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야전의 미덕 (1)
총 1,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나는 위풍당당하게 아르잔 토후국을 향해 진군했다.
워낙 주위에 사람이 바글바글한지라 겉으로는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세세하게 헤아려 보면 지난 시하브 토후국 정벌 때보다 대략 100명 정도 수가 줄었다.
'원하던 결과물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나도 당연히 병력은 많은 쪽이 좋다.
일단 머릿수가 많아야 마음 역시 자연스레 든든해지는 법이니, 가능하면 최대한 많이 이끌고 오고 싶지.
하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예상보다 빠른 선전포고 탓에 병력을 징집할 시간이 다소 부족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우리 역시 지난 전쟁의 피해를 완전히 복구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압도적으로 승리했다고 한들 피해가 아예 없을 수는 없거든.'
그래도.
크게 부족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애초에 조기에 전쟁을 선포한 것부터가 내가 스스로 판단해서 내린 전략적 결단이다.
그 때문에 병사들을 모을 시간이 조금 부족해지긴 했지만, 반대로 약간 모자란 병력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시간과 타이밍을 얻게 되었다.
건방진 아르잔 토후국 녀석들.
지금쯤 예상보다도 훨씬 빠른 우리의 진군을 눈치채고 엄청나게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적의 계획을 부수고 흐름을 주도하는 것.
이거야말로 최고의 이득이다.
'게다가 그 부족한 병력을 메꿀 방법이, 또 아예 없는 것은 아니거든.'
이런 걸 바로 교토삼굴(狡兔三窟)이라고 하지.
현명한 토끼는 숨을 굴을 세 개는 파놓는 법이라고.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며 진군을 하다 보니, 어느새 이런 순간에 없으면 어색할 그런 사나이 한 명이 나의 옆에 착 달라붙어 왔다.
"하하! 드디어 또다시 이 순간이 왔군요! 제가 이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르실 겁니다, 남작님!"
베테랑들로 이루어진 푸른이리 용병대의 대장.
언제나 시끄러운 호들갑과 함께하는 남자.
그렇지만 실력 하나는 또 확실한 그런 녀석.
바로 그 안티모스가 잔뜩 신이 난 채 스리슬쩍 곁으로 다가와 마구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래, 이번 전쟁에도 우리는 이 친구와 함께한다.
갑작스러운 참전 요청에도 그는 거절하지 않고 부리나케 합류해주었다.
아주 든든하다, 든든해.
다음에도 함께하자는 약속을 이렇게 지키다니. 생각보다 의리가 있구나, 안티모스야.
하지만 그런 의리의 안티모스도 불만스러운 부분이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이번 소집이 살짝 촉박하긴 했습니다. 보름 만에 우리 애들 다 모아서 니카로스까지 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거든요."
안티모스는 내 귓가로 손을 가져다 대는 시늉을 하더니, 상대적으로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그 점은 온전히 나의 잘못이긴 하다.
불문율을 어겼다고 표현하는 건 조금 과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용병 계약의 상식에 어긋나는 무리한 요청을 강요한 셈이니까 마찬가지니까. 대장인 안티모스의 고생이 많았을 수밖에 없지.
따라서 나는 곧바로 겸허하게 사죄와 유감의 말을 전하려고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안티모스의 이야기는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 물론 제가 감히 불평하고 그러는 건 전혀 아닙니다! 제가 어찌 남작님께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저 그래도 혹시나 다음번에 또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이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여유를 두고 요청을 내려주시면 감사할 것 같다는, 그런 사소하고도 소박한 바람이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부분이 다소 존재하는 바인 것을 알리고자...."
"...무슨 말씀인지 다 이해했습니다. 이번에는 불가피하게 그런 요청을 드릴 수밖에 없었지만, 다음에는 최대한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하! 사과라뇨! 그렇게까지는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그저 남작님의 작은 배려만으로도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으니까요!"
하여간. 이 징그러운 녀석.
호들갑을 떨면서도 조심스럽게 말을 하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나에게 은근한 부담과 압박을 주려고 하는 것인지.
진짜, 이 양반도 절대로 쉬운 상대는 아니라니까.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 쉽지 않은 사람이 지금은 바로 내 편이란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저런 안티모스의 주둥이도 그다지 거북하지 않다.
'역시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언제나 중요해.'
그래, 긍정적인 사고는 중요하지.
특히나 이런 시국에는.
앞으로 우리에 앞에 펼쳐질 크고 작은 일들은 생각하면 아예 필수에 가까울 정도야.
그렇게 나는 안티모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진군을 계속했다. 확실히 상대가 상대다 보니 시간 하나만큼 엄청나게 빨리 지나갔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서 우리가 지난 전쟁 때 점령했던 시하브 토후국의 영토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키로스 경도 슬슬 이 땅에서 주둔하던 소수의 병력과 함께 이쪽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키로스 경만 합류하고 나면 이제 정말로 모든 전쟁의 준비가 끝난다.
그리고 합류가 끝나고 조금만 더 나아가면 정말로 도착이 머지않았고 말이야.
그래, 전쟁이 머지않았다.
***
오늘도 또다시.
"이런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니카로스 놈들!"
아르잔 토후국의 에미르 바샤르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분노를 쏟아냈다.
그의 두 손에는 니카로스 남작령에서 보낸, 거칠게 잔뜩 구겨진 선전포고문이 쥐어져 있었다.
'이건 예상보다 너무 빨라!'
에미르 바샤르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니카로스도 최근에 이미 한 번 전쟁을 치른 영지다.
그런 만큼 당연히 최대한 탄탄하게 재정비를 마친 뒤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했는데, 설마 이 시점에 침공을 시작할 줄이야.
'망할! 우리의 공격 계획이 들켰던 건가...!'
계획이 들켰기에 역으로 선제공격을 가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는 이유가 없다.
에미르 바샤르는 으드득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역시 이번 침공을 준비하는 과정 중 보안을 충분히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은밀하게 모든 과정을 진행하고 싶다는 바람 또한 있었다.
그도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알고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이 모든 게 갑작스럽게 졸속으로 정해진 계획이었으니까!'
에미르 바샤르는 무의식적으로, 이 모든 사태의 핵심 원인이 된 자를 힐끗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아쉬파르.
아르잔 토후국이 힘들게 초청한 1인 동맹.
사실 아르잔 토후국의 선제공격 계획은 전부 아쉬파르의 바람과 요청이 있었기에 추진될 수 있던 것이었다.
어째서 그가 이런 적극적인 선택을 선호하는지, 그 이유까지 에미르 바샤르가 알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그저 지금의 아르잔 토후국은 그런 아쉬파르의 의향을 거부할 힘이 없다는 것뿐.
따라서 아르잔 토후국은 처음에는 한 번도 고려하지도 않았던, 예정에 없던 공격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에미르 바샤르는 이런 선택이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전황을 한방에 뒤집을 힘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전체적인 병력은 여전히 훨씬 부족한 만큼 최대한 안전하게 방어전을 펼치고 싶었다.
방어전의 압승 후 적의 본토를 향해 신속한 역공.
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훌륭한 계획인가.
하지만 에미르의 그런 뜻은 전혀 반영되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조급하게 공세를 준비하다가.
작전을 준비하던 움직임을 전부 읽혀버린 끝에.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채 적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러니 당연히 에미르 바샤르는 자연스레 아쉬파르를 원망의 눈초리로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흠, 이 시점에 침공이라니. 제법 괘씸한 놈들이군요."
그러나 그 아쉬파르는, 그런 에미르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태연하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입으로는 괘씸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불쾌하다는 감정을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다.
느껴지는 것은 오직 예사로운 자신감과 여유뿐이었다.
그는 그 태도 그대로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에미르 바샤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각하, 멍하니 무얼 하고 계십니까? 어서 출진 명령을 내려주시지요."
"...다시 말씀해주실 수 있소?"
"허허, 이제는 귀조차 잘 안 들리십니까? 저 같은 늙은이도 이리 멀쩡한데 벌써 그러시면 안 됩니다. 만수무강하셔야지요."
말투는 그럭저럭 정중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은 명백한 괄시뿐.
상황이 악화한 탓인지 아쉬파르는 이전보다도 훨씬 더 노골적으로 에미르 바샤르를 무시하고 있었다.
"...."
당연히 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참을 수 없이 불쾌한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귀중한 전력을 쳐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에미르 바샤르는 그저 분노를 삼키며 되물었다.
"...아쉬파르 공, 죄송하지만 출진이라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것이오?"
출진.
싸움터로 나아감.
요컨대 성에서 나가 야전에서 전투를 벌이잔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준비가 덜 되어서 불리한 상황인데, 아예 수비의 이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성벽까지 버리고 밖으로 나가자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아쉬파르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각하? 우리가 다소 의표를 찔리기는 했다지만 사실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애초에 우리는 공세 계획을 구상 중이었고 그렇다면 야전 역시 당연히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의 눈빛이 형형이 빛났다.
"쳐들어오고 있는 것은 그저 1,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변방의 군세. 바로 제가 친히 직접 함께 진군하는데, 두려워할 이유 따위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 말인즉슨."
"네, 천이든 만이든. 그래 봤자 모두 눈뜬장님과 다르지 않은 무지렁이일 뿐."
그들은 감히 저에게 대적할 수 없습니다.
노인의 입에 담긴 것은.
그저 지극히 오만할 정도로 당당한 선언뿐.
"...."
에미르 바샤르는 그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과연, 저게 올바른 선택일까.'
물론 야전에 나가 적을 정면으로 무찌르고, 수성전 따위는 하지도 않고 순식간에 전쟁을 종결짓는다면 당연히 아르잔 토후국으로서도 좋은 일이다. 지지부진하게 대치할 필요도 없고, 소중한 영토를 더러운 제국의 개들에게 유린당할 일도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시하브 토후국도, 내가 총애하던 나스라딘 장군 역시 그런 생각으로 맞서 싸웠다가 처참히 패배하고 말았다.'
그래, 상대는 이미 승리를 경험해본 자다.
분명 한낱 애송이 영주에 불과할 테지만, 지난 승리는 그저 천운에 불과할 테지만,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믿고 있지만.
그러나 그 승리 자체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망설임이 길지는 않았다.
"각하."
아쉬파르가 형형하게 시린 눈으로 그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 그렇군.'
그 눈을 보고 에미르 바샤르는 새삼 깨닫고 말았다.
애초에 아르잔 토후국의 주인인 그에게, 자유로운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결정하는 것은 저 오만불손한 외부인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결국 천천히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소. 전 병력에 명령을 내리겠소."
"허허, 아주 현명하신 선택을 하셨습니다."
가용 가능한 모든 병사를 소집하는 명령을 내리며, 에미르는 자신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펼쳐진 이 모든 상황은 그저 어지럽다.
하지만 이 왕국의 주인으로서 무책임하게 정신을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그는 속으로 그렇게 되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기면 될 뿐이다. 이기면.'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충분하고도 남는 상황이지.
숙련된 정예가 다소 포함되어 있다고 한들 그래 봤자 변방의 낙후된 군대일 뿐. 그런 군대가 상대라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
그리고 비록 그 태도는 역겨울 지경이지만 아쉬파르의 실력 하나만큼도 무엇보다 확실하다.
따라서 승리는 아르잔 토후국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알기에, 또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에미르 바샤르는 간절히 기도했다.
고귀한 달의 신, 마네스이시여.
부디 아르잔 토후국을 지켜주소서.
#041. 야전의 미덕 (2)
(구) 시하브 토후국 영토 근방에서.
마침내 키로스 경은 우리 본대와 합류하였고.
"역시 다시금 생각해 봐도 영주님의 정식 즉위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아쉽습니다."
순조롭던 진군 도중, 문득 그렇게 입을 열었다.
마치 그저 일상적으로 지나가는 말을 흘리듯, 표정과 말투는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면 목소리에서만큼은 아쉬움이라는 감정이 제법 진하게 묻어져 나왔다.
나도 처음에는 가벼운 어조로 그런 그를 위로했다.
"저도 키로스 경이 참석해주지 못하신 게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그만큼 점령지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으니. 제가 키로스 경 말고 달리 누구에게 그런 중책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시지요."
"허허, 물론 저도 전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그렇게 걱정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늙은이의 사소한 투정이었을 뿐이었으니까요.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진짜로요."
"...."
음,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더욱더.
입으로는 연신 괜찮다고 대답하고 있지만, 어째 그의 주위를 맴도는 칙칙한 기운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 감정의 뭉치가 얼마나 선명한지, 이제는 슬슬 환상처럼 육안으로 뭔가 보여도 이상하지가 않을 정도로.
'영감님, 의외로 이런 거에 신경을 많이 쓰셨네.'
하긴.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키로스 경은 자타공인 명실상부 나의 최측근.
진짜로 아무것도 모르던 초보 영주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항상 한결같이 나를 믿고 보좌해준 사람이니까.
그런 만큼 즉위식이라는 이벤트가 남들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거기까지 이해하고, 나는 조금 생각을 고쳤다.
'적당히 대충 가볍게 위로하고 넘길 일은 아닌가.'
물론 당연히 그냥 넘어간다고 해서 딱히 키로스 경이 나에게 앙금을 품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진짜 상상도 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우리 영감님이 저 정도로 속상해하면 나도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거든.'
뛰어난 공감 능력이야말로 교양인의 미덕인 만큼.
그렇기에 나는 살짝 어조를 바꿔 다시 입을 열었다.
"하하, 사실 따지고 보면 키로스 경께서 아쉬워하실 이유는 전혀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영지에 있던 분들이 키로스 경을 부러워하시는 게 이치에 맞죠."
"네?"
웃음기가 섞였지만, 동시에 마치 확고부동한 진실을 전달하듯 명확하게.
"어차피 지금부터 펼쳐질 광경이야말로 진짜니까요."
"...."
내 당당한 의견에 잠시 키로스 경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래. 곰곰이 본질을 따지고 분석을 해보면 성에서 있던 즉위식과 선전포고, 사실 그 모든 것은 그저 앞으로 있을 전쟁을 위한 디딤돌에 불과했다.
'사실상 가신단을 설득하고 개전에 앞서 나의 통제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의식에 가까웠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즉위식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거대한 집단을 하나로 결속해주는 데는 역시 그런 의식만 한 것도 없고, 무엇보다 그 과정을 통해 나 자신도 이래저래 많은 것을 깨달았으니까.
'다만 내가 직접 계획한 이 거대한 프로젝트 전체에 있어서는, 단지 서막 단계였을 뿐이라는 거지.'
그러니까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즉위식은 일종의 예고편이라고 할까?
분명히 본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화의 홍보와 개봉 단계에 있어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그런 것 말이야.
'그리고 즉위식이 예고편이었다면.'
당연히 진정한 본편의 시작은 머지않아 치러질 전투와 전쟁이고.
"그러니까 그 진짜를 저와 가장 가까운 곁에서 직접 보실 수 있는 키로스 경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가 아니시겠습니까?"
그치. 아무리 예고편을 흥미진진하게 잘 만들었다고 해도, 정작 극장에서 본편을 못 보면 제대로 영화를 감상했다고 할 수 없지. 팥 없는 잉꼬도 아니고.
요컨대 지금 이 본편을 특등석에서 감상할 수 있는 우리 키로스 경께서 예고편 좀 못 봤다고 아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
어때, 내 말이 맞지요?
"...."
대략 그런 의미가 담긴 시선으로, 나는 뻔뻔히 웃으며 키로스 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 역시 곧 나와 비슷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허허! 역시 영주님의 참신한 논리에는 언제나 감탄할 금할 수가 없군요. 새삼스레 감탄했습니다!"
"그런가요? 저야 원래 평소에도 담백하고 합리적인 진실만 말하고 다니지 않습니까?"
"으음, 아무래도 저처럼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충신에게는 너무나 대답이 어려운 반문이군요. 하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영주님의 말씀이 완벽히 옳은 것 같습니다!"
어느새 키로스 경은 아쉬움을 죄다 털어 버리고, 다시 평소처럼 의기양양한 태도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 역시 이래야 우리 영감님답지.'
그렇게 기분이 좋아진 할아버지를 보며 나도 만족하고 있을 무렵, 키로스 경이 화제를 돌리며 다시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얘기도 들었습니다."
"어떤 이야기 말씀이지요?"
"허허! 영주님께서 제노비오스 집사장을 '집사장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부르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아.
그거.
"...."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주제가 튀어나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 분명 그런 적이 있긴 하다.
딱 한 번.
제노비오스 집사장을 묶어놓고 죄를 추궁했을 때.
사실 평소에도 속마음으로는 주위 사람들을 전부 그때그때 내 마음 가는 대로 막 부르는 편이다.
당연히 키로스 경도 수시로 영감님이나 할아버지 이런 호칭으로 부르고 말이야. 오늘도 이미 여러 번 그랬지.
'하지만 그런 호칭을 진짜로 입 밖으로 낸 적은 정말로 그때 딱 한 번뿐인걸.'
솔직히 딱히 의도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순간적인 감정의 동요로 인하여 나도 모르게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실수에 가깝달까.
