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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4 - 105-110

105화

본래 이 세상에서 강력한 귀족들이란 어지간해선 자기 가문의 영역을 떠나지 않는 법이었다.

우선 가주나 중요한 직책을 차지한 이들이 영역을 떠나는 순간 제 동포며 수하들을 돌보기 어려워지는 것이 첫째요, 강력한 마법사란 어떤 의미로 강력한 마수보다도 쉬운 사냥감이라는 이유가 둘째였다.

마력 강도가 식인보다 더한 중죄로 여겨진다지만 본래 어떤 행위를 잘못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를 저지르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자하르 가주의 동생이자 대가문의 이인자, 최상위 중의 최상위권에 달하는 마력을 가진 대귀족 탈리스가 이곳 카마인의 수도에 나타난 것은 실로 이변이라고 할 만했다.

투란은 동요한 마음을 얼굴로 드러내지 않고자 이를 악물며 무릎을 손톱으로 찍었다.

'탈리스 자하르······.'

아마 자신의 할아버지일 것이라고 짐작되는 귀족.

그 정체를 알아챈 순간 조금 전 느낀 기시감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다소 우묵하게 깊어 표정을 지우면 매섭게 보이는 눈매, 오뚝한 코, 쇳덩이처럼 짙은 잿빛의 눈.

때때로 물에 얼굴을 비쳐 보며 어머니와 다르다고 느꼈던 모든 부분이 저 남자와 비슷했다.

코마드의 영주나 레토가 투란을 보고 탈리스의 혈육이라 생각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만약 그들 두 사람이 평민이었다면 누가 봐도 딱 스무 살 정도 차이 나는 부자 관계로 보였을 테니까.

"······자하르?"

"엔릴 사막의 그 자하르 말인가?"

"듣기로는 가주의 동생이라던데."

"그런 거물이 왜 이 먼 곳까지 온단 말입니까?"

탈리스의 등장은 카마인 귀족들에게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는지, 회의실은 순식간에 소란스럽게 변했다.

그때, 투란은 탈리스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분명히 탈리스에게 있어 투란이 위장한 오닐은 십수 명의 카마인 귀족 중 하나일 뿐일 텐데도.

대체 왜 저러는지 의아해하기도 잠시, 탈리스의 콧잔등이 살짝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마치 냄새를 맡으려는 것처럼.

'······설마, 내가 느끼는 감정을 간파하는 건가?'

아주 잠시동안 투란이 남들과 다른 감정을 느낀 것을 알아챈 것이 분명했다.

평상시 그 자신이 남들에게 자연스럽게 쓰던 기술이지만, 막상 당하는 대상이 되니 소름이 쫙 끼쳤다.

그야말로 마음속을 읽히는 것 같은 기분.

투란은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 후 고개를 들자, 다행히 탈리스의 시선은 이미 그를 떠난 채였다.

"조금 전 카마인의 가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이렇게 온 것은 이번 전쟁을 중재하기 위함입니다. 이토록 어지러운 세상에서 대가문끼리 싸워서야 쓰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식으로 중재해주실 참이오? 참전 약속이라도 해주면 더없이 감사하겠소만."

말을 꺼낸 것은 지금 투란이 위장하고 있는 오닐의 아버지, 제멜이었다.

그의 말에 다른 카마인 귀족들 역시 동조하는 기색을 보였다.

"옳지."

"배후에서 자하르가 지원한다면 오히려 이참에 아라비온 세력을 축소시킬 수도 있겠어."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정만 보면 썩 이해하기 어려운 구도는 아니었다.

자하르와 아라비온은 이십 년 전 전쟁을 치른 사이.

그런 만큼 아라비온이 인접한 대가문인 카마인을 짓밟으려 들면 훼방을 놓는 것이 당연한 처사였다.

원래 적의 적은 아군인 법 아닌가.

그러나 대다수의 카마인 귀족들이 희망적인 관점을 꺼내며 기뻐하는 데 비해, 그리 기뻐하지 않는 이도 몇 명 있었다.

마치 자하르가 절대 그들과 협력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기뻐하는 쪽은 뒷이야기를 전혀 모르고······기뻐하지 않는 쪽은 모든 걸 아는 건가?'

아라비온과 자하르의 신이 썩 나쁜 사이가 아님을, 오히려 카마인의 신과 적대하는 관계임을 생각하면 이 동맹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었다.

즉, 지금 기뻐하지 않는 이들이야말로 이면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이들일 가능성이 컸다.

'카마인 가주와 중견 귀족 세 명, 젊은 귀족 두 명······제멜도 그중 한 명인가.'

이전에 아라비온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신들은 자기들이 인간의 몸에 빙의해 가문을 지배하고 있음을 편집증적으로 감추려는 경향이 있었다.

왜 그러는 것인지 대충 짐작은 갔다.

만약 투란이 평범한 고위 귀족이었다면, 그런데 그 위에 몸을 갈아치워 가며 영생하는 신들이 있었다면······.

'당연히 거기에 한 자리 끼고 싶었겠지. 영생의 비밀이 눈앞에 있는데 누가 죽고 싶을까.'

게다가 이미르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환생은 아무 대가 없이 간단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 앉을 수 있는 의석의 숫자는 제한된 셈.

이런 상황에서는 비밀이 널리 알려질수록 경쟁자가 많아질 게 분명했다.

어쩌면 환생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다수가 환생하는 소수에게서 그 권리를 강탈하고자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고.

투란이 한참 생각에 잠긴 사이, 탈리스가 이어서 말했다.

"물론 대외적으로 지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저희 자하르의 특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도울 예정입니다. 아라비온의 병력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모든 것을 알려드릴 수 있지요."

"은신과 추적이라. 전쟁에선 중요한 요소지."

"자하르 귀족들이 몰래 돕는다면 할만할 것 같은데."

"그런데 이런 걸 중재라고 부르는 게 맞나?"

제법 자신감이 생긴 듯 많은 이들이 희색을 띠는 가운데, 한 귀족이 손을 들고 물었다.

"아예 직접 참전하는 건 안 되는 겁니까?"

"예. 직접 참전은 절대 없습니다. 이건 저희 가주님의 뜻입니다."

"저런."

완전히 불청객으로만 보였던 조금 전과 달리, 탈리스는 이제 카마인 귀족 중 한 사람인 것처럼 회의를 주도했다.

자하르가 전쟁에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카마인이 어떤 식으로 협력해주어야 할지를 이야기하는 모습만 보면 정말로 완벽한 동맹군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뒤에서 정보를 캐고 있었는데 말이지.'

바로 얼마 전 자하르의 간첩이 카마인의 정보를 캐내던 것을 직접 본 투란으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탈리스가 카마인 귀족들과 회의에 몰두하는 동안, 카마인의 가주는 상석에서 가만히 이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입을 연 것은 두 시간 정도가 지나서 슬슬 모두가 할 말이 떨어졌을 때였다.

"그러면 이번 회의는 일단 여기서 마치지. 당연하지만 이번 자하르와의 협력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할 거다. 노토, 오닐, 아리스."

"예, 예!"

"알겠습니다!"

"옙!"

갑자기 부른 세 명의 이름 중 오닐의 이름이 있었던 탓에 투란은 황급히 답했다.

다행히 그 말고 다른 두 명 역시 비슷하게 놀란 기색이었기에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이미 말실수를 몇 번 한 적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생기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명심하도록."

섬뜩한 경고에 넙죽 고개를 숙이는 한편, 투란은 탈리스가 그를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잠시 후, 그가 회의장에서 나서자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오닐."

"예, 아버지."

"이번 가주님의 말씀을 잊지 마라. 만약 너 때문에 가문의 기밀이 유출된다면 내 손에 죽을 거다. 이해했겠지?"

"예······."

투란은 생전 오닐이 그랬듯 기죽은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연기가 제법 그럴싸했는지, 제멜은 자신의 아들이 다른 사람으로 바꿔치기된 상태라는 것은 짐작조차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이 아비는 가주님과 좀 더 나눌 이야기가 있을 것 같으니 먼저 돌아가거라. 쯧, 항상 오늘처럼 얌전하기만 하면 좋겠건만."

좀 더 나눌 이야기라.

듣기만 해도 그럴싸한 냄새가 풍겨왔기에 투란은 알겠다고 넙죽 고개를 숙인 다음 자리를 나섰다.

그리고 가주의 거처 밖으로 나가는 척하다가, 남들의 눈에 띄지 않을 때쯤 슬며시 모습을 감추었다.

* * *

과거 라비타스 가주의 거처에 방문한 적 있던 투란이지만, 카마인 가주의 거처는 그때보다 한 차원 높은 방어 체계가 갖추어져 있었다.

건물 내의 여러 벽이며 문, 복도까지 죄다 정체 모를 마법이 걸려 있어 손대기가 껄끄러울 지경.

그나마 다행히 지금은 회의 탓에 많은 외부인이 들어올 것을 고려하여 그중 대부분이 비활성화된 상태라서 은신한 채 돌아다니기가 편했다.

조금 전 헤어진 제멜의 기척을 추적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복도를 걷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는 가주의 오촌 조카라던 여인과 그 아들이 함께 걷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시저가 그쪽이랑 갑자기 갈라선 건가?"

"설마. 바로 얼마 전 전쟁만 해도 둘이 짝이 잘 맞던데."

"뭐, 우리 변호사 나리가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보니까 뭔가 얘기가 된 모양이던데. 일단 가서 들어보자고."

변호사라는 호칭도 그렇고, 어머니와 아들인 두 사람이 친구처럼 격의 없이 대화하는 모습만 봐도 저들 모두 신의 빙의체인 것이 분명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가주의 휴게실로 보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카마인 가주와 탈리스가 각자 기다란 좌식 소파에 기대듯 누워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도 오는군."

"우리 집에서 손님한테 그런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는데?"

"우리 집? 너희 대장 집이 아니라?"

"그게 그거지."

겉보기 나이에 맞게 격식 있는 태도로 말하던 조금 전과 달리, 탈리스와 제멜은 사이 나쁜 젊은이 같은 말투로 틱틱거렸다.

마치 중년 남자의 몸에 젊은이가 깃든 듯한 위화감이 묘하게 불쾌했다.

대화가 길어질 것을 대비해 투란은 방의 구석진 기둥, 조명이 비치지 않는 곳에 걸터앉았다.

그림자로 들어가자 은신 마법으로 소모되는 마력의 양이 눈에 띄게 줄었다.

'후······.'

베르크 가문의 저택만큼은 아니지만 이곳도 복도나 방에 화려한 조명들이 있어 은신을 무작정 오래 유지하기 쉽지 않았다.

아마 오닐로 위장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터.

내심 자신의 판단을 칭찬하던 그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누가 누구냐?"

"너부터 말해 봐. 아니, 알 것 같은데. 주작이지?"

"······어떻게 알았지?"

"시저의 부하 중에는 너만큼 빈정거리기 좋아하는 놈이 없거든. 난 유리다. 여기는 토라토라랑 무지개."

"이런, 네가 무지개라고 생각했는데. 못 보던 사이에 말이 늘었군그래."

"뭐,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얘기한 게 못해도 오륙백 년은 넘었으니까. 좀 변할 때도 됐지."

"난 거의 천 년쯤 됐을걸? 지난번에는 맞는 몸이 없어서 쉬고 있었거든!"

"몸이 젊어서 그런지 말투가 활기찬걸."

탈리스와 카마인 귀족들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사이좋게 떠들어댔다.

서로의 몸에 깃든 이의 정체를 알려주는 것으로 보아 딱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일까.

