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돌아오는 길, 투란은 배에 앉아 새로 얻은 정체불명의 보물을 유심히 관찰했다.
크기는 손바닥에 딱 들어올 정도.
테두리는 둥글고 앞뒤로는 비교적 납작해, 전체적인 형상은 그가 가져온 나침반과도 비슷했다.
특이점으로는 한쪽에 작은 단추가 있어서 이것을 누르면 딸깍 소리가 나며 뚜껑이 열린다는 것.
안쪽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어 용도를 알 수 없지만, 아마 이 역시 무언가 기능이 있을 터였다.
다행히 이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 굳이 손으로 들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주머니에 넣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일단 '소유한' 상태기만 하면 언제든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투란은 눈을 감은 채 저 바다 아래로 지나다니는 무수히 많은 기척을 느꼈다.
아주 작은 불꽃이 수백쯤 모인 무리, 그보다는 조금 더 큰 불빛 십수 개가 모인 무리,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불빛이 각각 따로따로....
이러한 탐지 범위는 평소에는 십수 미터, 의식을 집중하면 수십 미터에서 백수십 미터 정도까지 늘어났다.
투란은 몇 번이고 탐지 능력을 연습한 뒤에야 다시 나침반을 꺼내 방향을 확인하고 동쪽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배를 움직이기를 약 한 시간.
인간의 냄새를 대상으로 지정한 탐색 마법을 다섯 번째로 사용했을 때 마침내 먼 곳에서 옅은 체취가 느껴졌다.
'찾았다.'
소리 없이 쪽배를 몰아 청새치 호의 옆에 정박시킨 뒤 그대로 갑판에 뛰어 올라오자, 그를 보며 당직을 서던 선원이 비명을 질렀다.
"으헉! 괴, 괴물-이 아니라 기사님이셨군요? 섬에 머무시는 줄 알았는데...."
"볼일이 있어서."
선원은 아르마니가 그랬던 것처럼 심장에 아주 옅은 불꽃이 머물러 있었고, 그 외에는 온통 잿빛이었다.
종족의 차이인지, 아니면 그 녀석이 왕족이라 무언가 다른 것인지.
깍듯한 경례를 받으며, 투란은 좁아터진 객실로 돌아와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생각할 것이 많은 탓인지 유난히 머리가 무거웠다.
* * *
다음 날, 투란은 해가 높게 뜰 때까지 늦잠을 자다가 묘한 냄새를 맡고 깨어났다.
숙면 중이던 그를 깨운 것은 진한 피비린내였다.
'뭐지?'
바다 한복판도 아니고 여러 무역선이 머무는 섬에서 갑자기 피가 흐를 일이 무어란 말인가?
갑판 위로 올라가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으...."
"아파 뒈지겠네, 약 좀 발라 줘!"
등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낑낑대는 선원들.
옆에서는 갑판장 레낙이 무엇인지 모를 풀을 질겅질겅 씹으며 피 묻은 채찍을 허공에 몇 번 휘둘러 소리를 냈다.
"자, 모두 복창해라! 지각을!"
"하지 않는다!"
"항명은!"
"죽음이다!"
선원들은 죽상을 한 채 레낙의 말에 후렴구를 넣듯 외쳤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엇, 깨셨습니까? 어젯밤에 놀다가 늦게 들어온 놈들을 처벌 중입니다."
옆에서 뚱한 표정으로 채찍질을 바라보던 일등항해사 오스반이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 보면 어제 떠날 때 선장이 그런 말을 하긴 했었는데, 설마 정말로 늦게 돌아왔다고 채찍질까지 할 줄이야.
투란은 피범벅이 된 갑판 위를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러다 잘못하면 죽는 사람도 있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그가 개입해 규율을 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저들에겐 저들의 규칙이 있는 법이고, 무엇보다도 어제 선원들 역시 동의하는 것을 보았으니까.
그 대신, 투란은 성유물을 통한 시야로 다른 선원들이 각각 어떻게 보이는지를 주목했다.
대부분 큰 차이는 없었으나 채찍을 맞아 상처를 입은 이들은 그 부위에서 푸른 불꽃 일부가 빨갛게 물들며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선장님은?"
"섬에 내려가셨습니다. 배를 살 사람을 찾으러 가신다더군요."
"그렇군."
배의 소유주로서 일의 진행 상황도 확인할 겸, 투란은 채찍질 당하는 선원들을 뒤로한 채 섬으로 향했다.
"우호호, 으하하하!"
"우웨엑-"
"이 새끼야! 여기가 화장실인 줄 아냐!"
미겔 섬은 교역 도중 보급을 위해 머무르는 무역선들로 먹고사는 곳.
당연히 거리에 보이는 사람 중 상당수는 저 항구에 정박한 배의 선원들이었다.
대낮인데도 술에 취해 눈이 풀려 괴성을 지르는 놈들부터 토하는 놈, 대놓고 길거리에 오줌을 갈기는 놈까지....
이것들이 대륙에서는 그래도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 선원들을 지나쳐 중심부로 향하자 비교적 깔끔하고 큼직한 건물 한 채가 나왔다.
무려 선장들만 들어올 수 있다는 고급 술집.
가까이 다가가자 입구를 지키던 덩치 큰 문지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봐, 여긴 너 같은 애송이들이 들어올 곳이 아니야. 엄마 젖이 그리우면 저기 창녀들한테나 가서 찾으라구."
말로 답하는 대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불꽃을 피워올리자 문지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투란은 넙죽 허리를 숙인 그를 지나쳐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다니까! 그쪽에서 도망쳐 온 사람의 수가 못해도 수만 명 이상일세. 아마 당분간은 죽음의 땅으로 남아 있을걸."
피레스 선장은 술집 한편에서 자기 또래로 보이는 다른 선장과 한창 대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투란이 다가가자 그의 존재를 눈치챈 피레스가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투란 님."
"좋은 아침입니다."
"예. 아침이라기는 조금 늦었지만 말입니다...아, 이쪽은 겨울 까마귀 호의 선장 사무델입니다. 저와는 다르게 본인이 선장이자 선주이고, 이번에 투란 님의 배를 사기로 한 사람이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투란 님."
사무델 선장은 뾰족한 삼각모를 눌러쓴 중년 남자로, 피레스와는 달리 두 눈이 온전한 대신 한쪽 손에 갈고리를 달고 있었다.
몸에 결손이 있는 게 선장이 되기 위한 자격인 것일까.
그게 아니면 선장이 될 만큼 오래 뱃사람 일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어딘가를 다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가격은 어떻게 됐죠?"
"배와 그 안에 있는 잡다한 물품까지 모두 합쳐서 자하르 금화 천 닢에 거래하기로 했습니다."
자하르 금화를 본 적이 없어 제대로 값을 쳐준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피레스에게 수익의 이 할을 약속했으니 터무니없는 헐값에 팔진 않았을 터였다.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사무델 씨는 어디서 오신 겁니까?"
"엔릴 사막에서 오는 길입니다. 목적지가 아바챠이니 이 친구랑은 정확히 반대 항로라 할 수 있겠군요. 마침 이번에 아바챠에서 배를 한 척 더 사려고 생각했는데 싸게 살 수 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오."
사무델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피레스에게 대충 들은 것인지, 어리다고 얕잡아보지 않고 성의껏 대답했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짭짤한 햄과 대추야자로 입가심하며 잡담을 몇 분 정도 나눈 뒤, 투란은 본격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혹시 마법기 같은 걸 살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그만한 가치를 가진 작은 물건이라도 괜찮고요."
그는 의아해하는 사무델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지금 자신이 홀로 여행 중이라서 그만한 거금을 가지고 다니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자세한 사정을 들은 사무델이 곧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여기는 중계 지역일 뿐이라 그런 걸 가진 사람은 없을 거고, 아마 코마드까지는 가셔야 할 겁니다."
이곳 미겔 섬이 북해 교역의 요충지라지만 어디까지나 들러서 먹고 마시는 곳일 뿐, 섬 자체가 너무 작아서 그런 물건이 있을 정도로 경제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섬의 원주민들은 선원들 상대로 술과 몸을 팔아 먹고살 뿐 그리 부유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엔릴 사막 북쪽의 항구 도시이자 청새치 호의 목적지, 코마드는 자하르의 영지에서도 두 번째로 거대한 도시인 만큼 투란이 원하는 물건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추천장을 한 장 써드릴까요? 코마드를 통치하는 디르민 가문과 조금 인연이 있습니다. 그들은 조련사 혈통을 가지고 있으니 길든 마수를 사실 수 있을 겁니다."
투란이 그 말을 듣고 떠올린 것은 아시즈의 말, 틸리였다.
그 말 역시 조련사 혈통의 귀족에게 길든 것을 베르크 가문에서 구매해 아시즈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 강력하고도 영리한 붉은 말과 같은 녀석이라면 하나쯤 키워봐도 좋을 것 같았다.
"감사하긴 합니다만...."
내 뭘 보고 그런 걸 써주는 거냐, 라는 질문임을 이해한 사무델이 씩 웃었다.
"제가 돈을 드리는 만큼 투란 님이 길든 마수를 살 재력이 있으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판매자와 구매자를 중개하는 것뿐이니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 * *
이틀 뒤, 청새치 호는 식량과 물, 일부 채찍질 당한 이들을 제외하면 육체적 및 정신적 건강까지 완벽하게 회복한 후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이제 슬슬 항해의 2/3 정도가 지난 만큼 선원들의 사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번 항해는 진짜 나쁘지 않은걸? 해적은 우리 돈주머니가 됐고, 날씨도 끝내주고...."
"이게 다 신의 후손을 모신 덕 아니겠어."
그렇게 말하며 낄낄대는 선원들의 모습이 거슬리기라도 했는지, 항해 사흘째에 전방의 하늘에 먹구름이 자욱이 끼었다.
마침 당직을 서던 이등항해사가 이를 목격하고 곧바로 주변에 이 사실을 전파했다.
"전방에 먹구름! 모두 대비하라!"
다들 북해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잔뼈가 굵은 선원들인 만큼 폭풍에 맞설 준비는 빨랐다.
갑판장 레낙은 선원들에게 줄을 풀어 돛을 내리게 했고, 조타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키를 움켜쥐었다.
요리사와 같은 다른 이들은 선창이 꽉 차서 갑판 위에 올려놓았던 물건들을 급히 안쪽으로 옮겼다.
하지만 날씨란 언제나 예상보다도 변덕스럽게 들이닥치는 것이라, 미처 대비가 끝나기도 전 곧장 번개와 비바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슬슬 눈이 와도 이상하지 않을 계절의 비바람이란 순식간에 체온을 빼앗아가는 법.
선원들은 파랗게 질린 입술로 온몸을 덜덜 떨며 어떻게든 맡은 일을 완수하고자 노력했다.
그때, 커다란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힘껏 때렸다.
"으아아악!"
가장 큰 돛대 위에 올라가서 줄을 풀던 선원 한 명이 반동으로 튕겨 나가며 비명을 질렀다.
수십 미터 높이에서 갑판 위로 떨어지건 바다에 빠지건 죽은 것이나 다름없음은 자명한 일.
모두의 얼굴이 굳은 순간, 추락하던 선원의 몸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어?"
"이쪽으로."
투란의 명령과 손짓에 따라 선원의 몸이 느릿하게 다시 갑판 위에 내려앉았다.
마법사의 관점에서 마력을 타고나지 못한 일반인이란 동물, 혹은 살아있지 않은 자연물과 마찬가지.
즉, 사람 크기의 돌을 움직이는 것과 같은 힘을 들이면 일반인 역시 움직일 수 있었다.
"내려가!"
"예!"
그렇게 한 명을 구조한 뒤에도 투란의 활약은 계속됐다.
조금 전 그가 떨어진 탓에 미처 접지 못한 돛을 밧줄과 천을 조종해 접고, 갑판 위를 구르던 짐을 다시 밀어 넣었다.
그사이 발이 미끄러져 배 밖으로 튕겨 나가려던 선원 두 명을 더 건진 것은 덤.
키를 잡는 조타수를 뺀 모든 선원이 갑판 아래로 내려간 것을 확인한 투란은 마지막으로 내려가며 문을 닫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신경을 극도로 곤두세운 탓인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우...."
"가,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정말로 감사합니다!"
마치 숭배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눈물을 펑펑 쏟는 이는 조금 전 날아갔던 선원이었다.
"다치진 않았겠지?"
"예!"
"좋아. 그러면 됐어."
거듭 감사를 표하는 선원의 어깨를 두드려 적당히 다독인 뒤, 투란은 피레스 선장을 찾았다.
그는 다른 상급 선원들과 함께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토론하는 중이었는데, 투란이 다가가자 대화를 멈추고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투란 님. 덕분에 선원들은 물론이고 저희 모두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아마 돛을 내리지 않았으면 지금쯤 침몰했을 겁니다."
"저 역시 지금은 배의 선원 중 한 명이니 당연한 일이죠. 어떻게, 폭풍은 견딜 수 있겠습니까?"
"배랑 조타수의 실력을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해서 저랑 항해사들이 나가서 교대해 줘야겠지요. 그보다 다들 너무 젖은 게 걱정인데...."
갑판 위에 부려놓았던 짐을 모두 내린 탓에 선실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꽉 찬 상태.
축축하게 젖은 옷에 체온을 빼앗긴 선원들은 온몸을 덜덜 떨며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덥히려 하고 있었다.
투란은 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소리 높여 외쳤다.
["모두 원형으로!"]
아직도 하늘에서 번개가 우르릉 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선명하게 선실에 있는 모두에게 들렸다.
이는 과거 아라비온의 가주가 행차하던 당시 쓰였던 소리 확대 마법을 어설프게 모방한 것이었다.
비록 그들에 비하면 훨씬 조악한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만한 크기의 선실에 있는 수십 명에게 전달되기는 충분했다.
["지금부터 불을 피우겠다! 나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투란 님, 지금 불을 피웠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습니다."
피레스 선장이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그런 투란을 제지했다.
배가 흔들리며 실수로 불이 벽에 옮겨붙기라도 하면 그만한 참사도 없었다.
"괜찮습니다, 옮겨붙지 않게 불을 피울 방법이 있으니까요."
"그런 게 가능...."
가능합니까, 라고 물어보려던 피레스는 제 입을 막았다.
눈앞의 마법사가 사실 귀족급의 강자라는 사실을 그만은 알고 있었으니까.
잠시 후, 투란은 모든 선원들이 둥글게 모인 것을 확인한 뒤 손 위로 불꽃을 피워올렸다.
몸을 단단히 고정했기에 배가 흔들려도 불꽃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바람의 흐름을 조작해 열기가 사방으로 퍼지도록 하자, 몸을 녹여내는 온기가 선실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신이시여...."
불을 손에 든 채 열기를 나누어주는 투란의 모습을, 선원들은 홀린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는 며칠 전 강대한 힘으로 해적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며 통쾌해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인간은 마법사를 섬기며, 마법사는 인간의 위에 군림하며 또한 보살필지니.'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법사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31화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하늘이란 맑디맑아 마치 바다 위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뱃사람들을 비웃는 것 같았다.
쨍하니 내리쬐는 햇빛 아래, 선원들은 밤새 엉망이 된 갑판 위를 청소했다.
"어으, 허리야."
"그놈의 허리는 안 부서진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지 않나?"
"그렇긴 하지, 흐흐.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다니까."
농담을 주고받는 그들의 표정은 밝았다.
비록 몸은 고됐으나 지난 몇 시간 동안의 경험이 그들에게 묘한 안정감을 심어준 덕이다.
투란은 돛대 꼭대기에 걸터앉은 채 피로한 얼굴로 그런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지친 건 오랜만이네, 진짜....'
갑판 안에서 불을 피워 공기를 데우는 것쯤이야 썩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를 몇 시간씩 유지해야 했다는 것.
심지어 나중에는 파도가 지나치게 커진 탓에 직접 밀려오는 물결을 조작해가며 배가 뒤집히는 것을 막기까지 했다.
사실 힘의 대부분이 이 과정에서 소실됐다.
대가문의 수장쯤 되면 모를까, 지금 그의 마력으로 거대한 자연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저 아래에서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자면 그렇게 무리해가며 분투한 보람이 있었다.
결국은 아무도 죽지 않았고, 배도 침몰하지 않았으니까.
'그러고 보면 이 녀석도 꽤 도움이 됐지.'
투란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성유물을 꺼냈다.
몰아치는 폭풍우 탓에 흐려진 시야 속에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사람을 구조할 수 있었던 이유.
바로 이것에서 비롯된 감각을 근거 삼아 마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마법사를 구속하는 대표적인 방법이 눈을 가림으로써 정밀한 마법 사용을 억제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그러한 결점 중 하나가 없어진 것과 다름없는 셈이었다.
대상이 평범한 생명체라면 벽 너머에 있어도 바로 마법을 걸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보물의 새 기능에 감탄하던 도중, 멀찍이 떨어진 곳에 무언가 둥둥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섬이나 암초라기에는 지나치게 작고 수가 많은 것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시체, 혹은 어느 배에서 흘러나온 잡동사니임을 알 수 있었다.
"저 친구들은 폭풍을 견디지 못한 모양이군."
"저런."
근처에 있던 어느 배가 남긴 흔적이 지나치는 동안, 활기찼던 선원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엄숙한 얼굴로 정리에만 몰두했다.
만약 투란이 없었다면 자신들 역시 저와 같은 운명이 되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정비를 마친 청새치 호는 다시 남동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바람을 타고 물을 가르며 나아가기를 몇 시간.
드디어 그들이 나아가는 방향에 검은 그림자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의 중심, 엔릴 사막이 그들을 반겼다.
* * *
폭풍우에 휩쓸려 다소 위치가 어긋난 탓에, 청새치 호가 코마드 시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또 세 시간 뒤였다.
항구의 공무원에게 정박 신고를 한 뒤 선원들은 배에서 물자를 하역해 창고에 수납하기 시작했다.
투란은 다른 상급 선원들이 이를 감독하는 것을 구경하며 가만히 항구 한편에 앉아서 시간을 죽였다.
해가 뉘엿이 질 무렵에야 피레스가 금화 한 뭉치가 든 자루를 들고 그를 찾아왔다.
"늦었습니다, 투란 님. 여기, 약속했던 고용비입니다."
자루를 받은 투란은 묵직한 무게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제법 돈을 만져본 만큼 그 무게로 얼추 액수를 가늠할 수 있었는데, 지금 피레스가 준 것은 본래 투란이 계약했던 것에 비해 훨씬 무거웠다.
적어도 세 배 이상.
"이건 너무 많은데요. 원래 카마인 쪽 금화로 육십 닢 아니었습니까?"
