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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 80-85

80화

라비타스의 가주가 오고 있다는 말을 듣자, 두 사람 역시 조금 전 투란이 그랬듯이 긴장한 표정으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메이사였다.

"대가문의 가주면, 설마...?"

"모르지. 아마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안에 어느 신적 존재가 빙의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 투란이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리다가 굳이 백요정의 소재를 탐색하던 것으로 보건대 저들 가문은 영혼을 가지고 장난칠 능력이 없어 보였지만, 그 외의 방법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이를 들은 솔리프가 질린 듯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도망칠까?"

"우리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뭘. 그랬다간 오히려 더 수상쩍어 보일걸."

만약 저 라비타스 가주로 짐작되는 마법사가 아라비온 가주처럼 압도적으로 강했다면 안전을 위해서라도 도망쳤겠지만,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 세 사람이 힘을 합치면 싸워 이기진 못할지언정 도망 정도는 치고도 남을 터.

심지어 라비타스의 혈통 능력은 생존에나 적합하지 전투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 편 아닌가.

여기서는 다소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정보를 캐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결정한 세 사람이 마법 연습으로 소모되었던 마력을 회복하는 사이, 밑에서 올라오는 두 명의 귀족은 아이쿨과 만나 무언가 대화를 나눴다.

아이쿨이 그들이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보건대 산 위에 방문자가 있음을 알려 주는 듯했다.

잠시 후 리다가 그들이 있는 곳까지 올라왔을 때, 투란은 그녀의 옆에 있는 사람의 외모를 보고 깜짝 놀랐다.

강대한 마력을 가진 이의 정체가 기껏해야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곱상한 인상의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쪽의 존재를 알아챈 리다가 투란을 향해 손짓하며 외쳤다.

"아니, 투란 군 아닌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리다 님."

"오랜만은 무슨? 기껏해야 서너 달쯤 된 것 같은데. 나 같은 사람에겐 지난밤처럼 가까운 시간이라네!"

여전히 젊은 얼굴과 목소리로 늙은이처럼 말하는 리다의 모습은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그때, 옆에 있던 소년이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듯 작게 헛기침했다.

"으흠."

"그러고 보면 이쪽은 초면이군. 여기는 투란, 그러니까 어디더라...."

"칼라마프에서 왔습니다."

"아, 맞아! 내 늙어서 그런지 자주 깜빡한다네. 저 북동부 칼라마프 시에서 온 투란 군일세. 음, 방랑 귀족이었지. 이쪽은 오셀 라비타스, 내 사촌 동생일세."

"투란입니다."

"음."

투란이 상대의 정체를 모른 척 태연히 인사하자, 근엄한 얼굴로 인사를 받던 오셀이 옆구리를 찌르는 리다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저들 역시 소년의 정체가 라비타스의 가주라는 것을 감추려는 모양.

투란은 거리가 가까워지자 곧장 성유물의 감각을 끌어올리며 두 사람의 몸속에 자리한 상징을 확인했다.

맞잡은 은빛 손, 그리고 하얀 뱀 두 마리가 휘감긴 지팡이.

각각 정화자와 치유사 혈통의 상징이었다.

'라비타스 가주에게는 세 번째 혈통이 없어....'

이를 본 투란은 어느 정도 어깨에서 힘을 뺄 수 있었다.

눈앞의 소년이 어느 신이 빙의한 것이 아닌, 그냥 특출나게 강력할 뿐인 마법사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런 것치고 저 강대한 마력을 어떻게 쌓은 것인지는 불명이었지만.

그때, 리다가 뒤쪽에 선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면 친구가 더 늘었구먼. 소개해줄 수 있겠나?"

"이쪽은 솔과 미샤라고 하는데, 둘 다 저와 비슷한 처지인 친구들로 뜻이 맞아서 함께 다니게 됐습니다."

솔과 미샤, 그것이 두 사람이 앞으로 쓰기로 한 가명이었다.

본래 가명이란 걸 왜 쓰는지 생각하면 아예 비슷하지도 않은 이름을 쓰는 게 옳겠지만, 그러다 보면 불러도 반응이 늦는 경우가 잦은 탓에 그냥 적당히 비슷하면서도 이미 쓰이는 이름을 고르기로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리다 님이시지요? 투란 이 친구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로 아름다우시군요!"

인사하며 꾸벅 고개만 숙이는 메이사와 달리 솔리프는 능청스럽게 칭찬하며 친한 척을 했다.

이런 넉살 좋은 모습이 기꺼웠는지 리다가 유쾌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 늙은이를 띄워줘 봐야 나올 것 없네! 그보다 아이쿨에게 듣기로 여기서 몇 주 정도 머물렀다는 것 같던데, 온천이라도 즐기러 왔는가?"

"예. 혹시 저희가 여기 머무르는 게 폐가 된다면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그건 아닐세! 어차피 자연이 내려준 것인데 쓰는 사람이 임자 아니겠나, 다만...."

어째서일까, 리다가 조금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네들 정화 마법기 가지고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만...."

"앞으로도 계속 온천을 이용할 생각이거든 하나씩 구해 두게나. 알다시피 이곳 온천은 원숭이들이 많이 쓰는데, 그 녀석들은 몸을 담근 채 똥을 싸는 고약한 버릇이 있거든. 뭐, 우리가 병에 걸리거나 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찜찜하지 않은가."

자기는 평소 온천에 들어가기 전 늘 정화 마법을 쓴다고, 리다가 덧붙인 말에 투란 일행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그렇게 충격적인 진실로 모두를 꺼림칙하게 만든 리다는 메이사의 얼굴을 흘깃 보더니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해독제가 필요해서 유황을 찾았었지? 확실히 저 아가씨 건강이 많이 안 좋아보이는구먼. 그런데 귀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메이사는 최근 며칠 동안 계속해서 음식을 주입받으며 체중이 반 배 가까이 증가했지만, 여전히 일반인 기준으로는 끔찍하리만치 저체중이었다.

물론 시체나 다름없는 해골에서 병든 아가씨 정도로 보이게 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진전이었지만.

치료라도 해주겠다고 나서면 곤란한 만큼, 투란은 작게 헛기침하며 화제를 돌렸다.

"유황은 메-미샤 때문은 아닙니다. 그냥 좀 말랐을 뿐이죠. 그보다 리다 님이랑 동생분은 온천욕 하러 오신 겁니까?"

"그렇다네! 지난 몇 달 동안 정신없이 바빠서 휴식이 간절했거든. 거기다 내 동생은 어려서부터 본가에 갇혀 자라다시피 한 탓에 나올 일이 거의 없었던지라, 이참에 아이쿨도 좀 소개해주고 말이야."

"그러고 보면 동생분은 연세가 어떻게 됩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젊어 보이는데...."

투란의 말에 가주로 짐작되는 소년, 오셀의 얼굴에 순간 불쾌해하는 기색이 스쳤다.

아무래도 젊거나 어려 보인다는 말이 싫은 것일까.

그때, 리다가 오셀의 두 뺨을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어허, 인상 쓰지 말라니까. 그리 찡그리고 살면 얼굴에 주름살이 생겨."

"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누이. 안 그래도 너무 위엄이 없는 얼굴이라서요."

오셀은 뺨을 잡힌 탓에 웅얼거리듯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정말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와 동생처럼 보여서, 도저히 어느 신이 깃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잠시 후 잡혔던 뺨을 문지르며 오셀이 투란 일행을 향해 오만한 어조로 말했다.

"올해 백 살 하고 서른두 살이 됐다. 겉보기엔 이래도 여기 있는 이들에겐 아버지뻘쯤 될 테니 말을 편히 하지."

132세라니, 그들 중 가장 연장자인 솔리프보다도 나이가 두 배는 많았다.

하지만 리다에 비하면 너무 어린 나이이기도 했다.

아마 사촌 동생이라는 게 거짓말이거나 부모 세대에서 나이 차이가 심했던 것일까.

그렇게 나이를 밝힌 오셀은 이내 더 관심 없다는 듯 아이쿨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덕분에 투란은 리다에게 생각했던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시라프 습지 쪽에는 별일 없었습니까? 얼마 전에 남해 쪽이 꽤 시끄러웠던 것으로 아는데요."

투란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바라하 가문이 어떤 식으로 솔리프를 찾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발견된 게 남해였음을 고려하면 이곳 라비타스도 도피처 중 한 곳으로 예상할 수 있으니까.

"글쎄? 별일이랄 게 있던가? 아, 얼마 전에 저 동쪽 바라하 가문에서 사람이 온 적 있긴 했구먼."

놀랍게도 리다는 기다렸다는 듯 투란이 바라던 정보를 언급했다.

옆에 있던 솔리프가 눈에 보이게 움찔하자 메이사가 옆구리를 쿡 찔러 진정시켰다.

"그 먼 곳에서 무슨 일로 왔다고 합니까?"

"무려 대가문의 후계자씩이나 되는 이가 가문을 배신하고 도망쳤다는 모양일세. 남해 군도 어딘가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커서 그쪽 바다와 인접한 모든 가문에 수배령을 내렸는데, 절대 죽여서는 안 되고 마력을 흡수할 수 있게 산 채로 포획해야만 한다더군."

"대가문의 후계자를 죽이는 것도 아니고 생포하라니, 평범한 가문들에겐 어림도 없는 얘기군요."

솔리프를 잡고자 왔던 바라하 귀족들의 전력만 해도 어지간한 가문 몇 개는 가볍게 몰살시킬 수준이지 않았던가.

하다못해 죽이는 것만 해도 십여 개 이상의 가문이 힘을 합쳐야 할 게 분명했다.

그마저도 어지간하면 각개격파 당할 가능성이 더 컸고.

"그 대신 위치만 제보해도 제법 뛰어난 마법기를 제공하고, 포획해서 인도하는 데 성공하면 무려 성유물을 보상으로 준다네. 아마 이쪽은 대가문들까지 노린 것이겠지. 자네는 흥미 없는가?"

"딱히 흥미까지는...초상화 같은 것도 있습니까?"

"받긴 했네만 보진 않았지. 필요하다면 구해줄 수 있네."

"아뇨, 그냥 궁금했을 뿐입니다."

투란은 대답하며 슬쩍 솔리프를 바라보았다.

바라하에서 그를 쫓는다 한들 전처럼 대외적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비밀스럽게 몇몇 대가문 정도에만 연락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예 대대적으로 수배를 내린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남해와 인접한 지역에서는 원래 얼굴로 활동하기 곤란할 듯했다.

'당분간 이 가면은 솔리프가 쓰게 해야 하나.'

그러면 혈통을 읽을 수 없게 되겠지만, 그거야 필요할 때 잠깐 받아서 쓰면 될 문제였다.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투란은 문득 떠오른 바가 있어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저랑 관련된 얘기는 없습니까?"

"자네? 뭔가 하기라도 했나?"

"예, 남해에서 해적단 하나를 전멸시키긴 했습니다만."

그 해적단의 정체가 바라하 가문의 위장 집단임을 고려하면 솔리프를 구한 게 투란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가능성은 결코 작지 않을 터.

그러나 이를 들은 리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해에 해적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문은 우리들에게는 알려지지도 않는다네. 아랫 사람들이 처리할 일이지."

"그렇군요."

즉, 바라하 가문은 투란이 아닌 솔리프 한 명만 수배 선상에 올렸다는 의미였다.

'나를 그냥 솔리프랑 별 관계 없는 잔챙이 정도로 판단한 건가? 그래 주면 고맙긴 한데....'

하기야 투란이 얼마나 강력한 마법사인지 아는 이는 기껏해야 붉은 고래 해적단의 타산 정도일 터.

