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 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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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중에서도 슬럼이구나.

10년 전, 아인베르트 영지.

백작은 영지 전체에 선언했다.

-본녀는 아인베르트의 백작 되는 자로서, 더 이상 영지에 만연한 부패와 범죄를 좌시할 수 없다. 

-만백성의 뜻을 받들어 성황제의 뜻을 대리하노니, 오늘부로 본녀는 아인베르트의 모든 쓰레기를 치울 것이다.

당시 아틀라스 제국에는 '하얀 섬광'이라는 마약이 유행하고 있었다.

아인베르트 영지민들 중 5%가 한 번은 맛봤을 정도. 

영지의 부패는 극에 달해 있었고, 당연히 범죄 조직들이 극성을 부렸다. 

원래 권력은 이양될 때 가장 취약해지는 법.

새로 백작위를 얻은 엘리시아는 이 꼴을 좌시하기 싫었다.

-오늘부로 아인베르트의 빈민가를 검문하고, 치안을 정상화하겠다.

-황제 폐하의 뜻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죽음을.

그리하여 숙청이 시작되었다.

-불시검문에 협조하시오. 

-마약류가 없거나, 검증 마법에 통과한다면 무죄방면이 될 것이오.

단 하루 만에 치뤄진 대대적인 검문.

백 단위의 아이리스 사제들과, 천 단위의 기사들이 슬럼가를 말 그대로 갈아엎었다.

이들이 야생마들처럼 도시를 달렸다.

초인 병사들의 실행력은 일반인 이상.

조금이라도 마약 중독 증세가 보이면 일단 구금시켰고, 반항하는 자들은 가차없이 죽였다.

당연히 반발이 나왔다.

-저, 저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고위 사제에게 '진실 판독' 마법을 받으시오.

다만 엘리시아의 열의엔 상식을 초월한 점이 있었다.

'진실 판독'은 아이리스 고위 사제들만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엘리시아는 직접 비싼 돈을 내고 억울한 이들을 하나하나 걸렀다.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해라.

-빚을 져도 좋다. 권력이 있다면 돈은 따라오는 법.

-이들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무고한 이들은 풀려났다.

다만 단 한 번이라도 불법적인 일에 발을 담궈본 적이 있다면, 법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이 가루의 정체는 무엇이지? 만약 처음 보는 물건이라면 고위 사제들에게 협조해라.

-이, 이익! 제길! 이 좆같은 새끼들아!

-...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 왜 날 못살게 구냐고! 난 정상적인 사업가야!

-죄 없는 사람들을 중독자로 만드는 건 정상적인 사업 범주가 아니다, 쓰레기야. 그냥 죽어라.

무려 천에 가까운 기사들이다.

이렇게 밀어붙이니 범죄 조직이 버틸 리 없었다.

암왕 바라칼.

그도 이 숙청의 날에 몰락한 사람 중 하나였다.

딱 하루였다.

기사들이 나선 지 단 하루.

거의 이천 명에 가까운 범죄자들이 나무 꼬챙이에 꿰여 광장에 전시되었다. 도시 안쪽에 공간이 부족해 바깥에 매달리는 범죄자도 있었다.

이는 상당히 끔찍했지만...

가끔 대중들은 피를 원하는 법.

마약에 한 번도 손댄 적 없는 영지민들은 엘리시아의 이름을 환호하며 열광했다.

-본 도시는 앞으로 세 부류의 출입을 금한다.

-첫 번째는 범죄자. 사회의 그늘에 숨어 사는 쓰레기들이다.

바라칼은 그 연설을 들으며 이를 갈았다.

'범죄 없이 어떻게 돈을 벌란 말이냐?'

-두 번째는 마약 중독자. 이들은 교화되기 전까지 아인베르트를 방문할 수 없다.

'...사람들은 마약을 필요로 한다!'

-세 번째는 모험가. 이들은 범죄자들과 이름만 다른 뻔뻔한 족속들이니, 아인베르트의 검문소 문턱을 넘을 수 없다.

'모험가 길드까지...?'

그리하여...

원래 세 길드의 수장이자, 범죄 조직 우두머리였던 바라칼은 싸움에 진 개처럼 도망갔다.

허나 그에겐 아직 사령술이 남아 있었다.

'기다려라. 마약이 사람을 파괴한다고? 전혀! 그들은 스스로를 파괴했을 뿐이다! 내가, 내가 아인베르트에 진정한 도탄을 보여주리라.'

그는 10년이 지나 다시 아인베르트로 돌아왔다.

옛날보다 훨씬 강해진 사령술과...

악마와의 계약을 손에 쥔 채로 말이다.

'내가 널 죽이겠다. 엘리시아.'

*

차가운 새벽 공기에 휩싸인 도시.

난 골목 어귀에 앉아 게시판에 낙서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추레한 복장을 하고 연신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전단지 위쪽에 빨간 글자를 쓰고 있었는데...

보다 보니 규칙성이 보였다.

'몇몇 소형 길드의 전단지에는 낙서를 안 하는군.'

이 정도 봤다면 더 볼 건 없었다.

난 아주 천천히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히, 히익?"

날 보고 쫀 걸까? 

그는 소매 아래로 드러난 B 문신을 가릴 생각도 안 하고 골목으로 튀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걸 놓칠 내가 아니었다.

"가자... 릭바오."

-뀨우...

신체 강화에 익숙해진 몸은 빠르게 방향을 전환하며 그를 뒤쫓았다. 달리는 그의 등판을 노려보며 마법을 장전하자 몸의 마력이 솟구치면서 형태를 잡는 게 느껴졌다.

'영혼은... 너같은 쓰레기들에게도 삶을 강요하지.'

사령 화살.

이제 볼 필요도 없었다.

뾰족한 형태의 검은 마력은 내가 집중하자마자 공기를 찢으며 날았다.

-퍽!

"끄하아아아아아악!"

도시가 떠나갈 정도의 비명.

자기 팔뚝만 한 화살?이 정강이를 관통했으니 당연히 평범한 인간이라면 비명을 안 지를 수 없다.

그에게 물었다.

"아까 전단지에 낙서한 새끼가 너지?"

쓰러진 놈에게 다가가 소매를 강제로 걷자, 시퍼런 동맥이 이어진 자리에 'B'라는 이니셜이 드러났다.

그가 급박하게 소리 질렀다.

"이, 미친 새끼! 넌 뭘 하는 새끼야!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누구냐고? 아니면 네가 누구냐고? 너와 나의 정체성을 동시에 질문하는 거냐? 우리 사이엔 별다른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데."

"아, 아니..."

그러자 그는 말문이 막혀 아래를 바라봤다. 난 한쪽 발을 들어 콱! 하고 그의 화살 박힌 다리를 짓밟았다.

"끄아아아악!"

"난 네 정체를 안다. 남 사업 방해하고, 전단지에 줄이나 긋는 새끼지. 손목에 B라고 쓴 건 뭐냐. 네가 바라칼 패거리라고 광고라도 하고 다니는 거냐?"

"크흑... 이건, 순전히 심미적인 의도로 새긴 거야! 우리 엄마 이름이 B로 시작한다고!"

참신한 변명을 듣자 웃음이 나왔다.

"오호라. 이 새끼 봐라. 이렇게 추한 걸 심미적 의도로 새겼다고?"

"...뭐? 지금 너 내 엄마 이름을..."

"엄마 이름은 무슨, 새끼야. 애초에 다 알고 왔어."

그의 머리를 잡고 아주 똑바르게 말했다.

"네가 낙서 안 한 사무소들이 몇 곳 있었지. 빚 받아준다, 돈 빌려준다, 분쟁 해결해 준다는 곳들. 거기서 사주한 거지?"

"..."

"너 이름이 뭐냐?"

"로, 로버트야."

"반말은, 개-새끼야."

내가 공중에 사령 화살 하나를 더 띄우자 놈의 예절이 정상화되었다.

"죄송합니다! 로버트입니다!"

"좋아. 로버트. 너 나랑 거래 하나 하자. 잘 들어라. 네 목숨이 달린 얘기니까."

"예... 예."

"일단 가벼운 얘기부터 해보자. 내 전단지에 낙서는 왜 했니?"

로버트가 말했다.

"저, 명령을 받아서..."

"그럼 명령을 받아서 했겠지. 새끼야. 조직 두목이 게시판에 낙서나 처 하고 있겠냐?"

"죄, 죄송합니다."

순간 욱할 뻔했다.

'아, 이 새끼. 폐급이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새낀 눈치도 없고, 메타 인지도 안 되고, 내가 뭘 바라고 질문을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마음도 없었다.

벌써부터 답답해졌다.

"명령을 내린 새끼가 누구냐고."

"마, 말해도 모르실 것 같은데요."

순간 난 진짜로 혈압이 올랐다.

카밀라가 나한테 '당신의 영혼은 절대 미칠 수 없어요.'라고 했었는데... 

사실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나, 이런 개, 씨발..."

내가 진짜 분노해서 놈의 이빨을 털어버리려 하자, 그가 눈물을 찔끔 흘렸다.

"죄, 죄송합니다! 히익! 사, 사무소로 안내해 드리면 괜찮을까요?"

"그래. 바로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그렇게...

우린 의좋은 형제들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걸었다.

몇 번 더 생명의 위협을 가해주니 놈이 이런저런 사실들을 불었다.

"사, 사실... 일수 사업이나 해결사 사무소 사업은 바라칼 패밀리의 말단 사업에 해당합니다."

"호오?"

"바라칼 패밀리의 원래 사업은 마약 사업입니다."

'사업이라. 잘도 사업이란 말을 갖다 붙이네.'

왜일까.

내가 마약 파는 인간들을 직접 본 건 아닌데, 이런 말을 들으니 맘속에서 거부감이 치솟았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럼 내 전단지에 낙서는 왜 한 거야?"

"그, 그건 저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 동종 업종 견제가 아닐까요...? 저희 사무소만 이용하게 하려는 게 아닐지, 생각을..."

존나 답답한 말투였지만 대략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말단 놈이 명령했단 말이로군.'

대부분의 중세 해결사 사무소는 깡패 집단이 맞았다.

사설 경비, 탐정, 범죄자 사냥 등을 폭넓게 하는 사람들이 왜 깡패가 되었나?

기사단이 존재하고, 사법 체계 대부분이 결투에 의존하기 때문이었다.

'보통 명예로운 일들은 기사단들이 맡지.'

귀부인 호위, 영지전 수행, 몬스터 퇴치 등 조금이라도 선한 일들은 기사들이 받았다.

그 아래 떨어지는 용역들을 용병단과 사설탐정들이 가로챘다.

그리하여 보통 사람들이 하지 못할 '명예롭지 않은' 일들만 아래로 떨어진 결과...

그 일은 누굴 빚쟁이로 만들거나, 도박장, 창관을 관리하거나, 마약을 유통하거나, 소작농들이 일 못하겠다고 찡찡거리면 '진짜로 일 못하는 몸으로' 만들거나 하는 것들뿐이었다.

"다, 다 왔습니다."

로버트 놈은 절뚝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난 주위를 둘러봤다.

'진짜... 슬럼 중에서도 슬럼이구나.'

셀 수 없는 판자집들이 거미줄처럼 늘어선 도시. 

비를 막을 수 있는지 의심되는 걸레짝같은 집들이 쓰레기장처럼 이어져 있었는데, 집의 모양들이 몰개성적이면서도 중구난방해서 거리를 구별하기 어려웠다.

'이런 곳들이 수백 곳이 넘는단 말이지.'

여긴 경비가 한 명도 없었다.

당연히 주변 여관이랑 음식점에서 버린 음식물 쓰레기 냄새와, 누군지 모를 새끼들이 싸 놓은 똥 냄새, 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관상이 지독하게 안 좋은 사람들이 오갔다.

그들은 주머니에 두 손 넣고 구부정하게 걸어 다니며 나를 흘겨봤다.

'동네 분위기 예술이네.'

이런 동네들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아인베르트 행정관들도 조사하기 어려웠을 거다.

백작이 왜 이곳을 갈아엎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우린 목적지를 찾았다.

-볼로레르 해결사 사무소

"다, 다 왔습니다."

'나름 넓은 건물이긴 한데... 역시 추레하군.'

다른 판자집들과 별 차이는 없었지만 더 견고해 보이는 곳. 더러운 공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문을 발로 찼다.

쾅!

문짝이 날아가고, 담배 연기 자욱한 사무실이 드러났다.

상석에 앉은 남자가 똥 씹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의 책상 아래엔 온몸이 피멍으로 물든 열 살짜리 꼬마애가 쓰러져 있었는데... 담배빵을 좀 지져졌는지 어깨가 화상투성이였다.

벌써부터 이 볼로레르라는 작자가 맘에 들지 않았다.

볼로레르가 말했다.

"아유..."

"..."

"쒸이-벌. 어떤 놈팽이 새끼가 사무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와? 다시 들어와, 이 새끼야. 니애미가 가르친 대로 행동하지 말고, 예의 바르게 노크를 쳐하란 말이다."

난 그 입담에 웃었다.

"여긴 뭐 예절 지켜야 하는 곳인가?"

"내가 여기 주인인데 그렇다면 그런 데지. 이 씨발놈아."

그의 주변에 있던 어깨들까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난 사령 기사 유진이다."

"그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

"닥치고, 내 전단지에 왜 낙서했는지 그거나 말해라."

"우리가 했다는 증거 있어?"

"증인은 있지."

로버트의 머리를 잡고 그의 앞에 들이밀었다.

"사, 사장님! 살려주세요!"

"이 병신 폐급 새끼..."

그러자 볼로레르가 살벌한 눈빛으로 날...

아니, 로버트를 째려봤다.

"내가 저럴 줄 알았어. 진작 죽여버렸어야 했다. 그래. 내가 시켰다. 됐냐?"

자기 무력에 자신이 있는 걸까?

볼로레르의 온몸에서 검은 마력이 넘실거리며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호오... 나랑 같은 사령 기사인가?'

그 뿐만 아니었다.

심지어 그를 호위하듯 선 어깨들도 한때 기사 후보생이었다는 듯, 미약한 푸른 마력을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과거의 나라면 결코 이길 수 없겠으나, 운 좋게도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는 달랐다.

"화살 조준해. 좆같은 새끼. 아주 바늘꽂이로 만들어 버려."

여덟 명의 남자가 날 둘러싸며 석궁을 조준한 상황. 

볼로레르는 칼을 뽑고 아주 천천히, 모루 역할을 맡기 위해 걸어왔다.

'저 새끼 팔에도 B가 있네.'

그렇다면 나도 할 일이 있었다.

"릭바오. 나와라."

-뀨우?

가슴팍 속 주머니에 있던 릭바오에게 닭고기 한 조각을 내밀자, 릭바오가 촵촵촵하고 잘 먹었다. 

이렇게 보면 조그만 하늘다람쥐 같았다.

"크, 크흐흐. 저 병신새끼좀 봐."

"쥐 새끼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들이 비웃든 말든 난 릭바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저 새끼들을 죽이는 거야. 알았지?"

"보면 볼수록 가관이군. 그 좆만한 햄스터 새끼로 뭘 하게? 우릴 죽이게? 하하하하하하."

허나 내가 릭바오에게 검은 마력을 주입하자-

작은 하늘다람쥐처럼 생긴 놈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어...?"

마치 포토샵으로 사진을 확대하는 것 같은 느낌.

릭바오는 점점 부풀어 올랐고, 그 크기에 비례해 놈들의 표정에 당황이 서렸다.

그리고 몇 초가 지나자...

-끄어어어...

-쾅!

이 집의 바닥을 부숴버릴 것 같은 거대한 곰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력을 더 처넣으면 더 커질 것 같아 적당히 크기를 조절했건만, 곰은 곰만의 존재감이 있는 법.

난 릭바오의 엉덩이를 토닥거려줬다.

"옆에 있는 놈들을 죽여라. 알겠지?"

-크릉!

거대한 곰이 사무실 안쪽의 직원들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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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 릭바오.

평소에 나는 릭바오를 개처럼 훈련시켰다.

"물어. 릭바오."

-끄앙!

"잘했다."

카밀라의 마법에 맞아 소형화된 릭바오. 

난 그것에게 물어! 죽여! 멈춰! 가만히 있어! 앉아! 등의 명령어를 학습시켰다.

릭바오가 굉장히 똑똑해 그런 걸까?

릭바오는 '대체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나?'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면서 밥이나 달라 졸랐다.

어쨌건...

릭바오의 공격성을 이끌어내는 훈련은 이미 다 마쳤단 뜻이었다.

"전부 죽여라, 릭바오."

빈민가, 볼로레르의 사무실.

평소 아인베르트의 밑바닥 인생들이 모여 본인이 얼마나 잔인한 짓거리를 했는지, 여성 편력이 많은지 자랑하던 이곳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다.

-끄워어어어어어...

곰의 울음소리는 두려웠다.

깡있어 보이는 놈들이 무기로 위협하며 센 척을 했지만, 센 척을 한다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팔과 다리가 덜덜 떨렸다.

'무섭겠지.'

거대 육식동물에 대한 공포.

그것은 유전자에 각인된 것으로, 초인이 되지 않는 한 극복할 수 없었다.

건장한 남자라도 자기 키 만 한 곰이 달려오는 걸 보면 손에 땀이 나고 심장이 쿵쿵거리는 게 보통이니, 저들이 어떻게 버틸까.

릭바오는 그들의 두려움을 배반하지 않았다.

-쿵!

"오, 온다!"

릭바오가 한 번 발을 구를 때마다 건물의 바닥이 푹푹 꺼지며 부서지고, 매달려 있던 집기들이 쓰레기처럼 박살났다.

"석궁! 석궁 쏴! 쏘라고!"

몇몇 용기 있는 이들이 릭바오에게 석궁을 갈겼으나.

-퉁!

"아니... 석궁이."

화살의 품질이 조악한 편이라, 그것들은 릭바오의 두꺼운 털가죽을 뚫지 못하고 전부 튕겨 나갔다. 

그 장난감같은 석궁들은 릭바오를 화나게 하는 것 외엔 어떤 효과도 못 거뒀다.

-끄워어어!

-쾅!

릭바오가 격분해 들이받자 앞에 있던 남자가 공중을 날았다. 벽을 부수고 날아간 그의 몸은 옆 건물에 목부터 들이받고 떨어졌는데, 딱 봐도 즉사였다.

'그래. 너도 약한 놈은 아니지.'

나한텐 쪽팔리게 배를 드러내며 항복했지만, 그는 릭토 산의 폭군이라 불리던 마수였다.

인명 피해가 없던 이유는 일반병들이 아예 싸울 엄두조차 못 내고 알아서 가축들을 바쳤기 때문.

그런 놈을 동네 강도들이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끄워어!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사, 살려줘!"

릭바오가 앞발을 들어 올렸다, 마력 쓰는 범죄자 놈을 짓뭉개버렸다.

그리곤 바둥거리는 사람의 배에 자신의 대가리를 박아 넣었다.

치악력이 얼마나 강한지 한 번 릭바오의 턱이 움직일 때마다 갈비뼈들이 부서지고 피가 물감처럼 튀었다.

"으! 으악! 으아아악!"

'오... 그래도 사람 고기를 먹진 않는구나.'

신기하게도 릭바오는 사람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때.

"이 새끼... 진짜 화나게 하네?"

갑자기 볼로레르가 날 도끼눈으로 노려봤다.

아직 가오가 남아 있는 것일까?

그가 바닥에 침을 카악- 퉤! 하고 뱉으며 말했다.

"좆같은 새끼. 너도 사령술 좀 쓴다, 이거지? 어? 넌 뒤졌어, 이 새끼야."

말과 동시에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마력. 

볼로레르는 그에 멈추지 않고, 양손을 모아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수인을 맺어...? 보통 저런 식으로 하나? 닌자냐? 너?'

그리고 그 수인이 다 완성되자-

볼로레르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나와라. 나의 늑대들아."

-크르릉!

-커엉!

-끼이이익...

쾅! 소리와 함께 사무실 아래쪽 바닥 판자들이 뜯겨나가며, 숨어 있던 언데드 마수들이 튀어나왔다.

'이건...?'

내가 상대했던 늑대 마수들만큼 거대한 시체 세 구. 

그것들은 이미 썩어버린 눈으로 피눈물을 흘렸고, 아직 썩지 않은 이빨 사이로 검은색 침을 흘리며 다가왔다. 

검은 마력으로 강화된 몸을 보니 육체 능력이 생전이랑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크흐흐. 새끼야. 어때? 너한테 곰이 있다면... 내게는 이 늑대들이 있다!"

"..."

"내가 7년에 걸쳐 가다듬은 퍼페티어의 위력을 똑똑히 봐라!"

동시에 뛰어드는 세 마리의 늑대.

릭바오가 괜찮냐는 듯 나를 바라봤지만, 난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 널 지켜줄게.'

구결을 외우자-

-촤르르륵.

내 안쪽의 검은 마력이 재배열되면서 각종 병장기의 형태를 취했다.

검. 장검. 기다란 방패, 창, 화살 등.

