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아버지도 참 대단하시네, 설마 마수 사냥에 손님까지 동원하다니. 우리가 그렇게 못 미더웠나?"
어이없다는 듯 투덜대는 루그 가주의 외동딸, 이젤라.
화려한 드레스 대신 활동하기 편해 보이는 튜닉과 바지 차림을 한 그녀가 투란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손님한테 뭐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아버지가 너무 호들갑 떠신다는 거지."
"가주님께 호들갑이라니, 말이 과하시잖아요. 누님."
"신경 꺼."
그 옆에 서 있던 또 한 명의 귀족, 루그의 조카가 낮은 목소리로 다그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며 잠시 불똥이 튀는가 싶더니, 조카 쪽이 투란을 향해 인사했다.
"이렇게 뵙는 것은 처음이었지요? 마빈 발타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 역시."
투란은 마빈과 인사한 뒤 두 귀족의 뒤쪽에 선 열두 명의 기사를 보았다.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그들의 주인과는 달리 하나같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기사 네 명을 잡아먹으며 생존자조차 남기지 않은 미지의 적을 사냥하러 가니 당연한 일.
잠시 후, 귀족 세 명과 기사 열두 명으로 구성된 군대는 위풍당당하게 북문을 향해 나섰다.
지나다니는 주민들 모두가 그들을 보며 무릎 꿇고 머리를 깊게 조아렸다.
유일하게 고개만 숙인 채 서 있는 것은 갑옷을 입고 칼을 찬 사람들이었는데, 이제 투란은 저들이 경찰이라 불린다는 것을 알았다.
도시 내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기를 들려준 평민들....
당연하게도 마수 사냥은 물론, 가문 간의 전쟁에서도 병력으로는 절대 못 써먹을 이들이었다.
아직 미숙한 귀족인 투란만 해도 저런 무장한 일반인 따위 수천 명쯤은 죽여버릴 수 있을 테니까.
성벽을 벗어나 북쪽으로 향하자 옛 제국 시절에 만들어진 벽돌 도로가 그들을 반겼다.
열흘간 마수가 사람을 습격한 만큼 지나다니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후딱 끝내고 돌아가서 쉬고 싶네."
투덜거리며 길가의 돌멩이를 툭툭 걷어차는 이젤라.
조금 뒤처져 걸으며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중, 마빈이 슬쩍 접근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투란 씨, 혹시 누님에게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투란은 즉시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지난 며칠, 이젤라는 충격적인 첫 만남 이후로도 꾸준히 그에게 추파를 던졌다.
진지한 것은 아니고 가볍게, 농담하는 듯한 방식이기는 했지만.
하지만 투란은 그녀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가볍다 못해 경박하기까지 한 모습부터가 그의 이상형과 거리가 멀었고, 뭣보다 다른 혈통인 그녀와 결혼하면 데릴사위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곳의 도서관이 멋지다지만 그것을 위해 평생 묶여있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이군요."
대답을 들은 마빈의 얼굴이 환해졌다.
도대체 무슨 의미로 한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투란의 대답이 저 젊은 귀족을 만족시킨 것 같았다.
* * *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북쪽으로 나아가기를 약 한 시간.
토벌대는 대로 한복판에 부서진 수레와 찢겨 나간 피투성이 옷가지 몇 개를 발견했다.
누군가에게 습격당한 흔적이었다.
"그놈인가?"
"아마 그렇겠죠. 우리 쪽에서는 쭉 북쪽으로 나가는 걸 금지했으니 아마 북쪽에서 내려오다 당한 것 같은데...."
투란은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잔해를 확인하며 마수의 정체를 추리했다.
피 냄새가 그리 역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한 것은 몇 시간 전, 옷이 찢겨 나간 흔적으로 보건대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관통당한 듯함, 수레 한쪽에 난 기형적으로 큰 손자국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가락이 다섯 개....
마지막 단서로 상대의 정체를 확정할 수 있었다.
"원숭이군요."
"원숭이?"
"여기 손 모양이요."
"아."
사실 투란 역시 원숭이라는 동물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냥 마수 도감에 그려져 있던 예시와 딱 맞는 사례여서 입에 올렸을 뿐.
아마 책을 보지 못했다면 그냥 뭔지 모를 마수려니 하고 말았을 것이다.
"행상인들을 습격하고 숲으로 돌아간 것 같네요. 흔적을 찾아 추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추적...나 그쪽 마법은 거의 못 쓰는데. 마빈 넌?"
"저도 별로요. 혹시 기사 중에-"
"제가 한번 찾아보죠."
투란이 나서자 이젤라가 반색하며 물었다.
"오, 혹시 그쪽 혈통이에요?"
"많이 써서 익숙합니다."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한 뒤, 투란은 곧바로 탐색 마법을 발동했다.
조건은 찢겨나간 옷에 묻은 핏자국.
주문과 함께 그의 오감이 확장되며 피 냄새가 확 강해지더니, 그중에서도 도로의 왼쪽을 타고 냄새가 이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이 누군지 모를 희생자의 피 냄새 대신 다른 모든 냄새가 차단되어 식별할 수 있게 된 것이지만.
"이쪽으로."
투란의 인도에 따라 토벌대는 곧바로 도로를 벗어나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대로 길이 나지 않은 곳이라는 것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세 귀족이야 말할 것도 없고 기사들 역시 선 자리에서 사 오 미터씩은 우습게 도약하는 인종 아닌가.
그렇게 핏자국을 따라가기를 삼십 분, 그들은 한 개울가에 도착했다.
물을 마시던 사슴 몇 마리가 그들을 보고 화들짝 놀라 도망쳤다.
"여기서 끊겼네요. 몸을 씻었나 봅니다."
"짐승 따위가 추적을 피하려고 그런 짓을 했다고요?"
"그냥 씻고 싶어서 씻었을 뿐이겠죠."
원숭이 역시 목욕하는 문화가 있는 동물 중 하나라는 이야기 역시 도감에 적혀 있었다.
투란은 다른 방식으로 탐색하기 위해 우선 피 냄새를 추적하는 마법을 해제했다.
그 순간, 원상복구된 후각을 타고 들어오는 진한 체취.
급히 뒤를 돌자 이쪽을 노려보는 커다란 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뒤!"
외침과 함께 끼에엑-하고 찢어지는 듯한 고함이 울렸다.
신장만 이 미터쯤 되어 보이는 거대한 원숭이.
사람과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이질적인 외형의 동물이 수풀을 헤치며 튀어나와 자갈을 한 주먹씩 쥐어 던졌다.
손이 그 커다란 덩치를 고려하고도 비대하리만치 큰 탓에 토벌대를 향해 쏟아지는 자갈의 수는 수십 개 이상.
심지어 강한 마력이 실려 있어 속도 역시 보통 사람이 던지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빨랐다.
"아악!"
"피해!"
몇 명이 돌에 맞아 나뒹구는 동안, 투란은 다행히 소리치자마자 옆으로 도약하여 투석 공세를 피할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놀랍게도 이젤라와 마빈은 각각 기사 한 명을 방패 삼아 공격을 받아낸 상태였다.
"으, 괘, 괜찮으십-"
"공격해!"
이젤라는 자신을 대신해 다친 기사를 옆으로 내던지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멀쩡한 기사 여덟 명은 곧장 허리에 차고 있던 칼과 창을 들고 달려들었으나, 원숭이는 우끼익-! 하고 비명을 한 번 내지르더니 곧바로 풀숲으로 몸을 날려 나무 몇 개를 훌쩍훌쩍 갈아타며 도주했다.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그 속도가 마치 바람과 같아 기사들의 달리기로는 도저히 쫓을 수 없을 정도.
모두가 망연자실하여 멈춰 선 그때, 돌멩이 하나가 도주하는 원숭이의 뒤를 쫓았다.
투란이 가장 익숙하게 쓰는 강화, 가속, 추격의 세 가지 마법을 부여한 돌팔매질.
이리저리 휘며 나무 몇 개를 스쳐 지나간 돌멩이가 허리를 강타하자 원숭이가 비명을 내지르며 나뒹굴었다.
놈은 허리가 부러지기라도 한 것인지 일어나지 못하고 몸을 뒤틀기만 했다.
"뒈져!"
고통으로 몸을 비트는 원숭이를 향해 이젤라가 고함을 내지르며 손을 뻗었다.
손가락 앞에서 피어오른 화염이 통나무처럼 굵은 몸통을 가진 뱀의 형상으로 화해, 원숭이를 물어뜯으며 주변의 숲 십수 미터를 불태웠다.
그 속도와 범위 모두 투란이 만들 수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
이것이 바로 발타스 가문이 자랑하는 방화광 혈통의 힘이었다.
'저게 바로....'
불을 피우는 것은 마법사라면 누구나 가능한, 심지어 본능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역시 혈통 마법이 그쪽에 특화된 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뒤이어 따라온 마빈이 십수 개의 화염 창을 만들어 내리꽂자 이내 원숭이 마수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이를 본 토벌대의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와, 돌멩이 날아올 때 잠깐 오싹했네."
"무서우셨습니까, 누님?"
"닥쳐. 너야말로 계집애같이 비명이나 질러놓고...."
"누가 그랬습니까!"
두 귀족이 아웅다웅 다투는 사이, 투란은 자갈 세례를 맞고 쓰러진 기사들을 확인했다.
"으, 팔이 부러진 거 같아...."
"이 친구 머리에서 계속 피가 나오는데 어쩌지?"
"일단 이 약부터 발라."
다행히 기사들 중 목숨을 잃은 이는 없는 듯했다.
두 귀족의 방패막이가 되었던 이들이 제일 크게 다치긴 했으나 그마저도 자갈을 머리에 맞고 기절하거나 뼈가 한두 개 정도.
투란은 조금 전 이젤라와 마빈이 한 짓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마력이 강해짐에 따라 신체 능력 역시 강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둘의 몸은 평범한 기사보다 최소 몇 배 이상은 튼튼할 터.
그런데도 자기들이 다칠까 싶어 훨씬 약한 이들을 방패로 삼다니?
어머니에게 들은, 귀족에게 기사 따위는 언제든 희생시킬 수 있는 개에 불과하다는 말을 지독히 실감했다.
투란의 시선을 느낀 마빈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음? 왜 그러시죠?"
"아뇨, 아무것도."
대충 얼버무리긴 했지만 두 사촌 남매를 보는 투란의 눈빛에는 은근한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
그때, 이젤라가 손을 흔들며 투란을 불렀다.
"그보다 손님, 어서 와요! 마력 흡수하게!"
"예."
세 귀족은 불타서 반쯤 잿덩이가 되어버린 원숭이의 옆에 나란히 섰다.
손을 뻗고 마력을 흡수하자 이제는 꽤 익숙해진 연녹색 광채가 흘러나와 몸으로 스며들었다.
투란은 밀려오는 쾌감에 몸을 떨면서도 자신의 마력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확인했다.
원숭이의 힘을 흡수하여 얻은 성장치는 표범보다 강하고 토끼보다는 약한 정도.
원숭이의 강함이 그렇게까지 특출나지 않았음을 생각했을 때, 세 명이 함께 흡수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양이었다.
'확실히...듣던 대로 여럿이 흡수한다고 강화되는 정도가 깎이지는 않는 것 같네.'
마수를 죽여 마력을 흡수할 때, 최대 네 명까지는 함께 흡수해도 모두가 온전히 같은 양의 마력을 얻는 게 가능했다.
왜 세 명도 아니고 다섯 명도 아닌 네 명까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때문에 귀족의 수가 많은 가문은 사냥할 때 네 명이 한 조를 이룬다고 하던가?
그 와중에 한 자리가 남는데도 기사를 끼워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의 우월의식을 알 수 있었다.
"아, 난 더 흡수 못 하겠어."
"저도요."
이젤라와 마빈이 그렇게 말하며 몸에 흡수되었던 연녹색 광채 일부를 다시 허공으로 쏟아냈다.
저것이 바로 마력을 '흩어내는' 과정이었다.
타고난 마력 성장 한계에 도달하면 저런 식으로 마력의 극히 일부만을 흡수하고 나머지를 도로 방출하는 것이다.
투란은 모든 마력을 흡수한 자신을 향해 두 사람이 질투의 시선을 보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 *
오렘 시로 돌아오는 귀환길, 이젤라와 마빈은 원숭이와의 싸움을 몇 번이고 복기하며 자기들이 얼마나 영웅적으로 싸웠는지를 연이어 떠들어댔다.
두 사람이 기사들을 방패막이로 썼던 사실을 떠올리면 우습기만 했으나 투란은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러고 보면 투란 씨가 아니었으면 절대 못 잡았을 것 같기는 합니다. 추적 능력부터 시작해서 놈을 맞춰 떨어트린 것도 투란 씨의 공격이었으니까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겸손을 떨기는 했으나 내심 동의하는 바이긴 했다.
만약 그가 없었으면 토벌대는 아예 의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격을 허용해서 더 큰 손해를 입었을 것이고, 도망치는 원숭이를 쫓아 죽이지도 못했을 테니까.
추적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 치고 빠지는 공격을 당하면 그들이 뭘 할 수 있겠는가?
이젤라와 마빈이야 그냥 대로로 나와서 미친 듯이 오렘 시로 뛰면 목숨은 건졌겠지만, 기사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자갈 세례를 얻어맞다가 죽었을 게 뻔했다.
심지어 저 둘도 자잘한 자갈 세례가 아니라 큼직한 바윗돌을 하나씩 맞기라도 했다면 무사하지는 못했을 터.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 쉽게 잡긴 했지만, 확실히 기사 네 명이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잡아먹힐 만한 마수였다.
"오히려 너무 늦게 알아차려서 선공권을 준 게 아쉬운걸요. 놈에게도 탐색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탐색 능력이요?"
"네."
투란은 조금 전 만났던 원숭이의 생김새를 떠올렸다.
거대한 체구와 뛰어난 신체 능력은 거의 모든 마수의 전형적인 특성.
그중에서도 유난히 도드라지는 것은 기형적일 정도로 큰 손과 눈이었다.
이전에 만난 그림자 표범은 몸을 숨기는 능력이 발달해 아예 몸을 그림자처럼 만들어 움직일 수 있었고, 앞니 토끼는 무언가를 갈아내는 재주를 비약적으로 발달시켜 걸리는 것을 모조리 잘라 버리는 능력을 개화했다.
짐작건대 원숭이의 큰 손은 무언가를 강하게 던지는 능력, 큰 눈은 더 멀리 떨어진 것을 보거나 숲을 꿰뚫어 보는 능력으로 발전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내용을 전하자 토벌대에 속한 이들은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탄성을 터트렸다.
"와...."
"잠깐 새에 그런 것까지 알아차리셨을 줄은!"
모두가 그를 세상에 다시 없을 현자처럼 보는 것이, 이곳에 있는 사람 중 도서관에서 마수 도감을 읽은 자는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이를 살짝 돌려서 묻자 이젤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도서관? 그 고리타분한 데를...아무도 안 가죠."
그녀의 말에 따르면 하늘 도서관은 유명한 문화재 역할을 할 뿐, 안의 책에까지 관심을 가지는 이는 드물다고 했다.
출입부터가 가주의 허락을 맡아야 하기에 쉽지 않으며 책을 읽을 시간에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훨씬 많으니까.
기껏해야 투란 같은 이들이 몇 년에 한 번쯤 견학을 오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러 출입하는 정도라던가?
생각해 보면 지난 며칠간 다른 이용자가 한 명도 없기는 했다.
"옛날에 궁금해서 한 번 들어가 보긴 했는데 어려운 책만 있어서 반 권도 안 읽고 나왔어요."
그로서 투란은 새로운 사실을 또 하나 알 수 있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지는 않는다는 것.
"다음에 기회가 되시면 사서에게 읽기 쉬운 책이 있냐고 물어보시죠."
그 역시 다짜고짜 어려운 책부터 읽었으면 금방 독서에 흥미를 잃었을 것 같았기에, 투란은 가벼운 마음으로 덕담을 남겼다.
그런데 미처 예상치 못한 말이 돌아왔다.
"사서요?"
"네. 도서관을 관리하는 사람 말입니다."
"도서관에 그런 게 있던가?"
11화
토벌대가 돌아온 뒤, 발타스 가문은 이 승전(勝戰)을 널리 알리며 연회를 열었다.
도시 내에 음식과 술을 풀었으며 성 내에서도 화려한 만찬을 차려 기사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했다.
투란은 이것이 지나치게 요란스러우며 또한 성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만에 하나지만 그 원숭이 마수 외에도 또 도시 간의 통행을 막는 마수가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연회에 참석해서 슬쩍 운을 띄우자 이젤라는 걱정도 많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요? 그런 놈들이 한 번에 두셋씩 생기지는 않겠죠. 뭐 솔직히 생겨도 별 상관없고요."
일단은 경색된 무역로를 뚫었음을 선전하는 것이 먼저이며, 또 마수의 습격이 생긴다 한들 '아니었네, 몰랐어.' 하고 다시 토벌대를 보내면 그만이라는 논리였다.
지배자가 실수하거나 말을 바꾸면 권위가 떨어진다?
마법사 영주에게 있어 백성들의 지지와 신뢰 따위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것에 불과했다.
그들이 인간의 위에 군림하는 것은 그딴 보이지 않는 요소가 아닌, 만에 하나 반항하더라도 모조리 태워 죽일 수 있는 강대한 힘이었으니까.
"이번 토벌의 주연들이 이런 구석진 곳에서 뭘 하는 거지?"
그렇게 잡담을 나누는 도중,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이가 있었다.
루그 가주가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투란과 이젤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휴, 아버지. 말도 마세요. 손님이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요."
이젤라의 말을 들은 루그 역시 껄껄 웃으며 투란의 걱정이 지나친 것이라고 일축했다.
그 정도로 강한 놈들은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마리쯤이나 생길 뿐이라고.
하긴 듣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기는 했다.
본래 마수는 풍요로운 지역에 더 많이 나타나는 법인데, 대륙 전체를 두고 보면 비교적 변방인 이곳에까지 기사조차 순식간에 죽여버리는 놈들이 활보하고 다녔으면 케오른이 어떻게 홀몸으로 여행을 떠났겠는가.
다른 평범한 여행자들은 또 어떻고.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도중, 이젤라가 음식 좀 먹겠다는 핑계를 대며 슬쩍 자리에서 비켜났다.
투란과 독대하게 된 루그가 가장 먼저 들고 있던 술잔을 내밀었다.
"그보다 이거나 한 잔 마시게. 손님에게 술 한 잔도 주지 않아서야 주인으로서 체면이 상하지."
오렘의 독주는 무레이의 여관에서 마셨던 맥주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다.