그가 말하지만 않으면 바라하로서는 투란이 널리고 널린 방랑 귀족 중 하나일 뿐이며, 추격대가 솔리프의 포획에 실패하며 전멸한 것은 그냥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자세한 내막은 아마 바라하 본가 쪽을 뒤져보거나 해야 알 수 있겠지만, 일단 그가 수배되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 할 만했다.

'그러고 보면 붉은 고래 해적단도 나중에 찾아가 봐야지. 그 섬에 있던 사람들을 제대로 되돌려놨는지 알아야 하니까.'

동선이 조금 나쁘긴 하지만, 도서관에 들르고 나서 그쪽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 * *

조금 더 대화를 나눈 뒤, 투란은 리다와 오셀에게 이만 떠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들 역시 당분간 이곳 온천 지대 근처에 머물 계획이라는데, 그러던 와중 솔리프의 얼굴이 담긴 수배서라도 접하게 되면 곤란하리라 여긴 탓이었다.

리다는 자기들이 투란 일행을 쫓아내는 것 같다고 여기며 찜찜해 했지만, 오셀은 불청객들이 사라지는 것을 기꺼워하는 기색이었다.

어쨌든, 이번 만남으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아마도 라비타스는 신적 존재의 손아귀에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이후 투란 일행은 곧장 비제를 타고 날아가는 대신, 걸어서 시라프 습지대의 북서쪽으로 움직이며 전처럼 마법 연습과 건강 회복에 전념했다.

슬슬 충분히 살이 올라왔다고 판단했을 무렵, 투란은 메이사의 건강 회복을 위해 두 번째 계획을 실행했다.

"자, 좀 더 강하게!"

"아아악-!"

투란의 호령에 메이사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고함을 내지르며 다리를 밀어내려 애썼다.

그녀가 하는 것은 바로 과거 투란이 하람의 아래에서 행했던 신체 단련의 비법.

솔리프가 바라하 가문에서 익혔던 기술까지 일부 접목한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었는데, 이에 필요한 훈련용 마법기의 역할은 투란과 솔리프가 대신해주고 있었다.

한 명이 등을 받쳐 주고 다른 한 명이 다리를 꽉 눌러 압박하는 식으로.

진이 빠진 그녀가 거칠게 숨을 내쉬자 투란은 과거 하람이 그에게 그랬듯 단호하게 명령했다.

"아직 쉴 때가 아니야, 한 번 더!"

"이제 진짜 힘들어...."

"진짜 힘들 때 한 번 더 하는 게 도움이 된다니까. 빨리!"

"아아아아악-!"

과거 투란이 그랬듯 이러한 신체 단련은 정말 죽을 정도로 괴로웠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마력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이상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귀족의 신체 특성상, 뼈와 가죽밖에 없던 곳에 살이 차오르자마자 곧바로 근육으로 변하며 몸을 굳건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애초에 골격 자체가 썩 두껍지 않은 편인지라 하람이나 솔리프처럼 건강한 체격까진 무리겠지만, 평범한 성인 여성 수준만 되어도 강대한 마력에 힘입어 제법 쓸만한 신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삼사 주 정도를 북상하며 메이사의 재활에 전념하던 도중, 마침내 늪지대가 끝나며 황야가 펼쳐졌다.

꽤 오랜만에 돌아온 서부 황야 지대의 모습에 투란은 슬며시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여기서는 한 번에 가자. 아무래도 좀 불안해서."

"그러고 보니 어느 군대랑 싸운 적 있댔지?"

"그랬지. 흔적은 안 남겼지만...혹시 모르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발타스 가문이 속한 쪽이 전쟁에서 이기지 않았으려나 싶긴 하지만, 확실한 건 오렘에 가봐야 알 수 있을 터였다.

투란 일행은 비제가 끄는 그네에 탑승한 채 황야 지대 위쪽을 날며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전체적으로 휑한걸."

"그래도 사람들이 제법 다니는 걸로 봐서 전쟁은 끝났나 봐."

비제 역시 이전에 도서관에 들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헤매는 일 없이 곧장 오렘 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봐, 거기! 몸 좀 씻고 들어와!"

"어유, 이 정도는 괜찮잖습니까...."

"한 대 맞기 싫으면 빨리 꺼져!"

행상인과 경찰의 투닥대는 모습을 보며 투란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렘 시의 분위기는 예전 그대로였다.

"여긴 여전하네."

"그래?"

"응. 아무래도 전쟁에서 이겼나 봐. 주인이 안 바뀐 쪽이 더 낫긴 하지."

무난히 성문을 통과한 뒤, 세 사람은 곧바로 영주가 있을 궁전으로 향했다.

이전에야 투란 한 명이었으니 몰래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는 탓이었다.

힘으로 때려부수고 들어갈 것이 아니고서야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저게 도서관이야?"

"맞아."

"엄청 높네...."

메이사 역시 오렘의 도서관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지 감탄한 듯 탄성을 터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의 저택에 도착한 투란은 입구를 경비하는 기사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이봐, 오랜만이야. 그러니까 이름이-"

"아, 고귀하신 분! 어서 오십시오!"

마침 입구를 지키던 이가 처음 도서관에서 마주쳤던 기사였기에 별도로 마력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그의 안내에 따라 영주관 안쪽으로 들어온 투란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렘의 새 영주를 맞이하게 되었다.

"반갑군. 그러니까...투란? 전에 마빈에게 이야기는 들었소."

오렘의 새 주인, 길론 발타스는 이전 영주인 루그의 조카이며 과거 함께 사냥을 나갔던 마빈의 형이었다.

그는 루그가 지난 전쟁이 끝날 무렵 목숨을 잃어 자리를 물려받았다고 했다.

"전 영주님이 돌아가신 것에 조의를 표합니다."

"고맙소. 위로해주니 슬픔이 조금 가시는 것 같구려."

물론 말과 달리 얼굴에는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전 영주의 딸이던 이젤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죽었건 살았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눈앞의 영주가 불쾌해할 가능성이 있으니.

원숭이 마수를 잡겠다는 목적으로 가볍게 입장을 허락했던 전 영주와 달리, 이번 영주는 도서관의 사용을 대가로 돈을 원했다.

아무래도 전쟁으로 인해 영지가 피폐해진 탓이 아닐까.

어차피 금과 은이라면 넘치는 만큼 있는지라, 투란은 적당히 금화 한 뭉치를 제시하여 이용을 허가받은 뒤 두 사람과 함께 도서관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고귀하신 분들이시여."

"여기, 허가증이다."

"확인했나이다. 들어가소서."

기사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선 투란은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사서를 소리 높여 불렀다.

경험상 이 안에서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음을 알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저 왔습니다, 어르신!"

"아무래도 난 안 보이는 것 같네."

"나도 마찬가지야. 젠장, 아깝구만. 고대의 정령을 만나는데 직접 보고 들을 수 없다니."

아무래도 고대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솔리프였던 만큼 아쉬움이 더 큰 듯했다.

빨리 소개해달라는 듯한 둘의 시선에 투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나도 안 보여. 잠깐 위층에 올라가셨나 봐."

평소에는 항상 1층에 있더니, 무언가 찾아볼 자료라도 생긴 것일까?

투란 일행은 그대로 도서관 1층에서 몇 분 정도를 기다렸으나, 사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르신?"

투란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도서관을 울렸다.

81화

1층에 있는 책 몇 권을 뒤적여가며 십여 분을 더 기다린 뒤, 투란은 두 사람에게 잠시 도서관 밖으로 나가 달라고 부탁했다.

혹시 사서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그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을 내보낸 뒤에도 사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혹시 투란 자신조차도 볼 수 없게 된 건가 싶어서 만약 여기 있다면 책 한두 권을 가볍게 옮겨달라고 요청했으나 반응은 없었다.

즉, 사서는 이 도서관에서 사라졌거나 최소한 무언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소통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세 사람은 도서관 1층의 의자를 하나씩 차지한 채 그 이유를 궁리했다.

"왜일까?"

"글쎄...최근에 이 주변에 있었던 큰일이라고 해 봐야 전쟁 정도인데, 그게 영향을 줄 이유는 아닐 것 같아."

오렘의 도서관이 세워진 지 수천 년, 이곳 주변에서 일어난 전쟁만 몇 번에 주인은 얼마나 많이 바뀌었던가.

그깟 것으로 정령의 존재에 문제가 생겼다면 아마 진작 없어지고도 남았을 터였다.

"혹시 신에 대한 말을 흘려서? 불경죄라거나 그런 거 말이야."

"하긴 신이 만든 존재니까 그럴지도...음, 하지만 지난번에 내가 떠날 때까진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비제가 납치당한 것을 깨닫고 다급히 달려나가는 탓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또 오겠다는 말에 사서 역시 그러려무나 하고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갑자기 없어진 것은 사서조차 예상치 못했던 사태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까?

"만약 누군가에게 소멸당했거나 포획된 거라면?"

"그러면 여기 있는 것부터가 위험한 일이겠지. 사서 어르신과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면 최소 세 개, 어쩌면 네 개 이상의 혈통 능력을 가진 마법사라는 의미일 텐데...."

전자만 해도 대가문의 가주급에 준하는 잠재력을 가진 마법사일 것이요, 후자라면 높은 확률로 신적 존재가 빙의한 무언가일 터였다.

어느 쪽이건 투란 일행이 정면으로 맞상대할 적은 아니었다.

"근데 그만한 힘을 가졌으면 어지간해선 먼저 간파할 수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흉내쟁이 성유물의 감각 역시 이제는 익숙한 만큼 무뎌져서 평범한 인간이 오가는 정도는 무시하게 되곤 하지만, 강력한 마법사들의 움직임은 아무래도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즉, 집중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반경 수백 미터 내로 가주급 마법사가 접근하는 순간 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메이사를 안심시키던 도중, 옆에서 들려온 책 넘기는 소리에 투란은 아까부터 말이 없던 솔리프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느새 근처의 책장에서 뽑아온 책 한 권을 진지하게 읽고 있었다.

"뭐 보고 있어?"

"이거? 한 천년 정도 전의 철학 서적인 것 같은데 프레아 신앙과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걸 다루더라고. 혹시 전에 왔을 때 읽어봤냐?"

"아니, 난 철학은 별로 관심 없어서."

투란이 이 도서관에서 찾아 읽은 책들은 하나같이 실용적으로 써먹을 구석이 있는 것들뿐이었다.

예를 들면 마수 도감이라거나 여러 가문의 역사서, 혹은 여행기 같은 것들을.

지금은 없어져서 사서만 알고 있는 자연법칙에 관한 내용은 덤이고.

그에 비해 솔리프는 옛 역사며 신화 따위에 관심이 많은 만큼 그와 관련된 책을 찾다가 이를 접한 모양이었다.

"여기서는 인간에게 타고난 권리가 있대. 생존하고 번영하며 행복할 권리를 신들이 내려준 게 아니라 인간인 것만으로도 말이야. 그 아래에서는 평범한 일반인과 마법사 모두 동등하게 여겨져야 한다나."

"완전히 이단 서적이잖아? 용케 안 불타고 남았는걸."

신의 후손인 마법사들이 그 혈통과 힘을 근거로 인간을 보호하며 또한 지배한다는 프레아 신앙의 교리를 정면에서 반박하는 주장 아닌가.

학자들이 보면 눈에 불을 켜며 소각하려 할 게 뻔했다.

어쩌면 지금 그가 보는 것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한 권일지도.

조금 더 책을 읽던 솔리프가 이내 흥미를 잃은 듯 이를 원래 있던 곳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난 책 읽는 거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여긴 꽤 괜찮네. 동쪽에도 이런 곳이 있었으면 좋았을 걸."