잡담을 나누기도 잠시, 변호사로 짐작되는 카마인의 가주가 손을 들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오랜만에 회포 푸는 것도 좋지만 일단 일 이야기부터 하지."

"그래, 설명 좀 해봐. 시저가 갑자기 왜 우리를 도와준다는 건데? 솔직히 그동안 친구처럼 지내온 건 아니잖아?"

"맞아. 의심스럽단 말이지. 우리가 인어 통제에 문제가 생긴 건 이미 다 알고 있을 텐데, 이참에 둘이서 손잡고 아예 끝장내려고 하는 거 아닌가······."

제멜의 물음과 함께 카마인 귀족 세 명은 조금 전의 친근한 대화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탈리스를 노려보았다.

이에 탈리스가 흠, 하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는 답했다.

"이미 너희 대장에게 한 번 설명한 이야기를 또 해야겠군. 좋아. 까놓고 말해서 우리랑 저쪽······아라비온과의 제휴는 얼마 전에 잠정적으로 끝났다."

"왜?"

"저쪽이 우리 뒤통수를 쳤거든. 거기다 저놈들도 우리가 자기네 뒤통수를 쳤다고 믿고 있고."

"정말로 뒤통수 친 거 아니냐? 그 녀석이 헛소리를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인정하긴 싫지만 우리 중에 제일 똑똑하잖아."

아라비온의 수장, 생명학자가 자신이 언급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서인지 이들은 '그 녀석'이나 '저쪽' 등으로 돌려 말했다.

내심 그의 이름을 알고 싶던 투란으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온 용건만으로도 그런 감정 따위는 묻어놓기 충분했다.

아라비온과 자하르의 협력관계가 깨졌다니.

여기 잠입하지 않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도 알 수 없었을 특급 정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일단 우리가 당한 것으로 말하자면······그쪽 대장 놈이 우리 영토에 몰래 인공 던전을 만들어 놨더군. 밤 사냥꾼 전직 퀘스트를 재현하는 형식으로. 그런데 재수 없게 우리가 키우던 녀석이 거기에 휘말려서 죽었지."

아마 지하 미궁과 페르가 자하르를 이야기하는 것일 터였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투란이 거기에까지 개입했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까.

그것만으로도 흔적을 철저히 은폐하고 널려있는 마법기를 주워가지 않은 보람이 차고 넘치도록 있었다.

"뭐, 그 당시에 따져서 사과를 받긴 했는데······그러고 나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비가 입으려던 몸이 도망친 책임을 우리한테 돌리려고 들던데. 우리가 보낸 첩자가 협력한 것 같다면서 말이야."

"아, 그 해골?"

"뭐, 그런 의심을 할 정도로 걸작이기는 했지. 지금까지 만들어낸 몸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었으니까."

"애초에 너희가 지난번에 전쟁한 것부터가 그거 만들려고 그런 거였잖아. 의심할 만도 하네."

저들이 말하는 '몸'의 정체는 보나마나 메이사일 터.

말하는 내용으로 보아 두 진영의 협력이 깨진 것은 투란이 그녀를 데리고 나온 탓인 듯했다.

아라비온의 신이 자하르 쪽에서 수작을 부린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그보다 몸을 만들기 위해서 전쟁을 했다니?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일까.

자세히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투란은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때, 가만히 있던 카마인 가주가 입을 열었다.

"지금 주작이 한 얘기는 나도 개인적으로 조사해 봤다. 메이사 아라비온이 탈주한 건 사실이야. 덤으로 얼마 전에 마리오의 몸도 도망쳤다는 모양이던데. 잘은 몰라도 남해 쪽 어딘가를 떠도는 중이고."

"어째 요 몇 년 동안 유난히 악재가 겹치는걸. 안 그래도 우리도 얼마 전에 난리가 났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

탈리스의 물음에 카마인 귀족이 슬쩍 가주를 돌아보자, 그가 말해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 중 하나가 몰래 우리의 비밀을 퍼트렸거든. 그거 때문에 내부 단속한다고 바빴지."

아무래도 카마인의 귀족 중 누군가가 신들의 비밀을 알아차리고 내부에 전파하려다가 제지당한 모양이었다.

이들은 그것을 수습하느라 큰바다뱀의 사령을 제압하는 데 개입할 여유가 없었고.

의문이 해결된 것을 기뻐하기도 잠시, 탈리스가 검지와 중지를 까딱거리는 알 수 없는 손짓을 하며 푸념했다.

"그쪽도 피곤한 일이 많은걸. 확실히 신으로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원래 우리 몸만 있었어도 이렇게 귀찮은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지."

"뭐, 그때야 다 부숴 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어째 나누는 이야기만 보면 수천 년을 살아온 신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실무에 지친 관리자, 혹은 옛 추억을 되새기는 노인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게 인류가 섬기는 프레아 신족의 실체라니······.

이미르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새삼 실망스럽게 느껴졌다.

그때, 탈리스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툭 찍어 주의를 끌며 말했다.

"아, 한 가지 더 알려둘 게 있다."

"뭔데?"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자하르 귀족이 한 명 생겼다는 것."

"잡으면 되잖아? 너희가 작정하고 쫓으면 못 잡을 상대가 누가 있다고."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카마인 귀족의 태도에 탈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추적술의 메커니즘 상 매개체가 없는 상대를 쫓는 건 쉽지 않아. 거기다 아까 말한 것처럼 얼마 전까지 몸으로 쓰려던 녀석 하나가 비명횡사한 걸 수습하느라 바빴거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찾아봐야지."

이야기만 듣고도 투란은 탈리스가 언급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그게 누군데?"

"투란. 아마도 이 몸의 손자일 테니 투란 자하르라고 불러야 맞겠군."

106화

본래 어떠한 일은 그것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알고 대비한 상태에서도 충격을 견디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마치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을 때나 연인으로부터 이별을 선고받았을 때처럼.

그와 비슷하게, 탈리스가 이름을 언급한 순간 투란이 느낀 충격은 실로 컸다.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사이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자면 손자지 아마도 손자인 건 뭐야? 대체 아랫도리를 얼마나 놀리고 다녔길래 그것도 모른대."

"난 이해해. 이 세상에서 즐길 거리가 뭐 별거 있나? 괜히 우리가 콘돔 만들어보겠다고 그 지랄을 한 게 아니잖아."

"대체 언제 적 얘기를······."

손을 들어 정신 사납게 떠드는 카마인 귀족들을 제지한 것은 그들의 수장인 가주, 변호사였다.

"그래서, 네가 말한 그놈이 통제에서 벗어난 이유는? 자하르에서는 재능 있는 아이들이 어릴 때 미리 추적할 매개체를 준비해 둔다고 들었는데."

"아, 맞아. 나도 그거 들었어."

"그러면 어디로 도망치건 무조건 잡히겠네?"

"와, 가문 진짜 갑갑하게 운영한다. 너네 세력 안 가길 잘했어."

"그래도 멀리서 납치라도 당하면 찾으러 가긴 편하겠네. 아니면 시체 파밍이나."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탈리스가 설명을 계속했다.

"그 질문에 답하자면, 그놈이 애초에 가문 내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서 그렇다."

"사생아?"

"비슷하지. 이십 년 전의 전쟁 중에 아들놈 중 하나가 아라비온 포로를 건드렸는데, 나중에 그 녀석이 문제를 일으켜서 숙청하는 와중 도망친 포로에게서 태어난 모양이야."

"아, 나 이런 거 잘 알아. 그 여주가 임신하고 도망치는 장르 유행하지 않았나?"

"내가 보기엔 오히려 영웅 서사시 같은데. 마침 자기 아버지에 대한 복수면 구실도 좋네."

"원수 가문에서 나온 자식이면 로미오와 줄리엣이잖아!"

"그러면 자하르가 몬테규인가?"

인간으로 전락한 신들은 그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가 마치 연극 소재라도 되는 양 안줏거리 삼아서 낄낄거렸다.

그 경박한 태도에 불쾌해하기도 잠시, 탈리스가 어떻게 투란의 정체를 알아냈는지를 다른 신들에게 설명했다.

"그때는 워낙 바쁘기도 했고, 어차피 썩 강한 놈도 아닌지라 그 아들이 귀족으로 태어날 가능성도 없겠다 싶어서 안 찾았는데 얼마 전에 만난 가신이 내 사생아를 본 것 같다고 하더군. 대체 뭔 소리인가 싶어서 조사해 보니 그 녀석이었지."

그가 비제를 샀던 엔릴 사막의 항구 도시, 코마드.

그곳을 지배하는 영주 칼 디르민은 처음으로 투란에게 탈리스와 닮은 것 같다는 평가를 남긴 이였다.

그 말인즉 자주는 아니더라도 탈리스와 종종 얼굴을 마주할 일이 있었다는 뜻.

나중에 만나서 '당신과 닮은 젊은이를 봤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를 웃어넘기지 않고 조사한 것이었다.

'거기서 칼을 죽여야 했나?'

투란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귀족이 투란에게 딱히 잘못한 게 없다는 점은 둘째치고, 어차피 가신 가문의 가주가 살해당했다면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투란의 존재가 들통나는 건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사실상 자신의 출생 성분을 조사하기 위해 엔릴 사막에 들어간 것부터가 잘못이었던 셈.

그 당시에는 그의 외모가 이토록 친족들과 닮았으리라는 것을 짐작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근데 자하르 귀족이 왜 알아서 가문에 안 들어가고 돌아다닌대? 설마 다른 가문이랑 손잡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아마 자기 혈통을 감추고 다니는 것 같던데. 일단은 회색 지대에서 영주 행세를 하며 자기 부모의 흔적을 조사하고 소식이 끊긴 상태다. 어쩌면 우리가 자기 아버지를 죽였다고 의심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걸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유는?"

카마인 가주가 고요한 눈으로 탈리스를 응시하며 물었다.

"발견하면 제거해달라는 건가?"

"그 녀석이 어디서 문제를 일으키고 다녀도 우리가 시킨 건 아니라는 걸 알려주려고 한 것뿐이다. 갈등이 생기면 제거해도 상관은 없다만······우리에게 알려주면 더 좋긴 하겠군. 제법 실력은 있는 것 같으니 거둬 쓰고 싶거든."

"실력 있는 마법사가 귀하긴 하지. 그렇게 열심히 낳아대도 쓸만한 놈은 잘 안 태어나니까."

"혹시 그놈 핑계로 이상한 짓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안 한다."

위협하듯 말하는 것치고는 진심이 아니었는지, 그들은 이내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투란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까지로, 그다음부터는 대충 추억팔이 느낌의 대화가 이어졌다.

덕분에 가만히 앉아서 대화를 분석할 여유가 생겼다.

'일단 나에 대해서 아는 건 코마드에서 비제를 산 것과 칼라마프에서 머무르며 과거사를 조사한 것 정도인가. 덤으로 아라비온 귀족들과 함께 흑요정을 토벌한 것도 알고 있을 테고······.'

물론 정말로 탈리스가 아는 것이 지금 밝힌 정보뿐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분위기로 보건대 이들은 오랜 적대관계였고, 이제야 슬며시 화해의 손길을 내민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고 보기는 어려울 터.

다만 정말로 투란에 대해 알게 된 계기가 저것이라면 아직 다른 중요한 사실은 알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예를 들어 아라비온의 혈통 역시 타고났다거나, 혈통 능력과 외모를 흉내 내는 최상위 성유물을 소유하고 있다거나, 어지간한 준 가주급의 마력을 가졌으며 그보다 강한 힘을 가진 동료 두 명이 있다거나 하는 것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미 신들의 비밀을 알고 있으며 그중 한 명을 죽여보기까지 했다는 것까지도 말이다.

