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흑요정들이 군대를 일으켰다는, 심지어 도시를 세 개나 무너트렸다는 충격적인 소식에 투란은 할 말을 잃었다.
보통 도시 하나가 주변에 수십 개의 마을을 두고 있음을 생각하면 희생당한 사람의 수가 몇 명일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메이사 역시 비슷한 감정이었는지, 한참 침묵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알았어. 곧 돌아가겠다고 전해."
"지금 바로 가셔야-"
"간다니까!"
날카로운 목소리에 남자는 움찔하더니 깊게 고개를 숙이고 정원을 떠났다.
깊은 한숨을 내쉰 메이사가 투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슬슬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네요."
"조심하십시오."
흑요정 군대가 나타났을 때 굳이 메이사를 소환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그녀를 토벌대에 합류시키기 위함일 터.
투란은 메이사와 함께 흑요정과 싸우러 가겠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자신의 혈통을 감춰야 하는 것 이전에, 대가문 아라비온은 이종족 따위를 처리하는 데 이방인의 손을 빌려야 할 정도로 나약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에게 투란은 오히려 자기들에게 꼽사리 껴서 은근슬쩍 전리품-마력-을 훔치려는 도둑놈처럼 보일 터였다.
"고마워요. 아, 그러고 보니 이대로라면 부패 마법에 대한 대가를 못 주고 가겠는데."
메이사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참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투란, 혹시 사람의 몸에도 전기가 흐른다는 사실 알고 있어요?"
"전기...말입니까?"
투란이 의아해하는 태도를 보이자 메이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모르는군요? 그러면 이걸 제대로 가르쳐주는 것으로 빚은 없는 것으로 치는 게 어때요? 분명히 큰 도움이 될 텐데."
"알겠습니다."
투란이 수락하자 메이사는 곧바로 이론을 쏟아냈다.
"사람이 무언가를 보거나 느낄 때, 그 부위에서는 머리로 전기를 보내요. 눈으로 본다면 눈에서 뇌로, 냄새를 맡는다면 코에서 뇌로. 그 전기를 통해 머리는 감각을 이해하고, 온몸으로 다시 전기를 보내서 몸을 움직이게 명령하죠."
그녀의 말은 들을수록 황당하게 느껴지는 내용뿐이었다.
대체 사람 몸에 번개와 같은 힘이 왜 흐르고, 그게 무슨 수로 감각이나 명령 따위를 전달한단 말인가?
하지만 도서관에서 이런 종류의 지식을 자주 접한 투란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진실이 존재함을 알았기에,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우선 그 내용을 머릿속에 박아 넣었다.
이것이야말로 아라비온 가문이 대대로 전승해 온 자연법칙의 일부가 분명했다.
"그리고, 이런 전기를 마법의 힘으로 가속하면?"
"인식하고 반응하는 속도가 빨라지겠죠."
"맞아요. 어디 한번 해보시겠어요?"
투란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곧바로 메이사가 말해 준 이론을 시험해 보았다.
가장 먼저 자신의 몸속에 아주 미세한 번개가 흐르는 통로를 상상하고, 그 통로를 통해 전해지는 번개가 더 빨라지도록 기원하며 마력을 실으면-
"어-때-요-"
마법을 사용한 순간 맞은편에서 들려오던 메이사의 목소리가 기괴하게 늘어졌다.
투란은 자신이 눈을 깜빡이는 속도조차도 느려졌음을 깨닫고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마치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듯한 느낌....
십수 초 정도 느려진 세계를 만끽하던 도중, 날카로운 두통이 관자놀이를 찔렀다.
재빨리 마법을 해제하자 순식간에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성공했나요?"
"네, 이건 대체...."
잠깐 써 본 것만으로도 이 마법이 가진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걸 고작 부패 마법 따위의 정보와 교환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마 당장은 두통 때문에 적응하지 못하겠지만, 익숙해지면 제법 긴 시간 유지할 수 있게 될 거예요."
"이건...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드린 것에 비해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만."
투란의 말에 메이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러면 투란이 나중에 더 좋은 마법을 알고 나서 돌려주면 되잖아요?"
그렇게 말한 뒤, 메이사는 투란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 곧바로 정원 밖으로 휙 날아가 버렸다.
"아...."
투란은 그제야 그녀가 이런 방식으로 다음 만남을 약속한 것임을 깨달았다.
멀리서 조금 전 먼저 나갔던 아라비온 가문의 남자가 애처롭게 아가씨를 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홀로 남아 마법 연습을 마친 투란은 방으로 돌아가던 도중 아시즈와 마주쳤다.
얼굴에 깃든 피로한 기색을 통해 그는 자신의 친구가 조금 전까지 불편하거나 어려운 자리, 예를 들면 가문 회의 같은 곳에 참여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투란, 혹시 이야기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흑요정?"
"뭐야, 어디서 들었어? 나도 조금 전에 어머니한테 들은 건데."
"방금 메이사 아가씨랑 훈련 중에. 혹시 그때 내가 죽인 그 두 놈이 문제였던 건가?"
"그건 모르겠어. 놈들이 자기들의 학살 이유를 일일이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아서."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시즈의 얼굴이 어두운 것이, 그 역시 내심 그때의 충돌이 원인이 됐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는 어디까지나 피해자일 뿐이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딱딱 나뉘는 게 아니었다.
"혹시 베르크 가문에서도 참전하나?"
"응? 아니, 우리는 안 가지. 마법기 만드느라 바쁜걸. 하람 고모부도 본가에 남아 계실 거고."
즉, 투란이 받아야 할 마법기 제작에는 차질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의미였다.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뭘?"
"뭐긴? 전쟁이잖아! 이런 상황에서 혼자 순례하러 떠나는 건 자살행위라고. 여행 중에 사령술사 군대라도 만났다가는 그날로 천상의 궁전에 올라가게 될걸."
그러니까 마법기를 받은 뒤에도 당분간은 베르크의 식객으로 머물러 있으라는 게 아시즈의 제안이었다.
대충 이번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될 정도의 시간, 그러니까 몇 달에서 일 년 정도쯤이라도.
"아니, 그건 안 돼."
"왜?"
"나도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가능하면 베르크 가문에 더 신세를 지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가 이곳에 속하지 않는 이상 돌려줄 수 없는 빚이 될 테니까.
투란이 설득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아시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끙,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영원히 떠나 버리는 것도 아니잖아. 시간이 지나면 또 볼 수 있겠지. 내가 찾아올 수도 있고."
"하긴."
그 말에 마음이 조금 편해진 듯, 아시즈가 웃으며 투란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그러고 보면 맨날 봐서 잘 못 느꼈는데, 요즘 몸이 되게 커졌다?"
"그래 보여?"
"어. 좀 고모부같이 변했는걸."
그 말대로 지난 삼 주간 호리호리하던 투란의 몸은 상당히 큰 변화를 거친 상태였다.
아시즈가 말한 것처럼 하람과 같은 굵은 체형까지는 아니고, 이전의 몸이 사슴 같았다면 표범 정도로 변했다고나 할까.
베르크 저택에 준비된 체력 단련 도구, 그리고 하람의 철저한 교육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성취였다.
애초에 일반적인 공간에서는 귀족의 몸에 근육이 생길 만한 자극을 준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하긴, 요즘은 힘이 두 배쯤 세진 것 같더라. 체력도 훨씬 좋아졌고."
"...그 정도야?"
"어. 너도 어지간하면 나중에 기회 내서 한 번 단련해달라고 해봐."
"으음."
한참 고민하던 아시즈는 나는 역시 됐어,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가 특별히 게으른 사람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람의 체력 단련은 그만큼 가혹했다.
애초에 육탄전에 특화된 혈통도 아니면서 굳이 그의 가르침을 수용한 투란이 오히려 별종에 가까웠다.
"뭐, 어쨌든 더 자랄까 봐 좀 크게 해놓길 잘했네. 그럭저럭 맞겠어."
"뭘?"
투란의 질문에 아시즈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도 돼. 기대하라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물어봐도 아시즈는 끝내 대답해주지 않았다.
* * *
메이사가 본가로 떠나고 며칠 뒤, 투란은 베르크 가문의 구성원들과 함께 다케인 평야의 중심지, 모르겐 시를 방문했다.
흑요정 군대를 무찌르기 위한 토벌대가 출정하는 것을 배웅하기 위함이었다.
아라비온 본가의 귀족만 스물일곱 명, 기사는 사백 명....
거기에 전투에 적합한 혈통을 타고난 가신 가문의 귀족과 기사들까지 합류하자 그 규모가 아찔할 정도였다.
심지어 과거 자하르와의 전쟁에서는 이것의 몇 배에 달하는 귀족과 기사들이 맞서 싸웠다고 했던가?
"아라비온에 영광을!"
사람들은 토벌대가 행군할 때마다 옆에서 그렇게 외치며 주먹 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투란은 대열의 맨 앞에 선 메이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 베르크 저택에서 요양하던 때와 달리, 지금 그녀의 해골 같은 얼굴에는 처음 보았을 때처럼 피로한 기색만이 가득했다.
지난 며칠간의 본가 생활이 썩 즐겁지 않았던 것처럼.
"오, 메이사다. 메이사! 여기야!"
아시즈가 신나서 손을 휙휙 흔들자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미델라 가주가 재빨리 그의 손을 내렸다.
제발 귀족으로서의 체통 좀 지키라는 잔소리를 한참 들을 무렵, 어느 한 아라비온의 귀족이 하늘을 날아오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가주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바람 마법을 응용한 것인지, 그 목소리는 토벌대를 배웅하러 온 수만 명의 인파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순식간에 모두가 고요해진 가운데, 투란은 토벌대의 앞으로 한 노인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저 사람이 바로....'
현 아라비온의 가주, 바달 아라비온.
메이사의 아버지인 그는 겉보기에 예순 살이 족히 넘은 것처럼 보였다.
강대한 귀족이 저 정도로 나이를 먹으려면 대체 몇 년을 살아왔을 것이며, 그동안 쌓아온 마력은 어느 정도일까.
"아시즈."
"왜?"
"아라비온의 가주님, 안색이 좀 나빠 보이시는데. 혹시 건강이 안 좋으신가?"
그냥 노인이라서 그렇다기에는 유난히 얼굴이 창백해서, 당장 저기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투란의 질문에 아시즈가 머리를 긁적였다.
"뭐, 옛날에 자하르의 가주와 결투하다 다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연세가 연세셔서, 모르지."
"으음."
잠시 후, 가주의 노쇠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라비온의 용사들이여, 그대들은 지금부터 인류를 수호하러 떠난다. 명령하건대, 저 사악한 이종족 무리를 모두 도살하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말지어다. 인류를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모두가 가주의 말을 따라 외치며 이어질 연설을 기다렸으나, 예상했던 것과 달리 가주는 묵묵히 토벌대를 쳐다볼 뿐 연설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설마 고작 이 정도 말로 끝난단 말인가? 이런 병력을 모아놓고서?
투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닌지 모여 있는 인파 사이로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그도 잠시, 가주가 손을 들어 올린 순간 모두가 침묵했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낀 탓이었다.
지금부터 무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아...."
언제부터인가 맑은 해가 떠 있던 하늘이 점점 흐려지며 사람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투란은 가주가 저 높은 하늘의 바람을 조종하여 구름을 끌어모으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체 바람을 다루는 마법에 얼마나 능숙해야, 그리고 많은 양의 마력을 투자해야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잠시 후,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손을 내렸다.
["그대들은 뒤에 내가 있음을 믿고 나아가라. 이것이 아라비온의 힘일지니."]
우르릉, 아득히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번개 치는 소리.
잠시 후 하늘의 구름이 새카맣게 물들더니, 이내 한 가닥씩 벼락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치 물방울 새듯 떨어지던 벼락은 비가 내리는 것처럼 마구 쏟아붓기 시작했다.
천상의 신들이 분노하는 것이 이와 같을까.
난생처음 맞이하는 광경에 사람들은 반쯤 광란에 빠져 아무렇게나 소리쳤다.
"으아아아아아!"
"아라비온이여, 영원하라!"
"인류를 위하여-!"
"천둥군주시여, 당신의 후예를 가호하소서!"
누군가는 겁먹어서, 누군가는 감동해서 제각기 아무 말이나 쏟아내는 가운데 투란 역시 숨조차 쉬지 못하고 눈앞에서 일어나는 힘의 행사를 구경했다.
과거 케오른이 아라비온의 가주가 손짓 하나로 작은 언덕을 짓뭉개는 것을 보았다고 했던가?
지금의 마법 행사는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 내리치는 낙뢰 한 가닥 한 가닥에 실린 파괴적인 힘이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
굳이 좋지 않은 몸 상태에도 이러한 힘을 행사하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아라비온을 노릴지도 모를 뭇 세력, 주로 자하르와 관련된 이들에게 보내는 무력시위일 터였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건재하다고, 그러니까 감히 병력 일부가 빠졌다고 해서 아라비온을 노릴 생각은 하지 말라고.
잠시 후, 하늘이 맑게 개자 아시즈가 반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와, 진짜 프레아 신족이 내려와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은걸."
투란 역시 그 말에 공감했으나, 그러는 와중에도 마음속에 또 다른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과거 도서관의 정령이 말해 주었던, 그가 가장 신에 가까운 혈통을 지닌 마법사라는 말을.
'나도, 언젠가는.'
저처럼 강대한 존재가 되고 싶다고, 투란은 열망했다.
21화
메이사와 흑요정 토벌대가 떠난 뒤에도 투란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람과 함께 몸을 만들고, 무기술과 격투술을 익히고, 쉬고, 마법을 수련하고....
차이점이라면 그저 저녁 시간에 마법 수련을 할 친구 한 명이 없어졌을 뿐.
그래서 그 시간이 좀 더 쓸쓸하게 느껴진다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베르크 가문에 머무른 지 사 주일 하고 이틀이 되는 날.
저택의 가장 높은 층, 온갖 마법기가 난잡하게 늘어선 공방에서 아시즈의 형인 멜로가 투란에게 물건을 전했다.
그는 지난 한 달간 이를 만들고자 틀어박혀 있던 탓에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마법기는 팔찌 형태로, 길고 가느다란 가죽끈 몇 개를 머리 땋듯이 꼬아 만든 뒤 광채가 나지 않는 푸른 금속을 한 겹 둘러놓았다.
이 금속은 본래 동방의 어느 산지에서만 나는 것으로, 마법의 힘을 더 쉽게 담을 수 있는 소재라고 했다.
"차고만 있어도 신체 내구도를 소량 올려주고, 마력을 주입하면 그 정도가 더 올라갑니다. 궁극적으로는 수호자 혈통의 귀족과 비슷한 수준이 되지만 마력 소모가 심하니 오래 유지하지는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이건...정말로 대단한 보물이군요."
일반적으로 혈통 능력을 재현하는 마법기가 하루 몇 회 사용 제한 따위가 걸려있음을 생각하면 실로 강력한 성능이었다.
투란의 감탄사에 멜로가 자부심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 이만한 물건은 대가문에서도 흔치 않을 겁니다. 유난히 잘 나온 물건이라서요."
마법기의 제작에는 제작자의 실력과 제작 시간이 절대적 영향을 미치지만, 같은 실력에 같은 시간을 투자하고도 나오는 품질이 달라졌다.
그중에서도 이 물건은 본래 아라비온의 가주쯤 되는 사람에게나 진상했을 법한 최상품이라고, 멜로는 몇 번이고 강조하며 자신이 만든 물건을 자랑하다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아시즈는 덜떨어지고 멍청한 놈입니다만, 그래도 제 동생이니까요. 그 보답을 허술히 할 수 없죠."
아시즈를 깎아내리던 첫인상 탓에 쌀쌀맞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역시 동생을 사랑하는 형이었던 모양이다.
마법기를 받고 인사한 뒤 나온 투란은 다음으로 베르크의 가주, 미델라에게 향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작별 인사를 하는 투란에게 가문에 정식으로 합류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정말 감사한 제안입니다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역시 그런가...."
뜻밖에도, 미델라는 거듭 끈질기게 제안하는 대신 곧바로 단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어지는 말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실 아시즈에게 이야기를 듣기는 했소.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 이곳에서 안주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안 될 것을 알면서도 굳이 말을 꺼내 본 것은 늙은이의 미련이라 생각해 주길."
아무래도 아시즈가 미리 가주에게 언질을 준 모양이었다.
투란은 정중히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가주님께 받은 대접은 잊지 않을 겁니다. 아시즈와 베르크 가문은 영원히 제 친구일 것이고요."
"그래, 그거면 됐소."
알고 있었어도 씁쓸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는지, 미델라 가주의 얼굴에는 미미한 서운함이 깃들어 있었다.
면담을 마치자 베르크 가문의 다른 구성원, 그중에서도 투란과 친하게 지냈던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받아라."
하람은 대뜸 단검 한 자루를 턱 넘겨주었다.
평소에는 생활용품으로 간편히 휴대할 수도, 필요하면 무기로 쓸 수도 있을 법한 적당한 크기였다.
"마법기다. 대단한 기능은 없지만 단단하고 날이 잘 들지."
굳이 따지자면 베르크 가에 널린 마법등보다 조금 나은 수준인, 마법기 치고 썩 가치 있는 물건은 아니었으나 고작 몇 주일 가르친 제자에게 주기에는 과분한 보물이었다.
"...감사합니다."
투란은 하람이 왜 자신을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대부분이 육탄전을 천시하는 귀족들 중, 그가 평생 추구해 온 가르침을 충실히 흡수한 이가 투란이었기 때문이다.
존중의 의미를 담아, 투란은 마지막으로 평소에 쓰지 않던 호칭을 사용했다.
"스승님."
하람은 입술을 한 번 씰룩이더니 그대로 고개를 돌려 떠나 버렸다.
아마 표정 관리가 안 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다음으로는 아시즈가 씩 웃으며 잘 손질된 셔츠와 바지, 망토 한 벌을 내밀었다.
튼튼한 소재에 거추장스러운 장식 따위가 없어 편하게 입기 좋을 것 같았다.
"이건?"
"전에 내 옷이 부럽다며? 틈틈이 시간 내서 준비해 봤어. 쉽게 더러워지지 않고, 살짝 찢어지는 정도는 알아서 복구되지."
투란은 그제야 며칠 전 그가 크게 해놓기를 잘했다고 말했던 것이 무슨 의미였는지 알 수 있었다.
