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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 90-95

90화

투란의 대답에 희망에 차 있던 아르마니의 얼굴에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느슨해졌던 분위기가 다시금 팽팽해진 가운데, 인어 소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질문했다.

"어째서...?"

"이유야 여럿 있는데, 우선 너희를 못 믿으니까 그렇지. 그냥 핑계 대고 가져가려는 건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어? 거기다 이거랑 맞먹는 물건이라면 너희가 바닷속에서 쓰는 거울쯤은 될 텐데 그걸 떼줄 리는 없을 테고 말이야."

"그, 그건 그렇다만-"

"아르마니!"

무어라 대답하던 아르마니의 뒷덜미를 휙 잡아당긴 것은 그의 누이, 로위나였다.

동생을 제압한 그녀가 투란을 향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설마 그 괴물이 계속 바다를 활보하게 두겠다는 건가? 우리는 물론이고 너희 인간들에게도 이로운 일은 아닐 텐데. 지금까지야 운이 좋았다고 해도, 놈이 계속 이 바다를 헤엄치다 보면 언젠가는 너희들의 해안 도시도 모두 초토화될 거다. 만약 거울 너머로 넘어가 버린다면 그때부터는 남해도 무사하지 못할 테고."

그것은 투란으로서도 정말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정황상 흉내쟁이 성유물이 그 큰바다뱀을 봉인하다시피 했던 것이라면, 이를 가져감으로써 생겨난 재난에 그의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 해결책이라고 제시된 것이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심지어 확실히 해결되리라 확신할 수도 없는 방법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었다.

거기다 성유물을 잃으며 생기는 전력 저하는 장차 저 강대한 신들과 맞서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실로 치명적이기 짝이 없는 일.

그에 비해 또 다른 방법은 성공한다면 전력 저하는커녕 오히려 막대한 상승을 노릴 수도 있었다.

"그 부활한 큰바다뱀은 얼마나 강하지?"

"뭐?"

"아까 말했잖아. 온전히 부활한 것은 아니라고. 그래서 지금은 어느 정도인지를 묻는 거다."

"...그건 왜 묻는 거지? 설마 사냥하기라도 할 참인가?"

"할만하다고 생각이 들면. 네 말대로 해봐야 또 봉인하는 것뿐인데 그것보다는 아예 없애는 쪽이 안전하니까."

투란의 말을 듣던 솔리프가 워우, 하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진짜로 할 거냐?"

"도저히 못 잡을 정도로 강하지만 않다면. 혹시 무서우면 빠져도 뭐라고 안 할게."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어디 내가 이런 거 빼는 거 봤어?"

그렇게 답하며 슬쩍 메이사 쪽을 보니, 그녀 역시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여 투란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이에 로위나가 미치광이를 보는 듯한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대체...큰바다뱀이 뭔지 알기는 하는 건가? 한때 너희들의 신과 대등하게 맞서던 존재인데?"

"대충 알 만큼은 알아. 시체긴 했지만 직접 본 적도 있고. 질문에 대답해줄 생각이 없으면 이만 가보도록 해. 그 일은 우리 쪽에서 알아서 처리해볼 테니까."

물론 정말로 큰바다뱀의 힘이 그토록 강력하다면 한발 물러서서 힘을 키운 다음 도전할 생각도 있었다.

성유물의 감각 덕분에 상대가 어느 정도로 강대한 힘을 지녔는지는 대충 가늠해볼 수 있으니까.

그동안 폭풍으로 희생되는 이들이 좀 더 생기겠지만, 그렇다고 이를 위해 막대한 전력 저하와 그에 따르는 여러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지금 그가 가장 먼저 책임져야 할 것은 얼굴도 모르는 바닷가의 양들이 아닌 그의 친구들이었다.

그렇게 말을 끊자 로위나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한 기세에 투란은 내심 저 인어 공주를 얼마나 두들겨 패서 쫓아내야 할지 고민했다.

일단 어지간하면 죽이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인어들이 카마인의 배후에 자리한 신과 연계되어 있음을 아는 탓이다.

이미 아라비온-나긴 연합과 자하르-바라하 연합의 후계자, 다르게 말해 빙의체를 빼내며 적대관계가 된 만큼 위협적인 적을 한 패거리 더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저쪽에서 아득바득 성유물을 챙기겠다고 계속 덤비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러나 예상과 달리, 로위나는 발끈해서 덤비는 대신 지그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너는 얼마나 강하지?"

"음?"

"대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길래 그렇게 오만한 태도를 보이느냐고 묻는 거다. 혹시 저 지상에 있는, 너희들이 숭배하는 대가문의 가주들쯤은 되나?"

"그래도 적당히 힘 좀 쓰기는 하지."

인어들이 성유물을 뺏겠답시고 덤벼들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적이 될 텐데 순순히 실력을 알려줘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 의미를 이해했는지, 로위나가 적대할 의사가 없다는 듯 두 손바닥을 위로 드러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만약 너희가 충분히 강하다면, 내가 아버님께 직접 말씀드려보겠다. 함께 큰바다뱀을 사냥해 보면 어떻겠냐고."

"너희가?"

"그래. 우리가 도움을 주냐 아니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는 건 알 테지? 전력으로서야 말할 것도 없고, 너희들끼리는 큰바다뱀을 쫓기조차 힘들 테니까."

말만 들으면 꽤 혹할 만한 제안이기는 했다.

주로 바닷속에서 활동하는 큰바다뱀을 사냥하는 데 바다를 본거지로 삼은 인어들을 동료로 두느냐 아니냐는 분명히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 테니까.

애초에 지금 그들은 사냥감이 어디 있는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는 상태이지 않은가.

다만 걸리는 점이라면....

"조금 전이랑 태도가 너무 달라졌는데? 아까는 당장이라도 뺏을 것처럼 굴더니."

"큰바다뱀을 사냥하겠다고 호기롭게 말할 정도면 어중간한 약자는 아니겠지. 네 동료도 비슷한 수준이라면 나 혼자는 물론이고, 우리 종족이 힘을 합친다 해도 물건을 빼앗기 쉽지 않을 거다. 그러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르고.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 솔직하기까지 한 대답에 투란은 눈앞에 있는 인어 공주에 대한 평가를 조금 올렸다.

첫인상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바보로만 보였는데, 적어도 기량을 재볼 정도의 눈치는 있는 듯했다.

아니면 처음에는 위압적인 모습을 보이며 투란이 지레 겁먹어 성유물을 건네기를 원했을 뿐, 이게 본래 성격일지도.

"그래서, 너는 인어 왕을 설득할 수 있는 위치인 건가?"

"충분히."

투란이 슬쩍 아르마니를 바라보자 녀석은 격렬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로위나 누이는 우리 중에서도 손꼽히게 강하며 현명해서 아바마마께서도 좋아하신다!"

가진 힘 때문에 그리 고평가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제법 힘을 쓰는 인어인 모양이었다.

투란은 내심 짐작하던 인어들의 무력 수준을 하향 조정했다.

'녀석들이 뒤통수 칠 걱정은 좀 덜어도 되겠지만 그만큼 사냥에 도움도 덜 되겠네. 장단점이 있다고 봐야 하나.'

사실 현대에 살아남은 대다수 이종족들의 실력이란 대개 그 정도이기 마련이었다.

가장 강대한 사령술사였던 흑요정의 왕만 해도 비쩍 말라 몸 상태가 나쁘던 메이사보다 약하지 않았던가.

어지간한 마법사 가문 몇 개는 짓밟을 수 있으나 대가문이 작정하고 나서면 형편없이 짓뭉개질 정도가 보통이며, 아예 반쯤 짐승이 된 난쟁이 같은 이들은 그보다도 비참한 지경이었다.

그에 비해 눈앞의 로위나는 과거 싸웠던 흑요정 사령술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이들과 비슷한 수준이니, 이종족 중에서는 충분히 최상위권의 강자라고 할 만했다.

이 경우는 인어들이 대체 무슨 수로 카마인의 신과 대등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지지만.

내심 생각이 깊어지던 그때, 로위나가 투란을 향해 말했다.

"다만 정말로 그러한 요구를 관철할 만한 힘이 있는지는 알아야겠다. 네가 그냥 어쭙잖은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니라는 법은 없으니까."

"방법은?"

"이 섬의 북쪽에 눈에 띄지 않는 공터가 하나 있다."

한 판 붙어서 서로의 기량을 확인해보자는 뜻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투란은 아래를 슬쩍 내려본 뒤 물었다.

"물이 아니라 땅 위인데도 괜찮겠어?"

그 말을 들은 로위나가 흐릿하게 웃었다.

"나는 필요하다면 이곳에서도 싸울 생각이었다."

* * *

마주했던 골목에서 북쪽으로 삼십 분 정도 걸으며, 투란은 인어 남매에게 사소한 질문을 여럿 던졌다.

인어들의 기초적인 생태부터 그들의 사회 구조 등에 대해서.

아르마니와 달리 로위나는 비교적 나이 많은 인어답게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제법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사람을 먹는 건 교육으로 해결이 안 된단 건가?"

"그렇다. 적당히 배부르면 굳이 인간을 탐하지 않지만, 바다에 들어갔거나 해안에 있는 인간만큼 잡기 쉬운 먹이는 드무니까. 하층민들의 욕구를 제어하는 능력은 어지간한 동물보다 못해서, 바로 옆에서 대놓고 두들겨패지 않는 한 통제할 수가 없지."

"그러면 너희는?"

"우리 왕족들도 예전에는 많이 먹었다는 모양이지만 너희들의 신이 온 뒤로는 먹지 않는다. 딱히 윤리적인 이유라기보단 그냥 토벌당할 구실을 없애기 위함이지만...."

전에 아르마니가 몰랐던 인어의 식인 습성에 대한 비밀도 그렇게 얼렁뚱땅 알게 되었다.

한참 대화를 나누던 도중, 투란은 슬쩍 질문의 주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 시체는 어떻게 됐지?"

"어떤?"

"우리들의 신. 아직도 거기에 있는 건가? 그 역시 살아났다면 무언가 이야기를 했을 것 같은데 별말이 없어서."

그 당시 투란이 성유물을 가져간 뒤에도 익사한 신은 그 자리에서 부패하거나 무너지지 않았지만, 지금도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로위나가 태연히 답했다.

"아직 멀쩡히 그 자리에 있다고만 들었다. 혹시 보러 갈 건가?"

"나야 상관없지만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그 이야기를 들으니 새삼 궁금해지기는 했다.

왜 큰바다뱀은 죽음에서 부활했는데 익사한 신은 그러지 않았던 걸까.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었길래?

잠시 후, 그들은 조금 전 로위나가 말한 공터에 도착했다.

주변이 제법 울창한 숲이라서 다른 사람의 눈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좋은 싸움터였다.

투란은 옆구리에 매달려 있던 비제를 메이사에게 맡긴 뒤 가볍게 손을 풀었다.

"대표는 나 한 사람이면 되겠지? 어차피 뒤에 있는 둘은 나보다 강해."

투란의 말에 메이사와 솔리프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떨떠름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들 세 명은 각자 장단점이 달랐다.

전투 감각부터 마법 기술까지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나지만 혈통 마법이 비전투 쪽이며 마력이 제일 약한 투란.

풍부한 전투 경험과 강력한 융합 마법을 다루지만 감각 면에서 제일 뒤처지는 솔리프.

마력과 마법적인 감각, 혈통까지 모두 우수하나 비교적 신체 단련이 덜 되었으며 전투 감각이 부족한 메이사까지.

일반적으로 마법사의 기량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마력임을 생각하면 조금 전 그 말이 틀리지는 않으나, 실상 제대로 싸우면 누가 이긴다고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물론 나중에 투란이 아라비온의 벼락 혈통까지 개화한다면 그들 중 최강자가 누가 될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좋아,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나 정도는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할 거다. 힘겹게 이기는 수준이라면 큰바다뱀 앞에서는 볼 것도 없으니."

"그야 당연하지."

