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기절하듯 의식을 잃고 몇 시간 뒤, 투란은 누군가가 뺨을 톡톡 두드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비제가 부리 옆으로 조심스럽게 그를 두드리고 있었다.
"비제."
[많이 아파?]
비제는 대용량 주머니에서 꺼낸 석판을 들어 올려 미리 써 둔 것이 분명한 글자를 보여 주었다.
이를 본 투란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윽."
자리에서 일어나자 흠씬 얻어맞은 듯 얼얼한 통증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불의 영혼을 몸 옆에서 폭발시켜 수십 번씩 고속 이동을 한 것은 물론이요, 마지막에는 큰바다뱀의 두개골 안쪽에서 미친 듯이 온몸을 벽에 들이받았으니 멀쩡할 리 없었다.
'싸울 때는 흥분해서 몰랐는데...여기저기 꽤 많이 삐었나 보네. 스스로 나으려면 꽤 걸리겠어.'
물론 회복약 마법기를 꾸준히 복용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그전에 다른 동료들의 심각한 부상부터 치료해야겠지만.
"날개는 어때?"
[멀쩡해!]
"날 수도 있겠어?"
비제는 걱정하는 투란의 말에 그 자리에서 한 바퀴 가볍게 휙 날려다가 삑 하고 비명을 지르며 착지했다.
"진정해, 이따가 다시 상처를 봐 줄게."
[응....]
이후 투란은 옆에 쓰러져 있는 두 동료를 한 명씩 깨웠다.
그와 마찬가지로 과도한 마력 소모와 피로로 탈진했을 뿐인 솔리프는 금세 일어났으나, 메이사가 눈을 뜨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여긴?"
"아까 그 섬이야. 몸은 좀 어때?"
"나, 나...죽은 줄 알았어."
"그럴 뻔하긴 했지."
마지막 순간 하반신이 통째로 잘려 나갔던 것이 떠올랐는지, 메이사가 다소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멀쩡히 붙은 자신의 두 다리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잠깐 상처 좀 확인해 볼게."
"응."
본래 메이사가 애용하던 외투를 비롯한 여러 방어용 마법기는 모두 그 힘을 잃은 상태였다.
실로 아깝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저것들 덕분에 목숨이라도 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싼값이었다.
잃어버린 목숨은 무슨 수를 써도 되돌릴 수 없으니.
조심스레 찢겨 나갔던 옷을 걷어 올리자 배꼽 바로 아래로 길쭉하게 생겨난 흉터가 몸을 한 바퀴 두르고 있었다.
이를 본 솔리프가 혀를 차며 말했다.
"햐, 진짜 살아있는 게 기적이네. 뭐 내장 같은 걸 제대로 붙이지도 않고 그냥 절단면만 맞춘 채 치료한 거 아닌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좀 걱정되긴 해. 일단 움직여 볼래? 피가 통하는 건 확인했지만 걸을 수 있는지는 모르니까."
"으음...그러네, 아예 안 움직여."
가볍게 몇 번 찌르고 꼬집어본 결과, 메이사의 하반신은 그냥 붙어만 있을 뿐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회복 도중 신경이 제대로 아물지 못해서인 듯했다.
다시 회복약을 만들어 먹여 보았으나 딱히 상태가 호전되는 기색은 없었다.
상처 자체를 때우는 정도는 됐지만 근본적인 치유를 위해서는 더 강력한 회복 능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때 날 고쳐준 아가씨를 다시 불러야 하나? 그 아가씨 수준으로는 꽤 걸리겠지만...."
"어차피 비행 마법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괜찮아."
메이사는 자기 말을 입증하듯 곧장 부유와 비행 마법으로 몸을 지탱해 일으킨 다음 땅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확실히 투란보다 훨씬 예전부터 이를 사용해 온 만큼 숙련도가 남달랐다.
"아마 좀 연습하면 걷는 시늉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렇다고 평생 그러고 살 수는 없잖아. 거기다 내장 쪽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니 빨리 회복할 방법을 찾아야지."
투란은 메이사를 앉힌 뒤 그녀의 상처 부위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확인했다.
비교적 수준 낮은 회복약을 사용한 탓일까, 확실히 결합한 곳이 견고하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부러진 돛대를 억지로 때워 놓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내장도 온전히 붙었으리라 확신할 수 없는 만큼 가능한 한 빨리 치료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 우선 큰바다뱀 시체부터 흡수해야겠는데, 그러고 보니 그건 어떻게 됐지?"
"해변에 갖다 놓겠다던데. 나도 지금 일어나서 아직 못 봤어."
"빨리 가보자고! 지나가던 마수가 잡아먹기라도 하면 진짜 열 받아서 죽을지도 몰라!"
호들갑을 떠는 솔리프를 향해 투란은 가볍게 손을 내저어 그를 제지했다.
"괜찮아, 인어들이 지켜주고 있거든."
"그래?"
수백 미터쯤 떨어진 해변에서 잘 뭉쳐진 큰바다뱀의 힘과 그 옆에 자리한 인어의 기척이 느껴졌다.
고작 한 명일 뿐이지만, 어차피 이 북해 한복판에서 인어 왕족과 맞먹는 적이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어차피 시체를 이용해야 하는 건 저쪽이니까. 그보다 마력을 흡수해서 메이사가 더 강해지면 회복하기가 어려워지는 게 걱정인데...."
지금도 너무 강한 탓에 회복약이 제대로 듣지 않는데, 큰바다뱀의 마력을 흡수해 더 강해지고 나면 진짜로 상위 치유사의 도움 없이는 낫지 못하게 될 터였다.
"난 신경쓸 것 없어. 어차피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거기다 한 번 부활한 사령의 마력은 빨리 흡수하지 않으면 흩어져서 없어지잖아? 그렇게 힘들었는데 보상은 받아야지."
메이사가 덤덤히 웃으며 말했다.
* * *
회의를 마친 뒤, 세 사람은 곧장 동쪽 해안으로 움직였다.
큰바다뱀의 단말마로 인해 완전히 초토화된 그곳에는 한때 신으로 추앙받던 괴물의 시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진짜 이딴 걸 우리들이 잡았단 말이지...."
"보고도 실감이 안 나."
투란 역시 솔리프와 메이사의 중얼거림에 내심 공감했다.
두 번째 목숨마저 잃은 큰바다뱀의 몰골은 과거 바닷속에서 보았던 그때와 비슷했으나, 직접 싸워보고 나서 마주하고 나니 새삼 더 아찔한 느낌이었다.
그때, 큰바다뱀의 머리 위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휙 뛰어내려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뭐야, 이제 일어났나? 그 정도로 강한 인간도 지치면 약해지는 모양이지?"
"워낙 격한 싸움이었으니까. 다른 인어들은?"
시체를 지키고 있던 젊은 인어 왕족은 과거 경솔하게 입을 놀려서 혼이 났던 바다거북, 콜로바였다.
"다 근처 바다에서 쉬고 있지. 우리는 지쳤을 때 안에 들어가 있는 게 더 좋거든. 멀쩡한 나만 밖에서 이러고 있고 말이야. 빨리 그 마력이나 빨아먹어. 난 아버지를 불러올 테니까."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인어 왕자의 말에 투란은 고개를 끄덕인 뒤 제 동료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눈에 담긴 기대와 갈망이 느껴졌다.
"그럼 시작해볼까."
"응."
거대한 큰바다뱀 시체에 접근한 뒤, 세 사람과 한 마리는 곧바로 마력 흡수를 시작했다.
막대한 규모의 녹색 광채가 흘러나와 몸으로 스며들었다.
"엇."
그때, 마력 일부가 나뉘어 흉내쟁이 성유물 쪽으로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경험상 마수의 마력은 착용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흡수하지 않았는데, 설마 신의 사령이 섞여 있었던 것이 원인일까?
이를 본 투란은 재빨리 성유물을 벗어 던지려 했다.
가장 효율적인 마력 흡수의 숫자는 네 명.
이대로라면 그 자신은 물론이고 솔리프와 메이사, 비제가 마력을 얻는 데 있어 손해를 볼 터였다.
그러나 가까이 있던 메이사와 솔리프가 투란의 손을 잡으며 이를 막았다.
"왜?"
"그냥 두자."
"혹시 뭔가 좋은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성유물의 기원인 신의 마력이 깃들면 무언가 긍정적인 영향을 얻을지도 모르니 내버려두라는 뜻이었다.
그냥 파도꾼과 흉내쟁이의 마력을 얻는 것뿐이라면 무의미한 손실일 뿐일 텐데.
뭐라 항변하려던 것도 잠시, 머리를 때리는 어마어마한 충격에 투란은 답변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으헉."
"하아...."
옆에서 들려오는 경악한 탄성이며 신음 따위는 귓가에 제대로 들려오지도 않았다.
큰바다뱀의 마력은 정말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쾌감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
온몸의 뼈와 근육, 살점과 신경이 불타버린 다음 새롭게 재구성되는 듯한 느낌.
이것에 비하면 그간 있었던 모든 마력 흡수는 어린애 장난에 불과했다.
본래 최상위 귀족들 사이에서는 하위권이던 투란의 마력이 순식간에 솔리프와 같은 중위권을 넘어 상위권으로, 그리고 메이사의 그것과 같은 최상위 중의 최상위권으로 올라왔다.
그러자 과거 혈통의 잠금이 풀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철컹하는 소리가 나며 한계에 도달했다가 해방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로도 투란의 마력은 계속해서 상승하여 메이사보다도 좀 더 강한 수준, 최상위 귀족들과 대가문의 가주 사이에 자리한 어딘가쯤에 도달한 뒤에야 성장이 멈췄다.
"아...."
투란은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내고 동료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온몸에 힘이 끓어올라 주체할 수 없는 듯 주먹을 쥐었다 펴는 솔리프, 그리고 비행 마법을 유지하지 못해 주저앉은 메이사.
두 사람의 마력 역시 이전과 차원이 다르게 성장하여 평범한 대귀족들의 영역을 벗어난 상태였다.
메이사는 이제 그가 만나본 가장 약한 대가문의 가주, 오셀 라비타스를 상대로도 어느 정도 방어전이 가능할 수준에 이르렀으며 솔리프는 그보다 약하지만 투란보다는 강했다.
혹시라도 둘 중 누군가는 한계에 도달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역시 신들의 그릇으로 선택받은 이들답게 가주급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충분히 있던 모양이었다.
[투란! 투란! 나 기분 좋았어! 엄청!]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비제 역시 순식간에 몇 단계의 성장을 이룩한 상태였다.
딱 이번 싸움 직전의 투란과 같은, 대가문의 후계자들과 비슷한 수준의 최상위 귀족급 마력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만한 힘을 가진 마수가 등장하면 신화급 마수가 등장했다면서 난리가 날 게 분명했다.
아마 평범한 가문의 귀족들은 도저히 대적할 방도가 없어 대가문의 군대를 초청해야 할 터였다.
'이 정도면...아라비온이랑도 싸울 수 있겠는걸.'
아직 그 강대한 천둥군주와 맞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신의 빙의체가 아닌 평범한 귀족쯤은 잡졸로 여길 수준에 이르렀다.
