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MAGOPASTOR / Chapter 8 - 70-80

Chapter 8 - 70-80

70화

아시즈의 설명이 끝나자 투란은 곧바로 가면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처음에는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으나 마력을 불어넣자 곧바로 미지근하고 흐물거리는 무언가로 변하며 얼굴에 착 달라붙었다.

들었던 대로 계속해서 일정량의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는데, 자연적인 회복력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만했다.

"어때?"

"순식간에 폭삭 늙었는걸. 감쪽같아."

아시즈를 보며 말을 걸자 본래 그의 목소리보다 훨씬 거친, 마치 쇠를 비벼낸 듯한 저음이 나왔다.

옆에 놓인 거울을 보니 햇빛에 오래 그을린 고동색 피부와 덥수룩이 난 검은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 남자가 보였다.

그런데 잘 보니 목 아래는 비교적 허여멀건 한 투란의 피부 그대로라서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긴, 생각해 보니 흉터도 그대로 있었댔지....'

하기야 몸의 형상까지 바꿀 수 있었다면 솔리프 역시 이상함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터였다.

그 정도 기능이었으면 한낱 해적이나 사칭하는 데 쓰려고 내돌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때, 가만히 바라보던 아시즈가 투란에게 물었다.

"그런데 수염도 생길 줄은 몰랐네. 그거 진짜는 아니지?"

"설마."

혹시나 해서 한 가닥을 잡아 뽑으니 고통 없이 쑥 빠진 수염이 곧 바스러지며 사라졌다.

그것 말고는 쓸어내려 보아도 감촉 등에서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게 실로 감쪽같았다.

"짝이 되는 물건이 뭔진 몰라도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용하겠어."

그렇게 말하던 도중, 투란은 가슴에서 묘한 진동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 진동의 시작점은 바로 항상 목걸이로 만들어 차고 다니던 물건, 흉내쟁이 성유물이었다.

"이게 왜...?"

"설마 그게 그 한 쌍의 물건인가?"

생각해 보면 둘이 비슷한 면이 있기는 했다.

성유물의 주인이 가진 혈통의 이름부터가 흉내쟁이에다가 기능도 다른 이의 마력을 흡수해 혈통 능력을 재현하는 것이며, 가면 역시 남의 얼굴을 흉내 내는 물건 아니던가.

하지만 수천 년 전 바다에서 잠든 신의 물건과 한 쌍이라면 저 가면 역시 성유물이라는 의미인데, 그렇게 보기에는 담긴 마력이며 기능이 영 부실했다.

애초에 그런 물건이었다면 바라하 가문이 미쳤다고 밖으로 내돌리고 있었겠는가.

"둘이 급이 너무 안 맞지 않나?"

"전혀 안 맞지. 따지자면 네 수호자 마법기랑 여기 달린 마력등 수준의 차이인걸."

마법기를 감정하기 전 투란은 먼저 흉내쟁이 성유물의 감정을 부탁했다.

그간 이 물건의 기능을 제대로 알고 쓰기보다는 하나하나 실험해 가며 주먹구구식으로 써먹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감정을 시도한 뒤 아시즈는 이 물건을 자신의 기량으로는 절대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정도면 성유물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물건인 것이 분명하다던가?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마 아시즈의 어머니나 형에게 부탁해야 할 터였다.

"그건 그렇다 치고, 둘이 한 쌍이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붙이면 되나?"

투란은 혹시나 해서 가면을 벗은 뒤 성유물과 접촉해 보았으나 무언가 색다른 반응이 일어나기는커녕 조금 전까지 일어나던 진동마저 사라졌다.

아무래도 함께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별 반응은 없는데."

"한번 붙인 채로 마력을 주입해보는 건 어때?"

아시즈의 의견대로 두 물건을 접촉한 뒤 각각 마력을 주입한 순간, 곧바로 우웅-하고 깊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가면과 성유물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보라도 둘 사이에 무언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을 명확한 신호.

투란은 손끝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게, 이 방법이 맞는 것 같은데."

진동하기 시작한 두 물건은 놀랍도록 탐욕스럽게 투란의 마력을 잡아먹었다.

처음에야 이러다 말려니 했으나 일 분에서 오 분, 십 분, 이십 분이 넘자 슬슬 마력이 여유롭지 않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서 마력 주입을 끊었다가 물건에 하자라도 생기면 너무나도 아까운 일이 아닌가.

결국 자기 방에서 놀고 있던 솔리프까지 불러온 뒤, 세 명의 귀족은 함께 공명하는 물건에 마력을 주입했다.

* * *

갑작스러운 마력 흡수 현상이 끝난 것은 그들 세 사람이 거의 한계치까지 마력을 소모해 탈진한 뒤였다.

투란과 솔리프, 아시즈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큼직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어지러워 죽겠어."

"야, 이런 걸 할 거였으면 미리 불렀어야 할 거 아냐. 한참 부유 마법 연습하고 있었는데...."

"나라고 이럴 줄 알았나."

그렇게 탈력감과 어지러움으로 드러누워 있던 세 사람이 기력을 회복한 것은 거의 한 시간 정도가 지난 뒤였다.

마지막으로 참여한 탓에 비교적 마력을 덜 빨렸던 아시즈가 가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더니 투란에게 말했다.

"이 가면...이제 감정이 안 돼. 네 목걸이처럼."

즉, 마법기로서의 격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갔다는 뜻이었다.

힘겹게 일어난 투란은 곧바로 변화한 두 물건을 집어 든 뒤 유심히 관찰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외관상의 변화.

반투명했던 가면에는 파도 무늬가, 성유물에는 방울 달린 모자를 쓴 사람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성유물을 목에 걸고 가면을 쓴 다음 활성화하자 단순히 외관만이 아닌 기능 역시 변했음을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두 귀족의 몸을 휘감고 있는 마력의 흐름.

그것이 안쪽에서 무언가 작은 기호(記號)를 그려내고 있었다.

'아시즈는 하얀 모루와 검은 망치, 솔리프는...하얗게 빛나는 두 손과 그 안에 담긴 불덩어리인가?'

딱 두 사람의 혈통을 상징하는 기호가 아닌가.

곧바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 투란은 짐작한 것이 맞음을 알 수 있었다.

벼락을 머금은 하얀 구름과 그것을 둘러싼 어둠, 그리고 어둠 속에서 홀로 부릅뜨고 있는 눈동자가 하나.

이는 아라비온과 자하르를 상징하는 기호가 분명했다.

그때, 아시즈가 투란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너 지금 가면 쓴 거 아냐? 얼굴이 안 변했는데?"

그 말을 듣고 다시 거울을 보니 분명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얼굴에 변화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상대의 혈통을 감지하는 능력이 생긴 대신 변신 능력을 잃었단 말인가?

깜짝 놀란 것도 잠시, 투란은 문득 떠오른 깨달음에 거울을 마주보고 자신의 얼굴이 변하는 것을 상상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얼굴이 조금 전 보았던 코비누스부터 아시즈와 솔리프, 심지어 여자인 메이사나 리다의 것으로까지 자유자재로 변했다.

옆에서 이를 보던 아시즈와 솔리프가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설마...?"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 됐다고?"

투란은 계속해서 이 물건이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시험했다.

키는 오 센티미터에서 십 센티미터 정도, 골격이나 손가락의 비율도 조금 조절할 수 있었고 피부색이나 목소리는 거의 상상하는 대로 마음껏 바꿀 수 있었다.

이런 변화마다 마력이 소모되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실로 전설에나 나올 만한 최상위 성유물급의 물건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이 물건 역시 성유물이 맞았던 것 같네. 우리들의 마력은 성장이나 힘의 개방을 위한 촉매 같은 거였고...."

혹시나 해서 가면을 벗어보니 역시 이전처럼 다른 이들의 혈통을 감지할 수 없었다.

반대로 흉내쟁이 성유물을 떼어놓고 가면을 썼을 때도 코비누스의 얼굴로만 변할 수 있었고.

즉, 이 두 물건을 함께 사용해야만 추가된 기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석을 알리자 아시즈와 솔리프가 몇 번이고 두 물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한데."

"그렇죠?"

"아무래도."

이름 없는 프레아 신족이 남긴 최상위 성유물, 그리고 바라하 가문에서 그냥 아무렇게나 굴리던 마법기가 어떻게 한 묶음일 수 있단 말인가.

그때, 투란이 의견을 하나 내놓았다.

"혹시 원래는 이 성유물도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 아니었던 거 아닐까?"

"그게 무슨 소리야?"

"거기 처음 갔을 때 들었던 의문 중 하나가 왜 신과 큰바다뱀이 둘 다 사령으로 변하지 않았느냐는 거였거든. 신적 존재라서 변하지 않은 것이라고 쳐도 하다못해 둘의 마력은 남아있어야 맞을 테니까."

누군가 먼저 찾아와서 마력을 흡수한 것이라면 흉내쟁이 성유물을 챙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인어 왕자 아르마니가 그랬듯 선택받지 못해서 챙기지 못한 것이라면 하다못해 시체를 통째로 뽑아가면 될 것 아닌가.

둘의 마력을 흡수한 마법사가 그 새끼 상어처럼 무력하지는 않았을 테니.

"설마, 이 성유물이 그 두 존재의 마력을 흡수했다고?"

"어디까지나 짐작이긴 했지만. 원래는 한 쌍으로 쓰는 적당한 수준의 마법기였는데 한쪽은 죽은 신과 신화적 마수의 힘을 받아 성유물이 됐고, 다른 한 쌍은 평범한 마법기로 수천 년간 굴러다닌 거지."

과거에도 이 비슷한 생각을 떠올리기는 했으나 확신하지 못했던 것은, 흉내쟁이 성유물이 신적 존재 둘의 힘을 흡수한 것이라기에는 썩 대단치 않은 성유물이라서였다.

여러모로 유용하기는 해도 죽은 사람조차 살려내는 물약이나 불멸의 갑옷보다는 급이 떨어지지 않는가.

하지만 그 힘이 온전히 사용되지 않고 축적되어 있었다면, 그리고 이번에 세 귀족의 마력을 마중물 삼아 가면을 강화하는 데 쓰였다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투란의 추리는 여러모로 비약이 많기는 하지만 그것 외에 그럴싸한 설명을 떠올릴 수 없던 두 사람은 이를 수긍했다.

그때, 아시즈가 흉내쟁이 성유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근데 혈통을 알아내는 건 사실 그렇게까지 유용한 건 아니지 않나?"

투란 같은 별종들이 아니라면 대부분 귀족들은 자기 혈통을 딱히 감추지 않고 다녔다.

애초에 싸움에서 혈통 능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게 큰 편인지라 속이기가 어려우니까.

투란은 의아해하는 아시즈를 향해 말했다.

"이참에 확인해볼 수 있잖아. 정말 아라비온 내부에 자하르의 암살자라는 게 존재하는지."

"아."

그제야 아시즈 역시 이 물건의 진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새로이 변한 두 성유물의 조합 앞에서라면, 그 어떤 첩자들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 * *

마법기 감정을 마무리한 뒤, 투란은 베르크 가문의 별채를 거닐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지나다니는 하인들부터 기사, 그리고 가끔은 귀족들까지.

귀족과 기사들은 하나같이 망치와 모루, 부여사 혈통의 기호가 보였으며 일부 기사들은 번개를 머금은 구름 기호가 잠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예 기사조차 아닌 일반인 중에서도 이러한 기호를 타고난 이들이 제법 많았다.

'하긴, 내 어머니만 해도 기사가 아니었는데 아라비온 혈통이 잠재되어 있었으니까....'

그렇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투란이 이동한 곳은 바로 베르크 가문의 마구간.

그곳에서는 거대한 말 한 마리와 검독수리 한 마리가 어울려 놀고 있었다.

"잘 놀고 있었어, 비제?"

[투란! 쟤 너무 멍청해!]

푸드덕 날아온 비제가 흙바닥에 글자를 쓰며 발을 동동 굴렀다.

과거 경험하기로는 틸리도 제법 똑똑한 말이었지만, 자유자재로 글씨를 쓰고 문장을 만들어내는 녀석에게는 성에 차지 않는 듯했다.

"그러지 말고 재밌게 놀아. 괴롭히진 말고."

[안 괴롭혀!]

비제는 틸리를 데리고 이것저것 놀이를 시도했던 것과 저 말이 멍청한 탓에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해서 좌절했다는 이야기를 길게 풀어놓았다.

저 무던한 표정으로 짐작건대 못 알아들었다기보단 그냥 귀찮았던 게 아닌가 싶지만.

투란은 비제를 위로하며 강화된 성유물의 감각으로 녀석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아라비온의 기호...하지만 반투명하군.'

"혹시 바람 불어볼 수 있어? 세게는 말고, 그냥 산들바람 정도로만."

비제는 착한 아이답게 토 달지 않고 곧바로 마구간 근처를 휩쓰는 바람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반투명하던 기호가 활성화하며 투란의 몸속에서 노란 빛 같은 것이 전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까, 비제에게는 폭풍 혈통의 소질이 있지만 영혼으로 결속된 짝이 있어야 그 힘을 쓸 수 있는 거군....'

옆에 있는 틸리에게는 그런 기호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건대 모든 마수가 다 이러한 잠재력을 가진 것은 아닌 듯했다.

설마 비제의 선조 중에 아라비온 혈통의 인간이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이런 잠재력을 얻은 것일까?

이 역시 꽤 고민해볼 만한 주제였다.

이후로도 투란은 방으로 돌아가서 가면을 활용하는 방법을 더 연구했다.

이번에 시도한 것은 실존하는-혹은 실존했던-사람의 얼굴이 아닌,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을 조형하는 것.

처음에는 아예 새로 얼굴을 만들어 보았으나 그러자 무언가 참을 수 없는 어색함과 불쾌함이 느껴져서, 실존하는 사람의 얼굴을 기반으로 형태를 조금씩 바꾸는 것으로 방법을 바꾸었다.

기반이 되어줄 얼굴이야 궁전 안은 물론, 궁전 밖으로 나가면 차고도 넘쳤다.

투란은 매일 나가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관찰하며 기억한 뒤 밤이면 이를 적당히 변형하거나 조합해 실존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을 만들었다.

선이 굵고 호쾌한 젊은 농부, 얼굴이 길쭉하고 허약해 보이는 학자, 매부리코를 가진 늙은 상인....

혹시나 필요할 때를 대비해 솔리프와 아시즈에게도 두 성유물을 주어 쓰는 법을 연습시켰으나 뜻밖에도 두 사람은 이를 다루지 못했다.

흉내쟁이 성유물이 투란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효과조차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혼자서 가면의 기능을 연습하며 보내기를 약 일주일.

늑대를 사냥하러 갔다던 하람이 돌아왔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그렇게 부르지 마라."

쑥스러움을 무뚝뚝한 태도로 가장하던 것도 잠시, 하람은 옆에 있던 솔리프를 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굉장히 잘 단련되어 있군. 혹시 어느 대가문 소속인가?"

"음? 아, 아뇨. 그럴 리가요...."

그는 처음 보았을 때 그냥 다부진 체격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역시 이쪽 분야에 평생을 바친 전문가의 눈에는 뭔가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람은 솔리프의 몸을 이곳저곳 더듬으며 탄성을 터트리더니 그에게 어떤 식으로 단련했느냐고 몇 번이고 캐물었다.

바라하 가문 내에서 관련된 교육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었던 만큼 솔리프는 방랑 귀족에게 전수받은 것이라고 대충 때웠고.

그렇게 솔리프 한 사람만이 난감하고 나머지는 재밌었던 시간이 지난 뒤, 투란은 이전처럼 하람과 단련을 시도했으나 곧 그만두어야 했다.

이제 그의 신체 능력을 감당할 만한 장비가 없어서였다.

"강해졌군."

"운이 좋았습니다."

하람은 투란의 혈통은 몰라도 그가 신체 능력 쪽에 특화되어 있지 않음은 알았다.

그런데도 이 정도 신체 능력이라면 거의 최상위 귀족급의 마력을 쌓았다는 뜻.

"흠."

하람은 그가 무슨 수로 짧은 시간 내에 그만한 힘을 쌓았는지 의아해하는 기색이었으나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아마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일을 했으리라 짐작한 것일까.

어쨌든, 마력이 지나치게 강한 것도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 * *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를 약 삼 주일째.

투란은 메이사에게 보낸 편지의 답장이 진작 돌아오고도 남았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시즈, 보통 여기서 모르겐 시로 편지가 오가는 데 얼마나 걸리지?"

"늦어도 일주일이면 충분하지. 귀족 가문끼리 오가는 편지면 더 빠르고...."

혹시나 해서 아시즈에게 물어보아도 아라비온의 연락 체계가 특별히 더 느린 것은 아니었다.

즉, 메이사가 편지를 읽고 답장을 보냈다면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할 시간이라는 뜻.

답장이 오지 않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첫째, 메이사가 편지를 읽고 무시했다.

둘째, 메이사가 편지를 읽고 답장할 상황이 아니다.

셋째, 편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셋 중 어느 쪽이건 이대로 뭉개고 있어서는 해결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직접 모르겐 시에 다녀와 봐야겠어."

"솔리프 씨의 팔이 치료되는 걸 기다렸다가 다 같이 가보는 게 낫지 않을까?"

투란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얼굴에 손가락을 얹었다.

"원래는 같이 가는 게 안전했겠지만 지금은 이게 있으니까. 그냥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만 하고 나올 거면 차라리 혼자 가는 쪽이 편해."

이번에야말로 지난 몇 주일 동안 연습했던 성과를 시험해볼 시간이었다.

71화

아라비온의 수도, 모르겐 시는 그야말로 대도시가 형성되기 가장 이상적인 조건의 도시였다.

첫째는 막대한 인구 부양력을 가진 다케인 평야의 중심지라는 것.

둘째는 주변에 도시 확장을 가로막을 산 따위가 없으며 막대한 수량의 리벨 강이 도시를 가로질러 흐른다는 것.

마지막 셋째는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대가문 중 하나인 폭풍 혈통의 아라비온이 이를 수호한다는 것.

여느 대가문의 수도가 십만에서 오십만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데 비해 모르겐의 인구는 백만 명이 넘었고, 따라서 도시를 드나드는 떠돌이 한두 명쯤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어느 중년 여행자가 자연스럽게 모르겐 시에 진입할 수 있던 이유였다.

감쪽같이 변장한 투란은 촌뜨기 여행자들이 으레 그렇듯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를 두리번거렸다.

'새삼 다시 봐도 기가 막히게 크단 말이지....'

이전에도 한 차례 이곳 모르겐에 들른 적 있었으나 그때는 도시 외곽에서 출정식을 구경하기만 하고 돌아왔을 뿐, 내부로 진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투란은 안쪽으로 쭉쭉 걸음을 옮기며 이 도시가 제법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서민들이 거주하는 주거 구역부터 근처에는 극장이나 도박장, 목욕탕과 창관 등 그들을 위한 유흥가와 상업 구역이 있었으며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비교적 신분 높은 이들을 위한 도서관이나 토론장, 운동장 등 교양 있는 문화 시설이 존재했다.

대장간이나 종이 공장, 염색 공장 등 시끄럽고 냄새나는 것들은 주거 구역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큼직한 길이 잘 닦여 있어 대형 마차들이 쉼 없이 사람을 나르며 오갔다.

마치 도시 전체가 잘 만들어진 예술품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서 생기는 온갖 오염원은 잘 정비된 하수도를 통해 도시의 강물로 떠내려 보냈는데, 이것들은 강물 안쪽에 설치된 마법기의 영향으로 하류로 내려가던 도중 자연스럽게 정화되었다.

아마 정화자 혈통의 힘을 빌린 최상위 마법기가 여러 개 설치된 것 같았다.

그런 내부 설계에 감탄하는 한편, 투란은 성유물의 감각을 활성화해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마력이며 혈통 따위도 잊지 않고 확인했다.

대가문의 수도답게 지나다니는 사람 중 기사며 귀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들 중 제법 많은 수가 투란처럼 서민다운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아마 저들 중 몇몇은 그저 시끄럽게 굴고 싶지 않거나 아라비온에 자신을 드러내기 싫은 방랑자일 뿐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범죄자거나 간첩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몇 시간쯤 걸었을까.

드디어 도시의 중심부, 아라비온의 본가가 보였다.

그 찬란한 모습에 투란은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아, 눈 부셔...."

너무 화려하거나 해서 눈이 부시다는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하얀 성벽 표면에 빽빽이 박힌 마력등이 빛나고 있어서 눈이 부셨다.

만약 자하르 귀족이 저 안으로 은신 마법을 쓰고 침투하려 들면 그 순간 마력이 모조리 고갈되어 버릴 터.

투란은 천천히 성벽을 한 바퀴 돌며 아라비온 본가가 이런 '빛의 성벽'으로 완벽히 둘러싸여 있음을 확인했다.

안으로 진입할 수 있게 열린 통로는 커다란 성문 하나뿐.

그 앞에는 네 명의 귀족과 사십여 명의 기사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검문관들이 지나다니는 사람의 신원을 확인했다.