"자신감 하나는 확실하군. 부디 실력도 그 정도이길 바라지."

코웃음을 치며 말한 인어 공주가 깊게 숨을 한 번 들이쉬자 곧장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과거 아르마니가 새끼 상어로 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변화는 순식간이었다.

온몸의 윤곽이 뭉개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빠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 위가 갑각으로 뒤덮였다.

몸체의 높이만 삼 미터가 넘는 거대 꽃게를 마주한 투란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과연...인어가 뭘 믿고 지상에 나왔나 했더니."

상어나 물고기와 달리, 게는 지상에서도 충분히 잘 호흡하고 움직일 수 있는 생명체였다.

설마 이런 것으로도 변할 수 있을 줄 상상도 못했을 뿐.

그때, 로위나가 게 특유의 입을 가로로 벌리며 말했다.

"혹시 겁먹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

가, 라고 대답하기 직전 로위나가 거대한 집게발을 앞으로 쭉 내밀며 공격했다.

그 속도는 육중해진 체구에 걸맞지 않게 빨랐다.

이에 투란은 곧장 뒤쪽으로 몸을 피하며 가볍게 발을 굴러 땅에서 뾰족한 기둥 몇 개를 솟구치게 했다.

"윽!"

게의 배 딱지를 파고들던 가시 기둥은 콰득 소리와 함께 모두 으스러졌으나, 움찔하며 멈추는 것으로 보건대 타격이 아예 없지는 않은 듯했다.

이어서 불의 영혼을 소량 날려 보낸 뒤 폭발시키자 굉음과 함께 꽃게의 등딱지가 지글거리며 타올랐다.

"혹시 죽었나?"

"헛소리!"

폭발 공격의 타격에 비틀거리던 로위나는 그렇게 외치더니 곧바로 여러 개의 다리를 민첩하게 놀려 숲 안쪽으로 들어선 투란을 향해 달려왔다.

커다란 덩치 탓에 근처에 자란 나무에 걸렸으나 굵은 갑각류의 다리는 어렵지 않게 나무들을 분쇄하며 길을 만들었다.

'힘이며 속도, 내구도까지...동급 귀족보다 훨씬 강하군. 육탄전에 특화된 이들이랑 비슷한 수준인가? 생각보다 센데.'

속으로 그렇게 상대의 기량을 재보며, 투란은 곧장 바람 마법으로 몸을 띄워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로위나는 곧바로 고개를 하늘로 돌리며 입을 쩍 벌려 새파란 광선을 쏘아냈다.

"오."

대체 꽃게라는 생물이 언제부터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구조였단 말인가?

저 광선의 정체는 또 뭐고?

그렇게 놀라는 와중에도 광선은 순식간에 투란을 향해 다가와 있었다.

아마 사고 가속이 아니었다면 채 대비하지도 못한 채 얻어맞고 말았을 터.

이에 곧바로 가지고 있던 방어 마법기를 활성화하자 주머니에서 나온 녹색 방패가 이를 막아냈다.

소모되는 마력을 통해 그 위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신체 능력만 해도 육탄전에 특화된 상위 귀족급인데 거기다가 원거리 공격 능력까지 보유...동급 귀족들은 어지간해선 못 이기겠군. 생각보다 더 강한걸.'

어쨌든 실력을 대충 파악했으니 놀아주는 건 여기까지면 충분할 터.

주머니에 든 투석구를 잠시 만지작거리던 투란은 이를 집어넣고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주특기인 투석 공격에 잘못 맞았다가 저 갑각이 으스러져서 즉사하기라도 하면 일이 우스워질 테니까.

그 대신 투란은 하늘에서 힘을 끌어오기로 했다.

폭풍의 정령과 결합했다는 큰바다뱀의 존재 탓일까, 이곳의 하늘은 구름이 가득해서 낙뢰 주문을 쓰기 좋았다.

"혹시 죽을 거 같으면 미리 말해."

그렇게 충고한 뒤, 투란은 그대로 하늘에서 벼락을 끌어다가 로위나를 향해 내리쳤다.

폭풍 혈통을 완전히 개화하지 못한 그의 낙뢰 주문은 그 명중률이 썩 우수하지 않은 편이지만, 체고만 삼 미터에 달하는 거대 꽃게를 맞추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한 발, 두 발, 세 발.

제법 굳건하게 버티던 로위나는 마침내 일곱 번째 벼락을 얻어맞자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크윽...."

"그, 그만! 그만! 제발 그만 해라, 착한 악마! 이미 승부는 났다!"

아르마니가 황급히 쓰러진 제 누이를 몸으로 가리는 사이, 로위나의 몸이 쭈그러들며 다시 인어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투란은 지상에 착지하며 그런 아르마니를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왜 내가 괴롭힌 것처럼 구는 건지 모르겠네. 어디까지나 서로 합의한 대련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됐다, 아르마니. 추하게 굴지 마라. 네가 그럴수록 나만 망신시킬 뿐이니."

"미, 미안. 누이...."

아르마니를 밀어낸 로위나가 다시 일어나서 힘겹게 호흡을 골랐다.

조금 전 연타로 얻어맞은 낙뢰 주문은 분명히 꽤 큰 타격이었을 텐데, 그런 것치고는 빠르게 회복하는 것이 확실히 인간보다 튼튼한 종족다웠다.

"네 실력은 충분히 봤다. 너와 너보다 강한 동료 두 명에 우리들의 도움까지 있다면 큰바다뱀 사냥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 같군."

"그 정도인가?"

"그 정도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때 그들을 재해(災害)의 군주이자 위대한 신으로 섬겼지만, 지금의 그 큰바다뱀은 껍데기에 불과하니까."

아버지의 동의를 받아야 하겠지만 그녀 자신은 협력 의사가 있다고, 로위나는 그렇게 말했다.

* * *

간단한 합의를 마친 뒤, 인어 남매는 자기들의 아버지인 왕과 이야기하고 돌아오겠다며 사라졌다.

그들이 다시 돌아온 것은 헤어진 지 정확히 일주일 뒤의 저녁이었다.

"아버지가 동의하셨다."

"그래?"

"조건은 간단하다. 큰바다뱀의 마력이야 어차피 우리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힘이니 너희들에게 넘기겠다만 시체는 우리 것으로. 그 대신 놈을 싸움터로 유인하는 것은 물론, 함께 힘을 합치는 것까지 전적으로 협력하지."

"시체를 가공해서 뭘 만들 수 있는 건가?"

기억하기로 과거 큰바다뱀의 뿔이나 비늘 따위에서는 그다지 영험한 힘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령이자 정령이 된 상태에서라면 무언가 다를지도 모를 일.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진실인지 아닌지 몰라도 영 싱거웠다.

"한때 우리가 신으로 섬기던 존재니까. 궁정의 장식으로 쓸 계획이다."

대체 왜 신으로 섬기던 존재를 장식으로 쓴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인간도 아닌 이종족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드는 것이 바보 같은 일일 것 같았다.

"좋아, 그래서 큰바다뱀은 어디에 있지?"

"이 북해를 맴도는 폭풍의 중심지."

그렇다면 얼마 전 투란 일행이 폭풍우에 휩쓸렸을 때만 해도 큰바다뱀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의미였다.

물론 성유물의 감각에 잡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적어도 킬로미터 단위 거리에 있었겠지만.

로위나는 약 열흘 뒤, 이곳에서 북쪽으로 천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섬 근처로 큰바다뱀이 움직일 것이라고 했다.

바로 옆에 지상이 있으니 투란 일행 역시 충분히 땅을 딛고 쉴 수 있을 터.

그곳에서 인어들과 함께 힘을 합쳐 사냥한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다.

확실히 인어와 협력하는 것이 편하기는 했다.

사냥터부터 일정까지 모든 것이 순식간에 해결되었으니.

"그런데 너희 인어들 말고 다른 협력자는 없는 건가? 예를 들어 우리 같은 인간 마법사라거나."

투란이 은근슬쩍 떠보며 동향을 확인하려는 대상은 당연하게도 카마인 가문이었다.

그들의 신과 인어들이 결탁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으니까.

해안 도시들이 폭풍으로 무너지면 가장 곤란한 것이 그들이라는 점에서 이렇게까지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희한하다 못해 수상쩍은 일이었다.

그런 투란의 질문에 로위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음, 솔직히 말하자면 암암리에 협력하는 인간 가문이 몇 있어서 기대했다만...어째서인진 몰라도 확실히 도움을 받으리라 생각했던 이들에게서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어떤?"

"그거야 내 아버지만 아신다. 그들과 접촉하는 이는 그분뿐이니까."

어쨌든 그 때문에 투란 일행을 제외한 다른 인간 마법사들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아무래도 그에 대해서는 인어 왕과 직접 대면해 물어보기라도 해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91화

사흘 뒤, 투란 일행은 작전이 예정된 섬을 향해 배를 몰았다.

큰바다뱀이 몰고 다니는 폭풍의 영향일까, 하늘은 늘 먹구름이 끼어 어두컴컴했으며 강한 바람이 불고 높은 파도가 쳤다.

자연스럽게도 주변을 돌아다니는 배는 그들이 모는 것 하나뿐이라서, 자그마한 고기잡이배가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관객은 많지 않았다.

"과연, 악마의 힘을 가진 인간들은 이런 식으로 배를 모는 건가. 어지간한 인어들이 헤엄치는 것만큼이나 빠른데."

함께 배에 타고 있던 인어 공주, 로위나가 이를 보고 나지막이 감상평을 꺼냈다.

옆에 있던 아르마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전에 함께 탔을 때보다 훨씬 빨라졌다. 그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그야 지금은 세 명이 몰고 있으니까. 고등어 다 구워졌는데 좀 줄까?"

"고맙다!"

유체 조작 마법으로 낚아낸 고등어를 함께 구워 먹은 뒤, 아르마니가 자기 가족들에게 투란 일행의 방문을 먼저 알리겠다며 새끼 상어로 변하여 바다로 뛰어내렸다.

성유물의 감각을 바다쪽으로 집중하자 작은 기척이 물속에서 빠르게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 그런 말을 한 것치고는 저 녀석이 헤엄치는 게 더 빠른걸."

"그야 녀석은 상어니까. 부러운 일이지. 빠르게 헤엄칠 수 있다는 건."

로위나가 사라진 아르마니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잡담 중 나온 이야기에 의하면, 게의 모습을 취할 수 있는 그녀는 지상에서 활동하기 자유로운 대신 바닷속에서는 동족들보다 느린 편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이번 싸움에서도 지상에서 투란 일행과 함께 협공할 계획이었고.

메이사가 그런 로위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너희들이 변신할 수 있는 생물은 어떻게 정해지는 거지? 그냥 타고나는 거야?"

"비슷하다. 어느 정도 유도할 수는 있지만 타고난 방향성이란 게 있으니까. 나도 굳이 원한다면 좀 더 다른 종류의 게로 변할 수 있었겠지만...그래봐야 달라질 건 없었겠지."

먼 고대에는 큰바다뱀의 형상을 취할 수 있는 왕족도 있었으나 옛날이야기일 뿐이며, 지금은 아르마니처럼 상어나 고래 등 대형 생물의 형상을 취할 수 있는 왕족들이 높은 잠재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고 했다.

아직 어려서 그렇지, 아르마니 역시 인어들 사이에서는 나름 기대되는 잠재력을 가진 셈이었다.

"그런 녀석이 없어졌으니 난리가 났었겠는걸."

"음? 아, 뭐...그렇게 난리까지는 아니었다. 어련히 알아서 돌아오려니 했지."

아르마니를 구한 공적을 강조하고자 슬쩍 운을 띄우자 이를 알아챈 로위나가 별일 아니었다는 것처럼 까내렸다.

협력하기로 한 상태에서도 한 치도 밀리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에 헛웃음을 터트리며, 투란은 슬슬 섬이 보이기 시작하는 북쪽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전에 말한 약속은 잘 지켜졌겠지?"

