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할 일은 그저 도굴, 도난, 강도뿐.
2119년, 쌍둥이자리의 달.
아홉 번째 날.
햇볕이 쨍쨍 내리쬐며 푸릇한 연녹색 잎사귀들을 꿰뚫었다. 새로운 풀들은 조그맣게 고개를 들고 피어나기 시작했고, 겨울 동안 들리지 않던 새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사계절...'
아틀라스 제국에도 사계절이 있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엔 낙엽이 만발하니...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만개한 꽃나무들을 볼 수 있을 날씨였다.
비록 여자친구는 없지만.
'씨바... 여기 온 지도 2년이 조금 넘었군.'
처음 왔을 땐 지옥처럼 느껴졌다.
군대를 전역한 바로 다음 날 이세계로 떨어진 것도 모자라 상태창도 없으니 세상 전체가 원망스럽더라.
그래도 죽을 순 없어서 온갖 궂은일을 다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땐 정말 아득했다.
보링턴 영지 사람들의 인간성들이 좋은 편이라 다행이지, 아인베르트에 떨어졌으면 정말 죽을 뻔했다.
그렇게 1년 5개월 정도 뺑이를 치다 롤랜드 경을 만나고 인생이 변했다.
'롤랜드. 이 양반한테도 술 한 번 사야 하는데. 잘 지내려나?'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닌 양반이지만,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어쨌든 내 삶의 질은 엄청나게 올랐다.
'일단 밥을 안 굶어.'
게이너를 먹지 않아 단백질 섭취량은 부족하지만, 대신 검은 마력이 있는 상태.
나는 스물 초반의 몸보다 훨씬 좋은 몸을 만들었다.
게다가 섭취하기 힘들었던 과일과 채소도 풍족하게 먹었으니, 건강 상황은 오히려 현대 한국의 나보다 나았다.
무엇보다 좋은 건 목욕을 할 수 있다는 점.
최소한의 삶의 질은 마련한 셈이었다.
'하지만 돈이 부족해.'
갑옷이랑 던전 용품들을 사니 금화들이 뭉텅뭉텅 깨져 나갔다.
진짜 몇 년 놀다 보면 집도 팔 지경이라 일은 꾸준히 해야 했는데... 사실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강해지고 싶다.'
난 강해지고 싶었다.
날 비웃던 수 명의 귀족 영애들.
애초에 귀족 커뮤니티 자체가 배타적이긴 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동양인 사령 기사가 받는 평판은 처참해졌다.
인종, 출신, 명예.
상류층 커뮤니티가 가진 배타성은 참으로 추잡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날 얕잡아 보는 걸 용납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음 속에 생긴 욕망은...
'카밀라를 이겨보고 싶어.'
그것이 정욕에서 비롯된 공격성인지,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인지, 대등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향상심인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었다.
어쩌면 노기사 아이작보다 더욱 더 뛰어넘고 싶은 사람...
그건 내 스승이었다.
'정말 사람 욕심이란 끝이 없군.'
그래도 그런 게 사는 거 아닐까.
"가자, 릭바오."
-꾸워어.
난 릭바오를 타고 아인베르트령 서쪽 개척지를 향해 달렸다.
*
곰은 원래 산에서 살던 존재라.
게다가 마수이기까지 했으니, 아틀라스 제국의 가도를 이용하지 않아도 무난히 잘 달렸다.
-콰직! 쿠드득! 우드득! 콱!
마수 곰을 타고 달리는 것의 장점 중 하나는, 산세를 반쯤 파괴하며 이동할 수 있다는 것. 어차피 평원에선 말 만큼 빨랐고, 숲에서는 길을 만들며 이동했으니 서부 개척지까지 오는 건 굉장히 빨랐다.
그렇게 오고 나니...
'...장관이군.'
난 던전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단 사실을 깨달았다.
제국에 흔하지 않은 거대한 평원 위.
각양각색의 텐트 수십 개가 무질서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마치 전성기 시절의 몽골 군대를 보는 것 같았다.
일단 보이는 깃발만 해도 수십 개.
'전前 아인베르트 사병대, 붉은 십자 기사단, 더러운 핏불들(길드 이름이 이거다), 아이작 기사단...'
내가 아는 아틀라스의 소규모 무장 조직들이 대거 모여 텐트를 치고 있었는데, 아마 던전 안쪽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 같았다.
난 릭바오의 등에 올라탄 채 이들을 보며 천천히 움직였다. 기사단의 말들이 키 4m짜리 릭바오를 보고 푸르릉- 하며 기겁했다.
"거, 우리 말들이 놀라니 좀 조심해주시오!"
그 말을 들으니 좀 화났다.
여기가 한국의 원룸촌도 아니고, 애완동물 데려오지 말라고 팻말 박아넣은 것도 아닌데 예절을 따지는가.
그래서 최대한 화날 말을 했다.
"울 애기는 성질이 온순해서 괜찮아요!"
"아니...!"
'로커스트 깃발도 있군.'
카밀라의 로커스트 코벤보단 훨씬 격이 낮았지만, 그래도 전투를 못 하는 이들은 아니었다.
온몸에 문신을 새긴 헐벗은 남자가 날 보고 인사했다.
"형씨, 아주 좋은 마수를 길들였군?"
"...로커스트에서 오셨습니까?"
"그렇지. 검은 마력이 상당한 것 같은데, 물담배 한번 하고 갈래?"
이들은 안쪽에서 물담배를 뻑뻑 피우는 중이었는데... 참 여유로워 보였다.
한 번 피워보고 싶기도 했지만 기다리는 일행이 있어 그냥 출발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먼저 가겠습니다."
"그래. 그래도 같은 사령 기사끼린데 안에선 서로 공격하지 말자고."
"언제 들어가실 겁니까?"
"우린 이미 들어갔다 나왔어.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더군. 아마 하루 정도는 놀고 가진 않을까?"
"고생하십시오."
"잘 가게. 후배."
길을 가다보니 토인들도 보였다.
토인들은 피부가 흙빛이며, 도자기로 된 갑옷을 입는 자들.
아틀라스가 산맥의 나라, 로커스트가 늪의 나라라면, 토인들이 사는 태즈메이니아가 바로 숲의 나라였다.
그들은 나무뿌리 이글루 비슷한 것 아래 앉아 그늘을 만끽하는 중이었는데, 상당히 독특한 녹색 마력을 이용해 짐승을 길들이고 나무뿌리를 조종했다.
-끄릉! 끄르릉!
-꾸어어.
물론 그들이 기르는 회색 늑대들도 릭바오보단 몸집이 작았다. 그들이 잔뜩 쫄아서 불안해하자, 토인 한 명이 짜증난다는 듯 내게 말했다.
"거, 커다란 거 타고 다니면 입마개 좀 채워!"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울 애기는 절대 안 물어요. 릭바오가 얼마나 착한데. 그치? 릭바오?"
"어휴!"
그리고 그렇게 걷다 보니...
"유진! 오랜만이야!"
"와... 저 새끼 저거. 릭바오 타고 오는 것 좀 봐."
브랜드가 손을 흔들며 나를 맞아 주었다.
릭바오의 등에서 내리자 갑옷 부딪히는 소리가 심하게 났다.
-철커덕!
"야이 씨... 그나저나 갑옷 마련했어? 나 딱 한 번만 입어봐도 되냐?"
"안돼."
"애교 부려도 안 되냐?"
"네 애교는 아무 짝에도 필요 없어."
그렇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건 거의 10kg에 달하는 강철 판금 갑옷.
풀 플레이트라고 하기엔 민망한 수준이지만, 장비의 필요성을 절감한 나는 돈을 꽤 많이 부었고... 결과적으로 좋은 장비를 구할 수 있었다.
브랜드가 내 갑옷을 탕탕 치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이젠 진짜 사령 기사 같네."
"돈 좀 썼다."
에밀리와 카덴 역시 날 맞아줬는데...
겨울 동안 논 게 아닌지 기도가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오잉...? 마력이 늘었네?'
일단 에밀리.
몸속에 사역하는 푸른 마력의 양도 많아졌고 흐름도 더 정갈해진 티가 났다. 평소에도 살인적이었던 메이스 일격이 더더욱 강해졌을 터. 난 그녀를 칭찬했다.
"유진! 갑옷 멋진데?"
"돈 좀 썼지. 근데 너 훈련했어? 많이 세진 것 같은데."
"헤헤... 티가 나?"
에밀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배시시 웃었다.
"바라칼 죽이고 네가 돈 줬잖아. 그거 들고 스승님 찾아가서 훈련받았어."
"대단하다. 기특해. 에밀리."
"헤헤헤."
그녀는 뭐가 그리 좋은지 몸을 배배꼬며 웃었다. 아주 귀여웠다.
'그리고 카덴...'
그 역시 보법이 좀 달라져 있었다.
"만나서 반갑다."
"그래. 반갑다."
"..."
"..."
원래 그는 비쩍 마른 스타일이었는데...
겨울 동안 벌크업을 했는지 몸에 근육이 좀 붙어 있었고, 서 있는 자세를 보니 전보다 날카로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검술 훈련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
난 감탄했다.
'와... 얘들은 내가 돈을 주면 자기 계발을 하는구나?'
각각 금화 다섯 장씩 보너스를 지급했는데, 잘 쓴 것 같아서 상당히 기특하다.
그럼 브랜드는 뭘 배웠을까?
"브랜드."
"어?"
근데 왜 얘는 겨울 동안 뚱뚱해진 것 같지?
"넌 금화 다섯 장으로 뭐했어?"
"유진. 난 아주 대단한 걸 했지."
"뭔데."
그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나, 여자친구 세 명 만들었다."
브랜드 새끼는 아무 발전도 없었다.
그냥 내가 준 돈으로 비싼 술이나 먹고 여자들이랑 몸이나 부비러 다닌 새끼...
난 이 새끼한텐 보너스를 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릭바오 보여줘. 유진."
"그래."
릭바오를 강아지 크기만큼 소형화시켜 에밀리에게 보내주니, 그녀는 눈에서 하트를 뿜뿜 뿜어내며 릭바오를 마구 만졌다.
릭바오 이 새끼는 그 손길을 싫어하지 않았다.
"유진! 얘 씻겼어? 까하학! 얘는 어쩜 이리 귀엽지?"
-꾸어어엉!
릭바오는 앞발을 바둥바둥하면서, 에밀리의 얼굴을 핥다 바닥에 드러누워 배 긁어달란 시늉을 했다.
그녀는 릭바오의 배도 긁고, 배방구도 해보고, 자기가 먹던 육포를 살짝 떼서 입에 넣어주기도 했다.
그러자 릭바오가 촵촵 잘 먹었다.
그렇게 하루 밤을 보낸 다음, 던전의 검문소로 걸어가 행정 심사를 받았다.
던전이 개방된 지는 일주일.
입장 허가만 받아 놓으면 앞으로 두 달 동안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다.
"음. 서류는 완벽하군. 상패도 있고. 그나저나 지도 살 거요?"
"예."
"은화 두 장이오. 참고로 실제 지형과 다를 수 있소."
"예. 두 개 주세요."
난 그가 주는 지도를 사서, 독법에 가장 익숙한 브랜드와 하나씩 나눠 가졌다.
'얘는 그래도 똑똑해.'
브랜드는 전략, 전술에 조예가 깊었다.
또한 서류도 그가 다 썼는데...
