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역시 이쪽은 아닌가."
눈밭 위로 내리꽂힌 낙뢰를 보며, 투란은 다소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모된 마력이며 정밀도며 이전과 변한 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번개를 다루는 힘은 얻지 못한 것 같았다.
사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대가문들조차 두 개의 혈통을 가지고 있을 뿐인 이유는, 세 개 이상의 혈통이 합쳐지는 경우가 극히 드물뿐더러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그중 한 개의 혈통이 탈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니까.
말하자면 두 개까지가 딱 안정적으로 혈통이 유전되는 상한선인 셈.
네 개의 혈통쯤 되면 너무 비현실적인 영역이라 굳이 언급되지도 않을 정도라서, 투란 역시 지하 미궁에서 얻은 정보가 아니었다면 그런 게 가능했으리라 생각하지도 못했을 터였다.
물론 또 다른 가능성 역시 열려 있었다.
바로 열화된 혈통을 물려받은 것이 아닌, 아직 잠긴 혈통이 다 열리지 않아 마력을 더 쌓다 보면 번개 역시 다룰 수 있으리라는 것....
'만약 네 개의 혈통이라면 아직 가능성이 한참 남았다는 뜻이겠지.'
더 많은 혈통을 타고난 이가 일반적으로 성장 한계가 높다는 것은 딱히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한 개의 혈통을 타고난 여느 평범한 가문의 가주 중 대가문의 가주들과 맞먹는 강자가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덤으로 대가문 혈통의 아이들은 평균적으로 더 강한 마력을 타고나며 기사가 아닌 귀족으로 태어날 확률도 높았다.
평범한 혈통들이 십여 명의 귀족들로 가문을 이룰 때 백 단위의 귀족을 확보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투란은 문득 도서관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남서쪽을 바라보았다.
도서관의 정령은 그의 혈통이 아예 잠겨 있을 때도 아라비온 혈통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었으니, 아마 지금도 남은 게 더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지금은 좀 어렵지.'
비제를 타고 간다 한들 운 좋게 제대로 된 경로를 잡아야 사나흘쯤 걸릴 텐데, 여행 도중 생기는 변수나 일을 보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못해도 열흘 가까이 도시를 비워야 했다.
이는 그 외에 마법사 한 명 없는 도시를 버려두기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적당히 강력한 마수 한 마리만 뛰어들어도 모조리 초토화되고 말 테니까.
어차피 곧 칼라마프의 통치권을 어디로 넘길지 정해질 테니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일곱 도시의 가주들 중 어머니의 행방을 찾아낸 이가 한 명은 있을 터.
이번에 숨겨진 혈통의 정체를 알아내고 나니 진실이 무엇인지 더 알고 싶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서로 죽고 죽이는 두 가문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태어난 것일까....
"그럼 슬슬 돌아갈까? 비제-아니, 잠깐만."
비제를 타고 날아가려던 투란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부유 마법으로 자신의 몸을 몇 미터쯤 천천히 띄웠다.
'어디....'
마법사는 보통 인간들을 조종하듯 자신의 몸을 제어해 띄우고 이동할 수 있지만, 그 속도와 정밀성은 '비행'이라 말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라비온의 귀족들은 이렇게 띄운 몸에 바람을 휘감아 빠르게 하늘을 나는 것이 가능했다.
이는 그냥 바람을 커다란 덩어리처럼 다룰 수밖에 없는 범속한 마법사들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할 기예라, 과거의 투란조차도 가볍게 시도했다가 바로 포기했을 정도.
하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할 터였다.
"한번 같이 날아볼까?"
비제가 무슨 소리냐는 듯 삐약 우는 것을 보며, 투란은 몸에 바람을 휘감은 뒤 방향성을 부여했다.
마치 온몸을 뒤쪽에서 밀어내는 듯한 감각으로-
"어어엇-"
그 순간 하늘과 땅이, 왼쪽과 오른쪽이 뒤섞였다.
사물을 구성하는 모든 색채가 윤곽을 잃고 마구 뒤섞이며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게 된 가운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투란은 자기가 어딘가에 처박혀 있음을 깨달았다.
"아야...."
어지러움이 조금 가실 때쯤, 비제가 머리 위에 내려앉아 한심하다는 듯 부리를 부딪쳤다.
다행히 녀석은 제때 탈출한 모양이었다.
사실 이 정도 속도로 같이 처박힌다고 크게 다치지는 않았겠지만.
투란은 쓰게 웃으며 더러워진 옷을 털었다.
"그래, 네가 말 안 해도 한심한 줄 알아. 비행이란 게 생각보다 쉽지 않네."
아라비온 귀족들이 척척 해내길래 간단한 줄 알았는데, 직접 해 보니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이후로도 투란은 열대여섯 번쯤 더 땅에 머리를 박은 뒤에야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조금 전 생겼던 일은 얇은 다리에 비해 바람을 많이 받는 상체 쪽이 지나치게 앞으로 나갔던 것.
바람의 세기를 부위별로 조절하여 균형을 맞추는 것이 요령인 듯했다.
잠시 후, 투란은 직접 달리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속도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난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저 아래로 펼쳐진 작디작은 세상.
비제의 도움을 받아 날 때도 자주 보았지만, 그때랑은 또 다른 기분이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비행해서 그런 것일까.
그때, 옆에서 날던 비제가 투란의 머리를 한 번 쪼았다.
영혼의 끈 덕분에 녀석이 품고 있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직접 비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는 자기가 쓸모없어지리라 생각한 것일까.
"걱정하지 마, 그래 봐야 네가 훨씬 더 빠른걸. 그리고 혹시 느려진다고 해도 안 버릴 거야."
투란은 그렇게 안심시키며 비제의 다리를 잡고 비행을 멈춘 채 몸을 맡겼다.
확실히, 속도나 마력 효율이나 이쪽이 월등했다.
기분이 좋아져서 힘차게 날갯짓하는 비제의 모습을 보던 도중, 투란은 충동적으로 바람을 조종해 녀석의 날개 아래로 기류를 형성했다.
순식간에 몸이 앞으로 휙 가속하는 것이 느껴졌다.
"우왓."
비제 역시 당황했는지 삐약 울었지만, 녀석은 날짐승답게 순식간에 투란이 만들어낸 바람을 읽고 올라탔다.
썩 많은 마력을 소모하지 않았는데도 비행 속도가 훨씬 빨라진 게 느껴졌다.
문득 예전에 배를 타면서 돛에 바람을 불어넣어 속도를 높였던 것이 떠올랐다.
언젠가 다시 배를 탈 일이 있다면 혼자서 돛단배 한 척을 날아갈 듯이 모는 것도 꽤 재밌을 것 같았다.
* * *
비행 연습으로 시간을 보낸 탓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이미 해가 져 있어, 투란이 칼라마프 시 상공을 날아다니는 것을 알아차리는 이는 없었다.
시청 위쪽에 난 창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누군가 그를 다급히 부르는 것이 들렸다.
"보호자시여!"
들어오기 전부터 기척이 느껴져서 누가 이런 시간까지 있나 했는데, 시 공무원들의 수장인 다룩이었다.
"설마 내가 떠나고 나서 몇 시간 내내 기다리고 있었나?"
"그렇습니다."
분명히 나갈 때 며칠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무슨 미련한 짓이란 말인가.
그렇게 질책할 새도 없이, 다룩이 투란의 차림새를 보고 경악해 외쳤다.
아시즈가 만들어준 옷은 이곳저곳 찢어진 것이 채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투란 자신과 난쟁이들의 피까지 묻어난 탓에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아니, 혹시 다치셨습니까? 당장 의사를 불러야-"
"별로 안 다쳤으니 신경 쓸 것 없다."
치유사들이 크게 다친 부상자들 위주로 힘을 거의 다 쓴 탓에 몇 군데 다친 곳을 치료받지 못했지만, 이쯤은 하룻밤만 자도 나을 터였다.
어차피 그가 평민들처럼 상처가 덧나서 죽거나 하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평상시 무엇을 시키건 곱게 따르던 것과 달리, 다룩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보호자님은 이 도시의 수호신이자 아버지이신 분, 작은 상처라도 감히 쉽게 여길 수 없습니다! 치료받지 않으시려거든 차라리 이 모자란 늙은이의 목을 치소서!"
하다 못해 도시의 통치권을 넘긴다고 할 때조차 이러지 않았건만.
결국 투란은 미처 씻지도 못한 채 상처를 진찰받아야 했다.
"어, 어어-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보호자시여...."
한밤중에 불려온 의사는 손을 덜덜 떨 정도로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무려 귀족을 진찰한다는 압박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런 귀족조차 다치게 만든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상상 때문일까.
그는 윗옷을 벗은 투란의 몸을 여기저기 살피더니, 등과 옆구리의 상처 두 개만 꿰매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둘 다 난쟁이들의 창에 찔려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가져온 가방에서 바늘과 실을 꺼내 상처를 봉합하려던 도중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바로 귀족의 몸뚱이에는 바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
생각해 보면 건장한 해적들이 칼이며 창을 찔러도 생채기조차 나지 않는 몸뚱이에 바늘이 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끄응, 으...이게 왜 안 들어가지...."
"됐다. 어차피 이 정도 상처는 내일 정도면 다 아무니까. 이미 피도 안 나잖아."
결국 상처에 좋다는 약초즙 몇 개를 발라 치료를 마친 의사가 돌아가려고 짐을 정리하자, 다룩이 슬쩍 다가와서 을러댔다.
"당연하지만 도시의 보호자께서 다쳐서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은 알려져서는 안 된다. 만약 소문이 나면 너는 물론이고 가족들까지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라."
"예, 예...명심하겠습니다...."
투란의 앞에서는 항상 굽실거려서 몰랐는데, 의사를 겁박하는 모양새를 보니 어느새 그에게서도 권력자의 냄새가 났다.
하기야 평민들 사이에서라면 그보다 더 높은 직급을 가진 이가 없을 정도이니 겁먹을 수밖에.
의사가 떠난 뒤, 투란은 아마 오늘 새벽쯤에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상의를 걸치며 다룩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미리 말해둬야겠군. 서쪽의 위협은 사라졌다."
마치 내일은 날이 밝으리라 고하는 것처럼 지나가듯 말한 탓에 다룩은 잠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불경하게도 예? 하고 되물었던 그가 이내 조금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 그게 무슨...."
"아라비온의 군대도 곧 철수할 거고, 서쪽이 완전히 주인 없는 땅이 될 테니 진출하고 싶은 이들도 몇 있겠어."
과거 발타스 가문이 오렘과 무레이를 함께 지배했던 것처럼, 땅이 넓고 도시는 많은데 귀족의 수가 부족하다 보면 가문들 역시 여기저기 손을 뻗기 마련이었다.
물론 지금처럼 아예 멀찍이 떨어진 지역으로 진출하면 사실상 분리된 가문이 되는 것이고.
"혹시 보호자께서 아라비온의 군대와 함께 서쪽의 위협을 제거하신 겁니까?"
훌쩍 사라졌다가 온몸에 상처를 달고 돌아와서 그런 말을 하니 자연스럽게 도출될 결론이기는 했다.
"그래."
"아아, 이 도시가 또 당신께 은혜를...."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는 말도록. 아라비온 쪽과 너무 깊게 얽혀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안 좋으니까."
지난번에 떠돈 소문이야 그냥 연락을 받았다 정도였지만, 함께 싸우는 건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물론 지금 자하르 쪽은 페르가의 죽음을 조사하느라 정신이 없겠지만, 혹시라도 회색 지대에 아라비온이 손을 뻗었다는 오해가 생기지 않는 게 양쪽 입장에서 좋지 않겠는가.
"어쨌든, 슬슬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두도록 해. 이 도시가 완전히 안전해졌으며 조만간 다른 가문에 의해 관리될 것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조금 전과 달리, 다룩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예상했던 대로, 다음날이 되었을 때 투란이 입었던 상처는 이미 작은 흉터만을 남기고 아문 상태였다.
성유물에 담긴 치유사 혈통의 힘을 쓰면 그조차 남기지 않고 없애버릴 수 있겠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얼굴도 아니고 옆구리랑 등에 생긴 작은 상처 따위를 없애는 데 쓰기는 아까웠으니까.
서쪽의 위협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조만간 칼라마프의 통치권이 넘어가리라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도시 사람들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안정화 이후 넘어온 이들은 귀족 한 명이 아니라 제대로 된 가문의 관리를 받는 쪽이 더 나으리라 여겨 반겼지만, 몰락 시기에 구원받은 시민들은 투란에게 제발 자기들을 계속 통치해달라며 시청 앞에서 울며 빌기까지 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기가 거북했기에, 투란은 매일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돌산 한편으로 날아와 새로 얻은 폭풍 혈통의 힘을 개발했다.
가장 먼저 시험해본 것은 더 능숙하게 비행하는 것이나 바람을 몸에 둘러 순간적으로 달리는 속도를 높이는 등의 응용 기술.
메이사가 보였던 소리를 차단하는 장벽 같은 것도 시험해보았는데, 몇 가지는 생각과 달리 잘 안 되었으나 제법 유용하게 쓸만한 것이 많았다.
그다음으로는 바람의 힘을 공격용으로 사용할 방법을 연구했다.
가장 단순한 방식은 과거 강도들을 죽였을 때처럼 밀어내는 충격으로 온몸을 으스러트리는 것.
그 외에도 거친 모래를 섞어 소용돌이치게 만드는 것으로 절삭력을 부여하거나 압축한 공기를 쏜 다음 폭발시켜 충격을 주는 방법도 시험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기술을 몇 번 연습한 뒤 나온 결론은, 아라비온의 귀족들이 괜히 죽어라 번개 마법만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공격 쪽은 생각보다 시원찮은걸.'
둘 다 애초에 공격적이지 않은 힘을 억지로 공격용으로 활용한 것이라 그런지 마력 대비 효율은 물론 파괴력 자체가 떨어졌다.
기껏해야 훨씬 약한 이들을 제압할 때나 쓸만할까?
차라리 익숙하기 그지없는 방식, 투석구로 돌멩이 한 방 던지는 게 훨씬 나을 정도.
어떻게 공격력을 증가시킬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며 투란은 몸풀기 삼아 투석구로 돌멩이를 던졌다.
이렇게 꾸준히 숙련해주어야 마법을 쓸 때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
힘껏 던진 돌멩이가 늘 그렇듯이 팡 하고 굉음을 일으키며 바람을 가르더니-
"아."
문득 사서에게서 배웠던 자연법칙이 떠올랐다.
첫째는 바람이란 것이 이 세상에 가득 찬 공기의 이동으로 생겨나는 흐름이라는 것.
두 번째는 물체가 빠르게 움직일 때 나는 굉음이 공기를 찢으며 생긴다는 것....
다시금 돌멩이를 매겨 빙빙 돌리며, 투란은 과거 북해에서 아르마니와 함께 배를 몰던 때를 떠올렸다.
배를 쉽게 움직이는 요령은 직접 배를 움직이려는 것보다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물을 헤치는 것이지 않았던가.
'앞에 길을 하나 만들고, 돌멩이가 지나갈 때 그 앞의 공기가 좌우로 비켜나간다는 느낌으로....'
힘껏 돌팔매질한 순간 투란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돌멩이는 소리를 가르는 굉음을 내는 대신, 평소보다 훨씬 빠르고 조용히 날아 거대한 절벽을 꿰뚫었다.
51화
몇 차례 더 시험한 결과, 무소음 돌팔매질은 단순히 소리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두 배 이상의 속도와 그 이상의 관통력을 지닌 어마어마한 기술임이 확인됐다.
이 정도면 귀족의 반사신경으로도 인식하고 피하기 힘든 만큼, 사실상 제대로 쏘는 순간 무조건 맞힐 수 있는 필살의 기술이나 다름없는 셈.
물론 단점 역시 존재했다.
첫째로, 기존에 돌팔매질하던 것처럼 마구 뛰어다니며 제멋대로 던져댈 수 없었다.
비교적 가까운 곳이라도 일이 초, 먼 곳은 오 초 이상 시간을 들여 바람길을 구현해야 하는데 움직이면 출발점이 달라져 길 자체를 새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는-
"또 실패네...."
파앙, 굉음을 울리며 날아가는 돌멩이를 보며 투란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 멀리 목표물이었던 사슴이 깜짝 놀라서 헐레벌떡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무소음 돌팔매질의 원리는 미리 마력을 뻗어 바람길을 제어한 뒤, 돌멩이가 날아드는 것에 맞춰 공기를 치움으로써 저항력을 없애 가속하는 것.
그 때문에 날아가던 도중 목표물이 움직여 궤도가 어긋나면 이를 빠르게 수정할 수가 없었다.
돌멩이가 유도 마법에 따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일부분만 바람에 걸려 궤도 자체가 망가져 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마력으로 보정해 억지로 힘을 부여할 순 있지만, 그때부터는 효율과 위력 모두 박살이 났다.
여러 가지를 시험해보았지만 이를 극복할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싸움 중에 가만히 서 있어 줄 상대는 없을 테니 철저히 기습용으로만 써야겠네. 아니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상대에게나....'
물론 그것만으로도 끔찍하리만치 무서운 기술이기는 했다.
은신한 상태로 이런 식의 공격을, 심지어 마력까지 최대한 불어넣어 위력을 높인 것으로 날리면 상대로서는 반응할 수조차 없을 테니까.
아마 메이사 같은 최상위 마법사조차도 방어 마법기 없이 급소에 이 공격을 받는다면 실신하거나 그와 비슷한 수준의 타격을 입을 터였다.
'일단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 할까.'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기에, 투란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놀던 비제를 불러 칼라마프 시로 돌아갔다.
서쪽의 위협이 제거되었음을 공표한 지 어느덧 삼 주째.
슬슬 겨울이 물러가며 적당히 기분 좋게 서늘해진 공기 아래, 시민들이 입은 옷이 눈에 띄게 얇아진 것이 보였다.
그런데 위에서 내려다보자니 어째 도시의 남문 쪽 입구가 굉장히 소란스러워 보였다.
무언가 사건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감각을 활성화해 보니 입구 근처에 귀족만 서너 명, 기사는 스무 명이 넘게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딱히 위협이 될 만한 상대가 없음을 확인하고 착륙하자, 근처에서 난처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던 경찰이 다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도시의 보호자시여! 비겐의 주인께서 직접 찾아와 만남을 청하시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비겐의 주인?"
투란은 잠시 기억을 되새겼다.
아마 칼라마프에서 동남쪽에 있는, 지리적으로 봤을 때 엔릴 사막과 가장 가까운 곳의 도시였던가?
이전에 찾아왔던 귀족들 중 한 명이 그곳 영주의 아들이었음도 떠올랐다.
"무려 다른 도시에서 오셨다니 홀대할 수는 없겠지. 중앙 저택으로 모시도록."
명령을 전하자 경찰의 얼굴이 확 풀렸다.
다른 도시의 주인이 마법사들을 잔뜩 끌고 왔는데도 성문 앞에 세워놓아야 했으니 그 근심이 얼마나 컸겠는가.
"알겠습니다!"
칼라마프가 고비를 넘긴 이래, 투란은 계속해서 도시의 중앙 저택에 기거하던 빈민들이 각자 작게나마 새로운 집을 지어 독립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새삼 저택 생활에 욕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나중에 누가 이 도시를 통치하게 되건 계속 평민들을 살게 둘 리가 없음을 알아서였다.