목을 태우는 듯한 열기,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강렬한 향에 투란은 자기도 모르게 캑캑거렸다.
"하하! 술이라고는 처음 마셔보는 사람처럼 구는구만."
"이렇게 강한 술은 처음입니다."
다행히 귀족의 강인한 몸뚱이는 독주 한두 잔으로 상하지 않기에, 투란은 취하지 않고 적당히 술 상대를 할 수 있었다.
지나다니는 하인이 나눠주는 술을 네 잔쯤 마셨을 때, 루그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말했다.
"그보다 자네, 이젤라를 어떻게 생각하나?"
오늘 낮에 마빈에게 들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의 질문.
투란은 표정 하나 바뀌는 일 없이 태연히 대꾸했다.
"제가 신세 지고 있는 가문의 아가씨라고 생각합니다."
"이성적인 호감이 없단 건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거의 무례하리만치 솔직한 대답에 루그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으나 투란은 사과하지 않았다.
본래도 이젤라에게 큰 호감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토벌전 당시 보인 모습으로 지금은 없던 호감도가 더 떨어진 상태.
괜히 상대의 체면을 생각해 여지를 주는 것보다 딱 잘라 말하는 게 나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예상대로, 루그는 감히 자기 딸이 마음에 안 드는 거냐며 화내는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구만, 자네가 내 딸을 마음에 들어 했으면 싶었는데 말이야."
"더 좋은 인연이 있을 겁니다."
"이런 변방에 자네만 한 인연이 어디 흔하겠나? 이젤라에게 듣기로 이번에 마력을 흡수하면서 버거워하는 기색조차 없었다던데."
"음, 네. 아직 많이 부족하니까요."
"자네 마력량이 이젤라와 큰 차이가 없다던데, 그러면 우리 딸이 부족하다는 말이군."
뭐라 대답하기 난감한 말에 투란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때, 루그가 갑자기 한탄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뭐, 그리 틀린 말은 아닐세. 이젤라가 분명 타고난 자질이 나쁘지는 않았는데, 생각보다 성장 한계가 너무 빨리 왔어. 발타스의 가주 자리를 지키기에는 부족하지. 이대로라면 길론...그러니까 자네가 본 적 없는 내 다른 조카를 차기 가주로 내세워야 할 상황이야. 만약 이젤라가 자네와 결합하면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이젤라에게 관심 없다는 말에 마빈이 기뻐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투란이 이젤라와 결혼이라도 하면 친형이 가주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클 테니까.
이해할 수 없는 건 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는 루그의 태도였다.
설마 가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술에 취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도 잠시, 냉철하게 이쪽을 가늠하는 눈동자를 보자 루그가 왜 이런 푸념을 늘어놓았는지 짐작이 갔다.
그는 투란이 이러한 사정을 알고 마음이 흔들리기를 바란 것이다.
지난 며칠간 끈질기게 청혼했던 사람을 외면해서 차기 가주 자리를 잃게 했다는 죄책감이나 책임감, 혹은 이젤라와 결혼하면 이 도시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야심.
둘 중 어느 쪽이어도 걸리기만 하면 좋겠다는 계산이었을 터.
"가주님께서 현명한 결정을 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 대답으로 투란이 자신의 의도를 간파하고 거절했음을 알아챘는지, 루그가 조금 전보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렇군. 뭐, 알겠네...그러면 연회를 적당히 즐기게나. 혹시 도시를 떠나기 전에는 알려주고."
결혼에 관심 없다고 하자 곧바로 언제 떠날 거냐고 노골적으로 재촉하는 태도에 투란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대놓고 속물처럼 구니 화가 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습게 느껴진 것이다.
투란은 루그가 슬슬 자리를 떠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마지막으로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물론 대놓고 말하는 것이 아닌, 살짝 돌려서.
"아, 가주님.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뭔가?"
루그가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투란은 알아차리지 못한 척 말을 이어나갔다.
"도서관을 이용하면서 느낀 건데, 혹시 누가 책을 훔쳐 가지 않나 확인하지는 않습니까? 찾는 사람이 있는지와 별개로 하나같이 비싼 물건이지 않습니까."
"음? 자네 혹시 모르는 건가? 알고 있어서 도서관에서만 책을 읽는 줄 알았는데."
의미심장한 말에 투란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젓자, 루그 가주가 으스대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은근한 제안을 거절한 투란을 지식으로라도 찍어 누르며 만족감을 얻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하늘 도서관은 옛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물건이라, 허락받지 않은 이가 책을 꺼내 가면 어마어마한 소리로 경고음이 울리지. 사실 이걸 미리 안 알려주고 망신당하게 하는 게 내 즐거움 중 하나였는데 말이야."
"허락이라는 건 어떻게 받습니까?"
"그야 모르지! 도서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우리 가문이 이 도시를 차지하기 전부터 없었으니까. 뭐, 어차피 책을 가지고 나가도 경고음만 좀 울리다 말 뿐 알아서 책을 정리하는 기능 같은 건 정상적으로 작동하니까...."
투란은 그의 말을 들으며 눈을 반짝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던 것이 마지막 말로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 * *
다음 날, 투란은 그저께 그랬던 것처럼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고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투란의 얼굴을 익히고 있던 기사가 출입증조차 확인하지 않고 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1층 로비로 들어가자 늘 그랬듯 책상에 앉아 있던 중년의 사서가 투란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투란 님."
투란은 그의 인사말에 자신이 얼마나 무신경했었는지를 새삼 깨닫고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해 보면 단서는 처음부터 있었다.
우선 '투란 님'이라는 호칭.
이 도시의 어떤 기사와 평민도 그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고귀하신 분'이라 칭할 뿐.
거기다 책을 읽는 내내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것도 그랬다.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들어와서, 저녁 먹을 때가 되어서야 나오는 것이 투란의 독서 패턴.
그러는 와중 사서는 한 번도 따로 화장실에 가거나 식사를 하는, 혹은 물을 마시는 일조차 없이 투란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고 한들 불가능한 일은 아니나 지독히도 이질적인 요소.
하지만 투란은 내내 책에만 정신이 팔려 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신 겁니까?"
투란의 질문에 사서의 겸손하던 표정이 개구쟁이의 그것처럼 바뀌었다.
"거 참 지독히도 늦게 알아차렸구나, 둔한 놈아. 나에 대해서 바깥의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도 않은 게냐?"
"이 도시에서 그런 대화를 나눌 정도로 어울린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랬습니다."
"어지간히 외톨이인 모양이지? 매일 책이나 파고 있을 때부터 알아는 봤다만."
순식간에 대화의 상하 관계가 역전되었으나 이것이 어색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사서가 낄낄 웃으며 읽던 책을 휙 내던져 본래 있어야 했을 곳에 꽂아 넣었다.
"네 이름은 출입 허가증을 보고 알았다. 이 도서관 주변까지는 시선이 닿으니까."
"제가 어르신을 어떻게 부르면 되겠습니까?"
"나는 사서다. 이름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으니 그냥 그렇게 부르면 된다."
"알겠습니다, 사서 어르신."
"공손히 구는 꼴이 어색하구나. 며칠 내내 이놈 저놈 하며 온갖 일은 다 시켜 먹더니."
"이놈 저놈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르신이 지금 그러고 계시지요."
"어린놈이 한 마디도 안 지려고 들기는!"
이런 식의 말다툼이 꽤 기꺼운 듯, 콧방귀를 뀌면서도 사서의 얼굴에는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투란은 사서의 맞은편에 앉아 다시 한번 상대의 정체를 캐물었다.
"어르신은 옛 제국의 마법사이신 겁니까?"
"나는 애초에 사람이 아니다. 일종의 정령이라고 할 수 있지. 도서관의 정령."
"정령이라면...."
투란이 읽은 책 중에 그런 존재에 대해 자세히 다루는 책은 없었다.
'세계 일주기'에서 숲에 사는 요정들이 영술(靈術)이라는 능력으로 생령과 정령, 사령을 다룬다는 이야기 정도는 들었지만 딱 그 정도뿐.
그의 지식이 짧음을 알고 있는 사서가 곧바로 이를 설명했다.
"영혼이 산 것에 깃들면 생령, 죽은 것에 깃들면 사령, 죽지도 살지도 않은 것에 깃들면 정령이다. 말하자면 도서관이 곧 나의 몸인 셈이지. 이 형상은 이용자와의 대화를 위해 편의상 투영된 것이고. 말하자면 물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 말을 들은 투란은 무의식중에 탁자 위로 올려져 있던 사서의 손등을 쿡 찔렀다.
과연, 그의 손가락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손등을 관통해 책상을 두드렸다.
이를 본 사서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그만둬라, 기분 나쁘니까."
"죄송합니다."
얼른 손을 빼며 사과하자 사서의 표정이 다시 풀렸다.
"침입자에게 직접 힘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짜증 나는 일인지 모를 거다.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도서관에서 책을 꺼내가려는 도둑놈들을 죄다 응징했을 텐데...."
이런 존재가 있는데도 책이 왜 그리 많이 없어졌나 했더니 사람에게는 힘을 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마 책을 움직이거나 도서관 내부를 청소하는 것 정도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발타스 가주는 사서 어르신의 존재를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도서관을 이용한 사람들 모두가요."
"그야 그동안 나를 인식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이가 없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대화한 게 삼천 년쯤 된 것 같으니, 너희 '마법사'들이 제법 오래 산다 한들 기록조차 남지 않을 때가 되기는 했지...마법사라, 허."
어째서인지 사서는 '마법사'라는 단어가 우스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투란은 상대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무려 삼천 년이라는 아득한 세월 만에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났는데도 태연히 발타스 가문의 사용인인 척 행세하며 장난을 쳤단 말인가?
만약 그가 책에 흥미를 잃고 다시 안 오게 되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묻자 사서가 콧방귀를 흥 뀌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인 거지. 너희와 다르게 내게 삼천 년은 그렇게까지 아득한 시간이 아니니까. 앞으로 수천 년쯤 더 기다리면 한 놈은 더 오지 않겠냐."
그 말을 들으니 확실히 이 정령이 인간과는 전혀 다른 생물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기야 돌이나 강이 수천 년의 세월을 지루해하지는 않는 법 아니던가.
투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금 질문했다.
"자격이라면, 어떤 겁니까?"
"내 창조주는 유형(類型)의 완성도가 일정 수준 이상인 이들만이 나를 인식할 수 있게 해 두었지. 그리고 너는 내가 지난 삼천 년간 본 마법사 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았고."
"유형...이요?"
"너희가 혈통이라고 부르는 것 말이다."
혈통의 완성도가 높다니, 그게 무슨 의미인가?
고민과 동시에 과거 케오른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법사는 신의 후손, 혈통 능력은 조상인 프레아 신족이 가지고 있던 특징 중 하나....
그러니까, 저 정령은 투란이 지난 삼천 년간 보아온 마법사 중 가장 신에 가까운 존재라고 말한 것이다.
12화
투란은 자하르 가문, 다르게는 추격자나 사냥꾼 혈통이라 불리는 집안의 핏줄을 타고났다.
대표적인 특징은 뛰어난 후각과 반사신경, 그리고 남들보다 추적과 은신 마법을 쉽게 쓸 수 있다는 것.
그중에서도 은신 능력이 유난히 강력해서, 단순히 보이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예 생명체의 모든 인지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자하르는 손꼽힐 만큼 강력한 가문 중 하나일 뿐 절대강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케오른이 속한 아라비온 가문과의 전쟁에서도 다소 우세했을지언정 승리를 차지하지는 못했으니까.
그런데 그 적통도 아니고 기사와 일반인 사이에서 태어났을 뿐인 투란이 어떻게 그리 특별할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제 혈통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런 건 네 부모에게 물어보면 될 것 아니냐."
"전 고아입니다."
"그랬나?"
사람이라면 저런, 안됐구나. 하고 무의미한 말이라도 더할 법하건만 정령인 그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투란도 딱히 동정 같은 걸 바라지는 않았기에 상관은 없었다.
"흠, 그러면 내 한번 확인해 주랴? 네 몸을 조사하는 데 동의만 하면 된다."
"네."
동의를 받은 사서는 곧바로 그의 가슴에 손가락을 푹 꽂아 넣었다.
당연하게도 환영인 만큼 통증 따위는 없이.
한참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보듯 표정을 이리저리 바꾸던 사서가 탄성을 터트렸다.
"자잘한 게 좀 있긴 하지만 큰 덩어리는 추격자, 사냥꾼이로군. 이게 아마 자하르 가문의 형질이던가? 그 사막에 사는?"
"네."
어차피 상대가 어디 가서 유출할 능력이 없는 만큼 투란은 순순히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 이를 알아낸 뒤에도 사서는 무언가 더 보는 듯하더니 탄성을 터트렸다.
"음? 오호...하나 더 있구나! 뒤섞인 거였어!"
"뒤섞였다니요?"
"네가 가진 힘은 두 가지 혈통이 결합한 결과물이라는 거다. 무슨 뜻인진 알겠지? 내가 추천해 준 책에도 관련 내용이 있었으니까."
그 말에 투란은 이틀째에 보았던, 마법사 가문에 관한 내용이 적힌 책을 떠올렸다.
분명히 거기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기는 했다.
혈통 결합.
귀족이 가진 혈통 능력은 보통 자식에게 온전히 계승되거나 약해지지만, 드물게 더 강해지는 때도 있다.
바로 각자 다른 혈통의 부모가 가진 능력이 결합하여 더 다양하고 강력한 힘으로 개화하는 것.
물을 다루는 혈통과 얼음을 다루는 혈통 사이에서 물과 얼음을 둘 다 다루는 혈통이 탄생한다거나, 상처를 치료하는 혈통과 병을 치료하는 혈통 사이에서 상처와 병을 모두 치료할 수 있는 혈통이 탄생한다거나.
이렇게 여러 개의 혈통이 결합하여 강한 힘을 가지게 된 이들이 시조가 된 가문을 대가문이라 칭했다.
"그러면 나머지 하나는 뭡니까?"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아직은 잠겨 있어서. 아마 앞으로 네가 더 힘을 키우면 열릴 거다."
사서는 이런 식의 '잠긴 혈통'이 갓 결합한 첫 세대에서 일어나는 증상 중 하나라고 했다.
즉, 투란이 가진 힘의 절반은 어머니 쪽에서 온 것이 확실하다는 뜻이었다.
'어머니....'
기억 속 투란의 어머니는 늘 온화하고 우아했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나 지친 기색이 역력한 사람이었다.
남편 없이, 건장한 남자들조차 해내기 힘든 양치기 일을 어린아이까지 돌보며 해야 했으니 그럴 수밖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마법사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냥 평민치고는 지나치게 예의 바르고 유식하기도 했다.
투란이 살던 히사릴 언덕 주변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런 도시에서도 동화 같은 것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계층은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녀는 어느 귀족의 후예였을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은 기사 수준의 마력조차 가질 수 없을 정도로 혈통이 흐려진.
한참 시간이 지난 뒤, 마침내 모든 생각을 정리한 투란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좋아요, 대충 이해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투란이 여행을 시작하며 가지고 있던 목적 중 하나는 부모님의 흔적을 쫓는 것이었다.
'좋은 사람'이라던 그의 아버지가 왜 가족들과 함께 살지 않는지,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머니는 왜 투란과 함께 세상의 서쪽 끝으로 도망쳐야 했는지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이번에 알게 된 사실 덕에 투란은 한층 더 강한 동기 부여를 받게 됐다.
아마 그 답은 투란의 혈통 중 절반인 자하르 가문의 땅, 엔릴 사막에 있을 터였다.
* * *
도서관 정령의 정체를 알게 된 뒤, 투란은 단순히 혼자 독서에 몰두하는 게 아니라 그에게 책의 내용을 이것저것 물어보며 해설을 부탁했다.
무엇보다도 사서는 지난 수천 년간 도서관에서 수탈되어 없어진 책에 담긴 지식까지도 알고 있었는데, 모든 책이 유실된 탓에 직접 말로 가르쳐 주는 '자연법칙'은 그야말로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물질이 그렇게 많다는 겁니까?"
"그래. 허공에 물을 띄우고 이런 형태로 만들어서 들여다 보면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사서가 시키는 대로 특이한 모양의 물방울을 만들어 눈앞에 대자 놀랍게도 사물이 몇 배에서 몇십 배씩 확대되어 보였다.
이어지는 설명을 통해 투란은 온갖 질병이 이러한 미생물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라거나, 생물의 부패가 이러한 균의 섭식에 의한 것이라거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빛의 굴절, 마찰로 인한 열의 발생, 생물이 다치고 회복하는 과정에 대한 원리까지....
그중 상당수는 케오른에게 배웠던 마법의 원리와도 연관이 있었다.
예를 들면 기존에는 구름이 많이 꼈을 때 낙뢰 마법이 쓰기 쉬워진다는 사실만 알았다면, 이제는 왜 그런건지도 알게 된 것이다.
그중에는 사서 역시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다소 어설프게 겉핥기식으로만 배울 수 있는 분야도 몇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투란이 가지고 있던 세상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에는 충분했다.
심지어 이러한 지식은 그냥 아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러면, 부패부터 실험해 보겠습니다."
투란이 밖에서 가져온 사과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과가 빠르게 썩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을 수백 배쯤 빠르게 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떠냐?"
"엄청나네요...."
기존에도 이러한 마법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으나 그 효능과 마력 소모량은 둘 다 끔찍하리만치 비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부패의 원리를 간단히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투란은 이러한 일을 훨씬 더 적은 마력을 소모해 이뤄낼 수 있었다.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법 실력이 올라간 것이다.
마치 순식간에 이러한 마법을 '숙련'한 것처럼.
투란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쿡쿡 웃었다.
"루그 가주가 틀렸군요."
"뭐가 말이냐?"
"이 도서관에 끝내주는 고대 마법이나 마력을 높이는 비법 따위는 없다고 했거든요."
실제로 사서 역시 그러한 지식을 알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법칙이야말로 그보다도 더한 비법이었으니.
어쩌면 몇몇 강대한 가문이 이러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마법사가 이러한 것을 알고 있으면 경쟁력이 떨어질 테니까.
사서 역시 그러한 생각에 동의했다.
"어째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의 지식수준이 떨어지기만 한다 싶더니, 네 말대로라면 좀 이해가 가는구나."
사서가 투란에게 가르쳐주는 이러한 자연법칙은 옛 제국이 존속하던 시절, 즉 프레아 신족이 존재했을 당시 그들이 직접 집필한 책에서나 나온다고 했다.
제국 멸망 후에는 이런 종류의 서적 자체가 극히 드물어졌다고.
"그러고 보면 이 도서관은 옛 제국 시절에 만들어졌다고 하셨죠. 사서 어르신을 만들었다는 창조주가 신입니까?"