여섯 무기가 주변에 떠올라 귀신 들린 것처럼 주변을 선회하니...

"무, 무슨?"

-크으으!

달려들던 늑대 마수 중 하나는 정확하게 목젖을 꿰뚫는 검에 막혀 쓰러졌고.

한 마리는 아래로 내리찍는 방패에 짓눌려 다가오지 못했으며, 마지막 한 마리는 머리에 사령 화살을 맞고 즉사했다.

순식간에 끝난 싸움.

사무실에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릭바오도 싸움을 멈췄고, 릭바오와 싸우던 이들도 이쪽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

나는 좀 허무해져서 말했다.

"이게 끝이냐?"

"어. 어어..."

볼로레르는 자기 인형들이 순식간에 무력화되자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 동공이 엄청나게 커지고, 진땀을 흘리는 걸 보니 좀 있으면 오줌도 지릴 기세였다.

"아니, 애초에 이거 세 마리로 저 곰 하나를 상대할 수 있다 생각한 거냐?"

"어..."

난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리고 7년이면 중급 사령술사 아냐?"

"새! 새끼야! 중급이 장난이야! 흡수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는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도망갈 길을 찾았다.

하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니... 당황스럽네? 저게 저렇게 힘든 거라고? 비장의 기술로 간직할 정도로?'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너는 왜 저런 약한 것들을 다루는 거지? 대포 달린 트롤 같은 거 못 만드냐?"

"크, 크흐흐. 병신같은 놈. 지랄을 해라."

"..."

"너 트롤이 얼마나 큰 줄은 아냐? 애초에 트롤 손에 대포를 달 수 있었다면 개나 소나 사령 술사를 하겠지!"

"..."

"그리고 대포를 어떻게 발사할 건데? 도화선을 어떻게 처리할 건데. 대포알은 어디서 보급하고? 어?"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하는 볼로레르.

꽤 답변에 전문성이 있으니, 난 뒤통수가 멍해지는 걸 느꼈다.

'와... 내가 운이 진짜 안 좋았구나.'

레이돈 커스.

6m짜리 트롤 거인 세 마리를 다루던 중급 사령술사.

그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친 않았는데...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다.

이쯤 되면 결론은 하나.

'아니, 나 진짜 운이 나빴던 거야?'

원래 만났어야 할 적들은 다 이 정도 수준이었어야 했다.

그 사실을 생각하니 손발이 부르르 떨렸다.

'아니... 진짜 억까였다고? 그 모든 게?'

갑자기 깡패 중 한 놈이 밀리터리 픽을 들고 덤벼들었다.

"죽어어어!"

길이 50cm에 육박하는 전투용 곡괭이, 밀리터리 픽. 주로 방패를 든 상대의 머리를 찍거나 갑옷을 파괴하는 데 쓰이는 둔기였다.

"뭐하냐...?"

허나 내 옆에는 여섯 개의 병장기들이 떠 있는 상태.

-캉!

방패가 빠르게 날아와 그의 엉성한 공격을 막고, 한쪽에 있던 검이 볼 것도 없다는 듯 그의 목으로 정확히 파고들었다.

"커헉..."

그냥 상대가 안 되는 상황. 

볼로레르가 그 틈을 노려 이를 악물고 기습했지만,

-탕!

내 손에도 방패가 있었다.

뒷골목에서 구르던 놈이라서 그런가? 별로 검술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다.

'긴장감이 떨어지는군...'

정확히 말하자면 나보단 실력이 좋았지만, 놈은 방패가 없고 난 방패가 있었다.

-깡!

일단 한 번 방패로 검을 튕겨내고.

"크흐윽!"

"어휴."

최대한의 신체 강화를 건 다음 메이스를 휘둘렀다.

'부여하는 심상은 두려움.'

의외로 '분노'는 효율이 나오지 않더라.

물론 나도 화가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정말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능멸하고, 박살내고 싶은 원초적인 분노가 내게는 없었다.

심지어 내가 흡수한 다른 혼백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무시당하기 싫어 화를 냈을 뿐이라, 아직은 두려움이란 심상을 쓰는 게 더 나았다.

온몸을 휘감는 전능감과 함께, 무언가에 쫓기듯 힘을 실어 메이스를 휘두르자-

-빠아악!

"끼햐아아악!"

그의 무릎이 말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사선으로 빗겨 내리쳤는데, 무릎부터 정강이까지가 완전히 으스러지면서 그 형태조차 남기지 않은 꼴을 보니 끔찍했다.

'아... 제길.'

나는 극심한 후회에 시달렸다.

'혼백의 강타를 연습해야 했는데. 전투 상황이라 못 썼다.'

"어, 어억! 다리! 내 다리가!"

볼로레르의 다리가 수난이대 꼴 나자, 모든 전투원들이 의욕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무기를 탕! 내려놓으면서 내게 말했다.

"하, 항복하겠소!"

"날 죽이려고 했으면서. 응? 늬들은 내가 항복하면 받아줄 거였냐?"

"그, 그건!"

나는 폭력을 중단하고 해결사의 나무 의자를 질질 끌어다 앉았다.

"릭바오. 나가려는 새끼들 있으면 물어 죽여라."

-컹컹.

그리고, 놈들을 무릎 꿇린 채 질문 시간을 시작했다.

"볼로레르. 넌 왜 내 전단지에 낙서를 하라고 시켰지?"

"...크흑, 새끼야! 당연히 경쟁 업체니까 그러지!"

그것도 물론 좋은 답안이었다.

점수를 매기자면 10점 만점에 7점 정도.

하지만 나는, 70점 맞은 아들을 바라보는 학부모들처럼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 새끼야. 내가 어제 주변에 있는 게시판들을 다 돌았어."

"..."

"네 영역이 아닌 데에도 낙서가 되어 있었다고. 새끼야. 자꾸 거짓말할래?"

그의 손목에 새겨진 B 문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로버트의 표정과 볼로레르의 표정이 동시에 심각해졌다.

"새끼야. 네 엄마도 이름이 B로 시작해? 혹시 Bitch 아니냐?"

"크흑! 이 개새끼야!"

"알아. 이건 바라칼의 약자지. 너도 바라칼 패밀리인지 뭔지 하는 놈이잖아."

"주, 죽여라."

볼로레르가 갑자기 개소리를 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천장을 바라보다 말했다.

"바라칼. 그놈은 세냐?"

"크흐흐. 그분은 이미 중급 사령술사를 넘어서신 분이다."

"...뭐?"

"때가 오면... 그 분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한 축이 되실 터!"

볼로레르의 눈은 확신에 차 번들거렸지만, 내가 볼 땐 그저 불쌍해 보였다. 

마치 동네 양아치 형 한 명을 세상에서 제일 싸움 잘하는 남자로 착각해, 평생 존경할 거라 씨부리는 모지리 인생을 보는 기분이었다.

"야. 로커스트에 대마녀가 몇 명인지 알아?"

"..."

"총 열두 명이야. 아무리, 어? 악마들의 시대가 온다고 한들 그걸로 되겠냐."

그러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아, 악마라고! 그 사실을 어떻게!"

"그냥 심리전이었어."

사실 악마 얘기는 그냥 꺼내 본 거다. 

레이돈 커스도 똑같은 말을 했으니까.

그런데 생각 외로 월척이 걸린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세상이 위험에 처했구나 싱숭생숭하기도 했고.

'...흠.'

나는 이번 싸움에서 소외되어 있던 존재인, 바닥에 무릎 꿇은 열 살짜리 소년을 바라보았다. 깡마른 몸 상태가 딱 봐도 좋지 않아 보였다.

"넌 여기 왜 끌려왔냐."

"어... 저한테 밥 한 끼를 사주고... 빚을 갚으라고 시켰어요. 소매치기를 안 하면 다리 힘줄을 자르겠다고..."

"..."

"오늘 할당량을 못 채워서, 그게... 빚이 계속 이자 때문에 늘어난다고..."

그의 눈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고, 어깨엔 담배빵 자국으로 보이는 화상 자국들이 수십 개 있었다.

'다들 그냥 이거 관망했겠지?'

난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경비대에 넘기려 했는데, 거기서 끝날 수준이 아니었다.

"안 되겠다. 너넨 좀 맞자."

"네, 네? 아니... 잘못했습니다! 제발! 저희를 경비대에 데려다 주세요!"

"난 재판받을 권리가 있어!"

자연스럽게 일어난 다음, 한 대도 맞지 않은 놈들의 복부를 하나하나 후려치기 시작했다.

-빠악!

"커헉!"

혼백 타격술은 마법이 아니었다. 

이는 타격 시에 검은 마력을 흘려보내는 종류의 묘리. 굳이 말하자면 무술에 가까운 것이었다.

"자, 잠깐만!"

-빠직!

"으아아악!"

"살려줘!"

일반적인 신체 강화는 검은 마력으로 몸을 강화하는 것에 그치나.

물리력이 전달되는 정확한 타이밍에 검은 마력을 쑤셔박으면, 이는 혼백 타격술이 된다.

처음이라 잘 되진 않았지만 계속 하다보니 감이 잡혔다.

"커헉!"

나한테 얻어맞은 놈은 입에서 거무튀튀한 덩어리를 뱉었다.

혼백 타격술은 타인의 혼백을 직접적으로 상해하는 것.

이 기술에 맞은 이들은 혼백이 쪼개지며 그 조각들을 바닥에 흘리는 것이었다.

'호오... 이런 기술인가?'

몇 번 더 기술을 연습해봤다.

어떤 놈은 가슴에서 물컹한 점액질을 토했고, 어떤 놈은 머리 위쪽으로 분수처럼 혼백을 뿜어대었다.

제일 더러운 놈은 쓰러진 다음 엉덩이로 자신의 혼백을 뭉텅뭉텅 배출하는 놈이었는데...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니... 혼백 배설이라고...? 어질어질하네...'

어쨌든.

그렇게 바라칼 패거리를 심문하다 보니 충격적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됐고. 너네들 재산은 어디다 숨겼냐?"

"그, 그건... 비밀 문이 있습니다."

"비밀 문...?"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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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집마련 한번 해볼래?

혼백 타격술.

내 펀치에 맞은 놈들은 이상 반응을 보였다.

몇 놈은 이상할 정도로 저항력이 높았지만, 견디지 못한 놈들은 혼백을 다 토한 채 침을 질질 흘리며 천장만 바라보는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저능아가 되는 것이 죽음보다 두려운 걸까.

이 꼬라지를 본 이들이 하나둘 가오를 잃기 시작했다. 그들은 꺼이꺼이 울며 목숨을 구걸했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줄 건데?"

"아니, 그거 하지 마시라고요!"

아직 혼백 배설 펀ㅊ...

'아, 젠장. 뇌가 오염됐어.'

나는 강력하게 머리를 흔들며 더러운 생각을 지웠다. 

아직 [<<혼백 타격술>>]을 맞고도 정신을 유지하는 놈들에게 심문을 시작했다.

"너네들을 증거랑 같이 포장해 경비병한테 넘기면 어떻게 될까? 참고로 뒤집어씌울 생각은 마라. 너네한테 '진실 검증' 마법을 쓸 만한 돈은 있으니."

"제, 제발."

"남은 여생을 탄광에서 보내겠지."

제국 탄광은 아오지 탄광과 나찌 유대인 수용소를 반반 치킨처럼 합친 곳으로... 

흉악 범죄자들을 가둬놓는 곳이었다.

본래 아틀라스는 사형으로 범죄자들을 다스렸지만, 몇몇 이들은 지지리도 말을 안 들었다.

'어차피 잃을 거 없는데 뭐 어때?'란 식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많아지니...

황실이 새로 마련한 회초리가 바로 탄광행, 태형 따위였다.

"일단 바라칼 패거리에 대해 싹 다 불어라."

그렇게 말하자 녀석들이 정보를 토해내었다.

"아인베르트 외곽에 창관 세 개가 있는데... 그것들은 전부 바라칼 패밀리에서 운영하는 곳입니다!"

"술집도 마찬가지고요."

"밀수 사업도 하고 있습니다."

의리는 조폭 영화에서 나오는 개념일 뿐.

이들은 꽤 순순하게 답했다.

허나, 정보의 질은 좋지 않았다.

'바라칼 이 새끼. 점조직 여러 개를 이어놓은 형식으로 운영하는 건가?'

딱 봐도 그랬다.

이들이 말하는 건 평소 지령을 받는 장소나, 바라칼 패거리가 관리하는 사업장 중 일부.

그들이 말한 업장들을 하나하나 조져봐야 바라칼 패거리 전체가 타격을 입을 것 같진 않았다.

"이, 이제 풀어주시는 겁니까? 더는 모릅니다! 저도 말단이란 말입니다!"

"그래도 나쁜 짓 했는데 돈은 내야지. 재산 어디다 숨겼냐?"

"그, 그건... 비밀 문이 있습니다."

"비밀 문...?"

"뭐해? 문을 열어!"

볼로레르가 명령하자, 부하 중 한 명이 찬장 옆의 비밀스런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끼기긱! 소리와 함께 벽 쪽의 금고가 열리면서 안쪽 창고가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난 좀 당황스러웠다.

"...?"

내가 봤을 때 이들은 잡범이었다.

아무리 봐도 수준이 낮은 놈들인지라, 은신처 아래쪽에 비밀 창고 같은 시설을 만들 거란 생각은 못했다.

'아니, 왜 이렇게 본격적이야?'

열린 문은 음습한 지하실로 이어지는 구조. 

혹시라도 문을 닫아버리면 안 되니, 난 이들을 먼저 밀어 넣고 뒤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서 본 건...

'아아...'

인류애가 사라지는 광경이었다.

"저, 저기. 이건 그러니까요."

"닥쳐."

그곳은 감옥.

마치 모란 시장의 개 케이스를 연상케 하는 우리에 어린아이들이 갇혀 있었다.

그들은 나이별로 나눠져 들어 있었는데, 피부에 발진이 일어났고, 여러 번 긁어서 까진 상처가 있었으며, 눈빛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중독 증상이군."

"그, 그렇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의 감옥 주변에 뿌려진 하얀 가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하얀 섬광...'

롤랜드 경이 해준 얘기가 기억났다.

제국 서부에선 비단날개조개라는 생물이 잡히는데, 이놈들의 껍질을 으깨면 향정신성 효능을 가진 마약을 만들 수 있다.

'하얀 섬광'은 몸을 망치는 속도가 매우 빠르고, 중독성이 심하며, 일시적으로 지능을 낮게 만드는 마약인지라.

초인들이라면 의지로 중독에 저항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이 이를 극복하려면 압도적인 정신력으로 찍어 누르거나, 신전에 가야만 했다.

'...그냥 다 죽일까?'

이런 짓은 하는 인간들은 소수겠지.

그러나 인간 혐오가 생길 정도로 이 지하실이 싫었다. 분위기를 읽은 놈들이 갑자기 내게 용서를 빌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처자식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네 처랑 자식 데려와. 얘들처럼 약 먹여서 노예로 팔아버리게."

"그, 그건!"

게다가 쇠창살 속 애들은 귀도 잘리고, 머리에 노예 각인까지 새겨져 있었으니...

감정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애들에게 대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냥 빈민가에 태어났단 이유로, 어릴 때부터 폭력과 강압에 노출되다 마약으로 정신을 망치는 삶이라니.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볼로레르가 내 바짓자락을 붙잡고 사정했다.

"여깄는 마약 다 드리겠습니다!"

"..."

"이걸 팔면 금화 수십 장은 거저 얻을 수 있습니다! 제가 보장... 커헉!"

그에게 혼백 타격술을 꽂아 넣었다.

입에서 커다란 혼백 뭉텅이가 튀어나왔고, 놈의 손발은 부르르 떨렸다.

하는 수 없이 난 원래 계획을 수정했다.

"얘들아. 미안하다."

"예?"

갑작스러운 사과.

그 사과에 그들은 바짝 쫄았다.

"경비한테 이르지 않겠단 약속은 지킬 수 없겠다. 미안. 쏴리. 니들은 인간이 덜됐다. 고생 좀 해라."

"야이 개새-"

난 이를 악물고 덤벼드는 이들의 팔다리를 하나하나 메이스로 분쇄해 앉은뱅이로 만들어 주었다.

'상관 없어.'

어차피 제국 탄광에 가면, 사제들이 치료 마법을 써서 온전한 몸으로 만들어 준다고 들었다.

돌을 캐기 위해서 말이다.

*

한 시간 후, 내가 있던 사무실에 경비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다들 얼이 빠진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는데, 로자리오 여관의 아저씨는 아예 정신을 잃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

그는 분노했다.

이를 꽉 악물고, 핏줄이 돋을 정도로 주먹을 쥔 채 제자리에서 떨었다.

"이런 일이 흔합니까?"

"아무리 아인베르트가 똥굴이라 해도 이런 건 흔치 않다네. 유진."

"..."

그는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지하실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쉽지 않군."

"..."

"이해해 주게. 나도 아이 넷 기르는 아버지라... 이런 건 보기가 힘들군."

확실히. 

아기를 기르면서 오십까지 살아온 남자가 보기엔 역겨운 광경일 것이었다. 저래뵈도 아이들을 꽤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았으니까.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에 있는 술병을 꺼내려 했다.

본능적인 동작.

'어휴. 진짜.'

난 그를 말릴까 하다, 그냥 처량한 게 보기 싫어 제지했다.

-탁.

"엉?"

그는 왜 시비냐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할 말이 없어 좀 뜸을 들이다 대충 핑계를 댔다.

"혼자 술 드시면 속 버립니다."

"..."

"로자리오 여관으로 돌아가면 제가 한 잔 살게요. 아저씨. 이런 거 보고 혼자 술 드시진 마시지요."

딱히 맘에 드는 아저씨는 아니었다.

경비 조장이라는 사람이 맨날 술이나 먹고, 주사위 도박이나 하고, 여관 주변에 앉아 농땡이나 쳤으니 그랬다.

그러나 그렇게 밉지도 않았기에, 정신이 힘들 때 혼자 술을 마시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그냥 변덕 좀 부린 것이었다.

허나 그는 조금 감동했는지, 깊은 한숨을 쉬며 내게 사과했다.

"미안하군. 유진. 못난 모습을 보여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국 형법상 이들의 자산은 자네 것이네."

제국법은 일부 죄질이 나쁜 범죄자들을 특수취급했다.

도적, 산적, 해적, 마약범, 반역자 등.

이들의 경우 재산권 자체를 보장받지 못했으므로, 증거만 있다면 누구라도 재산을 '노획'할 수 있었다.

'금화 여섯 장. 은화 두 장.'

볼로레르의 주머니를 열어보니 황금빛 동전들이 반짝거렸다.

그걸 보니 기분은 좋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며 벌었을지 생각하니 속이 메스꺼웠다.

"아저씨. 먼저 가도 될까요?"

"그래."

그렇게 돈을 챙겨 나가려 하는데 경비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참 한심하게 살았군."

"갑자기 왜 그래요."

그는 쇠창살에 갇힌 소녀를 노려보다 말을 이어갔다.

"이게 내 딸이었으면, 소냐였으면 난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

"난 이딴 걸 용납할 수 없어 경비대에 들어갔네. 무력은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황제 폐하의 검이 되고 싶었어."

경비대 아저씨한테도 꿈은 있었다.

"그런데 난 술이나 퍼마시고 시간이나 버렸지. 정말 스스로가 역겹군. 어쩌면 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걸 수도 있어."

"그건 지나치군요. 여긴 관할도 아니잖습니까."

솔직히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다음 말을 들으니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여기 관할인 경비대 새끼들은 분명 한 통속이겠지."

섬뜩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난 그냥 아는 경비대원이라 생각 없이 데려온 건데...'

그게 오히려 정말 잘한 짓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었단 생각이 들었다.

"난 술을 끊겠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자네는 날 비웃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달라진다고 하면 자넨 믿어주겠나?"

"응원해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힘내십시오."

우린 그렇게 인사하곤 헤어졌다.

*

하얀 눈송이가 몇 개씩 떨어지는 저녁.

난 힘없이 로자리오 여관으로 걸어갔다.

'...좀 그렇네.'

중세에 떨어진 후 잔인한 꼴들은 많이 봐왔다. 사람 골통도 깨봤고, 죄 없이 죽는 이들도 많이 봤다.

하지만 오늘 본 건 좀 악질적이었다.

그냥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워지는 그런 종류의 것이랄까.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들을 고문하는 게 더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난 터덜터덜 로자리오 여관에 들어가 아줌마가 끓여준 스튜를 먹었다. 

'오늘은 누구랑도 대화하기 싫군.'

그저 빨리 자고 싶은 마음뿐. 억지로 스튜를 꾸역꾸역 쑤셔 넣는데, 갑자기 옆에서 아는 사람이 다가왔다.

여관의 장기 투숙객 중 한 명이었다.

"유진!"

"안녕하세요."

"오늘 무슨 일 있나? 뭐... 잘못 먹었어?"

"그러게. 유진! 오늘 스튜 정성스럽게 끓였는데, 혹시 맛이 없어? 내가 고기 두 개 더 넣었는데!"

