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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030-040

#030. 올바른 충성심 (2)

"어르신, 니카로스 남작이 선물을 보냈습니다."

"니카로스 남작? 그 애송이 꼬마 녀석?"

한창 바쁘게 업무에 전념하고 있던 가스파르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부하 직원의 보고에 대꾸했다.

그렇지만 시선을 돌려 직원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지금 가스파르의 신경 대부분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에 쏟아지고 있었다.

부하도 알고 있다.

가스파르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이런 모습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닌 만큼, 그를 오랫동안 곁에서 모셔온 부하는 태연하게 보고를 계속했다.

"그렇습니다. 이번 시하브 토후국과 벌인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며, 선뜻 후원해주신 가스파르 님께 감사의 의미로 월광교의 귀중한 보물을 보낸다고 적혀 있군요."

"크크, 선뜻 후원? 귀중한 보물? 하여간 여전히 웃기는 소리 하나는 잘 하는 꼬마야."

여전히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반응이 제법 격렬했다.

대충 요약된 채 전달된 말만 접했는데도 그 건방진 녀석의 말투까지 생생히 들리는 기분이었으니까.

'뻔뻔한 놈.'

선뜻 후원은 무슨.

사실상 난데없이 남의 가게에 쳐들어와서 이리저리 휘젓고 사람을 쥐고 흔든 뒤 도저히 돈을 빌려주지 않고는 못 배길 상황을 만들어 놓고서는.

'게다가 귀중한 보물이라고?'

이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

시하브 토후국의 보물 창고를 털고, 적당히 그럴듯한 물건을 포장해서 대충 이쪽에 던져준 거겠지.

안 봐도 뻔하다.

그런 소국의 창고에 보물이 있으면 얼마나 있으려고.

게다가 만약 진짜로 있어도 당연히 남작 본인이 덥석 집어삼켜 챙겼겠지.

그걸 왜 남에게 줘.

나라도 그랬겠다.

'뭐, 그렇긴 하지만.'

그런 니카로스 남작의 수작을 전부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놀랍게도 그다지 불쾌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옐레나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긴 하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가스파르가 약소한 남작 따위와 얽히게 된 핵심 원인은 역시 니카로스 남작이 가스파르의 손녀, 옐레나가 앓고 있는 병세의 원인과 범인을 찾아주었기 때문이다.

그조차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수십 년 된 심복의 배신.

그런데도 니카로스 남작은 마치 마법처럼 느닷없이 나타나 모든 진실을 밝히고 사건을 해결해버렸다.

덕분에 배신자 미르코가 죽은 직후부터 손녀 옐레나는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다.

워낙 오랫동안 저주에 시달려 한동안 재활이 필요하긴 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거의 다 끝나 일상생활도 가능할 정도. 아마 곧 완치 판정을 받을 수 있겠지.

'한때는 옐레나만 낫게 해준다면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다고 빌었어.'

신앙심 따위는 진작에도 말라 비틀어진 지 오래지만, 그걸 자각하면서도 신에게 공허한 기도를 바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간절하게 말이다.

그런데 니카로스 남작은 정말로 낫게 해주었다.

치료를 해주거나 저주를 풀어준 것은 아니지만, 아예 근본적인 원인 자체를 찾아주었으니 오히려 그보다 더 도움이 되었다면 된 셈.

그러니 애초에 그런 상대에게 불쾌감을 받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뭐, 옐레나를 살려준 거랑 별개로 그 뻔뻔한 태도가 심히 건방지고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물론 가스파르는 그런 쉽지 않은 일도 거뜬히 해내는, 만만치 않은 노인이긴 하다.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게다가 가스파르가 니카로스 남작에게 미약하게나마 호의를 보이는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시하브 토후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라.'

사실 가스파르는 오늘 선물을 받기 전부터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제국 동부 최대의 정보상이니까.

처음 니카로스 남작 꼬마가 전쟁을 준비한다고, 그리고 승리를 확신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솔직히 반신반의했었다.

돈이 되지도 않을 만큼 낙후된 변방이라 많은 관심이 두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일대의 대략적인 사정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제국의 녹슨 울타리.'

바할리아 제국이라는 이름값 덕분에 그나마 아직 형태라도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 조그마한 파문이라도 한 번 제대로 일어나면 순식간에 붕괴하고도 남을 곳이다.

그나마 최전선에서 맞서 싸우던 전대 니카로스 남작, 제논 발란티스의 용맹과 활약 덕분에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듯했지만, 그조차도 결국 불행하게 전사해버렸다.

이대로 변방이 무너지면 에우스페나까지 위험한 것 아닌가. 가뜩이나 이곳도 내부적으로 완전히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는데. 나도 나중에 도망치듯 대피하느니 지금이라도 과감하게 활동 구역을 옮겨야 하나.

가스파르가 내심 그런 고민까지 하고 있을 때쯤.

그 꼬맹이.

티베리오스 발란티스가 나타났다.

'크크, 이제는 그 제논조차도 없는 한낱 남작령 따위가 복수의 꿈을 꾸다니.'

저 변방에서 복수는 사실상 정복을 의미한다.

최약체의 정복 전쟁.

대체 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포부인가.

'그런데 그 애송이가 그걸 해냈다 이거지.'

심지어 큰 피해도 없이.

압도적인 승리라는 결과와 함께.

워낙 자신만만하게 선언하길래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성과를 낼 거라고는 가스파르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제국 전체가 내부 정쟁에만 전념하고 있는 탓에 가스파르 같은 예외가 아닌 이상 아직은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있지만, 이건 결코 보잘것없는 결과가 아니다.

'중앙과 공작령의 방치 하에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던 변방의 영지가, 자신의 힘만으로 저항을 시작했다.'

과연 이 현상이 제국에 어떤 파문을 일으킬까.

예측하기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조용히 지나가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는 안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그런 이변이 계속될 경우의 이야기긴 하지.'

다음에도 또 이변이 일어날 거라는 보장은 없다.

뒤늦게 벌어진 결과만 분석해보면 적어도 이번 전쟁에서는 객관적으로 니카로스에도 승산이 있긴 했으니까.

니카로스는 영지의 명운을 걸고 전력을 준비했고.

시하브 토후국의 연합 계획은 미완성이었으며.

과감한 선전포고를 통해 처음부터 전쟁을 주도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그 누구도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전망하지는 못했다.

'오직 니카로스 남작만을 빼고 말이야.'

그냥 단순한 운인가?

경험 없고 어린 영주의 무모한 도전이 그저 운 좋게 맞아 떨어졌을 뿐인가?

의문은 많지만, 당장 낼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다.

'그건 아직 모른다.'

운과 실력.

직접 그 꼬마를 모시고 있는 니카로스 남작령의 가신 대부분은 이미 운이란 쪽으로 판단을 마친 모양이지만, 가스파르가 보기에는 아직은 판단할 근거가 부족했다.

그래, 이제 고작 이례적인 결과 한 번.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

그게 이성적인 태도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왠지 그의 직감 또한 어느새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다.

단, 니카로스의 가신단과는 반대로.

실력이라는 쪽으로.

'그야 나는 실제로 봤으니까.'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는.

항상 자신과 확신으로 가득한 그의 모습을 봤으니까.

'정말로 이 모든 게 그 녀석이 지닌 능력의 결과라면.'

이 위기조차 극복할 수 있겠지.

어느새 가스파르의 시선이 책상 위 한구석에 읽던 얇은 서류 뭉치로 떨어졌다.

- 니카로스 남작령 집사장 제노비오스 크세로스의 밀서가 에우스페나 총사령관 아폴로니아에게 전달됨.

- 밀서 내용은 미확인 상태나, 전달 직후 에우스페나 군부 긴급회의 소집 확인.

- 추가 조사 진행 중.

이것은.

정적이자 에우스페나의 집사장인 페트로스조차 아직은 알아차리지 못한 군부의 기밀.

당사자 중 누구도 알려준 적 없지만, 어느새 가스파르는 알고 있게 되는 사실.

제국 전역에 퍼진 그의 무수한 검은 손들이 마치 까마귀처럼 가져다 바치는 정보.

요컨대 가스파르라는 노인이 지닌 힘의 단편.

물론 보고서의 내용대로, 가스파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존재하는 것은 그저 추측뿐.

하지만 그 정도 추측만으로도.

모든 상황이 니카로스 남작에게 마냥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과연 니카로스 남작은 어찌 대처할까?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판단해야 이 상황 속에서 최대의 이득을 볼 수 있을까?

- 푸른이리 용병대 일부가 에우스페나 공작령과 니카로스 남작령 경계에서 의심스러운 활동을 지속 중.

연이어 이어지는 정보와 보고 속에서.

가스파르의 생각은 깊어져 갔다.

***

고민이다. 고민이야.

전쟁을 마치고 니카로스로 돌아온 뒤부터.

하루하루가 매일 고민으로 가득 차 있는 것만 같다.

'어째 영지 운영이 전투보다 더 어려운 것 같아.'

전쟁은 직관적이잖아. 목표도 명확하고.

단지 최적의 방법을 고안하는 게 문제일 뿐.

하지만 내정은 목표 설정부터가 문제다.

이게 맞는 길이지 아니면 틀린 길인지, 그것부터 수십 번은 되새겨봐야 하는 안개 속 여정처럼 느껴지거든.

'그래, 푸념은 여기까지 하자.'

이 이상 투덜거리면 추하기만 할 뿐이야.

물론 내가 이렇게 투정 부릴 정도로, 빠르게 해결할수록 좋은 숙제들이 많이 쌓여 있긴 하다.

아직도 다음 전쟁을 반대하는 가신단.

(구) 시하브 토후국 영토의 동화 문제.

부족한 행정 인력 수급 문제.

등등.

많기도 하지.

'게다가 이것들 모두가 각각 해결하기 쉽지 않은 사안들뿐이라는 점에서 더 서글퍼.'

가신단의 반대 문제는 이제 사실상 영지 내부의 정치적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정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시하브 토후국의 정벌 건은 워낙에 명분이 확고하고, 또 기사단장인 키로스 경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던 덕분에 어떻게 날치기에 가깝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이나 그런 요행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

지금은 키로스 경도 자리를 비웠고, 니카로스 전체에 들끓던 복수심이 시하브 토후국의 멸망으로 어느새 제법 가라앉았으니까.

당연히 반대 의견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지.

'계승 직후, 낮은 정권 장악력으로 인해 가신들의 발언권이 강해지는 건 거의 필연에 가까워.'

<마이트 앤 로열>에서는 이걸 아예 정형화된 수치로 표기까지 했을 정도니까 나에게도 낯선 것은 아니다.

덕분에 해결 방법도 대충 몇 개 정도 알고 있긴 하고.

'...평화로운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아서 문제지만.'

이건 역시 고민이 더 필요한 사안이다.

모든 방법에는 각각 일장일단이 있으니까.

그다음으로.

'동화시키는 일이 어려운 건 말할 필요도 없고.'

게임에서는 적당히 능력치 좋은 가신에게 임무 맡기기 버튼만 한 번 딸깍 누르면 끝이었는데, 이걸 내가 직접 하려니 보통 막막한 게 아니다.

단결과 충성.

얕은 지식을 기반으로 몇 가지 방안을 떠올리기는 했는데, 이게 맞는지 확신을 얻는 게 어렵다.

'역시 이쪽으로 날 보좌해줄 수 있는, 능력치 좋은 전문가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하지만 당장 말단 인력조차 제대로 못 구하고 있는데 뛰어난 인재 겸 전문가는 너무 언감생심이다.

아마 그냥 적당히 말단 직원 모집하는 게 뭐가 어렵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을 거다.

나도 충분히 들 수 있는 의문이라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그건 정말 이 망할 시골구석 사정을 하나도 모르니까 들 수 있는 의문이기도 하거든.'

무척이나 유감스럽게도 제국에서 행정과 사무 업무가 가능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몹시나 힘든 일이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 정도는 가볍게 다루는 인재들이 길바닥에 널려 있는 현대와 이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아마 제국의 문맹률이 대략 90%를 넘기던가.

글을 읽을 줄 아는 이가 10명 중 1명도 안 되는 셈.

요컨대 제국은 일단 문자를 읽고 쓸 줄 안다는 것만으로 지식인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월광교 쪽도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테고.

물론 제국은 신분제 사회니까 귀족의 문맹률과 평민의 문맹률은 큰 차이가 나긴 한다.

모집 대상을 귀족으로 한정하면 이렇게까지 극심한 난이도를 자랑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이런 사실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못하는 게.

'여기는 변방이라 귀족이 거의 없거든.'

보통 이런 사무 업무는 약소 귀족 가문의 차남이나 수를 다루는 데 능숙한 상인 가문의 자제, 도제 방식으로 배운 똑똑한 평민 등이 주로 담당한다.

만약 제논이 아직 멀쩡히 살아있어서, 영지를 물려받지 못했다면 나도 지금쯤 비슷한 일을 했을 수도 있고.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니카로스에는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 전부 부족하다.

'...진짜 새삼스레 거지 같은 땅이야.'

사방에 넘쳐나는 적대 세력으로도 모자라서.

인프라와 산업 기반까지 처참하게 바닥을 기다니.

초원의 거친 원주민들과 제국의 가난한 이주민들이 모여 만든, 사실상 맨땅에 세워진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

대체 이 끔찍한 영지의 바닥은 어딜까?

나도 이미 알 만큼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매번 놀라게 되는 참으로 신기한 땅이다.

'물론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나가면 아예 해결하지 못할 것도 없는 문제들이긴 한데.'

시작을 과연 어떻게 끊어야 할지.

언급한 순서대로 차근차근 문제를 해치우는 게 제일 좋긴 하지만 그게 온전히 내 뜻대로만 되는 건 아니니.

결론은 역시.

그저 고민이란 거다.

그렇게 내가 헌신적이고 선량하게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의 미래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던 중.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영주님?"

불현듯 제노비오스 집사장이 나의 집무실을 찾아왔다.

"하하, 물론이지요. 집사장님의 요청이라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심스러운 집사장의 질문에 나는 친근한 미소와 함께 선뜻 대답했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게 사적으로도 가시를 잔뜩 세울 이유가 되지는 않으니까.

나는 신사인걸.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영주님께 드리고 싶은 요청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기탄없이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집사장은 잠시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곧 결심한 듯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오늘 밤 아무도 모르게 저와 단둘이서만 만나주실 수 있으십니까?"

네?

...아니, 진짜, 아무리 제가 신사라고 해도 그건 좀.

#031. 올바른 충성심 (3)

솔직히 잠깐이지만 엄청 식겁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갑자기 조심스럽게 집무실까지 찾아와서는, 야밤에 단둘이 비밀리에 만나자고 그렇게 수상하게 요청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망측한 해석밖에 안 떠오르잖아.'

이건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다.

절대로 내가 이상한 게 아니다.

"아무래도 저도 긴장을 하여 다소 두서가 없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다행히도 망상은 어디까지나 망상이었던 모양.

집사장은 한없이 사무적이고 딱딱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나저나 그렇게까지 비밀스럽게 전할 얘기라니.

대체 무엇일까.

집사장은 마치 듣는 귀가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하려는 듯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 니카로스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저와 키로스 경, 단 둘뿐일 겁니다."

서두가 길다.

근데 확실히 흥미롭긴 하다.

두 사람 모두 명실상부한 니카로스의 최고 원로.

전대 영주가 가장 신뢰하던 두 측근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니 이건 궁금할 수밖에 없잖아.

이미 충분히 뜸을 들였던 집사장은 눈을 한 번 질끈 감고 뜨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제논 님께서 숨겨두신 아드님이 한 분 계십니다."

"네...?"

아니.

뭐라고요?

생각보다도 훨씬 충격적인 이야기에, 순간적으로 전개를 따라가지 못했다.

"...나이는 영주님보다 7살 적습니다. 저도 자세한 내막까지 전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논 님께서 마님과 사별하신 이후에 태어난 아이지요."

그렇지만 슬프게도 집사장은 그런 나의 뒤처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홀로 질주를 계속했다.

"5년 전 제논 님께서 은밀하게 저와 키로스 경만을 부른 뒤 알려주셨습니다. 외부에 공식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아이다. 내가 직접 돌보는 것도 무리다. 그러니까 너희에게 맡기겠다.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만 부탁하마, 라고."

"아니, 아니. 잠깐 정리 좀 해봅시다."

그러니까.

나에게 마누엘 말고 형제가 하나 더 있다?

나보다 7살 어린 동생이 있다?

"그 전대 영주, 그러니까, 지금 아버지의 숨겨진 혼외자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혼외자.

이쪽 세상의 감성대로 표현하면, 사생아.

그러니까 나는 기억도 안 나는 어머니가 죽은 뒤에 제논이 몰래 여자를 만나다가 아이까지 생겼고, 그걸 지금까지 몰래 숨기고 있었다는 거잖아.

'충격적이네.'

딱히 그런 지조나 이성 관계 같은 문제에 있어 제논에게 엄청난 믿음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냥 그 무뚝뚝한 돌덩이 같은 아저씨가 그런 것에 흥미 가질 거라고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거든.

게다가 나보다 7살 적으면 벌써 14살이다.

원래 세계로 치면 중학생 정도.

그런데 5년 전에야 제논이 언급한 걸 보면 그동안은 어머니 쪽에서 혼자 양육하고 있었다는 건가?

그런데 그쪽도 갑자기 병사하거나 해서 결국 제논이 직접 신경 써야 하는 처지가 된 건가?

근데 홀아비 혼자 애를 키울 자신이 없으니까 그냥 집사장이랑 키로스 경에게 홀라당 맡긴 건가?

이것 참.

알고 보니 정말 쓰레기네요, 제논 씨.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어.

"허."

