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이 반석 위에 (3)
기사 전력의 우위와 마법사의 존재.
그 덕분에 건방지게도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 도적단 격퇴를 아주 간단히 끝내고, 나는 아르센과 병사들에게 뒤처리를 맡긴 채 발레리아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저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던 건 무엇이었습니까?"
"아, 그거...."
내가 친절하게 웃으며 물었음에도, 발레리아는 다시 우물쭈물 망설이며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참 새삼스럽지만, 내가 알던 원작의 발레리아의 이미지랑은 너무 달라서 상당히 낯설단 말이야.'
물론 근본적으로 비슷한 부분은 있지만, 그 용병 업계 제일의 광인과는 확실히 다르거든.
적당히 그런 생각을 품으며 여유롭게 기다리니, 마침내 발레리아도 입 밖으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주저한 끝에 나온 질문.
밑도 끝도 모호한 질문.
그러나 나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사람을 태우는 걸 즐기는 발레리아의 성향.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그 기질을, 도대체 내가 어떻게 알고 있던 거냐.
필시 그걸 물어보고 있는 거겠지.
'본인이 부정했던 걸 대놓고 물어보기 그래서 그렇게 뜸을 들였던 건가.'
하지만 어떤 질문인지 이해는 다 했음에도, 대답이 마땅치는 않았다.
사실 어떻게 알았냐,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항상 곤란했다.
<마이트 앤 로열>을 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남들보다 앞서 나가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원작 게임 하면서 봤는데요' 이렇게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니까 결국 언제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선에서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
"그냥 보면 알죠."
응, 보면 안다.
얘가 원작의 걔구나. 원작에서는 이랬지.
이것도 그냥 보면 아는 것의 일종이긴 하지.
거짓말은 안 했다.
"...."
발레리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묻기 전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혼란스러운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
너라면 말이야.
그런 의문스러운 말을 덧붙이며 발레리아는 홀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무언가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니.
저게 대체 무슨 뜻이지.
'...그냥 보면 안다고 대답해놓고, 도리어 내가 다시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고로 적당히 입을 다물고 있자, 다행히도 발레리아가 다시 입을 열어 이야기를 진행해주었다.
"딱히 네가 하는 말이 다 옳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고마워. 그럭저럭 참고는 할게."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며 주춤주춤 감사를 표했다.
"별말씀을요."
설마 그 전설의 방화광에게 감사 인사를 다 듣게 될 줄이야. 황공하여라.
그리고 발레리아는 감사 인사가 끝나자마자 다시 태도를 휙 바꿔 버럭 소리치기 시작해다.
"그래도 진짜 자꾸 이상한 걸 강요하지는 마! 나는 아카데미도 나온 교양인이라고!"
보고 있으면 재밌을 정도로 감정이 휙휙 바뀐다.
솔직히 지금 시점의 그녀가 이런 캐릭터일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어째 어디서 많이 듣던 단어까지.
그런 발레리아의 모습에 결국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뭔데...! 갑자기 왜 웃는 건데!"
그러게.
그러게나 말이야.
***
니카로스 남작령의 집사장인 제노비오스의 딸, 마르다 크세로스는 창문 너머로 고향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3년.
아니, 어느새 족히 4년만인가.
푸른 하늘과 드넓게 펼쳐진 초원.
오랜만에 보는 고향의 모습은 여전히 익숙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몇 년 동안 머문 수도 카이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낙후되고 열악한 변방의 모습.
"...."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주목하고 있던 것은 그런 부분이 아니었다.
사람의 얼굴.
마르다가 보고 있는 것은 바로 주민들의 표정.
그리고 그 표정에는 희망이라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놀랍게도 그 모습은 몇 년 전 그녀가 니카로스를 떠날 무렵만 해도 거의 찾아볼 수 없던 광경이었다.
'...그때와 비교해서 바뀐 것은 오직 하나뿐이야.'
영주.
니카로스에 바뀐 것은 오로지 영주밖에 없었다.
선대이자 초대.
제논 발란티스.
그래, 그는 분명 대단한 호걸이었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이 척박한 초원 위에 어엿한 영지 하나를 새로 세웠다는 위업만큼은 마르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한계 또한 명확했다.
성인이 된 마르다는 어느새 그 사실을 깨달아버렸고, 그에게 그다지 많은 기대를 걸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마르다 크세로스는 제논 발란티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제노비오스를 따라 수차례 제논과 대면했음에도.
'그렇다면 그의 자리를 이어받은 현 영주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현 영주.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죽은 제논의 복수를 철저하게 완수한 그의 차남.
마르다도 어린 시절 티베리오스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 당시에는 크게 기억에 인상적으로 남는 인물은 아니었다. 마르다의 '선천적인 기질'을 빼고 생각해도 그랬다.
제논의 장남 마누엘의 그림자 속에 있던 티베리오스는 조금도 주목받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들려오는 티베리오스의 행보는 그 당시의 인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한 기질을 숨기고 있건 걸까. 아니면....'
사람이 바뀐 걸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무렵.
그리고 무언가를 희망하고 있을 무렵.
마침내 니카로스의 현 주인인 티베리오스 발란티스가 마르다가 기다리고 있던 방으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어제 도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먼 곳에서 오신 분을 기다리게 했네요."
"아닙니다, 남작님. 제가 말씀드린 것보다 일찍 온 것뿐입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방 안으로 들어온 티베리오스는 먼저 정중한 태도로 사과부터 했다. 마르다는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사과가 끝나자, 티베리오스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명백한 악수의 의미.
"반갑습니다. 니카로스를 다스리는 티베리오스 발란티스입니다. 집사장님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마르다 크세로스입니다. 영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르다는 아주 잠깐 멈칫한 뒤, 곧 티베리오스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얼굴에 걸린 부드러운 미소와 달리, 손의 촉감은 무척이나 딱딱했다.
마르다 자신도 그리 고운 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티베리오스의 손은 그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거칠고 단단했다.
예상보다도 더.
과연 이건 좋은 징조일까, 아닐까.
순간적으로 고민해버린 마르다는 결국.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르다 양께서 니카로스에 돌아온 게 거의 4년 만이라고 하셨죠?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오신 소회가...."
"실례지만 제가 먼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살가운 얼굴로 입을 열던 티베리오스의 말을 끊으며,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누가 봐도 명백히, 어엿한 제국의 귀족이자 나고 자란 고향의 영주에게 보이기에는 지나치게 무례한 태도.
그러나 마르다는 그 사실을 자각하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허례허식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중요하고 급한 물음들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놀랍게도 봉변을 당한 당사자인 티베리오스 또한 그다지 그런 무례를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잠시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티베리오스는 곧 그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 대답에 마르다는 잠시 습관적으로 티베리오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 뒤, 곧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에우스페나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에우스페나는 자주 방문하십니까?"
"음, 자주라고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고작 두 번 방문했을 뿐이니까요. 대신 한 번 가면 제법 오래 머무르다 돌아오기는 합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가서 주로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기계적이라고, 어쩌면 일방적인 추궁이라고도 여겨질 수 있는 마르다의 질문이 계속 쇄도했다.
하지만 티베리오스 온전히 대답에만 집중했다.
"글쎄요. 아직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는 건 조금 그렇지만, 주로 우리 니카로스에 도움이 될 만한 분들을 만나고 다닌다고 표현하면 적절할 것 같군요."
"그렇군요."
마르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 이제는 티베리오스 역시 눈치챌 정도로 그의 얼굴을 유심히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보기 재밌었는지 티베리오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외에도 궁금한 게 계시면 더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황립 아카데미 졸업을 앞두고 계신, 우리 니카로스의 자랑이라도 해도 좋으신 분인데 제가 이럴 때라도 잘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척이나 넉살 좋고 친근한 모습.
이쯤 되자 도리어 마르다도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은 저의 태도가 불쾌하지 않으십니까?"
그 조심스러운 질문에 다시 한번 티베리오스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런 걱정을 하실 거라고는 전혀 상상 못 했는데요. 혹시나 신경 쓰이시면 태도를 바꾸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천성이다 보니 자각을 하면서도 쉽게 바뀌지 않더군요. 무언가 몰두할 때 특히 그렇습니다."
"솔직히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노력을 아주 아주 열심히 하면 못 바꿀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만 역시 이런 말은 밖으로 내면 안 되겠죠?"
"...."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의 대답에도 마르다가 그저 호응 없이 자신의 얼굴만을 응시하자, 티베리오스는 머쓱하다는 듯 말을 돌렸다.
"꽉 막힌 아저씨 같은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질문에 대답부터 한다면... 네, 그다지 불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결론을 먼저 얘기한 뒤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물론 저도 사람이다 보니, 저랑 결이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면 종종 불쾌함을 느끼곤 하지요. 하지만 마르다 양은 특별하지 않습니까?"
"제가 특별하다고요?"
"그렇죠. 사실 저는 지금 마르다 양의 능력에 무척이나 큰 흥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필요로 하기도 하고요. 왜냐면 제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있는데, 수도에서 열심히 공부하신 마르다 양께서 도와주시면 일이 더 순조로워질 것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직 졸업을 안 하신 마르다 양에게는 조금 이를 수 있지만, 일종의 기용 제안입니다.
티베리오스는 그렇게 웃으며 자신의 제안을 요약했고, 마르다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짧은 침묵 끝에 곧 다시 질문을 건넸다.
"...혹시 그 영주님께서 하고픈 일이 어떤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 질문에 니카로스의 영주 티베리오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씩 웃었다.
"마르다 양께서 도와주셨으면 하는 일이야 뻔하죠."
우리 영지를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드는 것.
그 흔하디흔한 대답에.
순간 마르다의 눈동자 속에 선명한 이채가 맴돌았다.
그 빛을 알아챘는지 아니면 못 알아챘는지 티베리오스는 그저 자신의 대답을 계속했다.
"저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런저런 무리한 '사업'들을 많이 벌일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 사업을 위해서는 당연히 강하고 튼튼한 기반이 되어줄 영지가 필요하지요."
티베리오스는 유독 '사업'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마르다 지금까지 벌였던 사업이라는 표현에서 그게 명백하게 '전쟁'을 의미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그 단어에서 제논 발란티스의 그림자를 떠올리고 말았지만.
"그걸 위해 제가 개인적으로 꿈꾸는 게 있거든요."
아직 티베리오스의 대답은 끝나지 않았다.
"모든 주민이 우리 니카로스를 사랑하고, 영지의 위기를 다 같이 극복하고, 솔선수범해서 모두 함께 지켜나가고, 노력을 한데 모아 발전시키고, 더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고, 그 모든 사실에 스스로 자부심을 품고."
"...."
"나 역시 영주로서 주민들이 기꺼이 그리하리라는 열망을, 그 어떤 외부의 강압도 없이 자유롭게 품게 되도록 노력하는."
그냥 이런.
제가 개인적으로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영지를 만드는.
그런 목표.
"그게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 마르다 양의 도움을 바라죠."
니카로스의 영주는 그렇게 대답을 마쳤다.
"...."
그리고 모든 대답을 들은 마르다는 잠시 멍하니 티베리오스의 얼굴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의 뜻, 잘 이해했습니다."
드디어.
마침내.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라는 인간의 얼굴이 마르다의 눈동자 속에 서서히 담기기 시작했다.
사실, 여태껏 아무한테도 털어놓지 않은 속내지만.
마르다는 선대 영주 제논 발란티스를 싫어했다.
단순히 기대를 품지 못했다는 수준을 넘어.
'아예 짜증을 느낄 정도로.'
그는 '호걸'이자 '위대한 기사'였지만, 결국 한 사람의 호걸이자 위대한 기사일 뿐이었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저 자신의 명예와 영광만 추구할 뿐, 영지와 그 주민들의 삶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전쟁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적어도 어렸던 그녀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렇기에 마르다는 호걸이라는 족속이 몹시 싫어졌다.
그렇기에 제논을 자꾸만 연상시키는 티베리오스의 행보와 포부를 보고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니카로스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편견은 틀렸다.
아니, 적어도 완벽히 옳지는 않았다.
적어도 제논보다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으니까.
그게 바로 마르다가 찾던 것이었다.
영주가 마치 당연하다는 듯 내뱉는 지금 그 말.
그녀는 이미 그 말을 머릿속으로 수십 번이나 반복하여 곱씹었다.
아직은 티베리오스의 모든 걸 파악하지 못했다.
겨우 단편적인 느낌만 받았을 뿐이다.
그녀의 편견이 완벽히 틀린 것은 또 아니다.
하지만 그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마르다는 기꺼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도 그 꿈, 돕고 싶습니다."
"오오, 정말 무척이나 반가운 말씀이군요. 아마 제가 알기로 마르다 양의 졸업이 앞으로 한 학기가 남았다지요? 그렇다면 대략 반년 정도 뒤에...."
"아니요. 지금 당장 돕고 싶습니다."
"...네?"
티베리오스가 이 방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당황이라는 감정이 잔뜩 띠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잘못 들은 건 아닐까, 그런 당혹감을 가득 담은 채로 되물었다.
"아니, 그러면 졸업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하지만 마르다의 대답은 명백했다.
"학위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하루라도 빨리 니카로스에서 일할 기회뿐입니다."
그 단호한 어조에 제아무리 넉살 좋은 영주라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어색한 한동안의 침묵이 끝나고, 결국 티베리오스는 오직 이렇게밖에 입을 열 수 없었다.
"...네?"
그 바람 빠진 되물음에도, 마르다 크세로스는.
선천적으로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데 장애가 있는 그녀는 그저 확고한 시선으로 티베리오스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061. 이 반석 위에 (4)
진짜.
진심으로 당황스럽다.
"학위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하루라도 빨리 니카로스에서 일할 기회뿐입니다."
마르다의 파격적인 발언은 나를 당황하게 하기에 아주 충분하였다.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부터 보통 평범한 사람들과는 그냥 조금... '많은 차이'가 있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발언까지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야 이건, 그만큼 이 세계 기준으로 보통 파격적인 발언이 아니거든....'
물론 당장 일해준다면 나로서는 무척이나 환영할 일고, 그녀의 지식과 능력 자체를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
이번 만남을 진행하기 전에 마르다의 아버지인 제노비오스 집사장에게 충분히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그 어려운 황립 아카데미 졸업을 한 학기만 남겨뒀다는 것만으로도 그 이상의 증명은 필요가 없을 정도니까.
'하지만 마르다 본인은 사회적 인식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을 텐데?'
수도 카이룸에 있는 황립 아카데미.
제국 최고의 권위를 지닌 그곳은 입학하기도 어렵지만, 그 이상으로 졸업하는 게 훨씬 더 어려운 곳이다.
당연히 그만큼 단순한 입학생과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이 가져오는 사회적 대우의 차이도 컸다. 진정한 제국 최우수 인재는 오직 학위를 지닌 졸업생만이라는 인식이 널리 통용될 만큼.
근데 마지막 학기만 놔두고, 사실상 시간만 더 투자하면 졸업이 확정이 상황에서, 그걸 다 박차고 나와?
'이걸, 이걸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졸업에 어떤 문제라도 있으신지...?"
"아니요. 그런 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무척이나 단호한 태도로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졸업 문제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또다시 영지에 관한 질문만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영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영지 발전을 위해 생각하고 계시던 방안들이 있는지요? 이제는 저도 영주님의 사람이니 숨기지 않고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뭐? 영주님의 사람?
내 가신?
이렇게나 갑자기?
'설마 저 아가씨 머릿속에서는 벌써 다 기정사실인 거야? 아니, 내가 물론 그녀를 기용하고 싶다고 먼저 의사를 밝히긴 했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건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닐까요, 선생님...?'
나는 당혹스러움을 참지 못하면서도 일단 간단히 뭉뚱그려 설명을 해주었다.
"...일단은 에우스페나의 페트로스 집사장과 저의 백작 승작 건에 대해 논의 중입니다. 논의가 끝나면 새롭게 정복한 영토를 포함해 새로운 백작령을 창립하고, 점령지의 주민들에게 본격적인 동화 정책을 펼칠 예정입니다."
"백작 승작이라. 무척이나 고무적인 성과로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주군. 놀랍습니다."
"...감사합니다."
표정에 전혀 놀랍다는 기색에 없이, 놀랐다고 말하는 마르다 양.
이제는 아예 호칭까지 주군으로 바뀌었다.
"그러면 그 동화 정책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하실 계획입니까?"
아. 진행 계획.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건 기회다. 이 세계에서 고등교육을 충실히 이수한 인재에게 나의 구상을 검토받을 기회니까.
"일단은 억압적으로 그들의 개종을 강요하기보다는 유화책을 펼칠 생각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입에 담긴 했지만, 이 방향성 자체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마음속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제국과 월광교 국가들의 대립이 극에 달한 이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점령지 주민이라고 강제로 찍어누르는 건 득보다는 실이 크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아주 기나긴 마라톤이니까.
그만큼 넓게 봐야지.
"예를 들어 점령지 주민들의 기존 월광교 신앙을 용인해주되, 월광교 신자에게는 십자교 신자에게 붙지 않는 종교세를 추가로 더 부과하는 방식으로...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개종을 유발할 수 있겠죠."
