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 40-45

[사령 기사가 초월급 외모를 숨김]

카밀라 앱 헤롯.

그녀는 내게 사령술을 가르친 스승이었고, 굉장히 높은 사람이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본 건 2형 마수를 처치하고 돌아왔을 때다. 

그녀는 무슨 학종이로 학 접는 것마냥 몇십 초 안에 마법 아티팩트를 만들어 내게 선물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그런 건 금화 백 장을 써도 제작이 어렵다더라.

'소름이 돋았지.'

근데 그런걸 빼빼로데이의 빼빼로처럼 줘버리니...

그 능력이 경악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엄청 높은 사람이었어.'

이는 하인들의 태도로 알 수 있었다.

그때 하인들은 부리나케 달려와 그녀의 발 아래 카펫을 깔아줬는데...

사실 카밀라는 그조차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그녀를 맨 처음 만났을 때, 카밀라의 발은 지상에서 살짝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늘에 떠다니는 여자한테 레드 카펫이 무슨 소용일까?

그럼에도 하인들이 극진하게 카펫을 깐 건 아마 보여주기 위함일 터.

'아마도 대마녀는 국가적 위상에 해당하는 존재겠지. 제국의 공작처럼.'

그런 사람들은 평소에도 품위를 유지할 '의무'가 있으니, 항상 좋은 옷을 입고 격식 있는 행동을 보여야 했다.

본인이 싫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얕보이거나 내려치기 당하는 순간 피해를 보는 건 본인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그녀를 만나려면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

질 낮은 밀랍 거울을 들여다보니 내 모습이 보였다.

산발이 된 머리, 듬성듬성 난 수염, 일주일 정도 갈아입지 않은 겨울용 셔츠, 가죽조끼, 후드 달린 망토.

한 달 정도 입어서 누더기가 된 옷들이었다.

그나마 피부가 좋고 목욕을 해서 사람처럼 보이긴 하지만, 이 복장으로 카밀라를 만났다간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을지 알 수 없었다.

'후.'

준비할 게 많았다.

*

아인베르트령 1구부터 5구까지.

여기는 '귀족 마을'이란 멸칭으로 불리는 아인베르트 내의 고위층 생활 구역이었다.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밥 한 끼에 금화 한 장을 받아먹고, 옷에는 진짜 금이 달려 금화 수십 장을 호가한다는 괴담이 떠도는 곳이기도 했다.

애초에 평민들은 통행 허가서를 들고 있지 않으면 들어갈 수조차 없었으니, 안쪽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실제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평민이지.'

바라칼을 죽여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5구 안에 발을 들이려면 수 장이 넘는 통행 문서를...

"잠깐. 이 초대장은...? 세상에, 빨리 들어가십시오!"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카밀라가 써놓은 초대장을 보여주자 경비들이 혼비백산하면서 바로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들어가도 되나요?"

"오늘 아침 로커스트의 사절단이 찾아와 미리 행정 처리를 해놨습니다."

"아..."

이 사람들, 진짜 일이 철저하구나.

어쨌든 그리하여 안에 들어가 보니...

'세상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흰색의 도시가 보였다.

'이게, 중세라고?'

이곳은 중세라고 하기엔 기괴할 정도로 수준 높은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과장을 좀 보태면, 한국에서 수십억 주고 살 수 있는 아파트 단지의 정원보다 정갈하고, 아담하고, 분위기가 있다고 할까.

철저하게 심미적으로 계획된 거리를 보는 것 같았다.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아담한 집들은 명확한 규칙에 따라 배치되어 있었고, 뒤쪽엔 귀족의 친척들과 부유한 상인들이 살아가는 고성들이 새것 같은 자태를 유지했다.

전반적인 테마는 흰색과 어우러지는 녹색의 나무들.

보도블럭은 틈 없이 서로 이어져 있었으며, 바닥엔 쓰레기는 커녕 얼룩 하나조차 없었다.

'아니, 이상하다. 지금 눈 오고 있잖아? 겨울이고.'

뭔가 위화감이 들어 하늘을 보니...

'뭔...?'

푸른 마력으로 이루어진 반투명한 막이 보였다.

얼핏 보면 인지하기조차 힘든, 거대하고 투명한 막이 도시 전체를 덮고 있었다. 그 위에선 계속 눈송이들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배리어에 닿자마자 치직- 하고 증발해 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육성으로 욕이 터져 나오려고 하는 걸 간신히 참았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귀족마을이라 불리는 지역이 꽤 넓은데... 이걸 다 덮는다?'

아인베르트 1구부터 5구까지.

한국에 비교하자면 동보다 좀 작은 단위의 행정구역이 다섯 개쯤 붙어 있다고 보면 된다.

근데 그 위에 거대한 반투명 마법 우산을 씌워서 눈을 증발시킨다고?

눈이 떨어지면 더럽고, 미관상 안 좋으니까?

'...어지럽네. 저게 있었으면, 나도 군대 있을 때 눈 안 치웠겠다.'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는 게 다르다는 걸.

심지어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도 품종이 좀 다른 것 같아.'

중세 평민들의 외모는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마력을 배운 기사들을 제외하면 다들 허리는 구부정하고, 키도 작고, 라운드 숄더에, 깡마르고, 피부엔 곰보가 피어 있었으니 그랬다.

당연히 입 냄새, 땀 냄새 등 온갖 체취도 심했는데...

5구의 행인들은 달랐다.

일단 여자든 남자든 키가 컸다.

그들은 허리를 딱 세운 채 걸어 다녔으며, 옷 역시 '아름다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인 게 티가 났다.

"허."

비록 무늬가 들어가 있어, 현대 관점에서 보면 뮤지컬 배우 복장 같긴 했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깔끔하고 멋있었다. 

'아... 씨. 여기선 내 비주얼이 좀 딸리는군.'

솔직히 보링턴 영지에선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편이었는데, 여기선 아니었다.

'그래. 왜 옷이 필요한지 알겠다.'

일찍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가장 커다란 옷 가게로 들어가자...

탈 중세적인 매장의 구조가 눈에 보였다.

'이야...'

8구의 옷가게보다 열 배는 커다란 매장 안.

깔끔하게 관리된 대리석 벽면엔 귀족들이 입을 법한 옷들이 하나씩 전시되어 있었고,

'옷 가게를 경비하는' 병사들이 세 명 정도 선 채 죽일 듯 날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 복장만 보고 거지인 줄 아는 거겠지.

가게 주인은 귀티가 풀풀 나는 중년 여성이었는데,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딱 봐도 날 싫어하는 게 눈에 보였다.

"흠, 귀부인을 만나는데 옷이 필요하시다고요? 물론 이해는 합니다만."

"..."

"보아하니 5구에 들어오신 평민분이신 것 같은데, 옷을 아무리 잘 입으시더라도 티가 날 거에요..."

"...?"

그 말을 들으니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게 이러는 게 당연하다는 분위기였다.

'...말이 되나? 이게?'

옷 가게 여직원들이 '어머! 고객님! 완전 딱이시다! 완전 잘 어울리세요!' 하고 말하는 건 들어봤다.

하지만 '닌 우리 옷 입어도 안 되니 나가라.'는 처음.

옷을 살 돈이 충분히 있다 말해도 들려오는 대답은 같았다.

"갑자기 떼돈을 버신 분들은 아틀라스 제국에 많지요. 산적을 처단하시거나, 영외 던전에서 보물을 찾으신 분들... 하지만 그런 분들이 저희 옷을 입고 품위를 유지하지 못하신다면 브랜드 이미지에도 악영향인지라."

"..."

이쯤 되니 슬슬 화가 뻗쳤다.

손님이 왕이란 말을 정말 싫어하지만...

'여기서 손님이 왕이라고 하면 반역죄로 잡혀가지. 왕족을 사칭했단 이유로...'

그래도 날 이렇게 차별하는 건 기분이 좀 나빴다.

"그래서 옷 가게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까? 없는 품위라도 돈 내고 만들려고요. 오히려 오늘 뵐 분이 제 옷차림에 실망한다면, 과연 이 가게에 대해 호감을 가지실까요?"

"오호호. 무례에 사죄드려요. 하지만, 제 입장에서 무턱대고 믿을 수도 없는 말인지라..."

거 참.

내가 누구 고소하는 것도 아닌데 증거를 요구하는 꼴을 보니 기가 막혔다.

여주인의 표정을 보니 '네가 누굴 만나는지는 모르겠는데, 진짜 귀한 분이면 생각 좀 해볼게!' 같지 않은가.

어이가 없어 초대장을 보여주니...

"...힉?"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방향을 잃어버린 동공은 지진을 일으켰다.

초대장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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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장]

로커스트 카운슬의 일원, [카밀라 앱 헤롯]이-

직계 제자인 [유진]을 식사에 초대합니다.

-장소 :

아인베르트 5구, [에이블린 스테이크 하우스]

-시간 :

2118년, 물고기자리의 달, 두 번째 날.

해가 가라앉은 시점

* 본 문서의 소유자, 카밀라의 직계 제자인 [사령기사 유진]님에게 '일시적으로' 로커스트의 국빈 자격을 부여합니다.

* 금일 [유진]의 아인베르트 5구 통행을 방해할 경우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알립니다.

※ 로커스트 카운슬의 일원이시자, 대마녀인 카밀라 님과의 약속에 늦는 건 외교적 무례로 비출 수 있으니, 미리 와서 기다리시길 권장드립니다.

※ 로커스트와 아틀라스의 미의식은 다르지만, 적정량의 품위를 유지하지 않으신다면 외교적 무례가 될 수 있는 점 양해 바랍니다.

[로커스트 카운슬 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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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그녀는 볼살을 파들파들 떨며 말했다.

"카, 카밀라 앱 헤롯 님이... 오늘 아인베르트 5구를 방문하신다고요?"

"예."

"그리고 당신은... 카밀라 님의 직계 제자고?"

이거 참.

신분 낮은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아- 아하! 당신이 요즘 유명한 사령 기사 유진 님이셨군요! 만나 뵈어서 반가워요!"

그녀는 한참 고민하다 뭔가 떠올랐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보려는 저 땀방울을 보니 딱 봐도 긴장한 게 티났다.

"제가 유명합니까?"

"오, 오호호. 귀, 귀부인들은 다 알아요! 악적 바라칼을 처치한 사령 기사 유진! 아인베르트령의 정의를 바로 세우신 분! 이라고. 제가 그런 귀하신 분을 몰라 뵙고..."

살짝살짝 눈웃음을 치면서 어떻게든 이미지 세탁에 들어가는 꼴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카밀라. 진짜 높은 사람이긴 하구나.'

5구. 

밥 한 끼에 금화 한 장을 받고.

그저 추레하단 이유만으로도 축객령을 내리는 이곳에서도 카밀라의 권위는 높았다.

초대장만 보여줘도 이 꼴이 나니 카밀라가 얼굴이라도 보여주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었다.

"저, 저희가 최선을 다해 꾸며드릴게요! 유진 님. 그러니 부디..."

"예. 예. 무슨 말 하는지 압니다. 이 가게에서 코디 받았다고 할 거니까, 최선을 다해 꾸며주세요. 돈은 충분히 있습니다."

깨갱!

그녀는 결국 꼬리를 내리고 독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날 싫어하는 느낌은 아니었고, '오늘 전 남친 결혼식이에요. 최대한 빡세게 꾸며주세요.' 라는 주문을 받은 미용실 원장 같았다.

이제 그녀에겐 날 최대한 꾸며 놓을 이유가 생긴 것이리라.

"일단 미용실로 와서 머리부터 정리하심이 어떨까요?"

난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신기하게도 넓은 매장 안에 본격적인 미용실이 있었는데...

