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본래 혈통 능력이란 따로따로 떼어 보아도 강력하지만, 이를 적절히 조합하면 더더욱 무서운 힘이 되는 법이다.
바람으로 구름을 끌어모아 더 강력한 벼락의 비를 뿌려내던 아라비온 가주의 마법이 그러하듯이.
지금 투란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마법 역시 그러했다.
처음에는 불꽃이었다가 이내 정제되고 정제되어 광선의 형태로 변하는 금색 빛무리.
그것이 은발 남자의 등 뒤로 둥그렇게 모여 거대한 광륜(光輪)을 형성하자, 선원들이 기겁해서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마, 마법사다! 선장님! 부선장님!"
"도와주십쇼!"
부하들의 부름에 패거리에 있던 두 명의 기사들은 정확히 반대의 행동을 보였다.
용감히 검을 뽑아 응전하는 한 명, 그리고 재빨리 뒤돌아 도망치는 한 명.
사실 두 행동 모두 딱히 의미는 없었다.
광륜에서 솟구친 빛의 채찍이 덤벼든 기사의 검과 몸을, 그리고 저 멀리 도망치던 이의 머리마저 절단했기 때문.
절단면에서 피와 뇌수가 흐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채찍에 끔찍하리만치 뜨거운 열기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 어?"
"둘 다...죽었다고?"
"말도 안 돼."
믿고 있던 이들이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는 모습에 현실감을 잃은 것일까.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망연자실한 기색으로 서 있는 선원들을 향해 금빛 채찍이 수십 가닥으로 분열하며 날아들었다.
투란은 그 몽환적이기까지 한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빛과 불....'
그 두 가지 혈통 능력을 다루는 가문의 이름을, 분명히 과거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엔릴 사막 동쪽에 있다는 대가문 바라하.
저 남자는 바로 그 먼 동방에서 온 귀족이 분명했다.
대체 왜 그 먼 곳을 근거지로 하는 귀족이 이런 곳에 와 있는지 생각할 새도 없이, 투란은 생존자가 몇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황급히 손을 뻗었다.
바로 옆에 있던 바닷가에서 대량의 물이 솟구치며 살아남은 선원 세 명을 감쌌다.
"으헉...어?"
"살았다!"
투란의 마력이 담긴 바닷물은 덮쳐오던 금빛 채찍과 충돌해 대량의 수증기를 피워 올렸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투란은 상대를 향해 정중히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화나신 줄은 알지만 잠시 이야기를-"
그러나 바라하 귀족은 말을 듣는 대신 곧바로 광륜에서 금빛 채찍을 만들어 투란에게 날렸다.
소름 끼치도록 빠른 것은 물론이요, 하나하나가 생명이 깃든 것처럼 제멋대로 휘어지는 채찍들.
이를 본 투란은 얼굴을 찡그리며 사고속도를 가속, 더 많은 양의 바닷물을 퍼낸 뒤 날아드는 채찍을 하나하나 요격했다.
그 와중에 빛의 산란을 이용한 것인지 눈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로 날아드는 채찍의 궤도가 미묘하게 달랐다.
흉내쟁이 성유물의 마력 감지 능력이 아니면 감쪽같이 속았을 터.
간신히 모든 공격을 쳐내자 어마어마한 양의 수증기가 해안가를 자욱이 뒤덮었다.
'후우....'
잠깐의 공방이었지만 극도로 정신을 집중한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고 가속의 도움이 없었다면 몇 방쯤은 맞지 않았을까.
그나마 하나같이 손이나 발처럼 치명적이지 않은 부위만을 노린 것으로 보아 저쪽도 그를 죽일 마음까지는 없는 것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불어온 강력한 바람에 해안가를 뒤덮고 있던 수증기가 훅 걷혔다.
바라하 귀족은 투란이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마법기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저건 뭐야?'
저 형상을 설명하자면 나무토막 끝에 종이를 붙인 막대기라고 해야 할까.
일자로 되어 있던 것이 쫙 펼쳐지며 반원형에 가까운 형상으로 바뀌더니, 이를 휘두르자 강렬한 바람이 일어나 불꽃을 앞으로 밀어냈다.
"쯧."
투란은 가볍게 혀를 차며 마찬가지로 바람 마법을 사용,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화염을 주변으로 퍼트려 버렸다.
구체나 창의 형상으로 정제된 불이라면 모를까, 바람으로 힘을 키우고자 허술하게 피워낸 불은 이런 식으로 흩어내는 게 가능했다.
이를 본 바라하 귀족이 놀라며 물었다.
"뭐야, 바람도 잘 다루잖아? 혹시 혈통 능력이 그 둘인가? 그런 가문은 없을 텐데."
조금 전 상대가 그랬듯, 투란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거대한 파도를 일으켜 공격했다.
그 위력만으로도 어지간한 사람은 온몸이 으스러져 죽을 정도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위장용.
상대가 화염의 장벽으로 파도를 증발시켜 막아낸 순간, 투석구에 매겨 두었던 돌멩이가 수증기를 뚫고 복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시야가 가려진 터라 대비조차 할 수 없을 절호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접근한 돌멩이는 알 수 없는 일렁임과 함께 슉 하고 사라져 버렸다.
마치 그 주변의 공간을 보이지 않는 괴물이 먹어치우기라도 한 것처럼.
'뭐지? 방어 마법기?'
투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조금 전의 방어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어떻게 해야 뚫을 수 있을지를 분석했다.
물리적 투사체에만 작용하는 것일까? 그런 것치고는 실체인 바닷물을 막지 않았는데....
그렇게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도, 상대가 갑자기 두 손을 들며 뒤에 펼쳐져 있던 광륜을 해제했다.
환하게 밝혀져 있던 해안가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항복, 항복! 내가 졌다. 여기까지 하자고."
마치 싸움이 장난이라도 되는 듯 구는 가벼운 태도.
투란은 가만히 상대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투석구를 주머니에 넣었다.
* * *
"실력이 좋던걸, 친구. 난 솔리프다. 넌?"
"투란."
이미 한 차례 치고받은 마당에 예의까지 차릴 필요는 없을 터.
짧은 대답에도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솔리프가 아직 하늘에 남은 수증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정도로 물을 다루는 마법사는 진짜로 처음 보는데. 카마인 가문 출신은 아니지?"
"아니야."
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혈통 능력을 들먹이는 것은 마법사에게 있어 최고의 찬사 중 하나.
하지만 연이어 짧게 끊어지는 답변이 알려주듯, 칭찬을 듣는 투란의 기분은 썩 즐겁지 않았다.
전투가 격렬해지며 미처 챙기지 못한, 그래서 새카맣게 타죽은 시체 세 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음? 아, 그러고보니 쟤네 지키려고 했던가? 혹시 뭐 형제나 친구쯤 되는 건...아니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거든. 죽은 사람은 말할 수 없으니까."
"아."
너 때문에 다 글렀다는 뉘앙스를 읽었는지, 솔리프가 민망해하는 표정으로 귀를 매만졌다.
"아니, 저 자식들이 화나게 해서 어쩔 수 없었어. 사람이 뒤통수까지 맞아가면서 성의를 보이는데."
옆에서 보기에도 화가 날 만하긴 했다만, 그래도 원하는 게 있으면 몇 명은 살려둬야 할 것이 아닌가.
심지어 그 역시 프레아 신족의 유적인지 뭔지를 찾고 있었으면서.
그때, 솔리프의 시선이 전투 내내 투란의 옆에 얌전히 매달려 있던 비제에게 향했다.
느낌상 상황이 곤란하니 화제를 돌리려는 것 같았다.
"아, 맞다! 그 검독수리, 마수지? 코마드 시에서 팔던."
비제가 마수치고는 변이 정도가 크지 않아 평범한 검독수리인 척하곤 하지만, 아무래도 평범한 동족들과는 사소한 차이가 있었다.
눈빛이 유난히 날카롭고 지성이 느껴진다거나, 날개가 체격보다 조금 긴 편이라거나 하는 등으로.
하지만 그 차이는 투란처럼 자주 접하는 이들이나 알 만한 정도에 불과한데, 솔리프는 비제를 본 순간부터 이를 확신하고 있던 것 같았다.
"맞아."
"역시 내 눈은 못 속인다니까. 저 녀석을 얻겠다고 무려 한 달을 매달렸는데. 어떻게 꼬신 거지?"
"글쎄, 인연이 닿았다고나 할까...."
투란은 그제야 상대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비제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던 바라하 가문의 차기 후계자.
정황상 그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를 알아차렸음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가문의 차기 가주가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데는 틀림없이 남들에게 알리기 꺼림칙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때, 솔리프가 투란을 향해 열 손가락을 폈다.
"열 배."
"뭐?"
"네가 산 가격의 딱 열 배를 더 주고 살게. 어때?"
"백 배여도 안 돼. 애초에 비제가 원치 않을 거고."
투란의 옆구리에 기대고 있던 비제가 맹렬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솔리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런가. 젠장, 대체 내가 뭐가 모자란 거지?"
그건 투란으로서도 몹시 궁금한 부분이었다.
메이사 역시 자격이 있었던 것을 보면 투란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조건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정작 비제 역시 '느낌'정도로밖에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쨌든, 솔리프는 아쉬움과 미련이 뚝뚝 남은 표정으로 비제를 바라보면서도 더 우겨대지는 않았다.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억지로 뺏으려 들었다면 바라하의 후계자를 죽여야 했을 수도 있으니까.
'근데 왜 비제한테 저렇게 집착하는 건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투란에게는 가장 소중한 가족이지만, 객관적으로 비제는 유용하긴 해도 썩 강력한 마수라고 보긴 어려웠다.
머리가 좋긴 해도 불이나 벼락을 뿜고 보이지 않는 칼날을 만드는 등의 능력이 전혀 없으니까.
분명 바라하의 후계자라면 그 권력과 재력으로 더 강력한 마수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텐데.
의문을 품던 그때, 솔리프가 갑자기 불타 죽은 선원들의 시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저놈들에게 물어보려던 게 뭔데? 내가 아는 거면 대신 답해줄게. 이 동네는 제법 오래 돌아다녔으니까."
"초석이 나는 곳을 찾고 있어."
"초석? 그 하얀 돌?"
"맞아."
"그거 내 고향 근처에서도 나는데, 혹시 불로영생의 비약이란 소문을 믿는 거라면 헛소문이야. 염장 고기에 색 낼 때나 쓰는 거라고."
"알아. 그냥 개인적으로 쓸 데가 있어서."
투란은 솔리프에게 불의 영혼에 대해서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태양 혈통의 귀족이 그 물건을 손에 넣는다면 얼마나 거대한 규모의 파괴행위가 가능할지 짐작하기도 어려우니까.
설명을 들은 솔리프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턱을 쓰다듬더니 말을 꺼냈다.
"이 근처에서 나는 곳을 찾는다는 거지? 그러면...아마 파라얀 섬에 가면 될걸? 동북쪽으로 며칠 정도만 가면 나올 거야."
솔리프의 말에 투란은 놀란 표정으로 상대를 보았다.
"그런 건 어떻게 알았지?"
"찾는 게 있어서 이 주변을 제법 오래 훑었으니까. 얼마 전까지도 배를 탔었는데, 그때 지나가면서 저곳에서 초석이 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들었거든.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러고 보니 프레아 신족의 유적지를 찾는다고 했던가?"
투란은 딱 거기까지만 언급하고 더 관심 없다는 듯 말을 끊었다.
혹시라도 저쪽이 귀중한 보물 같은 것을 탐사하고 있는데 깊게 흥미를 보이면 꺼림칙할 테니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솔리프는 오히려 투란이 관심을 보인 것이 기꺼운지 신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맞아. 남해의 섬 여기저기서 전승되는, 먼 고대에 큰바다뱀들과 싸우던 도중 바다에 가라앉아 돌아오지 않은 신에 관한 이야기지. 어느 경전에도 기록되지 않은, 말 그대로 잊힌 옛 신이라고. 흥미가 절로 생기지 않아?"
몹시 익숙한 이야기에 투란은 순간 목에 걸어둔 흉내쟁이 성유물을 매만질 뻔했다.
하지만 이 성유물의 주인이 죽은 곳은 분명 이곳에서 수천 킬로미터쯤 올라가야 나오는 북해인데....
'아.'
생각해 보면 북해에 내려오는 전설 중에 그런 이야기도 있었다.
북해와 남해를 하나로 연결하는 고대의 마법 거울.
만약 흉내쟁이 성유물의 원주인이 남해에서 싸우다가, 거울을 통과해 북해로 넘어가고 그곳에서 죽은 것이라면?
즉석에서 떠올린 것치고 굉장히 그럴싸하게 들렸다.
"그 신의 유해나 남긴 성유물이라도 찾는 건가?"
"그건 아무래도 무리지. 내가 인어도 아니고. 일단 목표는 그가 전투를 치르러 떠나기 직전 머물던 거처를 찾는 거야. 세월이 세월이니 신이 직접 남긴 기록 같은 건 다 없어졌겠지만, 적어도 전승되는 이야기 정도는 있겠지. 어떤 성격을 가진 신이었는지, 어떤 신들과 사이가 좋고 나빴는지 같은 거."
어디까지나 학구적인 목적이라며, 솔리프는 조금 전 선원들에게 허풍을 떨 때처럼 즐거워하는 태도로 수다를 떨어댔다.
이야기의 시작은 엔릴 사막의 남쪽 항구에서 우연히 익사한 신에 관한 이야기를 접했던 것.
이후 지난 일 년 내내 남해와 인접한 항구, 그리고 남해의 여러 크고 작은 섬들을 오가며 정보를 모았다.
그러던 도중 때로는 좋은 뱃사람들과 인연이 닿아 친구가 되었고, 때로는 지금처럼 함정에 빠져 힘으로 돌파했다.
생전 처음 보는 향토 음식을 먹거나 강대한 청새치 마수, 인어 군대와 싸우기도 했고.
평소에는 조금 전 보았던 것처럼 평민 행세를 했는데, 그러다 보니 강대한 귀족으로 살면서는 알 수 없던 사람들의 모습을 여럿 접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고 했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투란이 모험하던 것과도 사뭇 비슷했기에 제법 깊게 몰입할 수 있었다.
다만 이야기를 들으며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다면....
'어째 신에 대한 단서를 찾는 것보다는 핑계 삼아서 여행하는 게 주목적인 것 같은데?'
내심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솔리프가 투덜대듯 말했다.
"그런데 요즘은 분위기가 영 나쁘단 말이지. 양심 있는 뱃사람들은 별로 없고, 하나같이 아까 그놈들 같은 쓰레기들뿐이야. 요 몇 달 동안 저런 해적인지 깡패인지 모를 놈들만 수백 명쯤은 죽였을걸."
"그 정도면 남해의 치안 유지에 크게 이바지했겠어."
아무리 바다에 해적이 들끓는다고 한들 설마 그 수가 수십만에서 수백만쯤 되지는 않을 텐데, 만 명이라고 쳐도 수십 명 중 한 명이 솔리프의 손에 죽은 셈이었다.
"뭐, 겸사겸사 자경단 일도 하는 셈이지. 라비타스나 다른 가문에서는 별로 안 좋아하겠지만...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잖아?"
"이러고 돌아다니는데 가문에서는 뭐라고 안 하나?"
"당연히 가출한 거지. 내가 어디 사람인지는 대충 알 테지만, 혹시라도 여기 있다는 사실은 본가에 알리지 마. 나중에 보복한다. 경고했어."
가출이라니, 그보다 스무 살에서 마흔 살은 더 먹었을 남자의 말이라기에는 참으로 철없는 소리로 들렸다.
투란의 시선을 느꼈는지 솔리프 역시 다소 민망해하는 웃음을 지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 그냥 갑갑해서 나온 게 아니라, 이건 나 자신을 찾는 여행이라고."
"내가 보기에 너는 바로 내 앞에 있는 것 같은데."
"아니, 그런 게 아니라...날 봐. 완벽한 얼굴에 특출난 재능, 가문까지 모두 타고난 선택받은 삶을 살고 있잖아?"
"어...."
마법사는 마력의 영향으로 곧은 체형과 깔끔한 피부 등의 이점을 지녀 평민보다 외모가 뛰어난 편이기는 하지만, 솔리프는 딱 보기에도 그리 미남형 얼굴은 아니었다.
뭐라 대꾸하기 난감해 얼버무리자 그는 이를 동의라 생각한 듯 제멋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살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온전한 나 자신이 아닌, 만들어진 존재 같다는 걸."
"만들어져?"
"그래. 어려서부터 엄격히 교육받았거든. 너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이런 건 하면 안 된다...성격과 능력, 사소한 습관이나 말버릇까지 모든 것을 말이야."
"그건-"
좀 과하긴 해도 딱히 특별한 이야기 같지는 않았다.
귀족들에게 첩으로 보내고자 키우는 꽃들이나 하다못해 부유한 상인들도 자식들을 그렇게 키우지 않던가.
투란이 삼킨 말이 무엇인지 짐작했는지 솔리프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 정도야 뭐 있는 집 자식이면 다 할 법한 생각이지. 하지만 우리 가문은 그런 수준이 아니야."
"그러면?"
"다른 사람과의 교류부터 도전과 성취, 심지어 내가 무언가에 흥미를 갖고 몰두하는 것까지도 모든 게 만들어진 가짜였어. 마치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누군가가 섬세하게 나를 조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할까...."
61화
대가문의 귀족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솔리프.
그는 남들보다 어린 나이에 강대한 마력을 각성, 말 그대로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때때로 갈등도 좌절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원하는 대로 되는, 그래서 적당한 자존감과 오만함으로 무장한 귀족 청년이 되기 충분한 삶.
그러나 마흔여덟 살이 되던 십 년 전.
솔리프는 자신의 삶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자각했다.
계기는 가문의 행사로 만난 먼 친척의 손등에서 어린 시절 죽었던 친구와 같은 흉터를 발견한 것이었다.
"친구?"
"그래. 나 때문에 죽은 녀석이었지."
십 대 중반 무렵, 지금처럼 모험심이 넘치던 솔리프는 어려서부터 형제처럼 자란 친구와 함께 몰래 가문을 나섰다.
스스로 마력을 쟁취하고 실전 경험을 쌓으며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느 마을을 위협하는 마수를 사냥하러 갔을 때, 어린 솔리프는 상대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기의 순간, 함께 가출했던 친구가 대신 희생하여 목숨을 건졌으나 그 일은 그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어찌어찌 가문으로 돌아온 솔리프는 다시는 함부로 가문을 나서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자신의 모험심을 가슴 깊이 묻었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가문 사람들이 찾아 수습했다던 친구의 묘지를 파헤쳐 보니 아무것도 없더라. 그 친척은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특별한 임무를 위해 자리를 떠나 있었고 말이야."
정황상 그 친척이 어린 모습으로 위장하여 희생하는 친구 역할을 연기한 것이 분명했다.
아마 변장에 적합한 마법기 같은 것을 교묘히 이용했을 터.
어린 시절 그의 인격을 뒤흔들다시피 했던 큰 사건이 모두 가짜였다는 사실에 솔리프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날 위협했던 마수도 나중에 기록을 뒤져보니 가문 내에서 키우다가 방출한 녀석이랑 특징이 똑같았어. 방출 시기도 딱 내가 그 일을 겪었을 때였고."
그 외에도 과거사를 자세히 캐보니 그런 식의 일이 한둘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비슷한 또래인데도 마법 실력이 솔리프보다 뛰어나 늘 질투하고 동경했던, 그래서 필사적으로 수련한 끝에 앞질렀던 친척은 언젠가 시골로 파견을 나갔다가 그대로 실종되고 잊혔다.
열렬히 사랑했으나 신분 차이가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떠났던 하녀는 기록된 출생지부터 모든 것이 가짜였다.
역사학 쪽 취미를 공유하던 친구 몇 명 역시 알고 보니 자신과 교류하기 전에는 그쪽에 흥미를 보인 적조차 없었다.
"대충 이해했지? 가문 전체가 나를 만들고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래서 탈출한 거야. 이곳에서는 무엇을 만나 무엇을 선택하건 조작된 것이 아닐 테니까."
그렇게 가문을 탈출한 뒤로는 그동안 훈련받았던 성격이며 말투 따위를 모조리 바꾸며 진짜 자신을 찾고 있다고.
설명을 마치며, 솔리프는 언제 꺼냈는지 모를 술을 병째로 입에 털어 넣었다.
"이렇게 술 마시는 것도 가문 안에서는 꿈도 못 꿨지."
"혹시 누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생각해본 적은?"
"몰라. 벌여놓은 일의 규모로 보아 가주는 무조건 개입했겠지만 말이야."
존칭을 붙이지 않는 데서 솔리프가 자기 가문의 가주에게 가진 반감을 읽을 수 있었다.
투란은 이야기를 들으며 몸을 옮겨 살아남는다던 프레아 신족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만약 그들이 현재까지 살아남았다면, 그리고 계속 몸을 옮기고 있다면 당연히 재능 있고 강력한 마법사의 몸을 원할 터.