"동쪽엔 딱히 그런 거 없나?"

"옛 제국의 유적이야 몇 개 있는데 이런 도서관 같은 건 없지. 기억나는 게 아마 하루에 한 번 싸우다가 죽어도 살아날 수 있는 결투장 같은 거 정도?"

그렇게 잡담을 나누던 도중, 투란은 어느새 주제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음을 깨닫고 다시 메이사를 돌아보며 사서의 행방을 추리해보려 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조금 전의 솔리프와 마찬가지로 슬쩍 책을 한 권 가져와 읽는 중이었다.

"메이사?"

"응? 아, 그냥 눈에 띄길래 잠깐."

투란의 부름에 메이사는 어째서인지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책을 탁 덮었다.

그러자 드러난 표지에는 '밤의 귀족과 여주인'이라는 묘한 제목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아마 연애 소설 종류인 것 같았다.

이쪽도 슬슬 답이 없는 가설 늘어놓기에 질린 모양이었다.

"...그래, 뭐 지금 우리끼리 떠든다고 해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으니까. 이따 돌아가서 우리 이전에 도서관을 쓴 사람이 있는지나 물어보자."

그렇게 결론을 내린 뒤, 투란 역시 마수 도감을 펼치고 책상 위에 웅크려 졸던 비제를 데려와서 함께 읽었다.

* * *

초저녁 무렵까지 독서에 매진한 뒤, 세 사람과 한 마리 검독수리는 발타스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오늘 저녁에는 그들의 방문을 기념하여 만찬을 열기로 했으니, 적당히 술과 분위기를 이용해 영주에게 도서관을 이용했던 사람이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목욕탕에서 시중을 받던 투란은 과거 이를 거부했을 때 저 하녀들이 엉엉 울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는 누군가에게 대접받는다는 게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태연히 귀족 행세를 할 수 있게 되었던지.

간만에 머리를 빗고 금실 섞인 옷을 입은 뒤, 투란은 비제를 숙소에서 쉬게 하고 만찬장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마찬가지로 바짝 꾸민 솔리프를 만날 수 있었다.

짧은 은발에 기름을 발라 뒤로 빗어넘긴 그가 투란을 보며 가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너도 꾸미면 나만큼은 아니지만 꽤 미남이라니까! 좀 더 자신감을 가지라고, 친구."

"그렇다고 치자."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저놈의 자아도취는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것도 바라하 가문의 인격 조형이 만든 것일까, 아니면 그냥 타고나기를 저런 것일까.

만찬장 한편에 앉아 잡담을 나누던 도중, 성유물의 감각이 뒤쪽에서 메이사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고개를 돌린 투란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옆에 있던 솔리프 역시 한 발짝 늦게 고개를 돌리고 놀란 표정을 짓자, 둘의 시선에 움찔한 메이사가 괜히 손으로 머리를 빗어넘기며 물었다.

"...왜, 그렇게 이상해?"

"아니, 이상하진 않아. 예쁘네."

온천 지대를 떠나 이곳으로 오는 몇 주일간, 메이사는 계속해서 영양을 공급받으며 단련을 통해 온몸을 살과 근육으로 채웠다.

해골 같던 얼굴 역시 변하는 것이 당연지사.

여행 내내 물로 대충 씻으며 꾀죄죄한 몰골을 하느라 가려져 있던 외모가 하녀들의 정성 어린 꾸밈으로 드디어 빛을 발했다.

윤기 흐르는 적갈색 장발과 큼직한 푸른 눈, 계란형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거기에다 늘 걸치고 다니던 방어용 외투 대신 금실로 수놓은 은회색 드레스가 늘씬하고 우아한 체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정말로, 지금의 그녀를 보며 과거의 해골 마녀를 떠올리기란 불가능할 터였다.

굳이 위장하자면 머리카락 색 정도만 바꿀 수 있으면 더 좋기는 할 텐데, 그쪽으로 도움이 되는 마법기가 있는지도 나중에 알아보면 좋을 것 같았다.

투란의 대답에 메이사가 뻣뻣이 굳은 사이, 뒤쪽에서 젊은 청년 한 명이 투란을 향해 말을 건넸다.

"혹시 투란 씨 맞으신가요? 정말로 다시 오셨군요! 오랜만입니다, 저 기억하시죠?"

투란은 상대가 누군지 잠시 고민하다가 곧 그가 원숭이 마수를 함께 사냥했던 마빈임을 깨달았다.

전 가주의 조카이자 현 가주의 동생인 젊은이.

"오랜만입니다, 마빈."

"예. 그보다 여기 이분들은?"

"저랑 함께 다니는 친구들입니다. 솔과 미샤라고 하죠."

"아, 예...."

마빈은 솔리프와 메이사를 슥 훑더니, 그중 메이사 쪽을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곧바로 마력을 투사했다.

당연하게도 이미 전부터 한계에 도달했던 그의 마력은 여전히 과거의 투란과 같은 하급 귀족 수준이었다.

이에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한 뒤 마찬가지로 마력을 투사했다.

"윽!"

밀려오는 압박감에 깜짝 놀란 마빈이 탄성을 터트리며 한 발짝 물러서더니, 그런 제 추태가 부끄러웠던 듯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떠났다.

"으흠, 어...실례했습니다. 형님이 부르시는 것 같아서 이만."

핑계를 대며 물러서는 마빈의 뒷모습을 흘깃 보던 투란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느 정도로 했어?"

"중급에서 조금 위, 중상급?"

"난 아예 상급 정도로 했는데."

"그건 너무 강하잖아.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놀라더라. 그 정도면 눈에 띄니까 다음엔 좀 줄여."

그 말대로, 두 사람은 자신의 마력을 온전히 투사하는 대신 그중 일부만을 비치는 것으로 실력을 위장했다.

이것이 바로 솔리프가 가르쳐 준 바라하의 비전 중 하나였다.

원리는 대충 몸속에 마력을 반사하는 거울을 여럿 상상한 뒤 마력을 투사하며 여러 차례 반사하여 드러나는 힘이 줄어들게 하는 것.

당연하게도 실제 실력보다 더 강해 보이게는 할 수 없었다.

아마 이 기술이 없었다면 어디 가서도 마력을 투사해 신분을 증명하기 난처했을 터였다.

이런 변방 귀족들의 식견으로는 그들이 대가문의 후계자급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긴 어렵겠지만, 어쨌든 갑자기 막강한 귀족들이 여럿 나타났다는 소문 정도는 퍼졌을 테니까.

잠시 후 발타스 가주 길론이 상석에 앉으며 만찬이 시작됐다.

"자자, 많이들 드시오!"

"대접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일행을 대표해 인사한 뒤, 투란은 오랜만에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서부 황야 지대 특유의 식문화를 만끽했다.

회색 지대만큼은 아니나 이 동네도 비교적 양을 많이 치는 탓에 양 갈비며 양젖 치즈 따위가 많았다.

당연히 메이사는 적당히 눈치를 보며 물만 들이켰고, 솔리프 역시 양고기가 썩 입에 맞지 않는지 몇 번 입에 대다가 양념한 돼지갈비 따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오랜만에 들른 도서관은 만족스러우셨소?"

"예. 여전히 좋더군요. 볼 것도 많고...."

투란은 이전에 마신 적 있던 독한 증류주 한 잔을 음미하며 가주와 잡담을 나눴다.

화제는 바로 최근 이 땅에서 있었던 하디트와 코렐 두 가문이 얽힌 전쟁이었다.

"사실 전에 멀리서 하디트 쪽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까 오히려 이겼다고 해서 꽤 놀랐습니다. 발타스도 하디트를 지지했었지요?"

"그랬지. 덕분에 도시 하나를 더 얻었는데 통치할 혈족의 수가 부족해서 고민이오."

"비밀이면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됩니다만, 혹시 무슨 비밀 병기라도 있었던 겁니까? 한 번 밀린 전세를 역전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투란이 궁금한 것은 바로 코렐 가문의 군대를 전멸시킨 자신의 행위가 누군가에게 알려졌느냐였다.

그 당시에는 완벽히 증거를 은폐했지만 언제나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길론은 다소 뚱한 표정으로 이에 답해 주었다.

"코렐 가문의 정예 병력이 이동 도중 갑자기 실종되는 사고가 있었소. 혹시 귀족들조차 당해내기 힘들 정도로 강대한 마수가 등장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어서 휴전까지 했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결국은 원인 불명의 실종으로 끝났지만...여행할 때 조심하시오. 어디에서 그런 괴물을 마주칠지 모를 노릇이니까. 덤으로 그들의 흔적을 찾으면 포상금도 있소. 물론 마법기 같은 건 회수해야 하지만."

"기억해 두겠습니다."

아예 흔적조차 남지 않게 잡아먹을 정도로 은밀하고 위험한 마수가 있다고 여겨진 것일까.

하기야 마수란 놈들이 워낙 다양한 족속들이 있다 보니 그런 개체도 없으리란 법은 없었다.

실제로 얼마 전 마수 도감에서도 비슷한 능력을 가진 녀석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안개처럼 변해서 넓은 범위를 둘러싼 채 온갖 생물을 잡아먹는 박쥐라거나 어마어마한 크기의 입을 벌려 마을을 통째로 먹어치우는 뱀 같은.

그렇게 전쟁을 주제로 잡담을 나누며 술이 몇 번 더 오가자 길론이 조금 벌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귀족인 만큼 독주를 마신다고 인사불성으로 취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기분이 고양되는 효과는 있었다.

"아, 전쟁...정말로 끔찍했지! 나만 해도 몇 번 죽을 뻔했고 큰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우리 가문에서도 희생자가 많이 나왔으니까. 이젤라도 그때 목숨을 잃었다오. 그러고 보면 큰아버지가 그대와 이젤라를 짝지어주고 싶어 했다지?"

"켁!"

길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돼지갈비를 뜯던 솔리프가 갑자기 크게 기침했다.

어째서인지 옆에 있던 메이사가 그를 뚫어지도록 빤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랬긴 했습니다. 이미 거절했지만요."

"만약 그대가 그 제안을 받았다면 이 자리에 나 대신 앉아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하는 말이오만, 혹시 내 딸을 받아줄 생각은 없소? 안타깝게도 기사 수준의 마력만 타고나긴 했소만, 첩으로 두어서라도 가문 간의 결속을 다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우리 귀족들에겐 떠도는 것보다 정착하여 풍요를 누리는 삶이 어울리지 않소."

이전에 루그 가주가 했던 것과 비슷한 제안에 투란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직은 자유로운 게 좋습니다."

"그거 유감이군. 다른 두 손님. 솔과 미샤라고 했나? 그대들에게도 유효한 제안이니 한번 잘 생각해 주시구려."

길론의 제안에 솔리프와 메이사가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거절을 표하자 만찬장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전에도 느꼈지만, 이 가문 사람들은 곤란한 제안으로 사람들을 귀찮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아마 조금 전 마빈이 두 사람의 힘을 이야기해줬을 텐데, 자칫하면 오히려 가문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것마저 감수할 정도로 가문 내에 귀족이 부족한 듯했다.

하기야 기억하기론 발타스 가문에 귀족이 일곱인가 여덟 명쯤 되었는데 그중 최소 둘이 죽었다는 것 아닌가.

투란은 이후 적당한 주제로 대화를 좀 더 나누다가 원하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혹시 저희보다 먼저 도서관을 쓴 사람이 있었습니까? 뭔가 예전이랑 달라 보여서요."

"음? 내가 알기론 시설이 조금 망가지거나 책이 마구 꽂히는 정도는 알아서 정돈될 텐데. 혹시 책이 여럿 상하기라도 했소?"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냥 느낌이라 해아 할지, 분위기 같은 게 좀 달라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사서의 존재를 거론할 수 없기에 다소 말을 빙빙 돌릴 수밖에 없는 게 영 답답했다.

