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 5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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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모두의 아이돌이 될 수 없단 말이다.

'좆-'

이를 악물고, 벽에 걸린 메이스를 향해 무작정 뛰었다. 

신체 강화. 

허벅지는 터질 듯 부풀었고, 발가락은 힘 있게 땅을 박차니 몸이 화살처럼 날았다.

'같은-'

메이스까지의 거리 대략 10m.

비록 '등록'하는 과정에 1초 정도 걸리지만, 내 속도라면 분명 승산이...

'억까...!'

허나. 

그 짧은 순간 악마가 뱀처럼 웃었다.

"날 바라보렴."

갑자기 눈앞에 악마의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방향 전환조차 허용하지 않는 속도!

악마가 나한테 그 붉은 손을 천천히 뻗었으니, 난 가까스로 뒷구르기를 하며 그 공격을 피했다.

'순간이동? 아냐...'

난 답답해서 소리 질렀다.

"빨리 무기를 잡아, 뭘 하는 거야!"

지금쯤이면 후보생 셋 중 하나는 무기를 잡았을 터. 

복장이 터질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에밀리... 너. 뭐 하는 거야?"

"오, 오지마... 유진. 제발..."

에밀리는 그저 주저앉아 울고 있었고, 

"흐...흐으..."

"유진. 정신, 공격이다."

브랜드는 멍한 표정으로 새우처럼 쭈그린 채 떨고 있었으며, 카덴은 휘청이며 벽을 짚은 상태였다.

심지어 릭바오도 마찬가지.

-꾸어...

짐승은 자기 머리를 잡은 채 바닥에서 고뇌하고 있었다. 악마가 그걸 감미롭다는 듯 바라보며 읊조렸다.

"특별한 아이야. 동료들에게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하는구나."

'...뭔.'

공포스럽다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기사 후보생.

아직 기사도 못 된 병아리라 놀림 받긴 하지만, 셋이 모이면 중급 사령술사 하나를 족치는 인력들이다.

나름 사람 죽여본 짬도 있고-

속에 쌓아놓은 푸른 마력도 준수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억... 크헉..."

'아니, 무슨 공격을 당한 건데?'

그저 악마를 마주치자마자 맛이 가버리고 말았다.

카덴은 정말 괴로운 듯 숨을 몰아쉬며 핏발선 눈으로 허덕였고, 에밀리는 머리를 숙인 채 토하기 직전이었으며, 브랜드는 이미 푹 빠진 듯 헤벌레한 표정으로 악마를 바라봤다.

이 모든 게 딱 1초도 안 돼 일어난 일이었다.

"아아... 저 아이들은 죄가 없단다. 나한테 유혹당한 것뿐이지."

'유혹을 당해? 본 것 만으로?'

그제야 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악마...!'

200년 전. 

인류는 악마들과 벌이던 수백 년의 전쟁을 간신히 끝내고, 그들을 봉인했다 전해졌다.

얼핏 들어보면 '봉인했으니 우리가 이긴 거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를 달리 말하면...'

세상 내로라하는 초인들이 전력을 다했음에도 악마들을 몰아내는 데 몇백 년이 걸렸단 소리였다.

대체 노기사 아이작 같은 인간들이 백 년 동안 전쟁을 못 끝낼 정도면 저들은 얼마나 강한 것인가?

그 생각을 하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이제야 날 바라봐 주는구나. 좀 더, 좀 더 날 보렴."

날개를 펼친 새빨간 피부의 악마.

남성과 여성의 골격이 반쯤 섞인,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악마가 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가 나한테 뭔가 하려 하는 순간.

'어림없지!'

-탓!

빠르게 뛰쳐나가며 혼백 타격술을 사용했다. 

"후후후."

-휘익.

그러나 내 무기는 그저 악마를 '통과해' 버릴 뿐.

악마가 뿜어낸 핏빛 에너지가 가슴에 꽂히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달콤한 장미 향기와 함께 현기증이 일었다.

'아찔?'

속이 뒤집히는 느낌.

호르몬이 역류하고, 심장이 쿵쿵 뛰며, 머릿속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 신경, 호르몬에 간섭하는 수작질이었다.

"후후. 아이야."

"..."

난 고개를 갸우뚱한 채 악마를 바라보았다.

보물 방 안쪽엔 푸른 빛의 조명이 여러 개 달려 있었음에도...

악마의 발밑엔 그림자가 없었다.

"네 기술은 날 죽일 수 있지만... 너는 나의 차원을 모르는구나. 네 현실로 내 '꿈'을 죽일 수는 없단다."

그 말을 듣자 머릿속에 한 가지 이미지가 떠올랐다.

'몽마...!'

인간과 물리적으로 싸우지 않고, 정신을 공격하며 싸우는 존재들.

사람의 귓속에 속삭임을 불어넣는 것만으로 그들을 미치게하고, 인생을 파탄내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존재들.

하필이면 검은 방 안쪽에 봉인되어 있던 건, 메이스를 휘둘러 죽일 수 없는 존재였으니.

억까도 이런 억까가 없었다.

'아니...'

난 이를 까득- 하고 악물었다.

'진짜... 좆같은 새끼다. 아니,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걸려도 이딴 새끼가...'

"그나저나, 혼자 투쟁하는 건 괴롭지 않니? 동양인이 이 먼 타국까지 와서..."

그가 브랜드를 쓰다듬자...

브랜드는 핏발선 눈으로 코피를 흘리며 히죽거렸다. 우리 팀 최고의 브레인은 이미 이지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헤윽, 주인님...♥, 주인니이임!"

"...브랜드. 헤윽은, 씨발 너무하지 않냐?"

"유진. 너도, 너도 이리와. 주인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해주셔...♥"

그는 이미 정신이 나가버린 상태.

내가 대부분 형태의 사랑에 찬성하는 입장이긴 하나, 꼬추 새끼가 혀끝을 꼬아대며 말 끝마다 하트를 날리니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반면 에밀리와 카덴은 어떻게든 저항하는 중이었다.

"크윽. 내 사랑을... 모욕하지 마라!"

카덴은 칼을 뽑은 채 자기 목에 들이밀며 피를 흘렸고...

"...유진."

에밀리는 메이스와 방패를 들고 간신히 버티는 와중이었다. 그저 정신줄을 붙잡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그 꼴을 보고 악마가 웃었다.

"다들 사랑하는 이가 있는 모양이구나. 저리 버티는 걸 보니... 물론 그것도 오래는 못 가겠지."

"..."

"그나저나 아이야. 너는 어떻게 날 거부하는 거지? 너는... 어머. 너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지 않느냐?"

"무슨 소리야. 난 많은 사람들을 사랑해."

그러자 악마가 날 비웃었다.

"후후. 젊은 사령기사야."

"..."

"그건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거란다."

내 속이 뜨끔한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벽을 향해 달려나갔다.

'악마를 이길 무기! 빨리!'

그러나 남작이란 이름은 허명이 아닌 것일까.

악마가 손가락을 튕기자, 핏빛 에너지가 내 가슴에 처박히면서 바닥이 치즈처럼 늘어났다.

'크윽...'

공간 자체가 왜곡되는 느낌이었는데...

아마 시신경을 왜곡하는 종류의 마법인 것 같았다. 적응하지 못한 나는 발을 헛디디며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제길.'

어느새 다가온 악마가 내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아름답지 않은 거니?"

몽마가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물론 상당히 괜찮은 얼굴이긴 했지만...

이걸 보고 브랜드가 헤롱거린 걸 생각하면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다.

'흠... 그 정돈가?'

현대에서 와서 그런가.

몽마의 외모는 서큐버스/인큐버스 치고는 투박해 보였다.

애초에 미에 대한 감각이 천 년 이상 차이가 나는 상황.

서큐버스가 날고 기어봐야 현대의 성형 수술과 매스 미디어를 이길 리 만무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서큐버스보다 게임 속에 나오는 서큐버스가 더 아름다웠다.

현실이랑 비교해봐도...

'케이팝? 케이팝은 무슨. 어딜 케이팝에 비벼.'

그냥 인터넷 방송하는 사람 하나 데려와도 얘보다 예뻤다.

그런데...

"지금, 흠. 이라고 한 거니?"

놈은 내 생각을 '일부' 들을 수 있는 듯, 표정을 찡그린 채 다가와서 내 목을 긁었다.

기다란 손톱 끝에 맺히는 핏방울.

"큭!"

난 메이스를 사정없이 휘둘렀지만 놈은 안개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잡히지 않아.'

어느새 내 옆쪽에 다가온 그가 도톰한 입술을 달싹이자, 달콤한 설탕 같은 목소리가 내 귓속을 타고 흘렀다.

"아이야. 널 사랑해주려 했건만... 정말 무엄하구나?"

"저리 꺼져!"

아무리 때려도, 반으로 갈라버려도, 악마는 허깨비처럼 사라질 뿐이었다. 처음부터 거기 없었다는 듯. 계속 발악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톱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악마의 손톱이 날 긁은 게 아냐. 내가 스스로 자해를 했다.'

서큐버스가 냉엄한 표정으로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이야. 내 이름은 유혹하는 남작, 외르부스다. 나의 격은 수천 년을 살았으니 드높고, 그 세월 동안 천이 넘는 인간들을 파멸시켰으니 위대한 존재이기도 하지. 아름다운 여자들도, 강한 남자들도 내 손아귀를 피해 가지 못했어. 내가 멸망시킨 왕국만 수십이 넘으니..."

"..."

"그런데 감히. 단 백 년도 살지 못한 너 따위 애송이가, 내 외모를 보고 흠, 이라고?"

"크윽!"

"네 미학이 그렇게나 발전했단 말이냐?"

난 악마를 뿌리치고 무기고 벽면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다시 공간이 치즈처럼 늘어나면서 넘어지고 말았다.

"하... 씨. 피곤하게 구네."

"그렇다면 말해보렴. 얘야."

외르부스가 순식간에 내 뒤쪽을 점한 다음, 핏빛의 에너지를 투사하자 메슥거리는 느낌과 함께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난 바닥에 토사물을 쏟아내었다.

"내 어디가 그렇게 맘에 들지 않는 거니?"

외르부스는 아주 오만한 표정으로, 하이힐 신은 발을 또각또각 옮겼다.

마치 자신의 각선미를 보라는 듯.

오만한 미소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라는 듯.

세상에 자신보다 아름다운 이는 없다는 듯 날 내려다보며 다가왔지만...

'새끼야. 너보다 예쁜 사람은 지천에 널렸다고. 넌 모두의 아이돌이 될 수 없단 말이다.'

"...아이돌? 그게 뭐지? 대체 무슨 말로 날 능멸하는 것이냐?"

그쯤 되자 악마는 정말 참을 수 없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조금씩 내게 걸린 환각 마법이 풀려가려는 찰나,

"대답해라!"

"커헉."

악마가 핏빛의 에너지를 확 뿜어내자 목이 조여지고, 숨이 막혀왔다.

'침착해... 지금 내 목을 조르는 건 내 손이다.'

내 영의 격이 높아서 그런가?

몸은 슬슬 적응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방 안에 차오른 마력은 얼핏 보아도 십만 다르마를 능가하는 수준.