본래 아예 모르는 것보다 어설프게 아는 게 더 무서운 법.

어쩌면 이를 잘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민도 잠시, 신들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자 투란은 귀 하나를 열어놓은 채 그들의 대화를 머리에 쑤셔 넣었다.

일단 저들이 무엇을 아는지, 어떤 식으로 사고하는지를 알수록 대처하기 쉬울 테니까.

"그때 네가 줬던 유튜브 링크 때문에 시저가 날 파티에서 강퇴했잖아, 기억하냐?"

"아. 기억난다. 그거 때문에 게시판에서 조리돌림도 당했었지."

"그때 생산직 버프 좀 하라고 꾸준글 쓰던 놈이 넷카마였고······지금은 죽었지만."

"걔가 멀쩡했으면 문명 수준이 이 지경은 아니었을 텐데. 우리 중에 이과 쪽 지식 있는 놈들이 다 뒈져 버렸으니 이 꼴이지."

"어차피 발전에 필요한 물건들 대부분이 아이템 취급이라 그런지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않는데 뭘."

당연하게도 투란은 그들이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잊힌 옛 제국의 문화이거나 그런 것일 터.

혹시 사서에게 물어보면 무언가 유의미한 답이 돌아올지도 몰랐다.

그로부터 몇 시간.

다소 그늘진 곳에 있기는 했으나 워낙 휴게실 자체가 밝은 탓에 마력 소모량이 적지 않아, 투란은 언제쯤 끊고 일어나야 할지를 고민했다.

다행히 그런 결심이 필요 없게도 때마침 신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전에는 지랄 맞게 물어뜯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오랜만에 얼굴 보니 나쁘지 않네. 앞으로도 종종 만나자고."

"그래. 너희가 날 죽이지 않는다면 말이지만."

탈리스의 말에 제멜이 큭큭 웃으며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사이, 투란은 탈리스가 흘렸을 머리카락 한 가닥이라도 챙기고자 추적 마법을 사용했다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 흔적을······하나도 안 남겼어.'

자연스럽게 빠지는 머리카락이며 눈썹 따위는 물론이요, 그에 비하면 추적 효과가 오래 가지 않는 각질 한 조각이나 찻잔에 묻어있어야 할 침조차 남은 것이 없었다.

계속해서 염동 마법이나 유체 조작 마법 따위로 자신의 흔적이 남는 것을 막은 것이 분명했다.

마치 친구처럼 격의 없이 이야기하면서도 실상은 빈틈 한 조각 드러내지 않았다는 뜻.

그 편집증적이기까지 한 마음가짐에 혀를 내두르기도 잠시, 투란은 휴게실의 문을 열고 나서는 카마인 귀족들과 함께 방에서 빠져나갔다.

'탈리스를 쫓아가고 싶긴 한데······이제 마력이 별로 안 남았으니까.'

자칫 일이 안 풀렸다가는 가주의 거처 안에서 마력이 고갈된 채 고립될 터.

물론 여기서 추적할 매개체 없이 탈리스를 놓치면 다시 잡기는 힘들어지겠지만, 그것을 위해 잡히거나 들킬지도 모를 위험까지 감수할 가치는 없었다.

그대로 복도까지 함께 움직여 가주의 거처에서 나온 투란은 인적 없는 골목으로 나와 은신을 풀었다.

마침내 긴장감으로 심장이 터질 듯했던 잠입극이 끝났다.

* * *

느지막한 밤, 투란은 더없이 당당한 걸음으로 오닐의 저택에 돌아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이대로 오닐이 실종되어서는 안 됐다.

회의에 참석했던 녀석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당연히 그 행적을 찾을 테고, 아라비온에서 메이사를 빼낸 흉내쟁이의 존재가 알려진다면 여기서도 같은 이가 활동했음을 알게 될 테니까.

나중에 그 정체가 투란과 연결되기라도 하면 그때는 조금 전과 같은 간단한 이야기로 끝나지 않을 테니, 일단 며칠 정도는 오닐을 연기할 필요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퇴장할 수 있다면 더 좋고.

밤늦게까지 불이 켜진 저택 앞, 도열해 있던 집사와 하인들이 그를 맞이하며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마차는 지시하신 대로 정비해 두었습니다."

잠입을 위해서 볼일이 있다는 핑계로 타고 왔던 마차를 미리 돌려보냈는데, 혹시 그걸 구실로 패악질을 부릴까 싶었는지 마부가 변명하듯 말했다.

한참 피곤했던 투란은 가볍게 손짓하는 것으로 그들을 물렸다.

"됐다. 자고 싶으니까 다 꺼져."

그 와중에도 지난 며칠간 연습했던 오닐의 거친 말투가 저절로 나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신기할 정도였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대로 배우 일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투란은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 몸을 씻은 다음 침대에 드러누웠다.

"저, 주인님. 오늘 밤은······."

"피곤하다."

밤 시중을 들고자 다가온 첩을 대충 쫓아낸 투란은 곧바로 손거울을 꺼내 활성화했다.

마침 시간이 자정에 가까웠던 터라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안녕.]

"좋은 저녁이네. 식사는 했어?"

[응. 오늘은 개구리 튀김 먹었어. 솔리프는 아직도 기겁하더라. 안 그렇게 생겨서 완전히 도련님이라니까.]

이미 며칠 동안 오닐의 얼굴을 한 채 대화를 나눈 적 있었기에 메이사는 그의 변형된 얼굴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개척지에서 있었던 일을 주제로 떠들기도 잠시, 투란은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오늘은 마력이 얼마 안 남았으니 빠르게 용건만 얘기할게. 신들의 회의를 엿들었어."

[······신들의 회의?]

"응."

[처음부터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꺼내네.]

투란은 자신이 회의장에서 들은, 그리고 가주의 휴게실에 숨어 엿든 이야기들을 빠르게 메이사에게 전달했다.

그의 정체가 부분적으로 자하르 가문에 노출되었다는 이야기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금 당장 돌아와! 아니, 우리가 거기로 가는 게 낫겠어. 비제를 타고 가면 며칠이면 되니까······.]

"그럴 것까진 없어. 아까 말했듯이 저들은 아직 날 평범한 상급 귀족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거기다 여기 있다는 건 아예 짐작조차 하지 못한 상태고."

심지어 아예 자하르 가문에 합류하는 척 내부에 투신하여 정보를 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원래 가장 무서운 것이 내부의 적인 법 아닌가.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더 조사하다 보면 아라비온 쪽에서 머물 당시 나랑 친하게 지냈다거나 라비타스 근처에서 솔리프랑 동행했다는 사실도 알게 될 텐데.]

"날 이용해서 너희 둘을 추적하려고 들면 반대로 거짓 정보를 전해서 은폐할 수도 있지. 뭐, 이건 좀 더 천천히 생각해 보자. 당장 결정해야 할 문제는 아니니까."

일단 당면한 문제는 아라비온과 카마인의 전쟁이 임박했다는 것, 그리고 자하르가 슬쩍 카마인 쪽을 거들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역시 그러는 척하면서 되려 카마인의 뒤통수를 노리려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말이다.

지금 투란이 해야 할 일은 이 기회를 이용, 어떻게든 아라비온과 자하르의 사이를 벌려 두 가문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덤으로 되도록 자연스럽게 오닐의 신분을 벗어던질 방법도 고민해봐야 할 것이고.

[듣기만 해도 머리가 복잡하네······.]

"어쩔 수 없지. 세상 사는 건 누구나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렇게 푸념하듯 말하기도 잠시, 투란은 멀찍이서 느껴지는 기척에 눈을 부릅떴다.

이 마력의 주인은 분명 조금 전 느꼈던······.

"미안, 끌게."

[응? 왜-]

투란은 황급히 손거울의 마력을 끊고 대용량 주머니에 넣은 뒤 침대에 드러누웠다.

두 눈을 감은 채 성유물의 감각에 의식을 집중하자 누군가가 태연히 복도를 걸어와서 문을 여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히 귀족의 예민한 감각은 저 먼 복도의 발소리조차 쉬이 감지할 수 있건만,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고도의 은신 마법이 작용한 결과였다.

'탈리스······.'

그의 할아버지, 탈리스가 은신한 채 침대 옆에서 투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이틀 전 투란이 오닐의 목을 잘라 죽였을 때와 거의 같은 구도로.

투란은 잠든 척한 채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대체 왜 찾아온 것일까.

설마 처음 만났을 때 내비쳤던 감정 때문에 무언가 수상하다고 느껴서?

고작 그런 이유로?

여기서 공격하면 반격해야 하나?

죽인다고 해도 영혼을 잡을 능력이 없는 이상 정보가 전해질 텐데, 그렇다면 그가 자하르의 은신을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가장 큰 무기 중 하나가 너무나도 하찮은 이유로 노출되는 것이다.

"으음······."

고민도 잠시, 투란은 일부러 얼굴을 찌푸리고 몸을 뒤척이며 신음을 흘렸다.

마치 무언가 악몽이라도 꾸는 사람처럼.

보나 마나 탈리스는 이미 그의 몸에서 나는 불안감의 냄새를 맡았을 텐데, 편히 자는 모습을 보여주면 깨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한참 악몽을 꾸고 있는 사람이라면 두려움이나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니 더 자연스럽게 보일 터였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연기하기를 몇 분.

가만히 투란을 내려다보던 탈리스는 투란의 코 위로 손가락을 올려 호흡까지 확인한 뒤에야 침실에서 나갔다.

그의 기척이 완전히 감지 범위 내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투란은 눈을 뜨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추적 주문을 사용해 보았으나, 여전히 탈리스는 매개체가 될 흔적을 남겨 놓지 않았다.

"진짜 쉽지 않네······."

생전 처음으로 할아버지를 만난 소감은, 정말 다시 마주하기 싫을 정도로 예민하고 집요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 * *

회의가 끝나고 며칠.

투란은 지난밤의 정탐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태연히 오닐로서의 일상을 이어나갔다.

집안에서 이것저것 투덜거리며 패악질을 부리고, 부하나 다름없는 친구들을 불러 노름을 즐기고, 비싼 술과 음식을 마구 즐기고······.

우습게도 그 와중 투란이 연기하는 오닐의 평판은 이전보다 훨씬 나아져 있었다.

원본이 그랬던 것처럼 뼈를 부수거나 영구적 장애가 남는 수준의 막대한 손상을 입히는 것이 꺼려져 적당히 조절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아랫사람들이 느끼기엔 이전의 오닐에 비해 상당히 순한 맛이었던 탓이다.

잔뜩 욕을 먹으면서도 우리 주인님이 전보단 나아졌구만, 하고 실실대는 것을 들으며 투란은 혀를 찼다.

연기할 대상이 너무 개망나니인 것도 쉽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은 덤이었다.

그런 이야기가 널리 퍼진 탓일까?

회의가 끝나고 나서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쯤, 오닐의 아버지인 제멜이 그를 찾아왔다.

"요즘 조용하게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 아버지······."

"무슨 생각이냐? 설마 내가 모르는 동안 뭔가 또 사고라도 쳐서 바짝 기고 있는 건 아니겠지."

투란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는 제멜을 향해 미리 준비한 핑계를 읊었다.

지난 회의를 통해 가문이 생각보다 더 위기에 빠져 있음을 깨닫고 마음가짐을 새로 다잡았노라고.