"정말로 약속했던 돈만 드린다면 신들께서도 저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선장부터 시작해서 선원들 모두가 동의한 끝에 그들이 받은 해적선 판매금을 모은 것이라고, 피레스는 그렇게 설명하며 자루를 내밀었다.
투란은 고개를 저으며 조금 전까지 의자로 사용하던 궤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시겠지만 전 지금도 돈이 많아서 주체가 안 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본래 그가 머물던 객실에 있던 물건으로, 해적선을 팔며 얻은 금화 팔백 닢까지는 도저히 가방에 넣을 수 없어 아쉬운 대로 돈을 수납하는 용도로 가져온 것이었다.
그 답에 피레스 선장이 웃으며 답했다.
"어쩔 수 없지요. 받지 않으신다면 바다에라도 확 버리는 수밖에."
그렇게 말하는 뒤쪽에는 청새치 호의 선원들이 그 험상궂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순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돈을 받으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한참 눈싸움을 한 끝에, 투란은 이내 헛웃음을 터트리며 자루를 받아 궤짝에 쑤셔 넣었다.
"다시 만날 일이 있으면 같이 맛있는 식사라도 한 끼 사겠습니다. 모두에게요."
"더없는 영광일 겁니다."
투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궤짝에 연결한 두 개의 끈을 어깨에 걸어 짊어졌다.
이 돈을 처분할 때까지는 당분간 이러고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시가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선원들이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울 겁니다, 기사님!"
"감사합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자신이 구해낸 양들의 목소리를 듣자니 어째서인지 짊어진 궤짝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저 돈이 더 들어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무언가를 실감할 수 있어서일 터였다.
투란은 입꼬리를 올리며 코마드 시 안으로 향했다.
* * *
엔릴 사막 북부 최대의 도시, 코마드는 그 인구가 십오만에 달했다.
다른 곳에서 온 선원과 현지인의 복색이 구분되었는데, 현지인들은 주로 천을 길게 늘어트린 모자에 위아래가 통짜로 된 옷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치마인 줄 알았지만 잘 보니 바지는 따로 입고 있는 게, 망토와 같은 겉옷인 듯했다.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도중 옆에서 작은 불꽃 하나가 그에게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투란은 보지도 않고 손을 뻗어 상대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악!"
그가 짊어지고 있던 궤짝의 끈을 끊으려 했던 것인지, 젊은 청년의 손에서 손가락 두 개 길이의 단검이 툭 떨어졌다.
상대의 손목이 부러졌음을 알았기에 투란은 굳이 더 상대하는 대신 다시금 거리를 누볐다.
다행히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곳에서도 성유물의 기능은 그를 지나치게 피로하게 만들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가지를 돌아다니던 도중, 투란은 처음으로 평범한 사람이 아닌 이를 목격할 수 있었다.
'저건....'
불꽃이 심장, 혹은 그 외의 한두 군데만 밀집한 일반인들과 달리 온몸에서 타오르는 듯한 남성.
남들보다 유달리 화려한 복장이며 허리에 찬 칼 덕에 그가 이곳을 지배하는 가문에 속한 기사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 성유물의 힘을 쓰면 마법사와 일반인의 차이 역시 확실히 구분하는 것이 가능했다.
"실례하지. 혹시 디르민 가문의 기사인가?"
투란은 그렇게 말을 걸며 곧바로 자신의 힘을 투사했다.
어지간한 시골 가문의 가주, 혹은 대가문에서도 중견급은 될 만한 실력자의 마력이 자신을 짓누르자 기사가 경악하여 외쳤다.
"그렇습니다, 주인님. 분부하소서!"
주인님이라니, 이 지역에서는 또 상당히 괴상한 표현으로 귀족을 칭하는 듯했다.
"나는 아바챠에서 온 투란이다. 이곳의 주인을 뵙고 인사드리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어느 시골 가문이라면 모를까, 대가문과 그 가신 가문들이 지배하는 도시의 기사들은 비교적 콧대가 높았다.
비교적 힘이 약하고 한미한 가문에서 순례 중 이러한 도시를 방문해 대접을 요구하는 일이 비교적 잦은 탓이었다.
어쩌다가 대가문 출신의 귀족과 잘 엮여 강한 자식이라도 보면 이득이니까.
따라서 투란이 발타스 가문에 들렀던 시점과 같은, 비교적 약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적당히 멀리서 온 손님이구나, 하고 마는 정도의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투란은 그보다 몇 배는 강력했고, 따라서 디르민 가문에서는 그를 홀대할 수 없었다.
궤짝을 짊어진 채 곧바로 도시 중앙의 궁전으로 안내받은 투란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씻고 새 옷을 대접받은 뒤 디르민의 가주와 대면할 수 있었다.
"반갑소. 칼 디르민이오."
디르민의 가주, 칼은 서른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아마 실제 나이는 백에서 백오십 살쯤 되지 않았을까.
온몸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조금 전 보았던 기사보다 훨씬 강렬해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실제로 마력까지 비교해본 덕에, 투란은 이제 그를 기준으로 잡아 상대가 자신보다 강한지 약한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음."
그때, 칼이 투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주 작은 동작이었지만 그의 예민한 감각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손님의 이름과 가문은?"
"투란 브람스입니다."
"브람스라면...?"
"지금은 몰락한 수호자 혈통의 옛 이름일 뿐입니다."
그가 꺼낸 성은 실제로 카마인의 땅 근처에 존재하던 옛 수호자 혈통의 이름으로, 도서관을 이용하던 당시 보아두었던 것이었다.
본래 귀족이 다른 가문의 이름을 사칭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라지만, 음험하기로 악명 높은 자하르의 땅에서 다른 가문을 방문했을 때처럼 대충 얼버무리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했다.
베르크 가문에 있을 때처럼 누구의 은인이라서 덮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다행히 칼은 투란의 단련된 육체와 허리에 찬 단검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더 캐묻지 않았다.
"그렇구려. 그래서...우리 가문의 마수를 사려 한다고?"
"예. 돈이라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정확히는 이놈의 돈을 빨리 좀 어떻게든 써 버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거래하는 데 약점을 드러낼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 것 같더군."
칼은 투란에게 받은 사무델 선장의 추천장을 읽으며 그렇게 말했다.
거기에는 투란이 미겔 섬에서 자신과 해적선을 거래하여 자하르 금화 팔백 닢을 얻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는데, 말하자면 그 돈이 정당한 경로로 얻어진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꽤 많은 종류의 마수를 길들이고 있소. 탈 수 있는 것, 날아다니는 것, 헤엄치는 것, 손을 쓸 수 있는 것까지...원하는 대로 말해보시구려. 가격만 맞으면 못 팔 것 없으니."
다만 한 사람이 들 수 있는 돈으로는 정말 비싼 놈들은 사기 힘들 거라고, 칼은 덧붙이듯 말했다.
어째 마법사 가문의 주인이라기보다는 장사꾼 같은 모습이라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한번 직접 볼 수도 있겠습니까?"
"좋소. 나는 좀 바쁘니 내 딸에게 안내하게 하리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투란은 지나가는 듯한 투로 질문했다.
"혹시 저랑 닮은 사람이라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음?"
"조금 전에 저를 알아보신 것처럼 느껴져서 말입니다."
태연한 겉모습과 달리 투란의 모든 감각은 상대를 향해 집중된 상태였다.
설마 자하르 본가도 아니고 가신 가문의 가주가 곧바로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기색을 보일 줄이야.
그러나 예상과 달리 칼은 웃으며 답했다.
"아니, 별것 아니오. 정말로. 그냥 아는 사람이랑 조금 닮은 것 같은 느낌이라."
조금 더 캐물어 볼까 고민하던 투란은 일단 한 발짝 후퇴하기로 했다.
언제나 조급함은 일을 망치는 법이라고 했으니까.
일단 상대에게서 당황이나 적의는 느껴지지 않으니 천천히 기회를 노려도 될 터였다.
잠시 후, 그의 또래로 보이는 가주의 딸이 투란을 사육장으로 안내했다.
"몰락 귀족이신데도 돈이 많으시네요, 마수를 살 정도면?"
제법 예의를 갖추고 있던 가주와 달리 이 아가씨는 투란을 깔보는 듯한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냈으나, 투란은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딱히 저 아가씨의 마력이 자신보다 훨씬 약한 것이 눈에 보여서가 아니라, 다른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어서였다.
'날 보고 누굴 떠올린 거지?'
투란은 기억 속 어머니의 얼굴에서 자신과 닮은 점을 꽤 많이 찾을 수 있었다.
갸름한 얼굴형부터 반듯한 입 모양, 다소 큰 편인 귀와 잿빛 머리카락 같은 것을.
하지만 닮지 않은 부분 역시 많았다.
눈의 모양과 색이며 코의 형태 등....
반드시 부모의 생김새가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투란은 어머니와 닮지 않은 그런 부분을 통해 아버지의 얼굴을 몰래 그려내고는 했다.
과연 디르민의 가주는 투란의 얼굴에서 누구를 떠올린 것일까. 아버지? 어머니? 그도 아니면 그 둘과 관련된 누군가?
가주가 아는 사이라면 적어도 낮은 신분은 아닐 터.
그렇게 한참 상념에 빠진 사이, 그들은 어느새 사육장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예요."
"멋지군요."
예상했던 것과 달리 사육장은 꽤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그냥 돌로 된 방과 쇠창살에 가둬놓고 키울 줄 알았는데, 마수 한 마리마다 풀과 나무까지 심고 옆에 개울을 만들어놓은 독방을 하나씩 배치해 놓기까지 했다.
투란은 억지로 떠오르던 생각을 비우며 마수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늑대...저 정도 크기면 타고 다니진 못하겠군. 코끼리, 터무니없이 커서 번거로워. 말은...덩치나 마력이나 틸리보다 훨씬 못해 보이고. 이건 뱀인가?'
마수들의 면면을 보았으나 딱 이 녀석이다 싶은 것은 없었다.
혹시나 해 말의 가격을 물어보니 기겁할 만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 녀석이요? 제법 신경 써서 키우는 놈이라 금화 사천 닢 정도는 불러야겠는데요."
투란이 가진 것이 자하르 금화로 팔백 닢, 카마인 금화로 구백 닢이 좀 넘었다.
카마인 금화가 자하르 금화보다 조금 큰 편임을, 그리고 다른 화폐도 자잘하게 몇 있음을 고려해도 그의 전 재산이 저 말 가격의 반도 안 된다는 뜻.
투란은 자신이 제법 부자가 되어서 돈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곧바로 후회했다.
저 녀석보다 훨씬 뛰어난 기량을 지닌 틸리는 대체 얼마나 비싼 몸일까.
'하긴, 그 정도 값을 하니까 혼자 사령술사 둘을 상대로 아시즈를 지켰겠지.'
물론 그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결국 패배했겠지만, 그 정도만 해도 마수 중에선 놀랍도록 강한 축이었다.
아무래도 마수를 사는 건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것 같은데, 마법기를 만드는 가문을 찾아가는 쪽이 나을까?
하지만 저 돈이 든 궤짝을 들고 사막을 여행하는 것부터가 번거로운 일이요, 그쪽이라고 가격이 더 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던 투란은 어느 짐승을 보며 걸음을 멈췄다.
매끄러운 흑갈색 깃털로 뒤덮인 검독수리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32화
투란이 히사릴 언덕에 살 적, 검독수리는 늑대나 표범처럼 양을 노리고는 했다.
녀석들의 몸무게가 어지간한 양의 오 분의 일도 안 됨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힘이었다.
눈앞에 있는 놈은 마수치고는 그다지 크지 않아 제 동포들과 체구가 비슷했지만, 마수인 만큼 힘은 훨씬 더 강할 게 분명했다.
다른 마수들과 달리 좁은 새장에 갇힌 검독수리는 어째서인지 황금색 눈을 껌뻑이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녀석은 얼마입니까?"
"천오백 닢이요."
어째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싼 가격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투란의 전 재산에 가깝기는 했지만.
"능력은 뭡니까?"
"똑똑하고 잘 날아요."
그 말을 듣자 가격이 왜 저렇게 책정되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특수한 능력이 없는 마수는 아무래도 동급 중에서는 다소 낮게 치는 편이었으니까.
거기다 체격이 왜소한 만큼 힘도 약할 것이고.
하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가진 마력의 양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싼 것 같았다.
그런 의문을 꺼내자 가주의 딸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 검독수리는 인기가 많죠. 사람 한 명쯤은 충분히 들고 날 수 있으니까. 근데 쟤는 너무 머리가 좋다 보니 길들였는데도 말을 안 들어요. 내가 왜 자기보다 멍청한 것들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는 식이더라고요."
그때, 경악스럽게도 검독수리가 직접 그 질문에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투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질문했다.
"혹시 지금 대답한 거냐?"
끄덕.
"아무 말이나 끄덕이는 건 아니지?"
절레절레.
"너 참 잘생겼구나."
끄덕.
"역시 독수리보다는 매가 더 멋있는 것 같은데."
마지막 말에 검독수리는 부리를 딱 부딪히며 성난 표정을 지었다.
투란의 말을 뉘앙스만 이해하는 게 아니라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틸리도 똑똑하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건뭐 말만 못하지 사람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투란은 반쯤 넋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알아듣는군요, 확실히."
"네. 아예 글자도 가르쳐 보려고 했는데 배우기 싫은 건지 못 배우는 건지 안 하더라고요. 어느 쪽이건 마찬가지지만."
어찌나 제멋대로인지, 한 번은 팔렸다가 도망쳐버려서 자하르 가문에 부탁해서 잡아 오기까지 했다던가?
"아까운 일이죠. 덩치에 비해서 힘도 좋고 마수도 꽤 먹였거든요. 말만 잘 들었으면 훨씬 비싸게 팔았을 녀석인데."
그 말은 얼핏 듣기에는 불평 같았으나 은근히 부추기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어쩌면 너는 저 녀석을 완전히 지배해 주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터무니없이 싼 값에 좋은 마수를 사는 것이라는 식으로.
가주와 이야기할 때도 느꼈지만, 이 가문은 작정하고 귀족들을 상인으로 키우는 것 같았다.
투란은 가만히 설명을 듣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검독수리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면 말을 알아들으니 직접 물어보면 되겠네요. 이봐, 혹시 바라는 거라도 있어?"
가주의 딸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몇 번 물어봤는데 그런 질문에는 제대로 대답 안 해줘요. 워낙 제멋대로인 녀석이라...."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검독수리가 고개를 한 차례 갸웃하더니 발톱으로 투란을 가리켰다.
가주의 딸이 경악하여 입을 떡 벌렸다.
"아니, 갑자기 왜...."
"나를 바란다고?"
투란의 질문에 검독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닌데. 혹시 이유가 있어?"
이어지는 질문에는 고개만 좌우로 까딱거리는 것이 대답하기 싫거나 대답할 방법이 없어서인 듯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몸짓으로 답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혹시 내가 널 사면 읽고 쓰는 법을 배워볼 생각 있니? 직접 가르쳐 줄 테니까."
이어지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뒤, 투란은 가주의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사죠."
"네? 아, 그게, 아무래도 가격을 다시 책정해야-"
막상 검독수리가 순순히 말을 듣는 것을 보니 아까워진 듯했다.
물론 투란은 그런 그녀에게 어렵지 않게 현실을 가르쳐줄 수 있었다.
"어차피 저 친구도 제가 아니면 저렇게 협조적이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이봐, 그렇지?"
투란의 말에 검독수리가 고개를 크게 두 번 끄덕이더니, 가주의 딸을 향해 발톱으로 쇠창살을 탕 두드렸다.
당장 자신을 투란에게 팔라고 협박하는 듯한 모양새.
아주 죽이 잘 맞는 모습에 가주의 딸은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쩔 수 없네요."
* * *
"이어져라, 하나로. 너는 나고 나는 너...."
투란은 숙소에 놓아두었던 궤짝에서 금화를 가져와 계산을 마친 뒤, 무려 가주의 주관 아래 검독수리와 의식을 결속했다.
주문과 함께 투란의 영혼 일부가 저 검독수리와 연결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조련사 혈통의 능력인 조련 마법.
다른 마법사들처럼 일시적으로 동물을 제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두 생물을 영적으로 묶어버리는 능력이었다.
이러한 결속을 다시 풀거나 연결의 대상을 바꾸려면 마찬가지로 조련사 혈통의 귀족이 있어야 했다.
연결이 끝나자 투란은 검독수리의 생각 일부가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침내 무언가를 찾았다는 충족감과 뿌듯함, 이제 새장에서 나갈 수 있다는 해방감이었다.
저 마수는 대체 그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특별한 혈통? 재능? 그도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
"끝났소."
가주의 말을 들은 투란은 새장을 열어 검독수리를 해방했다.
녀석은 새장에서 풀려나고도 도망치는 대신 폴짝 뛰어 투란의 팔 위에 앉아 깃털을 골랐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로.
"네 이름은 뭐가 좋을까."
투란의 질문에 검독수리는 삐약, 하고 매서운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울음소리를 냈다.
그와 함께 영혼의 끈을 타고 전해져 오는 녀석의 사고.
언어화된 생각과 추상적인 감정 사이의 무언가라서 명확히 해독하기는 좀 어려웠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네가 직접 짓고 싶다고? 글을 배워서?"
검독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원하는 대로 해."
어차피 이름 짓는 데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 만큼 투란으로서는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지나치게 자주성이 높은 게 아닌가 싶긴 했지만...그래도 말은 잘 들으니까 상관없지 않을까.
투란은 어린 시절 길렀던 목양견을 떠올렸다.
그의 어머니가 히사릴 언덕에 왔을 적, 늙은 양치기에게서 양 떼와 집을 사며 함께 딸려왔던 녀석.
어머니를 병으로 잃고 그 개까지 늙어 죽은 뒤, 투란은 더는 개를 기르지 않았다.
마법의 힘으로 목양견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양치기 일을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늙어 죽는 경험을 또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 검독수리를 기르면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일반적으로 마수들은 마법에 미숙한 대신 동급 마법사보다 신체적으로 더 우월하며, 그만큼 수명 역시 어마어마하게 긴 편이니까.
어쩌면 이놈이 그보다도 오래 살지도 모를 일이다.
"신기하구려."
둘의 그런 모습을 보며 칼 가주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예전에 바라하의 계승자가 찾아왔을 때조차 거들떠보지도 않던 놈인데, 대체 브람스 씨의 어떤 점에 끌린 것인지."
바라하 가문이라면 엔릴 사막 동쪽에 자리한 대가문의 이름일 터였다.
태양 혈통을 타고나서 불과 빛을 다룬다고 하던가?
투란 역시 이 녀석이 왜 자신에게 끌렸는지 알지 못했기에 나중에 글을 가르친 다음 물어볼 생각이었다.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잘 데리고 다니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오. 이미 떠난 이상 우리 애도 아니니까."
