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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 - 100-105

100화

울창한 밀림과 반쯤 썩어가는 물이 한가득 고인 습지.

까마득히 오랜 세월 인간의 발걸음을 허락지 않던 태고(太古)의 땅에 불꽃 한 자락이 피어올랐다.

물론 이 땅에 불꽃이 생겨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때때로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 나무를 내리치며 이 땅에 열기를 가져오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생겨난 불은 대기 중에 가득한 습기와 축축한 나무들, 바닥에 고인 웅덩이 따위로 막을 수준이 아니었다.

막대한 양의 마력을 원료 삼은 불이 한없이 규모를 키워 가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아이고, 거 참 잘도 탄다."

태양 혈통의 대귀족이 전력을 다해 펼치는 화염 마법은 원시의 자연을 굴복시키기 충분했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고여있던 웅덩이는 순식간에 증발하여 날아올랐으며 푹 젖은 나무며 물풀들은 잿더미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습지를 보금자리 삼아 살아가던 무수한 생물들 역시 이러한 화마(火魔)에 영향을 받았다.

작은 곤충들부터 도마뱀이나 개구리, 수달, 물고기, 몇몇 종류의 새들까지.

수 없이 많은 생명이 덧없이 꺼져가며 매캐한 탄내와 함께 대량의 수증기와 재,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어느 고도로 발달한 문명사회의 사람들이 보았다면 끔찍한 자연 파괴라고 절규하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쉬이이익-!]

그때,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몸길이가 오 미터쯤 되는 거대한 늪살무사가 불길을 뚫고 솔리프를 향해 덤벼들었다.

파충류 특유의 기계적인 순발력 덕에 놈은 순식간에 덥석 팔을 무는 데 성공했으나, 유감스럽게도 뱀의 독니는 그의 피부조차 뚫지 못했다.

"아이, 자식이 더럽게."

솔리프가 그대로 휙 손을 휘두르자 거대한 뱀의 몸뚱이가 쾅 소리를 내며 바닥에 짓뭉개졌다.

원래도 저런 하급 마수 따위에게 당할 리는 없었겠지만, 수호자 혈통까지 각성한 지금의 솔리프에게 유효한 타격을 주려면 최소한 고위 귀족급의 힘은 가져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아예 무방비한 상태에서조차 상처 하나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불길을 뚫고 덤벼드는 마수 몇 마리를 더 태워 죽인 솔리프가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다 됐어! 날려버려!"

외침과 함께 하늘로 솟구치던 대량의 수증기가 갑자기 저 남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붙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를 만들어낸 것은 비제의 다리에 매달린 채 하늘을 날고 있던 메이사였다.

그녀는 바람을 부리는 검독수리와 완벽하게 호흡을 맞춰 바람 장벽을 생성, 솔리프의 화염이 만들어낸 부산물을 남쪽에 세워진 흙 장벽 너머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이를 마무리 짓기 위해, 장벽 너머에서 기다리던 투란은 카마인 혈통의 힘으로 날아온 수증기에 냉기를 불어넣었다.

순식간에 액화한 물이 강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후 비행 마법으로 장벽을 넘은 투란은 잿더미만 남은 땅 위로 손을 뻗어 땅속 깊이 스며들어 있던 물까지 끄집어냈다.

"솔리프, 그릇."

"자."

옆에 있던 솔리프가 지름 수십 미터 크기의 빛으로 된 그릇을 만들자 투란은 솟아난 물을 조종하여 그 안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염동 마법으로 그릇을 장벽 너머의 강에 퍼내는 것으로 대충 정리가 끝났다.

"좋아, 이번 구역 끝!"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마력도 많이 썼고 슬슬 해도 질 것 같으니까."

"어으, 열심히 일했더니 배고픈걸. 너도 그렇지 않냐?"

솔리프가 배를 문지르며 묻자 비제가 콧방귀를 뀌며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서 육포 하나를 꺼내 먹었다.

메이사가 가볍게 하늘 위를 날아올랐다가 내려오며 말했다.

"확인했어. 물 새는 곳은 없어."

"좋아, 그러면 돌아가서 쉬자. 비제, 부탁할게."

비제가 끄는 그네에 올라타 하늘로 날아오르며, 투란은 저 아래 펼쳐진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울창한 밀림 한가운데, 마치 뻥 뚫린 구멍처럼 휑한 구역 하나가 그 존재감을 자랑했다.

그것이 바로 지난 삼 주일간 투란 일행이 성실하게 습지를 간척한 결과물이었다.

우선 물을 공급하는 남쪽의 강 옆에 제방(堤坊)을 설치해 경로를 차단.

이후 개척할 구간 역시 주변의 흙을 솟구치게 하여 사각형으로 격리된 공간을 만든 뒤, 막대한 화력으로 안의 생태계를 통째로 태워 폐허로 만들고 남은 물까지 뽑아내어 마른 땅으로 만들고 다졌다.

평범한 마법사들이라면 이런 막대한 규모의 환경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어렵거니와 어찌어찌 한 번쯤 한다고 해도 완전히 탈진하기 마련이지만, 초월적인 마력을 가진 그들은 이런 일을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마수의 습격 따위야 위협조차 되지 못하는 수준이었고.

덕분에 그들 세 사람이 만든 간척지는 이미 그 범위가 사방 십수 킬로미터에 달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로 개척한 걸까?"

"글쎄, 정확히 재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십 분의 일은 넘지 않았을까."

"그 정도면 진짜 몇 달 안에 끝나겠는데?"

"요즈 씨가 돌아와서 보고 기절하는 거 아닌지 몰라."

"우리끼리 있을 때도 요즈 씨라고 하는 거야?"

"아, 젠장. 말버릇이 붙어서."

세 사람은 느긋이 수다를 나누며 아직 개척되지 않은 늪지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날아갔다.

습지가 끝나고 개척된 평야가 펼쳐질 때쯤, 투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손짓 한 번으로 벼락 몇 번을 쾅쾅 땅에 떨어트렸다.

"마수?"

"어. 전보다 더 많아졌네. 북쪽으로 도망가는 놈들이."

투란 일행이 습지의 남쪽부터 천천히 개척을 시작하자 지금처럼 위협을 느낀 몇몇 마수들이 북쪽의 개활지로 도망치곤 했다.

비록 이곳이 끔찍하리만치 시골이라지만 그래도 마을이며 도시가 몇 개쯤은 있는 만큼 불의의 사고를 피하자면 이렇게 미리미리 정리해줄 필요가 있었다.

* * *

북쪽으로 날아가며 마수를 사냥하고 수습하기를 수 차례.

투란 일행은 이곳 콜로아 지방의 유일한 도시인 콜로아 시에 도착했다.

이 도시의 인구는 약 천오백 명으로, 존재하는 마법사라고는 고작해야 기사 세 명이 전부였다.

과거 투란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당시 머무른 무레이 시와 엇비슷한 수준.

이는 이곳이 라비타스는 물론, 인류 사회를 기준으로도 변방 중의 변방이라서였다.

"신들께서 오셨다!"

"세상의 주인이시여!"

"오오!"

투란 일행을 본 평민들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넙죽 고개를 땅에 처박으며 엎드렸다.

몇 번이고 보았지만 익숙지 않은 풍경.

투란은 내심 혀를 차며 그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에서 그들과 같은 고위 귀족들은 신 같은 존재가 아니라 아예 신으로 추앙받았다.

평민들 대부분이 글도 잘 모르며 신학 역시 귀동냥으로 배운 무지렁이들인지라, 평생 본 적도 없던 귀족 나리들이면 신이나 다름없지 않으냐는 논리로 접근한 것이다.

그렇게 도시 중앙의 저택에 접근한 투란 일행을 반긴 것은 유난히 추레한 몰골을 한 평민들의 무리였다.

팔이나 다리, 혹은 손가락이나 발가락 따위가 한두 개씩 없거나 끔찍한 피부병 따위를 앓아 온몸을 붕대로 감싼 이들.

그들 모두가 투란 일행을 향해 넙죽 엎드려 외쳤다.

"위대하고 또 위대한 신들이시여! 부디 여기 이 불쌍한 이들을 굽어살피소서!"

"소문을 듣고 왔사옵니다!"

"부디 제 딸을 구해주십시오! 전 재산을 바칠 테니!"

이를 본 솔리프는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투란과 메이사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모두 질서 있게 줄을 서라. 치유는 모두에게 베풀어질 것이다."]

질서 있게 줄을 서는 훈련 따위 받아본 적 없음에도 평민들은 신의 명령에 곧바로 줄을 섰다.

그중 몇몇 사람들은 자기가 새치기를 당했다고 생각해 얼굴을 찌푸렸으나 크게 화내거나 소리치는 이는 없었다.

감히 신 앞에서 어찌 그런 불경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늘어선 줄의 맨 앞, 투란은 메이사에게 회복약 마법기를 넘겨주었다.

그녀가 마력을 주입하자 안쪽에서 액체가 찰랑였다.

"아픈 곳은?"

"여, 여기 이 손입니다. 독사에게 물렸다가 썩어 버려서...."

"아플 테지만 참아."

남자가 내민 손목 끄트머리는 무언가로 잘린 듯 뭉툭했는데, 아마 더 썩어들어가지 않게 조치한 것 같았다.

메이사는 투란이 빌려준 마법기 단검으로 끄트머리를 휙 잘라낸 다음 회복약을 절단면에 발랐다.

끅끅거리며 억지로 비명을 참던 남자는 이내 햇빛에 그은 피부와 전혀 다른 뽀얀 손이 자라나자 경악하여 눈을 부릅떴다.

"손이...생겼다! 감사합니다, 여신이시여! 정말로 감사합니다!"

물론 과거 비센의 피해자들을 치료할 때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냥 한 모금 먹이기만 해도 이런 조치는 필요 없었겠지만, 지금 치료가 필요한 이들은 그때보다 훨씬 많았다.

모두에게 회복약을 먹일 만큼 남은 마력이 여유롭지도 않았고.

이후 메이사는 투란과 솔리프의 도움을 받아 조금 전과 같은 절단상부터 피부병과 열병, 그 외의 온갖 질병을 회복약으로 하나하나 고쳐나갔다.

뒤에서 가만히 이를 지켜보던 투란은 환자 한 명을 제지하며 말했다.

"너는 어디가 아파서 왔지?"

"저, 저는 독 있는 벌레에 물려서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다보니...."

"아프지 않은 자가 거짓 치료를 받으려 하면 끔찍한 벌을 받으리라는 소문은 들었을 텐데."

투란의 말에 중년 남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더니 넙죽 엎드렸다.

"죄송, 죄송합니다! 그저 은총을 받고 싶은 마음에...!"

"꺼져라."

성유물의 감각으로 평민들이 가진 미약한 양의 마력, 사실상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수준의 힘마저 감지할 수 있는 투란은 이를 통해 건강 여부를 간단히 판단할 수 있었다.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꾀병 환자를 걸러내자 수군거리던 환자 몇 명이 슬그머니 몸을 감추었으나, 그러고도 여전히 환자는 많았다.

마침내 진료가 끝났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대지모신보다도 더 아름다운 여신이시여, 앞으로 당신만을 영원히 섬기겠습니다, 제 딸을 구해주셨으니 전 재산을...."

"알았으니 집으로 돌아가라. 대가는 받지 않는다."