망설이듯 한 손으로 수염을 이리저리 꼬던 길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뭐, 이젠 지난 이야기니까 말해도 상관은 없겠지. 한 달쯤 전에 다른 손님이 왔다 가긴 했소. 그때는 전쟁 중이라서 아무도 들이지 않으려 했는데, 그러기에는 꽤 거물이라서 그만."

"거물이라니, 대가문에서 오기라도 했습니까?"

투란의 질문에 길론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정확하구려. 저 북쪽 나긴 가문에서 온 귀족이었소. 이름이 아마 레노드라고 했지?"

길론의 말에 투란은 다급히 메이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레노드 나긴이라면 분명히 아라비온 가주의 아들이자 나긴 가문으로 입양된 메이사의 이복 오빠가 아니던가.

어린 시절 메이사가 분에 못 이겨 '살인자'라고 쓴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던.

투란의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그 이름을 들은 메이사의 푸른 눈이 서늘하게 살의를 머금었다.

82화

메이사가 독을 먹고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 그녀를 찾아온 가주의 본처 아니에타 나긴은 조롱 섞인 말투로 메이사를 위협했다.

'이번 사고는 어디까지나 강한 딸 하나 낳았다고 내 앞에서 건방을 떨던 네 어미 때문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조심하렴? 만약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리면 너나 네 외가 친척들도 비슷한 꼴이 날 테니까. 무슨 뜻인지 알지?'

이후 정말로 두 사람의 죽음이 '사고'로 묻히는 것을 보며, 메이사는 나긴 가문의 여인과 본가 상층부에 대한 적대감을 줄곧 키워왔다.

물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복 오빠 두 명에게 편지와 말로 악담을 퍼붓는 것에 불과했지만.

투란은 이 이야기를 들은 뒤로 나긴 가문의 정체성이 어느 쪽인가를 고민해 왔다.

아라비온의 중년파가 그냥 메이사를 괴롭히기 위한 핑계로 사용했을 뿐인지, 아니면 둘 사이에 무언가 그 이상의 유대가 존재했던 것인지....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사라진 사서와 레노드 나긴의 존재가 엮이고 있었다.

투란은 가볍게 헛기침하여 목소리의 떨림을 억누른 뒤 다시금 질문했다.

"혹시 그 사람이 어디로 간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까? 제 지인과 가까운 사이라서 먼 곳으로 간 게 아니면 인사라도 하고 싶군요."

"오, 그렇소?"

방랑 귀족 주제에 대가문의 마법사와 인연이 있다니? 라는 표정이 대놓고 얼굴에 드러났다.

"예. 레노드 나긴은 본래 아라비온 가주의 아들로 외가인 나긴 가문의 혈통이 발현하여 그쪽에 입양된 사람인데, 저는 그 이복동생인 메이사 양과 친분이 있습니다."

"그 해골 공-아라비온의 후계자 말이로군! 이름은 들었소. 이거 대단한 사람과 인연이 있으셨구려."

대가문 내의 사정에 정통함을 드러낸 것이 먹혔는지 길론 가주는 조금 전과 달리 의심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수긍했다.

어쩌면 이전에 찾아왔던 레노드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서일지도.

사실 그보다 대단한 것은 메이사의 외모가 제법 멀리 떨어진 이곳에마저 퍼져 있을 만큼 유명하다는 사실이었다.

하기야 저 엔릴 사막까지도 알려져 있을 정도이지 않던가.

그때, 얌전히 음식을 먹던 마빈 발타스가 슬쩍 끼어들어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비쩍 말랐습니까? 한 번 보면 꿈에서 나올까 두려운 추녀라던데요."

"입 닥쳐라, 마빈! 네가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좋을 사람이 아니야!"

옆에서 경솔히 입을 놀리던 마빈이 길론 가주의 고함에 찔끔 놀라 고개를 숙였다.

지금 막 메이사와 친분이 있다고 밝혔는데 거기서 험담이라니!

만약 저 말이 투란을 통해 그쪽으로 전해지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귀족 간의 법도라는 게 있지만 그래도 굳이 강자의 원한을 사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물론 이런 수습이 무색하게도 메이사는 정면에서 추녀라는 말을 듣고 표정을 관리하려 애쓰는 중이었지만.

당연하게도 그들 중 누구도 메이사의 정체가 그 해골 공주일 것으로 의심하지는 않았다.

"으흠, 미안하지만 조금 전 말은 못 들은 것으로...."

"물론입니다. 저도 친구에게 굳이 나쁜 이야기를 전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조금 전 드린 질문에 대해서는?"

어쨌든, 마빈의 경솔한 언행 덕에 투란은 조금 더 대화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아, 그 사람이 어디로 가냐고 했던가? 일단은 본가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소. 지금쯤이면 도착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군요."

투란은 가볍게 혀를 차며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인 후, 레노드 나긴이 얼마나 많은 수행원을 데려왔는지부터 도서관을 얼마나 이용했는지, 이곳 오렘에는 얼마나 머물렀는지 등을 물었다.

조금 전 말실수를 한 것을 만회하기 위함일까, 길론이 성실히 답해준 덕에 제법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 * *

만찬이 파한 후, 투란은 메이사와 솔리프를 자신의 거처로 불러내며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

회의 주제는 당연하게도 레노드 나긴과 사서의 실종에 어떤 관계가 있느냐였다.

"일단 요 몇 달은 전쟁 때문에 레노드 외에는 도서관에 들른 사람이 아예 없었어. 따라서 유력한 범인은 그 녀석뿐인 셈이지. 나처럼 몰래 잠입한 사람이 또 있다면 모르지만."

"일단 이야기로 들은 행적부터가 엄청 비상식적이던데. 무려 귀족 세 명에 기사 사십 명, 거기다 마수까지 데리고 쳐들어와서 도서관을 쓰게 해달라고 해놓고는 혼자서 몇 분쯤 들렀다가 바로 돌아가 버렸다며? 전쟁 중인 도시에 오래 머무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핑계는 댔지만...그럴 거면 처음부터 찾아오지를 말았어야지."

솔리프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도서관에 무언가 다른 용무가 있었다면 적어도 한두 시간쯤은 머무르는 게 맞았다.

하다못해 이곳에 찾는 책이 있는지 표지만 훑어가며 확인해도 수십 분은 넘게 걸릴 것 아닌가.

"메이사, 그 사람이 원래 책을 좋아하는 편이었어?"

"나도 잘 몰라. 그 자식은 내가 아홉 살 때 나긴 가문에 입양된 뒤로 만난 적이 없어서. 하지만 책을 읽는 걸 본 기억은 없어."

메이사의 말을 들은 투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책을 좋아하지도 않는 이가 귀족들까지 데리고 도서관에 찾아왔다면 당연히 가문 단위에서의 행사일 터.

정황상 레노드가 사서의 존재에 개입했을 가능성은 매우 컸다.

문제는 그가 어떻게 사서의 존재를 간파하고 이를 소멸시키거나 포획했는지, 그리고 왜 지금 갑자기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레노드가 어르신을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적어도 세 개 이상의 혈통 능력을 가졌단 거네. 그게 아니면 지금까지 도서관을 들른 대가문의 마법사들이 사서 어르신을 볼 수 있었을 테니까."

"아니면 무언가 도구 같은 걸 썼을지도 모르는 거 아니냐? 예를 들어서 도서관에 들어가 딱 호리병을 여는 순간 정령을 빨아들여 가두거나 뭐 그런 거 말이야."

"그런 마법기도 있어?"

"동쪽에 그런 성유물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긴 해. 진짜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깜짝 놀라 묻는 메이사의 말에 솔리프가 진지하게 답해주는 동안, 투란은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에 잠겼다.

"나긴 가문의 혈통은 지배자와 조련사였지."

"조련사는 몰라도 지배자는 처음 듣는데, 서쪽에만 있는 건가?"

"이곳에서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 아니, 아마 나긴 가문 말고는 그 혈통을 가진 사람이 없을지도."

솔리프의 물음에 메이사가 차분히 답했다.

지배자란 이름 그대로 생명체를 지배하는 힘을 지닌 혈통으로, 거창한 이름에 비해 실속은 별로 없었다.

과거 투란이 직접 몸으로 배웠듯 생물을 지배하는 마법이란 게 마법 생물을 대상으로는 거의 먹히지 않는 탓이다.

물론 그만큼 생명체 조종 능력은 뛰어나기에 강한 귀족이라면 손짓 하나로 수십만 명의 인간조차 통솔할 수 있겠지만, 그걸 대체 어디 써먹는단 말인가?

어차피 그 정도 실력의 귀족이 다른 혈통 능력을 쓴다면 수십만 명을 우습게 쓸어버릴 수 있을 텐데.

모름지기 널리 퍼지지 않은 혈통이란 다 그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너무 강력한 탓에 철저히 통제하고 박멸하거나, 널리 퍼지지 못할 정도로 쓸모가 없거나.

그런 설명을 들은 솔리프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정령도 마력이 있나? 사령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그야 당연히...없었지."

투란은 지난번 사서와 만났을 때 그의 몸에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즉, 마법적으로 지어진 건물에서 생긴 정령이라도 사서 자체는 마법 생물이 아닌 셈이다.

"그러면 지배자 혈통의 능력으로 정령을 지배했거나 지배하려는 걸지도 모르겠네."

"소멸시킨 거라면 몰라도 그쪽은 곤란한데, 워낙 사서 어르신께 해놓은 말이 많아서. 저들이 납치하고 심문이라도 하면...."

"너에 대해서 거의 다 알고 있다고 봐야지?"

"맞아."

투란은 골치 아픈 상황에 직면했음을 느끼며 작게 신음했다.

지하 미궁에서 본 밤 사냥꾼에 대한 정보부터 그 자신의 혈통까지, 사서가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정보는 그야말로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왜 이 시점에 갑자기 도서관에 쳐들어온 것인지도 궁금하고."

만약 나긴 가문에 신적 존재가 있어서 사서의 존재가 거슬렸다고 한들, 지난 수천 년간 내버려 두다가 갑자기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건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최근에 있었던 특별한 일이라고 해봐야 투란과의 만남 정도가 고작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이 사서를 제거해야 할 이유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발상을 바꿔 보자면 지금까지 사서의 존재를 몰랐다가 알아차리게 된 것은 아닐까?

계기라면 투란이 처음 사서의 존재를 별생각 없이 발타스 귀족들에게 흘렸던 것 정도.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돌고 돌아 나긴 가문까지 전해졌다는 건 너무 이상한 일이었다.

바로 한 지역 너머라지만 이곳 서부 황야 지대와 나긴이 지배하는 설원은 말 그대로 다른 문화권에 가까웠으니.

그런 투란의 말에 솔리프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나긴이랑 정면으로 맞붙을 셈은 아니지? 뭐, 촌구석 대가문이라서 아라비온이나 자하르보다야 못하겠다만...어째 너는 한다고 하면 진짜 할 것 같단 말이지."

본래 대가문이라고 하면 평범한 마법사 가문들에게는 하나같이 우러러봐야 하는 대상이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우열은 존재했다.

그중 가장 우월하게 여겨지는 것은 옛 제국의 몰락 직후 그 힘이 완전히 쇠하지 않은 프레아 신족의 직계들이 세운 유서 깊은 가문들.

아라비온과 자하르가 이에 해당하며 이들의 역사는 최소 이천 년에서 삼천 년에 달했다.

그들에 비해 혈통 결합으로 새로운 중시조를 얻어 설립된 대가문들은 한 수 아래로 여겨졌다.