"아녜요. 그런 거."

실제로 보니까 고기 두 개를 더 넣은 게 맞았다. 

'하여간 저 아줌마는.'

난 그리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다.

지금은 정말 혼자 있고 싶었는데...

왜인지 오늘따라 주변 사람들이 날 내버려 두질 않았다.

그래서 말했다.

"그냥, 오늘 끔찍한 걸 봐서 그래요."

"...뭔데?"

난 사람들이 관심을 꺼주길 바랬지만...

효과는 정 반대였다.

갑자기 여관이 조용하게 변했고, 나를 아는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운 채 이야기를 들으려 다가왔다.

"유진. 한번 말이라도 해보게. 응?"

"맞아. 자네가 그러면 우리도 답답하지."

'그렇지. 그런 시대지.'

중세는 엔터테인먼트가 부족한 시대라.

커뮤니티 사이트도 없고, 신문도 꽤 비쌌으니 현직 기사 후보생이 들려주는 싱싱한 무용담은 언제나 가치가 있었다. 

기사들은 말솜씨만 좀 있으면 공짜 술을 잔뜩 얻어먹을 수 있었다.

"유진. 말 안 해도 되는데... 그래도 우리랑 같이 있었잖아요? 알려주면 안 될까요?"

소냐랑 여관 주인의 아들들까지 몰려오니 이야기를 안 하기도 쉽지 않았다.

나는 얘기를 빨리 끝낼 생각으로 썰을 풀었다.

"그럼 어디부터 시작할까요? 제가 게시판에 전단지를 붙여 놨는데..."

여관에 있던 장기 숙박객들이 또랑또랑하게 내 얘기를 들었다. 

처음엔 말하는 게 힘들었으나...

그렇게 얘기를 계속하다 보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말이 잘 나오네.'

분명 기분이 나빴는데.

대화를 나누기가 싫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말문이 슬슬 트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 말투는 점점 사람들이 듣기 쉽게 변해갔다.

"...그 새끼들은 마약을 먹이고 있었어요. 애들한테. 그리고 소매치기로 일당을 못 채우면 담뱃불로 피부를 지졌는데, 그걸 보니 화가 치밀더라고요."

오늘 본 것들은 비참하고 괴로운 일들이었다.

사람 사는 곳엔 이런 일이 있다는 걸 어거지로 알려주는 광경인지라, 말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적 피로가 있었다.

허나 여관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주자...

"이런 개-새끼들!"

"엘리시아 백작께서 한 번 잡도리를 해놨거늘... 이렇게 또 지랄을 떨어!"

"다 잡아 죽여야 한다. 증말..."

이상하게도 마음이 몹시 편해지는 게 아닌가.

가슴 속에 있는 짐을 하나하나 내려놓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니면, 내 안에 쌓인 분노를 그들이 한 입씩 가져가 도와준단 생각도 들었다.

"유진. 아주 훌륭한 일을 했어. 그 새끼들은 죽어도 싸지."

"잔인하게 죽였나? 아니지. 탄광으로 보내야지."

"유진! 설마 죽이진 않았겠지?"

이들과 친한 사이는 분명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보링턴 영지 사람들보다 인심도 야박했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다 같이 얘기하고, 흥분하고, 슬퍼하는 지금만큼은 어떤 유대감이 있었다.

"잘했어. 유진."

그들은 내게 따스하게 칭찬도 하고.

"하아... 나도 마약 파는 새끼들한테 사촌을 잃었지."

자신의 푸념을 두서없이 내뱉기도 하고,

"응? 오기만 해봐. 나도 같이 싸워 줄게. 내가 얼마나 싸움 잘하는지 알지? 유진."

가끔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들.

현대를 떠나온 이후 나는 많은 괴리감을 느꼈었지만...

이렇게 바라보니 분노할 것엔 분노하고, 칭찬할 것엔 칭찬하는 면이 몹시 비슷하단 점이 안심이 됐다.

'어...?'

그렇게 얘기를 하다보니 몇 시간.

떠들다 보니, 마음속의 무거운 것들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아...'

아주 가끔이지만.

아무 사람이나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때가 있었다.

혼자 술 마시게 두지 말라던 그 충고가 왜 생겼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다들 이렇게 친해질 수도 있구나.'

새삼 아무것도 아닌 깨달음이 오늘따라 기꺼웠다.

*

그리고 다음 날.

나는 혹여라도 이 새끼들이 정신을 차렸나... 하고 게시판에 가서 내 전단지를 확인해 봤다.

'그럼 그렇지.'

하지만 사람은 바뀌지 않는 법.

현실은 언제나 어메이징하고, 나쁜 놈들은 좀처럼 교정되는 법이 없었으니...

내 전단지 아래쪽에는 새로운 글자들이 써져 있을 뿐이었다.

-널 죽이겠다.

짙은 빡침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그래... 해 보자 이거지?"

자꾸 이렇게 나오면 나도 봐줄 수가 없었다.

"유진. 왜. 그 문제가 아직 해결이 안 됐나?"

"...예."

경비 아저씨가 날 향해 다가왔다.

술을 마시지 않고, 주사위 도박도 하지 않는 그의 눈은 새벽 공기처럼 청명해 보였다.

확실히 술을 끊겠단 약속을 지키려는 걸까.

하지만 난 그냥 답답했다.

'씨바... 어떻게 못 하나?'

그때.

"유진."

"예?"

"내가 도와줄까?"

경비 아저씨가 처음으로 믿음직한 말을 했다.

"얘들 조지려면 공권력 필요할 텐데... 너 내집마련 한번 해볼래?"

"집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유진. 아이고. 이 사람아."

그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쟤들도 강도질을 하는데, 본인들이 당하지 말란 법은 없지 않나."

옳은 말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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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만 조지면 돼. 그럼 줄줄이 소세지처럼 나온다고. [20241004수정]

"내 집 마련이요?"

물론 난 항상 돈이 고팠다.

천장에서 벌레가 떨어지는 여관방을 졸업하고 싶었고, 잡탕 스튜보다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싶었다.

"쟤들도 강도질하는데, 본인들이 당하지 말란 법은 없지 않나?"

"아니, 그러니까..."

현대에서 살다 온 난 의구심을 느꼈다.

그는 내 의문을 이해했는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간단해. 유진. 걔들 사업장들을 자네가 안다고 했잖나. 거길 전부 다 조지는 거야. 자네는 집 사고, 나는 우리 딸 등록금 벌고. 완전 이득이지."

좀 의심된다고 그렇게 막 검문하고 조져도 되나?

영장 발부나 그런 것도 없이?

"문제가 안 생깁니까?"

"유진! 하아... 자네 생각보다 난 높은 사람이라네. 경비 대장한테 보고서를 써서 올릴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 유일하다고. 이게 무슨 뜻인지 아나?"

"와..."

맙소사. 

난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하는 말은...

이 구역의 모든 사법권을 경비 조장이 전부 쥐고 있단 소리였다.

'그냥 이 구역의 독재 집행관이잖아...?'

극단적으로 말해, 경비 조장이 '넌 죄가 없다' 판단하면 감옥에서 풀려나고, 그 반대도 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원래 실무 관리자의 권력이 세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어떻게 이딴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는 거지?'

"물론 내가 부정을 '심하게' 저지르거나, 사적인 목적으로 시민들을 괴롭히면 목이 잘린다네. '진실 검증' 마법도 있지 않나?"

'와.'

이 미개하고도 완벽한 세상.

이곳엔 현대와 다르게 마법이 있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진실 검증' 마법으로 알 수 있단 건.

극단적으로 피해자건 가해자건 '진술'이 필요 없단 소리였다.

그냥 '진실 검증'으로 문답해 사건 정황을 파악하고, 판결만 내리면 된다.

물론 가난한 사람은 재판도 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틀라스 제국은 그렇게 체제를 유지했다.

그런 보험이 있으니 '엇나가면 뒤진다. 유도리 있게 잘하자. 응?'이라고 하면서 경비 조장한테 다 맡길 수가 있는 것이었다.

어질어질했다.

"스스로에게 떳떳하기만 하다면, 수상한 사람 좀 패고 증거 수색을 해도 된다네. 그리고..."

그가 목을 축이더니 말했다.

"경비 대장님이 허가해 주셨어. 손목에 B문신 있는 놈들은 잡아 족쳐도 윗선에서 커버 된다고."

"...그 사람이 죄가 없으면요?"

"그런 건 유도리 있게 하는 거야. 유진. 너무 무식하게 굴면 나도 짤린다네. 정말 실수한다면 내 선에서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지." 

이게 옳은지 그른지는 몰랐다.

그렇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건 된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지금 갈까요?"

"그래. 자네가 그렇게 답할 줄 알았지."

우린 사악한 형제들처럼 슬럼가를 향해 걸었다.

*

-쾅!

"뭐야, 씨발! 어떤 못 배워먹은 씹새끼야!"

"애미가 없냐!"

푸른 초승달 주점. 

아저씨는 진짜 못 배워먹은 사람처럼, 온몸의 힘을 담아 문짝을 차면서 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보니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하얀 섬광의 냄새도 조금 났다.

마치 판타지 게임 속 도적 길드처럼...

몇몇 남자들은 테이블에 앉아 포커를 치고, 몇몇 놈들은 손목에 B 문신을 새긴 채 바에 기대 나이프를 돌리는 중이었다.

조지는 한두 번이 아닌 듯 침착하게 말했다.

"안녕!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고 있나?"

"..."

그 정신병자 같은, 소름 돋는 말을 듣자 모두가 침묵했다.

"난 아인베르트 11구 경비 조장 조지다. 최근에 마약 유통 정황이 확인됐으니, 다들 검문에 협력해라."

"이 씨발... 여긴 16구잖아! 11구 조장이 왜 여깄어?"

대머리 남자가 하던 카드를 던지고, 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건 월권이야! 우리는 16구 경비 조장한테도 승인 받고 영업하는 건데, 네가 뭔데..."

"11구 경비 조장이 16구를 못 턴다는 법은 없어. 그런 법은 제국법에 존재하지 않는다."

"뭐... 뭐라고?"

경비 조장 아저씨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경비 조장들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을 뿐이지. 남의 실적 가로채지 말자는."

"..."

"원래는 조장들끼리 서로의 구역을 순찰하며, 상호 견제하여 청렴을 유지하는 게 황제 폐하의 뜻이었다. 다만 우리가 서로 얼굴 붉히기 싫어서 불충했을 뿐."

"...그, 그럼 왜 갑자기 열심히 하는데?"

"새 사람이 되기로 했거든."

난 이제야 이해했다.

'그래서 그때 죄책감을 느꼈구나.'

볼로레르 사무소는, 경비조장 아저씨가 담당하는 구역은 아니었다.

허나 그가 태업을 안 했다면 그 사건을 막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으므로... 책임감 강한 경비 조장은 죄의식을 느꼈다.

"이, 씹새끼! 그래서... 그냥 둘이 걸어와서 갑자기 발정난 개처럼 쑤셔댄다고? 우리 업소를?"

"난 아이리스에 맹세코 정조를 지키는 남자다. 내가 쑤시는 건 내 아내밖에 없어."

"누가 궁금하대? 얘들아! 죽여!"

그러자 나이프를 돌리던 놈이 내게 단검을 던졌다. 꽤 빨랐지만...

-쐐액!

'...보이네. 나 확실히 강해진 걸까?'

-깡!

꽤 전투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단검이 느리진 않았지만 손쉽게 쳐냈다.

그 다음 메이스를 든 채 달려가,

"어, 어...?"

단검을 투척 이후의 계획도, 인생 계획도 없던 놈의 머리통을 으깨버렸다.

이런 놈 죽이는 데엔 마력조차 필요가 없었다.

-빠각!

그의 머리통이 갈비뼈 안쪽으로 부서졌다.

"끄, 끄악! 뭐해! 미친 새끼잖아! 저 새끼 죽여!"

그렇게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옆쪽의 경비 조장 아저씨를 보니...

원래 기사 후보생이었던 남자답게 잘 싸웠다.

-스륵.

경비 조장은 유려하게 방패로 공격을 흘리고,

-푹!

"컥..."

반대쪽 칼날을 불량배의 목젖에 쑤셔 박았다. 불량배가 허우적 거렸지만 이미 조장은 물러난 지 오래.

-쉭! 쉬익!

그리고 시간차 공격을 하려던 놈들의 손목을 자연스레 베었다. 

손을 내밀면 손을 스윽 베고,

발을 내밀면 발을 스윽 베는 동작.

싸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저걸 보면 '어? 범죄자들이 왜 이렇게 약하지? 저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같은 생각이 들 만한 움직임이었다.

'와... 대단하네.'

그러나 난 영지전을 뛰어 본 몸.

흉기를 든 인간 여럿을 상대로 저렇게 단순하게 움직이기 쉽지 않단 걸 알았다.

'...확실히 검술이 다르긴 하구나. 저러면 검도 오래 쓸 수 있겠지.'

심지어 경비 조장은 '검을 아끼며' 싸우고 있었다. 최대한 베기를 자제하고 여린 부분에 칼을 꽂는 꼴을 보니 장비 손상을 줄이는 게 보였다.

'배울 게 많군.'

네 명이 순식간에 죽자 그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사, 상대는 둘밖에 없잖아! 한꺼번에 덮쳐! 머저리들아!"

여럿이서 몰려다니면 금방 티가 나는 법.

그래서 우리 인원수는 둘밖에 없었다. 

합공이 좀 부담스러운지 경비 조장 아저씨가 외쳤다.

"유진! 조심하게!"

허나 이는 그가 날 몰라서 하는 말.

다수의 협공은 일반인 상대론 상당히 위력적이었지만...

적어도 내겐 문제가 아니었다.

'영혼은...'

내가 구결을 외우기도 전의 찰나에, 열 개가 넘는 사령 화살들이 뾰족한 모양을 갖추고 허공에 섰다.

그들에게 '집착'할 대상을 부여하자마자-

'영혼은... 뭐더라? 뭐였지?'

-쐐애애액!

수십의 화살들이 실내를 바늘꽂이로 만들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바박!

석궁 이상의 파괴력을 가진, 쇠뇌 급의 화살들.

두꺼운 목재 테이블 정도는 그냥 관통해 버리는 살인 화살들이 각자의 방향을 향해 연쇄적으로 날아갔다.

"무, 무슨!"

"끄아악! 씨발! 테이블 뒤로 숨어!"

그들 중 방패를 가진 자들을 일부. 

몇몇은 피하기도 했지만 상관 없었다.

마력의 십분의 일도 안 썼기 때문이었다.

"한 번 더 간다."

"히, 히이이이익!"

사령 화살 몇 개는 눈으로 보고도 피할 수 있었지만, 3초에 한 번씩 화살을 쏟아부으니 테이블 뒤에 숨는 게 고작이었다.

-파바바바박!

"제기라아아알!"

"수, 숨어!"

"미친! 테이블이 뚫렸어!"

-파바바바박!

사령 화살의 위력은, 하나하나가 곰 가죽을 뚫는 수준.

내 화살은 술집 가구들을 바늘꽂이처럼 만들고, 운 없는 이들의 뼈를 뚫고 장기를 찢었다.

"흐, 흐윽..."

마력의 절반 정도 쓴 상황.

결국 일 분도 안 되어 불량배들 열 명 정도가 정리되었다.

아저씨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유진...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한데? 벌써 중급 사령술사가 된 건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짬이 얼만데. 나도 사령 기사들이랑 일해 본 적이 있네. 개인적으로 술사들보다 기사들이 더 좋더군. 지킬 필요가 없어서."

그렇게 잡담을 하는데, 아래쪽에 늘어져 있던 불량배가 말했다.

"끄윽! 이러고도, 크흑. 무사할 것 같냐! 우리가, 우리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야 병신처럼 손목에 B를 새긴 대가지?"

"..."

"대체 왜 그러고 다니는 건가? 소속감이 그리 중요해? 인생을 탄광에 처박을 정도로? 그리고... 내가 개코거든. 개코."

"...증거도 없잖아!"

"하. 증거."

경비 조장이 크게 웃더니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쾅!

찬장을 발로 찼다.

그러자 찬장이 통째로 아래로 떨어지고...

벽에 네모 모양으로 뚫어놓은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거기에 빽빽하게 쌓여있는 건 하얀색 가루가 담긴 유리병들.

'하얀 섬광'이었다.

"허, 허억..."

"내가 몇 년차인데 이런 것도 모르겠냐. 딱 보면 티가 나. 니들은 다 구속이야. 씹새들아. 유진! 이거 반으로 나눠주게."

"예."

그는 카운터를 마구 발로 차 부수면서, 금화가 담긴 가죽 주머니를 내게 던졌다.

"얼만가? 와... 금화가 아홉 장이나 있네요?"

"대박이군. 보통 금화 세 장만 나와도 많이 나오는 건데."

우린 그렇게 여러 곳을 돌았다.

'와, 진짜 돈을 이렇게 쉽게 벌어도 되는 건가?'

다음으로 간 곳은 바라칼 패밀리가 운영한다는 창관. 

처음엔 헐벗은 여자들도 우리를 깔깔거리며 무시했으나, 어깨 몇 명을 피떡으로 만들고 마약을 찾아내자 표정들이 심각해졌다.

"아, 씨. 창관이 돈을 못 벌었어? 왜 이렇게 돈이 없어."

여기서 나온 돈은 금화 세 장.

상당히 적은 돈이었지만... 

우리가 투여한 시간과 노동력에 비하면 몹시도 많은 돈이었다.

'아무리 반으로 나눈다 해도 그렇지...'

난 조금 허망해졌다.

아무리 강한 괴물을 죽이더라도, 위대한 업적을 치른다고 해도 결국 돈을 가장 빨리 버는 방법은...

이런 악인들에게서 강탈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그렇게 16구의 가게들을 싸돌아 다니며, 닥치는 대로 패고, 죽이고, 빼앗았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내 의무를 다한 것 뿐이오."

우린 '빚'을 핑계로 강제 성매매를 강요당하던 여자들을 구했다.

"아, 아저씨... 너무 배고파요."

"조금만 참아라. 얘야. 유진! 이거 공금에서 좀 쓰겠네."

"예, 예."

또한, 마약에 절여져 강제로 소매치기를 하다 할당량을 못 채웠단 죄로 학대당하던 아이들도 구했다.

뭔가 기분이 어정쩡해졌다.

'이걸 뭐라 해야 하지? 합법 산적? 아니면 합법 다크 히어로?'

우린 진짜 용역 깡패처럼 바라칼의 업장만 보면 문을 발로 까고 들어가 개 잡듯 제압했는데, 이러다 보니 구해낸 사람만 서른 명이 넘었고, 약탈한 돈만 금화 서른 장에 달했다.

"오늘 하루 번 돈... 금화 열다섯 장! 키야. 이게 사는 맛이지. 안 그런가? 유진."

"...예. 진짜 신기하네요. 솔직히 이렇게 벌기 쉬울 줄 몰랐어요."

그랬다. 

목숨을 걸지도 않았고, 상처를 입지도 않았다.

난 일방적으로 범죄자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돈을 강탈했다.

이렇게 돈 벌어도 되나? 란 생각이 들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난... 6m짜리 트롤이랑 싸웠단 말이지? 운이 없어서.'

물론 항상 이렇게 돈을 벌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한다.

"솔직히 날마다 오는 기회는 아니라네. 바라칼, 놈이 병신이라 우리가 돈을 벌 수 있는 것이지. 물론 아니어도 다 털렸겠지만."

"..."

"자부심을 갖게. 유진. 자네랑 나는 오늘 아주 좋은 작전을 했어. 저길 봐!"

귀가 잘린 어린이들은 아인베르트의 행정관들에게 인계를 받았다.

억지로 성매매에 동원됐단 여자들은 아이리스 사제들이 한 곳에 몰아넣었으며, 노예 취급을 받던 제국민들은 행정관들이 조사했다.

범죄자들은 그 옆에서 무릎 꿇은 채 탄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오늘 저들을 구하지 않았다면, 저들의 하루는 어땠겠나?"

"괴로웠겠죠."

그들은 슬프고 아파 보였다.

하지만, 적어도 고통에서 해방된 이들의 얼굴엔 희망의 빛이 가득했으니.

그게 내 마음을 밝게 채워주었다.

"아, 아저씨!"

"...얘야. 고생이 많았겠구나."

머리가 빡빡 밀리고, 그 위에 담배빵이 찍힌 열두 살짜리 어린애가 우리를 향해 뛰어왔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무로 만든 목패를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뭐니?"

"감사패에요!"

조그만 나무패 위엔 어떤 마법적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음각된 글자들이 있을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저는 엄마한테 돌아갈 수 있어요! 물병자리의 달.'

감사패는 그렇게 작성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보니 왠지, 녹아내릴 것처럼 좋았다.

"기분이 어때?"

"..."

나는 그 까끌까끌한 표면을 만지며 말없이 웃었다. 조금 씁쓸했지만 적어도 내가 한 일은 나쁘지 않았다.

*

그렇게 이틀.