물론 과거 다 없어졌던 비싼 가구를 다시 사들이거나 정원을 손질하는 등의 사치를 부리지는 않은 만큼 여전히 휑한 곳이긴 했지만, 그래도 시청보다는 나았다.
잠시 후, 투란은 책상과 의자 몇 개만 달랑 가져다 놓은 옛 영주의 집무실에서 비겐의 주인과 마주 앉았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군요! 칼라마프의 보호자여. 비겐의 영주이자 메버른 가문의 주인인 알로스입니다."
"칼라마프의 투란입니다."
비겐의 영주 알로스는 이전에 찾아왔던 자기 아들처럼 영리해 보이는, 다르게 말하자면 간교해 보이는 인상을 한 중년 남자였다.
그는 가볍게 마력을 가늠해 보더니 곧바로 자기보다 못해도 백수십 살은 더 어려 보이는 투란에게 저자세를 취했다.
"이전에는 제 불민한 아들놈이 찾아왔었는데 혹시 무례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전혀요. 갑자기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게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말입니다."
"하하, 그건 제 의견이었다기보다는 이 근방 영주들이 모두 입을 모았던 내용이라...."
그간의 경험에 따르면 이곳 회색 지대처럼 섬겨야 할 군주가 없는 지역의 영주들은 다소 오만하고 안하무인 격인 경우가 많았는데, 어째 이자는 남 눈치를 보는 게 익숙한 듯했다.
지금처럼 능숙하게 책임을 돌리는 모습만 봐도.
"어쨌든, 이번에 직접 찾아온 이유는 그것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서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시의 주인이 되기 위한 조건, 투란의 어머니에 대한 행적을 조사하는 것.
아무래도 자하르의 땅, 엔릴 사막과 가장 가까운 도시인 만큼 이쪽이 성공할 가능성이 클 것이라 예상하기는 했다.
"단서를 찾으셨습니까?"
"그 여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주 확실히 알아냈다고 자부합니다. 아마 이곳의 그 어떤 영주도 이만큼 알아내지는 못했을 테지요. 혹시 먼저 찾아온 이가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아직은요."
그 말에 담긴 확신에 투란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알로스는 그렇게 호언장담을 해놓고는 다소 자신감 없는 표정으로 눈썹을 긁적였다.
"다만...그 여인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이 정보로 짐작하기가 어려워서, 만약 찾는 게 그쪽이라면 솔직히 말해 큰 도움이 되기 어려울 겁니다."
"그건 됐습니다."
어차피 투란의 어머니가 히사릴 언덕에 도착해 그를 낳고 키우다가 세상을 떠났음은 알고 있는 이야기.
투란이 원하는 것은 바로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며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였고, 말한 대로라면 이 비겐의 영주가 그 정보를 정확히 가져온 것이 분명했다.
"그보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하나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칼라마프의 보호자께서는, 혹시 아라비온 가문과 깊은 인연이 있으신 겁니까?"
질문을 들은 투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저런 이야기를 하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그가 아라비온 군대와 접촉해 서쪽의 재앙이 없어질 것이라 예견한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었으니까.
다만 그 이야기가 왜 이 시점에 나왔느냐가 문제였다.
"다름이 아니라, 그...저희 메버른 가문이 전쟁 당시 자하르 가문의 주둔지 역할을 했잖습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지리적 문제 때문이었을 뿐, 저 개인적으로는 중립을 고수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투란 역시 도시의 유력자들이 전해준 이야기로 얼추 알고 있었다.
본래 비겐 시의 영주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형으로 친 아라비온 파벌이었는데, 어느 날 급사한 채 발견되어 동생이 가문을 이어받았다고 했던가?
증거는 없지만 다들 자하르에게 암살당한 것이 분명하다고 공공연히 이야기가 나돌았다고 했다.
즉, 혹시라도 투란이 아라비온과 친한 탓에 자신을 색안경 끼고 볼까 지레 걱정한 것이었다.
"저는 두 가문 중 어느 한쪽에도 속한 사람이 아니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메버른 가문의 과거 행적에 대해 따질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투란은 그렇게 단호히 답하고 알로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몇 초가 지난 뒤, 그가 다소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 믿겠습니다...애초에 믿음이 없으면 이번 거래 자체가 성립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건 그거고, 혹시 약속을 입증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사실 도시의 통치권이란 게 그냥 말로만 오갈 것이 아니잖습니까. 본래 이 도시를 통치하던 가문의 후예들도 좀 신경 쓰이고요."
칼라마프를 통치하던 가문의 생존자는 죽을 날이 머지않은 귀족 두 명과 어린 기사 다섯 명뿐.
도시를 돌려받는다 한들 보호할 능력도 없을뿐더러, 몰락 당시 가장 먼저 중앙 저택의 재산을 깡그리 긁어모아 피난을 떠난 만큼 투란은 물론이요, 다른 이들 역시 그들이 주장하는 권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즉, 마지막에 붙인 말은 그냥 자기 말에 설득력을 부여하고자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말이었다.
투란은 이를 지적하는 대신, 다룩을 불러 두루마리 하나를 가져오게 했다.
가장 질 좋은 양피지를 실력 있는 필경사가 심혈을 기울여 써낸 것으로, 도시의 통치권을 양도하겠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당연하게도 받는 이의 이름과 속한 가문은 비어 있는 상태였다.
"제가 여기에 알로스 님의 이름과 가문을 적고 밑에 서명하는 순간부터, 이 계약은 위대한 프레아 신족의 이름으로 보호되어 이를 깨트리는 자는 제 적이 될 겁니다."
얼마 전 모였던 일곱 도시의 귀족들 모두가 투란의 마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직접 체험한 만큼, 이것은 꽤 강한 억제력이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도시라는 것이 대가문에서도 상위권에 들 만한, 여느 평범한 귀족 가문의 주인들을 압도하는 강자에게 적대 당하면서까지 차지할 가치는 없으니까.
적힌 계약의 내용은 이전에 언급했던 그대로였다.
투란이 원하는 정보를 가장 구체적으로 제공한 이에게 이 도시의 통치권을 양도하겠다는 것.
단, 양도받은 이는 통치자로서 성실히 도시의 시민들을 보호해야 했다.
"이 성실히 보호해야 한다는 조건이 좀 모호하게 느껴져서...."
"자기가 크게 다치거나 죽지 않는 선에서 전력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적어도 누군가 마수에게 공격당했다는 소문이 나면 순찰하거나 사냥을 나서는 정도로요."
"으음, 그 정도면 아주 못할 이야기는 아니군요. 저 역시 이미 영지를 그렇게 운영하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를 소홀히 하신다면 그 또한 계약 위반입니다."
그럴 경우 내가 당신의 적이 될 것이라고 덧붙여 말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움찔하는 표정으로 보아 아주 잘 알아들은 것 같았으니.
이후로도 몇 가지를 더 이야기한 끝에 두 사람은 대충 적당한 합의점에 도달했다.
모든 조건을 정리한 뒤, 알로스가 잠시 기다려달라며 방에서 나가더니 한 여자를 데려왔다.
"저, 저는...사리나라고 합니다, 위대한 신의 후손이시여."
나이는 사십 살쯤 되었을까?
젊은 시절에는 꽤 아름다웠을 얼굴에, 정갈한 말투와 자세로 보건대 귀족을 섬기는 교육을 따로 받은 듯했다.
알로스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내게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여기 이분 앞에서 하도록 해라. 일이 잘 끝나면 네 노후는 물론, 자식들까지도 확실하게 책임져 주마."
알로스의 말을 들은 사리나가 깜짝 놀라 그와 투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딱 봐도 한참 젊어 보이는 귀족이 자기가 사는 도시의 영주와 동격 이상의 대우를 받자 놀란 모양.
그녀가 머뭇거리자 알로스가 다소 짜증스러운 어조로 재촉했다.
"빨리!"
"예, 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대대로 비겐의 메버른 가문을 섬겨온 종으로, 과거 전쟁 시기에 자하르의 귀족분들을 대접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임신한 여자가 황금색 말을 타고 도망쳤다면, 아마 틀림없이 제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을 겁니다."
"어떻게 아는 사이지?"
투란의 물음에 사리나가 슬쩍 알로스의 눈치를 보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그, 제가 그녀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관리했다고?"
"예. 당시 자하르에서 아라비온 본토를 약탈하며 데려온 전리품 중 하나여서...."
사리나가 말을 멈춘 것은 이를 듣고 있던 투란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은 탓이었다.
어찌나 그 기세가 매서운지, 뒤쪽에 서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알로스마저 움찔할 정도였다.
"계속 설명해."
"아, 알겠습니다."
전쟁 시기였던 이십여 년 전, 그녀는 비겐 시를 야영지로 삼았던 자하르의 귀족들 밑에서 일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업무가 아라비온의 본토를 습격, 약탈해 온 여인들 중 평범한 이들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많았나?"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기껏해야 스무 명 정도 되었을까요...."
보통 가장 가치가 높은 것은 전투 중 불구로 만들어 포로로 잡은 적의 마법사지만, 평범한 인간 중에도 가치 있는 전리품이 있었다.
과거 투란에게 제시되었던 이들처럼 오로지 귀족의 첩이 되기 위해 외모와 교양을 가꾸어낸 꽃들.
사리나는 투란의 어머니가 그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52화
과거 투란이 보았던 연극, '영웅 케오른'에서 두 대가문의 전쟁이란 정정당당하기 짝이 없는 회전(會戰)이었다.
무기를 든 기사들이 맞붙으며, 귀족들은 그 옆에서 불과 벼락을 뿌려대며 우위를 겨루는 식으로.
하지만 실제 전쟁은 그보다 훨씬 더 음험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가장 먼저, 자하르의 귀족들은 은신한 채 몰래 접근해서 준비된 식량과 물에 이물질을 섞거나 정찰과 연락 등을 위해 본대를 이탈하는 이들을 저격하고 기습했다.
밤에는 대놓고 마법을 퍼붓고 도망가기를 반복해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게 만들었다.
그에 비해서 낮은 아라비온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주변을 밝히며 전진했고, 지나가는 지역을 통치하는 가문들에게서 반강제적으로 협조를 구해 부족한 물자를 보충했다.
당연히 거부하는 이들은 자하르의 끄나풀이 틀림없으므로 벼락으로 태워 죽였다.
아라비온의 진군 경로에 있는 귀족 가문들을 미리 다 밀어버릴 수는 없는 터라, 자하르는 상대가 느릿하게 다가오는 동안 전략을 바꾸었다.
바로 소수의 귀족과 기사들을 별동대로 파견, 본토를 직접 침공하는 것.
이러한 공격의 대상은 주로 다케인 평야 곳곳에 자리한 소도시들이었다.
가주가 버티고 있을지도 모를 본가는 부담스럽고, 그런 작은 도시들은 귀족과 기사들이 징집된 탓에 무방비했으니까.
별동대는 몇 안 되는 귀족과 기사들을 참살하고 중앙 저택의 재산 중 값나가는 것들을 약탈했는데, 그 과정에서 몇몇은 귀족의 첩이 되기 위해 키워진 이들에게 눈독을 들였다.
투란의 어머니, 비젤라는 다케인 평야 남부의 소도시인 키멜에서 납치된 소녀였다.
"비젤라?"
"예. 제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투란은 처음 듣는 어머니의 본명을 되뇌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비제보다는 훨씬 더 상류층 같은 느낌이 드는 이름이었다.
좀 더 여성적이기도 하고.
"제가 아직도 기억하는 건, 그 아가씨가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어서 그랬습니다."
"특이하다면 어떻게?"
"예, 그러니까...."
납치되어 온 여인들을 돌보며, 사리나는 그녀들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순응형, 둘째는 거부형.
순응형은 이미 돌아가기 글러 버린 거, 어떻게든 남자 하나 잘 꼬드겨서 아이 낳는 가축 역할만은 벗어나 보겠다고 애쓰는 유형.
그녀들은 가족들을 죽인 자하르의 귀족이나 기사들에게 아양을 떨며 특별 대우를 받으려 했다.
그리고 거부형은 자기 가족들을 죽인 원수들을 죽여버리겠다고 악을 쓰며 식사를 거부하거나 자기 얼굴을 망쳐서 가치를 떨어트리려 드는 유형.
그녀들은 아까우리만치 미모가 뛰어난 이들 몇 명을 빼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처분당했다.
하지만 비젤라는 그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녀는 마치 새로운 곳에 여행이라도 온 사람처럼, 온종일 자기가 돌아다닐 수 있는 모든 곳을 돌아다니며 사용인들에게 질문을 던져댔다.
이곳 사람들이 입는 옷은 왜 그러냐.
이 음식은 이름이 무엇이고 어떻게 만드는 거냐
이곳 사람들이 섬기는 신은 이름이 뭐냐....
한번은 같이 끌려온 아가씨가 대체 뭐가 그리 신나서 날뛰고 있냐고 질책했는데,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 재밌지 않아요? 적어도 집안에 갇혀서 아양이나 떠는 것보단 낫잖아요!'
당연히 한평생 귀족의 첩으로 살기 위해 교육받은 아가씨들에게는 모욕적이기 짝이 없는 말인지라, 비젤라는 그들 사이에서도 겉돌게 되었다.
덕분에 수발을 들어 주는 사리나는 그녀와 자연스럽게 친해지며 개인적인 이야기를 여럿 들을 수 있었다.
원래는 어려서부터 세상을 돌아다니는 상인이 되고 싶었는데 어림도 없다고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다거나, 집안에서 배우는 교육이 너무 지루해서 죽을 것 같았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가족들이 다 죽은 건 슬프지만 어차피 그 사람들은 내가 뭘 원하는지 관심도 없었다고, 평생 지긋지긋한 저택에 틀어박혀 사느니 이렇게라도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어서 좋다고 했습니다."
사리나의 설명을 들은 투란은 머릿속에서 스무 살쯤 더 어린, 아마 지금의 그와 비슷한 또래일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모든 가족을 잃고 납치당한 상태에서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냐고 외치는, 기이하리만치 엉뚱하고 긍정적인 아가씨....
기억 속 염세적이고 피로하기 짝이 없던 여인과는 조금도 일치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엉뚱한 아가씨가 그렇게 변한 것일까?
"남자 쪽은?"
투란이 어머니만큼이나 궁금한 쪽은 아버지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아라비온 기사의 딸이었으니 아버지 쪽은 보나 마나 자하르의 귀족이나 기사일 터.
정황상 귀족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인들에게야 다 같이 높으신 마법사들이지만, 일개 기사가 여자 하나를 첩으로 삼아 키우는 것을 귀족들이 곱게 보았을 리 만무하니까.
거기다 원래 마력이라는 게 완벽히 부모에게서 내려오는 것은 아니라지만, 투란의 잠재력은 기사와 평민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높았다.
"그 아가씨를 찾던 사람이 딱 한 명 있었습니다. 젊은 남자였는데, 그러니까 진짜 나이는 모릅니다만-"
"보기에는 젊어 보였단 거겠지. 생김새나 이름은? 기사였지, 귀족이었지?"
"그, 그것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 모시던 분들이 너무 많았던지라, 죄송합니다...."
투란은 아쉬움에 혀를 찼으나 이내 수긍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전직 여관 주인 같은 사람이 특별한 것이지, 보통은 이십 년 전 지나가듯 몇 번 봤던 사람의 얼굴 따위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그 아가씨가 만나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몇 개 했던 것은 기억이 납니다. 무뚝뚝해 보이는 것치고는 자상한 사람이라거나, 언젠가 같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거나, 딱히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고, 작게 덧붙이는 사리나의 말에 투란은 큰 안도를 느꼈다.
이미 첫 만남의 과정이 납치인 것부터가 문제긴 하지만, 그래도 둘 사이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과거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내심 투란은 그것이 그저 아들을 위한 입에 발린 말이 아닐까 의심해왔다.
사리나는 이어서 비젤라에 대한 설명을 계속했다.
여행을 위해 체력을 기른다고 저택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다가 도주하는 것으로 오해받아 독방에 갇힌 이야기부터, 불 피우는 법을 배운다고 나뭇가지를 가져다 비비다가 정원에 불을 낸 이야기까지.
듣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일화들을, 투란은 기꺼운 마음으로 차곡차곡 기억 속에 새겨 넣었다.
"아가씨가 임신하신 건 아마 도망치기 서너 달 정도 전이었을 텐데, 그때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중에 세 명이 같이 여행을 다니면 이런 것도 다 쓸 데가 있을 거라고요. 그런데 갑자기 도망칠 줄은...."
어느 날 밤, 사리나는 사소한 잡무 탓에 저택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비젤라와 마주쳤다.
사리나가 황급히 앞을 가로막자 비젤라는 깜짝 놀라 어디서 훔쳤을지 모를 말을 세우더니 애원했다고 했다.
늘 쾌활하던 평소와 달리 우울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제발 모른 척해달라고 간청하길래 저도 물었습니다. 나중에 셋이서 같이 여행을 떠날 거라고 하지 않았냐고, 대체 왜 지금 도망가는 거냐고...."
"그래서, 뭐라고 했지?"
"자기가 세상을 너무 아름답게 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진정한 자유란 없고, 결국은 우리 모두 양치기들에게 길러지는 가축에 불과했다고요. 이 아이에게도 그런 운명을 줄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투란이 처음 마법의 힘을 일깨웠을 때 어머니가 했던 말과 같았다.
결국 사리나는 도망치는 비젤라를 모른 척 보내주었고, 그렇게 이십 년이 지났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투란은 어머니가 도망치는 데 아버지의 도움이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면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 도망칠 좋은 말은 어디서 구했을 것이며, 자하르의 추적자들은 어떻게 따돌렸단 말인가.
"어떻게, 만족스러우셨습니까?"
가만히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알로스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투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상 다른 가문들이 이들보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내놓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일단 어머니 쪽 친척을 찾아볼 가치가 없으리라는 것을 확실히 안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 할 만했다.
자하르의 귀족이나 기사일 아버지가 누구인지, 왜 어머니와 함께하지 않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건 아마 차후 엔릴 사막에 가면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알지 못했던 과거의 어머니가 어떤 모습인지를 간접적으로 경험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칼라마프는 당신의 것입니다. 부디 계약에 따라 신실히 통치해 주시기를."
투란의 대답을 들은 알로스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윗전에서 이야기가 모두 끝난 만큼, 칼라마프 시는 본격적으로 메버른 가문에게 통치권을 이양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비겐 시의 공무원 중 일부가 넘어와서 몇몇 업무를 이어받으며 도시의 상태를 점검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관련된 서류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이런 수치가 말이 되나...?"
"그야말로 시체가 도로 살아난 격이군그래."
인구와 재정 기록으로 보면 칼라마프는 그야말로 죽었다가 부활한 도시나 다름없었다.
오로지 한 사람의 힘에 의존해서.
그러한 기적을 만들어낸 당사자, 투란은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제 또 여행이네. 재밌겠지, 비제?"
[어디 가?]
"저기 남서쪽으로 하늘 도서관이라는 곳에 갈 거야. 그러고 보면 너한테는 사서 어르신이 안 보이겠다. 몰래 다녀올 거라 같이 들어가긴 힘들려나."
이번에는 그냥 은신한 채 몰래 들어가서 용무만 보고 나올 생각이었다.
처음 갔을 때는 혹시 자하르의 은신조차 알아내는 비밀 조치 따위가 있을까 싶어서 정식으로 허락을 받아 들어갔지만, 그런 게 없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투란이 가진 마력을 보면 감히 그럴 리는 없지만, 그곳 가주가 또 자기 딸이랑 결혼하라고 엉겨 붙기라도 하면 귀찮았다.