귀족들이 옷을 사러 왔다가 어울리는 머리도 해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진짜 사치스럽구나.'

어쨌든 그렇게 머리와 옷을 잘 꾸미자...

"...오."

거울 속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

'이게 뭐야...? 이게 나라고?'

일단 머리.

내 머리카락은 남자치곤 긴 편이라, 장발에 가까웠다.

중세 시골 마을에 미용실이 없었던 지라 내가 스스로 대충 자르고 다녀서 이렇게 된 건데...

확실히 미용사가 전문적으로 다듬은 머리는 격이 달랐다.

살짝 웨이브가 진 흑발은 이목구비를 가리지 않은 채 얼굴 옆쪽으로 떨어졌고.

뒤쪽으로 포니테일처럼 묶은 머리는 예술가, 기사, 음유시인같은 느낌도 조금 주었다. 

남자치곤 부드러운 느낌이라 해야 하나. 

반면 남성적이고 샤프하게 다듬은 눈썹 덕에 평소보다 더 냉철하고 엄격해 보이는 인상을 주니...

서로 상충되는 요소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져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깔끔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난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게... 나?'

솔직히 본인이 거울보고 미남이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한 번에 10만원하는 미용실 갔다 나온 것처럼 만족감이 들었다.

그뿐인가.

내가 입은 옷도 그랬다.

"오, 옷은 어떠세요? 좀 맘에 드시나요?"

깔끔한 하얀색 린넨 셔츠 위로 검은색 베스트를 입은 상황. 

그 위에 검은색 코트를 덮어 마무리했는데, 코트 자체의 마감이 워낙 좋고, 각진 어깨 핏을 완벽하게 살려주는 쪽이라 멋있었다.

"와..."

군대에 있을 때도 옷빨이 잘 받는 편이었다.

하지만 검은 마력을 받아들인 이후 근질이 더 좋아진 상황.

옷 자체의 핏, 퀄리티, 내 키와 디자이너의 손길이 어우러지니...

'사령 기사가 초월급 외모를 숨김.'

거울 속 남자의 리즈시절은 바로 지금이었다.

"저, 저기 유진 님."

"예?"

그리고 난 생각치도 못한 이득을 하나 더 봤다.

"저희가 오늘은 무례를 저질렀으니 이번 옷은 무료로 드리겠습니다. 부디..."

"뭔 말인지 압니다. 여기서 옷 했다고 말씀드릴게요."

"가, 감사합니다!"

그래도 아줌마가 꾸벅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니 최대한 열심히 꾸며준 것 같아 좋았다.

날 처음엔 무시했지만...

그래도 금화 수십 장 어치 옷을 무료로 줬으니 갈음이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태도가 진심어렸기에 모질게 굴고 싶진 않았다.

"안녕히 가십시오!"

경비 세 명과 옷 가게 주인이 동시에 고개 숙이는 걸 느끼며, 난 새사람이 된 채 바깥으로 나갔다.

'시간이 의외로 많이 남네.'

지금 시간은 오후.

잠시 시간을 보내려 카페 의자에 앉으니, 커피 가격이 오십 실링이었다.

'머리가 깨졌나...?'

뭐. 정신이 나가버린 가격이긴 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앉아서 풍경을 바라보는데...

"...야. 저거 누구냐? 왜 동양인 새끼가 5구에 앉아 있지?"

"나도 몰라."

"아, 저 사람 사령 기사 유진 아냐? 요즘 유명한 사람?"

"아- 그 바라칼 잡았단 새끼?"

뒤에서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바라보니 에밀리나 브랜드를 떠올리게 하는 기사 후보생들이 서넛 앉아 떠들고 있었다.

귀티가 좀 나보이긴 했지만 태도가 껄렁한 것을 보니, 정통적인 귀족의 후계자라기보단 상속권 바깥의 놈들인 것 같았다.

'푸른 마력을 쓰는군.'

사령술사로 비유하면 중급 정도.

어린 나이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마력이었지만, 에밀리보다 강해 보이진 않았다.

'왜 에밀리한테 질 것 같냐.'

근육량이 무조건 싸움 실력과 직결되지 않듯, 마력량 역시 마찬가지라.

애초에 에밀리에겐 팔이 잘려도 방패를 들고 달려드는 호전성이 있었지만...

저들에게 그런 건 느껴지지 않았다.

'됐다. 신경 끄자.'

오늘은 중요한 날.

카밀라를 만나는 날인데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찾아갈 순 없었다. 

그러나...

"사령 기사? 요즘은 사령 기사들도 기사라고 불리나? 그냥 사령 술사 아냐?"

"옷 입은 꼬라지를 보니 돈은 있나 본데. 주제에."

"바라칼이 재산이 많았나봐? 새끼.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놈을..."

뒷담화는 그저 말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냥 병신인가보다, 하고 무시하는데... 

갑자기 일행 중 하나가 내 탁자로 다가오더니-

-퍽!

"어이쿠, 실수!"

일부러 부딪혔다.

하얀 탁자가 넘어지고, 식은 커피가 엎질러지며 새 옷에 거대한 얼룩을 남겼다. 누가 봐도 고의라고 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녀석들은 질 나쁜 불량배마냥 내게 말했다.

"아, 미안해서 어쩌나. 정말 미안하군, 평민."

"..."

"내가 세탁비를 주지."

그리고 녀석은 띵! 하고 손가락으로 금화 하나를 튕겼다. 

금화 한 장이 데구르르-하고 탁자 위에서 구르다가 멈췄다.

'후우...'

주변을 둘러보니 귀부인들이 날 보고 시시덕거리는 와중이었다.

-호호호. 동양인 주제에 우리 도시에 앉아 있다니... 아인베르트도 상당히 개방적인 나라가 되었군요.

-어디 어떻게 나오나 볼까요?

이쯤 되면 나도 마냥 참을 순 없었다.

나는 사령기사 유진.

이 이름에 자부심은 별로 없지만, 이름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다.

도시에서 이런 모욕을 당하고 참는다면. 

귀부인들이 내 이름을 저렇게 떠들어 댄다면.

이 세상 어떤 귀족이 내 이름에 금화를 걸고 임무를 맡기겠는가?

뒷담화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 정도 무례를 저질렀으면 나 역시 참아선 안 되었다.

'빨리 끝내자.'

나는 커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앉은 채 침착하고 명료하게 말했다.

"한심하군. 사과를 할 거면 제대로 하시오."

"허...?"

일부러 고풍스런 말투를 써서 제대로 뜻을 전달한 상황.

내가 전혀 주눅들지 않자 오히려 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가 말했다.

"실례지만 당신은 평민이 아닌가? 내가 커피를 '실수'로 쏟아 미안하군. 하지만 그만한 보상을 했는데도 이렇게 나오는 건 상당히 무례하다고 보는데!"

오히려 나한테 뒤집어 씌우려는 인성.

아주 비겁했다.

허나 나도 중세에서 2년 정도 살았고, 험한 꼴 좀 본 사람이라. 그동안 내 말빨은 많이 늘었다.

"혹시 귀족의 예절이라 하는 건 동전을 던져 상대를 모욕하는 일인가? 혹시 당신 가문의 예절이오?"

"...그건!"

"당신들 말대로 난 졸부요. 품위는 없어도 돈은 있지. 그러니 이 돈은 그대로 가져가시오. 내 '너그럽게' 당신들을 용서하지."

난 그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금화 한 개를 손가락으로 튕겨 그대로 얼굴을 향해 날려 보냈다.

-툭!

간신히 손으로 잡아낸 기사 후보생.

그러자 그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이..."

"당신이 한 걸 그대로 했는데, 이게 무례하시오? 그럼 당신도 무례한 짓을 한 거지."

"이, 평민 주제에 쓸데없는 말을! 나와라! 결투다!"

그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에 던지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쟤들 눈엔 마력이 안 보이나...'

하긴. 

검은 마력이나 푸른 마력을 볼 수 있는 건 재능이라고 하긴 했다.

그는 아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었지만...

사실 내가 주눅들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난 한숨을 한 번 쉰 다음, 그가 준 하얀 손수건으로 커피 묻은 옷을 슥슥 닦았다.

이 손수건은 얼마짜리일까.

그러자 주변 모든 이들이 당황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왜 그 말 안 나오나 했네."

"..."

"갑시다. 근데 뭘 걸 거요? 내 명예가 심각하게 실추된 것 같아서 보통 돈으론 안 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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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 쓰레기! 애인 앞에서 남자친구를 때렸어!

내가 한국인 출신이라 그런지 모르겠는데.

아틀라스 귀족들의 연애사를 듣다 보면 뒤틀린 구석이 많이 보였다.

예를 들어 귀족 여자들.

그들은 결혼 전까지 순결을 유지할 의무가 있었고, 이를 못 지키면 비난을 받았다.

여기까지 들으면 '아, 아이리스 신앙 때문이군.'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결혼 후의 외도'를 낭만적으로 인지한다는 사실이었다.

'귀족 남자들은 부인의 외도를 눈감아야 해. 안 그러면 좀스럽단 소릴 듣지.'

제국에서 출판되는 대부분의 로맨스 소설 내용이 이와 같았다.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귀부인이 불륜을 저지르다 남편에게 돌아가는 내용.

보링턴 영지에 있는 몇 권 안 되는 책의 내용은 다 저것이었기에 쉽게 패턴화할 수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정략혼을 한 다음, 남편보다 육체적 조건이 뛰어난 이와 연애하다가, 가정, 도덕, 신앙 등을 이유로 갈라진다. 끝.'

이걸 실제로 하는 환경이니 귀족 남자들도 결혼에 충실하지 않더라.

그들은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 첩으로 들이곤 했는데...

문제는 재산 상속권이 정실의 장자에게 있단 점이었다.

첫째 부인이 초산으로 아들을 낳으면 말 그대로 재앙.

사랑하는 여자의 아들들은 결코 가주가 될 수 없었으며, 재산도 거의 물려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온갖 다툼이 다 일어나지.'

아틀라스 귀족 대부분이 이렇게 살았다.

둘째, 셋째의 경우 쥐꼬리만큼 재산을 상속받는 반면, 맏형은 가주 자리까지 가져갔다.

당연히 샘이 나는 상황.

그러나 결투는 너무 위험하고, 암살을 하자니 황실의 눈이 무서운 상황인지라...

재산을 못 받는 이들은 상당히 비뚤어진 성격을 갖는 경우가 흔했다.

우리는 이들을 망나니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내 앞에 있는 새끼.'

얘도 내가 볼 땐 전형적인 망나니 중 하나였다.

"뭐?"

너무 쉽게 결투를 받아들이자 불안했던 걸까.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너... 결투가 무슨 뜻인 줄 아냐?"

"그럼 알지. 모르겠소?"

일부러 비웃듯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결투의 뜻을 아시오? 아, 물론 아니까 하자고 했겠지. 그걸 모르고 했다면 정신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거요."

"근데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갑시다. 누구 아들인지 몰라도 오늘 피 좀 보자고."

그러자 뒤에서 애인처럼 보이는 여자가 다가왔다.

여자는 적어도 나한테 시비를 건 놈팽이보다 열 살은 많아 보였는데... 

스킨쉽 하는 꼬라지를 보니 벌써 할 건 다 한 것 같았다.

그녀가 부모의 원수 보듯 날 노려봤다.

"사랑스러운 쟝, 당신이 참아요. 동양인에게 예의를 바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이거 놓으세요, 로렌. 전 이 불명예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난 한마디 하려다 말았다.

아틀라스 귀족 문화상, 여자랑 말다툼하는 남자는 남자답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사령 기사 유진! 내가 오늘 버릇을 고쳐주마. 결투는 생사결이 아니다. 먼저 쓰러지거나, 불구가 되거나, 항복할 경우 패배 처리다."

