탁!

땅을 박차면 몸이 화살처럼 날았다.

나무가 막아서면 무게중심을 옮겨 피하니, 기사 후보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랐다.

"...빠른데? 유진."

"나도 한 달 정도 조난당하면 저렇게 되나?"

어느새 뒤를 따라오는 기사 후보생들.

마력으로 강화된 그들의 날렵한 몸은 일반 병사들보다 훨씬 빨리 숲속을 누볐다.

하지만 달빛의 미묘한 반사광을 따라 짐승처럼 달리는 날 따라잡진 못했다.

난 이쯤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와 다른 숲이군.'

제대로 살펴보니, 산적들이 심어둔 목책과 어지럽게 뿌려진 곰 덫들이 보였다.

나뭇잎으로 교묘하게 가려진 함정들.

이것들을 밟으면 초인이라도 발이 잘릴 수 있었다.

"숲속에 함정이 있다. 조심해."

"나도 알아. 벌써 대장 노릇을 하려고 하네."

"이 씨. 난 몰랐는데?"

"밤눈이 왜 이리 밝아?"

그렇게 몇십 초 정도 더 뛰자...

산적 나부랭이들의 뒤꽁무니가 보였다.

부랑자 같은 낡은 옷차림.

그에 비해 형형하게 다듬어진 녹슨 무기들.

어둠 속에서 횃불조차 켜지 않고 밤눈에 의지해 나아가는 모습들.

그러나 그들의 육신에선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으니...

이들은 내 사냥감이나 다름없었다.

'영혼은 삶을 강요하는 폭군이라.'

사령 화살. 

검붉은 빛으로 타오르는 섬전 두 개가 공중에서 형체를 갖췄다. 

한 달 동안 토끼들을 사냥하며 가다듬은 기술이,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공기를 찢고 날아가자-

-푹!

"꺼헉!"

폭력적인 반응이 뒤따랐다.

엄지 두께의 화살이 통째로 산적의 가슴을 꿰어버렸다.

흉부에서 폭발하듯 피가 솟구쳤고, 그는 버티지 못한 채 앞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뭐, 뭐야! 왜 그래!"

"씨발. 갑자기 넘어져... 커헉!"

날아간 화살은 두 개.

산토끼를 사냥하던 내 화살을 상대로, 산적의 넓은 등은 그저 좋은 과녁이었다.

녀석들은 야생동물만큼 감이 좋지도 반사신경이 빠르지도 않았다.

-퍽!

나뭇가지를 아예 부숴버린 사령 화살이 산적의 등판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그대로 심장이 관통당한 놈은 뒤로 날아갔다.

"이, 이 개새끼들! 초인이다!"

"산개해!"

대략 산적의 수는 서른 가량.

그들 중 여럿이 뒤쪽으로 활을 겨누는 순간.

-촤르륵.

내 옆에서 다시 사령 화살이 만들어졌다.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탈력감이 들었지만, 이 정도는 별것 아니었다. 앞으로 여덟 발을 더 쏘고도 육체를 강화할 마력이 남아 있었으니 그랬다.

녀석들이 시위를 매기기도 전에 내 화살이 어둠 속을 날아가자, 그들은 활을 든 채 나무에 꽂혀 즉사했다.

브랜드가 놀라서 말했다.

"아니, 딜레이도 없이 그 기술을 쓴다고? 너 진짜 정체가 뭐냐? 사령 레인저?"

"좀 닥쳐!"

-휘리릭!

어둠 속에서 발사되는 조잡한 화살들.

방향도, 위치도 알 수 없는 고속의 화살은 인간에게 극한의 공포를 줄 수 있었다.

허나 기사 후보생들은 달랐다.

그들은 하품하는 표정으로 편안하게 방패를 들어 공격을 흘리고, 무식하게 숲속을 달렸다.

"어...어어!"

그렇게 근접전을 하게 된 산적들이 무기를 뽑아 들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보통 무협 소설에서 일 합이란 용어를 쓰는데, 산적들에겐 이조차 성립되지 않았다.

그들이 출수하기도 전에 기사들의 검이 장기를 뭉텅뭉텅 잘랐기 때문이었다. 

-텅!

"어쭈. 막아?"

방패로 막아도 소용없었다. 

후보생들의 검격이 뱀처럼 휘어 목을 꿰뚫었다. 회수가 느리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안정적 자세를 취하고, 몇 산적들이 시간차 공격을 하면 뒤로 빠져서 쉽게 피했다.

놀라운 무위였다.

'역시 후보생과 기사의 차이가 크군.'

그러나 롤랜드 경보단 현저히 약했다.

이들의 검에선 푸른 불꽃이 타오르지 않았다. 후보생들은 여러 명이 협공하면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공격하는 전법을 사용했는데, 이렇게 하다 보니 속도가 느렸다.

하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닌 법.

세 명밖에 안 되는 기사 후보생들이 천천히 학살하자 산적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으, 으아아악!"

"살려줘!"

그들은 산개해서 도망가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그런 오합지졸들이라 후보생들이 당황해했다.

"어, 잠깐만. 산개한다! 잡아!"

"상대가 수십이잖아!"

우린 넷. 

후보생들은 빠르고 강력했으나 숲에서의 이동에 익숙치 않았다. 

그들이 복귀하면 정보가 흘러갈 터. 

전원 사살하는 게 제일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유진!"

"맡겨둬."

다행히 우리 편엔 내가 있었다.

난 나무 위로 올라가, 원숭이처럼 다른 나무를 향해 도약하면서 사령 화살을 갈겼다.

-휘리릭!

그것은 곡예.

공중에서 발사된 화살이 25m 거리에 있는 숲속의 적을 향해 쐐애액- 날아갔다.

떨어지는 와중에 화살을 맞추는 건 사냥꾼 아저씨도 혀를 끌끌 찰 만한 난이도였으나, 내겐 문제가 아니었다.

"윽!"

두 개의 화살이 정확히 산적의 팔과 다리를 꿰뚫었다. 난 부상당한 이를 무시하고 다시 다른 나무를 향해 뛰었다.

-쐐애액!

그리고 공중에서 화살을 발사했다.

공중에서 발사된 사령 화살이 미사일처럼 작은 관목들을 뚫고, 산적들의 생명을 거뒀다.

"끄아아악!"

말 그대로 사냥. 

그들 역시 응사했지만 애초에 화살도 조잡했고, 조준도 엉망이라 내 주변에 올 수 없었다.

"에잇! 나와! 나오란 말이다!"

여섯 놈이 패닉에 빠져 도망가는 걸 멈추고,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영혼은, 삶을 강요하는 폭군이라.'

숲의 어둠 속에서 사령 화살을 날렸다.

-푹!

"끄흐으윽...!"

석궁에 달하는 충격량으로 팔다리를 얻어맞았으니, 균형을 유지할 리 없었다.

난 그들의 중앙으로 순식간에 떨어진 다음, 메이스로 산적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퍽.

그걸로 한 놈.

뒤늦게 정신 차린 산적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이, 이 새끼 죽여!"

"와아아아악!"

무려 다섯 명.

옛날이라면 쫄았겠지만...

지금의 나는 나술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했다.

-퉁!

내리치는 산적의 검을 방패로 튕기자, 그가 중심을 잃고 주춤주춤 밀려났다.

동시에 뒤쪽으로 사령 화살을 발사.

"윽!"

고개 뒤쪽으로 날아간 마력이 산적의 머리를 꿰뚫는 동시에, 앞으로 진각을 밟으며 메이스를 내리찍었다.

-콰직!

산적의 머리가 오목 머리가 되었다.

다른 산적 둘이 이때 안 찌르면 죽는다는 듯 내게 창을 찔렀지만 소용없었다. 뒤로 구르면서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고, 당황한 그들을 향해 다시 사령 화살을 날렸다.

-푹! 

야만적인 싸움법이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후우..."

주변을 둘러보니 살아있는 산적이 없었다.

그렇게 전투가 끝났으면 사령술사의 특권을 누릴 시간.

난 이들의 시체에 들어있던 혼백을 빠르게 흡수하였다. 

'흠... 역시. 구체적인 기억은 보이지 않는구나.'

기지 구조, 두목의 정체 등을 선택적으로 볼 수 있다면 좋았겠다. 하지만 혼백마다 강렬하게 느낀 감정,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한이 느껴질 뿐. 구체적인 정보를 엮긴 힘들었다.

'역시. 검은 책이 가르쳐야 할 정도의 일이군.'

어쨌든 녀석들의 혼백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검은 마력의 재료가 됐다. 

완전히 '소화'하려면 반나절 이상 걸리겠지만...

그래도 일부는 내 마력으로 치환되었기에, 이렇게 사령을 흡수할 때마다 화살의 최대 개수가 늘고 고갈되었던 마력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게다가 컨디션까지 좋아지는 효능이 있었으니.

'눈앞이 맑아.'

나는 무한 동력 살인 기계와 다를 바 없었다.

검은 책이 부르르 떨어서 잠깐 확인하니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에란트리 퀘스트 갱신]

[귀속자, 사령 기사 후보생의 임무는 아인베르트 인근의 금수 같은 산적들을 토벌하고, 나포된 인원들을 구출하는 것임.]

[보상은 상점 6점.]

간략화된 글자들.

게다가 상점 6점이면 기술이 세 개였다.

'하지만 기분이 좋진 않군.'

이렇게 주도적인 위치에서 사람을 죽여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걸로 퀘스트를 깨고, 보상을 받는다니?

이게 게임처럼 보이나?

'그만 생각해.'

지금은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었다.

'빠르게 가자. 최대한 많은 혼백을 모아야 해.'

나는 일어나서 땅을 박차고 뛰었다.

그렇게...

대략 20분도 걸리지 않아 도망치던 산적의 잔당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끄, 끄흐윽! 살려주세요!"

그러다 멍청한 놈도 만났다.

놈의 다리가 커다란 곰 덫에 찝혀 있었는데, 본인들이 덫을 깔고 위치 계산을 못한 것 같았다.

"끄아악!"

난 그의 머리를 붙잡고 본대로 귀환했다.

*

첫 전투는 우리의 대승이었다.

캠프의 분위기는 희망적이었다.

"삼십 명을 죽였다? 숲속이라 추적이 쉽지 않았을 텐데."

"대부분의 공적은 유진이 올렸습니다."

"허?"

에스톤 경이 날 바라봤다.

"얼마나 공적을 세웠길래?"

"산적 서른 정도를 죽였는데, 그 중 스물을 유진이 죽였습니다."

"대단한 게 아닌가."

"아주 효율적으로 싸우더군요. 근접 기술이 좀 형편없지만, 그래도 마력을 다루는 데 익숙합니다."

남작이 그 말을 듣고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날 바라보더니 웃었다.

"자네. 살인에 소질이 있군?"

"음... 그... 칭찬... 감사합니다."

이딴 게 칭찬?

허나 에스톤 경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게다가 자네가 산적 한 명을 생포해 와서 일이 좀 쉽게 풀릴 수도 있네."

"지금 심문하고 있습니까?"

"그렇네."

입맛이 씁쓸해졌다.

'심문이라면 고문이겠지.'

고문당할 그의 처지에 아주 약간의 동정심을 느꼈다. 

아무리 산적인들 다 이유가 있어 그렇게 되었을 텐데...

새삼 중세는 잔혹한 곳이 맞았다.

"일단 막사에서 쉬게. 짧게 자는 것도 좋고. 하지만 또 새벽에 깨울 수도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렇게 막사로 돌아가려 하는데, 병사들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이런 천인공노할 씹, 새끼가! 야, 이 새끼 죽여!"

"야. 진정해. 진정하라고! 씨발!"

욕짓거리까지 들리는 상황. 

나랑 에스톤 경은 서로를 가만히 보다 그쪽을 향해 걸었다.

나무로 된 의자 위.

아까 내가 잡아 온 산적이 밧줄에 묶여 있었다. 얼굴이 푸르딩딩한 걸 보니 이미 '심문'을 당한 것 같았다.

에스톤이 낮게 말했다.

"무슨 일이냐?"

"이, 이놈 목걸이를 좀 보십시오."

목걸이에 걸려 있는 건 금이나 은, 황동조차 아니었다.

그것은 작은 살덩이들이었다.

말라붙은 고기로 이뤄진 목걸이.

'저게 뭐야. 별 거 아니잖아. 그냥 고기 목걸이... 잠깐.'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귀...?"

사람의 귀였다.

커다란 성인 남성의 귀도 꿰여 있었지만...

그보다 작고 말랑거리는 귀도 꿰여 있었다.

왜 저 귀는 작을까?

선천적으로 귀가 왜소한 사람일까, 아니면.

'아니. 너도 정답을 알잖아.'

"...이런 건 처음인가? 유진?"

"..."

남작이 하는 말을 씹는 건 커다란 무례.

하지만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가슴 속에 분노와 허망함이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이걸로 확실해졌군. 이들은 귀 없는 악마의 추종자야."

악마.

남작의 입에서 나온 단어의 어감이 몹시 불쾌했다. 종교적 개념을 말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생물을 지칭하는 것 같았기에 그랬다.

난 주먹을 꽉 쥐었다.

'...'

잠시라도 이들의 인권을 생각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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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술의 격이 올랐다.

-산적이면 무조건 죽여도 되는가?

푸른 꽃밭 여관에서 이 주제로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내 의견은 [재판이 필요하다]는 쪽.

대학물 먹은 나는, 이 무식한 중세인들을 토론에서 바를 수 있다 생각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날 하루만큼은 마을 사람들 전체가 내 적이 되고 말았다.

내 '급진적인' 주장은 바스러지다 못해 가루가 되어버렸다.

-여러분! 이 동양인을 좀 보시오! 산적에게 재판이 필요하다는군! 재판이!

