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승(昇) (5)
국경은 흔히 지도 위에 그어진 선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하늘에서 똑같은 위치를 내려다보아도 땅 위에는 그 어떠한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인간이 그 지도 위의 선과 똑같은 모양의 물리적인 장벽을 세워놓는다고 한들, 그것이 진정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못한다.
국경을 만드는 것은 사회적 합의다.
다양한 정치적 요인이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산물이다.
요컨대 국경은 하나의 관념이라는 것이다.
"많기도 해."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양측의 군이 그 무형의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에우스페나의 지원군과 용병까지 달달 끌어모은 우리 니카로스 군의 병력이 거의 1,900명.
그리고 무려 네 개의 토후국이 뭉쳐 만들어낸 연합군의 병력이 대략 2,800명.
합계 4,700명이라는, 이 변방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군이 한자리에 모였지만 놀랍게도 분위기는 무척이나 고요하고 정숙했다.
'일종의 폭풍전야네.'
우리보다 먼저 움직였지만, 느릿느릿한 진군 끝에 이제야 도착할 수 있었던 월광교 연합군 놈들도.
출발은 상대적으로 늦었지만, 소식을 듣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온 덕에 겨우 늦지 않을 수 있었던 우리 군도.
양측의 움직임은 다르지 않았다.
두 군 모두 서로가 여실히 보이는 곳까지 도달했음에도 그저 침묵을 고수했다.
국경이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벽의 존재를 직접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절대 선을 넘지 않고 자신들의 영역에서 거리를 둔 채 방관만을 이어갔다.
그 광경은 평화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살벌했고, 그보다는 마치 서로를 잡아먹을 힘이 충분한 두 마리의 맹수가 상대방을 경계하며 쉬이 달려들지 못하는 모습과 더 비슷했다.
'옛날에 다큐멘터리에서 이런 거 많이 봤지.'
그리고 그 다큐멘터리들이 모두 그랬듯, 영원히 이런 장면만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양측의 대치가 시작된 지 약 17시간이 지난 시점, 연합군 쪽에서 마침내 우리 진영으로 사절을 보내왔다.
연합의 전언은 명료했다.
"각 국가와 영지의 대표만 모여 회담을 갖자고?"
"그렇습니다. 연합은 오직 평화만을 바랄 뿐입니다."
회담.
아직 전쟁도 평화도, 그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지금의 이 애매한 상황을 끝내기 위한 그런 회담.
상당히 재밌는 표현이었다.
평화만을 바랄 뿐이라니.
"좋다. 정확히 양군의 중간 지대에서 만나, 어디 평화에 대해 한번 논의해보자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래, 아무리 각색 없는 야생 그 자체의 다큐멘터리라지만, 그냥 서로 물러나든, 싸워서 한 놈이 죽어 나가든, 뭐가 되었든 최소한 결과는 보여줘야지.
나는 선선히 승낙했다.
안 그래도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아주 중요한 사람에게 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
양측의 의견은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게 합치되었다.
간소한 회담장.
그리고 결정권이 있는 최소한의 참가자.
잔가지는 전부 쳐내고 오로지 효율과 결과만을 추구한다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조건.
이 세계에서는 그리 흔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이지적이고 자유로운 현대인 출신답게 나 역시도 불필요한 허례허식은 모조리 치워버리는 쪽이 더 편하고 좋았다.
그런고로, 결정된 참석자는 단 14명.
연합의 4개국의 대표 한 명씩과 그들의 호위 넷.
그리고 니카로스의 영주인 나와 에우스페나의 대표 아폴로니아, 그리고 우리의 호위 넷.
나와 아폴로니아가 사이좋게 각각 절반씩 따로 호위를 선정하기로 했으니 나는 두 명을 내 마음대로 데려갈 수 있었다. 당연히 그렇다면 대상이야 이미 정해져 있었다.
키로스 경, 그리고 아르센.
절친하기도 하고 믿음직스럽기도 하고 개인 무력도 뛰어난, 내가 제일 신뢰하는 우리 기사들.
이 정도라면 혹여나 놈들이 비열한 개수작을 부리더라도 내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이제 출발하지, 남작."
다행히도 아폴로니아 역시 순순히 이 조건들을 수락하고 동행에 동의해주었기 때문에 준비는 빠르게 끝났다.
"그러죠."
그리고 준비가 끝났는데 굳이 머뭇거릴 이유도 없고.
이미 연합 쪽에서 마련해둔 회담장으로 가는 동안, 우리 일행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애초에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
다만 친하고 익숙한 사람들이 주위에 가득함에도 별다른 사담은 없었다. 다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위치를 지킬 뿐이었다.
나는 잠시 그런 침묵에 빠진 일행들을 둘러봤다.
아르센 경의 속내야 뻔히 보인다.
분명 솜씨는 뛰어나지만, 아직 경험이 적은 젊은 기사다. 두려움 따위는 품지 않겠지만, 적의 미리 마련해둔 장소에서 주군을 지킬 생각을 하면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
'아폴로니아 쪽에서 데려온 호위 기사들도, 처음 보는 얼굴들이지만 실력이 괜찮아 보이고.'
굳이 내가 아는 고정 네임드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 실력자는 많으니까.
'근데 키로스 경이랑 아폴로니아 쪽은 잘 모르겠네.'
물론 능력을 의심하는 건 결코 아니다.
아데프투스인 키로스 경의 무력이야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고, 아폴로니아도 개인 능력치 역시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냥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의미다.
사실 키로스 경도 평소랑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만 어째서인지 아폴로니아가 키로스 경에게 종종 눈길을 주고 있고, 키로스 경은 그 눈길에 달리 반응하지 않기 위해 의식해서 신경 쓰느라 되레 티가 조금 나는, 그냥 그런 느낌의 광경이었다.
'뭐, 굳이 얘기하자면 키로스 경보다도 나에게 몇 배는 더 눈길을 주고 있긴 한데 말이야.'
정작 딱히 입 밖으로 표현하는 말은 없다.
입장 상 먼저 캐물어 보기도 어렵고.
대체 저 여자는 뭐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일까.
처음부터 의문이었고 여전히 의문이다.
갑작스럽게 우리 성에 나타났을 때부터 여기까지 올 때까지 부지런히 바로 곁에서 관찰하고 살폈지만, 그녀는 놀랍게도 종종 의문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걸 빼면 정말로 아무 수작도 부리지 않았다.
전적으로 협조하겠다는 말까지 완벽하게 지키며 괜히 권위로 나를 찍어누르려고 하지도 않았다.
'물론 아직 뭔가 음모를 꾸밀 시간이 남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설마 이교도와의 교전 중에 뒤통수를 칠 만큼 대책 없는 인간은 아니라고 보는데.
나도 아예 긴장을 풀지는 않겠지만, 냉정하게 그럴 가능성 자체는 낮다고 본다.
'그러면 진짜 우리를 도와주러 왔을 뿐이라고?'
그거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그럴 리가 없는데?
"아."
그렇게 계속 고민하던 새, 어느새 회담장에 도착했다.
탁 트인 초원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천막 하나.
오로지 담백한 논의만을 위한 곳.
개인적으로 꼴이 제법 마음에 든다.
마치 이 동방의 현실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그래, 고민도 좋지만.
일단은 급하고 중요한 일부터 하자고.
나는 천막의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 안에는 이미 여덟 명의 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네 명의 호위와 그들이 지키는 월광교 4개국의 대표.
그 모두가 굳은 얼굴로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
그리고 나 역시 그들에게 눈길을 한 번씩 주었고.
물론, 나라고 한들 이들 모두를 알고 있지는 않다.
각 나라의 대표라고 해도 군주는 아닐뿐더러, 고정 네임드 캐릭터 출신은 지극히 드문 존재니까. 게다가 설령 네임드 출신이 있다고 한들, 게임 그래픽과 현실의 차이 때문에 얼굴만 보고 알아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왔군, 니카로스 남작."
아무리 그래도.
저 인간 정도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눈에 알아봐 줘야 마땅했다.
나는 모두를 둘러본 끝에,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언뜻 잿빛 머리칼이 가장 먼저 눈에 띄지만, 막상 그 아래를 보면 머리 색과는 달리 얼굴은 상당히 젊다. 저 머리는 노화로 인한 것이 아닌 선천적인 것이다. 아마 지금 시점이면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았을 터. 이 방에 모여 있는 대표 사이에서는 나를 제외하고 제일 젊다.
그 젊은 친구가 회담장 가장 중앙에 앉아, 차갑고 시린 녹색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나는 그를 안다.
이스마트.
고정 네임드 캐릭터.
마르딘 토후국의 장군이자 왕자.
현 에미르의 삼남.
'역시 너도 여기 왔구나.'
그리고 만약 동방의 정복자만 없다면, 향후 이 변방의 패권을 차지할지도 모르는, 그럴 가능성이 제일 큰.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
타고난 군왕(君王)의 씨앗.
나는 그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안 그래도 중요한 논의를 하고 싶었는데 잘됐네.
네가 있어서 아주 기뻐.
나는 그를 알고.
기다려 왔다.
이곳에서 나와 대화가 통할 인간은 저 남자밖에 없다.
***
마르딘 토후국의 대표, 이스마트는 고요한 눈빛과 함께 방금 회담장으로 들어온 니카로스 남작을 바라봤다.
그에 대해 이것저것 들은 얘기는 많다.
누가 뭐라 해도 현재 이 일대와 마르딘 토후국의 최대 위협으로 평가받는 존재인 만큼 당연히 사전 조사도 철저하게 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본 니카로스 남작은 머릿속으로 내심 상상하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피로가 조금 묻어나오지만, 여전히 굳건한 얼굴.
젊음과 관록이 동시에 공존하는 묘한 표정.
두려움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당당함.
잠재적인 적을 눈앞에 두고도 고수하는 정중한 말투.
그리고 무엇보다.
시종일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걸친 저 모습.
그 웃음은 마치 진심이 가득 담긴 즐거움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저 강자로서 보이는 오만한 여유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도 아니면 일종의 분위기를 풀어주는 배려처럼 보이기도 했고.
"...."
쉽게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던, 거칠고 피에 굶주린 정복자의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스마트는 그 사실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소.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소."
그래, 예상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지만 고작 그 정도로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회담에 있어 남작 개인의 태도 따위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저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마르딘, 우르드, 투나미르, 바르토 토후국의 여러분. 이왕이면 지금보다 즐겁고 편안한 자리에서 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거 하나만큼은 아쉽군요."
다행히도 니카로스 남작 또한 불필요한 기 싸움 따위는 걸지 않고 선뜻 인사를 받았다. 이 또한 의외의 면모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반길 일이었다.
그렇게 모든 회담장의 대표가 서로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이스마트는 곧장 본론을 시작했다.
"이미 전달했다시피, 우리 연합은 오직 평화만을 목적으로 모였소. 그리고 우리는 그 평화를 지금 니카로스의 팽창주의적 행보가 위협 중이라고 판단하고 있고."
거짓은 아니었다.
월광교 4개국은 분명 니카로스의 연이은 정복에 위기를 느끼고 연합을 결성했다. 그들의 가장 최우선 목표는 방어와 생존이었다.
물론 며칠 전에 있던 논쟁에서 알 수 있듯, 이렇게 이례적인 대군이 모인 김에 과감하게 니카로스를 쓸어버리자는 의견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그 목소리가 최우선 목표를 흔들 만큼 크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연합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딘 토후국이 강경책을 원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아버지, 에미르의 뜻이 그렇지.'
따라서 그저 평화를 바란다는 이스마트의 말은 사실이었다. 전쟁이 두렵지는 않지만, 그건 차선책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반(反) 니카로스 연합이 요구하는 것은 오직 단 하나.
니카로스를 억제할 조약.
'만약 무력을 쓴다고 한다면 그 요구 사항이 수용되지 않았을 때뿐이다.'
그리고 이스마트가 보기에.
이 제안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모양새가 대군과 강압적인 힘으로 니카로스 남작에게 대답을 강요하는 꼴이 되긴 했지만, 애초에 그것을 위한 연합이었다. 상대는 한창 기세가 높은 남작. 이 정도 압박감이 아니라면, 부담도 줄 수도 없을 테니까.
물론 그렇다고 니카로스를 무시하는 건 결코 아니다.
단독으로 1,800명이 넘는 병력을 모은 것도, 이렇게 빠르게 군을 소집해 집결시킨 것도 모두 예상 이상이다.
당연히 만만치 않으리라고 생각했음에도, 그 생각조차 뛰어넘었다.
'게다가 설마 에우스페나까지 끌어들일 줄이야.'
초대한 적은 없는, 그렇지만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는, 스스로 에우스페나의 총사령관이라고 소개한 아폴로니아를 보고 연합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게으르고 무능한 공작령의 개입은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또한 아직 크게 문제 될 정도는 아니야.'
그래, 그렇다고 한들 당장 1,900 대 2,800명의 구도는 바뀌지 않는다. 수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하는 건 아니지만, 애초에 이 병력은 그저 압박감을 주기 위함이다. 그 목적을 충족시키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아무리 공작령이라도 동쪽 머나먼 변방에서 벌어지는 대군의 공세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스마트는 기존 계획대로 이 모든 사실을 차분하게 풀어서 니카로스 남작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 끝에 요청했다.
우리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그걸 보장받을 수 있는 조약을 맺어야겠다고.
요컨대, 니카로스에 제약을 걸어야겠다고.
"...."
니카로스 남작은 그 제안이라는 이름의 협박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이스마트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과연 남작은 어떻게 나올까.
솔직히 말해서 어쩔 수 없이 제안을 수용할 확률이 크다고 생각하긴 했다.
예고도 없이 연합 결성을 발표하고, 국경지대에 2,800명이나 되는 대군을 마치 시위라도 하듯 배치했다. 언제든 전쟁을 터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만들었으니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였다. 어차피 남작도 한동안 점령지를 안정화할 시간은 필요하지 않나.
'하지만 거부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결과는 아니지.'
상대는 이스마트 자신보다도 젊은, 패기와 야망이 가득할 어린 정복자다.
당연히 이런 협박에 불쾌감을 느낄 테니 승승장구만을 거듭한 남작이 이성적인 결단을 내리는 대신 만용을 부리는 모습도 충분히 예상이 가긴 했다.
그렇기에 이스마트는 그 두 가지 선택지 모두 내심 각오하며, 침착한 태도로 남작을 바라봤다.
"...평화를 원하고, 그 평화를 위해서는 신뢰로 엮인 보장이 필요하다. 확실히 좋은 말이군요. 저 역시 평화를 무척이나 사랑하기에 그 사실에 크게 공감합니다, 이스마트 공."
니카로스 남작이 이렇게 얘기할 때까지만 해도, 그저 본격적인 대답에 앞선 의례적인 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면 이건 어떨까요?"
그렇기에.
"저도 이 연합에 끼워주십시오."
수용도 아니고 거부도 아닌, 이딴 어처구니없는 대답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뭐?"
순간 회담장 내부에 이스마트의 멍청한 반문만이 울려 퍼졌다.
"아, 못 미더우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당연히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니카로스 남작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081. 승(昇) (6)
이스마트는, 처음에는 그냥 잘못 들었나 했나.
아니면 제대로 이해를 못 했다거나.
그도 그럴 것이, 너무 터무니없지 않은가.
- 저도 이 연합에 끼워주십시오.
이 연합?
무슨 연합?
설마 월광교 4개국 모여있는 여기 이 연합?
그러니까 지금 반(反) 니카로스 연합에 니카로스가 합류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 중인가?
응?
"...뭐?"
따라서 순간적으로 멍청한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니카로스 남작이 연합의 위협에 굴복해 불평등 조약을 수용하는 것도, 반대로 반발하며 전쟁까지 불사하는 것도, 어느 쪽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각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모두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대답은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허."
시간이 잠깐 지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이스마트가 곧 무언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보다도 니카로스 남작이 조금 더 빨랐다.
"아, 못 미더우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당연히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남작은 여전히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걸고 있었다. 표정과 태도가 처음 입장했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여러분들의 연합은 이 일대의 평화를 위해 결성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저 역시 여기 변경의 구성원 중 한 명이고, 여러분들과 똑같이 평화를 사랑하지요. 그러니까 저 또한 연합에 가입해서 함께 평화를 추구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결론 아닐까요?"
"...."
상세하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남작의 친절함에, 이스마트는, 그리고 연합의 다른 대표들은 곧 다시 말을 잃고야 말았다.
그래, 뭐.
말 자체만 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는 아니다.
마르딘, 우르드, 투나미르, 바르토.
네 토후국이 뭉친 이 4개국 연합이 반(反) 니카로스 연합이라고 자주 불리긴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게 본질적인 정답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명칭.
눈 가리고 아웅이긴 하지만, 공동 성명에 니카로스와 맞서 싸우겠다는 직접적인 내용은 단 한 줄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져서, 니카로스가 연합에 합류하겠다는 제안도 완전히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오?"