"동의하오. 그럼 이제 돈을 거시오."

"돈밖에 모르는 천박한 놈. 너 같은 놈은 좀 빼앗겨 봐야 정신을 차리겠지. 좋다. 금화 백 장이다."

"백 장? 좋군.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갑시다."

"아아, 쟝! 당신이 날 위해 싸워준다니. 난 어떻게 해야..."

그가 준 손수건으로 옷의 얼룩을 쓱싹쓱싹 닦았다. 내가 한숨을 쉬는데, 그들은 나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싶었다.

"나의 레이디. 당신은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줄 필요 없소. 내 승리를 당신에게 바치겠소."

"아아... 쟝!"

둘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키스를 나눴다. 

카페에 앉은 사람들은 그걸 우와- 하면서 바라봤다.

여기서 불쾌한 건 오직 나뿐이었다.

'아이고, 옘병. 아주 지랄들을 해라. 지랄을.'

어쨌든 우린 그렇게 교회까지 갔다.

*

'난 언제 여자친구 사귀지.'

남중남고공대군대 전역 이후 바로 이세계에 끌려온 나는 아직도 여자랑 사귀어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고.

눈앞엔 법과 질서의 신, 토르크를 섬기는 신전이 있었다. 비록 아이리스의 교회보다 크진 않았지만 단순하면서도 감각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고급스런 건물이었다.

법과 질서의 신이라 그런 것일까.

교회 안쪽에 결투장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사소한 시비가 붙었을 때 자주 쓴다고 하였다.

'근데 왜 이 신은 왜 몸뚱이가 없을까?'

잠깐 토르크 신의 동상을 보니 몸뚱이가 없었다. 아이리스 여신은 일자 앞머리를 가진 평범한 여인이었는데...

정작 법과 질서의 신은 몸뚱이 없이 투구만 뜬 형태라 왜 그런지 궁금했다.

어쨌든 가만히 동상을 보고 있자니, 청동 투구를 쓴 신관이 걸어 나와 권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두 결투자가 이곳에 모였으니 법과 질서의 신, 토르크 앞에 엄숙히 맹세하시오. 기사 후보생 유진. 당신은 패배하면 금화 백 장을 지불할 것이며, 상대방을 죽이면 패배가 될 것이오. 이를 인정하시오?"

"예."

"쟝. 마찬가지요. 패배하면 금화 백 장을 지불할 것이고, 상대방을 죽이면 패배가 될 것이오."

"인정합니다."

"좋소. 이 시간부로 결투를 승인하오."

갑자기 청중석에 있던 30대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뛰어와 쟝의 품에 안겼다. 

토르크의 사제조차 눈살을 찌푸렸는데, 오히려 다른 교회의 사람들은 그게 로맨틱한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쟝. 지지 말아요."

"유진. 네가 불쌍하군."

"...뭐?"

"넌 승리해도 이 영광을 바칠 레이디가 없겠지?"

'레이디'엔 숙녀라는 뜻도 있지만.

귀부인이 기사한테 '내 이름을 팔아도 됨.'하고 권한을 부여한단 의미도 있었다.

그런 의미를 따지자면 내게도 레이디가 있었다.

'에스트라드.'

하지만 이 상황과는 맞지 않을 것 같아 다른 말을 했다.

"레이디는 없지만 내가 수학한 사문, 사령술을 가르친 스승에게 오늘의 영예를 바치겠다. 명예로운 결투를 하자."

의외로 정갈한 말투에 주변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동양인인데 의외군, 외지인인데도 상당히 태도가 예스러워...처럼 약간의 호감이 내포된 말들도 흘러나왔다.

분위기가 내 쪽으로 치우치려 하자-

쟝의 애인이란 여자는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듯 말했다.

"흥. 보통 연애해 본 적 없는 동정들이 그렇게 말하곤 하죠."

순간 욱하고 올라왔다.

'이런 씹... 좀 치네?'

솔직히 좀 긁혔다. 

하지만 결투는 말로 하는 게 아니라 주먹으로 하는 법. 그녀가 혓바닥으로 벌어놓은 업보는 그 애인이 주먹으로 치르게 될 것이었다.

*

쌀쌀한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날.

우린 씨름판처럼 생긴 커다란 원형의 싸움판 위에 올라가, 20m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토르크의 사제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말했다.

"사령 기사 유진. 안타깝지만 결투 시에 무기는 따로 지급되지 않소. 괜찮으시오?"

"괜찮습니다."

목을 우드득- 꺾고 구결을 외웠다.

'세상 누가 널 노리더라도, 내가 보호하겠다.'

구결을 외자 머리 위에 메이스, 장검, 방패 등의 냉병기들이 떠올라 규칙성 있게 자리를 잡았다. 

난 그중 메이스랑 방패를 쥐고 싸울 준비를 마쳤다.

"흥. 잡기술을 쓰는군."

반면 상대는 처음부터 은빛의 갑옷을 입은 상태. 

흉갑이 있어 든든했고, 아틀라스의 표준 무장인 검과 방패는 변수 차단에 용이했다.

사령술로 만든 무기도 물론 단단했지만, 실제 철로 만든 검이 더 강했기에 조건은 내가 더 불리했다.

하지만 왜일까.

내가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꼭 이겨요, 쟝!"

응원이 좀 화나긴 했지만, 올림픽 나간 선수의 마음으로 집중하기로 했다. 

"...결투 시작!"

-파밧!

토르크의 사제가 우렁차게 외치자, 결투가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모래 먼지를 튀기며 내 앞으로 돌진하는 쟝. 

나는 살짝 감탄했다.

'오... 솔직히 예상외군.'

놈의 속도는 질풍처럼 빨랐기 때문이었다.

에밀리, 브랜드, 카덴 등. 

종자부터 시작한 후보생들과 마력량 자체는 비슷했지만, 그걸 활용하는 스킬 자체가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놈은 바닥에 붙은 그림자처럼 순식간에 접근한 다음-

"버릇을 교정해주마!"

순식간에 허리를 비틀며, 신체 전반의 회전을 이용해 베기를 넣었다. 

잔뜩 회전이 들어간 검격.

그걸 본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릭바오보다 강해. 대충 막으면 안 된다.'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구결을 외웠다.

'두려움, 그것이야말로 가장 단단한 감정일지니-'

순식간에 방출된 검은 마력이 팔과 다리를 타고 흘렀다. 피부를 자연스레 덮는 에너지. 그것은 울컥거리며 솟구쳐 갑주의 형상을 이뤘으니-

'고통받는 피륙을 감싸게 하라.'

이것이 바로 사령 갑주였다.

그 효과는 방패와 메이스에도 미쳤으니, 검은 마력이 들어간 방패는 강철만큼 단단해졌다.

그의 검과 내 방패가 부딪히자-

-쾅!

"크윽...!"

충격파가 퍼져나가며 흙먼지가 폭발했다.

손발이 부르르 떨리고, 무게중심이 흔들렸다. 하지만 새로 만든 사령 갑주는 터지지 않았다.

놈이 날 보고 이죽거렸다.

"흐... 나이를 그만큼 먹었으면서 마력량이 그것밖에 안 되다니. 그게 너의 한계다. 평민. 더럽게 혼백을 흡수해 봐야 티끌만큼 강해지겠지."

확실히.

비교적 어린 나이에 저 정도 마력을 쌓은 건 대단하긴 했다.

에밀리도, 브랜드도, 카덴도 저놈보단 나이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나 역시 (카밀라 피셜) 괴물 같은 재능을 타고난 인간이라.

"...내가 얼마나 수련했는지 알아?"

"한 이십 년 했겠지."

"두 달이다. 새끼야."

"...뭐?"

쟝은 눈썹을 찌푸리며 검을 휘둘렀다. 

재차 소용돌이처럼 날아오는 회전격. 

그러나 난 싸워주지 않고 뒤로 빠지면서, 사령 검술 네 자루를 날렸다.

"이 비겁한 새끼! 잔재주를!"

사령 검술.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다고 한들 대처하기가 어려운 기술인지라.

인간의 관절보다 자유로운 루트로 움직이는 검들이 공중을 활보하며 그의 약점을 노리자, 놈 역시 당황하면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귀족은 역시 귀족.

쟝이 검을 휘두르자 사령 검술 중 하나가 그대로 박살났다.

'공격력 자체는 강해.'

그는 검에 회전력을 실어 후려치는 기술을 사용했는데, 파괴력이 발군이었다. 애초에 같은 인간보다 갑옷 입은 초인이나 괴물을 베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일 터. 

분명 가전 무술일 게 분명한 그것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별로 긴장이 되지 않는 건.

'...공격 패턴이 정직해.'

검은 마력으로 몸을 강화한 채, 상대를 죽이겠단 일념으로 후려치자-

-쾅!

"끄흑!"

방패 찌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흙먼지가 튀고, 놈과 내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이 자식이!"

-쐐애애액!

살벌한 기세로 소용돌이치는 검격.

그의 검을 한 발자국 물러서는 것으로 피했지만, 날카로운 충격파가 터지며 내 콧잔등 위 피부가 아예 찢어졌다. 

-파박!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검의 충격파만으로도 피부를 찢어버리는 경지. 

그러나 이 와중에도 내가 죽거나 다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크흐흐. 어떠냐!"

"쟝! 잘하고 있어요!"

'영혼은 삶을 강요하는 폭군이라.'

난 사령 화살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새로운 기술을 쓸 준비를 했다.

'아직 미숙해. 이걸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1초.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사령 번개.

상반되는 두 개의 심상으로 검은 마력을 찢은 다음, 그걸 스파크의 형태로 폭발시키는 기예.

이는 마법보다 기술에 가까운 짓이라 아직 숙련도가 낮았다.

-파지지지직!

내가 메이스를 들고 위협적으로 번개를 피워 올리자, 놈이 잽싸게 방패를 들며 뒤로 물러갔다. 

그러나 이건 페이크.

난 바로 사령화살을 이용해 시간차 공격을 넣었다.

'꿰뚫어라.'

"제, 제길!"

공기를 찢고 사령 화살들이 쇄도했다.

내가 준비한 건 세 발.

목, 흉갑, 퇴로를 조준하며 쏘아진 살벌한 섬전들이 하늘을 날며 공간을 찢었고, 놈의 중심을 완전하게 무너뜨렸다.

"...이, 이 새끼! 비겁한 수를!"

"전장에 비겁이 있겠냐."

-파지직!

난 다시 한 번 메이스에 번개를 피워낸 다음, 놈이 방패를 치켜들었을 때 그대로 내리찍었다.

-까앙!

신체 강화로 핏줄이 올라온 팔.

거기에 솟구치는 검붉은 번개 줄기가 더해졌다.

메이스가 가르는 궤적이 섬광처럼 빛났고, 온몸의 힘을 실은 타격이 천둥처럼 내리꽂히니.

"커헉!"

물리적 타격에 가미된 검은색의 번개가 놈의 신체를 순식간에 내달렸다.

"윽, 으극!"

"쟈, 쟝! 무슨 일이 일어난 거에요!"

이제야 그에게 뭐가 부족한지 알 수 있었다.

'초식은 훌륭했어. 에밀리나 브랜드의 기술보다 살인적인 위력을 가졌겠지. 그것에 좀 더 익숙했다면.'

한 마디로 실전 경험이 없는 귀족가의 망나니인지라.

목숨을 걸고 싸우는 데에 익숙치 않단 소리였다.

하지만 놈 역시 초인.

놈이 가진 정순한 푸른 마력이 순식간에 몸의 기능을 되돌리는 게 보였다. 