그 사실에 기쁨을 만끽하기도 잠시, 투란은 두 사람의 내면에 생긴 변화를 깨닫고 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냐?"
"둘 다 상징이 변했는데."
"뭐?"
"혹시 몸에서 무슨 소리 안 났어?"
"열리는 소리...라고 해야 하나? 빡 하고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나긴 했는데."
"나는 유리가 깨지는 소리였어."
본래 솔리프가 가지고 있던, 하얗게 빛나는 손과 불덩이의 상징 옆에는 방패 한 개가 더해진 상태였다.
저것은 분명 과거 그의 무술 스승, 하람에게서 보았던 수호자 혈통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메이사로 말할 것 같으면 번개 구름 옆에 하얀 모루와 검은 망치, 부여사 혈통의 상징이 더해져 있었다.
아마 주먹 쥔 손이 저것을 움켜쥐고 휘두르기만 한다면 과거 보았던 아라비온 가주의 그것과 같은 힘을 보일 터였다.
이를 알려주자 두 사람 다 깜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
"부여사...? 내가?"
"난 수호자 혈통이랑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은빛 태양의 네 가지 혈통 중 하나긴 하니까. 어쩌면 출생의 비밀 같은 걸지도 모르지."
"이 자식이 남의 부모를 가지고 막말하기는."
솔리프는 투덜거리면서도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가주의 자식인 메이사와 달리 평범한 귀족 부부 태생인 그의 출생 과정은 비교적 조작하기 쉬웠을 테니까.
메이사가 가지고 있던 마법기의 기능을 확인하는 마법을 사용하고 솔리프가 제 가슴을 두들겨 튼튼해졌는지 확인하는 동안, 투란은 폭풍의 정령이 사라진 영향으로 구름 한 점 없어진 하늘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콰릉, 번개 한 줄기가 바다 위로 내리꽂히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완성됐구나, 폭풍 혈통....'
본래 이런 맑은 하늘에서 강력한 벼락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힘을 소모해야 하는 법인데, 지금 투란이 느낀 마력 소모량은 폭풍우 치는 날의 그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만들어낸 낙뢰의 위치마저 센티미터 단위로 정밀히 꽂아 넣을 수 있을 정도.
마침내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벼락의 혈통 마법마저 발현한 것이 분명했다.
이후로도 가벼운 마찰로 만들어낸 번개를 몸 주위에 방어막처럼 두르거나 번개의 뱀으로 만들어 움직이는 등 여러 가지 응용기를 연습하자, 이를 알아챈 메이사가 물었다.
"번개도 제대로 쓸 수 있게 됐구나?"
"응. 확실히 편하네. 왜 아라비온 마법사들이 여러 공격 마법을 연습하지 않는지 알 것 같아."
공격용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바람 마법에 비하면 어이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단순한 힘이었다.
유일한 단점은 불의 마법과 마찬가지로 대지 변형 마법을 이용한 방어에 취약하다는 것 정도일까.
물속에 잠수한 이를 공격하기 어려운 것은 덤이고.
"그래서, 다들 확인 좀 해봤어?"
"응. 부여 마법을 쓸 수 있게 됐더라. 전혀 해본 적 없는 분야라서 제대로 쓰려면 연습해야겠지만."
"나중에 아시즈한테 연락해서 요령이라도 좀 알려달라고 하면 되겠네. 솔리프, 너는?"
"일단 힘은 엄청 세졌던데. 볼래?"
솔리프와 손을 맞잡고 잡아당긴 순간, 투란의 몸이 훅 하고 맥없이 상대를 향해 딸려갔다.
"와."
"엄청나지?"
솔리프는 본래도 작지만 다부진 체격에 강한 마력을 가진 만큼 투란보다 힘이 좀 더 세기는 했다.
하지만 분명히 이 정도의 압도적인 격차는 아니었다.
"방어 능력은 좀 더 시험해 봐야겠지만...뭐, 이 정도면 틀림없이 올라갔겠지."
원래도 태양 혈통으로 뛰어난 공격력을 갖췄던 솔리프가 수호자 혈통을 얻어 방어력과 육탄전 능력까지 갖췄으니, 순수 공방력은 이제 일행 중 최강이라 봐도 무리가 없었다.
단점이라면 기동력과 보조 쪽 능력이 없다시피 하다는 것.
안 그래도 이번 전투에서 혼자 하늘을 못 나는 탓에 비제가 다치고 나서부터는 후방 지원에 전념해야 하지 않았던가.
"나도 부여사 말고 그런 쪽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메이사가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푸념이 그 핏줄을 물려준 어머니에게 무례한 말이라 생각한 듯했다.
새로이 얻은 소득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기도 잠시, 바닷속에서 여러 인어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후 인어 왕을 비롯한 인어들이 우르르 올라왔다.
"착한 악마! 무사했구나!"
"그래, 무사했지."
투란은 환히 웃는 아르마니를 향해 인사하며 인어 왕족들의 모습을 슥 둘러보았다.
왕의 장자였던 문어 마쿤을 비롯해 죽은 왕족 몇 명의 빈자리가 확연히 보였다.
물론 그 사실에 크게 유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기진맥진한 채 간신히 섬에 올라왔을 때 그를 바라보던 인어 왕의 시선은 분명히 상대를 재어 보는 듯한 기색이었으니까.
만약 그들의 전력이 온전했다면, 그리고 투란이 어느 신의 빙의체라는 의심을 불어넣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투란 일행은 모두 살해당했을 수도 있었다.
무뚝뚝한 표정의 인어 왕이 아르마니의 머리를 짓누르며 말했다.
"그래서, 수확은 끝난 건가?"
"대충."
"그러면 이제 우리도 제 몫을 받아가겠다."
투란은 인어 왕과 왕족들의 힘을, 그리고 그들 일행의 능력을 가만히 재어보았다.
그들 모두 온전한 상태가 아니나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고, 그에 비해 저들은 약해진 상황.
여기서 싸운다면 승리는 분명했다.
하지만-
"약속대로 시체는 양보하겠어."
"흠, 공정하군."
인어 왕이 그들을 떠보는 듯한 기색을 보이기는 했으나 어쨌든 공격하지 않았으니 약속은 깨지지 않은 셈이었다.
저들이 큰바다뱀의 힘을 얻는 쪽이 그들에게 장기적으로 유리할 가능성도 크고.
거대한 고래를 필두로 여러 큼직한 바다생물로 변한 인어 왕족들이 큰바다뱀의 시체를 해변에서 끌어내고, 마지막으로 새끼 상어 아르마니가 지느러미를 휘둘러 인사하며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후, 진짜 끝이네...."
"그보다 이 섬에서 어떻게 나가지? 싸움 중에 배도 박살났고 비제도 날개 상태가 별로 안 좋은데. 쟤들한테 가까운 섬까지 데려다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일단 비제는 크게 다친 게 아니니까 회복약을 더 먹다 보면 금방 회복될 거야."
비제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날갯짓하다가 부러졌던 부분이 아팠는지 삐약 하고 물었다.
낑낑대는 녀석을 쓰다듬어주던 도중, 이를 바라보던 메이사가 입을 열었다.
"근데 그건 어떻게 됐어? 성유물."
"맞다! 까맣게 잊고 있었네. 우리가 먹을 마력을 나눠준 보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동료들의 성화에 투란은 곧바로 가슴에 매달려 있던 성유물을 꺼냈다.
겉보기에는 변화가 없었기에 곧장 돌기를 눌러 뚜껑을 열자-
"엇."
"왜?"
"안쪽이 변했어."
96화
투란이 가진 최강의 마법기, 흉내쟁이 성유물.
이 물건의 대표적인 기능은 주변의 마력 흐름을 관찰하는 것, 그리고 죽은 이의 마력을 흡수하여 저장하고 그 힘을 복용해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본래 내부에는 텅 빈 안쪽에 여러 색상의 마력이 액체 형태로 들어차 층층이 분리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형태가 완전히 바뀐 상태였다.
본래라면 텅 비어있어야 할 공간은 대부분이 정교하게 만든 톱니바퀴 같은 것으로 들어차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다섯 개의 동그란 원이 엇갈리듯 겹쳐 있었다.
그 다섯 원의 안쪽에는 각각 황금색과 갈색, 자주색, 회색, 청록색을 띠는 액체가 찰랑거렸다.
"이건...."
기억에 따르면 황금색은 태양 혈통, 갈색은 땅지기 혈통, 자주색은 광전사 혈통, 회색은 레노드를 비롯한 나긴 귀족들에게서 흡수한 지배자-조련사 혈통, 마지막 청록색은 비센에게서 흡수한 카마인의 여울-서리 혈통이었다.
분명 그 외에도 반 개쯤 남은 결계사나 방화광, 환영 혈통 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이를 본 솔리프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뭐야, 원래 다섯 개 말고 더 있지 않았나? 다 없어진 거야?"
"아마도."
설마 마력을 받아먹은 주제에 기능이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나빠질 줄이야?
어이없는 상황에 혀를 차기도 잠시, 메이사가 불쑥 성유물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한번 감정해 볼게."
"가능하겠어?"
"만드는 거랑 달리 감정은 초급 기술이니까. 아시즈는 몰라도 나 정도면 볼 수 있을 거야."
성유물을 받아든 메이사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함인지 그대로 모래사장에 주저앉은 채 인상을 찡그렸다.
역시 최상위 성유물은 그녀처럼 강력한 부여사에게도 감정이 쉽지 않은 것일까.
몇 분 뒤, 메이사가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확실히 예전이랑 기능이 완전히 달라졌네. 그래도 손해는 아닌 것 같아. 아니, 오히려 큰바다뱀의 마력을 나눈 보람이 넘치도록 있을 정도...."
"구체적으로 알려줄 수 있겠어?"
"일단 이제 보관할 수 있는 마력은 다섯 종류로 제한돼. 그 이상으로 담으려면 이전에 보관 중이던 것을 방출해야 하고."
"그건 손해잖아."
솔리프가 투덜거리자 메이사가 좀 인내심을 가지라는 듯 가볍게 혀를 찼다.
"대신에 이제는 안에 든 마력이 소모성이 아니게 됐어."
투란과 솔리프는 잠시 말을 잊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 말대로라면-
"다른 혈통의 힘을 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고?"
"응. 정확히는 여기 이 다섯 개 중 가장 위쪽, 이 원에 자리한 혈통의 능력이 항상 소유자에게 적용될 거야. 옆에 있는 태엽을 돌려서 위치를 바꿀 수 있고."
"이건 뭐...진짜로 신들조차 탐낼 만한 물건이구만. 어이가 없네."
"신과 큰바다뱀이라는 두 생물의 마력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물건이니까."
확실히 메이사의 말대로기는 했다.
신과 그에 맞먹는 마수의 마력이 뒤섞여 만들어진 물건이라니, 세상 어느 성유물이 이토록 사치스럽게 만들어졌단 말인가?
하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지나치리만치 강력하고 유용한 물건이기는 했다.
정말로 신화 속 보물들조차 이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 여겨질 정도로.
만약 이 기능이 널리 알려진다면 훗날 흉내쟁이 성유물은 여러 보물 사냥꾼들이 가장 탐내는 물건이 될 것이 분명했다.