그리고 대가문의 후계자쯤 되면 그러한 조건을 차고도 넘치게 충족할 것이 분명했다.
'마법의 법칙 중 하나, 더 그럴싸한 일일수록 마력 소모가 줄어든다....'
만약 생령술을 사용한 것이라면 꼭 그 법칙이 적용되리라는 법이 없지만, 적어도 마법적인 원칙으로 봤을 때는 성격이나 취미 따위가 같은 사람의 영혼으로 바꿔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 분명했다.
인격이 급격히 바뀌는 것은 엄연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어쩌면 메이사 역시 비슷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재능이며 신분까지 신의 몸으로 쓰이기에 부족함이 없을 인재가 아닌가.
솔리프의 경우처럼 주변에서 무언가 수작질이 있었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어쩌면 그냥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일 수도 있었다.
그녀가 식사를 거부하는 것이나 가문을 혐오하게 된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지도....
한참 고민에 빠진 사이, 솔리프가 갑자기 마시던 술병을 투란에게 휙 던졌다.
"뭐야?"
"아니, 너무 재미없는 이야기만 하니까 분위기가 처지잖아. 술이라도 한잔하라고. 못 마시는 건 아니지?"
투란은 진한 갈색을 띠는 술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한 모금 들이켰다.
후끈한 열감이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독하네."
"사탕수수즙을 발효시키고 증류한 술이야. 남해의 명물이지."
그렇게 말한 뒤, 솔리프는 분위기를 띄우겠답시고 다시 자신이 해온 모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투란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장단을 맞추다가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나중에 다시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은?"
"음? 글쎄, 어지간하면 없을 거 같은데. 가주만큼 강해지고 나면 다 엎어 버리러 돌아갈지도 모르지만."
"절대 돌아가지 마. 아니, 가능하면 가문의 눈에 띄지 않게 더 먼 곳으로 떠나. 저 먼 서쪽 같은 곳으로."
솔리프는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냐는 듯 눈을 껌뻑거렸으나 이 이상의 단서를 주기는 어려웠다.
그가 세운 가설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자면 지나치게 많은 비밀들을 알려주어야 하는 탓이다.
거기다 훗날 솔리프가 잡힌 뒤 고문이나 생령술, 그 외의 온갖 방법으로 투란과 나누었던 대화가 배후의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라도 한다면?
자기들의 존재를 인지한 누군가가 있음을 알게 된 그들이 절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는 않을 터였다.
* * *
밤새 이야기를 나눈 뒤, 솔리프는 기회가 되면 또 보자며 남쪽으로 떠나 버렸다.
투란은 부디 그가 되도록 오래 가문의 눈을 벗어날 수 있기를 기원했다.
기껏해야 하루 만나서 실력을 겨루고 술 좀 마신 사이일 뿐이지만, 그래도 아는 누군가가 갑자기 육체 강탈이라는 죽음이나 다름없는 일을 겪는다면 불쾌할 테니까.
해 뜨는 아침, 가볍게 물고기 몇 마리를 낚아 아침 식사를 한 투란은 비제와 함께 동북쪽으로 비행했다.
처음에는 느긋이 배를 타고 갈 생각이었지만, 이번에 새로이 알게 된 사실 때문에 계획을 바꾼 것이었다.
'빠르게 불의 영혼을 확보한 뒤에 아라비온 쪽을 방문해야겠어. 신의 존재 여부까진 어렵더라도 정말로 메이사의 삶을 조작하는 세력이 있는지는 알아볼 수 있겠지....'
리다의 의뢰로 짐작건대 라비타스 가문은 프레아 신족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신이라면 백요정을 이미 구했거나 굳이 필요로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자하르나 다른 대가문들은 연줄이 없어서 접근 자체가 힘들지만, 그에 비해 아라비온은 베르크 가문이나 메이사라는 연결고리가 있으니 비교적 조사하기 편할 터였다.
흉내쟁이 성유물을 이용해서 결계사 혈통인 척 행세도 해놓았으니 비교적 경계도 덜 살 것이고....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운이 없어 안 좋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불의 영혼을 활용해 막대한 화력을 투사하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었다.
그러자면 이번에 초석을 대량으로 구해야 하겠지만.
한참 계획을 짜던 도중 투란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외모를 바꾸는 마법기라도 하나 있으면 편하겠는데, 어떻게 구할 방법이 없으려나.'
여러 개의 혈통 능력을 위장할 수 있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만큼 둘을 조합하면 혼자서 수십 명을 연기할 수도 있을 터.
아라비온으로 가기 전에 그런 보물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게 원한다고 재깍재깍 구해지는 물건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에 잠긴 채 하늘을 날기를 서너 시간.
투란은 지나치다 보이는 섬 몇 군데에 착륙해 길을 물어보기를 반복한 끝에 파라얀 섬에 도착했다.
초석의 산지라고 알려진 이곳은 길이가 수 킬로미터쯤 되는 적당한 크기의 섬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니 마을도 하나 있는 것 같았다.
적당한 높이까지 내려온 뒤 후각에 신경을 집중하자 섬의 한가운데 어딘가에서 초석 특유의 묘한 지린내가 느껴졌다.
비제에게 부탁해 적당한 곳에 착륙한 투란은 냄새가 풍기는 곳을 향해 걸었다.
무성히 자란 나무를 헤치며 걷기를 몇 분, 어느 거대한 절벽 아래에 나무 기둥으로 벽과 천장이 고정된 동굴이 보였다.
안쪽에서는 깡깡 무언가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여긴가?'
광산의 입구를 지키는 사람이 따로 없었기에 투란은 곧바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렁이는 횃불을 광원 삼아 벽에서 하얀 광석을 캐내는 광부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들의 안색이며 옷차림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원래 광부라는 직업이 깔끔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한데....'
핼쑥한 얼굴에 옷에서는 찌든 내가 가득하며, 몸 이곳저곳에 멍 자국이 남아 있는 광부들.
심지어 다리에는 하나같이 족쇄까지 채워져 있었다.
누가 봐도 노예에 가까운 모습을 한 그들은, 자기들 사이로 불쑥 나타난 투란을 보며 기겁해 고개를 숙였다.
"저희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감독관님!"
"...감독관?"
투란이 의아해하는 듯한 기색으로 반문하자 광부들의 표정이 변했다.
이제 보니 눈앞의 청년은 차림새며 태도가 으레 보아온 감독관들과 영 달랐던 탓이었다.
"그, 혹시 일하는 걸 감독하러 오신 분 아니신지...?"
"그냥 이 섬에 초석이 난다길래 구해 보러 온 사람입니다. 이곳에 판매를 담당하시는 분이 따로 있습니까?"
"가, 같이 온 사람 있소?"
"아뇨. 혼자 왔습니다."
투란의 대답에 광부들이 기겁하며 외쳤다.
"빨리 도망치쇼! 아니,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좀 여기서 데리고 나가 주시오. 제발!"
"여기 다 끌려온 사람들입니까?"
"우리 모두 끌려온 사람들이오! 그 나쁜 놈들이...."
어느 광부가 열에 차 외치던 그때, 뒤쪽에서 촤악 하고 날카로운 채찍 소리가 났다.
이를 들은 광부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기겁하여 엎드렸다.
"시끄럽다! 뭔데 이렇게 말들이 많아? 잠깐 똥 싸고 오는 틈을 못 참아서는...응?"
채찍을 든 감독관은 투란을 발견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 파라얀 섬은 근처를 흐르는 해류의 특성상 직접 목표로 잡지 않으면 도달하기 어려운 곳이라서, 늘 오는 사람들만 방문하고는 했다.
분명히 오늘 들어온 배가 없다고 들었으니 손님 역시 없어야 할 터인데, 이 이방인은 누구란 말인가.
"그쪽은?"
"초석 사러 온 사람입니다."
"누가 온다는 연락을 못 받았는데...아니, 그보다 초석을 살 거면 마을 쪽에서 이야기하지 여긴 왜 온 거요? 어느 해적단 소속이지?"
"딱히 해적단 소속은 아닙니다. 그런데 혹시 이곳 광부들을 납치한 사람들로 채운 겁니까?"
투란의 물음에 주변에 있던 광부들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감독관의 눈치를 보았다.
주변의 광부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관리관은 그제야 무언가가 번뜩 떠올랐는지 억지웃음을 지었다.
"저, 우선 어디서 오셨는지부터...."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투란이 순식간에 고압적인 태도로 돌변하자, 이를 본 감독관이 몸을 부르르 떨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습니다."
"이 근방을 통치하는 가문이 어디지?"
"그, 가문은 아니고 코비누스 해적단입니다!"
"해적단?"
"예. 위대한 대해적 코비누스 님을 수장으로 모시는...."
간살맞은 목소리로 말하는 감독관의 설명에 의하면, 코비누스는 어느 귀족의 사생아로 오랜 세월 남해에서 악명을 떨친 해적 마법사였다.
한낱 해적이라 무시하기에는 그 실력이 꽤 뛰어나서 심지어 그를 토벌하러 온 다른 가문의 군대조차 몇 번 격파한 적이 있을 정도.
휘하에는 수십 명의 기사와 전함을 갖췄으며 섬도 몇 개씩이나 지배하고 있는데, 이 파라얀 섬 역시 그중 하나라고 했다.
가만히 설명을 듣던 투란은 광부들을 가리켰다.
"그래서, 그 코비누스란 놈이 여기서 사람들 납치해 와서 초석을 캐라고 시킨 건가?"
"예? 예...초석만 캐는 곳은 아니긴 합니다만."
그 말을 듣고 보니 곳곳에 놓인 수레에는 초석 말고도 반짝이는 광물이 몇 개 더 있었다.
하기야 불로영생의 비약으로 속여 파는 것 외에는 별 쓸모도 없는 물건을 대량으로 캐겠다고 광산까지 운영할 필요가 있겠는가.
다른 광물을 캐는 동안 겸사겸사 캐내어 부업으로 팔아치우는 정도의 느낌일 터였다.
투란은 허름한 차림의 광부들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음에 안 드는데."
다른 양치기가 양을 어떻게 부리느냐까지 간섭하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월권이겠지만, 남의 양을 훔쳐 오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하다못해 납치해 와서 잘 대해주기라도 했으면 모르겠지만 그도 아니지 않나.
이를 들은 관리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 이곳에도 그분 휘하의 기사가 있습니다! 제가 잘 이야기해볼 테니...."
"고맙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본래는 지난번 유황이 그랬듯이 초석이 널브러져 있으면 알아서 캐고, 주인이 있으면 적당히 싼 가격에 협상해 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꼴을 보니 그럴 생각이 사라졌다.
납치범 놈들한테 돈을 주고 물건을 산다니 그게 웬 말인가.
투란은 광부들을 향해 나지막이 명령했다.
"모두 이쪽으로."
딱히 동물 조종 마법을 쓰지 않았음에도 광부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홀린 듯이 투란을 향해 걸어왔다.
그 수가 총 서른다섯 명.
그들이 발목에 차고 있는 족쇄를 자물쇠 따기 마법으로 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푸, 풀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부디 저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마법사님!"
족쇄가 풀렸음에 감탄하는 이와 엉엉 울며 감사를 표하는 이, 집에 보내달라고 바지를 붙잡고 애원하는 이까지.
투란은 정중히 바지를 잡은 이를 떼어내며 말했다.
"우선 마을 쪽을 정리하고 올 생각이니 이쪽 정리는 맡기겠다."
"저, 정리라고 하시면...?"
"저놈."
투란이 관리관을 가리키자 그가 깜짝 놀라 도망치려 했지만, 일반 인간에 불과한 그를 나동그라지게 하는 데는 간단한 염동 마법 한 번이면 충분했다.
투란은 그의 유일한 무기이던 채찍까지 빼앗은 뒤 내던지고 광산 밖으로 나왔다.
뒤쪽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해안가에 자리한 마을은 광산에서 한 시간은 걸어야 할 거리에 있었지만, 그 정도는 비제를 탄 투란에게 바로 코앞이나 다름없었다.
대낮인지라 검독수리와 투란의 그림자가 지상으로 비쳐, 해적들은 금방 그 존재를 눈치채고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새를 탄 사람이다! 아니, 새에 매달린 사람...?"
"마법사인가? 촌장님한테 누가 보고해!"
갑자기 등장한 정체불명의 인물에 해적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투란은 지상의 해적들을 내려다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
주먹 안에는 새카만 가루 한 줌이 쥐여 있었다.
"실전에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 기억하지, 비제? 놀라지 마."
삐약 하고 알겠다는 의미의 대답이 들려오는 것을 확인한 뒤, 투란은 불의 영혼을 마을에 흩뿌렸다.
발화 마법을 거는 것과 함께 지상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62화
공격 마법의 위력과 범위는 본래 서로 반비례한다.
마법에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이 한정된 탓에, 위력에 치중하면 범위가 줄어들고 범위에 치중하면 위력이 줄어들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 파라얀 섬의 해안가에서 펼쳐진 마법은 그러한 법칙에서 벗어나 있었다.
반경 수십 미터를 초토화하고 해적들을 시체조차 남지 못하게 분쇄하는 데 든 힘은, 고작해야 숨 몇 번 쉬면 회복되는 수준의 마력과 새카만 가루 한 줌에 불과했으니까.
투란은 거뭇해진 손바닥을 털며 불의 영혼이 얼마나 강력하고 위험한 물건인지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이건 진짜로 다른 가문에 공유되면 안 되겠는데.'
바람 마법을 조합해 폭발 범위를 극적으로 넓히기는 했으나, 그걸 고려하더라도 터무니없는 위력이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소모형 마법기나 다름없는 수준이 아닌가.
물론 제작 방법이 어떤지를 생각하면 누군가 우연히 만들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세 가지 물질을 정확한 비율로 합친 뒤 마법사가 마력을 소모해 혼합한다는 조건은 지나치게 까다로웠다.
'나 말고 이걸 아는 게...같이 오빌을 죽였던 카마인의 귀족들 정도였지?'
그중에서도 다른 이들은 크게 관심이 없었고, 대장이었던 비센만이 호기심에 수첩을 들여다보고 내용을 베껴 갔었다.
그들은 방화광 능력을 얻을 수 있는 의식 쪽에 집중하고 있었고, 초석과 유황이 썩 구하기 쉬운 자원이 아님을 생각하면 불의 영혼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만 경계 정도는 해둘 필요가 있을 듯했다.
투란은 귀가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비제를 달래며 지상으로 착륙해 살아남은 해적들을 하나하나 확인 사살했다.
한창 잠들었거나 귀찮아서 나오지 않는 등, 건물 안에 머무르던 녀석들도 삼십여 명 정도 있었다.
"사, 살려 주십쇼, 제발-"
"죽어어어-!"
"부디 부하로 삼아 주십시오, 충성을!"
틀어박혀 있던 놈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해안가 전체가 파괴된 현장을 보고 곧바로 애원하거나, 용감하게 저항하거나, 그도 아니면 바로 편을 바꿔 굴복하거나.
투란은 그나마 고분고분해 보이는 몇 명을 따로 뽑아 죽이지 않고 대지 변형 마법을 이용해 땅에 파묻었다.
그나마 가장 오래 저항한 것은 이 섬을 지키라고 배치된 기사 두 명이었는데, 투란은 불의 영혼 한 자밤을 바람 마법으로 날려 보낸 뒤 폭발시켜 그들을 무력화했다.
이를 쓰지 않고도 죽일 수는 있지만, 기사급 마법사를 해치우는 데 필요한 양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으어어...."
실험 결과는 한 명 즉사,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내장이 모조리 터진 빈사 상태.
덕분에 어느 간격에서 어느 정도 위력이 필요할지를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놈은 자신이 곧 죽으리라는 사실을 이해했는지 피를 줄줄 쏟으며 악담을 퍼부었다.
"각오해라, 우리 선장님이...복수를...!"
"안 그래도 조만간 찾아갈 거다. 이딴 짓 좀 그만하라고."
투란은 그렇게 답한 뒤 머리를 걷어차 숨통을 끊었다.
코비누스란 놈이 귀족급 마법사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래봤자 투란보다 강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 정도 실력자였으면 해적질이나 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
그렇게 작업에 매진하던 도중, 투란은 어느 건물 안에 모인 십수 명의 기척을 느꼈다.
안에서는 불의 영혼 특유의 매캐한 냄새를 뚫고 역한 악취가 풍겨왔다.
커다란 창고 같은 장소의 문을 부수자 그곳에는 예상대로 추레한 몰골의 여자들이 가축처럼 모여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뭐든 다 해 드릴게요, 제발...."
"모두 해적들에게 납치된 사람들인가?"
"맞아요!"
"그렇다면 정리해서 나오도록. 자유다."
그렇게 말한 뒤, 투란은 그들을 쳐다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여러모로 차림새가 정갈하지 못한 이들이 꽤 많았는데, 리다와 같은 성격이 아니라면 투란의 시선을 달갑지 않게 여길 것 같아서였다.
잠시 후 주춤거리며 창고 밖으로 나온 여자들은 사방에 죽어 널브러진 해적들의 모습에 탄성을 터트리거나 비명을 질렀다.
몇 명은 오랜 시간 학대당한 탓인지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해 부축을 받아야 했다.
"저, 안에 광산이 있어요! 거기에 납치당한 남자들도-"
"그쪽도 족쇄는 다 풀어 놨다. 여기에 있던 해적들이 몇 명 정도였지?"
"잘은 모르지만 육칠십 명쯤 될 거예요."
투란은 광역 폭발로 쓸어버린 이들과 손수 죽이거나 땅에 파묻은 이들을 헤아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숫자가 맞는 게, 섬 어딘가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살아 있다 한들 한두 명 정도일 것 같았다.
어차피 배라고는 마을 항구에 있는 범선 한 척뿐인 만큼 그 숫자로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러면 일단 좀 씻고 쉬도록. 저기 파묻어놓은 놈들은 쓸 데가 있으니 죽이지 말고."
* * *
여자들에게 알아서 몸을 정돈하고 옷을 찾아 입으라고 지시한 뒤, 투란은 곧장 광산으로 돌아왔다.
처절히 찢겨 죽은 감독관의 시체 옆에 광부들이 하나같이 불안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투란을 본 그들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아, 마법사님이 돌아오셨다!"
"무사하셨군요! 호, 혹시 마을 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를 보며 화색을 띠는 이들은 칼라마프의 시민들을 떠오르게 했다.
자신만을 바라보며 안정을 갈구하는 연약한 양의 모습.
투란은 이제 자신이 그러한 이들을 보호하며 숭배받는 것을 내심 즐기고 있음을 인정했다.
입이 찢어진다 한들 누군가에게 이를 밝히지는 않겠지만.
"해적들은 다 처리했다."
"예! 아, 여기 정리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정리?"
"그, 초석을 가지러 오셨다길래...필요하시면 다른 것도 모두 마을까지 싹 운반해놓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투란이 해적들을 쓸어 버리는 동안 광부들은 광산 내에서 채굴한 광물들을 꺼내 갈 수 있게 정리해둔 모양이었다.
"이건 알아서 처리할 테니 우선 나가서 씻고 쉬지. 여자들도 구해 놨으니 돌봐 주고."
"여자들...? 아!"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테이야...."
마을에 있던 여자들과 관계가 있는 남자가 몇 있는지, 그들은 몸을 씻을 새조차 없이 곧장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모두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뒤, 투란은 우선 돌과 뒤엉킨 광석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금과 은이 섞인 돌은 강렬한 불꽃을 일으켜 녹여내고 액체 조작으로 띄워 분리했으며, 초석은 통째로 빻아버린 뒤 염동 마법으로 나눴다.
우습게도 마을 하나를 초토화하고 수십 명의 해적을 죽이는 것보다 이쪽의 마력 소모량이 수백 배는 더 많이 들었다.
금과 은을 녹이는 열기가 다른 곳으로 뻗어 나가지 않게 세심하게 통제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액체화한 금과 은을 덩어리로 굳혀 크기와 무게를 재어 보니 각각이 십수 킬로그램에 달했다.
아마 차후 화폐나 주괴로 정제하면 상당한 재산이 될 터였다.
그렇지만 일단 이곳에 온 본래 목적은 어디까지나 초석.
확보된 초석의 양을 확인한 투란은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 적은데....'
아무래도 곁들이로 캐는 광물이라서일까, 초석 가루의 양은 고작해야 십 킬로그램 정도에 불과했다.
이것이 불의 영혼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물질임을 생각하면 적어도 수십 배는 더 있어야 안심이 될 터.
투란은 어느 광부의 곡괭이를 집어 들고 광산 안쪽으로 진입했다.
'모자라면 직접 캐야지, 뭐.'
한평생 광부 일을 해본 적은 없었으나 막강한 힘 앞에서 요령 따위는 필요 없었다.