시간을 주면 안 되는 상대라 판단하고 놈을 추격했다.

'신체 강화, 그리고...'

순식간에 허공으로 찢으며 쇄도하는 메이스.

한껏 힘 있게 내려친 일격이 놈의 방패를 말 그대로 우그러뜨렸다.

-까아아앙!

"크아아악!"

'혼백 타격술.'

타격 시점에 맞춰 마력을 확 뿜어내자, 폭발하는 검은 마력이 그의 몸속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었다.

"커헉..."

끝이었다.

녀석은 검은색 뭉텅이를 뱉진 않았지만, 입에서 피를 울컥 토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마 우그러진 건 방패뿐만이 아니겠지.

'신체 강화, 혼백 타격술, 사령 번개...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쓰면 어떻게 될까.'

난 그런 생각을 하며 말했다.

"가서 치료나 받아라. 결투는 내가 이겼다."

"...크흑."

침묵에 휩싸인 경기장.

난 당당하게 고개를 든 채 구경하러 모인 이들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어떠냐.'

아까까지만 해도 시끌시끌했던 경기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 수다스런 귀부인들도, 호사가들도, 남자 귀족들도 말을 못 이은 채 입을 헤 벌리고 있는 꼴을 보니...

참 기분이 좋았다.

'내 실력이 귀족의 자제는 이겨 먹을 정도가 되는군.'

성취감도 세게 들었고, 돈도 벌었고.

내게는 참 좋은 날이었다.

"쟈, 쟝...!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또한 제일 꼬신 건 그의 여자친구 반응이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기절할 것처럼 굴었는데, 솔직히 연기인 게 보여서 좀 짜증났다.

'그래. 진 걸 인정하라고.'

근데 경기장의 분위기는 내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나의 쟝! 나의 쟝이, 질 리가 없어요! 일어나요! 일어나, 쟝!"

갑자기 그의 여자친구가 쟝에게 소리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난 좀 소름이 돋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씨발. 너 싸워본 적 없지? 네 남자를 죽일 생각이냐?'

관중들이 말릴 줄 알았는데...

심지어 경기장의 관중들도 덩달아 그 분위기에 동조하기 시작하니, 나는 어이가 없었다.

"비겁한 사령술사! 신성한 결투에 마법을 쓰다니."

"관중 일동은 조용히 하시오! 제국법상 결투 시 마법, 화기를 사용하지 말란 조항은 없소!"

"그래도! 그래도...! 그냥 기분이 그렇다고!"

토르크의 사제가 우렁찬 소리로 말했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우우... 쓰레기! 애인 앞에서 남자친구를 때렸어! 외지인 주제에."

"쟝의 연인을 봐. 너무 불쌍해. 자기 애인이 저렇게 맞았는데, 얼마나 슬플까!"

"싸워라! 쟝! 일어나!"

아니, 니들 감정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쟝이란 사람 한 명이 죽으려는 게 문제라고.' 

솔직히 그가 죽든, 불구가 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가 만약 죽는다면 금화 백 장도 날아가는 상황.

난 당황스런 얼굴로 토르크의 사제를 바라봤다. 

'안 말려요?'

그는 투구를 가로저을 뿐.

아직 상대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단 뜻이었다.

'아니... 왜? 쓰러졌잖아?'

"아직 그는 쓰러지지 않았소. 두 발로 버티고 있잖소."

난 쟝에게 말했다.

"항복해. 네가 졌어."

"나는, 항복할 수 없다!"

그가 무리해 한쪽 무릎을 세우고 일어섰다. 입에선 피가 죽죽 떨어졌고,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내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

"이 새끼야. 죽으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괜히 지랄하지 말고 금화를 내."

"...넌, 넌 몰라! 이건 내 명예란 말이다!"

"..."

"레이디의 이름을 걸고 질 순 없어!"

내가 관중석을 바라보니...

쟝의 여자친구는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치 감동의 드라마 한 편을 본 듯 그녀를 보며 감탄했다.

"나의 쟝! 아아- 나의 쟝이 일어나 줬어요!"

왜일까.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공포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다른 관중들을 보니 그들 역시 쟝을 부추기고 있었다.

'미쳤어...? 다들?'

"힘내라! 쟝! 동양인에게 본때를 보여줘!"

"아암- 아무리 생사결이 아닐지라도 결투에서 등을 돌릴 순 없지!"

"저걸 봐라! 저거야말로 아름다운 기사의 모습이다!"

저들 중 아무도 쟝이 다치거나 죽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새끼. 원래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팔이나 다리 하나 정도는 자르자. 이건 답이 없다.'

내가 주먹을 꽉 쥐었을 때.

-그마아아안-!!!

우렁찬 함성이 들리며 공기가 말 그대로 터져나갔다. 

구경꾼들은 날아가려는 자기 옷가지를 붙잡은 채 모자를 눌러 썼고, 여인들은 풍성한 치마가 날리지 않도록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말 그대로 사자후.

공간 자체를 압도하는 그 기백에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니...

경기장에 한 남자가 침입한 게 보였다.

"결투를 중지하라! 토르크의 신관이여. 나의 명예에 걸고, 이 결투를 중지해 주시오!"

'말도 안 돼.'

푸른 마력만으로 이 운동장 전체를 덮어버리는 괴물 같은 기사.

딱 봐도 비싼 찬란한 갑주를 걸친 이의 정체는-

"나, 붉은 여명 기사단의 호스피탈러, 아이작! 내 명예를 걸고 간곡히 부탁드리오! 신관은 이 결투를 멈춰주시오!"

'아, 씹. 저건 못 이기겠다.'

그의 이름은 노기사 아이작.

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며, 스무 번이 넘는 전투를 승전으로 이끈 괴물. 백 오십 년 동안 푸른 마력을 쌓은 고인물이자...

'전단지 공간 잡아먹는 새끼...'

백 살 넘게 살면서 내 영업을 방해하는 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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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스승이 S급 매력을 숨김

백 오십 년을 수행해 온 노기사.

기사단식 기수로 따지자면 무려 나보다 백 기수 이상 높은 인간이었다.

'돌겠군.'

그야말로 판타지라 나올 수 있는 숫자.

대학교로 치면 나보다 백 학번 높은 선배가 찾아온 꼴이었다.

게다가 그의 나이는 결코 허수가 아니라서-

뿜어내는 기백만으로 결투장 전체를 꽉꽉 채웠고, 노도같은 푸른 마력을 뿜어내 주변을 압도하였으니... 

관중들 중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저게 몇 다르마야? 천? 만? 미쳤나?'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뭐 하나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장비, 마력량, 전투 경험... 

내가 빠르게 강해졌다고 한들 지금 저 괴물과 싸우면 단 1초를 넘기지 못하고 도륙당할 게 눈에 훤했다.

그러나 오늘.

노기사는 내 적으로 온 게 아니었다.

"쟝 플레뵈르! 너는 아이작 기사단의 나이트 에란트다. 자넨 누구에게서 예절을 배웠지? 자네 맞선임들이 그렇게 가르쳤나?"

"다, 단장님? 아, 아닙니다."

그 말을 듣자 PTSD가 올라왔다.

-네 윗기수 선임들 다 불러. 지금 당장.

"자, 잠깐! 아직 일곱 신의 이름으로 결투가 끝나지 않았소!"

토르크의 사제가 뭐라 했지만 노기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당당하게 결투장 안쪽으로 걸어온 다음,

-빠악!

갑자기 쟝의 얼굴을 건틀릿으로 후려갈겼다.

그러자 갑옷을 입은 성인 남성의 육체가 z축 기준으로 1080도 회전한 다음 바닥에 처박혔다.

'...엄.'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다.

'당신이 패 죽이게 생겼잖아?'

어찌나 세게 후렸는지 두 대 맞았다간 신관도 필요 없을 지경이었다.

로커스트 최고 사령술사들도 죽은 사람을 되살리진 못하니...

불쌍한 쟝의 영은 하늘로 돌아가고, 그 혼백은 내가 흡수할 것 같았다. 아이작이 손수건으로 건틀릿을 닦으며 말했다.

"이번 결투는 네가 먼저 동전을 던져 시작되었다고 들었다. 쟝. 일어나 대답해라!"

그러자 놀랍게도 쟝이 쏜살처럼 일어났다.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을 보니, 역시 폭력만 있으면 저런 망나니도 길들일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흐, 흐렇흡니다."

"...후우."

노기사 아이작은 초로의 올백 머리를 차가운 건틀릿으로 쓸어 넘긴 다음,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사령기사 유진 경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솔직히 저 노인이 맘에 들진 않았다.

'정년퇴직이나 할 것이지...'

아이작은 유명한 기사였다.

영지의 모든 게시판엔 [아이작 기사단]의 전단지가 붙어 있었고, 당연히 의뢰를 받아가는 건수도 제일 많았기에 내 입장에선 곱게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개입한 판단은 깔끔했다.

'쟝이란 놈은 분명 귀족이겠지.'

딱 봐도 그는 귀족가의 일원이었다.

일단 평민은 5구에서 살아갈 수 없었고, 그가 쓰는 무술 역시 막싸움이 아니었으니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만약 내가 그를 죽이거나 사지 절단 불구로 만들었다면...

플레뵈르 가의 인간들이 날 피곤하게 했겠지. 한 마디로 아이작이 여기서 일을 수습한 건 아주 적절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아이작이 돌발행동을 시작했다.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새파랗게 어린 후배를 감독하지 못한 점, 정식으로 사과드리오."

갑자기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정중한 예를 취하는 게 아닌가?

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고개를 숙이기가 쉽다고?'

놀라웠다.

나보다 몇 배는 강한, 몇십 배나 많은 커리어를 쌓은 기사단장이 저렇게 머리를 숙일 수가 있나? 

밑에서 수백 명이 떠받드는데?

'아니. 절대 그렇지 않지.'

인간은 높은 자리에 있다 보면 아랫것들의 추켜세움에 익숙해진다. 

그래서 삼국지의 유비가 대단한 거다. 

보통 정신머리론 자존심을 철저하게 꺾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받아주지 않으면 내 불명예가 되겠군.'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고, 이를 몰아붙여 원하는 결과를 얻어낸다.

이는 군관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자질중 하나였다.

허나 다른 이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기에도 충분했다.

"하, 한항힘! 명예가...!"

"자기 잘못을 알고도 사과하지 않는 게 명예롭지 않은 일이다. 쟝 플레뵈르. 네가 사과하지 않으면 내가 할 수밖에."

"...흐, 흐럼 헤가 사과를..."

"이미 늦었다. 기사단 전체의 책임이 내 책임이다."

"헤헝합히하."

'보통 인간은 아니군.'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랑 체급이 다른 인간임에도, 동방의 외지인에게 고개 숙이는 데에 한 치의 부끄러움이 없다.

인격적으로 보든. 강함으로 보든.

그는 비범한 인간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렇기에 난 최대한 귀족스런 예를 갖춰 받았다.

"기사단장께서 극진한 예를 갖추시니 까마득한 후배 기사로서 영광이오. 앞으로 이런 일만 일어나지 않게 해 주시면 기꺼이 사과를 받겠소."

"정말 고맙소. 이번엔 내가 빚을 졌구려."

귀족다운 호탕한 마무리.

우리가 배우들처럼 합을 맞추자 결투장에 있던 청중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짝짝짝.

-짝짝짝짝짝짝.

"명예로운 결투였다!"

"역시 노기사 아이작 님이셔. 저 공을 쌓으시고도 저리 겸손하시다니..."

"저 동양인도 생각보다 품격이 있군."

'니들은 뭘 잘했다고 떠들어.'

물론 쟝이 불쌍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막말로 내가 여기서 놈을 불구자로 만든 다음 팔다리를 릭바오의 간식으로 던져줘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래도 짜증이 났다.

