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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 40-50

40화

"전...직?"

태어나서 처음 듣는 단어를 되뇌며, 투란은 곧바로 제목이 쓰여 있는 종이를 뒤로 넘겼다.

다음 장에는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인지 지리멸렬하게 써 놓은 글씨들이 한가득 있었다.

[밤 사냥꾼 = 사냥꾼 + 추격자 + 그림자 + 연금술사]

[전직 조건 : 악의 미궁 돌파]

[단독 돌파 필요? 아니면 여럿이서도 가능?]

[던전과 몬스터의 형태를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하면 조건을 달성한 것으로 취급할까?]

[해당 조건에 맞는 대상이 감지되면 개방하도록 설계할 것]

[대상에게만 진입하도록 유혹하는 기능 추가]

[대상이 아니면 진입 거부? X]

맨 위에 쓰여 있는 문장의 의미는 아마 밤 사냥꾼의 후손들에게 내려오는 혈통이 네 가지라는 의미일 터였다.

전직 조건이란 말은 여전히 의미 불명이지만...맥락으로 짐작하자면 밤 사냥꾼이 되는 것을 전직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유혹 기능이라면 투란을 끌어들인 그 정체 모를 충동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이 책의 정체는 미궁의 제작자가 남긴 낙서장 비슷한 무언가가 분명했다.

정황상 신들의 무덤을 만든 이와 동일인일 텐데, 그렇다면 절름발이 여신이나 그녀와 같은 격의 프레아 신족이 직접 남긴 글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투란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며 종이를 넘겼다.

뒷장에는 앞장과 비슷한 낙서 몇 줄, 그리고 미궁에 바글거리던 괴물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몬스터 썩은 아귀, 재료로는 거인의 피와 살점, 던전 보스인 거대 아귀는 여왕 거인을 재료로 사용.]

[동력은 마력으로? 수명 문제는 동면으로 처리.]

[산성 피랑 불 뿜기 기술을 재현할 방법은? X]

[실제 던전에 비해 너무 저레벨임. 한계를 올릴 방법은?]

몬스터라는 게 이 미궁에 가득 차 있던 그 괴물들을 칭하는 단어인 것 같았다.

녀석들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생물이고 그 재료가 고대에 사멸했다는 거인족이라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런 추악한 생물이 자연스럽게 존재한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 아닌가.

그보다는 생물마저 빚어낼 수 있는 신적인 힘에 오히려 경외감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후로도 종이를 서너 장 더 넘겨 보았으나 개중 이해할 만한 말은 별로 없었다.

대충 '대지모신 전직 실험에 응용'이나 '지난 실험 실패의 응용' 같은 글귀로 보건대 이러한 '실험'이 이곳 한 곳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뿐.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투란은 문의 눈동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들어온 게 오류라고 말했지.'

이 책을 모두 읽고 나니 대충 정황이 짐작이 갔다.

미궁의 제작자가 가지고 있던 목표는 프레아 신, 밤 사냥꾼을 만들어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그 신에게서 비롯된 네 가지 혈통을 모두 가진 마법사가 필요했다.

그 조건을 충족한 마법사가 미궁의 수장, 이 책에서 말하는 던전 보스를 잡으면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 미궁은 성유물로 인해 네 개의 혈통을 가진 것으로 인식된 투란을 그 '밤 사냥꾼 후보'와 착각하고 미궁을 개방한 것이다.

페르가 일행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관광이라도 왔다가 휘말린 모양이고.

어쨌거나 수장을 잡기는 한 만큼 혹시나 해서 자신의 몸을 다시금 점검했지만, 딱히 신적인 힘이 깃들었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저 바깥의 괴물과 귀족들을 잡아먹고 강대해진 마력만이 느껴질 뿐.

애초에 투란의 잠긴 혈통이 두 개일 가능성부터가 거의 없고, 그것이 그림자랑 연금술사일 리는 더더욱 없긴 했다.

둘 다 오렘의 도서관에서 읽은 역사서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먼 옛날 사멸한 혈통이니까.

엔릴 사막에 전해지는 전설과 대조해 보건대 아마 먼 고대, 옛 제국 시대나 그 이후쯤에 형제 가문인 자하르와 충돌하여 멸종한 것이 아닐까.

한참 생각을 정리하던 도중 투란은 문득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과거 저 북서쪽, 카마인 가문이 지배하는 땅 근처에서 죽였던 화형꾼 오빌....

인간을 태워 잿가루를 뒤집어쓰면 방화광 혈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던 그 괴인의 방식과 이곳 미궁의 방식이 어째 비슷하게 느껴졌다.

특히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방식으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설마 혈통을 인위적으로 얻는 방법이라는 것도 진짜였나?'

그러고 보면 오빌 역시 그렇게 말했지 않던가, 신이 방법을 알려 주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미궁의 제작자 역시 누군지 모를 밤 사냥꾼 혈통의 보유자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대신 직접 그런 혈통을 가진 이를 만들어냈으면 되지 않았을까?

이 주제를 두고 한참 고민하던 투란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소용돌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시간을 끌다가 나가는 소용돌이가 없어지기라도 하면 그만한 낭패도 없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 * *

소용돌이 너머로 나온 투란은 자신이 바니펠 외곽의 사막지대 한가운데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저 멀리 떨어진 곳에 신들의 무덤이 그 거대한 위용을 뽐내고 있는 것이 증거였다.

그는 비교적 높은 곳으로 이동한 다음 은신을 해제하고 영혼의 끈을 통해 검독수리를 불러냈다.

조금 먼 곳에 있었는지, 녀석은 거의 삼십 분 가까이 지나서야 나타나 투란의 머리를 콱 쪼아대곤 바닥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너무 늦어! 하루, 두 번째 날, 아무튼 늦어! 무서워!]

"하하, 미안...."

저 미궁에 갇히고 한 사흘 정도가 지났던가?

그동안 영혼의 끈을 통해서 검독수리가 느끼는 초조함을 전달받고 있었기에, 투란은 녀석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위로해 주었다.

그때, 검독수리가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냄새.]

"아."

사흘 동안 미궁에 처박혀 있던 것은 물론이요, 마지막에는 육탄전까지 불사한 탓에 투란의 옷과 몸은 썩은 살점과 피로 엉망이었다.

자신의 흔적을 없애는 과정에서 조금 정돈하기는 했지만 냄새를 없애기엔 한참 모자란 수준.

너무 더럽다는 이유로 검독수리가 탑승을 거부한 탓에, 그는 직접 두 발로 뛰어 바니펠의 오아시스로 향했다.

당연하게도 그곳은 도시의 가장 중요한 수원지(水源池)인 만큼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봐, 요즘 가문 내 분위기가 영 나쁘지 않아? 가주님이랑 가주님을 수행하던 녀석들도 안 보인 지 오래됐고 말이야."

"별일이야 있겠어? 높으신 분들 일에는 신경 쓰지 말자구.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보다 내일 한 잔 어때?"

"나 참, 사람이 기껏 심각하게 말하는데."

투란은 자기들끼리 수다를 떠는 기사 두 명의 사이를 지나쳐, 그들의 시야에 닿지 않는 곳에서 사람 두어 명이 몸을 담글 만한 양의 물을 마법으로 퍼냈다.

은신 능력 덕에 기사들은 바로 옆에서 오아시스의 물을 도둑질하는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퍼낸 물을 인적 없는 암석 지대로 가져간 뒤에는 대지를 변형시켜 구덩이를 만들고 안에 물을 채워 데웠다.

옷을 벗고 안에 들어가서 몸을 씻어낸 다음, 물을 허공으로 한 차례 띄웠다가 불순물을 모두 덜어내고 옷까지 씻어내 입자 그제야 좀 사람 같은 꼴이 되었다.

"후, 이제야 좀 살겠네...."

대체 예전에는 몇 주 동안 씻지도 않고 어떻게 살았는지.

목욕을 마친 투란은 그 흔적까지도 모두 폐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변이시켰던 땅은 다시 평평하게 만들고 물은 허공에 띄운 뒤 증발시켜 날리며 불순물은 모두 태워 없앴다.

[이제 깨끗해?]

"그래, 깨끗해. 이제 태워 줄래?"

[응!]

투란은 검독수리의 다리를 잡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바니펠 쪽에서 계속 들여보내는 부랑자들을 통해서 미궁이 열렸다는 사실은 곧 알려질 터.

가능하면 그 전에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야 했다.

앞으로 자하르에서는 열 명의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마력을 흡수한 이가 누구인지를 찾을 테니까.

안에 투란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은 만큼 미궁의 특수성으로 인해 마력이 없어진 것으로 생각해 주면 좋겠지만, 원래 이런 건 항상 나쁜 상황을 상정해야 하는 법이었다.

'아예 잠잠해질 때까지 몇 달 정도는 엔릴 사막에서 떠나 있는 게 낫겠어.'

귀족 열 명의 죽음은 자하르처럼 큰 가문에서도 지극히 심각하게 여길 만한 일이었다.

과거 아라비온과의 전쟁 당시 죽은 귀족이 각각 스물대여섯 정도였으니, 대가문 간의 전쟁에서 나올 만한 희생자의 절반 가까이가 아닌가.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차기 가주 후보이기까지 했던 만큼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질 터.

그러던 와중 정말로 우연히 투란 브람스라는 몰락 귀족이 갑자기 어마어마한 힘을 얻었다는 정황이 드러난다면?

말할 필요도 없이 범인 후보 일 순위일 게 분명했다.

물론 사막에서 벗어난다면 부모님의 흔적을 찾는다는 기존의 목표를 잠시 미뤄 두어야 하겠지만....

아마 어머니도 당신의 아들이 당신의 발자취를 뒤쫓다가 객사하기를 바라시지는 않을 터였다.

검독수리가 있는 만큼 다시 찾아오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테고.

한창 생각에 잠긴 사이, 위쪽에서 삐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독수리가 그를 내려다보며 어디로 가냐는 듯 혼란스러워하는 심상을 보냈다.

"아, 그래. 우선 저쪽으로 가자."

투란이 가리킨 방향은 북서쪽이었다.

* * *

검독수리를 타고 날아가는 동안, 투란은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전보다 강해진 마력으로 십여 킬로미터에 가까운 범위에 추적 마법을 사용, 인간의 냄새가 잡히는 순간 그곳을 피해 움직이는 식이었다.

하루 반나절 정도를 날고 쉬며 강행군하자 슬슬 사막지대가 끝나가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일방적으로 관찰한 사람들의 복식부터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날씨도 조금 더 습하고 서늘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두 달 이상, 귀족들조차 일주일쯤 달려야 할 거리는 이 날짐승의 날개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늘에서 새하얀 눈이 내릴 때쯤, 투란은 검독수리를 지상에 내려 앉혔다.

"고생했어, 여기부터는 슬슬 걸어갈 테니까 좀 쉬자. 힘들었지?"

[응. 쉴래.]

검독수리는 다소 피로한 기색으로 그렇게 글씨를 써 내려간 후 가방 옆에 설치된 막대기 위에 올라가 눈을 감았다.

투란은 녀석의 깃털을 쓰다듬어준 다음 눈 앞에 펼쳐진 하얀 바위산들을 보았다.

'여기가 회색 지대로군.'

엔릴 사막의 서쪽, 그리고 과거 투란이 아시즈와 처음 만났던 마데리 시의 동쪽에 자리한 이 지역은 거친 바위산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리고 과거 아라비온과 자하르의 군대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인 장소이기도 했다.

'여행기에서는 산맥에 숨어 살며 사람을 잡아먹는 눈먼 난쟁이들이 있다고 했던가.'

물론 정말로 그런 놈들이 있다고 해 봐야 투란에게는 썩 큰 위협이 되지 않을 터였다.

지금의 그는 어지간한 중소 가문의 가주들, 예를 들면 과거 만났던 발타스 가문의 가주보다도 강하며 대가문에서도 정예로 분류될 만한 실력자였으니까.

이만한 귀족이면 다른 귀족 가문 몇 개와 정면으로 맞붙지 않고서야 죽기가 쉽지 않을 지경이었다.

페르가처럼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처한다면 또 모르지만.

'일단 좀 느긋하게 다니면서 여기가 어딘지나 알아봐야겠다.'

투란의 새 목적지는 바로 과거 들렀던 오렘 시, 발타스 가문의 근거지였다.

그곳의 도서관을 다시 찾아가서 사서에게 미궁에서 알아낸 여러 비밀을 털어놓고 상담을 청해볼 생각이었다.

검독수리를 옆구리에 낀 채 한 시간쯤 걸음을 옮기자 옛 제국의 도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주변은 온통 새하얗게 뒤덮인 마당이건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발은 도로 위로 떨어지자마자 그대로 녹아 없어졌다.

그때, 도로 위를 걷던 투란의 맞은편에서 묘한 행렬이 다가왔다.

"엄마, 나 힘들어."

"시끄러우니까 빨리 걸어. 서면 놓고 간다!"

"이잉...."

온갖 짐을 짊어진, 남녀노소가 혼잡하게 뒤섞인 무리.

하나같이 피로한 기색이 가득한 그들은 투란을 지나치며 그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으나, 마치 말을 걸 기운도 없다는 듯 그대로 동남쪽으로 이동했다.

'뭐지?'

마치 무언가를 피해 도망가기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가 아닌가.

그들이 왔던 방향으로 걷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큼직한 도시 하나가 나왔다.

산맥 한가운데라서 그런지 큼직한 절벽을 뒤에 업은 채 반구형으로 성벽이 세워져 있었는데, 성문에 서 있던 경찰이 투란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행자? 그런데 그 새는 뭐고 옷은 또 왜...."

그가 의아해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막에서 입던 하얀 장옷은 괴물들의 피로 더러워져 씻는 김에 태워 버렸고, 지금은 아시즈에게 선물로 받은 윗옷과 바지, 망토만 입고 있었기 때문.

한겨울에 그렇게 입고 여행하는 사람은 두 종류뿐이었다.

미치광이, 혹은 마법사.

그 사실을 알아챈 경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 어어어서 오십시오! 혹시 어느 높으신 분이신지...."

아무래도 전처럼 평민 행세를 하려거든 두툼한 솜옷이나 모피로 된 옷이라도 한 벌 사다 걸쳐야 할 듯했다.

"그냥 지나가는 여행자일 뿐이다. 혹시 이곳의 주인께 하루 대접을 부탁드려도 되겠나?"

정체를 안 들켰으면 모를까 들켜 놓고 몰래 지나치는 것은 관습에 어긋나는 일.

그런데 투란의 그런 물음에 어째서인지 경찰은 우물쭈물하는 기색을 보였다.

"왜 그러지?"

"그, 그게, 이곳 칼라마프는 지금 영주님이 없습니다."

"뭐?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주인이 없는 도시라니?

딱 봐도 그리 작지 않은 크기건만, 하다못해 무레이처럼 작은 도시도 만일을 대비해 귀족 한 명은 기거하고 있지 않았나.

설마 조금 전의 그 피난 행렬도 이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저도 말단이라 잘은 모릅니다만, 최근에 서쪽에서 쳐들어온 흑요정들에게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지금 이 도시는 귀족이고 기사고 한 명도 없는 상황이라고, 경찰은 황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41화

귀족은커녕 기사조차 남지 않은 도시라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더없이 든든해 보이던 성벽이, 이제는 어느 침략자의 입김 한 번에 무너질 모래성처럼 보였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마법사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도시란 그와 다를 바 없었다.

"저, 다른 도시에서 저희를 구원하러 와주신 겁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경찰의 얼굴에는 절박함과 애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투란은 고개를 저으며 그런 기대를 부정했다.

"아니.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나는 그냥 지나가는 여행자일 뿐이다."

솔직한 대답에 경찰의 얼굴이 좌절감으로 일그러졌으나 감히 무어라 따지지는 못했다.

한낱 평민 따위가 감히 마법사에게 어찌 대거리할까.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투란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일단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는 보지. 혹시 시청은 제대로 일하고 있나?"

"예, 아마도 몇 명 정도는 남았을 겁니다!"

투란이 이 도시의 사정을 알아보려는 것은 딱히 주인 없는 도시를 차지해 보겠다거나, 아니면 이들이 가여워서 참을 수 없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주인 잃은 양들이 가엽다지만 세상에 어디 이런 이들이 한둘이겠는가.

불쌍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모두 도우며 살자면 귀족의 수백 년 수명조차도 짧을 터.

투란은 그저 한 가문이 몰락할 정도로 강력한 이종족 군대가 있다는 위협적인 소문의 진위를 알아보려는 것뿐이었다.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정을 알아보겠다고 말했을 뿐인데도 경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에게서 시청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들은 투란은 칼라마프 시내로 들어섰다.

한참 소란스러우리라는 예상과 달리 도시 내부는 기이하리만치 고요했다.

'분위기가...무겁군, 엄청.'

조용한 도시라는 게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 들렀던 무레이만 해도 그 당시에는 참으로 번잡하다고 느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인구 천여 명의 소도시답게 한적한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유독 이 도시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곳곳에 감도는 자포자기한 듯한 분위기였다.

영혼이 빠진 듯 텅 빈 눈을 하고 길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나이는 대부분 지나치게 많거나 어렸고, 옷차림 역시 평민 기준으로도 허름했다.

상점처럼 보이는 건물들은 하나같이 문을 닫았으며, 몇몇 건물은 강도라도 당했는지 문이 부서져 있었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투란은 이 도시를 보며 어린 시절 길렀던 목양견을 떠올렸다.

너무 늙은 나머지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축 늘어져서 숨이 멎기를 기다리고 있던 녀석.

이 도시에서는 그런 늙은 짐승과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젊고 힘쓸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을 데리고 피난을 떠났고...그럴 기력조차 없는 약한 사람들만 남은 건가.'

얇은 여행자 복장에 검독수리를 낀 그의 모습은 여전히 눈에 띄었지만, 칼라마프의 시민들은 입구의 경찰과 달리 딱히 관심을 주지 않았다.

자기들의 앞에 놓인 불행이 너무 무거운 나머지 주변을 돌아볼 기력조차 없는 듯했다.

잠시 후 도착한 칼라마프의 시청 역시 고요한 분위기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공무원으로 보이는 이들은 무언가 서류 비슷한 것을 뒤적이고 있었으나 동작이 굼뜬 게 별로 열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실수로 양피지에 구멍이 뚫려 욕설을 내뱉던 한 공무원이 힐끗 고개를 돌려 투란을 바라보았다.

그의 옷차림을 바라보던 공무원은 조금 전 그 경찰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호, 혹시...신들의 혈통을 물려받으신 분입니까?"

마법사를 암시하는 물음에 투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공무원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조금 나이가 많은 여자가 우물쭈물 질문했다.

"저, 몹시 실례되는 질문을 드리옵니다만, 혹시 고귀한 피로 가문을 이루신 분이신지, 아니신지를 여쭤보아도 되겠사옵니까-"

귀족인지 기사인지를 저렇게 어렵게 묻는 것을 보니 평소에 마법사와 대할 일이 별로 없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 도시의 귀족 가문이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권위적이었거나.