물론 이곳 역시 마력등이 한가득 설치되어 있어 은신해 지나가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요, 과거 메이사가 썼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탐지 마법기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를 피해 하늘로 날아서 진입한다면?

당연히 그 역시 방비가 되어 있었는데, 바로 성벽 위쪽의 뚫린 부분 전체가 마력 그물로 뒤덮인 것이었다.

아라비온의 가신 중 결계사 혈통은 없으니 마법기를 이용했거나 외부 인사를 초빙해 맡긴 것일 터.

심지어 이 마력 그물은 대지 변형을 이용해 땅을 파고드는 것 역시 고려했는지 아래쪽으로도 형성되어 있었다.

'성유물로 안쪽을 파악할 수도 없네.'

지금 투란이 흉내쟁이 성유물을 극한으로 활성화하면 지름 오백 미터 정도 범위의 마력을 감지하고 오십 미터 안의 혈통을 감지할 수 있는데, 둘 다 검문소 안쪽으로는 감지 능력이 발동하지 않았다.

저 결계의 힘 중 하나거나 무언가 별도로 탐지 능력에 대한 방어책이 갖춰진 듯했다.

주변을 한참 둘러본 뒤, 투란은 도저히 은신을 이용한 정공법으로는 진입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애초에 그게 쉬웠으면 진작 자하르 귀족들이 이곳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도 남았을 테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물론, 그게 포기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 * *

"이름과 직업."

"베카, 정원사입니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이름을 밝히자 검문관은 옆에 있던 서류에서 '정원사' 항목을 찾아 주르륵 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카라는 이름의 정원사에 관한 내용이 적힌 페이지가 나왔다.

붉은 단발에 갈색 눈, 주먹코, 뻐드렁니, 중키에 불룩 나온 뱃살과 한쪽 다리가 조금 짧음, 뺨에 긴 흉터.

모든 특징이 완벽히 일치하는 것은 물론이요, 마법으로 정밀하게 그려진 초상화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출입증까지 확인한 검문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

"감사합니다!"

씩씩하게 인사한 정원사 베카는 그대로 검문소를 지나 본가로 진입했다.

대가문의 핵심 구성원들이 거주하는 곳답게 유려하고 단정한 건물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베카, 아니 투란이 미소지었다.

'생각보다 쉽게 들어왔어.'

빛의 성벽 근처에서 숙소를 잡아 하루를 머무른 뒤, 투란은 주의를 끌지 않고자 몇 번이고 외모를 바꿔 가며 성문 주변을 돌아다녀서 검문 체계를 파악했다.

그 결과 아라비온이 생각만큼 깐깐하게 본가 출입을 통제하고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내부에 존재하는 귀족만 백수십 명에 기사는 천여 명, 이들의 수발을 들 하인들만 만여 명이 넘는데 이들의 출입을 정교하게 통제한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긴 했다.

모든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고 출입증까지 만드는 것만 해도 평범한 가문에선 찾아볼 수 없을 수준의 보안이었으니.

투란은 가장 주목받지 않을 가능성이 큰 하인을 대상으로 몇 차례 접근을 시도한 끝에 휴가를 나온 정원사 한 명에게 술을 잔뜩 먹여 그의 외모와 출입증, 옷을 훔치고 대신 은화 세 닢을 남겨 주었다.

나중에 정신 차린 정원사가 들어올 때 출입증이 없어 고생을 좀 하기는 하겠지만, 어차피 출입 기록도 없는 만큼 똑같은 사람이 두 번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차릴 가능성은 적었다.

검문관이야 매일 수백 명 이상을 검문하는 만큼 혹시 떠올리더라도 착각이려니 하고 말 가능성이 크고.

'거기다 애초에 이 얼굴을 유지할 것도 아니니까.'

베카와 함께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기는 했으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가족이나 친구들이랑 어떤 관계인지까지 자세하게 알아두지는 않았다.

즉, 얼굴 주인의 지인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바로 정체가 들통날 수밖에 없다는 뜻.

그런 난처한 일을 피하고자 투란은 성벽과 가장 가까이 붙은 건물의 그늘에 숨어서 조금 전 검문소에서 보았던 아라비온 기사 몇 명의 특징을 적당히 뒤섞은 얼굴을 만들었다.

나이는 십 대 중후반 정도에 금발과 갈색 눈, 키는 조금 작고 호리호리한 체격.

거기에 허름한 정원사 옷 대신 베르크 가문에서 가져온 훈련복을 걸치자 앳된 얼굴의 아라비온 견습 기사 한 명이 탄생했다.

원래 입고 있던 옷을 대용량 주머니에 쑤셔 박은 뒤, 투란은 더없이 당당한 태도로 큰길을 걸었다.

'이게 대가문의 본가다 이거지.'

성유물의 감각을 끌어올리자 무수히 많은 마법사와 마법기의 기척이 느껴졌다.

투란은 주의를 기울여 그들의 강함을 일일이 분석했다.

'귀족은 최하위가 열다섯 명, 하위급이 서른 명, 중위급이 마흔두 명, 상위급이 열일곱 명, 최상위급이 다섯 명 정도인가. 기사들은 세기 힘들 정도로 많고....'

본래 투란은 흉내쟁이 성유물을 얻은 뒤 귀족들의 마력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강함을 대강대강 분류하곤 했는데, 얼마 전 동료들과 토론한 끝에 이를 크게 다섯 단계로 나눴다.

이는 그가 관찰한 상대의 강함을 비교적 간단히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우선 기사들이야 귀족의 시선에서는 죄다 도토리 키 재기 수준에 불과하니 논외.

최하위는 아직 어려서 마력을 다 개화하지 못했거나 일반 귀족 중에서도 유난히 재능이 부족한, 간신히 혈통 능력을 개화했을 뿐인 밑바닥 수준.

하위는 일반 귀족들의 평균치, 혹은 대가문 귀족 중 재능이 밑바닥인 이들의 수준.

중위는 일반 귀족 중 비교적 우수한 재능을 가졌거나 대가문 귀족의 평균 수준.

상위는 일반 가문의 가주급이거나 대가문에서도 정예 수준.

최상위는 대가문에서도 몇 안 되는 강자, 나이가 젊다면 차기 가주 후보로 여겨질 만한 이들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가 더 있지.'

투란은 본가에서도 가장 커다란 건물 안쪽, 인간의 형상을 한 빛의 덩어리를 보았다.

바로 옆 건물에 있는 최상위 귀족, 아마 메이사로 짐작되는 이조차 왜소하게 여겨질 만치 강대한 힘의 결정체.

그가 바로 메이사의 아버지이자 폭풍 혈통의 최강자, 아라비온의 가주인 바달 아라비온일 터였다.

'저 작자의 진짜 정체가 프레아 신족이라도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닐 것 같네.'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처음으로 직접 관찰한 대가문 가주의 마력은 강대하기 그지없었다.

과연 메이사가 앞으로 수백 년을 산다고 저만한 힘을 축적하는 것이 가능할까?

저 괴물과 대등하게 겨뤘다는 자하르의 가주는 또 어떻고?

내심 의문을 품으며 투란은 천천히 아라비온 본가의 전체적인 구조를 확인했다.

우선 정중앙의 가장 큰 저택은 아마 가주의 거처인 듯했고, 바로 옆에는 그보다 조금 작은 메이사의 거처가 있었다.

용무가 있어 외출했는지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건물 등도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더 신분이 높은 이가 중심에 가까운 거처를 받는 형식인 듯했다.

비교적 작은 집들은 기사와 평민들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 기사나 그 가족들, 혹은 하인들의 거처인 것 같았다.

그가 신분을 훔쳤던 베카 역시 기사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이곳의 하인 대다수가 기사의 가족일 가능성이 컸다.

어린 기사들이 열심히 기합을 넣으며 훈련하는 곳을 지나치자 메이사로 짐작되는 이의 저택이 보였다.

가주가 머무는 본 저택 바로 옆에 자리한, 이 본가 성벽 안쪽에서 두 번째로 커다란 건물.

그 거대한 저택 안에 느껴지는 기척은 평민 다섯 명과 메이사 한 명에 불과했다.

다른 저택에 기사며 귀족들이 여럿 있고 사용인들도 수십 명인 것에 비해 희한하리만치 적은 숫자였다.

혹시 과거 리다가 쓰던 것과 같은 경계용 마법기가 있을까 싶어서 신중히 조사해 보았으나 안쪽에서 메이사 본인이 가진 것 외에 다른 마법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함정인가?'

아라비온의 후계자가 머무는 곳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허술한 경계 태세에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이 함정을 파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까지 잠입하며 징조며 단서 같은 것을 남긴 적이 없었으니까.

설마 언제 올지 모를 자하르 귀족을 매일 대비하고 있지는 않을 것 아닌가?

한참 고민한 끝에, 투란은 저택의 담벼락 그늘에서 은신 마법을 사용한 뒤 그대로 담벼락을 넘었다.

다행히 갑자기 경보가 울리며 수십 명의 귀족들이 뛰어오지는 않았다.

'됐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투란은 눈으로 저택 내부를 확인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제멋대로 자란 정원수들이 이리저리 얽힌 정원.

벽과 창문에는 담쟁이덩굴이 한가득 자라 있었으며 수십 장의 창문은 상당수가 깨지거나 더러워져 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 걸 몰랐다면 주인 없는 저택이려니 생각했을 외관이었다.

깨진 창문을 타고 들어간 방은 가구 하나 없이 휑했는데, 문으로 나와 보니 주변의 모든 방이 그런 모양새였다.

이를 알 수 있었던 것은 방문이 죄다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

복도와 벽에는 흔히 장식하곤 하는 태피스트리나 그림 하나 걸려있지 않았다.

저택 1층에 모여 있는 하녀들 역시 죄다 쉰에서 예순 살은 먹은, 진작 은퇴해야 했을 것 같은 노파들이었다.

하녀들은 무기력한 태도로 수다 한 마디 떨지 않고 제각기 할 일을 하고 있어 무언가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

투란은 수를 놓거나 책을 읽는 등 반쯤 노닥거리는 그녀들을 한참 지켜보다가 메이사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1층과 마찬가지로 활짝 열린 채 텅 빈 방 몇 개를 지나자 유일하게 닫힌 방이 보였다.

끼익, 잠겨있지 않은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니 역시나 오래된 듯 먼지 끼고 허름한 가구들이 보였다.

그 먼지투성이 방의 한구석, 메이사가 바짝 마른 몸뚱이를 웅크린 채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었다.

온몸을 휘감은 화려한 마법기만 아니면 대가문의 후계자라기보다는 가난한 노동자의 딸 같은 모양새였다.

그것도 몇 달 굶어서 죽기 직전인.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이렇게 허름한 곳에서, 이 정도로 무방비한 상황이라고?'

이 정도면 메이사가 항상 주변에 암살자가 도사리고 있다는 편집증에 빠질 만도 했다.

차라리 베르크 저택 쪽이 훨씬 암살에 대한 방비가 잘 되어 있다고 느껴질 정도이니.

대체 무슨 이유로 후계자를 이렇게 방치하고 있단 말인가?

만약 투란이 자하르의 암살자였다면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였을 터였다.

물론 몸을 지키고 있는 온갖 마법기 탓에 일격에 처치하기는 힘들겠지만.

투란은 곧바로 메이사에게 말을 걸어 볼까 하다가 주변에 비밀스러운 감시의 시선이 있을까 싶어 그만두었다.

비록 성유물의 감각으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세상에는 그조차 속여넘길 기술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일단은 크기에 비해 사람이 없는 이 저택을 거점 삼아서 주변 상황을 좀 더 관찰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행히 이곳은 자하르 귀족이 내부로 침투했을 때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으니 말이지.'

성벽 내부에도 촘촘히 마력등을 박아놓았으면 밤에도 활동하기 힘들었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던 듯했다.

눈부신 게 싫은 건 이들도 마찬가지일뿐더러 밤이 낮처럼 환하면 잠들기도 힘들 테니까.

물론 가주가 있는 본채까지 지금처럼 쉽게 접근하기는 힘들 터.

투란이 생각하는 것은 이전에 만났던 카드람과 같은, 아라비온 내 유력자들의 저택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거나 내부 문서를 몰래 훔쳐볼 수는 있을 테니.

슬슬 이 저택의 구석에 머물 곳을 마련해 볼까 생각하던 그때, 저 멀리서 저택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하나 느껴졌다.

상위 귀족급의 마력을 가진 마법사 한 명.

몸의 실루엣으로 보아 여성으로 짐작되는 이였는데, 그녀가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온 순간 혈통을 확인한 투란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저택에 들어온 마법사는 자연스럽게 다른 하녀들과 인사를 나누더니, 가지고 온 무언가를 들고 2층에 있는 메이사의 방으로 올라왔다.

똑똑, 두드리는 모양새가 상당히 자주 드나들었던 듯 익숙해 보였다.

"아가씨, 말씀하신 책 가져왔어요."

몇 초가 지난 뒤,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와서 곤히 잠든 메이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옆의 책상에 책 몇 권을 올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투란은 그녀가 내려놓은 책을 잠시 확인한 뒤 곧바로 정체불명의 상위 귀족을 조심스럽게 쫓아갔다.

'이 여자는 또 뭘까.'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삼십 대 초반의 하녀로만 보이는 여인.

하지만 실제로는 상위 귀족급의 마력을 가진 그녀의 안쪽에서, 자하르 특유의 어둠과 눈의 상징이 느껴졌다.

72화

메이사의 방에서 나온 자하르 귀족은 그대로 저택을 나가는 대신 1층의 응접실로 향했다.

늙은 하녀들은 조금 전과 달리 활기를 띠며 그녀를 맞았다.

"어머, 왜 벌써 나왔니? 더 이야기하지 않고?"

"곤히 주무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찾으시던 책만 놓고 나왔어요."

"아직 해도 다 안 졌는데...."

"어째 요즘 들어 자꾸 주무시기만 하는 것 같아."

"몸이 안 좋으셔서 그렇지. 뭐라도 좀 드셔야 건강을 회복하실 텐데."

"드시고 싶지 않으시다는 걸 우리가 억지로 먹일 수도 없잖우."

여인들은 투란이 은신한 채 바로 뒤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덕분에 그는 별 수고 없이 저 귀족의 가명이 '레토'이며 무려 아라비온 가주의 직속 하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하르 혈통의 귀족이 아라비온 본가에 들어와 있는 것만으로도 기절초풍할 일인데 심지어 가주의 직속 하녀라니?

'대체 어떻게?'

본가의 하인쯤 되면 하나같이 기사의 가족들을 어려서부터 철저히 키우는 모양이던데, 나이를 느리게 먹는 귀족의 특성상 평민 신분을 장기간 위장하기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혹시 그와 비슷한 위장용 마법기를 사용했나 싶었지만 성유물의 감각으로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기발한 방법으로 위장했다, 아니면...아라비온에서 자체적으로 자하르 혈통의 귀족을 보유하고 있다?'

귀족들에게 있어 혈통 능력이란 하나의 울타리와 같았다.

너는 나와 같은 능력을 가졌으니 동족이요, 너는 나와 다른 능력을 가졌으니 이방인이라고 규정하는 식으로.

여기에는 종교적, 정치적 요소 역시 함께했다.

본래 귀족들의 혈통 능력이란 신에게서 내려온 것인바, 그들의 힘 자체가 신의 후손으로서 가진 지배력을 상징했으니.

이러한 이유로 귀족들은 철저히 같은 혈통 능력을 가진 이들끼리 모여 가문을 구성했다.

물론 사촌 이내의 근친혼은 배척받기에 외부 혈통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꽤 많지만, 그 경우에도 자식의 혈통이 가문의 것과 다르면 가문 내에 머물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부여사 가문의 가주와 치유사 혈통의 귀족이 혼인했을 때, 그 자식이 치유사 혈통이라면 가주의 자식인 것과 관계없이 치유사 가문으로 입양을 보내야 했다.

이러한 규칙을 어기고 다른 혈통의 귀족을 자기 가문에 귀속시켜서 부리는 것을 혈통 도둑질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력을 목적으로 한 강도 살인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원래 금기나 규칙이란 것들은 그걸 깨는 사람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 아니던가.

어쩌면 아라비온에서는 제법 오래 전부터 자하르 혈통의 귀족을 길러낸 것일지도 몰랐다.

아직 둘 중 어느 쪽일지 확신할 만한 단계는 아니었지만.

한참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여인들의 수다가 끝나고 레토가 저택을 나섰다.

투란은 은신한 채 그 뒤를 따르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녀가 향한 곳이 바로 옆에 있는 가주의 거처였기 때문이다.

'안쪽까지 따라가기는...아무래도 좀 그렇지.'

메이사의 거처가 이상하리만치 경계가 허술한 것일 뿐, 가주의 거처는 그 나름대로 별도의 방비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다른 그 누가 와도 도망칠 자신이 있지만 가주와 마주하는 상황만큼은 피해야 했다.

저쪽에서 작정하고 공격을 가하는 순간 무슨 수작을 부리기도 전 즉사할 가능성이 크니까.

투란은 더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그 대신 레토의 하녀복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슬쩍 훔쳤다.

혹시 가발이거나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일 수도 있기에 추적 마법을 사용해서 본인의 것임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좋아, 이거면 일단 앞으로 어딜 도망가든 쫓아갈 수 있겠어.'

본래 추적 마법의 원리는 특정한 조건을 지정하여 그와 일치하는 대상을 강화된 감각으로 포착하는 것.

조건이 더 정밀할수록 적은 마력으로 넓은 범위를 조사할 수 있는데, 신체 일부로 그 주인을 찾는 것은 가장 효율적인 추적 조건 중 하나였다.

즉, 지금의 투란이라면 이 머리카락 한 가닥을 사용하는 것으로 대상이 수천 킬로미터 밖에 있어도 찾아서 쫓아가는 것이 가능했다.

괜히 세상 사람들이 자하르의 추적 능력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레토를 쫓을 방법을 확보하고 그녀를 보내준 뒤, 투란은 다시 메이사의 방으로 돌아와서 책을 펼쳤다.

무언가 가문 내의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으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것은 평범한 동화에 불과했다.

도끼를 빠뜨린 나무꾼, 개구리가 된 왕자, 별의 아이-

'다 아는 동화들이네.'

하나같이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 비젤라가 잠자리에서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아라비온 기사의 딸이 아는 동화가 다 이쪽 지방에서 유래한 것일 테니 당연한 일.

혹시 안에 무언가 숨겨진 암호 등이 있을까 싶어 몇 번씩 훑어보았으나 딱히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애초에 그런 게 있다고 한들 투란 같은 문외한이 손쉽게 알아볼 정도면 암호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오랜만에 동화를 읽으며 옛 추억에 젖었던 투란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책을 접은 뒤 메이사를 돌아보았다.

'그냥 동화를 보고 싶었나?'

유감스럽게도 잠든 그녀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기에, 투란은 방을 나서서 다시 저택 순찰을 시작했다.

거점으로 삼아 머물 만한 장소를 찾기 위함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5층까지 모든 방이 1층과 마찬가지로 문이 활짝 열린 채 휑하니 비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런 저택에 흔히 있는 다락방은 마룻바닥이 썩어 죄다 노출되어 있기까지 했다.

투란은 도저히 이 저택을 거점 삼아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만약 저택을 이 따위로 만든 게 자하르 귀족의 잠입을 대비하기 위함이라면 의외로 효과적이었어....'

은신 마법이라고 천년만년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언젠가는 풀고 쉬어야 할 텐데, 이곳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어쩌다 몸이라도 한 번 뒤척이면 반쯤 썩은 나무판자가 삐걱댈 것이요, 이러한 소음을 가려줄 벽과 바닥은 죄다 구멍이 뻥뻥 뚫려 있었으니까.

코라도 골면 아마 귀족의 청각으로는 1층에서도 이를 들을 수 있을게 분명했다.

유일하게 쉴 만한 방법은 메이사에게 방문을 밝히고 그녀의 방을 함께 사용하는 것인데, 그러기에는 아직 이곳에서 찾아낸 정보가 너무 적었다.

적어도 솔리프와 비슷하게 아라비온 본가에서 무언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증거 정도는 찾아야 메이사를 설득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 *

저택에서 나온 투란은 은신과 비행 마법을 함께 사용한 채 임시 숙소로 쓸만한 곳을 찾아 헤맸다.

길거리에서 마력등이 불빛을 내뿜고 있기는 했으나 딱 어둠만 내쫓을 정도의 광량이라 하늘 위에서는 어렵지 않게 은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성유물의 감각을 끌어올린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확인하며 돌아다니기를 몇 분, 저 멀리서 걸어오는 네 명의 가족이 보였다.

저들 중 한 명의 몸에서 상급 귀족 수준의 마력이 느껴졌다.

"오늘 공연 진짜 재밌었어요, 아버지!"

"난 별로...."

"어머, 아까 울었잖니. 도라."

"안 울었거든요?!"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감동적이면 울 수도 있지."

아내와 자식으로 보이는 이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는 중년 귀족의 얼굴이 낯익었다.

이름이 카드람이라고 했던가?

아라비온의 흑요정 토벌대에서 무려 부대장을 맡았던 인물로 기억했다.