마력이 가득 실린 곡괭이질 한 번 한 번에 땅이 퍽퍽 패였고, 그 기세로 갱도가 무너지려 할 때면 염동 마법과 대지 변형을 사용해 억지로 천장을 유지하고 보수했다.
초월적으로 강력한 마법사 광부 한 명의 노동력은 평범한 광부 수백 명을 아득히 능가했다.
몇 시간 뒤, 투란은 목표로 했던 양 이상의 초석을 확보하고 광산에서 나왔다.
"후우...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이제 다 됐어?]
"응."
[나 힘들어.]
"그래, 일단 돌아가서 쉬자."
옆에서 함께 부리와 발톱으로 땅을 팠던 비제가 지친 듯한 얼굴로 글씨를 썼다.
그렇게 대량의 초석까지 확보한 뒤 마을로 돌아와 보니, 납치되었던 이들은 나름대로 이것저것 일을 하는 중이었다.
상태가 안 좋은 사람들은 그나마 멀쩡한 건물에 누워서 쉬고 있었고, 멀쩡한 이들은 식자재를 꺼내와 한창 음식을 만들어 아픈 이들을 간호했다.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은걸.'
그냥 멀거니 앉아 있으려니 했는데, 납치된 와중에도 어찌어찌 살아남은 사람들이라서 행동력이 남다른 모양이었다.
조금 전 파묻은 해적 중에서 빠져나간 녀석이 없음을 확인한 투란은 납치된 이들에게 향했다.
그들은 한참 무언가를 두고 떠드는 중이었다.
"저어, 이래도 되려나? 따지고 보면 이 음식들도 모두 그분의 전리품인 셈인데...."
"일단 목숨은 살려야 할 것 아니에요? 시체가 필요한 건 아닐 텐데, 지금 아픈 사람들은 이거라도 안 먹이면 죽을 거라...엇, 마법사님!"
건장한 남자에게 훈계하듯 말하던 여인이 투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다른 이들 역시 요리를 멈추고 인사하는데, 그중에는 무릎마저 꿇는 이들도 있었다.
"일어나라."
동물 조종 마법의 힘이 실렸기에 사람들은 그대로 말을 따라야 했다.
처음으로 겪는 현상에 모두가 당황한 사이, 투란은 무미건조한 어조로 물었다.
"아픈 사람들을 보살피고 음식을 만들었던데."
"예, 예...."
사람들을 지휘한 이는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인이었는데, 아무래도 맏언니 역할을 하는 덕에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투란은 바짝 긴장한 그녀에게 자상한 어조로 말했다.
"잘했다. 계속 사람들을 지휘해서 휴식할 곳을 마련하고 생활을 유지해. 혹시 또 해적이 나타나면 나를 부르고."
자신을 질책할 줄 알았던지, 여인은 투란이 그렇게 말하고 휙 떠나자 다리가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았다.
주도적으로 움직일 줄 아는 사람에게 일을 맡겼으니 당분간은 별일 없을 터.
일을 맡긴 투란은 해변가 근처에 파묻은 해적 서너 명을 도로 뽑아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혼자서 마을 하나를 순식간에 몰살시킨 마법사에게 대항할 엄두 따위 내지 못했다.
"살고 싶겠지?"
"무, 물론입죠! 살려만 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 목숨을 버리더라도...."
딱 봐도 비굴한 놈들만 살려둔 만큼 충성 경쟁이 치열하기 짝이 없었다.
투란은 가볍게 손을 들어 그들을 진압한 뒤 질문했다.
"이 근방의 해적들 중 가장 깨끗한 놈이 누구냐."
"깨끗, 이라고 하시면...."
"제일 잘 씻는 놈 말씀입니까?"
역시 무식한 해적 놈들이라 그런지 생각의 수준이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가장 정직하고 일반인들을 안 건드리는, 적어도 너희들처럼 사람 납치하지 않는 새끼들이 있냐고."
"그런 놈이...."
"있나?"
"붉은 고래 패거리들?"
"에이, 그쪽도 결국 해적인데 뭘."
"아니야, 내가 전에 듣기로 그쪽 선장이 사람 장사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어."
"그러고도 일이 돌아가나?"
자기들끼리 떠들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고래 해적단이 투란의 조건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상선을 공격해 통행세를 받거나 약탈까지는 하지만, 납치는 하지 않으며 무분별한 어촌 습격 따위도 자체적으로 처벌할 만큼 규율이 단단히 잡힌 집단이라고.
그들의 본거지가 어디인지까지 들은 뒤, 투란은 해적들을 다시 땅에 파묻고 생존자들을 찾아가 한 차례 더 물었다.
해적들과 비슷한 답변을 들은 투란은 납치된 이들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알렸다.
"그 붉은 고래 해적단에게 부탁해서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하겠다. 일일이 돌려보내 주기에는 다들 떠나온 곳이 너무 다르니까. 거기에 드는 비용은 광산에 있던 광물 값의 일부면 충분하겠지."
납치된 이들의 출신지는 시라프 습지 근처부터 인근의 작은 섬, 엔릴 사막 남부, 동방 쪽 어촌까지 다양했다.
그들 모두를 돌려보내 주자면 몇 달은 걸릴 터.
그러느니 차라리 여러 배를 운용하는 해적단 중 쓸만한 이를 골라 부탁하는 쪽이 나았다.
어느 남자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렇지만...해적들이 약속을 지킬까요?"
"지킬 거다. 그 코비누스인지 뭔지 하는 놈이랑 똑같은 꼴이 나고 싶지 않다면."
본래 투란의 계획은 초석을 확보한 뒤 바로 다케인 평야로 떠나는 것이었으나,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다른 이의 양들을 납치해 마구 학대하는, 사실상 늑대나 다름없는 악덕 양치기를 본 탓이다.
투란이 남해의 해적들을 일일이 다 쫓아다니며 몰살시킬 수는 없겠으나 눈에 띄는 가시 하나쯤 뽑기는 어렵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이러한 일은 아마 다른 악덕 양치기들에게도 충분히 본보기가 될 터였다.
* * *
앞으로의 계획까지 정리를 마친 뒤, 투란은 기사들이 쓰던 가장 크고 넓은 집으로 들어가서 곧바로 불의 영혼을 만들었다.
마을 근처에 있던 나무 수십 그루를 재료 삼아 숯가루까지 확보한 만큼 준비는 완벽했다.
본래 조합에는 썩 많은 양의 마력이 소모되지 않으나, 수백 킬로그램 분량을 만들자니 꼬박 하루가 걸렸다.
지나치게 많은 마력을 소모했다가 그 코비누스란 놈이 당장 쳐들어오면 곤란한 만큼 적당히 마력이 소모되면 일을 멈추고 쉬어주느라 그런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나온 투란을 맞이한 것은 그가 지도자로 임명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다소 어려워하는 기색으로 투란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마, 마법사님. 마을에 있는 재물을 모두 정리했는데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재물?"
"예. 해적들의 시체에 있던 거랑, 광산에서 캐고 윗선에 바치지 않은 것들입니다."
"아."
생각해 보면 광산에서 캔 광물을 다 거기에 처박아 놓았을 리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불의 영혼에만 정신이 팔린 탓에 채 회수되지 않고 보관 중인 것이 있으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를 따라 창고로 향한 투란을 반긴 것은, 어제 광산에서 정제한 양의 몇 배가 넘는 양의 귀금속이었다.
63화
히사릴 언덕에서 살아갈 적 투란에게 돈이란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수준의 무언가에 불과했다.
구할 수 있는 물건 자체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어, 아무리 돈이 많다 한들 쓸 데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으로 내려와 보니 돈이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굉장한 것이었다.
마력이 전능의 열쇠라면 돈은 전능의 물질이라고나 할까.
맛있는 음식부터 책, 심지어 마법기나 비제 같은 마수까지도 돈으로 거래할 수 있었다.
하다못해 귀족들조차도 금과 은에 가치를 부여해 이를 화폐로 주조할 정도로 중시하지 않던가?
그리고 지금 투란의 눈 앞에 펼쳐진 재화는 지금까지 벌어온 것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거나 그조차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어설픈 기술로 주조된 금괴만 백여 개, 은괴는 사백여 개....
그 외에도 어딘가에서 약탈해온 것이 분명한 장신구며 보석 등도 난잡하게 쌓여 있었는데, 개중에는 무려 마법기도 하나 있었다.
'분명히 싸울 때는 저런 걸 가진 놈이 없었는데, 대체 어디서 났지? 몰래 숨겨놓은 걸 찾았나?'
그런 의문을 떠올리며, 투란은 안에서 무언가가 찰랑거리는 구슬을 한 번 던지고 받은 뒤 그대로 주머니에 보관했다.
그럴 확률은 별로 없지만 혹시라도 사용자에게 해가 되는 함정형 마법기일 수도 있으니 함부로 사용하는 건 금물이었다.
이 때문에 지난번 서쪽 황야에서의 싸움으로 얻은 마법기 두 개도 아직 그 기능을 확인하지 못한 채였다.
부여사 혈통을 가진 귀족들은 마법기의 기능을 뜯어볼 수 있으니 나중에 다케인 평야에서 아시즈에게 부탁하면 될 터.
투란은 창고를 쭉 훑어본 뒤 자신이 뽑은 대장 격 여인에게 물었다.
"혹시 자기 몫을 요구하는 사람은?"
"자, 자기 몫이라고 하시면?"
"광부들, 이 금은을 캐내느라 고생했는데 내가 모두 챙기는 게 억울할 것 같아서. 거기다 저기 있는 장신구 같은 건 원래 자기 물건이었던 사람도 있을 것 같고."
투란의 말에 여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얼른 표정을 관리하려 애썼다.
"그럴 리가요! 이렇게 해적들에게서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인데, 심지어 돈을 주어 고향으로 보내주신다고까지 하셨는데 그런 염치 없는 요구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투란이 생각하기에는 그런 염치 없는 사람이 몇 명쯤 있을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서 거짓말하는 사람 특유의 초조해하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어쨌든 잘 관리하고 있다면 더 신경 쓸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러면 그건 됐고, 몸이 안 좋은 사람들은?"
"걱정해주신 덕분에 다들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직 완전히 건강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고작 하루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는 상태에서의 휴식과 좌절한 상태에서의 휴식은 그 효율이 다른 법이었다.
풍족한 식사를 제공한 것 역시 효과가 컸고.
그리고 조금 슬픈 이야기지만, 금방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나쁜 이들은 이미 죽어서 바다에 버려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항해를 못 버틸 정도로 아픈 이는 없단 거겠지?"
"예, 아마...너무 오래 걸리지만 않는다면요."
"그러면 바로 출항 준비를 시작하지. 다른 것은 됐으니 음식과 물만 챙겨두라고 해. 해안가에 있는 해적 놈들은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 내버려 두고."
"저 보물도 모두 실어 놓을까요?"
"그냥 내버려 둬도 돼."
여인이 명령을 전달하러 간 사이, 투란은 대용량 주머니에 막대한 양의 재화를 모조리 쑤셔넣었다.
다행히 금과 은은 무거운 것이지 부피가 큰 것은 아니라서 생각만큼 많은 용량을 차지하지 않았다.
주머니 내부를 잘 정리해 물건들을 필요할 때 꺼낼 수 있게 정리하고 창고에서 나오자, 납치되었던 이들이 열심히 출항 준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이것도 실어요? 금방 썩을 것 같은데."
"후딱 먹어 버리면 되지. 그보다 이 인원으로 저만한 배를 몰 수 있을지가 걱정인데...우리 중에 항해사 같은 고급 인력은 한 명도 없는데 말이야."
"마법사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으시겠어요?"
"그래도 바다의 일은 또 다르니까."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짐작건대 납치되었던 이들은 앞날을 불안하게 여기면서도 투란이 어떻게든 해주리라 여기는 것 같았다.
가만히 이를 듣던 투란은 그대로 묻어둔 해적들에게 향해 그들을 꺼낸 뒤 물었다.
"너희들 중에 코비누스의 본거지로 안내할 수 있는 놈만 손을 들어라."
투란의 물음에 해적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가 무섭지만 그 이상으로 코비누스를 배신했을 때가 두려워서 그런 듯했다.
하지만 어차피 이들은 해적 중에서도 가장 비굴한 족속만 모은 것인지라 설득하기 어렵지 않았다.
"쓸모가 없으면 여기서 처리해야겠군."
"제가 압니다!"
"저도요!"
세 마리가 모두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적어도 저중 한 놈쯤은 가능할 터.
투란은 밧줄을 꺼내 놈들의 손목을 절대 풀리지 않도록 꽁꽁 묶은 뒤 범선으로 끌어올렸다.
한창 식량과 물을 적재하던 전직 광부들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예의 갖출 시간에 일하도록 해. 빨리 출발하고 싶으니. 이놈들은 구석진 방에 가둬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관리하고."
"아, 알겠습니다!"
투란은 그저 재촉만 하고 끝낸 게 아니라, 직접 염동 마법을 이용해 화물의 선적과 출항 준비를 도왔다.
과거 북해에서 청새치 호를 탈 당시 선원들에게 배워둔 바가 있었기에 그 혼자서 다른 이들 수십 명 분의 일을 해내는 것이 가능했다.
잠시 후, 모든 출항 준비를 마친 해적선이 돛을 펼치자 투란은 바람 마법을 구사해 돛을 밀어냈다.
과거 청새치 호를 타면서도 시도해 보았던, 하지만 지나치게 효율이 떨어져서 오래 시도하기는 힘들리라 여겼던 방법.
하지만 지금 투란에게는 그 당시의 두 배가 넘는 마력, 그리고 반쪽짜리지만 바람을 지배하는 아라비온의 혈통 능력이 있었다.
"우왓, 바람이?"
"순풍이다! 아니, 이 정도면 거의 태풍 수준인데 이러다가 배가 날아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몇몇 사람들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배는 순조롭게 바다를 가르며 나아갔다.
그 목적지는 바로 붉은 고래 해적단의 본거지, 아닉 섬이었다.
* * *
어느 광부가 예상했던 대로, 해적선을 운항하는 일은 투란이 거의 혼자서 모든 것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광부 일을 하던 사내들 역시 작은 어선이나 몰거나 하급 선원 일이나 했던 터라 범선을 모는 기술은 알지 못했다.
결정적인 문제는 목표로 삼은 아닉 섬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
해적들 역시 이름만 알지 여기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는 정확히 몰랐기에, 투란은 참으로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이 난관을 해결했다.
바로 파라얀 섬을 찾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나다니는 범선이며 섬에 들러 위치를 묻는 것이었다.
다만 이전보다 좀 더 빠르고 확실한 방식으로.
"검독수리 마수다! 마수가 온다! 사람이 매달려 있는데...."
"모, 모두 무기 내려! 당장!"
투란은 비제를 하늘 위로 날려 주변의 범선을 찾게 한 뒤, 지나가던 범선이 눈에 띄면 그대로 날아가서 마력을 투사했다.
그러면 대형 범선에 한두 명씩 배치된 기사들은 얼른 주변에 있던 부하들에게 저항을 포기하라고 소리쳤다.
그들의 가주조차 간단히 짓밟을 수 있는, 평생 한 번 볼 가능성조차 없을 대마법사의 존재감을 느껴서였다.
상대가 손짓 한 번에 배를 침몰시킬 수 있는 강자임을 자각한 상태에서 감히 뻗댈 수는 없었다.
"위대하고도 위대하신 신들의 핏줄이시여, 저는 라즈벳 가문의 기사로서 주인 되는 분의 명령에 따라 이 배를 보호하는-"
"아닉 섬으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예? 아, 아닉 섬이라면...항해사!"
"그러니까, 어-남쪽입니다! 아마도...."
"고맙다."
그렇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인한 투란은 갑판 위에 은화 한 닢을 툭 던져놓은 뒤 비제를 타고 해적선으로 돌아갔다.
기사와 선원들은 반쯤 넋이 나간 채 날아가는 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를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풀어 놓을 어처구니없는 일 중 하나로 머릿속에 기록했다.
이러한 과정을 몇 번 반복하기를 사흘.
투란은 목표로 했던 섬이 가까워졌음을 확인하고 배를 멈춰 마력을 회복하는 한편, 바쁘게 움직이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의 상태가 어떤지를 확인했다.
"멀미를 호소하는 사람이 몇 명 있지만 그것 말고는 괜찮습니다."
"그 정도로 끝났으면 다행이네."
계속 바람을 불어 억지로 속도를 높인 만큼 배의 탑승감이 썩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키를 잘 조종하여 해류를 타면 어느 정도 나았겠지만, 투란이 배운 항해 기술은 어디까지나 벼락치기 수준이라 거기까지는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상태까지 점검한 뒤, 투란은 그대로 저 멀리 보이는 아닉 섬을 향해 배를 몰았다.
가까이 접근하자 대응하기 위함인지 비슷한 크기의 범선 두 척이 마중을 나왔다.
"어이, 어디서 온 놈이냐? 배 세워!"
"계속 다가오면 침몰할 줄 알아라!"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튀어나온 해적 중 마법사는 없었기에, 투란은 손을 뻗어 적당한 양의 바닷물을 솟구치게 한 뒤 두 척의 범선 위로 덮어씌웠다.
순식간에 비 맞은 쥐 꼴이 된 해적들이 벌벌 떨었다.
"용무가 있어서 너희들의 대장을 보러 왔다. 돌아가서 알리도록."
투란의 말에 범선 두 척은 말 그대로 꽁지가 빠지도록 빠르게 섬으로 도망쳤다.
잠시 후, 어느 해적 마법사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인지 다시금 돌아오는 배에는 귀족급의 마력을 소유한 이가 타고 있었다.
뱃머리에 선, 한 손에는 기다란 작살을 들고 붉은 머리카락과 수염을 기른 거구의 사내.
투란은 그가 붉은 고래임을 알아채고 곧바로 마력을 투사했다.
이에 상대는 짧게 신음하더니 해적답게 경박한 말투로 소리쳤다.
"뭐 하는 작자길래 그만한 힘을 가지고 애새끼들이 노는 곳에 온 거냐! 아니, 얼굴이 어린데 진짜 애새끼인 건 아니겠지!"
투란의 힘을 확인하고도 저런 태도라니, 무식한 것인지 강단이 있는 것인지 모를 작자였다.
"그쪽이 붉은 고래인가?"
"그렇다!"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는데, 우선 관습에 따라 손님으로서의 대우를 요구한다. 해적이라지만 귀족인 만큼 그러한 법도는 알고 있겠지?"
"어...."
투란의 말에 붉은 고래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뭔데, 라고 얼굴로 말하는 것처럼.
귀족이라지만 결국 근본이 해적인지라 무식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투란은 가볍게 혀를 차며 대륙의 귀족들이 으레 행하는 접대의 관습에 대해 빠르게 설명했다.
이를 들은 붉은 고래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아아, 물론, 물론이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나 타산, 신들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으로서 어찌 고귀한 혈통을 대접하길 거부하랴!"
어색하다 못해 연극조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뒤쪽에 있던 그의 부하들은 멋있다고 탄성을 터트리며 이를 찬양했다.
실로 해적다운 모습이었다.
* * *
붉은 고래, 타산의 거처는 제법 크고 웅장하기는 해도 품격이나 호화스러움 면에서 대륙의 귀족들에 비해 훨씬 모자랐다.
납치되었던 사람들을 해적선에 머물도록 한 채, 투란은 손님으로서 그곳의 가장 넓은 홀에서 상대와 정식으로 대면했다.
타산의 뒤쪽에는 붉은 고래 해적단의 간부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투란은 혼자였지만 기세에서 밀리는 쪽은 전자였다.
그들 중 가장 강한 타산의 마력이 투란의 절반이 안 되는 정도요, 나머지는 모두가 기사 급에 불과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부탁할 일이 있다고? 어느 가문에서 왔는지는 몰라도 댁만 한 실력자라면 대륙에서 이름깨나 날린 작자일 텐데, 우리가 필요할 게 있나?"
"내가 강한 것과 별개로 내 몸은 하나니까. 귀족들이 굳이 가문을 꾸리고 기사를 키워내는 이유지. 유감스럽게도 나는 속한 가문이 없는 몸이라서."
타산의 눈에 의심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그의 말을 썩 신뢰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투란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본론을 꺼냈다.
여기서 북쪽, 혹은 북서쪽으로 배를 몰아 나흘쯤 가면 있는 섬과 그곳에 납치되어 광부와 성노예로 일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풀어내자 타산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코비누스, 이 개자식!"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과 함께 거대한 작살이 쾅 소리를 내며 바닥을 관통했다.
부하들에게 납치를 명령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다른 해적이 행한 납치까지 이렇게 격렬히 반응할 줄이야.
한참 씩씩거리던 그가 투란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나와 함께 코비누스를 토벌이라도 하자는 거냐?"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활동하는 만큼 코비누스의 마력이 어느 정도인지 봤을 텐데. 나랑 비교하면 어느 정도지?"
투란의 질문에 타산이 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말했다.