외교라는 게 고작 그런 말장난 같은 논리만으로 성립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스마트는 이미 답을 들었음에도 굳이 되물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니카로스와 4개국 연합.
일단 두 집단은 종교부터가 다르다.
황금십자교와 성화월광교.
수백 년 동안 서로 죽일 기세로 다퉈온....
아니, 실제로 죽여온 두 종교의 대립.
이 일대를 가득 채우는 수만 수십만의 백성들은 일평생 서로가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숙적이라고 가르침 받아왔고, 또 그렇게 실천하며 살아왔다.
나아가 그들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들 역시 이를 사명과 명분을 받들어 국가를 이끌어왔다.
그러니 그런 현실 속에서 두 집단이 공개적인 협력을 하자는 건, 절대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발상이 아니었다.
'물론 협력의 가능성이나 전례가 전혀 없다고 치부할 것은 또 아니긴 하지만.'
무엇보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 자체가 없지 않은가?
정말로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적과 동행도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게 올바른 위정자의 마음가짐이다.
하지만 이스마트가 아무리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진지하게 셈을 해봐도, 지금 같은 시국에서 니카로스와의 협력은 득보다는 실이 더 컸다.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우월하다고 믿는 저 오만한 제국의 종자 놈들을 신뢰할 수 없다.
토후국 내부의 목소리 큰 귀족과 전사들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을 게 뻔했다.
일대의 다른 연합 외 월광교 국가들을 자신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할 테지.
그런데 어째서.
"하하, 이미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물론 진심을 담아서 하는 말입니다. 설마 제가 귀하신 분들을 앞에 두고 실없는 농 따위를 입에 담을까요?"
당연히 본인 역시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을 니카로스 남작은 태연히 저렇게 얘기하는 것인가?
"...."
아직은 도저히 그 저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작의 뜻은 참으로 훌륭하다고 생각되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지? 우리의 협력은 말처럼 단순하고 쉬운 일이 아니오. 그 어려움을 생각하면 그저 서로를 존중하는 협약만을 맺는 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일 가능성이 크고. 남작도 응당 이 사실을 다 아리라 믿소. 그런데도 합류를 제안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물론 있지요."
남작의 대답은 경쾌할 정도로 또렷했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듣고 싶군."
"하지만 그 전에 하나 묻고 싶군요. 마르딘 토후국의 이스마트 공께서는, 그 이유가 합당하다고 판단되면 제 제안을 받아들이실 용의가 있으십니까?"
"...."
4개국 연합의 대표 네 명 중.
오직 이스마트 단 한 명만을 콕 집어서 묻는 그 질문.
마르딘 토후국이 분명 연합의 중심이자 실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독단으로 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스마트 개인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안에서 마르딘 토후국의 의지 전체를 쉽게 대변할 수 없다.
"우리 마르딘 토후국은...."
그렇기에 이스마트가 천천히 대답을 고르고 있던 바로 그 순간.
"대체 이 작자의 헛소리를 얼마나 더 들어주고 계신 겁니까, 이스마트 공!"
여태껏 가만히 대화를 듣고만 있던 투나미르 토후국의 대표가, 나이 많은 노장(老將)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평화를 위해 연합에 합류하겠다? 딱 봐도 우리의 기치를 조롱하고 기만하기 위해 수작질이지 않습니까! 더 들어줄 가치도 없습니다!"
그리고 투나미르 토후국과 함께 연합 내 강경파로 분류되던 바르토 토후국의 대표 역시 따로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장 이 무도한 자를 내쫓고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같잖은 거짓으로 점칠된 저 혓바닥에 말려들지 마시오, 이스마트 공!"
원색적인 비난이 이어졌지만, 놀랍게도 니카로스 남작은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달라지지 않은 태도로 여상스럽게 물을 뿐이었다.
"기만과 거짓이라니. 몹시 당황스럽군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어째서? 어처구니가 없군! 시하브와 아르잔 토후국이 어떻게 멸망하는지 우리 전부가 지켜봤다! 그런데도 감히 평화를 논하나!"
투나미르 토후국의 대표는 진심으로 분노하듯 새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남작은 그 대답에 수긍하지 않았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그 두 국가는 우리 니카로스의 원수였습니다. 끔찍한 음모로 저의 아버지와 형을 시해한 자들, 그리고 그들을 도운 자들. 애초에 우리와는 같은 하늘을 함께 이지 못하는 관계였으니,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경우지요."
"아직도 뻔뻔한 소리를...!"
"오히려 저야말로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그 대신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더 위로 올렸다.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억지로 무리까지 해가며 화가 난 척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혹, 진정으로 평화에 관심이 없는 쪽은 투나미르 토후국 아닙니까?"
그리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놈!"
투나미르 토후국의 대표는 검을 뽑았다.
그대로 니카로스 남작을 향해 겨눴다.
"압둘라흐 장군!"
바로 옆에 있던 우르드 토후국의 대표가 놀라 소리치고, 그와 동시에 남작의 등 뒤에 있던 호위들 역시 순식간에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당연히 연합의 호위들 또한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
눈 깜짝할 새에 일촉즉발의 상황에 빠진 회담장.
아직 누구도 무기를 휘두르지 않았지만, 언제 누가 일을 벌일지 아무도 몰랐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 처음으로 다시 입을 연 것은.
"...다들 조금 진정하시지요."
또다시 니카로스 남작이었다.
표정은 전보다 굳었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등 뒤에서 살벌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던 호위들을 만류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스마트를 보며 아주 살짝 더 가벼운 어조로 말했고.
"부디 이스마트 공께서도 한 마디 해주시죠."
"...압둘라흐 장군, 장군도 진정하시오. 아직 회담이 진행 중이었소. 대체 이 무슨 무례란 말이오."
이스마트의 시리고 엄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남작 측이 먼저 대범하게 무기를 내렸다.
애초에 먼저 검을 뽑았던 게 연합 쪽이었던 만큼, 이 이상의 폭거는 이스마트 또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스마트 공께서는 아직도 저 제국 놈의 편을 드는 것이오?"
투나미르 토후국의 대표, 압둘라흐 장군은 분함을 씹어뱉듯 중얼거렸지만, 무기만큼은 내렸다. 그도 당장의 구도가 자신에게 썩 유리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잊지 마시오. 우리는 오직 평화를 위해 모인 것이오."
"허, 평화라."
하지만 다시 자리에 앉지는 않았다.
"나 역시, 그리고 우리 투나미르 토후국 역시 진심으로 평화를 바라고 있소. 하지만 본인조차 믿지 않을 거짓부렁만을 입에 담는 이가 이곳에 있는 이상, 아무래도 이 회담장에서 그 평화를 찾는 것은 어려울 듯하군."
그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등을 돌리는 것이었다.
"...압둘라흐 장군."
"무의미한 회담은 여기까지요. 더는 우리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소."
투나미르 토후국의 대표는 그대로 회담장을 떠나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그 뒤를 바르토 토후국의 대표 역시 따랐고, 두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이, 무슨."
정말로 깜짝 놀랐던, 마르딘 토후국과 함께 온건파로 분류되던 우르드 토후국의 대표는 그 광경을 보고 무척 당황하고 말았지만, 그들을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못했다.
"...."
순식간에 연합의 대표 중 절반이 떠나버린 회담장.
연합의 맹주 역할을 자처하던 마르딘 토후국의 이스마트는 결국 작게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니카로스 남작, 지금의 무례는 내 정중하게 사과드리겠소. 투나미르 토후국의 발언이 우리 연합 전체를 대변하고 있지는 않소."
이스마트 자신이 생각해도 구차한 변명이었지만, 달리 더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그들의 갑작스럽고 몰상식한 행위에 대해서, 이스마트조차 전혀 언질을 듣지 못했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니카로스 남작은 그 사과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그럴 수 있지요. 너무 그렇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초에 이스마트 공의 잘못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스마트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일을 당했다면 분명 노발대발하며 어떻게든 책임 소재를 명확히 했을 텐데, 어째서인지 니카로스 남작은 그런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남작은 대신 그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압둘라흐 장군께서는 저런 무리수를 두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저의 제안에 어깃장을 놓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럴지도."
설마 남작이 저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지만, 이스마트의 생각도 비슷했다.
이미 토후국 하나나 둘 정도의 전력으로는 니카로스를 막지 못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렇기에 현재 니카로스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투나미르와 바르토 토후국으로서는 침략의 두려움을 참을 수가 없었겠지.
그러니까 니카로스의 제안은 추호도 믿지 않는다.
이례적으로 4개국이 모인 김에 아예 압도적인 무력으로 모든 화근을 제거하기만을 바란다.
그 정도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설마 이렇게 대놓고 행패를 부릴 줄이야.
이 도움 안 되는.
근시안적인 망할 놈들이.
그리고 마치 지금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작이 덧붙였다.
"뭐, 오죽했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들의 눈에는, 이스마트 공께서 저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주는 것처럼 보였나 봅니다."
그 또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약 이스마트와 마르딘 토후국이 남작의 제안을 일말의 여지도 없이 거절했다면, 압둘라흐 장군이 저렇게 난폭한 짓거리를 하지도 않았겠지.
"그런고로 다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공께서는 제 제안을 받아들이실 용의가 있으십니까?"
"...."
하지만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건 쉽지 않았다.
여전히 그 제안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남작의 진정한 저의를 아직 알지 못하는 이상, 더 들어볼 필요 정도는 있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가능성이 완전히 0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결국 다시 말해 고작 그 정도가 전부였다는 의미다.
그저 지금의 이스마트는.
차갑고도 철저하게 의무만을 수행하고 있다.
투나미르와 바르토 토후국에게는 그조차도 쉬이 용납되지 않았을 뿐이고.
그렇기에 이스마트는 처음과 전혀 다르지 않은 어조로 대답할 뿐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질문에 대답하는 건 어려울 것 같군. 오늘의 무례는 거듭 사과드리겠소. 하지만 이대로는 회담을 이어나가기 어려울 것 같으니, 조만간 다시 이야기를 나눌 자리를 만들겠소."
갑작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연합의 위신도, 마르딘 토후국의 위신도 상했다.
이대로 무언가 지속하는 건 무리다.
따라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회담장을 마련한 것은 연합.
그렇기에 떠나야 하는 쪽은 니카로스.
이스마트의 정중한 퇴거 요청에 니카로스 남작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스마트 공."
어째서인지, 그 말에 비꼬는 태도는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남작은 떠나며.
다만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길 뿐이었다.
"대신 조만간 다시 이야기를 나눌 자리를 만들겠다는 말씀만큼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웃음과 함께.
그는 결국 시종일관 웃음과 함께하다 사라졌다.
"...."
마르딘 토후국의 대표, 장군, 왕자.
이스마트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082. 승(昇) (7)
거의 촌극과 다름없는 꼴로 끝나버린 회담장을 정리하고, 뒤늦게 연합의 진영으로 돌아온 이스마트는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장군."
바로 조금 전까지 보인 모든 분노가 마치 전부 허상이었다는 듯, 어느새 완전히 태연한 기색으로 돌아온 투나미르 토후국의 압둘라흐 장군에게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그따위 일을 저지른 것이오?"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소만."
"나는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오."
압둘라흐 장군의 뻔뻔한 대답에 결국 이스마트의 입에서 한층 더 살벌한 목소리가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당신들이 당장에라도 니카로스를 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품은 건 나도 알고 있소. 그리고 굳이 그 마음조차 부정할 생각은 없지. 하지만 이미 우리끼리 합의를 했잖소. 먼저 이야기를 나눠보고 놈들의 대응부터 확인하자고. 전쟁은 그다음이라고."
그렇다.
무리한 모험보다는 현상 유지를 바라는 마르딘 토후국과 우르드 토후국.
최대한 빠르고 강경한 대책을 원하는 투나미르 토후국과 바르토 토후국.
궁극적 목적이 같았기에 한 연합으로 뭉쳤지만, 그 방법론에서만큼은 좁혀지지 않는 의견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의 격차를 최대한 절충한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런 이의가 없는 척해놓고는 결정적인 순간에 투나미르 토후국이 그 합의를 완전히 짓밟아버렸다. 바르토 토후국의 암묵적 동의까지 받아.
이스마트로서는, 연합의 결속 자체를 위협하는 행동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글쎄."
하지만 압둘라흐 장군의 생각은 다소 다른 듯했다.
"이미 니카로스 놈들의 대응은 확인했잖소? 나야말로 지금 이스마트 공의 말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군."
"그 말,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소."
그의 목소리는 예상보다도 훨씬 차분했다.
"애초에 니카로스 남작 놈의 태도를 보면 뻔한 사실이지 않소? 분명히 저자는 그저 어떻게든 지금 상황만을 모면하고 싶을 뿐이라오. 그러니까 연합에 합류하니 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대답을 회피하며, 동시에 무언가 협상의 의지가 있는 것처럼 꾸밀 뿐이지."
그는 이미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니카로스 남작,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다.
투나미르 토후국 홀로 상대하는 건 몹시 힘들 것이다.
순식간에 홀로 1,900명에 달하는 대군을 모아온 저력도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2,800명의 연합군보다는 명백히 열세다.
그리고 남작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다.
"이스마트 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연합은 강하지. 하지만 결국 각자 다른 국가의 임시 집합체일 뿐이라는 태생적 결함이 있소. 몸뚱이는 용맹한 사자지만 머리가 네 개나 붙어있는 셈이지. 그게 바로 우리의 약점이오."
"...그걸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그런 독단적인 행동을 벌인 것이오?"
이스마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덧붙였지만, 압둘라흐 장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저 교활한 남작 놈이, 바로 그 약점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독단적인 행동을 해서라도 저지하는 게 맞지 않겠소? 물론 사전에 이야기하지 못한 것에 내 개인적으로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긴 하오만, 나는 내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애초에 너무나도 뻔한 수작이지 않은가.
설마 니카로스 남작이, 저 혈기 넘치는 이교도가 진심으로 월광교 국가들과 연합을 맺을 생각을 품었으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분명 각 구성원 간의 입장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는 연합의 상황을 이용해서, 대충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제안을 하나 던져놓고 서로 갑론을박에 빠지게 할 생각이었겠지.
그렇게 연합이 허송세월하는 동안 전쟁을 더 준비할 시간을 벌고, 그러다가 아예 연합이 흐지부지 와해까지 되면 최고라는 판단 아래에.
압둘라흐 장군은 자신의 확신만큼이나 명료하게 이러한 추측을 이스마트에게 설명해주었다.
저 마르딘 토후국의 젊은 대표 역시 노회한 자신처럼 한시라도 빨리 냉정한 판단력을 갖추길 바랐다. 어찌 됐든 현재 연합군의 명목상 최고 결정권자는 그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스마트는 본 것이 있었다.
"분명히 일리가 아예 없는 판단은 아니오. 하지만 여전히 성급했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군. 아직은 결국 전부 추측의 영역이지 않소."
"허, 내 이야기를 여기까지 다 듣고도?"
"남작은 장군의 속셈을 거의 다 읽고 있었소."
"...."
단호한 지적에 잠시 압둘라흐 장군의 입이 막혔다.
"남작이 아직 경험이 적고 어린 군주라고 너무 무시하지 마시오. 그가 정확히 어디까지 눈치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장군이 억지로 판을 뒤엎기 위해 과하게 분노했다는 점은 확실히 꿰뚫고 있었소. 그리고 그걸 알고도 계속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했지."
압둘라흐 장군이 떠나고도 조금 더 남작과 이야기를 나눴던 이스마트였기에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장군의 주장에 일리가 있음에도, 섣불리 확신하지는 말자는 것이오. 우리의 속셈을 한눈에 파악한 자가 숨기고 있을 저의를, 가벼이 판단하는 건 위험한 일이니까."
"...결국, 그 또한 전부 니카로스 남작이 그만큼 흉흉한 속내를 감추고 있다는 의미일 뿐이로군. 아무리 봐도 과한 경계일 뿐이오,"
하지만 다시 입을 연 압둘라흐 장군이 내뱉은 건 수긍의 말이 아니었다.
"압둘라흐 장군!"
"아직 나 귀 안 먹었소. 소리 지를 필요 없소."
어느새 압둘라흐 장군의 말투에서 조금씩 짜증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좋아. 그렇다면 이스마트 공께서는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이오? 아직 상대의 속셈을 파악하지 못했으니 회담을 다시 열어서 대화라도 더 해보자고?"
"그게 필요하다면 그렇게라도 해야겠지."
"하! 우리는 그 미적지근한 대응 자체를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말이오!"
그리고 결국 노성을 터트렸다.