"물론. 싸움에 참여하는 우리 왕족들과 수발을 들 귀족 계급의 하인들 몇 말고는 아무도 없을 거다. 사실 하층민들을 관리하는 건 우리로서도 꽤 피곤한 일이니까."

이것이 바로 투란이 인어 측에 요구한 조건 중 하나였다.

어차피 큰바다뱀 사냥에는 별 도움도 되지 않으며 귀찮은 짐 덩이가 될 가능성이 큰 하급 인어들은 데려오지 말라는 것.

이는 그들과 인어 세력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강대한 마법사들이라지만 왕족들과 싸우는 와중 수천 마리의 인어 떼가 덤벼들면 마력과 체력 면에서 손실을 볼 수밖에 없으니.

"그러는 너야말로, 저 새를 싸우는 데 데려갈 참인가? 위험해 보이는데."

"이래 봬도 튼튼한 녀석이라서 괜찮아."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지그시 눈을 감고 이를 즐기던 비제가 로위나를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 따위가 감히 나의 가치를 알까, 하고 말하는 듯했다.

애초에 투란이 큰바다뱀 사냥을 시도해볼 생각을 한 이유부터가 비제의 존재 덕이었다.

아무리 강대한 적이더라도 먼저 알아차리고 도망칠 수 있는 날개가 있느냐 없느냐는 매우 큰 차이였으니까.

섬에 상륙하기 전, 투란은 이전에 그랬듯 추적 마법을 활성화한 채 바닷물 한 줌을 퍼내어 냄새를 맡았다.

'...좋아, 적어도 다수의 인어가 있지는 않은 것 같네.'

짐작건대 기껏해야 십수 명 정도일까.

목적지인 섬은 그리 큰 편이 아니었기에 상륙할 무렵 성유물의 감각을 활성화하자 섬 전체를 탐색 범위에 넣을 수 있었다.

인간 귀족으로 치면 최상위에서 중간급인 인어와 그보다 조금 약한 인어가 각각 하나, 그리고 상위권에서 중위권 수준인 인어가 여섯.

마지막으로 그 사이에 있는 하위권의 인어, 아마도 아르마니까지 왕족의 수는 총 아홉이었다.

여기 있는 로위나를 합치면 열 명이 될 것이고.

덤으로 그들보다 훨씬 더 미약한 힘을 가진, 인어의 기척이 열 개 정도 느껴졌다.

과거 처음 만났을 때의 아르마니처럼 평범한 인간과 비슷한 수준의 불꽃만을 품은 이들이 아마 수발을 들고자 찾아왔다는 귀족 계급의 인어일 터였다.

투란은 바람 마법을 사용해 은밀히 솔리프와 메이사에게 이 사실을 전달했다.

메이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왕족이 열 명...그 애는 전력으로 치기 힘드니 아홉이네. 만약 싸운다면 할만할까?]

[충분히. 인어들이 일반적으로 동급 귀족들보다 더 강하긴 하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다만 명심해야 할 건, 절대로 싸움 중이나 후에 저쪽보다 약해지면 안 된다는 거야.]

이번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어들이 어디까지나 믿을 수 없는 아군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큰바다뱀 사냥에 지나친 힘을 투사해 전력이 격감할 경우, 저들에게 기습당할 것도 대비해야 했다.

"다 왔군, 내리지."

* * *

몰래 떠드는 사이 어느새 배가 섬에 상륙하자, 투란 일행은 로위나와 함께 배에서 내려 안쪽으로 향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섬인지라 인어 왕족들이 머무르는 곳까지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오, 저 인간들인가?"

"다들 어려 보이게 생겼는데, 정말로 그만큼 센 거 맞나?"

"로위나 누이가 어련히 알아서 판단했겠지."

처음 만난 인어 왕족들은 하나같이 껄렁한 말투인 것이 어째 예상했던 것과 다른 느낌이었다.

다소 어색하게마저 느껴질 정도로 딱딱한 말투를 쓰는 아르마니나 로위나 같은 이들이라 예상했건만, 그냥 그들이 이상한 말투를 학습했을 뿐인 걸까.

해초류를 사용해 만든 듯한 옷을 입은 그들 사이로 유난히 작은 체구의 아르마니가 투란을 맞이했다.

"저기 회색 머리가 나를 구해준 착한 악마, 투란인데 정말 강하다! 로위나 누이가 힘도 못 쓰고 졌을 정도로!"

로위나는 자존심이 상한 듯 입꼬리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으나 뭐라 항변하지는 않았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인어 왕족들은 아르마니의 말을 듣고 한층 더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투란 일행을 바라보았다.

"호...."

"졌단 건 들었지만 그 정도인가?"

"저 정도면 지상에서도 손꼽히게 강력한 악마들일 텐데. 꼬맹이, 운이 좋았구나."

그렇게 떠드는 도중, 투란의 시선이 왕족들 뒤에 공손히 서 있던 어느 인어 귀족에게 향했다.

그는 투란 일행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에서 침을 흘리고 있었다.

"엇."

"어이, 야콘. 자제하라고 했잖나. 품위 없게."

"실례했습니다, 왕자님...."

왕족의 타박에 인어 귀족이 공손히 사과하며 재빨리 흐르는 침을 닦았다.

분명히 귀족 계급의 인어들은 왕족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자제력이 있다고 들었는데도 저 정도라니.

저들이 경멸하는 하층민 인어의 자제력이 어느 정도 수준일지 짐작이 갔다.

투란은 자기들을 향해 신나게 떠드는 인어들의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녀석들의 감정도 읽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원리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투란은 인간의 감정을 어느 정도 냄새로 읽어낼 수 있었다.

이는 심지어 대다수의 평범한 짐승들에게까지 적용되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인어는 예외였다.

몸에서 풍기는 비린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로위나가 걸치고 있던 인간의 옷을 벗어 던지고 인어들 특유의 해초류 옷을 걸치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면 서로 자기 소개부터 하지."

"나는 투란이다. 이쪽은 솔과 미샤. 잘 부탁하지."

딱 거기까지만 밝히고 입을 다물자, 이를 들은 인어 중 한 명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되물었다.

"음? 그게 끝인가? 너희들은 뭐 가문이나 그런 거 있지 않던가."

"인간 중에는 그런 것 없이 떠도는 이들도 있어서."

인어들은 희한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에 관해 깊게 아는 이가 없는지 이내 다들 어깨를 으쓱이며 그러려니 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이어서는 인어 쪽이 자기 소개를 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현 인어 왕의 자식이었다.

로위나의 오빠 한 명과 남동생 네 명, 여동생이 세 명.

그리고 아르마니까지 합쳐서 총 아홉.

가만히 듣던 투란은 곧장 의문을 꺼냈다.

"다른 친척은?"

"음?"

"그러니까 너희들의 아버지, 인어 왕에게도 형제자매가 있을 텐데 그 자식들은 없나?"

숫자로 보아 인어 왕족의 번식력이 그리 떨어지는 것 같지 않은데, 만약 그런 이들까지 합한다면 이들의 전력은 어지간한 대가문에 필적하게 될 터였다.

질문을 들은 인어 한 명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당연히 다 죽었지."

"...어쩌다가?"

"우리 손으로 보내줬다. 왕국에 왕은 한 명뿐이고 번성할 수 있는 건 그 혈통뿐이니까."

전대 왕이 교체될 때 새 왕의 직계자손이 아닌 왕족들은 모조리 숙청되었다고, 젊은 왕족은 기겁할 만한 이야기를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늘어놓았다.

투란은 혹시나 해서 옆에 있던 솔리프와 메이사를 돌아보았으나 그들 역시 경악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원래 그런 건가?"

"그렇다. 우리 말고 다른 왕국의 인어들도 마찬가지-"

"쓸데없는 이야기까진 하지 마라, 콜로바."

로위나가 주절거리던 수다쟁이 왕족을 향해 제지하듯 말했다.

인어 왕국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니, 그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긴, 애초에 다른 종족들도 모두가 한 패거리는 아니니까 당연한 거였나.'

과거 메이사가 토벌했던 사령왕 외에도 지하 어딘가에서는 흑요정 무리가 번성할 것이고, 회색 지대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난쟁이 패거리가 있을 터였다.

인어들이라 해서 한 집단만 남아있으리라고 속단할 필요는 없을 터.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새삼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어쩌면 이들이 과거 이미르가 말했던, 변호사와 협력 중인 인어 왕국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만약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헛짚은 셈인데....

의문을 속으로 삼키며, 투란은 조금 전 입을 놀렸던 비교적 경솔해 보이는 왕족에게 이어서 질문했다.

"혹시 다른 왕국에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나?"

"응? 그러면 시체를 독차지하지 못하잖아. 그거 때문에 이 짓을 하는 건데."

"콜로바!"

로위나의 오빠, 인어 왕의 장자라던 이가 날카롭게 소리쳤으나 이미 듣고 싶은 이야기는 얼추 들은 뒤였다.

때마침 감각으로 느껴지던 마지막 열 번째 인어가 수풀 뒤쪽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오자, 갑자기 격해진 분위기에 조금 움츠러들었던 아르마니가 활짝 웃으며 외쳤다.

"오, 아바마마! 똥을 잘 싼 것 같은 얼굴이다!"

"조용히 해라, 이 꼬맹이 녀석아."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이는 하얀 머리에 수염을 배꼽까지 기른 중년의 인어였다.

뭇 이야기책에서 그려내는 것과 달리 황금 왕관이며 진주 목걸이 따위는 하고 있지 않았으나, 부리부리한 두 눈과 깊게 팬 주름살에서 묻어나는 관록만으로도 주변의 다른 인어들보다 한 단계 높은 존재임을 짐작게 했다.

무엇보다도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지팡이처럼 짚은 삼지창 한 자루로, 그 안에 담긴 막대한 마력의 흐름으로 보건대 평범한 마법기 따위는 아닐 터였다.

'성유물, 그것도 최상위....'

투란의 흉내쟁이 성유물과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짐작되는 보물을 든 인어 왕이 투란 일행을 차분히 둘러보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린 마법사들이군. 잘 쳐봐야 육십 살도 안 됐겠어."

"실력이 꼭 나이를 따라가라는 법은 없지."

투란은 의도적으로 격의 없는 말투를 쓰며 인어 왕과 자신이 동격임을 강조했다.

이 자리에서 굽신거리는 순간 상대가 그를 완전히 아랫사람으로 대하게 되리라 직감해서였다.

예상대로, 인어 왕은 투란의 반말에 눈썹을 꿈틀거릴 뿐 분노를 표하지는 않았다.

"애송이들 주제에."

인어 왕은 코웃음치며 그대로 큼지막한 돌 의자에 앉아 그들을 오만하게 깔아보았다.

투란은 그런 그를 마주보며 곧바로 물었다.

"그보다 계산이 조금 바뀌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계산을 말하는 거냐."

"큰바다뱀의 시체, 로위나는 분명히 아무 가치도 없다고 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서."

"그런 얘기를 한 놈이 있나?"

인어 왕이 고개를 돌리자 그 자식인 왕족들이 모두 콜로바라 불린 수다쟁이 왕족을 바라보았다.

"어, 난 그냥...."

"다른 인어 왕국에 도움조차 청하지 않고 독점하려는 걸 보면 그쪽에 제법 가치가 있는 거겠지?"

투란은 지그시 인어 왕의 짙은 흑적색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십 초 정도 눈싸움을 한 뒤, 인어 왕이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인간들이란!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너희들에게는 별 쓸모도 없을 큰바다뱀 시체를 반으로 갈라주기라도 하랴? 아니면 진주라도 한 상자 원하나?"

"그 조개에서 나오는 거 말이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인간들이 그걸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

"아버지가 얘기할 때는 조용히 해라, 이 자식들아!"

뒤에서 주절거리던 왕족들이 맏이의 고함에 움찔하여 고개를 숙였다.

저 모습을 보니 왜 인어 왕이 로위나를 총애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고, 지상 쪽에 관한 이야기 몇 개만 들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지금 보이는 바에 의하면 인어 왕족들은 하나같이 변변한 마법기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마 바다 생물로 변한 상태에서는 물건을 집고 다루기가 힘들어서일 터.