워낙 당시 상황이 상황이라 그냥 스리슬쩍 잘 넘어간 줄 알고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설마 이 이야기가 자리에 없던 키로스 경의 귀에까지 들어갈 줄이야.
'대체 어떤 촉새 녀석이 이런 일까지 나불거린 거지?'
집사장인가?
역시 당사자인 집사장뿐인가?
하긴 집사장은 키로스 경과 사적으로도 친하잖아?
그렇다면 한 번 더 기강을 다져줘야 하나?
'우리의 지난 갈등, 행복한 결말로 예쁘게 마무리된 줄 알았는데... 정말로 유감입니다, 제노비오스 씨.'
그렇게 나도 모르게 부조리한 분노를 제노비오스 집사장에게 마구 방출하기 직전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무수한 실전으로 단련된 백전노장 키로스 경은 그런 하찮은 도피 따위는 허락해주지 않았다.
"허허! 그런 고로!"
어째 영주가 되기 전, 검술 훈련을 받을 무렵에 많이 보고 느끼던 그런 부담감이 다시 느껴진다. 지나고 나니 다 추억이라고 좋게좋게 미화하고 있었지만, 막상 실제로 다시 접하게 되니 전혀 반갑지가 않다.
키로스 경은 어쩐지 그다우면서도 동시에 답지 않은 그런 표정으로, 마치 기대감에 가득 찬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저도 영주님께 '키로스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한번 불려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였고.
열심히 정신적 도피 행각에 열중하던 나는 반사적으로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아니, 키로스 경은 굳이 따지면 '키로스 할아버지'나 '영감님'이란 호칭이 더 어울리죠."
...아.
"...."
이건 진짜 실수다. 의도한 게 아니다.
진짜 진짜로.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리 하여.
처음 즉위식에 참석하지 못해 아쉬움이 가득했던 때보다도 훨씬 더 처참한 기색이 된 키로스 경과 함께.
우리는 아주 순조롭고 평화로운 행군을 계속했다.
이제 머지않았다.
곧 적이 보인다.
어서 빨리 나와줘.
제발.
***
"지금이라도 성으로 돌아가는 게...."
아르잔 토후국의 총지휘관이 아쉬파르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소중한 조국이 동원 가능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을 이끄는 그는 도저히 불안감을 참을 수 없었다.
전방에서 니카로스 남작령 군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들 또한 아르잔 토후국 군을 발견하고 진군하고 있었다.
아군의 병력은 달달 긁어모아서 겨우 600명.
반면 척후의 보고에 따르면 니카로스 남작령의 병력은 무려 1,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압도적인 차이다.
심지어 적 병력 중 절반 이상이 숙련된 기사단과 용병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지휘관인 자신이 흔들리면 병사들도 겁을 먹으니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속내까지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이야기는 들었다.
지난 전쟁 때도 그 정예들이 주축이 되어, 더 많은 병력을 이끌던 시하브 토후국을 상대로 승리하였다고.
병력의 수도, 병력의 질도 모두 열세.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정면 승부라니. 이 얼마나 위험한 모험인가.
지금까지 배우고 겪어왔던 모든 병법을 무시하는 상황 속에서 총지휘관은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끌끌, 겁먹었는가, 장군?"
그러나 아쉬파르는 걱정에 빠진 그런 총지휘관을 그저 한심하다는 듯 내려볼 뿐이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전략적으로 판단을 내렸을 뿐입니다. 승리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는 것이...!"
"하! 아니긴 무슨! 겁을 먹은 게 대놓고 보이는데!"
그는 대놓고 총지휘관의 말을 끊으며 비웃었다.
귀족이자 군주인 에미르를 대하면서도 오만한 태도를 고수하던 아쉬파르다. 상대가 일개 에미르의 부하에 불과하다면 거리낄 것은 더욱더 없었다.
'이래서야 누가 지휘관인지도 모르겠군...!'
총지휘관의 속마음은 굴욕감과 분노로 들끓었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저 참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승리라는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 지휘관으로서, 이 불리한 상황을 뒤엎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쉬파르는 태연하게 자신의 의견을 다시 한번 주장했다.
"이미 끝난 이야기야. 수성전은 없네."
성벽을 버리고 밖으로 나와 정면으로 맞서 싸우자.
니카로스 남작령의 기습 선전포고로 상황이 급변했음에도 아쉬파르의 의향은 여전히 한결같았다.
물론 상식적인 판단은 아니다.
전력의 열세가 너무나 확연하고, 애초에 요새와 성벽은 이런 상황에서 활용하라고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아쉬파르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그 모든 상식적인 의견을 묵살했다.
당연히 아쉬파르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을 내린 것은 아니다.
어차피 촌구석 놈들은 들어봤자 이해하지도 못할 테니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합리적이고 당당한 이유가 무척이나 많이 있었다.
"...."
여전히 불안한 눈치를 숨기지 못하는 이 멍청한 지휘관에게 지금이라도 그 이유에 대해 설파해주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곧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흥. 뭐, 됐네."
자신이 함께하고 있음에도 계속 의심과 걱정을 멈추지 못하는 총사령관의 저 불경한 태도.
그게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적절한 때가 아니다.
그도 이제 알 수 있다.
교전이 머지않았다.
'굳이 이런 상황에서 이 머저리 지휘관 따위에게 시간을 쓰는 것도 어리석은 짓.'
아쉬파르도 이미 전쟁을 수차례 겪어 본 몸이다.
단지 자기 자신을 향해 방대한 자신감이 가득할 뿐.
안하무인처럼 보여도 나름의 선은 지킬 줄 알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쉽게 동의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내가 결과로 직접 보여주면 될 일이지. 정신만 제대로 차리고 있다가 내가 신호하면 병사들을 움직이게. 적의 진형을 완전히 무너뜨려 주지."
"...알겠습니다."
총지휘관은 결국 씹어 삼키는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어쩔 수 없다. 이제는 물릴 수도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아르잔 토후국이 믿을 수 있는 건 저 늙은이뿐이다.
아르잔의 총지휘관 또한 끝내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암벽(巖壁)의 아쉬파르. 내 이름과 이명을 똑똑히 기억해 두게."
자신만만한 아쉬파르의 목소리가 총지휘관의 귓가를 지나가는 동시에.
저 멀리서 서서히 니카로스 남작령의 군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042. 야전의 미덕 (3)
거친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마침내 아르잔 토후국의 드넓은 초원에서 양군이 대치했다.
'...이건 솔직히 예상 밖의 상황인데.'
눈 앞에 펼쳐진 적들의 저 초라한 진형.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지금까지 상정한 모든 계획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번 전쟁은 지지부진한 공성전 위주가 될 거라 예상했다. 이건 비단 나뿐만이 아닌 우리 지휘부 전체의 공통적인 판단이었다.
'그야. 전력 차가 워낙 압도적이어야 말이지.'
예정보다 빠르게 시작한 전쟁이다.
그러니 그만큼 더 열심히 적의 동태를 살폈다. 우리도 이른 개전을 위해 적지 않게 무리한 만큼 사소한 변수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모든 상황은 명확했다.
우리의 명분은 확고하고 기세 또한 우월하다.
예상했던 대로 굳이 이런 상황에서 멸망 직전의 아르잔 토후국을 돕겠다고 끝없는 수렁 속으로 자진해서 발을 담그는 머저리 국가는 없었다.
'그나마 월광교의 미친 수도사 용병대 놈들의 참전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계속 경계를 해왔지만.'
이 일대에 빠삭한 키로스 경이 직접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국경에 남아 상황을 살폈음에도 대규모 부대가 이동하는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외부의 지원은 없을 거라고 판단했지.'
그렇지만 지금 눈앞의 저 광경은 도대체 뭔가.
"...틀림없이 아르잔 토후국의 부대가 맞습니다, 영주님. 척후의 보고대로 규모는 대략 600명. 대부분이 급히 소집한 징집병으로 보입니다. 소수의 기병이 포함되어 있으나, 전황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곁에 있던 키로스 경이 침착한 어조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묘사해주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동년배인 집사장은 아저씨라고 불러놓고 자기는 할아버지라고 부른 것 때문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토라져 있던 키로스 경이었지만, 지금은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냉철한 백전노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 경험 많은 영감님이 보기에도 경각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겠지.'
전방에서 아르잔 토후국의 군대가 나타나 이쪽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
앞서가던 척후들이 그런 보고를 올릴 때만 해도 솔직히 나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물론 척후의 보고를 무시하는 게 엄청나게 바보 같은 일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만큼 지금 이 상황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우리의 전투 병력은 대략 1,000명.
단순히 머릿수만 해도 저들의 두 배에 달할 정도고, 기사단과 용병대와 같은 숙련병의 비율까지 고려하면 전력 차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지금 보이는 게 정말 적 전력의 전부라면 저들에게 승산 따위는 하나도 없다.
'적들도 결코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런데도 여기까지 이렇게 직접 나와주셨단 말이지.
수상하다, 수상해.
"아무리 봐도 달리 특별한 점은 눈에 띄지 않는군요."
"키로스 경, 이 일대에 특별히 적이 매복할 만한 지점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이 일대는 광활한 초원입니다. 우리의 눈을 피해 대규모 부대를 숨겨놓을 만한 곳은 없습니다."
안티모스와 나, 키로스 경은 쑥덕거리며 최대한 이 상황을 합리적으로 분석해보고자 노력했다.
그렇지만 명쾌한 해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결국 안티모스도 답답했는지 망상과도 같은 추측을 입에 담고야 말았다.
"혹시 우리 때문에 계획이 다 망가져서, 정말 생각 없이 될 대로 되라 이러면서 튀어나온 건 아닐까요...?"
"...."
에이.
설마.
"그럴 확률은 굉장히 낮을 것 같군요."
설마 그 더러운 난이도의 <마운트 앤 로열>을 기반으로 한 이 세상이 나에게 그렇게까지 친절할 리가.
물론 우리의 조기 선전포고 덕분에 놈들의 정체 모를 비장의 노림수가 아직 준비되지 못했을 수는 있다. 애초에 우리의 의도 자체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근본적으로 이 전투는 적의 타이밍을 빼앗고 계책을 저지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와 다름이 없지.'
그러니까 그 부분에 한해서는 완전히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게 저렇게 성 밖으로 튀어나올 이유까지는 되지 않거든.'
모든 상황이 낙관적으로 풀릴 거라고 마냥 기대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애초에 무슨 일이 생기면 거기에 대처하고 책임지라고 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거니까.
따라서 지금 내가 할 일은.
'적의 숨겨진 노림수를 계속 경계하며 침착하게 우리의 이점을 살리는 것뿐.'
정말로 저 녀석들의 속셈은 뭘까.
왜 밖으로 군을 이끌고 나온 걸까.
설사 노림수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해도 아직 수성전이란 선택지는 남아 있는데 말이야.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뭐가 되었든.'
지금은 느긋하게 고민만 할 시간은 아니니까.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작전을 이행해야지.
"적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으니 이대로 대치만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일단은 주의를 기울이며 우리도 돌격을 개시하죠."
"알겠습니다, 영주님."
"우선 용병대를 좌익과 우익에 나눠서 배치하고, 니카로스의 병사들이 중앙을 담당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기사단 역시 두 개의 부대로 나눈 뒤, 우회 기동하여 적의 후방을 공략하는 겁니다."
지난 시하브 토후국과의 전투와는 정반대.
우리의 가장 큰 이점이 절대적 전력의 우위인 만큼, 괜한 도박을 할 필요가 없다. 온 전력을 끌어모아 한 번에 포위하여 사방에서 치는 게 최고의 계책이다.
나는 적군에게서 한 치도 눈을 돌리지 않은 채, 신중한 목소리로 키로스 경과 안티모스에게 제안했고.
"정석적이군요. 저 역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게 가장 좋은 방도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 역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중앙의 징집병들이 모루가 되어 적들의 공세를 버티는 사이, 좌익과 우익의 숙련된 용병들이 적군을 양쪽에서 동시에 포위하는 전략.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검은 매의 기사단 역시 후방을 공략해 사방에서 적을 무너뜨리는 공세.
'단순하지만, 원래 가능하다면 단순한 게 최고지.'
이 진형이면 웬만한 상황에는 다 대응 가능.
극소수의 적 기병대만 적절하게 견제해주면 어렵지 않게 승기를 잡을 수 있다.
'그게 바로 정석의 장점이니까.'
그렇게 우리 지휘관들과 함께 세부적인 전략을 논의한 끝에, 나는 신중하게 최종 결정을 내렸다.
좋아.
이 정도면 될 것 같다.
'그리 대단하지는 않지만, 우리도 여차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여분의 카드도 남아 있고.'
야전의 작전 회의는 충분하다.
이제 남은 것은 실행뿐.
나는 그렇게 판단하며 말 위에 올랐고.
"하하! 그러면 슬슬 움직여 보겠습니다! 남작님은 안전한 후방에서 그저 지켜봐 주시면 됩니다!"
"허허, 확실히 안티모스 군의 말대로입니다. 영주님이 나설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안티모스와 키로스 경이 그런 나를 보며 똑같이 입을 열었다.
"...."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오히려 새삼스럽지.
적의 숨겨진 속셈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냥 전력 차 자체가 이 정도로 명백하다면 지난 전쟁 때처럼 굳이 영주가 최전방까지 가서 직접 병사들을 이끌 필요는 없다.
그렇기에 나 역시 순순히 고개만 끄덕였다.
"...검사합니다. 그러면 믿고 맡기겠습니다."
어째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상당히 기분이 묘하긴 하지만, 사실 나로서도 나쁠 건 전혀 없는 얘기라는 것.
"전군...."
그렇게, 어쩌면 오늘 나의 마지막 역할이 될지도 모를 돌격 명령을 우리 전 병사들에게 내리기 바로 그 직전.
"이런. 적이 먼저 움직입니다, 영주님."
아르잔 토후국 군이 한발 앞서 행동을 개시했다.
"저건...?"
상상도 하지 못한 이변과 함께.
'설마.'
적병이 지휘관의 구령에 맞춰 서서히 이동한다.
그렇게 병사들이 양측으로 갈라지며 적의 진형 한가운데 둥근 공간이 만들어진다.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그 빈 곳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한 노인이었다.
기다랗게 내려온 백색 수염.
머리를 완전히 덮을 정도로 커다란 고깔모자.
자수가 잔뜩 새겨진 화려한 로브.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히 땅을 짚는 용도로 쓰기에는 너무나 거추장스럽고 커다란, 고목을 연상시키는 나무 지팡이.
그 광경을 목격한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아.'
저거.
마법사다.
나는 마치 비명처럼 반사적으로.
전력을 다해 소리쳤다.
"마법사다! 적에게 마법사가 있다! 모두 산개! 당장 산개하라!"
불행 중 다행히도 그 광경을 본 것은 나뿐만 아니었는지, 다른 우리 지휘관들의 반응 역시 신속했다.
"전군 산개!"
"흩어져! 빨리 흩어져!"
키로스 경과 안티모스는 되묻지 않았다.
둘 다 즉각적으로 자신이 지휘하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그래, 지금은 그렇게 되물을 시간조차 아깝다.
당장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동시에, 적 마법사 전방의 빈 땅에서 커다란 암석이 하나 돋아났다.
집채만 한 바위가 말이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욕지거리를 참지 못했다.
"이런 개...!"
재빠른 속도로 계속 위로 돋아나던 그 바위는 마치 역행하는 유성처럼 어느덧 하늘로 높이 떠올랐고.
"어, 어어!"
"저, 저, 저게 뭐야...!"
"...솔레오시여."
초현실적인 광경에 웅성거림을 참지 못하는 우리 군을 향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이 드넓은 초원을 통째로 때려 부술 기세로.
'라이코쉬의 분쇄...!'
대지 학파의 중위 마법...!
망할.
심지어 하필이면 대지술사냐.
땅이라는 부모의 품을 떠난 바위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펼쳐진.
무척이나 짧은 정적.
말이 다급한 울음소리를 내지른다.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도 경험이 풍부한 기사들과 용병들은 이미 부랴부랴 서둘러 흩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광경을 난생처음 보는, 어째서 산개해야 하는지 그 이유조차 깨닫지 못했던 우리 징집병들의 상황은 달랐다.
마치 괴기한 꿈과 같은 광경에 잠시 말을 잃고 만 그들은 하늘을 나는 바위를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그 짧은 주저함의 대가는 끔찍했다.
쾅.
콰광.
으아악.
굉음과 함께 결국 바위가 우리 군을 향해 떨어진다.
부서진 돌조각과 피가 한데 어울려 사방으로 튄다.
비명이 울린다.
공포가 번진다.
"전군! 후퇴하라! 후퇴 후 진형을 재정비한다!"
"후퇴! 후퇴! 신속하게 뒤로 물러나라!"
핏방울과 흙먼지 속.
아직 충격이 다 가시지 않은 다급한 현장 속에서 우리의 지휘관들이 필사적으로 소리친다.
저런 것에서 앞에서 정석적인 진형 같은 건 의미가 없다. 말 그대로 상식을 깨부수는 기적이다.
눈을 떼기 힘든 그 광경을 보니.
정말로 새삼스레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래, 이곳은 게임 속 세계이자 판타지 세계다.