"지금도 우리 투나미르 토후국은 저 망할 제국의 개들에게 시시각각 위협당하고 있소! 나는 에미르의 명을 받들어 그 상황을 타개하고자 연합에 우리 군을 이끌고 합류한 것이고! 그런데 어떻게 이만한 병력을 모아놓고도 아직 상황을 더 보자는 말밖에 하지 않는 것이오!"
지금 압둘라흐 장군이 내뿜는 분노는 진짜였다.
회담 때와는 달리.
"남작 놈의 속셈을 아직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오히려 단순히 압도적일 힘으로 뭉개버릴 수 있을 때 뭉개버려야지! 감히 허튼수작을 부릴 틈도 없이! 애초에 니카로스 놈들에게 대항하고자 모인 연합이지 않소! 대체 얼마나 더 우리에게 인내심을 요구할 생각이오!"
이스마트는 그 분노를 피부로 여실히 느꼈다.
수십 년을 전장에서 뒹군 노장의 감정은 무척이나 거세고 예리했다.
하지만.
"투나미르 토후국의 분노와 절박함을 우리도 잘 이해하고 있소. 하지만 고작 감정 따위로 국가 대계의 본질을 흐리지 마시오."
그런 무형의 기세 따위는 젊은 이스마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그저 한 점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네 개 국가가 모인 연합이 사전에 합의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니카로스의 침략에 대한 공동 대응, 그리고 연합을 통한 압박이 전부요. 그리고 지금 장군께서 주장하는 바는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우리 연합의 선제적 공격이고. 이게 감정만으로 결정할 일은 아니지 않소."
"...."
이스마트의 냉정한 대꾸.
그리고 그에 맞춰지듯, 압둘라흐 장군의 분노 역시 시리게 식어 내려갔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러나 그렇다고 분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분노는 그저 차가워졌을 뿐이었다.
어느새 다시 낮게 내려앉은 어조로, 압둘라흐 장군은 이스마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스마트 공의 이야기는 잘 알아들었소."
"그렇다면."
"우리 투나미르 군과 바르토 군은 바로 오늘 밤 이곳을 뜰 것이오. 당연히 이는 이미 바르토 토후국 측과도 합의가 된 사안이고."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당연히 진심이지."
마치 처음부터 다 정해져 있었다는 듯, 압둘라흐 장군은 한치의 막힘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왕이면 마르딘 토후국 측에서도 우리와 의견을 함께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게 잘 안 됐으니 차선책을 쓸 수밖에. 우리 투나미르 군과 바르토 군, 합계 1,200명을 데리고 내일부터 곧장 니카로스의 영토를 습격할 계획이오."
"그건 제정신으로 할 말이 아니오. 여기까지 와서 연합을 탈퇴하겠다고? 니카로스를 상대로 선전포고라도 하겠다고?"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전부 다 같소."
이스마트의 표정이 점점 싸늘해졌지만, 압둘라흐 장군은 짐짓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니, 라고.
"이스마트 공께서도 말했다시피 우리 연합이 합의한 내용은 그저 두 가지 전부지. 그리고 우리는 연합을 통한 압박 작전에 성실히 임했고, 침략에 대한 공동 대응에도 성실하게 임할 마음이니 연합의 기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게 결코 아니오."
"말장난을."
"그리고 선전포고라니. 그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압둘라흐 장군이 입꼬리를 거칠게 말아 올렸다.
"아직 젊으신 이스마트 공께서는 잘 모르시는 모양이지만, 원래 이 일대는 선전포고 따위는 없는 기습과 약탈이 무척이나 성행하는 곳이오. 그냥 일상과도 다르지 않지. 아마 니카로스 남작도 제법 익숙할 것이오."
"지금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오."
"그렇지. 당연히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니, 모든 게 명확했다.
애초부터 투나미르와 바르토 토후국은.
니카로스를 도발하는 것이 목표다.
'이 일대를 화약고로 만들 속셈인가.'
도저히 모두가 싸워서 끝장을 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그렇기에 그 상황 속에서.
이스마트는 어조로 바꾸지 않고, 대신 원론적인 말 대신 실질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올바른 판단이었으니까.
"그래서 1,200명을 따로 데리고 나가, 그 병력으로 니카로스의 1,900명을 상대해보겠다는 것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만용이오만."
"허허,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우리에게도 생각이란 게 있소."
압둘라흐 장군은 마치 몹시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살벌한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가 1,200명을 분리해서 따로 습격을 감행한다고 한들, 설마 니카로스 군이 1,900명 전부를 움직여 따라붙겠소? 여기에 아직 연합군 1,600명이 남아있는데? 기껏해야 그쪽도 일부를 분리하는 정도겠지. 그것도 대략 800명 정도? 최대로 잡아봤자 1,000명 이하? 최근 니카로스의 저력을 고려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정면 승부를 피하면 감당 못 할 수준까지는 또 아니오."
"그러면 남아있는 연합군 쪽이 오히려 위험해지지 않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그리 멀리 가지는 않을 테니까. 우리 또한 아직 확고부동한 연합의 일원이오. 니카로스가 우리를 따라오지 않고 본대를 칠 낌새가 보이면 곧바로 달려와 놈들의 후방을 치겠소. 그럼 문제가 없겠지."
"...."
이미 사전에 나름대로 모든 계산을 철저히 끝마쳐놓은 강경파의 논리다. 그저 막무가내 같지만,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이미 담겨 있다. 그리고 신념까지도.
따라서 이스마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한들, 2,800 대 1,900이라는 구도를 놔두고 굳이 병력을 반으로 쪼개서 수적 우위 일부를 상실하는 건 아무리 봐도 어리석은 판단이오."
당연히 압둘라흐 장군은 그 말조차 듣지 않았다.
"나도 그 점만큼은 동의하오. 그래서 마르딘과 우르드 토후국의 협조를 바란 것이고. 그렇지만 이미 말했지 않소? 애초에 이건, 그 설득이 잘 풀리지 않았기에 내세우는 차선책에 불과하다고. 우리도 어쩔 수가 없었소."
"어쩔 수가 없었다... 말은 참 잘 하는군."
연이은 폭거에 이스마트가 마치 비꼬듯 중얼거렸지만, 압둘라흐 장군은 구태여 반응하지 않았다.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가보겠소. 당장 떠날 준비를 하려면 상당히 바쁘거든."
"...."
이스마트는 말하지 않았다.
압둘라흐 장군을 붙잡지도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이스마트가 그러자, 압둘라흐 장군 쪽에서 그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 그래. 떠나기 전에, 말 안 듣는 괴팍한 노인네가 된 김에 두 가지만 이스마트 공에게 물어보겠소."
압둘라흐 장군은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까 니카로스 남작이 아직 경험이 적고 어린 군주라고 해서 너무 무시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남작에게 개인적으로 동질감이라도 품고 계시오?"
"개소리를."
여태껏 냉정하고 공적인 모습만 보이던 이스마트의 얼굴이 처음으로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 짧고 직관적인 대답에 압둘라흐 장군은 다시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러면 마지막 질문."
그리고 그 질문과 함께 곧바로 웃음을 지웠다.
"이런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평화를, 현상 유지를 추구하는 것은 이스마트 공 개인의 판단이오, 아니면 에미르의 판단이오?"
"대답하지 않겠소."
"과연. 대답해주어 고맙소."
정말로 그 감사 인사를 마지막으로 압둘라흐 장군은 등들 돌려 떠났다.
"...."
그리고 혼자 남게 된 이스마트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하."
거친 바람 소리와 함께.
어째서인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날 밤, 정말로 투나미르 군과 바르토 군이 따로 연합군을 빠져나와 떠나갔다.
하룻밤 새 연합은 갈라졌다.
그러고 곧 머지않아.
다시 한번 회담을 시작하자는 니카로스 측의 전언이 전달되었다.
부디 약속을 지켜달라고.
#083. 승(昇) (8)
엉망진창이었던 연합과의 첫 회담이 끝나고.
우리의 본영으로 복귀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맞은편 반(反) 니카로스 연합의 진지에서 몹시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곧바로 놈들의 진지 일부가 텅 비어버린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갈라져 나갔네, 저놈들.'
연합 자체가 완전히 와해한 건지, 아니면 일시적으로 일부가 따로 행동하기로 한 건지. 아직 거기까지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뭐가 되었든 예삿일은 아니다.
한눈에 봐도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 한 번에 빠져나갔다.
분명 대국적으로 보면 우리에게 유리한 결과물이다.
적이 두 무리로 나눠진 만큼, 당연히 수적 열세를 극복할 방법 또한 늘어나게 되었으니까.
다만 그만한 숫자가 갑자기 자리를 비워서 벌일 일이라고는 우리에게 있어 불미스러운 짓밖에 없을 테니, 당연히 대응도 빠르게 해야 했다.
다행히 어제저녁부터 수상한 움직임을 잔뜩 목격한 덕분에 어느 정도 준비는 미리 하고 있었다.
'어차피 적들이 내 영토로 침범하기 위해서는 맞은 편에 있던 우리 본대를 피해서 우회해야 해. 조금 늦게 출발해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어.'
그렇게 판단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명령을 하달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남작."
짧고 간결한 그 호칭.
지금 이곳에서 나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아폴로니아 경."
에우스페나의 쓰레기 부패 권력자 중 한 명.
그리고 동시에 우리 아빠 옛 친구.
이 인간뿐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이분께서는, 오늘도 자신의 이상한 성격을 친히 증명하듯 인사 한마디도 없이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 예상한 건가?"
역시.
앞뒤 맥락을 죄다 떼어먹은, 저 난해한 질문 방식.
참으로 한결같다.
사실 슬슬 저렇게 물어도 무슨 뜻인지 대충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굳이 불확실한 추측에 몸을 맡길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경의 화법은 몹시나 불친절합니다. 정말 독보적일 정도지요. 그러니 조금 더 조리 있게 질문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
응.
침착하고, 그리고 또 솔직하게.
지나치게 솔직한 것 같기도 하지만, 언뜻 사회성이 굉장히 부족해 보이는 저 인간에게는 이 정도 수위는 되어야 무언가 뜻이 제대로 전달될 것이다.
나의 빅데이터가 그렇게 판단 내리고 있다.
'아니면 말고.'
다행히도 나의 호의가 잘 전송되었는지 아폴로니아는 잠시 침묵하긴 했지만, 곧 다시 한번 더 상세하게 질문을 해주었다.
"...어제 남작이 먼저 저 야만적인 연합에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던져서 순식간에 회담을 결딴내버렸지. 그리고 바로 하룻밤 새 놈들의 군은 둘로 갈라졌고. 처음부터 멍청한 야만인 놈들의 분열을 의도하고 시도한 행위였나?"
거봐. 하려고 하니까 훨씬 이해가 쏙쏙 잘 되게 이야기하네. 평소에는 도대체 왜 그랬던 거야.
아무튼, 얼토당토않은 제안이라.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거 아니었던 거 같은데.
"음, 의도했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냥 그럴 수도 있다... 그 정도 생각만 하고 있었죠."
그래, 내가 뭐 제갈량도 아니고. 고작 세 치 혓바닥만으로 모든 걸 절묘하게 조종하고 적들의 분열을 책동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냥 말 그대로, 겸사겸사 이런 일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염두만 해뒀을 뿐이다. 운이 좋게 잘 풀린 셈이지.
"과연. 전부 기만책이었군."
하지만 저 말 안 통하는 권력자님께서는, 또 내 대답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이미 결론까지 다 내리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친절한 나답게 친절하게 오류를 정정해주었다.
"그건 아닙니다. 기만이라뇨. 저는 항상 진심입니다."
"그게 진심이었다고? ...저 야만 연합에 합류하고 싶다던 제안이 진심이었다고?"
표정의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묘하게 흔들리는 어조에서 그녀가 당황했다는 사실이 여실히 느껴졌다.
"네, 그렇습니다."
"허."
아폴로니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크게 숨을 한 번 내뱉었다.
"...."
그리고 딱 그게 끝이었다.
다른 반응 더 보이지도 않았고, 나에게 뭔가를 더 캐묻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숨만 내뱉고 곧 침묵했다.
대화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자 오히려 내 쪽에서 더 당황스러워졌다.
"그게 끝입니까?"
"무언가 더 필요한가?"
"동쪽의 월광교 신자들과 어울리는 일이 별로 달갑지 않으신 입장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놈들은 참으로 역겨운 족속들이다."
"그런데 불쾌감을 표하시거나 만류하시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어찌 된 연유인지 물으실 수도 있으실 텐데. 그런데도 가만히 넘어가시니 되레 제가 더 의문스럽군요."
내가 무척 솔직담백하게 묻자, 아폴로니아는 솔직담백하게 대답해주었다.
"말했지 않았나, 남작. 나는 증오 따위로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라고."
"...."
이것 참.
묘하게 본인 말을 철저하게 지키시는 분이셨다.
부패하고 이기적인 권력자시면서.
어쨌거나 무슨 말인지는 대충 알겠다.
"그런 겁니까?"
"그런 거다."
그렇게 나와 아폴로니아가 상당히 멍청해 보이는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을 무렵.
"영주님, 모든 군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니카로스의 모든 군사적 업무를 총괄하시는 믿음직한 할아버지, 키로스 경이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그는 잠시 내 곁에 있던 아폴로니아에게 힐끔 눈길을 주긴 했지만, 그 이상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그래, 군의 준비가 됐다, 라.
적들은 이미 먼저 움직였다.
공식적인 선전포고 같은 건 없었지만, 어차피 무언가 나쁜 속셈을 꾸미고 있을 게 뻔하다.
현재 겉으로 보이는 적 본진의 동태와 밤새도록 수집한 관측 정보를 취합한 결과, 예상되는 적 별동대의 규모는 대략 1,300명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
'적이 그 정도 규모라면 역시 우리 측에서는....'
나는 머릿속으로 짧게 최종 검토를 마쳤고.
"키로스 경."
곧바로 명령을 하달했다.
"검은 매의 기사단 전체, 그리고 이번에 고용한 용병대 전체를 직접 이끌고 적 별동대를 추격해주십시오. 놈들을 반드시 궤멸시킬 필요는 없지만, 약탈만큼은 기필코 저지해야 합니다."
화끈하게.
그래, 역시 이 분배가 최적인 것 같아.
하지만 나의 판단과는 달리, 키로스 경은 당당히 대답하면서도 그런 우려를 뒤에 조심스레 덧붙였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되레 우리 측 본대의 전력이 너무 저하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하지.
검은 매의 기사단 80명.
그리고 용병대 전체 600명.
따라서 우리 측 별동대의 합이 680명.
그렇게 되면 남은 본대의 병력은 1,200명이 된다.
'언뜻 보기에는 본대의 머릿수가 압도적이라 키로스 경이 무슨 지적을 하나 싶겠지만.'
별동대는 전원이 숙련된 기사와 용병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곳에 남을 본대는 3분지 4를 어설픈 징집병만으로 채우게 된다.
이렇게만 보면 본대보다도 별동대가 훨씬 강해진다.
그야말로 주객전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고작 그 전력만으로 아직 여기 남아있는 연합의 본대와 대치해야 한다.
그렇기에 키로스 경의 우려는 지극히 당연했다.
하지만.
"하하, 괜찮습니다. 이곳에는 아폴로니아 경과 공작 각하께서 보내주신 지원군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도 정말 순수하게 징집병만으로 가득 차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전력이 남아있고.
"...."
그러나 내가 시원스레 웃으며 대답했음에도, 애석하게도 키로스 경의 우려를 완전히 종식하지는 못했다.
그는 잠시 대답을 잇지 못하며, 그저 순간적으로 두 눈만을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다.
키로스 경이 새로운 걱정을 던지고 있다.
소리는 전혀 없었지만, 그 눈빛만 봐도 무슨 뜻인지 감이 바로 잡혔다.
- 아폴로니아 경을 믿으십니까...?
아무리 봐도 이 뜻이었다.
"음."
당연히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가지고 있었다. 다만 아폴로니아라는 당사자를 여기 바로 옆에 두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이 답을 우회적으로 잘 전달해서 키로스 경을 이해시킬 수 있을지, 그게 상당히 곤란한 문제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내 고민이 무색하게도.
"남작은 나를 믿는 건가?"
그 당사자 아폴로니아 씨가 한치의 가감도 없이 그냥 노골적으로 그 질문을 내게 직접 해버렸다.
"...."
"...."
나와 키로스 경이 동시에 침묵했다.
'...진짜.'
진짜 저 한결같은 인간.
이건 또 예상 못 했네.
네가 이겼어.
어쨌거나 본인이 먼저 저렇게 물었으니, 애써 우회할 고민을 더 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기에 나는 이제 당당히 대답했다.
"네, 믿습니다. 이런 순간에 아폴로니아 경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그래, 응.
정말로 믿고 있다.
나와는 정치적 적대 관계고, 개인의 인품조차 결코 훌륭하지 못한 소유자고, 언제든 은밀한 수작을 부릴 수도 있다고 경계하던 아폴로니아지만.