여자는 밝혀도 사무 처리 능력은 확실한 건지, 서류 처리가 고속으로 이뤄졌다.
"이것만 사인하면 끝이오."
공무원이 우리에게 내민 것은 네 장의 각서.
미리 공부한 대로 살벌한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았다.
-던전 내부는 아인베르트의 병력이 관할할 수 없는 지역이다.
-또한 속지주의에 따르는 외국인들과 마찰이 생기면 법적 절차가 복잡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안쪽에서 일어난 범죄, 사고 등에 대해선 본국의 관여가 어려울 수 있다.
-이에 동의한다면...
그러니까.
'본국의 관여가 어려울 수 있다'라는 말은, 곧 하지 않겠다는 뜻.
던전 안쪽에서 무슨 흉악 범죄와 강탈이 일어난들 법적 조치를 아예 취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거의 백지 각서 급의 종이였지만, 우린 이미 다 알고 왔기 때문에 재빠르게 사인했다.
"저쪽으로 가쇼."
그렇게 우린 아인베르트 인부들이 발굴한 인공 석굴을 따라 걸었다. 공무원은 우릴 쳐다보지도 않고 다음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행운을 빌지."
*
아인베르트 서부 던전 1층.
왠지 모르게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인공 석굴의 안쪽, 우린 푸르스름한 조명을 따라 걸었다.
지하라 그런지 기온이 서늘했는데...
에밀리가 하얀 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상하지 않아, 유진?"
"뭐가?"
"병기고의 규칙 말야. 내가 봤을 때 그건,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무기가 돌아갈 수 있도록' 설계된 것 같아."
그렇긴 했다.
이 지하 시설은 보통 정성으로 지어진 게 아니었다.
음울한 기운을 내뿜는 벽면 곳곳에는 푸른빛을 내뿜는 보석들이 박혀 있었고(브랜드가 훔치려 했지만, 무슨 수를 써도 빠지지 않았다) 재질조차 알 수 없는 낡은 바닥은 너무 단단했기에 건설 자재를 도굴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들어간 기술도 기술이고, 재료와 정성도 상당해.'
카밀라 같은 똑똑한 마녀들은 이 던전들의 건축 의도가 '쉘터'라고 했는데...
쉘터라고 하기에는 너무 넓었고, 군사 시설이라고 하기엔 방비가 허술한 데다 값진 보물들이 이곳저곳 흩어져 있는 게 이상했다.
분명 쉘터랑 비슷한 의도로 지어지긴 했겠다만...
사소한 기획의도들이 마찰을 일으키는 기분이라 해야 하나. 뭐, 내가 알 건 없었다.
'난 고고학자가 아니다.'
일개 탐험가인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도굴, 도난, 강도뿐.
우린 이미 수십 명이 지났을 법한 통로를 걸으면서 첫 번째 갈림길을 마주했다.
"자, 여기가 첫 번째 갈림길이야."
지도를 보던 브랜드가 말했다.
"지도에 따르면 갈림길은 무려 다섯 개. 석판을 밟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하네."
"어느 구역이 제일 넓어?"
"애초에 그런 건 의미가 없어, 유진. 학자들이 지도를 다 만든 건 아니거든."
지도 위에는 어디가 병기고인지 나와 있지 않았다. 우린 일단 꼴리는 번호부터 공략하기로 했다.
카덴이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4."
"음. 이유라도 있어?"
평소에도 좀 음침한 헤어스타일을 가진 새끼라 약간 무서운 감이 있는데, 던전 내부의 조명까지 받으니 공포 영화가 따로 없었다.
왠지 죽을 사가 떠오르긴 했지만...
아틀라스 제국의 언어로 4가 '죽음'이란 단어와 연관되진 않았으므로 그런 편견은 지웠다.
카덴이 말했다.
"4."
"그래. 뭐. 가자."
그렇게 우린 4번 통로를 향해 발을 옮겼다.
내가 살던 자취방보다 조금 더 큰 방의 안쪽.
브랜드가 미리 설명한 대로 커다란 발판 하나가 있었는데...
거기에 우리가 다 같이 발을 얹자마자-
발판이 아주 불길한 붉은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후우... 기대된다. 그치?"
"그러게."
에밀리의 미소를 마지막으로-
우린 새로운 공간에 이동되었다.
"음...?"
그리고...
"너, 너네들 누구야?"
약간의 멀미를 겪는 와중에, 아주 추레한 인상의 탐험가 여럿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의 복장은 제각각이었다.
어디 시체에서 벗겨온 듯한 각반을 찼고, 흉갑은 당연히 각반 재질과 맞지 않았으며, 그들이 들고 있는 칼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자연스레 아래쪽을 바라보니...
그들의 칼에 쓰러진 건 몬스터가 아닌 사람이더라.
"뭘 봐...! 갈 길 가! 뒤지고 싶어! 어! 어!"
그가 갑자기 날 향해 허공에서 칼을 휙휙 휘두르기 시작했다.
나, 에밀리, 카덴, 브랜드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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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같이 와줘서 고맙다.
어두침침한 던전의 안쪽.
우린 다섯 갈래의 갈림길을 찾아냈고...
각각의 방 안엔 순간 이동 마법이 새겨진 발판이 존재했다.
"4."
앞머리로 한쪽 눈을 가리는 스타일을 고수하고, 머리카락은 칠흑처럼 어두우며, 눈 아래엔 다크 서클이 있는, 말수가 적고 가끔 아는 얘기가 나오면 시니컬하게 흥분하는 음울한 남자 카덴은 왠지 모르게 4라는 숫자에 집착했다.
"4."
원래 이런 애들이 자기 의견을 무시하면 굉장히 화를 내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의견을 존중한 결과...
4번 발판을 쓰자마자 정체 모를 남자 넷에게 가로막히게 되었다. 그들은 피 묻은 칼을 들고 우리를 위협하며 말했다.
"니들 뭐야! 뒤지고 싶어? 저리 가라고!"
'보링턴 영지 시절이 생각나는군.'
상대의 복장은 우리보다 좋지 않았다.
내가 영지전 뛸 때 보던 민병대들의 복장과 비슷한 상황.
좋게 말하면 장비에 다양성이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어디서 훔쳐 입은 듯한 제각각 패션이었다.
그들의 칼을 맞고 죽은 사람들은 이미 반쯤 옷을 벗고 있었는데, 아마 죽은 다음 강도질 당하는 중인 것 같았다.
'...평소라면 무시했겠지만.'
등 뒤에 벽이 있는 상태.
놈들 네 명이 길을 막고 있으면 우리가 나아갈 수가 없는 구조라, 난 최대한 예의를 갖추면서 놈에게 말했다.
"나도 너흴 굳이 죽일 생각은 없다. 그 칼 집어넣고 저리 꺼져라."
하지만 칼을 든 대머리 놈은 심각한 소통 장애를 호소했다.
"내가 니들을 어떻게 믿고! 너네야 말로 칼을 땅바닥에 내려놔! 빨리!"
"네가 먼저 내려놓으면 나도 내려놓을게."
"니들이 먼저 내려놔야 우리가 내려놓지."
"얘기가 끝나질 않잖아..."
그때.
갑자기 브랜드가 튀어나오면서 말했다.
"이 씨발놈들아."
"...!"
입장 극딜 메타.
브랜드는 양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질겅질겅 껌을 씹는 듯한 입 동작을 취하며 걸었다.
"왜 저래 진짜..."
"..."
에밀리가 그걸 보고 혐오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앞의 놈들은 그런 브랜드의 모습이 좀 무서웠는지 움츠러들었다.
브랜드가 아주 고압적으로 말했다.
"니들 상패 꺼내봐."
"내, 내가 좆으로 보여! 우리가 우리 상패를 왜 보여줘야 하는데!"
"니들 소속이 어디야? 어디 기사단 소속이냐? 아니면 용병단이냐?"
"우린 푸른... 그. 늑대 용병단이다."
"자아, 이럴 때 우리 사령 기사 유진님이 나서 줘야지."
브랜드가 날 바라봤다.
"로커스트엔 관상 문화가 있다고 했는데, 유진. 관상도 볼 줄 알아? 쟤들 얼굴이 어때?"
"왕이 될 상... 은 아니군. 내가 볼 때 쟤들은 눈썹이 굵은 게 산적 같아."
"네가 볼 때도 그렇지?"
물론 이건 개소리였는데...
갑자기 눈앞의 살인범들이 우문현답을 했다.
"이, 이 좆같은 새끼들! 사람의 얼굴만을 보고 미래를 유추하다니 얼마나 야만적이고 미개한 풍습이냐!"
"..."
"사납게 생긴 동물들도 자기 자식을 품을 땐 온정을 베풀고, 비뚤어져 자란 나무도 잎을 뱉어내고 꽃을 피우는 법인데! 너희는 어떻게 사람이란 족속들이 생긴 것만 보고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할 수가 있어!"
갑자기 좀 부끄러워졌다.
현대 한국에서 자란 나는 과학을 신봉하고 관상학, 수상학 등의 미신을 배척해야 했거늘...
이런 던전 속 거지한테 말솜씨로 패배하니 가슴이 쓰렸다.
'저 새낀 말을 왜 저렇게 청산유수로 잘하는 거야?'
"그럼 이렇게 하자."
"..."
"니들이 진짜로 푸른 늑대 용병단이면, 바로 전에 맡았던 임무를 말해봐라. 내가 1, 2, 3 하는 순간, 정확히 너네들이 했던 임무를 말하는 거야. 알았지?"
"...자, 잠깐!"
"1."
그들은 충격받은 눈치로 서로를 바라봤다.
"2."
그리고 내가 숫자를 세자...
"3."
"상단 호위!"
"어, 어어..."
"늑대 마수를 죽였,"
"야이, 개-새끼야! 용병하면 상단 호위고, 상단 호위하면 용병이지 이 무식한 새끼..."
난 한숨을 쉬었다.
"결국 관상이 맞았던 거 아냐. 너네 산적 비슷한 거지?"
"그래! 내 얼굴만 보고 산적이라고 하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범죄자로 만들었다! 죽어라!"
"사실 너넨 산적처럼 안 생겼어."
"..."
역시.
던전 속에서 마력 한 줌 없이 사람이나 죽이는 새끼들이 제대로 된 놈들일 리 없었다.
놈들이 칼을 세게 거머쥐던 그 순간, 순식간에 구결을 완성시켰다.
'영혼은 삶... 뭐였지?'
그러자 주변에 수 개의 사령 화살들이 만들어지며, 단 1초의 딜레이도 없이 공중에서 튕겼다.
-팡!
공기 터지는 소리!
거의 발리스타 볼트에 가까운 투사체들은, 눈앞의 범죄자들이 반항할 기회 한 번 주지 않고 무식하게 중요 장기를 꿰뚫어 버렸다.
"푸하아아악!"
그 충격량이 너무 큰 나머지 한 명은 화살을 맞은 채 1m 정도 날아갔으며, 목에 맞은 놈은 아예 머리와 몸이 분리돼 버렸다.
'사령술이 굉장히 강해졌어...'
몇 초도 되지 않아 전투가 끝난 상황.
놈들은 대부분 화살을 맞는 시점에서 죽사했고, 뜬 눈으로 피를 뱉어내는 놈도 하늘로 올라가기 직전이었다.
이럴 때 할 일은 단 하나라.
우린 자연스럽게 이들의 시체를 구석으로 옮긴 다음, 옷 벗기기를 시작했다.