우리는 이 잡듯이 바라칼 패거리들을 고문하고, 사업장을 뒤졌다.

"거, 거봐! 마약 없다니까!"

"주머니 까봐."

"거, 거긴..."

그러나 범죄자들도 슬슬 적응하는 것일까.

그들은 마약이나 돈주머니 등을 좀 더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우리의 수익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유진. 자네가 지금까지 얼마 벌었지?"

"금화 마흔 장 정도입니다."

"끌끌. 좋다, 좋아."

경비 조장 아저씨는 이걸로 대장 승급까지 노려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하아."

해가 떠오르는 아침.

오늘도 여전히 내 게시판엔 시뻘건 협박 문구가 쓰여 있었다. 돈은 많이 벌리는데, 이런 쪽에선 하나도 발전이 없는 느낌이라 슬펐다.

"근데 발전이 별로 없긴 하네요. 물론 힘써주신 건 감사하지만..."

내가 한숨을 쉬는데, 아저씨가 말했다.

"무슨 소린가?"

"예?"

"돈 벌려고 한 거 아냐?"

조장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날 바라보자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돈도 돈인데. 얘들이 내 게시판에 낙서 못 하게 해야죠. 바라칼 패거리를 쓸어버리는 게 원래 목적 아니었어요?"

"아닌데?"

"...?"

그러자 경비 조장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혼자 조직원들을 다 잡을 순 없지! 다들 점조직 형태인데. 개인이 집단을 어떻게 뿌리 뽑겠나."

"그럼..."

"지금까지 한 일은 그냥 끌어내기에 불과하네. 명분 관리를 위한 밑작업이라고. 실제로는 한 사람만 잡으면 술술 풀려."

"그게 누구입니까?"

확실히 경비 조장을 오래 해서 그런 걸까? 말투에서 깊은 짬내가 느껴졌다.

"과연 16구역 경비 조장이 협력하지 않았다면, 거기에 바라칼이 들어올 수 있었을까?"

천둥이 치는 것 같은 깨달음이 떠올랐다. 

경비 조장은, 살기 어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걔만 조지면 돼. 그럼 줄줄이 소세지처럼 나온다고."

소세지는 아틀라스의 일반적인 요리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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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널 죽이고 가져가면 되겠군.

아인베르트 16구.

이곳은 잘못 지은 판자집들이 가득한 우범지대로, 못생긴 건물들 수백 채가 혼란스레 얽힌 미로같은 곳이었다.

도시 외곽이라 통행량도 많지 않았고, 매춘 외에 별다른 산업도 없으니.

들어오는 인간들이라곤 변태적인 행위를 좋아하는 부호들이나, 밑바닥 인생을 사는 용병들, 혹은 아예 가난한 사람들밖에 없더라.

그리하여 비위생적이고,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인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나니 일반적인 경비 조장들은 여기서 근무하길 꺼렸다.

허나 16구역 경비 조장인 헤도닉스는 달랐다.

'크흐흐. 이만큼 꿀 빨기 좋은 곳이 없지.'

헤도닉스가 달 마다 써야 하는 보고서는 수십 장.

대부분 '누구를 이러저러해서 처벌했습니다.' 같은 내용이었는데, 경비 대장이 수십 장의 보고서 사이에서 허위 정보를 감별하고, 누락된 내용을 잡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직접 찾아와 사건을 검수하면 뽀록나겠지만...

지도를 만들기도 힘든 곳이 16구다.

누가 귀찮게 그런 짓을 하겠는가?

'정말 쉽다니까.'

사회 전체가 헤도닉스를 방조하는 꼴이었다.

일단 경비 대장들.

그들은 대부분 '오늘도 이슈 없이 무난히 넘어가는' 상황을 선호했다.

그래서 자기 모가지 날아갈 사안이 아니라면 대충 읽고 도장만 찍어 총대장에게 패스했다.

아이리스의 고위 사제들.

그들에게 '진실 검증'은 많은 마력이 드는 기술조차 아니었지만, 이를 남발하면 본인들의 일거리가 많아졌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자기들에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면 마법 써주길 꺼렸다.

16구의 사람들.

이들은 법보다도 자기 옆의 깡패들을 두려워했다.

10년 전 엘리시아가 도시를 쓸어버렸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은 변하지 않은 상태.

이들은 교육을 못 받아 8할 이상이 문맹이었고, 숙청 이후에도 출세하는 유일한 방법이 범죄라 믿었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본인들의 생명이 위급하지 않다면 옆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든 말든 관심 없었다.

헤도닉스는 이 허점을 잘 활용했다.

적당히 불법행위를 방조하면서 권력을 기르고.

맘에 드는 여자를 협박해 잠자리를 가지고, 돈 좀 버는 놈들이 나오면 재산을 뜯어내고, 어떤 가게든 간에 자신을 함부로 대하면 영업을 못하게 했다.

그야말로 슬럼가의 왕.

이 권력은 바라칼 패밀리가 들어온 후 더더욱 공고해졌다.

깡패들은 범죄를 묵인받는 대신 조직적으로 상납금을 내며, 창관의 여자들을 주기적으로 공급했다.

그의 인생에 쾌락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요즘 사는 게 질리는데, 신형 마약 없나?

-무두장이의 딸도 먹어봤고, 여관 주인의 딸도 먹어봤군... 크흐흐. 남자 노예는 없나? 어리고 예쁜 놈으로다가...

-너 죄인 되고 싶어! 어!

그러나 며칠 전 이 평화는 깨지고 말았다.

11구의 경비 조장 조지와, 이름 모를 사령 기사 하나가 16구를 이 잡듯 뒤졌기 때문이었다.

"조지 이 씹새끼..."

원래 경비 조장들 사이엔 서로 구역에 간섭하지 않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 

조지 본인도 그 합의를 지키면서 살았었는데...

갑자기 11구역 조장이 그걸 깨버린 것이다.

"상도덕도 없는 새끼 아냐..."

그는 깨어질 것 같은 머리를 붙잡고, 비척비척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 새낄 어떻게 조져야 하지?"

조지.

어릴 땐 검도 못 다뤘으면서, 술이나 퍼마셨으면서, 이제야 정의로운 척 위선을 떨며 밥그릇을 위협하는 존재.

생각만으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해줄까? 응?"

"일단 네 아내는 못생겼으니 죽여버리고... 크흐흐. 그래. 조지의 딸. 이름이 소냐였냐?"

"걔는 창관에 팔면 딱..."

그때였다.

-쾅!

갑자기 사무실 문이 날아가더니, 두 남자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한 명은 조지.

옛 지인이자 11구의 경비 조장을 맡은 남자였고, 한 명은 처음 보는 검은색 머리의 동양인 기사였다.

헤도닉스는 너무 당황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혼잣말이 많이 음습해졌군. 헤도닉스. 잘 지냈나?"

'드, 들었나?'

지금 헤도닉스는 팬티 한 장만 걸친 차림. 

반면 조지와 동양인은 훤칠한 갑옷을 걸치고, 쇠로 된 병장기를 찬 상황이었다.

그는 당황해서 소리 질렀다.

"뭐, 뭐냐. 네가 왜 여깄어? 여긴 내 구역이다! 네가 여기 들어오는 건 월권행위야! 심하면 반역도 인정될 수 있다고!"

"그렇긴 해."

"그럼 빨리 나가, 씨빨아!"

그러자 조지는 한숨을 쉬며 걸어오더니-

-빠악!

헤도닉스의 종아리에 로우킥을 갈겼다. 

조지는 쇠로 된 그리브를 덧댄 상태.

초인이 마력을 실어 맨몸을 발로 차니, 헤도닉스의 정강이에 가해지는 고통이 경악할 수준이었다.

"크흑! 이, 이 개새끼가!"

헤도닉스는 벼락처럼 일어나 벽에 걸린 도끼를 붙잡고 눈앞의 조지를 죽이러 들었다. 

하지만,

-스릉...

어느새 그의 목 앞까지 다가온 검은색 검 때문에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그것은 사령술.

검은 머리의 동양인은 공중에 뜬 검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것 같았다.

'무, 무슨...?'

공중에 뜬 검은 그의 목을 얕고 길게 스윽 그었다.

더 이상 다가오면 죽인다는 것처럼.

헤도닉스의 다리에서 힘이 점점 빠졌다.

"정말 안타깝군. 자네는 훌륭한 기사가 될 줄 알았어. 그런데 여기 들어오는 것조차 어렵지가 않더군. 사람이 이렇게 떨어지는 게 말이 되나?"

"뭐, 뭐라고?"

"헤도닉스. 자네는 탄광에 갈 확률이 높다네."

헤도닉스가 순식간에 사령 검술을 쳐내고 유진에게 달려들었지만...

-푹!

"끄아아아악!"

사령 기사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의 정강이에 구멍을 내버렸다.

"크, 크흐으으윽."

전성기의 그라면 피할 수도 있었겠다.

허나 마약과 향락으로 절여진 몇 년의 시간은 한 남자의 잠재력을 전부 빼앗았으니. 

그는 이제 유진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이, 사악한 사령술사 새끼가!"

"아니, 내가 왜 너한테 사악하단 소리를 들어야 하지?"

"원래 악인들은 그렇네. 유진."

-깡!

그가 최대한 깊숙하게 검을 찔러 넣었지만, 유진은 민첩하게 자세를 낮추고 방패로 검격을 흘렸다.

그 다음, 푸른 마력으로 강화된 복부에 유진의 메이스질이 적중하니.

-퍽!

"끄흑..."

그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게다가 조지는...

"아, 안돼! 제발 거기만은!"

그 틈을 타서 절대로 뒤지면 안 될 것 같은 서랍들을 엉망으로 파헤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경비대의 개코답게, 손쉽게 증거물을 찾아냈다.

"오, 이게 뭐야. 'B'라는 사람이 보낸 편지로군? 바라칼이랑 이름이 비슷한 사람이겠어."

"아, 안돼."

"내가 지금부터 읽어주지. 크흠!"

그는 눈앞이 하얘지는 걸 느꼈다.

"친애하는 16구역의 경비 조장 헤도닉스 씨. 최근 저희가 많은 편의를 제공해 드렸으나,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회의를 할 예정이니, 필히 참여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약속 장소는... 오늘 저녁이구만? 잘됐네."

"이, 이 개새끼.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뭐가."

"이렇게 일을 막 하고도, 나중에 말이 안 나올 줄 아냐고! 우리 경비 대장은..."

"아, 헤도닉스. 혹시 착각할까 말하는 데 이건 합법적인 조사 과정이야."

"뭐?"

조지가 칼을 뽑더니-

"카하아아아악!"

사령 화살이 꽂히지 않은 그의 남은 한쪽 다리를 잘라버렸다. 절단면은 깔끔했다.

"이미 경비 대장님께 보고드렸다. 자, 명령서를 보여주지."

헤도닉스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드니, 경비 대장의 인장이 찍힌 짧은 명령서가 보였다.

"경비대 내부에 부패 정황이 있음. 필요할 경우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조사할 것...?"

"그러니 나한테 뭐라 하지 마. 다 대장님이 시킨 거야. 알겠어? 난 책임 없어요~."

"안 돼."

헤도닉스.

그는 영원히 이 슬럼가가 그에게 쾌락을 제공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딱 하나 예상치 못했던 건...

경비대 내부에서 서로의 비리를 고발하고 공을 쌓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단 사실이었다.

사실 이렇게 서로 견제하는 게 올바른 경비대의 모습이었으니, 그의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너도 기사 후보생이었으니 사지 좀 잘린 걸로 죽진 않겠지. 얘들아!"

"예!"

한때 헤도닉스의 명령을 따르던 경비들이 눈치를 씰룩씰룩 보며 사무실로 몰려왔다.

"니들은 다 헤도닉스가 시켜서 한 거지?"

"...예. 그렇습니다."

"어, 어떻게 니들이 이럴 수 있어?"

한때 충성스럽던 부하들은 어쩔 수 없단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 잘 지키고 있어. 만약 헤도닉스가 탈주할 경우 너넨 죄를 물 거고, 헤도닉스가 증인으로 있다면 '모든 책임을 질' 거다.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헤도닉스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

'진짜 레전드같은 일 처리다.'

16구의 부패 현황이 발견되면, 경비대 총대장이 물러날 확률이 높다.

그러면 아저씨의 상관은 총대장으로 올라갈 수도 있었고, 조지 아저씨는 대장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헤도닉스는 형을 피할 수 없겠지.'

그가 'B', 즉 바라칼에게 편지를 받고 그걸 서랍에 보관한 시점부터 게임은 끝났다.

이는 고위 사제들이 '진실 검증' 마법을 써 볼 정도로 심각한 일이라. 

헤도닉스가 자살하지 않는다면 은닉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1차 조사가 끝난 후 나는 바로 친구들을 불렀다.

"뭐? 하루에 금화 한 장이라고? 게다가 선불?"

"그래."

에밀리, 브랜드, 카덴.

이제 나를 사장님처럼 바라보는 동료들이었다.

와중에 셀라나는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근접전에 소양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미리 선금을 지급했다.

"자. 받아라."

"유, 유진. 나 반할 것 같아. 어떡해?"

"조용히 해."

에밀리가 금화 한 장을 받아들고 주접을 떨어서, 난 간단히 주의를 줬다.

"오늘 할 일은 암왕인가 뭔가 하는 범죄자 새끼를 잡아 족치는 일이야. 16구역 들어가서."

"아..."

그러자 기사 후보생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들의 무력은 범죄자보다 딸리지 않았다.

허나 도시의 갱들이 무서운 이유는 그 전투력 때문이 아닌 법.

그들은 뒤끝이 아주 길고, 주변 사람들을 비열한 형태로 집요하게 괴롭혔기에 까다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인맥이 있었다.

"경비 조장 인맥이 있다. 그 사람이 위쪽에 정식으로 보고하면... 일이 커질 거야."

"아, 이해했어."

이미 헤도닉스가 잡힌 시점에서 이는 '일개 범죄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인베르트령 전체의 치안 조직.

그 이상으로 제국 전체의 부패와도 관련된 일이 되었으니, 이제 조용하게 넘어가긴 글러버린 것이다.

할 일이 엄청나게 많은 아인베르트 백작도 이쯤 되면 어떤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가자고."

"좋다. 유진. 앞장서."

그렇게 기사 후보생들과 나는 스쿼드를 결성한 다음...

바라칼을 대면하기 위해 술집으로 향했다.

*

"끌끌끌. 늦는구만."

16구역 구석의 술집.

꼬불꼬불한 골목 안쪽에 있는 이곳의 내부 공간은 꽤 넓었다.

일반 손님들이 이용하는 구획과 VIP들이 이용하는 방이 철저히 분리된 곳이었는데, 길고 넓은 테이블의 상석엔 바라칼이 앉아있는 형태였다.

그가 손잡이를 툭, 툭, 쳤다.

"...가서 데려옵니까?"

"아니."

양옆으로 앉아있는 건 수 십의 범죄자들. 

이들은 전부 바라칼 패밀리의 간부들이었고, 이들 중에선 10년 전에 살아남은 이들도 있었다.

"기다려라. 놈도 떡고물이 필요하면 여기로 오겠지."

그런데...

-쾅!

갑자기 VIP룸의 문짝이 날아갔고,

문 앞에 서 있던 조직원은 우당탕탕 굴렀다.

"거 참. 이 도시 놈들은 문 여는 법을 모르는 건가?"

바라칼이 투덜거리자, 부서진 문 사이로 두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검은 머리칼을 가진 동양인 사령술사.

그리고 11구역 경비 조장 조지.

그 뒤로는 기사 후보생으로 보이는 사람 몇과 경비대원들이 서 있었다.

딱 봐도 좋은 의도로 온 것 같진 않았다.

"너넨 뭘 하는 것들이냐? 헤도닉스는?"

그러자 조지가 웃으며 답했다.

"안타깝게도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다리가 잘리고 말았소."

"하하하. 요즘 계단엔 칼날이 달렸나 보군. 나도 조심해야겠어. 그리고 옆에 있는 인간은 사령술사인가?"

"사령 기사다."

검은 머리의 동양인 기사, 유진이 말했다. 

바라칼은 눈에 이채를 띄우고 그를 바라봤다.

"그렇군. 젊은 나이인데 벌써 중급 사령술사의 경지에 올랐구나. 너라면 이 구역의 왕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굳이 경비 조장을 따라다니는 이유가 뭐지?"

"어떤 새끼들이 전단지에 자꾸 낙서를 하더라. 그렇게 파보니 여기가 나오더라고."

"아... 내 말단 부하들이 잘못을 저질렀나 보군. 내 미안하네."

바라칼은 그렇게 말하고서 껄껄껄 웃었다.

조직을 운영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건 가오. 그는 반지로 툭툭 손잡이를 건드리면서 유진에게 말했다.

"그래, 사령 기사. 여기서 제안을 하나 하지."

"...응?"

"내가 가진 보물은 결코 돈 따위가 아니다. 이는 대륙의 모든 사령술사, 아니. 초인들이 탐낼 만한 귀물."

"..."

"그것을 줄 테니 물러나라."

"보물이 뭔데?"

"모르면 알 필요 없다."

"그럼 널 죽이고 가져가면 되겠군."

그는 조지에게도 말했다.

"그리고 11구역 경비 조장 조지라고 하셨나? 피차 피 볼 것 없이 여기서 물러납시다. 당신한테도 금전으로 보상하겠소."

그러자 경비 조장과 유진이 서로를 바라보곤 웃었다. 이는 바라칼의 자존심을 긁는 일이었다.

"이게 우스운가? 아니면 뭐가 이득인지 판단도 못 할 만큼 멍청한 건가?"

"멍청이라. 나도 똑똑하진 않은데, 네 입에서 나올 소린 아냐."

"크흐. 젊은 놈이 조직 경영도 안 해보고 나대는 꼴이 우습구나."

"경영은 못 하지. 하지만 내가 두목이라면, 조직원들 손목에 'B'라고 새기진 않을 거야. 어디 가서 깡패라고 광고라도 할 게 아니면 말이지."

"크흐흐... 어린 사령 기사야. 그것은 하등한 것들에게 소속감을 주기 위한 방편이다. 그리고..."

바라칼이 웃으면서 오른손을 들자, 비교적 깨끗한 손목이 드러났다. 

그곳엔 B 문신이 없었다.

"악마에게 바치는 제물의 표식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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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혼백을 걸레 조각으로 만들어놨다. [2024-10-05 마이너 수정]

악마.

술꾼들의 입담에 의하면, 그들은 200년 전 봉인된 존재들이라 했다.

물론 난 그들이 뭘 먹고 사는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성경 속 존재들처럼 뿔이나 날개가 달렸는지 몰랐다.

하지만 추론할 수 있었던 건 하나.

한때 악마들은 대륙 전체를 몰락시킬 만큼 강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귀환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돈을 벌어놔도, 악마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인프라를 박살 내면 누릴 게 없어질 게 아닌가?

생각만으로도 억울해졌다.

'200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것들이 갑자기 나온다고? 하필 내가 여기 떨어진 시점에?'

레이돈 커스도, 눈앞의 바라칼도 자꾸 '악마'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데.

말하는 투를 들어보면 실제 대화라도 나눠 본 뉘앙스였다.

설마 진짜 그들이 풀려나기라도 한 걸까.

조지가 눈썹을 꿈틀하며 말했다.

"악마? 너 지금 그 단어의 무게를 알고 말하는 거냐?"

"그래. 우둔한 경비 조장 놈아. 너희 아틀라스 제국이 쉬쉬하는 동안에도 그분들은 이미 세를 떨치고 계신다."

"..."

"어쨌든 협상이 결렬되었으니 너흴 살려둘 이유 따윈 없겠지."

그의 몸속에서 검은색의 파도가 흘러나와, 피부에 질퍽하게 엉겨 붙었다.

그것들은 서로 젤리처럼 엉키고, 맥동하면서 바라칼의 피부를 빈틈없이 채웠는데...

멀리서 보니 그 꼴이 고치 같았다.

'뭘 하려는 거지...?'

매우 불길한 광경.

나는 본능적으로 검은 마력을 끌어올린 다음-

"쏴! 화살을 쏘라고!"

석궁수들과 함께 사령 화살을 발사했다. 

-쐐애액!

다섯 개의 검은 화살들과, 정규군 볼트들이 공기를 찢었지만.

-탱!

결과는 허망했다.

화살은 고치 속의 무언가에 맞아 튕겨나갔고, 그 껍질을 뜯고 우화하는 바라칼의 몸은 기괴하게 변형되어 있었다.

'...인간 딱정벌레?'

갑각이 있는 곤충이 사람만큼 커지면 저렇게 될까?

팔, 다리가 접히는 부분은 복합 외골격 관절로 대체되었고, 원래 갈비뼈가 있던 부분은 바깥으로 튀어나와 갑옷 역할을 했다.

양쪽 팔에는 손 대신 거대한 키틴질 방패와 날카로운 낫이 달려 있었는데, 딱 봐도 일반적인 철보다 강해 보였다.

'마수화? 아니... 신체 변형인가...!'