-아이리스시여... 대체 왜?

-재판 비용은 누가 대란 말인가? 유진. 산적을 거기까지 데려가는 돈은?

마을 사람들의 어조는 생각보다 감정적이었고, 심각했다. 심지어 악기 연주를 하던 이들도 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봤으니...

엄청난 부담이 느껴졌다.

호감도를 덜 쌓아놨다면 그때 맞아죽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어쨌든 말을 꺼내기 무섭게 사람들이 새떼처럼 몰려와 날 갈궜다.

-유진. 자네 상식이 부족해서 그래. 놈들은 사람을 납치해 힘줄을 자르고 노예로 팔아넘긴다네. 지금 그들이랑 우리가 같은 인간이라 말하는 건가? 그럼 실망인데.

-아니. 재판이 나쁜 인간 착한 인간 가려 하는 게 아니잖아요?

-당연히 선한 이들만 재판에 세워야지.

-예?

-판사는 거의 다 남작, 백작님들이라네. 바쁘다고. 자네는 연쇄 살인범, 아동 유괴범 놈들을 재판장까지 이송해 값비싼 행정 절차를 치르라 하는데 이야말로 억지가 아닌가!

-...

수 시간 동안 설득해도 나만 공격받는 상황.

평소 친절했던 마을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사납게 굴어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그랬지.'

당시엔 중세의 인프라가 달라서 그렇겠거니 하고 넘겼는데, 지금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아니, 씨발. 애 귀를 왜 자르지?'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난 에스톤 경에게 물었다.

"...악마가 힘을 줍니까? 귀를 바치면?"

"악마들이 사라진 지 벌써 이백 년이 지났네. 저건 일종의 미신이야."

"그럼 왜 그럽니까. 귀 없는 노예가 더 싸지 않습니까?"

"유진. 이게 첫 에란트리 퀘스트인가보군. 이유는 묻지 말게나. 나도 모르니까."

당연하다는 듯 냉소적으로 말하는 에스톤 경의 옆얼굴. 그는 씹어뱉듯 말했다. 

"순진함은 버리게. 앞으로 이런 꼴을 자주 보게 될 테니."

난 의자에 묶인 산적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흙먼지가 묻었고, 다리는 곰 덫에 다친 상태였다. 많이 처맞았는지 얼굴이 푸르딩딩했다.

-빠악!

"커헉!"

그의 뺨을 억세게 후려쳤다.

피, 땀, 눈물과 함께 날아가는 산적의 이빨. 일단 그에게 물어봤다.

"귀로 목걸이는 왜 만든 거냐? 재산이랑 연관도 없는 것을."

그러자 갑자기 산적이 고개를 퍼뜩 들더니, 흉흉하게 웃는 게 아닌가. 그리곤 내가 전혀 예상 못한 행동을 했다.

-퉤!

그가 내 부츠에 침을 뱉었다.

좀 당황스러웠다.

"그게 그렇게도 궁금하냐? 이 사악한 사령술사 새끼!"

그의 눈엔 넘칠 정도의 원망이 서려 있었는데... 본인이 잘못한 건 생각도 안 하는 눈치였다.

"내 말 안 들어서 잘랐다. 왜? 불만 있냐?"

"뭐?"

"귀 잘린 악마니 뭐니 해도..."

"..."

"이렇게 귀라도 하나 자르지 않으면, 멍청한 노예 새끼들이 말을 듣는단 말이다! 우리가 밥도 먹여 주는데...!"

"...뭐?"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포로를 납치한 건 저들인데, 밥을 줬으니 오히려 역정을 부려도 된다?

논리와 상식의 간극이 너무 깊었다.

'아니. 얘 지금 나랑 비슷한 인간이 맞나?'

게다가 다음에 나오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너도 네 이득을 위해 사람을 죽이잖아!"

"..."

"사령을 흡수하는 주제에. 너는 애들 귀 좀 안 잘랐다고 착한 인간이냐!"

'와...!'

그것은 합리화였다.

세상 사람들 다 이렇게 산다는 추잡한 합리화. 그 꼴을 보니 한숨부터 새어 나왔다.

어디부터 설명할지 감도 안 잡혔지만, 병사들의 표정이 뚱한 걸 보니...

혹시라도 놈의 말에 홀리는 놈이 있을 것 같아 굳이 말했다.

"아이고. 이 모자란 새끼야."

"뭐?"

크고, 똑똑하고, 분명하게.

다들 들으라는 듯 말했다.

"너는 행인을 죽이고, 그 어린 자식의 귀를 잘라 전리품으로 걸고 다녔다. 그런 새끼랑, 병사로 출진해 공을 세운 사람이 같아? 사람을 죽였으니까? 진짜 넌 그렇게 생각해?"

"아, 아니..."

"하하하하하!"

그러자 브랜드가 호탕하게 웃었다.

병사들도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 이들은 신나서 서로의 어깨를 두들기며 흡족해했다.

"말 잘한다!"

"저거지."

"동양인이 혀에 기름을 발랐군."

사실 현대에도 그런 사람은 있었다.

징집되어 군에 복무하는 이들을 잠재적 살인자라 부르고.

연쇄 살인범에게 복수하려는 사람에게 '죽이면 너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야!' 같은 논리를 들이대는 이들.

그들은 '너도 어쨌든 사람을 죽였어.'라는 문장만 앵무처럼 반복하며, 쾌락을 목적으로 열 명 죽인 사람과 복수를 목적으로 한 명 죽인 사람이 같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판사들도 둘의 형량을 달리 하는데 그들은 왜 그러는 것일까?

내 낮은 지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내가 잘못 생각했군.'

중세에 현대 가치관을 들이대면 안 되는 거였다.

애초에 산속에서 남 눈치 안 보고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다. 이들을 감시할 인프라고 뭐고 없는 상황.

산적들이 약자를 상대로 얼마나 타락할진 현대의 갱단만 봐도 알 수 있었는데...

상식이랍시고 생각을 너무 이상적으로 했다.

'게다가 지금 상황이 여유로운 것도 아니지.'

내일 산적 두목에게 죽을 수도 있었고, 삶이 그리 넉넉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이들을 손쉽게 죽여도 되는지. 

경험치 얻는 기분으로 죽이는 게 옳은지.

그런 걸 따지고 있었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다.

'마음을 고쳐먹자. 뭐가 옳든 이렇게 사는 건 틀린 거다.'

남작이 날 바라봤다.

"좋은 연설이었네. 유진. 자네가 죽일 건가? 이미 중요한 정보는 다 뱉은 것 같은데."

"아, 아니. 잠깐만. 살, 살려..."

"혼백 흡수는 하지 말게나. 원래는 신관을 불러야 하는데 그냥 산에 버려. 자네가 혼백을 흡수하다 미쳐버리면 답이 없네."

에스톤이 내게 검을 내밀었다.

귀족이 자신의 검을 내어주는 것은 인정의 징표. 난 간단히 예를 표한 다음...

-푹!

검을 들어 산적의 턱 아래에 집어넣었다.

"끄윽. 개, 새끼야..."

산적의 원망 섞인 욕설.

병사들은 경건한 태도로 이를 바라보았고, 난 그가 죽는 걸 확인했다. 

왠지 심각해진 분위기.

뭔가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은 눈치라 나는 당당히 말했다.

"오늘, 혹은 내일. 산적들은 전부 죽을 것이오."

그러자 병사들이 환호했다.

"""와아아아아!"""

후보생들도 웃는 걸 보니...

이제야 내가 이 사회에 녹아들 준비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무채색의 새벽.

하루의 어둠이 끝나고, 새로운 해가 떠오르려는 시간.

에스톤 경은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라 일렀다.

-굳이 오래 끌 것도 없지.

-이번엔 사령 기사 유진의 공이 아주 컸다. 분대 하나를 섬멸했으니 녀석들은 방비를 강화했을 터. 분명 새벽에도 잠을 못 잤을 거다.

-...

-그리고 인간의 집중력은 아침이 시작될 때 바닥나기 마련이다. 우린 이때를 노려 공격한다.

새벽의 어두운 숲속.

우린 숲을 헤쳐가며 표범처럼 뛰었다.

-우린 모루의 역할을 맡아 캠프 앞에서 농성한다. 그 사이, 너흰 망치의 역할을 맡아 적들의 측면을 파괴해라.

간단하지만 정석적인 양동 작전.

우린 옆쪽의 절벽에 올라 산적들이 만든 캠프를 바라보았다. 절벽의 높이는 약 8m 정도. 산적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물이 훤히 보였다.

"일단 방책이 있군."

나무로 이뤄진 방책이 원형을 이뤘는데, 중간중간에 감시를 위한 나무 망루가 있었다.

안쪽엔 텐트 여러 개가 세워져 있었는데, 꽤 규모가 컸다.

"유진. 어떡할 거냐."

"일단 망루부터 다 무력화 시킬게."

"근데 괜찮냐? 너?"

"뭐가?"

난 브랜드를 바라봤다.

그의 눈엔 걱정과 의심이 서렸다.

"사령술을 배우면 감정이 그렇게 민감해진다던데."

"내가 워낙 감정이 희박한 놈이라."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어쨌든."

전투를 앞둔 상황.

이제부터 사람을 죽여야 했다.

영지전을 할 적엔 굉장히 가슴이 뛰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정신이 명료했다.

'이들을 죽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겠지.'

착하게 살라고 말해서 들을 것들이 아니다.

이들이 에란트리 퀘스트의 제물이라면, 내가 강해지는 재료가 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바치고 강해지리라.

목적의식이 확실해지자 마음이 단단해졌다.

"그럼 우리도 출발하겠다. 유진. 타이밍은 대충 맞추자."

"좋아."

더 볼 것도 없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8m.

일반인이라면 떨어져서 머리가 깨질 수도 있는 높이지만, 마력으로 강화된 신체는 그 절벽을 발로 딛으며 달려갈 수 있게 해줬다.

'몸이 가볍다.'

검은 책 왈, 의지를 지탱하는 건 감정과 목적이라.

의지를 가로막는 죄의식이 없어 그런지, 마력의 흐름이 어느 때보다도 명료했다.

강화된 육체. 

목적의식으로 충만해진 몸은, 검은 마력을 채찍질하며 새벽 공기를 갈랐다.

-탁.

대략 2m에 가까운 점프.

튀어나온 나무 말뚝을 붙잡고 위로 뛰어서, 난 순식간에 산적들이 낄낄거리는 망루 위로 올라왔다.

'...이 새끼들. 아주 잘 먹고 잘 사네.'

후줄근한 옷차림.

그러나 야생에서 살던 나보단 몰골이 나았다. 어린애들 귀나 자르는 주제에, 씻을 건 다 씻고 먹을 건 다 먹는 듯한 바이브를 보니 참기가 힘들었다.

"어?"

그것이 그들의 유언이었다.

"너희의 영을 해방해주마. 살지 마라."

석궁의 활시위가 풀리는 듯한 파공성과 함께, 검붉은 화살 두 개가 녀석들의 가슴과 머리를 각각 꿰뚫었다. 

즉사.

암살까진 아니었지만, 그들은 알람조차 느끼지 못한 채로 죽었다.

조금의 가책도 없이 녀석들의 혼백을 빨아들였다.

'하아...'

차오르는 검은 마력.

어제 조금 소화시킨 마력과, 이들의 혼백이 갈려 나가면서 공급한 마력이 어우러지며 핏줄을 타고 흘렀다.

난 망루를 박차고 뛰며 고속으로 달렸다.

반쯤 졸고 있는 경비들. 

모닥불 앞에서 시시덕거리고 있는 놈들.

'아, 제길.'

그리고 텐트 사이에 나신으로 쓰러진 여자가 보였다. 온몸이 멍투성이였지만 일단 살아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고.

한쪽 귀가 잘린 걸 보니 막대한 분노가 솟아올랐다.

'...'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허공에 화살을 만들어 닥치는 대로 쏘았다.

-퍽!

약 10m 거리에서 발사되는 석궁 수준의 화살 세례.

장궁을 당기는 동작조차 없이, 재빠른 죽음이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탈력감과 함께 생겨난 검은 화살들이 그들의 영혼을 해방했다.

-푹! 푹! 푹!

"으, 으아아아악! 씨바아아알!"

알몸의 여자가 퍼뜩 일어나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날 보더니, 이를 악물고 텐트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마 거기에 포로들이 잡혀 있겠지.

"적습! 적습이다!"

망루에서 땡! 땡! 땡! 땡!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날 목격한 놈들이 조잡한 방패와 칼을 들고 모였다. 그 수가 적어도 수십.

졸고 있었어도 부담스런 병력이었다.

다만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검은 책이 말하되 마력을 움직이는 건 의지라.

의지를 구성하는 것은 이성과 감정이니, 그것이 얼마나 깨끗하게 합일되었는지가 중요하다 했다.

"주, 죽여!"

"젠장! 사령술사야! 두목을 불러와!"

그 차이는 사령술의 격이 나눠질 차이.

산적 놈의 조잡한 화살이 내 머리 옆쪽을 핑! 하고 스쳤지만, 난 약간의 두려움도 없이 내면을 관조하였다.

"막아! 방진을 짜라!"

조잡하게라도 창과 방패를 이용해 방진을 만드는 놈들.

난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심상은 어느 때보다 완벽해.'

검은 마력의 상태는 최상.

내면에선 혼백의 소용돌이가 들끓었고, 그것은 의지의 인도에 따라 표출되기만을 원했다. 

난 산적들을 바라보았다.

'저런 이들조차 살고자 할 것이니. 저런 이들조차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통받을 지어다. 그러니, 영혼은 삶을 강요하는 폭군이라.'

두려움.

생에 대한 의지.

도망에 대한 충동.