바라하와 라비타스, 카마인이 이에 해당하며 보통 천 년에서 이천 년 사이의 역사를 지녔다.

나긴은 그들보다도 더 뒤에 생긴 신흥 대가문으로, 이들의 역사는 채 오백 년이 안 됐다.

평범한 인간의 시선으로야 까마득한 세월이지만, 백 년에서 이백 년 정도를 한 세대로 치는 귀족들의 기준으로는 말 그대로 갓 떠오른 졸부에 불과했다.

그들이 대가문임에도 불구하고 척박한 설원 지대에 자리 잡은 이유였다.

하지만 그래도 대가문은 대가문이며 심지어 어느 신적 존재가 배후에 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은가.

정면 충돌은 위험하다 못해 무모하기까지 한 선택이었다.

"직접 치는 건 미친 짓이고, 일단은 레노드부터 추격해 봐야지. 운이 좋으면 나긴 가문에 돌아가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그게 안 되면 전처럼 잠입해 보고."

"한 달이라면서? 그 정도면 가문으로 돌아가고도 남지 않았나?"

"귀족 한 사람이 혼자 뛰어서 돌아간다면 그렇겠지만 기사를 수십 명씩 끌고 왔잖아? 우리가 비제를 타고 다니느라 못 느껴서 그렇지 원래 세상은 생각보다 넓고 움직이기 힘든 곳이야. 동행의 수가 많아지면 더더욱 그렇고."

"하긴, 생각해보니...내가 바라하에서 남해로 올 때도 몇 달 걸렸지. 혼자 다녔는데도."

귀족과 기사가 일반인들보다 발이 빠르다지만 제대로 된 길 위가 아니면 이리저리 지형에 따라 돌아가야 하는 것은 물론, 도중에 식사 등을 위해 쉬거나 잠들기까지 해야 하는 만큼 나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나긴 가문이 있는 북서쪽 설원지대와 이곳 서부 황야 지대는 옛 제국의 도로로 이어지지도 않은 터라 빙 돌아가기까지 해야 할 터.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메이사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면 내일 바로 출발할 거야? 이곳 영주가 별로 안 좋아할 거 같은데."

"지금 바로 출발해야지. 미안하지만 그쪽 체면 챙겨주기엔 우리도 급하니까 어쩔 수 없어."

* * *

솔직하게 급히 떠난다고 말해 봐야 괜히 말다툼으로 시간만 끌릴 가능성이 컸기에, 투란은 쪽지만 한 장 남긴 채 일행과 함께 오렘 시를 떠났다.

비제가 끄는 그네에 탄 셋은 곧바로 북쪽을 향해 날고 또 날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 하는 만큼 회복약까지 먹여가며 말 그대로 쉬지도 않고 날아가기를 하루 반나절.

투란이 직접 뛰어도 보름은 넘게 걸릴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문제는 그들 모두 이곳이 초행인 탓에 레노드의 여행 경로는커녕 나긴 가문의 본거지가 어디인지조차 모른다는 것.

이는 직접 발품을 팔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찾았어?"

"어. 사흘 전에 지나갔대. 북서쪽."

"그래도 찾아서 다행이네. 그러면 다시 타자."

"어후, 지겨워."

그들은 주변에 마을이나 도시가 보이면 근처에서 몰래 착륙, 레노드가 이끄는 나긴 가문의 마법사들이 지나친 적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들이 움직였다는 방향으로 다시 이동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투란은 계속해서 변장 가면으로 얼굴을 바꾸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혹시라도 충돌이 일어난다면 누가 그들을 쫓았는지를 수소문하게 될 테니까.

그렇게 하루를 꼬박 더 조사한 뒤에야 투란 일행은 마침내 레노드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찾았다."

"확실해?"

"맞아. 귀족 세 명에 기사가 서른여덟 명...두 명은 아마 죽었거나 다른 일이 있어서 떨어졌나 봐. 보니까 마수도 세 마리 있네. 아마 귀족들이랑 결속되어 있겠지."

"아까 잠깐 듣기로 나긴의 수도까지는 나흘 거리랬으니까 내일에서 모레쯤이면 본가에 도착했겠는걸. 운이 좋았네."

어두운 밤, 투란은 성유물의 감각으로 수백 미터 이상 떨어진 나긴 마법사들의 야영지를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았다.

당시 나긴 귀족들의 대표가 레노드였다고 했으니 아마 저들 중 가장 강력한 마법사가 레노드일 터.

과연, 셋 중 상급 귀족 수준의 마력을 지닌 이가 한 명 있었다.

"레노드는 나긴 가문에서 후계자로는 여겨지지 않는댔지?"

"맞아. 그냥 상당히 실력 있는 정도랬어."

"확실히 눈에 보이는 건 딱 그 정도긴 하네."

투란은 메이사와 솔리프, 비제를 한쪽에 기다리게 한 뒤 은신 마법을 쓰고 나긴 가문의 야영지로 들어섰다.

귀족 중 결계사가 있는지 주변에 결계가 쳐져 있었으나, 이를 꿰뚫어 보는 감각과 비행 능력 덕에 어렵지 않게 돌파할 수 있었다.

"어후, 슬슬 서늘하군요. 고향에 돌아온 게 실감이 납니다."

"남쪽은 마침 여름이라 따뜻해서 좋았는데 말이지."

"형님은 따뜻했습니까? 전 더워서 죽을 맛이었는걸요."

"기사씩이나 되어서 흰소리는!"

투란은 기사들의 잡담을 흘려들으며 밝은 모닥불을 피해 레노드에게 접근했다.

그러던 도중 옆에서 가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짐승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늑대...아니, 개인가?'

네 발로 섰는데도 머리 높이가 사람만 한 개 한 마리가 투란이 있는 쪽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다.

거기다 그보다도 큰 곰과 엘크 한 마리까지.

과연 조련사 혈통의 대가문다운 구성이라 할 만했다.

잠시 후, 투란은 레노드가 머무는 가장 큰 천막 앞에 도착했다.

들어가기 전 성유물의 감각을 끌어올리자 천막 안에 있는 이의 상징이 보였다.

개처럼 보이는 짐승에게 손을 뻗는 것이 조련사, 사람 형상에 실을 연결해 위에서 조종하는 것이 지배자일 터.

다행히 그 둘 외에 다른 상징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혈통 능력은 두 개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투란은 가지고 있는 방어 마법기를 모두 활성화하며 긴장한 채 천막 입구를 들추고 들어갔다.

레노드가 프레아 신족의 빙의체로서 힘을 드러내는 순간 불의 영혼을 폭발시키면 메이사와 솔리프가 곧장 달려올 터였다.

그러나 그런 경계가 무색하게도 레노드는 무료한 듯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앉은 채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일 분 가까이 기다린 뒤, 투란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레노드는 아닌 거였나?'

사서에게 해를 가할 능력이 있다는 점 때문에 의심했건만, 의외로 레노드는 혈통도 두 개일뿐더러 투란의 접근 역시 알아차리지 못했다.

물론 자하르 귀족의 은신이란 별도의 방법이 없으면 최상급 귀족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말이다.

아니면 이전에 바달 아라비온이 그랬듯 마력을 활성화하지 않으면 세 번째 혈통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지도.

투란은 차분히 레노드가 가진, 그리고 천막 안쪽에 자리한 마법기들을 하나하나 분석했다.

만약 정령을 제압했다면 당연히 무언가 마법적 힘이 깃든 물건에 넣어두었을 테니까.

'아무래도 망토는 아닐 거 같고...지팡이는 수상하니까 가져가 볼까? 일단 보류. 반지는 끼고 있어서 몰래 가져가지는 못하겠어. 그리고 이건-'

투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은 것은 천막의 구석진 곳에 놓인 궤짝, 정확히는 그 안에 담긴 보석함이었다.

크기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

다른 마법기들보다 유난히 강한 마력이 흐르는 것은 물론이요, 안쪽에서 회색의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설마, 이건가?'

생긴 것부터 성유물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특성까지, 모든 것이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정령을 봉인하는 마법기일 거라고.

투란은 레노드의 눈치를 슬쩍 본 뒤 보석함을 품에 넣고 천막을 나와 메이사와 솔리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당연하게도 이 과정에서 나긴 가문의 마법사들은 아무도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은신을 푼 투란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찾았어? 레노드가 맞아?"

"들키진 않았고?"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메이사와 솔리프가 급히 말을 걸어왔다.

두 사람 다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신적 존재와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압박감을 느끼고 있던 모양이었다.

"일단 안 들키고 이걸 찾아왔어.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안에 우리가 찾던 게 들어있을 것 같아."

"마법기인가? 우리 중에 부여사가 없어서 당장 확인이 안 되는데, 막 열어 봐도 되겠어?"

"아시즈를 찾아갈 시간은 없어. 만약 이게 아니면 저놈들을 덮쳐서 제압한 다음 캐물어야 하니까. 비제, 바로 도망쳐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네는 계속 매고 있어 줄래?"

[알았어!]

자기만 믿으라는 듯 글씨를 쓰는 비제의 모습에 살짝 웃으며, 투란은 조심스럽게 보석함을 열었다.

혹시라도 함정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기에 두 사람과 조금 떨어져서 방어 마법기를 활성화한 채였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짙은 연기가 쏟아져 나오더니 안쪽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여기는 또 어디냐?"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얼마 전 들었던 사서의 목소리에 투란은 웃으며 인사했다.

83화

"끄응."

보석함에서 걸어 나온 사서는 마치 오랜 시간 좁은 곳에 갇혀 있던 사람처럼 기지개를 켜고 몸을 좌우로 돌렸다.

정령 역시 근육통을 겪기라도 하는 것일까?

투란은 그가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시간을 준 뒤 말을 걸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마도...음, 어째 몸에 힘이 영 들어가지 않는군. 혹시 도서관과 멀리 떨어진 곳인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과 몸을 내려다보던 사서는 갑자기 투란을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그보다, 왜 저기서 나오니까 바로 네가 보이는 건지 모르겠구나. 설마 날 납치해오라고 지시한 게?"

"그럴 리가요. 전 오히려 어르신을 구출한 쪽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투란은 메이사와 솔리프를 바라보았다.

둘의 멍한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답을 들은 것과 다름없었다.

"둘 다 안 보이나 보네?"

"응."

"그냥 혼잣말하고 있는 거로만 보이는걸."

혈통을 두 개만 발현했던 시절의 그도 사서를 볼 수 있었으니 조건은 잠재된 혈통의 개수일 텐데.

두 동료에게도 아직 발현되지 못한 혈통이 있으리라던 짐작이 틀렸던 것일까?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투란은 다시 사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어떻게 잡히셨는지는 기억나십니까?"

"평소처럼 지내던 중에 웬 띨띨하게 생긴 놈이 찾아오길래 장난이나 치려는데, 갑자기 녀석이 말을 걸어오더구나. 나를 아는 눈치였지."

"정확히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대충...."

사서는 완벽한 기억력의 소유자답게도 그 당시의 대화가 어땠는지를 그대로 읊어 주었다.

[오...정말로 정령이 남아 있었잖아? 나 참, 기왕 흔적을 지울 거면 통째로 없애지 뭐 이렇게 대충 뭉갰담.]

[정령이라니, 설마 내 얘기를 하는 게냐?]

[그걸 몰라서 물어? 이봐, 인공지능. 혹시 요즘 누구한테 이상한 이야기를 하거나 들은 적 없냐? 생명학자에 대해서라거나, 아니면 전생술(轉生術)에 대한 거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군. 책을 읽지 않을 거라면 꺼져라. 도서관에서 소란은 금지다.]