그가 우리를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즈즈즉. 너희는 패배자들이다."

검은색 투구벌레처럼 변형된 머리.

입 부분의 집게 턱이 움직일 때마다 즈즈즉 소리가 났다.

"인생을 쉽게 살아온 쓰레기들이지. 즈즈즉."

"뭐? 네가 뭔데?"

듣던 에밀리가 인상을 팍 쓰고 일갈했지만 바라칼은 신경조차 안 썼다.

"즈즈즉. 여기사. 너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출세할 수 없다는 걸 알겠지. 네 외모라면 백작과 결혼하는 건 불가능. 가슴은 꽤 크다만... 즈즉. 호구처럼 살아봐야 평민이 출세할 수 있는 건 남작이 한계다. 그러나..."

그가 양쪽 팔을 펼치고 지껄였다.

"그분들이 다시 지상에 도래하시면, 나는, 즈즉, 대공의 자리까지 노릴 수 있겠지."

"그래서 애들 귀를 자르고 노예로 판 거냐?"

"즈즈즉. 사령 기사 주제에 쓸모없는 도덕심이 있구나. 이 세상은 정글. 약육강식. 원래 강자는 약자를 병탄하는 게 당연한... 즈즈즉. 것이다."

-쐐애액!

그가 한쪽 팔을 휘젓자 사령 화살이 날아왔다. 쐐기 모양으로 변형된, 화살보다 가시에 가까운 물건.

허나 나는 검은 마력의 흐름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몸인지라.

예비 동작이 있는 사령 화살을 방패로 후려버리고, 가죽 주머니를 던져 릭바오를 해방했다.

"전부 죽여라. 릭바오."

-끄워어어!

순식간에 술집 내부를 휘젓는 키 4m의 곰.

마력을 쏟을 수 있는 만큼 쏟자, 볼로레르 사무실에서 봤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몸집이 불어났다.

키는 술집 천장에 닿을 지경이었고, 몸의 너비는 테이블 수 개를 합쳐 놓은 것보다 컸으니 주변 범죄자들이 다가오지 못했다.

"미, 미친. 저게 뭐야?"

"쥐가... 쥐가 커다래졌어!"

-끄으응!

릭바오는 회의실 탁자에 앉아있던 간부들을 온몸으로 깔아뭉개고, 씹고, 후려치면서 전진했다. 얼마나 그 힘이 강한지 앞으로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박살나고, 집기들이 부서졌다.

'이걸로 잡병들의 시선을 돌렸고...'

이제 우린 바라칼 하나만 상대하면 되었다.

맨 처음 그와 부딪힌 건 에밀리였다.

"감히 네가 날 평가해!"

"즈즈즉!"

-콰앙!

여기사 에밀리.

그녀는 여자의 몸을 지녔지만, 메이스만 잡으면 파괴력이 제곱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는 상대도 마찬가지.

키틴질의 갑주를 두른 바라칼은, 두께가 10cm는 될 법한 방패를 들어 간단히 막고선 힘으로 밀어붙였다.

"크윽!"

에밀리가 고전하는 상황.

나는 속으로 구결을 외웠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너를 지켜줄게. 아, 에밀리. 널 말하는 건 아냐.'

여섯 자루의 장검이 주변에 떠오르자마자, 난 강화된 다리로 땅을 박차며 섬전처럼 뛰쳐나갔다.

바람이 화악-하고 옆얼굴을 스쳤다.

"날 봐라!"

신체 강화 2단계.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이었다. 허나-

-깡!

'제길. 뭐 이래?'

내 메이스는 허무하게도 튕겨져 나오고 말았다. 놈이 든 방패는 몸과 연결된 기관의 일종.

적당한 탄성도 갖고 있어서 타격 무기와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즈즉! 이게 끝이냐!"

"그럴 리가."

그러나 내게도 수가 있었다.

에스트라드의 어머니가 남긴 유품.

공중에 떠다니는 장검들은 바라칼 주변을 날파리처럼 날아다니다가,

-푹!

"끄흐..."

괴물의 중심을 향해 동시에 쏘아졌다.

키틴질 장갑이라면 전부 튕겨낼 수 있겠다.

그러나 에스트라드의 어머니도 검을 좀 쓰던 사람인지라.

검들은 하나하나 살아있는 것처럼 갑옷의 틈새 사이를 꿰뚫고, 그도 모자라 앞뒤로 움직이며 바라칼의 몸을 슬근슬근 톱질했다.

"즈즉!"

하지만 놈이 온몸을 비틀면서 바닥을 굴러다니자, 그의 몸에 박혀 있던 장검들은 부러져 흩어지고 말았다. 그가 이죽거렸다.

"이래서 너희가, 즈즉! 멍청한 거다!"

그리곤 재빠르게 일어나, 나한테 사령화살을 날리며-

"에밀리! 피해!"

메이스를 휘두르려던 에밀리를 역으로 베어버렸다.

"크흑!"

-서걱.

끔찍한 소리.

에밀리는 간신히 피했지만, 그 피해를 완전히 줄이진 못했다. 순간적으로 당황이 찾아왔다.

"에밀리?"

"...윽!"

메이스를 잡고 있던 에밀리의 오른쪽 팔이 하늘로 솟구쳤다. 철제 건틀릿까지 끼고 있던 팔.

허나 놈의 낫은 예리했기에, 그것을 버터처럼 썰어버렸다.

'개-새끼가.'

솟구치는 분노가 내 혈관을 범했다.

심장은 자동차 엔진처럼 쾅쾅거렸고, 눈앞은 새빨개졌다.

나는 몸을 사리지 않고 최고속도로 달려들어 바라칼을 후려쳤다.

-쾅!

"즈즉. 눈물 나는군. 네 연인이냐?"

그러나 돌아오는 건 비웃음뿐.

바라칼이 거북이처럼 방패를 뒤집어쓰자 공격하기가 심히 어려웠다.

'...침착.'

내 안의 분노는 지금 당장 달려들라며, 바라칼을 죽이라며 아우성을 쳤지만...

침착하라고 한마디 하자 완전히 진정되었다. 

'유일한 방법은 혼백 타격술이다.'

그러나 여기엔 문제가 있었다.

'숙련도가 낮아.'

볼로레르의 사무실에서 혼백 타격술을 연습하긴 했다. 

하지만 그때 연습한 건 그저 기초일 뿐. 

제대로 된 신체 강화를 걸고, 무기를 든 채 혼백 타격술을 연마하진 않았다.

'그렇게 치면 배가 뚫려 죽을 게 뻔했으니까.'

일반적인 인간이 그런 공격을 맞으면 말 그대로 터져 죽어버리고 만다.

그렇기에...

무기를 든 채 정확하게 혼백 타격술을 꽂아넣는 건 오늘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실행했지만...

-까아앙!

제대로 된 효과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흘려 넣은 검은 마력 중 일부가 바라칼의 몸 안쪽으로 터져 나갔지만, 대부분은 허공에 버려지고 말았으므로 실패였다.

'...제길.'

"즈즈즉! 이성을 잃었구나!"

바라칼이 웃으며 한쪽 팔을 내리쳤다.

세상을 절반으로 갈라버릴 것 같은 일격.

다행히도 속도가 그리 빠르진 않았다. 내가 옆으로 사악- 하고 피하자, 뒤에서 대기하던 브랜드의 장검이 우아하게 솟구쳤다.

-푹!

장검은 가슴의 장갑 사이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허나,

"귀찮군!"

바라칼은 순수한 힘만으로 방패를 휘둘러 브랜드를 쫓아버린 다음, 갑자기 한쪽 손을 들고 이상한 말을 읊조리는 게 아닌가?

-■■■■■■!

차마 알아들을 수도 없는 기분 나쁜 웅얼거림.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소리를 내뱉자, 즉각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끄, 끄하아악!"

"캬하아아악!"

손목에 B가 새겨진 이들이 갑자기 쓰러졌다.

그들은 팔과 다리 근육을 이리저리 뒤틀더니, 눈을 뒤집고, 게거품을 뿜으면서 발작하기 시작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건... 혼백을 흡수하는 게 아니잖아...?'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액체는 마력이 아닌 피였다.

"우욱..."

"저게 뭐야!"

시체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피는, 투명한 혈관을 타고 흐르는 핏줄처럼 전부 바라칼을 향해 연결되었다.

"크윽!"

경비원 중 한 명이 혈류를 향해 창을 휘둘렀으나 헛수고. 말 그대로 칼로 피 베기였다.

그리고 바라칼은...

"즈즈즉... 보았느냐? 이게 바로 악마가 내려준... 힘이다!"

그 피를 흡수해 순식간에 육체를 수복해 버렸다. 내가 찔러넣은 사령 검술도, 브랜드가 위험을 감수하며 입힌 상처도 전부 아물어 버렸다.

바라칼은 진득하게 웃으며 날 향해 돌진했다.

난 이를 악물고 메이스를 휘둘렀지만,

-캉!

아직 내 무기술이 뛰어나지 않았다.

메이스의 중간 부분이 완전히 베여 위쪽으로 날아간 상황. 나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영혼은 삶을 강요하는 폭군이라.'

"즈즉! 죽어라!"

-푹.

-서걱.

크로스 카운터.

그가 휘두른 칼날은 내 방패와 함께 팔꿈치를 통째로 잘랐고.

내가 쏘아낸 사령 화살은 정확히 벌레의 눈을 뚫고 들어갔다.

"즈즈즈즈즈즉!"

"씹."

몰려오는 격통.

난 놈의 공격을 피하며 뒤로 구른 다음, 범죄자 하나의 시체를 통째로 포식했다. 

허기. 

한때 약자를 괴롭히던 근육은, 미세한 단위로 분해되어 새로운 팔이 되었다.

-쩌저적!

내가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바라칼이 당황스러운 어투로 지껄였다.

"...바로 흡수해서 네 몸의 일부로 삼는다고? 즈즉. 어떻게?"

"비밀."

"즈즈즉! 이 새끼가!"

그러자 놈이 분기탱천했다.

바라칼은 다른 기사 후보생들을 아예 무시한 채, 날 향해 달려왔다.

-쾅! 쾅! 쾅!

벌레 인간의 발이 바닥을 한 번 찰 때마다 술집 전체가 진동했고, 주변에서 알짱거리던 경비원들이 날아갔다.

카덴이 뒤쪽에서 폴암을 내리쳤으나 장갑에 맞고 튕길 뿐.

바라칼은 다른 이들을 배제한 채 날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즈즉! 이 힘을 얻기 위해...!"

"..."

"아들을, 제물로 바쳤단 말이다!"

-깡!

바라칼은 힘 있게 칼날을 휘두르며 압박했지만, 그 순간 내 머리에 어떤 영감이 스쳤다.

'...저렇게 칼이 길고, 신장이 크면 오히려 근거리를 못 하지 않나?'

이 세상 모든 무기는 적정 거리에서 치명적이다.

아무리 명검이라 한들 손잡이 부분에 맞으면 아프지 않고, 아무리 날카로운 창이라 한들 영역 안쪽으로 파고들면 힘을 못 썼다.

난 근거리로 이동한 후, 반 잘린 방패를 들어 그의 손목을 후려쳤다.

-탕!

제대로 된 신체 강화와 연계된 혼백 타격.

그러나 이번에도 효과는 좋지 않았다.

'...내 팔이 너무 빨라. 마력을 넣는 속도에 비해!'

"쥐 같은 새끼가! 즈즉!"

공략법을 들킨 게 무서운 걸까?

놈은 최대한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난 사령검술을 이용해 검은색 메이스를 만들고 주변을 뛰어다니며 타격을 꽂았다.

-깡!

약하게나마 들어가는 혼백 타격술.

맘에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까보단 나았다.

'나아지고 있잖아...?'

평소엔 혼백 타격술을 연습하지 못했다.

이걸 사용하려면 맞아줄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이 기술은 영구적 장애를 동반하기 때문이었다.

허나 지금.

신체강화 2단계와, 혼백 타격술을 동시에 맞아줄 샌드백이 생긴 것이었다.

그래서 내 기술은 사용을 거듭할수록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그래... 홈런은 안 쳐도 된다. 안타라도 꾸준히 치면 되는 거야. 그럼 언젠가 홈런을 치겠지!'

"쥐새끼 같은 놈이...!"

-깡! 

실처럼 아른거리는 감각은 잡으려고 할 때마다 손끝에서 도망치기 바빴다. 

바라칼이 괴성을 지르면서 칼날을 휘젓는 동안, 난 그의 다리 옆쪽에 딱 붙어서 돌며 공격 기회를 노렸다.

'조금만 더.'

-깡!

내 공격은 놈의 키틴질 갑주에 막혔고.

'이번엔 마력을 넣는 타이밍이 너무 빨랐어.'

-깡!

어쩔 땐 방패에 막혔으며.

'조금만 더 집중해서...!'

-콰직!

어쩔 땐 그의 턱주가리에 맞고 튕겨나가기도 했다.

운 좋게 연한 부분을 타격할 때도 있었지만, 나보다 커다란 놈을 상대로 너무 깝친 것일까.

결국 운이 다하고야 말았다.

"즈즉! 무릎 꿇어라!"

"...!"

그가 거리를 벌리며 낫을 쐐액- 하고 하단으로 휘둘렀다.

허리를 통째로 잘라버릴 기세. 

난 이를 악물고 여섯 자루의 검을 전부 회수해, 놈의 타격점을 정확히 맞췄다.

-깡!

그럼에도 놈과 나는 체격 차이가 났다.

체격의 차이는 곧 운동량의 차이.

-콰지직!

나는 뒤쪽의 멀쩡한 테이블을 부수면서, 벽으로 날아가 부딪혔다. 

"커헉."

입에서 선혈이 튀어나왔다.

바라칼이 날 죽이려고 사령 화살을 꺼내던 순간.

"유진!"

조지가 창을 들고 달려와 바라칼을 후려쳤다. 바라칼이 상당히 귀찮아했지만, 옆에서 카덴과 브랜드마저 합세하니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이, 귀찮은 벌레들이! 즈즉!"

나는 빈혈을 느끼며 옆쪽 범죄자의 시체에 다가가, 그의 몸을 포식했다. 

"크흑..."

전능감과 함께 몰려드는 통증.

다친 내장이 다시 회복되면서, 한때 붉게 물들었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걸 본 바라칼은 조바심을 내며 마구 칼날을 휘둘렀지만...

-휘익!

"즈즉?"

벌레 인간의 동작이 어딘가 엉성해졌다.

칼날을 휘두르고 나서, 재빠르게 회수하지 못한 그 찰나의 상황.

놈은 왜 말을 안 듣냐는 듯 당황스레 칼날을 바라봤지만, 경비 조장은 그 기회를 놓칠 인간이 아니었다.

"새끼야!"

머리를 매섭게 노리고 내질러지는 창격에 바라칼은 후퇴했다. 그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뭐, 뭘 한 거냐?"

게다가...

"...죽어, 이 새끼야아아!!!"

한쪽 손이 잘린 에밀리도 남아있었다.

'에밀리! 젠장! 뭐하는 거야!'

그 꼬라지를 보니 속이 타들어 갔다.

2차 대전 일본군인가?

손이 잘리면 기어가서 상대를 물어뜯는단 그거?

하지만 에밀리는 내 걱정과 다르게, 순식간에 다리 쪽을 파고든 다음 방패로 공격했다.

-깡!

"즈즉! 캬하아악! 이 벌레같은 년!"

다리에 방패가 적중하자 바라칼이 멈칫거렸다. 데미지는 크지 않았지만, 적어도 짜증나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교대하듯 바라칼을 향해 다시 뛰었다.

'어렵군. 기술 숙련도가 높아. 완벽하게 쓰기가 힘들어.'

혼백 타격술은-

물리적 충돌이 일어난 바로 그 시점에, 검은 마력을 흘려넣어 상대의 안쪽을 부수는 기술이다.

참 좋은 기술이지만 더럽게도 어려운 이유는...

'완벽히 타이밍이 맞아야 하기 때문이지.'

메이스로 충격을 줬을 때의 타이밍.

그리고 마력이 메이스를 지나 상대에게 도달하는 타이밍.

그 두 개가 정확히 일치해야 하는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고점은 엄청나게 높았다.

만일 '더 강한 신체 강화'가 나온다면, 혼백 타격술도 이에 맞춰 수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까아아아앙!

그리고 이번 싸움에서 처음으로, 난 그걸 성공하였다.

"무... 무슨... 커헉."

바라칼은 방패로 내 메이스를 막아냈지만...

벌써 소리부터 달랐다. 검은 마력이 충돌하며 엄청난 여파를 내뿜었고, 부서진 가구의 잔해들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바라칼의 입에선 검은 혼백 뭉텅이들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백 번 공을 치면... 한 번은 홈런이 나오겠지.'

실패한 혼백 타격술 여러 번.

성공한 정타 한 번.

그것은 그의 혼백을 걸레 조각으로 만들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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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거면 아들 영혼은 괜히 바쳤다. 그치?

신체 변형.

손을 기다란 칼날처럼 변형해 휘두르거나, 아가미를 만들어 물속을 수영하거나, 촉수를 이용해 제2의 팔처럼 활용하는 등.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강력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배우지 않았었다.

'물론 강해 보이긴 해. 하지만 인간의 육체라고 약하란 법은 없지.'

그건, 내가 초인이란 존재에 가진 이미지 때문이었다.

이 척박한 세상에 홀로 떨어진 후 내가 맨 처음 목격한 초인은 롤랜드 경.

그는 신체를 변형하거나 마법을 쓸 줄 몰랐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약했나?

아니었다.

'멋있었지.'

오히려 잡다한 전술이 전혀 필요 없는 인간이 롤랜드 경이었으니, 그의 전투는 언제나 단순하게 시작하고 끝났다.

비상식적인 속도로 돌격한 다음, 푸른 불꽃에 휩싸인 검을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면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단순한 만큼 전술적 대비가 쉬웠지만, 몸놀림이 너무 빠르고, 불타는 검에 닿으면 뭐든 잘려 나가니 오히려 막을 방법이 없더라.

말 그대로 중세의 탱크.

대한민국에서 살다 온 내게 초인의 첫인상은 그것이었다.

그렇기에 딱히 복잡한 모양이 된다고 해서 인간보다 강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인간의 육체는 강해.'

물론 유틸성을 아예 제하는 건 멍청한 일이지만...

바라칼처럼 벌레의 신체를 갖는 게 굳이 합리적인가? 라고 물으면 비효율적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저렇게 변하면 시중에 유통되는 장비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그 대가를 전부 마력으로 소모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커, 커헉!"

벌레 인간이 후퇴하면서 검은색 뭉텅이들을 토해냈다.

-휘익!

그가 다가오지 말라는 듯 칼날을 휘둘렀지만, 이제 그것에 맞아주는 후보생들은 없었다. 후보생들은 구르거나 자세를 낮추거나 하면서 그의 칼날을 피했다.

브랜드가 소리 질렀다.

"가까이 붙어 싸워! 놈의 칼날은 길다! 안쪽으로 파고들면 아무것도 못 해!"

자세를 낮추고 기다리던 카덴이 눈을 예리하게 빛내며 뛰어들었다. 

올림픽 선수처럼 완벽한 자세.

그는 조금의 운동량도 낭비하지 않은 채, 아주 담백하고 정석적으로 솟구치듯 창을 찔러 넣었다.

-푸욱!

"즈즉! 크허어억!"

"죽음을... 맞이해라."

카덴이 큭큭 웃으면서 창을 비틀었다.

그는 괴물과 거리를 유지하며 밀고 당기다, 힘있게 창을 당겨 바라칼의 내장을 줄줄 뽑았다.

'저 중2병... 막타는 진짜 잘 치네.'

싸우는 방식도 뭔가 암살자 같다 해야 하나? 하지만 가끔 자아도취에 빠지는 경향성이 있어 챙겨줘야 했다.

"즈즉!"

바라칼이 낫을 휘두르는 찰나.

난 여섯 자루의 검을 두르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막아라.'

-탱!

여섯 검이 한 꼭지점으로 모이며 벌레가 내리치는 칼날을 막았다.

무게중심이 쏠린 손목 쪽을 정확히 타격하는 여섯 개의 검. 그것들이 한 번에 힘을 쓰자, 아무리 괴물의 팔이라 한들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게 바로 지렛대의 원리였다.

"제길. 빚졌군."

"뒤로 가."

지금 바라칼은 기진맥진한 상태.

방패는 옆으로 열려있었고, 한쪽 손은 카덴을 내리치려다 여섯 개의 검에 막혀 있었다.

몇 초 유지되지 않을 자세였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후우...'

고요하고 차가운 집중을 끌어올리자, 검은 색의 마력이 파도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는 한때 사람의 정신을 구성하던 엑기스.

심상과 함께 육신을 강화하자 혈관이 터질 것 같은 작열감이 들었다.

'폭파하고 싶어. 해방하고 싶다.'

두려움에서 조금 더 나아간 감정.

가슴 깊은 곳에 응어리처럼 쌓인 걸 전부 풀어내며 앞으로 뛰어들고 싶은, 원초적 충동.