그나마 유일하게 쓸만한 것이 바로 저 삼지창인데, 저걸 달라고 했다가는 보나 마나 큰바다뱀 사냥이 파탄 날 게 뻔했다.

즉, 투란이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대가는 바로 정보였다.

"...그걸로 끝인가?"

"물론."

"어떤 이야기지?"

"변호사."

인어 왕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둘이서만 이야기하지. 너희들! 조금 떨어진 곳에 가서 놀고 있어라!"

"난 인간들 이야기가 궁금한데."

"나도."

"당장 꺼져!"

왕의 고함에 투덜대던 왕족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자, 투란 역시 마찬가지로 솔리프와 메이사를 잠시 물러나게 했다.

둘만 남은 자리에서 인어 왕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 이름, 어디서 들었지?"

"이미르에게서."

어차피 적대 진영인 만큼 마음껏 이름을 팔자 인어 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모르는 이름이군."

저 이름을 모른다면 인어 왕 역시 신들의 판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참여자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기껏해야 그들 사이의 말 중 하나 정도일 뿐.

사실 변호사라는 별명을 동맹에게도 써먹는다는 것부터가 그가 이 관계에 그렇게까지 진심이 아니라는 증거라 할 만했다.

"변호사랑 협력중인 건가?"

"협력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대대로 연을 맺기는 했지. 우리들의 목줄을 쥔 건 그쪽이니까."

말투며 표정으로 보건대 변호사에게 개인적인 호의는커녕 적개심마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따르는 것은 변호사가 인어 왕국 쪽에 무언가 압력을 행사할 방법이 있기 때문이고.

물론 그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줄 마음은 없을 터였다.

'여러 인어 왕국을 지배하고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왜 변호사가 단일 세력으로도 여러 강대한 적들과 맞설 수 있는지 알만했다.

저만한 인어 세력이 너댓 개만 되어도 어지간한 대가문 하나쯤은 우습게 짓누를 전력이지 않은가.

다스리는 영역이 두 개의 바다 전역이라면 펼칠 수 있는 영향력은 그 이상이라 할 수 있을 터.

그때, 인어 왕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투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역시 그 괴물 족속 중 하나냐?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내가 답하지 않아도 이미 답을 아는 것 같은데."

"하, 어쩐지...어린 인간들이 지나치게 강하다고 할 때 알아봐야 했는데. 또 무슨 장난질을 칠 셈이지?"

"큰바다뱀을 잡겠다는 건 진심이니까 걱정할 것 없어. 그쪽에서 이상한 수작만 안 부린다면 말이지만."

투란의 말에 인어 왕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여기서 죽여 봐야 언젠가는 살아 돌아와서 복수할 것 아니냐. 내 일족에게 영원한 적을 선물할 마음은 없다."

"서로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네."

인어 왕이 그를, 덤으로 다른 두 사람까지 프레아 신족의 일원으로 오해해 준다면 배신에 대한 억지력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을 터였다.

어차피 죽여도 살아 돌아오는 이를 굳이 적으로 삼는 것만한 바보 짓은 없을 테니.

투란은 기뻐하는 기색을 억누르며 줄곧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그래서, 질문하고 싶다는 게 그것뿐인가?"

"이번 일, 왜 변호사에게는 협조를 구하지 않았지? 그쪽으로서도 혹할 이야기일 것 같은데."

신의 빙의체쯤 되면 마력의 한계가 없어지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강대한 마력을 흡수할 기회를 놓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다못해 예비 빙의체들에게라도 마력을 선물해줄 수 있을 터.

투란의 질문에 인어 왕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 건 너희들이 더 잘 아는 이야기 아니냐. 왜 내게 묻지?"

"내가 변호사의 친구는 아니니까."

암암리에 변호사와는 다른 파벌임을 강조하자 인어 왕이 흥, 하고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가져간 그 성유물을 이용한 봉인 자체가 놈이 제안한 방법이다. 사냥은 애초에 말 안 했고. 그놈이 알면 절대 시체를 우리에게 줄 리 없으니까."

"왜지?"

인어 왕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적갈색 눈을 크게 뜨고 투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질문이 그냥 떠보기 위함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묻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다시 진정한 인어 왕족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그렇다. 큰바다뱀의 사제로서, 그들의 형상을 취할 수 있던 시절의 모습으로."

92화

큰바다뱀이 도착하기까지 남은 일주일.

투란 일행은 마법을 수련하거나 거대한 괴수를 잡을 때 어떻게 합격해야 할지를 논의하며 시간을 보냈다.

로위나와 아르마니를 비롯한 인어 왕족들 역시 거기에 끼어들어 자기들이 어떤 역할을 맡으면 좋을지를 토론했다.

"숨을 못 쉬어서 물 위에 있어야 한다면 내가 받쳐주면 되지 않을까? 너희가 타고 온 나무쪼가리는 제대로 싸움이 시작되면 바로 박살 날 게 뻔하잖아."

그렇게 말하는 이는 바다거북으로 변할 수 있는 인어 왕족으로, 등껍질의 길이만 무려 칠 미터에 달했다.

오히려 자기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로위나보다도 큰 체격에 감탄하기도 잠시.

"더 빨리는 못 가는 건가?"

"이게 최대야! 더 빨리 가려면 몸을 줄여야 해!"

제 무게에 짓눌린 듯 느릿느릿 걸어가며 외치는 바다거북의 모습에 투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히 헤엄칠 때는 그것보다 좀 더 빨랐고, 몸 크기를 줄여도 세 사람이 올라탈 정도는 되었기에 쉬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아무래도 타고 빠르게 이동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그 외에도 인어 왕족들은 다양한 바다 생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길쭉한 갈치부터 오징어, 청새치, 범고래, 해파리까지....

당연하게도 그들 모두 커다란 동물로 변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로위나처럼 특수한 능력 한두 개씩은 다 가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주둥이로 모든 것을 꿰뚫거나 촉수에서 전기를 내뿜고 고함을 쳐서 음파를 방출하는 식으로.

모름지기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는 법.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자 투란 일행 역시 자기들의 기술 몇 가지를 공개했다.

투란의 주특기인 투석 기술부터 메이사의 번개 주문, 솔리프가 쓰는 '심판의 빛'까지.

황금빛 채찍이 파도를 후려치며 물을 증발시켜 수증기가 일어나자 인어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오오...!"

"악마의 힘이라는 건 물을 다루고 얼리는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다양하구나."

카마인 가문의 마법사 말고는 인간 마법사를 접한 경험이 별로 없는 것인지, 인어 왕족들은 투란 일행이 선보이는 기술을 몹시 신기하게 여겼다.

마지막으로 불의 영혼을 이용한 폭발 마법을 보여주자 이를 본 왕족 한 명이 말했다.

"어머니랑 비슷한 기술이네. 그분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머니?"

"응. 도움이 안 될 만큼 약하고 어린 녀석들을 지키러 궁전에 남으셨거든. 이 녀석은 거기 데려놓고 올 시간이 없어서 남은 거고."

젊은 공주가 옆에서 헤엄치며 형과 누나들에게 치대던 아르마니를 붙잡아 뺨을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인어 왕비가 제 남편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한 강자라면 큰 도움이 됐을 텐데, 이들로서도 완전히 왕국이 파멸하는 일은 막고자 일종의 보험을 들어둔 모양이었다.

투란 일행으로서는 아쉬우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인어 쪽이 지금보다 더 강해지면 사냥이야 쉬워지겠지만, 그만큼 주도권 역시 저쪽이 쥐게 될 가능성이 커지니까.

"인어 왕은 고래라고 했지?"

"맞다. 그분은 정말로 대단하시지. 아마 싸움에서도 가장 앞장서실 거다."

현재 인어 왕은 섬을 비운 상태였는데, 바로 그가 직접 큰바다뱀을 이곳으로 유도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서서히 자극해가며 궤도를 돌리는 식으로 움직인다고 하던가?

투란 일행에게는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으나, 먼 옛날부터 큰바다뱀을 섬기던 이들답게 그에 관한 여러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가지고 있던 그 삼지창의 능력일지도 모르고.

그렇게 서로의 능력을 어느 정도 알아보고 함께 싸울 방법을 연구한 뒤에는 각자 떨어져서 바다에서의 싸움을 대비한 별도의 훈련을 시작했다.

투란은 그 와중에 몇 가지 마법을 만들어냈는데, 물속에서 급히 숨을 쉬기 위해 지상과 이어지는 관을 만들거나 배를 움직일 때처럼 주변의 물을 조작해 몸을 움직이는 기술이었다.

"으윽...."

"좀 더 잘 해봐, 이건 네게 가장 중요한 기술이니까."

"말처럼 쉬워야 말이지! 내가 너희들처럼 천재인 줄 알아?"

만든 것은 투란이었지만, 이를 가장 치열하게 연습한 것은 바람 마법을 잘 다루지 못해 하늘을 날지 못하는 솔리프였다.

투란은 물을 이용해서 몸을 움직이려 허우적대는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일단 비제가 너랑 한 쌍으로 움직이긴 하겠지만, 혹시 얘가 크게 다쳐서 싸울 수 없게 될 수도 있으니까 물속에서 싸우는 경우도 대비해둬야 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은 괜히 불운을 가져올까 싶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그들 모두 이 싸움에서 사망자가 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애초에 싸움이라는 행위의 본질 자체가 그러했다.

그 가능성이야 강함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서로의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니.

심지어 이번 상대는 직접 마주치기 전까진 그 힘을 완벽히 예상하지 못할 정도이지 않은가.

투란의 머리 위에 앉아있던 비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발을 쭉 뻗어 물 위로 글씨를 썼다.

[죽을 수도 있어?]

"괜찮아, 너는 솔리프를 데리고 날면서 지원만 해주면 돼. 절대로 위험하게 하지 않을게."

[투란도 죽으면 안 돼. 짝도, 하인도.]

"누가 하인이냐?"

옆에서 듣던 솔리프가 발끈한 표정으로 말하자 비제가 가벼운 날갯짓으로 바람을 불어 물을 뿌렸다.

퉷 하고 바닷물을 뱉어낸 솔리프가 투란에게 물었다.

"그럼 너희 둘은 직접 날아다니면서 싸우는 거지?"

"응. 폭풍우 속에서 우리 셋을 데리고 나는 건 비제한테 너무 부담이 크니까."

옆에서 매끄럽게 물을 조종해 몸을 움직이던 메이사가 대신 대답했다.

투란보다는 조금 습득 속도가 느렸으나 그녀 역시 이런 마법적 감각 면에서는 더없이 천재적인 성취를 보였다.

솔리프가 은빛 턱수염이 조금 자라난 턱을 쓰다듬다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근데 아무것도 안 숨기고 다 쓰는 게 맞나? 다른 곳에 소문이 퍼질까 봐 걱정되는데."

"뭐, 저 인어들이 생각보다 지상 쪽이랑 교류가 많지 않아 보이기도 하고...이건 짐작이지만, 아마 이 왕국은 조만간 카마인 가문과도 연을 끊을 거야. 그 뒤에는 다른 대가문들과 교류랄 것도 할 게 없겠지."

카마인의 신, 변호사를 썩 달가워하지 않던 인어 왕의 표정과 큰바다뱀의 시체로 옛 왕족의 능력을 되살리겠다던 야망을 합치면 자연스레 도출되는 결론이었다.

독립할 만한 힘을 갖춘 이들이 더 이상 종속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야 신기할 것도 없는 일 아닌가.

이를 들은 솔리프가 아, 하고 손바닥으로 물을 팡 치며 외쳤다.

"그러고 보니 그거! 어쩔 거야?"

"뭘?"

"큰바다뱀 시체. 정말 고스란히 넘겨줄 건 아니지?"

"안 넘겨주면?"

"저 왕족들이야 자제력이 있으니 하하 호호하고 있는 거지, 지금도 해안가 어딘가에서 인어들한테 잡아먹히는 사람이 있을걸. 인어들한테 그런 막강한 힘을 넘겨주는 게 괜찮은 일인지, 난 정말로 모르겠다."