"음...글쎄, 내가 힘을 재는 데는 별로 재주도 없고 코비누스랑 만난 지도 오래되어서, 아마 네가 더 강할 것 같기는 한데 잘은 모르겠다."
"그래?"
지금 투란의 마력이 한 개 혈통을 가진 마법사들 중에서는 적수가 없는 수준임을 생각하면 희한한 일이었다.
설마 대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생아라도 된단 말인가?
사실 예상 밖이긴 해도 계획에 차질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탁월한 마법 실력에 불의 영혼까지 가진 투란은 동급 마법사라고 한들 어렵지 않게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
"녀석은 이곳 남해의 해적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편이니까. 나도 나름 실력자라고 자부하긴 하지만...."
조금 전의 다혈질적인 모습이 거짓으로 느껴질 만큼 순식간에 소심하게 구는 태도가 마치 가면을 바꿔쓰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코비누스에게 심하게 당한 적이라도 있는 것일까.
"어쨌든, 내가 부탁할 건 다름이 아니라 그 납치됐던 사람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거다. 그에 따른 탑승료는 지불하지."
그런데 어째서일까.
투란의 말을 들은 타산은 물론이요, 붉은 고래 해적단의 간부들 모두가 기이한 사람을 보듯 그를 쳐다보았다.
타산이 모두를 대표하듯 물었다.
"왜?"
"왜 돈을 내느냐고? 그야 협박해서 시키면 제대로 안 할 것 같으니까-"
"아니, 왜 굳이 그런 일을 하느냐는 거다. 그런 짓을 해서 뭘 얻을 수 있다고?"
"적어도 내 기분은 좋겠지."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이야기에 찬사를 보내던 양들의 모습이 실로 기꺼웠으며, 따라서 그들이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을 보기 싫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지나치게 투란 자신의 내면을 노출하는 일이니까.
대답을 들은 타산의 얼굴이 화가 난 것처럼 굳더니, 그가 뒤쪽으로 손을 휙 저었다.
잠시 후 부하 한 명이 솔리프가 주었던 것과 같은 사탕수수 술을 가져왔다.
"투란이라고 했지. 혹시 나에 대해서 미리 조사하고 온 거냐?"
"민간인을 납치해 팔거나 살육하는 일은 없이, 상선만 약탈하는 비교적 온건한 해적이라는 평가만 알아보고 오긴 했지. 다른 놈들이면 고향에 보내주는 게 아니라 또 팔아치울 테니까."
대답을 들은 타산은 한참 의심하듯 투란을 들여다보았으나 진실을 말하고 있으니 거리낄 게 있을 리 없었다.
잠시 후, 그가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내 부모는 어부였다. 아버지는 내가 여덟 살 때 바다에 빠져 죽었고, 어머니는 열 살 때 해적들에게 납치됐지."
즉, 타산은 평민 사이에서 태어난 귀족급 마력의 소유자였다.
극히 드문 일이라지만 의외로 이런 경우가 꽤 있는 것이, 피가 흐려진 평민들에게서 귀족이 태어날 확률이 극히 낮다 한들 태어나는 아이의 수가 훨씬 많다 보니 이런 경우가 한 번쯤은 생기는 것이다.
아마 타산의 부모에게서 위로 몇 대를 올라가면 기사나 귀족의 사생아가 하나쯤은 있을 터였다.
"천한 출신 탓에 어쩌다 보니 해적이 되었지만, 나는 그 때문에 평생 상선을 털지언정 사람을 납치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너는 그냥 하고 싶어서 할 뿐이라고 하니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지는구나. 그 말대로라면 너는 이제부터 내 형이다! 이 술을 받아라!"
수염이 숭숭 난 중년 아저씨의 요구에, 투란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64화
좀 더 대화하며 알게 된 바에 의하면, 타산이 말한 '형'이라는 것은 무슨 의형제 같은 거창한 개념이 아니었다.
그저 한 명의 사람으로서 상대를 인격적으로 자기보다 위로 두어 존경한다는 뜻일 뿐.
즉, 여기서 무슨 군신 관계가 성립해 서로 복종하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한 수 굽혀주겠다는 의미이니 상관은 없지만, 그보다 거의 백 살쯤 많을 남자에게 형님이라고 불리는 건 실로 기괴한 기분이기는 했다.
타산 역시 기분에 취해 외쳤던 조금 전과 달리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았는지 목소리에 쑥스러움과 자괴감이 섞여 있었다.
"어쨌든 형님...의 뜻은 잘 알았으니 내 그 사람들은 책임지고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 물론 탑승료 따윈 필요 없고 말이야. 안 그러냐!"
"예, 선장님-!"
타산의 외침에 뒤에 서 있던 간부들이 일제히 외쳤다.
개중에는 배를 이리저리 굴리며 드는 비용 문제로 한숨을 쉬는 이도 있는 것 같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이러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투란은 고개를 저어 그런 타산의 말에 딴지를 걸었다.
"아니, 그래도 뭔가를 줘야 내가 안심되겠어."
이 남해에서 해적을 근절할 수 없다면 적어도 좀 괜찮은 해적들이 득세하는 편이 나을 터.
하지만 타산이 아무 대가 없이 납치된 이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다면 그만큼 붉은 고래 해적단의 재정은 나빠질 것이고, 당연히 세력 역시 위축될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도 나중에 일을 제대로 안 한 것을 확인해서 처벌하러 왔을 때 생계를 변명거리로 삼을 수 있지 않겠는가.
투란은 그런 변명의 여지조차 없게 하고 싶었다.
"우리가 타고 온 배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처음에는 섬에서 얻은 광물을 쓸 생각이었으나, 생각해 보니 이번에 타고 온 배로 갈음하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과거 북해에서 팔아치웠던 배에 비해서는 작고 허름하지만 그래도 범선은 범선.
타산은 됐다며 극구 거절했으나, 부하 중 제법 똑똑해 보이는 간부가 재정 문제를 들먹이며 간절히 설득하자 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이를 수락했다.
"으흠, 옳은 일을 하며 대가를 받기 민망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안 받으면 어린 형님의 체면을 짓밟는 일이 되겠지. 배가 아깝지 않도록 앞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겠다!"
"그거면 됐어."
그렇게, 주는 이가 더 많이 주려 하고 받는 이가 더 적게 받으려 하는 괴상한 협상이 끝났다.
* * *
이야기를 마친 뒤, 투란은 해적선에 있던 사람들을 내려보내 섬에서 쉬게 했다.
고향이 먼 몇 명은 앞으로 꽤 장거리 항해를 해야 할 수도 있는데, 그러자면 체력을 보충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그들 중 몇 명, 주로 여인들은 고향에 돌아가서도 제대로 살아갈 자신이 없다며 차라리 투란을 따르길 원했으나 홀로 여행하는 그에게 일반인들은 번거로운 짐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디서건 정착할 수 있게 적당한 양의 돈을 나눠주자 그들은 눈물을 보이면서도 이내 수긍했다.
쉬는 동안 투란이라고 마냥 놀지는 않았다.
우선 파라얀 섬에서 데려왔던 해적들을 통해 코비누스 해적단에 대한 정보를 뽑아냈다.
붉은 고래 해적단 쪽의 정보까지 얻어 대조한 덕에 조직도부터 방어 체계, 수장과 간부들의 능력과 무장 등 제법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는 한편, 투란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은신한 채 붉은 고래 해적단 내부를 이리저리 돌며 내부 상황을 염탐했다.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손님들 앞에서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이리라는 예상에서였다.
그 결과 다행히 이들이 그렇게까지 앞뒤가 다른 족속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물론 말단이나 중견급 해적 중 몇몇은 타산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내심 살인과 약탈을 즐기고 싶어 했으나, 적어도 그러한 분위기가 주류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이들이 한 명도 없었다면 마법으로 세뇌라도 한 것이 아닐지 의심했을 터.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던 와중에도 친목 삼아 타산이 부르는 술자리에 틈틈이 참여했는데, 덕분에 놀라운 사실도 하나 알 수 있었다.
"솔리프가 여기 왔었다고?"
"그렇다! 정말로 사내다운 사내였지."
타산이 그립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그들에게 파라얀 섬의 초석에 대해 알려준 것이 바로 이 붉은 고래 해적단이었다.
그 당시에는 광부들을 납치해 부리는 줄은 몰랐지만.
"내 혈통 능력이 궁금해서 찾아왔다더군. 힘이 세고 수영을 잘하는 사람을 찾고 있다던데."
정작 타산이 평범한 역사 혈통이라 실망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친구가 되어 며칠 내내 술잔을 기울였다고 했다.
투란은 솔리프가 찾던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흉내쟁이 성유물에 담긴 혈통 중 하나의 이름은 '파도꾼'.
그리고 당시 대화를 나누었던 바에 의하면 솔리프는 익사한 신의 혈통 능력 중 하나가 뛰어난 신체 능력과 수영 실력임을 어딘가에서 알아내어 그 후손을 찾고 있었다.
사실 정말로 후손이 남아 있었다면 진작에 널리 알려져 있었을 테니 추적의 방향이 잘못된 것 같았지만.
그렇게 여러 일을 해가며 바쁘게 보내기를 사흘.
슬슬 모든 정리를 마친 투란은 떠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말 혼자서도 괜찮겠나, 어린 형님?"
"그래. 오히려 누가 함께하는 쪽이 더 번거로워."
타산은 영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듯 신음했으나 투란으로서는 정말로 혼자인 쪽이 편했다.
그래야 은신 능력이며 불의 영혼 같은 것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으니까.
떠나기 전, 투란은 타산에게 충고 겸 경고를 남겼다.
"네 부하 중에는 다른 생각을 하는 이도 있을 테니 알려둬. 나중에 내가 보호했던 이들이 제대로 고향에 돌아갔는지 확인할 텐데, 문제가 생긴다면 코비누스 해적단을 혼자 격파할 정도의 마법사를 적으로 돌리게 될 거라고."
"명심하겠다."
타산은 진지한 태도로 답했다.
* * *
당연한 일이지만, 코비누스 해적단의 구역은 파라얀 섬이 있는 쪽이기에 투란은 다시 북서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배로는 무려 사흘을 항해했던 거리지만 비제를 타고 날자 몇 시간 만에 돌아갈 수 있었다.
아무리 바람을 불어 속도를 높였다 한들 비행과 항해는 기본적인 속도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아직 파라얀 섬의 해적들이 전멸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는지 시체가 그대로 방치된 것을 확인한 뒤, 투란은 북상하는 동안 몇 번 섬에서 머물며 기억해둔 해도와 자신의 위치를 대조했다.
몇 번의 착오가 있기는 했으나 느지막한 저녁이 되었을 때쯤 첫 목표를 찾을 수 있었다.
'여기가 미칸 섬, 저 멀찍이 떨어진 게 비나투 섬이니까...좋아, 슬슬 다 왔군.'
코비누스 해적단의 본거지는 크게 세 군데로, 지도로 보면 딱 삼각형 모양이라서 삼형제 섬이라고도 불렸다.
코비누스를 비롯한 해적단의 간부들은 평상시 배를 타고 다니며 그 세 개의 섬을 이리저리 오갔기에 그들이 어디 있는지는 직접 찾아가봐야 알 수 있었다.
투란은 그중 한 곳, 비나투 섬의 하늘을 날며 성유물의 감각을 활성화했다.
해적의 수는 이백여 명, 기사는 열 명, 귀족이 한 명....
처음에는 혹시 코비누스인가 싶었으나, 그런 것치고는 마력의 양이 너무 약했다.
기껏해야 귀족으로서의 최저 턱걸이를 조금 넘어선 수준.
아마 최고 간부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눈을 감은 채 한참 시간을 들여 분석한 뒤, 투란은 저들의 기지에 민간인은 한 명도 없으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좋아, 빠르게 해결할까.'
그냥 쳐들어가서 때려죽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오늘 밤이 끝나기 전 대비하지 못하는 상대를 몰살시킬 생각이었던 만큼 마력과 체력을 아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을 모두 아끼는 최고의 방법은 바로 다른 자원을 대신 소모하는 것.
투란은 비제에게 기지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날게 지시한 다음 불의 영혼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이제 넉넉히 수백 킬로그램을 확보한 만큼 쓰는 데 거리낄 것은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카만 가루들은 어두운 밤에 묻힌 채 바람 마법을 타고 해적들이 거주하는 구역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일어나는 폭발.
끔찍하리만치 커다란 굉음과 빛, 그리고 화염이 일어나며 건물들이 무너지고 해적들의 몸뚱이가 터져 나갔다.
투란은 성유물의 감각으로 도망치는 이들을 놓치지 않으며 계속해서 폭발을 일으켰다.
이백 명, 백오십 명, 백 명, 오십 명....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것은 기지의 중심부, 돌로 된 성채 내에 숨은 기사 서넛과 귀족 한 명.
넓은 곳에 퍼진 수백 명을 하나하나 죽이는 데 드는 수고를 불의 영혼 몇 주먹으로 갈음한 셈이었다.
'아무래도 실내에 있는 상대는 죽이기 힘들군. 돌로 된 건물도 두께가 있으면 완전히는 못 부수고....'
불의 영혼을 이용한 폭발은 범위를 늘리기는 쉽지만 강도 자체를 강하게 하기는 어려운 느낌이었다.
하기야 처음 봤을 때도 포대기 하나에 담긴 양을 모두 터트렸는데 즉사시키지 못할 정도이지 않았나.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하며, 투란은 비제와 함께 폐허가 된 해적 기지 안쪽으로 들어섰다.
중앙 성채 내부의 시체들은 그나마 돌로 된 천장과 벽이 있어서인지 모양새가 온전했다.
눈과 귀에서 피를 흘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 폭발의 압력으로 죽은 모양.
최심부까지 들어가자 살아남은 기사들과 귀족 한 명이 보였다.
"너, 너는...?"
반쯤 불탄 콧수염에 삼지창 마법기를 든 귀족의 모습을 보며 투란은 파라얀 섬의 해적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되새겼다.
이름은 바고스, 물을 다루는 혈통의 귀족.
코비누스의 심복 중 하나였다.
"코비누스는 어디 있지? 알려주면 곱게 죽여주마."
"대체, 당신 정도로 강한 이가 왜 이런 습격을?"
"너희들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투란은 그들이 죽는 이유가 고작해야 사람 몇 명 납치해 부려서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보다 더 터무니없는 이유로 죽어야만 좌절스러울 테니.
바고스가 눈을 부릅뜨며 악을 썼다.
"지랄하지 마라! 내가 뒈져도 큰형님을 배신하진 않는다! 모두 공-"
격, 이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폭발이 일어나며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사방으로 나뒹굴었다.
소량의 불의 영혼을 바람으로 날려 정확히 몸 앞에서 폭발시키는 기술.
얼마 전의 실습을 통해 기사를 죽이기 적합한 양을 알아냈기에 살아있는 이는 없었다.
그러는 와중 바고스 역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는데, 다른 이들처럼 폭발에 당한 게 아니라 미리 준비되어 있던 투석 공격에 다리 한쪽을 잃은 것이었다.
자랑거리인 삼지창 마법기나 물을 조종하는 마법 따윈 쓸 틈도 없이.
투란은 무력해진 바고스의 머리를 움켜쥐며 말했다.
"이제 너만 남았다."
"으, 으으-!"
바고스는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감히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금 전 그만한 대마법을 난사하고도 이렇게나 힘이 넘치다니?
이 정도면 대가문에서도 최상위의 강자, 아니, 어쩌면 가주나 다름없는 괴물이 아닌가.
폭발이 순수한 마력에 의한 결과물이 아님을 모르는 바고스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대를 앞에 두고서도, 그는 이를 악물며 고집을 지켰다.
"나는, 형님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러냐."
투란은 건조한 눈으로 바고스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녀석의 목을 꺾어 죽였다.
비록 악덕 양치기일지언정 자기들끼리의 의리를 지키겠다는 뜻을 존중하기 위함이었다.
* * *
폐허가 된 비나투 섬의 안쪽에는 생각과 달리 그리 많은 양의 재물이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
짐작건대 대부분은 코비누스의 기함에 실려 있거나 그가 머무는 섬의 창고에 저장하는 듯했다.
귀족과 기사들의 마력을 흩어내고 재물을 수습한 뒤, 투란은 어차피 가져갈 수 없을 배 몇 척을 모두 침몰시키고 그대로 두 번째 섬으로 날아갔다.
유감스럽게도 그쪽에도 코비누스는 없었다.
'이건 운이 없다고 해야 할지, 있다고 해야 할지.'
상대가 대비하기도 전에 전력을 깎아내는 효과는 있었지만, 사실 투란은 바로 코비누스를 죽여 머리를 잘라낸 뒤 오합지졸들을 정리하기를 원했다.
불의 영혼을 대량으로 가지고 있다 한들 한정된 자원인 만큼 마력을 쓰는 쪽이 더 낫긴 하니까.
그렇게 두 개의 섬을 폭격하고 적당히 쉬며 마력을 보충했을 때쯤에는 이미 새벽이 깊어 있었다.
아마 다음 곳에도 없다면 배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 중일 텐데 그때부터는 꽤 귀찮은 일이 될 것 같았다.
'어지간하면 이번에는 있어라.'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 세 번째 목적지인 데벤 섬에 도착했을 무렵, 투란은 느껴지는 기척에 눈썹을 찌푸렸다.
솔리프와 맞먹는 수준의 귀족 한 명에 그보다는 못하지만 투란보다 강력한 귀족이 세 명, 그리고 투란보다 약하지만 평범한 가주급은 되는 귀족이 일곱 명....
'이건 또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해적 패거리의 전력이라기에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저 정도면 메이사가 이끌던 흑요정 토벌대에도 유의미한 타격을 줄 정도가 아닌가.
일개 해적이 이 정도 힘을 지니고 있었다면 진작에 남해를 통일한 대가문이 되고도 남았을 터.
투란은 섬의 기슭에 착륙한 뒤, 작은 땅굴을 만들어 그 안에 비제를 숨겼다.
혹시라도 지난번처럼 어느 귀족에게 잡힐 것을 염려해서였다.
"금방 오겠지만, 혹시 내가 안 와도 정말 배가 고파지기 전까진 나오지 마. 나오면 이 섬에서 도망치고. 알겠지?"
[조심해!]
마지막으로 충분한 양의 육포와 물까지 준비해둔 뒤, 투란은 은신하여 섬 안쪽으로 숨어들었다.
당연하게도 해적들 따위가 자하르의 은신 능력을 대비하지는 않았기에 순조롭게 성채 안으로 진입에 성공.
기척을 확인한 결과 귀족들 대부분은 위층에 모여 자는 듯했고, 딱 둘만이 지하 쪽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가장 강한 귀족의 기척은 아래에서 느껴졌다.
'우선 저쪽부터 확인해 볼까....'
지난번 리다에게 들켰을 때와 같은 상황을 대비해 느릿하게 움직이기를 몇 분.
성채 지하의 감옥에 도착한 투란은 미처 예상치 못한 모습에 두 눈을 부릅떴다.
'저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창살에 기댄 채 건들거리는 귀족 청년 한 명.
그 안쪽에는 놀랍게도 솔리프가 엉망진창이 되어 꽁꽁 묶여 있었다.
65화
본래 마법사, 그중에서도 귀족쯤 되는 이를 구속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쇠사슬로 온몸을 묶어도 달궈 녹여서 탈출할 수 있고,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 가두면 벽에 길을 만들어 버리니까.
하지만 지금 솔리프는 그런 식으로 도망치는 대신 무기력하게 벽에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를 묶은 사슬에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건대 아마 저게 문제인 듯했다.
'최상위 귀족을 구속할 수 있을 정도면 거의 성유물이나 다름없는 보물일 텐데....'
물론 이곳에 모여든 귀족들이 솔리프를 잡으러 온 바라하 가문의 정예일 가능성이 크단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의아한 것은 굳이 해적 코비누스의 마지막 거점인 데벤 섬에 태연히 머무르고 있다는 것.
이대로 도망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좀 더 남아서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나을까?
잠시 고민하던 투란은 두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당장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정보가 많을수록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을 터.
그리고 마침 이곳에는 그에게 가장 적절한 정보를 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투란은 감옥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나온 뒤, 바람 마법의 응용기인 바람길을 구현했다.
평소에는 돌을 소리 없이 빠르게 쏘아내는 데 쓰는 기술이지만 조금 변형하면 다른 용도로도 쓸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의 입에서 상대의 귀로 이어지는 길을 만들어 몰래 목소리를 전하는 것.
[이봐.]
뜻밖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솔리프가 몸을 뒤틀자 철컹 하고 사슬 울리는 소리가 났다.
건들거리던 젊은 귀족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어 씨, 뭐야? 그거 절대 못 벗는다니까! 괜히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한껏 얕잡아보는 듯한 태도는 도저히 대가문의 후계자를 대하는 것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잠시 후, 다시 정적이 돌아오자 투란은 조금 전과 같은 방식으로 말을 걸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얼굴을 움직이지 말아봐. 소리 없이 말할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투란은 솔리프의 실루엣이 빳빳이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두 번째 바람길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그의 귀 안쪽에서 시작해서 솔리프의 입으로 도착하는 경로였다.