계획대로만 잘 풀리면 점진적으로 월광교 주민들을 십자교로 통일시킬 수 있고, 세수 증대의 효과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기대하고 있다.
물론 세부적인 내용은 현장 실무자들과 심도 있는 논의를 해봐야겠지만, 일단 우두머리인 내가 생각하는 방향성은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나의 대답을 경청한 마르다는 한동안 골똘히 고민하더니 곧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상당히 이례적인 방향이긴 하지만, 현재 제국 변방의 현황을 고려하면 오히려 적합한 방침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통제와 안정이란 관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다행히 이 세계 기준으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마르다 역시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나의 아이디어도 그렇게까지 쓸모가 없진 않네.
그러나 아직 그녀의 말이 다 끝난 건 아니었다.
"다만 그만큼 행정적인 소요도 많이 들 것입니다. 단순히 가구와 장정의 수만 파악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종교까지 세부적으로 계산해서 세금을 거둬야 하니까요. 어설프게 제도부터 시행하면 오히려 혼란만 가중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종교로 인해 주민들이 두 집단으로 분리되면 동화 정책 또한 지지부진해질 수 있고요."
반박할 수가 없네. 안 그래도 나도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토를 점령해놓고 소화 못 하면 어쩌지 이러면서 걱정하던 게 바로 우리 니카로스니까 말이야.
지금은 사정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다는 게 절대로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
'그래서 그만큼 추가적인 행정 인력과 마르다라는 인재를 원했던 것이기도 하고.'
그리고 영지의 진정한 통일을 위한, 다른 방면의 동화 정책도 서서히 윤곽을 잡아가고 있고.
그렇지만 이런 나의 조심스러운 판단과는 별개로 마르다의 두 눈은 어느새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
표정 변화가 거의 없어서 눈치채는 게 늦었지만, 저건 확실하다.
저 여자.
이미 반쯤 눈이 돌아갔다.
"물론 그렇다고 제대로 된 검토조차 하지 않고 폐기할 만한 안건은 아닙니다. 우선 영지의 전면적인 인구 조사부터 다시 시행한 후 논의해보면 될 것 같습니다."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저는 어느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면 될까요?"
"네...?"
대체 이게 오늘의 몇 번째 '네...?'인지.
이 멍청한 소리를 내지 않을 수가 없다.
도저히 저 이상한 여자의 우악스러운 진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르다는 영주인 나조차도 저 멀리 뒤처지게 만들어 버린 뒤 자신만의 질주를 계속했다.
"아니, 우선은 다른 실무 인원들을 먼저 만나봐야겠군요. 일단은 아버지... 집사장님부터 만나봐야겠습니다. 그게 제일 빠를 테니까요."
그렇게 말이 끝나자마자 마르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응? 이렇게 나가려고?
이미 우리 영지에서 일하는 건 다 확정이야?
내가 지금 뒷북치고 있는 거야?
'나도 분명 그걸 원하긴 했지만, 네 졸업 문제도 그렇고 절차도 그렇고....'
큰일이다.
대체 뭘 먼저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설마 나를 이렇게까지 궁지로 몰아넣다니.
그녀의 아버지 제노비오스에 이어, 마르다를 지금까지의 내 인생 최고의 난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그렇게 내가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어느새 나가는 문 바로 앞까지 선 마르다는 마치 끝으로 건넬 말 하나를 깜빡했다는 듯 작은 탄성과 함께 뒤를 돌아봤다.
"아. 그리고... 어쩐지 영주님의 얼굴은 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그, 감사합니다...?"
"네, 저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와 함께하는.
오늘 처음 보는 마르다의 작은 미소 하나.
정말로 끝의 끝까지 이해하지 못할 말만을 남겨둔 채, 마르다는 유유히 방을 나갔다.
"...."
어쩌면 나는.
역대급으로 이상한 인간과 엮어버린 게 아닐까...?
미지의 공포가 떠나간 자리에 홀로 남아, 나는 참을 수 없는 두려움에 떨고야 말았다.
어쨌거나 나는 이렇게.
두 번째 황립 아카데미 출신의 인재를 얻게 되었다.
***
제국의 동방 너머.
니카로스와 멀지 않은 한 월광교 토후국.
"입이 있다면 어디 한번 말해보시오."
"말? 무슨 말? 설마 지금 나를 추궁하는 것이오?"
"그저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자 할 뿐이오."
"책임? 하! 책임이라니! 니카로스의 성장이 이제 위협적일 정도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게 어찌 책임을 따질 문제란 말이오?"
지금 그곳에서는 소란스러운 회의가 한창이었다.
"이제는 무슨! 시하브 토후국이 멸망했던 순간부터 놈들은 위험했소! 아르잔 토후국이 그렇게 홀로 멸망하게 내버려 뒀으면 안 됐단 말이오! 그리고 아르잔 토후국의 전쟁을 방관하고자 의견을 주장한 것이 바로 당신이지 않소!"
"그건 이미 모두 합의했던 사안 아니요! 마법사를 고용한 아르잔 토후국 측에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둘이 양패구상하여 서로 전력을 깎아내는 게 최선의 경우라고! 무의미한 결과론으로 논점을 흐리지 마시오!"
"이 무책임하고 우둔한 자가...!"
"지금 뭐라 했소!"
아니, 이미 회의보다는 감정적인 말다툼에 가까웠다.
바람직한 광경은 아니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지금 이들은 그만큼 궁지에 몰려있었으니까.
그 원인은 오직 하나.
니카로스 남작령.
두려울 정도의 기세로 일대를 휩쓸고 있는, 그 두려운 제국의 종자들을 상대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 주제를 바탕으로 각자의 의견을 내세우며 시작된 회의는 어느새 이 지경이 되어있었다.
그렇지만 쉽게 답이 나올 리는 없었다.
수적 우위를 과시했던 시하브 토후국.
마법사라는 필승의 수단까지 동원한 아르잔 토후국.
그 모두가 정면에서 철저히 박살 난 지금 상황에서, 그 어떤 방법조차 확실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으니까.
결국, 서로의 감정만을 해치는 신하들의 다툼을 보다 못한 에미르가 크게 소리쳤다.
"그만! 그만!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할 여유 따위는 없소! 지금 필요한 건 대책이란 말이오!"
"...."
한바탕 소리를 터트린 에미르가 곧 기침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 기침 소리에는 그가 지금껏 버텨온 세월의 무게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에미르의 두 눈은 아직 지혜로움으로 형형히 빛나고 있기도 했다.
연로하고 병든 에미르는 생각했다.
니카로스가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주를 두 번이나 잃고 망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는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언제 그들이 다음의 사냥감이 될지 모른다.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니카로스의 새 주인.
전부 그 녀석 때문이다.
어린 녀석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변경의 패권을 쟁취하고 있었다.
이제 이 일대에 그를 단순한 애송이라고 무시하는 얼간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들 일단 진정하고, 혹시나 좋은 해결책이 있는 자만 나서서 자유롭게 이야기해보시오."
"...."
에미르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이야기했고, 신하들은 한동안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망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점차 하나둘씩 그럴듯한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은 힘을 합쳐야 합니다."
"토후국 하나나 둘의 힘으로는 니카로스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습니다."
"단순한 두 나라 사이의 동맹을 넘어서, 그 이상의 대대적인 연합이 필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에미르는 침중한 목소리로 긍정했다.
"그 말이 옳소."
인정하기 싫고 분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혼자서는 니카로스 남작령을,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를 감당할 수 없다.
그리고 국익과 국정에 있어.
자존심 따위는 일말의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에미르는 긴 세월 끝에 그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주위의 다른 토후국들에 사절을 보내시오. 아마 놈들도 우리와 비슷한 위협을 느끼고 있을 터이니."
"명을 따르겠습니다."
반(反) 니카로스 연합을 결성해야 한다.
이미 일대의 모든 월광교 국가는, 모두 그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명령을 내린 에미르는.
지금까지 가만히 침묵하며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한 청년을 바라봤다.
"이스마트."
"네, 주군."
"이번 니카로스와의 전쟁을, 너에게 맡겨도 되겠느냐."
그 질문에는 어쩐지 조금 전과는 다른 피로와 불안이라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기색을 느끼면서도 장군 이스마트는, 에미르의 삼남 이스마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맡겨주십시오.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주군이자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의 푸른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 이 시대는 결코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예견했던 대로.
#062. 기둥 아래 (1)
마치 폭풍과도 같았던 마르다와의 첫 만남 겸 갑작스러운 채용 면접이 끝나고, 나는 집무실로 돌아와 천천히 이번 성과를 돌이켜봤다.
그래, 어쨌거나 이 정도면 우리 니카로스의 인재 기반이 상당히 튼튼해진 것 같다.
처음 영주가 됐을 때랑 비교하면 감개무량할 정도로.
이제 한동안 여유를 조금 가지고 영지의 기틀 다지기에 집중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실 한 명씩 잘 따져보면 어째 그리 멀쩡한 인간은 없는 것 같긴 한데.'
어떻게 이런 사람들만 모인 건지.
이건 절대로 내가 의도한 게 아닌데 말이야.
'그래도 어디까지나 중요한 건 능력이니까.'
이런 사소한 부분으로 앓는 소리를 낼 수는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리 멀쩡한 인간 못한 인간 중 한 명을 나의 집무실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영주님...?"
"네. 들어오시죠, 제르만 씨."
바로 우리의 유명한 천덕꾸러기.
제르만이었다.
"일단 편히 앉으시죠. 혹시 마실 것 필요하십니까?"
"아,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렇다면야."
항상 욕먹고 구박받는 게 주 업무던 제르만은, 영주의 집무실 안쪽까지 들어온 게 처음인지 굉장히 쭈뼛거리며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내가 잡아먹을 것도 아니고.'
오늘은 정말 담백하게 일 얘기만 하려고 부른 거야.
나는 제르만의 대답대로 딱 나 혼자 마실 만큼의 찻잎만 천천히 우린 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우선 제르만 씨도 영지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 피곤하실 텐데, 이렇게 부른 것에 대해서는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저야 영주님이 부르시면 항상 달려가야지요, 헤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사죄는 철회하겠습니다."
"...."
아주 마음이 넓고 착한 아이구나, 제르만.
모범적인 일개미의 자질이 있어.
나는 제르만을 보며 씩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저번에 제가 드린 제안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나의 제안.
우리 영지의 정보 분야를 담당할 조직을 한 번 꾸려보라는 바로 그 제안.
내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자, 제르만은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네, 생각은 해봤습니다."
"오."
말을 더듬지도 않고, 겁 많은 제르만치고는 상당히 명확한 대답이었다.
"그럼 그 생각이 어떤지도 듣고 싶군요."
그러자 제르만은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헤헤, 사실 저야 영주님께서 까라고 하시면... 아니, 말씀을 내리시면 그냥 열심히 할 뿐이죠. 제 목숨도 여러 번 구해주신 분인데 어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웃은 뒤,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렇지만, 혹시나 실례가 안 된다면 어째서 저인지,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을 마친 제르만은 불안하다는 듯 눈치를 살폈다.
'정말. 그렇게 불안하면 그냥 덮고 넘어가도 될 텐데. 왜 굳이 묻고 사서 걱정거리를 만든담.'
뭐, 사실 이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아예 이해하지 못할 일은 또 아니다.
그저 그만큼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뿐이겠지.
그 심정을 대충 알 것 같기에 나는 곰곰이 대답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음, 확실히 저와 제르만 씨의 첫 만남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죠. 물론 거의 전적으로 제르만 씨의 잘못이 크긴 했지만요."
"사실 저도 그냥 죽은 두목 놈 때문에 억지로...."
"...."
"아뇨,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주님."
잠시 헛소리하는 제르만을 눈빛만으로 진압하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래서 저도 처음에는 제르만 씨에게 큰 기대를 품지는 않았습니다. 포로들의 대표 역할을 맡길 때까지만 해도 그랬죠."
"...."
"그렇지만... 네, 놀랍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제르만 씨는 언제나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더군요."
하나같이 쉽지 않은 일들이었는데도 말이야.
"그런고로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제르만 씨가 이 일을 맡기기에 가장 적임이라고 생각되고, 또 믿음직스러워서 맡긴다. 그뿐입니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했다.
물론 그 외에도 정보 조직 창설 자체가 아직은 실험적인 시도인 만큼 최소한의 비용만 부담할 계획이고, 대외적으로 당당히 드러낼 수 없는 임무인 만큼 언제든 도마뱀 꼬리처럼 잘라내도 좋을 담당자가 필요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런 건 딱히 말 안 해도 괜찮겠지?
"믿음직스럽다고요...."
다행히도 제르만은 나의 설명이 어느 정도에 수긍이 됐는지, 천천히 그 말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헤헤, 맡겨 주십시오, 영주님."
"좋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제르만 씨."
아주 신뢰도 100%의 웃음을 질질 흘리는 제르만을 보며 나 또한 따라 웃었다.
좋아. 당사자도 승낙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임무를 전달해야지.
"일단 제르만 씨에게 당장 맡기고자 하는 임무는 두 가지입니다. 둘 다 상당한 장기간이 소요될 듯하니 들어보시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지원이 있으시다면 저에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필요한 지원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그야 자금일 될 수도 있고, 영지 내에서 활동하기 위한 권한일 될 수도 있고, 그리고 제르만 씨가 자유롭게 부릴 수 있는 인력이 될 수도 있지요."
그렇게 대답하자, 갑자기 제르만은 엄청나게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곧 조심스럽게 물었다.
"인력이라면, 제가 원하는 아무나 되는 겁니까?"
그 묘하게 의미심장한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하였다.
"물론이죠."
***
제르만은 집무실에서 나온 즉시, 빠른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나갔다.
- 저는 제르만 씨가, 니카로스 남작령의 정보 분야를 담당할 조직을 새롭게 창설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갑작스럽게 영주를 따라 끌려간 에우스페나에서 처음 들은 그 제안.
솔직히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제르만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락이나 거절 같은 걸 논하기 전에 아예 실감조차 제대로 나지 않았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대체 어떤 제국의 귀족이 자신의 영지를 약탈하러 온 도적단의 간부 출신에게 그런 역할을 맡길까.
강도의 입장인 제르만 자신이 생각해봐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영주 티베리오스는 그 이상한 선택을 이미 내렸고, 제르만 역시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 그 제안을 고려할 수 있을 만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어? 이거 엄청난 출세 기회가 찾아온 거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정보 조직의 수장이면 엄청난 고위 가신이잖아?
물론 순탄하고 행복한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다는 건 당연히 제르만도 알고 있다.
아예 맨땅에서부터 조직을 만드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기껏 다 만들어도 영주는 단순히 창설과 몇 가지 임무만을 우선 내려줬을 뿐이니 언제든 토사구팽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있다.
한창 세력을 키워나가는 이 전도유망한 니카로스 남작령에서의 기회가 말이다.
기회라는 이름의 희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르만 같은 밑바닥 출신에게는 어마어마한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주 티베리오스는 제르만을 보며.
믿음직스럽다고 했다.
'물론 고작 그런 말에 의미를 두는 건 아니야.'
당연히 그게 흔하디흔한 의례적인 말이라는 것은 제르만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냥, 이것 역시 담백한 사실이었을 뿐이다.
제르만이 그런 말을 들어본 게 살면서 처음이라는 것 또한 말이다.
'...아무튼, 이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야.'
그렇게 판단했기에 제르만은 누구보다 전력을 다해 이 임무를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런 결심이 품은 제르만이 빠르게 달려 도착한 곳은 바로.
"야, 잘 지냈냐? 어깨 구멍 난 건 좀 괜찮고?"
"뭐, 뭐야? 너 이 새끼, 네가 여기는 왜...!"
니카로스 성에 있는 의무실이었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제르만이 찾던 한 인물이 골골거리면서 누워있었다.
"왜긴 왜야. 당연히 너 보러 왔지."
"이 미친놈이...!"
제르만을 보며 격한 분노를 뿜어내는 한 남자.
그의 정체는 바로, 며칠 전 일행과 함께 제르만을 집단 폭행하다 그만 제르만의 물어뜯기에 어깨가 한 움큼 뜯겨나가 버린, 그 비운의 사나이였다.
"네놈이 여기는 뭐하러 온 거냐! 설마 나를 놀리려고 찾아온 거냐!"
그는 당연히 자신의 어깨 살을 뜯어간 제르만의 얼굴을 보자마자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제르만은 그런 그의 거친 반응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먼저 시비를 건 것은 그이기도 했고.
"멍청한 자벤. 내가 설마 미쳤다고 그딴 이유로 여기까지 왔겠냐?"
그런 사소한 감정 다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용건이 있으니까.
병실에 누워있는 남자, 자벤.
제르만은 자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야, 너 나랑 일 하나 하자."
"...뭐?"
뻔뻔한 어조로 그렇게 제안한 제르만은, 순간적으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이 빠진 자벤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 여기 영주님이 나한테 중요한 임무를 하나 맡겼다.