"저쪽이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면 나도 약속을 어길 마음은 없어. 그게 약속이니까."

아직도 귀족 계급의 인어 몇몇은 가끔 투란 일행을 보며 식욕을 드러냈지만, 적어도 왕족들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투란 역시 상대를 대화가 통하는 지성체, 사람으로 여기고 그에 걸맞게 대할 뿐.

상대가 약속을 지키기를 원한다면 그 역시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황금률의 규칙이었다.

옆에서 대화를 듣던 메이사가 작게 헛기침한 뒤 말했다.

"나도 찬성. 거기다가 투란이 말한 대로면 저 인어들이 강해지는 건 신들의 지배력에 구멍을 내는 일이잖아? 우리한테는 오히려 이득이라고 생각해."

의견이 이 대 일로 밀리자 솔리프는 에라, 하고 풀썩 물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사이 제법 연습했다고 익숙해졌는지 물을 침대처럼 굳혀놓은 기술이 일품이었다.

"난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너무 걱정할 건 없어. 일단 큰바다뱀을 사냥하고 난 뒤의 우리라면 저들이 새로 얻은 힘으로 인간을 핍박하는 것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인어 왕의 말대로라면 전성기보다는 터무니없이 약한 수준일 테지만, 이 정도 자연현상을 일으킬 정도의 생물을 잡는다면 분명히 막강한 힘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그들 모두 최상위 귀족의 영역을 넘어, 여느 대가문 가주들의 발밑까지 따라붙을 수 있을지도.

"거기다 큰바다뱀으로 변하는 힘을 얻는다고 엄청난 위협까진 안 될 거야. 어차피 저들 중 왕이 되어 살아남는 건 한 명뿐일 테니."

얼마 전 들은 인어들의 관습을 입에 올리자 솔리프와 메이사가 곧바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자기들끼리 노는 인어 왕족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마침 젊은 왕족 한 명이 로위나의 머리에 모래를 들이붓다가 꽥 소리를 내며 얻어맞고 있었다.

"그랬지...그래서 말이지만, 정말로 쟤들을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지."

"뭐가?"

"나중에 왕위를 계승하고 나면 서로 죽고 죽인단 거잖아? 근데 어떻게 저렇게 친근하게 지낼 수 있는 거지?"

"나였으면 옆에 서 있을 엄두도 못 냈을 거야."

물 위에 축 늘어져 누워있던 메이사가 거들 듯이 말하자, 투란은 인어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변명하듯 말했다.

"뭐, 그건...아무래도 인간이랑은 도덕적 개념이 다른 거겠지."

사실 이렇게 말하는 투란 역시 잘 이해가 가지 않기는 했다.

장차 서로 죽여야 할 사이인 형제 자매들끼리 저런 화기애애한 모습이라니?

만약 그가 인어 왕족 중 한 명이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형제자매들을 처리하려 애썼을 터였다.

반대로 도저히 최종 승자가 될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애초에 왕국에서 도망쳤을 것이고.

그런데 저들은 명백히 힘과 재능의 우열이 보이는 상태에서도 서로를 형제 자매로 여기며 사이좋게 지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자, 이를 들은 두 사람이 투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아니, 나는 그렇게 먼저 다 죽인다는 생각까진 안 해봤는데."

"가끔 느끼는 거지만 넌 감성이 좀 이상해."

"그런가?"

"그래, 정말로."

메이사와 솔리프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훈련이 끝난 뒤, 투란 일행은 물고기가 질린 탓에 짐승 한 마리를 잡고 미겔 섬에서 가져온 여러 향신료와 곡물가루를 합쳐 요리한 것으로 끼니를 때웠다.

충분히 배를 채운 투란은 딱 한 입만 먹고 입맛을 다시는 메이사를 향해 말했다.

"식사 보충하러 가자."

"응."

메이사는 슬쩍 솔리프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제법 긴 시간 함께 지내며 여러 차례 해온 일이지만, 그녀는 이러한 식사 주입 행위를 솔리프에게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태도를 보였다.

마치 화장실에 가는 것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것처럼.

"올 때 물이나 좀 떠와."

이를 아는 솔리프 역시 일부러 별 것 아닌 듯 대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때로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분위기가 이상해지기도 했다.

조금 떨어진 숲속에서 주입이 끝난 뒤, 메이사가 주섬주섬 벗어 두었던 마법기를 다시 걸치는 것을 보며 투란은 얼마 전부터 떠올리기 시작한 생각을 꺼냈다.

"이번 사냥이 끝나고서부터는 솔리프한테도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어."

"뭘?"

"이거 말이야. 네가 더 강해지면 그때부터는 나 혼자서 기절시키기 어려울지도 모르니까."

비쩍 마르고 허약했던 시절에야 상관없었지만, 메이사가 점점 건강해질수록 투란 역시 그녀를 기절시키기가 버거워지고 있었다.

물론 마력의 양이 같다면 근력은 체격 조건에서 우월한 투란이 더 강했다.

하지만 메이사는 최상위 귀족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마력을 지녔으며 투란은 최상위 귀족 중에서는 하위권의 마력을 지녔다는 것이 문제였다.

심지어 이번 사냥이 끝나고 큰바다뱀의 마력을 흡수했을 때 한계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더 강해질 가능성이 큰 쪽 역시 메이사였다.

훨씬 더 강한 존재의 마력을 흡수하는 경우 미리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쪽이 효율이 높으니까.

"지금만 해도 이 지경인데, 아마 그때쯤이면 한 사람이 다리를 잡고 다른 한 사람이 기절시키는 식이어야 할지도."

조금 전 메이사가 본능적으로 버둥댔던 곳은 말 그대로 땅이 헤집어지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를 들은 메이사는 음, 하고 작게 신음했다.

"그건 좀 그런데...."

"그래?"

"응. 아무래도. 만약 그렇게 되면 차라리 좀 굶어 볼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거나."

다른 방법이란 바로 얼마 전 짐작하게 된, 사람들을 도우며 스스로의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이었다.

갑자기 큰바다뱀을 사냥해야 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북해 위를 떠돌며 위기에 빠진 상선을 구하거나 하는 식으로 이를 충족해볼 계획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폭풍 때문에 상선이건 해적선이건 돌아다니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러면 그때는 그쪽 방법을 먼저 찾아보는 것으로."

"그래."

그렇게, 두 사람은 사냥 이후에 할 일부터 미리 만들어 놓았다.

이는 달리 말해 사냥 중 누구 하나 죽는 일이 없게 하자는 다짐이기도 했다.

* * *

훈련과 휴식을 거듭하며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섬 날씨는 점점 험상궂게 변했다.

강해지는 바람과 몰아치는 빗방울, 때로는 뇌우까지.

기후가 이상해지는 것을 눈치챈 섬의 동물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가 싶더니, 이내 바닷속의 물고기들조차 수면으로 풍덩 풍덩 떠오르며 이상 증세를 보였다.

그에 따라 비교적 화기애애하던 분위기 역시 경직되어갔다.

이제 큰 싸움이 곧 다가온다는 것을, 어쩌면 그들 중 누군가가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실감한 탓이다.

마침내 운명의 날이 되었을 때, 끔찍하리만치 강렬한 폭풍우가 섬을 뒤덮었다.

"이래서야 목소리도 잘 안 들릴 지경인데!"

"급한 일이 아니면 이제부터는 수신호로 소통해!"

물론 투란과 메이사는 바람 마법으로 목소리를 전할 수 있고, 솔리프는 환영 마법으로 글자를 만들어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싸움에 쓸 마력 한 줌이 아까운 상황에서 그런 마법을 남용할 수 없는 만큼 그들은 간단한 수신호 몇 가지를 만들어 익혀둔 상태였다.

[보여?]

[보여.]

[지금은?]

[거기서는 잘 안 보여. '위로'라고 한 거 맞아?]

수신호가 어느 정도 거리에서까지 인식될 수 있는지 확인할 무렵, 멀리서 로위나가 질척거리는 땅에 신경질을 내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접근한 그녀가 소리치듯 말했다.

"곧 부왕께서 오신다! 장소는 예정대로 동쪽 해안!"

"알았어!"

두 사람에게 이를 전달한 뒤, 투란은 옆구리에 앉아 있던 비제를 한 차례 쓰다듬어 안심시키며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에는 이미 인어 왕족들이 집결한 상태였다.

"드디...왔...."

"일...정도...."

심한 폭풍우 탓에 그들의 목소리 중 제대로 전달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왕의 장자, 문어로 변할 수 있는 인어 마쿤이 가까이 다가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 분 정도 남았다."

"알았어."

"작전은 변함없겠지?"

"한 가지 수정해야겠어."

"뭘?"

"결계는 아무래도 쓸모없을 것 같아."

전날, 투란은 가지고 있던 결계사 혈통의 마력 대부분을 들이부어 가며 동쪽 해안가에 결계를 설치해 두었다.

전투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 조치였는데, 지금 보니 폭풍에 휩쓸린 탓인지 죄다 흩어진 상태였다.

평범한 폭풍이라면 어림도 없을 일이건만 큰바다뱀이 폭풍의 정령과 융합하며 마법적인 힘이 실린 영향인 듯했다.

이를 들은 왕의 장자가 혀를 찼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어차피 그런 데 의존할 마음은 없었다. 그것 외에는?"

"없어. 그리고 오 분보다 더 빠른 것 같은데. 지금 바로 온다."

"뭐? 그렇군...모두 전투 준비!"

마쿤의 외침에 인어 왕족들의 형상이 하나하나 바뀌기 시작했다.

로위나를 비롯하여 지상에서 활동할 수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닷속으로 들어갔고, 바다거북이 투란 일행을 등 위에 올려주었다.

그 상태로, 투란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힘의 격류를 보며 깊게 호흡을 골랐다.

"온다...."

전에 봤던 것보다 더 강해진, 아마 인어 왕으로 짐작되는 기척과 그 뒤를 따르는 거대한 존재가 느껴졌다.

마치 바람으로 빚어진 듯 몸 안쪽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뱀 한 마리.

큰바다뱀이 오고 있었다.

93화

먼저 보이기 시작한 것은 몸길이가 삼사십 미터쯤 될 거대한 혹등고래, 인어 왕의 변신체였다.

다른 왕족들과 달리 그는 변신 전보다 더 마력이 강해진 상태였는데, 지금이라면 메이사조차 그와 일대일로 겨루어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평상시라면 저 거대한 고래의 모습과 힘을 보며 감탄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뒤쪽에서 다가오는 괴수의 존재감이 그보다 훨씬 더 거대했기 때문이다.

'큰바다뱀....'

과거 흉내쟁이 성유물을 얻을 당시, 투란은 어느 프레아 신족으로 추정되는 남자와 함께 죽어있는 큰바다뱀의 시체를 보고 그 장대한 위용에 감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살아서 움직이는 큰바다뱀의 모습은 그 당시의 기억이 초라해 보이게 했다.

호수며 산과 같은 자연경관의 위용에 감탄하는 것과 그 자연경관이 실제로 살아 뛰어다니고 움직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닌가.

게다가 큰바다뱀의 외모 역시 그 당시 보았을 때와 사뭇 달라진 상태였다.

이끼가 잔뜩 껴 있던 과거와 달리 온몸을 휘황하게 빛나는 은빛 비늘로 뒤덮었는데, 간혹 몇 군데 손상된 부분은 사령들이 으레 녹색 광채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듯이 휘몰아치는 바람 비슷한 무언가로 채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성유물의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몸속의 방대한 마력까지.

그 양은 이전에 봤던 라비타스의 가주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아마 저것이 이번 사냥의 수확물이 될 터였다.

"죽이는구만...."

고개를 돌리자 솔리프가 한가득 웃음을 머금고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원래부터 옛 신화며 전설 등에 크게 집착하던 만큼, 진정으로 신화적인 괴물과 맞선다는 것이 실감 나자 새삼 기쁜 듯했다.