[쯧, 진짜 말이 안 통하는구만. 뭐, 자세한 건 돌아가서 얘기하자. 거기에는 네 입을 열어줄 친구가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길래 뭔 개소리냐고 되물었더니 그놈이 저 보석함을 꺼내 열더구나. 그러자 의식이 안으로 훅 빨려 들어가더니 정신을 차리고 나니 지금이었다."

"...혹시 그 띨띨한 놈이 이렇게 생긴 거 맞습니까?"

투란이 바닥에 대지 조작 마법으로 레노드의 얼굴을 그려내자 이를 본 사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이를 들은 투란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 말인즉 레노드가 사서를 직접 인식하고 말까지 걸었다는 뜻이 아닌가.

분명히 아까 전 확인했을 때는 두 개의 혈통을 가졌을 뿐인 평범한 대가문 귀족이었던 그가 말이다.

심지어 대화 내용 역시 의미심장하기 짝이 없었다.

인공지능이라는 건 뭔지 모르겠지만, 생명학자는 대충 짐작이 갔다.

도서관에서 접했던, 난쟁이들을 마구 조작하던 신이 생명을 다루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생명학자란 틀림없이 그에게서 기인하는 혈통일 터였다.

전생술이야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하는 기술일 것이고.

즉, 레노드나 그를 보낸 세력은 투란이 사서와 도서관에서 무언가 수상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찾아온 것이다.

어쩌면 레노드의 안에 그 생명학자 혈통의 시조인 신이 직접 깃들어있을지도.

그나마 구체적인 내용이나 대화의 상대까지는 전혀 모르는 것 같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사서는 투란에 대해 이야기해주기를 거부했고, 이후 봉인되었다가 지금 풀려났으니까.

"감사합니다. 제 비밀을 지켜 주셔서."

투란은 사실 사서가 굳이 그의 정체를 비밀로 지켜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야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준 덕에 선생처럼 여기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사서에게 투란은 어쩌다 자기와 대화가 된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

감사 인사를 들은 사서가 픽 웃으며 답했다.

"네가 좋아서 그런 건 아니니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그 자식이 워낙 싹퉁바가지가 없었어야지."

"아...."

아무래도 업신여기듯 물은 태도에 빈정이 상해서 그랬을 뿐인 모양이었다.

확실히, 예의를 지키는 건 언제나 지키지 않는 것보다 더 유용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도중, 뒤에서 누군가가 투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메이사가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혹시 우리한테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좀 전해줄 수 있을까?"

"아."

솔리프와 메이사가 보기에는 투란이 혼자 떠들며 바닥에 레노드의 얼굴을 그리는 것으로만 보였을 터.

차근차근 조금 전 들은 이야기를 모두 알려주자 두 사람의 얼굴 역시 심각하게 변했다.

"으음...."

"확실히 수상한데, 진짜로. 그 레노드라는 자식의 몸 안에 뭔가 있는 건 확실한 거 아냐?"

"그렇다고 봐야지."

짐작건대 과거 바달이 그랬듯, 힘을 행사하는 순간 새로운 혈통이 깃들거나 하는 방식일 가능성이 컸다.

지금도 레노드의 인격이 유지되고 있는지 아닌지는 불명이지만.

두 사람이 이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사이, 투란은 사서에게 나직이 물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르신?"

"음?"

"이대로 도서관으로 돌아가시면 레노드나 그 배후 세력이 다시 어르신을 납치하러 올 겁니다. 그렇다고 거기에 대응하시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이를 들은 사서가 기가 찬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빙빙 돌려 말하지 마라, 이놈아. 살고 싶으면 얌전히 내게 붙어 있으란 거 아니냐?"

"그 말을 하려던 게 맞긴 합니다."

"쯧, 어쩔 수 없지. 이래서야 도서관의 정령이 아니라 보석함의 정령이 되는 꼴이다만...일단 이걸 매개로도 머무르기는 충분한 것 같으니 말이다."

다행히 사서는 생각보다 시원시원하게 동행을 허락했다.

만약 그가 자기 본분에 충실하겠다고 다시 도서관에 데려다달라고 우겼으면 난처했을 텐데.

그렇게 사서를 구출하고 합류를 설득하기까지 하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였다.

저들을 얌전히 나긴 가문의 본거지로 돌려보내고 퇴각할지, 아니면 공격해서 레노드를 포획해 정보를 캐낼지를 정하는 것.

"공격하자."

"여기선 한 번 빠지는 게 어때?"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한 메이사와 솔리프가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암묵적인 합의로 메이사가 먼저 의견을 냈다.

"저것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보석함을 도둑맞았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이대로 물러나면 훔친 이가 자하르 귀족이라는 것과 목적이 사서의 구출이었다는 것까지 드러나게 돼. 그러면 당연히 도서관이 있던 오렘 시로 다시 사람을 보낼 거고, 범인이 우리라는 결론에 도달할 거야. 하지만 모두 몰살시키면 입을 막을 수 있겠지."

거기까지 말한 뒤, 메이사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다소 서늘한 어조로 덧붙였다.

"거기다...어차피 나긴 가문은 적이잖아? 조금이라도 전력을 줄일 수 있으면 이득이고, 레노드를 잡아서 심문하면 적의 정체를 엄청나게 많이 파악할 수 있어."

투란은 메이사의 말에 섞인 악의를 느낄 수 있었다.

레노드, 정확히는 과거 그녀를 조롱했던 나긴 가문 여인에 대한 증오가 실려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주장 자체는 꽤 그럴싸할뿐더러 투란의 사고방식과도 맞닿는 바가 있었기에, 의견 자체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솔리프가 재생된 손을 가볍게 들며 자기 의견을 꺼냈다.

"음, 우선...우리가 범인이란 건 저것들을 전멸시켜도 들키게 될걸? 애초에 보낸 목적이 정령, 그러니까 사서 아저씨를 회수하라는 거였으니 전멸했다고 하면 그쪽부터 조사할 테니까. 그것까지 막자면 우리를 본 오렘 시 사람들을 다 죽여야 하는데 그러진 않을 거잖아?"

솔리프가 약간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묻길래 투란은 고개를 끄덕여 그럴 일은 없다고 확실히 못을 박았다.

마수 사냥을 의뢰했건 돈을 받았건, 결국 발타스 가문의 역대 영주들이 그에게 도서관의 사용을 허락하는 호의를 보였음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저놈들을 전멸시키건 말건 우리들의 정보를 은폐하긴 글렀다는 거야. 게다가 하나 더, 사서 아저씨 말대로면 저 레노드란 놈 안에 신이나 그 비슷한 게 들어있는 건 반쯤 기정사실인 거 아니야? 만약 그놈이 위기에 빠졌다고 숨겨진 힘을 행사하기라도 하면? 자칫 잘못했다간 전멸까지도 각오해야 할 텐데,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나?"

솔리프의 말을 들은 메이사는 잘근잘근 입술을 짓씹을 뿐 뭐라 대꾸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대화를 듣던 사서가 투란을 향해 말했다.

"전에는 완전히 혼자 다니더니, 그 짧은 새 친구라도 만든 게냐? 저런 이야기까지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예."

"흠, 소중히 해라.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친구는 천 개의 금화보다도 귀중한 법이니까. 사실 나라고 직접 느껴본 건 아니고 책에 나오는 잠언이지만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한 투란이 두 사람에게 사서의 말을 전해주자 그들 역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다소 냉각되었던 분위기를 환기한 뒤, 투란은 자신이 낸 결론을 그들에게 알렸다.

"일단, 공격하자."

"근거는?"

"우선 레노드의 몸에 있는 마력은 기껏해야 상급 귀족 수준이야. 저기서 혈통 능력 두 개가 갑자기 생긴다고 해도 우리 셋을 단숨에 해할 만큼 극적으로 강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봐.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왜 드러내놓고 신으로 행세하지 않고 저렇게 숨어다니겠어?"

"음, 그야...그러려나."

"무엇보다도, 이건 그 정도 위험을 감수할 만한 기회야. 신의 빙의체가 이 정도로 무방비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두 번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

공격을 반대했던 솔리프마저도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투란은 슬쩍 메이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만, 전멸시키지는 않을 생각이야. 아니, 오히려 일부러 좀 살려보내는 게 낫겠지. 마침 저들의 본가가 가깝기도 하고."

"왜?"

"이번 공격을 이용해서 사서 어르신을 구출한 게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의심하게 만들 수 있거든."

투란은 흉내쟁이 성유물을 연 뒤 그 안에서 마력 두 덩이를 덜어내어 내밀었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과거 지하 미궁에서 죽었던 자하르 귀족들의 마력이었다.

"왜냐면 나긴 가문의 귀족들을 습격하고 보석함을 강탈한 이들은 자하르의 귀족들이니까."

* * *

"습격이다! 자하르, 자하르다!"

"빨리 반신들께 전해!"

"살려줘!"

어두운 밤, 결계가 경고를 울리는 것과 사방에서 날아든 암기가 기사들을 덮쳤다.

지난 두 달 동안의 느슨한 여행에 적응해 있던 그들은 이에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다.

"비, 빛을...!"

그나마 영민하게 판단한 어느 기사가 다급히 손 위에 빛의 구체를 만들었으나, 빛이 퍼지기 전 새카만 무언가가 이를 잡아먹었다.

그와 함께 빛을 만들던 기사의 목이 날아가자 나긴 가문의 기사들은 빛을 만들어 은신을 밝히는 대신 보이지 않는 적을 피해 엉망진창이 되어 도망쳤다.

"그만, 그만! 도망치지 마라, 겁쟁이 자식들아! 내가 왔다!"

그때, 레노드의 수행원으로 따라온 결계사 혈통의 귀족이 자기 막사에서 뛰쳐나오며 거대한 빛을 만드는 동시에 자신의 몸 주변으로 방어용 결계를 급조했다.

갑자기 왜 자하르 귀족들이 습격해왔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전열을 정비해야 할 터.

"로기! 내게 와라! 날 보호해!"

조금이라도 방어 태세를 굳히고자 자신과 영적으로 결속된 개를 부른 순간, 여기저기서 날아든 암기들이 그의 온몸을 유린했다.

외침을 위해 벌렸던 입안과 목, 가슴으로.

비록 숙련자의 기술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하나하나가 최상위 귀족 수준의 마력이 담긴 탓에 어중간한 결계쯤 찢어발기고도 남을 위력이었다.

"컥...."

"바, 반신께서 당하셨다."

"모두 도망쳐라! 본가나 다른 쪽에 지원을 청해!"

누군가의 외침이 기폭제가 되어 살아남은 기사 중 절반 가까이가 우수수 야영지 주변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그나마 조련된 마수 세 마리가 어떻게든 저항하려 했으나 빛을 만드는 능력이 없는 그들로서는 도저히 은신 능력에 대처할 방도가 없었다.

세 마리 마수가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급소를 찢기고 꿰뚫려 죽어가는 사이, 한 발짝 늦게 천막에서 나온 레노드와 그를 수행하는 귀족이 환한 빛을 밝혔다.

그리고 다른 기사들은 두 귀족이 습격당하는 것을 막고자 주변을 몸으로 둘러쌌다.

잠시 후, 은신이 풀리며 엉망진창이 된 야영지 한복판에 사람의 모습이 생겨났다.

한 기사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들을 가리켰다.

"저기, 저놈들이다...."

환한 빛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하르 귀족의 수는 세 명.

하나같이 큼직한 망토로 온몸을 가리고 얼굴에 가면을 쓴 그들은 서로 다른 체형이 아니면 구분하기 힘든 차림새였다.

당연하게도 이 자하르 귀족 세 명의 정체는 투란과 솔리프, 메이사였다.