케오른에게 얼핏 듣기로 가주의 이복동생이자 심복 중 하나라고 했으니, 저 인사의 집에서라면 무언가 괜찮은 정보를 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대의 무력 수준을 보면 경보 같은 게 발동하더라도 충분히 도주하거나 제압할 자신이 있었고.

투란은 카드람 일가가 저택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은신 마법을 유지한 채 염동 마법으로 지붕 근처의 창문을 따고 들어갔다.

아마 잘 쓰지 않는 다락방으로 보였는데, 그래도 메이사의 거처에 비해서는 깔끔했다.

아무래도 내부를 폐허처럼 유지하는 건 아라비온 귀족들의 취향이 아니라 메이사의 개인 기호인 모양.

투란은 은신 마법을 해제하고 가면을 벗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야금야금 소모되던 마력이 회복되는 것과 함께 피로가 밀려왔다.

가주의 코앞에서 들키지 않는 이상 도망칠 자신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가문의 본거지에 침입하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순 없었다.

투란은 흉내쟁이 성유물을 꺼내 결계사 혈통의 마력을 소량 흡수한 뒤 다락방의 문과 창문 등에 결계를 설치했다.

이곳에 쌓인 먼지의 상태로 보건대 당분간 누가 오진 않을 것 같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안전지대를 확보하고 선잠을 자기를 몇 시간.

피로를 풀고 마력까지 회복한 투란은 저택에 깨어있는 사람이라고는 불침번을 서는 하인 한두 명뿐임을 확인하고 곧바로 저택 탐사를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목표는 카드람의 서재였다.

모름지기 집안에서 그 사람의 개인적인 비밀을 찾기 가장 쉬운 곳이라면 온갖 문서 등을 모아두었을 장소뿐이니.

다행히 이를 찾고자 꽤 넓은 저택을 일일이 다 뒤지고 다닐 필요는 없었는데, 2층 구석의 한 방이 무려 마법기로 잠겨있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서재가 아니라면 이를 침실보다도 삼엄하게 막아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 정도쯤이야.'

자기 딴에는 철저히 막아두었다지만 흉내쟁이 성유물 앞에서 이 정도 보안 체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투란은 서재 입구를 봉쇄한 마법기의 흐름을 확인한 뒤, 카드람의 침실에서 그와 한 쌍으로 보이는 열쇠를 찾아냈다.

아내와 한창 번식 활동을 마치고 잠든 카드람은 침입자가 자신의 침실에 들어왔음을 눈치채지조차 못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안쪽은 진짜 허술하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투란이야 가면으로 시간을 절약해 빨리 들어온 것이지, 사실 시간과 공을 들이면 하인으로 위장해 잠입하는 것쯤은 다른 자하르 귀족들도 가능할 터였다.

아까 본 그 여자도 그런 방법을 썼을지도 모르고.

그 상태에서 마구 학살이라도 하면 대체 어떻게 대처하려고 이렇게 무방비하단 말인가.

그렇게 아라비온의 부실한 보안 체계에 혀를 차며 서재로 진입한 투란은 한 개의 책상과 열 개 정도의 책장, 그리고 여러 책과 서류가 빼곡이 꽂인 것을 확인했다.

이 안에 그가 원하는 자료가 있을지 확인해볼 시간이었다.

'어디 볼까.'

그럴 것 같기는 했지만 예상대로 책상에 늘어놓은 서류는 썩 영양가 없는 내용들이었다.

모르겐 시 내부의 물자 유통 등에 관한 결재 확인서.

보통 귀족들이 이런 것에 관심이 없음을 생각하면 아마 카드람 역시 도장이나 찍어주는 역할일 게 분명했다.

문서를 도로 잘 정리한 투란은 책장에 꽂힌 문서를 하나하나 뽑아 확인한 뒤 다시 밀어넣었다.

이건 평범한 교양 도서고, 이건 종교 서적, 이건 아라비온 귀족들의 가계도....

'아.'

몇 분 정도 뒤지던 도중 투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지난 흑요정 토벌에 대한 보고서였다.

첫 장의 내용은 서부 숲 지대 부근의 개척지에서 대형 나무를 낮은 가격에 수입해오는 것.

거기서 조금 더 넘어가니 투란 자신에 관한 내용이 나왔다.

흑요정 토벌의 공로자이자 메이사가 특별히 챙기는 정체불명의 귀족이라는 식으로.

그다음 장에는 해당 내용을 보충하기 위함인지 투란에 대한 신상명세가 적힌 문서가 놓여 있었다.

'오....'

마법으로 그려진 실물에 가까운 초상화는 물론이요, 지난 행적까지도 어느 정도 정리된 문서.

사실상 아라비온에서 바라보고 있는 투란이 어떤 인물인가가 이 몇 장에 정리된 셈이었다.

[부모를 모르는 결계사 혈통의 귀족으로 주특기는 투석구를 이용한 돌팔매질, 무력 수치 4.]

[베르크 가문의 아시즈를 흑요정에게서 구원한 뒤 손님 자격으로 머무르며 가출한 후계자와 친분을 쌓음.]

[이번에 흑요정들이 침공한 것이 해당 전투 중 살해당한 흑요정들로 인한 것이라 추정됨.]

[회색 지대의 칼라마프에서 주인 없는 도시를 지배 중.]

[검독수리 마수 한 마리를 영혼 결속으로 부리고 있음.]

칼라마프를 다른 가문에 인도하고 떠났다는 것까지 적히지 않은 것은 아마 최신 내용이 반영되지 않아서일 터였다.

투란이야 비제를 타고 하루 이틀 만에 훅훅 드나드는 것이지 보통 사람은 이동하는 데만 몇 달이 걸릴 거리니까.

그 와중에 히사릴 언덕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케오른은 정말로 투란에 대해 아라비온 상류층에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글을 쭉 읽어내리던 투란은 맨 밑에 적힌 부분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글씨체가 최소 세 종류인 것으로 보건대 이 문서는 몇 명의 사람들이 돌아가며 편지를 나누듯 적어낸 것 같았다.

[근황 : 베르크 가문으로 돌아와서 후계자와 연락을 시도함. 과한 친목 관계가 우려됨. 제거 요망.]

[해당 귀족의 무력은 최소 7에 달함. 간단하게는 제거 불가능.]

[레토?]

[과함. 일단 편지를 차단하고 반응을 확인할 것.]

[후계자가 망가졌을 때를 기억.]

[왜 반년도 안 되어서 무력 수치가 4에서 7이 되었는지? 오류 확인 요망.]

레토, 조금 전 보았던 자하르 귀족의 이름....

투란은 이를 보고 그녀가 아라비온 쪽에 소속되어 있음을, 최소한 아라비온의 고위층이 그녀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그가 메이사와 지나치게 친해지는 것을 경계해 자하르 귀족을 보내서 암살하려 한 것이다!

'편지를 보낸 게 삼 주 전이었지, 자칫하면 자하르의 암살자와 싸워야 할 뻔했네.'

투란은 아직 은신 능력을 사용하는 자하르 귀족을 마주한 적이 없기에 그 능력을 흉내쟁이 성유물로 간파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만약 가능하다면 싸움은 우스우리만치 싱겁겠지만, 간파할 수 없다면 약한 적이라도 방심할 수 없었다.

아무리 수호자 마법기를 비롯한 방어 대책이 있다더라도 자는 중에 급소에 칼이 꽂히는 건 치명상일 테니까.

그보다 후계자가 망가졌을 때를 기억하라니, 이건 무슨 뜻일까?

좀 더 정보를 알아내야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기에, 투란은 우선 문서를 원래대로 정리해 넣으며 위치를 잘 기억했다.

일단 있는 곳을 알았으니 필요하다면 나중에 또 와서 가져가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이런 걸 찾아볼 만한 사람이 이 인간 하나로 끝날 것 같지도 않고 말이지.'

자하르 귀족을 부리는 권한을 가진 상위 귀족이 최소 세 명은 된다는 것 아닌가.

저들 중 가주가 있을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직 투란이 이곳에 잠입했음을 아는 이가 없는 만큼 시간은 많았다.

이후의 문서 탐색은 예상했던 대로 꽤 지루한 시간이었다.

대부분이 행정 문서였음에도 불구하고 뜻밖에 의미있는 내용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일일이 읽어봐야 했으니까.

그러던 도중, 낡은 편지지 한 장이 책 사이에서 후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투란은 종이가 바스라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이를 펼쳤다.

[숙부에게.

이곳 나긴 가문에서의 삶은 꽤 한가합니다.

어머니 쪽 친척들도 다 낯선 사람이라 데면데면하니 어쩔 수 없지요.

시간을 들여 가며 차근차근 친해질 수밖에요.

시렐은 계속해서 자기가 잘 지낸다고만 하는데 어째 편지에 성의가 없어 보일 때가 많습니다. 혹시 공부를 빼먹고 있지 않나 확인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메이사가 갑자기 저한테 살인자라고 쓴 편지를 보냈던데, 혹시 가문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레노드가.]

투란은 조금 전 보았던 아라비온의 가계도를 다시금 펼쳐 확인했다.

레노드 나긴, 시렐 아라비온, 메이사 아라비온.

세 명의 이름이 가주인 바달 아라비온의 밑에 있었는데, 앞의 두 명은 옆에 적힌 어머니의 이름이 '아니에타 나긴'으로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시즈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잠시 기억을 되짚자 처음 메이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떠올랐다.

가주에게 자식이 셋 있는데 그중 첫째는 모계 쪽 혈통이 발현하는 탓에 그쪽으로 입양을 보냈었다던가?

'메이사가 자기 이복 오빠에게 살인자라는 편지를 보냈다라....'

투란은 그 편지를 몇 번이고 읽으며 머리에 새겼다.

딱히 근거는 없지만, 그녀가 자기 가문을 적대시하는 이유가 이 안에 담겨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73화

투란은 본래 사람들과 자주 부대끼며 살아오지 않아 정치라는 녀석에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 개념 정도는 어느 정도 학습하고 있었다.

상급자에게 아부하거나 동료와 부하들을 꼬드기고, 적을 계략에 빠뜨려 모함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행위.

평범한 인간이야 살아가기 위해 사회에 영합해야 하니 당연히 이러한 정치 논리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요, 심지어 강대한 귀족들조차도 이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같은 가문의 동족들, 그리고 더 큰 사회를 구성하는 다른 가문의 귀족들과의 관계를 조율해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구도란 그 집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더 복잡하고 이리저리 꼬이는바, 귀족 중의 귀족인 대가문의 내부 정치쯤 되면 보통 사람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음험했다.

지난 며칠, 투란은 매일 낮 소년 기사의 모습으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귀족들이 어느 저택에 사는지를 확인한 뒤, 밤마다 그들의 저택에 침입해 서재를 털어 자료를 수집했다.

제각기 창의적인 방식으로 서재를 방비해 놓기는 했으나 다행히 뚫지 못할 정도로 철저한 이는 없었다.

아무래도 서재야말로 가장 안전한 공간이라 생각했던 탓일까.

그곳에서는 정말로 파면 팔수록 구린 이야기들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뇌물을 받고 가문 내에서 마법기나 마력을 분배하는 데 개입한 것쯤이야 거론하기도 우스운 수준.

짓지도 않은 죄를 씌워 모함하거나 사냥해야 할 마수의 강함을 위장하는 등, 사람 목숨까지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이야기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은근히 돌려 말하기는 했으나 암살을 지시한 정황마저 존재했다.

이러한 문서들을 여럿 읽고 그 내용을 조합한 끝에, 투란은 현재 아라비온 내부에 세 개의 파벌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에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원로파와 중년파, 청년파 정도.

원로파는 이름 그대로 삼백 살에서 사백 살 사이쯤 되는, 현 가주보다 조금 어리거나 동년배인 이들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오랜 세월 쌓아온 공훈으로 두루 존경받기는 하지만 가문 내의 일에 자주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카드람이 속한, 백 살에서 삼백 살 사이의 귀족들이 모인 중년파.

이들은 사실상 가문의 주축으로, 중요한 역할을 독점하며 온갖 권력을 휘둘렀다.

특이한 점으로, 이들은 가주의 반려인 나긴 가문의 여인과 그 자식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메이사를 적대시했다.

마지막은 전도유망한 청년 귀족들을 주축으로 하는 청년파.

당연하게도 세 파벌 중 최약체로, 차기 가주가 되어야 할 메이사를 지지하고 있으나 정작 그녀와 제대로 된 유대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이중 투란은 주로 중년파의 서재를 털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들이 집중적으로 메이사를 고립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자하르 귀족 레토를 이용해서 메이사가 계속 자하르의 암살자들에게 노려지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 만드는 것.

그러는 와중 자기들은 암살자의 존재가 망상일 뿐이라는 식으로 분위기를 몰아 메이사를 미치광이 취급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메이사와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인 사용인들은 죄다 먼 곳으로 보내 버렸으며 친분을 쌓으려 접근하는 청년파의 젊은이들 역시 괴롭히거나 심하면 죽이기까지 했다.

그녀가 폐허나 다름없는 저택에서 늙은 하녀들 몇 명과 함께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왜 메이사가 그 당시 베르크 가문의 저택으로 도망쳐 왔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나마 그들을 내버려 둔 것은 가신 가문이라 건드리기 부담스러웠거나, 그조차 망가트렸다가는 정말로 메이사가 자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다행히 베르크 가문을 특별 취급하거나 그들과 소통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쪽까지 한패는 아닌 것 같았다.

만약 그랬으면 메이사는 물론이요, 아시즈에게도 안된 일이었을 테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렇게 새로이 알아낸 정보를 조합하니 과거 메이사의 이복 오빠, 레노드가 보낸 편지의 의미도 알 수 있었다.

'정황상...메이사의 어머니랑 남동생을 죽인 게 중년파 쪽인 것 같네.'

가계도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메이사에게는 남동생이 한 명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인 2207년, 고작 여덟 살의 나이에 채 마력조차 각성하지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목숨을 잃은.

그리고 레노드의 편지 역시 같은 해에 쓰인 것이었다.

둘 사이에 관계가 없다기에는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닌가?

'대외적으로는 사고사였지.'

메이사의 어머니, 오린 베르크는 간신히 혈통 능력을 개화한 최하급 귀족이었음에도 가주에게 강대한 자식을 안겨주어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사고로 죽은 뒤 그냥 없었던 것처럼 간단히 묻혀 버렸다.

심지어 친척인 아시즈조차 '사고로 죽었다'라는 말만 전해 들었을 뿐 그 사고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나긴 가문 출신의 정실이 후계자급 귀족을 낳은 첩의 존재를 불쾌하게 여겼다는 이야기가 여럿 적혀 있는 것은 물론이요, 그 후원자가 자하르 귀족을 부리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 사고에 그들이 개입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투란은 중년파 귀족들의 저택을 터는 과정에서 그들이 오린을 '처리'했다는 심증까지도 확보할 수 있었다.

[레토를 이용, 모자(母子) 제거.]

[확인.]

누구의 어머니와 자식인지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해당 문서가 2207년에 쓰인 것임을 생각하면 정황은 명백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해당 일을 질책하는 내용도 몇 개 발견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자식은 과했음. 대상이 망가졌음.]

[고립 상태를 위해서는 필요했음.]

[회복할 방법을 찾아볼 것.]

음식을 거부하는 메이사의 기벽은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으로 생긴 것 같았는데, 이들은 이를 '망가졌다'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썩 달갑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아마 신이 써야 할 몸의 상태가 나빠져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와중에도 메이사를 고립시키는 건 계속 유지해야 했기에 이를 극복하기가 어렵다고 투덜대는 내용이 몇 개 나왔다.

이를 통해 투란은 중년파의 배후에 신적 존재가 있음을 반쯤 확신할 수 있었다.

솔리프를 특정한 성격으로 깎아내듯, 메이사를 고립시켜 그녀의 성격을 조작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메이사를 이렇게 괴롭히는 것부터가 그런 뒷배 없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말이지.'

대체자가 없는 후계자, 확고한 차기 가주라는 차세대 권력을 이 정도로 적대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자살행위였다.

심지어 현 가주가 이미 노쇠한 마당이니, 자리가 교체되는 순간 곧바로 중년파 전체가 숙청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

그런데도 이런 일을 벌이는 이유라면 역시 중년파에서 영혼 교체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어서일 가능성이 컸다.

어차피 프레아 신족의 영혼이 깃들고 나면 과거 메이사가 겪은 온갖 불합리에 대해서는 따질 일이 없을 테니까.

아니, 오히려 몸을 쉽게 옮기고자 지시한 당사자가 그 신족일 가능성이 컸다.

아마도 메이사의 어머니와 남동생을 해친 것 역시 그녀를 고립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일 것이고.

비록 이곳의 문서 중 가주가 자신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거나 하는 내용은 없지만, 그의 묵인이 없고서야 아무리 유력자들이 뭉친다 한들 후계자를 이렇게까지 핍박하기는 불가능했다.

문제는 영혼 교환이나 메이사의 가족을 죽인 것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서재가 개인적인 공간이라도 그 정도 비밀까지 노골적으로 남겨두기는 불안했기 때문일까, 그에 관한 내용까지는 적어놓은 것이 없었다.

'좀 더 자료를 모아보는 편이 나을까, 아니면 바로 메이사에게 알려주는 쪽이 나을까.'

투란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내 메이사와 본격적으로 접촉해 보기로 했다.

어지간한 유력 귀족들의 집은 싹싹 뒤졌으니 이제는 진짜 가주의 본채를 털거나 중년파 쪽 귀족들을 직접 잡아다 고문해서라도 정보를 얻어야 할 지경인데, 둘 다 사전에 메이사의 협력을 얻지 않고 저지르기에는 지나치게 부담스러웠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한 자료는 완벽히 준비되어 있었다.

잿가루와 종이를 이용해 초상화를 그려내는 염사(念寫)를 응용, 관련된 문서들을 모두 복사해놓았으니까.

지금 메이사가 처한 상황으로 보건대, 이러한 자료들을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뢰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 * *

투란이 메이사와 접촉하기로 한 것은 이곳에 잠입한 지 정확히 열흘째가 되는 밤이었다.

낮에는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뜻밖의 소음이 발생했을 때 주의를 끌 가능성이 크며, 일이 잘못되었을 때 은신해 도망치기도 유리하리란 계산에서였다.

몰래 숨어 지내던 저택에서 나온 투란은 메이사의 저택을 향해 날며 성유물의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본가 내에 존재하는 무수한 생명체들이 감각에 들어왔다.

이를 하나하나 확인하기도 잠시, 이번에도 목표를 찾지 못했음을 깨달은 투란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번에도 없나?'

지난 며칠, 투란은 시간이 날 때마다 성유물의 감각을 이용해서 이곳에 이종족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과거 흑요정 사령술사들의 사례로 보건대 백요정 생령술사가 존재한다면 그 역시 존재감이 느껴져야 할 테니까.

여기서는 대충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이들이 영혼을 교체하는 데 생령술사를 이용할 필요가 없거나, 아니면 그들을 본가 밖이나 감지되지 않는 특수한 공간에 가둬 두었거나.

그는 개인적으로 후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흉내쟁이 성유물의 감각은 의외로 터무니없는 상황에서 잘 막혔으니까.

내심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메이사의 저택으로 접근하기도 잠시, 투란은 그녀가 자기 저택에 없음을 깨달았다.

새벽 두 시, 보통 사람이라면 무슨 용무가 있을 만한 시간이 아닌데도 말이다.

'어디로 간 거지?'

혹시 낮에 잠을 너무 많이 잔 나머지 밤잠이 오지 않아서 산책이라도 하는 것일까?

다행히 메이사의 존재감은 워낙 거대했기에 감각을 넓히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자기 집에서 벗어난 것은 오히려 절호의 기회였다.

혹시라도 메이사의 방에 성유물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감시 체계가 있을까 싶어 몰래 관련 자료만 올려놓을 생각이었는데, 밖에서라면 아예 말을 걸 수도 있으니까.

그녀를 향해 날아간 투란의 눈앞에 보인 것은 바로 묵은 빵과 밀가루 냄새가 솔솔 풍기는 대형 제빵소였다.

아라비온 본가 곳곳으로 갓 구워낸 빵을 공급하는 이 건물은 모든 제빵사들이 퇴근하고 불이 꺼진 탓에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메이사의 기척을 따라 내부로 진입한 투란은 안쪽에서 들려오는 묘한 소리에 걸음 속도를 높였다.

"우욱, 욱...."

목소리의 정체는 당연하게도 메이사.

놀랍게도 그녀는 제빵소 한쪽의 남은 빵을 꾸역꾸역 입으로 욱여넣고 있었다.

그러고는 입을 꾹 다물며 손으로 틀어막는가 싶더니, 잠시 후 참지 못하고 이를 모조리 토해냈다.

"하아...."

숨을 고르던 메이사는 자신이 토해낸 빵을 어마어마한 고열의 발화 마법으로 연기조차 나지 않게 태워버린 뒤, 다시금 빵 한 덩이를 집어 입에 쑤셔 넣었다.