"투란. 방랑 귀족이다. 혹시 이 도시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여기에 있나?"

딱딱한 하대에 공무원들이 그제야 살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데, 그 모습이 마치 홀로 야생을 헤매다가 양치기를 발견한 양과도 같았다.

어찌나 감격했는지 눈물을 흘리는 이마저 있었다.

* * *

잠시 후, 자신을 임시 책임자라 소개한 통통한 체격의 노인이 투란을 시청의 맨 위쪽 방으로 데려왔다.

그의 이름은 다룩으로, 본래는 썩 높은 계급이 아니었으나 현재 남은 시 공무원 중 가장 나이가 많고 경력이 길어 대표가 되었다고 했다.

"존귀한 분을 이런 초라한 곳에 모시게 되어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부디 이 무례를 용서하시어-"

"너무 띄우지 말고 간결하게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이쪽 문화가 그런진 모르겠지만 불편해서."

원래 소도시일수록 유독 귀족들을 어렵게 대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은 그중에서도 정도가 심했다.

말하는 것을 하나하나 들어주다가는 그대로 하루가 다 가버릴 것 같았다.

노인, 다룩은 투란이 짜증이 난 것인지 슬며시 눈치를 보며 작게 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오는 길에 듣기로 이 도시의 귀족과 기사들이 흑요정들에게 몰살당했다던데."

"사실 저희도 자세한 정황을 알지는 못합니다."

다룩은 그렇게 운을 뗀 뒤 정황을 설명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삼 주 전, 도시 서쪽의 길목에서 몇몇 행상인들이 마수 사냥꾼의 시체를 목격했다.

쇠로 된 무기까지 싹둑 잘린 것이 딱 봐도 마수, 그것도 상당히 강력한 놈의 흔적이라 그들은 곧바로 도시로 달려와 시청에 이 사실을 알렸다.

자잘한 마수라면 모를까 맹수 출신의 마수라면 평범한 마수 사냥꾼 따위에게는 어림도 없는 노릇.

거기다 도시에서 고작 하루 거리라면 그리 멀지도 않은 만큼 칼라마프의 기사 두 명이 이를 퇴치하기 위해 떠났으나 그들은 사흘이 지난 뒤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두 명이 안 된다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한 법.

이곳 도시를 통치하던 가문의 가주는 동생과 아들에게 기사 열 명을 달아 보내 그들을 토벌하게 했다.

'어째 상황이 예전에 원숭이 마수 잡을 때가 생각나는걸.'

심지어 투란이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병력 구성까지도 얼추 비슷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그런데, 그분들까지 모두 돌아오지 않으신 겁니다...."

귀족 두 명의 실종이라는, 작은 가문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손실.

가주는 도시의 방위조차 포기한 채 지나치게 늙거나 어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제외한 모든 기사를 끌고 서쪽으로 향했고, 며칠 뒤 만신창이가 된 기사 한 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그는 모두 죽었다며, 누가 죽였느냐는 질문에는 사령이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숨이 끊어졌다.

"사령이라."

"마침 저 서쪽에서 흑요정들이 무수히 많은 인간을 도살해 잡아먹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어느 학자가 말하길 사령을 다루는 거라면 흑요정이 분명하다고...."

따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흑요정 군대가 이곳에 몰려와 모든 인간을 잡아먹을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많은 시민이 피난길에 오른 끝에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된 것이었다.

"근처에 있는 도시에 구원은?"

"그게, 몇 번 전령을 보냈습니다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이런 시국에 병력을 분산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중에는 죽은 영주와 혈연으로 이어진 가문도 있었는데, 그들조차 난색을 표했다고 했다.

조금 상황이 진정된 뒤에 사람을 보내겠다면서.

사실상 거절이나 다름없는 대답이었다.

"겁먹었군."

하기야 공짜로 도시 하나를 얻는다 한들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흑요정 군대가 근처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있는 상황에서는 기사 한 명조차 아까울 터.

투란은 고개를 까딱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정은 대충 알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곳의 일은 내가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거절의 말을 꺼낸 순간, 투란과 마주 앉아 있던 다룩은 그대로 일어나서 바로 옆에 넙죽 엎드렸다.

"부탁드립니다! 부디 이 도시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해도 투란으로서는 수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도시에 묶이는 것.

가문의 주인이란 다른 가문과의 전쟁이나 그와 맞먹는 대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본가를 벗어나지 않아야 했다.

그동안 어떤 강적이 쳐들어와 도시를 초토화할지 알 수 없기 때문.

투란은 과거 청새치 호를 탔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배 한 척, 수십 명에 불과한 선원들의 목숨을 지켜야 했던 시절 느꼈던 압박감....

이 도시의 영주가 된다는 건 만 명이 넘는, 도망친 사람들을 고려하더라도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떠맡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겠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니까.

이러한 의사를 전하려는데, 주름진 얼굴 위로 눈물을 줄줄 흘리던 다룩이 미처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 나약한 양들에게는 양치기가 필요합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귀족을 양치기로, 평민들을 양으로 비유하는 것.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들은 뒤 그의 의식 한편에 깊게 박혀 있던, 하지만 그간 온갖 장소를 여행하면서도 한 번도 들은 적 없던 이야기가 여기에서 나올 줄이야.

투란은 동요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그 비유, 이곳에서 자주 쓰는 말인 건가?"

"어, 어떤 것 말씀이신지...."

"귀족이 양치기고 평민들이 양이라는 것."

"제가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탓에 다른 지방이 어떤지는 잘 모릅니다만, 회색 지대에서는 자주 쓰이는 비유입니다. 귀족은 양치기이고 기사는 목양견이며 평민들은 양이라, 양은 순종하여 풀을 뜯으며 목양견이 이끄는 대로 따르고, 목양견은 양치기에게 복종하고 양들을 수호할지니...."

회색 지대는 이름처럼 돌산이 많은 곳이라 농사짓기가 마땅치 않아, 드문드문 자란 목초지에 양을 풀어 키우는 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이렇게 빗대게 되었다고.

거기까지 들으니 반쯤 확신할 수 있었다.

투란의 어머니는 이 지역 출신이거나, 최소한 이곳에 방문하여 머무른 적이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이는 그가 자란 히사릴 언덕 주변은 물론이요, 양을 많이 기르는 엔릴 사막의 유목민들과 몇 차례 교류했을 때도 들어본 적 없는 표현이었다.

"그러면, 혹시 이런 사람을 본 적은? 이름은 비제. 본명이 아닐 수도 있어. 이십 년 정도 전에는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쯤 되었을 거다."

투란은 가방에 넣고 다니던 어머니의 초상화를 꺼내 물었으나 다룩은 유심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도시 전역에 같은 그림을 뿌려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노인은 주름진 눈을 촉촉이 뜨며 투란을 올려다보았다.

저 눈빛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려면 적어도 이 도시가 유지되기는 해야 한다는 것....

투란은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 도시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보호자 정도는 되어 줄 수 있지."

"보호자라고 하시면?"

"임시로 머무르며 이 도시를 지키겠다는 거다. 저 서쪽의 위협이 없어지거나, 도시에 적합한 주인이 생길 때까지만."

* * *

"우리 도시에 구원자가 오셨다! 우리는 살았다!"

"존귀하신 신의 자손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모두 두려워하지 말라-!"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칼라마프 시에는 새 귀족이 그들을 보호하러 왔다는 공고가 나왔다.

영주가 아닌, 구원자가 왔다는 모호한 뉘앙스는 이러한 조치가 '임시'에 불과함을 알리지 않음으로서 시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

시청 앞의 광장에서 환영식까지 열렸는데, 시간도 물자도 부족할 텐데도 제법 그럴싸한 모양새가 된 게 공무원들이 필사적으로 준비한 듯했다.

그런 와중에 투란이 정말로 귀족이기는 한지, 그리고 귀족이라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를 감히 알아보려는 이는 없었다.

애초에 판단할 방법도 없을뿐더러, 실력을 확인해보려는 시도만으로도 그를 불쾌하게 만들 것이라 여긴 탓이다.

하지만 이를 멀리서 지켜보는 시민들의 입장은 조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맞나?"

"겉보기에는 별 차이 없어 보이는데."

"프레아 신들처럼 잘생기기는 했구만."

"그러면 뭐하나, 어디 마수들이 얼굴 보고 도망친다던가?"

투란은 급조된 환영식 자리에서 자신을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을 느꼈다.

거리가 멀어 들리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인지, 그들 중 몇몇은 입 밖으로 비아냥거림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그런 냉소적인 말과 달리 그들의 눈빛에서는 불안, 그리고 방어 본능이 담겨 있었다.

시민들은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들을 지켜 주던 영주가 죽은 상황에서, 누군지 모를 저 청년이 사기꾼이거나 또 죽어 없어진다면 두 배로 좌절감을 느끼게 될 테니까.

"이, 이봐! 다들 왜 이리 조용하나!"

옆에서 다룩을 비롯한 공무원들이 안절부절못하며 괜히 시민들을 다그쳤지만 그런다고 환호가 커지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투란은 문득 과거 아라비온의 가주가 보였던 어마어마한 벼락 폭풍을 떠올렸다.

그 당시에는 대단하긴 해도 좀 무의미한 짓 아닌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실제로 굉장히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귀족이 왜 귀족인지, 그들의 보호자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직접 느끼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 것일 줄이야.

'나도 한번 해볼까. 마침 이곳엔 마법사가 한 명도 없으니....'

투란은 과거 베르크 가문에서 머물 적, 극장에서 보았던 기사 배우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귀족에 비하면 티끌이나 다름없는 마력을 가지고도 화려하게 불꽃을 피워내며 강대한 마법사인 척 연기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가?

그의 손 위에서 화염이 솟구치자 광장 주변이 순간 고요해졌다.

몇몇은 저 귀족이 험담을 듣고 화가 나서 마법을 쓰려나 싶어 두려워했고, 몇몇은 정말로 저 앳된 청년이 자기들을 보호할 힘이 있음을 알고 기뻐했다.

하지만 투란이 보이려는 공연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불의 온도를 낮추는 것.

지나치게 낮추면 불이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이 생기기에 적절한 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전에 연습해본 적 있기에 이는 어렵지 않게 통과.

그 다음으로 한 일은 그렇게 온도를 낮춘 불꽃을 위로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평민들이 피운 횃불만도 못한, 아마 기사 정도만 되어도 웃으며 무시해버릴 낮은 온도의 불꽃을.

하지만 환영식에 참여한 시민들 중 마법사는 없기에 그러한 사실을 아는 이는 없었다.

"앗...."

"오, 오오오오오!"

"불이, 불이!"

이제는 모든 귀족을 합쳐 놓고 보아도 앞줄에 설 법한 투란의 마력.

그 힘이 이 옅은 불꽃의 질이 아닌 양만을 키우는 데 집중된 결과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스산하게 휘몰아치던 눈보라를 뚫고, 광장 위쪽의 하늘 수백 미터가 붉게 타올랐다.

42화

거대한 불꽃이 피어오른 뒤, 음울하기만 하던 칼라마프 시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시민들은 모일 때마다 도시의 하늘을 수놓던 불꽃을, 그 장엄한 광경을 이야기하며 기뻐했다.

강대한 존재가 도시 한가운데에 버티고 있다는,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쳐들어온 외적에게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믿음.

그것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은 자신이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음을 느끼고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온 칼라마프 시민들의 숭배를 한 몸에 받게 된 대마법사 투란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시청 회의실에서 다룩을 비롯한 공무원 몇 명, 그리고 도시에 깔아둔 기반이 너무 많아서 떠나지 못한 상인과 조합장 등이 주도하는 토론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은 장작이나 집을 수리할 자재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벌써 이번 겨울 동안 얼어 죽은 사람이 수십 명이 넘어요."

"그보단 식량이 더 중요하죠! 조만간 시민들이 서로 잡아먹게 생긴 판에 장작이 문젭니까?"

열아홉 살 청년이 뭘 안다고 이런 데 참여해야 하나 싶지만, 지금 이 도시에서 투란이 관여하지 않은 모든 정책은 거지들의 명령만큼도 가치가 없었다.

그가 참여하여 듣고 허락해야만 공무원들에게 그 권위가 실려 무슨 정책이건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공무원들이 무기력하게 서류나 뒤적이고 있던 건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귀족의 후광이라는 권위를 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마을이나 다른 도시에서 수입하려고 해도 돈이 없는걸요."

"그야...."

회의 내용을 조금만 들어도 이 도시의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도시가 유지되기 위한 온갖 물자가 결핍된 것은 물론이요, 이를 해결할 재화나 노동력 역시 부족한 상태.

이는 그 두 가지를 가지고 있던 이들 대부분이 다른 도시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래서야 인근의 귀족 가문들이 굳이 칼라마프를 접수하려고 하지 않은 이유도 알 만했다.

차라리 도시가 완전히 멸망하기를 기다렸다가 새로 이주민을 보내 개척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었으니.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도중, 투란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에 올렸다.

"식량 문제는 내가 해결하지."

그 한 마디에 떠들썩하던 회의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비교적 나이 많은 상인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시의 보호자시여, 혹시 어떤 방식으로 식량을 해결하실 것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 근방을 돌며 보이는 동물들을 칼라마프로 몰아오겠다. 처음에는 고깃국 같은 것으로 양을 불리고, 남는 건 염장하거나 연기를 쐬어 말리면 겨울을 날 정도는 될 것 같은데."

지금의 투란에게는 썩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검독수리를 탄 채 주변을 날며 성유물의 감각에 들어오는 모든 동물에게 칼라마프로 이동하라고 명령하면 될 테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말고 수천 명이 겨울을 날 식량을 마련할 방도는 없었다.

동물들의 이주로 생겨난 공백이야 시간이 지나면 더 먼 곳에서 이동해 온 동물들로 채워질 터.

그 말을 들은 모두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서, 설마 그런 일까지 가능하신 게...아니, 절대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호자시여!"

"하지만 신께서 주신 힘을 천한 이들이 연명하는 데 사용하다니, 감히 그렇게 해도 좋을지."

평민들에게 마법사란 굉장한 힘으로 마수 따위를 물리치는 존재이지, 평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해 주는 편리한 일꾼 따위가 아니었다.

이토록 초월적인 힘을 지닌 존재에게 동물을 몰아오는 일 따위를 시키는 것은 다소 불경스럽게까지 느껴졌다.

투란은 그러한 불안감은 간단히 일축했다.

"저 북쪽 다케인 평야에서는 귀족들이 추수 후 땅에 번개가 내려치게 한다. 그러면 이듬해에 땅이 더 기름져지기 때문이지. 내가 하는 일도 그와 다를 바 없어."

수십 분 뒤, 투란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자신이 말한 대로 칼라마프 시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아 날았다.

성유물의 감각을 최대한 넓히자 잿빛 바위산 곳곳에 숨은 동물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모두 저곳을 향해 움직여라. 그리고 벽 앞에 도착한 다음에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나지막한 명령에 동물들이 하나둘씩 이동하기 시작했다.

산양 무리, 토끼, 심지어 늑대나 표범까지도.

수풀 속에 숨어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이들조차 성유물의 감각에 걸려드는 순간 마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일에 그렇게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들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숨 쉬듯 양 떼를 지배해온 투란에게 있어 동물 지배 마법은 거의 돌팔매질만큼이나 숙련된 마법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시민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로 몰려온 동물들이 나란히 성벽 앞에 서서 도축 당하기를 기다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빨리 다 잡아...! 아니, 맹수들부터 빨리 숨통을 끊고, 토끼들은 다 잡지 말고 울타리에 가둬. 풀이라도 먹여서 키우는 쪽이 나을 테니까."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구먼. 귀족 나리들이란 이런 것도 가능했단 말이야? 그런데 옛날의 높으신 분들은 왜...."

"이번에 오신 보호자님이 훨씬 더 강력한 마법사라서 그런 거겠죠, 할아버지! 그때 그 불 못 봤어요?"

"하기사. 내가 멍청한 소리를 했구나."

수백 마리가 넘는 동물을 도축해서 그 살점을 요리하고 분배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공무원들과 경찰이 총동원되고 열의를 되찾은 시민들까지 도운 끝에 그럭저럭 일이 진행되었다.

간만에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자 모두의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그렇게 식량 문제를 해결한 뒤에는 겨울을 날 건물이 부족하다는 문제 역시 어렵지 않게 해결했다.

바로 도시 중앙에 자리한, 이곳을 지배하던 가문의 거주지를 개방해 집이 없거나 망가진 이들을 수용하는 방법.

본래 백수십 명이 여유롭게 거주하던 공간인 만큼, 조금 밀집하기만 하면 천여 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었다.

"그, 그러면 도시의 보호자께서 머무실 곳이...."

"나야 시청 숙소에서 머물면 그만이지. 침대도 있어서 썩 나쁠 것 없던데."

경악하는 공무원들에게 투란은 태연히 답했다.

애초에 평생을 양치기로 살아왔으며 그 이후로도 방랑하며 노숙하는 데 익숙한 투란은 저택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곳의 값나가는 물건은 가문의 몇 안 남은 관계자들이 피난을 떠나며 죄다 들고 나가버린 상태라 반쯤 폐허나 다름없기도 했고.

어쨌든, 이 또한 신의 명령과 다름없는 권위가 담겨 곧바로 실행되었다.

"자, 자! 모두 천천히 움직이시오! 도시의 보호자께서는 시민들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으시니!"

"어린애들은 이쪽으로 줄 서라!"

"정말로 우리가 여기서 살아도 되는 거요?"

"그렇다니까. 보호자께 감사드리쇼."

"허 참, 양치기가 양을 돌보며 도축하는 게 아니라 제 살을 떼어 먹여주니 이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그렇게 평생 구경조차 하지 못할 영주의 저택에서 머물게 된 시민들의 입을 통해 투란이 한층 더 신격화되었지만 그러한 평판에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가 바라는 것은 한 가지였다.

최대한 빠르게 이 도시가 원래대로 돌아와서, 어머니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

* * *

며칠 뒤, 칼라마프의 주변에 자리한 도시들은 이 죽어가던 도시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주변을 돌아다니던 피난민이 뚝 끊긴 것은 물론이요, 오히려 상단이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며 모피를 팔아 곡물이나 천 따위를 사 오기까지 하니 이를 모를 수가 없었다.

거기다 투란이 딱히 자신의 존재를 비밀로 하라고 하지도 않은 만큼 상인들은 거리낌 없이 이를 밝혔다.

"칼라마프의 투란?"

"예. 자신을 그렇게 칭하는 이가 칼라마프 시의 주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정확히는 자신을 영주가 아닌 도시의 보호자로 칭한다고 하더군요."

칼라마프에서 사흘 거리에 자리한 도시, 비겐의 주인은 이 흥미로운 소식에 탄성을 터트렸다.

"도시의 보호자라니 꽤 재밌는 칭호인걸. 나이는?"

"겉보기엔 스무 살쯤 되어 보인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너무 어린데."