오후에 투란과 자주 나다니며 연극을 보거나 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침이나 저녁에 틈틈이 준비한 것일 터.
그 정성을 생각하니 쉬이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시즈...."
"넌 좋은 친구야, 투란. 단순히 내 목숨을 구해주어서가 아니라, 함께 지내면서 네가 사는 방식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거든."
아시즈는 투란을 향해 솔직하게 고백했다.
처음에는 그의 뛰어난 재능에 내심 질투를 품었던 것, 하지만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발전에 힘쓰는 모습에 감탄했다는 것까지.
자신이 그간 너무 나태하게 살아왔음을 느꼈다며, 그래서 이번에 옷을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다시 한번 마법기 제작을 충실히 수련하리라고도 했다.
"덤으로 나중에 흑요정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순례도 떠날 거야. 좀 더 안전한 곳에서."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시즈의 또 다른 친구를 언급했다.
"다시 떠날 때 잊지 말고 틸리도 데리고 가."
"물론이지!"
말 마수, 틸리는 어지간한 사람만큼이나 똑똑하면서 귀족과도 겨룰 만한 힘을 가진 녀석이었다.
지난번처럼 극한의 상황이 또 일어나는 게 아니라면 아시즈가 위기에 처할 일은 어지간해선 없을 터였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야?"
"우선은 동쪽으로."
"카마인?"
"응."
다케인 평야에서 동쪽으로 쭉 가면 카마인 가문이 지배하는 항구 도시가 나왔다.
그들은 아라비온이나 자하르보다는 작지만 나름 오랜 역사와 저력을 가진 대가문으로, 물과 얼음을 지배하는 혈통 능력을 다루는 것이 유명했다.
"그쪽이라면 또 옛날에 한 번 가본 적 있지. 어지간하면 배는 타지 마. 궁금해서 한번 타 봤는데 진짜 파도가 지랄 맞더라니까."
아시즈의 경고에 투란은 실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배를 타고 그 파도를 지나쳐야 했다.
배를 타고 동남쪽으로 한참 내려가면 도착하는 자하르의 땅, 엔릴 사막이 그의 목표였으니까.
"뭐, 네가 애도 아니고-아니, 나이는 애다만, 어쨌든 나보다 어른스러운 놈이니까 잘 지내겠지. 무사해라. 죽지 말고."
"그래."
투란은 아시즈와 마지막으로 한 차례 포옹한 뒤 저택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정말로 요람을 떠날 시간이었다.
* * *
자빌린 시를 떠난 투란은 싸늘한 가을바람이 얼굴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한때 황금빛으로 펼쳐져 있던 다케인 평야의 밀밭은 어느새 수확이 끝나 밑동만 남은 채였다.
처음 세상에 내려올 때가 늦여름 정도였을 텐데, 어느덧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투란은 동쪽을 향해 뛰며 하람에게 배운 오래달리기에 적합한 호흡법을 운용했다.
내딛는 박자에 맞춰 크게 두 번 내쉬고, 두 번 들이쉬고.
이전보다 훨씬 굵어진 허벅지에서 나오는 다릿심 덕에 마치 땅이 알아서 뒤로 밀려나는 것처럼 몸이 쏘아졌다.
그 속도는 하늘을 나는 아라비온의 귀족이나 그와 비슷한 종류의 이동 능력을 보유한 혈통이 아니라면 감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
평야 곳곳을 지나다니는 여행객이나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순찰대는 투란을 목격하고도 감히 따라붙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달린 뒤 잠시 쉬고, 또 달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멈춘 뒤에는 준비해 둔 건빵과 육포, 말린 채소 몇 개를 우려내어 죽을 끓였다.
그동안 고급스러운 음식에 입이 길들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오랜만에 먹은 여행 음식은 그럭저럭 입에 맞았다.
그렇게 적당히 배를 채운 다음 평야 한복판에 드러누워 망토를 덮자 어째서인지 웃음이 나왔다.
처음 언덕을 내려올 때처럼 또다시 머무를 집 하나 없는 외톨이가 되었음을 실감해서였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투란의 마음속이 전처럼 텅 비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새로이 사귄 친구들,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스승들....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에 내려온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낮과 밤을 보내며 달리기를 이틀.
마침내 아라비온이 지배하는 평야 지대가 끝나며 울룩불룩 솟은 산봉우리 몇 개, 그리고 그 위로 빽빽이 돋은 숲이 보였다.
과거 그가 흑요정들과 마주쳤던 지역이 그렇듯, 아라비온의 영향력 아래 있기는 하지만 정식으로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 곳이었다.
투란은 가장 먼저 아라비온의 영토에 들어온 뒤부터 봉인하다시피 했던 탐색 마법을 발동해 마수를 찾았다.
늑대, 사슴, 살쾡이, 너구리...온갖 종류의 동물을 대상으로 삼아 동족보다 월등히 큰 개체의 흔적이 있는지를 탐색하는 방식으로.
몇 분 지나지 않아 대상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멧돼지군.'
흔적을 쫓아 만난 마수는 왜 그리도 뿔이 났는지, 씩씩거리며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엄니가 유난히 길쭉한 게 아마도 저것으로 무언가를 꿰뚫는 데 특화된 것이 아닐까.
어이! 하고 소리치자 놈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발끈하여 달려들었다.
[뀌이이익!]
투란은 신중히 달려오는 멧돼지를 관찰하다가 마법을 사용해 사고를 가속했다.
순식간에 느릿해지는 세상.
타이밍을 맞춰 한 걸음 걷는 것만으로 궤도에서 벗어난 뒤, 옆에서 정확히 단검을 꽂아 넣자 뇌가 후벼 파인 멧돼지가 그 자리에 널브러졌다.
'이런 느낌인가.'
하람과 대련할 때는 항상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해서 몰랐는데, 확실히 몸을 써서 사냥하는 것도 꽤 재밌었다.
물론 저 멧돼지가 그냥 돌팔매질 한 번으로도 죽일 수 있는 수준의 상대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배를 타려면 뱃삯도 필요할 터라, 투란은 죽은 멧돼지의 마력을 흡수한 뒤-예상했던 대로 잔챙이였다-놈을 도축하여 가죽을 벗겨냈다.
조금 시간을 내어 무두장이에게 맡기거나, 그게 아니라면 통째로 팔아치우기만 해도 그럭저럭 돈이 될 터였다.
"끄응."
예상치 못한 점이라면, 다 벗겨낸 가죽의 부피가 사람만 한 탓에 들고 다니기 불편하다는 것.
근력이 충분한 것과 별개로 균형을 맞추고자 두 손으로 들어야 하는 데다 부피가 지나치게 커서 시야를 가리는 게 영 거슬렸다.
그렇기에 투란은 항구도시에 도착해 팔려던 기존의 계획과 달리, 근처에 있던 제법 큰 마을에 들러 바로 가죽을 팔아치워 버렸다.
누가 봐도 마수의 것이 분명한 가죽을 팔아치우느라 다소 소란이 있었지만, 어찌어찌 거추장스러운 짐을 치우고 금화 스무 닢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가벼워진 몸으로 이틀을 꼬박 달려 도시 두 개를 지나쳤을 때쯤.
이제 카마인 가문의 영역이 멀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던 투란의 후각에 이질적인 냄새가 포착됐다.
'음?'
처음 감지된 것은 타고 남은 잿더미의 냄새.
그것만이라면 지나가는 여행자가 모닥불이라도 피웠거니, 하고 넘길 수 있을 것이건만 냄새의 정도가 지나쳤다.
만약 이게 모닥불이라면 나무 수십 채를 태운 것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거기다 식물만이 아니라 동물까지 태운 악취가 풍겨 혹시 산불이라도 났나 싶었는데, 접근해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한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반쯤 타들어 가 무너진 목책 안,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마을이 무너진 것이 보였다.
혹시 마수의 습격이라도 받은 것일까?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마을 한가운데의 광장에 꽁꽁 묶인 채 불탄 시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인간이나 그와 맞먹는 지성을 가진 종족이 악의를 품고 벌인 흔적이었다.
'흑요정들이 이쪽까지 진출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만약 그랬다면 투란이 동쪽으로 떠날 것을 알고 있는 아시즈가 이에 대해 귀띔해주지 않았을 리 없었다.
이 난장판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하던 도중, 투란은 악취를 뚫고 살아있는 사람의 체취를 감지했다.
땀, 눈물, 소변....
'여긴가?'
투란은 냄새의 흔적을 따라 반쯤 불탄 통나무집 중 한 곳, 탁자 밑에 숨겨진 다락문 하나를 찾아냈다.
빗장으로 잠긴 문을 힘으로 쥐어뜯자-
"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기어가는 소녀가 보였다.
나이는 기껏해야 여덟아홉 살쯤 됐을까?
꼬질꼬질한 옷에 그을음으로 거뭇한 눈가에는 하얀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진정해. 나는 네 적이 아니야. 도와주러 왔어."
부들부들 떨던 소녀는 투란이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자 가쁜 숨을 내쉬며 물었다.
"진짜요...?"
"그래. 혹시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니?"
"다, 다 죽었어요. 그 마법사가-"
"마법사?"
"네...."
소녀는 거기까지 말한 뒤 그대로 푹 고꾸라졌다.
아마 이 지하실에 꽤 오래 갇혀 있느라 심신이 소모된 것이 아닐까.
투란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은 채 지하실 위로 올라왔다.
일단은 잘 먹여 쉬게 한 뒤 근처의 다른 마을에라도 데려다주면....
"찾았다!"
통나무집 입구를 반원형으로 둘러싼 네 명의 남녀.
그중 대장처럼 보이는, 새하얀 얼음의 활을 든 여자가 투란을 향해 화살을 겨눈 채 말했다.
"무릎 꿇어, 이 살인마 놈아!"
22화
상대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꽁꽁 묶인 채 타죽은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희생자가 될 소녀까지 꺼내오고 있는 악당....
투란은 재빨리 상대를 관찰했다.
수는 네 명.
외모는 마법사인 만큼 확신하기 어려우나 겉으로 보기에 대부분이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정도.
특징이라면, 네 명 모두 몸에서 진한 흥분과 긴장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처음으로 늑대 사냥에 나섰던 그처럼.
짐작건대 실전 경험이 많지 않은 애송이들인 듯했다.
"잠시-"
"앗!"
해명하려고 투란이 입을 여는 순간, 화염 창을 들고 있던 마법사가 탄성과 함께 이를 휙 쏘아 버렸다.
당황한 표정으로 보아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제어를 놓친 모양.
투란은 아이를 안고 있던 팔 중 하나를 앞으로 뻗어 창을 받아내며 팔찌에 마력을 최대로 주입했다.
수호자 혈통의 힘이 전신을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화염의 창이 폭발하며 불길이 몸을 뒤덮었다.
"무슨 짓이야!? 애가 있었잖아!"
"아, 아니, 실수로...."
투란과 그에게 안겨 있던 소녀가 동시에 불길에 휩싸이는 것을 보며 얼음 활을 든 여인이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경악하여 두 눈을 부릅떴다.
마법을 그대로 받아낸 투란은 화상은커녕 그을린 기색조차 없이 멀쩡했다.
심지어 그가 품에 안고 있던 여자아이까지도.
"대체 뭔...."
"어떻게?"
똑같이 마법으로 상쇄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몸으로 받아내 버리다니?
수호자 마법기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로서는 상대가 방어에 특화된 혈통이거나 압도적인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투란은 상대가 겁먹은 것을 눈치채고 목소리를 낮게 깔아 위협했다.
"이 마을을 공격한 건 내가 아니다. 또 공격하면 그때부터는 이쪽도 자기방어를 하겠어."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빛에 겁에 질린 화염 창잡이가 얼른 두 손을 내리며 저항의 의사가 없음을 보였다.
잠시 후, 활잡이 여인 역시 겨눴던 활을 내려놓았다.
"비센."
"투란."
모든 싸움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법.
이름을 교환한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확 낮아졌다.
활잡이 여인, 비센이 투란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그쪽을 어떻게 믿어야 하지?"
"이 애가 일어나면 물어봐. 아무래도 진짜 범인을 본 것 같으니까."
"화형꾼을 봤다고?"
"화형꾼?"
"설마 모른다는 건가?"
투란의 되묻는 모습에 비센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몰라."
투란의 대답에 그녀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으며 설명해 주었다.
지난 몇 달 전부터, 이 주변에서 어느 정신 나간 마법사가 주기적으로 외진 마을을 습격해 사람들을 묶고 불태워서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놈은 화형꾼이라는 별명까지 붙어 인근 도시의 영주에게 토벌령이 내려져 있었으나, 생존자가 한 명도 없었기에 성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 투란에 의해 한 명이 구조되기 전까지는.
"그러면 이 애가 말해줄 수 있겠는데. 지금은 기절했지만 처음 발견했을 때 마법사가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말했거든."
투란은 거기까지 말한 뒤, 생존한 소녀를 다락문 옆에 눕히고 망토를 벗어 덮어 주었다.
이들의 기묘한 대치는 삼십여 분 뒤, 소녀가 다시 눈을 뜨는 것으로 끝났다.
"정신이 드니?"
"여긴...?"
"네 집이야."
투란은 아이가 놀라지 않게 자상한 목소리로 말하며 우선 가죽 물통에 든 물을 먹여 주었다.
소녀는 자신의 상황을 실감한 것인지 앳된 얼굴이 괴로움으로 물들었으나, 이내 투란의 요구대로 자신이 보았던 범인의 인상착의를 조목조목 읊었다.
"빨간 망토에, 얼굴은, 수염이 났고...나무꾼 아저씨처럼 험상궂었어요."
소녀는 사람들이 마법사에게 끌려갈 당시, 다락문에 숨은 채 눈만 내밀고 상황을 보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놈이 더 남은 사람이 있나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문을 닫은 뒤 빗장을 걸었다고.
어린아이답게 부족한 어휘력으로 어떻게든 설명하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자, 동그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소녀는 입술을 꾹 깨물며 울지 않았다.
고통과 시련은 이처럼 아이를 빠르게 어른으로 만드는 법이었다.
혹시나 힘으로 겁박당하고 있을 가능성까지 대비해 소녀를 데려와 다시 한번 질문한 뒤, 비센은 투란에게 정중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지만...."
투란은 그런 그녀를 한참 내려다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공격당한 것은 화가 났으나 우발적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공격당할 당시 아이의 안부를 걱정했다는 점 때문에 심하게 화내고 싶지 않았다.
귀족 중에 평범한 이들을 저렇게 아끼는 이는 흔치 않았으니까.
다른 세 명의 사과까지 받은 뒤, 투란은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혹시 그 화형꾼이란 놈을 잡으러 온 겁니까?"
"예. 불탄 지 얼마 안 된 곳에 사람이 있길래 이번에는 진짜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허탕이었다며 고개를 젓던 비센은, 그래도 이제는 인상착의를 확보했으니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저희 중에는 타고난 추적자가 있으니까요."
"추적자?"
투란이 놀란 표정을 짓자 비센이 아차, 하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동료 세 명 중 유난히 작은 체구의 여성이 있었다.
"설마, 당신들 자하르 가문 사람이었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엔릴 사막은 이곳에서 까마득히 먼 곳에 있을뿐더러, 심지어 여기서 서쪽으로 더 가면 아라비온의 영역이지 않던가.
이들이 메이사의 암살을 시도했던, 그 악명 높은 자하르의 암살 집단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하나같이 어수룩해 보이는데....
투란의 생각을 짐작했는지 비센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저희는-"
그러나 비센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빤히 바라보고 있자, 마침내 그녀가 자포자기한 듯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저희는 아바챠에서 왔습니다."
"아바챠라면, 카마인의?"
"비센 카마인입니다. 이들은 가신 가문에 속한 친구들이고요."
투란이 가려는 항구도시의 이름이 바로 아바챠, 카마인 가문의 거점임을 생각하면 실로 공교로운 만남이었다.
사실 이 마을이 크게는 카마인의 영향권 아래 있음을 생각하면 딱히 우연이랄 것도 아니지만.
"아샤는 선조 대에 자하르 귀족과 결합했던 집안의 후손인데, 그쪽 혈통이 약하게 발현해서 탐색 마법에는 능해도 은신 쪽은 재주가 없습니다."
여러 혈통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대가문의 혈통은 때때로 열화하는데, 보통은 결합하기 전의 능력 중 한 가지만 발현하는 형식이었다.
이런 경우를 '원시 혈통'이라 칭하며, 대가문 쪽에서도 굳이 핏줄을 수거하려 들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 열화된 혈통이 다시 결합하여 강해질 가능성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카마인 가문의 귀족들이 어쩌다 여기서 마법사 사냥을 하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썩 신중한 판단은 아닌 것 같군요. 그것도 기사들조차 동반하지 않았다면 더더욱."
모름지기 귀족이라면 한미한 가문 소속이라도 기사들을 한가득 동반하는 법 아니던가.
수행원, 혹은 투란이 싫어하는 방식이지만 고기방패 역할이라도 하도록.
그의 말에 비센 패거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아예 혼자 다니시는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게...."
"저는 충분히 제 안전을 책임질 수 있으니까요."
화염 창을 쏘았던 남자가 소심한 목소리로 말하자 투란은 당당히 답했다.
조금 전 화염 창을 그대로 받아내는 모습을 보인 만큼 그 말에는 설득력이 충분했다.
"게다가 네 분, 보아하니 그리 나이도 많지 않으신 것 같은데 가문에 허락은 받고 나오신 겁니까?"
움찔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넷의 정체가 가문 내에서 무단으로 이탈한 가출 귀족이라는 것을.
어린 귀족들이 기사 하나 대동하지 않고 이런 곳을 돌아다닐 이유가 그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마법사 사냥은 그만두고 돌아가시죠. 위험합니다."
화형꾼이란 놈도 만만한 시골 사람들이나 괴롭히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변변찮은 실력일 가능성이 컸지만, 이들은 그 변변찮은 마법사에게도 당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허술했다.
만약 투란이 이들과 싸운다면 모두를 사냥하는 데 길어야 십 분이 안 걸릴 정도로.
마력이 강하고 약하고 이전에, 그냥 다들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티가 풀풀 풍겼다.
"그건 안 됩니다."