"너무나 늦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즉위하신 영주님께 이러한 사실까지 바로 알려드리면 혼란만 더 가중될 것 같았기에 보고를 미뤘습니다."

"아니, 그건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그래, 확실히 집사장 말이 옳다.

난데없이 영주가 되어 도적 떼랑 목숨을 건 혈투나 벌이고 있던 시절에 저런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면 괜히 불필요한 잡념만 늘어났겠지.

"혹시 마누엘 형님에게도 이 이야기를 전달했습니까?"

"아니요. 마누엘 전 영주님께는 원정 이후에 전하려고 했지만, 그만...."

집사장 아저씨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래, 얘기할 새도 없이 그만 원정 중 전사했다.

이거겠지.

'하, 이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제논과 그렇게 큰 친밀감이 없던 나도 이 정도로 충격을 받은 이야기다.

마누엘이나 내가 빙의하기 전의 원래 티베리오스가 이 사실을 들었다면 훨씬 더 큰 충격에 빠졌을 테지.

어쨌든 이건 집사장 아저씨가 제대로 판단한 게 맞아.

"그럼 오늘 저에게 이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은 역시."

"그렇습니다. 혹시나 영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그 아이와 직접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제가 이야기를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밤에 단둘이 만날 수 있냐고 물어본 거구나.

이런 혼외자 건에 대한 소문이 퍼져서 좋을 것이 없으니, 남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말이야.

'이건 조금 고민이네.'

여태껏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배다른 동생의 존재.

사실상 말이 이복동생이지.

솔직한 느낌을 말하자면 완전히 남이나 다름없다.

'제논 본인도 그다지 나의 아버지라는 실감이 안 들었는데, 하물며 그가 숨겨왔던 혼외자 동생이라니.'

이 상황에서 어떻게 걔한테 정을 붙여.

절대로 내가 매정한 게 아니다.

'...게다가 이게 단순히 가족 간의 끈끈한 우애, 이런 아름다운 것만 지향할 수 있는 사안은 또 아니거든.'

나는 잠시 눈앞 집사장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다소 긴장된 것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사무적인 모습.

그래, 동생이란 것은, 제논의 또 다른 자식이란 것은.

'내가 지금 앉아있는 이 니카로스의 주인 자리에 대한 지분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의미하니까.'

담백하고 객관적으로 보면 이것도 사실이지.

물론 혼외자라는, 사생아라는 한계는 분명 존재한다.

이 보수적인 세상은, 종교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매우 가혹한 곳이니까. 일반적으로는 자기 몫도 제대로 상속받지도 못하지.

'하지만 여기는 언제 영주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최전선이야.'

제논이 그렇게 죽었고, 마누엘도 그렇게 죽었다.

웬만하면 현재 발란티스 가문의 유일하게 남은 적자인 나의 정통성이 흔들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여기는 그 웬만하지 않은 상황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곳이잖아?

'만약 내가 머지않아 불우하게 죽어버린다면, 남은 가신들이 그나마 제논의 피를 잇기는 한 그 사생아 동생을 영주로 추대하는 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거야.'

조금 상상력을 키워보면.

아예 더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도.

위험한 행보와 정책만을 고수하는 풋내기 영주.

이대로 가다간 애송이 하나 때문에 영지가 멸망.

그러니 참으로 슬프지만, 오직 순수하게 영지를 위해.

'가신들이 영주를 쓱싹.'

무척이나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나는 이게 피해망상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마이트 앤 로열>은 이런 게임이니까.

이 세상의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거든.

이 세상의 모든 군신 관계는 기본적으로 그저 서로의 이득을 위한 계약 관계일 뿐.

하늘 같이 섬겨야 할 주군에 대한 대쪽 같은 충성심.

이런 것은 정말로 찾아보기 힘들다.

'하물며 황제마저도 개처럼 죽어 나가는 시대인걸.'

당연히 나도 게임 내내 숱하게 배신당하고 죽었다.

게임의 특성상 각 NPC 모두 고유한 성격과 야망이 있는 만큼 어이없고 비합리적인 않은 배신도 많았고.

'그런 곳에서 사생아를 허수아비 영주로 추대해서 마음껏 조종한다는 시나리오 정도면 충분히 합리적이지.'

그러니까 고민이란 거다.

'아직 내가 영지를 완전히 장악하지도 못했는데, 지금 그 동생이라는 아이를 만나는 게 나에게 유리할까?'

하필이면 이 소식을 전한 게 지금 나와 정치적으로 대립 중인 집사장인 것도 역시 신경 쓰이고 말이야.

역시 굳이 그쪽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게 더 좋은 선택은 아닐까.

어쩌면.

나도 조금 더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게 옳을 수 있고.

"...."

그렇게 차갑고도 긴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아니, 실제로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으나,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길었다.

그만큼 고민의 무게가 무거웠으니까.

"...."

그리고 그 침묵의 시간 동안, 집사장 또한 조금도 나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아 주었다,

덕분에 마침내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좋습니다. 오늘 밤 직접 만나러 가지요."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안티모스의 푸른이리 용병대가 보낸, 책상 위 서안으로 힐끔 시선을 돌렸다.

***

밤이 되고.

나는 집사장이 미리 일러준 접선 장소로 향했다.

다행히 집사장 아저씨 또한 이미 도착한 채 나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오셨군요. 영주님 이쪽입니다. 사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성 바깥의 마을로 가야 하기에 30분 정도는 걸어야 합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집사장은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나는 얌전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니카로스는 워낙 개발이 안 된 시골이라 밤에는 조명이 없어서 발조심 해야 해. 안 그러면 다쳐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길이 험하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렇지만 제노비오스 집사장은 확실히 한두 번 왕복한 솜씨가 아닌 듯, 어둠 속에서도 능숙하게 안내했다.

다만 이동하는 동안 딱히 잡담할 생각은 없는 듯, 꼭 필요한 말을 제외하고는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이동에만 집중했다.

나는 잠시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뒤, 집사장을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아이는 그동안 집사장님과 키로스 경 두 분께서 직접 돌보신 건가요?"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상세하게 대답했다.

"음, 직접 돌봤다는 말에는 조금 어폐가 있군요. 아이는 마을에서 보모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희는 주기적으로 집에 방문해 어떻게 생활하는지 살펴본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사실 키로스 경은 바깥 업무가 잦아 대부분 제가 찾아갔지요."

하긴.

그 두 아저씨가 사이좋게 한 집에서 직접 아이를 키우는 장면은 잘 상상이 안 가긴 해.

"그리고 아이가 처음부터 워낙 조숙하기도 했습니다. 제논 님께서 우리에게 맡길 때부터 이미 어지간한 생활은 스스로 해내려고 하더군요."

어린 시절부터 눈치를 많이 보고 자란 아이는 금방 어른스러워진다는 이야기도 언뜻 들어본 것 같긴 한데.

그 아이도 그런 경우인가.

천천히 그 아이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봤다.

생긴 건 제논과 닮았을까.

그렇다면 귀여움과는 좀 거리가 있을 텐데.

성격은 어떨까.

제논과 마누엘 모두 타고난 기질이 세긴 했지만, 그 아이는 성장 환경이 너무 다르니까 추측이 쉽지가 않다.

'그리고 재능은 어떨까?'

제논에게 사생아가 있었다는 설정 같은 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그러니까 그 아이도 원작 게임으로 치면 무작위 생성 캐릭터의 일종이라는 것이겠지.

시스템적으로 무작위 생성 캐릭터의 존재 목적 자체가 플레이어에게 예측하지 못할 변수를 주기 위함이므로, 사생아로 설정되는 일도 그렇게 극히 드문 것은 아니다.

'영주의 숨겨진 자식이라는 비밀만큼 영지의 정세를 뒤흔들 수 있는 소재도 없으니.'

그리고 무작위 생성 캐릭터라고 해서 꼭 성능적으로 고정 네임드 캐릭터에게 밀리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핵심은 '무작위'지, '엑스트라'가 아니거든.

'게임을 많이 하다 보면 극히 드물게 무작위 생성 캐릭터가 대제국을 건설하는 상황도 볼 수 있을 정도야.'

따라서 궁금한 거다.

그 아이가 능력과 잠재력이.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아이의 사생아 동생이라는 입지지만, 어째 재능 쪽에도 관심이 많이 가네.

'워낙 영지에 인력이 없어서 그런가.'

어쨌든 그런 식으로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까지 도착했다.

"이 집입니다."

성 아랫마을 가장 외곽에 있는 허름한 집 한 채.

외형만 보면 영주의 자식이 사는 집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다른 근처 평민들의 집과 비슷한 정도.

아니, 그보다도 조금 더 열악한 환경일지도.

'이런 곳에 사는 건가.'

내가 천천히 둘러보는 사이, 집사장은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안에 있느냐? 나다, 제노비오스. 말했던 대로 영주님을 모셔왔단다."

딱딱하지만 자연스러움이 동반되는 어조.

그런 집사장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곧 문이 열렸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주님. 이런 누추한 곳까지 발걸음하시게 만들어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이마를 가릴 정도로 길게 내려오는, 새까만 흑발.

그 머리칼 사이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내가 그랬고, 제논이 그랬고. 마누엘 또한 그랬듯.

발란티스 가문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외형의 소년이 문을 열고 우리를 반겼다.

그래, 너구나.

내 동생.

안녕? 만나서 반가워.

#032. 올바른 충성심 (4)

어린 소년은, 어린이답지 않게 무척 차분하고 정중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주님. 레온이라고 합니다."

레온.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졌다.

처음 보는 사이지만.

피붙이로서 느낄 수 있는 본능적인 정, 이끌림....

'역시 그런 건 전혀 없네.'

하긴.

그런 게 있었다면 제논과 마누엘한테 진작 느꼈겠지.

그러나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는 것이 존재하긴 했다.

확실히 생긴 게 나와 닮았다.

'정확히는 나와 이 아이 모두 제논을 닮은 거겠지만.'

다른 색은 일절 보이지 않는 새까만 흑발.

맹금류를 떠올리게 하는 금안(金眼).

날카로운 눈매.

그 모든 점이 제논과 마누엘.

그리고 거울 속의 내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이것 참.

'어디 밖에 데리고 나가서 생판 관련 없는 남이라고 거짓말하는 건 무리겠는데.'

이 집안은 무슨 유전자가 이렇게 강해?

"...영주님?"

너무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집사장이 조심스레 나를 불렀고, 나는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래, 할 일을 해야지.

단순하게 호기심 채우고 구경만 하려고 내가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건 아니니까.

"그래, 반갑다. 내가 니카로스의 영주,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이어서 말했다.

일단은 간단한 질문부터 시작하자고.

"그래, 제노비오스 집사장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네가 나의 아버지... 선대 영주님의 피를 이었다고."

너도 알고 있었느냐?

최대한 감정을 빼고.

마치 홀로 내뱉는 중얼거림처럼 나는 물었다.

그리고 아이는 내 질문을 천천히 잠시 곱씹더니.

"네, 저도 처음 제노비오스 집사장과 만난 날 그 사실을 들었습니다."

곧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대답했다.

'이런 점도 역시 어린이답지가 않네.'

그건 그렇고 저 대답은 조금 의외다.

이 아이도 집사장을 만난 다음에야 자기가 영주의 핏줄인 걸 알았다니.

그럼 그 전까지는 어머니가 알려주지 않았던 건가.

아니면 외압에 의해 알려주지 못한 것일 수도.

어쨌거나 덕분에 대화의 물꼬가 트였으니, 나도 더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이름이 레온이라고 했지. 성씨는 있느냐?"

"어머니께서 평민이었기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무엇을 하고 지내지?"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합니다."

"함께 노는 친구는 있고?"

"없습니다."

"여기 살면서 불편한 점은 없느냐?"

"그것도 없습니다."

음, 이 미친 듯이 칼 같은 단답형 대답의 향연.

마치 성벽을 칼로 쑤시는 기분이다.

'이가 쥐뿔도 박히지 않는 기분이란 뜻이지.'

슬프게도 나랑 친해질 생각은 전혀 없는 건가.

먼저 서먹함부터 깨고 대화를 진행하려고 했는데, 대답만 고분고분하지 막상 따지고 보면 협조적 면모는 조금도 없다.

참 호흡 안 맞춰 주네.

괜히 친구 하나 없는 게 아니야.

그래, 그럼 이런 질문은 어떨까?

"그러면 꿈이나 장래에 이루고 싶은 목표 같은 것은 있느냐?"

이 질문에는 레온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뭔가 통한다는 기쁨도 잠시.

아쉽게도 그 망설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없습니다."

과연.

있는데 숨기느라 멈칫한 건지, 아니면 진짜 없어서 멈칫한 건지.

'하지만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야.'

어차피 문답이란 그저 구실에 불과하고, 진짜 보고 싶은 것은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저 아이의 태도였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한 번 더 숙고한 뒤, 화제를 바꿨다.

"사실 나도 너의 처우에 대해 고민이 많다."

일단은 솔직한 나의 심정을 먼저 밝히면서.

"비록 어머니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같은 핏줄을 타고난 형제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

마치 일상적인 안부를 건네는 것처럼 평온한 어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레온의 두 눈이 충격으로 부릅떠졌다.

확실히 이 세상의 상식대로라면 다소 충격적인 발언이긴 하지.

'적자이자 후계자가 사생아 동생에게 일단 내 형제는 맞다, 그렇게 대놓고 인정한 셈이니까.'

물론 나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

나처럼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이 세상 사람들처럼 출신 따위로 인간을 차별할 리가 없잖아?

아예 별개의 실리가 있다면 또 몰라.

"하지만 나도 어디까지나 그 사실은 머리로 이해할 뿐이야. 진정으로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조금 갑작스러워."

"...이해합니다, 영주님."

이해라.

"그렇다면 고맙군."

이해해준다면야 더 거리낌 없이 물어볼 수 있겠어.

나는 절대로 저 아이가 잘못 들을 수 없도록 아주 명확한 어조로 질문했다.

"그런 의미에서 너에게 묻지."

혹시 돌아가신 아버지 제논이나.

니카로스라는 영지 자체를 미워한 적은 없느냐?

"여, 영주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지금까지 등 뒤에서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던 집사장이 경악했다.

하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놀랄 만한 질문이란 건 저도 이해하지만, 아저씨는 잠시 좀 빠져 계시면 좋겠어요.'

이건 그만큼 중요한 질문이니까.

"...."

그리고 무엇보다.

레온 역시 내심 충격을 받았으면서도, 지금 이곳 자리의 누구보다 침착하게 답을 고르고 있으니까.

이 무대의 주인공도 아직 조용한데, 아저씨가 벌써 판을 엎어버리면 안 되지요.

나는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하는 레온을 주시했다.

기대하고 있는 게 있으니까.

"...저는."

그래, 바로 저 눈 말이야.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저를 거둬주시고 이렇게 살 공간까지 마련해주신 분이 바로 제논 님이고 이 니카로스라는 영지인데. 제가 어찌 미워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는 이 집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선명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계속 묘하다고 생각은 했어.'

지나치게 닮았다.

제논, 전사한 전대 영주이자 나의 아버지와.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벌써 여물어 가기 시작하는 그 건장하고 타고난 체격도.

잔뜩 긴장한 것이 여실히 티가 나면서도 여태껏 말 한 번 더듬지 않는 그 담대함도.

그리고 무엇보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상대를 철저히 관찰하고 살아나갈 방도를 구하는 저 눈동자.'

그 차가운 눈빛 속에서 이글거리는 열망까지.

모든 것이 내가 기억하는 제논의 모습과 판박이다.

첫 전쟁에서.

심장을 누르며 나를 응시한 제논의 그 눈빛 말이야.

위화감의 정체를 이제야 알겠다.

'생판 남인 나야 당연히 말할 것도 없고, 사실 감정적인 면모가 있던 마누엘 역시 제논을 완전히 빼다 박았다고 표현하기에는 어폐가 조금 있었지.'

하지만 이 레온이라는 아이는 다르다.

처음에는 그냥 한 핏줄이라 생긴 게 닮았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잠깐 대화를 해보니까 그 정도 수준이 아니란 걸 알겠다. 거기서 나온 위화감이다.

'그냥 독보적일 정도로 제논을 빼다 박았어.'

한 마디로 표현해서.

리틀 제논.

물론 그렇게 표현하면 조금 징그럽긴 하지만, 역시 달리 이만한 표현이 없다.

얼굴 몇 달 보지도 못한 나까지 이렇게 선명하게 그 양반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을 정도니까.

그렇기에 나는 마음을 정했다.

아이러니하지만, 게임 속 세계에 떨어진 뒤로 캐릭터의 상태창 같은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 쓸데없이 현실적인 세상은 나에게 그런 플레이어의 특권 같은 걸 하나도 허용하지 않았으니까.

따라서 나에게 처음 본 사람의 능력과 잠재력을 파악하는 능력 같은 건 전혀 없다. 그저 달달 외운 고정 네임드 캐릭터의 능력치만 기억하고 활용할 뿐이지.

그렇기에 나는 이 아이의 잠재력 또한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런 숫자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눈을 볼 수 있는 능력치만큼이나 믿음직한 확신을 얻었으니까.

적어도 제논의 독기와 투쟁심까지 제대로 물려받았다면, 타고 난 자질과 관계없이 범상한 경지 정도는 넘어설 수 있을 테니까.

그 성정 또한 일종의 재능이니까.

"그래, 미워하는 마음 따위는 한 번도 품어본 적이 없다고?"

좋아. 그렇게 말했다 이거지?

본심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최소한 너의 입으로 직접 그렇게 밝혔다 이거지?

그렇다면 더 뜸 들일 이유가 없지.

나는 마침내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나를 섬겨볼 생각이 있느냐?"

"...네, 네?"

처음으로 레온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모습을 봤다.

역시 표정에 생동감이 있어야 대화가 재밌지.