그 때문에 하루 한두 시간 정도는 집에서 마법 연습까지 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이자, 제멜이 감동한 표정으로 투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부디 그 마음 변하지 말거라. 네가 그대로 나아간다면 이 아비는 언제나 네 편일 거다."

절절하게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와 부드러운 눈빛.

누가 봐도 엄격하지만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가 카마인을 지배하는 신의 빙의체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쩌면 과거 레노드 나긴의 몸에 깃든 이미르가 그랬듯 그 역시 별도의 표층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상태에서 숙주의 인격이란 일종의 뒤집어쓴 껍데기 같은 것이라고 했던가?

신의 영혼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그렇게 더없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제 아들을, 정확히는 아들인 척하는 이를 위로하던 제멜이 용건을 꺼냈다.

"이번에 너에게 임무가 떨어졌다."

"임무라고 하시면······."

"며칠 전부터 북쪽 해안에서 난동을 부리는 마수가 하나 있는데 현지 귀족들의 힘으로 대처하기 힘든 수준이라더구나. 내 특별히 요즘 네 행실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토벌대 대장으로 널 추천했다.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가문 사람들도 널 달리 보게 될 게다."

영토의 수호야말로 그들이 귀족으로 평민들의 위에서 군림하는 이유인바, 침입자를 격퇴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

마치 이전에 메이사가 흑요정 토벌대의 수장을 맡았던 것처럼.

그리고 이런 일은 보통 오닐처럼 젊고 강력하면서도 마력 한계가 남은, 그리고 유력자와 가까운 혈족이 맡는 법이었다.

투란은 그가 기억하는 오닐의 말투를 적당히 재조합하여 어리숙하면서도 어른스러운 척하려는 애송이 같은 말투로 외쳤다.

"예, 아버지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기뻐하는 듯한 목소리는 완전히 연기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마수와의 싸움.

이것이야말로 슬슬 볼 장 다 본 오닐 카마인의 신분을 벗어던지기 딱 좋은 구실이었으니까.

107화

오닐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지 보름.

투란은 방탕한 귀족 청년의 삶을 사는 한편, 틈틈이 가문의 거주지 내부를 돌아다니고 다른 이들을 정탐했다.

가장 신경 쓴 것은 당연히 탈리스 자하르의 거취였다.

그는 카마인 가주의 거처 주변에 있는 손님방에서 머무르는 것 같았는데, 회의 날 이후로는 투란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더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

혹시 또 한밤중에 쳐들어올까 싶어 투란은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탈리스의 침입을 대비하고 새벽이 밝은 뒤에야 쪽잠을 잤으나, 그런 그를 비웃듯 탈리스는 그 잠깐 잠든 사이를 틈타 아바챠를 떠나 버렸다.

쫓아서 붙잡아볼까, 하고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어떻게 잡아 봐야 소용 없을 것 같단 말이지.'

투란이 탈리스를 보며 느낀 첫인상은 집요하고 편집증적인 뱀 같은 인간이라는 것.

이미르처럼 속이거나 협박해서 무언가 유의미한 정보를 캐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노리는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존재하리라는 확신만 전해줄 뿐.

어쨌든, 탈리스가 없어진 상황에서 투란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생겼다.

첫째는 계속해서 오닐인 척 행세하며 카마인 내부에 잠입해 몇 달, 혹은 몇 년 뒤 있을 아라비온과의 전쟁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

둘째는 적당한 기회를 틈타서 지금의 위장 신분을 벗어던지고 자유의 몸이 되는 것.

투란은 기회가 찾아오자 고민할 필요도 없이 후자를 골랐는데, 바로 오닐의 신분을 계속 유지하기가 부담스러워서였다.

"주인님, 부디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뭐든 고칠 테니까요······."

"생각 없다. 물러가. 다음에 부를 테니."

"주인님-!"

투란은 알몸으로 달려드는 첩을 밀어내듯이 걷어차 방에서 쫓아냈다.

염동력으로 잠긴 문 너머에서 서러운 울음이 들려왔다.

오닐의 몸으로 갈아타고 며칠.

투란은 원본과 달리 온갖 핑계를 대어 가며 첩들과의 잠자리를 피했다.

원본의 왕성한 욕구에 시달렸던 첩들은 처음에는 안도했으나, 이내 시간이 지나자 불안해져 그를 찾기 시작했다.

오닐이 그들에게 질려서 새 첩을 들이려 한다 여긴 것이다.

투란으로서는 안기려 드는 여인들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사랑하지도 않는, 심지어 그의 본래 얼굴조차 모르는 여인들과 관계했다가 덜컥 아이라도 들어서면?

혹시라도 자하르나 아라비온의 혈통을 타고나면 책임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얼마 전 그의 혈육, 자신과 닮은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던 만큼 그 사실이 더 무겁게 다가왔다.

물론 마법사, 그중에서도 귀족의 아이란 잘 태어나지 않는 편이었다.

그들의 임신 가능성이 평범한 인간과 같았다면 수백 년을 살며 적극적으로 숫자를 불리려 노력하는 귀족들의 수는 지금쯤 평민의 수를 역전하고도 남았을 테니.

따라서 한두 번의 불장난쯤이야 정말 운이 없지 않고선 큰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할 때면 매일 밤 마주하는 메이사의 얼굴이 떠올랐기에, 투란은 그러한 선택지를 고를 수 없었다.

* * *

"모두 집합!"

시간이 지나 출진 당일, 아바챠 인근의 해안가.

55명의 기사와 4명의 귀족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서 투란의 지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아바챠 북쪽에 출몰했다는 마수를 토벌하기 위해 소집된 군대였다.

"집합 완료되었습니다, 대장님."

"음."

투란은 젊은 귀족 부관의 정중한 보고를 고갯짓 한 번 까딱하는 것으로 답했다.

그 오만한 태도에 몇몇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으나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며칠 후면 얼굴 볼 일 없을 사이고, 괜히 오닐이 죽기 직전 갑자기 사람이 달라졌다는 평가를 주변에 퍼트리게 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이동에 사용할 마수는?"

"원래는 지금 도착했어야 하는데 조금 늦는 모양입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확인을······."

투란의 물음에 당황한 여인이 중얼거리기도 잠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범고래 한 마리가 나타났다.

중급 귀족 수준의 마력을 가진 마수로, 그 위에는 비슷한 수준의 힘을 가진 마법사 한 명이 타고 있었다.

"토벌대 맞습니까?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늦었잖습니까."

"이 녀석이 늦잠을 자서 말입니다. 조련사라고 해서 마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친구가 될 수 있을 뿐."

부관에게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남자는 카마인에 속한 조련사 혈통의 귀족으로, 과거 비센과 함께 했던 길이라는 젊은 귀족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와는 달리 마력도 성숙했으며 강력한 마수까지 데리고 다닌다는 차이점이 있기는 했지만.

잠시 후, 토벌대는 미리 준비해둔 배 한 척을 범고래의 몸에 연결했다.

돛대며 닻처럼 항해에 필요한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냥 나무를 배 모양으로 깎아놨을 뿐인 물건이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조련사의 외침과 함께 범고래가 큼직한 배를 끌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마수답게도 녀석은 육십 명이 탄 배를 매달고서도 힘든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하기야 비제가 저 범고래와 비슷한 수준의 마력을 가졌을 적에도 사람 몇 명쯤은 달고 날 수 있지 않았던가.

같은 마력량을 가진 마수라면 작을수록 더 빠르고 클수록 더 강한 법.

수천 배쯤 무거운 저 범고래가 이만한 괴력을 내는 것은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가만히 앞에서 배를 끄는 범고래를 지켜보기도 잠시, 투란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의 부관으로 배정된 귀족 여인이 동료와 부하 기사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강의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번에 출몰한 마수는 문어 형태라고 한다. 보통 문어 마수들은 유독한 성분의 먹물을 뿜는데, 귀족들에게는 큰 효과가 없으나 기사들은 타격이 있을 수 있으니 되도록 피하고······."

투란은 부관의 뒤쪽에 서서 설명을 경청했다.

'문어라······그 인어 왕의 큰아들도 문어로 변할 수 있었지. 큰바다뱀 사냥 중에 죽어버리긴 했지만.'

원본 오닐이 사냥감의 정보 따위에는 관심이 없을 거라고 여긴 탓일까?

누구도 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기에 아는 정보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붙들고서 자세히 설명시키는 건 지나치게 어색하게 여겨질 여지가 있어서 어려웠고.

뒤쪽에서 시선을 느꼈는지, 한참 설명하던 부관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대장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설명이나 계속해."

"죄송합니다."

퉁명스러운 말투에 부관이 굳은 얼굴로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독한 술을 들이키는 척하며 이를 경청하던 투란은 그녀가 마수의 공격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르는 건가, 아니면 비밀로 하는 건가.'

마수란 어디까지나 마력이 깃들었을 뿐 평범한 동물일 뿐.

따라서 특별한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인간을 적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예외도 몇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고양잇과'로 분류되는 맹수들.

과거 투란이 처음 사냥한 표범 마수가 대표적으로, 이런 놈들은 자기보다 약한 생물을 흥밋거리로 사냥하는 본능이 있어 마수가 되면 인간을 장난으로 수십 수백씩 사냥하곤 했다.

그다음으로는 원숭이나 고래, 까마귀처럼 지능이 높은 동물일수록 잔학한 행위를 유희거리로 즐길 확률이 높아 위험하고.

과거 오렘 시의 북쪽에 출몰했던 원숭이 마수가 이 경우일 확률이 높았다.

마지막으로 토끼나 다람쥐처럼 무해한 초식동물들이 인간에게 피해를 보았던 기억을 가진 채 마수가 되어서 보복하려 드는 경우가 있었다.

'이 경우는 또 다른 문제일 수도 있지만······.'

얼마 전부터 해양 마수들이 해안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의 연장선일 가능성도 꽤 큰바, 그와 관련된 원인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과거 마수 도감에서 읽었던 지식을 되짚는 사이, 북쪽으로 쭉쭉 나아가던 배가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도착했습니다!"

확실히 뻥 뚫린 해안을 이동하는 것은 확실히 지상으로 이동하는 것에 비해 간단하고 빨랐다.

물론 비제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보다야 못했지만 말이다.

고작 두 시간 만에 아바챠에서 북쪽으로 150km 거리에 있는 도시, 사비스에 도착한 토벌대는 곧바로 상륙해서 반쯤 폐허가 된 항구를 지나쳤다.

부서진 시설이나 시체를 수습하며 통곡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건대 습격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그들은 딱 봐도 높은 신분 같은 차림새를 한 토벌대의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다의 주인들이시여!"

"부디 복수를!"

누군가가 카마인 본가에서 온 마법사들이라는 이야기를 꺼내자 피 맺힌 외침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이러한 소리가 영주의 저택까지 들린 것일까?

곧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뛰쳐나온 사비스의 영주가 투란을 맞이했다.

"아아, 오닐 님! 수십 년 만에 뵙는군요. 아장아장 걸어다니실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리 헌앙해지셨는지. 저 아히바, 이렇게 적극적으로 구원을 와주신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 뭐······오랜만이네요. 아히바 씨."

외관상 이백오십 살은 족히 넘었을 노귀족이 노골적으로 딸랑거리자 투란은 귀찮아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존칭을 썼다.

그것이 정답이었는지, 영주는 그에게서 딱히 어색함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수는?"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보통 하루 두 번 정도 쳐들어오는데 고생이 말이 아닌지라······."

빈말은 아닌 것 같은 게, 이 늙은 영주의 몸 곳곳에도 다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력의 양으로 보아 귀족으로서는 중상위권쯤 될까.