칼 가주는 혹시 녀석이 도망가면 알아서 잡아야 한다며, 악담인지 충고인지 모를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
"아, 잠시."
그때, 떠나려는 투란을 가주가 붙잡았다.
항상 계산적이던 상인의 얼굴에는 어째서인지 모호한 망설임이 떠올라 있었다.
"이건 그냥 듣고 넘겨도 좋소만. 혹시 탈리스 님과 인연이 있으시오?"
"탈리스 님이라고 하시면...?"
"아니, 아니오. 그냥 혹시나 해서. 잊어주시오."
처음 듣는다는 듯한 태도에 칼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마치 조금 전 했던 질문을 없던 것으로 만들려 하는 듯한 태도였다.
투란은 칼 가주가 그의 얼굴에서 저 탈리스라는 이름의 누군가를 보았음을 직감하고 그 이름을 머리에 새겼다.
그리고 조금 전에는 분위기상 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져 보기로 했다.
실없는 질문을 먼저 던진 건 저쪽이니까.
"그러면 가주님, 저도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시오."
"혹시 비제라는 여인을 아십니까?"
"비제?"
"이렇게 생겼습니다."
투란은 가방의 가장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종이를 꺼냈다.
질 좋은 종이 위에 흩뿌려진 잿가루는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마법으로 그린 거군. 수호자 혈통치고는 재주가 좋은걸."
"이쪽에 능숙한 친구가 있어서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종이에 잿가루를 흩뿌려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메이사와 마법을 수련하던 중 배운 기술이었다.
머릿속으로 형상을 그려낸 뒤 그 모양 그대로 잿가루를 배열해 종이에 묻히면 그림에 재주가 없는 이도 자신이 떠올린 바를 투사(透寫)하는 것이 가능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오 년에서 육 년쯤 된 탓에 완벽히 재현했다고는 자신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그녀를 아는 사람이 보면 느낌 정도는 들 정도로 비슷한 형상이었다.
투란은 유심히 그림을 바라보는 가주의 행동 하나하나에, 몸에서 풍기는 냄새에 신경을 집중했다.
'어떠려나.'
그가 어머니의 초상화를 부담 없이 보여준 것은 그녀가 일반인이어서였다.
설령 투란이 타고난 자하르 혈통이 어머니에게서 내려온 것이라고 한들, 일단 마법사가 아닌 이상 무언가 큰 죄를 저지를 만큼 거물이기는 힘들 테니까.
물론 어머니의 정체를 알자마자 바로 아버지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기대와 달리, 칼은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혀 모르겠군. 이만한 미인을 보았다면 쉬이 잊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어머니나 누이요?"
"비슷합니다."
극도로 후각을 집중한 상태에서도 상대에게서 당황하거나 놀라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 사실에 투란은 안도와 실망을 동시에 느꼈다.
"그쪽도 무언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구려."
"세상에 사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기야."
무거운 말투로 보건대 그 역시 나름대로 고충을 안고 사는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외부인인 투란이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계약을 마친 뒤, 투란은 본격적으로 새 친구의 실력을 시험하고자 궁전에서 나와 코마드 시의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큼직한 검독수리를 팔에 얹고 뒤에 기사까지 대동한 모습에 주위의 시선이 모였다.
수십 분 정도 걸음을 옮기자 서서히 메마른 모래바람의 냄새가 풍겨왔다.
이윽고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지평선 너머까지 모래뿐인 사막....
배를 타고 오는 중에 얼핏 보기는 했지만 직접 밟으니 기분이 새로웠다.
투란은 가볍게 손을 뻗어 메마른 공기를 휘저어 보았다.
'역시 겨울에다 밤이라서 그런지 뜨겁지는 않군. 오히려 추운 편이라면 모를까.'
아마 이곳이 사막의 최북단인 것도 그 이유일 터였다.
엔릴 사막은 끔찍하리만치 넓은 것으로도 유명해서, 같은 사막 내에서도 지역별로 기후가 다를 정도였다.
지도로 봤을 때 자하르 가문이 지배하는 영토의 크기가 아라비온의 세 배에서 다섯 배 정도였던가?
물론 사막의 특성을 생각하면 인구는 오히려 그보다도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한번 가볍게 날아볼까."
말이 끝남과 함께 검독수리가 날아오르자, 투란은 한 손으로 녀석의 튼튼한 다리를 붙들었다.
강한 힘이 몸을 잡아채며 순식간에 세상이 저 아래로 가라앉았다.
"오...."
눈이 시릴 정도로 불어오는 맞바람에 투란은 재빨리 눈앞의 바람을 차단했다.
자기 몸을 조종해 둥실 띄우는 부유 마법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감.
그가 직접 뛰는 것보다도 훨씬 빠른 것 같았다.
자하르 귀족이 이 녀석을 어떻게 잡았는지 몰라도 틀림없이 달음박질로 잡은 것은 아닐 터였다.
은신한 채 몰래 포획한 것이라면 모를까.
슬쩍 뒤를 돌아본 투란은 어느새 코마드 시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작아졌음을 깨닫고 웃었다.
반대편에는 여전히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탓인지 지상에서와 달리 그리 막막하게 보이지 않았다.
훨씬 거리감이 없어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투란이 몸에 부유 마법을 걸어 무게를 줄이자, 검독수리는 몸이 가벼워져서 신났는지 더 빠르게 날갯짓했다.
"이 정도면 다케인 평야는 하루 만에 가로지르고도 남겠는걸...."
정말이지, 그동안 두 발로 걸어서 여행했던 것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의 속도였다.
녀석이 지쳐서 내려올 때까지, 한 사람과 한 마리 검독수리는 신나게 비행을 즐겼다.
33화
투란은 밤이 늦을 때까지 비행을 즐기고서 다시 디르민 가문의 궁전으로 돌아왔다.
일단 손님으로 들어온 이상 며칠은 얌전히 접대를 받는 것이 예의였기 때문이었다.
악성 매물을 처리해 준 고객이라서 그런 것일까?
돌아와 보니 그의 숙소는 어느새 더 크고 화려한 방으로 바뀐 상태였다.
심지어 옆에는 조금 더 작은 방석으로 둥지 같은 것까지 꾸며져 있었는데, 아마 검독수리의 침실인 듯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주인님."
가볍게 손짓해 하인들을 물러가게 한 투란은 어느새 제 침실에 누운 검독수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좋냐?"
삐약, 하고 작게 울며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투란은 그 모습에 픽 웃으며 침대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그렇게 편안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사람과 동물이 함께하는 본격적인 글자 교습이 시작됐다.
교육 장소는 머무는 건물 앞의 작은 공터.
"자, 한번 따라 써 볼래?"
나뭇가지로 땅에 글자를 적자 검독수리가 발톱으로 땅을 긁어 이를 따라 썼다.
투란은 녀석이 잘못 쓴 부분 몇 개를 지적했다.
"여기 획은 아래로, 그리고 이건 끝을 긁듯이 올려야 해."
검독수리는 썩 똑똑한 학생이라 보기는 어려웠지만, 인간의 기준에서나 그런 것이지 동물 중에선 천재라 봐도 무방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글자를 몇 번이고 다시 쓰는 녀석의 모습을 보자니 옛 기억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날 가르치실 때도 이랬으려나.'
어린 시절, 그가 어머니에게 글자를 배울 때도 이런 방법을 썼다.
양가죽을 가공한 양피지는 그들이 있는 작은 마을에서 만들 게 못 되고, 그 외의 다른 쓸만한 것은 없었으니까.
'잘 기억하는구나, 투란. 우리 아들 정말 똑똑한걸?'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묘하게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 추억을 곱씹던 도중, 누군가 그를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글자 교육 중인가 보네요?"
"예."
가주의 딸, 이름이 이리드라고 했던가?
이름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여인이 질투심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자신을 무시하던 동물이 다른 이에게 복종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그 대상이 깔보던 몰락 귀족인 만큼 더더욱.
"혹시 검독수리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요?"
"동물을 먹는다는 정도는 압니다."
"이 녀석은 물고기를 특히 좋아해요. 그중에서도 이곳 앞바다에서 나는 전갱이가 최고죠."
슬쩍 시선을 돌리자 검독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도 그녀는 녀석이 즐겨 먹는 식단부터 건강 유지에 필요한 수면 시간 등, 키우기 위해 일상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을 줄줄이 읊었다.
확실히 조련사 혈통을 타고나서인지 동물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다.
"대단하시네요.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투란이 순순히 감사를 표하자 가주의 딸은 움찔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전 이미 약혼자가 있어요."
이 여자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까.
멈칫했던 투란은 자신의 칭찬을 상대가 일종의 호감 표시로 받아들였음을 깨닫고 픽 웃었다.
어쨌든 약혼자가 있다니 과거 발타스 가문에서처럼 불편한 상황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라 해야 할까.
"알겠습니다."
이해했음을 밝혔으나 어째서인지 그녀는 전보다 조금 더 기분이 언짢아진 것 같았다.
"뭐, 그건 됐고...혹시 점심에 일정 있으세요?"
"딱히 없습니다."
"그러면 식사나 같이하시겠어요? 다른 손님들이 모두 브람스 씨를 궁금해해서요.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손님들이 저를 찾는단 말입니까?"
"네. 사육장을 방문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저 녀석을 탐냈으니, 과연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주인이 되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당연하게도 이 세상에 여행하는 귀족이 투란 한 명뿐인 것은 아니었다.
귀족 한 명 찾기 힘든 변방이라면 모를까, 어지간한 대도시라면 순례나 방랑 중인 귀족이 몇 명씩 머물기 마련.
과거 머물렀던 베르크 가에도 그런 이들이 몇 명 오갔었는데 당시 투란은 그들과 썩 잘 어울리지 못했다.
웬 근본도 모르는 떠돌이 주제에 가주가 총애하는 둘째 아들, 아시즈와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질투를 받았던 탓이다.
그때의 기억 탓에 거절하려 하기도 잠시, 투란은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좋습니다. 지금 바로 가면 될까요?"
지금 그는 자하르 가문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모아야 할 처지.
그런 점에서 귀족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날릴 필요는 없었다.
* * *
"처음 뵙겠습니다. 투란 브람스입니다."
"브람스? 근처에서는 못 들어본 성이군요."
"카마인 쪽에서 왔다던데?"
"그러면 아라비온이랑 꽤 가까운 것 아닌가?"
마지막 사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날카롭게 그쪽을 쏘아보았다.
가주의 딸, 이리드가 차갑게 말했다.
"괜히 우리 쪽 손님을 그 참새 새끼랑 엮지는 말죠."
"실례했습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자 말을 꺼낸 이가 고개 숙여 사과했다.
딱히 못 꺼낼 말까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이쪽에서도 아라비온을 미워하는 마음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투란은 인사를 나누며 디르민 가문에 머무는 귀족 세 명의 얼굴을 익혔다.
비교적 젊은 남녀와 중년 남자 한 명.
앞의 둘은 인근 지역에서 순례 겸 신혼여행을 온 가슈브라는 가문에 속한 부부였는데, 남자 쪽이 차기 후계자고 여자는 자하르의 방계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투란의 위장 신분과 마찬가지로 몰락 귀족이었다.
"돌프 메렌이오. 브람스 씨. 역사(力士) 혈통이지."
역사는 수호자와 마찬가지로 육탄전에 특화된 혈통으로, 수호자가 방어 능력에 특화되었다면 이쪽은 물리적인 힘을 내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반갑습니다."
악수를 하던 투란은 상대가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끼고 재빨리 수호자 마법기의 힘을 최대로 발동했다.
예상대로 어마어마한 악력이 손아귀를 짓눌렀다.
"역시 수호자 혈통답게 튼튼하군. 그런 것치고 악력은 부족하지만 말이야."
자신의 근력이 우위임을 확인한 돌프가 우월감에 찬 미소를 지으며 으스댔다.
투란은 이러한 횡포에 화를 내는 대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는 것으로 받아넘겼다.
"그쪽 훈련은 거의 하지 않아서요."
"흐, 하긴 우리 중 제대로 된 신체 단련 방법을 계승한 이들이 거의 없기는 하지. 그래도 몸을 보니 아예 아무것도 안 한 몸뚱이는 아닌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좀 노력하긴 했습니다."
"스스로 그만큼 단련했다고? 역시 약한 사람들은 부럽다니까! 난 아무리 큰 바윗돌을 들어도 별 자극이 안 오던데 말이야."
그 말대로 돌프는 기본적인 골격은 좋지만 혹독하게 단련된 체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대부분의 육탄전 혈통이 몰락한 이유 중 하나였다.
과거 투란이 해낸 속성 4주 훈련 같은 것은 숙련된 선생과 단련용 마법기, 끈기와 열정에 찬 학생이라는 삼박자가 모두 갖춰졌기에 가능했던 일.
저 셋 중 한 개라도 빠지면 순식간에 단련 기간이 몇 달에서 몇 년 이상으로 늘어나는데,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긴 시간 동안 몸을 혹사할 만한 인내심이 없었다.
가뜩이나 강인한 육신 탓에 단련 자체가 기사나 일반인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기도 했고.
"이봐요, 댁이 힘 좋은 건 알았으니까 거기까지 하고. 그 검독수리는 어디 두고 왔어요? 걔 보고 싶어서 왔는데."
가슈브 부부 중 부인 쪽이 대놓고 무시하는 투로 말하자 으스대던 돌프의 얼굴에 힘줄이 불끈 솟았으나, 그는 꾹 참듯이 이를 악물고 물러섰다.
하기야 한낱 몰락 귀족 따위가 어찌 감히 대가문 출신의 귀족에게 대거리할 수 있으랴.
투란은 이를 못본 척하며 답했다.
"근처에서 좀 날아다니라고 했습니다. 오전에 글쓰기 연습을 하느라 답답했을 터라. 불러 드릴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남편 쪽은 좀 더 예의 바르게 부탁하는 모양새였다.
투란은 손을 하늘로 뻗으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리로 와, 하고.
그의 생각이 영혼의 끈을 타고 전해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검독수리가 날아왔다.
"와, 진짜네...."
투란의 팔에 내려앉은 검독수리는 자신을 둘러싼 귀족들을 보며 경계 어린 표정을 짓더니, 가슈브 부인이 만지려는 듯 손을 뻗자 부리를 딱 부딪히며 거부했다.
이를 본 그녀가 잔뜩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새대가리 새끼! 대체 내가 뭐가 모자란다고 저 지랄이야? 저딴 몰락 귀족보단 훨씬 잘 키워줄 수 있는데."
바로 앞에 당사자가 있음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태도.
그간 대가문 출신의 귀족을 몇 번 보았지만 이 정도로 거만한 태도는 처음이라서 오히려 신선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호감이 가는 건 아니었지만.
검독수리 역시 자신을 욕한 것이 불만인지 눈을 부라렸으나 힘의 차이를 인식한 탓인지 덤벼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투란은 마음속으로 그에게 대신 복수해달라고 요구하는 부추김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그렇게 말하지 마. 실라. 무례하잖아."
"무례는 무슨. 내가 틀린 말 했어?"
부부 중 남자 쪽은 그래도 상식이란 게 있었으나, 타고난 성격과 가문의 격차 탓인지 아내의 폭주를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하기야 이 모임의 주최자라 할 수 있는 디르민 가문의 후계자, 이리드만 해도 저러한 횡포을 보며 얼굴을 찌푸릴지언정 뭐라 제지하지는 못하고 있는 마당 아닌가.
이것만 봐도 엔릴 사막에서 자하르 가문이 가진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엉망이 된 분위기와 별개로 이어지는 식사는 훌륭했다.
동방에서 수입되는 향신료로 맛을 낸 매콤한 닭고기구이부터 납작한 빵에 허브를 버무린 양 갈비, 쪄낸 생선이며 가재 등 바다와 사막을 함께 낀 코마드의 문화를 고스란히 담아낸 듯한 코스였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에는 차를 한 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는데, 돌프가 먼저 대화의 주제를 꺼냈다.
"요즘 서쪽이 그렇게 시끄럽습니다."
"서쪽이라면, 회색 지대요?"
"그보다 더 서쪽입니다. 흑요정들이 난리를 피워서 아라비온-그러니까, 참새들이 대대적으로 토벌대를 꾸렸다던데."
듣자 하니 돌프는 흑요정들이 일어난 지역 근처에서 살다가 최근 엔릴 사막 쪽으로 넘어오며 그쪽의 이야기를 접한 모양이었다.
투란은 무언가 최신 소식이라도 있을까 싶어 가만히 앉아서 귀를 기울였다.
"누가 지휘하는지도 들으셨나요?"
"그들의 후계자인 어린 아가씨라던데요."
"아, 그 비쩍 말랐다는 해골? 이름이 뭐랬더라? 마사였나?"
"난 메레디스라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면 아마 메이사일 겁니다."
다른 이들에게서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그것도 악평을 듣는 건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투란을 뺀 네 명의 귀족은 그 여자가 뼈와 가죽만 남은 끔찍한 추물이라며, 그래서 결혼하는 남자가 누구건 첫날밤 침실에서 눈을 꾹 감아야 할 거라며 온갖 악담을 쏟아냈다.
"이참에 그년을 암살할 순 없을까요?"
"암살이라니, 우리 자하르는 그런 비열한 짓은 하지 않는다고요. 우연히 귀족 몇 명이 그쪽으로 순례를 떠났을 수는 있지만."
"하긴 그렇죠? 아, 그년만 죽이면 참새 새끼들 표정이 볼만할 것 같은데...."
가슈브 부인은 투란과 롤프를 슬쩍 바라보며 대놓고 거짓말을 하듯 이죽거렸다.
그러던 도중 묘한 방향으로 이야깃거리가 전환되었는데, 마침 딱 투란이 원하던 주제였다.
"그래도 그것들은 일찌감치 후계자를 정해놔서 편하겠어요. 우리는 세 명 중 한 명이 정해지기를 기다린 게 몇 년째인지 모르겠는데."
가슈브 부인이 한탄하듯 말하는 것으로 짐작건대 자하르는 아라비온과 달리 정해진 후계자가 없는 모양이었다.
몰락 귀족들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으로 보건대 딱히 비밀은 아닌 듯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아무래도 높으신 분들이 함께하는 자리가 아니면 듣기 어려웠다.
감히 평민들이나 기사들이 귀족의 일을 함부로 운운하기는 힘든 법이니.
"혹시 그 세 분의 성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투란이 묻자 가슈브 부인은 잠시 가당찮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순순히 답했다.
자신의 지식을 내보여 찍어 누르려는 듯한 기색이었다.
"가주님의 사촌 동생이신 라흐만 님이랑 오촌 조카인 알마 님, 그리고 손자인 페르가 님까지. 다들 지난 전쟁에서도 활약하신 강력한 귀족이시죠."