***

나와 집사장은 레온의 집을 떠났다.

아쉽게도 답변을 바로 듣지는 못했다.

나의 친절한 제안에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던 레온은 결국 정중한 태도로 고민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거든.

별수 없지.

확실히 취업은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하는 중대 사안이니까. 그런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아마 저 아이의 향후 교육을 생각하면 키로스 경과 상담하는 과정도 필요할 듯한데, 지금 그 영감님이 영지에 안 계시니 말이야.

나도 더 느긋하게 생각하면 여러모로 좋지.

그렇게 오늘의 오붓했던 형제간 대화를 회상하던 중, 앞장서서 나를 안내하던 집사장이 문득 입을 열었다.

"...솔직히 조금 의외였습니다."

"그런가요?"

그래도 한 번 지나온 길이라고, 올 때보다 확실히 걸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한결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만약 니카로스의 가신 모두가 그 대화를 들었다면 다들 똑같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영주님께서 쉽지 않은 결정을 하였다고."

"하하. 저렇게 부끄러운 대화를 모두에게 들려들 수는 없죠."

나는 그저 웃으며 무마했다.

그래, 집사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나도 대충 안다.

저렇게 사생아 출신 동생을 선뜻 거둬들인다는 게 이 세계 기준으로 그렇게 일반적인 선택은 아니지.

단순히 여기 사는 사람들이 전부 무자비한 차별주의자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원래 관습이란 것도 처음에는 다 실리가 있기에 만들어진 것이니까.'

적자가 사생아를 차별하는 실질적 이유야 간단하다.

위협이 되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아버지가 같다는 이유로 내 정당한 재산의 절반을 가져간다고 하면 대체 누가 반기겠어?

사실 사생아만 차별한다고 하는 것도 애매하다.

가문에 재산이 제법 있다면, 그냥 피를 나눈 모두가 적이고 경쟁자인 셈이니까. 친형제고 뭐고 할 것 없이.

사생아가 그 와중에도 두드러진 것은 그냥 얘들만 대놓고 차별해도 될 이유가 있기 때문일 뿐.

'사실 나도 이렇게 남 일처럼 말할 처지는 아니긴 해.'

아무리 약소한 남작령이라지만, 영지라는 게 어디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일단은 사생아 한 명 나타났다고 내 정당한 계승 자체에 잡음이 생기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이 변방에서는 언제든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레온이 절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일방적인 무시부터 시작해서, 그 아이와 직접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다양한 '결말'들을 고려했었다.

집사장이 쉽지 않은 결정이라고 한 것도 이 뜻이겠지.

나도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음에도 받아들였다.

이건 절대 내가 겁 없는 얼간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냥 내가 얻게 될 이득과 위험을 잘 고려해서 계산했을 뿐이지.'

이 변방은 만성적인 인재 부족에 시달리는 곳이다.

제논과 마누엘이 죽은 뒤로는 더더욱 그렇지.

그런데 갑자기 싹수 좋아 보이는 유망주가 나타났네?

내 영지로 꼬드길 명분도 확실하네?

'이걸 어떻게 참아?'

물론 이제 겨우 14살인 어린이니까 당장 전력이 되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이 약소 영지로 살아남는 일이 몇 년 바짝 노력한다고 완수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길게 봐야지. 아주 길게.'

그러니까 유망주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는 거다.

그래, 위험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애초에 내가 택한 이 길 자체가 위험한걸.

'따지고 보면 전쟁을 벌이는 거랑 똑같은 거야.'

위험하다는 것은 안다.

까딱하다가는 나를 파멸로 이끈다.

하지만 성공하면 얻게 될 이득이 무척 크다.

두렵다고 가만히 있다가는 말라 죽을 뿐이다.

그렇지.

다를 게 없어.

어차피 이 세상에서 예상치 못한 사태 따위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건 내가 또 엄청 질리게 잘 알고 있지.

그러니까 일단은 인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저 아이가 역심을 품는다면, 그건 나의 운이 없었던 것.

만약 저 아이가 실제로 일으킨 반역을 막지 못한다면, 그건 나의 실력이 없었던 것.

설령 반역을 저지른다고 해도, 그 전까지 인재를 유용하게 활용하면 최소한 손해 보는 건 아니지 않을까?

'고된 길을 건너 살아남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사고방식도 필요한 법.'

그래도 이왕이면.

괜한 반역 따위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긴 하다.

'영혼은 그냥 남남이라지만, 그래도 같은 몸뚱이의 핏줄을 내 손으로 치우면 마음이 편치 않을 테니까.'

나도 정이 많은 사람이다.

게다가 유능한 인재가 되어 나와 영지를 위해서 오래도록 봉사해주면 더 좋잖아.

어쨌든 결론은 그거다.

나는 그저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라는 것.

물론 저 아이가 저만한 자질을 보이지 못했다거나, 주제도 모르고 설칠 기색을 보였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다 무의미한 가정일 뿐이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내가 집사장에게 물었다.

"사실 저도 집사장님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아무래도 최근 우리의 사이가 그렇게 완만하지는 않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까지 정성스럽게 비밀을 밝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사실 처음부터 의문이었다.

말했다시피 레온은 내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고, 그 레온을 가장 잘 써먹을 수 있는 게 바로 집사장이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짓만 하는 어린 영주.

영주와 정치적으로 대립 중인 집사장.

집사장과 기사단장만 알고 있는 사생아의 존재.

영지를 비운 기사단장.

그림이 얼마나 깔끔해?

설령 실제로 무슨 짓을 저지르지는 않더라도, 최후의 저항을 위한 수단으로써 최대한 숨겨볼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친절히 공개해주다니 솔직히 상당히 의외였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일전에 이미 키로스 경과 시하브 토후국 정벌이 끝나는 대로 영주님께 알려드리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음, 이미 약속을 했다면 확실히 애매할 수 있지.

하지만 지금 그 키로스 경이 영지에 없고, 어차피 상황은 항상 바뀌는 만큼 아직 영지의 안정이 덜 됐다는 핑계로 더 숨길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내가 계승식도 하지 않았으니까 핑계도 매우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고.

다행히도 집사장은 곧 나의 남은 의문조차 해소해주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언제나 그저 니카로스의 안위만을 바랄 뿐입니다. 고작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영지에 해가 될 선택을 하지는 않습니다."

집사장은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만큼은 한 점 흐림 없이 또렷하고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니카로스의 안위만을 바랄 뿐이라.'

그래, 저 아저씨도 확실히 진심이구나.

그 정도는 들으면 알 수 있다.

하긴.

돌이켜 보면 저 아저씨는 언제나 그랬다.

그저 나와 지향하는 바가 달랐을 뿐이고.

'애석하게도 내가 맞고 저 아저씨가 틀렸을 뿐이지.'

저 충성심이 날 돕는 데 사용되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따라서 나는 그런 의례적인 대답밖에 하지 못했다.

"집사장님의 노고에는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 뒤로 나는 그저 묵묵히 집사장의 등만을 바라보며 걸었다.

그리고 이튿날.

집사장은 구속된 채 알현실로 끌려 들어왔다.

나는 영주의 자리에 앉아 그런 그를 내려다보았다.

#033. 올바른 충성심 (5)

그 날.

집사장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골치가 아프군.'

불구대천의 원수, 시하브 토후국을 정벌하고 그 땅을 정복한 것은 분명 기쁜 일이다.

집사장도 그 사실을 부정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일이 너무 늘었다.

기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늘어난 일을 떠맡아야 하는 장본인으로서 한숨이 조금씩 새어 나오는 것만큼은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당장은 아슬아슬하게 수습할 수 있겠어.'

원래도 행정적인 역량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니카로스 남작령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기존의 영토보다 더 거대한 땅을 정복해서 관리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영지가 제대로 굴러간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 집사장은 지금 그 신기할 일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차라리 이게 몇몇 개인의 노력에 좌우되는 일이라면 마음이라도 편하지. 구조적으로 영지 자체의 역량이 부족한 게 원인이다 보니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키로스가 점령지에 남아줘서 다행이야.'

행정 업무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기사 출신이지만 오랜 세월 쌓은 경험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키로스 경이다.

집사장과 키로스 경 이외에는 이렇다 할 인력이 없었던 니카로스 설립 초기, 업무 구분도 없이 닥치는 대로 할 수 있는 일부터 처리했던 시절도 있었으니 사실 아예 문외한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하지만 여기까지가 한계다.

어떻게든 경험과 요령을 쥐어 짜내서 간신히 현상 유지까지는 가능하게 했지만, 이 이상은 정말로 무리다.

'그런데도 영주님께서는 또 다른 정복을 준비하고 계시니....'

당장 점령한 지역에서 새로운 제국 동화 정책을 펼칠 인력은 또 어떻게 마련할지도 막막한데, 이 상황에서 관리해야 할 땅을 더 늘리겠다니.

과연 승리할 확률이 얼마나 될지 그것도 분명 우려스럽지만, 사실 솔직한 심정을 밝히자면 이기도 난 뒤의 상황도 만만치 않게 두렵다.

'그래도 이미 점령한 땅을 버릴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해내야지.'

그 아이라도 불러야 하나.

집사장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가 곧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직 공부도 덜된 아이를 부를 수는 없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어린 도련님이었던 영주님의 성장과 성공.

모두가 그 사실에 기뻐할 때 자신만큼은 순수하게 그 기쁨을 즐길 수 없다는 점이 슬프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바로 그의 천성인데.

그렇게 집사장은 또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집사장님.... 아니, 제노비오스 크세로스."

완전무장한 한 무리의 기사들이 집무실을 급습했다.

"뭐, 뭐냐! 너희는!"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기사들을 보며 집사장은 화들짝 놀라며 그렇게 되물었다.

'뭐지? 적인가? 아니, 분명 우리 니카로스의 기사들이야. 그런데 어째서 내 집무실에 이렇게!'

니카로스 남작령의 자랑, 검은 매의 기사단.

무장은 낯익지만, 어째 각 개인의 면면은 생소하다.

자세히 보니, 집무실을 채운 기사 대부분이 원로인 집사장과는 그다지 교류한 적 없는 젊은 신인이었다.

낯선 환경에 반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집사장은 그 젊은 기사 무리 사이에 그나마 아는 얼굴이 한 명 있다는 걸 발견하고 반색하며 그를 불렀다.

"아, 아르센! 자네 아르센 아닌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설명을 해주게! 이 무슨 경우 없는...!"

아르센.

검은 매의 기사단 중에서도 드물게 정식 기사, 네오파이트의 지위를 인정받은 젊은 단원.

기사단장 키로스가 제법 괜찮은 자질을 가진 재목이라고 소개까지 따로 해준, 재능 있는 유망주.

그 능력을 인정받아 얼마 전 영주님의 에우스페나 방문 때도 호위 역할을 맡은 인재다. 집사장 제노비오스도 개인적으로 몇 번 만나 격려를 해준 적이 있다.

아예 안면 없는 관계도 아니니 지금의 상황 설명 정도는 해줄 터. 집사장 제노비오스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기대하며 아르센을 바라봤다.

"...조용히 하시오, 제노비오스. 당신은 지금 내통 혐의를 받고 있소."

그렇지만 그런 집사장의 기대는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아르센의 대꾸에, 집사장은 잠시 모든 생각을 멈춘 채 말을 잃었다.

"뭐? 내통...?"

내통.

외부의 조직과 남몰래 관계를 맺고 연락하는 것.

사실상, 배신과도 다름이 없는 그런 행위.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내통하다니, 내가 니카로스를 배신했다니! 대체 누가 그런 음해를 한 것이야!"

순간 집사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니카로스에 대한 충성심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자신이다. 그런데 내통이라니.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분명 누군가의 모함이다!

그렇기에 집사장은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던 집사장은, 이어지는 더 싸늘한 대답에 그만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혐의를 제기한 것은 바로 영주님이오."

"뭐...?"

마치 전원이 끊긴 기계처럼.

집사장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러나 기사들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그들은 집사장을 결코 기다려 주지 않았다.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순순히 따라오겠소? 아니면 묶여서 끌려가시겠소?"

"영주님께서, 내가 내통했다는 혐의를...?"

"...안 되겠군. 묶어라."

기사들의 살벌한 재촉조차 제대로 듣지 못할 만큼 완전히 넋이 나간 집사장.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아르센이 동료들에게 턱짓했다.

그렇게 집사장은 사슬에 묶여 알현실로 끌려갔다.

***

알현실 가장 높고 깊은 곳에 마련된 나의 자리.

영주의 의자.

사실 영주가 된 뒤 벌써 몇 번이고 실제로 앉아 봤던 자리이기도 하고 <마운트 앤 로열>을 할 당시에도 3D 그래픽으로 수없이 접했던 공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매번 앉을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 세상이 그저 게임이던 시절의 나는 그저 모니터 너머의 한 명의 관객이었을 뿐이니까.'

생동감과 체감이랄 게 전혀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그래, 시야가 다르고 시점이 다르다.

의자에 앉아 천천히 알현실을 살피면, 자연스레 이 공간 속 모든 것이 낮게만 보인다.

바닥도, 사물도.

그리고 인간까지도.

그렇게 멍하니 이 시야에 익숙해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문득 깨닫게 되고 마는 것이다.

'아, 나는 명실상부한 이곳의 주인이자 지배자구나.'

비록 이 영지가 한낱 약소한 남작령에 불과하다고 해도, 이런 본질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오늘만 해도 그렇다.

나의 긴급한 소집에 이곳까지 불려온 가신단은 불안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평소라면 자기들끼리 이러쿵저러쿵 쑥덕거리며 이 방안에 커다란 웅성거림을 잔뜩 만들었겠지만, 오늘은 그렇지도 않다.

존재하는 것은 그저 위태로운 침묵뿐.

'이 양반들도 다 눈치를 챈 거지.'

오늘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그러게.

왜 이렇게까지 내 말을 듣지 않아 주었을까.

이렇게까지 선을 넘어버리면 나도 상처를 받고 말아.

그렇게 영겁과도 침묵이 시간이 조금 흐르고.

마침내 오늘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영주님! 이건 오해입니다! 저는 결코...!"

알현실의 문이 열리기 전부터 저 멀리서 울려 퍼지는 절박한 목소리.

우리의 친애하는 원로.

제노비오스 크세로스 집사장이다.

"영주님, 그를 대령했습니다."

문이 벌컥 열리고 니카로스의 젊은 기사들이 집사장을 거칠게 끌어당겨 알현실 중앙에 무릎 꿇렸다. 집사장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유감스럽게도 어린 친구들의 완력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

그래,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지금부터 아주 조심스럽게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잠시 묶여 있는 집사장을 말없이 내려다보며 살폈고, 그리고 집사장은 아직도 그저 혼란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살폈다.

'...그래, 눈높이는 딱 적당하네.'

지금부터 내가 진행할 일을 고려하면 지금은 이 눈높이가 제일 적합하다.

큰일이야. 벌써 이런 거에 익숙해져 좋을 건 없는데.

괜히 허파에 바람만 찰 테고.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내려갈 수는 없고, 할 일은 해야 하니까.

가신단의 불온한 침묵만이 가득한 알현실에서.

나는 입을 열었다.

"솔직히, 무척이나 실망이 큽니다, 집사장님."

"...저는 억울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긋나긋한 어조로 조용히 책망하자, 자연스레 집사장의 대답 또한 한결 차분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말 속에 가득 담긴 분통함만은 숨길 수 없었다.

'일단은 시치미를 떼겠다 이건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나갈 수밖에.

"그렇다면 이 서신은 무엇입니까?"

나는 오른손을 들어 몇 장 분량의 고급 편지지를 꺼내 올렸다.

안이 이미 빼곡한 글씨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서신을.

"그, 그건! 그걸 어떻게 영주님께서...!"

집사장도 이것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봤는지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그래, 이건 편지다.

정확히는 우리의 집사장께서, 에우스페나의 총사령관 아폴로니아에게 보낸 밀서.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긴 했지.'

가신단의 극렬한 반대에 맞부딪히는 그런 정책을 고수할 때부터 예상했다. 원작을 수십 수백 번 플레이했으니 당연히 예상하고 고려할 수밖에 없었지.

'자기가 침몰하는 배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살고자 하는 의지를 어떻게 통제하겠어.'

그렇기에 처음부터 대비 또한 하고 있었다.

아직 부족한 정보력이지만, 그래도 달달 최대한 긁어모아 인근 에우스페나의 동태를 살폈지.

그렇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빠르게.

심지어 다름 아닌 집사장 아저씨가 움직일 줄이야.

'이건 나라도 조금 충격이네.'

예상과 마음의 상처는 별개니까.

"...영주님께서 어찌하여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인지는 저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전부 오해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꺼내자, 집사장이 전략을 바꿨는지 이번에는 그저 오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글쎄. 오해라.'

어쩌면 정말로 그럴 수도 있겠지.

나는 천천히 밀서의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내려 갔다.

내용의 절반 이상은 사실 현재 니카로스의 위기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 영지의 역량이 한계에 달함.

- 새로 즉위한 영주는 무리한 확장 정책만을 고수.

- 이대로 가다가는 니카로스 남작령에는 파멸뿐.

대충 그렇게 요약이 되는, 구구절절한 사정.

'사실 진짜 중요한 건 결론이거든.'

이렇게 잔뜩 하소연한 뒤, 그래서 결과적으로 집사장은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바로 그 결론.

- 따라서 현재 니카로스 남작령에는 지원이 필요함.

- 부디 신성한 봉신의 계약을 준수해주길 바람.

- 최악의 경우 군사적 지원 또한 고려해주길.

요컨대 이것.

'이것 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밌는 표현이 정말 많이도 담겨있어.'

집사장 아저씨, 작가 해도 되겠어요.

니카로스 남작령을 향한 지원.