일단 영지의 양들을 지키고자 스스로 몸 바쳐 싸운 양치기라는 점에서 내심 높은 점수를 주었다.

"다친 것 같으니 쉬시죠. 사냥은 저희끼리 하겠습니다."

"아, 마음은 고맙지만 저도 영주로서······."

"쉬세요. 놈의 마력은 제 겁니다."

노골적으로 탐욕 가득한 기색을 담아 명령하자 노귀족은 아쉬워하는 기색으로 물러섰다.

어쨌든, 평범한 가문의 가주로서 부족함이 없는 영주를 이렇게 만든 것으로 보건대 마수는 최소 상위 귀족급 이상의 마력을 지닌 개체인 것 같았다.

영주를 죽이지는 못한 것으로 보아 최상위권에는 못 미칠 것이고.

확실히, 제멜이 자기 아들을 위해 딱 적당한 먹잇감을 준비해둔 것 같았다.

투란은 머릿속으로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위장할지를 고민했다.

* * *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토벌대는 영주 저택에서 몸을 쉬게 하는 대신 곧바로 해안 근처에 진영을 꾸려 마수의 습격을 대비했다.

투란이 반발하리라 여겼는지 부관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귀찮으니 앞으로 지휘까지 다 알아서 해라'라는 지시를 받고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의외인 점은 범고래 마수와 이를 데려온 조련사가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

이유는 호전성이 떨어지는 녀석이라서 제대로 관련 훈련도 받지 못해 싸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냥 마수 옆으로 움직이는 걸 보조만 해 줘도 유용하잖습니까······."

"절대로, 절대 안 됩니다! 이건 제멜 님과도 이야기가 된 사항입니다. 이 녀석은 단순히 제 단짝이 아니라 카마인의 소중한 운송 수단입니다."

"알아서 하라고 해."

부관은 유능한 전력의 태업에 불만 가득한 기색이었으나, 정작 대장인 투란이 그러려니 넘겨 버리니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결정은 다른 토벌대원들의 불만을 샀다.

"망나니라고 악명이 자자하더니 직접 보니 알 만하구만."

"정말 실력은 있는 거겠지?"

"성격이 저 모양인데 실력이라도 없었으면 진작에 내쳐졌겠지. 믿어보자구."

퉁명스러운 태도와 문제 있는 지도력은 물론이요, 임시 야영지에 차려진 음식의 질이 나쁘다는 이유로 식탁을 한 번 걷어찬 덕에 오닐의 이름값은 와장창 떨어진 상태였다.

원본의 패악질에 익숙하던 본가의 하인들과 달리 이곳에 파견된 기사들 대다수는 그를 소문으로만 접한 탓에 이러한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것 역시 불만을 촉발했다.

그렇게 폐허가 재건되는 것을 구경하며 몇 시간 정도를 보냈을까.

해 질 무렵, 투란은 성유물의 감각으로 전해지는 신호에 눈을 가늘게 떴다.

'왔군.'

느껴지는 마력의 정도는 상급에서 중간, 딱 원본 오닐과 비슷한 수준.

다리 하나하나의 길이가 십 미터쯤 될 거대한 문어가 지상으로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를 본 토벌대원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제 무기를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훈련받은 대로 대형 유지! 철저히 보조 임무를 수행해라! 주 전투는 우리가 맡는다!"

부관의 외침과 함께 카마인의 마법사들이 문어를 향해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기사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인접한 바닷가에서 대량의 물을 끌어 지배하에 놓는 것.

비록 여울 혈통의 힘을 발현하지 못한 그들이지만, 숙련도가 높은 덕에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더 순조롭게 물을 다룰 수 있어 대량의 바닷물이 모여들었다.

부관을 비롯한 귀족들은 이를 적절히 분배하여 자기들의 얼음 무기를 만들어냈다.

당연히 투란 역시 자기 몫으로 남은 가장 많은 양의 바닷물을 지배하여 거대한 얼음 채찍을 만들어냈다.

성유물을 카마인 혈통으로 설정한 뒤 딱 상급 귀족 수준의 마력을 사용하자 실제 오닐이 썼을 법한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온다!"

그런 마법사들의 기세를 감지한 것일까?

선공은 문어 쪽에서 이루어졌다.

놈의 눈 주변에서 커다란 관 하나가 비죽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대량의 먹물이 콸콸 쏟아졌다.

"으아아아악!"

"켁, 내 눈, 내 눈이!"

가장 앞에 있던 불운한 기사 몇 명이 이를 뒤집어쓰고 비명을 내질렀으나, 다행히 대부분은 몸을 피하거나 유체 조작 마법으로 먹물을 지배해 공격당하는 것을 막았다.

투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대열의 가장 안전한 뒤쪽에 있던 터라 발 하나 움직일 필요도 없었고.

"죽여!"

"이 빌어먹을 문어 새끼가!"

마수의 선제공격에 분노한 카마인의 마법사들은 곧바로 반격을 가했다.

기다란 얼음 창이 다리 하나를 꿰뚫는가 싶더니 과거 비센이 그랬듯 활을 만들어 쏘아낸 화살 몇 개는 눈 주변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귀족들 중 가장 강력한 부관의 얼음 칼 몇 자루는 큼직한 머리통을 파고들어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치게 했다.

그리고 투란이 만들어낸, 길이만 삼십 미터쯤 될 거대한 채찍은 순식간에 놈의 다리 하나를 베어냈다.

"오오!"

"역시 대장님이시다!"

바로 얼마 전까지 뒤에서 그를 씹어대던 기사의 외침이 우스웠으나, 투란은 웃음을 참고 진지한 얼굴로 마수를 상대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격과 방어의 분배였다.

너무 강력하게 공격해서 죽여버리는 건 본래 목적을 망각하는 행위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무력한 모습을 보여 의심을 받는 것도 곤란했다.

그 와중에 자신이 지휘하게 된 토벌대가 죽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방어의 비중이 올라갔다.

"꺼져!"

"가, 감사합니다 대장님!"

얼음 채찍이 문어 다리에 휩쓸릴 뻔했던 기사 한 명을 빠르게 잡아채 날려 보냈다.

감사의 인사를 한 귀로 흘린 투란은 카마인 귀족들이 맹렬히 문어를 공격하는 것을 보았다.

저들 중 일대일로 문어와 대적할 만한 이는 없었으나 투란이 대부분의 공격을 저지하니 일방적으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문어는 온몸에서 푸른 피를 흘리며 몸을 빙글 돌려 바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엇, 도망친다!"

"잡아!"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문어는 눈앞에 생겨나는 서리 송곳 함정들을 그대로 짓밟아 뭉개며 바다를 향해 돌진했다.

카마인 귀족들은 다급히 이를 제지하려 들었으나 중급에서 중하급 수준의 마력을 가진 그들로서는 상급 귀족급의 마력을 가진 문어를 멈추기 역부족이었다.

문제는 그들 중 가장 강한 상급 귀족, 오닐이 이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다는 것.

"대장님! 그냥 가게 두면 안 됩니다!"

"명령하지 마라! 대장은 나다!"

다급히 외치던 부관은 터무니없이 유치한 답변에 경악하여 입을 쩍 벌렸다.

신분 낮은 기사들과 달리 그녀는 오닐이 얼마나 저급한 인간인지 잘 알았다.

고작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유만으로 마수를 놔주고도 남는다는 것 역시.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부디 저놈을 저지하기 위해 힘을-!"

그러나 부관이 사과하고 설득하려 들 새도 없이, 투란은 곧바로 도망치는 문어 마수를 따라 바다로 달려갔다.

"모두 끼어들지 마라! 내가 마무리할 테니! 따라오는 놈은 죽여버리겠다!"

"뭐, 뭔······?"

토벌대원들은 경악하면서도 감히 그를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주의 가까운 친척이자 강력한 귀족인, 그리고 토벌대의 대장인 오닐의 명령이지 않은가.

괜히 거스르다가는 위험을 무릅쓰고도 욕만 먹을 터.

덕분에 투란은 토벌대원들을 뒤로한 채 홀로 문어를 따라 바닷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입에 차오르는 바닷물을 꿀꺽 마시자 숨을 깊게 들이쉰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여울 혈통을 타고난 이에게 따라오는 부가 능력, 수중 호흡.

호흡의 문제 없이 문어를 추격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존재를 느낀 문어가 몸을 빙글 돌렸다.

자신을 계속 따라오는 적이 한 명임을 깨닫고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제는 다섯 개 정도 남은 다리가 쫙 펼쳐지며 그를 감쌌다.

카마인의 상급 귀족 오닐이라면 이 상황에서 당황하거나 두려워했을 수도 있겠지만······.

'잘 가라.'

투란이 손을 뻗고 전력으로 마력을 투사한 순간, 오닐이 쓰던 것과 같은 얼음 채찍 십수 개가 생겨나 문어의 몸뚱이를 마구 헤집으며 뇌를 부숴 숨통을 끊었다.

다리에 별도의 신경이 있는 덕에 좀 더 꿈틀거리기는 했으나 그것은 무의미한 발악일 뿐.

조금 전 토벌대원들의 사투가 무색할 정도였다.

그렇게 손쉽게 마수를 처치한 투란은 곧장 대용량 주머니에서 오닐의 시체를 꺼냈다.

처음 죽인 이래 계속해서 얼려둔 덕에 시체는 제법 신선도가 낮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갓 죽었을 당시에 비하면 다소 상태가 안 좋지만-

'그 정도야 물에 불면 티도 안 나지.'

* * *

"대장님은?"

"아직······."

"젠장, 따라갔어야 했나?"

"그 망나니 새끼! 괜히 공적을 독차지하겠다고······!"

"미친 자식 같으니."

전투 후 몇 시간, 카마인의 토벌대원들은 지친 상태에서도 어디 앉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며 해안가를 전전하고 있었다.

그들의 수장인 오닐이 문어 마수를 잡겠답시고 혼자 뛰어든 탓이다.

뒤늦게나마 귀족들이 오닐을 찾겠다고 뛰어들어 보았으나 이 밤바다 속에서 사라진 이의 흔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

결국 그들은 밖에서 모닥불을 피운 채 오닐이 나오기만을 바라며 주변을 수색할 뿐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기사 한 명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왔다.

"차, 찾았습니다! 문어랑 대장님 모두!"

"어디냐!"

다급히 기사가 알려주는 장소로 달려간 카마인 귀족들은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얼굴을 굳혔다.

어마어마한 사투가 있었음을 증명하듯 날카로운 무언가에 잔뜩 헤집어진 문어 마수의 사체.

파도에 쓸려온 듯 바닷가에 널브러진 그것의 다리 하나에, 목 없는 오닐의 몸뚱이가 휘감겨 있었다.

108화

오닐의 죽음을 발견하고 몇 시간.

토벌대원들은 즉시 범고래 마수에 조련사를 태워 아바챠 본가로 이동, 대장의 죽음을 보고했다.

당연하게도 카마인 가문에서는 난리가 났다.

비록 저열한 품성 탓에 평가가 낮지만 마력으로는 본가의 귀족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한 실력자이지 않던가.

그런 그가 한낱 마수를 잡다가 죽다니?

즉시 진상 조사를 위해 조사단이 편성되었는데 그중에는 오닐의 아버지이자 가주의 동생, 가문의 절대 강자 중 한 명인 제멜 카마인이 있었다.

"여기입니다, 제멜 님."

"흠."

토벌대원들은 더없이 근엄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사내를 보며 몸을 떨었다.

조사단장의 아들이 바로 이 앞에 목 없는 시체가 되어 엎어져 있었으니까.