거듭된 구역질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이러한 행위를 멈추지 않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투란은 그제야 메이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도저히 음식을 먹기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든 억지로 영양을 보충해 보려는 시도가 분명했다.

'이런....'

도저히 남에게 보일 만한 꼴이 아닌데, 차라리 여기서는 못 본 척하고 다음 기회를 노려 말을 거는 편이 나을까?

잠시 고민하던 투란은 그대로 은신을 풀었다.

이미 다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게 오히려 기만이나 다름없으리라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지금이 아니면 편하게 이야기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이대로 아침이나 낮이 되면 메이사는 또 그 휑하기 짝이 없는 저택으로 돌아갈 터.

그에 비해 이 제빵소는 제법 튼튼하게 지어져 있어서 그 폐허 저택보다 훨씬 방음이 잘 됐고, 무엇보다도 별도로 감시 체계가 갖춰져 있을 가능성이 적었다.

"메이사."

갑작스러운 부름에 깜짝 놀라서 돌아서는 메이사.

투란이 얼른 두 손을 들어 싸울 의사가 없음을 드러내자, 그녀의 손가락에 맺혔던 벼락이 빠지직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짐작건대 저것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면 수호자 마법기를 최대한 활성화해도 상당한 타격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투란? 여긴 어떻게? 잠깐, 혹시 환영...인가?"

정말로 이곳에 있을 법하지 않은 사람이 뜬금없이 등장한 탓일까.

메이사는 조심스럽게 투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 찔러 그가 실존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아마 조금 전 보았던 것만 아니었으면 그러한 모습에 작게 웃기라도 했을 터였다.

"진짜네. 대체 여긴 어떻게, 아니, 그보다 방금...다 봤어요?"

"의도한 건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나치게 마른 메이사의 얼굴은 다른 사람에 비해 표정을 읽어내기 쉽지 않았는데, 그나마 짐작하자면 분노와 부끄러움이 섞인 듯했다.

한창때의 아가씨가 음식을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는 것을 남에게 보인 것은 물론, 그게 본인의 개인적인 마음의 상처와 관계가 있다면 더더욱 알리고 싶지 않을 테니 당연한 일.

그도 잠시, 메이사의 얼굴에 새겨진 감정이 곧 경악과 경계심으로 바뀌었다.

그제야 투란이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깊이 생각한 듯했다.

"대체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죠? 혹시 아시즈랑 함께 온 건가요? 손님으로 들어온 거라면 내가 전해 듣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몰래 들어왔습니다. 그보다 우선 이것부터 봐주실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겁니다."

대가문의 본거지에 몰래 들어왔다는, 남들이 들으면 경악할 일을 태연히 언급하며 투란은 곧바로 아라비온 귀족들의 저택에서 베껴온 문서를 내밀었다.

그 와중에도 메이사는 더 추궁하는 대신 이를 받아들어 펼쳤다.

"뭐죠, 이건?"

"이곳 귀족들에게서 받아낸 겁니다."

사실 여부야 그녀가 직접 보고 판단할 일.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자 메이사는 문서와 투란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크고 툭 튀어나온 눈으로 정신없이 문서를 훑기 시작했다.

투란은 그런 그녀에게 가볍게 덧붙였다.

"참고로, 거기에 적힌 레토는 본가의 그 하녀가 맞습니다. 자하르 혈통의 귀족이더군요."

깜짝 놀랄 만한 발언에 메이사는 온몸을 움찔했으나, 그 상태로도 문서를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이미 그 내용에 깊게 몰입한 상태인 듯했다.

그렇게 십여 분이 지난 뒤, 메이사는 들고 있던 종이를 콱 구기며 웃음을 터트렸다.

깡마른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러면 그렇지. 내가 미친 게 아니었다고...."

혹시 감정이 격해져 기절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메이사는 눈물을 줄줄 흘리기만 할 뿐 제법 자신을 잘 다스리고 있었다.

저 바짝 마른 몸 어디에서 저만큼 눈물이 나오는지가 신기할 지경이긴 했지만.

잠시 후, 조금 진정한 메이사가 투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 이제 말해주시겠어요? 이걸 어떻게 구했는지랑, 왜 이걸 저한테 보여주러 오셨는지."

설명을 요구하는 말과 달리, 이미 이쪽을 바라보는 푸른 눈에는 믿음이 가득했다.

투란은 메이사가 이러한 정보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음을, 그래서 자신이 원하던 것을 가져다준 그를 깊게 신뢰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74화

불 하나 켜지지 않은 채 달빛만이 비치는 제빵소.

투란은 메이사에게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이러한 자료를 구했는지, 그리고 왜 이를 조사했는지를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과거사부터 시작해서 그가 가진 능력이나 함께 하게 된 동료, 솔리프의 존재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게 되었다.

그래도 슬슬 세 번째 설명하는 것이라서일까.

이전보다 조금 더 조리 있게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음을 실감하며, 투란은 자신이 여행 중 알아낸 여러 비밀과 거기에서 추론한 가설을 설명하는 것으로 말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자하르와 아라비온의 혈통 능력까지 한 번씩 펼쳐 증명을 마치자, 줄곧 말없이 듣고만 있던 메이사가 입을 열었다.

그 내용은 뜻밖에도 날카로운 질책에 가까웠다.

"다소 논리적 비약이 많네요, 증거도 부족하고."

"맞습니다."

투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지금까지 그는 간접적인 근거만 여럿 확보했을 뿐, 어느 신의 존재나 메이사를 핍박하는 이들의 실체에 대한 확실한 물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으니까.

직접 도서관에서 사서를 만나 관련된 정보를 접하거나 미궁에 들어가서 직접 이를 체험하지 않았다면 그냥 터무니없는 음모론 정도로 취급할 법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가씨가 겪어온 인생 자체가 하나의 증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대가문의 후계자라는, 이 세계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음에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핍박받아온 여인.

투란의 가설은 그녀가 어쩌다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렇죠. 그래서 믿을 거예요. 믿고 싶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믿고 싶다, 어쩌면 그것이 메이사의 진심일 터였다.

그래야 자신이 미치광이가 아니라고, 나쁜 것은 이 저주받은 가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몇 번 호흡을 고른 그녀가 투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제가 뭘 해야 할까요?"

"우선 도망칠 준비부터 해야겠죠."

꽤 젊은 편인 바라하의 가주와 달리, 아라비온 가주는 이미 몇 년 안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막강한 마법사라지만 신적 존재일지도 모를 가주의 손길을 뿌리칠 정도는 아닌 만큼, 기회가 있을 때 먼저 도망쳐야 했다.

"도망이라...."

투란은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두려움, 그리고 학습된 좌절감을 읽을 수 있었다.

메이사는 대가문의 가주들을 제외하면 대적할 이가 거의 없는 대마법사였지만, 그와 별개로 평생을 가문의 울타리 안에서 핍박받으며 살아온 미성숙한 어른에 불과했다.

사실 그녀의 나이가 이제 스물두 살 정도임을 생각하면 귀족으로서는 아직 어린애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투란은 더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무엇을 떠올렸는지 깡마른 얼굴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어렸다.

"혹시 제가 도망치면 이모 쪽에 보복이 가해지진 않을까요?"

메이사가 자신의 외가인 베르크 가문을 소중히 여김은 모르는 이가 없는바, 탈주의 대가로 그들을 핍박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이 역시 고민했던 바이기에 투란은 곧바로 준비해두었던 답변을 꺼냈다.

"그럴 수도 있겠죠. 그래서 도망친 다음 이번에 얻은 문서 중 일부를 가신 가문들 사이로 뿌릴 생각입니다."

다케인 평야와 그 인근에 존재하는 아라비온의 가신 가문은 총 17개.

그중 서너 가문 정도는 중년파와 결탁하다시피 했으나 나머지는 비교적 느슨한 군신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라비온 본가의 중역들이 저지른 비리 내용을 메이사의 이름으로 전달한다면?

"아무래도 당분간은 베르크 가문을 핍박하기 어렵게 되겠죠. 명분에서 밀릴 테니까요."

메이사가 가문 내 중역들의 비리를 폭로한 뒤 베르크 가문이 핍박받는다면 다른 가신 가문들의 눈에는 이것이 주군 가문의 불합리한 폭거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평소에 눌려 지내던 청년파는 물론이요, 몇몇 강직한 원로파 귀족들 역시 이러한 상황을 불쾌하게 여길 터.

아무리 중년파가 가주를 등에 업은 아라비온의 핵심 권력이라지만 그들 모두를 힘으로 찍어누르다가는 가문 전체가 반 토막이 날 게 분명했다.

베르크 가문을 핍박한다고 메이사가 돌아오리라는 보장도 없는 만큼, 사실상 화풀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저지르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부작용이 컸다.

"아...."

"물론 수십 년 뒤에는 비리 문서의 영향이 약해지겠지만, 그 전에 가주와 맞설 방법을 찾아봐야죠. 아니면 늙어 죽기를 기대하거나."

메이사와 솔리프, 투란의 조합이라면 어지간한 신화급 마수는 충분히 사냥하고도 남았다.

대가문의 권역 주변에 그러한 존재들이 탄생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냥당하기 마련이지만, 바다부터 시작해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몇몇 오지에는 아직 생존한 개체가 있을 터.

물론 넓디넓은 세상 곳곳을 헤집어가며 찾는 것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운만 좋으면 십수 년 안에 여러 대가문과 대적할 만한 힘을 갖추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렇다고 베르크 가문을 위해서 메이사가 희생양이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몇 분 정도 침묵의 시간이 지난 뒤, 메이사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투란."

그렇게, 투란은 또 한 명의 동료를 얻게 되었다.

* * *

어느 정도 이야기가 정리된 뒤, 그들은 구체적인 탈출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우선 나가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마법기는 평소에 다 착용하고 다니니까 그냥 산책이라도 하고 싶다고 우기고서 나가 버리면 그만이죠. 그전에 그 여자를 처리할 필요가 있긴 하겠지만요."

"레토 말이죠?"

"예."

아라비온의 귀족들을 따르는 자하르 귀족, 레토.

그녀를 처리하지 않고 도망쳐 봐야 금방 추적당할 게 뻔했다.

저택 내에 있는 그녀의 흔적이야 투란이 제거해줄 수 있지만, 그 외의 수단을 써 쫓아오는 것까지는 막아낼 수 없으니까.

"이곳을 뒤져본 바에 의하면 아라비온 내에 존재하는 귀족 중 자하르 혈통의 귀족은 그 여자 하나뿐이니, 제거하면 도망칠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친한 사이입니까?"

지난 며칠 동안 귀족들을 뒤지고 다니느라 자주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가끔 메이사의 저택을 확인할 때면 레토가 그곳에 들르는 것이 느껴지곤 했다.

거기다 직접 동화까지 가져다달라고 할 정도이니 어느 정도 친분이 있을 수도 있을 터.

투란의 질문에 메이사는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친근감을 느끼고 있긴 했죠.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한창 고립되어 있던 메이사는 그나마 자신과 자주 접촉해도 교체되지 않고 사근사근한 레토를 내심 기껍게 여겼으나, 혹시라도 필요 이상으로 친하게 지냈다가 교체당할까 싶어서 일부러 쌀쌀맞게 대했다고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가끔 동화를 보며 어머니가 읽어주던 것이라는 이야기를 꺼내거나 하는 식으로 은근히 교류하여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웃기는 일이죠. 제 가족들을 죽이고 저를 괴롭히던 여자를 내심 소중하게 여겼다니...."

메이사는 미친 사람이 넋두리하듯 자신이 당했던 일을 읊었다.

편하게 쉬던 도중 아무 전조도 없이 창문이 깨진 것, 집안에 두었던 옷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갈기갈기 찢긴 것, 소중히 품에 간직하고 있던 가족의 초상화가 사라진 것.

계속해서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가문의 구성원들, 주로 어른들에게 알렸으나 그들은 이를 그냥 과민반응으로만 취급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빛을 뿌리고 공격 마법을 난사했으나, 나중에는 아예 모른 척해 버리게 됐다.

직접 공격당한다 한들 어차피 그녀가 걸치고 있는 방어 마법기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으니까.

아예 보이지 않는 유령 비슷한 무언가와 공생하는 셈 치기로 한 것이다.

문서에 건조하게 적혀 있던, '적절한 자극을 주었다'라고 표현한 일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를 들으며 투란은 동정심을 느꼈다.

보통 사람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진작에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 버렸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 여자는 어떻게 해도 좋아요. 아니, 비참하고 끔찍하게 죽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탈출하기 전까지 마주쳤을 때 감정을 절제하기가 힘들 것 같다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짐작건대 내심 가지고 있던 친밀감이 그보다 몇십 배는 큰 배신감과 적개심으로 변한 듯했다.

덕분에 투란은 필요에 따라 레토를 생포한 뒤 고문하겠다는 계획을 양심의 가책 없이 세울 수 있었다.

"그러면 그 여자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죠. 혹시 그 외에 아라비온에서 쓰는 추적 마법기가 더 있을까요? 멀리 떨어진 상대를 쫓을 수 있는 종류로."

지난번에 메이사가 사용하던 마법기는 비교적 근거리에 숨은 상대를 판별하는, 자하르 귀족과 싸울 때나 쓰기 좋을 물건이지 장거리 추적용이 아니었다.

흑요정들을 집요하게 쫓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그런 용도의 물건도 있을 터.

예상대로 메이사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있어요. 제가 쓰던 건 본가에 반납했고, 별자리를 이용하는 점성술 마법기가 있는데 아마 아직 카드람 숙부...그 개자식이 가지고 있을 거예요."

숙부가 개자식이라면 메이사 자신의 조부까지 모욕하는 셈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투란은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아버지 쪽 자하르 친척들도 썩 자랑스러운 사람들일 것 같지는 않기도 했고.

"그 집은 이미 들어가 봤으니까 제가 탈출 직전에 훔쳐 오면 되겠군요."

"확실히 자하르 혈통이 한 편이 되니까 엄청 편하네요. 그냥 뭐든 뚝딱 훔쳐오면 그만이라서."

조금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메이사는 울어서 벌개진 눈을 한 채로 그렇게 농담하며 웃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몇 가지 문제점을 제시하고 이를 해결할 방법을 궁리했는데, 그 결과가 다소 우스꽝스러웠다.

메이사가 그냥 몸만 나오는 동안, 투란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모든 뒷정리를 다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걸 혼자서 다 하실 수 있겠어요? 제가 뭐라도 좀 돕는 게-"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메이사, 당신의 탈출 쪽부터 고려해 보죠. 일단 갑자기 산책하러 나간다고 하면 의심할 가능성이 크니까, 우선은 내일부터 매일 산책하러 나가세요.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면 무뎌지기 마련이니까."

"일상적인 일로 만들라는 거군요."

"예.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건강 상태도 해결해야 할 겁니다. 이대로는 도망친다고 해도 얼마 안 가서 쓰러질 것 같으니."

"으음...."

아무래도 이쪽은 썩 꺼내고 싶지 않은 주제였는지 메이사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몸 상태는 그 정도로 심각했다.

하루에 열서너 시간을 기절하다시피 잠들고 마력을 조금만 심하게 사용하면 현기증을 느낄 정도라니, 아무리 강대한 마법사라도 이런 몸 상태로는 도주하기 쉽지 않았다.

이에 투란은 그간 쭉 꺼내지 않고 미뤄 두었던 주제를 언급했다.

"혹시 음식물을 거부하는 게 돌아가신 가족들과 관계가 있습니까?"

"...맞아요."

메이사는 그렇게만 대답한 뒤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어차피 당장 다그쳐 말하게 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이야기도 아닌지라, 투란은 자연스럽게 주제를 넘겼다.

"혼자 해결하시긴 어렵겠죠?"

"어려울 것 같아요, 아무래도...."

메이사라고 이 섭식 장애를 고치기 위해 아예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약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에 대외적으로는 몸을 가볍게 하려 한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남들 몰래 온갖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어 보며 어떻게든 영양을 공급해보려 시도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입으로 넘길 때마다 어머니와 동생의 얼굴이 보이며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이 밀려왔다.

결국 그녀가 궁여지책으로 짜낸 방법이 바로 조금 전처럼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아주 적은 양의 음식물이 몸으로 들어가서 조금은 건강 상태가 호전되었으니까.

조금 전 그러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자 메이사는 민망한 마음에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비슷한 감정을 보이면 오히려 그녀가 더 창피해할 것을 알기에, 투란은 의도적으로 기계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면 제가 도와드리도록 하죠."

"어떻게요?"

"직접 먹여드리는 겁니다."

메이사는 순간 할 말을 잃고 투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음식을 직접 먹여준다니, 옛 제국 시절의 퇴폐적인 연애 소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 아닌가?

입에서 입으로 음식을 직접 전달하는....

처음에는 모욕감을 느껴야 할지 잠시 고민했으나, 놀랍게도 그렇게 말하는 투란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사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 그 방식이 도움이 될까요? 전 잘 모르겠는데."

결국 메이사의 입에서 나온 답변은 그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어정쩡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투란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자신이 말을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게 했음을 깨닫고 보충했다.

"기절시킨 다음 음식을 갈아 만든 액체를 직접 관 같은 것으로 목구멍 안쪽에 밀어 넣는 겁니다. 혹시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토한다고 해도 일부는 몸속에 남겠죠."

"아."

확실히 그런 방법은 지금까지 한번도 써본 적 없었다.

쓸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게 옳을 터였다.

가문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믿을 없었고, 그나마 신뢰하는 베르크 가문의 사람들에게는 강한 척을 해야 했으니까.

그녀가 그 폭압적이기까지 한 방법에 망연자실한 사이, 투란은 대용량 주머니에 저장해 두었던 비상식량을 꺼냈다.

말린 콩가루, 육포, 채소....

탄수화물이니 단백질이니 하는 복잡한 영양학 지식 따위는 없지만, 여러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게 건강하다는 상식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이 모두를 으깨 물과 섞어 만든 영양죽은 딱 봐도 맛없어 보였으나 어차피 바로 위장에 쑤셔넣을 것이니 괜찮았다.

마지막으로 얇은 봉 하나를 근처에서 찾아 가열 마법과 염동 마법으로 형태를 잡자, 음식을 위장까지 밀어 넣을 금속관이 완성되었다.

"다 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절해야 하죠? 지난번처럼 마력을 다 소모해서?"

"그건 안 좋습니다. 마력으로 간신히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버틸 힘까지 빼 버리는 거니까요. 방어 마법기를 벗으시면 제가 깔끔하게 기절시켜 드리죠."

다른 사람의 앞에 무방비한 모습을 드러내고 기절하기까지 하라니.

실로 두렵기 짝이 없는 요구였으나 메이사는 잠시 망설인 뒤 곧바로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 방어 기능이 있는 마법기를 벗었다.

"됐어요."

"다 끝나고 나면 바로 깨워 드리겠습니다."

투란은 그렇게 메이사를 안심시킨 다음 뒤쪽으로 돌아가서 가느다란 목을 팔로 휘감았다.

하람에게 배웠던 제압 기술이 이런 데서 쓸모가 있을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다행히 근육이 가득해 통나무 같던 하람의 목과 달리, 메이사의 목은 지나치게 말라 혈관이 도드라져 있어 기술을 걸기 편했다.

분명히 이 혈관을 막는 것이 빠르게 기절시키는 요령이라고 했던가?

"그윽-"

힘을 적절히 가감해가며 가느다란 목을 죄기를 약 십수 초.

본능적으로 버둥대던 메이사의 몸이 축 늘어졌다..

76화

카드람의 늙은 집사는 저택의 청소 상태를 점검하며 조금 전 보았던 주인의 행동을 떠올렸다.

어째 오늘따라 그 모습이 영 낯설게 느껴졌다.

분명 오늘 오전 중에는 가문 회의가 있을 텐데 급히 돌아온 것도 그렇고, 그를 대하는 태도는 마치 무언가 찔리는 것이라도 있는 것 같지 않던가.

거기다 조금 전에는 과거 몇 번 본 적 있던 가주 직속 하인을 데려와서는 누구도 지하실로 들어오지 말라고 명령하기까지.

이는 그가 수십 년간 주인을 모시며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설마...?'

생각이 한참 이상한 쪽으로 흘러갈 무렵, 조금 전 카드람과 함께 지하실로 내려갔던 하녀가 웬 포대자루 하나를 들고 올라왔다.

부피는 제법 컸으나 쉽게 드는 모양새로 보아 안에 그리 무거운 물건이 들은 건 아닌 듯했다.

"엇."

그녀의 모습을 본 집사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단정하기 그지없던 조금 전과 달리 급급히 입은 것처럼 어설픈 옷차림....

심지어 그중 몇 군데는 억지로 벗기기라도 한 것처럼 찢어져 있기까지 했다!

그런 집사의 시선을 느꼈는지, 하녀가 포대자루를 들고 있던 손 하나를 떼어 슬며시 매무새를 다듬었다.

"당분간 지하실로는 내려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 알겠습니다."

카드람 부부는 귀족치고는 상당히 금실이 좋아 서로 첩을 두지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건만, 그것도 오늘로 끝인 듯했다.