그래도 지금만큼은 믿고 있다.
'아폴로니아가 이런 상황에서까지 내 뒤통수를 칠 인간은 아니야.'
바로 이런 믿음.
당연히 이 믿음은 내가 아폴로니아라는 인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고작 게임을 통해 조금 접해봤다고, 그녀의 본질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건 한낱 자만일 뿐이고, 그 사실은 이 세계에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육체의 아버지 제논을 대하면서 이미 뇌리에 박힐 만큼 잘 깨달았다.
'그렇지만 뿌리 깊게 이교도를 증오하고, 부패한 권력자로 전락했음에도 어째서인지 기사라는 정체성만큼은 포기하지 않고 있는, 그녀의 외적인 모습만큼은 잘 알고 있을 뿐이야.'
그리고 이곳은 제국의 최전선.
적들은 전례를 찾기 힘든 월광교 4개국 연합.
'수작을 부릴 거였으면 진작에 부렸거나, 아니면 한참 나중에야 하겠지. 어쨌든 지금은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 대해 이 정도를 알고 있다면, 조금이나마 믿음을 가지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렇기에 나는 기사단과 용병대를 전부 키로스 경의 손에 쥐여줘도 본대의 전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한 거다.
어디까지나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일 뿐이란 거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완전히 0인 건 아니지만.'
그건 또 그거 나름의 대책이 있으니까.
원래 이 거친 변방에서 최고의 효율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위험은 감수해야 하는 법인걸.
따라서.
나는 이미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이미 나와 상당히 여러 번 호흡을 맞춰온 키로스 경은, 나의 결단을 진심으로 존중해준다.
우려는 하되 의심은 하지 않는다.
참으로 고맙게도.
"...알겠습니다. 부디 무운을 빌겠습니다, 영주님."
"저 역시도요. 키로스 경만 믿고 있겠습니다."
"허허, 놈들은 그 더러운 흙발을 영주님의 영토에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할 것입니다."
키로스 경은 늘 그래왔듯, 믿음직스럽게 웃어주며 나의 명을 받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자리를 떴다.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그렇게 또다시.
이곳에는 나와 아폴로니아만이 남게 되었다.
"...."
"...."
그 상황에서 아폴로니아는 무언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서 나 역시 딱히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는 말없이 그저 내 얼굴만을 바라봤고.
나도 굳이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기묘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몇 분의 시간이 흘렀다.
다시 먼저 소리를 낸 건 아폴로니아 쪽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지, 남작?"
지극히 사무적이고 공적인 질문.
그렇기에 나는 친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남아있는 적 본대와 계속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군의 대응 방안을 여쭤보시는 것입니까?"
"그래."
그것도 당연히 정해놨지.
나는 항상 준비된 21세기 교양 인재니까.
"계획은 크게 두 개입니다."
첫 번째 계획은 대화.
두 번째 계획은 대화.
"...두 개가 뭐가 다른 거지?"
아폴로니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지만, 나는 이 질문만큼은 곧바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야, 일부러 못 알아듣게 표현한 거니까.'
지금까지 못 알아들을 말만 잔뜩 한 것에 대한, 작고 사소한 복수랄까. 이 정도는 봐주길 바라.
그래, 나는 대화를 할 거다.
정말 두 가지 대화를 할 거다.
'첫 번째 대화는.'
사람 대 사람으로서 나누는, 진솔하고 심도 있는 이해의 시간. 내가 평소 자주 즐기는 것.
'그리고 두 번째 대화는.'
수천 명의 피와 땀이 튀는.
수백의 군마가 땅을 뒤흔드는.
철로 만들어진 칼과 창이 오가는.
이 야만스러운 세상에 널리고 널린.
나도 이미 수차례 겪었던.
그런 변방 식(式) '대화'.
거짓말이 아니다.
#084. 승(昇) (9)
적 연합군의 대략 절반가량이 따로 분리되어 우리 니카로스의 영토를 약탈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 약탈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기사단과 용병대를 분리하여 파견했다.
그래, 공식적인 선전포고만 오고 가지 않았을 뿐 이미 명백한 전시상황이나 마찬가지다.
애초에 이 변방에서 예고 없는 습격과 약탈은 일상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흔할 일이다.
따라서.
여태껏 있었던 대화의 시도라는 것들이 결국 전부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한 이 시점에서.
"그러면 이번에는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아폴로니아 경께서는 진지에서 편히 쉬고 계시지요."
나는 굳이 또 한 번의 회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마르딘 토후국의 이스마트가 그걸 수락했다.
그렇게 나는 양측의 별동대가 본대를 떠난 바로 다음 날 아침 일찍, 지난번의 그 회담 장소로 출발하려 했다.
그리고 출발하기 직전.
양 세력의 대표 단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나의 제안으로 인해 본진에 남게 된 아폴로니아가, 문득 그런 말을 꺼냈다.
"저 야만인 연합군의 대표... 이스마트라고 했나? 아무래도 그리 유능한 인물은 못 되는 모양이로군."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한 까닭이 아예 유추되지 않는 건 또 아니었기 때문에, 태연하게 되물었다.
"어찌 그리 생각하셨습니까?"
"뻔하지 않은가? 저 중에서 그나마 가장 강한 국력을 지닌, 마르딘 토후국의 대표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히 지난 회담 때 미쳐 날뛰는 다른 대표 놈을 통제하지 못했고, 결국 내부분열조차 막지 못해서 지금 같은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으니까."
"과연.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확실히 틀린 말은 말은 아니었다.
이스마트는 회담 때 대놓고 무리수를 두며 어깃장 놓던 압둘라흐 장군을 제대로 제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연합은 갈라졌고, 일부의 독단 행동마저 묵인했다.
그러니 그 모든 걸 내 옆에서 전부 지켜본 아폴로니아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이상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역시 진상이라는 것도 까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친구이지 않습니까?"
"...."
그걸 다 알면서도 그녀의 말에 수긍하지는 않았다.
내가 꺼낸 말이 곧 상식이었으니까.
나는 그대로 곧장 회담장으로 떠났다.
***
"반갑소, 니카로스 남작."
"하하, 저도 반갑습니다, 이스마트 공."
회담장에 도착하니 오늘도 차가운 얼굴을 한 이스마트가 나보다 먼저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등 뒤에 호위 한 명을 세워놓았고.
나 역시 아르센을 호위로 데리고 왔으니, 총합 넷. 지난 회담의 열네 명보다 훨씬 더 인원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직도 살짝 수가 많았다.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 전에 이것만큼은 먼저 짚고 넘어가겠소. 지금 투나미르와 바르토 토후국이 벌이고 있는 행동은 결코 우리 연합의 총의가 아니오. 우리 연합 또한 그들의 독단 행동을 저지할 방법을 찾고 있소."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스마트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그 와중에도 그는 여전했다.
중대한 내용과는 달리 얼굴 위에는 표정 한 점 없었고 입 밖으로 나온 문장 또한 무척 담담했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따지면 상당히 뻔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쟤네 편 때문에 내 땅이 약탈당하기 직전인데도, 결국 자기 잘못은 아니라는 변명이 전부니까.
그렇지만.
굳이 그렇다고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거야 저도 당연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굳이 이스마트 공께 책임을 따져 물을 일도 아니지요.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소?"
오히려 내가 먼저 선선히 동의해서 그런지 이스마트의 대답이 살짝 뒤늦게 따라왔다. 표정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나는 그 묘한 흥미와 의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진심이다.
'애초에 이런 일에 감정 쏟는 것도 낭비잖아.'
전부 영혼 한 점 없는 껍데기 같은 대화일 뿐인데.
나는 선량한 교양인답게 진심이 가득 담긴 진솔한 대화를 선호한다고.
그렇기에 티 없이 맑은 나는 곧바로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드리는 말씀인데, 지금부터 우리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단둘?"
"여, 영주님...!"
갑작스러운 제안.
내 등 뒤에 서 있던 호위기사 아르센이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이스마트의 등 뒤에 있는 저쪽 호위 역시 몸을 움찔한다.
지금 이 회담은, 이미 지난번과는 달리 오직 각 세력의 대표끼리만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는 내 제안이 수용되어서 만들어진 자리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단둘이라는 걸 강조한다는 건 딱 하나의 의미밖에 없다.
그리고 그 의미를, 이스마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입에 담았다.
"호위까지 전부 물리고, 정말로 남작과 나 단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이요?"
"바로 그겁니다."
그래, 바로 이것뿐.
그러니 당연히 호위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는 거다. 우리는 사실상 잠재적 적대 관계고, 호위는 그와 같은 관계에서 서로의 안위를 보장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니까.
"장군님, 이건 말도 안 되는 요청입니다."
"잠시만 기다려보게."
그러나 이스마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호위의 만류에도 그저 고요하게 고민만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거절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내가 일반적이지 않고 무리한 요청을 했으니.
그렇지만 반대로 믿기도 한다.
그라면.
"좋소. 요청을 받아들이지. 자네는 잠시 나가 있게."
"장군님!"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게.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어."
"...알겠습니다."
나의 이 요청을 피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래.
내가 아는 그 '이스마트'라면 분명히 이럴 줄 알았다.
이스마트의 차가운 목소리에 결국 그의 호위가 천천히 회담장을 나가기 시작했고, 나 역시 나의 호위기사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우리 충직한 아르센이 하고 싶은 말이 상당히 많은 모양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견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아르센 경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어지간하면 내 부하들 역시 듣지 않았으면 좋겠거든.'
지금부터.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물론 듣는다고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아무래도 이쪽이 더 안전하긴 하니까.
"...."
그렇게 마침내.
회담장에는 나와 이스마트만 남게 되었다.
"남작의 요청대로 호위도 물렸소. 그렇다면 이제 슬슬 듣고 싶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길래 호위까지 물리자고 한 것이오?"
이스마트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나에게 묻는다.
그 물음은 마치 냉혹한 서리 바람 같은 추궁처럼 들리기도 했고, 반대로 그저 한없이 사무적인 요식 행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껍데기 따위에는 조금의 신경도 쓰지 않고, 드디어 그토록 하고 싶던 말을 밖으로 뱉었다.
한치의 가감도 없이.
"이스마트 공, 딱히 마음에도 없는 짓거리만 계속하려니까 참 머리가 아프지요?"
"...뭐?"
이스마트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지며 순간 날것 그대로의 반문이 튀어나오고 말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거침없이 나의 말만을 이어나갔다.
"연합이랍시고 하나 만들긴 했는데, 각 구성원은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당연히 그런 놈들만 모여 만들어진 연합군 또한 총사령관 말을 더럽게 안 듣고. 그러다가 결국 독단 행동까지.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만약 제 일이었다고 상상하면... 아, 그냥 상상도 하기 싫군요."
"...지금 나와 우리 연합을 모욕하는 것이오?"
나는 그저 진심만 담아 이야기했을 뿐인데 이스마트가 조금씩 으르렁거리며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뜨겁다기보다는 차가운 그 기세는 무척이나 예리하고 날카로웠고, 당장에라도 곧장 검을 뽑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분노를 눈앞에 두고도 당당했다.
"그럴 리가요."
그래, 언제나 예의 바르고 친절한 내가 굳이 의도적으로 상대에게 모욕을 줄 리가 없으니까.
모든 건 결국 그의 오해일 뿐이니까.
"물론 그렇게 물어보시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건 저도 압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던 가치나 행보를 타인에게 평가절하당한다면 화가 날 수밖에 없겠지요. 그리고 저의 표현이 여러분 연합의 기치를 비하했다고 해석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굳이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건.
"하지만 말입니다."
그저 담백한, 공감일 뿐이겠지.
"애초에 이스마트 공께서도 현 연합의 방침에, 그따위 기치에 조금의 관심도 없었지 않습니까?"
누누이 말했다시피.
나는 진솔하고 진심이 가득한 대화를 좋아한다.
"무슨."
그도 그렇잖아?
"사실 이스마트 공께서도 개인적으로는 압둘라흐 장군의 의견에 더 공감하셨지요? 연합의 현 방침이자, 맹주인 마르딘 토후국의 에미르, 공의 아버지가 정한 현상유지라는 계획을 그저 웃기지도 않은 개소리라고 판단했을 뿐이지 않습니까?"
대화 상대가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 주제에 대해서만 조금 비웃어줬을 뿐인데, 이걸 상대방에 대한 모욕이라고 부르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잖아?
"...."
연이어 이어진 나의 이야기에 이스마트가 잠시 침묵하였고, 당연히 나는 멈추지 않았다.
정말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이번 기회에 그냥 우리 니카로스를 밀어버리고 싶은 생각뿐이었겠지요. 그런데 명령이랍시고, 임무랍시고 그 뜻과 아예 반대되는 일을 하려니 도대체 얼마나 짜증이 나셨습니까? 심지어 자신과 같은 뜻을 품은 이의 의견까지 억지로 반박해가며."
이 진실을 말하고 싶어서 얼마나 오래 참았는지.
"바로 그렇기에 압둘라흐 장군의 독단 행위로 몰래 부추기고 묵인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 이게 바로 진실이다.
'아폴로니아가 내린 평가도 언뜻 틀린 것은 아니야.'
언뜻 보기에 지금까지 이스마트가 연합군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원작의 유능한 고정 네임드 캐릭터 출신이라는 칭호가 무색할 정도로 무력한 모습만 보여왔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잖아?'
사실 애초부터 지극히 하기 싫은 일은 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총책임자가 자신의 유능함을 십분 발휘해서 손수 사보타주를 감행하고 있었는데?
어리석은 강경파를 은밀하게 이용해서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이 회담을 파투낼 생각뿐이었는데?
오히려 이 결론만을 원하고 있었는데?
정말.
"하하, 생각할수록 웃기는 일입니다."
쉬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기도 하고.
만약 나도 저 인간에 대해 미리 알고 있지 못했다면 결코 알아차리지 못했겠지.
젊은 이스마트.
군왕(君王)의 씨앗.
그리고 그 자질을 타고 난 삼남(三男).
'그렇기에 그 도저히 억누르지 못할 숙명으로 인해.'
아버지와 두 명의 형까지 손수 제거하고.
스스로 에미르의 자리까지 오른.
역천(逆天)의 왕.
내 눈앞의 상대는 그런 인간이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뭐든지 저지를 수 있는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이, 연합군이라는 거대한 힘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는 적을 용납할 리는 결코 없지.
알고 보면, 모든 게 참 단순한 일이다.
"...그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뭐요? 그 얼토당토않은 심증만으로 나의 책임이라도 추궁할 속셈이오?"'
어느새 이스마트의 분노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나의 장황한 이야기에 대해 아무런 반박도 긍정도 하지 않았고, 그저 다시 무감정한 말투로 오직 그렇게만 물을 뿐이었다.
이것 참, 까다로운 인간.
나는 진솔함이 좋다니까.
이미 그 무감정한 목소리 속에서도.
슬슬 다 티가 나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책임을 따져 물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제 내 진솔함이라도 먼저 보여줘야지.
"이스마트 공께서는 현 연합의 기치가 무의미한 헛짓거리에 불과하다고 판단하시겠지만, 사실 저는 일부나마 그 방침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함께 힘을 합쳐서 외적과 맞서 싸우고 평화를 지킨다... 충분히 좋은 이야기지 않습니까?"
"니카로스도 연합에 합류하겠다. 그 웃기지도 않는 개소리를 다시 꺼내는 건가?"
"개소리라니. 조금 마음이 아프군요. 하지만 맞습니다. 저는 언제나 진심이고 그 제안 또한 진심으로 드린 게 맞습니다. 다만 현재 현장에 나와계신 총책임자 이스마트 공께서 그 안건에 전혀 흥미가 없다는 크나큰 문제점이 있지요."
"...그래서 본론이 뭐지?"
마치 애가 타는 듯한 그 되물음.
좋아.
이제 서론은 다 집어치우고 시원시원하게 본론으로 가자고? 나야 환영이지.
"그러니까 우리 둘이서 결판을 내야죠."
나도 한 시원시원하거든.
"시원하게 양군 한 판 붙고, 이긴 쪽 뜻대로 합시다."
우리 니카로스 군이 이기면 나도 연합에 받아주고.
너희 연합군이 이기면 그대로 우리 본토까지 밀고 들어오고.
요컨대.
마치 결투 선언과 같은.
전쟁 선언.
"어떻습니까? 직관적이고 괜찮지요?"
"흐."
모든 이야기를 종합한 끝에 내가 그렇게 묻자, 그 차갑던 이스마트가 순간 묘한 소리를 흘렸다. 그건 마치 본인도 모르게 의도치 않게 나온 소리처럼 들렸다.
"흐하하."
하지만 이스마트는.
그 소리를 뒤늦게라도 전혀 막지 않았다.
대신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미친 사람이군. 완전히 미친 사람이야. 니카로스 남작."