"예. 하지만 도시 어디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하늘을 화염으로 가득 채우는 마법을 보였다고 합니다. 평민들의 말인 것을 고려하더라도 실력자인 것은 분명하겠지요."

비겐의 주인은 참모 역할을 하는 기사의 말에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귀족이 쉬이 늙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강력한 귀족 중에 어린 외모를 한 이는 드물었다.

마력을 쌓을 기회라는 것이 어느 정도 한정된 만큼 힘을 쌓다 보면 오랜 세월이 걸리는 탓이다.

이러한 법칙을 무시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순례를 다니며 운 좋게 제 기량에 맞는 마수들을 연이어 맞닥뜨려 힘을 쌓아온 행운아거나.

그게 아니면...대가문에서 장례를 몰아주는 것으로 작정하고 키워낸 인재거나.

"하필 그런 작자가 이 시기에, 아라비온의 군대가 있는 곳 옆에 출몰해서 껍데기뿐인 도시를 차지했다고? 뭔가 구린내가 나는데, 그것도 굉장히."

이십 년 전 회색 지대에서 일어난 두 대가문의 전쟁은 현지인들에게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첩자로 의혹을 사서 처형당한 평민들의 숫자는 감히 셀 수도 없고, 몇몇 주인 없는 방랑 기사들은 강제로 징집당해 최전선에 서서 죽어가야 했다.

심지어 귀족들마저도 각각 편을 갈라 싸운 터라, 비겐의 주인부터가 자하르의 손을 빌려 아라비온 지지자였던 형을 죽이고 가주 자리를 찬탈한 당사자였다.

이러니 대가문들의 행보에 민감할 수밖에.

"어디일까. 투란 아라비온? 투란 카마인? 투란 라비타스? 투란 자하르...이쪽이 좀 느낌이 오는데. 뭔가 어감이 딱 맞잖아."

"자하르 쪽에 연락을 넣어 볼까요?"

"어허, 감히 그럴 순 없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아랫사람이 아는 척하는 거...윗사람에겐 상당히 불쾌한 일이거든. 자기 속내를 읽히는 느낌이니까. 게다가 그냥 찍은 건데 아니면 어쩌려고?"

"그러면 도시 점령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내놓으실 겁니까?"

"일단 은근히 받아들이는 느낌으로 가지. 괜히 항의했다가 어느 쪽이건 밉보이면 곤란하니까. 어차피 지금 항의해 봐야 흑요정들이 몰려와서 초토화될지도 모르는 도시잖아."

비겐의 주인이 알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그 시각 칼라마프 인근의 모든 영주들이 그와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는 점이었다.

자하르가 아니라 아라비온이나 카마인, 혹은 더 먼 곳에서 온 어느 대가문 출신의 인재일 것으로 짐작했다는 점만 빼고.

이렇게, 투란은 얼렁뚱땅 회색 지대의 주인들에게서 칼라마프의 보호자로 묵인받게 되었다.

* * *

칼라마프 시가 어느 정도 정상화된 뒤, 투란은 다룩을 통해 어머니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를 여러 장 베껴 그려 도시 전역에 뿌렸다.

사실 이렇게 초상화를 뿌리면서도 딱히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이 회색 지대는 인구 밀도가 썩 많지 않은 편이지만 그래도 도시만 여덟 개에 자잘한 마을의 수는 백 개가 넘었다.

그중 투란의 어머니가 정확히 칼라마프에 살았거나 거기 머물렀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심지어 투란이 태어난 이후로는 쭉 히사릴 언덕에 살았으니 거의 이십 년 전에 살았거나 머무른 것인데, 그 당시에 만났던 사람이 얼굴을 잊었거나 죽었거나 피난을 떠났을 가능성도 컸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점은 투란이 이 도시에서 가지고 있는 인기가 얼마나 큰지를 간과했다는 것.

도시의 보호자가 찾는 여인이라는 말에 시민들은 거의 없던 기억을 쥐어짜다시피 했고, 그 과정에서 투란은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온갖 정보를 전해 들어야 했다.

"저, 도시의 보호자시여...."

"또 제보가 왔나?"

"예...."

투란에게 보고하러 온 공무원의 얼굴에 의기소침한 기색이 어렸다.

지난 일주일 동안 투란이 십수 차례 무의미한 제보를 받아 실망했음을 알고 있어서였다.

"그래도 들어는 봐야겠지. 제보자는?"

"이곤이라는 사람인데 옛날에는 여관을 운영했다가 도박으로 망한 부랑자입니다. 한 십팔 년인가 십구 년쯤 전에 자기가 운영하는 여관에 초상화와 꼭 닮은 외모를 한 여성이 방문했었다고 했습니다."

"가보지."

지금까지 이런 부류의 제보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니긴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딱 이십 년으로 끊은 게 아니라 십팔 년에서 십구 년 정도라고 애매하게 말하는 점이 특히.

잠시 후, 시청 회의실로 들어온 추레한 인상의 남자가 투란을 향해 고개 숙여 외쳤다.

"도시의 보호자시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번에 베풀어주신 식량과 숙소가 아니었다면 저는 개처럼 길거리에서 죽어갔을 겁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보다 이야기를 좀 자세히 듣고 싶은데. 초상화에 그려진 사람을 본 적 있다는 이야기."

"물론 말씀드려야지요! 그건 제가 지금처럼 패가망신하기 전, 멀쩡히 여관을 운영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십팔 년에서 십구 년 사이의 애매한 어느 시간대, 당시 칼라마프는 아라비온과 자하르의 전쟁으로 한창 어수선한 시기였다.

지금처럼 절망적이지는 않지만 언제 한쪽의 편을 들었다가 반대쪽 가문의 군대가 도시를 싹 쓸어버릴지 모른다고 모두가 두려워하던 시기.

그런 상황에서, 어느 날 젊은 여자가 이곤이 운영하는 여관에 찾아와서 하룻밤을 보냈다.

"갓 스물쯤 되었던 것 같은데 임신했는지 배가 조금 불러 있었습니다요. 이름이 비제였는지는 모르겠고요."

투란은 거기까지만 듣고도 흥분으로 가슴이 터질 듯했다.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그리고 그 당시 자신을 임신하고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는 한 적 없었으니까.

아니,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저 부랑자가 지어낸 말이거나 착각일지도 모를 일.

투란은 은근히 상대를 추궁했다.

"그런데 기억력이 좋은 편인가? 거의 이십여 년 전에 하룻밤 머문 손님이라면 잊어버릴 법도 한데."

"헤헤, 제가 좀 맹하게 생겼어두 열 살때 좋아했던 여자애 이름이랑 얼굴도 기억할 정도입죠. 그래서 도박도 패를 잘 기억해서 할 줄 알았는데 그만...."

막상 이쪽 업계에선 안 먹혔다며 혼자 중얼거리길래, 투란은 그를 살짝 다그쳐 본론으로 돌아오게 했다.

"여자 혼자 여행하는 것도 희한한 일이고, 제법 크고 좋은 말까지 한 마리 가지고 있어서 기억에 남았습니다. 거기다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게 어디로 도망치는 듯한 모양새길래 대체 어떤 잘난 놈팽이가 저런 미녀를 임신시키고 버렸나, 궁금하기도 했고요."

"왜 버렸다고 생각했지?"

"그게, 식사 중에 배를 쓰다듬으면서 혼잣말을 했거든요. '아가야, 제발 네 아버지처럼 되지는 말거라'라고요."

43화

이후로도 몇 가지 더 물어보니, 그녀는 이곤에게 서쪽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고 했다.

그런데 가까운 곳의 지명 몇 개를 말해 줬는데 전혀 모르는 듯한 모양새였다고.

즉, 칼라마프 시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은 아니리라는 의미였다.

"아, 거기다 생각해 보니 그 여자가 탔던 말도 이쪽 출신이 아닌 놈 같았습니다. 온몸의 털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게 딱 봐도 명마라서 마구간을 단단히 걸어 잠가야 했습죠."

투란은 문득 먼 옛날, 히사릴 언덕 아랫마을의 장로 라부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죽기 전, 아직 그가 마을 사람들과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을 시기.

라부스는 어린 투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을에 끝내주게 좋은 황금색 말 한 마리가 있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워낙 멋진 놈이라 근처 도시에서 비싼 돈을 주고 사 갔다고 했던가?

아마 투란의 어머니는 히사릴 언덕까지 그 말을 타고 온 뒤, 녀석을 팔아 언덕 위의 양 목장을 샀을 터였다.

마을 놈들이야 당연히 말 값을 후려치고도 남았겠지.

'이 정도면 확실하군.'

눈앞의 부랑자, 이곤이 말하는 여인이 투란의 어머니라는 것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남편 쪽 이야기는?"

"그게, 사실 거기까지 대화를 많이 나누진 않았습니다. 죽은 마누라가 예쁜 여자들한테 말 걸면 껄떡댄다고 욕해서...."

거기다 애초에 그 여자 본인이 남들과 어울리기를 꺼리는 탓에 잡담 따위는 나누지도 못했다고.

정말로 도망치는 처지였다면 타인과 접촉을 최소화하고 싶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앞선 질문을 한 차례 반복해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는지를 확인한 뒤, 투란은 금화 몇 닢을 주고 그를 돌려보냈다.

"어이쿠, 이런 큰돈을 받으면 죄송스러워서...."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어."

금화 수 닢은 투란에게나 푼돈이지 저 부랑자에게는 겨울을 나고도 남을 돈이었다.

물론 도박으로 잃어버린다면 그럴 수 없게 되겠지만 거기까지 걱정해주는 것은 지나친 오지랖.

큰돈을 준 만큼 앞으로 가짜 제보가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기에, 투란은 공무원들에게 초상화를 회수하고 관련 제보도 받지 말라고 지시했다.

어차피 어머니가 이 도시 출신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으니 알아봐도 다른 도시에서 알아보는 게 나을 터였다.

모든 것을 정리한 뒤, 그는 시청 꼭대기의 숙소 침대에 드러누웠다.

"후우...."

서쪽으로 떠난 것이라면 그의 어머니가 왔던 곳은 북쪽과 동쪽, 남쪽 중 하나일 터.

그중 유력한 것은 아무래도 동쪽이나 남쪽이었다.

어머니건 아버지건 둘 중 한 명은 자하르 쪽이라서 그가 이쪽 혈통을 타고난 것일 테니.

그보다 아버지처럼은 되지 말라는 말이 걸렸다.

듣기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말.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좋은 사람이었다고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긍정적인 뜻일 터.

하지만 그렇다면 왜 아버지처럼 되지 말라고 했을까, 그리고 왜 혼자 도망쳐야 했을까?

생각에 잠겨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드러누워 있자, 옆에서 검독수리가 슥슥 무언가를 쓰는 소리를 냈다.

고개를 들자 녀석이 모래가 담긴 철판을 들이밀었다.

[아파?]

이 철판은 투란이 칼라마프에 온 뒤 직접 만들어준 것으로, 땅에 쓰는 것과 달리 긴 글을 쓸 수는 없으나 실내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물론 어디 들고 나가기는 크고 무거워서 지금처럼 방에서 쉴 때나 써야 했다.

"아픈 건 아니고, 머리가 복잡하네."

[투란 비제 이야기하면 괴로워.]

"음?"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깜짝 놀랐다가 생각해 보니, 이 녀석 앞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꺼낸 적이 많기는 했다.

처음 코마드 시의 가주에게 물어볼 때부터 영혼 결속 때문에 이 녀석이 옆에 있었으니까.

심지어 영혼이 결속되어 있어 감정까지 일부 공유하고 있으니 기분을 속일 수도 없었다.

[비제 누구야? 짝?]

"아니, 내 어머니. 나를 낳아준 사람이야. 넌 어머니를 기억하니?"

투란의 질문에 검독수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좌우로 도리도리 저었다.

[몰라. 나 어머니 없어.]

"나도 이제는 그렇긴 해."

정말로 어머니 없이 태어난 건 아닐 테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의미일 터였다.

검독수리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투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글씨를 썼다.

[내 이름 비제.]

"음?"

[나 비제야.]

검독수리가 재빨리 이를 지우고 다시 문장을 만들어냈다.

[투란, 비제 없어서 괴로워.]

그러니까, 어머니가 없는 것을 괴로워하는 것 같으니 자기가 어머니와 같은 이름을 써서 그 대신이 되겠다는 의미였다.

그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마음씨에 투란은 자기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러진 않아도 돼. 어머니가 없어서 슬프던 시절은 옛날에 지나갔거든. 네 이름이니까 더 신중히 생각해서...."

[많이 생각했어. 나는 비제.]

다른 이름을 생각해 보라고 제안해도 검독수리는 부리를 딱딱 부딪쳐 가며 고집을 부렸다.

몇 차례 더 설득을 시도했으나 전혀 통하지 않기에 투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뭐...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이제부터 비제라고 불러줄게."

사실 이름이 겹친다는 게 썩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특정 지역에서만 많이 쓰이는 이름 몇몇을 제외하면 세상 어딜 가나 사람들이 쓰는 이름이란 비슷한 법이니까.

투란만 해도 그간 여행을 다니며 동명이인을 서너 명은 보았고, 비제라는 이름 역시 몇 번 들은 적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할게, 비제."

[나는 비제!]

어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검독수리가 삐약 울며 날개를 펄럭였다.

* * *

어머니의 존재에 대한 단서를 잡는 것과 별개로, 투란은 칼라마프의 보호자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사실 직접 먹여 키운다는 점에선 아버지라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아니, 통나무가 저절로 날아온다고...?"

"자자, 쉴 틈 없으니까 빨리 정돈해서 목재소로 가져가자고."

"돌이 어떻게 이렇게 완벽히 사각형이지? 규격도 완벽해서 더 깎을 필요도 없잖아!"

식량 수급이 어느 정도 해결된 뒤, 투란은 다른 부족한 물자 역시 직접 마법을 사용해 해결했다.

단검에 절단 강화 마법을 건 뒤 허공을 날아다니게 해서 수십 그루의 나무를 벌목, 부유 주문으로 띄워서 가져오거나 대지 변형 마법을 응용해 암석의 형태를 변형하는 것으로 건축에 쓸 수 있는 석재를 대량으로 확보했다.

그 과정에서 물체를 움직이는 염동 마법과 대지 변형 마법을 숙련하는 마법 수련의 효과는 덤.

강대한 마법사 한 명이 자신의 힘을 노동력으로 사용하니 수천 명의 장정보다 못할 것이 없어, 칼라마프는 더 빠르게 재건되어갔다.

거기다 강대한 마법사가 도시를 지킨다는 소문이 퍼지자 피난을 떠났던 이들이 돌아오기까지 한 덕에, 몇 주일이 지났을 때쯤 칼라마프 시는 과거만큼은 아닐지언정 그와 비슷한 수준의 위세를 뽐내게 되었다.

시청으로 돌아온 투란은 이제 제법 사람처럼 변한 도시의 유력자들과 회의에 들어갔다.

"슬슬 겨울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동사한 사람이 한 명도 없더군요. 열 명이 죽었습니다만 그중 여덟 명은 노환이고 두 명이 보수 작업 중 실수로 죽은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위대한 투란께 돌립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좋아지고 있으며 이게 다 투란의 존재 덕분이라고 찬양했다.

이러한 숭배를 반쯤 흘려들으며, 투란은 회의실 한쪽에 펼쳐진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칼라마프 시 인근을 그려낸 것이었다.

'아직도 서쪽에서 무언가 나타날 기미는 없군.'

칼라마프의 서쪽 도로로 쭉 가다 보면 아라비온 가문이 흑요정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지역이 나왔다.

과거 이 도시를 지배하던 가문을 몰살시킨 정체불명의 무언가, 아마 흑요정 사령술사일 가능성이 큰 존재는 저쪽에 있을 터.

도시가 충분히 안정된 만큼 서쪽 도로 너머를 정찰해 놈의 정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녀석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몇 달 몇 년씩 이 도시에 묶여 있을 수는 없지 않나.

그가 가진 성유물의 힘과 검독수리의 기동력이라면 비교적 적은 위험 부담으로도 어떤 존재인지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이러한 의견을 밝히자 모두가 난색을 보였다.

"그,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조금 더 두고 보시는 것이...."

과거 칼라마프를 지배하던 귀족 가문 하나를 몰살시킨 정체불명의 적을 만나러 간다니?

그러다가 투란이 죽으면 이 도시는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그들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뿐, 감히 가지 말라고 붙잡지는 못했다.

이 도시의 살아있는 프레아 신과 다름없는 이에게 어찌 감히 그럴 수 있을까.

"무언가 이상한 기색이 느껴지면 바로 돌아올 테니 걱정할 것 없다. 혹시 내가 이겨낼 수 없을 정도의 강적이라도 도시로 몰아오지는 않을 테니, 사람들을 잘 단속하도록."

투란이 그들에게 이 사실을 공지한 것은 그가 잠시간 자리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려 둘 필요가 있어서일 뿐,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룩을 비롯한 도시의 유력자들은 무사히 다녀오시라며 깊숙이 절해야 했다.

숙소로 돌아와 한 시간 정도 쉬며 마력을 최고의 상태까지 회복한 뒤, 투란은 그대로 창문을 타고 나왔다.

"가자, 비제."

검독수리, 비제가 삐약 울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슬슬 이 녀석을 어머니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어머니를 이름으로 부른 적부터가 별로 없기도 했고.

도시 상공으로 날아오르자 그림자를 통해 이를 알아챈 몇몇 시민들이 투란을 향해 외쳤다.

"검독수리다! 검독수리야!"

"칼라마프의 투란이시여! 영원히 이 도시를 보호하소서!"

투란은 자신을 향해 찬사를 보내는 시민들이 영 불편했다.

서쪽의 적을 토벌한 뒤에는 다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칼라마프의 보호자 자리를 내려놓을 생각이었으니까.

자신의 위치를 대체할 귀족을 불러올 방법 역시 이미 생각해 놓은 뒤였다.

바로 이 도시의 통치권을 조건으로 어머니의 행적을 조사할 것을 요청하는 것.

서쪽의 적만 없다면 칼라마프는 충분히 가치 있는 도시이니 모든 가주들이 혹할 터였다.

이제는 전처럼 초상화를 뿌리거나 할 필요도 없었다.

이십여 년 전, 홀로 말을 타고 여행하던 이십 대 초반의 젊은 임산부를 찾아 달라고 말하면 될 테니.

이곤처럼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 또 나오기를 기대하느니 그런 특별한 경우를 기억하는 사람을 찾는 쪽이 훨씬 가능성이 클 터였다.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다소 기분이 찜찜해졌다.

마치 어머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그를 신처럼 숭배하는 시민들을 팔아넘기는 것 같았던 탓이다.

만약 다음 영주가 제대로 도시를 다스리지 않아 사람들이 고통받는다면 투란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래서 도시 따위는 맡기 싫었는데.'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투란은 자신이 칼라마프의 영역 끄트머리까지 와 있음을 깨달았다.

확실히 비제의 비행 속도는 어마어마했다.

"어디, 확인해 볼까...."