잠시 후, 투란은 메이사에게서 성유물을 받아 조작법을 익힌 후, 태양 혈통을 지정하고 목에 걸었다.
그러자 곧바로 변화가 느껴졌다.
"진짜네."
태양 혈통 안에 깃든 능력 중 하나인 뛰어난 시력, 그리고 여러 형태의 빛을 관찰하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적용된 것이 느껴졌다.
마력을 끌어올려 빛과 불을 만든 뒤 섞어내자 자연스럽게 심판의 빛이 등 뒤에서 광륜을 그려냈다.
"뭐 소모되고 그런 게 전혀 없는 거냐?"
"굳이 따지자면 내 마력이 소모되기는 하지."
"그거야 당연한 거고. 지금 있는 게 다섯 개랬지? 한번 다 시험해 보자고."
잠시 후, 광전사 혈통으로 전환한 투란은 조금 전처럼 솔리프와 힘겨루기를 했다.
그때만 해도 마치 어른에게 휘둘리는 어린아이처럼 힘 차이가 났으나 이제는 오히려 투란이 조금 더 우위였다.
아마도 광전사 혈통이 수호자 혈통보다 마력 대비 근력 강화 정도가 더 높아서일 터였다.
"으헉-이런 미친!"
"뭔가 강하게 힘을 쓰니까 기분이 고조되는 느낌이네. 전투 중에 함부로 쓰면 위험하겠어."
"그래서 광전사 혈통이라고 불리는 거긴 해."
이후 다른 세 개의 혈통까지 모두 시험해 본 뒤, 투란 일행은 흉내쟁이 성유물이 큰바다뱀의 마력을 빨아간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음을 인정했다.
한 개 혈통, 혹시라도 대가문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두 개 혈통의 능력을 조건 없이 보장하는 마법기라니?
수호자 마법기가 대량의 마력을 소모해 수호자 혈통의 능력, 그중에서도 방어 능력만을 부여하는 것으로 최상위 마법기가 되었음을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모든 기능을 확인한 투란은 두 사람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
"뭐가?"
"다 같이 잡은 건데 나만 부당하게 이득을 봤잖아. 나중에 손실을 보전할 수 있도록 할게."
흉내쟁이 성유물은 투란에게 귀속된 물건인 만큼 다른 두 사람은 아예 쓸 수조차 없었다.
그런 것을 위해 저 신화적 생물의 힘 일부가 소모되었음을 생각하면 두 사람이 큰 희생을 한 것이지 않은가.
거가다 비제 역시 투란과 영혼으로 결속된 사이임을 생각하면 그가 다섯 중 세 명 분량을 독차지한 셈.
이는 전혀 공정하지 않았다.
메이사는 몸이 두 조각이 났을 정도이며 솔리프 역시 자칫 잘못했으면 그와 맞먹거나 더 크게 다칠 수도 있었으니까.
이를 들은 솔리프가 껄껄 웃더니 대뜸 투란의 등을 손바닥으로 팡 두드렸다.
성유물을 마지막으로 시험했던 카마인 혈통으로 설정해둔 탓에 투란은 맥없이 앞으로 고꾸라져 모래사장에 얼굴을 처박았다.
"켁."
"아이고, 이거 너무 셌구만. 아직 힘 세진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어쨌든, 그딴 시답잖은 소리는 집어치워. 손발이 다 오므라들 지경이네."
"잘 때렸어. 허리만 아니었으면 나도 한 대 때려줬을 텐데."
평상시 솔리프가 투란을 때렸다면 먼저 나서서 눈을 부릅떴을 메이사가 오히려 이를 두둔했다.
"마력을 나눠주는 건 우리가 결정한 거야. 서로 목숨을 걸 수 있는 친구가 강해지는 건데. 반대로 넌 이런 기회가 오면 네 마력이 우선이니까 내 성유물이 강해지지 못하게 막을 거냐?"
"그건...아니긴 하지."
투란이 픽 웃으며 얼굴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자 메이사가 조심스레 일어나며 거들 듯이 말했다.
"애초에 이번 싸움에서 결정타를 먹인 것도 투란이었잖아? 기여도로 보면 한 사람 몫을 더 받을만해."
"그건 아니지. 다 같이 목숨을 걸었는데 기회를 잘 잡았다고 더 받는 건-"
"아, 쓸데없이 고집 부리지 말고!"
* * *
해변에서 한참을 떠든 뒤, 세 사람은 가장 먼저 회복약 마법기를 사용해 비제의 날개를 치료했다.
아마 진짜 액체였다면 배가 터져 죽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약을 먹이고 또 먹이기를 반나절.
마침내 회복한 비제가 삐약-하고 우렁차게 울며 하늘을 날자, 솔리프가 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비제가 쓰는 마법은 네 힘을 빌리는 거라면서? 설마 이제는 번개도 되냐?"
"아마도."
멀리서도 그 말이 들렸는지, 비제가 솔리프의 바로 앞에 벼락 한 줄기를 쾅 떨어트리며 의기양양한 자세를 취했다.
이를 본 솔리프가 깊게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저 악마 같은 새가 드디어 공격 능력까지 얻어 버렸구나. 아, 세상이여!"
투란은 솔리프의 머리에 벼락을 떨어트리려는 비제를 제지하고서는 대용량 주머니에서 금속 그네를 꺼내 다리에 매달았다.
잠시 후, 세 사람을 태운 비제가 하늘로 훌쩍 날아올랐다.
전보다 더 힘이 강해진 비제지만 그네를 끌고 나는 속도가 크게 빨라지지는 않았는데, 힘이나 속도가 부족해서라기보단 지나치게 빨리 날면 그네 쪽이 버티지 못해서였다.
물론 탑승하고 있는 이들이 마력으로 강화하면 되긴 하지만 급한 상황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배도 제법 빠르긴 했지만 역시 나는 게 제일이네. 익숙하기도 하고."
메이사가 넓게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보며 조금 신난 듯한 어조로 말했다.
늘어트린 두 다리가 힘없이 덜렁거리는 것이 몹시 신경 쓰여 투란은 의도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목적지는?"
"얼마 안 남았을걸. 미겔 섬을 지나서 십 분 정도 날았으니...아, 저쪽인 것 같은데. 비제, 지금 궤도에서 조금만 왼쪽으로."
지금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흉내쟁이 성유물의 원주인이 있는 작은 섬.
본래 솔리프가 그를 보고 싶어 하기도 했지만, 혹시 강화된 성유물이나 한 쌍인 가면을 가지고 돌아가면 무언가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섬에 착륙한 그들은 곧장 안쪽에 자리한 연못을 찾아 물 속으로 들어갔다.
물론 이전처럼 잠수해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이거 참, 카마인 귀족이랑 동행하니 편하구만."
"별 말씀을."
성유물을 카마인 혈통으로 지정한 투란의 유체 조작 능력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정밀해져 있었다.
연못 안쪽의 물을 갈라낸 다음 통로를 만들고, 발 닿는 부분을 얼려서 내려가는 계단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
덕분에 그들은 몸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손쉽게 아래로 내려왔다.
물 너머가 들여다보이는 것이 신기했던 나머지 날개를 내밀다가 흠뻑 젖은 비제만 빼고.
"음...."
"여기지?"
"맞아."
본래 큰바다뱀이 있었던 곳은 푹 패인 모래와 바위 덕에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곳에 남아 있어야 할 신의 시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추적 마법을 발동해 인간의 시체를 찾아보아도 사방 수십 킬로미터 안에는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분명히 아르마니가 신의 시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고 했었는데."
"거짓말이었던 건가?"
"아니, 아마 거짓말은 아닐 거야."
의아해하는 두 사람을 지나쳐, 투란은 성유물의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작은 영혼 조각 앞으로 걸어갔다.
가슴께에 걸린 성유물이 제 주인과 만남을 알아차린 듯 지잉 하고 울었다.
"어르신."
보석함을 꺼낸 뒤 뚜껑을 열어 사서를 불러내자, 게슴츠레 눈을 뜬 그가 영혼 조각을 보며 말했다.
"오, 하나 더 찾은 게냐?"
"예. 아마도 그런 것 같네요."
"찾았다니...어라?"
"보이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솔리프와 메이사가 놀란 듯한 얼굴로 사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 둘, 내가 보이는 게냐?"
"네...."
"이렇게 생기셨군요, 처음 뵙습니다 어르신."
"난 처음이 아니니 인사는 됐다. 그 큰바다뱀을 사냥한 모양이지?"
"예, 그랬죠. 그거 때문일까요?"
"아마도."
세 번째 혈통을 깨운 탓인지 솔리프와 메이사 역시 사서와 상호작용이 가능해진 모양이었다.
뜻밖의 사실에 놀라기도 잠시, 투란은 원래 그를 불렀던 용무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혹시 이분의 영혼 조각을 수납해서 분석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분? 누구길래?"
"전에 말씀드린 그 큰바다뱀과 같이 공멸하신 신입니다."
"흠...뭐, 어디 넣어 봐라. 알아보마."
보석함에 마력을 주입해 조각을 빨아들인 뒤, 투란은 두 사람에게 익사한 신의 영혼 조각만이 남았음을 알려 주었다.
"아마도 신의 사령이 시체를 유지하던 근원이었던 것 같아. 그걸 우리가 흡수하면서 잔재만 남게 된 거고."
조금 전 보았던 것을 설명해 주자 두 사람 역시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을 하신 분의 영혼 조각을 마음대로 들고 다니는 것도 찜찜한걸."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잘못하면 비센 같은 피해자가 또 생길 수도 있는데. 아마 그분도 그런 일이 생기기를 바라시지는 않을걸."
메이사가 딱 투란이 했던 생각과 같은 이야기를 꺼내 논박하자 솔리프도 뭐라 더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중에 안식을 드릴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투란의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영혼 조각이 있던 곳을 향해 예를 취했다.
남들 모르게 싸우다가 생명을 다한 영웅을 위한 추모였다.
* * *
북해에서 남은 마지막 과제까지 마친 뒤, 투란 일행은 가장 우선한 목표인 메이사의 치료를 위해 움직이기로 했다.
문제는 이제 여느 대가문의 가주들과 더 근접한 힘을 가진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평범한 수준의 치유사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
적어도 평범한 치유사 가문의 가주, 즉 상위 귀족급 이상의 치유사에게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성유물에 치유사 혈통을 남겨 놨으면 편했을 텐데, 아쉽게 됐어."
"기회가 되면 구해 봐야지. 근데 그러자면 뭘 빼야 할까?"
"굳이 따지자면 나긴 혈통이 제일 쓸모 없을 것 같기는 해."
지배자와 조련사, 둘 다 어지간해서는 쓸 일이 없는 혈통 능력이기는 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세 사람은 비제를 탄 채 계속해서 남서쪽으로 날아갔다.
해 질 무렵, 드넓게 펼쳐진 대륙의 해안선이 그들을 반겼다.
"이렇게 또 엔릴 사막을 찾게 되는구만."
"예전에 어머니는 여기 사람들이 다 머리에 뿔이 달리고 얼굴이 빨갛다고 했는데."
