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신적 존재들이 으레 그렇듯 이미르의 말에는 천상의 것으로 짐작되는 정체불명의 단어가 섞여 있었으나, 투란은 익숙하게 이를 분리하여 확실한 내용만을 정리했다.
무슨 수로 살아 있었냐느니, 수천 년 동안 어디 숨어 있었냐느니 하는 것들을.
이를 통해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명확했다.
밤 사냥꾼 오타스는 현재 자하르를 지배하고 있는 신이 아니라는 것.
아니, 오히려 현대에 살아남은 신 이미르는 그가 이미 먼 고대에 사멸했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거 곤란한데....'
투란은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당황하여 굳은 표정을 상대에게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을 테니까.
기존에 세웠던, 자하르를 지배하는 신의 하수인인 척하려던 계획이 완전히 백지화된 상황.
보통 사람이라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을 것이나 투란은 그 상황에서도 최대한 머리를 굴려 새로이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할 방법을 궁리했다.
사고 가속까지 이용하여 고민한 덕에 고작 일 초 정도 만에 제법 그럴싸한 방안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분은 언제나 존재하셨다. 너희들이 몰랐을 뿐이지. 밤 사냥꾼은 누구에게도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까."
투란이 새로이 짜낸 전략은 바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밤 사냥꾼을 자신의 뒷배로 내세우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이미르는 다소 어리둥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딱 그놈이나 할 만한 소리구만...그래서, 오타스가 전하겠다는 말이 뭔데? 그보다 말을 전하고 싶은 쪽은 나야! 전에 우리가 그렇게 나쁜 사이도 아니었는데 이딴 식으로-"
"그분은 부활을 위해 오랜 세월 은신처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신다."
투란이 말을 잘라먹자 불쾌함을 느꼈는지, 이미르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어지는 말 역시 빈정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 역사책이라도 보고 싶다는 건 아닐 테고?"
"살아남은 신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각각 어느 가문을 지배하고 있는지 말해."
"아, 그런 거? 대답해주기 어렵지는 않지. 우리끼리는 큰 비밀이랄 것도 아니니까. 근데...."
이미르가 침을 퉤 뱉으며 멸시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듣고 싶으면 우선 이거부터 풀어, 이 멍청한 엔피씨 새끼야! 어딜 감히 신 앞에서 건방지게 이래라저래라야?"
누가 보면 사슬로 묶인 쪽이 그가 아니라 투란이라고 착각할 만한 태도였다.
아마 긴 세월 인간의 몸을 장난감처럼 옮겨타며 살아온 신적 존재로서의 오만, 그리고 레노드의 몸이 죽어도 자신의 영혼은 온전하리라는 보장 덕일 터.
투란은 그런 이미르를 말없이 몇 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몸이 죽고 네 영혼이 온전히 돌아갈 것을 믿나 본데, 밤 사냥꾼께서는 내게 영혼을 수확하는 방법을 내리셨다. 네가 정 말을 듣지 않는다면 영혼만 가져와도 좋다는 허락도 받았고."
투란의 말에 이미르는 겁먹는 대신 얼굴을 찡그리며 분노한 기색을 드러냈다.
"지랄. 정말 그런 방법이 있다면 진작 써먹지 왜 말로 설득하고 있냐? 애초에 오타스가 가진 직업 중에 그럴 능력이 있는 것도 없잖아!"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는 허세와 달리, 그의 몸에서는 옅은 공포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혹시나, 하고 의심 정도는 하고 있다는 뜻.
그나마 겉으로라도 태연한 척 위장하는 것은 아마 긴 세월을 살며 익혀낸 처세술 덕일까.
투란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윽박지르듯 말했다.
"그분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이 얻으신 힘이 뭔지는 감히 너나 나 따위가 짐작할 게 아니지. 다만 그분께서 경고하신 것을 말해주자면, 이걸 쓰다가 잘못하면 영혼이 망가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거야. 기껏 얻어낸 정보원이 그렇게 되어서야 우리로서도 아쉽지. 그게 말로 설득하는 이유다."
"뭐...."
"하지만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한다면 그 몸째로 풀어주는 것은 물론, 별도의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어.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으로."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대가?"
"진정한 불멸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지."
물론 그딴 방법 따윈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투란은 마음껏 공수표를 남발했다.
채찍 다음으로 당근을 제시하는 화술에 잠시 침묵하던 이미르가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자세히 말해 봐."
"너희들처럼 필멸자의 몸에 기생해 치졸하게 삶을 연명하는 게 아니라 온전한 신으로서의 권위를 되찾을 수 있다는 거다. 지금 내 주인께서 그러신 것처럼."
그 말을 들은 이미르의 눈에 희미한 열망이 떠올랐다.
애초에 저들도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몸에 기생해가며 살아야 하는 것이 썩 달갑지 않을 터였다.
심지어 지금처럼 상급 귀족 수준의 몸에 들어가 있는 상태라면 더더욱.
"...정말 그딴 게 됐으면 이런 짓은 왜 하고 있냐? 지금 사막을 지배하는 나치 새끼도 오타스가 온전한 힘을 유지한 채 돌아왔다고 하면 오줌을 질질 싸면서 무릎 꿇을 텐데. 세계 정복도 식은 죽 먹기겠구만."
저 말인즉 이들이 긴 세월 쌓아온 힘조차도 전성기의 프레아 신족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그 강대한 아라비온 가주와 맞붙었다는 자하르 가주, 그리고 그 배후에 있을 나치라 불리는 신조차 감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그 사실에 내심 전율하는 한편, 투란은 다시금 위압적인 태도로 선택을 강요하여 이미르의 질문을 뭉개버렸다.
"그에 대해서도 대가를 지불하면서 모두 알려주지. 이제 선택해. 거래할 건지, 아니면 영혼이 소멸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가며 의리를 지킬 건지."
오만하게 굴던 조금 전과 달리 이미르가 두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고민에 빠진 기색을 보였다.
아마 영혼을 잡아채겠다는 위협에 대한 일말의 공포, 그리고 신의 몸을 되찾을 수 있다는 보상에 대한 유혹 때문일 터.
심지어 그것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조차 썩 대단한 정보가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현대에 남은 신들이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는 정보는 그 비밀을 아는 이들에게 있어 꼭 숨겨야 할 것도 아니니까.
잠시 후, 이미르가 다소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속한 쪽에 대해서는 말 못 해. 우리 대장은 밖에서 자기랑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면 그 사실을 알 수 있거든."
'대장'을 언급하는 순간 이미르의 얼굴에는 영혼의 소멸을 언급했을 때보다도 더 큰 두려움이 나타났다.
자신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만으로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말에 투란은 왜 도서관의 사서가 납치당했는지, 그리고 아라비온과 나긴을 지배하는 신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생명학자....'
밤 사냥꾼 오타스를 비난하고 지하 미궁을 만들었던 프레아 신족.
아마 도서관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이 문제가 된 것일 터였다.
이해하기 힘든 것은 메이사나 솔리프, 아시즈 등에게 관련 이야기를 했을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은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때라고 딱히 더 조심스럽게 언급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도.
"대신에 다른 진영 쪽 이야기는 다 알려주지. 어때? 어차피 오타스가 관심 있는 건 엔릴 사막 쪽일 거 아냐. 예전에도 거기서 나오기 싫어했으니까."
"좋아. 다만 엔릴 사막 밖의 세력도 모두 얘기해."
여기가 마지막 타협점임을 직감한 투란은 곧바로 제의를 수락했다.
이미르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침묵하더니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지금 자하르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의 수장은 나치야. 대대로 가주의 몸에 깃들어 있지."
"나치라는 건 어떤 신을 의미하는 거지? 이름인가?"
"그냥 그렇게만 전해도 돼. 어차피 오타스는 무슨 뜻인지 다 알아먹을 테니까."
투란은 더 자세히 설명해보라고 윽박지를까 하다 그만두었다.
밤 사냥꾼의 사자라는 설정을 유지하자면 저 말에 반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거나 하는 식으로 둘러대다 보면 대가로 내민 '진정한 불멸'이 의심받을 테고.
무엇보다도 굳이 자하르 세력을 먼저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미르는 아직 투란이 그쪽 패거리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밤 사냥꾼 오타스가 가장 먼저 그쪽에 관심을 가질 것으로 생각했거나.
"나치 밑에는 아마 서너 명쯤 더 있을 텐데 보통은 자하르의 요인이나 가신 가문의 구성원 중 누군가에게 빙의해 있거나 휴면 중일 거야. 딱 맞는 빙의체를 찾는 게 쉽지 않기도 하고, 직접 만드는 건 손이 많이 가니까."
"빙의체를 만든다라, 어려서부터 성격을 조작하는 걸 말하는 건가?"
"그것도 이미 다 안다고?"
"대충은. 자세히 설명해 봐. 생령술을 쓰는 건가?"
이것은 조금 전에 언급했던 것보다 더 중요한 정보라서 그런지, 이미르는 잠시 입을 오물거리다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이미 투란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는 기색을 내비친 것도 영향이 있을 터였다.
"...맞아. 생령술사의 도움을 받아서 몸을 옮기는데, 성격이나 습관 같은 게 비슷할수록 동조율이 높아. 보통은 지금 이 몸처럼 그냥 적당히 비슷한 녀석을 찾아서 빙의시키지만 잠재력이 높거나 특정한 소질이 있는 녀석은 어려서부터 특정한 성격이나 취미를 가지도록 조련하기도 해."
투란은 이미르를 둘러싸고 있던 메이사와 솔리프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짐작만 하고 있던 사실이 지금 이미르의 입을 통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영혼 빙의는 다 너 같은 방식인가?"
"뭐?"
"보니까 원래 몸 주인의 의식이 그대로 있는 것 같던데, 그렇게 공존하는 형식이 일반적이냐고."
솔직히 겉으로만 보면 그가 짐작하던 것보다 훨씬 온건한 방식이었다.
이래서야 영혼 강탈은커녕 공존에 가깝지 않은가.
신 하나쯤 몸에 키우면 호신용으로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그러나 이어지는 이미르의 설명은 그런 투란의 생각을 산산이 부숴 버렸다.
"나도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인격을 구성하는 영을 갈아치우고 동력인 혼만 남기는 거라고 했던가? 대충 그래서 원래 몸 주인의 인격은 그냥 뇌에 남은 정보로 이뤄지는 반사 작용일 뿐이라던데. 내가 빠지면 바로 식물인간 신세지."
피해자가 될 뻔했던 두 사람이 가볍게 몸을 떠는 것도 모른 채, 주절주절 설명하던 이미르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마 투란의 질문이 영혼을 되돌리는 방법 쪽으로 이어지리라 여겼기 때문인 듯했다.
혹시라도 자신의 목숨 보전에 장애가 될 만한 이야기를 꺼내면 안 될 테니까.
이를 읽은 투란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자하르 가문에 있는 신들은 누구지? 현재 누구의 몸을 차지하고 있고?"
"내가 아는 건 깜둥이랑 총잡이 둘 뿐이고, 지금 누구한테 들어가 있는지는 몰라. 그쪽이랑 우리는 가벼운 협력 정도지 거기까지 공유할 만큼 친하진 않아서."
아라비온-나긴과 자하르가 별개의 세력이고 교류도 드물다니, 이 역시 실로 유익한 정보였다.
필요할 때 둘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게 생각보다 훨씬 유의미하리라는 의미니까.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갯짓으로 더 말해보라는 뜻을 전했다.