- 추가 인력으로 아무나 데려와도 좋다고 하셨다.
- 그래서 나는 너를 합류시킬 생각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그 친절한 설명이 모두 끝났음에도, 자벤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있었다.
"네가? 날? 도대체 왜?"
그래,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굳이 자신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서로를 죽일 기세로 다툰 원수 사이나 다름없는데?
그 의문에 제르만은 그렇게 대답하였다.
"네가 더럽게 열 받고 짜증 나는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장 내가 알고 있는,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놈 중에 너 정도 되는 놈은 또 없거든. 그냥 철저히 능력만 보고 판단한 거다."
"...."
제르만의 그 말은 분명 진심을 담고 있었다.
자벤.
그는 분명 도적단의 간부는 아니었지만 그러면서도 신기할 정도로 자기 패거리들을 우르르 몰고 다니는 우두머리 같은 녀석이었다.
제르만의 집단 폭행 사건까지 사실상 주도할 정도로.
'타고난 깡다구랑 대장 기질이 있고, 그만큼 애들 모을 만한 인망도 있지. 싸움 실력도 나쁘지 않고....'
그렇기에 조직을 처음 창설하는 단계에서는 한 명쯤 있어도 좋을 유형이다. 제르만은 그렇게 판단했다.
"뭔, 말도 안 되는...."
하지만 그런 제르만의 판단과는 별개로 자벤은 쉽게 대답을 토해낼 수가 없었다.
갑자기 며칠 전까지 죽일 듯 싸운 상대 밑으로 들어가라니, 어떻게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있겠는가.
제르만은 그런 자벤을 보며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네 심정은 알겠는데. 그러면 앞으로 뭐 해 먹으면서 살 건데? 어차피 여기 영주님한테 찍혀서 이 땅에 남지도 못할 테고. 설마 인제 와서 어디 시골에 처박혀 농사라도 짓게? 네가? 그 성질머리랑 욕심으로?"
"...."
"그냥 눈 딱 감고 수락해라. 잘 생각해. 우리 같은 밑바닥 놈들한테 이런 기회 쉽게 오는 거 아니야."
결국, 제르만의 냉정한 설득에 자벤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러면 내가 뭘 하면 되지?"
"일단 몸부터 마저 회복하고, 네 옛날 따까리들 아직 근처에 있지?"
"그래, 성밖에 대기하면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럼 걔들부터 한번 불러보자고. 앞으로 사람 쓸 일이 꾸준히 많이 있을 것 같거든? 다음 일정은 그 뒤에 이야기하고."
"그래, 알겠다, 이 박쥐 같은 녀석아."
"허, 자기도 좋으면서 앙탈은."
그렇게 피식 웃으며, 제르만은 병실을 떠났다.
마침내 제르만이 가장 첫 번째로 고려하던 인력을 하나 수급해냈다. 제르만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물론 제르만도 알고 있다.
그가 고려한 자벤의 장점과 능력이 여차하다가는 그대로 리더까지 잡아먹고 조직을 반으로 쪼개놓기에 최적의 기질이기도 하다는 걸.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좋은 거거든.'
처음 영주의 제안을 승낙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눈치챌 수 있었다.
아, 이거.
엄청 좋은 기회긴 한데, 까딱하다간 내가 다 덤터기 쓰고 뒈질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그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제르만 역시 비슷한 대책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나 대신 희생양이 되어줄 고기 방패 놈을 하나 구하면 되는 게 아닌가?
그리고 지금의 제르만이 알고 있는 그런 최적의 희생양이 바로, 저 꼴 보기 싫은 자벤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첫 단추가 완벽히 풀린 것이다.
아름답고 모범적일 정도의 깔끔한 폭탄 돌리기.
원래 나쁜 짓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잘 배워나가는 법.
제르만은.
앞으로 설립될 니카로스의 정보 조직 책임자는.
가득한 만족감에 두 입꼬리를 높이 올렸다.
#063. 기둥 아래 (2)
"처음 뵙겠습니다. 집사장 제노비오스 크세로스입니다. 이렇게 명망 높은 발레리아 님을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 반가워요. 저도 앞으로 부탁드려요."
집사장의 집무실.
지금 그곳에서는 니카로스의 집사장 제노비오스와 새롭게 영지 마법사가 된 발레리아 사이의 첫 대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면 제가 주로 맡아야 할 업무는 뭐죠?"
"사실 평상시에는 업무라고 할 게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저 영주님의 요청에 따라 마법과 관련된 조언을 해주시거나, 혹시나 영주님 주위에 마법적인 위협이 없는지 확인하거나, 그 정도가 전부입니다."
"...으음, 그렇군요."
"그리고 그 외에는...."
영지 마법사의 권위는 영주의 바로 턱밑까지 닿을 정도로 높지만, 그래도 실질적으로 영지 내부의 모든 대소사를 총괄하는 것은 바로 집사장 역할이다.
그렇기에 사실상 이번이 첫 취업인 사회 초년생 발레리라는 집사장에게 업무에 관한 안내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 적당히 담백하면서도 심심한 공적인 시간이 흘러가고.
"네, 이 정도면 이해가 다 되네요."
"허허, 혹시나 다른 궁금한 점이 생기면 언제든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감사해요. 그럼, 이만."
마침내 모든 설명을 다 들은 발레리아가 집무실을 떠나기 위해 문을 열자.
"앗."
"응?"
마침 딱 맞은편에서 문을 노크하기 위해 서 있던 마르다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오, 마르다. 영주님과 이야기는 잘 되었느냐? 생각보다 조금 빨리 끝났구나. 허허, 그래서 우리 영지에서 일할 생각은 조금 들었고?"
발레리아를 배웅하던 제노비오스 집사장 역시 자신의 딸, 마르다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마르다는 눈을 반쯤 찡그린 채 잠시 자신에게 말을 거는 제노비오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곧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듯 마주 인사했다.
"아. 네, 아버지. 이야기는 잘 끝났어요."
"수도에서 오래 머물러도 영 차도가 없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구나...."
"마음 아파하실 것 없어요. 그래도 아버지 정도면 굉장히 잘 알아보는 편이니까."
제노비오스의 걱정과 울먹거림을 당차게 일축하고 마르다는 다시 시선을 발레리아 쪽으로 돌렸다.
"...이분은?"
"아아. 소개가 늦었구나. 오늘부터 우리 니카로스에 영지 마법사로 초빙되신 발레리아 트리하스 님이시다. 작년에 황립 아카데미를 졸업하셨지. 과는 다르지만 크게 보면 너에게 선배님이 될 수도 있겠구나."
선배.
그 단어가 나오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발레리아가 흥미롭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선배라. 혹시 그쪽도 황립 아카데미를 나오셨나요?"
"나오진 않았지만, 마지막 학기 이수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아하, 고생 많으셨네."
그렇게 흥얼거리듯 이야기한 발레리아는 곧 자신의 손을 뻗어 마르다에게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발레리아 트리하스에요. 집사장님에게 이렇게 훌륭한 따님이 계신 줄은 몰랐네."
"감사합니다. 저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마르다 역시 그 손을 맞잡으며.
그렇게 덧붙였다.
"오늘부터 니카로스에서 일하게 된 마르다 크세로스입니다."
그리고 그 덧붙인 말에, 발레리아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응? 오늘부터? 아직 졸업은 안 하셨다면서요?"
"네, 하루라도 빨리 니카로스를 위해 봉사하고 싶어, 그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미 영주님과 이야기 또한 되었습니다."
"...네?"
그리고 이 대화를 듣고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뒤에서 딸과 영지 마법사의 대화를 흐뭇하게 듣고 있던 제노비오스 집사장이었다.
"그, 그, 그게 무슨 말이니...? 졸업을 안 하고 오늘부터 여기서 일하겠다고...?"
하지만 마르다는 그런 아버지의 당황에도 언제나처럼 태연할 뿐이었다.
"네, 아버지. 영주님과 이야기는 잘 끝났다고,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뭐? 그게 그 뜻이었다고...!"
"...."
그리고 경악하는 제노비오스를 멍하니 바라보며, 발레리아는 그만 그렇게 생각하고야 말았다.
'여기는 영주만 이상한 게 아니구나.'
이렇게 마르다의 기용이 공인되었다.
'...그러고 보니까 왠지 마르다라는 이름,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
며칠이 지나고, 니카로스 성 밑의 마을.
그 외곽에 있는 작은 공터.
그곳에서는 한 소년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홀로.
그리고 묵묵히
"...."
소년의 손에 들린 쇳덩어리가 허공을 가른다.
상대가 되어주는 이 하나 없는, 그저 고독하고 정적인 훈련의 연속.
하지만 소년은 그 사실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최선을 다했다.
"...!"
아니, 단순히 최선을 다한다는 표현을 넘어서 필사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강렬하지만 절도 있게.
날카롭지만 청량하게.
소년은 아직 미숙했음에도 분명 또렷하게 그런 경지를 추구하고 있었다.
"뭔, 어린놈이 저렇게...."
그리고 그런 소년을, 멀리서 은밀하게 지켜보는 남자도 하나 있었다.
그는 어설프지만, 그래도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몸을 숨기며 소년을 관찰했다.
소년의 일과는 어떻게 되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지.
무슨 화제를 주로 꺼내는지.
취미나 버릇은 무엇인지.
어떤 활동에 가장 몰입하는지.
남자는 그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자 했고, 그게 바로 남자가 받은 임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임무가 다 무색하게도, 며칠 동안 빈틈없이 소년의 하루를 관찰했음에도 딱히 수집할 내용 자체가 거의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장작 패기 등을 하며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다가.
해가 질 무렵부터 이곳 공터로 와.
홀로 검을 휘두르며 훈련을 하고.
늦은 밤이 되어야 겨우 집으로 돌아가 잔다.
요 며칠 동안 관찰한 소년의 하루는 정말 이 다섯 줄의 내용만으로도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간결했다.
'...사람들이랑 주로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조사하라더니. 뭔 사람 자체를 거의 만나지도 않는구먼.'
이런 종이 한 장 분량도 안 되는 내용을 위에 보고해도 되는 걸까.
남자도 아직은 이 업무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 정도 수준이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남자가 걱정과 짜증으로 작게 투덜거릴 무렵.
'...오늘도 역시.'
검을 휘두르던 소년의 시선이,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분명히 남자를 향했다.
그 시선의 의미는 명확했다.
'나를 지켜보고 있네.'
아직 남자는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놀랍게도 지금 검을 휘두르고 있는, 레온이라는 이름의 소년은 이미 남자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레온은, 선대 영주의 사생아라는 꼬리표가 붙은 아이는 다짐했다.
'...이렇게 되면 말해봐도 좋을지도.'
저 남자를 붙인 결정권자와 한 번 만나야겠다고.
***
일이 끝나질 않아.
하루하루가 고민이다, 고민.
그래, 지금 당장하고 있는 고민은 이거다.
아무래도 점령지도 제대로 관리하려면 조금 더 능력이 있는 관리자급 인선을 한 명 더 파견해야 할 텐데 말이야. 누굴 보내면 좋을지.
'사실 후보 자체가 그리 많지 않긴 해.'
마르다는 스펙이 제일 좋긴 해도 아직 신입이라 장기 출장 근무를 보내기엔 좀 그렇고.
키로스 경은 어디까지나 군인으로서 치안 유지를 잘하는 거지 내정 책임자 역할과는 거리가 멀고.
페트로스 집사장한테 빌린 인원들은 너무 수상해서 내 눈이 안 닿는 데 두기 너무 꺼려지고.
역시 제노비오스 집사장밖에 없나?
'말년에 험한 데 가서 고생 좀 하셔야겠는데....'
어쩔 수 없지.
집사장 아저씨는 착하니까 다 이해해주지 않을까?
아. 그리고 살짝 다른 얘기지만, 생각해보면 이제 슬슬 '점령지'라는 표현도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머지않아 내가 백작이 된다면 그곳도 명실상부한 나의 영지이자 제국의 영토가 될 텐데, '점령지'처럼 위화감을 조성하는 호칭을 더 쓸 수는 없잖아.
'그러면 아예 지역명도 제국 양식으로 새로 바꾸는 게 나을 듯한데.'
어떤 이름이 좋을까.
역시 시작은 여기서일 텐데.
그렇게 한창 집무실에 앉아 고민하던 중, 나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그러나 문을 열고 나타난 주인공을 보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으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주님."
흑발과 황금빛 눈동자.
아직 소년의 티가 물씬 묻어나오는 얼굴.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차갑고 메마른 표정.
제논 발란티스가 낳은 혼외자이자.
나의 이복동생, 레온이었다.
설마 이 꼬마가.
먼저 여기까지 찾아올 줄이야.
나는 일단 그 이유를 머릿속으로 열심히 추측하면서도, 태연한 태도로 레온을 맞이해주었다.
"놀랍구나. 네가 먼저 이렇게 내 집무실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일단 편히 앉아 있거라. 이렇게 보니 나도 반갑구나."
다행히도 레온은 나의 말대로 고분고분하게 손님용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찻잎으로 두 잔의 차를 우려 나와 레온의 자리 앞에 둔 뒤,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어쩐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
"영주님께 여쭙고자 하는 게 있습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질문이라.
요즘 젊은 친구들은 참 당돌해서 좋군요.
관대한 어른인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물어보거라."
"요즘 사람을 붙여 저의 행동을 주시하시는 게 영주님이신지 궁금합니다."
레온은 곧바로 그런 나의 가슴 한 중앙에 제대로 돌직구를 박아버렸다.
"...."
나는 순간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저 질문에 대한 나의 솔직한 대답은.
오직 '긍정'뿐이었으니까.
'진짜 이 머저리 같은 제르만아....'
그래, 나는 레온의 감시를 제르만에게 명령했다.
그렇게 크게 대단한 이유가 있지는 않다.
비록 혼외자지만 그래도 레온은 유일하게 세상에 남은 나의 혈연이기도 하니, 당연히 집안의 가장으로서 항상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또 이제 막 새롭게 정보 조직을 만들어 활동해 시작하려는 제르만과 친구들에게 적절한 경험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설마 아직 중학생 정도밖에 안 되는 아이 하나도 은밀하게 감시 못 하겠어?'
하지만 못했다.
우리 바보 제르만과 친구들은 고작 며칠 만에 다 들켜서 의뢰 표적을 나한테까지 오게 해버렸다.
'이건 그냥 테스트였다고 치고, 진짜 핵심인 두 번째 임무까지 조져 먹으면 내가 진짜 똑같이 조져준다.'
그렇게 속으로 제르만에 대한 분노를 씹어뱉으면서도, 나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청소년 레온 군에게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래, 내가 지시했다."
"...."
...어쩔 수 없어.
이미 영주의 집무실까지 온 걸 보면 심증은 확실한가 본데, 이런 건 부정하면 더 추해져.
그러면 차라리 당당하게 나가야지.
나의 대답을 듣고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이복동생을 보며 나는 그대로 쐐기를 박아넣었다.
"불쾌하게 했다면 사과하마. 그저 영주이자 가문의 가주로서 필요하다고 판단한 일을 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뻔뻔하기 그지 않는 발언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세상은 논리보다 권위가 더 우선시되는 곳이다.
그리고, 비록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오히려 나 또한 조금 흥미로워졌다.
그래, 내가 범인인 건 맞다.
이제 너는 정답을 알았지.
그러면 다음은 뭐냐?
'나랑 같은 피가 흐르는 동생아, 너는 이제 어떻게 반응할 것이니?'
화를 낼까, 공포에 떨까, 떼를 쓸까?
이런 상황에서 과연 내가 괜찮은 싹수를 봤었던 이 소년은 어떤 대처를 할지.
자연스럽게 그런 게 궁금해졌다.
나는 그런 의문을 담은 채, 레온을 바라봤고.
"아닙니다. 전혀 불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주님께서 저에 관한 관심을 놓지 않아 주셨다는 사실에 그저 기뻤을 뿐입니다. 그러니 저 같은 것에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
...쉽지 않은걸.
설마 이렇게 대응할 줄이야. 이러면 나로서도 달리 더 할 말이 없지.
나는 레온의 눈을 뚫어지게 주시했음에도, 그의 말이 얼마나 진심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레온이라는 인간이 한없이 진지하고 흔들림이 없다는 것뿐.
그렇게 내가 되려 당혹감을 느낄 때쯤.
레온이 추가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영주님에게 드리고 싶은 요청이 있습니다."
나는 침묵과 함께 그의 발언을 허락했다.
"지난번 만남 때, 섬겨볼 생각이 있냐고 물으셨죠. 그 대답, 지금 하고 싶습니다."
레온은 숨을 한 번 내쉬고, 한 글자 한 글자 선명하게 본인의 뜻을 전했다.
"부디 저도 영주님과 니카로스를 위해 봉사할 기회와 자리를 주십시오."
허.
설마, 이 상황에서, 이 말이 나올 줄이야.
그래, 지난번 만남 때 나는 나의 이복동생에게 그렇게 제안했다. 나는 언제나 인재가 부족했고, 저 꼬마가 보여주는 기질과 자질이 탐났기 때문에.