"그러고 보면 진짜 오래도 있었다, 여기에."
여행을 떠난 이래 한 도시에서 가장 오래 머문 게 베르크 가문에서 보낸 한 달이었는데, 이곳 칼라마프에서는 어찌어찌 두세 달 정도를 보냈으니 가장 길게 체류한 장소라 할 만했다.
투란은 그간 익숙해진 시청 숙소의 방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문을 열고 나왔다.
이제 시장 자리에서 물러난 다룩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위대한 투란이시여."
공식적으로 보호자의 자리를 내려놓은 그를 부르는 호칭은 위대한 투란이 되었다.
칼라마프라는 도시를 죽음에서 구해낸, 다른 귀족들이 감히 하지 않을 위대한 일을 해낸 자.
"계속 시장 일을 하지 못해서 아쉽겠어."
"어차피 분수에 맞지 않는 직책이었습니다. 거기다 너무 나이가 들기도 했고요."
하기야 다룩의 나이가 예순대여섯인가 되었으니, 마법사도 아닌 사람으로서는 집에서 쉬어야 할 나이였다.
"우선 이것부터 받아 주십시오."
"이건?"
다룩은 어느새 투란의 방 옆에 있던 궤짝을 열어 대량의 금화와 은화를 꺼내 보였다.
이 가난한 도시에 이런 재산이 어디 있었단 말인가?
"시민들이 모은 것입니다. 위대한 투란께서 몰아오신 동물의 모피를 판 돈과 남는 석재를 판 것이니 본래 주인께 돌아가야 할 돈이기도 하지요."
"도시를 위해서 쓰라고 해."
"어차피 여기 두면 시민들의 것이 아닌 메버른 가문의 재산이 될 것입니다. 부디 거절하지 마소서."
투란은 다룩을 바라보다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그가 뜻을 굽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금화는 팔백 닢, 은화는 이천 닢쯤 될까.
배낭에 담기에는 터무니없이 많은 양이었으나 그에게는 메이사에게 받은 대용량 주머니가 있었다.
돈을 집어넣은 것을 확인한 다룩이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바깥까지 모셔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뒤를 따르는 와중, 투란은 성유물의 감각으로 바깥의 기척을 느꼈다.
시청 밖, 조금 떨어진 광장에 늘어서 있는 수천 명의 사람....
뛰어난 감지 능력이 이럴 때는 영 안 좋았다.
이런 건 모르는 상태에서 보아야 깜짝 놀라고 기분이 좋은 것일 텐데.
["와아아아아아아----!"]
예상대로, 시청 밖으로 나온 투란을 반긴 것은 칼라마프의 모든 시민이 모인 듯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대부분이 나이 많은 이들과 어린이들로 구성된, 과거 폐허가 되었던 옛 칼라마프의 생존자들.
그들은 막대기와 천으로 깃발 따위를 만들어 휘두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검독수리와 남자가 마치 문장처럼 조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것 말고도 '위대한 투란이여 영원하소서', '우리들의 구원자' 같은 낯부끄러워지는 문구 역시 존재했다.
"민망한걸."
"부디 그러지 마십시오. 오늘만은 모두가 위대하신 분을 칭송하고자 모인 것이니."
투란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을 훑었다.
무한한 감사, 떠난다는 것에 대한 슬픔, 숭배와 칭송....
때론 긍정적이고 때론 부정적인 그 반응들은 지난 몇 달 동안 보아온 것이지만 이제 더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니 새삼 아쉽게 느껴졌다.
'나, 사실 이렇게 칭송받는 걸 좋아했나?'
투란은 자신의 유치한 면을 발견한 기분에 괜히 민망해져서 걸음 속도를 올렸다.
가득 모인 인파 속을 지나 성문에 도착할 무렵, 그곳에 무언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시민들은 투란을 보자마자 하얀 천을 휙 걷어내며 삼 미터 정도 크기의 조각상을 드러내 보였다.
옆구리에 검독수리 한 마리를 낀 젊은 남자.
투란의 모습을 그대로 조각한 것이었다.
"...이건 대체 언제부터 한 거지?"
"급히 만들어서 조금 아쉽습니다만, 나중에 더 좋은 것으로 다시 만들어 세울 생각이긴 합니다. 성문 네 군데에 모두 설치되어 있습니다."
다룩이 옆에서 넉살 좋게 답했다.
한 번이라도 성문 쪽을 드나들었으면 눈치챘을 텐데, 항상 비제를 타고 다니느라 몰랐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얼핏 보았다 한들 설마 그의 모습을 새긴 조각상이라 생각하진 않았을 터였다.
기껏해야 새 건물이나 세우고 있으려니 했으면 모를까.
"메버른 가문에서 별로 안 좋아하지 않나?"
"미리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쪽에서도 이 조각상이 남으면 도시의 통치권이 어떻게 넘어왔는지를 확실히 할 수 있다고 좋아하더군요."
"아직 먹고 살기도 힘들 텐데...."
"때로는 삶보다 중요한 것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곳 시민들에게 있어 구원자를 기념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옳습니다!"]
다룩의 말에 뒤에 있던 시민 몇 명이 찬동하듯 외쳤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몇 번 타박하던 투란은 입을 다물고 조각상을 지나쳐 성문을 나섰다.
저 멀리, 이제는 익숙해진 회색 지대의 돌산들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며 무언가 그럴싸한 연설을 하려 했지만 조각상의 영향이 너무 커서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면...음, 뭔가 그럴싸한 말을 많이 생각했는데 기억이 안 나네."
"말이 어찌 필요하겠습니까? 지금까지 행하신 모든 일이 그보다 귀한 것을요."
이 노인이 언제부터 이렇게 달변이었던가.
투란은 뭐라 말하려고 입을 몇 번 달싹이다가, 이내 비제에게 빨리 날아오를 것을 지시했다.
익숙한 부유감과 함께 순식간에 멀어지는 땅.
뒤를 돌아보자 몇몇 시민들이 마침내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칼라마프의 구원자는 도시를 떠났다.
53화
칼라마프 시를 벗어난 투란은 지상에 깔린, 서쪽으로 향하는 옛 제국의 도로를 지표 삼아 날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흑요정과의 전투 당시 아라비온의 군대가 주둔했던 건물이 보였다.
'저건 안 부수고 갔네.'
마법사들의 숫자가 숫자인 만큼 썩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굳이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다 여긴 모양이었다.
아마 앞으로는 회색 지대와 중서부 사이를 지나다니는 여행자들의 쉼터 정도로 쓰이게 되지 않을까?
물론 마법을 써서 대충대충 지은 건물인 만큼 그전에 무너질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이를 지나쳐 계속 서쪽으로 날자 잿빛 돌산이 끝나며 숲과 평야가 조화로이 어우러진 땅이 펼쳐졌다.
서부에서 가장 크고 질 좋은 나무가 많이 자라는, 그래서 흔히 중서부 숲 지대라고 불리는 곳.
과거 투란이 아시즈와 만났던 것도 이 지역의 서쪽에 자리한 도시 근처였다.
'진짜로 살아 있는 사람이 없는 수준이잖아.'
대상을 인간으로 설정한 탐색 마법을 사방 십수 킬로미터에 펼쳤음에도 걸려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저 지상에 드문드문 보이는 도시며 마을들 역시 모두 폐허가 된 상태.
이 땅 전체에 죽음이 내려앉았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정말로 흑요정이란 놈들은 인간과 공존할 수 없는 늑대들인 건가?'
생포한 흑요정을 심문하여 알아낸 바에 의하면, 이번 대침공의 이유는 사령왕이 가장 아끼는 막내딸과 사위가 지상을 구경하던 중 살해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땅의 지배자가 인간인 만큼 보나 마나 인간의 짓이라, 제 동포들을 죽여서 원한을 풀려 했다는 것.
무수히 많은 사람과 흑요정들이 죽은 이유치고는 참으로 터무니없으나 그들 사회에서 사령을 다루는 왕족의 명령은 곧 법이나 다름없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 점은 마법사들의 명령이 절대적인 인간 사회와 불쾌하리만치 닮아 있었다.
'딸과 사위란 건 아마 아시즈를 죽이려던 그 둘이겠지.'
아라비온 내에서 이 사실이 알려져 있을까, 투란은 그럴 확률이 반반 정도라고 여겼다.
베르크 가문에서 얼마나 입단속을 잘했느냐에 달렸을 터.
물론 딱히 그에 대해 떳떳하지 못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서 아시즈를 죽게 두고 두 흑요정들이 놀이 삼아 사람을 사냥하게 내버려 두는 게 옳은 일은 아니니까.
물론 이곳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부디 천상의 궁전에서 편히 쉬기를.'
투란은 저 지상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정말로 신들이 천상의 궁전에 있을지, 그들이 인간의 영혼을 받아줄지는 이제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지 않으면, 죽은 이들이 쉴 곳 하나 없다면 그건 너무나도 비참한 일이니까.
* * *
과거 엔릴 사막을 날던 때와 달리 급하게 갈 이유가 없어, 투란은 비제를 적당히 쉬어주게 하며 여유롭게 이동했다.
하늘을 나는 건 시야가 선명하고 해가 떠서 따뜻한 낮에만.
그러다가 녀석이 지치면 옆구리에 낀 채 직접 걷고, 밤에는 적당히 텅 빈 마을 한 곳을 찾아 쉬었다.
이전의 여행과 크게 달라진 점 중 하나는 식사였다.
메이사에게 받은 대용량 주머니에 여러 종류의 말린 음식부터 요리도구, 향신료 등을 넣어둔 덕에 노상에서도 제법 먹을 만한 요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맛있어, 비제?"
[너무 짜!]
"불평하지 말고 먹어. 직접 요리할 것도 아니면서."
[내가 발로 요리해도 잘해!]
자기가 발로 해도 투란이 한 것보다 나을 거라고 주장하는 비제와 가끔 말싸움하며, 둘은 순조롭고 무탈하게 나아갔다.
그렇게 여행하기를 나흘째.
투란은 이곳이 과거 그가 아시즈와 만났던 숲 근처임을 깨달았다.
조금 더 가자 마데리 시, 흑요정의 도시가 숨어 있다고 미리 경고했던 곳도 보였다.
당연하게도 이곳 역시 침공당해 폐허가 된 상태였다.
"더 강하게 말했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옆에 있던 비제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투란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며 웃었다.
확실히, 그때 강권한다 한들 달라질 건 없을 터였다.
흑요정들의 공세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강력했으니.
이곳의 귀족들이 모여서 대응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직접 당하기 전까지 누가 그럴 줄 알았을까.
그렇게 마데리를 지나쳐 또 날기를 하루.
슬슬 서쪽 숲 지대가 끝나며 다소 들쑥날쑥한 구릉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다시금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과거 투란이 더없이 번화하다고 여겼던,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 전체를 두고 봤을 때 변방에 속하는 서쪽 황야 지대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번거롭다 여겨 지나쳤던 도시 몇 개를 휙휙 지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오렘 시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가 이렇게 작았나?'
분명히 옛날에 봤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처럼 보였건만.
하기야 그 당시 투란은 수십 명이 살던 작은 마을을 거쳐 천 명이 사는 작은 도시를 본 게 고작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만 단위의 사람들이 사는 도시를 보았으니 얼마나 커 보였겠는가.
하지만 지금 보니 오렘 시는 기껏해야 칼라마프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조금 큰 정도에 불과했다.
그만한 도시의 구원자이자 주인으로 군림까지 해본 지금, 투란의 눈에 이 도시는 한없이 작아 보였다.
"고생했어, 비제. 잠시 다녀올 테니까 여기서 쉬고 있을래?"
[오래 안 걸리지?]
"안 걸려. 음, 아마도. 별일 없으면."
이렇게 말해 놓고 오래 걸린 적이 있음을 기억해서일까, 비제는 의심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따 식사나 맛있게 해달라고 쓴 뒤 휙 날아갔다.
투란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배웅한 뒤 오렘 시로 들어섰다.
'아, 그때 그 경찰이잖아.'
투란한테 더러우니 좀 씻고 다니라고 말했던 이가 동문을 지키고 있었다.
하기야 몇 년 만에 오는 것도 아닌데 그새 사람이 바뀌어 봐야 얼마나 바뀌었겠는가.
은신 마법을 사용하고 있기에 그는 투란이 자기 앞을 대놓고 지나가는데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성문을 들어선 투란은 그대로 저 멀리 보이는 도서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새삼 은신 능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니 이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힘인지 실감이 났다.
아마 지금 그가 이 상태로 중앙 저택에 쳐들어가서 발타스 일가를 도살한다 한들 그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은신한 채 도시 내부를 돌아다니자니 어째 분위기가 조금 뒤숭숭한 느낌이 들었다.
'또 마수라도 나왔나?'
투란은 은신을 풀고 누군가에게 물어볼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도서관을 향해 접근했다.
혹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성가실 테니까.
늘 그랬듯 앞에서 경비를 서는 기사를 지나친 투란은 도서관의 문을 잠근 자물쇠를 쥐었다.
그리고 열쇠 구멍 안쪽에 바람을 몇 번 불어넣어 내부의 구조를 파악한 뒤, 염동 마법으로 내부의 실린더를 정확히 맞춰 풀어냈다.
'성공.'
본래 염동 마법을 쓴다 한들 안쪽의 구조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내부를 으깨버릴지언정 섬세하게 풀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폭풍 혈통의 힘을 이용하면 바람을 불어넣고 그 흐름을 감지하는 식으로 자물쇠를 푸는 것이 가능했다.
투란이 칼라마프에서 시간을 보내며 익힌 간단한 잡기 중 하나였다.
슬쩍 뒤쪽을 돌아보니 기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전방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귀족만큼은 아니더라도 예민한 감각을 지닌 만큼 조금 전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시전자가 특정한 행동을 하며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반작용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
이것이야말로 자하르의 은신 능력이 특별한 이유였다.
사막 위에 뚜렷이 발자국이 생기는데도 그 변화를 무의식중에 넘겨버리듯이, 자물쇠 소리가 났음에도 이를 누군가의 기척으로 연결하지 못한 것이다.
아마 직접 접촉하거나 자신을 향해 공격이 날아오는 것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눈치채지 못할 터.
투란은 그대로 도서관에 들어간 뒤 문을 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전에 몇 번이고 들어와 본 탓에 꽤 익숙해진 둥근 벽과 나선형 계단.
그 앞에는 책상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 사서가 있었다.
"어르신?"
혹시나 해서 불러봤는데 사서는 그를 감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신이 만들어낸 정령이라 한들 자하르의 은신마저 꿰뚫어 볼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일까.
천장의 환한 마법등 탓에 급속도로 마력이 감소하고 있었기에, 투란은 은신을 해제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사서 어르신."
그런데 어째서일까, 사서는 그런 투란에게 반응하지 않고 책상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모습이 마치 잘 만든 인형과도 같았다.
"...어르신?"
투란은 사서의 어깨를 쿡 찔렀으나 손가락은 아무것도 없는 듯 이를 관통했다.
그러고 보니 직접 접촉할 수 없다는 것을 지난번에 이미 경험하지 않았던가.
당황한 나머지 순간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은 것이었다.
'설마 정식으로 출입증을 들고 오지 않아서 그런 건가?'
일단 이 도시의 주인이자 도서관의 주인이 발타스 가문의 수장이니 그의 허락을 받아 들어와야만 출입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일지도.
투란의 표정이 심각해지던 도중, 갑자기 사서가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어때, 그럴싸했냐?"
"...네."
투란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리자 사서 역시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런 사람, 아니, 정령인 줄은 알았지만 또 장난을 친 것일 줄이야.
"진짜 놀랐잖습니까."
"네 얼굴만 봐도 시도한 보람이 있었다. 그래서, 상당히 빨리 돌아왔구나? 워낙 배포 좋게 나서길래 못해도 십 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사실 저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다녀온 것 치고는 너무 많은 걸 보고 들어서요."
출생의 비밀부터 신과 혈통에 얽힌 비밀, 정체 모를 음모까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투란은 그중 가장 간단히 확인할 수 있는 것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혹시 제 혈통, 다시 봐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야 어렵지 않지."
이전에 그랬듯, 사서는 곧바로 투란의 몸에 푹 손가락을 꽂아 넣었다.
"추격자, 사냥꾼, 그리고 대기술사로군."
대기술사는 아마 폭풍 혈통 중 바람을 다루는 힘만을 의미하는 것일 터.
먼 옛날 아라비온의 혈통에 흡수된 뒤 폭풍 혈통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며 잊힌 모양이었다.
"그리고 하나는 아직도 안 열렸군. 두 개 유형을 각각 양쪽에서 물려받았다니, 정말 억세게도 운이 좋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벼락을 다루는 혈통 능력 역시 잠재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 만족하며, 투란은 궁금했던 질문 하나를 더 꺼냈다.
"혹시 프레아 신족들은 모두 네 개의 혈통, 그러니까 어르신이 말씀하시는 유형을 가지고 있던 겁니까?"
"음? 그래, 맞다. 확실히 놀지는 않았구나.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거냐? 혹시 나 말고도 정령이 남았던가?"
"정령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비슷한 걸 보긴 했습니다."
투란은 사서에게 자신이 보았던 것을 그대로 설명했다.
저 먼 엔릴 사막에 있는 신들의 무덤이라는 유적과 그 지하에 잠든 미궁, 신들이 거인을 새로이 빚어 만든 괴물들과 마법사를 신으로 만드는 과정에 대한 것까지.
마지막으로 누군지 모를 미궁의 제작자가 남긴 실험 일지까지 보여 주자, 이를 본 사서가 나지막이 신음하며 제 수염을 꼬았다.
"으음, 지하 미궁과 신을 만드는 실험이라니...대체 누가 이런 일을 한 거지?"
"역시 절름발이 여신입니까?"
"아마도 아닐 거다. 잠시, 예전에 있었던 책들을 좀 검색해 보마."
사서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동자를 조금 위로 올리더니, 이내 눈알을 팽글팽글 돌리기 시작했다.
흔히 사람들이 그러듯 상하좌우로 돌리는 게 아니고 말 그대로 한 방향으로만 계속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몇 분 정도 기괴하게 눈알을 돌리던 사서가 갑자기 손가락을 튕기자, 투란의 앞에 반투명한 책이 생겨났다.
"읽어봐라. 너희들이 말하는 옛 제국 멸망 후 소실된 문서 중 하나다. 이 글과 글씨체가 똑같구나."
없어진 책을 구현하는 능력이라니, 이전에는 보여준 적 없던 것이었다.
투란은 책을 넘기려 했으나 사서의 몸이 그렇듯 이 역시 만질 수는 없었다.
그 대신, 좌우에 있는 묘한 기호를 누르면 책이 한 장씩 넘어가는 형식이었다.
'이 글씨는....'
사서의 말대로 밤 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 놓았던, 미궁의 주인이 쓴 것과 똑같은 글씨체였다.
아마 일기장처럼 보였는데, 주인이 작성하는 데 그다지 열의가 없었는지 매 장마다 내용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오타스 그 돼지 새끼는 진짜 병신이다.
과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종족을 내버려 두면 분명 훗날 우리 후손들에게 위협이 될 거라고, 그래서 미리 박멸해야 한다고 말해도 귀찮다고 안 듣는다.