"카마인은 변호사가 지배하고 있는데 우리랑은 아예 적대 관계야. 인어들이랑 결탁하고 있거든."
"인어랑 결탁했다고?"
"그래. 생전에도 인어공주랑 결혼하겠다느니 뭐니 지랄하더니 꿈을 이룬 거지, 미친 물고기 박이 새끼...."
문득 이전에 만났던 인어 왕자 아르마니가 떠올랐다.
가족들에게 왜 인간을 먹는지 물어본다던 그 소년은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어쨌든, 신들조차 경계할 뿐 함부로 덤비지 못할 정도라면 인어들의 저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인 듯했다.
설마 인어 왕쯤 되면 큰바다뱀으로 변할 수라도 있는 것일까.
"계속해."
"루반의 수장은 약쟁이야. 이놈은 꽤 예전부터 고립주의라서 못 만난 지 거의 천 년쯤 됐어. 아직 살아 있기나 한지 모르겠네."
루반은 바라하의 북쪽, 즉 대륙의 동북쪽에 자리한 대가문의 이름이었다.
역사와 수호자, 두 개의 육탄전 혈통을 결합하여 유일하게 육탄전에 특화된 대가문이라던가?
전에 솔리프가 말했던 결투장 역시 저 가문의 영토에 있다고 했다.
"바라하는?"
"그쪽이...정비공이던가? 바뀌었을 수도 있는데 확실하진 않아. 걔들도 고립주의까진 아닌데 좀 자기들끼리 노는 편이거든. 그나마 나치 쪽이랑은 좀 친하니까 그놈은 알고 있을지도."
과연, 바라하와 자하르 사이의 연계가 비교적 긴밀해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프레아 신족들에게도 거리의 제약은 작지 않은 것인지, 대륙 동쪽의 가문들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잘 모른다는 대답만이 이어졌다.
그런데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니 남는 대가문이 하나 있었다.
"라비타스는?"
"거기는 아마 아무도 없을걸?"
"왜지?"
"그야 뭐...가문을 지배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로 협의한 게 있으니 몰래 삼켜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기니까. 실제로 전에 황무지나 숲에 있던 대가문들은 지배하려다가 들켜서 몰살시켰거든. 거기다 몸을 얻는 게 아예 공짜인 것도 아니고."
정확한 조건까진 언급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어느 대가문을 지배하고 빙의를 이어나가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들 역시 어느 정도 규모를 이루어야 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몸을 옮기는 동안 그걸 도와줄 이가 한둘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저 말대로라면 그 라비타스의 어린 소년 가주는 진짜로 신이 깃들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이미르의 말 하나만 믿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면 99% 정도라고는 봐도 될 것 같았다.
"그러면 너희들이 통제하지 않는 생령술사도 있나?"
"없지? 애초에 흔하지도 않은 놈들이었는데 진짜 싹싹 긁어모아서 처리했으니까...어디 숨겨놨는지는 말 못 해."
"그건 됐어."
궁금하긴 했지만 물어봐야 유의미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게 뻔했다.
그렇게 몇 차례 더 문답을 나눈 뒤,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난 이미르가 말을 끊었다.
"이봐, 이 정도면 난 충분히 말한 것 같은데 슬슬 알려주지 그래? 그 불멸의 비밀이라는 거 말이야."
투란이 곧바로 답하지 않자 이미르가 조금 불안했는지 재빨리 덧붙였다.
"그냥 떼먹으면 우리 대장한테 이 이야기 다 말할 거야. 그 사...신이 원래도 오타스랑 사이 별로 안 좋았거든? 만약 그런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걸 들키면 재미없게 될걸."
그러니까 오타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거든 비밀을 알려달라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투란은 그 말을 듣고 작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면 그가 너라고 가만히 내버려 둘까? 나 같으면 싫어하는 이에게 비밀을 나불거린 부하 역시 썩 달갑지 않을 것 같은데. 거기다 애초에 그분께서는 비밀로 할 생각도 없으신데 말이야."
역으로 협박하는 태도에 이미르가 얼굴을 굳혔다.
그가 뭐라고 답하기 전, 투란은 차고 있던 단검을 꺼냈다.
"무슨...."
"네가 알려준 정보는 오타스 님께 모두 전해드리도록 하지. 대가는 나중에 그분이 직접 오셔서 드릴 테니 기다리도록 해. 이 사실을 너희 대장에게 전할지는 알아서 하고."
"잠깐! 이 몸은 내버려 둔다고-"
투란은 거기까지 말한 뒤 곧바로 단검을 휘둘러 이미르의, 정확히는 레노드의 목을 잘랐다.
하는 말로 보건대 적합한 빙의체란 걸 구하기도 쉽지 않은 모양이니, 아마 이를 통해 이미르의 활동을 어느 정도 봉쇄할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도로 부활할 때까지 자신이 알게 된 바를 그 '대장'에게 전할 수 없을지도 모르고.
허망함과 배신감이 섞인 표정을 짓는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은 몸뚱이에서 마력 덩어리 하나가 휙 빠져나왔다.
'저게 신의 영혼인가?'
안에서 혈통의 상징을 볼 수 있을까 생각했으나 그럴 여유조차 없이 마력 덩어리는 빠르게 북서쪽을 향해 날아가려 했다.
이에 투란은 곧장 품에서 보석함을 꺼내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미 사서를 꺼내서 비제의 옆에 붙여놓은 덕에 텅 비어 있던 보석함이 활성화되었으나, 이미르의 영혼일 그것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은 채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마지막으로 염동 마법과 생명체 조종 마법까지 써가며 제어를 시도하던 투란은 혀를 차며 보석함을 다시 집어넣었다.
옆에서 이를 보던 메이사가 말했다.
"안 됐나 봐?"
"응. 아무래도 그냥 정령만 잡을 수 있는 물건인가 보네. 잡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마 아라비온-나긴 세력의 수장일 생명학자에 대해서는 물론, 그가 쓰던 여러 신비한 능력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건만.
신들이 쓰는 힘이 뭐냐고 물었다가는 오타스의 사자라는 사실이 의심받을 것 같아서 묻지 못한 게 아쉬웠다.
* * *
투란 일행은 죽은 레노드의 시신을 적절히 수습하고 흔적을 정리한 뒤 비제가 몸을 숨긴 곳으로 이동했다.
걸어가는 도중, 입을 다물고 있던 솔리프가 다소 허탈한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신이 이렇게까지 많이 남아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네...심지어 일부는 이종족이랑 붙어먹기까지 하고 계시다고? 젠장, 내가 이렇게 작게 느껴질 줄은 몰랐는데."
"뭐, 모두 같은 편이 아니란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수확이야. 어쩌면 신과 싸우기 위해 다른 신의 힘을 빌릴 수도 있을 테니까."
물론 그들 사이에 어느 정도 느슨한 유대감이 있음을 고려하기는 해야겠지만, 투란 일행이 그들 중 한 패거리와 맞먹는 무력을 얻는다면 그때부터는 이 거대한 판도에도 직접 끼어들 수 있을 터였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그 힘을 쌓는 것.
도착한 세 사람을 보며 비제가 반갑다는 듯 울자 투란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힘을 쌓으러 가야겠지."
"어디로 가게?"
"우선은 북해로 갈까. 솔리프한테 보여주기로 한 것도 있고...바다는 육지보다 강한 마수가 많으니까."
일반적으로 크고 강한 생물일수록 더 강한 마수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의거하면, 육지 생물보다 커다란 바다 생물들이 훨씬 더 강한 힘을 타고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실제로 투란은 북해를 항해할 때나 남해를 돌아다니던 도중 강대한 마수의 기척을 몇 번 느낀 적 있었다.
배를 버리고 잠수해서 찾기 힘들거나 싸워 이기기 어려울 것 같아 물러섰을 뿐.
하지만 신화급 마수조차 압도할 수 있는 최상위 귀족 세 명이 힘을 합친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랐다.
86화
설원 지대를 떠나 동쪽으로 이동하며, 투란은 우선 사서의 상태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를 확인했다.
도서관과 거리가 멀어져서인지 힘이 빠진 것 같다고 하던 게 걸렸던 탓이다.
물론 그들에게는 정령을 다루는 능력도, 정령에 관한 지식도 없는 만큼 그 방식은 주먹구구식일 수밖에 없었다.
보석함에 몇 번 들어갔다가 나오며 원시적인 실험을 반복한 끝에 도출된 결론은 간단했다.
사서는 이제 완전히 보석함에 종속된 정령이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기존에 도서관과 연결된 상태에서 쓸 수 있던 권능 대다수를 잃었다는 것.
예를 들면 과거 사용했던 혈통을 알아보는 능력 등이 이에 해당했다.
"도움이 안 돼서 유감이구나."
사서는 늘 그렇듯 심드렁하고 무료한 태도로 말했으나, 눈을 마주치지 않고 슬쩍 피하며 은근슬쩍 미안해하는 기색을 비쳤다.
투란은 웃으며 그런 사서를 위로했다.
"괜찮습니다, 이미 전에도 신세를 많이 졌는걸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서의 쓸모가 없어진 건 아니었다.
과거 오렘의 도서관에 존재했던 모든 장서에 대한 기록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던 덕이다.
"-은빛 태양이 가진 혈통 중 알려지지 않은 두 개가 수호자와 치유사란 말인가요?"
"아마도. 사서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그는 자신을 '보호자'로 자칭하는 경우가 많았고, 다친 자에게 손을 얹자 상처가 나았다는 일화도 있으니 말이다."
비제가 끄는 그네 위에서, 투란은 맞은편의 허공에 앉은 사서와 함께 옛 신들의 혈통을 분석했다.
다른 이들도 들을 수 있게 사서의 말을 따라서 읊자 옆에 앉아 있던 솔리프가 휘파람을 불었다.
"정작 난 그런 이야기를 전혀 못 봤는데 말이지.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가문 내의 사서는 다 뒤져봤는데도 말이야."
"그렇다면 아마 고의적으로 은폐한 것이겠지. 유형, 그러니까 너희가 말하는 혈통을 완성할 수 있는 단서를 없애기 위해서."
왜 그런 것일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귀족들이 자체적으로 신의 혈통을 다시 완성시키는 것을 경계한 탓이 아니었을까.
비교적 잘 알려진 밤 사냥꾼의 혈통이야 이미 두 개가 사멸한 마당이니 딱히 거리낄 것 없어서일 테고.
"그러면 은빛 태양의 혈통은 방화광과 환영이 합쳐진 태양, 그리고 수호자, 치유사인가...솔리프, 친척 중에 그 두 혈통을 가진 사람 있어?"
"없을 거 같은데. 할아버지는 태양 혈통의 귀족이고 할머니는 평민 출신 첩이야. 어머니 쪽은 할아버지가 땅지기, 할머니가 태양 혈통이고. 그 위까지는 잘 몰라."
"확실히 좀 애매한걸."
투란의 경우처럼 평민 출신 할머니의 혈통 쪽에 변수가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은빛 태양의 혈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수호자와 치유사의 두 혈통은 신의 영혼이 가진 힘으로 대체하려던 것일까?
그때, 가만히 듣던 메이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에 비하면 내 쪽은 좀 더 확실하네. 아버지가 폭풍과 역사, 어머니가 부여사 혈통을 가졌으니까."
