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올바른 방향 (1)
불타고, 불타고, 불탄다.
눈에 닿는 모든 것이 타오른다.
감히 자신을 억제하려 하는 물결이 있긴 하지만, 무의미하다. 불길은 꺼지지 않는다. 마땅히 태워야 할 것을 태운다. 비명이 두 귀를 가득 채운다.
어느새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다.
"아...."
사실 여기까지 오면서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영주가 한 말에 왠지 마음이 끌리긴 했다.
처음 도적 한 놈을 태웠을 때 뭔가 둑이 무너지듯 큰 감정의 파도가 심장과 뇌를 덮치긴 했다. 그렇기에 황립 아카데미의 우수한 졸업생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일개 남작령의 영지 마법사가 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모든 사실에도.
마음 한구석에 의구심은 남았다.
정말 영주의 말대로 이 변경이 최선일까?
전쟁 말고 다른 방향도 있지 않을까?
굳이 비상식적인 길을 가야 할까?
요즘 하는 사냥도 생각보다 재밌어.
잘 하면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기도 해.
건전하면서도, 합리적인, 마법사다운 방향이.
지금 다시 생각해도 자연스러운 판단이었고,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지금 이 상황이 되니.
정말 모든 게 허튼소리에 불과했다.
'차원이 다르다.'
그저 숲속의 짐승 몇 마리를 태워 잡는 것과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도적 하나를 태우는 것과는.
하나의 마법사가 휘두르는 초월의 기적.
그 하나를 이겨내지 못해 무너져 가는 군단.
그에 따른 압도적 비명, 압도적 향기.
'가장 순수한 불의 권능감(權能感).'
이것이었다.
오직 이것이었다.
이것만이 진정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점점 더 진하게 미소지었다.
더 크게, 더 뜨겁게, 더 격렬하게.
더 많은 걸 연료로 태워서. 모든 걸 다 태워서라도.
'설령 그 불타는 게.'
그녀 자신의 혼과 마음이 되더라도.
그렇게 그녀의 심장이 뜨거워지고 있을 무렵.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어떤 불길에도 개의치 않는.
"끝났습니다. 이제 그만 가죠."
익숙한 목소리.
어느샌가 익숙해진 목소리.
어째서인지 유독 가슴 깊은 곳까지 닿는 목소리.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곧바로 그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제법 엉망이 된 몰골로 서 있었다.
새까만 흑발의 머리와 황금빛 눈을 가진 사내가.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픽 웃으며 덧붙였다.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시죠. 다음이 또 있을 테니까."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 말에, 그녀의 정신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아, 응. 그래."
불이 꺼졌다.
불을 꺼뜨렸다.
전부 스스로.
"돌아가자, 영주야."
어째서인지 그렇게 대답함에도.
아쉬움은 없었다.
아마 이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그의 말을 믿어도 좋아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잘 모르겠음에도 그녀는 영주, 티베리오스 발란티스의 뒤를 따랐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이날, 그녀의, 발레리아의 혼과 마음은 여전히 불타지 않고 멀쩡했다.
***
전쟁이 끝났다.
나의 승리로.
나를 잡기 위해 우리 군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왔던 이스마트는 결국 아슬아슬하게 내 멱을 따는 데 실패했고, 응당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이던 그는 우리의 포로가 되었고, 적은 그대로 무너졌다.
그걸로 모든 게 끝났다.
그렇기에 그 치열했던 전투의 승리자이자 21세기 출신 자비로운 교양인으로서, 나는 이제 뒤처리라는 것을 해야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영주님."
"고생이라뇨. 진짜 고생은 아르센 경께서 하셨죠.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당장 해야 할 일은 상당히 많았다.
지원군의 책임자 아폴로니아와 이야기도 나눠야 했고, 우리 니카로스 군의 지휘관들에게 피해 보고도 받아야 했고, 지금까지 근처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을 집사장 아저씨도 챙겨야 했다. 부하들의 공적을 치하하고, 부상자와 사망자의 수습도 해야 했고, 아직 남아있는 적의 별동대 추적도 해야 했다. 먼저 떠난 키로스 경의 토벌대와 호응해서 앞뒤로 포위하면 그야말로 최고의 구도일 테니까.
하지만 당장 해야 할 그 여러 가지 일 중에서 내가 첫 번째로 고른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곧장 적군의 무장 해제와 격리만을 먼저 진행한 뒤, 슬슬 우리 진지 깊은 곳에 묶여 계실 한 사람을 만나러 갔다.
"이스마트 공."
