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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볼라드에게 받은 금화 다섯 장.
난 선수금을 아주 알뜰하게 사용했다.
'일단 장비.'
에스톤 경이 나한테 견갑, 흉갑, 그리브 등 다양한 장비를 제공해 줬지만...
그래도 소모품은 많을수록 좋았다.
'가끔은 소모품이 훨씬 이득이 될 때가 많아.'
특히 덫이나 독 같은 것.
덫은 마수의 지능으로 피하기 힘들었기에 유효한 수단이었다.
또 신경계와 혈관을 망가뜨리는 독은, 두꺼운 가죽을 가진 마수들에게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어서 구매했다.
금화 한 장을 써서 곰 덫 여러 개, 쇠 올가미, 마수들에게 사용할 독 앰플들을 샀다.
'금화 한 장이라. 뭐, 임무 나가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나머지 돈은 인원을 구하는 데에 썼다.
일단 에밀리 같은 경우 전투력이 상당히 높았으니, 금화 한 개를 냈다.
-선수금으로 은화 다섯 장. 그리고 작전이 끝나면 추가로 은화 다섯 장 받는 거지?
-정확해.
-좋아. 막노동보다야 백 배 낫지. 젠장. 일주일에 금화 하나라니. 이제야 일다운 일을 해보네.
-에밀리. 막노동도 해본 거야?
-날 뭘로 보는 거야? 당연히 해봤지.
-그럼 기사는 돈 때문에 하는 건가?
-돈이라기보단 자존심이지. 시골에 처박혀 살긴 싫었어.
그녀가 호탕하게 웃었다.
여기사라 그런가?
대학원생인 셀라나보다 훨씬 시원시원한 면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다른 이들에게도 돈을 지급하니, 들어간 비용은 금화 네 장.
'꽤 비싼 투자 비용이지만...'
내가 이번 임무로 얻는 돈은 그보다 더 많았다. 이들에게 준 돈을 전부 제해도 무려 금화 다섯 장이 남았다.
'오천 실링 이상의 이득이라니? 이래서 사람은 대표로 살아야 해.'
게다가 마수의 부산물도 팔 수 있으니 이번엔 운이 좋았다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내겐 검은 책이 있어.'
마수 여러 마리를 죽이면 또 책이 마법을 가르쳐 줄 테니... 여러모로 내게 득이 된다고 할 수 있었다.
*
볼라드의 저택은 아인베르트령의 외곽에 있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 출발해도 마차로 수 시간 걸리는 거리인데, 첫인상이 꽤 을씨년스러웠다.
"외곽이라 그런가? 아니면 땅이 안 좋아서 그런가. 좀 쌔한데."
"그런 말 마라. 재수 없다."
나무들은 깡말라 있었고, 나뭇잎들은 누렇게 바스라져 먼지처럼 쌓인 곳이었다.
하얀색의 거대한 저택 하나가 그 안에 우뚝 서 있었는데 그래도 넓고 비싸 보였다.
"숙식은 전부 우리가 제공하겠네. 여기 있는 동안 편히 쉬고, 들어오는 마수들을 막아주고, 산의 마수들을 싹 다 토벌해주게나."
볼라드는 부자였다.
아무리 땅값이 싼 곳이라 하지만...
저택의 시설이 미친듯이 좋았다.
제일 놀란 건 화장실이었다.
'미친, 수세식 변기가 있잖아?'
현대인인 내게 수세식 변기란 삶의 질과 동의어. 의외로 다른 이들도 화장실에 연신 호평하고 있었다.
"유, 유진! 수세식 변기가 있어! 너 봤어? 손잡이를 당기면 알아서 물이 내려가! 하수도랑 연결된 것 같아!"
"난 이런 게 존재하는 줄도 몰랐어!"
게다가 식사 시간에 먹는 밥의 품질도 훌륭했으니.
"안녕하세요.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집안의 가장 높은 어른.
볼라드의 어머니가 직접 내려와 같이 식사를 진행했다. 인자한 미소가 따스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우리 앞에 놓인 건 소고기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돌판 위에 치지직 구워지고 있는 기름기 많은 스테이크였다.
그걸 보며 손발을 덜덜 떨었다.
"스, 스테이크를 주신다고요?"
"많이 먹어야 잘 싸우시지 않겠습니까.
"가, 감사합니다!"
적당히 익혀진 고기는 한 번 씹을 때마다 육즙이 줄줄 흘렀고, 기름진 고기는 위장에 녹이면 엄청난 포만감을 가져다줬다.
다른 팀원들도 식사에 매우 만족하는 눈치였다.
"환대 감사드립니다."
"환대라... 아녜요. 저희가 더 드리지 못해 죄송하죠."
"마수가 많이 강한가요?"
그러자 그녀가 똑바로 날 쳐다봤다.
"예."
다른 사람들도 실패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원래 일이란 건 남들에게 힘들어야 가치가 높은 법.
내가 증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점심을 먹은 다음, 우린 저택 앞에 장비를 들고 모였다.
"...유진."
"응?"
에밀리가 꿈을 꾼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는 게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은 몰랐어."
"그러게."
넓고 깨끗한 집.
대리석으로 도배된 바닥.
깔끔한 하얀색 침대. 맛있는 밥. 욕조와 수세식 변기가 있는 화장실. 하인들.
세상에 이걸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여자인 에밀리와 셀레나는 당연히 이런 환경을 원했으며, 현대인인 나도 비슷한 욕구가 솟구쳤다.
새삼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들 열심히 살아보려고 모인 이들이었다.
'얼마일까. 이 집은.'
그 존나 거지 같은 집이 금화 수십 개를 받았으니...
땅값이 싸다 해도 금화 수 백개는 있어야 할 터.
허나 벌 수 없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자."
그렇게 릭토 산으로 들어갔다.
을씨년스러운 산의 입구가 우릴 반겼다.
오랜 시간 쓰지 않은 등산로는 낙엽, 부엽토, 썩은 나무 등에 덮여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허나 우린 전원이 초인.
제일 허약해 보이는 셀라나조차 몸속에 마력을 사역하여 일반인보다 체력이 좋았다.
-탁! 탁!
우린 땅을 박차며 힘차게 위로 뛰었다.
그렇게 정상까지 와서 주변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뒷산이 좀 넓었다.
"동네 뒷산이라고 얕봤는데... 그렇게 좁진 않네?"
"그러면 산에 올라가자마자 마수가 안녕하세요! 하고 반겨줄 줄 알았냐?"
"아, 조용히 해!"
마치 본능처럼 그들은 날 바라봤다.
산은 두려움을 유발하는 곳이었다.
수천 개씩 박힌 나무들은 시야를 강탈하고.
동물들은 보호색을 뒤집어쓴 채 우릴 노려보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동물들, 마수들은 '언제나 죽을 가능성이 있는' 야생에서 생존한 전문가들이었다.
"유진. 마수를 어떻게 잡지? 덫은 어디 깔아야 하고?"
"..."
그러니...
전문적인 사냥꾼이 아니면 마수 사냥 같은 건 엄두도 못 내리라. 지금 날 바라보는 팀원들의 눈빛도 상당히 불안해 보였다.
"유진?"
"아, 파악했어."
다만 난 웃었다.
짧은 시간 동안 산세를 대충 파악했기 때문이다.
'마수가 어딨는지는 아직 모른다.'
허나 난 숲속에서 한 달을 살아온 몸.
짐승의 흔적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으며, 토끼를 추적해서 쏴 죽일 정도로 사냥에 능했다.
또한 내 눈엔 검은 마력이나 혼백의 흔적이 보였으니...
"가자고."
마수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 오랫동안 있었던 자리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린 최대한 효율적으로 싸우기로 했다.
마수가 잘 다닐만한 곳마다 덫을 쳐 놓았고, 마수의 흔적이 자주 발견되는 곳이 있으면 영역이라고 판단.
거기 존재하는 동물들을 밀렵해 그 피 냄새를 주변 나무들에 뿌리고 다녔다.
중간중간에 땅굴도 파고, 나무로 된 스파이크를 만들어 박아 넣은 다음 위에다 독도 발랐다.
브랜드가 존경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봤다.
"대단하다. 이건 어디서 배웠어? 조난당했을 때?"
"응. 그 때 배웠지."
"역시 유진. 최고의 사령 사냥꾼..."
"좀..."
그렇게 몇 시간.
-크르르릉!
드디어 못 참았는지 늑대 형상을 한 마수 다섯 마리가 산 뒤쪽의 바위에서 기어 나왔다.
더 이상 우리가 이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걸 참지 못한 것 같았다.
"전열."
내가 낮게 말하자 이들은 사전에 합의한 대로 방진을 만들었다. 에밀리가 맨 앞에 서고, 나랑 브랜드가 측면을 담당하고, 셀레나를 맨 뒤쪽에 세운 진형이었다.
전원 초인들이라 그런가.
육체와 반사신경이 뛰어나 전열을 만드는 속도 자체가 남달랐다.
-그르르릉!
그리고 마수들은 그걸 판단할 지능이 없었다.
'고통스러울 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에 허덕이는 게 마수다. 저들은 자기가 인간인지, 동물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앞으로 들이박는 존재.
두 마리의 늑대가 앞으로 뛰었다.
크기는 호랑이만큼 컸고, 이빨은 40개가 넘었지만 지금의 나한텐 고양이처럼 보였다.
-타악!
두 마리 늑대가 시간차를 두고 도약했다.
허나 우린 시간차 공격을 용납할 정도로 어정쩡한 이들이 아니었다.
-크륵?
늑대 한 마리가 이미 설치해 놓은 올가미에 걸렸다.
세게 발버둥 칠수록 더더욱 살갗을 조이는, 동물들에게 가장 잔혹한 덫.
늑대가 쇠줄을 물어뜯었지만, 그런다고 풀릴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쇠로 된 실들이 늑대의 이빨에 엉키며 그것을 괴롭게 했다.
그래서, 먼저 달려든 늑대 한 마리는 혼자만 덩그러니 공격하는 꼴이 되었다.
"짐승 새끼!"
에밀리가 온몸의 푸른 마력을 끌어올려 앞으로 어깨를 박고, 한쪽 손에 든 방패로 늑대의 눈 부분을 찍어버렸다.
'오.'
마치 내 과거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강해.'
푸른 마력이 담긴 방패 치기.
버클러의 앞 부분, 뾰족하게 튀어나온 강철의 돌기가 늑대의 머리뼈를 아예 부숴버렸다.
그 충격이 어찌나 컸는지, 늑대는 차마 반격할 생각도 못 하고 고개를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나, 메이스 기술과 방패 기술이 상당히 숙련되어 있었다.
'진짜... 타격술은 너한테 배워야 겠는데. 끝나면 가르쳐달라고 해야지.'
"유진 님! 에밀리 님! 조심하세요!"
그때.
하늘에서 푸른색 벼락이 떨어졌다.
-쾅!
주변 사물들이 전부 흰색으로 표백되는 착각. 무식하게 강력한 전류가 늑대의 머리에 내리꽂히자, 숯구이가 된 늑대가 옆으로 누웠다.
'와... 씨.'
마법을 쓴 건 셀레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마법을 배웠고, 아인베르트 마법학부를 졸업한 후 석사 대학원생을 하는 중이라 했다.
그 말인즉슨 마법을 10년 가까이 수행했단 것. 마법의 위력이 생각보다 강했다.
'대단한 전력이다. 마법사.'
-크르르르!
자기 편이 죽어가서 원통했던 걸까?
머리에 종양 달린 늑대 한 마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셀레나에게 달려들었다.
내 역할은 후방의 마법사를 보호하는 것.
내가 활약할 때였다.
-그러러러렁!
내 몸보다 세 배는 커다란 늑대가 무서운 기세로 흙바닥을 박차며 뛰어왔다. 허나 지금은 두렵지가 않았다.
'신체 강화, 2단계.'
무게중심을 넓게 잡은 채 온몸을 이완시켰다.
지금 내 육체엔 어떤 것도 없었다.
감정, 심상, 검은 마력... 그 무엇도.
'일단 온몸에 넘쳐나는 검은 마력을 제했다가...'
운동이 필요한 부분에 펌프질하며, 가장 구체적인 심상을 담아 휘두른다.
'두려움.'
그저 투기에 몸을 맡기는 이전과는 달랐다.
이는 사령의 화살과 비슷한 기술.
근육에 검은 마력을 펌프질하고, 거기에 심상을 박아넣어 강화하는 기예였다. 근육통과 함께, 앞으로 뛰쳐나가고 싶단 충동이 밀려왔다.
앞으로 메이스를 휘두르자-
-콰아앙!
결과는 놀라웠다.
"유... 유진 님?"
"괜찮아?"
메이스로 늑대의 머리를 후려친 것뿐이었다.
헌데, 내 메이스는 늑대의 머리를 때리는 걸로 모자라 아예 땅속에 박아버렸다.
메이스가 완전히 박살나고, 늑대의 머리는 폭죽처럼 터졌다. 뼛조각과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땅은 마치 수류탄이 터진 것처럼 패였는데...
옆으로 날리는 흙먼지를 보니 어지간히 세게 내리친 것 같았다.
'이게... 2 단계?'
대신 내 육체의 격이 낮아서 그런지, 근육통이 상당히 심한 데다 마력 소모도 많았다.
난 늑대의 시체에 손을 내밀고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사용했다.
흡수, 그리고 포식.
늑대의 혼백을 빨아 검은 마력을 저장함과 동시에, 근육통이 서서히 풀리고...
'완력도 강해지는 군.'
늑대의 야성 때문인지 근육의 힘 자체도 강해지는 게 느껴졌다.
핏줄이 울끈불끈 돋아나는 전완근을 보니 뭔가 뿌듯했다.
우린 그렇게 늑대 다섯 마리를 도살한 다음 저택으로 돌아왔다.
*
"맙소사. 하루에 여섯 마리를 잡았다고? 진짜 일주일이면 씨가 마르겠군. 그 때 즈음이면 공사를 시작할 수 있겠어."
"맡겨만 주십시오."
"아주 잘 해줬네. 푹 쉬게나."
우린 웃으면서 저택 안쪽으로 들어갔다.
볼라드 모자의 표정이 밝은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각방이라니. 잠도 잘 오겠어.'
볼라드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 서로서로 각방을 받았는데... 난 내가 이렇게 성공했나 싶어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성공한 건 아닌데.'
뭐랄까.
남의 돈으로 비싼 밥 먹는 느낌이랄까?
그런 게 좋았다.
게다가 이들이 준비한 서비스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으니.
"...유진 님. 목욕물을 데워드리겠습니다."
예쁘장한, 칼처럼 단발을 친 메이드가 들어와서 내 욕조에 물을 받고, 덥히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아니, 뜨거운 물로 목욕이라니. 이런 환대라뇨."
"주인님께서 특별히 당부하신 일입니다."
정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씨바아...'
이게 얼마만이냐.
이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1년 1개월.
나는 처음으로 뜨거운 물을 이용한 목욕을 해봤다. 온몸의 피로가 그대로 사라지고, 근육 하나하나가 결대로 풀어지는 느낌. 나른함과 함께 의식이 통째로 날아갈 것 같은 압도적 편안함이 들었다.
'뒤질 것 같네.'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처음보단 많이 강해졌지.'
영지전을 뛸 때만 해도, 난 키 외에 아무것도 믿을 게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원거리 공격도 할 수 있고 강해지는 것도 남들보다 빨랐으니.
'내일도 이렇게 쉽게 끝나면... 돈 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금화 몇백 장이 그렇게 어렵게 보이진 않았다. 그건 아마 내가 능력이 있기 때문이겠지.
'아냐, 방심하지마...'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쨍그랑!
갑자기 등골이 저릿해지는 감각이 날 덮쳤다. 막대한 양의 혼백을 가진 뭔가.
거대한 격을 가진 생명체가 아주 빠른 속도로 저택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온몸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
'마수...?'
볼라드는 처음부터 공지했었다.
매우 강한 마수가 한 마리 있는데, 저택에 내려올 수도 있다고.
-첨벙!
난 그대로 욕조에서 일어났다.
'씨발롬. 목욕하는데...'
그리고 반쯤 젖은 채 밖으로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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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전부 비밀일세.
중세에 떨어지는 건 좆같은 일이었다.
특히 그 시점이 육군 만기 전역하고 바로 다음 날이라면, 더 그랬다.
사회인이 된 당일.
부푼 꿈을 안고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남중, 남고, 공대 나온 인생... 진짜 팍팍하고 땀내나는 인생이었다. 하지만 앞으론 다를 거야. 눈앞에 장밋빛 인생이 펼쳐져 있다.'
이런저런 기대감에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눈을 떠보니 보링턴 영지였다.
'육성으로 욕이 나왔지. 근데 그건 한국어가 아니었어.'
그렇다면 마냥 불행했을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중세도 사람 사는 곳.
군대에 폐급만 있지 않은 것처럼, 보링턴 영지에도 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가 적응하도록 도왔고-
난 꽤 행복한 기억도 쌓을 수 있었다.
행복을 1~10점까지 점수로 매겨보자면.
땀나는 영지전에서 살아남고, 동료들이랑 첫 술을 마셨을 때 5점.
스테이크를 처음 먹었을 때, 인생이 좀 편 것 같아서 7점.
추운 겨울날 사냥꾼 아저씨가 토끼 고기를 줬을 때 8점 정도 되었다.
그리고 방금 목욕했을 때 느낀 행복은 무려 10점이었다.
'후우...'
41도에 달하는 뜨거운 물이 뭉쳐있던 근육들을 쫘악 풀어주던 그 순간은...