이래저래 표현은 애매하지만, 사실 그냥 까놓고 말해서 우리를 향한 에우스페나의 개입이나 다름없다.

그래, 확실히 명분은 있다.

편지에도 언급된 '그 신성한 봉신의 계약'. 우리가 너희 부하가 되어서 주군으로 모시니 너희는 유사시에 우리를 지켜줘라, 라는 그 '보호비 계약'.

일반적으로는 진작에 도움의 손길을 주고도 남았겠지.

그러니 이제라도 도와달라는 게 대놓고 이상한 말은 아니다.

하지만 벌써 몇 번이고 강조했지만.

이 땅은 결코 일반적인 곳이 아니잖아.

게다가 무엇보다 저 밀서 중 가장 핵심적인 표현은.

'군사적 지원이지.'

군사적 지원.

말은 참 든든하고 좋아.

하지만 생각해보자.

집사장이 언급한 최악의 경우란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기세등등하게 아르잔 토후국을 정벌하러 갔다가 처참히 패배하고 빈털터리로 돌아와 니카로스의 국방이 완전히 파탄 나는 그런 상황이겠지.'

그래, 솔직히 이것 이외에는 없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우리 니카로스를 향해 진군하는 아폴로니아의 군대.

'나는 결코 상상하고 싶지는 않은걸.'

만약 이 세상이 원래대로 게임이었다면, 지금쯤 선명한 Game Over 화면을 연상하고 있었겠지.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면서 말이야.

"단순히 오해라고 하기에는 이 밀서에는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들만 잔뜩 담겨있군요. 이건 그야말로 종속과 다른 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로서는 우리의 약점까지 대놓고 알려주는 저 밀서를, 내통이라고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집사장에게는 반론의 여지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진정한 최악이란, 살아남지 못하는 것입니다."

억울함과 공포로 인한 집사장의 떨림이 멈췄다.

그는 어느새 사슬에 묶인 채로도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나를 직시했다.

"저는 그저 순수하게 니카로스와 영주님의 안위를 위해서 최악의 경우를 대비했을 뿐입니다."

그래, 이게 참 재밌는 부분이다.

저 밀서에 나와 있는 온갖 간접적인 표현들을 깊게 고려하지 않고 그저 보이는 대로, 읽는 대로만 받아들이면 정말 순수한 도움 요청의 서신일 뿐이거든.

나는 결코 쉽게 상상할 수 없지만.

슬프게도 정말 집사장에게 순수한 충성심만 가득했다면 말이야.

그렇기에 나는 마치 추궁하듯 계속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공작님이 아닌 아폴로니아 경에게 서신을 보낸 것입니까?"

"영주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에우스페나 공작님은 이미 본인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제가 페트로스 집사장과 함께 아폴로니아 경과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 사실 또한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페트로스 집사장은 승냥이 같은 자입니다. 그런 그가 위기의 순간 니카로스를 도우리라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대안으로 아폴로니아 경을 택한 것입니다. 그녀는 그래도 선대와의 인연이 적지 않게 있기에 최소한의 호의는 기대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습니다."

"글쎄요. 저는 아폴로니아 경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군요. 군사적 지원이라는 핑계로 그저 승냥이 하나만 더 불러오는 꼴이 되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저도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동의합니다."

그래? 그걸 동의한다고?

그런데 어째서 밀서를 보낸 거지?

다행히도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기도 전에 집사장이 먼저 대답을 계속했다.

"하지만 적어도 영주님 개인의 목숨만은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한 최소한의 호의는 바로 그것입니다.

집사장은 여전히 차분한 태도로, 그렇게 대답했다.

"...."

나의 목숨.

그 말을 듣자마자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모든 것이 아연하다.

진짜.

상상도 못 했거든.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최악의 경우 내 목숨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저지른 짓이었다고?

그 사실을 곱씹고, 되새기니.

나도 모르게 웃음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한 손으로 눈가를 덮은 뒤에야 간신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렇게 진정한 뒤, 집사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집사장 아저씨."

마음속으로만 쓰던 그 호칭을 입에 담으며.

"마음 아프지만 저는 그런 것 따윈 원하지 않습니다."

단호하고 명확하게.

#034. 올바른 충성심 (6)

"...!"

니카로스의 집사장, 제노비오스 크세로스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두 눈과 귀를 의심했다.

모든 것은 최악의 경우, 영주 개인의 목숨이라도 구하기 위한 방책이었다는 제노비오스의 해명.

그리고 그 해명을 모두 듣고 스스로 밝힌.

- 나는 그런 것 따윈 원하지 않는다.

젊은 영주의 대답.

충격적이긴 하지만 사실 그 내용만으로 따지자면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은 아니다.

두려움 따위는 잊은 듯 시종일관 무리한 확장 정책만을 고수했던 현 영주의 성향을 고려하면, 저런 말을 내지르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으니까.

그렇기에 그 역시 대꾸할 말은 얼마든지 있었다.

말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다.

아직 영주님께서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다.

어린 탓인지 너무 자존심만을 챙기려고 한다.

생존은 그렇게 쉽게 논할 문제가 아니다.

살고자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실리적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무리한 확장 정책의 미래는 파멸밖에 없다.

당연히 그런 최악의 경우 또한 대비하여야 한다.

가신에게는 영주의 안위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난폭한 시도를 반복했음에도 그저 승승장구만을 거듭하던 도련님, 티베리오스 현 영주가 이런 수단에 거부감을 느낄 것 정도는 당연히 예상했다.

영지의 내밀한 내부 사정을 외부인에게 알리는 것이 옳지 못한 일이라는 것 또한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알았음에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 알았기에 보고조차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비밀리에 진행하였다.

'설령 잠시 영주님을 뜻을 어긴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결단이야말로 진정한 충심의 발로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런 확신에 가득 차 있었음에도, 이 순간 제노비오스는 그저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영주의 말이 뜻하는 내용이 아닌, 그 내용을 담는 그릇이었으니까.

'저 눈빛, 저 태도.'

즉, 그 전부를 제노비오스는 이 알현실의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제논 발란티스.

지금은 죽고 없는, 니카로스 남작령의 설립자.

벌써 30년 전의 이야기다.

에우스페나 공작령의 젊은 관료이던 제노비오스가 제논과 처음 만난 것은.

'사실 처음에는 그저 웃기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지.'

제논은 몰락 귀족 출신이면서도 언제나 오만하고 당당하게 앞장섰다.

입버릇처럼 자기는 결코 시시하게 역사에 묻혀 사라지지 않겠다고, 큰 공을 세워서 언젠가는 꼭 자신만의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거라고 장담하고 다니기도 했다

솔직히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지 않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매진하여, 마침내 에우스페나 공작령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구한 제노비오스이었기에 더욱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제논은 끝내 그 말들을 전부 지키고 이뤘다.

자살 행위에 가까운 돌격 끝에도 언제나 사지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고, 공작령의 대대적인 동방 정복 전쟁 때도 선봉에 서서 누구보다 많이 적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만의 땅을 얻어 영지를 세웠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노비오스 또한 약속된 안정까지 버리고 공작령을 뛰쳐나와 그의 독립에 합류하고 있었다.

물론 그 뒤로도 적지 않은 고난과 시련은 펼쳐졌다.

그토록 모두가 따랐던 제논도 이제는 죽고 없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었어.'

제논은 그럴 가치가 있는 사내였으니까.

한 남자가 자신의 삶을 바쳐 섬기고 모실 가치가 있는 사내.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섰음에도 이 생각에 변함은 조금도 없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제노비오스는 이 니카로스에 기꺼이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그가 남긴 자식이자 현 영주에게도 끊임없이 계속.

하지만 지금 그 티베리오스의 대답을 듣고 나서, 이 모든 충성심이 그저 그릇된 것이라는 걸 깨닫고 말았다.

얼마 전, 시하브 토후국과의 전쟁이 있기 전.

언쟁 중 동료 키로스가 현 영주를 믿지 못하던 자신에게 내뱉은 말.

- 그분의 아드님이신 현 영주님도 그런 기질을 물려받았다는 것도 그리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지.

이 순간 그 말이 문득 제노비오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 마음 아프지만 저는 그런 것 따윈 원하지 않습니다.

단호하고 명확했던 영주의 대답.

그 터무니없는 대답을 말하던 영주의 눈빛과 태도.

제노비오스는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제논 님....'

그가 한때는 의심하고 비웃었고, 그리고 끝에는 결국 믿고 따르게 된 남자가 수도 없이 보여준 바로 그 모습이었으니까.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도 항상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웃던, 그 강렬한 미소와 시선.

이걸 보고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제논을 섬겨왔던 지난 30년의 세월이 전부 무의미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야 알겠다.

그와 비슷한 시기부터, 어쩌면 조금 더 일찍부터 제논을 모셨던 키로스가 어째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현 영주의 의견에 동조했는지.

키로스는 그저 설명하지 못했을 뿐.

계속 진실만을 얘기했구나.

'...하여간 명불허전 뇌까지 근육인 늙은이. 설명 하나도 제대로 못 해주다니.'

직접 체감하고 나니 이제는 그도 깨달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한참 대답을 고르며 입술을 달싹이던 제노비오스는, 곧 그렇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주제넘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똑같은 진실을 두 번이나 직시하고도 또다시 부정할 만큼, 제노비오스 크세로스라는 인간이 어리석지는 않았으니까.

"그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설령 그게 죽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

와.

진짜 진심으로.

솔직히 엄청나게 아슬아슬했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야.'

집사장 아저씨가 아폴로니아에게 보낸 서신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덕분에 과감하게 진행할 수 있었던 심문이긴 하다.

하지만 그런데도 실제로 이렇게 저지를 수 있었던 건 거의 도박에 가까웠다.

'그야 니카로스의 핵심 원로 중 하나인 집사장의 위세가 만만치 않고, 또 영주인 나보다 그런 원로를 믿고 따르는 세력 역시 적지 않으니까.'

어차피 옳고 그름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아직 나는 영지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지 않다.

만약 집사장이 나의 체포 계획을 미리 알아차리고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면, 절대로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풀리지는 못했겠지.

따라서 기습의 묘리를 살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양측 모두 작정하고 정치적으로 전면전을 벌였다면, 영주인 나도 분명히 성치 않았을 테니까.

'물론 그렇다고 아예 내가 지지는 않았겠지만.'

게다가 따지고 보면 이 증거를 확보하는 과정부터 그리 쉽지 않았거든.

분명히 온전히 내가 설계하고 추진한 계획 덕분에 얻은 정보긴 하다. 그렇지만 이만한 결과를 얻는 데 운의 영향이 아예 없다고 하긴 또 그렇지.

나의 가장 큰 지지자였던 키로스 경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가신단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또 다른 전쟁 준비를 공표했다.

반발을 억지로 찍어 누른 셈이니, 당연히 어딘가에서 누군가 몰래 수작을 벌일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 어딘가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가 바로 에우스페나고 말이야.'

에우스페나.

이 일대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인 동시에 따지고 보면 같은 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리 니카로스와 같은 제국의 영지.

만약 우리 가신들이 변수를 창출하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고려할 만한 곳으로 이만한 곳이 또 없다.

실제로 나도 시하브 토후국과의 전쟁에 앞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기도 하니까.

거기까지 예상했다면 나도 마땅히 대응해야지.

바로 그 대응을 위한 동원된 것이 안티모스가 이끄는 푸른이리 용병대였다.

시하브 토후국 정벌이 끝난 뒤, 푸른이리 용병대는 승전을 축하하는 짧은 잔치 끝에 에우스페나로 돌아갔다.

니카로스의 다음 전쟁은 몇 달은 지나야 선포될 테고 그동안 용병대가 일도 없이 빈둥빈둥 놀 수는 없으니까.

따라서 나는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으로 돌아오는 길에 안티모스에게 그렇게 부탁했다.

'돌아가는 김에 한동안 니카로스에서 에우스페나 향하는 길목을 감시하며 혹시 수상한 자가 지나가지는 않는지 확인 좀 해달라고 말이야.'

언뜻 듣기에는 엄청 무리한 요청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니카로스가 워낙 외진 변방이라 길목이라 할 만한 곳도 한둘뿐이거든.'

게다가 에우스페나도 사실 엄연히 제국의 동쪽 변경에 속한 곳이다. 그저 니카로스가 그보다도 더 동쪽에 있는 낙후된 최전선일 뿐인 거고.

덕분에 에우스페나 서쪽으로 오가는 사람은 많아도 반대로 동쪽으로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 완전 남남도 아닌걸.'

애초에 용병이란 특화된 업무가 전투일 뿐이지, 본디 돈을 받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의 한 부류.

이래 봬도 나도 어차피 머지않아 큰 계약을 한 건 또 체결할 예정인, 귀한 고객 중 하나인데 이 정도 배려야 해줄 수 있지. 실제로 안티모스는 특유의 쾌활한 웃음과 함께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그리고 부탁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바로 집사장이 아폴로니아에게 사람을 보낸 게 걸린 거고.'

물론 푸른이리 용병대가 전문 첩자도 아닌 만큼, 사람이 지나갔다는 것 이상의 사실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 이것만 해도 용병으로서는 대단한 성과니 더 바라는 것도 부조리한 일이고.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여기서부터 전문가한테 맡기면 되니까.

'그리고 바로 이럴 때를 위해서 그 괴팍한 가스파르 영감님과 친구가 된 거지.'

정보라는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그만한 전문가가 없다.

적어도 이 제국 동쪽 일대에서는 말이야.

실제로 푸른이리 용병대를 통해 보고를 받은 즉시 가스파르의 가게로 사람을 보내니, 아니나 다를까 이미 영감님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알아서 자세한 서신의 내용까지 캐내고 있었다.

'하여간 진짜 귀신 같은 할아버지야.'

게임 속 상황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제로 겪고 나니 조금 소름이 돋긴 했지만, 어쨌든 당장 나로서는 반길 일이었다.

다행히 가스파르 영감님도 내가 어지간한 사정은 대충 다 파악하고 사람을 보냈다는 것을 알고 싼 가격에 순순히 정보를 공유했다.

범인이 집사장 아저씨라는 사실과 밀서의 모든 내용이 그대로 담긴 복사본까지 해서 아주 깔끔하게.

'준비물을 다 모았으면 실행을 할 차례.'

증거를 모았으니 집사장을 체포하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이것도 말처럼 쉽게 결단할 일은 아니었다.

'영지 내에 집사장의 지지자가 워낙 많았어야지.'

만약 아무 기사한테나 사정을 설명하고 집사장을 잡아 오라고 시켰다면, 도리어 그 기사가 집사장이 옳다고 판단하고 그쪽에 붙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무척이나 슬프게도 말이야.

따라서 인선 또한 신중히 고심해야 했다.

'그리고 그때 떠오른 게 아르센이었고.'

아르센.

에우스페나 방문 당시 키로스 경을 대신하여 날 호위했던 젊은 기사.

'키로스 경을 제외하고 그나마 나와 제일 많은 교감을 나눈 기사기도 하고, 경력이 짧아 원로 가신들과의 인맥에서 상대적으로 더 자유롭기도 하지.'

그리고 초원 원주민 파벌 출신의 인재이기 때문에, 제국 이주민 파벌의 집사장을 대하기에 더 거리낌이 없기도 할 테고.

'게다가 까놓고 말해서 나와 아르센은 에우스페나에서 함께 온갖 고난을 함께한 전우 관계나 마찬가지인걸.'

따라서 아르센을 필두로, 그와 비슷한 처지의 젊은 기사들을 모아 체포 작전을 진행하였고, 다행히 이 친구들은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아예 집사장을 꽁꽁 묶어서 데려올 만큼 철저하게 명령을 처리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키로스 경이 아르센이 괜찮은 인재라고, 나이도 나와 비슷하니까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라고 말했었던가.'

생각해보니 역시 옳은 말인 것 같다.

사실 '친구처럼 친하게'라는 말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깝게 지내는 것은 확실히 좋을 듯해.

영주로서 민감한 사안들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초당파적 무장 조직이라는 느낌으로.

'굳이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친위 세력이라고 할까.'

그렇게 무척이나 길고도 힘든 과정을 거친 끝에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이 광경이다.

정말로 쉽지가 않았어.

'사실 집사장이 예상보다는 훨씬 더 빠르게 본인의 죄를 시인하기는 했지만, 내가 그런 세부적인 내면의 심리까지 전부 예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닌 결과다.

내 계획이 성공했다는, 그런 결과.

그렇기에 나는 시선을 내려 그 결과의 상징을.

두 팔이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집사장을 보았다.

"...."

그는 더는 억울함이나 불안감 따위의 감정으로 떨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인 듯, 초연한 눈초리로 말없이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거 참. 나는 그런 식의 생존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을 뿐인데, 도대체 갑자기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겨 저렇게 고분고분하게 급변하신 건지.'

무슨 오해를 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나만의 구명 수단.

그래, 정말로 나는 그런 걸 원하지 않는다.

믿기지 않겠지만 진짜 진심이다.

물론 내가 이 망할 땅에서 영주가 된 것도, 끝없는 전쟁과 정복이라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운 것도 전부 그저 나의 생존을 위한 것이긴 하다.

'요컨대 나 하나 살기 위해 저지른 일은 맞단 거지.'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이야.'

나는 안다.

도망칠 구멍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얼마나 나약하게 만드는지 말이야.

내가 지금 시도 중인 건, 가뜩이나 실낱같은 확률을 뚫고 전력을 다해서 도전해야만 겨우 성공할까 말까 하는 극한의 과업이다.

'그런데 언제든지 포기하고 관둬도 된다는 안일한 마음을 품은 채로 도전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결과적으로 이도 저도 아닌, 마음의 독 같은 일일 뿐.

게다가 그런 식으로 도망칠 거였다면 진작에 도망쳤지, 괜히 아폴로니아처럼 믿을 수 없는 여자의 도움 따위를 받을 리가 없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오직 간절해야 하고, 오직 전념해야 한다.