세 사람을 모두 높여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녀 역시 뻗대는 것치고 자하르 가문 내의 지위는 썩 높지 않은 듯했다.
하기야 그러니까 남편을 들여오는 게 아니라 다른 가문에 시집가는 모양새가 되었겠지만.
어쨌든, 셋 중 탈리스라는 이름이 없는 것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때, 이리드가 한탄하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탈리스 님이 확실히 정해주셨으면 좋겠는데."
뜻밖에 훅 튀어나온 이름에 투란은 순간 눈을 부릅떴다가,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자하르 혈통인 가슈브 부인이 당황한 사람 특유의 냄새를 맡을 것을 염려해서였다.
필사적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투란은 슬쩍 질문을 던졌다.
"탈리스 님은 또 어떤 분입니까?"
다행히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는지 누구도 그의 질문이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다.
"가주님의 친동생이자 현 자하르의 이인자시죠. 사실상 가문을 이끌어 나가는 분이랄까."
투란과 닮았을 누군가의 정체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거물이었다.
34화
모임이 끝나고 거처로 돌아온 뒤, 투란은 검독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자하르의 이인자이자, 칼 가주가 투란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를 떠올렸을 정도로 닮은 사람....
일단 바로 찾아가 볼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대가문의 이인자라는 것은 심지어 그 메이사보다도 강력한 마법사라는 의미니까.
만약 그에게 있어 투란이 지워야 할 오점이거나 그 비슷한 무언가라면, 존재가 발각되는 즉시 벌레처럼 밟혀 죽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확실한 성과 하나가 생겼다는 건 나쁘지 않네.'
최소한 지금보다 더 강해진 뒤에는 찾아가서 캐물을 상대가 하나 생긴 셈이다.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아직 그는 마법사로서 젊다 못해 어린 나이였고, 시간은 많았으니까.
이후로도 투란은 며칠 동안 디르민 궁전에서 시간을 보냈다.
접대를 받으면 며칠은 묵어 가는 것이 예의였으니.
검독수리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것이 꽤 재밌어서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나는 검독수리입니다."
[나는 검독수리입니다]
"좋아, 잘 썼네."
[조아 잘 썼네]
"이건 따라 쓰라고 말한 게 아닌데. 그리고 틀렸어."
사흘째 낮, 검독수리는 드디어 글자로 문장을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은 조금만 문장이 길어져도 오자(誤字)가 생기기 일쑤긴 하지만, 이 정도면 어지간한 시골 무지렁이들보다는 낫다고 봐도 좋았다.
"이름은 정했어?"
[아직]
"혹시 '아직'이 이름인 건 아니지?"
검독수리는 글을 써서 답하는 대신 재미없는 농담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기도 잠시, 투란은 진지한 얼굴로 질문했다.
"그러면 이제 가르쳐줄 수 있어? 왜 날 골랐는지."
투란의 질문에 검독수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천천히 땅에 글자를 써내려갔다.
마치 사람이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너는 조아 너의 안쪼근 나와 딱 마자]
"혹시 '좋아'라고 말하고 싶었니?"
투란이 발음하며 땅에 글자를 써주자 검독수리는 딱 하고 부리를 부딪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머지도 많이 틀렸네. 아직 더 배워야겠다."
녀석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며 투란은 조금 전 들은 말을 분석했다.
본래 마법사가 마수와 영적으로 결속하는 데는 일정한 제한이 있었다.
가진 마력에 비례해 한도가 존재해서 더 강한 마수를, 더 많이 결속하다 보면 더는 결속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마 그런 제한이 없었으면 조련사들이 진작 수백 수천 마리의 마수와 결속해 세상을 지배했을 터.
하지만 투란의 한도가 유난히 넓어서라고 보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대가문의 후계자가 이 녀석을 보러 온 적이 있다는 것.
그만한 이의 마력이 투란보다 약할 리는 없었다.
거기다 전에는 도망쳤지만 팔린 적도 있었다니 그때도 결속은 했다는 뜻이지 않은가.
즉 한도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그가 타고난, 자하르와 다른 가문이 혼합된 혈통이 원인일지도....
이러한 이론을 설명해 주었으나 검독수리 자신도 그 '딱 맞는' 느낌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창 대화를 나누던 도중, 뒤쪽에서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투란! 새랑 궁상맞게 마당에서 뭐 하나?"
첫 모임 이후 가슈브 부부는 투란이 운이 좋을 뿐 별 볼 일 없는 잔챙이에 불과하다 여겼는지 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달리, 몰락 귀족 돌프 메렌은 친한 척 말까지 트며 거처로 찾아와 귀찮게 굴기 시작했다.
그냥 놀러만 오면 적당히 상대하다가 보내겠는데, 틈만 나면 같은 육체파 귀족끼리 우호를 다지자며 힘으로 엉기려 드는 게 문제였다.
정말로 친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자기가 우위인 부분에서 찍어누르며 우월감을 누리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쨌든, 저 귀찮은 작자와 얽히는 것도 오늘로 끝일 터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자 그의 옷차림을 본 돌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자네 어디 나가나?"
투란은 옷을 완전히 갖춰 입은 것은 물론, 이곳 현지인들이 입는 길고 하얀 장옷을 걸치고 옆구리에 가방을 메고 있었다.
가방 옆에는 새로 달아놓은 길쭉한 금속 막대기가 있었는데, 폴짝 뛰어 그 위에 앉은 검독수리가 돌프를 째려보았다.
"저는 오늘 떠날 겁니다."
"어디로 가려고?"
"그냥 사막 이곳저곳을 돌아보려고요."
"말이라도 하고 가지 그랬나!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
더 말을 섞고 싶어 하지 않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지만 돌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친한 척 굴었다.
"나도 슬슬 떠날까 했는데, 혹시 길안내 해줄 사람 필요하지 않나? 내가 이 근방은 빠삭한데 말이야."
"됐습니다."
귀족 길잡이라니 실로 호사스러운 일이지만, 저 작자와 같이 여행했다가는 홧병이 나서 죽을 것 같았다.
투란의 거절에 돌프는 뜻밖에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감이구만. 혹시 생각 바뀌면 말해주게!"
수상할 정도로 흔쾌히 작별 인사를 하고 사라져 버리는 게 찜찜했지만, 어쨌든 떨쳐냈으니 그것으로 된 일.
칼 가주에게 떠난다는 사실을 통보한 뒤 궁전을 나오자 기사 두 명이 그를 배웅하고자 따라왔다.
투란은 바로 코마드를 떠나는 대신 그를 배웅 겸 감시하러 나온 기사 한 명에게 물었다.
"책 파는 곳을 안내해 줄 수 있나?"
"예, 주인님."
코마드의 가장 큰 서점은 항구 근처에 있었는데, 아무래도 책이 비싼 물건인 만큼 입구를 지키는 경비가 있었다.
그는 옆구리에 큼직한 검독수리 한 마리를 끼고 뒤에 기사 두 명을 대동한 투란을 보고 굳어 버렸다.
"어, 어...."
"들어가지."
그를 지나쳐 서점에 들어간 투란은 서점의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인과 짧게 대화를 나누며 책을 두 권 샀다.
사막을 여행할 때 도움이 될 만한 여행기 겸 지침서 한 권, 그리고 엔릴 지방의 종교 서적 한 권.
책값은 과거 아바챠에서 샀던 책 두 권으로 갈음했다.
새로 산 두 권의 책을 들고 나오던 투란은 한쪽을 보고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연약한 불꽃으로만 인식되는 사람들 사이, 홀로 타오르는 불길이 보인 탓이었다.
* * *
서늘한 겨울 사막의 바람을 맞으며, 코마드 시를 벗어난 투란은 조금 전 구매한 책을 펼쳤다.
사막 여행자를 위한 지침서, 작가는 브릿소 자하르.
모든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후원자를 위한 헌사를 읽어 보니, 무려 자하르 출신의 기사가 본가의 지원을 받아 직접 집필한 책이었다.
'제대로 된 지도가 있었으면 좋았겠지만...이것도 나쁘진 않지.'
첩자로 몰리고 싶지 않고서야 몰락 귀족 따위가 대가문의 내부 지도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케오른이 그려 주었던 지도조차 대충 뭉뚱그려서 어느 지방에 어느 대가문이 있더라, 하는 정도일 뿐 제대로 지형을 그려낸 것은 아니었으니까.
투란은 여행기에 적힌 내용을 한참 읽다가 우선 코마드의 남서쪽에 있는 바니펠이란 도시에 가 보기로 했다.
그곳에 무려 옛 제국의 유적이 있다는 정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의 사서와 같은 존재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면 최고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나쁘지 않은 관광이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어디 가볼까."
혼잣말과 함께 검독수리를 잠시 내려다보던 투란은 녀석을 타는 대신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고 이전처럼 두 발로 걸음을 옮겼다.
검독수리는 왜 자기를 타고 가지 않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가방에 매달려 가는 것도 썩 나쁘진 않은지 그대로 목을 움츠리고 눈을 감았다.
사막을 걸으며 깨달은 것은 과거 보았던 여행기에서처럼 모래만이 가득한 세계가 아니란 것이었다.
걷다 보면 암석과 자갈이 널린 곳도 꽤 자주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 모습이 투란의 고향인 히사릴 언덕 밑의 황야지대와도 비슷했다.
성유물의 힘으로 주변에 의식을 집중하면 그토록 황량한 풍경에서도 생명의 불꽃이 피어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기야, 정말 아무것도 살지 못할 정도로 황량한 지역에서는 대가문이 세워질 수도 없을 터였다.
동물들이 번성해야 마수가 많이 태어나고, 그 마수를 잡아먹는 것으로 강대한 마법사를 키워낼 수 있으니.
투란은 성유물의 힘으로 지나다니는 짐승 중 마수를 구분한 뒤 곧바로 검독수리를 보내 사냥하게 했다.
녀석은 화살과도 같은 속도로 날아 회색 털의 큼직한 토끼 한 마리를 낚아챘다.
'하필 토끼 마수네.'
다행히 과거 마수 사냥꾼들을 도륙했던 놈과 달리 저 토끼는 썩 강한 마수가 아니었기에 반격의 여지는 없었다.
그만큼 마력 역시 약했기에 성장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냥하는 것이 기분 좋았는지 검독수리는 토끼를 찢어발기고 살점을 먹어치우며 삐약삐약 울어댔다.
투란은 물통의 뚜껑을 열고 물을 들이부은 뒤 조작해 가며 피투성이가 된 녀석의 발을 씻겨 주었다.
그렇게 걷기를 몇 시간.
해 질 무렵, 투란은 사막의 황량함과 어울리지 않는 풍요로운 장소를 발견했다.
큼직한 오아시스, 그리고 그 물을 빨아 먹고 자란 나무와 들풀로 이루어진 작은 숲과 초원 지대였다.
여행기에 따르면 엔릴 사막에는 이런 오아시스가 수천 개 이상 있으며, 이를 거점으로 삼는 유목 부족 역시 존재했다.
지금 이곳만 해도 수십 개의 천막이 오아시스를 둘러싸듯 펼쳐져 있었고, 그 주변에는 목줄이 묶인 양들이 널브러져 쉬고 있었다.
사는 지역은 달라도 그와 같은 양치기인 셈이다.
"지나가던 여행자인데 쉬어갈 수 있겠습니까?"
투란의 방문에 유목 부족의 사람들은 처음엔 경계했으나, 커다란 검독수리를 데리고 있는 것 말고는 제대로 된 무장조차 없는 개인임을 알고는 경계를 풀었다.
등에 찬 팔뚝 길이의 단검쯤이야 생활용품 정도지 무장으로 치지도 않았다.
"환영하겠소, 여행자. 내가 베푸는 호의가 온전히 돌아올 수 있기를. 그런데 그 검독수리 혹시 마수요?"
"그럴 리가요. 그냥 좀 덩치가 큰 녀석일 뿐입니다."
투란은 태연히 거짓말하며 늙은 족장의 천막에 초대받아 식사를 해결했다.
유목민들 역시 손님 대접을 섭섭히 하는 것을 불명예로 여기는 족속인지라 제법 호화스러운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아무래도 양이건 질이건 귀족 가문의 식사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형제는 어디서 오셨나?"
"코마드에서 왔습니다."
"바다에 있는 큰 도시 아닌가?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혼자서 멀리까지 왔구먼."
물론 투란은 기껏해야 서너 시간 가볍게 달렸을 뿐이지만, 평민들에게는 쉬지 않고 며칠씩 걸어야 닿을 거리였다.
이후로도 촌장은 어디로 가는지, 무엇 하는 사람인지를 꼬치꼬치 캐묻더니 자기 부족의 아가씨와 결혼해서 머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까지 꺼냈다.
왜 그러나 했더니, 이 부족은 이만한 규모치고 유난히 젊은 남자가 부족한 것 같았다.
그 이유야 여럿 상상할 수 있었다.
마수나 맹수의 공격, 도적, 그도 아니면 모종의 자연재해....
다케인 평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높은 생산성 덕에 인구 밀도가 높은 아라비온과 드넓은 엔릴 사막을 기반으로 하는 자하르를 동일 선상에 놓고 보긴 어려울 터였다.
귀족 한 명, 기사 한 명이 지킬 수 있는 영역의 차이가 몇 배 이상일 테니까.
그렇게 촌장의 오지랖을 적당히 얼버무리며 식사를 마친 뒤, 투란은 다시금 남서쪽으로 떠날 것을 밝혔다.
"이 겨울에 해가 진 사막을 걷겠다고? 가다가 얼어 죽을 걸세! 미친 짓이야. 오늘 밤은 여기서 머무르다 가시게."
노인이 그렇게 말했으나 투란은 거절하고 길을 나섰다.
딱히 저 촌장이 한밤중에 몰래 아가씨 한 명을 들여보낼 것 같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나오시죠, 돌프 씨."
오아시스 지역을 벗어날 무렵, 투란은 뒤쪽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프 메렌이 머쓱한 표정으로 바위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알고 있었나?"
성유물 덕에 투란은 주변 십수 미터, 감각을 넓히면 수십에서 수백 미터 내에 있는 귀족이나 기사의 위치를 정확히 간파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 감각에 의하면, 돌프는 투란이 디르민 가문을 떠난 뒤 지금까지 쭉 그를 미행하고 있었다.
그가 여기까지 검독수리를 타지 않고 걸어온 이유였다.
날아가면 당장은 떨쳐낼 수 있겠지만, 저 작자가 무슨 목적으로 쫓아오는지를 알 수 없게 될 테니까.
혹시 동료라도 데려오는 기색이 있으면 그대로 도망쳐버릴 생각이었는데, 감각을 수백 미터로 넓혀도 다른 이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젊은 친구가 혼자 여행하면 위험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랬다네. 이곳 사막이 꽤 위험한 곳이거든...."
"내 마력이 목적인가?"
질질 끄는 대화는 질색인 만큼 투란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과연, 이를 들은 돌프가 곧바로 가면을 벗고 히죽 웃었다.
"알면서 이런 곳까지 나온 거냐? 용감한 건지, 겁대가리가 없는 건지."
마력을 목적으로 하는 강도 살인.
이는 귀족 사회에서 식인이나 영아 살해보다도 더한 최악의 금기로 여겨지는 행위였다.
귀족에게 있어 가장 탐스러운 먹잇감이 마수가 아닌 같은 귀족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탓이다.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소문이 나는 것만으로도 당사자는 물론, 그 가문까지도 인근의 모든 귀족에게 적대시 당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혈통이 끊길 정도.
귀족 가문들이 손님 접대를 중시하는 것 역시 이러한 정서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래서 귀족들이 몰락 귀족이라고 하면 질색을 하는구나 싶네."
"흐, 같은 처지에 내려다보는 듯이 말하는구나. 아니, 네놈은 오히려 나만도 못하지 않으냐?"
돌프는 그런 투란을 깔아보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마력은 강한 주제에 힘은 형편없이 약한 것으로 보아 수호자의 원시 혈통이겠지? 방어력만 남고 몸을 강하게 하는 힘마저 잃어버린. 어떻게 그만한 힘을 쌓았는진 모르겠다만, 네깟 쭉정이가 가지고 있기엔 아까우니 얌전히 헌납하거라."
수호자 혈통이면서도 신체 능력이 형편없으니 싸워 이기기는 쉽고, 그런 주제에 마력은 오히려 자기보다도 조금 더 강하니 이겼을 때의 보상 역시 충분했다.
심지어 같은 몰락 귀족이니 죽음을 조사하고 보복하거나 공론화해 줄 친척도 없을 터.
이만큼 탐스러운 먹잇감이 어디 있단 말인가.
투란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돌프를 바라보다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달이 뜨지 않은 밤, 사막을 밝히는 것은 옅디옅은 별빛뿐이었다.
"올라가 있어."
삐약 소리를 내며 냉큼 하늘로 날아오르는 검독수리.
혹시라도 새를 타고 도망칠까 싶어 돌프가 움찔한 순간, 투란의 몸이 새카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상대를 탐스러운 먹잇감이라고 생각한 것은 이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35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투란의 모습을 보며 돌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신 마법이라니?
겉모습만 감출 뿐 기척이 그대로 드러나는 탓에 염탐꾼 역할을 하는 기사들이나 익히는 잡스러운 마법 아닌가.
하지만 상대가 서 있던 곳에 손을 내질렀는데도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 시점에서 의아함은 경악과 공포로 변했다.
모래 위로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며, 청각과 후각을 총동원해도 기척이 잡히지 않는 은신....
이 사막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설마, 자하르-악!"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돌프는 뒤통수에서 밀려온 격통에 비명을 지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머리가 깨진 것인지 뜨끈한 피가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뭐지? 뭘 맞은 거야?'
뒤를 돌자 달걀만 한 돌멩이가 바닥을 구르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새도 없이 두 번째, 세 번째 돌멩이가 연이어 날아들며 옆구리와 등을 후려갈겼다.
한 발 한 발이 평범한 귀족이었다면 뼈를 부수고도 남았을 위력.
다행히 마지막 한 발만은 날아오는 것이 보였기에 팔로 쳐낼 수 있었다.
끔찍한 격통 속에서, 백여 년을 떠돌며 살아온 귀족의 뇌가 필사적으로 생존 수단을 짜냈다.
"불꽃이여!"
썩 익숙하지 않은 주문과 함께 주변에 불길이 일어났다.
은신 마법에 대처하는 방법 첫 번째, 주변을 밝힐 것.
하지만 불꽃은 돌프의 몸 주변을 벗어나지 못했다.
마법의 힘을 방출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역사 혈통의 특성 때문이었다.
상대는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다시금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어디냐, 어디야!'
돌프는 쉼 없이 고개를 돌리며 상대가 어디서 공격해오는지를 간파하려 애썼다.