"가자!"

투란은 그렇게 외친 뒤 메이사와 함께 자리에서 날아올라 큰바다뱀을 향해 움직였다.

솔리프 역시 한 발짝 늦게 비제의 다리를 움켜쥔 채 날아올랐으며, 인어 왕족들은 바다를 통해 큰바다뱀을 향해 접근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더 커지는 목표물의 크기에 전율하기도 잠시, 투란은 자리에서 멈춰선 뒤 바람길을 만들었다.

사방으로 몰아치는 격렬한 와류 탓에 평소보다 조금 더 힘들었으나 그럭저럭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 상태로, 투란은 주머니에서 준비해 온 비밀병기를 꺼냈다.

그것은 이전에 쓰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투석구였으나 그 크기가 이전과 사뭇 달랐다.

끈의 길이도, 돌을 얹는 주머니의 크기도.

과거의 투석구가 딱 달걀만 한 돌멩이를 얹어 던지는 정도였던 데 비해, 지금 그가 꺼낸 것은 조금 과장을 보태 사람 상반신만 한 바윗돌도 얹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투란은 거기에다가 미리 준비해 온 커다란 바윗돌을 얹은 뒤 돌리기 시작했다.

'역시 좀 어색한걸....'

근력이야 전혀 부족하지 않지만, 평생 던져온 것과 전혀 다른 규격에 돌을 던지는 것이니 아무래도 평소 같을 수는 없었다.

지난 며칠 간 훈련하기는 했지만 그게 어디 평생을 해온 일에 비할 바겠는가.

마력으로 강화된 덕에 투석구는 끊어지거나 하는 일 없이 순조롭게 커다란 바윗돌을 얹은 채 빙빙 돌아가며 원심력을 부여했다.

잠시 후, 쏘아진 바위가 바람길을 타고 소리의 몇 배쯤 되는 속도로 날아들어 큰바다뱀의 머리 어딘가로 날아들었다.

[□-----■-----□-----!]

거침없이 바다를 가르며 섬으로 접근하던 괴수가 몸을 비비 꼬며 비명을 내질렀다.

저 거대한 존재로서는 보통 사람이 손톱만 한 돌을 맞는 것과 다름없겠지만, 그 안에 담긴 강대한 마력이 규모 이상의 물리력을 발휘한 탓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런 큰바다뱀의 비명은 그저 한 동물의 외침으로 끝나지 않았다.

쩍 벌어진 입에서 토해진 비명, 혹은 포효에 주변으로 파문과 해일이 일어났다.

아마 일반인들이 멀지 않은 곳에서 이 소리를 들었다면 그 충격만으로도 죽었을 터.

투란 역시 인상을 쓰며 두 손으로 귀를 막아야 했다.

"큭...."

그렇게 비명을 내지른 큰바다뱀은 황록색으로 기괴하게 빛나는 두 눈을 투란에게 향하더니, 곧바로 반격을 시작했다.

바다에서 용오름이 일어나더니 그대로 물기둥 몇 개가 휘청거리듯 솟구쳐서 투란을 향해 날아들었다.

재빨리 비행 마법으로 몸을 날려 한두 개는 피했으나 날아드는 물기둥의 숫자는 족히 십수 개가 넘었다.

비행 마법 자체가 구조적으로 썩 튼튼한 기술이 아님을 생각하면 한 번이라도 잘못 맞는 순간 그대로 격추될 터.

위기의 순간, 투란은 재빨리 준비해 두었던 불의 영혼 한 주먹을 몸 옆에서 터트렸다.

누군가 옆구리를 후려치는 듯한 충격과 함께 몸이 순식간에 튕겨 나가며 물기둥의 공격 범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후우...."

투란을 지나친 물기둥 중 한 줄기는 뒤쪽에 있던 섬의 해안을 강타했는데, 그 영향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모래사장에 길이만 수십 미터, 높이가 몇 미터는 넘는 골이 푹 파인 것이다.

직접 맞는다고 한 방에 죽지는 않겠지만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투란이 큰바다뱀의 주의를 끄는 사이, 다른 방향에서도 공격이 시작됐다.

"아아아아-!"

짙은 먹구름 탓에 사실상 거의 마력 소모 없이 벼락을 난사할 수 있게 된 메이사가 미친 듯이 큰바다뱀의 온몸을 지져댔으며 비제에 매달린 솔리프 역시 몸통 주변을 오가며 황금빛 채찍으로 비늘을 마구 태우고 긁어냈다.

그런가 하면 아래에서는 온갖 바다짐승의 형상으로 변한 인어 왕족들이 자기들의 주특기로 큰바다뱀의 몸통을 갉아 먹으며 괴롭혔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무래도 거대한 고래의 형상을 한 인어 왕이었다.

거대 고래가 머리로 큰바다뱀의 옆구리를 들이받자 쿵 하고 산과 산이 충돌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

얼마 전 싸웠던 로위나에 비하면 마력의 양이 수십 배씩 강한 것도 아니건만, 압도적인 체구만으로도 저 정도 힘을 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기야 몸 길이가 채 절반이 안 된다고 한들 몸통 쪽은 오히려 고래가 훨씬 두껍지 않던가.

전체적인 체중 면에서는 그리 큰 차이가 없을 터.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과 달리 바다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쪽이 더 잡기 쉽다고 생각했는지, 큰바다뱀이 포효하며 기다란 몸통으로 고래를 휘감았다.

이를 풀어내고자 촉수를 비늘에 박은 채 전기를 뿜어내던 해파리가 꼬리치기에 맞고 그대로 으스러졌다.

'저건 죽었군.'

첫 번째 희생자의 등장에 인어 왕족들이 눈에 띄게 위축되는 것이 보였다.

큰바다뱀이 입을 쩍 벌려 고래의 옆구리를 물어뜯으려는 것을 보며, 투란은 가까이 접근해 얼굴에 불의 영혼을 쏟아내고 곧바로 불을 붙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장대한 폭발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쏟아낸 흑색 가루가 폭풍우에 휘말려 젖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몸 주변이라면 모를까, 멀리 날려 보내면서까지 가루가 젖지 않게 보호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불의 영혼이 물과 접촉하면 폭발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건 알았지만 아예 폭발하지조차 않을 줄이야?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기도 잠시, 투란은 실패한 방법을 곧장 머릿속에서 지우고 고래의 옆구리를 물어뜯느라 고정된 커다란 눈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급한 만큼 조금 전에 던졌던 것처럼 큰 녀석이 아닌, 평소에 던지는 작은 돌멩이로.

저 거대한 생물에게는 티끌만도 못하게 작은 공격이나 큰바다뱀은 눈을 찔린 사람이 으레 그렇듯 온몸을 비비 꼬며 꼬리로 바닷물을 쾅쾅 내리쳤다.

조금 전 투란을 덮쳤던 것과 같은 물기둥이 수십 개, 아니 수백 개쯤 일어나 사방 수백 미터를 마구 휘저었다.

"조심해!"

투란은 재빨리 바람 마법으로 목소리를 전했으나 마침 주변을 날아다니며 몸통을 헤집고 있던 솔리프와 비제는 미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휘몰아치는 폭풍우 너머로 한 사람과 새가 비틀거리는 것이 보이는가 싶더니, 결국 그들은 물기둥 한 가닥에 휘감겨 그대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런....'

그나마 다행인 것은 투란이 흉내쟁이 성유물의 감각 덕에 폭풍우 속에서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

바로 날아서 접근한 투란은 솔리프가 물을 조종해 바닷속에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괜찮아?"

"나는! 근데 비제는 날개가 부러진 거 같아!"

투란은 비제와 솔리프를 그대로 들어 뒤쪽에 있는 섬의 해안가로 끌어올렸다.

솔리프가 낑낑대는 비제를 보며 자괴감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젠장, 내가 없었으면 피하고도 남았을 텐데."

가진 마력에 비해 신체 내구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비행형 마수들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점 중 하나였다.

물론 비제는 상급 마수답게 어지간한 적의 공격쯤은 충분히 받아낼 수 있지만,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건 문자 그대로 신화적인 영역에 든 마수가 아니던가.

이마저도 투란이 과거 바라하의 잔당들에게서 얻은 방어 마법기 하나를 목에 둘러준 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더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 수도 있었다.

투란은 비제의 부러진 날개를 잘 맞춘 뒤 회복약을 먹였다.

"좀 괜찮아, 비제?"

비제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투란은 영혼의 끈을 통해 녀석이 느끼는 고통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비행이라는 것이 상당히 섬세한 기술이며 지금 이곳에 미친 듯이 폭풍우가 치고 있음을 생각하면 당장 전투에 참여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투란은 비제에게 섬 안쪽에 들어가 있으라고 지시한 뒤, 솔리프를 근처에 있던 바다거북 인어의 등 위에 올렸다.

접근이야 어렵다지만 저기서 지원사격이라도 하면 그럭저럭 도움이 될 터였다.

다시 큰바다뱀과 사투를 벌이는 현장으로 돌아온 투란은 변한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어느새 인어 왕족 두 명이 더 죽었으며 대왕고래 역시 몸 이곳저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둘은 괜찮아!?"]

비제와 솔리프가 격추당하는 모습을 보았는지, 한창 큰바다뱀을 공격하던 메이사가 바람 마법으로 목소리를 보냈다.

이에 투란은 괜찮다는 수신호를 보낸 뒤 다시금 커다란 바윗돌을 꺼내 바람길을 만들어 던졌다.

쾅 소리와 함께 큰바다뱀이 휘청이는 것이 보였다.

'제법 타격을 입은 것 같기는 한데....'

문제는 조금 전부터 인어 왕족들이 눈에 띄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

하늘을 날며 공격하는 투란 일행과 달리 바다에서 활동하는 탓일까, 큰바다뱀은 당장 입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는 그들을 우선해 공격했다.

이에 상당한 피해를 본 인어 왕족들은 적극적으로 교전하는 대신 살살 물러나기만 하고 있었다.

아마 저들 역시 투란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여기서 지나치게 큰 희생을 치러서 힘의 균형이 깨지면, 투란 일행이 싸움 후 자기들을 숙청하려 들지도 모른다고.

이미 사망자가 셋이 나온 상태에서는, 투란 일행 쪽이 위험을 감수하거나 사망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 더 희생을 감수하려 들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지.'

투란은 바윗돌 하나를 대형 투석구에 건 채 빙빙 돌리며 큰바다뱀의 머리 주변을 날아다니는 것으로 주의를 끌었다.

녀석은 이전처럼 소용돌이를 일으켜 자신을 위협하는 날파리를 요격하려 했으나, 투란은 그때마다 불의 영혼을 이용한 고속 이동으로 이를 회피했다.

몇 번이고 이를 반복하자 온몸이 얻어맞은 듯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죽겠네....'

그래도 이렇게 나선 보람은 있었던 것이, 다소 소극적으로 변했던 인어 왕족들이 투란의 이러한 분전을 보고 다시금 공격적인 태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솔리프 역시 빛의 화살이며 창 따위를 만들어 쏘아대는 것으로 큰바다뱀의 주의를 끌고 있었다.

그리고 메이사로 말할 것 같으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벼락 대신 솔리프처럼 빛을 이용한 물리적인 공격 마법 쪽으로 선회한 듯했다.

아마 벼락 마법이 저 큰바다뱀을 상대로는 생각보다 썩 효과적이지 않다고 느껴서일까.

그렇게 치열한 공방을 나누기를 수십 분.

투란은 몸속의 마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음을 깨닫고 한 발짝 물러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메이사가 나서서 투란이 했던 것처럼 큰바다뱀의 주의를 끄는 역할을 맡았다.

'이제 슬슬 지치는데...언제 쓰러지는 거지?'

성유물의 감각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큰바다뱀의 마력은 이전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있었다.

몸뚱이 역시 곳곳이 파괴되어 사령들이 으레 그렇듯 휘몰아치는 폭풍으로 대체된 상태.