이미 사막을 몇 달 헤매본 적 있는 솔리프는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으며 그에 비해 메이사는 경계심 반, 호기심 반인 표정으로 드넓게 펼쳐진 사막 지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그런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느긋이 사막 여행을 다녀보는 것도 제법 재밌는 일이겠지만, 우선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치료가 우선이었다.
투란 일행은 사막의 구릉 한 곳에 착륙해 비쩍 마른 사막여우 한 마리와 건량으로 끼니를 해결한 뒤, 그대로 마을과 도시를 피해 가며 쭉 내려갔다.
간혹 내려다보이는 행상인이며 도적들을 관찰하기를 이틀.
엔릴 사막의 북서부에서 남서부를 관통하듯 내려오자 익숙한 늪지대가 보였다.
바로 라비타스의 영지, 시라프 습지였다.
"어째 뭔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으로 자주 도망 오는 느낌이란 말이지."
"신들과 엮이지 않은 대가문이란 점에선 가장 안전한 곳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치유사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고."
투란 일행은 이전처럼 아이쿨이 머무는 온천 지대를 찾아가는 대신, 곧바로 라비타스의 수도가 있는 방향을 수소문했다.
지난번에야 온천에 몇 달씩 뭉개고 있느라 우연히 리다를 만났을 뿐, 시일이 급한 상황에서는 그녀가 사는 곳으로 직접 찾아갈 필요가 있었다.
"빨리 만났으면 좋겠네...."
메이사가 허리의 흉터를 매만지며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처음 다쳤을 때만 해도 비행 마법으로 걸을 수 있으니 괜찮다고 호언장담하던 그녀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이를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배변 문제부터 시작해서 하반신을 쓸 수 없다는 것이 가져오는 여러 불편을 하루하루 실감한 탓이다.
다행히 그녀의 그런 문제를 공감해준 비제의 빠른 비행 덕에 투란 일행은 곧 라비타스의 수도, 메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우, 넓구만."
"가면 절대 벗지 마, 솔."
"걱정 붙들어 매셔."
라비타스의 수도, 메렘은 아라비온의 수도인 모르겐에 비해 훨씬 작고 아담한 도시였다.
시라프 습지 자체가 인구 부양력이 부족한 탓에 큰 도시를 건설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래도 인구 십오만이 넘는, 여느 평범한 도시들쯤은 간단히 압도하는 규모의 대도시였지만.
투란은 도시에 들어가기 전 가면을 벗어 솔리프에게 양도했는데, 이는 라비타스 가문 내에 솔리프의 수배서가 나돌고 있음을 알아서였다.
다행히 그 당시에는 두 라비타스 귀족 모두 초상화를 본 적 없어 솔리프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직접 본가에 찾아간다면 누군가는 이를 알아챌 게 분명했다.
흉내쟁이 성유물과 한 쌍이 아니면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꿀 수는 없으나 시체의 얼굴을 본뜨는 기능은 그대로인지라, 지금은 지나가다 발견한 어느 사냥꾼 청년의 시체에서 얼굴을 본뜬 상태였다.
이를 쓴 솔리프는 짐꾼처럼 투란 일행의 뒤에 선 채 여러 가짜 짐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그 위에 앉은 비제가 비웃듯이 솔리프의 머리를 꾹꾹 밟았다.
"야, 그만 안 해?"
비제와 솔리프가 투닥이는 소리를 들으며, 투란 일행은 메렘 시로 진입했다.
메이사는 비행 마법으로 움직이는 대신 투란이 안아든 상태였는데, 아직 그녀의 기술이 자연스럽게 걸어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는 아니어서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야 상관없지만 도시 한복판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그녀가 아라비온의 귀족이라고 광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잠시 후, 투란은 지나가던 경찰 한 명을 불러 기사를 불러오도록 했다.
적당히 최상위 귀족 수준의 마력을 투사한 뒤 리다의 지인임을 밝히자 만남은 초고속으로 이루어졌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다행히 라비타스 구성원들의 거주지는 아라비온처럼 철저히 고립되지 않았기에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저택은 무른 대지 탓에 고층 건물이 없어 크고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독특한 양식에 고풍스러운 기품이 느껴졌다.
곧장 응접실로 향하자 라비타스의 노부인, 리다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물담배로 보이는 것을 피우며 투란을 반겼다.
"반갑네, 젊은 투란. 미샤 양도...이런, 그때는 그냥 친구라더니 그 사이 더 사이가 발전한 겐가? 젊음이 좋구먼. 잠시도 떨어지기 싫어하는 걸 보면."
메이사를 안아든 투란의 모습에 리다가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농을 던졌다.
이에 투란은 쓰게 웃으며 메이사를 옆의 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앉은 뒤 나지막이 물었다.
"생각하시는 그런 건 아니고...그보다, 옆에 계신 분을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리다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사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유난히 피로한 인상에 긴 은발이 인상적이었다.
외모로 보건대 최소한 그녀가 자랑하던 잘생긴 남편 중 한 명은 아닌 것 같았다.
곁눈질로 그를 바라본 리다가 다소 성가셔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내 지난번에 말했지 않던가? 바라하의 후계자가 탈주했다고. 그 아버지인 고디스 바라하 씨라네. 내가 자기 아들과 닮은 사람을 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오셨지."
97화
마주 앉은 이의 정체를 들은 순간, 투란은 재빨리 메이사의 손을 꽉 붙잡았다.
본능적으로 투란을 돌아보려던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나마 당사자가 이 자리에 없는 게 다행이네.'
들어올 당시 솔리프를 방랑 기사 출신의 짐꾼이라고 소개했기에 그는 하인 숙소에서 비제를 돌보며 쉬는 중이었다.
과거 첫 만남에서 보았을 때를 생각하면 솔리프의 연기력도 썩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갑자기 자기 아버지를 만났을 때까지 평정을 유지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고디스 씨, 이쪽이 내가 전에 말씀드렸던 투란 군과 미샤 양이라오. 공교롭게도 마침 딱 만나게 됐군."
"고디스 바라하입니다. 태양의 이름으로 두 젊은이에게 무한한 영광이 있기를."
고풍스러운 어조로 인사한 고디스는 다소 게슴츠레한 눈으로 투란과 메이사를 바라보았다.
상대를 탐색하려는 기색이 역력한 시선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투란 군. 혹시 그때 동행하던 솔이라는 사내가 어느 가문 출신인지 아는가? 내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그때 얘기했던 바라하의 후계자랑 똑 닮아서 말이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때 온천을 떠나고 얼마 안 되어서 헤어졌거든요."
"이런, 그렇다는구려. 고디스 씨. 유감이오."
이를 들은 고디스는 우묵한 눈으로 투란을 바라보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투란 씨라고 하셨지요."
"예."
"혹시 얼마 전 남해에서 해적단을 토벌하시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납니다만, 감히 사람들을 납치해서 부리는 족속들이 있길래 처리했죠."
그렇게 말한 뒤, 투란은 깜빡했다는 듯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도 그때 만나기는 했습니다. 해적들이 본거지로 삼는 섬이 세 개가 있어서 하나씩 처리하다가 마지막 섬에 방문했는데 이미 간부들을 다 처리해 버렸더군요."
이것은 투란이 즉석에서 떠올린 줄거리였다.
코비누스 해적단을 토벌하러 갔다가 자력으로 바라하의 귀족들을 처리한 솔리프와 만났으며, 이후 잠시 동행하다가 헤어졌을 뿐이라는 것.
'물론 이 정도로 의심을 완전히 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정말 투란이 바라하 귀족들과 충돌했는지 아닌지를 애매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충분히 수확이라 할 만했다.
"그렇군요...혹시 그 솔이라는 이가 어디로 떠난다는 이야기는 남기지 않았습니까?"
"서쪽으로 간다고는 들었습니다. 하늘 산맥의 이야기를 듣고 그 너머를 보고 싶다고 했던가요."
실제로 가보고 싶다고 한 적이 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마 저쪽도 이를 진지하게 믿지는 않겠지만.
"혹시 지금은 두 분만 동행중이십니까?"
"얼마 전에 방랑 기사 출신의 시종 한 명을 들이기는 했습니다. 성실한 짐꾼이죠."
이미 들어오며 솔리프를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닌 만큼 투란은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태연히 말했다.
그러자 이를 들은 고디스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혹시 그 시종을 한번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역시나, 흉내쟁이 신의 가면으로 변장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듯했다.
바라하의 후계자가 짐꾼 노릇을 할 리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답게 솔리프의 성격을 잘 알아서일 터.
불쾌감을 드러내며 거절하려던 그때, 리다가 가볍게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자, 고디스 씨!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좋소만 슬슬 나도 옛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구려. 자리를 좀-"
"대부인, 저는 아직 저 젊은이들에게 용무가 있습니다."
세 사람 중 솔리프로 의심되는 이가 시종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무언가 단서를 얻었다고 생각했는지, 고디스가 다소 흥분한 태도로 리다의 말을 끊었다.
그 무례함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잠시, 냉엄한 목소리가 응접실 안의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이보시오, 바라하."
젊은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항상 세상 다 산 듯 나른한 태도이던 리다지만, 지금 그녀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디스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그대를 손님으로 받아들여서 몇 주일 동안 섭섭지 않게 대접했는데, 그대는 내가 반가운 옛 친구를 만나는 것마저 방해하는구려. 심지어 보아하니 아예 심문까지 할 기세고."
"저는 그저-"
"내 그래도 어른이라고 손주보다 어린놈을 예의 차려 대했건만, 이젠 아주 우스워 보이던가!"
호통과 함께 빡 소리가 나며 부러진 담뱃대가 호피 위로 떨어졌다.
서슬 퍼런 기세에 고디스가 실례했다고 말하며 응접실을 나가자, 리다는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피곤한 작자라니까. 미안하네, 투란 군, 미샤 양. 손님들을 데려다 놓고 몹쓸 꼴을 보였어."
"저 사람이 제 시종을 의심하는 모양새던데, 혹시 찾아가서 해치려 들지나 않을까 걱정되네요."
"만약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이 메렘을 살아서 나갈 수 없으리라 장담하겠네. 감히 내게 그럴 수는 없어."
늘 온화하던 리다답지 않게 격한 반응인 것이, 아무래도 솔리프의 아버지 때문에 꽤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녀는 옆에 있던 종을 가볍게 울려 사람을 부른 뒤, 고디스가 투란 일행의 시종을 찾아가려고 하면 제지하라고 지시했다.
"저 사람은 언제 찾아온 겁니까?"
"아마 두 주가 좀 넘었을 걸세."
그렇게 말한 뒤, 리다가 다소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집에 돌아와서 초상화를 보니 자네들의 일행과 똑같은 얼굴이길래 가족들에게 흥밋거리로 이야기를 좀 풀었는데, 손주 하나가 마법기를 얻겠다고 바라하 쪽에 제보했지 뭔가."
그러고 보니 솔리프의 위치를 제보하기만 해도 꽤 괜찮은 마법기 하나를 준다고 했던가?
리다쯤 되는 이들에게야 무의미한 수준이겠지만 어린 귀족이라면 충분히 혹할 만했다.
"그런 거였군요...."