비센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들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들은 가문 내에서 타고난 자질이나 승계 순위 등이 부족해서 밀려난 이들로, 그 때문에 가문 내에서 성장할 만한 마력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문에 공급되는 마수는 자질이 뛰어난 구성원들에게 먼저 돌아가는 만큼, 이런 식으로라도 힘을 보충하고 공적을 쌓아야 한다고.
이는 상당수 대가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 중 하나였다.
혈통이 강한 만큼 자식이 귀족급 마법사로 태어날 확률이 높지만, 그 모두에게 돌아가기에는 마수가 부족해지는 것이다.
아시즈처럼 '순례'를 다니는 것도 해결법 중 하나긴 하지만, 이 역시 비용과 안전 문제 등을 생각하면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기는 힘들었다.
기사들의 수 역시 한정되어 있으니까.
"투란 님, 혹시 화형꾼 사냥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미 저희가 네 명이라 마력은 좀 힘들겠지만, 놈에게 걸린 현상금은 모두 드리겠습니다. 아니면...제 몫의 마력을 양보할 수도 있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누님!"
"언니!"
"바보 같은 소리 마. 차라리 내 몫을 양보하고 말지."
비센의 말에 다른 세 명이 반발하는 것이, 아마 그녀는 이들 사이에서 꽤 괜찮은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투란은 미단을 떠올렸다.
도시 무레이에서 만났던 마수 사냥꾼들의 대장을.
"그 화형꾼이라는 놈, 어느 정도 실력인지도 안 알려진 겁니까?"
"귀족급 마법사인 건 확실합니다. 놈이 습격한 마을 중 몇 개는 특별히 기사가 여럿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도 모두 살해당했으니까요."
인근 도시의 영주가 아직 화형꾼을 토벌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보아하니 기사들로는 답이 안 나오고 귀족이, 어쩌면 가주가 직접 행차해야 하겠는데 어디 살고 뭐 하는 놈인지조차 모르니 쫓기도 힘들고 습격하는 시기도 지역도 제멋대로라 마을에서 머물며 기다리기도 힘들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과거 발타스 위쪽에 있던 원숭이 마수처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다 공격하는 흉포한 놈이라면 찾아가면 그만일 텐데.
인간 악당이란 이래서 마수보다도 성가셨다.
"좋습니다."
토끼 마수에 의해 찢겨 죽은 마수 사냥꾼들을 보았을 당시 기분이 썩 좋지 않았음이 떠올랐다.
아예 모르는 이들이라면 모를까, 이만큼 대화를 나눈 이상 이들이 죽는다면 그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될 것 같았다.
양치기 된 이가 양을 지키기는커녕 마구잡이로 죽이는 것 역시 기분이 나빴고.
무엇보다도, 만약 화형꾼이 생각보다 더 강한 마법사라면 좀 더 마력을 쌓을 기회기도 했다.
투란도 이제 귀족으로서 중견급 이상의 마력을 쌓은 만큼, 길가에 널린 하급 마수로는 쉬이 힘이 증가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함께 일하게 되었으니 여쭤보는 건데, 투란 님은 어느 가문에 속하셨습니까?"
"수호자 혈통의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사실 이제 자신의 혈통을 이 악물고 감출 이유까지는 없다만, 투란은 여전히 이를 숨겼다.
친해진 아라비온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가 소문으로라도 전해지는 것이 싫어서였다.
자하르의 은신 능력 자체가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가장 유용하기도 했고.
"그렇군요."
수호자부터 시작해서 육탄전에 특화된 혈통을 타고난 가문은 대부분 자신의 영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같은 귀족끼리의 싸움, 특히 대규모 전쟁에서 불리하다는 이유로 진작에 도태된 탓이다.
그나마 소수의 생존자는 하람처럼 다른 가문의 가신으로 머무르거나 방랑하는 경우인데, 비센 패거리는 투란이 그런 방랑 귀족이리라 여겼다.
어쨌든 상당한 실력자인 것은 확실하니 그것이면 충분했다.
* * *
투란과 비센 일행은 가장 먼저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인 소녀를 근처의 다른 마을로 데려갔다.
그곳의 촌장은 갑자기 하늘 같은 귀족들이 들이닥쳐 옆 마을의 어린아이를 떠맡기자 반쯤 넋이 나간 듯 보였다.
"여기, 돈은 충분히 줄 테니 어른이 될 때까지는 잘 돌봐주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무렴요!"
"몇 년 안에 다시 확인하러 오겠다."
물론 어지간해선 그가 다시 확인하러 올 일은 없겠지만, 이렇게 말해 놓아야 함부로 대하지 못할 터였다.
투란은 작은 마을의 주민들이 외부인, 그중에서도 어린아이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직접 겪은 사람이었다.
"다정하시군요. 아무 관계도 없는 평민 여자아이인데."
"네, 뭐."
투란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네 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청년, 케벡이었다.
그는 치유사 혈통으로, 본래 비전투적인 혈통은 우선순위가 높아서 가출할 필요가 없으나 비센과의 의리 때문에 함께 나온 것이라고 했다.
투란의 몫으로 돌아갈 마력을 양보한 것도 그였다.
"비센 씨에게는 관심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 무슨...."
"태도에서 티가 많이 나더군요."
투란의 말에 케벡이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솔직히 말해서 태도로 알았다기보다는, 케벡이 비센을 바라볼 때 발정하는 냄새를 풍겨서였다.
아마 투란처럼 후각이 뛰어나다면 저 아샤라는 반쪽짜리 자하르 혈통 아가씨도 알고 있지 않을까.
"무슨 이야기들 하고 계시는지?"
"아무것도 아니야!"
촌장과 몇 마디를 더 나누던 비센이 돌아오자 케벡이 다급히 이를 수습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투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 애가 했던 말이 신경 쓰이는군요."
"진짜일까요?"
"모르겠습니다. 들어본 적도 없는 이야기라...아마 미치광이의 헛소리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투란이 구했던 소녀는 옆 마을로 가는 도중, 지하실에서 화형꾼이 하는 말을 몇 마디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 내용이 참으로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여기 제물을 바칩니다, 신이시여! 당신의 후예가 혼과 살점을 태움으로써 당신들을 향해 나아가고 있나이다!]
마법사는 주민들을 죽이며 자신이 신과 가까운 존재가 되어간다 외쳤다고.
소녀는 그렇게 증언했다.
23화
아득히 먼 고대, 지상에 강림한 프레아 신족은 이종족들의 가축이자 노예였던 인류를 해방하고 옛 제국을 세웠다.
비록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제국이 몰락하고 여러 마법사 가문이 난립하는 세상이 되었다지만, 모든 인간은 아직도 그들을 신으로 섬겼다.
그리고 이들을 섬기는 경전의 첫 장에 적힌 가르침이 바로 마법사와 인간의 관계를 논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마법사를 섬길 것, 마법사는 인간의 위에 군림하며 또한 보살필 것.
군림과 보살핌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는 가문이나 개인차가 있지만, 일단 큰 틀에서는 그러했다.
만약 화형꾼의 주절거림이 진짜라면 많은 마법사 가문이 신의 가르침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해야 할 터였다.
불탄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서, 비센 일행은 이를 주제 삼아 토론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데. 솔직히 그런 게 가능했으면 지금까지 해본 사람이 있었겠지."
"맞아. 세상에 미친 놈이 어디 한둘인가?"
"하지만 신의 핏줄이 세상에 퍼진 지가 수천 년인걸. 이종족이 아니고서야 마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않겠어? 제대로 다룰 수조차 없는 수준일 뿐이지."
"하긴 윗대로 오르고 오르면 다들 마법사 한 명쯤은 있을 테니까...."
만약 일반인을 죽여서 마력을 얻어낼 수 있게 된다면 세상은 전보다 몇 배는 더 잔인해질 것이다.
전쟁할 때마다 적대 가문의 일반인들을 잡아다 몰살시키거나, 위기에 몰린 이들이 다스리던 일반인들을 죽여 힘으로 삼으며 최후의 반격을 노리거나.
물론 정말로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진작에 널리 알려졌을 가능성이 컸다.
평범한 인간도 마수를 잡으면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미신만 해도 무수히 많은 마수 사냥꾼을 양산했으니.
이윽고 비센 일행은 두 가지 의견을 두고 대립했다.
굳이 헛소문일 게 뻔한 이야기를 캐물을 필요 없이 바로 죽여버리자는 이가 둘, 그래도 알아두면 나쁠 것 없지 않으냐며 제압하고 물어나 보자는 것이 둘.
만약 진짜라고 한들 그런 것을 알아서 어디 쓸 것이냐, 중범죄자라도 쓰면 될 것 아니냐, 한참 토론하던 도중 한 명이 투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투란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선은 죽인다는 전제로 공격하고, 제압할 수 있으면 그때 제압해 보죠."
사람을 죽여 힘을 얻는 방법 따위는 알아도 쓸 생각 따위 없지만, 그와 별개로 알고는 있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했다.
불편한 일이라고 해서 그냥 눈을 감는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토론이 끝날 때쯤, 불탄 마을의 잔해가 눈앞에 들어왔다.
"아, 다 왔다."
"그러면 추격을 시작해 볼까. 아샤?"
"네!"
"가장 앞에 서서 탐색해. 뒤에는 내가 서고 가운데는 길과 케벡이, 뒤쪽은 투란 님이 서주시길 바랍니다."
"좋습니다."
투란은 비센의 요청에 대답하며 조금 전 실수로 화염 창을 쏘았던 남자, 길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는 마수를 길들이는 능력을 지닌 조련사 혈통이지만 본인이 가질 마력조차 부족한 탓에 쓸만한 마수를 데리고 있지 않았다.
거기다 실수로 창을 쏘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 넷 중 가장 어리고 미숙했고.
"이제부터...찾아볼게요."
아샤는 두 눈을 부릅뜨고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
당장 떠오르는 탐색 조건이라면 '인간 남자의 발자국'이나 '붉은 옷감' 정도일까.
투란이 생각하기에 전자는 마을 내에 지나치게 흔적이 많을 것이고, 후자는 옷이 어디 걸려서 찢어지지 않고서야 흔적이 별로 남지 않았을 것 같았다.
"어때?"
"좀 더 둘러봐야 할 것 같아요."
"좋아, 움직이자. 어디로 가면 돼?"
투란은 나서지 않고 가만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반쪽짜리 자하르의 추적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본인의 마력을 보존해두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추격에 나선 아샤는 작고 앳된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신중하고 노련한 사냥꾼의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가장 먼저 일행을 어떤 길로 인도하더니, 그것이 대로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고개를 젓고는 다시 마을로 돌아갔다.
그러한 과정을 세 번 반복할 때쯤, 투란은 질문을 던졌다.
"혹시 지금 어떻게 찾고 있으신 겁니까?"
"인간 남자의 발자취를 찾은 뒤에, 큰길로 이어졌을 때쯤엔 잿가루의 냄새를 찾았어요. 거기서 옷을 갈아입거나 하지 않았다면 옷에 재가 묻었을 테니까...."
그녀의 탐색 방식은 꽤 전문적이었다.
이전에는 왜 이렇게 찾지 못했던 것일까?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성별을 알 수 없다는 것이 큰 문제였을 터였다.
보통 남자가 여자보다 바깥을 많이 나돌아다닌다지만 찾아야 할 대상이 두 배로 늘어나는 셈이니.
거기다 이렇게 빨리 피해 현장을 찾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추적하고 도중에 마력이 떨어져서 쉬고를 몇 번 반복했을까.
슬슬 날이 어둑해질 때쯤, 열세 번째 흔적을 쫓던 아샤가 탄성을 터트렸다.
"찾았다!"
"잠깐, 아샤! 조금만 천천히 달려!"
냅다 뛰어간 그녀의 뒤를 쫓아 도착한 곳은 웬 천연 동굴 앞이었다.
사람이 살기에는 턱없을, 기껏해야 작은 동물이나 드나들 법한 크기의.
"여기?"
"고양이보다 큰 동물이 들어갈 수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잠시."
투란은 쑥덕거리는 그들 사이로 지나간 뒤 천연 동굴 한편에 세워져 있던 바위를 옆으로 밀었다.
마력의 작용이 더해지자 사람 두 명 크기의 바위가 쿵 하고 기울며 큼직한 입구가 드러났다.
"이런 식으로 드나들었겠군요."
"우와...."
"돌 구르는 소리가 너무 컸습니다. 안쪽에도 들렸을 거예요."
"그렇다고 문을 안 열 수는 없잖습니까. 일단 들어갑시다."
전투가 임박했고 상대의 위치도 확보된 만큼 대형을 바꿔서 투란과 비센이 선두, 나머지 셋이 뒤에 섰다.
발광 마법으로 주변을 비추는 작은 광체(光體)를 하나 생성하며, 비센이 아샤에게 물었다.
"안에 사람은?"
"있어요. 한 명...."
"놈이겠군. 범죄자가 아니고서야 이런 곳에 혼자 있을 이유가 없지."
투란은 자하르 혈통 특유의 야간 시야 능력으로 빛에 드러나지 않는 동굴 내부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사람이 가공한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황량한 모습....
아무리 귀족이라 한들 며칠 정도면 모를까, 이런 곳에서 오래 거주하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불편한 일일 터였다.
그런 것까지 감수해야 할 만큼 이곳에서 저지른 살인이 중요했던 것일까.
잠시 후, 그들은 동굴 가장 깊은 곳에서 공터를 발견했다.
천장에는 환기를 위해 뚫린 듯한 작은 구멍이, 구석에는 담요와 나무토막으로 만들어진 원시적인 이부자리와 무엇인지 모를 용액 몇 개가 든 냄비가 있었다.
벽에는 횃불 몇 개가 타오르며 주변을 밝혔다.
그렇게 만들어진 쉼터의 한가운데에서, 한 남자가 그들 일행을 기다렸다는 듯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이런 외진 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 손님들?"
후드가 달린 붉은 로브-아마 아이는 그것을 망토로 착각한 모양이었다-에 험상궂은 얼굴과 수염까지, 소녀에게 들은 인상착의 그대로였다.
몸에서는 미처 완전히 씻기지 않은 잿가루 냄새가 은은히 풍겼다.
아샤가 작게 속삭여 이를 알렸다.
"냄새가 나요, 저놈이 맞아요."
그때, 투란은 그들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기이할 정도로 맑은 저 눈빛....
얼마 전 떠올린 마수 사냥꾼 미단의 눈빛과 놀랍도록 닮은 눈빛이었다.
얼굴 생김새만 아니면 본인이 아닌가 싶었을 정도로.
투란이 그 사실에 의아해하는 사이, 비센이 어느새 만들어낸 얼음 활에 화살을 메기며 물었다.
아마 한 번 착각한 것 때문에 다소 자신감이 떨어진 것 같았다.
"맞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묻겠어. 네가 인근 마을에서 주민들을 잡아다 태워 죽이고 있는 살인마냐?"
비센의 질문에 화형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말인지 잘-"
상대의 손이 앞으로 쭉 내밀어지는 것을 보며 투란은 곧장 사고 가속과 수호자 마법기를 모두 사용했다.
그와 함께 그들이 서 있던 장소 좌우에서 꽝 하고 폭발이 일어났다.
"아-악-!"
"뭐-!?"
폭발의 근원지는 동굴의 구석, 정체 모를 새카만 가루가 든 자루.
수호자 마법기를 사용한 투란, 그리고 그런 투란이 의도치 않게 방패막이가 되어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아준 비센은 괜찮았으나 뒤에 있던 셋은 폭발로 인한 압력과 열기를 고스란히 뒤집어쓰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무리 애송이라지만 귀족 세 명을 순식간에 무력화하다니,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강력한 함정이었다.
'뭐지?'
투란이 놀라면서도 반격을 위해 돌멩이를 쟁여놓은 투석구를 한 바퀴 빙글 돌렸을 때, 비센이 한발 앞서 화형꾼을 향해 얼음 화살을 쏘았다.
그녀의 화살은 소리보다도 빠르게 날아 놈의 허벅지를 꿰뚫고 다리를 얼어붙게 했다.
"악!"
하지만 화형꾼은 허벅지가 꿰뚫려 주저앉으면서도 반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놈이 손바닥으로 땅을 내려찍자 주변의 암석이 일그러지며 손의 형상으로 비센과 투란을 덮쳤다.
대지 변이, 그것도 이 정도 거리에서 이런 속도와 규모라면 상당히 수준급의 마법이었다.
'이건...?'
불로 사람을 태워죽인 것 때문에 당연히 방화광 혈통일 거라고 짐작했건만.
이런 기량이라면 대지를 다루는 데 특화된 땅지기 혈통일 가능성이 컸다.
"꺄악!"
비센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여 암석의 손에 붙들리는 사이, 투란은 가속된 사고 속도 덕에 재빠르게 몸을 날려 그를 덮쳐오는 암석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곧바로 준비 중이던 돌팔매를 날리자 익숙한 파열음과 함께 투란 쪽을 겨누던 화형꾼의 오른손이 그대로 분쇄됐다.
"끄아아아아악!"
투란은 손이 날아간 고통에 절규하는 화형꾼에게 접근하며 왼쪽 손을 두 차례 비볐다.
극미량의 마찰전기를 증폭하여 만들어지는 전격 마법.
아직 정밀 조준은 어렵지만, 그래도 이 정도 거리에서 사람을 맞추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빠직 솟아난 번갯불이 가슴을 강타하자 화형꾼은 그대로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바닥에 고꾸라졌다.
확실히 번개 계열 주문이야말로 상대를 제압하는 데 가장 적합한 기술이었다.
위력이 과하면 순식간에 살상 기술로 변하지만.
"해, 해치웠습니까?"
"아마도요."
투란은 뒤에서 물어보는 비센에게 짧게 대답하며 화형꾼의 숨이 아직 멎지 않았는지 확인한 후, 완벽히 제압하는 과정을 진행했다.
가지고 있던 덩굴 씨앗 몇 개를 바닥에 뿌린 뒤 성장시켜 두 팔을 뒤로 감아 묶고, 다른 한 가닥으로는 눈을 휘감아 앞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마법을 써야 할 방향을 가늠하게 하는 시야, 그리고 목표 지정에 도움이 되는 팔을 제압당한 상태에서 유의미한 저항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를 풀고자 마력을 집중하는 순간 식물을 지배하고 있는 투란에게 바로 신호가 가니 죽여버리면 될 것이고.