솔리프의 제지에 어린 딸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던 젊은이가 몇 번이고 넙죽 고개를 숙인 뒤에야 사라졌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그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동네는 사람도 없다면서 아픈 인간이 왜 이리 많아? 매일 고쳐도 끊이질 않네."

"며칠 정도를 걸어서 올 수 있는 거리 안에 사는 사람을 다 합치면 그래도 몇만 명 정도는 되니까. 이곳에 오면 치료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모양이지."

라비타스 본토에서는 귀족들이 주기적으로 여러 도시와 마을을 돌며 평민들을 치료하는 행사를 펼치곤 하지만, 이곳 콜로아 지방은 워낙 외진 탓에 그럴 힘이 있는 귀족들이 찾아올 일이 없었다.

사실 이곳 평민들이 투란 일행을 신으로 섬기는 데는 이러한 행사 역시 큰 영향을 주었을 게 분명했다.

치유력이야말로 라비타스 귀족들의 대표적 권능이니까.

그렇게 태연히 잡담을 나누며 돌아가는 투란 일행의 뒤쪽.

치료받은 이들은 서로 얼싸안아 기쁨을 나누다가도 저택 쪽을 향해 극진히 절하며 은혜를 되새겼다.

* * *

도시 중앙에 자리한 저택.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선 투란 일행을 맞이한 것은 본래 이 도시의 지배자였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나이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다른 이들은?"

"지시하신 대로 주변 순찰 중입니다. 강한 마수가 나타난다면 바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했다."

사실 투란 일행의 존재는 본래 이 도시를 지배하던 기사들에게 있어 그야말로 자연재해나 다름없었다.

이런 촌구석에 배치되는 것은 열악한 생활을 감내해야 하는 대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떵떵거리는 것이 장점인데, 뜬금없이 굽신거려야 할 상전들이 생겨버린 셈이니까.

심지어 이들이 개척에 필요한 자원이며 인력을 원한다면 시세에 맞는 적절한 대가로 거래해 협조하라는 본가의 지시까지 함께 들고 온 만큼 마냥 손님 취급할 수도 없었다.

대체 왜 저런 귀족들이 이런 촌구석에 일하러 왔는지는 몰라도 일단 본가 쪽에 뭔가 연줄쯤은 있다는 것 아닌가.

얼마 전 투란이 내린 지시, 남쪽에서 올라오는 마수들을 경계하라는 지시 같은 것을 거부했다가 나중에 '기사들이 일을 않더라'라는 식의 말을 본가에 흘리면 그들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면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수고하도록."

이후 투란 일행은 본래 기사들이 사용했던 저택의 가장 좋은 방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식탁에 모였다.

수더분한 시골 아낙처럼 생긴 여인이 늪 멧돼지와 사과로 만든 갈비구이, 생선과 게살을 함께 넣어 쪄낸 찜 요리를 내왔다.

"오, 이거 맛있는데. 이 동네는 다른 건 별거 없어도 음식 종류 하나는 다양하단 말이지."

"아무래도 습지는 다른 지방보다 생물의 종류가 다양하니까. 얼마 전에 개구리 요리 먹었을 땐 기겁했잖아?"

"그야 먹어본 적이 없으니까! 애초에 나만 그런 게 아니거든? 이 지방 사람도 아니면서 그런 걸 태연히 입에 집어넣는 건 너밖에 없어!"

투란과 솔리프가 잡담을 나누는 사이, 메이사는 앞에 놓인 요리를 한 입 한 입 정성스럽게 씹어 삼키고 있었다.

두 눈을 감은 채 지그시 식사를 음미하는 모습은 일견 경건하게마저 느껴졌다.

잠시 후, 보통 사람 한 명이 먹을 만큼의 식사를 마친 그녀가 입을 닦으며 말했다.

"난 여기까지. 좋은 식사였어, 뤼테."

"여신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이 아낙네는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메이사의 칭찬에 뤼테라 불린 중년 여인이 흐뭇이 웃으며 식기를 정리했다.

이것이야말로 투란 일행이 간척 사업을 진행하는 와중에도 소문을 내고 병자들을 모아 치료하는 이유였다.

메이사의 고질적 문제인 섭식장애의 치료법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식으로 타인들을 도우며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었으니까.

첫날부터 지금까지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고쳐온 덕에 이제 메이사는 제법 수월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 고위 귀족을 기준으로 정상적인 식사량을 충족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기절한 채로 음식을 주입 당할 필요는 없어졌다.

"근데 이게 일시적인 효과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그때 그 불타던 사람들 고쳐서 회복한 것도 얼마 안 지나서 초기화됐잖아."

"뭐, 이런 식으로 음식 먹는 습관을 들여야지. 그렇다고 평생 다른 사람들을 돕기만 하면서 살 순 없으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걸까?"

메이사의 물음에 투란과 솔리프가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아니, 그냥 계속 이렇게 시골에서 땅을 개척하고 사람들을 도우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음식 먹기에 급급해서 사람들을 고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에게 새 삶을 주는 것에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메이사는 다소 수줍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저런 성품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치료하며 자존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내심 평민들의 칭송으로 한껏 우월감과 자부심을 느끼던 투란이 자신의 유치한 본심을 들키지 않고자 슬쩍 음식으로 시선을 돌리는 사이, 솔리프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에휴, 난 절대 평생 이러고는 못 살아. 제대로 된 술집도 도박장도 극장도 도서관도 없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평생을 사냐? 기껏해야 몇 달 정도 일하는 거니까 참는 거지."

그 말대로 이곳 콜로아 시는 문화 생활이라는 것을 할 만한 여지가 없다시피했다.

사실상 조금 큰 마을 수준의 도시이니 당연한 일.

이것 역시 광산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귀족들이 몰려와서 이곳을 개척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아무 죄 없는 귀족들을 이런 곳에 보내서 습지를 개척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무리 대가문의 가주라고 한들 불만을 살 만한 일이니까.

아마 연극광인 아시즈였다면 괴로워서 온몸을 비틀고 있지 않았을까.

그 때문에 콜로아의 기사들은 투란 일행이 무언가 큰 죄를 지어 유배된 귀족일 거라고 수군거리고는 했다.

"넌 사람들이 기뻐하는 거 보면서 좀 공감이 되거나 그런 느낌 안 들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그거 보자고 평생 이런 데서 살기는 싫다 이거지. 난 안 그래도 세상을 여행하고 싶은 마음에 집안 나온 사람이거든? 똑같은 풍경만 보고 똑같은 일만 몇 달씩 하다 보면 지겨워서 죽어."

두 사람의 말다툼을 귓등으로 흘리며 투란은 하늘에 뜬 큼직한 달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암약하는 신들이니 세상의 비밀 따위를 놓고 투쟁하는 것보다는 이처럼 평화롭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쪽이 더 마음이 편했다.

평생을 이렇게 사는 게 즐거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이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101화

"자, 조금만 더 힘을 내, 거의 다 됐어."

"으윽······!"

세상의 남쪽 끝, 어느 호기심 왕성한 모험가들만이 간간이 오가는 오지 중의 오지.

콜로아 지역 어딘가에서 격려하는 목소리와 쥐어짜는 듯한 신음이 들려왔다.

신음 소리의 주인은 적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한 여인이었다.

시라프 습지 특유의 간소한 옷차림 사이로 팽팽한 근육이 도드라진 팔뚝과 종아리가 보였다.

잠시 후, 막대기를 든 채 몇 번이고 앉았다 일어서던 메이사가 가쁜 숨을 내쉬며 이를 내려놓았다.

"하악, 하아······더, 더는 못하겠, 어."

"아깝네, 한 번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맞은편에서 그녀를 도와주던 청년, 투란은 바닥에 드러누운 메이사의 모습에 혀를 차며 쇠막대기를 제자리에 놓았다.

겉보기에는 그냥 길쭉한 쇠막대기처럼 보이는 이 물건은 메이사가 직접 만든 마법기였다.

효과는 마력을 주입해서 무게를 늘리는 것.

그들과 같은 최상위 귀족들의 근육이 단련될 정도의 부하를 가하려면 이러한 식의 도구가 필요했다.

물론 그냥 무게를 늘리면 연약한 땅으로 몸이 파고드는 탓에 대지 변형 마법으로 땅을 붙잡아주는 것은 덤이었다.

"아무래도 신체 단련은 여기까지면 충분할 것 같아. 얼마 전부터는 근육량이 아예 안 늘어나는 것 같으니까."

"드디어-악! 조금만 살살······."

파들거리는 종아리와 허벅지를 꾹 주무르자 메이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습지를 간척하는 동안, 그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이렇게 서로 도와 가며 신체를 단련했다.

아무래도 이전에 시간과 환경 문제로 어중간하게 단련을 하다 말았던 메이사 쪽이 유난히 진전이 빨랐다.

비록 선천적으로 골격이 얇아 우람한 근육질까지 되지는 못했지만, 다소 가늘던 몸에 여성 특유의 윤곽이 생겨나며 힘과 내구도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이제 신체 능력 자체는 육탄전 쪽 혈통을 활성화하지 않은 투란보다도 조금 더 뛰어날 정도였다.

물론 투란 역시 이전보다 더 튼튼한 몸을 가지게 되기는 했다.

이전에 하람과 함께 했던 속성 과정이 있었던 만큼 극적으로 강해지지는 못했지만, 근육이 좀 더 붙어 전보다 한층 사내다운 체격이 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솔리프는 이미 바라하 가문에서 한계까지 몸을 단련한 만큼, 그들의 훈련을 돕거나 지금처럼 다른 일을 하러 가고는 했다.

메이사가 좀 더 쉬도록 내버려 둔 채, 투란은 훌쩍 제방 위로 뛰어올라 남쪽, 그들이 이미 개척한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저 지평선 너머까지 메마른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진짜 많이도 했네······.'

투란 일행이 콜로아 지방에 온 지 두 달 반.

마법을 이용한 간척이 점점 요령이 붙은 덕에, 그들은 슬슬 기존 계획 구역의 삼 분의 일 가까이를 간척한 상태였다.

아마 개척을 끝낸 뒤 밭을 만든다면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리고도 남을 터였다.

물론 이 지역의 흙은 농사 짓기에 썩 좋은 편이 아닌 것 같다는 사서의 조언이 있기는 했지만.

이곳 콜로아 지방은 물론이요, 라비타스가 다스리는 시라프 습지 전체를 통틀어서도 이만한 규모의 평야가 없음을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위업이었다.

'사실 일반적으로 이 정도 실력의 마법사들이 습지 간척하겠다고 매달려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지.'

어지간한 대가문 하나를 창설해야 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매달려있을 필요가 무엇 있단 말인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치유사의 힘을 빌리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물론 정말로 이 일이 완전히 무의미하고 고된 노동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었다.

간척 사업 과정에서 대규모 마법을 다루는 요령을 배우는 것은 물론이요, 지금처럼 시간을 내어 몸도 다질 수 있었으니까.

여행 중이라고 신체 단련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니나 아무래도 지금처럼 한곳에 머무르는 것만은 못했다.

그렇게 간척지를 보며 감상에 빠져있기도 잠시, 뒤쪽에서 강대한 마력의 기척이 느껴졌다.

덤으로 바로 옆에 붙은 미약한 기척 하나도.

잠시 후, 북쪽에서 습지를 뚫고 나온 솔리프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어이, 투란! 나 왔어!"

"슬슬 올 때다 싶었는데 딱 왔네. 별일은 없었고?"

"일이랄 게 뭐 있나."