저 악마는 확실히 수천 년을 살아왔고, 그 격은 사람의 인지를 손쉽게 망가뜨릴 정도로 강했다. 

'...보링턴, 아니. 그 수준은 진작 뛰어넘었다. 노기사 아이작이랑 싸워도 버틸 거야.'

내 눈앞의 현실도 추상화처럼 뒤틀어지고, 심장도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러나 정신 공격이 전부라 그런 걸까.

어느새 적응한 내가 스스로 목조르기를 그만두자 조금 살 만한 어지러움만 남았다.

악마가 다가왔다.

"말해라. 아이야. 내 아름다운 외모가 무슨 단점을 갖고 있지?"

"솔직히..."

이 정도로 물어보면 나도 대답을 안 해줄 수없었다. 

"너 정도도 나쁘진 않아. 나도 솔직히 잘생긴 편은 아니고. 너 정도면 충분히 아름답지만, 네가 '만약' 의학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더 아름다워지고 싶다면-"

"...이 쓰레기 같은 놈!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묻는 말에 대답해라!"

"커헉!"

-우득.

점점 더 조여드는 폐부.

하는 수 없이 나는 서큐버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말해 달래서, 하는 거야? 난 남의 외모를... 막, 평가하고... 그런 사람이."

"...말해!"

수년 간, 최고의 미남 미녀를 봐 온 '현대인 유진'의 시선이 놈의 얼굴 구석구석을 평가했다.

"개인 취향인데... 일단... 사각턱도 좀... 깎고."

좀 과하게 생겼다고 해야 하나.

서양에선 사각턱도 미의 기준이라던데,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러자 놈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광대도... 좀 깎고."

"...!"

"코에 필러도 넣고, 그, 팔자 주름 개선도 하고, 그런 절차를 받는 걸 추천한다. 하지만... 그렇게 뜯어 고치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워 질 거야. 그러니까 스스로의 외모에 만족하면서 살아..."

"이, 쓰레기가!!!"

중성적인 존재가 일갈하자 검은 마력이 폭주하며 카덴, 에밀리, 브랜드가 동시에 퍽! 하고 쓰러졌다.

그러나 난 달랐다.

'아... 이제 익숙해졌어.'

마치 물속의 부력에 적응하는 것처럼, 세발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익숙해진 상태.

난 한쪽 무릎을 짚고 일어나 중성적인 악마를 노려보았다.

"그나저나 너... 물리적인 공격은 못 하는 것 같네?"

"무릎 꿇어라."

놈은 내게 핏빛 에너지를 쐈지만, 이제는 저항할 만했다. 체온이 가파르게 오르고 심장이 쿵쿵거리는 걸 제외하면...

아주 괜찮았다.

'오랜만에 영靈의 덕을 보는구나.'

내가 전혀 영향받지 않는다는 듯 행동하자, 악마가 당황한 듯 소리를 질렀다.

"...내 아이야! 저놈을 죽여라!"

"녜헤에에엣!"

브랜드가 나한테 달려왔지만,

'하... 씨. 넌 카덴처럼 저항하는 척이라도 좀 해봐. 릭바오도 저항을 하는데...'

그가 강한 이유는 항상 감정을 절제하고, 생각하면서 싸우기 때문이었다. 생각을 잃은 브랜드의 움직임 역시 초인의 그것이었지만...

거기엔 냉정한 살의가 빠져 있었다.

-휘익.

난 그의 공격을 간단히 피한 후, 온몸을 뒤틀면서 혼백 타격술을 넣었다.

-빠악!

사령 갑주로 감싸여진 주먹이 브랜드의 턱에 적중하자, 그는 공중에서 트리플 악셀을 밟으며 혼백 뭉텅이를 쏟아내었다.

그래도 신체 강화를 쓰지 않아서 죽진 않았다.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악마."

"..."

"너는 물리적인 건 전혀 못 하는 거지?"

"...네 놈도 날 해칠 수 없다."

"..."

"여기서 굶어 죽기 싫다면, 네 동료들을 죽이기 싫다면 투항해라. 조용히 나가주겠다."

분노를 짓누른 악마의 말.

하지만 나는 놈을 보면서 그저 낄낄 웃었다.

"그래. 한 일주일 동안 널 못 이기면 내가 굶어 죽겠지."

"..."

"하지만 나한텐 교보재가 있거든."

내 바지 뒷주머니엔 '검은 책'이 있었으니.

이는 로커스트에 단 스무 개인가, 열 개밖에 없다는 최고 등급의 교구였다. 그것의 정체를 아는 것일까? 악마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너 같은 놈들 죽이는 법을 지금부터 공부하겠다. 내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하면 잘 해."

"멍청한 놈. 영계에 간섭하는 법을 며칠 안에 배우겠다니, 그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동안 난 네 동료들을 하나하나..."

"내 동료들을 조종해? 뭐, 묶어놓으면 되지."

"크흐. 어떤 밧줄이 기사 후보생의 육신을 구속할까?"

난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렇게 차갑고,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굴긴 싫었지만...

오히려 내 동료들을 구하려면 해야만 하는 판단도 있었다.

"그럼 팔다리 힘줄을 다 끊어 놔야지."

"...뭐? 미친 건가?"

"뭐, 어쩌겠냐. 상황이 그런데. 나중에 미안하다고 무릎 꿇는 한이 있어도 일단 다 같이 살아야 할 거 아냐."

그러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검은 책을 펼치려는 순간-

그의 몸속에서 빠져나온 핏빛 안개가 보물 방 안쪽을 가득 채웠다. 악마가 정말 이러기 싫었다는 듯- 씹어 뱉듯 말했다.

"이 방법까진 안 쓰려고 했건만... 너는 특별히 더 괴롭게 죽여주마."

순간 난 정신을 잃었다.

*

유혹의 남작 외르바스.

그것이 200년의 긴 잠을 잔 이후 마주한 건, 역겹도록 멍청한 인간 모험가 아홉 명과 곰 한 마리였다.

'...너희는 글자조차 읽을 줄 모르면서, 알지도 못하는 구멍에 막대기를 꽂아 넣는구나. 하긴, 인간이란 건 항상 그렇게 멍청하지.'

그것은 애초에 영체.

육체 없이 수천 년을 살아온 존재라.

영혼만 갖고 살아갈 수 있었던 외르바스의 족속들은, 오로지 지성체의 감각기관에만 인지되며 수많은 왕국을 파멸로 몰아 넣었다.

'너희 중 영체의 대응 방식을 아는 건 극소수...'

물론 일정 경지에 이른 마법사들은 그를 '물질적으로' 가두는 것에 성공하기도 했으나.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대응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남작 외르부스는 휘하 수십만의 몽마들을 이끌고 셀 수 없는 인간들의 삶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쓰레기 같은 놈들.'

장군들을 외도하게 만들었다.

왕비와 공주들을 이용해 질투심을 유발했고,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을 붙였으며.

귀족들을 헌신하는 애완동물로 만든 다음 파멸로 이끌어줬다.

애초에 그와 같은 족속들은 '영계를 인지하고 영향까지 끼치는' 이들을 제하면 말 그대로 이길 방법이 없는 존재인지라.

그는 대공의 자랑이었으며,

인간과의 전쟁에서 활약하는 그림자 첨병이었다.

그러나 오늘 만난 사령 기사는...

'감히, 감히 내 외모를 모독해...?'

아주 천박한 방식으로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외르바스의 얼굴은 유혹의 남작이 만들어 낸 것.

영체가 얼굴을 타고나진 않지만, 그의 이미지는 수많은 인간을 고통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면서 깎아낸 미학의 결정체였다.

유진은 그걸 가장 해선 안 되는 방식으로 모독하였다.

'타인의 외모를 까 내리다니... 대체 얼마나 무례하고 몰상식한 행위지?'

턱을 깎으라는 등, 코에...

'필러? 필라?'

뭔가를 넣으라는 등...

이렇게나 천박하고 직접적인 모욕을 들어본 건 그가 존재하고 난 이래 처음이었다.

외르부스는 전에 없을 정도로 극한의 분노를 느끼며 다짐했다.

'네 정신은 내가 직접 부숴주마! 아니, 수 천년 동안 직접 고통받게 해주지.'

그리하여 수천 년을 살아온 악마는, 유진의 내면세계 속으로 직접 들어와 더럽힐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

유진의 내면은 그가 상상한 것과 조금 달랐다.

'...허.'

마치 세계가 멸망한 이후를 보는 듯한 광경.

끝없이 넓게 펼쳐진 유진의 내면세계엔 하얀색의 모래, 모래, 모래뿐이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듯. 무한으로 치달은 엔트로피가 만드는 것은 이런 풍경밖에 없다는 듯.

그의 내면 세계는 그 존재만으로 종언을 표현하고 있었다.

"...나갈 수 없어?"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적막한 회색 하늘이 펼쳐진 사막엔 아무것도 없었다. 

존재하는 건 오로지 작은 마노석을 연상케 하는 공뿐.

악마는 그 작은 돌멩이가 유진의 '영'이라 추정했다.

'네 정신이 특이하긴 하지만... 결국 나, 유혹의 악마를 이길 순 없을 것이다!'

그는 씨익 웃으며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

외르바스의 한쪽 손이 그대로 검은색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거짓말."

마치 처음부터 잿더미였다는 것처럼, 외르바스의 팔은 바람에 날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내가 수천 년을 살아왔는데, 나보다... 높다고? 격이?"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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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황금빛 보물 방의 안쪽.

악마 외르부스는 핏빛 안개를 뿜어낸 다음 유진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유진은 정신을 잃은 채 방 가운데에 정좌한 상태. 

에밀리는 침음성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윽..."

악마가 유진의 안쪽으로 사라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브랜드, 카덴, 에밀리에게 건 마법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남작의 마법은 의지가 꺾이는 순간 기억마저 변조할 정도로 위험한 것. 이는 가장 지독한 저주, 질병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그것이 실시간으로 에밀리와 카덴의 머릿속을 갉아먹고 있었다.

-쿵!

에밀리는 머리를 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시각각 그녀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핏빛의 저주. 

이는 실시간으로 그녀의 기억을 왜곡시켰다.

그녀의 스승.

그녀가 사랑하게 된 사람.

좋았던 기억, 싫었던 기억 등.

모든 추억들이 외르부스의 이미지로 덮여가며 실시간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이를 방어하는 건 오로지 단 하나, 고통받는 에밀리의 의지뿐.

'잃고 싶지 않아...!'

그녀는 필사적으로 견뎠다.

아이리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러한 유혹을 이겨내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사랑을 떠올리는 것이라.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사람을 떠올리며 버텼다.

상대가 모르는 풋사랑이라고 한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랑이라고 한들.

그 마음의 무게는 타인이 단정 지을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크억!"

그러나 수천 년을 살아온 악마의 힘은 인간의 의지력으로 감당하기 힘든 것이라...

그녀의 머릿속은 실시간으로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부서져 갔다.

외르부스의 말에 따른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메이스를 뽑아 유진의 머리를 후려쳐야 했다.

'그래야, 남작의 총애를 얻을 수 있어!'