유일한 단점은 식물을 강화하고 지배하는 데 투란의 마력이 소모되기에 너무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 제압했으니 저 세 명부터 신경 써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예상은 했지만 투란이 함께 오지 않았으면 이들 넷은 진작에 천상의 궁전으로 떠났을 게 분명했다.
이놈은 침입자를 맞이할 준비를 충분히 해둔 것 같았으니.
비센이 치유사 케벡을 깨워 다친 셋을 치유하는 사이, 투란은 단검의 면 부분으로 화형꾼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어이, 일어나."
"으으...."
"그만, 마력 더 일으키면 바로 죽인다."
신음과 함께 일어난 화형꾼이 본능적으로 마력을 일으켜 팔목을 휘감은 덩굴을 치우려고 하길래, 투란은 곧바로 목에 칼을 들이대며 을렀다.
화형꾼은 상황을 이해한 듯 얌전히 순응했다.
"너희들은, 대체 누구야, 어떻게 여길...?"
"다 방법이 있지. 그래서, 네가 화형꾼 맞지?"
"그게-"
상대가 뜸 들이는 모습을 본 투란은 곧바로 허벅지에 단검을 콱 박았다.
거친 비명이 동굴에 울려 퍼졌다.
"빨리 대답해."
일반인 수백 명을 불태워 죽인 학살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 따위 뭐가 있을까.
으르렁거리는 투란의 목소리에 화형꾼이 덩굴로 휘감긴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치료를 마친 비센 일행이 투란의 뒤로 다가왔다.
"덩굴로 제압하신 건가요?"
"수호자 혈통의 귀족이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줄은 몰랐는데...."
"우선 물어볼 것부터 물어보죠."
오래 제압하기 힘들다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화형꾼 놈이 듣고 시간만 끌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다행히 놈은 그리 심지가 굳은 편이 아니라서 심문은 금방 진행됐다.
본명은 오빌 크라프, 78세, 이곳에서 한참 남쪽에 있는 크라프 가문의 귀족이라고 했다.
지금은 가주인 형과 의절해서 방랑하는 중이고....
"그래서, 방랑 귀족께서는 왜 이곳의 마을 사람들을 태워 죽이고 계셨는지?"
"신께서, 신께서 말씀하셨다. 죄 많은 이들의 혼과 살을 태우면 당신들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뭐?"
"너희는 날 이렇게 대해선 안 돼. 나는 곧 대가문의 시조가 될 사람이니까!"
횡설수설하는 화형꾼 오빌의 말에 의하면, 어느 날 신이 그에게 다른 혈통의 힘을 얻는 여러 비법을 알려 주었다는 것이었다.
이미 다른 귀족들 몇 명도 그것으로 새로운 혈통 능력을 얻는 것 역시 보았다고.
그중에서 오빌이 진행한 것은 방화광 혈통을 얻을 수 있는 비법으로, 이를 위해서는 한 번에 다수의 인간을 태우며 그들의 잿가루를 몸으로 뒤집어쓰는 의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이제 앞으로 몇 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고, 그러니 자신을 풀어달라고 애원하며 몸을 비틀었다.
"...그냥 미친놈 아냐?"
"그러게."
듣기만 해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에 비센 일행은 오빌을 비웃었다.
하지만 투란은 그럴 수 없었다.
'평범한 사람도 마수를 죽이면 그 힘을 얻을 수 있어! 내가 이미 그런 마법사를 몇 명이나 봤다니까?'
수상쩍은 미신, 누군진 몰라도 같은 사례가 이미 몇 개나 있다는 주장....
그냥 눈빛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오빌의 주장은 과거 미단이 하던 것과도 놀랍도록 비슷한 형식이었다.
24화
이후, 계속된 추궁과 고문에도 오빌은 횡설수설하기만 하며 의미 있는 정보를 뱉어내지 않았다.
어떤 신이 알려주었느냐는 질문에는 '신이었다', 너와 같은 이들이 누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여럿 보았다'라는 식의 답변을 반복할 뿐.
정신이 온전하지 않거나, 그런 척 연기하면서 어떻게든 탈출할 틈을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투란이 짐작하기에는 두 번째일 가능성이 컸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면 본능적으로라도 마력을 써서 덩굴을 풀려다가 그의 손에 죽었을 테니까.
어차피 둘 중 어느 쪽이어도 더는 살려둘 이유가 없는 데다 구속을 유지하느라 마력도 많이 소모했기 때문에, 투란은 비센과 손짓으로 간단히 의견을 교환한 뒤 오빌의 목을 단검으로 베어 죽였다.
그 모습을 보며 비센 일행 중 가장 어린 길이 인상을 찌푸렸다.
"윽...."
"왜 그래?"
"아뇨, 그냥 좀."
저항하지 못하는 이를 묶어놓고 죽이는 것이 마치 도축하는 것 같아 꺼림칙하다고, 중얼거리는 말에 비센이 한숨을 내쉬며 질책했다.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자칫 잘못했으면 우리 모두 여기서 죽었을 텐데 동정심이 들어? 거기다 놈이 죽인 사람이 몇 명인지 생각하면 살려둔 채로 끌고 가서 더 고통받게 해도 시원치 않아!"
"이만한 실력의 귀족을 상대론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지만 말이야."
치유사 케벡이 덧붙이듯 말했다.
그가 말한 대로 죽음을 확신하고 날뛰는 마법사, 그중에서도 귀족을 제압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눈과 손이 제압되어 있다고 한들 불을 아무 곳에나 피운 뒤 사방으로 쏘아댈 수는 있으니까.
이를 막자면 마력을 억제하는 마법기로 구속하거나-굉장히 희귀한 물건이었다-그보다 힘이 몇 단계쯤 월등히 강한 귀족이 직접 제압하고 있어야 했다.
아니면 계속해서 전격 주문이나 물리적인 타격으로 기절시키는 것도 방법일 것이고.
오빌을 바로 불구로 만드는 대신 굳이 번거로운 방법으로 제압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다짜고짜 몸을 훼손하면 묻는 말에 답하는 대신 어차피 살 수 없다고 생각해서 발악하리라 짐작한 것이다.
비센 일행이 떠드는 사이, 투란은 단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아까 이부자리 옆에서 주운 수첩을 펼쳤다.
그 안에는 이곳 주변의 지도와 습격 계획, 죽인 사람의 숫자 등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아마 자신이 몇 명을 죽였는지, 그리고 목표치는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이를 오빌이 화형꾼이라는 증거로 가져가면 될 것 같았다.
이것으로 부족하면 마을에서 구출했던 소녀를 증인으로 불러도 될 것이고.
또한, 이 수첩 뒤쪽에는 정체 모를 조합식 같은 것이 여럿 적혀 있었다.
풀이나 광물 따위의 이름이 적힌 것으로 보아 아마 공터 구석에 놓인 용액들의 제작법인 듯했다.
이에 대해 오빌에게 물어봤을 때는 마찬가지로 '신께서 알려 주셨다'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 '신'의 정체를 짐작할 단서가 될까 싶어, 투란은 수첩의 내용을 머릿속에 넣어 두었다.
다 읽은 수첩을 주머니에 넣자 비센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면, 이제...."
"흡수하죠."
투란과 비센, 길, 아샤까지 네 명이 죽은 화형꾼의 시체 주변으로 모였다.
치유사 케벡만이 아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물러선 가운데, 네 사람이 손을 뻗자 오빌의 몸에서 연녹색 광채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온몸을 타고 흐르는 힘이 육체를 변이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더 강한 육체, 더 날카로운 감각, 더 강대한 마력....
흡수가 모두 끝난 뒤, 그들은 화형꾼의 잘린 목과 로브 등 증거가 될 만한 물건들을 챙겨서 동굴 밖으로 나왔다.
화형꾼이 주로 활동한 지역은 마로브라는 도시의 변두리라, 투란과 비센 일행은 다음 날 아침 마로브 시의 시청을 찾아가 현상금을 찾았다.
공무원들은 우르르 몰려온 귀족들을 보며 혼비백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가 직접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축하하오, 비센 양. 카마인 가문에 새로운 별이 떠올랐구먼그려."
"과찬이십니다."
우습게도, 막상 도착해 보니 오빌의 정체를 입증할 증거 따위는 별로 필요하지도 않았다.
마로브의 영주는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대가문 출신의 마법사와 굳이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잡아 온 화형꾼이 가짜라서 또 사건이 일어나면 오히려 그것으로 빚을 지울 수 있겠다고 계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하루 간 마로브 시에서 손님으로 대접받은 뒤 얻어낸 현상금이 총 금화 천오백 닢.
마력을 받는 대신 현상금은 공평히 분배하기로 했기에 본래는 삼백 닢이 투란의 몫이었는데, 최종적으로는 분배를 조금 조정해 총액의 절반인 칠백오십 닢을 받게 되었다.
전투만 보면 투란이 거의 다 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추적에서는 아샤가, 현상금 수령에서는 비센의 이름값이 기여한 바를 고려한 결과였다.
'이건 너무 빵빵한걸....'
문제는 이 금화 칠백오십 닢의 부피와 질량이었다.
처음 언덕을 내려올 당시 쓰던 낡은 양가죽 가방은 진작에 처분했고, 지금 그가 쓰는 것은 자빌린 시의 상점에서 산 소 마수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가방이라고 한들 크기 이상의 용량을 담기란 힘든 법.
이래서야 어디서 금화를 처분하거나 짐 들어줄 사람이라도 하나 구해야 할 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엔릴 사막으로 가는 데 드는 돈이 이 정도는 아닐 테니까.
"그러면 이제 저희는 마수나 좀 사냥하면서 더 돌아다녀 볼 생각인데, 투란 님은?"
"저는 곧바로 아바챠로 갈 생각입니다."
"아...."
투란의 거절에 비센 일행은 아쉬워하면서도 다행스러워하는 다소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가 합류하면 사냥은 훨씬 안전하고 편해지겠지만 넷 중 누군가가 마력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헤어지기 전, 비센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놈이 남긴 이야기는...."
"예, 다른 곳에 떠벌리고 다니진 않을 겁니다."
도시로 오는 길, 투란과 비센 일행은 화형꾼이 주장했던 바를 비밀로 하자고 합의했다.
그 말이 진실이건 거짓이건 사회를 지나치게 혼란에 빠트릴 만한 이야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투란은 그녀에게 자신이 의심하는 바를 모두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그럴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었을뿐더러, 그로서도 그 이상한 눈빛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기 어려워서였다.
'기이할 정도로 맑은 눈빛'이라고밖에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세상에 눈빛이 맑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던가.
어차피 이에 대해 당장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당장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아보러 가는 것만으로도 빠듯한 처지였으니까.
서쪽으로 움직이는 가출 귀족 무리를 마지막으로 바라본 뒤, 투란은 자신의 목적지인 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묵직해진 가방을 멘 채 동쪽으로 가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얼굴로 불어오는 맞바람이 습기를 머금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맡아본 적 없는 비릿하고 짭짤한 냄새 역시.
'여기선 화염 마법을 다루기가 까다롭겠는걸.'
예상대로 손바닥 위에 불꽃을 만들자 그 화력이며 마력 소모량까지 모든 것이 나빠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대신 허공에서 물을 만들어내고 얼리는 마법은 놀랍도록 쉬워졌고.
덤으로 북해 쪽은 구름이 많이 낀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하늘에서 번개를 내리치게 하는 낙뢰 주문도 조금 더 연습 비중을 높였는데,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맞은편에서 오던 무리를 몇 차례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했다.
투란의 걸음이 멈춘 것은 마침내 그 앞에 새파란 물의 세상이 펼쳐졌을 때였다.
이 세상의 천장이라 불리는 거대한 바다, 북해(北海)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오...."
책에서 삽화로 본 적은 있지만, 직접 바다를 보고 나니 그 삽화가 실물을 반도 담아내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의 광채가 바닷물 위로 이지러지는 절경이란.
한참 멍하니 서서 바다를 구경하던 투란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바닷가를 따라 쭉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쪽으로 툭 튀어나온 거대한 반도(半島)지형이, 그리고 수십 척의 범선이 늘어선 항구가 보였다.
카마인 가문의 거점이자 북해 최대의 항구도시, 아바챠에 도착한 것이다.
"빨리빨리 내려!"
"옙, 지금 바로 갑니다!"
"이 띨빵한 새끼야! 빨리 내리랬지 대충 내리랬냐! 그거 떨어트렸다가 부서지면 죽여버린다!"
아바챠의 항구는 그야말로 열기로 가득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이제 슬슬 초겨울이 다가오는 날씨임에도 선원들은 웃옷을 벗어젖힌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짐을 날랐고, 무엇이 그리도 급한 것인지 욕설과 고함이 사방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주변을 좀 더 돌다 보니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물고기가 범선 한쪽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작살로 사냥한 듯 몸에 막대기 몇 개가 꽂혀 있었는데, 아마 물고기가 변이한 마수인 것 같았다.
책에서 말하기를 바다의 마수는 육지의 동물들이 변한 것보다 훨씬 크다더니, 확실히 그랬다.
선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항구를 벗어나니 비교적 한적해 보이는 과일 노점상 하나가 보였다.
다른 지역과 교역하는 곳이라 그런지, 지금껏 본 적 없던 다양한 과일이 놓여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뭘 드릴까?"
"저거 한 줌 주시죠."
무레이 시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작은 갈색 열매를 고르자 과일상은 무엇인지 모를 그것을 퍼담으며 무려 은화 한 닢을 불렀다.
"너무 비싼데."
"이건 대추야자요. 저 먼 엔릴 사막에서만 나는 놈이지. 배 타고 온 게 비싼 건 당연하잖소."
그가 외지인임을 한눈에 알아봤는지, 과일상은 능글맞은 말투로 물건을 포장했다.
어차피 은화 한두 닢으로 흥정할 처지도 아니라, 투란은 무레이에서 마수를 사냥하고 받았던 은화 한 닢을 내고-이곳 화폐에 비해 크기가 작아서 동화도 두 개 주었다-대추야자를 산 다음 물었다.
"안 그래도 그 엔릴에 한번 가보고 싶은데, 혹시 배를 타려면 어디서 알아보면 됩니까?"
"엔릴로 가는 배? 그쪽은 어지간하면 무역선밖에 안 다닐 텐데...무역선 선장들에게 직접 문의해 봐야지. 그런데 어지간해서는 힘들 거요."
사람이 좋은 것인지, 그게 아니면 대추야자를 팔아서 기분이 좋은 것인지 과일상은 꽤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보통 무역선이란 한계치까지 물자를 꽉꽉 채워 넣는 탓에 손님을 태울 여유가 없으며, 누구를 태우려면 그만큼 교역품을 담을 여유가 없어지기에 비싼 돈을 부를 거라고.
"무역선 선장들은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글쎄? 그건 나도 잘, 아마 낮에는 다들 바쁠 테니 저녁에 술집 같은 곳에서 선원들을 통해 찾아보시구려."
"조언 감사합니다."
노점상을 벗어난 투란은 관광 삼아 적당히 아바챠 시 내부를 이곳저곳 구경했다.
도중에 괜찮은 극장을 찾아 연극까지 한 편 보자 날이 어둑하니 저물었다.
'가볼까.'
해가 떨어져 다른 가게들이 문을 닫을 때, 항구 주변의 술집들은 선원들을 손님으로 받아 등불을 밝힌 채 시끌벅적한 소음으로 제 존재를 알렸다.
투란은 그중 비교적 번듯하고 깔끔해 보이는 술집을 하나 찾아 들어갔다.
과거 들렀던 귀족 가문의 저택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고급스러운 시설에 종업원이며 손님까지 번듯한 차림들을 한 것이 고급 선원을 대상으로 하는 술집이 분명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투란은 빈자리에 앉아 포도주 한 잔과 간단한 안주를 주문한 뒤 가만히 앉아 주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녀석이 여기 어울리는 손님인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종업원은 돈을 내자 넙죽 고개를 숙이며 그를 손님으로 받아들였다.
이곳 기준으로는 제법 고급일 치즈와 포도주 한 세트를 음미하며 삼십 분 정도 기다리자 원하던 화제가 나왔다.
"자네는 내일 출항이던가?"
"맞아. 또 그 지긋지긋한 사막으로 가야 한단 말이지...항로에서 인어들도 나오고, 그놈의 빌어먹을 해적들은 또 어찌나 극성인지 말이야."
"그 정도라고?"
"지난번에 올 때도 배에 구멍이 뚫렸었다니까? 우리 선주는 미친놈이야. 아무리 그래도 기사 한 명은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삼십 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둘이 술에 불콰하게 취해 대화를 나누는데, 그중 한 명이 자기네 선주(船主)가 빌어먹게 짠돌이라서 배에 기사 한 명 고용하지 않는다고, 그 때문에 오는 길에 선원이 몇 명이나 죽었다고 한탄하고 있었다.
가만히 이를 듣던 투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있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실례 좀 해도 되겠습니까."
"음?"
"물건 안 사오. 제길, 여기도 이제 웬 잡상인이 다-"
투란은 가볍게 손을 뻗어 종업원을 부르려는 남자를 제지했다.
"잡상인 아닙니다. 승객이라면 모를까."
"승객?"
"엔릴 사막으로 가는 배를 찾고 있습니다만, 옆에 계신 분이 그곳으로 가는 배를 타신다길래."
투란의 말에 두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한 것처럼 우리 배가 내일 가긴 하오만, 일반 손님은 안 받소. 사람 한 명 태우면 그만큼 화물을 덜어내야 하거든. 선원도 부족할 지경이야."
과일상에게 들은 것과 기막힐 정도로 일치하는 이야기였다.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이 마시던 포도주잔에 손을 얹었다.
"배에 마법사가 필요하다고 하던 것 같길래."
검붉은 액체가 사르륵 얼어붙는 것을 보며 두 선원이 입을 벌렸다.
25화
"어, 설마...?"
포도주를 얼리는 것쯤이야 그와 같은 수준의 마법사에게는 기술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것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선원들을 기겁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보통 선장 정도는 되어야 마법사와 같은 높으신 분들을 직접 대할 자격이 생기기 때문.
자신이 기사인지 귀족인지 밝히지 않았다지만, 일개 선원들로서는 어느 쪽이건 하늘 같은 상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귀하신 분을 누추한 곳에...."
"편하게 얘기하셔도 됩니다. 이쪽이 고용해달라고 요청하는 처지이니."