"그래. 절름발이 여신이 나를 만들었지. 사실 옛 제국의 유산 태반은 그녀가 만들었을 거다. 신이라고 해도 창조적인 재주를 가진 이는 별로 없었으니까."
절름발이 여신.
프레아 신족 최고의 대장장이이자 건축가로, 신들이 사용하는 온갖 강대한 보물과 궁전을 만든 존재였다.
때문에 마법기를 만드는 가문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후손을 자처하고는 했다.
"혹시 여신과 대화도 나눠 보셨습니까?"
"어떤 존재였냐고 물어볼 거라면 나도 잘 모른다고 미리 답해두마."
그의 창조주, 절름발이 여신은 도서관을 만든 뒤 사서에게 지켜야 할 사명을 주입하고 곧장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바빠서 잠시 지체할 틈도 없다는 듯이.
투란이 아쉬워하며 한숨을 내쉬자 사서가 낄낄 웃었다.
"그리 실망하지 말거라, 이놈아. 이 땅에는 신들의 유산이 많으니까. 어쩌면 그중에는 나랑 달리 신과 가까이 지냈던 정령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새로운 선생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으며 즐겁게 떠들기를 열흘.
투란은 사서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떠난다고?"
"네. 슬슬 이곳의 주인이 대놓고 눈치를 주더라고요."
사실 투란이 이곳에 머문다고 해서 생기는 손해라고 해봐야 얼마 안 되는 식비 정도가 고작일 것이건만, 루그 가주는 놓쳐버린 먹이가 눈앞에서 계속 아른거리는 게 괜히 거슬리는 듯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놓고 거절하지 말고 조금 여지를 줄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잠시 했으나 투란은 이내 그런 생각을 접었다.
그렇게까지 하는 건 손님으로서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구나."
무덤덤하게 답하는 사서의 얼굴에 오랜 세월 끝에 만난 대화 상대와 헤어진다는 섭섭함이나 좌절감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투란은 그가 수천 년쯤 더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던 게 빈말이 아님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오고 싶으면 오거라, 아니면 말고."
"아직 못 읽은 책이 많은 걸요."
사실 이제 도서관에 들러야 할 이유는 별로 없었다.
살면서 필요할 법한 상식도 거의 다 습득했고, 사서가 알고 있는 '자연법칙' 역시 마법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어느 정도 다 배운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투란은 언젠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어쩌면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기다릴 수도 있는 늙은 선생에게 자신이 겪은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더 들려주고 싶었다.
* * *
루그 가주와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투란은 곧바로 오렘 시를 떠났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처음 왔을 때와 같은 누더기도, 발타스 가문의 손님으로서 입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흰 셔츠와 뻣뻣하지만 튼튼한 바지, 그리고 질긴 가죽 신발과 머리까지 덮을 수 있게 후드가 달린 망토.
고귀한 귀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만 하나같이 새것인 옷을 입고 있으니 돈 많은 여행자 정도로 보였다.
낡은 양가죽 배낭 하나를 허리에 찬 모습이 다소 이질적이기는 했지만.
도서관에서 얻은 대륙 전도에 의하면 자하르 가문의 본거지, 엔릴 사막은 오렘에서 동쪽으로 꼬박 한두 달쯤은 가야 하는 거리였다.
어차피 급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부모에 대한 단서가 없어질 것이었으면 지난 십팔 년간 이미 없어졌을 것이고, 남아 있을 것이면 조금 늦게 간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을 테니까.
투란은 오렘에 오기 전 그랬듯이 길을 걷고, 마법에 포착되는 마수를 사냥해 힘을 취하기를 반복했다.
일부러 경로를 이리저리 꼬며 큰 도시에는 들르지 않았는데, 이미 다른 가문에 손님으로 들르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를 체험해 본 탓이었다.
만약 지도 없이 이런 짓을 했다면 완전히 방향조차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여행 중에도 어느 정도 위생 관리에 신경을 썼다는 것.
한 번 깔끔하게 살아보고 나니 다소 관리하고 싶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미생물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니 더럽게 사는 것이 껄끄럽게 느껴졌다.
어차피 물이야 근처 개울에 많고 비누도 한 개 가지고 나왔기에 하녀들이 관리해 줄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깔끔을 떨 수 있었다.
그렇게 걷기를 약 아흐레.
투란의 탐색 마법에 다시금 마수의 흔적이 걸려들었다.
손바닥보다도 큰 말발굽이 땅에 찍힌 것으로 보아 아마 말이 변이된 마수일 터.
그런데 적당한 거리에서 몸을 숨긴 채 다가가니 기묘한 광경이 보였다.
[히히히힝-!]
커다란 나무 앞에서 포효하는 새빨간 털의 말은 마수답게도 어깨높이만 평범한 사람의 한 배 반쯤 되어 보였다.
그 뒤쪽에는 나무에 기대 앉은 사람이 기절한 듯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눈을 감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수에게 습격당한 것인가 싶었지만 잘 보니 놈은 오히려 쓰러진 사람을 지키고 있었다.
등에 안장도 매여 있는 게 아마 저 남자가 키우는 마수인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둘의 바로 옆에서, 처음 보는 복식을 한 남녀가 흉흉한 기색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빌어먹을 악마 놈 같으니, 무슨 애완 마수 따위가 저렇게 강한 거야?"
"어떻게 빈틈 좀 만들어 봐."
"말이 쉽지!"
아무래도 그들은 말의 방어를 뚫고 쓰러진 남자를 끝장내고 싶어 하는 듯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투란은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검보랏빛 피부와 은색 머리카락, 위아래로 길게 찢어진 귀....
저들은 어머니가 들려주던 동화나 책에서만 접한 존재, 흑요정이 분명했다.
13화
요정은 먼 고대, 프레아 신족이 강림하기 전까지 인류를 노예로 삼아서 부리던 이종족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검보라색 피부와 은색 머리카락이 특징인 흑요정은 죽은 마법사나 마수의 몸에서 생겨나는 사령을 다루는 사령술이 특기.
예상대로 두 흑요정의 손에서 연녹색 광채가 솟아났다.
[■□■□■□-]
적막한 숲을 울리는 괴기한 으르렁거림과 함께 대여섯 마리의 사령이 나타나 붉은 말과 그 주인을 둘러쌌다.
늑대, 살쾡이, 물소....
붉은 말이 격렬하게 포효하며 마구 땅을 굴러 적을 위협했으나 누가 봐도 열세에 몰린 기색이 역력했다.
투란은 나무 옆에 몸을 숨긴 채 고민에 빠졌다.
'도와야 하나?'
케오른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당연히 인간 쪽을 도와야 하겠지만, 이 싸움이 어쩌다 일어난 것인지 모른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만약 저 쓰러진 남자가 먼저 흑요정들을 공격하기라도 했다면 이를 돕는 것이 오히려 나쁜 일이 될 테니까.
책에서는 흑요정을 비롯한 이종족들이 하나같이 인간을 노예 삼으며 잡아먹기를 즐기는 괴물들이라고 묘사했지만, 적어도 저들이 명백히 악이라는 증거를 확인한 뒤에-
"그거 누구 손이야? 나도 하나 줘."
"네 거 먹어. 알아서 챙겼을 거 아냐."
누가 봐도 인간의 것이 분명한 손가락을 오독오독 뜯어먹는 흑요정 남성.
저 모습을 본 순간 흑요정이 식인을 즐긴다는 정보는 편견이 아닌 사실임이 확인됐다.
투란은 모습만 감추고 있던 은신을 완전 은폐로 전환한 뒤 스무 걸음 정도 다가가, 아몬드형으로 깎은 돌 하나를 매기며 익숙한 주문을 외웠다.
"단단해져라, 빨라져라, 꿰뚫어라-목표는 머리."
이제 마법의 숙련도가 높아진 탓에 이런 식으로 주문을 외우는 게 썩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조금은 나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투석구에서 돌이 해방됨과 동시에, 투란은 힘을 행사하여 앞을 가로막고 있던 '공기'를 갈라내는 것으로 돌멩이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지게 했다.
"내가 죽인 놈들은 다 남자라서 털이 너무 많았-"
여자 흑요정이 농담하듯 말하던 도중, 빠악 하는 파열음과 함께 맞은편에 있던 동료의 머리가 사라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순식간에 목 위를 휩쓸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붉은 말을 노리던 사령 중 남자 흑요정이 다루던 절반이 그대로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어? 켈?"
흑요정 여성은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멍한 표정을 짓더니, 투란이 짐작했던 것보다도 훨씬 빠르게 사령들을 자기 주변으로 불러들였다.
덕분에 그녀를 노린 두 번째 돌멩이는 몸을 둘러싸고 있던 산양 사령에 의해 튕겨 나갔다.
"쳇."
"어떤 자식이야! 나와!"
흑요정은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내지르며 즉시 물소 사령을 돌멩이가 날아온 곳으로 보내 땅을 마구 뒤엎게 했으나 당연하게도 투란은 이미 그 자리에서 이탈한 뒤였다.
그제야 상대가 은신 중임을 눈치챘는지 그녀는 사령 하나를 더 소환했다.
"어디, 이래도 숨을 수 있나 보자!"
이번에 나타난 사령은 제 동족과 비슷한 크기의 작은 여우.
놈은 나타나자마자 사방으로 환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나뭇잎에 가려 다소 어두침침했던 숲이 대낮의 들판보다도 더 환해졌다.
"쯧."
물속에다가 불을 피워내는 것이 힘든 것처럼 밝은 곳에서는 은신의 효율이 급격히 감소하는 법.
막대한 마력 소모를 감수하며 은신을 유지하거나 이를 해제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면 도망가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러면 저 붉은 말과 그 주인이 다시 위기에 처할 터.
투란이 혀를 차며 은신을 풀자 흑요정이 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너! 악마 놈! 감히 켈을 죽여!"
그녀는 뭐라 답할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늑대와 물소 사령에게 공격을 명했다.
이에 투란은 부싯돌로 불을 켤 때처럼 두 손을 강하게 한 번 비비며 불꽃을 만들었다.
마찰은 열기를 만들어내며 열기는 곧 발화의 원인이라.
그 원리를 어렴풋이 인지하고 이를 유발하는 것만으로도 손 위에 생겨난 불꽃은 이전의 그것보다 훨씬 강렬했다.
화염의 구체가 허공을 빠르게 돌며 원심력을 얻더니 앞서 달려오는 늑대의 머리에 정확히 꽂혔다.
[■■■■-!]
늑대 사령은 미처 인지하기도 힘든 속도로 날아든 화염구에 비명을 내지르며 고꾸라졌다.
문제는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거대한 물소.
재차 화염 투척을 시도하기에는 거리가 지나치게 짧으며 저런 덩치를 한 번에 해치울 수 있다는 확신도 없어, 투란은 곧바로 몸을 굴려 놈의 돌진 궤도에서 벗어났다.
다소 꼴사나운 모습이지만 피하는 데는 성공할 수 있었다.
"이게...!"
그러한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흑요정 여성은 다시 한 차례 손짓해 사슴 사령을 소환하며 투란을 향해 달려들게 했다.
아마 한 번에 조종할 수 있는 한계가 네 마리인 것 같았다.
'미리 한 놈을 처리해서 다행이네.'
만약 여덟 마리 이상을 한 번에 상대해야 했다면 도망치는 것밖에 답이 없었을 터.
다시금 달려오는 물소의 공격을 피하며 두 번째 화염구를 일으켜 사슴 쪽을 지져 버리는데, 갑자기 다리에서 화끈한 통증이 밀려왔다.
"윽!?"
아래를 내려다보니 조금 전까지 환한 빛을 내뿜던 여우가 어느새 빛을 끄고 기척을 죽인 채 다리를 물어뜯고 있었다.
은신을 막기 위한 조명 역할로만 꺼낸 줄 알았건만, 설마 공격까지 수행할 수 있었을 줄이야.
황급히 다른 발로 여우의 목을 걷어차 떼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틈을 노리고 달려든 물소의 돌진까지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투란은 그대로 쾅 들이받혀 허공을 수십 미터 날아 근처의 나무에 처박혔다.
"컥...."
잠시지만 의식이 날아갈 정도의 충격.
내장이 밀려 올라간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아, 투란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꺽꺽대며 그대로 널브러졌다.
이를 본 흑요정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꼴 좋다! 감히 나의 켈을 죽이다니, 죽고 싶다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꺄악!"
[이-히히히힝!]
그렇게 한 방 먹였다고 의기양양하던 흑요정을 급습한 것은 다름 아닌 붉은 말.
조용히 둘의 싸움을 관찰하던 놈이 그제야 투란을 자기편으로 인식하고 참전한 것이다.
산양 사령을 몸에 씌워둔 덕에 일격에 죽지는 않았지만, 밑에 깔린 채 발굽으로 사정없이 짓밟힌 흑요정의 꼴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케헥, 윽, 도와, 빨리!"
주인의 명령에 따라 투란을 끝장내려던 물소와 여우, 그리고 몸을 감싸던 산양까지 붉은 말을 향해 덤벼들어 삼 대 일의 난투가 시작됐다.
간신히 자리에서 벗어난 흑요정 여인이 씩씩대며 엉망이 된 매무새를 정리했다.
"감히, 나한테 이런 굴욕을, 죽여 버리겠어...."
그렇게 분노하기도 잠시, 흑요정은 조금 전 물소에 치여 날아갔던 투란이 어느새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도망쳤나? 아니면 은신?
'빨리 산양을 돌아오게 해야...아니, 그러면 저쪽 싸움의 균형이 깨지는데?'
진퇴양난의 상황에 판단이 흐려진 순간, 조금 전보다 다소 작은 파열음과 함께 그녀의 의식이 꺼졌다.
흑요정 역시 눈썹 위쪽이 사라지면 생각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인간과 같았다.
"후아...."
마력과 체력 모두 한계까지 짜내 날린 마지막 투석.
그것이 상대의 머리를 부순 것을 확인한 투란은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땅이 마구 울렁거리며 몸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져 도저히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죽겠네, 진짜.'
살면서 이만큼 심신을 혹사해 본 것이 있었을까.
샛노래진 하늘을 올려다보던 도중, 갑자기 붉은 그림자가 그 위를 훅 뒤덮었다.
[히히힝.]
투란에게 다가온 붉은 말이 주둥이를 가슴에 비볐다.
잘은 모르겠지만 훌륭했다, 하고 격려해 주는 듯한 느낌.
픽 웃으며 녀석의 콧잔등을 쓰다듬은 투란은 수십 분 정도 쉬며 어느 정도 체력을 보충한 뒤 일어났다.
아무리 죽을 것 같아도 싸움에서 이긴 이상 전리품만은 챙겨야 했다.
남자 흑요정이 부리던 세 마리, 여자 흑요정이 부리던 다섯 마리의 사령을.
* * *
"으...."
어둑한 숲, 아시즈 베르크는 두통에 신음하며 눈을 떴다.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한 탓인지 기억이 마구 뒤엉켜 혼란스러웠다.
갑작스러운 흑요정의 습격, 싸움, 도주, 하나둘씩 그를 위해 희생되는 가솔....
"다믹!"
마지막까지 그를 보필하던 집사의 이름을 부르며 아시즈는 다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정갈하게 늘어선 장작 위로 타오르는 모닥불.
맞은편에는 적갈색 망토를 두른 사람 한 명이 앉아 있었다.
회색 머리카락을 꽁지머리로 묶은 잘생긴 남자였는데 나이는 평민 기준으로 그보다 두세 살쯤 젊어 보였다.
"일어나셨군요."
"당신은?"
"그쪽이 흑요정에게 습격당하고 있길래 구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주변을 본 아시즈는 이곳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숲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혼란스러워하기도 잠시, 익숙한 기척이 그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온 애마(愛馬), 틸리가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에 다리를 기댔다.
"틸리...."
"좋은 말이더군요. 주인을 보호하고, 안전을 위해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것까지 알아들을 정도로."
틸리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아시즈는 그제야 상대가 자신을 구해주었음을 확신했다.
만약 수상한 이였다면 자신의 애마가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근하게 둘 리 없었으니까.
"구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베르크 가문의 아시즈입니다."
"투란입니다."
가문을 밝히지 않았지만 아시즈는 상대가 귀족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를 쫓던 흑요정 사령술사들은 기사 따위가 상대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수많은 사령을 부리던 그 공포스러운 모습이란....
"혹시 흑요정과 충돌하신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이유...아니요, 없습니다. 저는 그냥 가솔을 거느리고 순례 중이었는데, 갑자기 일방적으로 기습당했습니다. 이종족들이 사납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그렇게 답한 아시즈는 새삼 떠오른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져 이를 꽉 악물었다.
그를 따라온 여섯 명의 기사와 열 명의 하인들, 그중에서도 아시즈를 키워주다시피 했던 집사 다믹까지 모두 죽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라서였다.
낯선 사람이 보고 있는 만큼 참으려 했지만,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귀족의 체면조차 잊고 아시즈가 흐느끼는 사이 투란은 배려심 있게 모닥불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사실 그를 위로하기에는 몸이 호소하는 피로감이 지나치게 컸다.
물소 사령에게 들이받힌 몸뚱이 이곳저곳이 쑤시고 삐걱거리는 중이었으니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몸속에 느껴지는 막대한 양의 마력이었다.
무려 여덟 마리의 사령을 잡아먹어서 얻어낸, 못해도 싸움 전의 두 배는 될 만한 양의 힘....
원숭이 마수를 잡은 뒤 길가에서는 자잘한 녀석들만 잡느라 별 성장을 하지 못했음을 생각하면 정말로 큰 행운이었다.
비록 그러다가 진짜로 죽을 뻔하기는 했지만.
잠시 후, 아시즈는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슬렀는지 새빨개진 눈가를 문지르며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이번에 잃은 사람들이, 제게는 너무 소중했던 이들이라...."
"가족이었습니까?"
"저와 함께 순례를 나온 기사와 하인들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를 키워주다시피 했죠."
그 말을 듣고 투란은 내심 아시즈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다.
기사 따위 발깔개 취급하는 발타스 가문의 귀족들에 비하면 얼마나 고상한 태도란 말인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우선 가장 먼저 수집해야 할 정보가 있었다.
"혹시 습격해 온 흑요정의 수가 몇이었습니까? 제가 죽인 건 둘이었습니다만."
"그게 전부일 겁니다."
투란은 그렇게 확인을 받은 뒤에도 혹시 몰라 주변에 탐색 마법을 한 차례 더 돌렸다.
다행히 사방 수 킬로미터 내에는 흑요정이 없었기에 일단 한숨 놓을 수 있었다.