일단 투석 공격이라면 몸에서 떨어지는 순간 모습이 보일 테니 쳐내건 피하건 할 수 있을 터였다.
만약 근접해서 공격한다면 한 대 맞아주고 붙잡는 순간 자신의 승리일 것이고....
그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화염구가 대여섯 개씩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것들은 제자리에서 몇 번 회전하더니 어마어마한 속도로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끄아아아악-!"
돌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날아드는 화염구를 받아내며 돌진했다.
팔과 어깨, 복부의 옷이 타들어 가며 살점이 익는 것이 느껴졌으나 이를 악물고 견뎠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놈을 잡기만 하면-
"나와! 나오라고!"
화염구가 쏘아졌던 곳에 도착한 돌프는 고함을 내지르며 사방으로 손을 휘두르고 모래를 차올렸다.
하지만 무언가 와닿는 느낌 따위는 없었다.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존재와의 절망적인 싸움....
고통과 공포로 반쯤 굳었던 머리가 싸늘하게 식자 어느 정도 판단력이 돌아왔다.
'도망치자!'
한밤중의 사막에서 자하르의 마법사와 싸우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자살행위였다.
그가 대가문 출신도 아닌 한낱 역사 혈통의 귀족일 뿐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돌프는 그대로 아무 방향이나 골라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마저 달리는 데 방해가 되니 그대로 냅다 벗어던진 채였다.
"흐억, 헉, 허억!"
역사 혈통답게 그의 속도는 평범한 귀족들의 그것보다 훨씬 빨랐다.
힘이 두 배라고 달리기가 두 배로 빨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강한 다릿심은 도움이 되니까.
체력 역시 더 좋은 만큼 이렇게 쭉 달리기만 하면 당장은 살아남을 수 있을 터였다.
앞으로 한평생을 자하르 귀족에게 추격당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오줌을 지릴 것 같지만-
그렇게 안심한 것을 비웃듯, 뒤쪽에서 푸드덕대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돌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아...."
새카만 하늘 위, 한 손으로 검독수리의 다리를 붙잡은 투란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호자 혈통만큼은 아니어도 튼튼하군. 평범한 귀족이 그 정도로 맞았으면 진작 죽었을 텐데. 아니면 방어에 도움이 되는 마법기라도 있는 건가?"
"부, 부디 자비를-."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이쪽을 내려다보는 회색 눈에는 자비는커녕 한 조각의 인간다움조차 엿보이지 않았다.
내리꽂히는 화염구를 보며 돌프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
투란은 건조한 표정으로 온몸이 타들어 간 채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비참하게 타죽은 모습에 죄책감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더 강했을 뿐, 따지고 보면 처음 언덕을 내려왔을 때 만난 강도들과 다를 바 없는 작자였을 뿐이니까.
'그건 그렇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걸...아니, 튼튼하다고 해야 하나? 역사가 이 정도라면 수호자 혈통이랑 싸울 땐 더 강한 공격 수단이 필요하겠어.'
만약 상대가 제대로 몸을 단련한 역사였다면, 그리고 자하르 혈통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쉬이 이길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놈의 물리적인 방어력은 돌팔매질과 화염구를 십수 번 이상 버텨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런 방어력 자체가 역사의 혈통 능력에서 나왔음을 생각하면 무의미한 가정이지만, 대놓고 능력을 드러내기 껄끄러운 투란으로서는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고생했어."
[쉬워]
검독수리가 모래 위로 글씨를 쓰며 뿌듯해하는 감정을 보내자, 투란은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긁어 주었다.
이 녀석이 없었다면 도망치는 돌프를 잡기 곤란했을 터.
아무래도 기회가 되면 공격에 적합한 마법기라도 구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방어를 뚫을 수 있는 강력한 마법을 개발하거나.
잠시 후, 투란은 검독수리와 함께 돌프의 마력을 흡수했다.
본래 마수는 섭식 행위를 통해 마력을 흡수하지만, 투란과 영적으로 결속된 검독수리는 그의 인도 아래 인간 마법사처럼 마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연녹색 광채가 절반은 투란에게, 나머지 절반은 검독수리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을 구경하던 도중 갑자기 시체에서 한 줄기 빛이 더 솟구쳤다.
"...어?"
빛은 투란의 주머니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바다에서 얻은 정체불명의 성유물.
그것이 마치 마법사라도 되는 것처럼 돌프의 마력을 나눠 받고 있던 것이다.
흡수가 끝난 뒤 투란은 바로 성유물의 뚜껑을 열었다.
텅 비어있던 곳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녹색 액체가 소량 들어차 있었는데, 그 정체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설마 마력을 저장하는 물건이었을 줄이야.'
성유물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거나 흡수를 시도해 보았으나 반응은 없었다.
이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설마 직접 마셔보기라도 해야 하나?
한참 고민하던 투란은 이내 뚜껑을 닫았다.
비록 귀족의 몸을 해칠 수 있는 독성 물질이 거의 없다지만, 그래도 무엇인지 모를 것을 섭취하기는 꺼려졌다.
하물며 이것은 무려 프레아 신족이나 그와 맞먹는 존재가 남긴 물건이지 않은가.
좀 더 알아보고 판단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력 흡수를 마친 다음에는 시체를 뒤졌으나 유감스럽게도 썩 쓸만한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하기야 뭔가 끝내주는 마법기라도 있었으면 당장 죽게 생긴 마당에 썼을 터.
그나마 도망칠 때 내던졌던 주머니에 보석이 몇 개 있어서 헛헛해진 재산을 채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한때 금화가 너무 많아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이런 게 낫기는 했다.
'그러면...슬슬 보내줄까.'
마력이 흩어진 시체에 불을 붙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옷과 살점이 모두 잿가루로 화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마지막으로 뼈를 짓눌러 으깨고 바람을 불어 날려 보내는 것으로, 돌프 메렌이라는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했던 흔적은 완벽히 사라졌다.
* * *
다음 날 아침, 투란은 검독수리를 타고 남서쪽으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느낀 바지만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참으로 작고도 작았다.
저런 곳에서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나, 하는 회의감마저 들 정도로.
"힘들지는 않아?"
투란의 물음에 검독수리는 전혀 문제없다는 감정을 보내며 삐약거렸다.
돌프의 마력은 그보다 강한 투란에겐 적당한 양분 정도였으나, 검독수리에게는 제법 큰 도움이 되었기에 녀석은 이제 투란이 몸을 가볍게 하지 않아도 꽤 오랜 시간을 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 반나절을 날며 작은 오아시스 수십 개와 제법 큼직한 도시 세 개를 지나쳤을 무렵.
투란은 자신이 목표로 했던 곳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바로 저거군.'
그것은 기본적으로 새하얀 사각뿔 형태의 건축물이었으나, 정말 멀리서 보지 않고서는 정확한 형태를 알기 어려웠다.
그 높이며 바닥 면의 길이까지 모든 것이 수백 미터 단위인 탓이다.
신들이 직접 만들었다고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
이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처음 오렘의 도서관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경외감이 느껴졌다.
여행기에서 말하길 저 건축물의 이름은 신들의 무덤으로, 이름과 달리 정말로 신이 묻혀 있지는 않았다.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옛 제국 시대의 유물이 몇 점 전시되어 있다고 하던가?
아마 오렘의 도서관이 그랬듯, 정말로 가치 있는 물건들은 제국 멸망 무렵에 어딘가로 빼돌려졌을 터였다.
신들의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착륙한 투란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전보다 한층 따뜻해진 공기였다.
아무래도 남쪽으로 내려와서 그런 것일까.
아직 덥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몸이 튼튼한 사람이라면 긴소매 옷을 입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여름이 되면 여행기에 나오는 것처럼 타들어 갈 듯 더운 날씨가 되겠지.
"저녁때까지 적당한 곳에 가서 놀고 있을래? 그때 불러줄게."
[맛있는 거!]
"알았어. 맛있는 거 준비해 둘 테니 걱정하지 마."
이제 문장 부호까지 쓸 수 있게 된 검독수리를 날려 보낸 뒤, 투란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여행자의 모습으로 바니펠 시에 들어섰다.
몰락 귀족 행세를 해보고 느낀 것이지만, 꼭 필요하지 않다면 차라리 평민처럼 다니는 쪽이 더 그의 취향에 맞았다.
무엇보다도 평민 행세를 하다가 귀족임을 밝힐 수는 있지만, 그 반대는 힘들다는 게 중요했다.
"손님? 혼자신가?"
"예."
도시에 들어선 투란은 식당 겸 여관을 찾아 간단한 식사를 주문했다.
손님이 그 한 명뿐이라 그런지 여관 주인이 맞은편에 앉아 말 상대를 해준 덕에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가출해서 혼자 여행 중이라고? 허 참, 무모한 친구로군. 혹시 도적이나 마수는 안 만났나?"
"운이 좋았죠."
사십 대의 주인은 그를 철없는 애송이 보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상인의 아들이 유적 하나 보겠다고 가출해서 일주일을 꼬박 걸어왔다고 하면 저런 시선을 보내는 것이 맞기는 했다.
"그보다 이곳에 있는 신들의 무덤은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아시나요? 책에서 보기로는 돈만 있으면 된다고 하던데."
"책도 읽었나? 정말 있는 집 자식인 모양이군. 어쨌든 내가 알기로 지금은 못 들어가네."
"어째서죠?"
분명히 여행기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는데, 하고 생각하던 투란은 이내 그 책이 쓰인 지 적어도 십수 년은 지났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니, 어쩌면 수십 년쯤 되었을지도.
그 사이 바니펠을 지배하는 가문의 수장이 정책을 바꿨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주인의 말에 의하면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별 건 아니고, 일주일쯤 전에 높으신 분들이 온 뒤부터 쭉 그렇다더군. 얼마 전에 방문했던 대상(隊商)에서도 그 유적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못 봤다는 모양이야."
"높으신 분들이요?"
"그분들 말이야, 그분들. 알잖나."
"아하."
이름조차 언급하기 두렵다는 듯 돌려 말하는 모습에 투란은 그제야 주인이 언급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자하르의 기사나 귀족이 이 도시에 방문한 것이다.
'귀찮게 됐네.'
그러니까 높으신 분들이 천민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들끼리 구경하고 싶어서 유적을 독차지 중이라는 뜻 아닌가.
볼 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라던데 일주일 내내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투란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그들이 떠날 때까지 적당히 이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괜히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칼 가주가 그랬던 것처럼 투란의 얼굴에서 탈리스의 그림자를 읽어내는 사람이 있으면 성가실 것 같았다.
"당분간 여기 머물러야겠네요, 그럼."
"돈은 있고?"
"물론이죠."
아무리 귀족들이 여유로운 작자들이라도 설마 유적지 관광을 몇 주 몇 달씩 하지는 않을 터였다.
'검독수리 녀석한테 뭘 줘야 하려나.'
전에 대추야자는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은데, 사막에서 물고기를 구할 수도 없으니 마수라도 근처에서 하나 잡아다 줘야 할 것 같았다.
* * *
"페르가! 페르가! 어디 있어!"
"여기 있으니까 소리치지 마! 저놈들이 듣잖아!"
새카만 어둠 속, 페르가 자하르는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차크람을 손가락에 걸었다.
자하르 혈통 특유의 암시야 능력으로도 꿰뚫어 볼 수 없는 어둠 너머,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신들의 무덤에는 숨겨진 지하가 존재한다.
어린 시절, 그가 할아버지인 자하르의 가주에게 들은 말이었다.
가주는 페르가에게 그 비밀을 풀 수 있으면 네가 다음 가주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농담하듯이 말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 그는 매년 한 번씩 신들의 무덤을 둘러보며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를 찾았다.
신들이 지은 시설을 힘으로 뚫는 것은 안 될 일인 만큼 벽의 틈새를 두드리거나 옛 서적에나 나오는 비밀스러운 언어들을 말하는 방식으로.
당연히 성과는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 친한 친구 몇 명과 반쯤 관성적으로 들렀던 무덤에서 갑자기 지하로 가는 문이 열렸다.
페르가는 드디어 비밀을 풀었다고, 차기 가주는 내가 될 것이라고 기뻐하며 뛰쳐 내려왔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새카만 어둠으로 가득 찬 미궁, 그리고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괴물들이었다.
[□□□□□□----!]
마수도, 인간도, 이종족도 아닌 듯한 괴생명체.
인간을 최대한 악의적으로 뒤틀어놓은 것처럼 생긴 놈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물론, 기괴한 어둠에 익숙한 탓에 자하르의 정예들조차 쉬이 상대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올라가는 통로마저 없어진 터라 그들은 며칠인지도 알 수 없는 시간을 지하에 갇혀 있어야 했다.
"남은 물은?"
"없어...."
"빨리 만들어. 목이라도 축여야 해."
지시하는 것과 동시에 뒤쪽에서 울려퍼지는 괴성.
어째서일까, 페르가는 그 목소리에 담긴 의미가 조금 이해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이 느낀 착각이 아니었는지 옆에 있던 친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밤 사냥꾼이...사막에...돌아왔다?"
36화
여관 주인과 협상해 적당히 방 하나를 잡은 뒤, 투란은 소화도 시킬 겸 바니펠 시의 상업 지구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세상의 동쪽과 서쪽을 잇는 대교역로(大交易路)에 속한 곳이라 동쪽에서 오는 상인들과 서쪽에서 오는 상인들이 마주하며 온갖 문물을 전파하고 있었다.
저 남해에서 온 흑설탕, 동부의 비단과 약초 등....
시장에 풀린 물건들은 개중 일부에 불과한데도, 이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한참 새로운 물건들을 물어보고 한 줌씩 사던 투란의 눈에 새하얀 돌멩이 같은 것이 들어왔다.
"이건 뭡니까?"
"이거? 초석(硝石)이란 거요. 저 남해의 섬에서만 나는 건데 가루 내어 먹으면 수명을 연장해 주지."
자칭 불로장생의 영약이야 세상 어딜 가나 파는 것이라 별로 특별하지 않지만, 그 낯선 이름이 기억을 자극했다.
초석, 분명히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이름인데....
'아.'
깨달음을 얻은 그는 가방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한 달쯤 전, 화형꾼 오빌을 죽이고 얻었던 물건.
그 뒤에는 여러 정체 모를 조합식이 적혀 있었는데, 당시 투란은 아바챠에서 조합식의 재료를 몇 개 찾아보았다가 나오는 것이 없어서 실망했던 적이 있었다.
'불의 영혼, 조합식은 초석 가루 75, 나무 잿가루 15, 유황 10를 섞은 뒤 마법으로 셋을 결합할 것.'
불의 영혼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오빌에게 영향을 준 '신'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점에서 한 번쯤 제작을 시도해 보아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위는 다른 조합식도 비슷한 형식인 것으로 보아 아마 비율을 의미하는 것일 터.
투란은 초석을 두세 덩어리 산 뒤 상인에게 물었다.
"혹시 유황이라는 것도 있습니까?"
"유황? 그건 처음 듣는데."
이후로도 시장 곳곳을 돌며 유황의 존재를 수소문한 끝에 동부의 물건을 들여오는 상인으로부터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주로 화산지대에서 나는 물건으로, 소독용으로 쓰이긴 하나 수요가 그리 많지 않아 유통하는 상인은 별로 없다고 했다.
당연히 엔릴 사막을 오가는 대상들 사이에서는 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코마드에서도 좀 알아볼 걸 그랬네. 거기는 동방의 물건이 더 많이 들어올 텐데.'
생각해 보면 대륙 동부가 아니더라도 화산은 있을 테니 그렇게까지 찾자고 애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오빌도 대륙 동부까지 가서 유황을 구한 것은 아닐 테니까.
"그래서, 이 흑설탕은 안 살 텐가?"
"단 건 별로 취향에 안 맞아서요."
시장을 좀 더 돌아본 투란은 해 질 무렵, 도시 밖으로 나와서 영혼의 끈을 통해 검독수리를 불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옆으로 내려앉는 새카만 그림자.
검독수리는 투란을 쏘아보더니 발로 땅에 글씨를 적어 내렸려갔다.
[늦어!]
"미안. 시장에 볼 게 많더라고. 여기 맛있는 것도 가져왔어."
이름도 발음하기 힘든 특이한 향신료를 발라 말린 돼지고기 육포를 주자 검독수리는 잠시 냄새를 맡아보더니 이내 부리와 발톱을 써서 그것을 오물조물 뜯어먹었다.
[맛있어!]
"다행이네. 별일은 없었고?"
돼지고기 육포를 모두 씹어 삼킨 뒤, 검독수리는 모래로 된 바닥에 연이어 글씨를 적어내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빨라 반쯤은 읽는 게 아니라 유추해야 할 정도였다.
저 커다란 건물 반대편의 산에는 그와 같은 검독수리 가족이 산다는 것, 도시 옆 언덕에는 여우가 있고 그 바로 옆에 토끼굴이 있다는 것 등....
투란으로서는 무엇 하나 신기해할 것 없는 일이지만 이 녀석에게는 그러한 사실 하나하나가 흥미로운 주제인 모양이었다.
"재밌었던 것 같아서 다행이다. 혹시 앞으로 며칠 정도는 이 근처에서 보낼 수 있겠어?"
[왜?]
"별로 좋은 숙소를 못 구할 것 같아서. 매일 만나러 올게. 같이 다른 도시도 구경하러 가고."
투란은 검독수리에게 네가 있으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평민으로 위장하기 힘들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제대로 설명하기도 힘들뿐더러 녀석이 자기가 걸리적거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다행히 야생에서 살아가는 것이 녀석의 구미에도 썩 맞는지, 검독수리는 순순히 수긍했다.
다만, 조건 하나를 붙여서.
[또 맛있는 거!]
"그래."
* * *
그로부터 며칠, 투란은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다.
평소에는 여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도시 근처로 나와 마법을 수련하고, 때로는 검독수리를 불러 놀거나 녀석을 타고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다른 도시에 들러 유황 등의 조합식 재료가 있는지를 수배했다.
그중에서도 마법 수련은 아무래도 사막인 만큼 모래를 다루는 것이 주였다.
'이거 괜찮은걸.'
고개를 끄덕이는 투란의 앞, 우뚝 선 암벽에 커다란 홈이 패여 있었다.
이번에 그가 한 실험은 돌멩이 대신 모래를 투석구에 담아 던지는 것.
본래라면 흩어져야 할 모래의 형상을 돌멩이처럼 둥글게 결집해 탄환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렇게 만든 모래 탄환은 몇 가지 장점이 있었다.
날아가는 도중 원뿔 형태로 바꿔 상대에게 관통상을 입힐 수 있다거나, 조금 더 작은 여러 개의 덩어리로 만들어 날리는 것으로 광역 공격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힘을 소모해 모래를 뭉쳐야 하기에 그냥 돌을 던질 때보다 마력 소모가 조금 더 심해지긴 하지만, 장기전이 아니라면 그리 큰 차이는 아니었다.