"괜히 자네를 성가시게 만든 것을 한 번 더 사과해야겠구먼. 내 그 아이는 따끔히 혼냈으니 부디 용서해주게나."
"용서라고 할 게 뭐 있겠습니까. 제가 비밀로 해달라고 했거나 한 것도 아닌걸요."
부탁할 것이 있어 온 만큼 투란은 부드럽게 리다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 * *
이후 몇 가지 잡담과 근황을 나누며 분위기를 풀어낸 뒤, 투란은 본격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그의 동료인 메이사, 지금 알려준 가명으로는 미샤가 크게 다쳐 치료를 맡기고 싶다는 것.
"음? 어디 다쳤는가? 겉으로 봐서는 멀쩡해 보이는데...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 보기 좋구먼그래. 그때는 너무 말랐었는데 지금은 훨씬 나아졌어. 좀 더 살이 쪄야 할 것 같지만."
원래 할머니들이 보기에 젊은이는 정말로 심각한 수준의 비만이 아닌 이상 지나치게 깡말라보이는 법.
리다의 말에 메이사는 멋쩍게 웃으며 옷을 슬쩍 걷어 허리 아래의 절단상을 드러내 보였다.
그 끔찍한 모습에 리다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이건?"
"얼마 전에 강한 마수를 사냥하다가 다쳤습니다. 급히 조치하기는 했습니다만 보시다시피 상태가 나빠서요."
"저런...자네들만한 귀족들이 이리 다칠 정도라니, 아이쿨보다도 강한 녀석이겠구먼."
투란은 잠시 아이쿨이 큰바다뱀과 싸우는 모습을 상상했다.
최상위에서 중위권 정도, 큰바다뱀의 마력을 흡수하기 전 솔리프와 동급의 마력을 가진 원숭이 대왕은 분명 막강한 존재지만 그 괴수 앞에서는 별 힘을 쓰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지요."
"그래도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서 다행일세. 물론 나 정도 되는 치유사의 힘을 빌리려면 원래는 금은보화로 방 하나를 채워야 하지만 말이야. 내 미안한 일도 있었으니 공짜로 해줌세."
장난스레 생색내는 리다의 말에 메이사가 정중히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다 님."
"뭘 이 정도 가지고. 어디, 지금 바로 해결을-"
메이사의 배에 손을 가져다대고 마력을 끌어올리기도 잠시, 리다의 안색이 변했다.
깜짝 놀란 듯 뒤로 물러선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미샤 양, 아니, 당신은 대체...?"
"이걸 먼저 이야기하려 했습니다만, 미샤가 좀 많이 강한 편입니다. 그래서 리다 님을 찾아온 것이고요."
리다는 의구심에 찬 표정으로 메이사와 투란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끙, 하고 신음했다.
아마 아는 대가문의 귀족 중 그녀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가진 사람이 있나 고민했으나 떠오르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정말로 비밀이 많은 친구구먼, 자네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다시 한번 보겠네."
다행히 리다는 더 캐묻는 대신 다시 메이사의 상처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가볍게 치료하려던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아예 윗옷을 반쯤 걷어 올리게 한 채 상처 부위를 돌아가며 매만졌기에, 투란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런."
"많이 안 좋은가요?"
"안 좋다고 해야 할지, 미약한 회복력으로 어설프게 붙인 탓에 안쪽이 엉망이야. 어쩐지, 아까 안아 들고 온 것도 다리가 안 움직여서 그런 거였구먼."
리다의 설명에 의하면 현재 메이사의 몸 안쪽은 말 그대로 대충 때워 놓은 것에 가까웠다.
그나마 내장과 혈관은 대충 맞춰졌으나 뼈와 신경, 근육 등은 말 그대로 아무렇게나 붙여만 놓은 상태.
이는 다쳤을 때 상처를 지나치게 우악스럽게 붙인 것은 물론이요, 치료에 사용한 회복약 마법기가 메이사의 수준보다 너무 하급품이라 그런 것이었다.
이렇게 대충 붙인 상처를 도로 고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치료보다도 더 강력한 회복 마법이 요구됐다.
"그러면...."
"아무래도 이를 고치자면 우리네 가주가 직접 힘을 써야 할 것 같네."
어지간한 대가문의 가주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성장한 메이사에게 압도적인 치유력을 행사할 만한 존재는 그뿐이었다.
"가주님의 힘을 빌리는 거라면 공짜로는 안 되겠군요."
"절대 안 될 일이지. 아니, 아마 어떤 대가로도 불가능할 걸세. 가주조차 이런 상처를 강제로 뜯어고치려면 아주 많은 힘을 소모해야 할 테니 말이야."
마법사 가문의 주인들이 어지간해서 본가를 떠나지 않는 것은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 가문과 가솔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물론 라비타스처럼 적이 없는 가문이라면 지난번처럼 간단한 온천 여행쯤은 다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힘을 대량으로 소모하는 상황은 피해야 했다.
"다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닐세."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잘못 붙은 상처를 강제로 교정하는 것보다는 갓 생긴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더 쉽다네."
리다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투란과 메이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말인즉, 그녀의 허리를 다시 한 번 자르고서 올바르게 붙이라는 의미였으니까.
"그, 그건...."
대답하는 메이사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는 것만 봐도 그 당시에 느낀 고통과 공포가 작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아요. 그래야 제대로 고칠 수 있다면."
"용기 있는 아가씨구먼! 좋네. 그렇다면 가주에게는 내가 따로 이야기해 보겠네."
"그 방식으로도 리다 님의 힘으로는 어렵습니까?"
"어렵지. 다른 부위라면 천천히 붙일 수 있겠지만 잘린 허리를 붙이다가 쉬고 다시 붙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닌지라 투란은 나지막이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방법을 이야기한 다음에는 치료비에 대한 것을 논해야 했다.
리다의 마력을 쓰는 것이라면 그녀의 호의를 팔아 공짜로 해줄 수도 있지만, 가주가 직접 나서는 이상 그럴 순 없었다.
"대가로 준비한 것은 있는가?"
"예. 재산이라면 꽤 있습니다."
과거 섬에서 캐낸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은 물론이요, 그것으로 모자란다면 성가신 업무 몇 개를 대신 처리해 주는 것으로 갈음할 생각도 있었다.
이를 들은 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러면 내가 오늘 가주에게 언질을 넣을 테니 그 아이가 시간이 나면 함께 만나 이야기해보세나."
무심코 가주를 '그 아이'라 칭한 리다의 말을 못 들은척한 채, 투란은 메이사를 안고 응접실에서 나왔다.
아까 전부터 밖에서 느껴지던 기척의 주인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투란 씨."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솔리프의 아버지, 고디스 바라하였다.
그는 조금 전 응접실을 나간 뒤 밖에서 줄곧 투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시종과 만나보겠다는 부탁이라면 거절하겠습니다. 보나마나 이상한 트집을 잡으실 것 같으니까요."
"아...그, 그렇다면 이거라도 좀 받아 줄 수 있겠습니까?"
조금 전 크게 혼난 탓일까, 다소 의욕이 꺾인 듯한 고디스는 고집을 부리는 대신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투란은 메이사를 안느라 두 팔이 묶여 있었기에 메이사가 그의 얼굴을 살피고는 대신 편지를 받았다.
"혹시 나중에 그 솔이라는...바라하의 후계자와 다시 만날 일이 있으면 부디 그 편지를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말한 고디스는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그대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말로 편지 한 장만 전해주려던 모양이었다.
"이 편지, 뭔가 이상한 건 아니겠지?"
"일단 느껴지는 건 없어."
그 말대로 성유물의 감각으로 보기에는 마력 한 점 없는 평범한 편지에 불과했다.
잠시 후, 주어진 숙소로 돌아간 투란은 가장 먼저 하인 숙소에 있던 솔리프와 비제를 불렀다.
"어떻게, 회복은 잘 됐냐? 음, 모양새를 보니 아닌 것 같긴 하네."
"아무래도 이곳 가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더라고."
"켁."
바로 돈 생각이 났는지 신음을 터트린 솔리프는 이내 하려던 말을 삼켰다.
침대에 앉아 있던 메이사의 표정이 무거워진 것을 감지한 탓이었다.
투란은 바람 마법으로 숙소 주변의 공기를 차단한 뒤 용건을 꺼냈다.
"그보다 너랑 관계 있는 이야기도 하나 있는데."
"뭔데?"
"여기 네 아버지가 있더라."
투란의 말에 솔리프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공포나 분노, 거부감 따위보다는 황당함에 가까웠다.
"그 사람이? 대체 왜!?"
"네 행적을 좇는 탐사대 비슷한 거로 동원된 모양이야. 안 그래도 나한테 시종 하나가 있다니까 너로 의심하고 있었으니 만나게 되면 조심해. 가능하면 아예 안 만나면 더 좋고."
"나 참...만나면 안 들킬 자신이 없는데."
솔리프가 평소 부모에 대한 이야기는 그다지 하지 않았기에 투란은 그와 그의 아버지가 어떤 사이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뉘앙스로 보건대 크게 원망하거나 하는 기색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네 아버지가 편지를 보냈더라."
"편지?"
"혹시 만나면 전해달라던데."
조금 전 받은 편지를 내밀자 이를 펼쳐본 솔리프의 얼굴이 진중하게 변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젠장, 안볼 걸 그랬어."
"왜?"
"뭐, 뻔한 이야기들이야. 날 탓하는 내용들...."
솔리프가 읽어보라는 듯 편지를 내밀었기에 투란은 이를 받아 메이사와 함께 읽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만 고디스의 편지는 온갖 고풍스러운 표현을 가득 넣은 탓에 가독성이 떨어졌다.
한참 이를 읽던 메이사가 짧게 요약했다.
"대충 정리하면...네가 가출해서 어머니가 슬퍼하고 계신다, 혹시 너를 데려오려던 가문의 정예들과 싸워 죽인 거냐, 만약 그렇다면 돌아와서 참회해라, 가주께서는 네 죄를 다 용서하겠다고 하셨다, 뭐 이런 내용이네."
"용서는 개뿔이. 수배서까지 내놓고선."
투덜거리는 솔리프의 목소리를 귓가로 흘리며 편지를 읽던 도중, 투란은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눈을 가늘게 떴다.
미묘하게 문장이나 띄어쓰기가 어색한 부분이 몇 개 보였던 탓이다.
"음...."
"왜?"
"아니, 여기 이 부분이 좀 이상해서."
"어디...아!"
투란이 가리킨 부분을 바라보던 메이사가 탄성을 터트렸다.
"여기 이 부분부터 두 글자씩 대각선으로 읽어도 문장이 나오게 되어 있네. 이런 거 옛날에 어머니랑 해본 적 있어."
"뭐라고 쓰여 있는데?"
솔리프의 물음에 메이사가 손가락으로 선을 그으며 글자를 읽었다.
"절대...돌아...오지...마."
98화
'절대 돌아오지 마.'
솔리프의 아버지, 고디스가 편지에 숨긴 문장을 읽자 숙소 안이 잠시 침묵에 잠겼다.
이후 세 사람은 또 숨겨진 문장이 있는지 여러 방식으로 읽어 보았으나 그 외에는 별다른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무슨 뜻일까?"