솔리프의 옆에는 반쯤 넋이 나간 듯한 기색인 기사 요즈가 뒤따르고 있었다.

슬슬 요즈가 돌아올 때가 되었기에 이를 확인하고자 솔리프가 다녀온 것이었는데, 마침 딱 마주쳐서 동행한 듯했다.

그는 솔리프에게 붙들려 제방 위를 올라갈 때까지 제정신이 아닌 듯한 기색을 보였다.

"위, 위대하신 분. 요즈가 인사드립니다."

"그 도마뱀은 잘 반납하고 왔나?"

"예······그보다, 저분이 귀족이신 줄은 전혀······."

요즈가 저토록 동요한 것은 바로 솔리프가, 정확히는 지금 가면으로 변장한 '필'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였다.

비록 그가 이곳의 무지렁이들처럼 귀족을 신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하늘 같은 상전을 손가락으로 부리며 가르쳤음을 알게 되었으니 어찌 마음이 편할까.

사실 솔리프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계속 기사 행세를 할 수도 있었지만, 앞으로 요즈 앞에서 제대로 마법을 쓰자면 정체를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아마 이게 보고가 들어가면 라비타스에선 필이 솔리프라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

물론 투란은 이 사실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라비타스 가주와 리다는 투란 일행의 힘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테니까.

바보가 아니고서야 저 멀리 있어서 영향력도 행사하기 힘든 대가문의 비위를 맞추겠다고 준 가주급의 대귀족 둘, 그리고 최소 대가문의 후계자급 귀족 한 명을 적대하겠는가.

심지어 그들이 모두 근거지 없는 떠돌이라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보복 걱정 없이 무슨 일이건 저지를 수 있다면 더더욱.

"내가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말을 안 듣더라고. 이렇게 고집 센 기사는 흔치 않은데."

"그걸 고집이라고 해야 할지······뭐, 그건 됐고. 오느라 너무 피곤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간척한 곳부터 둘러볼까?"

"알겠습니다."

투란과 솔리프가 태연히 대해서일까, 요즈는 조금 평정을 되찾은 듯한 기색을 보였다.

제방을 내려온 솔리프는 땀투성이가 된 채 쉬고 있는 메이사를 보더니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나 없는 동안 둘이서 뭐 했어?"

"몸 만들었지."

"······끝?"

"끝인데."

"젠장, 기껏 기회를 만들어 줘도. 너희는 대체 뭐가 문제냐?"

투덜대는 대화를 멀리서 들은 메이사가 훈련 기구에 마력을 실어 던지자 솔리프는 이크 하고 잽싸게 몸을 피했다.

무거워진 마법기가 나뒹굴자 쾅 하고 땅에 균열이 생겨났다.

* * *

처음 간척지 안쪽을 보며 요즈가 보인 반응은 감탄이었다.

그는 바닥을 연신 쓸어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땅이 이렇게 딱딱하고 물기도 없다니! 이런 간척지는 태어나서 처음 봅니다."

"그런가?"

"예. 본래 갓 간척한 땅은 습하고 무른 탓에 건물을 세워도 쉽게 기울어지거나 무너지곤 하는데, 이곳은 마치 시라프 습지 바깥의 땅 같습니다."

물론 이는 투란이 시간이 날 때마다 땅지기 혈통과 여울 혈통의 능력을 번갈아 써가며 땅을 잘 다져주고 바닥의 물을 뽑아낸 덕분이었다.

당연히 아예 생물이 살 수 없을 정도까지 한 것은 아니고, 딱 일반적인 평야와 비슷한 정도로만 조절했다.

'너무 열심히 했나?'

사서에게 배운 이상적인 습지 간척 요령을 시행한 것이었는데, 요즈의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필요 이상으로 완벽하게 한 것 같았다.

물기를 완전히 빼고 다지는 과정이 없었다면 개척지가 지금의 1.5배는 됐을 텐데.

내심 아쉽긴 했지만, 투란은 이내 기왕 하는 일 완벽하게 하는 쪽이 낫지 않겠느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나중에 이곳에서 사람들이 살게 된다면 좀 더 좋은 땅에서 사는 쪽이 기분 좋을 테니까.

그렇게 간척지의 상태에 감탄했던 것도 잠시, 빠른 걸음으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요즈의 감탄은 이내 경악으로 변했다.

북쪽 끝에서 경계선인 남쪽의 강까지 걸어가는 데만 한 시간이 걸리는 길이로,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모두 간척된 상태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게 대체······."

"왜? 너무 넓어서 신기한가 봐?"

실실 웃는 솔리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에도 요즈의 입은 저러다 턱이 빠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쩍 벌어진 상태였다.

"그, 그 정도가 아닙니다! 분명히 이 일을 맡았을 때는 적어도 수십 년은 걸릴 사업이라고 생각했는데······."

하기야 그들이 여기에 투자한 힘은 어지간한 고위 귀족 군대조차 감히 범접하기 힘들 수준이 아니던가.

경악하는 요즈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투란은 드넓게 펼쳐진 간척지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혹시 무언가 조언해줄 것은?"

"조언······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초보자 세 명이 시도한 거니까, 여러 개척 사업에 참여해본 사람이 보기에는 고쳐야 할 점이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요즈가 늪이나 습지를 간척하는 사업에 여러 차례 관여한 적 있다는 이야기는 떠나기 전 리다에게 들었다.

투란의 물음에 요즈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몇 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우선, 물이 빠져 나가는 길이 필요합니다."

"물이 빠지는 길?"

"예. 곧 우기가 올 텐데, 지금 같은 상황이면 이 안에 물이 고이게 될 겁니다. 자연스럽게 땅이 물을 먹어서 해결될 수준이 아닙니다."

요즈의 조언에 투란 일행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견을 교환했다.

"강으로 흘려보내게 해야 하나?"

"낮은 곳으로 흐르게 해야 하니까 하류 쪽으로 향하게 해야겠는걸."

사서에게 자문했을 당시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한 건 아마 그가 이 지역에 얼마나 비가 많이 오는지를 알지 못해서였을 터였다.

이후로도 요즈는 유용해 보이는 조언을 이것저것 해 주었다.

아예 지금처럼 황폐하게 두는 것보다는 물을 많이 먹는 나무를 심어 가꾸는 쪽이 좋다거나, 땅을 완전히 평평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물이 배수로 쪽으로 빠져나가도록 살짝 경사를 주는 것이 좋다거나.

"이곳에 사람들을 이주시킬 필요도 있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보호하기 귀찮을 것 같은데."

솔리프의 말에 요즈가 고개를 저으며 설명하는데, 어째 그 태도가 기사 필을 가르치던 선생의 모습과 비슷하게 보였다.

아무래도 그 역시 아직 이전의 버릇이 남은 듯했다.

"덥고 습한 탓에 생장이 빨라 이대로 두면 잡초가 무성해질 테고, 그러다 보면 동물들이 꼬이거나 마수가 생겨 제방이 무너질 우려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몇몇 포식자를 제외하면 동물은 사람을 피하는 만큼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살아야 이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먹고 살 방법은?"

"이곳에는 노천 광산이 많으니 이를 채굴해서 식량을 사면 될 겁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는 땅 일부를 농경지로 개간해 자급자족도 할 수 있습니다."

과연 개척 사업에 많이 참여해본 사람이라서 그런지 설명이 줄줄 나오는 것이 꽤나 믿음직스러웠다.

"근데 광산을 마음대로 채굴해 팔아도 되는 건가? 이곳은 엄밀히 따지면 라비타스 가문의 땅이잖아. 우리는 개척단이고."

메이사의 질문에 요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번에 가주님께 그 부분에 관해서도 말씀을 드리고 문서를 작성해 왔습니다. 광산 수익을 간척지 개발에 사용하는 경우로 한정해 재산을 집행할 권리입니다."

그가 내민 문서를 읽어보니 확실히 그런 내용이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유능함에 투란은 이 중년의 기사를 새삼 달리 보았다.

대가문의 가주씩이나 되는 이가 한낱 기사를 심복으로 부리는 이유가 달리 있으려니 싶긴 했다만, 이건 정말로 상상 이상의 수완이 아닌가.

'혹시 나중에 어디 완전히 정착하면 부하로 두고 쓰고 싶을 정도인데.'

물론 이미 라비타스 가주의 직속 부하인 이가 한낱 떠돌이 귀족의 부하로 일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 어려운 일이겠지만 말이다.

이후 동료들과 몇 차례 더 상의한 뒤, 투란은 요즈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했다.

* * *

요즈의 조언에 따름으로서 투란 일행의 간척 사업은 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북쪽 경계에서 간척지로 이어지는 길을 내는 것.

좌우의 폭이 백 미터, 길이가 육십 킬로미터쯤 되는 길이 생겨나는 데는 딱 하루가 걸렸다.

이후 라비타스의 기사인 요즈가 직접 콜로아의 기사들과 교섭, 대대적으로 개척민을 모으기 시작했다.

오지 중의 오지인 남쪽의 마경에 개척지를 꾸린다는 이야기에 처음에는 다들 난색을 보였으나, 온갖 노천 광산이 펼쳐져 있으며 개척민들에게 넓은 농경지도 주어진다는 이야기에 곧 사람이 모였다.

"정말로 내 농장을 얻을 수 있는 건가?"

"그 병자들을 치료하는 신들께서 공언하셨다잖나. 설마 거짓말을 하진 않으시겠지."

"금은보화로 몸을 두를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거기다가 투란 일행이 콜로아 시에서 머무르며 병자들을 치료하여 얻은 명성 역시 이러한 개척민 모집에 도움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채 몇 주가 되지 않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간척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좋아, 여기부터가 내 집이다!"

"여긴 내 구역이야!"

"지랄-"

"무슨 일이냐!"

투란 일행이 미리 근처 습지에서 잔뜩 베어다 놓은 나무를 이용, 집을 지은 개척민들은 개척지 내의 농토를 분배하고 노천 광산을 채굴하며 온갖 분쟁을 일으켰다.

콜로아 시 주변의 여러 마을에서 몰려온 개척민들이 각자 출신지별로 세력화한 탓이다.

다행히 이는 요즈가 직접 콜로아 시에서 데려온 자경단을 지휘해 그럭저럭 수습했다.

그렇게 어찌어찌 자기 구역을 분배받은 개척민들은 지난 몇 달 동안 개척된 곳에서 잡초를 뽑고 밭을 만들며 노천 광산에서 금이며 은, 철과 구리 따위를 캐냈다.

미개척지가 으레 그렇듯 별 노력 없이도 막대한 수확을 올릴 수 있음에 사람들은 행복의 노래를 불렀다.

"아, 슬슬 배고픈데······."

"광장으로 갈까? 오늘 음식은 뭐가 나오려나?"

그리고 이렇게 사람이 모였을 때 생기는 중대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식량에 대한 것.

심지어 이곳 콜로아 지역은 물론, 시라프 습지 자체가 식량 자급력이 떨어지는 곳인 만큼 이는 더 중요한 문제였다.

대량의 광석을 콜로아 시로 보내 식량을 수급하려 한다 해도 시장에 풀린 식량 자체가 많지 않았으니까.

저 위쪽에 자리한 도시 쪽으로도 상단을 보냈지만 그들이 식량을 싣고 오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개척민들은 그렇게까지 심한 식량난에 시달릴 필요가 없었는데, 바로 투란이 이전 칼라마프에서 썼던 것과 같은 방법을 썼기 때문이었다.

"저기 온다!"

"오오······악어도 있어."