추적 능력이 필요한 것만 아니었어도 그 새끼한테 부탁할 일이 없었을 텐데.
평생 거기서 계집질이나 하라지....]
오타스라는 사람이, 어쩌면 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대한 악감정이 듬뿍 묻어 나왔다.
다음 장에는 조금 전 불평한 것에 대한 해답이 나와 있었다.
[오타스의 도움 없이도 그 스팀펑크 쥐새끼들을 박멸할 방법을 떠올렸다.
포로로 잡은 놈들을 개조하는 거다.
자손 세대에서 무조건 낮은 지능과 뛰어난 신체 능력, 과도한 폭력성이 발현하도록.
항상 발정기를 유지하게 하고 페로몬 추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도 좋겠군.
사실상 아포칼립스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이런 개체를 대량으로 풀어 번식시키면, 아마 수십 세대 뒤에는 종족 전체가 병신이 되겠지.
저놈들이 자랑하는 방어 체계도 일단 번식이 가능한 동족이라면 작동하지 않을 테니.
적어도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증기 비행선에 탄 쥐새끼들에게 사냥당하는 일은 없어질 거다.]
마치 한 종족을 자기 장난감처럼 취급하는 문구는,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님을 고려해도 소름끼칠 정도였다.
투란은 옆에 있던 사서에게 이해가 가지 않는 단어 하나를 물었다.
"혹시 스팀펑크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글쎄."
사서는 아는지 모르는지 잘 짐작이 가지 않는 모호한 태도로 그렇게만 답했다.
이후 투란은 가만히 두 장의 일기를 훑어보다가 저 '스팀펑크 쥐새끼'가 난쟁이들을 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지능을 퇴화시키고 신체 능력을 극대화하다니, 딱 그들에게 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거기다 옛 난쟁이들의 유물이 수증기를 이용한다는 것 역시 증기 비행선이라는 문구와 맞닿는 면이 있었다.
'...역시, 짐작은 했지만 이 신은 생명을 다루는 능력이 있었구나.'
하지만 투란이 아는 프레아 신족들은 물론이요, 그 후손에게 내려오는 혈통 능력 중에도 그런 종류의 힘은 없었다.
그가 가보지 않은 남부나 동부의 신이거나, 그게 아니면 후손을 남기지 못해 경전에도 기록되지 못한 잊힌 신이 아닐까.
이어서 책을 넘기자 이번에는 아예 다른 내용이 나왔다.
[이곳의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단순히 이종족의 노예로 살아온 세월이 길어서가 아니라, 아예 새로운 현상을 탐구하는 능력이 없다.
그러니까 수백 년간 한 발짝도 진보하지 못하고 우리가 제공하는 것만 받아 사용하고 있지.
이건 뇌 구조의 문제라고 봐야 하는 걸까?
과연 인간들에게 '창의력'이라는 것을 인위적으로 주입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그들을 계속 통제할 수 있을까?]
분명히 이전에는 제 후손들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던 그가, 이번 장에서는 인간을 마음대로 개조하고 통제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앞의 장과 이번 장이 쓰이는 동안 세월이 오래 지나며 무언가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묘하게 오싹한 기분을 느끼며, 투란은 다음 장을 넘기다가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명이 있다니 말도 안 돼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야
뭐가 있지???
지난번에 만든 전직 실험
그걸 그릇 삼아서 일단 몸을 옮기면]
54화
수명과 그릇.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그 내용이 암시하는 바는 분명했다.
프레아 신족에게는 수명이 있었으며, 그들은 승천한 것이 아니라 늙어 죽었다는 것.
심지어 그중 일부는 몸을 옮긴 채 아직도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무엇 하나 밖에 꺼내놓기 무서운 내용뿐이었다.
"혹시 이걸 작성한 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모르지. 그건 내가 생겨나기도 전부터 있던 것이거든. 만약 나중에 보충된 것이었다면 어떤 녀석이 들고 왔는지 정도는 기억했겠다만."
그 외관이며 행동이 사람 같기는 하지만, 사서는 어디까지나 도서관이 지어지며 함께 생겨난 정령이었다.
그가 아는 건 도서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안에 보관된 책의 내용뿐.
유감스럽게도 이 글씨체의 주인이 남긴 책은 더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재밌는 내용 하나를 알긴 했구나. 수명이라, 음.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겠어. 내 창조주가 왜 그렇게 급해 보였는지...."
사서가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면 절름발이 여신이 도서관을 창조할 당시 엄청나게 조급하게 굴었다고 했던가.
짐작건대 그녀는 수명이 다해가고 있음을 아는 상태에서 이를 만들러 온 것일 터였다.
대체 왜 마지막 시간을 도서관 제작 같은 일에 투자했는지는 도통 모를 노릇이지만.
이후로도 투란은 사서와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었다.
여행 중 새로이 터득한 마법의 원리를 자연 법칙으로 분석해 본다거나, 그가 지나온 땅에 과거에는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등이 그 주제였다.
만약 프레아 신족들 중 수명의 한계를 극복해 살아남은 이들이 있다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지에 대한 것도 토론했으나 마땅한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직 대놓고 세상의 전면에 등장해 군림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그때, 사서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몰래 들어왔던데, 혹시 너도 이 도시를 공격하는 세력에 가담해서 그런 게냐?"
"공격이요?"
"그래."
처음 듣는 이야기에 투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먼 곳에서 바로 날아온 거라서 이쪽 사정은 잘 모릅니다. 안 그래도 좀 어수선한 느낌이긴 했는데...."
"지금 이 도시는 전쟁 중이다. 엄밀히 말하면 전쟁에 말려들었다고 보는 쪽이 옳겠지만."
오는 길에 하늘에서 내려다보았던 모습을 회상해도 딱히 그런 느낌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지나다니는 사람이 조금 적어 보일 뿐.
"혹시 마법사 가문 간의 전쟁입니까?"
"그래. 하디트와 코렐이라는 두 가문을 주축으로 이 근방의 모든 마법사 가문들이 두 패거리로 나뉘어서 싸우고 있다더구나."
하디트와 코렐, 들은 적 있는 이름이었다.
과거 이곳 오렘의 영주 앞에서 신분을 둘러댈 당시 분쟁 중인 가문들의 예시 중 하나로 나오지 않았던가.
마법사 가문 간의 전쟁이라면 전투의 흔적이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종족과 달리 그들에게 적의 도시나 마을은 어디까지나 차지해야 할 먹잇감이니까.
물론 아라비온과 자하르의 전쟁처럼 대규모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바로 옆에서는 이종족들이 도시 몇 개를 쓸어버리고 있는데, 그 와중에 사람들끼리 전쟁이라니...."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쟁이 난 모양이다만은."
"자세히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도 이 주변에서 떠드는 이야기만 주워들은 거라 확실하지는 않다."
사서의 설명에 의하면 하디트와 코렐은 이곳 인근에 자리한 두 개 도시를 지배하는 가문이었다.
그들은 십여 년 전, 모종의 문제로 전쟁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서로 귀족 두어 명과 기사 열서너 명을 잃었다.
결국 어찌어찌 휴전은 했지만, 당연하게도 서로 깊은 앙금이 남은 채였다.
그런데 몇 달 전, 흑요정들이 동쪽의 숲 지대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가 아라비온의 군대에 격퇴당하며 그곳이 매력적인 개척지로 떠올랐다.
과거 도시가 자리하고 있던 곳에 새로 식민지를 세우고 나무만 잔뜩 캐어 운송해 와도 어마어마한 이득을 누릴 수 있을 터.
이 근방의 가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주인 없는 땅을 개척할 개척단을 꾸렸다.
가문의 귀족 한두 명과 기사 십여 명, 그리고 숲 지대에서 피난 온 실향민(失鄕民)들이 주축이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어느 구역을 어느 가문에서 차지하느냐로 신경전을 하다가 두 가문끼리 또 싸운 모양이다. 이번에는 이권 문제라서 그런지 전보다 규모가 커져서, 지금은 이 근방의 여러 가문이 두 패로 나뉘게 되었지."
그런 상황에서 오렘의 지배자인 발타스 가문은 둘 중 하디트 가문의 편을 들어 주었는데, 바로 가주의 아내가 그쪽 가문 출신이어서였다.
문제는 지금 하디트 가문이 패배 직전이라는 것.
승기를 잡은 코렐 가문의 군대는 상대 진영에 속해 있던 가문의 영토를 휘젓고 다니며 항복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이곳 오렘 시가 슬슬 그러한 일을 당할 차례이고.
모든 설명을 들은 투란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으음...."
이야기를 들으니 왜 도시의 분위기가 이렇게 어수선해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그런 와중에도 도서관 앞에 기사 한 명을 경비로 세워놓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마 기사를 빼면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이 드러날 테니 허세라도 부리고 싶었던 것이겠지만.
"뭐어, 사람이 다 그런 것 아니겠냐. 지금 있는 놈들부터가 사백 년쯤 해 먹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정도면 슬슬 바뀔 때가 됐지."
사서는 이러한 전쟁은 언제나 있었던 일이라며 썩 대단치 않은 일이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확실히 수천 년을 살며 이 도시의 주인이 몇 번이고 바뀌는 모습을 보았던 이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했다.
"아무래도 이 근방에는 너무 오래 있지 말아야겠네요. 쓸데없는 일에 말려들 수도 있으니."
마법사라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은 별로 없으니 비제를 타고 다니는 것이 딱히 눈에 띄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까.
투란은 의자에 앉은 채 고민에 빠졌다.
엔릴 사막은 앞으로 일이 년 정도는 더 있다가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남부라도 여행해 보면....
"윽."
그때, 투란은 내면에서 찌르듯 솟아나는 날카로운 감정의 신호에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아찔하기까지 한 고통과 공포, 그리고 누군가를 간절히 찾는 마음....
'비제?'
그것은 영혼으로 결속된 단짝, 비제의 감정이었다.
투란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며 사서에게 외쳤다.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또 오거라."
느릿한 사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투란은 은신 마법을 사용하며 도서관에서 뛰쳐나온 상태였다.
탐색 마법을 발동하자 동쪽에서 비제의 체취와 옅은 피 냄새가 났다.
그래도 계속해서 감정이 전해져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
투란은 곧바로 비행 마법을 사용해 동쪽으로 날아올랐다.
뒤쪽에서 도서관을 지키던 기사가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얼굴을 찡그렸다.
* * *
'고작 한두 시간 정도였을 뿐인데....'
투란은 하늘을 날며 혀를 찼다.
비제 정도면 어지간한 귀족도 잡기 힘든 마수인 만큼 알아서 놀라고 내버려 둔 것인데 그 잠깐 사이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과거 엔릴 사막에서 며칠씩 내버려 두었어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재수가 없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비제를 제압한 범인이 누구인지는 짐작이 갔다.
한창 이 근방을 휘젓고 다닌다는 코렐 가문의 귀족들.
정황상 그놈들밖에 후보가 없었다.
냄새가 향하는 방향으로 쭉 나아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 주둔지가 보였다.
아라비온의 군대와 달리 이들의 막사는 여러 개의 천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귀족은 여덟 명, 기사는 서른다섯 명인가....'
투란은 성유물의 감각을 이용해 주둔지 내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
귀족의 비율이 유난히 높은 것은 아마 정복전이 아닌 굴복시키는 것이 목표여서일 터.
은신한 채 주둔지 안쪽으로 들어서자 어느 덩치 큰 여자가 비제를 한 손에 움켜쥔 채 검은 머리의 남자 귀족에게 넘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마력은 지금 투란이 가진 것의 절반이 조금 넘는 수준으로, 일반 마법사 가문의 가주들 중에는 상당한 수준의 강자였다.
아마 이 주둔지의 대장인 듯했다.
"아니, 그건 또 뭡니까? 누님."
"마수. 지나가다 눈에 띄어서 잡았어. 잘 가둬놔."
"보기보다 엄청 강하고 사나운 놈이야. 이거 봐, 여기 긁혔다니까?"
덩치 큰 여자의 옆에 있던, 동료로 보이는 귀족이 자기 팔뚝을 드러내며 으스댔다.
검은 머리 귀족은 이를 무시하며 대장에게 질문했다.
"왜 그냥 죽여서 드시지 않고요?"
"아들놈한테 주려고. 지금 죽이면 집에 돌아가기 전에 사령이 되어버리잖아."
"아하...어라, 누님. 이 녀석 주인이 있는 모양인데요?"
검은 머리 귀족이 비제의 발목 부분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곳에는 투란이 야생 검독수리로 오해받지 않게 하고자 묶어둔 끈이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대장으로 보이는 귀족은 알고 있었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그거? 신경 쓰이면 풀어서 버려."
"그래도 됩니까? 혹시 어느 대가문에서 키우는 놈이기라도 하면...."
"그런 놈이 이런 촌구석에 왜 있겠냐? 신경 쓸 것 없어. 기껏해야 하디트 쪽에서 누가 비싼 돈 주고 사 온 거겠지. 어차피 우리 쪽에 마수 키우는 사람은 없잖아?"
"그야 그렇죠."
검은 머리 귀족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비제의 발목에 묶여 있던 끈을 태워 버렸다.
비제는 날카롭게 삐약거렸으나, 날개 한쪽이 이상한 각도로 꺾인 탓인지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못했다.
투란은 그 모습을 보자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놀랍도록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나친 분노로 감정이 모두 타들어 가고 이성만이 남은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잠시 후, 그는 은신을 유지한 채 비제를 든 귀족을 따라 주둔지 구석에 자리한 천막으로 향했다.
검은 머리 귀족은 두꺼운 금속 막대에 열을 가해 이리저리 구부리는 것으로 즉석에서 작은 감옥을 만들고 있었다.
"음, 뭐 날개도 꺾였는데 이거면 되겠지...기사 하나 붙여서 지키라고 하면...어?"
검은 머리 귀족이 의아해한 것은 자신의 뒤에 드리운 그림자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회색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젊은 청년이 보였다.
이런 사람이 우리 군대에 있었던가?
아니, 그보다 소리조차 없이 막사 안에는 어떻게-
"실례합니다. 그 검독수리는 제 친구인데,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어, 어? 그게 누님이 잡아오신 거라 곤란한데."
검은 머리 귀족은 느닷없는 상대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어수룩한 태도로 대응했다.
주둔지 한복판에 자리한 막사 안에서 갑자기 외부인이 출현했다는, 그리고 대장이 잡아 온 새를 돌려 달라고 정중히 요구하고 있다는 상황....
미처 상상조차 못한 전개에 순간적으로 뇌가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그와 함께 본능적으로 상대를 향해 마력을 투사했으나, 어째서인지 돌아오는 반작용이 없었다.
마법사 사회에서 상대를 향해 마력을 투사하는 것은 자신의 힘이 이 정도임을 알려줄 테니 네 힘은 어느 정도인지를 보이라는 요구.
이에 응하지 않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였다.
아예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보통 인간이거나, 그게 아니면 자신의 마력량을 떳떳이 내보이지 못할 만큼 형편없는 마법사거나.
조금 머리가 차가워진 검은 머리 귀족은 상대가 실상 대단치 않은 놈이며, 어떻게든 제 동물을 데려가려 허세를 부리고 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래도 일말의 위험이 있는 만큼, 그는 신중히 처리하고자 질문을 던졌다.
"이, 일단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이름 말야. 이름."
"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소중한 아이이니 돌려주십시오. 그러면 날개를 부러트린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검은 머리 귀족은 이어지는 말을 듣고 확신했다.
이 녀석, 기껏해야 기사거나 자기보다도 못한 최하급 수준의 귀족이 분명하다고.
그렇지 않다면 제 힘을 드러내서 내가 누구인지 아냐고, 당장 내놓으라고 겁박하는 게 이치에 맞지 않겠는가.
"싫다면-"
어쩔 건데, 라고 말하려던 순간 검은 머리 귀족은 상대의 모습이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뭐지? 내가 환각을 봤나? 그게 아니면-
생각이 채 이어지기도 전,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의 머리 잃은 몸뚱이였다.
* * *
투란은 목이 잘린 채 널브러진 귀족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상대가 강하건 약하건 관계없이, 최소한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미안해하는 기색이라도 보였다면 살려 주었을 터.
그조차 보이지 않은 시점에서 놈은 강도요, 사냥해야 할 늑대에 불과했다.
목이 잘린 귀족의 몸뚱이를 뒤로한 채, 투란은 단검을 집어넣고 비제의 옆에 앉아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혼의 끈을 타고 환희에 찬 감정이 전해져 왔다.
[투란 나 아파! 이 사람들 나빠!]
"혼자 둬서 미안해. 이 사람들이 널 먼저 공격했어?"
[응!]
바닥에 쓰인 글씨를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럴 것 같다고 예상은 했지만....
주인이 있다고 표시해둔 마수를 먼저 공격해서 납치한 뒤 먹잇감으로 쓰려고 하다니, 아주 흠잡을 데 없는 강도였다.
투란은 흉내쟁이 성유물을 꺼내, 치유사 혈통의 마력 중 사 분의 일 정도를 마셨다.
몸속에 치유사 혈통의 마력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되겠지.'
평범한 생물이라면 훨씬 더 적은 양으로도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마법 생물을 치료하는 데는 더 많은 마력이 들어갔다.
뒤틀린 날개에 손을 가져다 대고 힘을 행사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뿌드득 소리와 함께 날개가 도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완전히 회복한 비제가 기쁨을 발하며 글씨를 썼다.
[이제 안 아파!]
"다행이다. 비제, 많이 아팠어?"
[응! 하지만 괜찮아! 투란이 구해줬어!]
그렇게 쓰더니, 갑자기 반대쪽 발로 글씨를 슥슥 지워내고는 약한 소리를 했다.
[앞으로는 같이! 혼자 가지 마!]
"그럴게."
혼자 남았다가 사냥당할 뻔한 것이 꽤 큰 충격을 주었던지, 비제는 옆구리의 막대기 위에 올라와서도 투란의 몸에 머리를 비벼댔다.
잠시 녀석을 위로해준 뒤, 투란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천막에서 나왔다.
이제부터는 납치범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줄 시간이었다.
55화
칠 년 전, 어린 투란이 어머니를 병으로 잃었을 당시 마을의 유지들은 재산을 관리해 주겠다는 명목으로 문서 하나를 내밀며 지장을 찍을 것을 요구했다.
거기에는 히사릴 언덕의 양 목장을 마을 공동 소유로 이전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투란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으나, 유지들은 어차피 이딴 문서는 처음부터 요식행위에 불과했다며 그를 강제로 내쫓았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투란은 육체도 마력도 채 여물지 않았던 시기라서 감히 맞서 싸울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마법사라는 사실을 대놓고 드러냈다가는 나쁜 귀족들에게 잡혀가리라는 두려움 역시 몸을 굳게 했고.
그렇게 목장에서 쫓겨난 뒤, 들판 위에 한참을 드러누워 있던 투란은 마법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며 어머니의 유산을 되찾을 방법을 떠올렸다.
바로 마을 주변에 자리한 성긴 덤불에 숨어 있다가, 마을을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것.
첫 목표는 그의 재산을 강탈한 마을의 유지들이었다.
다행히 어린 귀족의 온 힘을 다한 돌팔매질은 수십 미터 거리를 날아 중늙은이들의 뼈를 부수기 충분했다.
처음 공격한 두 명은 다리가 부러졌고, 그다음 한 명은 턱이 날아가 평생을 죽만 먹게 됐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머리를 잘못 맞아 며칠을 꼬박 앓다가 죽었다.