그렇게만 한다면 순도 높은 쾌락과 행복을 선물 받을 터. 모든 걸 포기한 사람은 투쟁하는 사람보다 훨씬 편했으니...

그녀는 그 감정에 투쟁하는 것만으로도 심력을 다 쏟아붓고 있었다.

카덴 쪽도 상황은 심각했다.

"아아- 나의 영애! 내 사랑을, 내 사랑을 모욕하지 마라!"

그는 재빠르게 검을 뽑아 반대쪽 손 힘줄에 꽂아 넣었다.

'카덴...'

아무런 망설임도 없는 냉정한 동작. 

붉은 피가 튀고, 카덴은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재빠르게 검을 뽑아낸 후 다시 자신의 다리를 베었다.

"모독하지, 말란 말이다!"

피를 너무 많이 쏟은 것일까.

카덴은 거친 숨을 내쉬다가 쓰러졌다.

아마 기절한 원인은 과다 출혈이겠지.

그러나, 모든 이들이 유혹을 견뎌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브... 브랜드?'

기절해 있던 브랜드가 어느새 비틀거리며 일어나, 검을 빼 들고 유진을 향해 다가가는 중이었다. 

그의 눈을 보니 흐릿해진 상태.

아직 악마의 마법이 그 효력을 발휘하는 상황이리라.

그걸 본 에밀리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안 돼...!'

흘러 넘치는 푸른 마력.

그것이 에밀리의 몸속을 격한 파도처럼 흐르자, 영혼을 갉아먹던 핏빛의 마력이 쿵! 하고 정체되었다.

'...제발, 딱 한 번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푸른 마력을 쓰는 이들은, 역경을 겪으면서 자신의 한계를 깨고 각성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에밀리는 지금 자신의 한계를 넘어 악마의 지배를 조금이나마 이겨냈다.

"...브랜드."

"흐, 흐으... 나의 주인님...!"

두 초인의 충돌.

살기 어린 두 무사가, 몸의 통제력을 거의 잃은 상태로 서로를 타격했다.

브랜드의 검이 에밀리의 눈을 스쳤고, 에밀리의 메이스는 브랜드의 복부를 후려쳤다.

*

인간의 내면세계는 여러 형태를 띈다.

본인이 살아온 본가, 익숙한 숲, 화려한 성채의 내부 등.

보통 이 공간은 혼백의 크기만큼 협소했으며, 영은 대부분 말랑한 젤리 같은 형태를 띄어 관계로 조작하기 쉬웠다.

'그런데 넌 뭐냐?'

외팔이가 되어버린 외르부스는 유진의 영을 바라보았다.

백색의 하늘에 떠 있는 조그만 마노색 돌덩어리. 

이미 자신의 왼쪽 팔(신체가 아닌, 영체의 일부분)을 잘라낸 그것은 물을 빨아들인 스펀지처럼 커지고 있었다.

'...커진다?'

그는 이상함을 느꼈다.

영. 그것은 최초의 폭발에서 비롯된 신의 파편이다.

이는 끝이 없는 윤회의 핵심이며, 혼백 너머로 존재의 의지를 결정하는 판단의 주체라.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것이었기에 악마 대공이나 일곱 신조차도 깎아내거나 더할 수 없는 존재였다.

비록 삶이 거듭될수록 영 자체가 변화할 순 있었지만...

저렇게 실시간으로 변하는 건 아예 말이 안 됐다.

'내가 헛것을 보나?'

그렇게 고민하던 외르부스는 마침내 깨닫고 말았다.

'...!'

유진이 가진 영은 커지는 게 아니라, 그저 가까워져 올 뿐이라는 걸.

'멀어서, 작게 보였다고?'

외르부스는 그걸 보고 '공포'라는 감정의 존재를 되새겼다.

'너...'

보통 인간의 영은 30cm 정도의 곰 인형 크기인데... 

대체 뭘 해야 사람의 영이 저 따위 위압감을 뽐낼 수 있는 것일까. 

그걸 본 외르부스가 지껄였다.

'너, 인간이긴 한 거냐?'

무한하게 펼쳐진 지평선 위쪽.

드러난 하얀색 영의 정체는 거대한 달이었다. 천체, 마노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별의 표면은 하늘 전체를 가득 채워버렸으며-

이제 외르부스의 시야로는 '빈 하늘'을 인지할 수가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게... 영이 맞긴 한가?'

만약 이것이 현실이라면,

이 영의 주인은 일곱 신마저 우습게 볼 정도의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어느 존재가 고작 인간의 몸으로 잠재력을 품는단 말인가.

'설마...'

그러던 중.

악마의 가슴속에 딱 하나.

정말 생각하기 싫었던, 논리적으로 어떤 가치도 없는 억지스러운 가정이 하나 떠올랐다.

'설마, 이게... 하필이면 내 앞에 있는 게 [그 새끼]의 환생이었다고? 아주 우연히?'

이백 년 전.

인간들은 전부 쉬쉬했지만, 지지리도 길었던 전쟁을 끝낸 이는 따로 있었다.

그건 일곱 신들도, 아틀라스의 기사들도, 로커스트의 마녀들도 아닌 한 명의 인간.

진주해 이남에서 온 정신병자였다.

그는 수행자였으며, 사령술사이자 마법사였고, 신들과 악마들을 다 포함해 이름 부르기조차 꺼리는 진성 인격 파탄자이기도 했었다.

외르부스는 그것을 보면서 우주적 공포에 덜덜 떨었다.

'왜, 왜 하필 나지...? 왜, 하필이면 내가 '이 새끼'를 마주해야 하는 거지?'

악마는 유진이 생각했던 것과 굉장히 비슷한 피해의식을 느끼며 절망했다.

차라리...

물리적 세계에서 끝을 봤다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승산이 있었겠다.

영혼의 격이고 뭐고 사람은 목이 잘리면 죽기 때문.

차라리 여기사의 몸을 빼앗아 유진에게 대항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그러나 낙장불입이라.

악마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는 수 천 년을 살아온 존재라 유진의 몸을 지배할 수 있다고 확신했었다.

'억울해...!'

악마는 피를 토할 것처럼 억울했다.

세상에 인류는 수억 명 있었다.

영혼은 그 숫자보다 많이 존재하는데, 눈앞의 사령기사가 [그 새끼]의 환생일 확률이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게다가 영혼이란 것의 특성상 인간 아닌 걸로도 태어날 가능성이 존재했으니, 그 확률을 고려하는 것 자체가 멍청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그런데 문제는,

존재의 운명을 비웃고 능멸하는, 말도 안 되는 억지적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 데에 있었다. 

외르부스는 그런 존재의 '내면에 들어가는' 최악의 선택을 하였으니.

그는 절망감을 느끼며 무릎 꿇었다.

"위, 위대한 영이여...!"

[...]

"제 모든 존재를 바쳐 당신을 즐겁게 해드리겠나이다!"

외르부스 역시 격이 있는 악마.

수천 년 동안 셀 수 없는 인간들을 파멸시켰고, 그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이였다.

하지만 수억분의 일 확률로 억까를 당하면 아무리 강인한 정신도 박살 나고 말았으니.

그가 머리를 조아리자 다행히 유진의 영이 대답했다.

[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윤회하는 존재이다. 넌 내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가?]

"당신이 욕망하는 자, 카, 카밀라와의 사랑을 이뤄 드리겠습니다! 영원히, 행복한 꿈을...!"

그러자 거대한 달, 백색 왜성이 말했다.

[사랑?]

건조하면서도 우주적인 목소리.

그것이 사막의 모든 모래를 진동시키며 살짝 띄웠다. 

그러자 외르부스는...

그것이 자신을 용서할 '가능성'을 보였단 사실만으로도 정신적 황홀경에 젖었다.

'내가, 내가 왜 인간을 죽이는 일 따위를 했을까?'

그는 어떤 종교적 열정에 젖어 영을 향해 소리질렀다.

"카, 카밀라가 당신을 사랑하는 환상을... 계속 보여드리겠습니다! 영원히!"

[카밀라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소유하고 싶어 할 뿐.]

위대한 존재치고는 지나치게 세속적인 말.

외르부스는 그 엇나간 답변들 들으며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그렇기에, 드리는, 말씀인데요...? 그러니까. 카밀라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행복한 환상을, 평생 보여드리겠..."

[그러니 네가 사랑을 모른다는 것이다. 혐오스런 영체야. 신들이나, 너희들이나... 인간으로 살아본 적도 없는 주제에 어떻게 인간의 사랑을 이해한단 것이냐.]

"...어."

['나'은 현재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연인으로선.]

"..."

외르부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맞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은 카밀라를 지배하고, 범하고 싶다. 그뿐이다. 카밀라에 대한 감정은 현재 그 이상으로 발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혼백으로도 그 사실을 알지.]

"그, 그러니까 그 환상을!"

[네 제안은 아무 쓸모도 없구나.]

"이, 이이이이익!"

외르부스는 모든 체면을 버리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펄럭!

두 날개를 펼친 외르부스의 영채.

그것은 유진의 사막을 고속으로 횡단했다.

박쥐같은 형체가 바람처럼 날자, 수천 개 넘는 모래 둔덕이 외르부스의 날개 아래쪽을 스치며 멀어져갔다.

"왜, 왜 안 끝나?"

그러나 그의 내면세계엔 끝이 없었다.

어딜 날아가도 새하얀 모래, 모래, 모래뿐.

마치 외르부스가 느끼는 절망감처럼, 유진의 영이 가린 그림자가 밤처럼 사막을 덮어왔다.

악마는 울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그에겐 자부심이 있었다.

"나는, 나는... 수 천 년을 살아온 남작이란 말이다!"

악마로서의 자부심.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혼백을 수도 없이 흡수한 그였다. 

그렇게 수십 세기를 이어온 존재가, 기술 한 번 잘못 썼다고 죽는 건 너무도- 너무나도 부조리했다.

"내가, 내가 파멸시킨 인간만 만 명이 넘는단 말이다!"

마지막 힘을 다해 날았지만 그보다 백색 왜성의 그림자가 커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아이리스의 기사단장도! 로커스트의 마녀들도... 내가, 내가 다 죽였는데!"

한 영적 생명체는 필사의 힘을 다해 날개를 퍼덕였으나...

아무리 날갯짓을 빠르게 한들 운석 충돌을 피할 순 없는 법.

결국 외르부스는 깔렸다.

-찍.

수천 년을 살아온 남작.

수만 명의 인생을 도탄으로 몰아넣은 위대한 악마는 그 허무한 소리와 함께 죽었다.

거대한 영이 닿자마자 영체는 검은색 혼백을 뱉으며 터졌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하얀색 별에 밟혀 종이 같은 두께로 쫙 펴졌다.

곧 유진의 영이 하늘을 향해 다시 날아가자...

터져 죽어버린 외르부스의 시신은 검은색 가루로 변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한 악마.

그가 수 천 년을 살며 쌓아온 기억,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그만의 미학들은.

일말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곱게 갈아져 검은 마력이 되었다.

[벌레.]

유진의 영은 그런 평가를 남겼다.

*

'...'

보물 방의 안쪽에서 난 눈을 떴다.