브랜드가 소리 질렀다.
"와, 씨발! 이 새끼 고추 존나 작아!"
"아, 진짜! 수준 좀!"
이런 부랑 범죄자들 속옷이면 냄새가 날 만도 한데...
브랜드는 수치심도, 더러움도 못 느끼는 사람처럼 그의 팬티를 탁탁 털어 금화 한 장을 기어코 찾아낸 다음 자랑을 시작했다.
누런 팬티를 샅샅이 뒤진 브랜드의 얼굴엔 자부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봐. 에밀리, 카덴, 유진. 응? 이게. 이렇게 해야 돈을 버는 거야."
"횡재했군. 브랜드."
"줄까?"
금화에서 쿰쿰한 사타구니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아니, 너 가져."
놀랍게도 이들은 금화 세 장에 은화 다섯 장이라는 놀라운 금액을 갖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우리들의 사기는 엄청나게 올랐다.
게다가 나한텐 부가적인 이득도 있었으니.
-촤르륵...
난 이들의 혼백을 흡수할 수 있었다.
"유진. 이거 완전 꿩 먹고 알 먹고 아니냐?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조사해볼까?"
모험가란 직업이 게임이나 각종 판타지 매체에선 유명했지만...
아틀라스 제국에서 이들은 대부분 범죄자들에 불과했다.
'몬스터들은 다 죽었고, 던전도 드물게 발견되는 세상이다.'
이백 년 전, 악마들과의 대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
수천이 넘는 초인 군단이 자연에 살던 '괴물'들을 다 잡아 씨를 말렸다고 했다.
중세의 기사들에게 천연기념물, 생물다양성 같은 말을 할 순 없는 법.
노기사 아이작 같은 인간들이 4일 밤 동안 잠도 안 자고 추적해 죽이길 반복하는데 뭐가 남아나겠는가?
결국 괴물들은 인간과의 생존 경쟁에서 패배, 도시에서 먼 시골로 도망치거나 죽고 말았다.
'실제로 트롤도 보링턴 영지에서나 좀 보였지.'
이런 세상이니 모험가가 필요할 리 없었다.
만약에라도 트롤이나 마수가 나타나면 기사단이 조지거나, 귀족이 직접 나서기 때문.
고로 대부분의 모험가는 노상강도인지라 제국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그러니까 우린 정의의 기사가 되는 거야. 유진."
"...이딴 게 정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 번 남의 돈 뺏어본 본 놈들이 원래대로 돌아갈 순 없는 법.
애초에 떳떳하게 무력을 쓰는 놈들은 용병단이나 기사단으로 갔으니, 민간인도 아니면서 무기 들고 다니는 놈들은 99.9% 확률로 범죄자가 맞았다.
"좋아. 정의로운 강도질을 하자."
"좋아, 유진."
우린 그렇게 맹세한 다음 미로 같은 던전을 계속 걸었다.
*
두 시간 정도 걷자, 결국 아인베르트 고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지도의 한계점에 봉착했다. 브랜드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여기서부턴 지도가 없군."
이 이후부턴 말 그대로 미지의 영역.
우린 던전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고, 어떤 방식으로 엉켜 있는지도 모른다. 길을 잘못 들면 죽을 수도 있을 터. 하지만 보상은 확실할 게 뻔했다.
"여기서부턴 내가 지도를 작성할게."
'독도법을 배웠다고 했지.'
그는 각종 전술 이론을 알았고, 지도 그리는 것, 읽는 것에 익숙하니...
전투를 제외해도 쓸모가 많았다.
"일단 오른쪽 길이랑 왼쪽 길이 있는데, 어디로 갈까."
"왼쪽."
이번에도 단답하는 카덴.
"아니, 카덴. 아까부터 굉장히 확실한 표정으로 길을 말하는데 혹시 무슨 기준이 있는 거야?"
에밀리가 좀 당황스러워 묻자, 카덴이 대놓고 기분 상한 티를 내면서 말했다.
"그러면... 오른쪽으로... 가던가... 맘대로 해."
"아, 아냐. 카덴. 미안해."
어차피 앞에 뭐가 있는진 몰랐다.
그의 말마따나 누구 말을 듣던 별 상관없었기에, 우린 카덴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분.
우리는 두 번째 탐험가 집단을 마주하고 말았다.
"야, 씨발. 빨리 가라고!"
"악!"
그들은 화려한 갑옷을 입은 존재들.
새하얀 견갑 아래쪽엔 황금빛 넝굴 장식이 붙어 있었고, 검에는 아이리스를 모시는 음각 기도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은 아이리스를 섬기는 아틀라스 제국의 대형 기사단, 황금 넝쿨 기사단의 일원이라.
금발의 평기사는 낄낄거리며 낡은 옷을 입은 소년을 발로 차서 굴리고 있었다.
-퍽!
"크흑!"
소년의 나이는 잘 쳐봐야 열 살에서 열한 살 정도. 어린애가 맞는 걸 보니 마음이 안 좋았지만, 중세에 저런 애들은 많았다.
평기사가 말했다.
"뭐해. 다리에 힘 안 줘? 돈 받기 싫어?"
"으, 으윽... 죄송해요."
"또 똥오줌 먹여줄까? 응? 낄낄낄."
돌아가는 꼴을 보니 감이 왔다.
'저 꼬마는 기사의 종자로군.'
종자는 기사의 하인.
우리 같은 기사 후보생들이나, 돈이 없는 이들은 굳이 종자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돈 있는 기사들은 마치 하인처럼 종자를 대동한 채 돌아다녔다.
귀족 영애들의 인생이 제각각인 만큼 종자들의 인생도 제각각이었는데...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난 종자들은 나름 잘 먹고 합리적인 일만 하는 등 상당히 좋은 대접을 받았지만, 저렇게 학대를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마력을 준답시고 가스라이팅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새끼야. 너, 마력을 깨우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걸 가르쳐주는데도 이렇게 좆같이 굴어?"
"야, 알폰소. 그만해라. 죽겠다."
"이 새끼가 요즘 빠져가지고..."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응?"
그리고 그 와중에, 그들이 우릴 발견했다.
알폰소라고 불린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야. 니네들, 누구야? 딱 봐도 약해 보이는데. 너네는 어디 기사단 몇 기니?"
"..."
"몇 기냐고. 대답 안 해?"
브랜드와 에밀리, 카덴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들 역시 종자 생활을 해본 몸.
평기사가 아주 자연스레 하대하자 몸이 굳어버렸다.
'원래 권위란 건 그렇지...'
한 번 뼈에 새겨진 위계, 두려움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라. 바짝 쫄아버린 브랜드는 내게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유진, 평기사는 못 이겨.
브랜드의 시선을 따라 놈들을 바라보니...
'강하긴 하군.'
놈들의 마력은 내 다섯 배 이상.
아마 검에서 불도 뿜을 줄 알 것이었다.
만약 전투가 일어난다면 나는 어떻게든 해나갈 자신이 있었지만, 적어도 우리 후보생들이 다 죽는 건 피할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선배를 보면 인사를 해야 할 거 아냐. 응?"
에밀리, 브랜드, 카덴.
이들 역시 고통스런 후보생 생활을 한 것이었을까. 이들은 폭력으로 길들여진 사람들처럼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이들은 역시 위계질서가 강한 환경에서 살았고, 상관이 폭력에 능한 초인이었으니 그렇게 되었겠지.
'필시 온갖 가혹행위가 있었을 터.'
한국에서 마음의 편지, 1303같은 최소한의 구제책을 마련해도 사고가 터지는 판인데, 중세라면 어떻겠는가.
하는 수 없이 난 결정을 내렸다.
'여기선 내가 나서야겠군.'
세 명 앞으로 나아가 알폰소라고 불린 놈을 노려봤다.
"갑옷의 문양을 보니 황금 넝쿨 기사단 출신인데... 괜히 문제 만들지 말고 서로 갈 길 가자."
"하. 이건 또 뭐야? 사령술사잖아. 아니, 너 같은 놈들도 요즘은 기사라고 하나?"
그들이 날 보고 낄낄거렸고, 난 함께 웃다가 정색했다.
"못 알아들었냐? 비키라고. 우리 시간 없어."
"...너 지금 나한테 반말 쓴 거야?"
"이 병신새끼들. 자꾸 딴 소리만 하네. 귀에 좆박았냐, 씹새끼들아? 비키라니까 반말이고 뭐고가 왜 필요해."
"..."
어차피 저자세로 나가도 저들이 친절할 이유는 없겠지.
그렇다면 굳이 협조적으로 나설 필욘 없었다.
물론 나도 두렵긴 했다.
나 역시 칼을 많이 맞아보고, 피를 흘려봤기에 강자에 대한 두려움이 자연스레 있었다. 고통, 죽음, 굴복 그런 단어들.
그러나 지금 필요 없는 감정을 지우려 결심하자-
'용기.'
가슴 속의 모든 두려움과 공포가 씻은 듯 사라졌다. 난 한층 더 맑아진 눈으로 말했다.
"얼마나 할 짓이 없으면 던전에서까지 군기를 잡고 있냐? 난생 첨보는 사람한테. 뒤지기 싫으면 비켜."
"야, 이 새끼 존나 웃기네."
"..."
"네가 날 이길 것 같냐?"
알폰소가 살기 어린 눈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며 푸른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딱히 위압감은 들지 않았다.
"아니."
"...그걸 알면 왜."
"근데 너네 중 하나는 무조건 죽일 거다."
공중에 화살을 하나 만들어 그들 쪽으로 세웠다. 알폰소를 비롯한 기사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날 바라봤다.
"일단 저 종자 소년부터 죽여주지."
"..."
"그리고 그 다음엔 너, 황금 넝쿨 기사단의 알폰소라고 했지?"
-텅.
난 그의 갑옷을 툭 치면서, 몸에서 사령 안개를 뿜었다.
시야를 차단하는 검은색 안개가 아주 조금씩 스멀스멀 빠져나와 주변을 뒤덮었고, 그들은 발 닿는 게 불쾌한 듯 뒤쪽으로 조금씩 물러났다.
"...새끼. 아주 비겁한 사술을 쓰네?"
내게는 여러 장의 패가 있었다.
[이식-육체변형]으로 얻은 두 번째 심장.
언제든 대형화시킬 수 있는 릭바오.
사령 화살, 검술, 갑주, 번개 등.
이걸 다 활용하고, 기사 하나를 죽인 다음 칼에 찔리면 [포식]을 쓰는 식으로 버틸 거다.
'어차피 통로는 좁아. 협공도 그리 쉽진 않겠지.'
내가 가진 모든 카드를 활용해 저들에게 최대한 고통을 주고, 결코 던전 바깥에서도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었다.
그 의지를 확실히 하듯, 뒤쪽에 있는 후보생들에게 전달했다.
"얘들아. 내가 누구 공격하면 한 놈만 노려라. 알았어?
"좋아."
"알겠다."
"그래."
카덴이 가장 먼저 확고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 다음은 에밀리, 브랜드의 순.
투항한다는 선택지가 사라지자 그들에게 남은 건 살의뿐이라. 그들은 이지선다 앞에 강요되자, 훈련받은 대로 두려움을 잊었다.
그러자 알폰소는 벌레 씹은 표정을 짓더니 다시 웃는 가면을 썼다.