가정의 평화가 깨졌음에 탄식하며 집사는 재빨리 하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 때문에 그는 포대자루가 웅크린 사람과 비슷한 크기라는 것을, 그리고 하녀의 키가 조금 전보다 살짝 커진 상태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고생이 많으십니다! 여기 통행증이요."

"으, 냄새...됐으니까 빨리 지나가!"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한가득 풍기는 수레.

검문소 담당자는 몇 번을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 악취에 질색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청소부로 변장한 투란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수레를 끌고 검문소를 나섰다.

"후아...."

사방이 성벽과 결계로 둘러싸인 마경에서 지낸 것이 며칠이던가.

폐쇄된 공간 특유의 압박감이 사라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투란은 근처의 골목으로 들어가서 수레 앞쪽의 뚜껑을 열고 포대자루에 담긴 레토를 꺼냈다.

사슬에 꽁꽁 묶인 채 흠씬 두들겨 맞고 의식을 잃은 그녀는 지금 평범한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생각보다 쉽게 나왔는걸.'

카드람으로 변장해 레토를 유인하여 포획, 그다음에는 레토로 변장해서 저택을 나온 뒤 준비한 음식 쓰레기 수레에 레토를 담아 검문소를 지난다는 계획은 순조롭게 성공했다.

지난 며칠간 변장 연습부터 시작해서 몰래 수레며 옷이며 출입증까지 훔치느라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다소 허탈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심지어 지나치게 열성적인 검문소 담당자가 수레를 열어볼 것을 대비해 환영 혈통의 마력까지 조금 삼켜놓았건만.

어쨌든 순조롭게 나왔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라, 투란은 아라비온 귀족들이 자주 입는 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뒤 레토를 어깨에 걸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 부근에서 마법사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하루이틀 일도 아닌지라 그를 주목하는 시선은 없었다.

그렇게 서쪽으로 날기를 이십여 분.

모르겐 시의 외곽으로 나온 투란은 붉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꺼내 추적 마법을 시전해 방향을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적이 뜸한 언덕 위를 느긋하게 날아다니는 메이사와 아라비온 귀족 세 명이 보였다.

투란은 바람 마법을 이용하여 곧바로 목소리를 보냈다.

[계획대로 됐습니다, 메이사.]

물론 바람의 흐름을 읽는 아라비온 귀족들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뭐지?"

"저 사람이 바람을 보낸 거 같은데, 아는 얼굴인가?"

"난 처음 봐. 덱스랑 좀 닮긴 했지만...."

아라비온이 대가문답게 귀족의 수가 많다지만 그 수는 고작해야 백수십 명 정도.

심지어 일반인보다 긴 세월을 살아가는 그들은 어지간해서는 모든 동포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나마 얼굴을 잘 모르는 경우라면 대외적으로 잘 활동하지 않는 원로들 정도.

그런데도 그들이 바로 의심하지 못한 것은 그가 이전에 쓰던 소년 기사의 얼굴에서 나이만 올린 모습을 하고 있어서였다.

아라비온 귀족 몇 명의 얼굴을 섞은 것이라 묘하게 낯이 익으니 못 보던 친척인가 싶을 수밖에.

그렇게 생겨난 의혹이 의심으로 발전하려던 순간, 뒤쪽에서 막대한 양의 전격이 쏟아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메이사의 급습에 아라비온 귀족 세 명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새카맣게 타 죽고 말았다.

죽은 이들을 내려다보며 메이사가 변명하듯이 중얼거렸다.

"셋 다 그쪽의 하수인들이었어요."

"잘하셨습니다. 그럼 바로 이동하죠."

만약 청년파 쪽 귀족이었다면 기절만 시키거나 잘 설득해서 도망치는 방향을 위증시키도록 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중년파 쪽이라면 죽이는 게 깔끔했다.

추적의 여지를 모두 떼어낸 두 사람은 곧바로 남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았다.

* * *

대가문의 후계자급 귀족이 온 힘을 다한 비행속도는 평범한 귀족이 달리는 것의 몇 배 이상이라, 그들은 두어 시간 만에 베르크 가문의 영지인 자빌린 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투란과 메이사는 곧바로 도시에 진입하는 대신 근처의 인적 없는 골짜기로 착륙했다.

그 상태로 영혼의 끈에 의식을 집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검독수리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비제!"

오랜만에 만난 영혼의 단짝이 너무나 반가워서일까, 비제는 삐약 운 뒤 그네와 다리 사이에 묶여 있던 밧줄을 풀어던지고 투란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몸을 이리저리 비벼대던 녀석은 바닥에 착지하더니 보고 싶었다는 내용과 왜 빨리 안 왔냐고 잔소리하는 내용의 글을 서사시처럼 길게 써 내려갔다.

꽤 긴 시간 내버려 둔 죄가 있는 투란이 그랬구나, 그랬구나, 하고 받아주자 뒤에서 이를 보던 메이사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던 도중, 비제가 내려놓은 그네에서 한 남자가 내리며 투란을 향해 다가왔다.

"너무 오래 걸렸잖아, 인마."

투덜대듯 말하는 남자는 회색 꽁지머리에 여행자 특유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얼핏 보면 투란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물론 가까이서 보면 키가 더 작고 다부진 체격에 얼굴까지도 전혀 닮지 않아 동일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솔리프가 회색 가발을 벗어 던지며 말했다.

"이 녀석 타고 여기서만 며칠을 날아다닌 줄 알아?"

"전부터 타고 싶어 했으니까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투란이 아라비온 본가에 잠입한 지난 십수일 간, 솔리프는 지금처럼 가발을 쓰고 비슷한 옷을 입은 채 자빌린 시 주변을 날아다녔다.

그들이 메이사의 탈출을 도운 사람으로 투란을 의심할 것에 대비해서였다.

가문 내에서는 아시즈의 배려로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피하며 대외적으로는 나다니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투란은 자신이 베르크 가문에서 벗어난 상태임을 숨기고 있었다.

"뭐, 그건 됐고! 이쪽이 아라비온의 아가씨겠군. 솔리프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메이사예요...앗!"

악수를 청하는 솔리프의 모습에 메이사 역시 이를 받으려 했으나, 손을 맞잡은 순간 손목이 쑥 빠져나온 탓에 경악하여 비명을 질렀다.

의수 장난에 성공한 솔리프가 웃음을 터트렸다.

"성공!"

"설마 이거 해 보겠다고 안 고치고 있던 건 아니지?"

"누굴 바보로 아냐? 얼마 전부터 시작했는데 쉽게 안 낫더라고. 그래도 팔꿈치에서 손목까진 왔잖아."

그 말대로 한때 팔꿈치 위까지 날아갔던 솔리프의 오른팔은 어느새 손목까지 자라난 상태였다.

얼마 전 드디어 아시즈가 불러왔다는 치유사 아가씨가 제법 열심히 일하고 있는 듯했다.

황당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는 메이사의 시선을 무시한 채, 투란은 어깨에 얹어놓았던 레토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러면 슬슬 선물 포장을 풀어볼까."

이제 곧 메이사는 비제를 타고 아라비온의 손길이 닿지 않는 먼 곳까지 날아가야 할 터.

그전에 레토를 심문해 정보를 얻은 뒤 처분할 필요가 있었다.

포대자루에서 빠져나온 레토는 포획 당시 주먹에 연거푸 얻어맞은 탓에 코와 광대뼈가 부러진 것은 물론, 두 눈과 입술이 퉁퉁 붓고 이빨까지 몇 개 빠져 제법 단정했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였다.

물을 한 번 끼얹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재빨리 눈알을 굴려 주변을 살피더니, 그나마 낯이 익은 메이사를 향해 다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아, 아가씨, 살려주세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제발 용서해주세요...."

코맹맹이 소리로 애원하는 모습이 이종족들조차 잡아먹기 전 한 번 재고해볼 정도로 애처로웠으나, 그런 레토를 내려다보는 메이사의 눈은 증오로 새파랗게 벼려져 있을 뿐이었다.

"재밌었어?"

"네?"

"내 가족들 죽이는 거, 재밌었냐고."

그 질문에 오들오들 떨던 레토의 몸이 뚝 하고 멈췄다.

조금 전까지의 모습은 연기였다는 듯, 고개를 든 그녀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켰구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긴 했지만-아아아악!"

메이사는 여유롭게 중얼거리던 레토를 향해 곧바로 전격을 한 방 꽂아 넣었다.

그 위력은 보통 사람조차도 죽이지 못할 정도에 불과했으나, 사슬에 묶인 지 한참 지난 만큼 지금의 레토는 바로 그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더 지껄여 봐."

"뭐, 뭘 말하라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네 어머니랑 동생이 그때 피를 얼마나 토했는지, 그런 거?"

한 번 전기 찜질을 당했음에도 저런 조롱을 쏟아내다니, 그 용기만은 가상할 정도였다.

발끈한 메이사가 다시금 전기를 쏘려는 것을 보며 투란은 다급히 이를 제지했다.

"왜...."

"너무 흥분했습니다. 잠시 심호흡이라도 하고 계세요. 일단은 제가 심문하고 있을 테니."

그 말을 듣고서야 메이사는 조금 전 자신이 반쯤 눈이 뒤집혀 레토를 죽여버릴 뻔했음을 자각했다.

그래서는 안 됐다.

저 여자는, 그녀의 가족들이 괴로워했던 것의 몇 배를 괴로워하며 죽어야 했다.

메이사가 물러나서 두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동안, 투란은 의아해하는 솔리프에게 그간의 사정을 간략히 설명했다.

이 여자가 메이사의 부모를 암살한 자하르 혈통의 귀족이며, 아라비온의 수하로 일했다는 것을.

"자하르의 암살자가 아라비온에서 일했다고? 대체 왜?"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혹시 고문 좀 할 줄 알아?"

"알겠냐. 너는?"

"해본 적은 없지만 필요하면 할 순 있을 것 같은데."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레토가 쿡쿡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진짜 애송이 같아서 못 들어주겠네. 아가들아, 저 계집애가 뭘 약속했는지 몰라도 지금 날 풀어주는 게 좋을 거야. 그러지 않으면 곧 태어난 걸 후회하게 될 테니까. 설마 아라비온의 손에서 평생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완전히 무력화된 상태에서도 오히려 협박하는 레토의 얼굴에는 독기가 다그했으나, 투란은 그녀의 몸에서 짙은 공포와 좌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지금 보이는 모습은 사실상 자포자기나 다름없는, 조금만 툭 찌르면 벗겨낼 수 있을 얇은 껍질에 불과했다.

"그보다 이야기나 좀 해봐. 카드람 그 인간은 어떻게 꼬드긴 거야? 거기서 기습당할 줄은 상상도 못했잖아! 그걸 말해주면 나도 하나 말해줄게, 어때?"

"질문하는 쪽은 나야."

"너 고문해본 적도 없다며?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게 때리고 지지고 자르는 게 다가 아니야. 고문은 소용없을 테니 차라리 이렇게라도 정보를 얻는 게 좋을-"

내면의 불안을 무시하기 위함일까, 열정적으로 조롱해대던 레토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고개를 든 투란은 그녀가 부은 눈을 한껏 부릅뜬 채 자신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카림?"

"그건 누구지?"

투란의 반문에 레토는 앗 하고 놀라며 입을 다물었으나, 그는 이미 상대의 몸에서 피어나는 당혹감과 혼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물론 그와 반대로 레토는 투란의 냄새를 맡을 수 없을 터였다.

부러진 코 안쪽이 피 냄새로 꽉 차 있을 테니.

"말해 봐, 카림이 누구지?"

"...너, 부모가 누구야? 아니, 어떤 혈통의 귀족이야?"

되묻는 레토의 말을 통해 투란은 그녀가 자신의 얼굴에서 또다시 누군가의 흔적을 엿보았음을 깨달았다.

짧은 시간 고민한 뒤, 투란은 즉석에서 떠오른 거짓말을 내뱉었다.

"탈리스 자하르."

"뭐?"

"누군지 알고 있을 텐데."

엔릴 사막의 항구 도시, 코마드에서 투란은 그곳의 영주에게 자하르의 2인자인 탈리스와 닮은 용모라는 평가를 받았다.

만약 이 레토가 아라비온에서 쭉 키워온 마법사라면 탈리스의 얼굴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러고 보면 얼굴이 많이 닮았네. 눈 색도 똑같고. 새로 결혼이라도 하셨을 리는 없으니까 사생아인가?"

만약 투란이 변장 가면을 쓰는 것을 보았다면 이 얼굴조차 꾸며낸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갑자기 카드람에게 두들겨 맞은 뒤 여기서 깨어난 것뿐이었다.

설마 얼굴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성유물 따위가 존재할 거라고 감히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 와중에 레토는 중요한 정보마저 무의식중에 노출하고 말았다.

그녀가 아라비온에서 태어나 봉사하는 것이 아닌, 자하르 가문에서 나고 자란 귀족이라는 사실을.

투란은 그 사실을 내색하지 않으며 다시금 질문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질문은 내가 해. 카림이 누구지?"

투란의 말에 레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탈리스 님의 아들이잖아? 네 말대로라면 너한테는 배다른 형이고...하긴 그 녀석은 전쟁 중에 죽었으니 모를 수도 있나?"

그 말을 들은 순간 투란의 머릿속에서 그간 모아온 단서가 하나로 합쳐졌다.

과거 칼라마프에서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로 짐작되는 이는 젊은 귀족이었고, 대가문의 2인자이면서 가주의 친동생인 탈리스는 젊은 나이가 아닐 터.

그런 탈리스와 그 아들이 모두 투란과 닮았다면, 정황상 탈리스는 투란의 할아버지이며 카림이라는 이가 아버지일 가능성이 컸다.

그보다도....

"죽었다고?"

아마 아버지로 짐작되는 이가 이미 죽었다는 이야기에 투란은 실망과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실망은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해준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에서, 안도는 정황상 그가 어머니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온 것이었다.

"그, 그래. 그보다 네가 정말 탈리스 님의 아들이라면 빨리 이것부터 풀어 줘! 난 어디까지나 윗분들의 뜻으로 와 있는 거라고! 너도 네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는 알 거 아냐, 그렇지?"

한 줌의 희망조차 없이 절망했던 상황에서 살아날 구멍이 생긴 탓일까?

레토는 조금 전까지의 여유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다급하고 비굴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 와중, 투란은 윗분들의 뜻으로 와 있다는 말을 듣고 얼굴을 굳혔다.

그것은 과거 전쟁까지 벌였고 지금까지도 으르렁대는 두 대가문의 상층부가 뒤에서는 결탁하고 있었다는 의미였으니까..

75화

기절한 메이사를 내려놓으며 투란은 그녀의 저항하는 힘이 실로 보잘것없음에 혀를 찼다.

마법사의 신체 능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마력의 양임을 고려하면, 최상위 귀족급의 마력을 가지고도 이토록 힘이 약한 것은 신체가 그만큼 엉망진창이란 의미였다.

'하긴, 몸무게가 내 사 분의 일이 될까 말까 하니.'

짐작건대 주먹질만으로 싸운다면 히사릴 언덕에서 양을 치던 시절의 그와 제법 좋은 싸움이 될 것 같았다.

이 상태로는 가진 힘을 다 쓸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앞으로의 수명조차 보장할 수 없을 터.

어떻게든 건강 상태를 회복시키고자 투란은 메이사의 입을 벌린 뒤 준비된 관을 밀어 넣었다.

딱딱하고 거친 표면 탓에 목구멍이나 내장에 상처가 난다거나 하는 걱정 따위는 불필요했다.

애초에 바늘조차도 박히지 않는 것이 귀족의 피부일진대 내장 쪽이라고 크게 다를까.

오히려 쑥 밀어 넣었던 관이 식도 안쪽의 괄약근에 의해 우그러지는 탓에 마력을 불어넣어 강도를 높여주기까지 해야 했다.

'이 정도인가? 아니, 좀 더 깊이-됐다.'

관에 바람을 불어넣어 그 흐름을 파악한 투란은 관의 끝이 위장에 도달했음을 확인하고 유체 조작 마법을 사용해 영양죽을 흘려 넣었다.

분량은 얼추 수프 두 국자 정도.

일부러 양을 줄인 것은 칼라마프에 있던 시절, 오랫동안 기아에 시달렸던 사람이 급히 음식을 먹다 죽는 모습을 보았던 탓이었다.

귀족의 몸이 평민보다 튼튼하다고 한들 굳이 탈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은 피하는 게 좋을 듯했다.

급여를 마친 투란은 꽂혀 있던 관을 뽑아내고 공기 중의 수분을 모아 물방울을 만들었다.

괜히 두드리거나 때리는 것보다 이걸 한 번 끼얹는 게 확실할 테니.

"으음...."

그때, 작은 신음과 함께 메이사의 눈이 깜빡였다.

투란이 손 위에 모여있던 물방울을 흩어내는 것과 함께 그녀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끝난 건가요?"

"네."

어지러움에 머리를 감싸 쥐기도 잠시, 메이사는 입안에서 풍기는 쇠 비린내를 씻어내고자 혀를 이리저리 굴렸다.

다행히 무언가를 먹을 때 곧바로 치밀던 구토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음식을 먹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까.

"설마 이렇게 간단할 줄은...."

"아마 몇 번 더 하면 빠르게 회복될 겁니다. 평생 이렇게 할 수는 없으니까 장기적으로는 스스로 극복해야겠지만."

"노력해 볼게요."

과연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으나, 메이사는 그렇게 답하며 조금 전 벗어놓았던 마법기를 다시 착용했다.

이후 그들은 제빵소에 남은 흔적을 완벽히 지운 뒤 헤어져서 각자 머무는 곳으로 돌아갔다.

평소처럼 휑한 저택으로 돌아온 뒤, 메이사는 그대로 먼지투성이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몸이...뜨거워.'

늘 나른하기만 하던 몸뚱이에서 묘한 활력이 돌며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십 년 동안 굶주렸던 육체가 탐욕스럽게 음식물을 분해하며 힘을 만들어내자 일어난 현상이었다.

* * *

다음 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메이사는 곧바로 저택을 나와 본가의 성문으로 날아갔다.

평소처럼 경비를 서고 있던 이들은 갑자기 등장한 후계자의 존재에 경악하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아, 아가씨! 여긴 어쩐 일로...."

"바깥 바람 좀 쐬고 싶어서."

아라비온의 권력자들이 메이사를 괄시하고 핍박한다지만 어디까지나 대외적으로 그녀는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감히 통행증이니 뭐니 요구할 간 큰 사람이 없었기에, 그녀는 수행할 귀족이나 기사 한 명 없이 곧바로 검문소를 지나친 뒤 광활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평소보다 몸 상태가 좋아서일까, 어쩐지 비행 속도도 평소보다 더 빨라진 듯했다.

몇 시간 정도 날아다니며 자유를 만끽하고 돌아왔을 때, 당연히 가문 내부는 반쯤 뒤집혀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메이사! 후계자라는 녀석이 이렇게 경망 되게 행동하다니! 너 때문에 몇 명이 하던 일을 팽개치고 모였는지 아는 게냐?"

카드람을 비롯한 가문의 중역들이 모조리 튀어나와 메이사를 둘러싼 채 추궁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오줌을 지려도 이상하지 않을 흉흉한 기세였으나,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맞섰다.

"그냥 답답해서 산책 좀 했을 뿐이에요. 숙부나 다른 사람들도 나갈 때 누구한테 허락받나요?"

"네 위치를 자각해야 할 것 아니냐! 혹시 자하르의 암살자들에게 습격이라도 받으면-"

"그쪽 가주가 다케인 평야까지 찾아오기라도 할까봐요? 그게 아니면 문제없을 텐데. 애초에 전에 제가 너무 과민하게 군다고 한 건 숙부였잖아요."

"그건 어렸을 때 이야기 아니냐."

"어쨌든, 앞으로도 내키면 나갔다가 알아서 들어올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메이사는 마구 쏘아댄 뒤 대답조차 듣지 않고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갔다.

카드람을 비롯한 중년파 귀족들은 불쾌한 표정으로 수군댈 뿐 뭐라 더 질책하지 못했다.

그들의 손아랫사람인 것과 별개로 메이사는 후계자였으니까.

저택에 돌아오자 이미 질책을 당했는지 늙은 하녀들이 그녀에게 몰려와 무언가 하소연하려 했으나, 메이사는 가볍게 손을 젓는 것으로 그들을 물리친 뒤 침실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 새벽이 되었을 무렵, 그녀는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지를 확인한 뒤 저택을 나섰다.

전에 만났던 제빵소로 들어온 뒤 가볍게 손가락을 한 번 튕겼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레토가 근처에 있나?'

어젯밤 약속하기로, 투란은 레토가 주변에 없다는 것을 확신했을 때만 모습을 드러내기로 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은신 능력을 파훼하지 못했거나 레토가 주변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일 터.

몇 군데를 더 돌아다니던 메이사는 이내 소득 없이 저택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한 번 음식을 섭취하며 내장이 활성화된 탓일까, 배를 찌를 듯한 굶주림이 밤새 그녀를 괴롭혔다.

둘째 날, 어제처럼 검문소로 향한 메이사를 맞이한 것은 비교적 서열이 낮은 아라비온 귀족 몇 명이었다.