의식과 함께 성유물의 감각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생명체의 불꽃.

하지만 그중에서 사령이나 흑요정 비슷한 무언가는 느껴지지 않았다.

"좀 더 가보자, 비제."

비제가 삐약 울며 다시금 서쪽으로 비행했다.

투란은 추적 대상을 흑요정으로 지정하고 탐색 마법까지 운용하여 무언가 냄새가 걸리는지를 확인했으나 잡히는 것은 없었다.

이곳에 있던 위협이 어딘가로 이동이라도 한 것일까?

'그건 그것대로 곤란한데.'

눈에 보이는 적을 격퇴하면 안심할 수 있을 텐데, 어딘가로 이동해 버렸다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무엇보다도 결과물이 없으면 다른 도시의 가주들이 위협의 소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터였다.

그들에게 자하르 혈통의 탐색 마법으로 샅샅이 뒤져보았노라고 말할 수도 없으니....

그렇게 주변을 좌우로 움직이며 얼마나 훑었을까, 슬슬 이러다가 회색 지대 밖으로 나가 버리겠다고 생각할 때쯤 저 앞에서 불꽃 하나가 환하게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멈춰!"

투란이 다급히 외치자 비제는 곧바로 정지 비행을 시작했다.

평범한 검독수리라면 불가능할, 체격에 비해 압도적인 힘을 가진 마수이기에 가능한 고급 기술이었다.

그 상태로, 투란은 성유물의 감각에 걸려든 거대한 마력의 불꽃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사령...아니, 마법사인가?'

탐색 마법의 대상을 인간으로 변경하자 체취가 풍기는 게 마법사, 그중에서도 귀족인 것이 확실했다.

가진 마력은 페르가의 그것보다도 더 강하며 지금의 투란과 비교해도 두 배 이상.

저 정도면 대가문에서도 핵심 중의 핵심으로 분류될 만한 인재였다.

그때, 정체불명의 존재가 투란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보더니 몸을 띄웠다.

'나를 알아챘다고? 이 거리에서?'

비제에게 당장 남쪽으로 도망치라고 명령하려던 순간, 투란은 상대가 비행하는 방식이 꽤 익숙함을 깨달았다.

몸을 붕 띄운 다음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듯한 비행 방법....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저 멀리서 날아온 마법사와 대면하게 되었다.

"투란?"

"오랜만입니다. 메이사."

아라비온의 후계자, 메이사 아라비온이 특유의 해골 같은 얼굴에 놀란 기색을 띠며 그를 바라보았다.

44화

눈이 수북이 쌓인 숲 한쪽의 공터에 착륙하며, 투란은 자신의 맞은편에 내려오는 메이사의 모습을 관찰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더 마를 수 있었을까 싶었던 몸뚱이가 전보다 작고 왜소해졌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엄청나네, 진짜.'

마력의 흐름을 감지하는 흉내쟁이 성유물의 기능 덕에, 투란은 그녀가 몸에 두르고 있는 거의 모든 물건이 마법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귀걸이와 목걸이, 옷, 팔찌, 반지, 신발, 그리고 주머니에 들어있는 듯한 몇 가지 잡동사니까지.

페르가 역시 자하르의 후계자 후보답게 마법기 서너 개쯤 가지고 있었으나 이쪽은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다.

아무래도 후계자가 될 수도 있는 사람 중 한 명과 온전한 후계자의 차이겠지만.

열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둔 채, 메이사가 투란을 바라보며 흥미로워하는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본 지 고작 서너 달쯤 된 것 같은데, 그사이에 많이 달라졌는걸요."

"제가 달라졌나요?"

"네. 그것도 꽤 많이요."

과거 베르크 저택에서 만났던 투란이 어른스러운 척하려는 소년처럼 보였던 데 비해, 지금의 그는 좀 더 성숙한 인상을 풍겼다.

과거 배 위에서 수십 명, 그리고 칼라마프 시에서 수천 명의 목숨을 짊어져 가며 생긴 변화였다.

"전 잘 모르겠네요. 그보다...."

그때, 가방 막대기에 타고 있던 비제가 자기를 좀 보라는 것처럼 부리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녀석은 곧바로 바닥에 내려와 눈밭에 글씨를 썼다.

[누구야?]

보통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잘 안 끼어들더니, 너무 친근하게 대하는 기색이라 질투라도 하는 것일까?

투란은 차분한 어조로 한 사람과 한 새를 서로에게 소개해 주었다.

"친한 친구인 메이사 양. 메이사, 이쪽은 비제라고 합니다. 제 가족이죠."

애완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엄연히 지성이 있는 이 검독수리에게 모욕적일 것이고, 친구라고 칭하기엔 영혼으로 결속된 둘의 관계는 그보다 더 가까웠다.

투란의 말을 들은 비제가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쭉 내밀며 메이사를 쳐다보았다.

"가족?"

메이사는 놀란 기색을 띠더니 이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설마 영혼을 결속한 마수인가요?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한 아이는 처음 보는데...."

"예. 어지간한 사람보다도 훨씬 똑똑할 겁니다."

"어디서 인연이 닿은 건가요?"

"여행 중에 만났습니다. 비제가 절 선택했고, 조련사 혈통의 중계로 영혼을 결속했죠."

투란의 말 중 거짓은 없었다.

그저 그 여행 중 만난 곳이 엔릴 사막의 코마드 항구이며, 돈으로 사 온 것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을 뿐.

"낭만적이네요. 저도 그런 아이랑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라비온의 후계자인 만큼 마음만 먹으면 강력한 마수 한 마리 얻기는 어렵지 않을 테지만, 사실 마수라는 녀석들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기 영 번거로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틸리만 해도 보통 말보다 훨씬 커다란 탓에 실내에는 데리고 들어가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비제처럼 작으면서 유용한 마수는 희귀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다른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여행하기 좋지 않은 장소인데."

메이사의 질문에 투란은 솔직히 대답했다.

얼마 전 여행 도중 우연히 칼라마프라는 도시에 방문한 뒤, 어찌어찌하다 보니 도시의 통치자가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를.

어차피 그녀가 조금만 더 동쪽으로 가면 알 수 있을 이야기라서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칼라마프의 마법사들을 몰살시킨 서쪽의 위협에 대한 것까지 모두 말하자 그녀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뭔가 아시는 게 있습니까?"

"네. 이건 어쩌면 저희 책임이라고 봐도 좋겠네요."

그녀의 말에 의하면 지난 몇 달 동안 아라비온의 군대는 흑요정들을 토벌하며 지하 왕국을 철저히 발굴하고 파괴했다.

그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동쪽으로 도망친 흑요정들이 몇 있는데, 그중 강력한 사령술사가 한 명 있다는 것이었다.

"칼라마프의 마법사들이 실종된 게 한 달 정도 전이라고 했죠? 그러면 아마 그놈 짓일 거예요. 동쪽으로 도망친 것도 그쯤이었으니까. 사령을 보충하고 싶었겠죠. 여기까지 쳐들어온 이들만 죽었고 회색 지대가 무사한 걸 보면 역시 이곳에서 벗어나진 않았나 보네요."

그제야 왜 저 서쪽에서 흑요정들을 때려잡고 있어야 할 메이사가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결국 전쟁이 아라비온의 승리로 끝나고, 저들은 마지막 패잔병들마저 박멸하러 이곳으로 온 것이다.

"더 동쪽으로 도망가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아마 난쟁이들이랑 결탁해서 그것들의 거주지에 숨어있는 것 같아요. 짐작이지만."

"난쟁이라니, 그 눈먼 난쟁이 말입니까?"

투란은 과거 읽었던 세계 일주기를 떠올렸다.

하루 한 번씩만 열리는 산맥의 통로 안에 숨어서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눈먼 난쟁이들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니 그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땅이 바로 이곳 회색 지대였다.

정작 투란은 근처를 돌면서 난쟁이를 보았다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네. 전설에 따르면 산맥 속 난쟁이들의 거주지는 너무 깊어서 신들조차 모두 토벌하지 못했다고 하니까요. 어쨌든, 더 동쪽으로 간 게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사정상 회색 지대로는 진입하기 어려워서."

"자하르 때문에 그렇습니까?"

"네, 아무래도."

과거 아라비온과 자하르가 전쟁을 벌인 땅, 회색 지대.

그곳에 아라비온의 대규모 병력이 지나가는 것은 그 자체로 중대한 위협행위나 다름없기에, 아라비온 군대는 회색 지대로 진입하지 못하고 그 근처만 열심히 뒤져대는 중인 듯했다.

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누던 도중, 투란은 멀찍이서 마법사 한 명이 날아오는 것을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메이사 역시 한 발짝 느리게 그 사실을 알아채는 것이 아마 흉내쟁이 성유물과 어느 정도 비슷한 기능의 마법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날아온 아라비온의 귀족은 사십 대쯤 되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여긴 왜 오신 거죠, 숙부?"

"네가 진영으로 돌아오는 게 너무 늦길래 찾으러 왔다. 이곳은 회색 지대에서 너무 가까워. 혼자 오래 있는 건 좋지 않아."

숙부라는 호칭으로 보아 아라비온 가주의 동생인 듯했다.

가진 마력이 투란과 비슷한 수준인 것으로 보아 아라비온에서도 상위권의 강자일 터.

그런데 어째 숙부와 조카 사이인 것 치고는 둘의 분위기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메이사는 대놓고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였고, 저 숙부라는 자 역시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으나 풍기는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쪽의 젊은이는? 아,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예의겠군. 난 카드람 아라비온일세. 여기 메이사의 숙부이고 내 형님이 아라비온의 가주가 되시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카드람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나와 투란을 압박했다.

동격의 힘으로 이를 맞받아치자 그의 얼굴에 깜짝 놀란 듯한 기색이 어렸다.

"칼라마프의 투란입니다."

"칼라마프? 내 견문이 짧아 못 들어본 가문 이름인데...아니, 저 동쪽에 있는 도시 이름 아니던가?"

"맞습니다. 부모의 혈통조차 제대로 모르는 몰락 귀족 출신이라서 따로 이름을 내세울 가문은 없고, 도시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부릅니다."

몰락 귀족이라는 말을 들은 카드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데 힘이 대단한 친구로군. 어느 대가문 소속이라고 해도 믿겠어."

"예전에 베르크 가문에서 신세를 진 적은 있었습니다. 그때 메이사 아가씨랑도 인연이 생겼죠."

영 수상한 놈 같다는 추궁에 오히려 나는 너희 집안의 손님이었다고 받아치자, 카드람이 저 말이 맞느냐는 듯 메이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말이 맞아요. 그보다, 숙부는 먼저 돌아가세요. 저도 곧 정리하고 갈 테니."

"하지만 메이사, 이런 곳에 누군지도 모를 이와 둘만 두고 가기는 좀...."

"가세요."

숙부를 대하는 것이라기에는 다소 무례하게 느껴질 정도로 고압적이고 날카로운 말투.

카드람이 알았다고 답하며 다시 저 멀리 날아갔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메이사가 한숨을 내쉬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지난번에도 그렇고, 못난 꼴만 보이네요."

무슨 말인지 생각하던 투란은 지난번에 헤어질 때도 메이사가 아라비온의 귀족에게 성질을 내고 있었음을 떠올렸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딱 아라비온 가문 사람에게만 오만하고 차갑게 구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베르크 가의 사람들이나 투란 같은 외부인에게는 신기하리만치 친절하고 호의적이라서 그러한 모습이 더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누구에게나 웃을 수만은 없는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요."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여행 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듣고 싶네요."

* * *

메이사와 헤어진 뒤, 투란은 주변을 한참 더 순찰하다가 다시 칼라마프로 돌아왔다.

그가 자리를 비운 것은 고작 몇 시간 정도에 불과했건만, 온종일 목숨줄이 타들어 가는 듯한 시간을 보내던 도시의 유력자들은 검독수리를 타고 날아오는 그를 보며 눈물을 펑펑 흘리고 무릎을 꿇었다.

"아이고, 투란 님. 돌아오시지 않으셔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으셨나 해서 저는, 저는...!"

"주책 부리지 말게 이 사람아. 고생 많으셨습니다. 혹시 무언가 단서는 얻으셨습니까?"

눈물 흘리는 늙은 상인을 밀어내며 공무원 다룩이 그렇게 묻자, 투란은 비제에게 간식 하나를 주며 대꾸했다.

"다행히 단서 정도는 얻었다. 아무래도 저 서쪽의 숲에서 넘어온 흑요정 사령술사가 원흉인 것 같더군. 그리고 서쪽으로 한 팔십 킬로미터 정도 거리에 아라비온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

"아, 아라비온의 군대 말씀입니까?"

"그래. 사령술사는 그쪽에서 토벌해 줄 테니 이쪽에서 뭘 하려고 들 필요는 없겠어."

물론 난쟁이들의 거주지로 숨어든 탓에 다소 추적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마데리 시 인근에서 들고 일어난 흑요정 소굴을 모조리 파헤친 것으로 보아 저들 역시 나름대로 추적 방법을 갖추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상황 정리를 마치고 쉼터로 돌아오자 비제가 또 철판을 쥐고 무언가를 썼다.

[투란!]

"왜?"

[오늘 만난 메이사.]

"맞아. 메이사였지. 그런데 왜?"

[메이사의 안쪽도 나랑 맞아.]

"너랑 맞는다고?"

처음 비제가 투란을 원했을 때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이었다.

그녀가 투란보다 먼저 비제와 만났다면 비제가 그녀를 주인으로 섬기고 싶어 했으리라는 뜻일까.

놀란 표정을 본 비제가 얼른 글을 몇 번 쓰고 지웠다.

[하지만 나 투란 골랐어.]

[메이사는 기회 없어.]

[투란은 행복해!]

나를 얻은 너는 행운아야, 라고 격려하는 듯한 말에 투란은 헛웃음을 짓다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쨌든, 이건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했다.

비제의 영혼에 다른 사람도 아닌, 투란과 메이사만이 딱 맞는다고 한 이유가 무엇일지.

* * *

메이사와 만나고 일주일, 투란은 점점 자신이 이 도시에서 할 일이 사라지고 있다고 느꼈다.

슬슬 날이 따뜻해져 가는 칼라마프는 강대한 마법사의 힘에 의지하지 않아도 자급할 수 있는 도시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쪽으로 찾아올지도 모를 사령술사를 순찰하는 것 외에는 마법 수련밖에 할 일이 없어 하루하루가 지루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투란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오로지 귀족만이 할 수 있을 일거리가 새로 생겨났다.

바로 귀족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었다.

"도시의 보호자시여, 고귀한 손님이 방문하였나이다!"

"고귀한 손님?"

투란의 질문에 공무원이 정중히 답했다.

"예. 비겐과 아론드, 룸멜, 라바나...주변의 모든 도시에서 온 합동 사절단입니다."

"모셔 오도록."

잠시 후, 투란은 일곱 도시의 귀족들을 시청 회의실에서 맞이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칼라마프의 영주이신 투란 님. 손님으로서 접대를 청하는 바입니다."

"기꺼이 환영하지요. 다만 이곳 시청의 숙소에 머물러주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칼라마프가 제법 정상화되었다지만 그렇다고 시민들이 잘 집이 넘쳐나지는 않았다.

피난을 떠났다가 도시로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거주할 집이 필요했던 탓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중앙 저택은 복구되지 않고 부랑자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었다.

"...시청 숙소 말씀입니까?"

투란의 대답에 사절단에 속한 귀족들은 하나같이 황당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시청이라면 주로 평민들이 일하는 공간인 만큼 그 호화스러움은 저택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들을 저택 응접실이 아니라 여기서 맞이한 것부터 감정이 상하는데, 이곳 숙소에서 머무르라는 건 숫제 쫓아내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소리가 아닌가.

"일부러 푸대접하려는 게 아니라 현재 칼라마프는 집이 모자라서 그렇습니다. 중앙 저택은 집 없는 이들을 위해 개방한 상태라서요."

"중앙 저택을 개방하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그, 그러면 가주, 아니, 영주님은 어디서 숙식을 해결하신단 말입니까?"

"저도 여기서 먹고 잡니다."

고귀한 귀족이 저택을 평민들에게 양보하고 시청 숙소 따위에서 기거하고 있다니?

그 말을 들은 사절단의 귀족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이 투란이라는 자는 절대 대가문에서 키워낸 비밀병기 같은 것일 리가 없다고.

그 오만한 이들이 아무리 연기라지만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정말로 몰락 귀족인 거 아닙니까?'

'이렇게까지 품위며 체통이며 모르는 꼴을 봐선....'

'이러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는데요.'

그렇게 시선을 교환하는 이들을 향해 투란은 질문했다.

"그래서 저를 찾아오신 이유부터 들어보고 싶은데, 누가 말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재빨리 대표로 나선 것은 칼라마프의 동남쪽에 자리한 비겐 시 영주의 아들이었다.

딱 봐도 영리해 보이는 얼굴을 한 그가 투란을 향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칼라마프의 영주님께 저희 일곱 가문과 혼인 동맹을 맺을 것을 제의하고 싶습니다."

45화

결혼이란 남녀 한 쌍이 부부의 연을 맺는 신성한 의식.

이것이 옛 제국 시대부터 내려오는 인간 사회의 관습이지만, 정작 귀족들의 경우는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범속한 인간들과 달리 신의 후예로서 마법의 핏줄을 조금이라도 더 퍼트려야 할 필요성이 있는 탓이다.

귀족들의 결혼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그중 첫 번째는 비교적 대등한 마법사끼리 결합하는, 평민들의 그것과 같은 형식의 반려혼(伴侶婚).

그리고 둘째는 더 우월한 마법사에게 열등한 마법사들이 여럿 붙는 형식의 종속혼(從屬婚).

지금 일곱 가문에서 제의한 것은 그 두 가지 중 종속혼으로, 기사의 딸로 어느 정도 잠재력을 타고난 여성들을 투란에게 시집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한낱 첩일 뿐이라서 감히 칼라마프의 통치에는 간섭할 수 없었다.

"당연히 외모며 교양이며 빠지지 않는, 고귀한 분들의 첩이 되기 위해 잘 교육받은 아가씨들입니다."

귀족의 첩으로 들이고자 어려서부터 철저히 관리받아 키워진 아가씨들....

과거 도서관에서 마법사 가문의 운영법에 관한 내용을 읽을 때 본 적 있었다.

기사의 자식이지만 마력을 타고나지 못했거나, 기사와 일반인 사이의 애매한 마력을 타고난 이들 중 미색이 빼어난 이들을 뽑는다고 하던가?

당연히 육욕이라는 게 남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며, 모든 남자가 여성을 원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남성도 존재하기는 했다.

임신이나 그 외의 여러 문제로 수요는 훨씬 적다고 했지만.

"다른 것보다 우선 이런 제안이 왜 나왔는지부터 알고 싶군요.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서."

투란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를 듣다가 되물었다.

그가 칼라마프의 보호자가 된 지 어언 한 달.