그렇기에 저 재능있는 꼬마가 먼저 내 밑에서 일할 마음이 들었다면, 나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궁금했다.
"안 될 건 없지. 내가 먼저 제안했던 만큼 당연히 나로서도 환영할 일이다. 다만 궁금하구나. 왜 하필이면 지금 그 제안에 대답할 생각이 들었는지."
도대체 어떤 판단이 그때 하지 못한 대답을 지금 하게 만들었을까?
놀랍게도 그 질문에, 레온은 이 방에 들어온 처음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망설인 만큼, 이 꼬마가 끝내 내뱉은 답이 참으로 진풍경이었다.
"...그저, 저를 감시하던 남자를 보니, 지금의 저도 영주님을 모실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모든 예상을 깨부수는 그 참신한 대답에 나는 결국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저런 모자란 녀석도 영지에서 일하는데, 나라고 못 할 건 어딨겠냐, 이 생각이 들었단 거지?
진짜.
진심인지, 아니면 만들어낸 대답인지는 몰라도.
그냥 말도 안 되게 당돌하네.
"좋아, 허락하마. 너는 오늘부터 나와 니카로스의 가신이다."
하여간.
저 어린 것이 누굴 닮은 건지.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064. 유해조수 퇴치 (1)
우리 가족 같은 중소 영지에 새로운 구성원들이 많이 늘고 근 한 달 동안은 그럭저럭 정적이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일은 끊이질 않았다.
일단 우리의 육각형 특급 인재이자 영지의 기둥이신 집사장 아저씨가 변경 지대로 출장을 가셨다.
거기서 열심히 인구 조사나 피해 복구 사업 등을 하시면서 본격적인 개혁의 기틀을 잡고 계시지.
그리고 집사장 아저씨를 파견 보내면서, 마침내 그쪽 점령지 이름을 바꾸는 조치도 같이 진행했다.
(구) 시하브 토후국의 영토는 '제노아 남작령'으로.
(구) 아르잔 토후국의 영토는 '마누엘라 남작령'으로.
그래, 맞다.
둘 다 죽은 아버지와 형.
제논과 마누엘의 이름에서 따온 거다.
'처음부터 이름을 안 바꿀 수는 없었지.'
만약 두 영토 모두 전통적인 제국의 강역이었다면 시하브와 아르잔이라 기존의 이름을 그대로 써도 문제 될 게 없었겠지만, 이곳은 내가 처음으로 정복한 완전히 다른 문화의 땅이었으니까. 새로 정복한 영지에서 월광교의 색깔을 빼는 작업은 필수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왕 바꾸는 김에 두 사람을 이름을 썼고.'
그 아이디어를 낸 건 바로 나였다.
- 점령지의 이름을 바꾼다면 아무래도 돌아가신 선대 영주님들의 존함을 바탕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렇게 하는 편이 지난 정복이 정당한 복수라는 사실이 잘 드러나고, 기존의 니카로스 남작령 주민들을 대상으로도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을 테니까요.
사실 제법 예전부터 떠오른 발상이긴 했다.
'우리 주민들에게, 구심점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사실 이 중세와 비슷한 세상은 귀족과 평민들이 상당히 서로 데면데면한 세상이기도 했다.
평민들에게는 '조국'과 '국민'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
그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땅과 조상 대대로 일궈온 땅에만 애착이 있을 뿐.
따라서 귀족은 그저 자신과는 다른 세상의 사람.
같은 국민이 아닌, 인간으로서 완전히 다른 종(種).
나라는 자신들의 나라가 아닌 그저 귀족들의 것.
'그게 딱히 절대적으로 잘못됐다고 말할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영주라는 이름의,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서는 이래저래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조국이 없다는 건 애국심 또한 없다는 뜻이니까.'
지금까지 귀족들이 전쟁터로 끌고 온 징집병들은 사실상 그저 권력자의 압박, 그리고 고향과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일말의 책임감으로 끌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일상적인 영지의 요역(徭役)에서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의욕과 용기가 날 수가 있나.'
그렇다면 우리 주민들에게 약간의 '동질감'을 심어주면 좋지 않을까? 그게 나의 오랜 구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의 조심스러운 첫 시도가 바로 새로 정복한 남작령에 붙인 두 이름, 제노아와 마누엘라.
니카로스를 위해 싸우다 죽은 두 사람의 이름을 주민들에게 오랫동안 각인시켜주는 것.
'다행히 우리 니카로스는 그나마 조건이 좋은 편이야.'
초대 영주 제논의 영향력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현 주민들은 대부분 제국에서 새로 이주해온 사람들이거나 제논이 직접 굴복시킨 토착 원주민의 가까운 후손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요컨대 동질감을 느낄 요소가 아예 없진 않다는 뜻.
발란티스 가문이 아닌 니카로스를 위해서.
영주와 그 가족들이 아닌 주민 모두를 위해서.
종교를 초월한 우리의 고향 땅 이웃들을 위해서.
'이렇게만 인식을 바꿀 수 있다면 우리 니카로스의 발전에 조금 더 보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대충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이건 장기적으로 천천히 추구해야 할 정책이니까.
어쨌거나 그건 아직은 부가적인 사실이고.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마침내 내가 3개 남작령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니카로스 남작인 동시에 제노아 남작, 마누엘라 남작이기도 하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이 부분이었다.
'물론 여전히 평소에는 그냥 대표 작위인 니카로스 남작으로만 불릴 테니,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공식적으로 나 혼자서 3개나 되는 남작령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게 요점.
실질적인 힘과 행정 구역 개편의 명분.
새로운 백작위를 탄생시킬 모든 걸 충족시켰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바탕으로 페트로스가 에우스페나에서 나의 백작 승작 건을 추진하는 것이고.'
재료는 다 모았다.
이제 남은 건 페트로스가 얼마나 잘 요리해주냐 뿐.
과연 그 욕심쟁이 탐관오리 아저씨가 얼마나 우리의 동맹에 진심일지.
그 아저씨가 자기 역할을 다 못할 경우의 대책도 몇 가지 생각해 둔 게 있긴 하지만, 가능하면 그런 일은 없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만족감과 기대감을 동시에 품고 즐거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시간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예산이 부족합니다."
영지의 주요 가신들이 모이는 정기 조회 시간.
마르다는 웬 보고서를 한 뭉치 안고 오더니, 조회가 시작되자마자 진지한 표정으로 곧장 그렇게 공표했다.
사실 저 아가씨는 항상 진지한 무표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확실히 평소보다 더 그랬다.
"물론 당장 현상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로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제노비오스 집사장의 파견 이후부터 제노아와 마누엘라에서도 점차 순조롭게 조세 징수가 이뤄지고 있으니까요."
확실히 집사장 아저씨가 경력을 허투루 쌓은 건 아닌 모양인지 그 아저씨가 가자마자 두 남작령은 빠르게 정상화되고 있었다.
무척 반가운 이야기였지만, 안타깝게도 마르다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영주님께서 말씀하신 공립 학교 설립, 군제 개편, 상비군 체제 도입, 상업 증진, 농업 개혁 등의 정책을 전부 진행하기에는 예산이 턱없이 모자랍니다."
...확실히 내가 갑자기 유능한 행정관 한 명 생겼다고 신나서 너무 막 내지르긴 했어. 돈도 없는데 저걸 한 번에 다 하는 건 역시 무리겠지.
미안해, 마르다 양.
"물론 굉장히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한다면 불가능한 일까지는 아닐 테지만, 영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즉각적이고 빠른 시행이지 않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세 남작령 모두 그렇게 풍요로운 영토는 아니기에 그건 어렵다고 판단됩니다."
이 말도 맞다.
나는 빠른 걸 원한다.
물론 나도 마음 같아서는 느긋느긋하게 나만의 작고 귀여운 영지 키우기 놀이나 하면서 전원생활을 보내고 싶긴 하지만, 슬프게도 이 가혹한 세상이 그만한 여유는 절대로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거든.
"그러면 역시...."
"네,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추가 예산을 확보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단호하게 끄덕였다.
우선순위라.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걸 정하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한 번에 다 하는 게 무리라는 건 알아도 결국 여전히 다 필요한 일들이라고 생각하긴 하니까 말이야. 단지 장기적인 관점이냐, 단기적인 관점이냐의 차이가 조금 있을 뿐.
'게다가 추가 예산 확보 문제도 그렇지.'
생각나는 방안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이런 편법들이 항상 그렇듯 미래를 팔아 현재를 사는 느낌의 고위험 수단들이 대부분이거든. 아무리 나라지만 따서 갚기를 생활화할 수는 없다.
"...."
그렇게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이어나가며, 나는 겸사겸사 회의에 참석한 다른 가신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대부분 진지한 표정으로 나와 마르다가 나눈 안건에 대해 함께 고민 중인 것 같았는데, 어째 영지 마법사 발레리아 한 명만 묘하게 안절부절못하는 듯한 태도로 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보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발레리아 씨? 달리 말씀이나 보고 드리고 싶으신 의견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니. 딱히 심각한 건 아닌데. 지금 주제랑 관련된 것도 아니고."
요컨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긴 있다는 거네.
"당장 급박하게 처리할 일을 논의 중인 건 아니었으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지금은 영지의 문제와 해결 방안을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니까요."
내가 그렇게 말하며 허허 웃자, 발레리아는 결국 뜨덤뜨덤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도 이 영지에 온 지 제법 지난 것 같은데. 나 너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봉급만 타 먹고 있는 것 아냐? 나는 일 안 해...?"
...이건 또 전혀 상상도 못 한 피드백인걸.
"살짝 속은 기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여기 영지 마법사로서 맡은 역할만큼은 성실하게 수행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되돌아봐도 내가 한 일이 없어. 이게 맞는 거야?"
설마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줄 몰랐다.
사실 발레리아가 표현을 이렇게 해서 그렇지. 정말로 그녀의 역할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옛날 가스파르 영감네 손녀 사건이 마법사가 핵심이었던 것처럼, 일단 뛰어난 마법사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안전 확보가 되니까 말이야.
물론 아직 니카로스가 시골 영지인 만큼 평시에는 그다지 능동적으로 처리할 일이 없긴 하지만, 저렇게까지 말할 일은 아닌데.
아, 설마 그건가.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 굉장히 심심하다는 것이로군요, 발레리아 씨."
"...너, 지금까지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응? 맞지 않습니까?"
아니, 왜?
진짜 그거 맞잖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전설의 방화광(예정)을 전쟁이 잔뜩 있다고 꼬드겨서 데려와 놓고는 평화로운 상황 속에 방치만 했으니, 버틸 재간이 있나.
'저 매사 당당한 아가씨가 당황하면서 떠듬거릴 때는 자기 본성 관련될 때밖에 없으니 더 확실하지.'
상당히 미안하게 됐는걸.
"어쨌든, 나는 진지해. 그리고 너도! 생각해보면 나한테 돈 주는 건 너잖아. 돈을 더 합리적으로 쓰라고."
발레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찌릿 노려본다.
설마 고용주 지갑 사정까지 고려해 주다니.
감동이야.
'그래도 이것도 기왕이면 빠르게 해결책을 내려야 좋을 문제긴 하네.'
가볍게 표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고 넘길 사안은 아니다.
사실상 발레리아는 본인 취향 하나 때문에 우리 영지에서 열정페이로 일하고 있는 셈이니, 당연히 나 또한 영지의 주인으로서 그런 부분을 충족시켜 주는 게 맞다.
그렇게 어떻게 해야 발레리아의 심심함을 해소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지금까지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키로스 경이 씩 웃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허허, 심심함을 얘기하니 저도 빠질 수가 없군요. 사실 저도 몸이 근질근질해진 지 꽤 되었습니다, 영주님!"
파격적인 끼어듦과 함께 은근히 옷 너머로 자신의 건장한 근육을 불끈불끈 과시해주는 우리 키로스 경.
'...왜 영감님까지 이래요.'
아무리 나라도 키로스 경에게는 언제나 묘한 부담감이 있다. 절대로 나쁜 감정은 아니지만, 아무튼 있긴 있다.
내가 당혹감에 땀을 뻘뻘 흘리자 키로스 경이 다시 호쾌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허허! 농담입니다! 반 정도는요!"
"...그렇다는 건, 반 정도는 진심이라는 의미로군요. 이거 심각한데요."
"허허!"
하지만 키로스 경은 이즈음에서 웃음을 줄이고,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다만 저도 빠질 수가 없다는 말만큼은 온전히 진심입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영주님도 아셔야 할 사안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키로스 경은 간략한 내용이 적힌 보고서 한 장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내가 확인해야 할 사안이라.
키로스 경의 이어지는 구두 보고를 들으며, 나는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니카로스와 제노아 사이의 경계, 그 북쪽 삼림지대에서 주민들이 의문의 '짐승'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최근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숲은 이전부터 주민들이 약초 채집을 위해 자주 들리던 곳이라, 갑작스러운 위협의 등장에 인근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아.
이거는 설마.
"언제부터 습격이 발생했죠? 피해 규모는요?"
"경비대에서 확인한 바로는, 최초 습격은 대략 3주 전입니다. 그리고 사망자는 5명, 부상자는 2명입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확실히 검증된 수치일 뿐이고, 그 일대의 치안이 평소에도 좋았던 편은 아니라 아직 우리가 확인하지 못한 인명 피해가 더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그 의문의 '짐승'이라는 녀석에 대해서는 파악한 게 있습니까?"
나의 그 질문에 키로스 경은 조금 더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아직 정확히 정체를 판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생존자들의 증언과 습격 현장에 남은 흔적을 바탕으로 볼 때, 아무래도 중형 이상의 '몬스터'의 소행이 아닐지 추측 중입니다."
"중형 이상의 몬스터라."
"그리고 또 하나. 두 명의 생존자 모두 똑같이, '빛나는 붉은 눈'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아."
거기까지 단서가 나왔으면 정말로 확실하네.
그래.
슬슬 '그 녀석'이 나올 때가 되긴 했지.
'드디어 나타났구나.'
제법 오래 기다렸다.
이 <마이트 앤 로열> 속 세계는 당연히 판타지 세상답게 몬스터라는 이름의 괴물 또한 존재한다.
한 명의 인간보다도 약한 정말로 들짐승 수준의 개체에서부터, 아예 중무장한 군대를 끌고 가야 겨우 토벌할 수 있을 만큼 강대한 개체까지 아주 다양하게.
'그리고 그 안에서도 특별히 이름 붙여진 '네임드' 개체들도 있고 말이야.'
나는 지금 키로스 경의 보고를 듣고 곧장 한 네임드 개체의 존재를 떠올렸다.
제국 동방의 변경 지대에서 서식하며.
주로 숲에서 머물고.
인간을 습격하며.
빛나는 붉은 눈을 특징으로 가진 바로 그 녀석.
거기까지 깨닫자, 내 생각은 그다음 영역으로 미치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 우리 주민들이 습격당했다는 점에서 절대로 기쁜 소식은 못 되지만.'
그래도 철저히 이득만 놓고 따져보자면, 영지에 딱 시의적절한 기회가 될 수는 있겠다.
"여러분, 그러면 정해졌네요."
"응? 뭐가?"
정해졌다는, 갑작스러운 나의 선언.
소리 내어 의문을 표한 건 발레리아 한 명뿐이었지만, 다른 가신들 역시 말만 하지 않았을 뿐 다들 의아하다는 표정은 비슷했다.
그렇기에 나는 친절하고 명확하게 다시 답해주었다.
"그 짐승, 토벌하러 나갑시다."
예산 부족.
치안 유지.
발레리아의 심심함 달래주기.
영지의 동질감 심어주기라는 나의 목표.
'그리고 슬슬 한 번 찔러봐야 할 중앙 정치 진출까지.'
잘만 하면.
그 모든 일을 종합적으로 한 번에, 깔끔히 해결할 수가 있겠는걸.
#065. 유해조수 퇴치 (2)
티베리오스 가라사대.
그 짐승 잡으러 가자.
나의 한 마디에 순식간에 그 '의문의 몬스터' 토벌 부대가 결성되었고, 그대로 곧장 출진까지 추진되었다.
"몬스터 토벌은 처음인데... 이 정도 인원으로 괜찮은 거야? 너무 수가 적지 않아?"
이번 토벌 부대는 철저하게 소수 정예.
주요 인원으로는 나와 키로스 경, 발레리아가 참가했고, 그 외의 전력으로 솜씨 좋고 용감한 병사 10명과 인근 마을의 토박이 출신 사냥꾼 3명이 있었다.
총 16명.
언뜻 보기에는 적어 보일 수 있는 숫자인지라, 발레리아는 이동 중 일행을 둘러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 질문에 대답해준 것은 경험 많은 키로스 경이었다.
"허허, 제가 보기에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애초에 이런 토벌은 서로 힘을 겨루는 전투가 아닌, 사냥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따라서 오히려 인원을 과하게 동원할 경우, 불필요한 피해만 더 유발될 수 있지요."
"흐응, 그렇군요."