그걸 느끼며 팔을 거세게 휘두르자,

-터엉!

사령으로 이뤄진 메이스가 박살나며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쾅!

"미, 미친... 유진?"

"맙소사"

두꺼운 키틴질 갑옷 안쪽에서 터지는 검은 마력의 충격파.

공기의 폭압이 천장의 샹들리에를 흔들고, 에밀리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단단했던 가슴 갑주에 쩌적, 하고 금이 갔다.

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뒷걸음질쳤다.

"커헉..."

'감 잡았어. 빠따도 휘두르다 보면 느는 법이지.'

맨 처음 혼백 타격술을 배웠던 나는 타율 5푼의 폐급 타자와도 같았으나...

지금은 3할 정도 안타를 치는 수준이 되었으니 나름 조절이 가능했다.

'감 잡았다.'

이제 며칠만 연습하면 이 기술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것이니, 기분이 좋았다.

"무, 무슨 짓을!"

당황한 채 비틀거리는 바라칼.

그의 집게턱에서 혼백들이 뭉텅이로 쏟아졌다. 그는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해 휘청이면서 칼을 휘둘렀지만-

'그러면 사령 검술이 널 괴롭히겠지.'

-쐐애액!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간 여섯 자루의 칼들은, 집요하게 시간차 공격을 하며 녀석의 남은 눈 하나를 노렸다.

"즈즉! 즈즈즉! 그만!"

말벌처럼 날아다니는 여섯 자루의 장검이 불규칙한 궤도로 움직이며 놈의 틈을 찾았다. 그러다, 상대에게 제일 곤란한 타이밍만 노리며 비집고 들어가니.

-탱! 탱! 탱! 탱!

네 번의 검격은 실패했지만, 두 번의 검격은 성공했다.

"크하악!"

마치 뱀처럼 휘어진 사령 검술이 그의 눈 안을 그대로 후볐다. 난 그와 동시에 명령했다.

"릭바오! 지금이야! 물어!"

-꾸워어어!

옆에서 잡병들을 정리한 릭바오가 달려와 몸으로 놈의 방패를 들이받았다.

바라칼의 힘은 강하다. 하지만 벌레가 릭바오의 체급을 이길 순 없는 법. 바라칼은 머리에 검 두 자루를 박은 채 그대로 땅에 엎어지며 주변의 집기들을 싹 다 부쉈다.

-콰지지직!

-끄워어어!

오래된 주점이 부서지면서 자욱하게 먼지가 피어오르고, 나뭇조각들이 튀었다.

"말도, 안 돼... 어... 어떻게, 즈즉... 이럴 수가 있지?"

-촤르륵...

그걸로 끝.

바라칼의 머리 위쪽부터 검은 갑각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점액으로 뒤덮인 바라칼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 피눈물을 흘리며 날 바라봤다.

"너, 너 정체가 뭐야?"

"..."

당황스럽고, 공포스런 표정이었다.

그의 눈엔 나에 대한 증오가 서려 있었지만, 따져보면 경악하는 감정이 훨씬 강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조지에게 소리 질렀다.

"이 씨발, 쿨럭. 경비 조장 새끼야... 저 새끼 안잡아가고 뭐해? 사령 기사가, 쿨럭. 혼백을 흡수해도 부작용이 없다고. 씨발...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음... 그런가?"

하지만 나는 경비 조장이랑 친한 편.

그는 내 말을 믿어줄 확률이 높았다.

"전 특이 체질이라서요. 혼백을 흡수해도 효율이 낮은 대신, 부작용도 거의 없습니다."

"음... 그렇다는군."

그러자 바라칼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야, 이 씨발, 비전공자 새끼... 멍청한 새끼야! 어떻게, 쿨럭."

갑자기 바라칼이 조지를 향해 일갈했다.

"로커스트가 세계 정복을 못 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사령술 부작용 때문이다. 쿨럭... 죽은 자들을 보자마자 부작용도 없이 흡수할 수 있으면... 커헉. 누가 니들처럼 푸른 마력 다루냐."

"..."

"나는... 이 힘을 얻기 위해! 내 아들의 영혼까지 악마에게 바쳤단 말이다! 그래도, 커헉. 피만 빨지 혼백 흡수는 못 해!"

"...그래서?"

"근데 저놈은 그냥 그걸 한다고!!!"

목구멍에서 피가 날 정도로 소리 지르는 바라칼.

하지만 인신매매와 마약 판매를 일삼은 그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이곳에 많지 않았다.

이미 내 특성을 아는 기사 후보생들은 불쾌한 표정으로 바라칼을 바라볼 뿐이었고, 나머지 경비들도 내게 호의적인 눈길을 보냈으니.

그가 아무리 정치질을 해봐야 파워에서 밀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라칼이 내 특성에 대해 계속 까발리는 건 원치 않았기에, 재빠르게 주제를 돌렸다.

"새끼. 이럴 거면 아들 영혼은 괜히 바쳤다. 그치?"

"...야, 이."

원래 악마와 결탁한 자들은 생포해서 교회로 데려가는 게 원칙이라고 한다.

그러나 놈이 교회 안쪽에 들어가 '유진이란 놈은 혼백을 흡수해도 아무런 부작용이 없답니다!' 같은 말이나 지껄이면 피곤해질 터.

난 슬슬 릭바오에게 눈짓을 보냈다.

'물어. 뭔 말인지 알지?'

그러자 릭바오가 고개를 숙인 채 바라칼의 머리를 씹었다.

-와작!

그걸로 끝.

한때 암왕이라 불리던 남자의 머리가 깨진 수박처럼 바닥에 흩어졌다.

"..."

한때 이름 있던 범죄자의 최후 치곤 허망해서 그런 걸까?

후보생들도. 경비들도. 범죄자들도 그 광경을 보고서 침묵했다.

-뚜벅.

하지만 나는 사령 기사.

그 와중에도 할 일이 있었다.

난 고요한 술집의 분위기를 헤치며 그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곤 물컹거리는 혼백 덩어리에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하아...'

약간의 전능감.

그의 영혼을 이루던 에너지는, 물결로 변해 내 혈관으로 빨려 들어왔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그가 살아왔던 기억 같은 게 아니었다.

'...뭐지?'

보이는 건, 흰색의 사막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바라칼뿐.

그는 눈앞의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빌고 있었다.

[무능한 쓰레기 놈. 나는 네 놈에게 힘을 주었다. 새로운 마법을 가르쳤고, 그에 대한 깨달음도 주고, 심지어 검은 마력까지 주었지. 게다가, 네가 가진 회복 마법은 기존 사령술로는 구현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제발, 제발...! 위대한 분이시여! 저는 열심히 했습니다!

놈의 앞에 고여 있는 건 칠흑같은 어둠.

마치 모자이크처럼 처리되어 지직거리는 기괴한 현상이었다.

난...

그것이 악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네 체급은 상급 사령술사에 비견할 정도였다. 그런데 얼마나 싸움을 못하면 이렇게도 처참하게 질 수 있는 것이냐.]

바라칼이 울면서 절규했다.

-억울합니다! 흡수가, 흡수가 중간부터 안 됐단 말입니다!

-그 사령 기사 놈에게 몇 대 맞으니, 구결도 기억이 안 나고 마력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단 말입니다!

[감히 나를 의심하는 것이냐?]

'저게 혼백 타격술의 효과겠지.'

정신과 기억의 파괴.

그것이 일시적 펀치 드렁크같은 상태를 유발한 게 분명하였다.

하지만 악마는 바라칼의 말엔 관심조차 없는 듯 굴었다.

[앞으로 너의 영혼 전체는 나의 것. 네 영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할 것이며, 혼백은 영원히 나의 영역에서 고통받을지어다.]

-안돼애애애애!

바라칼의 혼백이 가루로 변해 흩어지며, 다른 차원의 존재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막대한 양의 마력이 검은 마력으로 변환되어 흘러 나가고 있었다.

'이 새끼가.'

물론, 난 그걸 바라볼 생각이 없었다.

'어딜 도망가.'

내 영이 의지로서 강제하니, 바라칼이 빻아져 만든 혼백 가루들이 선회해서 내 쪽으로 흘러 들어왔다.

[...너는, 뭐지?]

그러자-

악마가 날 바라봤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정체를 파악하려 해봤지만, 모자이크처럼 지직거리는 균열은 쉽사리 속을 보여주지 않았다.

[감히 내게 대항하다니. 무엄한 사령술사야.]

그것은 화난 듯 자신의 인력을 강화시켜 바라칼의 혼백을 끌어들였지만, 애초에 당기는 힘이 비교가 되지 않았다.

[...?]

느껴지는 악마의 당황.

내 영혼은 탐욕스럽게 바라칼의 혼백을 빨아들였고, 그건 이윽고 검은 마력이 되어 내 핏줄에 스며들었다.

[...나보다 격이 높다고? 인간. 넌 정체가 뭐냐?]

물론 난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신상 정보를 유출할 만큼 멍청하지 않았기에, 바로 눈을 떴다.

"하아..."

바라칼의 마력을 갈무리한 직후.

잠깐의 명상 끝에 눈을 뜨자 원래의 선술집이 눈에 들어왔다. 뭐... 원래라고 하기엔 많이 망가져 폐허 같은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뭐, 뭐야. 유진. 벌써 끝났어?"

"나 많이 잤냐?"

"아니... 물방울 백 개도 안 떨어질 시간이었어."

한쪽 팔이 없는 에밀리는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

"넌 사령술 진짜 잘 쓰는구나?"

"그렇지...?"

그녀는 곧 의심을 거두고 날 부축했다.

한쪽 팔은 잘렸지만 부축은 할 수 있었다.

*

어쨌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러게 전단지를 건들지 말았어야지.'

이 모든 게 전단지를 건드려 생긴 일.

에밀리는 잘린 자기 팔을 보자기에 잘 싸맨 채 지혈하고 있었고, 다른 기사 후보생들은 에밀리를 돌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바라칼이 보물 소리를 했는데?'

내가 주변을 뒤적거리자, 뒤쪽에서 경비 조장 조지가 다가왔다.

"자네."

"예?"

"바라칼의 보물을 찾는 거지?"

하여간. 눈치도 좋은 양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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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싸움이 끝난 후 바라칼의 시체를 싹싹 뒤졌다.

하지만 특이 사항은 없었다.

나온 건 금화 수십 개가 들은 지갑과 아들의 모습을 그린 펜던트 정도. 

'아들인가...? 진짜?'

그걸 보자 구역질이 치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산 거지?'

성공하기 위해선 남들도 매정하게 버려야 한다던 인간이다.

그래서 자기 아들까지 악마에게 바쳤다. 

그런데도 인간성이 남아있다는 듯 그 펜던트를 목에 건 이유는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나는 포기했다.

비틀려도 이만큼 비틀린 인간은 찾기 힘들것 같았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그의 시체에서 보물 비슷한 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단 사실이었다.

조지가 담배를 뻑뻑 피면서 말했다.

"아마 보물인 만큼 자기 소매 속에 숨기거나 하진 않았겠지. 하지만 찾기 쉬운 곳에 뒀을 거야. 보안은 철저하되 옮기기 쉬운 곳. 바라칼은 범죄자고, 따지고 보면 수배를 피해야 하는 입장에 있으니."

"그렇군요."

경비 조장의 말에서 한없이 진한 짬이 느껴졌다.

"걸핏하면 부하들도 보물을 옮겼을 거다. 자기 수하들을 믿지 못할 케이스도 있겠지만, 이 경우엔 다르지 않나."

"손목에 B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니 거역할 수 없었겠죠."

"그렇지."

우린 선술집 안쪽을 바라봤다.

16구의 경비원들이 몰려와 바라칼이 있던 곳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들은 가게의 집기들을 헤집고, 주인의 멱살을 잡은 채 윽박질렀다. 주로 바라칼한테 얼마나 받아 처먹었는지, 마약 매매를 했는지가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든 말든.

우린 사무실 뒤쪽으로 걸어가 이곳저곳을 건드려 봤다.

경비 조장은 익숙해 보였다. 그는 찻잔도 건드려보고, 책의 위치를 바꿔도 보고 하면서 숨겨진 공간이 있나 찾았다.

'아무리 봐도 없는데.'

그저 평범한 방.

하지만 조지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유진. 잘 보게. 바닥을 이렇게 밟다 보면."

-쿵. 쿵.

"여기는 이런 소리가 나지만."

-텅. 텅.

"여기는 이런 소리가 난다네. 어떤가?"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와... 씨. 아저씨. 이런 기술은 어디서 배우는 겁니까?"

"관심 있나? 경비 조장으로 10년만 좆뺑이를 쳐보게. 아주 자연스레 실력이 늘 거야."

그나저나 이 아저씨가 친절하게 나오는 데엔 이유가 있을 터.

나는 넌지시 물었다.

"근데 아저씨. 이거 분배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사령술사에게 필요하단 보물은 자네가 갖게. 난 더 이상 무력이 필요 없어. 그저 딸내미 대학 보낼 돈만 필요할 뿐야."

"소냐가 대학에 가고 싶어 합니까?"

"왜? 우리 딸에게 관심 있나?"

우린 걸음을 딱 멈췄다.

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뇨."

경비 조장 아저씨는 잠시 날 노려보더니, 칼을 뽑아서 손잡이 부분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쾅!

그러자 얇은 판자가 그대로 박살나며 지하의 어두컴컴한 공간을 드러냈다. 꽤 잘 관리된 지하 통로였다.

"호오..."

"진짜, 범죄자 놈들이 이런 거 하나는 기깔나게 잘 해놓는다니까."

나는 죽은 범죄자의 메이스를 들고 (아까 시체를 뒤지면서 하나 챙겼다)바닥의 나무 판자를 통째로 부숴버렸다.

부서진 바닥의 틈을 보니 기관장치들이 보였는데, 원래는 어떤 버튼을 누르거나 해야 열리는 구조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문을 부쉈으니 더 생각할 게 없었다.

"음... 들어가도 됩니까? 함정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보통 조직원들이 먼저 뒈지기 때문에 그런 건 없다네."

-탁!

나와 경비 조장은 지하 통로 안쪽으로 떨어졌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통로.

지하라 그런지 피부가 서늘해지며 솜털이 바르르 떨렸다. 

"유진."

"..."

우린 통로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바닥이 매끈하게 다져진 걸 보니 인공적인 토굴이라. 게다가 벽면에 매달린 횃불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타오르고 있었는데, 먼지가 많이 쌓이지 않은 걸 보니 주기적으로 관리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경비 조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원 병력을 부를까?"

"그냥 가죠."

우린 서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안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마치 개미굴 같은 구조.

난 바라칼이란 놈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심히 궁금해졌다.

'사업은 잘하는 놈이었겠지.'

하급 사령술사였던 시절에 암왕이라 불릴 정도면, 범죄 수완은 상당히 뛰어났을 것으로 보였다.

'허나 무력은 의외로 높지 않았다.'

상급 사령술사 수준의 마력을 갖고 있었으나 싸움 실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저 더 강하고, 더 빠르고, 더 단단하면 모든 걸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

수준 높은 상대랑 많이 싸우기보단 자기보다 약한 이들을 많이 때려본 놈이었다.

'공략법이 있는 적이었어.'

놈의 팔은 너무 길어서, 오히려 몸쪽에 딱 붙으면 공격하기 어려웠다.

가까이 온 놈을 쳐내려면 발차기를 하거나 방패를 휘둘러야 했는데, 놈은 신체 구조상 다리도 길어서 발차기도 하지 못했다.

이걸 맨 처음부터 알아냈다면, 몇 명의 부상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유진.

조지가 내 팔을 잡아당기면서 입 모양으로 말했다. 침착하게 동굴 앞쪽을 살피자 술에 취한 듯 낄낄거리는 인영 네다섯이 보였다. 

그들은 멍하니 서 있는 사람들을 눈앞에 둔 채 낄낄거리는 중이었다.

"이야. 씨바. 이 년은 좀 팔아버리기 아까운데? 어떡하지? 이름이 뭐라고? 로냐?"

"어떡하긴 뭘 어떡해? 손댈 생각은 하지도 마. 의뢰주가 처녀를 원했다."

"무식한 새끼. 사람 몸에 구멍이 몇 개인데? 응? 티 안나게... 어? 다른 구멍으로... 어?"

그걸 본 조지가 나한테 말했다.

-어떡할까.

-죽이죠.

-그래. 둘만 남기고.

-아, 제가 할게요.

순식간에 검은 마력을 뿜어내 화살을 창조한 후, 

-파바바박!

그들에게 정확히 네 발을 발사하였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놈들과의 거리는 50m가 채 안 됐으므로, 정확도는 나쁘지 않았다. 쐐액-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은 고기 뚫는 소리를 내며 고통을 가져다줬다.

"크하아아악!"

"씨! 씨발 뭐야!"

이런 곳에서 술 먹고 낄낄거릴 놈들이면 제대로 된 삶을 사는 이들이라고 할 순 없다. 게다가 아까 나눈 대화를 들어보면 별로 살려주고 싶은 인간 군상도 아니니...

나와 조지는 전광석화의 기세로 달려들어 그들을 때려눕혔다.

"윽, 미, 미친 새끼야!"

-퍽!

조지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이빨 서너 개가 날아갔고, 난 메이스를 휘둘러 놈들의 기동성을 제한했다.

-빠악!

"으흐으으으으으으-윽!"

정강이를 부숴버리는 식으로 말이다.

"이, 이 개새끼들! 니들 누구야!"

범죄자 중 하나가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내게 소리 질렀다.

화살에 맞지도 않았고, 이빨도 남아 있었지만 정강이가 부서져서 많이 아파 보이는 놈이었다.

"니 애미다!"

조지가 군홧발로 그의 턱주가리를 차버렸다. 

그의 머리는 축구공처럼 위로 날아가려다, 목뼈와 목살이 아직 분리되지 않은 관계로 다시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지만.

조지는 친히 그의 손가락을 창날로 뚫어 잠을 깨워주었다.

"으극... 으그극... 미친, 미친 새끼들아..."

"너흰 누구고,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말해라."

"흐, 흐흐... 바라칼 님께서... 너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난 아무 말 없이 바라칼의 펜던트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러자 놈의 눈깔이 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 이걸 네가 어떻게?"

"위에서 싸우는 소리가 안 들렸나 보지?"

"..."

"바라칼 패밀리는 몰락했다."

그의 손목을 보니 B 문신이 있었다.

조지는 그걸 보고 낄낄거렸다.

"니네 인생도 몰락했고."

"그러니까 다 불어라. 다 불면 한 놈은 살려주겠다."

"그,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물론 놈은 믿지 않았지만, 사람이 다섯 모이면 무조건 한 명은 폐급인 법이라.

이는 통계학적 진리에 의거한 내용이었다.

다른 남자가 눈을 뒤룩뒤룩 굴리다가 내게 말했다.

"진짜요?"

"그래. 내 이름은 사령 기사 유진. 명예에 걸고 맹세하겠다."

"그... 그러면."

그러자 놈은 이런저런 얘기를 해줬다.

이쪽으로 계속 나가면 숨겨진 만灣 하나가 나오는데, 여기서 노예를 팔아넘겼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성노예가 제일 많이 팔리지만... 어린 노예랑 힘 좋은 노예도 많이 팔립니다. 주로 로커스트 연합에 팔지요."

로커스트는 부족 연합이다.

그들을 지휘하는 수뇌부는 대마녀들의 의회인 로커스트 카운슬이나, 각 부족마다 법이 달라 어느 곳에선 노예가 합법이며, 어느 곳에선 노예가 불법이었다.

애초에 부족과 부족끼리 전쟁을 하는 일도 잦다고 하니, 안쪽 상황이 어떨지 상당히 궁금했다.

'아니... 사실 아틀라스도 영지전을 하긴 하지.'

그렇게 보면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안쪽으로 가시다 보면 사무실이 하나 나오는데..."

"..."

"거기 안쪽에 보물 창고가 있습니다."

"드디어 쓸모 있는 소릴 하는구나. 창고를 여는 법은?"

"이, 이걸 쓰시면 됩니다."

놈은 부적처럼 생긴 나무패 하나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진상했다.

"그, 그럼 이제 가봐도 됩니까?"

"아니?"

"...예?"

서로의 이해가 불일치한 것일까?

우린 서로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살려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어. 살려는 준다고 했지."

"이런 씨발!"

놈이 순간 분노해 주머니칼을 들고 달려들었지만, 한쪽 다리가 부서진 채로 그 짓을 하긴 쉽지 않았다.

난 옆으로 슥 피해 그의 다친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크헉!"

놈은 그대로 바위 턱에 머리를 박아버리고 기절했다.

남은 놈들은 부상을 입은 채 바닥에서 버르적거렸고, 노예로 팔려던 인간들은 거적데기만 걸친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중이었다.

저러다가 약 기운이 떨어지면 정신이 돌아오면서... 심각한 금단 증상에 시달리게 될 것이었다.

"...끌끌."

"일단 가시죠."

우린 놈들을 묶어놓고 앞으로 걸었다.