그때, 아시즈가 투란에게 넙죽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투란 님, 혹시 지금 급한 일이 있으십니까?"
"저 역시 순례 중입니다."
투란의 말을 들은 아시즈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정도 힘을 가지고도 순례 중이라니...혹시 대가문의 자제분이신 겁니까? 그런데 왜 혼자서?"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아무래도 아시즈는 투란의 힘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한 명을 기습해서 처리한 다음 다른 한 명과 힘겹게 싸우다가 저 붉은 말의 도움으로 이겼을 뿐인데, 그가 혼자서 두 명을 압도했다 여기는 모양.
투란은 이러한 오해를 풀고자 자신의 기세를 상대에게 흘려보냈다.
움찔한 아시즈 역시 마주 기세를 흘려내 답했는데, 그의 힘은 사령술사와 싸우기 전의 투란보다도 강했다.
지금의 그와 비교하면 삼 분의 이 정도쯤.
'...의외로 세잖아?'
이 정도면 저 붉은 말과 힘을 합쳐서 싸워볼 만도 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던 투란은 이내 싸움에서 마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특히 딱 봐도 심약해 보이는 게 전투에 적합한 성품이 아닌 듯하니 더더욱.
투란이 그렇게 견적을 재는 사이, 아시즈 역시 상대의 정체를 짐작하며 내심 경악했다.
마력이 제법 강력하긴 하지만 그 사령술사 둘과 맞설 수준은 절대 아니었던 탓이다.
이는 남들보다 특출난 마법 실력과 전투 감각, 혹은 강력한 혈통을 타고났다는 뜻.
거기다 아직 순례 중이라고 하니 성장 한계가 오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만하면 어느 대가문에서건 환영할 인재였다.
왜 그런 이가 하수인 한 명 없이 이런 곳을 헤매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해진 행선지가 없으시다면 저희 베르크 가문에 투란 님을 초대해도 괜찮겠습니까? 제 목숨을 구해주신 값과, 안전히 가문으로 돌아가도록 동행해주신 값을 치르겠습니다."
"값이라고 하시면?"
그가 아는 가문 중 베르크 가문이라는 곳은 없었다.
저런 마수를 키우는, 심지어 여행에 데리고 나오기까지 하는 것으로 보아 제법 부유한 곳 같기는 하지만....
"저희 베르크는 저 북쪽의 대가문 아라비온의 가신으로, 대대로 마법기를 만들어 온 부여사(附與師) 혈통입니다."
그러니까 투란에게 빚진 목숨값쯤은 충분히 갚을 수 있다고, 아시즈는 당당히 선언했다.
14화
언덕에서 양을 치며 세월을 흘려보내던 투란에게 여러 목표를 제시해 준 아라비온의 기사, 케오른.
그는 자기 가문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자부심에 찬 표정을 짓고는 했다.
위로는 귀족부터 아래로는 기사까지 모두가 인류의 보호를 사명으로 여기는 긍지 높은 가문이라면서.
투란이 긴 고민 끝에 제안을 수락한 것은 단순히 좋은 마법기 하나 받고 싶어서가 아닌, 그러한 이야기에서 생겨난 동경심이 작용한 결과였다.
비록 본가는 아닐지언정 그 가신 가문인 만큼 기풍 정도는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그가 아라비온의 원수인 자하르 혈통임을 생각하면 다소 위험을 감수해야 하겠지만...직접 은신 마법만 드러내지 않으면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도서관의 사서가 보여줬던 것과 같이 혈통을 감별하는 재주는 몹시 희귀한 것이었으니까.
다음 날 아침, 두 사람과 말 한 마리로 이루어진 일행은 가장 먼저 싸움이 있었던 장소로 향했다.
흑요정에게 살해당한 베르크 가문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함이었다.
아시즈는 어제 내내 기절해 있었기에 투란이 길잡이 역할을 맡았다.
"이쪽입니다."
"대체 이런 곳에서 길을 어떻게 찾으시는 겁니까? 제가 보기엔 다 거기서 거기 같아 보이는데...."
"혼자 돌아다니다 보면 금방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아, 저기 흑요정 놈들이 있군요."
아시즈는 머리 잃은 흑요정 두 명을 보며 잠시 입술을 꾹 깨물더니 이내 몸을 휙 돌려버렸다.
짐작건대 분이 풀리지 않아서 시체라도 훼손하려다가 그만둔 것 같았다.
그사이 투란은 어제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놈들의 시체를 제대로 확인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비슷한 양식으로 만들어진 검은 가죽 코트.
만듦새로 보아 제대로 된 공방에서나 제작할 법한 물건이었으며 그리 헤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두 번째는 놈들의 귀.
한 놈은 완전히 머리통이 분쇄되어서 이마 위쪽만 날아간 여자 흑요정을 통해 추측한 것인데, 두 갈래로 찢어진 귀가 모두 긴 것으로 보아 상당히 고위 계급인 것 같았다.
이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추론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근처에 흑요정의 도시로 가는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흑요정의 도시? 이 주변에 그런 게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요...."
"이놈들은 지하에 도시를 만드니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지상에는 이어지는 굴만 몇 개 파 놓고, 가끔 저런 사령술사들이 나와서 인간을 사냥한 뒤 흔적도 없이 지하로 숨는 거죠. 아마 이 근처에서 실종된 사람이 있다면 그중 상당수가 이놈들 짓일 겁니다."
"그런 건 대체 어디서 아신 겁니까?"
"책에서 봤습니다."
투란은 오렘 시에서 몇 번 보았던, 그를 대단한 현자처럼 여기는 눈빛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일단 근처에 있는 도시의 영주에게 흑요정의 도시가 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이후 두 사람은 틸리가 만든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사용인들의 유해를 하나씩 수습했다.
하룻밤 새 야생동물 따위에게 훼손된 부분이 많아서 보기에 썩 좋지 않았는데, 아시즈는 어제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눈물을 글썽거렸으나 울지는 않았다.
열여섯 명의 시체에서 유품을 수습하고 매장하는 동안 투란은 주기적으로 탐색 마법을 사용해 흑요정이 접근하지 않나 확인했다.
다행히 무덤을 만들 때까지 접근하는 이는 없었다.
"슬슬 다 끝난 거 같군요. 마음 같아선 모두 고향 땅에 돌려보내 주고 싶지만...."
"그건 아무래도 어렵겠죠."
아무리 거대하다지만 말 한 마리로 열여섯 구의 시체를 운반하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틸리의 등에는 본래 사용인들이 나눠 짊어졌던 짐이 한가득 실려있는 만큼 더더욱.
아시즈는 마지막으로 큼직한 돌 하나를 네모나게 변형시킨 뒤, '사랑하는 내 가족들'이라는 문구를 새겨넣고 무덤 앞에 꽂아 비석으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범한 돌에 불과했던 비석에서 은은히 빛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부여사....'
본래 마법의 힘을 어딘가에 부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영구적으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투란이 가진 투석구와 돌에 강화와 가속 마법을 건다고 해도 그 효과는 불어넣은 마력이 점점 흩어지며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마법이 영구적으로 걸린 물건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마법기(魔法器)로, 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부여사 혈통의 능력이 필요했다.
비석에서 빛이 사라진 뒤, 아시즈가 다소 지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대단한 건 못 걸었고, 짐승들이 냄새를 맡지 못하게 간단한 은폐 마법을 걸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왔을 때 파헤쳐져 있으면 슬플 것 같아서요...."
무덤을 떠나 북쪽으로 향하는 길, 투란과 아시즈는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고 있었다.
투란이야 원래부터 침묵이 익숙한 사람이었고 아시즈 역시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던 탓이다.
그렇게 둘 다 입을 꾹 다물고 걷기를 몇 시간.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먼저 입을 연 쪽은 아시즈였다.
"감사합니다, 투란 님."
"어떤 게 말입니까?"
"저를 비웃지 않으셨잖습니까."
아시즈가 자조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귀족씩이나 되어서 아랫사람들의 희생에 엉엉 울다니, 꼴불견이겠죠."
"꼴불견일 이유는 또 뭡니까."
"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의로운 싸움에서 죽은 이는 신들과 함께 천상의 궁전에 머물 것이니 이를 슬퍼하는 건 나약한 일이라고, 진정한 귀족은 희생을 딛고 나아갈 줄 알아야 한다고...하지만 가족의 죽음에 슬퍼하는 게 강함이라면, 전 도저히 강해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나약한 게 아니라 다정한 것이겠죠."
투란은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렸다.
그 사무치던 슬픔, 이 세상에 유일하게 하나뿐인 아군이 사라져 혼자가 되는 그 느낌을.
그것을 '나약함'의 산물 따위로 여기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대화가 끊겼지만 그래도 이번의 침묵은 조금 전보다 훨씬 느낌이 가벼웠다.
날이 완전히 어둑해질 무렵, 아시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기왕 함께 다니기로 한 거 앞으로는 좀 더 편하게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 보이는데...."
"네? 아, 뭐. 그러시죠."
"시원시원하구만. 앞으로 잘 부탁해, 친구!"
지나치게 갑작스러운 제안에 투란이 어정쩡한 태도로 승낙하자, 아시즈는 마치 그가 십년지기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조금 전의 우울해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인 게, 아무래도 억지로라도 기분을 끌어올리려는 듯한 기색이었다.
'친구라.'
생각해 보면, 누군가에게 '친구'라고 불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투란은 묘한 감상을 느끼며 손을 맞잡았다.
* * *
그렇게 말을 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투란은 이 '친구'가 정말로 다른 세상에 살던 사람임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처음 이를 느낀 것은 저녁 식사 시간에서였다.
"이건...?"
"냉장궤. 지난번 도시에서 음식을 여럿 넣어두었지."
아시즈가 틸리의 등에 실린 배낭에서 꺼낸 것은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큼 커다란 금속 상자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붉게 칠한 것 말고는 별로 특별한 점이 없어 보였는데, 놀랍게도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항상 안쪽이 차가운 건가?"
"맞아! 덕분에 어지간한 음식은 일주일쯤 넣어 둬도 문제가 없지. 차갑게 식은 건 데우면 되고."
안에 보관되어 있던 빵과 고기를 꺼낸 아시즈가 시범을 보이겠다는 듯 불꽃을 피워내어 음식을 데웠다.
그러는 와중 실수로 좀 태우긴 했지만-평소에는 기사들이 해줬다는 모양이었다-그래도 음식의 맛은 상당히 훌륭했다.
갓 만들어진 요리만은 못해도 보존성을 위해 바싹 구워낸 건빵이나 말린 고기 따위와는 비교하는 게 실례인 수준.
노숙하며 거친 음식을 먹는 데는 익숙해졌지만, 그 역시 가능하다면 맛있는 것을 먹는 쪽이 더 좋았다.
아시즈가 가지고 있는 마법기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단추를 누르면 물이 나오는 마법기, 주변의 나무를 가져다 모아주면 알아서 작은 쉼터를 만드는 마법기, 주변에 누군가 접근하면 경보를 울리는 마법기....
심지어 입고 있는 옷조차 청결해지는 기능이 있는 마법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투란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고 말았다.
"그냥 그 옷만 줘도 목숨값으로 충분하겠는데."
마법기라는 것은 절대 흔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그가 들렀던 오렘 시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가주인 루그만이 몇 개 가지고 있으며 그마저도 가보로 여기며 잘 들고 나오지도 않았을 정도.
그런데 이 젊은 귀족은 저 말의 등짐 안에 마법기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모양새가 아닌가....
이를 들은 아시즈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물건이야 내 목숨값에 댈 정도는 아니지. 본가로 돌아가면 훨씬 더 좋은 것으로 보상할 것을 약속할게. 만약 어른들이 허락지 않는다면 직접 만들어서라도."
더 좋은 것을 준다길래 투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원래 자기 급할 때랑 아닐 때 달라지는 게 사람 마음이지 않던가.
막상 아시즈가 가문에 무사히 돌아간 뒤 대충 싸구려 마법기로 때우려 들어도 투란은 실망하지 않을 터였다.
그저 처음으로 생긴 우정을 쓰레기통에 처박은 뒤, 언젠가 충분한 힘을 얻었을 때 대가를 치르게 할 뿐.
하루 반나절쯤 지났을 무렵, 투란과 아시즈는 인근에서 가장 큰 도시인 마데리에 도착했다.
누가 봐도 마수인 게 분명한 틸리의 존재 탓에 입구를 지키던 경찰이 화들짝 놀라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무더기로 달려 나왔다.
"신의 후손을 뵙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귀족을 신의 후손이라 칭하는 모양이었다.
곧장 도시 중앙의 저택에 초대된 투란과 아시즈는 이곳의 가주와 면담하며 인근에 사람을 잡아먹는 흑요정의 도시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알렸다.
"흑요정...? 그런 게 진짜 있던가?"
"예. 여기 혹시 몰라 머리도 가져왔습니다만, 보시겠습니까?"
"아니, 됐네 됐어. 그런 거 봐야 입맛만 떨어지지. 뭐 알았네. 순찰이라도 시켜봐야겠군. 그보다 자네들이 데려온 마수, 혹시 팔 생각은 없나?"
"아뇨, 틸리는 제 가족 같은 아이라...."
유감스럽게도 이곳의 지배자는 두 귀족의 말을 그리 주의 깊게 새겨듣지 않는 것 같았다.
딱히 그를 설득할 방법도 없는 만큼, 두 사람은 이틀 정도 적당히 대접을 받은 뒤 도시를 떠나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마데리를 떠나 북상하기를 오 일째.
투란이 그들을 습격해 온 평범한 불곰 하나를 연습 삼아 낙뢰 주문으로 지져버리자 아시즈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봐, 투란. 너 대체 할 줄 아는 마법이 몇 개야?"
"음?"
"아니, 같이 다니는 동안 본 게 벌써 몇 종류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잖아! 동물 조종부터 시작해서 빙결, 부유, 액체 지배, 강화, 발광, 구속, 즉사, 대지 변이, 낙뢰까지...평생 마법 연습만 하고 살았나? 아니면 원하는 마법을 마음대로 습득할 수 있는 혈통 능력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아시즈가 말한 마법 중 일부는 독학으로 습득한 것이지만, 그 외의 나머지는 모두 케오른이 가르쳐준 것이었다.
투란으로서는 이러한 반응이 오히려 생경했다.
얼마나 숙련되었느냐가 문제일 뿐, 마법 자체는 혈통 마법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발동할 수 있는 것이 정상이지 않던가?
물론 처음 케오른에게 이런 기술이 있다, 하고 듣기만 했을 당시에는 다소 헤매긴 했지만.
하지만 여기서 그냥 되던데, 라고 대답하는 것은 너무 오만해 보일 것 같았기에 투란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내 가문이 어딘지는 캐지 않기로 했잖아."
"아니, 그건 그냥 농담이야. 그딴 말도 안 되는 혈통 능력이 있을 리 없잖아. 그보다 너 진짜 몇 살인데? 얼굴은 서른 살도 안 되게 생겨서는, 설마 한 여든 살쯤 먹은 건 아니겠지?"
"음?"
"어?"
아시즈의 말에 투란이 의아해하는 기색을 띠자, 아시즈 역시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말을 멈췄다.
"너는 몇 살이길래?"
"올해 마흔세 살이 됐지, 아마도."
"나는 이제 열아홉 번째 생일이 한 달쯤 남았는데...."
새로 사귄 친구의 나이가 자신의 절반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안 아시즈의 표정은 실로 볼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투란 역시 자기보다 몇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아시즈가 주름 자글자글하던 마을의 유지들과 비슷한 나이였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케오른만 해도 사십 대 중후반 정도의 외모에 실제 나이는 칠십이 넘지 않았던가.
그보다 몇 배는 더 장수하는 귀족들이라면 외견과 실제 나이가 일치하지 않는 게 당연한 일.
그동안 귀족들과 깊게 교류하지 않아 미처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뭐, 우리한테 고작 스물 한두 살 차이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아니, 그보다 그 마법 실력이나 좀 설명해 봐. 대체 어떻게 가능한 거야? 나이를 들으니 더 이해가 안 가는데?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연습해도 시간이 없었겠다!"
끈질기게 캐묻는 탓에 투란은 그냥 어려서부터 꾸준히 마법을 수련했다고,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이 정도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고 답했다.
딱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히사릴 언덕에서 그가 시간을 죽이는 방법이 온갖 방식으로 마법을 가지고 노는 것이었으니까.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아시즈가 허탈한 표정으로 길가의 돌멩이를 탁 걷어찼다.
"나 참, 그 정도 마력으로 사령술사 둘을 끝장냈다고 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설마 세상에 이런 천재가 두 명씩이나 있을 줄은."
"두 명?"
투란의 물음에 아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 정도는 아니지만. 아니, 비슷하려나? 그쪽은 아무래도 혈통이 혈통이니. 어쨌든 네 또래인 천재 한 명을 더 알거든. 내게는 육촌 누이가 되지."
"혹시 그 사람한테 내 마법기 만들어달라고 할 수 있나?"
천재 부여사가 만든 물건이라면 아무래도 뭔가 더 좋을 것 같지 않은가.
투란의 말에 아시즈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쪽은 우리 가문 사람이 아니라 본가 쪽이라서."
"본가라면 설마?"
"맞아. 아라비온의 공주님. 어쩌면 장차 대가문의 수장이 되실지도 모를 분이지."
15화
평범한 마법사 가문과 달리 대가문의 가주가 그 자리를 친자식에게 물려주기란 쉽지 않다.
강대한 마력이 자식에게 그대로 전해질 확률은 키나 외모가 전해지는 확률보다 조금 높은 정도일 뿐인데, 대가문쯤 되면 같은 세대의 친척만 수십 명이 넘으니까.
어차피 윗대로 가면 다 같은 조상을 가지는 만큼, 어지간하면 그중 한 명 정도는 가주의 친자식보다 강하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주의 자식 중 최고의 재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으니, 어려서부터 전폭적으로 지원을 받은 거지."
아라비온의 공주, 메이사는 가주와 베르크 가문의 방계 귀족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이었다.
가주의 세 자식 중 첫째는 모계 쪽 혈통이 발현하는 탓에 그쪽으로 입양 보냈고, 둘째는 고만고만한 수준이라 아쉬워하고 있는데 마침 첩에게서 뒤를 이을 만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심지어 메이사는 타고난 마력만 강한 게 아니라 마법 습득 능력 역시 천부적이라, 마력을 각성하고 고작 십 년 만에 아라비온의 혈통 마법을 비롯한 온갖 전투 마법에 통달했다고 했다.