'대체 니들은 쟝을 왜 응원했냐? 기사로서 미덕을 다하며 죽어가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기 위해? 아니면 처절한 로맨스가 보고 싶었어?'

물론 사람이 죽는 건 중세의 엔터테인먼트긴 하지만... 

차라리 '죽여라! 죽여라!'라고 외치는 것보다 저런 게 더 불쾌했다. 

토르크의 신관이 따졌다.

"토르크의 율법상 '무릎을 꿇거나' '불구가 되지 않으면' 패배가 아닌데, 왜 결투에 간섭하신 거요."

"내장이 다치면 불구자가 아니란 거요? 내가 당신 복부를 몇 번 타격하면 불구자가 되나 안 되나 시험 한 번 해보겠소?"

"이, 이는 협박이오! 감히 지금 토르크를..."

"토르크 성전 기사단은 나랑 비슷하게 생각할 거요. 내 보장하지."

오히려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귀족적인 인간은, 그였다.

그는 말단 부하 하나를 구하려 본인의 자존심을 팔았고, 생판 모르는 동양인에게 망설임 없이 예를 갖추니 정신적 수준이 높았다.

"그리고 쟝. 결투 상대에게 돌아갈 돈은 네 월급에서 차감하겠다. 인성과 무예 수련에 집중하도록 해라."

"...할헸흡니다."

"유진 경, 불초한 후배의 팔다리를 자르지 않아 감사할 따름이오."

'딱 보면 보이는 건가. 역시 저 정도 올라가면 눈썰미가 생기는구나.'

간단히 목례하고 떠날 준비를 하자, 아이작은 쟝과 함께 다가와서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건넸다.

"유진 경이라고 하셨소?"

"아직 기사 후보생인지라 경은 아닙니다만."

"허어...! 사령술의 수준으로 보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겠지. 그런데도 마력량은 수준급인 걸 보니... 사령술에 경천동지할 재능을 가진 모양이구려. 미리 축하드리오."

"...감사합니다."

'무슨 인간들이 개코밖에 없냐.'

참으로 세상은 넓고 괴물들은 많았다.

"우리 가능성 있는 후배 님. 내 정식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혹시 시간이 있으시오?"

"죄송합니다. 오늘은 높으신 분과 약속이 있어서..."

아이작은 굉장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보다 높은 새끼가 있다고?' 같은 표정. 

하지만 내가 로커스트 인장이 찍힌 편지 봉투를 보여주자 그는 납득했다.

"역시. 당신 같은 후배 님이 로커스트와 연이 없을 리 없지. 아쉽구려. 검술 스승이 없다면 직계 제자로 삼았을 텐데."

"검술 스승은 없습니다."

그러자 아이작이 씨익 웃었다.

"참으로 호쾌하고도 재능 있는 젊은이구려. 내 조만간 시간을 내겠소."

"감사합니다."

인맥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라.

우린 그렇게 악수하고, 결투장을 나왔다.

사람들이 내 뒤에서 뭐라고 떠들었지만 난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저들은 옷을 잘 입고, 키도 크고, 돈도 많지만...

진정한 귀족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옷을 새 걸로 바꿔달라 할까. 아니, 시간이 없다.'

어느새 시간은 밤.

아직 달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해가 산 밑으로 고개를 숙이고 달이 떠오르려 하는 중이었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떨어졌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카밀라와의 약속이다. 좀 더럽게 간다고 해도 늦는 것보단 낫겠지.'

난 신체 강화를 걸고 도심을 질주했다.

"도심에서 마력을 쓰지 마시오!"

"못 배워먹은!"

"동양인!"

5구의 시민들이 욕을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과태료를 물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깟 과태로 좀 무는 한이 있어도 약속에 늦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그렇게 몇 분.

신체 강화를 건 채 쉬지 않고 뛴 결과, [에이블린 스테이크 하우스] 앞까지 제때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야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화려한 음식점 건물 앞.

오늘 아침에 본 로커스트 소년이 물방울 시계를 들고, 꼬롬한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흐음. 얼굴이랑 옷차림은 훨씬 나아지셨는데, 많이 다치셨군요. 도중에 싸움이라도 하신 겁니까?"

"어떤 기사 후보생이 내 옷에 커피를 일부러 쏟아서 결투하고 왔습니다. 노기사 아이작과 토르크의 신관이 결투의 증인이니..."

"예?"

갑자기 소년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카밀라님의 직계 제자인 당신의 옷에 커피를 쏟았다. 그것도, 약속 직전에? 혹시 반反로커스트 첩자로서의 기미는 없었습니까? 당장 고문을..."

"아닙니다. 그냥 양아치였어요."

"쩝... 아쉽군요."

대체 저 남자애는 무슨 세상을 살아온 것일까?

어쨌든 소년과 로커스트 무사 두 명은 나를 특등석으로 안내해준 다음 간단히 목례하고 물러났다.

"물방울이 천 번 떨어질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카밀라 님이 도착하실 겁니다."

"..."

특등석.

나른하게 이완된 상태로 테라스를 보니...

내려오는 저녁노을의 환상적인 빛이 커다란 연회장 전체를 비추며 떨어졌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대리석 테이블 위 정갈한 글씨체로 써진 메뉴판이 보였고, 웨이터는 아주 현란한 솜씨로 최고급 유리잔에 물을 따랐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귀족 영애들과, 자제들이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어머. 저 사람은 뭘까요? 특등석에 앉다니.

-글쎄요. 드레스코드는 맞는데, 저리 더러워진 옷을 입고도 들어온 걸 보니 참 급하셨나봐요.

-분위기나 흐리고... 근데 그 소식 들으셨어요?

그들은 얼굴엔 상처가 있고, 옷에 흙먼지와 커피가 묻어있는 동양인 사령 기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쟝 플레뵈르가 저 사람한테 맞아서 굴욕을 당했다고 하네요.

-어머머...

-쟝 씨가요? 왜요?

'소문 존나게 빠르군.'

입을 가리고 참새처럼 재잘재잘 떠드는 귀족 영애들. 그들은 귀부인, 기사 후보생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주둥이를 나불댔다.

-참 품위가 없네요. 아이작 경이 중간에 난입하지만 않았다면 쟝이 이겼을 텐데.

-불쌍한 쟝. 로렌은 얼마나 울었을까요?

-하! 저런 야만적인 동양인에게 지다니, 쟝도 수행이 부족하군요. 제가 기사라면 저런 무뢰배쯤은 이길 수 있습니다.

-어머! 멋져요! 나의 기사님.

난 그들을 바라봤다.

당연히 하지 말란 뜻이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눈웃음을 지으며 부채로 입을 가리고 더 떠들었다.

본인들이 아무리 무례하게 군들 절대 처맞지 않는단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게다가 저런 집단 사이엔 꼭 남자 하나가 끼어 쟝과 비슷한 역할을 했으니...

아주 든든한 모양이었다.

-오호호. 저 얼굴에 상처 난 것 좀 보세요.

-저 꼴로 레이디를 만나러 온 것 같은데... 과연 어떤 레이디가 올지 의문이군요. 기사가 저렇게 품위가 떨어져서야.

-아마 눈이 째진 동양인 레이디가 아니겠어요? 호호호...

내가 외모에 그리 민감한 편은 아니나...

에밀리보다 훨씬 매력 없는 영애들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비웃는 걸 듣고 있자니 사람 수준이 어디든 비슷하구나 싶었다.

그 무례가 드러나는 방향이 다를 뿐.

결국 사람은 본능적으로 외지인을 배척하고, 놀리기 좋은 대상을 끌어 내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럴 거면 초기 컨셉을 사령-야만전사로 잡는 게 나았겠군.'

-야만인은 무례하지 않소.

-왜냐면 무례하게 굴던 이들은 전부 맞아 죽었기 때문이지...

같은 소리나 하면서 깽판을 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라, 그냥 말없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오호호. 우릴 보는 것 좀 보세요. 화난 걸까요? 아니면 관심이 있는 걸까요.

-저런 남자를 만날 레이디는 뭐... 당신보다 훨씬 덜 아름다울 게 뻔하지요. 아니면 여기사께서 오실지도 모릅니다.

-여성으로서 살지도 못하고, 싸움이나 하는 투박한 여기사라니! 정말 저 동양인에게 딱 어울리는 반려로군요!

-아하하하하!

-한 번 얼마나 격이 떨어지는 여성을 만나는지 보자구요!

그때였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카밀라 앱 헤롯을 호위하는 로커스트의 기사들이 아주 정중한 예를 갖추면서 조심스레 이쪽을 살폈다.

살기 어린 시선.

혹시라도 카밀라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는지 찾는 표정이었다.

'저 인간들도 괴물이네.'

검은 마력을 어떻게 쌓았는진 모르겠다.

그러나...

카밀라의 정규 호위를 맡을 이들답게 하나하나가 정예 기사를 넘어서는 괴물들이었다.

에밀리 백 명이 달려들어도 저거 하나를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혹시라도 바닥에 함정 같은 게 있나 살피면서 VIP 경호를 시행했다.

-어머머. 남자들이 저렇게 옷을 벗고 다니다니. 역시 로커스트인들은... 야성적이랄까?

-그런데 지금 뭘 하는 거죠? 대체 누가 들어오길래 저런.

-긴장하지 마시오. 레이디. 어떤 여성이 들어와도 당신보다 아름답진 않을 테니.

-오호호... 고마워요.

그리고 마침내.

'아, 나의 스승님.'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카밀라 앱 헤롯.

대마녀. VVIP. 로커스트 카운슬의 일원인, 아마도 로커스트 사회의 최상류층일 여자 말이다.

'와...'

저녁노을이란 자연조명을 받아서 그런 걸까?

그녀가 지닌 천부적인 아름다움은 좌중을 말 그대로 압도해 버렸다.

대마녀라는 이름에 걸맞는 고혹적이고 도도한 눈빛. 

이국적이면서 압도적인 황금색의 눈동자.

느리면서도 우아한 걸음걸이.

게다가 로커스트 특유의 이브닝드레스 같은 복장은, 신이 직접 창조한 것 같은 완벽한 신체를 가감 없이 드러냈으니.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현대에서 온 나의 기준마저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어머, 유진."

"..."

"반가워요. 잘 지냈어요?"

그리고 그런 그녀가 눈웃음치며 내 앞자리에 앉자, 레스토랑 안쪽의 모든 영애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마법 스승이 S급 매력을 숨김...'

아무도, 그 누구도 수군거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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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유진. 당신 정말 고생했군요?

"유진, 잘 지냈어요?"

"잘 지냈습니다."

카밀라가 등장하자 귀족 영애들이 일제히 땅을 쳐다봤다.

그녀들보다 훨씬 예쁘고, 지위가 높고, 능력 있는 존재.

방금 전까지 말로 자신을 치장하던 영애들은- 카밀라를 보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예쁜 여자는 여자가 봐도 예쁜 것이라, 그녀들은 카밀라의 몸을 곁눈질 했는데...

정작 카밀라가 바라보자 눈을 까는 모습들이 보였다.

'아이고... 불쌍하다. 증말.'

어쨌든 오랜만에 스승을 보니 참 반가웠다.

물론 카밀라가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내게 사령술을 가르쳐준 스승을 대면하는 건 가슴 뛰는 일이었으니 그랬다.

'자랑하고 싶다.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난 고생을 많이 했다.

비록 남들보다 빨리 강해지긴 했으나, 그렇다고 내가 흘린 땀과 피의 가치가 낮아지는 건 아니었다.

그 회포를 풀 생각만 해도 상당히 들떴다.

카밀라도 반가운 듯 말했다.