'...실화냐?'

이번엔 기억이 잊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면세계에서 일어난 일이 어젯밤 꾼 악몽처럼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단 의미였다.

'대체 뭘 하는 새끼였던 거야? 나는?'

-유진, 당신은 절대 미칠 수 없어요.

-...당신, 인간이긴 한가요?

남작은 약하지 않은 존재였다.

영체니, 수행이니 잘 모르는 내가 생각을 해봐도, 수천 년을 살아온 영적 존재가 있다면 그것의 정신을 뛰어넘는 건 인간으로서 불가능했다.

근데 난 했다.

오히려 수 천년 살아온 존재를 압살했다.

악마 남작은 '운 없게도' 하필 나한테 '내면 세계를 공격한다'는 수를 뒀다가 카운터 맞아 갈려 나가고 말았다.

'게다가 그건 또 다른 인격도 뭣도 아냐. 이건... 나 자체야.'

무엇보다 기분 나쁜 건 영의 진단이 정확했단 것이다.

카밀라를 향한 내 마음.

그건 사랑과 확실히 구별되는 지점이 있었다.

'어찌 되었건...'

악마를 갈아 마셔서 그런 것일까?

지금 내 몸속을 흐르는 마력량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만 다르마 이상.

마력량이 강함의 절대적인 지표인 건 아니지만, 이전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이 근육 안쪽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 시력이 돌아왔군.'

내 눈이 완전히 뜨이고, 시야가 돌아온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동료들부터 찾았다.

"얘들아."

"유진. 일어났어?"

그리고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맛봤다.

'...친구들이.'

전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다행히 악마의 존재가 소멸해 핏빛 마법은 다 사라진 것 같았지만... 

그 후유증이 너무 심했다.

"카덴. 너는 왜..."

"내 사랑을 모독하는 건 참을 수 없었어. 내가 널 죽일까봐 육체를 무력화했다."

"...미안하다."

"큭큭. 별거 아니다."

그 말을 듣자 울컥하고 눈물이 나왔다.

카덴은 항상 중2병같이 행동하며 우습게 굴었지만...

적어도 그가 가진 결의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누가 그를 놀리던 상관 없었다. 

카덴은 자신을 희생한 다음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그러지 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니까. 그리고 에밀리도 다쳤어."

"유진. 일어났구나. 괜찮아?"

에밀리를 보니, 그녀의 양쪽 눈이 갈라져 있었다.

"유진. 나, 진짜 열심히 견뎠어."

"고마워. 정말, 정말 잘했어."

"헤헤."

에밀리가 아주 작게 미소 지었다.

내가 잘못을 지은 건 아니지만...

희생한 동료들을 바라보니 가슴이 아팠다.

"브랜드. 너도 살았구나. 다행이다."

"제길."

브랜드는 구석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미안하다. 유진. 에밀리의 눈을 벤 사람은... 나야."

"..."

그의 눈빛은 정말 암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씨발... 병신새끼처럼 굴어서."

"..."

"그렇게 쉽게 홀리지만 않았어도..."

브랜드는 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푹 떨궜다. 그의 말 마디마디마다 짙은 자기혐오와 죄의식이 배어 있었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뭐... 그렇다고 한들.'

이게 브랜드의 잘못은 아니었다.

난 빠르게 말했다.

"브랜드. 네가 잘못한 건 없다."

"..."

"그저 결과적으로 피해가 난 것 뿐이지. 적어도 나는 널 원망하거나 하진 않을 거야."

실제로도 브랜드를 원망할 사람은 없었다.

다들 어떤 상황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그치만 할 말이 없진 않았다.

"다만... 네가 여자 친구 세 명을 사귀어도 1초를 저항할 수 없었단 건, 그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단 거잖아."

"..."

"사랑하지 않는 여자 셋한테 시간을 쏟아붓고도 유혹마법에 지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앞으론 자기계발 열심히 하자. 브랜드. 알았지?"

브랜드가 자기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다."

난 주위를 둘러봤다.

릭바오, 브랜드는 그나마 정상.

하지만 에밀리랑 카덴이 부상을 심하게 입었으니, 이제 남은 병력은 나밖에 없었다. 에밀리가 물었다.

"유진. 이제... 어떡할 거야?"

전력의 반은 잘려 나간 상황이지만.

검은 책은 외르부스를 이겨서 잘 했다는 듯 계속 진동중이고, 내 마력량은 전과 비교도 안 되게 늘었다.

"뭘 어떡해."

"..."

"내가 너네들 다 데리고 나간다. 전부 살려서 신전 치료를 받게 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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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해일이 몰아쳤다.

영靈.

이는 현대인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었다. 내가 절이나 교회에 안 다녔던 사람이라 그런 것도 있고, 나름 공대생 출신이라 그런 것도 있었다.

'그래도 이 세계 사람들은 영과 혼을 갖고 있다.'

부정할 수 없다.

나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과 혼이 어떻게 다르냐, 라고 물으면...

대부분은 의지, 결정을 통제하는 게 영, 감정, 기억 등을 느끼는 게 혼백이라고 이해하더라.

'다 좋다 이거야.'

근데 그러면 문제가 하나 생긴다.

'영은 혼백 없이 스스로 말할 수 있을까?'

일단 언어란 건 기억 없이는 사용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영도 별도의 기억 저장소를 갖고 있단 소리인데,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또한 의식이 어느 쪽에 있는지도 미지수였다.

'영이 말을 하기도 했었지.'

만약 영이 '나'라면.

'내'가 영이 말하는 상황을 관찰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면 의식은 혼에 담긴 걸까, 영에 담긴 걸까.

그러나 가장 기괴한 의문은 따로 있었으니.

'그럼 대체 뇌는 왜 존재하는 거지?'

외르부스는 뇌가 없이도 말할 수 있다.

그는 영적 생명체라 그런 게 가능하단다.

그렇다면 영적 생명체는 영적 뇌가 있나?

나도 영적 뇌랑 육체 뇌가 따로 있는 건가?

'그만하자.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이윽고 생각하길 그만두었다.

'마법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난 이 세상을 모른다.

이 세상이 창조론으로 만들어졌는지, 진화론으로 만들어졌는지, 지동설인지, 천동설인지, 하다못해 이 행성이 동그란지, 평평한지 조차 모른다.

그렇기에 난 고민하기보다 결론을 내렸다.

'내 영의 정체, 그건 바로...'

[혼백 믹서기]다.

솔직히 이 영으로 국을 끓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미국 주식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변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영의 격이라는 건 정말로 종교적인 의미인지라.

사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만 살면서 영의 덕을 딱 두 개 보았으니.

1. 사령술의 근본적 한계를 완화한다는 점.

2. 외르부스조차 갈아버릴 정도의 정신 방벽을 제공한단 점.

이 두 가지였다.

'좋았어, 줄여서 혼믹. 앞으로도 잘해보자고.'

"유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영에 관한 생각. 내가 외르부스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

"그건 정말... 대단한 것 같아. 유진. 솔직히 듣고 놀랐어."

에밀리의 양쪽 시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초인의 자연 회복력은 일반인 이상.

하지만 눈은 잘 낫지 않는 부위였기에, 적어도 자연 회복을 하려면 한 달 정도 걸린다더라.

그렇기에...

여기서 회복될 때까지 농성하는 계획은 쓸 수 없었다.

일단 식량이 한 끼밖에 안 남았고, 이 좁은 방 안에서 똥을 싸며 버틸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밀리는 더듬더듬하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꽉 잡고 일으켜주자, 에밀리는 뺨을 빨갛게 물들인 채 꼼지락거리며 일어났다.

"영은 어디에 쓰는 걸까, 에밀리?"

"음... 난 잘 모르지만."

"..."

"엄마가 말씀하시길, 혼은 느끼기만 하는 데에 반해 영은 깨달음을 얻게 해 준다고 하셨어. 그래서 영감靈感이라고 부른다나."

'깨달음이라...'

내 영은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지식? 심득心得? 아니면 진리?

이런저런 영감들이 막 떠오르는데, 에밀리의 말이 상념을 끊었다.

"나, 짐만 되는 상황이네."

"보물 같은 짐이지."

"어머."

에밀리가 생긋 웃으면서 날 툭 때렸다.

나는 내 팀원들에게 말했다.

"다들 무긴 골랐어?"

"응."

던전 내부의 보물 방.

이곳에서 보상을 획득하는 방식은 간단했다.

원하는 아티팩트를 잡고 떼어내면 그대로 마력이 흘러들어 각인되는 방식.

실험 결과, 소유자가 아닌 사람이 아티팩트에 손대면 마력을 잃어버렸다.

"유진. 나, 눈 멀었다고 일부러 이상한 거 골라주는 거 아니지?"

"미쳤어? 에밀리?"

황금색 열쇠로 열 수 있는 방.

이곳에서 액세스할 수 있는 무기들은 철 열쇠를 썼을 때 봤던 것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전설 속의 병기들.

마법 대학에서도 만들기 힘들어하는, 원리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붉은 용 숨결 방패

'용의 숨결'이라는 광역 화염 마법을 하루에 여섯 번씩 뿜어낼 수 있는 방패였다. 

설명에 따르면 웬만한 철은 흔적도 없이 액체로 녹여버린다는데, 사실상 이거 하나만 구해도 좁은 통로에서의 전투는 볼 게 없었다.

게다가 그 강도도 웬만한 무기들을 한참 상회한다니, 단순하면서도 좋은 선택이었다.

-물푸레나무 장창

투척할 경우 천 피트 내의 목표물에게 '무조건' 적중하는 장창이었다. 

게다가 설명문에 의하면 상대를 꿰뚫은 후 폭발까지 한다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물론 무조건 '꿰뚫는' 건 아니라서, 쓰는 사람의 경지가 높아야 하긴 하겠지만...

저점도 고점도 높은 안정적인 무기라 충분히 쓸만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들도 많네.'

장비 등급이 올라가서 그런 걸까? 

존재 가치를 추정하기 곤란한 것들도 꽤 있었다. 간단히 설명들을 요약하자면...

-체인질링의 장검 : 

10피트 이내의 상대와 위치, 자세를 바꿀 수 있는 장검.

-중력 반전기 :

기존에 작용하는 중력의 방향을 반대로 하고, 그 세기를 조절할 수 있는 지팡이.

-아낙스의 시계 :

사용자를 제외한, 특정 범위 내 물질의 시간을 두 배 빠르게 가도록 하는 시계.

-고블린 수확 장치 :

고블린의 영과 혼을 섭취가능한 즙으로 만드는 장치. 이를 섭취한 사람은 해당 능력을 전부 얻을 수 있음.

-검은색 축복의 메이스

사용자의 '모든 능력'을 상황에 따라 3할 3푼만큼 증가시킴. 자동 복구 기능.

-세 길잡이의 나침반 :

세상 어떤 물체든 추적할 수 있는 장치. 3번 사용 가능함.

-마카르의 의사 혈액 :

핏줄에 투여할 경우 마음대로 형태를 변환할 수 있으며, 액체, 고체 상태를 오고 갈 수 있는 의사 혈액. 자동 복구 기능.