한국에서 살던 시절까지 포함해도 몇 안 되는, 최고로 쾌락적인 경험이었다.
육체뿐 아니라 정신도 행복했다.
'미래를 꿈꿀 수 있었어. 나도 언젠가 욕조 딸린 집에서 살 수 있단 미래를.'
그런데 그것은 처참히 방해받고 말았다.
'어떤 새끼냐.'
먼 거리임에도 확실하게 검은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혼백과 완전히 뒤섞여 웅웅거리는, 거칠고, 오염된, 진득한 파동.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마력을 뿌려대지 않았다.
뜨뜻한 목욕물에 계속 몸담구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지만 무시했다.
'돈 받았으면 일은 해야지.'
축축하게 젖은 옷이라도 입고 뛰쳐 나갔다.
위쪽에서 비명과 함께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악!
복도를 마구 달리다, 비명이 들린 위층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
-탁! 탁! 탁!
내 각력은 일반적인 범주를 상회한다.
한 번 발을 튕기자 몸이 3m씩 점프하며, 계단을 열 개씩 뛰어넘었다.
"...씹."
그리고 내가 위로 올라갔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저게 뭐야...?'
4층 복도 중앙.
하얀 대리석 바닥 위에 시체 몇 개가 늘어져 있었고, 비명은 저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 저택의 주인인 노부인이 머무르는 방 앞이었다.
-...
그리고, 복도 중앙에 있던 '그것'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뭐냐? 넌."
마치 거대한 거미 같았다.
다리가 네 개 달린 거미.
몸통은 약 2m 높이에 있었고, 입은 몸통만큼 커다랬으며, 머리는 짧았다.
이빨이 빼곡 들어찬 대가리에서 검고 끈적한 침이 줄줄 흘렀다.
'공격 수단은... 다리 네 개인가.'
그것의 팔다리는 흉악할 정도로 길었고, 끝에는 기다란 칼 같은 게 달려 있었다.
저렇게 키가 크면 공격은 위에서 날아올 터. 인간의 몸으론 대응하기 힘들 것이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꽤 잘 훈련된 게 분명한 사병들이 별다른 피해도 못 입히고 바닥에 죽어있었다.
머리부터 허리까지 단칼에 잘린 걸 보니 괴물의 힘이 상당한 듯싶었다.
"으... 으, 저리가!"
"저주받은 괴물!"
노부인은 넘어진 채 공포에 떨었고, 그 앞을 사병들이 막아선 상황.
괴물이 캬아악! 소리를 내며 사병 한 명의 머리를 꿰뚫으려는 순간.
'아, 그렇겐 안 되지.'
기존 메이스는 박살 나버린 상태.
허나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 난 복도에 쓰러진 상단원의 메이스를 집어 들고 앞으로 뛰었다.
-신체 강화, 2 단계.
검은 책이 가르쳐주는 마법은 한 번 배우면 완전히 숙달해서 잘 쓸 수 있게 되는...
그런 구조가 아니었다.
기사의 마법이라 그런가?
무술과도 비슷한 점이 있어,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숙련도가 올라 더더욱 강해졌다.
이 기술을 많이 써보진 못했으나...
그래도 파괴력은 준수했다.
'이겼어!'
괴물의 머리를 노리고 정확히 휘두른 일격!
허나, 아까 늑대 마수의 머리를 통째로 부숴버린 메이스 공격은 그것의 앞발 중앙부에 팅! 하고 막혀버리고 말았다.
"뭐...?"
순간 소름이 돋았다.
마치 마수가 '검술을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검술이잖아?'
그냥 막은 게 아니었다. 완전히 갑각화된 단단한 부분을, 내 메이스 중앙부에 들이밀어서 파괴력을 효율적으로 흘렸다.
본능적으로 죽음을 느낀 나는 뒤로 휙 빠졌다.
-쌔액!
마수가 반대쪽 다리를 휘두르자 내 앞쪽의 공간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사령갑주가 있긴 하나...
저 날카로운 손톱 같은 것에 닿았다면 내 허리도 무사할 수 없었을 터다.
"누구냐!"
에밀리, 셀레나를 포함한 인원들이 4층으로 뛰쳐 올라왔다. 그러자 마수는 카아아악! 하는 소리를 내더니 날 노려봤다.
주먹만 한, 백내장에 물든 눈깔들.
내가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데... 그것의 주둥이가 천천히 벌어졌다.
-안... 돼! 절대, 절대로... 못 건드려...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일 때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 건가...'
소름이 돋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내게 손톱을 휘두르려 하다가,
-쨍그랑!
옆쪽의 창문을 깨고 바로 뛰어들었다.
'뭐...?'
일반적인 마수들은 지능적이거나 전략적인 행동을 잘하지 못한다. 해봐야 시간차 공격이나 무리 사냥 정도.
게다가 생존 본능보다 공격성이 더 강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도망이란 생각 자체를 못했다.
어제 본 늑대들처럼 말이다.
허나 저것은 내게 공격하는 척하면서 옆으로 '도망치길' 택했다.
난 최대한 빠르게 사령 화살을 날렸다.
허나, 그것들의 유도기능이 그리 좋지 않아 애꿎은 저택의 벽면만을 꿰뚫었다.
-파바박!
대리석 표면이 박살나고, 시멘트를 채워 넣은 벽면이 쩌적 갈라지며 가루를 뿌렸다.
"비켜요!"
난 바람처럼 달려갔다.
허나 괴수는 이미 도망친지 오래.
긴 거미 다리를 가진 그것은 벽을 타고 내려가 숲속으로 사라졌다.
'특이한 개체가 있다고... 검은 책이 그랬었지.'
특수하게 강한 마수들이 가끔 존재하는데, 그들을 죽이면 특이점을 흡수할 수 있다고.
'역시 그냥 주는 건 없나.'
난 뒤돌아 상황을 파악했다.
볼라드 경의 어머니.
백발이 희끗희끗한 에스트라드는 두려운 눈으로 자기 호위병들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위병들이 달려가 그녀를 부축하였다.
"에스트라드 님! 괜찮으십니까!"
"나, 나는 괜찮아요."
"..."
난 눈살을 찌푸리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허나, 그 감각은 생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뭔가가 아니었다.
일단 상황을 정리해봤다.
"젠장... 유진."
"응."
"윌라드가 죽었어."
윌라드.
그는 나를 따라온 5인의 기사 중 하나로, 에밀리랑 인맥이 이어져 있던...
경력 없는 후보생 중 하나였다.
나보다도 앳된 소년의 눈엔 죽기 직전의 공포와 떨림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제길.'
그와 난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진 않았다. 볼라드가 쿵쿵거리며 위쪽으로 올라왔다.
"제길! 유진...!"
"..."
"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어머닌!"
2층 계단을 오르고 헉헉거리는 볼라드.
난 그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무사하십니다만, 저희 팀원 한 명, 호위병 두 명이 죽었습니다."
"...뭐? 릭토 산의 폭군이었나?"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어보는 볼라드.
그의 옆머리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물어보는 어투에선 간절함이 느껴졌다.
"곰처럼 생긴 놈이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아주 익숙한, 쌔한 기분을 다시 느껴야 했다.
아까 본 놈은 아무리 생각해도 곰 모양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곰보단 거미와 비슷했습니다."
그러자 볼라드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
우린 윌라드의 시신을 갈무리했다.
그의 시체와 무구를 잘 정돈해 관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
"그래서. 대장."
"..."
이제 내 칭호는 대장이 된 건가?
브랜드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 역시 내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윌라드는 죽었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
"..."
후보생들이라 그런가.
이런저런 임무를 하며 죽음을 많이 겪어본 표정이었다. 오직 셀라나만이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제가..."
"다 자고 있었어. 죄책감 느끼지 마."
-툭툭.
에밀리가 다가가 셀라나를 안아주었다.
"냉정하긴 하지만 처리는 해야겠지."
"그래."
브랜드의 눈빛은 평소의 장난스런 모습과 달랐다.
"윌라드의 돈은 어떻게 할 거야."
집단에 속한 누군가가 죽었을 때, 기사단과 용병단의 방식이 달랐다.
기사단은 무구를 회수하고, 돈은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 보내는 반면.
용병단은 가족에게 부고를 날리고, 원래 임무에서 받아야 했을 돈이나 재산을 나눠 가졌다.
굳이 용병들을 욕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중세의 경제는 빡셌으니까.
월급만으로 하루 세 끼를 못 챙겨 먹는 직업들이 널려 있었다. 부수입이라도 안주면 지원자가 없으니, 이는 도덕적 판단이라기 보다 경영방침을 묻는 질문이리라.
난 윌라드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나이는 열여섯 정도였다.
'윌라드가 살아남았다면 500실링을 줘야 했겠지.'
참 애매한 액수였지만...
이 돈마저 없다면 비를 맞아가며 자야 하고, 사람답지 못한 밥을 먹어야 한다는 걸 난 알았다.
보링턴 영지에 있던 시절, 난 목숨 한 번 걸 때마다 50실링을 받았다.
'사람의 마음이 갈대 같구나.'
볼라드 남작의 저택을 떠올렸다.
그 시설, 그 부, 메이드들의 호의, 맛있는 음식. 목욕. 목욕. 목욕...
돈을 더 벌어야 위로 올라가겠지.
"앞으로의 방침을 정하겠다."
난 생각을 정리하고 그들에게 말했다.
일부러 말투를 좀 예스럽게 했지만 아무도 장난스레 듣지 않았다. 공식적인 상황이라고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받아야 할 돈은 전부 유족들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누가 죽던 상관 없다. 임무 중 목숨을 잃는다 해도, 우린 유족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룰 것이다. 그 이유는..."
"..."
"우리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기 때문이다."
보링턴 영지의 사냥꾼 아저씨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결론을 내리자 에밀리, 브랜드를 비롯한 4명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돈에 대해선 아쉽지만 그래도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의견을 정리한 후.
나는 젊은 윌라드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가슴에 검은 덩어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신관이 없으니 장례 의식은 내가 거행해야 했다.
"유진. 괜찮겠어? 힘들면 무조건 말해야 해?"
에밀리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고, 브랜드는 긴장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컨디션 안 좋으면 하지 마라."
셀라나는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으니...
여기서 사령술사들이 받는 취급을 대충 알 것만 같았다.
-촤르륵.
손을 올리자 윌라드의 혼백이 물결처럼 흘러들었다. 곧 그의 기억과 흔적들이 흩어지고, 가루가 되어 안쪽에 스몄다.
약한 전능감.
푸른 마력을 다루던 존재라 그런 것일까?
마력의 총량이 산적보다 더 많았다.
"사령 기사 유진. 수고했다. 가서 좀 쉬어."
"고맙다."
난 생긋 웃었다.
'이제야 사령 기사라 불러주는군. 사령 장례지도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우리가 기사단의 전통을 택했기 때문일까. 브랜드는 날 사령 장례 지도사 대신 사령기사라 불렀다.
그걸 보니 조금은 호감이 생겼다.
'뭐, 나도 오늘은 목욕이나 하며 푹 쉬고 싶긴 했는데.'
아직 할 일도 남았으므로 볼라드의 사무실을 찾아 올라갔다.
"볼라드 님."
"유진. 왔군. 앉게나. 그... 장례는... 잘 치렀나?"
"예."
"피곤하겠구만. 오늘은 쉬게. 자네가 미치면 큰일이니까."
"감사합니다."
우린 의자에 앉아 창문 너머의 릭토 산을 바라봤다. 음침하게 말라붙은 가을 산. 창문 사이로 바람이 귀곡성처럼 울었다.
난 그에게 물었다.
"어제 이 저택으로 들어온 마수... 그건 [릭토 산의 폭군]이라는 놈이 맞습니까?"
볼라드는 시간을 끌다 힘들게 말했다.
"아니."
"..."
"아마 다른 걸세."
볼라드가 긍정했다면 그에게 실망했을 터였다. 이미 어제 반응으로 둘이 다른 존재인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는 진실을 말했다.
난 그 점을 높이 샀다.
다만 가까운 사이라도 할 얘기는 해야만 했다.
"애초에 계약서를 쓸 때, 릭토산의 폭군을 포함한 산의 마수들이라 했습니다만."
"..."
"부속 조항이 있었죠."
더 강한 마수가 등장하면 돈을 더 청구할 수 있단 조항이었다.
"애초에 대부분의 마수는 전부 포유류 형태입니다. 그걸 1형 마수라고 하죠."
1형 마수.
내가 상대했던 늑대들처럼, 포유류의 형태가 남아 있는 것들을 그리 불렀다.
이들을 보면 '강화된 동물'처럼 보였으므로 구별하기 쉬웠다.
허나 형태를 구별하기 어렵게 되면 그때부터 2형 마수라 불렀다.
그들은 '평균적으로' 1형 마수들보다 강했고, 육체를 강화하는 원시적 사령술을 쓸 수 있어 극히 위험했다.
"어제 본 놈은 2형 마수였습니다."
"미안하네. 이에 대해 추가금을 지급하겠네."
"..."
"얼마를 원하나?"
다만 내가 듣고 싶은 건 그런 말이 아니었다.
볼라드에게 물었다.
"볼라드님. 이건 제 계약에 관한 문제이기도 한데, 우리 팀원들의 생명에 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
"아는 게 있다면 전부 말씀해 주십시오. 그 마수의 정체가 뭔지, 혹시라도 '특별히 노리는 게' 있는지."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그가 졌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전부 비밀일세."
"..."
"우리 가문은 저주받았어."
그 말에선 상당히 가라앉은 느낌이 났다.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어떤 마수의 습격을 받고 있었네. 몇 년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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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쫀 거야...?
'결국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해야 한다.'
이건 중세나 현세나 마찬가지다.
일자리. 일. 수익 분배 권한 등.
이런 것들은 규모가 작을수록 리더가 독점하기 마련이고, 그 특성상 '잘했을' 때의 이득이 피고용인과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잘하는' 게 단순히 열심히 하는 건 아니란 사실이었다.
누군가에게 얕보이지 않고, 이득인 거래를 끌어내 아래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 있는 능력을 말했다.
그래서 난 강하게 나갔다.
"중요한 사실은 미리 말씀해 두셨어야 했습니다."
"미안하네."
볼라드가 말을 이었다.
"우리 가문은 저주받았다네."
뒤이은 말들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거 아나? 우리 가문은... 어머니 말에 따르면 원래 아인베르트보다 권세가 강한 백작 가문이었어."
"...백작이요?"
"그래."
백작.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볼라드의 저택이 참 넓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백작이라면 이 저택은 작다 못해 앙증맞은 초가집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본래 이름은 에스트라드 돌 벨도아. 원래는 이런 외진 곳에 살지 않으셨다 하지. 불만은 없네만."
이곳의 남쪽 땅 전체를 지배했던 이름.
그게 벨도아였다.
"허나 당대의 가주님이 살해당한 이후 가문은 끝났지. 그리고 그 범인은..."
그는 아주 찝찝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님의 어머니."
"조모 되시는 분이란 말입니까?"
"...그래."
아틀라스 제국은 신상필벌에 엄정한 국가.
저런 스캔들이 터지면 황실에서 칼춤을 추었다.
"귀족들이여. 몸이 가루가 될 때까지, 태산처럼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채 약자들을 지켜라. 그렇지 않으면..."
볼라드가 아틀라스 귀족 칙령 1호를 읊었다.
"짐이 그 뼈를 부숴 가루로 만들겠노라."
말 안 들으면 대가리를 부수겠다.
이는 아틀라스 제국의 귀족들이 지니고 살아야 할 모토였다.
"자네도 아는군."
"보링턴 영지에서 들었습니다."
아틀라스 제국의 선조는 돌을 들고 참아내던 자들.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을 막아내고, 외신들을 찢어 죽이고, 이 땅에 철과 불을 내려 터를 다진 이들이라.
이들은 귀족 사회가 부패하지 않는 원인이기도 했다.
'애초에 그들이 부패했다면 이 나라가 없었겠지.'
다스리는 방식은 단순했다.
초인 기사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황실 소드마스터가 찾아가 목을 베었다.
대마법사가 범죄를 저지르면, 황실 첩보부대가 찾아가 납치한 뒤 고문해 정신을 박살냈다.
성직자가 비리를 저지르면 막대한 권력을 이용해 지주들의 권리를 퍼주는 식으로 갈라치기해서, 아예 영업을 못하게 했다.
일곱 신은 '기도하면 계시를 내려주는 신'이지만.
황실 구성원들은 '진짜 신'이다.
교단에서 모시는 일곱 신보다 황제 한 명이 더 강하니 통치가 쉬웠다.
'진짜 미친 세상이긴 하구나.'
그런데 이 사실을 알려준 롤랜드 경은 대체 뭘 하던 사람일까.
"결국 벨도아 가는 즉시 사라졌다 하지. 황실 정보요원이 직접 방문했고, 몇백 명에 달하던 모든 백작가의 인원들은 그날 작위를 박탈당했다."
"반대하던 사람들은..."
"전부 죽었다. 백작은 책임을 치렀고."
-비록 아내에게 살해당한 건 사실이나... 한 가문의 수장이 얼마나 무능하고 부덕했으면 처로 하여금 그런 마음을 품게 했는가?
-가주라면 당연히 그 가문에서 제일 강해야 한다. 처에게 살해당할 정도라면 가문을 이끌어선 안 된다.
-그런데, 너희는 황실을 실망시키고 말았다.
당대엔 그런 분위기였다 했다.
그 말을 들으니 할 말이 없었다.