"미안해요. 유진. 원래대로라면 제자를 더 챙겨줘야 할 의무가 있는데 많이 바빴어요."

"아닙니다. 스승님.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담백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 여자는 내 인생을 끌어 올려준 여자야.'

카밀라가 없었다면 난 아직도 보링턴 영지에서 똥을 나르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진심으로 감사했다.

"오히려 스승님 때문에 전 기회를 얻었습니다. 며칠 전엔 바라칼을 죽였고, 그의 재산을 뺏었지요. 저한텐 큰돈이었습니다."

"유진, 정말 잘했네요. 그 내용은 검은 책에 적혀 있나요?"

"예."

그녀에게 검은 책을 내밀자 카밀라가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세상에. 유진."

"..."

"당신 정말 고생했군요?"

'크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는 카밀라.

그 말을 들으니 가슴 속에 쌓여있던 온갖 감정들이 화산처럼 폭발해 넘쳤다.

"그 말을 들으니 진짜 기분이 좋네요."

"고생했어요. 이건 제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좋은 성과네요."

"예."

"특히 레이돈 커스. 이 사람, 결국 트롤의 시체와 대포를 붙여 병기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는데... 이걸 이겼다고요?"

꽤 놀란 듯 말하는 카밀라.

'레이돈 커스 이 새끼, 그냥 패배자인줄 알았는데.'

카밀라 수준의 마녀가 봐도 혁신적인 연구 성과를 만들어 낸 것일까?

난 궁금해서 물었다.

"대포 달린 트롤이 대단한 건가요?"

"물론이죠. 기계랑 사령술을 섞는 건 힘들어요. 그가 좀 더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사회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쉽네요. 하지만 정말 놀라운 건 유진, 당신이에요. 이런 사람을 사령 화살이랑 신체 강화만으로 잡다니. 잘했어요."

'대大 레이돈 커스...!'

물론 그는 산적질이나 하는 병신이었지만, 사후에 카밀라 앱 헤롯의 인정까지 받았으니 만족할 것이었다.

"게다가 나머지 임무는 다 중상급... 유진 님. 정말 목숨을 걸고 살았군요."

"그랬죠."

"나이가 몇이죠? 유진 님?"

"스물다섯입니다."

"흐음. 제가 한 살 많네요? 어쨌든 배운 시간에 비해 대단한 성취를 한 걸 보니 좋네요. 잘했어요."

난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스물여섯? 대체 저 나이에 어떻게 검은 마력을 쌓은 거야?'

"그나저나..."

카밀라가 배시시 웃으며 내 옷을 바라보았다. 

길고 아름다운 눈꼬리가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옷이 정말 예쁘네요. 머리 스타일도 잘 어울리고. 제가 옷 칭찬하면 진짜 잘 입은 거니까, 자랑스러워해도 좋아요."

"감사합니다."

"근데 싸우고 왔어요? 새 옷이 많이 헤졌네요. 제자의 품위를 지적하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이건 그러니까..."

난 오늘 겪은 일에 대해 상세하게 말했다.

"제가 옷을 사러 들어갔는데."

"저 보려고 옷까지 사신 거에요? 귀여워라."

"아, 들어보세요."

긴장이 풀린 걸까.

내가 무의식적으로 카밀라의 말을 끊자, 그녀의 호위 두 명이 천인공노할 범죄를 본 듯 입을 허- 벌리고 날 노려봤다.

'...미안.'

집중이 깨져 주변을 둘러보니, 귀족 영애들도 귀를 쫑긋 세운 채 이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걸 본 카밀라가 말했다.

"미안해요. 유진. 원래 음식점 전체를 대관하려 했는데, 눈에 너무 띄는 게 싫어 반려시켰거든요. 근데 오히려 이게 더 눈에 띄네요."

카밀라가 한 번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색의 차단막이 생겨나 우리 둘을 완전히 덮었다.

안쪽의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 막.

귀족 영애들은 왠지 모르게 더욱 화난 표정으로 귓속말을 속닥거렸고, 호위무사들은 조심하라는 듯 날 노려보곤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하면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겠죠?"

"오..."

"이제 이 공간에 우리 둘밖에 없는 건데... 기분이 어때요?"

"좋네요."

우린 키득거리며 웃었다.

카밀라가 날 놀리는 감이 있었다.

나처럼 예쁜 여자랑 있는데 어때?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그녀한테 동물적인 욕망이 안 드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2년 이상 성욕을 억제해 온 나다.

이걸 보고 참으면 그냥 게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한테 고마운 사람인지라, 약간의 무례도 범하기 싫었다.

'침착!'

그렇게 생각하자 일순간 모든 성욕이 다 사라졌다. 

카밀라의 외모도 이성으로서 예쁘기보다, 순수하게 아름다운 것으로 바뀌었다.

'후. 좋았어.'

"건배할까요?"

"건배."

우린 짠- 하고 유리잔을 부딪힌 다음 달콤한 술을 조금씩 들이켰다. 와인의 진한 포도 향기가 코끝에 맴돌다 사라졌다.

"그래서, 제대로 된 푸른 마력 사용자랑 싸우니까 기분이 어땠어요?"

"검은 마력이 더 다용도이긴 한데, 근접전으로 가면 좀 불리할 것 같긴 해요."

"잘 봤네요. 그래서 사령기사들이 필요한 거에요."

이번 싸움에선 내가 압도했다.

하지만 그 괴물...

노기사 아이작이랑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뭘 어떻게 돼. 죽었겠지.'

냉정하게 말해 이길 각이 아예 안 보였다. 

움직이기 전에 결판이 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까, 속도에 대처할 기회가 아예 없단 뜻이었다. 그런 얘기를 하자 카밀라가 너무하다는 듯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유진 님! 당신은 아직 사령술을 배운 지 두 달밖에 안 됐어요. 아틀라스의 사룡四龍을 이길 순 없지요."

"사룡이요?"

"뭐, 호사가들이 붙이는 유치한 말놀음이긴 하지만... 아틀라스 제국의 최강자 넷을 뜻하는 말이에요. 검성 둘, 마법사 하나, 사령술사 하나요. 아, 물론 황실은 제외하고요."

'사천왕 같은 거잖아. 왜 나만 빼고 저런 별명 놀이를 하는 거야. 소외감 느끼게...'

그러나 내 중세 인생의 대부분은 보링턴 영지에서 보냈던 터라,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렇게 우린 회포를 풀었다.

난 카밀라가 그간 어떻게 살았는지도 물었고.

"그러니까 아틀라스의 황제 폐하를 만나야 한단 말입니까?"

"그렇죠. 세상에 환란이 닥치고 있으니... 연합군의 결성이 필요하거든요."

"환란이요?"

"곧 알게 되겠지만, 악마들이 몇 부활한 정황을 확인했어요. 아- 유진. 혹시라도 이런 말은 하면 안 돼요."

"당연히 안 하겠습니다."

귀족 영애들에 대한 대화도 했다.

"귀족 영애들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좀 그렇더군요. 뭔가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어머, 그래요? 내 앞이라 그렇게 얘기하는 거 아녜요?"

"차라리 그들이 싫어하는 여기사들이 더 좋아요. 진심입니다."

"흐응..."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결국 이야기는 내가 얻은 보물에까지 흐르게 되었다.

"그나저나 유진. 바라칼이 갖고 있던 보물은 뭐였어요?"

"잠시만요."

난 가방 속에서 물건을 꺼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이는 바라칼에게서 압수한 것들.

하나는 진주빛으로 빛나는 커다랗고 둥그런 보석이었고, 하나는 황금빛으로 장식된 커다란 열쇠였다.

"흐음... 바라칼이 뭘 꾸미려 했는진 잘 모르겠지만, 정말 귀중한 걸 건졌네요. 유진."

카밀라는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물건을 살피며 말했다. 기다란 손가락이 보석을 살살 훑는 게 뭔가... 뭔가였다.

카밀라가 진주색 보석을 들어 올렸다.

"일단 이 보석은 전생석前生石이에요."

"전생석?"

"말 그대로 자신의 영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는 도구죠. 아마 이게 있으면 유진 님은 본인의 영과 더 잘 소통할 수 있을 거에요."

영.

그것은 마법적 능력과 상관관계가 있었다. 사령술을 사용할 때 필요한 '의지'가 영에서 비롯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해요. 유진 님의 경우 영의 힘은 충분하지만, 혼백이 그를 따라주지 못하는 케이스니 도움이 되겠죠."

'대박이잖아...!'

그러니까, 총으로 비유하자면 구경이 넓어지고 탄환이 더 세진단 의미였다.

"당신이 전생에 누구였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이 돌은, 그걸 알 수 있게 해주는 귀물이에요."

그거, 정말 궁금했다.

"어떻게 쓰죠?"

"흐음. 좀 위험할 수도 있는데, 뭐, 스승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겠죠? 손을 줘봐요."

"예."

그녀가 말하는 대로 손을 내밀자 그녀가 내 손에 전생석을 쥐어줬다.

"...음."

"..."

그녀가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부드러운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검은 마력이 내 혈관을 타고 흘렀다.

"기분이 어때요?"

"음. 아무렇지도 않네요."

"아무 말이나 해봐요. 유진."

"갑자기 그러라고 하시면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는데요."

"흐음. 저랑 처음 만났을 때 제가 예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사실이죠. 뭐."

"하. 유진. 여자 만날 때마다 그러는 거 아니죠?"

우린 손을 잡은 채 웃었다.

왜일까? 카밀라는 나보다 훨씬 높은 여자인데, 정작 심리적인 장벽은 매우 낮았다.

카밀라가 불편해할 수 있었으나 전혀 그러지 않았고.

'말하는 게 편하네.'

그녀가 잘 맞춰줘서일지 모르지만...

서로 한마디씩 하면 별다른 노력 없이도 대화를 이을 수 있었으니, 불편한 침묵이 없어 즐거웠다.

"뭔가 감정을 떠올려 봐요."

"무슨 감정이요?"

"그냥... 음. 오늘 본 사람들은 어땠어요? 당신 옷에 커피를 쏟았으니, 화를 낼 만한 일이잖아요."

"화났죠."

"근데 유진 님은 별로 화나 보이지 않는걸요."

"에이, 뭘요. 짐승처럼 격이 낮은 존재들인데, 그들이랑 뭘 하겠습니까?"

카밀라는 눈을 얇게 뜨고, 좀 이상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난 살짝 알딸딸한 기분으로 취한 듯 말했다.

"저 여자들은 남자가 자길 위해 죽어주면 그것을 사랑인 줄로 압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가치를 빼앗아야 본인의 가치가 높아지는 줄 알죠. 본인들이 사랑받고 싶은 동물적인 욕정과 허영심을 구별하지 못하는 질 낮은 쓰레기들입니다."

"...그리고요."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이랑 한 번이라도 몸을 섞으려 노력하죠. 저들은 겉으로 곱상하고 고상한 척하지만, 결국 무엇이 인간다운지 한 시도 고민하지 않는 가축입니다."

"유진."

방언이라 해야 하나?

난 어느새 멍해진 기분으로 말을 뱉었다.

온몸이 떨렸다.

느껴지는 감정은 분노. 수치심. 그리고...

이 모든, 처참한 존재들에 대한 불같은 연민이었다.

강렬한 불꽃이 내 영혼 전체를 불살랐다.

"참으로 고통스럽겠지요."

"..."

카밀라가 내 손에서 자기 손을 빼려고 했지만, 내 악력이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정신 차려요, 유진."

그녀는 가만있지 않았다.

카밀라의 내부에 봉인되어 있던 엄청난 양의 검은 마력이 풀려나왔고, 그것은 보호막 안쪽을 막대한 위압감으로 짓눌렀다.