그렇게 온갖 지원을 받은 결과 이제 스물한 살인데도 마력의 양이 가문의 핵심 구성원들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
그 덕분에 아라비온의 역대 가주 중에서도 손꼽힐 만한 강자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아, 그녀가 가주가 될 때쯤엔 자하르를 멸망시킬 수도 있으리라 기대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 나이에 그만한 마력이면, 혹시 가문 내에서 '장례'까지 몰아줬나?"
"맞아. 우리 큰할아버지 마력도 걔가 먹었어. 물론 우리도 같이 나눠 받긴 했지만."
죽은 뒤에도 마력이 남아 사령화 등 온갖 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마수만이 아닌 모든 마법 생물의 공통점.
당연하게도 죽은 마법사의 마력 역시 흡수할 수 있는 대상이라, 투란과 아시즈만 해도 베르크 가 기사들의 시체를 묻어주며 그들의 마력을 흡수했다.
이를 흔히 '장례'라 하는데, 아라비온은 노쇠하거나 사고 등으로 죽은 귀족의 장례를 몇몇 재능 있는 젊은 마법사들에게 집중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귀찮게 순례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가문 내에서 충분히 힘을 쌓는 게 가능했다.
물론 그만큼 가문 내의 다른 구성원들은 힘을 물려받지 못해 열심히 마수를 사냥해야겠지만.
'확실히 대가문이 위에서 군림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구나....'
문득 부럽다고 생각하기도 잠시, 투란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만으로도 큰 선물을 받은 것임을 새삼 떠올리며 손가락을 한 차례 튕겼다.
마찰열에서부터 생겨난 불꽃이 화염구에서 화살, 창, 검의 형상으로 연이어 변했다.
이를 본 아시즈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불꽃의 형상 변환? 벌써 세 개가 추가된 거야?"
"어."
"젠장, 난 이미 그거 쓰는 법 다 잊어버렸는데."
그들은 걸으며 잡담을 나누는 와중에도 여러 방식으로 마법을 수련했다.
매일 다양한 마법을 써가며 수행하는 투란의 모습에 자극받은 아시즈가 자기 역시 등한시했던 전투 마법 훈련을 다시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전처럼 무력하게 자기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기는 싫다면서.
아시즈는 그가 이론상으로만 체득하고 있는 여러 마법의 정보를 알려 주었고-사실 그중 상당수는 케오른에게 배운 것과 겹쳤다-투란은 그 대가로 자신이 언덕에서 독학한 마법 몇 종류와 도서관에서 배운 자연법칙 중 가장 간단한 것 몇 가지를 가르쳤다.
물론 탐색과 은신 마법은 쓸 줄 안다는 티조차 내지 않았다.
그가 자하르 혈통이라는 단서를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이러한 교류 덕에 투란은 평범한 재능을 가진 마법사의 마법 습득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한 가지를 작정하고 훈련해도 습득하는 데 며칠은 걸리는군. 그마저도 실전에서 쓸 수준은 아닌 데다 계속 연습하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고....'
그렇게 계산하기도 잠시, 투란은 헤매는 아시즈를 보며 오만해져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단속했다.
비슷한 수준의 재능을 가진, 심지어 힘 자체는 그보다도 훨씬 더 강한 또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마당에 감히 어떻게 자만할 수 있겠는가.
"그보다 투란, 가지고 싶은 마법기는 정했어?"
"어느 정도는."
투란이 처음 생각한 것은 '치유'의 힘이 담긴 마법기였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그는 어지간한 마법쯤 원하면 스스로 연습해서 쓸 수 있지만, 치유 능력은 혈통을 타고나지 않으면 거의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에서 상처 치유의 원리를 대충 이해한 뒤로 가벼운 생채기 정도는 고칠 수 있게 됐지만, 그 정도 힘을 실전에서 써먹을 수는 없었다.
문제는 그의 혈통 중 절반이 아직 '잠긴' 상태라는 것.
만약 나머지 절반의 혈통이 치유사 쪽이라면 마법기가 낭비되는 셈이다.
그 때문에 차라리 혈통 마법과 관계가 없이 유용한 것을 고를까도 고민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는 못한 상태였다.
생각에 잠긴 투란을 보며 아시즈가 피식 웃었다.
"뭐, 천천히 고민해 봐. 어차피 도착한 뒤에도 우리 집안에서 머물면서 좀 쉬다 갈 거잖아?"
"오래는 안 머물러. 순례 중이니까."
"그렇게 급하게 굴지 말라구. 어차피 우리한테 시간은 많은걸."
그 말대로 투란에게는 아직 수백 년 이상의 삶이 남아 있었다.
저기 도로 반대편, 그들의 시선을 피해 지나다니는 평범한 인간들의 자식이, 어쩌면 그 자식의 자식조차 늙어 죽고도 남을 시간 동안 살아갈 수 있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투란은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일까, 이 세상에는 그를 오만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 * *
히사릴 언덕을 떠난 이래, 투란은 내륙 쪽으로 들어갈수록 풍요로워지는 환경에 자주 감탄하곤 했다.
울창한 숲부터 시작해서 맑은 물이 한가득 흐르는 개울과 강, 무엇이든 뿌리는 대로 자랄 듯 풀밭이 한가득 자라난 평야까지.
암석 언덕 사이로 잡초만 듬성듬성 자란 언덕과 황야를 보고 자라온 양치기 청년에게 이곳은 낙원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 투란은 자신이 이전에 보았던 '풍요로움'이 가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귀족의 시력으로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진 황금빛 밀밭....
심지어 이것이 갓 마주한 것이 아닌, 벌써 반나절 정도 걸어왔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여기서 나오는 양이면 지금까지 지나오며 본 모든 도시와 마을의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오죽하면 저 밭에서 길을 잃는 사람도 꽤 자주 나온다고 하던걸."
투란의 평가를 들은 아시즈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이 광활한 땅의 이름은 다케인 평야.
마데리를 떠난 뒤 꼬박 보름을 걸은 끝에-물론 이는 보통 사람이었으면 한두 달은 걸렸을 거리였다-도착한 아라비온의 핵심 영지였다.
이 평야의 한가운데에는 아라비온의 거점인 모르겐 시가, 가장자리 곳곳에는 베르크와 같은 가신 가문이 다스리는 위성도시가 여럿 분포해 있었다.
이러한 권역 내에 사는 이들의 수를 합치면 백만 단위라고 하니 가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다케인 평야에 들어온 뒤부터는 아시즈도 길을 찾을 수 있었기에,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 없이 베르크 가문의 영지인 자빌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가 어둑하니 떨어진 탓에 굳게 닫힌 성문을 쾅쾅 두드리자, 위쪽에서 누군가 외쳤다.
"통금 시간이 지났다! 내일 들어오도록!"
"나야, 빈!"
"아시즈 도련님?"
오 미터 높이의 성벽 위에 걸터앉아 통금을 외치던 기사가 아시즈의 목소리를 듣더니 그대로 폴짝 뛰어내렸다.
"정말 도련님이시군요! 벌써 순례를 끝내고 오신 겁니까? 거기다 다른 사람들은 왜...."
"그들은 모두 천상의 궁전으로 떠났어.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은 들어가서 쉴 수 있을까? 부모님에게도 내가 돌아왔다고 전해주고."
가솔의 행방을 묻는 말에 밝고 쾌활하던 아시즈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과장될 정도로 밝게 굴던 것은 역시 우울한 감정을 묻어 버리기 위함이었던 모양.
아마 그가 진정으로 이러한 감정을 이겨내는 데는 굉장히 긴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어쩌면 평생 극복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잠시 후, 두 사람은 자빌린 시의 대로를 타고 베르크 가의 궁전에 도착했다.
미리 소식을 전해둔 덕에 가문 사람들 모두가 아시즈를 맞이하러 나와 있었는데,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중년 부인이었다.
어두운 금발에 외모도 아시즈와 똑 닮아 누가 봐도 모자 관계임을 짐작할 만했다.
"아시즈, 내 아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엄마!"
투란은 당당히 '엄마'를 외치며 그녀를 끌어안는 마흔세 살 아저씨의 모습에 내심 경악했다.
물론 겉모습은 이십 대 청년이긴 하지만...아니, 외관을 고려해도 상당히 깨는 모습이었다.
아마 저 여인이 베르크 가문의 주인이자 아시즈의 어머니인 미델라 베르크일 터.
뒤에는 그 남편으로 보이는 이와 아시즈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청년이 있었는데, 전에 들은 바를 떠올리자면 각각 아버지와 후계자인 형인 것 같았다.
"아시즈, 체면을 생각해라. 적어도 '어머니'라고 해야지."
"죄, 죄송합니다."
아버지의 질책에 움찔한 아시즈가 고개를 숙이더니 곧바로 시선을 돌려 투란을 가리켰다.
"이쪽은 투란, 남부에서 새로 사귄 친구입니다. 제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주었죠. 이 친구가 아니었으면 살아서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을 거예요."
"이번 순례길이 그렇게 위험한 곳은 아니었을 텐데...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흑요정 사령술사들에게 습격당했어요."
아시즈는 마치 얻어맞은 어린아이처럼 어머니에게 자세한 사정을 일렀다.
갑작스러운 습격과 사령 군대의 공격에 죽어가는 부하들, 위기에 빠져 기절한 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그들을 처리한 투란의 등장까지.
이를 들은 미델라 가주가 분노하여 펄펄 뛰었다.
"흑요정이라니! 그 더러운 지렁이들이 감히 내 자식을 노려? 직접 군대를 끌고 가서 찢어발기지 않으면-"
"진정하시오, 가주. 사람들이 보고 있소."
남편의 노력으로 간신히 진정한 뒤에도 미델라의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부인에 비해 훨씬 냉정한 성격으로 보이는 아시즈의 아버지가 투란을 향해 질문했다.
"그래서, 은인은 어느 가문에 속해 있는지 여쭤봐도 되겠소?"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어렵다?"
"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잘 모른다고 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투란은 늘 그랬던 것처럼 적대하는 가문이 있어 밝히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지 않았다.
이유인즉, 과거 적대했던 역사가 있는 정도라면 모를까 현재 적대 관계인 가문이란 생각보다 많지 않은 탓이다.
발타스 가문의 루그 가주만 해도 이야기를 듣자마자 후보 중 하나로 아라비온과 자하르를 꼽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솔직하면서도 동시에 솔직하지 않은 답을 미리 준비해 둔 상태였다.
"저는 평민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동안 밝히지 않았던 이야기를 술술 하자 어머니에게 안겨 있던 아시즈가 깜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
"뭐야, 그런 얘기는 안 했잖아!"
"어디 가서 자랑할 건 아니니까."
사실 투란의 정체성은 혈통 간의 서열을 중시하는 집안에서라면 다소 불쾌하게 여길 만한 것이었다.
아무리 마법사 세계에서 힘이 전부라 한들 귀족들에게 기사는 집 지키는 개이며 평민은 그보다도 못한 존재 아니던가.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이야기를 들은 가주 부부는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 투란을 멸시하지는 않았다.
저런 부모 밑에서 자랐기에 아시즈 역시 아랫사람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성격이 되었을 터.
미델라 가주가 몇 차례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말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 좋소, 가문을 모르는 투란. 우리 집안의 보물과 같은 아이를 구해주었으니 베르크의 주인으로서 마땅히 대가를 치르도록 하리다. 다만 방을 내어드리기는 어렵고, 본가가 아닌 도시의 가장 좋은 여관에서 머물 수 있도록 조치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엄-어머니! 저를 구해준 은인을 집에서 대접조차 하지 않다뇨?"
감히 가주의 말을 끊고 나서는 아시즈의 모습에 그의 아버지가 잔소리하기도 지친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철없는 아들을 엄한 표정으로 제압한 미델라가 말을 이어 나갔다.
"평소라면 괜찮겠지만, 지금은 집안에 귀한 분이 계셔서 아무리 은인이라지만 신원을 모르는 손님을 들이기가 어렵구려. 부디 이해해 주기를."
"제 이야기면 그러실 필요 없는데요, 이모. 설마 아시즈를 구해준 사람이 갑자기 절 암살하려 들지는 않겠죠."
그때,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외모를 한 여성이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투란은 그녀를 본 순간 해골을 떠올렸다.
마치 뼈 위에 살점 없이 가죽만 한 장 발라둔 것처럼 움푹 들어간 눈과 뺨.
그뿐만이 아니라 목과 팔, 몸통과 다리까지 전신이 제 체중조차 이기지 못하고 부러질 것처럼 가늘었다.
대체 사람이 얼마나 굶어야 저 정도로 마르게 되는 것일까.
"메이사? 네가 갑자기 여긴 왜?"
아시즈의 말에 투란은 그녀가 얼마 전 이야기됐던 아라비온의 공주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공주라기보다는 시체라고 하는 게 어울릴 것 같은데.'
정말로, 그녀가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면 살아있을 거라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투란이 속으로 무례한 생각을 하는 사이, 메이사 아라비온은 마치 아침에 해가 떴다고 말하는 것처럼 태연한 어조로 질문에 답했다.
"얼마 전에 자하르네 개새끼들한테 암살당할 뻔했거든. 그래서 피신 왔어."
16화
메이사의 말에 지레 찔린 투란은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물론 이곳에서 그를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대가문의 후계자가 암살당할 뻔했다는 화제 앞에서 도련님을 구한 은인이란 그 순위가 뒤로 밀릴 수밖에.
"본가에서 암살이라니? 그곳의 방어 체계가 얼마나 단단한데...."
"아마 내통자라도 있는 거겠지. 거기에 날 아니꼬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
아시즈의 말에 대답하는 목소리에서 짙은 피로감이 묻어났다.
뛰어난 재능과 우월한 신분을 타고났다고 해서 마냥 삶이 편하지만은 않은 모양.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으로 머리를 쓸어내린 메이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면 전 피곤하니 먼저 자러 갈게요. 모두 좋은 밤 되시기를."
그렇게 순식간에 현장을 정리한 아라비온의 공주는 대답조차 듣지 않고 곧장 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말 그대로 부유 마법으로 살짝 날아오른 뒤 바람을 불게 해 추진력을 부여해서 날아간 것이다.
이를 바라보던 아시즈의 어머니, 미델라가 옆에 있던 나이 든 하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에나? 투란 씨에게 우리 가문에서 두 번째로 좋은 손님방을 내어드리게."
아무래도 오촌 조카건 뭐건, 후계자의 명령을 감히 거절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 * *
이른 아침, 투란은 낯선 천장을 보며 눈을 떴다.
잠에 취해 멍하던 머리가 돌아가자 이곳이 베르크 가문의 저택이며, 자신이 지난밤 손님으로 이곳에 왔음이 떠올랐다.
그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넓은 방 한편에 놓인 '세면대'로 가는 것이었다.
어젯밤 하녀에게 들은 대로 길쭉한 막대기 하나를 당기자 졸졸 새어 나오는 물줄기.
이를 멍하니 구경하던 투란은 옆에 놓인 비누까지 사용해 얼굴을 깨끗이 씻은 뒤 수건으로 닦아냈다.
탈수 마법이 깃든 것인지 가볍게 한 번 문지르자 곧바로 물기가 날아갔다.
'부여사 가문이라서 그런 건가.'
베르크 가문의 본거지는 그야말로 수백 년간 쌓인 마법기의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사실 편리성으로 따지자면 아침마다 하인들이 찾아와서 직접 얼굴을 씻겨주기까지 하는 다른 가문보다 편할 것 없지만, 일단 신기하고 재미있지 않은가.
원래 특권층이란 이렇게 남들이 쓸 수 없는 것을 독점하는 데서 쾌감을 얻는 법이었다.
손님용으로 준비된 가운을 걸친 뒤 복도로 나오자 새하얀 광채가 천장에 매달린 것이 보였다.
횃불이나 등잔 따위로 만들어내는 불빛과는 전혀 다른 백광(白光).
그 창백한 불빛은 기다란 복도 위쪽에 빈틈없이 박혀 빛나며 그림자 하나 생겨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제 마력도 꽤 강해지고 은신 숙련도도 높아진 투란은 어두컴컴한 곳에서라면 완전 은폐를 몇 시간이라도 유지할 수 있지만, 이런 곳에서라면 기껏해야 일이 분 정도가 한계였다.
만약 자하르의 암살자가 이곳에 숨어든다면 짧은 시간 내에 목표를 찾아 죽이거나 마력을 모두 소모한 채 복도를 헤매다 들켜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될 터.
심지어 이마저도 저택 내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침입자 감지 및 요격용 마법기를 계산에 넣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투란! 여전히 일찍 일어나는군! 그런데 복도에서 혼자 뭐 하고 있어?"
그렇게 멍하니 복도의 마법기를 구경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덕인지 한층 신수가 훤해진 아시즈였다.
"저게 신기해서."
"저거? 아, 마법등? 어릴 때 부여 마법 연습할 때마다 만들어보는 건데...하나 줄까? 창고에 남아돌아."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어차피 저런 빛은 투란 역시 직접 만들 수 있었다.
케오른에게 가장 먼저 배운 마법 중 하나가 빛을 조형해 간단한 무기를 구현하는 마법이었으니까.
그저 물리적인 공격은 투석구로 해결되며 야간 시야 덕에 빛을 밝힐 필요가 없어 안 썼을 뿐.
"혹시 배는 안 고파? 조금 있으면 어머니가 아침 식사에 초대하실 것 같은데."
"충분히 기다릴 수 있어. 그보다 하나 좀 묻고 싶은데."
"음?"
"어제 그 아라비온의 아가씨, 혹시 어디 아픈 건가? 말하기 힘든 거라면 말 안 해줘도 돼."
대가문 후계자의 건강 상태라면 나름 군사 정보인 만큼 투란은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다행히 아시즈는 쓴웃음을 지을 뿐 무언가 첩자 짓이라도 하는 거냐고 의심하지는 않았다.
사실 궁금해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더 수상할 만한 외모기는 했다.
"좀 심하게 말랐지? 어렸을 땐 안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물이랑 소금만 먹는다고 하더라. 마른 쪽이 날아다니기 더 좋다면서...듣기로는 몇 명이 따라 하려다가 다 포기했대. 그러다가 진짜 죽을 것 같다면서."
"확실히 몸에 안 좋아 보이던데."
아무리 마력이 육신을 진화시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지만 결국 귀족도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상식적으로 들어가는 게 없는데 소비되는 것만 있으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리 없잖은가.
"그래도 그럭저럭 멀쩡해 보이긴 하니까. 애초에 본인이 하겠다는데 우리가 어쩌겠어.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저쪽은 결국 대장 집안인걸."
어제 얼핏 보기에는 서로를 편하게 친척 남매처럼 대하는 느낌이었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어느 정도 벽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잡담을 나눈 뒤, 투란은 아시즈가 예상했던 대로 그와 함께 베르크 가문의 아침 정찬에 참여했다.