'이러면 돌멩이는 아껴야겠네. 숫자도 별로 없으니.'
그가 애용하는 깎아낸 돌멩이는 아무래도 무게나 부피 문제 탓에 그리 많은 양을 가지고 다닐 수 없었다.
평상시 휴대하는 숫자는 그때그때 다르나 일반적으로 대여섯 개 정도.
지난번 돌프처럼 튼튼한 녀석이 상대라면 탄환이 부족해져서 화염구 같은 다른 마법에 의지해야 했다.
물론 그건 사막에서 화염 마법의 효율이 높아서이기도 했지만.
그 밖에도 모래를 써서 할 수 있는 일은 제법 많았다.
발목을 묶는 것부터 바람을 일으키는 마법과 섞어서 흩뿌리는 것으로 시야를 차단한다거나, 모래를 움직여서 마치 헤엄치듯이 움직인다거나.
흙으로 된 땅에 비해 훨씬 유동적이지만 액체보다는 무겁다는 그 어중간한 특성을 이용하는 게 꽤 재미있었다.
'그건 그렇고...이놈의 귀족 나리들은 대체 무덤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벌써 며칠째인지.'
슬슬 이곳에서 머문 게 엿새인가 이레쯤 되어가는데도 신들의 무덤에 걸린 봉쇄령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어차피 꼭 봐야 할 필요도 없는데 그냥 다른 도시를 더 둘러보는 쪽이 나을까?
고민하던 도중, 투란은 그냥 몰래 들어가 보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냈다.
'까짓거 들키면 도망치지 뭐.'
검독수리 덕분에 그런 배짱이 생기기도 했다.
혹시라도 무언가 경비시설이 있어서 걸린다 한들 도망치면 제깟 놈들이 어쩔 것인가....
어쩌면 무덤에 있는 정령에게 밉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천년만년 뭉개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 투란은 한숨 푹 자며 신체와 마력을 최고조로 만든 뒤 신들의 무덤으로 향했다.
어두운 밤이라 몸을 감추는 데는 그리 많은 마력이 소모되지 않았다.
슬슬 입구가 보인다 싶을 무렵, 기사 두 명이 누군가를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으읍-읍-]
"젠장, 왜 이렇게 시끄러워?"
"조용히 시켜. 죽이진 말고."
기사들은 포대기 속에 든 누군가를 퍽 후려친 다음 그대로 유적 안으로 끌고 갔다.
투란은 은신한 채 그들의 뒤를 따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감각을 넓히자 유적 안에 귀족이 무려 세 명이나 있는 것이 감지되었던 탓이다.
저들이 바로 유적을 점거했던 귀하신 분들일까?
무덤 내부로 들어선 투란은 우선 주변의 환경을 관찰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말 그대로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도록 촘촘히 맞붙은 돌벽들.
하나같이 부자연스러우리만치 새하얀 소재였는데, 투란은 거기에서 옛 제국의 도로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안쪽에는 유리 속에 보관된 옛 제국의 유물들이 있었는데, 그 형상이 독특해 하나같이 용도를 알기 어려웠다.
앞에 유리가 붙어있는 새카맣고 커다란 사각형 상자, 동그란 원 두 개를 잇는 막대기, 수십 개의 작은 단추가 달린 철판까지.
이를 슬쩍 훑어보며 안으로 들어서자 조금 전 들어갔던 기사 두 명, 그리고 귀족 세 명이 보였다.
그리고 포대기에 들어가 있던 추레한 행색의 남자 한 명도.
'이상한데.'
초조함, 공포, 그리고 또 다른 무언가.
고귀하신 귀족 나리들과 추레한 남자의 몸에서는 같은 냄새가 풍겼다.
딱 봐도 납치당한 것처럼 보이는 작자야 그렇다지만 귀족들은 왜?
그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이가 추레한 남자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좋아, 잘 구해왔군. 너! 놓여있는 짐을 들고 저 안으로 들어가라."
귀족이 가리킨 곳을 본 투란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새하얀 벽돌로 된 바닥 한편에 새카만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공간이 있었던 탓이다.
누가 봐도 자연적이지 않은, 마법의 힘이 개입한 것이 분명한 공간....
그 옆에는 커다란 통이 십수 개 놓여 있었다.
"저, 저게 뭡니까?"
"질문을 허락하지 않겠다. 들어가."
추레한 남자의 용기 있는 물음은 순식간에 진압당했다.
귀족의 명령 한 마디로, 물음을 던졌던 이의 몸이 삐걱거리며 움직이더니 통 두 개를 들고 곧바로 소용돌이 안쪽으로 사라졌다.
동물을 지배하는 마법.
투란 역시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지만 그것이 인간을 대상으로 펼쳐지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투란은 슬며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정체불명의 공간은 무엇일까, 저들은 안에 무엇을 넣고 있는 것이고?
알 수 없는 상황인 만큼 일단은 물러나는 것이 현명할 터였다.
하지만....
그는 유적 한편의 새카만 공간을 바라보았다.
저 정체불명의 소용돌이는 어째서인지 그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빨리 이쪽으로 오라고,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때, 귀족들이 입을 열었다.
"페르가 님은 무사하실까요?"
"그러길 바래야지. 계속해서 식량과 물을 투입하고 있으니까...."
"본가에는 연락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 연락을 페르가 님의 경쟁자들이 들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봤나?"
페르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분명 자하르 방계였던 여자가 말하기로 자하르 가문의 차기 후계자 후보 중 하나랬던가?
그가 이곳에 손님으로 와서 저 정체불명의 공간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위험하겠는데.'
후계자 후보라면 메이사만큼은 아닐지라도 엄청난 강자일 텐데, 그런 이가 빠진 공간이라면 그에게도 충분히 위협적일 수 있었다.
슬쩍 물러나려던 그때, 투란의 머릿속에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어쩌면 기회일지도.'
만약 페르가가 곤경에 처해 있다면, 그를 구하며 적당히 은혜를 입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아시즈를 구하며 베르크 가문에 스며들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하르 가문 내로 침투할 수 있다면 부모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
아니,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비이성적인 충동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이유야 아무래도 좋으니 지금 당장 저 안으로 들어가라고, 그곳에는 네가 원하는 것이 모두 있다고....
투란은 그대로 은신을 유지한 채 걸음을 옮겨 조금 전 추레한 남자가 들었던 통 두 개를 슬쩍 챙겼다.
완전 은신 상태인 만큼 귀족들은 그러한 행위가 있었음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그 상태로, 그는 그대로 소용돌이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 * *
'어둡다.'
소용돌이 속에서 투란이 처음으로 느낀 감상은 그것이었다.
마력을 각성하며 자하르 혈통의 능력을 얻은 뒤로 어둠이라는 개념 자체를 반쯤 잊고 살아왔건만, 이곳은 그런 그조차도 시야에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어두웠다.
'젠장.'
막상 들어오자 머리가 순식간에 식으며 조금 전의 논리가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자각할 수 있었다.
은혜를 입혀 스며든다고?
페르가가 아시즈처럼 받은 것을 갚을 줄 아는 사람일 거라는 보장이 있나?
그가 살아나가서 태도를 뒤집으면 투란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자하르 본가의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에서 탈리스의 흔적을 찾는다면?
그냥 좀 닮은 사람일 뿐이라고 변명해야 할까?
외부인인 칼이야 그렇다 쳐도 탈리스와 얼굴을 자주 맞댔을 본가 사람들에게 그게 통할 리 없었다.
그런 고민도 잠시, 앞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끄아아아악!"
"좋아, 또 들어왔군."
"제 식솔들이 밖에서 계속 보내주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두컴컴한 시야 너머, 조금 전 들어갔던 추레한 남자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손이 부러진 그의 앞에는 거지꼴이나 다름없는 귀족 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정황상 남자를 해친 것은 그들이 분명했다.
식량과 물을 챙기던 도중 한 명이 바닥을 나뒹구는 남자를 가리켰다.
"아, 저 자식 너무 시끄럽잖아. 누가 처리 좀 해봐. 어차피 식량도 아껴야 하는데."
"예, 페르가 님."
그 명령에 다른 귀족 한 명이 공손히 답하더니 곧바로 추레한 남자의 목을 부러트렸다.
투란은 가만히 은신한 채, 그들이 식량과 물을 챙기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저게 페르가 자하르....'
식량과 물을 뺏고자 사람을 죽이는 와중에도 죄책감 비슷한 것조차 없는 모습.
적어도 은혜를 받으면 갚을 줄 아는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잠시, 투란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야]
[너는]
[잘못됐어]
[밤사냥꾼이]
[아니야]
37화
먼 고대, 풍요로웠던 엔릴 평원을 거인들이 지배하며 커다란 덩치로 모든 것을 먹어치우매 사막이 되었다.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마셔야 했던 거인들은 갈증을 이기지 못해 인간을 노예로 삼아 그 피를 짜내어 먹으니 하루에 죽는 이가 수천이라.
그러나 달조차 뜨지 않은 캄캄한 밤, 프레아 신족의 밤 사냥꾼이 찾아와 거인들을 모조리 쏘아 죽임으로써 인간들은 구원받았다.
해방된 인간들이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 세 명을 신부로 바치니 그들에게서 태어난 세 자식은 각자 몸을 숨기는 힘과 그림자를 다루는 힘, 독을 만들어내는 힘을 타고났다.
밤 사냥꾼이 승천한 뒤, 세 형제는 누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막을 지배할 것인지를 두고 다투었다.
몸을 숨기는 첫째는 형제들과 싸우고 싶지 않아 떠났으나 그림자를 다루는 둘째와 독을 만드는 셋째가 치열하게 다투며 사막을 어지럽혀 많은 사람이 비탄에 빠졌다.
마침내 돌아온 첫째가 두 동생을 물리치고 사막의 패권을 차지했으니 그가 곧 자하르의 선조이다....
[너는]
[밤사냥꾼이]
[아니야]
저 멀리서 들려오는 환청에, 투란은 코마드의 서점에서 샀던 종교 서적의 내용을 떠올렸다.
대체 갑자기 그 신의 이름이 왜 언급된단 말인가?
'이미 들어와 있는 자하르의 귀족들과 무언가 연관이 있나?'
따지고 보면 투란 역시 밤 사냥꾼의 먼 후손이기는 하겠다만, 그가 다른 혈통과 결합하여 있음을 고려하면 순수한 자하르라 보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렇게 고민하며 새카만 공간 너머로 나아가기를 몇 분, 투란의 감각에 이질적인 생명체가 걸려들었다.
지금까지 성유물을 사용해본 바에 의하면 평범한 생물은 심장에 작은 불꽃이 피어올라 있고 마법사나 마수는 그 불꽃이 온몸으로 번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유일한 사례일 뿐이지만, 인어 아르마니를 봤을 때로 짐작건대 이종족은 인간과 다른 신체 일부에 불꽃이 옮겨붙어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존재의 내면은 그중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
큼직한 껍데기 안에 내면은 텅 비어있고, 불꽃이 물처럼 흐르며 몸을 움직이고 있다고 해야 할까?
마치 푸른 불꽃이 인형 안에서 그것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향해 다가간 투란의 눈앞에,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생명체가 드러났다.
[□□□-]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비대칭적인 두 눈.
하나는 지나치게 크고 다른 하나는 작은 유리구슬 두 개가 제각기 구르며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코는 구멍만 움푹 패 있었고 입은 타원형으로 헤 벌어져 톱날 같은 이빨이 안에 박혀 있었으며, 두 팔과 다리는 길고 관절이 하나씩 더 있어 불안정하게 삐걱거렸다.
벗겨진 피부 위로 흘러내리는 점액질은 딱 보기에도 점성이 높아 한 번 묻어나면 쉬이 닦아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무언가 뒤틀린 듯한, 보기만 해도 불쾌감을 느끼게 만드는 외관의 생명체.
그런데 투란이 이를 좀 더 자세히 보고자 한 걸음 다가간 순간, 갑자기 놈이 그를 인식한 것처럼 고개를 휙 돌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
그 고함 한 번에 모두가 투란을 인지한 것인지, 서너 마리의 괴물들이 이질적인 움직임으로 다가와 곧바로 큼직한 손, 혹은 앞발이라 부를 만한 것을 휘둘렀다.
그 속도며 기세가 어지간한 귀족조차 압도할 정도였다.
"큭!"
사고를 가속하는 것과 동시에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섯 개인 손가락이, 그리고 그 끝에 달린 갈고리발톱이 보였다.
느릿하게 다가오는 그것을 피하고자 몸을 뒤로 젖히며, 투란은 두 손을 마찰해 불꽃을 일으킨 뒤 형태를 다잡지 않고 앞으로 방사했다.
어둠 속에 사는 만큼 빛과 열기에는 익숙하지 않은지, 녀석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불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 알아챈 거지?'
지금 그는 자하르 혈통 특유의 완전 은신 마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어둠 속에서 은신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거의 숨 쉬듯이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즉, 저 괴물들은 자하르의 은신조차 꿰뚫어 보는 힘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인지 범위가 그리 넓지 않다는 것.
눈에 보이지 않고 감각으로만 잡힐 거리, 이십 미터 정도까지 멀어지자 괴물들은 그를 놓쳤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흩어졌다.
'좋아, 일단 선공권은 이쪽에 있군.'
투란은 새카만 어둠 속, 이리저리 흘러내리는 푸른 불꽃의 잔영을 보며 투석구에 돌멩이를 매겼다.
준비할 시간이 충분한 만큼 돌멩이를 여러 번 빙빙 돌리며 충분히 마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이상으로 마력을 불어넣다 보면 들이는 힘에 비해 효율이 급감해 썩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한 방에 한 명을 정확히 침묵시켜야 할 때라면 쓸만했다.
'받아라!'
빠악! 체감상 마력의 일 할 정도를 투입하여 날린 투석은 괴물의 머리를 순식간에 함몰시켰다.
투란은 주변의 다른 괴물들이 공격에 반응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놈에게 다가갔다.
'좋아, 죽었어.'
돌멩이는 점액질 피부로 뒤덮인 얼굴 한가운데를 정확히 꿰뚫고 뒤통수로 빠져나와 있었다.
뒤쪽에 떨어진 돌멩이를 회수한 뒤, 투란은 시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마력 흡수를 시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이 몸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마법 생물인 건 확실하군....'
이종족은 평범한 인간이나 동물처럼 마력이 없어서 죽여도 힘을 흡수할 수 없었다.
흑요정 사령술사 같은 족속 역시 마찬가지.
그러니까 이것들은 마수나 마법사 쪽에 분류해야 할 생물이라는 뜻이다.
희한한 점은 이 괴생명체에서 흡수한 마력의 양이 썩 많지 않다는 것.
그간 마수들을 죽여 힘을 흡수하며 쌓인 경험에 의하면 이 정도 속도며 내구력을 가진 생물은 더 많은 마력을 주어야 했다.
거기다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성유물이 녀석의 마력을 흡수하지도 않았다.
'진짜 정체가 뭐지, 이 녀석들?'
마수라고 하기에는 무엇을 기반으로 했는지도 잘 모르겠고, 무엇보다도 똑같이 생긴 놈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감각을 넓히자 수백 미터 안에만 오륙십 마리 이상이 있는 것이 감지되었으니까.
[너는 밤 사냥꾼이 아니야-]
다시 들려오는 지긋지긋한 환청.
한숨을 내쉬던 도중, 투란은 뒤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조금 전 보았던 귀족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정지."
페르가 자하르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지시를 내렸다.
그와 함께 움직이던 십여 명의 귀족들 앞에 나타난 것은 이곳에서 출몰하는 괴생명체의 시체였다.
"뭐야, 우리가 이쪽으로도 왔었나?"
"모르지. 방향감각이 맛이 간 지가 언제인데."
친구들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귓가에 흘리며, 페르가는 꿀렁이는 점액질 피부를 서슴없이 만지며 녀석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 부위는 미간, 흉기는 달걀만 한 크기의 무언가....
이것이 바로 그를 이곳으로 이끈, 미세한 흙냄새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무기 좀 보여줘 봐."
한 명 한 명의 무장을 모두 확인한 페르가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차크람, 활, 단검, 도끼.
그들이 가진 무기 중 무엇도 이러한 상처를 만들 만하지 않았던 탓이다.
혹시 녀석들이 동족상잔을 한 것이라기에는 이빨이나 발톱 자국도 아닌 것 같았다.
"왜 그래, 페르가?"
"우리 말고 누군가 있어. 이 안에."
"음? 설마 구조대인가?"
"그랬으면 진작 눈치챘겠지. 이곳에서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게 얼마나 눈에 띄는데."
그 사실을 몰랐기에 페르가 일행은 유폐 첫날 어마어마하게 고생해야 했다.
어둠 속에서 서로 거리가 멀어진 탓에 소리쳐 불렀다가 그대로 백 마리가 넘는 괴생명체들의 공격을 받았으니까.
"우선, 지금부터 크게 원을 그리면서 움직이자."
"왜?"
"누군가 우리 대화를 가까이서 엿듣고 있다면 이렇게 움직여야 거리를 유지하기 힘들 테니까."
페르가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곧바로 죽은 괴물의 시체를 오른쪽에 둔 채 크게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그러는 와중, 페르가는 옆에 있던 왜소한 체구의 남자를 불러냈다.
"갈텐?"
"예, 페르가 님. 분부하시지요."
바니펠을 지배하는 로스문 가문의 가주, 갈텐 로스문은 페르가의 부름에 넙죽 고개를 숙였다.
본래 가신 가문의 주인은 자신의 주군, 즉 본가의 가주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저자세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갈텐과 페르가의 사이는 그렇지 않았는데, 갈텐이 비교적 능력이 부족한데도 페르가의 누이와 결혼함으로써 가주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라서 그랬다.
"근처에 함정을 설치해 줘야겠습니다. 이 안에 있는 쥐새끼를 잡을 수 있게."
"쥐새끼라고 하시면?"
"보나 마나 라흐만이나 알마 중 한 명이 보낸 거겠죠. 이참에 날 여기 묻어버리기 위해서."
"하지만 밖에는 제 형제들이 지키고 있을 텐데...."
"그들이 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하르의 귀족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잖습니까."
선조부터가 제 형제들을 모조리 치워버리고 집권한 집안답게, 자하르의 권력다툼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신이나 다름없는 가주가 모든 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본가에서라면 모를까, 이처럼 보는 눈 없는 곳에서라면 얼마든지 경쟁자를 쳐내려 시도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로스문 가문은 결계사 혈통으로, 마법을 공간에 심는 데 능했다.