"폭풍 혈통 중 번개를 담당하는 혈통의 이름이-"
"뇌명사(雷鳴師)다. 현대에는 잊힌 이름이지만 말이지."
옆에서 듣던 사서가 나지막이 설명하는 것을 들으며, 투란은 작은 수첩 한 장과 목탄을 꺼내 글씨를 적었다.
[은빛 태양 = 방화광 + 환영 + 수호자 + 치유사 ]
[천둥 군주 = 뇌명사 + 대기술사 + 부여사 + 역사 ]
[밤 사냥꾼 = 추격자 + 사냥꾼 + 그림자 + 연금술사 ]
[혹한의 분노 = 광전사 + 서리... ]
그 외에도 땅지기 혈통이 시조로 모시는 대지모신(大地母神)이나 부여사 혈통이 시조로 모시는 절름발이 여신 등까지 적어 내려가니 제법 긴 목록이 만들어졌다.
솔리프가 천둥 군주가 적힌 부분을 짚으며 말했다.
"이대로라면 메이사는 그냥 스스로 신의 네 혈통을 다 얻을 수도 있겠는데? 투란처럼 추가로 개화한다는 전제하에서지만."
"설마."
"아니, 모를 일이잖아. 너나 나나 신들이 점지한 몸인데...젠장, 난 왜 이런 거 없지?"
솔리프의 칭찬으로 시작해 자학으로 끝나는 투덜거림에 메이사가 고개를 저으며 투란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희박한 가능성일 뿐인걸. 그쪽으로 따지면 투란이 훨씬 낫지. 이미 네 개 혈통이 보장되어 있잖아."
"글쎄, 짐작이지만 혈통의 숫자만큼이나 배합도 중요한 것 같아서 잘 모르겠네."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투란과 같은 혈통을 가진 프레아 신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배합이 신의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 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네 개의 혈통을 모두 얻는 것과 관계가 있는지도 아직 알 수 없었다.
다음으로 생명학자를 쓰려던 투란은 직접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쓰는 것 역시 주의를 끌 수 있겠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자신이 가진 성유물의 주인을 적어넣었다.
[익사한 신 = 파도꾼 + 흉내쟁이 + ? + ? ]
이를 본 메이사가 파도꾼이란 글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혹시 여울 혈통을 말하는 걸까?"
"아마 아닐걸. 전에 미궁의 문에게 듣기로 파도꾼 혈통의 특징 중 하나가 뛰어난 신체 능력이었거든."
그에 비해 물을 비롯한 유체를 다루는 여울 혈통은 육탄전에 썩 소질이 없는 편이었다.
과거 독자적으로 이쪽을 조사하며 비슷한 정보를 얻은 솔리프는 이 때문에 붉은 고래 해적단의 타산 등, 해적 출신 귀족 중 신체 능력이 뛰어난 이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혹시 어르신은 아는 바가 없으십니까?"
투란의 물음에 사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르겠구나. 내가 알 수 있는 건 도서관에 들어온 적 있는 책의 지식뿐이니까."
아무래도 그 신에 대한 기록이 오렘 시까지는 닿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쉬움에 혀를 차며 신의 혈통을 쭉 정리하던 도중, 투란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이건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혈통의 이름이란 거 너무 중구난방이지 않나?"
"뭐가?"
"대가문 사이에서도 폭풍이나 태양처럼 두 혈통을 하나로 합쳐 부르거나 합치지 않고 부르거나 하고, 어떤 혈통은 현상을 말하지만 어떤 혈통은 그 힘을 쓰는 사람을 말하고...."
대표적으로 태양 혈통을 구성하는 방화광과 환영만 해도 그랬다.
전자는 불 지르기를 즐기는 사람을 뜻하는데 후자는 능력 자체를 칭하는 말이 아닌가.
과거 케오른에게 처음 배울 당시에도 그런 점을 느껴서 물었으나 그 늙은 기사는 자기 역시 그렇게 배워서 알 뿐, 이름의 기원까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이를 들은 메이사와 솔리프가 서로를 바라보더니 마찬가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그냥 다 그렇게 불러서 그러려니 했는데."
투란과 달리 두 사람은 딱히 그러한 작명 방식에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묘한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잠시, 사서가 그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실제로 방화광을 화염 혈통이라고 부르거나 환영을 환영술사 혈통으로 칭하기도 했다. 어떤 호칭이 어떤 식으로 정착했는지까지는 나도 모르겠다만...음, 슬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구나. 피곤해졌어."
그렇게 말한 사서는 가볍게 하품하더니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연기가 되어 보석함으로 스며들었다.
이 역시 사서가 보석함에 종속되며 생긴 변화 중 하나였다.
장시간 밖에서 활동할 경우 피로를 느끼는 것.
사라진 사서를 잠시 내려다보던 투란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나는 비제를 바라보았다.
날갯짓에 힘이 빠진 것은 물론, 영혼의 끈을 타고 진한 피로감이 전해졌다.
"우리도 슬슬 내려가서 쉬자. 이미 나긴 가문의 영역은 한참 벗어났으니까 이 정도면 안전하겠지."
* * *
다케인 평야 북부의 작은 구릉지에 착륙한 뒤, 비제는 완전히 탈진해서 기절하다시피 잠들어 버렸다.
실제로 그럴 만한 강행군이기는 했다.
오렘 시까지 몇 시간을 날고 반나절 정도를 쉰 뒤, 곧장 북쪽으로 하루 반나절을 날았다가 잠시 쉬고 하루를 꼬박 비행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그냥 혼자 나는 것이라면 모를까, 금속으로 된 큼직한 그네와 사람 세 명까지 발에 매달고서.
만약 비제가 어지간한 상급 귀족 수준의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투란과 메이사가 번갈아 가며 바람 마법으로 비행을 보조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위업이었다.
야영지를 꾸려 하룻밤 머문 뒤, 투란 일행은 완전히 탈진한 비제를 번갈아 안은 채 직접 걸어서 동쪽으로 움직였다.
다행히 추적 마법으로 사람의 흔적을 찾아 피한 덕에 누군가와 마주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이틀 정도 꾸준히 맛있는 음식을 먹여주고 쉬어준 끝에 비제가 완전히 부활하자, 투란은 곧바로 그네를 꺼내 탑승하는 대신 비제의 발목에 편지 한 장을 묶어서 날려 보냈다.
한 시간 뒤 돌아온 녀석의 발목에는 새 편지가 묶여 있었다.
[나야 평소처럼 연극이나 보면서 지내고 있지 뭐. 너희는 다 잘 지내고 있지? 혼자 지내니까 적적해....]
그간 있었던 일을 줄줄이 적어낸 뒤 또 보고 싶다는 이야기로 끝나는 편지.
다 읽고 이를 접은 투란은 기다리던 이들에게 한 문장으로 내용을 요약해 주었다.
"아시즈는 잘 지내나 보네."
떠나기 전 아시즈와는 편지를 나눌 때를 대비해 암호를 교환해 두었다.
첫 문단에서 '연극'이 언급되는 것은 이 편지가 누군가의 감시 하에 쓴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비제, 내가 말했던 대로 움직였지?"
[응! 아시즈 만나기 전에는 크게 한 바퀴 돌았어! 나갈 때도!]
물론 눈에 띄지 않게 해 질 녘에 보내기는 했으나 혹시라도 누군가 비제의 모습을 보고 행적을 짐작하면 곤란한바, 투란은 비제에게 베르크 가문으로 바로 날아가는 대신 크게 빙 둘러 남쪽에서 날아오는 것처럼 위장하게 시켰다.
마찬가지로 돌아올 때도 남쪽으로 날아가다가 빙 둘러 다시 북쪽으로 올라오게 했고.
아무것도 달지 않고 나는 비제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를 생각하면 감히 그 뒤를 쫓아올 사람은 없을 터였다.
"다행이다...."
"잘 지낸다니 기쁜걸. 또 그쪽으로 술 한잔하러 가고 싶네. 음식도 맘에 들었는데."
가까운 친척인 메이사는 물론, 솔리프 역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역시 베르크 가문에서 제법 오랜 시간 대접받으며 머무른 만큼 어느 정도 정이 쌓였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비제를 타고 다시 반나절 정도를 날아간 끝에, 그들은 마침내 아라비온의 권역을 벗어났다.
"후아...."
메이사가 뒤쪽으로 멀어지는 다케인 평야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아라비온의 권역 안에 머무른다는 것에 꽤 압박감을 받았던 듯했다.
"괜찮아?"
"응. 이제 좀 안심이 되네. 저곳에 있는 동안 계속 뭔가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어."
아마 그 압박감의 정체는 오랜 세월 그녀를 짓눌러온 아라비온 본가의 존재, 그리고 천둥 군주의 빙의체인 아버지 바달일 터.
그런 메이사의 말에 솔리프가 딴지를 걸었다.
"근데 안심하는 게 맞나? 카마인 쪽에는 아예 이종족이랑 붙어먹은 신이 있다며?"
"아직 그쪽은 우리랑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으니까. 확신은 없지만, 어쩌면 동맹으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과거 만난 인어 왕자 아르마니의 사례로 보면, 인어는 흑요정이나 난쟁이에 비해 그나마 말이 통할 가능성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카마인의 신은 그들의 존재를 짐작조차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큰 만큼 크게 경계할 필요는 없을 터.
투란의 말에 솔리프는 음, 하고 작게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이동하기를 한 시간 정도 되었을까.
해가 저물어갈 무렵, 투란은 주변 풍경을 바라보다가 근방의 지형이 익숙함을 깨닫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오늘은 저쪽에 있는 마을에서 쉬자."
"벌써? 아직 좀 더 이동해도 될 것 같은데."
"난 찬성이야. 아직 저 녀석이 무리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슬슬 맛있는 거 먹고 침대에서 자고 싶기도 하니까."
메이사는 좀 더 빨리 다케인 평야에서 멀어지고 싶어하는 기색이었으나, 이어지는 솔리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계속 투란에게 의지해 음식을 급여 중인 그녀로서는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동료의 요구를 무시하기 어려웠다.
난 어차피 안 먹으니 상관없다는 식으로 여겨질 테니까.
잠시 후, 그들은 구릉 지대 위에 자리한 어느 언덕 마을로 들어섰다.
농사일을 마치고 오는 듯 괭이를 들고 터덜터덜 걷던 남자 한 명이 투란 일행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못 보던 얼굴들인데, 어디서 왔...어엇!"
이방인을 경계하는 듯한 태도이던 그는 투란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괭이를 떨어트리며 무릎을 꿇었다.
솔리프와 메이사가 투란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 뭘 했길래 저러냐?"
"사람이라도 죽였어?"
"죽이긴. 오히려 살렸지. 내가 맡긴 아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보러 왔다."
"아...무, 물론입죠! 잘 지내고 있습니다요, 아주!"
"안내해."
이 마을의 정체는 바로 화형꾼 오빌에게 멸망한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를 맡긴 곳이었다.
잠시 후, 투란은 일 년 만에 그 소녀와 재회할 수 있었다.
"구, 구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혹시 마을 사람들이 괴롭히거나 하지는 않고?"
"전혀요. 다들 잘 대해 주세요!"
다행히 대답하는 소녀의 태도나 체취에서 협박당했거나 하는 기색은 느낄 수 없었다.
눈에 띄게 학대당한 흔적 등도 없었고.