가주 부부와 아시즈의 형, 그리고 친척 세 명 정도가 함께 했으며 아라비온의 아가씨는 없었다.
남들 다 즐겁게 먹는 데서 혼자 물에 소금만 먹게 두면 민망할 것 같기는 했다.
아무래도 눈치도 많이 보일 것이고.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들게."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면 가주 미델라의 말은 기만에 불과했다.
흔해빠진 수프며 빵 따위는 말할 필요도 없고, 생전 본 적도 없는 온갖 요리가 다케인 평야의 밀밭처럼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게의 살을 밀가루 반죽에 싸서 찐 요리라느니, 저것은 삶은 감자 반죽에 송로버섯을 올린 것이라느니....
옆에서 친절하게 설명하던 아시즈가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뭐 이렇게 화려하게 차렸어요? 내 생일 때도 못 봤던 것들이 한가득한데, 누가 보면 아라비온 가주님이라도 오신 줄 알겠네."
"조용히 해라."
아무래도 아시즈의 은인이라는 이유로 힘을 준 것이지 이 집안에서도 일상적인 식사는 아닌 듯했다.
그렇게 온갖 호화스러운 만찬으로 입을 호강시키고-솔직히 몇 개는 너무 낯설어서 입에 안 맞았다-다디단 빵과 쓴 차로 마무리하며 미델라가 용건을 꺼냈다.
"그러면 어젯밤에 했던 이야기를 이어서, 내 아들이 자신의 목숨값으로 강력한 마법기 하나를 약속했다더군."
"예, 맞습니다."
"구체적으로 원하는 물건이 있소?"
"방어에 도움이 되는 물건을 원합니다. 마법으로 남을 해치기는 쉽지만 자신을 지키기는 어려우니까요. 가능하면 기습에 대처할 수 있는 종류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온갖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혹시라도 나머지 절반의 혈통이 방어 쪽이라고 한들, 어쨌든 방어에 방어가 더해지면 더 나은 방어가 되지 않겠는가.
특히 최근 만난 흑요정 사령술사들이 기습에 맥없이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바가 많았다.
입장 바꿔 투란 자신이 그러한 공격을 받는다 가정할 경우 마땅히 대책이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뛰어난 반사신경과 몸놀림에만 의존하는 것은 지나치게 불안한 방어 수단이었다.
"자주 만들어본 물건이라 어렵지는 않겠군. 하지만 그쪽은 당장 만들어진 게 없는데. "
"그러면 제가 만들어 줘도 되나요?"
"베르크 가문의 명예를 땅에 떨어트릴 생각이 아니면 그만둬라."
아시즈의 제안에 어제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던 그의 형, 멜로가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그는 자신의 부모를 향해 시선을 돌려 허락을 구하듯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만들겠습니다. 마침 얼마 전 본가 쪽에서 의뢰받은 물건이 끝나서 손이 남으니까요."
"어떻게 만들 셈이지?"
"기습에 대비한다면 항상 휴대하는 물건이 좋겠죠. 반지나 귀걸이, 목걸이 같은 형태에 마력을 주입하면 바로 수호자 혈통의 방어력을 끌어내는 기능을 넣을 겁니다."
"괜찮군. 기간은?"
"한 달로 하겠습니다."
수호자 혈통이라면 책에서 본 적 있었다.
마법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을 선호하는 다른 혈통들과 달리 뛰어난 신체 능력을 기반으로 한 육탄전에 특화된 혈통.
그중에서도 특히 신체 내구도가 강점이라고 하던가?
그 힘을 잠시 빌릴 수 있다면 확실히 방어 능력으로는 더할 나위가 없을 터였다.
"자식 자랑을 하는 부모만큼 꼴불견이 없는 것을 아오만, 멜로는 이미 가주인 내게도 크게 뒤지지 않는 실력자요. 사실상 부여사 혈통의 가주급 마법사가 직접 한 달의 시간을 할애해 만든 마법기라는 뜻이지."
"감사하긴 합니다만...조금, 과하지 않습니까?"
베르크 가문의 제안은 오히려 이를 받는 투란이 다소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었다.
책에서 보았던 지식, 그리고 아시즈에게 들은 정보를 종합하자면 부여사 혈통의 마법사가 만드는 마법기는 힘을 불어넣는 시간에 따라 그 품질이 달라졌다.
물론 무한하게 시간을 투자한다고 어마어마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가진 마력의 양과 마법 재능에 따라 효율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시간이 달라지는데, 한 달이면 어지간한 부여사에게는 거의 한계치에 가까운 기간이었다.
제작에 따른 반작용까지 고려하면 반년 정도는 강력한 마법기를 만들 수 없을 정도.
사실상 가주급 마법사의 반년을 독점하는 셈이다.
"이게 과하다면 내 아들의 목숨이 그만큼 값싸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렇지 않지, 절대로 그렇지 않아. 그러면 앞으로 한 달은 우리 가문에 손님으로 머물러야겠군."
"너무 오래 신세를 지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민폐라 생각하지 말고 머물기를."
* * *
"아무래도 어머니가 널 탐내시는 거 같아."
만찬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아시즈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을 꺼냈다.
"나를?"
"응. 사실 어제 자기 전에 어머니랑 만나서 너에 대해 더 이야기했거든. 네 마법 재능이 메이사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부터 그런데도 항상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원래는 어머니가 널 제대로 된 뒷배가 없는 방랑 귀족이라는 이유로 우습게 보지 않게 하려는 거였는데...."
"듣다 보니 날 아예 가문에 합류시키고 싶어졌다는 거구나."
투란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발타스 가문의 이젤라였다.
기사들을 태연히 방패로 쓰는 모습에 질리긴 했지만 그걸 제외하고도 그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던 여자.
크게 보자면 그녀를 팔아치우려던 루그 가주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다.
시골의 변방 가문과 대가문 직속 가신 가문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그렇지. 왕창 퍼주면서 부담을 준 다음에 예쁜 아가씨 하나 소개하는 식으로 꼬드기는 거야. 실제로 가문에 그런 식으로 합류한 어른도 몇 분 계시고."
이번에 마법기를 만드는 데 손을 보탤 수호자 혈통의 귀족 역시 그중 한 명이라고 했다.
몰랐는데, 마법기에 혈통 마법의 능력을 부여하려면 해당 혈통의 귀족이 제작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알게 된 투란의 심적 부담은 두 배로 커졌다.
"곤란한데."
아시즈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뭐, 너무 걱정하진 마. 어차피 마법기는 그냥 네 환심을 사려고 좋은 걸 주는 거지 이거 받고 싶으면 결혼하라고 강요는 안 할 테니까.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무도한 사람은 아니야."
"그런가."
투란으로서는 그쪽이 더 꺼림칙했다.
차라리 이걸 받으려거든 우리 가문에 속해라, 하고 강요한다면 죄책감 없이 물건만 훔쳐서 도망가 버릴 텐데.
때로 되갚을 수 없는 호의를 적의보다도 더 부담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투란 역시 그중 하나였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로 베르크 가문 사람과 결혼해 머무르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나중에 낳은 애가 자하르 혈통이라도 각성하면 대체 어떻게 변명한단 말인가.
"그렇다니까. 아, 혹시 지금부터 할 일 있어?"
"왜?"
"밖에 놀러나 가자고. 여기 자빌린이 수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즐길 만한 게 꽤 많거든. 설마 다른 도시에 있을 때처럼 내내 틀어박혀서 마법 수련만 할 생각은 아니지?"
"맞는데."
"아, 제발. 우리 삶을 좀 즐겨보자고. 친구!"
친구라는 말에 결국 투란은 아시즈의 손에 이끌려 베르크 가문의 저택을 나왔다.
어젯밤에는 통금시간이 지난 뒤여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대낮의 도시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 중 몇몇은 투란과 아시즈가 입은 복장을 보고 살짝 반응했지만 다른 도시에서처럼 넙죽 허리를 숙이거나 절하지는 않았다.
그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하며 지나갈 뿐.
십 분 정도를 걷자 여러 상점이 늘어선 번화가가 보였다.
"그래서, 이제부터 뭘 하고 노는데?"
"그야 네가 좋아하는 게 뭐냐에 따라 다르지. 술이랑 도박, 여자까지. 어느 쪽 취향이야?"
"도서관."
"새삼 느끼는 거지만 진짜 취향 고리타분하구나, 너."
"제대로 놀아볼 일이 별로 없었거든. 하지만 네가 제안한 세 가지는 다 별로인 것 같은데."
술이야 여러 가문에 초대받으며 몇 번 마셔봤는데 그냥 그런 느낌이었고, 도박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서 꺼려졌다.
그리고 마지막인 여자로 말할 것 같으면, 어머니나 케오른의 만류가 아니더라도 꺼려지는 바가 여럿 있었다.
특히나 그가 타고난 혈통이 경멸시 되는 지역에 와서는 더더욱.
"흠, 다 별로라...그러면 연극은 어때?"
"연극?"
책에서 얼핏 설명을 보기는 했다.
특정한 사건이나 설화 같은 것을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이라고 하던가.
물론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이를 들은 아시즈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연극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그래."
"이러면 내가 또 안내하지 않을 수 없겠구만. 마침 자빌린에서 가장 끝내주는 극장이 멀지 않거든. 무려 기사 배우도 있는 곳이라니까."
잘은 몰라도 배우라는 게 광대 비슷한 직업인 것은 아는 투란으로서는 기가 차는 이야기였다.
히사릴 언덕 인근에서는 거의 신화적 존재로 여겨지는 이들이 여기서는 대중 앞에서 재롱을 떤다니....
확실히 대가문에 속한 영역은 다른 지역과 아예 동떨어진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잠시 후, 극장에 도착하자 작은 소년이 두 사람에게 넙죽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시즈가 씩 웃으며 한쪽에 놓인 공연 광고지를 가리켰다.
"저쪽에서 원하는 걸 찾아봐. 제목이랑 공연 내용이 대충 나와 있을 테니까."
별생각 없이 광고지를 들여다보기도 잠시, 투란은 어느 한 공연의 광고지를 본 순간 얼어붙었다.
옆에서 다가온 아시즈가 이를 보며 말했다.
"<영웅 케오른>? 이거 보려고?"
17화
투란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으나 적힌 내용이 변하지는 않았다.
케오른, 그 익숙한 이름....
혹시 동명이인일까 싶어서 밑에 있는 내용을 보니 20년 전의 아라비온-자하르 전쟁을 배경으로 한 연극이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라비온의 가장 용맹한 기사, 케오른의 활약을 그린 이야기라고.
한참 광고지에 시선이 꽂혀 있는 것을 본 아시즈가 말했다.
"꽤 괜찮은 연극이긴 해. 본가 쪽에서 우리가 전쟁 이겼다고 선전하려고 만든 거긴 하지만. 볼 거야?"
"보고 싶은데...혹시 넌 이미 본 거라서 별로인가?"
"음? 아니 뭐, 한 번쯤 더 봐서 나쁠 건 없지. 이봐, 혹시 언제 볼 수 있지?"
"십오 분 뒤에 바로 시작합니다!"
잠시 후, 투란과 아시즈는 극장의 가장 좋은 좌석 두 개를 차지해 앉았다.
당연히 본래 주인은 따로 있었지만, 푯값의 열 배를 내면 없던 자리도 생기는 법.
착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극이 시작됐다.
[때는 바야흐로 2195년도, 아라비온의 용사들이 저 악마들의 사막으로 갔을 때로부터 시작된다-]
성량이 풍부하여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단정하게 차려입은 배우 몇 명이 올라섰다.
정기적인 교역을 위해 들른 그들은 사막을 지키는 자하르의 기사들과 말다툼을 벌이고, 이내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들끼리의 싸움은 곧 귀족의 싸움이, 그리고 두 가문이 주축이 된 전쟁으로 번졌다.
나중에는 두 가문의 가주들끼리 나와 결투를 벌이는데, 가주 역의 배우 두 명이 각각 마법으로 서로를 공격하는 시늉을 하자 관객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실제로는 서로를 해치지도 못할 만큼 약한 마법을 휘황찬란하게 꾸미는 재주가 있었다.
[낮에는 폭풍이, 밤에는 죽음이, 전쟁은 길어지며 희생자는 많아지는 가운데-케오른이라는 이름의 기사가 한 명 있었으니.]
그렇게 배경을 깔고 나서야 등장한 케오른 역의 배우.
부리부리한 눈에 건장한 체격을 한 남자는 투란의 기억 속, 온화한 늙은 기사와 상당히 괴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연극 속 케오른에게는 그러한 외모가 더 잘 어울렸다.
전장에서는 가장 먼저 돌격하고 마지막에 물러서며, 풍부한 경험과 마법 실력으로 귀족들마저 그 이름을 기억하는 용사.
비록 수십 명의 귀족과 수천 명의 기사들이 격돌하는 와중에 그 한 명의 비중은 크지 않았지만, 케오른은 기사 중의 기사로서 모두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운명의 날, 케오른은 자신을 보호해 줄 귀족 없이 자하르의 귀족과 맞서 싸웠다.
자신에 비해 미약하기 짝이 없는 케오른을 조롱하는 상대.
하지만 케오른은 신의 도움처럼 묘사되는 온갖 행운과 동료들의 유품, 용맹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고전 끝에 적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
대가문의 혈통을 타고난 귀족이 한낱 기사와의 결투에서 살해당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퍼지자 두 가문에 희비가 갈리고, 마침내 이 년간 계속된 치열한 전쟁이 끝을 맺는다-
해설자의 말을 끝으로 막이 내리자 격한 박수 소리가 극장을 울렸다.
"어때, 볼만했어?"
"음? 아, 무척...좋던데."
투란은 다소 멍한 기분으로 아시즈의 물음에 답했다.
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케오른이 했던 말이었다.
자기가 딱히 엄청난 업적을 세운 유능한 기사도 아니라고 했던가?
정말이지, 겸손도 그만한 겸손이 없었다.
투란은 과거 히사릴 언덕에서 케오른과 시험 삼아 힘을 겨뤄봤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케오른이 가지고 있던 마력은 투란이 가지고 있던 것의 십 분의 일 정도.
심지어 이마저도 투란이 마력을 딱 한 번 흡수해 본 어린 귀족이라 그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귀족들은 모두 케오른보다 수십 배는 강할 게 분명했다.
이 정도면 확실히 후세에 연극으로 남을 만한 업적이었다.
어디까지나 사실이라면 말이지만.
"조금 전의 그 연극, 실제로 있었던 일이야?"
"아마? 나도 어렸을 때 일이라 잘은 모르지만 유명한 이야기긴 해."
이십 년 전이어도 스물세 살은 됐을 텐데, 지금의 투란보다도 나이가 많았으면서도 마치 갓난아이 시절처럼 말하는 아시즈의 태도에 실소가 나왔다.
"기사가 귀족을 죽인 게 충격적인 일이긴 한데, 그렇다고 전쟁이 끝나는 게 맞나 싶어서."
"뭐, 그 당시 이미 종전 분위기였다고 듣기는 했어. 양쪽의 기사만 각각 수백 명, 귀족도 스무 명 이상 죽고 가주들까지 결투 중 다친 상태였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케오른이 귀족을 살해하고 아라비온이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자, 저런 저력을 지닌 기사가 더 있다면 승산이 없다고 여긴 자하르가 화해를 제안하여 종전에 이른 것이라는 게 아시즈가 아는 바였다.
'내가 아는 거랑은 조금 다른데.'
투란이 케오른에게 듣기로 두 가문의 전쟁은 자하르의 우세로 끝난 것이었다.
아마 여기에는 숨겨진 내막이 더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이곳이 아라비온의 영역인 만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각색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언젠가 케오른과 만나면 저 이야기가 정말이냐고 한번 물어보고 싶기는 했다.
* * *
<영웅 케오른>이후로도 세 편의 연극을 더 보고 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제 투란은 배우라는 직업이 관객들 앞에서 재롱떠는 광대 비슷한 무언가라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예술가였다.
화가가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작가가 깃펜으로 글을 쓰듯 말과 행동으로 볼 수 없게 된 과거의 인물을 재현하는....
연극에 푹 빠진 투란의 모습에 기뻐하며, 아시즈는 지난 수십 년간 자기가 관람해 온 연극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투란을 그쪽 세계로 더 깊게 끌어들이려 애썼다.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저택에 돌아올 때쯤 콰릉 하고 번개 한 줄기가 안쪽으로 치는 것이 보였다.
발갛게 노을 진 하늘 위로 빗줄기는커녕 구름조차 몇 점 떠 있지 않은데도.
이를 바라보는 아시즈의 표정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메이사가 마법 연습을 하는 모양이네. 하여간 성실하다니까."
"저게 아라비온의 혈통 마법이었지?"
"맞아. 폭풍 혈통. 내 핏줄을 싫어한 적은 없지만...저건 좀 부럽긴 하단 말이지. 진짜 신이라도 되는 것 같잖아."
부여사들이 절름발이 여신을 조상으로 섬기듯, 아라비온은 프레아 신족 중 천둥 군주의 후예를 자칭했다.
실제로 바람과 번개를 다루는 그들의 혈통 능력은 강력한 공격력과 응용성을 겸비한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게다가 단순히 파괴력만 강한 것이 아니고, 이 지역의 풍요로움 또한 그들의 능력으로 유지되는 것이었다.
추수가 끝나면 아라비온의 귀족들이 텅 빈 다케인 평야 위를 날며 무수히 많은 번개를 내리꽂는데, 희한하게도 그렇게 하면 다음 해에도 지력(地力)이 소모되지 않고 계속해서 땅의 풍요로움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궁금한걸.'
아시즈가 말하기를 그와 동급의 재능을 지닌 천재 마법사, 차기 아라비온의 주인이 될 사람의 실력이란 어느 정도일까.
한번 보고 싶기는 했지만, 몰래 훔쳐보다가 걸리면 암살자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암살당할 뻔한 위협 탓에 이곳으로 피신 온 처지이지 않던가.
"한번 보러 갈래?"
"궁금하긴 하지만...나처럼 수상한 외부인이 접근하는 건 별로 안 좋을 것 같은데."
투란의 말에 아시즈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어때? 네가 암살자인 것도 아닌데. 내가 보증하면 되잖아! 솔직히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메이사랑 너 중에 누가 더 뛰어난지."
"진짜 날 데려가고 싶은 이유는 그쪽인 거 같은데?"
"솔직히 말하자면, 몇 년 전에 메이사랑 같이 훈련했을 때 쌓인 게 좀 있었거든. 쟤가 좌절하는 것도 한번 보고 싶단 말이지."
실로 유치하기까지 한 동기에 투란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하지만 내 마력량으로는 상대가 안 될걸."