의외로 놈의 말은 맞았다.

긴 통로를 걷다 보니 절벽 안쪽으로 이어진, 배 하나를 댈 수 있을 만한 작은 만이 나왔고.

그 전에는 바라칼이 사무실로 이용하던 방 하나가 있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안쪽에 마법적인 장치를 댈 수 있는 홈이 패여 있었다.

-쓰윽.

거기에 대고 나무패를 문지르자,

-콰과과과과광.

"와... 씨."

"이런 건 보신적 없습니까?"

"경비 조장 생활을 20년은 했는데, 이런 건 처음 본다네."

사무실의 돌벽이 통째로 아래로 내려가면서 밀폐된 공간 하나를 드러냈다. 

아파트의 벽장만큼 작은 공간.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허..."

영롱한 빛을 내뿜는 보석 하나랑, 각종 보석들로 치장된 커다란 열쇠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보물 상자 세 개가 놓여 있었는데, 딱 봐도 귀중품이었다.

'이 열쇠는 보물상자의 구멍과 맞지 않아.'

보석도, 열쇠도 상자와 연관은 없어 보였다. 열쇠는 내 손바닥 만큼이나 컸고, 보석 역시 그랬으니 그랬다.

'그나저나 진짜 보물이라고?'

원래 이런 보물 상자는 뜯기 전에 가장 설레는 법.

나는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보석과 열쇠를 살폈고, 아저씬 땅에 있는 보물 상자를 뒤졌다.

"유진. 이것 좀 보게."

"와..."

보물 상자 세 개엔 금화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상자 자체가 엄청 크진 않았지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대박 쳤다는 느낌에 가슴이 설렜다.

'이 상자 하나가... 집이잖아!'

흥분해서 그에게 물었다.

"이게 다 얼마입니까?"

"이 상잔 한 백 개에서 이백 개 정도 되겠군."

대체 얼마나 짬이 있어야 상자 크기만 보고도 금화의 양을 가늠하는 것일까.

"그리고 전부 합치면 금화 육백 개 정도 되는군. 확실히... 마약 팔아서 돈을 많이 벌긴 했구만."

우린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조장 아저씨는 건실한 사람이지만, 역시 한 명의 인간인지라.

그의 눈에는 전에 없던 탐욕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현명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 뜻은, 내게 검을 들이대는 무모한 짓거리를 하지 않았단 뜻이었다.

"유진. 솔직히 내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긴 힘들었겠지. 그러나 난 이번 전투에서 자네에게 큰 도움을 받았네. 바라칼이 약하다고 생각하고 방심했거든."

"왜죠?"

"상급 사령 술사가 됐단 소문은 보통 와전이된다네. 그 나이에 이루기 쉬운 성취가 아니지."

그는 본론을 말했다.

"나는 이 상자 하나를 갖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가지십시오."

"고맙네."

내가 많이 이득 보는 거래였으므로, 그에게 공수표를 날리기로 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고, 사람이 말 예쁘게 해서 뭔가 잃을 건 없었다.

적어도 개념이 있는 사람을 대한다면 말이다.

"제가 사업 자금이 필요해서 많이 가져갑니다. 대신 앞으로 사령 기사의 무력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 좋군."

그렇게 우린 정체 모를 보석 하나, 정체 모를 열쇠 하나, 보물 상자 3개, 노예가 될 뻔한 사람들을 루팅해 바깥으로 나왔다.

*

바깥으로 나오니 선술집은 매우 붐비고 있었다.

보통 상황이라면 가게 주인이 상당히 좋아할 상황이었으나... 

지금은 케이스는 좀 특수했다.

일단 눈앞의 남자 이름은 로톤.

맨 처음 여자친구가 납치당했다며 바라칼 패밀리의 위치를 알려준 사람이었다.

"크흑... 로냐! 로냐아아!"

그는 여자친구 앞에 무릎을 꿇고 우는 중이었다. 로냐가 마약에 절여진 채 허공만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그걸 보니 기분이 참 더러웠다.

"슬프군요."

"그래도 너무 슬퍼하진 말게. 유진. 내가 알기로 로냐의 아버지는 대장장이야. 치료받을 돈은 있어."

중세의 세계.

마법의 효율은 상당히 좋았다.

아무리 마약에 중독된 사람일지라도 신전에 돈을 바치면 증세를 해결하는 게 가능했고, 잘린 팔다리를 복원할 수도 있었다.

물론 로냐만큼 망가진 사람을 되돌릴 수 있을까는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단 소리였다.

"...아, 유진. 그리고 저놈들한테선 거리를 좀 두게나."

반대편에는 딱 봐도 비싼 갑주를 걸친 입은 일곱 신의 성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근엄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는데, 나를 보는 시선이 가히 좋지 않았다.

"저들은 왜 저럽니까?"

"사령술을 쓰는 부정한 이가 공을 채가니 싫은 것이지. 본인들은 16구에 바라칼이 들어온 줄도 몰랐으면서 말야."

"그렇군요."

그 외에도 11구 경비병, 16구 경비병, 소형 기사단 등 다양한 사람이 와 있었다.

난 그 와중에 기사 후보생들을 찾아내었다.

'이들은... 내게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어, 유진. 왔어?"

한쪽 팔이 잘린 에밀리가 왼손으로 수프를 먹다가 말했다.

카덴은 평소처럼 무표정이었고, 브랜드는 여유롭게 인사했다.

"우리의 세 번째 성공이로군. 유진."

"그렇지. 에밀리. 팔 붙일 돈은 있냐?"

"...후우. 유진. 모르겠어. 빚이라도 내야 할 것 같은데."

"얼만데?"

"금화 다섯 장은 받겠지."

그 말을 듣자 좀 답답해졌다.

'...보링턴 영지랑 물가가 많이 다른가 보네.'

심지어 신전에서도 다른 물가로 장사를 한 다니. 중세는 어딜 봐도 어메이징했다.

'그나저나 에밀리가 한쪽 팔을 못 붙이면 어떻게 되지?'

난 보자기에 싸인 팔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에밀리의 무력은 평소에 많은 도움이 됐다.

브랜드는 모든 방면에 융통하지만 지략가 비슷한 스타일이고.

카덴은 기습 능력이 탁월하지만 전면전을 하지 않았다.

반면 에밀리는 선천적으로 호전성이 강했다. 그녀는 든든하게 전열을 맡아줄 수 있었다.

그녀가 외팔이가 되면 팀 전체의 전투력이 낮아질 것이기에, 난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그 돈 내가 빌려줄게. 이자는 연에 1푼이다."

"뭐, 뭐라고? 유진?"

에밀리가 화들짝 놀라면서 수저를 떨어뜨렸다. 

이 험난한 중세에서 1푼의 이자로 돈을 빌릴 수 있는 곳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모두가 내 입을 바라봤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말했다.

"우리 팀에서 다치는 사람에겐 치료비를 빌려주겠다. 연 단리 1푼의 이자로."

치료라는 건 최상급 기사단에서만 제공하는 복지.

아직 기사가 되지 못한 후보생 병아리들은, 다치거나 하면 자기 지갑을 털어 스스로를 치유해야 했다.

영지전을 뛰던 나랑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소극적으로 싸우게 되지.'

뒷배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른 법.

다쳐도 치료받을 수 있단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몸을 덜 사리며 적을 죽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었다.

사실 에밀리 정도면 그냥 공짜로 줄 수도 있지만, 계속 그런 방식을 유지한다면 호구로 보일 가능성이 있기에 자제했다.

"그러니 다들 오늘처럼 용맹하게 싸워줘. 알았지?"

"넌 앞으로 대장이다. 유진...!"

브랜드가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떨었고, 난 피식 웃으며 답했다.

"원래 대장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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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달을 바라보며 평온에 젖을 수 있었다.

물병자리의 달 마지막, 제국의 한겨울. 

하얀 하늘에서 떨어진 함박눈들이 세상을 꽉 채웠다.

거리의 노숙자들이 많이 얼어 죽었고, 여관 주인의 아들들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바깥으로 나와 눈을 치웠다. 

그러지 않으면 본인들 아버지한테 처맞기 때문이었다. 

난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생각했다.

'나, 많이 벌긴 했네.'

지금 내가 가진 돈은 대략 560,000실링.

금화가 너무 많아 전 재산 휴대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와 버렸다. 

'정말 장족의 발전을 이뤘군. 늑대 마수 몇 마리한테 고전하던 시절이 어제 같은데.'

보링턴 영지에서 목숨 걸고 싸우던 시절이 생각났다.

그땐 하루에 50실링만 벌어도 감지덕지하고 고개를 숙이며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대박을 쳤고, 나름 평민 중에선 돈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거의 로또지, 뭐.'

암왕이란 작자의 숨겨진 재산을 다 흡수한 결과, 몇 년 동안 사치스레 살아갈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그건 긴 여관 생활을 청산할 때가 되었단 의미였다.

모든 이별이 그렇듯 약간의 슬픔과 후련함, 기대감이 느껴졌다. 

비록 인심은 야박했으나 서비스는 좋았던 곳. 그리고 경비 조장도 나한테 신경을 많이 써줬으니, 나중에 만나면 좋게 대해줄 예정이었다.

"후우."

슬슬 걸어가 로자리오 여관의 게시판을 보니, 사령 기사 유진의 전단지가 깨끗하게 보존돼 있었다. 

바라칼 패밀리가 전부 쓸려나간 탓이었다.

"이제야 전단지가 깨끗하네요."

입김을 내뿜으며 말하자 조지가 답했다.

"그래. 바라칼 패밀리가 싹 쓸려나갔으니까."

"그런 것 같긴 해요."

여관 앞쪽의 광장을 보니...

앙상한 가지만 남은 중앙 나무에 범죄자들의 시체가 목매달려 있었다.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물들처럼 말이다.

공포에 질려 죽어간 그들의 머리 위엔 하얀 눈송이가 쌓였는데, 사람들은 그걸 가만히 두지 않았다.

"주거!"

지나가던 일곱살짜리 어린애가 눈을 뭉쳐 목 매달린 시체한테 던졌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짱돌 섞인 눈덩이가 적중하자, 얼어붙은 시체가 진자처럼 흔들렸다.

"호호! 우리 아기! 잘한다!"

"꺄르르!"

그걸 보던 조지가 말했다.

"아틀라스 성전 기사단이 직접 나섰지."

"..."

"원래 이런 짜잘한 일은 하지 않는데... 아인베르트령에서도 '뭔가 했다'라는 걸 보여줘야 하니까."

그래서 오백 명에 달하는 인원들을 처형하고, 천 명에 달하는 이들을 탄광으로 보낸 다음, 비슷한 인원들을 감옥에 처넣었다 했다.

감옥이 미어터진 나머지 초인들이 직접 토목공사를 해 감옥을 넓혔고, 간수 100명 가량을 추가 채용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여러모로 잘 끝났네.'

에밀리는 신전에서 팔을 붙여 적응 중이었다. 

브랜드와 카덴은 수련에 매진하겠다고 했다.

아인베르트령 내부에선 내 이름이 꽤 알려졌는데, 사령 기사가 아니라 '바라칼을 토벌한 사내'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유진."

"예?"

"총대장이 사임했다네. 나도 다음 달부턴 경비 대장이야."

"경비대장 (진)이시군요. 축하드립니다."

"(진)이 뭔데?"

"진급 예정의 줄임말입니다."

조지는 그 말을 듣고 코웃음쳤다.

"그런 걸 왜 붙이나? 조장이면 조장이고 대장이면 대장이지."

"음... 그러게요."

우린 조용한 겨울날을 쳐다보면서 잠시 가만히 있었다.

*

할 일은 항상 많았다.

'일단 내 목표는 기사 시험을 치르는 거야.'

로커스트에 가서 정식으로 기사 시험을 치루고, 서훈을 받아야 했다. 그 자격을 얻으려면 에란트리 퀘스트를 치러야 했고.

'하지만 다른 일도 바빠.'

일단 집을 구해야 했다.

삶의 질은 그렇다 쳐도,

지금 여관방 안쪽에 오십육만 실링 상당의 금화를 쌓아놓은 상태인지라 보안 측면에서 상당히 위태로웠다.

게다가 내가 살던 곳은 11구.

경비 조장 아저씨가 맨날 여관 쪽으로 순찰을 돌아 치안이 유지되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여기도 16구에 비빌 수 있을 정도의 우범 지역이었다.

그리 집값이 높지 않은 곳이라(저번에 알아본 폐가의 가격이 금화 85장이었다), 정식으로 서훈받은 기사들이나 귀족 영애들은 이런 곳에 살지 않았다.

그렇기에...

난 치안이 나은 8구로 이사 갈 생각을 했다.

"오오...! 사령 기사 유진 님!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화창하고 고요한 겨울.

볼살이 투둘투둘하게 부풀어 오른 제국 공인중개사가 손을 싹싹 비비며 고개를 조아렸다. 왠지 모르게 내시나 환관이 생각나는 태도였다.

"악적 바라칼! 죽은 줄만 알았던 그가 아인베르트 영지로 돌아왔으나, 사령 기사 유진 님이 힘써주신 덕분에 치안이 안정되었죠. 지금 아인베르트의 만백성이 당신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아, 그만 하세요. 갑자기 왜 이래요?"

만 백성의 찬양을 받는 정돈 아니다.

그냥 술집에서 '아, 유진? 그... 요즘 유명한 동양인?' 하고 언급되는, 알 사람만 아는 가수 같은 느낌이었다.

과장 섞인 칭찬은 판매를 위한 심리적 기술일 뿐.

난 그 지점을 명확하게 했다.

"그나저나 16구의 집도 거래하시고, 9구의 집도 거래하시네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아인베르트에서 제일 유명한 공인중개사가 또 저 아니겠습니까!"

그는 볼라드의 의뢰를 받기 전, 11구의 폐가 하나를 금화 85장에 팔아먹으려던 사람이었다.

욕망의 항아리처럼 생긴 인간.

하지만 아인베르트령에서 인정받은 공인중개사는 몇 없었고, 다들 정직한 편이라기에 그의 서비스를 이용했다.

"제가 특별히 마차도 준비했습니다! 자! 어서 타시죠!"

"마차 값도 내야 하나요?"

"아이고! 제가 설마 그런 걸 받겠습니까! 오늘 집 안 사셔도 좋으니, 당연히 공짜로 구경시켜 드려야지요!"

'이야... 확실히 돈 벌고 명예를 쌓으니 사는 게 달라지는 구나.'

확연히 달라진 태도.

성공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어쨌든 그는 탐욕스런 미소를 띄우며 나를 이곳저곳 끌고 다녔다.

확실히 8구의 정경은 11구와 완전히 달랐다.

'미친... 이게 뭐야?'

일단 거리에 똥이 없었다.

치우지 않은 돌이나 부서진 건물 자재들은 많이 널려 있었지만, 적어도 음식물 쓰레기, 정체 모를 오물 같은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한 마디로 위생적이란 뜻이었다.

'이런 게 가능하다고?'

11구나 16구에선 못 배워먹은 사람들이 어떤 구멍으로든 자신의 욕구를 표출한 다음, 그 흔적을 거리에 남기곤 했는데...

이곳엔 적어도 그런 게 없었다.

좀 낡았지만 바닥엔 타일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쓰레기가 없으니 상당히 괜찮아 보였던 것이다.

그러자 공인중개사가 말했다.

"흐흐. 그렇지요. 아무래도 8구 이상부터는 중산층이 거주하는 곳이다 보니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개념이 있고, 경비들도 많지요."

"그렇네요..."

오가는 행인들을 바라봤다.

사람들의 복장이 극적으로 달라지진 않았다.

그러나 옷의 이음새나 마감이 11구의 것보다 좋았고, 전반적으로 더 두툼한 겨울 옷을 입고 있었다.

내가 11구, 16구에서 본 게 중세의 씹창난 현실이었다면...

이곳은 각종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볼 법한 판타지 마을의 모습 같았다.

"유진 님. 여긴 어떠십니까?"

"오."

그는 빨간색 지붕으로 덮인 이층 저택을 보여주었다.

벽면은 시멘트와 벽돌로 덮여 있었고, 앞쪽엔 작은 정원이 있었으며, 가까운 거리에 경비소 첨탑이 있어 치안도 좋았다.

게다가 뾰족한 창 모양의 울타리도 있었으니 이전 여관과는 삶의 품질 자체가 달랐다.

"들어와 보시지요."

게다가.

'허...!'

정말 놀랍게도,

비교적 깔끔한 화장실 내부에 현대적 모양의 변기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옆에 욕조까지 있었다.

"...와."

내 넋을 놓자 공인중개사가 신나서 설명을 시작했다.

"이 집이 얼마나 훌륭한 집인지 보십시오. 이 고급스러운 변소가 보이십니까? 이는 유명한 변소 장인이 단단한 도자기로 직접 만든 것인데요. 자, 레버를 당겨 보십시오! 그럼 마법이 일어날 것입니다!"

홀린 듯 다가가 변기의 레버를 당기자, 소용돌이치는 물소리와 함께 물이 후루루루룽 하고 내려갔다.

"우와아아...!"

그 엄청난 광경을 보니 심장이 쿵쿵 뛰고 손발이 부르르 떨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솔직히 카밀라가 갑자기 나타나 전설 속의 검을 하사해도 지금보다 기쁠 것 같진 않았다. 그 생각을 하니 스스로가 싫어졌다.

'내 인생은 대체 얼마나 내려간 것이지?'

진한 현자 타임이 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더운 여름, 푸세식 화장실에서 일을 봐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 사소한 장치 하나가 삶의 질을 얼마나 높여주는지 말이다.

'이건 사치가 맞아.'

실제로도 사치였다.

아틀라스 제국 도시 중 하수도가 제대로 된 지역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수도가 별로란 말은, 비가 오면 도시의 오물이 넘쳐나 발에 차박차박 차인단 뜻이었다.

그렇게 더러워진 신발을 강물에 씻고, 그 강물을 어린 애들이 마시고, 냄새나는 푸세식 변소에 가기 싫은 놈들이 노상 방뇨, 노상 배변을 한단 소리이기도 했다.

마치 개처럼 말이다.

'이 씨발.'

이제야 좀 사는 것 같았다.

"이 집이 시설은 제일 좋습니다. 제가 또 하나 마법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는 마법이랍시고 저택의 지하실로 내려가, 난로처럼 보이는 곳에 장작들을 던져 넣었다.

"불타오르라."

공인중개사가 영창하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색의 마력이 불꽃으로 변해 난로에 옮겨 붙었다. 지금 보니 공인 중개사도 꽤 마력을 쓸 줄 아는 엘리트 같았다.

'이 인간도 돈 많겠지?'

-화르륵!

그러자 난로에 불꽃이 타올랐다.

온기가 관을 타고 위쪽으로 전달되기 시작하자, 집 전체에 따사함이 감돌았다.

"자, 이제 위로 올라와 보십시오!"

방바닥이 뜨뜻했다.

난 그 온도에 마음까지 녹을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제국의 최신 기술 중 하나인... 연기 보일러입니다!"

공인중개사가 아주 자랑스레 말했다.

머리가 녹아 없어질 정도로 도파민이 나왔다.

'솔직히 밤에 잘 때 추웠는데.'

보링턴 영지에서의 나날들이 기억났다.

사냥꾼 아저씨의 집에서 겨울을 보낼 땐 그나마 나았었다. 그의 집은 숲에 있었고, 난로에 넣을 장작이 부족할 일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집을 나온 다음부턴 그냥 한랭지옥이었다.

'발이 너무 시렸어.'

난 평소에 대자로 팔다리를 뻗고 잠에 들었다. 하지만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겨울이 되면 손발이 너무 차가워 잠들기 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벼룩 가득한 이불로 몸을 꽁꽁 감싼 채 태아처럼 잠들곤 했는데, 일어나고 나면 어깨가 아팠다.

며칠 후 냄새나는 양말 세 개를 겹쳐 신으면 잠들 수 있단 걸 알았지만...

어쨌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왔기에 보일러가 대단해 보였다.

'정말 최고인데.'

"자, 보십시오! 마법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수도꼭지를 옆으로 돌리면!"

"오오..."

주방에서 물이 나왔다.

한 마디로 물도 나오고, 바닥도 뜨끈뜨끈하고, 잘 열리지는 않지만 뻑뻑한 창문도 달린 천국 같은 집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넓이도 층당 11평 정도는 되어 살 만 했다.

"어떠십니까."

"정말 대단하군요. 사람은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하는 거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다른 집도 가 보시죠."

난 여러 집을 돌아다니다가... 

망설이지 않고 첫 번째로 본 집을 골랐다.

"축하드립니다. 유진 님. 이제 당신도 어엿한 8구의 시민입니다. 아인베르트 행정소에 등기 등록을 해 드리겠습니다."

"...가격은요?"

"금화 삼백 장에 드리겠습니다."

'의외로 비싸진 않군.'

그 거지 같은 집이 금화 여든다섯 장이었단 걸 생각해 보면, 이 집을 금화 삼백 장에 준다는 건 정말 좋은 오퍼였다.