이에 마을의 청장년층이 복수를 위해 무기를 들고 뛰쳐나왔으나, 투란은 뛰어난 후각을 이용해 항상 먼저 위치를 파악한 뒤 멀리서 저격하여 한두 명을 맞히고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아직 어린 나이라지만 이미 그의 달리기는 마을의 누구보다도 빨랐기에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몇 날 며칠을 다투었을까.
십수 명이 더 크게 다치고 죽은 끝에, 마침내 열두 살 소년 한 명에게 고립당하다시피 한 마을은 항복을 선언했다.
문득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 것은, 지금의 상황이 딱 그때와 비슷하다고 느껴서였다.
조금 전 귀족 하나를 죽였으니 남은 적의 수는 귀족이 일곱이요, 기사가 서른다섯.
하나하나는 투란보다 형편없이 약하지만 정면으로 들이받는다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저들이 일종의 연합군인 만큼 각자 다양한 혈통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하지만, 그러한 열세는 적절한 전략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먼저 올라가 있어, 비제."
막사에서 걸어 나온 투란의 말에 비제가 곧바로 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은신 능력을 다른 이와 공유할 수 있다면 훨씬 편할 텐데.
어쩌면 자하르 가문에서는 그와 관련된 비전이 전해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과연 그것을 익힐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훌쩍 날아오르는 검독수리를 보며 근처에 있던 기사 몇 명이 놀라 외쳤다.
"어? 저거 아까 막시 님이 잡으신 마수 아냐?"
"그런 것치곤 날개가 멀쩡하잖아."
"분명히 가둬두라고 하셨는데...."
날아오른 비제 탓에 주둔지가 소란스러워진 사이, 투란은 은신을 유지한 채 대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빙빙 돌아가는 투석구에 마력을 실으며 바람길을 생성했다.
'우선 이쪽부터.'
새액, 아주 가느다란 바람 새는 소리와 돌멩이가 날아가며 덩치 큰 여자 귀족의 머리를 꿰뚫었다.
이전처럼 우악스럽게 짓뭉개 부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빠른 탓에 큼직한 구멍이 하나 생겨난 것이다.
그와 정면으로 대결했다면 일이 분쯤은 버틸 수도 있었을 실력자치고는 지나치게 허망한 최후.
던질 때 소리가 나지 않는 것과 별개로 머리를 꿰뚫는 소리는 났기에, 모두의 시선이 털썩 쓰러지는 여자 귀족을 향해 모였다.
"막시 님?"
"언니...공격이다! 공격이야!"
"모두 방어 태세로!"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한 상황에서 수장을 잃은 코렐 연합군의 군대는 순식간에 패닉에 빠졌다.
당연히 그중 자하르의 귀족이 숨어들어 공격한 것으로 의심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저 먼 엔릴 사막에 있어야 할 이들이 갑자기 기습해오리라 생각하는 건 지나치게 비상식적이니까.
그 덕분에, 투란은 느긋이 바람길을 준비하여 두 번째로 강한 귀족을 저격할 수 있었다.
'두 명째.'
이번 목표는 다소 작고 왜소한 체구의 남자 귀족.
그는 처음 당했던 이와 달리 방어용 마법기를 가지고 있었는지, 머리가 꿰뚫려 죽는 대신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머리에서 희멀건 뇌수가 흐르는 것으로 보건대 당장 전투에 참여하기는 무리일 듯했다.
그때, 귀족 중 한 명이 그제야 머리가 돌아갔는지 큰소리로 외쳤다.
"은신이야! 모두 빛을 밝혀!"
이대로 세 명째까지 죽일 수 있었으면 더 편했을 텐데.
물론 가장 강한 둘이 죽은 시점에서 우열관계는 역전된바,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투란은 가볍게 혀를 차며 손가락을 강하게 튕겼다.
마찰열을 기반으로 생겨나는 불꽃 한 자락.
거기에 강력한 바람을 훅 불어넣은 순간, 투란의 머리 위에서 솟구친 화염의 폭풍이 주둔지 전체를 휩쓸었다.
"아아아아악!"
"뜨거워, 물! 물!"
처절한 절규가 사방에서 울려퍼졌다.
만약 이러한 화염 폭풍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몰아쳤다면 대응하기 그리 어렵지 않았을 터였다.
화염이 바람에 실려 날아오는 속도란 마법사들의 기준으로 썩 빠르지 않고, 방어는 그냥 맞바람을 불면 그만이니까.
한 사람이면 몰라도 수십 명이 힘을 합치면 투란이라 한들 이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주둔지 한복판에서 갑자기 몰아친 화염 폭풍은 코렐 연합군에게 괴멸적인 손해를 강요하기 충분했다.
그와 비교적 가까이 있던 기사 여덟 명과 귀족 한 명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타죽었으며, 멀리 떨어져 있던 기사 대여섯 명 역시 끔찍한 화상을 입은 채 절규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주둔지를 휩쓴 화염 폭풍이 채 걷히기도 전, 그 중심지를 향해 수십 개의 마법이 쏟아졌다.
"죽여!"
그래도 전쟁까지 치른 능숙한 마법사들이라는 것일까?
날아드는 마법의 기세가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불꽃 화살, 암석 세례, 물 폭탄, 빛의 창, 마력이 한가득 실린 진짜 화살과 투창까지....
혈통으로 강화되고 수십 년간 숙련된 마법들은 제 주인이 실은 마력보다도 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것이 쏟아진 자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뭣...."
"은신! 빨리 빛부터!"
코렐 연합군의 귀족들은 일제히 빛의 구체를 띄워 사방으로 날렸으나, 주변 백수십 미터가 환해진 상태에서도 드러나는 이는 없었다.
"어...?"
"없잖아?"
화염 폭풍을 일으킨 뒤, 투란은 바람 마법으로 추진력을 얻어 빠르게 주둔지를 이탈했다.
그러던 와중에 마법 몇 발을 얻어맞기는 했으나 수호자 마법기를 활성화한 덕에 가벼운 상처만 입었을 뿐.
그마저도 조금 전 쓰고 남은 치유사 혈통의 마력을 소모하는 것으로 바로 회복됐다.
코렐 연합군이 마치 유령을 상대하는 듯한 기분에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사이, 투란은 다시금 바람길을 생성해 귀족 한 명을 저격했다.
상대가 이쪽의 귀족들만을 정확히 저격하고 있음을 알아챈 코렐 연합군의 기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어, 아아아...."
"항복! 항복입니다! 살려주세요!"
"항복은 무슨! 모두 흩어져서 도망쳐! 저놈은 우릴 다 죽일 셈이다!"
어느 귀족의 외침에 투란은 다시금 돌을 던지는 것으로 그 짐작이 사실이었음을 입증했다.
만약 혈통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저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면 자비를 베풀 수도 있었겠으나, 일단 이를 드러낸 이상 살려 보낸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저 먼 서쪽에 자하르 귀족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것이 언제 그와 연결될지 모를 일이니까.
["이제 같이 공격하자, 비제."]
바람 마법을 이용해 하늘을 날고 있던 비제에게 목소리를 보내자, 녀석이 삐약 울며 흩어져 도망치는 마법사들 중 한 명을 향해 내리꽂혔다.
도망치던 기사 한 명이 비제의 발톱에 걸려 갈기갈기 찢기며 울부짖었다.
"아아아악!"
살아남은 코렐 연합군의 잔당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며 직감했다.
어쩌면, 그들 중 누구도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 * *
"총 마흔세 명...좋아, 한 명도 안 놓쳤네."
투란은 마지막으로 죽인 기사의 시체를 주둔지에 내던지며 수를 셈했다.
그간 살면서 사람을 죽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마흔세 명은 이전의 기록을 한 번에 초과해 버린 수치였다.
분노로 달아올랐던 머리가 조금 식으니 그 사실이 새삼 씁쓸하게 다가왔다.
분명 저들 중 누군가는 주인 있는 마수를 사냥하는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투란이 그들을 배려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애초에 복수할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냥 떠나 버리는 것.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렇게까지 해가며 무고한 이들을 배려할 정도로 착한 사람이 못 됐다.
얻어맞은 이상 보복해야 했고, 보복한 이상 후환을 남길 수는 없었다.
"우선 정리부터 하자. 비제, 준비됐지?"
[응!]
투란은 우선 비제와 함께 마법사들의 마력을 흡수했다.
당연하게도 기사의 마력쯤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아서 그냥 사령화를 막는 정도에 불과했고, 그나마 대장과 그 바로 다음쯤 되는 귀족들은 아주 약간 도움이 되는 정도.
대신 흉내쟁이 성유물에는 무려 여섯 개의 다른 혈통 능력이 새로이 충전됐다.
그런 투란과 달리 비제는 눈에 띄게 마력이 성장했다.
아무래도 자기와 동급이거나 그보다 강한 마법사들을 여럿 먹어치운 셈이었으니까.
녀석은 강해진 힘이 기꺼운지 삐약 울며 춤을 췄다.
"너무 좋아하지는 마. 그러다가 사람 먹는 거 버릇될라."
[나 이제 강해! 다음엔 안 잡혀!]
"조심해. 아직 세상엔 너나 나보다 강한 사람들이 여럿 있으니까."
물론 정말로 투란보다 강한 사람의 수가 많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메이사와 같은 대가문의 최상위 마법사들, 그리고 그 위에 군림하는 가주들 정도일까.
대가문의 수가 열 개가 되지 않음을 생각하면 그 수는 다 합쳐야 사오십 명 정도에 불과할 터였다.
마력을 모두 흡수한 뒤에는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마법기를 찾았는데, 반지와 귀걸이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돌팔매질을 한 차례 막아낸 어느 귀족의 방어용 마법기는 일회용이었는지 깨져버린 듯했다.
이전처럼 자하르 귀족들의 추적을 걱정할 필요는 없는 만큼, 투란은 그것들을 모두 챙기고 주둔지 전체를 불태워 마지막 흔적마저 지워냈다.
"당분간은 여기서도 떠나야겠네. 어디로 가고 싶어?"
[투란이랑 같이 가면 어디든 좋아!]
투란의 질문에 비제가 해맑은 답변을 써냈다.
"그러면 저쪽으로 가보자. 기왕이면 안 가본 곳을 여행하는 게 더 재밌을 테니까."
북쪽은 아라비온과 너무 가깝고 서쪽은 하늘산맥으로 막혔으며 동쪽은 이미 왔던 곳이니 남은 선택지는 남쪽.
과거 케오른이 준 지도에 따르면 그곳에는 대가문 하나가 있었다.
시라프 습지라 불리는 땅을 지배하는 라비타스 가문.
그들은 치유사와 정화자라는 비전투적인 두 개의 혈통이 엮여 만들어진 대가문인 것으로도 유명했다.
* * *
이번 비행은 칼라마프에서 날아왔던 것과 달리 또다시 강행군이 되었다.
마법사 사회에서 영혼을 결속한 마수를 도둑질하는 것은 분명히 죽어 마땅한 죄이지만, 투란의 말 외에 증명할 방법이 없는 만큼 강도 살인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다행히 엔릴 사막에서 나올 때보다는 훨씬 순조로웠는데, 마력을 한껏 흡수한 비제의 속도며 지구력이 전보다 훨씬 나아진 덕이었다.
녀석은 거의 쉬지 않고 날면서도 피로를 호소하지 않았다.
추적 마법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피하며 사흘을 꼬박 날자 서서히 지형과 기후가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완전히 사방이 키 작은 숲과 늪지대로 뒤덮였을 때쯤, 투란은 저 멀리 마을이 하나 보이는 것을 확인한 뒤 그 근처로 착륙했다.
"이 동네 냄새가 영 별로인데...."
갈대밭 아래로 잔뜩 고인 물속에서 무언가 썩은 듯한 악취가 풍겨왔다.
어차피 후각이란 쉽게 피로해지는 법이라서 금방 적응하기는 했지만, 영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투란은 비제를 옆구리에 낀 채 조금 전 하늘에서 보았던 마을로 향했다.
이 근방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는 만큼 이곳의 풍습이나 근처에 있는 도시 등에 대한 정보를 구해볼 생각이었다.
'오.'
위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가보니 이 마을은 상당히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려 집의 절반 가까이가 호수 위에 지어져 있었던 것.
모든 집이 그런 것은 아니고, 한 삼 분의 이 정도만 그렇게 지어진 것 같았다.
투란이 가까이 다가가자 까무잡잡한 피부의 중년 여인이 그를 보며 깜짝 놀라 외쳤다.
"에그머니나!"
왜 저렇게 놀라나 했더니, 그녀의 시선은 투란의 옆구리에 매달린 비제를 향해 있었다.
"괜찮습니다, 아주머니. 착한 녀석이에요."
"내 저렇게 생긴 새는 처음 보네...그런데 혹시 병이라도 걸렸어요? 옷을 그렇게 껴입구."
그러고 보면 중년 여인의 옷차림은 투란과 달리 훨씬 얇고 팔다리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아마 남쪽인 만큼 더워서 그런 것일까.
얼마 전 칼라마프에서는 얇게 입었다는 이유로 마법사임을 들켰는데 여기서는 정반대의 이유로 수상한 취급을 받다니, 퍽 우스운 일이었다.
"그런 건 아니고 좀 멀리서 와서요. 혹시 이 근처에 큰 도시가 있을까요?"
"도시? 저기 저쪽으로 가면 나오기는 하지만은...요즘 분위기가 영 뒤숭숭해."
"무슨 일이라도 있나 봐요?"
얼마 전에 그런 분위기를 그냥 넘겼더니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만큼, 투란은 곧바로 이를 캐물었다.
중년 여인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 뭐냐, 어느 집안인지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가장 높으신 분이 얼마 전에 돌아가셔서 그렇다던데."
56화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 더 캐어 물어본 결과, 이번에 세상을 떠났다는 높으신 분은 무려 대가문 라비타스의 가주였다.
당연하게도 마을 사람들 역시 그런 이가 왜 죽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정황상 노환으로 죽은 것으로 짐작됐다.
대가문의 가주쯤 되는 이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면 분위기가 뒤숭숭한 정도가 아니라 이미 습지대 전체가 뒤집히고도 남았을 테니까.
'하기야, 신조차도 늙어 죽는 마당인데 대가문의 가주라고 별수 있을까.'
투란은 과거 보았던 아라비온 가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손짓 한 번에 수천 가닥의 벼락을 뿌려 대지를 태우는, 마치 인간의 형상을 한 자연재해처럼 보이던 존재.
그런 이들조차도 정해진 수명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사실이 새삼 무상하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투란은 마을 사람들이 모일 때 사용하는 회관에 머물며 이곳 늪지대의 음식을 처음으로 접했다.
물가에 자리한 마을답게 대부분이 생선 종류로 하나같이 푹 쪄내거나 끓인 것이었는데, 진한 흙내를 잡고자 이 지역에서 나는 여러 향신료가 들어가 맛이 꽤 특이했다.
"자자, 많이 들게!"
"젊은 친구가 멀리서 온 여행자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좀 해주게나!"
"우리는 죄다 이 근처를 떠나본 적이 없는 촌놈들이라서 말이야."
"밖에는 신기한 게 많겠지?"
회관에는 어느새 마을 주민 수십 명이 몰려들어 있었는데, 다들 멀리서 온 여행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식사와 숙박을 제공하는 대가로 투란의 여행기를 들려줄 것을 청했다.
이곳 시라프 습지는 특성상 마차나 수레 따위가 지나다니기 힘들어, 행상인들조차 습지의 안과 밖을 오가는 이가 드물기에 밖에서 온 여행자의 이야기가 귀하다는 것이었다.
그 말대로 이곳 사람들은 복식부터 건축 양식까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서부 황야와 크게 달랐다.
마치 엔릴 사막에 처음 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부모들이 그렇게 떠들어대는 동안, 따라온 어린아이 몇 명은 투란의 허리 옆 막대기에 올라타 있던 비제를 만지려 들었다.
이에 녀석이 사납게 입을 쩍 벌려 거부 의사를 드러내자 몇 명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면 안 되지, 비제. 착하게 굴어."
장난스러운 질책에 비제는 코웃음을 치듯 부리를 딱 부딪치더니 고개를 숙이고 아이들의 손길을 적당히 받아주었다.
비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뒤, 투란은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여행 중 경험했던 일들 몇 가지를 적당히 각색해서 풀어놓았다.
서쪽 끝에 자리한 하늘 산맥, 저 북해에서 배를 탔던 이야기부터 회색 지대의 바위산, 한없이 풍요로운 다케인 평야, 지금은 초토화됐지만 거대한 나무가 가득 자라나 있던 숲 지대의 도시들....
지금처럼 평민인 척하고 근처의 마을에 스며들 때마다 이러한 요청을 몇 번 받았기에, 이제 투란은 꽤 그럴싸한 이야기꾼이 되어 있었다.
가만히 이를 듣던 어느 중년 남자가 말했다.
"그러고 보면 전에 듣기로 여기서 동쪽으로 쭉 가면 바다가 있다고 했는데 혹시 거기 얘긴가?"
"아뇨, 거긴 남해죠. 제가 간 곳은 북해고...대충 이렇게 보시면 될 겁니다."
평생을 마을 주변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이 헷갈리는 탓에, 투란은 과거 케오른이 간단히 알려준 정보를 기반 삼아 직접 여행하며 본 여러 지역의 위치를 간단히 지도로 그려냈다.
제대로 재어보며 다닌 것이 아니기에 땅의 크기며 위도나 경도 따위가 모두 엉망진창인 지도였지만, 적어도 어느 지역이 어디쯤 붙어있는지는 알아볼 만했다.
"오오, 이게...?"
"여기가 우리가 사는 곳이라고? 되게 작잖아."
"젊은 친구가 저기까지 다 가봤단 말이야? 몇 년을 걸어도 모자라겠는걸!"
"저 산맥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부유한 상인들이 큰돈을 내고서라도 가지고 싶어 할 지도를 보며, 마을 사람들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의 이야기들을 즐겁게 떠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투란은 이야깃거리를 풀어 마을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대가로 이곳 사람들이 입는 옷과 신발 한 켤레를 받았다.
옷은 성기고 질겨 쉽게 헤지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는 소재에다가 팔과 다리가 절반쯤 잘린 형태였다.
그에 비해 신발은 평범한 가죽신에 비해 두 배쯤 두껍고 발목 위까지 올라왔는데, 겉 부분이 정체불명의 허여멀건 한 물질로 뒤덮여 있었다.
이는 근방에서 자라는 나무의 수액을 바른 것으로 물이 새어들어가지 않게 해 준다고 했다.
"물이 안 샌다니 배에다가 쓰면 끝내주겠는데요."
"실제로 그쪽에 쓰려고 사가는 사람들이 있다네. 대신에 불은 조심하게! 작은 불똥만 튀어도 확 타들어 가니까."
옷을 갈아입은 투란은 그대로 마을을 나서서 사람들이 알려준 길을 따라 걸었다.
확실히 그들이 준 의복을 입자 움직이기가 훨씬 편했다.
귀족의 몸뚱이가 튼튼하다고 한들 옷이 젖어 달라붙거나 신발에 물이 들어가 질척거리면 불쾌한 것은 마찬가지.
물론 감기나 그 외의 온갖 질병에 시달리느냐 아니냐가 다르기는 했다.
옆구리에 매달려 가는 게 심심했는지, 비제는 투란의 옆구리에서 떠나 근처를 몇 번 날아다니다가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아 왔다.