"아뇨, 그건 좀."
투란의 정중한 말투에 선원들은 오히려 더 불편함을 느끼는 기색이었다.
사람의 본성이란 게 힘없는 이가 고개를 숙이는 것은 비굴한 것으로 보고 얕잡아보지만, 힘 있는 이가 고개를 숙이면 오히려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쩔쩔매기 마련이니.
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을 만나며 배운 바 중 하나였다.
"그래서, 가능합니까?"
"예?"
"배에 승객으로 타는 것 말입니다. 당연히 해적이나 인어가 습격한다면 격퇴하는 데 힘을 보탤 겁니다."
"제 권한으로는 결정하기가 어려운 일이라."
"그러면 선장님과 만나야겠군요."
"바로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투란의 요청에 엔릴 사막으로 가는 배를 탄다던 선원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는 자기만 놓고 가지 말라는 듯 애처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으나, 일어난 선원은 쌩하니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설마 저러고 도망가 버리는 건 아니겠죠?"
"서, 설마요, 하하...."
두 사람은 이후 십 분 가까이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가만히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선원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나갔던 동료가 선장을 데려오는 것으로 침묵이 끊겼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또 마시자고."
두 선원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떠났던 선원이 불러온 이가 투란의 맞은편에 앉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왼쪽 눈에 안대를 찬 사십 대 남자.
검게 탄 피부와 깊게 팬 주름살이 연륜을 느끼게 했다.
"청새치 호의 선장, 피레스라고 합니다."
"투란입니다."
그 정도 직급이면 마법사도 많이 만나봤다는 것인지, 피레스는 선원처럼 굽실거리는 대신 관찰하는 듯한 눈빛으로 투란을 바라보았다.
잠시 말없이 시선을 교환한 뒤, 먼저 입을 연 것은 피레스였다.
"제 배에 타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예."
"우선 좀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면 좋겠군요. 종업원! 남는 개인실이 있나?"
"있습니다, 선장님."
피레스는 이 주점이 익숙한 듯, 종업원에게 요청해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에 앉자 그가 가장 먼저 꺼낸 주제는 투란의 정체였다.
"우선...귀족이십니까, 아니면 기사십니까?"
"기사입니다."
투란이 자신의 신분을 낮춘 것은 선장이 지나치게 겁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선상 반란을 일으킨 기사는 창칼로 무장한 선원 수십 명이 덤벼들면 어찌 해결될 수도 있지만, 귀족에게는 식후 운동 수준에 불과하니까.
예상대로 투란이 기사라는 이야기를 듣고 선장은 좀 더 편해진 기색이었다.
"이렇게 비공식적인 경로를 선택하신 것으로 보아 카마인 가문에 속하신 분은 아니겠군요. 혹시 엔릴로 가시는 사정은...?"
"개인적인 일입니다."
"하긴, 그렇겠지요."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드러내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냥 혹시나 해서 찔러본 정도인 것 같았다.
피레스 선장이 갑자기 목소리를 확 깔며 말했다.
"저희가 말씀하신 대로 기사가 필요한 건 맞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전투 능력이 충분하신지를 알지 못하면 고용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기사는 귀족과 달리 각각 마력량에서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전투 능력까지 비슷하지는 않았다.
모자란 마력량을 벌충하기 위해 수련하는 육탄전과 무기술 실력부터 마법 실력, 전투 경험까지 꽤 다양한 요소가 요구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레스가 보기에 투란은 썩 믿음직한 실력자인 것 같지 않았다.
잘해야 스무 살 언저리쯤 되었을 앳된 얼굴은 생채기 하나 없고, 무기도 허리에 찬 단검 한 자루뿐.
그나마 가점 요소라면 제법 잘 단련된 것처럼 보이는 다부진 체격 정도였다.
"실력이라, 어떻게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제가 마법사는 아닙니다만, 바다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익혀야 할 필수적인 기술 몇 가지는 압니다. 물과 얼음을 다룰 수 있으십니까?"
마침 오는 동안 연습했던 기술들이었다.
투란은 종업원을 불러 물 한 잔을 가져오게 한 뒤, 피레스가 보는 앞에서 가볍게 조작해 보였다.
물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순식간에 기화하거나 얼리기, 얼음의 형태를 변형하기, 마지막으로 얼음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까지.
물과 얼음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카마인 혈통의 능력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선장을 만족시키기는 충분한 수준이었다.
"훌륭한 실력이시군요. 혹시 바다에서 활동하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요, 바다는 처음입니다."
"으음."
선장은 투란의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보다 더 우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실력은 충분하신 것 같군요. 다만, 이미 들으셨다시피...저희 배는 예산 문제상 기사에게 어울리는 봉급을 지급할 여력이 없습니다."
배의 주인이 경호원 역할을 할 기사를 고용할 비용을 내어주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던가.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어차피 저는 개인적으로 엔릴 사막에 가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라서, 낮은 봉급이라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필요하다면 돈을 내고서라도 탈 생각이었지만 거기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안 써도 될 것을 쓸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투란의 말에 선장의 얼굴이 조금 희색이 돌았지만, 여전히 심각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죄송한 말씀이지만 봉급은 도착 후에나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지금은 돈이 아예 없어서 그렇습니다."
선장의 설명에 의하면, 지금 무역선에 채워진 화물을 사느라 돈을 거의 다 쓴 상태라는 것이다.
엔릴 사막에 도착해서 화물을 팔아 수익을 낸 뒤에야 여유가 생길 것이라고.
싸게 고용되어 준다는데도 저런 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진짜 돈이 없긴 한 모양이었다.
"뭐...좋습니다, 그 정도는."
"다행이군요! 함께 일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데 대답을 듣자마자 갑자기 심각하던 표정을 풀며 방긋 웃는 것이 아닌가.
겉으로 보기에는 묵직한 인상의 애꾸눈 사나이가 그런 모습을 보이자 투란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넉살은 나쁘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았다.
* * *
협상을 마친 뒤, 투란은 피레스 선장에게 근처에 있는 시설 좋은 여관을 소개받아 그곳에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앞으로 배에서는 양질의 식사를 하기 힘들 것 같기에 다음 날 아침으로 여관에서 제공하는 가장 좋은 정찬 코스를 주문했다.
"식사 나왔습니다, 손님!"
바다를 접한 아바챠의 식사 문화는 그간 투란이 접해왔던 것들과는 또 색달랐다.
조개 요리부터 시작해서 바다 생선을 찌고 구운 것과 해초, 초절임, 젓갈까지.
굴 같은 것은 지나치게 비려서 잘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생선구이 종류는 대체로 즐길 만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에는 시간이 남길래 어제 미리 봐 두었던 서점에 가서 책을 두 권 샀다.
인어에 관한 여러 설화가 적혀 있는 책과 범선 내의 여러 규율을 모아 놓은 규칙서였다.
책 넣을 공간조차 없는 가방 옆에 가죽끈 두 개를 달아 책을 묶었을 때쯤, 슬슬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미리 들었던 장소로 가자 돛이 세 개 달린 거대한 범선이 항구에 정박해 있는 것이 보였다.
투란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제 만났던 선원이 다른 이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는 것을 보고 다가갔다.
"그건 맨 아래에다 넣어놔! 위에다 두면 무거워서 중심이 이상해지니까...어서 오십시오, 기사님!"
"지금 타면 되나?"
"예!"
항해 규율상 배의 안전을 책임지는 기사는 선장과 같은 서열로 여겨지기에, 투란은 상대에게 하대했다.
태도로 보건대 그 역시 이쪽을 더 편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어제는 통성명도 제대로 못한 것 같은데."
"일등항해사 오스반입니다!"
"일등항해사? 그러면 이등이랑 삼등도 있는 건가?"
"맞습니다!"
그냥 해본 소리였는데 진지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내심 당황하며, 투란은 고개를 끄덕인 뒤 줄사다리에 올라탔다.
두 번의 도약만으로 수 미터 높이를 휙 뛰어넘어 갑판에 오르자 주변에 있던 선원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우와...."
"방금 봤나? 봤어?"
"대단하군."
"시끄럽다! 다들 할 일이 없나? 갑판 한 번 더 닦아?"
기사들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는 흔치 않은지, 청새치 호의 하급 선원들은 깜짝 놀라는 기색을 보이다가 빨리 일이나 하러 가라는 상관의 호통에 이리저리 튀어 나갔다.
그렇게 다른 이들을 쫓아낸 삼십 대 초반의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기사님. 갑판장 레낙이올시다."
거친 말투지만 투란을 얕잡아보거나 한다기보다는 격의 없이 호방한 느낌에 가까운 태도였다.
그는 술에 취한 듯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매만지며 투란의 합류를 환영했다.
"안 그래도 지난 항해에서 죽은 놈들이 다 제 직속 부하였지 뭡니까. 그 씨바랄 놈의 선주 새끼는 애들 목숨 날아가서 새로 고용하는 걸 배에 구멍 나서 뱃밥 채우는 거랑 똑같이 보는 게, 선장님만 아니었으면 진작 때려치웠을 겁니다."
말투는 거칠지만 자기 부하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기에, 투란은 내심 이 갑판장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다.
그는 계속해서 선주에 대한 불평을 마구 쏟아내며 투란이 묵을 객실을 안내했다.
"여깁니다요."
투란이 머물 객실은 두 팔을 쫙 펴면 양쪽 벽에 손을 댈 수 있을 만큼 좁았다.
세로로 놓인 침대 하나, 그리고 물건을 수납하기 위한 궤짝 하나가 고작이었으며 창문은 나무판 두 개를 경첩에 이어 만든 형태였다.
"조금...좁은데."
"예, 뭐. 그렇지요. 사실 선장실이 더 넓긴 한데 그쪽은 선장이 다뤄야 할 물건이 여럿 있어서."
호탕하게 굴던 레낙도 그 부분에선 할 말이 없는지 겸연쩍은 기색을 보였다.
그래도 일단 한 몸 누일 공간이 있으면 됐다 싶어, 투란은 들고 있던 가방을 궤짝에 넣는 것으로 간단히 짐을 풀었다.
침대에 드러누워 창문 너머로 비치는 해를 보자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본래 투란이 처음 베르크 가문에 머무를 적에 세웠던 계획은 다케인 평야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뒤, 아시즈와 만났던 마데리 시 근처에서 동쪽으로 걸어 엔릴 사막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이는 과거 투란이 처음으로 읽었던 책, '세계 일주기'에 나오는 경로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경로가 갑자기 들고 일어선 흑요정과 아라비온 가문 사이의 전쟁터가 되어버렸다는 것.
흑요정 군대에게 걸린다면 그대로 사지가 찢겨 한 끼 식사 거리가 될 것이고, 아라비온 역시 전쟁 중에 가문도 명확하지 않은 마법사가 근처를 배회하는 것을 기껍게 여기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투란이 선택한 차선책이 바로 동쪽으로 쭉 이동해 북해까지 간 뒤, 배를 타고 남동쪽으로 내려가서 엔릴 사막의 북쪽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메이사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지금쯤 흑요정과 한창 전쟁 중일 아라비온의 공주님.
그 바짝 마른 해골 아가씨는 지금의 투란으로선 감히 이길 엄두가 나지 않는 강자였지만, 아무리 강한 마법사라고 한들 무적의 존재는 아니었다.
엔릴 사막에 도착한 뒤에는 그쪽 방면의 소식도 수집해 봐야 할 것 같았다.
* * *
"끼아아아아아-!"
불탄 성채의 앞, 아라비온의 기사는 기괴한 고함을 내지르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흑요정 전사들을 보았다.
영력이 없어 사령을 다루지 못하는, 인간으로 치면 평민이나 다름없는 존재들....
하지만 그들의 힘이며 순발력은 숙련된 기사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종족의 격차 때문.
그렇기에 먼 옛날, 프레아 신족이 강림하기 전의 인간들을 짓밟고 그 위에 군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흐압!"
내지르는 검의 속도를, 힘을 마력으로 강화하자 흑요정 한 명의 몸이 절반으로 갈라졌다.
그 다음으로 덤벼드는 놈은 불을 뿜어 얼굴을 지져 버리고, 다시 칼을 휘두르고.
하지만 그렇게 모조리 해치우기에는 놈들의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두 명, 네 명, 여섯 명....
점점 손발이 어지러워지며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공격이 한 차례씩 마력으로 담금질 된 육신을 헤집었다.
그렇게 출혈로 아찔해진 시야 속, 그를 향해 내리쳐지는 장검 한 자루.
죽음을 직감한 순간 하늘에서 우르릉하는 굉음과 함께 섬광이 흑요정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꺄아아아아악!"
조금 전의 고함과 비슷하지만 공포가 조금 더 많이 섞인 비명.
어두컴컴해진 하늘 위, 해골처럼 바짝 마른 얼굴을 한 여인이 날아왔다.
메이사 아라비온이 쏘아낸 낙뢰 한 줄기가 순식간에 수십 갈래로 나뉘며 흑요정들을 모조리 태워 죽인 것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아가씨...."
"부대로 합류해."
"예!"
낙오된 기사를 구해낸 메이사는 피로에 찬 얼굴로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흑요정 군대와의 싸움은 정정당당한 결투와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땅굴을 통해 일반 병사들을 보내 아라비온 군대의 취약한 부분을 몇 번이고 기습했고, 그렇게 생겨난 기사들의 시체는 지하로 끌려간 뒤 사령이 되어 사령술사들의 전력으로 사용당했다.
감히 메이사와 대적할 만한 강자는 없었지만, 정면으로 싸워주지 않는 상대가 적이어서야 힘이 아무리 강해도 소용이 없었다.
"메이사,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게냐?"
"예, 숙부."
메이사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중년의 귀족을 향해 살짝 고개만 까딱여 인사했다.
그의 이름은 카드람 아라비온으로, 가주의 이복동생이자 이번 토벌대의 부대장이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기사 한두 명의 목숨보다 네가 훨씬 소중하니까."
"괜찮아요, 이 정도는. 그보다 전황은요?"
메이사의 딱딱한 어조에도 카드람은 웃는 낯을 잃지 않으며 답했다.
"나쁘지 않다. 이대로면 이 근방은 곧 수복될 것 같아. 아직 땅굴은 못 찾긴 했지만."
"찾으면 알려주세요. 제가 직접 갈 테니까."
"쉬는 게 좋을 텐데...."
카드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메이사는 다시 마법으로 몸을 띄워 한쪽으로 휙 날아가 버렸다.
"쯔, 버릇없는 계집애 같으니. 형님이 애를 너무 막 키웠다니까."
조금 전까지의 상냥한 태도는 오간 데 없이, 카드람은 혀를 차며 메이사가 지나간 자리를 흘겨보았다.
"저러다 제 어미랑 동생 꼴이 나고 말지...."
26화
청새치 호의 항해는 뱃머리 옆에 달린 큼직한 종을 치는 것으로 시작됐다.
선장의 명령에 따라 닻을 올리고 세 개의 거대한 돛을 펴자, 바람을 받아 팽팽해진 돛이 배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선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동안 투란은 느긋이 객실의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다.
첫 번째는 범선 내의 규율을 적은 것.
선장부터 시작해 배 안의 여러 직책을 설명한 뒤 불문율이나 미신 등을 적어 두었는데, 기묘한 것이 꽤 많았다.
여자를 태우면 안 된다거나, 밤에는 바다를 내려다보면 안 된다거나, 휘파람을 불면 안 된다거나....
대체 뭐 이렇게 안 되는 게 많나 싶을 정도.
거기다 규칙을 위반했을 때의 처벌들도 하나같이 흉흉한 게, 뭐만 하면 돛대에 묶어놓고 채찍질하는 것이 많았다.
다음으로는 인어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아무래도 정말로 인어가 사는 곳 옆에서 쓰인 것이라 그런지 오렘 시의 도서관에 있던 것보다 더 상세하고 구체적인 내용이 여럿 있었다.
북해와 남해를 잇는 마법의 거울 이야기부터 거대 물고기로 변할 수 있는 인어 왕족에 관한 이야기까지.
대충 눈에 띄어서 사 온 것 치고는 제법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아서 나쁘지 않게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두어 시간 정도 독서를 즐긴 뒤, 투란은 슬슬 좁은 객실이 답답하게 느껴져 책을 접고 갑판으로 올라왔다.
어느새 육지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라, 사방이 온통 새파란 바닷물로 가득했다.
그 때문에 배가 바람을 가르며 움직이고 있는데도 나아가고 있다는 실감조차 들지 않았다.
"어이쿠, 기사님 오셨습니까!"
갑판에 오르자 일등항해사 오스반이 그를 반겼다.
조금 전 책에서 선원들의 직급 등을 참고한 덕에 그가 이 배에서 선장 다음가는 직책임을 알 수 있었다.
모든 화물을 책임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선장의 부재 시 함선 운영까지 담당한다고 하던가?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굽실거리는 게 영 사람이 가벼워 보이기는 했지만.
"안에만 있자니 갑갑해서 바람이나 쐬려고 나왔지."
"객실이 좀 그렇지요? 하하...사실 원래 상선이 다 그 정도는 아닌데 말입니다."
오스반은 그게 다 욕심 많은 선주가 화물을 쑤셔 박으려고 선창(船倉)을 지나치게 크게 늘린 탓이라고 변명했다.
원래는 상급 선원들 역시 투란의 객실보다 조금 더 큰 방을 하나씩은 쓸 수 있는데, 이 배에서는 좀 큰 방 하나를 같이 써야 한다는 것이다.
투란은 혼자 방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엔릴 사막까지는 스무날에서 한 달 정도 걸린다던데."
"예. 물론 바람이나 파도가 좋을 때의 이야기이긴 합니다. 북해가 워낙 거친 곳이다 보니."
오스반은 어린 시절 남해 쪽에서 배를 탔는데, 그곳은 파도가 적고 바람도 약하게 불어서 배가 빠르게 못 가는 대신 항해에 변수가 거의 없다고 했다.
그에 비해 북해는 극과 극이라서, 순풍을 탈 때면 말 그대로 바람처럼 날아갈 수 있지만 자칫하면 항로가 크게 틀어지거나 침몰할 수도 있는 게 문제였다.
해적이며 인어 같은 놈들이야 어디건 가리지 않고 들끓으니 말할 것도 없었고.
"그래도 이번에는 기사님이 계셔서 든든합니다!"