요컨대.
마법사라는 이름의 초인이 존재하는 세계.
'망할, 망할, 망할...!'
낭패다.
설마 이런 전장에 마법사까지 데려올 줄이야.
진작에 가능성을 떠올렸어야 했는데.
이제야 저 녀석들이 왜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기어 나온 것인지 알겠다.
놈들의 노림수가 뭐였는지도 알겠다.
마법사를 데리고 왔으니 충분히 선제공격을 시도할 만큼 자신감에 머리가 돌아버릴 수도 있지.
심지어 다른 어떤 학파보다 유독 공성전에 특화된 대지 학파의 마법사라면 더욱더.
인정한다.
진짜 개같이 대단한 걸 준비하긴 했네.
미친놈들.
설마 동원 병력이 양측 합쳐 2,000명도 되지 않는 소규모 전쟁에 마법사까지 데려와?
저 녀석들은 돈이 남아도나?
괜히 마법사라는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한 게 아니다.
마법사는 극히 귀한 존재니까.
어지간한 제국의 백작령 정도는 되어야지 영지 마법사 1명을 데리고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게다가 귀한 만큼 성격도 엄청나게 오만하다.
돈을 목적으로 전장을 떠도는 마법사는 그중에서 더욱 귀하고, 당연히 그런 마법사를 고용하는 비용도 어마어마하다.
설마설마했다. 설마설마했어.
분열된 탓에 체계적인 아카데미가 없는 월광교 쪽은 마법사가 더 귀할 텐데.
게임에서도 이렇게나 이른 시점에 이런 변방에서 마법사를 본 적은 없다.
'...아니, 이것도 솔직히 다 구차한 변명이야.'
그냥 결국 내 생각과 대비가 부족했을 뿐이다.
이 세상이 단순한 게임이 아님을 몇 번이나 되새겼음에도 여전히 안일했을 뿐인 거다.
지금은 이따위 자기변명 따위나 할 때가 아니다.
그딴 건 나중에 해도 절대 늦지 않는다.
변명이든 후회든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다.
지금은 대책의 순간이다.
"저, 저런 걸 어떻게 이겨...!"
"도, 도, 도망쳐야 해!"
단 한 번의 공격.
단 한 번의 마법.
5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만의 아군의 사기가 절망적으로 꺾였다.
어쩔 수 없는 노릇.
우리 병사들은 모두가 낙후된 변방 출신이다. 마법의 위력과 살상력을 체감한 것도 이것이 처음이다.
"...."
그렇다고 경험이 많은 용병들이라고 해서 멀쩡하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기에 절망이 더욱 컸다. 실제로 지금 그들은 잔뜩 구겨진 얼굴로 주위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마법사는 전장의 지배자에 가까우니까.
저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다. 아무리 돈과 계약이 중요하다고 한들 가망 없는 전장에서 선뜻 목숨을 내다 버릴 정도는 되지 않는다.
그나마 검은 매의 기사단만이 어떻게든 사기를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보병대의 협조도 없이 고작 100명도 안 되는 기병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충격의 순간 속에서.
내가 그렇게 판단을 내리는 사이에도.
"다음 마법이 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영주님!"
어느새 적 마법사는 다음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멀리서도 선명히 보이는 부자연스러운 마력의 일렁임에 우리 병사들이 동요가 더욱 심해진다.
물론 어지간해서는 저만한 마법을 연사할 수 없다. 마법사도 어디까지나 인간이니까. 당연히 쿨타임은 있지.
그러나 우리가 그게 여유롭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어서 영주님을 뒤로 모셔라! 빠르게 후퇴한 뒤 전열을 재정비한다!"
나를 보좌하던 키로스 경이 그렇게 소리칠 때까지, 나는 저 너머 마법사가 있는 방향을 뚫어지게 보았다.
마법사의 가장 큰 저력을 병사들의 마음을 공포로 부숴놓는 데 있다. 우리는 다루지 못하는 괴물 같은 힘을 이용해 일방적으로 공격하는데, 마음이 꺾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빠르게 해답을 구해야 한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 기사들에게 거의 반강제로 끌려나갈 때까지 나는 전방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043. 야전의 미덕 (4)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바윗덩어리.
땅을 울리는 충격과 흙먼지.
병사들을 뒤덮는 공포.
예상치도 못한 마법사의 등장과 포격으로 인해 아군은 속수무책으로 후방으로 물러났다.
마침내 어느 정도 안전거리를 벌려,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자 키로스 경은 곧장 영주인 나의 안위를 챙겼다.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네요."
나는 대충 갑옷을 털며 그렇게 대답했다.
확실히 내가 봐도 먼지투성이에 엉망인 몰골이긴 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서둘러 움직이다 이래저래 긁힌 것만 빼면 완전히 멀쩡하다.
분명 다행이긴 하지만.
과연 지금 이런 상황에서 운이 좋다는 표현을 쓰는 게 적절할지는 모르겠네.
"키로스 경도 괜찮으십니까?"
"영주님께서 먼저 마법사를 발견하고 경고해 주신 덕분에 무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과찬의 말씀을.
그거 좀 먼저 발견했다고 칭찬을 듣기에는 애당초 적에게 마법사가 있을 걸 예상하지 못한 나의 실책이 너무나 크다.
"남작님! 키로스 경! 여기 계셨군요!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를 겁니다! 물론 저는 당연히 두 분께서 저런 이교도 놈들의 간악한 공격 따위에 당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다소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조금 진정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안티모스 씨."
그렇게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으니 어느새 안티모스까지 우리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쟤도 그다지 깔끔한 꼴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저 주둥이 하나만큼은 한결같은 걸 보니 아무래도 걱정은 안 해줘도 될 것 같다.
일단 시끄러운 안티모스부터 적당히 진정시킨 뒤, 주위에 모인 지휘관들을 보며 물었다.
"일단 서둘러 피해 현황부터 파악하죠. 현재 병사들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당장 적이 쫓아오지는 않는다.
어쨌든 당장은 여유가 조금 있으니, 침착함을 우선시해야 한다.
"실질적인 병력 손실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세부적인 사상자 구분은 아직이지만, 전투 불능 인원은 대략 서른 명 정도입니다. 하지만...."
휘하 지휘관들의 보고를 취합해 나에게 정리해주던 키로스 경이 뒷말을 흐렸다.
그래, 이 부분은 안 들어도 뻔하다.
"실질적 피해와 관계없이 대다수 병력이 공포에 질려 통제가 어려운 상황이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영주님."
"아닙니다. 어쩔 수 없지요. 키로스 경의 잘못이 아닙니다."
기사의 대표로 키로스 경이 고개를 숙였지만, 이건 그가 사죄하거나 책임을 질 문제가 아니다.
'자기 머리 바로 집채만 한 바위가 살벌한 기세로 떨어지고 있는데 대체 어느 누가 태연할 수가 있을까.'
경험 많은 용병대까지 이미 반쯤 넋이 나가 도망칠 기회만 노리고 있다.
이건 온전히 인간 본연의 본능 문제다.
그래.
전장의 마법사가 무서운 이유가 바로 이런 점이지.
라이코쉬의 분쇄.
대지 학파의 중위 마법.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사실 충격적인 비주얼에 비해서 실질적인 살상력은 그렇게 높지 않다.
1,000명이나 되는 병력이 서로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다닥다닥 모여서 진군하는 것도 아니고, 마법의 연사 속도도 생각보다 빠르진 않다.
그러니 아무리 떨어지는 바위가 커다랗다고 한들 단 한 방으로 그렇게까지 압도적인 피해를 주진 못한다.
"괴물 같은 이교도 놈들! 저, 저런 걸 어떻게 이겨!"
"모두 죽을 거야...."
"이, 이놈들! 사기를 떨어트리는 발언은 삼가라! 이 이상 떠든다면 군법으로 처벌하겠다!"
하지만 지금 우리 병사들의 꼴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홀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공격이 일방적으로 퍼부어진다는 그 사실 자체가 문제다.
하늘에서 떨어져.
바로 옆 동료를 곤죽으로 만드는 폭격의 향연.
굳이 비유하자면 포병.
걸어 다니는 1인 포병대.
홀로 전황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괴물.
지금 우리의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그런 적이다.
"...."
진짜.
아직도 모르겠다.
미친놈들.
대체 저 귀한 마법사는 어디서 데려온 거냐.
이건 사기잖아.
게임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진짜 마음 같아서는 엉엉 울고 싶다.
내가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안티모스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영주님, 후퇴하는 것도 하나의 해답입니다."
"후퇴,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장은 적이 추격하고 있지 않지만, 언제 개시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 물러나는 것조차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
안티모스는 보기 드물게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의견을 밝혔고, 나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추격은 머지않아 개시될 것이다.
마법사의 마력도 결코 무한한 것은 아니고, 압도적인 화력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기동력은 떨어지다 보니 일부러 무리하지 않는 것뿐이겠지.
어차피 우리가 도망갈 곳은 정해져 있으니까.
그러니 이미 사기가 꺾인 용병대를 대표해야만 하는 안티모스의 입장은 차치하더라도.
확실히 일리가 없는 얘기는 아니다.
도망치지 않는다면 여기서 싸워야 할 텐데.
과연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보통 적군에 마법사가 있다면 똑같이 마법사를 데려오는 게 최선의 대응.
압도적인 수의 중무장 기병대를 동원해서 우월한 속도로 단번에 쓸어버리는 게 차선책 정도 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마법사도 없고 기병이라고는 채 100명조차도 되지 않는, 경무장한 검은 매의 기사단이 전부다. 이 정도 숫자로는 적의 징집병 무리조차 제대로 돌파하기 힘들다.
'아무리 검은 매의 기사단이 우리 니카로스의 자랑이라고 한들... 설령 키로스 경이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필사의 돌격을 감행한다고 해도 무리야. 돌파는커녕 적진에 도달하기도 전에 반쯤 붕괴하겠지.'
솔직히 너무나도 절망적인 상황이다.
요컨대 승산이 없다면 후퇴하는 것만이 답이란 거다.
'하지만.'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나를 가로막는 문제가 아직 하나 남아 있었으니까.
'그러면 후퇴한 다음에는 또 새로운 답이 생기는가?'
당연히 자존심 같은 쓸데없는 것은 다 제쳐뒀다.
오로지 이성적으로만, 전략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나는 고민했다.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긴박한 상황이기에 고민했다.
한번 판단하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지금 우리 군은 붕괴 직전이다.
간단히 생각하면 당연히 물러나는 것이 옳다. 퇴각한 다음에 군을 재정비해야지.
하지만 병사들도 안다.
그들도 귀가 있고 눈이 있다.
당장 벌일 퇴각이, 적에게 압도당해 두려움에 떨면서 도망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병사들도 안다.
어차피 언젠가는 싸워야 하는 상대다.
아무리 지금 물러난다고 한들, 결국에는 우리 땅까지 쫓아와서 다시 퍼부을 포격이다.
그런데 이미 패배 의식이 깊게 박혀 버린 우리 병사들에게 다시 맞서 싸우라고 명령하면, 그때라고 과연 용감하게 나설 수 있을까?
게다가 대지술사는 야전보다는 공성전에 더 특화된 마법사다. 성벽을 끼고 싸운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유리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까."
단순히 도망치는 것으로는 안 된다.
퇴각한다면 대책이 있어야 한다.
만약 그 대책이 없다면.
"키로스 경."
"네, 영주님."
차라리 지금 맞서 싸워야 한다.
단순한 이판사판식 돌격이 아닌.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카드를 가능한 한 모두 끌어모으고 활용해서.
"아무래도 '그놈들'과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할 합리적 수단을 마련한 다음에.
현명한 토끼는 세 개의 숨을 굴을 파 놓는 법.
일단 내가 혹시 몰라 파둔 여분의 '토끼굴'이 이 상황에서 제법 쓸만할지.
그것부터 어디 한번 현명하게 계산을 해보자고.
***
다행히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기사들의 대응은 신속하고 훌륭했다.
"여기 대령했습니다, 영주님."
백전노장 키로스 경은 오래 지나지 않아 내가 찾던 '그놈들'의 대표를 바로 내 앞에 떨궈 놓았다.
"여, 여, 여, 영주님? 저, 저를 찾으셨다고요? 이런 상황에서, 저를, 어째서, 왜...?"
'그놈들'의 대표.
제르만은 불안한 듯 잔뜩 말을 더듬으며 두리번두리번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제르만.
바로 그놈이다.
마누엘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방지게도 감히 나의 땅을 약탈하러 왔던 그 붉은바위 도적단의 부두목.
다른 간부들의 목이 모조리 날아가는 사이 정보를 팔아 혼자 목숨을 건진 박쥐.
포로로 잡힌 말단 도적들의 원활한 관리와 통제를 위해서 살려놓은 샌드백.
'상당히 별 볼 일 없어 보인다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놀랍게도 이 녀석들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꼭 필요한 나의 히든카드이자, 토끼굴이다.
진짜로.
어쩌다 보니 상황이 그렇게 됐네.
"...."
"여, 영주님? 뭐라고 말씀이라도 좀 해주시면...?"
"이 녀석! 영주님께서 생각하고 계시지 않느냐! 조용히 입 다물고 기다리고 있어라!"
"죄, 죄송합니다! 함부로 혓바닥 놀리지 않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기사님!"
물론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상정하고 데려온 것은 아니다. 그게 가능하면 애초에 위기에 빠지지도 않았지.
전쟁터 한복판에 있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어중이떠중이들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당연히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해서 그런 것이다.
그동안 '제르만과 100인의 도적' 친구들은 요긴하게 잘 써먹었다. 태생이 태생이다 보니, 썩 말을 잘 듣는 족속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00인분의 인력이라는 게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전쟁으로 인한 영지의 피해 복구 사업에도 동원하고, 점령지에 새롭게 초소를 세우는 작업에도 활용하고.'
아주 쏠쏠했지.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이번 전쟁에도 동행했다.
비전투 인력의 일부로.
누차 말했다시피 우리는 이번 전쟁이 공성전 위주가 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장기전을 대비한 진지 구축부터 시작해서 할 일이 태산과 같을 테고.
그런 상황 이렇게 유용한 친구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건 너무 아깝잖아? 그래서 데려왔다.
그건 그렇고 이 친구.
그동안 대충 관심 끄고 방치하느라 잘 몰랐는데.
샌드백으로 고생을 많이 했나, 어째 예전보다 더 야위고 바들거리는 거 같다. 마음이 아플 정도로.
'그러면 안 되지.'
지금부터 아주 명예롭고 중요한 임무를 맡아주실 분인데 말이야.
마침내 생각의 정리를 끝낸 나는 사람 좋게 웃으며, 제르만을 윽박지르는 키로스 경을 만류했다.
"하하, 괜찮습니다. 워낙 긴박한 상황이다 보니 제르만 씨도 긴장할 수밖에 없겠죠. 일단 진정하시지요, 키로스 경."
난생처음 입에 담는 호칭.
제르만 '씨'.
예상치 못한 나의 반응에 키로스 경은 잠시 흠칫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곧 무언가를 깨달은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그래, 인간관계에 있어 호칭은 무척이나 중요하지.
나는 직접 허리까지 굽힌 채, 바짝 엎드린 제르만의 어깨를 붙잡아 주며 말했다. 일부러 최대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조금 무리해서 웃음까지 지었다.
"너무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실 제가 지금 제르만 씨를 부른 것은 아주 괜찮은 제안을 하나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든요."
"네, 네? 제안이요? 이, 이런 상황에서 말씀입니까?"
"하하, 맞습니다. 지금이 조금 위기 상황이긴 하죠. 하지만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위기는 곧 기회다.
참 좋은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제르만 씨와 동료분들께서 조금 솔선수범해주시면 좋을 일이 있습니다."
내가 밝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어째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제르만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어허. 사람이 한낱 살인강도한테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말씀해주시는데 그런 표정이라니. 실례야 아주.
근데 아마 너의 예상이 맞긴 할걸?
애초에 이런 목적으로 데려온 건 아니지만, 모두의 위기는 모두의 힘으로 함께 극복해야지. 그치?
후방에서 비전투 인력으로서 병사들을 지원하는 것도 충분히 명예로운 일이지만, 그래도 전장에는 그보다 더 빛나고 화려한 주인공의 자리가 따로 있잖아?
"곧 있을 두 번째 돌격 때, 제르만 씨와 동료분들께서 선봉에 서주시지요."
이번 제안만 수락하고 살아남으시면.
완전한 자유를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조금 더 환하게 웃었다.
미안한데 여기서 발악이라도 한 번 해보려면.
너희 어깨에 막중한 책무를 좀 얹어야 할 거 같아.
네가 앞에서 돌덩이 좀 마구 맞아주라.
#044. 야전의 미덕 (5)
무척이나 감사하게도 우리의 현명한 제르만 씨는 가장 선봉에서 명예로운 방패가 되어 달라는 나의 부탁을 선뜻 승낙해줬다.
덕분에 우리는.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나는.
두 번째 돌격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
솔직히 아직도 두 손발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걸 억지로 감추고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하고 있지만, 내가 지금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정도로 전장의 마법사는 압도적인 존재다.