-너 말고도 귀족 할 사람 많아.
황실의 그런 태도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왜 죽인 거지? 자기 남편을?'
치정? 복수? 아니면 내가 모르는 마법적 이유?
무엇이 원인인진 모르겠지만...
왠지 거기까지 물어도 답해줄 것 같진 않았다.
"그렇게 가문이 무너지고, 어머니는 범죄자의 딸이라 신분을 세탁했네. 거미 괴물은 어머니를 몇십 년간 따라다니고 내 아버지를 죽였지. 그리고 자취를 감췄는데..."
망해버린 백작가의 저주.
가주의 저주일까? 아니면 가문 자체의 원한일까.
때문에 집안은 풍비박산나기 직전이었다.
"근 몇 년 동안은 나타나지 않았는데, 릭토 산에 다시 온 것 같군."
"예측하지 못하셨단 말입니까?"
"그렇네. 가끔 릭토 산의 폭군은 고기를 찾아 이 저택에 내려온다. 가축의 시체를 던져주면 알아서 돌아가곤 하지."
"..."
한 마디로 이 집안을 노리는 괴물이 둘.
하나는 릭토 산의 폭군.
하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저주받은' 괴물이다.
"그럼 그 거미 괴물은."
"아마 죽은 가주, 혹은 충성심 강한 인물의 사령이겠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어제 본 바로 에스트라드의 외모는 오십 대 정도였다.
젊을 때부터 그녀를 따라다닌 마수라면 적어도 몇십 년 동안 살아남았다는 뜻.
마수는 살아남은 세월만큼 강하다.
그것이 왜 지금 다시 나타났는진 모르나, 어쨌든 일감이 늘었단 사실이 중요했다.
"그럼, 자세한 정보나 약점은 모르신단 뜻이군요."
"안타깝게도 그렇네. 포기해도 이해하겠네. 미리 알려주지 않은 탓이니."
"밝히기 꺼리셨던 건 이해합니다."
묘한 위화감이 뒷목을 스쳤다.
그의 이야기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으나, 그걸 도무지 짚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임무를 포기할 순 없지.'
괴물은 대적 불가능한 존재가 아니었다.
고로 그에게 말했다.
"임무는 원래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대신, 거미 괴물을 잡으면 보수를 더 주십시오."
"...음. 얼마를 원하나?"
상인 대 상인으로서의 눈싸움.
나는 평균적인 가격보다 약간 높은 선에서 불렀다.
"금화 사십 개 추가."
"..."
"사령 기사의 명예에 걸고 모든 비밀을 함구하겠습니다."
"앞에 '사령'이란 단어만 좀 빼주면 안 되나?"
"안 됩니다."
그는 오래 고민하더니 말했다.
"좋아. 그럼 후금으로 지급하겠네."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오랜 시간 시달렸어. 나 역시 그렇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 만하다.
그저 그 핏줄을 타고났단 이유만으로 괴물에게 시달리는 삶이라니.
"자네가 이 일을 잘해준다면 한이 없겠군."
"대신 일시적인 작전권, 명령권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병사들이 제 말을 곧게 따르도록."
"그리하겠네."
딱 봐도 그 2형 마수는 나보다 윗줄.
허나 그렇다고 이길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뒷주머니의 검은 책도 웅웅거리는 걸 보니...
확실히 이번 일에 뭔가 있긴 한 것 같았다.
*
"공지를 하나 할게."
나는 내 팀원들인 브랜드, 에밀리, 셀라나, 카덴을 불러 모았다.
카덴은 음침한 후보생 놈.
말수가 적어 존재감이 없었다.
"어제 본 거미 괴물은 2형 마수다. 놈을 죽이고 시체를 데려온다면 볼라드가 추가 보상을 주기로 했어. 너희들이 그때까지 살아남으면..."
"..."
"아니, '죽는다 해도' 금화 네 개를 추가로 주겠다."
"뭐...? 금화 네 개?"
"그만큼 위험하단 뜻이야. 너네들의 작전 수행 능력이 그만큼 필요해."
에밀리, 브랜드, 셀라나의 눈빛을 보니 향상심도 있지만 두려움도 컸다.
보상이 크단 건 위험도 높다는 뜻.
후보생 생활을 해본 이들은 거저 얻는 게 없다는 걸 알았다.
"하, 좆같은 인생. 이렇게라도 벌어놔야 집이라도 사지."
카덴이 이곳에 합류하고 처음으로 감정적인 말을 내뱉었다.
나보다 잘생기고 어린 남자였는데...
항상 입꼬리엔 비웃음이 걸려 있고 머리카락으로 한쪽 눈을 가린 놈이었다.
내가 보기엔 중2병 같았다.
"해, 해볼게요."
"까짓거! 메이스로 머리 때리면 죽겠지."
"사령 사업가 유진. 협상을 잘하네."
원래는 그냥 구제 사업 정도로 생각한 일의 스케일이 커졌다.
허나 할 일은 하나.
전부 죽이고 돈을 받으면 되는 것이니, 난 생각을 단순하게 했다.
*
우린 길을 나섰다.
"너희의 실력은 충분히 봤어. 일단 약한 놈부터 차례대로 해결하자."
"알았어."
"전투력 손실은 다른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다. 거미형 마수를 만나면 끝까지 싸우겠다 오기 부리지 말고, 도망가라."
일단 할 일 첫 번째.
산의 약한 마수들을 모조리 죽인다.
-푹!
-크르르르르!
릭토 산에 왔던 첫날.
나는 대충 산의 지리를 봐 두었고, 경험상 마수들이 살 만한 곳들을 지도에 마크해 뒀다.
그 정확도는 무려 33%.
한 달 동안 숲속에서 살아본 게 전부인 아마추어치곤 꽤 정확도가 높았다.
우린 가장 흔한 늑대, 개 모양의 마수들을 말 그대로 학살했다.
'영혼은 삶을 강요하는 폭군이라.'
내 팔뚝만 한 발리스타 화살들이 발사되자마자 늑대의 가슴팍과 척추에 박히니, 그들은 반항조차 하기 전에 바로 죽었다.
이제 구결을 제대로 외울 필요도 없었다.
'영삶강폭.'
그 이미지와 심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갈비뼈를 부수고 척추까지 꿰뚫는 일격이 수십 발씩 나갔다.
-쐐애애액!
-깨갱!
발견하자마자 죽이고, 발견하자마자 죽이고.
맞든 맞지 않든 한나절에 몇십 발씩 쏴댔다. 나무들이 박살나고, 화살을 피하는 놈들도 있었지만 상관 없었다.
'다시 흡수하면 되지.'
마수들의 마력을 흡수하자, 주변 후보생들이 몹시 당황해했다.
"유, 유진 씨. 괜찮아요? 그렇게 흡수를 많이 해도?"
"젠장. 사령 궁수 사기 아니냐? 나도 사령 궁수나 할 걸 그랬나?"
"닥쳐. 브랜드. 이건 유진이 특이한 거야."
보통 늑대 마수 한 마리에 은화 한 개.
그리 비싼 돈은 아니지만 목숨 걸고 근접전 해야 할 일을 이렇게 처리하니, 왠지 그들이 날 보는 시선이 변했다.
"아니, 에밀리. 들어봐. 우린 화살 쏘면 아교로 깃털 붙이고, 나무 깎고, 쇠 화살촉 붙여야 하는데 유진은 그런 거 안 하잖아."
"..."
"마법사처럼 시전 시간이 긴 것도 아니고, 검은 마력 흡수하는 것도 빠르고... 진짜 대단하지 않냐?"
시체를 실시간으로 흡수, 포식하면서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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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유진
[마력 총량] 약 536 다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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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보다 약 100 다르마의 마력이 늘었다.
하루 만에 20% 강해진 것이니 말이 안 되는 성장치였다.
'마력량은 지표일 뿐이지만. 그래도.'
"남은 시체들은 산 위에 매달자."
차마 다 포식하지 못한 시체들은 산 곳곳에 매달아 놨다. 릭토 산의 폭군인지 뭔지 하는 놈에게 도발하는 의미였다.
그렇게 대략 저녁까지 마수 열여덟 마리를 순식간에 학살했다.
우리 전략은 정석적이면서도 뚫기 힘들었다.
-크르르?
멀리서 방심하고 있으면 내가 화살비를 내려 꼬치구이로 만들고.
-크르릉!
가까이 오면 에밀리와 카덴, 브랜드에게 말 그대로 갈려 나갔다.
엄폐물 뒤에 숨으면 셀라나가 번개를 떨어뜨려 나무를 통째로 구워 버리니, 그야말로 학살.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늑대 마수가 약한 건가. 내가 강해진 건가.'
이제 기본적인 마수 구제 작업으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경지에 달한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죽인 늑대 마수의 시체 위에 손을 얹고, 그것의 육체를 포식했다.
-꿀렁, 꿀렁...
무형의 힘이 꿈틀거리며 혈관을 타고 들어오는 느낌. 내 전완근을 바라보니 근육이 쩍쩍 갈라지고 핏줄이 싹 돋는 느낌이 상당히 좋았다.
'운동할 필요가... 있겠지. 근데 이건 진짜 편하다.'
포식.
그 권능 하나만으로도 내 몸의 근질이 전반적으로 좋아졌다.
전완근, 코어 쪽, 복근 쪽의 근육, 허벅지 근육 등이 쫙쫙 운동이 되며 실시간으로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원래 마수가 갖고 있던 근육의 강점이 내 신체에 반영되는 기분.
'개사기네...'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군가의 멍한 시선이 느껴졌다.
셀라나였다. 그녀의 시선이 손등 위에 돋은 내 핏줄을 향해 있었다.
"아, 무서웠어요? 미안해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저..."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뒤쪽으로 쪼물쪼물 빠졌다.
옆에서 에밀리도 보고 있었는데, 내가 소매를 내리자 왠지 아쉽다는 듯 쨥쨥거렸다.
'대신 만능은 아니군. 흡수하는 완력이 점점 약해지고 있어.'
검은 책이 말하기론 그랬다.
[같은 마수를 여러 번 포식하면 그 효율이 점점 낮아짐.]
-더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운동하면 됨.]
-상식적이군.
[또는 귀속자의 새 에란트리 퀘스트를 수행하면 됨.]
[곰 형태 마수, 혹은 릭토 산의 제2형 마수를 흡수한다면 발전이 있을 것임.]
[또한 상점 6점과 함께 추가 고위험군 마법의 교육을 제공하겠음.]
이런 것 때문에 임무를 수락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와중.
-쿠워어어어!
갑자기 숲 저편에서 거대한 곰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 정도로 영역에서 깽판을 부리면 나오셔야지. 너도 폭군인데.'
-쿵! 쿵! 쿵! 쿵! 쿵!
"전투 준비."
멀리서 보니 딱 봐도 크기가 4m는 되어 보였다.
내가 보링턴 영지에서 영지전을 치를 때 보던 그놈처럼 말이다.
허나...
'두렵지 않아.'
지금의 난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에밀리, 전열. 나머지 측면. 셀라나, 마법 준비해."
우린 마치 기계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놈은 힘싸움을 하러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검은 마력을 준비하며 곰의 머리를 후려칠 준비를 했다.
"와라."
4m짜리 곰과의 힘싸움.
내가 질 확률은 없었다.
-쿵! 쿵! 쿵! 쿵! 쿵!
"준비해!"
브랜드의 긴장된 비명.
나는 곰의 눈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세를 낮춰 잡았다.
곰의 체구는 거대했다.
몸무게가 얼마나 나갈까?
내가 생물학 박사는 아니지만, 적어도 2톤보단 훨씬 많이 나가 보였다.
-쿠어어어!
확실히 폭군의 위용은 대단했다.
그것은 자기 어깨에 채이는 모든 나무들과 돌들, 흙먼지 등을 전부 위쪽으로 날려 보내며 뛰어왔다.
마치 거대한 폭풍이 내게 쇄도하는 것 같았다.
"마법 거리는?"
"거의, 거의 다 왔어요."
셀라나가 마법을 준비했다.
난 지지 않고 곰의 눈을 노려봤고, 놈도 백내장 낀 눈으로 날 노려봤다.
-쿵!
앞으로의 거리 100보.
-쿵! 쿵!
앞으로의 거리 50보.
순간 곰의 전진이 좀 느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왜 이러지?
-쿠워어어!
더 크게 소리지르며 포효하는 곰.
내 다리엔 더 강한 힘이 들어갔고, 방패는 마치 철벽처럼 단단했다.
'와라...!'
그렇게 곰을 기다리는데...
-크르릉.
30보 남은 시점에서, 갑자기 곰이 방향을 선회했다.
-쿵! 쿵! 쿵! 쿵! 쿵!
"...?"
난 당황스러워 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우리 눈싸움 계속 하는 거 아니었어?'
곰은 땅을 박차더니 말 그대로 하늘을 날아, 볼라드의 저택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너... 설마...'
당황스런 감정과 함께 좆됐다는 감각이 몰려왔다.
'나한테 쫀 거야...?'
이건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곰이 볼라드 등을 학살하면 내가 돈을 못 받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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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부터 네 이름은 릭바오야.
항상 인생이 계획대로 풀리는 건 아니었다.
'곰이 도망쳐?'
본능적으로 강한 상대를 알아보는 걸까?
아니면 내 마력량이 방대해 그런 걸까.
숲의 폭군이란 놈은 내게 달려오다, 도중에 볼라드 저택 쪽으로 방향을 선회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 유진. 어쩌지!"
"뭘 어쩌긴 어째! 뛰어!"
곰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거대한 짐승은 나무를 피하며 달릴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우지끈, 쿵, 쾅 등의 소리를 내며 막아가는 장애물을 전부 부수고 뛰었다.
'늦겠어.'
가장 빠른 나조차도 숲에서 뛰는 건 평지에서 달리는 것보다 느렸는데...
저놈은 몇십 년 이상 산에서 살아온 놈이라 비교가 안 됐다.
게다가-
-휘이익!
놈은 곰인데도 날다람쥐처럼 피막 같은 게 있었다.
'아니!'
그리곤 막대한 각력으로 점프하고 활강하는 것이 아닌가?
'대포 달린 트롤, 날개 달린 곰... 아니, 근데 저 피막이 안 찢어진다고?'
대열을 유지할 틈이 없었다.
"먼저 갈게."
나는 순식간에 나무 위로 솟구치며 아래쪽을 향해 사령 화살을 발사하였다.
-촤르륵.
구결을 외울 필욘 없다.
심상은 집착.
죽어가는 이들이 내뱉던 원한 섞인 단말마, 추잡하게 수렴하는 욕망이 솟구치며 형태를 갖췄다.
검은 마력이 섬전의 모습을 갖추니.
'꿰뚫어.'
-파앙!
곰을 정확히 맞출 생각 하지 않고, 면적을 뒤덮는단 생각으로 화살을 발사했다.
제대로 만든 석궁보다 훨씬 강력한 화살들.
그것들이 공기를 찢고, 중간에 가로막는 나뭇가지는 아예 뚫어버리며 쇄도했다.
-크워어어!
곰은 화살 몇 발을 맞았다.
그것의 두꺼운 가죽 덕분인지 대부분의 화살은 튕겨 나갔지만, 몇 발은 곰의 두꺼운 가죽을 뚫고 근육 속에 박혀 통증을 유발했다.
'저게 데미지가 없다고?'
그 순간.
'기만전술?'
갑자기 곰이 급격하게 방향을 바꾸며 앞발을 휘둘렀다.
'당했다.'
6m짜리 트롤도 꽤 컸지만, 곰에겐 곰만의 위압갑이 있었다.
애초에 그건 언데드가 아닌 살아있는 생명체.
골격도 튼튼하고, 꽉꽉 찬 근육질에선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걸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빠악!
눈앞의 나무가 통째로 부숴졌다.
적어도 수십 년은 살아온 굵직한 나무가 박살나며 톱밥을 튀겼다.
'젠장.'
백스텝을 밟기 힘든 산속.
놈의 공격이 워낙 엉성해 검술이 있으면 이득을 볼 수 있었겠으나... 내게 그런 테크닉은 없었다.
난 경사면에서 나려타곤하고, 온몸에 흙을 묻혀가며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그러자 곰이 다시 저택 쪽으로 달리는 게 아닌가?
'아니, 이런 상황이 익숙한가? 학습을 어떻게 시킨 거야?'
허나.
-크르륵?
동물이 인간에게 진 이유는 강함 때문이 아니었다.
-푹!
그것의 다리에 곰 덫 하나가 파고들었고, 아래쪽에 파놓은 구덩이가 아래로 푹 꺼지며 날카로운 송곳들을 드러냈다.
'새끼야. 나도 다 계획이 있어.'
못 함정은 체중이 나가는 대상일수록 위협적이다. 게다가 끝엔 연금술 가게에서 구매한 특제 독이 발라져 있는 상황.
-푸욱!
결국 곰은 자기 앞발이 쇠못에 꿰뚫리는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크어어어!
곰은 구덩이에서 찔린 다리를 억지로 빼내곤, 정말 화난 표정으로 날 노려보며 다른 다리를 휘둘렀다.
-따악!
그러자 반쯤 닫혀있던 곰 덫이 내 쪽으로 휘이익 날아왔다.
곰 덫 스프링의 힘으로는 그것의 가죽조차 꿰뚫지 못했다.
'덫은 괜히 샀군.'
소형 마수, 제대로 된 동물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난 놈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드디어 네가 나만 봐주는구나?"
-크르릉!
수많은 마수의 시체들이 매달려 있는, 도축장처럼 기괴한 숲속.