-천 다르마.

-만 다르마.

-십만 다르마.

-백만 다르마.

"..."

"..."

난 익사할 지경이 되었지만, 무슨 깡인지 주눅들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고개를 돌려 영애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말했다.

-저 년은 나중에 남편에게 매 맞으면서 살겠군. 그러면서도 사치로 스트레스를 풀 거고, 아들을 갈굴거야. 어미의 명예와 체면을 하니, 더 열심히 살라며.

"유진. 무슨 소리에요? 저들의 미래를 본 것도 아니고."

-왜 못 보지?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아, 저 기사 후보생 놈은 평생 여자 꽁무니만 쫓다가 죽겠군. 어머니가 없었던 결핍을 귀부인과 불륜하며 찾다가, 서른한 살에 결투로 죽을 것이다.

"..."

-저 년은 남편이 일찍 죽겠군. 정확히 2년 이후에. 그리곤 아들을 낳지 못해서 평생 무시당하다가, 늙은 다음부턴 돈 자랑 말곤 할 게 없겠어. 더 끔찍한 건, 윤회한 다음에도 똑같을 거란 사실이다.

"...유진?"

-카밀라. 이 모든 게 병신같은 아이리스 년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나? 순결의 여신이라니? 정말 병신같군. 평생 순결을 간직할 거면 대체 여성성, 남성성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 저능아 년이 외도에 대한 불안감으로 신앙 장사나 하니까 대륙이 이 꼬라지가 나는 것이다. 내 진작 그년의 대가리를 깨 버렸어야 했는데.

"...유진!"

-아, 그나저나 헤롯의 왕녀야. 네 영혼도 나만큼이나 불쌍하고 불행하구나.

그 말을 하자 카밀라의 동공이 커졌다.

"...당신, 누구죠?"

-영에 어찌 이름을 붙이지? 다 알 만한 존재가 그러니 당황스럽다.

"..."

-불쌍하고 착한 왕녀. 젊은 나이에 그 정도의 마력을 얻으려 수년을 고통 속에 보냈겠지. 

"아..."

카밀라가 경악스런 표정을 짓고 날 바라봤다.

-네 어미를, 할머니를 괴롭게 하지 않기 위해. 그 짐을 조금이라도 같이 지기 위해. 그러니 어찌 강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넌 괴로움을 다 참고서도 사령들을 꾸역꾸역 삼켰다. 남들이 놀 때, 연애할 때, 혼자 울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다 참아 가면서 검은 방 속에 스스로를 가뒀지.

"..."

-그래서 역천의 마녀 소리를 들었지만 로커스트를 바꾸긴 힘들다. 그들은 못생긴 아이가 태어나면 우물에 버렸고, 그게 두려워 예쁜 여자를 사와 아기를 낳게 만들고 있다. 네 할미인 메데이아가, 네 어미인 카산드라가, 네가 그걸 아무리 막으려 한들 아무도 들어 처먹질 않으니...

"..."

-근데 그 이유가 뭔 줄 아느냐? 네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태어난 이가 외모 차별에 대해 논하는 건 설득력이 없어. 참 웃기지 않은가. 헤롯의 왕녀야.

"...유진, 미안해요."

-아아, 그래, 내가 빈 껍데기 주제에 시간을 많이 허비했군. 이제 보석을 부숴라, 왕녀. 지금 의미 있는 건 이 찌끄레기같은 흔적이 아니라, 유진의 삶이지.

지금 내 맘속에 있는 건 욕정도, 사랑도, 동경도, 존경도 아니었다.

그저 카밀라란 불쌍한 존재에 대한 연민.

카밀라가 손을 다물자-

-깡!

진주색의 보석이 산산조각났다.

카밀라의 체온이 느껴짐과 함께, 난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당신, 지금 유진이 맞나요?"

"...네?"

"...돌아왔군요."

'내가 씨-발 뭔 말을 한 거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통제력을 완전히 잃었었다. 

정작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뭔 개소릴 지껄인 거야? 감히 스승 앞에서.'

애초에 내 정신도 그리 수준이 높지 않은데, 저 귀족 영애들을 욕할 권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스승님. 일단 죄송합니다. 이건 제가 아니었습니다."

"유진."

"그..."

"내가 당신의 영을 보고 했던 말, 기억해요?"

진지한 표정의 카밀라. 

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그건 다른 정신이 아니에요. 유진."

"..."

"당신 그 자체이지요."

좀 침울해졌다.

그리고 당황스러웠다.

대체 내 안에 있는 건 뭐지?

"이 세상 모든 영혼은 윤회를 거쳐요, 유진. 보통의 영이 갖는 수명은 길어야 수만 년. 하지만 당신의 것은 좀 달라요."

"..."

"전생석이 보여주는 건, 영에 묻어있는 아주 조그만 기억들. 당신은 무언가... 위대하거나, 아주 두려운 존재의 영혼이 다시 태어난 결과물이에요."

"그건."

"아마 그러니까, 혼백을 흡수하면서 어떤 부작용도 겪지 않는 거겠죠. 내면세계로 간다면 저마저 압도할 거고요."

딱히 그러고 싶진 않았다.

"유진. 하지만... 영은 전투에 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땐 말씀을 못 드렸는데, 정식으로 제 쪽으로 들어오시는 게 어때요?"

카밀라의 두 손이 따스하게 내 손을 감싸쥐었다. 

조금은 유혹하는 것 같은 감각.

그녀의 눈에서 보이는 건-

"...유진."

"..."

"몇 년이면 돼요. 몇 년이면 당신은 아틀라스 제국의 사룡을 뛰어넘을 거에요."

질척한 소유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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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서 연애라도 좀 하고 그래라.

'대체 영靈이란 건 뭐야...?'

힌두교에서는 영혼의 격이 높으면 부자로, 높은 사람으로 태어난다고들 했다.

하지만 카밀라의 생각은 좀 달랐다.

아무리 위대한 영을 가졌다고 한들 출생은 무작위. 

항상 부자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항상 강자로 살지도 않는다 했다.

어차피 격이 높아도 목이 잘리면 죽는 건 매한가지였기에, 내게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이 카밀라의 논지였다.

"당신은 잠재력이 있어요. 노기사 아이작? 책임지고, 그보다 몇 배는 강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유진 님."

"..."

카밀라의 눈빛에서 강렬한 소유욕이 엿보였다.

원하는 걸 반드시 얻고야 말겠다는 집착.

무엇이 그 감정의 방아쇠를 당겼는진 모르겠지만, 산산조각나 흩어진 전생석을 보니 대충 짐작은 갔다.

'...카밀라.'

아름답고, 강하고, 최상위의 권력을 가진 여인. 

그러나 그 가면이 벗겨지자,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불안한 내면이 드러났다.

마치 빌딩 옥상 위에서 금 간 유리를 밟는 사람처럼...

그녀는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게나 강한데도 뭔가를 두려워해?'

처음 봤을 땐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인식 가능한 그녀의 마력은, 어림잡아도 백만 다르마가 넘었다. 

평소에 봉인하고 다닌다 뿐이지 마음만 먹으면 아인베르트 영지 전체를 폭파시키는 것도 어렵진 않은 인간.

그게 카밀라 앱 헤롯이었다.

그런 그녀가 무언가를 두려워한단 사실이 무서웠다.

"음. 솔직히 말할게요."

"..."

"지금 같은 자유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절 섬긴다면 세상을 쥘 수 있을 정도의 강자로 만들어 드리겠어요."

기사 서임과 충성 서약은 달랐다.

서임해준 사람에게 칼을 들이밀면 불명예지만, 기사는 군관이 아닌 명예직이라. 

다만 여기서 제안을 받아들이면 명령을 들어야 할 터였다.

'거역할 수 없을 거야.'

그녀가 날 지배하게 될 것이었다.

이는 강압이 아니라 덕에 의한 일.

난 인생을 바꿀 만한 기회를 준 그녀를 거역할 수 없을 것이고, 지능이 높은 카밀라에게 매번 설득될 확률이 높았다.

물론 그 사실이 그리 기분 나쁘진 않았다.

'남 밑에서 사는 것, 그것도 괜찮지.'

중세는 열악하다.

배고픔과 폭력이 만연한 게 이곳 특성상, 그녀의 휘하에 들어가는 건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안정을 누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유진. 궁금하지 않아요?"

안력眼力이 강하다고 해야 할까? 

카밀라는 뚫어지도록 날 바라보면서, 그 욕심과 의지력을 뿜어냈다.

"아틀라스의 학자들이 말하길, 이 세상이 창조된 지 수억 년이 지났다고 해요. 그러면 그 많은 시간 동안 죽어온 생명들의 혼백은 어디로 갔을까요?"

"...!"

"로커스트는 그것에 접촉할 '권한'을 갖고 있어요."

그런 건 생각도 못 해 봤다.

"당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말 그대로 무한한 힘을 다룰 수 있게 될지 모르죠."

그 말을 들으니 본격적으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인생의 선택지다, 유진.'

여기서 어떤 선택을 내리냐에 따라 앞으로의 루트가 달라질 터. 일단 그녀의 밑으로 들어간다면 엄청난 힘과 영예를 얻겠다.

'부가적으로 족쇄도.'

하지만 그게 대수인가? 

어차피 중세에서 자유롭게 사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녀의 비호가 있다면 아인베르트령의 영애들 따위는 내 앞에서 고개조차 들지 못할 것이니,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좋은 선택지야. 성공한 커리어... 그 끝이 불행하진 않을 것 같군.'

그러나 대척점에는 자유가 놓여 있었다.

자유.

그건 그냥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요소가 아니었다. 

이는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자유롭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리.

자유가 없다면 원하는 사람을 구할 수 없었고, 원하는 사람을 죽일 수 없었고, 자유로이 사랑할 수 없게 될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카밀라는 똑똑하니 날 놓아주지 않을 거고, 주도권도 내주지 않을 거다.

아마 평생 카밀라 밑의 존재로 살겠지.

'...어려운 문제네.'

난 결론을 내렸다.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제안 감사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고민해봐도 될까요?"

"유진, 쉽지 않군요."

묘한 슬픔과 분노가 그녀의 눈에 감돌았다.

약간의 굴욕감도 보였다.

하지만, 날 위해서든 카밀라를 위해서든 이게 올바른 선택일 것 같았다.

'물론 잘 살고 싶다.'

무시당하기 싫다.

더 올라가고 싶다.

나를 무시한 저 악역 영애들.

그들이 다신 속닥거리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으로 사는 게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적어도 지금은 내가 선택을 내리고 싶었다.

나는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약간의 농을 던졌다.

"전 쉬운 남자가 아닙니다."

"그러네요. 유진. 어려워요. 내 제안을 거절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예?"

"제가 태어난 후 제 말을 거절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카밀라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의 진심.

그녀가 가졌던 불안, 본심, 열망 등이 가라앉자 평소처럼 우아하고 도도한 가면이 얼굴을 덮었다.

'...'

난 카밀라의 가면을 벗기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시달렸다.

"어쨌든 유진. 제 제안은 계속 유효해요. 그리고 책 받아요. 저만의 가르침을 추가해 놨으니까."

"아, 벌써요?"

"이렇게라도 스승 노릇을 해야죠."

그녀가 검은 책에 손댄 건 잠깐뿐.

뭔가 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검은 책에선 아예 다른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진짜 대단한 여자는 맞았다.

"그리고 이게 우연인지 필연인진 모르겠지만, 유진 님. 당신이 가진 황금색 열쇠는요."

"아...!"

"그건 [병기고]를 열 수 있는 열쇠에요."

병기!

쟝과 싸울 때도, 바라칼과 싸울 때도 쓸 만한 병기가 없어서 고민하던 차였다. 근데 때 맞게 이런 말이 들리다니...