그의 실력조차 본 적 없으면서, 오스반은 투란이 있으니 해적이며 인어 따위는 감히 이 배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며 떵떵 소리쳤다.
다소 낯뜨겁기까지 한 아부에 투란은 쓰게 웃으면서도 그만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 봐야 괜히 분위기만 나빠질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옆에 있던 하급 선원들이 오스반의 말을 들으며 안도하는 기색을 보여서였다.
아마 그 역시 부하들을 안심시키고자 일부러 이렇게 허풍을 떠는 듯했다.
사실 근거의 빈약함과 별개로 그의 믿음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귀족 중에서도 중상위권쯤 되는 실력자가 호위 중인 무역선을 건드릴 수 있는 적은 많지 않을 테니까.
이어지는 찬양을 한참 들은 뒤, 투란은 오스반에게 궁금했던 바를 물었다.
"사실 이곳 기사들의 몸값이 왜 그리 높은지 잘 모르겠어. 카마인 가문에서도 적당한 가격에 기사들을 배치해서 무역선이 약탈당하지 않게 하는 게 더 이득이지 않나? 어차피 교역할 때마다 세금을 걷을 텐데."
아라비온만 해도 그 가신 가문의 영지에서 기사들이 배우 일까지 하고 있지 않았던가.
깊게 알아본 적은 없지만, 설마 극단에서 무역선조차 감당하기 힘들 높은 봉급을 주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음, 그게...."
그런 의문에 오스반이 뺨을 긁적이다가 다소 조심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좀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이 뱃일이라는 것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 뱃놈들은 연락 닿던 이가 몇 년쯤 소식이 끊기면 어디 멀리 갔나보다 하는 게 아니라 죽었구나, 하고 말 정도지요. 그렇다 보니."
"기사니 뭐니 해도 결국 배가 침몰하면 죽을 목숨이라서 겁을 먹는단 건가?"
"그, 그런 뜻까진 아닙니다!"
"아니,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확실히 모든 일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였어."
생각해 보면 그 역시 바다 한복판에서 갑자기 배가 침몰했을 때 쉬이 땅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물이야 넘치는 게 바닷물이니 마법으로 마실 수 있게 정제하고 먹을 것은 생선을 잡아다 구워 먹으면 그만이라지만, 땅까지 헤엄쳐 가는 일은 또 얼마나 수고스러울 것이며 잠은 어떻게 잔단 말인가?
투란조차 그럴 정도니 평범한 기사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력이 다 떨어져서 보통 인간과 다름없게 된 다음 익사하고 말 터.
어쩌면 카마인 가문도 옛날에는 기사들을 적극적으로 무역선에 태웠지만, 손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서 몸값을 비싸게 부르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무언가 재밌는 이야기들을 하는 분위기로군."
그때, 갑판 아래에서 피레스 선장이 안대를 고쳐 쓰며 올라와 그렇게 말했다.
그는 가장 먼저 투란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귀한 분을 맞이해놓고 몇 시간째 인사도 못 드렸군요. 혹시 이 머저리들이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럴 리가요. 여러 가지로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오스반? 밀 보관하는 곳에 물 샐 것 같던데, 배치 좀 바꿔놔라."
"옙!"
피레스의 명령에 오스반이 주먹으로 가슴을 팡 두드린 뒤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투란은 그런 피레스를 보며 조금 전 물어보려던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면 엔릴 사막에는 주로 뭘 가져다 팝니까? 제가 그쪽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서요."
"다양합니다. 사막이라는 곳이 진짜 모래만 가득한 곳이다 보니 목화 재배가 안 되어서 솜과 무명천도 잘 팔리고, 아라비온과 육상 교역이 끊긴 뒤로는 곡물도 많이 팔리지요. 하지만 갈 때보다는 올 때가 진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올 때?"
"예. 엔릴 사막에서 필요한 물건들은 하나같이 가격에 비해 무겁고 부피가 큰 것들인데, 그쪽에서 아바챠로 넘어오는 물건들은 비싸면서 보관이 쉽지요. 향신료나 보석 종류가 대부분이라서 올 때는 잠도 더 편하게 잘 수 있습니다."
"돌아가는 길도 함께 탈 수 있으면 좋았겠는데, 아쉽군요."
투란의 너스레에 피레스가 킬킬 웃다가 되물었다.
"엔릴 사막 쪽에 오래 머무십니까?"
"예, 아마도."
사실 투란은 아직 자하르의 땅에서 어떻게 자신의 뿌리를 찾을지 명확히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신분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본가로 쳐들어가는 것은 상자 안에 보물이 들었는지 칼이 들었는지 모르는데 다짜고짜 손을 들이미는 행위였으니까.
하지만 그 방법을 배제하자면 단서는 기껏해야 어머니의 얼굴을 그려낸 초상화랑 유품 몇 개 정도가 고작일 뿐.
그것만으로 찾자면 사막에서만 몇 년, 혹은 그 이상으로 머물러야 할 수도 있었다.
* * *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투란의 첫 항해는 일주일 동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폭풍도, 해일도, 해적과 인어의 습격도 없이.
그 말인즉, 할 것 없이 심심한 나날이 이어졌다는 의미였다.
"이게 5번 줄이라고?"
"예. 앞에서 강한 역풍이 불어올 때면 이거랑 저쪽의 가운뎃줄 두 개를 풀어서 빨리 돛을 거둬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배가 제자리에서 맴돌아 버리지요."
"오호."
책도 다 읽었겠다, 투란은 적당히 여유가 있는 선원들을 하나둘 붙잡아 가며 범선의 항해 방식부터 시작해서 여러 기술을 익히는 것으로 지식욕을 충족했다.
선원들은 하늘 같은 기사 나리가 천한 선원들이나 익히는 기술을 배운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그들의 말을 경청하며 한 번 익힌 것은 쉬이 잊지 않는 것을 보고는 아낌없이 자기들의 요령을 이것저것 전수해 주었다.
사실 외모만으로 보면 투란은 이곳 선원들 사이에서도 막내뻘에 가까워 가르치는 데 별로 위화감이 없기도 했다.
"식사 시간입니다!"
"자, 먹고 하자! 모두 식당으로!"
식사는 하루 세 번 나왔는데, 예상했던 대로 양이건 질이건 지상에서의 식사와 비교할 수 없이 조악했다.
애초에 식량 보관함을 넉넉하게 배분하지 않았을뿐더러 보존식 역시 저질스러운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선장실 역시 썩 넓지 않은 탓에 피레스 선장과 투란 역시 선내의 가장 큰 식당에서 선원들과 함께 식사했다.
"그래도 이 양배추절임까지 빼놓지는 않아서 다행이지요! 이게 없었으면 우리 모두 진작에 잇몸병에 걸려 죽었을 테니까요."
"잇몸병?"
"예. 잇몸에서 피가 나오며 죽는 병인데, 신 음식을 먹으면 낫습니다. 과일은 금방 상하니 양배추절임이 최고죠. 맛은 뒈지게 없지만요. 크흐."
옆에서 건빵에 염장 고기와 양배추절임을 곁들여 먹던 갑판장 레낙이 겁주듯 말하며 웃었다.
지난 며칠 범선을 다루는 기술을 배우며 이것저것 많이 물어서인지, 그는 이제 말투만 존칭이지 투란을 자기네 새끼 선원쯤 되는 것처럼 취급했다.
"신기한걸. 그런 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이런 거야 뭐, 언젠가 누군가 알아내고 나서 퍼진 것이겠지요. 그게 밝혀지기 전에는 인어를 날로 잡아먹기도 했답니다."
"오."
문득 사람을 오독오독 뜯어먹던 흑요정 사령술사들이 떠올라서 조금 식욕이 떨어진 투란은 먹던 것을 내려놓았다.
그때, 돛대 꼭대기에서 주변을 관측하던 선원이 깜짝 놀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배다! 전방 2시 방향! 중형선!"
"뭐?"
"해적이냐!"
한창 식사 중이던 선원 중 한 명이 소리치자 잠시 후 답이 돌아왔다.
"모르겠다! 위에 가문의 깃발이 안 걸려있어!"
"느낌이 해적일 거 같은데. 어쩐지 비도 안 오고 날씨가 너무 좋다 싶긴 했지. 일단 전투 준비!"
갑판장의 지시에 한창 식사 중이던 선원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후다닥 갑판 위로 뛰쳐나가거나 무기를 분배했다.
일등항해사 오스반은 청새치 호의 방향을 왼쪽으로 꺾어 다가오는 배를 피하고자 했고, 피레스 선장은 다소 긴장한 듯해도 꽤 의연한 태도로 식탁에 앉아 부하들이 상황에 대처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투란은 바삐 움직이는 선원들을 슬쩍 피해가며 갑판에 나온 뒤 탐색 마법을 사용해 다가오는 배를 확인했다.
얼핏 보기에 그들이 탄 청새치 호보다 조금 작고 돛이 네 개가 달려 있었는데, 가늠해 보니 속도가 그들보다 조금 더 빠른 것 같았다.
잠시 후, 정체불명의 배는 청새치 호를 추격하듯 방향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젠장, 역시 해적이었군!"
"어떻게 할까요, 선장님. 따돌립니까? 저쪽이 조금 더 빨라서 오래 추격하면 잡힐 수도 있습니다. 바람이 잘 따르면 잡히기 전에 근처의 섬에 정박할 수도 있고요."
투란은 피레스의 시선이 자신을 슬쩍 훑는 것을 느꼈다.
한 차례 실력 검증은 했지만, 그래도 실전 능력까지 본 것은 아니기에 다소 불안해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괜찮겠습니까?"
"저 안에 기사나 귀족이 있는 게 아니라면 문제없습니다."
"...좋습니다. 배 돌려! 맞붙는다!"
"기사님 만세!"
"다 죽여버리십쇼!"
투란의 자신감이 느껴지는 답변에 청새치 호의 선원들은 조금 불안해하면서도 믿는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잠시 후, 다시금 방향을 돌린 청새치 호와 상대 배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아마 해적일 듯한 상대 쪽 선원들은 갑자기 방향을 돌린 청새치 호의 모습에 당혹스러워하는 듯했으나, 호전적인 기세를 거두지는 않았다.
"거기-배 세워라-! 그러면 목숨은 살려주마-!"
거리가 수백 미터쯤으로 가까워졌을 무렵, 뱃머리에 선 남자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투란은 그 말을 듣고 궁금해져서 옆에 있던 갑판장에게 물었다.
"항복하면 정말로 살려주는 건가?"
"자기들 마음대로라고 들었습니다."
"역시 그렇군."
하기야 법도 안 지키는 해적들이 약속이라고 지키는 것도 이상했다.
덕분에 투란 역시 아무 가책 없이 마음껏 손을 쓸 수 있었다.
결국 제 욕망을 위해 인간을 죽이는 인간이란 사냥해야 할 늑대일 뿐이니까.
점점 더 가까워지는 두 척의 범선.
거리가 삼사십 미터쯤 되었을 때, 투란은 초월적인 다릿심으로 도약하여 해적선의 갑판에 착륙했다.
굉음과 함께 갑판이 으스러지는 것을 본 해적들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27화
"어...."
투란이 처음 갑판에 착지했을 때, 해적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몇 초 정도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인간이 수십 미터를 도약해서 배와 배 사이를 넘어온다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순간 뇌가 이해를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몇 초 뒤, 이름 모를 어느 해적이 큰 목소리로 외치며 이러한 정적을 깨트렸다.
"주, 죽여버려! 싸우라고!"
칼이나 도끼부터 시작해서 무언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흉기를 들이밀며 다가오는 칠십여 명의 해적들.
투란은 내심 당혹스러웠다.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가 이만한 모습을 보여주면 어지간해선 전의를 잃고 항복하는 것이 정상일 텐데, 어째서?
하지만 그가 당황했다고 해서 이 전투에 무언가 유의미한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쥐가 갑자기 덤벼드는 것에 곰이 움찔했다 한들 쥐에게 승산이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갑판 너머를 향해 손을 뻗자 투란의 의지에 호응하여 새파란 물결이 솟구치더니, 순식간에 뜨끈한 열을 방출하며 무엇이든 꿰뚫을 듯 날카로운 얼음송곳으로 변했다.
"저, 저건...?"
"피-!"
피해, 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수십 발의 얼음송곳이 갑판 위에 모여있던 해적들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 결과는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가 꿰뚫려 즉사하고, 목이 꿰뚫려 숨이 막혀 버둥거리고, 가슴이나 배를 꿰뚫려 고꾸라지고....
순식간에 열대여섯 명의 해적들이 목숨을 잃거나 무력화됐다.
이마저도 기사인 척 연기하고자 일부러 본래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약한 힘을 실었을 뿐이건만.
마법의 힘을 타고나지 못한 인간이란 이리도 연약했다.
"쫄지 마, 새끼들아! 어차피 못 죽이면 우리가 죽어!"
전방에 있던 해적들이 몸 이곳저곳에 얼음송곳을 꽂은 채 절규하는 사이, 뒤에 있던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이를 듣고서야 해적들이 왜 이리 처절히 반항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저들 역시 투란이 자신들을 살려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이다.
다급히 달려드는 해적들에 맞서, 투란은 바다에서 끌어온 물 중 일부를 손으로 모아 얼음 장검 한 자루를 만들었다.
이대로 얼음송곳을 난사해 모두 쓸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기사 흉내를 내려면 이쯤에서 힘을 절약할 겸 직접 육탄전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겍-"
서걱, 목이 잘려나가며 무력히 쓰러지는 몸뚱이.
쇠조차 짓뭉개는 근력이 고스란히 실린 장검 앞에 인간의 살점과 뼈 따위는 장애물조차 되지 못했다.
그렇게 한 명을 베어낸 뒤에는 날아드는 공격을 적절한 자세로 맞받아치며 목을 긁고, 큼직하게 한 걸음 물러나 거리를 벌린 다음에 장검을 길게 늘여 세 명을 동시에 베었다.
하람과 무기술을 겨루던 때와 달리 이러한 행위에서 전투의 고양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해적들의 신체 능력은 투란과 비할 바가 되지 못했으며, 그들의 전투 기술은 그보다도 더 조악했으니까.
그러는 와중 해적들의 공격이 몇 번씩 투란의 몸에 닿기는 했다.
결국에 손은 두 개고 칼은 한 자루라, 기사 수준으로 힘과 속도를 제한한 상태로 사방에서 날아드는 모든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하람과 같은 달인이라면 이야기는 달랐겠지만.
"어억...."
하지만 이러한 공격은 굳이 막으려 들 필요조차 없었다.
어느 덩치 큰 해적이 온 힘을 다해 드러난 목을 찔렀으나 피부조차 뚫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후로도 어깨를, 가슴을, 등을 베고 찌르는 이가 몇 명 더 있었으나 그중 유효한 공격 따위는 없었다.
귀족의 육체는 일반인이 날카로운 금속 좀 휘두른다고 뚫릴 만큼 연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수호자 마법기가 없었다 한들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렇게 삼 분 정도가 지났을 때쯤, 투란은 자신이 갑판 위에 서 있는 유일한 사람임을 깨달았다.
온통 피바다가 된 갑판 위로 낮은 신음과 고통에 찬 비명만이 울려 퍼졌다.
"아아아악!"
"어, 엄마, 추워요, 엄마-"
"살려주세요...."
쓰러진 해적들을 내려다보며 얼음 장검을 바닥에 내던지자, 때마침 철컥 소리와 함께 갈고리 몇 개가 갑판에 걸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먼저 뛰어든 후 두 배가 교차해 버린 탓에 청새치 호가 다시 한 바퀴 돌아서 이제야 해적선을 따라잡은 것이다.
능숙히 밧줄 위로 균형을 잡으며 걸어온 피레스 선장이 해적선의 갑판 위를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끝났습니다, 선장."
"그런 것 같군요. 이건, 참...."
피레스는 무언가 많은 것을 말하고 싶은데 말이 안 나온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짐작건대 투란이 귀족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하지만 그와 달리, 뒤쪽에서 다가온 선원들은 모두 흥분에 가득 차 무엇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댔다.
"저, 정말 대단하십니다! 기사님 만세!"
"우와아아아아!"
"개새끼들! 꼴 좋다!"
몇몇 선원은 제 기쁨을 이기지 못해 널브러진 해적의 시체를 뻥 걷어차다가 발라당 넘어졌다.
그때, 선원 중 한 명이 투란의 행색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우선 선의에게 가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맞습니다! 아니, 움직이기 힘드실지도 모르니 선의 영감을 여기로 부르죠!"
선원들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 만도 했던 게, 지금 투란은 온몸이 피투성이에 옷 이곳저곳이 찢어져 꽤 다친 것처럼 보였다.
투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아무 곳도 안 다쳤으니까. 이건 다 해적 놈들의 피야."
"그게 정말입니까?"
"세상에...."
"역시 신의 후예시라니까."
사실 평범한 기사였다면 맨살을 창칼에 찔렸을 때 피부 정도는 찢어졌을 터였다.
그게 눈 같은 급소라면 치명적인 타격이 됐을 것이고.
물론 선원들이 그런 것까지 알고 있지는 않았기에 그저 역시 기사란 대단하구나, 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그러면 먼저 들어가서 쉬어도 되겠습니까, 선장?"
"물론입니다. 갑판장!"
"예! 이 구더기들아, 우선 갑판부터 치워라! 살아있는 놈이건 아니건 다 밖에 던져버려!"
갑판장 레낙이 벌건 얼굴로 웃으며 외쳤다.
* * *
선원들이 뒤처리하는 사이, 투란은 다시 청새치 호로 돌아와 망가진 옷을 벗고 몸을 씻어냈다.
어차피 사내들밖에 없는 배라 갑판 위에서도 거리낄 게 없다는 게 편했다.
"혹시 남는 옷 좀 빌려줄 수 있나?"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냄새가 좀 날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신지...."
"상관없어."
혈통 특성으로 유난히 코가 좋은 투란이지만 그렇다고 악취에 특히 더 민감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후각은 금방 피로해지는 기관이라 낯선 냄새가 처음 났을 때를 빼면 금방 익숙해지기 때문.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처음 오렘 시에 머물 때까지 그리 거지꼴을 하고 있지도 않았을 터였다.
"후우...."
몸을 씻고 땀내 나는 선원 옷으로 갈아입은 투란은 피투성이가 된 원래 옷을 객실에 넣어 두었다.