만약 여기서 제멜이 자식의 죽음에 책임을 묻겠다며 토벌대원들을 즉결처형한다 해도 가주에게 쓴 소리나 몇 번 듣고 넘어가고 말 터였다.

기사들이나 어중간한 수준의 귀족들에 비해 저런 최고위 귀족들의 존재는 귀하디 귀했으니까.

그런 토벌대원들의 불안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멜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제 아들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더없이 무미건조한 투의 질문이었다.

"머리는 왜 잘렸지?"

"그, 마수의 입 안에 들어가 있던 것으로 보아 전투 중 물어뜯긴 것 같습니다."

"문어의 이빨이란 게 생각보다 날카롭군. 몰랐어. 마수라서 그런 것인가."

오닐의 목이 잘린 절단면을 매만지는 모습은 자식을 잃은 슬픔이 너무 큰 나머지 무감각해져버린 사람처럼 느껴졌다.

"사건의 경과를 자세히 설명하도록."

"예, 저희는 작전 지역에서 순조롭게 출발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부관은 진실을 적당히 왜곡하여 보고했다.

원래는 술을 잔뜩 퍼마시며 행패나 부리던 오닐이지만 그가 피해를 입은 지역의 복구를 지시했다거나, 적극적으로 작전 계획을 구상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러자 제멜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만, 내 아들인데 그 정도도 모를까. 괜히 치켜세울 필요 없다. 보나 마나 술이나 처먹고 있었겠지."

"죄, 죄송합니다."

놀라우리만치 자기 자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말에 부관은 경악하면서도 솔직히 인정했다.

한 차례 마음을 읽힌 그녀는 이후로 있었던 일들을 정직히 늘어놓았다.

알아서 하라고 지휘를 일임한 채 주정 부리기, 전투 중에도 뒤에 물러서서 채찍으로 기사들이나 구하며 싸우는 시늉만 하기, 다 죽어가니까 자기가 마무리를 짓겠다며 혼자 뛰어들기······.

이런 걸 다 말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으나 제멜을 비롯한 카마인의 고위 귀족들은 오히려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혼자 뛰어들었다고?"

"예. 따라오면 죽여버리겠다고 하셔서 아무도 도우러 가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흠. 생각보다 용감했군.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부관은 놀라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까지는 너무 슬픈 나머지 딱딱하게 군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숫제 기르는 개가 죽었을 때만도 못한 태도이지 않나.

그렇게 놀라기도 잠시, 제멜의 시선이 돌아오자 부관은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오닐의 몸에 마력이 없는 것 같은데?"

"아마 머리를 먹히는 와중 흡수당한 것 같습니다. 정작 마수는 마력을 소화하기에 너무 상처가 심한 나머지······."

"흡수 중 죽어버리며 잉여분이 증발했단 거군. 모두 마력을 투사해 보도록."

토벌대의 귀족들에게 마력 투사를 명령한 제멜은 그들 중 특별히 강해진 이가 없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그들은 오닐의 시체에 남은 마력을 약탈했다는 죄목을 벗을 수 있었다.

이후 제멜이 조사대원들과 작게 이야기하는 동안, 토벌대원들은 사형수가 된 심정으로 입술이나 손톱을 마구 짓씹었다.

잠시 후, 그들에게 선고가 내렸다.

"이번에 참여한 귀족들은 모두 성장 한계에 도달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맞나?"

"마, 맞습니다."

"마수의 마력은 너희 넷에게 분배될 거다. 바로 흡수하도록."

제멜이 내린 처분에 토벌대원들은 물론이요, 조사대원들조차 놀란 기색을 보였다.

토벌대 귀족 중 한 명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 처벌은?"

"처벌은 없다. 너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현실적으로 오닐을 막을 수도 없었을 테니. 오히려 내가 가주께 사과해야 할 일이다. 자식을 미욱하게 키워 모두를 위험하게 하지 않았나."

"제멜 님······!"

자식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덤덤히 자신의 부덕함을 털어놓는 그의 모습에 토벌대원들 중 몇몇은 감동한 나머지 찔끔 눈물마저 흘렸다.

이렇게 훌륭한 아버지에게서 어찌 그런 개망나니 같은 자식이 나왔단 말인가?

토벌대의 귀족들이 마력을 흡수하는 사이, 제멜은 조금 떨어져서 오닐의 시체를 다시 관찰했다.

아버지가 자식과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다른 이들은 접근하지 않고 삼가는 태도를 보였다.

"흠······설마 가짜 같은 건 아니겠지? 내 아들이지만 이렇게 봐선 잘 모르겠단 말이야. 안 불었으면 좀 나았으려나."

제멜은 오닐의 불어 터진 얼굴이며 몸뚱이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부모는 자식의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안다는 것도 평민들의 이야기지, 어려서부터 하인들에게 떠맡긴 그가 아들의 신체적 특징 따위를 알 리 없었다.

그 정도로 깊게 관심 주어 가며 키운 자식도 아니었고.

"주작이 뭔가 비범한 느낌이 든대서 한번 제대로 키워보고 싶었는데······쯧, 이렇게 죽어버릴 줄은."

그 자체로도 제법 쓸만한 실력자인 것은 물론, 그들 중 한 명이 사고로 죽었을 때 급히 사용할 예비 육체이기도 했던 터라 영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다시 말하자면 오직 그뿐.

지금까지 수백 명쯤 있었고 앞으로도 수천 명은 더 있을 자식 중 하나가 죽었다고.

제멜은 그렇게 생각하며 오닐의 얼굴과 이름, 몇 없는 추억 따위를 기억에서 지웠다.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비결 중 하나는, 불필요한 정보를 제때제때 정리하는 것이었다.

* * *

적당히 물에 불어 터진 오닐의 시체를 토벌대원들에게 내던진 뒤, 투란은 은신한 채 마지막 과정까지 세심히 관찰했다.

혹시라도 제멜을 비롯한 조사대 중 누군가가 오닐의 죽음을 자세히 파고들어 의혹을 밝혀낸다면 지금과 같은 바꿔치기 전략은 두 번 쓸 수 없게 될 테니까.

다행히 카마인의 귀족들은 그가 만들어낸 연극을 그럭저럭 받아들였다.

시체를 자세히 조사하면 무언가 허점을 한두 개 찾았을지도 모르지만, 보통 사람들은 누가 봐도 명확한 결론 앞에서 굳이 복잡하고 어려운 진상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오닐의 몸뚱이가 관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뒤, 자유의 몸이 된 투란은 평범한 어부로 위장하여 근처의 섬에서 배 한 척을 샀다.

"자, 이제 어디부터 찾아본다······."

투란이 곧장 남부 간척지로 돌아가는 대신 북해로 나온 것은 인어들을 찾기 위함이었다.

정확히는 그와 함께 큰바다뱀의 사령에 맞서 싸웠던, 아르마니가 속한 계파의 인어 왕족들을.

이번 문어 마수의 습격을 본 투란은 이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시를 공격하러 오는 문어의 모습은 분노나 식욕, 흥미 따위보다는 오히려 누군가가 시킨 일을 수행하려는 듯한 태도에 가까워 보였으니까.

거울을 통해 이를 전하자 솔리프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혼자 인어들이랑 만나겠다고? 큰바다뱀들의 힘을 쓴다면 혼자서는 힘들 텐데.]

"싸우지는 않을 거야. 그냥 정말로 마수들을 해안에 몰아넣고 있는지만 알아볼 뿐이지."

일단 진상을 알아둔 뒤 손이 남을 때 메이사, 솔리프와 함께 쳐들어가서 때려 부수면 됐다.

세력의 힘이라는 걸 저쪽만 쓰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보고를 마친 투란은 홀로 배 한 척을 탄 채 북해 위를 미끄러지듯 항해했다.

'역시 혼자 배 타고 여행하는 건 쓸쓸한걸.'

예전에 솔리프, 메이사와 함께 했을 때는 좀 지루하긴 했어도 서로 떠들며 웃는 것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비제가 귀엽게 재롱부리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았고 말이다.

그나마 다행히 아예 할 일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 대용량 주머니에 아시즈에게 받은 책 여러 권이 있어 그것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울 혈통의 힘으로 배를 움직여 북해를 누비며 책 한 권을 펼친 투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아, 찾았다."

그렇게 탐사하기를 사흘.

그가 마주한 것은 어느 배를 습격하는 인어 떼거리였다.

차림새로 보아 해적으로 보이는 이들은 전의를 잃고 바다로 뛰어내리다가 인어들에게 잡혀 산 채로 잡아먹히고 있었는데, 아무리 악당들이라 해도 식인 현장을 바라보기는 영 내키지 않는 터라 투란은 곧장 현장에 개입하기로 했다.

손짓 한 번에 솟구친 바닷물이 순식간에 수십 개의 얼음송곳이 되어 인어들을 향해 쏘아졌다.

"캬아-!"

정밀하게 날아든 송곳은 순식간에 인어들의 팔과 다리를 찢어발겼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나뒹구는 것뿐이었다.

온몸을 물어뜯긴 해적들은 간절한 표정으로 투란에게 손을 뻗었으나 그는 이를 외면했다.

회복 마법기를 메이사에게 맡겨두고 오기도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늑대 족속에 속하는 해적을 살려둘 마음은 없었다.

염동 마법으로 인어 한 마리를 끌고 온 투란은 곧장 놈을 향해 윽박지르듯 말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너희들의 왕족을 데려와라. 안 그러면 죽인다."

그러나 투란의 질문에 돌아온 것은 캬악, 하는 짐승의 신음과 발버둥뿐이었다.

레토를 통해 배운 고문의 정석을 사용해 보았으나 이 역시 먹혀들지 않았다.

인어들은 하나같이 사람의 살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며 입을 딱딱거릴 뿐, 무언가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쯧."

투란은 인어들을 모두 살처분한 다음 배를 뒤져 보았다.

예상대로 해적선인 배는 이전에 그가 팔았던 것에 비해 훨씬 낡고 허름한 데다 손상된 곳이 많았기에 그냥 내버렸다.

이전처럼 팔아치울 방법이 마땅찮기도 했고.

이후 북해 곳곳을 돌며 인어들을 몇 번 더 만났으나 그때마다 하나같이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나마 대화가 가능한 인어를 만난 것은 무려 일곱 번째 만남에서였다.

"너, 너어······는······."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면서도 말을 하는 인어.

몸 안에 다른 인어들보다 조금 더 강한 힘을 담은 것은 물론이요, 체격도 좋은 편인 것으로 보아 귀족 계급인 듯했다.

"이봐, 내 말을 들을 수 있나?"

"그, 그래······아니, 너······너무 맛있어 보여······왜······?"

"인어 귀족인가?"

"맞아······."

귀족 계급이라서 그나마 대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욕구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일까.

투란은 그를 붙잡아 채근했다.

"너희 왕족들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우리, 우리 왕족······도망쳤어, 거울 너머로······."

"거울 너머? 남해로 이어진 거울을 말하는 건가?"

투란의 물음에 인어 귀족은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들도 알 건 다 안다. 그래서, 모든 인어 왕족들이 내려간 건가? 북해에는 아무도 없고?"

인어 귀족은 대답하고 싶지 않은지 입을 꾹 다물었으나, 발톱을 창의적으로 파고드는 얼음 송곳의 감촉에 비명을 내지르다가 이내 술술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본능이 약해지고 이성이 강해지는 만큼 고통에 대한 내성도 떨어지는 듯했다.

"사, 사제장의 일족이 부활했다······왕족들은 그들에게 죽고 싶지 않으니 도망쳤고······."