정렬된 의지는, 그런 심상을 더 익숙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이제 공중에 흩어진 검은 마력은 그저 에너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의지만으로 만지고, 조작하고, 날려 보낼 수 있는 물질이자 나의 신체. 순간 내 머리가 한없이 맑아지며 사령술의 격이 올랐다.

그들을 죽인다.

하나의 목적이 혼백들의 방향을 통일시켰다.

"저, 저게 뭐야?"

눈을 뜨자, 내 눈에 보인 건 주위를 둘러싼 화살의 무리였다.

검은색의 혼백으로 타오르는 섬전들.

그것들은 오와 열을 맞춘 군인처럼 뾰족한 끝을 정렬시킨 채, 공중에서 희생자를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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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해치웠나!

그것은 깨달음이었다.

심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경험.

-이건 죄가 아닌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할 일 아냐? 이건 너무 끔찍한데. 나는 지금 뭘 하는...

마음속에 울려 퍼지던 ADHD적 불안들이 재로 변하자, 영혼에 고요가 찾아왔다.

항상 잡음이 몰아치던 정신이 조용해진 상태.

무언가에 집중하고, 의지를 투영하기 제일 좋은 상태였다.

마음이 잔잔한 물처럼 평온해졌다.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지.'

내 주변을 둘러싼 건 수십 산적의 무리.

인간의 몸이 강하다 한들 수십의 창날을 튕겨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왁자지껄 욕하고 위협하는 소리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집중은 마약과도 같았기에, 

나는 아무것도, 무엇도 두렵지가 않았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단 하나.'

눈앞의 적들을 죽이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

산적들을 죽이고 에란트리 퀘스트를 해결하는 것.

그것에만 의지를 집중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될 일이었다.

몸속 모든 마력이 토해져 나왔다.

진한 탈력감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마법 자체는 제대로 실행됐기 때문이었다.

'...되네.'

순식간에 등장한 수십 개의 사령 화살들.

평소 단 두 개만 컨트롤할 수 있던 화살들은, 분신술이라도 쓴 것처럼 그 숫자가 늘었다.

악몽에서 나올 법한 불타는 화살들이 뾰족한 대가리로 산적들을 겨눈 채 공중에 떠올랐다.

"뭐, 뭐야! 씨발!"

"아니... 화살이?"

산적들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하긴, 나라도 그렇겠다.'

타오르는 검붉은 화살 수십 개가 공중에 도열한 채 명령을 기다리는 모습은 내가 봐도 장관.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건 그들이 보는 마지막 쇼가 될 예정이었다.

화살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날아라. 저들을 전부 꿰어 죽여라. 너희가 얼마나 증오하고 싫어했는지, 지금 내게 보여주어라.'

영은 비록 폭군같은 면이 있긴 하나...

그것은 삶이란 혼돈 속에서 의지를 발하는 주체. 정신을 일점에 집중하자 수십의 화살들이 내 명령에 복종했다.

-파아앙!

발사.

파공음이 흙먼지를 휘날리며 주변의 자갈을 터지게 했고, 검은 투사체들은 소용돌이의 형상을 띄며 고속으로 쇄도했다.

원한으로 단조된 화살들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가 순식간에 산적들의 몸을 '날려' 버렸다.

-뻐억!

"크하아악!"

보통 화살이라면 꿰인 상대를 쓰러지게 하겠지만.

내 격정으로 빚어진 화살은 산적들의 뼈를 뚫는 것도 모자라, 맞은 이들의 몸을 공중에 날려버렸다.

"씨, 씨발! 미친, 무슨 화살이!"

"컥! 왜..."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아아아아악!"

마법의 발동 자체는 1초도 소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이 만들어낸 건 그저 지옥이었으니...

"그, 끄으으..."

"미친..."

산적 수십이 꼬치에 꿰인 채 땅 위에 스러졌다.

몇은 화살에 관통되어 망루에 산 채로 꽂혔고, 누군 가슴이 뚫린 채 땅에 말뚝을 박았다.

목에 화살을 맞은 이들은 아예 화살촉 때문에 목이 떨어져 나갔으며, 팔이나 다리에 맞은 이들도 충격량 때문에 몸을 덜덜 떨었다.

그렇게 참상이 일어난 자리마다 폭죽처럼 피가 흩뿌려졌으니...

그야말로 학살.

산적들의 캠프는 물감을 난사한 현대 미술처럼 피로 가득하였다.

-탁!

그리고 그 틈은 기회.

나는 앞으로 뛰쳐나가며, 시체들의 가슴팍에 붙은 혼을 마구잡이로 빨아들였다.

-촤르륵!

맺혀 있던 검은색의 몽글한 사령들을 몸 안으로 빨아들이자, 약간의 전능감과 함께 마력이 소량씩 회복되었다.

-아, 안돼! 죽기 싫어!

-내일도 강간을 해야지!

-젠장! 두목이 어제도 날 괴롭혔어!

-왜, 세상은, 세상은 나한테만 운이 없는 거야...

여러 사념들을 한 번에 흡수하는 건 이번이 처음.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해야했다.

"주, 죽어어어!"

패닉에 달려드는 산적의 머리를 메이스로 가격하고, 옆에서 시간차 공격하는 놈에게 화살을 날렸다.

-퍼억!

"히이익..."

하필 왼쪽 눈에 들어간 화살은 놈의 뒤통수를 뚫고 나왔다. 놈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뒤로 쓰러졌다.

허나...

'끝이 없네.'

이렇게 잘 싸우고 있음에도 끝이 없었다. 

사람 백 명은 은근히 많은 숫자라...

캠프엔 아직도 많은 산적 대가리들이 바글거렸다. 어떻게 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 표정으로 날 노리는 놈도 있었고, 그저 공포에 질려 도망가는 놈들도 있었다.

나는 보이는 시체마다 혼백을 흡수하면서 버텼다.

그러다 보니 절로 무리가 왔다.

'씨... 좀 무리가 되는데?'

카밀라 왈, 혼백을 흡수하면 사령술사는 간질 발작을 일으키며 정신이 나가버린다 했다.

그 감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보통 흡수를 하면 한 혼백의 기억이 살짝 보이는데...

지금은 그것이 몇 배로 나타났다.

수 개의 목소리가 귀에서 들리고, 수 개의 기억이 만화경처럼 겹쳐 보였다.

뿐인가? 산적들이 죽어가면서 느끼던 감정의 파도가 지금 내 분노를 흐리게 만들었으니.

전투 능률도 떨어졌고, 당장 미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나한텐 묘한 확신이 있었다.

'돼.'

지금까지 열 개에 달하는 영혼을 흡수해 왔고,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카밀라가 말한 사실이 진짜라면.

진짜로 내 영혼의 격이 비인간적으로 높다면 나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역시 예상대로였다.

'할 만하네!'

거의 초 단위로 시선들이 사라지면서 혼백이 흡수되었다. 

그럴 때마다 소량의 검은 마력이 차올랐으니...

한 명을 흡수할 때마다 사령 화살 세 개를 쏠 수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깡!

나는 방패를 앞세운 채 산적의 공격을 후려치며 달렸다. 

"미, 미친! 막아!"

"어떻게 막아, 저걸!"

조잡한 방패를 땅에 박은 다음에 앉아있는 산적들. 메이스로 부수기엔 방패의 벽이 견고했다.

하지만 내 실력은 이제 거기에 막힐 정도가 아니었으니.

'죽어라.'

-쐐애애액!

화살들이 유도 미사일 처럼 굽어지면서 방패 뒤쪽의 산적들을 요격하였다.

"커어어어억!"

"미친! 화살이 휘었어!"

U턴을 하고 돌아올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허나 공중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방향을 수정할 정도는 되었다.

그것들이 방패 위를 휘어지며 꿰뚫자, 그들은 억울한 소리를 지껄이면서 죽었다. 

이것은 일방적인 사냥.

산적을 꿰어 죽이고, 때려죽이고, 죽을 때마다 흡수해 일부로 삼으니.

"으, 으아아아악!"

"씨발! 악마다! 악마야! 도망쳐!"

"미, 미친! 막아! 막으라고!"

산적들이 차마 당해내지 못하고 오합지졸처럼 도망쳤다.

-뿌우우!

그때.

전투 나팔이 울리면서 성문 쪽 망루 하나가 통째로 무너졌다. 

'아! 에스톤 경의 사병들이군.'

기다란 파이크와 타워쉴드로 무장한 병사들이 전열을 맞춰 천천히 진격했다.

"""우! 우! 우!"""

우렁찬, 통일된 수십 명의 함성은 거의 백 에 가까운 산적들을 압도했다. 그 기세에 눌린 이들이 어기적거리며 엉망으로 퇴각했다.

"이, 이 새끼들 뭐야!"

"흐, 흐으윽... 난 죽었어. 엄마, 엄마..."

"저 새끼들 삼십밖에 안 돼! 떼로 덤비면..."

-촤르르륵!

에스톤 경의 병사들은 굳이 교전하지 않았다.

1열이 타워쉴드를 땅에 쾅! 하고 박자.

2열에 있던 병사들이 석궁을 들고 방패 위에 얹었다.

다음에 할 건 하나밖에 없었다.

-핑!

수십에 달하는 화살비가 산적들을 말 그대로 꿰어버렸다.

"끄어어억!"

"아아아악!"

울려 퍼지는 집단 비명.

몇몇이 그들을 향해 달려 들었지만, 1열의 병사들에게 창으로 찔려 죽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석궁을 장전하는 사병들을 보니 마음이 든든했다.

'저긴 괜찮고.'

다른 쪽에선 다섯 기사 후보생들이 깽판을 치는 중이었다.

"크아아아아!"

에밀리가 메이스와 방패를 앞세우고 마치 짐승처럼 망루 하나를 들이받자-

-콰광!

망루의 목조 건축물 자체가 완전히 박살나며, 위층에 있던 산적들이 아래로 후두둑 떨어지는 게 아닌가?

마치 인간 공성추를 방불케 하는 위력.

난 좀 벙쪘다.

"제길! 무슨 일이야."

"사, 사람이 어깨로 들이받았어!"

"그게 말이 되냐!"

흩날리는 흙먼지.

무너진 건축 자재에 깔려 죽는 산적들.

하지만 에밀리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휘두르자, 건축 쓰레기들이 수류탄 파편처럼 튀었다.

브랜드를 비롯한 기사들이 그 분진 사이로 와아아악! 하면서 달려나와 산적들을 도륙하기 시작하였다.

날아가는 목들을 보니 모공이 송연해졌다.

'저딴 게 기사 '후보생'이라고?'

확실히 그녀는 롤랜드 경보다 약했다. 

비유하자면 코끼리와 미어캣 정도.

마력은 거의 십분의 일로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검에서 푸른 불꽃도 나오지 않았으며, 무기술에서도 현저히 낮았다.

허나 산적들을 도륙하는 폼은 강철의 전차가 따로 없었으니...

'그럼 롤랜드 경은 얼마나 강한 거지? 카밀라는...?'

정신이 아득해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아내가 바람을 피는 보링턴 남작도 저것보다 몇 배는 강했으니.

이 세상이 어떻게 힘의 균형을 이루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때였다.

-쾅!

"무슨 짓거리들이냐!"

가장 거대한 막사의 버건디색 천이 걷히자...

끔찍한 몰골을 가진, 반쯤 썩어가는 거인이 머리를 내밀고 기어 나왔다.

'저건...'

그것의 머리 모양은 얼추 사람과 비슷했다.

허나 훨씬 크고, 흉측했다.

거기에 이어진 건 기다란 목과 근육질의 몸체.

살가죽이 이리저리 찢어지고 벗겨져 뼈가 보이는 부분이 많았지만, 검은 마력이 깃든 근육이 흉악하게 부풀어 있었다.

"아..."

그것은 키가 6m에 가까운 언데드 거인.

트롤의 시체를 되살려 만든 사악한 피조물이었다. 그 몸은 썩어가는 근육으로 이뤄져 있었고, 양손엔 대포가 달렸으며, 성기는 잘려서 없었다.

딱 봐도 좆됐단 느낌이 들었다.

'저 능력으로 산적을 해...?'

산적 두목이 중급 사령술사라고 했던 에스톤 경의 말이 떠올랐다.

물론 내가 해야할 일은 하나.

나는 숨도 쉬지 않고, 화살을 만들어 그것의 머리에 연달아 쐈다.

-딱! 탁!

허나 결과는 실패.

사람의 갈비뼈를 쉽게 파괴하는 그것은 거인의 해골에 큰 충격을 주지 못했다.

-크워어어어!

트롤은 에밀리를 조준하더니,

"씹!"

-쾅!

천둥같은 소음과 함께 대포를 발사했다.

어찌나 화력이 강한지, 그 거체가 반동 때문에 뒤뚱하고 흔들릴 정도였다.

에밀리가 있던 자리는 그대로 날아갔다.

마치 어뢰에 맞은 것처럼 토사가 솟아올랐다.

'에밀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인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했다.

"크, 쿨럭!"

다행히 에밀리가 죽진 않았다.

에밀리는 흩날리는 분진 속에서 피를 토하며 걸어나왔다. 저걸 막고도 피만 토할 뿐이라니 대단했다.

어떻게든 대책을 짜려던 그 순간, 

-쿠워어어!

트롤은 쉴 틈도 없이, 다른 손의 대포로 포로들의 천막을 조준했다.

현재 몇 사병들이 뒤로 빠져 구조를 돕고 있지만...

며칠 동안 굶고 고문당한 포로들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들은 가다가 엎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했으니 속도가 느렸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포로들이 고기 완자가 될 상황.

'어림도 없지!'

바로 검은 마력을 뿜어내 더 큰 화살을 만들어냈다. 

화살의 크기가 커질 수록 집중력도 제곱으로 잡아먹었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순간 화력이었다.