나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적어도 감시하에 두기라도 해야 한다 여긴 것일까.

산책에 동행하겠다는 그들을 메이사는 굳이 떼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놀리기라도 하듯 더 빠른 속도로 비행하며 잔뜩 진을 빼놓았을 뿐.

그렇게 돌아온 뒤 잠을 청하고 새벽에 침실을 나서서 인적 없는 곳을 돌아다녔으나 이번에도 투란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나 슬슬 초조함을 느낄 때쯤, 쿰쿰한 땀 냄새가 풍기는 기사들의 훈련장을 배회하던 그녀의 앞에 투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란!"

"레토가 사흘 내내 따라다니고 있더군요."

"감지할 수 있는 건가요?"

"네. 다행히도."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흉내쟁이 성유물을 매만졌다.

지난 며칠, 그는 잠조차 거른 채 메이사의 저택에 숨어서 내부를 감시했다.

덕분에 레토가 은신한 채 메이사의 방에 들어와 구석구석을 다 뒤지는 것은 물론, 한밤중에 집을 나선 그녀를 몰래 추격하는 것까지도 볼 수 있었다.

이 흉내쟁이 성유물이 자하르의 은신조차 꿰뚫어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덤이고.

그렇게 사흘 내내 염탐하는 레토를 뒤에서 염탐한 끝에, 메이사가 무의미하게 돌아다니기만 하는 것을 확인한 레토가 추격을 멈춘 뒤에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전혀 못 느꼈어요."

"그럴 수밖에 없죠. 그래서, 산책에는 별문제 없을 것 같습니까?"

"네. 저쪽도 그냥 기분 전환 삼게 내버려 둘 모양이에요."

대외적으로는 후계자로서 행세할 수 있는 메이사지만, 그녀조차 무조건 복종해야 할 절대군주가 바로 가주 바달이었다.

만약 그가 메이사에게 나가지 말라고 명령하면 따라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갑작스러운 외출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냥 가문의 중역들, 투란이 이름 붙이기를 '중년파'의 귀족들만이 제멋대로 왁왁거릴 뿐.

대충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했다.

여러 서재에서 내부 자료를 조사하며 확인한 바에 의하면, 가주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거의 모든 업무를 친족들에게 맡긴 채 거처에 틀어박혀 있었으니까.

그가 최근에 거처를 나온 것은 자하르와의 전쟁, 그리고 흑요정 토벌대를 배웅할 때뿐이었다.

"혹시라도 가주가 직접 나왔으면 그때를 틈타서 거처를 뒤져볼 생각이었는데 말이죠."

가주가 직접 메이사를 질책하기 위해 행차한 틈을 노리는 것 역시 계획 중 하나였으나 아무래도 이쪽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가볍게 논의를 마친 뒤, 투란은 사흘 전처럼 메이사를 기절시키고 음식을 주입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같은 일과가 반복됐다.

산책과 수면, 그리고 음식물의 주입.

네 번째 날 밤, 투란은 기절했다가 일어난 메이사를 보며 말했다.

"내일 탈출하죠."

"벌써요?"

"여기서 더 지나면 다른 사람들이 의심할 겁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살찌는 속도가 빠르네요."

지난 며칠, 메이사의 몸에는 변신이라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움푹 들어갔던 눈 주변에는 살이 차올랐으며 쭈글쭈글하던 피부는 펴지고 장작개비 같던 몸 역시 두꺼워졌다.

그나마 아직은 반신반의할 정도지만, 며칠만 더 지나면 누가 봐도 이러한 변화를 알 수 있을 터였다.

"내일 정오에 모르겐 시의 서쪽에서 만나죠. 정오가 되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났는데 제가 안 오면 다시 돌아오시면 됩니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거니까."

추적 능력이 있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정확히 만날 장소를 확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 * *

탈출 당일, 새벽이 되자마자 눈을 뜬 투란은 곧바로 작전 실행에 들어갔다.

첫 번째는 카드람을 비롯한 중년파 귀족들의 저택에 침투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비리 서류를 확보하는 것.

이 과정에서는 은신이 아닌 가면의 변장 능력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지난 며칠간 여러 차례 들어갔다 나오며 내부 상황을 파악해둔 덕이다.

"음? 베크잖아, 아까 나가지 않았나?"

"주인님이 시키신 일이 있어서."

투란은 각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의 모습으로 위장해 가며 태연히 서재를 드나들었다.

그렇게 모든 서류를 확보하는 데 걸린 시간은 두 시간.

이마저도 저택과 저택 사이를 평민들처럼 걸어서 오가야 하지 않았다면 채 절반도 안 걸렸을 터였다.

그렇게 총 열다섯 명의 서류를 모두 확보한 뒤, 투란은 보관해 두었던 머리카락을 꺼내 추적 마법을 발동했다.

자하르 귀족 레토를 쫓기 위함이었다.

'어디...좋아, 마침 거처에서 나와 있군. 기다리는 수고를 덜었는걸.'

가주 직속 하녀인 그녀는 당연히 가주의 거처에서 머무르지만, 하루 몇 번은 심부름이나 그 외의 여러 용무로 밖을 돌아다니고는 했다.

사실 그녀를 납치하는 것이 이번 계획의 가장 큰 변수였다.

혹시 오늘따라 나갈 일이 없어서 가주의 거처에 처박혀 있으면 손을 쓸 수 없으니까.

만약 그랬다면 다시 서류를 되돌린 뒤 내일로 탈출 계획을 미뤄야 했을 터였다.

평범한 정원사의 모습으로 위장한 투란은 추적 마법에 의지해 본가를 가로질러 어느 저택에 도착했다.

'여긴....'

저택의 대문 옆에는 큼직하게 [시렐 아라비온]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긴 가문의 여인에게서 태어난, 메이사의 이복 오빠.

레토는 그의 저택 안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작자는 전에 조사해 봤을 때 별 거 없었지.'

서재에 있는 것도 평범한 문서들일 뿐이고, 중년파와도 그냥 친척으로서 적당한 교류만 할 뿐 그쪽에 가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메이사는 그를 끔찍하리만치 증오했다.

시렐의 어머니가 가주의 반려, 아니에타 나긴이었기 때문이다.

'메이사의 어머니와 남동생이 죽은 뒤에...그 여자가 메이사를 조롱했었다지.'

사건 직후 메이사가 이복 오빠인 레노드에게 살인자라는 편지를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황은 모를지언정 배후에 나긴 가문이 있다고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사실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중 하나가 바로 중년파와 나긴 가문 사이의 연대였다.

가주의 정체가 어느 신 중 하나라면 반려 따위는 큰 의미 없을 텐데.

그냥 메이사를 괴롭힐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투란은 내심 나긴 가문 내부에도 무언가 관련된 문제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아니면 반대로 이를 통해 나긴 가문 쪽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있는 것이거나.

생각에 잠긴 사이, 대화를 마친 레토가 저택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미리 준비해둔 변장을 마친 투란은 곧바로 그녀에게 접근해서 말을 걸었다.

"레토."

투란의 부름에 레토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카드람 님! 여긴 어쩐 일로-"

"따라와라. 시킬 일이 있으니."

투란은 자신이 카드람의 모습을 완벽히 취했는지, 목소리에 어색함은 없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메이사가 옆에서 똑같다고 말해주기는 했지만 직접 대조해가며 확인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레토는 의심하는 기색 없이 그런 투란을 따라왔다.

혹시 무슨 일을 시키려는 것인지 물었을 때 둘러댈 말도 준비해 두었는데, 그녀는 잘 훈련된 암살자답게도 그조차 묻지 않았다.

카드람 저택으로 들어서자 나이 든 집사가 의아해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주인님? 지금은 일일 회의에 참여하실 시간이신데...."

"깜빡 놓고 온 물건이 있더군."

투란의 말에 집사의 얼굴에 의아해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을 속이기엔 어설픈 변장이었던 것일까?

하지만 집사는 그런 자신의 직감이 그냥 과민반응이라 생각했는지, 더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투란은 그녀를 데리고 저택의 지하실로 향했다.

"저, 카드람 님? 여긴 왜...?"

저택에는 왔어도 지하실로 안내된 적은 없는지, 그제야 레토의 얼굴에 묘한 불안감이 어렸다.

혹시 카드람이 자신의 몸이라도 원한다 생각한 것일까?

대답하는 대신 묵묵히 걸음을 옮기자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복종하는 것을 택했다.

불이 켜지지 않아 어두컴컴한 지하실.

레토가 훈련받은 하녀답게 습관적으로 문을 닫자 안쪽에 미리 설치되어 있던 결계가 발동됐다.

"윽...!?"

레토를 찾아오기 전, 투란은 흉내쟁이 성유물에 담겨 있던 결계사 혈통의 마력을 한 사람 분량 소모했다.

그렇게 설치해놓은 결계의 효과는 대상의 행동을 느리게 만들어 봉쇄하는 것.

당황한 레토가 힘겹게 품에서 암기 몇 개를 꺼내려 했으나 그 움직임은 느릿하기 짝이 없었다.

투란은 여유롭게 손을 잡아채 무기를 뺏은 다음 과거 솔리프에게 쓰였던 마력 제압의 사슬로 몸을 칭칭 감았다.

온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 레토가 다급히 외쳤다.

"카, 카드람 님? 이게 대체 무슨-!"

투란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곧바로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77화

투란은 케오른을, 전쟁으로 가족과 친구를 모두 잃었던 그 늙은 기사를 떠올렸다.

그가 더없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가문에게 끔찍한 방식으로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입맛이 썼다.

아니, 따지고 보면 두 가문의 전쟁으로 직간접적인 죽음을 맞이한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두 피해자인 셈이었다.

목양견들과 어린 양치기들이 멋모르고 서로 치고받으며 물어뜯는 동안 뒤에서 서로 악수하며 속닥거리는 늙은 양치기들....

마음 같아서는 두 가문의 상층부를 전부 쓸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지금의 투란이 막강한 마법사라고 한들, 대가문의 가주들이 인간이라면 그는 기껏해야 살쾡이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심지어 이마저도 벌레나 그 이하의 무언가에 불과했던 과거에 비하면 실로 크나큰 발전이었다.

속에서 들끓는 울분을 삭이며, 투란은 주저앉은 레토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좋아, 내 질문에 순순히 답하면 탈리스 님을 만나게 해주겠어.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명령을 받았지? 아라비온에서는 누구의 지시를 따랐고?"

투란의 말에 레토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잠깐만...못 알아들은 거야? 이건 윗분들의 뜻이라니까? 감히 날 심문하겠다고?"

"질문에 대답해."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는 투란의 태도에 레토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를 악물었다.

그 눈에서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독기가 감돌았다.

"...탈리스 님, 탈리스 님을 뵙게 해줘! 그분 앞에서라면 다 이야기할 수 있-"

투란은 손을 뻗어 레토의 입을 틀어막은 뒤 다른 한 손으로 팔뚝을 가볍게 꼬집었다.

살점 한 토막이 찢겨 나오며 손에 가로막힌 입 안쪽에서 끔찍한 절규가 울렸다.

"다시 묻겠어. 자하르 가문에서-"

"미친 새끼!"

투란은 돌아온 욕설에 반응하는 대신, 다시 그녀의 입을 막고 팔뚝의 살점을 쥐어뜯었다.

그 모습에 솔리프는 물론이요, 조금 전까지 원한으로 눈을 부라리던 메이사조차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둘 다 대가문의 후계자로서 실전 경험을 겪으며 사람도 죽여 보았으나, 저항하지 못하는 인간을 이토록 철저히 괴롭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두 사람과 달리 투란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문이라는 것을 하면서도 조금도 마음의 동요를 겪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있어 레토는 저 늙은 양치기들의 수족이 되어 무고한 이들을 농락하던 악당이었기 때문에.

상대를 적으로, 울타리 밖의 늑대로 규정한 순간 그는 무슨 짓이건 거리낌없이 할 수 있었다.

물론 마법사라면 모를까, 평범한 인간과 다름없게 된 레토가 이런 가혹한 고문을 오래 버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녀는 곧 고통과 출혈로 숨이 넘어가려 했으나, 투란은 그러한 도피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바라하의 치료약 마법기.

상급 귀족의 몸뚱이에는 효율이 나쁜 물건이지만, 최상급 귀족 세 명이 마력을 들이부으면 부족한 효율을 갈음할 수 있었다.

고개를 저으며 저항하는 레토의 입에 강제로 약을 밀어넣어 회복시킨 뒤 다시 부수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을까.

이러한 모습을 참지 못한 솔리프가 먼저 '바깥을 감시하고 있겠다'라고 말한 뒤 골짜기 밖으로 나갔다.

해적 수백 명을 태연히 학살했던 그조차도 비위가 상해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는 의미였다.

옆에서 비제가 흙바닥 위를 콩콩 뛰어다니며 노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투란은 레토를 통해 차근차근 고문 실력을 쌓아 나갔다.

뛰어난 후각과 학습력으로 상대가 풍기는 고통의 냄새를 분석, 어디를 어떤 식으로 자극해야 더 괴로워하는지를 알아가는 식이었다.

마침내 뒤쪽에서 바라보기만 하던 메이사조차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해졌을 무렵, 레토가 텅 빈 눈으로 중얼거렸다.

"말할게, 아니, 말할게요. 제발, 제발 그만...차라리 죽여 주세요...."

처음 정신을 차린 뒤 연기하던, 눈물을 펑펑 흘리며 외치던 것에 비하면 고요하기 그지없는 모습.

투란은 그녀의 목 안쪽으로 코를 가져다대며 체취를 깊게 들이마셨다.

짙은 피비린내 사이로 공포와 절망, 그리고 체념의 냄새가 풍겼다.

* * *

반쯤 망가져 버린 레토의 자백에 의하면, 그녀를 직접 아라비온으로 파견한 이는 자하르의 후계자 후보 중 한 명, 가주의 사촌 동생인 라흐만이었다.

명령의 내용은 카드람 아라비온을 비롯한 아라비온의 중역 여섯 명이 지시하는 바를 성실히 수행할 것.

비밀 명령이었기에 자하르 쪽에서는 라흐만 외의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아라비온 쪽에서도 그녀의 정체를 아는 건 그 여섯 명과 직속 수하들 뿐이었다.

의외로 그 여섯 명 중 아라비온의 가주는 없었는데, 그가 이러한 내통을 알고 있는지 아닌지는 레토 역시 알지 못했다.

그녀의 정체를 아는 여섯 명 역시 가주의 앞에서는 레토를 철저히 하녀로만 대했고, 가주 역시 그녀를 특별 취급하지 않았다.

"가주의 거처 내부를 뒤져본 적은? 은신 능력이 있으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딱히 안 찾아봤어요. 괜히 쓸데없는 걸 알아봐야 위험할 것 같기만 해서...."

레토는 그냥 기계적으로 주어진 임무만을 수행했을 뿐, 딱히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이들에 대해 깊게 캐보려 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투란이 보기에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수동적인 행태였으나 원래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은 법이었다.

가주의 거처에서도 주어진 일만 수행했다는 말에 다시금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지 확인해본 뒤, 그는 화제를 가주 본인으로 돌렸다.

"가주는 어떤 사람이었지?"

"그냥, 노인 같았어요. 너무 지친 나머지 세상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옆에서 이를 듣던 메이사가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레토와 비슷한 감상을 받았던 듯했다.

과연 가주는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며 모르는 척 연기했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무관심한 절대자일 뿐일까?

메이사의 성장 배경을 생각하면 전자일 가능성이 크지만 후자의 가능성도 아예 놓을 순 없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가설을 늘어놓으며, 투란은 다음으로 어떻게 긴 세월 들키지 않고 첩자로 암약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나이를 먹지 않는 하녀가 있으면 당연히 마법사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해결법은 실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십오 년 전 잠입할 당시에는 스무 살인 척하고, 이후로는 점점 화장법을 바꿔 나이를 먹는 것처럼 속였다는 것이다.

"그걸 믿는다고?"

"네...."

투란은 눈물과 피로 엉망이 된 레토의 얼굴에 물을 끼얹어 화장을 지워 보았다.

과연, 삼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던 이전과 달리 그 얼굴이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마법기 없이도 얼굴을 뒤바꾸다니, 그야말로 마법 같은 기술이지 않은가.

새로이 알게 된 사실에 감탄하기도 잠시, 투란은 이어서 레토가 실행해온 범죄의 내용을 캐물었다.

이미 중년파 귀족들의 문서에서 암시되었던 일들이지만 실행자가 그 내용을 자세히 밝히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문서의 내용을 지적해 하나하나 주석을 달던 도중, 메이사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주제로 나왔다.

"그 두 사람, 아니...정확히는 세 사람에게 독을 썼어요. 도시 인근으로 소풍을 나왔을 때 몰래 음식에 뿌렸죠."

"독이라고?"

뜻밖의 말에 투란은 얼굴을 찌푸렸다.

마법사, 그중에서도 귀족에게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기사라면 보통 사람 수백 명이 죽을 정도로 대량의 독을 먹었을 때 죽을 수도 있지만, 귀족쯤 되면 독을 배가 터지도록 들이켜도 설사나 좀 하면 낫는 것이다.

먼 고대에 사멸했다는, 밤 사냥꾼에게서 유래한 독을 다루는 혈통의 능력이 있다면 모를까.

"네. 어디서 받은 건진 모르겠지만 엄청난 효과였죠. 아무리 약했다지만 귀족이던 그 여자까지 죽일 정도에다가, 이미 제법 힘이 쌓여 있던 메이사...님까지 위험했으니까요."

메이사에게까지 독을 먹였다는 말에 투란은 눈썹을 좁혔다.

아무래도 저것이야말로 그녀의 섭식 장애를 유발한 직접적 원인이었던 모양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마도 신적 존재의 몸뚱이가 되었어야 할 그녀에게까지 독을 먹였다는 것.

아무리 약하다지만 귀족인 메이사의 어머니가 죽었을 정도의 맹독이 아닌가.

정확히 죽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죽거나 크게 상해도 상관없다고 여겼던 모양이었다.

"독의 출처는 모른다고, 확실해?"

"네...."

집요하게 질문을 반복해가며 동요하는 기색이 있는지 확인했으나 거짓말을 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후로도 몇 가지 범죄 내용을 더 확인하고서야 드디어 물어볼 말이 모두 떨어졌다.

"그러면 슬슬 뽑아낼 건 다 뽑아낸 것 같은데...메이사, 복수를 하고 싶으시다면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아뇨, 됐어요."

뜻밖에도 대답하는 메이사의 얼굴에서 레토를 향한 증오는 그다지 엿보이지 않았다.

"저 여자는 이미 껍데기밖에 안 남은 것처럼 보이는걸요. 고통도...저로서는 당신처럼 확실하게 줄 자신이 없고요."

투란이 고문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것만으로도 복수심이 충족되었다는 의미일까.

메이사는 손을 들어 소량의 전격을 장전, 그대로 내리꽂아 레토의 목숨을 끊었다.

잠시 후, 돌아온 솔리프와 함께 세 사람과 한 마리 검독수리가 죽은 그녀의 마력을 흡수해 영혼을 날려 보냈다.

마지막 흔적까지 모두 지워낸 뒤, 다소 어색한 침묵 속에서 솔리프가 입을 열었다.

"고문하는 거 말이야. 꺼림칙하진 않든?"

"별로.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잖아."

투란의 대답에 솔리프는 입을 벌리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막의 귀족들이 냉혹하다더니 헛말이 아니었구만...뭐, 그래. 적에게 잔인한 거야 필요한 덕목이지. 우리편한테는 좋은 녀석이면 되는 거니까."

중얼거리는 투가 어째 남에게 말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 하는 것 같았다.

사실 투란 역시 이러한 성격이 썩 평범한 것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보통 사람은 누군가를 적으로 규정하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무감각해질 수 없었으니까.

과거 케오른이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했을 때 속으로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얼추 정리를 마친 뒤, 투란은 다소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메이사를 향해 말했다.

"그러면 이제 헤어질 시간이군요."

"그러네요."

멀리 피신하는 메이사와 달리 투란과 솔리프는 베르크 저택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번에 얻어낸 문서를 여러 가신 가문에 뿌려 공분을 끌어내는 것은 물론, 그들이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정말로 일이 안 풀리는 최악의 경우라도 베르크 일가가 도망칠 수 있게는 도와야 할 테니까.

"가기 전에 음식 공급을 해두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다시 만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아...."

투란의 말을 들은 메이사가 다소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솔리프를 돌아보았다.

"음식 공급?"

"전에 말했던 것처럼 메이사 아가씨는 음식 섭취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서 도와드려야 하거든."

"어떻게?"

질문을 들은 투란은 곧장 답하는 대신 메이사를 흘깃 바라보았다.

기절시킨 뒤 목에 관을 집어넣고 음식물을 주입한다는 행위가 수치스럽게 느껴질 수 있음을 생각해서였다.

"알려줘도 될까요, 메이사? 혹시 나중에 제가 옆에 없거나 하면 이 친구한테 부탁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투란의 말에 메이사는 작게 신음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기절시킨 뒤 관을 통해 위장에 음식을 주입한다는 방법을 설명하자, 이를 들은 솔리프가 입을 떡 벌리며 말했다.