"새끼들. 뭘 그리 진지를 빨고 있어? 아, 장난 좀 쳐본 거야. 장난. 하여간 뭐든 진지하게 받아들여 가지곤."
"..."
"가자. 얘들아."
그는 멀어지는 와중에도 번들거리는 눈을 빛내며 말했는데...
"너네들도 보물 많이 찾아라! 알겠지?"
"..."
"대답 안 해?"
"알폰소, 가자."
자기 감정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가 떠나고 난 직후.
알폰소가 한 말에서 떠올릴 수 있는 추측은 하나밖에 없었다.
비록 직감에 불과한 내용이라지만, 우리 넷은 비슷한 생각을 공유했다.
"...에밀리."
"응."
"저 새끼들, 이 던전 안 나가겠지?"
"맞아. 굉장히 높은 확률로."
내가 볼 때 저들은 입구 막기를 할 생각이었다.
남들이 힘들여 얻은 보물을, 입구막기하면서 강탈하고 빼앗을 생각.
굳이 힘이 있다면 수고스레 던전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오가는 사람들만 다 죽이면 그들의 보물을 가질 수 있으니까.
'사기가 낮아졌군.'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날 따라와 준 세 명의 기사 후보생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
"난 앞으로 갈 거다. 무조건 병기고에 가서 고대 무기를 받을 거고. 만약 우리가 던전 나갈 때 저 새끼들이 있으면, 싸우고 죽일 예정인데 너넨 어떻게 할래."
"..."
"두렵나? 두렵겠지. 특히 너네들은 더욱."
위계질서가 강한 초인들 밑에서, 벌과 상에 덜덜 떨면서 살아가다 보면 인간의 정신은 아작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라도 버티는 게 용한 것.
난 이들의 면면을 바라봤다.
가장 괴로워했던 브랜드 역시 할 땐 하는 사람이었고.
에밀리는 투쟁심이 강했으며, 카덴도 나름의 음울한 기백이 있었다.
"너네도 언젠가 평기사가 될 건데, 다른 놈들한테 쫄고 살 거야? 평생?"
"...그럴 순 없지."
"약한 놈에겐 강하고, 강한 놈에겐 굽신대면서 살 거냐고."
"아니."
브랜드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눈빛은 절망적이었지만, 그 안엔 타오르는 불길 하나가 있었다.
"지금 빠지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말하자. 다 같이 데려다 줄 테니."
"..."
난 이들을 바라봤다.
"없나?"
"..."
"그러면- 다 같이 고대 병기고를 턴 다음 그 무기로 쟤들을 죽이고 싶은 게 맞아?"
"그래."
그 말을 하자 세 명의 후보생들이 여유를 되찾고, 마음 속으로 결정을 내린 게 보였다.
난 그걸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다들 같이 와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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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에서 제일 시원한 곳은 어딜까?
적대적인 기사 네 명을 만나는 소사건.
내 입장에선 흘려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나야 후보생 생활을 해본 적이 없고, 저 인간들이 얼마나 악질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달랐다.
'실제로 학대를 당했나보네.'
가장 상처가 심해 보이는 건 브랜드였는데...
그가 말을 하지 않자 대화를 시작할 사람이 없어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심히 당황스러웠다.
"..."
"..."
"..."
기나긴 침묵의 행군.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팀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리더는 나지만, 분위기메이커는 브랜드였단 사실을.
'좀 천박해 보이긴 해도, 브랜드는 우릴 즐겁게 해주려 노력했다.'
그가 침묵하고 나서야 그런 것들이 보였는데... 그 생각을 하니 짜증이 치솟았다.
'하여간 비열한 새끼들.'
처음부터 돈을 내놓으라 협박했다면 덜 미웠겠다.
하지만 은근히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고, 후보생들이 두려워할 만한 부분을 살살 긁으며 괴롭히려 드니 살의가 치솟았다.
그들과 싸우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당장을 위해서라도 분위기를 개선할 필요성은 있었다. 그래서 말했다.
"얘들아. 우리 분위기가 너무 어둡다."
침울한 분위기는 긴장으로, 긴장은 실수로 이어질 수 있는 법.
전사는 너무 풀어져서도 긴장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기 위한 특단의 대책을 생각해냈다.
"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각자 웃긴 얘기 하나씩 해보자."
"흠."
에밀리, 브랜드가 당황하는 사이.
의외로 카덴이 선공권을 잡았다.
'오... 카덴. 그 음침해 보이는 표정 뒤에 이야기 보따리를 숨기고 있는 거냐? 의외인데?'
"좋아. 카덴, 네가 먼저 해봐."
"크흠... 어느 시골 마을에 엄마랑 아주 어린 아들이 살았다."
우린 카덴이 무슨 재밌는 얘기를 하나 싶어 바라보았다.
그러자 카덴이 천천히 이야기를 풀었다.
"하지만, 산적이 마을을 공격했지. 엄마는 눈이 멀어버렸고, 아들은 성대가 잘려 벙어리가 되었다."
"..."
갑자기 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려운 길을 가는구나, 카덴. 그래도 그 만큼 자신이 있으니까 하는 거겠지?'
대체, 여기서 어떻게 변화구를 줘야 저 얘기가 재밌어질 수 있는 거지? 엄마가 장님이 되고 애가 벙어리가 되었는데?
심한 긴장에 침이 절로 넘어갔다.
"결국 아들은 노예로 팔려가 둘은 생이별을 했는데... 엄마는 아들의 이름을 불렀지만 장님이라 찾지 못했고..."
'그래서 웃긴 얘기는 언제 시작하는 거냐, 카덴?'
"아들은 성대가 없어 엄마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지. 크큭. 둘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풉킥. 크흐흑. 흐기긱! 프하하하하!"
"..."
에밀리가 진짜 쓰레기 바라보는 표정으로 카덴을 노려봤고, 브랜드는 진지하게 따졌다.
"그건 웃기다기보단 슬픈 얘기 아니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다음 투수, 에밀리.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쉰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 그, 딸기가... 이제 직장에 들어갔는데. 직장을 잃었어! 일을 못 해서! 그럼 그 딸기를 뭐라고 할까?"
"..."
"..."
에밀리는 자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진득하고 차가운 침묵 속, 던전을 이동하는 네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 적막하게 들렸다.
"따... 딸기 시럽."
"왜지? 에밀리? 왜 딸기 시럽이지?"
카덴이 진짜로 이해를 못 하겠단 표정으로 묻자, 에밀리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딸기가 실업을 해서 시럽이라고. 카덴. 좀."
"그렇군. 미안하다."
솔직히 난 조금 웃겼는데...
에밀리의 농담 능력치가 낮아서 그런 걸까.
그녀의 농담은 별 효과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팀의 분위기를 살리는 건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었다.
난 내 위대한 영을 믿기에-
'여기서 역전 만루 홈런을 쳐야 한다.'
당당하게 말했다.
"누가 마차를 타고 간다 가정해 보자. 그럼 이 마차에서 제일 시원한 곳은 어딜까?"
그러자 팀원들이 나름 눈썹을 찡그리며 고민하기 시작했고...
나는 이들의 눈빛을 하나하나 즐거운 표정으로 쳐다보다, 최대한 자연스런 태도로 말했다.
"차 가운데."
"...아."
"..."
"..."
그래도 에밀리는 좀 실소했지만, 나머지들은 오늘 부모님이라도 돌아가신 듯 땅만 바라봤다.
순식간에 수치심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미안해."
"..."
"미안하다고, 이 새끼들아."
"아냐, 유진. 난 진짜 조금 웃겼어..."
그렇게 침묵 속에서 걷는데, 와중에 카덴이 지껄였다.
"재밌는 얘기 하나 더 해줄까? 이번엔 진짜 자신 있다."
아무도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
던전은 가면 갈수록 넓어지는 구조였다.
하나의 긴 가지에서 방사형으로 넓어지는 구조라 해야 하나. 전체적인 지도를 보면 나뭇가지 같았다. 통로 중간중간에 방들이 있었는데, 안이 깔끔히 빈 경우도 있었고, 이상한 잡기들로 채워진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기괴한 건 문 자체가 닫혀 있는 경우였다.
"이건 어떻게 여는 거지?"
난 거대한 철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두들겨도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식물 문양들이 양각된 철의 문.
세게 쳐 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다간 무기가 부러질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황금빛 열쇠를 꺼내 열쇠 구멍에 넣어 보니...
"아주 아쉽게 안 맞아."
크기와 양식은 똑같은데, 이 문에 넣는 게 아닌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문의 위치를 지도에 남긴 다음 미지의 영역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걸은 결과...
우린 첫 번째 몬스터를 발견했다.
'우와... 고블린이다!'
고블린!
이 세상은 마수를 제외하면 몬스터가 드문 게 현실인지라. 내가 이세계에 전이하고 나서 저 초록색 난쟁이들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킥! 키익!
-키샤아악!
그래서일까?
좀 신기하면서도 반가웠다.
그들은 애만 한 키에 녹색 피부, 긴 팔, 노란 눈깔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의 팔처럼 보이는 고기를 양옆으로 잡아당기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우리 존재를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그 짓에 집중하는 중이라, 난 편하게 그들을 관찰했다.
'진짜 신기하다.'
그런데 갑자기 카덴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번엔 내가 하지. 유진.
자신의 '재밌는 얘기'에 아무도 웃어주지 않아 화난 것일까?
그는 육식동물처럼 자세를 낮추고 걷다가,
-스륵.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고블린의 모가지를 땄다.
'...깔끔해!'
확실히 날카로워진 검법.
그가 은빛 궤적을 남기며 장검을 휘두르자 고블린의 머리가 아주 깔끔하게 잘려 데굴데굴 굴렀다.
연속되어서 하나의 획으로 보이는 동작.
어찌나 빠르고 정확한지 고블린 두 마리를 베어 넘기는 와중에도 적들은 인식하지 못했다.
-키익!
-캐야아악!
고블린들이 눈치를 깠지만 이미 늦었다.
카덴은 빠르고 효율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찌르고, 베고, 그걸 방어로 전환하는 동작에 딜레이가 없었다. 그는 쉬지 않았다.
푸른 마력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공격과 공격 사이에 틈인 없는 훌륭한 검술은 고블린 수십 마리의 목숨을 순식간에 거뒀다.
그러자-
-키샤하아아악!
키가 2m에 달하는 고블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튀어나왔다.
그걸 보며 사령 화살을 조준하자-
"돕지 마!"
카덴이 오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
-키햐아악!
큰 소리를 내면서 카덴을 향해 몽둥이를 내리치는 고블린. 그러나 카덴은 몽둥이와 검이 맞닿는 순간까지 지독하게 눈을 뜨고 버텼다.
'...대단하군.'
-깡! 깡! 깡!
카덴은 정말 위태위태하게 싸웠다.
그는 일부러 방패를 가슴 쪽에 붙이고, 오로지 한 손에 든 검만으로 소드 레슬링을 하며 타격을 흘려냈다.
-키샤아악!
잡병 고블린이 던지는 조잡한 투창.
하지만 카덴은 우아하게 돌면서 종이 한 장 차이로 그것을 피했다.
난 녀석을 보고 감탄했다.
'이 새끼... 연습하는 거야?'
카덴과 고블린의 몸짓에 속도가 붙었다.
그는 푸른 마력까지 써가며 화려하게 스텝을 밟다가-
-푹!
거대 고블린의 몽둥이를 완벽하게 튕겨내고, 갑자기 공세로 전환해 심장을 꿰뚫었다.