"하마다! 하마 고기는 우리 차지야!"

저 멀리서 몰려오는 동물들을 보면서도 개척민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저것들이 모두 어느 강대한 마법사의 지배하에서 얌전히 목숨을 내놓을 것들임을 아는 탓이다.

"제방 안쪽으로 들어가서 기다려라."

얼마 전 수집한 나긴의 지배자 혈통을 활성화한 상태에서, 투란은 소량의 마력을 소모하는 것만으로도 아직 개척되지 않은 습지 안에 숨은 동물들을 대량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심지어 지배당하는 동물의 종류를 조종해 독이 있는 벌레 따위를 제외하는 섬세한 조작마저 가능했다.습지 근처에서 살아온 개척민들은 개구리며 도마뱀 따위를 먹는 데도 익숙했기에 썩 필요한 능력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덕분에 개척민들은 즐겁게 사냥감을 도축하고 조리해 일용할 양식으로 삼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척지 안에는 주거지부터 광산과 식당, 심지어는 술집과 도박장까지 생겨났다.

솔리프는 때때로 가면을 벗어 평민인 척 몰래 이런 곳을 드나들며 제 나름대로 고립된 곳에 갇혀 생긴 피로를 풀고 행복을 찾았다.

"우와······."

그렇듯 하나하나 오락거리가 생겨나는 개척촌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오락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매일매일 넓어지는 북쪽 제방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습지가 개척되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었는데, 투란 일행이 부리는 마법은 개척민들이 보기에 그야말로 신의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손짓 한 번에 나무 수백 그루가 불타고 늪이 증발하는 모습을 달리 어찌 부른단 말인가.

때때로 불타는 숲에서 마수가 튀어나올 때면 투란과 메이사의 전격이 우르릉 내리꽂혀 사람들의 심장을 철석 내려앉게 하곤 했다.

"신이시여······."

그럴 때마다 제방 위에 올라선 개척민들은 엎드려 절하며 무언가를 빌고는 했다.

마치 먼 고대에 프레아 신족을 보는 인간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앙이란 으레 이렇게 단순히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 * *

점점 크고 넓어지는 개척촌을 키워가는 것에 재미를 붙이기를 서너 달.

슬슬 규정했던 지역의 절반 이상이 잠식되었을 때쯤, 투란은 저 하늘에서 날아오는 비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고생했어, 비제."

[배고파! 맛있는 거 줘!]

"악어 고기는 별로였지? 잉어찜으로 할까?"

[응!]

잡담을 나누며 투란은 비제의 목에 걸린 주머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마침 옆에 있던 메이사가 이를 보고 물었다.

"이번에도 아시즈야?"

"응."

한창 남쪽에서 개척에 몰두하면서도 투란은 주기적으로 비제를 베르크 가문으로 보내 소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무도 태우지 않은 비제는 세상의 남쪽 끝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 북쪽 끝에 가까운 다케인 평야를 약 이틀 만에 오갈 수 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다행히 지금까지 받은 답장들은 하나같이 하루하루가 평화롭다는 이야기뿐이었다.

때로 아시즈가 새로 생긴 연극 대본을 몇 개 보내주기도 했기에 이를 읽는 것도 제법 즐거웠는데, 솔리프가 이를 연기할 배우를 모아보겠다고 난리를 치다가 포기하기도 했다.

이곳 개척촌이 제법 번화해졌다지만 배우로서 훈련받거나 관련된 재능을 가진 이가 있을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평소처럼 편지를 느긋이 읽어나가기도 잠시, 어느 한 문구에 도달한 투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음······."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한 번에 이야기해줄게. 솔! 이리 와봐!"

"왜? 쉬는 시간이라서 주사위 굴리러 가야 하는데."

투덜대며 다가온 솔리프에게 앉아보라고 손짓하며, 투란은 자신이 읽은 내용을 동료들에게 알렸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만간 아라비온에서 전쟁을 일으킬 것 같다는 이야기가 있어."

이를 들은 두 사람의 얼굴이 투란과 마찬가지로 굳었다.

102화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전쟁이란 썩 낯설지 않은 일이었다.

여러 마법사 가문들은 온갖 풍요를 누리면서도 언제나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했으며, 이를 위한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 전쟁이었으니.

하지만 대가문이 직접 주도하는 전쟁이란 이야기가 달랐다.

본래 가진 게 많은 이들일수록 얻을 것보다는 잃을 것을 두려워하는 법 아니던가.

얼마 전 있었던 아라비온과 자하르의 전쟁만 해도 무려 삼백 년 만에 일어난 대가문끼리의 전쟁이었을 정도.

그런데 고작 이십여 년, 채 후유증이 가시지도 않았을 지금 또 전쟁이라니?

"설마 자하르랑?"

"보나 마나 이번에도 짜고 치는 거겠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바로 아라비온이 자하르와 가짜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투란은 편지의 아랫부분을 가리키며 그들의 짐작을 부정했다.

"아니, 목표는 카마인이라고 하더라."

"······갑자기?"

아라비온의 동쪽, 물과 서리를 다루는 북해의 지배자.

얼마 전 투란 일행이 북해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마주쳤던 비센의 가문이 바로 이번 전쟁의 목표였다.

"갑자기라고까지 할 건 없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알잖아? 둘의 사이가 사실은 별로 안 좋다는 걸."

"카마인 가문을 지배하는 신이 아라비온이나 자하르 쪽과 관계가 나쁘다고 했지. 그쪽에서는 인어들의 힘을 빌려서 대적하고 있었고······."

"아, 인어!"

메이사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맞아. 우리가 인어들에게 큰바다뱀을 선물했으니까. 그래도 어지간하면 다음 세대쯤은 되어야 결과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른걸."

짐작건대 지난 몇 달 동안 인어들이 큰바다뱀의 시체를 어떤 식으로든 사용해서 카마인 가문의 통제에서 벗어난 것이 분명했다.

힘의 균형이 깨졌음을 알아챈 아라비온이 본격적으로 카마인을 건드리는 것이고.

아마 이토록 그 사실을 빠르게 알아낸 것은 미리 내부에 첩자라도 심어둔 덕이 아닐까.

그들이 한 일이 두 대가문의 전쟁을 촉발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에 솔리프와 메이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시즈의 편지에 의하면 최근 카마인 쪽과 혼인한 아라비온 귀족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면서 분쟁이 시작된 모양이야."

"전쟁 명분으로는 조금 약한데."

"뭐, 결국에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겠지. 물론 지금 아라비온 쪽은 가문에 대한 통제력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지만······."

상식적으로 얼마 전 피를 튀겨가며 싸운 자하르가 버티고 있는 와중에 적대 가문 하나를 더 늘리는 건 미친 짓이지만, 뒤쪽에서 적당히 손을 잡고 있다면 그리 위험한 일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몰래 자하르 귀족들의 도움을 받을지도 모를 일.

"이참에 아예 카마인 가문을 지워 버릴 셈인 걸까?"

"그럴 수도 있지. 신들끼리 적대하고 있다면 이전처럼 가짜 전쟁은 아닐 가능성이 크니까."

어쩌면 신들끼리 진심으로 격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전에 만난 이미르 같은 잔챙이가 아닌, 아라비온 가주와 카마인 가주의 결투라거나.

"어쨌든,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어."

"끼어들려고?"

"일단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자세히 알아보고 싶으니까."

투란은 말을 꺼내며 메이사와 솔리프를 바라보았다.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게 변했다지만 아무래도 아라비온 본가 사람들에게 메이사를 드러내 보이기는 껄끄러웠다.

마찬가지로 솔리프 역시 이미 아라비온 쪽 사람들에게 얼굴이 많이 팔린 상태였다.

그렇다고 변장 가면을 쓰면 그때는 투란이 얼굴을 감추지 못하게 될 터.

"이번에는 내가 혼자서 살펴보고 올게. 두 사람은 여기서 계속 개척 사업을 진행해줘."

"위험하잖아!"

"맞아. 아무리 강해졌다지만 아직 진짜 신들에게 걸렸다가는 죽을 거라고."

둘의 반발에 투란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으며 합당한 이유를 꺼냈다.

"어쩔 수 없어. 변장용 도구는 한 개뿐이고 이쪽의 일도 마냥 방치할 수는 없으니까."

이곳 남부를 개척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라비타스 가주의 치유 마법을 빌린 대가.

급한 일이 있다고 내던지는 것은 그들과의 신용을 내던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투란 일행과 같은 막강한 귀족들을 빠르고 온전하게 치료할 치유사가 거의 존재하지 않음을 생각하면 이를 중단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몇 차례의 말다툼과 설득 끝에, 결국 두 사람 모두 투란이 혼자서 두 가문의 분쟁을 정탐하는 것에 동의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로 조심해야 돼. 위험할 것 같으면 차라리 도망치라고. 알았지?"

"알았어. 나도 내 목숨이 소중하니 걱정하지 마."

솔리프의 걱정에 손사래를 치며 투란은 슬쩍 메이사의 눈치를 보았다.

뜻밖에도 그녀는 걱정 가득한 표정인 솔리프와 달리 제법 초연한 태도였다.

"괜찮아, 원하면 무모한 짓을 해도 돼. 네가 죽으면 널 죽인 게 누구건 복수하러 갈 테니까."

"아, 그런 식이구만······."

괜히 강한 놈의 눈에 띄어 죽었다가는 자기도 따라 죽을 테니 그런 짓 하지 말라는 협박.

농담이라고 웃어넘기기에는 표정이 너무 진심이었던지라 투란은 위험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다짐해야 했다.

이후 그는 개척지 운영을 전담하고 있는 라비타스의 기사 요즈를 찾아가 몇 달 정도 개척지를 비울 것을 통보했다.

지금 투란은 엄연히 치료의 대가로 노동 중이며 요즈는 그 감시자였으니까.

"알겠습니다. 개척이 조금 늦어지겠군요."

요즈는 몇 달 정도 자리를 비우겠다는 말에 그렇게 무덤덤한 태도로 대꾸할 뿐이었다.

하기야 아예 진척이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미 절반 넘게 일을 진행한 상태에서 갑자기 도망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웃기는 일이기는 했다.

심지어 다 떠나는 것도 아니고 친구 두 명은 계속 일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보다 요즈가 신경 쓰는 것은 투란의 옆에 서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낯선 사람 한 명이었다.

"저, 옆에 계신 분은 설마······?"

"아, 이쪽은 솔이라는 친구인데 당분간 필을 대신해서 개척 일을 맡아줄 거다. 인사하지."

"안녕."

가면을 벗고 본래 모습을 드러낸 솔리프가 더없이 뻔뻔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아니, 아무리 봐도 그 바라하의 후계자이신-"

두 사람의 표정을 본 요즈는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재빨리 안으로 삼켰다.

그 역시 라비타스의 중요 실무자 중 한 명인 만큼 솔리프의 초상화를 본 적 있는 모양이었다.

"그냥 지나가다가 만난 것으로 치자고.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알잖아?"

"아, 알겠습니다."

어차피 솔리프가 이곳에서 가면을 벗는다고 그 소문이 널리 퍼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곳은 라비타스의 영역 내에서 가장 남쪽인 콜로아 지방, 그중에서도 더 남쪽의 변두리였으니까.

그런데도 굳이 가면을 쓰고 있던 것은 그냥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인데, 그보다는 투란이 가면을 쓰는 쪽이 훨씬 유용했다.