투란이 흉내쟁이 성유물에 들어있는 마력을 타인에게 인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

계기는 두 사람과 함께 온천 지대에서 머물며 마법을 수련하던 도중 툭 튀어나온 솔리프의 한 마디였다.

'내가 태양 혈통의 마력을 빼서 넣어줄 수 있으면 편할 텐데 말이야.'

지금 성유물 안에 바라하 혈통의 마력이 꽤 많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소모형인 이상 언젠가 다 떨어질 터.

덤으로 메이사의 폭풍 혈통 역시 아직 투란에게 없는 벼락의 힘이 있으니 부여해줄 수 있다면 쓸모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투란은 발상을 전환, 오히려 성유물에 있는 마력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정확히는 이전에도 해본 적 있는 생각이지만 물건의 정체를 감추느라 이를 알아볼 기회가 없었다는 게 더 옳은 말일 터였다.

성유물의 존재를 공유할 만한 동료를 얻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으니까.

물론 지금 자하르의 은신 능력을 두 사람이 쓰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투란 일행을 보며 레노드의 비서가 다급히 외쳤다.

"대체 왜 우릴 습격한 거지!? 나긴이 아라비온과 혼인 동맹을 맺었다지만 너희와는 전쟁 중이 아닐 텐데! 이건 명분 없는 살인 행위다! 또 자하르의 악명이 전 세계로 퍼지는 꼴을 볼 참이냐!"

"마음대로 하시지."

투란은 변조된 목소리로 답하며 손 위로 화염구를 피워올려 그대로 나긴 진영을 향해 쏘아냈다.

다른 두 명 역시 이에 합세하듯 주변에 있던 빛의 화살을 만들어 쏘아내거나 벼락을 내리쳤는데, 이에 맞선 나긴 가문의 마법사들은 한 번의 격돌로 힘의 격차를 깨닫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 무슨...!"

투란 일행의 공격은 놀랍도록 간단히 나긴 측의 저항을 분쇄했다.

비록 썩 익숙하지 않은 공격방식이긴 하지만 기초 역량 자체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그나마 공격을 한두 번 받아내고 우수수 쓸려나가는 기사들 사이로 두 귀족이 제법 분전했으나 그들 역시 힘에 부치기는 마찬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 역시 암기에 목을 꿰뚫리자 멀쩡히 싸울 수 있는 이는 레노드 한 명만이 남았다.

간신히 살아남아서 바닥을 나뒹굴던 기사 한 명이 작게 중얼거렸다.

"괴, 괴물들이야...."

이들을 상대하자면 여기서 이틀 정도 거리에 있는 본가의 정예들이, 아니, 어쩌면 가주가 직접 찾아와야 할 터.

하지만 아무리 강대한 마법사라도 이 먼 거리에서 싸움을 알아차리고 찾아올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그렇게 좌절하는 이들 사이에서 레노드 나긴은 겁을 먹는 대신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포위한 자하르 귀족들을 노려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의심하는 사람처럼.

잠시 후, 그가 쯧 하고 혀를 차며 하늘로 두 손을 뻗었다.

"젠장, 어쩔 수 없나."

레노드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맞은편에서 가면을 쓴 채 지켜보던 투란은 그제야 상대의 내면에 자리한 상징이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어느 정도 실력을 보이느냐에 따라 도망칠지, 아니면 제압할지가 결정될 터였다.

만약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강자라면 즉시 은신하여 세 갈래로 나뉘어 도망친 뒤, 투란이 비제를 탄 채 다른 두 동료를 회수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과거 바달이 그랬듯 상징의 변화는 순식간이었다.

본래 지배자와 조련사까지 두 개만 있던 상징 안에서 추가로 떠오르는 두 개의 상징.

그것은 교차한 도끼, 그리고 몰아치는 눈보라였다.

투란은 그 눈보라가 과거 아라비온의 가신 가문 중 하나이던 서리 혈통의 상징임을 알 수 있었다.

'도끼, 서리, 지배자, 조련사? 무슨 조합이지?'

그런 투란의 의문에 답하듯 레노드의 안에 생긴 상징이 서로 얽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달과 달리,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그중 고작 두 개뿐이었다.

눈보라가 교차한 도끼를 휘감는 동안, 지배자와 조련사 혈통은 우리는 저것들과 관계없다는 듯 도도하게 제 자리를 지켰다.

그때 현실에서는 레노드가 대량의 수분을 손에 모은 뒤 얼려내어 도끼를 한 자루 만들어내고 있었다.

"레, 레노드 님?"

"싸우기 전에 이거 하나만 묻자, 혹시 너희들 중에 '협정'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놈 있냐? 아니, 애초에 너희들 정말 자하르 가문 소속인 건 맞아?"

자신을 향해 어떻게 한 거냐는 듯 묻는 기사의 물음을 무시한 채, 레노드가 자신을 포위한 투란 일행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얼굴에 두려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물론 지금 레노드의 몸에 비치는 힘을 보자면 아주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급 귀족 수준이던 그의 마력은 이제 최상위권, 그중에서도 메이사와 솔리프의 정도에 도달해 있었으니까.

아마 그를 포위한 게 동급이거나 그 이상인 최상위 귀족 세 명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을 터였다.

84화

[녀석의 혈통 중 하나는 서리다. 조심해.]

[다른 하나는?]

[모르겠어. 하지만 아마 육탄전 쪽인 거 같아. 마력의 양은 최상급, 너희 둘의 중간 정도야.]

투란은 싸움에 앞서 바람 마법을 이용해 은밀히 목소리를 퍼트려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그들 중 유일하게 바람을 능숙히 다루지 못하는 솔리프는 듣고만 있어야 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생긴 찰나의 틈새.

이를 노린 레노드가 얼음도끼를 휙 휘두르자 날에서부터 싸늘한 빛무리 한 줄기가 반월형으로 쏘아졌다.

목표는 세 명 중 가운데 서 있던 투란이었다.

"윽!"

투란은 곧바로 대지의 벽을 만들어 이를 방어하려 했으나, 놀랍게도 빛무리는 마력이 담긴 바위벽을 가볍게 잘라내며 투란을 향해 쇄도했다.

그 순간 몸에서 튀어나온 녹색 방패가 이를 막아내며 얼어붙었다.

바라하의 귀족에게서 빼앗은 자동 방어 마법기였다.

'위험했다.'

투란은 방패에서 전해지는 파괴력에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 그건 가진 마력에 비해 지나치게 강력할뿐더러 무슨 마법인지 원리부터 이해하기 힘든 기술이었다.

어쩌면 두 개의 혈통이 섞인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흡!"

그때, 솔리프가 기합과 함께 땅거죽을 뒤엎어 수십 발의 암석 탄환을 전방으로 쏘아 보냈다.

이어서 메이사까지 화염 창을 여럿 만들어 쏘아내자 레노드는 더 공세를 이어나가지 못하고 도끼를 휘둘러 이를 쳐내며 물러섰다.

"아니, 뭔 힘이 이렇게...."

자신만만하던 조금 전과 달리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난처해하는 기색이 어렸다.

투란 일행이 조금 전까지 나긴 가문의 마법사들을 핍박할 때 상급 귀족 수준의 힘만을 사용했다면 지금은 말 그대로 본 실력을 완전히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부러 혈통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완전히 전력을 다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두 사람이 열심히 공격을 가하는 사이, 투란은 빛을 먹는 보자기를 꺼내 레노드가 만든 빛의 구체를 삼키게 했다.

환하게 빛나던 야영지가 순식간에 어둠으로 뒤덮이자 셋은 다시 몸을 감추고 암기를 던지거나 주변에 있는 시체의 피를 얼려 쏘아냈다.

투란은 길고 가느다란 바늘 형태의 암기를 던지며 혀를 찼다.

'이건 영 익숙해지지가 않네.'

투란 일행이 쓰는 암기는 아라비온에 있던 자하르 귀족, 레토가 쓰던 것으로 당연하게도 능숙하게 다루는 연습을 하지 않은 만큼 그 효율이 저열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자하르의 암살자인 척 위장할 생각이 없었다면 이런 걸 사용할 이유는 없었을 터였다.

"윽...!"

하지만 레노드는 그 미숙한 투척 공격을 조금 전처럼 쉽게 쳐내지 못했다.

은신 능력 탓에 투사체가 어디서 날아오는지 알 수 없게 되었던 탓이다.

다시 빛을 만들려 할 때마다 투란이 계속해서 마법기를 사용해 이를 없애 버렸고, 이를 막자니 다른 두 사람이 계속 공격하는 데 대응해야 하기에 손이 비지 않았다.

"으아아아!"

참다 못한 레노드가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르자 주변으로 싸늘한 냉기가 퍼져 나갔다.

적당히 서늘한 정도이던 공기가 순식간에 숨결조차 얼어붙을 만큼 차가워져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나긴의 기사들이 온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레, 레노드, 님."

"너무 춥, 습니다...."

그렇게 고함 한 번으로 주변 온도를 떨어트린 레노드는 이내 손짓으로 수십 개의 얼음 송곳을 만들어 사방으로 쏘아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을 찾으려 했다.

물론 상대를 볼 수 있는 이와 볼 수 없는 이가 서로 투사체를 날려 대며 싸우면 그 결과는 뻔한 일.

계속해서 찔리고 베인 상처가 생겨나며 레노드의 몸이 점점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이상한데....'

계속해서 공격을 날리는 한편, 투란은 가볍게 손가락에 침을 묻힌 뒤 허공을 휘저었다.

이곳의 기후는 꽤 건조한 편이건만, 레노드는 놀랍도록 수월하게 얼음을 응집해가며 투사체로 사용하고 있었다.

물을 다루는 여울 혈통의 능력이 있다고 해도 이런 환경에서는 저만큼 쉽게 능력을 행사할 수 없을 텐데도.

심지어 계속 얼음을 만들고 있는데도 주변의 공기가 건조해지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이래서야 수분을 모아 얼리는 게 아니라 아예 얼음을 창조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게 늑대 무리에게 사냥당하는 물소 같은 꼴로 저항하기를 약 일 분.

마침내 기사들이 견디지 못하고 모조리 얼어 죽었을 때쯤, 궁지에 몰린 레노드가 두 눈을 새빨갛게 붉혔다.

"으...."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그의 몸속을 맴돌던 마력의 흐름이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수작을 부리는 것을 눈치챈 투란이 은신을 풀고 경계하라고 외치려던 순간, 레노드가 발을 쾅 굴렀다.

"이, 자식들이-!"

발에서부터 시작된 얼음 장판이 순식간에 반경 백수십 미터로 퍼져 나가며 빙판을 만들었다.

바닥을 얼음으로 덮는 마법이라니, 이딴 게 대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미끄러워서 걷기 힘들어지라고?

그런 의문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레노드의 몸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미끄러졌다.

어느 거인이 직접 몸을 들어 옮겨준다면 저런 속도가 나올까 싶을 정도로.

그 목표는 바로 직전에 암기를 던지며 자신의 위치를 노출하고 만 솔리프였다.

"죽-어-!"

순식간에 솔리프가 있던 곳에 도착한 레노드는 반쯤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내지르며 도끼로 땅을 내리쳤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그 동작이 가져온 결과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콰드득, 내려찍은 바닥에서 솟아난 얼음 송곳이 부채꼴로 전방 수십 미터를 뒤덮었다.

은신으로 몸을 숨기면 그냥 통째로 다 날려버리면 그만이라고 외치는 것처럼.

"이런 미친!"

자신을 향한 공격에 경악한 솔리프는 가지고 있던 바라하의 마법기를 최대 위력으로 가동했다.

백색 구체가 온몸을 휘감자 그 위로 얼음 송곳이 빠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마구 으스러졌다.