손이 좀 거칠기는 했지만 그거야 평민으로서 살아가자면 일 정도는 익혀야 하니 어쩔 수 없을 터였다.
확인을 마친 투란은 초조해하는 촌장을 불러 금화 몇 닢을 손에 직접 얹어 주었다.
"어이쿠, 송구스러워서...."
"이건 오늘 하룻밤 여기서 머무르는 값이다."
물론 그게 자신의 말을 충실히 이행한 보상임을 모를 정도로 촌장이 멍청하지는 않았다.
마을에서 가장 좋은 집을 얻어 머무르며, 투란은 두 사람에게 과거 이 근처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이미 오빌에 대한 이야기는 말한 적 있던 만큼 두 사람 다 이곳이 거기였냐며 감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런 말 해놓고 진짜로 들르는 건 아마 너밖에 없을걸. 나였으면 진작 잊어버리고 그냥 지나쳤을 텐데."
"말을 했으면 지켜야지."
"이럴 때 보면 상냥한 면이 있어."
싱긋 웃으며 메이사가 말하는 것을 듣자 투란은 불편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예전에 케오른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랑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냥,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가 이곳에 남은 여자아이를 챙기려 한 것은 어디까지나 책임감 때문이었다.
아주 잠시지만 그의 보호 아래 들어온 이상, 그녀는 투란이 책임져야 할 어린 양이었으니.
투란은 칼라마프의 시민들, 그리고 남해의 섬에서 구해낸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아보고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보복할 의향도 있었다.
이를 들은 솔리프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제 꽤 오래 지냈는데도 정말로 모를 놈이라니까. 한편으로는 피도 눈물도 없고, 한편으로는 물러 터졌고...."
"어쨌든 우리 둘 다 그 덕분에 도움을 받았잖아?"
"뭐, 그야 그렇지만."
메이사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솔리프 역시 더 할 말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 * *
마을에서 하룻밤을 머문 투란 일행은 곧바로 북해까지 직선으로 이동하는 대신,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아라비온과 카마인 가문 사이의 구릉 지대를 훑듯이 움직였다.
약 500년 전, 이 근방에 실종된 신화급 마수 한 마리에 대한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서에게 들었던 탓이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탐색하며 마주치는 마수는 하나같이 잡을 가치조차 없을 만큼 약한 것들이었다.
지나치게 공격성이 강한 녀석들만 제거해 가며 돌아다니기를 며칠, 솔리프가 슬슬 포기할 것을 제안했다.
"뭐,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거지. 여기에 그만큼 센 놈이 계속 살았으면 진작 사냥당했을걸. 아니면 그 원숭이처럼 여기서 키우는 놈이거나...."
"잠시."
솔리프의 말을 끊은 투란은 눈을 감고 후각에 신경을 집중했다.
옆에 있던 메이사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왜 그래?"
"이상한 냄새가 나서. 뭔가 타고 있는데...."
코끝으로 전해지는 매캐한 탄내가 묘한 기시감을 자아냈다.
마치 산불이라도 났나 싶을 정도로 독한 냄새.
잠시 후 떠오른 것은 화형꾼 오빌이 일을 저지르고 난 흔적을 마주했을 때였다.
"비제, 저쪽으로!"
어지간해선 비제를 탄 모습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투란은 이를 깨고 곧장 냄새가 나는 곳으로 향하게 했다.
잠시 후 그들이 도착한 곳에서는 무언가 타들어가는 소리와 절규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그만!"
숲속에 자리한 작은 화전민 마을.
아마 자기들끼리 고립되어 살아왔을 그들은 기둥에 묶인 채 하나하나 불타며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광장 한가운데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잿가루를 받아내고 있는 여인이 한 명.
뒤돌아선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네에서 뛰어내린 투란은 곧장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비센."
"누가 날...어, 투란 님?"
과거 함께 오빌을 사냥했던 애송이 귀족 집단의 대장, 비센 카마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두 눈이 기이하리만치 맑게 빛났다.
87화
처음 세상에 나왔을 당시, 투란은 작은 도시에서 미단이라는 이름의 마수 사냥꾼을 만났다.
마수를 사냥함으로써 일반인도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마수 사냥 미신이야 세상 어디에나 퍼져 있지만, 그가 인상이 깊게 남은 것은 특유의 눈빛 때문이었다.
오로지 확고한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는, 그것 외의 다른 모든 게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듯한 눈빛.
비록 그들과의 인연은 다소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끝났으나, 투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로 비슷한 눈빛을 가진 이를 만나게 됐다.
신들에게 받은 지혜로 사람을 태워 그 재를 뒤집어씀으로써 새로운 혈통을 개화할 수 있으리라 믿던 화형꾼 오빌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지금, 오랜만에 만난 카마인 가문의 귀족 비센 역시 앞의 두 사람과 같은 눈빛을 보였다.
분명히 처음 만났을 때는 그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지금 그것에 대해 묻기에는 영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금 당장 바로 옆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불타는 중이었으니까.
투란은 곧바로 염동 마법을 사용, 묶여 있던 마을 사람들의 구속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잠깐!"
깜짝 놀란 비센이 제지하기 위함인지 곧바로 수분을 결집, 얼음의 활과 화살을 한 쌍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를 투란에게 쏘자 곧바로 옆에 있던 솔리프가 빛의 망치를 만들어 요격했다.
"어딜!"
그녀의 마력이 이전보다 제법 강해졌다지만 여전히 중위권에서 중상위권을 오가는 수준일 뿐.
당연하게도 최상위 귀족인 솔리프의 망치는 가볍게 얼음 화살을 부수고 나아가 비센의 복부를 강타했다.
"컥...."
비센은 그대로 주저앉아 먹은 것을 모조리 게워내고 제 토사물에 얼굴을 처박은 채 기절했다.
물론 이마저도 적당히 한 것일 뿐, 진심으로 후려쳤다면 일격에 배가 뜯겨나가 죽었을 터였다.
그사이 모든 마을 사람의 구속을 푼 투란은 곧바로 솔리프에게 사슬 마법기를 넘겼다.
"제압하고 감시해 줘. 혹시 이상한 수단을 쓸지도 모르니까 경계해야 돼."
"걱정 마셔."
호언장담하는 솔리프를 뒤로한 채, 투란은 곧바로 불타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메이사가 그들의 몸 주변을 진공 상태로 만들어 불을 껐으나 그들은 이미 심한 화상과 질식으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이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돌아보는 메이사를 향해 투란은 곧바로 회복약 마법기를 꺼내 내밀었다.
"이걸 만들어 줘, 내가 먹일 테니까."
"살릴 수 있을까?"
"충분해."
회복약 마법기는 다소 미묘한 성능의 물건으로 여겨졌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강력한 마법 생물일수록 치료의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일 뿐.
최상위 귀족인 그들의 몸에도 효과가 있는 치료약이라면 일반인에게는 생명의 비약이나 마찬가지였다.
투란은 곧바로 화상 입은 사람들을 분류했다.
기준은 성유물의 감각을 통해 몸 안에 느껴지는 마력의 불꽃이 얼마나 밝은가에 따라서.
이미 죽은 몇 명을 조금 떨어진 곳에 배치하고 중증인 이들부터 순서대로 배치하자 메이사가 찰랑거리는 액체가 든 병을 내밀었다.
"다 만들었어!"
"이리 줘. 아마 또 만들어야 할 거야."
투란은 가장 상태가 나쁜 사람의 목을 받쳐 든 뒤 단검을 꺼내 화상으로 엉겨 붙은 입을 갈랐다.
그리고는 평소 메이사의 식사를 위해 사용하던 금속 관을 꺼내서 그 구멍에 쑤셔 박고 회복약을 흘려 넣었다.
잠시 후, 이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탄성을 터트렸다.
"오오...!"
"사, 살아났어!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있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던 사람의 온몸이 쩍 갈라지더니 안에서 뽀얀 피부가 자라났다.
엉겨 붙었던 손가락부터 연기를 마셔 익어버린 폐, 열기로 손상된 눈 따위도 모두 회복되는 과정은 차라리 부활에 가까워 보였다.
목에서 관을 뽑아낸 투란은 곧바로 메이사에게 빈 병을 던지며 외쳤다.
"다음!"
이후로도 회복약을 여러 환자의 몸에 흘려넣던 투란은 메이사의 마력이 눈에 띄게 감소한 것을 확인하고는 역할을 바꿔 그가 마법약을 충전하고 메이사에게 먹이는 일을 시켰다.
그렇게 세 명, 다섯 명, 열 명, 스무 명.
안타깝게도 도중에 먼저 숨이 끊긴 이가 몇 명 있기는 했지만, 상태가 위급했던 이들 대부분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후...."
투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옆에 서 있던 메이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시작된 상황이 끝났음을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듯 다소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생했어, 메이사. 이제 당장 급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아."
"아, 응...살렸네. 우리가."
메이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단순히 누군가를 위험에서 구하는 거라면 지난 흑요정 토벌에서도 경험했을 텐데, 크게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일까지는 익숙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 우리가 살렸지. 뒷정리는 내가 하고 있을 테니 먼저 옷이라도 갈아입고 와."
화상 환자의 몸에 직접 접촉해 관을 삽입하고 약을 흘려 넣어야 했던 만큼, 두 사람 모두 진물과 그을음 따위로 옷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메이사를 보낸 투란은 멀쩡한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단 다쳤던 이들은 회복되었지만 깨어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집에서 쉴 수 있도록 정리해라. 그리고 당분간 이쪽으로는 다가오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갑자기 나타나 악마를 제압하고 가족과 친구들을 구한 투란을 신처럼 숭배했다.
마치 과거 칼라마프의 시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투란은 그 사실에 만족감을 느꼈다.
* * *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
"전혀."
투란과 메이사가 사람들을 구하는 동안, 솔리프는 사슬에 묶인 비센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가 여전히 의식을 잃은 비센을 발끝으로 툭 차며 말했다.
"그래서, 이 여자랑은 또 어떻게 아는 사이야? 보니까 카마인 귀족 같던데 사귀는 사이라면 헤어지라고 하고 싶은걸. 취미가 너무 고약하잖아."
"얼마 전에 말했던, 이곳에서 사람을 태워 죽이는 귀족을 사냥할 때 함께 했던 사람이야."
과거 간단히 설명한 적이 있던 만큼 솔리프 역시 이를 곧장 알아들었다.
"근데 그 사람이 여기서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고? 왜?"
"그거야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때마침 반쯤 혼절했던 비센이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묶은 사슬과 투란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나지막이 물었다.
"대체 왜 제 일을 방해하시는 겁니까?"
"그걸 몰라서 묻냐고 하고 싶지만...우선 나부터 묻지. 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정황이야 따져볼 필요도 없었다.
비센은 과거 오빌의 수첩에 있던 방화광 혈통을 얻는 의식을 시도한 것일 터.
그녀 역시 당시 수첩에 적혀 있던 내용을 옮겨 적었으니 방법 자체를 아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 비센은 혈통 능력을 얻는 방법 자체를 썩 신뢰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일반인을 태워 죽이는 행위에도 강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시간과 상황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지만 반년하고 조금 더 된 시간은 이렇게까지 극적으로 변하기에는 아무래도 짧지 않은가.
질문을 들은 비센이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태연히 답했다.
"그야...세 번째 혈통을 얻어야 하니까요. 투란 님도 이미 시도해보신 거 아닌가요?"
"그럴 리가."
투란의 답에 비센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히죽 웃었다.