아무리 마수라지만 몸무게가 자신의 백 배쯤 되어 보이는 짐승을 들어 옮기는 모습은 가히 경이로웠다.
"그렇게 혼자 다니다가 또 사냥당한다."
투란의 농담에 비제가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울며 투란의 옆구리를 머리로 두드렸다.
어쨌든, 덕분에 점심은 멧돼지 고기를 이곳 방식으로 조리한 스튜로 해결할 수 있었다.
길러낸 돼지와 달리 오도독 씹히는 지방의 식감을 즐기며 식사를 마치고 한 시간쯤 더 걷자 도시가 나왔다.
이곳의 이름은 슬롭.
다른 지역과 달리 돌 성벽이 아니라 목책으로 경계를 나눠 놓았는데, 아무래도 지역 특성상 땅이 무른 탓인 듯했다.
그나마 이 근처는 도시가 세워질 수 있을 정도로 물이 차 있지 않은 곳인데도 묘하게 땅이 질척거릴 정도였으니까.
"음? 이봐! 그...까마귀는 아닌 것 같고, 뭐 하는 새지? 설마 마수인가?"
"검독수리라고 하는데, 마수는 아니고 그냥 잘 훈련받은 새일 뿐입니다. 사람은 안 해쳐요."
"흐음...."
역시 도시에서 비제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지나치게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경찰은 다소 의심어린 표정을 짓다가 동화 두 닢을 내밀고서야 투란을 통과시켰다.
"괜찮아."
비제가 다소 의기소침한 듯한 기색으로 울자 투란은 등을 팡팡 두드려 주며 위로했다.
잠시 후, 늘 그랬듯 적당한 숙소부터 잡고자 상업 지구가 늘어선 번화가 쪽으로 움직이는데 묘한 것이 눈에 띄었다.
여러 가게가 늘어선 곳 한복판에 자리한 검은 기둥.
가까이 다가가 보니 거기에는 마법, 그중에서도 대지 변형의 기술로 쓰인 것이 분명한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라비타스의 주인, 시라프 습지의 수호자, 모든 다치고 병든 이의 어머니 되시는 이쉬엘 라비타스가 천상의 신들께 부름을 받아 세상을 떠나셨다.]
[그분의 아들딸들은 이 기둥 앞에서 예를 갖추라.]
지나다니는 사람들 중 몇 명이 그 추모비 앞에서 허리 숙여 절하는 것이 보였다.
이를 잠깐 둘러보던 투란은 추모비의 마지막 부분으로 시선을 옮겼다.
[슬롭의 영주, 바르켄 크라프의 이름으로 이를 적는다.]
아무래도 이 도시를 다스리는 것은 크라프라는 이름의 가문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이름이 묘하게 낯설지 않았다.
자주 접한 정도는 아니고 몇 번 정도 본 적 있는 것 같은 느낌....
투란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
오렘의 도서관에서 읽은 이름? 베르크 가문에서 지내며 접한 아라비온의 가신 가문? 그도 아니면-
"아."
투란은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대용량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과거 저 북쪽에서 만났던, 방화광 혈통을 얻겠다고 난동을 부리던 화형꾼 오빌....
그가 밝힌 이름이 분명히 오빌 크라프였다.
'여기 출신이었다고?'
그러고 보면 분명히 남쪽에 있는 가문 출신이라고 이야기했던 것 같기도 했다.
대체 왜 저 먼 북쪽까지 가서 일반인들을 학살하고 있었는지는 도통 모를 노릇이지만.
'신이라....'
기이할 정도로 맑은 눈빛과 누군가가 알려준 기이한 미신을 신봉한다는 공통점.
예전에는 수상한 무언가가 있다는 정도로 여겼던 데 비해, 지금 투란은 오빌이나 미단에게 그러한 방법을 주입한 존재가 진짜 프레아 신족일 것이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가 다른 이의 몸을 입고 이 땅 위에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물론 왜 그러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곳의 가주가 그 정체불명의 프레아 신족과 무언가 관계가 있지는 않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저 멀리 있을 이곳 도시의 중앙 저택 방향을 바라보던 투란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가 인간 중에서 상당한 강자라고 한들 신적 존재의 행사에 함부로 끼어들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언젠가 그가 지금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저 대가문의 가주들과 맞먹는 강자가 된다면 이를 파헤쳐볼 법도 했다.
새로이 알게 된 사실에 혀를 차기도 잠시, 투란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빌의 수첩에 적혀있던 불의 영혼의 재료 중 하나, 유황.
어쩌면 그게 이 근처에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든 실험을 시키려면 재료를 모으기 쉬운 곳에 있는 사람을 고르지 않았을까.'
예상대로, 시장을 돌아다니며 수소문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이 돌아왔다.
"유황을 찾으신다고?"
"예. 좋은 해독제라고 들었습니다."
"나도 가지고 있긴 한데 썩 많지는 않아서...일단 한 줌 정도는 있는데 사시려오?"
상인은 채 한주먹도 안 되는 양의 유황에 무려 금화 한 닢을 불렀으나 투란은 흥정조차 하지 않고 이를 구매했다.
금화의 크기나 무게를 재어보지도 않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바가지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혹시 이걸 더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아십니까?"
"음? 아니, 이보쇼. 그게 내 장사 밑천인데...."
"어차피 남들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곳에서 가져오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조금만 물어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기왕 산 김에 알려주시죠."
투란의 말에 상인이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손에 들린 금화 한 닢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문 쪽 길로 한 나흘쯤 가면 온천이 여럿 있는데 그 근처에서 나올 거요. 원숭이들이 많이 있는데, 개중에는 마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구려. 그리 흉포한 놈은 아니오만."
"온천이요? 그게 뭡니까?"
"땅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이 고인 곳이오. 잘은 몰라도 그쪽 동네 사람들은 몸을 담그면 건강에 좋다고 믿더군. 원숭이들도 좋아한다던데."
원숭이 마수라고 하니 과거 발타스 가문의 귀족들과 함께 토벌했던 녀석이 떠올랐다.
이런 상인들도 존재를 아는데 굳이 토벌하지 않을 정도면 딱히 사람에게 적대적인 놈은 아닌 모양이었다.
* * *
마지막으로 금화와 은화의 규격을 잴 때 쓰는 저울까지 하나 산 뒤, 투란은 곧바로 슬롭 시의 동문으로 나와 걸음을 옮겼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을 때는 평범한 사람과 같은 수준으로 걷다가 인적이 없어졌음을 확인한 뒤에는 비제의 도움까지 받아 날며 거리를 벌렸다.
그가 멈춘 것은 반경 삼 킬로미터 내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뒤였다.
"드디어 이걸 실험해보는구나."
[뭐야? 뭐 해?]
바닥에 글씨를 적던 비제는 습지 특유의 축축한 흙이 발톱 사이에 파고든 것을 깨닫고 얼굴을 찡그린 채 마구 휘적여 이를 떼내려 애썼다.
투란은 웃으며 녀석의 발톱에 붙은 진흙을 떼어낸 뒤, 근처에 있는 나무 하나를 골라 올라가게 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아마 괜찮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멀리 가?]
"아니, 멀리 안 가. 그냥 실험을 좀 해보려고."
투란은 근처에 있던 적당한 크기의 나무 몇 종류를 부러트린 뒤 불태웠다.
첫 시도인 만큼 다소 시행착오가 몇 번 있었으나 적당히 화력을 조절한 끝에 숯 몇 덩이를 만들 수 있었다.
몰랐는데 숯을 만드는 데는 나무의 종류 역시 중요한 것 같았다.
그런 다음에는 대용량 주머니에 있던, 과거 엔릴 사막의 바니펠 시에서 산 초석을 한 덩이 꺼냈다.
'비율이 각각 75와 15, 10이었지.'
다시 수첩을 뒤져 정확히 확인한 뒤, 투란은 유황 덩어리의 절반 정도를 손으로 으깨 저울에 올렸다.
그리고 반대쪽에 염동 마법을 걸어 균형을 맞췄다.
"좋아, 이게 10...."
유황과 같은 무게를 만드는 데 어느 정도의 힘이 필요한지를 확인한 투란은 식사용 그릇을 꺼내 그 위에 유황가루를 털어넣었다.
그다음으로는 10에서 절반 정도가 더 올라간 힘을 저울 한쪽에 가하고 반대쪽에 균형이 맞을 때까지 숯을 부순 가루를 부은 뒤 이를 그릇에 넣었다.
마지막으로는 유황에 가하던 힘의 일곱 배 하고 절반 정도를 가한 뒤 초석 가루를 계량해 넣는 것으로 완성.
그 과정에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던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후우...."
세 종류의 가루를 털어넣은 그릇에는 하얀색과 흑색, 노란색 가루가 제대로 섞이지 못한 채 이리저리 뒤엉켜 있었다.
여러 차례 가루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 다지고 섞기를 반복해도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혹시나 싶어 조금 떼어내서 불을 붙여 보아도 그냥 타들어갈 뿐.
'예상은 했지만 이대로는 아무 효과도 없나.'
투란은 그 당시 오빌이 일으킨 어마어마한 폭발이 바로 이 '불의 영혼'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분명 그 당시 폭발은 동굴 좌우에 놓여 있던 검은 가루에서 시작되었으며, 다른 조합식 중에는 그런 효과를 낼 만한 이름의 물건이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그것을 만들려면 아무래도 마지막에 쓰인 '마법적인 결합'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어디.'
투란은 가루 위로 손을 얹은 채 상상했다.
서로 섞이지 못하는 이것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작은 입자, 사서에게 배웠던 가장 작은 단위부터 엉키는 것을.
순간, 번쩍하고 그릇 안에서 빛이 솟아났다.
다시 손을 떼자 가루는 과거 그 동굴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새카만 색으로 변해 있었다.
57화
이것이 바로 제대로 완성된 불의 영혼인 것일까.
투란은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낼 정도에 불과한 그것을 들어 조심스럽게 비벼보고, 냄새를 맡고, 가볍게 혀로 핥아 보며 물질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뭔가 좀...다른데.'
가장 먼저 느껴지는 차이는 바로 촉감.
분명히 조금 전 그는 세 가지 물질을 완전히 고운 가루가 되도록 빻았음에도 더 알이 굵고 거칠해져 있었다.
거기다 조금 전까지 나던 지린내와 달걀 썩은 냄새는 오간 데 없이 약한 탄내만이 풍기는 것도 이상했다.
단순한 화학적 변화라기보다는, 누군가 도중에 다른 물질로 바꿔치기라도 해버린 듯한 느낌....
가루를 내려다보던 투란은 이내 그것을 그릇에 담은 뒤 마법으로 불을 붙였다.
그와 함께 사고를 가속해 불꽃이 어떠한 반응을 일으키는지를 관찰했다.
검은 가루 위로 생겨나는 불꽃,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빠른 연소 반응과...폭발.
뻥 하는 굉음과 함께 그릇이 산산이 조각나며 흐릿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
정말로 얼마 안 되는 양에다가 작은 불꽃을 붙였을 뿐인데 이 정도 위력이라니.
물론 그와 같은 수준의 귀족에게 타격을 입히기에는 한참 부족하지만, 거의 마력을 소모하지 않고 이만한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장점이 있는 물질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방법은 과거 오빌이 썼던 것처럼 평범한 물건인 척 가져다 놓은 뒤 가까이 왔을 때 터트리는 것.
적당히 분산해서 배치하여 폭발이 폭발을 유도하게 한다면 적은 마력을 소모해 어마어마한 규모의 폭발을 일으킬 수도 있을 터였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방법을 더 상상해볼 수 있었다.
몸 옆에 뿌리고 폭발시켜서 그 반발력으로 빠르게 움직인다거나, 하늘을 날며 지상으로 대량의 가루를 투하해 폭발시킨다거나, 가루를 바람으로 상대에게 날려 폭발시킨다거나.
굳이 전투에만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회색 지대처럼 산이 많아 도로가 구불구불한 곳에서 이 가루를 잔뜩 터뜨려 돌을 부숴 길을 만든다거나, 광산에서 터뜨려서 채굴에 도움을 줄 수도 있을 터.
적어도 직접 마법으로 돌을 부숴서 길을 내는 것보다는 이걸 쓰는 게 훨씬 효율적일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조건이 있었다.
바로 이 검은 가루, 불의 영혼을 안정적으로 대량 수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유황은 동쪽 온천에 가면 구할 수 있을 거고, 숯가루는 나무만 있으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으니까...초석이 문젠가.'
지금 주머니에 있는 초석의 양은 고작 주먹보다 조금 큰 덩어리 세 개뿐.
가루로 만들어 쓰자면 썩 많은 양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 상인이 말하기를 초석이 남해에서 난다고 했던가?
마침 시라프 늪지대에서 동쪽으로 가면 나오는 것이 남해이니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 * *
남은 유황 절반까지 모두 불의 영혼으로 조합해낸 뒤, 투란은 비제와 함께 동쪽으로 움직였다.
하늘을 날다 보면 실수로 온천을 지나가 버릴까 싶었던 만큼 이번에도 걸어서였다.
물론 고위 귀족의 걸음이란 평민들의 그것과 차원이 다른바, 그는 늦은 밤이 되었을 때쯤 사나흘이 넘게 걸린다는 거리를 주파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긴가보다."
근처에 있던 마을 주민에게 물어본 결과, 온천 지대는 이곳 사람들이 뒷산이라 부르는 어느 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혹시라도 온천을 이용할 생각이면 원숭이 대왕께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몇 번이고 충고했다.
함부로 인간을 해치지 않는 분이지만, 무례하게 굴거나 제 동족인 원숭이를 해하는 이들은 용서하지 않는다면서.
'원숭이 대왕이라니.'
그 흑요정, 사령왕은 비록 메이사에게 토벌당했다 한들 투란이 혼자 맞서기 버거울 정도의 강자였다.
그런데 이런 시골의 원숭이 마수가 왕도 아니고 대왕이라니, 너무 거창한 이름이지 않나.
투란은 비제를 타고 곧바로 산을 올라 주변을 빙 돌며 유황이 있는 곳을 찾았다.
그리고 동시에 성유물의 감각을 넓혔다.
원숭이 대왕이라는 마수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는 알아본 다음 접근하는 쪽이 안전할 테니까.
그런데-
"어?"
깜짝 놀란 목소리에 위쪽에서 날던 비제가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투란은 그런 비제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답해줄 정신조차 없었다.
'마수랑 사람...둘 다 말도 안 되게 강하잖아?'
형태로 짐작건대 원숭이인 듯한 마수는 놀랍게도 그 마력이 투란보다 강하고 메이사보다 약한 수준이었다.
신화급 마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다음쯤은 될, 한번 등장하면 작은 도시 몇 개를 초토화할 수 있을 괴물.
아마도 저놈이 원숭이 대왕일 터였다.
그리고 그 마수의 맞은편에는 투란과 비슷한 급의 마법사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신장이나 몸의 윤곽으로 보아 여자로 짐작되는데, 목을 뒤로 축 늘어트리고 있는 것이 아마도 의식을 잃은 듯했다.
산 아래의 마을 사람들에게 원숭이 대왕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듣긴 했으나 저대로 두고 보기는 꺼림칙했다.
과거 아시즈와 틸리 때처럼 마수가 사람을 지키고만 있을 뿐,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일 수도 있지 않은가.
"비제, 미안한데 잠깐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을래? 나 혼자서 다녀와 봐야 할 것 같아."
비제는 불만스럽다는 듯 울었으나 그의 목소리에 실린 진지한 기색을 읽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에서 손을 떼며, 투란은 곧바로 비행 마법과 은신 마법을 사용해 성유물의 감각이 느껴지는 곳으로 접근했다.
'이건....'
그들은 산 중턱의 골짜기 깊은 곳, 유독 유황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장소에 있었다.
가까이 접근하자 어둠을 꿰뚫어 보는 시야로 한 마수와 인간의 모습이 드러났다.
원숭이 대왕은 사람 서너 명을 합친 수준의 큰 덩치에 검은 얼굴, 새빨간 털을 가지고 있었다.
전에 봤던 원숭이 마수는 물론이요, 마수 도감에서 보았던 일반적인 원숭이와도 이질적인 골격과 생김새였다.
놈은 증기가 흘러나오는 물에 몸을 담근 채 가만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앉은 여인은 원숭이 대왕과 마찬가지로 온천에 하반신을 담그고 있었는데, 위쪽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탓에 갈색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돌에 양팔을 기대고 뒤쪽에 목을 눕힌 모습은 기절했다기보다는 느긋이 반쯤 누워있는 형상에 가까웠다.
'그냥 목욕 중이었나....'
자신이 착각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투란은 바람의 힘으로 조금씩 나아가던 몸을 멈추게 하려 했다.
그때, 갑자기 삑 하고 새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소리가 시작된 곳은 물가 옆에 놓인 작은 거울이었다.
마력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마법기인 듯했는데, 아마 주변에 특정한 조건을 충족한 이가 접근하면 울리는 것으로 보였다.
깜짝 놀란 투란이 뒤로 물러서서 소리가 그치자 축 늘어져 있던 여인이 깨어나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음? 뭐야? 누가 가까이 왔나?"
의아해하는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원숭이 대왕이 물에서 튀어나와 힘껏 울부짖었다.
쩌렁쩌렁한 포효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자 물속에 있던 여인이 그런 마수를 타박했다.
"너무 성질부리지 말거라, 아이쿨. 이 온천이 우리만 쓰라고 있는 것도 아니거늘. 거기! 해치지 않을 테니 나와 보시구려! 이 늙은이가 몸 좀 보였다고 화내지는 않을 테니!"
얼핏 보인 외모며 목소리는 그리 늙어 보이지 않건만, 여인의 말투는 마치 칠십 먹은 노파의 그것과 같았다.
그녀는 잠시 기다리고도 투란이 나오지 않자 쯧 혀를 차며 온천에서 몸을 일으켰다.
"끄응, 아무래도 여기까지 해야겠구나. 앞으론 이곳도 자주 못 찾아오겠어. 누군지 모를 사람이 훔쳐보고 있어서야 목욕이라도 어디 맘 놓고 할까...."
여인의 말을 들은 원숭이 마수가 크흥 하고 콧김을 내뿜으며 발을 굴렀다.
그러지 말라고 호소하는 것일까.
원숭이들이 머리가 좋은 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 마수는 비제처럼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 같았다.
멀리서 성유물의 감각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투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은신을 해제한 뒤 그들에게 다가섰다.
"실례했습니다. 나쁜 의도로 찾은 것은 아니고, 마수가 나오는 곳인데 사람의 기척이 느껴져서 혹시 위험한 일이라도 생겼는지 확인하려고 접근했을 뿐입니다."
여인이 여전히 옷을 입지 않고 있었기에 투란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물론 흉내쟁이 성유물로 마력을 읽을 수 있는 만큼, 혹시라도 저쪽이 기습한다면 곧장 대처할 수 있었다.
투란을 본 여인은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잘생긴 젊은이였구먼! 실례는 무슨, 오히려 이쪽이 횡재했는걸. 어허, 아이쿨. 인상 펴거라. 그래서 이 늙은이를 도우려 했다고?"
"예."
"마음씨가 참 고운 사람일세. 요즘 그런 사람이 드문데 말이야."