나무들은 전부 까맣게 헐벗은 산속에서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원을 그렸다.
-크릉.
오래 끌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더는 방법이 없다 생각한 걸까.
곰은 흙먼지를 휘날리며 이쪽으로 쿵쿵 뛰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곰은 다시 저택을 향해 가겠지. 솔직히 두려움이 컸지만 난 그냥 마음을 안정시켰다.
'진정해, 유진. 눈앞에 있는 건 키가 4m에 육박하는 곰 한 마리일 뿐이야.'
뭔가 그 생각이 좀 이상했다고 여기던 찰나,
곰이 그 거대한 몸을 세워 날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크워어어!
썩지 않은 나무 하나를 통째로 끊어내는 타격. 허나 나도 신체 강화를 쓸 수 있는 몸이라.
양쪽 다리를 굳건하게 땅에 박은 채, 방패를 들이대고 메이스를 휘둘렀다.
'메이스는 버려도 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행해진 일격.
-콰앙!
곰의 두꺼운 앞발과 방패가 부딪혔다.
보링턴 영지의 대장장이 영감이 준 방패.
무게도 4kg밖에 안 나가고, 전체가 철로 되어있던 방패는 그대로 조각났다. 곰의 발바닥에 내 어깨뼈를 밟듯이 후려쳤고, 억지로 견딘 내 뼈는 복합골절을 일으키며 조각나 버렸다.
'...씨발!'
극한의 타격감.
몸이 휘청거리고 덜덜 떨렸다.
지금까지 맞아봤던 건 아무것도 아니다 싶을 정도의 타격감과 고통이었다.
어깨뼈는 완전히 박살나기 직전이었고, 팔뼈는 꺾여서 옷을 뚫고 나왔다. 쇄골에도 금이 갔다.
마수가 된 곰이랑 힘 대결을 하면 안 된다는, 값진 교훈을 얻었다.
허나...
교훈 말고 얻은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나 역시 곰의 몸에 데미지를 남겼다.
내 메이스는 놈의 쇄골을 후려쳐서 완전히 박살냈고, 근육과 내장에도 타격을 줬다.
-콰직!
두꺼운 가죽을 송곳처럼 뚫고 안쪽의 뼈를 부수는 느낌.
느낄 수 있었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후려친 일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그것의 근육도, 뼈, 내장까지 데미지가 골고루 전달되었다.
-크, 크어억...
곰이 피를 토하며 날 죽일듯한 눈으로 노려봤다.
'아, 씨... 허리 다쳤나?'
서 있긴 한데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허나 곰이 간과한 게 있다면, 지금 우리가 싸우는 지형이었다.
이곳은 사전에 우리가 숲의 폭군을 몰아넣기로 계획되었던 지점 중 하나.
평소 폭군이 자주 다니는 길을 특정하고 함정을 설치해놓은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여기 매달아 놓은 마수들의 시체는 고작 위협용으로 달아놓은 게 아니었으니.
-쐐애액!
나는 곰에게 사령 화살을 날려 시간을 벌었다.
-크르릉!
그리고 거꾸로 매달린 소형 마수의 시체에 손을 가져다 대고, 그대로 [포식]을 사용했다.
'허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천박한 고통이여...'
그게 정확한 구결인진 모르겠으나 마법은 작동했다. 소형 마수의 신체를 이루던 성분들이 내 몸속으로 꾸역꾸역 흘러 들어오면서, 인간이었던 부분을 조금씩 대체하기 시작했다.
몸이 점점 마수화되는 기분.
'...아니. 거부한다.'
허나 내가 거부하자 이윽고 영혼이 주도권을 잡았다.
어느 정도 늑대의 특성을 가져오는 건 좋다.
허나 그것이 인간성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강력한 의지가 내게 있었다.
당연히 그 힘은 이미 죽어있는 시체 따위가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드득! 우득!
"끄으윽..."
복합골절된 뼈들이, 신기하게도 자기 자리를 찾아가며 서로 문대고 합쳐졌다. 찢어진 근육과 피부, 진탕이 된 내장 등이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했다.
"웩..."
난 검은 피를 쭉 토했다.
이는 내상으로 인한 게 아닌, 죽은 피를 내뱉는 과정이라.
-크우?
그러자 곰이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어때, 이 새끼야. 신기하지? 카밀라가 그랬어. 내 영혼이 좀 특출나다고."
-크어억...
"그러니까... 여기서 싸우면 난 계속 회복이 된다고. 그리고 의외로 메이스도 멀쩡해."
짧은 공방이었지만 곰의 전의는 한풀 꺾인 것 같았다. 곰은 다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내게 이빨을 드러내면서 다가와 거대한 앞발을 휘둘렀다.
-크워어!
그러나 소용없었다.
놈의 타격엔 분노가 많이 빠져 있었다. 그건 반쪽짜리 방패로도 어떻게든 막아낼 정도로 형편없었고, 쌓이는 소소한 부상은 옆에 매달린 마수의 시체로 해결할 수 있었다.
난 곰과 일대일로 싸우면서, 거리가 멀어지면 사령 화살을 쏘는 식으로 대응하였다.
'새끼...'
내가 보호해야 할 부분은 머리, 허리, 다리.
그렇게 조심하면서 계속 싸우자...
승기는 완전히 내게 넘어왔다.
-크우...
그 꼬라지를 본 곰의 눈빛에서 희망이 아예 사라지는 게 보였다. 난 굽어진 메이스로 반쪽짜리 방패를 치며 도발했다.
"...뭐하냐?"
-크륵!
"도망가지 마. 맞서 싸워!"
-크르...
그런데...
갑자기 놈은 몸을 웅크리고 날 불쌍한 눈치로 바라보는 게 아닌가.
"...새끼가?"
"유진 씨!"
그때, 다른 팀원들이 내게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목도한 광경은 4m짜리 곰이 전의를 상실하고 내 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장면.
그리고 그 다음,
-크우.
곰은 공격을 하지 않았다.
곰은, 아예 몸을 한 바퀴 뒤집은 다음 내게 배를 보여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곰이 하는 짓을 가만히 보니...
"...?"
마치 개들이 하는 복종의 표시같지 않은가?
놈은 눈을 꿈벅거리며 자신이 졌다고 온몸으로 피력했다.
'이것도 기만 아냐? 이 새낀 머리가 참 좋은데.'
"유, 유진! 뭘 한 거야!"
"...하지 마라."
"사령 조련사 유진! 아니... 사령 드루이드 유진!"
브랜드가 또 지랄을 시작했다.
평소에 별로 감정적인 면을 보이지 않던 카덴도 눈을 휘둥그레 떴고, 에밀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이 주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끅끅거렸다.
"아니. 유진. 멀리서 봤는데, 곰이랑 그렇게 싸우는 사람이 어딨어?"
"그럼 어떻게 싸우는데?"
"방패로 곰의 공격을 흘려내야지. 이렇게."
에밀리는 방패를 거북이처럼 쓰고, 마치 아래로 미끄러지듯 허리를 우겨 넣었다. 복싱의 더킹 같은 동작. 그걸 보니 좀 신기하긴 했다.
그걸 신기하게 바라보니 오히려 에밀리가 몰랐다.
"이야... 진짜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구나? 미안하다, 야. 내가 집에서 방패술 가르쳐줄게."
셀레나가 말했다.
"마... 마수를 길들이셨다고요?"
"..."
"그런 사례가 없진 않아요. 로커스트에선 오염된 말들도 군마로 쓸 수 있으니... 되긴 되는데."
그러자 곰이 답했다.
-크워어.
제발 살려달라는 말투.
난 난감해졌다.
곰은 자기가 언제 때렸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 날 보는 중이었는데, 지금 보니 백내장도 없고 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물론 난 캣맘, 아니. 곰 맘이 아니었다.
'이 새끼 사람을 죽였을 거 아냐.'
마수는 사람을 해치는 족속.
사람 먹는 짐승을 내 편으로 들일 생각은 없었다.
난 곰에게 휘어진 메이스를 들고 다가섰다.
"너는 새끼야. 사람을 죽였으면 달게 받을 생각을 해야지, 이제와 살겠다는 건 무슨 심보냐?"
그를 죽이려 다가가니, 갑자기 곰이 앞발을 움직여 흙바닥에 뭔가를 쓱쓱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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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 I |
| 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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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필사적으로 귀여운 눈빛.
'아, 이 새끼 사람 말을 알아듣나?'
잘 보니 놈이 그려놓은 건 사람이더라.
머리 하나, 이족보행, 팔 두 개를 보니 그럴듯해 보였다.
사람을 관 속에 가둬 죽였단 건지, 아니면 아직 사람을 먹어본 적이 없다는 건지...
짐승의 말을 이해할 순 없지만 곰은 아직 변명할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유, 유진 님."
갑자기 셀라나가 옆에 와서 내게 말했다.
"아인베르트 마법 대학에선 보통 작은 마수들로 실험을 하곤 해요. 하지만... 이런 거대한 마수에 대한 연구는 아무리 해도 부족해요."
"왠지 그건 로커스트쪽에서 더 할 것 같은데?"
"맞아요. 그래서 연구가 필요한 거에요."
셀라나의 말을 이해했다.
사람 말을 알아듣는 곰을 대학교에 팔아먹으면 돈이 된단 소리였다.
'흠...'
난 묘한 눈으로 곰을 노려봤다.
좀 미친 생각이지만...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기사가 되려면 말이 필요하지.'
뿐만 아니다.
이세계에서 말은 자가용 같은 것이다.
귀족들은 얼마나 우아한 말을 기르는지를 두고 서로의 품격을 비교하며, 몇몇 튀고 싶은 이들은 이족보행 도마뱀이나 타조 따위를 데려와 거리를 거닐기도 했다.
'애초에 거리에서 검은 마력을 풀풀 휘날리면서 날아다니는 것도 이상하고.'
아인베르트 영지에서 가장 필요한 건 바로 말이었다. 허나 내겐 말을 기를 돈이 없었다.
'사료 값이 필요하다.'
애초에 말을 어디에 보관할 것인가?
아무리 월세를 살아도 마굿간 달린 집이 필요한데, 이는 내 재정 상황으로 힘들다.
금화 40장을 받아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곰은 사료가 아니라 고기를 먹고, 툭하면 다른 말을 잡아먹을 수 있으니 다른 말 주인들이 가만 있을 리 없다.
난 잠시, 곰과 지긋하게 눈싸움을 했다.
"곰이랑 힘 싸움을 해서 이기네. 대단하다. 야. 그래서... 팔 거야?"
"기다려봐. 시켜볼 게 있어."
난 에밀리의 말을 대충 받고 곰에게 다가갔다.
포식을 어떻게든 응용하면 치료가 될 것 같긴 하지만...
일단 마수는 자생력이 뛰어난데다, 이놈은 해수였으니 딱히 그런 걸 시도할 의무는 없었다.
"...너 내가 하는 말 알아 듣냐?"
-크워.
끄덕거리는 곰.
그렇다면, 적어도 마법 대학에 갈 동안은 살려줄 이유가 있었다.
"네 이름을 정해줄게."
-크우?
"이제부터 네 이름은 릭바오야."
곰은 이 이름을 싫어했지만...
곰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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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땐 쉬더라도 기본적인 군기를 유지하라 이 말이야.
릭토 산의 폭군, 곰 형태의 1형 마수.
그것은 내게 배를 까뒤집으며 항복의 의사를 밝혔고, 땅에 인간 그림을 그려 자신을 변호했다.
'이 새끼.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
나는 그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응답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릭바오야. 알겠지?"
-크르륵.
놈은 맘에 안 든다는 듯 골골거렸다.
허나 놈에게 거부권 따윈 없었다.
"릭바오가 뭐야, 유진? 좀 더 ㄹ로 시작하는 정상적인 이름도 많잖아. 란체스터라던가. 란슬롯이라던가."
"그런 게 있어."
에밀리가 궁금한 듯 물었지만 나는 넘겼다.
그렇게 우린 릭토 산의 폭군을 데리고 저택으로 내려갔다.
"아니, 미친."
"..."
"...이 뭔."
볼라드가 말을 잃었다.
병사들은 창을 들고 이놈을 찔러야 하나, 창이 들어가긴 하나... 같은 표정을 지었다.
"릭토 산의 폭군을 생포했습니다."
"대, 대단하군."
볼라드는 그 말 외엔 할 말이 없어 보였다. 그의 이해를 좀 더 도울 필요성이 느껴졌다.
"저희는 이 릭바오... 그러니까 릭토 산의 폭군을 마법 대학에 팔 생각입니다."
"아, 그렇군!"
이제야 볼라드는 완전히 이해했다.
남의 저택 앞에 키 4m의 곰을 데려오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
그의 세계관, 상식, 나라는 인간에 대한 지식 을 총동원해도 그걸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허나 내가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 가정하면, 상인인 그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돈이 되길 바라겠네."
"그래서 말입니다. 볼라드 씨. 이놈이 볼라드 가의 일원을 죽인 적이 있습니까?"
"뭐... 사람을 죽인 적은 없지."
그건 의외의 말이었다.
"허나 저택 식구들에게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힌 건 부정할 수 없지."
애초에 저택 사병들은 놈과 함부로 맞서지 않았다.
가죽이 너무 두껍고, 근육질 몸뚱이가 너무 커다란 나머지 뒤로 도망치기 바빴단 거다.
"무슨 손해를 입혔습니까?"
"놈이 우리 저택 근처에 다가와 사병들을 위협했네. 저택 정원에 심어진 나무를 부수고, 우리가 가축이나 말을 도살해 던져줄 때까지 소란을 피우곤 했지."
"아주 영악한 새끼네, 이거."
의외로 놈은 뼈가 부러질 때까지 싸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생존에 이익이 되는 일만 하는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한 마디로 덩치만큼 비겁하단 거다.
'하긴. 이게 정상이지.'
마수들은 포유류를 베이스로 하고, 거기에 혼백이 더해져 변이한 형태다.
동물의 본능이란 건 항상 생존에 이로운 방향으로 작용하는 법.
릭토 산의 폭군 역시 먹이가 풍족하면 인간의 영역을 건드리진 않았다.
"새끼."
내가 곰을 보자 그것이 꾸웅하는 소리를 냈다.
"일단 넌 봐준다. 하지만 네 모든 혐의가 사라진 건 아니다. 넌 원래 죽었어야 했어."
-끄웅.
"허나 유진. 이건 알아두게나. 작전을 위해 우리 가문에서는 여러 물자를 지원할 수 있네만... 그렇다고 저렇게 무식한 곰을 먹여 살릴 수 없다네. 애초에 저걸 구속할 만한 쇠사슬이 있을지도 의문이고."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오오, 사령술인가?"
셀라나 말에 따르면, 몇 톤 넘는 마수들을 옮기는 방법이 있단다.
1. 마수를 시멘트에 넣고 굳힌다.
결과 마수의 체중과 시멘트 무게가 합쳐져 도저히 마차로 옮길 수 없는 지경이 되는데...
2. 그걸 사람이 옮긴다.
오랜 시간 수행한 기사들이 달라붙어 그 커다란 돌덩이를 들고, 직접 아인베르트 대학까지 옮기면 일 끝.
너무 간단한 일이지만 그러긴 싫었다.
보통 마수라면 혼백에 지배당하기 마련이나... 이 새끼. 내가 봤을 때 사람 말을 좀 알아듣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아뇨. 사령술은 아닙니다."
"..."
난 볼라드 저택 앞마당에 족쇄를 이용해 릭바오를 묶어 놓았다. 그리고 주변에 큰 원을 그렸다.
주변에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방울들이 달려 있었다.
"바오야."
-...
"이 선을 넘어오면 좆되는 거야. 알았지?"
-...
"알아들었어?"
-...크룩!
"이 선 넘으면 맴매야. 맴매."
이 새끼, 눈빛을 보니 알아들었다.
나는 볼라드에게 말했다.
"사병을 몇 배치해, 릭바오가 도망가면 뿔나팔을 불어주십시오. 교전은 피하시고요."
"알겠네."
"식사는 잡아놓은 마수들을 먹이시면 될 겁니다."
그러자 릭바오의 표정이 좀 더 안 좋아졌다.
"뿔나팔 소리가 들리면 넌 맴매야. 알았어?"
-셀라나. 저거 팔면 얼마나 나오냐?
-적어도 금화 삼십 개는 나올걸요.
내 입꼬리는 흐뭇하게 올라갔다.
*
네 개의 다리를 지닌 2형 마수.
거미 괴물.
그것은 여러 의미 없는 행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늘을 향해 소리 지르고, 마수의 시체를 해하고, 머나먼 거리를 달리고, 산속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그 행위엔 강박적인 느낌이 있었다.
-내가 뭘 하고 있었지?
죄책감, 분노, 집착...
복수.
그것의 의식은 점멸을 반복했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의식이 끊겼고, 정신을 차리면 칼날엔 뭔가의 피가 진득히 묻어 있었다.
'나, 저것과 거리를 뒀어야 했어.'
괴물은 볼라드 저택과 거리를 두려 끊임없이 노력했다.
허나 혼백은 썩어 문드러졌으므로...
그것은 '왜 볼라드 저택에서 멀어지려 했는지'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저 느껴지는 건 피 냄새.
몇 명을 죽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허나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 하나 뿐.
인간으로서의 혼백이 끊임없이 강요한단 사실 뿐이었다.
'가야 해.'
그것은 볼라드 저택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성채와도 같은 집.
혼백이 살던 때에 비해 작은 곳에 불과했으나, 아주 중요한 게 있었다.