'뭔 힘이...!'

구체 너머로 전해져 오는 압력에 솔리프가 눈을 부릅떴다.

그가 가져온 마법기는 바라하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의 방어 능력을 지녔건만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투란은 레노드의 강화된 힘조차 그와 메이사의 중간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이것만 보면 마력이 두 배쯤 더 강한 사람과 싸우는 것 같았다.

빛나는 구체로 몸을 감싼 탓에 은신을 풀자 이를 본 레노드가 희열에 찬 표정으로 외쳤다.

"거기구나!"

새빨갛게 충혈된 눈과 거품을 물고 침까지 흐르는 입가, 헤 벌어진 입은 딱 봐도 정상적인 사람의 그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가진 또 하나의 혈통, 교차한 도끼 상징의 정체는 이성을 잃는 대가로 강대한 신체 능력을 얻는 광전사가 분명했다.

레노드가 그 자리에서 수십 미터를 도약해 도끼를 내리치자 꽝 하는 굉음과 함께 백색 구체에 수십 개의 금이 생겼다.

이 구체가 깨지고 육탄전에 돌입한다면 오 초 안에 승부가 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신체 능력이었다.

"젠장, 도와줘!"

궁지에 몰린 솔리프가 다급히 외친 순간, 옆에서 날아온 돌멩이가 그대로 레노드의 머리를 강타했다.

다급한 마음에 전력을 다해 날린 투란의 일격이 몇 초 정도 레노드의 의식을 빼앗았다.

"괜찮아?"

"죽진 않았어, 으...몇 군데 찔린 것 같은데."

솔리프가 투덜대며 재빨리 은신하여 적에게서 거리를 벌리는 것과 함께, 메이사가 거대한 침엽수 몇 그루를 염동 마법으로 뽑아와서 막 의식을 차리던 레노드를 내리쳤다.

완전히 광폭화한 광전사가 노성을 터트렸다.

* * *

십여 분 뒤, 투란 일행은 빈사 상태가 된 레노드를 사슬 마법기로 구속했다.

그 과정에서 솔리프가 얼음 송곳을 잘못 맞아 허벅지를 꿰뚫리거나 메이사가 도끼에 얻어맞아 팔이 부러지는 사고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잡긴 했으니 작전 성공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동원해 만든 회복약으로 상처를 치료하며, 세 사람은 야영지에서 조금 벗어난 침엽수림 한가운데에 레노드를 내던졌다.

"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좀만 더 셌으면 혈통 능력을 써야 했을 거야."

"그래서 이 녀석의 정체는, 그거 맞지?"

"아마도."

신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그들 셋 모두 레노드의 안에 있는 존재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프레아 신족, 혹한의 분노.

카마인 혈통을 비롯한 서리 혈통의 귀족들이 선조로 여기는 이야말로 서리 혈통과 광전사 혈통을 동시에 가질 만한 이였다.

'그런 것치고 왜 카마인이 아니라 나긴 가문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이유야 짐작해볼 만한 것이 여럿 있었다.

카마인 가문에 아직 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다거나, 그게 아니면....

'이미 카마인을 지배하는 신이 따로 있다던가.'

조금 전 레노드의 몸을 차지한 이가 '협정'이란 단어를 언급하지 않았던가.

그 단어가 거대 세력 간의 협의와 조약 등을 의미함을 생각하면 곧바로 한 가지를 연상시킬 수 있었다.

바로 이 땅에 남은 프레아 신족들이 한 패거리가 아니라는 것.

'하긴, 말이 신이지 강한 인간일 뿐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그 자손인 마법사들이 끊임없이 대립하고 다투는 것을 생각하면 신들이라고 뭔가 다르리라 여기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한참 추리에 빠져 있던 도중, 솔리프가 널브러진 레노드를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한데. 우리가 그걸 잡았다는 거 말이야. 마냥 좋지많은 않고...좀, 허무하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마냥 쉽게 잡은 건 아니지만."

굳이 신이 아니라 '그것'이라 표현하는 것은 저들에게 대화만으로도 무언가 감지할 능력이 있으리라는 짐작에서였다.

물론 도서관에서 대화했다는 것만 알 뿐 투란의 정체나 정확한 대화 내용을 모르는 것으로 보아 정확도는 높지 않은 것 같지만, 가능하면 위험을 피하는 것이 좋았다.

투란은 고개를 끄덕여 솔리프의 말에 동의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네. 사실 나도 좀 그랬거든."

그 역시 모든 마법사의 선조이자 이종족을 물리치고 인류를 구원한 창조주, 위대한 프레아 신족이 고작 그들 세 사람에게 잡혔다는 데서 묘한 실망을 느꼈다.

얼굴 한 번 보는 게 소원이었던 우상이 사실 운 좋은 술주정뱅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면 이런 기분일까.

그런 두 사람의 말에 뒤에 있던 메이사가 고개를 저었다.

"허무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 않았어? 이딴 몸을 가지고도 우리 셋이랑 이렇게 싸울 정도면, 난 그 사람이 얼마나 강할지 상상이 안 가서 좌절감마저 느껴질 지경인데."

"아, 하긴...."

메이사의 아버지, 바달 아라비온이 언급되자 세 사람 모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레노드의 안에 깃든 신은 상급 귀족의 몸뚱이에 두 개의 혈통 능력을 엮는 것만으로도 최상급 귀족 세 명과 그럭저럭 싸울 수 있는 힘을 발휘했다.

그렇다면 대가문 가주의 몸에 깃들어 네 개의 혈통을 온전히 엮어낸 신은 얼마나 강대한 괴물일 것인가?

이론상 그들 모두가 대가문의 가주급 마력을 지니고서도 감히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지도....

상상만으로도 자신감이 사라질 것 같았기에, 투란은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일단 이번 기회에 정보를 많이 얻어 봐야지. 그런 김에 이 녀석이 쓰던 수상쩍은 마법들도 알아내고 말이야."

"아, 그 빛 쏘는 거? 그거 되게 이상하더라. 냉기인 줄 알았는데 물리적 실체도 있고, 맞은 곳이 얼어붙기도 하고 말이야."

"그것도 그렇고 그냥 얼음 마법을 다루는 것도 좀 이상하더라고. 뭔가 정상적인 마법이랑 궤가 달라."

솔리프의 반문에 투란이 조금 전 자신이 관찰하며 느꼈던, 전혀 수분을 사용하지 않는 듯한 얼음 마법을 설명하자 메이사가 거기에 덧붙이듯 말했다.

"아, 맞아. 정리하는 중에 봤는데 그렇게 만든 얼음은 물도 안 남고 사라지더라. 마치 환상이라도 됐던 것처럼."

"그러면 환영으로 만든 얼음-은 아닐 거고, 뭐지? 얼음을 소환하는 건가?"

"그걸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투란의 말에 솔리프가 윽 하고 신음했다.

가면 탓에 보이지는 않지만 안쪽의 얼굴이 죽상일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제 또 그거 할 차례인가?"

"보기 싫으면 전처럼 망보러 가도 돼. 마침 내 단짝도 혼자 있느라 심심할 테니까."

"됐어. 슬슬 적응해야지."

질색하는 솔리프와 가볍게 잡담을 나누는 한편, 투란은 슬쩍 메이사 쪽에 신경을 집중했다.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는 탓에 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이 혼란으로 가득 차 있음은 느낄 수 있었다.

[괜찮겠어?]

[상관없어. 저 몸뚱이는 결국 그 더러운 여자의 자식이니까. 내 오빠 같은 게 아니야.]

바람 마법으로 은밀히 목소리를 전하자 메이사는 딱 그렇게만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에 투란은 곧장 소량의 회복약을 레노드의 입에 흘려 넣고 큼직한 물방울 한 덩이를 끼얹었다.

"으으...."

힘겹게 눈을 뜬 레노드는 자신을 둘러싼 이들의 모습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전투라도 치른 듯 여기저기 찢어진 망토에 가면 차림을 한 괴한 세 명.

떳떳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대놓고 드러낸 모습에 깜짝 놀라 마력을 끌어올리려 했으나 몸에서는 아무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 여긴? 이건 뭐지? 당신들은 뭐야?"

"기억이 안 나나 본데?"

"그냥 모른 척하는 거 아닐까?"

메이사의 물음에 투란은 가볍게 코를 킁킁거린 뒤 고개를 저으며 그 가설을 부정했다.

주저앉은 레노드의 몸에서 혼란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즉, 신은 완전히 레노드의 몸을 차지한 게 아니라 빙의하듯이 필요할 때만 오가는 것이 분명했다.

투란 일행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것으로 보아 평상시에도 어느 정도 의식을 잠식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아마 정말로 안에 숨은 것 같은데. 이봐, 네 안에 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 녀석을 꺼내라. 안 그러면 고문하겠어."

"뭐, 뭐라고? 난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

레노드는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으나, 투란은 그의 얼굴에 순간 비친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마치 '들켰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

'레노드도 자기 안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 좋아, 이참에 숙주와 어떤 식으로 공존하는지도 확인할 수 있겠는걸.'

투란은 레노드의 신발을 벗긴 뒤 기다란 바늘을 들어 발가락 끝에 가져다 댔다.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한 레노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쪽이랑 개인적인 원한은 없으니 고문 전에 마지막으로 말하겠어. 네 안에 있는 그놈을 불러와."

진짜 레노드와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투란은 그가 썩 강단 있는 성격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레노드는 굳이 고문할 것도 없이 겁에 질려 외쳐대기 시작했다.

"아, 으...! 이미르! 이미르! 살려줘요! 제발!"

이미르, 그것이 혹한의 분노라 불린 신의 이름인 것일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레노드의 몸에 깃든 신은 간절한 부름을 외면하는 듯 아무 반응이 없었다.

지금 제 숙주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인데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숙주가 죽어도 영혼이 소멸하지는 않는 건가?'

투란이 전투 과정은 물론, 그 이후로도 완전히 정체를 감추도록 했던 것 역시 이럴 수도 있으리라 생각해서였다.

만약 죽였는데 영혼이 본거지로 휙 돌아가버리기라도 하면 소득 없이 이쪽의 정보만 노출하는 셈이니까.

어쨌든, 이대로라면 레노드를 협박하고 고문해 봐야 의미 있는 정보를 얻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이에 투란은 그 앞에 쭈그려 앉은 채,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미리 준비했던 말을 읊었다.

"이미르, 오타스 님의 뜻을 전하러 왔다."

오타스.

그것은 과거 투란이 접했던 일기장에 언급되던 어느 프레아 신족의 이름이었다.

투란은 그 정체가 높은 확률로 자하르의 선조, 밤 사냥꾼이라 생각했다.

당시 일기장의 주인이 간절히 필요했던 것이 바로 자하르의 추적 능력이었으니까.

즉, 지금 그는 자하르의 신에게 명령을 받은 사자인 척 사칭한 것이다.

'이렇게 대놓고 이름을 언급하면 모습 정도는 보이겠지.'

이것으로 범인이 지나가던 방랑 귀족 투란일 거라고는 생각하기 더 어려워졌을 게 분명했다.

밤 사냥꾼의 진짜 이름을 그런 잔챙이가 알고 있을 가능성은 없으니까.

예상대로 겁에 질렸던 레노드의 안에 누군가 대신 들어간 것처럼 그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의아했던 것은 그것이 분노나 공포가 아닌, 오히려 경악에 가까운 감정이었다는 것.

레노드의 몸을 차지한 프레아 신족 이미르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오타스? 그 오타쿠 새끼가 아직도 살아있었다고? 무슨 수로? 대체 수천 년 동안 어디 숨어 있었길래?"

8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