간단하게는 특정 지역에 누군가 지나가는 순간 소음을 일으키게 하거나 화염을 일으키고 땅이 꺼지게 만드는 식으로도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물론 이곳 미궁은 구조물 자체가 신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땅을 조작할 수는 없지만, 갑자기 불꽃이 솟구치는 것만으로도 견제하기는 충분할 터였다.
"이멜다는 계속해서 주변을 밝혀줘."
"아무리 내 혈통 능력이 이쪽이라도 마력 소모가 적지는 않을 텐데?"
"감수해야지. 자다가 목이 베이는 것보단 낫잖아."
"그야 그렇지만...."
빛을 다루는 환영 혈통의 귀족, 이멜다가 페르가의 지시에 환한 빛을 뿌려냈다.
미궁 특유의 어둠 탓에 이러한 빛은 이십여 미터 밖으로 벗어나지 못했지만, 어차피 누군지 모를 암살자 역시 그 범위 밖에서는 그들을 인지할 수 없을 터였다.
범위 안으로 들어온다면 이 어마어마한 백광 속에서 은신을 오래 유지할 수 없을 것이고.
"기억해. 혹시라도 한 명이 공격당하면 그 주변으로 빛을 만들어서 쏘아 보내는 거야."
페르가의 지시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일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이가 한 명 있었으니, 바로 그들의 뒤에 서 있던 투란이었다.
'자기들끼리 엄청 열심히 대비하고 있네.'
페르가가 열정적으로 지시하는 동안, 투란은 딱 이십 미터보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은신한 채 그 대화를 모두 엿듣고 있었다.
성유물의 힘 덕분에 저들의 움직임을 명확히 관찰하고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투란은 불꽃의 크기를 통해 상대의 힘을 가늠했다.
친구인지 가신인지 모를 아홉 명의 마력은 투란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훨씬 못했지만, 페르가만은 투란의 두 배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저 정도가 대가문에서도 상위권의 실력자들만이 가지는 힘일 터.
'일단 적당히 거리를 두고 탈출할 방법을 찾아봐야겠군.'
함정을 설치하고 빛을 여기저기 뿌리며 수색하는 이들을 뒤로한 채, 투란은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그로부터 사흘, 투란과 페르가 일행은 어두컴컴한 미궁 속에서 기묘한 동거 생활을 보냈다.
다행히 결계사 혈통의 귀족이 설치한 함정은 썩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성유물이 마법으로 사용된 마력까지 감지한 덕에 함정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저들이 새카만 어둠 탓에 자기들이 어디로 이동했는지를 명확히 알지 못해 설치한 함정을 밟아 곤욕을 치르는 일까지 있었다.
거기다 항상 빛을 밝히느라 환영 혈통의 귀족 한 명이 전력 외가 되어버린 탓에, 결과적으로 투란은 의도치 않게 저들의 힘을 깎아먹은 셈이 됐다.
불편한 점이 하나 있다면 잠을 편하게 잘 수 없다는 것.
여럿이라서 교대로 불침번을 서면 되는 페르가 일행과 달리 혼자인 그는 숙면 도중 괴생명체나 다른 귀족에게 걸리는 순간 죽은 목숨이었다.
그나마 노숙하며 얕은 잠을 자는 데 익숙한 편이라 적응할 만은 했다.
어둠 속에서 완전히 방향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페르가 일행과 달리, 투란은 성유물의 힘으로 몇몇 장소를 거점으로 삼아 천천히 탐색 범위를 넓혀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특정 방향이 지나치게 많은 수의 괴생명체들로 틀어막혀 있는 탓에 하나하나 죽여가며 돌파하기 힘들 때도 있었는데, 이럴 때는 페르가 일행의 힘을 빌렸다.
"또 온다!"
"젠장, 어째 덤벼드는 횟수가 늘었는데."
"빛을 켜고 있어서 그렇겠지."
화염구를 던져 괴물들의 주의를 끈 다음, 은신을 풀고 힘껏 내달려 도망치다가 페르가 일행과 마주칠 때쯤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도는 것으로 간단히 유인할 수 있었다.
비록 괴물의 마력은 저들에게 뺏기게 되었지만, 어차피 잡아봐야 별로 힘도 안 주는 녀석들이라서 아쉽지는 않았다.
그렇게 열린 공간으로 탐색하러 나아가고 돌아가서 적당한 공간에서 쉬고, 페르가 일행을 관찰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또 유적 너머에서 식량과 물을 든 부랑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냄새를 이용해 들어온 부랑자를 추적한 뒤, 당연하다는 듯이 목숨을 거두고 식량과 물을 취했다.
"계속 보내니까 슬슬 남아도는군요. 이것도."
"아마 기사들까지 살아있을 거라고 가정하고 보내서 그럴 겁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죽게 두지 말고 좀 살려볼 걸 그랬나? 수발 들 사람이 없어서 불편한데."
"맘에도 없는 소릴."
그들의 대화로 짐작건대 함께 들어온 기사들은 모두 괴물들에게 내버린 모양이었다.
투란은 발타스 가문의 귀족들이 제 기사들을 방패막이로 쓰던 것을 떠올렸다.
죽은 기사들을 두고 낄낄대는 눈앞의 저들은, 그때의 두 귀족보다도 더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덕분에 괴물들을 몰아가는 데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불편한 동거를 하며 이틀 정도를 더 탐사했을 무렵, 투란의 눈앞에 거대한 문 하나가 나타났다.
좌우 너비가 사 미터, 높이는 칠 미터쯤 되어 거인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가까이 다가가자 대문 한가운데에서 커다란 눈동자가 나타나더니 투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사냥꾼, 추격자.]
[조건 불만족.]
그렇게 말하더니, 시선이 투란의 얼굴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파도꾼, 흉내쟁이.]
[조건 만족.]
[입장하겠는가?]
38화
파도꾼과 흉내쟁이.
처음 듣는 두 호칭에 투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저게 자신에게 아직 발현하지 않은 혈통의 이름이란 말인가?
하지만 두 개의 혈통이 결합한 것이라면 대가문의 핏줄이라는 뜻일 텐데....
[입장하겠는가?]
재차 이어지는 질문.
그때, 투란은 눈동자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팍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성유물을 꺼내 옆으로 흔들었다.
예상대로 대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를 내려놓자 목소리가 무미건조한 태도로 말했다.
[오류, 파도꾼, 흉내쟁이, 소실.]
아무래도 파도꾼과 흉내쟁이는 투란이 타고난 것이 아닌, 저 성유물의 주인이 본래 가지고 있던 힘인 모양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문은 그것을 투란의 혈통과 합쳐 판단한 것이고....
"파도꾼이랑 흉내쟁이는 뭐야? 이 문은 또 뭐고?"
눈동자는 대답하는 대신 퉁방울만 한 눈으로 그를 거만하게 내리깔아볼 뿐이었다.
눈꺼풀조차 없는데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얕잡아보는 듯한 기색.
투란은 다시금 성유물을 집어 든 뒤 물었다.
"파도꾼과 흉내쟁이에 대해 알려줘."
[파도꾼, 1차 유형, 수중 호흡, 수중 신체 강화, 유체 조작. 흉내쟁이, 1차 유형, 흐름 탐지, 흡수 및 모사(模寫).]
역시, 네 개의 혈통을 가진 이가 아니면 상대해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던 모양이었다.
그보다 성유물을 가지고도 수중 호흡이나 유체 조작 같은 능력을 얻었다고 느낀 적이 없는데, 신분증 역할만 해줄 뿐 능력까지는 재현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지만 흐름 탐지라는 능력은 기능하는 것 같으니 무언가 사용방법이 있는 것일지도....
"너는 뭐지?"
[문의 정령.]
예상대로 이 눈동자의 정체는 도서관의 사서와 같은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생김새며 성격까지 모든 것이 훨씬 더 비인간적이긴 했지만.
사서가 감성만 조금 다를 뿐 인간과 다를 바 없다면, 이 문의 정령은 훨씬 딱딱한 느낌이었다.
누군가 미리 정해준 내용을 질문에 맞춰 읊기만 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이 미궁은 뭐지? 만들어진 목적은 뭐고, 여기서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밤 사냥꾼의 미궁, 올바른 네 개의 유형을 가진 이가 수장을 처치함으로써 밤 사냥꾼이 되는 것, 수장을 처치하면 탈출로가 개방됨.]
밤 사냥꾼이 된다니, 설마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이야기에 투란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순간, 문에 박혀 있던 눈동자가 갑자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녀석의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점점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오류.]
[사냥꾼, 추격자, 파도꾼, 흉내쟁이.]
[2개 유형 오류, 그림자, 연금술사, 부재.]
[4개 유형 충족.]
[오류, 밤 사냥꾼의 유형과 일치하지 않음.]
[미궁 개방 오류?]
[오류, 폐쇄 불가, 내부 인원 잔존 중.]
[미허가 인원 진입.]
[제작자 문의.]
[오류, 제작자 부재중.]
자기 멋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기 시작하는 대문의 눈동자.
어째 위험한 분위기에 한 걸음 물러선 순간, 갑자기 눈의 홍채가 세로로 찢어지며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자체 판단. 미궁 수장 출격, 지시, 내부 잔존 인원 소거.]
마지막 말과 동시에 문이 스스로 열리더니, 안쪽에 있던 괴물 한 마리가 성유물의 감각에 걸려들었다.
마치 무언가를 차단하고 있던 막이 사라진 것 같았다.
'저건....'
어둠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으로 짐작건대 키가 두 배쯤 큰 것을 빼면 다른 괴물들과 생김새 자체는 비슷했다.
다른 점은 내면에서 흐르는 마력의 양.
척 보기에도 제 동족들의 열 배가 넘을 것 같은 강력한 흐름이 느껴졌다.
거대한 괴물, 미궁의 수장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투란을 향해 말했다.
[너는]
[밤사냥꾼이]
[아니야]
[가짜는]
[죽어야 해]
메아리치듯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
그것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들렸던 환청과 똑같았다.
상대가 적임을 확신한 순간, 투란은 곧바로 매겨 두었던 돌멩이를 투척했다.
몇 바퀴 돌리며 충분한 양의 마력을 실은 일격.
평범한 괴물의 미간을 순식간에 뚫고 즉사시키는 위력의 공격은, 허망하게 퉁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이 정도라고?'
곧바로 화염구와 전격 역시 한 방씩 날려 보았지만 이 역시 유효한 타격을 입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금 마력이 줄어든 것으로 보아 타격을 주기는 했으나 목숨을 취하기는 어림도 없는 수준.
괴물이 성큼성큼 다가오며 킬킬댔다.
[간지러워]
저 녀석 역시 비교적 자그마한 동족들과 마찬가지로 가진 마력보다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지닌 모양이었다.
투란은 일대일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곧바로 몸을 돌려 도망쳤다.
[거기서어어어어!]
쿵, 쿵, 포효와 함께 들려오는 묵직한 발소리.
은신 상태에서 거리를 꽤 벌렸음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괴물은 큼직한 보폭으로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쪽의 위치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뜻.
그것만이 아니라-
[□■□■□■□■□■□■□■□■□■-!]
그동안 인간을 만날 때만 빼면 느긋하게 미궁을 배회하던 괴물들이 일제히 고함을 내지르며 사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미궁의 수장이라던 큰 괴물에게 쫓기는 와중 그런 녀석들까지 모두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윽!"
투란의 맞은편에서 튀어나와 다섯 개의 갈고리 손톱을 휘두르는 괴물 한 마리.
그대로 한쪽 팔을 들어 방어하며 수호자 마법기의 힘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푹, 갈고리 손톱이 팔뚝에 파고들었으나 피부만 살짝 뚫을 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그렇게 한 손으로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과 동시에, 반대쪽 손으로 단검을 뽑으며 녀석의 목을 그었다.
[□□□!]
평범한 단검이라면 마력을 실어도 녀석의 질긴 몸을 뚫을 수 없겠지만, 하람의 단검은 그리 강력한 편은 아니어도 명색이 마법기였다.
목이 반쯤 잘린 괴물이 푸들대며 물러서자 투란은 다시 새카만 미궁 속을 달리며 생각에 잠겼다.
'밤 사냥꾼의 미궁....'
신이 될 수 있는 곳이라니, 이런 불경하고도 괴상한 장소를 만든 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곧바로 떠오르는 것은 프레아 신족의 일원, 절름발이 여신이었다.
하지만 왜 신을 만드는 건물 같은 것이 필요하지?
"이크."
생각에 깊게 잠길 새도 없이 곧바로 또 다른 괴물이 달려들어, 투란은 재빨리 미끄러지듯 녀석의 두 다리 사이로 파고든 다음 마력으로 몸을 튕겨 일어서 달렸다.
깊은 고민을 하기에는 영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평생 달리면서 도망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확실한 건, 저 녀석을 사냥해야 한다는 거야.'
문에 박힌 눈동자가 했던 말을 믿는다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끊임없이 그를 쫓아오는 적을 처치할 필요가 있었다.
거대한 괴물의 속도는 썩 빠르지 않았지만, 적어도 녀석이 쫓아오는 한 잠을 자거나 쉴 수는 없을 테니.
하지만 잠깐 붙어본 것만으로도 알 수 있듯 그 혼자서는 승산이 없는 상대.
떠오르는 해결법은 바로 지난 며칠간 신세를 졌던 페르가 일행의 존재였다.
물론 저 괴물과 충돌시키면 그쪽도 희생이 많이 생기겠지만....
어차피 저들과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이지 않던가?
암살자로 오해당한 이상 투란은 페르가 일행 앞에 모습을 드러내서 함께 동료가 될 수도, 같이 살아 나갈 수도 없었다.
몰래 훔쳐본 페르가의 성향을 생각하면 일시적으로 협력한다 한들 언제 뒤통수를 쳐도 이상하지 않을 터.
그렇다면 차라리 제대로 이용이라도 하는 쪽이 나았다.
'어디 한번 같이 싸워봅시다, 친척 형님.'
* * *
"아악!"
"요즈닐!"
페르가는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청년의 이름을 외치며 차크람을 날렸다.
그를 덮치던 괴물 한 마리의 상반신이 썰려 나갔다.
"상태는?"
"다쳤어! 전투 불능!"
"우보에게 치료해달라고 해!"
치유사 혈통의 귀족, 우보가 피로한 표정으로 다친 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마력이 스며들며 어깨부터 가슴까지 쩍 갈라져 있던 상처가 다시 아물기 시작했다.
"회복됐어?"
"일단은."
다음 적을 향해 공격하고자 차크람을 손가락에서 돌리던 페르가는 시야 안에 더 적이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거대한 도끼를 든 광전사 혈통의 귀족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끝난 건가...?"
"모두 경계 풀지 마. 이러다 또 올 수도 있으니까."
여느 때처럼 휴식을 취하던 페르가 일행을 갑자기 덮쳐온 수십 마리의 괴물들.
슬슬 이 안에서의 전투에도 이골이 나기는 했다만, 사방에서 백수십 마리가 동시에 덮쳐오는 데는 아무리 귀족들이라 해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나마 가장 강력한 페르가가 열심히 날뛴 보람이 있어 죽은 이는 없지만, 다들 지치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깐,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무슨 소리?"
"쿵, 쿵 하고...."
그 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의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터무니없이 거대한 무언가가 다가오는 감각....
"도, 도망칠까?"
"멍청한 소리. 어디로 가면 될 줄 알고? 싸울 준비나 해!"
그 말대로, 앞에 벽이 있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도망치는 데 성공할 확률이 극히 낮았다.
적을 맞이한다면 적어도 등뒤가 막힌 곳은 아닌 게 낫지 않겠는가.
하다못해 어마어마한 질량에 깔려 죽을 일은 없을 테니.
다치거나 마력을 지나치게 소모한 이들을 제외한 일곱 명의 귀족이 전투를 준비하자, 그들의 앞으로 거대한 존재가 어둠을 뚫고 불쑥 나타났다.
어느 귀족이 그 모습을 보고 탄성을 터트렸다.
"뭔...."
거대한 괴물은 제 동포들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키가 사 미터에서 오 미터는 되어 머리가 천장에 닿을 듯했다.
몸에서 흘러내리는 점액질 액체의 양도 몇 배나 많아 뒤쪽으로는 끈적이는 액체로 된 길이 나 있었다.
[□■, □■, □■-]
작은 괴물들과 비슷한, 하지만 단순히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말하는 듯한 괴성.
어째서인지 페르가 일행은 그 말의 뜻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밤 사냥꾼, 은빛 태양, 혹한의 분노, 반쪽짜리들, 아이들의 원수...모두 죽여...?"
"대체 무슨 소리야?"
저 존재가 대체 무엇이길래 프레아 신들의 이름을 말하며 증오를 표하고 있단 말인가?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괴물이 곧바로 오른팔을 뻗어왔다.
그들이 예상치 못한 것은 놈이 키가 두 배로 큰 만큼 팔도, 손톱도 두 배로 길다는 것.
그 공격 범위는 모두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커헉-"
"우보!"
"가주님!"
치유사 혈통의 귀족, 우보와 바니펠의 주인 갈텐 로스문이 각자 가슴과 복부가 꿰뚫렸다.
이를 본 페르가 일행 역시 다급히 반격에 나섰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담긴 차크람이 둘을 매달고 있는 오른 팔뚝 살점을 갈라냈고 기다란 화살은 미간에 박혔다.
가슴팍에는 화염이, 목에는 거대한 빛의 화살이 꽂혔다.
하지만 괴물은 몸을 해치는 온갖 공격을 무시한 채 갈고리손톱에 꿰인 두 사람을 톱날 같은 이빨로 가져가 와드득 씹어 삼켰다.
[■■!]
맛있어!
그 말의 의미가 전해지자 페르가 일행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눈앞의 적은 말로만 듣던 신화급 마수와 맞먹는 존재가 분명했다.
수십 년에 한 번쯤이나 나올 법한, 가주나 그 바로 아래 수준의 실력자들만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
"어, 어떡해, 페르가!"
"어차피 도망 못 간다니까! 쳐!"
외침과 함께 차크람을 날리자, 금속 원반이 곡선으로 휘며 조금 전 거대 괴물의 팔을 갈라냈던 부분으로 파고들었다.
안에 담긴 마력의 힘으로 차크람은 살점을 파고든 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회전하며 뼈를 갈아냈다.
카가각, 하는 굉음이 울리더니 이내 쩍 소리와 함께 큼직한 살덩이가 떨어졌다.
"됐다!"
"역시 페르가 님!"
처음으로 유효한 타격을 입혔다는 사실에 귀족들은 기뻐하며 연이어 공격을 가했다.
그들의 공격은 페르가의 그것만큼 효과적이지는 않았지만, 몸뚱이를 움직이는 마력을 착실히 깎아낼 정도는 되었다.
[□■□!]
아프잖아!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다시금 날아드는 왼팔.