"흐읍."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달려가 창을 던졌던 고블린의 목까지 깔끔하게 자르니, 카덴은 혼자서 고블린 패거리 스물 정도를 정리했다.
'카덴... 강한데?'
싸움은 수천 가지 변수의 조합.
검술에 능통하다 한들 화살 한 대 잘못 맞으면 죽었고, 마력량이 아무리 많아도 제대로 못 쓰면 소용이 없었으며, 위력적인 마법을 알아도 근접에서 붙으면 위험해졌다.
그런 면에서 카덴은 강했다.
'마력량은 낮아. 하지만 검술로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구나.'
"끝났다."
아주 침착하게 말하는 카덴.
우리가 짝짝짝- 하고 박수를 쳐주자, 카덴이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싸움의 열기가 싸늘한 분위기를 달궈준 걸까?
피를 좀 보고, 전리품 몇 개를 줍자 분위기가 나쁘지 않게 변했다.
에밀리와 카덴이 커다란 고블린의 시체를 뒤지다가 이상한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런 걸 찾았는데, 유진. 네 열쇠랑 비슷하지 않아?"
에밀리가 찾아낸 걸 유심히 바라보았다.
"오..."
그것은 내 황금 열쇠랑 비슷한 무늬를 갖고 있었는데, 대신 색깔이 매우 탁했다.
굳이 말하자면 철의 색이랄까?
딱 봐도 내가 가진 황금 열쇠랑 비슷한 물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내가 황금 열쇠를 빼내 철 열쇠에 대어보니 무늬가 일치했다.
"이거 뭔가 익숙하지 않아?"
"맞아. 아까 발견했었던 그 방. 그 열쇠 구멍에 끼울 수 있을 것 같아."
"가보자."
말없이 지도를 그리던 브랜드의 눈도 이채를 띄었고, 에밀리와 카덴의 기분도 한결 나아진 듯 보였다.
다시 그 방 앞에 가서 철 열쇠를 꽂아 넣어 보니...
-쿠구구궁...
철컥, 하고 기관 장치가 동작하는 소리와 함께 돌문이 위로 들어 올려지기 시작했다.
"오오...!"
그 안에 있는 건 검은색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방. 복도와 비슷하게 푸른 빛을 내뿜는 조명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그 벽면엔 딱 봐도 품질이 좋아 보이는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검과 창을 비롯한 무기도 있지만, 그릇이나 랜턴같은 장식품들도 있군.'
물건 아래엔 각각 마법 문자처럼 생긴 것들이 쓰여 있었는데.
"이게 뭐야? 대체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만지지 마. 에밀리."
갑자기 내 피부에 소름이 쫙 돋았다.
방 안에 쓰여진 글자들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이건 극도로 이상했다.
여기 온 후, 나는 대륙 공용어를 '자연스레' 사용할 수 있었다. 말하고, 듣고, 읽는 것까지.
그러나 로커스트의 주술 문자는 읽지 못했다.
맨 처음 롤랜드 경에게 받은 상패의 글자를 읽을 수 없었고, 릭바오의 목줄에 써진 문자도 마찬가지였다. 순간이동 발판 위에 쓰인 것도 인식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던전에 쓰여 있는 문자들은 물 흐르듯 읽혔으니.
난 눈을 가늘게 뜨고 푸르게 빛나는 글자를 바라봤다.
-미분류 창고 1151
-오래된 수행자를 위한 지원 물자들을 여기 남긴다.
이곳에 있는 건 전부 마법 아티팩트.
또한, '수행자'라는 이들을 위해 준비된 물건이었다.
-열쇠 하나당 다섯 명이 사용할 수 있다.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은 각자 하나.
나는 이 장소가 '왜' 만들어졌는지 찾아봤지만 그런 말은 없었다.
간단한 사용법과 주의사항만 적혀 있을 뿐.
하긴, 디테일한 부분에 모든 부분의 요약을 적어놓을 필욘 없었다.
어쨌든 그걸 설명해주자 다들 좋아했다.
"마, 맙소사. 유진. 이걸 읽을 수 있어?"
"응. 이건 비밀로 해줘. 내가 여깄는 것들 해석해 줄 테니까."
에밀리가 설레는 표정으로 벽에 다가갔다.
벽면에 걸린 건 메이스.
난 그녀를 위해 글자를 읽어주었다.
-귀환의 마법이 걸린 강철 메이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주인을 향해 돌아온다.
딱 봐도 품질이 심상치 않았다.
강철로 만들어진 메이스의 이음새는 상당히 단단한 편. 장인의 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공장에서 만들었다고 해도 납득이 갈 정도였다.
"이, 이걸 가져도 된다고?"
"일단 다 한 번씩 보고 결정하자."
그렇게 우린 여러가지 물건들을 둘러봤다.
-크기보다 물을 스무 배 더 담을 수 있는 물통.
-행운을 불러오는 클로버 박제 목걸이
-기억력을 소폭 상승시키는 묵주.
-약 2048페이지를 사용할 수 있는 초소형 다이어리.
-공중에서 한 번 더 점프할 수 있게 해주는 신발.
이것들을 한 번씩 본 팀원들의 표정은 엄청나게 밝아졌다.
특히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브랜드였다.
"유진... 솔직히."
"응?"
"전설의 무기를 얻는다 해도 그 기사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 왜냐면 어차피 내 실력은 그대로잖아."
우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근데..."
"..."
"이게 '철 열쇠'로 열 수 있는 방에 있는 물건이라면... '금 열쇠'로 열 수 있는 방엔 뭐가 있는 거야?"
"..."
"네 말에 따르면 손바닥만 한 크기의 다이어리가 2048페이지를 갖고 있는데... 금 열쇠를 가진 방에는..."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매직 아이템과 전설급 아이템의 차이가 있겠지.'
"확실히 그 정도 물건이 있다면, 우리도 10년차 평기사랑 비빌 수 있는 거 아냐?"
지금까지 오면서 본 방은 이거 하나가 전부.
그러나 가슴이 뛰었다.
황금 방의 무기를 본 건 아니지만, 그 정도의 아티팩트로 무장한 기사 후보생 다섯이 약할 리는 없었다.
"와... 유진. 진짜 그거 우리 주는 거야?"
내가 모든 걸 가지는 것도 좋겠지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할 뿐더러 전체적인 전투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또한...
따져보면 바라칼도 여럿이서 같이 잡은 것이다.
이 정도는 나눠도 괜찮았다.
'물론 기사단이 약탈한 물자는 기사단의 것이다.'
이는 용병단도 마찬가지.
집단의 방침을 너무 파격적이고 개방적으로 정하면, 필연적으로 똥파리가 꼬이고 분쟁이 생기기 마련이라.
나는 최대한 이들이 듣고 싶어하면서도 내 이득에 부합하는 말을 했다.
"나, 기사 서임 받으면 바로 기사단 만들 거야. 너네들 다 들어올 거지?"
"...당연하지."
기사들은 구두 약속도 중하게 여기는 법.
난 이들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들은 각자의 판단대로 보물을 하나씩 골랐다.
나도 첨예하게 고민한 다음 보물을 하나 골랐는데...
"유진... 그 판단, 확실해?"
"흠..."
왠지 그 반응이 그리 좋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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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류의 선택지가 있었다.
강철 문을 지닌 보물 창고의 안쪽.
우린 서로 선택한 물건들을 비교해봤다.
일단 에밀리가 선택한 건, 섬광을 뿜어내는 방패.
손잡이 안쪽에 있는 레버를 꽉 쥐면, 방 전체를 엄청난 빛으로 채워버리는 물건이었다. 한 번 맞아보니 눈이 아픈 걸 넘어 광과민성 발작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녀는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그걸 들고 방방 뛰었다.
"게다가 내구도도 상당해. 보통 단단한 게 아냐."
또한 방패는 강철보다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물질로 되어 있어, 휘두르기 편해 보였다.
'잘 골라잡았네.'
인간은 감각 정보 7할을 시각에 의존한다. 이는 대부분의 초인들도 마찬가지.
나 역시 눈뽕 한 번이면 골로 갈 수 있었으니, 시선 주기 쉬운 방패에 저런 기능을 달아 놓은 건 좋은 선택이었다.
카덴은 공중에서 점프할 수 있는 부츠를 골랐다.
"카덴. 근데 너 그거 쓸 수 있겠냐?"
"...아마."
그는 부츠를 신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는데, 몸을 땅에 붙인 채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는 걸 보니 싸우는 스타일이랑 잘 맞을 것 같았다.
'운동신경 좋네.'
오른쪽으로 치우쳤던 무게 균형을 순식간에 반대로 기울이거나, 공세를 순식간에 물리는 등, 카덴은 각종 변칙적인 움직임들을 만들어냈다. 움직이는 경우의 수가 제곱으로 늘어나니,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까다로울 게 틀림없었다.
직관적이면서도 효율적인 전술인지라 난 그를 칭찬했다.
제일 의심가는 건 브랜드의 선택이었다.
"넌 진심이야? 브랜드?"
"응. 어차피 황금 열쇠를 한 번 더 쓸 거라면, 여기선 보조적인 걸 고르는 게 좋겠지."
그래서 그가 고른 걸 보니...
[행운을 불러오는 네잎클로버 박제 목걸이]였다.
카덴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그 선택을 비판했다.
"브랜드. 운은 아무것도 이뤄주지 않아...! 모든 선택은 오로지 네가 해야 해! 네 삶, 네 싸움, 네 죽음마저도...!"
"이 새끼 또 병이 도졌네."
다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명이 불친절하긴 해.'
고대인의 언어는 저 목걸이의 작동 원리, '행운의 기준이 뭔지' 같은 건 설명하지 않았다.
그런 건 좀 불안했으나...
이런 던전을 만든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저기다 '꽝' 카드를 놔뒀을 린 없을 터.
난 그의 선택을 존중했다.
'운은 중요해.'
맨 처음 롤랜드에게 추천패를 받은 것.
그걸 이용해 카밀라의 제자가 된 것.
바라칼을 죽여서 떼돈을 번 것.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운이었다.
'물론 노력도 했지만.'
이 세상은 수억 가지의 변수가 이루는 합주곡인지라...
사람이 노력이란 씨앗을 뿌리면 결국 이를 수확하는 건 운이라.
불운은 강철처럼 단단한 인간의 목숨을 농락하고, 행운은 가장 멍청한 사람을 리더의 자리에 앉히니.
이런 관점에서 보면 브랜드의 판단은 최고의 판단일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의외의 사실이 있었는데.
-꾸워어어.
놀랍게도, 릭바오 역시 보물의 선택권을 갖고 있었다.
'모든 열쇠는 다섯[명]까지 된다고 했는데.'
그 [명]이라는 단어 안에 [마리]가 들어있을 줄이야.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릭바오도 아티팩트 하나를 골랐다.
그것은 물병.
물의 양을 스무 배 넘게 담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꾸어어.
"나쁘지 않네."
그 선택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아무리 초인이라 해도 오랜 시간 물을 못 마시면 죽는다. 그 시간이 일반인보다 길 뿐.
그런 관점에서 보면 물이라는 보험을 낮은 무게로 들어놓을 수 있다는 건 상당한 이점이었다.
게다가 여기엔 또 하나의 장점이 있었는데-
'판정이 이렇게 되냐?'
물통이 릭바오에게 '귀속'되어서 그런 걸까?