행복한 고민이긴 했다만...

황금 방이라 그런지 다음과 같은 말도 적혀 있는 게 문제였다.

[각 개인은 황금 방의 물건은 하나만 소유할 수 있음.]

이건 다른 황금 방을 턴다고 해도 그 물건을 소유할 수 없다는 뜻.

고대인들은 '황금 아티팩트'에 한해 명당 하나씩만 소유할 수 있도록 제약을 걸어놨다. 

그래서 선택이 어려웠다.

일생에 단 한 번밖에 고를 수 없는 기회인데,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이건 너무 힘들다. 유진."

브랜드가 탄식을 내뱉었다.

전설 속 무기를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게 된 상황. 동료들은 그 극도의 기쁨에 흥분하면서도 선택을 힘들어했다.

"일단 명당 하나 제한이 없다면 가장 먼저 가져가야 할 건 저기 있는 나침반이야."

"왜...?"

"보물 방이나 황금 열쇠 같은 것들을 추적할 수 있으니까."

"1.5배 이득이로군."

"정확히."

오히려 그를 상회하는 이득이 맞았다.

열쇠 하나가 있으면 다섯 명이 보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릭바오한테 시키면 되지 않을까?"

"...유진. 천재냐?"

그러나 우리 마스코트 생물께서는 다른 상품을 원하고 있었으니. 

릭바오는 사람처럼 두 발로 서서 자기가 원하는 상품을 가리키고 있었다. 로보트 사달라고 조르는 일곱 살짜리 어린애처럼 말이다.

"야, 이 새끼야. 네가 사람이야...?"

-꾸어어.

저거 주면 잘 싸울 수 있다는 듯 말하는 곰.

그가 가리키는 것은 '리빙 메탈 아머'였다.

-리빙 메탈 아머 :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변하는 갑주.

어떤 형태, 두께로 변하든 무게는 무조건 1 스톤이며, 최고 두께는 0.5피트임. 경도는 사용자의 마력에 비례하며, 손상될 경우 자동 재생됨.

릭바오의 몸에 사령 갑주를 걸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내 마력량이 바닥나는지라. 

당연히 저거 하나 걸치고 다니는 게 훨씬 합리적이긴 했다.

-꾸어어...

"그건 확실히 네 말이 맞지."

릭바오의 말을 알아듣는 건 아니지만.

그는 '일단 나가서 악마들을 상대해야 할 위험이 있고, 입구막기를 하던 기사 4인조와 맞붙을 수 있다'며 울부짖는 것 같았다.

"아니. 유진, 그걸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한 마디로 미래, 고점을 보면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소리. 

물론 롤랜드 경처럼 타오르는 검을 가진 사람이랑 부딪히면 저 갑주가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갑옷이란 건 언제나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나았다.

게다가 릭바오 같은 경우 몸집이 워낙 크고, 그게 실시간으로 변하며, 웅갑을 만드는 데엔 돈이 많이 들 게 뻔했다.

어떻게 보면 릭바오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 새끼, 왜 똑똑하지?'

"그래. 넌 그거 가져라."

-꾸어어.

그러자 곰 새끼가 아주 자연스레 [리빙 메탈 아머]를 들어 자기 몸에 걸쳤다.

-철컥, 철컥, 철컥...

마치 아이언맨 슈트처럼 스스로 펼쳐지는 거대한 갑주. 그것이 풀 플레이트 아머처럼 릭바오의 거대한 근육과 가죽을 감쌌으니.

-꾸워어어어!

위압적인 풀 플레이트 아머를 걸친 채 포효하는 릭바오의 모습은, 강철로 이루어진 생체 탱크를 보는 것 같았다.

"우와! 황금 나침반!"

"황금 나침반? 그게 뭐야. 유진?"

"그런 게 있어."

나는 감탄했다.

릭바오가 정말 강해지기도 했지만, 갑주를 걸친 모습이 정말 웅장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후보생들도 각자 무기를 하나씩 골랐다.

"카덴... 확실해?"

"지금 난 전투에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태다. 힘줄이라도 붙으려면 일주일 넘게 걸려."

그가 고른 건 의사 혈액.

자기 의지에 따라 혈액을 움직여 싸울 수 있는, 나노머신같은 무기였다. 

그의 혈관을 찾아 의사 혈액을 주사하니, 카덴이 목을 우드득 꺾으면서 말했다.

"크... 유진. 벨 거 하나만 던져줄 수 있나? 땔감 같은 거."

쓰지 못한 땔감을 공중에 던지자-

-휘리릭!

카덴의 손목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마력으로 감싼 피의 채찍이 그것을 수 토막 내어버렸다. 그는 킬킬 웃으며 말했다.

"위력은 괜찮아. 나중엔 여기에 마력도 두를 수 있겠군. 그치만... 인체를 재생시키는 기능은 없어. 말 그대로 피를 뿜어내 그걸 조종하는 것뿐이지."

"그래. 최대한 움직이지 마라."

"이걸로 보조하겠다."

에밀리 역시 당장 도움 되는 무기를 골랐다.

"용의 숨결 방패... 근데, 너, 그럼 방패가 두 개잖아?"

난 굉장히 무서운 광경을 떠올렸다.

에밀리가 양손에 방패를 하나씩 들고 상대를 후려치는 광경 말이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일단 지금 당장 눈이 없어. 양손에 방패를 들면 방어라도 가능하겠지. 그리고..."

"..."

"방패 두 개는 나중에 합칠 수 있지 않을까? 좋은 대장장이를 찾아가면?"

난 감탄했다.

'다들 생각이 있구나.'

제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여전히 브랜드였다.

"제일 고점이 높은 건 고블린 추출기이긴 한데... 너무 아깝다."

"대체... 대체 왜?"

모두가 원망하는 눈길로 브랜드를 노려보자, 그가 설명했다.

"영은 신의 파편. 이는 악마의 대공이나, 일곱 신들조차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야. 심지어 아이리스께서도, 현재 성황제께서도 죄인의 영을 소멸시킬 수 없어."

"그건... 그렇지."

"근데 고블린의 영을 추출해서 즙? 즙으로 만들 수 있다고? 저건... 대체 뭐야? 저건, 존재해선 안 될 물건이잖아."

그 말을 들으니 확실히 등골이 싸했다.

'심지어 외르부스의 영조차 하늘로 날아갔는데...'

어쩌면 이 방에서 유일한 '신급' 병기는 저 고블린 추출기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한층 더 기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고블린들이 거의 다 죽어서 쓸 만한 각이 많이 안 나와. 저걸 제대로 쓰려면 고블린 농장을 만들어야 하는데..."

브랜드는 자기 혼자 세뇌당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인상을 쓰며 병기들의 최대 활용을 고민하였다.

"시간 두 배로 감는 시계는 어디다 쓰지?"

"농사. 어류 양식장. 작물 생산량이랑 어업 생산량이 두 배가 돼. 전쟁을 길게 한다면 저것도 무조건 필요해."

"...미친."

그가 인상을 계속 찌푸리다 고른 건-

"체인질링의 장검."

"...그래."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새낀, 능력자 배틀물 보며 자란 현대인인 나보다도 이런 쪽에서 상상력이 뛰어났다. 

게다가 전투 스타일도 지적인 편이라...

저걸 제대로 활용하면 일대일 대결에선 진짜 역겨울 거다.

오히려 브랜드가 날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봤다.

"유진. 넌 그걸로 괜찮겠어?"

"응."

검은색 축복의 메이스.

사용자의 '모든' 능력을 상황에 따라 33% 상승시켜주는 미친 무기였다.

그냥 직관적으로 봐도 참 좋은 효과긴 하지만...

'그래서 '모든 능력'이 뭔데?'

이 세상은 게임이 아니었다. 

일부러 잴 수 있게끔 만든 마력량을 제하면, 힘, 지능, 매력 같은 걸 숫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일단 근육의 힘은 33% 올라갈 거 아냐.'

벤치프레스 100kg 치던 사람이 133kg 친다고 엄청 세지진 않겠다. 하지만 그 사람이 벤치 프레스 뿐만 아니라 '모든 운동'에서 33%높은 효율을 발휘한다면 어떨까?

지금 내게 부족한 건 마력량도, 유틸성도 아니다. 이기기 위해 필요한 건 순수한 체급.

그렇기에 내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검은색 메이스를 골랐는데.

"...호오?"

"왜? 유진?"

"이거 성공인데."

무기를 잡자마자 온몸에 전능감이 넘치니...

나는 내가 진짜 '모든 면에서' 33% 강해진 걸 깨달았다.

시험 삼아 사령 화살을 써 보니, 평소보다 33%가 더 만들어졌고. 위력도 33% 더 강해졌을 거란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더 강해진 악력으로 주먹을 꽉 쥐자, 원래대로라면 통증을 호소했어야 할 손가락 관절에서 전에 없던 단단함이 느껴졌다.

"근육의 힘이 강해지면 인대가 다칠 줄 알았는데, 그럴 일도 없겠어. 인대 내구도도 33% 강해졌다."

"그럼 잘 골랐네."

"매우 잘 골랐지."

한 마디로 인대, 관절, 뼈, 속도, 반응 속도,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의 양까지 전부 강화된 것.

난 이 무기를 드는 것만으로도 두 배 이상 강해졌다.

'미친.'

선택, 정말 잘했다.

*

"다들 준비됐어?"

동료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릭바오는 전열을 맡았다.

중간에선 브랜드가 후방까지 가는 적을 맡고, 카덴, 에밀리는 후방에서 서로를 지키기로 했다.

"문, 연다."

황금 열쇠를 들이대자 쿠쿠궁- 하고 열리는 문. 

열쇠가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바깥에서 잠잠하던 악마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깍깍?

-까가각?

-끼야아아아악!

어디 가지도 않고 기다리던 악마들. 

난 쿵쿵대는 심장 소리를 진정시키며, 차가운 눈으로 눈앞의 악마들을 바라보았다.

문을 열기 직전처럼, 정말 똑같이 징그러운 새끼들이었다. 저 멀리 사령기사 레반칼의 시체가 보였다.

'아저씬 죽어버렸군.'

시체 다섯 구는 악마들의 할버드에 꽂힌 채 검은 방 주변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리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다.

나는 내게 달려오는 붉은색 파도를 노려보며 뒤쪽에 명령을 전달했다.

"후방 두 명은 방어만 해."

"알았어."

그리곤,

-탁!

절제된 살기를 피워올리며 악마의 파도 사이로 뛰어들었다.

-까아아악!

날 보며 어두운 노호성을 토하는 염소 머리의 악마. 

키는 4m이며, 그 가죽과 근육은 내 신체 강화까지 튕겨내는 정신 나간 생물이었다. 내구도 자체가 탈 지구급인 짐승.

허나-

지금 난 놈이 두렵지 않았다.

'신체 강화-'

정확히 33% 강화된 신체 강화.

정확히 33% 강화된 혼백 타격술.

정확히 33% 강화된 사령 번개.

이 모든 걸 33% 강화된 집중력으로 꽂아 넣으니,

"저, 저게 무슨..."

-콰아앙!

힘의 해일이 몰아쳤다.