아주 환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으로 본, 그의 제대로 표정다운 표정이었다.
"뱀처럼 교활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누차 했지만, 설마 이런 인간일 줄이야."
차갑고 냉혹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우는 것은 오직 살벌하면서도 반갑다는 듯한, 그저 정말로 즐겁다는 듯한 미소뿐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지만.
"남작, 혹시 본인이 맛이 간 인간이라는 것에 자각은 있소?"
대화 상대가 웃으니, 나도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원래 남들 이상으로 합리적이고 현명한 선택을 내리다 보면, 때로는 그런 누명을 쓸 때도 있지요."
그래, 이게 이상적이잖아.
나는 연합에 끼고 싶은데, 만약 적 총사령관이 방해된다면, 이게 제일 간단하고 빠른 방법인걸. 맛이 갔다니.
"끝까지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패륜의 자질을 타고난 이스마트는 딱히 내 말에 동의해주지 않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괜찮겠소? 전쟁이라. 나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는 제안이긴 하지만, 만약 내가 그쪽이 이긴다고 연합 합류라는 목표를 달성한다는 보장은 없는데 말이지? 오히려 양측의 적대 관계만 명확해지지 않겠나? 게다가 에미르, 내 아버지가 뜻을 굽힌다는 보장도 없지."
확실히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나도 이미 고민해본 사안이다.
"만약 제가 이기면, 우리끼리의 교전은 불가피한 충돌로 포장합시다. 전부 감히 총사령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뛰쳐나가 멋대로 행동한, 멍청한 압둘라흐 장군 쪽 책임으로 말입니다. 저와 이스마트 공께서는 최대한 평화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들의 만행 때문에 대화가 잘 풀리지 못한 것으로."
"그건 제법 마음에 드는 결론이군. 그렇다면 내 아버지, 에미르 쪽은?"
그거야말로 고민할 가치도 없는 물음이지.
"이제 그 둔하고 어리석어진, 늘어난 겁을 현명함으로 포장하는 비겁한 늙은이 따위가 중요합니까? 저는 그저 이스마트 공 한 사람과 결론을 맺을 생각뿐입니다."
그래, 이 전쟁이 끝나면 네가 직접 에미르가 되든, 아니면 실권만 잡듯,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잖아.
"끝까지 미친 인간."
그리고 마치 이런 내 추측을 증명하듯, 이스마트는 자신의 아버지가 모욕받았음에도 그저 즐겁다는 듯 미소만을 흘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좋소. 과연 모든 게 남작이 뜻대로 잘 풀릴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손해 볼 것은 없으니까. 조건을 수락하지."
마침내 동의의 뜻을 밝혔다.
"뒷마무리의 세세한 부분은 이스마트 공에게 맡기겠습니다. 물론 나중에 따로 이야기도 더 나눠보고요."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남작은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나 보군."
"승리를 확신하지도 못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과거에도 한 번, 언젠가 어디선가 했던 그 말.
이스마트는 그 문장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옳은 말이군. 그리고 나 또한 나의 승리를 확신하고 수락한 것이고."
"뭐, 합리적으로, 결과만 보고 판단합시다."
그 말과 함께, 나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명백한 악수의 의미였다.
잠시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스마트는, 곧 더한 미소를 지으며 나와 손을 맞잡았다.
"좋소. 그 결과가 몹시 기대되는군."
전쟁을 반기며 기뻐하는 인간이라.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교전은 내일 아침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하루 정도는 서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소?"
"시간까지 미리 정해주시다니, 무척 신사다우시군요."
"설마 남작만 하겠소."
우리는 손을 계속 맞잡은 채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더없이 높은 곳만을 꿈꾸는 이스마트는 여전히 정말로 즐겁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눈동자 속에 나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마치 거울처럼. 나 또한 선명히 확인할 수 있게.
그래.
참으로 길었다.
이 판을 만들고자 얼마나 인내해왔는지.
마침내 진짜 시작이다.
#085. 승(昇) (10)
충돌, 교전, 전투, 전쟁.
그 무어라 불러도 좋을 것.
무척이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두 번째 회담을 끝마치고, 재빠르게 우리 본진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그 무어라 불러도 좋을 것들에 관한 준비를 했다.
언제 서로 죽고 죽이며 싸울지.
상호 건전하고 신사적인 합의를 통해 결정된 전투 일시는 바로 내일 아침.
당연히 전투처럼 중요한 사안을 헐레벌떡 부랴부랴 준비해서 좋을 건 없다지만, 그래도 문제는 없다.
'당연히 우리는 훨씬 전부터 오늘을 디데이로 잡고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적어도 대략적인 얼개만큼은 완벽히 내가 그린 큰 그림대로 진행이 됐다. 그런데 설마 미리미리 준비도 안 해뒀을 리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무리 작업뿐이다.
'물론 양쪽 모두 살벌한 대치를 계속 지속했던 만큼, 적들이라고 해서 딱히 준비가 덜 된 건 아닐 테지만.'
그래도 아예 결행 날짜를 정해놓고 있던 우리와 바로 전날에야 정확한 전투 일시를 알게 된 적 사이에는 어느 정도 유의미한 차이가 있지 않을까?
소소하게 그런 기대를 한 번 해보고 있다.
그렇게 내가 부지런히 아랫사람들을 부리며 흥얼거리고 있을 무렵.
"남작."
지금 여기 우리 본진에서 유일하게 나보다 아랫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한 인간이, 소리 없이 슬쩍 다가와 나를 불렀다.
이래저래 예전보다는 얼굴이 제법 익숙해진.
"아폴로니아 경."
에우스페나 공작령의 부패 장군이자 암 덩어리.
나의 정적, 아폴로니아였다.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의례적인 인사치레는 전부 집어치우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전쟁을 벌이기로 했군, 결국."
"네, 전쟁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결국."
그 뻔한 문답에 아폴로니아는 잠시 침묵하였고,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전쟁이 아닌 다른 선택지는 없었나?"
상당히 묘한 질문이었다.
그녀에게서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고.
"설마 아폴로니아 경께서 그리 물어보실 줄은 몰랐습니다. 경께서는 저 이교도들을 증오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과거부터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게. 이건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다는 질책이나 권유 따위가 아니야. 그저 순수한 의문일 뿐이지."
순수한.
순수한 의문이라.
나는 잠깐 그 표현을 곱씹은 뒤, 픽 웃었다.
"네,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선택지는.
"그렇군."
그런 거지.
괜히 실없는 질문을 던졌던 아폴로니아 역시 내 대답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뜬금없이 완전히 다른 화제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런 이야기를.
"남작, 며칠 전 처음 니카로스에서 나를 맞이하며, 내가 그곳까지 방문한 연유를 물어봤었지."
"그랬지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워낙 사소하고 뻔한 문답이다 보니 세세하게 표현 한 글자까지 다 생생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 그런 질문을 하기는 했다.
여태껏 봉신들의 위기를 죄다 무시하던 에우스페나 공작령이, 다른 이도 아닌 총사령관 아폴로니아를 파견 보냈다는 건 도저히 쉬이 믿기는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사실 이미 아폴로니아와 상당한 시간을 함께 보냈음에도 여전히 의아한 일이긴 하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그저 남작이 먼저 보낸 지원 요청을 수락해서 왔다고만 대답했었지."
"그러셨습니다."
"그게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와는 별개로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았던 내용도 있었다."
"...."
평소답지 않게 서론이 조금 길다.
절대적으로 그런 건 아니지만, 상대가 아폴로니아라는 걸 고려하면 몹시 이례적일 정도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내 속에서 조금씩 싹틀 즈음,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핵심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자원해서 스스로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품속에서 양피지로 만들어진, 한눈에 봐도 고급스럽고 고풍스러운 두루마리를 꺼냈다.
"바로 이걸 전달하기 위해서."
그녀의 두 손에 의해 그대로 펼쳐지는 두루마리.
그 위에 빼곡히 적혀 있는 글자들.
내용은 상당히 길었지만, 사실 그 핵심은 오직 최상단의 단 한 단어만 읽어도 곧바로 파악할 수가 있었다.
다만 핵심을 파악했어도, 지금의 이 상황 자체가 쉽게 이해되지 않아서 문제였다.
내 두 눈에 또렷이 담기는 그 단어.
승작(陞爵).
작위가 올라가는 일.
그걸 보고 나조차 잠시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폴로니아가 꺼내든 두루마리는 명백히 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최하단에는 에우스페나 공작의 인장 또한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
아니.
이게, 왜 지금?
지금 이 타이밍이 맞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해가 안 된다.
나는 결국 순간적으로 멍청한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허."
그러나 아폴로니아는 그런 내 목소리 따위는 전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자신의 할 말만 계속 이어나갔다.
"에우스페나의 모든 가신단이 합의하고 공작 각하께서 결정하셨다. 따라서 지금의 나는 공작 각하의 대리인이며, 이는 곧 그분의 뜻이다."
그녀는 이전보다도 더 격식을 차리고 딱딱한 어조로.
"남작. 아니, 이제는 아니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그렇게 선언하였다.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그대는 지금 이 순간부터 니카로스 백작이다."
내가 그토록 탐내왔던, 바로 그 이름을.
"...."
아폴로니아의 말이 다 끝났음에도, 나는 쉬이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고, 실감도 잘 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 기분 따위와는 별개로, 이 모든 건 분명한 현실이고 진실이었다.
나는 결국 헛웃음을 터트리며, 한참의 침묵 끝에 그렇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걸 왜 이제야 전해주시는 겁니까? 처음부터 공작님의 서신을 갖고 오셨다면, 저를 처음 보자마자 바로 말씀을 해주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 궁금한 것이 참으로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것은 이거였다.
이미 아폴로니아와 만난 지 며칠이 지났는데, 그걸 왜 이제야 이 타이밍에야 전달해주는 거냐.
하지만 그녀는 몹시 태연했다.
"그냥. 지금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더군."
"...도대체 그 판단 기준이 뭡니까? 게다가 명색에 백작 승작인데 너무 간결하게 끝낸 것 아닙니까? 이래도 괜찮습니까?"
그리고 다음 질문에도 마찬가지였다.
"두 질문에 모두 같은 대답을 할 수 있겠군. 그저 개인적인 판단 기준을 적용했다고만 말하지. 지금은 여유가 그다지 없는 전시상황이니까. 약식으로 진행할 명분은 충분히 있어. 걱정하지는 말게. 나에게 그 정도 자율적인 권한은 있으니까."
그녀는 조금 전까지 보이던 경건함과 격식 또한 전부 형식적인 무언가에 불과했다는 듯, 곧바로 다시 평소처럼 냉소적인 태도로 대꾸했다.
누가 실질적으로 공작령의 반절을 다스리는 권신 아니랄까 봐, 그 모습에 공작에 대한 공경 따위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내가 결국 낼 수 있는 소리라고는 이게 전부였다.
"하."
걱정 같은 건 애초에 한 적도 없는데.
쓸모없는 대답만 하다니.
솔직히 아직 모든 게 온전히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아직도 알 수 없는 게 너무나도 많다.
아폴로니아는 지극히 비상식적이고 이상한 행동을 했고, 나는 거기에 휘말린 불운한 정상인일 뿐이니까.
무엇보다 그토록 오랫동안 직접 설계하고 꾸며왔던 계획은 결실, 백작 작위를 마침내 차지했음에도 이 괴상한 상황 때문에 체감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눈물이 다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자, 그러면 백작. 이제 본격적인 논의를 해보지."
저 어딘가 많이 어긋난 아폴로니아의 말처럼 난 이미 백작이 되긴 했다.
그렇다면 이제 정신 차리고 할 일을 먼저 해야 한다.
이 순간에도 전쟁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어째서인지 봉변을 당했음에도 웃음이 다 나왔다.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런가.
그래, 체감 같은 건 끝나고 해도 늦지가 않아.
"본격적인 논의라. 좋죠. 뭐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아폴로니아 경?"
"전투가 머지않았다. 백작의 구체적인 전략을 먼저 듣고 싶군."
아, 전략.
그래, 그거 엄청 본격적이고 중요한 안건이지.
지금 남아있는 적의 병력은 1,600명 정도.
그리고 우리 본대의 병력은 1,200명.
단순히 머릿수만 봐도 적이 우리보다 대략 3할은 더 많고, 키로스 경의 별동대가 정예병을 거의 다 데려가서 우리 본대의 병력 대다수가 징집병에 불과하다는 걸 고려하면 전력의 격차는 더 커진다.
무척이나 훌륭한 전략이 다급히 필요한 상황.
그리고 그 전략은.
'당연히 이미 준비되어 있지.'
설마 내가 그런 생각도 하나 하지 않고 이런 상황을 스스로 초래했을 리는 없으니까.
나는 겸손하고 부족한 많은 교양인이지만, 그 정도 멍청이까지는 아니니까.
따라서 나는 다시 평소처럼 당당히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소소한 복수의 의미에서 그냥 비밀로 하고 싶은데, 그래도 일단 지금은 협력 관계니까.
정말.
내가 생각해도 난 너무 착하고 관대해.
"얼마든지 설명해드리지요."
그러니까 나중에 실제로 보고 놀라지나 말라고.
***
비슷한 시간.
마찬가지로 두 번째 회담을 끝마치고 곧장 반(反) 니카로스 연합군의 본진으로 복귀한 마르딘 토후국의 이스마트 역시 바쁘게 준비를 시작했다.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까...."
투나미르 토후국과 바르토 토후국의 대표들이 별동대를 꾸려 떠난 지금, 연합군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이스마트와 대등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는 우르드 토후국의 대표는 침통한 말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보며 이스마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다른 방법은 없었소."
아예 거짓은 말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두 번째 회담은 어디까지나 이스마트와 니카로스 남작 단둘만의 비밀스러운 논의였다. 그러니 우르드 토후국의 대표에게도 그 합의와 내막을 공유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압둘라흐 장군이 주도 중인 약탈로 인해 애석하게도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해졌다고만 설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는 결론까지 전부 거짓인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이스마트는 알 수 있었다.
'남작이 다른 방법 따위를 받아들일 리가 없지.'
분명 이스마트 역시 남작의 제안을 반긴 것은 사실이다. 남작이 지적한 것들 또한 분명한 진실뿐이다.
이스마트 역시 전쟁을 바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만약 자신이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고 해서, 행여나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몹시나 회의적이었다.
그렇기에 이스마트는 거짓말을 한다는 죄책감 따위는 전혀 없이 태연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물론 설령 정말로 거짓말을 했다고 한들, 그런 감정은 조금도 느끼지 않았을 테지만.
"한탄은 나중에 해도 되오. 지금은 서둘러 대책을 마련할 시간이지."
"...옳은 말씀입니다. 그나마 우리 쪽 전력이 명백히 우위에 있다는 것만큼은 위안이 되는군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소. 놈들도 분명 믿는 구석이 있을 테니 군을 그렇게 쪼갠 것일 테지."
그래, 연합 측도 니카로스 군이 반으로 갈라졌다는 첩보는 이미 입수했다. 그리고 압둘라흐 장군을 저지하기 위한 별동대 쪽에, 그들이 자랑하는 기사단과 용병대가 대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 또한 확인했다.
그런 고로 현재 적 본대에 있는 것은 징집병들과.
"에우스페나의 지원군. 그들을 믿는 것일까요?"
아폴로니아가 직접 이끄는 300명의 지원군이 전부.
거기에 대해서는 이스마트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지. 수십 년 전의 에우스페나 군의 위용은 제법 위협적이었다고 하니까."
직접 겪은 건 아니지만, 기록은 남아있다.
전대 공작은 제법 열성적으로 동방 정복에 나섰다.
니카로스 남작령 또한 바로 그 정복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그렇지만 그 또한 결국 20년은 더 된 이야기요."
지금의 공작령은 휘하 봉신들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무능하고 게으른 돼지에 불과할 뿐.
이 월광교의 땅에 그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다.
"...그렇다면 모든 게 함정일 수도 있겠군요."
"어찌 됐든 결론은 하나밖에 없소."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
이스마트는 거의 반쯤 직감에 가깝게, 그 커다란 방향성의 결론을 이미 내리고 있었다.
'승리를 확신하지도 못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겠냐, 라.'
이스마트 역시 남작의 그 말에 동의하긴 했지만, 진심으로 한 치의 의심 없이 자신의 승리만을 낙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도자이자 장군으로서 그것은 자신감이 아닌, 어리석은 망상에 더 가까웠다.
니카로스가 표면적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수없이 전쟁에서 승리해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니카로스는.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는 쉽지 않은 상대다.
그러니까 요컨대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가짐의 문제일 뿐.'
그리고 그런 마음의 의미에서.
이스마트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우르드 토후국의 대표와 논의를 계속하며, 휘하 장군들과도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하며, 이스마트의 입꼬리가 그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끝에 만들어진 건.
하나의 사나운 미소.
'그래, 나 역시.'