특히 릭토 산의 폭군...
다른 마수의 냄새가 진동하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위험해.
그것의 혼백은 무언가에 홀린 듯, 짙은 분노와 불안 속에서 볼라드 저택을 향해 갔다.
*
릭바오를 생포한 저녁.
사람들이 보는 눈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마, 맙소사! 저게 유진님이야. 검은 머리의 기사...
-와. 사령술사인데 몸이 왜 저렇게 좋으시대? 저 힘줄 좀 봐.
-릭토산의 곰을 생포할 정도면 얼마나 힘이 좋으실까. 히히.
메이드들은 내가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시시덕거렸다.
초인의 감각 앞에서 그들의 소곤거림은 큰 의미가 없었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동양인 남자이긴 한데,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어?
-맞아. 밤에 힘만 잘 쓰면 되지.
-얘.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그들의 눈빛엔 약간 유혹적인 기미도 감돌기 시작했으니.
태어나 생전 받아본 적 없는 시선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어허...! 그러면 안 돼.'
사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기사 말야. 순식간에 상처를 회복할 수 있고, 힘도 엄청 세다는데.
-와. 씨. 나도 배울까? 사령술?
-아주 지랄을 해라.
그렇게 떠들다 나랑 가까워지면 직각으로 인사를 했다.
"어, 어이쿠! 안녕하십니까! 유진 님!"
힘은.
다른 사람의 허리를 유연해지게 하고, 머리를 가벼워지게 한다. 그들은 아주 쉽게 나한테 고개를 조아렸으니...
기분이 나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이런 것 때문에 힘을 기르는구나.'
그렇게 저택을 한 바퀴 돌아보고, 저녁 식사를 위해 만찬장으로 갔다. 난 앞으로의 계획을 대충 말해줬다.
"곰뿐 아니라, 거미 괴물 문제도 해결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유진 님."
예의 바르게, 그러나 감정 없이 처신하던 에스트라드도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 눈빛엔 완전한 신뢰와 감사가 담겨 있었다.
"유진 님. 레이디로서의 보증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서찰을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레이디라고 무조건 결혼하거나 애인이 되는 게 아니었다.
기사란 영웅적인 일을 하는 존재.
그의 업적의 증인은 꼭 필요했다.
고로 이건 큰 명예였다.
'범죄자의 딸, 저주받은 여인이라고 해도 말이지.'
이미 그녀의 얼굴엔 다크 서클이 새겨져 있었다.
"오래 시달리셨나 보군요."
"그래요. 남편이 죽은 다음부터는 안 오더니..."
그 원한이 얼마나 강한 건지...
거의 몇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거미 괴물은 여인을 스토킹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집안의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에스트라드 양은 공포에 떨었다.
난 여기서 또 위화감을 느꼈고.
'아니...'
순식간에 그 정체를 깨달았다.
"에스트라드님. 지금까지 다른 기사분들에게 부탁해 보셨나요?"
"아뇨. 기사 분들도 저 같은 사람을 구원하긴 싫어하시기에... 돈으로만 움직이는 분들이 몇 분 있었지만 태업하더군요."
"실례지만 레이디의 무력은..."
"어렸을 땐 마력을 다룰 수 있었지만, 이젠 없어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에스트라드의 몸에서 마력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다.
이런 여자가 2형 마수에게 몇십 년 동안 쫓기면서 생존했다고?
그 의문을 알아챈 건지 에스트라드 양이 말했다.
"아마 보게 하려는 거겠죠.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하나 죽어가는 모습을."
"어머니.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나는 입을 꾹 닫았다.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거미 괴물이 쳐들어올 확률이 높아.'
여기서 며칠 더 기다려 보고, 2형 마수가 안 오면 그대로 집에 갈 생각이었다. 그동안은 경계 태세를 유지해야 했다.
난 팀원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쉴 땐 쉬더라도 기본적인 군기를 유지하라 이 말이야. 군기 유지 휴식. 알았어?'
그리고 정말 의외로.
후보생들은 이 명령을 알잘딱깔센으로 알아들었다.
목욕할 때 제외하곤 항상 갑옷을 입었고, 만찬도 조촐하게 먹었고, 항상 긴장을 놓지 않았다. 새삼 그들은 엘리트였다.
대부분의 시간은 에밀리와의 대련에 썼다.
"...그러니까. 네가 쏘는 그 검은 화살들을 검으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이거 아냐."
"그렇지. 그러면 내가 근접에서 싸울 때도 도움이 되겠지. 상상해 봐. 수십 개의 검이 주변에서 날아다니며 널 베는 거라고."
만약 내가 구상한 이기어검술, 그러니까...
사령 화살을 사령 검으로 바꿀 수만 있으면 근접전 고민은 아예 해결된다 생각했다.
허나 에밀리 생각은 달랐다.
"하지만 그 검도 결국 네 검술을 따라가지 않을까? 사령술의 원리는 나도 모르는데..."
"아마 안 그럴걸."
"상위 기사들은 30피트를 1초 안에 주파하는 괴물들이야. 네 사령검술이 그걸 막아내면 모르겠는데... 방패술 배워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아."
우사인 볼트는 100미터를 10초에 뛴다.
허나 숙련된 기사들은 백 미터를 1초 안에 뛴단다. 그 말을 들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 말 대로야. 배워 나쁠 것 없지.'
그녀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이 가르쳤다.
"힘을 빼!"
"방패는 몸에 붙이고, 상대방의 공격이 오면 빗겨내듯 위로 들어. 그게 기본이야."
"메이스 휘두를 때 팔에 힘을 빼야 해. 타격할 때만 손에 힘을 준단 느낌으로. 다시."
"메이스를 들고 있을 때, 괜히 상대를 가리키고 있지 마. 메이스는 타격 무기야. 언제든 상대를 내리칠 수 있도록 무기를 '들고' 있어야 해."
여기사 밑에서 구른 시간이 있어서일까.
진짜 귀족들이 배우는 타격술과 방패술을 가르쳐주니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몸이 더 가벼워.'
무게중심을 항상 가운데 두고 싸우다 보니, 싸움 자체가 훨씬 안정적으로 흘러갔다.
옛날의 나술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무게중심을 하체에 옮기고 무기를 가볍게 휘두르는' 게 뭔지 아주 단순하게 이해했다.
"하아... 유진... 그래도 배우는 게 꽤 빠르다. 잘 외우는 느낌이야."
"고맙다. 에밀리."
"쓰읍. 나도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으련만."
에밀리는 땀에 젖은 목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하얀색 목선이 달빛에 비추어 드러났다.
상당히 건강미가 넘치는 육체였다.
"원래 이렇게 해주면 돈 받아야 해. 알지?"
"더 줄게."
"됐어."
그렇게 다시 연습하던 와중.
-뿌우우!
전투 나팔이 울렸다.
'드디어 왔군...'
나랑 브랜드가 미리 언질을 해 놔서 그런지, 병사들이 빠릿빠릿하게 대응하며 자리를 잡았다.
"가자. 에밀리."
우린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고 화살처럼 달렸다. 그러자 저택의 정원이 눈에 들어왔고...
거대한 거미형 마수가 릭바오를 죽이려고 하는 꼴이 보였다.
-크애아아아악!
-크워어어!
"릭바오오오!!!"
릭바오의 몸값은 금화 서른 개.
지금 죽어선 안 되는 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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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플 거야.
릭토 산의 폭군은 미칠 것 같았다.
'도망친다! 도망친다!'
습격의 전조는 이전부터 알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미 괴물이 200m 내에 들어왔을 때부터 명확하게 느꼈다.
'끔찍하다! 베인다! 죽는다! 미친 존재다!'
릭바오는 그것과 구면.
숲의 폭군은 나름의 휴전 의사를 밝히며 그것을 존중했건만...
그 거미 괴물은 달랐다.
그것은 대다수의 마수들보다도 머리가 나쁘고, 포악하고, 행동 원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아무 이유도 없이 릭바오를 때리고, 꿰뚫고, 베어서 거의 죽을 때까지 몰아붙였다.
릭바오는 분노에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증오스럽다! 죽이고 싶다!'
허나, 자연에서 약한 존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릭바오는 그것이 내려올 때마다 자리를 비켜 주었고, 그럴 때마다 자존심이 뭉텅뭉텅 깎이는 걸 받아들이며 살아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놈이 지금 여기로 오고 있었다.
-끼잉! 끼잉!
그래서 릭바오는 아픈 개처럼 낑낑거리며 유진이 그려놓은 원 안쪽을 돌았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거미 괴물도 무섭지만, 유진도 무섭다.
거미가 오면 자신은 죽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이 원 바깥으로 나가면 유진이 '맴매'를 할 것이다.
두 번 맴매 당했다가는 생명을 보장할 수 없었다.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릭토 산의 폭군이기에...
그것은 인간처럼 두려워하고 동물처럼 불안해했다.
물론 경비병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저 새끼 저거 왜 저래? 저거."
"몰라. 미친 곰 새끼. 저놈이 말 몇 마리를 처먹었는지 알아?"
"선 넘으면 뿔나팔 불라고 했는데..."
"아직 선은 안 넘으니 지켜보자고."
아직 유진과 싸운 상처가 남아 있다.
도망가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
결국 릭바오는 나름 머리를 굴려 이를 타개하려 했다.
그는 앞발을 들어 땅에 그림을 그리고, 제일 불쌍한 얼굴로 경비병들을 바라봤다.
X
나름 릭바오가 거미 괴물의 외모를 표현한 그림이었다.
그러자 경비병들이 껄껄 웃었다.
"저것 봐. 저 곰... 저거 이름이 뭐였지?"
"릭바오."
"이름 참 뭐같이 지었네. 릭바오가 바닥에 뭔갈 그리는데?"
"하. 로커스트 서커스단에 팔면 딱이겠군."
아무리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 한들 릭바오의 본체는 곰. 그림도 잘 못 그리고, 글자를 배울 만큼의 지능도 없었다.
'우리 죽는다! 죽는다!'
극도의 불안!
로커스트에서 탈출했을 때도 이 정돈 아니었다.
그는 동물 최초로 자살을 선택할까 했지만...
'미친 괴물! 미친 괴물!'
네 발로 기는 거미 같은 생물이 시선에 들어오자 그 조차 할 수가 없었다.
*
"릭바오오오오!!!"
나는 앞으로 뛰쳐나갔다.
검은 마력으로 한껏 강화된 몸은 20m에 달하는 거리를 순식간에 가로질렀으며, 내 방패는 거미 괴물의 칼날에 닿았다.
-팅!
허나 거미 괴물은 힘싸움을 해주지 않고 뒤로 물렸다. 난 긴장한 눈으로 그것을 노려봤다.
'애초에 검은 마력 자체가 방대하군.'
레이돈 커스와 비교해도 딸리지 않는 마력량.
하지만 우리에게도 대비책은 있었다.
-유진. 그런 식으로 작전을 짜면 안 되지. 사령 전략가는 아니구만. 줘봐. 내가 도와줄 테니.
그건 바로 브랜드와 함께 짜놓은 작전이었다.
볼라드가 내게 지휘권을 이양해, 사병들이 군말 없이 이에 따랐으니.
-쾅!
볼라드 가에 있던 대포 두 문이 불을 뿜었다.
-키샤악!
허나 괴물의 칼날은 그 대포알을 손쉽게 튕겨냈다. 난 눈을 가늘게 떴다.
'검술이라고?'
단순히 방패처럼 막은 게 아니었다.
대포알을 비껴쳐 빗나가게 하는 방어 테크닉. 저것은 엄연한 검술이었고, 그 실력은 나보다 높았다.
'허나 물러설 순 없지.'
내게 기사도가 있는 건 아니다.
의무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내가 고생 조금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민간인이 존재하는 상황이라, 뒤로 빼긴 싫었다.
그들이 죽어도 내가 슬퍼하진 않겠다.
그래도 사람이 죽는 건 좀 그랬다.
"날 봐!"
-키르륵.
사령 화살 여러 개를 이기어검술처럼 띄우고, 거미 괴물을 향해 돌격했다. 쾅! 마력으로 강화된 몸이 포탄처럼 날아가자 괴물도 무시할 수 없었다.
-키샤아악!
어떤 생물과도 닮지 않은 대가리가 날 노려보며 울부짖었다. 꽤 공포스러웠지만 상관 없었다.
'예전의 나와는 다르다!'
에밀리에게 습관 교정을 받은 몸.
게다가 볼라드가 새로 준 방패도 그리 약하진 않았다.
분명 내 방패술이 고수의 그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저번처럼 생초보의 움직임을 보이진 않을 것이니...
난 날아오는 거미의 다리를 방어하는 동시에 대가리를 후릴 생각을 했다.
-쐐애액!
허나 현실과 예상은 달랐다.
-탱!
난 칼날을 막아내자마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씹... 수 싸움 밀렸다. 또 한 번 받아내면 죽어.'
하는 수 없이 뒤쪽으로 스윽 빠지자,
괴물은 날 죽이려고 들어 올린 앞발을 아주 조용히 내렸다.
'소름 돋네.'
압도적인 힘이나 반사신경을 갖고 있다면 무술은 필요 없겠다.
'지금까진 그래왔지.'
검은 마력의 도움을 받으며 싸웠다.
오로지 힘으로 대부분의 상황을 해결했다.
다치면 회복하고.
원거리에서 활로 쏘고.
허나 상대도 그와 비슷한 스펙을 갖고 있다면 어떨까?
-거기서부턴 수 싸움이 중요해져. 유진.
그랬다.
하지만 난 수 싸움에서 졌기에,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패널티를 지불했다.
밀폐된 지형이었다면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결과였다.
'인간의 혼백이 들어갔으면 검술을 쓸 수도 있지. 운 좋게 머슬 메모리가 들어가서... 하지만 저 몸으로 그게 된다고?'
참으로 불합리했다.
검술은 두 팔 달린 영장류가 쓰는 것이지, 네 발 달린 거미가 쓰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난 저택 테라스에 있는 셀라나에게 소리질렀다.
"마법 준비해애애!"
"네, 유진 씨!"
-쐐애액!
'온다!'
그 소리를 듣고 거미가 쇄도했다.
빠른 데다가, 아주 집요하게 내 사각을 노리며 날아오는 검격.
놈의 신장은 4m정도 되기 때문에 더더욱 궤적을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깡!
'제길...'
사령 화살을 날려야 하는데.
방패라는 우위를 지녔음에도, 한 번 검을 쳐낼 때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일어나며 집중력이 고갈되었다.
'이와 비슷한 상대가 있었나? 나술...?'
아니,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나술은 오랜 시간 검을 배운 사람이 아니었다.
검법대로 싸우기보단 기술을 군데군데 섞어 막 싸우던 인간.
트롤 역시 검법을 모르는 이에게 조종받았으므로 공격이 읽기 쉬웠다.
하지만 눈앞의 괴물은 달랐다.
확실히 사람을 죽이기 위한 계획을 짜고, 그걸 실시간으로 수정하면서 이행하는 존재가 저것이었다.
첫 번째 공격을 회피해도 죽을 수 있었고, 막아도 결과가 마찬가지일 수 있는 상황.
반면 상대는 여유로웠다.
"유진 씨! 조금만 더 버텨요!!"
"내가 간다!"
브랜드가 옆에서 뛰쳐나와 거미 괴물의 뒤꽁무니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평소에 사령 어쩌구 하면서 놀리던 태도는 없었다. 그는 아주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검격을 날렸으나...
-깡!
한 번 검을 맞대보곤 뒤로 굴렀다.
그 위로 쐐액! 하고 참격이 지나갔다.
그 틈을 이용해 수십 개의 사령 화살들을 날렸지만.
-키흑. 낮은, 재... 주.
거미 괴물은 얄밉게도 자기 몸통을 칼날의 면적으로 가린 채 전부 튕겨내는 게 아닌가?
'어려운 상대다.'
난 튕겨 나가는 화살들을 보며 침음성을 삼켰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었다.
계속 검을 나누며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의 계획을 짜고 실천하는 존재였다.
그것이 주는 압도적인 감각이 날 전율하게 했다.
-쾅!
그 때.
괴물의 머리 위로 날벼락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눈앞이 하얀색으로 물들고, 땅이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분진이 흩날렸다.
그것은 셀라나의 마법, 낙뢰.
푸른 마력을 이용한 기예였다.
"...제길."
허나 거미 괴수의 몸통이 생각보다 작았기 때문일까?
마법은 빗나갔고, 놈은 더 크게 분노하며 셀라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날 봐!"
주의를 끌어야 했다.
에밀리가 달려들고, 카덴이 그 틈을 노리며 창을 쐐애애액! 던졌다.
허나 빗나간 창은 애꿎은 벽에 주먹만 한 구멍을 낼 뿐. 에밀리의 몸은 뒤로 탱! 하고 밀려나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작전대로 간다!"
"미, 미친... 유진! 하지마!"
"명령에 따라!"
내가 뭐 직위가 높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일단은 팀장이고...
이럴 때 확고한 리더쉽이 없으면 우왕좌왕하게 되며, 그 경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일단 냉정한 카덴이 먼저 움직이자 브랜드, 에밀리를 비롯한 다른 후보생들도 작전대로 포지션을 잡았다.
'후우, 아플 거야.'
그렇게 생각했지만 일단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머리가 앞으로의 고통을 상상하며 비겁해지지 못하도록 말이다.
"크아아아아!"
검은 마력으로 강화된 육신이 힘으로 넘쳐 흘렀고, 방패를 잡은 손은 덜덜 떨렸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힘으로 놈의 다리를 내리치자-
-까앙!