아시즈가 걸어준 마법이 있으니 옷은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갈 터였다.
지금 상태로 보아 몇 시간 정도면 되지 않을까.
갑판 위로 올라오니 피레스 선장 역시 어느새 청새치 호로 돌아와 있었다.
"아직 더 뒤져보고 있습니다만, 일단 저 배는 몇 년 전에 아바챠에서 실종된 상선이더군요. 해적 놈들이 나포해서 써먹고 있던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팔아버리는 쪽이 낫겠습니까?"
투란이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짓자 피레스가 웃으며 말했다.
"싸움을 혼자 끝내버리셨으니 배의 소유권 역시 온전히 투란 님께 있습니다."
"아."
그러고 보면 저런 배가 한두 푼일 리 없는데, 싸움이랄 것도 없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치고받았다고 잠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된 모양이었다.
"보통은 어떻게 합니까?"
"다시 아바챠로 돌아가서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대가로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고, 엔릴 사막에 가서 파는 것도 방법이지만...그냥 지금 가는 길에 있는 섬에서 팔아버리는 쪽이 나으리라 봅니다. 북해 군도에서는 항상 범선이 필요하니까요. 원래 물건은 필요한 곳에서 가장 비싼 법입니다."
북해 군도란 이름 그대로 북해 한중간에 흩뿌려진 섬들로, 세계의 북서부와 중부, 북동부의 교역 중개지이기도 했다.
청새치 호도 조만간 이 북해 군도의 섬 중 한 곳에 머물러 식량과 식수를 보급할 예정이었다.
피레스 선장이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게, 저만한 배를 움직이자면 인원을 꽤 동원해야 하다 보니...."
"운반비가 필요하단 거군요. 얼마나 드리면 되겠습니까?"
피레스는 어라, 하고 하나뿐인 눈을 멀뚱멀뚱 떴다.
투란이 이렇게까지 순순히 응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차피 제가 저 배를 혼자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사람을 쓰면 대가를 치러야겠죠."
지난 일주일간 범선 다루는 법을 배운 만큼, 저 정도 크기의 배를 움직이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물론 험한 항해 중 사람이 죽을 것을 대비해 선원을 넉넉히 배정한다지만, 그래도 비슷한 크기의 배 하나를 더 운영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아마 일거리도 두 배로 늘고 당직도 두 배로 많이 서야 할 텐데, 아무 대가 없이 그렇게 부려먹어서야 되겠는가.
"그러시다면, 수익의 일 할 정도를...."
"이 할. 판매까지 모두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쪽에 아는 사람이 적지 않으니 괜찮은 가격으로 받아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피레스 선장의 기뻐하는 표정을 보며 투란은 문득 새로운 문제가 하나 생겼음을 깨달았다.
지금도 금화로 터질 듯한 배낭에 범선 한 척을 판 돈은 또 어떻게 보관한단 말인가.
아무래도 이번에 머무는 섬에서 뭐든 비싸고 작은 물건이라도 사야 할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그런 것을 판다면 말이지만.
잠시 후, 피레스 선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 선원들이 다시 투란을 향해 환호하며 만세를 외쳤다.
아마 저 기사님이 배 판 돈을 조금 떼어줄 것이며 이를 너희에게도 돌릴 테니 열심히 일하라고 독려한 모양이었다.
싸운 사람은 투란 한 명뿐이지만 승전(勝戰)을 축하하며 술까지 한 잔 돌릴 무렵, 어째서인지 밧줄로 연결된 저 너머 해적선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어났다.
선원 한 명이 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선장님! 인어, 인어입니다!"
"뭐? 인어까지 쳐들어왔단 말이냐? 어디?"
피레스 선장이 깜짝 놀라 외쳤다.
지난 일주일 내내 멀쩡하다가 해적에 이어 인어까지 연타로 쳐들어오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
하지만 이어지는 선원의 말로 그가 생각했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그게 아니고...해적 놈들이 인어를 잡아다 키우고 있었습니다. 배 밑에서요!"
* * *
투란이 해적선으로 돌아왔을 때, 갑판장 레낙은 아래로 내려갔던 부하들의 옷을 벗기고 탈탈 털고 있었다.
해적선 내부를 탐색하러 보낸 이들이 귀한 물건을 발견하면 몰래 몸에 챙길지도 모르니 이런 식으로 수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슬슬 초겨울 날씨인 북해에서는 꽤 고역인 일이었지만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조금 전 해적 칠십 명을 도륙한 기사님의 물건을 훔치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감히 어찌 불평하겠는가.
"그래, 안에 인어가 있다고?"
"예. 저도 아직 들어가 보지는 않았고, 보고만 받았습니다."
"잘했다. 투란 님,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그러죠."
당연하게도 정말 인어가 존재한다면 그것의 소유권 역시 투란에게 있었다.
갑판 아래의 선실로 들어가며 투란은 피레스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인어가 비싸게 팔립니까?"
"예쁜 암컷 인어라면 엄청난 값에 팔리는 것으로 압니다. 희귀한 것을 찾는 부자들이 환장한다지요."
투란은 과거 책에서 읽었던 인어의 특징을 떠올렸다.
암초 사이에서 노래를 불러 배를 끌어들인 뒤 침몰시켜서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했던가.
정말로 목소리가 그리도 좋아서일까, 아니면 사람을 홀리는 무언가 특별한 힘이 있는 것일까?
이제 직접 만나보면 알 수 있을 터였다.
"이쪽입니다."
철컥, 배의 밑창으로 내려온 투란은 눈앞의 광경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선원들이 말한 인어는 고작해야 열서너 살쯤 되었을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피레스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수컷이었잖아? 아마 수컷은 헐값일 겁니다. 물고기로 변할 수 있는 전설 속 왕족쯤 되지 않고서야...."
그때, 피레스의 말을 들은 인어 소년이 분노하여 외쳤다.
"무엄하다! 수컷이라니! 이 몸은 북 에스타데일의 마흔일곱 번째 왕자인 아르마니다! 예의를 갖춰라, 땅의 백성!"
과연, 인어 소년의 목소리는 투란이 생전 들어본 그 어떤 인간의 목소리보다도 아름다웠다.
마치 극장에서 연극을 할 때 배경으로 나오는 악기와도 같은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러한 목소리보다 더 놀라운 것은 말의 내용이었다.
"...저거, 자기가 왕족이라는 겁니까?"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래야 죽이지 않고 살려서 팔아줄 것 같아서 허풍을 떠는 것일지도 모릅니다만."
해적들이 굳이 돈도 안 되는 수컷 인어를 잡고 있었던 것을 보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고, 피레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물고기로 변할 수도 있나, 인어 왕자?"
"그, 그건 못 한다!"
"왜?"
"그게, 이렇게 물 밖에서 묶여 있느라...온전한 상태로 바다에 들어가야 변할 수 있다."
투란과 피레스는 서로를 마주 보며 말하지 않고도 뜻이 통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꼬맹이가 도망치려고 개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어쩌시겠습니까?"
"인어들도 사람을 꽤 자주 잡아먹는다죠?"
"예."
"그러면 죽이겠습니다. 어차피 돈도 안 된다고 하니."
"하지만 진짜라면 너무 아까운 일인데...."
"검증하자고 놔줄 순 없잖습니까. 어차피 녀석이 변신하지 않으면 팔리지도 않을 텐데."
투란은 곧바로 인어 소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래도 외관상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만큼 아프지 않게 즉사시키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위기감을 느꼈는지 인어 소년이 물러서며 빽 소리쳤다.
"나,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인간을 먹은 적이 없다! 먹을 생각도 없고! 날 살려주면 보물을 주마!"
"보물?"
투란이 멈칫하자 인어 소년, 아르마니의 얼굴에 화색이 띠었다.
"그래, 보물! 너희들이 섬기는 프레아 신들이 남긴 것 말이야!"
28화
신화를 접하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신이 사용하던 보물에 대한 것이다.
한 번 휘둘러 강이 말라버릴 정도의 불꽃을 피워내는 지팡이, 입고 있으면 신조차도 해할 수 없는 갑옷, 죽은 자를 살려내는 생명의 비약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물병....
이러한 프레아 신족의 마법기, 다르게는 '성유물'이라 불리는 물건은 전 세계를 놓고 봐도 수십 개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모든 물건이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것은 아니지만 그중 몇 개는 대가문의 가주들조차 목숨처럼 지키며 대대로 물려주려 하는 보물일 정도.
그런데 한낱 해적들에게 붙들려 있던 인어 따위가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다니?
"대단한걸. 왕자님이 그 정도면 인어 왕께서는 대체 얼마나 대단한 보물을 가지고 계신 거지?"
투란의 말에서 빈정거리는 어조를 느꼈는지 인어 특유의 파란 피부가 보랏빛으로 변했다.
아마 인간이 분노나 민망함으로 얼굴을 붉히는 것과 비슷한 작용이 아닐지.
자칭 왕자, 아르마니가 외쳤다.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로 어느 동굴에서 너희들의 신이 싸우다 죽은 것을 발견했어! 원래는 아바마마께 말씀드려서 챙기려 했는데, 너희들에게 속아서 잡히는 바람에...."
"신이 싸우다 죽은 것을 발견했다고?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봐."
투란이 진지한 얼굴로 쏘아보며 묻자 겁을 먹었는지, 아르마니가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파, 파란 머리카락의 남자였는데, 큰바다뱀의 송곳니에 몸이 꿰뚫린 채 죽어 있었다. 그 역시 손으로 적의 머리를 꿰뚫고 있었고. 다른 것은 전부 세월의 흐름으로 낡아 버렸지만, 허리에 차고 있는 동그란 쇳덩이만은 녹 하나 슬지 않고 멀쩡했으니 분명 보물 중의 보물이겠지."
"왜 물건을 바로 가져오지는 않았고?"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가까이 가려고 하면 알 수 없는 힘이 몸을 밀어내서...."
"신이라고 확신한 이유는?"
"너희들 중 큰바다뱀과 서로 죽고 죽일 만한 존재는 신뿐이니까!"
큰바다뱀은 과거 인어들이 신으로 섬기던 종족으로, 이름 그대로 몸길이만 수십 미터가 넘는 거대한 뱀이었다.
물론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지만.
어쨌든 신으로까지 추앙받던 괴수와 싸우던 상태 그대로, 바닷속에서 모습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유지되어 있다니?
정말 신의 유해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저 말이 진짜라면 비범한 무언가가 존재함은 확실했다.
투란은 어느새 자신이 흥분하고 있음을 깨닫고 심호흡하여 마음을 가라앉힌 뒤, 차분히 조금 전의 생각을 되짚었다.
혹시라도 인어의 목소리에 현혹당한 것은 아닌지, 냉정한 정신으로도 같은 판단을 내릴 것인지.
그렇게 정리해 보니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속아서 잡혔다고 했던가? 정확히 어쩌다 잡힌 거지?"
그 질문을 들은 아르마니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더니 고개를 숙였다.
다른 종족이라지만 얼굴 형태는 큰 차이가 없기에, 투란은 상대의 표정에서 묻어난 옅은 수치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너희 땅의 백성들이 속임수를 써서 물속에 사는 이들을 끌어내는 수법이 있잖아. 쇠 갈고리에 줄을 매다는."
"설마 낚시 얘긴가?"
"그래, 그거. 보통은 그런 것쯤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지만, 변신한 상태에서는 본능이 좀 앞서다 보니...."
그러니까, 이 인어 왕자는 무려 물고기로 변한 상태에서 해적들에게 낚였다는 것이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지만 듣고 나니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아마 해적들은 자기들이 낚은 물고기가 갑자기 인어로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잡아다 가뒀을 터였다.
무식한 놈들이라도 뱃사람으로서 주워들은 게 있으면 인어 왕족이 눈알 빠지게 비싸다는 이야기는 들었을 테니.
진짜인지 핑계인지 몰라도, 물고기로 변하는 것조차 못 보여주는 수컷 인어를 굳이 가둬놓을 만한 이유는 그뿐이었다.
"혹시 해적들한테도 다 얘기한 건가?"
"했는데 다들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죽은 신의 시체라니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만 하던걸."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기는 했다.
투란이야 오렘의 도서관에서 사서와 만나며 프레아 신족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었으나, 일반인들에게 신이란 문자 그대로 경전에나 나오는 신화적인 무언가일 뿐이었으니까.
그조차도 지금 저 인어가 하는 말이 그냥 살려고 아무거나 주워섬기는 것인지 진짜인지 반신반의하는 마당인데, 안전한 수익을 두고 왜 위험에 뛰어들겠는가?
"조금 전에 널 발견한 선원들에겐?"
"안 했, 아니 못 했다. 날 보더니 인어가 있다면서 뛰쳐나가 버렸거든."
그렇다면 이 정보를 알고 있는 건 그와 피레스 선장 둘뿐이라는 뜻.
멍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그를 흘깃 돌아보니, 투란의 시선을 느낀 피레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까 봐 투란이 그를 죽여버리리라 생각하기라도 하는 듯했다.
물론 그럴 생각 따위는 없었다.
피레스의 인격을 믿는다기보다는 자신의 무력을 믿었으니까.
저 지상에서야 투란보다 강한 귀족이 꽤 많지만, 이 바다 위에서 그는 절대 강자 중 한 명이었다.
갑자기 카마인 가문이나 그와 비슷한 혈통의 강력한 귀족과 맞닥뜨리거나 하지 않는다면 말이지만.
"그렇게까지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선 이 녀석을 조금 더 살려두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랬으면 해적 놈들이 이 인어를 가둬두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피레스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 말대로, 확실히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해적들에게 붙들린 것을 보면 이 인어 소년에게 전투 능력이랄 만한 것은 없을 터였다.
"그러고 보면 그놈들도 웃기는군요. 이 인어만 팔면 부자가 됐을 텐데, 굳이 해적질하다가 목숨까지 잃다니."
"탐욕이야말로 놈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니 말입니다. 거기다 설마 이 정도 크기의 배에 기사도 아니고 귀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투란은 피레스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되물었다.
"제가 너무 과했습니까?"
"네. 다른 녀석들이야 기사가 싸우는 걸 제대로 본 적이 거의 없어서 모르는 모양입니다만, 저는 압니다. 보통 그 정도 숫자를 상대로 멀쩡하기는 어렵지요."
여기서 갑자기 투란의 정체를 눈치챘다고 밝히는 이유?
나는 당신이 얼마나 강대한 존재인지 안다고, 그러니까 그 앞에서 전설의 보물 따위를 노리는 허황한 짓거리를 할 생각 없다고 호소하는 것이 분명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암시를 이해했음을 알리자 피레스의 어깨에서 눈에 띄게 힘이 빠졌다.
적당히 갈등의 여지를 봉합한 투란은 다시금 인어 소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그 신의 유해가 북해에서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있나? 지도를 보여주면 말이야."
투란은 말을 꺼내면서도 이 인어가 북해란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저들이 인간의 지도를 본 적이 있을 리가 없으니.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르마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순순히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밝혔다.
"별로 안 멀다. 여기서 남쪽으로 오백 킬로미터 정도쯤?"
"남쪽으로 오백 킬로미터라고?"
투란은 상대의 답변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첫째로 배 밑창에 갇혀있는 녀석이 이곳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어떻게 알 것이며, 둘째로...인간들이 쓰는 방향이며 거리 단위를 어떻게 그대로 쓴단 말인가?
이러한 의문을 입에 담자 돌아온 답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잘 모르겠다. 당연히 쓰던 것이라서. 이게 너희 땅의 백성들이 만든 거였나?"
"아마도. 선장도 알고 계셨습니까?"
"처음 듣습니다. 보통 인어들한테 이런 걸 물어보지는 않으니까요. 인어를 키우는 높으신 분들이라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투란이 알기로 인간들이 사용하는 역법(曆法)부터 단위 등은 모두 옛 제국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다.
어쩌면 이러한 것들은 제국 시대보다 더 이전, 인간이 이종족의 노예였던 시절의 유산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 시절에 관한 역사는 거의 남지 않아, 오렘의 도서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이들이 인간과 같은 언어를 쓰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는 것일지도.
"어쨌든, 남쪽으로 오백 킬로미터면...."
"그 정도면 미겔 섬이랑 별로 안 멉니다. 오차를 고려해도 백 킬로미터가 안 될 것 같군요."
미겔 섬은 북해 군도에서 가장 큰 섬 중 하나로, 이번에 청새치 호가 중간 보급을 하며 이 해적선을 팔아치울 장소였다.
즉, 잠시 시간을 내면 들를 만한 거리라는 뜻.
"일단 좀 더 가둬두고 생각해 보죠. 혹시 녀석이 이상한 말을 퍼트리거나 할 수도 있으니 관리는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한참 고민하던 투란은 일단 결정을 보류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 정하기에는 그가 이 인어에 대해 아는 바가 너무 없었다.
* * *
사실 투란은 저 인어 소년, 아르마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지는 않았다.
결국 저들 족속은 흑요정과 마찬가지로 먼 고대에 인간을 잡아다 노예로 부리고 잡아먹던 이종족 중 하나가 아닌가.
다만 그가 믿는 것은 상대의 절박함이었다.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이성을 가진 존재라면 자기 목숨 앞에 무엇이든 바칠 수 있을 테니까.
"자, 오늘 식사다."
"고맙다, 친절한 악마."
아르마니를 붙잡은 지 이틀째.
투란이 마법사, 그중에서도 귀족임을 안 뒤로 아르마니는 투란을 악마라고 불렀다.
그러고 보면 전에 만났던 흑요정 사령술사들도 아시즈와 투란을 그렇게 불렀지 않던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묘한 대답이 돌아왔다.
"너희들의 조상은 밖에서 찾아와 우리의 완전하던 세상을 파괴한 악마들이라서 그렇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아르마니는 큰 거부감 없이 투란이 가져다준 식사를 천연덕스럽게 꿀꺽 삼켰다.
인어라서 혹시 생선이라도 잡아줘야 하나 했는데 다행히 사람이 먹는 식사도 잘 먹었다.
"이런 것도 잘 먹으면서 왜 굳이 인간을 먹지?"
"잘 모르겠다. 나는 인간을 안 먹어 봐서...아마 낮은 계급의 동족들은 먹을 게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닐까? 나중에 돌아가면 아바마마께 한번 여쭤보겠다."
풀어주겠다고 약속한 적도 없는데, 아르마니는 자신이 인어 왕국으로 당연히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말했다.