어쩌면 지금이 물러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릴 생각은 없다.'
그렇기에 나는 반대로 더 침착하게 세부적인 진형까지 하나둘씩 계획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어떻게든 생각을 짜내자 그럴듯한 방책들이 조금씩 떠오르긴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키로스 경이 우려스럽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영주님, 도적놈들을 선두에 세워 방패로 쓴다는 전략은 저도 굉장히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영주님의 발상에 감탄했습니다. 그렇지만...."
고작 이걸로 마법사의 포격을 버틸 수 있겠습니까?
뒷말을 흐린 키로스 경의 걱정은 그런 의문을 담고 있었다. 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슨 질문인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 역시 뻔했다.
나는 한 박자 쉰 뒤 그렇게 대답했다.
"확실히 고작 이 정도 수단만으로 아군의 사기를 유지하고 포격을 버틸 수 있을 리는 없겠죠."
"...!"
나도 다 알고 있다.
이번 돌격 때는 결속력이 조금 약해지는 것을 감수하고 병사들 사이의 간격을 더 띄울 생각이다. 이러면 아까 전처럼 한 번의 포격에 30명씩이나 전투 불능이 되고 그러진 않겠지.
넉넉히 잡아서 대략 한 번에 20명 정도 낙오?
우리가 대략 1,000명 이상, 적이 600명.
게다가 병력의 질도 우리도 더 높으니 동수만 있어도 이길 수 있다고 가정하면.
이론상 돌격 중 500명이 죽어도 우리의 승리.
그리고 500명 이상을 죽이려면 우리가 돌격하는 동안 마법 포격을 25번 넘게 발사해야 한다.
아무리 괴물 같은 마법사라고 해도 그 정도는 무리지.
그러니까 절대적인 전력만 보면 여전히 우리가 우세하다. 그건 무척이나 고무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는 현실이고 우리 병사들은 감정 없는 로봇이 아니거든.'
병사들은 RTS 게임의 유닛이 아니다.
명령을 한번 내렸다고 도망치지도 않고 전멸할 때까지 싸우지 않는다.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다.
현대전에서는 전투력의 30% 정도만 손실되어도 부대의 전투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전투력은 단순히 수치적인 병력의 머릿수만이 아닌 병사들의 전투 의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물론 전근대에 가까운 이 세상의 교리는 현대전과 다소 큰 차이가 있겠지만.
'예상치 못한 마법사의 등장이라는 극단적인 전황을 고려하자면.'
대충 포격을 5번 정도 맞으면 그대로 무너지지 않을까. 아니, 이것도 지나치게 희망적인 관측일까.
전장의 마법사는 병사들의 몸보다 마음을 먼저 흔들어 부셔 놓거든.
"영주님, 그렇다면...."
그래, 이게 현실이다.
선두에 고작 인간 방패 100명이 더 선다고 이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나도 다 안다.
키로스 경의 우려는 옳다.
이대로는 단순한 자살 행위다.
"그러니까."
단순히 '이대로'로 끝나지 않게.
현실을 바꿔줄 만한 수단을 더 동원해야지.
"도적들의 바로 뒤, 우리 병사들의 가장 앞. 그곳에서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영주님!"
키로스 경은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지만, 나는 뜻을 꺾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말했잖아.
카드를 다 쓰겠다고.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나 같은 인텔리에게 선봉은 그다지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언제는 위험하지 않았던 적이 있나?'
처음 제논의 빈자리를 채웠던 전투부터 시작해서 시하브 토후국 정벌전을 넘어 끝내 오늘까지.
위험하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걸 다 알면서도 그저 담백하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 추구했을 뿐이다.
'원래 이번 전투 때는 얌전히 사릴 예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지.
아쉽다, 아쉬워.
말했다시피 문제는 오직 병사들의 사기뿐.
절대적인 전력 자체는 우리가 우위.
'그러니 유일한 승리의 방법은.'
그 고무적인 사실을 활용하는 것.
사실 떠오르는 계획은 이미 있다.
도적단 설득이 잘 끝난 덕에 시도할 수 있을 듯하다.
과연 잘 될지 안 될지는 해보기 전까지 모르겠지만.
"저를 믿으십시오."
그래도 당장 이거보다 나은 계획은 아마 없을걸.
그거면 충분하지.
"영주님...."
"제가 선봉에서 직접 우리 병사들을 속여보겠습니다."
"...네?"
아군을 속여보겠다.
다소 생뚱맞아 보이는 나의 포부에 베테랑 키로스 경조차 잔뜩 당황한다.
그 표정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까 같은 가짜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이.
그래, 웃음을 나올 정도면 됐지.
좋아, 돌격하자.
끝장을 보자.
***
아쉬파르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가 펼친 회심의 마법이 그대로 하찮은 것들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저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봐라.
마치 벌레 무리와도 같다.
그런 광경을 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러운 충족감이 온몸을 채웠다.
우월감.
자신이 저 미천한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훨씬 더 우월한 존재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애초부터 격이 다르다는 확신이 뇌를 번개처럼 달려 질주한다.
'그래, 바로 이 감각을 위해 전장에 나선 것이다.'
돈? 물론 좋아한다.
흔히 마법사는 돈 따위에 흥미가 없다고들 생각하지만, 그건 절대 사실이 아니다.
아쉬파르는 돈을 좋아한다. 그러니 거액을 받고 이런 벽지까지 와서 용병 행세를 하는 것이지.
그러나 돈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이유다.
진정한 이유는 바로 저 광경에 있다.
그래, 이건 일종의 증명이다.
무지렁이들에게 마법사의 위대함을 알리는.
'이 얼마나 고귀한 사명인가!'
야전을 펼친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애초에 저런 놈들을 두려워해서 수성전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멍청한 에미르 같으니.
역시 고귀한 혈통이라고 한들, 그래 봤자 결국 마법의 이치도 깨닫지 못한 범인일 뿐인가.
'수성전을 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전쟁이 길어질 수밖에 없잖나.'
그러면 외부에서 고용된 아쉬파르까지 그만큼 요새에 더 오랜 시간 동안 갇혀 떠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 변변찮은 시설조차 갖추지 못할 정도로 낙후된, 변방의 하찮은 돌벽 안에서 말이야.'
불쾌하게도.
게다가 상대는 고작 변방의 잡병.
그나마 이름을 좀 떨친 기사단과 용병대라고 한들, 결국 일평생을 우물 속 개구리처럼 살아왔을 무지렁이들.
그런 하찮은 놈들에게 겁을 먹어 성벽 뒤에 숨는다니.
'단순히 수치스럽다는 말 따위로는 그 심정을 다 표현하지도 못할 정도야.'
어차피 자신이 나서 전장을 몇 차례 휘저어 주면 저절로 무너질 쓰레기에 불과한데.
아쉬파르는 자신했고, 또 결과로 증명했다.
그의 선택에는 언제나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밖으로 나와야만 저 벌레들이 절망에 빠져 절규하는 모습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지 않은가.
아쉬파르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고민했다.
슬슬 추격을 시작해도 되겠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바위를 떨궈 주면 될까? 우둔한 것들이 언제쯤 결코 도망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목숨을 구걸하게 될까?
그렇게 행복한 고민을 하던 아쉬파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적이, 적이 다시 돌격을 시작한다!"
근처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르잔 토후국의 한 지휘관이 내뱉은 경악이었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아쉬파르의 고개도 니카로스 군을 향해 휙 돌아갔다.
정말이었다.
물러났던 저 역겹고 비천한 종자들이, 어느새 다시 대형을 갖춰 서서히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허, 이런 열등한 것들이 감히."
아르잔의 지휘관이 병사들에게 서둘러 진형을 갖추라고 명령하는 모습을 짜증 난다는 눈으로 대충 흘기며, 아쉬파르는 다음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감히 자신의 마법을 보고도 아직 이를 드러내다니.
버러지 놈들이 주제를 몰라도 정도가 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늙은 마법사는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대충 천 명 정도 된다고 했던가.
확실히 하찮은 것들이 머릿수가 많긴 하다.
헛된 희망을 한 번 정도는 더 품어볼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선봉에서 달리는 병사들의 저 추레한 몰골과 무장을 봐라. 용기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기색을 봐라.
저딴 머릿수 따위는 위대한 지혜 앞에서는 하등 의미가 없는 것이다.
'좋다. 그 한심한 지능으로 인해 고작 한 번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몇 번이고 더 알려주마.'
고귀한 마법사에게 대항해서는 안 될 이유를.
다시 한번 아쉬파르의 눈앞에서 거대한 바위가 솟아난다.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리고 다시 지상으로.
보잘것없고 하찮은 병사들의 머리 위로.
추락. 폭음.
순식간에 아까와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바위 아래 니카로스의 병사들이 깔려 압사하고, 뜨거운 피가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그 광경을 보며 아쉬파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이번 웃음은 아까보다도 더 짧았다.
그는 곧 어떤 위화감을 느끼고 말았다.
'무너지지, 않는다고...?'
니카로스 남작령의 군대가 붕괴하지 않는다.
피 먼지 속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앞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쉬파르라는 인간을 더없이 불쾌하게 만들었다.
"...기분이 좋지는 못하군."
그는 조금 전보다 더 진한 감정을 가득 담아 거칠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물론 그런 휘두름 속에서도 주문은 마치 그의 관록을 증명하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깔끔했다.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적의 학문을 익혀 왔다.
이제는 아쉬파르의 머리보다 몸이 먼저 주문을 기억하고 있었다.
바위가 떨어진다.
니카로스 군의 머리 위로.
한 번.
한 번 더.
그리고 두 번.
그래서 네 번.
어느새 다섯 번.
아쉬파르는 분명 전력을 다했다.
순식간에 많은 마력을 사용하여 조금 숨을 헐떡거릴 정도로.
"뭐냐...?"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망연한 중얼거림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니카로스 군이 계속 진군하고 있다.
그들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
***
니카로스 군이 계획한 두 번째 회심의 돌격.
그 선봉에 있는 것은 니카로스 남작령에 포로로 붙잡혔던 도적들이었고.
"이 새끼들아!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결국 그냥 다 죽는 거야! 살길은 돌격뿐이다! 조금만 버텨! 살아남기만 하면 우린 자유다! 어차피 붙기만 하면 이쪽이 이겨! 튀지 말라고!"
거기서 또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제르만이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목이 찢어지게 미친 듯 소리쳤다. 정말로 진심을 가득 담아서.
영지를 약탈하던 도적의 개심과 속죄.
마지막으로 고귀한 희생.
언뜻 보기에는 낭만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그림이었지만, 사실 딱히 그가 진심으로 니카로스 남작 티베리오스의 제안에 회유된 것은 아니었다.
'이 개 같은 꼬마가...! 뭐가 제안이야! 거기서 수락 안 했으면 진짜 다 죽여버릴 기세였으면서...!'
- 무엇보다 저는 제르만 씨가 목숨 귀한 줄 아는, 현명하고 합리적인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전례가 있으니까요.
- 그러니 저도 그냥 다 죽으라는 식의 무리한 요청까지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적당한 협조 정도면 됩니다.
- 대충 절반, 포로의 절반 정도가 전투 불능이 되면 후방으로 빠지셔도 좋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저희가 알아서 하지요.
빌어먹을 정도로 소름 돋는 애송이 녀석.
진짜 선택지만 있었더라도 이딴 말도 안 되는 거래는 수락하지 않았을 거다. 무엇보다 저 망할 풋내기 남작이 반드시 약속을 지킬 거란 신뢰 따위도 없다.
'협조는 개뿔! 그냥 협박이잖아...!'
그렇지만 애초에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
제르만은 제안을 건네는 동안 번쩍였던 티베리오스의 눈빛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진짜로 수틀리면 죄다 죽여 버릴 분위기였어!'
그리고 더 끔찍한 것은, 실제로 그런 능력도 된다는 것이고.
아무리 니카로스 군이 현재 적 마법사에게 쫓겨 추하게 도망친 꼴이라지만, 그렇다고 그게 무력한 포로 100명도 제압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강약약강'에는 소질이 따로 필요 없으니까.
1,000 vs 100.
단순히 숫자로만 봐도 압도적인 차이다.
숙련도나 무장, 건강 상태 등까지 고려하면 격차는 더 벌어진다.
아무리 긴박한 상황이라지만 아예 작정하면 비전투 인원 따위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겠지.
물론 도적 포로들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테고, 그러다 일부가 도망이라도 치게 되다면 상황이 조금 더 귀찮아질 수도 있지만.
'여기서 도망쳐봤자 어디로 가라고...!'
여기는 아르잔 토후국의 영토.
침략받아 잔뜩 성이 난 월광교 광신도들의 황무지.
엄밀히 따지면 붉은바위 도적단은 제국과 월광교, 그 어느 쪽의 편도 아닌 회색분자에 가깝지만, 지금 아르잔 토후국의 눈에는 단순한 제국의 부역자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그래, 니카로스 남작 티베리오스의 말대로.
제르만은 정말로 합리적이고 자기 목숨 귀한 줄 아는 인간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그는 더럽게 부조리하지만, 결국에는 본인이 살 확률이 가장 큰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선택지는 전부 생존율이 0%니까.
제르만은 수학에 능했다.
"도망치지 마! 이제 진짜 거의 다 왔어! 진짜 조금만 더 하면 그때는 도망쳐도 돼! 멍청한 선택하지 마, 이 머저리들아!"
제르만이 울면서 소리쳤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는 커다란 마법 돌멩이가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소리에 묻혀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런 울음소리 따위와는 별개로, 니카로스 군은 여전하고 꾸준하게 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
#045. 야전의 미덕 (6)
사실 돌격에 앞서 나는 병사들에게 그리 선언했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대신 땜빵이 되어줄 도적 나부랭이들이 있어. 너희는 안전해. 그러니 안심하고 돌격하렴.'
물론 당연히 그대로 얘기하지는 않았다.
더 그럴듯하게 잘 포장해서 말했다.
나는 미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전반적으로 대충 이런 느낌인 건 맞았다.
그리고 이건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였다.
우리의 앞에 존재하는 것은 한낱 개인으로서는 항거하지 못할 힘을 휘두르는 마법사였고, 진격을 시작하는 즉시 폭격에 맞을 예정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진격에 앞서 반드시 믿음과 신뢰를 먼저 심어주어야 했다.
그리고 다행히 효과가 아예 없진 않았다.
전쟁터에서 나 대신 맞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큼 기쁜 소식은 없다. 덕분에 어떻게든 병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해 다시 전선에 세워놓을 수는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정말로, 진심으로, 까놓고 말하자면.
'아마 걔들, 방패로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될걸...?'
그래, 그렇다.
지금까지 기껏 설명한 것과 상반되는 것처럼 들려도 어쩔 수 없다. 그냥 현실이 그렇다.
'아니, 진짜 솔직히 생각해보자고.'
라이코쉬의 분쇄.
애당초 저 폭격 마법은 곡사로 발사되어서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윗덩어리다.
정면에서 직사로 날아오는 총알도 아니고, 전방에 고작 100명 정도의 사람을 세우는 게 그렇게까지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리가 없다.
굳이 적 마법사가 선두만 집중적으로 조질 생각이 아니고서야 폭격 마법은 그냥 우리 머리 위에 공평하게 떨어진다고 봐야지.
그리고 마법사가 그런 생각을 품을 이유는 전혀 없고.
그렇잖아? 맞잖아?
불편한 진실일지 몰라도 현실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몰라도, 조금 있다가 병사들도 실제로 다시 폭격에 맞게 된다면 이 사실을 여실히 깨닫게 될 거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정말 모든 게 끝이다.
내가 사기를 친 게 들킬 테니까.
병사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사방으로 도망치겠지.
그러니까.
"자랑스러운 니카로스의 용사들이여."
절대로 들키지 않아야 한다.
이 사기극을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입도 계속 털어줘야 하고.
"내가 가장 앞장서겠다."
무엇보다 내가 행동으로 직접 보여줘야겠지.
바로 그걸 위해서 내가 최전선에 서는 것이다.
"나를 따르라."
키로스 경.
제가 병사들을 한 번 속여보겠다고 했죠?
끝까지 한 번 최선을 다해 홀려보겠습니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환상적으로.
***
니카로스 남작령의 한 병사, 요셉이라는 이름의 징집병은 반쯤 무아지경의 상태가 되어 전진했다.
곁에는 비슷한 처지의 동료이자 친구들이 가득했다.
그들의 가장 앞에 선 젊은 영주는 그렇게 외쳤다.
"멈추지 마라! 내가 가장 앞장서겠다! 위대한 솔레오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솔직히 쉽게 믿을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들은 조금 전 그 마법이라는 것의 위력과 공포를 직접 체험하고 온 산증인이었으니까.
"후욱, 후욱...!"
사실 지금도 두 다리가 떨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숨이 거칠어진다.
상상만으로 털썩 주저앉아 버릴 것 같다.
하지만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결국 그 소리를 듣고 말았다.
"적이 마법을 준비한다! 충격에 대비하라!"
간부의 다급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그 말을 듣자 요셉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우, 으아."
멀리서도 보이는 저 두려운 바윗덩어리.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가오는 게 실시간으로 보이는 죽음의 폭격.