그것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번개.

염소 머리 악마의 단단한 뼈, 척추, 근육 같은 것들은 말 그대로 압착 돼 폭발해 버렸고, 주변에서 깝치던 잔챙이 악마들도 충격파에 맞아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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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갈 희망을 주고 싶어.

새빨간 피로 엉망이 된 바닥.

그 위로 악마들이 구더기처럼 몰려왔다.

그들은 오염된 던전의 벽에서 개미처럼 굴을 파고 내려오는 중이었는데, 터진 수도관처럼 흘러나오는 게 끝이 없어 보였다.

'진짜 숫자가 많은 건가?'

마치 생지옥과 같은 광경.

허나 동료들은 잘 싸웠다.

일단 방패 두 개를 든 에밀리는,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임에도 제대로 방어하며 싸우는 기염을 토했다.

'대단하네...'

-깡!

일단 용의 숨결 방패가 대형이라 대충 막아도 되는 게 컸고.

무엇보다도 카덴이 의사 혈액을 이용해 에밀리의 감각 기관을 만들어 주었기에 가능했다.

만일 왼쪽에서 공격이 날아오면,

-카아아악!

에밀리의 머리 위에 더듬이처럼 붙은 카덴의 의사 혈액이 꿈틀거렸다.

그 감각을 느낀 에밀리가 아무 망설임 없이 왼쪽으로 방패를 후려치니, 조그마한 악마의 공격은 그대로 막히고, 가벼운 체중은 하늘로 날아가더라.

물론 그녀의 쌍방패로도 커버 못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서걱!

그 부분은 카덴의 의사 혈액으로 방어하였다.

"조심!"

뭣보다도 브랜드랑 릭바오가 놀지 않았다.

브랜드는 무섭도록 냉정한 표정을 지은 채, 적재적소에 필요한 지원만 하면서 깔끔하게 체력을 아꼈고.

릭바오는 에밀리를 보호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날뛰었다.

-꾸어어어어!

-쾅!

갑옷을 입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심리적 안정성은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짐승 역시 마찬가지.

강철 갑주를 입은 릭바오는, 무게가 1 스톤밖에 되지 않는 가벼운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채 미친 듯 달려 나갔다.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대한 곰.

-꾸어엉!

그는 자신의 앞발이 깨지는 것도 두려워 않고, 강철 갑주 덧씌운 앞발로 최대한 강하게 땅을 후려쳤다.

그러자 지진 같은 충격파가 발생하며 말 그대로 주변 악마들이 고깃조각이 되었다.

-까아악!

-끼애애액!

'잘 샀다. 릭바오가 더 호전적으로 변했어.'

게다가...

카덴의 의사 혈액만큼은 아니더라도, [리빙 메탈 아머] 역시 순간 변형이 가능한 물건인지라. 

-까아악!

릭바오가 살기 어린 표정으로 염소 악마를 노려보자, 거대한 강철의 충각이 그의 머리 위에 솟아났다.

-까아아악!

염소 악마는 기병 돌격을 방어하듯 할버드를 세우고 릭바오를 맞았지만,

-꾸워어어어!

새빨간 피를 뒤집어쓴, 4m짜리 갑옷 입은 곰은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발아래 악마들을 말 그대로 짓뭉개버리며 거대한 충각을 이용해 할버드 악마를 들이받았다.

-쿵!

-까애애액!

단단한 던전의 벽, 리빙 메탈 아머의 충각, 릭바오의 질량 및 가속도.

할버드 악마는 반쯤 위로 들린 채 충각에 들이박혔다. 뼈가 박살나고 내장이 흘러나오며 입에선 피를 줄줄 흘리니... 

그걸로 전투 불능이었다.

"길을 뚫어! 릭바오!"

-꾸어어어!

나 역시 놀지 않고, 미친 악귀처럼 날뛰며 검은색 플랜지드 메이스를 휘둘렀다.

-빠아아악!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만루 홈런처럼 하늘을 나는 악마들.

심플하면서도 고급진 디자인을 가진 이 무기는, 악마의 골통을 수백 개 부숴도 구부러지긴 커녕 흠집조차 안 났다.

어느새 염소 악마의 할버드를 노획한 브랜드가 내 뒤를 따랐고, 카덴을 업은 에밀리가 더듬이의 인도에 따라 내 뒤쪽으로 따라붙었다.

"이쪽이야!"

전투 상황에서도 지도를 보는 브랜드.

그렇게 우린 꾸역꾸역 몰려오는 악마의 파도를 따돌리며 회랑을 빠져나갔다.

*

악마들의 파도를 뚫어내는 데에 한 시간.

회랑을 탈출한 다음부턴 열 시간 이상 걸었다. 시계가 없어 대충 때려맞춘 것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배꼽시계랑 인체의 피로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지나온 길이 맞아."

브랜드가 여러 번 지도와 대조하고 나서야 우린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절반 가까이 왔어. 조금만 더하면 집이야."

"잘됐네."

"오늘은 좀 배고파도 굶고, 일어나서 식량을 먹고 출발하자."

"오케이."

에밀리는 눈 없이 싸운 게 피곤했는지 곯아떨어졌고, 카덴은 릭바오의 배 쪽에 뒤통수를 댄 채 조용히 잠들었다.

나와 브랜드는 램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그의 눈에서 짙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브랜드.

그는 외르부스에게 세뇌당한 다음부터 막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에밀리의 눈이 멀었고, 일행이 위기에 처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뭐... 브랜드의 책임은 아니지만.'

그 꼴이 조금 안쓰러워서 말했다.

"...너도 좀 자."

"대단하던데. 유진."

"뭐가."

"그냥, 나 따위보단 훨씬 더."

브랜드는 자조적으로 웃으면서 수통의 물을 들이켰다. 

릭바오의 수통은 다른 사람이 쥐고 있으면 점점 물이 흘러나오는 단점이 있기에 빨리 마셔야 했다.

"네 말에 따르면 사령술을 배운 지 몇 달밖에 안 됐다고 했잖아."

"그렇지."

"그런데도 네 마력량은 지금... 웬만한 평기사의 두 배에서 세 배 정도는 돼."

"푸른 마력이 더 늘이기 쉽나?"

"흐."

그러자 브랜드가 말했다.

"상상해봐. 공작가 자제로 태어나, 태내 연공으로 많은 마력을 상속받고, 온갖 영약을 처먹고, 수련할 때마다 투구게의 피를 빠는 삶을."

"..."

투구게의 피.

그것을 마시면 명상이나 집중력에 상당한 부스트를 준다고 브랜드는 설명했다.

"사령술은 무조건 죽은 이들의 혼백을 흡수해야 하잖아. 가난한 사람들이 빠르게 복수할 땐 사령술이 훨씬 낫지. 방법만 알면 노베이스로도 할 수 있으니. 뭐... 로커스트엔 사령술사를 전문적으로 키우는 방식이 있다곤 들었지만. 적어도 아틀라스에선 그래."

"...어디든 돈 많은 사람이 황금 티켓을 쥐는 건 매한가지로군."

황금 티켓 증후군을 중세인이 알 리 없지만.

브랜드는 대충 어감으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에 들어올 때 봤던 4인조 기사 중 한 놈. 알폰소였나. 최소한 백작가의 자제일 거다. 물론 장남은 아니겠지만..."

"...아직 두려워?"

"두렵지. 유진. 난 두려워."

브랜드는 조그만 고체 연료를 들어 램프의 맨 아래에 집어넣었다.

그의 눈 속에서 불꽃이 아프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몇 년 동안 종자 생활을 했다고 말했나?"

"그랬지."

"우리 형제는 인생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아홉 살에 종자가 되었어. 하류 인생은 어차피 답이 없었으니."

브랜드의 말투는 고요했다.

하지만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우리가 모신 첫 번째 기사님은 친절하고 좋은 분이었다. 각종 전략과 전술, 머리 쓰는 법, 독도법 등을 가르쳐주셨지. 때로는 마력보다 머리가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과 함께."

"...그건 좋군."

"그렇지. 하지만 좋은 시절은 1년 만에 끝났어. 두 번째 기사는..."

램프 불꽃이 일렁이자 그림자가 춤을 췄다.

브랜드의 눈썹은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다는 듯 기괴한 모양으로 구겨졌다.

"잘못이 있을 때마다 서로를 때리도록 시켰다. 누가 잘못했는지 서로 결론을 낸 다음, 뼈가 부러지고 살갗이 파여 나갈 때까지 때리라고 했지."

"..."

"보통 난 때렸고, 동생이 맞았다."

고대 로마의 형벌을 떠올렸다.

데시마티오Decimatio.

그들은 열 명의 군인들로 하나의 조를 짰는데, 탈영 등의 죄를 저지를 경우 열 명 중 한 명을 아홉의 손으로 '직접 뽑아' 죽이게 했다.

"그 이유는 동생이 시켰기 때문이었다. 야위고, 병치레가 잦은 동생은 자신보다 내가 가문을 잇는 데에 더 적합하다 믿었어."

'...씨발.'

"난 내가 아프지 않아서 좋았지만, 그만큼 마음이 병들었지."

벌써부터 역해지기 시작했다.

여긴 중세다.

강자가 모든 걸 지배하는 구조이고, 질서의 보호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약자가 강자를 죽이고, 억제하지 못하니...

강자들은 자기 본능대로 행동한다.

그러다 도를 넘으면 황실은 몇 명을 목매달아 죽이고 본보기로 삼았다.

"너네 중 한 명이라도 나가면 이는 탈영이다. 애국하는 아틀라스 제국의 남자로서 입대해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는 종자로서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고... 이를 못 하면 그저 너희가 부적격인 거다. 그런 낌새라도 보이면 죽을 때까지 종자 생활을 못 하게 만들어주마. 아니, 오히려 종자 생활 기간을 늘려 주는 건 어떠냐? 젠장. 아직도 기억나는군."

애초에 입대란 건 '종자가 되는' 걸 두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종자가 된 것 역시 가난하게 태어난 게 브랜드의 '선택'일 리 없었다.

하지만 열 살짜리 애들이 뭘 알았겠는가.

"결국 기사는 다치고 쓸모 없어진 동생을 내 손으로 죽이고, 내 입으로 먹게 만들었다. 그는 그걸 보며 웃었지."

"..."

"그걸 본 그는 웃으면서 말하더군."

할 말이 없었다.

"시킨다고 진짜 하냐고."

브랜드가 날 보면서 갑자기 처 웃기 시작했다. 

낄낄, 킥킥킥, 히히히히히히히.

그의 정신은, 불꽃이 만든 그림자에 잠겨 어둠 속을 유영하는 와중이었다.

"내가 병신같은가, 유진? 반항조차도, 도망조차도 진작 결심하지 않은 내가?'

그렇지 않다.

나 또한 군대에서 겪어봤다.

계급, 두려움, 사회적인 억압과 체벌.

이것들은 인간의 정신을 깎아 불구자로 만든다. 

그렇게 족쇄 채워진 인간들은 끝도 없는 채무감을 느끼며 소모품처럼 활용된다. 세상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네가 말했지. 여자 세 명을 끼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게 말이 되냐고."

"..."