마르딘 토후국의 왕자이자 조금 전까지 나와 싸운 적의 수장, 내 목을 거의 벨 뻔한 사람을 말이다.
"니카로스 남작... 아, 이제 백작이라고 그랬나."
묶여는 있지만, 역시나 귀한 포로인 만큼 크게 고초를 겪고 있지 않던 이스마트는, 전투 때의 살벌하고 진한 웃음 따위는 애초에 지은 적도 없다는 것처럼 태연하고 무표정하게 나를 반겼다. 솔직히 귀신 같은 정도였다.
'그래도, 뭐. 아예 변화가 없진 않네.'
지금껏 두 차례의 회의 내내 본 베일 것만 같던 예리함과 냉엄함은 많이 가셨달까. 상당히 여유롭고 편해진 모습이었다. 얼굴만 보면 누가 승자인지 모르겠다. 어째 픽 웃음이 나왔다.
"전투가 끝난 직후에도 말했지만, 그대의 승리를 축하하오. 나도 나름대로 자신이 있긴 했는데, 아무래도 그대의 준비가 더 철저했던 모양이야. 승복하지 않을 수가 없군."
"신사적으로 이해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하군요."
나는 편안한 미소와 함께 진심으로 답했다.
그래,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순순하고 온건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적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보통 죽을 때까지 저주를 뱉어내거나, 난데없이 성벽 위에서 뛰어내리거나, 자기는 아군 학살해놓고 목숨 구걸하거나, 그런 인간들만 잔뜩 봤지. 끔찍해.
'그런고로 나는 이 상황이 참으로 달가워.'
다만, 이스마트 같은 신사에게도 독기가 전혀 없는 건 아닌 듯했다.
"이제 모든 건 그대의 뜻대로 되겠군. 압둘라흐 장군의 부대는 곧 완벽하게 토벌되겠고, 모든 책임은 그에게 덮어씌운다. 그리고 그대는 우리 연합에 합류한다. 나의 지지를 받아서. 그 지지를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누가 되었든 박살을 내면서."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요."
지적하기도 애매하고 안 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아주 살짝 묘하게 날이 선 듯한 대답.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턱가를 문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잠시 힐끗 보더니, 이스마트는 여상하게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거기까지는 기본적인 요식 행위라고 하고, 이제 그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뭔가? 아무래도 기존 연합 네 개 국가의 영토겠지? 이미 승자가 됐고, 먼저 연합을 위협을 받았다는 명분까지 있는 이상, 국경의 영토를 한 움큼 떼어가도 4국은 감히 거부하지 못하겠지."
나의 선택을 이해해보고자 그동안 생각을 많이 한 듯, 그리고 이미 확신이라도 한 듯 유려하게 튀어나오는 그의 미래 예측에, 결국 나는 이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하지만 오해가 있는 듯하군요. 연합 가입 요청은 요식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뭐? 이미 시하브와 아르잔 두 개 토후국을 정벌한 그대가, 지나친 주목을 피하고자 우리 연합의 이름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아니,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은 합리적인 방안이고, 또 나도 아예 고려하지 않았던 요소는 아닌데, 그래서 부정하기 어렵긴 한데.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지요. 그건 부수적인 사유 정도?"
"부수적 사유? 진정한 이유?"
그래.
그게 전부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빙빙 안 돌아왔지. 그렇게까지 전투 전부터 대화에 집착하지도 않았지.
그렇잖아?
"설명해줄 수 있겠나?"
물론.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줄 준비가 되었다.
사실 안 물어봤어도 설명하려고 했다.
일단 시작은, 이것부터.
"일단, 저는 4국의 영토를 조금도 요구할 생각이 없습니다."
"...."
이스마트의 눈이 조금 커진다.
별다른 말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표정의 변화도 크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그의 놀람과 의심이 여실히 느껴졌다. 마치 상식을 파괴하는 말이라도 들은 듯했다.
'이것 참. 확실히 그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닐 정도로, 내 선택이 이례적인 것이긴 한데.'
그래도 그만큼 합리적인 것이기도 하거든.
그래,
솔직해 말하겠다.
'우리 니카로스의 영지 장악력은 이제 진짜 한계야.'
단순히 똑똑한 친구들 몇 명 더 뽑아서 행정력을 충실하게 갖추는 것으로 해결될 그런 장악력이 아니다. 이건 말 그대로 니카로스라는 제국 영지의 본질을 좌우하는 문제다.
시하브 토후국에 이어 아르잔 토후국까지.
우리가 완전히 흡수한 두 개의 소국.
이 둘 전부가 하나같이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보다 큰 국가였다.