마음 같아서는 당장 손에 든 창도 다 내던지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영주님과 지휘관들은 결코 그런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설령 허락해준다고 한들 이미 달아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요셉은 본인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칠흑의 세상 속에는 오로지 충격만이 존재했다.
다리가 울린다.
대지가 울린다.
대기가 울린다.
비명이 울린다.
그리고 끝으로 곁에서 울려오는 작은 중얼거림에 요셉은 다시 눈을 떴다.
"저, 저것 봐."
"마법이...!"
첫 폭격은, 정확히 선두를 달리던 도적 포로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들의 피와 살은 사방으로 무참히 튀었지만, 니카로스의 병사들은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요셉과 친구들은 그 광경을 보고 잠시 생각이 멈춰버렸다. 혼란 속에서 저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유추하려다 그만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그들을 깨워주고 대신 답을 내려주는 존재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영주님이 말했고.
그가 하는 말의 뜻은 명확했다.
"봐라! 이 전투는 성전이다! 그저 피 흘려야 할 자가 피 흘릴 뿐인 심판이다! 신께서 우리를 가호하신다!"
...아.
그렇구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순간적으로. 그저. 잠시.
"...!"
그렇게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어쩐지 그 이야기에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그 자신도 모르게 요셉의 두 다리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덕분에 니카로스의 아들들은 마법 폭격에 맞고도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그만큼 적과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또 떨어진다!"
그리고 잠시 뒤 이어지는 두 번째 폭격.
이번에 요셉은 눈을 감지 않았다.
다시 한번 땅이 울렸다.
다시 한번 비명이 울렸다.
"우, 으아, 으아악!"
이번 비명 역시 요셉의 앞에서 들려왔다.
그렇지만 이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앞은 앞인데.
너무 가깝다.
비명이 생각보다도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다.
요셉은 본능적으로 그 발원지를 향해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고작 50걸음.
그곳은 바로 도적들이 아닌, 요셉과 똑같은 니카로스의 병사들이 자리 잡고 진군하던 위치였다.
"사, 살려...."
매일 보던 얼굴들.
니카로스에서 함께 살아가던 일부가 그대로 뭉개져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설프게 살아남은 이들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어, 어, 어."
그 광경을 목격하자 요셉의 심장이 다시 폭풍 속 격랑처럼 넘실댄다. 확고했던 믿음과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두 다리가 다시 후들거리기 시작한다.
"뭐, 뭐가 마땅한 심판이라는 거야! 고기 방패로 쓰이는 건 결국 우리잖아! 소, 속았어! 속았다고! 우린 다 죽을 거야!"
바로 옆에서 똑같은 광경을 목격한 전우 한 명이 미친 듯이 거품을 물며 소리친다. 불경하기 그지 않는 언사였지만, 요셉은 차마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나의 죽음이 너무나도 가깝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할까.
도망치면 살 수 있을까.
과연 도망칠 수는 있을까.
그래도 살기 위해서는 역시.
그렇게 요셉의 생각보다도 먼저 발이 움직이기 직전.
"...아니, 저것 좀 봐."
누군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의 눈을 떼지 못하던 참사의 현장에서 한 인간이 서서히 일어났다.
폭격의 여파로 나가떨어져 거친 흙바닥을 뒹군 듯 엉망인 몰골이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당당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아직 이곳에 살아있다!"
그는 바로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선봉을 자처했던 니카로스의 주인이었다.
그가 남아 선명하게 소리쳤다.
"봐라! 솔레오께서 우리를 지켜주셨다! 나와 너희가 바로 그 기적의 증명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아."
요셉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피 먼지가 몰아치는 와중에 듣기에는 썩 괴상한 이야기였지만, 아예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는 또 아니었다.
그래, 파괴적인 충돌이 아군을 덮쳤지만, 우리의 영주님은,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는, 가장 위험한 곳에 선 가장 고귀한 자는 아직 살아있다.
적들이 가장 죽이고 싶을 자가 아직 살아있다.
요컨대.
이교도의 마법은 감히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
"...!"
그것은 일종의 환상이었다.
믿게 되는, 믿고 싶은.
그 별것 아닐지도 모르는 한 사실에.
돌아서려던 발이 멈춰버렸다.
요셉은 눈을 떼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이 상황 속에서.
'적어도 한 번 정도는 더.'
눈앞의 저 젊은 영주를 믿어볼 만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정말로 아주 잘.
요셉과 그 친구들은 니카로스 남작령에서 태어났다.
그들의 부모님은 초대 영주 제논을 따라 제국에서 이 변방으로 건너온 개척 1세대였고,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니카로스라는 영지가 새롭게 생겨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커왔다.
그렇기에 그들은 안다.
여기가 얼마나 거지 같은 땅인지.
언제 도적 떼가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치안.
갑작스레 한집 식구가 되어버린 거친 초원 원주민들.
마치 연례행사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이교도들의 침략.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이웃 영지의 멸망 소식.
언제든 우리가 바로 다음이 될 수 있다는 공포.
'하지만 니카로스는 아직도 살아있다.'
그 모든 갈등과 위기를 극복하고 아직도 존재한다.
그 사실이 바로 주민들의 자부심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부심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바로 눈앞의 영주,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라는 사실도 안다.
솔직히 전 영주인 제논과 마누엘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죽음을 각오했다.
마침내 그들이 멸망할 때가 찾아왔다고 생각해버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기대를 주지 않았던 현 영주는 그 거대한 위기를 보란 듯이 극복해냈다.
아니, 단순히 극복했다는 수준을 넘어 아예 믿지 못할 위업을 이뤄냈다.
증오스럽던 도적 떼의 토벌.
원수였던 시하브 토후국의 정벌.
어느새 그 역사는 주민들의 작은 희망이 되었다.
'그러니까 한 번 정도는 더....'
믿어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한번.
무의식적으로 요셉의 다리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그만큼 적과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 광경을 보며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는 조용히 두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니카로스를 위하여! 고향을 위하여!"
어느새 적이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
니카로스 군이 무너지지 않는다.
연신 파괴적인 마법 폭격을 두들겨 맞고도 멈추지 않고 진군하고 있다.
양군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끈질기다.
감히 마법사가 전력을 보였음에도 도망치지 않는다니.
아쉬파르는 분노와 굴욕감에만 그만 욕지거리를 씹어 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쉬파르 님."
아르잔 토후국 군의 총지휘관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처하기 위해 노력했다.
"적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일단은 잠시 뒤로 물러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뭐...? 물러나라고? 나 보고 저런 무지렁이를 앞에 두고 자리를 피하라고?"
그 제안에 아쉬파르의 분노에 불이 번져 더 크게 타오르기 시작했지만, 총지휘관은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쉬파르 님께서 쓰러지시면 군 역시 무너집니다."
"...."
늙은 마법사는 잠시 침묵했고, 짧은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좋네."
으드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대답과 함께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말에 담긴 것은 명백한 동의의 뜻이었다.
무척이나 화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니다. 지금은 지휘관의 말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아쉬파르 또한 인정했다.
"잠시 교전하며 시간만 벌어주게. 그러면 내가 후방에서 놈들의 진형을 완전히 박살 내주지."
"알겠습니다."
아쉬파르가 쓸 수 있는 마법은 '라이코쉬의 분쇄' 말고도 다양하다. 그중에는 당연히 양측 병력이 근접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유용한 마법도 존재하고.
그래, 조금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지긴 했지만, 아직 위기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 봤자 무너지던 사기를 간신히 붙잡고 있는 적일 뿐이다. 돌격이 한 차례만 저지되어도 마치 도미노처럼 순식간에 붕괴하고 말겠지.
아쉬파르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그렇게 달래며 후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니, 정확히는 옮기려고 했다.
전방에서 다급히 들려오는 병사의 비명만 아니었다면.
"적의 진형이 바뀝니다!"
"뭣!"
보고를 듣고 당황하는 총사령관의 목소리.
그 소리에 아쉬파르 역시 순간적으로 전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말로 돌격 중인 적의 진형이 바뀐다.
전방을 가득 채우던 추레한 병력이 좌우로 빠지고, 그 자리를 중무장한 숙련병이 채운다.
그리고 마치 날카로운 화살촉을 연상시키듯, 그들이 한 점으로 모인다.
오랜 세월 전장에서 뒹굴던 아르잔 토후국의 총지휘관은 그 형태를 단박에 알아봤다.
"어린진(魚鱗陣)...!"
그 이름 그대로 물고기 비늘 형태를 지닌 넓은 삼각형 모양의 진형이자,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적의 종심을 돌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진형.
어디를 향한 돌파인지는 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지금 니카로스 군이 노릴 만한 지점은 오직 한 곳밖에 없다.
그들은 명백히 마법사 아쉬파르가 있는 아르잔 토후국 군의 중심을 향하고 있었다.
"놈들을 막아야 한다! 병사들을 중앙으로 모아라!"
총지휘관의 다급한 외침에 아르잔 토후국 군도 황급히 진형을 바꾼다. 아쉬파르의 원활한 마법 발동에 초점을 맞추던 병사들이 중앙으로 모여 두꺼운 벽을 형성한다.
'막을 수 있다...! 우리도 병력을 한데 집중해 돌파를 저지한다면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어.'
이기지 않아도 된다.
시간만 번다면 머지않아 아쉬파르가 모든 니카로스 군을 분쇄할 수 있다.
아르잔 군의 총지휘관은 순간 그런 판단이라는 이름의 기대를 품고야 말았지만.
"자, 장군님! 놈들의 뒤쪽에서!"
애석하게도 니카로스 군이 펼치는 공세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보병들 뒤쪽 저 멀리서 거리를 두고 진군하던 기병들이 박차를 가한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전장을 크게 우회 기동한다.
"검은 매의 기사단!"
목표는 오직 한곳.
아르잔 군의 후방.
니카로스의 상징과도 같은 부대다.
그들 또한 돌격을 개시한 이상, 이제 아르잔 군은 전방에만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
총지휘관의 두 눈이 불안하게 떨린다.
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그를 구한 것은 바로.
후방으로 물러나려다 발을 멈췄던 아쉬파르였다.
"...자네는 측면에만 집중하게."
노인은 마치 씹어뱉듯 입을 열었다.
"놈들의 기병대만 어떻게든 저지하게. 정면의 돌파는 내가 막지."
"그, 그렇지만 아쉬파르 님! 너무 위험...!"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
망설이는 총지휘관을 보며 아쉬파르가 거칠게 일축했다. 마법사의 두 눈 가득한 분노와 굴욕감에 총지휘관은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했다.
"...."
그래, 틀린 말도 아니다.
위험하긴 하지만,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총지휘관은 빠르게 명령을 하달했다.
중앙으로 모이던 병사들이 흩어져 다시 측면과 후방을 보호한다. 아르잔 군의 진형이 요동친다.
그 와중에도 니카로스 군은 여전히 마법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점점 더 서서히 가까워진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아쉬파르는 뇌까렸다.
"...열등한 벌레 놈들이."
충돌이 머지않았다.
마침내 서로가 적 병사 하나하나의 얼굴까지 그의 눈에 담을 수 있을 즈음, 말에 탄 한 사내가 당당히 검을 뽑았다.
"네놈이더냐."
아쉬파르는 그 사내의 두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검을 뽑은 사내.
황금빛 눈을 가진 검은 머리의 청년.
니카로스 남작.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누구보다도 가장 앞에서 돌격하는 선봉.
아쉬파르가 그를 눈에 담은 순간.
티베리오스 역시 선명하고 진한 미소를 지었다.
#046. 야전의 미덕 (7)
마침내.
마침내 저 망할 놈의 폭격을 뚫고 여기까지 왔다.
눈앞에 저 가증스럽고 얄미운 마법사가 보인다.
두 입꼬리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렸으니까.
"모두 진형을 바꿔라!"
호령에 맞춰 다시 한번 병사들이 사방으로 움직인다.
징집병들이 좌우로 빠지며, 그동안 후방에서 숨죽이던 푸른이리 용병대가 앞장서 선봉의 창끝에 선다.
어린진(魚鱗陣).
오로지 종심 돌파를 위한 진형.
목표는 오직 하나.
적 마법사만 먼저 제거하면 승리는 확정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보다 더 적합한 진형은 없다.
정예병을 한 곳으로 모은 탓에 상대적으로 측면이 부실해졌긴 하지만 괜찮다.
적들에게도 측면을 공략할 여력 같은 것은 없다. 우리 검은 매의 기사단이 놈들을 흔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 끌 생각 따위는 하나도 없으니까.
"돌격! 돌격하라! 내가 너희를 이끌겠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까지도 최선두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남작님께서 친히 앞장서신다! 뒤처지는 놈은 내가 용서 안 한다! 부와 영광이 눈앞에 있어! 솔레오께서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이 망할 것들아!"
바로 뒤에서 평소와는 달리 진지하고 격정적으로 소리치는 안티모스의 목소리가 들린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1,000에 달하는 병사들이 오직 나의 등만을 쫓으며 따라붙고 있다.
그래. 양군이 충돌할 때까지 무너지지 않고 버틴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음에도, 나는 안전한 후방으로 물러서지 않았고 여전히 선봉에서 모두를 이끌었다.
"위대한 솔레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싸움을! 비열한 침략자들을 자비를 보이지 마라!"
목이 터지도록 소리쳤다.
고통과 피로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기세 그대로 누구보다 먼저 나아가 우리를 가로막는 적병을 베어 넘겼다.
"...!"
용감하게 창을 꼬나 들고 나선 녀석이었지만, 내가 더 빠르다. 나는 검을 휘두르자 곧 녀석이 피 끓는 소리를 내며 무력하게 쓰러져 땅을 뒹군다.
"뭣들 하는 거냐! 최소한 돈값은 해야지! 설마 푸른이리 용병대의 이름에 부끄러움을 남길 생각이냐!"
그리고 그 틈을 노려 나의 측면을 노리던 또 다른 적병의 목을 안티모스가 순식간에 쪼개버린다. 그리고 혹시나 또 다른 위협이 있는지 주위를 신속하게 살핀다.
"...."
그래, 나도 물론 알고 있다.
정말로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이렇게 직접 선봉에 서는 게 전략적으로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거든.'
슬프게도 나는 돌격 대장으로서는 썩 보잘것없다.
나름 꾸준하게 단련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네오파이트에도 아슬아슬하게 턱걸이하는 수준일 뿐이니까.
그리고 지금 그런 나를 지키기 위해 안티모스와 주위 용병들이 나를 둘러싸며 온 전력을 다하고 있다.
돌파의 첨병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짊어진 정예들의 신경이 분산되고 있다.
전장에 순간적인 충격을 줄 수는 있어도, 절대적 수치로만 보면 비효율도 이런 비효율이 없다.
하지만.
"봐라! 남작님께서는 쓰러지지 않는다! 선봉에서 당당히 맞서고 계신다! 이게 바로 솔레오의 가호다!"
"...!"
그 순간적인 충격이 중요한 거다.
가장 중요한 인물이 가장 위험한 곳에서.
정확히는 그렇게 보이는 곳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음에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바로 그 명명백백한 증거.
마법 폭격에 맞을 때와 똑같다.
전장에서 그런 걸 본 이상 병사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만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은 없으니까.
유감스럽게도 이것도 결국 다 합리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상황 손수 다 만들어놓고 나만 빠지는 건 너무 아깝지.'
처음부터 모든 게 말도 안 되는 도박.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목숨이 위험했던 것은 병사들뿐만이 아니다.
'나도 선봉에 섰고, 몇 번이나 죽을 뻔했지.'
물론 선봉이라고 유독 더 위험했던 건 아니다.
곡사로 떨어지는 돌멩이를 상대로 딱히 후방도 안전하지는 않았던 것처럼, 전방이라고 더 위험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곤죽이 될 확률은 비슷하다.
이 또한 사기 유지를 위한 환상의 일환이었다.
그냥 다른 병사들과 다를 바 없이 위험했던 것뿐이다.
'...그래, 딱 그 정도.'
운 없이 죽은 우리 병사들과 똑같은 위험을 감내했고.
끝내 살아남고 이겨낸 끝에 나는 여기까지 왔다.
혹시 조금이라도 일이 잘못 풀렸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지.
그렇지만.
'이 방법만이 유일했거든.'
저 괴물 같은 마법사를 상대로 병사들을 여기까지 끌고 오기 위해서는 정말 이 방법밖에 없었다.
도적 방패고 수적 우위고, 결국 솔선수범하는 내가 없었다면 모두 수포가 될 계책이었을 뿐이다.
영주가 직접 나서는 것 외에는 병사들의 사기를 봉합할 방법이 도저히 없었다.
그래서 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결국.
이 자리는 그렇게 해서 얻은 자리다.
'그러니까 쉽게 양보해줄 수는 없지.'
그런 거로 하자.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승패는 모른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
사기 토템인 내가 더 필요하다.
'사기 유지라는 합리적 필요와 양보하기 아깝다는 나의 사적 동기가 일치했던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면.
이 위험천만한 선봉에서도 더 잘할 수 있겠지?
아무렴.
뭐, 어때.
"우, 으아아!"