[됐어. 작게 말해도 들리니까 속삭여.]
[그쪽은 누구야?]
[얼마 전에 해변에서 같이 술 마셨던 사람.]
[...아, 그래, 투란. 그런 이름이었지. 이건 어떻게 한 거야? 마법기인가?]
며칠 전 딱 한 번 만났을 뿐인 만큼 솔리프는 투란의 목소리를 바로 기억하지 못했다.
바람길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목소리가 다소 왜곡되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만.
투란은 상대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역으로 질문했다.
[여기 있는 귀족들, 바라하의 정예 맞지?]
[그래. 날 데려가려고 작정했더라. 제법 열심히 싸워 봤는데 제압용 마법기를 무더기로 가져와서 상대가 안 됐어. 설마 날 구하러 온 건...아닐 것 같은데.]
[파라얀 섬에 가 보니 코비누스라는 놈이 사람들을 마구 납치해서 노예로 부리고 있길래, 죽이러 왔더니 이 꼴이 보이더라고.]
[...나도 오늘 알았는데 코비누스는 내-바라하 가문 사람이 쓰는 위장 신분이야. 얼굴을 바꾸는 마법기를 쓰더라. 아마 내 어린 시절 친구가 쓰던 거랑 같은 거겠지.]
내 가문이라고 말하려다가 말을 바꾼 것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예상했던 대로 코비누스 해적단은 바라하 가문이 남해 쪽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만든 집단인 모양이었다.
아마 몇 시간 전 죽였던 바고스 같은 이들은 위장 신분을 이용해 현지에서 모은 하수인일 테고.
[내가 가능하면 가문에서 멀리 도망치라고 했잖아.]
만약 솔리프가 투란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서쪽, 시라프 습지 쪽으로 도망쳤다면 고작 며칠 만에 이곳에 잡혀 있지는 않을 터.
보나마나 이후로도 계속 남해 곳곳을 탐험한 게 분명했다.
[하하,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빨리 잡으러 올 줄은 몰랐어. 거기다가 이 정도 병력을 동원할 줄도....]
기껏해야 부모님이나 친척 서너 명이 와서 설득하려 할 줄 알았다고, 솔리프는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상황을 파악한 뒤, 투란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를 고민했다.
이미 코비누스 해적단의 주요 거점 두 개를 부수며 상대의 콧털을 뽑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현지 해적들만 죽였으니 여기서 멈춘다면 적당히 끝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솔리프를 구출한다면 그때부터는 말 그대로 바라하의 얼굴에 정면으로 주먹을 한 방 날리는 셈.
혼자서, 아니 구출한 솔리프를 동료로 삼는다고 쳐도 귀족 두 명이 대적하기에는 대가문이란 집단이 지나치게 강대했다.
그에 비해 여기서 슬쩍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훨씬 달콤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위험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솔리프와 친하지도 않았고, 아직 바라하의 뒷배일지도 모를 신적 존재를 자극할 만한 정보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하.'
생각을 이어가던 도중, 투란은 자신이 겁을 먹어 물러날 변명거리를 찾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이곳에 쳐들어온 이유는 어디까지나 코비누스 해적단이 평범한 사람들을 납치해 마구 부리면서 학대했기 때문.
그 행위에서 과거 어머니에게 들었던, 기사들을 잡아 마구 부리는 악한 귀족을 떠올리고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 나쁜 귀족을 두려워하던 그 자신을 투영한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대가문이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무력집단 중 하나라고 해서 무언가가 달라진단 말인가?
오히려 그토록 강한 이들이 평범한 사람들을 겁박하는 것이야말로 더더욱 추잡한 짓일진대.
상대가 약하다고 생각할 때는 마음껏 날뛰다가 강한 적이 나타났음을 알자 개새끼처럼 꼬리를 마는 건 실로 비겁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솔리프.]
[왜?]
[구해줄까?]
[나야 당연히 좋겠다만, 가능하겠냐? 숫자부터 힘까지, 어지간한 마법사 가문 열몇 개도 밀어버릴 수준이야. 거기다가 몇몇은 내가 가지고 있던 마법기도 갖고 있고. 네 실력이 좋은 편인 줄은 알지만 어려울걸.]
그러고 보면 본래 솔리프는 바라하의 후계자답게 제법 강력해 보이는 마법기를 여럿 들고 있었는데, 지금은 묶여 있는 사슬 말고는 완전히 비무장 상태였다.
하기야 잡아서 끌고 갈 상대에게 그런 것을 들려줄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방법이 있어. 우선 그 사슬, 풀면 다시 싸울 수 있지?]
[겉보기엔 멀쩡해도 여기저기 제법 많이 다쳐서 치료받지 않으면 싸우긴 힘들 것 같은데.]
[치료하면 되겠네. 단, 이거 두 가지를 약속해 줘.]
[뭔데? 들어나 보자.]
[첫째, 오늘 이 섬의 귀족 중 우리 둘을 빼면 아무도 살아나갈 수 없을 거라는 거.]
투란의 말이 끝나고 답변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후, 솔리프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 죽이겠다는 거냐?]
[그래.]
[그건 좀, 그래도 내 가문 사람들인데-]
물론 이런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만큼, 투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가 여행 중 발견한 프레아 신족의 비망록(備忘錄), 그리고 이를 통해 도출해낸 결론까지도 모두.
자신이 신의 영혼을 담을 그릇으로 쓰일 것이라는 가설을 듣자 솔리프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지금 한 말, 설마 지어낸 건 아니겠지?]
[필요하다면 몇 가지 근거는 나중에 따로 확인시켜줄 수도 있어. 만약 지어낸 거라면 날 죽여도 좋아.]
아마 바닷가에서 만났을 당시의 솔리프라면 투란의 이런 말을 크게 귀담아듣지 않았을 터였다.
당시의 그는 그저 자신을 구속하고 휘두르던 가문에서 탈출했을 뿐인 가출 청년이었으니까.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가문의 마법사들에게 마수를 사냥하듯 일방적으로 겁박당한 상태에서는 이를 흘려듣기 어려웠다.
가문의 마법사들이 자신을 후계자로서 조금도 존중하지 않고 제압한 이유가 정확히 설명되는 탓이었다.
[좋아, 그건 일단 믿겠어. 그런데...꼭 다 죽여야 하나? 일단 내 앞에 있는 놈만 제압하고 우리끼리 도망쳐도 되잖아.]
[이미 내가 코비누스 해적단을 공격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여기서 널 풀어주는 순간 범인이 누구인지 뻔한 일이니 그때부턴 우리 둘 다 바라하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는 셈인데, 기왕 적이 됐으면 기회가 있을 때 상대의 전력을 최대한 깎고 우리의 전력을 끌어올려야 해.]
덤으로 이곳에서 큰 손실을 입히면 그만큼 바라하 가문의 추격을 저지할 수도 있었다.
대가문은 그 규모에 걸맞게 강력하고 많은 귀족이 마수들을 사냥하며 영지를 유지해야 하니까.
강력한 귀족들이 죽어 나간 상태에서 또 다른 귀족들을 밖으로 내돌리면 그만큼 기반이 약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마치고 입을 다물자, 잠시 후 솔리프가 우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좋아, 이해했어. 두 번째는?]
[나와 함께 움직이며 전적으로 모든 일에 도움을 줬으면 좋겠어. 한 이십 년 정도.]
이십 년은 그가 어느 대가문의 가주와 맞먹지는 않더라도 그들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수준의 강자가 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가정한 것이었다.
그만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강대한 적수를 만나느냐 아니냐는 운에 달렸겠지만.
전적으로 자신을 도우라는 것은 그냥 동료라기보다는 부하를 영입하는 것에 가까운, 솔리프와 같은 최상위 귀족으로서는 굴욕감을 느낄 만한 조건이었다.
그렇기에, 투란은 상대가 무조건 물 수밖에 없을 미끼 하나를 덧붙였다.
[두 번째 조건의 대가로, 네가 간절히 원할 만한 것을 알려줄게.]
[뭔데?]
[나는 익사한 신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 * *
협상과 전술 토론까지 마친 뒤, 투란은 은신을 유지한 채 다시 감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여전히 삐딱한 태도로 경비를 서고 있는 귀족의 뒤로 돌아가서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단검으로 목을 찔렀다.
"끅-"
바라하 귀족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부릅뜨며 저항하려 했으나, 훨씬 강대한 마력을 지닌 데다 신체까지 잘 단련된 투란의 완력을 이겨내기는 불가능했다.
목에 이어 가슴과 배를 몇 차례 더 찌른 뒤, 투란은 생명을 잃은 귀족의 몸을 앞으로 내던졌다.
감옥 안에 가만히 앉아서 이를 바라보던 솔리프가 허탈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로 죽여버렸군...."
"그래, 정말 죽였지. 이제부터는 풀어줄 테니 가만히 있어."
이미 협상 후 자하르 혈통의 힘을 쓸 수 있음을 밝혔기에 그 사실에 놀라지는 않았다.
쇠창살을 가볍게 구부려 들어간 투란은 솔리프의 몸을 구속하고 있는 사슬을 매만졌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마법기의 기능은 참으로 간단하면서도 강력했다.
생물을 둥글게 둘러싸면 묶여 있는 시간에 비례해 더 강한 구속력이 작용하여 대상의 마력 사용을 억제하는 것.
전투 중 던져서 휘감거나 하는 식으로 쓰기는 힘들지만, 제압한 적을 완벽히 구속하기에는 이만한 물건이 없었다.
바람 마법을 이용한 자물쇠 따기 마법으로 사슬을 모아 둔 자물쇠를 풀어내자, 솔리프가 두 팔을 돌리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끄응, 역시 마력이 바로는 안 돌아오나...."
"좀 쉬고 있어. 치료해줄 테니까."
들어오기 전에 미리 흉내쟁이 성유물에 들어있던 치유사 혈통의 힘을 흡수해 놓았기에, 투란은 곧바로 솔리프의 몸에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사 분의 일을 비제에게 사용했던 탓에 남은 것은 3/4 정도였는데, 강력한 마법생물일수록 같은 상처도 더 많은 마력을 소모해야 치료할 수 있기에 완치까지는 어려웠다.
그래도 애초에 중상이 없었던 만큼 전투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는 회복할 수 있었다.
일을 마친 투란이 귀족의 몸에서 마력을 흡수하는 동안, 완벽히 몸을 회복한 솔리프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은신에 치유 마법까지...너야말로 프레아 신족의 환생 같은 거 아니냐?"
"과장하긴. 계획은 기억하지?"
"물론. 들은 지 얼마나 됐다고."
함께 지하 감옥을 나오며, 투란은 위쪽에 느껴지는 기척에 주의를 기울였다.
혹시나 했는데 그들 중 아무도 지하에서 일어난 일을 파악하지는 못한 듯했다.
솔리프를 밖으로 내보낸 뒤 위층으로 올라간 투란은 귀족들이 머무는 침실 전체가 마력으로 뒤덮여 있음을 알아챘다.
결계사 혈통의 힘이 분명했다.
'하긴, 엔릴 사막이 바로 위쪽인데 경계하지 않을 리가 없지.'
물론 자하르의 귀족들이 아라비온같은 적대 가문이 아닌 이들을 갑자기 습격할 이유 따위는 없지만, 그래도 은신 능력을 가진 이들이 주변에 있다면 대비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자는 중에 경계가 취약해지는 것을 경계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가만히 은신한 채 창밖으로 불을 한 번 번쩍여 신호를 보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밖에서 솔리프가 과거 썼던 것과 같은 빛의 채찍을 마구 휘두르며 파괴행위를 시작했다.
"내가-풀려났다-!"
고위 귀족 특유의 풍부한 성량으로 쩌렁쩌렁 외치며 사방으로 빛과 불이 솟구치자 순식간에 잠들었던 성채가 깨어났다.
해적들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사이, 침실 쪽에 깔려 있던 결계가 걷히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그 녀석이 풀려났습니다!"
"어떻게? 엔케가 지키고 있었잖아!?"
"일단 다시 제압해야 하니까 한 명은 감옥으로 내려가서 사슬이 있는지 확인해! 나머지는 나를 따르고!"
바라하 귀족들의 목소리에서는 진한 혼란이 묻어났다.
솔리프가 풀려난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이상 상태였으니 당연한 일.
그렇기에, 그들은 빠르게 복도를 가로지르느라 복도 전체에 새카만 가루가 한가득 뿌려져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애초에 자하르 혈통처럼 암시 능력이 있지 않고서야 한밤중의 복도에서 그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웠겠지만.
투란은 비행 마법으로 창문에서 떨어지며 복도 한가득 깔린 불의 영혼을 점화시켰다.
66화
앞서 두 개의 섬을 폭격하며 투란은 불의 영혼이라 불리는 이 검은 가루의 힘을 여러 방향에서 탐구했다.
다행히 삼형제 섬에는 실험 대상인 해적들이 넘쳐나는 탓에 꽤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었다.
머리 위에서 터트려 보고, 발밑에서 터트려 보고, 벽 한 칸 너머에서 터트려 보고, 구석에 몰아넣어 터트려 보고....
그 결과, 개방된 공간보다는 폐쇄된 공간에서 폭발이 일어날 때 타격력이 극대화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바람의 흐름을 읽는 능력으로 파악한 바에 의하면 온갖 방향으로 분산되어야 할 힘이 벽에 충돌해 돌아와서 그런 것 같았다.
이를 잘 활용하면 꽤 재미있는 것을 많이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당장 전투가 임박한 상태에서는 비교적 단순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바람길을 만들 때처럼 바람의 벽을 생성, 폭발 지역을 실내로 만드는 것이었다.
* * *
'끔찍한걸.'
하늘을 날며 투란은 조금 전 일어난 폭발로 엉망이 된 복도 쪽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이 새카매질 정도로 들이부은 불의 영혼을 일제히 격발하며 동시에 창문 쪽을 바람벽으로 폐쇄하는 전략.
그 결과 복도 안쪽에서 시작된 폭발은 그 힘이 밖으로 흘러나가는 일 없이 안쪽에 온전히 투사되었다.
물론 침실과 계단 쪽 문 등으로 조금 분산되기는 했지만.
성유물의 감각으로 파악한 바에 의하면 아홉 명의 귀족 중 두 명은 즉사했으며 다른 두 명도 상당한 타격을 입은 듯 흐름이 흔들렸다.
이는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본래 투란이 기대했던 것은 아홉 명에게 적당히 타격을 입혀 신체와 마력을 손상시키고, 정말 운이 좋으면 한 명 정도나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정도였으니까.
아무래도 성채 건물이 폭발력을 이길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진 것이 영향을 준 듯했다.
"오린, 아미아...빌어먹을! 결계사의 함정인가!?"
"아, 아닙니다! 앞에 결계가 깔려 있었다면 분명히 제 마법기에 걸렸을 텐데-"
"일단 여기서 벗어나! 창문으로 뛰어내린다!"
"저 둘은요?"
"업어!"
이미 안쪽에 있던 불의 영혼은 모두 소모된 상태지만, 폭발의 원인을 모르는 저들로서는 이와 같은 공격이 또 들이닥칠 수도 있으리라 여겼을 터.
그것을 전제로 두고 보면 썩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일곱 명의 귀족이 두 구의 시체를 업고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사이, 투란은 허공에 뜬 채 투석구를 빙빙 돌리며 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움직이는 대상이라서 바람길까지는 쓰지 못하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그의 투석 공격은 어지간한 귀족쯤 일격에 죽이기 충분했다.
'우선은 저 녀석부터 해치울까.'
일곱 명 중 유난히 체격이 왜소한 남자.
시체를 업고 있는 터라 두 손이 묶였을뿐더러 상태도 제일 나쁜 편에 속했다.
그를 겨냥해 돌을 던지자 바람 찢는 소리와 함께 목표물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무언가 방어 마법기를 가지고 있었는지 오색의 광채가 솟구쳐 막으려 들긴 했으나, 시간을 들여 위력을 높인 투석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뭐...."
"저격이다! 방향은 위쪽!"
"아무것도 안 보여!"
"그러면 빛을 밝혀!"
이놈이고 저놈이고 공격 상대가 안 보이면 빛부터 밝히고 보는 것은 먼 옛날 자하르가 은신 마법을 믿고 패악질을 부리던 역사가 있는 탓이었다.
아마 그들이 멸종시키기에 너무나 성가신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엔릴 사막의 주인은 바뀌었을 터.
하지만 이를 예상했던 투란은 돌을 던진 뒤 곧바로 폭발이 일어났던 복도로 진입, 구멍이 난 바닥으로 내려간 뒤였다.
제아무리 빛에 특화된 혈통이라 한들 바깥에서 돌과 나무를 뚫고 안쪽까지 비출 수는 없는 법.
"적은...?"
"안 보여!"
그 결과, 주변이 대낮처럼 환해진 상태에서도 적을 찾지 못한 바라하 귀족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멀찍이 떨어진 정원에 서 있던 솔리프를 향해 달려들었다.
일단 조금 전의 기습이 무엇이건 간에 솔리프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젠장, 저놈부터 제압해!"
각자 빛과 불로 된 무기를 생성해 쏘아내는 바라하의 귀족들.
이에 맞서 솔리프는 과거 투란과 싸울 때 그랬듯 광륜(光輪)을 만들어 빛의 채찍을 뽑아냈는데, 휘둘러지는 기세가 그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때는 상대가 어느 정도 실력을 지녔는지 모르니 충분히 손대중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큭-"
하지만 그런 힘을 가지고도 솔리프는 전투를 우세하게 이끌어 나가지 못했다.
일 대 육이라는 수적 열세부터가 쉽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그는 다치고 가진 마법기조차 죄다 뺏긴 상태가 아니던가.
그에 비해 투란보다 강한 마력을 가진 세 명은 앞장 서서 솔리프의 공격을 받아내며 각자 다른 마법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 놈은 솔리프가 쓰던 걸 뺏은 것 같고, 다른 한 놈은 내 수호자 마법기랑 비슷한 느낌...마지막 하나는 직접 움직이면서 막는 형식인가?'
그나마 솔리프가 순식간에 제압당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그 역시 방어 마법기를 사용하고 있어서였다.
바로 투란이 애용하던 수호자 마법기를.
그것을 최대로 활성화한 상태의 솔리프는 이론상 수호자 혈통을 지닌 대가문의 후계자급 마법사와 동급인바, 아무리 고위 귀족들이 협공한다 한들 단시간에 격침하기 어려웠다.
그 덕분에 투란은 제법 여유롭게 건물 밖으로 나와 바람길을 생성하며 두 번째 저격을 준비할 수 있었다.
목표는 여섯 명 중 가장 덜 움직이는 놈.
한창 전투에 몰입한 바라하 귀족들은 당연히 그 움직임을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커헉!"
소리 없이 날아든 돌멩이가 한 명의 심장을 꿰뚫자 한창 솔리프를 압도하던 바라하 귀족들이 얼른 진형을 방어 태세로 바꾸었다.
그중 한 명이 시체의 모양을 통해 돌멩이가 날아온 방향을 유추했으나 투란은 이미 또 성채 안으로 몸을 감춘 뒤였다.
"아니, 정말로 자하르라고...? 어째서?"
솔리프를 잡으러 온 패거리의 대장, 가주의 사촌 동생이라던 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자하르 귀족이 이곳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나 완전히 정신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괜히 대장을 맡은 게 아니라는 듯 빠르게 평정을 되찾으며 지휘를 내렸다.
"일단 나와 소루가 계속 녀석을 상대한다! 레이는 건물 안쪽에 숨은 자하르 놈을 잡아!"
투란보다 강한 귀족 세 명 중 두 명과 약한 귀족 세 명이 다시 솔리프를 둘러싸더니, 나머지 한 명이 그대로 건물 안쪽을 향해 달려왔다.
그의 손 위에서 화염으로 된 새 한 마리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어마어마하게 몸집을 불리며 성채로 날아들었다.
'이런....'
화염의 새가 성채 안쪽으로 파고들며 복도와 방을 모조리 휩쓸자 안쪽에 숨어 강대한 마법사들의 싸움을 훔쳐보던 해적 백수십 명의 몸뚱이가 그대로 불탔다.
방화광 혈통이 강대한 힘을 가지면 이만한 일도 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투란은 수통에 있던 물을 꺼내 얼굴에 덮어씌운 뒤 그대로 저택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후끈한 열기가 등과 뒤통수를 핥는 것이 느껴졌다.
"크으...."