"아마 고디스 씨도 무언가 켕기는 게 있다는 걸 알아차리셔서 그랬을 수도 있지. 아니면...."
이를 본 솔리프가 아버지에 대한 동정심을 품어 접촉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이중 함정이거나.
투란은 속으로 떠오른 생각을 입 안으로 삼켰다.
"후."
뜻밖의 사실에 심란해서일까, 솔리프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두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메이사가 그런 그를 향해 물었다.
"만나볼 거야?"
"모르겠어. 정말로 아버지가 날 생각해서 저걸 남긴 거라면 이야기해 보는 게 예의겠지만. 아니, 사실 난 부모님이 날 키우며 보여준 애정부터가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했거든."
정말로 바라하가 솔리프를 신의 빙의체로 철저히 키워낸 것이라면 당연히 도출되는 결론이었다.
온갖 석연찮은 방식의 교육방식이 부모의 동의 없이 그에게 베풀어졌을 리 없으니까.
"만약 부모님이 정말로 날 사랑했다면, 그래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인질로 잡힌 탓에 날 쫓고 있는 거라면-젠장,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나? 그러고도 남을 것 같은데...."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것이 복잡한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탓에, 투란과 메이사는 뭐라 대꾸하는 대신 가만히 앉아 그의 푸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고민 자체가 무색했음을 알게 되었는데, 시종 한 명이 와서 고디스가 리다의 저택에서 떠났다고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떠났다고?"
"예, 그렇습니다."
"스스로 떠난 건가, 아니면 리다 님이 쫓아내신 건가?"
"저 같은 작은 자는 그런 것까지 알지는 못하는지라...."
하기야 하인들이 알면 무엇을 알겠는가.
곧장 리다에게 찾아간 투란은 고디스가 스스로 떠난 것이라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아마 자네들이 단서라고 생각했는데 별 소득이 없으니 떠난 것 아니겠나? 그렇다고 감히 여기서 힘으로 겁박할 수도 없을 테니 말이야."
빙그레 웃으며 말하던 리다가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다만 밖에서는 조심하게나. 라비타스의 권역 밖에서 저들이 자네를 노린다면 나라고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으니. 내가 대가문의 일원으로서 그 힘을 업었듯이 나 역시 가문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네."
손님으로 찾아온 투란을 보살피는 것이야 귀족의 의무이니 당연히 행할 것이지만, 젊은 친구를 위해 다른 대가문과 명분 없이 충돌할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숙소로 돌아와 이를 알려주자 솔리프는 허탈함과 안도가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구만...."
"결국 편지의 의도는 알 수 없게 됐네."
메이사의 말에 투란은 주머니에서 긴 은발 몇 가닥을 꺼냈다.
고디스가 응접실에서 떠난 뒤 몰래 챙겨둔 것이었다.
"이게 있으니까 물어보고 싶어지면 언제든 쫓아갈 수 있기는 해."
지금 투란의 마력으로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매개체 삼아 추적 마법을 사용한다면 수천 킬로미터 이상의 범위를 감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조금 무리한다면 바라하 본가로 돌아간 뒤에도 그 행적을 찾을 수 있을 정도.
투란의 말에 솔리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건 좀 더 나중에...일단 메이사가 회복되고 나서 생각해 보자고. 지금은 잘 모르겠으니까."
* * *
그로부터 며칠, 투란 일행은 라비타스 저택에서 나름 안락한 시간을 보내며 몸과 마음을 치유했다.
물론 메이사와 솔리프는 이 시간을 꽤 불편하게 여겼는데, 한 사람은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일일이 수발을 받아야 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시종으로 위장하고 있어야 했던 탓이다.
다행히 딱 일주일째 되는 날, 라비타스의 가주가 그들을 초대한다는 연락이 왔다.
투란 일행은 리다와 함께 수도의 중앙 궁전으로 향했다.
"그러고보면 투란 군, 미샤 양을 시종에게 맡기지 않고 늘 직접 안아서 움직이는구먼?"
함께 이동하던 도중, 리다가 메이사를 안아 든 투란의 모습을 보며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예? 아, 네. 이쪽이 편해서 말입니다."
메이사와 솔리프가 서로 서먹하거나 어색한 사이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투란을 중심으로 모인 '친구의 친구'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이렇게 움직여야 할 때는 투란이 직접 메이사를 안아 들었는데 그 모습이 흥미롭게 보인 듯했다.
"너무 질투가 심한 남자는 매력이 없다네."
"참고하겠습니다."
리다의 농담을 자연스럽게 받아넘기며, 그들은 궁전 가장 안쪽의 거대한 방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러 거대한 마수들의 박제와 섬세한 공예품 장식들.
그리고 투란의 시야에서만 보이는, 벽 전체를 둘러싼 마력의 흐름이었다.
'무슨 마법이 걸려 있기는 한 모양이지....'
가주의 처소 전체에 걸린 이 마법 때문인지, 투란은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 라비타스 가주 오셀의 마력을 감지할 수 없었다.
구석에는 거대한 호랑이와 사자가 한 마리씩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데, 둘 다 중위 귀족급의 마력을 가진 마수인 것으로 보건대 가주가 거느리는 애완동물인 것 같았다.
가주의 거처에 다른 사람이 머물지 않는 것은 아마 이번 치료 의뢰를 비밀스럽게 하고 싶다던 투란의 요청이 리다를 통해 전해졌기 때문일 터.
방의 가장 안쪽, 드리워진 베일 너머에서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내 힘을 원한다지?"
오셀은 이전에 투란 일행과 만난 적 있었음에도 전혀 모르는 사람인 척 태연히 질문을 던졌다.
공연히 그를 아는 척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낼 필요는 없는 만큼, 투란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장단을 맞췄다.
"예, 가주님. 제 동료, 미샤의 상처를 치료하기를 원합니다."
"대가문의 가주가 직접 힘을 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이해할 터."
나름대로 무게감 있는 어조로 말하기는 했으나 변성기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년 같은 목소리 탓에 조금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물론 여기서 오셀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는 끝장인 만큼 투란은 이를 꽉 물었다.
"가주님의 은혜에 보답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금과 은, 그리고 제 힘을 한 차례 사용하실 권리를 드리겠습니다."
"힘을 사용할 권리라."
귀족이 다른 이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계약은 의외로 꽤 자주 있는 것 중 하나였다.
주로 재산이 없는 방랑 귀족들이 풍요로운 영지 귀족들을 대상으로 이런 식의 거래 조건을 내밀고는 했다.
"단,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무고한 이를 해치는 일이 아닐 것, 목표와 기한이 명확한 일일 것, 제 능력으로 도저히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투란의 말에 오셀은 음, 하고 신음하며 수염도 자라지 않았을 턱을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마침 그 조건에 딱 맞는 일이 하나 있기는 하군."
"무엇입니까?"
"늪지 간척."
간척이라면 물이 찬 곳을 메워 땅으로 만드는 일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대부분이 습지인 라비타스의 영지에서 당연히 필요한 일일 것 같기는 했다.
"어디를, 얼마나 해야 합니까?"
"시라프 습지 남부의 콜로아 지역. 아마 개척해야 할 영역은 가로 세로로 각각 백 킬로미터쯤 될 거다."
크기까지 바로 나오는 것으로 보건대 투란이 제시한 조건을 리다에게 미리 듣고 대가를 준비해둔 모양이었다.
"가문의 힘을 동원하기 쉽지 않은 사업인 모양이군요."
"범위도 넓고 지형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제법 성가신 마수가 여럿 살고 있다더군. 아마 혼자서 하자면 수십 년쯤 걸릴지도 모르지."
강한 마수의 마력이라면 대가문의 귀족들 역시 탐내는 것이니, 저 성가시다는 것은 마력이 별로 강하지 않은 주제에 특수한 능력을 지녀 사냥하기 까다로운 것들일 터였다.
원래 시라프 습지의 마수들은 이렇게 먹을 것 없으면서 잡기 힘든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라비타스의 지원은 전혀 없이, 저 혼자 해야 합니까?"
"사람을 쓰는 것은 자유다만 고용비는 네가 부담해야 할 거다."
잠시 고민하던 투란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귀족들이라면 오셀의 말대로 최소 십 년 이상을 노력해야 할 일이지만, 준 가주급 귀족 세 명의 힘을 동원한다면 그렇게까지 오래 걸릴 일이 아니리라는 계산이었다.
정말 운이 없어도 몇 달이면 되지 않을까.
"좋습니다."
"쉽게 이야기가 끝나서 다행이군."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는가 싶었는데, 어째서인지 오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멀뚱히 투란을 바라보기만 했다.
"뭐지? 이야기가 끝났으면 나가보도록."
"치료는 언제 진행됩니까?"
"당연히 네가 할 일을 마친 뒤다."
오셀의 말에 투란은 고개를 저었다.
"늪지 간척을 위해서는 미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치료부터 먼저 해주십시오."
"가문도 없는 방랑 귀족의 무엇을 믿고? 치료만 받고 도망치면 나로서는 아무 대가 없이 힘만 빼는 셈인데."
싸늘한 오셀의 대답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난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었다.
그때,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리다가 혀를 차며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시오, 가주. 마법을 쓰는 데 있어 몸 상태가 온전한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인데. 공연히 어렵게 돌아갈 필요가 있겠소?"
"누이!"
"기왕 일을 맡길 거면 서로 마음 상한 채 맡기는 것보다는 즐겁게 하는 것이 나을 터."
그렇게 말한 뒤, 리다가 투란과 메이사를 흘깃 보더니 덧붙이듯 말했다.
"거기다 많이 본 바는 아니지만 저 젊은이들이 그렇게 우리를 기만하지는 않을 것 같소. 별도로 이야기했던 바도 있고, 무엇보다도 평생 안 다치고 살 게 아니고서야 감히 그런 짓을 할까."
별도로 이야기했던 바라면 아마 예전에 말한 생령술사 건에 대한 것일 터였다.
어린애 대하듯 말하는 리다의 태도에 발끈했던 오셀이지만, 이어지는 말을 가만히 듣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손짓 한 번으로 베일을 걷었다.
이전에 본 적 있던 열대여섯 살 정도 되는 미소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라비타스 가주, 오셀이 투란과 메이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날 보고도 놀라지 않는군?"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흥."
코웃음을 친 오셀이 리다를 보며 말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누이."
"미안하오, 내 못할 말을 했구려. 앞으로 가주 앞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리다."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투란 일행에게는 시종일관 고압적인 태도이던 오셀이지만, 리다에게는 정말 그 나이대의 어린 소년처럼 절절매는 모습을 보였다.
투닥거리던 그들은 이내 투란 일행의 시선을 의식한 듯 흠, 하고 헛기침하며 말을 멈추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오셀이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함인지 처음처럼 위엄 있는 어조로 말했다.
"우선 실력을 보지. 내게 그런 요구를 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투란과 메이사를 향해 마력의 파장이 밀려왔다.
대가문의 가주, 이 세계의 최강자들 중 한 명이 직접 투사하는 막대한 힘의 격류.
본래 이런 식의 마력 투사는 어떠한 의지도 담기지 않아 아무 현상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보통이건만, 그 밀도가 너무 높은 탓에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에 투란과 메이사는 속임수 없이 순수하게 가진 마력을 모두 내보이며 이를 맞받아쳤다.