키로스 경의 전매특허인 친절한 설명에 호기심이 더 돋았는지, 발레리아는 연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상당히 몬스터 토벌에 익숙해 보이시는데, 이 근방에서 몬스터가 제법 자주 나타나나 봐요?"
이번 질문에 대답한 것은 나였다.
"자주 나타난다고만 하기에는 어폐가 조금 있고, 주기적으로 나타난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지."
"허허, 영주님의 설명이 맞습니다."
그래, 키로스 경도 끄덕거린 대로 이 제국 동방은 몬스터가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곳이다.
여기 제국 동방의 가장 큰 특징은 다름 아닌 척박함과 십자교-월광교 사이의 극한 대립.
당연히 사람이 살기에는 무척이나 험악한 곳이다.
'그리고 사람이 살기 힘들다는 말은, 생명체 자체가 살아가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만물의 영장조차 못 버티고 죽어 나가는 곳인데, 몬스터라고 쉬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까닭에 이 근방의 절대적인 몬스터 출몰 횟수는 제국 평균보다 낮은 편이었다.
다만 가끔 주기적으로, 그런 끔찍한 환경조차도 씹어 버티며 꾸역꾸역 인간을 위협하는, 진짜로 위험한 놈들이 나타날 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역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하하, 아무래도 발레리아 씨는 몬스터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인데, 추가적인 설명을 더 해드릴까요?"
"누굴 바보로 알아! 이래 봬도 아카데미에서 서부 대수림으로 현장 답습까지 다녀온 몸이라고!"
오. 그건 또 썩 괜찮은 경력인데.
'확실히 제국에서 몬스터 하면 서부 대수림이지.'
서부 대수림.
제국 서쪽 국경 너머에 펼쳐진 거대한 삼림지대.
일명 '녹색 바다'.
고작 숲 따위에 바다라는 별명을 붙인 게 우습기도 하겠지만, 놀랍게도 그곳은 정말로 엄청난 크기의 삼림이 바다처럼 그 끝을 모르고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숲의 크기만큼이나 커다랗고 방대한 몬스터 군단은 덤이고 말이야.
'제국 동부가 이교도와의 무한 전쟁 중이라고 한다면, 서부는 몬스터와의 무한 전쟁 중이라고 할까.'
우리 니카로스만 한 지옥의 영지는 없어도, 그에 버금가는 연옥의 영지가 널려 있는 곳이 바로 대수림이었다.
그런 곳을 보고 왔다면 사람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발레리아의 걱정도 이해가 된다.
진짜 거기는 모든 게 다 '거대'하니까.
다행히도 동부의 몬스터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영주 너는 토벌 경험 많아? 몬스터가 자주 출몰하지는 않는데, 너도 영주 된 지 얼마 안 됐다며?"
"허허, 영지 마법사님의 표현이 조금 거칠기는 하지만 저도 비슷한 생각이긴 합니다. 이번 토벌은 저희에게 맡기고, 영주님은 뒤로 물러나 계시는 편이 더 안전하지 않을지?"
"그래!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음, 그게 그 말이 아닌 것 같은데.
키로스 경의 말은 순수한 걱정이고, 발레리아 네 말은 그냥 나에 대한 경쟁심리였던 거 같은데.
"물론 저도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배운 지식이긴 합니다. 당연히 전문가의 영역까지 침범할 생각은 없습니다."
원작 게임을 통해서는 수천수만 번 몬스터를 잡아 봤지만, 이렇게 내가 직접 몸을 쓰는 체험은 처음이니까.
내가 전문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자각 중이다.
적어도 머리로는 말이야.
"다만 이번 토벌에서만큼은 저의 이론적 지식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오, 혹시 이번 사건을 일으킨 몬스터의 정체가 짐작 가시는 겁니까?"
키로스 경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눈을 빛내며 물었고, 어느새 병사와 사냥꾼들까지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입 밖으로 낼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기대의 시선을 많이 받아버리면 역시 거기에 부응해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결국 타고난 쇼맨십을 발휘해 입을 열어주었다.
"저는 이번 습격 사건을 '칠색이랑'이 일으켰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
그렇지만 이런 나의 단호한 선언과는 달리 관객들의 반응은 상당히 싸늘했다.
내가 영주라서 대놓고 표출만 못 하고 있을 뿐,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한 기색이 얼굴에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응? 칠색이랑? 그게 뭔데?"
오직 이 근방 출신이 아닌 발레리아만이 의아하다는 듯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을 뿐이었다.
키로스 경이 결국 조심스럽게 진언하였다.
"...영주님, 칠색이랑은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 도는 민담에서만 나오는 괴물입니다. 어린아이를 겁주거나 할 때 주로 언급하지요.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역시 이 시점에서는 이런 반응인가.
칠색이랑.
붉은 눈을 지닌, 다리 여섯 달린 괴물 늑대 몬스터.
이 녀석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평상시에는 마치 카멜레온처럼 주위 환경과 완벽히 동화되어 마치 투명한 생물체처럼 보인다는 점과.
'아주 짧은, 투명화를 푸는 한순간 털이 주위 빛을 아름답게 반사해 화려한 무지갯빛을 뿜어낸다는 것이지.'
녀석의 이름이 칠색이랑(七色異狼)인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나야 게임을 통해 수차례 그 녀석을 잡아 봤기에 당연히 실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 세상에서는 아직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환상 같은 녀석이었다.
그야, 뭐.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놈이니까.
흔적도 그만큼 거의 남기질 않은 거지.
그런고로 나와 이들 사이를 가로막는 상식의 괴리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무렵.
우리 토벌을 돕기 위해 징집된 3명의 사냥꾼, 그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초원 출신의 청년.
니카로스 남작령이 아닌 제노아 남작령, (구) 시하브 토후국의 영토였던 마을에서 참여한 사냥꾼이었다.
이미 그들 또한 나의 주민이고, 몬스터의 출몰지가 니카로스 남작령과 제노아 남작령 사이의 경계인 만큼 그의 존재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초원의 사냥꾼은 입을 열었다.
"...아니요, 기사님. 칠색이랑은 실존합니다."
새로 모시게 된 이교도 귀족을 앞에 두고 몹시 긴장하면서도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는 대대로 이 땅에서 사냥꾼 일을 해왔는데, 제 조부님께서 살아생전 말씀해주셨습니다. 증조부님께서 칠색이랑과 마주친 적이 있다고."
설마 나 말고도 실존을 믿는 사람이 우리 일행에 더 있었을 줄이야. 이건 긍정적인 의미로 의외네.
"증조부 시대의 목격담이라. 그렇다면 100년은 조금 덜 된 정도겠군."
"그렇습니다, 기사님."
내 추측 외에도 사냥꾼이라는 전문가의 증언까지 더해지자 확실히 다른 사람들도 조금은 태도를 진지하게 바꾸기 시작했다.
아직 명확한 물증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사냥꾼이 이런 상황에서 이유 없이 헛소리할 가능성은 적으니까.
"흠,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상당히 곤란하군요. 보이지도 않는 민담 속 몬스터를 어떻게 찾아서 토벌하면 좋을지."
어느새 키로스 경의 병사들의 책임자로서 구체적인 사냥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역시 키로스 경, 판단이 빨라. 항상 뭐가 제일 중요한지 잘 아신단 말이야.'
다행히도 이번에는 더 고민할 필요가 없을 거야.
내가 있잖아.
나는 고민하는 키로스 경을 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칠색이랑은 자기 서식지 근처의 초목이 불타는 소리와 냄새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평범한 짐승이라면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겠지만, 그 녀석은 오히려 그 근처로 다가와서 적극적으로 화재 진화를 시도하죠."
이건 타고 난 놈의 습성 중 하나.
이 방법을 쓰면 그리 어렵지 않게 칠색이랑을 우리 쪽으로 유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어때?
나는 항상 다 계획이 있지?
"대단합니다! 어찌 그런 방법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키로스 경 역시 이 방법을 쓰면 먹히리라고 판단했는지, 감탄하며 나의 의견에 동조해주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알았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조금 궁했다.
"...음, 옛날에 책에서 읽었습니다."
<마이트 앤 로열>에서 봤어.
사실 책이나 게임이나 비슷한 것 아닐까?
그러면 아무튼 거짓말은 아닌 거다.
"무슨 책이길래 민담에나 나오는 몬스터에 대해 그렇게 잘 나와 있대? 궁금하네."
"...워낙 예전에 읽은 책이라 제목까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다음에 생각이 나면 공유해드리겠습니다."
"그래!"
"...."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쓸데없이 호기심이 가득한 발레리아가 잠시 나를 위협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추적 방법까지 공유하자 다행히도 그럭저럭 다들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나는 조금 더 구체적인 사냥법을 일행들에게 설명하며, 자신만만한 걸음걸이로 계속 전진하였다.
"슬슬 숲이 보이는군요."
그렇게 점점 우리가 목표로 하던 숲이 시야에 담기기 시작했고.
"어? 비 온다."
어느새 하늘에서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비는 곧 폭우가 되었다.
***
니카로스 남작령과 제노아 남작령 사이의 경계.
작은 산을 중심으로 둥글게 숲이 빼곡한 삼림지대.
이곳은 이 광활한 동방 초원지대에서 매우 드물게 드높은 나무들을 가득 볼 수 있는 곳이었고, 그만큼 각종 고유한 식용 및 약용 자원들이 풍부한 땅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인근의 우리 주민들은, 지금의 제노아 남작령이 아직 시하브 토후국이라고 불리던 시절부터 이 숲을 수없이 방문해왔다.
이웃한 적대국의 부대와 마주칠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이다.
요컨대 이곳은 나의 주민들에게 더없이 귀중한, 삶의 터전 중 하나라는 이야기였다.
'그만큼 중요한 곳이니 이렇게 영주인 내가 친히 토벌을 주도하고 나서는 것이지.'
물론 떡고물 생각도 아예 안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핵심 사유는 분명 민생이었다.
다만 아무리 민생을 중시하는 착한 영주인 나라도, 이런 상황이 되자 괜히 직접 나선 것 같다는 후회가 아예 안 들 수는 없었다.
나뭇잎을 쉬지 않고 때리는 빗방울 소리.
어느새 질척질척 진창이 되어버린 흙바닥.
불쾌할 정도로 축축해진 옷.
젖어버린 머리카락.
분명 아침에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하늘이 화창했는데, 어느새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거세게 빗줄기 쏟아지고 있었다.
이것 참.
이러면 많이 곤란한데.
여기는 원래 비가 잘 오지 않는 곳인데.
비가 와서 기분이 찝찝하다는 것 자체는 딱히 문제가 아니었다.
천생 군인인 키로스 경이나, 군인에 가까운 나, 그리고 몸 굴리는 게 일인 병사와 초원의 사냥꾼들은 비 좀 맞는다고 아이스크림처럼 막 녹아내리지는 않으니까.
"...으으, 축축하고 기분 나빠. 이럴 줄은 몰랐는데."
물론 수도에서 곱게 자라신 우리의 영지 마법사님은 빼고.
하여간 문제는 우리가 추적 겸 토벌을 위해 이 숲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사람이랑 똑같이 이런 폭우가 쏟아지는 순간에는 야생동물도 활동을 최소화한다.
비록 몬스터가 일반적인 동물이랑은 다른 생물로 분류되긴 하지만, 실제로는 동물과 상당히 비슷한 행동을 보이는 만큼 아마 칠색이랑도 지금쯤 나대지 않고 어디 적당한 은신처에 가만히 머물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놈을 유인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방화를 할 필요도 있는데, 당연히 이런 폭우 속에서는 그 또한 더 어려워지고.
"영주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날씨에서 작전을 속행하는 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이만 물러갔다가 다음에 다시 오는 것도 방법입니다."
키로스 경이 비에 쫄딱 젖은 생쥐들을 대표해서 나에게 철수를 제안했다.
음, 확실히 헛고생했다는 기분이 들긴 해도 안전하게 진행하려면 그게 최선이긴 하다.
우리 주민들을 잡아먹은 짐승 놈의 토벌도 중요하긴 하지만, 지금 데리고 온 병사와 사냥꾼들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
'우리 방화광님께서 이럴 거면 왜 데려왔냐고 화를 많이 내시진 않을까 걱정이네.'
그렇게 소소한 걱정을 하며, 결국 내가 후퇴를 결심하고 모두에게 명령을 내리기 바로 그 직전.
갑자기 숲 전체를 울리는.
사나운 늑대의 하울링이 숲 너머에서 들여왔다.
- 아우우우우우우우우-!
일반적인 늑대의 울음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살벌하고 커다란 이 포효.
"이건...!"
이건 확실하다.
지금 이 숲에서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 생물은 단 하나밖에 없다.
"칠색이랑!"
놀랍게도 우리가 숲에 들어오자마자, 칠색이랑이 거친 울음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허."
나는 순간적으로 헛웃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이 그 존재조차 확실히 알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습성을 자랑하던 몬스터가, 인간이 우르르 몰려오자마자 대놓고 소리를 질러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바로 그 칠색이랑이?
나는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를 부르고 있군요."
칠색이랑은, 폭우 속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
무척이나 노골적으로.
사실상 도발과 다름없이.
재밌네.
짐승 주제에.
#066. 유해조수 퇴치 (3)
애초에 '몬스터'란 무엇인가?
이 세계는 게임 속 세상을 기반으로 한 만큼, 당연히 내가 살던 지구와는 다른 점이 많다. 그렇기에 생태계 역시 지구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지 않았다.
요컨대 이 세계에는 소나 말 따위의, 지구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생물들도 있지만.
반대로 집채만 크기의 토끼, 먹이사슬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는 육식성 쥐, 다리 여섯 달린 무지갯빛 거대 늑대 등 지구에서는 전혀 볼 수 없던 생명체도 무수하게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지구에 없던 생명체라면 전부 몬스터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지.'
단순히 특이하게 생겼다고 몬스터라 불리진 않는다.
이 세상에서도 평범한 야생동물로 분류되는 생명체와 몬스터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이 세계의 학자들과 이 세상을 설정한 개발자들.
그들은 이미 그 둘 사이의 수많은 구분 방법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규정지어 놓았다.
그리고 그 중, 플레이어였던 내가 주목할 만한 요점은 단 하나뿐.
'인간을 향한 끝 모를 적개심.'
그렇다.
몬스터는 그 종에 따라 각자 천차만별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지만, 그런 각양각색의 외형과는 달리 모두가 공통적이고 태생적으로 인간을 향한 무한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무수히 많은 종족이, 오직 단 하나의 종족만을 이토록 맹목적으로 미워한다니.
대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 세계에 떨어지고 다시 그 사실을 되새겨보니.
나는 새삼스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웅대하고 거친 늑대의 하울링.
이건 누가 들어도 칠색이랑의 울음소리였다.
"영주님, 이건...."
"네, 틀림없네요. 우리가 찾던 놈입니다."
경험 많은 키로스 경 역시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고, 이미 칠색이랑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나는 그 물음에 확답을 내려줬다.
"딱 들어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괜찮겠어? 나 하나 안 다치고 건사하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괜히 병사들 다쳐서 좋을 건 없잖아? 상황이 나빠지면 내가 다 지켜주지는 못할 수도 있어."
그리고 발레리아는 딱딱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걱정된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이것 참.
지금까지 작전에 대해서는 별 발언이 없다 싶었는데, 설마 혼자서 우리를 다 지켜줄 생각이었던 건가.
기특하여라.
"칠색이랑의 신체 능력은 거의 네오파이트에 버금가는 수준입니다. 위험하긴 하죠. 다만 기교는 없고 단순히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전부이니, 실제 기사 수준의 전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면에서 붙는다면 지금의 전력으로도 부족함은 없습니다."
그래, 네오파이트 수준의 나.
아데프투스 키로스 경.
정통 마법사 발레리아.
거기에 용감한 병사 10명과 숙달된 사냥꾼 3명까지.
칠색이랑은 단독 행동하는 몬스터치고는 힘이 떨어지는 편이니, 오히려 우리 전력은 부족하기는커녕 차고 넘치는 상황이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면에서'라는 조건이 붙을 때의 이야기지?"
이런 눈치 빠른 아가씨 같으니.
"네, 칠색이랑의 가장 큰 특징은 투명화. 사냥할 때의 놈은 붉은 눈을 제외한 전신을 주위 환경과 동화시켜 보이지 않게 합니다. 그나마 눈 부위는 제대로 보인다지만, 고작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붉은 광원 두 개만 보고 제대로 대처하는 건 어렵죠."
특히 이렇게 폭우가 쏟아져 시야가 흐려지고 가시거리가 짧아지는 날에는 더욱더 그렇지.
투명화라는 건 그만큼 까다로운 능력이다.
부족한 신체 능력에도 불구하고 칠색이랑을 극도로 치명적인 포식자로 만들어줄 정도로.
"그래서 결론은 뭐야? 원래 말한 대로 후퇴?"
"그것도 여전히 유효한 선택지긴 하지만, 저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는 걸 보아 우리를 쉽게 보내줄 것 같지도 않군요."
그냥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저게 단순히 꺼지라고 내뱉는 위협으로 들리지는 않거든.