지금 그의 마력량은 잘 쳐줘야 대가문의 마법사 중에서는 보통, 발타스 같이 구석진 변방 가문의 가주와 동급이거나 그보다 조금 못한 정도였다.
그에 비해 메이사는 아라비온의 핵심 구성원들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힘을 지녔다고 하지 않던가.
"이야, 마력량만 아니면 이길 수 있다는 거지? 대단한 자신감인걸."
"그런 뜻이 아니잖아."
두 사람이 베르크 저택 안쪽의 정원에 도착했을 무렵, 본래는 잘 정돈되어 있었을 정원은 이미 벼락 폭풍을 맞아 폐허가 되어 있었다.
사방이 마력등으로 환히 빛나는 탓에 더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풍경 속, 어제 보았던 해골 같은 아가씨가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이, 메이사!"
"아시즈? 그리고 옆에는...."
"투란입니다. 아가씨."
"아, 그랬죠. 투란. 그런 이름이었지. 그래서, 두 사람은 갑자기 무슨 일로?"
의외로 암살당한 뻔한 사람답지 않게, 메이사는 수상쩍기 그지없는 투란의 존재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아시즈가 뭔가 찔리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슬쩍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뭐, 마법 연습하는 것 같길래 우리도 같이 어울리고 싶어서. 옛날에도 그런 적 있었잖아?"
"아...기억나네. 네가 일주일 내내 매달리던 걸 내가 두 번 만에 해내니까 울면서 뛰쳐나갔지."
"야."
둘이 말다툼하는 모습은 대가문의 후계자와 가신 가문의 일원이 아닌, 평범한 친척 남매의 그것처럼 보였다.
발타스의 이젤라와 마빈 같은,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음습하지 않고 밝은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참지 못하고 풋 웃자 아시즈가 그를 쏘아보았다.
"실례."
"너까지 비웃는 거냐? 아무튼, 여기 이 투란도 내가 본 사람중에서 마법재능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라고. 한번 둘이 대결해 보면 어때?"
"대결?"
아시즈의 제안에 메이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몸에서 기세를 흘려냈다.
'윽.'
이를 마주한 투란은 느껴지는 압박감에 헛숨을 내쉬었다.
3배에서 5배, 어쩌면 그 이상....
지금 가진 힘으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을 폭력적인 힘의 격류가 저 빼빼 마른 아가씨의 몸에 잠들어 있었다.
과연, 이게 대가문의 후계자가 가진 저력이라는 것일까.
잠시 후 기세를 거둔 메이사의 얼굴에는 이미 흥미가 사라진 채였다.
"미안한 말이지만 나랑 대결하기는 좀 어려워 보이는데."
"아니, 마력이야 당연히 네게 적수가 될 리가 없지. 이 친구가 진짜 대단한 건 마법 습득 실력이라고."
아시즈는 투란이 자기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마법의 천재라고, 메이사조차 그 정도는 되지 못할 거라고 허풍을 떨어댔다.
이를 들은 메이사의 얼굴에 옅은 흥미가 떠올랐다.
"그 정도라고?"
투란은 이 친구가 과장하는 것이라고 겸양을 떨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겸손하게 굴면 역시나 그렇지, 하고 끝나는 것 아니겠는가.
그 역시 이 명문가 아가씨의 실력이라는 것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서로 할 줄 모르는 마법을 하나씩 보여주고 더 빨리 성공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괜찮은 방법인데. 메이사, 네 생각은?"
"좋아. 그러고 보니 투란 씨는 자기 혈통 마법이 뭔지도 모른다며? 나 역시 바람이나 번개 마법을 쓰는 건 불공평하겠지. 그쪽은 빼고 하는 것으로 할까."
그렇게 말한 메이사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가볍게 발로 땅을 한 번 굴렀다.
투란도 써본 적 있는 대지에서 가시를 솟아나게 하는 마법을 쓰려나 했는데-
"우왓."
촤르륵, 바닥에서 솟아난 덩굴을 보며 아시즈가 기괴한 감탄사를 터트렸다.
덩굴줄기는 단순히 솟아난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여서 옆에 멀뚱히 서 있던 아시즈의 팔과 몸통, 다리를 휘감은 뒤 그를 들어 올린 채 이리저리 휘둘렀다.
"으아아아-!"
"식물 창조, 그리고 조종 마법이에요. 할 수 있으려나?"
"이거-좀-놔-줘-!"
"잠깐 그러고 있어. 재밌잖아."
아시즈가 덩굴에 휘둘려 허공을 붕붕 나는 사이, 투란은 조금 전 있었던 일을 가만히 복기했다.
바닥에서 덩굴을 창조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닐 터였다.
그가 배운 자연법칙에 의하면 마법의 힘으로도 물질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불을 피우는 마법은 타오른다는 '현상'을 구현하는 것뿐이며, 물을 만드는 마법은 공기 중에서 보이지 않는 수분을 끌어오는 것일 뿐.
따라서 저 덩굴은 마찬가지로 땅속에 심겨 있던 씨앗을 빠르게 자라나도록 하는 것이 분명했다.
'창조'가 아니라 '성장'임을 파악하는 것.
이러한 원리를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는 마법 사용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다.
"자라나라."
그리 익숙하지 않은 마법인 만큼, 투란은 나지막이 주문을 외우며 바닥에 손을 대었다.
잠시 후, 메이사의 그것보다 훨씬 비실비실한 덩굴 몇 줄기가 바닥에서 자라났다.
투란은 그렇게 자라난 덩굴이 자신의 오른손을 휘감도록 만들었다.
"오...."
메이사가 보여준 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한 수준이지만, 이를 본 두 사람 모두 탄성을 터트렸다.
아예 모르는 마법을 한 번 보고 어설프게나마 따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어서였다.
물론 투란은 땅속에 덩굴의 씨앗이 남아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사용한 것이라서 비교적 힘의 손실이 적었던 것이지만.
"자라나라고 한 걸 보니까 이 마법의 정체를 바로 알아챈 것 같은데, 혹시 어디서 본 적 있어요?"
"처음입니다."
"아시즈의 말이 맞는 날도 다 있네."
그를 바라보는 메이사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눈구멍이 푹 꺼진 가운데 안구만 튀어나온 모습이 기괴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가진 기대감을 느끼기는 충분했다.
"그러면 이제 그쪽이 문제를 낼 차례네요. 어디 한번 해 보시죠."
메이사의 도전적인 표정에 투란은 어떤 마법을 골라야 할지 고민했다.
기왕 하는 것 저쪽이 따라할 엄두조차 내기 힘든 어려운 마법을 써 보고 싶은데 딱 떠오르는 게 없었다.
자하르 혈통의 마법을 쓰는 건 규칙 위반 이전에 자살행위일 것이고....
그때, 투란의 눈에 문득 폐허가 된 정원 구석을 빠르게 기어다니는 쥐 한 마리가 보였다.
가벼운 손짓으로 쥐를 불러내자 메이사가 다소 실망한 듯한 말투로 물었다.
"동물 조종?"
"설마요, 이 녀석은 재료일 뿐입니다."
투란은 가볍게 쥐의 목을 움켜쥔 채 마법을 시전했다.
이 생명체의 몸속에 있는 무수히 많은 미생물, 본래는 존재하되 인지할 수 없던 이들에게 힘을 부여하는 마법....
잠시 후, 쥐가 산 채로 손 위에서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다 됐습니다."
그가 낸 문제는 도서관의 사서에게서 배운 자연법칙을 통해 얻어낸 마법, '부패'였다.
18화
마법을 사용하는 데 있어 '인과'란 굉장히 복잡한 요소였다.
일으키려는 현상이 자연스러운 일인지, 사용자가 마법적 현상의 원인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지, 소모된 마력의 양이 그 현상을 일으키기 적합한 정도인지....
그중에서도 현상의 원인에 대한 인식능력은 마법의 성공률과 마력 소모량에 동시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라, 이를 아느냐 모르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문제는 '부패'가 겉으로 봤을 때 그 원리를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투란 역시 사서에게 배운 마법으로 확대하여 들여다보고 나서야 미생물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았던가?
거기다 의도치 않았던 함정이 하나 더 생겼으니, 바로 살아있는 동물에게 부패를 거는 것이 과일 따위에 사용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게 힘들다는 것이었다.
'위험했다.'
투란은 산 채로 썩은 생쥐를 내려놓으며 몸속의 마력이 삼분의 일 이상 소모되었음을 깨달았다.
살아있는 쥐와 사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속적인 생명력 공급의 부재? 동물과 식물?
자주 써보지 않은 마법이라서 정확히 그 이유가 무엇일지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나중에 죽은 동물의 사체에 마법을 써보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지도....
어쨌든, 지금은 이를 드러내지 않고 여유롭게 성공한 것처럼 행세해야 했다.
"좋아요, 이젠 제 차례군요."
그렇게 말한 메이사가 가볍게 손짓하자 정원 위로 산들바람이 훅 불기 시작했다.
잠시 후 불행하게도 정원 언저리를 배회하던 쥐 한 마리가 허우적대며 날아와 그녀의 손에 쏙 들어갔다.
[찌지지직!]
그녀 역시 투란과 같은 마법을 시도해 보았으나, 생쥐는 별다른 반응 없이 빠져나가려고 몸을 뒤틀어댈 뿐이었다.
"으음...."
메이사는 양손에 각각 생쥐 한 마리를 쥔 채 툭 튀어나온 눈을 굴려 가며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찾으려는 것처럼.
그 기괴한 모습에 어느새 덩굴에서 풀려난 아시즈가 질색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뭐 써도 저런 마법을 쓰냐? 되게 징그럽네."
"그냥 당장 생각난 게 저거라서."
사실 이 마법을 꺼낸 이유는 이것이 별로 실용성 없는 마법이라서였다.
어지간하면 마법사끼리 싸우는 과정에서 상대를 붙잡고 몇 초를 기다릴 시간 따위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아라비온 가문이 가진 자연법칙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설마 했는데, 아라비온쯤 되는 대가문도...잘 모르는 건가?'
사서에게 고대의 지식을 배울 적, 투란은 유서 깊은 마법사 가문들이 이러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으리라 의심했다.
이를 알고 있는 마법사는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절대적인 우위를 쥘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메이사는 이러한 것을 그리 잘 아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아직 어려서 배움이 얕아서일까? 그도 아니면....
"잘 안되나 본데, 메이사. 투란이 이긴 거로 하는 게 어때?"
투란이 생각에 잠긴 사이, 아시즈가 생쥐를 잡은 채 인상을 쓰고 있는 메이사를 향해 놀리는 듯한 투로 말했다.
이를 들은 순간, 항상 우울함과 나른함을 바탕에 깔고 있던 그녀의 눈빛에 날이 섰다.
"나도 할 수 있어."
스읍, 가볍게 숨을 들이쉰 메이사의 두 눈이 뚫어질 듯이 생쥐를 노려보았다.
마법을 사용하는 데 부족한 인과를 메꾸는 방법의 하나는 대량의 마력을 투입해 비효율을 양으로 채우는 것.
극단적인 사례지만, 대가문의 가주쯤 되는 강대한 마법사라면 평범한 기사 따위는 마치 동물을 죽이듯 말 한마디로 즉사시키는 것조차 가능했다.
그러려면 한 명을 죽이는 대가로 거의 탈진하다시피 해야 하겠지만.
"조금만 더...."
메이사는 생쥐를 쥔 채 끊임없이 기원했다.
썩어라, 썩어라, 산 채로 썩어라-
익숙하지 않으며 원리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마법 시도.
몸속의 마력이 마구 빨려 나가는 것도 개의치 않으며 얼마나 힘을 투자했을까?
마침내, 멀쩡하던 생쥐 쪽이 썩기 시작했다.
조금 전 투란이 했던 것보다 더 느릿하지만 분명히 같은 현상이었다.
"오, 됐잖아?"
감탄을 터트리는 아시즈의 옆에서 투란 역시 똑같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부패 마법의 비밀이 '생물을 썩게 하는 미생물의 성장 및 강화'라는 것을 알아차렸단 말인가?
"...됐다."
그때, 메이사가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손에서 빠져나온 생쥐가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가는 사이, 투란과 아시즈는 재빨리 쓰러진 그녀를 부축했다.
"메이사! 왜 그래!? 눈 좀 떠봐!"
아시즈가 다급히 외치는 사이, 투란은 그녀의 얼굴과 몸 상태를 분석했다.
'이유가 뭐지? 마력을 너무 많이 써서? 하지만 마력이 고갈된다고 쓰러지지는 않을 텐데.'
투란은 어린 시절 마법 연습을 하다가 몇 번이고 마력이 고갈된 적 있었지만 그 때문에 기절하지는 않았다.
그저 몸을 강화할 만한 힘조차 날아간 탓에 탈력감으로 고생했을 뿐....
그 생각과 함께 메이사의 앙상한 몸을 보니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그거구나.'
"이곳에 치유사 혈통의 마법사는 없지?"
"없어!"
"그러면 이 아가씨 방으로 물이랑 소금 가져오라고 해. 어른들도 모셔오고."
투란은 지시를 내린 뒤 곧바로 메이사를 안아 올렸다.
갓 태어난 새끼양 서너 마리 정도밖에 안 되는 몸무게....
확실히, 이런 몸뚱이가 마력의 도움 없이 원활하게 기능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마력으로 강화되어 억지로 유지되던 몸이 마력이 고갈되며 탈이 난 게 분명했다.
* * *
"으...."
"메이사, 괜찮니? 정신이 들어?"
메이사 아라비온은 자신을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그녀의 오촌 당이모인 베르크 가주, 미델라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왜?"
"아시즈가 그러는데 손님과 마법 훈련을 하다가 갑자기 쓰러졌다더구나. 맞니?"
그 말을 듣고서야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친척 오빠가 생명의 은인이자 마법 천재라고 띄워주던 뺀질뺀질하게 생긴 남자와의 마법 대결, 자신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해내고 자랑하는 모습에 자존심이 상해서 과도한 마력을 투자해 따라 했던 일까지....
"맞아요. 두 사람은요?"
"일단 신전에 머무르게 하고 감시 중이야. 혹시 그 사람이 네게 뭔가 이상한 짓을 한 걸지도 모르니까."
"아뇨, 그건 아니에요. 제가 바보 같은 짓을 했어요."
메이사는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갈아입혀진 옷이 흘러내리며 앙상한 팔뚝이 드러나자, 이를 본 미델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수프를 좀 끓여 놨단다. 마법 때문에 안 먹는 건 알지만 건강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언짢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감사해요. 이모. 조금 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래, 좀 더 쉬려무나."
미델라가 방에서 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 메이사는 침대 옆에 놓인 수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벼운 손짓으로 띄워 자신의 앞으로 가져왔다.
밀가루와 버터, 우유가 뒤섞인 고소한 향에 뱃속이 마구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 몸에 영양분을 공급해 달라고 외치듯이.
숟가락을 집은 메이사는 조심스럽게 떠낸 수프를 입에 넣었다.
오랜만에 물과 소금이 아닌 것을 맞이하여 기뻐 날뛰는 혀와 위장, 그리고-
그녀를 노려보며 피눈물을 흘리는 네 쌍의 눈동자.
[제발 살려줘, 메이사. 너라면 할 수 있잖니....]
[너무 아파, 누나.]
"우웩-"
입가와 몸을 적신 토사물의 시큼한 악취를 느끼며, 메이사는 흐느끼듯이 웃었다.
* * *
베르크 가문 저택의 지하에는 절름발이 여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은 크게 두 가지 기능을 했다.
가문의 구성원들이 신에게 기도하는 공간, 그리고 감옥에 집어넣기는 애매하거나 신분이 높은 이를 일시적으로 가두는 방.
왜냐하면, 이 신전의 출입문은 단 하나이며 문과 벽 모두 감히 부수고 나갈 수 없을 정도로 견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허튼 생각은 말도록."
"예, 알겠습니다."
메이사를 방에 데려가고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투란은 정중히 양해를 구한 미델라에 의해 이곳 신전에 감금됐다.
옆에서 아시즈가 증언해 주기는 했지만, 투란이 무언가 수작을 부려 메이사를 해쳤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녀가 깨어나고 나면 진상이 밝혀질 터라, 투란은 괜히 얼굴 붉히는 대신 얌전히 신전에 머물기로 했다.
사건 당시 옆에 있던 아시즈를 같이 가두지 않는 것이야 뭐, 같은 가문 사람인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고.
벽에 기대어 앉은 그는 맞은편에 선 간수를 바라보았다.
옆구리에 큼직한 장검을 한 자루 찬 건장한 체격의 남자.
그의 이름은 하람 베르크로, 혼인을 통해 베르크 가문에 편입된 수호자 혈통의 귀족이었다.
시간도 죽일 겸 가만히 앉아 눈을 감은 채 메이사가 보여주던 마법을 복기하는데, 날카롭게 바람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눈을 뜨자 하람이 열심히 허공에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 하십니까?"
"훈련."
하람은 짧게 대답한 뒤 다시 장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 베기, 찌르기, 빙글 돌려 벤 뒤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좌우로 연이어 베기....
평민이나 기사가 날붙이 하나를 들고 그런다면 우스울 뿐이겠지만, 혈통 능력으로 뛰어난 신체 능력을 타고난 귀족이 이러한 기교를 부리니 압박감이 차원이 달랐다.
마치 몸 주변을 칼의 그림자가 휘감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야 할까.
여신상 앞에서 저렇게 칼부림을 하고 있어도 되는 건가 싶기는 했지만, 그 동작만은 춤처럼 우아해 보였기에 투란은 가만히 앉아 이를 관찰했다.
"오...."
무의식중에 터진 감탄사.
이를 들은 하람은 갑자기 검술 연습을 멈추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혹시 방해가 됐습니까?"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하람은 다시 검술 훈련을 시작하는 대신 투란을 뚫어져라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혹시 검술에 관심이 있나?"
"예?"
갑자기 이게 웬 엉뚱한 질문이란 말인가?
투란은 잠시 혼란을 느꼈다가 솔직히 답했다.
"관심은...잘 모르겠습니다만, 멋있다고는 생각했습니다."
"그렇군."
무뚝뚝하게 대답한 하람이 다시 장검을 뽑더니, 몇 가지 동작을 더 구사한 뒤 말했다.
"대부분 귀족은 격투술이나 무기술 따위를 하찮게 여긴다. 마법으로 직접 공격하는 게 더 쉽고 강하니까. 이런 건 기사 따위나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지."
"아무래도 육탄전에 특화된 혈통이 아니면 그쪽은 좀 비효율적이니까요."
귀족은 혈통에 따라 힘을 자기 육체에 적용하는 데 능한 부류와 밖으로 투사하는 데 능한 부류로 나뉘는데, 대부분이 후자인 탓에 육탄전에 능한 귀족은 드물었다.