과거 만났던 강단 있는 여전사의 모습과는 실로 딴판인 것이, 확실히 만나지 못한 사이 무언가 큰 변화를 겪은 것 같았다.
아마 저 변한 눈빛과도 관계가 있을 터.
"나랑 헤어진 뒤로 무슨 일이 있었지? 함께 했던 동료들은 어디로 갔고?"
"그때...아, 케벡이랑 아샤, 길 말씀이시군요? 셋 다 죽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의견이 좀 안 맞아서요."
동료를 죽였다는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티끌만큼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투란은 옆에서 지켜보던 솔리프를 불렀다.
"솔리프."
"응?"
"저 여자의 눈빛, 어때?"
"눈빛? 뭐, 그냥...잘 모르겠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너무 침착해 보인다 정도?"
투란과 달리 솔리프는 비센의 눈에서 무언가 특별한 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때마침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메이사에게도 물어보았으니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사서까지 불러내 물어보고 부정적인 답을 들은 뒤, 투란은 작게 혀를 찼다.
'이것도 나만 느낄 수 있는 건가?'
"그래서, 그냥 갑자기 새 혈통을 얻고 싶어지진 않았을 거 아냐. 왜 갑자기 이 방법을 믿게 된 거지? 오빌처럼 신이 보장이라도 해 줬나?"
"신? 그렇죠, 신일 겁니다. 그 목소리는. 계속 말했어요. 더 나은 존재가 되라고, 왜 너에게 주어진 권리를 포기하냐고...."
이전에 오빌을 잡아 심문했을 때와 같은 식의 횡설수설에 투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미단은 사람이 선량하다는 것만 빼면 정상인과 다를 바 없게 느껴졌는데, 오빌과 비센은 반쯤 정신을 놓은 듯한 것은 물론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마력의 유무?
아니면 전자는 목표가 인간이 아닌 마수라는 것?
이후로도 투란은 비센을 꾸준히 심문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대충 알아냈다.
투란과 헤어지고 몇 주일, 그들은 카마인의 서쪽 변경을 헤매며 마수를 사냥했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내면에서 시작된 목소리에 강한 유혹을 느낀 비센이 동료들에게 화형 의식을 치러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고, 그들이 기겁하자 장난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비센은 반쯤 맛이 간 상태였고, 결국 방해가 되는 동료들을 자는 사이 하나하나 죽여 묻었다.
이후로는 과거 오빌이 그랬듯 화형꾼 흉내를 내며 의식을 치르다가 지금에 이른 것이고.
"그러면 가문에는 돌아가지 않은 건가?"
"네. 세 번째 혈통을 얻으면 돌아가야죠...그러면 부모님도, 다른 모두가 절 자랑스러워할 겁니다.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당신도 두 번째 혈통을 얻고 싶잖아요? 거기 당신들도요."
말도 안 되는 설득을 하는 비센을 무시한 채, 투란은 동료들에게 이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다.
고민에 빠진 듯 입술을 쓰다듬던 메이사가 먼저 의견을 냈다.
"일단 불의 영혼이 효력이 있던 것으로 봐선 방법 자체가 완전히 엉터리인 건 아닌 것 같아."
"정말로 이 불지랄로 방화광 혈통을 얻을 수 있다고?"
솔리프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자 메이사가 고개를 저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얘기하는 거야. 이해가 안 가는 게, 이런 식으로 혈통을 얻을 수 있다면 진작에 퍼지고도 남았을 것 같거든. 지금이야 우리가 제지했지만 사실 이게 그렇게 어려운 방법은 아니잖아?"
"비슷하게 마수를 사냥해서 정말 마법사가 되었다는 사람도 본 적 없긴 하지."
투란이 그녀의 말에 가볍게 덧붙이듯 말했다.
정말로 이런 방법이 유용한 것이었다면 진작에 널리 퍼져서 귀족들은 개나 소나 혈통을 네 개씩 주렁주렁 달고 다니며 휘하에 평민 출신 기사를 잔뜩 두었을 터.
이를 통해 그들은 거기에서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첫째는 정체불명의 눈빛을 가지게 된 이들의 지식이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는 것.
둘째는 지식 자체는 맞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 별도의 자질이 요구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투란만이 볼 수 있는, 특별한 눈빛을 가진 사람들의 정신을 오염시킨다는 것까지.
"오염원은 아마 신의 영혼이나 그 비슷한 무언가겠지?"
"그렇다고 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지식이 어디서 불쑥 솟았겠어."
"어쩌면 온전한 영혼이 아니라 조각 정도일지도 몰라. 그냥 생전에 가지고 있던 정보 일부만 투영되는 거야."
"오...."
제법 그럴싸한 가설에 감탄하기도 잠시, 솔리프가 비센을 바라보며 미뤄 왔던 질문을 꺼냈다.
"근데, 그래서 저 여자는 어떻게 하냐?"
"죽여야지."
"그러면 그 영혼이란 게 우리한테 달라붙는 거 아냐?"
"그렇다고 살려 보낼 순 없잖아. 일단 내가 처형할 테니 멀리 떨어져 있어. 난 이미르의 영혼도 본 적 있으니까 내게 파고들면 알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영혼을 봐도 해결책이 없는데."
"우선 보석함을 써 봐야지.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몇 달 정도는 시간이 있을 테니 그 사이에 대책을 마련해 봐도 될 거고."
최악의 경우, 카마인에 있는 신과 협상하여 생령술사의 힘을 빌리는 방법도 있었다.
일단 계속해서 몸을 갈아타고 있다는 건 그 역시 생령술사를 부리고 있다는 뜻일 테니.
토론 끝에 처형이 결정된 뒤, 투란은 두 사람을 물러나게 하고 사슬에 묶인 비센에게 다가갔다.
힘없이 주저앉은 그녀를 보며 투란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비록 일반인 수백 명을 태워 죽였다지만 정황상 저게 온전한 본인의 의지는 아닐 가능성이 컸으니까.
만약 메이사나 솔리프의 몸에 신이 깃들어 살육을 벌인다고 해서 그게 그들의 잘못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서 풀어준다면 또 같은 짓을 시도할 가능성이 컸을뿐더러, 저 지식이 널리 퍼지는 것도 안 될 일.
투란은 사슬에 묶여 일반인이나 다름없어진 비센의 목을 꺾어 고통 없이 즉사시켰다.
잠시 후, 이미르 때와 마찬가지로 비센의 몸에서 작디작은 마력덩어리가 흘러나왔다.
주변에 있는 사람을 향해 빨려 들어가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것은 하늘로 올라가 어딘가로 향하려 했다.
'과연, 이번에는 될까....'
투란은 이전에 그랬듯 사서가 담겨 있던 보석함을 꺼내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날아오르던 영혼은 그대로 빨려 들어가듯 보석함 안으로 스며들었다.
* * *
"아주 작은 영혼 조각이구나."
비센의 영혼이 보석함으로 들어간 뒤, 그 안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서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영혼 조각이요?"
"그래. 네가 말한 정보들과 이걸 이뤄내야 한다는 열망, 그 두 가지만 남은 파편이라고 보면 되겠지. 생전의 기억이니 뭐니 하는 건 다 날아가 버렸어."
사서 역시 영혼에 대해 무언가 자세히 아는 바는 없지만, 일종의 영체인 정령답게 본능적으로 느끼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어르신께 문제는 안 생길까요?"
"그럴 만큼 큰 힘은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 다만 이 조각을 지나치게 많이 모았다가는 아예 자아를 되찾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든다만."
"조각이라...."
"대신, 몇 개 더 모은다면 그 안에 있는 정보는 내가 읽어줄 수 있을 것 같구나."
저 영혼 조각에 담긴 지식이라면 확실히 유용할 터였다.
불의 영혼만 해도 정체를 감춰야 하는 상황만 아니라면 투란의 화력을 거의 두 배 이상으로 늘려 주는 물건이었으니까.
심지어 화형꾼처럼 과격한 방식이 아닌, 좀 더 온건하게 혈통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어 실현할 수 있다면 그 유용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이미 혈통 능력이 네 개 있는 투란이 더 힘을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사서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읊자 옆에 있던 솔리프가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어떤 신의 영혼인지도 아실 수 있습니까?"
"난들 알까? 사실 이게 정말로 신의 영혼일 거라는 확신도 없는 것을."
사서가 콧방귀를 뀌며 말하더니, 갑자기 무언가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음, 이걸 말해도 될지 모르겠군. 어쩌면 내 착각으로 괜히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으니...."
"괜찮습니다."
평소답지 않게 조금 자신감이 결여된 표정으로, 사서가 보석함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조금이지만, 그립다는 느낌이 들더구나. 내게 고향 같은 건 없지만 고향을 떠올린다면 이런 기분일지도 모르겠어."
88화
비센을 처형한 뒤, 투란 일행은 화전민 마을에 남아 재건을 도우며 하룻밤을 머무르기로 했다.
마을 주민의 절반 가까이가 죽은 탓에 무너지고 불탄 집이며 창고를 수리할 인력이 부족했던지라, 주민들은 이러한 도움에 다시 한번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메이사, 지붕을 잘못 올렸어."
"이렇게 하는 게 아니야?"
"그러면 안 들어맞아서 비가 다 샐걸. 반 정도 돌려야 해."
투란은 메이사가 염동 마법으로 올려놓은 지붕 천장을 돌리며 지붕이 어떤 식으로 지어져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새로운 건축학적 지식을 접한 메이사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이런 건 다 어디서 배웠어?"
"그냥 살면서 알게 된 거지."
"와...."
그 역시 딱히 건축에 깊은 조예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지냈던 오두막을 보수하거나 칼라마프에서 건축물 몇 개를 직접 지은 경험은 있었다.
지금 짓는 창고가 썩 복잡한 건물이 아니기도 했고.
"이렇게 하면 된단 말이지?"
"그래, 그렇게."
다시금 지붕을 띄워 90도 정도 돌리는 메이사의 얼굴에는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감돌았다.
혹시 이런 일을 귀찮아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녀 역시 사람들을 돕는 일을 꽤 재밌어하는 듯했다.
메이사가 배운 대로 일을 하는지 확인한 투란은 옆에서 닭장을 짓던 솔리프에게 다가가 다그쳤다.
"울타리 아래가 이렇게 구멍투성이면 살쾡이나 여우가 와서 다 잡아가잖아."
"뭐? 그것들이 이런 작은 구멍을 어떻게 들어와?"
"고양이랑 비슷한 종류의 동물들은 사실상 뼈가 없는 수준이나 마찬가지라서 머리만 들어가면 다 들어올 수 있어."
"신기하구만...그거야말로 진짜 마법 아냐?"
메이사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보다 마흔 살은 더 많고 여행 경험도 풍부한 솔리프조차 이럴 줄이야.
마을 사람들은 감히 하늘 같은 귀족님들께 틀렸다고 말할 용기가 없으니 투란이 일일이 가르쳐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고생하던 와중, 비제가 휙 날아와서 바닥에 글씨를 썼다.
[청소 다 했어!]
"벌써?"
[응!]
비제에게는 기둥을 세우고 사람을 태우느라 엉망이 된 광장을 치우게 했는데, 보니까 그 말대로 완전히 들어엎은 수준으로 싹 정리되어 있었다.
작은 덩치로 일일이 땅을 헤집어서는 시간이 오래 걸렸을 테니, 아예 바람 마법으로 싹 휩쓸어버린 듯했다.