그리하여 화살을 거대하게 만드니, 만들어진 건 단창.

그 불길한 마력 덩어리를 한 손으로 잡은 채,

'영혼은-'

트롤을 향해 집어 던졌다.

'내 영혼이 폭군이다, 이 새끼야.'

거리가 멀지 않아 위력이 떨어졌고, 내 던지기 실력은 끔찍했으나.

공기를 찢고 날아가는 마력의 창은 꽤 위력이 강했다.

-깡!

-크어어어억!

그것이 트롤의 대포에 부딪혔다.

마치 종을 치는 것같은 진동음이 울려 퍼지고, 그의 손은 위쪽으로 들렸다.

동시에 그것의 팔에서 굉음이 발생했다.

-쾅!

나의 일격이 포신을 휘게 했던 것일까.

화약을 얼마나 처박았는진 모르겠지만, 폭발이 일어난 건 포로들이 있던 자리가 아니었다.

터진 건 트롤이 장착하고 있던 대포.

-끄어어어어!

트롤의 오른팔 근육이 화려하게 폭발하자, 마치 한강의 분수처럼 썩은 피가 튀었다.

하늘에서 추적추적 썩은 살점들이 떨어져 내리고, 한쪽 팔을 잃은 거대한 트롤은 울부짖으면서 옆으로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그야말로 치명타.

에밀리가 충혈된 눈으로 그걸 바라보며 말했다.

"...해, 해치웠나!"

그러자...

-쿠워어어어!

내가 주목하지 않았던 막사에서 검은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 씨.'

거기서 모습을 드러낸 건 트롤 2호기.

방금 놈보다 더 크고, 흉악하며, 마력량도 많은 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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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부질없다!

내 인생 최대의 위기.

그건 주식값이 대폭 내렸을 때도, 바지를 안 입고 대학교에 갔을 때도, 수능 시험장에 늦게 도착했을 때도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 키 7m의 거인이 나타났을 때.

지금이었다.

"크흐흐! 이 병신새끼들! 감히 우릴 건드려!"

"두목이 너흴 다 죽일 거다!"

산적들의 기세는 올랐고, 우리 편의 기세는 반비례로 떨어졌다.

"아니, 한 마리가 더 나온다고?"

"말도 안 돼. 유진이 열심히 했는데..."

"방심하지마! 저 한 마리가 끝이 아닐 수도 있어...!"

'진짜 쟨 분위기 파악을 못 하나?'

째려보고 뭔가 말하려던 순간. 

갑자기 거대한 트롤이 입을 비죽 벌리고 클클클 웃었다.

-크흐흐. 눈치가 빠른 놈이로구나!

언제나 나쁜 예감은 적중하는 법.

다른 막사 두 곳에서 언데드 트롤들이 추가로 기어 나왔다.

이놈들의 크기는 4m 정도로... 

꽤 작았지만 적어도 내 키의 두 배 정도란 사실은 다를 바가 없었다.

그야말로 트롤 축제.

이제 후보생들도, 에스톤 경도, 병사들도 할 말을 잃었다. 절망감이 아군 사이에 솔솔 피어났다.

'인생이 레전드다.'

일반적인 트롤이라면 이런 불합리한 기분은 들지 않겠지.

허나 저들은 일반적인 언데드가 아니었다.

양쪽 손에 대포를 장착하고, 멀리서 쏴제길 수 있는 고도화된 개체였다. 

심지어 대포가 쇠로 되어 있어 근접전도 할 수 있으니, 두 번째 상대치곤 가혹한 면이 있었다.

그것이 이죽거렸다.

-기사단도 아닌 상단 주제에, 죽을 곳을 찾아 이 누추한 곳까지 오다니.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냐?

"..."

-투항해라.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거나... 산적이 된다면 하루라도 더 살 수 있게 해주마.

인간은 본래 긍지가 있다.

허나 영혼은 삶을 강요하는 폭군이라.

때론 그 어떤 이상보다도, 하루를 더 살아갈 수 있다는 유혹이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병사들 사이에 동요가 퍼졌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들은 동료의 눈치를 보며 덜덜 떨었다. 이때 지휘력을 발휘해야 할 에스톤 경조차 트롤 세 마리를 보더니 아무 말을 못 하는 상황.

하는 수 없이 내가 말했다.

또렷하고, 공터에 꽉 차는 목소리로.

"새끼야. 그럼 애먼 사람 납치하고, 강간하고, 애들 귀를 자르는 데 가만히 있겠냐?"

-크흐흐. 그럼 가만히 있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쾅!

내 말에 아군 병사들이 전의를 다지려던 순간, 트롤이 발로 땅을 내리찍었다. 분진이 흩날리고 미세한 지진이 일었다.

-잘 들어라. 정의감에 경도된 멍청이들아.

그가 지껄였다.

-본좌의 이름은 레이돈 커스. 

-중급 사령술사로, 근 30년 동안 퍼페티어Puppeteer를 수련한 몸이다.

퍼페티어는 사령술 중 언데드를 다루는 기술을 총칭하는 용어였다. 말투에서 자부심, 오만, 열등감이 느껴졌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준비했다. 

-사령술을 연습하고, 가다듬고, 트롤의 시체에 대포를 붙이고, 멋대로 폭발하지 않도록 개조를 거듭했지. 

-오랜 봉인을 찢고 악마들이 다시 나타났으니, 앞으론 그들의 시대가 될 것이라!

-나는 그들의 가장 충실한 종이 되어 영지를 하사받을 것이다. 너희도 생각이 있다면 머리를 조아려라.

"크흐흐!"

"그래! 조아리라고! 씹새들아!"

욕을 하면서 낄낄거리는 산적들. 

아군의 사기는 갈수록 줄어들기만 했다.

"3, 30년이라고 했어. 저 새끼..."

"이길 수 있나? 사령술사 30년이면 백 명은 먹었을 텐데...!"

아군의 사기가 점점 떨어지는 상황. 

난 초조한 눈길로 에스톤 경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얼굴만 시뻘겋게 달아오를 뿐 말을 제대로 못 했다.

'아니, 아저씨. 설전도 전투의 일각이잖아.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설전은 전투의 일종.

이는 각 군의 지휘관이 말싸움을 해 기선을 제압하는 행위로, 영지전에서도 자주 나왔다.

허나 에스톤 경은 말싸움에 소질이 없었다.

"이, 이 나쁜... 산적! 정의롭지 못한 놈!!!"

-크흐흐. 귀족 학교에서 검술은 배우고 말은 못 배웠나 보구나.

'하... 씨. 아저씨, 잘 좀 해봐요.'

오히려 난 안도했기에 답답했다.

안도한 이유는 단 하나.

산적이 이렇게 우리에게 말을 걸어줄 이유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놈이 강했다면 말을 안 하고 힘으로 우릴 죽였겠지.

'에밀리가 대포알을 맞고 살아남은 걸 보면... 의외로 전력은 비등할 수도 있겠다.'

나도 확신은 안 서지만.

적어도 저 레이돈이란 놈이 싸움을 꺼리는 건 확실했고, 이 트롤들을 동원해도 피해가 클 것 같으니 설전을 거는 게 보였다.

그래서 답답했다.

이 설전이 상당히 중요한데, 에스톤 경이 말을 못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유진. 뭐, 할 말 없어?"

브랜드와 에밀리를 비롯한 후보생들 또한 나만 바라보는 상황. 아까도 말을 했으니 이번에도 지휘관 역할을 맡아야 했다.

'이 싸움, 이길 수 있다.'

일단 놈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잠깐. 질문이 있다. 사령술 쓰는 사람으로서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데."

-...뭐냐. 초보 사령 기사.

그는 자신의 '위대한 창조물'에 관심을 가져주는 게 기쁜지 내게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 상황.

난 최대한 평온한 어투로 내뱉었다.

"저 트롤은 7년에 하나씩 만든 거냐?"

그러자 갑자기 공터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언데드 트롤의 숫자는 총 넷.

저 인간이 30년 수련을 한 건 대단했지만...

말을 바꿔보면, 30년 동안 트롤 네 마리 만드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안 했단 소리가 된다.

그것은 물경력이었다.

"저거 하나 만드는 데 7년이 걸린다고?"

-뭔...

"그냥 트롤 잡아서 손에 대포만 붙이면 되는 거 아니냐? 나 같으면 대포 들고 내가 쏘겠다."

그 말 한마디로 전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난 산적들을 둘러보며 적들에게 말했다.

"니들도 힘들었지? 저 냄새 나는 거 옮기느냐. 심지어 저거 고추도 없더만."

"풉..."

결국 산적 중 하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작았지만...

상단원들과 후보생들, 심지어 에스톤 경에게까지 번져나갔다.

"푸, 푸하하하하!"

-...

말은 무서운 것이다.

사람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영웅도 조롱거리가 될 수 있고, 사기꾼들도 리더 취급을 받을 수 있으니 그렇다.

이 전장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트롤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어.'

말이 저 트롤의 힘을 약화시킬 순 없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주는 공포가 많이 사라졌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던 거대한 살인병기들은, 이제 만드는 데 오래 걸리는 데다 고추도 없는, 덩치만 커다란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후보생들의 표정도 덩달아 밝아졌다.

'마음의 짐이 사라졌군.'

이걸로 승률이 20%는 올랐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자 트롤이 분노하였다.

-네 놈이 개발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이느냐! 트롤의 팔에 대포를 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느냐!

"연구비 빼돌렸냐?"

물론 난 디테일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뭐...?

"포신 한 번 휘면 팔 전체가 날아가는 놈을 개발하는 데 30년이 걸려? 그거 만들어서 고작 한다는 짓이 산적들 모아서 여자들 강간하고, 애들 귀 자르는 짓이야? 이야... 진짜. 좆같다."

-...

"내가 봤을 땐 네가 제일 문제다. 에스톤 남작님! 혹시 저런 새끼들 때문에 악마가 봉인된 게 맞습니까? 악마들 돈 빼돌려서?"

이제 산적들 사이에서도 반응이 왔다. 

몇은 자기들이 모욕당한 것에 분노하고 씩씩거렸지만, 소수의 인간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본인들이 생각해도 자기들 인생이 웃긴 것이다.

-악마들은...!

"아, 다 부질없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는 시점.

일부러 그의 말을 끊고 쐐기를 박았다.

"강해지려고 사령 기사가 됐는데! 널 보니 인생을 잘못 살았구나 싶다! 나도 50살 먹었을 때 너처럼 되면 어쩌냐? 인생에 고민이 많다."

-사령술...

"30년 공부하고 뒤에 숨어서 트롤이나 조종하는 새끼. 그러니까 네가 그 나이 처먹고도 애인이 없는 거다. 그냥 닥치고 아이리스 교회나 찾아가라, 이 순결한 동정 새끼야. 그러면..."

-닥쳐어어어!

트롤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7m짜리 트롤은 지축을 쿵쿵 흔들면서 달려왔고, 다른 트롤들은 손의 대포를 이쪽으로 겨눴다.

분노 때문일까.

그들이 대포를 조준하는 속도가 느렸다.

에스톤 경은 말재주가 없었으나 그걸 놓칠 위인은 아니었다.

"전원 산개!!!"

"""산개!"""

그가 큰 소리로 명령하자 40명의 병사들이 사방을 향해 거리를 벌리며 뛰쳐나갔다. 

공포에 짓눌리지 않은 가벼운 마음들.

그것이 육체의 기능을 극한까지 끌어내니, 병사들은 평소의 컨디션대로 빠르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로써, 트롤 대포의 살상력이 떨어졌다.

"가자아아!"

에밀리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트롤의 다리로 달려들어 마구 난도질을 했다. 

화난 4m 트롤이 대포 손으로 땅을 내리찍었지만, 공포가 없는 인간은 더 집중할 수 있는 법. 에밀리는 끝까지 트롤의 손을 보고 굴러서 피하는 기염을 토했다.

브랜드가 내게 달려와서 어깨를 탁탁 쳤다.

"이야. 너 말 잘하는데? 나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는데... 넌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가 있냐?"

"이 정도야."

"이제부터 넌 사령 연설가 유진이다."

'아니, 씨발, 좀.'

기사들도 연설을 한다고.

내가 뭐라 하려는 순간 브랜드가 감쪽같이 튀어 나갔다. 

그때. 7m짜리 거인이 지축을 울리며 내 앞까지 다가왔지만,

"어림없다!"

에스톤 경이 앞쪽으로 돌진해 그것의 팔 힘줄을 베어버렸다. 팔 전체를 자를 수 없으니 힘줄만 베어버리고 빠지는 판단.

그건 매우 정확했기에, 트롤은 날 공격하지 못하고 어그로를 잃었다.

-이 자식이!

그렇게 아군들이 만들어준 작은 틈.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내가 할 일은 따로 있다.'

숨을 죽인 채 주변의 검은 마력을 샅샅이 읽어 들였다.

'...분명 조종자가 숨어 있겠지.'

중급 사령술사와 하급 사령술사의 차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저 거대한 공성 병기 세 마리를 동시에 조종하는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 맞았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저 세 마리를 조종하며 자기 앞가림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조종자를 직접 죽이면 이 전투도 끝이다.

'어딨냐.'

기억을 더듬어봤다.

맨 처음, 첫 번째 트롤이 일어설 때 천막 안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무슨 짓거리들이냐!'

그건 트롤의 걸걸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놈은 전투가 시작된 다음부터 움직이지 않았을 확률이 높으니...

'...찾았다.'

극소량의 검은 마력이 흘러나오는 텐트를 곧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첫 번째 트롤이 머리를 내밀었던 곳.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몸 주변에 검은 화살 수십 개를 형성했다.

마력을 보충하지 않아 온몸에 탈력감이 들었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영혼은 삶을 강요하는 폭군이라.'