엉망진창인 논리지만 그래도 결과든 훌륭하다.
적이 비명을 지른다.
우리가 열심히 지옥을 뚫고 온 끝에 이번에는 그들의 차례가 되었다.
압도적인 마법의 화력.
속수무책으로 도망치던 니카로스 군.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낙승을 예상하던 아르잔 군에게 지금의 상황은 그야말로 날벼락이나 다름없을 거다.
그들의 공포가 선명히 보인다.
"막아라! 막아! 우리에게는 마법사가 있다! 조금만 버티면 이긴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고자 멀리서 적 지휘관이 외친다. 그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 버티면 너희가 이기겠지.
너희도 아직 진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버티게 두지 않을 거야.
"조금만 더 전진하라! 이제 다 왔다! 적들은 오합지졸뿐이다! 이제 니카로스의 복수를! 니카로스의 분노를 보여줄 순간이다!"
아군은 멈추지 않는다.
적은 우리의 발을 묶지 못한다.
그야말로 파죽지세.
물론 우리가 그렇게 전진하는 동안.
적이라고 무력하게 있지만은 않았다.
"마법이다! 모두 피해라!"
마법.
땅이 비정상으로 갈라지고, 마치 수십 가닥 가시의 세례처럼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기는 암벽들이 솟아오른다.
뾰족한 암벽의 끝머리가 꼬챙이라도 되는 양 우리 군의 불운한 몇몇 병사들의 사지를 찢어발긴다.
대지 학파의 살인 기술이 다시 한번 우리를 덮친다.
그렇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이제 이 정도로는 부족해.'
우리의 진군을 막기에는.
절대로 적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나의 겁많은 병사들을 과대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담백한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다.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마라! 가족의 목숨과 고향의 미래가 너희 두 발에 달려있다!"
마법에 찢겨나간 병사들의 비명과 신음이 전장을 가득 채우지만, 우리 군은 결코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 누구도 도망치지 않고 내 등 뒤를 빼곡히 채워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애초에 대지 학파의 마법은 야전보다는 공성전에 훨씬 더 어울리는 녀석이다.
저런 바위로 성벽을 두들기거나, 반대로 성벽 너머에서 적 진형을 후려갈긴다고 생각해 봐라.
상대에게는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은 광경이다.
하지만 여기에 그 커다란 바위가 으깨 마땅한 성벽 같은 건 하나도 없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굳이 바위로 뭉개기에는 지나치게 작고 연약한 인간의 무리가 전부다.
'이래서야 귀한 마법까지 쓰는 수지가 안 맞지.'
그래, 처음부터 아르잔 토후국 놈들은 전장을 잘못 골랐던 거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독점할 수 있던 승리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나눠줘 버리고 말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우리 병사들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지금 승리의 천칭이 우리 쪽에 더 기울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절대로 무너질 리 없지.'
저번에도 말했잖아.
말단 병사만큼 승리의 향기에 예민한 녀석이 없다고.
여기까지 왔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몇 번이고 우리 병사들이 무너질 뻔했다.
몇 번이고 궤멸적인 패배를 당할 뻔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살아서 여기까지 왔다.
모든 포격을 버티고 마침내 도달했다.
자, 시건방진 마법사야.
이제 네가 선명히 보인다.
그리고 너에게 도달할 길까지.
즐겁고도 즐거운 복수의 시간이다.
***
도대체, 도대체 어째서 이런 상황에 부닥친 것인가.
이해할 수가 없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저 무지렁이들에게 격의 차이를 알려주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그런 외유였을 뿐인데.
무서운 기세로 가까워지고 있는 니카로스 군.
그 가장 선두에 있는 한 청년을 아쉬파르는 흔들리는 눈으로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직이 청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남작...!"
그래, 아쉬파르 역시 아는 얼굴이었다.
사전에 설명을 들었으니까.
그렇지만.
저런 인간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니카로스 남작이 황금빛 눈을 빛내며 아쉬파르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좀체 지워지지 않는 웃음과 함께.
"대체 무슨...!"
그 웃음을 본 순간 아쉬파르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하찮은 전쟁 따위에서는 절대로 느끼지 않으리라 생각한 감정이 끝없이 샘솟았다.
지금 아쉬파르는.
마법사는 두려움에 떨었다.
"말도,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리고 곧장 망연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인정할 수 없다.
뛰어난 마법사의 두뇌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격렬한 감정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의식적으로 인지했지만, 그래도 인정할 수 없다.
그걸 인정한다는 굴욕적인 선택지는 그의 기나긴 삶에 단 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딜, 감히."
늙은 마법사는 그렇게 씹어 뱉으며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뒷걸음질 치던 발을 멈췄다. 두 다리를 땅에 단단히 고정하고 다시 한번 지팡이를 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 불쾌한 애송이 영주만 죽이면 적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
지팡이 끝으로.
사방에 가득한 바위 조각들이 몰려든다.
기다랗고 뾰족하게. 마치 고드름의 형상처럼.
대지 학파의 하위 마법.
'무타노의 송곳.'
하위 마법이라고 하지만 갑옷 정도는 우습게 우그러뜨린다. 한 인간을 꿰뚫어 죽이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중위 마법 수준의 위력은 없지만, 난전 속에서 한 개인을 저격하기에는 이만한 마법이 없다.
"죽어라."
바위의 창이 마치 화살처럼 쏘아진다.
니카로스 남작.
그 끝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단 한 명뿐이다.
맞출 수 있다.
표적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순식간에 가슴을 꿰뚫어 심장을 터트려 주마.
아쉬파르는 머지않아 펼쳐질 그 광경을 상상하며 비릿하게 웃었고.
"우오오오오오! 남작님!"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그 미소를 지워야 했다.
바위의 창은 니카로스 남작에게 닿지 못했다.
아쉬파르가 미처 보지 못한 곳에서 방패를 들고 잽싸게 나타난 금발의 젊은 용병 한 명이 막아냈기에.
"...!"
회심의 기습이 무위로 돌아가고.
마침내 남작과 마법사,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다.
남작의 검이 마법사를 향한다.
"제기랄!"
아쉬파르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 한번 황급히 지팡이를 휘둘렀다.
아직. 아직 늦지 않았다.
아직은 거리가 조금 남았다.
한 번, 단 한 번이라도 마법을 적중시킨다면.
"이이...! 죽어라, 이 벌레 같은 것!"
이제 그 목소리에 여유는 조금도 없다.
남은 것은 필사의 저항뿐이다.
"왜! 왜! 왜! 도대체 왜! 아직도!"
그러나 그 어떤 바위의 창도 남작에게는 닿지 못했다.
"제발, 제발 좀 죽어!"
어떤 것은 주위에 있던 호위 기사가 몸을 던져 막아 저지한다. 또 어떤 것은 미리 궤적을 파악하여 재빠르게 몸을 날려 피해낸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직접 검을 들어 막아낸다.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다.
"죽으란 말이다, 죽어!"
어느덧 둘 사이의 남은 거리는 단 열 걸음.
"이...!"
아쉬파르는 반사적으로 깨달았다.
이번이 최후의 기회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그의 지팡이가 휘둘러진다.
지금까지 휘둘렀던 그 모든 과정과 완벽하게 똑같이.
그렇지만 아쉬파르는 어리석지 않다.
그 결과만큼은.
이번은 다르다.
"하하! 나의 승리다, 이 하찮은 것아!"
지팡이 끝에서 모이는 것이 창이 아닌, 마치 수십 개의 꽃잎을 지닌 화려하고 거대한 바위의 꽃송이.
대지 학파의 중위 마법
'황금의 꽃'.
개화와 동시에 전방으로 터져나가 일대를 초토화하는.
대인용 지향성 산탄 폭발.
열 걸음도 채 남지 않은 거리.
이 거리에서 그 산탄을 피할 수는 없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마법사는 확신과 희열에 가득 차 소리쳤다.
"이제 죽...!"
하지만 그 외침은 끝마무리 되지 못했다.
'황금의 꽃'은 니카로스 남작을.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를 죽이지 못했으니까.
아쉬파르의 앞에 보이는 것은 끔찍하게 구멍 나 죽어가는 남작이 아닌, 푸른 빛을 띠는 투명한 막과 그 너머에서 여전히 그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남작이 전부였다.
마법사는 망연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
저건.
마력 방벽.
어째서. 저 애송이가.
저런 것을.
"...사."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마법사는 본인도 모르게 입술을 움직이고 말았다.
"사, 사, 사...!"
여태껏 부정했던 감정이 다시금 찾아온다.
두려움.
명예를 잃는다는 두려움.
변방의 애송이 따위에게 패배한다는 두려움.
지금껏 익혀온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장 아래에 있는.
그저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의 기나긴 삶에 단 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았던 선택지가 마침내 생겨났다.
"살려줘, 제발...!"
그렇지만 지금 그런 말에 의미가 있을 리가 없다.
태양 빛에 번쩍이는 검이 휘둘러지고.
그 한마디 말만 남긴 채.
마법사의 목이 육신을 떠났다.
니카로스 군의 승리였다.
#047. 야전의 미덕 (8)
나의 검이 그의 목에 닿기 직전.
마법사는 다급한 얼굴로 뭐라 이야기하려 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지금 그런 걸 들어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살려...!"
나의 검은 멈추지 않았고.
머지않아 내 손끝 위로 사람의 살과 뼈를 가르는 감각이 지나갔다.
그 강렬한 순간 속에서 나는 당당한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쳤다.
"마법사의 목을 베었다! 우리의 승리다!"
어떻게 보면 수백 명의 적군 중 고작 한 인간이 더 죽었을 뿐이지만, 딱히 이 발언을 설레발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마법사의 목을 벤 순간 이 전투는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우리가 이겼다!"
"니카로스 만세! 영주님 만세!"
나의 목소리를 들은 아군이 환호한다.
그들도 승리의 기운을 선명히 느꼈다.
병력의 수, 병력의 질.
애초에 모든 것이 우리가 우위에 있었다. 적들은 단지 마법사라는 비대칭 전력을 통해 일시적으로 우리를 압도했을 뿐이고.
그 일시적인 순간에 우리를 완전히 끝장내지 못했다면, 결국 적들에게 남는 결말은 패배뿐.
너무 억울해하지는 말자. 다 너희 실책이니까.
물론 내가 잘 해낸 덕도 크지만 말이야.
실제로 적군은 빠르게 붕괴하고 있다.
돌파를 위해 선봉에 선 것은 우리 군의 최정예들. 마법사까지 잃고 충격에 빠진 아르잔 군의 병사들은 결코 우리를 막을 수 없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나는 잠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살폈다.
'...진짜 아프다.'
농담이 아니라 온몸이 너무 쑤셔 죽을 것 같다.
조금 과하게 무리했나.
생명이 위중할 정도의 상처는 없지만, 고통은 장난 아니다. 거의 신체 한계를 넘어서 몸을 썼고, 포격의 충격에 날아간 걸 시작으로 몇 번이나 사선을 넘어버렸다.
갑옷만 봐도 엉망진창인 것이, 아마 지금쯤 안쪽은 멍투성이겠지.
'솔직히 가능하면 적 마법사를 생포할까 하는 생각도 아예 안 한 건 아니야.'
이교도긴 하지만 그래도 아주 귀한 인력인 만큼 회유할 수만 있다면 크나큰 전력이 될 테고. 하다못해 최소한 몸값이라도 두둑이 받을 수 있었을 테니까.
와, 그런데 도저히 그런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더라.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내가 사망해 버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냥 죽일 수 있을 때 망설임 없이 죽였다.
'괜히 마법사 마법사 하는 게 아니네....'
지식으로는 이미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경험하니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전장에서 마법사의 역할에서 포병에 가까운 만큼, 마법사는 상대적으로 근접전에는 취약하다고 알려져 있다.
근데 약하기는 개뿔.
저 '상대적으로', 이 부분이 포인트다.
어디까지나 근접전에 특화된 기사보다 조금 약한 정도일 뿐이라는 의미인 거다.
마법사 너무 OP네요.
빠른 너프 바랍니다.
그렇게 잡생각으로 과열된 뇌를 식혀 주던 중, 안티모스가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남작님!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 없으십니까!"
그래, 안티모스.
함께 돌파의 선봉에 서서, 몇 번이나 내 목숨을 구해준 용병대장.
그래서인지 안티모스도 상당히 꼴이 엉망이었다.
"네, 심각한 부상은 없습니다."
"아이고! 다행입니다! 진짜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가장 앞장서서 이교도 놈들을 썰어버리며 끝내 마법사의 멱을 따시는데! 아, 엄청나게 멋지긴 했습니다! 진짜 멋지긴 했는데, 그래도 걱정이라는 것을 아예 안 할 수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정말. 저놈의 주둥이는 전장에서는 변함이 없네.
또다시 발동 걸린 언어의 파도를 상대하고 있자니 급격히 피곤해진다. 만약 중간에 멈추지 않았다면 진짜 몸과 정신의 피로가 다 합쳐져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도 할 말은 해야지.
"감사합니다. 덕분에 몇 번이나 목숨을 건졌습니다."
담백하지만 진심이 듬뿍 담긴 나의 감사 인사.
그 인사에도 안티모스는 그저 평소처럼 호쾌하게 웃을 뿐이었다.
"하하! 별말씀을! 고용주를 지키는 것은 용병의 본분일 뿐입니다."
물론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그걸 실제로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용병 업계 최고 인성이라 불릴 수준이 아닐까.
내가 내심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적의 지휘관을 사로잡았다! 우리의 승리다!"
저 멀리서 누군가 소리쳤다.
키로스 경이였다.
이미 완전히 무너진 적군을, 내가 멈춘 뒤에도 검은 매의 기사단과 함께 계속 휘젓던 키로스 경이 마침내 적 지휘관까지 붙잡은 모양이었다.
좋아.
이러면 더 볼 것도 없이 게임 끝이지.
"하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안티모스가 승리 선언을 듣고는 나에게 웃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고, 나 역시 따라 웃었다.
하하.
진짜 너무 힘들었다.
***
아르잔 토후국의 에미르, 바샤르는 자신의 옥좌에 앉아 보고를 들었다.
참패.
마법사가 적의 병사들을 흔드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니카로스 남작은 잠시 후퇴한 뒤 곧장 부대를 수습하고 재돌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남작이 직접 선봉에서 마법사의 목을 베고 아르잔 토후국의 지휘관은 사로잡혔다.
그 처참한 이야기를 에미르 바샤르는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소름 돋는 침묵에 다른 신하들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런가."
모든 보고를 다 듣고도 10분이나 넘는 시간 동안 침묵을 지키던 에미르 바샤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놀랍게도 담담했다.
"모두 나가라. 혼자 있고 싶다."
"주군!"
신하들이 놀라 벌떡 고개를 들었지만, 에미르 바샤르는 단호했다.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다. 나가라."
신하로서 두 번이나 내려진 주군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다. 그들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주춤주춤 알현실을 떠났다.
이제 에미르 바샤르는 혼자 남았다.
완전히 혼자.
그렇지만 그는 굳이 홀로 소리 내 중얼거렸다.
"방심하지 않았다."
증오는 했으나 방심하지는 않았다.
처음 시하브 토후국을 지원할 때만 해도 주제도 모르는 애송이 영주라고 생각한 것은 맞다. 그러나 처참히 박살 난 에미르 말릭을 보고도 그 생각을 고수할 정도로 에미르 바샤르가 어리석은 자는 아니었다.
"그래, 나는 전력을 다했다."
전력을 다했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마법사를 고용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사를 소집했다. 국가의 미래를 팔아 현재를 샀다고 할 정도로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전력을 다했음에도 패배했을 뿐이다.
도대체 어째서인가.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증오스러운 이교도.
방심하지 않았다.
에미르 바샤르는 신실하다. 독실하다.
이교도를 상대하는 데 방심 따위를 할 리가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 불경한 일이다.
그러니 적을 상대하기 위한 충분한 준비를 했다.
그러나 괴물을 상대할 준비는 하지 못했다.
그저 그뿐이다.
"크, 크흐흐, 흐하하하."
그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웃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솔직히 웃기지 않은가.
"고귀한 마네스께서 우리 아르잔 토후국을 버렸구나."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괴물을 제국에서 태어나게 할 리가 없지. 그것도 아르잔과 마주한 이 변경에서.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어린 녀석이다.
그런데 마법사 상대로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두려움에 떠는 징집병들을 수습해?
그리고 직접 선봉에 서서 돌격해?
심지어 손수 검을 휘둘러 목을 베?
독실한 에미르 바샤르는 마네스 앞에서 한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모든 선택은 그저 신앙심의 발로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이게 평생을 바친 그 신앙과 믿음의 결과물인가.
그러니 웃을 수밖에.
한바탕 웃은 에미르 바샤르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알현실과 연결된 난간으로 향했다.
하늘이 맑았다. 그 사실에 되레 더 화가 났다.
그는 난간에 손을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높았다.
에미르의 알현실은 성의 최상층에 있으니까.
잠시 크게 한숨을 내쉰 그는 곧 난관 위로 올라갔다.
자연스레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러나 절대 물러서지는 않았다.