"역시 너밖에 없다."
투란이 머리를 톡톡 두드려주자 비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지막으로 대지 변형 마법을 사용해 죽은 이들의 무덤을 만든 뒤, 마을 사람들은 그나마 멀쩡한 회관에서 다 같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함으로써 죽은 이들을 추모했다.
당연히 투란 일행은 가장 상석에 자리를 얻었다.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자들이라 이런 보잘것없는 음식만을 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디 자비를...."
실제로 그들이 내온 음식이란 것이 썩 변변찮은 것들이기는 했다.
훈연하여 보존했던 어느 산짐승의 고기를 넣어 만든 스튜부터 거친 흑빵 등, 히사릴 언덕에서 투란이 먹던 식사와 비교해도 더 낫다 보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물론 이를 내놓은 마을 사람들의 앞에는 멀건 곡물죽과 산나물밖에 없었다.
아마 이것이 구원자들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접이었을 터.
투란은 곧장 숟가락을 들어 스튜를 한 입 떠먹고 정체불명의 향신료가 들어간 채소 무침을 입에 가져갔다.
"됐다, 이 정도면 만찬이지."
"에이, 솔직히 만찬까지는 좀-윽!"
솔직하게 딴지를 거는 솔리프의 다리를 발끝으로 걷어찬 뒤 마을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그들은 투란이 거침없이 먹는 모습에 조금 안심한 듯한 기색이었다.
솔리프 역시 조금 투덜대면서도 식사를 시작하자 마지막으로 남은 메이사에게 시선이 쏠렸다.
"음."
발타스 가문의 연회에서는 '쟤는 뭔데 음식에 입 한 번 안 대냐'라는 시선을 받고도 차갑게 무시하던 메이사지만, 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시선에는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투란은 조심스레 숟가락을 드는 그녀를 제지했다.
"무리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우리가 먹고 있으니까. 한 사람 정도는 좀 까다로워 보여도 괜찮겠지."
"괜히 먹었다 토하면 오히려 더 슬퍼할걸."
솔리프의 말에 메이사가 살짝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스튜를 푹 떠냈다.
"지금이라면 한 입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숟가락에 담긴 고기 한 점과 국물을 바라보던 메이사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입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몇 초 정도 오물거린 뒤 꿀꺽 삼켰다.
투란은 곧이어 일어날 성대한 폭발을 예상하고 솔리프에게 환영 마법이라도 써달라고 해야 할까 생각했으나, 예상과 달리 메이사는 이를 토해내지 않았다.
몇 번 심호흡하던 그녀가 서서히 눈을 떴다.
"음?"
"뭐야, 됐나?"
두 사람은 물론, 정작 음식을 삼킨 메이사조차 자신이 식사에 성공했음을 믿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환하게 웃으며 스튜를 한 숟가락 더 뜨고 거친 빵까지 베어먹었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 드신다...."
"입에 맞으신 것 같아!"
"다행일세, 다행이야."
'입에 맞는다'라는 것은 굉장히 순화된 표현인 것이, 메이사는 한참 굶은 거지처럼 게걸스럽게 음식을 탐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사실상 십 년 넘게 굶어오다시피 했음을 생각하면 이를 탓하기는 가혹했다.
"맛있어?"
"맛은...잘 모르겠어,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렇지만 직접 씹고 삼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읍!"
그렇게 신나게 음식을 먹어치우던 것도 잠시, 메이사는 조금 뒤늦게 찾아온 구역감에 입을 가렸다.
볼이 확 부푸는 것을 본 투란은 얼른 그녀를 식탁에서 끌어내 회관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우웩-"
메이사가 조금 전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내는 동안, 투란은 뒤에서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괜찮아?"
숨이 딸려 대답하기 힘들었는지, 고개만 끄덕이던 메이사가 고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웃고 있었다.
"먹었어, 내가...조금이지만."
"십 년 만이지?"
"응."
즉석에서 물을 만들어 입을 씻어낸 메이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뭔가, 어머니랑 동생이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아. '그만큼 도왔으면 이 정도는 먹어도 괜찮아'라고."
물론 정말로 식사를 허락한 것은 가족들이 아니라 메이사 자신의 마음일 터였다.
아마도 가족들을 버린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나는 이만큼 남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존감과 상쇄된 것이 아닐까.
덕분에 그녀의 섭식장애를 극복할 방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앞으로 계속해서 사람들을 돕다 보면, 그래서 메이사가 자신을 그만큼 가치 있는 존재라고 여기게 된다면 남들처럼 온전히 식사를 할 수 있게 될 듯했다.
잠시 후, 완전히 수습하고 회관으로 돌아온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상을 하고 있는 솔리프였다.
"야...."
"왜?"
"저 자식들, 지금 우리 둘 중 누가 애 아빠일지 궁금해하고 있잖아. 빨리 어떻게든 좀 해 봐."
투란이 시선을 돌리자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나마 음식이 맛없어서 토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 * *
다음 날 아침, 마을을 떠난 투란 일행은 이 근방에서 마수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곧장 동쪽을 향해 날았다.
그네에 탄 채 주변을 구경하던 솔리프가 투란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괜찮을지 모르겠네."
"뭐가?"
"이유야 어쨌든 카마인의 귀족을 죽인 거잖아. 정식으로 시체를 가져가서 이러이러해서 죽였다고 진위를 알려놓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해서. 나중에 그 마을 사람들을 통해서 왜곡된 소문이라도 퍼지면 곤란하잖아?"
맞은편에 앉은 메이사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동의하는 듯한 기색이라, 투란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답했다.
"그걸 가져갔다가는 대가문이랑 정식으로 책임소재를 가려야 하는데, 카마인에선 어지간하면 자기네 귀족이 학살을 벌였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할걸. 어차피 우리 쪽이 떠돌이니까 뒤집어씌우기도 쉬울 거고. 실력을 드러내면 모르지만 그러면 또 다른 방향으로 주목받을 거야."
"음...."
"거기다 어차피 그쪽 마을에서 소문이 날 가능성은 별로 없어. 제대로 된 마을도 아니라 화전민촌이기도 하고, 소문이 나면 너희들에게도 별로 안 좋을 거라고 얘기해놨으니까."
"그건 협박 아니야?"
"충고지. 비센이 두 번째 화형꾼이 되려 했다는 증언을 막자면 카마인에서 마을 사람들을 몰살하려 들지도 모르는데."
투란의 말에 메이사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들이 못 배웠다고 바보인 건 아니야. 자기 목숨 달린 일을 판단할 정도는 되니까. 거기다 우리가 마을 재건을 도운 것도 있고."
"고마워서라도 소문 안 낼 거다?"
투란은 솔리프의 말에서 역시 아직은 어린애구만, 하고 가소롭게 여기는 듯한 기색을 느꼈다.
물론 그가 이를 언급한 것은 그런 뜨뜻미지근한 이유가 아니었다.
"아니, 마을이 붕괴하면 먹고 살려고 다른 마을로 흩어져서 소문이 날 수도 있잖아. 고립된 화전민촌이 유지되면 그만큼 이야기가 퍼질 가능성이 작아지겠지. 일반적으로는 교류 없이 자급자족하는 사람들이니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도와준 거였어?"
"그거 때문만은 아니고, 그냥 그런 장점도 있단 거야."
거기까지 설명한 뒤, 투란은 마지막으로 자기가 생각했던 바를 덧붙였다.
"무엇보다도, 어찌어찌 진상을 알게 되면 카마인에서도 그냥 일을 묻고 싶을걸. 미친 짓을 저지르다가 죽은 구성원 때문에 방랑 귀족 세 명을 적대한다니 수지가 안 맞잖아. 공론화됐으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뒤집어씌워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무리할 필요 없지."
그렇게 비센의 처우에 관해 이야기한 뒤, 화제는 그녀의 안에 있던 신의 조각에 대한 것으로 옮겨갔다.
정확히는 어떻게 하면 신의 조각을 더 모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였다.
"마수 사냥꾼들을 찾아보다 보면 단서가 생기지 않을까?"
"가끔 만날 일이 있으면 확인해 보는데 별 성과는 없더라고. 애초에 그런 사람들의 숫자가 적지 않으니까."
마수 사냥꾼은 미단 패거리처럼 순수하게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무장한 이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보다는 마수 사냥 자체를 생계 유지의 방법으로 쓰는 이들이 더 많았다.
정확히는 마수 사냥과 일반 사냥을 겸업한다고 해야 할까.
그들이 사냥한 최하급 마수는 어린 마법사들이 힘을 키울 양식이 되며, 이를 일일이 찾는 것보다는 돈을 주어 수배하는 것이 편하기에 마법사 가문들 역시 마수를 사냥해오는 이에게 포상금을 지급했다.
그간 투란이 지나가다가 본 마수 사냥꾼들은 대다수가 그런 부류로, 미단처럼 신의 파편을 품고 있는 이는 없었다.
"으음, 이상한 행동을 하는 마법사를 찾는 건...비효율적인가."
"그렇지. 아무래도 썩 흔한 경우도 아니고."
실질적으로 확실한 구분법이 직접 투란의 눈으로 보는 것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냥 우연히 마주치기를 기대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네에 앉아 얼마나 떠들었을까, 셋 중 가장 눈이 좋은 솔리프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 왔다."
"벌써?"
"역시 나는 게 빠르긴 하네."
잠시 후, 투란과 메이사의 눈앞에도 수평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제가 워낙 높이 날고 있는 터라 그들이 실제로 바닷가까지 도착하는 데는 거기서도 한 시간 반 정도가 더 걸렸다.
해안에 착륙한 뒤, 솔리프가 바다를 바라보며 감상에 빠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구만, 북해에 오는 것도."
"온 적 있었어?"
"애초에 바라하에서 북해 쪽으로 넘어왔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 난 바다에 오는 것도 처음이라서."
메이사가 신기하다는 듯 바닷물에 손을 담그며 퐁당거리더니 이를 맛보고는 짜다고 인상을 썼다.
그 철없는 소녀 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바닷가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뒤에는 곧장 근처에 있는 어촌으로 향해 이곳이 정확히 어딘지를 확인했다.
간단한 수소문 끝에 지금 그들이 아바챠의 북쪽에 자리한 해안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들은 솔리프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쯧, 아바챠도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말이지."
"내가 가본 바로는 별거 없더라고. 그보다는 익사한 신의 유해가 있는 곳을 방문하는 쪽이 더 흥미롭지 않겠어?"
"뭐...그렇긴 하지."
이미르의 말에 의하면 카마인의 수도, 아바챠에는 '변호사'라는 별명의 프레아 신족이 머무르고 있을 터.
이전에야 몰랐으니 그냥 드나들었지만 그 사실을 알고도 걸어들어가기는 부담스러웠다.
이를 아는 만큼 솔리프 역시 가볍게 투정만 한 번 부렸을 뿐 더 뭐라 말하지 않았다.
이후 어촌 몇 군데를 더 돌아다닌 그들은 곧 제법 큰 고기잡이배 한 척을 구할 수 있었다.
돛 한 개에 갑판 아래로 큼직한 선실과 화장실 역할을 하는 방 하나가 딸린 녀석으로, 딱 해안 근처에서나 몰고 다니기 적합한 크기였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멀리는 몰고 가지 마시구려. 파도가 조금만 세져도 뒤집혀버릴 테니."