그렇게 약 일주일 정도 주변 정리에 시간을 보낸 투란은 떠나기 직전 메이사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녀는 편지를 받은 이후 개척 사업까지 멈춘 채 마법기 제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가야 할 것 같은데, 일은 잘 되어가?"

"마침 딱 끝났어. 여기."

그녀가 건넨 물건을 받으며 투란은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손잡이와 테두리를 은으로 도금한 작은 손거울.

만듦새 자체는 썩 대단치 않았으나 그 안에는 놀랍도록 강력한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심지어 투란이 가진 수호자 마법기와 비견될 정도였다.

"내가 가진 손거울과 한 쌍이 되는 물건이야. 둘이 동시에 마력을 불어넣어야만 소통할 수 있어."

"거리는?"

"멀어질수록 마력 소모가 심해질 거야. 여기서 아라비온이나 카마인 가문의 영역 정도면 우리들의 힘으로도 오랜 시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해."

"그런가, 확실히 통신 계열 마법기는 효율이 낮은걸."

지금까지 부여사 혈통의 대귀족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메이사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최고 수준의 부여사일 터.

비록 일주일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을 투자해 만든 물건이라지만 그런 부여사의 물건이 이 정도 효율인 것은 문제가 있었다.

이래서야 평범한 귀족들이라면 수백 킬로미터 이상 멀어지는 순간 소통이 불가능해지는 수준 아닌가.

확실히, 여러 마법사 가문들이 이러한 종류의 마법기를 잘 만들지 않은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마 내가 부여 마법이 익숙하지 않아서이기도 할 거야. 나중에 좀 더 제대로 된 걸 만들면 비제를 통해서 보내줄게."

"너무 무리하지는 마."

투란이 없어서 속도가 느려지겠지만 개척 사업도 진행해야 하는데 너무 이쪽에 시간을 뺏기면 곤란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가 슬슬 떠날 때가 되었을 무렵, 메이사가 갑자기 투란을 끌어안았다.

딱딱한 뼈만이 느껴졌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먼 옛날 어머니에게 안겼던 때처럼 포근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메이사."

"죽지 마."

투란은 대답하는 대신 그녀를 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 * *

모든 준비를 마친 뒤, 투란은 오랜만에 비제의 다리를 직접 손으로 잡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네를 묶어서 타는 건 편하기는 하지만 이 검독수리의 속도를 온전히 끌어낼 수 없는 방식이었다.

오랜만에 투란과 둘이서만 비행한다는 것에 기뻐하며, 비제는 막대한 양의 바람을 등 뒤로 불어내어 북쪽으로 날았다.

지상을 내려다보던 투란은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에 감탄을 터트렸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진짜 빨라졌구나, 너."

처음 비제를 탔을 때도 그 속도에 감탄했건만 지금은 그 당시와 비교했을 때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빨랐다.

하기야 그때는 귀족으로 치면 고작해야 중하급에서 중급 수준의 마수이지 않았던가.

칠십 킬로그램이 조금 넘는 투란의 체중이 버거워서 속도가 느려지고 쉽게 지칠 정도.

그에 비해 최상위 귀족급의 마력을 지닌 지금, 비제가 날갯짓을 한 번 할 때마다 주변의 구름이 갈라지며 저 멀리 떨어진 지상에마저 여파가 닿았다.

아마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날았다면 비행만으로도 사람이 날아갈 만한 바람이 불지 않았을까.

투란의 칭찬이 기뻤는지 비제가 더 맹렬히 날갯짓했다.

그렇게 비행하다가 인적 없는 곳에 착륙해 쉬어가기를 이틀.

투란은 거의 칠천 킬로미터에 가까운 거리를 날아 다케인 평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로 고생 많았어, 비제."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 혼자 오면 더 빠른걸? 그렇다고 투란이 무거워서 그런 건 아니고······.]

제 능력을 뽐내던 비제는 자신의 글이 친구를 짐짝처럼 취급하는 것임을 깨닫고 다급히 발톱으로 흙바닥을 긁어냈다.

투란은 그 모습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깃털 달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직접 날아왔으면 쉬지 않고도 열흘은 걸렸을걸. 덕분에 시간을 많이 절약했어. 고마워."

[앞으로도 계속 투란이랑 다닐래!]

"고맙지만 지금은 메이사랑 솔리프를 도와줘. 이번 일은 나 혼자 해야 하니까."

아무래도 비제를 데리고는 제대로 변장해서 움직이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검독수리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은 눈에 띌 수밖에 없으니까.

혹시라도 비제가 꼭 필요해질 때는 메이사와 연락해 이곳으로 오도록 해야 할 터였다.

"그러면 조심히 돌아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지?"

[투란보다 내가 더 잘 알아!]

꽤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화가 났는지, 비제는 삐죽한 말투로 글을 쓴 뒤 그대로 날아올랐다.

친구를 배웅한 투란은 바로 근처에 보이는 도시, 자빌린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가면을 사용해 평범한 외모의 청년으로 변장한 채였다.

"고생 많으십니다."

"어? 어어, 그래. 반갑네. 젊은이."

지나다니는 경찰들에게 넉살 좋게 인사까지 하며 도시로 들어선 투란은 감각을 확장하여 근처에 마법사가 얼마나 있는지를 확인했다.

'저쪽도 베르크의 기사인가······이쪽을 감시하는 인력은 별도로 동원하지 않은 모양이네.'

과거 메이사를 빼낸 사건 때문에 어느 정도 첩자를 심어놨을 것으로 생각했건만, 의외로 그렇게까지 정성을 들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사건 직후에는 첩자를 심어 놓았었는데 몇 달 동안 소식이 없는 것을 보고 그만두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뭐, 혹시 아시즈한테 보낸 편지를 훔쳐봤다고 해도······거기에 의미 있는 이야기는 안 써놨으니까.'

투란은 편지를 보낼 때 의도적으로 메이사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 않았다.

마치 솔리프와 둘이서만 여행하는 것처럼.

거기다 그들의 위치를 짐작할 만한 단서도 적지 않았던 만큼, 누군가 이를 보았다 해도 유의미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한참 도시를 돌며 정탐한 투란은 은신 마법을 쓴 채 베르크 가문의 저택으로 당당히 들어섰다.

대낮에다가 빛을 내는 마법기가 주변에 여럿 켜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신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오래는 못 버티지만 말이지.'

마력이 급속도로 감소하는 것을 느끼며 투란은 잰걸음으로 저택 안을 누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시즈의 방에 도착하여 문을 닫고 은신을 풀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우."

이런 식의 잠입은 그가 방대한 마력을 지녔음은 물론, 이 저택에서 몇 달을 머무르며 구조를 숙지했기에 가능했다.

평범한 자하르 귀족이었다면 진작에 마력이 고갈되었을 터.

투란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성유물의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베르크 가문의 가주 부부부터 아시즈의 형인 멜로, 투란의 스승인 하람까지 여러 귀족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시즈는 어디서 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마법 훈련이라도 하는지 정원에서 마법을 쓰고 있었다.

'저택 안에도 이상한 사람은 없는 것 같네······좋아, 그러면 좀 쉬어볼까.'

투란은 침대에 누워 이틀 간의 여행으로 쌓인 피로를 풀며 방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시즈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약 두 시간 뒤였다.

"너, 너는······!? 잠깐, 투란?"

"오랜만이야, 아시즈.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

뜬금없이 방을 차지하고 있는 갈색 머리 청년의 존재에 놀라기도 잠시, 아시즈는 옷을 보고 투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가 직접 만들어 준 것이니 몰라볼 수가 없었다.

"설마 내가 보낸 편지 때문에 온 거야?"

"응. 덤으로 이곳에 뭔가 수작질은 없었는지도 좀 확인하고 싶었거든."

저택 안에 간첩은 없는 것 같다고 확인해주니 아시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좀 경계하긴 했어. 누군가 친한 사람의 얼굴을 몰래 쓰고 내게 다가오지 않을까 하고."

"일반적으로는 거의 없는 능력이지 않나?"

"그렇긴 한데 네가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물론 투란이 가진 가면이 아마도 흉내쟁이 혈통의 힘을 빌려 만들어진 마법기, 혹은 성유물임을 생각하면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짐작건대 흉내쟁이 신은 자기 혈통을 물려줄 후손을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니까.

그래도 혹시 모를 위험을 경계하는 태도는 나쁘지 않았다.

투란 역시 저들이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는지를 다 알지는 못하니 말이다.

"그보다 좀 자세히 말해 봐. 편지에는 너무 간략하게만 쓰여 있던데. 정확히 전쟁이 언제 일어나는 거야?"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지. 아마 어머니도 모르실걸. 다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아. 본가 쪽에서 한기 내성을 부여하는 마법기를 대량으로 의뢰한 것을 보면······."

과연, 이는 누가 봐도 물과 냉기를 다루는 카마인을 겨냥한 것이 분명했다.

이후 투란은 아시즈와의 심도 있는 대화를 통해 아라비온 가문의 근황을 여럿 알게 되었다.

본가와 가신 가문들의 분위기가 어떻게 변했다거나, 이번 전쟁의 명분을 쌓고자 카마인을 악마화한 연극을 뿌리기까지 하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들을.

"그 정도란 말이지······."

"설마 또 본가 쪽으로 잠입할 건 아니지?"

"이번엔 안 해. 너무 위험하니까."

이전에 투란이 아라비온 본가를 헤집고 다닌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침입자의 존재를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하르의 은신 능력은 몰라도 정체불명의 변장 실력을 갖춘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 차례 잠입을 시도하는 건 만용에 불과했다.

심지어 솔리프와 메이사가 함께한다 해도 아라비온 가주와 맞설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상황인데 지금은 혼자이지 않은가.

"그보다는 상대 쪽에 잠입해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네. 혹시 관련 자료 같은 거 구해줄 수 있을까? 아무래도 인접한 가문인 만큼 도서관을 뒤지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상대 쪽이라니? 설마?"

아시즈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을 보며 투란은 씩 웃었다.

"맞아. 이번에는 카마인 쪽을 좀 들여다보려고."

103화

베르크 가문에 방문하고 약 이틀.

투란은 아시즈의 방에서 머무르며 그가 가져다주는 책을 통해 카마인 가문에 대한 여러 정보를 수집했다.

그들의 가문이 성립하면서부터 내려온 온갖 역사며 휘하에 속한 가신에 대한 정보 등 알아야 할 것은 많았다.

물론 오렘의 도서관에는 카마인 가문에 대한 지식도 여럿 있었으나 그곳의 정보는 죄다 구식인 게 문제였다.

"빨리빨리 좀 넘겨 봐라. 젊은 놈이 뭐 이렇게 글 읽는 속도가 느린 게냐?"

"어르신이 너무 빠르신 겁니다. 전 이제 다 읽었는걸요."

투란은 투덜대는 사서의 말에 대꾸하며 책을 한 장 넘겼다.

본래 도서관의 정령이던 그는 이렇게 한 번 읽은 책의 내용은 절대 잊지 않는 능력이 있었기에, 만약 투란이 나중에 무언가를 잊어버린다 해도 물어보면 알려줄 수 있었다.

"정령이라니, 나는 못 보는 게 아쉽네······."

"흥, 누굴 구경거리로 아는 겐지."

물론 아시즈가 옆에서 보기에는 투란이 그냥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낮 동안에는 열심히 정보를 수집하고, 자정이 될 무렵에는 손거울에 마력을 불어넣어 메이사와 교신을 시도했다.