고통과 식욕의 충돌 탓인지 반쯤 오락가락하는 탓에 설명이 길어졌으나, 몇 번씩 다시 묻자 대충 윤곽을 알 수 있었다.

설명에 의하면 아르마니가 속한 계파의 인어 왕족들이 큰바다뱀의 힘을 얻자, 다른 인어들은 숙청당할 것을 두려워해 남해로 도망쳤다는 모양이었다.

그들 같은 귀족 중에서도 쭉정이인 이들과 평민 계급의 인어들은 남겨졌고.

"마수들이 해안을 습격하는 이유는 뭐지?"

"마수······? 아마도, 사제장들······지배······."

큰바다뱀의 혈족에게 마수를 지배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에 투란은 얼굴을 굳혔다.

그의 예상이 맞아떨어질 가능성이 더 커졌으니까.

이후 몇 가지를 더 물어본 뒤, 투란은 귀족의 숨통을 끊었다.

"살려줘······."

"살고 싶었으면 사람을 먹으려 들지 말았어야지."

인간들을 해치는 이종족이란 양을 물어가려는 늑대일 뿐.

그것이 자기들 사이에서 얼마나 선량하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 * *

유감스럽게도 인어 귀족을 심문해서도 아르마니의 친족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인어 귀족은 다른 인어 왕족들의 휘하에 속한 이였으니까.

심문한 결과에 의하면 지금 그 계파에 속한 인어들은 다들 깊은 바닷속에서 치열하게 세력 다툼 중일 것이라고 했다.

그처럼 물 밖에 나온 이들은 죄다 평민이나 끈 떨어진 귀족들일 뿐이고.

그 시점에서 투란은 인어들에 대한 탐사를 멈추고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마수들의 해안 침공에 인어들의 지분이, 그것도 아르마니 쪽 인어들의 영향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으로 목적은 달성되었으니까.

아마 다음에 올 때는 혼자가 아닐 터였다.

투란은 비제를 부르는 대신 직접 배를 몰아 남서쪽으로 향했다.

그와 달리 비제는 추적 능력이 없는 터라 이곳이 어디인지 설명해서 오게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러다 보면 드넓은 북해를 헤매기 십상이었다.

그러느니 스스로 대륙에 도착한 다음 적당히 접선하기 좋은 위치에서 비제를 불러 타고 내려가는 게 나았다.

'이참에 칼라마프도 한번 들러볼 만하겠는걸.'

마침 딱 지금 위치에서 남서쪽으로 가다 보면 회색 지대에 상륙할 가능성이 컸다.

쭉 남쪽으로 내려가면 엔릴 사막에 도착할 것이고.

꾸준히 배를 몰아 이동하기를 약 오 일.

투란은 대륙의 어느 해안가에 상륙했다.

바다 위에 제법 오래 있었던 탓인지 예전에 청새치 호를 타다가 내렸을 때처럼 묘한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저기, 혹시 여기가 회색 지대가 맞습니까? 폭풍에 휘말려서 여기가 어딘지 잘······."

"맞네. 자네 운도 없구먼. 요새는 바람도 잘 안 분다던데."

근처의 어촌에서 위치를 확인한 뒤, 투란은 평범한 여행자 차림으로 바꿔 입고 내륙으로 이동했다.

칼라마프는 회색 지대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도시.

적당히 큰길을 따라 방향을 잡고 이동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닿게 될 터였다.

[곧 갈게!]

"그래, 먼저 가면 조심히 기다리고 있어."

물론 최상위 귀족급의 마수인 비제가 위험할 일이 얼마나 있겠느냐만은, 투란은 거울 너머로 석판을 든 비제의 모습을 보고 웃음지었다.

그렇게 인적 없는 곳을 빠른 걸음으로 뛰어 움직이기를 약 사흘.

칼라마프에 도착한 투란은 그가 구원한 도시의 모습을 감회 깊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다들 잘 지내는 모양이네."

한때 반쯤 허물어졌다가 새로이 보수한 성벽부터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까지, 마지막으로 떠났을 때와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그와 계약한 영주가 도시를 제법 잘 다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비제와 만나기 전, 가볍게 내부를 둘러볼 생각으로 성문을 넘은 투란은 뜻밖의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내 동상이 없네?'

민망해 죽을 것 같기는 했으나 내심 뿌듯함도 조금 느꼈는데, 각 성문 옆마다 설치했던 투란의 동상이 모두 철거되어 있었다.

이곳을 통치하기로 한 가문이 자기들의 영향력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 제거한 것일까?

조금 불쾌하지만 썩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닌지라, 투란은 혀를 차며 시청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계약했던 대로 마수 사냥 같은 것들만 잘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나갈 참이었다.

그런데······.

"하."

시청 앞에 붙은 커다란 공고.

대충 이런저런 이유로 새로 세금이 생기니 바치라는 내용 밑에 적힌 문구를 보고 투란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를 칼라마프의 영주, 투란의 이름으로 선언한다.]

당연하게도, 기뻐서 나온 웃음은 아니었다.

109화

투란에게 있어 칼라마프는 특별한 도시였다.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접 얻어내고 다스린 영토.

이곳의 시민들은 그가 손수 먹여 키워낸 양들이요, 성벽은 공들여 지은 울타리였다.

그런데 그런 땅에서, 자신의 이름을 사칭해서 백성들을 착취하려 드는 이를 만나다니?

이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투란은 발끈하여 중앙 저택으로 쳐들어가는 대신, 마음을 가라앉히며 세금 공고를 다시 확인했다.

'소득세 개정안. 일부 사치품 거래 과정에서 추가로 세금을 걷는 건가.'

세법(稅法)이니 뭐니 하는 것은 평민들의 일인 만큼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칼라마프의 지도자로 일하는 동안 겉핥기 수준의 지식은 쌓았다.

그것을 기반으로 유추하건대 적어도 이곳에 적힌 새 규정은 가난한 이들을 쥐어짠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해진 세금 비율 역시 과도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다시 말해서 투란의 이름이 걸린 것을 빼면 꽤 합리적인 내용이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가혹한 착취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투란은 머리를 식힌 뒤, 근처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가서 술 한잔을 시켰다.

늙은 주인이 술잔을 가져다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젊은 친구가 대낮부터 술인가?"

"먼 곳에서 왔더니 다리가 오죽 아파야지 말입니다. 이런 술 한 잔이 아니고선 어떻게 고통을 이기겠어요?"

"여행자인가 보군."

"비슷합니다. 칼라마프에는 한 일 년 만에 오는 것 같은데 뭐가 많이 바뀌었네요."

투란의 말에 주점 주인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뭐 그리 바뀐 게 있다고."

"많은데요. 제가 떠날 때쯤엔 투란 님의 석상이 성문 주변에 있었는데 그것도 다 없어졌고······새 영주님이 오셨었단 얘기를 들었는데, 혹시 그분이 부수신 겁니까?"

"돌아오신 투란 님께서 직접 부수신 걸세. 민망하다고 하시더구먼. 본인이 그러시다는데 어쩌겠나."

"그랬군요. 그러고 보니, 투란 님은 떠나기로 하셨다고 들었는데 어찌 돌아오신 겁니까?"

자기 자신에게 존칭을 붙이는 건 꽤 민망한 일이었지만 이제 그쯤은 자연스럽게 견딜 정도로 얼굴 가죽이 두꺼워진 상태였다.

아예 생판 다른 남을 위장해 살아보기까지 했는데 이 정도가 대수일까?

과연 투란의 연기가 썩 훌륭했는지, 술집 주인은 이상해하는 기색 없이 태연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높으신 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야 나 같은 무식한 놈이 알 바 아니지만, 두 달쯤 전에 다시 돌아와서 도시를 통치하기로 하셨다네. 기쁜 일이지. 이 도시가 진정한 주인을 맞이한 것이니."

호감이 가득하다 못해 넘쳐 흐르는 말투와 나이로 보건대, 이 주인은 아마 과거 투란이 칼라마프에 처음 왔을 당시 남아있던 원주민 중 한 명인 듯했다.

그가 도시를 구원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며 가장 열성적인 광신도가 되었던 이들.

투란은 이를 고려하여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두 달이라······어떻게, 예전이랑 달라지신 건 없습니까?"

"전과 달리 가면을 쓰셨더군. 듣기론 오지에서 웬 마수랑 싸우다 얼굴을 심하게 다치셨다던가."

"저런."

"참으로 슬픈 일이지. 만약 내 늙은 얼굴 가죽을 대신 바쳐 나을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드렸을 텐데. 자네 그분의 얼굴을 본 적 있나? 저 천상의 프레아 신들조차 그만큼 잘생기지는 않았을 게야."

자기 얼굴에 대한 극찬까지 들으니 아무리 투란이라도 얼굴이 붉어져서, 그는 술 한 잔을 더 마신 뒤 좀 취한 것 같다고 핑계를 대며 주점을 나왔다.

다음으로 투란이 한 일은 근처의 골목에서 은신한 채 시청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일단 일반 시민으로부터 정보를 모았으니 이제는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볼 참이었다.

"이봐, 담당자 어디 갔어?"

"점심 식사하러 가셨는데······."

"빨리 오라고 해! 서류가 이만큼 쌓였는데 정신이 있는-"

시청의 공무원들은 예전과 같이 한참 바빠 보였다.

그 익숙한 풍경을 지나치며, 투란은 돌아다니는 사람 중 아는 얼굴들을 한둘씩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시청 건물의 안쪽에서 마주친 기사 한 명.

이제 서른 살쯤 되었을, 무료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하품하는 여인의 내면에서는 자하르의 상징이 보였다.

얼마 전 탈리스가 그의 존재를 인지했음을 말했던 덕에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보나 마나 자하르에서 투란을 도발해서 낚아보고자 이런 짓을 한 것일 터였다.

본래 칼라마프를 양도받았던 메버른 가문이야 애초에 친 자하르 파벌이니 한 번 으르렁거린 것만으로도 냅다 도시를 바쳤을 것이고.

이후 투란은 은신한 채 시청 한편에 가만히 서서 수십 분 동안 공무원들의 업무 수행을 확인했다.

민원, 신고, 그 외의 온갖 복잡한 자료를 처리하는 과정을.

그 결과, 특별히 기강이 해이해지거나 도시 내에 특별한 문제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생각보다 잘 돌아가서 당황스러울 지경인데.'

심지어 파견된 자하르 기사들은 도시 주변에 마수가 출몰했다는 소식을 접하면 직접 잡으러 나가기까지 했다.

과거 투란이 도시를 인도받아야 했던 메버른의 가주, 알로스에게 요구했던 것처럼.

그렇게 내부 사정을 확인한 투란은 마지막으로 가짜가 머무르고 있을 중앙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택 입구에 도착한 그는 내부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이거 어디서 되게 많이 본 짓거리잖아?'

과거 베르크 가문의 저택이나 아라비온 본가에서 본 적 있던 기초적인 마법기, 발광구(發光球).

그것이 저택 주변에 빼곡히 박혀 빛났다.

감히 자하르의 암살자 따위는 이 안에 들어설 엄두조차 내지 말라는 식으로.

이래서야 적대 가문인 아라비온과 우스우리만치 똑같은 방법이지 않은가?

이를 통해 저들 역시 동족들의 은신을 막아낼 뚜렷한 비법 따윈 없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기야 자하르 혈통만 쓸 수 있는 비법 같은 게 아니라면 곧바로 다른 이들에게 퍼져 그들을 노리는 칼이 될 테니 있어도 감춰야 하는 게 맞겠지만.