배의 판매 대금을 받은 늙은 어부 역시 바로 그렇게 조언했다.
귀공자 같은 인상의 투란과 차가운 아가씨 메이사, 그나마 좀 수더분하게 생겼지만 역시나 부유하게 자라서 귀티가 나는 솔리프까지.
숙련된 뱃사람처럼 보이는 이가 한 명도 없는데 대뜸 배를 탄다고 하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돈을 받았으니 그만이라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렇던가.
"충고 감사합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어부의 걱정을 받아 넘긴 투란은 곧바로 출항을 준비했다.
그의 말에 따라 배를 정비하던 솔리프가 물었다.
"정말 이런 배로도 괜찮은 거 맞냐? 난 지난번에 운이 좋아서 안 마주쳤지만 북해 폭풍이 그렇게 지랄이라던데."
"아라비온 귀족이 둘씩이나 있는데 뭘. 거기다 정말 답이 없으면 차라리 배를 버리고 날아가면 되니까 싼 배를 타는 게 훨씬 나아."
"그런가."
잠시 후, 모든 정비를 마친 그들은 닻을 올리고 돛을 펼쳤다.
투란과 메이사가 번갈아 바람을 부는 동안 솔리프가 뱃전으로 마주치는 물을 가르자 배는 그야말로 나는 듯 앞으로 나아갔다.
"시원-하다!"
그렇게 소리친 것은 뜻밖에도 솔리프가 아닌 메이사였다.
아무래도 처음으로 하는 항해가 이토록 속도감 넘치는 것이 꽤 인상적인 듯했다.
아마 나중에 평범한 범선으로 느릿하게 나아가는 것을 보면 지루함에 몸부림치게 되지 않을지.
다행히 셋 중 뱃멀미를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항해에 별다른 장애는 없었다.
식량과 물이야 바다에서는 넘치는 것과 마찬가지.
우선 과거 들렀던 미겔 섬을 기점으로 삼고자 투란은 이전에 선물로 받은 나침반으로 목적지를 동남쪽으로 잡은 채 항해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 반나절쯤이 지났을 무렵-
"지루하네...."
첫 항해에 들떴던 메이사가 지루함을 느끼는 데는 굳이 평범한 범선을 타는 것까지도 필요없었다.
원래 사람이란 쉽게 자극에 무뎌지기 마련 아니던가.
그리고 항해란 똑같은 자극만이 계속 반복되는 일이었고.
"투란, 뭐 좀 찾았어?"
"아니, 아직."
"투란, 지금은?"
"못 찾았어."
"투-"
"아무것도."
셋 중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흉내쟁이 성유물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투란 한 명밖에 없었다.
따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투란에게 뭔가 찾았냐고 묻고 못 찾았다고 답하는 문답만이 이어졌다.
물론 투란은 성유물의 감각을 통해 꽤 많은 마수들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다는 지상과 달리 인간들에게 쉽사리 사냥당하지 않는 마수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각축장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놈들 중 특출나게 강한 일부 마수들조차 중급이나 중상급 귀족 수준일 뿐, 실질적으로 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큼 강력한 마수의 기척은 없었다.
그나마 신난 것은 투란이 잡아준 전갱이를 맛있게 먹어치울 수 있게 된 비제뿐.
솔리프가 바다를 내다보며 한탄하듯 말했다.
"아니, 분명히 그냥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건 날아가던 때랑 비슷한데...항해는 이상하게 지루하단 말이지."
"그야 비제를 타고 나는 건 어지간하면 도중에 내려서 쉬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지루하단 생각을 할 틈이 없을 정도로 급할 때니까."
"그런가."
"어쩌면 배가 작아서 그럴지도 몰라. 뭔가 읽을거리라도 좀 사 왔으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네."
메이사의 말에 아바챠가 아닌 다른 카마인 쪽 항구 도시라도 들렀다 갈까 고민하던 도중, 투란은 전방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눈을 크게 떴다.
"오."
"왜?"
"마침내 네가 기대하던 게 왔네."
"마수? 얼마나 센 놈이야? 최상급?"
얼마나 지루했던지 호들갑을 떠는 솔리프를 진정시키며, 투란은 가볍게 손을 들어 바람의 흐름을 느꼈다.
이미 마찬가지로 바람을 느낀 메이사 역시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니, 폭풍."
투란의 말에 솔리프의 얼굴이 구겨졌다.
89화
과거 청새치 호를 타고 폭풍을 만났을 당시, 투란은 위기에 빠진 배를 구하고자 진이 다 빠지도록 애를 써야 했다.
바람이며 파도에 튕겨 날아다니는 선원들을 챙기고 열기로 몸을 데워주며 거대한 범선의 균형을 제어해야 했던 탓이다.
그에 비해 지금은 조건이 훨씬 좋았다.
우선 보호해야 할 배의 크기며 무게는 이전의 수십 수백 분의 일로 줄었으며 그 자신의 마력은 이전에 비하면 몇 배로 늘어 있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선원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닌, 동급 이상의 마법사 두 명이 있는 만큼 이전 같은 폭풍 따위는 딱히 두려워할 대상이 되지 못했다.
문제는, 이번 폭풍이 그때보다도 훨씬 더 격렬했다는 것이었다.
"와, 죽는 줄 알았네...."
"엄살은."
폭풍우가 지난 뒤, 투란 일행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갑판 위에 드러누워 신음했다.
높이 몇 미터짜리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염동 마법으로 배를 붙잡아 넘어가지 않게 유지하고.
십 미터가 넘는 대형 파도는 뱃머리를 앞으로 향해 갈라서 지나치고.
바람이 지나치게 강해져 배가 기우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바람 마법으로 맞바람을 쳐서 막아내고....
이런 짓을 온종일 쉬지 않고 해대고 나니 마력은 물론이요, 과도한 집중력 소모로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장담컨대 만약 청새치 호가 이번 같은 폭풍과 마주쳤다면 진작 침몰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투란은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며 누군가 자기를 구조해주길 기다리거나 직접 가까운 해안까지 헤엄쳐가야 했을 테고.
[힘들어?]
"꽤...넌 괜찮아? 온종일 날고 있었는데."
[응! 난 멀쩡해!]
폭풍을 피해 계속 하늘에 떠 있던 비제는 자기가 쓰는 글처럼 쌩쌩해 보였다.
여럿을 매달고 먼 곳을 쉬지 않고 날아가는 것이야 지치는 일이지만, 높은 곳을 적당히 활공하며 시간을 보내는 건 이 검독수리 마수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인 모양이었다.
비제가 갑판을 발톱으로 쿡쿡 찍으며 글을 썼다.
[이 나무, 내가 들고 다닐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어렵지. 마음만이라도 고맙다."
아무리 비제가 강력한 마수라지만 자기 몸무게의 수천 배쯤 되는 배를 지고는 날기조차 어려울 터.
그렇게 비제와 노닥거리며 적당히 기운을 회복한 투란은 몸을 일으켰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두 사람 다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아마 나도 비슷하겠네."
폭풍이 치는 내내 갑판 위에서 마법으로 배를 조율해야 했던 탓에 그들 모두 그야말로 비 맞은 쥐 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둘 다 기가 쭉 빠진 채 갑판 위에 드러누워 있기까지 하니 그 모양새가 우스울 수밖에.
그래서 뭐 어쩌라는 듯 다시 뒤통수를 갑판에 대는 솔리프와 달리, 메이사는 그 말을 듣고 황급히 몸을 일으켜 머리를 정돈했다.
잠시 후, 기운을 차린 그들은 번갈아 가며 갑판 아래의 선실에서 몸을 씻고 식사와 용변 등을 해결한 뒤 근처에 섬이 있는지를 찾았다.
폭풍우를 맞는 와중에 목적하던 곳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알기 어려웠으니까.
주변을 빙 돌아본 비제가 동쪽으로 조금 가면 제법 큰 섬이 있다고 알려주었기에 곧장 그곳으로 배를 몰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기 시작한 섬의 모습에 투란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왜?"
"아니, 딱 맞게 와 버린 게 어이가 없어서."
물론 애초에 이쪽 방향을 목적지로 잡고 오다가 폭풍우를 만난 것이니 완전히 우연이라 보기는 어려웠지만, 제법 운이 따르는 것은 분명했다.
투란 일행이 도착한 곳은 첫 목적지로 잡았던 미겔 섬이었다.
* * *
몇 개월 만에 들르는 미겔 섬의 풍경은 여전했다.
널찍하게 지어진 항구에 들어찬 무역선들, 술에 취해 싸우는 선원과 그들을 목표로 추파를 날리는 매춘부들....
굳이 차이점이라면 겨울철이던 이전과 달리 한창 여름이라서 사람들의 복장이 훨씬 헐해졌다는 점일까.
배를 정박하고서 항구 관리원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가 투란 일행이 타고 온 고기잡이배를 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대륙에서부터 이걸 타고 오셨다고요? 허, 저희 같은 보통 사람들은 목숨이 열 개여도 엄두를 못 낼 일인데...과연 대단하십니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행색, 거기다가 자그마한 배로 북해 한복판의 섬까지 왔다는 점에서 투란 일행의 신분을 짐작한 관리원은 지독히도 저자세로 일관했다.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궁금했던 바를 물었다.
"안 그래도 이번에 폭풍이 장난 아니긴 하던데. 원래 이 정도는 아니지 않나?"
"안 그래도 요즘 날씨가 더 나쁘다고 이야기가 많이 돌았습니다. 거기다 인어들도 전보다 극성이라서 이 근처로 오는 항로를 택하는 배가 많이 줄었지요."
그런 말을 듣고 다시 항구를 보니 확실히 예전에 비해 다소 활기가 부족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여전히 붐비기는 했지만 뭔가 살짝 빈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수속을 마친 뒤, 투란 일행은 우선 섬 안쪽의 숙박 시설에서 잠시 몸을 쉬기로 했다.
거리를 걷던 중 웬 불콰한 얼굴의 선원이 메이사를 바라보다가 말을 걸어왔다.
"이봐, 이쁜이. 하루에 얼마야? 은화 다섯 닢까진-억!"
자연스럽게 가슴팍을 향해 뻗어 나가던 손이 우득 소리를 내며 팔과 수직을 이루었다.
그냥 반사적으로 툭 쳤을 뿐인 메이사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꺼져!"
"이, 이 미친 년이 사람 친다아악-!"
투란은 선원의 동료들이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이전처럼 손가락을 튕겨 불꽃을 일으켜 보였다.
당연하게도 이를 본 선원들은 그 자리에서 돌덩이가 된 듯 발걸음을 멈췄다.
"자, 잘못했습니다!"
냅다 도망치는 선원들을 바라보며 작게 코웃음을 치고 주변을 둘러보니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둘이 아니었다.
덕분에 마법사들이 이 섬에 왔다는 소문만은 확실하게 퍼질 것 같았다.
투란은 조금 전 선원을 쳐냈던 손을 바라보는 메이사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응. 날 그런 식으로 보는 게...뭔가 상상했던 것보다 기분이 엄청 나쁘네."
하기야 메이사가 저런 저속한 방식의 추파를 받아본 일이 있을 리 없었다.
아라비온의 후계자라는 신분은 물론이요, 외모 역시 객관적으로 썩 매력적이지 않았으니.