미리 이 시간마다 교신을 시도하기로 약속했던 만큼, 얼마 지나지 않아 저쪽에서도 마력이 주입되며 일그러짐이 일어났다.

[아, 됐다! 투란, 잘 보여?]

"응. 이 정도 거리에서도 생각했던 것보다 깔끔하게 작동하네. 마력 소모도 그럭저럭 견딜만하고."

거울 너머의 메이사는 자신이 만든 마법기가 제대로 작동했다는 사실에 감격한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옆에서 그녀를 밀치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도 한번 보자, 오······진짜 지금 다케인 평야에 가 있는 거냐? 신기한데.]

솔리프가 슬쩍 끼어들어 얼굴을 비추자 메이사가 뒤에서 살며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비키라는 듯 등을 팡 두드렸다.

"부담스러운 얼굴 좀 치워."

[부담스럽다니, 이 미남의 얼굴에 그런 심한 말을.]

솔리프와 가볍게 잡담을 나눈 뒤에는 여전히 토라진 비제를 거울 너머로 달래주느라 잠시 시간을 써야 했다.

어쨌든 녀석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된 뒤, 투란은 아시즈에게도 메이사와 얼굴을 마주할 기회를 주었다.

"메, 메이사?"

[오랜만에 보네, 아시즈.]

"진짜로 너야? 머리색이랑 눈은 같긴 한데······."

깡마른 해골 같던 시절만을 기억하던 아시즈는 메이사의 변한 모습에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쩍 벌렸다.

본래의 그녀를 알던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대체 누구시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참 동안 신기하다는 듯 메이사의 얼굴을 보던 아시즈가 나지막이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모랑은 안 닮았네."

[그래 보여?]

"응. 오히려 내 어머니랑 좀 더 닮은 것 같기도······어쨌든, 그 바보 같은 금식을 그만 둔 건 진짜 다행이야. 정작 내가 말할 땐 들은 척도 않더니."

[아하하······.]

아직 음식을 먹지 않던 것이 비행 마법을 위해서라고 믿는 아시즈의 말에 메이사는 떨떠름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혹시 누군가에게 예뻐 보이고 싶어서 그만둔 건 아니지?"

[그, 그런 거 아니야.]

신이 나서 놀리던 아시즈는 메이사의 푸른 눈이 정신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더니 슬쩍 투란을 훑어보고는 거울을 톡 두드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이게 네가 만든 마법기라며?"

[맞아. 몰랐는데 나한테 이쪽 재능도 있더라고. 혹시 조언 좀 해줄 수 있을까?]

"내 실력으로 도움이 될진 모르겠다만······어디가 문제였는데?"

아직 미숙하긴 하지만 제대로 교육받은 부여사인 아시즈는 메이사에게 꽤 유용한 요령을 여럿 전수해줄 수 있었다.

이십여 분 뒤, 마력이 다 떨어져 연결이 끊기자 아시즈는 투란을 향해 감격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메이사가 완전히 건강해졌어! 거기다 표정도 옛날보다 훨씬 좋아 보이고······잘 지내는 거 같아서 다행이야."

감동의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보며 투란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친구가 마음이 여리고 눈물이 헤픈 사람이라는 것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던 바였다.

"사람이 사는 데는 먹는 즐거움도 중요한 법이니까."

"그렇지. 아······진짜 좋다. 이렇게 얼굴 보니까 그간 쌓인 걱정이 다 날아가는 기분인걸."

해맑게 웃는 아시즈의 표정을 보며, 투란 역시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 * *

극적인 가족 상봉까지 마친 다음 날.

슬슬 필요한 정보를 모두 수집한 투란은 베르크 가문을 떠났다.

대용량 주머니에는 아시즈가 따로 구매한 책 이십여 권을 더 넣어둔 채였다.

'심심할 테니 이거라도 읽으면 좋잖아.'

아시즈는 그렇게 덤덤히 말하며 넘겨주었으나, 그가 넘겨준 책들은 그처럼 가벼이 취급할 물건이 아니었다.

이곳 다케인 평야가 물산이 풍부해서 사치품을 구하기 쉬운 곳이라지만 이처럼 두껍고 안쪽이 깔끔하게 잘 필사된 책은 싸지 않았으니까.

아마 이를 구하고자 몇 달 분량의 용돈을 털었을 게 분명했다.

이에 투란은 책의 대가로 아시즈의 침대 위에다가 제대로 주조되지 않은 금과 은 덩어리들을 한가득 쏟아놓고 저택에서 나왔다.

보나 마나 직접 주려고 하면 안 받겠다고 우길 테니 이렇게 하는 게 나았다.

자빌린 시를 떠난 투란은 또 다른 여행자의 얼굴로 모습을 바꾸어 느긋이 평야를 걸었다.

슬슬 시원해져 가는 바람, 노랗게 영글어 넘실거리는 밀밭이 가을의 도래를 알렸다.

'개척지도 이 정도로 풍요로워지면 좋을 텐데······흙 성분이 중요한가? 조금 가져가서 나중에 이렇게 바꿀 수 있는지 알아보면 좋겠는걸.'

투란은 북동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바닥의 흙을 한 줌 집어 들어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아라비온 귀족들이 매년 추수 후 경작지에 벼락을 뿌려대는 것이야 비밀이랄 것도 없는 일.

그 원리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들의 간척지에도 비슷한 일을 하면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매년 벼락을 내려줄 아라비온 귀족이 없다면 지속하기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도시 주변을 걸어서 이동하던 투란은 적당히 인적 없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은신 마법을 쓰고 날아올랐다.

이러면 혹시라도 돌아다니는 아라비온 귀족과 만나도 걱정 없을 터였다.

카마인 가문이 있는 동쪽으로 날아가기를 며칠.

적당히 마력을 보존해 가며 날아가던 투란이 도달한 곳은 바로 과거 그들이 비센과 싸운 화전민촌이었다.

해 질 무렵, 느긋이 마을로 들어서는 그를 보며 주민 한 명이 사냥용 창을 겨누었다.

"웬 놈이냐!"

"지나가는 여행자인데 길을 잃어서 말입니다······혹시 하루만 머무를 수 없을까요?"

"우리 마을에는 손님이 머물 집이 없다. 저기 산 아래로 내려가면 더 큰 마을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도록 해!"

"이미 해가 다 졌는데 어떻게 내려갑니까?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고 하루만 묵게 해 주시죠. 집 밖에서 노숙해도 괜찮습니다."

"······쯧, 조용히 머무르다 가도록 해.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비센이 저지른 참극의 여파 탓일까, 화전민촌의 주민들은 외지인을 잔뜩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투란은 하룻밤을 머무르며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들과 간단한 잡담을 몇 마디 나누어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 마을 사람들을 태워 죽이는 귀족이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 마을은 괜찮습니까?"

"못 봤다. 그런 게 있었다면 우리가 살아 있을 수도 없었겠지."

마을 상태도 멀쩡한 것으로 보건대 아직은 비센의 죽음이 잘 은폐된 모양이었다.

자신의 흔적을 확인한 투란은 날이 밝자마자 곧장 화전민촌을 떠나 카마인의 수도, 아바챠로 움직였다.

늘 바다를 향해 대충 동쪽으로 움직였던 전과 달리, 이번에는 옛 제국의 큰 도로를 걸으며 평민들 사이에 섞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들었다.

"얼마 전 바다 쪽에서 마수들이 떼로 뛰쳐나왔다고 하더구먼."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그렇다니까. 높으신 분들이 얼른 막기는 했지만 피해가 적지 않다는 모양이야. 당분간 해안 쪽은 함부로 가지 말게나. 나도 한 놈 봤는데, 정말 끔찍했지. 마을을 휩쓸던 그 커다란 괴물이······."

어느 공터에서 모닥불을 함께 쓰며 잡담하던 늙은 행상인은 투란에게 조언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해양 마수들이 지상을 습격한 이유가 무엇일까?

큰바다뱀 사령의 난동으로 인한 영향이라기에는 시간 차이가 있는 만큼, 그보다는 인어들이 큰바다뱀의 시체를 이용하며 생긴 부작용일 가능성이 더 컸다.

'아니면 인어들이 작정하고 마수들을 해안으로 몰아갔을 수도 있고······.'

투란은 부디 인어들이 그러지는 않았기를 바랐다.

그래도 함께 강대한 적에 맞서 싸운 동료들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되는 건 싫었으니까.

도로를 따라 걸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워듣기를 사흘.

마침내 카마인의 수도, 아바챠에 두 번째로 들어선 투란은 도시의 분위기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주변을 돌아다니는 선원이며 노동자들은 죄다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물건을 파느라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상인들의 목소리에는 흥겨움이 아닌 악이 담겨 있었다.

과거 느꼈던 활기와 생명력은 찾아보기조차 힘들 정도.

투란은 도시 내부를 적당히 돌다가 곧장 카마인 가문의 구성원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도 상당히 경계가 철저한걸······하긴, 자하르도 잠재적인 적일 테니 당연한 일인가.'

빛의 성채를 구성하고 검문소까지 운영하던 아라비온만큼은 아니지만, 카마인 본가의 귀족들 역시 높은 담장으로 본거지를 봉쇄하고 그 안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라비타스 같은 곳은 주요 구성원들이 아예 본가 밖에서 살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것만 해도 엄청난 경계 태세였다.

하지만 하늘까지 철저히 막던 아라비온과 달리 위쪽이 뚫려 있었기에, 투란은 은신과 비행 주문을 함께 사용해 높은 곳에서 강하하는 것으로 어렵지 않게 진입할 수 있었다.

'앞으로 아라비온과 전쟁할 거면 하늘을 더 신경 쓰는 게 좋을 텐데 말이지.'

물론 어지간해선 날아오는 아라비온 귀족의 모습이 다 보일 테니 그런 것이겠지만 말이다.

내부로 들어온 투란은 곧장 감각을 끌어올려 과거 아라비온 본가에서 그랬듯 강력한 마력을 가진 귀족들의 저택에 잠입했다.

제각기 다양한 방법으로 서재를 봉쇄하고는 있었으나, 이미 여러 번 털어본 적 있는 투란은 능숙하게 그들의 방어 체계를 파훼해 가며 서재를 뒤졌다.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은, 그렇게 샅샅이 뒤져 본 결과물이 생각보다 신통치 않다는 것이었다.

'여기도 아닌가······.'

세 번째 저택을 나오며 투란은 아쉬움에 혀를 찼다.

고위 귀족 세 명의 서재를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유용한 정보 같은 것을 얻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과거 아라비온 본가에서 터트렸던, 여느 대가문에나 흔히 있을 비리들 따위만 가득할 뿐.

투란은 고작 이런 걸 알아보고자 온 게 아니었다.

카마인과 인어들의 유착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관계가 현재도 유지되고 있는지나 깨졌다면 어떻게 깨졌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목표였으니.

아무래도 아라비온 귀족들이 그랬듯 이들 역시 신들과 관련된 비밀은 자택에 보관하지 않는 듯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카마인 귀족들의 거처에서 나온 투란은 근처의 시설 좋은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과거 아라비온 본가에 잠입했을 때와 달리 비교적 출입이 자유로운 것이 다행이었다.

매일매일 저택 구석진 곳에서 쪽잠을 자는 건 생각보다 더 피곤한 일이었으니까.

'아예 내부인으로 위장하고 좀 더 비밀스러운 곳을 뒤져볼까······.'