시리게 웃는다.
전쟁을 원한다.
불이 붙는다.
#086. 전쟁의 불 (1)
다음날.
마침내 양군이 서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스마트는 시리게 뜨거운 눈으로 저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니카로스 군을 잠시 가만히 바라봤다.
적의 대다수는 징집병.
그나마 정예병이라고 할 만한 존재는 그 숙련도가 미지수인 에우스페나의 지원군 300명뿐.
사전에 파악한 니카로스 군의 현재 전력은 이러하였고, 확실히 그 정보는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징집병치고는 제법 군율을 잘 갖추고 있군.'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징집병들의 기세가 마냥 만만치만은 않았다.
전쟁의 시대.
혼돈의 땅.
따라서 난세.
스스로 몸도 가누지 못할 만큼 곪아 썩어가는 제국.
수십 갈래로 갈라져 서로 잡아먹는 월광교의 영역.
그 두 개의 세력이 겹치는 이 동방의 땅은 언제나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니카로스야말로 그 전란의 가장 깊은 중심에 존재하고 있었다.
본래부터 끝없는 전쟁의 불길과 직면하고 있었고 그런 시류는 2년 전 현 남작, 티베리오스 발란티스가 새로 즉위한 이래로 더 짙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그 또한 넘어서 아예 스스로 먼저 그 불길을 찾아 나가고 있었다.
'그런 시간을 계속 겪으면 한낱 시골 촌부까지도 저만한 투쟁심을 지니게 되는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남작은 설마 저기까지 의도한 것일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직접 물어보고 싶군.'
거기까지 떠올리고, 이스마트는 곧 짧은 웃음과 함께 모든 생각을 떨쳐냈다.
개인적으로 그런 상상들이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제는 더 진지한 고민을 해야 했다.
'그래, 상당히 인상 깊긴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자신의 연합군을 당해낼 수 없다.
이건 단순한 오만이 아닌, 경험 많은 장군으로서 내리는 냉정한 판단이었다.
그렇기에.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스마트는 조금의 방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바로 곁에 있던 우르드 토후국의 대표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스마트 공, 놈들이 진격합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양측이 신중하게 서로의 태세를 살피고 있던 그 순간, 놀랍게도 수가 더 적은 니카로스 군이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하. 역시 놈들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나 보오."
어떻게 보면 연합군에게 딱히 좋은 징조는 아니었지만, 이스마트는 우르드 토후국의 대표와 달리 침착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니, 단순히 침착한 수준을 넘어 아예 묘한 웃음기까지 담겨있었다.
참으로 기꺼웠으니까.
"무자파르 공."
그렇기에 이스마트는 곧바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이스마트 공."
이스마트의 부름에 곧 한 사내가 다가왔다.
풍성한 수염과 친근한 인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중년의 남성. 무자파르.
아직 노인이라고 불리기에는 한참 이른, 여전히 정정해 보이는 그의 오른손에는 기다란 지팡이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공께서 수고를 해주셔야 할 것 같소."
"하하, 수고라뇨.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지요."
무자파르는 넉살 좋게 허허 웃었다.
그렇다.
총 네 개 토후국이 뭉친 반(反) 니카로스 연합.
그리고 자타공인 그 중심이자 맹주로 인정받는 마르딘 토후국.
그렇다면 어째서 마르딘 토후국이 한 치의 이견도 없이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당연히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다.
이스마트의 아버지인 현 에미르가 오랜 세월 쌓아온 개인적인 명성과 신뢰가 두터웠기 때문에.
오랜 난세 끝에 수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수많은 월광교 토후국 중에서도 그나마 마르딘 토후국의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 역사만큼이나 이 일대에서는 가장 충실하고 강건한 군대를 보유 중이기 때문에.
이처럼 뭐라 하나라고 단언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적어도 쐐기를 박는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의, 특별한 이유가 하나 더 따로 있기는 했다.
그게 바로 무자파르.
마르딘 토후국의 유일한 왕실 마법사.
일시적인 계약 관계가 아니다.
금전적인 이유로 잠시 무력을 판 용병이 아니다.
오직 마르딘 토후국에만 충성을 바치는 전속 마법사.
마르딘은 이 변방에서 극히 드물게도 그 강렬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토후국이었다.
따라서 그의 존재는, 곧 마르딘 토후국이 지닌 번영과 힘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믿고 있겠소."
"그래도 너무 그렇게 부담 주시지는 마시지요. 심장이 괜히 두근두근합니다. 애초에 전장은 저의 주 무대가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당사자는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자파르는 조금 어색하다는 듯 괜스레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수계(水系) 학파.
마법사 무자파르가 수학한 학파의 이름.
그 이름 그대로 수계 학파는 자연의 일부인 물을 중점으로 공부하고 모방하며 다루는 학파였다.
그렇기에 그 존재만으로도 인간의 삶과 국가 대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인재라고 평가받을 수 있었지만, 반대로 원소 자체의 직접적인 살상력이 떨어지는 만큼 전쟁이라는 분야에서만큼은 다소 활약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그도 어디까지나 다른 원소의 마법 학파와 비교한, 상대적인 이야기일 뿐이었지만.
무자파르의 성정과 엄살을 이미 익히 알고 있던 이스마트는 그저 픽 웃을 뿐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무자파르 공에게만 모든 걸 맡기지는 않을 테니까."
고작 물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평가절하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그렇다고 상식을 깨부수고 자연법칙을 뒤흔드는 마법의 위력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굳이 직접 목숨을 거두지 않아도 괜찮다.
적군의 발밑에 순식간에 늪과 개천을 만들 수도 있다. 땅을 진흙투성이의 진창으로 만들 수도 있다. 적들의 머리 위에만 폭우를 쏟아내고 시야를 가릴 수도 있다. 전장 한복판에서 추위에 벌벌 떨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만 하면 나머지는 범속한 인간들이 모여 만들어진 아군의 군대가 전부 마무리 지을 테니까.
그리고 마르딘 군은 그를 능히 해낼 수 있을 만큼 우수하고 자랑스러운 병사들을 지니고 있으니까.
지금 이곳에 남아있는 연합군은 그 마르딘 군의 병사들이 주축이 되고 있으니까.
"자, 그러면 우리도 슬슬 작전을 개시하겠소."
"알겠습니다. 우리 우르드 군도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마트는 전군에 당당하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망설임을 지니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이 정도만으로 벌써 승리를 확신하지는 않는다.
마법사의 존재가 확고한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얼마 전 아르잔 토후국이 여실히 증명 당했지 않은가.
'그리고 아르잔 토후국을 상대로 그 사실을 증명한 게 바로 니카로스 군이고.'
지금 그가 마주한 적에게는 그만한 저력이 있다.
비록 그 당시 니카로스 군의 돌파를 주도하던 기사단과 용병대는 이곳에 없지만, 적어도 니카로스 남작이 마법사의 이름값 따위에 무력하게 무너지고 도망가지 않을 것 정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스마트는.
야망이 가득한 변방의 한 젊은이는.
그저 각오를 다졌을 뿐이다.
강적과 맞서 싸울 각오를.
그리고 이길 각오를.
살벌한 웃음과 함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이스마트 공!"
이 직후 펼쳐질 상황은 아직 각오하지 못했다.
전장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단순한 비유가 아닌, 실제 현실로서.
***
나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월광교 연합군을 똑바로 바라봤다.
대략 1,600명.
상당히 많다.
게다가 딱 봐도 상당히 훈련이 잘 되어있다.
'여러 가지 각자만의 특색과 강점이 있긴 할 테니 정확한 비교까지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평균치만 보면 시하브나 아르잔보다도 훨씬 더 나아 보이는걸.'
과연.
몇 가지 희박한 확률만 뚫는다면 여기 동방의 패자(霸者)가 될 만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마르딘 토후국답다.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아.
그에 비해서 우리 쪽은 어떤가.
슬프지만 나에게도 눈이라는 게 달려 있다.
1,200명.
키로스 경은 별동대를 이끌고 떠났다.
니카로스의 자랑, 검은 매의 기사단도 따라갔다.
아득바득 끌어모은 용병대도 그쪽에 딸려 보냈다.
내 땅을 지키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고, 전반적으로 우리 전력이 4국 연합보다 부족한 만큼 눈물을 머금고 그런 결단을 내렸지만, 솔직히 결단 내린 내가 생각해봐도 너무 과하게 무리하지 않았나 싶다.
뭐 내 손에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그야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랬지.
그리고 안 그래도 때마침.
"영주야."
그 '그만한 이유'께서 나를 향해 다가왔다.
바할리아 제국의 동쪽 국경을 지키는 방패이자.
명실상부한 상위 귀족인 백작 작위의 보유자이자.
맨땅에서부터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지도자이자.
인격적으로도 그야말로 티 없이 무결한 나를.
감히 '영주야'라는 말도 안 되는 호칭으로 부르는 자.
이 세상에 그런 정신 나간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오오, 우리의 니카로스의 자랑스러운 영지 마법사님께서 저를 부르셨군요. 소인, 백작 티베리오스, 이곳에 대령했나이다."
"...뭐 잘못 먹었어? 말투가 왜 그 모양이야? 전투 앞두고 총사령관이 이 모양 이 꼴이어도 되는 거야?"
그리고 애석하면서도 기쁘게도.
그런 정신 나간 사람이 나의 영지 마법사다.
그래.
발레리아 트리하스.
"그럴 리가요. 저는 지극히 정상이랍니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진짜로 더 심각해 보이는데."
"하하, 사실 전부 이번에 첫 전장을 앞두고 떨고 계실 발레리아 씨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저의 가벼운 장난이었습니다. 이제 오해가 전부 풀리셨으니 마음껏 감사하셔도 됩니다."
"...재수 없네."
전반적으로 헛소리만 가득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이야기가 아예 포함되지 않은 건 아니다.
'정말로 발레리아의 두 손이 떨리고 있긴 했거든.'
그래.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 일평생을 제국 수도에서 살며, 그나마 지금 시대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 중 하나인 아카데미에서 막 졸업해 나온 발레리아다.
그런 그녀가 이제 첫 전장을 겪는데 긴장을 안 할 리가 없다.
'그게 어떤 의미의 긴장인지는 애매하지만, 어쨌거나 어깨에 너무 힘이 과하게 들어가는 건 좋지 못하지.'
그러니까 정말로 그걸 완화해주기 위해 그런 것이다.
원래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어깨에 조금 힘을 빼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 법이니까
실제로 발레리아는 내 헛짓거리를 코앞에서 직관하고 어이가 없었는지, 바람 빠지는 한숨을 내뱉었다.
적어도 두 손을 더 떨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마움을 잊은, 배은망덕한 발레리아는 감사 인사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어쨌거나, 사실 말이야. 나 조금 상당하게 짜증이 나 있던 상태였거든."
"짜증이요?"
"응. 기껏 이 먼 곳까지 왔는데 회담이니 뭐니 하면서 하릴없이 대기만 했잖아. 짜증 안 날 수가 없지."
그렇게 말하는 발레리아의 오른손이 어느새 화르르 타오르고 있었다. 떨림이 있던 자리를 대신 불꽃이 채우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어떻게든 결론이 나와서 속이 시원하긴 해."
"하하, 그거 다행이네요."
"그래서 하나 궁금한 게 생겼어."
이 결론, 처음부터 네가 다 의도했던 거야?
발레리아는 그렇게 물었고,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째 이 질문을 묘하게 자주 들은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그 기분 그대로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과연 어땠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입을 삐쭉 내밀고 툴툴거릴 것 같다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그러지 않고 그저 나와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할 뿐이었다.
"대답해주기 싫으면 안 해줘도 돼. 어차피 딱히 중요한 건 아니니까."
하긴.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발레리아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뭘 하면 되나요, 영주님?"
존경심이라고는 일말의 부스러기도 담기지 않은 그 영주님이라는 호칭.
자연스레 내 입꼬리가 더 위로 올라갔다.
그래, 나는 준비된 인재니까.
당연히 그 대답 역시 준비되어 있지.
발레리아가 왜 '그만한 이유'인지.
내가 왜 믿고 맡기던 주력들을 다 파견 보낸 건지.
대체 무슨 자신감과 그냥 한 판 붙자고 선언한 건지.
이 결론이 결국 왜 의도된 것인지.
그 모든 의문에 대한 답 또한 이 말에 담겨있다.
"싹 다 태워버리세요."
그 대답에.
발레리아는 결국 더는 숨기지 못하고.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087. 전쟁의 불 (2)
첫 시작은, 연합군의 우익이었다.
먼저 위풍당당하게 연합군을 향해 진군을 개시한 니카로스 군. 그리고 절대로 그따위 만용에 밀리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맞돌격을 감행한 연합군.
따라서 결과적으로, 서로는 오직 서로만을 향해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들었다.
당연히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다면, 그 끝에 남을 수 있는 건 오직 충돌이란 결과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다시 당연하게도.
군대가 서로 충돌하면 피와 살점이 튈 수밖에 없었다.
병사라는 이름의 사람이 죽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그런 걸 두려워하는 자는 없지.'
애석하게도.
적어도 선택권이라는 걸 지닌 인간 중에서는.
"...."
따라서 무자파르, 마르딘 토후국의 왕실 마법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신중하게 주문만을 외기 시작했다.
마력이라는 이름의 거대하고 신비한 힘이 서서히 그의 주위를 가득 채워 내고 있었다.
전장에서 마법사의 역할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특히나 첫 충돌이 머지않은 순간이라면 더욱더.
전투란 본디 기세의 겨룸이나 다름이 없다.
칼을 든 대다수 인간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진다.
그 기세라는 것은 일종의 흐름이자 줄기다.
'그리고 그 줄기의 뿌리는 첫 교전에서 시작되지.'
무자파르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무엇보다 절묘한 시점이었다.
양군의 충돌보다 늦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이르지도 않게.
'정확히는 충돌 직전, 병사들을 당황에 빠뜨리면서 적 지휘관에게는 대응할 여유를 주지 않는 바로 그 시점.'
지금 그가 해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수계 학파의 하위 마법, '이소의 수렁'... 바닥을 진창으로 만드는 것 정도면 첫 시작으로 적절하겠지. 전황이 어찌 흘러갈지 모르니 마력의 여력은 남겨놔야 해.'
전쟁.
사실 자신 있는 분야는 아니다.
좋아하는 분야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잘하지 못할 분야라는 것은 또 아니다.
무자파르는 개인적으로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시대는 격렬하게 전쟁을 탐하고 있었으니까.
그 역시 한 사람의 마법사로서, 이미 수차례 전장을 경험한 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평화를 사랑하던 중년의 마법사는, 침착하게 마음을 달래며 각오를 다졌다.
애초에 망설임 따위의 감정은 이곳에 온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변이란 것은.
"마력...?"
언제나 순식간에 찾아오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경험 많은 마법사라 할지라도 지금만큼은 조금이나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어째서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도저히 부정할 수 없게도.
맞은 편 니카로스 군이 위치한 곳에서도 거대한 마력의 파동과 요동이 느껴졌으니까.
'이건...!'
한 사람의 원숙한 마법사로서 이걸 헷갈릴 수는 없다.
이 흐름은 오직 단 하나만의 사실을 의미한다.
그 결론이, 무자파르의 뇌를 빠르게 가르며 내달렸다.
동시에 그의 입도 함께 움직였다.
"이스마트 공!"
적에게도.
"니카로스 군에게도 마법사가 있습니다!"
전쟁을 위한 마법사가 있다.
순간적으로 당황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을 잊지는 않았다. 무자파르 최대한 신속하게 이스마트, 연합군의 총지휘관에게 이 중대한 사실을 전달하였고, 그의 대답을 듣기보다도 먼저 곧바로 대응부터 준비했다.
'적군에게도 마법사가 있다면 한가롭게 하위 마법이나 외울 때가 아니야...!'
흔히 초인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그리고 그게 또 아예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법사가 정말로 완전무결한 만능의 존재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마법이라는 이름의 기적을 구현하는 일에는 마력이 필요했다. 마력이란 또 다른 형태의 생명력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한 사람의 마법사가 짧은 시간에 펼칠 수 있는 주문에는 한계가 있었다.
마치 격렬한 운동 끝에 숨을 몰아쉬듯, 마법을 연속으로 펼칠 수도 없었다.
결국, 세상 모든 게 다 그렇듯.
마법 또한 한정된 자원의 얽매인 결실이란 것이었다.
따라서 마법사와 마법사 간의 대립은 무엇보다도 신중해야 했다. 자신도 상대방도 모두 똑같이 한정된 자원을 지니고 있었다. 정확한 자원의 양은 다를 수 있어도, 바닥이 존재한다는 본질만큼은 공유했다.
그렇기에 그 대립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더없이 효율적인 판단이 필수적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내 쪽이 조금 더 빨랐어.'