그나마 비슷한 게 발타스 가문에서 혼인 제의를 받았을 때지만 그때조차 지금보다는 훨씬 정중하지 않았던가.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불쾌감과 혼란을 느끼는 그녀를 가볍게 달래준 뒤, 투란 일행은 우선 좋은 숙소 하나를 잡아 하루 반나절 정도를 빈둥거리며 강렬한 항해로 쌓인 피로를 풀었다.
그리고 다음 날, 투란은 동료들을 과거 방문한 적 있던 미겔 섬 최고의 주점으로 안내했다.
숙소에 딸린 식당도 썩 나쁘진 않았지만 경험상 그쪽에서 먹은 음식과 술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
특히 메이사는 아직 끼니마다 한 줌 정도의 음식만 먹을 수 있는 만큼 가능하면 맛있는 것을 먹여주고 싶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찾으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전에 만났던 문지기가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다시 한번 교훈을 주었던지라, 질문하는 종업원의 태도는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투란은 과거 시켰던 것처럼 햄과 대추야자 등의 안주에다가 밀을 원료로 만든 증류주를 시켰다.
맛 좋은 식사와 술로 지난 항해의 피로를 풀며 그들은 앞으로의 계획을 가볍게 토론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마수 사냥이 시원찮단 말이지."
"솔직히 한 마리쯤은 금방 찾을 줄 알았어."
두 사람의 말에 투란은 고개를 저었다.
"뭐, 그야 인내심을 가지고 찾아보는 수밖에 없지. 여기서 몇 년 머무를 생각도 해야 할 것 같더라. 아니면 다른 지역을 탐사해 보거나."
"사실 난 거기도 괜찮았을 거 같은데 말이지. 그 하늘 산맥인가? 거기 서쪽 말이야."
나긴 가문의 영역을 떠날 당시, 솔리프가 제안했던 의견 중 하나가 바로 세상의 서쪽 경계라 할 수 있는 하늘산맥 너머로 가보자는 것이었다.
어차피 비제가 있는 이상 높은 산맥 따위가 걸림돌이 되지는 못할 테니까.
꽤 솔깃한 의견이었음에도 투란이 이를 거절하고 동쪽으로 날아간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사서조차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그곳을 탐사하고 돌아온 이가 없다는 것.
그들은 손꼽힐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 집단이었지만, 그 정도로 미지의 공간이 된 곳이라면 예상치 못한 위협이 있으리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둘째는-
"애초에 네가 여기에서 신의 유해를 보고 싶다며."
"아, 맞다."
"여기 온 이유가 반쯤은 그거 때문인데 정작 당사자가 깜빡하면 어떡하냐."
투란의 타박에 솔리프가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때, 누군가가 그들이 앉은 테이블 옆에 서서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실례합니다, 존귀하신 손님분들. 이 섬의 주인께서 잠시 뵙기를 원하시는데 기회를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정중하게 말을 걸어온 것은 놀랍게도 이 주점의 지배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그의 물음에 메이사와 솔리프가 투란을 보며 물었다.
"섬의 주인?"
"누구인지 알아?"
"아니."
이전에 청새치 호의 선장, 피레스에게 듣기로 미겔 섬의 주인은 그럭저럭 실력 있는 마법사라고 했다.
이름도 한 번 들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성유물의 감각을 넓혀 보아도 강력한 마법사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배의 경호원으로 고용된 것이라고 짐작되는 기사 몇 명의 기척만 느껴질 뿐.
물론 이 섬의 넓이가 수 킬로미터는 넘는 만큼 그냥 그의 감지 범위 밖에 있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그쪽이 찾아왔으면 좋겠는데."
투란의 말에 지배인이 슬쩍 눈썹을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가 사라지자 기다리던 솔리프가 곧장 질문을 던졌다.
"전에 여기 왔을 때 뭔 일 있기라도 했냐?"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그냥 여기서 해적선 한 척 팔았던 거 정도?"
"해적선을 팔았다고?"
"내가 얘기 안 했던가?"
해적들을 때려잡고 배를 노획했던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을 기울이던 도중, 투란은 근처에서 다가오는 기척에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자."
두 사람은 왜 그러느냐고 묻는 대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험상 투란이 이럴 때는 다 이유가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탓이었다.
그들은 대충 술과 음식값을 탁자에 올려놓은 뒤 곧바로 술집을 나와 조금 떨어진 변두리로 걸음을 옮겼다.
인적 없는 골목에 도착했을 때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람 두 명이 그들을 막아섰다.
"뭐야, 이건?"
솔리프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만한 것이 슬슬 초여름인 마당에 저런 후드 차림은 보기만 해도 수상쩍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선원들 중에는 웃통을 벗고 다니는 이들이 태반인 마당 아닌가.
투란은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중 작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르마니냐?"
"...어떻게 알아본 거지?"
인어 왕자, 아르마니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두건을 벗어던지며 소리쳤다.
투란은 이에 간단히 답했다.
"느낌."
물론 그가 상대를 바로 알아본 것은 바로 성유물의 감각 때문이었다.
물갈퀴 형상의 귀와 목의 아가미에 푸른 빛이 퍼지는 모양새는 이전에도 본 적 있던 인어 특유의 기척이었으니까.
섬 한복판에 갑자기 인어의 기척이 느껴졌을 때는 당황했지만, 신장과 체형이 이전에 봤던 아르마니와 굉장히 비슷했기에 본인일 것이라고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몸속의 불꽃, 아마도 저들이 쓰는 마력 비슷한 힘이 전보다 상당히 강해졌다는 점 정도.
아마도 저들 역시 나이를 먹으며 점점 힘이 붙는 것 같았다.
"오, 오랜만이다. 착한 악마."
"그놈의 착한 악마는...그래, 반갑다."
하지만 투란이 급히 동료들을 데리고 나온 것은, 바로 저 인어 소년의 옆에 있는 또 다른 한 사람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인어라고 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그래서 옆에는 네 형이냐? 아니면 누이?"
"네가 내 동생의 은인이자 악마들의 보물을 가져간 이가 맞나 보군?"
질문을 질문으로 맞받아치며 후드를 벗자 이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인어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의 몸 속에서는 아르마니의 그것보다 훨씬 강렬한 불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짐작건대 인어 왕족, 그중에서도 상당히 격이 높은 존재가 분명했다.
투란은 마찬가지로 그 질문에 또 질문으로 답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후드를 벗는 걸로 대신한 건가?"
"그렇다고 치지."
"그러면 이쪽 대답도 조금 전에 저 녀석이랑 말한 것으로 끝난 것 같은데."
동생의 은인을 대하는 것이라기에는 굉장히 날 선 대화였지만 이종족과 인간 사이에서는 이 정도 거리감이 적당했다.
인어라고 하면 꽤 오랜 세월 해안에서 사람을 잡아먹어 온 악명 높은 이종족이지 않던가.
그 사실을 아는지 인어 공주 역시 이를 타박하지는 않았다.
"로위나다."
"투란. 그보다 좀 전에 지배인이 이 섬의 주인을 얘기하던데, 혹시 이곳의 지배자가 인어들의 하수인이었나?"
"비슷하다. 애초에 우리의 허락 없이 이런 곳이 존속할 수 있을 것 같나? 금방 하층민들의 식사 터가 될 텐데."
그녀가 말하는 하층민이란 인간들을 습격해 잡아먹는 일반적인 인어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물었다.
"좋은 걸 가르쳐줘서 고맙군. 그래서, 우리를 부른 용건은?"
"네가 가져간 물건."
뜻밖에도, 로위나는 투란이 목에 걸고 있는 흉내쟁이 성유물을 정확히 가리켰다.
옷에 가려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것을 회수해야겠다."
그녀의 말과 함께 뒷골목에 싸늘한 침묵이 오갔다.
당연하게도 흉내쟁이 성유물은 투란의 가장 큰 자산인 만큼 이를 반환하라는 요구는 재고할 여지조차 없는 요구였다.
심지어 그 대가조차 언급하지 않고 고압적으로 '회수'를 운운한다면 더더욱.
그들의 눈에 떠오른 전의를 읽었는지 로위나 역시 전투를 대비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던 그때, 아르마니가 황급히 두 팔을 벌리며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자, 잠시! 누이! 너무 목적만 말하지 않나! 내가 잘 설명해 보겠다!"
"이것 이상의 말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투란은 착한 악마다! 그 물건은 내 목숨의 보상이었고! 회수한다고 하면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야 옳다!"
로위나는 썩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마니가 재빨리 투란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네가 미안할 건 아니지. 정확히는 아직까진 그렇단 거지만. 그래서, 무슨 일인데?"
저 로위나라는 인어는 힘으로 뺏을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한 모양새였지만, 실제로 전력 면에서 압도적인 우세인 것은 오히려 투란 일행 쪽이었다.
저 인어의 몸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기껏해야 상위 귀족 중에서도 상위권, 투란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대화의 여지를 제공한 건 오히려 이쪽이 자비를 보인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굳이 변수라면 인어들이 같은 힘을 가진 동급 마법사보다 월등히 강한 경우 정도일까.
그런 사실은 꿈에도 짐작치 못한 채, 아르마니는 자기가 큰 싸움을 진정시켰다는 듯 뿌듯한 표정을 짓더니 충격적인 발언을 꺼냈다.
"그게, 네가 가져간 그 물건이 없어지고 나서 큰바다뱀이 살아났다."
"뭐? 설마 거기 있던 그 녀석을 말하는 건가?"
"맞다."
투란은 아직도 바닷속에 잠들어 있던 그 신화적으로 거대한 생명체의 존재감을 기억했다.
몸 길이만 백 미터쯤 될법하던 거대한 뱀....
먼 고대에 프레아 신족들과 동등히 맞섰다는 그 괴물이 살아난다면 현대에는 감히 대적할 존재가 없을 터였다.
이미르가 말하기를, 현대에 존재하는 신들조차 온전한 옛 신이 돌아오는 순간 적수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메이사와 솔리프를 돌아보자 그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떠올린 듯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를 본 아르마니가 다급히 덧붙였다.
"아니, 정말로 완전히는 아니다! 그러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것들...너희들 말로는 사령과 정령 사이의 존재가 된 거다."
"사령과 정령?"
"그렇다."
아르마니가 이어서 설명하기를, 투란이 성유물을 가져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만 남아 있던 큰바다뱀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놈은 흔히 말하는 사령과 비슷한 상태가 되어 바닷속을 마구 헤집었는데, 그러던 와중 폭풍의 정령과 결합하며 북해의 기상을 어지러트리는 능력마저 손에 넣었다.
"폭풍의 정령이라고?"
"그렇다. 어쨌든 우리 인어들에게는 바다를 어지럽히는 놈을 물리쳐야 할 사명이 있는데, 아바마마께서 말씀하시길 놈을 잠재우기 위해선 네가 가져간 그 물건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투란의 외모를 아는 것은 아르마니 한 명뿐이며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몇 달 내내 북해의 여러 섬에 인어 왕족들이 잠입한 채 투란과 비슷한 인상착의를 한 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투란 일행이 일으킨 소란을 통해서 소식이 전해져 곧장 찾아온 것이고.
"그런 거였나."
"그렇다! 그러니까 부디 그 물건을 돌려다오. 바다의 안정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네게 생긴 손해는 내가 아바마마께 부탁해서 비슷한 물건으로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
아르마니의 외침에 투란은 동료들과 잠시 시선을 교환하며 의견을 나눈 뒤 선언했다.
"그건 안 되겠는데."
9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