눈이 번쩍 뜨였다.

"병기고요? 그게 어딨어요?"

"보통은 던전에 있죠."

"던전..."

"잘 모르시면 설명해 드릴까요?"

"네. 선생님."

그러자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후후. 아틀라스 제국 이전에도 이곳엔 많은 사람들이 살았어요. 학자들은 그들 역시 악마와의 전쟁을 치렀다고 추측하는데... 던전은 이들이 만들어놓은 창고에요. 그 안에 병기고가 있고요."

명확한 설명이었다.

'던전...'

게임에 익숙한 내겐 몬스터를 사냥하고 레벨을 올리는 곳처럼 느껴졌는데, 실제 호사가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면 느낌이 비슷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건 [물류 창고의 열쇠], [지식 보관소의 열쇠], [병기고의 열쇠], [종자 보관실의 열쇠] 등인데. 이건 병기고의 열쇠에요."

"아..."

"그리고... 바라칼이 이 사실을 알았는진 모르겠지만, 아인베르트 영지 아래쪽에서 던전이 발견되었죠."

'바라칼...'

이 새끼는 전생석이랑 던전 열쇠를 들고 뭘 하려던 걸까?

차마 알 순 없었지만 다음 목표지역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병기고]는 열쇠 하나당 최대 다섯 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시스템이고... 각자 하나의 병기를 들고나올 수 있어요. 병기 자체에 귀속 기능이 있기에, 양도는 힘들어요."

"...귀속이요?"

"고대인들이 만든 병기들은 굉장히 강력해요. 유진 님."

'한 번에 털어갈 수 없는 시스템이라?'

그건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어쨌든 병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듣자 상당히 가슴이 뛰었다. 운이 나빠서 나랑 안 맞는 병기를 가져가는 일은 없다는 것이 아닌가.

"몇은 아틀라스 최고의 대장장이 수준마저 뛰어넘고, 몇은 현재 로커스트가 만들 수 있는 최고 기술 등급마저 초월하죠."

"스승님은 관심 없으신가요?"

"왜요. 관심 있으면 유진 님이 선물해 주실 건가요?"

"제 입에 풀칠하기도 바쁘긴 합니다만, 기회가 되면 그 정도는 해야죠."

"말만 들어도 기쁘네요. 유진 님."

그녀와 나는 짠- 하고 술을 한잔 더 마셨다.

"던전 관련된 사안들은 아마 몇 달 후에 백작이 정식으로 공표할 거에요. 그 전까진 말씀하시면 안 돼요."

"백작님도 만나보셨군요."

"당연한 말씀을. 여기 오자마자 만났답니다."

카밀라는 나랑 말하는 도중에도 흩어진 전생석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더니, 손으로 꽈악 쥐었다. 

그러자 전생석이 이전보다 작은 크기로 '붙어' 버렸다.

'...설마! 악력으로 탄소를 쥐어서 다이아몬드로 바꾼 것인가?'

"유진 님. 지금 이상한 생각 하셨죠?"

"아뇨."

카밀라가 날 도끼눈으로 노려보았다.

"전생석은 대충 고쳐 놨어요. 이걸로 수행은 하실 수 있겠지만... 추천드릴 수는 없겠네요. 유진 씨는 특이케이스라서."

난 전생석을 노려봤다.

'과연 나는 뭘 하는 새끼였을까?'

악마, 신, 정령, 조상 등 여러가지 존재들이 떠올랐지만 딱히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스승님. 아까 제가 무슨 얘기를 했었습니까. 상당히 오만한 말씀을 드렸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으시면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도 좋아요."

"음... 예."

어쨌든 그렇게 얘기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식사 나왔습니다."

정말 뻘쭘한 표정으로 기다리던 웨이터가 스테이크를 내려놓았다.

'보호막이 해제되니 좀 아쉽군...'

카밀라랑 단둘이 얘기하는 건, 이성 간의 긴장감이 없다고 한들 재밌는 일이었다. 그 심정을 알아챈 걸까?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다시 차단막을 쳤다.

난 좀 행복해졌다.

"여기 스테이크가 맛있다는데 기대되네요."

"잘 먹겠습니다. 스승님."

"영광인 줄 알아요."

"스승님의 하늘과 같은 은혜에 차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하지 마요."

"예."

보호막 바깥의 테라스 위쪽.

겨울 하늘에서 눈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걸 바라보다, 아주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다가를 반복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편지 보내요."

"어디 계신 줄 알고..."

"검은 책이 알려 줄 거에요. 유진 님. 나랑 편지 안 하고 싶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좀 자존심 상하네요. 저는... 어디 가서 못생겼단 소리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혹시 유진 님, 여자한테 관심 없어요?"

'사령 게이야...'

"아뇨."

"흐음."

우린 즐겁게 식사를 마친 다음, 웃으며 헤어졌다.

*

겨울의 달이 차갑게 세상을 비추는 밤. 

카밀라는 영빈관의 방 내부에서 홀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오늘 같이 식사했던 남자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유진.'

그는 확실히 특이한 사람이었다.

일반인들은 그녀의 억제된 마력만 접해도 그 의지가 접히고, 복종하려는 상태가 되는데.

유진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혼자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아, 불쌍한 헤롯의 왕녀야.

그녀는 본인이 왕실이라고 주장한 적 없었다. 

한 마디로 유진이 그녀의 정체를 꿰뚫어 본 것. 대마녀의 수준으로도 그걸 어떻게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할머니... 메데이아가 살아있다는 건 극비야.'

카밀라는 어이가 없었다.

'대체 유진. 당신은 뭐였던 거죠?'

전생석 때문에 폭주했을 당시, 유진은 그녀의 정신 공격을 전부 견뎠다.

'마력 거의 전부를 썼는데, 꿈적도 하지 않았어. 대체 얼마나 격이 높아야 하는 거지.'

그래서 순간 이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유진이 신기하고, 욕심나고, 걱정되어서.

그녀가 통제해 준다면, 그녀가 더 많이 가르친다면, 유진이 고통받는 모두를 구해줄 수 있을 텐데.

어쩌면 그녀마저도.

'...너무 성급했어.'

하지만 그녀가 '내 아래 두겠다'는 스탠스를 공고히 해서 그런 걸까.

그는 도망가고 말았다. 

'...유진.'

카밀라는 속이 타들어 갔다. 

도톰한 입술을 꽉 깨물고, 가늘어진 눈길로 8구 방향을 바라보자...

그냥 납치할까? 같은 몹시 나쁜 생각들이 들었다.

그녀의 마음이 불안해지자 검은 마력이 노도처럼 흘러나오고, 영빈관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젠장, 통제해. 카밀라...'

-똑똑.

그때였다.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가 감정을 몰아낸 걸까.

유진에게 편지를 전달했던 소년이 들어오자, 그녀의 공황이 사라졌다.

소년은 대뜸 반말을 던졌다.

"카밀라. 후회 안 하겠느냐?"

"..."

"나도 맨 처음에 그를 보았다. 혼백을 흡수하는 데 어떤 부작용도 겪지 않았지. 그 정도 인재라면 로커스트에서 어떤 특권을 줘서라도 모시는 게 나을 수 있어. 아무리 영의 격이 높다고 한들, 중간에 객사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겠느냐."

평소엔 시종 역할을 하던 소년.

하지만 그는 담담한 눈을 하고 카밀라를 바라보며 무려 반말을 썼다.

이는 목이 잘릴 만한 무례였지만 카밀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밀라. 그... 창문을 좀 열고 환기 좀 하고 그래라."

"..."

소년이 창문을 열자 카밀라가 그를 정말 싫다는 듯 흘겨봤다.

"...모든 걸 짊어지려 하는 건 좋지 않단다. 넌 항상 귀족 영애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니?"

그리곤 아틀라스 귀족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자유로운 말을 내뱉었다.

"밖에 나가서 연애라도 좀 하고 그래라. 우리가 아이리스 신도도 아니지 않느냐."

"하아, 아버님."

"왜."

-우드득. 우득.

소년 시종의 골격이 통째로 비틀리며, 좀 더 키가 커다란 20대의 남성이 되었다. 

실제 그의 나이는 50대.

그가 굵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란 생물이 원래 그렇다. 휘두르려 하면 도망가기 마련이야. 나도 그랬잖니? 나도 네 엄마가 좋아서 결혼했는데, 지금은 잡혀 산단다."

"아버님, 전 연애할 생각이 없습니다."

카밀라는 누군가에게 질 수가 없었다.

이는 그녀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성장환경 때문.

만약 카밀라가 결례를 범하거나 패배한다면 손해를 보는 건 그녀 하나뿐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겐 무조건 상대방 위쪽에 서야 한단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래도 그 정도면 키워볼 만하지 않니?"

"..."

차단막 안에서 흘러나온 대화는 그녀의 아버지조차 몰랐다.

카밀라는 전부 털어놓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녀는 자기 혼자 책임지고 참는 것을 선택하였다.

'만약 유진의 전생이 대악마라면... 그는 무조건 제거되어야만 해.'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긴 하는 걸까.

그녀의 아버지는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그나, 그녀나 공적인 모습과 사적인 모습이 많이 달랐다.

"그냥 연애라도 좋으니, 로커스트란 국가의 격이 실추되어도 좋으니... 좀 즐기면서 살아라. 카밀라."

"..."

"딸아."

카밀라에게 반말을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남자. 

그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딸에게 말했다.

카밀라의 마력이 어느 정도이든, 역천의 재능을 가졌든...

아버지의 눈으로 보기에 그녀는 그냥 가녀린 딸이었다.

"네가 부서질 것 같아서 그렇다."

"..."

"난 아직도 널 그렇게 만든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세상이 멸망한다고 한들 네 탓은 아닌데, 좀 내려놓고 행복해지면 안 되니? 최선을 다했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니냐."

"..."

"그리고 애초에 네 수명 문제도 있잖니."

카밀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어요."

물론 딸이란 존재는 원래 아버지 말을 듣지 않는 법이었고, 그녀의 아버지도 그걸 모르진 않았다. 그래서 그냥 한숨을 쉰 다음-

"...그래."

결렬로 대화를 끝내고 말았다.

*

몇 달 후, 백작 전체에 포고령이 붙었다.

-아인베르트령 서부 지하에서, 광부들이 [던전]을 발견하였다. 

포고령은 전단지가 되어 게시판에 붙었고, 사람들의 입소문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 던전은 [아인베르트 대학 고고학부]에 의해 1할 정도 탐사되었다. 조사 결과 대략 천 년 전의 유물로 확인되며...

"드디어 내게도 인생 역전의 기회가 온 거야. 응?"

"너는, 새끼야. 어디 가서 싸울 생각하지 말고 집에나 틀어박혀 있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현재 성기사 인원이 영지에 부족한 바, 해당 조사를 민간에 이양하기로 했다.

조사를 민간에 이양.

그 말은, 던전에서 어떤 전리품을 챙겨도 가져갈 수 있단 소리였다. 

-아인베르트 백작, 엘리시아 아인베르트가 해당 내용을 사실로 인정한다.

-2119년, 쌍둥이자리의 달. 둘째 날.

-[아인베르트 백작 직인]

난 주머니에 있는 황금색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게시판을 바라보았다.

"겨울 동안 잘 놀았지."

물론 그렇다기엔 수련도 많이 하고, 검은 책에게 강의도 듣고 했지만...

적어도 돈 될 일은 하지 않았고, 던전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새 장비를 마련하는 일에만 전력을 다했다.

그리하여 남은 돈은 금화 이백 장.

슬슬 다시 돈벌이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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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할 일은 그저 도굴, 도난, 강도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