-키, 힉. 낮은, 수준...
바로 등 쪽에 공격을 허용했다.
-서걱.
섬찟한 느낌.
'와... 씨. 무슨 속도가.'
거미는 앞에서 찌를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그저 내 등으로 칼날을 뻗고선, 안으로 당기며 베어낼 뿐이었다. 사령 갑주가 있어 덜 다쳤지만...
거미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푸욱!
"커헉!"
거미의 기다란 다리가 내 몸에 깊숙하게 박혔다. 팔뚝만 한 칼날로 폐를 관통당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씹...!"
-까앙!
게다가 거미의 다리는 네 개.
그것이 다른 다리를 이용해 내 머리와 가슴을 공격했으므로, 등 뒤가 꿰뚫린 상황에서도 방패를 들어야 했다.
-깡!
그리고 난 그 상태로-
'영혼은... 참... 씨발. 좆같네.'
영창과 함께 수십 발의 화살을 머리 위로 띄운 다음-
'뒈져라.'
거미의 머리 위로 그대로 쏟아부었다.
-캬아아악!
놈의 가죽은 릭바오보다 약했다.
번개처럼 쇄도한 화살이 놈의 부드러운 몸통에 팍! 팍! 박히면서 관통하자 녀석 역시 검은 피를 뿜으며 휘청거렸다.
-쾅!
-콰광!
그 틈을 노려 발사되는 두 문의 대포.
이번에 놈은 대포알을 다 튕겨내지 못했다. 놈은 강한 충격량에 얻어맞은 채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유지이인!"
"죽어어어!"
브랜드, 카덴, 에밀리가 동시에 협공.
눈앞이 시뻘개지며 점점 의식이 흐려져 갔다.
'진짜 좆같은 작전이었다.'
아래를 보니 내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강처럼 이어지는 와중이었고...
거미 놈은 내 몸을 방패처럼 휘두르며 거리를 벌리려 하더라.
그런데 그때.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하나 벌어졌다.
-쿠워어어!
릭바오가 갑자기 목줄을 끊고 달려들면서 거미 괴물의 꼬리를 물어버린 것이었다.
'릭바오!!!'
-하, 하등한 마물...! 끼륵.
왜 그랬을까.
잘은 모르지만 릭바오는 저 거미 괴물이 나보다 싫은 것 같았다.
버티지 못한 거미 괴물은 나를 옆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쾅! 소리와 함께 내 등이 담벼락에 부딪히고,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와...'
하늘을 보니 빨갰다.
내복처럼 입어 놓은 사령 갑주가 아직 끊어지지 않은 상태. 이것이 링메일같은 역할을 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몸통이 반으로 갈라질 뻔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런 때를 대비해 세워놓은 계획도 존재했다.
"유, 유진 님이 부상 당했다!"
"그거 가져와! 빨리!"
옆쪽을 보니 병사 여럿이 늑대 마수의 시체를 지고 관짝소년단처럼 뛰어오는 게 보였다.
난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통증을 참아가며 숨을 쉬었다.
살고 싶었다.
"유진 님, 시키신대로... 헉!"
몸이 움직이지 않았으나...
내 심장, 근육, 커다란 몸과 목숨이 너무 소중해 잃기 싫었다.
피가 다 빠진 와중에도 검은 마력이 팔을 들어 올리니,
"하아..."
나는 손을 뻗어서 그대로 마수의 시체를 포식할 수 있었다.
"쿨럭."
입에서 검은 피가 솟구치면서 상처가 재생되었다. 아팠지만 몹시 기뻤다.
통증은 삶의 증거였기 때문이었다.
-...불, 쾌... 쓰레기, 재생?
이런 적은 처음인 걸까?
거미 괴물은 도망조차 못 가고, 날 바라보며 사람의 말을 했다.
허나 소용없었다.
-그륵! 크그그극!
릭바오가 몸이 꿰뚫린 채로도 끝까지 거미의 다리를 물고, 안 놔줬기 때문이다.
저 거미 괴물은 재빠르지만 가볍다.
몇 톤짜리 곰이 다리를 물고 있는데 도망갈 순 없었다.
그것은 내게 돌진하려 했지만,
-그르르륵!
반쯤 눈 돌아간 릭바오가 네 발을 땅에 박으면서 버텼다.
-개, 쓰레기!
허나 그것의 집착 역시 상상을 초월했으니.
-푸슉!
놈은 자신의 다리를 힘으로 끊어버리고, 오직 셋밖에 남지 않은 다리를 건물 벽에 붙인 채 저택을 오르기 시작했다.
"꺄, 꺄아아악!"
'아니... 저 여자는 왜 저깄어?'
4층을 보니, 노부인 에스트라드가 창밖을 보다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다리가 세 개밖에 남지 않은 거미가 자신의 다리로 창문을 깨려던 그 순간.
'새끼야. 그래도 안 되지.'
순식간에 쇄도한 검은색의 화살이 거미의 몸통을 푹! 뚫고 들어갔다.
단 두 발의 화살.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놈의 뒤통수와 가죽 부분을 관통했다.
가죽도 얇고 몸통도 작았기 때문에 관통상이 더 치명적이었다.
-아직, 살...
거미는 그렇게 말하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버르적거렸다.
"물러나세요!"
셀라나의 경고와 함께 하늘이 번쩍- 하면서 두 번째 벼락 마법이 떨어졌고.
"..."
볼라드의 가문을 괴롭히던 망령은 그렇게 숨이 끊어졌다.
"...하아."
"해치운... 건가? 유진. 괜찮아?"
에밀리가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해치운 거다. 에밀리. 대체 몇 번을 말해? 그 말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니. 왜? 이 말을 하면 적이 살아나기라도 해? 그건 비합리적인 미신이야."
나와 에밀리는 서로를 노려봤다.
허나 전투는 이미 이긴 상황.
우린 그냥 피식 웃는 걸로 이 순간을 넘겼다.
거미의 시체를 바라보니...
뭉글뭉글한 괴수의 혼백 속에 뭔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게 있었다.
'그래. 힘... 힘을 내놔.'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난 비척거리면서 시체를 향해 걸어갔다.
가을의 하늘이 공허해 보이는 날.
바람은 굉장히 쌀쌀했고, 어느새 나온 볼라드는 크게 뜬 눈으로 죽은 거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우웅.
뒷주머니에 있던 검은 책이 할 말이 있다는 듯 떨었고.
에스트라드, 에밀리, 사병들은 전부 입을 꾹 다문 채 내 행동을 지켜봤다.
"...장례식을 진행할게요."
그리고 내 눈앞엔 처음 보는 혼백이 있었다.
몽글몽글한 검은색 젤리 안쪽.
그 안에 찬란히 빛나는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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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아팠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평소의 흡수와는 다르군...'
시야가 새까맣게 암전된 다음, 다른 세상이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여긴..."
그곳은 새하얗고 고요한 사막.
무기질적인, 흑백 무성 영화 같은 모래가 대양처럼 이어진 곳이었다.
하늘은 어두운 회색이었는데, 끝도 없이 펼쳐진 걸 보니 광활하면서도 허무하게 느껴졌다.
'와본 적이 있어.'
이곳은 나의 내면.
언젠가 꿈에서 본 세상이자, 내 영과 혼백이 기거하는 정신 세계였다.
-...여긴?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앉아 있는 건 한 여인이었다.
-어디야. 여긴 어디지?
머리는 산발이었고 눈빛은 반쯤 돌아 있었다.
허나 한때의 품위를 증명하듯 비싼 드레스 위엔 레이피어를 차고 있었으니, 그녀는 필시 귀족이었으리라.
'역시. 내가 추측한 대로군.'
마수 안에 들어간 건 가주의 혼백이 아니었다.
에스트라드의 무력은 내가 봐도 약한 수준.
그런 괴물이 수십 년에 걸쳐 추적하는 데 생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눈, 코, 입에서 끊임없이 검은 물을 흘리며 표독한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기사. 네 이름을 대라. 너는 누구고, 여긴 어떤 곳이냐?
"사령 기사. 유진입니다. 당신의 혼백을 제거하러 왔습니다."
-감히! 네놈은 내가 누군지 아느냐?
"예."
그리고 난 그녀에게 말했다.
"전 벨도아 가의 부인, 에스트라드 양의 어머니 되시는 분이지요."
-...?
의뭉스런 눈길로 날 노려보는 여자.
그녀의 몸에서 홍수처럼 검은 물이 쏟아졌고, 그것은 이윽고 사막에 오아시스를 만들다가 발끝에 닿았다.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여보, 제발, 그만 해요!
어느 봄날이었다.
허나 그녀의 남편은 화가 솟구쳤는지, 전투할 때나 쓰는 검을 든 채 딸의 방으로 찾아갔다.
-쾅!
그리고 문을 발로 차 부쉈다.
당시 에스트라드는 편한 복장으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걷어차자마자 의자에서 엎어지고 말았다.
-아, 아버지...! 잘못했어요!
그리고 빌었다.
뭘 잘못했는지도 몰랐지만, 그렇게 빌어야 고통을 덜 받는단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당신, 이제 그만해요! 열 살짜리 딸한테 너무 과하잖아요!
에스트라드의 어머니가 가주 앞을 막아섰지만 소용 없었다.
실제 가문을 이끌기 위해 훈련받은 가주와, 정략결혼 용도로 길러진 신붓감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에스트라드의 어머니를 발로 차서 날려버렸다.
-병신같은 년.
-크헉.
-이런 년들은 어릴 때부터 확실히 군기를 잡아야 하는데 그걸 모르는군.
가주는 자기 아내를 반쯤 기절시킨 후, 공포에 질린 에스트라드의 다리를 검집으로 내리 찍었다.
-끄-꺄아아아아악!
무자비할 정도의 비명.
백작이 한 번 내리칠 때마다 딸의 살점이 폭발했다.
딸의 뼈가 복합골절되어 살을 찢고 나오자 방이 피바다가 되었다. 백작은 의자를 끌어다 앉은 채 비명 지르는 딸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우리 딸. 아빠도 사실 이러기 싫단다.
-사, 살려주세요...
-자식을 때리는 부모의 마음이 어떤지 아니? 응?
백작은 경멸하듯 바라보다, 칼을 뽑아 으깨진 에스트라드의 다리를 짓이겼다. 딸이 너무 강하게 입술을 깨문 나머지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아, 죽겠군. 사제. 회복시키게.
-예.
아이리스의 사제 두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와 에스트라드의 몸에 치유 마법을 걸었다.
한 번에 금화 다섯 개씩 들어가는 고비용 마법. 허나 백작가엔 돈이 썩을 정도로 많았다.
-크, 크흑...
그 말은, 에스트라드의 고통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오늘 네가 남자 하인 한 명이랑 같이 노는 걸 봤단다.
-아, 아파요. 제발.
-네가 하인과 염문이 났단 소식이 퍼지면 누가 결혼하려 하겠느냐? 응? 너처럼 쓸모없는 년도 돈을 벌어야 할 것 아니냐?
-살, 살려주세요.
-젠장. 모지리 같은 년. 네 어미를 닮아 멍청하구나.
에스트라드의 인생이 그랬다.
부모를 잘못 만난 그녀는 점점 야위어갔고, 나중엔 숟가락을 들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몸이 되어버렸다.
백작은 왜 딸이 점점 못 생겨지냐고 패악질을 부렸다.
외가가 아무런 도움을 안 주는 상황.
결국 보다 못한 에스트라드의 어미가 결심했다.
-내 딸만큼은 안 돼. 걔는 행복하게 살아야만 해.
딸의 삶은 비참했다.
저택에 갇혀서, 매일 폭력을 눈치 보고, 악몽에 시달리며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배로 낳은 자식이 그 꼬라지로 사는 걸, 어미는 견딜 수가 없었다.
-죽일 거야.
남편은 그녀보다 수십 배는 강했다.
허나 그가 모르는 사실 하나가 있었다.
그건, 이미 그의 아내가 죽음을 각오했단 사실이었다.
그녀 역시 검술을 배우며 자란 귀족의 여인이라.
또한 한 방울에 금화 수백 장을 호가하는 독약은 가주라도 죽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암살에 성공했다.
-이 짐승 같은 년!
최후의 순간, 가주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결혼해준 은혜도 모르고! 가주에게, 크헉. 반역을!
-죽어. 죽으라고. 네가 죽어야 에스트라드가 살아.
그렇게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정략결혼은 최악의 형태로 끝났다.
남편은 강압적으로 폭력이나 일삼는 고문관이었고.
아내는 남편을 배신하고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은 살인자였으며.
그 딸은 결코 아버지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모지리, 쓰레기였다.
-어, 엄마. 뭐 하는 거에요?
-에스트라드...
그녀의 어머니는 이미 알았다.
자신에게 주어질 건 사형밖에 없다는 걸.
-너는, 내가 지켜줄게.
그 후.
황실은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격분하며 형을 집행했다.
-본 황실은, 이런 끔찍한 범죄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그 방식은 본보기를 만드는 것.
황실은 병든 마을을 불에 태우듯 그들을 엄벌했다.
백작가는 사라지고, 남편을 죽인 아내는 처형당했으며, '어린 귀족에 대한 학대'를 방조한 다른 이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다리에 힘줄이 끌린 채 노역장으로 보내졌다.
-남은 재산의 8할은 황실이 몰수, 2할은 장녀 '에스트라드 돌 벨도아'에게 상속한다. 이상 판결 끝.
그렇게 백작가는 끝났다.
에스트라드는 자기 손으로 어머니의 시체를 묻었고, 장례를 치를 겨를조차 없었던 어미의 혼백이 꾸물꾸물 흘러나오니.
그것이 동물의 몸에 스며 거미 괴물이 태어났으니... 그것의 목적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에스트라드.
그것은 딸을 지키는 것이었다.
에스트라드는 돈을 물려 받았으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자길 지켜줄 사람은 없는데 돈만 많이 들고 다니는 상황.
그녀를 지켜주겠다며 기사들이 찾아왔지만...
범죄자의 딸에게 바랄 건 돈밖에 없던 기사들이 태업을 저질렀고, 그녀를 동정한다던 여기사들조차 그녀를 등쳐먹고 도망갔다.
그리하여 에스트라드는 온갖 잡배들과 사투하는 삶을 살았고, 그녀를 노리는 자들 사이엔 꼭 초인들이 껴 있었다.
-아아, 사랑스러운 나의 딸.
-내가 널 지켜줄게.
거미는 기꺼이 수호자를 자처했다.
아주 못생기고, 썩어 문드러진, 기괴한 수호자.
그것은 진득하게 상처를 입어가면서도 초인들과 싸웠다.
기사 후보생들, 중급 사령술사, 다른 마수들.
하나하나 강렬한 상대였지만 얼마나 고통스럽던 거미 괴물은 포기하지 않았다.
-내 몸이 부스러져 가루가 되어도,
귀족의 자제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검술 교육을 철저하게 받으니, 기백은 거미 괴물이 되어서도 완전히 죽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에스트라드를 지켜보며 그녀를 위해 상처 입고, 싸우고, 죽였다.
-내 영혼이 썩어서 문드러져도...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소문이 돌았다.
벨도아의 딸은 저주를 받았다.
가주의 사악한 혼백이 마수가 되어 그 피를 노리니, 주변에 다가가선 안 된다.
오히려 그 저주가 에스트라드의 방패막이 되어 주었으니, 그녀는 이를 악물고 다시 살아남으려 노력했다.
꽃 피는 봄이 지나고,
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내리는 낙엽이 지나고,
하얀색 눈이 떨어지는 겨울이 지났다.
그런 일이 수차례 반복될 동안, 거미 괴물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에스트라드를 지켰다.
배가 고파도 상관없었다.
몸에 상처가 늘어가도, 점점 혈관이 썩어들어가도 거미 괴물은 오로지 이전의 혈육만을 쫓았다.
허나 모든 건 썩는 법.
-에스트라드? 에스트라드 옆에 사람이 있어. 내 딸을 지켜야 해.
동물의 혼백과 사람의 혼백이 섞인 상황이니, 그녀의 찬란한 모성애마저도 결국 시간의 흐름에 따라 썩어 문드러졌다.
거미의 정신은 이성적 사고를 전혀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서졌다.
-내 딸... 이름이 뭐였지? 아니. 저 인간을 죽여야 한다. 저 인간이 내 딸을 해하고 있어!
그렇게... 거미는 자기 사위를 찔러 죽이고 말았다.
"당신은 사위를 죽였소."
귀족 여인의 표정이 비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내가 왜?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딸의 남편이 아버지랑 겹쳐 보였겠지. 그걸 구분하지 못했을 거요."
한 여인이 남긴 껍데기는 '딸을 지키는 것'과 '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구별하지 못했으며...
결국, 딸이 주저앉아 우는 꼴을 보고서야 괴물은 정신을 차렸다.
-아, 안돼.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결국 비틀린 혼백은 사위를 죽인 죄책감에 시달리며 딸과 거리를 두었다.
허나 그 기억마저도 망각하니...
다시 몇 년 만에 저택으로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눈, 코, 입에서 타르같은 액체를 줄줄 흘리는 여인이 말했다.
-내 딸을 만나게 해줘.
"만나서 무슨 말을 하실 겁니까?"
-...
가슴이 아팠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남편이 어머니에게 죽었다는 말을 하실 겁니까? 아니면, 평생 딸을 괴롭게 만든 망령이 어머니라 하실 겁니까."
-난...
귀족 여인의 발끝부터, 아주 천천히 가루가 되기 시작했다.