제법 긴 시간이건만 인근의 다른 가문들은 웬 정체불명의 애송이 하나가 도시를 휘어잡는 와중에도 이를 제지하거나 교류를 시도하는 대신 침묵하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슬슬 얼굴 좀 보고 알아갑시다, 하는 것도 아니고 대뜸 이런 제안을 하다니?

질문을 듣고 라바나 시에서 왔다던 귀족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칼라마프의 영주께서 가문을 이루지 않으신 탓에 도시 운영에 어려움이 많으시다는 것을 압니다! 지금만 해도 중앙 저택조차 쓰지 못하고 계실 정도이지 않습니까? 일곱 명의 첩을 통해 자손을 보시면 그중 쓸만한 기사들도 꽤 태어날 터, 장차 통치하심에 있어 쓸모가 많겠지요! 그들의 핏줄 절반이 저희에게서 기원한 만큼 서로의 우의를 다지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고 말입니다!"

그가 말한 것이야말로 귀족들이 가문을 형성하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신처럼 막강한 마법사라고 한들 결국 몸뚱이는 하나일 뿐.

아무리 큰 땅을 지배해 봐야 동서남북에서 동시에 등장하는 마수를 막아낼 수도, 사방에 흩어진 평민들에게 동시에 명령을 내릴 수도 없었다.

그에 비해 평범한 기사 네 명을 휘하에 부리는 귀족은 그들을 이곳저곳에 주둔시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넓은 영토를 통치할 수 있는 것이다.

더 많은 귀족, 더 많은 기사가 확보될수록 큰 영토를 수월하게 통치할 수 있는 법.

투란은 가만히 앉아서 고민했다.

왜 갑자기 이러한 제의가, 하필 지금 나온 것일까?

최근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떠올리자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서쪽의 위협이 사라질 거라는 소식을 들어서 그런 거였군. 장차 칼라마프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건가.'

얼마 전, 아라비온의 군대와 접촉해 서쪽의 위협이 무엇인지를 알아낸 투란은 이를 대대적으로 공개했다.

도시를 위협하는 실체가 분명해지고 곧 사라지리라는 소식을 아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

설마 흑요정이나 난쟁이들이 인간 사이에 첩자를 심어놓지는 않았을 테니 굳이 비밀로 할 이유도 없었다.

회색 지대의 영주들은 그 소식을 접하고는 곧 가치가 상승할 칼라마프에 미리 침을 발라놓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도시끼리의 거리는 보통 사람의 걸음으로 사흘에서 일주일 정도...기사라면 개인차가 있겠지만 몇 시간에서 하루 정도면 이동할 수 있지. 기사를 전령 삼아서 서로 빠르게 상의했나? 아니, 이전부터 미리 상의해 두었을지도.'

어느 쪽이건 인근 일곱 도시의 영주들이 함께 행동했다는 건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들은 투란을 축출하는 대신, 그를 이곳 회색 지대의 다른 지배 가문들과 혈통을 섞게 하여 공생하기로 합의한 것이 분명했다.

가만히 이를 듣던 투란은 고개를 저었다.

"감사한 제안입니다만 거절하죠. 아니, 오히려 이참에 역으로 제안하고 싶습니다. 마침 이렇게 모두 모였으니."

"역으로 제안하신다면...?"

"이 도시, 칼라마프의 통치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모든 귀족이 눈을 빛내는 것을 보며 그는 자신의 조건을 나지막이 읊었다.

바로 이십여 년 전, 회색 지대를 여행하던 어느 젊은 여인의 행적을 찾아내라는 것.

이러한 조사를 요구한 것이 누구인지는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는 것이 조건이며, 가장 유용한 정보를 가져온 가문에게 칼라마프의 통치권을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들은 귀족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말도 안 되는...."

"고작 그런 조건만으로 도시를 넘기신단 말입니까!?"

여느 귀족 가문들에게 있어 도시란 권위와 더불어 실용적인 가치 역시 높은 것이었다.

평민들이 열심히 일해 바치는 공물이 온갖 호화스러운 생활을 유지할 기반이 되니까.

그런데 그런 도시를 고작 여자 한 명의 행적을 찾는 대가로 넘겨주겠다니?

길에서 동전 하나 주워 준 대가로 전함을 선물하겠다는 것만큼이나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설마 진짜로 아라비온의 비밀병기쯤 되는 건가?'

얼마 전 아라비온 가문과 접촉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만큼 그쪽이 가장 신빙성이 높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몰락 귀족이라는 작자가 도시 하나를 턱하고 내놓을 리 없지 않은가.

정처 없이 떠도는 이들이 가장 바라는 것 중 하나가 자신의 도시를 얻어서 정착하고 가문을 꾸리는 것일 텐데.

"그것뿐인 게 걸리신다면 하나 더 추가하죠. 누가 이 도시를 가져가건, 통치자로서 성실하게 도시의 시민들을 보호할 것을 프레아 신족의 이름으로 약속하라는 것. 이를 어기는 순간 도시의 통치권은 유지되지 않는다는 조건입니다."

투란이 떠올린 것은 그가 처음으로 방문했던 무레이 시의 풍경이었다.

밖에서 마수들이 어린애들을 몇 명이고 잡아먹었음에도 귀찮다며 마수 사냥꾼들에게 일을 떠밀던 모습....

아무에게나 넘겼다가 이 도시가 그런 꼴이 된다면 굉장히 불쾌할 것 같았다.

하다못해 이곳을 원래 통치하던 가문조차도 그러한 보호를 위해 싸우다 멸망한 것이 아니던가.

투란의 말에 귀족들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성실하게 도시의 시민들을 보호한다니?

프레아 경전에서나 나올 법한 구태의연한 말이 아닌가.

어느 귀족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그렇게까지 하십니까?"

말을 보태지는 않았지만 다른 귀족들 역시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부랑자들을 위해 중앙 저택을 개방하고 자기는 허름한 시청 숙소에서 기거하며, 도시 하나를 넘기는 대가로 시민들의 보호 같은 조건을 내거는 이유가 뭐냐고.

귀족들에게 있어 평민이란 종교적인, 그리고 실리적인 이유로 보호할 필요가 있는 대상이지만 저렇게까지 감싸고 돌 필요까지는 없는 존재였다.

양치기가 제 양을 소중히 여긴다 한들 결국에는 도축해서 살점이며 털가죽 따위를 쓰려 키우는 것 아니던가?

그들이 보기에 투란은 양을 제때 도축하기는커녕 늙어 죽도록 자기 침대 위에서 재워가며 보살핀 뒤 곱게 묻어주기까지 하는 괴상한 양치기였다.

투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왜일까요."

이후, 일곱 도시의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다가 물러갈 것을 청했다.

"하룻밤조차 머무르지 않고 떠나는 것이 무례임을 압니다만, 급한 일이니 가주님께 말씀드려서 최대한 빨리 답변을 받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접대의 관습상 와서 제 할 이야기만 턱 꺼내고 돌아가는 것은 무례한 일이지만, 애초에 고귀한 귀족들을 시청에서 재우겠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서로 비겼다고 할 만했다.

귀족들이 모두 물러간 뒤, 회의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룩이 들어와서 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도시의 보호자시여. 혹시 하명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회의를 열겠다."

"이미 모두 아래층에 모여 있습니다."

하기야 인근 모든 도시의 귀족들이 찾아왔다면 당연히 도시의 앞날에 관한 중대한 이야기가 오갔을 터.

도시를 이끌어가는 이들이라면 모여 있는 것이 당연한 바였다.

잠시 후, 투란은 회의실에 모인 그들에게 조만간 칼라마프의 통치권을 다른 가문에게 이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를 들은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위대한 보호자시여, 이 도시는 아직 당신이 필요합니다...."

"도시 서쪽의 위협은 곧 아라비온이 물리칠 것이고, 다른 가문들 역시 통치권을 얻게 된 명분이 명분인 만큼 충분히 신경 쓸 거다. 그러면 나 없이도 충분히 유지되겠지."

칼라마프의 유력자들은 내심 투란이 이곳에서 자신의 가문을 꾸려나가기를 바랬다.

투란은 여느 귀족들과 달리 착취하지 않으며 자신의 능력을 도시를 위해 사용하는, 그들이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헌신적인 양치기였으니까.

그러나 도시의 통치권을 유지하느냐 넘기느냐는 결국 귀족들의 의사에 달려있을 뿐.

본래 양이건 목장이건 사람끼리 사고파는 것이지, 양이 자신을 키워줄 사람을 고르는 법은 없었다.

* * *

당연하게도 투란의 제안을 받은 일곱 귀족 가문에서 곧바로 답변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아마 그들이 통치하는 도시나 주변 마을에서 은밀히 어머니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 뒤, 자기들이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섰을 때나 동의를 표할 터.

통치권 양도에 대한 이야기는 단속해 둔 만큼, 칼라마프의 시민들은 곧 주인이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여전히 희망차게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투란은 때때로 시청 꼭대기의 지붕에 앉아 그들의 삶을 내려다보곤 했다.

"다들 참 열심히 산다, 그렇지?"

철판을 가져오지 않은 비제는 글을 쓸 곳이 없어 그저 삐약 하고 우는 것으로 답했다.

투란은 칼라마프의 시민들, 그가 없었다면 무력하게 죽어갔을 이들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다른 귀족에게 들은 질문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

갓 마법의 힘을 깨우쳤던 어린 시절, 어머니는 그가 양치기의 아래에서 부려지는 목양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투란은 자신이 평범한 인간들, 양들보다 특별히 더 우월한 존재라고 여기지 않았다.

결국은 그 역시 양치기의 횡포가 두려워 숨어 사는 개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다가 만난 케오른은 투란이 사실 개가 아니라 양치기임을, 그리고 양치기가 마냥 두려운 존재만이 아닌 숭고한 존재일 수 있음을 알려 주었다.

마수와 이종족이라는 늑대들로부터 기사와 평민을, 목양견과 양을 돌보는 선량한 양치기....

투란은 그 늙은 기사가 말했던 것과 같은 이상적인 존재가 되고 싶었다.

과거 어린 자신이 두려워하던, 양과 목양견들을 마구 부려 죽게 하는 사악한 양치기가 아니라.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 조금 떨어진 곳에서 꽤 강력한 기사의 기척 하나가 느껴졌다.

'누구지?'

처음에는 어느 가문에서 온 전령쯤 되나 싶었는데, 그런 거였다면 공무원 중 누군가가 먼저 투란을 찾아와 보고했을 터였다.

귀족이건 기사건 어지간해선 다른 도시에 들어설 때 곧바로 그 존재를 알리기 마련이니.

도시 중앙에 가까운 시청까지 오도록 보고가 없었다는 건 아무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몰래 들어온 건가?'

투란 역시 자주 그런 짓을 했기에 비난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일반적으로 마법사 사회에서는 무례하게 여겨지는 일이었다.

암살을 위해 침투한 것이 아니냐고 추궁해도 할 말이 없을 테니까.

"비제, 잠시 여기 있을래?"

삐약 하고 답하는 것을 들은 뒤, 투란은 슬며시 모습을 감춘 채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나는 상대의 얼굴.

이를 본 투란의 눈이 커졌다.

"아...."

그는 슬쩍 주변의 골목으로 들어가 은신을 해제한 뒤, 걸어 나오며 곧바로 상대를 불렀다.

"어르신!"

아라비온의 기사, 케오른의 고개가 투란을 향해 휙 돌아갔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 반가워하는 기색이 어렸다.

"정말이었군! 혹시나 해서 찾아와봤네만 진짜 자네였을 줄이야!"

그렇게 기뻐하기도 잠시, 케오른이 헛기침하며 자세를 고쳐 인사했다.

"실례했습니다. 칼라마프의 투란이시여."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세요. 그런 거 안 좋아하는 거 아시잖습니까."

"자네 어째 몸은 확 자랐는데 하나도 안 변했구먼."

장난스러운 투정에 케오른이 껄껄 웃으며 말을 놓았다.

얼마 전 메이사에게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번에는 하나도 안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심지어 몸을 단련한 탓에 겉보기의 차이는 훨씬 컸을 텐데도.

잠시 후, 투란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자 케오른을 자신이 머무는 시청의 숙소로 데려왔다.

그와 만난 지가 얼추 반년쯤 되었던가?

따지고 보면 고작 며칠 만났던 사람에 불과한데 왜 이리 반가운 것일까.

그만큼 케오른이라는 사람이 투란에게 준 영향이 컸다는 의미일 터였다.

"설마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곳에 오려면 엄청나게 돌아오셔야 했을 텐데요."

기사의 걸음이면 히사릴 언덕에서 반년 만에 여기까지 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만, 회색 지대의 서쪽이 전쟁터가 된 만큼 여행 거리가 어마어마하게 길어졌을 터였다.

북쪽은 산맥으로 막혀 있으니 남쪽으로 지나와야 했을 터.

그런 투란의 말에 케오른이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게 말인데...그냥 여행하다가 온 것은 아닐세."

"여행이 아니면요?"

"사실 여행 중에 전쟁 소식을 듣고 토벌대를 찾아가서 복귀를 신청했다네. 이미 흑요정들과도 몇 차례 싸웠지."

"아...."

그러니까, 눈앞의 늙은 기사는 은퇴한 여행자가 아닌 토벌대 소속의 아라비온 기사로서 이곳에 온 것이었다.

아마 과거 메이사와 그 숙부를 만난 뒤로 토벌대 내에 투란의 이름과 신상이 퍼지며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터.

"혹시 제 혈통에 대해서 아라비온 쪽에 말씀하셨나요?"

"말하지 않았네. 얼핏 듣기로 자네도 딱히 자하르 귀족으로 살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것 같길래. 혹시 오지랖이었나?"

"아뇨, 맞습니다."

태연히 답하는 늙은 기사에게서 거짓말하는 사람 특유의 긴장한 냄새 따위는 조금도 풍기지 않았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웃기도 잠시, 케오른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본격적인 용건을 꺼냈다.

"이제 아라비온의 전령으로서 제 일을 해야겠군. 정확히는 메이사 아가씨의 전령으로서 일하는 것이지만 말이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신 겁니까?"

한낱 기사와 대가문의 후계자라면 어지간한 귀족과 평민보다도 훨씬 큰 신분 차이건만.

물론 케오른이 보통 기사가 아니기는 했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안면이 있긴 하네. 어쩌다 보니 분에 맞지 않는 감투를 쓰게 되어서...."

"영웅 케오른 말이군요."

"자네 설마 그 연극 봤나?"

케오른이 민망함과 자괴감이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메이사 아가씨의 제안부터 전함세."

"예."

"흑요정 사령술사...자칭 사령왕의 토벌에 문제가 생겨서 협조를 부탁하고 싶다고 하시네."

46화

"사령왕이라...."

왕이라는 호칭의 기원은 먼 고대, 인간을 지배하던 이종족의 지배자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옛 제국의 몰락 후 몇몇 인간 귀족들 역시 제 영토를 왕국이라 선언하며 왕을 자칭하기도 했지만, 결국 대중적으로 정착하지는 못했다.

역사상 왕이라 불렸던 이들 대부분이 신족과 그 후손들에게 퇴치당하는 악당 역할이었기 때문.

즉, 왕을 자칭할 만한 이종족이라면 역사서에나 나올 법한 기량을 지니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나름 숭고한 호칭인 만큼, 어중이떠중이에게는 쉬이 그러한 이름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불릴 정도로 강한 놈입니까? 형편없이 밀려서 도망쳤다고만 들었는데요."

이전에 메이사와 이야기할 때만 해도 그냥 다 잡은 먹잇감 취급하는 기색이지 않았던가?

"본래도 꽤 강한 놈이긴 하네만 최근 들어 더 성가시게 되었네. 혹시 살아남은 흑요정 일파가 난쟁이들의 소굴에 합류했다는 이야기도 아가씨께 들었나?"

"아마 그럴 수도 있겠다고 듣긴 했습니다."

"놈들이 숨어 있는 소굴을 찾아내 대대적으로 진입했다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네. 귀족만 여덟 명, 기사는 이백여 명이 죽었지."

"잠깐만요, 분명 토벌대의 규모가...?"

"본가와 가신 가문에서 데려온 이들을 합쳐 귀족 사십 명에 기사 칠백 명이었다네. 중부 지역에서의 토벌로 죽은 귀족이 세 명, 기사가 백이십 명 정도였는데 이번 한 번 함정에 빠진 것으로 그보다 더 많이 희생되어 버렸어. 가능한 시체를 회수하려 애썼네만 그중 상당수가 사령으로 부려지고 있겠지."

그 정도면 저 신들의 무덤에서 자하르 가문이 입은 손실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최상위 귀족이던 페르가가 희생되었음을 생각하면 단순히 일 대 일로 볼 수는 없겠지만....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겁니까?"

"난쟁이들의 소굴에 정체불명의 마법기가 대량으로 준비되어 있었다네.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식이지만 하나같이 치명적이기 그지없는 물건들이었지."

갑자기 여기서 마법기는 또 왜 나온단 말인가.

설마 어느 마법사 가문이 아라비온의 군대를 공격하기 위해 이종족과 협력하기라도 한 것일까?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떠오르는 후보가 하나 있기는 했다.

"설마...자하르가?"

"아가씨께서는 그건 아닐 거라고 하시더군. 옛 난쟁이들의 유물을 발굴해 사용하는 것 같다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네."

투란이 읽은 책에 의하면 난쟁이들은 이종족 중에서도 유독 지성이 떨어지며 폭력적이고 원시적인 성격에 뛰어난 신체 능력만이 장점인 종족.

그런 족속들이 만든 물건이래 봐야 뼈 목걸이 정도일 텐데 귀족들에게 위협이 될 리 없었다.

하지만 메이사가 그런 말을 했다면 아마 무언가 아는 바가 있어서일 터였다.

대가문의 후계자인 만큼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일단 이야기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는데요."

"어떤 것 말인가?"

"혹시 탈리스 자하르가 누군지 아십니까?"

"잘 모르겠네. 가주의 이름이 아닌 건 아네만."

투란은 케오른에게 엔릴 사막을 여행했던 이야기를 짧게 들려주었다.

어느 가신 가문의 가주가 투란의 얼굴에서 자하르의 현 이인자인 탈리스라는 귀족의 얼굴을 보았다고.

"어쩌면 아라비온의 귀족 중 제 얼굴을 보고 이상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죠."

과거 베르크 가문에 머물 당시에야 부여사 가문인 만큼 전쟁 참여자가 한 명도 없었고, 메이사 역시 전쟁 중에는 갓난아이였던 만큼 투란의 얼굴에서 자하르 귀족의 흔적을 읽어내지 못했을 터.

하지만 토벌대에는 투란의 얼굴에서 탈리스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러한 지적을 받은 케오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뜻인진 알겠네만 걱정할 건 없을 것 같군. 전쟁 도중 자하르 귀족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옷에 가면을 쓰고 있었다네. 포로에게 듣기로는 얼굴을 가려서 개성을 지운 채 은신 마법으로 서로 바꿔 치며 혼란을 주기 위함이었다는데, 실제로 상대하던 적의 힘이 갑자기 변해서 낭패를 보았다는 귀족들의 증언이 많았지."