그렇게 투란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이들이 철저히 방비해놓았음을, 그래서 은신한 채 몰래 진입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내부 구조를 훤히 알고 있다면야 베르크 저택에 침입할 때처럼 재빨리 들어갈 수 있겠지만, 그가 기억하는 칼라마프의 중앙 저택은 어디까지나 부랑자 수용소였다.

하지만 투란에게는 직접 안에 들어가지 않고도 내부를 확인할 수단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흉내쟁이 성유물 특유의 감지 능력.

이것으로 안쪽을 확인하자 상급 귀족 한 명, 중급 귀족 두 명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숫자나 강함으로 봐선 딱 상급 귀족 수준인 사람 한 명을 잡아가려고 배치한 거군.'

다들 제법 강력한 마법기 여럿으로 무장하고 주변에 정체 모를 결계나 마법 등도 깔린 것으로 보건대, 상급 귀족 투란이 사칭을 보복하려 찾아왔다면 수월히 사냥당했을 게 분명했다.

한참 정보를 모으던 도중, 안쪽의 귀족들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설마 이 거리에서 정찰한 걸 알아차렸나?'

그런 투란의 놀람이 무색하게도, 귀족들이 나선 것은 그저 평범한 순시(巡視)를 위함이었다.

가짜 투란은 말 한 마리에 올라탄 채 기사로 보이는 수행원들과 함께 칼라마프 시내를 행진했다.

"오오, 투란 님······."

"이쪽을 보셨어!"

"아니, 나야!"

재잘대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보건대 이러한 순찰은 썩 드문 일이 아닌 듯했다.

가짜 투란은 본래의 그와 꽤 비슷한 체격을 한 남자로, 회색 꽁지머리도 똑같았으나 얼굴에는 금속으로 독수리를 복잡하게 조각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안장 한편에는 비제와 같은 검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는데, 마수는 아니고 그냥 잘 훈련된 검독수리였다.

투란은 일반인인 척 적당히 가까이 접근해 가짜 일행의 내면에 자리한 상징을 확인했다.

그를 사칭하는 상급 귀족은 자하르, 기사인 척 뒤에서 따라오는 중위권 두 명은 각각 결계사와 환영 혈통이었다.

'결계사랑 환영이면 둘 다 자하르의 가신 가문이었지······.'

투란은 자신을 사칭하는 가짜가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손을 흔드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 * *

그날 밤, 칼라마프 인근의 언덕에서 투란은 오랜만에 비제와 인사를 나누었다.

낮에 보았던 녀석과 달리 지성이 느껴지는 영민한 눈을 한 이 검독수리는, 투란을 보자마자 몸통 박치기를 하듯 달려들어 그의 가슴에 머리를 부벼댔다.

얼마나 등을 쓸어주었을까, 비제가 바닥에 빠르게 글씨를 써내려갔다.

[못 만나서 슬펐어! 솔리프는 멍청이야! 메이사는 착하지만 투란이 더 좋아!]

"그래그래, 나도 너랑 만나고 싶었어. 자, 여기 먹을 거."

[자꾸 먹을 거로 넘어가려고 하지 마!]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비제는 투란이 미리 준비한 비장의 양고기 육포를 덥석 받아먹었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온갖 어리광을 부려대는 녀석을 달래준 다음, 투란은 비제와 함께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가 향한 곳은 칼라마프에서 동남쪽에 자리한 도시, 비겐.

그곳의 영주이자 본래 도시의 통치 권리를 양도받았던 알로스 메버른을 만나는 것이 다음 목표였다.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비겐 시에 도착한 투란은 성유물의 감각을 끌어올려 중앙 저택 주변에 그럴싸한 방어 체계 따윈 없음을 확인하고 뛰어내렸다.

은신 마법을 사용한 그가 정원에 착륙하는 것을,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알아차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가문의 본거지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수준의 경계 태세······.

평범한 마법사 가문이라면 다들 이럴 수밖에 없기는 했다.

마법기를 만들 수 있는 건 부여사의 특권인데, 대부분의 부여사 혈통 귀족들은 대가문에만 속해 있으니까.

그나마 다음으로 안전한 곳이라면 결계사 혈통의 본거지 정도일까.

은신한 채 태연히 저택 안을 헤집던 투란은 마침 저녁을 다 먹고 홀로 차를 마시던 알로스를 발견, 그 뒤에서 은신을 해제하며 말을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알로스."

콰당탕, 굉음과 함께 그 자리에서 탁자를 엎어버리며 일어선 알로스는 투란을 귀신 보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영주의 저택 한복판에 자리한 차실에 느닷없이 침입자가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

당연하게도 이 소음을 듣고 밖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영주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아무 일도 없다! 들어오지 마라!"

알로스의 외침에 밖에서 조금 더 소란이 일어나더니 이내 고요함이 찾아왔다.

깊게 한숨을 내쉰 그가 나지막이 답했다.

"그래, 그래요······일 년 만이던가요, 투란 자하르 님."

투란 자하르.

입으로 한 차례 되뇌어도 썩 내키지 않는 울림이었다.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투란은 능숙한 염동 마법으로 넘어진 탁자를 일으키며 바닥에 떨어진 찻물을 끌어올려 날려 보낸 다음 맞은편에 앉았다.

이를 본 알로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우선 앉으시죠."

"저는······."

"싸우러 온 건 아닙니다. 무례하게 한밤중에 찾아온 건 죄송하게 됐습니다만, 상황이 상황이니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투란의 정중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알로스의 얼굴에 깃든 두려움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침실에 칼을 들고 침입한 누군가가 정중한 말투로 말한다고 덜 두려울 리는 없으니까.

"저는, 저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친족들을 감히 거스를 수 없었어요."

"그건 저도 압니다. 막상 가 보니까 통치도 썩 나쁘지 않게 하고 있더군요. 다행히도."

일관되게 차분한 목소리 덕일까, 그제야 알로스 역시 어느 정도 진정한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를 향해, 투란은 다시금 목줄을 콱 쥐는 질문을 던졌다.

"저에 대해서 어디까지 말했습니까?"

"예?"

"자하르 쪽에 제 정보를 전했을 텐데요."

"그건······."

"그건······."

불리한 질문을 받자 알로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과거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이 영주는 제법 영리한 사람이라서, 이렇게 여유를 주지 않고 주도권을 쥔 채 흔드는 것이 대화하기 편했다.

"말하셔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집안 일인데 그것 가지고 알로스 님을 해치기야 하겠습니까. 혹시 탈리스 님도 왔다 가셨던가요?"

태연히 자하르의 실력자, 탈리스를 언급하는 투란의 태도에 알로스의 얼굴에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어렸다.

잠시 후, 그가 자포자기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예······."

알로스는 자신이 자하르 가문의 압력에 굴복하여 그가 아는 모든 것을 진술했다는 것을 고했다.

투란의 부모를 조사했던 내용부터 그가 도중에 아라비온 귀족들과 함께 흑요정 토벌에 참여했던 것, 그리고 거래 도중 도시 경영을 안정적으로 하라고 요구한 것까지.

'과연, 멀쩡하게 통치하고 있는 이유는 그래서인가.'

투란이 칼라마프 시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면 자하르가 이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그쪽에 적대감을 만드는 행위.

따라서 적당히 운영하며 자신의 명성이 도둑질당했음을 깨닫고 발끈해 쳐들어온 투란을 제압, 적당히 구슬려 보겠다는 의도일 터였다.

"다른 가문들도 자하르가 칼라마프를 지배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자하르에서도 알지 못하게 보안을 유지하라고 했습니다. 아라비온 쪽이 알면 귀찮게 된다면서······."

"절 사칭하는 귀족이 누군지는요?"

"그것도 모릅니다. 애초에 투란 님을 사칭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전해들었을 정도라."

하기야, 그들이 알로스에게 썩 신경써주지 않는다는 것은 저택의 경비 태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십중팔구 투란이 그에게 보복하러 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 꼴이지 않나.

모든 진술을 들은 뒤, 투란은 알로스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일단 자하르 쪽에 전해 주십시오.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통치하면 절 사칭한 건 용서하겠다고요."

"······예?"

투란의 말에 알로스는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상 쫓기고 있음을 알게 된 상황에서 자신의 방문을 자하르 쪽에 알리라는 것부터가 비상식적인 말인데, 그 내용이 '용서하겠다'라니?

이래서야 누가 봐도 도발에 가까운 행위가 아닌가.

그런 그를 향해 투란이 이어서 말했다.

"덤으로 이것도 전해 주십시오. 이런 수작을 부린 것으로 보아 저를 가문에 영입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만약 이런 말을 들었다고 칼라마프의 통치를 게을리하거나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면 저도 엔릴 사막에 있는 자하르의 가신 가문들에 똑같은 짓을 할 거라고 말입니다."

"아니, 그건 숫제-"

"예. 협박입니다."

더없이 당당한 투란의 말에 알로스는 도저히 뭐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가문 자하르, 세상의 모든 대가문 중 가장 음험하고 잔인하며 집요한 이들을 상대로 감히 협박이라니?

이미 물러설 곳 없이 적대적인 아라비온 귀족이 아니고서야 세상 그 누구도 저들을 그렇게 대할 수는 없었다.

아니, 아라비온 귀족들조차도 어지간한 일로는 상대를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라도 저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자하르야말로 가장 잘 알겠죠. 자기들에게 적대적인 자하르 귀족이 충돌을 피한 채 사막을 헤집으며 괴롭히면 어떤 끔찍한 일이 생길지."

"그야······그렇지요."

지금 투란이 알로스를 독대하고 있는 상황만 봐도 그 영향이 얼마나 무시무시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날이야 아라비온에 속한 귀족들도 전쟁이 끝난 만큼 그럭저럭 돌아다니고 있지만, 전쟁 중에는 순례는커녕 가문의 저택조차 함부로 벗어나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 대신, 순순히 칼라마프를 통치하고 있으면 조만간 직접 만나러 갈 겁니다. 한 십 년에서 오십 년 정도 안에. 그렇게 전해 주시면 됩니다."

"그들이 그걸 받아들이겠습니까?"

"받아들이지 않으면 서로 슬픈 일이 생기겠죠."

덤덤한 말투로 대답하는 투란의 모습을 보며 알로스는 직감했다.

정말로 저들이 칼라마프를 잘 경영하지 않으면 투란은 자기가 말한 대로 자하르의 땅을 습격하고도 남으리라는 것을.

그간의 경험상 저것은 결코 허세를 부리는 이의 표정이며 말투가 아니었다.

그렇게 선언한 뒤, 투란은 마지막으로 품에서 귀걸이 하나를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건 무엇입니까?"

"착용자에게 약한 화염 내성 효과를 주는 기능이 있다더군요. 여행 중에 우연히 얻은 물건입니다."

"이걸 왜······."

"알로스 님은 계약을 준수하려고 했는데 제 가문의 압력으로 일이 잘못된 것이니까요."

잃어버린 도시의 몫이라는 투란의 말에 알로스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귀걸이를 받아 착용했다.

어쨌든, 그와 같은 평범한 가문의 가주에게 있어 마법기란 한 개라도 있으면 좋은 물건이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니요, 오히려 이것밖에 드릴 게 없어서 죄송할 뿐이죠. 그러면 나중에 뵙겠습니다."

말이 끝난 순간, 자리에 앉아 있던 투란의 모습이 마치 지워낸 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알로스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끅끅 웃음을 터트렸다.

한 가문의 주인인 그지만, 대가문 앞에서는 스스로가 너무도 작은 존재임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1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