나름 빠르게 피한다고 피했는데도 등이 화끈거리는 게, 제법 심한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하다못해 수호자 마법기만 활성화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그건 솔리프에게 빌려주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
그렇게 물러나며 흉내쟁이 성유물에서 마력을 흡수, 고개를 돌리자 레이라고 불린 바라하 귀족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불타오르는 성채가 뒤쪽에서 화광(火光)을 내뿜으며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분명 너희 쪽과는 다 이야기가 끝났을 텐데. 지금 우리의 행사를 방해하는 건 가문의 뜻이냐, 자하르?"
"마음대로 생각하시지."
말하는 모양새로 보건대 바라하와 자하르 두 가문 사이에 무언가 교감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마 그들의 영토에 들어서면서까지 추격해도 간섭하지 않는 대신 무언가 유·무형적인 자산을 양보하겠다거나, 뭐 그런 종류의 시시한 무언가가 아닐는지.
그게 아니면 좀 더 어두운 종류일 수도 있기는 했다.
예를 들어 자하르의 뒤에도 같은 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거나, 아니면 두 가문에 각각 다른 신들이 배후로 자리하고 있어 그들끼리 모종의 합의를 했다거나....
그렇게 속으로 여러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툭 던지듯 내뱉는 투란의 얼굴에는 동요하는 기색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딱 봐도 자기보다 훨씬 어린 귀족의 도발에 얼굴이 일그러진 레이와 달리.
"대체 뭘 믿고 까부는 거지? 우리 바라하가 너희의 천적임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혹시 후계자라도 되시나?"
빛과 불, 두 가지 모두 자하르의 은신 능력에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요소였다.
애초에 자하르 혈통 자체가 이런 정면 대결에서는 썩 뛰어나지 않기도 하고.
아무리 투란이 재능 넘치는 마법사라지만 그보다 강한 힘을 가진 전투 특화 마법사와 정면에서 싸우기란 어려웠다.
하다못해 솔리프와 싸울 때처럼 주변에 물이라도 있으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은 상황이니 더더욱.
하지만 상대를 바라보는 투란의 눈에 두려워하는 기색 따위는 없었다.
"후계자는 아니다만 그래도 너 정도는 이기지."
그 말에 발끈한 레이가 막대한 마력이 담긴 화염의 구체를 쏘아낸 순간, 투란이 땅을 쾅 구르자 바로 앞에서 거대한 벽이 솟아났다.
마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가 만든 돌벽은 화염구의 폭발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뎌냈다.
"방화광 족속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물가에서 마주친 여울 혈통이나 땅지기였지, 아마?"
그리고 조금 전 투란이 흡수한 것이 바로 땅지기 혈통의 마력이었다.
서부 황야에서 죽였던 군대의 대장이 가지고 있던.
막대한 열기는 흙과 돌조차 녹인다지만, 대지를 지배하는 가문의 힘이 깃든 땅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투란이 반격을 위해 투석구로 돌멩이를 날리자 우습게도 그 역시 땅지기 혈통의 영향을 받아 평소보다 더 강하고 빠르게 쏘아졌다.
"큭!"
갑작스러운 공격에 레이가 경악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순간,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녹색의 무언가가 돌멩이를 대신해서 쳐냈다.
조금 전에도 보았던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방패.
아마 방어형 마법기일 그것은 무슨 공격이건 다 쳐낼 자신이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레이의 주변을 돌았다.
"젠장...!"
자기 의지로 막은 게 아니었는지, 레이가 맞을 뻔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욕을 내뱉었다.
붉어진 얼굴로 보건대 자신이 두려워했다는 사실에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는 모양.
그가 투란을 향해 손을 뻗자 이내 빛으로 만들어진 화살 수십 개가 쏘아져 나갔다.
본래 빛을 물질화한 공격은 기사들이 가장 애용하는 마법 중 하나일 정도로 간단한 것이지만, 빛을 다루는 혈통의 귀족이 사용하면 그 역시 흉악한 무기가 됐다.
이에 투란은 다시금 발을 굴러 송곳을 솟구치게 하는 것으로 날아드는 화살들을 하나하나 격추했다.
둘 다 물리적인 힘을 다루지만, 대지 마법이 더 방어적이고 느리다면 빛은 공격적이고 빨랐다.
그렇게 치고받던 와중 투란은 상대에 비해 다소 남아도는 신경 일부를 할애해 불의 영혼을 꺼낸 뒤 바람 마법으로 날렸다.
자연스럽게 방패를 지나친 그것은 레이의 몸 주변에 도착한 순간 격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윽!"
이런 식의 공격은 고위 귀족의 몸에 상해를 주기 어렵지만, 그래도 일시적으로 시력과 청력에 타격을 줄 정도는 됐다.
이러한 공방전에서 그것이 얼마나 유의미한 영향을 줄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
잠시 얼굴을 감싸 쥔 틈을 놓치지 않고 투란의 대지 송곳들이 레이의 발과 다리를 관통했다.
녹색 방패가 막아주는 것도 한둘이지 아예 멈춰선 상태에서 모든 공격을 막을 순 없었다.
"아아아악!"
고통으로 비명을 내지르는 레이.
하지만 그 역시 수백 년을 살아온 고위 귀족답게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빛의 화살을 쏘아내며 투란에게 방어를 강요했다.
다시금 불의 영혼을 바람 마법으로 흘려보내려 했으나 놀랍게도 이번에는 가루가 손을 벗어난 순간 바로 폭발하고 말았다.
손에 가벼운 화상을 입은 투란이 작게 신음했다.
"윽...."
"무슨 개수작인지 몰라도 두 번은 안 통한다!"
전투 중이라 집중하고 있던 탓에 이쪽이 검은 가루를 보내 터트린 것임을 알아채고 곧바로 대응법을 마련한 모양.
심지어 절반은 방화광 혈통이라 그런지 화염을 일으키는 속도 역시 그보다 훨씬 빨랐다.
이에 투란은 불의 영혼을 더 사용하는 것을 포기한 채 정직하게 마법 승부에 나섰다.
대지를 변형해 더 많은 송곳을 만들어 상대의 이동을 강요하고, 동시에 날아드는 화살을 격추하는 식으로.
그러는 와중 짬짬이 날린 투석은 녹색 방패가 방어했으나 이 역시 크게 보면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본래 모든 마법기는 주인의 마력을 원동력으로 삼는 법.
저렇게 자동으로 막는 형태의 마법기는 마력 소모가 더 심하리라는 것을 고려하면 손해 보는 쪽이 누구일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허억, 헉...."
가빠지는 호흡과 식은땀은 그가 마력을 지나치게 빠르게 소모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투란 역시 슬슬 땅지기 혈통의 마력을 거의 다 소모했다는 것.
땅지기 마력을 모두 소모한 투란이 먼저 물러서자, 레이가 자신의 우세를 깨닫고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하하...제법 노력했다만 역시 힘든 모양이지?"
"별로."
말하는 것과 달리 투란 역시 계속해서 치고받느라 힘을 꽤 많이 소모한 상태였다.
그래도 상대보다는 여유가 있지만, 이후 솔리프의 싸움을 도와주러 가야 할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낭비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사실 저쪽이 불의 영혼에 대처할 방법을 바로 생각해낸 것이 다소 계산 밖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더 빨리 끝냈을 텐데, 역시 대가문의 마법사답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긴 잠시간의 소강상태를 틈타 투란은 품속에서 흉내쟁이 성유물을 꺼내 두 번째 마력을 삼켰다.
"뭐냐, 그건? 마법기인가?"
"비슷해."
체력과 마력을 회복하기 위해 시간을 끌려는 기색이 노골적이었으나 투란은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 역시 이질적인 마력이 몸에 흘러드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잠시 후, 투란은 마력이 완전히 몸에 정착했음을 확인하고 두 손에 빛과 불을 일으켰다.
"무슨...?"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레이는 의아함을 드러냈다.
빛과 불이라니, 은신을 주력으로 삼는 자하르 귀족이 질색하는 두 종류의 힘이 아닌가.
물론 조금 전 상대가 뜬금없이 숙련된 땅지기 혈통 귀족의 힘을 보이기는 했으나, 어쨌건 태양 혈통인 그를 상대로 꺼낼 만한 무기는 아니었다.
그런 의문에 답하듯 투란은 양손에 깃들어 있던 빛과 불을 하나로 합쳤다.
마치 서로 다른 위상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전혀 어우러지지 않는 두 종류의 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지러지듯 하나로 합쳐진 그것은 투란의 등 뒤에서 빛나는 고리의 형상을 띠었다.
67화
솔리프가 보여주었던 빛과 불이 섞여 만들어진 광선 마법은 본래 바라하의 가주와 그 후계자에게 내려오는 비전이었다.
과거 메이사가 투란에게 몰래 가르쳐 주었던 아라비온의 사고 가속 마법처럼.
둘의 차이점이라면 전자는 태양 혈통을 타고나야 사용할 수 있지만 후자는 폭풍 혈통이 없어도 쓸 수 있다는 것 정도.
감옥에서 투란이 이 기술을 알려달라고 했을 때 솔리프가 의아해한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원리를 알아도 태양 혈통이 아니면 못 쓸 텐데?'
'방법이 있으니까 일단 가르쳐 줘.'
'...뭐, 그렇다면야. 우선 불도 색이 여러가지가 있는 건 알지?'
불꽃의 색은 그것이 무엇을 원료로 타오르냐에 따라 달라지며, 마법사는 발화 마법을 사용함에 있어 마력의 성질을 조작해 이를 어느 정도 조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색상은 어떤 파장(波長)의 빛이 밖으로 나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 불과 빛의 색을 정밀하게 조정해 둘을 일치하게 맞추면 하나로 섞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이상적인 색상은 솔리프가 만들어낸 것과 같은 황금색이고.
파장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빛과 불의 파장이 맞으면 왜 둘이 섞이는지까지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어차피 솔리프도 거기까지 알고 마법을 쓰는 것은 아니니 이 정도를 안 것만으로도 이론은 충분했다.
'어디.'
투란은 등 뒤로 펼쳐진 광륜에서 빛의 채찍을 한 가닥 뽑아내 가볍게 흔들었다.
아무래도 숙련도 문제가 있어서일까.
움직임이 솔리프의 그것과 비교하면 영 미숙하고 조잡하게 느껴졌다.
물론 감옥에서 잠깐 몇 번 연습한 것만으로도 이 정도로 쓸 수 있게 된 것부터가 평범한 마법사들이 보기에는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재능의 폭력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뭐냐. 대체 어떻게 심판의 빛을?"
이 모습을 본 바라하 귀족, 레이의 머릿속에서는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생각이 오갔다.
설마 후계자가 가문에서 도망친 몇 년 새에 저만한 나이의 자식을 보았나?
당연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게 아니면 눈앞의 적은 자하르가 아니라 은신 마법기를 썼을 뿐인 바라하 혈통의 사생아인가?
대체 누구의 자식인지부터 따지기 어려울뿐더러, 그러면 조금 전 보인 땅지기 혈통의 능력은 또 뭐란 말인가?
온갖 의문으로 사고가 엉망진창이 된 탓에, 레이는 투란이 뽑아낸 채찍이 자신을 향해 쇄도한 순간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대응에 나섰다.
"큭!"
손에서 뻗어나온 빛의 검이 채찍을 쳐내는가 싶더니 이내 열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뎅겅 잘렸다.
온전한 상태였다면 모를까, 지금 투란과 레이의 마력 총량이 역전된 상태였기에 발생한 일.
녹색 방패가 다시금 공격을 막아주어 연명하기는 했으나, 그 영향으로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이 뭉텅 깎여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눈앞의 상대가 바라하의 비전, 심판의 빛을 썩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한다는 것.
조금 전 같은 속도라면 그래도 방심하지만 않으면 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나마도 발과 다리를 다치지 않았다면 여유롭게 피할 수도 있었을 테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투란이 뽑아내는 빛의 채찍이 순식간에 네 개로 늘어났다.
"익숙하지가 않아서 아직은 네 개 정도밖에 못 다루겠네."
까무러칠 듯한 말과 함께 순식간에 늘어난 채찍이 레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조금 전의 공격보다 딱 두 배쯤 빠른 속도였다.
* * *
레이를 정리한 투란이 곧바로 정원에 돌아왔을 때, 솔리프는 슬슬 힘이 다해서 제압당하기 직전이었다.
물론 그를 몰아붙이는 바라하의 마법사들 역시 마력 상태가 썩 여유롭지 않기는 마찬가지.
언제 자하르 귀족이 다시 나타날지 몰라서 주변을 환하게 밝혀놓느라 마력을 낭비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너, 너...."
"그걸 대체 어떻게!"
조금 전 레이와 마찬가지로, 바라하 귀족들은 뒤에 광륜을 두른 채 나타난 투란의 모습에 경악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십여 개의 채찍을 뽑아내 능숙하게 휘두르는 것을 보고는 반쯤 넋이 나가고 말았다.
갑자기 뒤집힌 전황에도 그들은 제법 분전했으나 이미 승부의 추는 기운 상태였다.
투란이 레이를 제압하고도 마력을 절반이 조금 안 되게 유지하고 있던 데 비해, 바라하 귀족들은 솔리프를 제압하느라 거의 모든 힘을 다 짜낸 상태였으니까.
심지어 그 와중 기진맥진해 있던 솔리프가 사력을 짜내 고위 귀족 한 명과 공멸하자, 투란은 비행 마법으로 여유롭게 정원 위를 날며 적을 하나씩 제압해 나갔다.
우선 불의 영혼을 뿌린 뒤 폭발시키는 것으로 비교적 약한 귀족 세 명의 눈과 귀를 제압.
그 상태에서 둘을 베어 죽인 다음 당황하여 도망치려는 나머지 하나를 투석으로 죽였다.
아까처럼 반격당할까 싶어 불의 영혼은 그렇게 딱 한 번만 사용하고, 마지막 남은 바라하 귀족들의 대장은 조금 전 레이와 싸웠을 때처럼 빛의 채찍을 이용해 차근차근 제압했다.
그는 빛을 삼키는 보자기 형태의 마법기를 휘두르며 제법 분전했으나, 이미 마력이 거의 다했던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팔다리가 잘려 땅에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열기 탓에 피가 흐르지 않아 과다출혈의 위험이 없다는 것은 다행일까, 아닐까.
"대체.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은신부터 심판의 빛과 비행에 폭발 마법까지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바라하 대장의 두 눈에는 불가해한 생물을 본 사람 특유의 공포가 담겨 있었다.
정말로 마법의 신이 내려온 것이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는 일이 아닌가.
차라리 어느 대가문의 가주가 쳐들어왔다고 한들 이만큼 황당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대답이 아닌 질문이라, 투란은 대용량 주머니에서 사슬 마법기를 꺼냈다.
우선 마력을 회복한 뒤에도 저항하지 못하게 제압해두고 차근차근 정보를 빼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슬을 본 대장의 표정이 변하더니, 그의 머리가 화르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모두 집중한 듯 어마어마한 화력이었다.
"아."
본래 마법사의 몸에 제대로 된 인과 없이 마법을 걸면 강력한 반발 작용이 일어나지만, 유일하게 그러한 제약에서 벗어난 것이 바로 자기 몸에 직접 마법을 거는 것이었다.
바로 지금 머리에 발화 마법을 갈겨 버린 눈앞의 귀족과 같이.
미처 대처할 새도 없이 머리가 새카맣게 타 죽어버린 대장.
투란은 그의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혀를 차며 사슬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저 정도 지위면 틀림없이 솔리프의 인생을 조작한 배후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이건만.
역시 죽음을 각오한 귀족을 제압하기란 쉽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처럼 관련된 마법기를 가진 상황에서조차도.
'어쩔 수 없나.'
이미 끝난 일에 미련을 가져봐야 소용없는 일.
투란은 대장의 시체 옆에서 떠나 바닥을 나뒹굴고 있던 솔리프를 조심스럽게 들어 앉혔다.
그는 한쪽 팔이 팔꿈치부터 잘려나가고 옆구리 살점이 한 움큼 파여나가는 등 말 그대로 온몸이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꼴이 말이 아닌걸."
"흐, 그래도 이 정도면 잘 버텼지...?"
대답하는 솔리프의 눈에 초점이 흐릿한 것이, 이대로 내버려 두면 곧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이 상태에서 의식을 잃는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최상급 귀족의 생명력이면 몇 시간 정도는 더 버티긴 하겠지만 자연 치유는 기대하기 어려울 터.
투란은 죽은 귀족들의 시체를 향해 감각을 뻗은 뒤, 유리병 형상의 실루엣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찾아 꺼냈다.
아까 솔리프와 작전 회의를 하던 도중 이들이 쓰는 마법기의 기능을 대충 들어둔 탓에 이것이 회복 마법기임을 알 수 있었다.
'마력을 주입하면 회복약이 나온다고 했지.'
짐작건대 죽은 자조차 살려내는 생명의 비약이 나오는 성유물을 따라한 것일 터였다.
마력을 주입하자 텅 빈 병에 액체가 찰랑이는 것이 보여, 투란은 이를 솔리프에게 먹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백하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번으로 회복하기에는 약의 효과가 미약하고 솔리프가 지나치게 강력한 터라, 투란은 계속해서 마력을 회복약으로 변환해 먹이기를 반복했다.
싸우느라 얼마 남지 않았던 마력을 다시금 대량으로 소진하자 아찔하기까지 한 탈력감이 밀려왔다.
'쯧, 아무래도 치유사 혈통보단 효율이 떨어지나....'
하기야 혈통 능력을 똑같은 효율로 재현할 수 있는 마법기라면 그 자체로도 성유물 급이라고 할 만했다.
투란의 수호자 마법기 역시 수호자 혈통의 힘을 재현하는 대신 마력 효율은 안 좋은 편이지 않던가.
그렇게 몇 번 쉬어 가며 마력이 회복될 때마다 회복약을 만들어 먹인 끝에, 솔리프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몸을 일으켰다.
잘린 팔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기력은 꽤 회복한 것 같았다.
"부활!"
"그래, 부활했으면 이거나 좀 만들어 봐...."
벌떡 일어났던 솔리프는 투란이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유리병을 내밀자 머쓱한 표정으로 회복약을 만들어 주었다.
이를 마시자 계속 쓰려오던 등 부분의 화상이 조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서로 회복약을 만들어 주고받으며 고비를 넘긴 뒤, 솔리프는 팔에 차고 있던 수호자 마법기를 염동 마법으로 풀어서 넘겨주었다.
"진짜 대단한 물건이던걸, 이게 없었으면 진작에 당했을 거야."
"내 보물이지."
단순 기능이야 흉내쟁이 성유물 쪽이 압도적으로 우월하지만, 투란이 개인적으로 더 애착을 가지는 물건은 이쪽이었다.
아무래도 친구에게 받은 선물이니까.
물론 아시즈가 직접 만든 건 싸우느라 너덜너덜해진 옷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면...바로 수습할 거냐?"
"우선 비제부터 불러오고."
"정리부터 하고 있어야겠네."
"내가 할 테니 그냥 두고 쉬어."
비록 흉한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지만 그래도 과거 가족이자 동료였던 이들 아닌가.
서로 살육전을 벌인 것만으로도 속이 편치 않았을 텐데, 그 시체를 뒤지고 모으는 일까지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같이 싸워놓고 나 혼자 쉬기는 좀 미안한데."
"몸뚱이만 멀쩡하면 싫다고 해도 일 시킬 거니까 사양하지 마."
"그렇다면야."
솔리프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나무에 기대앉는 것을 본 뒤, 투란은 곧바로 비제를 숨긴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채와 마을을 지나는 동안 해적이나 섬의 주민들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해적들이야 성채가 불타는 꼴을 보고 기겁해서 배를 타고 도망갔을 것이고, 주민들은 집안에 틀어박혀 싸움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작은 토굴의 입구를 파헤치자 웅크리고 있는 비제가 보였다.
"비제, 나 왔어."
[투란, 아파?]
투란의 얼굴을 본 비제가 곧바로 글씨를 썼다.
어두운 토굴 안이라서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만, 투란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아픈 건 아니고 좀 지치네. 다 끝났으니까 나와도 돼. 좋은 선물도 있어."
[선물?]
"맛있는 거."
이번 싸움에 비제를 데려오지 않은 것은 녀석이 투란에 비해 지나치게 약해서였다.
마수치고는 제법 강한 축이라지만 힘 좀 쓰는 가주급 마법사의 공격을 잘못 맞으면 위험해질 수도 있었으니까.
아마 투란과 맞대결을 펼쳤던 레이 정도면 비제를 일격에 즉사시킬 수도 있을 터.
하지만 저 성채에 늘어선 시체로부터 마력을 흡수한다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 * *
'어마어마하네.'
비제와 함께 성채에 돌아온 투란은 죽은 바라하 귀족들의 시체를 정리한 뒤 마법기를 노획했다.
흉내쟁이 성유물 덕에 다행히 시체의 속옷까지 싹 벗겨가며 뒤질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회수한 마법기는 무려 스물세 개.
열 개 정도는 비교적 평범한 물건이었고 일곱 개는 꽤 뛰어난 물건이라 할 만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개는 투란의 수호자 마법기에 비해서도 크게 밀리지 않을, 대가문에서도 높게 쳐줄 만한 보물이었고.