나는 긴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토벌을 강행합시다. 저렇게 녀석이 먼저 존재를 알린 게, 우리에게도 이득인 측면이 있으니까요."
그래, 까다로운 판명과 서식 구역 추적 단계를 생략하면 우리로서도 편한 일이다.
"당연히 구체적인 계획도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 괜한 만용을 부리는 스타일은 아니잖아? 그렇지?
원래는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숲에 적당히 불을 지르며 놈을 근처로 유인하는 작업부터 진행했겠지만, 지금 같을 때는 그건 생략해도 좋겠지.
좋아. 그러면 바로 2단계로 넘어가자고.
"가져온 횃불을 모두 꺼내라."
내가 명령을 내리자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횃불을 꺼내 일행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칠색이랑의 투명화는 근거리에서 강한 빛을 쬐면 풀리는 성질이 있습니다. 횃불 정도의 밝기면 충분하죠."
녀석이 불만 보면 정신 못 차리고 허겁지겁 끄려고 하는 습성이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
떨어지는 신체 능력을 투명화라는 강점을 통해 보완하는 만큼, 빛과 불은 칠색이랑의 역린이나 다름없다.
키로스 경은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렇게 되물었다.
"하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횃불을 유지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무슨 그런 걱정을."
우리에게는 불의 전문가가 함께하잖아요.
"발레리아 씨?"
"그래, 걱정하지 마. 횃불이 꺼지지 않게만 하면 되는 거지? 그 정도야 간단하지."
황립 아카데미에서 화염 학파 마법을 배운 정통파 마법사에게 고작 빗물에 꺼지지 않을 불을 만드는 일은 무척이나 쉬운 일인걸.
'이번 작전의 핵심이 화염이다 보니 데리고 온 것도 있지만, 사실 발레리아를 데려온 제일 큰 이유는 너무 영지에만 있으면 심심할까 봐 그런 거였는데.'
어쩌다 보니 폭우 덕분에 이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애로사항이 꽃폈을 것이다.
"확실히 대처법까지 제대로 알고 있네? 회의 때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바로 결단 내린 걸 보면 원래부터 달달 외우고 있던 모양인데. 솔직히 조금 대단한걸."
순수하게 감탄하는 발레리아의 칭찬에 나는 머쓱하다는 듯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냥.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수밖에 없더라고요."
한 게임만 1만 시간을 붙잡고 있다 보면,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외우기 싫어도 외우게 될 수밖에 없단다.
"하다 보면?"
나의 묘한 표현에 발레리아가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지만, 일단 나는 진지한 작전 논의로 먼저 넘어갔다.
"총 3개 조로 나뉘어 삼각형 모양의 대형을 갖춰 울음소리가 난 방향으로 천천히 나아가죠. 횃불이 있으니 놈도 몸을 숨긴 채로 가까이 오지는 못할 겁니다. 습격의 순간에는 몸을 드러낼 수밖에 없죠."
차례대로 횃불에 발레리아의 마법을 주입 받는 일행들을 보며, 나는 브리핑을 계속했다.
"사냥꾼들은 놈의 기척이나 붉은 눈동자가 다가오는지 살피고, 병사들을 창을 내밀어 주위를 경계, 그리고 놈이 모습을 드러내면 키로스 경이 적극적으로 나서 저지해주십시오. 발레리아 씨의 마법은 아군에게도 피해를 갈 가능성이 있으니 일단 대기입니다."
"알겠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정교하게 딱 표적만 맞히는 건 일도 아닌데."
너무 아쉬워하지 마, 발레리아야.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결국 믿을 건 너뿐이니까.
그렇게 투덜거리던 발레리아를 달래며 마침내 우리는 숲 더 깊숙한 곳을 향해 전진을 시작했다.
그래, 이 대형 그대로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놈이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이 모든 건 간접적으로나마 비슷한 경험을 수없이 해왔던,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최적의 작전이니까.
'이 괴물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우리가 오자마자 하울링을 한 거니.'
그 소리 때문에 널 사냥하려는 무리가 떠나가려다 발길을 돌렸잖아. 아무리 봐도 어리석은 행동 같은데.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해.'
불이 약점인 놈의 특성.
폭우가 내리는 날씨.
작정하고 몬스터를 잡으러 온 우리.
어차피 싸워야 할 상대라면, 그나마 자신이 유리한 날씨에 싸우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할 수도 있지.
이것도 상당히 합리적인 이야기다.
'물론 만약 놈이 사람일 경우의 이야기지만.'
하지만 아무리 교활하다고 한들 놈은 결국 몬스터.
과연 녀석이 이 정도로 고차원적인 분석을 하고 행동한 것일까?
그건 나에게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어찌 되었건.'
그런 만에 하나의 가능성조차 고려해도 우리의 작전과 전력은 충분하다. 놈에게도 생각이 있다면, 그 생각째로 한꺼번에 박살 내면 될 일이다.
'특별한 변수만 없다면, 위기도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전진을 계속했다.
그 와중에도 비는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렸다.
질척한 바닥에 신발을 진흙투성이가 되었고, 거센 물줄기가 산기슭을 타고 마치 폭포처럼 흘러 떨어졌다.
***
"...."
침묵과 긴장만이 가득한 추적 과정.
아무리 대비가 단단하다고 해도, 언제 어디서 습격받을지 모르는 상황을 계속 버티는 것은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도 오직 단 한 사람만큼은 정말로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네가 들고 있는 창은 뭐야? 평범한 창은 아닌 것 같은데?"
문득 나를 보며 그렇게 묻는 발레리아.
그녀의 표정에 불안 따위의 감정은 한 점도 없었다.
'...태평한 건지, 아니면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물론 답은 후자겠지.
황립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막 졸업한 사회 초년 마법사에게 두려운 일이 뭐가 있을까.
'사실 실제로 저만한 자신감을 가질 자격이 충분하기도 하고.'
오만함이야말로 마법사의 정수.
오히려 지금의 발레리아는 다른 평균적인 마법사에 비하면 굉장히 정상적이고 겸손한 편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이라는 가정이 붙긴 하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쥐고 있던 창을 발레리아 쪽으로 돌려 보여주었다.
"지난번에 정복한 토후국에서 노획한 무기입니다."
"오, 역시 사연이 있는 물건이었네."
이 창은 지난 아르잔 토후국 정벌 이후 놈들의 국고에서 털어온 아티팩트였다.
그래, 이거 하나만으로 부족한 노획량을 다 메꿀 수 있다고 내가 판단했던 바로 그 물건 말이다.
물론 오늘 내가 직접 나설 일은 거의 없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것도 작전의 일환이고 그리고 또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있듯이 평소 들고 다니던 검 대신 특별히 이 녀석을 챙겨 나왔다.
근데 발레리아도 역시 보통이 아니네.
대놓고 보여준 적도 없는데, 그 거리에서 언뜻 본 것만으로 평범한 물건이 단박에 아니라는 걸 알아보다니.
마력에 민감한 건가.
"이런 걸 용케 구했네. 이거 그거지? 아티팩트 중에서도 옛...."
그렇게 발레리아가 나의 창에 관심을 보이며 가까이 다가오려던 바로 그 순간.
"영주님! 위!"
누군가 몹시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고.
나는 곧장 창을 바로 쥔 채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대로 기세를 담아 휘둘렀다.
"...!"
깡-!
쇠를 울리는 거친 소리가 빗속에서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뇌를 일깨우는, 마치 1초가 1년과도 같은.
긴박의 시간.
나는 곧 충격으로 튕겨 나와 흙바닥을 굴렀고.
- 크르르!
그와 동시에 다리 여섯 달린 거대한 늑대가, 일곱 빛깔의 광채를 강렬히 흩뿌리며 우리의 중심에 착지했다.
"영주님! 모두 영주님을 지켜라! 놈을 포위해라!"
키로스 경은 곧장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칠색이랑과 나 사이를 가로막았고 병사들 역시 재빠르게 창을 꼬나쥐며 놈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어, 어...!"
그리고 발레리아는 누가 봐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넋이 나간 모습.
놀랐지?
나도 진짜 놀랐다.
설마 갑자기 우리 머리 위에서, 번개같이 발레리아를 똑바로 노리며 떨어질 줄이야.
"허."
확실하다.
이거, 분명 의도한 거다.
요컨대 우리의 횃불 때문에 정상적으로 접근하면 들킬 수밖에 없으니까, 작정하고 산기슭에 숨어있다가 투명화가 풀리기 전에 급강하하며 기습을 감행한 거지.
심지어 노린 것은 정확히 발레리아.
불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화염 마법사.
칠색이랑의 천적.
만약 내가 다급히 몸을 날려 창을 휘두르지 않았다면, 발레리아는 분명 갈기갈기 찢겼을 것이다.
'...어처구니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발레리아를 표적으로 삼은 것까지 놈의 계획인가?
그녀가 가장 중요한 인물이니까?
그것까지 알아본 건가?
어찌 되었건, 저 녀석.
상상 이상으로 교활하고 집요하다.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크게 다친 곳도 없고요."
그래 봤자 놈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 허를 찌르는 훌륭한 시도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어.
나도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너의 공격은 나에게 막혔고.'
너는 사방을 포위당해 도망칠 길까지 잃었지.
이제 어떻게 할래?
나는 그런 시선을 담아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칠색이랑을 바라봤지만, 예상과는 달리 놈의 붉은 눈동자에 낭패나 공포 따위의 기색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그저 으르렁거리는 놈의 울부짖음과 함께하는, 우리 인간을 향한 맹목적인 적대감뿐.
그리고 그 순간.
- 아우우우우우우우우-!
우리가 처음 숲에서 들었던 그 포효와 똑같은 소리.
칠색이랑이 다시 하늘을 보며 하울링을 시작했고.
주위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둑이 무너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해일이 밀려오는 소리 같기도 한 그런 굉음이.
"어, 어어?"
"저, 저, 저 위 좀 봐...!"
병사들이 산봉우리가 솟은 방향을 보며 웅성거렸다.
자연스럽게 나의 시선 또한 그리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기슭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흙빛 파도가 사납게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즉.
폭우로 인한 산사태.
칠색이랑과 우리를 전부,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을 만한 거대한 그런 산사태였다.
그 광경을 목도하고, 나는 본능적으로 다시 칠색이랑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경악을 담아서.
설마.
설마 여기까지 노렸다고?
산사태가 발생할 타이밍까지 계산했다고?
한낱 몬스터가?
아니면 이 모든 게 단순한 우연?
"영주님! 위험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내리기도 전에 산사태가 먼저 우리를 덮치고야 말았다.
흙에 덮여 캄캄해지는 오감 속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보고 들은 것은 오직,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키로스 경의 목소리와.
"...!"
나를 감싸기 위해 빠르게 몸을 날리고 있는 발레리아의 모습이 전부였다.
그렇게 어두워졌다.
시야가 캄캄해졌다.
#067. 유해조수 퇴치 (4)
그래.
인정하겠다.
아무래도 내가 방심한 것 같다.
이 세상이 단순한 게임 속 세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옛날 옛적부터 알고 있었다.
비록 게임 플레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이곳에 사는 모든 존재는 훨씬 더 생생하고 고차원적인 존재였다.
그 정도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냥 바보같이 알면서도 실수한 거다.
내가 이미 잘 안다고 자신한 분야였기 때문에.
상대가 인간이 아닌 몬스터였기 때문에.
대비할 만큼 충분히 대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근래 계속 패배 없이 승승장구만 했기 때문에.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한 가지다.
앞으로는 방심하지 않겠다.
그거 하나면 된다.
***
"...야. 어서, 일어나! 어서!"
다급하게 나를 깨우는 여자의 목소리.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눈을 찡그리며 깨어났다.
온몸이 쑤신다. 아프다.
5분만 더 자고 싶다.
하지만 역시 그러면 안 되겠지.
고통을 꾹 참고 상반신을 일으키자, 곧 흙투성이가 되어 꼬질꼬질한 발레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드디어 일어났네!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어!"
발레리아는 내가 눈을 뜨자 반갑다는 듯 소리쳤다.
그래.
나도 반가워.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곧장 상황 파악부터 시도했다.
"여기가 어디죠? 다른 일행들의 위치는 알고 있습니까? 발레리아 씨는 정신을 차린 지 얼마나 되었죠? 칠색이랑도 아직...."
"...너무 한 번에 묻지 마. 나도 아직 깨어난 지 얼마 안 됐거든."
발레리아는 살짝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진정시킨 뒤, 곧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말했다시피 나도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여기가 어딘지는 아직 몰라. 다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도. 그 망할 늑대도 아직 못 봤어. 그냥 눈을 뜨니까 네가 보이길래 곧장 너부터 깨운 것뿐이야."
그런가. 일이 상당히 꼬여버렸다.
과연 다른 사람들은 무사할지.
"일단 운이 상당히 좋았어. 우리 둘 다 흙구덩이 깊숙한 곳에 안 파묻히고 숨도 멀쩡히 쉴 수 있었으니까."
맞는 말이다.
이렇게 압사해버리면 개죽음도 그만한 개죽음이 없지.
그렇게 어느 정도 상황 판단이 끝난 내가 입을 열려고 한 바로 그 순간, 나보다 한발 먼저 발레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는 고마웠어. 그 망할 늑대가 나를 노리는 거, 네가 막아줬잖아."
내가?
아, 그랬지.
칠색이랑의 첫 기습의 목표는 발레리아였고, 그 공격을 저지한 것이 바로 나였다.
"그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래, 어떻게 모셔온 우리 귀중한 마법사님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잃을 수는 없지.
그냥 반사적인 행동이었을 뿐이다.
거기까지 대답하자, 슬슬 주위 환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직도 폭우는 질리지도 않고 내리고 있었고.
"발레리아 씨, 그 다리는...?"
발레리아의 부츠 너머, 발목 부근에서 붉은 핏기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상처를 발견하자 살짝 당황하며 답했다.
"별것 아냐. 그냥 뭐, 조금 쓸린 정도지."
아니, 아무리 봐도 그냥 쓸린 정도가 아닌데.
이대로 가만 놔두다가는 덧날 만한 상처다.
그만한 상처를 보자,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러길래 왜 그렇게 무리한 짓을."
그러자 발레리아도 울컥한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뭐? 왜? 왜긴 왜야! 나도 너 구하려고 그런 거지! 나 아니었으면 너 어디까지 쓸려나갔을 줄 알고!"
"...."
할 말이 없었다. 정론이었으니까.
산사태의 순간, 그녀가 몸을 날려 나를 잡아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 둘마저 뿔뿔이 흩어져 정신을 잃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감사 인사를 먼저 표하는 게 맞는데, 그걸 알면서도 어쩐지 실천이 쉽지가 않았다.
목구멍이 반쯤 막힌 기분이었다.
"아니, 그...."
그냥 그랬다.
왠지 그녀의 상처 자체가 나의 불찰로 인해 생겼다고 생각하니, 괜히 못마땅하단 듯한 반응만 나왔다.
이건 앞으로는 방심하지 않겠다는 다짐과는 완전히 별개의 반사적인 문제였다.
아직도 머리가 멍한 건가.
작전을 말아먹은 것에 대한 심적 후유증이 남은 건가.
'...이거, 그, 상당히 나답지 못한 짓인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천천히 반성하고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건넬 여유조차 부족하였다.
내가 발레리아를 보며 입을 열고자 한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등 뒤 너머로 붉게 이글거리는 한 쌍의 광원을 보고야 말았으니까.
아, 저거.
그거다.
칠색이랑의 눈동자.
"발레리아 씨, 불!"
나는 그렇게 외치며 벌떡 일어나 발레리아를 안고 다급히 몸을 날렸다.
동시에 놈의 억센 발톱을 아슬아슬하게 등을 스친다.
"뭐, 뭐야! 뭔데!"
그리고 발레리아는 나의 품속에서 놀란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나의 말대로 주위를 환하게 비추는 불길을 사방으로 훌륭히 방사해냈다.
사방이 밝아진다.
그리고 개 같은 늑대 놈이 또다시 일곱 빛을 뽐내며 모습을 드러낸다.
흙투성이가 되었긴 하지만, 여전히 건재한 칠색이랑.
녀석의 몸뚱이에 큰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그 녀석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 증오의 눈길로 나와 발레리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물러서지 않고 그 시선과 마주하며, 나는 발레리아를 다시 바닥에 내려주며 그렇게 물었다.
"발레리아 씨,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일어서는 건 가능. 근데 미안하지만 빠르게는 못 움직일 것 같아."
아니, 그게 미안할 일은 전혀 아니지.
오히려 내가 미안해하는 게 마땅할걸.
나는 긴박한 시간 속에서도 차분히 전황을 분석했다.
적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
우리 전력은 나와 다리를 다친 발레리아.
그리고 창 한 자루.
나는 허공 위로 오른손을 뻗었고, 바로 그 순간 저 멀리 흙바닥 속 어딘가에서 파묻힌 창 한 자루가 홀로 날아와 나의 손안으로 스스로 안착했다.
그리고 그대로 두 손에 힘을 줘 창을 꽉 쥐며, 마주 대치 중인 칠색이랑을 향해 겨눴다.