놀랍게도 여인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저벅저벅 걸어와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무방비한 태도에 투란이 움찔하자 그녀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이 친구 겉보기만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어린가 봐? 눈 돌릴 것 없네. 내 나이가 삼백 살이 넘었고 남편만 열두 명인데 증손자보다도 어릴 아이에게 몸 좀 보이는 게 대수일까?"
그 말에 투란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직시했다.
여인은 말하는 것과 달리 얼굴이며 몸이며 기껏해야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늙은이의 이름은 리다일세. 리다 라비타스. 자네는?"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라비타스의 귀족이었다.
하기야 그렇지 않다면 저만한 강자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있을까.
"투란이라고 합니다. 칼라마프에서 왔습니다."
"칼라마프? 저 멀리 회색 지대에 있는 곳 아닌가? 멀리서도 왔구먼!"
투란이 가문이 아닌 출신지를 말했음에도 리다는 이를 묻는 대신 깔깔 웃으며 뒤로 손을 뻗었다.
이에 원숭이 대왕이 옷을 휙 던져 주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오랜 친구라도 되는 듯 보였다.
"리다 어르신...은 저 마수랑 영혼을 결속하신 겁니까?"
"음? 아니, 그런 건 아닐세. 그냥 오랜 친구일 뿐이지. 난 옛날부터 이곳에서 온천욕 하는 걸 좋아했거든. 이 녀석은 아마 여기서 천 년은 살았을 게야. 내 조부님의 조부님이 어린 시절에도 있었다고 했으니."
저만한 수준의 마수를 천 년씩 사냥하지 않고 내버려 두다니?
깜짝 놀라기도 잠시, 녀석의 마수치고 온순한 성품과 힘을 생각하면 썩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본래 마법 생물의 힘을 흡수하는 과정이란 그 효율이 높다고 보기 어려운바, 넷이 흡수한다 한들 얻을 수 있는 양은 본래 저 마수가 가진 힘의 이 할에서 삼 할 정도가 고작일 터였다.
그에 비해 이렇게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 유사시에 고위 귀족급 강자 한 마리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영혼을 결속하지 않은 '친구' 수준이니 과한 도움을 바라기는 어렵겠지만.
"그래서 착한 투란 군, 이곳에는 무슨 일인가? 혹시 온천욕을 즐길 거라면 이 늙은이는 많이 했으니 양보함세. 같이 해도 상관은 없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깔깔 웃는 것이 투란을 놀려 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어리숙한 손주를 보는 할머니 같은 모습에 투란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용무를 밝혔다.
"이곳에서 유황이 난다길래 좀 얻으러 왔습니다."
"유황? 그런 걸 쓸 데가 있나?"
"예. 해독제로 쓰인다길래...."
"주변에 독에 당한 사람이라도 있나 보구먼?"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먼 곳에서 팔아 장사라도 좀 할까 했습니다."
불의 영혼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밝힐 수가 없으니 다소 변명이 길어지게 되었다.
리다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거라면 내가 많이 있는 곳을 안다네! 바깥에 드러난 곳에서 가끔 주워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장사할 거면 그것보다는 많이 캐야겠지. 따라오게나."
리다는 투란에게 골짜기 안쪽으로 따라오라고 손짓한 후 먼저 걸음을 옮겼다.
원숭이 대왕이 투란을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힐긋 보더니 그 뒤를 따랐다.
그녀가 안내하는 곳은 꽤 깊고 복잡한 곳에 있어서, 혼자서는 길을 찾기 쉽지 않을 듯했다.
뛰어난 후각이 있다지만 그것이 길까지 알려주지는 않으니까.
잠시 후, 투란은 골짜기 깊은 곳에 노랗게 펼쳐진 땅을 보며 작게 신음했다.
"아."
가까이 다가가서 노란 돌 하나를 집어 보니 그것이 통째로 유황 덩어리임을 알 수 있었다.
문득 슬롭 시에서 그 조그마한 양을 금화 한 닢 주고 샀던 것이 떠올라서 새삼 속이 쓰려졌다.
설마 이곳에서는 바닥에 굴러 다니는 수준의 물건이었을 줄이야.
'아니, 덕분에 이곳의 존재를 알게 됐으니 정보 제공비 정도로 생각하면....'
투란이 애써 합리화하는 사이,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가져갈 바구니 같은 건 안 가져왔나?"
"이제부터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원래는 대용량 주머니로 담아갈 생각이었지만, 라비타스의 고위 귀족 앞에서 성유물을 드러내기는 다소 껄끄러웠다.
투란은 근처에 있는 나무 중 가장 큰 녀석을 쓰러트리고 한쪽 면을 통째로 파내서 쪽배 같은 형상의 바구니를 만들었다.
"오, 그거 들고 갈 수 있겠나?"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투란은 염동 마법으로 사방에 뿌려져 있는 유황 덩어리들을 움직였다.
수백 킬로그램 무게의 유황이 차곡차곡 움직여 안에 담기자, 이를 본 리다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자네 마법 쓰는 솜씨가 아주 좋구먼. 나이답지 않게."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무슨? 내 자네 나이 때는 사람 고치는 것 말곤 할 줄 아는 게 없었는걸!"
리다는 자기 가문의 아이들이 투란처럼 예의 바르고 겸손했으면 좋겠다며, 정말로 노인 같은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투란은 가만히 이를 듣다가 그녀에게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라비타스의 귀족들은 다 리다 어르신 같습니까?"
"음?"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것 말입니다. 말씀하시는 것과 달리 제가 보기에는 백 살도 안 되어 보이셔서...."
투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리다가 깔깔 웃으며 그의 어깨를 퍽 쳤다.
그 서슬에 바구니에 담겨 있던 유황이 우르르 쏟아졌다.
"아이구, 미안하네. 하지만 자네도 그 얼굴로 그런 말 하는 것 아니야! 지금까지 그러면서 아가씨들을 얼마나 홀렸을지."
"그냥 보이는 그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이제는 이 노인네까지 홀리려 드는구먼."
농담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하며 리다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치유사 혈통과 정화자 혈통을 가진 귀족은 힘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강해지면 아예 늙지 않게 된다네. 치유와 정화의 힘을 함께 쓰면 육체의 시간을 고정할 수 있거든."
"그러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되물으려던 투란은 낮에 보았던 추모비를 떠올렸다.
그냥 일원도 아니고 무려 라비타스의 가주조차 죽었음을 오늘 보지 않았던가.
무슨 질문을 하려 했는지 알고 있는지 리다가 씩 웃으며 답했다.
"왜 영원히 살지 못하냐면, 귀족이 늙어 죽는 건 사실 몸이 아니라 영혼이 늙어서 그런 것이기 때문이라네."
그렇게 말하며, 리다는 마치 손자에게 비밀 이야기라도 해주는 할머니처럼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58화
리다의 말에 투란은 유황을 담고 있던 통나무 바구니를 아래에 내려놓았다.
이 이야기가 유황을 챙기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라는 직감이 들어서였다.
"어르신께 따지려 들고 싶은 건 아닙니다만, 경전에서 말하기를 사람이 죽은 뒤에는 영혼이 천상의 궁전으로 떠나서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프레아 신들의 경전이란 게 지역에 따라 그 교리며 신들의 구성이 여럿 달라지는 경향이 있으나, 그러한 사후세계에 대한 교리만은 똑같았다.
마법사들이 죽은 이의 영혼을 흩어내는 것을 장례 의식으로 치는 것 역시 그 때문이 아니던가.
죽은 마법 생물이 원한을 간직한 채 사령(死靈)이 되어 지상에 남는 것이 아닌, 고스란히 하늘로 올라가서 신들에게 닿아 고통도 괴로움도 없는 삶을 영원히 누리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런데 저 말대로라면 천상의 궁전에 올라간 영혼들 역시 늙어 죽으리라는 것인데, 이는 기존의 사후세계를 통째로 부정하는 말이었다.
투란의 지적에 리다가 눈썹을 찡그렸다.
"이래서 젊은이들이란! 성급하게 굴지 말고 내 말을 끝까지 듣게나. 영혼이 늙어서 육신이 죽는 것이지, 영혼까지 죽는다고는 하지 않았다네. 경전에서도 나오지 않던가? 천상의 궁전에서 육신은 의미가 없다고. 자네는 죽어서도 똥오줌을 싸고 괴로워하며 살고 싶은가?"
리다는 가볍게 혀를 차며 투란이 만든 통나무 바구니 위로 올라가서 다리를 꼬고 앉았다.
"말하자면, 사람의 영혼이란 곧 몸을 움직이는 동력이라 영혼이 노쇠하면 몸의 기력 역시 쇠하고 마는 것이라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아예 숨을 쉴 힘조차 없어져서 죽는 것이고...영혼이야 뭐, 그 뒤로 천상의 궁전에 올라가 늙은 그대로 살거나 다시 젊어지거나 하겠지. 거기부터는 직접 보고 온 사람이 없으니 상상의 영역이다마는."
"그러면 영혼의 노화를 되돌릴 방법이 있어야 정말로 영생할 수 있겠군요."
"그게 바로 우리 가문이 전력을 들여 연구하는 분야일세! 아직은 여러모로 갈 길이 멀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리다가 옆에 서 있던 원숭이 대왕의 허벅지를 팡팡 두드렸다.
"이 녀석을 보게나. 거의 천 년쯤 살아왔음에도 이렇게 건강하지 않은가? 아마 아이쿨을 살려두기로 한 내 조상들도 녀석이 이만큼 오래 살 줄은 몰랐을 게야."
과연, 저 원숭이 대왕을 이곳에 내버려 둔 이유 중 하나는 마수의 수명 한계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인 모양이었다.
리다가 아이쿨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쿨이 우리보다 훨씬 오래 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원숭이의 영혼이 사람의 영혼보다 훨씬 강인해서? 아니면 더 저급하고 단순한 생명체라서? 하지만 이 친구는 말만 못할 뿐 어지간한 사람보다도 훨씬 지혜롭다네. 무언가 다른 기준이 있겠지. 우리가 모르는."
확실히, 아이쿨은 비제가 천 살쯤 먹으면 딱 저렇게 될까 싶은 느낌의 마수였다.
투란은 자신을 바라보는 녀석의 뚱한 눈동자를 마주하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제게는 영혼을 결속한 마수가 있습니다만, 그 녀석도 저 아이쿨만큼이나 똑똑합니다. 글도 쓸 줄 알지요."
"글을? 대단하구먼! 내 아이쿨에게 글자를 가르치려다 녀석이 워낙 성가셔하는 탓에 포기했거늘. 혹시 어디 두고 왔는가?"
"문제가 생길까 싶어서 산 위쪽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이곳으로 오라고 할까요?"
"그러시게. 아이쿨도 오랜만에 같은 마수 친구를 보고 싶을 게야."
리다의 말에 아이쿨이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마 자기는 마수 친구 따위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영혼의 끈을 통해 이곳으로 오라는 신호를 보내며 작은 불꽃을 쏘아 올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비제가 새카만 날개를 펼친 채 골짜기로 내려왔다.
녀석은 거대한 원숭이의 모습을 보더니 기겁하며 투란의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마수 특유의 감으로 상대의 강함을 짐작하기라도 한 것일까?
우습게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관심 없는 듯 굴던 아이쿨은 그런 비제의 모습에 상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비제. 겁먹을 것 없어. 여기는 리다 어르신이랑 아이쿨, 둘 다 친구야."
"이름이 비제구나? 나는 리다란다. 해치지 않을 테니 얼굴이라도 한번 보여주련."
리다의 나긋나긋하고 다정한 말투가 먹혔는지, 비제는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리다를 바라보았다.
아이쿨은 자신의 거구가 위압감을 준다고 생각해서인지 큰 몸뚱이를 쭈그리고 앉은 채였다.
그 모습에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비제는 슬그머니 나와서 유황투성이인 바닥을 발톱으로 긁었다.
[안녕.]
"그래, 글씨가 참 예쁘구나. 허, 글을 쓰는 마수라니, 이 아이가 오래 살며 역사서라도 쓰면 그 자체로 하나의 보물이나 다름없겠어. 혹시 몇 살이니?"
[몰라!]
"아마 열 살쯤 됐을 겁니다."
결속 당시 듣기로 녀석이 십여 년 전 잡혔을 때 아성체(亞成體)였다고 했으니 그리 큰 차이는 나지 않을 터였다.
새들이란 길어도 일이 년이면 성체로 자라는 법이니.
"어리구나, 어려! 내 이런 곳만 아니었어도 맛있는 것을 좀 챙겨 주었을 텐데."
리다는 비제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더니 아이쿨을 향해 이것 보라며, 너도 글 좀 배우면 이렇게 소통할 수 있지 않느냐고 잔소리를 해댔다.
아이쿨은 듣기 싫다는 듯 커다란 손으로 귀를 막았다.
* * *
리다가 한참 비제와 아이쿨을 중계한 끝에, 거대 원숭이와 검독수리는 나름대로 기묘한 유대관계를 형성한 것 같았다.
정확히는 고양이처럼 까불대는 새끼 새와 느긋한 대형견 같은 관계라고 해야 할까.
그사이 유황 덩어리들을 모두 바구니에 얹자, 리다는 기왕 온 김에 함께 온천욕이라도 한번 즐겨보라는 제안을 했다.
피부도 좋아지고 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잠시 후, 투란은 천 한 장으로 하반신을 가린 채 온천에 몸을 담갔다.
다른 물건은 모두 옷과 함께 벗었으나 흉내쟁이 성유물만은 금속 고리에 꿰어 목걸이처럼 만들어 걸어둔 채였다.
물의 온도는 보통 사람이라면 화상을 입고도 남을 정도로 뜨거웠으나, 그 덕분에 귀족의 몸에 딱 맞았다.
"으...."
옆에서는 비제가 날개를 펄럭이며 잠수했다가 나오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아이쿨의 두툼한 손가락에 머리가 눌려 꽥하고 물을 먹고 있었다.
거대 원숭이는 껄껄 웃다가 화난 검독수리의 부리에 옆구리를 콱 찍혔으나, 안타깝게도 두툼한 가죽에는 별 타격이 가지 않은 듯했다.
둘이 재미있게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것도 잠시, 투란은 몸에 천 한 장을 감은 채 마찬가지로 온천욕을 즐기는 리다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제게 바라시는 게 있으십니까?"
"음?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는가?"
"조금 전에 하신 이야기들, 그냥 지나가듯이 하기에는 중요한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아서요."
무려 모두가 바라는 보물 중의 보물, 영생의 비밀에 대한 토론이지 않은가.
그냥 수다쟁이 노인이 떠들었을 뿐이라고 넘기기에는 무거운 이야기였다.
하물며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는 더더욱.
투란의 말에 리다가 씩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거야 다 자네 때문이지. 내 남편들도 잘생긴 이들만 골라 뽑았건만 자네만한 이는 없었거든. 남자들이 예쁜 여인 앞에서 아무 말이나 술술 나오는 거랑 마찬가지라네."
네 외모에 반해서 기밀을 줄줄 불었다는 말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자, 리다가 낄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농담이니 그렇게 보지 말게! 우리가 늙지 않는 것이야 어지간하면 다 아는 일인 데다 영생을 목표로 한다는 게 알려진다고 한들 뭐가 그리 달라지겠나? 어차피 아는 게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거늘."
그렇게 말하는 리다의 얼굴에는 묘한 피로감과 좌절감이 묻어나 있었다.
하기야 그녀의 나이와 강함을 생각하면 이번에 죽은 라비타스의 가주와 그리 먼 관계가 아닐 터였다.
어쩌면 자매쯤 되는 관계일지도.
그때, 리다가 갑자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며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사실 자네에게 이런 말을 꺼낸 건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가 맞네. 혹시 백요정(白妖精)을 본 적 있는가?"
"백요정이라면...."
"정확히는 생령술사(生靈術士)의 소질을 타고난 백요정 왕족 말일세."
과거 투란이 몇 번 만나고 싸웠던 흑요정들이 죽은 자의 영, 사령을 다룬다면 백요정은 살아있는 자의 영인 생령을 다룬다고 했다.
그것 말고는 정보가 거의 없는데, 이는 땅굴로 파고들어 제법 번성한 흑요정들과 달리 수천 년 전 씨가 마르다시피 한 탓이었다.
심지어 투란이 읽었던 세계 일주기에서도 백요정은 '이 지방에 옛날에 그런 애들이 살았다더라'라는 식으로 언급된 것이 고작이었다.
"아뇨, 없습니다. 백요정이라면 이미 멸종하지 않았을까요? 저도 역사서를 꽤 봤지만 지난 수천 년간 아예 등장했다는 이야기가 없는 수준이던데...."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어쩌면 세상의 오지 어딘가에는 아직도 인간들을 피해 근근이 살아가는 백요정들이 있을지도 몰라.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하다네. 언젠가 백요정 생령술사를 발견하게 된다면 생포하건 설득하건 우리에게 데려와달라는 게야."
확실히, 산 자의 영혼을 다룰 수 있는 존재라면 라비타스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영혼을 다루어 노화를 멈추거나 역행할 수 있다면 문자 그대로 영생의 길이 열리는 셈이니.
리다가 다소 오묘한 표정으로 투란을 바라보며 이어서 말했다.
"자네의 가진 힘이나 기술로 보아 평범한 집안 출신이 아닐 텐데, 그런데도 가문조차 밝히지 못하고 떠도는 것으로 보아 어떤 이유에서건 집안 내에서 어울리지 못한 것이겠지. 그만큼 남들이 가지 못하는 곳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겠나? 모름지기 짊어진 것이 많아 엉덩이가 무거운 이들은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하는 법이니."
제대로 마력을 겨루어본 적도 없건만, 리다는 투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것처럼 말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서너 개의 마법기 중 흉내쟁이 성유물과 유사한 기능을 가진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투란은 그녀의 말을 부정하는 대신 가만히 듣다가 역으로 질문했다.
"생령술사를 데려오면 저는 무엇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녀가 알려준 지식은 상당히 희귀한 것이었지만, 수천 년 전 사라졌을 생령술사를 데려오는 것의 대가라기에는 터무니없이 가벼웠다.
막말로 이는 어느 대가문의 대표 성유물을 훔쳐 오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적어도 그쪽은 실존한다는 것이 확인된 물건이기라도 하니까.
투란의 말에 리다가 씩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대가라, 나는 어떻겠나? 나이가 좀 많긴 해도 어디 가서 빠지는 외모는 아니라고 자부한다네. 자랑하기 쑥스럽다만 내 남편들 역시 모두 내게 만족해왔고 말이야."
찰랑거리는 검은 장발, 매끄럽고 건강한 갈색 피부를 한 미녀가 몸을 감춘 천을 슬쩍 들치며 유혹했다.
하지만 투란은 거기에서 특별히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 늙은 사람처럼 굴던 것이 머릿속에 강하게 남은 탓이다.
무엇보다도, 슬슬 이게 저 노인이 자신을 놀리는 방식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터득한 상태였다.
"진지한 답을 듣고 싶습니다."
"재미없는 친구 같으니! 그래, 만약 자네가 생령술사를 데려온다면, 우리는 자네에게 불로(不老)의 성유물을 줄 걸세."
늙지 않는 성유물....
투란은 무의식중에 조금 전 옷과 함께 벗어둔 수호자 마법기를 바라보았다.
비슷한 기능의 물건을 가지고 있기에 그녀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설마 라비타스의 혈통 능력이 그대로 담긴 물건인 겁니까?"