일종의 마음속의 배수진.

일종의 선택과 집중이라는 것이지.

그 사실을 알 뿐이다.

'그래, 역시 나는 무척이나 합리적이야.'

그렇기에 집사장을 보며 물었다.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다, 라. 진심입니까?"

"그렇습니다, 영주님."

"영지의 기밀을 유출한 것은 중죄입니다. 그 처벌이 절대 약하지는 않을 텐데요."

"모든 것이 저의 불찰이니, 그저 달게 받을 뿐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묶여 있는 집사장을 향해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언제나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든 채.

"...!"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가신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른다. 경악과 공포라는 감정이 그들의 얼굴 위를 여실히 뒤덮었다.

'그러게 평소에도 내 말을 좀 잘 들어주지 그랬어.'

사실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런 것이기도 했다.

집사장은 현재 반(反)영주 파벌의 구심점이자 선봉 같은 인물이었고, 나의 뜻에 반대하는 가신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앞으로 내가 감행해야 할 무리한 도전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매번 이런 식으로 가신들의 거센 반대에 직면하면 얼마 가지 못해 모든 게 무너지고 만다.

<마이트 앤 로열> 원작에서도 언제나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균열이 더 치명적이었으니까.

그러니 앞으로 큰 사업을 더 벌이기 전에, 그 중심이 되는 집사장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쓰러뜨려 두면 반대 세력의 힘도 한풀 꺾을 수 있겠지.

집사장의 죄를 처벌한다는 일차적인 목표를 넘어 나는 분명 이런 효과까지 기대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표현해서 권력 강화.'

그렇기에 그의 처벌을 끝내기 전까지는 아직 아무것도 끝났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거다.

그렇게 굳은 표정으로 생각을 곱씹으니.

어느새 나는 집사장의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집사장 아저씨는 날이 시퍼렇게 선 나의 검을 보고도 여전히 초연했다. 그는 코앞까지 다가온 나의 모습을 한 번 또렷하게 살피더니, 곧 마음을 다잡은 듯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집사장에게 물었다.

"두렵지는 않으십니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이 또한 제가 감내해야 할 업보입니다."

"저를 원망하는 마음은 없습니까?"

"그런 마음은 한 점도 없습니다. 그저 제가 부족했을 따름입니다."

정말. 이 아저씨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오늘 새로운 모습을 무척이나 많이 보게 되었다.

수많은 가신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며 초조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상황 속에서, 나는 마침내 마지막 질문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아직도 저에게 충성하십니까?"

그래.

니카로스도, 죽은 제논도 아닌.

바로 나에게.

이번에도 집사장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간결한 대답.

그렇단 말이지.

나는 그 대답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가신들이 순간적으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먼저 울려 퍼지고.

곧 쇠사슬이 두 갈래로 절단되며 쟁그랑 소리로 방안을 가득 채웠다.

"영주님...?"

그 소리를 듣고 다시 눈을 뜬 집사장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기밀 유출은 중죄입니다."

나는 오늘 이 알현실에서 처음으로 웃었다.

언제나처럼 친절하고 친근하게.

"그러니 일단 근신부터 시작하죠. 반성 많이 하셔야 합니다."

그래, 아직도 충성한다니 됐지 뭐.

오늘 조리 있게 잘 설명했으니 다음에는 안 이럴 거 아니야?

합리적으로 가자고, 합리적으로.

우리 이성적인 문명인답게 말이야.

그러니까 한 번은 더 믿어보겠습니다.

집사장님도 부디 문명인답게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근신이 끝나는 대로, 같이 저의 즉위식부터 논의해봅시다, 집사장님."

이제 진짜 할 때가 되었잖아?

그렇지?

#035. 첫 번째이자 두 번째 (1)

집사장의 기밀 유출에 대한 최종 판결.

가택 연금 10일.

잔뜩 무게를 잡고 사람까지 묶어온 것치고는 엄청나게 가벼운 판결인지라 폐회를 선언한 뒤로도 웅성거림은 제법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더 설명하지 않고 웅성거리는 가신을 뒤로한 채 먼저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가장 먼저 오늘 적지 않은 활약을 한 젊은 기사, 아르센이 나에게 달라붙었다.

"영주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주제넘지는 않을까 다소 우려되지만, 너무나 가벼운 처벌을 내리신 것이 아닐지...."

오, 이것도 굉장히 심복다운 대사야.

역시 나와 깊은 우정을 나눈 아르센다워.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일단은 집사장님께서도 악의는 없다고 하셨으니 이번에는 이 정도로 넘어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위대한 솔레오께서도 언제나 자비의 미덕을 강조하셨지 않습니까?"

관대한 대사에 더해서 관대한 미소까지도 덤.

거기에 우리 바할리아 제국이 믿는 국교의 교리까지 적당히 버무리니, 내가 말한 거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역시 이만한 교양인이 따로 없다.

"...."

하지만 이렇게 여유를 과시했음에도 아르센은 아직 불안감이 남은 듯 선뜻 긍정의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그래, 솔직히 불안할 만도 하지.

원래 화근은 남기지 않는 법이라고 하니까.

하지만.

"하하, 너무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아르센 경께서는 저를 믿어주시면 좋겠군요. 함께 그 끔찍했던 에우스페나까지도 다녀온 인연이지 않습니까?"

이래 봬도 깊은 고민 끝에 결정한 결과다.

조리 있게 잘 설명했으니 다음에는 이러지 않을 거라는 기대는 뭐 반쯤 농담이라고 해도, 그거 말고도 결정의 이유는 많으니까.

어떻게 분위기랑 공포감의 영향으로 그렇게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사실 이런 사건 하나로 원로의 목을 치는 건 부담이 너무 크다.

분명 나중에 뒷말과 불만이 나올걸?

이것도 분명 작지 않은 위험 요소다.

게다가 가뜩이나 인력도 부족한데, 집사장의 자리까지 공백이 되어버린다면 진짜 당장 감당이 안 될 거다.

집사장이 특출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당히 오랜 세월 경력을 쌓아온 관록 있는 관료니까.

어차피 일단 처벌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집사장의 정치적 영향력은 어느 정도 깎을 수 있고, 얄팍한 수작질 정도는 내가 먼저 파악할 수 있다는 능력까지 과시했다.

따라서 정치적 주도권을 잡겠다는 소기의 목적은 이미 충분히 달성한 셈.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보아도.

지금 이렇게 무리해서 집사장을 죽인다고 해도 얻는 것보다 더 잃는 게 크다는 거지.

'물론 한 번은 더 집사장을 믿는다는 게 완전히 거짓말인 것도 아니지만.'

조금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함께 어떻게든 이겨내고 해낸 우정이 우리에게는 있잖아?

부디 집사장 아저씨도 현명하게 판단하길 바라.

그런 식으로 생각을 정리하자 아르센도 화들짝 놀라며 믿어달라던 나의 질문에 열정적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무, 물론입니다, 저는 항상 영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이왕이면 너희도 최소한 한 번 정도는 나를 전폭적으로 믿고 밀어줘.

'불안하다는 건 나도 이해하지만.'

직접 결과로 증명할 테니까.

***

영주가 직접 내린 판결로 인해 본인의 집에 갇혀 열흘 동안 나오지 못하게 된 제노비오스 집사장이었지만, 의외로 그가 심심할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게 다 무슨 고생입니까? 저희도 하루빨리 집사장님의 연금이 끝나고 나오시는 것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집사장님이 안 계시니 저희가 영주님을 말리기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존의 반(反)영주 파벌에 속해있던 동료 가신 중 몇몇이 그의 집에 방문했으니까.

명목상 엄연히 가택 연금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외부와의 접촉 또한 영주가 막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지만, 제노비오스의 예상과는 달리 티베리오스 영주는 다른 가신들의 방문을 전혀 막지 않고 있었다.

그런 영주의 배려는 분명 감사한 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제노비오스는 그 상황을 온전히 즐길 수만은 없었다.

"크, 크흠. 어쨌거나 이렇게 방문해주어 고맙네."

"허허, 감사하다뇨. 당연히 찾아뵈어야지요. 집사장님 없이 저희가 무슨 일을 추진할 수 있겠습니다. 집사장님이야말로 니카로스의 기둥인걸요!"

"...."

여기까지 직접 방문한 가신들의 의도가 너무나 투명하게 전부 보였기 때문에.

외부와의 접촉을 직접 막지야 않았다지만, 그래도 분명 지금의 제노비오스 집사장은 영주가 내린 처벌을 받는 죄인의 신분이다.

그렇기에 니카로스의 가신이라면 당연히 그를 방문하는 것에 영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비록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이토록 당당하게 제노비오스를 찾아온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번 사고로 저희의 의견을 표출하기가 더 어려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전쟁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니카로스를 위해서."

아직도 뜻을 꺾지 않은 강경파 존재한다는 것.

제노비오스의 기밀 유출 발각과 그 처벌을 단순히 '사고'라고 일축하고, 전쟁 반대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그의 추측이 더욱 확실시되었다.

"...."

그렇기에 제노비오스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아폴로니아에게 밀서를 보낸 것은 온전히 제노비오스 홀로 판단해서 저지른 일이다.

당연히 같은 파벌에도 이 사실은 공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제노비오스조차 그 어리석은 소행을 후회하고 이제는 생각을 고쳤음에도, 제삼자들이 이렇게 옹호해주며 자신들의 뜻을 계속 고수하다니.

대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가뜩이나 동료들과 두루두루 연을 쌓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는 제노비오스였기에 더더욱 대답을 고르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사실 솔직한 심정으로... 집사장님이 그렇게까지 그릇된 판단을 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소 방도에 논란에 여지가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사람을 대역죄인 다루는 것처럼 묶어놓고 심문하시다니...."

"아니, 그 말은 취소하게."

자신의 죄를 대놓고 축소하고 영주님의 판결까지 비난하는 것만큼은 참아줄 수가 없었다.

"집사장님...?"

"이번 건은 분명한 나의 실책이 맞아. 그것도 영지의 안위를 위협할 만큼 어마어마한 우행이었지. 나는 그저 영주님의 자비로 목숨을 구했을 뿐이네.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더는 가타부타하지 말게."

이것이 거짓 없는 제노비오스의 본심이었다.

지나치게 겁에 질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당시에는 그저 대국적으로 옳다고 생각한 일을 했을 뿐이지만, 판결이 끝나고 모든 것을 뒤돌아보니 자신의 과오가 너무나도 확실했다.

판단에 필요한 질문은 하나뿐.

'만약 지금 영주님이 티베리오스 님이 아니라 제논 님이었어도, 내가 똑같이 행동했을까?'

답은 당연히 '아니오'였다.

티베리오스는 더는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지도해야 할 도련님이 아니었다. 그는 정당하게 그 자리까지 오른 니카로스의 주인이자 지도자였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망각하고 주제넘게 굴다니, 제논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정말로 영주를 무시했다고 욕을 들어도 달리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그렇기에 우유부단하게 굴던 제노비오스도 이 발언만큼은 단호하게 일축했다.

"..."

분명히 자신들의 편일 거라고 믿던 제노비오스가 이렇게까지 확고하게 부정하자, 그들은 잠시 당혹감으로 말을 잃고 말았다.

덕분에 한동안 방안에는 불편한 침묵만이 들어섰다.

"...그럼 저희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돌아가게."

그 뒤로 결국 영혼 없는 대화만이 잠시 오간 뒤, 제노비오스의 자택에 방문했던 일행은 어색한 걸음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떠나는 그들을 보며 제노비오스는 작게 소리 내어 한숨을 내쉬고야 말았다.

도저히 쉬운 일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절대로 이걸로 끝은 아니었다.

다음 날.

이번에는 영주 티베리오스가 그의 집에 찾아왔기에.

***

"잘 지내고 계십니까? 집사장님이 너무 답답하지는 않으실지, 그게 걱정되어서 잠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답답할 리가 있겠습니까. 모두 제가 저지른 잘못의 대가일 뿐인데요. 그저 하루하루를 영주님의 자비에 감사하며 보내고 있을 뿐입니다."

제노비오스는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정중하게 영주를 맞이하였고, 티베리오스의 얼굴에는 평소처럼 친근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러나 제노비오스는 쉽게 긴장을 풀지 않았다.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집사장님은 우리 니카로스를 지탱하는 기둥 중 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하루빨리 건강히 복귀하셔서 저를 도와주셔야지요. 집사장님이 안 계시니 정말 일이 산더미 같습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놀라울 정도로 어제 방문했던 일행들이 했던 말과 비슷한 표현이 가득 담긴 격려.

제노비오스는 잠시 침을 꿀꺽 삼킨 뒤 한 박자 늦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지나고 나니, 직접 당해보고 나니 알겠다.'

영주님을 단순히 어린아이 취급하고 안일하게 행동했던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말이야.

'어쩌면 외부와의 접촉을 허용했던 것도 영주님의 특정한 의도가 담겨 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계속해서 안부 인사가 오고 가는 상황 속에서도 제노비오스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

그리고 마치 그런 제노비오스의 심정이라도 간파한 듯, 티베리오스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흡사 지금까지 했던 일상적인 대화를 계속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제, 다른 가신 분들께서도 방문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내용과 의미는 전혀 일상적이지 않았지만.

또다시 제노비오스는 한 박자 늦게 대답하고 말았다.

여전히 노골적인 표현은 하나도 담겨 있지 않다.

하지만 말 속에 가득 담긴 정황과 은근한 분위기 모두가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하긴. 생각해보면 영주님은 처음부터 그러셨지.'

혈혈단신으로 에우스페나에 방문해 가스파르와 페트로스와 연줄을 만들어오시고, 자신의 밀서 또한 순식간에 간파하신 분이다.

어설픈 수작질 따위는 그저 역효과만 날 뿐이겠지.

'...대체 이런 분을 상대로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뒤늦은 후회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깨닫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분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혹시 저도 알아도 될지요?"

그렇기에 평소라면 잔뜩 긴장했을 이 질문에도 제노비오스는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영주님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에게 하루빨리 돌아와 자신들의 의견에 힘을 실어 달라고 하더군요. 그들은 여전히 전쟁을 반대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진짜 솔직하게 다 말했다.

말을 마치며 확실하다는 뜻으로 고개까지 한 번 끄덕거렸다.

이렇게까지 전부 얘기하자 도리어 티베리오스가 더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나치게 솔직하신 것 아닙니까? 조금 더 포장하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최대한 태연함을 가정하려고 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티베리오스의 당황.

그 모습을 보니 제노비오스도 더 마음이 놓였다.

따라서 미소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영주님께 충성을 다하겠다고."

그러자 결국 티베리오스 또한 따라 웃고 말았다.

평상시 항상 얼굴에 걸고 다니는 미소보다 조금 더 진심이 담기고 즐거워 보이는 그런 웃음을.

잠시 그렇게 웃던 티베리오스는 곧 다시 자세를 바꿔 진지한 태도로 질문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제가 감히 염치불구하고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여쭤보셔도 됩니다."

티베리오스는 한 호흡 숨을 고른 뒤, 느리지만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

"그 전쟁, 아르잔 토후국과 벌일 새로운 전쟁. 집사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제노비오스는 이번에는 즉답하지 않고 잠시 눈을 감은 채 침묵했다.

대답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질문은 이 가택에 연금된 뒤로도 스스로 계속 되뇌며 물었던 것이기도 하니까.

따라서 이 침묵은 그저 진솔한 고백을 위한 짧은 디딤돌에 불과했다.

"우려되는 것은 여전히 진심입니다. 아직 우리 니카로스에도 취약한 점은 많으니까요."

그래, 이 말에도 역시 거짓은 없었다.

여전히 전쟁은 걱정된다.

만약 패배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기 싫다.

우리가 불리한 점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

역시 무리한 도전은 그의 성향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저는 그동안 전쟁에 앞서 우려하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 또한 그저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제노비오스의 일면에 불과하다.

"제논 님을 모실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말입니다."

티베리오스를 무시하는 것도.

승리의 확률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성향과 천성을 알고 있는 것뿐이며.

"그러니 그 우려를 최대한 덜기 위해 전력을 다해 영주님을 보좌하겠습니다."

그렇기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이유를 댄 것뿐이다.

30년의 세월 동안 변함없이 니카로스 남작을 모신 한 집사장으로서.

그 말에 결국, 티베리오스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소리가 날 정도로 흥겹게.

그렇게 한동안 기분 좋게 웃은 영주는 다시 자신의 집사장을 바라봤다. 처음 이 집에 방문했을 무렵 풍기던 긴장감은 어느새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오랜만에 정말 진심으로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영주 티베리오스는 제노비오스 집사장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악수의 의미로.

"환영합니다. 저의 편이 된 것을."

영주와 하는 악수라는.

평상시에는 겪어보지 못한 낯선 행위에 잠시 집사장이 멈칫했지만, 망설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니카로스의 전 가신이 이미 영주님의 편입니다."

"하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두 사람이 굳게 손을 맞잡았다.

뒤이어 영주는 마치 재밌는 이야기를 건네는 것처럼 웃으며 집사장에게 물었다.

"그러면 곧 있을 저의 즉위식 준비도 집사장님에게 맡겨도 되겠습니까?"

설마 이 상황에서 바로 이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다.

잠시 당황한 집사장이었지만, 그도 곧 영주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 웃었다.

"...사실 당시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제논 님의 즉위식은 제대로 치르지 못했습니다."

그래, 30년 전에는 정말 모든 게 열악하고 혼란스러웠으니까. 즉위식 같은 것은 사치에 불과했다.

그리고 마누엘 역시 즉위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돌아오지 못할 복수 원정을 떠나버렸고.

사실상 니카로스 남작령의 즉위식은 이번이 처음.