사령이 살아 있는 생물보다 훨씬 구조적으로 튼튼하다지만 불사의 존재는 아닌 만큼 분명 타격은 있을 터였다.

문제는 그와 맞서는 투란 일행, 그리고 인어 왕족들 역시 그만큼 힘을 잃고 지쳤다는 것.

심지어 인어 왕족들은 본래 전투에 참여했던 아홉 명 중 세 명이 죽은 상태였고, 투란 일행 역시 비제가 무력화되며 솔리프가 적극적으로 교전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지금의 균형이 꽤 아슬아슬하게 잡혀 있음을 고려했을 때 자칫 실수하는 순간 전황이 뒤집힐 가능성도 있었다.

'포기해야 하나?'

불쑥 떠오른 생각에 고민하기도 잠시, 투란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떠올린 생각을 지웠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지 않은가.

아주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될 것 같은 상황인 것을.

'이 폭풍우만 아니었으면 좀 더 편했을 것 같은데.'

만약 원거리에서 불의 영혼을 대량으로 날려보내며 터트릴 수 있었다면 전투가 훨씬 편했을 터였다.

투석구라는 매개체를 사용해 공격하는 것도 제법 마력 소모를 아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지만, 그래도 불의 영혼을 이용한 폭발 공격만은 못했으니.

이 비바람을 멎게 하거나 불의 영혼을 직접 몸 안쪽에, 혹은 표면에 올린 뒤 비바람을 맞지 않게 감싸서 터트릴 수 있다면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심지어 한쪽이 막힌 상태에서는 반대쪽으로 폭발력이 극대화되기까지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투란은 번뜩 뇌를 스치는 발상에 눈을 부릅떴다.

'투석구의 주머니는 비를 가려주지, 폭발시키면 강한 반발력이 일어나고.'

동시에 떠오른 것은 과거 난쟁이들이 쓰던 마법기였다.

액체가 수증기로 변하며 부피가 증가하는 원리를 이용, 금속 조각을 쏘아내던 물건.

그와 비슷한 원리로 바윗돌을 불의 영혼으로 밀어낸다면 어떨까.

투석구 안쪽에 불의 영혼을 잔뜩 넣고 그 위에 바윗돌을 얹은 뒤 쏘는 순간 폭발시킨다면?

발상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투란은 불의 영혼을 몇 주먹씩 꺼내어 큼직한 투석구 위에 얹었다.

그리고는 그 위로 바윗돌을 올려서 빗방울에 맞지 않게 가린 뒤 염동 마법으로 형태를 고정, 하늘로 날아올랐다.

[□--■---]

몇 번 봤다고 얼굴을 익혔는지, 주변을 얼쩡거리던 메이사에게 신경질을 내던 큰바다뱀이 투란을 향해 적대적으로 눈을 부라렸다.

지금 맞서는 적 중 가장 고통스러운 타격을 준 것이 그임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아래쪽에서 맞서던 인어 왕족들 역시 그런 투란의 등장에 힘을 얻는 기색이 역력했다.

바다쪽에서 큰바다뱀의 돌격을 몇 번이고 몸으로 받아낸 인어 왕이 최고의 수비수라면, 거대한 바윗돌을 날려 몇 번이고 머리를 강타해 충격을 주고 있는 투란은 최고의 공격수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경계하는 큰바다뱀의 모습을 본 투란은 씩 웃으며 그대로 바윗돌을 던지는 것과 함께 불의 영혼을 폭발시켰다.

손 쪽에서 뜨끈한 열기가 느껴지며 바윗돌이 이전보다도 더 빠르고 강하게 날아갔다.

목표 지점은 큰바다뱀의 정수리, 과거 흉내쟁이 성유물의 주인이 손을 박아넣고 있던 그 부분이었다.

94화

처음 폭발이 일어났을 때, 전투 현장에서 투란이 무슨 일을 했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몇 번이고 불의 영혼을 이용해 긴급 회피를 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왜 공격을 받지도 않는데 터트린 거지?'라고 의문을 품었을 뿐.

그들이 무언가 변화를 느낀 것은 원심력과 폭발력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그래서 음속의 몇 배 이상으로 날게 된 바윗돌이 큰바다뱀의 급소를 정확히 파고든 순간이었다.

과거 어느 신에 의해 만들어진, 아마 본래 저 거대한 짐승의 목숨을 끊었을 것이 분명한 상처 부위.

그곳으로 쏘아진 바윗돌이 폭풍의 살점을 헤집으며 파고들어 반대쪽 비늘을 뚫고 빠져나갔다.

그 과정에서 어찌나 큰 타격을 입은 것인지, 큰바다뱀은 입을 쩍 벌릴 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온몸을 마구 뒤틀었다.

"피-해-라-!"

인어 왕이 고래 특유의 거대한 폐활량을 이용해 외치자 그 목소리가 폭풍우를 뚫고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다급히 물러나는 자식들을 보며, 왕은 조금 전의 그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던 공격을 떠올렸다.

'방금 그건 대체....'

비록 바닷속과 자신의 왕국 주변을 오가며 살아갈 뿐이라지만, 인어 왕은 제법 긴 세월을 살며 선조들에게 여러 지혜를 물려받은 덕에 평범한 인어들보다는 뛰어난 식견을 자랑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 조금 전 투란이 보인 투석 공격은 그와 같은 수준의 마법사에게서 나올 법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 중에서도 가장 강대한 마법사 군주, 저들이 대가문의 가주라 칭하는 족속에게서나 보일 법한 힘.

조금 전까지 보이던 투란의 힘이 그 정도가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비정상적인 수준의 화력이었다.

'역시, 영생하는 족속 중 하나가 분명하군....'

예상했던 것보다 투란의 힘이 약했기에 다소 의심을 품었던 왕은 이를 보며 새삼 믿음을 굳혔다.

그는 내심 떠오르던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버둥거리는 큰바다뱀의 여파로부터 제 자식들을 보호했다.

[□-------■-------!]

몸길이만 백 미터가 넘는 괴수의 몸부림이 만들어내는 여파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막대한 질량이 대기와 물을 휘저을 때마다 해일이 일어났으며, 조금 전 투란의 공격에 뚫린 상처 부위에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바람이 쏟아져 나오며 마법적인 폭풍을 일으켰다.

몸통 크기만 팔 미터가 넘는 거대 문어가 반쯤 물 위에 떠 있다가 거기에 휘말려 수백 미터를 날아갔다.

"으헉-!"

"내 입으로 들어와! 어서!"

어느 바다거북의 등딱지 위에서 공격하던 솔리프가 거북의 입속으로 쏙 들어가는 것을 본 뒤, 투란은 추적 마법으로 비제의 위치를 확인했다.

주변을 휩쓴 해일이며 폭풍은 섬까지 퍼져 나가 이미 물기둥 세례로 엉망이던 백사장을 밀어버리고 뒤쪽의 숲까지 박살 냈지만, 다행히 비제가 있는 안쪽까지는 닿지 않은 것 같았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투란은 조금 전 폭발의 여파로 너덜너덜해진 투석구를 휙 내던졌다.

본래 돌을 던질 때 마력으로 투석구 역시 보호하지만, 아무래도 조금 전의 폭발을 이겨낼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보니 손도 좀 다쳤나.'

손가락이 화끈거리고 물집이 잡힌 것이 폭발의 여파로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마력 소모를 최소화하고자 수호자 마법기조차 활성화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이 정도만 다친 게 다행이었다.

회복약을 조금 먹어 치료할까 고민하던 그때, 메이사가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야?"

"불의 영혼을 쓴 건데...자세한 원리는 나중에 말해줄게."

사실 즉석에서 떠오른 발상을 곧바로 실현한 것이라서 실패할 가능성도 꽤 크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이미 수백 번쯤 연습해 본 것처럼 한 번에 합을 맞출 수 있었다.

과거에도 돌을 던지며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몇 번 있기는 했다.

중요한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반드시 원하는 목표를 맞출 수 있다는 확신.

이는 어려서부터 수 없이 연습해온 투란의 숙련과 직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일 수도 있었다.

심지어 조금 전에는 바람길을 사용하느라 돌을 목표물로 유도하는 마법조차 쓰지 못했으니.

'그보다 이 기술, 좀 더 연구하면 쓸 데가 상당히 많을 것 같은데....'

당장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응용법만 해도 몇 가지가 있었다.

큼직한 주머니에 자갈 수백 개와 불의 영혼을 담은 뒤 적들 한복판에 던지고 터트린다거나, 아니면 과거 난쟁이들이 썼던 것처럼 길고 가느다란 관에다가 금속 조각을 넣고 뒤쪽에 불의 영혼을 담은 뒤 터트려 쏘아낸다거나.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와중, 큰바다뱀의 몸부림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로 숨통이 끊기기 직전인 것일까?

투란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닌지, 조금 전 바람을 맞아 날아갔던 거대한 문어가 다가와서 큰바다뱀을 향해 다리를 휙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반쯤 죽다시피 한 상태였던 괴수의 내면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피해!"

투란이 다급히 외쳤으나 이미 둘은 너무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숨이 끊어질 듯 골골대던 큰바다뱀이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는가 싶더니 온몸에서 녹색 광채를 터트렸다.

조금 전까지 몸속에 담고 있던 폭풍의 정령이 어디론가 빠져나가며 온전한 사령으로 화한 것이다.

여전히 온몸이 으스러져 죽기 직전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 과정에서 한 줌의 힘을 더 얻었는지 놈은 문어를 향해 입을 쩍 벌려 입에 마력을 모았다.

그곳에서 터져 나온 것은-

"끄아아아아악!"

황금빛 섬광과 함께 거대 문어의 몸은 마치 달궈진 칼로 버터를 자르듯 녹아내렸다.

심판의 빛.

태양 혈통의 바라하가 자랑하는 비전 마법이 큰바다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본 투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저 녀석이 어떻게?

그런 의문을 비웃듯, 큰바다뱀은 이내 온몸으로 막대한 양의 번개를 내뿜으며 주변에 있던 인어 왕족들은 물론, 하늘을 날던 투란과 메이사까지 노리기 시작했다.

저것 역시 얼마 전까지 미친 듯이 몸을 두들겨 대던 메이사의 번개 공격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급히 불의 영혼 한 줌을 폭발시켜 몸을 튕겨나게 함으로써 번개를 피한 투란과 달리, 메이사는 벼락에 얻어맞아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다로 떨어졌다.

투란은 그녀를 구하러 가려다가 큰바다뱀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깨닫고 이를 포기했다.

메이사는 투란과 달리 온전한 폭풍 혈통을 개화한 만큼 전격 내성도 강하니 무사하리라 믿을 수밖에.

'흉내쟁이....'

연이어 쏘아지는 전격을 피하며 처음 떠올린 단어는 바로 그것이었다.

사서에게 부탁해 얻어낸 옛 큰바다뱀에 대한 고문 어디에서도 저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없었으니까.

그가 가진 성유물처럼 죽인 이의 힘을 강탈해 다루는 것이 아닌, 얻어맞은 능력을 베껴쓸 수 있는 형태인 것 같았다.

흉내쟁이 신과 접촉해 있으면서 그의 사령 역시 뒤엉켜 있던 것일까?

솔리프의 힘을 한 번 쓰고 다시 쓰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어느 정도 제한이 있는 것 같지만, 그걸 고려해도 썩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메이사가 전투 초반부터 먹구름 가득한 날씨에 힘입어 아라비온 가주나 보일 법한 장대한 벼락 폭풍을 날려댔던 탓이다.

아마 그 힘을 모조리 다시 토해낸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이들을 두 번은 죽이고도 남을 터.

그렇게 머리를 굴리며 날아드는 전격을 피하던 도중, 투란은 어느새 주변에 몰아치던 폭풍우가 그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큰바다뱀과 융합해 있던 폭풍의 정령이 사라지며 기상을 조종하는 능력을 잃은 모양이었다.