"아티팩트...."
그래, 발레리아의 말대로 아르잔 토후국에서 건진 이 창은 아티팩트다.
그것도 아티팩트 중에서도 극히 드문.
2개 이상의 능력을 갖춘 '옛 지혜의 산물'.
이 녀석이 보유 중인 능력은 딱 2개지만, 지금 내가 주목할 만한 건 그중에서도 1개의 능력뿐이다.
'귀속'.
일정 거리 안에 있다면, 언제든지 자유롭게 소유자의 손안으로 돌아오는 귀환 능력.
굉장히 단순해 보이지만, 막상 실전에서 이만큼 유용한 능력은 또 드물거든.
'내가 무기가 없는 줄 알고 자신 있게 습격한 모양인데 아쉽게 됐네, 이 망할 늑대야.'
그런 내 비웃음 섞인 시선이라도 읽은 건지, 칠색이랑은 전보다 더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좋아. 상황 파악은 끝났다.
지금은 키로스 경도, 다른 병사들도 주위에 없다.
'그렇다면 나 홀로 전방에 서야 하겠네.'
아무래도 나의 직업이 봉건 영주다 보니 이런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못할 일은 또 아니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까짓거 하면 되지.
나는 창을 쥔 두 손에 조금 더 꽉 힘을 주었다.
그래, 이제는 방심하지 않는다.
인정할 건 인정한다.
놈은 위협적이다.
다른 일행과 떨어져 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
나도 사력을 다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고작 그뿐이다.
놈을 과대평가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내가 부족했던 것일 뿐이니까.'
괜한 자만심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나의 실책을 인정했기에 더욱 객관적으로 직시하는 것뿐이다.
몸을 숨기다 기습하는 것.
폭우와 산사태라는 환경적 이점을 살리는 것.
적을 함정으로 유도하는 것.
잘 생각해보면 이 모두 인간이라면, 인간의 군대라면 당연히 감행할 법할 일들일 뿐이다.
작전을 짤 때 숨 쉬듯 고려하는 일이지.
'그냥 내가 놈을 인간만도 못한 존재라고 판단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뿐이야.'
이제는 그런 실수 따위 반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마음먹었기에 놈은 이제 한낱 토벌해야 할 야수에서 나의 평범한 '적'이 되었다.
계책을 꾸밀 줄 아는 한 개체의 적.
심지어 지금껏 그 계책 전부를 실패한 그런 적.
하나같이 시도는 좋았지만 어쩌겠니.
이 바닥에서는 운도 전부 실력이잖아.
'그리고 고작 그 정도 실력의 적이라면.'
나의 상대가 될 수는 없다.
시하브, 아르잔.
나는 훨씬 더 까다롭고 지독한 놈들도 짓밟고 여기까지 도달한 거니까.
'아, 그리고 지금 나에게는 발레리아도 있고.'
어쨌거나 요컨대.
도저히 질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든다는 거다.
여기까지 와서 더 오래 끌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에는 내가 먼저 놈을 향해 창을 꼬나 들고 돌격했다.
"발레리아!"
그렇게 외치며 말이다.
"응!"
다행히도 발레리아는 이런 나의 맥락 없는 부름조차 현명하게 알아먹고 호응해줬다.
그녀의 손안에서 화염의 구슬들이 마치 한 실로 꿴 것처럼 줄줄이 쏟아져나온다. 그리고 그대로 칠색이랑을 향해 추적한다.
화염 학파의 하위 마법.
'불타는 진주'.
아주 좋아.
정교한 대인용 화염 마법에는 저만한 게 없다.
칠색이랑은 재빠르게 몸을 날려 구슬들을 피하지만, 저 불덩이들은 끈질기게 놈을 따라갈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다.
돌격을 멈추지 않고 칠색이랑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놈은 나를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결국 잠시 멈칫하고는 두 발로 서 나를 맞이했다.
사납게 발톱을 뽐내는 4개의 다리.
칼날과 비견되는 총 16개의 발톱.
'그 정도 단단함이면 내 일격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 모양이지만.'
아쉽게 됐다.
내 일격만 막기에는 제법 괜찮은 대응이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로 우리의 일격은 못 막거든.'
너는 또다시 판단을 실수한 거다.
발톱과 창날의 충돌 직전.
나의 창날 끝에 이글거리는 불길이 더해진다.
소수의 정예 전투 마법사만 가능한, 동시에 두 가지 마법을 발휘하는 이중 주문.
화염 학파의 하위 마법.
'사린의 불타는 검'.
보이는 그대로, 날붙이의 위력을 강화하는 보조 마법.
그 효과는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극적으로 바뀐다.
'그리고 당연히 발레리아의 역량이야 두말할 것 없이 최고고.'
나의 불타는 창날이 망할 늑대의 발톱들을 순식간에 녹여버리고, 그대로 놈의 어깻죽지까지 찔러 태운다.
- 아우우우우우우우-!
놈이 울부짖는다.
지금까지 내뱉은 위협의 포효와는 다른, 순수한 고통의 울음소리.
그래.
이 소리가 듣고 싶었다.
극심한 고통에 이성이 마비된 그 녀석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지만.
"어딜 감히!"
그곳에는 발레리아의 불덩이들이 이글거린다.
깜빡해서는 안 될 사실을 깜빡해버린 칠색이랑은, 그 실책의 대가로 끔찍하게 불타 고통받았다.
늑대의 고기 익는 냄새가 내 코를 찌른다.
그만큼 녀석의 생명력까지 함께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놈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칠색이랑은 그 지경이 돼도 포기하지 않았다.
놈은 불타는 와중에도 나를 똑똑히 직시하며, 그 몸뚱이에서 유일하게 재가 되지 않을 분노를 뿜어냈다.
"티베리오스! 위험해!"
놈이 나를 향해 몸을 던진다.
뜨거운 열기, 거대한 체구, 무시무시한 완력과 속도.
위협적이라면 위협적일.
그런 최후의 일격.
하지만 너무 뻔하다.
'이게 만약 전장에서 만난 기사의 공격이었다면.'
낙제점을 줄 정도로 말이야.
그래, 기억난다.
비록 내가 직접 막은 건 아니었지만, 이것보다 훨씬 훌륭했던 최후의 일격을 날린 사람도 한 명 봤었지.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넘쳐흐르는 놈의 빈틈 한구석 사이로 창날을 찔러넣었다.
푹-!
살이 뚫리는 소리와 지글거리는 소리가 동시에 섞여 내 귀를 때린다. 놈의 움직임이 멈춘다.
끝내 나의 창날이 칠색이랑의 심장을 관통했다.
"...."
놈이 그 지경이 됐음에도 여전히 피비린내 나는 붉은 눈동자를 나를 노려보았다.
정말로 죽음을 목전에 둔 이 순간까지 녀석의 증오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글거리는 증오와 정면으로 마주했음에도 큰 감흥은 없었다.
절대로 놈을 과소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짐승이 타고 난. 이유도 없는 적개심 따위.'
명예, 부, 원한, 그리고 종교.
미워하기 마땅한 수만 가지 이유를 바탕으로 서로를 창칼로 찢어나가는.
동족이 동족을 온 힘을 다해 죽여대는.
그저 인간이 인간을 미워하는.
'그런 전쟁에 비하면 이 얼마나 하찮고 시시해.'
이 순간 나도 모르게.
나는 옛 기억을, 첫 전쟁의 추억을 떠올렸다.
나스라딘.
시하브 토후국의 장군.
나에게 이교도를 향한 맹목적 증오를 가르쳐준, 이 늑대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최후의 일격을 날렸던.
인상 깊었던 한 사내.
때가 되면 알아서 다 잊게 되리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아직도 그 남자에 대한 기억이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그래, 이 사나운 늑대야.
너의 교활함과 분노는 잘 봤지만, 유감스럽게도 너보다도 이미 죽어서 흙이 되어버린 사내가 훨씬 더 인상 깊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창을 쥐고 있던 두 손에 더욱 전력을 다해 힘을 담았다.
그렇게 칠색이랑의 숨은 끊어졌다.
#068. 유해조수 퇴치 (5)
칠색이랑 퇴치 완료.
어쩌다 보니 본래의 계획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달성하긴 했지만, 어쨌든 완수는 완수다.
나는 밀려오는 성취감에 천천히 숨을 몰아 내쉬었다.
"됐다! 앗, 아야...."
그리고 죽은 칠색이랑이 털썩 쓰러짐과 동시에, 등 뒤에서 환호성과 함께 곧장 그 뒤를 따라오는 앓는 소리가 들렸다.
휙 뒤를 돌아보니, 아무래도 신난 발레리아가 격하게 몸을 움직이다 그만 다친 발목에 무리를 준 것 같았다.
'...하여간. 칠푼이 같으니.'
뭐,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 저렇게 되기도 하지.
그 심정 이해 못 하는 바 아니다.
나는 털썩 주저앉은 발레리아 쪽으로 재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그야 당연히 괜찮지! 이 정도쯤이야 나 같은 일류 마법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발목 다친 거랑 마법 실력이 일류일 거랑 도대체 무슨 상관인 건지. 아무리 봐도 괜찮은 모습이 아닌데.
나는 결국 철없는 허세를 무시하고 한쪽 무릎을 굽혀 발레리아의 부츠를 벗기기 시작했다. 처음 정신을 다시 차렸을 때부터 그녀의 이쪽 발목이 신경 쓰였다.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뭐, 뭐?"
비 때문인지 아니면 피 때문인지.
부츠가 축축하게 젖어 벗기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요령껏 힘을 주니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뭐긴 뭐야. 의료행위지.
'공인된 자격증 같은 건 없지만, 야전의 치료라는 게 원래 다 그 모양인 거니까 이해해주길 바라.'
마침내 발레리아의 맨발을 확인하자, 예상대로 예사롭지 않은 상처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딱 봐도 발목을 제법 심하게 접질렸다.
그뿐만 아니라 산사태에 휩쓸리다가 뾰족한 물체에 찔리기라도 당한 듯,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에서 핏물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상처를 숨기고 있으면서 괜찮기는 뭐가.'
그 상처를 보니 어쩐지 또다시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질척한 응어리 같은 게 솟아 나오려고 했지만, 지금은 그딴 쓸데없는 짓에 할애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다급히 겉옷의 품속을 뒤져 붕대를 꺼냈다.
옷 안쪽 깊숙한 주머니 속에 있어 그런지, 다행히 산사태에 휩쓸렸음에도 붕대는 멀쩡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 와중에 발레리아는 발을 붙잡힌 상태로,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 그만해줬으면 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깨끗이 소독된 거니까요."
직업병이라고 해야 하나.
요즘은 항상 이런 걸 품속에 넣어 다닌다.
"그런 문제가 아니거든...!"
그러면 아무 문제 없네. 이만한 상처를 가만히 내버려 뒀다가는 나중에 후회한다고.
최대한 상처 부위를 깨끗이 닦은 뒤, 나는 빠르게 붕대를 감아 응급 처치를 완료했다.
일단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다.
"끝났습니다. 물론 나중에 성으로 돌아가서 제대로 치료받는 건 잊으면 안 됩니다."
"...하여간 잔소리."
잔소리라니.
꼼꼼함과 친절함이지.
치료를 끝내고 나는 다시 일어나 쭉 허리를 폈다.
진짜 정신을 다시 차렸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정말로 온몸이 끔찍하게 아프다.
발레리아 정도는 아니겠지만 나도 벗겨놓고 보면 온몸이 타박상과 멍으로 엉망진창이겠지.
'그 상황에서 몸을 무리하게 움직여서 더 그럴지도.'
이렇게 격하게 몸을 움직인 건, 두어 달 정도 전에 아르잔 토후국과의 전쟁 중 마법사의 목을 벤 이래로 처음인가. 바쁜 와중에도 평소 간단한 검술 훈련 정도는 빼먹지 않고 하지만, 역시 실전은 다르다.
'훈련 시간이나 강도를 더 늘려야 하나. 아예 키로스 경한테 다시 훈련받는 것도 방법인데.'
어째 후방에서 얌전히 있어야 할 영주치고 직접 몸을 쓰는 일이 예상보다 잦은 것 같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호신술 정도의 실력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물론 키로스 경의 그 지옥 같은 개인 교습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므로, 몇 번 더 심사숙고하고 판단을 내린 뒤 판단할 생각이지만.
그거 너무 힘들어.
그리고 내가 잠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 정도 고통이 가라앉은 듯, 안색이 괜찮아진 발레리아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어쨌든, 고마워, 치료해줘서."
'어쨌든'이라는 말은 빼도 될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그 생각을 실제로 입에 담는 대신, 다른 말을 밖으로 냈다.
"제가 더 고맙죠. 전투 때 마법으로 보조해준 것도 그렇고, 산사태에서 저를 구해준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많이."
여전히 쉽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야 할 말은 맞다. 그걸 알고도 실천하지 않을 만큼 내가 바보 같은 인간은 아니다.
"참 일찍이도 얘기하네."
발레리아는 픽 웃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냥 따라 웃었다.
"그건 그렇고 생각보다 실력 괜찮던데? 그 커다란 늑대를 혼자서 썰어버리고 말이야?"
썰었다는 정도는 아닌데.
게다가.
"그것도 사실 제가 먼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는데 굉장히 훌륭한 솜씨의 마법이었습니다, 발레리아 씨."
마음만 먹으면 정교하게 딱 표적만 맞히는 건 일도 아니다. 그 말이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발레리아의 솜씨는 말 그대로 완벽했다.
아마 나도 발레리아의 지원이 없었다면 이렇게 쉽게 칠색이랑을 압도하지는 못했겠지.
물론 이기긴 이겼겠지만.
진짜로.
어쨌든.
'별다른 실전을 겪어보지도 않은 상태일 텐데도 이 정도 실력이라는. 천재적 재능이란 게 실제로 있네.'
하지만 굳이 이 생각까지 입을 열어 전하지 않았다.
"물론이지. 내가 누군데. 이 정도는 기본 아니겠어?"
"...."
더 칭찬 안 해도 이미 발레리아의 콧대가 하늘 높이 솟은 상태였으니까.
'여기서 더하면, 음, 조금 꼴 보기 싫을 것 같아.'
그런고로 나는 황급히 화제를 바꿨다.
"그러면 이제 수습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래, 어떻게든 우리 둘이서 칠색이랑 토벌을 완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상황 자체가 종료된 것은 아니다.
'산사태에 휩쓸려간 다른 인원들을 찾는 게 역시 급선무겠지.'
워낙 갑작스러웠던 상황이라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언뜻 보기에도 제법 큰 규모의 재난이었다. 일행 모두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칠색이랑을 포위 중이었으니 아마 죄다 그 산사태에 당했겠지.
'키로스 경 수준 되는 실력자라면 제 한 몸 건사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다른 병사나 사냥꾼들이 걱정인걸.'
이번 토벌의 총책임자는 나.
만에 하나 사망자라도 발생하면 그건 전부 나의 책임이다.
더없이 부끄러운 일이지.
"일단은 주위를 간단히 수색하고, 다른 일행을 발견하지 못하면 빠르게 성으로 돌아가 구조대를 더 데려와야겠습니다. 발레리아 씨는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나의 힘으로 당장 이 현장에서 모두를 구하고 싶지만, 이미 이쪽에도 부상자인 발레리아가 있다. 게다가 폭우 또한 아직 멈추지 않고 내리고 있으니 그녀를 야외에 오래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금은 감정보다는 이성적 판단이 필요한 때다.
"...알겠어. 어쩔 수 없지."
발레리아는 자신이 당장 짐에 된다는 현실을 깨닫고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무리한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발레리아의 동의까지 구하고, 내가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떠나기 바로 그 직전.
"영주님! 거기 계십니까! 무사하십니까아아!"
"...응?"
"...어?"
저 멀리서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마치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큰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 목소리.
분명 키로스 경이다.
실제로 휙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엉망진창의 몰골이 된 키로스 경이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달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닌, 병사와 사냥꾼들을 등 뒤에 잔뜩 주렁주렁 이끌고.
하나, 둘, 셋, 넷....
천천히 머릿수를 세어보니 키로스 경 포함해서 모두 14명이다.
그렇다. 병사 10명, 사냥꾼 3명.
우리 토벌 부대 전원이 멀쩡히 살아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내가 잠시 멍하니 서 있자, 저쪽 역시 나를 발견해낸 듯 더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앞에 도달한 키로스 경은, 곧장 털썩 무릎부터 꿇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을 지키지 못하다니 전부 저의 불찰입니다! 부디 못난 소신을 용서치 말아 주십시오!"
아니, 영감님.
이건 너무 과해요.
사실상 불가피한 자연재해였고, 거기에 굳이 책임을 따져도 이런 날씨에 무리하게 부대를 숲속으로 끌고 온 나의 잘못이 제일 큰 셈인데.
"키로스 경, 부디 일어나주세요. 키로스 경의 실수가 아닌걸요. 이러면 제가 면목이 없어집니다."