그렇기에.

"그러니 제가 그때 몫까지 더해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겠습니다. 맡겨두십시오."

집사장은 온 여한을 풀겠다는 듯 자신 있게 다짐했다.

#036. 첫 번째이자 두 번째 (2)

가택 연금이 끝난 집사장 제노비오스는 곧장 분주히 업무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영주 티베리오스가 대신 나서서 이것저것 열심히 떠맡아 처리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수십 년의 경력을 쌓은 제노비오스의 공백을 완전히 채울 수는 없었다.

"하...."

그렇기에 고작 열흘 만에 다시 쌓여버린 서류의 산.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것만 같은 업무량을 보고, 제노비오스는 속으로 며칠 전 자신이 벌인 바보 같은 짓을 탓하고 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염없이 멍하니 앉아서 푸념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책임감 하나는 니카로스 남작령의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제노비오스는 곧 두 팔을 걷어붙이고 서류의 산을 해치워 나가기 시작했다.

분명 이건 오랜 경력을 지닌 집사장에게도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훨씬 편했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 영지에서 처리해야 할 급한 일들이 한둘이 아니며, 심지어 머지않아 또 다른 전쟁까지 예정되어 있다.

지금 집사장 제노비오스와 그 휘하의 관료들이 멈춰버린다면, 니카로스는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그 과실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붕괴하는 한심한 영지가 된다.

'절대로 그런 꼴은 용납할 수 없지.'

그렇기에 제노비오스는 바위처럼 꼿꼿하게 집무실 책상 앞에 자리 잡아, 쉬지 않고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동안 쌓은 관록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내듯, 고된 노력 끝에 오늘 미리 상정해둔 만큼의 업무를 처리해낼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되긴 되는군....'

물론 내일은 또 내일의 업무가 있겠지만, 적어도 오늘의 고비는 넘겼다.

제노비오스는 그 사실을 자축하며 녹초가 된 채 소파 위로 몸을 던져 간신히 얻은 여유를 즐겼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런 그의 여유는, 곧 초대한 적 없는 방문자로 인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허허! 소문은 이미 다 들었네, 제노비오스! 헛짓거리하다가 영주님에게 잘못 걸려 제대로 죽을 뻔했다고!"

"키로스...."

귀가 아플 정도로 쓸데없이 호탕한 웃음소리.

정면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 쉬는 게 답답해지는 근육질 몸뚱이.

노크조차 하지 않고 남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혀 버리는 저 뻔뻔한 입장까지.

질릴 정도로 익숙한, 제노비오스의 직장 동료.

그리고 오랜 인연의 친구이기도 한.

바로 니카로스의 기사단장 키로스 경이었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나?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라고 했잖나! 허허허!"

"...안 그래도 나도 후회 중이니 제발 닥쳐주게. 그리고 당장 내 방에서 꺼지는 것도 잊지 말고."

그러나 슬프게도, 당장이라도 현기증과 함께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제노비오스의 표정을 봤음에도 키로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허허, 그렇게 섭섭한 소리는 하지 말게. 절친한 동료이자 친우에게 그 무슨 매정한 말인가?"

그저 당당한 웃음과 함께 그의 바로 옆자리까지 성큼성큼 스리슬쩍 걸어와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을 뿐.

"...."

넉살 좋은 키로스의 태도에 제노비오스는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벌써 수십 년이나 된 인연이다.

물리적인 힘을 갖추지 못한 이런 공허한 말 따위로는 키로스를 말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제노비오스는 니카로스 남작령의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영주님이 상대면 조금 자중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건 극히 드문 예외적 상황이니.'

지금은 나만의 시간을 좀 달라고 실랑이를 하는 것조차 귀찮고 힘들 정도다.

무력하고 가녀린 제노비오스는 어쩔 수 없이 지친 목소리로 오랜 친구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서, 한창 점령지를 지키고 있어야 할 기사단장님께서 여기까지는 무슨 일인가? 자네가 돌아올 거라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영주님께 급히 보고드리고 논의할 사항이 있어서 부랴부랴 돌아왔지. 나도 홀로 말 한 필 겨우 이끌고 출발해서 방금 막 도착한 참이야."

"...늙은이가 참 체력도 좋아."

이웃한 국가였던 만큼 니카로스 남작령과 (구) 시하브 토후국의 영토는 상대적으로 가까운 편이지만, 그렇다고 마치 마실이라도 나가는 것처럼 가볍게 오고 갈 만큼의 거리는 또 아니다.

그런데 그 거리를 말을 몰고 전력으로 달려왔음에도 저렇게 쌩쌩하다니. 친구 키로스의 괴물 같은 체력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새삼스레 감탄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서 영주님부터 찾아뵙지, 귀한 휴식을 즐기고 있던 나는 왜 괴롭히고 있는 건가?"

"당연히 나도 영주님부터 뵈려고 했지. 그런데 영주님께서 잠시 시찰로 인해 자리를 비우셨다지 뭔가."

"아, 그래. 확실히 오늘도 그런 일정이 예정되어 있으시긴 했지."

듣고 보니 기억났다.

오늘 이 시간 즈음에 영주 티베리오스가 또다시 영지 시찰을 다녀오기로 했다는 것이 말이다.

딱히 드물거나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티베리오스는 영주가 된 이래로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성 밖으로 직접 나가 니카로스의 실태를 살펴보곤 했다.

처음에는 가신들도 굳이 그렇게까지 빈번하게 행차하지는 않아도 된다고, 무리할 필요 없다고 영주를 말렸으나, 티베리오스는 언제나처럼 사람 좋게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게다가 혹시나 발생할 주민들의 부담까지 먼저 고려해서 최소한의 인력만 데리고 조용히 다녀올 계획이라고 설명까지 했으니, 가신들로서도 더 만류하기가 어려웠다.

'안 그래도 당시에는 시하브 토후국과의 전쟁이나 에우스페나 방문 건 같이, 최선을 다해 영주님을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도 이미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굳이 그런 사소한 일로 실랑이하며 더 힘을 뺄 이유도 없었지.'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어느새 정기적인 일정이 된 시찰인 된 만큼, 그리 오래지 않아서 티베리오스도 성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잠시 시간을 보내며 성안에서 얌전히 영주를 기다리겠다는 키로스의 판단 또한 틀리지는 않았다.

그 점은 분명 제노비오스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래서 영주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내 집무실에서 죽치고 있겠다?"

"허허, 역시 자네야. 내 생각을 단박에 맞추는군. 한 점의 오류도 없는 정답일세!"

"꺼져. 당장 꺼져!"

그게 하필이면 자신의 바로 옆이라는 게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제노비오스는 결국 누운 자세 그대로 손만 머리 위로 뻗어, 반사적으로 손에 잡히는 잡동사니들을 키로스에게 휘휘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허허! 이 친구 참 환대가 거칠군!"

"...."

하지만 슬프게도 그런 격렬한 불만 표출도, 니카로스의 제일의 기사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무력한 위협에 불과할 뿐이었다.

오히려 키로스는 마치 그 공격을 계기로 흥이라도 난 듯,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구석 집무실을 둘러보며 이리저리 쏘다니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졌으니 제발 아무거나 만지고 망가뜨리지만 말아 주게."

제노비오스는 결국 오늘 두 번째로 포기하고 말았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아는가?"

"차라리 어린애면 다행이지, 이 근육 덩어리야."

그렇게 방 주인의 전폭적인 허락까지 얻어 마음껏 두리번거리던 키로스는 곧 제노비오스의 책상 위에서 내용이 절반 정도 채워진 편지지 하나를 발견했다.

"오, 내가 오기 전까지 편지라도 쓰고 있었나?"

"그래, 잠깐 쓰다가 눈이 조금 피곤해져서 누워있는 상황이었지."

정확히는 금일의 업무를 다 끝내고, 남는 휴식 시간에 편지를 쓰다가 체력이 고갈되어 잠시 소파에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키로스가 쳐들어와서 고통을 받는 중인, 그런 상황이었다.

키로스는 편지의 내용까지는 확인하지는 않고, 제노비오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자네 딸에게 보내는 편지인가 보지?"

그렇게 묻는 키로스의 입가에는 흐뭇하다는 미소가 잔뜩 걸려있었고, 제노비오스는 말없이 누운 채 고개만 대충 끄덕거렸다.

마르다 크세로스.

제노비오스가 애지중지하는 외동딸.

니카로스를 떠난 지 벌써 5년이나 다 되어가는 탓에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 아이가 아직 어린 아기이던 시절부터 키로스도 자주 돌봐주었던 귀여운 조카 같은 아이였다.

"자네 같은 투덜이 아래에서 어떻게 그런 귀여운 딸아이가 태어났는지. 새삼스럽지만 참으로 놀라워...."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순식간에 도끼눈으로 변한 제노비오스의 시선을 피한 키로스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요즘 그 아이 병에는 좀 차도가 있다고 하던가? 수도 카이룸에는 뛰어난 의사도 많을 텐데."

"...글쎄. 내가 받은 답장에 그런 내용은 없더군. 애초에 본인부터 병보다는 그냥 타고난 체질에 가깝다고 여기는 모양이라."

"흠, 하긴. 당사자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를 않느니."

그렇게 성공적으로 화제를 돌리는 데 성공한 키로스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건 그렇고, 생각해보니 아직 편지 보낼 때 안 됐지 않았나? 일부러 그 아이에게는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보내는 중이었잖나?"

"맞네. 편지 좀 적당히 보내라고 한 소리 들은 뒤로는 자제하고 있으니까."

"그러게 누가 공부하는 애한테 편지를 일주일에 20개씩 보내라 그랬나...."

무척이나 드물게도 상대방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키로스의 눈빛에, 제노비오스 또한 달리 할 말이 없는지 기침만 몇 번 내뱉었다.

"허허. 알고 보니 자숙 전문가였군, 이 친구."

"...."

"그래서 한참 자중하는 와중에도 이렇게 또 편지를 보내는 걸 보니, 이번에 영주님에게 호되게 당한 내용이라도 쓰고 있었나?"

"...그래."

딱히 절친한 키로스에게까지 숨길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입으로 설명하려니 생각보다 입을 떼기 쉽지 않아, 제노비오스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감사하게도, 결과적으로는 굉장히 관대한 처분을 받긴 했지. 하지만 그래도 과정이 과정이었던 만큼 그 아이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가택 연금 10일이라는 가벼운 처벌을 받기는 했지만, 분명히 근본적으로는 영지의 기밀 유출이라는 중죄로 인해 심판을 받은 제노비오스다.

만약 영주 티베리오스가 작정하고 그를 끝내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더한 극형도 내릴 수 있었겠지.

"하긴. 우리 니카로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아이였으니, 뒤늦게 남들에게 이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는 지금 자네가 직접 설명해주는 게 더 낫겠지."

"그래, 그런 이유라네."

가뜩이나 고향인 니카로스 남작령에 대한 애정이 깊고, 영지를 위해 봉사하는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딸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중죄를 저질러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뻔했다.

그 이야기를 아예 영원히 숨길 수는 없으니, 그나마 당사자가 직접 설명하는 편이 차라리 더 낫겠지.

"...."

어쩌다 보니 의도치 않게 상당히 무거운 대화 주제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렇기에 먼저 말을 꺼낸 키로스도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런 침묵이 불편했던 당사자, 제노비오스는.

"아, 그러고 보니 영주님께 전해야 한다는 급한 소식은 뭔가? 자네가 직접 점령지에서부터 여기까지 부랴부랴 달려올 정도면 보통 사건은 아닐 텐데."

화제를 돌리기 위해 그렇게 물었다.

이미 피곤했기에 굳이 심력을 더 소모하고 싶지는 않아 이제야 상세히 물어보는 것이긴 하지만, 궁금한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어지간한 소식이면 그냥 전령만 먼저 보내서 알리고 기사단장인 키로스와는 천천히 논의해도 괜찮았을 텐데. 굳이 그 수고를 해가며 본인이 직접 찾아오다니.

'대체 무슨 소식이길래.'

영지를 운영하는 원로 중 하나로서 당연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정말로 심각한 일이라면 저 노인네가 이렇게 태연하게 내 집무실에서 빈둥거릴 리는 없을 테니까, 급하긴 해도 감당이 안 되는 일은 아니겠지.'

제노비오스는 내심 그렇게 먼저 판단하며 키로스의 대답을 기다렸고.

"아, 그렇지. 아르잔 토후국의 동태가 심상치 않네. 이대로 가다간 곧 그쪽에서 먼저 쳐들어올 것 같아."

"뭐?"

"그래서 시급히 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영주님과 논의하러 왔다네."

"...."

곧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위급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키로스를 보며 말을 잃고야 말았다.

#037. 첫 번째이자 두 번째 (3)

여느 때처럼 영지를 시찰한 뒤 성으로 돌아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얼굴 하나가 나를 반겨주었다.

키로스 경.

우리 니카로스의 기사단장이자 영지 최고의 기사.

지금쯤 한창 바쁘게 (구) 시하브 토후국의 점령지를 관리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는 어떻게?

"아니, 키로스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렇게 뵈니 무척이나 반갑군요!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저는 전혀 들은 게 없는데."

"허허,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사전에 연락을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다급히 보고드릴 사안이 있어 불가피하게 이렇게 찾아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내가 먼저 반가움 반 의아함 반 정도의 심정으로 인사를 건네자, 키로스 경 역시 평소처럼 쾌활한 웃음을 되돌려주었다.

하지만 그런 친근한 안부 인사와는 달리, 그가 전하는 소식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아르잔 토후국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요?"

"그렇습니다. 놈들은 숨길 생각조차 없는 듯하더군요. 요 며칠간 무척이나 노골적으로 병사를 무장시키고 군량미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 말인즉슨...."

"예, 아무래도 아르잔 토후국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우리를 향한 선제적 침략 전쟁을 말입니다.

"...."

키로스 경이 엄숙하고 단호한 어조로 고한 결론을 듣고, 나는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르잔 토후국. 이웃한 월광교 소국.

몇 달 전 나는 죽은 가족의 복수라는 지극히 합당한 명분을 바탕으로 전쟁을 선포했었고.

아르잔 토후국은 감히 그 정당한 정벌에 개입하여, 우리의 원수인 시하브 토후국에 지원군을 보냈었다.

'덕분에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본래 나의 계획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적을 압도하는 것이었는데, 아르잔 토후국의 지원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수적 열세에 빠지고 말았으니까 말이야.

'진짜, 지금 생각해도 정말 치가 떨리는 일이야.'

물론 결국에는 내가 이기긴 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또 순순히 그 괘씸한 아르잔 토후국 놈들을 용서해줄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나의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정치적으로 판단해도, 무도한 아르잔 토후국이 먼저 정당한 복수에 난입했다는 명분까지 손에 넣은 셈이니까.'

안 그래도 지금의 니카로스와 나에게는 끝없는 확장과 정복만이 살길인 상황. 당연히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으니, 나는 한창 분주하게 아르잔 토후국까지 추가로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침공을 준비 중이던 그 나라가 도리어 나를 먼저 치려고 한다 이 말이지.'

이러면 조금.

계산이 복잡해지는데.

그렇게 내가 잠시 입을 다물자, 키로스 경과 동행하던 집사장 아저씨가 힐끗 내 눈치를 살피더니 곧 먼저 입을 열어 본인의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하브 토후국과 벌인 전쟁 때, 아르잔 토후국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원정 같은 것을 벌일 여유가 남아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 확실히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바로 그게 의문이지.

나의 침공 계획을 눈치챈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근래 우리 니카로스가 보인 호전적 태도를 고려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의 계획을 눈치채고 선제공격을 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게 과연 실제로 가능하냐는 것이지.'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과 시하브 토후국의 전쟁.

아군 1,030명과 적군 1,400명.

적의 총 병력 1,400명 중 500명은.

바로 아르잔 토후국 측에서 보내준 지원군이었다.

'그리고 마음 아프게도 그중 대부분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말이야.'

500명이라는 손실은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다. 아르잔 토후국 같은 소국으로서는 더욱 감당하기 어려울 테지.

그런 손해를 입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우리의 공격에 대비해 수세를 굳히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벌써 선제적 침공을 결심하고 준비하고 있다고?

상식적으로 이건 말이 안 된다.

'...그렇지만.'

나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던 키로스 경을 응시했다.

'이 보고를 올린 건 바로 키로스 경이야.'

키로스 경.

평소의 실없는 모습만 보고 깜빡하기 쉽지만, 그의 본질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제국의 변경에서 이교도들과 맞서 싸운 백전노장이다.

그런 그가, 최전방에서 적과 마주하고 있던 그가.

놈들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렇기에 나는 더는 홀로 고민만을 반복하지 않았다.

"키로스 경, 마지막으로 한 번만 물어보겠습니다. 아르잔의 침략은 확실합니까?"

그저 다시 딱 한 번 되묻기만 했을 뿐.

확답을 요구하는 영주의 질문.

가신으로서 당연히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키로스 경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저의 보고와 추측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최대의 확신을 담으며.

결론만큼은 온전히 영주인 나에게 맡기는 그 대답.

정말 무척이나 키로스 경다웠다.

'좋아. 그렇다면.'

영주로서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없지.

원래 나처럼 현명한 교양인은 전문가를 적재적소에 활용하고 신뢰하는 법이라고.

"좋습니다. 그러면 우선 놈들이 머지않아 쳐들어올 거라고 가정하고 그 대책부터 수립해 보죠."

이런 일일수록 원래 신속한 판단과 대처가 중요하다.

괜히 어영부영하다간 이도 저도 안 돼.

"알겠습니다, 영주님."