마법을 위해 마력을 모으고 사용하는 데에도 시간이 든다. 이 긴박한 순간에는 시간조차도 자원이었다.
적어도 선제권은 자신에게 있다.
무자파르 순간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뭣...!"
아니, 순간 그렇게 오판을 내렸다.
적 마법사가 펼친, 분명 자신보다 뒤늦게 시작된 요동치기 시작한 마력의 흐름이 순식간에 형태를 갖춰간다.
그리고 마치 그 완성의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려왔다는 듯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실체를 지닌 현상이 되어 현실에 현현한다.
마법이 펼쳐진다.
그 현상의 형태는 붉은 화염(火焰).
연합군의 우익을 불태우는, 거대한 불의 소용돌이.
화염 학파의 중위 마법.
'단풍나무'.
용맹하게 돌진하던 연합군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른다.
심장 속에 공포가 심어지고 퍼져 내려간다.
굳건하던 그들의 두 다리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토록 자랑스럽던 군의 대열에 균열이 생긴다.
그 광경을 보고 무자파르는 으드득 이를 악물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마치 전부 참사가 자신의 미숙에서 비롯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대국적으로 보면 놈의 실책일 뿐이야...!'
그래,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다.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다.
전부 인정하겠다.
흠잡을 데 없이 능숙한 솜씨다.
무척이나 신속한 현현 속도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미숙하다.
'마법사와 마법사 간의 대립 중에, 고작 병사들 따위에게 신경이 팔려 그렇게 큰 규모의 마법을 쓰다니.'
이렇게 되면 당연히 무자파르로서는 견제하기 더 쉬워진다. 유리해진다.
게다가 적이 펼친 것은 화염 학파의 마법.
무자파르가 수행한 것은 수계(水系) 학파.
물론 전장에서 화염 학파의 마법만큼 효과적인 마법은 없다. 원소 자체의 살상력도 뛰어날뿐더러 불에 대한 공포는 모든 생물이 본능적으로 지닌 것이니까.
게다가 학파와 학파 사이에 명백한 우열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 마법학계의 정론이었다.
하지만 우열은 없어도, '상성'만큼은 존재한다.
'수계 학파의 마법이라면, 최소한 답은 있다.'
당연히 일방적으로 압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당연히 불가능한 일도 아닐 뿐이다.
만약 바위나 바람 따위를 다루는 마법사였다면, 저 불길한 불기둥을 제압할 방법을 찾기 위해 큰 곤란을 겪어야 했겠지. 무엇보다 주위에 자칫 잘못하다 휘말릴 수 있는 병사들이 가득하니까.
하지만 수계 학파라면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굳이 형식화된 마법을 펼칠 필요도 없다.
그저 그에게 가장 익숙한 물이라는 원소의 기운을 담아, 그냥 마력만 때려 박아도 충분하다.
오히려 이게 마력의 측면에서 가장 효율적인 대처다.
'불길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이어지는 놈의 마법도 전부 차단한다. 놈의 마력이 전부 고갈될 때까지. 그렇게 적 마법사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제압당하는 광경을 전 병사에게 과시하고, 내 마법을 펼쳐 나의 건재함은 알린다. 그렇게 적군에게 절망감을 준다.'
그래, 이게 바로 정석적인 마법사 간의 싸움이다.
니카로스 군의 마법사는 그 점에서 미숙했다.
개인적인 솜씨는 뛰어나 보였지만, 전장이라는 환경에 너무나도 무지했다. 애초에 전쟁이라는 것은 개인의 힘만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설령 마법사라고 한들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건 무자파르의 상식이었고.
동시에 이 세상의 상식이었다.
"뭐, 뭐야...."
적어도 바로 직전의 순간까지는.
무자파르가 마력을 쏟아붓는다.
적의 마법을 차단하려고 한다.
저 끔찍한 불기둥을 지워버리고자 한다.
화마를 진압하고 병사들을 살리고자 한다.
그런데.
그게 안 된다.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불과 물의 관계를 실제로 증명하듯, 무자파르가 마력을 쏟자 불기둥은 조금씩 작아졌다. 마력의 수증기가 자욱하게 퍼지며 타들어 갈 뻔하던 병사들의 몸 또한 식혀주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 모든 고무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불기둥, 화염 학파의 중위 마법 '단풍나무'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저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는 듯.
다시금 서서히 몸을 부풀렸다.
연합군 병사들의 비명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아, 아니...! 도대체 어째서...!"
무자파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눈으로 보고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뀌는 것은 없었다.
"도대체 어째서!"
그래, 그는 실수하지 않았다.
크게 틀린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올발랐다.
그래도 굳이 무자파르의 실수한 부분이 있었다면.
단 하나.
"...!"
그가 상대 중이던 니카로스 군의 마법사는
작열(灼熱)이었다.
작열의 발레리아.
오직 그게 전부였다.
***
그리고 그 순간.
지금 전장의 화염을 지배하는, 타오르는 모든 걸 다스리는 발레리아 트리하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물론 주문은 외우고 있다.
마법도 펼치고 있다.
아무리 첫 전장이지만 해야 할 것은 잊지 않는다.
그녀의 손끝에서 솟구친 불길이 적진을 휩쓸고, 병사들의 비명과 혼란 속에서 모든 것을 집어삼켜진다. 모두가 그녀가 의도한 대로 펼쳐졌다.
그렇지만, 그리고 그렇기에.
그녀의 눈은 멍한 듯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 여러분들은 언제나 '불의 길'을 걷는 인재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품어야 합니다.
불의 길.
화염 학파의 또 다른 이름.
머릿속에 그녀가 강의를 듣던, 화염 학파의 옛 교수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석은 무지렁이들은, 단순히 그 이름만 보고 말도 안 되는 편견을 지니곤 합니다. 야만스럽다거나, 오로지 살상에만 도움이 된다거나.
맞는 얘기였다.
심지어 같은 마법사임에도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한, 비(非) 화염 학파의 인간들까지 종종 있었다.
- 그거야말로 진정 야만스러운 발언이죠. 불은 단순한 무기가 아닙니다. 불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그 무엇도 보다도 강력한, 일종의 '힘'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 이 자연의 모든 건 바로 그 힘을 통해 순환하고 돌아가죠.
이것은 진리였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조차 아직 거스르지 못한.
- 알겠습니까? 우리는 그 힘을 다룰 수 있는 자들입니다. 비록 여전히 마력 변환의 효율이 높지 못하다는 문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우리에게는 오직 그 문제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열성적인 교수님이었다.
제법 들어줄 만한 강의를 한 교수님이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그녀는 이런 기억까지 가지고 있었다.
- 저는 감히 말하건대, 그 문제만 해결된다면 이 위대한 제국이, 인간의 문명이,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던, 그 무엇보다도 거대한 진보를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 세상에는 굶주리는 자들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갈등을 모조리 종식할 수 있는 그런 진보 말입니다.
발레리아는 떠올렸다.
- 우리가 걷는 '불의 길'은 그만큼 위대한 길입니다.
그래.
'그때 이 말을 듣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더라.'
그 당시에는 꽤 괜찮다고 여겼던 것 같다.
어찌 보면 낭만적이기도 했다.
아마 그러니까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는 거겠지.
적어도 자신이 일평생 배워왔던 것이 마냥 마냥 투박한 살상 도구라고 평가받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랬지.'
그리고 그 순간, 발레리아의 정신은 전장으로 돌아왔고, 그녀의 손끝에서 새로운 불길이 피어올랐다.
적 마법사가 물줄기로 반격했지만, 발레리아의 화염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시야를 가렸고, 그 틈을 타 그녀의 불길은 다시 적을 삼켰다. 불꽃은 대열을 무너뜨리고 방패를 녹이며 전장을 지배했다.
병사들은 불길에 밀려 혼비백산한다.
적 마법사가 그 앞에서 서서히 무릎을 꿇는다.
"아."
발레리아의 미소가 진해진다.
그녀의 불길이 전장의 모든 것을 태우며 커져간다.
마지막 화염이 공중에서 터져 적군을 완전히 삼키던 순간, 적군 모두 그녀를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렇구나."
이제는 알 수밖에 없었다.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단호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교수님, 미안하지만 교수님 말은 틀렸어요.'
불은.
그저 무기였다.
더없이 완벽하고 이상적이며 아름다운.
마침내 인간을.
군대를 불태우며.
발레리아 트리하스.
미친 발레리아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작열(灼熱).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진정 깨달았다.
#088. 전쟁의 불 (3)
전장에서.
"하."
자신의 두 눈에 똑똑히 박히는 광경에, 연합군을 지휘하던 이스마트는 그만 웃음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니카로스 군 또한 마법사를 지니고 있었다.
그 화염 마법사가 연합군을 불태우고 있다.
아군 마법사 무자파르는 전혀 제압을 못 하고 있다.
그야말로 충격의 연속이었다.
물론 니카로스 군이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을 아예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니카로스는 최근 전쟁 마법사를 직접 상대하고 겪어봤으니 필요성을 느낄 개연성은 충분히 있었고, 무엇보다 이번에는 공작령 차원의 지원군도 있었으니까. 거기에 마법사 한 명이 몰래 숨어있었다고 해도, 엄청나게 놀랄 일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설마 이 정도로 끔찍한 상황이 펼쳐질 줄은 몰랐다.
무자파르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다.
그는 입버릇처럼 자신은 겨우 평균에 턱걸이하는 수준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그리고 그게 마냥 이유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 마르딘 토후국에 헌신하며 수많은 경험을 쌓은 그의 실력은 고작 그 정도로 쉽게 치부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 수계 학파의 마법사 무자파르가, 화염 마법사 하나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있다.
정말로 이 광경만큼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군의 전력은 압도적이었다.
방심하지는 않았어도, 승산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니카로스 남작의 저력은 진정해도, 도전하는 쪽은 남작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 도전을 방어하는 쪽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도전하는 쪽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
이스마트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일단 표정을 억눌렀다.
"이, 이스마트 공...!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어쩌면 지금이라도 후퇴를...!"
바로 곁에서 똑같은 광경을 보고, 똑같이 상황을 이해한 우르드 토후국의 대표가 말까지 더듬으며 그렇게 입을 열고 있었으니까.
그는 이미 반쯤 넋을 잃은 상태였다.
그 심정이 아예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적의 전력을 오판한 건 총사령관으로서 무척이나 뼈아픈 실책. 확실히 반성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와 절망에 매달릴 시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스마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후퇴? 아니, 그럴 수는 없소."
"이스마트 공!"
후퇴?
그래, 당연히 떠올릴 수 있는 결론이다.
아군이 실시간으로 무너지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후퇴를 시도하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될까?'
답이야 뻔하다.
물론 눈앞의 니카로스 군은 느려터진 보병뿐이고, 뒤로 조금만 물러나면 곧바로 월광교 연합의 영토이니, 후퇴 자체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겠지.
하지만 후퇴에 성공해도 문제다.
여기서 연합군의 본대가 후퇴한다면 이 일대에는 니카로스 군의 본대, 니카로스 군의 별동대, 연합군의 별동대만이 남게 된다.
'그렇다면 그 규모는 대략 1,200명 대 1,900명.'
본대가 빠진 연합군 쪽이 1,200명이다.
따라서 그럴 경우, 그나마 병력의 규모가 압도적이라는 게 가장 큰 이점이던 연합이 그마저도 상실해버린다.
연합군의 본대가 물러나는 즉시, 별동대는 니카로스의 전군에 의해 양쪽에서 포위당할 것이다. 전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 연합은 파멸뿐이다.
니카로스를 견제할 무력조차 반 토막 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할 테니까.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이스마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마치 비명과도 같은 우르드 토후국 대표의 물음.
솔직히 이스마트는, 참으로 뻔한 걸 물어본다고 생각했다.
"돌격을 감행해야 하오. 방법은 그것뿐이오."
"이, 이스마트 공!"
우르드 토후국의 대표가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이스마트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결코 대책 없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결론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충격적인 열세에 몰리긴 했지만, 사실 침착하게 계산해보면 기본적인 전세 자체가 바뀌지는 않았다.'
물론 그 영향이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대놓고 커다란 불기둥이 군의 일부를 태우고 있으니 병사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다. 화마에 직접 영향을 받지 않는 자들도 그 시각적 충격만으로 공포에 질리고 있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하면 그뿐.'
적의 마법을 진압하려던 무자파르의 시도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실패한 것은 또 아니다. 분명 불기둥은 조금이나마 작아졌고, 그 크기를 크게 키우지도 못했다. 무자파르는 확실히 불기둥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저 끔찍한 불기둥도 조금 크기만 클 뿐, 일개 점 하나에 불과. 시각적 충격과 비교하면, 사실 실제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그리 넓지 않다.
'물론 그럼에도 많은 이가 죽겠지만.'
애초에 전쟁은 많은 이가 죽는 것이다.
따라서 당장 통제하기 힘든 건 우익 정도뿐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중앙과 좌익도 무너질 테지만, 적어도 아직 그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다.
'그리고 니카로스 군은 여전히 징집병투성이일 뿐.'
이 또한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병력의 수도 열세고, 질도 그리 우세하지 못하다.
여기까지 셈이 됐다면 결론이야 명확하다.
'돌격.'
당장 최대한 빠르게, 정예병을 중심으로, 적의 총지휘관인 남작을 목표로, 니카로스 군을 일점 돌파한다.
정면승부.
전쟁.
이것만이 유일한 답이다.
"도, 돌격이라니...!"
우르드 토후국의 대표는 여전히 침착함을 되찾지 못하고 그저 떨고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이 모든 걸 여유롭게 설명해줄 시간은 없다.
이스마트는 이제 그 바보는 내버려 두고, 당장 필요한 명령부터 하달했다.
지금 그가 믿고 부를 사람은 따로 있었다.
"기병대장! 지금부터 내가 이끄는 중앙을 중심으로 적을 향해 돌파한다! 기병대는 적의 측면과 후방을 노려라! 놈들의 전력을 분산시킨다!"
"알겠습니다, 이스마트 공!"
기병대장.
마르딘 토후국의 '하얀 들소 기병대'의 지휘관.
니카로스는 언제나 자신들의 '검은 매의 기사단'이 일대에서 가장 정예한 기병대라고 자부하는 모양이지만, 이스마트는 그 오만한 발언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마르딘 토후국 역시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초원의 주민들. 그리고 그런 그들이 가장 아끼고 자랑하는 '하얀 들소 기병대'.
바로 그들이 있었으니까.
"믿고 맡기겠소."
그러니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현재 연합군 본대가 보유하고 있는 기병의 수는 대략 100명 정도. 압둘라흐 장군의 별동대가 약탈을 목적으로 비슷하게 거의 100명가량을 데려가서,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
연합군의 총규모를 생각하면 다소 아쉬운 숫자지만 그래도 크게 부족하지는 않다. 그들 또한 초원의 전사이자 일당백의 용사. 월광교의 기병대는 결코 임무를 포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명령과 함께, 당장 이스마트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이스마트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생각 따위는 전무했다.
"시간이 없다! 돌격한다! 놈들은 한낱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제국의 개들을 용서하지 마라!"
단 한 번의 호령으로.
연합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것은 일종의 장관이었다.
돌파의 중심은 마르딘 군.
그들이야말로 이스마트가 믿는 수족들이었고, 이 긴박한 순간에 무리해서 두 국가의 군을 섞는 건 지나치게 위험했다. 우르드 군은 뒤를 받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기에 그 마르딘 군의 중심에서.
그리고 서서히 선봉과 가까워지면서.
표정 관리를 해야 할 우르드 토후국의 대표가 서서히 멀어지는 상황에서.
"하."
마침내 이스마트는 표정을, 미소를, 웃음을.
더는 억누르지 않았다.
"하하!"
지금까지 참느라 너무 고생했으니까.
그래, 안다. 다 안다.
자신의 군단이 끔찍한 위기 상황에 빠져있다.
일반적으로는 웃을 상황이 아니다.
상식에 어긋난 행위다.
"니카로스 남작."
하지만 그게 웃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그야 웃음은 본디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고.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그 웃기는 인간이.
그자가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그 이유면 충분했다.
그렇기에 이스마트는 더욱 진하게 미소지었다.
"내가 앞장선다! 마르딘의 자랑스러운 전사들이여! 자손들이여! 나를 따르라! 나 역시 결코 단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을 터이니 그 목숨, 고귀한 마네스를 위해 바쳐라!"
"마르딘을 위하여!"
"마네스를 위하여!"
총사령관 이스마트가 선창하고, 그 뒤를 마르딘의 전사들이 이으며, 그 마지막을 일반 병사들이 외친다.
그들 또한 보고 있다.
가장 위험한 곳에서, 이곳에서 가장 고귀한 자가, 가장 앞장서서 돌격하고 있는 것을.
그 광경 자체가 호소력을, 묘한 마력을 만들어낸다.
마법이 아닌, 인간의 심장을 건드는 힘을.