월세를 살면 더 아낄 순 있었겠지만.

어차피 여기서 2년 정도 살다가 집을 팔면, 세금계산 포함해도 이쪽이 싸게 먹혔다.

참 나쁘지 않은 소비였다.

*

그날 저녁, 나는 약간의 사치를 부렸다.

'이렇게 하는 건가?'

부싯돌을 이용해 지하의 난로에 불을 올리고, 철관 레버를 당겨 욕조를 데우도록 만들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욕조 안에 물을 붓고 기다리자-

1도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뜨뜻한 목욕물이 데워졌다. 난 옷을 벗고 그 안에 몸을 푹 담궜다.

"아...뜨끈하다."

그리고...

창문 바깥의 추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송이들이 팔랑팔랑 떨어지는 겨울.

내가 숨 쉴 때마다 입김이 구름처럼 나왔다.

목 아래는 뜨거운 물에 잠긴 것과 반대로, 윗부분은 겨울바람 때문에 시원했는데...

이게 그렇게나 기분이 좋았다.

'할 일은 많다.'

일단 대장장이한테 들러 새로운 장비를 마련해야 했고, 바라칼한테 빼앗은 보물 두 개의 정체도 알아내야 했다.

특히 보물.

그 열쇠가 어떤 상자를 열 수 있을지 상상하다 보니 절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난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내일이 기대되는 걸.'

중세에 온 지 2년 차.

솔직히 삶이 그렇게 즐겁진 않았었다. 

밑바닥에서 아무리 굴러봐야 인생이 좋아질 것 같지 않았고, 평생 영지전을 뛰며 건강이 나빠지면 어떡하지, 다쳐서 치료비로 다 나가면 어쩌지...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하루하루 나아지는 재미가 있었다. 

사령을 흡수하면 마력량이 늘었고, 가면 갈수록 싸움 실력도 늘었다.

사람들이 날 바라보는 시선도 그에 따라 점점 변해갔는데, 이게 다시 일하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좋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채, 오전에 사놓은 와인을 뜯어 향기를 맡다 병째로 홀짝였다.

"하아..."

술 먹고 목욕하는 게 심장에 나쁘다 했다.

허나 그거 때문에 죽으면 사령 기사가 아니라 노약자라.

마음을 비운 채 술을 음미하자, 달짝지근한 알콜 냄새와 함께 과일향이 올라왔다.

"...좋네."

아주 오랜만에.

나는 하얀 달을 바라보며 평온에 젖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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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특이한 족속들이었다.

새로운 도시에서의 하루는 상쾌했다.

'와... 씨. 삶의 질이 달라졌네.'

물론 중세 특유의 불편함은 변하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취객들이 나불대는 소리가 들린다던가, 겨울바람이 알 수 없는 틈으로 슝슝 들어온다던가 하는 문제들 말이다.

하지만 여관보다는 훨씬 나았다.

거기선 새벽에 이런저런 소리들이 들렸다.

알 수 없는 교성, 목적이 명확한 신음, 전혀 알고 싶지 않았던 남의 가정사 등등. 의외로 내용이 흥미로워 잠이 안 오는 소음 공해가 사라지니 수면의 질이 상승했다.

'냄새도 그래.'

창문을 열면 상쾌한 공기가 흘러 들어오고, 수세식 화장실에선 냄새가 '훨씬' 덜 했다.

코를 막을 필요도 없이 인상 좀 찌푸리면 될 정도?

이런저런 면에서 이곳은 여관보다 우월했다.

'아, 기분이 너무 좋은걸.'

그러다 보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인플레이션이랑 빈부격차가 얼마나 심한 거야?'

솔직히 수십만 실링을 모았을 때 알부자가 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인베르트 영지 내에 대저택을 지으려면 이 돈으로도 '한참' 부족했다.

애초에 귀족들은 금화가 아닌 백금 동전, 수표를 쓴다는 데... 

난 아직 백금 동전을 구경도 못 해 봤으니 갈 길이 멀다.

'금화 백 개가 백금화 하나니까.'

확실히 초인이 존재하는 세상의 빈부격차는 엄청나구나 싶었다. 소드마스터가 300살까지 살면서 이런저런 의뢰를 받고, 재산을 축적하고, 맏아들에게 상속시키는 걸 생각하면...

참 멋지면서도 끔찍했다.

'...솔직히 귀족들은 현대 부자들만큼 잘 사는 것 같았어. 애초에 마력 때문에 건강 문제도 적고. 그러면 현대인보다 즐겁게 살 수 있을까?'

나라고 욕심이 없진 않았다.

아틀라스 제국엔 일부다처제가 있었고, 1인 1주택에 대해선 추가적인 세금을 물지 않았다.

게다가 각종 마법을 사용하면 에어컨이나 자동 청소 기능 같은 것들도 구현할 수 있으니...

집에다 개인 요리사, 메이드, 마법사를 상주시키는 순간 인생의 질이 달라질 것이었다.

어쩌면 나, 이 척박한 중세에서 현대보다 행복하게 살 수도 있는 게 아닐까?

'...기대가 되는 걸.'

상쾌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바깥으로 나왔다.

그나마 여관이 나은 점이 있었다면 밥 정도.

여관 아줌마가 밥을 자동으로 해주지 않았기에, 근처 식당에 가서 스스로 챙겨 먹어야 했다. 가격은 한 끼에 30실링 정도.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지만, 커다란 소세지, 계란, 브로콜리, 감자 등 다양한 영양소가 들어있어 만족스레 먹었다.

'이젠 수련해야지.'

별다른 일이 없으면 수련에 집중하는 게 요즘 일과였다. 방 안에서 오랜만에 검은 책을 펼쳐보니...

반가운 글들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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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유진

[등급] 중급 - 25년 추정

[마력 총량] 약 1724 다르마 

[신체 능력] 키 6피트, 몸무게 180파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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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놀랐다.

저번에 검은 책을 들여다봤을 때의 마력량이 600 정도였기 때문이다.

사람 한 명의 혼백을 흡수해 봐야 10에서 30 다르마 정도가 늘어나는데, 내가 그 만큼 범죄자들을 죽인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바라칼의 마력이 강했던 걸까?

의문이 들어 검은 책에게 물었다.

-제2형 마수의 마력량이 200 정도였는데, 바라칼이 1000 정도라고? 그렇게 강한 존재였나?

[본서의 추론에 따르면 바라칼은 악마와 계약한 존재. 악마에게서 마력을 부여받은 걸로 보임.]

[또한 귀속자의 '흡수' 효율은 비정상적으로 높음. 특히 같은 사령술사를 대상으로 했을 때 더 그러함.]

-...왜?

내가 동족을 포식하는 괴물이란 말인가.

[사령술사, 사령기사들은 정제된 에너지인 검은 마력을 보유하는 자들임. 이들을 흡수할 경우 이미 만들어진 그릇을 가져가는 것이나 다름 없어서, 흡수 효율이 원래 높음. 다만 귀속자는 특이할 정도로 효율이 높음.]

'이러니 로커스트가 세계 통일을 못 하는 것이군...'

사령술사끼리 서로 죽여서 강해지는 구조라면 강력한 집단이 나올 수가 없다.

로커스트가 부족 연합 체제인 건 그런 이유가 있겠지.

그나저나, 검은 책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 엄청 운 좋은 거잖아.'

억까 끝엔 행운이 따르는 법일까.

바라칼은 내게 아주 좋은 보물 고블린이 되어 주었다.

본인의 강함을 끝까지 활용하지 못했고, 수준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돈과 마력을 모았으니, 난 순식간에 마력량이 세 배나 늘어 집도 구할 수 있었다.

'역시 어느 세상이건 대박을 쳐야 하는구나.'

어쨌든 산술적으로 따지면 세 배 정돈 강해졌지만, 실전의 기준으로 한다면 거의 열 배 강해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손을 쥐었다 펴봤다. 

전완근에 핏줄이 쫙 돋으면서 공업용 기계 같은 힘이 느껴졌다.

'확실히 힘이 더 강해지긴 했어.'

검은 마력은 내 신체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원하는 바에 자동으로 호응한다.

이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더 빠르게 뛸 때뿐만 아니라.

심장이 뛸 때, 숨 쉴 때, 먹은 밥을 소화 시킬 때, 갈라진 근육을 회복시킬 때도 자동으로 적용된다.

즉- 일반인보다 심장 건강히 뛰고, 영양소 흡수율도 높고, 상처도 빨리 낫는다는 뜻.

마력이 몸을 이상적인 형태로 재조정하니, 지금 내 몸은 바디프로필 찍는 사람 수준으로 강화되어 있었다.

또한 에란트리 퀘스트 관련 페이지도 갱신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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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란트리 퀘스트 수행 현황]

기사 시험을 위해 달성해야 할 점수 : 50

현재 점수 : 30 (+10)

-보링턴 영지의 나술 처치 (하급, +2점)

-아인베르트 통행로의 세 늑대 처치 (하급, +2점)

-악적 레이돈 커스 처치 (중급, +6점)

-릭토 산의 폭군 및 제2형 마수 처치 (중상급, +10점)

-상급 사령술사 바라칼 처치 (중상급, +1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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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배운 기술은 총 여섯 개다.'

[사령화살], [신체강화], [명상법-정제], [포식], [사령갑주-기초], [혼백 타격술].

검은 책의 말에 따르면 50점을 찍는 순간까지 내가 배울 수 있는 기술은 총 15개라.

앞으로 9개의 스킬이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책이 나한테 가르침을 퍼주기 시작했다.

[귀속자는 많은 점수를 쌓았으므로, 그 동안 밀린 교육 과정을 이수할 권리가 있음.]

[배워야 할 새 마법은 5개임.]

'5, 5개라고?'

밀린 교육 과정이라니.

누가 보면 내가 싫어하는 일 억지로 하는 줄 알겠다. 5라는 상식을 뛰어넘은 숫자를 보자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씨... 어? 나한텐 이게 다 보상이라고.'

-그나저나 5개라고? 갑자기 너무 많은데?

[귀속자는 자랑스러워해도 좋음. 본 서는 많은 이들을 교육시켜 왔지만, 귀속자처럼 성장이 빠른 케이스는 없었음.]

[또한 보통 하급 임무 여러 개를 수행함으로써 점수를 채우는데, 귀속자의 경우 중상급 임무만 여러 번 수행했으므로 성장이 빠름.]

나는 받아들였다.

그리곤 흥분되는 마음으로 검은 책의 선택지들을 하나하나 고르기 시작했다. 일단 맨 처음 배운 마법은 [사령 시야].

시력뿐 아니라 기사의 감각 전반을 동시에 상승시켜주는 마법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경계와 감각기관에 신체 강화를 거는 것.

특수한 상황에선 신체 강화 2단계처럼 쓸 수도 있었지만- 이걸 계속 수련하면 평소에도 눈으로 가는 마력이 많아져 감각 능력 자체가 상승한다고 했다.

두 번째로 배운 마법은 [사령 갑주 - 중급.]

[귀속자는 천 갑옷 형태뿐 아니라, 플레이트 아머의 형태로도 사령 갑주를 만들어 낼 수 있음. 또한, 기존에 입고 있는 갑옷 위에 덧씌우는 식으로 강화하는 것도 가능함.]

'드디어...'

내가 사령기사란 단어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가장 크게 기대했던 놈이었다. 검은 책이 알려준 대로 마력을 순환시키자, 손 위를 덮는 단단한 건틀릿 같은 게 생겨났다.

다만 단단해서 그런지 손가락을 굽히기 쉽지 않았다.

'음... 손가락을 움직일 수가 없군.'

[손가락 관절 같은 부위는 좀 더 세심하게 검은 마력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음. 본래 '심상을 부여한 갑주'를 만들어야 하지만, 아직 귀속자가 배우지 않은 과정임.]

'그렇구만.'

그러려니 했다. 애초에 흉갑이나 견갑만 강화시켜도 생존률이 비약적으로 올라갈 터. 

-그리고 방패에도 쓸 수 있잖아?

[올바름.]

그렇다면 더 물어볼 건 없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기술들을 배웠다.

[사령 안개]

[귀속자의 검은 마력을 안개 형태로 뿜어내, 범위 내 생명체들의 시야를 가리고 정신을 오염시킴. 반경 10피트 정도의 사정거리를 가짐. 추후 '산성 안개'를 배울 수 있음.]

사령 안개. 일단 적들의 시야를 가릴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큰 이점이었다.

[푸른 마력을 수련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지만, 정식 기사 중에서도 시야를 단련하지 않는 이들이 많음.]

그 말인즉슨, 나보다 강력한 상대를 만나도 상성 차이로 뒤집을 수 있다는 의미. 게다가...

[귀속자의 수준이라면 전투 중 상시 안개를 뿜어내는 게 가능함.]

'마치 패시브처럼 말이지.'

이렇게 세 가지의 마법을 새로 배운 상태.

하지만 네 번째 선택지에 이르자 다시 선택 장애가 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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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 - 육체 변형]

[위험][전공 : 뮤테이터]

[포식의 상위 단계. 귀속자는 생물의 특질을 흡수하는 걸 넘어, 장기를 이식해 본인의 몸으로 이로써 인간 종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으며, 두 번째 심장을 만드는 것도 가능함. 대신, 이식 시의 리스크는 본인이 책임져야 함.]

[사령 번개 - 기초]

[고난이도]

[귀속자는 검은 마력의 성질을 번개와 같이 바꿔 물체, 혹은 신체에 부여할 수 있음. 불꽃보다 절삭력은 약하나 상대의 신체를 마비시키고, 더 빠름.]

[사령 불꽃 - 기초]

[고난이도]

[귀속자는 검은 마력의 성질을 불과 같이 바꿔 물체, 혹은 신체에 부여할 수 있음. 마력과 물질을 분해하며 계속 태우는 성질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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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씨...'

중세라 그런가.

사람들은 화염, 번개, 해일, 폭풍 등 자연의 분노를 보고 많은 영감을 느낀 것 같았다.

-불꽃이랑 번개는 어떻게 다르지?

[불꽃은 고열로 상대를 녹여 절단하고, 번개는 신체를 마비시키는 데에 적합함.]

[둘 다 위력 면에서는 비슷함. 번개 형태를 다루는 사령기사와 불꽃 형태를 다루는 사령 기사가 서로 검을 부딪히면 대부분 비슷한 승률을 보임.]

'흐으...'

롤랜드 경이 떠올랐다.

맨 처음 나한테 보패를 줬던 사람. 

그는 푸르게 불타오르는 검을 들고 싸웠는데, 그걸로 사람을 베면 뼈까지 깔끔하게 잘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하긴 하네.'

그런 사람이 적은 돈 받고 보링턴 남작한테 고용될 이유가 있었을까?

어쨌든 불꽃과 번개 중 하나는 배워야 할 것 같았다.

-왜 둘 다 배울 수도 있게 되어 있지?

[둘 다 배울 수도 있음. 그러나 추천하진 않음. 하나를 마스터하는 것도 힘든 일임.]

확실히...

아래 [고난이도]라고 쓰여 있는 걸 보니 혼백 타격술보다 배우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아마 신체 강화랑 적합하게 섞어 쓰는 것도 힘들겠지.

'그냥 선택하자.'

내가 첫 번째로 선택한 건 [사령 번개].

타격무기를 주로 쓰는 내 특성상. 

절삭력을 높이는 강화 보다 상대를 마비시키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선택한 건 [이식 - 육체 변형].

-심장을 두 개 쓸 수 있다고?

[다양하게 활용 가능한 기술임.]

[심장이 꿰뚫릴 경우 내출혈을 치료하는 동시에, 두 번째 심장이 뛰게 하는 식으로 이식 가능함.]

[또한 초식을 주로 하는 2형, 3형 마수를 잡으면 해당 동물의 소화 특성을 이식해 더 많은 근육을 만들 수도 있음.]

'와, 씨...!'

사령 기사, 만능이잖아.

그런데 이 짓을 해서 50점을 찍을 정도면 이미 정규 기사급을 넘어선 게 아닌가?

아니면 정규 기사가 그만큼 강한 것인가.

검은 책에게 그걸 물어보니 의외의 답변을 뱉었다.

[앞서 말했듯 귀속자는 다른 이들과 다름.]

[보통의 사령 기사 후보생들은 고위험군 마법을 전혀 배우지 못하며, 50점을 찍은 상태에서도 1000 다르마 정도의 마력을 유지함.]

[또한 귀속자의 습득력 역시 비현실적으로 빠른 편임.]

-흐음... 그 정돈가.

[대부분 사령 기사 후보생들은 하급 임무로만 50점을 채우고, 배운 열 다섯 기술 중에서도 몇 가지만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이들임.]

내가 좀 대단하구나 싶었는데, 책은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최상위권 자제들을 제외하면. 그들은 외격임.]

-얼마나 강한데?

[자기 마력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마법이 있음. '혼백 유전술'... 대마녀 가문의 자식들중 최고위 인물들은 부모로부터 막대한 마력을 물려받고 태어남.]

'허어...'

난 일부러 '얼마나 많이 받아?'같은 건 물어보지 않았다.

일단 내 성장세만 해도 엄청 빠르고, 남의 상황을 알아봐야 배만 아프기 때문이었다.

*

그 후로 나는 수련에만 열중했다.

'애초에 혼백 타격술도 완성하지 못했어.'

혼백 타격술을 수련하려면 살아있는 타겟이 필요하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검은 마력을 때려 박을 때의 느낌과, 물질에 검은 마력을 때려 박을 때의 느낌이 아예 다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내가 배운 기술들은 총 다섯 가지나 되었기에...

솔직히 하루를 다 쓰는 것도 엄청 빠듯했다.

나는 잠도 줄여가면서 수련에 매진했다.

'그나마 제일 쉬운 게 갑주 만들기랑 안개 뿜어내기다.'

마치 자전거 페달을 자동적으로 밟는 것처럼, 전투 중 상시 안개를 뿜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온몸에 갑주를 걸친 채로.

'젠장... 땀나네.'

물론 이 짓을 하면 마력 소모량이 엄청나, 2000다르마에 달하는 나의 마력도 몇 분 안에 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그럼 핑 하고 현기증이 돌았지만...

[마력 효율의 개선이 필요함.]

정작 나는 어느 때보다 즐거웠다.

하루하루 새로운 걸 배우고 나아진단 느낌.

더 강하고, 더 능력있는 내가 되어간단 느낌.

그리고 이 세상은 그것에 대해 확실히 내게 보상해 줄 수 있었다.

그렇게 검은 책의 매뉴얼에 따라 수련을 하기 며칠.

어느 날 아침에 나가보니, 처음 보는 검은 머리의 소년이 오만한 표정으로 차렷 자세를 한 채 우리 집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

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겨울인데도 제대로 된 옷을 걸치지 않고, 승려복 비슷한 걸 입은 소년. 다만 옷의 재질 등을 봤을 때 범상한 인간은 아니었다.

또한 그의 옆에 비슷한 느낌의 반쯤 헐벗은 남자들이 무서운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으니, 사람들은 이 주변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로커스트인들이잖아.'

이 새끼들은 안 춥나?

그런 생각으로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갑자기 소년이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2188년, 물병자리의 달. 위대한 로커스트 카운슬의 일원이신 대마녀 카밀라 앱 헤롯 님께서 유진 님께 전언을 전하십니다."

"..."

"대마녀, 카밀라 앱 헤롯 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최근에 제국과의 외교에 관한 일로 매우 바빠, 하나밖에 없는 제자의 안위를 챙기지 않았으니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리하여 오늘 저녁에 자리를 만들 예정이니, 제자 유진의 참여 여부를 조심스레 물어보는 바이다.'"

"..."

"이상입니다."

마치 남의 말을 들은 다음 '약해 보이거나 비공식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수정해 놓은 대본을 읽는 것 같았다.

소년은 내게 걸어와서 한마디를 더 했다.

"카밀라 님께선 참여 여부를 물으셨습니다. 허나, 사실... 이를 거절하여선 안 됩니다. 카밀라 님 께서는 자비를 베푸실 확률이 높지만..."

"높지만?"

카밀라는 의외로 권위 의식이 없었다. 

하지만 자기 위치란 게 있으니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 한단 부담감이 있겠지.

"거절하시면 많은 로커스트인들 및 열혈 대마녀 추종자들에 의해 피해를 입으실 수 있는 점 미리 알려드립니다."

"열혈 대마녀 추종자요?"

"그렇습니다. 카밀라 님은 로커스트 내에서 인기가 많으십니다."

그리하여 소년 주변의 병사들을 바라보니...

정말 질투 섞인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얘들도 꽤 치는 애들인데...'

딱 봐도 나보다 마력이 많은 이들이 그러고 있으니 참 무안하달까.

어쨌든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으므로 참석의 의사를 밝혔다.

"가지."

"감사합니다."

로커스트인 세 명은 그렇게 말하고 눈밭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

맨발로 말이다.

검은 마력이 아무리 많아도 '감각'이 발달해 시리긴 하던데...

쟤들은 괜찮은 걸까?

하여간 특이한 족속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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