다음날 낮, 한참 생각에 잠긴 채 아바챠 시내를 돌아다니던 투란의 귀에 어느 노점상의 외침이 들려왔다.

우울하거나 악에 받친 다른 이들과 달리 제법 쾌활한 목소리였다.

"꼬치구이 사세요-! 갓 구운 꼬치구이!"

서른 살 정도 되었을 수염투성이 사내가 목청 좋게 외치며 지글거리는 불판 앞에서 바삐 손을 놀렸다.

솜씨가 꽤 좋은지 손님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를 물끄러미 보던 투란은 이내 그 앞에 줄을 서서 꼬치구이 하나를 샀다.

"거스름돈은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손님! 맛있게 드십시오!"

제법 맛있는 돼지고기 꼬치를 먹으며 투란은 열심히 장사 중인 노점상의 내면에 의식을 집중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부릅뜨고 있는 눈동자.

자하르의 상징을 가진 기사가 이런 곳에서 꼬치를 팔고 있다니, 누가 봐도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자하르에서 보낸 간첩······기사인 걸 보면 레토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건가. 붙잡아서 캐내 볼까? 아니면 뒤를 밟아?'

잠시 고민하던 투란은 두 번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고통으로 사람의 입을 여는 것에는 제법 자신이 있지만 세상에는 그러한 방법이 통하지 않는 이도 있을 테니까.

'어쩌면 이쪽을 찾아보는 게 의외로 괜찮은 정보가 나올지도 모르지.'

직접 카마인 본가를 들쑤시는 것은 무분별하게 늘어진 정보 중 필요한 것을 수집해야 하는 일이지만, 첩자의 정보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건 누군가가 수집하고 선별한 결과물만 얻어내는 것이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유용할지는 뻔했다.

그날 저녁, 노점상이 장사를 접고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던 투란은 은신 마법을 쓴 채 느긋이 뒤따라 움직였다.

당연히 노점상은 누군가 자신의 뒤를 그대로 따라오고 있다고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아바챠 외곽의 낡은 집으로 투란을 안내해 주었다.

"어으······."

집에 들어온 간첩은 기지개를 켜며 힘든 시늉을 했다.

기사쯤 되는 이에게 꼬치 장사 따위는 저럴 만한 일이 아닐 텐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조차 저런 연기를 할 정도로 훈련받은 것일까?

장사 물건을 정리하고 몸을 씻은 뒤 침대에 드러누운 간첩이 코를 골자, 투란은 그제야 낡은 집 이곳저곳을 뒤져 보았다.

거의 삼십 분 가까이 뒤진 뒤에야 간첩이 누운 침대 밑 판자에 수집한 자료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굳이 암호까지 쓸 필요는 없다고 느꼈을까, 간첩이 정리한 자료는 투란 역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게 정리된 상태였다.

'카마인 가문 구성원들의 위치, 이동 경로, 대화 내용······정말 많이도 조사하고 있네.'

아마 이는 내부의 협력자, 혹은 부하를 통해 얻어낸 정보일 터였다.

설마 여기서 꼬치를 구우며 이런 정보를 모을 수 있을 리는 없을 테니.

이 노점상은 부하들이 보낸 정보를 취합하는 중간 간부쯤 되는 것이 아닐까.

어지간해선 꼬치구이 노점상 따위가 의심받을 일 없으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썩 나쁘지 않은 전략이었다.

설마 다른 마법사들의 마력을 감지하는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기사급 마력을 가진 노점상의 존재를 알아차릴 거라고는 짐작도 못했을 테니.

간첩들이 적어둔 가문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읽던 도중, 투란은 비센에 대한 내용을 보았다.

'평소 친하던 가신 가문의 구성원 몇 명을 데리고 나간 뒤 연락 두절 상태······가족들은 가문의 영역 밖에서 순례 중이라고 추정 중.'

아무래도 카마인 가문은 비센의 죽음은커녕 그 일행의 죽음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인적 없는 곳에서 죽이고 묻은 것이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찾기 어려운 게 당연한 일이지만······.

혀를 차며 계속해서 간첩의 자료를 열람하던 도중, 투란은 밑줄이 쳐진 부분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아홉 달의 두 번째 날, 가문의 중역들이 모이는 비밀회의가 예정되어 있음. 가능하면 잠입해서 내용을 수집할 것.'

일주일 뒤에 예정된 비밀회의, 그것도 고위층만이 참여하는.

여기에 몰래 들어갈 수만 있으면 무언가 유의미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104화

새벽녘, 투란은 간첩들이 모아둔 자료들을 모두 확인한 뒤 다시 잘 정리해 넣어놓고 집에서 나왔다.

소리 없이 문을 닫은 뒤, 그는 대용량 주머니에서 나무로 된 길쭉한 함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남부에서 한창 간척지 사업을 하던 도중 이주민 몇 명에게 지시해 만든 물건이었다.

여러 사람의 모발을 각각 분리해서 보관할 수 있는 보관함.

그 안에는 두 동료의 머리카락부터 시작해서 비제의 깃털, 솔리프의 아버지인 고디스의 머리카락 등이 있었으며 이번에 얻은 자하르 기사의 머리카락 역시 수집품 중 하나가 되었다.

만약 그를 다시 찾을 일이 있다면 이것을 사용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여관에서 정오 무렵까지 푹 자며 밤샘으로 인한 피로를 보충한 뒤, 투란은 맛 좋은 점심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다시 카마인 귀족들의 거주지에 들어섰다.

늦은 밤에 방문했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대낮인 만큼 모두가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어디 보자, 저쪽에 기사 숙소가 있으면······다음 길목까지 가야 하나.'

아시즈에게서 얻은 기초 지식, 그리고 자하르 간첩의 정보를 합쳐본 결과 카마인에는 딱히 파벌이랄 게 없었다.

라비타스와 마찬가지로 가주가 이제 백오십 살 정도로 아직 젊어서 후계자 문제도 없었고.

굳이 나누자면 가주를 비롯한 상위권 귀족들과 그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기대받는 어린 귀족들, 그리고 중상위권 이하의 귀족들 정도로 나눌 수 있었다.

고위층의 비밀회의란 당연히 그중 전자에 속하는 주류 파벌의 귀족들만이 참여할 터.

투란의 목표는 참석자 한 명을 몰래 대체하는 것으로, 이미 누구를 대체할지도 정해둔 상태였다.

'찾았다, 오닐 카마인.'

투란이 도착한 저택의 주인, 오닐은 현 카마인 가주의 동생이자 최상위 귀족인 제멜 카마인의 아들로 그 역시 높은 잠재력을 지닌 젊은 귀족이었다.

이 정도 신분이면 그 '비밀회의'에 참석할 가능성이 컸다.

주변을 빙 돌아 열린 창문 하나로 들어선 순간, 새된 소음이 투란을 반기듯 저택 안을 울렸다.

아마 유리잔 비슷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 같았다.

"꺼져, 새끼들아! 이딴 걸 요리라고······."

"시, 실례하겠습니다!"

"마니, 마니? 정신 차려!"

"쉿, 조심히 데리고 나가······."

소리를 따라 걸어가자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기절한 하인 한 명, 그리고 그를 데리고 방에서 나서는 하인 두 명이 보였다.

뒤쪽에서는 젊은 귀족 한 명이 씩씩거리며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상위권의 하위쯤 되는 마력이 느껴졌다.

그가 바로 이 저택의 주인이자 이번에 투란이 목표로 삼은 카마인 귀족, 오닐일 터였다.

'유리잔을 던져서 머리를 깬 건가? 벌써 성격 나오는구만.'

무엇 때문에 그리 화가 났는지, 오닐은 식탁에 화려한 정찬이 차려져 있음에도 씩씩거리며 식당을 나가 버렸다.

덕분에 맛 좋은 해산물 요리로 이루어진 아바챠 식 정찬은 식탁을 정리해야 할 하인들의 몫이 되었다.

귀족을 모시는 데 익숙해서일까?

그들은 말없이 남은 음식을 먹다가 자기들의 주인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지고서야 불평을 터트렸다.

"요즘 진짜 너무하다니까. 하루에 이런 행패만 몇 번이야?"

"맞아. 이렇게 맛있는데 뭐가 문제라고."

"그냥 제 성질 못 이겨서 난리 치는 거지 뭐······덕분에 우린 맛있는 거 먹고 좋잖아."

아마 마수인 듯한, 팔뚝 크기의 새우구이를 한입에 쑤셔 넣은 하인이 웅얼거렸다.

확실히 맛있어 보이는 터라 투란 역시 하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연어구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야, 다 먹지 말고 좀 남겨. 토닌이랑 걔 데리고 갔던 애들 것도 남겨야 하니까."

"그래도 이번에는 유리잔만 깨고 끝났네. 지난번에 보슈 씨 일가가 맞아 죽은 것 때문에 큰 어르신께 혼나서 그런가."

"큰 어르신은 무슨? 저딴 걸 그냥 내버려 두는 큰 개자식이지."

"나도 귀족으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슬슬 열이 올라서일까, 하인들은 어느 귀족의 귀로 들어가면 즉시 목이 매달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원색적인 욕설을 퍼부어가며 오닐을 비난했다.

저딴 놈을 낳고 내버려 두는 부모들도 죄다 개새끼들이라느니, 어디 순례라도 가서 끔찍하게 뒈져버렸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식으로.

자기 가솔들에게 인망이 없는 귀족이야 찾아보면 적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미움받는 이는 흔치 않았다.

'역시, 잘 찾아온 것 같네.'

마법사는 신의 후손으로서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은 마법사를 섬기는 것이 인간 세상의 법칙.

어려서부터 그렇게 교육받고 자란 귀족들은 평민들을 하찮게 취급할지언정 직접 학대하고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귀족으로서 지나치게 '품위 없는'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기사나 귀족들이 평민들에 비해서는 약자를 학대하는 식의 가학적 쾌감을 썩 즐기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하지만 때때로 여기 이 오닐처럼 그러한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이단아들이 태어나고는 했다.

다른 양식 있는 귀족들이 보기에는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평민들을 직접 괴롭히는 부류 말이다.

이 역시 투란이 위장용 신분으로 오닐을 고른 이유 중 하나였다.

그가 잠입했다는 흔적을 없애려면 당사자를 제거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사람 좋은 이를 죽이는 것은 찜찜하니까.

하인들의 불평을 듣던 투란은 저택 밖으로 나간 오닐의 기척을 쫓았다.

산책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정원을 어슬렁거리던 그는, 갑자기 허공에서 얼음의 채찍을 만들어 근처의 정원수들을 죄다 베어 버리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다른 나뭇가지를 정리하던 정원사가 그 모습을 보고는 경악해 비명을 질렀다.

"으헉-!"

"모양이 마음에 안 든다. 전부 다시 심어!"

"아,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렇게 정원사를 좌절시킨 오닐은 마구간이 냄새난다며 벽을 무너트리고 자기를 흘깃 보고 지나쳤다는 이유로 어느 기사의 발등을 밟아 뼈를 부수는 등 계속해서 저택을 누비며 온갖 패악질을 부려댔다.

뒤에서 은신한 채 그 모습을 보던 투란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야기는 들었지만······진짜 애새끼 같네.'

오닐의 나이가 이미 육십 살이 넘었음을 생각하면 정말로 나잇값 못하는 패악질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 저것마저도 제 딴에는 어느 정도 자제 중인 상태였다.

'최근 아버지에게 혼난 게 자기 첩이랑 가족들을 때려죽여서 그랬다고 하던가?'