구결을 외자, 수십 개의 화살이 곡선을 그리며 날았다. 대서양의 물고기 떼가 선회하는 것 같은 장관.

허나 그것들은 물고기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날았기에...

-쐐애애액!

폭풍처럼 천막을 완전히 찢어발겼다. 

안에 있던 사람도 걸레 조각이 될 정도로 말이다.

"크아아악!"

당연스럽게도 천막 속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눈에 띄게 굼떠진 트롤의 움직임. 나는 소리 지르며 달렸다.

"나와, 이 새끼야!"

현기증이 핑! 하고 돌았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촤르륵!

한쪽 손을 뻗어 죽은 산적들의 혼백을 흡수하면서, 그들의 기억이 만화경처럼 시신경 앞에 펼쳐지는 와중에도, 흩날리는 분진과 자갈들을 피하며 달렸다.

마침내.

나는 화살 하나를 맞은, 음습한 인상의 비쩍 마른 장발남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가 피곤한 얼굴로 날 노려보며 소리질렀다.

"...이, 좆같은 새끼! 내 결과물을! 내 창조물을! 모욕해!"

'더 들을 것도 없다.'

말이란 건 얻을 게 있을 때만 하는 법.

아까 산적을 흡수하면서 검은 마력을 소량 충당한 상태였고, 지금 저놈은 트롤 세 마리를 조종하느냐 바빴다.

고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령 화살을 발사했다.

-텅!

그러나 실패했다.

순식간에 중급 사령술사 앞에 거대한, 검은색의 방패가 생겨나더니 내 화살을 튕겨내는 게 아닌가.

그걸 본 놈이 낄낄거렸다.

"크, 크흐흐... 나이 가지고 뭐라 하더니! 꼴 좋다! 네 놈도, 쿨럭. 그 나이, 이십 대 중반에... 고작 사령 화살밖에 못 쓰는 꼴이라니."

'트롤 세 마리를 움직이면서도 저걸 할 여력이 있다고?'

뒤를 돌아보니 아군이 좀 밀리고 있었다. 

애초에 트롤들은 개체 당 몸무게가 몇백 킬로그램이 넘어가는 존재. 

그것들이 구르기만 해도 아군들은 맥을 추지 못했다. 놈은 더더욱 기세가 올라 지껄였다.

"네 놈도 몇 년 동안 사령술을 배웠겠지!"

"..."

"하지만, 하지만! 결국 너도 그 정도 잠재력밖에 안 되는 거다! 결국 너도 나처럼, 쿨럭. 이용당하고, 버려질 거야아아악!!!"

남자의 눈에 핏발이 서며, 그의 모든 마력이 응집되었다.

'안 좋아!'

난 재빠르게 피하려고 했지만 그의 손에서 검은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게 더 빨랐다. 폭포수. 터진 봇물. 용의 숨결...

그렇게 쏟아지는 검은색 물대포를 간신히 피했지만.

"커헉!"

지금까지의 피로 때문인지 오른쪽 다리가 좀 느리게 움직이더라.

-치지지직!

살 타는 소리.

바늘 수천 개로 찌르는 듯한 통증.

아래를 바라보자, 오른쪽 무릎 아래가 통째로 녹아 사라져 있었다.

그걸 본 레이돈이 바닥을 치며 광소하기 시작했다.

"하하! 아하하하하!"

"..."

"내, 내 승리다! 초보 사령 기사!"

그는 신이 난 듯 검을 뽑아 들고 내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고통. 두통. 어지럼증.

그 모든 게 한 번에 밀려오면서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오늘 몇 개의 혼백을 흡수했더라.'

"여기서 너가 날 죽인다고 해도 넌 평생 장애인으로 살겠지! 크흐흐! 신체를 재생하는 데 드는 돈은..."

"...새끼야. 나쁜 말은 쓰면 안 되지."

난 그래도 상체를 일으킨 채.

옆에 쓰러진 산적의 시체에 한쪽 손을 얹었다.

"하하하! 혼백을 흡수하려고? 해봐! 해보란 말이다!"

'후우...'

지금부터 내가 사용할 마법은 혼백 흡수가 아니었다.

마수 늑대 세 마리를 죽인 대가로 검은 책이 가르쳐준 고위험군 마법이었다.

'허기, 모든 생물의 천박한 고통이여.'

새로운 구결.

새로운 심상.

그리고... 새로운 효능.

-쩌어억!

산적의 육체가 그대로 비쩍 말라붙으며, 없어졌던 다리가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크윽!"

타오르는 단면에서 검은 혈관 수백 개가 동시에 자라나고, 뼈가 복원되며, 원래의 형태처럼 근육들이 돋아 3D 모델처럼 자리를 잡아갔다.

그걸 본 레이돈이 아연실색했다.

"뭐, 뭐? 포식? 너, 뮤테이터냐? 아니, 어떻게! 사령 화살밖에 못 쓰는 새끼가아!!!"

타인의 신체를 빼앗는다.

몸의 양식으로 삼아, 부서진 신체를 재구축한다.

그것이 바로 [포식].

검은 책이 가르쳐준 최고 위험군 마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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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 기사 유진.

'허기.' 

한국에서 살았던 시절.

돈은 없었지만 하루 세 끼를 먹는 게 어렵지 않았다. 당시 내게 허기란 실존하는 위협이 아니었기에, 내가 죽거나 야윌 거란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덜 먹으면 먹었지.

'허기, 모든 생물의 천박한 고통이여.'

허나 여기 도착한 후엔 달랐다.

허리가 휠 정도의 고생과 부족한 영양 섭취.

힘들여 만든 근육은 점점 나빠지고, 뼈는 앙상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야윈다는 건, 말라간다는 건, 약해진다는 건 아주 공포스러운 감정이었다.

중세에서 힘은 절대적인데, 굶을수록 약해진다면 최후에 나는 얼마나 비참해질까?

'적의 시체를 물어뜯어라.'

마침내 토끼들을 사냥하면서 깨닫길...

뭔가가 살을 찌우고, 풍족해지고, 번성할 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의 신체를 빼앗았기 때문이라.

그 죄악은 살아 있기에 받아야 하는 고통이며, 죽을 때까지 이고 살아가야 할 짐이었다.

그것이 [포식]의 심상.

-쩌어억!

타인의 신체를 이용해 내 몸을 강화하고, 회복시키는 사령술의 골조였다.

내 손에서 뻗어 나온 검은색의 에너지는 산적의 혈관과 근육을 물고, 씹고, 분해해 몸을 불렸다.

한때 팽팽했던 피부, 부풀어 올랐던 근육, 따스하게 맥동하던 심장.

그것들이 사막의 수수깡처럼 말라비틀어지며 내 육신을 채웠다.

-찌걱.

그리하여 다리가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다.

내부부터 천천히 채워지는 방식으로, 뼈, 근육, 핏줄, 신경계 등 다양하고 세밀한 요소들이 나뭇가지처럼 서로의 모습을 얽으며 원래의 형태를 제작했다.

거기에 걸린 시간은 대략 5초.

난 천천히 일어나 레이돈을 마주 보았다. 그의 마력은 고갈된 상태. 

몸 전체가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너... 뭐야?"

"..."

"어떻게 남의 몸을 갖다 붙이고도... 제정신인 거냐?"

얼굴에 서린 건 깊디깊은 절망이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저벅저벅 걸어가자, 레이돈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리 질렀다.

"내 말을 들어!"

다시 한번 그가 검은 안개를 뿜어냈다.

닿은 모든 걸 녹여버리는 산성 액체의 대포.

허나 같은 수에 두 번 당할 내가 아니었으니, 피곤한 와중에도 옆으로 굴러 피했다.

애꿎은 흙만 부글거리며 끓었다.

"어떻게! 남의 신체를 네 몸에 붙이고도, 제정신인 거냐고!"

"...글쎄."

난 레이돈을 바라보았다.

처참하고 마른 몰골.

움푹 들어간 볼살과 불안정한 눈빛을 보니 정신적으로 많이 몰린 것 같았다.

허나 그게 그를 용서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고통스레 죽여줄까. 아니면... 편하게 죽여줄까.'

마음은 반반.

네가 뭔데 피해자인 척을 하냐 생각하면 가학심이 끓는 물처럼 달아올랐고.

네가 고통받는다고 내가 이득을 보나?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다 귀찮았다.

"고작, 고작 몇 년 동안 사령술을 배운 새끼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냔 말이다!"

"몇 년 아니야."

"...?"

"한 달이다."

"구라도 정도껏..."

좀 비틱질이긴 하지만.

그래도 거짓말쟁이로 오해받기 싫어 검은 책을 꺼냈다.

레이돈이 게슴츠레하게 내 손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경악하여 소리질렀다.

"너, 잠깐만... 혹시, 혹시 그거...!"

"너도 이거 아냐?"

"검은 책이잖아!!! 이 씨발 새끼야!!!"

레이돈의 입에서 선혈이 울컥하고 쏟아져 나왔다. 

"대체 왜!"

눈썹 사이의 주름은 깊고 사악하게 패였고, 시기심의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말끝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대체 왜! 고작, 동양인 주제에, 어, 어떻게 그걸 구한 거야! 이 씹새끼! 부러운 새끼!"

"..."

"왜! 왜 세상은, 나한테만-"

레이돈이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 마력을 뿜어냈다. 

아까와 같은 공격. 

땅에 떨어진 산적의 혼백을 흡수하며 옆으로 구르자, 역시 쉽게 피해졌다.

-쏴아아아악!

그는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아니. 심지어 혼백을 흡수할 때도... 후유증이 없다고?"

"..."

"그러면 난? 내가 노력해 온 세월은... 뭔데?"

놈이 이빨을 너무 꽉 문 나머지 입술 바깥으로 핏물이 흘렀다. 

더는 꼴도 보기 싫어서 말했다.

"뭐긴 뭐야. 네가 노력한 세월이지."

"뭐...?"

설마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걸까.

그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네가 갖고 있는 트롤 세 개만 해도 일개 마을은 몰살시킬 수 있는 병력이다. 귀족만 없으면."

실제로 그렇다.

보링턴 마을 영지의 주민들.

그들은 이 파워 밸런스가 망가진 세계에서 최하층의 인간들이었다.

보링턴 남작을 제외하면 제일 강한 게 경호 대장, 나, 사냥꾼 정도였는데... 

그들조차도 롤랜드 경 한 명에 비하면 토끼처럼 약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보링턴 영지의 사람들.

그들은 약하고 가난할 지언정 산적처럼 남들을 빼앗고 살아가는 삶을 부정했다. 그들과 비교 당하면 수치스러워 했고, 그래도 남들에게 당당하기 위해 삶을 살았다.

결코 풍족하지 않았지만 낯선 동양인에게 친절을 베풀 만큼 여유도 있었다.

내가 지금 그들보다 강하다고 한들...

그들의 친절과 호의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다. 분명히.

"너는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었어. 많은 사람들이 네 기술과 연구를 필요로 했을 거다."

"아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이 세상은 병신이라고!"

"병신은 너 같은데."

"네가! 어려서! 모르는 거라고!!! 어려서!"

그가 벼랑 끝까지 몰려 소리질렀다.

"고작 이딴 걸로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어! 이게, 내 유일한 길이었단 말이다!"

내가 세상을 모른다니.

그 꼴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말을 처해도 알아듣지 못하니 소귀에 경 읽기였는데, 생각해 보니 소에 대한 모욕이더라.

"이렇게 끝날 순 없어..."

마력이 떨어진 그는 옆으로 기어갔다.

그리곤 쓰러진 자기 부하의 시체 위에 손을 얹어 혼백을 흡수하려고 했다. 사령이 그의 손에 액체로 변해 빨려 들어갔다.

"나도! 으으극! 나도 할 수 있다고!"

-촤르르륵!

흡수.

레이돈의 손바닥 사이로 울컥울컥 검은 혼백이 스몄다. 

체력이 별로 좋지 않은 걸까? 

그의 눈알이 하얗게 뒤집어지더니-

"으, 윽! 으극! 으고곡! 오극!"

눈에 핏발이 서고,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이 덜덜덜덜 떨렸다. 다리 사이론 뜨뜻한 물이 흘렀다.

"으읍! 오곡! 우욱! 우웨애애액!"

그가 땅에 쓰러졌다.

그는 바닥에 버르적거리며, 허리를 활처럼 튕기고, 이빨로 흙바닥을 긁다가 위 안에 들어있던 토사물을 토했다. 

네 발로 간신히 체중을 유지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다,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아냐! 아니라고! 이미 그 시간은 지났어! 나는 나다! 레이돈 커스다!"

나는 그를 죽일 수 있었지만 일단 지켜보았다. 

다른 사령술사들이 혼백을 흡수하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밀라는 흡수한 다음 약간의 두통만 느끼는 것 같았는데... 원래는 엄청 지난한 과정이구나.'

그렇게 고통을 겪던 와중.

30초가 지나서야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수명이 10년 정도 줄어든 모습이었다.

바닥을 긁으면서 일어난 레이돈의 손엔 흙과 피가 잔뜩 묻어 있었고, 눈에선 피눈물이 흘렀다.

"넌."

"..."

"넌 대체 이런 걸 어떻게 하는 거냐."

"뭐, 흡수?"

"그래!!!"

'아, 씨.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냐, 지랄은. 잘한 건 하나도 없는 새끼가.'

"기억이 뒤섞이고! 온몸이 가렵고, 혈관이 터질 것 같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이 고통을, 너는... 너는 어떻게 참느냔 말이다!"

"흠... 그 정돈가."

편하게 보내주긴 싫었다.

"흠, 그... 정돈가? 흠, 그 정돈가? 크흐흐. 흐흣. 흐흐흐.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그 정도냐니... 흐흐흐..."

"..."