나는 브랜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난 에밀리처럼 용맹하지도 못하고, 카덴처럼 날래지도 못해. 복수란 목적이 있지만... 너 처럼 특별한 사람도 아니지. 스스로의 한계를 너무 잘 알기에 주저앉게 된다."

"..."

"그러니 난 쓰레기..."

더 들을 수도 있었지만...

난 어떠한 충동이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어쩌겠냐."

그러자 브랜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봤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식으로.

브랜드는 오히려 자신에게 쓴 소리를 해 주길, 죄책감에 휩싸여 자기 정신에 훨씬 더 강한 고통을 주길 바라고 있었지만.

난 그럴 생각은 없었다.

"뭘 어떡해. 나라도 어릴 때부터 그 지랄 당했으면 너처럼 행동했다."

"...뭐?"

"코끼리도 어릴 때부터 족쇄 달아서 매어놓으면 반항을 못 한다. 그럼 자유를 찾지 못한 코끼리를 욕해야 할까?"

왜일까?

난 분명 100%의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데...

방금 떠올린 단어들이 즉석에서 이어지면서 튀어나왔다.

"스스로를 미워하지 마라. 이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결론이었고, 운명이었다. 네가 겪은 모든 불행은 우연의 산물이다."

"우연의 산물? 하. 그렇지. 나랑 내 동생이 가난하게 태어난 것도, 하필 종자가 된 것도..."

"정확하다. 정말 높은 확률로, 너는 그곳에 태어난 것만으로 그 비극을 겪어야 했을 거다. 네가 어떠한 노력을 하든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피하기 어려웠겠지."

정말 신기하게도, 

어쩌면 절망밖에 없을 그 말을 듣자 브랜드의 눈빛이 오히려 차분해졌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자유롭지 않다."

"...괴롭다. 유진. 난 어떻게 해야."

난 브랜드를 바라보았다.

뇌 안에서 격류가 휘몰아쳤다.

스치듯 본 불교 관련 다큐멘터리,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내용, 평소에 하던 생각, 새롭게 휘몰아치는 영감 등이 머릿속에 소용돌이치며 하나의 형태를 만들었고...

그것은 깨달음이란 맥락을 이뤘다.

처음 본 깨달음이 아닌, 언젠가 삶의 일각을 스쳤으나 바람처럼 헤어진 기억이었다.

'브랜드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 살아갈 희망을 주고 싶어.'

그러한 목적을 설정하자 말이 튀어나왔다.

"네 삶은 고통이었을 거다. 브랜드."

"..."

"너의 혼백은 하루하루 타오르는 지옥 속에서 살아갔겠지."

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용기와 지혜를 지닌 사람은, 어떤 고통을 겪을지 선택할 수 있다."

그러자 브랜드가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봤다. 난 조용히 램프의 고체 연료를 갈면서 말했다.

"아마 네가 복수할 대상은 높은 인간이겠지.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득해서 괴롭겠지. 노력하고 노력한들 일천한 재능으로 닿지 않는 것 같아 속이 타들어 갈 거다."

"..."

"그리고 넌 그 고통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결과가 어떻게 끝나든, 너는 갈망하는 것을 향해 발악하고 비명 지를 권리가 있는 거다."

지성을 가진 자들은 결코 닿지 못할 곳을 향해 발악할 권리가 있다.

육신은 장작이요, 영혼은 불꽃이라.

우린 꽃처럼 피어나 영웅처럼 싸우고, 보석같은 깨달음을 얻은 뒤 모래처럼 스러지리라.

그러자 브랜드가 경악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유진... 너."

그의 눈빛 안쪽엔 전에 없던 심지가 굳어 있었다. 

'...나 좀 말을 막 했나?'

반면 난 스스로도 무슨 말을 했는지 헷갈렸다. 브랜드가 너무 괴로워 보여서 도와주고 싶었는데...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좀 부끄러웠다.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브랜드에게 말했다.

"자라."

"...고맙다."

어쨌든 고맙다니 다행이었다.

*

다음 날.

우린 마지막 남은 한 끼 식사를 처리하고 다시 던전 바깥쪽으로 걸었다.

배를 채워서 그런 걸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한 끼를 먹은 이들의 눈빛은 결의에 차 있었다.

'피곤한데. 그냥 안 나왔으면 좋겠다.'

기사 4인조 병신들.

웬만하면 피 보기 싫으니 그냥 가면 안 될까... 그런 편리한 생각을 했는데 이게 왠 걸.

"아이고! 우리 기사 후보생들! 반가워!"

알폰소가 썩어빠진 미소를 지으며 튀어나왔다. 난 브랜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떨고 있었지만...

적어도 눈빛에는 전에 없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원래 용기는 두려운 사람들이 내는 거지.'

그렇다면, 브랜드는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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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는 기사를 막아낼 방법은, 내가 생각해도 그리 많지 않았다.

던전은 나뭇가지 형태.

출구가 없고 입구만 존재하는 지형이기에, 한 번 들어가면 입구 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내가 모르는 탈출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탐험가들 말을 들어보면 대부분의 던전 구조는 비슷했다. 그러므로, 사실 강하기만 하다면 입구 막기가 합리적인 전략이긴 했다.

하지만 난 그런 게 정말 싫었다.

'옛날부터 그런 새끼들이 있었지.'

웹툰이나 만화에서 승급 시험 같은 걸 치르면, 꼭 입구 쪽에서 기다리다 친구들 뒤통수쳐서 보상을 뺏는 새끼들이 존재한다.

본인이 냉정하고, 잔학무도하고, 강하고, 똑똑하다고 여기는 새끼들.

이들은 어딜 가나 존재하는 하이에나, 뻐꾸기 같은 인간상들인데, 놈들의 공통점은 항상 자기들이 남들보다 잘난 줄 안다는 것이었다.

떠올리기 쉬운 생각 하나 해놓고 말이다.

금발의 기사, 알폰소도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우와... 이게 누구야? 어? 때깔이 고와졌네! 고생 좀 했나봐?"

그리고 난 이런 놈들을 아주 싫어했다.

별 이유는 아니고...

어렸을 적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본 뻐꾸기의 행동 방식을 보고 치를 떨었었기에.

그것뿐이었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처음 들어갈 땐 그냥 뒤질 줄 알았는데. 그래서 안에서 뭣 좀 건졌어? 응?"

"..."

"이 씨발, 내가 물으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내가 별다른 반응을 안 보여서 그런 걸까?

알폰소는 날 무시하고 기사 후보생들을 노려봤다. 그의 순백색 건틀릿엔 핏자국이 묻어 있었는데, 꼬라지를 보니 이미 한 따까리 한 것 같았다.

예상은 했다. 

다만 며칠 동안 저기서 기다릴 생각을 한 건 대단했다.

'게다가 지원도 불렀군.'

"친구들 데려왔네."

"하. 씨발... 넌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사령술사 새끼야?"

"..."

"야."

알폰소가 살기 어린 눈으로 날 바라봤다.

"잘 모르나 본데, 너 여기서 죽는 거야. 여기가 네 무덤이라고."

원래 4인조 기사 모임이었던 집단.

그들의 숫자는 어느새 열 이상으로 불어나 있었다. 후보생 여섯. 평기사 여섯. 종자 일곱. 사제 둘. 스무 명에 달하는 일개 소대 병력이다.

'반면 우리 측의 전력은...'

눈 없는 에밀리.

힘줄 잘린 카덴.

죽음을 각오한 브랜드, 릭바오, 그리고...

나.

알폰소는 조금의 긴장감도 없이 말했다.

"야, 여기사!"

"..."

"씨발, 후보생 년이 빠릿빠릿하게 대답 안 해? 눈까지 멀었다고 귀에까지 좆대가리를 처박았냐? 뭐하냐? 방패 두 개 들고."

그러자 남은 열한 명의 인원도 낄낄댔다. 

"너는 특별히 용서해 줄게! 어? 천천히 갑옷을 벗은 다음에 알몸으로 기어와!"

물론 에밀리는 대답도 하지 않고 동요도 하지 않았다. 다른 동료들도 묘하게 침착해 보였다.

'다들 아는구나. 후퇴 자체가 불가능하단 걸.'

오히려 선택지가 사라지니 불안감이 죽었다.

여긴 중세, 던전.

상대방이 약자라면 평화를 지킬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설령, 우리가 병신처럼 황금 무기를 내놓아도 살아 돌아갈 확률 따윈 없었다.

뒤에 있는 동료들은 차마 말로 못 할 일들을 당하다 죽겠지.

그러므로-

난 조용하게 메이스를 뽑아 들었다.

-스릉.

섬뜩한 소리와 함께 온몸에 차오르는 힘.

그걸 본 알폰소가 이마에 핏줄을 돋우면서 웃었다.

"...병신."

그는 푸른빛 망토를 휘날리며 뒤돌아 군중 속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아틀라스 제국 소속. 

순백의 여신 아이리스 교단 산하, 황금 넝쿨 기사단.

호스피탈러 6명, 에란트 6명, 종자 7명. 사제 2명.

화려한 갑주를 입은 엘리트 정규 군인들이었다.

아틀라스 정규 편제의 일개 소대급 병력이었으며, 아인베르트령의 고급 전투를 책임지는 초인들이었다.

평기사들이 정면 방어를 담당하고, 후보생들이 망치 역할을 담당하며, 부상당한 이들은 사제의 힘으로 회복시키니.

그들 중 패배를 예상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쿵! 쿵! 쿵!

이들은 창을 세 번 내리찍으며 방패 대형을 갖췄다.

"""순백의 영광을 위하여!"""

각 잡힌 움직임.

그들은 황금 넝쿨이 새겨진 거대한 타워 쉴드를 땅에 내리쳐 벽을 만들곤, 2m 넘는 장창을 절도있게 치켜들었다.

"""아이리스에게 무한한 영광을!"""

그들의 방패에 새겨진 잠언이었다.

-철컥.

난 아주 천천히 동료들의 면면을 살폈다.

'...릭바오의 역할은 에밀리와 카덴을 보호하는 것.'

"뭐 하냐? 석궁 겨눠."

"""예!"""

후보생 여섯이 달려와 거대한 석궁 여섯 정을 방패 위에 얹었다. 장전하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해 보였으나 초인들 입장에선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브랜드의 역할은, 릭바오를 뚫을 이들을 상대하는 것.'

그렇기에-

"에밀리, 카덴, 브랜드, 릭바오. 나는 내 목숨을 걸고..."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지키겠단 맹세를 입에 담았다.

"...너희를 지키겠다."

내 혼백이 뜨겁게 요동치면서 영의 의지와 호응하니-

결코 쉽게 부러지지 않을, 전보다 날카로워진 여섯 자루의 검은색 장검이 내 주변을 수놓았다.

-탁!

"발사!"

부풀어 오른 허벅지가 땅을 박차고, 몸뚱이가 섬전처럼 쇄도하는 동시에.

여섯 초인들이 조준한 석궁이 날 향해 발사되었다.

-타다다당!

죽음을 향한 돌격.

그러나 나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귀속자 유진.]

[그대는, 악마 남작, 외르부스를 처치하는 위업을 이룸.]