릭바오가 작아지니 물통도 함께 작아졌다.
약 10L에 달하는 물을 손톱만 한 크기로 줄여 보관하는 걸 보니 정말 잘 골랐다 싶었다.
'근데 잠깐만. 이거...'
갑자기 끔찍한 가정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혹시... 릭바오 '라서' 되는 건가?'
릭바오는 인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알아듣는 것뿐 아니다.
인간의 언어에 포함된 논리 관계를 따지고 문장의 의도를 추론할 수 있다.
-불쌍한 아이에요. 이 아이는.
왠지 모르게 카밀라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인간?'
난 심각한 표정으로 릭바오를 바라보다 고개를 털었다.
'다음에 카밀라를 만나게 되면 릭바오에 대해서도 물어봐야지.'
지금은 호기심에 골몰할 때는 아니었다.
어쨌든 내가 고른 보물은...
-피를 끌어당기는 반지.
이는 말 그대로 피를 잡아당길 수 있는 반지로.
누군가 몸 바깥으로 피를 흘리면, 그 피를 내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마법 아티팩트였다. 해당 인력은 내가 투여한 검은 마력에 비례했다.
에밀리는 딱히 이 선택을 좋아하지 않았다.
"피를 다루는 거? 그게 의미가 있어? 네 피를 조종하면 과다출혈은 어느 정도 막을 수 있겠지만... 마력이 들어가잖아?"
카덴도 마찬가지였다.
"남의 몸에 상처를 낸 다음 피를 끌어들일 수 있겠지. 그건 치명적이야. 하지만 푸른 마력이 강하면 저항할 거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오직 브랜드만은 놀란 표정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아니. 발상 좋은데?"
"고맙다."
"왜, 뭔데? 나도 좀 가르쳐줘!"
딱히 예상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브랜드가 머리는 잘 쓰는 편이었다. 에밀리와 카덴이 열심히 스무 고개로 내 의도를 추리하는 와중에도 브랜드는 웃고만 있었다.
*
그렇게 이틀.
첫 번째 열쇠와 보물 방을 발견했지만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사용한 철 열쇠는 가루가 되어 흩어졌고, 다른 몬스터들을 죽여봐야 열쇠가 나오진 않았다.
오히려 던전에서 제일 흔한 것들은 인간.
오히려 그들의 개체수가 몬스터보다 많았으니, 우리는 이틀 동안 인간들을 제일 많이 마주쳤다.
"니, 니들은 누구야!"
"너네 산적이냐? 장비 꼬라지 보니까 산적인데?"
"니들이 뭔 상관이야! 우린 해적이다!"
한 번은 해적들을 만났다.
물론 우린 정의의 기사들.
그들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우린, 하는 수 없이 그들을 전부 학살한 다음 속옷까지 벗겨 탈탈 털고 시체를 빈 방에 집어 넣었다. 금화 네 장을 얻었다.
'부디 다음 생엔 원피스를 찾으러 가길.'
"지나가겠습니다."
"지나가십시오."
"친절하시군요. 감사합니다."
다음으로 만난 건 친절한 기사단 7인조였다.
이들은 아틀라스 성전 기사단 사람들이었는데, 평소에 종자들한테도 잘해주는지 표정들이 좋았다. 우린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고 평화롭게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으로 만난 건...
"혹시 이 열쇠를 쓰실 수 있는 방의 위치를 아십니까?"
"아, 철 열쇠군요. 공짜로 알려드리긴 좀 그렇습니다만..."
"돈을 드리겠습니다."
용병들이었다.
지도에 보물 방의 위치를 표시해 주고 금화 열 장을 받아낼 수 있었는데, 그들은 열쇠의 정체를 아는지 활짝 웃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아, 정말 감사합니다. 사령 기사 유진 님. 복 받으실 겁니다! 시간 나시면 아인베르트 14구의 [개같은 하류인생 찌끄러기들] 용병단에 와주세요."
"용병단 이름이 그거라고요?"
"뭐 이상한 점 있습니까? 용병단 이름이 다 그렇죠, 뭐... 어쨌든 고생하십쇼."
그렇게 3일.
남은 식량이 반밖에 안 남았을 때 즈음, 우린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분위기가 더 어두워졌군.'
던전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내부 인테리어가 변한 건 아니었지만, 에밀리랑 카덴이 느낄 정도로 기온이 떨어졌으며.
신체 강화를 쓰지 않아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비릿한 쇠냄새가 났다.
그게 피 냄새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우린 지금 상당히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어. 유진."
"..."
브랜드가 만든 지도를 바라보았다.
길이 막힐 때마다 뒤쪽으로 돌아가 다른 갈림길을 선택했는데...
이렇게 보니 우리가 탐험한 건 부채 모양 던전의 정중앙을 가르는 선이라.
어쩌면 정중앙이라 보물 방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이쯤에서 한번 종합해 보자고."
"..."
"우린 철의 열쇠를 얻었다. 그걸로 마법 아티팩트 다섯을 얻었지. 그리고 금화 열여섯 장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삼 일을 돌아다녔는데, 마주한 보물 방은 단 한 개.
고블린 무리 이외에 다른 몬스터들도 죽여 봤지만 열쇠는 출현하지 않았다.
아인베르트의 고고학자들이 미리 빼돌린 건지, 원래 이곳의 설계 자체가 그런 건지...
이유는 몰랐지만 열쇠와 보물 상자의 개수가 그리 많진 않았다.
"그리고 남은 식량은 얼마 없어. 우리가 최대한 더 뒤져볼 수 있는 시간은 길어봐야 이틀 정도다."
"이틀이라."
"또, 마지막 날은 대충 아침만 먹은 채 출구까지 달려가게 되겠지."
"흐음."
보물 방, 열쇠가 출현하는 빈도로 보아 황금 병기고를 찾을 확률은 낮았다.
하지만 던전이란 구조 특성상 깊이 들어갈수록 더 귀중한 게 있을 거고, 이왕 삼일 동안 고생한 거 뒤로 빼고 싶진 않았다.
'애초에 던전이 흔하지 않은데, 어디가서 황금색 문을 찾겠어.'
"지금 우리의 전투력은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아. 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고 싶어."
"...난 찬성."
"나도."
기사 후보생들은 본래 리스크를 감수할 줄 아는 이들인지라.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못 이길 것 같으면 미련 없이 뒤로 빠지자고."
"좋아."
다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대하는 모습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철의 문에서 얻은 보상만 해도 상당한 편.
마법 아티팩트를 가진 네 후보생들과 짐승 하나는 엄청난 전력인지라... 다들 그냥 집에 돌아가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러던 우리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잠깐 기다리시오. 우린 적대적이지 않소."
"저희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로커스트의 사령기사가 주도하는 혼성집단.
안쪽엔 아인베르트 기사랑 아이리스 사제도 섞여 있었는데...
이들의 복장이 거의 피로 목욕을 한 걸 보니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리더가 대뜸 내게 물었다.
"당신들, 앞으로 갈 거요?"
"..."
"아, 실례했군. 아직 당신들과 면식이 없는데... 그렇다면 먼저 정보를 풀겠소, 내 먼 후배여. 일단 이 앞에는 악마들이 있소."
"악마...?"
그 말을 듣자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인생의 난이도가 갑자기 상승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우린 긴장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하급 악마지만 고블린이나 트롤 따위를 생각하면 큰 코 다칠 거요."
"..."
"게다가 그 숫자도 많아 다 죽이지 못한 상태지. 일단, 그대들은 '열쇠'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소?"
"그렇소."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그는 우리를 한 번 둘러보더니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나는 로커스트의 사령기사 166기생, 레반칼이오."
레반칼.
그의 마력은 나와 비슷했지만, 손에 박힌 굳은살과 자세 등을 보니 적어도 이십 년 이상은 굴러 본 인간인지라.
"혹시, 지금부터 상호 불가침의 맹세를 해주실 수 있겠소? 기사의 명예에 걸고."
"..."
본능적으로 기도를 살핀 결과...
나는 이들의 전투력이 낮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이들은 강하다.'
전투란 건 수백 가지 요소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혼돈스런 과정. 굳이 마력량이 높다고 우위를 가릴 순 없다.
예를 들어 셀라나.
2형 마수를 죽일 때 날 도와줬던 대학원생 여자는, 원거리 파괴력에 있어선 이곳의 누구보다도 강했다.
하지만 그녀가 일대일로 싸우면 우리 중 한 명이라도 이길 수 있을까?
아니.
근거리 대응 기술이 있어도 안 됐다.
숙련된 군종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는 상급 사령술사 언저리라던 바라칼도 마찬가지.
자기보다 약한 놈들만 짓밟고 살아온 인생은, 자기 목숨 걸고 수년을 싸워온 기사 후보생들에게 둘러싸여 처참하게 끝났다. 브랜드, 카덴, 에밀리 중 하나가 바라칼의 기술을 쓸 수 있었다면...
그때 난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냥 죽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 관점에서 저들은 강해 보였다.
'만두귀 남자가 있으면 조심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들의 분위기에서 짙은 살인의 짬이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저들을 존중하였다.
"좋습니다. 불가침의 맹세를 하겠습니다."
"후... 다행이구려."
"후보생 유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레반칼이오."
그러자 바로 다음 제안이 흘러나왔다.
"유진. 우리는 5일 동안 던전 안쪽을 헤맸소. 그 동안 만든 지도를 공유해 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건 저희도 환영입니다."
그리고 그의 지도를 보자 확실히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이, 이게 행운인가?'
브랜드의 클로버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은은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는데, 그것이 영향을 발휘했는진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단 하나.
그의 지도에 [황금빛 자물쇠 방 - 병기고]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는 것뿐이었다.
"보상을 주는 방들이 몰려 있는 겁니까?"
"그렇소. [병기고], [종자 보관실], [기록 보관실]이오. 이것들이 한 곳에 몰려있지."
그곳은 거대한 원형의 회랑.
원형의 벽을 따라서 보물 방들이 밀집해 있었다.
브랜드는 순식간에 그 지도를 보면서 내용을 필사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렇게 할 걸 그랬나...'
여러 그룹을 모아 정치를 하고, 이들과 합작하면 훨씬 던전 탐사가 쉬웠을지 모른다. 그의 지도를 유심히 바라보니 조금 이상한 그림도 보였다.
"[검은 방]? 이건 뭡니까."
"크흐. 그건, 지금까지 연 사람이 없는 수수께끼의 방이지."
"..."
"그렇다면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제안이오. 당신들도 열쇠를 갖고 있다면, 우리랑 같이 길을 뚫어줄 수 있소?"
"..."
"맹세컨데 우리는 당신들의 열쇠에 관심이 없소. 왜냐면..."
그가 품속에서 물건을 꺼내 들었다.
'...아니.'
그것은 검은색의 열쇠!
불길한 핏빛 문양 사이에 붉은색 루비가 박힌...
나의 '황금 열쇠'보다 격이 높아 보이는 열쇠였다.
"우리 보상이 최고라 믿기 때문이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히든피스야? 아니... 전생은 내가 했는데.'
근데 히든피스라기엔 열쇠에서 풍겨오는 마력의 느낌이 심히 불결했다.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어디서 한 번 느껴본 종류의 힘인데?'
왠지 모르게 본능이 비명을 지르는 감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일단은 말을 아꼈다.