"그러면...."

"아라비온에서 자하르 귀족의 얼굴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걸세. 심지어 평화 협정도 양쪽의 기사들이 서류를 나눴을 뿐이니까. 그보다 자하르의 이인자라니, 설마 그가 자네 아버지란 말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여기서 그 흔적을 좀 찾아가는 중이었거든요."

투란은 어쩌다 보니 자신이 자하르 귀족 열 명의 마력을 먹어치웠다는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걸 말하다 보면 밤 사냥꾼에 관련된 기묘한 현상 등 온갖 이야기가 다 나와야 할 테니까.

"게다가 만약 제가 자하르에 포섭된 상태라면 너무 위험한 일 아닙니까."

진영 내로 들어온 투란이 어느 날 밤 갑자기 잠자는 귀족들을 떼로 죽여버리고 도망치면 대참사일 터.

그 말을 들은 케오른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경험상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밝히지 않는 법이라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저를 너무 좋게 봐주십니다."

"나야 자네가 반년 전까지만 해도 자하르와 무관계한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그사이에 자하르가 자네를 어떻게 꼬드겼건 그런 무도한 일은 하지 않으리라 믿네."

그가 엔릴 사막까지 가본 적 있다고 말했음에도 이런 믿음이라니.

투란은 민망한 기분에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아라비온 쪽에 추가 지원을 요청할 수는 없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가주 본인이 오면 사령왕이고 난쟁이의 유물이고 다 때려 부수고도 남지 않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아라비온의 역량이면 충분히 더 지원 병력을 구할 수 있을 터.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네. 첫째는 놈들 본거지의 구조상 약한 마법사들을 많이 밀어 넣어봐야 희생자만 많아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고, 둘째는 아가씨가 입장 상 본가에 지원군을 청하기 어려우시다는 거지."

"메이사 아가씨가요?"

자하르처럼 경쟁자가 있다면 평판에서 밀릴 것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확고한 후계자가 가문의 지원을 받는 데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그러한 뉘앙스를 읽은 케오른이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게 가문 내의 정치적 문제가 얽혀 있어서 깊게 언급하기는 조금 어렵네만...후계자라고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본가에서 지원군을 청하자면 아가씨가 그쪽에 양보하셔야 할 것이 있다네."

그러니까 강력한 지원군이 필요한 상황인데 여러 이유로 본가에 손을 벌리기는 어렵고, 마침 막강한 귀족 친구 하나가 바로 옆에 있으니 힘을 빌리고 싶다는 뜻이었다.

거기까지 말한 케오른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물건 하나를 꺼냈다.

흉내쟁이 성유물의 감각 덕에 투란은 그것이 마법기임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아마도 저것이 메이사가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해 준비한 보상일 터.

하지만 잠시 후 밝혀진 물건의 정체는 그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대용량 주머니일세. 성유물이지."

"성유물...이요? 제가 생각하는 그 성유물이 맞습니까?"

"맞네. 비록 성유물 중에서는 최하급으로 치는 것이지만 말이야. 비슷한 물건이 꽤 많다던가?"

케오른이 내민 것은 기껏해야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에 불과한 천 주머니였다.

투란이 이를 받아들자 케오른은 한번 실험해보라는 듯 주머니에서 가죽 물통을 꺼내 내밀었다.

"백 배의 물건을 넣을 수 있다고 들었네."

그 말대로 주머니보다 훨씬 커다란 가죽 물통은 간단히 천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쭈글쭈글한 주머니는 조금 부풀지조차 않았으며, 다시 거기에 손을 넣자 가죽 물통이 잡혔다.

"이런 귀한 물건을 어르신께 맡겨 보냈다니 믿기지가 않네요. 아니, 어르신을 못 믿는다는 게 아니라...."

"내가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습격당해서 빼앗기면 낭패였겠지. 걱정하지 말게. 이 근처까지는 메이사 아가씨와 함께 왔으니까. 도시가 보일 때부터 혼자 걸어왔을 뿐."

하긴, 아무리 그래도 기사 한 명에게 성유물을 덜렁 들려서 보낼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을 터.

투란은 손에 들린 주머니를 몇 번이고 뒤집어 보았다.

'대용량 주머니라.'

홀로 여행할 때마다 옆구리에 배낭 하나 매고 다니기가 얼마나 귀찮았던가?

식량을 좀 챙기다 보면 무겁고 부피가 커져 많이 넣을 수도 없었고, 돈이라도 많이 벌면 들고 다니기도 불편했고.

그 모든 문제가 이 작은 주머니 하나로 해결되는 셈인데, 이런 건 어디서 돈 주고 구할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다만....

'대체 본가에 양보해야 할 것이 뭐길래 이런 물건을 줘 가면서까지 지원을 요청하지 않으려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대가문의 후계자가 희생할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하던 투란은 툭 던지듯 질문했다.

"제가 참여하면 충분히 토벌할 수 있겠습니까?"

"아가씨는 그러리라 믿으시더군."

대답을 들은 투란은 대용량 주머니를 매만지다가 거기에 달린 끈을 허리춤에 묶었다.

"알겠습니다. 저도 메이사 아가씨가 다치시는 것은 바라지 않으니까요."

여기서 투란이 외면한다면 그의 몇 안 되는 친구가 더 나쁜 선택을 하거나 위험한 선택 둘 중 하나를 해야 할 터였다.

거기다가 사고 가속 마법에 대한 보답도 아직 하지 못한 상태이지 않던가.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하는 법이었다.

* * *

투란은 다룩에게 며칠에서 일주일쯤 도시를 비우겠다고 통지한 뒤, 케오른과 함께 비제를 타고 서쪽으로 비행했다.

그가 한쪽 손으로 비제의 다리를 잡고 반대쪽 손으로 케오른의 손을 잡는 식이었다.

늙은 기사는 두 사람을 달고 하늘을 나는 검독수리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검독수리라니! 이런 비행 수단은 대체 어디서 얻은 겐가?"

케오른의 말에 비제가 불만스럽게 삐약 울며 몸을 뒤틀었다.

자신을 비행 수단 취급한 것이 불쾌한 듯했다.

"비행 수단이라고 부르지 말라는군요."

"이런, 실례했습니다. 비제...음, 혹시 수컷인가 암컷인가?"

"암컷입니다."

"비제 양."

정중한 사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스러운 울음 한 번과 함께 비행이 정상화되었다.

그들은 머지않아 어느 언덕 위에서 케오른을 기다리던 메이사와 접촉했다.

"여기까지 온 건 도와주시겠다는 뜻으로 알면 될까요, 투란?"

"예. 그보다...다치셨군요."

"심한 정도는 아니에요."

다시 만난 메이사는 목과 어깨 등 몇 군데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설마 치유사가 다 죽은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저보다 급한 이들이 많아서요. 회복할 마력은 한정되어 있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가야죠."

당장 덜 다친 메이사보다 숨이 넘어가게 생긴 이들을 치료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투란은 드러나지 않게 숨을 훅 들이쉬었다.

꽤 진한 혈향, 조금 전에 씻었는지 풍기는 물과 비누의 냄새, 그리고 옅은 체취....

'확실히 함정은 아니군.'

메이사에게서 적대적인 대상과 마주한 생물 특유의 긴장이나 흥분의 냄새는 풍기지 않았다.

다른 감정은 냄새로 간파하기 모호할 때가 많지만 두려움과 긴장, 분노와 흥분은 제대로 주의하면 놓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케오른에게 설명은 다 들으셨죠?"

"예, 들었습니다."

"그럼 바로 이동하죠. 가능하면 저쪽이 전력을 회복하기 전에 바로 공격하고 싶으니까."

"메이사 양도 부상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어차피 조금 다치는 정도로는 딱히 느낌도 안 와서."

아무리 생각해도 다쳐도 아프지 않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가 아닌 것 같지만, 자신이 그렇다는데 뭐라 말하기도 애매한 일이었다.

잠시 후, 세 사람과 한 마리 검독수리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설치되어 있던 아라비온의 진영에 도착했다.

"아으...."

"여기 물 좀 더 가져와!"

"젠장, 붕대가 너무 가려운데."

다친 마법사들로 가득한 그곳은 의외로 천막 같은 것을 대충 쳐놓은 곳이 아닌, 잘 만들어진 건축물이었다.

아마 기사들이 돌과 나무를 이용해서 뚝딱 지어낸 것일 터.

사방에는 환하게 빛나는 마법기 구슬이 한가득 박혀 있었는데, 혹시라도 은신 마법을 쓴 누군가가 침투해오는 것을 대비하기 위함인 듯했다.

역시 자하르와 적대하는 가문다운 편집증적인 조치였다.

세 사람이 진영 앞에 내려앉자 지난번에 보았던 카드람을 비롯한 아라비온 귀족들이 다가왔다.

당연하게도 투란을 보는 그들의 눈빛은 썩 곱지 않았다.

적의까지는 아니지만 수상하게 여기는 기색이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사람이구나, 메이사."

"네. 말씀드렸다시피 제 친구이고, 베르크 가문의 벗이에요. 그 정도면 등을 맡길 수 있겠죠. 마력이야 아실 거고."

"힘이야 충분하다만 문제는 출신성분이지. 제 혈통 능력조차 모르는 몰락 귀족이라니 수상하지 않으냐. 혹시 자하르의 버러지가 위장한 것이면 어쩌려고?"

놀랍도록 날카로운 지적에 투란은 손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해 모였다.

"원하신다면 혈통 능력을 보여드리죠."

"음?"

아라비온의 귀족들은 그렇구만, 하는 기색만을 보였으나 그가 혈통 능력을 모른다고 알고 있던 메이사는 눈에 띄게 놀랐으며, 케오른은 당황한 표정마저 짓고 있었다.

이중에서 유일하게 투란이 자하르 혈통임을 알고 있는 것이 그였던 탓이다.

투란은 그들의 앞에서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불꽃을 피워올린 뒤 눈앞에 이를 길게 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꽃은 사라졌으나, 그곳에는 길쭉한 마력의 선 한 줄기가 남았다.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것을 볼 수 없었지만.

옆에서 길쭉한 나뭇가지 하나를 가져와서 던지자 불꽃이 확 일어나며 나뭇가지를 태웠다.

누가 봐도 완벽한 결계사 혈통 특유의 마법 함정이었다.

47화

"결계사라...싸움에는 그다지 도움 안 되겠는데?"

"뭐, 그래도 저 정도 마력이면 혈통 능력 없이도 제 몫을 하겠지."

예상했던 대로 혈통 능력이 밝혀지자 투란을 향하던 의심의 시선은 확 사그라들었다.

물론 자하르의 가신 가문 중 결계사가 있기는 하나, 그렇게 따지면 의심해야 할 혈통만 십수 개쯤 됐기에 굳이 거기까지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다소 느슨해진 시선을 뒤로한 채, 투란은 몸에 깃들어 있던 결계사 혈통의 마력이 완벽히 소멸하는 것을 느꼈다.

'좋아, 딱 맞네. 연습한 보람이 있는걸.'

흉내쟁이 성유물의 진정한 힘을 깨달았을 당시, 그는 지하 미궁에서 귀족 열 명 분량의 마력을 흡수하며 그들의 혈통 능력이 담긴 힘 역시 담았다.

그 구성비는 사냥꾼-추격자가 셋, 환영 하나, 광전사 하나, 치유사 하나, 마지막으로 결계사가 넷.

결계사만 유난히 많은 것은 그것이 신들의 무덤이 있던 도시, 바니펠을 지배하던 가문의 혈통 능력이라서였다.

그들은 당시 페르가를 구조하고자 가주까지 직접 뛰어 들어왔을 정도였으니까.

투란은 칼라마프의 보호자로 일하는 동안 이미 본인이 보유하고 있어 별 가치가 없는 자하르의 마력, 그리고 남아도는 결계사의 마력을 이용해 몇 가지를 실험했다.

그러던 도중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성유물을 쓸 때 반드시 한 명 분량의 마력을 모두 소모할 필요는 없다는 것.

역사 혈통의 힘을 썼을 때처럼 온전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한 명 분량의 마력을 다 마셔야 하지만, 조금 전처럼 간단한 재주만 보이는 데는 가볍게 몇 방울 떼어 마시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이래저래 실험 과정에서 조금 없어진 것을 제외해도 세 명 반 정도 분량이 남아 있으니 적절히 나눠 쓰면 결계사 흉내를 내기는 어렵지 않을 터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메이사가 나서서 물었다.

"혹시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충분합니다."

"저 역시 이의 없습니다. 아가씨."

"음."

"좋아. 이 건에 대해서는 끝난 것으로 알겠어. 모두 회의실로."

모든 귀족들이 동의한 것을 확인하고, 그녀는 투란과 다른 귀족들을 아라비온 막사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회의실로 데리고 갔다.

탁자나 의자도 제법 갖춰져 있는데, 어째 형식이 일관되지 않은 것이 다른 멸망한 도시나 마을에서 집어온 것 같았다.

"그러면 지금부터 작전 회의를 시작하겠다. 전장을 구현해."

메이사의 지시에 어느 귀족이 책상 위로 손을 뻗자, 이윽고 흘러나온 빛이 이리저리 조형되어 어느 협곡의 환영을 그대로 투영해 냈다.

이것이 바로 빛을 섬세하게 조작하는 환영 혈통의 힘.

흉내쟁이 성유물에 담긴 것과 같은 능력이었다.

'나도 많이 연습해보면 할 수 있으려나.'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전장이 될 난쟁이들의 은신처가 어떤 곳인지 들여다보는 사이, 메이사가 환영을 짚었다.

"보다시피 저들이 숨어 있는 장소는 협곡 지형. 지난번에는 좁은 장소에 과도하게 많은 병력을 투입한 탓에 손실이 컸다. 따라서 이번에는 귀족들과 실력 있는 기사 백여 명 정도만 들어간다."

"백오십 명쯤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면 아직 다친 이들까지 포함된다. 이종족을 상대론 짐덩이일 뿐이야."

"그래도...."

"저놈들도 지난번에 사령술사가 절반 가까이 죽었어. 그거면 충분해."

잠시 귀족들끼리 떠든 뒤, 기사는 백이십 명이 들어가는 것으로 정해졌다.

진형을 어떻게 짤 것인지까지 상의한 다음, 메이사가 다시 한번 환영 혈통의 귀족에게 명령했다.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난쟁이들이 쓰는 무기다. 워낙 전장이 혼잡해서 못 봤던 사람들도 있었을 테니 보여주도록."

잠시 후 생겨난 두 번째 환영은 투란이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금속으로 된 길쭉한 기구에 둥그런 관 같은 것이 옆에 몇 개 붙어 있었으며, 앞으로는 길쭉한 원기둥 하나가 쭉 뻗어 있는 형태.

얼핏 보면 창 같기도 했으나 그렇게 쓰기에는 지나치게 거추장스러워 보였다.

"이게 바로 난쟁이들의 마법기다. 놈들이 이것을 쓰면 사방으로 연기가 솟구치며 금속 덩어리가 발사되지. 비슷한 형태로 끌고 다니는 큰 것과 들고 다니는 작은 게 있는데, 작은 것도 기사들이 급소에 맞으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으며 큰 것은 귀족들에게도 제법 타격이 된다."

다른 귀족들은 고개만 끄덕이는 것이 이미 다 알고 있던 내용이라 그런 듯했다.

애초에 이곳에서 지난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투란뿐이었으니, 그를 위한 설명이라 봐도 좋았다.

이후에도 끈끈한 불을 뿜어내는 물건 등 난쟁이들 특유의 기괴한 마법기 몇 개를 더 소개한 뒤 회의가 끝났다.

"앞으로 세 시간 뒤에 문이 열리면 바로 진입한다. 시간이 더 지나면 지난 전투의 희생자들이 사령이 되어서 적에게 합류하게 될 테니까."

"예!"

"그러면 모두 해산. 투란, 당신은 잠시 이쪽으로."

마지막에 따로 부른 탓일까, 귀족들은 해산하는 와중에도 투란과 메이사를 흘긋거렸다.

* * *

급조된 막사의 위층에는 메이사가 개인 숙소 겸 집무실로 쓰는 방이 있었다.

그녀는 문을 닫고 집무실 주변을 바람으로 둘러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더니, 조금 전까지의 싸늘한 무표정을 벗어던지며 외쳤다.

"방금 어떻게 결계사 혈통의 능력을 쓴 거죠? 설마 연습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한 건가요!?"

과거 베르크 저택에서 함께 마법을 연습하던 당시, 그녀는 투란의 혈통 능력을 찾아 주고자 다양한 마법을 가르쳐주고 시도해보게 했다.

그중 결계사의 마법도 있었기에 메이사는 그가 결계사 혈통일 리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러한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했던 만큼 투란은 동요하지 않고 답했다.

"그럴 리가요. 마법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전혀 티가 안 나던데...."

수호자 마법기처럼 신체에 직접 작용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몸 밖에서 작용하는 혈통 마법을 마법기로 재현하면 그 흔적이 명확히 드러났다.

예를 들어 방화광 능력을 재현한다면 불이 몸 주변이 아닌 마법기에서 피어오르는 식으로.

만약 결계를 만드는 마법기를 사용한 것이었다면 귀족들도 당연히 이를 알아챘을 터였다.

하지만 흉내쟁이 성유물은 그런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왜냐면 이쪽은 정말로 혈통 능력을 일시적으로 부여하는 원리였으니까.

투란은 꽤 많은 지역을 돌아다녔음에도 아직 혈통 능력을 약탈하거나 흉내 내는 힘에 관한 이야기는 접하지 못했다.

그만큼 이것은 희귀한 물건이었다.

"특별한 물건이라서요. 대신 제약이 꽤 있어서 완전히 자유롭게 쓰진 못합니다."

"그런 걸 쓸 거였으면 먼저 말을 해주지 그랬어요? 미리 입을 맞출 수 있었을 텐데."

"사용할지 말지 확신을 못 하고 있었거든요. 저들이 순순히 저를 받아들였으면 꺼내지 않으려 했는데, 태도를 보니 혈통 능력을 알려주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을 기색이라."

신뢰할 수 없는 아군을 뒤에 두고 있다는 압박감은 전투에 있어 어마어마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할 터.

어차피 쳐들어가는 쪽에선 결계사 능력을 쓸 일도 별로 없으니 차라리 안심시키는 용도로 보여주는 게 나으리라는 판단이었다.

덕분에 전투 중 갑자기 투란이 은신해서 자기들의 뒤통수를 노리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게 됐지 않나.

설명하던 도중, 투란은 메이사의 얼굴에 어렴풋이 안심하는 듯한 기색이 엿보임을 깨달았다.

그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베르크 저택에서 함께 지낼 당시, 그녀는 매사에 무관심한 듯하면서도 마법만큼은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과 승부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죽하면 기절할 정도로 전력을 다해 가며 부패 마법을 시도했을 정도.