'이게 내 마지막 신앙심이다.'
이교도 손에 붙잡혀 죽을 바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마네스는 바샤르를 버렸지만, 바샤르는 결코 마네스를 버릴 수 없었다.
그는 뛰어내렸고.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에미르 바샤르는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소문을 하나 떠올렸다.
'아, 마네스께서 나와 아르잔 토후국은 버렸을지언정 월광교마저 버린 것은 아니구나.'
월광교의 땅에도 괴물이 하나 있으니까.
인간 바샤르는 그렇게 추락했다.
***
우리 군대는 위풍당당하게 진군했다.
변방의 남작이 지휘하는 군이 마법사가 포함된 적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피해가 제법 있기는 했으나 충분히 대단한 성과였다.
어디 자랑할 곳 없나.
이건 어디 자랑해도 될 이야기 같은데.
게다가 포로로 붙잡힌 적 지휘관을 심문해 보니 아르잔이 정말로 거의 모든 병력을 데리고 나온 게 맞았다. 따로 도움을 주러 온 동맹도 없고.
이러면 성은 텅 비어있을 것이다.
녀석들이 시하브처럼 굳이 꾸역꾸역 저항할 수도 있겠지만, 결과를 바꿀 수는 없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행군은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남작님은 이번 전쟁이 끝나면 뭘 하실 예정입니까?"
어느새 옆으로 온 안티모스가 나에게 물었다.
다소 두루뭉술한 질문이네.
"응? 글쎄요. 끝나고 난 뒤라."
"하하, 이런 말 하면 부정 탈 수도 있지만, 사실상 이 전쟁은 이미 이긴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설레발치는 게 나쁘다는 걸 대놓고 자각하면서도 이렇게 스스럼없이 치다니. 누가 안티모스 아니랄까 봐 이건 또 신선하다.
나는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는 안 냈다고.
"그러니까 이제 이 승리 다음에 있을 남작님의 행보가 궁금하다, 이것이죠!"
그런가.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다.
확실히 나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사안이고.
"글쎄요. 일단은 내부 정리부터 해야겠죠. 갑자기 관리해야 할 영토가 너무 커져 버려서 해야 할 일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시하브 토후국도 아르잔 토후국도 원래 니카로스 남작령보다 큰 땅이다. 당연히 인구수도 더 많고.
물론 변방인 만큼 미개발 지역도 많지만, 그래도 그걸 다 소화하는 것도 일이다.
총체적으로 계산해보면.
아마 지금 확보한 영지만으로 어지간한 제국 백작령 수준은 되지 않을까?
"아... 아쉽네요. 이대로 남작님께서 세상 끝까지 진격해 월광교 놈들을 몰살시켜 버릴 줄 알았는데...."
나는 그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지만, 안티모스는 정말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사실 지금 니카로스도 절대 안전한 게 아니다.
기반은 부실한데도 나쁜 의미의 주목을 너무 많이 받아 버렸다. 언제 역으로 침략받는 순간이 올지 모른다.
이제는 숨을 고르며 재정비가 필요할 때다.
"하하, 당장 복수는 끝났으니 저도 좀 쉬어야지요."
게다가 복수라는 만능의 명분도 이제 없으니까.
아르잔 토후국을 도와주러 온 또 다른 나라가 있었다면 어떻게 더 억지를 써볼 여지가 있었겠지만, 이제 더는 여지가 없다.
'...사실 정 여의치 않으면 그냥 명분이고 나발이고, 대놓고 이교도 토벌을 명분으로 성전을 선포해도 안 될 건 없지만.'
그러면 순식간에 일대의 월광교 국가들이 죄다 합세해 나를 조져 놓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너무 끔찍해.
"하긴, 그것도 그렇죠. 특히 이번에는 남작님도 너무 무리하셨지 않습니까! 전투 끝나고 난 뒤 키로스 경 표정 보셨지요?"
...봤지.
엉망진창이 된 내 몰골을 보고 기절할 뻔한 얼굴이 된 키로스 경의 얼굴을.
내가 그냥 겉만 이렇지 심각한 상처는 없다고 잘 얘기한 끝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별수가 없는걸.
이길 방법이 그것밖에 안 보이는데.
나는 잘못이 없다.
"그래도 제가 보기에도 엄청 멋있긴 했습니다! 바로 뒤에서 따라가면서 보는데, 이야, 마법조차 남작님을 두려워해 피해가지 뭡니까!"
하여간 과장은.
도중에 자기가 지켜준 것도 한둘이 아니면서.
"그러면 반대로 안티모스 씨는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수도로 돌아가실 겁니까?"
이번에는 내가 안티모스에게 물었다.
"하하! 설마요! 이렇게 보람찬 전쟁을 겪어 봤는데 그런 시궁창 같은 곳으로 돌아가는 건 말도 안 되죠!"
허허, 시궁창이라니.
그래도 제국의 수도인데. 진짜 어지간히도 진저리가 난 모양이다.
"아마 다시 에우스페나에 자리를 잡고 다음 일자리를 알아보지 않을까요?"
"그러면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만날 수도 있겠군요."
사실 안티모스만 한 용병도 드물다.
맡은 바 임무에도 충실하고, 부하들도 뛰어나고.
무엇보다 몇 번 같이 싸워서 그런지 호흡이 잘 맞는다. 다음에도 용병 고용할 일이 생기면 푸른이리 용병대를 다시 고용하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될 정도로.
그렇게 안티모스가 잡담을 나누며 계속 행군한 끝에 우리는 아르잔 토후국의 성으로 도착했다. 역시 이곳까지 진격하는 동안 그 어떤 저항도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차근차근 병사들을 움직여 성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문이 열리고 백기를 든 아르잔 토후국의 병사가 나타났다.
항복인가.
이걸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 늦었다고 해야 할지.
어쨌거나 지루한 공성전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나도 환영이다.
그렇게 우리 군의 허락 아래 나의 천막으로 들어온 적의 사절은 나의 예상대로 항복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그 이유는 나조차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에미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령은 나의 되물음에 그저 무겁게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 기사들도 웅성거렸다.
이것 참.
'...이런 일도 다 있네.'
독실한 광신도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말이야.
다시 보니 전령의 얼굴에 불안함이 가득했다.
에미르까지 죽은 지금 승리한 침략자인 내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 걱정이 된 모양이다.
"...."
나는 잠시 천천히 말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일단 성안의 모든 수비군의 무장을 해제한 뒤 대기해라. 그다음에 정식으로 항복 사절을 받겠다."
그리고 덧붙였다.
"에미르의 시신은 정중히 수습하도록."
나는 승자니까.
당연히 그에 걸맞은 품위를 보여야지.
안 그래?
#048. 붉은 태동 (1)
꿈을 꿨다.
무대는 전장이었다.
나는 선봉에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고, 하늘에서는 포격이 빗발쳤다.
바위가 떨어져 내렸다.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우리 군, 우리 병사들을 향해서.
나는 한 사람의 책임자로서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했으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포격은 한 치의 자비도 없이 우리를 뒤흔들었다.
그렇게 나의 병사들이 땅을 구르며 처참하게 죽어 나갔다. 그들의 피가 튀며 내 머리를 데웠다.
"...."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나는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이게 전부 한낱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이겼지.'
현실에서 나는 승리자였다.
그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래.
저 두려운 포격도, 저 강력한 마법사도 전부 극복하고 승리를 일궈냈다.
그러니 현실이 되지 못한 한낱 꿈속의 환상 따위를 보고 추하게 겁에 질릴 이유는 없었다.
현명한 내가 그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반대로 그 모든 광경에서 아예 눈을 돌리고 그저 비웃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나의 일부 병사들이 저렇게 죽어 나간 것만큼은 사실이니까.'
나는 작전을 짰고, 열심히 실천해서, 성공시켰다.
우리는 이겼다.
하지만 그 작전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마법 폭격에 맞고도 계속 전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지, 폭격을 피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 병사들도 제법 많이 죽었다.
특히 니카로스에서 나고 자란 나의 평범한 주민들이.
'기동력이 압도적인 검은 매의 기사단은 말할 것도 없고, 용병들도 최후의 돌파를 위해 상대적으로 눈에 조금 덜 띄는 후방에서 진군했으니까. 게다가 경험이 많다 보니 눈치껏 자기 살길은 하나는 알아서 잘 찾았거든.'
그렇기에 남는 건 그저 징집병들뿐.
물론 징집병들도 전투 지속이 불가능할 정도의 큰 피해를 본 건 아니었고, 마법사를 상대한 것치고는 상대적으로 굉장히 미미한 피해만 보긴 했다.
하지만 지난 도적 토벌이나 시하브 토후국 정벌 때보다 훨씬 더 큰 손실이 난 것도 명백한 진실이었다.
'저번에도 생각했다시피, 내가 잘못한 일은 아니야.'
하지만, 어쨌든 나로 인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버린, 내가 다스리는 영지의 백성들.
어째 그들이 자꾸 눈에 밟힌다.
그냥 그래서.
이 꿈이 딱히 무서운 악몽 같은 건 전혀 아니지만.
'한동안 잊지 못할 그런 기억이 하나 늘었구나.'
그냥 그렇게 생각하며 지켜봤다.
이번에도 충분히 잘하긴 했지만.
다음에는 더 잘해야지, 뭐.
그게 이 야만의 세상에 떨어진 교양인이, 마땅히 보여야 할 미덕일 테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나는 멈추지 않을 거니까.
그러다 잠에서 깼다.
***
나는 에미르가 사용하던 침실에서 눈을 떴다.
"...."
방 좋네.
침대도 푹신푹신하고.
'그리고 꿈도 아주 좋을 걸 꿀 정도로 말이야.'
하여간.
에미르 귀신이 아직도 방에 달라붙어 있나.
'졌으면 좀 순순히 사라져주시지.'
너무 추잡스럽고 질척거리시네요.
대충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정신을 차리니, 슬슬 해가 뜰 시간이었다. 창밖 너머로 하늘의 색깔이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평소보다 좀 이른 기상이긴 하지만 잠은 이미 다 달아난 지 오래. 이래저래 일찍 깬 김에 주섬주섬 업무에 매진할 채비나 시작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영주님!"
"그래. 고생이 많다."
방을 나가니 밤새 문 앞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가 우렁찬 목소리로 나를 반긴다.
씩씩한 모습이 상당히 보기 좋아 나는 친절한 미소와 함께 손까지 흔들며 대꾸해주었다.
우리 군은 어제 항복을 받고 난 뒤로 아르잔 토후국의 성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이른바 점령이다.
예상대로 성안은 에미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몹시나 혼란스러운 분위기였지만, 다행히도 무모한 짓을 벌이는 바보는 없었다.
'역시 키로스 경이 현지인들을 제법 잘 통제하고 있는 모양이야.'
역시 믿음과 신뢰의 영감님이시다.
물론 이런 불온한 분위기 속에서는 통제도 한계가 있을 테지만, 다행히 우리도 여기서 그다지 오래 있을 계획은 애초부터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고 성벽까지 물리적으로 훼손하는 공성전이 없었기에 당장 급하게 해야 할 후속 처리는 시하브 토후국 정벌 때보다도 적었으니까.
이러면 뒷수습할 일거리 자체가 줄어들지.
따라서 우리도 니카로스로 돌아가서 제대로 된 체계를 세우기 전까지는, 임시로 현상 유지만 할 생각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임시는 임시일 뿐 이 시한폭탄 같은 상황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그건 여기서 당장 군대만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걸. 집사장 아저씨랑 본격적으로 논의해봐야지.
그렇게 나는 아침 일찍부터 이리저리 성을 돌아다니며 혹시나 문제의 소지가 될 일이 더 없는지 살폈고, 곧 머지않아 목표로 하던 장소에 마침내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아르잔 토후국의 국고.
'즉, 아르잔 토후국의 모든 재산이 모여있던 곳.'
나는 문 앞에서 씩 입꼬리를 올렸다.
자연스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야 이제 이게 다 내거니까.
'어제는 점령과 항복한 병사들의 무장 해제만으로 너무 바빠서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여기를 빼먹는다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
이곳은 현실 역사의 근대 이전에 자주 보이던, 전쟁으로 한몫 딴다는 개념이 제법 잘 성립하는 세상이다.
게다가 쉼 없는 정복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그런 행위가 필수불가결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내가 돈에 환장한 살인강도라서 남의 집 저금통 보고 히죽거리는 건 절대로 아니고.'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필요를 따지고 거기에 대해 만족하고 기뻐할 뿐이다.
그런 터무니 없는 평가는 부패한 쓰레기 페트로스나 태생적 돈귀신인 가스파르 영감님에게나 어울리지.
그렇기에.
'과연 우리 아르잔 토후국의 에미르께서는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유산을 남겨놓으셨을까.'
의식적으로 억제하려고 해도 왠지 나도 모르게 자꾸 올라가려는 두 입꼬리를 슬쩍 무시하며.
나는 천천히 국고의 문을 열었다.
***
제국과는 조금 떨어진 월광교의 땅 한가운데.
지금 그곳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한 월광교 국가와 다른 월광교 국가 사이의 전쟁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척이나 평범한 일에 가깝지.
이곳엔 바할리아 제국과 같은 압도적인 강자가 없다.
제국이 되기를 꿈꾸는 수십 개의 왕국만이 존재할 뿐.
따라서 이곳은 만국을 위한 만국의 투쟁만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종교가 같다는 것이 결코 평화의 이유가 되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날의 전쟁은 평범하지 않았다.
특별했다.
"막아라! 막아! 수는 우리가 더 많다! 저자가 대장이다! 저 녀석만 죽이면 승리다! 저 녀석만 죽이면 돼!"
한쪽의 지휘관이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풍성하게 기른 수염이 매우 품위 있었지만, 지금 그의 목소리는 마치 비명과도 같이 절박하고 거칠었다.
"왜! 왜! 왜! 도대체 왜 죽지 않는 것이냐!"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미 승리의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음에도, 승리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병력도 더 많고, 각 병사의 숙련도도 훌륭하다.
뛰어난 전쟁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었고, 기병대 또한 정예하다. 본국이 일대에서 제법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후방의 지원 역시 넉넉했다.
지휘관은 전투 전에 이미 승리가 결정된다고 믿는 부류였다. 지금까지 그 믿음은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그의 상식이 철저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사실 승리하지 못한다는 표현에도 부족함이 있었다.
그는 패배하고 있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오직 단 한 명의 존재 때문에.
"하하! 나를 따르라, 나의 용사들이여! 내가 그대들과 함께한다! 저 겁많은 돼지 놈들에게 진정한 싸움이 무엇인지 알려주자꾸나!"
한 사내가 선봉에 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내를 적대하는 수백의 병사, 수천의 화살이 오직 그만을 노렸다. 그저 그의 목숨만을 바랐다. 무수한 살의가 사내를 덮쳤다.
그러나 그는 절대 쓰러지지 않았다.
피하고 막고 휘두른다.
화살은 그의 몸에 닿지도 못했다. 병사들은 근처에 가기도 전에 사내의 검에 몸뚱이가 둘로 갈라져 죽었다.
마력으로 몸을 강화한 극소수의 전사들 또한 죽어 나가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기적을 다룬다는 마법사마저 그를 죽이지 못했다.
그야말로 산을 뽑는 힘과 세상을 덮는 기개.
그는 모든 저항을 마치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깨부수며 끝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를 그를 추종하는 수백의 정예병들이 따랐다.
그렇게.
군대가 갈라졌다.
믿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오직 단 한 사람의 용력이 이 광경을 만들었다. 더 많은 병력을 지니고도 집단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괴, 괴물...!"
오직 그 말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직 그 단어만이 저 사내를 설명할 수 있었다.
상대편 지휘관은 이미 패배를 직감했다.
"괴물! 괴물이다! 저놈은 괴물이야아아!"
그렇게 아이처럼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저 괴물이 지휘관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를 찢어 죽이기 위해서.
"거기서 울고 있었느냐! 자, 사내답게 맞서 싸워 너의 목을 내놓거라!"
전장을 휘젓는 사내가 소리쳤다.
그리고 무척이나 오만하게 웃었다.
그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는 이미 이 전장의 지배자였으니까.
그리고 그는 왕이었으니까.
비유적 표현 따위가 아니다.
그는 정말로 왕이었다. 술탄이었다. 지도자였다.
아르타 술탄국의 왕.
칼리드 이븐 타우프.
위대한 전사 왕.
칼리드는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친정 중이었다. 그의 병사들은 자신의 위대한 왕을 열렬히 숭배했다. 그것은 이미 신앙과 같았다.
그리고 신과 함께하는 군대가 패배할 리가 없다.
"사, 살려...!"
"네가 진정 지휘관이라면, 너의 병사들과 기꺼이 운명을 함께하거라!"
승부는 났다.
마침내 칼리드가 적 지휘관의 목을 베었다.
"우리의 승리다! 나의 위대한 병사들이여!"
허무할 정도로 깔끔한 압승이었다.
칼리드는 적장의 수급을 손에 쥔 채 검을 높이 들어 올렸고 그의 병사들은 환호했다.
이것으로 칼리드는 패권에, 새로운 월광교 제국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전투와 뒷수습이 끝나자 곧 연회가 벌어졌다.