무너져가던 연합군이 다시 규합되고, 용맹하게 전진한다. 니카로스 군을 향해 달려든다. 거리가 빠르게 좁혀진다.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충돌한다.
두 군대가 서로 맞붙고 창칼이 오가며, 피가 튄다.
니카로스 군의 저항은 거셌다.
단순한 징집병 집단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용맹하게 맞서 싸우며 저항했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더 강하다!"
하지만 연합군 역시, 마르딘 군 역시 멈추지 않았다. 거센 저항에도, 아군의 일부가 여전히 불타고 있음에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아직 이곳에 있다! 두려워 마라, 마르딘의 자식들이여!"
그들의 지도자가 그 군대라는 창칼의 날 끝이 되어 아직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이스마트.
마르딘 토후국의 장군, 왕자.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수없이 전장에서 마르딘의 위대함을 직접 증명시킨 자.
분명 그에게는 권위와 힘이 있었다.
"장군님을 혼자 두지 마라! 고귀한 마네스 앞에 부끄러움을 보이지 마라!"
연합군은 멈추지 않는다.
두 집단이 충돌하는 와중에도 멈추지 않으니 상대편은, 니카로스 군은 분투함에도 조금씩 밀려날 수밖에 없다.
서서히 길이 뚫린다.
그리고 보인다.
저 먼 곳에.
니카로스 남작이 있다.
자신을 보고 있다.
"하!"
두려움은 조금도 없었다.
니카로스 군 마법사의 불길에도 연합군은 아직 버티고 있었다.
무너짐이 아예 멈춘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직은 버티고 있었다.
아군 마법사 무자파르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불길이 더 커지지 못했다.
후방 교란과 적 전력 분산이라는 임무를 맡은 하얀 들소 기병대도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후방의 우르드 군도 충분히 버텨주고 있었다.
니카로스 군도 연합의 예리한 돌파에 점차 밀려나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이건 누가 더 오래 버티냐의 시간 싸움이었다.
그렇기에.
'승산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스마트는 한 발 더 내디뎠다.
니카로스 남작이 있는 방향을 향해.
"승리가 눈앞에 있다! 조금만 더 버텨라!"
적 총지휘관의 목을 직접 취하는 것.
위험하지만,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불길이라는 재앙에 쫓기는 있는 상황에서, 다른 방법을 기대할 여유 따위는 없었으니까.
도박이지만 동시에 이성적이고 명확한 전략.
그러니 이 상황에서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는. 알고 있었듯.
이스마트는 본디 이런 인간이다.
연합군이 점점 더 깊이 나아갈수록, 니카로스 군의 저항은 점점 더 거세진다. 징집병이 아닌, 잘 훈련되고 뛰어난 무장을 갖춘 병사들도 나타났다. 에우스페나 군인가. 점차 낙오되는 아군이 늘어난다. 이스마트의 몸에도 상처가 는다. 너무나 많은 피를 머금은 그의 칼날이 무뎌진다.
하지만 어느새 절반이나 왔다.
그리고 아직 더 나아갈 수 있다.
"전장의 영광을! 승리의 기쁨을!"
지금 연합군은 분명 승리의 활로를 열고 있었다.
도전자 이스마트는 어느새 훨씬 더 가까워진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를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존재하는 건.
마치 반갑다는 듯한.
웃음.
전투가 순식간에 끝을 향해 달려간다.
#089. 전쟁의 불 (4)
"...."
나는 아군의 중심에서, 서서히 가까워지는.
아니, 무척이나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는 연합군의 모습을 바라봤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솔직히 이렇게 될 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그래, 나도 눈이 있다.
우리 군의 약점은 나 역시도 이미 다 알고 있다.
발레리아의 충격적인 데뷔전으로 최대한 그 약점을 덮어보려고 했지만, 저쪽에도 조금이나마 발레리아를 견제할 수 있는 마법사가 존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이스마트'가 존재하는 이상, 허깨비 같은 공포만으로 군을 무너뜨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입맛이 쓰다.
왜 다 알고 있었음에도 굳이 이따위 도박을 했냐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애초에 도박을 안 하는 방법은 없었다고밖에 답할 수가 없다.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우리의 전력 부족이니까.'
뒤늦게 출발한 우리 별동대로 적 별동대의 약탈을 막기 위해서는 최대한 정예병만으로 부대를 구성해야 했다. 점령과 약탈은 다르다. 설령 미래를 위해 잠시 뒤로 밀려나 내 땅을 내어줄 수는 있어도, 나는 내 영토를 일방적으로 약탈당하는 것만큼은 용인할 생각이 없었다.
대국적인 승리와 내 영토의 안전.
나는 모든 것을 얻고자 했다.
'그저 그게 전부지.'
그래, 어쩔 수 없었어.
적은 무려 4개 국가의 연합이라고.
이걸 어떻게 전력으로 압도해.
오히려 꼼수로 여기까지 끌고 온 게 더 대단한 거야.
'좋아. 여기까지만.'
구질구질한 앓은 소리는 딱 여기까지 하자고.
'그래, 뭐. 발레리아의 마법을 통해 적군을 일방적으로 한 방에 무너뜨리겠다는, 그 시도가 나쁜 건 아니었어. 딱히 시도했다고 손해 본 건 없고. 얻은 것만 잔뜩 있으니까. 그리고 겨우 도박 하나에 실패했다고 다 끝난 것도 아니니까.'
플랜B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도박이 안 통하면, 견실하고 성실하게 이겨내면 될 뿐이다.
그리고 그거야말로 내 전문이고.
여전히 챔피언은 우리고, 저쪽은 챌린저일 뿐이다.
나는 다시 한번 나를 향해 돌진 중인 적군을, 이스마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들의 처지에서 생각해봤다.
일방적으로 공격 중인 적 마법사.
실시간으로 무너져가는 아군의 사기.
촉박한 시간과 부족한 기회.
마법사라는 전력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열악한 적의 본대.
기병대를 통한 후방 교란 및 전력 분산 유도.
적 본대를 돌파해 적의 요인을 잡는 게 승리의 유일한 해답.
'...이것 참. 어째, 어디서 본 것 같은 광경인데.'
딱 입장만 정반대인걸.
돌멩이에 얻어맞던 기억이 아주 새록새록이야.
'그렇다면 응당 결과도 정반대가 되게 해야겠지.'
나는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봐라! 저 불길을! 우리의 마법사가 적을 압도하고 있다! 위대한 기적이 우리를, 제국을 가호하고 있다! 니카로스를 위하여!"
"니카로스를 위하여!"
병사들 또한 우렁차게 소리친다.
아군에게든, 적에게든. 확실히 저 선명히 타오르는 불기둥만큼 병사들의 시야에 강렬하게 박히는 것은 없다.
비록 단박에 적군을 무너뜨리지는 못했지만, 애초에 그건 내가 양심이 없던 거다. 압도적 전력 열세의 구도를 뒤집을 수 있었던 건 상당 부분 그녀 덕이다.
물론 나머지 상당 부분은 내 덕이고.
'어쨌든, 진짜 발레리아 안 데려왔으면 어쩔 뻔했어.'
저렇게 마구 신나게 날뛰는 걸 보니 나중 뒷감당이 조금 두렵긴 하지만,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할 거다.
그래, 지금 중요한 건 시간은 우리의 편이라는 사실.
버티기만 하면, 한 번만이라도 적을 저지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각오를 다지는 와중에도 우리 병사들은 두 손에 꼭 쥔 창과 자기 자신의 몸뚱이를 통해 벽을 세우고 있다.
억지로 끌려온 징집병임에도, '어지간하면' 그 무엇도 등 뒤로 보내지 않겠다는 투지가 '살짝이나마' 느껴진다. 진심으로 자랑스럽다.
"역겨운 월광교 놈들이 돌파를 시도한다! 막아라!"
하지만 슬프게도 투지만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지는 않았다.
첫 충돌과 함께, 순수하게 징집병으로만 이루어진 아군의 선두, 첫 방어선이 먼저 무너진다.
아군이 분투했음에도 적은 오로지 길을 뚫기만을 바라며 계속 깊숙이, 깊숙이 들어왔다.
그 길의 끝은 바로 나를 향하고 있다.
솔직히 우리 병사들의 뜨거운 분투에도 불구하고, 이대로라면 나에게까지 적병이 도달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만 같다.
하지만.
"니카로스 백작을 지켜라! 가장 우월한 제국의 힘을! 에우스페나의 긍지를 보여라!"
내가 믿는 구석이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첫 방어선이 무너지자마자, 곧바로 우리 군 깊숙한 곳에서 징집병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튼튼하게 무장한 집단이 튀어나왔다. 그대로 적을 막아섰다. 사납던 적의 돌파에 제동이 걸렸다.
과연. 역시.
아폴로니아의 지원군.
에우스페나의 '동방개척자'.
그래, 나 역시 아는 이름이다.
아폴로니아가 처음 우리 니카로스에 이들을 데려왔을 때부터 알았다.
썩어빠진 현 공작령에서 그나마 가장 정예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
아폴로니아가 처음으로 속해있던, 그리고 나의 아버지 제논과 키로스 경 또한 한때 머물렀던 부대.
전대 에우스페나 공작의 동방 정벌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산증인들.
'아폴로니아가 이들을 지원군이라고 처음 우리 니카로스로 데리고 왔을 때는, 정말 진심으로 놀랬지.'
수천 시간 원작을 하면서도 에우스페나가 지원군을 보내는 일 자체를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심지어 다른 잡스러운 부대도 아닌 설마 '동방개척자'를 파견할 줄은 정말로 몰랐으니까. 나조차도 처음 본 광경이었다.
'사실 여전히 이해는 어려운 사실이지만.'
지금은 그저 든든하게 즐겼다.
다행히도 그들은 이름값을 했다.
참으로 고마울 정도로, 내 기대보다도 훨씬 더 잘 싸워주고 있었다. 우월한 무장과 부족하지 않은 실력을 자랑하며 철통같은 방패가 되어주었다. 그 방패에 돌파의 창날이 조금씩 무뎌진다.
'이대로만 가면, 우리의 승리다.'
하지만 적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여전히 믿는 구석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놈들이 후방을 노린다! 기병대다! 경계하라!"
우리를 뒤흔들고자, 연합군의 기병대가 측면과 후방을 노린다. 그 말 탄 전사들은 자신들보다 압도적으로 수가 많은 우리를 향해서,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돌진했다.
한눈에 알 수 있다.
저건 쉬이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마르딘 토후국의 '하얀 들소 기병대'.'
우리 검은 매의 기사단에 버금가는, 마르딘 토후국이 가장 아끼고 자랑하는 정예 경기병대.
나는 안다.
수가 많지는 않지만, 그 저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 믿음직한 기사단이 했던 일들을, 저들 역시 그대로 할 수 있다.
"...."
동방개척자가 형성하던 방어벽조차 얇아진다.
적의 돌파가 다시 더 거세진다.
아니, 거세진다는 표현보다는.
'아직도 끈질기게 남아서 나를 노리고 있다.'
실제로 그토록 거센 저항에 수많은 낙오자가 발생했음에도 거의 다 왔다.
몇 명이나마, 적병이, 내 눈앞에.
그곳에는 놀랍게도 이스마트 또한 존재했다.
'그래, 너도 아는구나. 역시 그 방법밖에 없었지.'
스스로 직접 나서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긴박한 순간에, 여기까지 돌파에 성공해내기 위해서는 말이야.
이 기묘한 공감대.
과거 나의 모험이 성공했듯.
이스마트 또한 정말로 거의 다 도착했다.
그 수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제국 기사에 버금가는, 진정한 연합군의 최정예들이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전진했다. 거센 저항에 쓸려나갈지언정, 자신의 두 발로 스스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영주님!"
그리고 그런 그들조차도 이제는 태반이 쓸려나갔을 무렵.
"...!"
마침내 나와 이스마트의 시선이 마주쳤다.
가깝다.
팔을 뻗고, 검을 쥔 채 길게 뻗고, 서로 세 발자국 정도만 앞으로 걸으면, 두 검 끝이 닿을 정도로, 가깝다.
'아쉽네. 거의 다 막았는데.'
아깝다. 조금만 더 잘 풀렸다면, 여기까지 오는 걸 허용하지도 않고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따위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나는 오랜만에, 나의 창을 꽉 쥐었다.
심장이 터질 듯 아주 두근두근한다.
'그래, 이게 진짜 마지막.'
일종의 겨루기.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적 중 한 명이 이스마트보다도 먼저 나에게 접근했다.
어째 얼굴이 익숙했다.
'아, 그래.'
회담장에 봤던 이스마트의 호위다.
놈이 나에게 검을 휘두른다.
역시 그의 호위답게 솜씨가 훌륭하다.
"이놈! 보낼 수 없다!"
그리고 그걸 내 바로 곁에 있던 아르센 경이 막았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살벌한 소리가 내 귀를 때린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다. 기사와 전사가 물러섬 없이 서로의 숨통을 노렸다.
'고마워, 아르센.'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이스마트가 남았다. 그 호위가 시선을 끄는 사이 이스마트도 다가왔다. 여전히 그의 입가에는 살벌한 미소가 걸려있다. 아주 인상 깊다.
그리고 동시에.
'가깝다.'
나는 창을 들었다.
몇 합이나 버틸 수 있을까? 이길 수 있을까? 이스마트도 개인 무력이 나쁘지는 않았는데.
서살 굳이 내가 이길 필요는 없다.
버티기만 해도 곧 제압된다. 잠시 밀렸을 뿐, 여긴 우리의 병사들이 가득하니까.
그 버티는 게, 너무 쉽지는 않을 것 같다는 거 하나만 문제다.
너무 기사를 다 키로스 경에게 다 몰아줬나. 호위 역할인 아르센 말고도 몇 명은 조금 더 남길걸.
후회는 언제 해도 늦다. 그게 후회니까.
"그곳에 있었나! 니카로스 남작!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이스마트가 나에게 가까워지자마자 웃음을 터트리며 거의 포효하듯 내 이름을 부른다.
너무 열렬해서 두근거릴 정도다.
'나를 열렬히 불러주는 건 좋지만.'
이제 나는 남작 아니라 백작이거든.
그건 알아주길 바라.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놈이 내게 검을 휘두른다. 예리하고, 살벌하다.
이거.
생각보다도 더 막기가 쉽지는 않겠는데.
"아쉽군...!"
일단, 한 번은 막았다.
뼈를 울리는 진동에 두 손이 파르르 떨린다. 하지만 아직도 조금 더 버텨야 한다. 역시 생각보다 어렵다.
'어째 전쟁 때마다 하는 생각 같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더 열심히 검술 훈련할걸. 나름 한다고 했는데, 항상 실전에서는 부족함을 느낀다. 후회의 연속이다.
하지만 긍정적 태도를 잊지는 않는다. 그래도 서서히 밀려났던 우리 병사들이 다시 다가오고 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다시 한번 나의 창과 놈의 검이 부딪힌다.
꽉 쥔 두 손에서 피가 터진다.
그러나 놈은 여전히 검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억울해.'
똑같이 무기를 부딪치며 싸우는데, 어째 나만 손해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억울해도 상대는 봐주지 않았다.
다시금 놈이 검을 든다. 노리는 건 정확히 내 목이다. 검에는 담겨 있었다. 내 목 정도는 한 방에 베어낼 힘이.
"...!"
나 역시 다시 창을 들었다.
어찌 보면 반사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래, 계획은 있다.
또다시 도박이긴 하지만.
정면승부로도 승산은 있다.
우선 이 공격만 막고.
그 직후에는.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고.
"하."
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이건 평소처럼 내가 그냥 항상 짓는, 맥락 없고 실없는 웃음이 아니었다. 명백한 이유가 있는 웃음이었다.
웃음과 함께.
동시에 다시금 강렬한 쇳소리가 대기를 때렸다.
"아."
나는 단 한 순간도 눈을 감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걸 볼 수 있었다.
"역시, 이거, 아쉽군."
이스마트는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마침내 다가온 내 병사들이 그를 주위에서 창으로 겨누며 포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목을 노리던 그의 검은.
"괜찮으십니까, 영주님?"
흑발과 샛노란 눈동자를 지닌 소년.
레온이 자신의 검을 들어 막아내고 있었다.
아.
진짜.
고맙다.
내 동생.
레온이 이스마트의 검을 막은 동시에, 순식간에 우리 병사들이 내게 당도한다. 물러섬 없이 창을 들어 이스마트를 포위한다. 도망치거나 후퇴할, 조금의 틈도 없이.
상황은 참으로 명백했다.
말도 안 되던 저력을 보이던 연합군도 이제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이스마트는 나를 똑바로 보며 쓰게 웃었다.
"그대 승리일세, 남작."
그래.
내가 승리했다.
마땅히 그래야지.
#090. 올바른 방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