"우린 당신들의 보상에 관여하지 않을 거요. 그러니... 다 같이 한 번에 털고 한 번에 나오는 게 어떻겠소?"
이세계에 떨어진 지 2년.
난 또다시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했다.
-레반칼과 목숨 걸고 싸워서 검은 열쇠를 쟁취하느냐.
-후퇴하느냐.
-레반칼과 연합해 황금 방의 보물을 챙기느냐...
세 종류의 선택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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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걸로 난 최강이다!
'싸울까, 말까...'
물론 나도 좋게 지나가고 싶긴 했다.
하지만 이곳은 척박한 중세.
병든 거지한테 돈을 적선하면, 다음날 거지 수십이 몰려와 삥을 뜯고 소매치기를 하는 곳이라.
약한 게, 얕보이는 게 죄가 되는 세상이니 선의나 도덕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레반칼과 싸울지 말지 대충 판단을 하고 있는데...
'강하단 말야. 만두귀라고 해야 하나?'
놈은 전투에서 나보다 몇십 년을 더 구른 살인의 전문가였다.
격의 차이가 현격하지 않은 이상 저들을 쉽게 죽이긴 힘들 터.
게다가...
놈은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악마를 한두 마리 죽여선 저렇게 많은 피를 뒤집어 쓸 수가 없었다.
'대체... 악마가 얼마나 많길래? 몇 마리를 죽여댄 거야?'
단순히 피를 묻힌 게 아니라, 피로 목욕이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인지라-
그들이 겪은 전투의 스케일이 어느 정도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만약 회랑에 악마들이 '지나칠 정도로' 많다면, 결국 우리가 저들을 죽인다고 한들 보물 방에 접근하긴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일단 질문을 했다.
"악마의 숫자가 많소?"
"많지."
"우리가 합세한다고 이길 수 있는 건 맞고?"
"아니. 이기는 건 '아예' 불가능하오."
그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우린 서로 보물만 챙겨 빠르게 도망갈 거고, 서로의 생사는 확인하지 않을 거요. 작전의 목표는 섬멸이 아니오. 이 점은 확실하게 하고 싶소."
'그럼 더 생각할 게 없군.'
난 웬만해선 먼저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물론 완전히 신뢰해도 나쁘진 않겠지만...
애초에 저들의 지도가 진실이란 보장도 없기에 최소한의 의심은 남겨두기로 했다.
"좋습니다.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저라고 그 열쇠가 탐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크흐. 사령기사 유진. 믿어줘서 고맙소이다."
그러자 레반칼이 웃으면서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난 너그러이 받아주었다.
"날 죽이려던 눈빛이 좀 보였는데... 잘 생각했소. 욕망보다 계산을 우선할 수 있는 걸 보니 미래가 창창하군. 걱정하지 마시오. 그 나이에 그 마력량이면 나중에 크게 될 테니. 내 여기서 최강의 무기를 얻은 후 인연으로 대하겠소."
"말씀 감사합니다."
왜일까...
난 괜시리 불안해졌다.
레반칼이 히든피스를 얻을까 불안한 건 아니었다.
제일 미심쩍은 건 저 검붉은 열쇠의 정체.
저 열쇠에서 흘러나오는 불길한 힘을 한 번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났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인생이 그렇게 쉬울까...?'
뭐랄까.
중세인들의 센스는 현대인과 좀 다르다.
사악해 보이는 물건에 숨겨진 힘을 가진 히든피스를 숨길 정도로 반전이나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란 거다.
뭐... 로커스트인들은 워낙 검은 마력에 친숙하니 검은색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저 열쇠 중앙에 루비가 박혀 있긴 하다만.
난 쌔한 느낌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작전은 간단하오. 검은 방과 황금 방은 각자 반대편에 있지."
"..."
"그저 서로의 보물방을 향해 달리고, 추후에 보물을 얻으면 도망가든, 서로를 구해주든 뒤끝 없도록 합시다."
"좋습니다. 오히려 이런 작전이 좋죠."
"좋아. 그럼 잠깐 쉰 다음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소."
그렇게 몇 시간 후.
우리 열 명(릭바오 포함)은 앞쪽의 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
레반칼을 따라가다보니 피 냄새가 점점 심해졌다.
혹시라도 그가 우릴 죽이려는 건 아닐까 의심도 들었지만.
이 정도의 짙은 피 냄새를 만들기가 오히려 어려웠기에 의심을 거뒀다.
"...여기부턴 악마들의 영역이오. 저거 보이시오?"
"..."
있을 리 없는 고깃조각이 천장에 붙어 있었다. 그것은 민달팽이처럼 꿈틀거리면서 아래쪽으로 피를 토해내고 있었는데...
가면 갈수록 던전의 벽은 덩굴 모양을 한 살점으로 뒤덮여 생물의 내장같은 느낌을 주었다.
'징그러...'
그렇게 몇 분 더 걸어가자 레반칼이 말했던 거대한 회랑이 나타났다.
절벽 아래에 거대한 회랑이 있는 형태.
나는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을 노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입구막기 4인조가 문제가 아니겠는데?'
회랑은 거의 수만 명을 처넣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는데...
그 안에 혐오스레 꿈틀거리는 악마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들의 피부는 피처럼 붉었고, 머리 위엔 염소 같은 작은 뿔이 돋아 있었으며, 두 눈깔과 입은 얼굴 중심으로 잔뜩 찌그러져 낄낄거렸는데.
그 숫자가 어찌나 많은지, 항아리 속에 구더기들이 가득 차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할 수 있겠소?"
레반칼이 아주 조용하게 물었다.
그는 이윽고 가야 할 방향을 알려줬다.
"저기, 칼 문양이 있는 곳이 병기고라고 추정되오. 아무리 고대인이라도 칼 그려놓고 기록 보관실이라 하지 않겠지."
확실히 그러했다.
시야를 강화하여 살펴보니, 그가 말한 문 위쪽에는 [고급 수행자를 위한 병기고]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갈 방향은 반대편. 저기요."
그리고 그가 가리키는 곳...
외진 곳의 검은색 문을 보니.
[최고 수행자를 위한 마지막 시련, 남작급 악마 봉인소] 라 쓰여진 글자가 보였다.
그리고 아래 쓰여진 글자는 [유사시 만 명 단위의 군단이 필요할 수 있음]이라.
난 그제야 열쇠에서 나오는 기운을 어디서 봤는지 떠올렸다.
'...바라칼!'
바라칼을 상급 사령술사로 분류한 이유는, 원거리에 있는 인간들을 [포식]하며 어떠한 패널티도 겪지 않았기 때문.
그는 사령술과 비슷하지만 사령술 아닌 뭔가를 사용했고, 그때 느꼈던 감각은 열쇠에서 내뿜는 기이한 에너지와 비슷했다.
'혹시 저 방에 악마랑 같이 히든피스가 들어있을 확률은?'
없었다.
중세인들은 그리 재밌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막 100층짜리 던전-탑을 지어놓고, 가장 좋은 히든 보상은 지하 1층에 보관하는...
그 지랄을 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란 거다.
검은색 방 안에는 담백하게 악마 한 마리만 봉인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 씹... 안돼. 이러면 좆됐잖아. 절대 안 믿을 텐데.'
"저, 죄송합니다만."
"유진. 괜찮소. 작전에 필요한 거라면 언제든 듣지."
레반칼이 완전한 신뢰의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말을 꺼내기조차 미안했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제가 고대어를 할 수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슬슬 레반칼의 어조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목소리 아래에 깔린 건 지독한 불신.
하지만 난 급박한대로 그의 손목을 붙잡고, 최선을 다해 설득했다.
"전 고대어를 읽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열려는 그 검은 문. 그 앞에는 [최고 수행자를 위한 마지막 시련, 남작급 악마 봉인소]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렇겐 안 봤는데. 실망이군. 유진."
"제발 한 번만 믿어주십쇼. 예? 솔직히 열쇠도 검은색 아닙니까?"
"흥. 피부가 검어도 착한 사람들은 많다네."
'이 씨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레반칼은 듣지 않았다.
'근데 내가 저 상황이면 나라도 안 듣지.'
"아인베르트 대학의 고고학자들도 고대어는 읽을 수 없어. 자네가 무슨 얘길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네만... 됐네."
"..."
"사소한 욕심 때문에 내 열쇠를 빼앗으려 하다니? 이제 꺼지든, 보물 창고를 털든 맘대로 하게."
뒤를 돌아보자 레반칼의 일행들은 전부 쓰레기 보는 표정으로 날 노려봤고, 브랜드를 비롯한 셋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린 브랜드가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돌격.
-탁!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한 레반칼의 일행들이 절벽을 박찼다.
그들의 목적지는 악마들로 가득 찬 회랑의 중앙부.
-카드드득!
-까득?
-깍깍?
악마들이 놀라는 소리를 내며 위를 바라봤지만, 레반칼의 일행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본인들의 기술을 사용했다.
"신체는 정신의 형상! 정신은 신체의 형상!"
레반칼이 구결을 외우자.
그의 등 뒤쪽에서 검은색의 키틴질 거미 다리 여덟 개가 솟구쳐 나오더니, 붉은 피부를 가진 악마들을 말 그대로 도륙내기 시작했다.
방향을 전환할 때마다 등 뒤에 달린 칼날들이 회전했는데- 그 각속도가 워낙 치명적이라 악마들을 말 그대로 갈아버렸다.
자기 두 팔과 여덟 다리를 휘두르며 싸우는 레반칼은 아수라의 현신을 보는 것 같았다.
푸른 마력을 가진 평기사 역시 마찬가지.
그는 망토를 휘날리며 여성 사령술사를 호위 중이었는데...
-서거억!
마치 풍차처럼 거대한 양손검을 휘두르자, 그 범위에 있던 모든 악마들의 허리가 분쇄되어 피의 분수가 솟구쳤다.
여성 사령술사는 두 손을 펼친 다음 손에서 검은색 벌레 떼 비슷한 걸 뽑아내었다.
-애애애애애애애애앵.
손바닥만 한 파리 수백 마리가 여성 사령술사 주변을 돌면서 주변의 악마들에게 달라붙고, 그들의 피부를 갉아먹었다.
붉은 악마들도 파리를 먹고, 찢기 시작하니 그야말로 아수라장.
그들은 강력했지만...
-까가각!
-깍기이익!
악마들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회랑 안쪽에서 키가 3m에 달하는 염소 뿔 거인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딱 봐도 대응하기 쉬운 것들이 아니었다.
"씨발... 유진. 어떡하냐?"
-끼아아아악!
-깍깍!
정신을 차린 붉은색 악마들이 레반칼을 향해서 화염구를 날리기 시작했다.
'저들이 전부... 마법을 쓸 줄 안다고?'
그것의 크기는 야구공보다 조금 큰 정도였지만, 애초에 악마들은 수백 이상이라.
그들은 아군 오사가 생기든 말든 신경 안쓰고 불의 비를 내렸는데...
다행히도? 그들 파티에 있는 여성 신관이 보호막을 치자 흩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길이다아아!"
갑자기 레반칼이 빈틈을 찾아낸 다음, 섬전처럼 검은색 문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유, 유진! 빨리! 어떡할 거야!"
"씹... 뒤에서 악마가 몰려온다!"
후퇴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뒤를 보니 악마들이 꾸역꾸역 던전 벽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던전 통로 자체가 내장처럼 꾸물꾸물 좁아져 지나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극단적인 상황.