어차피 치료하는 과정에서 메이사의 본 실력이 들통날 것이요, 그렇다면 그 동료인 투란의 실력을 지나치게 낮게 잡아 봐야 의심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제 실력을 드러내야 노동력의 가치를 높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둘의 힘을 확인한 오셀은 놀라고 당황한 탓인지 한참 말이 없다가 거의 일 분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군, 좋다. 조건에 동의하지."
아마 오셀이 동의를 표한 데는 조금 전 리다가 말한 바가 큰 역할을 했을 터였다.
그들처럼 강력한 귀족은 일반적인 마법기 따위로 큰 부상을 치료할 수 없고, 그렇다면 지금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치유사인 오셀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으니까.
거기다 두 사람의 실력이라면 그조차도 어느 정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기도 했다.
이를 본 리다가 손뼉을 짝 치며 웃었다.
"잘 됐구려! 그러면 이참에 바로 처리하는 게 어떻겠소? 어차피 오늘 가주가 따로 마력을 사용한 일이 없던 것으로 아는데."
"그럽시다, 누이. 모두 따라오도록."
* * *
미리 준비해둔 듯, 자리에서 일어난 오셀은 앞장서서 가주의 처소 옆에 자리한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 방은 옆의 처소와 마찬가지로 벽과 바닥에 마력의 흐름이 잔뜩 깔려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침상으로 보이는 것이 몇 개 있었다.
"치료실이다. 병마를 불러오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힘이 깃들어 있지. 우선 시종은 나가도록. 짐승도 상처가 덧날 수 있으니 데려오지 말고."
"아, 옙."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오려던 솔리프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비제를 데리고 방 밖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오셀은 곧바로 방 전체에 정화 마법을 사용했는데, 아마도 몸에 나쁜 균 따위를 모조리 정리하기 위함인 듯했다.
과연 이들이 미생물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아니면 경험적으로 그래야 한다는 것을 습득하고 있을 뿐일까.
내심 궁금증을 키우던 사이 오셀이 침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눕도록."
메이사가 다소 겁에 질린 기색으로 침대에 눕자, 오셀은 구석에 놓여 있던 거대한 톱 하나를 가져왔다.
이 역시 꽤 강력한 힘이 깃든 마법기였다.
"이것으로 자를 거다. 아픈 게 싫다면 기절시켜 줄 수도 있는데, 머리를 때리는 거랑 호흡을 막는 것 중 뭐가 좋지?"
"그거라면 제가 도울 수 있겠습니다. 괜찮지, 미샤?"
"응."
"직접 하겠다고? 나야 귀찮은 일이 줄어서 좋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런 오셀의 오지랖이 무색하게도, 투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능숙하게 메이사를 기절시켜 침대 위에 눕혔다.
이를 본 두 라비타스 귀족이 이상한 사람 보듯 투란을 쳐다보았다.
"어째 익숙해 보이는구먼, 둘 다?"
리다의 말에 뭐라 대꾸하는 대신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오셀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아무래도 좋으니 빨리 시작하지. 내 시간은 비싸니까."
잠시 후 시작된 수술.
오셀이 주도하고 옆에서 리다가 보조하는 가운데, 투란은 조금 더 뒤에 물러서서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이를 관찰했다.
"우선 여기부터...음, 쉽게 잘리는군. 확실히."
오셀이 메이사의 허리를 잘라내는 동안, 투란은 바짝 긴장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이 자리에서 배신하면 당장 밖에 있는 솔리프를 불러와 그를 막아선 채 메이사를 다시 치료해야 할 테니까.
그러나 다행히 오셀은 메이사의 허리를 완전히 잘라낸 뒤 곧바로 치유 마법을 사용해 이를 고치기 시작했다.
손으로 섬세하게 내장과 뼈의 위치를 조정하는 것이 인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라비타스의 가주쯤 되면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건가.'
옆에 있던 리다 역시 치유를 돕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오셀이 직접 개입하는 것에는 못 미쳤다.
잘린 부위가 마치 찰흙처럼 순조롭게 붙는 모습은 실로 경이로울 정도라, 투란은 저 라비타스 가주와 싸울 때를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지간한 부상으로는 전투력을 떨어트리기 힘들겠어. 자기 자신을 치료하는 것이 남을 치료하는 것보다 더 쉬울 테니 더더욱....'
치유사와 정화자 혈통을 가진 라비타스 가주는 가진 힘에 비해 썩 위협적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목이 잘리지 않는 한 아무리 다쳐도 무한하게 치료하며 덤벼든다고 치면 생각보다 성가신 상대일 수도 있었다.
심지어 자기보다 수준 낮은 마법사라면 저보다도 훨씬 간단하게 고칠 수 있을 것 아닌가.
단체전이 된다면 일반적인 전투적 혈통의 마법사들보다 더 까다로운 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잠시 후, 모든 치료를 마친 오셀이 후,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주 자리를 계승하고 나선 나와 엇비슷한 수준의 마법사를 치료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대체 너희들은 정체가 뭐지?"
"투란과 미샤입니다. 지금은."
나중에 사이가 더 좋아지면 자세한 것을 말해주겠다는 암시를 남기자 오셀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도 더 캐묻지 않았다.
알아서 돌아가라며 오셀이 먼저 떠나버리고 십 분 정도가 지난 뒤, 메이사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끝났어?"
"응. 생각보다 간단하더라. 한번 일어나 볼래?"
투란의 말에 메이사가 조심스럽게 다리를 움직여 침상에서 일어나 두 다리로 바닥 위에 섰다.
가볍게 그 자리에서 몇 번 뛰어본 그녀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어났다.
99화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자주 받을 수 있는 치료가 아니니까 이참에 확실히 확인해야 해."
"전혀! 오히려 살면서 이만큼 몸이 가벼웠던 적이 없는 것 같을 정도인걸?"
허리를 다친 뒤의 불편함이 워낙 컸던 탓인지, 메이사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흥분하여 외쳤다.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해진 허리를 매만지던 그녀는 문득 여기 혼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못 본 걸로 해줘."
"어린 청춘들의 풋풋함은 언제나 보기 좋은 법이지. 우선 옷부터 갈아입으시게나. 지금 입은 것은 피에 젖어 보기 흉하니."
리다는 흐뭇이 웃으며 메이사를 옆에 있는 작은 방으로 데리고 가서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치료실을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솔리프와 비제가 고개를 휙 돌렸다.
"어떻게, 잘 치료되셨습니까?"
시종을 연기하는 탓에 솔리프는 존칭을 쓰며 투란과 메이사에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여 답하자 그가 불끈 주먹을 쥐며 기뻐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물론 옆에 있던 비제 역시 다행이라는 의미를 표현하고자 두 날개를 촥 펼쳤다 접기를 반복했다.
"자, 그럼 나가세나. 우리가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가주도 피곤할 테니. 자네들을 위해 가솔들을 다 물려둔 상태거든."
확실히 가주의 거처치고는 사람이 너무 없다 싶었다.
리다와 함께 가주의 거처를 나서며, 투란은 나지막이 감사 인사를 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다 님."
"내가 뭐 도운 것이 있던가?"
"가주님께 저희를 믿어 보라고 거들어 주셨잖습니까."
"내 생각에 자네들이 믿을 만한 친구들인 것 같아서 그랬지. 그러니 날 실망하게 하지 말아주게나. 살면서 배신은 많이 당해 보았지만, 칼에 자주 찔린다고 안 아파지는 것은 아니거든."
"절대로 그럴 일 없을 겁니다."
투란의 장담에 리다가 아무렴, 하고 너그럽게 웃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본가를 걷는 동안, 만나는 라비타스의 귀족들 모두가 리다를 보며 극진히 예를 갖췄다.
들어올 때도 봤던 모습이지만 조금 전 가주와의 대화를 떠올리니 이 모습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분명 최상위 귀족이면 대가문에서도 경외시되는 위치인 것은 사실이나 이들은 그 이상으로 그녀를 어려운 사람처럼 대하고 있었으니까.
"가주님이 리다 어르신의 사촌 동생이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네. 나이 차이로 보자면 내 손주들이랑 별 차이가 없지만 말이야. 어린 시절 집안 문제로 부모 손에서 자라지 못한 탓에 내가 직접 젖을 먹여 키웠지. 마침 같은 나이의 아들을 낳았었거든. 젖형제라서 그 아이와도 사이가 좋다네."
과연, 왜 가주가 리다에게 쩔쩔매며 다른 이들 역시 그녀를 어려워하는지 알 만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어머니나 다름없는 셈이니까.
아마 지금까지 굳이 언급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은 자신이 이 정도 존재이니 괜히 서로 약속을 어겨 얼굴 붉힐 일 만들지 말자는 의미일 터였다.
그때, 옆에서 걷던 메이사가 질문을 꺼냈다.
"가주님이 맡기신 콜로아 지역이란 곳이 그렇게 개척하기 힘든 곳이라고 들었어요."
"음, 사실 나도 직접 가본 적은 없다네. 이곳 시라프 습지에서도 가장 남쪽에 자리한 변경이니 말이야. 다만 워낙 환경이 험한 탓에 개척하는 데 필요한 노력에 비해 효율이 안 나와서 버려졌다고 듣기는 했지."
직접 가문에서 사람들을 부려 개척하기는 어렵지만 갑자기 생긴 공짜 노동력을 동원하기엔 딱 맞는 장소라는 뜻이었다.
'가로 세로로 백 킬로미터 정도라고 했던가.'
그냥 이동하는 거리라면 달리건 날건 한두 시간이면 충분할 공간에 불과하지만, 늪지대 전체를 개척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기는 했다.
무엇보다도 투란 일행은 간척에 대한 사전 지식 자체가 전혀 없으니 더더욱.
"그런데 굳이 그런 변방을 개척할 이유가 있는 건가요? 수도 주변에도 개척할 만한 습지는 많던데...."
메이사의 말대로, 단순히 농지 같은 것을 원한다면 굳이 저 남쪽 변방을 개척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질문에 리다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그곳 근처에 풍요로운 광산이 여럿 있다더구먼."
과연, 돈은 언제나 많을수록 더 좋은 법이긴 했다.
개척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리다의 저택에 돌아온 뒤, 솔리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정도 넓이라면 여기서 몇 년 정도는 꼼짝없이 묶여 있어야겠는걸. 어쩌면 십 년 이상일지도."
"그렇게나 오래 걸릴까?"
메이사의 물음에 솔리프가 허공에 빛으로 몇 가지 도면을 만들어내며 말했다.
"가로 세로로 백 킬로미터라며? 비제를 타고 날면 오가는 데 이삼십 분도 안 걸리는 거리니까 우스워 보일 수도 있지만, 범위로 따지면 엄청 넓은 거라고. 뭐, 무려 대가문의 가주에게 힘을 빌리는 와중에 이 정도로 너무한 일이라고 불평할 순 없는 노릇이지만."
심지어 다른 대가문의 가주들이 모두 가지고 있을 전투력이 아닌, 오로지 오셀만이 가진 능력인 회복 능력을 빌리는 것인 만큼 그 가치는 더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들 간척이라는 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는 알아? 난 늪지에 와본 게 이번이 처음이라 전혀 모르겠는데."