이런 식의 대답을 들을 때마다 투란은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그냥 사람 잡아먹는 이종족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이 소년의 말투며 행동거지가 너무나도 사람 같았기 때문이었다.
투란을 다짜고짜 죽이려고 들던 그 흑요정들과는 다르게.
이후로도 투란은 아르마니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으로 읽었던 인어들의 풍습이나 사회 체계와 실상의 차이, 북해와 남해의 두 인어 왕국을 연결하는 전설의 거울의 실존 여부, 인어들의 옛 신화에 관한 이야기까지....
"아, 그러고 보니 지금은 얼마나 됐지? 그곳이랑 거리."
"서쪽으로 육십오 킬로미터쯤?"
지난 며칠간 대화를 나누며 아르마니가 어떻게 위치를 아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인어들은 바다 위에서 본능적으로 방향과 위치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 번 기억한 장소는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한창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있던 도중, 위쪽에서 똑똑 나무판자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다녀오마."
"잘 다녀와!"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모습만 보면 그가 저 인어를 이곳 선창에 가둬둔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범선 밑창에서 올라오자 해적선을 담당하고자 넘어온 일등항해사 오스반이 그를 반겼다.
"기사님, 미겔 섬에 다 왔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슬슬 올라가 봐야겠는걸."
"예!"
아르마니를 가둬둔 선창 입구를 쇠사슬로 단단히 묶어 봉한 뒤, 투란은 갑판으로 올라갔다.
어둑한 밤바다 너머로 커다란 섬과 그 앞의 부두에 정박한 여러 척의 범선이 보였다.
* * *
부두에 두 척의 배가 입항한 뒤, 투란은 가볍게 몇 차례 뛰어 청새치 호로 향했다.
서로 다른 배에 머무느라 이틀간 만나지 못했던 피레스 선장이 가볍게 인사한 뒤 용건을 꺼냈다.
"어떻게, 결론이 좀 나셨습니까?"
"예."
그가 묻는 바는 간단했다.
저 인어의 말을 믿고 정체불명의 보물을 찾으러 가볼 것인지, 아니면 녀석을 그냥 이곳의 유력자쯤 되는 이들에게 팔아치워 볼 것인지.
투란은 이에 답하는 대신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 섬에 얼마나 머무실 겁니까?"
"특별한 일이 없다면 하루에서 이틀 정도일 겁니다."
아흐레간의 항해로 피로해진 선원들을 쉬게 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이야 투란이 있어서 그럴 가능성이 없지만, 지나치게 부하들을 혹사하다가 선상 반란이 일어나서 선장이 죽고 남은 이들이 해적으로 전향하는 일은 굉장히 흔했다.
"딱 좋군요. 혹시 작은 배 한 척 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이 탈 정도면 됩니다."
"설마?"
"다행히 여기서 별로 멀지 않은 것 같으니 오늘 밤 안에 다녀와 보겠습니다."
29화
미겔 섬에 상륙하고 수십 분 뒤, 피레스 선장은 은밀히 선원 몇 명을 보내 작은 쪽배 하나를 구해왔다.
요청했던 대로 두 사람이 타면 꽉 찰 만한 크기의.
투란은 온몸을 천으로 둘러 인어의 특징을 감춘 아르마니와 함께 쪽배로 옮겨탔다.
"달이잖아!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배에 탄 아르마니가 하늘에 뜬 보름달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인어 소년이 해적선 밑에 얼마나 오래 갇혀 있던 것인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해적선 밑창에서는 햇빛도 달빛도 들지 않았으니까.
다만 먹은 음식의 양과 잠든 시간으로 한두 달쯤 되었다고만 짐작할 뿐이었다.
"어? 저기 기사님이 어디 가시는 거 같은데...?"
"잠깐 볼일이 있으시다더군. 금방 돌아오실 테니 신경 쓰지 말도록!"
투란이 아르마니와 함께 쪽배에 타는 것을 보고 선원 몇몇이 놀라기도 했지만, 피레스 선장이 딱 잘라 말하자 이내 다들 관심을 끊었다.
다른 커다란 범선에 타는 것도 아니고, 설마 저만한 조각배를 타고 혼자 떠나버릴 리가 있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보다 상륙 준비는 끝났나?"
"물론이죠!"
"좋다. 오늘 밤은 술집이건 어디건 마음껏 놀아라! 내일 집합하지 않는 놈은 채찍질 당할 각오는 하고!"
"와우!"
피레스 선장의 명령에 이은 선원들의 환호를 뒤로한 채, 투란은 준비해 온 쇠사슬로 인어의 팔과 다리를 배에 연결했다.
아르마니는 얌전히 이에 응하며 확인하듯 되물었다.
"정말로 거기에 보물이 있으면 풀어주는 거겠지?"
"그래."
"혹시 별로 쓸모없는 물건이어도 내 잘못은 아니다."
"알았으니까 길 안내나 잘 해봐."
잠시 후, 두 사람이 탄 쪽배가 어둠을 뚫고 바닷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투란은 처음에는 그냥 힘으로 배를 옮긴다는 느낌으로 마법을 사용하다가 도중에 발상을 바꿨다.
요령은 힘을 가하는 대상을 배가 아니라 배 주변의 바닷물로 지정하는 것.
전방의 물을 옆으로 치워내며 동시에 배의 뒤와 옆에 있는 물로 배를 밀어내는 식으로 힘을 행사하자, 힘도 훨씬 덜 들고 배도 매끄럽게 나아갔다.
직접 해보니 이렇게 작은 배를 타고 마법으로 움직이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온갖 문제가 산재한 만큼 장거리 항해에는 적합하지 않겠지만.
"그런데 갈 때는 그렇고 돌아올 때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내가 없으면 길을 못 찾을 텐데."
"날 걱정해주는 거냐?"
"아니, 그것 때문에 안 풀어줄까 봐 그렇다."
"대충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
투란은 품에서 작은 나침반 하나를 꺼냈다.
피레스 선장에게 미리 받아놓은 물건으로, 이것이 알려주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서쪽에서 아주 약간 남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돌아올 때는 마찬가지로 동쪽에서 아주 살짝 북쪽으로 꺾어서 가면 될 터였다.
물론 다소 오차는 있겠다만, 탐색 주문으로 반경 십수 킬로미터 정도는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뭐, 만약 그래도 길을 잃는다면...남서쪽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어쨌든 육지에는 닿을 수 있을 터였다.
아마도.
"뛰어내리고 싶군...."
"참아."
투란은 바다를 내려다보며 투정 부리는 아르마니를 가볍게 타박하며 배의 움직임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렇게 쪽배를 몰고 나아가기를 체감상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슬슬 앞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 그들이 있었던 미겔 섬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아마 무인도로 보이는 섬이었다.
"저긴가?"
"맞다."
"좋아, 그러면 잠시."
상륙하기 전, 투란은 배를 멈추고 바닷물을 손으로 한 줌 퍼내며 탐색 주문을 사용했다.
사용하는 감각은 후각, 탐색 대상은 인어.
눈을 감고 바닷물을 세 번, 네 번쯤 퍼내 냄새를 맡아보아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적어도 그를 속이고 인어들의 본거지로 끌고 온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 투란의 모습을 보며 아르마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확인."
처음 물속에서 탐색 주문을 사용할 때 투란을 당황하게 한 것은 사용할 만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후각이야 애초에 물이 코로 들어가는 순간 눈물만 줄줄 뽑게 될 테니 무의미하고, 시각과 청각도 물이 방해되는 탓인지 지상보다 탐색 범위가 훨씬 좁았다.
그에 비해 이렇게 물을 꺼내 냄새를 맡는 방식은 정확한 위치는 알기 어려우나 대상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는 쉬웠다.
지금만 해도 탐색 대상을 고래나 상어 같은 것으로 바꿔 보면 곧바로 묘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어쨌든 안전을 확인했으니 망설일 필요는 없을 터.
그들은 적당한 기슭에 배를 세운 뒤 내려서 무인도 안쪽으로 들어갔다.
인어 소년이 이곳저곳을 뒤지듯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아마 여기 어디쯤이었던 것 같은데...."
지난 며칠간 대화하며 들은 바에 의하면 이 섬은 아르마니의 비밀 별장 같은 곳이었다.
인어 공동체, 그들의 말로 인어 왕국에서의 생활이 너무 답답할 때면 가끔 올라와서 산책한다던가?
그러던 와중 우연히 섬 안쪽의 해저 동굴에서 그것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아버지인 왕에게 보고하려고 헤엄쳐 가다가 얼마 못 가서 해적들의 낚싯바늘에 걸렸다는 게 참으로 웃지 못할 일이었지만.
"찾았다! 여기다!"
그때, 아르마니가 외치며 작은 연못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라고?"
"맞다.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데...혹시 물속에서 숨 쉴 수 있나?"
"못 쉬지."
카마인 혈통의 귀족이라면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투란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능력이었다.
"그렇게 깊지는 않겠지?"
"한 백 미터 정도 된다."
"좋아, 그 정도면 해보지 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투란은 배에서 가져온 쇠사슬로 아르마니를 근처의 나무에 꽁꽁 묶었다.
가만히 이를 기다리던 인어 소년이 놀라 외쳤다.
"자, 잠시만!"
"왜?"
"혹시 네가 저 안에서 숨막혀 죽기라도 하면 나도 여기서 굶어 죽는 것 아닌가?"
"안 그러기를 바래야지. 너나 나나."
완벽히 구속되었는지 확인한 뒤, 투란은 수호자 팔찌와 속옷 한 장 빼고 모든 옷을 벗은 뒤 허리띠에 단검을 찼다.
그리고 홀쭉하던 배가 부풀도록 숨을 한가득 들이쉬며 그대로 연못을 향해 잠수.
우선 눈에 물이 닿지 않게 얇은 막을 쳐서 시야를 확보한 뒤, 조금 전 배를 몰던 요령대로 몸을 물속으로 잡아끌었다.
느낌상 이 상태로 이삼십 분은 너끈히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
연못 밑바닥을 훑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로 내려가는 구멍이 보였다.
아마 저곳이 바다와 이어진 동굴일 터.
물의 도움에 의존해 내려가고 또 내려가니 귀가 조금 욱신거렸으나 그것 말고는 제법 견딜만했다.
'헤엄이란 것도 해볼 만한걸.'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물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방법도 제대로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기술을 숙련하는 것만으로도 물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데 마력 소모가 훨씬 덜해질 테니까.
앞으로 또 물속에 들어갈 일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밑바닥까지 내려온 뒤 주변을 둘러보자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찾았다.'
가뜩이나 어두운 밤바다를 깊숙이 들어오니 빛 한 점 없이 컴컴했지만, 자하르 혈통인 투란에게 어둠은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생명체....
그것이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절로 오금이 떨릴 만한 괴수의 형상이 보였다.
'이게 바로 큰바다뱀인가?'
몸통의 굵기만 수 미터, 몸길이는 거의 백 미터에 가까울 것 같은 뱀이 이리저리 똬리를 튼 채 죽어 있었다.
세월이 어찌나 오래 지났는지 그 위에는 녹색 이끼가 켜켜이 쌓여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형지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천천히 움직여 그것의 몸을 따라 올라가자 마침내 머리가 드러났다.
위에 솟은 네 개의 뿔과 쩍 벌린 입속에 빽빽이 돋아난 이빨까지, 그 형상은 차라리 도마뱀에 가까웠다.
그리고 두개골 한가운데에 깊숙이 손을 박아 넣고 있는 존재가 하나.
"아...."
투란은 물속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탄성을 터트리며 물거품을 내뱉었다.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인간 남자처럼 보이는 이는 큰바다뱀이 그런 것처럼 온몸이 이끼로 뒤덮인 상태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몸은 부러진 송곳니에 꿰뚫린 가슴을 빼면 조금도 썩거나 손상된 기색 없이 온전해 보였다.
본래 입고 있었을 갑옷은 대부분이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듯 삭아 있었는데도.
그는 겉으로 보기에 서른 살 정도로 보였고, 아르마니의 말대로 푸른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부릅뜬 눈은 초점이 없는 것만 빼면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아르마니가 말한 것처럼, 그 외에는 놀랍도록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다.
'이 존재가 정말로 프레아 신족인가?'
한번 마력을 실어 공격해 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그것이 너무 불경한 일 같이 느껴져 그만두었다.
정말로 신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그게 아니라 그저 강력한 마법사였을 뿐이더라도 인류의 적이었던 큰바다뱀과 대적하다 죽은 사람이지 않은가.
후손 된 자로서 선조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마저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왜 이 사람, 아니 존재는 사령이 되지 않은 거지?'
마력을 가진 이가 죽으면 사령이 된다는 것은 상식.
그런데 바닷속에서 서로 죽인 둘 중 누구도 사령이 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하다못해 누군가가 먼저 와서 둘의 마력을 흡수했다면 당연히 저 신기한 물건도 회수했을 것 아닌가.
정말로 신적 존재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
혹시나 싶어 흡수를 시도해 보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만약 저만한 존재들의 힘을 얻었다면 단숨에 몇 배에서 몇십 배쯤 강해지고도 남았을 텐데.
의문을 뒤로한 채, 투란은 남자의 얼굴과 생김새를 확실히 머릿속에 새겨 놓았다.
머리카락과 눈의 색, 이목구비의 형상, 거의 바스러져 흔적조차 남지 않은 갑옷 조각의 색과 형태....
나중에 다른 지역에 전승되는 신화 속 신들 중 이와 비슷한 생김새로 기록된 이가 있는지를 찾아보면 단서를 얻을 수 있을 터.
몇 분의 시간을 소모해 완벽히 그 모습을 기억한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 용건에 시선을 돌렸다.
'실례지만, 좀 빌려 쓰겠습니다. 선조님.'
물론 이 남자가 신이건 마법사건 투란의 직계 조상일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지만, 투란은 그렇게 예를 갖춘 뒤 남자의 허리춤을 확인했다.
정체불명의 둥그런 금속은 반쯤 삭은 허리띠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는데, 딱 보기에도 자기 혼자 세월의 흐름을 피해 간 것처럼 번들거렸다.
문제는 과연 저 물건을 가지고 나갈 수 있느냐였다.
아르마니가 손을 댔을 때는 알 수 없는 힘이 몸을 밀어냈다고 하던가?
하지만 그의 말과 달리 둥근 금속은 간단히 투란의 접촉을 허용했다.
'음?'
그때, 손가락 너머로 이질적인 감각이 전해져 왔다.
마치 금속에서 뻗어 나온 무언가가 투란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다.
몇 초 뒤, 갑자기 머릿속에서 무언가 철컥 맞아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를 들은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맥락은 짐작할 수 없어도 조금 전의 과정을 통해 이 물건이 자신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주인이 될 자격을 심사한다는 건가? 물건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슬슬 정말로 이 물건이 성유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보물이 주인을 가린다는 전승은 꽤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
물건을 얻어낸 뒤, 투란은 슬슬 호흡이 떨어짐을 느끼고 다시 왔던 곳을 향해 몸을 옮겼다.
일 분 정도 열심히 헤엄쳐 달빛이 보일 때쯤, 무언가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건...?'
아직 수면 위로 흐릿하게 달빛만 보이는 상태인데도 저 위, 연못 가장자리쯤에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오감 중 무엇으로도 규정하기 힘든 희한한 감각....
"푸하...."
"찾았나? 찾았어?"
"일단은."
대답하며 가빠진 호흡을 고르기도 잠시, 투란은 아르마니를 보며 자신이 조금 전 느낀 감각의 정체가 저 인어 소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본 아르마니의 몸속에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있었다.
아주 옅은, 당장이라도 꺼질 것 같이 약한 연푸른색의 불빛.
그것은 아르마니의 물갈퀴 형상 귀와 목의 아가미, 그리고 심장으로 보이는 부위에 옅게 퍼져 있었다.
'저게 대체 뭐지?'
갑자기 이런 현상이 생긴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도 왼손에 꽉 쥐고 있는 이 둥근 금속....
성유물인지 마법기인지 모를 무언가로 인한 현상인 것이 분명했다.
"왜?"
"아니, 아무것도."
투란은 땅으로 올라온 뒤 몸의 수분을 모조리 날려 버리고 옷을 입었다.
그리고 곧바로 둥근 금속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역시 이것 때문이 맞았군.'
물건과 떨어지자마자 순식간에 아르마니의 몸속에 보이던 불빛이 사라지며, 그의 존재감을 인식하던 감각 역시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일단 이 물건의 기능은 두 가지인 것 같았다.
첫째는 주변에 있는 생명체의 기척을 감지하는 것, 그리고 둘째는 생명체의 몸속에 있는 무언가를 감지하는 것.
그게 무엇인지는 조금 더 배워봐야 할 것 같았다.
"그, 그러면 이제...?"
"그래. 놔주마. 가라."
가볍게 손짓하는 것만으로도 아르마니를 묶고 있던 쇠사슬이 철컹 소리를 내며 곧바로 벗겨졌다.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어 왕자는 곧바로 물에 뛰어드는 대신 우물쭈물하는 기색을 보였다.
"왜?"
"아, 아니...이렇게 쉽게 놔줄 줄 몰랐다."
"이것만 얻고 다시 잡아다 팔려 들 줄 알았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
"약속했으니까."
인간을 잡아먹는 이종족은 죽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일단 스스로 인간을 먹은 적 없다고 주장하는 녀석을 굳이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다 저쪽에서 속임수 없이 제대로 물건을 안내해 주었으면 이쪽도 그에 맞게 보답하는 것이 투란이 어머니에게 배운 도덕관이었다.
내가 받기를 바라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
"고, 고맙다. 착한 악마. 혹시 나중에 인간과 싸우게 되면 아바마마께 너는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하마."
"실없는 소리는 관두고."
아르마니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더니 투란이 조금 전 잠수했던 연못으로 몸을 던졌다.
풍덩, 하고 물거품이 일어나며 작은 새끼 상어 한 마리가 물속으로 깊숙이 잠수하는 것이 보였다.
인어 왕족이라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제 와서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솔직한 놈이었다.
'그럼 슬슬...돌아가 볼까.'
투란은 배를 정박해 두었던 장소로 걸음을 옮기며 손안에 든 둥근 금속을 매만졌다.
이 물건이 무엇일지 알아보는 것도 꽤 재밌는 일이 될 것 같았다.
3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