페르가는 상대가 자신을 목표로 공격하고 있음을 깨닫고 재빨리 사선으로 몸을 날렸다.
그 궤도에는 자신의 사촌 동생이 있었다.
"혀, 형님-"
"미안하다!"
사촌 동생을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와중에도 페르가의 얼굴에 죄책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다시금 차크람을 투척했으나 이번에는 당하지 않겠다는 듯 왼쪽 갈고리발톱을 들어 이를 방어했다.
몸통이 꿰여 있던 그의 사촌 동생이 차크람에 직격해 그대로 몸이 두 동강이 났다.
"우오오오오!"
그때, 광전사 혈통의 귀족이 포효하며 커다란 도끼로 괴물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이성을 잃는 대가로 강대한 신체 능력을 얻는 혈통 능력.
거기에 무거운 마법기의 힘이 더해지자 정강이가 움푹 패며 괴물의 한쪽 무릎이 꺾였다.
"해냈다!"
"내가! 놈의 무릎을 부쉈-"
좋아하기도 잠시, 쾅 소리와 함께 광전사 귀족의 몸뚱이가 그대로 수십 미터를 날아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분노한 괴물이 반대쪽 발을 들어 그를 걷어찬 것이다.
주인 잃은 도끼만이 애처롭게 바닥에 나뒹굴었다.
[□■■□■!]
이후의 전투는 말하자면 줄다리기와도 같았다.
한쪽 다리를 다쳐 기동성을 잃은 거대 괴물이 비틀거리며 갈고리 손톱을 휘두르고, 페르가 일행은 이리저리 몸을 날려 피하며 반격해 상대의 체력을 깎아 먹었다.
불편한 점은 그러는 와중에도 작은 괴물들이 간간이 덤벼드는 탓에 온전히 커다란 괴물의 사냥에 전력을 쏟을 수 없다는 것.
그나마 그렇게 덤벼드는 작은 괴물 중 일부는 갑자기 허공을 향해 시선을 돌리거나 맥없이 쓰러졌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조력이었으나 전투가 지나치게 치열했던 탓에 누구도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허억, 헉...."
십수 분 뒤, 페르가는 체력도 마력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자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아남은 것은 오직 그뿐.
다른 이들은 모두 거대 괴물의 갈고리에 꿰이거나 다른 작은 괴물들의 기습에 목숨을 다한 상태였다.
어딜 가나 빠지지 않을 우수한 귀족들이 이런 정체 모를 공간에서 개처럼 죽어간 것이다.
'대체 뭐 하는 놈이냐, 거기다 이 녀석과 가주가 되는 데 무슨 관계가 있지?'
페르가가 떠올린 것은 자신의 할아버지, 하늘과도 같은 자하르의 가주였다.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이런 지옥에 빠지지도, 친구와 가신들을 잃지도 않았을 텐데....
여기서 살아나간다 한들 이제 그는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죽은 이들의 친척들이 그를 곱게 보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개인 기량을 키워 봐야 모든 지지자를 잃고 어떻게 정치적인 겨룸을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우선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어야....
"아...."
지나치게 피를 흘린 탓일까, 현기증에 비틀거린 순간 갈고리 손톱이 그의 몸을 꿰뚫었다.
내장을 다친 것인지 목구멍 안쪽에서 솟구친 핏물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죽음을 직감한 순간, 그를 꿰뚫은 괴물이 다른 무언가를 본 것처럼 눈을 빙그르르 돌렸다.
[□□□!]
'가짜 밤사냥꾼?'
왜 허공을 보고, 아니, 누굴 보고 말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다소 이국적인 여행자 복장의 청년.
그의 두 손에 들린 무기가 굉장히 익숙했다.
페르가를 따르던 광전사 혈통의 가신이 사용하는, 육탄전에 특화된 혈통이 아니라면 쓸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무거운 대형 도끼가 아니던가.
회색 머리의 청년은 그 무거운 무기를 간단히 휘둘러 만신창이가 된 거대 괴수의 목에 박아 넣었다.
39화
페르가 일행이 괴물들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투란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을 전력으로 도왔다.
은신한 채 다른 이들의 마법에 자신의 공격을 섞어 넣거나, 작은 괴물들과 단검으로 육탄전을 벌이거나, 수호자 마법기를 활성화해 위험한 공격을 몇 번 대신 받아주기까지 하는 식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귀족 측이 일방적으로 밀려 버릴 상황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덧없게도, 귀족들은 싸움 도중 하나둘씩 죽어 나갔다.
정상적인 컨디션이라면 모를까, 어둠으로 인한 시야 봉쇄와 오랜 지하 생활로 인한 피로가 겹친 상태에서는 평상시 전력의 절반조차도 발휘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다툰 끝에 살아남은 이는 투란과 페르가 두 명뿐.
상대 역시 작은 괴물들이 모두 죽어 다소 여유가 생겼기에, 투란은 페르가와 거대 괴물이 일대일로 맞서는 것을 보며 어떻게 저 녀석을 거꾸러트려야 할지 고민했다.
[죽어어어!]
미궁의 수장은 한쪽 팔을 잃고 다리가 뭉개지며 그 외에도 온갖 부상이 가득했지만, 여전히 넘치는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저것을 무찌를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죽은 귀족들이 남긴 마법기, 그중에서도 무기 종류였다.
활, 지팡이, 단검, 그리고 도끼.
셋 중에서 우선 활은 제외하기로 했다.
손에 익지 않아 효율도 나쁠뿐더러 화살도 찾기 힘든 상황이고, 무엇보다도 투석구보다 크게 강할 것 같지 않았다.
지팡이는 사용자가 쓰던 모양새로 보아 방어용 마법기인 것 같았으니 이 역시 제외.
단검은 방화광 혈통의 힘을 쓸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었으나 사용자가 직접 휘두르다 죽었던 것을 보건대 아마 하루 사용 횟수가 다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도끼는 충분히 강한 위력을 지녔음을 이미 조금 전 증명했지만-
'너무 무거운걸.'
몰래 다가가 들어보니 도저히 제대로 들고 휘두를 만한 물건이 못 됐다.
크기치고도 지나친 수준인 게 아마 걸려 있는 마법이 그와 관련이 있는 듯했다.
육탄전 쪽에 소양이 있는 혈통이라면 충분히 들고 휘두를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조금 전 문의 눈동자가 했던 말이 번뜩 떠올랐다.
투란이 가진 성유물의 능력이 '흉내쟁이'라는 것.
그 정보와 물건의 안에 담겨 있는 역사 혈통의 마력을 조합하면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아마 이 액체를 이용하면 역사 혈통의 힘을 흉내 낼 수 있는 거겠지.'
사용하는 방법이야 처음 이 액체를 본 순간부터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저 확신이 없어서 미뤄뒀을 뿐.
딸깍, 뚜껑을 연 투란은 찰랑거리는 연녹색 액체를 곧바로 입에 털어 넣었다.
'윽.'
처음 느껴지는 것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 가는 얼음장 같은 한기.
하지만 그것은 곧 불꽃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며 온몸을 달구기 시작해, 이윽고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막대한 힘이 솟구쳐 올랐다.
마력의 양이 증가하거나 한 것이 아닌, 순수한 육체적 능력의 상승이었다.
'이게 역사 혈통의 힘인가.'
꾸욱, 주먹을 쥐자 그 악력으로 손이 뭉개질 것 같은 두려움마저 들었다.
그때, 체력이 떨어진 것인지 페르가가 마침내 미궁 수장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배와 가슴이 갈고리 손톱에 꿰뚫리는 것이 보였다.
이를 본 투란은 거대한 도끼를 집어 든 뒤 곧바로 괴수를 향해 도약했다.
무기로 인한 무게 중심의 변화, 증가한 다릿심 덕에 조금 궤도가 어긋났으나 다행히 도끼가 급소에 닿을 정도는 됐다.
[너! 가짜 밤 사냥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제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저 괴물 역시 자하르의 은신 따위는 간단히 꿰뚫어 보는 모양.
투란은 작은 양의 마력 소모조차 절약하고자 은신을 풀며 도끼를 휘둘렀다.
퍽, 손에 전해져 오는 묵직한 감각과 함께 거대 도끼가 녀석의 목에 절반 이상 박혔다.
'이런, 역시 한 방에 죽일 정도는 안 되나.'
[죽어어!]
왼손으로는 이미 페르가를 꿰고 있어서일까, 미궁 수장은 잘려나간 오른팔을 휘둘러 도끼에 매달려 있던 투란을 후려쳤다.
그는 도약했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튕겨 나가 미궁 한편의 벽에 처박혔다.
"크윽...."
온몸이 뻐근하긴 했으나, 과거 마수에게 치였을 때와는 달리 그럭저럭 버틸 만한 정도였다.
수호자 마법기의 힘은 물론 역사 혈통의 힘이 가져다준 신체 능력의 향상 덕분.
물론 잘린 팔에 맞아서 이 정도지, 저 손톱에 당했다면 이렇게 간단히 끝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멀쩡히 일어나는 투란을 본 미궁 수장이 꿰여 있던 페르가의 몸뚱이를 휙 내던지고 달려왔다.
[가짜아아-! 죽어어!]
맹렬하게 외치는 것과 달리 이쪽으로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기세는 썩 위협적이지 않았다.
성유물을 통해 보이는 몸속의 불꽃도 이미 전보다 훨씬 약해진 지 오래.
도끼가 박혔다가 뽑힌 목에서 피가 울컥 쏟아지는 모양새로 보건대 이대로 내버려두기만 해도 자멸할 게 뻔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낼 수는 없지.'
이미 지나친 부상으로 굼떠진 녀석을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이요, 문의 눈동자가 제시한 탈출로 개방의 조건인 '미궁 수장의 처치'가 어떤 기준이냐도 문제였다.
혹시라도 과다출혈로 죽은 것을 수장이 알아서 죽어버린 것으로 판단해 문을 안 열어주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투란은 아라비온의 비전으로 사고를 가속하며 자신을 향해 느릿하게 날아드는 다섯 개의 갈고리 손톱을 응시했다.
'우선 피하고....'
하람에게 배운 백병전에서의 짧은 보법(步法)을 펼치자 손톱이 아슬아슬하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드러나는 것은 녀석의 좌반신.
그 몸통을 노리는 대신, 들고 있던 도끼를 힘껏 올려치자 퍽 소리와 함께 미궁 수장의 팔뚝이 반쯤 뭉개졌다.
[아파아아아아!]
'한 번에는 안 되는군.'
그러면 여러 번 하면 될 뿐.
투란은 박혀 있던 도끼를 뽑으며, 녀석이 팔을 들어 올리기 전 재빨리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도끼로 나무를 좌우 한 번씩 찍어 넘어트리듯, 위아래로 같은 곳을 찍힌 팔이 잘려나갔다.
[아파! 나빠! 내 아이들! 다 죽였어! 밤 사냥꾼! 가짜!]
완전히 정신이 나간 것인지, 미궁 수장은 아무 말이나 지껄여대며 투란을 향해 마지막 남은 무기를 들이밀었다.
톱날처럼 자라난 이빨을.
당연하게도 물어뜯기라는 것은 모든 생물의 가장 큰 약점인 머리를 들이대는 위험한 행위라, 투란이 옆으로 몸을 날리자 미궁 수장은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는 꼴이 됐다.
목을 잘라내기 참으로 적절한 자세였다.
콰득! 찐뜩한 액체가 번들거리는 목에 도끼질 한 방.
아래로 연결된 신경이 상했는지 몸이 축 늘어졌으나 목숨은 멀쩡했다.
투란은 내려찍어 생긴 자국에 두 번, 세 번, 네 번씩 연이어 도끼를 내리쳤다.
[가...짜...내...아이...]
대체 얼마나 질긴 것인지, 놈은 목이 반쯤 덜렁거리는 상태에서도 힘겹게나마 말하고 있었다.
입을 연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니 말을 한다고 하는 게 옳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마지막으로 도끼를 내리쳐 완전히 목을 끊어버린 순간, 미궁 수장의 온몸을 타고 흐르던 마력의 흐름이 멈췄다.
이를 보고서야 저 괴물이 진정으로 죽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후아...."
투란은 깊은 한숨과 함께 무거운 도끼를 집어 던졌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온몸의 힘이 쫙 빠지는 듯한 기분이-
아니, 내면으로 의식을 집중해 보니 그냥 기분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몸속에 흐르는 역사 혈통의 마력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속도로 짐작건대 모든 힘이 사라지는 데는 아마 삼십 분 정도가 걸리지 않을까.
하기야 아무리 성유물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영구적인 혈통 능력을 얻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기는 했다.
이렇게라도 힘을 저장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물건이기도 하고.
다소 아쉬움을 삼키며, 투란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널브러져 있던 최후의 생존자에게 다가갔다.
페르가 자하르.
그는 입으로 울컥 피를 토해내며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나는 폐...하나는 심장 가까이를 찔렸군. 이건 못 살겠는걸.'
마법사가 일반인보다 생명력 역시 우월하다지만 이 정도 부상에서 살아나기는 어려웠다.
물론 조금 전 역사 혈통의 힘을 빌렸듯이 치유사 혈통의 귀족에게서 마력을 흡수해 치료하면 살려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너, 너는...?"
페르가의 시선이 투란을 향했으나 그 눈의 초점이 딱 보기에도 심히 흐렸다.
아마 투란의 얼굴이 보이기는커녕 그가 사람이 맞는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편하게 해줄까?"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친척이라지만 존칭을 쓸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지난 며칠간 미궁을 탐사하며 처절하게 죽어간 기사와 부랑자들의 시체를 보았으니까.
아마 그들 역시 페르가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도 더 살고 싶었을 터였다.
"살려 줘...."
"그건 들어줄 수 없는 요구야."
투란이 고개를 저었으나 페르가는 이를 알아듣지 못한 듯 계속 살려달라고만 중얼거렸다.
잠시 후, 성유물의 감각으로 그의 온몸에 남아있던 불꽃이 사그라들며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죽었군.'
투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을 바라보았다.
죽어있는 백수십 마리의 작은 괴물과 십여 명의 귀족, 그리고 미궁의 수장까지.
개인의 이익은 둘째치고서라도, 저 모두가 사령으로 부활하는 꼴을 보지 않으려거든 일단은 수확해야 할 시간이었다.
* * *
투란은 가장 먼저 작은 괴물들의 마력을 흡수했다.
마법사는 그 힘이 강할수록 약한 이의 마력을 흡수하는 것이 무의미해지기에, 가능하면 약한 존재의 힘부터 순서대로 흡수하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총 백사십오 마리를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힘은 거의 성장하지 않았다.
놈들은 능력에 비해 가진 마력이 적어 고작해야 기사와 귀족 사이의 어중간한 수준에 불과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 차례는 죽은 귀족들.
성유물의 감지 능력은 죽은 자의 마력도 볼 수 있기에 생전에 누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따로 기억하지 않고도 순차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귀족들의 힘을 흡수하자 성유물 역시 별도로 마력을 흡수해 저장하기 시작했다.
결계사, 환영, 광전사, 치유사, 사냥꾼....
각각의 혈통에 따라 마력이 녹아든 액체는 내부에서 층층이 분리되어, 마법으로 조종하면 어렵지 않게 특정한 힘만 분리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대로 여러 혈통의 힘을 동시에 삼키면 어떻게 될까?
문득 궁금해지기는 했으나 정말로 필요할 때를 생각하면 섣부르게 실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차곡차곡 마력을 흡수할 때마다 투란의 육신과 영혼은 점점 더 강인하게 담금질 되어 갔다.
다섯 명은 그보다 훨씬 약해 썩 도움이 되지 않는 수준.
하지만 네 명은 조금 약하거나 비슷한 수준이라서 충분히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결정타는 미궁의 수장과 페르가 자하르.
각각 투란의 두어 배쯤 되는 힘을 가진 이들의 마력을 모두 흡수한 순간, 강렬한 쾌감이 머릿속을 때렸다.
이는 조금 전 역사 혈통의 힘을 일시적으로 얻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각이었다.
내면에 의식을 집중하자 갓 미궁에 들어왔을 때의 두 배가 조금 안 되는 양의 마력이 느껴졌다.
이는 평범한 귀족들이 전쟁 등의 특수 상황이 아니라면 수십 년에서 백 년 이상 쌓아 올려야 할 수준의 힘이었다.
물론 대부분은 이 정도까지 힘을 축적하기도 전에 성장 한계에 부딪히고 말겠지만.
'그러고 보면 나도 슬슬 성장 한계가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르겠는걸.'
통상적으로 마력의 성장 한계는 타고난 양의 수 배에서 수십 배 정도.
히사릴 언덕에서 머물던 시절의 마력량이 어땠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짐작건대 현재 그가 가진 힘은 그 시절의 여덟 배에서 열 배 사이쯤은 되는 것 같았다.
이쯤 되면 슬슬 그 잠긴 혈통이라는 게 열릴 때도 된 것 같은데, 설마 대가문의 가주 수준까지 강해지기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기도 잠시, 투란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이 미궁을 떠날 시간이었다.
'마법기는 당연히 포기해야겠지.'
이들의 죽음을 조사할 것은 무려 추적에 특화된 자하르가 아닌가.
그 역시 추적 마법을 많이 써본 만큼, 아무 마법기나 찾는 것은 안 되어도 특정한 형태의 마법기를 지정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수십 명의 자하르 귀족들이 이를 찾고자 사방을 돌아다니면 엔릴 사막 어디에 있건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잡힐 터.
평생 도망 다닐 게 아니라면 고를 수 없을 선택지였다.
이후로도 투란은 텅 빈 미궁을 돌아다니며 추적 마법을 여러 차례 사용해 자신의 몸에서 나온 터럭이나 피, 그 외의 온갖 흔적을 추적해 제거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향한 곳은 눈동자가 달린 문이었다.
"수장을 죽였어."
말을 걸었으나 눈동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활짝 열리며 기능이 정지하기라도 한 것일까.
투란은 몇 차례 더 말을 걸어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오."
안쪽의 방은 커다란 전당 같은 곳이었는데, 그 한가운데에서는 들어왔을 때의 그것과 같은 새카만 소용돌이 공간이 생겨나 있었다.
아마 저곳이 탈출구일 터.
곧바로 탈출하는 대신 투란은 주변을 조금 더 둘러보기로 했다.
'대부분 쓸데없는 장식들...아니, 저 위에 뭔가 있는데.'
무언가 옥좌 비슷한 느낌의 의자 옆에 작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책이라기보다는 그냥 종이 몇 장을 실에 꿰어놓은 것에 가까워 보이기는 하지만....
맨 앞장에 다소 거친 글씨로 쓰인 제목이 눈에 띄었다.
[밤 사냥꾼 전직 과정 재현 실험]
4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