[이것은 상급 사령술사 이상, 즉 '마녀'급 인사들도 버거워하는 퀘스트이며, 일개 사령기사 후보생에겐 신화적, 영웅적인 행위임.]

[이는 '최상급 임무 이상'의 위업이므로, 상점 100점을 부여함. 또한 성적을 B+(우수학생)에서 EX+(기밀관리대상)로 상향 조정함.]

구결을 외우고, 심상을 떠올렸다.

'카밀라류 독문 사령술, 입문 1 단계.'

날 향해 날아오는 여섯 발의 살벌한 화살.

하나하나가 릭바오의 몸에 구멍을 뚫을 만한 위력이었지만, 지금 내 반사신경은 33.3% 정도 재빨라진 상태였다.

난 거세게 땅을 박차고, 벽을 달리며 전부 피해냈다.

"장창!"

[귀속자가 현재 학습할 수 있는 새 기술은 6개.]

[(첨삭 - 카밀라 앱 헤롯) 해당 과정에서 카밀라 앱 헤롯의 독문 마법을 교육 과정으로 제공함.]

[(첨삭 - 카밀라 앱 헤롯) 또한, 교육 과정 최종 수여에 따른 특수 보상을 제공함.]

살인에 익숙한 여섯 개의 창 자루가 살벌한 푸른 섬광을 뿜으며 쇄도했다.

몇 년을 깎아온 일격.

그 창격은 수십 년 동안 마수들을 죽이고, 정적들을 단죄한 것이라.

이는 교단의 수호를 맹세한 이들의 긍지였으니, 직격당하면 사령 갑주를 걸치고 있어도 몸통이 찢길 것이었다.

그러나...

'가련한 이여, 그대는 책임에서 도망갈 수 없으리.'

-카밀라 앱 헤롯 류, 독문 사령술 1 단계.

-그림자 이동.

구결을 외우자 내 몸이 그 자리에서 검은색 액체처럼 녹아 사라졌다.

"어,"

"무슨..."

그 후 아주 잠깐동안 의식이 암전된 다음-

내 몸은 갑작스레 그들 중앙에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기습. 허나 기사단의 이름은 허명이 아니란 걸까?

중장갑을 걸친 호스피탈러들이 재빠르게 방패를 치켜들며 대응했다. 

'신체 강화.'

폭포수처럼 혈관을 채우는 마력.

내 어깨 근육이 불거진 힘줄로 맥동하였고,

"찔러!"

'혼백 타격술.'

검은 축복의 메이스는 검은색 마력으로 일렁거렸으며.

-푹!

'사령 번개.'

이윽고 검붉은 우레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으니.

후보생들이 석궁을 버리고, 검을 뽑아 내게 찔러 넣는 동시에, 나는 방패 위로 일격을 내리꽂았다.

'...천벌.'

고통스런 업으로 이뤄진 검붉은 번개.

한 방에 수천 다르마를 소모하는 극강의 일격을 내리치자, 고목처럼 굵직한 천둥이 기사단의 방패에 작렬했다.

-콰앙!

결과는 참혹했다.

마력 2만 다르마에 달하는 내가 내리친 천벌. 

푸른 마력에 휩싸인 아이리스의 방패는 그대로 찢겨나갔고, 이를 방어하던 이의 갑주도 박살나 흩날렸으며, 피해자의 내장은 당연히 그 형체도 유지하지 못한 채 벽면을 칠했다.

"...어?"

일격을 얻어맞은 성기사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스러졌다.

"..."

극한까지 단련된 아틀라스 제국의 정예 병력이지만, 상사의 내장이 몇 미터를 튀는 상황에선 침착을 잃어버리는 법.

그러나-

"치유의 힘을!"

아이리스의 여사제가 지팡이를 흔들자, 푸른색 마력이 피어오르며 성기사의 몸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잘린 몸의 단면 사이로 구더기 수백 마리 같은 살점들이 자라나 서로 붙으려고 드니-

죽은 이 빼고는 다 살려낸다는 아이리스의 축복이 얼마나 강렬한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그걸 용납할 사람은 아니었다.

"주, 죽여!"

-콰직!

수 명의 병사들이 검격과 창격을 찔러 넣었다.

쿠크리처럼 생긴 검들이 사령 갑주에 튕겨 나갔고, 푸른색으로 타오르는 장창은 기어이 방어를 뚫은 다음 나의 내장을 관통했다.

그러나-

'니들이 사람이냐...?'

분노가, 검은 마력이, 내가 가진 두 번째 심장이 미친듯 펌프질하며 내 육신을 지탱했다. 입에선 괴성이 튀어나오고 혈관은 폭주하는 상황.

"■■■■■!!!"

온몸에서 피를 쏟던 나는, 반으로 찢겨진 성기사의 머리를 대장장이처럼 두들겼다.

-콰직!

그대로 터져나가는 성기사의 머리.

뇌수가 백 조각 나면 아이리스 할애비가 와도 살릴 수 없었다.

병사들이 추가 공격을 하려 했지만, 사령 검술 여섯 자루가 어지러운 궤적을 그리며 주변 후보생들을 견제했다.

-챙!

"크흑!"

이들은 아직 검에 푸른 마력을 부여할 수 없는 인원들이라. 

사령 검술이 매섭게 공격 방향을 바꿔가며 노리자, 

"어억!"

-푹!

후보생 중 하나의 목 부분으로 깊숙하게 사령 검술이 박혔다. 

"이 개새끼가!"

알폰소가 그 틈을 뚫고 달려들었다.

그의 마력은 다른 평기사들과 동등.

푸른색 신체 강화가 작렬하며 벼락처럼 들이닥치니, 단 0.5초도 지나지 않아 불타오르는 검격이 머리카락 앞을 스쳤다.

'내장이 꿰뚫렸다. 폐부도.'

이미 몇 리터의 피를 흘린 상황.

마력도 20% 정도 사용한 터라 현기증이 들이닥쳤지만, 난 미친 사람처럼 메이스를 들어 옆에 있는 알폰소를 후려갈겼다.

-까아아아앙!

"크하아악!"

신체강화, 혼백 타격술을 걸어 내리친 일격.

알폰소의 푸른 검격과 검은색 축복의 메이스가 충돌했다.

'이 정도 공격은 동률인가.'

뼈가 저릴 정도의 충격이 느껴졌고, 알폰소도 검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그가 이를 악물고 소리질렀다.

"뭐하냐, 놈을 노려!"

다섯 평기사들이 거대한 방패를 치켜들고 날 향해 죽일 듯 달려들었다. 

무게 1톤은 가뿐하게 넘어가는 다섯 이상의 초인들이 날 포위한 상황.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대응책은 존재했다.

'...사령 안개.'

이는 기존에 배웠던 사령 안개가 아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령의 안개 (신경독 강화)]

기존 '사령 안개' 마법을 개량. 

안개에 유독성 물질을 포함해 이를 들이마시는 자들에게 마비를 유발함.

[사령의 안개 (산성 강화)]

기존 '사령 안개' 마법을 개량. 

안개는 이들의 갑옷, 피부를 녹여 고통을 유발하고, 액체로 만듦.

[사령의 안개 (추적 강화)]

기존 '사령 안개' 마법을 개량. 안개는 악의를 갖고 적의 갑옷 틈으로 스며들며, 아군으로 지정한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려 교육 과정 세 개를 투자해 만들어낸 최고급 사령 안개였다.

-쉬이이이익!

검은색 스모그가 갑주의 틈새 사이로 최루탄처럼 뿜어져 나오며, 고작 너비 5m밖에 안 되는 던전의 안쪽을 꽉 채워버렸다.

"크윽!"

"알, 알폰소! 퇴각해야 해!"

"무슨 개-씹소리야! 사제! 빛의 기적을!"

"잠시만요!"

"제기랄! 사령기사인데 우리만큼 빠르고 강하잖아! 빼자!"

"지-랄하지 말고 싸워!"

그로써 생겨난 아주 조그마한 틈.

사제가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난 사령 화살을 준비하면서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철의 방'에서 챙긴 보상.

붉은 루비가 끼워진 반지는 피를 끌어당기는 효능을 갖고 있었다.

'시체를 포식한다. 시체가 뭔진 명확치 않으나...'

반지에 몇 천 다르마에 달하는 마력을 쏟아붓자, 루비가 섬뜩한 빛을 내며 발광했다.

'피 역시 시신의 일부임은 확실하지.'

"콜록, 젠장! 빨리 쓰라고! 눈이 아프잖아!"

"빛이여!"

난 놈들의 방심이 최고조에 달할 때 사령화살을 날렸다.

-타다다다다닥!

수십 발에 달하는, 석궁보다 열 배는 강력한 화살들이 비처럼 안개를 뚫고 쏟아져 들어갔다. 쐐액 소리를 내며 순차적으로 안개를 갈라버리는 화살 소리가 쾌감을 줬다.

"크악!"

"제길, 사제가! 사제가 다쳤다!"

-콰과과과과!

동시에 반지의 효과가 발동하니...

바닥에 흐른 엄청난 양의 피가 소용돌이 형상을 이루며 끌려오기 시작했다.

-까드드드득!

그 격류가 너무 강한 탓일까?

내가 죽인 기사 한 명의 몸은 통째로 솟아올라 공 모양으로 뒤틀어졌고, 바닥에 쓰러진 후보생 시체는 다리를 위쪽으로 한 채 천천히 끌려왔다.

-콰득! 까드드드득!

팔, 다리가 튀어나온 살점의 공.

거기엔 기사의 내장도, 뇌 조각도 있었다.

그 흉측한 혹성이 공중에서 뒤틀어지며 열시히 피를 짜내니...

-텅.

-까득.

-카드득.

피를 빠는 데에 방해되는 갑옷과 뼈.

그것들은 마치 입 속에서 치킨 뼈 바르듯 아래로 탁탁 떨어졌다. 

그 혹성이 나에게 수혈하고, 동시에 난 [흡수], [포식]을 사용하니...

'...피의 징수.'

그들이 쑤셔댄 상처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천벌'을 쓰며 소모한 검은 마력이 순식간에 메꿔지기 시작했다.

차오르는 흉측한 전능감이 온몸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빛이여!"

사제가 마침내 사령 안개를 거둬내는 순간, 그들은 이 광경을 보고 말았다.

"...저, 저게 뭐야?"

-까드드득! 까득!

공중에서 볼링공만큼 쭈그러든 남자 두 명의 시체. 

아직 살아있는 사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 

이것들이 한 줄기의 강을 만들며 날 향해 모여들었으니...

"하아..."

내 몸은 전투 전보다 건강해졌고, 내 마력은 그 이전보다 늘었다.

전투라는 지옥 같은 과정을 거쳤는데도 손해 본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

알폰소 동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저 새끼... 사령술사가... 맘대로 흡수를 하는데?"

누군가 말했던가?

사령술사가 조건 없이 '흡수'를 쓸 수 있다면, 벌써 대륙은 로커스트가 통일했을 거라고.

그들의 말은 맞았다.

피를 먹는 기사...

죽지 않는 기사를 막아낼 방법은, 내가 생각해도 그리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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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말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