"씹-새끼..."

그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남자는, 손가락을 쫙 펴고 그대로 자신의 목에 집어넣었다.

-푸슉! 울컥울컥!

사령술사의 힘은 일반인보다 강한 편.

강제로 경동맥 쪽을 잡아 뜯자, 피가 분수처럼 튀며 바닥에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었다. 힘 빠진 레이돈의 몸은 그 위로 쓰러졌다.

-철퍽.

그렇게 레이돈은 죽었다.

"...해치웠나."

그의 시체를 바라봤으나 다시 살아나는 일은 없었다.

'넌, 왜 그렇게 살았냐?'

그에게 터벅터벅 걸어가서 혼백을 흡수하였다.

눈을 감자 한 남자의 인생이 보였다.

로커스트의 부촌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이후.

그는 얼굴이 좀 못생겼단 이유로, 사령술에 소질이 없단 이유로 영지를 물려받지 못했다. 남들이 받는 걸 못 받으니 그는 조금씩 비뚤어졌다.

-로커스트에서 천 위 안에는 들어야 하는데... 제길. 왜 난 소질이 없는 거지?

-아냐. 노력해도 안 되는 것 같아.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데...

-네가 날 거절해? 감히? 나는 커스 가문의 일원이다!

-...다 죽여버릴 거야. 다 죽여버릴 거라고.

그는 매일 자신과 남들을 비교하며 점점 초라해져 갔다.

자신은 쓸모없는 인간.

자신은 무능한 인간.

자신은 재능 없는 인간.

낮은 자존감이 성공 확률을 줄이고, 그 실패는 다시 자존감을 낮췄다.

레이돈 커스가 생각하길...

원래 세상은 불합리하고, 태어나자마자 그 위계가 정해지니 자신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더라. 그는 남들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졌으면 했다.

'거 참. 세상 불합리한 걸 그 나이 되어서 알았냐.'

그리하여 레이돈은 가까운 이들을 까내리기 시작했다.

주로 엄청 잘나거나 성공하지 않은 사람들.

가장 대표적인 건 그의 누이로...

레이돈은 그녀의 행실이 방탕하다고, 바람을 핀다고 소문을 흘려 부부끼리 크게 싸우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때 희열을 느꼈다.

-흐흐. 너도, 너도 괴로워해라.

'아, 이 새끼...'

결국 추방된 그는 산적이 되었다.

그제야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 만한 취미가 하나 생겼는데...

그건 바로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불행하게, 세상이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게 하는 일이었다.

행복한 가정을 납치해 부모 앞에서 아이의 귀를 잘랐다.

잘생긴 남자가 있으면 여장을 시키고, 산적들에게 노리개로 던져주어 수치심에 자살하게끔 만들었다.

예쁜 여자? 당연히 그들도 좋은 꼴을 당하진 못했으니.

그 싸구려 우월감만이 그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에라이, 씨발놈아. 더 들을 가치도 없다.'

-끄아아아아악!

난 그의 혼백을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레이돈의 기억, 감정, 사고방식 등.

그의 자아를 이루던 것들이 곱게 갈려서 가루가 되었다.

허나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는 것일까.

레이돈이 지금까지 수집해 온 혼백은 대략 백 개가량. 

그가 품은 검은 마력은, 다른 시체와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오...'

검은 마력이 비교도 안 되게 늘었다.

*

그날 밤.

아름다운 별밤 아래, 우린 술과 모닥불을 갖고 잔치를 벌였다. 반쯤 취한 상단원들과 후보생들은 신나게 떠들었고...

그 주제는 대부분 신기한 동양인 사령 기사에 대한 것이었다.

"""유진! 유진! 유진!"""

캠프의 분위기가 좋았다.

비록 여섯 명의 병사가 죽긴 했으나, 이 정도면 대승. 

손에서 대포 쏘는 거인들을 넷 만났는데 이 정도면 잘 싸운 축에 들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본인들이 운이 좋았단 사실을 알았으므로 슬퍼하지 않았다.

"어? 이렇게 커다란 트롤은 처음 봤다고. 몇 피트였지?"

"거의 20피트는 됐지."

"캬아... 그때 유진이 대포를 사령술로 쏘더니!"

"아, 쪽팔리니 그만 하세요."

원래 후까시도 지나치면 치질이 걸리는 법.

웃으며 말했지만 흥분은 가실 줄을 몰랐다.

후보생 브랜드가 나한테 다가와 또 유난을 떨었다.

"사령 술사 유진! 그는 훌륭한 사령 궁수이며, 사령 연설가이고, 시체를 흡수해 자기 몸도 낫게 하는 사령 치료사..."

"닥쳐 좀! 씨발, 대체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야!"

난 지랄하는 브랜드를 옆으로 밀어버렸다.

여기사 에밀리가 웃었고, 다른 이들도 비슷한 분위기 속에 술을 마셨다.

에스톤 경이 내게 포도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고맙네. 유진."

"뭘요."

"저길 보게나."

난 축제에 잘 섞이지 못하고, 구석에서 음식을 뜯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의 꼴은 처참했다.

머리가 아예 밀린 남자도 있었고, 귀가 잘린 여성과 그녀의 딸도 보였다. 이미 노예 각인이 찍혀버린 소년은 공허한 눈으로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우리가 구한 사람들이네."

"..."

"이제 나도, 자네도...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일을 했다 말할 수 있겠지."

내가 그들을 바라보자 그들이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 표정에 서린 안도가 내 맘을 편하게 만들어줬다.

"난 원래 사령술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어. 타인의 혼백을 흡수하고, 부정적인 관념을 바탕으로 마법을 쓰니 미치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지."

"..."

"허나 자네의 힘은 큰 도움이 되었네. 모든 사령술사들이 자네처럼 힘을 쓴다면 세상의 문제가 구 할은 줄어들 텐데."

에스톤 경이 날 보면서 씨익 웃었다.

"사령 기사 유진."

"드디어 그렇게 불러 주시는군요."

"이제 왜 자네가 기사라고 소개했는지 알겠어. 기사도를 지켰다면 누구나 기사라 불릴 자격이 있지. 적어도 내게 자넨 후보생이 아니니, 기사가 된 후 모른 척하진 말게나."

"알았어요."

에스톤이 내 어깨를 툭툭 친 뒤 일어나자, 이제 후보생들이 밀려왔다.

"야, 유진. 너 아인베르트 가면 뭐 할 거냐?"

"글쎄. 이제 집부터 구해야겠지."

"일단 너 타격술 교습부터 받아라. 아니다. 내가 가르쳐 줄게."

"오, 진짜?"

사사로운 얘기들이었다.

-앞으로 어디에 집을 구하겠다. 

-도시에 가면 뭘 먹고 싶다.

-어디에 던전이 열렸고, 진짜 악마들이 나타났다더라.

-마을에 돌아가면 첫사랑이랑 결혼하겠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우린 새벽에 잠들었다.

그렇게 통행로에서의 이야기는 끝났다.

-덜컥. 덜컥.

산적 레이돈 커스를 죽이고, 그 목을 수거한 에스톤 남작은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 마침내 아인베르트에 도착했다.

그곳의 사병들에게 생포한 산적들과 포로들을 넘기니 작은 상장패들을 나눠주더라.

"유진. 이거 받게."

"이게 뭡니까?"

"산적 레이돈 커스를 토벌했단 증명이지."

그가 내민 건 금속에 나뭇가지가 그려진 상패. 

아래엔 '산적 레이돈 커스 토벌. 제국력 2188년, 물병자리의 달.'이라 새겨져 있었다.

주머니를 보니 은화가 두둑하게 들어 있었다.

"아니... 은화가 왜 이렇게 많아요?"

"넉넉하게 챙겨 넣었네. 거기에 레이돈 커스의 현상금도 붙었지. 다음에 보자구. 유진."

"언제든 연락하세요."

"아주 좋아."

그렇게 에스톤 경은 갈 길을 갔고,

"흐으으으읍."

나는 드디어 대도시 아인베르트를 마주했다.

상수도가 잘 관리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길거리가 더러워서 그런 걸까.

보링턴 영지보다 냄새가 좋지 않았다.

"...좋아. 뭐든 해보자고."

어쨌든, 이제 여기가 내 새로운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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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 다섯 장이요?

아틀라스 귀족은 네 종류로 나뉘었다.

남작, 자작, 백작, 공작.

작위 수여와 박탈에 관대한 제국 특성상, 모두가 공작을 꿈꿔야 할 것 같으나 현실은 달랐다.

'평민 출신이면 백작 이상으로는 갈 수 없지. 사실상 그래.'

평민이 아무리 잘나고, 사관학교를 졸업해 군공을 세워봐야 자작이 한계.

오백 년 제국 역사상 평민에게 백작위, 공작위를 수여한 적은 단 열 번밖에 없으니, 차라리 장군이 될지언정 백작은 될 수가 없었다. 

백작부턴 무조건 아버지가 백작 이상의 지위를 가져야 했으니... 

그들은 진정 푸른 피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일까? 

아인베르트 백작령의 스케일은 보링턴 남작령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미친. 아직도 도시가 안 끝난다고?'

하루 종일 걸어도 영지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나 시끄러웠고, 어디에나 사람들이 있었다.

중세의 영지가 아무리 넓어야 보링턴 남작령의 몇 배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최소 몇십 배 정도의 차이가 났다.

아인베르트 백작령은, 백작 저택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도로가 뻗어진 원형의 도시. 

외곽으로 갈수록 난개발이 심해져, 아인베르트의 행정관들조차 그 방대한 지역을 다 파악하지 못한 게 현실이었다.

그래서...

외곽으로 갈수록 치안, 위생이 급격히 안 좋아지는 범죄 도시가 되었다.

'젠장.'

그리고 내가 살 만한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비싸?'

서울에 아파트 구하는 줄 알았다.

집이라도 좋은 이해라도 하겠는데 그것조차 아니었으니.

난 눈앞의 흉가를 바라보면서 침음성을 삼켰다.

"...호오. 자네, 이 집에 관심이 있나?"

내 앞엔 귀접이라도 당할 것 같은 집이 있었다. 위쪽 처마엔 거미줄이 걸렸고, 대들보는 반쯤 썩어 문드러져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안쪽의 넓이는 대략 6평 정도.

방 두 개가 딸려 있었고, 퀴퀴한 냄새가 났으며, 푸세식 화장실 냄새는 차마 코로 맡을 게 못 되었다.

'염병.'

기사들이 살기 좋은 집이었다.

왜냐면 집이 무너져도 기사들은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집을 살 건가?"

"일단 가격만 알아보려 왔어요."

볼살이 투둘투둘하게 부풀어 오른 제국 공인중개사가 낄낄거렸다.

"뭐, 숨겨둔 재산이라도 있나? 자네 자산이라면 솔직히 턱도 없을 것 같은데."

"귀신 나올 것 같은데요."

"아 몰라. 그냥 같이 살어. 누가 알아? 여자 귀신이 나올지."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이 없어서 그런지 중개사 놈들이 더 불친절했다. 

어쩌면 내가 돈이 없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이 집의 가격은 팔만 오천 실링이네."

"예?"

"금화 여든다섯 개면 충분하지."

"금화 여든다섯 개요?"

동화는 1실링이다.

은화는 백 실링이고, 금화는 천 실링이다.

그리고 지금 내 지갑엔 3700실링정도 있었다.

"자네 돈이 얼마 있는데?"

손을 싹싹 비비면서 파리처럼 말하는 공인중개사. 나는 그에게 말했다.

"삼천칠백?"

"흠... 그러면 전세도 안 되겠군. 월세가 괜찮겠어. 월세는 이백오십 실링이라네."

'씹...'

아직 내 물가 관념은 보링턴 영지의 그것에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집값은 거의 열 배 가까이 차이가 났고, 소모품 가격이 세 배 차이 나는 이곳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여긴 감자 요리 하나에 5실링이 넘어.'

게다가 저녁 식사는 몇십 실링이 넘었다.

비싼 집에서 먹으면 한 끼에 백 실링까지 소모할 수 있었으니, 마치 놀이공원에 온 기분이었다.

핫도그 하나에 구천 원에 파는 그런 놀이공원 말이다.

"흐헤헤히히. 자네 시골에서 왔나? 이 주변을 다 돌아다녀 보게나. 원래 여긴 물가가 이래."

여관에서 자면 하루 숙박비가 40실링에 달한다.

하지만 난 이런 폐가에서 살고 싶진 않았기에...

공인중개사한테 알겠다고 말한 후 쓸쓸한 발걸음을 옮겼다.

"레전드 동네네."

꿈을 찾아 대도시로 왔건만.

물가도 비싸고 냄새가 너무 심하다.

아인베르트 외곽령의 하수도는 보수되지 않은 지 30년이 지났는데, 그 때문인지 푸세식 변기가 흔했으며 길가엔 똥, 정체불명의 오염물질, 거지, 마약 중독자 같은 게 널려 있었다.

'...이것이 중세의 도시구나.'

특히 인도에 똥이 떨어져 있는 경험은 한국에서 온 내게 아주 색다른 충격이었다.

'길가에 똥을 버리다니.'

월세를 내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사회에 말 못 할 불만이라도 있는 걸까?

누군가 말로 뱉기 힘든 분노를 항문으로 배설한 것일지도 몰랐다. 왜냐면 둘 다 구멍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노상방뇨는 기본에,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면 그냥 바깥에 던져 버리고, 개들도 영역표시를 하는 이곳이 위생상 좋을 리가 없었다.

정말 웃긴 건 이런 데서 먹고 자는 데 한 달 사백 실링 이상이 든다는 점이었다.

내가 가진 돈으로는 일 년도 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하룻밤 묵던 여관으로 다시 터덜터덜 걸어가야 했다.

*

로자리오 여관.