그런데 내심 자기와 동급이라 생각했던 경쟁자가 혈통 능력마저 실력으로 재현하는 경지에 올라버렸나 싶어, 깜짝 놀랐다가 자신이 뒤처진 것이 아님을 알고 안심했을 터였다.

자꾸 사람들이 찾아오는 게 토벌대의 수장으로서 해야 할 업무가 많은 듯해, 투란은 메이사를 더 귀찮게 하지 않고자 방에서 나와 케오른을 찾아갔다.

그는 눈이 부시다 못해 다소 아플 정도로 밝혀놓은 마력등 사이에 혼자 앉아있었다.

"어르신."

"아, 투란. 듣기로 이야기는 잘 된 것 같더군."

"예."

그는 메이사와 달리 어떻게 결계사 혈통의 힘을 흉내 낸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누가 이야기를 엿들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투란은 무언가 긴밀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조금 전 들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세 시간 뒤에 공격할 예정이고, 모든 귀족들과 기사 중 강한 순서대로 백이십 명을 뽑겠다더군요."

"좋은 생각이군. 지난번에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보다 많은 수는 별 쓸모가 없을 것 같았으니. 유감스럽게도 나는 같이 못 갈 것 같으이."

"대기 명령을 받으신 겁니까?"

케오른은 비록 나이가 들었다지만 다친 곳도 없고 마력도 훌륭한 편이라, 정예를 뽑는다면 무조건 들어갈 만한 사람이었다.

투란의 질문에 늙은 기사가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싸우러 갈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늙은이가 젊은 사람을 싸움터로 내몰고 뒷짐 지는 꼴이 되어서 면목이 없네."

"영웅 케오른이 흑요정 따위와 싸우다가 죽으면 체면이 살지 않아서 그런 거겠군요."

"그렇지. 지금까지는 적당히 안전한 곳에서 싸우게 했지만, 이번 전투는 그럴 수 없을 테니."

별로 농담할 기분이 아닌 탓인지, 케오른은 자신의 이름이 담긴 연극이 언급되었음에도 민망해하는 대신 깊은 한숨만을 내쉬었다.

"그러면 이곳에 남는 김에 제가 돌아올 때까지 비제를 봐주실 수 있으십니까?"

"놓고 갈 생각인가?"

"예. 지형도 별로 좋지 않고, 그 난쟁이들이 쓴다는 마법기에 다칠까봐 걱정이 되어서요."

적들이 숨어 있는 협곡은 위쪽에 강한 난기류가 불며 지형이 구불구불한 탓에 아라비온의 귀족조차 비행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쇳덩이를 쏘아대는 마법기에 얻어맞는다면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겠는가.

케오른이라면 믿고 비제를 맡길 수 있었다.

"내 목숨처럼 지키지. 무사히 돌아오게나."

비제가 앉아있는 막대기를 그대로 쑥 뽑아 케오른에게 넘기자, 녀석은 투정을 부리듯 부리를 딱 부딪쳤지만 싫다고 떼를 쓰지는 않았다.

옆에서 함께 회의를 들은 만큼, 자기가 짐덩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똑똑한 녀석."

[빨리 돌아와!]

기특한 마음에 머리를 쓰다듬자 비제가 나무로 된 벽에 글씨를 새겼다.

* * *

"출발."

메이사의 짧은 명령 한 마디에 총 스물여섯 명의 귀족, 백이십 명의 기사들이 움직였다.

목표는 흑요정들이 숨은 난쟁이의 소굴.

최전방은 메이사와 카드람, 투란 등 가장 강력한 귀족들.

중앙은 비교적 약한 귀족들이 자리하고 옆과 뒤쪽은 기사들이 감싼 채 길게 늘어섰다.

좁은 공간을 돌파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형태였다.

그렇게 포진한 채 어느 거대한 바위 앞에서 몇 분 정도 기다리자, 쩌억 소리를 내며 바위가 갈라지더니 아주 깊고도 깊은 협곡 하나가 드러났다.

투란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이걸 진짜 보게 될 줄이야...."

세계 일주기의 작가도 이 동굴을 직접 보지는 못하고 이런 게 존재하더라는 전설만 접했을 텐데.

심지어 이 바위의 움직임은 흉내쟁이 성유물로도 무언가 마력이 작용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마 흑요정들이 이곳으로 도망치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쭉 들키지 않았을 터.

잠시 후, 아라비온의 군대는 바짝 긴장한 채 협곡 안으로 진입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던 피비린내와 시체 썩는 냄새가 훅 풍겨왔다.

아마 저 갈라지는 바위가 무언가 신비한 작용을 해서 이를 감추고 있던 것이 아닐까.

협곡 곳곳에는 말라붙은 핏자국과 탄 자국 등 전투의 흔적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 시체는 한 구도 남지 않았다.

아마 아라비온 군대의 시체는 사령으로 만들기 위해 끌고 갔을 것이고, 난쟁이와 흑요정들의 시체는 자기들끼리 잡아먹건 장례를 치르건 했을 터.

이를 관찰하고 있자니 성유물의 감각을 타고 협곡 좌우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저쪽 역시 그들의 진입을 눈치채고 병력을 배치하는 듯한 모양새.

투란은 감각을 집중해 수백 미터 거리에서 다가오는 난쟁이의 형상을 주시했다.

'꽤...특이한걸.'

과거 성유물로 보았던 이종족, 인어 왕자 아르마니와 달리 난쟁이들의 마력적 구조는 어째 지하 미궁에서 보았던 괴물들과 더 가까웠다.

차이점이라면 머리 쪽의 불꽃이 기괴하게 헝클어진 느낌이라는 것 정도.

혹시 난쟁이도 신이 만든 생물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투란의 감각에 또 다른 생명체가 포착되었다.

인간과 비슷한 형태지만 귀 부분이 위아래로 길게 찢어진 형태에 뇌 부분에서 묘한 빛이 일렁였다.

'저게 흑요정이겠네.'

이전에 만난 적 있었으나 흉내쟁이 성유물의 감각으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

이십여 명만 뇌에서 빛이 나는 것이, 아마 저게 사령술사의 특징인 듯했다.

메이사 역시 눈치를 챘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손을 들어 군대를 정지시켰다.

"온다. 전투 준비!"

투란은 주변에서 진한 긴장과 두려움의 냄새를 맡았다.

이전에 한 차례 기습을 당해 큰 피해를 본 만큼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탓일 터였다.

철컥, 쇳소리와 함께 협곡 좌우에서 구멍이 생겨나며 난쟁이들이 기어 나왔다.

48화

투란이 난쟁이를 직접 보고 처음 떠올린 것은 두더지였다.

앞이 보이지 않음을 증명하듯 반쯤 뭉개진 눈, 뾰족하게 툭 튀어나온 코와 앞니, 다부진 근육질에 온몸에는 털이 수북이 나 있었다.

사방에서 튀어나온 그 추한 족속들은, 아라비온 군대를 향해 아까 환영으로 보았던 위협적인 마법기를 겨누고 외쳤다.

성유물의 감각에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진짜 마법기는 아닌 것 같지만.

"앙마들! 쭈겨라-!"

["쭈겨라아아아아!"]

난쟁이 특유의 뭉개진 발음과 함께 치익, 공기 새는 소리가 나며 무수히 많은 금속 조각이 아라비온 군대를 덮쳤다.

하지만 완전히 불시의 습격이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이미 저것이 의미하는 바를 경험한 상태.

그들은 제각기 방어용 마법기를 들어 몸을 가리거나 몸을 숙여 은폐했다.

"아윽!"

"괜찮아?"

"죽을 정도는 아냐!"

희생자는 기껏해야 서너 명, 부상자는 그 두 배 정도.

선두에 있던 투란은 수호자 마법기를 발동, 금속 조각 대여섯 발을 받아내며 그 위력을 가늠했다.

'이 정도면...그냥 맞으면 꽤 아프겠는데.'

한 대 맞았으면 도로 쳐서 갚아줘야 하는 법.

이번에는 아라비온의 군대가 마법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선두에 있던 메이사의 두 손에서 뻗어 나간 백색 섬광이 난쟁이들을 덮쳤다.

["꺄라라라락-!"]

"앙마! 앙마!"

비명을 지르는 것은 마법의 범위 가장자리에 있던 놈들뿐.

중심부에 있던 난쟁이들은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타죽은 뒤였다.

놈들의 몸뚱이가 어지간한 기사들의 마법 정도는 먹히지도 않음을 생각하면 조금 전 벼락에 실린 마력이 얼마나 강대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만했다.

아마 힘을 약하게 해서 확산시켰으면 평범한 인간쯤은 일격에 수천 명씩 쓸어버릴 수 있지 않았을까.

뒤이어 아라비온의 귀족들, 그리고 다른 혈통의 귀족들 역시 제각기 적성에 맞는 힘을 사용해 난쟁이들을 공격했다.

"다 죽여버려라-!"

"더러운 두더지 새끼들 같으니!"

불, 벼락, 빛, 얼음송곳과 바윗돌 따위가 사방으로 쏟아지며 계속해서 쏘아지는 금속 조각과 교차했다.

이에 아라비온의 군대를 이곳으로 이끈 장본인, 흑요정들 역시 전투에 참여했다.

다른 동족들보다 후리후리하게 키가 큰 흑요정 남성.

이마에 쓴 은색 왕관으로 보건대 저자가 자칭 사령왕인 모양이었다.

"사령왕이다!"

"메이사 님!"

누군가의 외침에 호응하듯 메이사가 곧바로 사령왕을 향해 벼락을 때렸으나, 그의 몸 앞에 생겨난 십수 마리의 사령들이 온몸을 태워 가며 이를 받아냈다.

그리고는 짐승과 사람 형상의 사령을 연이어 꺼내 메이사를 뒤덮는데 그 숫자며 힘이며 과거 투란이 싸웠던 사령술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에 다른 사령술사들 역시 자신의 사령을 소환해 인간 군대를 향해 돌진시켰다.

대부분 아라비온의 마법사에게서 태어난 탓인지, 인간 형상의 사령은 죄다 온몸에 벼락과 바람을 휘감고 있었다.

[죽-인-다아아아-!]

"막아라!"

사령들이 특유의 기이하게 울리는 음성과 함께 제각기 십수 마리씩 귀족들을 향해 덤벼들자, 기사들이 그 앞을 가로막으며 시간을 벌었다.

두 진영이 뒤엉켜 혼란이 야기되는 동안 투란은 성유물의 감각을 이용해 정확히 사령술사를 확인했다.

'첫 번째 목표는...저놈.'

몇 번씩 돌리며 충분히 마력을 축적한 돌멩이가 전장을 가르며 사령술사 한 명의 머리를 정확히 저격했다.

그는 과거 싸웠던 사령술사가 그랬듯 몸에 사령을 두른 채였으나, 이전과 달리 투란의 돌멩이는 손쉽게 이를 꿰뚫고 순식간에 머리를 깨부쉈다.

실려 있는 마력량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두 명, 세 명째까지 순조롭게 머리를 부순 투란은 대용량 주머니에서 다시 돌멩이를 꺼냈다.

대지 변형 마법을 이용해 달걀 모양으로 조형한 것을 잔뜩 넣어둔 만큼 이제 어지간해선 돌멩이 부족으로 고생할 일은 없었다.

[카오오오오!]

그때, 옆에서 불쑥 짐승 형상의 사령 세 마리가 솟구쳐 그를 노렸다.

연이은 저격을 눈치챈 것일까?

투란은 곧바로 사고속도를 올리며 그중 곰처럼 생긴 녀석의 머리에 검을 꽂아 넣었다.

[커엉-!]

사령에게 물리적 공격이란 썩 효과적이지 않음에도, 놈은 괴로운 듯 온몸을 마구 비틀며 바닥을 뒹굴었다.

칼에 찔린 사령의 마력 구조가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시간이 많았으면 천천히 호기심을 충족하련만, 전투 중인 만큼 투란은 곧바로 불을 일으켜 놈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놈들을 보낸 사령술사를 향해 다시 한번 돌멩이를 날려 머리를 부쉈다.

"쭈거어어어어!"

그렇게 하나를 또 죽였다고 숨돌릴 틈도 없이, 이번에는 멀리서 마법기를 쏘아대던 난쟁이들이 덤벼들었다.

그 수는 총 일곱.

인간보다 작은 체구에 기괴한 외형을 한 놈들은 둔중하게 생긴 몸뚱이와 어울리지 않게 빠른 속도로 달려들어 손에 든 창을 휘둘렀다.

정확히는 창이 아니라 금속 조각을 쏘아대던 마법기에 칼날만 붙인 것이었다.

"께엑!"

평범한 귀족이라면 이 상황에서 뒤로 물러서며 기사를 방패 삼아 마법을 쏘겠지만, 투란에게는 잘 다져진 육체와 강한 마력, 그리고 전투 기술이 있었다.

처음 덤벼드는 놈의 공격은 가볍게 피하며 발차기로 머리를 분쇄, 두 번째는 칼로 목을 자르고 가까이 다가온 세 번째는 팔꿈치를 내려찍어 정수리를 으깼다.

그사이 녀석들 역시 투란의 등과 옆구리를 찔렀으나 수호자 마법기 덕에 가벼운 생채기만 났을 뿐이었다.

"단단?"

"앙마...앙 뚤려...."

왜 공격이 먹히지 않는지 의아한 듯, 난쟁이들은 어눌한 말씨로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칼과 주먹에 한 대씩 얻어맞고 곤죽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놈은 조금 다르게 생긴 마법기를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화염이 확 솟구쳤다.

"윽!"

투란은 재빨리 수호자 마법기의 힘을 끌어올리며 화염을 뚫고 칼을 찔러넣어 난쟁이의 머리를 꿰뚫었다.

제법 후끈한 게 화염 저항 반지가 없었다면 가벼운 화상쯤은 입었을 것 같았다.

'대체 뭐길래 마력도 안 담겨 있는데 이런 위력이...예전이었으면 위험했을 수도 있겠는데. 정말 마법기가 맞나?'

지금의 그가 귀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라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때려죽이는 것이지, 과거 아시즈와 만나기 전이라면 위험했을 터였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뻥 하는 굉음과 함께 젊은 귀족 한 명이 나뒹굴었다.

"도련님!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허억...."

무엇에 맞았는지, 귀족은 갈비뼈가 으스러진 듯 가슴이 움푹 꺼져 있었다.

시선을 돌리자 조금 전 난쟁이들이 쓰던 마법기를 키운 듯한 물건이 보였다.

얼른 화염구 몇 개를 만들어 쏘니 굉음과 함께 마법기에서 대량의 수증기가 솟구쳐 난쟁이들을 휩쓸었다.

"까아아아아아!"

"뜨거우어어어엉!"

조금 전 쓰러진 귀족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는 놀랍게도 스스로 부상을 치유하고 있었다.

치유사 혈통의 귀족이라면 본래 진영의 가장 안쪽에서 보호받고 있어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본 투란은 이미 진형 따윈 붕괴한 지 오래임을 깨달았다.

'하긴, 지휘하는 사람이 없으니까...나만 해도 어쩌다 보니 전장에 휩쓸려서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고.'

대장인 메이사는 사령왕과 대치하는 중이었고, 부대장인 카드람 역시 꽤 강력한 사령술사 세 명에게 붙들린 상태였다.

자연히 아라비온 군대는 통솔하는 이 없이 난쟁이와 흑요정 무리와 뒤엉킨 채 제멋대로 싸우던 것.

물론 그렇다고 전황이 불리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적의 병력 대부분을 차지하는 흑요정이며 난쟁이들이 죄다 쓸려나가는 중이었고, 사령술사 역시 몇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 멀리서 어마어마한 섬광 한 줄기가 내리치며 싸움의 끝을 알렸다.

* * *

"후우...."

자기 혈통 능력만을 마구 휘두르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메이사 아라비온은 천재답게도 온갖 마법을 활용해 가며 전투에 임했다.

사방에서 끼어드는 평범한 흑요정들은 즉석에서 대지를 변형해 암석 송곳을 만들어 퇴치.

난쟁이들이 다가오면 손뼉을 치며 소리를 증폭해 예민한 청각을 공격했고, 커다란 사령이 공격해 오면 몸을 살짝 띄운 뒤 바람으로 움직여 피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령술사들을 향해서는 끊임없이 전격을 꽂아 넣어 방어를 깎아내기까지.

가끔 이러한 체계를 뚫고 들어오는 공격이 있다고 한들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그녀가 온몸에 두른 옷은 베르크 가문의 주인이 무려 두 달을 투자해 만든 최상위 방어 마법기였으니까.

한참을 싸운 끝에, 메이사는 사령들을 태워 죽이고 사령왕의 머리에 낙뢰 한 줄기를 내리꽂았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라도 마력이 없으면 인간일 뿐이듯, 강한 사령술사 역시 사령 없이는 흑요정에 불과할 뿐.

새카맣게 타들어 간 시체에 남은 것은 은빛 왕관뿐이었다.

'아....'

장기전 끝에 찾아온 승리를 확인한 순간, 익숙한 어지럼증이 그녀의 머리를 휩쓸었다.

영양 결핍으로 약해져 가는 몸뚱이가 보내는 신호.

그때, 비틀거리는 메이사의 손목을 누군가 잡아채며 부축했다.

"괜찮습니까?"

부축한 이가 회색 머리카락과 눈을 한 청년, 투란임을 깨달은 메이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난 그녀와 맞먹는 재능의 소유자.

그리고 정말로 자기 혈통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감추는 것인지 모르지만...예전에 무방비했던 자신을 죽이지 않고 보살펴주었던 사람.

그것만으로도 메이사는 상대에게 깊은 신뢰를 줄 수 있었다.

적어도 어머니와 동생을 죽인 뒤, 자신까지 위협하며 죄다 자하르의 잘못으로 뒤집어씌우려 드는 쓰레기들보다는 믿을 만하다는 뜻이니까.

메이사에겐 어떻게든 가문의 영향력 안에 있지 않은 아군이 절실했다.

"괜찮아요, 조금 어지러웠을 뿐...전투는 어떻게 됐죠? 이쪽에 집중하느라 못 봤는데."

"거의 끝났습니다."

그 말대로 슬슬 전투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 난쟁이들과 흑요정들이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는 가운데 몇몇 기사들은 인간의 시체를 수습하기까지 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라비온 귀족 한 명이 전투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메이사에게 다가와서 보고했다.

"대승입니다, 아가씨!"

"피해 상황은?"

"집계 중입니다만 지난번과 비교하면 반의반도 안 나왔을 겁니다! 귀족은 두 명, 기사는 삼십 명 정도가 죽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둘은 왜 죽었지?"

"한 명은 대형 마법기에 적중당했고 다른 한 명은 사령에게 당했습니다. 저, 그런데 아가씨...."

"왜?"

그의 시선이 자신의 옆을 향해 있길래 고개를 돌린 메이사는, 그제야 자신이 자연스럽게 투란의 부축을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 미안해요. 깜빡 잊고 그만."

"괜찮습니다."

투란은 워낙 가벼워서 상관없었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비쩍 마른 몸을 조롱하는 것처럼 들릴 테니까.