나는 팀의 리더로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이런 씨발... 미안합니다. 레반칼 아저씨. 내가 정말 미안해요.'
남작 급 악마가 뭔진 모르겠다.
하지만 중급 사령술사만큼 나약한 존재는 아니니까 봉인해 놨겠지. 거기에 레반칼이 상상하는 히든피스는 없다.
있는 건 재앙 뿐.
나는 사령 화살 수십 개를 만들어 멀리 있는 레반칼을 조준한 다음,
"뛰어. 원래 계획대로 황금 병기고에 들어간다."
일제히 발사하면서 절벽의 끝을 박찼다.
-파바바바박!
"크흑! 유진! 이 개자식이이이이!"
비록 전부 다 거미의 다리에 막히긴 했지만, 어쨌든 레반칼의 속도는 늦춘 상황.
나는 신체 강화와 함께 몸이 날아가는 걸 느끼며 릭바오 주머니를 던졌다.
"날뛰어라, 릭바오!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
-꾸어어어어억!
투입 마력량 최대!
한계까지 커진 릭바오의 4m 몸뚱아리가 괴성을 지르며, 피막같은 겨드랑이 살을 펼친 후 악마들 사이에 쿵! 떨어졌다.
-콰드드드득!
-꾸어어어어!
거대한 짐승의 몸은 무게만으로도 폭력이라.
릭바오가 공중에서 떨어지면서 앞발을 후려치자, 힘의 파도가 퍼져나가면서 가벼운 악마들을 공중으로 날려버렸다.
많은 악마들이 그 가죽에 손톱, 불꽃의 비를 박아 넣었지만 소용없었다.
'영혼은... 삶을 강요하는 폭군이라.'
"유진! 그 따위로 비겁하게 굴다니! 미쳤소! 그렇다면 둘 다 자멸이오!"
"내가 이렇게 해서 얻는 건 없다고! 씨이발-사람 말을 좀 믿어!"
그쪽에 붙은 여성 사령술사가 화난 표정으로 날 가리키자, 수백이 넘는 파리떼가 이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칼질론 절대 이길 수 없는 수백의 벌레 안개. 난 사령 검술 여섯 개를 띄운 다음-
'프로펠러!'
-타다다다다닥!
그것들을 공중에서 헬리콥터처럼 회전시키며 파리떼를 갈아버렸다. 이렇게 쓰는 건 처음이지만 생각 외로 잘 되었다.
그 다음-
"...어리석은 것들."
뒤따라온 카덴은 릭바오의 등을 밟고 점프한 다음- 부츠에 저장된 공기압을 폭발시켰다.
-퍼엉!
압축된 공기의 폭탄.
성인 남성의 몸무게 정도는 가볍게 띄우는 충격파가 공중에서 터지자, 살아남은 파리들이 말 그대로 터지거나 기절해 땅으로 떨어졌다.
"유진! 어떻게 그럴 수 있소! 당신은 기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했으면서!"
평기사는 검은 방으로 가는 것도 잊어버린 채 이쪽으로 달려왔는데...
"유진은 진짜 읽을 수 있어!"
에밀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사이로 끼어들어 마력을 폭발시켰다.
-카아앙!
그녀의 방패에서 터져 나오는 섬광탄!
벼락을 연상케하는 거대한 빛이 잠깐 동안 회랑을 채우자, 에밀리의 앞에 있던 기사는 자기 눈을 감싸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고, 그녀는 바닥을 세게 박차며 릭바오를 향해 뛰었다.
도중에 많은 악마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었지만, 장비도 걸치지 않은 녀석들이 에밀리의 메이스질을 당해낼 순 없는 법이라.
"크흑! 으아아아아!"
그녀는 머리와 온몸에 불덩이를 맞아가면서도 미친 사람처럼 메이스를 휘둘렀다.
전투의 흐름 속에서 각성한 것일까?
왠지... 그녀의 메이스에 일렁이는 기운이 맺혀 있었다. 자그마한 악마들은 그 타격을 버티지 못하고 돈까스 고기처럼 다져져 하늘을 날았다.
-까드드득!
-끄워어어어!
그리고 나는...
황금색 병기고의 앞을 막는 키 3m의 거대한 악마들을 마주했다.
그들의 뿔은 50cm가 넘어 보였고, 다리는 검은색 털로 뒤덮여 있었으며, 두 손에는 거대한 할버드를 들고 있었으니.
중학교 시절 판타지 대백과에서 반인-반염소 악마를 연상시켰다.
-까드드득!
-까아아악!
-꾸어어어어!
그 둘이 4m에 육박하는 할버드 두 개를 세운 채 릭바오를 막아서자, 차마 릭바오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였다.
'내가 나설 차례군...'
"내 쪽으로 오지마!"
난 릭바오의 등을 박차고.
검은 마력을 뿜어내면서 앞쪽으로 내달렸다.
주변으로 퍼져 나오는 검은색의 안개. 시력을 온전하게 빼앗아가는 기초적인 사령술이 악마들의 사이를 채우자, 2m짜리 악마들이 크릉크릉거리며 당황해했다.
짧은 틈의 당황은 언제나 죽음으로 이어지는 법.
난 수십 개의 사령 화살을 일제히 발사하면서,
-빠악!
신체강화를 건 일격을 그들의 허리에 박아 넣었다.
-까아아아아악!
하지만...
'뭐, 뭐야?'
거대한 악마들은 근육 안쪽에 철심이라도 박아 넣었는지, 신체 강화 일격을 맞고도 그 충격을 흡수해냈다.
놈들은 4m 넘어가는 할버드를 나한테 폭풍처럼 휘둘렀다.
'지금은 몸을 사릴 때가 아냐!'
-콰직!
두꺼운 사령 갑주와 4m짜리 할버드의 충돌.
웬만한 벽 따위는 손쉽게 부숴버릴 일격이 내 사령 갑주를 찢으며 옆구리 살을 뜯어냈다.
아마 갑주가 없었으면 허리가 통째로 잘렸을 터.
물론 많이 아프긴 했으나, 난 그저 참으면서 놈들의 품 안쪽으로 접근한 다음-
-신체 강화, 사령 번개, 혼백 타격술.
눈을 부릅뜨고 내 인생 최강의 공격을 사용하였다.
울끈불끈거리는 근육.
맥동하는 검은 마력.
그 핏줄을 타고 흘러 메이스에 맺히는 건, 어떤 생물의 기관이든 완전히 태워버릴 수 있는 폭력적인 번개.
그 거대한 힘을 온전히 들어 올린 다음, 다시 한번 악마의 골반을 향해 내리찍자.
-빠가아아악!
-까어어어어억!
말 그대로 폭발이 일어났다.
충격파와 함께 터져 나오는 검붉은 섬광.
그것은 놈의 옆구리에 닿자마자 수류탄처럼 터지며 그것의 근육과 살점을 말 그대로 찢어버렸다.
폭발과 함께 악마의 내장이 몇십 미터 이상 피를 흩뿌리고, 놈의 척추가 끊겨 너덜너덜해지자...
-까드득!
허리가 완전히 파손된 놈은 아래로 쿵, 하고 떨어졌다.
-푹!
동시에 다른 놈의 할버드가 내 옆구리를 꿰뚫으려 했지만...
-카앙!
때맞춰 날아온 여섯 자루의 장검이 눈송이 모양을 이루며 할버드를 꽉 잡았다. 난 당황해하는 악마의 할버드를 그대로 즈려밟곤,
"브랜드, 뛰어!"
"알았어!"
놈에게 사령화살을 쏜 다음 다시 한 번 메이스를 내리찍었다.
-푹!
-콰앙!
놈의 머리에 반쯤 박힌 사령화살을 메이스로 내리치는 일격. 혼백 타격술과 함께 사용하자 놈의 두개골엔 금이 가고, 입에선 검은 뭉텅이가 쏟아져 나왔다.
'아, 젠장. 레반칼?'
그때.
"하! 이걸로 난 최강이다!"
레반칼이 검은색 열쇠를 꽂아넣었다.
-콰드드드득!
그와 함께 검은색 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한 핏빛 안개. 그것들은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욕을 내뱉으려던 그 순간.
"됐다! 유진!"
브랜드가 황금 열쇠를 꽂아넣는 동시에, 황금색의 문이 굉음을 내며 위쪽으로 들어올려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우린 미친 개처럼 황금빛 문을 향해 달렸다.
"뛰어!"
"뛰어, 뛰어어어!"
무거운 황금색 문이 녹슨 기계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갔고, 그 40cm도 안되는 틈 사이로 카덴, 브랜드, 에밀리, 소형화된 릭바오, 그리고 내가 굴러 들어갔다.
'사령 검술, 시간을 끌어라!'
-서걱!
-카앙!
사령 검술은 상대편 사령술사가 만들어 낸 벌레들을 쳐내며, 달라붙는 악마들을 죽여가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 결과-
"씨발, 살았어, 유진...!"
우리는 가까스로 굴러 황금빛 방에 들어올 수 있었다.
-쿵!
황금빛의 거대한 문이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까아악!
손을 집어넣던 악마의 팔을 말 그대로 짓뭉개졌고, 염소 악마가 쑤셔넣으려고 했던 할버드도 콰지직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핏빛 안개는 문 안쪽으로 들어와 증발하듯 사라졌으니...
'...아.'
닫힌 문을 보니 다리에 힘이 싹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더라.
'진짜... 진짜 급박한 순간이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후보생들의 표정도 마찬가지.
다들 긴장 풀린 표정을 짓고 도파민에 환호하고 있었다.
"된 거야, 유진? 진짜 된 거냐고."
"씨발... 아아. 내 후보생 생활도 이걸로 끝이다."
"...크."
우리가 기쁨에 휩싸여 소리 지르려던 그때.
"아아- 여긴 이렇게 생겼구나?"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보물방의 구석에서 들려왔다.
후보생들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못 들을 걸 들은 것처럼 돌아가 보물 방의 구석을 향했다.
"...이곳에 들어와 보고 싶었는데, 한 번도 와보지 못했어. 모든 벽에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었거든..."
거기엔 붉은 피부의 인간이 있었다.
긴 검은색의 머리, 황금색의 눈동자, 머리 위에 솟아난 두 개의 뿔.
그리고 자기 키보다 훨씬 커다란 박쥐의 날개. 누가 봐도 등급이 높아 보이는 그것은, 아주 여유롭게 보물 방의 내부를 돌아다니며 말했다.
"문이 열렸으면 하고 바랐지만... 너희가 갖고 있는 황금색 열쇠는 내가 쓸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언제, 들어온 거야?'
아무리 봐도 지성이 있고, 누가 봐도 악마라고밖에 할 수 없는 존재가 소름끼치게 웃으며 우릴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최악의 가정이 떠올랐다.
'레반칼이 더 빠르게 열쇠를 꽂았어.'
우리가 문을 연 그 짧은 순간-
남작 등급의 악마가 안개로 변해 이 안으로 파고들었을 가능성이 떠올랐다.
심장이 미친 것처럼 쿵쿵쿵쿵 뛰었다.
'언제 들어온 건진 몰라. 하지만...'
할 일은 하나.
안개의 양에 의해 힘이 결정되는 놈이라면, 우리 실력으로도 죽일 수 있을지 몰랐다.
그렇기에 나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씨발! 다들 무기 잡아! 제일 세 보이는 거!"
"흐."
그러자 악마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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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모두의 아이돌이 될 수 없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