내 면목까지 언급하고 나서야 키로스 경은 겨우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비통한 표정이 가득한 그를 보며 너무나도 궁금했던 사실을 물었다.
"그보다 다른 부대원들을 어떻게 전부 수습해서 데려온 것인지, 그 과정이 궁금하군요."
내 질문에 대답한 것은 슬픔의 키로스 경이 아닌, 그 뒤에 있던 다른 병사 한 명이었다.
"키, 키로스 경께서 흙더미 속에 파묻힌 저희 모두를 직접 맨몸으로 꺼내서 구출해주셨습니다! 부디 키로스 경께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영주님!"
그게 뭐야.
산사태에 똑같이 휩쓸려놓고, 벌떡 일어나서 혼자 다른 사람들을 다 찾아서 구했다고?
맨몸으로 땅을 파 13명이나 되는 사람을 꺼냈다고?
괴물인가.
그리고 처음부터 나도 처벌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어, 병사 친구야.
"아니, 이만한 공적을 세우셔놓고 그토록 자책하신 겁니까? 키로스 경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영주님을 지키는 책무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죄인...!"
"진짜 고집불통이시네. 저는 완전히 멀쩡합니다. 아니면 여기서 비 맞아가면서 누구 고집이 더 센가, 한 번 끝을 볼까요?"
"...한시라도 빨리 영주님께서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그건 곤란합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여기까지 합시다.
더하면 저도 부끄러워져요.
나도 딱히 잘한 게 없어서.
간신히 진정된 키로스 경은 나의 등 뒤에 있던 발레리아에게도 잊지 않고 감사를 표했다.
"발레리아 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긴박한 순간, 영주님을 뛰어드신 결단과 용기에 존경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뭘요. 이래 봬도 저도 가신인데, 그냥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예요."
굉장히 의외의 대답.
살짝 재수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모범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째 유독 이번 토벌 때 발레리아가 의외의 모습을 계속 보여주는 것 같네.'
첫 만남 때부터 의외였지만, 지금은 그 이상하다.
신기해.
"좋습니다. 모두의 무사가 확인되었으니, 빠르게 성으로 복귀해 제대로 된 치료만 받으면 되겠군요. 거기 자네들, 저쪽으로 가면 칠색이랑의 사체가 있을 테니, 가서 이쪽으로 가지고 오게."
내가 그나마 상태가 제일 좋은 병사들을 지정해 그렇게 명령을 내리자, 키로스 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영주님! 칠색이랑을 홀로 토벌하신 겁니까!"
"음, 혼자는 아니고 발레리아 씨와 함께했지요."
"실로 대답한 위업입니다! 역시 영주님입니다!"
...너무 그러지 마요.
호들갑 같잖아.
물론 키로스 경은 정말로 진심으로 하는 감탄이겠지만, 사실 그게 더 낯뜨겁다. 자화자찬은 괜찮은데, 남이 하는 이런 열렬한 환호는 오히려 더 버티기 힘들더라고.
하지만 키로스 경은 도저히 멈출 맘이 없어 보였다.
나의 만류에도 그의 경탄은 칠색이랑 회수하러 간 병사들이 돌아올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하여간.
이 영감님은 그 많은 일을 겪고도 지치지를 않아요.
하지만 평범한 인간인 나는 너무나 피곤하니까 빠르게 수습해서 성으로 돌아갑시다.
그렇게 병사들을 시켜 칠색이랑의 사체를 성으로 가져갈 수도 있도록 포장하는 도중, 쉬고 있던 발레리아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응? 그러고 보니까 이거 왜 이렇게 멀쩡해? 내가 태우고 네가 가슴이랑 어깨에 뻥 구멍 뚫지 않았어?"
오, 상대한 예리한 지적인걸.
중요한 요점이기도 하고.
"놀랍게도 칠색이랑은 오직 가죽과 털에 한해서 손상을 순식간에 수복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심지어 온몸의 생명 활동이 멈춰도 그 능력은 유지되지요."
"...그게 말이 돼?"
나는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신기하지? 나도 원리는 몰라.
아마도 그만큼 가죽과 털을 통한 투명화가 이 녀석의 가장 중요한 밥줄이라 그런 거 아닐까. 그리고 얘도 나름대로 이름 좀 있는 전설 속 몬스터기도 하고.
어쨌든.
"우리로서는 잘 됐지요."
칠색이랑의 가죽을 온전한 상태로 얻을 수 있게 됐으니까.
처음에 토벌을 선언하면서 고려했다시피, 이번 토벌이 단순히 몬스터 토벌의 의미만을 지니는 게 아니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다양한 일들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했다.
예산 확보.
중앙 정치 진출.
그리고 그중 두 가지 안건의 핵심 재료가 바로, 이 신기한 무지갯빛 가죽.
사실상 이걸 얻어내는 게 나의 핵심 목표였던 셈.
'이걸 본격적으로 어떻게 요리해볼까.'
하지만 이런 나의 만족감과는 달리, 발레리아는 살짝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
"...설마 지금 기껏 태워놓은 녀석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서 아쉬워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무, 무, 무, 무슨 소리야, 그게! 그럴 리가 없잖아! 도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
맞네.
어휴, 이 제정신 아닌 인간.
#069. 유해조수 퇴치 (6)
개 같은 괴물 늑대.
칠색이랑을 성공적으로 토벌하고 성으로 돌아온 뒤.
"상당히 험난한 과정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영주님."
우리 니카로스의 새로운 기둥 중 하나로 순조롭게 성장 중인, 마르다 양께서 그렇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저런 말을 하면서도 표정 변화 하나 없다는 점은 여전히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악의는 전혀 안 느껴지고, 그냥 성격 자체가 저런 듯하니까 말이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크게 다친 곳 없이 토벌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
뭐, 물론 완벽히 익숙해진 건 아니지만.
사실 여전히 의문이긴 하다.
살짝 까칠하고 투덜거리는 성향이 있긴 해도 이 아가씨의 아버지인 제노비오스 집사장은 정상적인 편인데, 어째서 마르다 양만 이 정도로 무뚝뚝하고 딱딱한 기질이 가득한 건지.
'하지만 그걸 또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잖아.'
직장 상사가 대놓고 자기 성격을 콕 집어 얘기하면 얼마나 불쾌하겠어. 그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인걸.
나는 언제나 상식적이고 착한 영주를 표방 중이라고.
그런 고로, 나는 곧장 업무 얘기로 넘어갔다.
"지금 진행 중인 무두질이 끝나면, 칠색이랑의 가죽은 다른 가죽들과는 별개로 분리해서 세심하게 보관해주세요. 이 가죽은 따로 쓸모가 정해져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가죽을 정확히 어떤 곳에 사용하실 예정인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영주님께서 지난 회의 당시 이번 토벌이 예산 확보에도 도움이 될 거라 하셨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고려하고 계시는지까지는 제가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주 잠시 대답을 고민했다.
"...."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평소와 똑같은 무표정이었지만 그 목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면 확실히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으니까.
그래, 질문 속에서 느껴지는 묘한 불안감.
지금 마르다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에는 분명 초조함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해하기 썩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영주인 내가 보기에도 딱히 별문제가 없는 일상적인 질문 같은데, 초조해하는 이유가 대체 어디 있는 건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어느새 이런 마르다의 감정 표현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지의 내정 담당으로서, 본인이 이해하지 못 하는 일이 발생해서 불안한 건가...?'
만약 나의 이런 추측이 진실이라면.
솔직히 조금 강박증이 아닐까 싶긴 하다.
황립 아카데미 출신인 동시에 현 집사장의 딸,
그녀의 능력과 입지는 이미 모두 인정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마르다는 아직 신입이다. 신입이 벌써 모든 걸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게다가 앞으로도 나는 계속 남들이 쉽게 이해 못 할 선택을 많이 할 예정이기도 하니까 더욱 그렇지.'
이거는 업무와 관련된 공적인 문제이기도 하니, 더 문제가 될 것 같다면 나중에 따로 얘기를 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일단 세심하게 말을 고른 대답부터 해줬다.
"당연히 그럴 수 있죠. 칠색이랑의 가죽이 무척 희귀한 물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으로 이게 영지의 예산에 유의미한 도움을 줄 정도는 아니거든요."
"저도 그렇게 판단 중이었습니다, 영주님."
그래, 원래 희소성이 물질적인 가치와 반드시 정비례하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사실 칠색이랑쯤 되면 존재 자체가 너무 안 알려진 탓에 그 가죽의 가치를 아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을 정도다.
아무리 귀하고 좋은 물건이라도 구매할 사람이 그걸 못 알아보면 무슨 의미가 있어.
하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다행히도 제가 지금 이 물건을 아주 필요로 하고, 또 좋은 가격에 구매할 의향과 능력을 모두 갖추신 귀인을 한 분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극소수의 특별한 사람에 대한 정보가 보유 중이라는 게 바로 나의 최대 강점 아니겠어?
사실상 이런 정보의 우위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고 버틴 셈일 정도니까.
"...그건, 굉장히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런 분을 아시게 되었습니까?"
"하하, 제가 원래 이런 정보를 상당히 중히 여기지 않습니까? 다 이런저런 연결망들이 있지요."
상당히 뻔뻔한 대답인 것 같지만, 나와 가스파르 영감님과의 친분이 우리 주요 가신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인 만큼 아예 설득력이 없는 설명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원작 지식 없이도 알아서 이런 정보를 물어다 주는 정보 조직 창설이 나의 목표인 만큼, 이 정도 설명으로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가 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군요."
다행히도 이런 내 기도가 통한 듯, 마르다 양은 알겠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아. 이해해줬다면 본론으로 넘어갈 수 있지.
"그런 의미에서 마르다 양에게 따로 부탁드리고 싶은 임무가 있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영주님. 니카로스를 위해서라면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음, 그 정도로 진지한 사안은 아니라고 보는데.
그냥 대외적인 업무와 관계된 마르다 양의 수완을 한번 보고 싶을 뿐인걸.
'...진지한 사안 맞나?'
어쨌거나.
"혹시 다블레 상회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제국 5대 상회 중 하나지 않습니까? 주로 제국 중앙을 무대로 활동하는 상회지만 근래 들어 서서히 지방까지 세를 확장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잘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지.
제국 5대 상회.
상당히 재수가 없는 놈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재력과 영향력만큼은 확실히 제국 안에서도 손에 꼽히는 거물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방 시장 개척에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다블레 상회라면, 첫 번째 후보로 딱 적당하겠지.
따라서 나는 그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다블레 상회의 협상단을 우리 영지로 파견 오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목 뻣뻣한 거대 상회의 협상단을 이 위험하고 가난한 변방 국경지대까지 직접 찾아오게 하기.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어려운 난이도가 마르다의 의욕을 더욱더 화르르 불태운 모양이었다.
반짝거리는 두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확고한 어조로 대답하는 마르다의 얼굴을 보니 정말로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음, 엄청 믿음직스럽긴 한데.
'...딱 봐도 무리할 생각 만반인 거 같은데.'
물론 신입 사원의 패기도 좋지만, 그래도 이렇게 대화를 끝내버리면 내가 너무 악덕 고용주 같잖아.
내가 막 사람에게 과한 부담 주는 스타일은 아닌걸.
"마르다 양에게 자신 있게 대답해주니 저도 안심이 되는군요. 하지만 너무 무리하시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그들을 꼬드길 만한 소재가 따로 하나 있거든요."
"그렇다면 영주님께서 이미 고려 중이신... 미끼가 있으시단 말씀입니까?"
그래, 미끼라는 표현 아주 좋네.
사실 이 설명만 잘 해도 어려움은 확 줄어들 거야.
"'자줏빛 현자'가 찾는 물건 중 하나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 그렇게만 얘기하면 그쪽도 다 알아들을 겁니다."
아마 이 떡밥 하나만 제대로 흘려도 온갖 거대 상회들이 죄다 눈에 불을 켜고 우리 니카로스로 몰려들걸?
그러니까 마르다 양은 이걸 예쁘게 잘 포장해서 서안만 만들어주면 돼.
정말로 할만하지?
***
그렇게 우리의 성실한 마르다 양이 의욕을 활활 불태우며, 새로운 임무를 위해 잠시 자리를 떴을 즈음.
"영주님, 이제 무두질은 거의 다 끝났습니다. 한동안 태양 빛에 말린 뒤, 건조된 가죽에 기름을 발라 후처리만 하면 완료입니다."
"음, 고생했네."
우리 영지의 무두장이가 중간 과정 보고를 위해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마르다도 자리를 비웠고, 작업이 완료되려면 아직 시간도 한참 남았다.
그런 고로 무두장이를 적당히 치하해주고 나도 슬슬 다른 업무를 위해 떠나볼까 싶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무두장이는 홀로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네는...?"
"영주님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무두장이를 따라온,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리고 거친 삶의 흔적 또한 가득한 젊은 청년.
확실히 자세히 보니 내 기억 속에 있는 이였다.
아, 얘.
그 사람이네.
칠색이랑 토벌에 동행했던 3명의 사냥꾼 중 하나.
제노아 남작령 출신의 초원 청년.
그리고 증조부가 칠색이랑과 실제로 만난 적이 있다고 증언해준 사냥꾼이기도 하면서.
"하하, 이야기 하나 하는데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네. 우리는 함께 싸운 전우 아닌가?"
발레리아를 노린 칠색이랑의 첫 번째 기습 때 나에게 위를 보라고 경고해준 바로 그 친구이기도 한, 바로 그 사람.
토벌 직후에는 워낙 경향이 없어서 따로 이야기도 못 나눴는데, 설마 본인이 직접 이렇게 찾아올 줄이야.
반가운걸. 무척.
"그러니 편하게 이야기해도 좋아."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음에도 어째서인지 몸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냥꾼 청년.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최대한 또박또박하게 자신의 말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건.
"꼭, 영주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직접 드리고 싶었습니다!"
내가 딱히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처음 야수가 나타났다고 탄원을 올릴 때만 해도,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영주님에게 저희는 이교도고 영주님은 무척이나 바쁜 분이니까요!"
말이 조금 빠른 경향은 있었지만, 젊은 사냥꾼의 목소리는 여전히 또렷했다.
"하지만 탄원을 올리고 곧장, 영주님께서 직접 토벌에 나서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토벌을 주도하셨고, 몸을 사리지 않고 솔선수범하셔 끝내 칠색이랑의 숨통까지 손수 끊으셨습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외치며, 사냥꾼은 마지막 한 마디까지 확실히 입에 담았다.
"그래서, 저희 주민들을 대표해서, 아, 물론 제가 대표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주님께 직접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결론까지 제대로 토해낸 그는, 마치 겨우 해냈다는 듯 뜨거운 한숨을 한번 내뱉었다.
나는 그런 그를 잠시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
이것 참.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네.
몇 번이나 말했다시피, 이번 토벌은 처음부터 나만의 목적이 따로 있었던 계획에 가까웠다.
처음 몬스터의 습격 정황을 들었을 때부터 나는 범인이 칠색이랑임을 확신했으니까.
물론 나의 영지를 위해서, 민생을 위해서.
그런 생각도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뭐라고 할까, 상당히 기계적이었지.'
영지가 발전해야 나에게 이득이 되니까.
영지의 위험요소가 제거되어야 영지가 발전하니까.
그냥 그 정도의 계산.
당연히 그런 계산에 영지의 주민, 그 개개인의 삶에 관한 관심은 거의 담겨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서 습관처럼 종종 되새겼기에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체감하지는 못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평범한 영지의 주민과 일대일로 대화해본 기억 자체가 없는 것 같네.'
시찰이야 제법 자주 나갔지만, 언제나 몇 발자국 거리를 두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상당히 낯설었다.
'...하지만 결코 나쁜 기분은 또 아니야.'
그야.
이런 말을 들으면 그냥 자연스럽게.
'내가 지금 하는 일이 그렇게 글러 먹은 건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으니까 말이야.'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나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느낌이었다.
따라서 나는 우리 사냥꾼 청년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영주로서 당연히 책임져야 할 일일 뿐이지."
내가 느낀 점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뻔뻔한 대답이란 건 나도 알지만. 그래도 뭐 어때.
처음부터 나의 선의가 아예 한 점도 없던 것은 아닌 만큼, 이런 말 못 할 건 또 없잖아.
그러니까 그냥 겉으로는 이렇게 한 번 젠체해주고.
"오히려 나야말로 자네의 활약, 확실히 기억하고 있네. 우리 니카로스에 이렇게 유능한 젊은이가 있을 줄이야. 혹시나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성을 찾아와도 좋네."
"그, 그런! 영광입니다, 영주님...!"
속으로는 나 홀로 다짐해주면 되지.
나쁘지 않은 기분이고, 좋은 일이니까.
다음에는 더 의식해서 하자.
언제나 이들은 내가 벌이는 일에 불가피하게 따라올 수밖에 없는 처지니, 그만큼 내가 더 신경을 쓰자.
나는 자연스레 그렇게 생각하며, 젊은 사냥꾼 청년에게 씩 웃어주었다.
그래.
역시 나의 이 미담도 영지에 널리 널리 퍼뜨려야겠다.
#070. 치킨 게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