"정확히는 쉬지 않고 착용자에게 치유와 정화의 힘을 부여하는 물건이라네. 이미 평범한 인간에게 착용시켜 죽을 때까지 늙지 않음을 확인했지. 당연히 우리에게도 한 개밖에 없는 보물일세."
"착용한 이는 몇 살까지 살았습니까?"
"백이십에서 백삼십 살. 개인차가 있지만 보통 그 정도로 살더구먼."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에 투란은 잠시 숨을 돌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말대로라면 정말로 신들이 남긴 최상위 성유물과 맞먹는 것이지 않은가.
새카만 하늘 위로 점점이 밝힌 별을 보고 있자니 좁아졌던 사고가 다시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번뜩 떠오른 생각에 투란은 리다에게 질문했다.
"혹시 저 말고도 이런 제안을 받은 이들이 더 있습니까?"
"몇몇 친분이 있는 대가문의 유력자들에게 은밀히 제안해 두었다네. 드물지만 자네 같은 방랑 귀족들 중 강한 이들도 있고. 당연히 보상은 가장 처음 데려오는 사람의 몫일세."
말하자면 그는 라비타스 가문이 여기저기 뿌리는 낚싯바늘 중 하나인 셈이었다.
한 개를 던지는 것보다는 두 개에서 세 개, 백 개를 던지는 쪽이 더 유리할 테니까.
확실히 뛰어난 실력자임에도 가문에 소속되지 않은 채 떠도는 귀족이란 딱 백요정을 찾아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존재였다.
수천 년 전 사라진 종족이 숨은 곳이라면 일반인이 드나들기는 어려운 곳일 텐데, 강대한 마법사들이란 보통 제 가문의 근거지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기 마련이니.
몇 번 고민해 봐도 썩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줄기차게 그것만 찾으라는 요구도 아니고, 그냥 돌아다니다 운 좋게 찾기라도 하면 성유물이 들어오는 것 아닌가.
"혹시 찾는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대답 하나면 오늘 이 늙은이가 신나게 떠든 값으로는 충분하구먼."
리다가 노인답게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 * *
온천욕을 즐긴 뒤, 리다는 나중에 또 보자면서 산 아래로 먼저 훌쩍 떠나 버렸다.
적당한 장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투란은 유황 덩어리를 모두 대용량 주머니에 보관했다.
물론 냄새가 독한 만큼, 주머니 안의 공간을 잘 분배해 다른 물체와 접촉하지 않게 조정한 뒤였다.
성유물답게 이 주머니에는 그런 기능도 있었다.
완벽히 수납한 뒤 그 양을 들여다보자 새삼 탄성이 나왔다.
'어지간하면 모자랄 일은 없겠는걸.'
아마 이백에서 삼백 킬로그램쯤 될까.
이마저도 그 골짜기에 있던 양에 비하면 티끌만한 수준에 불과하니 더 필요해지면 그때 다시 와서 챙기면 될 터였다.
투란은 비제를 옆구리에 앉힌 채 동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지난밤에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생령술사를 데려오면 영생을 보장해 주겠다는 말....
그 대화 도중 투란은 눈앞에 보이는 영생에 대한 유혹만이 아닌, 도서관에서 봤던 옛 프레아 신의 기록을 떠올렸다.
말년에는 인류에 대한 경멸과 통제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그 존재를.
만약 그가 몸을 옮기거나 생령술사의 힘을 빌려 수명을 연장하다가 깔아보던 제 후손들이 영생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면.
그래서 언젠가는 신들의 영역조차 노리게 될 거라는 피해망상에 빠진다면?
어쩌면, 통제할 수 있는 소수의 백요정을 뺀 나머지를 멸종시켜서라도 이를 막고 싶지 않았을까?
59화
동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투란은 가장 먼저 새로 확보한 유황과 가지고 있던 초석 대부분을 사용해 불의 영혼을 조합했다.
소량을 남겨둔 것은 다시 확보할 때 어떤 물건이 필요한지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확보한 불의 영혼은 덩어리로 치면 세 주먹이 조금 넘는 양으로 가지고 있던 초석보다 약간 많은 정도에 불과했는데, 이는 제작 비율상 초석이 가장 많이 들어가서였다.
정작 숯가루나 유황은 필요한 양이 적은 데 비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는 게 유감이었다.
계속해서 동쪽으로 나아가며 투란은 그렇게 확보한 불의 영혼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실험했다.
그 결과, 바람의 힘으로 확 뿌려낸 뒤 광역 폭발을 일으켜 공격하거나 몸 옆에서 터트려 추진력을 확보하는 방식이 가장 실용성이 높음을 알 수 있었다.
'추진력 확보는 좀 아프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보이지 않는 힘으로 몸을 후려쳐서 강제로 움직이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발바닥에서 폭발시키는 게 덜 아프긴 한데, 이것을 실험하다가 신발에 가연성 점액이 붙어있음을 깜빡해 날려 먹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렇게 여행과 실험으로 며칠을 보낸 뒤, 투란은 다시 비제의 다리를 움켜쥐고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온천욕의 힘으로 다소 남아있던 피로까지 털어낸 비제가 날고 싶어 안달이 났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곳 습지에서의 여행이 생각보다 더 고역이었던 탓이다.
첫 번째는 시도때도 없이 내리는 비.
다 내리고 나면 그냥 몸에 있는 물을 날려버리면 그만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비가 내리는 중에는 그대로 맞아야 했다.
쏟아지는 빗물 하나하나에 염동 마법을 걸어 막을 수는 없으니 아예 방어막을 쳐야 하는데 그러고 이동하자면 움직이면서 계속 앞쪽으로 방어막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실험 도중 방수 장화를 잃어버린 뒤로는 계속 신발 안에 물이 찰랑이게 된 것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둘째로 밤에 모기를 비롯한 벌레들이 꼬이는 것 역시 참을 수 없이 귀찮았다.
다른 지방이라고 그런 게 없지는 않지만, 이곳 습지는 정도가 지나쳤다.
노숙하건 어느 마을에서 머물건 누워서 눈만 감으면 온몸이 간질거리도록 벌레들이 달라붙는데, 딱히 녀석들의 이빨이며 침 따위가 몸을 파고들지는 못하지만 그냥 위에서 기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끔찍이 불쾌했다.
본래 양치기 출신으로 여기저기 여행하며 노숙하는 데 익숙한 투란조차 그럴 지경이니, 아마 아시즈 같은 이들이 이곳에 머물렀다면 하룻밤만 자고도 기겁하며 결계사를 찾지 않았을까.
그런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언가 수확이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근처의 마을이며 도시 몇 군데를 돌며 초석에 대해 알아보아도 마땅한 수확이 없었다.
백요정에 대한 것이야 이 땅에 실마리가 있었다면 리다가 진작에 확보했을 테니 굳이 찾을 가치도 없었고.
그렇게 모든 불편에서 벗어나고자 높이 날아올라 동쪽을 향해 쏘아지기를 하루.
지난 며칠간 걸어온 것의 몇 배가 넘는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하자 곧 눈앞에 새파란 수평선이 펼쳐졌다.
남해였다.
* * *
남해는 과거 투란이 갔던 북해와는 냄새부터가 달랐다.
북해가 좀 더 서늘한 느낌의 바다 비린내 위주라면, 남해는 따뜻함 속에 여러 생물의 냄새가 뒤섞여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오래간만에 보는 바다를 만끽한 뒤, 투란은 남쪽으로 쭉 내려가며 어촌 몇 개를 지나쳐 어느 항구도시에 도착했다.
기껏해야 인구 수천쯤 될법한 크기로, 아바챠나 코마드처럼 교역의 중심지가 되는 곳은 아니라 그냥 근근이 주변의 생선이나 잡아 팔며 연명하는 곳인 듯했다.
도시로 들어선 뒤에는 가장 먼저 물고기를 파는 상인을 찾아, 전갱이를 수십 마리 사서 인적이 드문 해안가로 향했다.
그리고는 이를 모두 비제에게 먹이로 주었다.
이제는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디르민 가문 아가씨의 조언을 외워 두었다가 따른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비제는 그간 여행하며 먹은 육지 생물들의 고기보다 전갱이를 훨씬 맛있게 먹었다.
"이거 좋아한다며, 남쪽 전갱이도 괜찮니?"
[응! 맛있어!]
그렇게 열심히 일한 비제에게 특식을 대접한 뒤, 다시 시장을 방문해 초석을 찾자 예상대로 매물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 돈이 문제였다.
"...이게 금화 다섯 닢이요?"
"불로영생의 비약이라니까! 목숨이 걸렸는데 그게 싼가!? 자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늙어 죽는 걸 보고 싶어!?"
"두 분 다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어, 아니...그러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러고 보면 바니펠에서 초석을 팔던 상인도 딱 똑같은 소리를 했는데, 아무래도 초석 상인들 사이에서 공통으로 통하는 판매 전략인 모양이었다.
물론 정말로 이게 불로영생의 비약이었다면 리다를 비롯한 라비타스의 귀족들이 백요정을 찾아 헤매지는 않았을 터.
가진 돈을 털면 이곳의 초석을 몽땅 사버릴 수도 있겠으나 말 그대로 돈 낭비였으며, 무엇보다도 모두 산다고 한들 유황의 양과 균형이 맞지 않았다.
애초에 불의 영혼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초석의 양은 무려 유황의 일곱 배 이상이 아니던가.
따라서 투란은 지난번 유황을 구했을 때처럼 초석을 소량만 구매한 뒤 이것이 어디서 나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순순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허, 그런 건 왜 물으쇼?"
"비밀이오, 비밀!"
"거기 외지인, 자꾸 그런 거 묻고 다니면 재미없을 거요."
초석을 파는 상인 몇 명을 물어봐도 하나같이 비슷한 대답이 돌아오더니, 나중에는 으름장까지 놓았다.
아무래도 초석의 산지가 어디인지를 비밀로 묻어두는 세력 같은 게 있는 것 같았다.
'비밀이 유지된다는 건 쉽게 구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
유황처럼 그냥 며칠 거리를 걸어가서 구해올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비밀을 유지하려 해도 될 리 없었다.
희소성 역시 없을 것이고.
남해에서 난다는 정보와 결합해 보면 저 바다 어딘가에 초석이 나는 섬 같은 게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속으로 한참 추리하던 도중, 누군가가 뒤쪽에서 은밀하게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상대의 손이 주머니로 향하는 순간 곧바로 손목을 부술 준비를 하는데, 의외로 손은 주머니가 아닌 어깨로 향했다.
"이보쇼, 젊은이."
뒤를 돌아보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이는 허름한 옷차림에 이빨 몇 개가 없는 중늙은이였다.
딱 전형적인 부랑자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는 투란을 향해 음흉한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초석이 나는 곳을 찾는다고?"
"예."
"이미 몇 개 샀는데도 더 많이 찾는 것으로 보아선 구해다가 장사라도 하려나 보지?"
초석을 샀다는 사실까지 아는 것으로 보아 투란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듯했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게 썩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시장을 들락거리는 수백 명의 기척을 일일이 신경쓰지는 않으니까.
투란은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합니다."
"그러면 말이야, 내 초석이 나는 곳으로 안내해줄 수 있는데."
"제가 뭘 드려야 합니까?"
처음 본 사이에 공짜로 초석 산지를 안내해주리라 믿는 것은 바보뿐일 터.
이미 예상했던 질문인지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돈이면 충분하지. 초석은 섬에 있거든. 배를 타면 탑승료를 내야 하는 법 아니겠나."
마침 조금 전 추론했던 것과 딱 맞는 이야기.
투란은 주변을 슬쩍 둘러본 뒤 사내에게 물었다.
"얼마입니까?"
"금화 열다섯 닢. 비싸진 않지? 초석을 캐서 다른 곳에 팔면 몇 배는 받을 수 있다구."
"좋습니다. 다만 돈은 초석 산지가 있는 곳을 확인하고 드리고 싶은데요."
"아이쿠, 물론이지. 나를 어찌 믿고 그 큰돈을 지금 주나. 내일 해지고 한 시간 정도 뒤에...저기 저 산 보이지?"
"예."
남자가 가리킨 것은 도시 한쪽을 감싸듯 솟은 산이었다.
그리 높지는 않은, 딱 동네 뒷산 정도 높이였다.
"저 산 뒤쪽으로 쭉 가면 작은 마을이 하나 있거든. 그곳으로 배가 올 거야. 돈은 거기 타서 주면 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투란의 감사 인사에 남자가 흐흐 웃었다.
"오히려 내가 고맙지."
그렇게 말하고 남자가 떠난 뒤, 투란은 근처에 있던 아무 여관이나 골라 방을 하나 빌렸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비제가 꿈틀거리더니 발톱을 휘젓길래 투란은 곧바로 대용량 주머니에서 모래 담긴 석판을 꺼냈다.
[그 사람 거짓말쟁이!]
아무래도 석판은 공간이 한정된 만큼 쓰이는 문장이 짧고 간결했다.
그래도 이런 대화를 자주 나눠본 만큼 투란은 이를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었다.
"초석이 어디서 나는지 알려준다던 사람?"
[응!]
"왜 그렇게 생각했어?"
투란의 질문에 비제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글씨를 썼다.
[초석 비싸, 알면 직접 캐!]
"그렇지. 이야, 너 진짜 똑똑하구나. 사람들도 그 생각을 못 해서 속고는 하는데."
사람이 아닌 검독수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날카로운 분석에 투란은 웃음을 터트리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투란도 알았어?]
"대충은."
며칠 씻지 않은 사람 특유의 고린내 사이로, 먹잇감을 사냥하기 직전의 포식자가 내보내는 흥분의 냄새가 풍겼다.
기억하건대 사람에게서 그런 냄새가 났던 경우는 하나뿐이었다.
강도질하기 직전인 강도들.
"아마 밀수선이나 해적선 같은 거겠지. 찾아가면 돈을 뺏은 다음 뱃노예로 쓰려고 할지도 모르고."
한창 청새치 호를 타던 도중 선원들에게 바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지라, 이쪽으로는 아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왜?]
"정보를 줄 수 있는 친구들이 알아서 모여준다는데 찾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아마 이곳의 상인들을 잡아다 마법을 보여주며 을러대거나 고문을 가했으면 초석이 나는 곳을 알기는 어렵지 않았을 터.
그런데도 투란이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상인들이 알려주기를 거부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자기들의 밑천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려주어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
그런 와중에 이쪽의 재산과 자유를 뺏으려 드는, 그래서 아무 가책 없이 가학성을 풀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찾아오다니?
그야말로 반갑기 그지없는 일 아닌가.
마지막에 그 남자에게 말했던, 알려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 * *
다음날, 투란은 해가 뜬 내내 여관에 틀어박힌 채 마법을 수련하다가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밖으로 나왔다.
곧 통금 시간이라서 지금 나가면 성벽 안으로 들여보내 줄 수 없다는 관문 경찰의 설명에 정중히 예를 표한 뒤, 부랑자 같은 이가 설명했던 곳으로 걷자 작은 마을 하나가 나왔다.
마을 목책 앞에 걸터앉은, 유난히 인상이 나쁜 청년이 껄렁대는 어조로 물었다.
"혹시 배 타러 온 손님이신가?"
"예."
"들어가슈."
마을 안으로 들어서는데 뒤쪽에서 '병신'하고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노골적으로 함정 같은 냄새를 풍기는 것이 아닌가 싶을 무렵, 앞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투란은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이건 또?'
얼마 전 유황 온천에서와 마찬가지로 느껴지는 강렬한 마력의 흐름.
심지어 그 힘이 리다는 물론 아이쿨보다도 더 강력했고, 메이사보다는 조금 못한 수준이었다.
분명히 대가문의 최상위급 마법사란 전 세계를 뒤져도 백 명이 채 넘지 않을 텐데 뭐 이리 자주 만난단 말인가?
그가 행성처럼 강력한 마법사들을 끌어들이는 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라비타스의 고위 귀족...설마 후계자인가? 그런데 왜 이런 곳에?'
투란은 의아해하면서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설마 누군가가 그를 잡고자 함정을 파놓은 것이라면 하다못해 밤중에 오라고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어차피 이 정도 어둠 속에서라면 메이사가 직접 쫓는다고 해도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옆에 있는 작은 기척은 아마 호위하러 온 기사들일까?
그렇게 분석하며 해안가에 있는 배를 향해 걷자, 얼마 지나지 않아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그게 정말인가?"
"설마 지어내겠습니까? 제가 살려줍쇼, 하고 빌었더니 그놈들이 그러는 겁니다. 내 다리 사이로 기어봐라, 그러면 살려주마! 그래서 제가 냉큼 구르면서 그곳을 콱 찼더니...."
범선 앞에 피워 놓은 모닥불 주변, 딱 봐도 뱃사람처럼 보이는 험상궂은 남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투란의 감각에 들어온 기사는 그중 두 명으로, 아마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뱃사람들 사이에 앉아 넉살 좋은 태도로 떠들어대는 청년이 있었다.
나이는 외관상으로 봤을 때 투란보다 대여섯 살쯤 많을까?
짧게 친 은발에 키는 조금 작지만 어깨가 떡 벌어지고 잘 단련된 체격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바로 투란의 감각에 잡힌 정체불명의 대마법사였다.
"에라이, 허풍도 작작 떨어라 임마!"
어느 선원이 마법사의 뒤통수를 퍽 때렸으나, 놀랍게도 그는 성질을 부리는 대신 헤헤 웃었다.
대가문의 최상위 귀족, 혹은 후계자쯤 될만한 실력자가 일반인들을 상대로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일반인인 척 위장하는 것이야 투란 자신도 자주 해온 일이긴 했으나, 막상 제삼자의 눈으로 저런 광경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치 늑대 무리에 능청스럽게 끼어든 사자를 보는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 은발 마법사의 시선이 투란을 향하더니 그 옆구리에 앉은 비제에게로 옮겨갔다.
"엇...?"
비제를 가리키며 깜짝 놀란 듯한 기색을 보이는 마법사.
마치 아는 사이인 사람을 뜻밖의 장소에서 목격했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대체 라비타스의 귀족이 비제와 만날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의아해하는 순간, 선원 한 명이 갑자기 손뼉을 짝짝 쳤다.
"자자, 손님들도 다 오셨겠다! 슬슬 가볼까!"
"어이쿠, 벌써 그렇게 됐나."
은발 마법사가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두 눈을 껌뻑이자, 조금 전 뒤통수를 후려쳤던 선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야기는 재밌게 들었다만, 이제 배 타고 갈 시간이다. 우선 가진 짐부터 다 내려놔라. 대신 실어줄 테니."
"어...감사하지만 제가 직접 들고 타도 되는데요. 소중한 물건이 좀 많이 들어 있어서."
은발 마법사의 대답에 선원은 정강이를 빡 걷어차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눈치 없기는, 이제부터 네 역할은 갑판닦이야, 새끼야."
"데려다주신다던 프레아 신족의 유적지는요?"
"그딴 걸 우리가 어떻게 아냐?"
선원의 말에 은발 마법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얼핏 보기에는 쾌활하게마저 느껴지는 웃음이지만, 투란은 그 안에 담긴 진득한 살의를 감지할 수 있었다.
"젠장, 또 속았구만. 이 개새끼들. 대체 이 근처에서만 몇 번을 속는 거야?"
화륵, 은발 마법사의 전신에서 화염이 솟구쳤다.
다른 마법사들이 으레 쓰는 것과 같은 황적색이 아닌, 마치 태양처럼 환한 백금색 불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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