아인베르트령 외곽에 있는 곳으로, 그나마 치안이 보장되고 주변이 깨끗한 곳이었다.

그 이유는 딱 하나.

바로 여관 주인 아줌마의 남편이 경비대에서 근무하는 부사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소한 권력과 무력을 가진 아저씨가 진상들을 줘패니 주변이 청정했다.

그는 오늘도 술에 꼴은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유진 왔능가."

"예."

"자네도, 어? 주사위 한 판?"

"안 합니다."

"에잉."

그는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나무 컵 속에 주사위를 넣고 굴렸다. 

"이 씨발! 6이 두 개다! 두 개라고! 개새끼들아! 돈 가져와!"

"아니 어떻게 확률이! 이건 조작이야."

"돈 없으면 니들 싹~다 구속이야! 감옥 가고 싶어!"

-삐이이이걱.

여관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소녀가 활짝 웃으며 날 반겼다. 

찰랑이는 금발을 뒤쪽으로 묶고, 커다란 가슴골을 그대로 드러낸, 살집이 예쁘게 부푼 소녀였다.

"어머! 유진 님! 오셨어요!"

"아, 예."

이름은 소냐, 여관 주인의 딸이었다.

그렇게 예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웃는 모습이 생글생글하고, 주근깨가 묘하게 매력 포인트인데다, 그 풍만한 가슴 무게가 웬만한 성인 머리만 해서 사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

옆으로 눈을 돌려보니 그녀의 덩치 큰 오빠 세 명이 구석에 앉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것도 사업 모델일까?'

간혹 여관에서 술 먹고 소냐의 가슴을 만지거나, 밤 시중은 없냐고 물어보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러면 저들이 달려가 삼대 일로 줘패고 지갑을 탈탈 털었다.

나는 이게 중세의 야만성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현상인지, 나이차 많이 나는 오빠들의 극진한 사랑인지, 여관 주인이 의도한 비즈니스 모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안쪽은 그리 시끄럽진 않았다.

마치 금요일 새벽 두 시의 대학가 술집 같았다. 존나 시끄럽지만, 다른 여관보단 좀 낫단 의미였다.

"오늘 하루 숙박은 40실링이야."

"예. 여기요."

"오호호! 고마워! 유진!"

난 얌전히 여관 주인에게 40 실링을 건네줬다.

동전들을 건넬 때마다 묵직했던 주머니가 푹푹 깎여나가는 게 느껴졌는데, 혈관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방으로 터덜터덜 올라갔다.

'이 씨발. 진짜 다시 똥이라도 날라야 하나?'

긍정 포인트.

아인베르트 백작령에선 노동자의 보수가 꽤 높았다.

월급이 보링턴 영지의 다섯 배 정도 되니, 목숨 걸고 영지전에서 싸우는 것보다 여기서 똥이나 나르는 게 이득이었다.

물론 나는 사령 기사 후보생.

초인적 능력이 있으니 노동보다 더 벌 기회가 있었으나... 문제는 커리어가 부족하단 점이었다.

-아, 그 레이돈 커스를 토벌했단 말인가? 대단하군. 근데 미안하네. 상패가 하나밖에 없는 데다... 자네는 사령 술사가 아닌가. 자네가 옆에 다니면 불운이 따를 걸세.

-사령 기사입니다.

-어쨌든 사령술을 쓰면 문제가 된다네. 임무 중에 미쳐버리기라도 하면 답이 없지.

심지어 가끔은 여기사들이 더 많은 파이를 가져가는 경우까지 있었다.

-남정네한테 우리 딸을 호위시키라고? 하! 방랑 기사들이 얼마나 늑대 같은데...

-저는... 음. 아이리스 님의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아니, 그 키로 아직도 동정이라고? 자네는 성격에 문제가 있나? 저리 꺼지게나.

"옘병."

그래도 벌레는 안 나오는 침대에 누우니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흐, 흐응, 아앙, 하아...

-야... 네 오빠가 더 좋아? 내가 더 좋아?

왼쪽 방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이 씨발년아! 내가, 내가 다 해줬잖아!

-꺄, 꺄악! 꺄아아악! 

오른쪽 방에서 굉장히 사적인 소리가 났다. 

어쨌든 오늘 하루도 이걸로 끝.

요즘 내 일과를 설명하자면, 낮에는 직업을 구하러 다녔고...

밤에는 검은 책과 함께 수행을 하였다.

난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끔 문 앞에 쐐기를 설치하고, 검은 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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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유진

[등급] 하급 - 5년 추정

[마력 총량] 약 455 다르마 

[신체 능력] 키 6피트, 몸무게 180파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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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책은 나에 대한 평가를 일부 수정했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마력 총량.

처음엔 50 다르마 정도 되던 그것이 기괴할 정도로 늘었다.

'산적들이랑 싸우기 전에... 마력 총량이 100 정도였는데.'

산적들을 대량으로 죽여서 그런지, 아니면 레이돈 커스가 중급 사령술사라 그런지 지금 내 마력은 455에 달했다.

소름 돋는 건 등급이 '견습생'에서 '하급'으로 올랐다는 점.

-내가 아직도 하급이라고?

[본 서는...]

책이 화난 것처럼 말했다.

[귀속자의 말은, 매우 경솔함.]

따박따박.

[귀속자는 사령술을 익힌 지 두 달도 되지 않음.]

[레이돈 커스만 해도 그 트롤 시체 3구를 조종하는 데에 30년의 수행 과정을 거침.]

[일반적인 수행자가 하급 수준으로 올라가려면 3년에서 5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

[귀속자는 본인 재능을 좀 더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음.]

그 칭찬은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내 재능이 그렇게 좋으면 [명상법-침수형] 이것도 배울 수 있게 해줘.

[그건 형평성에 어긋나며, 본 책의 교육 방침과 다름.]

-쳇. 나중에 다른 데서 배운다?

[그건 귀속자의 선택임.]

에란트리 퀘스트의 보상도 받았다.

[사령 화살], [포식].

이 두 개는 원래 쓰던 기술로...

사실상 이것만 해도 마력을 못 다루는 이들은 백 명 이상 상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레이돈 커스를 이겼을 때, 포인트를 6점 줬지.'

그리하여 지금 내 점수는 10점.

3개의 보상을 더 받았다.

첫 번째로 선택한 건 [명상법-정제].

[귀속자의 혼백을 높은 수준으로 정제함. 혼백을 더 빨리 흡수할 수 있고, 사령술의 격을 높임.]

혼백 흡수가 잦은 내 영의 특성상, 하룻밤이 지나야 마력량이 늘어난다는 건 큰 단점이었다. 

이게 있으면 딱 몇 분 만에 희생자의 혼백을 마력으로 바꿀 수 있었다.

두 번째 선택은 [신체 강화].

[귀속자가 현재 사용하는 신체 강화는 매우 저열한 수준임. 짐승처럼 폭주하는 것에 가까워 효율이 떨어짐. 이를 익히면 순간적으로 막대한 힘을 일격에 실을 수 있음.]

근접 전투 확률이 높은 중세 특성상, 힘은 강해서 나쁠 게 없다. 팔 힘뿐 아니라 다리 힘도 늘어나니 도주 상황에서도 유용했다.

그리고 세 번째 마법은 바로...

[사령 갑주 - 기초]

[검은 마력을 신체에 둘러 가벼운 타격이나 참격을 막음. 마법에 대한 저항력도 소폭 증가함.]

사령 갑주였다.

갑주라기보다 검은 쫄쫄이에 가깝지만, 어차피 충격 흡수용 2차 갑옷 같은 요소라 상관없었다.

마법으로 충격 흡수용 내복을 만든다는 것 부터 굉장히 유용하게 느껴졌다.

"후우..."

일단 이 세 가지 기술들을 연습했다.

약 한 시간 가량의 연습 후...

나는 사령 화살을 한 개 만들어냈다.

-촤르륵.

요즘 내가 연구하는 건 바로 사령 화살의 개량.

사령 화살을 창의 형태로 만드는 것까진 성공했다.

내 목표는 그 다음.

사령 화살을 검의 형태로 만들고, 내 주변을 날아다니게 하면 이기어검술 흉내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허나 그리 잘 되진 않았다.

[사령술의 원리는 검은 마력에 심상을 투영하는 것.]

[영이 가진 '의지'로 검은 마력을 움직임. 이후 심상을 투영해 독특한 효과를 부여할 수 있음.]

다시 한 번 의지를 집중하자, 화살 형태를 띄고 있던 검은 마력이 날카로운 단검의 형태를 갖췄다.

[사령 화살이 상대를 잘 꿰뚫는 이유는, 검은 마력의 형태와 심상이 잘 들어맞기 때문임.]

[...집착.]

[이 강렬한 심상을 화살에 부여하면 화살은 상대를 향해 무작정 날아가게 됨.]

-쐐액!

내가 단검에 심상을 주입하자, 

-타앙!

그것이 총알처럼 날아가 대충 만든 과녁판을 쪼개버렸다.

대실패.

이렇게 발사되기만 한다면 사령 화살이랑 다를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영의 격만 높으면 강한 기술이 나오는 게 아니었나?

[영은 '의지'를 관할하고, 혼백은 그를 제한 감정, 기억, 사념 등을 관할함. 심상은 혼백에서, 의지는 영에서 나옴.]

-그러면...

[귀속자가 쓸 수 있는 기술 중, 가장 높은 숙련도가 느껴지는 건 '포식'임. 그것과 비슷한 방향으로 연구해 보면 좋을 것임.]

늑대 세 마리를 쓰러뜨렸던 그날.

마수화 대신 포식을 선택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귀속자는 굶주림에 대한 이해도가 높음.]

죽기 직전까지 굶어본 적도 있었고, 굶기 싫어 남을 죽여본 적도 있으니.

굶주림의 심상이 내 안에서 강렬하고 명확했다.

[특히 귀속자가 '포식' 사용 시에 많이 쓰는 건 토끼의 심상인데.]

[그건 단순히 많이 굶는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님.]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토끼.

맨 처음, 내가 춥고 배고플 때 사냥꾼이 준 게 토끼 고기였다.

그리고 조난을 당했을 때 가장 많이 먹었던 것도 토끼였고.

'엄마 토끼를 죽인 적도 있었지.' 

조그만 새끼들이 굴 밖으로 기어나와 죽은 어미의 젖을 빨았다. 

그걸 보고 여러 감정을 느꼈지만...

가장 크게 느끼는 건 굶주림이었다.

눈에서 눈물이 나올 때도 입은 침을 줄줄 흘렸으니...

허기란 건 내게 참 천박하고도, 절실하고, 숭고하기까지 한 이미지였다.

그런 복합적으로 구성된 심상들이 사령술의 경지에 많은 영향을 줬으니, 난 검은 책이 말하는 대로 계속 수련하며 기술을 발전시켰다.

[기억할 것. 체계적이고 강렬한 심상, 그를 투영하는 의지, 검은 마력의 총량 등이 마법의 격을 결정함.]

그렇게 나는 살았다.

낮엔 일감을 구하러 다니고.

저녁에는 새로운 심상들을 실험하며 사령술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그러던 와중.

'아, 씨발. 취직이나 하러 갈까?'

그런 생각을 하던 내게 일이 떨어졌다.

난 좀 절박한 마음에 아가리를 마구 털었다.

"사냥? 사냥 말씀입니까? 그건 제가 또 전문입니다."

"하하. 제가 조난을 당했을 때... 매일 토끼만 먹고 살았습니다. 멧돼지, 사슴, 토끼, 오리 등 많은 동물을 먹어봤지만 토끼가 제일 낫더군요."

"금화... 다섯 장이요?"

"아, 당연하죠. 예. 해드릴 수 있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것도 꽤 큰일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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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잘해봅시다.

대도시 아인베르트.

이곳의 일자리 플랫폼은 세 종류가 있었다.

첫 번째는 바로 술집.

가장 서민적이면서 정보가 느린 곳이었다.

"자네. 그거 들었나? 이번에 로커스트의 대마녀, 카밀라 헤롯이 여길 직접 다녀가셨다는군."

중세엔 이름 모를 사람끼리 합석하는 경우가 꽤 잦았다. 대충 아무 테이블이나 합석해 일거리를 찾으면 대물을 건질 때가 있다고 했다.

물론 간만 축날 경우가 더 많았지만 말이다.

두 번째는 신문, 게시판, 호외였다.

-아인베르트 백작 저택, 정원사 구함

-정원의 미적 가치가 하락하여, 새 정원사의 안목이 절실히 필요...

여관, 행정소, 술집, 분수대 등. 

통행량 많은 곳엔 어디나 게시판이 있었다. 

여기서 일자리나 홍보 전단지들을 볼 수 있었는데... 종이가 그리 싼 편이 아니라서 광고 효과가 확실한 편이었다.

세 번째는 길드.

-돈 대신 받아드립니다.

대부분의 길드는 흥신소 느낌이었으며, 길드원들은 깡패에 가까워 꺼려졌다.

이들 셋 모두 값어치가 있었으나, 문제는 이 세가지 모두 고인물들이 꽉 잡고 있단 점이었다.

예를 들어 이런 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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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기사단]

-아이작 기사단의 대장, 아이작 경은 누구인가!

: 아틀라스 제국 사관학교 177기 졸업

: '붉은 여명 기사단' 호스피탈러 23년 복무 후 은퇴

: 아인베르트에서 상패 19개 수령

: 참여 전투 3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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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씹새끼들. 아니, 늙으면 은퇴를 해야지.'

마력을 익힌 초인들은 늦게 늙는다.

예를 들어 아이작 경의 초상화를 보면...

실제 나이는 151살인데 겉보기엔 말끔한 50대 남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인간들이 정년 퇴임은 안 하고 마을 여관마다 전단지를 붙여대니 나한테 기회가 올 리 있나?