"...조금 전에 한 말은 취소다, 넌 진짜 미친 새끼야."

* * *

마지막으로 음식물을 공급한 뒤, 메이사는 비제의 몸에 매달린 그네를 탄 채 남쪽으로 날아갔다.

목적지는 바로 시라프 습지의 온천 지대.

비제의 중재 아래 원숭이 대왕 아이쿨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되면 주변에서 그녀를 건드릴 만한 존재는 없을 터였다.

어차피 그곳을 자주 찾는 리다 역시 딱히 호전적인 성격이 아니니 싸움이 날 염려가 없고.

몰래 베르크 저택으로 돌아온 뒤, 투란은 아시즈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알려주었다.

아시즈는 압박감을 견디려는 듯 의자에 깊게 몸을 묻으며 고개를 마구 흔들어댔다.

"진짜 저질러 버렸구나...그러면 이제부터는 배짱 싸움인 건가."

"그렇지."

짧으면 며칠, 길면 몇 주 안에 아라비온은 메이사를 탈출시킨 정체불명의 조력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터.

짐작건대 투란은 그러한 일을 저질렀을 범인 후보로 삼 순위에서 사 순위쯤 될 게 분명했다.

일 순위에서 삼 순위야 레토나 다른 자하르 귀족들일 테고.

여기서 그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그 조력자가 아님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베르크 가문이 부당한 압력에 직면하지 않게 지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무력 시위인 셈.

지금 투란이 가진 힘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결계사 혈통인 척 흉내 내야 한다는 제약을 생각하면 마냥 쉬운 일까지는 아니었다.

"우리가 견뎌낼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해."

이미 배달부를 통해 익명으로 각 가신 가문에 아라비온 귀족들의 비리가 전해지도록 해 둔 상태.

그들 모두가 분노하는 상태에서 베르크 가문에 지나친 불이익을 주거나 그들을 멸하려 시도한다?

이는 아라비온의 가주가 직접 쳐들어오지 않고서야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투란이 그 실행범이라는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감히 그런 일을 저지르기에는 배보다 배꼽이 클 터였다.

그로부터 며칠, 뜻밖에도 아라비온의 귀족들은 솔리프의 손이 완전히 치료될 때까지도 쳐들어오지 않았다.

돌아온 비제를 통해 메이사가 무사히 온천 지대에 도착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한편, 투란은 그동안 솔리프를 치료했던 치유사 혈통의 여인 루아와도 안면을 텄다.

그녀는 투란이 솔리프의 치료비를 낸 물주라는 사실을 알고 평민들의 삶을 지원하는 계획 몇 개를 제시했는데, 투란은 이에 거리낌없이 돈을 내놓았다.

양들을 잘 보살피는 양치기의 모습이 기꺼웠던 것은 물론이요, 솔리프를 치료하는 입막음비도 포함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일주일쯤 더 지났을 무렵, 각 가문에 몰래 보낸 비리 문서의 효과가 나타났다.

여러 가신 가문들이 격분하여 항의하고자 모르겐 시로 함께 향하자는 제안을 보낸 것이다.

당연히 투란은 미델라 가주에게도 익명으로 편지를 보내 두었기에 베르크 가문 역시 여기에 합류했는데, 가주는 투란과 솔리프가 함께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기쁨을 드러냈다.

일종의 무력시위가 필요한 상황에서 투란은 물론, 방랑 귀족이라는 솔리프 역시 머릿수만 채우는 것으로도 의미가 있었던 탓이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하람과 아시즈의 아버지만 가문에 남은 채, 베르크 일가는 수십 명의 기사를 끌고 모르겐 시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십수 개의 귀족 가문들이 모여 있었다.

귀족의 수만 수십이요, 기사의 수는 수백에 달하는 대군세.

그 모습이 지난 흑요정 토벌대를 떠올리게 했다.

"베르크 가주도 오셨구려."

"물론입니다. 메이사가 그 꼴로 지내고 있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더군요! 대체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메이사의 당고모인 베르크 가주 미델라의 격분한 모습은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하는 데 제격이었다.

모두가 아라비온의 공식적인 대답을 기다리는 가운데, 모르겐 시 대로를 통해 수십 명의 아라비온 귀족들이 다가왔다.

투란이 그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얼굴을 굳히자, 옆에 있던 솔리프가 작게 물었다.

"왜?"

"왔어."

아라비온 가주, 바달 아라비온.

그가 직접 왕림했음을 알리자 솔리프가 혀를 찼다.

"저 인간이 여기서 우릴 노리면 다 죽는 거 아냐?"

"설마."

투란이 범인이라는 증거가 무엇 하나 없는 상황에서 다짜고짜 끌고 가서 조사하려고 시도한다?

그건 지금까지 아라비온이 유지해온 기득권을 통째로 내던지는 행위였다.

저 가주와 상층부, 신적 존재가 무슨 생각이건 그들이 기존의 질서를 유지할 마음이 있는 한 저지를 수 없는 일이라는 뜻.

그런데도 아라비온 가주가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그를 공격한다면-

'한 번 정도는 막아내고 도망칠 수 있을 테니까.'

그 혼자 일대일로 가주를 마주한다면 일격에 즉사할 가능성이 크지만, 이곳에는 솔리프부터 시작해서 수십 명의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아무리 초월적인 강자라 한들 숫자가 이 정도쯤 되면 어느 정도 저항력이 생기기 마련.

공격을 받아내고 도망치는 이들 사이에 섞여 비제를 타고 날아간다면 제아무리 아라비온 가주라도 그를 쫓아올 수는 없었다.

비제의 속도는 인간이 바람 마법을 사용해 날아가는 속도로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이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투란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감으로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충분히 피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해도 자신을 찢어발길 수 있는 맹수가 코앞에 다가오면 불안하고 두렵기 마련인 탓이다.

그때, 바달 아라비온이 주름진 입을 열며 말을 꺼냈다.

["내 형제들이여, 불미스러운 일로 모이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오."]

이전에도 그랬듯, 가주의 말은 바람 마법을 통해 사방 수백 미터로 또렷하게 전해졌다.

투란은 모여 있는 가주들의 뒤쪽에서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며 성유물의 감각을 최대한 활성화, 가주의 상징을 들여다보려 애썼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처음에는 흐릿했던 상징이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아라비온 특유의 벼락을 머금은 구름, 그리고 그 아래에 꽉 쥔 주먹이 하나....

세 종류의 상징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78화

아라비온 가주, 바달의 말에 소란스럽던 평야가 순간 고요해졌다.

아무리 분노했다고 한들 저 강대한 마법사의 앞에서 함부로 목소리를 높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번 일에 대해서 나는 모든 권한을 린 아라비온, 내 친애하는 육촌 형제이자 과거 다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에게 일임하겠소. 부디 그의 말을 내 말처럼 여겨 주기를."]

거기까지 말한 뒤, 바달은 힘이 쭉 빠진 노인처럼 눈을 감고 몇 걸음 물러섰다.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 직접 나오고서도 대리인을 내세운다는 사실에 가신들은 무어라 대들지 않았다.

어차피 가주가 직접 나서면 주눅이 든 채로 대화에 임해야 할 테니 이쪽이 이득일 것이요, 무엇보다도 그렇게 물러난 바달의 얼굴이 실제로 너무나도 피로해 보였던 탓이다.

잠시 후 조금 전 바달이 소개한 아라비온의 원로, 린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자, 모두 들어주시오. 이번에 돌게 된 문서는...."

실로 참담하게도 얼마 전 본가 안쪽에 자하르 귀족이 잠입, 여러 기밀문서를 탈취하고 위조했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그 자하르 귀족이 정작 자하르 가문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만 빼면 제법 진실에 근접한 주장이었으나, 당연하게도 가신 가문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아라비온의 본거지가 언제부터 그렇게 허술했습니까? 빛의 성채는요?"

"문서에 적혀 있던 정황이 내 동생의 죽음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이미 이쪽에서 마수를 목격했다던 이를 체포해서 심문했습니다! 위조는 얼어 죽을 위조!"

"헛소리 작작 하시오!"

가주와 달리 원로는 만만해서일까, 가신 가문의 가주들은 연이어 목청을 높여 그 주장을 반박했다.

그러한 소란을 틈타 투란은 옆에 있던 아시즈를 불렀다.

"아시즈."

"응? 왜?"

"저기 저 사람, 혹시 어떤 혈통인지 알아?"

투란이 가리킨 것은 서리 혈통의 젊은 귀족들 사이에 서 있는 건장한 체격의 중년 여인이었다.

그녀를 지목한 것은 몸속에 자리한 상징이 조금 전 바달에게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꽉 쥔 주먹의 형상이었기 때문.

"어...아마 하람 고모부처럼 저쪽 가문이랑 결혼해서 편입된 사람일 텐데, 육탄전에 특화된 쪽일걸?"

"확실하게 알아봐 줄 수 있어?"

"중요한 거야?"

"굉장히."

"조금만 기다려 봐."

아시즈는 더 묻지 않고 곧바로 그들을 향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서리 혈통의 귀족들은 한창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중에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에 성가셔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시즈의 친화력에 동화된 듯 얼굴에 웃음기를 띠었다.

그가 답을 알아내고 돌아오는 데는 채 삼 분이 걸리지 않았다.

"역사 혈통이라더라. 근데 이건 갑자기 왜?"

투란은 답하려다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바달을 흘깃 보며 입을 닫았다.

아라비온의 혈통 능력은 어디까지나 바람의 흐름을 읽는 것이지 뛰어난 청력이 아니지만...어쩐지, 저 사람쯤 되면 이 주변의 모든 바람을 지배해 대화를 읽어낼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여긴 좀 너무 트여 있으니까, 나중에 알려줄게."

"돌아가서?"

"그래."

아시즈를 달래며 투란은 조금 전 보았던 아라비온 가주 바달의 혈통을 떠올렸다.

폭풍 혈통을 상징하는 번개 섞인 구름과 꽉 쥔 주먹.

즉, 그는 바람과 번개, 힘까지 세 개의 혈통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였다.

'정작 바달의 부모는 아라비온과 카마인 혈통의 귀족이었는데 말이지.'

물론 서재에서 본 가계도에 바달의 조부모 세대가 어떤 혈통인지까지는 나오지 않았으니 그 위에서 격세유전이 일어난 것일 가능성도 있지만, 투란은 내심 저 역사 혈통이 무언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일 거라고 짐작했다.

왜냐면 솔리프도, 메이사도 두 개의 혈통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이 하는 '정신을 가공하는' 작업이 새로운 혈통 능력을 부여하는 데 필요한 조건일지도.

그렇게 한참 생각에 잠기던 도중, 저 뒤에서 베르크 가주 미델라가 새된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 들렸다.

"더 긴 말 하고 싶지 않습니다. 메이사 아가씨를! 내 조카를 괴롭힌 이들에게 적절한 처벌을 내려 주십시오! 대체 얼마나 모질게 대했길래 대가문의 후계자가 자기 가문에서 도망친단 말입니까!?"

괜히 옆에 있던 솔리프가 움찔하는 가운데, 옆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옳소! 하고 동조했다.

아라비온 귀족들의 비리를 기록한 문서에는 여기 모인 가신 가문들, 즉 자기들과 영합하지 않은 가문에 불이익을 준 내용이 한가득 적혀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메이사에 대한 괴롭힘이었다.

자기 가문의 일은 안에서 처리하는 것이 순리라지만 그들이 한 일은 정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게다가 이곳의 구성원 상당수는 미델라와도 먼 친척이며 즉 메이사와도 혈연관계에 있다 할 수 있었다.

애초에 대가문 차기 가주의 안위라는 것이 그 보호를 받아야 할 가신 가문들에게 있어서 중대사이기도 했고.

이에 원로는 잠시 멈칫하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문서에는 메이사...그러니까, 메이사 아가씨가 스스로 도망쳤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아오만, 사실은 다르오. 메이사 아가씨는 도시 밖으로 산책하러 나갔다가 납치당하신 거요. 자하르 놈들에게 말이지."

"뭐라고?"

"또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우리 아라비온에는 등신들밖에 없어서 수십 명의 자하르 귀족들이 쳐들어오는 걸 아무도 몰랐나? 아니면 뭐, 자하르의 가주가 직접 다케인 평야에 오기라도 했단 말이요?"

마지막으로 누군가 꺼낸 말에 귀족들은 본능적으로 바달 아라비온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자하르, 저 엔릴 사막의 살인귀들이 찾아왔다면 그와 맞서기 위해서는 강대한 가주의 힘이 필요하니까.

그러나 바달은 무어라 말하는 대신 묵묵히 주름진 두 눈을 감을 뿐이었다.

이에 원로가 크흠, 하고 헛기침하여 주의를 끌며 말했다.

"현재 누구에 의해 납치되었는지는 내부 조사 중인데, 지금처럼 여러분이 우리를 믿지 못하고 이렇게 분열되어 있어서는 제대로 일이 진행될 수가 없소. 그러니 부디 협조해 주시구려. 우리 아라비온이 모두 하나 된다면 저 사막의 추잡한 사냥개들 따위가 감히 어찌 천둥 군주의 후예들을 범하려 들까?"

아무래도 아라비온 본가에서는 이번 사태를 자하르 귀족들의 수작질로 몰고 가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본래 내부의 균열을 메꾸는 방법으로 외부의 적을 강조하는 것만한 방법이 없지 않던가.

거기다 어차피 자하르 쪽과 내통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최악의 상황에도 그냥 짜고 치는 식으로 치고받아도 될 일이었고.

"정말로 이 모든 게 자하르의 계략일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인 거 아닌가. 아라비온에서 놈들의 수작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의미인데...."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구만."

그러나 원로가 예상하지 못한 바가 있었으니, 가신 가문들은 그러한 주장을 오히려 아라비온의 지도력 상실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평상시라면 저 강대한 가주의 앞에서 하지 못할 말이건만, 그가 지금처럼 노쇠하여 골골대고 있을 때는 이야기가 달랐다.

술렁술렁 퍼져나가는 이야기를 들은 원로의 얼굴에 아차 하는 기색을 보였다.

"자, 잠깐...."

"잠시 물러나 있게, 린."

무어라 말하려던 원로는 자신을 제지하는 늙수그레한 목소리에 얼른 한 걸음 물러섰다.

조금 전까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바달이 나선 탓이다.

늙은 가주가 다시금 앞장서자 가신 가문의 구성원들 역시 성토를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앞서 말했듯 이번 일은 자하르의 귀족들이 개입된 것으로 보이오. 하지만 가신들에게 가해진 불이익 중 일부는 분명히 우리 혈족들의 책임일 터, 이에 대해서는 그대들 중 일부가 포함된 조사단을 결성해 조사하게 하리다."

조금 전처럼 바람 마법을 응용하지도 않았건만, 바달의 목소리는 전보다 훨씬 힘있고 또렷하여 제법 떨어져 있는 이들에게도 들려왔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맑기 그지없던 하늘에 구름이 모여들며 벼락이 우르릉 울려 퍼지는, 과거 흑요정 토벌대의 출병 당시와 비슷하던 힘의 행사가 일어났다.

그 강대한 힘의 편린을 목격한 가신들이 주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가주께서 그리 양보하신다면...."

"그거면 만족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힘을 보이며 다짜고짜 윽박지르는 식이었다면 그들도 자존심이 있으니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나, 정작 바달은 힘을 보이는 한편 제안하는 듯한 기색으로 그들을 존중하며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주었다.

이에 가신들 역시 다소 떨떠름한 기색을 보일지언정 더 대놓고 들이받지는 못했다.

"야, 저거 괜찮은 거냐? 분위기가 좀 별론데."

솔리프가 슬쩍 투란을 보며 그렇게 물었으나 투란은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조금 전과 달리 정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바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직관한 탓이다.

'저건....'

바달이 본격적으로 나서며 마력을 사용한 순간, 제각각 나뉘었을 뿐인 번개구름과 주먹 사이에서 무언가가 하나 생겨났다.

망치와 모루, 지금 옆에 있는 베르크 가문의 그것과 같은 부여사 혈통의 상징이.

주먹 쥔 손은 그 망치를 들어 올리더니 모루를 쾅 내리쳤고, 그러자 거기서 시작된 벼락과 바람이 바달의 내면에서 미친 듯이 소용돌이쳤다.

투란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천둥군주....'

거대한 망치를 들고 바람과 벼락을 부리는 자.

지금 바달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아라비온이 시조로 섬기는 위대한 프레아 신족, 천둥군주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 * *

한 차례 무력행사를 보인 바달이 다시 힘없는 노인의 모습이 되어 물러난 뒤, 가신단은 원로들과 몇 시간을 더 토론한 끝에야 적당한 절충안을 마련했다.

기존에 가주가 약속했던 대로 카드람을 비롯한 중년파 귀족들의 실권을 일시적으로 박탈하고 가신 가문 쪽 귀족들을 포함해 엄중히 조사하는 것은 물론, 이번 모임과 무력행사를 구실 삼아 어떠한 불이익도 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이다.

투란이 보기에는 이 정도가 그나마 현실적으로 가장 나은 결과였다.

어차피 아라비온이 싹 갈아엎어질 가능성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바, 적어도 중년파가 반쯤 무력화되고 가신단이 요구를 관철한 상태에선 당장 베르크 가문이 위험에 처할 일이 없어진 셈이니까.

그에 비해 자빌린으로 돌아온 베르크 가문 귀족들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들의 친척이자 차기 아라비온 가주인 메이사가 가출, 혹은 실종된 상태에다가 주군 가문인 아라비온을 정면으로 들이받기까지 한 상황 아닌가.

비록 이를 불문에 부치기로 합의했다지만 아무래도 윗사람에게 밉보이는 상황이란 마음 편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투란은 베르크 가문에 돌아온 뒤에도 솔리프, 아시즈와 천둥군주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말로 상대가 신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을 확인한 만큼,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그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기가 꺼려졌다.

다행히 두 사람은 나중에 더 안전해졌을 때 설명해 주겠다는 말을 납득해 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예상했던 대로 아라비온의 조사대가 투란을 찾아왔다.

"결계사 혈통의 방랑 귀족, 투란. 맞나?"

"예."

메이사의 몇 안 되는 외부인 친구이자 마침 사건 발생 몇 주 전 근처에 찾아와서 편지까지 보낸 인물.

심지어 마력과 마법 실력도 뛰어난 편.

이러한 정보를 나열해놓고 보면 확실히 수상쩍기 그지없는 인사였다.

공식적으로는 자하르의 수작질인 만큼 그 협력자가 아니냐는 정도의 의심에 불과했지만.

물론 그들의 수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난관에 부딪쳤다.

"저 검독수리가 끄는 그네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녔다고?"

"예, 제가 봤습죠."

"일주일 전에도?"

"그렇습니다요."

투란인 척 연기한 솔리프의 행적을 도시 사람들에게 접한 것은 물론, 가문의 시종들 역시 매일 투란을 봤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아시즈가 미리 이야기를 돌려둔 덕이었다.

물론 잡아다 고문이라도 했으면 몇 명은 불었을 수도 있지만 현재 아라비온이 감히 그럴 처지던가.

그들은 심지어 투란의 검독수리, 비제가 얼마나 힘이 세고 빠른지까지 확인했으나 영리한 비제는 조사대 앞에서 평소 힘의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비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비제, 더 빨리! 최대한 빠르게 날란 말이야!"

그네에 앉은 투란이 날카롭게 질책하는데도 힘겹게 낑낑대며 날아다니는 비제를 본 조사대는 저 검독수리가 딱히 도주에 유용하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마수가 평범한 동물보다 머리가 좋은 편이라지만, 설마 주인과 완벽히 짜고 친 뒤 명령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이후 마지막으로 결계사 혈통의 귀족이라는 것까지 입증한 뒤에야 조사대는 투란에게 혐의가 없음을 인정하고 물러났다.

그 과정에서 하나 더 깨달은 바가 있다면....

'역시, 자하르 쪽과의 연계가 생각했던 것만큼 강하지는 않은 모양이네.'

아라비온의 중년파가 자하르와 강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중 누군가는 투란의 얼굴이나 초상화를 보고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자하르 귀족들의 얼굴을 확보하지 못했거나 직접 만났다고 해도 얼굴이 익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의미일 터.

기왕이면 저들의 본가로 다시 한번 잠입해 정찰하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두 번은 어려울 터였다.

마지막에 저지른 일이 있는 만큼 저들도 얼굴과 목소리를 위조하는 마법기의 존재를 인지했을 테니.

이후로도 한 달 정도 더 머무른 뒤, 투란은 슬슬 미델라에게 가문을 떠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실 메이사를 만난다는 핑계로 머무르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오히려 늦은 것이라, 미델라는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투란이 아라비온의 압박을 견뎌내기 위해 가문의 머릿수를 불려주고자 남았음을 아는 탓이었다.

"그럼 가볼까."

"이놈의 그네 다시는 타기 싫었는데."

며칠 내내 그네를 타며 질렸다고 투덜대는 솔리프와 함께, 투란은 한밤중에 그네에 탄 채 베르크 가를 떠났다.