저 하늘 위에 있는 나의 영.
하얗고 둥근 마노석 같은 구체가 세계의 중력을 끌어올렸고, 소용돌이에 휩싸인 여인의 혼백은 이를 견딜 힘이 없었다.
-죽어...
그녀가 날 죽이려 했지만...
애초에 이곳은 나의 세계.
그녀의 손이 검은 가루가 되어 휘날렸다.
-죽어...! 난 내 딸을 만나러 가야 해!
허나 그 혼백은 포기하지 않았다.
끝까지 독기 서린 얼굴로 날 노려보며, 자신의 존재 전부를 불태우며 달려들었다.
-아직, 에스트라드에겐 내가 필요해!
안타까웠다.
이미 그녀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저 망령이자 껍데기일 뿐. 허나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에스트라드 양은 강한 사람입니다."
에스트라드는 강한 여자였다.
"따님은 자기 트라우마를 전부 극복했고, 상단을 만든 다음 결혼할 남자까지 찾았습니다. 어릴 때 받은 학대를 생각하면... 인간 승리에 가깝지요."
그리하여 낳은 아들이 볼라드였다.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변에 지켜줄 사람도 있고요."
-...
그리 말하자 괴물은 발악을 멈추었다.
"당신이 에스트라드를 지킨 것도 사실이고, 그녀의 남편을 죽인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속으론 알지 않습니까?"
-...
"더 이상 당신은 당신이 아닙니다."
혼백은 한 인간의 껍데기일 뿐이다.
그 안에 얼마나 찬란한 감정이 있다고 한들 결국 쇠하기 마련.
실제로 거미 괴물의 의사를 결정한 주체는 '동물의 영'이었다.
어머니가 남긴 혼백은 의사 결정에 영향력만 행사했을 뿐.
마침내 그녀가 깨달은 듯 말했다.
-나는... 괴물이 되어버렸군요.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유진. 사령 기사 유진입니다."
이지가 돌아온 눈동자.
비록 영은 없었지만, 그 혼백은 생전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할 수 있다면요."
-제 정체를 에스트라드에게 숨겨 주세요.
그것이 어미로서의 마지막 배려일 거다.
끝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적어도 딸의 삶을 축복하기 위한 안배.
나는 그녀에게 예를 취했다.
"그리하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감사합니다. 사령 기사 유진.
귀족 여인은 똑바로 서서 내게 감사의 예를 표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기억, 감정, 사상, 집착 전부가 소멸하며 내 영혼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리하여 하얀색으로 빛나던 파편마저 내 안으로 받아들이니...
'...특이점이라. 이게 당신을 잡아두던 것이었군.'
현대에 태어난 나는 그 정체를 더 깊게 고찰할 수 있었다.
모체는 호르몬의 이상을 겪어가며 태내에 자식을 기른다.
그로 인해 애착이 형성된다.
자식을 보호하고 싶단 강렬한 욕구가 생기며, 이를 위해선 자신의 파멸조차 감수할 정도로 애착이 강해진다.
'당신은...'
에스트라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느꼈다.
한 혼백이 지녔던 가장 강렬한 의지, 특이점.
그 심상은 새로운 사령술을 창조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재료가 되어, 사령 기사로 하여금 몇십 년분의 수행을 건너뛸 수 있게 해준다는 걸 말이다.
'마음이 아프군.'
허나, 새삼 잔혹하게도 사령술이란 인간의 혼백을 이용하는 기예라. 난 그걸로 싸우는 인간이었다.
감정이 깨질 것처럼 아픈 것과 별개로 격이 높아진 상황.
이제 난 중급 사령술사에 달하는 인간이었다.
'아, 제기랄.'
그렇게 눈을 뜨자-
"...유진! 괜찮아?"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내 주변으로 귀족의 사병들과 후보생들이 모여 있었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걸까?
아침 햇살이 찬란히 눈꺼풀을 뚫는 게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자...
내 옆쪽에 도열한 검은 화살들이 보였다.
'아니, 화살이 아니구나.'
그것은 찬란하게 가다듬어진 보검 여섯 개.
똑같이 생긴 십자 모양의 검은 칼날들이었다.
'사령 화살이 진화했구나.'
-사랑하는 에스트라드.
-난 널 지키기 위해서 모든 걸 걸 수 있단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던 한 사령이 남긴, 마지막 맹세이자 집착.
그것은 내 힘의 일부가 되었다.
"...유진."
"..."
그때 에스트라드가 내게 다가왔다.
젊을 때의 모습을 알아서 그런 걸까?
내 눈에는 그녀가 참 새롭게 보였다.
"사령술사들은, 흡수한 사령의 정체를 볼 수 있다고 했었죠."
"..."
아마 에스트라드는 아무것도 몰랐을 거다.
그녀는 진심으로 고통 속에서 살았으니...
자신 외의 사람들을 관찰할 여유가 없었겠지.
"그 거미의 정체가 뭐였는지 알 수 있을까요?"
허나 에스트라드도 마음 깊은 곳에선 의심했을 것이다.
만약 가주의 혼이 뒤쫓는다면 그녀는 아무런 대항도 못하고 죽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마른 가을 하늘을 봤다.
기사로서 의무를 다할 시간이었다.
"멸망한 가문의 사악한 혼백들이 들러붙어 만들어진 개체입니다."
"그렇군요."
그리하여 에스트라드가 평온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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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저렇게 피부가 깨끗할 수 있지?
볼라드 저택에서의 일이 끝났다.
우리가 처치한 건 소형 마수 스물여섯 마리, 릭토 산의 폭군, 그리고 제2형 마수라는 거미 괴물로.
이제 릭토산에 있는 괴물은 씨가 말랐다고 할 수 있었다.
보상이 빵빵해서 그런지 오늘 내 기분은 아주 좋았다.
'일단 금화 45장.'
제2형 마수의 평균 사냥 비용은 대략 금화 삼십 장. 1형 마수와 달리 일반 병력으로 대응이 안 되기에 가격이 상당히 높았다.
게다가 이 거미 괴물은 무려 수십 년 동안 에스트라드의 가족들을 괴롭혀 온 장본인이라.
볼라드는 45,000실링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경제관념이 박살나겠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관의 하루 숙박비가 40실링.
삶의 질을 버리면 내년 한 해 동안 아무것도 안 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돈이었다.
'게다가 보상은 그게 끝이 아니지.'
은으로 만든 감사패, 레이디의 인정...
그보다 좋은 건 새 기술을 익혔단 것이었다.
'사령 검술.'
한때, 에스트라드를 보호했었던 수호자의 맹세.
그것은 이제 나를 지키는 검이 되었다.
몇 번 후보생들과 대련한 결과, 근접전에서 압도적 위력을 발휘한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이딴 게 소환물이라고? 무슨 검술이...
에밀리, 브랜드의 말에 따르면 '후보생 수준에서는 아예 대응이 불가능한 기술'이라 했다.
한 마디로 지금의 나는 대부분의 기사 후보생들보다 강하단 소리.
확실히 내가 봐도 사기긴 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검에겐 약점이 없지.'
인간은 경동맥, 대동맥, 심장, 근육들이 있어 약점이 존재한다.
허나 공중을 날아다니는 검에겐 그런 게 아예 없었다.
유일하게 무력화되는 조건은 부러지는 것인데, 어디 날아다니는 검을 부수는 게 쉬운 일인가?
게다가 그 검 하나하나의 검술이 나보다 나으니, 어지간히 숙련된 검사라도 대응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인맥도 보상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후보생들에게 아끼지 않고 수당을 지급했다.
이렇게 깔끔하게 정산해 주는 사람이 많이 없는 걸까? 후보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아니, 미친. 진짜 금화 네 장을 준다고? 유진?"
"그럼 가짜로 주냐?"
"와... 넌 진짜 최고다. 내 평생 충성한다."
브랜드에게 물어보니, 물주들이 임무만 끝나면 갑자기 야박해져서 목숨 건 사람들에게 돈을 잘 주니 않는다고 한다.
세금이니 뭐니 그런 걸 떼면서 말이다.
물론, 난 그렇게 살기 싫었다.
"앞으론 더 줄게. 지금 돈으로는 재투자할 거니까 앞으로도 기대해라."
그러자 모든 후보생들이 열광했다.
"유진. 일 있으면 앞으로도 꼭 불러. 알았지?"
"맞아. 우리 냅두고 다른 데 가면 안 된다."
'그리고 가장 기괴한 보상은...'
그건 바로 지금 내가 타고 있는 것이었다.
'곰.'
그렇다.
난 위풍당당한 4m짜리 곰의 등에 타 있었다.
높이가 4m는 아니지만...
마력이 없으면 올라타기도 힘들었고, 등 위에 앉으면 후보생들의 정수리가 보일 정도였으니 이 곰은 컸다.
'이 새끼는 대체 뭘까?'
묵묵하게 걷는 릭바오.
현대를 잊기 싫어 이름을 웃기게 짓긴 했지만.
우스꽝스러운 이름과 달리 놈은 아주 특이한 개체였다.
'다른 마수들과 달리 본능에 휘둘리지 않아.'
혼백 두 개가 완벽히 섞였다.
마치 누군가 인공적으로 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아니... 그 이상이지. 녀석은 지능이 높다.'
녀석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
논리적 추론이 가능하고, 나름의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이런 동물들을 양산할 수 있다면 전쟁에서 압도적 우위를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점이 상당히 의심스러웠다.
'이게 되면 마수를 길들이는 것도 가능할 텐데, 왜 안 하지?'
"릭바오. 넌 정체가 뭐냐?"
-꾸엉.
물론 곰 새끼가 말할 리 없다.
검은 책을 열고 곰에 대해 질문했더니 답변이 가관이었다.
[말해줄 수 없음.]
'아, 이 새끼.'
거기서 눈치를 깠다.
검은 책은 귀속자한테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또한 아는 걸 모른다고 말할 수도 없다.
고로 저렇게 대답한단 건 검은 책이 릭바오의 정체를 안다는 의미.
로커스트랑 관련된 놈이란 뜻이었다.
'높은 값을 받을 수 있겠군.'
그렇게 우린 아인베르트 영지까지 천천히 갔다.
*
"거기, 정지!"
"멈춰라!"
아인베르트 영지 앞.
거대한 곰을 탄 나를 보자, 경비병들이 창을 든 채 헐레벌떡 뛰어왔다.
선두에 선 남자는 아는 사람이었다.
"이게 누구야. 유진 아냐?"
항상 꼴아 있던 여관 주인의 남편.
오늘은 여기서 당직을 서는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대체... 뭘 타고 있는 거야?"
"뭐, 곰이죠."
"내가 술에 취했어도 그 정돈 안다네. 허허."
그는 낄낄거리면서 겁도 없이 릭바오에게 다가가 머리를 만졌다.
상당히 용기있는 행동이라 할 수 있었다.
-크르릉...!
당연히 릭바오가 싫어했다.
"이거 마수냐? 야생에서 살다 온 놈 맞아?"
"예. 특이한 표본이라 대학교에 팔려고요."
"그렇군. 하지만 이걸 도시 내로 들일 순 없어. 일반적인 곰이라면 입마개만 채워도 괜찮겠지만, 이놈은 좀 크다고."
생각해 보니 말이 되었다.
"육식성이니 마굿간에 넣을 수도 없고, 게다가 발에 족쇄를 채운다 한들 이놈이 신경이나 쓰겠나."
"도시 안으로 데려가려면 어떡해야 합니까?"
"흠..."
부사관이 말했다.
"팔다리를 자르면 되지 않을까?"
"예?"
조금 당혹스러웠다.
릭바오도 지금 장난하냔 얼굴로 부사관을 노려봤다.
"그럼 누구한테 해코지도 못 하고, 무게도 가벼워지는 이점이 있겠지."
허나 이해했다.
'하긴, 중세는 이런 곳이긴 하지.'
인간도 인권이 없는 곳인데 릭바오에게 동물권이 어딨겠는가?
다리를 자른 다음 들고 가라는 말은 상당히 합리적이었다.
무게도 줄일 수 있고, 마굿간에 집어넣어도 뭐라 안 할 테니 말이다.
'흠, 그래도 그건 좀?'
허나 그러긴 좀 싫었다.
내가 먹으려고 짐승을 죽이는 것과, '옮기기 편하라고' 팔다리를 자르는 건 기분이 달랐기 때문이다.
릭바오는 볼라드 저택에서 여기 올 때까지 반항 한 번 안 했다. 나름 말을 잘 들었단 소리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몰라도, 그걸 내 손으로 불구자 만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러웠다.
'못 할 것은 없다. 윤리적인 판단도 의미 없다. 허나 기분이 나빠서 기각.'
참 사치스러운 감정이지만.
먹고 살 만하니 동물에 대한 애정 같은 것도 생기나 싶다.
"셀라나. 다른 방법은 없어?"
"일단 대학에서 동물 통행증을 받아야 해요."
"동물 통행증?"
"예. 행정 처리를 하면 관문을 통과할 수 있어요. 그런데... 며칠 걸려요."
"그럼 그동안 릭바오를 둘 데가 없군.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전혀 예상 못한 곳에서, 예상 못한 인물이 나타났다.
"...어머. 유진 씨? 오랜만에 뵙는군요."
화려하게 장식된 검은색 사두마차.
난 저 마차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로커스트 코벤.'
창문의 차양을 살짝 열고 고개를 내민 여성은 카밀라 앱 헤롯으로, 나한테 검은 마력을 전해주고 사령술을 가르친 귀인이었다.
'여전히 아름답네.'
비단 같은 검은색 생머리.
창백한 피부와 금색 눈동자.
약간 노출증 같은 복장과 차가운 눈매는, 현대의 미 기준에 익숙해진 나조차 홀릴 정도였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유진 님의 동료분들이신가요. 반가워요. 저는 카밀라 앱 헤롯. 부끄럽지만 로커스트 카운슬의 일각을 맡은 마녀입니다."
"아, 아, 안녕하세요!"
브랜드와 카덴은 너무 황송해 머리부터 조아렸고, 에밀리는 뭔지 모를 절망의 눈빛으로 카밀라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애인이 눈앞에서 강탈당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왜 저래?'
"그나저나 유진. 특이한 것을 주우셨군요."
"예. 산에서 만났는데 말이 통해 데려왔습니다."
"후후. 어떻게 간파하셨군요."
그녀는 재밌다는 듯 입을 가리고 낮게 웃었다.
"어디 보자, 통행 때문에 고생하고 계신 건가요? 문을 좀 열어주세요. 저 곰의 상태를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그녀를 수행하는 로커스트의 전사들이 문을 열고, 바닥에 검은 카펫을 깔아주었다.
그뿐인가?
혹시라도 태양광선이 그녀의 피부를 뚫지 못하게 하려는 듯 거대한 양산을 꺼내 위에 덮기까지 했으니...
"칫..."
에밀리와 셀라나가 동시에 고까운 눈으로 혀를 찼다.
'아까부터 진짜 왜 저러냐... 쪽팔리게...'
물론 카밀라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우아한 태도로 걸어와 릭바오를 바라보았다.
방대한 검은 마력을 느낀 것일까.
릭바오는 카밀라 앞에서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릭바오의 머리 위에 손을 얹더니,
"착하지..."
아주 잠깐 검은 마력의 흐름을 읽었다.
눈을 감았다 뜬 그녀가 말했다.
"유진 님. 이 곰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었나요?"
"마법 대학에 납품할 생각이었습니다."
"저런. 불쌍한 아이네요."
카밀라는 아주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유진 님, 혹시 탈것이 필요하지 않으신 가요?"
"이 곰을 타란 말씀입니까. 전 좋습니다. 하지만 크기가 너무 크고, 관리비가 많이 들어서 곤란합니다."
"그래도 말은 잘 듣는 모양이네요. 성격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 않는 걸 보니."
"그렇습니다."
"크기가 작으면 타고 다니실 수 있겠군요."
"그러면 저야 좋은데. 방법이 있겠습니까?"
"하아. 유진. 스승님을 그렇게 얕보면 안 되죠."
무려 스승이란 파격적인 호칭.
그에 경비대장, 후보생들, 그리고 로커스트의 견습생들까지 화들짝 놀랐다.
"스, 스, 스승...?"
"헉..."
"유진. 너, 아니."
특히 브랜드랑 에밀리의 반응이 신선했다.
브랜드의 눈알이 주먹만큼 커졌고, 에밀리는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는 릭바오의 쇠 목걸이를 양손으로 감싸더니,
-툭.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것을 벗겨냈다.
"...?"
마술인가?
마치 손가락에 링을 끼우고, 옆으로 당겨 빼는 마술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제가 스승인데, 바빠서 신경을 못 써드린 부분이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그런 말씀 하실 필요 없습니다."
머리에 차양까지 씌워주는 여자인지라 저렇게 겸손하게 나오면 오히려 내가 불편했다.
"그러니 선물을 하나 드릴게요. 유진."
뭘 선물하려는 지 궁금해하던 찰나.
압도적인 양의 마력이 그녀의 몸속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
솜털이 쭈뼛 서는 느낌.
그녀가 검은 마력을 끌어올린 것만으로도 주변 사물들이 진동하고, 컵이 테이블 위에서 떨어지는 등 이상 현상이 벌어졌다.
"무, 무슨..."
"아니."
후보생들도, 경비들도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만 양해를 구할게요."
카밀라는 그렇게 말하곤 목줄에 검은 마력을 불어넣었다.
내가 쓰는 사령 기사로서의 기술이 아니었다.
사령술사 혹은 주술사로서의 기술.