투란의 혈통 역시 원거리 능력과 근거리 능력의 비율을 규정하자면 7대 3 정도로, 비교적 마법을 멀리 투사하는 데 능숙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실전을 겪다 보면 피하고 싶어도 마주하는 상황이 생기긴 하더군요."
투란은 언덕에서 마주한 표범 마수를 걷어찼던 것과 토끼 마수의 목을 그어 해치웠을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던 하람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갑자기 들고 있던 칼을 거꾸로 쥐어 그에게 내밀었다.
"한번 해 보겠나."
"일단 수상한 사람이라서 여기 있는 건데, 무기를 주셔도 되는 겁니까?"
"너는 전사가 아니니 상관없다."
투란은 그 말을 몇 번 곱씹은 뒤에야 의미를 이해했다.
어차피 딱 봐도 칼 쓰는 실력이 형편없을 것 같으니 검을 주건 말건 관계가 없다는 뜻.
조금 전의 그 현란한 칼 놀림을 보건대 자만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만약 둘 다 칼을 들고 마법 없이 싸운다면 투란이 열 명쯤 있어도 상대가 안 될 게 분명했으니.
"어디...."
투란은 두 손으로 어설프게 장검을 쥔 채 하람이 가르쳐주는 대로 자세와 동작을 취했다.
원하는 대로 한 번에 되던 마법과 달리 이쪽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동작이 영 어설펐다.
"그게 아니다, 앞쪽 다리를 좀 더 뻗고-"
"팔꿈치가 너무 높아. 그러다 보면 칼로 허벅지를 벤다."
"팔을 더 들도록."
처음에는 과묵한 사람인 줄 알았던 하람은 검술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놀라울 정도로 말이 많았다.
그렇게 삼십 분 정도 기초 검술을 배운 투란은 뻐근한 손목을 매만지며 검을 반납했다.
"여기요. 더 해보고 싶은데 힘드네요...."
"이 검은 내 혈통에 맞춘 것이니까. 보통 귀족에겐 무겁지."
어쩐지, 평범한 철검이라면 삼십 분이 아니라 세 시간을 들고 휘둘러도 힘들 리가 없건만.
이 칼잡이는 검술 훈련을 핑계로 자신의 체력을 깎아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려던 것이 아닐까.
속으로 의심하는 사이, 하람이 팔뚝을 주무르는 그를 향해 충고하듯 말했다.
"가능하면 시간을 내서 몸도 단련해두는 게 좋을 거다. 마력 때문에 운동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신체 능력이 보장되지만, 그래도 제대로 체력을 키우느냐 아니냐는 차이가 크니까."
확실히, 정말 급한 순간에 육탄전이라도 불사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느 정도 이런 기술을 배워두는 편이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했다.
눈앞의 하람처럼 육탄전에 특화된 혈통과 싸우면야 상대가 안 되겠지만, 그와 비슷한 수준의 힘을 가진 이와 싸울 때는 또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지나치게 혹사한 근육을 푸는 운동법을 배우던 도중, 신전의 문이 열리며 미델라 가주가 들어왔다.
그녀는 가장 먼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실례가 많았소, 투란 씨. 은인에게 못할 일을 했구려."
"아가씨는 무사하신가 보군요. 저야말로 죄송했습니다. 손님으로서 적절치 못한 처신이었습니다."
투란은 그런 미델라의 사과를 부드러운 태도로 받았다.
섬기는 가문의 후계자가 갑자기 쓰러진 상황에 이 정도야 나름 합리적인 조치라 할 만했으니.
둘의 대화를 들은 하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니 다행이군."
"고생하셨어요, 하람."
"가주의 명령이라면 따라야지. 그러면 나는 이만."
하람은 가주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곧바로 신전을 나가 버렸다.
"혹시 하람이 무례하지는 않았나 모르겠구려. 워낙 무뚝뚝한 사람이라. 악의는 없었을 거요."
"오히려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투란의 답에 미델라가 흐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거 다행이군. 그보다...메이사가 투란 씨에게 사과하고 싶다던데, 혹시 시간 좀 내어줄 수 있겠소?"
19화
"죄송해요, 저 때문에 신전에 갇히셨다죠?"
메이사의 방에 찾아간 투란이 가장 먼저 들은 말이었다.
이 고귀한 아가씨의 사과에 그는 잠시 뭐라 답해야 할지 말을 고른 뒤 가장 무난한 대답을 꺼냈다.
"필요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보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여기서 괜히 무리한 일을 시켜서 미안하다고 하면 난 할 수 있지만 넌 할 수 없었다고 조롱하는 꼴이 된다.
이러한 계산이 담긴 대답임을 알았는지 메이사가 깜빡했던 것을 떠올린 것처럼 탄성을 터트렸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동물을 썩게 만드는 마법. 혹시 알려지지 않은 혈통 마법인 거 아닌가요? 마력 소모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이던데."
"아닙니다. 원리만 이해하면 아가씨도 충분히 쓰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그렇게 대화하던 도중, 투란의 예민한 후각이 낯선 냄새를 포착했다.
다소 변질되었지만 고소한 향, 그리고 시큼한 악취가 뒤섞인 무언가....
'토했나?'
동물을 도축하다가 실수로 위장을 가르거나 했을 때 나는 냄새가 메이사의 입가에서 희미하게 풍겼다.
분명히 음식을 안 먹는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투란은 무언가 말하려다 이내 자신의 발언이 여러모로 적절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후각에도 흐릿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아주 말끔히 치운 것일 텐데, 이를 맡았다고 하면 그쪽으로 특화된 혈통이 아니냐고 의심받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에 잠긴 사이, 투란이 말을 끊은 이유가 마법의 원리를 말해주고 싶지 않아서라고 생각한 메이사가 피식 웃으며 떠보았다.
"공짜로 알려줄 수는 없단 거군요. 하지만 방법을 알려주지 않으면 혈통 마법이 아니라는 증거가 안 될 것 같은데요."
"저는 딱히 이긴 게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시선을 맞추었다.
먼저 항복한 쪽은 메이사였다.
"이대로 끝나면 찜찜하니까, 그 마법의 비밀을 알려주면 저도 아라비온의 비기 하나를 알려드릴게요. 공평하죠?"
"좋습니다. 그러면-"
투란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생물들이 존재함을, 그리고 그것이 커다란 생명체를 잡아먹는 것이 부패 현상임을 설명했다.
이러한 작은 생물에 힘을 부여하여 부패 현상을 가속하는 것이 마법의 원리라는 것까지.
거기까지 설명한 것만으로도 메이사는 마법의 원리를 알아차린 것인지 아, 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니까...근본은 생물 강화 마법이었다?"
"예."
"어쩐지. 그걸 모르고 쓰니까 효율이 그따위였군요. 거기, 쥐 한 마리만 잡아다 주겠어?"
메이사의 부탁에 뒤쪽에 공손히 서 있던 하녀가 깜짝 놀란 태도로 되물었다.
"쥐, 쥐를요...?"
"그래. 이렇게 큰 집인데 어디 하나쯤은 살고 있겠지."
잠시 후, 메이사는 산 채로 썩어 문드러진 생쥐 한 마리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쥐를 잡아온 하녀는 그 모습을 보며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투란과 메이사 둘 다 거기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러면 대결은 제가 진 거네요. 마지막에 성공은 했다지만 힘으로 억지로 밀어붙여 성공한 거니까."
"저는 그 부분도 내기의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아니죠. 보통 마법을 다루는 실력을 얘기할 때 마력량을 포함하진 않잖아요."
그렇게 말한 메이사가 갑자기 민망해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음, 아시즈한테는 비긴 것으로 해주실 수 있겠어요? 그 녀석이 기고만장해하는 거 보기 싫은데."
"알겠습니다."
"그러면 대가를 치러야겠죠. 어디...이게 좋겠네요."
메이사는 옆에서 빗을 가져와 자신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몇 번 빗더니, 이를 휙 들어 머리카락이 빗에 달라붙어 올라가는 것을 보여 주었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물체가 마찰하면 서로 끌어당기는 현상이 생기거든요. 이게-"
"마찰전기죠."
투란의 대답에 메이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고 있었어요?"
"네."
도서관에서 구름에서 번개가 내리치는 원리를 배울 적 그러한 지식 역시 접한 바 있었다.
번개가 양전하와 음전하의 접촉에 따라 일어난다느니 뭐니 하는 이야기까지는 너무 어려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번개가 전기라는 힘에서 기원한다는 것과 마찰로도 작게나마 비슷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예시를 보여주기 위해 투란은 손가락을 몇 번 비벼 빠직, 하고 작은 전기 불꽃을 일으켰다.
이를 응용하면 낙뢰 마법만은 못하지만 직접 번개를 쏘는 전격 마법도 쓸 수 있었다.
실전에서 쓰기에는 아직 덜 다듬어져서 연습만 하는 수준이긴 하지만.
"이것만 해도 꽤 심오한 비전 중 하나인데...."
곤란한데, 하고 중얼거리던 메이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어떻게 갚을지는 조금 더 생각해 봐도 될까요?"
"그러시죠."
투란은 대가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식을 주었으면 무언가를 받아야 한다는 게 그가 언덕을 내려와 얻은 깨달음 중 하나였으니까.
잠시 침묵이 이어진 뒤, 메이사가 고개를 저으며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 충분한 대가가 떠오를 때까지 앞으로도 같이 하면 어떨까 싶은데...."
"마법 연습 말입니까?"
"네. 서로 배우는 게 꽤 많을 것 같아서요."
"좋습니다."
어차피 매일 마법 훈련을 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을 생각이던 차, 수준 높은 마법사와 서로 성취를 겨룬다면 동기 부여 면에서 나쁘지 않을 터였다.
"그러면 내일부터 매일 해 질 무렵에 정원에서 보죠."
* * *
메이사와의 면담을 마친 다음 날, 누군가가 아침 일찍부터 투란을 찾아왔다.
바로 어제 신전에서 그와 짧게 검술 수련을 했던 수호자 혈통의 귀족, 하람이었다.
"잘 잤나."
"아...예.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
"어제 한 말은 생각해 봤나?"
투란은 그가 어제 무슨 말을 했었는지 되짚었다.
가능하면 시간을 내서 몸도 단련해 두라는 이야기였던가?
이를 말하자 하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언했다.
"가지."
"설마 훈련하러 말입니까?"
"싫은가?"
잠시 고민하던 투란은 이내 수긍하며 문을 나섰다.
아시즈가 오늘도 연극을 보러 나가자고 하긴 했지만...그래도 노는 것보다는 무언가 하나라도 얻는 쪽이 더 보람찰 것 같으니까.
하인을 한 명 불러 약속을 취소하겠다고 전하려는데 때마침 아시즈가 복도 너머에 나타났다.
"어이, 투란! 듣기로 오늘 진짜 끝내주는 연극이...."
밝은 목소리로 외치던 아시즈의 목소리는 그 옆에 선 하람을 보며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아시즈로군."
"아, 안녕하세요. 고모부."
"너도 올 테냐?"
"예? 아뇨...저는 이번에 밖에 나갔다가 오느라 여독이 안 풀려서 좀."
무엇을 올 것인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아시즈는 횡설수설하더니 슬쩍 왔던 길로 다시 도망쳐 버렸다.
잠시 후, 투란은 그가 왜 그런 식으로 반응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 번 더."
"흐읍...."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베르크 저택의 동쪽 구역, 건물 네 개로 둘러싸인 훈련장 안에는 아마 마법기인 듯한 여러 기구가 있었다.
마력을 불어넣을수록 무거워지는 금속 막대부터 시작해서 안에 들어가는 순간 몸이 어마어마하게 무거워지는 공간 등.
하람은 그런 곳에서 투란에게 여러 가지 동작을 몇 번이고 수행하게 하며 온몸의 근육을 혹사했다.
일반적으로 귀족의 근력이 제 육체의 무게에 압도당하는 일은 없으나 이곳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여기까지."
투란은 하람의 말에 막대에 불어넣던 힘을 회수한 뒤 이를 내던지고 드러누웠다.
땀에 푹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힘든가."
"네...."
느낌상 흑요정 사령술사들과 싸울 때보다도 더 지친 것 같았다.
그때는 그냥 물소 사령에게 들이받혀 나뒹구느라 몸 상태가 안 좋았을 뿐이라면, 이번에는 정말로 목부터 발가락까지 온몸의 근육을 조진 것이었으니까.
투란의 대답에 하람이 슬쩍 입꼬리만 올리는 기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너는 마법사니까 한 번이면 된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마법사가 아니면 다릅니까?"
"원래 근육은 한 번 단련해서 만들어 놔도 시간이 지나면 도로 사라진다.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단련해야 하지. 하지만 마법사는 마력이 육신을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는 덕에 일단 한 번 몸을 만들면 약해지지는 않는다."
그렇게 말한 뒤, 하람은 하늘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거기다, 운동하고 바람을 쐬면 개운하지 않나."
"그렇긴...하네요."
하람의 말에 투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동의했다.
확실히, 온몸의 땀을 쭉 뺀 채 나동그라져 있자면 묘한 고양감이 느껴졌다.
마치 책을 읽었을 때랑 비슷한, 내가 전보다 좀 더 나은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성취감....
드러누운 투란을 향해 이렇게나 단련하기 좋은 몸을 가지고도 육체 단련을 게을리하는 마법사-특히 귀족들이 모두 바보라며 한참 투덜대던 하람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금 지시를 내렸다.
"이제 다 쉬었겠지."
"아니요, 아직-"
"나는 안다. 너는 충분히 쉬었어. 이제부터는 무기술과 격투술을 가르쳐주도록 하지."
그렇게 오전을 지옥 같은 단련 시간으로 보낸 뒤, 투란은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작은 식당에 가서 하인들에게 음식을 내어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서 나타났을지 모를 아시즈가 불쑥 튀어나와 맞은편에 앉았다.
"대체 어쩌다가 하람 고모부한테 걸린 거야?"
"그게...."
투란이 어젯밤 하람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이야기를 설명하자, 아시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낚였구만."
"낚여?"
"고모부는 모든 귀족이 육탄전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거든. 나도 어렸을 때 비슷한 수법으로 당했어."
옆에서 멋들어진 검술을 시연해 보이면서 이런 거 해보고 싶지? 하고 꼬드긴 다음 훈련장으로 끌고 가서 혹사하는 게 그의 고정 패턴이라는 말이었다.
아시즈 역시 어린 시절-그가 스물다섯 살 때 일이었다-하람에게 끌려가 고초를 치른 뒤에는 훈련하자고 해도 얼씬조차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한 번만 단련해 놔도 효과가 좋다던데?"
"그래도 너무 힘들잖아! 차라리 마법 훈련이 낫지. 어차피 넌 손님이니까 그만두겠다고 하면 될걸."
아시즈의 제안에 투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 좀 더 해보려고."
평생 걷고 뛰고 돌팔매질하는 것 외에 신체 단련이라는 것을 해본 적 없는 투란이지만, 하람의 교육 방식이 꽤 체계적이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거기다 이곳에는 베르크 가문의 부여사들이 직접 만든 훈련 기구도 한가득이지 않은가.
그런 물건의 힘을 빌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너도 같이 해보는 건 어때?"
"나? 나는 이제 너무 늙어서...."
외관상 이십 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시즈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 * *
그로부터 삼 주간, 투란의 일과는 충실하기 그지없었다.
이른 아침 일어나서는 하람과 함께 신체 단련.
온몸의 근육을 잘근잘근 짓이긴 뒤 양질의 점심 식사로 영양을 보충하고, 오후에는 휴식 삼아 아시즈와 함께 시내로 나가 연극을 관람하거나 도서관에서-물론 오렘 시의 도서관 같은 곳은 아니었다-책을 읽었다.
그리고 해 질 무렵에는 저택에 돌아와서 메이사와 함께 마법을 훈련했는데, 그러는 와중 그녀와 꽤 가까워지게 됐다.
삼 주가 지났을 때쯤에는 서로를 친근하게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을 정도.
첫 만남만 해도 메이사가 투란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음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잘 안되나 봐요, 투란?"
"아무래도 아라비온이 아니니까요."
메이사의 놀리는 듯한 말투에 투란은 턱을 긁적이며 눈앞의 벽에 가득 새겨진 탄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의 마찰로 일으킨 전기를 상대에게 쏘는 마법, 뇌격의 흔적.
현재 그의 과제는 이를 정확히 목표에 맞추는 것이었는데, 아직도 열 번 쏘면 두세 번은 과녁 중앙이 아닌 주변에 꽂히고는 했다.
투란의 마법이 미숙해서라기보다, 원래부터 번개 마법 자체가 정확하게 명중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였다.
이를 극복하려면 번개가 날아가는 원리를 완벽히 규명해 이를 충족하거나 숙련도를 높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저로선 도와주기 어렵네요. 번개 마법을 조준한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폭풍 혈통을 타고난 그녀는 당연히 번개를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어, 오히려 시행착오를 겪는 투란에게 조언을 줄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달리던 이가 기는 이에게 걷는 법을 가르쳐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열심히 해 봐야겠죠."
깊은 한숨을 내쉬던 도중, 투란은 이제 앞으로 일주일 정도 뒤면 마법기가 완성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이곳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도.
'...뭔가, 떠나고 싶지 않은걸.'
베르크 가문에서의 생활은 투란이 태어난 이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가문의 본거지인 만큼 생활 수준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몸과 마법을 모두 단련할 수 있는 선생과 파트너, 그리고 함께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친구까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영원히 머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손님이니까.
지금이야 들킬 염려가 없다지만 진정한 정체를 평생 감출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메이사 아가씨!"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도중, 낯선 목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
어째서인지, 처음 보는 이십 대 초반의 남자가 투란을 묘하게 적개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이 남자는...?"
"네 알 바 아니야. 그보다 여긴 무슨 일이지? 당분간 요양할 테니 본가 사람들은 접근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마 아라비온 가문 소속인 것으로 보이는 남자를 대하는 메이사의 태도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적개심마저 느껴질 정도.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던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가주님께서 아가씨를 소환하셨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것이...."
남자는 투란을 흘깃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썩 물러가라는 듯이.
하지만 투란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 메이사가 날카롭게 캐물었다.
"빨리 대답해. 쓸데없는 이유면 각오해야 할 거야."
조금만 망설이면 마법을 날려버리겠다는 듯 살벌한 태도에 남자가 다급히 답했다.
그 내용은 옆에서 가만히 듣던 투란으로서도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남부에서 흑요정들이 대대적으로 발호했다고 합니다! 이미 세 개 도시가 무너졌을 정도라 원정대를 구성할 거라고...."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