허허벌판에서 열린 간소한 연회였지만 병사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신이 흙먼지 속에서 병사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어울렸으니까.
"오늘 승리의 주역은 너희들, 나의 용사 모두다! 다들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겨라!"
칼리드는 양팔에 병사를 한 명씩 끼고 호탕하게 소리쳤다. 다른 병사들도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전하."
그때 한 여성이 나직이 그를 불렀다.
"음? 무슨 일이냐, 카티라?"
칼리드의 책사이자 전장에까지 데리고 다닐 정도로 가장 신뢰하는 신하인 카티라였다.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서쪽에서 조금 놀라운 소식이 하나 들려왔습니다."
"오, 놀라운 소식?"
벌써 알딸딸하게 취한 칼리드는 흥미를 보이며 어서 얘기해 보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바할리아 제국의 남작 중 한 명이 최근 국경 지역에서 눈에 띄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불과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두 개의 토후국을 격파하고 그 영토를 병합하였으며, 이로 인해 인근 국가들 역시 상당한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호오, 제국의 남작이라."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칼리드는 조금 어조를 바꾸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작 남작 따위가 그만한 행보를 보이다니 확실히 재미있는 소식이긴 하구나. 상당히 흥미로워. 이왕이면 나도 직접 얼굴을 한 번쯤 보면 더 좋을 듯하고."
그저 재밌는 소식이라고만 평가한다.
여전히 얼굴은 웃고 있다.
취기로 인해 붉게 달아오른 피부 또한 여전하다.
그는 평소의 호기로운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유심히 살피면 어딘가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이 그의 표정 밑에서 스멀스멀 흐르고 있었고, 어쩐지 주위 대기가 조금 차가워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에도 카티라는 태연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재밌는 소식이라는 뜻으로 전해드린 건 아닙니다만."
"하하! 하지만 그게 그거지!"
그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린다.
카티라는 당연히 알고 있다.
저 웃음과 열락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그녀의 왕은 결코 기만 따위를 하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전부를 보이지는 않을 뿐이다.
"그래서 그 남작의 이름은 무엇이냐?"
왕이 물었고.
신하는 답했다.
"니카로스 남작,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라고 합니다."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칼리드는.
칼리드 이븐 타우프는
아르타 술탄국의 왕은.
그리고 동방의 정복자는.
그 이름을 천천히 입에 담아 되뇌었다.
#049. 붉은 태동 (2)
끼익.
삐걱거리는 소리가 내 귀를 때린다.
아르잔 토후국이 꼭꼭 지켜왔던 국고의 문을 밀어 열자, 가장 먼저 퀴퀴한 먼지 덩어리들이 나를 반겼다.
대충 손을 휘휘 저어 먼지를 털어내고 있는데, 놀랍게도 창고 안에는 먼지 친구들 말고도 나를 반기는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
"영주님? 무척 일찍 일어나셨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키로스 경?"
"허허, 그렇습니다. 바로 접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나의 든든한 오른팔이자 기사.
그리고 대놓고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삐쳐버리는 영감님이기도 한 키로스 경이었다.
이 할아버지가 이렇게 이른 아침에, 나보다 먼저 나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바로 어제까지 행군과 전투, 점령까지 했던 몸이다.
무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나는 조금 걱정이 담긴 어조로 키로스 경에게 물었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이 시간에 여기 계실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네요. 저도 반갑습니다. 그런데 업무에 전념하시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아닙니까? 전투가 끝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조금 더 쉬셔도 괜찮을 텐데요."
"허허, 늙은이는 원래 아침잠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오히려 가만히 누워 있으면 괜히 좀만 더 쑤시지요! 저보다는 오히려 영주님이 더 걱정이군요. 더 주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성장기지 않습니까!"
"신경 써주셔서 무척이나 감사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저의 성장기는 이미 끝난 것 같습니다."
"저런!"
하여간. 넉살도 좋으셔.
저런은 무슨 저런이야.
나는 그저 어이가 없어서 웃었지만, 키로스 경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더 주무시는 게 좋겠다는 말은 진담입니다. 오늘따라 유독 평소보다도 피곤해 보이십니다, 영주님."
키로스 경은 살짝.
아주 살짝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그렇게 물었다.
'...진짜 우리 영감님, 이상하게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오늘따라 유독 더 피곤해 보인다면 역시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밤새 괴상한 꿈을 꾸다 잠을 설친 탓일 거다.
하지만 이런 나의 개인적인 문제로 키로스 경까지 걱정하게 만드는 것은 신사답지 못한 행위이니만큼, 나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저도 더 자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저의 수면욕보다 재물욕이 더 큰 순간인 것 같습니다. 에미르가 꼭꼭 숨겨 놓은 보물을 털어먹을 생각에 눈이 아주 번쩍 떠지더군요."
따지고 보면 이것도 딱히 거짓말은 아니다.
잠에서 깨서 가장 먼저 아르잔 토후국의 국고로 온 것은 분명히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지만, 어째서인지 키로스 경은 다소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어, 음...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렇지만, 으음,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하하,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평소답지 않게 대답을 주저하고 있는 키로스 경의 모습. 자연스레 나까지 불안해지는 광경이었지만, 일단은 차분하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야기를 마저 다 듣자.
"...에미르가 비축해둔 재산이 아무래도 영주님의 기대에는 다소 미치지 못할 듯합니다."
"아."
아.
진짜 아,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소라고 한다면 정확히 어느 정도로...?"
"저도 이곳을 살펴본 지 그리 긴 시간은 지나지 않아 아직은 어림짐작으로 계산해 볼 수밖에 없지만, 대략 시하브 토후국의 절반 정도로 추정됩니다."
"...저런."
정말 저런이다.
저런.
'이거, 정말.'
갑자기 확 김이 빠져버린 기분이다.
지금의 나는 맛없는 콜라다.
그래, 뭐.
사실 나도 설마설마하긴 했다.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은 또 아니다.
'아르잔 토후국도 그렇게 부유한 나라는 아니니까.'
오히려 약소국에 가깝지.
'그런데 그런 나라가 나랑 맞서 싸우기 위해 마법사를 고용해서 전장에 내놨어.'
그리고 마법사를 용병으로 부리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은 더 말하면 입 아플 정도고.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
그들에게 남은 돈은 과연 얼마였을까...?
"...."
전투가 끝나고 여기까지 오는 내내 은연중 했던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이 얘기란 거지 결국.
'그래, 너희 진짜 뒤는 생각도 안 했구나....'
뭐, 순수하게 나쁜 기분만은 아니다.
그만큼 나의 위협을 고평가해 주고, 전력을 다해 맞섰다고 생각하면 남자로서 영 불쾌한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곤란하다.
'내 기분보다는 우리 니카로스 경제가 더 중요하거든.'
하여간. 어차피 우리가 이길 텐데.
마법사 같은 걸 고용할 돈이 있으면 그냥 얌전히 보관하고 있다가 나한테 그대로 넘기지 그랬니.
그럼 모두가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어휴, 이기적인 녀석들.
그래, 어쩔 수 없지.
아쉬움은 여기서 떨쳐내고, 이제 현황을 파악했으니 지금은 대책을 먼저 세울 시간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게 그렇게까지 심각한 일은 아니다.
'어차피 한동안은 전쟁을 중단하고 내부 정리를 할 계획이기도 했으니, 전비로 쓸 목돈이 당장 필요하지는 않아. 게다가 가스파르 영감한테 보낼 상환금 쪽은 아직 따로 여유가 있으니 이쪽도 괜찮고.'
시하브 토후국을 정복하고 얻은 이득도 아직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지금은 식사보다는 소화를 먼저 해야 할 때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기서 예상보다 조금 덜 털어간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전혀 없다. 그냥 내심 계획하던 사업 규모만 조금 줄이면 되겠지.
'쩝, 그래도 영 아쉽긴 하네.'
나는 무척이나 이지적이고 이성적인 모범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기대가 수포가 되었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할 만큼 기계적인 인간은 또 못 된다.
오늘의 선물 상자는 꽝인가.
그렇게 속으로 남자의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흘리며 씁쓸함을 삼키고 있으니, 키로스 경이 조심스럽게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천천히 기다란 상자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이게 영주님께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귀중해 보이는 물건을 하나 발견하긴 했습니다. 마력이 담긴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아티팩트인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어떤 마법이 새겨져 있는지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아티팩트?
거의 기대조차 안 하고 있던 이름을 들었다.
물론 아티팩트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나도 하나 이미 가지고 있고, 아주 요긴하게 잘 쓰고 있기도 하지.
나옐라의 수호 반지.
하루에 한 번, 일정 위력 이하의 공격을 막아주는 마력 방벽을 펼쳐 사용자를 지켜주는 마도구.
'솔직히 이거 없었으면 진짜 죽었을지도 몰라.'
당장 이번 전투 때도 사실상 이 반지가 내 목숨을 한 번 살려줬으니 두말할 것도 없지.
마법사가 최후의 발악으로 쓴 대지 학파의 중위 마법 '황금의 꽃'은 확실히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반지가 없었다면, 최소한 못해도 치명상이었다.
그리고 이 마법 반지를 얻은 곳이 바로 시하브 토후국의 국고. 그러니 물론 아르잔 토후국에서도 아티팩트를 발견할 확률이 0은 아니긴 하다.
'하지만 솔직히 확률이 너무 낮아서 별 기대는 안 하고 있었거든.'
B급 아티팩트인 나옐라의 수호 반지가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시하브 토후국이 무척 이례적인 경우다.
고정 등장하는 아티팩트 자체가 무척 드물 정도일뿐더러, 그게 일개 토후국일 확률은 더더욱 낮다.
'아주 드문 가능성을 뚫고 무작위 생성 아티팩트가 뜬 건가.'
그렇다면 나야 대환영.
키로스 경의 반응을 보아하니 막 한눈에 봐도 엄청 귀해 보이는 물건은 아닌 듯하지만, 그래도 아티팩트는 아티팩트다. 하찮고 무가치해 보이는 물건도 잘 찾아보면 다 쓸모가 있다.
그래, 정 안 되면 어디다 팔아서 돈으로 바꿔도 되고.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잘만 하면 오늘 수확이 기대에 못 미쳤다고 슬퍼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새로 생긴 아주 약간의 기대감과 함께 키로스 경에게서 건네받은 상자를 열었고.
"...!"
잠시 충격으로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 충격.
정확히는 기분 좋은 충격.
순간적으로 나의 두 눈을 의심했다.
상자 안에 있는 것은 오랜 세월 사람의 손을 탄 것으로 보이는, 한 자루의 창이었다.
그래, 나는 이 창을 알고 있다.
설마.
설마 이게 여기서 나타날 줄이야.
"...키로스 경."
"네, 영주님."
"이번 전쟁의 수확이 지난번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 결론은 한 번 더 재고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의문을 표하는 키로스 경을 두고 나는 그저 기분 좋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하, 이 창 한 자루의 가치만 제대로 반영해서 넣어도 계산 결과가 완전히 바뀔 테니까요."
뭐? 하찮고 무가치한 물건이어도 괜찮아?
정 안 되면 팔아도 돼?
진짜 전부 의미라고는 조금도 없는 가정이었잖아.
***
바할리아 제국의 수도, '카이룸'.
그리고 그 중심에 자리한 '황립 아카데미'.
엄밀히 말해 황립 아카데미 또한 분명 제국에 널리고 널린 교육 기관 중 하나일 뿐이지만, 실제로 황립 아카데미를 그렇게 치부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이야말로 제국 번영의 원동력이자.
유수의 인재들로 이루어진 학문의 전당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아카데미는 예부터 철저한 실력주의를 표방해왔다. 먼 변방에서까지 입신양명의 꿈을 품고 상경한 이들도 적지 않을 만큼.
고향에서 수도 없이 천재라고 불리었고, 또 수도 없이 그 칭호의 자격을 증명한 자들.
그들은 자신 있게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린다.
물론, 그들이 천재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고 멋있는 결말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천재만이 모이는 곳.
따라서 이곳에서 그들의 특별함은 한낱 범속함으로 전락하고 만다.
아니, 그 범속함이라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친 듯이 집중하고 노력해야 한다. 이미 거의 모든 학생이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충격적인.
'진정한 천재'들의 존재.
그들의 선의, 그들의 악의.
그런 하찮은 요소들은 중요하지 않다.
압도적인 재능의 주인들은 그저 숨 쉬듯 자연스럽게 다른 천재들조차 자신의 발아래에 놓을 뿐이다.
살면서 처음 경험해보는
감히 넘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 드높은 재능의 절벽.
그러한 환경 속에서, 생각보다 많은 수의 신입생들이 단 1년도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아카데미를 떠난다.
영광의 학교는 뒤처진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물론 그것도 지금에 와서는 딱히 영구불변한 진리는 아니지만.
"...."
지금 기숙사에 남아 홀로 묵묵하게 편지를 읽고 있는 '마르다'라는 이름의 여성은, 바로 그 무자비한 황립 아카데미의 모든 교육을 과정을 거의 다 달성한 학생 중 한 명이었다.
마르다의 책상 위에는 편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겉으로 보면 어디 우체통이라도 그대로 털어온 모양새였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 대부분은 단 한 사람이 혼자서 보낸 분량이었다.
그 범인은 바로 고향에 남아계신 그녀의 아버지.
지난번에 도착한 편지를 다 읽은 지 아직 몇 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새 또 새로운 편지지가 세 자릿수 단위로 쌓여 버렸다.
감정의 표출이 드문 마르다가 드물게 살짝 질린다는 표정으로 눈 앞에 펼쳐진 편지의 산을 바라봤다.
사실 한 사람이 혼자 이만한 분량을 다 보냈다는 게,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까지는 아니었다.
물론 단 한 명이 단기간에 편지를 저렇게까지 많이 보내는 것은 조금 이례적인 일이긴 하다. 그래도 마르다가 금지옥엽의 외동딸이란 걸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무엇보다 이곳 카이룸에서는 편지가 잘 오고 가지 않으니까.'
그래, 이 도시에서 편지는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편지보다는 훨씬 빠르고 간편하게, 실시간으로 서로 음성을 교환할 수 있는 마도구가 등장하고 또 보편화 되었기 때문에.
낭만을 추구하고 사랑을 나누는 연인 사이라면 종종 편지를 보낼 수도 있겠지만, 일상적인 영역에서는 이미 마도구가 그 자리를 완전히 대신하고 있다.
그래, 이곳 수도 카이룸에서는.
학문을 갈고닦기 위해 수도에 온 지 벌써 수년.
당연히 마르다도 이런 첨단 문물을 보고 신기해할 시절은 한참 전에 지났다.
"...."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유독 감상적으로 변했는지, 그런 현실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오만 생각들이 뒤를 잇는다.
그녀의 고향에는 저런 마도구가 하나도 없다.
그곳은 제국에서 가장 낙후된 곳이니까.
하지만 마르다는 자신의 고향을 사랑했다.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 초원 위에, 사람이 모이고 건물이 하나둘씩 세워지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
그 역사는 영지의 모든 주민의 자랑이고.
또 마르다 한 개인의 자랑이기도 했다.
그리고 똑똑한 그녀는, 다른 주민들보다 한 발 더 앞선 단계까지 도달했다.
사랑하는 것을 넘어.
내 손으로 직접 발전시키자.
그렇기에 그녀는 이곳 황립 아카데미까지 왔다.
영지 건립 이래 최초로. 수많은 사람의 응원과 함께.
그녀에게는 단순한 출세의 꿈이 아닌 사명이 있었기에 아카데미에서 버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입학 초기에는 그녀의 보잘것없는 출신을 두고 뒤에서 비웃는 이들도 있었지만, 조금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끝에, 그녀는 마침내 졸업을 앞두고 있다.
여기까지 도달한 것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이 최소한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인재 이상의 존재라는 걸 증명했다.
그렇지만 그만한 성과를 얻었음에도 근래의 마르다는 웃지 못했다.
그녀가 아카데미로 떠난 사이 고향에서 끔찍하고 암울한 이야기밖에 들려오지 않았기에.
그녀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는 고향의 미래가 없는 게 아닐까.
설령 그녀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돌아간다고 한들 이미 늦은 게 아닐까.
아니, 어쩌면.
돌아가기도 전에 멸망하는 것은 아닐까.
그 예상은 충분히 합리적이었고 가능성이 있었다.
그녀는 똑똑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이번에 도착한 아버지의 편지에는 새로운 내용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전대 영주들의 연이은 사망.
새롭게 즉위한, 어린 영주.
파죽지세의 승전과 정복.
그리고 아버지 자신이 반역죄로 기소당했다가 영주의 자비로 용서받았다는 이야기까지.
아버지는 정말로 그간 있었던 모든 내용을 담았다.
마르다는 어느새 편지에 몰입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티베리오스 영주님이라."
마침내 마르다는 입을 열었다.
자신의 고향, 니카로스에서 새롭게 즉위한 영주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
마르다.
마르다 크세로스.
그리고 니카로스 남작령의 집사장, 제노비오스 크세로스의 딸은 그렇게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한 통의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050. 붉은 태동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