제 발로 선 메이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지시를 내렸다.

"잊지 말고 몇 마리는 생포하도록 해. 특히 난쟁이들, 좀 똑똑해 보이는 녀석으로."

"알겠습니다."

"저 마법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건지, 아니면 누가 가르쳐 준 건지 확인해. 마법기도 멀쩡한 건 모두 수거하고."

지시를 받고 귀족이 사라진 뒤, 투란은 어지럼증이 채 가시지 않은 것인지 머리를 감싸 쥔 메이사를 보다가 질문했다.

"저게 옛 난쟁이들의 유물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케오른이 알려 줬나요?"

"예."

"맞아요. 먼 옛날 난쟁이들은 지금처럼 눈이 멀지 않았으며 저런 것을 만들어낼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죠. 지금은 그냥 짐승에 가깝지만요."

"신들이 그렇게 한 겁니까?"

투란의 말에 메이사는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평범하게 프레아 신족을 숭배하는 이에게서는 절대 나올 법하지 않은 발상이었던 탓이다.

그녀 역시 가문의 비밀 서고에서 관련된 내용을 읽지 않았다면 감히 그런 상상을 할 수 없었을 터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에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신들이 마음만 먹으면 생물을 아예 새로 빚어낼 수도 있다는 것을요. 당연히 눈을 멀게 할 수도, 멍청하게 만들 수도 있겠죠."

"어디 가서 말하지는 마세요."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이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전 그녀의 말 덕분에 대가문들이 신들에 대한 비밀을 여럿 품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 * *

잠시 후, 전장 정리와 부상자 수습을 끝낸 아라비온 군대는 가장 먼저 논공행상을 진행했다.

흑요정과 난쟁이들의 시체는 쓰레기나 다름없으니 모조리 태워 버리지만, 사령과 죽은 마법사들의 마력은 이곳에서 곧바로 흡수해야 했다.

특히 협곡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지난 전투에서 희생된 마법사들의 시체는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곧 사령이 될 터였다.

"우선 메이사, 사령왕을 물리쳤으니 일등이지만...."

"됐어요, 숙부. 이런 잔챙이들로는 의미 없으니까."

"그렇겠지."

마법사의 힘이 강해질수록 질 낮은 마력으로는 성장하기 어려워지는 법.

사령왕이 부리던 사령들이 제법 강력하다지만 메이사와 같은 수준의 마법사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지금의 그녀가 성장하려면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마법사, 혹은 마수의 힘을 흡수해야 했다.

신화급 마수를 여럿 처치하거나, 아니면 현 가주인 아버지가 죽어 그 장례를 치르며 마력을 흡수하거나.

어느 쪽이건 백 년은 족히 걸릴 일이었다.

"그러면 나머지는 전공을 정리하기 어려우니 가진 마력량과 부상 정도에 따라 분배해야 할 것 같군. 나도 이미 성장 한계에 도달해서 별 의미 없으니 다음 순서는...."

"그러면 제가 잡은 사령들은 투란에게 양보하죠."

메이사의 말에 아라비온의 귀족들이 동시에 술렁였다.

그녀처럼 막강한 마법사에게나 잔챙이지, 평범한 귀족들에게 사령왕의 사령은 순식간에 마력을 훌쩍 키울 수 있는 자양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을 흡수할 권리를, 아무리 후계자가 직접 데려온 이라지만 가문 사람이 아닌 용병에게 양보하다니?

전투 전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만큼, 당연히 마력 분배에는 참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이들로서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투란이 마력 분배에 참여한다고 했으면 귀족 중 적어도 절반쯤은 그가 끼어드는 것을 반대했을 터였다.

"데려올 때 마력 흡수에서 제외한다는 조건을 걸지 않은 거냐? 아니, 설마 마력을 보상으로 한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면 저만한 실력자를 어떻게 데려오겠어요? 무엇보다도 원래 제 몫으로 돌아갈 것을 분배할 뿐이니 상관없죠."

"그래도 그건 이야기가 다르지...하다못해 미리 말이라도 해야 했을 것 아니냐."

카드람은 한숨을 내쉰 뒤, 메이사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잘 생각해라, 메이사. 채 몇 시간도 안 지났는데 벌써 네가 저 사내에게 빠져서 분별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돌아."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지만 그런 거 아니에요."

두 사람은 몇 초 정도 눈싸움을 했으나, 결국 카드람이 먼저 고개를 저으며 물러섰다.

투란에게는 사령왕의 사령 중 가장 마력이 강한 여섯 마리가 분배됐다.

그래 봐야 죄다 메이사의 공격 한 번에 뻥뻥 터져나가던 녀석들이라 큰 힘은 안 되겠지만, 이 정도 수준에서는 성장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보상이라 할 만했다.

"그러면 마력 흡수를 시작하지."

투란은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맹렬한 적의, 그리고 그와 함께 마력을 흡수하는 세 명의 날카로운 시선에 쓰게 웃으며 잿더미만 남은 사령의 마력을 흡수했다.

사령 중 하나가 아라비온의 귀족인지라 흉내쟁이 성유물은 몰래 땅 밑에 묻어놓은 채였다.

흡수되는 마력 일부가 분산되는 모습은 틀림없이 눈에 띌 테니까.

하나, 둘 셋, 넷, 다섯....

마지막 여섯 번째 사령의 마력을 흡수하던 투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째서인지 몸속에서 무언가 철컹하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49화

처음에는 환청을 들었다고 여겼지만, 그렇게 여기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선명한 음성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소리와 함께 몸이 마력을 받아들이는 힘이 급격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배가 터지도록 음식을 먹어치웠을 때 여기서 딱 한 개만 더 먹으면 토할 것을 아는 듯한 느낌.

지금 그가 마법사로서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사실에 아찔한 절망감을 느낀 순간, 마치 투란을 놀리듯 마력을 받아들이는 힘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오히려 그가 느꼈던 성장 한계는 옆에 있던 어느 귀족에게 찾아왔다.

"엇."

짧은 탄성을 터트리는 귀족의 앞에서 연녹색 광채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과거 발타스 가문의 마법사들과 함께 사냥할 당시 보았던 것과 같은 현상.

이를 본 카드람이 가볍게 혀를 차며 물었다.

"한계로군. 이번에 처음 도달한 건가?"

"예...."

대답하는 귀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성장 한계에 도달한 마법사라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그런 감정을 느끼기 마련.

그 역시 저 귀족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

심지어 투란 자신은 저 귀족보다 훨씬 강한데도 불구하고 조금 전 어마어마한 좌절감을 느꼈으니까.

"괜찮아, 비켄."

"얼굴 펴, 임마. 그래도 이 정도면 나보단 낫잖아!"

실의에 빠진 이를 위로하고자 다른 동료들이 마구 떠드는 사이, 투란은 자신의 몸에 무언가 변화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온몸의 촉각이 몇 배나 민감해졌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옷감이 몸에 스치는 것이나 손과 손이 비벼지는 것은 평소와 같았지만,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흐름은 훨씬 더 예민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주변에 사람들이 걸어 다니며 만들어내는 미묘한 흔들림과 저 협곡 위쪽에서 몰아치는 사나운 난기류까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낄 수 없던 그 모든 것이 감각에 들어와 있었다.

'설마....'

당장이라도 이 감각의 정체를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지금 이 협곡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라비온의 귀족들이.

만약 생각하는 바가 맞다면 이곳에서 시험해보는 건 너무 위험한 행위였다.

투란은 확인을 조금 뒤로 미루고 대지 변형 마법으로 묻어둔 성유물을 회수한 다음 메이사를 찾아갔다.

그녀는 한참 웬 석판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아, 투란. 마력 흡수에 문제는 없었죠?"

"덕분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런데...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혹시 다른 사람이 들을까 싶어 살짝 애매한 투로, 투란은 왜 그런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자신에게 마력을 분배해 주었느냐고 물었다.

물론 메이사가 자기 가문 사람들을 썩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이건 정도가 지나쳤다.

심지어 투란은 이미 대용량 주머니까지 미리 받았던 만큼 그의 몫을 남겨주지 않는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건 지금 말하긴 좀 어렵고, 일단 제 개인적인 호의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아라비온이 아니라."

투란의 물음에 메이사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말했다.

다소 묘한 말투에 혹시 그녀가 자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이라도 느끼고 있나 싶었으나, 후각에 신경을 집중해 보아도 그런 종류의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좋습니다. 친구의 호의라면."

그 말을 들은 메이사가 흐릿한 웃음을 지었다.

투란은 이내 그녀가 들고 있던 석판을 가리키며 화제를 바꿨다.

"그보다, 이건 뭡니까?"

"이거요? 주변의 지성체를 찾을 수 있는 탐색 마법기예요. 혹시 살아남은 잔당이 없나 찾아보고 있는데...음, 없는 것 같네요, 이제."

그 말대로 석판 위에서는 파란 점 백수십 개가 이리저리 이동하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두 개의 점이 가까이 붙어 있었는데 이것이 투란과 메이사인 듯했다.

"좋은 물건이군요."

얼핏 짐작건대 탐색 범위가 수백 미터는 될 것 같은 게, 그가 가진 흉내쟁이 성유물의 기능과도 견줄 만했다.

물론 이렇게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직접적인 감지 능력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휴대와 사용의 편리성 면에서는 여러 차이가 있지만.

투란의 칭찬을 들은 메이사가 웃으며 답했다.

"듣기론 지난 전쟁 때 생포한 자하르의 귀족을 써서 만든 물건이라네요."

귀족을 생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던 만큼, 투란은 그 제작 과정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끔찍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문득 케오른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자하르의 은신 능력을 간파할 수 있는 최상위 마법기가 몇 개 있다는 이야기.

어쩌면 저것 역시 그중 하나일지도.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도중, 기사 한 명이 메이사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아가씨, 포로가 준비되었습니다."

"안내해. 같이 보러 가시겠어요?"

"그러죠."

메이사가 슬쩍 고개를 돌려 묻길래 투란은 곧바로 응했다.

그 역시 난쟁이들의 유물에는 꽤 관심이 있었으니까.

* * *

그들이 향한 곳에는 엉망진창이 된 난쟁이들과 흑요정 몇 명이 포위당한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온몸에 피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한참 고문당한 듯했다.

"앙마들...그망...아파...."

어눌한 말투로 비는 난쟁이들의 모습에 투란은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그래봐야 사람 먹는 식인종에 불과한 족속들인데....

과거 북해에서 만났던 인어 왕자 아르마니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종족임을 떠올려서일까.

"잘 들어라, 지금부터 다시 질문할 건데, 아까처럼 순순히 답한다면 아프게 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거나 입을 다물면 조금 전보다 더 끔찍하게 아프게 될 거야. 이해했지?"

"이해...했서, 했서!"

어느 귀족의 윽박에 난쟁이들은 어눌한 말투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우선 이 물건은 뭐지?"

"조상들 꺼...까망이가 찾고...쓰능 법 알려줬서."

"까망이라는 건 사령왕을 말하는 거겠지? 흑요정들의 수장...우두머리 말이야."

수장이 지나치게 어려운 말이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난쟁이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아까 전에 똑똑한 녀석을 뽑으라고 했는데, 이 정도가 난쟁이 중에선 머리가 좋은 편이란 뜻일까.

옆에 있던 흑요정의 뺨을 후려쳐 같은 대답을 확보한 뒤, 귀족이 난쟁이들의 마법기를 들이밀었다.

"그래, 너희들이 이걸 당기면 쇳덩이가 나오더군. 우리가 쓰면 안 나오고. 이유가 뭐지?"

"그겅 우리 꺼...까망이능 못 써...앙마들도 못 써...다 쓰면 다시 못 써...."

난쟁이의 진술을 듣던 투란은 옆에 널브러져 있던 난쟁이들의 유물-마법기 하나를 집었다.

가볍게 흔들자 옆에 달린 둥그런 관 안에서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이것 비슷한 커다란 물건을 터트렸을 때 대량의 수증기가 쏟아져 나오지 않았던가.

혹시나 해 금속이 나오는 부분을 하늘로 둔 채 옆에 달린 막대기를 당겨 보았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손잡이만 난쟁이가 당겨도 나가나?"

"한번 확인해 보죠. 거기."

투란의 혼잣말에 메이사가 답하자 어느 기사가 즉시 난쟁이를 끌고 와서 자기가 들고 있는 마법기를 막대기 부분만 당기도록 지시했다.

녀석이 막대기를 당기자 푸슉 하고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금속 조각이 쏘아졌다.

"오."

"정말로 난쟁이들이 당겨야 나가는군."

"대체 무슨 마법이지?"

"혹시 잘라낸 손으로 당겨도 나가나?"

어느 창의적인 귀족의 생각과는 달리, 손이 잘린 것을 감지하는 것인지 그런 방식으로는 쏠 수 없었다.

이후로도 이런저런 실험을 해 보았으나 그 결과는 썩 신통치 않았다.

난쟁이들의 마법기에서 쏘아지는 금속 조각부터가 단순한 쇳덩어리가 아니라 무언가 특별한 공정을 거쳐 제작된 것이며, 내부 구조는 뜯어보려는 순간 수증기가 폭발하며 부품을 엉망으로 만드는 탓에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여러 발 쏘다 보면 안에 든 액체가 다 떨어져서 쏠 수 없게 되는데, 난쟁이들도 이를 다시 채우는 법은 모른다고 했다.

말하자면 일회용 도구인 셈이었다.

"이걸 사령왕이 줬다고 했지? 그놈은 이걸 어디서 구했지?"

살아남은 흑요정 몇을 고문하여 질문했으나 그들 역시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그저 본래는 지하 왕국의 왕족 중 한 명에 불과했던 사령왕이 어느 날 은색 왕관을 가지고 엄청난 사령술 실력을 얻었으며, 도망치던 중 저 마법기들을 구해온 뒤 난쟁이들에게 제공하여 그들을 동맹 삼았다는 것 정도.

이를 들은 한 귀족이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우리가 만들어서 쓸 수 있었다면 꽤 쓸만했을 텐데."

투란은 몇 차례 그것이 사용되는 것을 관찰하며 과거 도서관에서 사서에게 배웠던 자연 법칙을 떠올렸다.

물이 수증기가 되면 부피가 증가한다고 했던가....

'혹시 안에서 저 액체가 수증기가 되면서 금속 조각을 밀어내는 건가?'

대체 어떻게 막대기 하나 당겨서 그게 일어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 원리가 아닐까 싶었다.

아라비온의 귀족 중 유식한 몇 명도 그와 비슷한 결론을 도출했으나 그것을 어떻게 해야 재현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포로들을 겁박해 얻은 정보를 모두 정리한 뒤, 메이사는 협곡 안쪽을 탐색하고 돌아온 이들에게 물었다.

"혹시 안쪽에서 서적 같은 것을 발견한 건?"

"없습니다."

"사람 뼈는 꽤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오래된 것이었지만요."

"그러면 정리해도 되겠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 것인지, 난쟁이와 흑요정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 * *

다행히 협곡 입구의 바위는 누군가 안에서 나오려고 하면 저절로 문이 열렸기에 하루를 꼬박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탁 트인 곳으로 나오자 새로 생긴 바람을 감지하는 감각이 한껏 활성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후아...."

"이제야 좀 살겠군, 저 안쪽은 너무 갑갑했단 말이지."

"누가 아니래."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아라비온 귀족 몇 명이 투덜거렸다.

투란은 옆에서 걷던 메이사에게 말했다.

"그러면 저는 막사에 들러서 비제를 데리고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게 좋겠네요."

투란이 다른 아라비온의 귀족들과 친분을 쌓는 게 반갑지 않았던 메이사는 즉시 동의했다.

그러며, 작게 여지를 남기는 말을 꺼냈다.

"다음에 또 볼 수 있겠죠?"

"그때는 이번에 진 빚을 꼭 갚겠습니다. 그리고...."

투란은 지나친 오지랖이 아닐까 잠시 망설였다가 말을 꺼냈다.

서로 호의를 주고받는 친구 사이라면 걱정하는 말 정도는 꺼낼 수 있을 테니까.

"비행을 위해 몸을 가볍게 하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뭘 좀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걱정이 되어서요."

그 말을 들은 메이사가 쓰게 웃었다.

"생각해 볼게요."

투란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당사자가 싫다는데 강요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메이사와 헤어진 뒤, 빠른 걸음으로 먼저 막사에 도착한 투란은 비제와 케오른이 날갯짓과 손짓으로 무언가 이상한 놀이를 하는 것을 보았다.

"재밌어 보이십니다, 어르신."

"오, 자네 왔구만! 혹시 다친 곳은 없는가?"

"멀쩡합니다. 그보다...."

[투란! 케오른 재밌어!]

분명히 떠날 때까지만 해도 탐탁지 않게 보더니, 비제는 저 늙은 기사와 노는 데 푹 빠진 것처럼 보였다.

"토벌은 잘 끝났고, 희생자는 몇 명 없습니다. 저는 이만 떠나 봐야 할 것 같네요."

"벌써 가나? 식사라도 하고...."

"그럴 상황이 아니라서요."

협곡 안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언급하자 케오른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확실히, 계속 여기 남아 있어 봐야 분위기만 끔찍이 나빠질 것이 분명했다.

지금 투란에게 불만을 느끼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어르신은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일단 돌아가서 생각해 봐야겠지. 아마 은퇴하고 소일거리라도 하며 보내지 않을까 싶네. 슬슬 뼈마디가 시큰거리기도 하고, 여행도 할 만큼 했거든."

그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케오른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눈에 띄게 늙어 보였다.

그간의 여행과 토벌전에 참여했던 시간 탓일까.

투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스스로도 무슨 뜻인지 모를 덕담을 건냈다.

"오래 사세요."

"그러겠네."

다행히, 웃으며 답하는 케오른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는 덜 나이 들어 보였다.

* * *

돌아오는 길, 투란은 성유물의 감각을 활성화해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비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자기를 타고 가지 않느냐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잠깐만, 확인할 게 좀 있어서."

녀석을 진정시킨 뒤, 투란은 가벼운 손짓으로 바람을 불게 했다.

과거 어느 부랑자들을 쓸어버렸을 때처럼.

하지만 이번에 일어난 바람은 그때와 전혀 달랐다.

그 당시에는 그저 바람의 힘을 강하게 하고 방향을 조금 조절할 수 있는 정도라면, 지금은 일어난 바람을 제 손가락처럼 자유롭게 제어하여 몸에 휘감을 수 있었다.

심지어 거기에 들어가는 마력 소모량은 이전의 십 분의 일쯤 될까 싶을 정도.

투란은 확신했다.

자신이 바람을 다루는 혈통 능력을 얻었다는 것을.

"어쩐지 이럴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심란한 기분으로 손짓하자 바람이 일어나며 주변의 풀밭을 모조리 눕혔다.

현시대에 바람을 다루는 능력은 오로지 폭풍 혈통의 아라비온만이 지닌 특권.

즉, 투란의 부모는 각각 자하르와 아라비온이라는 두 원수 집안의 후예라는 뜻이었다.

5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