이제 비제는 지상에선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고도에서 날 수 있었기에 그들의 동선이 누군가에게 읽힐 일은 없었다.

다케인 평야를 지나 슬슬 개척민들에 의해 재건되어 가는 숲 지대를 거쳐 황야를 지난 뒤 시라프 늪지까지.

그네를 튼튼하게 만드느라 전보다 더 무거워졌음에도, 그들은 고작 사나흘 간의 비행으로 온천 지대에 도달할 수 있었다.

"...투란?"

"오랜만입니다, 메이사."

두어 달 만에 보는 메이사는 웬 새끼 원숭이를 돌봐주고 있었는데, 얼굴이며 몸에 그리 살이 붙지 않은 게 스스로 음식을 먹는데는 실패한 것 같았다.

직접 위장에 밀어넣었을 때 급속도로 살이 찌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만 먹었어도 저 지경은 아닐 테니.

"이곳 생활은 괜찮았습니까?"

"네. 아이쿨이 잘 대해줘서요."

온천 지대의 주인인 원숭이 대왕, 아이쿨은 메이사의 말에 크흠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과거 투란을 대하던 투박한 태도와 달리 메이사를 꽤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어쩌면 그냥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뭘 그렇게 쏘아보는 거야, 인마."

솔리프를 상대로는 또 불만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는 것으로 봐서 더더욱 그런 의심이 들었다.

그렇게 간단히 안부를 나눈 뒤, 메이사가 다소 초조해하는 듯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베르크 가문은 어떻게 됐나요? 이모는요?"

아마 이곳에서 지낸 한 달간 그녀가 가장 걱정했던 것이 그들의 안전이었을 터였다.

투란과 솔리프야 제 한 몸 건사하기 어렵지 않은 최상급 귀족이라지만 그들은 비교적 약하고 지켜야 할 게 많은 이들이 아닌가.

그간 자신이 당하던 괴롭힘을 하소연하지 않은 것 역시 베르크 가문이 아라비온의 권세 앞에 짓눌릴까 두려워서였다.

투란은 그런 메이사에게 그녀가 떠난 뒤 다케인 평야에서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안전할 겁니다. 적어도 대외적으로 자하르와의 긴장이 유지되는 동안은요."

"다행이다...."

설명을 들은 메이사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걸렸다.

아무래도 지난 시간, 이 온천 지대에 반쯤 갇혀지내다시피 하며 걱정으로 속이 많이 탔던 모양이었다.

잘 된 일이라고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그녀가 갑자기 투란을 덥석 끌어안았다.

전보다는 살이 좀 붙었으나 아직도 깡마른 체격인 탓에 무게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좀 마음이 어지러워서...여기 오고 나니까 그제야 이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게 생각나더라고요. 정말로, 정말로 고마워요. 날 그 지옥에서 꺼내줘서."

투란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런 메이사의 등을 몇 차례 두드려 주었다.

79화

포옹을 푼 뒤, 세 사람은 잠시 어색한 침묵을 유지하다가 우선 긴 여행의 피로를 풀기로 했다.

메이사가 비제를 돌봐주는 동안 투란은 솔리프와 함께 온천에 몸을 담갔다.

"오, 끝내주는구만...좀만 더 뜨거웠으면 더 좋았겠는데."

그들이 있는 곳은 과거 리다와 함께 들어갔던, 이 온천 지대에서도 가장 뜨거운 탕이었으나 그마저도 솔리프의 성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의 몸에 잠재된 두 혈통 중 하나는 불을 다루는 힘이 아니던가.

투란이 뛰어난 후각과 순발력을 타고났듯, 솔리프는 여러 종류의 빛을 감지하는 능력과 열기에 대한 내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라하 귀족들이 폭발에 다쳤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절대적인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열기를 즐기던 도중, 옆에서 솔리프가 나지막이 말을 걸어왔다.

"이봐, 투란."

"왜?"

"저 아가씨, 너한테 완전히 푹 빠진 거 아니냐?"

"갑자기 뭔 소리야?"

"조금 전 그 태도만 봐도 알잖아! 하기야, 대가문 하나를 통째로 뒤집어엎어 가며 자기를 구해주는 남자라면 내가 여자였어도 반했겠다만."

"그건 아닐걸."

그간의 경험에 따르면 소위 '사랑'이란 것을 느끼는 사람의 몸에서는 발정한 짐승과 같은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투란은 지금까지 메이사에게서 한 번도 그러한 종류의 냄새를 맡은 적이 없었다.

조금 전 포옹했을 때도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다소 복잡한 종류의 감정이 느껴졌을 뿐.

그런 것도 모른 채, 솔리프가 다 안다는 듯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에이,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 애초에 너도 관심이 있으니까 위험을 감수한 거잖아?"

"널 구할 때도 바라하 쪽에 밉보이는 걸 감수했는데, 설마 그것도 너한테 관심이 있어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 거 아냐."

"아니, 그게 그거랑 같나...."

투란의 대답에 솔리프는 기가 찬다는 듯 혀를 차더니, 이내 화제를 돌렸다.

"하다못해 말이라도 좀 편하게 하라고. 어차피 우리 셋 다 신분이며 실력부터 나이까지 비슷한데 두 사람이 서로 존칭하고 있으니 나 혼자 어색하잖아."

"다른 건 몰라도 나이가 비슷하다는 건 좀 양심이 없는 소리 같은데."

투란이 열아홉 살, 메이사가 스물두 살인 데 비해 솔리프는 쉰여덟 살로 두 사람과 거의 세 배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났다.

물론 최상위 귀족쯤 되면 삼사백 년 가까이 산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같은 세대로 묶이지 못할 정도의 차이는 아니지만.

합당한 지적을 들은 솔리프가 대뜸 분통을 터트렸다.

"그런 식으로 늙은이 취급할 거면 연장자 대우라도 좀 해주든가!"

* * *

온천욕을 끝낸 두 사람은 몸을 닦고 옷을 입은 뒤 각자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갈라졌다.

투란은 떠나는 솔리프를 향해 다시금 충고했다.

"이미 말했지만, 여기서 원숭이는 절대 잡으면 안 돼. 다 아이쿨의 가족이니까."

"알았다니까. 위험에 처한 원숭이를 보면 구해주기도 할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

자신만만하게 손을 내저은 솔리프가 떠나는 것을 보며, 투란은 감각을 활성화한 뒤 메이사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솔리프가 근사한 사냥감을 찾아 오늘의 끼닛거리를 만드는 사이 식사를 주입해둘 계획이었다.

아무래도 주입 과정을 남에게 보이는 걸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사가 있는 곳에 도착한 투란은 뜻밖의 광경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비제를 무릎에 앉힌 채 날갯죽지를 세심하게 주물러 주고 있었다.

"여긴 어때? 좋아?"

비제는 삐약거리며 한쪽 다리를 쭉 뻗어 바닥에 무어라 글을 썼는데, 보니까 '좋아' 랑 '좀 더 오른쪽' 같은 내용이었다.

얼굴 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탓에 사람처럼 풍부한 표정을 짓지는 못했지만, 눈이 반쯤 풀린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분 좋은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몇 분 정도 더 주물러준 뒤, 메이사가 비제의 날개를 찰싹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여기까지!"

[더 해줘!]

"나중에 해줄게, 나중에. 아니면 아이쿨한테 해달라고 해."

[걔는 바보라서 그런 거 못 해! 힘 너무 세고 손가락도 너무 두꺼워!]

비제는 바닥에 쓴 글을 보라는 듯 발을 동동 굴러댔다.

보통 저렇게 칭얼대는 모습은 투란의 앞에서가 아니면 잘 보이지 않더니, 그새 메이사와 더 친해진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녀 역시 투란과 마찬가지로 '들어맞는' 사람이 아니던가.

비제가 처음 투란과 만났을 때 보이던 호의로 짐작건대 혈통으로 연결된 마수와 사람 사이에는 특별한 유대감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둘의 사이 좋은 모습을 흐뭇이 바라보기도 잠시, 투란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내 영혼 계약을 메이사가 이어받아도 바람 마법을 쓸 수 있으려나?'

물론 비제를 버릴 생각 따위는 절대 없지만, 필요에 따라 그래야 할 상황이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예를 들어 자하르 혈통과 '들어맞는' 마수를 찾았는데 투란의 영혼이 둘을 동시에 수용할 용량이 모자란다거나, 아니면 그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거나....

잠시 망상에 빠진 사이, 떼쓰던 비제를 잘 달래서 아이쿨에게 날려 보낸 메이사가 그를 맞이했다.

"다 씻으셨나 보네요."

"아, 예."

그렇게 답한 뒤, 문득 조금 전 솔리프와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라 투란은 곧장 말을 꺼냈다.

"이제부터 우리끼리도 편하게 말하죠. 동료니까. 어차피 솔리프와도 격의 없이 이야기하고 있고요."

아시즈와 말을 틀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메이사와 격의 없는 말투로 대화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어째서인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네? 아, 네...응. 알겠어. 투란."

비슷한 기분이었는지, 메이사 역시 묘하게 떨떠름한 기색으로 이를 받았다.

투란은 이러한 분위기를 억지로 무시하며 곧장 용건을 꺼냈다.

"좀 있으면 솔리프가 저녁거리를 만들 건데, 그 전에 식사를 주입해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지난번에 떠난 뒤로 아무것도 못 먹었지?"

"...응. 시도는 해 봤는데, 아직은 잘 안 되더라."

투란은 대답하는 메이사의 얼굴에서 자괴감을 읽을 수 있었다.

짐작하자면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에 대한 분노가 아닐까.

곧바로 음식 주입을 시작하자고 말하는 대신, 투란은 메이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차분히 말했다.

"난 네가 어떤 기분인지 몰라. 음식을 못 넘기는 괴로움이란 걸 겪어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레토는 죽었고, 내가 옆에 있으면 어떤 자하르 귀족도 몰래 접근해올 수 없어."

지난번 레토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투란은 메이사가 섭식 장애를 겪게 된 이유를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어머니와 남동생이 독살당하는 과정에서 함께 독을 먹고 괴로웠던 것이 기억에 남은 탓일 터.

투란은 그런 그녀에게 이미 독을 탔던 이는 죽었다고, 그리고 혹시라도 누군가 비슷한 짓을 해도 막을 수 있다고 말하며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를 들은 메이사는 감사를 표하는 대신, 나지막이 신음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게...사실, 독을 먹을까 봐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야."

"그러면?"

투란은 무의식적으로 질문하면서도 이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하리라 짐작했다.

메이사는 줄곧 그 날의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려왔으니까.

하지만 말을 놓기로 하며 마음의 거리가 한 발짝 좁혀진 덕일까,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툭 내뱉듯 말했다.

"내가, 너무 비겁하게 느껴져서."

왜 자신을 비겁하다 여기는 것인지, 투란은 캐묻는 대신 침묵을 유지했다.

곧 스스로 그 이유를 말하리라 직감해서였다.

예상대로, 메이사는 곧장 과거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모르겐 시 인근의 경치 좋은 언덕으로 소풍을 나왔던 세 사람.

그러나 도시락을 먹던 도중 갑작스러운 복통이 시작됐고, 마력을 각성하지 못한 남동생이 가장 먼저 상태가 나빠졌다.

그를 구한 것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후계자로 여겨지던 메이사가 가진 회복 마법기였다.

비록 독을 제거하는 기능은 없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었지만, 온몸에서 피를 쏟아내는 와중에도 당장 죽지 않게 할 수는 있었다.

문제는 그러던 와중 최하급 귀족 수준의 마력을 가진 어머니와 메이사 자신마저 중독 상태가 깊어졌다는 것.

어머니와 남동생이 메이사에게 고통을 호소하며 구해달라고 하는 동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피눈물을 흘리며 치유 마법기를 번갈아 사용해 죽음을 유예하는 것뿐이었다.

심지어 호위를 위해 주변에 있어야 할 기사들조차 모두 사라진 탓에 메이사는 도움조차 청하지 못하고 마법기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계속해서 피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어머니와 동생, 온몸이 타들어 가는 듯한 중독의 고통, 점점 말라가는 마력....

"결국,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마력으로 나를 치료했어. 무서웠거든. 두 사람을 계속 치료하다가는 나까지 죽을까 봐. 조금만 더 힘을 냈으면 다 살릴 수도 있었는데."

메이사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자 적갈색 머리카락이 그 위로 뒤덮였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투란은 자신이 섭식 장애의 원인을 완전히 잘못 짚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내면에 자리한 상처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닌, 가족들을 버리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었다.

여기서는 뭐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까?

머릿속으로 여러 대답을 구상하기도 잠시, 투란은 계산 없이 솔직한 본심을 드러내며 메이사를 위로했다.

"내가 말하는 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잘못하지 않았어. 열두 살짜리 어린애한테 자신을 버려 가며 가족들을 구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아무도 널 탓할 수는 없어. 심지어 희생된 가족들조차도."

마침 투란이 어머니를 잃고 마을과 전쟁을 치르던 것도 딱 열두 살 때의 일.

그 당시의 그가 얼마나 어리고 쉽게 겁에 질렸는지를 생각하면, 감히 그 행동이 비겁하다 탓할 수 없었다.

이를 들은 메이사는 그대로 머리카락을 뒤집어쓴 채 흐느꼈다.

* * *

짧은 위로의 시간이 지나간 뒤, 메이사는 용기 내어 스스로 빵 한 조각을 먹었다가 토해내고는 전처럼 기절한 채 음식물을 주입받았다.

이후 솔리프가 만든 토끼 구이로 끼니를 때운 투란은 동료들을 모아 현 상황에 대한 분석, 그리고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것을 제안했다.

가장 먼저 나온 주제는 모르겐 시에서 보았던 아라비온의 가주, 바달의 몸에 깃든 네 개의 상징에 대한 것이었다.

"네 개의 혈통 능력이라...."

"아마 바람과 번개, 그리고 근력과 부여술이겠지."

"그러면 아라비온 가주의 몸에는 천둥 군주가 깃들어있다는 건가? 어, 잠깐만."

솔리프가 메이사를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그쪽 신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분명 천둥 군주는 남자였지?"

"맞아요. 아니, 맞아."

그녀는 솔리프와도 말을 편히 하기로 했는데, 아직은 영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나중엔 여자 몸으로 갈아탈 생각이었단 거잖아? 난 내가 여자가 된다고 상상만 해도 끔찍한데, 대단하구만. 여러가지로."

"오래 살다 보니 그 정도는 신경 쓰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어차피 그동안 아라비온에 여자 가주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아니면 아예 천둥 군주 본인이 아닐지도."

투란이 제시한 가설에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본인이 아니라니?"

"그냥 입고 있는 몸이 아라비온 혈통이기 때문에 비교적 가까운 천둥 군주의 능력을 사용할 뿐, 영혼 자체는 다른 신일 수도 있다는 거야. 애초에 부여사 혈통의 선조는 더 유명한 신이 따로 있잖아."

"절름발이 여신...."

저 오렘의 도서관과 옛 제국의 도로, 그 외에도 여러 유물을 만들어낸 신의 이름이 메이사의 입에서 나왔다.

"마침 본격적으로 나서자 추가된 네 번째 혈통이 부여사였던 것도 수상하고. 어쩌면 평상시에는 가주 본인의 자아가 표면에 나와 있다가 힘을 쓸 때만 신의 자아가 표출되는 방식일 수도 있어. 뒤에 물러서 있을 때랑 나설 때 느낌이 달랐거든."

"하긴. 완전히 딴사람 같긴 했지. 아니 잠깐, 그러면 여자가 남자 몸을 입고 있었단 건가? 이건 이것대로...."

찬동하던 솔리프는 어째 이상한 부분에 꽂힌 듯 아라비온 가주의 몸에 신이 깃들어 있다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둘 중 어느 쪽인 게 더 이상한지를 한참 중얼거렸다.

투란은 가볍게 바위를 두드려 주의를 환기시킨 뒤 결론을 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가주가 자기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지는 못한다는 거야. 그럴 수 있었으면 처음부터 대리인을 내보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는 그들 세 사람이 바달과 동급으로 강해질 수 없다 해도, 그냥 적당히 버틸 수 있을 수준의 기량만 확보하면 이길 수 있으리라는 의미였다.

그때, 메이사가 솔리프를 돌아보며 물었다.

"바라하의 선조는 은빛 태양이었지?"

"맞아. 그러면 이쪽의 네 개 혈통은 뭐가 있으려나?"

"경전이나 설화로 대충 짐작해볼 수 있지 않겠어?"

메이사의 말에 솔리프가 음, 하고 신음하더니 무언가 떠올린 듯 말을 꺼냈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넷 중 하나는 육탄전 쪽 혈통일 것 같기는 해. 빛의 검을 휘둘러 도깨비들을 참살한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꽤 자주 나왔거든."

도깨비란 동방의 이종족으로, 상어처럼 뾰족한 이빨을 가졌으며 어린아이를 즐겨 먹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물론 현대에는 다른 이종족들이 그렇듯 인류에 밀려서 오지로 도망친 족속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마음 같아선 돌아가서 물어보고 싶네. 아니면 가문의 서재를 뒤져보거나."

물론 솔리프의 말처럼 정말 바라하 가문으로 돌아갔다가는 곧바로 전쟁을 치러야 할 터였다.

투란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메이사를 보며 말했다.

"어쩌면 메이사에게도 부여사 혈통이 잠재되어 있을지도."

"내가?"

"나도 원래는 두 개밖에 없었으니까."

메이사의 잠재력이 투란보다 커서 모를 뿐, 그녀가 한계에 도달했을 때 세 번째 혈통이 해방될 가능성도 있었다.

어쩌면 그때는 충분히 바달과 겨룰 수 있을지도 모르고.

투란은 마찬가지로 솔리프에게도 그런 종류의 자질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전하자 메이사와 솔리프는 각자 자기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세 번째 혈통 능력이라, 정말로 그런 게 있으려나...."

"알아볼 방법은 없을까?"

"하나 있긴 해. 오렘의 도서관에 가보는 거지."

투란의 말에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솔리프가 고개를 까딱였다.

"아, 그 서쪽에 있다는?"

"마침 여기서 별로 멀지도 않으니까."

만약 두 사람이 사서와 소통할 수 없다고 한들 투란이 직접 중개하면 혈통 감별 정도는 가능할 터였다.

물론 부탁을 들어줄지는 가서 시도해 봐야 알겠지만.

그렇게 일행의 첫 목표는 오렘의 도서관에서 두 사람의 혈통을 확인해 보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렇다고 당장 출발하지는 않았는데, 우선 메이사의 건강이 좀 더 회복된 뒤 움직이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하루하루 영양 공급을 받을 때마다 눈에 띄게 살이 차오르는 만큼 시간이 지나면 이전의 모습은 알아볼수조차 없게 될 터.

나중에는 당당히 세상을 활보해도 아라비온 쪽이 그 존재를 알아차리기 어렵게 될 터였다.

그쪽에서 찾는 건 해골처럼 비쩍 마른 여인인데, 변화한 메이사를 보고는 누구도 예전의 그녀를 떠올릴 수 없을 테니.

이후 그들은 며칠 정도 시간을 보내며 각 가문에서 내려오는 여러 마법적 비전을 교환했다.

메이사가 투란에게 알려주었던 사고 가속 마법부터 시작해서 솔리프 역시 바라하의 비전을 여럿 알려 주었는데, 투란은 이미 두 사람과 마법 수련을 하며 대부분을 익혔던지라 따로 배울 게 없었다.

오히려 두 사람이 각각 바쁠 때 대신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면 모를까.

"그러니까, 이렇게...젠장, 안 되잖아."

그 와중 알게 된 게 있다면, 유감스럽게도 솔리프의 마법적 자질이 투란이나 메이사보다 한 수 뒤처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평범한 마법사들을 기준으로는 천재라고 부르기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긴 했지만.

투란은 메이사가 알려준 마법을 바로 성공시키지 못해 화내는 솔리프의 앞에서 차분히 이를 재연했다.

"다시 보여줄 테니 따라해 봐. 이렇게...음?"

마법을 시연하던 도중, 투란은 산 아래에서 느껴지는 두 사람의 기척에 얼굴을 굳혔다.

그중 하나는 몸의 굴곡이며 마력의 양으로 보건대 라비타스의 귀족, 리다가 분명했다.

이곳이 본래 그녀가 자주 온천욕을 하러 방문하는 장소임을 생각하면 썩 놀랍지 않은 일.

오히려 지난 몇 달간 리다가 방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었을 정도였다.

과거 잡담을 나누며 들은 바로 어지간하면 몇 달에 한 번쯤은 들른다는 모양이었으니까.

투란을 놀라게 한 것은 그 뒤에 따라오는 한 귀족이었다.

메이사의 두 배에서 두 배 반 정도.

아라비온 가주 바달보다는 못하지만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을 지닌 괴물....

눈에 띄게 긴장한 모습에 솔리프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래?"

"아마...귀한 손님이 오신 것 같아서."

저 정도 마력을 가지고 리다와 함께 방문하는 이의 정체야 뻔했다.

대가문 라비타스의 가주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8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