아마 개인이 이만한 수의 마법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수십 개의 귀족 가문이 일어나서 그를 사냥하러 나설지도 모를 일이었다.
투란은 가장 먼저 솔리프에게 본래 소유하고 있던 마법기들을 찾아갈 것을 권했다.
"그래도 되나?"
"어차피 원래 갖고 있던 마법기는 네게 최적화된 물건일 거 아니야. 나 혼자 무더기로 가지고 있어 봐야 쓸모없겠지."
한 마법사가 불을 뿜는 마법기를 두 개 가진다고 해서 그의 화력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힘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력을 소모해야 하니까.
마법기가 여럿 있다면 그중 일부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동료에게 분배하는 쪽이 효율이 높았다.
솔리프는 다소 민망해하는 표정으로 배낭과 종이 달린 나무 막대기, 속옷 등 십여 개의 마법기를 챙겼다.
이후 투란은 남은 마법기들을 찬찬히 정리하며 물건의 기능을 하나하나 떠올리거나 옆에 있던 솔리프에게 확인시켰다.
그래도 대부분이 조금 전의 전투에서 보았던 것이라 대충 용도를 알 수 있었다.
'이건 레이라는 놈이 쓰던 거네. 자동 방어 기능...성능은 좋아도 마력 소모가 너무 심해 보이던데, 일단 갖고는 있어야지. 이건 아마도 수호자 마법기랑 겹치는 것 같으니 솔리프한테 쓰라고 하고. 오, 이건 아까 그 보자기잖아?'
빛과 불이라는 공격적인 힘을 타고난지라 바라하 귀족들은 공격용 마법기를 그리 많이 가져오지 않았다.
그나마 공격용에 가까운 것이 바로 지금 투란이 집어 든 물건, 빛을 삼키는 보자기.
조금 전 바라하 귀족들의 대장이 쓰던 이 물건은 펼친 채 마력을 주입해 휘두르면 주변의 밝은 빛을 흡수해버리는 기능이 있었다.
태양 혈통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마법기를 가져온 것은 아마 솔리프를 사냥하기 위함일 터.
그리고 빛을 없애는 기능이라면 투란 같은 자하르의 마법사 역시 굉장히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이거 진짜로 쓸만하겠는걸.'
그동안 빛을 밝히면 무력하게 도망치거나 은신을 해제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보자기를 이용해 빛을 삼켜 버리면 은신한 채로 싸울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자하르 귀족들도 이미 이와 비슷한 형태의 마법기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동안 자하르의 마법사가 싸우는 것을 본 건 지하 미궁에서의 전투뿐인데, 그곳은 은신 능력이 무의미한 장소였으니까.
보자기를 접어 넣은 뒤 다시금 마법기를 정리하던 투란의 눈에 띈 것은 반투명한 가면이었다.
"혹시 이게 그건가? 모습을 바꾼다는 가면?"
"음? 아, 맞아. 아마도. 얼굴에 쓰니까 모습이 바뀌던데."
"자세한 기능이나 부작용 같은 건 모르고?"
"그렇지."
투란은 가면을 이리저리 확인해보다가 그것 역시 대용량 주머니로 보냈다.
이것도 나중에 아시즈에게 감정을 부탁해볼 참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친 뒤에는 대망의 마력 흡수 시간이 다가왔다.
이번에 죽은 열 명의 귀족 중 한 명은 지하 감옥에서 투란이 흡수해버린 터라 그 수는 총 아홉.
늘어선 시체를 보며 솔리프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기분 진짜 이상한걸. '장례'를 치른 게 처음은 아니지만...."
설마 자기 가문 사람들을 죽이고 장례를 치를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비제를 옆에 세우자 솔리프가 나지막이 물었다.
"혹시 저 녀석에게 시체를 먹게 할 거냐?"
"아니, 비제도 마법사랑 같은 방식으로 마력을 흡수할 수 있어. 따로 가르쳤거든."
"오, 그거 배울 수 있는 마수가 별로 없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비제가 유달리 똑똑해서 자기 혼자 그런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시체를 훼손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에 조금 기분이 풀렸는지, 솔리프가 조금 전보다 다소 편해진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마력 흡수가 시작됐다.
첫 대상은 이들 중 비교적 약한, 평범한 가주급의 마력을 가진 귀족 여섯 명.
당연하게도 솔리프는 물론이요, 투란 역시 이들의 힘을 흡수해 유의미한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나마 투란은 태양 혈통의 마력을 흉내쟁이 성유물에 담는다는 소득이 있었다.
이를 본 솔리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다시 봐도 안 믿기네. 마력을 흡수해서 혈통 능력을 재현하는 성유물이 존재할 줄이야...."
이미 지하 감옥에서 설명하고 그 결과까지 직접 보았던 탓에 놀라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듯했다.
하기야 현존하는 것은 물론이요, 역사에 기록된 마법기 중에서도 이러한 기능의 물건은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옆에 있는 최상위 귀족 둘과 달리, 비제는 여섯 귀족의 마력을 흡수하며 눈에 띄는 성장세를 이룩하고 있었다.
평범한 귀족보다 조금 강한 수준에서 가주 급 마법사를 여섯 명이나 흡수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갑자기 상승한 힘에 발을 동동 구르며 날아다니던 비제를 진정시킨 뒤, 그들은 마지막으로 고위 귀족 세 명의 마력을 차근차근 흡수했다.
솔리프는 아무래도 그리 재미를 보지 못했으나 투란은 조금이지만 자기보다 강한 귀족들의 마력을 연이어 흡수하며 오랜만에 성장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뼈와 근육 같은 살덩어리부터 마력과 정신, 영혼, 혹은 그보다 더 깊은 본질 자체가 한층 초월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감각.
그 아찔하기까지 한 쾌감을 몇 번의 호흡으로 내뱉은 뒤 눈을 뜨자 주변의 사물이 한층 더 명료하게 느껴졌다.
마력이 강해져 신체 능력이 향상되며 감각 역시 날카로워진 것이다.
'이 정도면...아마 페르가와 비슷하려나.'
그가 가진 힘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터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얼추 그 비슷한 수준쯤 될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솔리프와 비교하자면 대충 팔 할 정도.
과거 페르가가 자하르의 후계자 후보 중 하나로 여겨졌음을 고려하자면, 이제 투란도 하위권이지만 여느 대가문의 후계자들과 견줄 만한 실력자가 된 셈이었다.
가지고 있는 마법기와 마법 실력을 고려하면 그보다도 더 강할 것이고.
두근거리는 심장에 손을 얹고 기분을 가라앉히려 애쓰던 도중, 옆에서 비제가 날카롭게 삐약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무래도 조금 전보다 더 급격히 성장한 탓에 지나치게 흥분한 듯했다.
"비제, 좋은 건 알겠지만 진정-"
그런 비제를 제지하려던 투란은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새카만 밤하늘 위, 검독수리 한 마리가 날개짓할 때마다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68화
본래 여러 마법을 습득하는 마법사와 달리, 마수들은 그저 갓 각성할 당시 선천적으로 타고난 힘만을 쓸 수 있었다.
과거 투란이 마주쳤던 그림자 표범이나 살인 토끼가 그랬던 것처럼.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가설이 존재했다.
마수들의 지적 능력과 상상력이 지나치게 빈곤해서라거나, 육탄전에 특화된 혈통들이 마법을 몸 밖으로 쉬이 뻗지 못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거나.
따라서 투란은 비제에게 꾸준히 마법을 쓰는 요령이나 감각 등을 전수했다.
만약 마수가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게 지적 능력의 문제라면 비제는 충분히 이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여겼으니까.
하다못해 간단한 염동력이나 발화 마법만 쓸 줄 알아도 엄청나게 편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별 진전이 없어 언제부턴가 반쯤 단념한 참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무시무시한 바람 마법을 선보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깜짝 놀라기도 잠시, 투란은 자신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고 의식을 집중했다.
비제와 연결된 영혼의 끈을 통해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비제에게 전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마력이나 정신력같이 소모되는 무언가가 아닌, 순수한 '정보'에 가까웠다.
'설마, 내가 가진 폭풍 혈통의 능력이 전달되는 건가?'
이에 확신을 주듯, 비제가 소용돌이를 멈추자 영혼의 끈에서 느껴지던 일렁임이 사라졌다.
투란은 진정하고 내려온 비제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새가 새로이 얻은 능력을 분석했다.
"힘이 강해지니까 갑자기 할 수 있게 됐다고?"
[응!]
"전에 가르쳐준 건?"
[그건 안 돼! 불 피우거나 움직이는 건 못 하겠어!]
"그러면 혹시 안 보이게 숨는 건 할 수 있겠어?"
잠시 시도해 보던 비제는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즉 투란이 가진 힘 중 오로지 폭풍 혈통의 능력, 그중에서도 현재 개발된 바람 쪽의 힘만 빌려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랑 메이사만 딱 맞는다고 했던 이유가 이거였나?'
비제에게 잠재되어 있던 소질이 바람, 혹은 바람과 번개의 힘이었기에 그와 상성이 맞는 혈통의 귀족에게만 반응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동안 녀석에게 '딱 맞는' 사람이 나오지 않은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아라비온 혈통의 귀족이 엔릴 사막에 가서 마수를 살 일은 없었을 테니까.
조금 더 실험해본 결과, 비제가 쓰는 바람 마법은 전형적인 마수 특유의 선천적 마법에 가까웠다.
정밀한 조작력은 인간 마법사보다 떨어졌으나 순수한 출력과 효율은 훨씬 더 낫다는 점에서.
옆에서 이를 가만히 보던 솔리프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절대로 나중에 야생에 풀어주지 마. 저 녀석이 사람 고기에 맛이라도 들리면 대가문에서 토벌대를 꾸리지 않는 한 못 잡을 테니까."
확실히 고위 귀족급 마력을 가지고 바람까지 다루는 검독수리란 문자 그대로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며 저 멀리서 통나무집조차 날려버릴 바람을 불어대는 녀석을 무슨 수로 쫓아 공격한단 말인가.
그런 솔리프의 말에 비제가 훌쩍 뛰어 머리 위로 앉더니 부리로 콕콕 쪼아댔다.
"악! 왜 이래, 아프잖아! 야, 그만 좀 하라고 해!"
[난 사람 안 먹어! 투란이 먹지 말랬으니까!]
몇 번이고 쪼아댄 뒤 바닥에 착지한 비제가 그렇게 글씨를 쓰고는 씩씩대며 투란의 옆구리에 있는 막대 위로 올라갔다.
그 유치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기도 잠시, 투란은 머리를 쓰다듬는 솔리프에게 질문했다.
"혹시 이런 사례 들어본 적 있어? 마수가 후천적으로 마법을 깨우치는 거 말이야."
"음, 전혀 모르겠는데...."
맞춤형 교육을 받으며 컸다지만 대가문의 후계자인 솔리프조차 알지 못할 정도면 확실히 흔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하기야 마수 도감에서도 관련된 내용이 없지 않았던가.
언젠가 마수에 해박한 사람을 만나면 자세히 물어보아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니면 도서관의 사서라거나.
그렇게 뜻밖의 상황에 대한 분석을 마친 뒤, 그들은 전장 정리에 들어갔다.
우선 솔리프가 화염을 피워 모든 시체를 불태우고 비제는 바람을 불어 이를 전투가 일어난 성채 주변으로 확산시켰다.
어떤 의미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화장(火葬)인 셈이었다.
그동안 투란은 추적 마법을 써서 불타버린 성채 내에서 쓸만한 보물을 찾았다.
유감스럽게도 성채 전체를 휩쓴 화염이 보물 창고까지 들이닥쳤는지 금화와 은화, 각종 보석 장신구 따위가 모조리 녹아 엉겨 붙어 있었다.
슬슬 그의 대용량 주머니는 남은 용량이 넉넉지 않았던 터라 이는 솔리프가 가지고 있던 대용량 배낭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투란의 대용량 주머니보다 훨씬 큰 대신 배율이 낮아 넣을 수 있는 총량이 비슷했는데, 바라하 귀족들이 안에 있던 잡동사니를 모조리 버린 탓에 공간이 남아돌았다.
솔리프는 아끼던 사탕수수 술이 모두 없어졌다고 슬퍼했다.
수확을 마친 뒤에는 그들의 몸에서 나온 터럭이나 피, 깃털 등을 일일이 추적 마법으로 찾아 제거했다.
숙련된 자하르 귀족이나 추적 마법기를 가진 이라면 이를 단서로 쫓아올 수도 있으니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모든 정리를 마쳤을 무렵, 해가 떠오르며 긴 밤의 끝을 알렸다.
솔리프가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며 물었다.
"밤을 꼴딱 새웠더니 피곤해 죽겠네...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뭐지, 대장?"
대장이라니, 지금까지 한번도 들은 적 없는 호칭이었다.
심지어 그 말을 한 것이 그보다 마흔 살쯤 더 많은 대귀족이라서 더더욱 기묘하게 느껴졌다.
투란은 그런 기분을 내색하지 않으며 솔리프의 왼팔을 가리켰다.
"일단 그것부터 고쳐야지."
"아."
솔리프는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 팔꿈치부터 잘린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생명의 샘'이라는 이름이 붙은 회복약 유리병으로는 잘린 팔을 도로 붙일 수 없었으나, 치유사 혈통의 귀족은 없어진 팔조차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염동 마법을 쓰면 일상 생활에 큰 지장은 없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지 않은가.
"내가 아는 곳으로 가면 익명으로 치료할 수 있을 거야. 치료비야 충분히 벌었으니 걱정할 것 없고."
"어딘데?"
"아라비온."
처음에는 라비타스의 리다에게 치료를 부탁할까도 생각했으나 그녀가 평상시 어디서 거주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문제가 있었다.
설마 항상 온천 옆에 머무르지는 않을 텐데, 만약 라비타스 본가에 있다면 불러내기 위해 신분을 드러내고 주목을 받아야 할 터였다.
남해와 가까운 시라프 습지대가 바라하 가문의 수색 범위에 들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그런 식으로 행적을 노출하느니 차라리 멀찍이 떨어진 다케인 평야에서 베르크 가문의 인맥을 통해 은밀히 치유사 혈통의 귀족을 수배하는 쪽이 나았다.
"아, 그 북서쪽의? 어쩐지 하늘을 날더라니, 너 아라비온 귀족이었냐? 은신 마법은 자하르 귀족을 죽여서 탈취한 거고?"
"아니, 그건 타고난 능력인데...혼혈이지. 굳이 말하자면."
혼혈이라는 말에 솔리프의 얼굴이 굳었다.
보통은 그냥 두 가문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지만, 투란은 이미 두 가문의 능력을 모두 보여주지 않았던가.
"설마 혈통 결합?"
"맞아."
솔리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작게 셋이냐, 라고 물었다.
혈통 능력의 수를 말하는 것임을 짐작한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직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혈통이 네 개면 마력이 강해질 때마다 하나씩 열리더라고. 지금은 세 개째야. 아직 벼락 쪽은 못 써."
투란의 설명에 솔리프는 입을 쩍 벌리더니 하늘을 보며 한탄했다.
혈통 능력이 네 개라니, 이건 역사서를 뒤져 봐도 안 나올 괴물이 아닌가.
"빌어먹게 불공평한 세상 같으니."
"대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난 것만 해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축복받은 삶일걸."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말을 네 개의 혈통 능력을 타고난 괴물에게 듣자니 실로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투란은 솔리프가 열 받아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무시하며 하던 일에 몰두했다.
바로 비제를 타고 가기 위한 도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으려나?"
"뭐, 좀 간당간당해 보이긴 해도 부서진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까...."
그들이 만든 것은 밧줄과 나무판자를 쓴 일종의 그네로, 탑승자의 안전을 보장하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한 모양새였다.
어지간히 배짱 있는 이가 아니라면 도저히 타기 힘들 물건이지만 어차피 둘 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다칠 사람은 아니니 상관없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어설프게 그네에 걸터앉자 비제가 다리에 밧줄을 매단 채 날아올랐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네가 이륙했다.
"우왓...."
처음으로 하늘을 날아보는 솔리프가 까마득히 작아지는 지상을 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생각해보면 투란 역시 엔릴 사막에서 처음 하늘을 날았을 당시 비슷한 기분이었으니 비웃을 것은 아니었다.
투란은 그네에 탄 채 하늘을 날며 뒤쪽을 바라보았다.
지난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 비나투 섬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웠다.
* * *
막대한 양의 마력을 흡수한 보람이 있게도, 비제는 사람 한 명과 탑승용 그네를 더 얹고도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날았다.
심지어 스스로 바람 마법을 사용해 기류를 만들면 속도를 한층 더 높일 수 있었는데, 그러면 바람의 저항을 이기지 못한 그네가 삐걱삐걱 비명을 내지르는 탓에 어느 정도 속도를 조절해야 했다.
이렇듯 거추장스러운 그네에도 장점이 있다면 두 손이 자유로워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건빵과 어포로 끼니를 해결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하늘 위에서 식사하며, 투란은 솔리프에게 약속했던 대로 자신이 본 신의 최후를 전해주었다.
"북해라...."
"그래. 아마도 두 바다를 잇는다는 거울이 그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지. 신적 존재들인 만큼 거울을 나와서 한참을 더 싸우다가 최후를 맞이했을 수도 있지만."
덤으로 그 신이 남긴 것이 흉내쟁이 성유물이라는 것까지 알려주자 솔리프는 굉장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한참 탐구하던 것의 진실을 밝혀내어 기쁜 이의 얼굴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뭐라고 해야 하지, 궁금해했던 게 너무 쉽게 풀렸다고 해야 하나. 기쁘지 않은 건 아닌데."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기는 했다.
애초에 솔리프가 이를 찾던 게 무언가 거창한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모험하는 과정 자체를 즐겼던 것이 아니던가.
그런 상황에서 떡하니 답지를 받았으니 기쁨보다 허탈함이 더 큰 모양이었다.
"아직 모든 게 다 밝혀진 건 아니잖아. 왜 그 신이 다른 프레아 신족들과 협력하지 않고 거기서 혼자 싸워야 했는지부터 역사에 제대로 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이유 같은 것도 있을 거고. 무엇보다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하긴, 그것도 알아볼 만하겠구만. 나중에 유해가 남은 곳도 찾아가 보고 싶은데 안내해줄 수 있냐?"
"시간이 나면."
이후로는 투란이 그간 겪은 모험에 대해 이것저것 잡담을 나누었는데, 솔리프는 그 와중에도 투란의 출생에 대해서는 절대 묻지 않았다.
저 먼 동방 바라하 출신이라지만 아라비온과 자하르가 얼마나 험악한 사이인지를 아는 만큼, 그 과정이 썩 평화롭지 않으리라 짐작해서였다.
투란 역시 그 오해를 어느 정도 짐작하기는 했으나 굳이 이를 정정하지는 않았다.
아직 그 역시 아버지의 정체 등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있는 상태는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나중에 다시 이를 조사하다 보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길 터였다.
그래도 현 상황이나 입지 정도는 알려야 할 것 같았기에 투란은 자신이 아라비온 가문과 썩 깊은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님을 밝혔다.
그냥 차기 가주인 메이사와 친분이 있으며 가신 가문인 베르크 가문의 은인일 뿐이라고.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북서쪽으로 날기를 몇 시간, 곧 육지가 눈에 들어왔다.
해변 안쪽에 빽빽이 숲이 들어찬 모습으로 보건대 과거 흑요정들이 발호했던 서부 숲지대가 분명했다.
"좋아, 다행히 엔릴 사막은 건너뛰었나보네."
지난번 전투에서 있었던 대화로 짐작건대 자하르와 바라하 가문 사이에는 솔리프를 잡기 위한 모종의 합의가 있었을 터.
가능하면 엔릴 사막 쪽과는 접촉하지 않는 쪽이 좋았다.
휴식을 위해 안장에서 내리며 솔리프가 한탄하듯 말했다.
"너 진짜 여행 쉽게 하는구나."
배를 타고 오자면 적어도 일주일에서 이주일은 걸렸을 거리를 순식간에 주파했으니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투란은 비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직접 걷고 배 타고 다녔어. 애초에 너도 비제 같은 아이를 얻으면 되잖아."
"그게 어디 쉽나. 누가 뺏어가지만 않았어도."
"먼저 선택받을 기회가 있었던 쪽은 내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윽."
날짐승 출신의 마수는 흔하나 비제처럼 작은 체구여서 데리고 다니기 편하며 잘 길들었고 힘까지 강한 마수는 드물었다.
과거 투란이 싸게 산 것 역시 주인을 가리는 까다로움 때문이었지 본래 가격은 훨씬 비싸다고 하지 않았던가.
해변에서 저녁식사를 해결하고 잠든 다음 날, 그들은 어제처럼 그네에 탄 채 북쪽으로 이동했다.