메이사의 물음에 솔리프 역시 고개를 젓더니, 두 사람 모두 투란을 바라보았다.
"나라고 잘 아는 건 아니긴 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자문을 좀 구해 보려고."
그렇게 말하며, 투란은 품에서 보석함을 꺼냈다.
"사서 어르신께?"
"아는 게 많은 분이시니 간척하는 방법도 도움을 주실 수 있지 않겠어?"
"하긴."
"일단 제대로 요령만 알면 그렇게까지 오래는 안 걸릴 거야. 내가 여울 혈통과 땅지기 혈통의 능력을 쓸 수 있으니까."
"오, 그러고 보니 그랬지. 잊고 있었어."
간척을 어떻게 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물과 대지를 다루는 혈통 능력이 도움이 안 될 리는 없었다.
거기다 메이사와 솔리프 역시 다른 귀족들에 비해 뛰어난 마법 재능 덕에 그런 종류의 마법을 제법 잘 다루는 편이고.
보석함을 열자 사서가 늘 그렇듯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말했다.
"아직 네가 준 조각은 분석이 안 끝났다. 너무 흐릿하게 흔적만 남아서 정보 자체가 망가졌어."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르신. 오늘은 다른 걸 좀 물어보고 싶어서 찾았습니다."
"다른 것?"
"어르신! 혹시 늪지 간척의 비법 같은 거 아십니까?"
솔리프의 물음에 사서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모른다."
"켁."
"그런 방법을 써놓은 책 따위는 없었으니 어쩔 수 없지. 다만 내가 아는 지식을 통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어느 정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만은."
사서가 가진 자연법칙에 대한 지식은 아직 투란 일행이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로 깊고도 넓었다.
그날 저녁, 세 사람은 끼니마저 거른 채 오랜만에 학생으로 돌아와 수업을 들어야 했다.
가만히 앉아 이를 듣던 비제는 이내 지루하다는 듯 두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 * *
사흘 뒤, 투란 일행은 리다의 저택을 나와 메렘 시의 남쪽으로 향했다.
리다는 성문 앞까지 그들을 배웅해 주었다.
"너무 힘들면 간간이 돌아와서 쉬다가 해도 좋다네. 가주가 빠듯하게 기한을 정한 것은 아니니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어르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들르겠습니다."
리다의 저택에서 머무는 것은 썩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마 솔리프가 시종 연기를 해야 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거의 베르크 저택에서 머물던 것만큼이나 편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리다와 인사한 뒤, 그들은 바로 옆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과 한 마리 마수를 향해 걸어갔다.
마흔 살 정도로 보이는 중년의 기사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위대하신 분들께 인사드립니다, 요즈라고 합니다."
"안내인인가?"
"예."
요즈는 투란 일행을 목적지로 안내할 길잡이이자 도망치지 않고 성실히 일하는지를 확인할 감시자로 가주가 보낸 이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리다의 증손주이기도 했다.
"리다 어르신께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잘 부탁하지."
"영광입니다. 그러면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요즈의 옆에는 몸길이만 육 미터가 넘는 거대한 도마뱀 마수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는데, 등 위에는 앉거나 누울 수도 있을 정도로 큼직한 안장이 놓여 있었다.
이 마수는 목적지인 콜로아 지역까지 걸어가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며 가주가 빌려준 것이었다.
"자, 키키 님, 잘 부탁드립니다."
가주가 소유한 마수라서 그런 것일까, 요즈는 자기가 부리는 도마뱀 마수에게마저 존댓말을 했다.
정작 그 도마뱀은 탈것 자리를 뺏겨 심통이 난 비제가 머리 위로 올라가 부리로 콱콱 찍자 겁에 질린 듯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지만.
잠시 후, 투란 일행이 모두 탑승한 것을 확인한 요즈가 앞에서 무언가를 몇 번 두드리니 거대 도마뱀이 일어나서 움직였다.
턱, 턱, 느긋이 걷는 듯하지만 그 속도는 귀족들이 가볍게 뛰는 속도와 비슷할 정도로 빨랐다.
"여기로 와 보게, 필. 혹시 내가 죽기라도 하면 자네가 키키 님을 몰아야 하니까. 간단한 요령을 알려주지."
"예, 어르신. 뭐든지 가르쳐 주시면 배웁죠."
우습게도, 방랑 기사 출신의 시종 '필'을 연기하는 솔리프는 요즈의 아랫사람이 되었다.
같은 기사에다가 겉보기에는 나이 차이가 두 배 이상 나며 저쪽은 가주의 하수인이었으니까.
물론 솔리프는 과거 해적들이 뒤통수를 후려쳤을 때조차 허허 웃던 이답게 태연히 요즈를 윗사람처럼 여기며 귀족 나리들을 대접하는 방법을 배웠다.
대체 시종이면서 왜 이렇게 아는 게 없냐고 혼까지 나면서.
옆에서 이를 보던 메이사가 투란에게 작게 속삭였다.
"보다 보니 좀 불쌍한데, 언제까지 저렇게 연기해야 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곳은 엄청 변방이라고 하니까 소문이 안 샐 테니 괜찮겠지. 뭐, 본인도 즐기는 것 같으니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며 투란은 솔리프의 아버지, 고디스의 머리카락을 이용해 추적 마법을 사용했다.
한참 멀리 떨어진 서북쪽에서 그의 기척이 느껴졌다.
"바라하 귀족들은 서쪽으로 이동한 거 같네. 내가 준 단서를 그대로 받아들인 모양이야."
저들이 서부를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투란 일행의 행적을 찾아내는, 그래서 다시 그들을 찾아오는 데는 정말로 까마득히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어쨌든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두 귀족과 기사인 척하는 귀족 한 명, 기사 한 명으로 이루어진 일행은 거대 도마뱀에 탑승한 채 착실히 남쪽으로 쭉쭉 내려갔다.
도마뱀 마수, 키키는 이곳 환경에 잘 적응한 생물이라서 그런지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숲이며 늪지로 뒤덮여 길조차 없는 곳을 순조롭게 돌파했다.
들르는 마을이며 도시마다 마수의 안장에 달린 라비타스의 깃발을 보고는 고개를 넙죽 숙이며 가장 좋은 숙소를 내준 덕에 이동 시간은 조금 길어졌으나 여행 자체는 편안했다.
"언제쯤 도착할까요, 어르신?"
"이 속도면 아마 일주일이면 될 걸세. 위대한 분들이시여, 앞쪽에 있는 절벽을 바로 내려가면 시간을 크게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하지."
요즈는 수행원치고는 당당하게 투란에게 이런 요구를 하기도 했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투란 일행의 부하가 아닌 라비타스 가주의 직속 부하였으니까.
투란은 성유물의 땅지기 혈통을 활성화한 뒤 절벽의 경사를 조종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만들어냈다.
이 정도는 본래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혈통 능력이 있는 쪽이 마력 소모가 훨씬 덜했다.
"이야, 대단하십니다. 투란 님! 과연 신들의 후예!"
솔리프의 너스레에 투란과 메이사 두 사람 모두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열흘 정도를 남하한 끝에, 투란 일행은 라비타스 영토의 최남단인 콜로아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입니다."
"와...."
"이야기는 들었지만 진짜 마경이 따로 없네."
본래 시라프 습지는 다른 대가문들의 영지에 비해 자연환경이 척박하고 인구밀도가 낮은 편이었지만, 콜로아 지역은 그중에서도 특출났다.
가장 가까운 콜로아 시에서 오십 킬로미터 정도를 더 내려간 곳부터가 투란 일행이 개척해야 할 지역이었는데, 딱 봐도 간척된 지역과 울창한 밀림 아래로 물이 잔뜩 고인 습지대의 경계가 나뉜 것이 보였다.
"여기서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큰 강 하나가 더 있고, 동쪽으로는 산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언덕이 있습니다. 그 안쪽이 가주님께서 지시하신 개척 영역입니다."
"우선 한번 둘러나 볼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요즈는 투란의 요청대로 도마뱀을 몰아 그들이 개척해야 할 지역을 크게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본래 습지를 돌다 보면 마수가 여럿 나오기는 했으나 이곳의 마수는 유난히 인간에게 적대적인 탓인지 자주 그들을 공격해왔다.
"또 나왔네."
도마뱀 위에 탄 채, 투란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날아드는 거대 곤충 마수 한 마리를 태워 죽였다.
그렇게 죽인 녀석의 마력을 빨아들여 흩어내느라 잠시 멈추기를 반복해야 했던 탓에 간척지대를 모두 돌아보는 데는 거의 열 시간이 걸렸다.
모든 순회를 마친 뒤에는 측량용으로 박아 놓은 나뭇가지에 추적 마법을 사용해 거리를 대충 측정했다.
"어때?"
"딱 맞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이야기한 거랑 크게 다른 범위는 아닌 것 같네."
하기야 그 라비타스 가주가 설마 이런 것으로 사기를 치겠는가.
그렇게 개척해야 할 영역까지 모두 확인한 뒤, 요즈가 투란 일행을 향해 고개를 넙죽 숙여 보였다.
"그러면 저는 키키 님을 가주님께 반납하고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은 우리끼리 알아서 간척 작업을 진행하면 되는 건가?"
"그건 제가 감히 어찌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말은 정중하지만 결국은 알아서 하라는 소리였다.
"그러면 데려다 주고 오도록. 다시 돌아오려면 한두 달 정도는 걸리나?"
"아마도 그쯤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부디 건강하시기를."
인사와 함께 요즈가 도마뱀을 가지고 떠난 뒤, 투란 일행은 덩그러니 개척 지대 앞에 남겨졌다.
솔리프가 가면을 벗으며 본 모습을 보였다.
"후, 이 잘 생긴 얼굴이 오랜 시간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니. 끔찍한 일이야."
간만에 나온 헛소리에 두 사람 모두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솔리프가 머쓱한 표정으로 가면을 넘겨주더니 팔을 걷어붙였다.
"자! 그러면 시작해 보자고, 근데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사서 어르신이 말했잖아. 물을 빼고 땅을 다지는 것부터 해야 한다고."
"아, 그랬지."
"우선 물을 빼서 보관할 경계부터 만들자. 강 쪽에서 시작하는 게 편할 것 같은데."
투란의 의견대로, 그들은 우선 비제에 탄 채 남쪽 끝의 강변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범람한 물이 북쪽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바로 이 습지대의 발생 원인 중 하나였다.
"일단 이거부터 막아둬야겠지."
투란은 성유물을 조작해 땅지기 혈통을 활성화한 다음 대지 변형 마법을 사용했다.
얼마 전 절벽에서 내려가는 길목을 만들 때와 달리 막대한, 잠시나마 허탈감이 들 정도로 많은 양의 마력이 소모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큼 지금 투란이 구현한 현상의 규모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원래도 여러 차례 연습해 익숙했던 기술, 혈통 능력, 그리고 준 가주급의 마력.
세 가지 요소가 더해진 결과, 그들이 선 장소부터 시작해서 수백 미터 너머까지 거대한 대지의 벽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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