내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곧장 키로스 경과 집사장 아저씨, 두 원로 가신들의 대답이 돌아왔다. 되물음이나 반발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일단은 그 아르잔 놈들이 완전히 미친 게 아닌 이상, 분명히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나는 집사장의 추측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르잔 토후국의 전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양측 모두 최상의 상태라고 한다면,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보다 근소 우위에 있는 정도일까. 간단히 말해 시하브 토후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 승전으로 기세가 오르고, 아르잔 쪽은 큰 손해를 본 것을 고려하면 지금은 한시적으로 우리가 조금 더 우위에 있을 테지.'

심지어 침공은 방어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러니 이런 현황 속에서 공격을 계획한 만큼, 당연히 아르잔 놈들도 판을 뒤엎을 회심의 수단 정도는 마련했다고 가정하는 게 옳을 것이다.

"문제는 그 믿는 구석이 무엇인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죠."

"그들 역시 시하브처럼 또 다른 동맹을 구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무척이나 대견하게도 집사장 아저씨가 먼저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지만, 슬프게도 곁에 있던 키로스 경이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르잔 토후국을 제외한 다른 인근 국가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낌새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추가 동맹이 있을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일단 저는 회의적입니다."

확실히 나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나중에 따로 자기들끼리 뭉치면 또 몰라, 반쯤 침몰한 저 시하브-아르잔 연합에 인제 와서 뒤늦게 합류할 만한 바보들은 아마 없겠지.

애초에 아르잔 토후국이 우리와 시하브 토후국 사이에 끼어든 것부터가 상당한 무리수였다. 그러니 애초에 명분조차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다른 국가들이 굳이 괜한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유심히 지켜보긴 하겠지만.'

이미 시하브 토후국 멸망이라는 이변을 한 차례 일으킨 나와 니카로스 남작령의 존재를 말이야.

사실 이런 경계와 주목도 나에게는 썩 좋은 일이 아니지만, 어쨌든 당장 급한 일은 아니다.

지금은 아르잔에 집중할 때다.

이번에는 내가 또 다른 의견을 냈다.

"어쩌면 용병을 불러들일 속셈일지도 모르겠군요."

지난 전쟁 때 우리가 안티모스의 푸른이리 용병대를 고용해서 적지 않은 재미를 봤으니, 억울했던 아르잔 쪽에서도 비슷한 수단을 동원하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월광교 터번쟁이 놈들이 불러들일 수 있는 용병이라면... 역시 그 두개골에 환장한 미치광이 놈들일까요."

키로스 경이 드물게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황금십자교의 세력이 바할리아 제국 하나로 대표되는 것과는 달리, 성화월광교의 세력은 수십 개의 소왕국으로 쪼개져 있다.

덕분에 용병을 고용하는 방식도 제국과 차이가 있지.

"...그렇다면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긴 하지만, 과연 아르잔 토후국이 그들을 불러들일 정도의 능력이 있을지는 의문이군요."

사실상 돈만 있다면 어지간한 용병대는 아예 떼거리로도 고용할 수 있는 제국과는 달리, 월광교 땅에서 규모가 있는 용병대를 고용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명망과 명분 역시 충분히 갖춰져야만 한다.

아, 물론 당연히 돈은 기본적으로 빠져나가는 거고.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의 용병대는 단순히 먹고살 돈을 벌기 위한 직업에 가깝지만, 월광교의 용병대는 신에게 봉사하는 수도사에 가까운 존재이니까.

'흉기를 들고 가차 없이 이교도의 머리를 깨버리는 그런 수도사들 말이야.'

덕분에 아무리 아르잔 토후국이 용병대를 외부 병력으로 끌고 오고 싶다고 한들, 그 요청을 받은 수도사들이 수긍을 안 하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하, 어쩌겠니.

이게 바로 발전된 사회 시스템의 차이인걸.

"...."

어쨌든 당장 중요한 건 그 가능성이다.

아르잔 토후국이 용병대를 고용할 능력이 있을까.

그리고 수도사들이 요청을 받아들일까.

그런 가능성.

이런 내 지적에 어느새 키로스 경과 집사장 아저씨 역시 침묵한 채 고심에 빠져있었다.

쉽지 않은 문제야.

상대가 우리라는 이교도 세력이니 기본적인 고용 요건 정도는 충족하겠지만, 이번 전쟁에서 아르잔도 이런저런 추태를 상당히 많이 부린 편이라 거절할 가능성도 충분하단 말이지.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르잔이 꼭 수도사들을 끌어들일 거란 보장은 없지.'

아니, 애초에 비장의 수단이 확실히 용병이라는 증거 또한 아직 없다. 지금 모든 것은 그저 추측일 뿐이니까

결국, 한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역시 이런 논의로는 끝이 없겠군요."

그래, 이대로는 답이 없다.

무책임한 소리가 같지만 어쩔 수가 없어.

'추측의 근거로 쓸 증거들이 너무 부족하니까.'

제국에게 있어 국경 너머는 미지의 땅이나 다름없다.

국경 근처의 상황도 간신히 파악하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인데, 그보다 더 깊은 곳의 내부 사정 같은 것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여유도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가스파르 영감님 정도라면 몇 가지 증거를 더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할아버지에게도 쉽지만은 않은 일일 것이다.

불가능까지는 아니겠지만, 분명 시간은 걸리겠지.

'그리고 이미 적들이 준비하고 움직이고 있다면.'

그 시간을 기다릴 여유 따위는 아마 없을 거야.

명확한 상황 파악 따위를 하다간 늦는다.

지금은 당장 가지고 있는 정보만을 최대한 활용해서 대책을 세울 때란 이야기다.

"그러니 지금은 가능한 한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요컨대 야전의 미덕을 발휘할 때라는 것.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영주님."

"확실히 그 방법이 최선일 듯하군요."

다행히도 두 원로 아저씨도 이대로는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했는지, 순순히 나의 제안에 동의해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 구체적인 방안이 문제인데 말이야.

'사실 떠오르는 것들이 아예 없지는 않은데....'

이게 나 혼자 결단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거든.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집사장님."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방도를 고민하고 있던 집사장 아저씨를 불렀다.

"네, 영주님."

제노비오스 집사장은 다소 갑작스러운 나의 부름에도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래, 우리 집사장님.

이번 아르잔 토후국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 파벌과 함께 힘쓰시다가, 내 목숨이라도 보장받기 위해 끝내 무리수를 두었던 우리 집사장님.

그리고 다행히도 지금은 마음을 고쳐먹고 완전히 나의 편이 되어준 집사장님.

아무래도 이번 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서는, 그런 집사장 아저씨의 결단과 협조도 필요할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이번 기회에 가신들을 모두 모아놓고 하고 싶은 말도 있고 말이야.

"저의 즉위식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네, 네? 즉위식 말씀입니까?"

한창 전쟁 얘기하다가 갑자기 즉위식 얘기를 꺼내서 그런가, 집사장 아저씨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하지만 곧 숙달된 관료답게 또박또박한 어조로 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

"그, 네. 그렇습니다. 전부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보름 정도면 준비가 끝날 것으로 예상하오니, 영주님께서 특별히 원하시는 날짜가 있다면 최대한 거기에 맞추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역시 집사장님에게 믿고 맡긴 보람이 있군요."

보름, 보름이라.

나는 잠시 머릿속으로 차분히 계산해본 뒤, 이번에는 영지의 기사단장인 키로스 경에게 물었다.

"키로스 경, 현시점에서 사실상 아르잔 토후국을 향한 원정 준비는 대부분 끝난 상태지요?"

"맞습니다, 영주님. 시하브 토후국과의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실질적인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기에, 보급과 편제 같은 핵심적인 사안들은 이미 모두 완수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병력의 소집 정도뿐입니다."

그렇지.

애초에 집사장이랑 다른 가신들이 반대하든 말든 나는 무조건 아르잔 토후국까지 밀어버릴 생각이었다.

덕분에 최종 결정을 위한 가신단과의 정쟁이랑 별개로 준비는 쉬지 않고 하고 있었지.

이런 우격다짐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은 나도 그리 선호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야, 그렇게라도 안 하면 우리 다 죽으니까.'

이 망할 니카로스에 여유 따위는 조금도 없으니까.

정치적 갈등 따위로 전쟁과 정복을 멈추면, 머지않아 나타날 동방의 정복자에게 무력하게 쓸려나갈 뿐이에요.

"즉위식은 보름 뒤, 원정 준비는 대부분 완료...."

두 사람의 보고를 모두 들은 나는 잠시 작게 소리 내어 중얼거리며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소재는 충분히 모인 것 같네.

"저, 영주님...?"

내가 두 가지 키워드를 이리저리 실시간으로 조합하는 모습을 본 집사장 아저씨가 설마설마하는 눈빛으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음, 정말로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집사장님의 그 추측이 맞는 것 같은데요.

마침내 모든 결론을 내린 나는.

호기롭게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의 즉위식 날 곧바로 선전포고하고 출병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입 밖으로 결국 나와버린 나의 결론에, 집사장은 그저 입을 쩍 벌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경악했다.

그래, 저런 반응도 이해한다.

전쟁이란 중대사를 이렇게 급작스럽게 결정했으니 놀랄 수밖에 없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아무리 고려해봐도 이게 최선의 대처야.'

아직 나는 영주로서 부족함이 많고 경험도 더 쌓아야 하지만, 적어도 이 게임의 본질에 관해서는 알고 있다.

우리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 아르잔 토후국이 선제공격할 속셈이라면.

우리도 아르잔 토후국의 선제공격을 막기 위해서 '선제 선제공격'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

'놈들이 뭘 준비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준비가 다 끝나기도 전에 모조리 쓸어버리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

그렇지?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이게 제일 합리적이네요.

#038. 첫 번째이자 두 번째 (4)

적의 속셈을 막기 위해서.

예정보다 일찍 아르잔 토후국을 공격하자.

단순히 농담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의견이 진지하게 타당성을 검토해보자는 것임을 깨닫자 키로스 경과 집사장 아저씨, 두 원로 역시 경악을 멈추고 곧장 심도 있는 분석을 시작했다.

"확실히 그게 최선의 해답일 수도 있겠군요. 갑작스럽게 계획을 변경하는 만큼 기존 일정보다는 더 분주하게 준비해야겠지만, 전략적인 차원에서는 크게 무리한 강행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니카로스의 모든 군사적 업무를 총괄하는 키로스 경은 나의 의견에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그래, 나도 다 충분히 고심하고 낸 의견이야.

내가 즉위한 이래로 우리 영지는 항시 전투준비태세나 다름없었다. 군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도 안티모스가 이끄는 푸른이리 용병대와 맺은 계약은 한 번 더 조율해봐야 할 듯합니다, 영주님."

"옳으신 말씀입니다. 현재 우리 군에서 용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니까요. 제가 직접 연락해보지요."

시하브 토후국과의 전쟁은 끝날 무렵, 머지않아 새로운 전쟁을 또 벌일 예정이라고 밝히고 그때도 계약을 맺어 함께 하자고 구두 약속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녀석들은 그때그때 외주 받아서 활동하는 프리랜서나 마찬가지니까 한 번 더 확인을 해봐야겠지.

'안 된다고 그러면 다른 용병대를 또 구해야 하니까.'

그래도 이 근방에 안티모스 수준의 능력자는 거의 없으니 만약 계약이 파투나면 많이 아쉬울 것 같긴 하다.

어디 한 번 그 시끄럽던 안티모스가, 직접 호언장담한 것만큼 훌륭한 의리를 지니고 있는지 확인해보자고.

그렇게 열심히 키로스 경과 전쟁 계획을 구상하던 중, 한동안 가만히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집사장 아저씨가 마침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저는 조금 우려스럽습니다."

"...."

"...."

그렇게 말을 시작한 집사장을 나와 키로스 경이 잠시 말없이 물끄러미 쳐다만 보자, 곧 집사장은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급하게 해명을 시작했다.

"무, 물론 저도 전쟁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르잔 토후국의 정벌해야 할 필요성은 저 역시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은 진작에 개심했다는 사실을 마구 호소하는 것 같은 그런 목소리였다.

허허, 우리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이죠.

"하하, 물론이지요. 저도 당연히 집사장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 편히 어떤 점이 우려되는지 설명해주시길 바랍니다."

반대되는 의견이라고 듣지도 않고 무시할 수는 없지.

그건 교양인답지 않은, 아주 부적절한 자세야.

내가 그렇게 안심시키자 집사장은 비로소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영주님과 우리 군의 승리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그 분야는 저보다 키로스 경이 훨씬 더 전문가지요. 저는 그의 판단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제가 우려하는 것은 그 이후입니다.

집사장은 그렇게 말하며 나의 두 눈을 바라봤다.

'그 이후의 이야기, 라.'

그 말인즉슨.

"점령지 관리를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영주님."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건 간과할 수 없는 주제다.

"영지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몸으로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무척이나 송구스럽습니다만, 현재 우리 니카로스의 행정적 역량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그렇지.

본래 니카로스 남작령은 이 일대에서 가장 약소한 세력 중 하나였고, 당연히 그만큼 적은 인력만으로도 일상적인 업무를 소화할 수 있는 영지였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더 커다란 영토의 시하브 토후국을 집어삼켜 버렸고, 이제는 시하브 토후국과 비슷한 체급의 아르잔 토후국까지 정복할 계획을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추가로 아르잔 토후국까지 정복한다면... 분명히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욕심이 과해서 무리하게 처먹다가 배탈이 나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지.

"확실히 합리적인 지적이군요."

"그저 소임을 다하지 못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집사장님의 잘못이 아니니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집사장 아저씨는 본인의 부족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런 거로 그를 탓하는 것은 부조리한 일이다.

애초에 이건 약소 영지의 태생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가까우니까 말이야.

"저도 그 문제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이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시하브 토후국 정벌 직후부터 나왔던 이야기니까.

당연히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애초에 인재 풀 자체가 취약하다는 니카로스의 근본적인 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문제기도 하다.

따라서 아직도 명확한 방도는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방도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지.'

이미 원작 게임, <마이트 앤 로열>에서는 한 번 극복해본 적 있는 상황이니 당연히 대처법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단지 실제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꺼려지는 방법이라 여태껏 망설였던 것뿐.'

이 세상은 단순한 게임보다 훨씬 더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현실 세계니까. 그래서 혹시나 더 좋은 방법이 존재할까 계속 고민했지.

하지만 이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라면, 역시 더 망설일 여유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마침내 결론을 내린 뒤,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에우스페나의 페트로스 집사장과 이야기를 해보죠."

***

아르잔 토후국.

바할리아 제국의 국경과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그 월광교 소왕국은 현재 불안함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추잡하고 역겨운 이교도 쓰레기들이 어떻게 감히, 감히!"

아르잔 토후국의 지배자, 에미르 바샤르.

그는 연신 방을 왔다 갔다 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왕국을 책임지는 주인으로서 그다지 적절한 태도가 아니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지만, 그걸 알면서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그는 지금 명백히 궁지에 몰려있었으니까.

고작 니카로스 남작령의 애송이 남작 하나 때문에.

시하브 토후국이 졌다. 그리고 멸망했다.

500명의 지원군과 자신이 아끼던 장군 나스라딘까지 붙여줬건만,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시하브 토후국이 멸망한 이상 이제 니카로스 남작령의 다음 목표는 아르잔 토후국이 될 수밖에 없다.

영지의 모든 신하가 이 분명한 사실에 대해 걱정하며 쑥덕거리는 것을 에미르 바샤르는 감히 막지 못했다.

자신 역시 지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놈들이 쳐들어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다.

지금은 그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겠지.

문제는 이것이었다.

'그래서 이길 수 있느냐?'

에미르 바샤르는 그의 신실함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이고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었다.

'불가능하다.'

아르잔 토후국은 진다.

지난 원정에서 니카로스 남작령이 단독으로 동원한 병력이 자그마치 1,000명을 넘겼다.

시하브 토후국이 큰 피해도 주지 못한 채 패배했으니 이번에도 비슷한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겠지.

게다가 단순히 머릿수만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놈들이 자랑하는 검은 매의 기사단이 떨치는 위명이야 이미 유명하고 심지어 지난 전쟁 당시 보병대의 절반 이상이 숙련된 용병이었으니까.

'망할 놈들. 대체 그만한 자금은 어디서 났는지.'

반면 아르잔 토후국은 어떤가.

시하브에 지원군으로 보낸 500명이 궤멸했던 피해조차 아직 복구하지 못했다. 이 상태로는 수적 열세를 피할 수 없다. 병력의 질까지 고려하면 더 암울해진다.

이래서야 패배는 명백하다.

아르잔 토후국은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니카로스 남작령을 이길 수 없다.

"무슨 욕을 그리 하십니까? 조금 망측하군요, 각하."

그래, 혼자만의 힘으로는 말이다.

그렇다면 혼자가 아니면 되지 않겠는가.

전력 부족이라는 현실을 알고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할 만큼 에미르 바샤르가 어리석은 인간은 아니었다.

"...아쉬파르 공."

그렇기에 지금 아르잔 토후국은 혼자가 아니다.

에미르 바샤르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그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하얗게 센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

아쉬파르라고 불린 노인은 지팡이를 짚으며 에미르 바샤르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아쉬파르는 고귀한 혈통이자 왕국의 주인을 향해 면전에서 대놓고 망측하다고 지적하는 무례를 저질렀지만, 에미르 바샤르는 감히 그 사실을 지적할 수 없었다.

그는 결코 평범한 노인이 아니었고,

"미천한 것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한들 결국 모두 무의미한 일일 뿐입니다. 애초에 벌레 따위가 무리를 짓는다고 용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아르잔 토후국에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그것과 하등 다르지 않은 상황입니다."

노인이 내뱉은 것은 오만할 정도로 당당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그 누구도 감히 외람되이 그 발언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다.

저 노인은, 아쉬파르는 분명히 그 망상과도 같은 말을 정말로 실현할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 아르잔 토후국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지금 그들에게는 아쉬파르라는 동맹이 있다.