가다 보니 과거 칼라마프에서 서쪽으로 가던 길, 그리고 아시즈와 함께 움직였던 길이 보였다.
"슬슬 다 와 가네."
"진짜로? 살았다, 안 그래도 이 그네 좀 아슬아슬한 것 같았-으아아악!"
도중에 풍압을 이기지 못한 그네가 부서지며 솔리프가 추락하는 작은 사고가 있었으나, 다행히 발목을 살짝 삐는 정도로 끝났다.
과거의 실수를 거울 삼아 조금 더 나은 그네를 만들어 반나절 정도를 날자 마침내 다케인 평야가 보였다.
"이제 진짜 도착했다."
"이번에는 제발 살살 착륙하자고."
황금빛 밀이 넘실거리던 과거와 달리, 봄보리가 가득 자라는 평야는 녹색을 띠고 있었다.
투란과 솔리프는 적당히 인적이 드문 곳에서 착륙한 뒤 안장을 수납하고 직접 걸어서 움직였다.
"엔릴 사막이랑은 달라도 너무 다른걸?"
"아무래도 그쪽은 좀 황량하지."
"맞아. 옛날에는 그쪽을 통해서 아라비온의 작물이 전해져 오기도 했었다는데...."
보통 육상 교역은 해상 교역보다 물량 면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지만, 마법사 가문의 교역은 오히려 육상 쪽이 훨씬 더 유리했다.
길들인 대형 마수를 이용해 어마어마한 크기의 수레를 운용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대상단이 몇 년마다 한 번씩 옛 제국의 도로를 통해 아라비온에서 자하르를 오가던 시절이 있었다고 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살육전이 벌어지고 난 지금은 꿈같은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과거 아시즈의 안내를 받아 갔던 길을 기억하는 터라, 투란은 반나절 정도를 걸어 순조롭게 베르크 가문의 영지인 자빌린 시에 도착했다.
마침 성벽 앞에 머무는 기사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엇, 투란 님?"
"오랜만이야, 빈. 아시즈는 건강한가?"
"물론입니다! 도련님이 기뻐하시겠군요. 혹시 옆에 계신 분은?"
"여행 중에 사귄 친구."
베르크의 기사 빈은 그 말을 들은 뒤 솔리프의 정체 따위는 자세히 물어보지도 않고 그들을 들여보냈다.
지난 한 달 동안 귀빈 대접을 받았던 아시즈 도련님의 은인이자 친구가 아닌가.
옆구리에 낀 검독수리야 뭐 애완동물쯤 될 것이고.
순조롭게 자빌린 시로 들어선 투란은 익숙한 도시의 풍경을 보며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아시즈와 함께 쏘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식당이나 극장 따위를 보니 새삼 그 좋았던 시절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겨 도시 안쪽에 자리한 베르크 가문의 궁전에 도착하자 소식을 듣고 급히 뛰쳐나온 아시즈가 두 팔 벌려 그를 환영했다.
"투란, 이 친구야! 역시 바깥에서 지내기가 만만치 않지? 금방 돌아올 줄 알았다니까!"
"그래, 정말로 만만치 않더라."
그가 겪은 온갖 모험을 아시즈가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며, 투란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포옹을 나누었다.
이곳에 머문 것은 고작 한 달 정도이고 밖에서 나돈 것은 몇 달에 불과하건만, 마치 긴 여행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다.
69화
궁전 입구에서 해후를 나눈 뒤, 그들은 가장 먼저 아시즈의 어머니이자 베르크 가문의 주인인 미델라에게 방문을 고했다.
그녀는 몇 달 만에 찾아온 아들의 은인을 후대하며 별채 하나를 내주었다.
옆에 있는 솔리프는 그냥 여행 중 만난 친구로, 방화광 혈통의 방랑 귀족이라고만 소개했다.
소박한 차림새에 한쪽 팔까지 없으니 딱 보기만 해도 가난하고 험하게 살아온 방랑자 그 자체인지라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이전에도 본 적 있던 베르크 가문의 귀족들과 인사를 나눈 뒤, 투란은 별채로 들어서며 아시즈에게 하람의 안부를 물었다.
육탄전 기술과 신체 단련법을 전수해 준 스승이자 아시즈의 고모부인 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모부? 마수 사냥하러 가셨는데."
"마수?"
"거대 늑대랬나, 알려진 덩치나 속도로 봐선 기사들로 상대가 안 될 놈이라고 직접 나서셨어. 며칠이면 잡아 오실걸."
바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투란은 아쉬움을 삼키며 별채의 응접실에 앉았다.
아시즈와 솔리프는 친구의 친구를 만난 이들이 으레 그렇듯 서로를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앞으로 둘이 친하게 지내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이런 묘한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었는지, 아시즈가 투란의 옆구리에 앉은 비제에게 관심을 보였다.
"얘는 뭐야, 애완동물?"
"비제라고 해. 영혼 결속을 했지."
"오...틸리처럼?"
"맞아."
어깨높이만 삼 미터쯤 되는 거대한 말, 틸리.
녀석 역시 비제처럼 마법사와 영혼을 결속한 마수로, 그 대상은 베르크의 가주인 미델라였다.
물론 지난번에는 아시즈와 함께 순례를 나왔었지만.
"혹시 만져 봐도 될까?"
"비제한테 직접 물어봐. 얘는 사람만큼 똑똑하거든."
"괜찮겠니? 비제?"
아시즈의 물음에 비제가 발톱으로 글씨를 쓰려다가 비싼 탁자를 망가트리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순한 태도에 옆에서 솔리프가 투덜거렸다.
"저 자식, 나한테는 사납게 굴더니...."
그렇게 검독수리 마수를 주제로 잡담을 나누며 분위기를 조금 환기한 뒤에는 서로의 근황으로 주제가 넘어갔다.
"나야 뭐, 늘 평소처럼 지냈지."
"순례 다시 나간다며?"
"아니, 그래도 몇 년은 쉬고 나가야...."
장수하는 귀족답게도 느긋한 시간관념이었다.
하기야 평민처럼 몇 주 몇 달을 길게 느끼며 급하게 살아가는 투란 쪽이 귀족으로서는 별종이긴 했다.
차를 한 잔 마신 뒤, 아시즈는 얼마 전 있었던 흑요정 토벌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메이사랑 같이 흑요정 토벌에 참여했다면서?"
"어디서 들었어?"
"소문이 다 났지! 돌팔매질을 귀신같이 잘하는 귀족이 참전했다더라고. 그런 사람이 너 말고 또 있겠어?"
"하긴."
전에 봤던 자하르 귀족들도 활이나 다른 투척 무기를 쓰지 투석구를 쓰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천한 이들이 쓰는 무기라는 느낌이니까.
투란 역시 더 살상력 높은 무기로 갈아탈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오랜 세월 써온 숙련도가 아까웠다.
하다못해 화염구도 투석구로 쏘듯 던지면 더 적은 마력으로 강하게 날릴 수 있을 지경이니.
"이야기 좀 풀어 봐. 대체 어쩌다 말려든 건데? 결계사 혈통이라는 소문은 또 뭐고?"
"아, 그거."
그러고 보면 흉내쟁이 성유물을 써서 그런 거짓말도 했던가.
워낙 돌아다니는 곳마다 아무 소리나 막 지껄이고 다녔더니 스스로도 헷갈릴 때가 있었다.
투란은 잠시 성유물의 감각으로 주변을 살펴 염탐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 뒤, 바람 마법을 사용해서 응접실 주변의 소리를 차단했다.
이를 본 아시즈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어, 어어?"
투란이 마법의 천재라는 것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으나, 이러한 기술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바람을 이토록 정밀히 조작하는 기술은 숙련으로 가능한 영역이 아님을 아라비온의 가신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너, 설마 아라비온 혈통이었어!?"
"저 친구한테도 말 안 했던 거냐? 가장 친한 친구라더니 뭐 이렇게 비밀이 많아."
깜짝 놀라는 아시즈의 반응에 옆에서 듣던 솔리프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투란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일단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처음부터 천천히 설명해 줄게."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밀실에서, 투란은 칼라마프에서 알아낸 부모님에 대한 과거를 털어놓았다.
아라비온에서 납치된 기사의 딸과 자하르 귀족의 연애사, 그리고 파국에 관한 이야기를.
아예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아시즈는 벌레가 들어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입을 쩍 벌렸고, 그나마 투란의 혈통을 알고 있던 솔리프는 작게 혀를 차기만 했다.
이후로는 저 서쪽 히사릴 언덕에서 태어난 소년 투란이 양치기로 살아왔던 것과 기사 케오른을 만난 것, 동쪽으로 여행하다가 아시즈와 마주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후반부는 그가 자하르 가문과 아무 관계 없이 아시즈를 만난 것임을 입증하기 위한 내용이었다.
"-대충 그렇게 된 거지."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시즈가 옆에 놓인 차를 벌컥 들이켜다가 캑캑 기침했다.
그러고는 투란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 쉬운 이야기가 아니었을 텐데."
투란은 내심 안도와 기쁨, 감사함을 느끼며 이를 드러내지 않고자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되도록 평정을 유지하고자 했으나 목소리가 약간 잠겼다.
"그냥 내가 겁쟁이라서 말하지 못했을 뿐이야."
과거, 정확히 말해 얼마 전까지 투란은 자신의 정체를 거의 편집증적으로 감추고 다녔다.
여기에는 그가 자하르 혈통임을 알려주었던 기사 케오른의 과거사가 큰 역할을 했다.
내심 아버지처럼 여기던 사람의 가족들을 몰살한 것이 자신의 친척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막연한 자기혐오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감정은 이후 사귀게 된 친구들이 모두 아라비온 계열이었던 탓에 더더욱 강해졌다.
혹시라도 자신의 정체가 들통났을 때 친구들이 경멸하는 시선을 보내기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로 끔찍한 일일 테니까.
이러한 자기혐오를 덜어내게 된 계기는 그의 나머지 반쪽이 아라비온이며, 그가 부모님의 사랑으로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직접 만난 아라비온 귀족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고결하기만 한 이들이 아니라는 것 역시 영향을 주었고.
그리고 얼마 전 솔리프를 구하기 위해 섬에서 전투를 벌인 뒤에는 자신의 정체를 꼭꼭 감춰야만 한다는 강박감까지 어느 정도 극복했다.
하고 싶은 일,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서는 대가문과도 격돌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이를 뒷받침할 만한 실력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아시즈에게 부탁할 일들이 많음을 생각하면 여기서는 다 털어놓고 갈 필요가 있었다.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함을 밝히는 데 있어 자신의 밑바닥을 내보이는 것보다 더한 일은 없으니까.
어느 정도 충격이 가셨는지, 아시즈가 실실 웃으며 투란을 띄워주듯 농담을 던졌다.
"대가문 간의 혈통 결합이라니...네가 본가에 정식으로 합류하면 메이사의 자리가 위협받을지도 모르겠는걸?"
"내 이야기는 비밀로 해 줘."
"엥, 어째서? 자하르 혈통이라는 게 좀 찜찜하게 여겨질 수는 있지만 네 개의 혈통 능력을 타고난 귀족이면 무조건 환영할 텐데. 떠도는 게 더 편해서 좋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시즈의 말이 바로 일반적인 귀족들의 관념이었다.
대부분은 대가문의 핵심 구성원으로 호의호식하는 삶을 원하지, 출신 불명의 방랑자로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투란은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솔리프를 흘깃 보며 물었다.
"그건 여기 옆에 솔리프랑도 관계가 있는 이야기인데...말해도 되겠지?"
"네가 이 친구를 그만큼 믿는다면."
솔리프의 허락을 받은 뒤, 투란은 솔리프의 정체와 과거사를 간략히 설명했다.
평범한 방랑 귀족으로만 보였던 이가 저 동방 대가문의 후계자였다는 사실에 아시즈는 벌떡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이거, 귀하신 분을 이렇게 누추하게 대접하게 되어서-"
아시즈의 육촌 동생인 메이사 역시 똑같이 대가문의 후계자인데도 이런 태도일 줄이야?
다소 뜻밖의 모습에 놀랐으나, 생각해 보면 친척 동생과 생판 남을 똑같이 대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아시즈의 태도에 솔리프는 익숙한 듯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이젠 가문을 떠난 몸이니."
여전히 어색하기 짝이 없는 두 사람을 무시한 채, 투란은 설명을 계속했다.
이제부터는 전보다 더 무거운 주제였다.
베르크 가문을 떠난 뒤 마주쳤던 여러 사건들, 그리고 그를 통해 알게 된 신과 대가문에 대한 여러 비밀스러운 정보.
마지막으로 이를 통해 도출한 가설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쯤, 아시즈는 처음 투란과 만났을 때보다 열 살쯤 더 늙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 이건...내가 감당하기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들인데."
"가주님이나 여기 없는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면 안 돼, 아시즈. 내가 이걸 다 털어놓을 정도로 믿는 건 너뿐이니까."
투란의 엄숙한 말에 아시즈는 몸을 달달 떨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서, 이제부터 뭘 할 생각이야?"
"아라비온의 배후에 프레아 신족이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여기 이 친구에게 그랬던 것처럼 메이사의 삶을 농락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싶어. 도와줄 수 있어?"
이는 아시즈에게도 그저 남 일이 아니었다.
메이사의 어머니는 아시즈의 어머니인 베르크 가주 미델라의 사촌 동생이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시즈가 조금 전과 달리 심지가 느껴지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까짓거 해보자고. 멋있게 연극 한 편 만드는 셈 치면 되겠지. 그래도 나 정도면 조연은 될 거 아냐."
연극광다운 말에 투란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농담으로 분위기를 환기한 뒤, 그들은 밀실 마법을 풀고 하인을 불러서 차를 한 잔 청했다.
벌컥 들이키던 조금 전과 달리 우아하게 차를 음미한 아시즈가 물었다.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이 친구의 팔을 회복하고 싶어서 그런데, 알고 지내는 치유사 있어?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입이 무겁기만 하면 돼."
"아, 이분...의 실력이 드러나면 안 되니까?"
"그렇지."
본래 더 강한 마법 생물일수록 치료에 많은 힘이 소모되는바, 치유사는 원치 않아도 자기가 치료하는 대상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진 존재인지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투란은 솔리프가 최상위 귀족이라는 사실이 들통나지 않기를 바랐다.
은발에 막강한 실력자인 귀족의 존재가 소문나는 것도 달갑지 않고, 무엇보다도 아라비온 내부를 조사하던 도중 뜻밖의 상황이 일어났을 때 숨겨둔 한 수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는 본래 가지고 있던 강박증과 별개의 전략적 판단이었다.
"으음, 한 명 있긴 해. 근데 좀 이리저리 나돌아다니는 사람이라 바로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
"순례라도 하는 중인가?"
"아니, 평민들을 치료해주는 게 취미라서."
"오."
그 설명만으로도 투란은 누군지 모를 치유사에게 높은 점수를 매겼다.
이어지는 설명에 의하면 그녀의 이름은 루아 마나그로, 아라비온의 가신 중 하나인 마나그 가문의 귀족이었다.
기사 사이에서 귀족급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서 양녀로 입양된 경우라고 했다.
"아, 그래서?"
"그렇지."
귀족들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력이라지만 출신 성분에 따른 격차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아시즈나 솔리프처럼 대등한 귀족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이 가장 귀하며 부부 중 한쪽, 주로 어머니가 첩이면 중간, 기사나 평민들 사이에서 태어나 격세유전으로 각성한 귀족은 가장 천하게 여겨졌다.
하다못해 실력이라도 뛰어나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귀족들 사이에서도 겉돌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굳이 평민들 치료하러 돌아다니기까지 하는 것도 괴짜 같다고 다들 안 좋아하더라고. 난 그런 거 신경 안 쓰지만."
과연, 가문의 기사들과 하인들까지 두루 친하게 지내는 친화력의 화신다운 말이었다.
어쨌든 이야기대로라면 정말 딱 투란이 원하는 인재였다.
아시즈 말고 친하게 지내는 귀족이 없다면 당연히 소문낼 일도 없을 것 아닌가.
"근데 재수가 없으면 몇 달 정도 걸릴지도 몰라."
"일단 연락부터 해줘. 정 오래 걸릴 것 같으면 직접 찾아가도 되니까. 이 녀석은 세상에서 가장 빠르거든."
투란이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자, 비제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소리로 울었다.
* * *
오랜만에 머물게 된 베르크 가문의 별채는 여전히 별세계와도 같았다.
투란은 생활에 도움을 주는 온갖 마법기들이 넘쳐나는 방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아시즈와 솔리프를 불러 별채의 식당에서 만찬을 즐겼다.
비제를 샀던 코마드 시를 떠난 뒤 이런 고급스러운 식사를 즐길 기회가 없었던지라, 몇 달 만에 입이 호강하니 기분이 절로 즐거워졌다.
한평생을 대가문의 후계자로 살아왔던 솔리프 역시 비슷한 기색이었다.
"그래, 빌어먹을 집안이지만 이런 건 좋았지. 아, 조금은 그립구만...."
"돌아갈래?"
"농담도. 난 이쪽 음식이 더 맞는 거 같아."
그렇게 지친 몸과 마음을 어느 정도 위로한 뒤, 투란은 우선 메이사에게 편지를 한 장 썼다.
그가 베르크 가문에 머물고 있으며 한번 만나고 싶으니 이곳으로 찾아오거나 자신을 초대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보나 마나 누군가 먼저 들여다볼 테니 남들에게 말하기 힘든 이야기는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기왕이면 메이사가 찾아와주는 쪽이 좋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아라비온 본가로 진입하기는 조금 꺼려졌다.
그래서 예전에 출정식을 보러 갈 때도 도시 외곽까지만 들렀다가 나오지 않았던가.
물론 안으로 진입하면 그것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기는 했다.
직접 눈으로 보아야만 알아낼 수 있는 정보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편지를 보낸 뒤에는 남들 몰래 아시즈의 방으로 가서 미뤄 두었던 과제를 꺼냈다.
바로 지난 여행 도중 얻었던 마법기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대체 다 몇 개야?"
"좀 많지?"
"좀 많은 정도가 아닌데...."
투란이 늘어놓은 마법기의 수는 총 열다섯 개.
부여사 가문인 베르크나 이런 가문들을 가신으로 거느린 대가문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귀족들이라면 가문의 기둥뿌리를 뽑아야 할 정도였다.
헛웃음을 터트린 아시즈는 하나하나 마법기에 손을 대어가며 검사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조사한 것은 서부 황야에서 얻은 반지와 귀걸이.
예상은 했으나 수준 낮은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인 만큼 썩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다.
착용하고 있으면 밤눈을 밝게 해 주는 것과 화염 내성을 조금 올려주는 기능 정도.
그나마 귀걸이 쪽은 조금 도움이 되겠으나 반지는 정말로 전혀 쓸모가 없어서 솔리프한테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다음으로는 바라하 귀족들의 마법기를 검사했다.
대부분이 방어나 보조, 혈통 마법을 모방하는 기능을 가진 것들이었는데 역시 대가문의 마법기답게 성능이 좋았다.
물론 실전을 통해 기능들을 어느 정도는 파악했으나 정확한 성능과 부작용을 확인하는 것은 마법기 사용에 있어서 필수였다.
지금처럼 지인 중 부여사가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게 마법기의 기능을 하나하나 새겨들으며 무엇을 사용할지, 무엇을 분배할지 고민하던 도중 아시즈가 마지막으로 변신 가면에 손을 얹었다.
아마 바라하 귀족이 솔리프를 농락하고 해적으로 변장하는 데 사용했을 물건.
눈을 감고 마력을 주입해 성능을 알아보던 그가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음...."
"왜?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조금 전까지 다른 마법기들을 검사할 때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반응.
투란이 묻자 아시즈가 눈을 뜨며 답했다.
"일단 기능 자체는 좀 지저분하긴 해도 유용하네. 시체의 얼굴에 씌우고 마력을 주입하면 얼굴을 저장하고, 산 사람의 얼굴에 씌우고 발동하면 저장한 얼굴로 바꿔 주는 거야. 기한은 가면을 벗을 때까지고 계속해서 마력을 소모해."
"소모량은?"
"기사들이라면 몇 시간 정도가 한계고 귀족급 마법사라면 아슬아슬하게 회복력이 더 높아서 계속 쓸 수도 있을걸. 마법을 쓰고 나면 회복이 거의 안 되겠지만."
마력의 회복 속도는 총량에 비례하는 법.
저 설명대로라면 투란 정도의 고위 마법사는 마력 회복 속도가 조금 느려지는 정도로 반영구적인 착용이 가능할 터였다.
전력으로 싸워야 할 때는 가면을 벗으면 그만이니 이 정도면 충분히 감당할 만한 부작용이었다.
"좋은걸."
"그렇지. 이 정도 기능이면 최상급 마법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따로 짝이 되는 물건이 있는 것 같아. 그거랑 같이 써야 진짜 기능을 쓸 수 있는 식인 것 같은데."
7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