'이런 씨밸럼.'

그냥 취업이나 할까, 생각했다.

물론 똥 푸는 일은 아니었다.

입단 시험이 없는 기사단이나 상단 같은 곳을 노리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봤는데.

-사령술사는 좀 힘드오.

-상패가 하나밖에 없다니? 게다가 종자 생활도 안 해보셨는데 우리 조직의 위계질서에 적응할 수 있겠소?

-하! 동양인 남자는 남자가 아니지!

-진짜 내가 아들 같아서 하는 말인데...

그런 말을 들으며 거부당하기 마련이었다.

"진짜 답이 없나."

그렇게 절망하고 있을 때.

그래도 내가 발품을 판 의미가 있는지, 내게 먼저 다가와주는 사람이 있었다.

"당신이 유진인가? 보링턴 영지의 유진?"

"그렇습니다."

"볼프람의 아들 볼라드라네. 만나서 반갑네."

내게 의뢰를 맡기려고 한 건 전형적인 중세풍의 남자.

모자엔 커다란 깃털을 꽂고, 팔 부분이 부풀려진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딱 봐도 돈이 많아 보여서 가슴이 들떴다.

우린 간단히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마력도, 굳은살도 없는 걸로 보아 전문적인 싸움꾼은 아니었다. 

아마도 귀족의 말예거나 상인이겠지.

그가 내게 술 한잔을 샀다.

"좋은 밤이네. 그나저나 럼주에 오줌을 탄 것 같군. 젠장. 어쨌든 자네, 검은 화살을 쏘는 궁사라고 들었는데? 맞나?"

"저는 사령 기사입니다."

손가락 끝에 사령 화살 다섯 개를 만들어 표창처럼 빙빙 돌렸다.

나름 고급 기술.

그걸 보자 그의 눈이 등잔불만큼 커졌다.

"오. 이렇게 큰 사령 화살은 처음 보는군...! 역시 에스톤 경이 추천한 인재야."

"...에스톤 경? 에스톤 경과 아시는 사이입니까?"

"그럼. 내 불알친구라네. 같은 동네에서 자랐지."

'역시...'

인맥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모든 건 인맥이었다.

"아인베르트령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말야. 허나 에스톤이 추천한 자네라면 믿을 수 있겠지!"

"감사합니다."

"뭘. 그가 자네를 닳도록 칭찬하더군. 이리저리 뛰면서 사령 화살을 날려대는데, 다른 사령 술사들처럼 정신이 불안정하지 않다더군? 허허. 또 내가 자네 관상을 좀 보니 괜찮아 보여."

"그래서 업무 내용은 무엇인지?"

"간단히 말하자면 마수 사냥일세."

그가 본론을 꺼냈다.

"릭토 산이라는 언덕이 하나 있는데, 거기 마수들이 많이 살고 있어. 역참터를 지을 예정인데 그래야 지을 수가 없지."

"그렇군요."

생각보다 의뢰 내용이 빡셌다.

릭토 산.

아인베르트 외곽령에 있는 작은 언덕으로, 봉우리 높이가 400m 정도인 동네 뒷산이었다.

허나 등산로가 없어 매우 험하고 넓이는 꽤 된다고 했다.

여기 올라가서, 원래 터줏대감인 마수들을 싹 다 죽이면 된다는 게 의뢰의 골자였다.

"선금으로 금화 다섯 장."

"오."

"그리고 후금으로 금화 다섯 장 주겠네."

"오...?"

금화 열 장.

이 미친 액수를 들으니 척추가 찌릿찌릿했다. 무려 만 실링이면... 내가 보링턴 영지에서 영지전을 이백 번 뛰어야 벌 수 있는 돈이었기에 그랬다.

허나 사람은 쾌락에 굴복하면 동물이 되는 법.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처럼 사고해야 사기당할 확률이 낮았다.

볼라드에게 물었다.

"아니, 볼라드 씨. 이렇게 큰 금액을 선뜻 주셔도 되는 건가요?"

"일단 끝까지 들어보게."

그가 형편없는 럼주로 수염을 축이더니 말했다.

"내가 지금 상단병들을 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별도로 누굴 더 고용할 만한 짬도 없는 상황이야. 그러니까... 내가 준 선금으로 자네가 팀을 꾸려줬으면 좋겠어."

"아하."

"물론 전투 장비 외에는 지원하겠네. 릭토 산 옆이 우리 저택이니까."

그의 말을 이해했다.

그가 준 금화 다섯 장을 이용해 무기, 팀원등 각종 준비를 하란 뜻이었다. 

식량은 일주일 동안 볼라드의 저택에서 지원. 

정말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특히 첫 번째 의뢰란 점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이건 좋은데.'

내가 상대했던 늑대 세 마리.

이걸 기사단에게 맡기면 은화 세 장 정도의 비용이 든다.

릭토 산의 마물이 50마리를 넘어가진 않을 테니 내게 이득이었다.

'그리고 난 검은 마력을 볼 수 있지.'

아인베르트엔 초인들이 많았다.

그들과 술을 마시며 물었는데, 마력을 보유한 인간 중에서도 그걸 느끼거나 볼 수 있는 인력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치면...

'사냥은 내 전문일지도.'

산에서 한 달 살아봤고, 마력도 보이는 내게 최적화된 의뢰 중 하나란 생각이 들었다.

"근데 자네 할 수 있겠나? 산에 있는 마물들을 토벌하는 건 쉽지 않을 거야. 기한은 일주일이고... 만약 일이 지나치게 어려워지면 돈을 더 주지."

게다가 에스톤 경의 지인이니 이름을 걸고 사기를 치지도 않을 것이었다.

난 밀어붙였다.

"사냥? 사냥 말씀입니까? 그건 제가 또 전문이지요. 제가 조난을 당했을 때... 매일 토끼만 먹고 살았습니다..."

이리하여 계약서를 쓰니...

그건 내가 여기 와서 쓴 첫 번째 계약서라.

"조심하게나. 릭토 산에는 릭토 산의 폭군이라는 유명한 마물이 있어. 그 마물은 가끔 저택으로 내려오기도 하는데, 그것도 상대해 줘야 하네."

"이해했습니다."

볼라드랑 악수하자 그제야 뭔가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다음 날 아침부터 난 준비에 착수했다.

'잡다한 인원은 필요 없어.'

예를 들어 짐꾼.

애초에 볼라드 저택이 임무 지역 옆에 있기에 보급이 원활하다. 

게다가 내 속도는 워낙 빠르니, 산속에서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인원은 쓸모가 없었다.

다만 엘리트 인력은 '언제나' 필요했다.

이는 영지전을 여러 번 뛰어본 나였기에 훨씬 더 절절하게 느끼는 사실이었다.

'레이돈 커스가 우리 편이었으면 얼마나 유용했을까. 심지어 그때 기사 후보생 몇 명만 데리고 다닐 힘이 되어도.'

지금의 나는 근접전, 원거리전 양쪽 다 능한 만능 인재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다구리에 취약하단 약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법.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는 인력은 언제나 필요했다.

"전단지를 좀 만들려고 합니다."

"몇 장이오."

"50장 정도면 충분합니다."

책 제작소에 들러 전단지를 50장 정도 뽑아 주변에 붙였다. 

'이것만 해도 은화 네 장이 들었군.'

그런데 안쪽을 보니 그게 비싼 가격이 아니더라.

인쇄기도, 금속활자도 없는 세상이라 그런가? 솜씨 좋은 중세인 몇 명이 허리 디스크랑 터널 증후군을 참아가며 글씨를 쓰는데 딱 봐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이 정도면 싼 편이군.'

어쨌든 그렇게 전단지를 붙이고 시간을 축내다 보니...

여관으로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첫 번째 지원자는 취객이었다.

"형씨. 응? 내가, 내가 주먹을 좀 써요. 이거 봐. 어? 훅훅! 훅훅!"

그에게선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강한 취기가 느껴졌으니, 취권의 고수가 아니라면 뽑을 이유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당신은 저희의 채용 기준에 맞지 않아..."

"아이, 씹새꺄! 형님이 말하면 들어! 지금 나 무시해! 어!"

그가 갑자기 날 향해 주먹을 휘둘렀는데...

당연히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물리적 수단을 동원한 알콜 중독 치료법을 사용했다.

"유진 씨! 그만 패세요!"

"아이, 씨. 유진! 여기서 이러지 말라니까. 내가 경비대 부사관인데! 어! 여기서 싸울 거야!"

이빨 몇 개를 털어서 치아 관리도 해주고, 덤으로 지갑도 가져갔다.

다음 지원자는 사령술사였다.

사령술사들은 원래 정신이 좀 박약하단 인식이 있었는데, 그는 마약도 추가로 하는 것 같았다. 눈빛이 몽롱하고 말투가 어눌했다.

"흐, 나 사령술, 쓴다."

"...음. 사령 화살을 여기에 써 보시겠어요?"

"흐으...읏! 여엉호느으은... 사람을...지배하는, 포, 포꾼이다아아앗!"

그는 요상한 신음을 내며 열심히 검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땀을 줄줄 흘리는 걸 보니 안쓰러웠다.

"흐아아아앗! 영호느으으은!"

"..."

"포끄으읏!"

그렇게 5초의 집충 끝에 마침내 사령 화살을 쏴 내니.

-푹.

그것이 내 탁자 위에 있던 사과 하나를 꿰뚫었다. 그러자 여관에 있던 사람들이 낄낄거렸다.

"우와. 나 사령술 처음 봐."

"사악한 거니까 보지 말게나."

"검붉게 화살이 타오르니 멋있군."

사령술사 남자는 '나 잘했죠?' 하는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허나 내 기준엔 너무 미달인지라 아주 정중하게 거절을 통보했다.

"죄송합니다. 당신은 저희의 채용 기준에 맞지 않아..."

"왜! 왜! 왜애애애애! 약 줘! 약 달라고!"

난 미쳐서 단검을 뽑고 휘두르는 사령술사를 반 죽여놓고 반으로 던졌다. 

그의 옷을 벗기고 지갑을 싹 털었다.

다음으로 여관에 모습을 드러낸 건 마법사 후드를 쓴 여자였다.

"안녕하세요오..."

검은색 포니테일에 도수가 높은 커다란 안경을 맞추고 있었는데... 

온몸을 로브로 가렸는데도 풍만하게 튀어나오는 살집을 가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몹시도 낯을 가리는지 소극적으로 내게 말했다.

"저기요..."

"예."

"저는요... 아인베르트 마법 대학 대학원생인데요. 등록금을 못 내서요."

뭐가 그리 부끄러운 건지, 말을 끝내자마자 머리를 푹 숙이는 게. 딱 봐도 사람 대하는 것에 익숙치 않아 보였다.

'흠. 마법사라...?'

이 세계의 대학원생은 꽤 고급 인력이라.

저 여자가 겉으론 무해해 보여도, 안쪽에서 느껴지는 푸른 마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 두 배 정도...!'

이런 사람과는 그냥 안면만 통해놔도 나중에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나중에 대학 쪽이랑 거래할 수도 있고 말이다.

"어떤 마법을 쓸 줄 아십니까?"

"저는 푸른 마력을 수련했어요..."

가장 흔한 게 검은 마력, 푸른 마력이었다.

검은 마력이 인간의 혼백을 정제해 만들어낸 사악한 에너지라면, 푸른 마력은 하늘에서 내린 것.

영, 이데아, 지혜, 초월, 신격을 상징하는 에너지였다.

"뭘 할 수 있죠?"

"벼락을 내리칠 수 있어요..."

벼락 좋아.

"좋습니다. 잘해봅시다."

"가, 감사합니다!"

"저는 보링턴 영지의 유진입니다."

"아인베르트의 셀레나에요."

우린 악수를 하고 계약서를 썼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고, 셀레나는 뒤돌아 보지도 않은 채 뛰어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들어온 건...

"어?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

"유진!"

빨간 포니테일 머리를 한 여자.

메이스와 방패를 쓰는 여기사로, 산적 소탕 시에 큰 활약을 했던 기사 후보생. 에밀리였다.

그녀는 반갑다는 듯 갑자기 달려와 어깨동무를 했다. 몹시도 반가운 표정.

얼굴은 평범해도 몸매가 상당히 폭력적이라... 옆쪽 가슴이 닿는 감촉이 상당히 부드러웠다.

다만 그녀는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유진! 메이스 다루는 법 좀 배우라니까? 그동안 어디 갔었어? 연락 좀 하지."

"미안하다. 나 열심히 살았다."

"...너, 뭐 용병단이나 파티 같은 거 꾸릴 셈이냐?"

진지하게 묻는 에밀리. 

난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런 느낌으로 가보려고. 서로의 능력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

"들어온 사람은?"

"마법사 대학원생 하나."

"와, 씨. 좋은데? 나도 끼워줘."

에밀리라면 믿을 수 있었다.

여자의 몸이나 파괴력이 출중했고, 메이스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나도 전위의 역할을 할 수 있으나 훌륭한 전위는 많을수록 좋은 법.

그 외에도 내가 알던 사람들이 좀 왔다.

"브랜드? 브랜드 아냐."

"뭐... 뭐야! 네가 왜 여깄냐. 사령 사업가 유진으로 전직한 거냐!"

"미친 새끼. 나 이번에 일 받았는데 같이 할 거냐?"

"고맙다. 야. 일자리를 줘서."

그렇게 만들어진 6인의 특공대.

우린 날이 밝자마자 볼라드의 저택으로 향했다.

"잘 왔네, 유진. 여섯 명? 좀 적어 보이는데."

"전원 초인입니다."

"그렇군. 일은 전부 자네들에게 위임하겠네."

"맡겨 주십시오."

그렇게 우린 생애 첫 마수 사냥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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