거기다 벼락 폭풍으로 인해 몸을 피했던 인어 왕족들은 물론이요, 조금 전 번개 공격으로 추락했던 메이사와 솔리프 역시 물속에서 접근하여 공격을 시도하며 주의를 끌고 있었다.

번개가 물속에서는 순식간에 퍼져 나가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음을 노리는 것이겠으나 저 압도적인 육체에 한 대 얻어맞는 순간 즉사할 가능성이 크리라는 점을 고려하면 실로 만용에 가까운 행위였다.

'그렇다면....'

동료들이 벌어준 귀중한 기회를 이대로 날려 먹을 수는 없는 일.

유감스럽게도 대형 투석구가 폭발력으로 찢어진 탓에 조금 전과 같은 기술을 또 쓰기는 힘들지만, 폭풍우가 그쳤다면 이전에 폐기했던 전술을 동원하면 그만이었다.

하늘을 날던 투란의 몸이 거짓말처럼 지워졌다.

* * *

'빌어먹을....'

물을 조종해 만들어낸 호흡관으로 숨을 들이쉬며, 솔리프는 눈앞에 존재하는 신화적 괴수의 위용에 욕설을 내뱉었다.

조금 전 그는 놈이 귀찮은 파리를 떼어내듯 몸을 휘저은 탓에 그 물결에 얻어맞아 수십 미터를 뒤로 밀려나야 했다.

아마 큰바다뱀이 작정하고 솔리프를 노렸다면 얼마 버티지 못했을 터였다.

아직 유체 조작 마법의 숙련도가 부족한 편인 그는 바닷속에서 썩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편이니까.

하지만 그런 공포를 속으로 삼키며, 솔리프는 빛의 창 한 자루를 물속에서 만들어 큰바다뱀의 배와 가슴 어딘가를 향해 던졌다.

바라하의 후계자로서 수십 년간 교육받은 투창술은 물속에서도 제 역할을 다했다.

"윽."

제법 마력을 많이 실은 공격인 만큼 따끔했는지, 큰바다뱀이 이제는 완연히 녹색으로 물든 눈을 부릅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르게 말하면 고작 그 정도에 불과했다.

주특기인 '심판의 빛'은 비늘을 갈라내고 살점을 찢기 충분하다는 것을 조금 전의 경험으로 알았지만, 그 정도 거리까지 접근했다가는 분명히 목숨을 잃고 말 터였다.

거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조금 전에는 그 녀석이 자신의 기술을 베껴 쓰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그런 시도를 하기가 꺼려졌다.

다가올 반격에 대비해 황급히 몸을 옆으로 피한 순간, 거대한 꼬리가 조금 전 그가 있던 곳을 가르며 강렬한 와류를 만들어냈다.

"그륵-!"

물 위로 만들어놓은 호흡 통로가 사라지며 순식간에 바닷물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공기 대신 짜디짠 물을 들이마시며, 솔리프는 필사적으로 뭍을 향해 마법과 신체 능력을 총동원해 헤엄쳤다.

다행히 지나가던 로위나가 집게발로 그를 잡고 끌어올려 준 덕에 제법 빠르게 올라갈 수 있었다.

"케헥, 헥...고맙...."

"너희들의 대장, 어디 갔지? 조금 전까지 있더니 없어졌다."

다급히 물 밖으로 머리를 꺼내 호흡하던 솔리프는 로위나의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말대로 조금 전까지 하늘을 날며 주의를 끌던 투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기어코 번개 마법에 격추당했나?

아니면 피하기가 힘들어서 그들처럼 물속으로 대피한 것일까?

혹시 메이사와 함께 있나 해서 보니 그것도 아닌 게, 메이사는 조금 전 솔리프와 마찬가지로 큰바다뱀의 주변으로 잠수한 채 계속해서 빛의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보다 훨씬 능숙하게 몸을 움직일 수 있어서인지 몰라도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하는 것 같았다.

'좀 떨어지라고 말해야 하나? 여기서 수신호는 안 보일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솔리프는 큰바다뱀의 머리 위쪽에서 일어난 폭발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 * *

[■■■■■■■■■■■■■■--------!]

'확실히 여기가 약점이군.'

투란은 과거 바라하 귀족들에게서 얻은 태양 혈통의 마력,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이의 힘을 흡수한 채 은신 마법을 사용하여 조금 전 바윗돌로 관통했던 정수리의 급소에 접근했다.

평상시라면 아무리 자하르의 은신 마법이 있다 한들 쉼 없이 움직이는 머리에 실수로 얻어맞을까 두려워서라도 감히 하기 힘든 일.

녀석이 지쳐서 굼떠진 것은 물론이요, 바닷속에서 공격해오는 적들에게 시선을 분산한 덕에 가능한 접근이었다.

그 상태로 투란은 과거 익사한 신의 팔이 꽂혀 있던 자리, 지금은 바윗돌이 지나가 더 넓어진 곳에 가지고 있던 불의 영혼을 대량으로 들이붓고 떨어져서 불을 붙였다.

그렇게 생겨난 구멍 안쪽은 사람이 통과하기 충분할 정도로 넓었다.

안으로 뛰어들어 심판의 빛을 활성화, 빛의 채찍을 마구 휘둘러 사령의 본질을 지워내자 큰바다뱀은 당장이라도 죽을 듯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마구 비틀어댔다.

생물로 따지면 뇌를 후벼파고 있는 셈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 아프다 이거지?'

투란은 두개골 안쪽, 비교적 좁은 홈에 발을 끼운 채 이리저리 몸을 휘청거리며 채찍을 휘저었다.

사령의 녹색 광채가 빛의 채찍에 타들어갈 때마다 비명과 몸부림이 더 커져만 갔다.

-안 돼!

그때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사람의 목소리.

투란은 그것이 큰바다뱀과 융합해버린 존재, 흉내쟁이 신의 그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죽어.

누가 죽어야 한다는 것일까,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인 투란이?

의문은 곧바로 답으로 돌아왔다.

-괴물, 죽어. 사람을 위해서, 뱀, 죽어....

그것이 바로 흉내쟁이 신의 사령이 품고 있는 뜻, 아마 그가 죽기 직전까지 강하게 갈망했을 원념의 정체였다.

인간을 위해 큰바다뱀과 싸운 신이 남긴 사령이 그 숙적과 야합했다는 점은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그 잘못된 헌신을 끝내주고자, 투란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쥐어짜며 뇌가 있어야 할 부분을 채운 녹색 광채를 심판의 빛으로 지우고 또 지워냈다.

사령의 본질이 타들어 가는 매캐한 냄새가 비강을 가득 채우고 온몸이 흔들리는 두개골의 벽에 부딪히기를 몇 분.

마침내 두개골 내부의 흔들림이 멈추더니 이내 자유 낙하를 시작했다.

큰바다뱀과 신의 사령이 얽힌 무언가가 완전히 부서졌음을, 그래서 이 거대한 뱀의 온몸을 장악하고 있던 마력이 한 점으로 모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맙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투란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편히 쉬십시오, 신세 많이 졌습니다."

아마 그는 이 말을 듣지 못하겠지만 이것이 투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였다.

잠시 후, 풍덩 소리와 함께 두개골 안쪽에 물이 차기 시작하자 투란은 그대로 잠수하여 밖으로 빠져나왔다.

안에 갇혀 있느라 잠시 막혔던 성유물의 감각이 활성화되며 주변에 있는 생명체들을 비췄다.

인어 왕과 왕족들, 솔리프, 그리고 메이사....

투란은 바다거북의 등껍질 위에 올라탄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황급히 비행 마법을 써서 날아갔다.

"투란! 회복약, 빨리!"

다급한 얼굴로 외치는 솔리프.

그 아래에는 메이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누워 있었는데, 허리 아래가 어디로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하반신이 사라졌다는, 최상위 귀족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고도 남았을 극심한 부상.

투란은 다급히 회복약 마법기를 꺼내 솔리프에게 내민 뒤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는 거야!?"

"몸 가지러!"

다행히 메이사의 잘린 나머지 절반은 아슬아슬하게 흉내쟁이 성유물의 감각을 벗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재빨리 잠수해 하반신을 건져내어 가져오는 한편, 투란은 인어 왕족들의 상태를 관찰했다.

'다들 크게 다치고 몇 명은 죽었지만...여기서 마력을 다 소모했다가는 위험해.'

아무리 상태가 나쁘다고 한들 모든 마력을 다 써서 무력화된 귀족을 죽이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어쨌든 저들은 변신만 할 수 있으면 거대한 바다 생물이고 이쪽은 마력 없이는 무력한 인간에 불과하니까.

따라서 현실적으로 보자면 둘 중 한 명만이 마력을 써서 치료하고 다른 한 명은 얼마 남지 않은 힘이나마 온존해야 했다.

문제는 그랬다가는 높은 확률로 메이사가 죽는다는 것.

회복약 마법기는 그들 수준의 마법사들에게 썩 효율적이지 않은 물건이며, 그녀의 부상은 두 사람이 모든 마력을 들이부어도 살아날 수 있으리라 장담하기 어려웠다.

아주 잠시간의 고민 후, 투란은 다급히 회복약을 먹이고 있는 솔리프에게 다가가 말했다.

"상반신을 들어. 몸을 맞출 테니까."

"붙일 수 있나?"

"적어도 네 때랑 다르게 상처 부위가 타거나 녹아버린 건 아니잖아. 근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아마 마지막으로 발악할 때 어딘가에 잘못 걸린 것 같아. 안 그래도 너무 가깝다고 생각은 했는데...."

과거 솔리프의 잘린 팔은 심판의 빛으로 절단면이 녹아 버렸기에 도로 붙일 수 없었지만, 메이사의 몸은 그나마 꽤 깔끔하게 찢겨 나간 상태였다.

몸을 지키던 여러 고위 마법기까지 박살 낼 정도로 놈이 가진 육탄전 능력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에 경악해야 할지, 아니면 저만한 괴수에게 얻어맞고도 산산이 으스러지지 않은 메이사의 튼튼함에 감사해야 할지.

바다거북에게 육지로 가 달라고 부탁한 투란은 솔리프와 번갈아 가며 회복약을 만들어 메이사를 치료했다.

육지 안쪽에 있던 비제까지 급히 불러와 모든 마력을 동원한 끝에, 거의 이십 분 정도가 지나서야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됐어, 이제는 시간이 지나면 회복할 거야."

"살았다...."

이미 반쯤 탈진한 상태였던 솔리프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곧장 자리에 뻗어 버렸다.

투란은 비제의 날개가 혹시 잘못 붙지 않았는지 잠시 확인한 뒤, 메이사의 상태를 진찰했다.

그녀는 여전히 창백한 안색을 한 채 기절해 있었으나 달리 다시 연결된 하반신에서는 따뜻하게 피가 돌고 있었다.

성유물의 감각으로 본 바에 의하면, 계산대로 투란과 비제까지 모두 마력을 들이붓지 않았을 경우 제대로 몸이 붙지 않아 죽었을 게 분명했다.

"후아...."

안도의 한숨을 쉬던 그때, 몇 개의 그림자가 투란과 솔리프의 위쪽에 드리웠다.

인어 왕과 그를 따르는 인어 왕족 몇 명.

처음 싸웠을 때보다 숫자가 줄어든 그들이 묘한 표정으로 투란 일행을 바라보았다.

인어 왕이 관찰하는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

"크게 다친 모양이군."

"안타깝게도. 다행히 고비는 넘겼어."

투란은 정말로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한 어조로 답하며 인어들의 표정을 슬쩍 관찰했다.

만약 저들이 여기서 적대를 표한다면 그들은 정말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몸속에 남은 마력은 아르마니가 상어로 변해 덤벼든다고 해도 쉬이 대처하기 힘든 수준이었으니까.

긴장감에 찬 몇 초간의 대치 후, 인어 왕이 나지막이 말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도록. 시체를 빨리 회수하고 싶으니 그 여자가 깨어나면 바로 힘도 흡수하고. 일단은 해변으로 가져와 두마."

인어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며, 투란은 조금 전 솔리프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모래밭 위에 드러누웠다.

9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