오닐은 반려 대신 첩을 세 명 두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과도한 행위로 첩이 죽자 이에 대해 항의하러 온 아버지와 오빠를 죽여버렸다고 했다.

아무리 첩이 반려보다 신분이 낮다지만 지나치게 비상식적인 처사라서 오닐은 아버지에게 크게 혼나고 근신형을 당한 상태였다.

심지어 더 어린 시절에 고의로, 혹은 실수로 죽인 사용인이 한둘이 아닐 지경이라고 하니 다들 두려워하며 반려조차 맞이하지 못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투란은 계속해서 오닐을 따라다니며 그의 말투와 몸짓, 표정 등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분석했다.

'지난번에 카드람을 흉내 낼 때는 너무 급했지. 그래서 가까운 사람에게 들킬 뻔했고······이번에는 더 확실히 해야 해.'

* * *

오닐의 저택에 잠입하고 사흘.

투란은 잠들 때 외의 모든 시간을 투자해 가며 오닐의 모든 것을 보고 흉내 냈다.

과거 보았던 배우들이 과거의 인물을 재현했듯, 저 오닐의 모든 행동거지를 완전히 재현할 수 있게.

심지어 그가 심심풀이로 친구들을 저택에 불러 도박을 하거나 침실에서 여자를 안는 것조차 관찰하며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를 모두 캐냈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오닐의 저택에 그의 아버지인 제멜 카마인이 방문했다.

"여전히 망나니짓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구나."

"아버지."

"나흘 뒤에 중요한 가족 회의가 있는 것은 알고 있겠지?"

"예."

"마음 같아서는 집어치우라고 하고 싶지만, 내 자식 중 너만 한 놈이 없으니 한 자리는 끼워주마. 거기서는 절대 사고 쳐서는 안 된다."

"예······."

저택 내에서 폭군이나 다름없던 오닐은 자기 아버지의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졸아든 목소리로 답했다.

어쨌든 오닐이 회의 참석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은 기쁜 소식이었다.

이 녀석이 생각보다도 더 끔찍한 수준의 망나니였던 탓에 중요한 자리에 초대받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니까.

'하긴, 아무리 대가문이라도 이만한 귀족이 흔치는 않지.'

심지어 여기 오닐은 성격이 문제일 뿐, 상위권의 마력을 가지고도 아직 한계가 오지 않아 성장 가능성이 남은 이였다.

이만한 실력자는 대가문에서도 이십여 명이 채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성격 문제로 버리기는 아까울 수밖에.

제멜은 소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 제 자식에게 혀를 찬 뒤 그대로 저택에서 떠나 버렸다.

"젠장, 젠장, 젠장-!"

당연하게도 그가 떠난 뒤 오닐은 응접실을 모조리 때려 부수며 패악질을 부렸고, 그 와중에 하인 한 명이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렇게 확답을 받은 다음 날, 투란은 간단한 실험을 시작했다.

"이봐."

"예, 주인님!"

"차 한 잔 가져오도록. 아무거나 상관없어."

"알겠습니다!"

오닐이 저택에서 떠난 틈을 타, 투란은 오닐의 모습을 취하고 그와 같은 옷을 입은 채 하인을 불러 차를 주문했다.

그간 연습한 보람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이상한 점을 알아차릴 정도의 유대감이 없어서인지 하인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차를 가져다주었다.

이후 다른 곳에서 몰래 하인들과 몇 차례 더 접촉한 뒤, 투란은 자신의 연기가 제법 무르익었다고 확신했다.

육 일째 새벽.

투란은 여느 때처럼 예쁘장한 첩 한 명을 겁탈하듯 안고서 홀로 잠든 오닐의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달빛 아래로 비치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잠시, 하람의 단검을 꺼내 목을 내리치자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과거 자하르에 맞서던 아라비온의 기사들이 그랬듯, 깊게 잠든 오닐은 죽는 줄도 모른 채 일격에 숨이 끊어졌다.

상위권의 힘을 지닌 고위 귀족의 죽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허망한 최후.

이를 보면 왜 아라비온 귀족들이 그렇게 방비에 열을 올리는지 누구든 알 수 있을 터였다.

'그간 저지른 일에 비하면 곱게 죽은 셈이지.'

행동하는 꼴을 보고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안에서 갑자기 신의 영혼이 튀어나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곧장 모든 계획을 백지화하고 도망쳐야 했을 테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투란은 죽은 오닐의 마력을 흡수하고 잘린 목에서 흘러나와 침대며 이불에 스며든 피를 모조리 추출, 미리 준비해둔 통에 담았다.

이후 그 통과 시체를 대용량 주머니에 넣고 오닐의 모습을 취하자 감쪽같이 바꿔치기가 끝났다.

이제부터 그는 오닐 카마인이었다.

* * *

"너무 식었잖아!"

회의 당일, 투란은 더없이 당당히 아침 식사를 하며 과거 오닐이 그랬듯 스튜를 바닥에 내던지며 하인들을 괴롭혔다.

물론 이마저도 원본에 비하면 너그러운 처사였던 터라, 하인들은 괴로워하는 기색조차 없이 그릇을 치웠다.

식사를 마친 투란은 본래 오닐이 그랬듯 친구, 정확히는 부하에 가까운 이들을 몇 명 불러서 간단한 카드 게임을 즐기며 자신의 변장이 완벽한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해가 질 무렵, 약속된 시간이 오자 마차 한 대가 오닐의 저택 앞에 섰다.

"회의에 참석하실 시간입니다, 주인님."

"알고 있어."

오닐의 집사는 대리석처럼 꼿꼿한 태도로 그를 안내했지만, 투란은 날카로운 후각으로 집사가 오닐을 끔찍이 경멸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투란이 탑승하자 마차는 곧장 카마인 거주지의 중심부, 가주의 거처로 향했다.

'일단 여기까진 잘 된 것 같네······.'

그간의 경험에 따르면 자하르의 은신조차 간파하는 마법기는 몇 종류 있으나 이 흉내쟁이 가면을 알아차릴 수 있는 물건은 없었다.

마법기를 감지하는 마법기 같은 것 역시 일반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고.

예상대로, 가주의 거처에 설치된 정체불명의 결계는 투란이 통과하고도 아무 신호도 울리지 않았다.

마차가 거주지 앞에 서자 투란은 문을 열고 내렸다.

"오닐? 웬일로 왔구나. 형님이 넌 안 부를 줄 알았는데."

저택 앞에는 이미 카마인 귀족 몇 명이 있었는데, 중년 남자 한 명이 투란을 보고는 삐딱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간 모아온 정보에 의하면 그는 오닐의 외숙부일 터였다.

"예, 외숙부······아버지가 좋게 봐 주셔서요."

"음? 갑자기 외숙부라고 부르는 건 또 뭐냐, 전에는 그냥 아저씨라고 하더니."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잡아내기는 어려웠던 터라, 투란은 머쓱한 표정으로 대충 모면하며 얼른 자리를 떴다.

다행히 강자에게 약한 오닐의 본래 태도와 비슷해서인지 이를 의심스럽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잠시 후, 투란은 다른 카마인 귀족들과 함께 가주의 거처 안쪽에 자리한 회의실로 들어섰다.

참석하는 이는 총 열여섯 명.

이들이 바로 백 명이 넘는 카마인 귀족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구성원들이었다.

그리고 상석에서는 카마인의 가주, 로도르 카마인이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영리해 보이는 외모에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그 덕분인지 젊은 나이인 것치고는 꽤 위엄이 느껴졌다.

'저게 카마인의 가주······.'

짐작건대 저자의 안에는 '변호사'라는 별명의 프레아 신이 머무르고 있을 터였다.

아무래도 저만한 숙주를 부하에게 넘기는 것은 불안할 테니까.

그리고 높은 확률로 이 회의의 참여자 중에서도 다른 신의 빙의체가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 이렇게 둘러봐서는 도저히 누구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잠시 후, 회의가 시작되자 투란이 예상했던 대로 곧장 아라비온에 대한 주제가 나왔다.

"전쟁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얼마 전부터 해로가 완전히 끊겨버린 상태이다 보니······."

"거기다 최근 북해의 바람이 잦아들며 남해와 비슷한 환경이 되었는데, 그 때문에 배들의 속도가 느려지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투란이 변장한 오닐은 나이가 어린 만큼 무언가 의견을 내거나 물음에 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 떠들던 도중, 드디어 원하던 주제가 언급됐다.

"라누사, 인어들과는 아직도 연락이 안 되나?"

"예. 고래부터 시작해서 현재 모든 인어 왕국들이 소통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청산호 왕관의 명령도 통하지 않고요."

청산호 왕관.

아마 저게 카마인이 인어들을 지배해온 비밀인 듯했다.

이름으로 보건대 대충 성유물쯤 되는 것일까?

"쯧, 큰바다뱀의 사령이란 게 나타났을 때 바로 제압해야 했나?"

"어쩔 수 없지 않았습니까. 마침 그 당시에 중요한 문제를 맞이하고 있었으니까요. 막상 일이 다 끝나고 나니 이미 인어들이 사고를 친 마당이었고."

큰바다뱀의 사령이 난동을 부리던 당시 왜 카마인 귀족들이 간섭하지 않았나 했더니, 이들 역시 그 당시 무언가 일이 생겼던 듯했다.

과연 무슨 일이었을까?

내심 궁금했으나 이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오닐이 이미 알고 있어야 할 일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심받을 테니.

"어쨌든, 청산호 왕관이 통하지 않는다면 인어들이 옛 큰바다뱀의 가호를 되찾았을 가능성이 크군. 이번 마수들의 난동도 그 때문이고. 전쟁이 마무리되면 내가 직접 담판을 짓지. 인어들을 제어할 수 없게 되는 건 곤란하니까."

"가주님께서 나서신다면 안심입니다."

아라비온 가주와 달리 카마인 가주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가문 내 업무에 개입했다.

다른 이들도 어색해하지 않는 것으로 보건대 평상시에도 이런 식인 모양.

그렇게 자리만 채우고 앉아서 정보를 빼먹던 도중, 가주가 갑자기 손뼉을 짝 치며 주의를 끌었다.

"그러면 이제 내부에서 할 이야기는 대충 끝났으니 중요한 손님을 부르도록 하겠다."

"아, 그때 얘기하셨던······?"

"그래. 들어오도록!"

가주의 말과 함께 굳게 닫혀있던 회의실 한쪽의 문이 열리며 사람 한 명이 들어왔다.

어째서인지 회의 내내 밖에 서 있길래 회의실을 지키는 것인가 싶었던 정체불명의 최상위 귀족 한 명.

그는 뒤로 빗어넘긴 검은 머리에 회색 눈, 다소 마르고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가진 중년 남자였다.

'저렇게 생긴 카마인 귀족이 있던가?'

자하르 간첩의 자료에는 어설프게 그린 카마인 귀족들의 초상화도 있었는데, 그중 저런 외모를 한 이는 없었다.

카마인이 숨겨둔 비밀병기라도 되는 것일까?

그런데 어째서인지 저 얼굴이 썩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정확히 누구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꽤 자주 만나본 것 같은······.

묘한 기시감에 의아해하던 그때, 가주가 구성원들에게 남자의 정체를 소개했다.

"모두 처음 보는 사이겠지. 이번 전쟁을 중재하고자 저 먼 사막에서 올라온 탈리스 자하르다. 부디 환영해 주도록."

10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