훨씬 더 섬세하고...
물건에 속성을 부여하기 위한 고난도의 마법이었다.
-치이이익...
쇠로 된 목걸이의 표면에 불길한 상형문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원리는 알 수 없으나, 차원이 다른 검은 마력이 그것에 음각되며 새로운 효과를 부여하였으니.
목걸이는 더 단단하고 부드러워졌으며, 이전에 없던 새로운 효과를 얻었다.
"아, 됐네요."
카밀라는 몇십 초도 걸리지 않아 목걸이를 완성하곤, 자연스럽게 릭바오의 목에 끼웠다.
그러자-
-끄워어어엉...
릭바오의 몸이 점점 줄어들더니, 손바닥만 하게 작아지는 거 아닌가?
'...?'
"소형화의 저주를 새겨넣었어요. 영구적으로. 하는 김에 형태도 좀 바꿔서 착용감도 좋게 했고요. 아, 혹시라도 사람한테 쓰진 마세요. 곰한테만 적용되는 거니까."
그녀는 장난스레 웃었지만...
나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마법 아이템을 이렇게 쉽게 만들어 낸다고...?'
보링턴 마을의 대장장이 영감과 비교할 순 없겠지만, 그는 방패 하나 만드는 데에도 며칠을 소모했다.
허나 카밀라는 쇠의 모양을 조금 변형시키고, 거기에 영구적인 마력을 부여하는 데 단 1분조차 쓰지 않았다.
'아니. 말이 안 되잖아.'
너무 당황스러워 말도 생각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 내가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카밀라는 대체 얼마나 강한 것일까?
-뀨우?
작아진 몸에 적응 못 하는 릭바오를 주머니 속에 넣었다. 녀석은 머리를 빼꼼 내밀곤 당황스런 얼굴로 카밀라를 바라봤다.
"녀석은 실험실을 싫어할 거에요. 그러니, 마법 대학이나 그런 곳에 팔진 말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릭바오의 쇠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아주 정교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진 물건.
내가 마력을 집어넣으면 소형화가 풀리고 릭바오가 더 커지는 원리였다.
"아, 그리고 유진. 저는 아인베르트에서 몇 주 이상 체류해야 해요."
"그렇군요."
"많이 바쁘지만 조만간 찾아갈게요. 사령술을 많이 익히셨네요. 스승으로서 아주 보기 좋아요."
"감사합니다."
카밀라는 작게 웃은 다음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처음 왔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나한테 도움만 준 채로 말이다.
"저게, 저게 사람 피부라고? 어떻게 저렇게 피부가 깨끗할 수 있지?"
에밀리가 덜덜 떨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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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여자친구가 일주일 전에 잡혀갔어유.
'...슬슬 겨울이군.'
물병자리의 달, 겨울 초입.
하늘에서 눈송이가 나풀나풀 떨어지고 있었다. 도시에 사는 평민들은 대부분 판잣집 안에 살았는데, 거기서 연기 때는 걸 보니 묘한 향수가 느껴졌다.
'소주 먹고 싶다. 김치찌개랑.'
그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지금 내 자산은 다 합쳐 36,000실링 정도.
처음에 비하면 정말 많은 돈이었다.
보링턴 영지에 살 땐 목숨을 대가로 50실링을 받았으니, 그때 기준으론 감히 상상도 못하는 금액이긴 했다. 그래서 요즘 내 기분은 상당히 좋았다.
찬란히 빛나는 금화 주머니를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감이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물가 때문일까?
돈이 많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 순 있겠지. 하지만 이 돈으론 집을 살 수도 없고, 몇 년을 뻐길 수도 없다. 어떻게든 돈 나올 구멍을 만들어야 해.'
예를 들어 이 스테이크 하우스 전단지를 보자.
[아키메 스테이크 하우스]
-제국 최고의 육질을 가진 소고기 엄선
-버터와 12가지 향신료가 들어간 특제 소스
-릭서스 공작령 전 주방장, 아키메가 직접 조리함
-완벽한 온도, 완벽한 조리.
-한 끼에 500실링.
한 끼에 무려 은화 다섯 장.
그래도 맛있어 보였다.
군침이 돌 정도로 말이다.
'나도 먹고 싶다. 버터 스테이크. 대체 열 두가지 향신료를 버터와 함께 볶아낸 특제 쏘오-쓰는 어떤 맛일까? 저 수준이면 볼라드 저택에서 먹었던 것보다 훨씬 맛있겠지?'
그뿐이 아니었다.
[아인베르트 대욕장]
-물 온도 매우 뜨거움
-하루 이용료 은화 두 장
그 전단지를 보니 볼라드 저택에서 했던 그 뜨끈한 목욕이 다시 생각났다. 뭉친 근육을 전부 풀어주는 따사로운 물의 축복.
중세는 냄새나고 후진 곳이지만, 매일매일 저런 스테이크 먹고 목욕할 수 있다면 살 만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냥 팍팍 써버려?'
여기서 돈지랄을 한 번 할까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성비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참자...'
하는 수 없이 나는 터덜터덜 로자리오 여관으로 갔다.
로자리오 여관.
숙박비는 더럽게 비싸고, 밥이라곤 잡탕 수프와 감자밖에 나오지 않으며, 샤워라곤 기대도 할 수 없는 곳이 지금 내가 사는 집이었다.
"어머! 유진! 오랜만이네!"
"제가 좀 늦었죠?"
"아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린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주인 아줌마가 탐욕스런 표정으로 반겼다.
"일주일 치 방세는 미리 냈지! 하지만 여행이 열흘 넘게 걸렸으니, 연체료랑 오늘 방값까지 다 해서 총 190실링이야. 유진."
"예. 예."
그녀는 한 푼이라도 더 뜯어먹겠다는 듯 날 노려봤다.
내가 그녀 아래 있다는 어떤 확신이 눈빛에서 느껴졌는데...
오히려 내가 금화 한 장을 딱 내려놓자 표정이 바뀌었다.
"어, 어... 유진. 너 돈 좀 벌었니?"
"에이. 그냥 살 만큼만 벌었죠."
여관에 앉아 낮술을 마시던 이들도 금화의 반짝거림에 놀라 이쪽을 쳐다봤다. 갑자기 아줌마가 손을 싹싹 비볐다.
"이야... 유진. 내가 잘 해줘야겠네."
"아이, 됐어요.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아줌마가 갑자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눈을 뒤룩뒤룩 굴리길래, 난 그냥 거스름돈 받자마자 바깥으로 나갔다.
'이백 실링이 그냥 나갔네.'
그래도 마냥 기분 나쁘진 않았다.
'적어도 여긴 돈을 벌 기회가 있어.'
난 강해졌다.
옛날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말이다.
검은 마력으로 강화한 신체는 일반병 입장에서 재앙이었고, 사령 화살은 효율적인 원거리 대응 수단이었다.
게다가 사령 검술까지 얻었으니 내 무력은 꽤 강한 게 아닐까?
내 안에선 새로운 욕구가 꿈틀거렸다.
들끓는 투쟁욕, 인정욕, 상승욕이었다.
'사령 검술은 실전에서 얼마나 위력적일까.'
'이 제국에서 나보다 강한 사람은 어느 정도 될까.'
'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그리고...'
난 눈을 가늘게 떴다.
'카밀라 앱 헤롯. 난 당신보다 강해질 수 있을까?'
그녀는 아름다웠다.
마법을 안 가르쳐줘도, 그저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도가 차오르는 여성이 있다면, 분명 카밀라였다.
'저런 여자를 만날 수 있을까.'
일단 지금 수준으론 불가능.
허나 카밀라가 인정한 내 재능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남중,남고,공대,군대라는 4연격을 겪은 내 마음속에 희망이 차올랐다.
'좋아. 겨울엔 쉬지 않겠다. 일단 몸 상태도 아주 좋으니 달려보자.'
제국은 불합리한 면이 있지만, 목숨을 걸면 그 대가를 지불하는 곳. 특히 내가 지닌 재능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 터이다.
'일단 남작위를 딴다.'
남작위를 따려면 기사가 되어야 한다.
기사가 되려면 명성이 필요하다.
명성을 얻으려면 의뢰가 필요했다.
고로...
전단지를 관리하기 위해 게시판으로 다가갔는데.
"이게 뭐야...?"
그만 아주 기분 나쁜 꼴을 목격하고 말았다.
내 전단지가 구석에 처박힌 채 반쯤 찢어져 있었다.
'아니...'
사령 기사 유진이라 써진 전단지 아래엔 커다란 빨간 글씨로 '사기꾼'이라고 적혀 있었으며, 작은 글자로 '타락한 사령술사', '아기를 잡아먹음' 따위의 낙서도 적혀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아주 기분 나쁘게도 칼로 찍찍 그어 걸레조각으로 만들어 놨는데...
생각보다 모욕감이 심했다.
다른 전단지들은 멀쩡한 게 더 짜증났다.
'노기사 아이작' 전단지.
'돈 받아 드립니다.' 전단지.
아키메 스테이크 하우스 광고지.
전부 다 비싼 종이를 써서 그런지 눈송이가 떨어져도 젖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장난'을 당하지도 않았다.
내 전단지만 이 꼴이 나니 열불이 치솟았다.
"아저씨. 이거 누가 한 거에요."
멍하니 있던 여관 주인의 남편에게 말하자, 그가 게슴츠레하게 게시판을 보곤 욕을 지껄였다.
"아이. 씨발. 이 좆병신 새끼들. 또 저 지랄을 해놨네."
"예?"
"뭐. 유진. 너도 알겠지만 여긴 치안이 별로 안 좋다. 알지?"
경비대 부사관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아인베르트 판자촌(여기보다 더 후진 곳)에 들어가면 수많은 조직들이 암약하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간덩이가 처 부었는지 요새는 마약까지 판다더군."
"..."
"최근에 정규군들이 바빠서 그런가? 뭐... 어쨌든. 걔들이 길드를 운영하는데 신참 기사단이나 용병단이 들어오면 저렇게 텃세를 부리곤 하지."
"..."
"십 년 전에 물갈이를 한 번 해서 참 깨끗해졌는데..."
난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목표 시장이 겹치지도 않는데 이 지랄을 한다고?'
"정말 다행히도 넌 강하니 괜찮아."
"그게 무슨 뜻인가요?"
"남의 광고지를 훼손하는 건 결투 성립 요인이거든."
결투 성립 요인.
제대로 된 재판이 없는 이 중세에서, 남의 전단지를 훼손하는 건 죽을 죄까지 갈 수 있단 말이었다.
그 소리를 들으니 더 화가 치솟았다.
'...내가 니들을 못 죽인다. 그 뜻이냐?'
경비 아저씨가 충고하듯 말했다.
"꼭 제대로 된 대응을 해라. 유진. 이런 거 냅두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넌 평생 웃음거리가 될 거고, 여기 발 붙이고 못 살 거다."
"...그건 알죠."
좀 머리를 굴려보니, 의외로 이게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커리어도 마땅하지 않은 상황이었어. 그리고... 마약 조직이면 필연적으로 돈이 많지 않을까? 포상금도 있을 텐데.'
애초에 제국은 모든 마약을 엄밀히 금하는 나라였다.
게다가 10년 전에 한 번 물갈이를 했으니, 이곳의 범죄조직이 그리 강할 리 없었다.
"아저씨."
"응?"
"혹시 여관에 할 일 없는 사람들 있어요?"
그러자 아저씨가 웃었다.
"왜. 게시판 감시라도 하게? 할 일 없는 놈들은 뭐, 언제나 널리고 널렸지."
'게시판을 감시하는 할 일 없는 놈들이라...'
뭔가 어감이 묘했지만, 난 기초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
난 바쁘게 움직였다.
일단 전단지 50장을 새로 뽑아서 붙인 다음, 몇몇 믿을 만한 이웃들에게 돈을 주고 게시판을 감시하게끔 시켰다.
그렇게 며칠.
드디어 조사 결과가 나왔다.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구먼유!"
로톤은 어딘지 구수한 말투를 가진 순박해 보이는 남성이었다. 그는 내게 손을 쓱쓱 비비면서 말했다.
"이놈들은 바라칼 패거리에유."
"바라칼?"
"이런 말 하기 좀 무섭긴 한데."
그는 정말 부담스럽게도 내 옆으로 엉덩이를 딱 붙이더니, 갑자기 귓속말을 시작했다.
입 냄새가 확 났다.
화가 치솟았으나 그냥 참기로 했다.
"그 바라칼 패거리란 놈들, 보통 나쁜 놈들이 아니어유. 멀쩡한 애들 잡아서 소매치기로 만들고, 하루에 할당량 못 채우면 채찍으로 때리고, 빚 갚으라고 협박하고, 마약 중독자를 만들고... 주변 범죄는 모두 그 놈들이 한다고 보시면 되유."
"그러다 경비대에 붙잡히면 죽지 않아요?"
"동양인이라 모르시는구나. 놈들은유.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놈들이어유. 어휴. 다들 막장인생들이라."
이해가 갔다.
'하긴. 의외로 사형제도는 범죄율을 낮추지 않지.'
애초에 극단적인 범죄자들은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
자기 인생이 잘 되면 좋지만, 안 되면 그냥 감옥 가면 되지~ 죽으면 되지~ 같은 생각이 있는 것이다.
사형제도가 있다고 한들 '안 걸리면 되지 않나?' 같은 생각을 하기에...
아무리 극형을 때려도 실질적으로 범죄율이 줄지 않았다.
새삼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확실히 법이 엄한 거랑, 매섭게 작용하는가랑은 다르군.'
"근데 괜찮으시겠어유?"
"뭐가요."
"바라칼 그 놈은 전설이어유."
"전설..."
이제 제발 귓속말 그만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는 자꾸 숨결로 반고리관을 간지럽혔다.
"10년 전... 바라칼은 '암왕'이라고 불렸어유. 제국이 토벌을 하려고 했지만 결코 잡지 못했고... 그 만큼 능력있는 사령술사라는 거에유."
"..."
"혹시 제 말이 안 믿기면, 수요일 새벽 네 시에 나와 보셔유. 놈들은 팔에..."
순박한 남성은 집착적인 눈길로 휴지에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내게 친절히 설명했다.
B.
"이런 문신이 있어유."
"무슨 원한이라도 있어요?."
"제 여자친구가 일주일 전에 잡혀갔어유. 이름은 로냐에유."
"...로냐라. 알겠습니다. 된다면 꼭 찾아드리겠습니다."
"감사해유."
로톤에게 50실링을 주고 그를 보내주었다.
'바라칼이라...'
그는 의외로 검은 책에 등재된 인물이었다.
[본 서는 로커스트 및 사령술사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음. 바라칼은, 10년 전 '아인베르트 재개발 및 치안 확립 사업' 당시 생존한 범죄자 중 한 명임.]
-...유명해?
[죄질이 나쁘기로 유명함. 바라칼은 마약을 팔아 엄청난 재산을 쌓았고, 그를 은폐했음. 아직도 모험가들 사이에선 '바라칼의 보물'에 관한 소문이 있음.]
'보물이라...'
마약상이 몇 년 동안 쌓아놓은 보물.
그것은 어딨을까.
그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싹 도는 것을 느꼈다.
-바라칼의 수준은 어느정도 되지?
[2년 전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을 당시 중급 사령술사였음.]
-좋네.
겨울 내내 할 일이 없진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난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 네 시에 나가보라고 했지.'
로톤의 말에 따르면...
놈들은 내 전단지 뿐만 아니라 다른 소형 기사단들의 전단지도 찢어놓는다고 했다.
분명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다음 날, 새벽 네 시.
나는 이른 아침부터 부랑자로 위장한 채, 으슥한 골목에서 검은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귀속자는 새로운 마법을 배우기에 충분한 점수를 쌓았음.]
[앞으로 빠른 시간 내에 '로커스트 사령 기사 응시 시험'에 도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임.]
-그건 좋겠군.
책은 내게 평소처럼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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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사령 강화 - 기초]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에 검은 마력을 불어넣어 해당 특성을 반영함. 현재 귀속자가 보유중인 [사령 화살], [사령 검술], [사령 갑주]보다 강력한 효과를 지님.
(핵심)[사령 시야]
-신체 강화를 감각 기관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줌. 멀리 떨어져 있는 적을 집중적으로 감시하거나, 청력을 극한으로 집중시켜 특정 장소의 소리를 엿들을 수 있음.
(핵심)[혼백 타격술 - 기초]
-귀속자가 '메이스류' 무기군을 사용하기에 추천함. 사령 기사들은 상대와 병장기를 맞부딪히는 것만으로도 혼백에 타격을 줄 수 있음. 추후 [오러블레이드]로 발전시킬 수 있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니... 또 밸런스 게임이 미쳤네.'
뭘 골라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검은 책이 힌트를 하나 주었다.
[이번 기술들은 전부 귀속자의 세부 병종인, '뮤테이터'의 하위 기술들임. 중복해 배워도 문제가 없음.]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이번엔 부담 없이 새로운 마법을 익혔다.
[혼백 타격술]
사령술사식 내가중수법이라 해야 하나.
내 공격을 상대가 막아도 데미지를 쌓을 수 있단 점이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이를 발전시키면 오러 블레이드로 만들 수 있으니...
확실히 핵심적인 기술이었다.
그렇게 검은 마력을 운용하며 검은 책의 가르침에 집중하다 보니...
'...저 새끼군.'
왠지 게시판 앞을 알짱거리며 주변을 서성이는 놈 하나가 보였다.
그의 팔뚝을 잘 보니 'B'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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