겉으로 보면 고작 한 개인에 불과하지만, 홀로 1,000에 달하는 병력조차 압도할 수 있는 그런 강한 동맹이.

'아쉬파르만 있다면 니카로스와의 전력 차이도 충분히 메꿀 수 있다.'

에미르 바샤르는 분명히 그렇게 판단했다.

승리할 수 있다는 객관적인 가능성을 분명히 보았다.

그렇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생각해 보면 각하께서 무지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렇게 불안에 떠시는 것도 이해는 합니다, 허허."

저 지나치게 거만한 태도.

겉으로 존대는 하고 있지만, 그 말 하나하나에 묻어나오는 오만함은 전혀 숨길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숨길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이해해 주어, 감사하오, 아쉬파르 공."

하지만 에미르 바샤르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독립된 에미르가 보이기에는 지나친 저자세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저런 오만함도 당연한 일이지.'

심지어 지금은 아르잔 토후국 쪽이 아쉬운 상황.

만약 아쉬파르가 불쾌함을 느껴 갑자기 떠나기라도 한다면 전쟁은 분명 패배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아르잔 토후국은 멸망하겠지.

그 사실을 알기에 에미르 바샤르는 그저 몰래 이를 으드득거리기만 할 뿐 함부로 아쉬파르의 무례함을 지적하지는 못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막대한 거금까지 들여가며 저런 오만불손한 인간을 고용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애초에 다른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저 안하무인의 노인을 제외하고는 지금 그 누구도 아르잔 토후국을 도와주지 않았다.

주위의 다른 월광교 국가들은 니카로스 남작령의 승리에 겁은 먹은 것인지 아니면 싸움이 끝난 뒤 어부지리를 노리는 것인지, 조용히 관망할 뿐 그 누구도 아르잔 토후국을 돕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성전에서 가장 믿음직한 존재인 수도사들 또한 이번 전쟁에서는 자신들이 나설 이유가 없다는 헛소리나 하며 단 한 명의 병력조차 지원해주지 않았고.

'이런 배교자보다 못한 쓰레기 놈들...!'

성전이라는 이유로 시하브 토후국을 돕기 위해 나섰다고 이런 처지가 된 에미르 바샤르로서는 몹시나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었지만, 그는 그저 참고 감내했다.

이 시대가 누구에게나 냉혹하다는 것은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제국과 월광교 국가를 가릴 것 없이.

사실 아쉬파르와 계약한다는 이 꺼려지는 선택지조차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긴 했지만, 오히려 이만한 능력을 지닌 존재를 고작 돈만으로 끌어들인 것 자체가 무척이나 운이 좋은 경우에 가까웠으니까.

"저만 믿고 계신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각하에게 승리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승리.

그래, 그것이면 됐다.

승리할 수만 있다면 이 정도 굴욕과 손해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굴욕은 오직 자신만의 것이며 어차피 아르잔 토후국이 멸망한다면 금전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지금 고민해야 하는 것은 오직 저 간악한 이교도를 심판하고 파멸시킬 계획뿐이다.

'니카로스 남작,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아쉬파르가 함께하는 이상 더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순식간에 니카로스 남작령의 침공해 모든 것을 짓밟고 유린하고 복수할 뿐이다.

'사로잡는다면 내 결코 편하게 죽이지 않으리라!'

모든 것은 고귀한 달의 신, 마네스의 이름으로.

에미르 바샤르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며 머지않아 다가올 전쟁을 기다렸다.

#039. 첫 번째이자 두 번째 (5)

보름이라는 시간은 무척이나 빠르게 지나갔다.

원래는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상황을 관망한 뒤 선전포고할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개전해야 하는 만큼, 나를 포함한 영지의 모든 이들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침내 모든 채비가 끝나고.

"영주님, 즉위식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미 모든 가신이 모여있습니다."

평소보다 훨씬 진중한 목소리로 그렇게 고하는 집사장을 보며 나는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이미 가신들로 가득 차 있는 알현실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나갔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니까.

"니카로스 남작령의 주인이신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남작님 납시오!"

내가 알현실에 나타나자 곧장 체격 좋은 위병 하나가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거 참.

저런 건 누가 시킨 건지.

'이 방 안에 내가 이 영지의 주인인 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말이야.'

여러모로 조금 낯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속내와는 별개로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

그렇게 계속 알현실 가장 깊은 곳에 마련된 나의 자리로 걸어가다 보니, 자연스레 주위의 늘어선 가신들의 얼굴이 눈에 담겼다.

즉위식.

게임에서는 수도 없이 겪은 상황이었지만, 역시 모든 게 현실이 되고 나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내가 정식으로 영주로 즉위하는 날이다.

실질적으로는 니카로스의 주인이 된 지 벌써 1년 가까이 지났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 이 즉위식의 가치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이 즉위식이야말로 우리 니카로스가 당면했던 위기를 하나 이겨내고, 내가 이제 영주로서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상징이나 다름없으니까.

나뿐만 아니라 이미 영지의 모두가 그 사실의 무게를 체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장 불가피한 사정이 없는, 가능한 한 모든 가신이 빠짐없이 이 자리에 참석 중이었다.

'점령지를 지키느라 급하게 다시 돌아간 키로스 경은 못 왔지만 말이야.'

엄청나게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는 없지.

전쟁이 임박한 이 시점에 거길 비워둘 수도 없으니까.

'그래도 여기가 이렇게 바글바글한 건 오랜만이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자연스레 옛 기억을 되새겼다.

오늘만큼 사람이 많았던 날이 또 언제 있었더라.

그래, 마누엘이 복수 원정을 나갔다가 전사해 버리고, 갑작스럽게 내가 영주가 되어 버렸던 그 날이 아마 오늘과 비슷했던 것 같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니 어째 분위기도 그 날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긴. 어찌 보면 당연히 일일 수도 있다.

달리 생각하면 그 날 또한 일종의 즉위식이었으니까.

그 누구도 준비되지 않았던.

갑작스럽고 조잡한 그런 즉위식 말이야.

'하지만 다행히 모든 게 그 날과 똑같은 건 아니야.'

느낄 수 있다.

오늘은 분명히 다른 점이 있었다.

이 느낌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계속하던 사이, 어느새 나의 자리까지 도착하고 말았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 앉았고, 그대로 이 알현실의 가장 높은 곳에서 모두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 날과 똑같이 여전히 모든 가신이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오롯이 나뿐이다.

그러나 똑같지는 않다.

이제 이 느낌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지 떠올랐다.

'그 시선 속에 담겨 있는 게 다르지.'

그때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신뢰가 지금은 있다.

나는 자신 있게 그리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이곳에 있는 가신 모두가 확고부동한 신뢰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건 그저 꿈 같은 이야기일 뿐이지.

내가 반대 파벌의 수장인 제노비오스 집사장을 설득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대표 한 명이 전향한다고 반대 의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기에 여전히 불안함은 존재했고, 아직 불만스러운 기색 또한 적지만 남아있었다.

그렇지만.

'그 모든 불안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내 뜻에 공개적으로 반발하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래, 이게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지.

준비도 되지 않은 채 즉위한 나를 향해 의심과 불손함을 가득 뿜어내던 그 날과는, 이미 확연히 다른 상황이 되었다.

우려는 되지만 영주님의 뜻이니 따르겠다.

반대하고 싶지만 더는 반대할 힘도 명분도 없다.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다. 지금은 싸울 때다.

영주님은 이미 한 번 스스로 승리를 쟁취하신 분이다.

지금은 영주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최소한 이 공간의 모든 가신이 이 정도 생각 정도는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이 정도만 되어도 엄청나게 감지덕지하지.'

완벽하지는 않지만, 무척이나 고무적인 결실이다.

이제는 가신들이 협조를 안 해준다고 더 불평하고 투덜거리는 것도 민망할 정도로.

물론 이런 지지가 무한정 계속될 리는 없다.

내가 앞으로 잘한다면 지금보다 더 든든한 뒷받침을 해줄 테지만, 반대로 내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실패한다면 이 신뢰는 마치 한순간의 환상처럼 순식간에 바스러지고 말겠지.

하지만 그런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냥 내가 계속 잘하면 되는 거잖아?'

애초에 내가 다스리고 있던 것은 처음부터 실수 따위는 용납되지 않는 끔찍한 영지였으니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나는 과거와는 달리 무척이나 편안하고 평온한 심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오늘 하고 싶은 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전에 가장 먼저 우리 니카로스를 지금까지 지탱해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짧은 문장을 입에 담고, 곧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여, 영주님...!"

고개를 숙였기에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그 상태로도 갑작스러운 나의 감사 인사에 다들 당황하고 웅성거리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나 자신이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 집사장을 심판하고 즉위식을 계획한 이래로 이 말만은 가신들에게 꼭 공개적으로 하고 싶었어.'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아니, 원래도 머리로는 알고 있긴 했지만, 이제는 정말 제대로 직접 체감 또한 하고 있으니까.

뒤돌아보면, 그리 생각하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의식해서 되새기긴 했지만, 어느새 나는 우리 가신들을 일종의 장해물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키로스 경이나 아르센 같은 극소수를 제외한, 나의 방침에 반대하는 다른 모든 가신을 말이야.

솔직히 노력했음에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나는 명백한 정답을 이미 알고 있는데, 그들은 그 정답을 받아쓰는 것을 계속 막아왔으니까.

'당연히 답답할 수밖에 없지.'

그렇지만 이들 역시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매 순간 나름대로 우리 니카로스가 살아남고 또 부강해질 방법을 고민하고 있으며, 다른 누구에게도 쉽지 밀리지 않을 애착 또한 두고 있다.

'그저 그들이 상상하는 미적지근한 방법 따위로는 이 난세를 헤쳐 나갈 수 없을 뿐.'

이들이 부족하다기보다는 그냥 시대 자체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게 가장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하긴.

애초에 게임 속 세상의 주요 배경이 될 정도의 시대니까 절대로 평범할 수는 없지.

"그렇기에 여러분이 어떤 걱정을 하는지, 무엇을 우려하는지 저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께서 우리 니카로스를 걱정하고 계신 마음 역시 조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나는 시선을 돌려 알현실을 가득 채운 모든 가신의 얼굴을 차례대로 하나하나 응시하였다.

그래, 나랑 보는 관점이 다르다고 해서.

'이 아저씨들이 나쁘고 무능한 사람이란 뜻은 아니지.'

지난 그 집사장 아저씨의 바보짓 이후로 나는 그 사실을 여실히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가신들은 이 세상이 게임이던 시절보다 훨씬 더 풍부한 생각을 하고 훨씬 더 다양한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솔직히 그러한 특징이 언제나 영주에게 언제나 득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들이 없다면 영지는 돌아가지 않는다.

비록 아직 온전히 나를 향한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가신단이 영지를 향해 그만한 충성을 보였다면 나 역시 그에 맞춰 어느 정도는 진심을 보여야 한다.

그게 바로 영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이자, 영주로서 가신과 영지를 이끌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저는 이 전쟁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아주아주 오랜만에.

조금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복수도, 어린아이의 치기도, 미숙한 영주의 만용도 아닙니다."

그래, 애초에 그런 거였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겠지.

나는 지혜롭고 현명한 문명인이니까.

그러니 이 모든 것을 저지른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저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일 뿐입니다."

나의 극단적인 단언에 가신들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설득이 아니니까.

"여러분들은 모두 제국의 최전방에서 싸우고 계시는 투사입니다. 그렇기에 사실 여러분들 역시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어차피 이들 또한 이미 답을 알고 있을 테니까.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 이 변방 땅에서 살아왔고 또 투쟁해온 사람들이다. 비록 나처럼 이 세상에서 펼쳐질 무수한 가능성을 보고 온 것은 아닐 테지만, 현지인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분위기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저 내심 부정해왔을 뿐이죠."

"...."

그저 믿고 싶지 않았을 뿐.

불안전하지만 적어도 어떻게든 굴러가고 있는, 현 바할리아 제국의 체제가 영원하길 빌었을 뿐.

그렇지만 나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이 환상을 산산조각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도 훨씬 일찍.

막을 수도 없을 만큼 일찍.

"위태로운 우리의 제국을 노리고, 여러분들이 기억하는 그 어떤 과거보다도 더 거대하고 혼란스러운 난세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플레이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나타나 개입하기도 전부터 정해진 시대의 흐름이니까.

"무척이나 마음이 아프지만, 이 시류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설령 이 세상 모두가 그 혼돈을 피해갈 수 있다고 한들 우리만큼은 절대로 피할 수 없습니다."

거기까지 얘기한 뒤, 나는 잠시 천천히 숨을 골랐다.

어느새 모든 가신이 그저 가만히 입을 다문 채 나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떨까.

나의 이 막연한 이야기들이 이들에게 제법 그럴듯하게 들리고 있을까?

아직 거기까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부터 말할 이유 정도는 모두가 공감하리라 믿는다.

"우리가 바로 제국의 가장 앞장선 방패이기 때문에."

<마이트 앤 로열> 최악의 영지.

가장 첫 번째로 멸망하는 제국령.

도전과제 달성률 0.0%를 자랑하는 통곡의 벽.

플레이어의 지옥.

우리가 모두 그런 곳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그렇기에 저는 바로 그 최전선의 주인으로서 결단을 내리겠습니다."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바람직한 그런 결단.

1만 시간을 바친 플레이어로서 증명한 바로 그 결단.

"이 다시 오지 않을 시대의 격랑을 기회로 삼아, 니카로스의 번영을 불러오겠습니다. 시대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 자들의 피와 살점을 물어뜯어 살아남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패배자들을 발판으로 삼아 폭풍 속에 몸을 던질 용기뿐이야.

"지금의 전쟁은 그저 그 생존과 번영을 위한 시작에 불과합니다."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되지만, 그래도 갈 길이 멀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부디 저를 믿고 따라와 주십시오."

아직 갈 길이 한참 먼데 이런 데서 발목이 묶여서는 안 되지.

"저는 그저 결과로서 증명하겠습니다."

만약 결과가 안 좋다면.

어떻게 내가 보상을 해주면 좋을까.

솔직히 그 부분은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어차피 그때쯤이면 보상을 받을 사람은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니카로스 남작령의 유일하고 정당한 영주로서 선언하겠습니다."

즉위식의 끝.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이 땅의 명명백백한 주인이다.

"아르잔 토후국 정벌, 시작하겠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번영과 영광을 위해서.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승리는 반드시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미 선전포고문을 든 나의 전령들이 아르잔 토후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겠지. 이제 더는 아무도 막지 못한다.

또 다른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으니까.

"...."

그렇게 나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잠시 갑작스러운 침묵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숨을 쉬고 침을 삼키는 것마저 조심스럽게 느껴질, 그런 무거운 그런 침묵.

하지만 결코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니카로스 만세."

누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외쳤다.

비록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이 순간에는 그 어떤 것보다 뚜렷하고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자연스레 그 발원지로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집사장 아저씨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아저씨가 시작이었다.

"니카로스 만세!"

"니카로스 만세! 니카로스 만세!"

"티베리오스 남작 각하 만세!"

하나둘씩 다른 가신들 역시 소리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모두의 함성과 포효가 알현실을 가득 채웠다.

진동에 방 전체가 요동치도록 격렬하게.

그리고 나의 몸조차 오싹오싹 떨릴 정도로 강렬하게.

그 떨림을 느끼자.

나도 모르게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 같은 아마추어의 연설 한 번으로 인해, 앞으로 있을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아.'

내가 워낙 현명한 지식인인지라 원래 그런 헛된 기대하고는 그다지 인연이 없거든.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히 나와 집사장 같은 권력자의 눈치를 보고 억지로 환호하는 자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신들과의 갈등도 다시 이어지고, 극단적인 상황 또한 언제든지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했잖아.

당장 우리는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 정도만 신경 써도 충분하다고. 이 이상은 과한 욕심이야.

그래,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모두의 사기가 높은 것만큼 좋은 일도 또 없지.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니까 부디 이 분위기 그대로만 갑시다.'

나는 마침내 마지막 말을 입에 담았다.

"출진하겠습니다."

오직 그렇게 고하며.

난 자리에서 일어나 알현실 밖으로 전진을 시작했다.

"니카로스 만세!"

"티베리오스 남작 각하 만세!"

내가 떠나고 있음에도 함성은 끝나지 않았다.

방을 가득 채운 모든 가신이 내가 지나가는 한 걸음 한 걸음 전력을 다해 소리쳤다.

좋아.

이게 바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내가 일으키는 두 번째 전쟁이다.

두 번째니까.

당연히 처음보다는 훨씬 더 잘해야겠지.

자신은 이미 충분히 있다.

***

"...."

두 다리가 떨려올 정도로 울리고 있는 알현실.

그 가장 깊고 어두운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한 소년은, 서서히 떠나가는 영주의 뒷모습을 보며 단 한 치도 눈을 떼지 못했다.

"...니카로스 남작,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그 소년, 제논 발란티스의 숨겨진 사생아이자 현 영주 티베리오스의 이복동생, 레온은 본인도 모르게 그 이름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래, 그는 이 자리에 초대받아서 온 손님이었다.

초대한 이는 바로 니카로스의 주인 티베리오스였다.

지난번 영주와 함께 방문한 이후로 오랜만에 레온의 집에 찾아온 집사장은, 영주의 서신이라며 즉위식의 초대장을 건네주었다.

당연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레온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감히 거절 같은 것은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어째서 자신이 이런 장소에까지 초청을 받은 것인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나 즉위식 때 부정한 사생아인 자신을 공개하고 제물로 쓸 생각인가 하고 두려움에 떤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하찮은 의문 따위는 조금도 없다.

"...."

소년은 그저 그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깊은 눈빛과 함께, 계속 영주가 떠나간 자리만을 바라봤다.

#040. 야전의 미덕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