그 두 국가의 정복 전쟁이 연이어 이어졌다.
그리고 이번 전쟁 또한 중간의 여유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사실상 3연속 전쟁.
'문제는 바로 이거지.'
이미 우리 니카로스 '백작령'의 인구 절반 이상이 얼마 전까지 월광교도였던 사람들이다.
집사장 아저씨와 마르다 양이 최근 열심히 교화 정책을 펼치고 있긴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여전히 그들 대부분이 그대로 월광교를 믿는다. 이제 제국의 시민이라는 자각조차 부족하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토후국 네 곳에서 영토를 조금씩 더 떼와?'
농담이 아니다.
진짜 니카로스 무너진다. 통제 같은 게 될 리가 없다. 오히려 제국이라는 정체성이 먼저 사라진다.
그런 고로.
우리 영지 사정을 잘 모르는 이스마트로서는 믿을 수가 없겠지만, 나는 정말로 당장 영토를 더 가져올 생각이 없었다. 진심으로. 나는 바보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진정 원하는 건 뭐지?"
"하하, 말했지 않습니까? 연합에 저도 속하는 것이라고."
"그게 진실이라고 한들, 그 속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은 따로 있을 텐데."
역시, 예리하고 똑똑하신 분.
요점을 정확하게 짚으시네.
하지만 사실 이것도 대답이 뻔한 질문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연합에 속해서까지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하나뿐이죠."
안전.
"요컨대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
마치 이들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위협이라."
니카로스, 나라는 대상을 상대로 연합을 결성해서 함께 맞서 싸우겠다고 결심한 4개국의 행위는 틀리지 않았다. 참으로 현명한 짓거리였다. 나라도 같은 비슷한 상황이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만, '나라는 대상' 자체가 그릇됐을 뿐이지.'
그래, 진짜 억울하게 말이야.
나 같은 평화주의자를 이렇게 자극하다니.
급하게 병력 모아오느라 진짜 진이 다 빠졌다.
'하지만 나는 선량하고 효율적인 인간인 만큼.'
그 잘못된 대상을 지정한 연합조차도 알뜰하게 재활용할 의향이 있다. 아예 처음부터 새로 만든 것보다는 그게 더 쉬우니까.
'연합을, 올바른 방향으로.'
따라서, 나는 처음부터 그것만을 바랐다.
"그럼 이게 마지막 질문이 되겠군. 그대가 말하는 위협이란, 이 변방의 초신성 니카로스조차 홀로 맞서길 꺼리는, 그 위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물음에, 나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잘 물었다.
어째 다른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속이 시원할 정도다.
그렇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르타 술탄국."
그리고 그곳의 왕.
"칼리드 이븐 타우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그동안 수십 수백 번 속으로 되뇐 그 호칭을 쓰자면.
동방의 정복자.
그래.
"아르타 술탄국이라면, 분명히 현재 먼 동쪽에서...."
이제 그가 나타날 때가 정말 머지않았다.
바할리아 제국과 거의 붙어있는 마르딘 토후국의 이스마트 역시 이미 그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정말로 미친 속도로 동쪽을 향해 진군할 터다.
'원작 게임 속 니카로스의 운명은 단둘.'
동방의 정복자가 등장하기 전에 멸망하거나.
동방의 정복자에게 멸망하거나.
예외는 오직 하나.
나의 마지막 플레이.
나는 이미 답을 안다.
관건은 실천뿐이다.
필요한 건 노력과 준비가 전부다.
'어찌 보면.'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고 이제 2년.
그 모든 시간과 과정은, 단 하나를 위한 준비에 불과했을지도.
동방의 정복자를 막아.
살아남는다는.
'그리고 연합 결성이야말로 그 마침표를 찍는 화룡점정.'
니카로스 백작령, 마르딘 토후국, 우르드 토후국, 투나미르 토후국, 바르토 토후국, 국경지대의 다섯 세력.
'그들의 적은 바로, 동방의 정복자가 이끄는 아르타 술탄국.'
현명하고 합리적으로.
이 일대에서 연합이 생긴다면, 응당 그게 맞지.
나는 처음부터 한 점 흔들림 없이 이걸 위해 싸웠다.
이것이야말로 연합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다.
그러니까 기존 연합 4개국아.
부디 고기 방패가 되어줘.
영토 안 뺏어갈게.
#091. 올바른 방향 (2)
한창 전선에 나와 저 멀리서 따라붙는 적군을 바라보고 있던 압둘라흐 장군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듣고야 말았다.
"...뭐라? 패했다고? 본대가, 우리 네 개 국가의 연합군 본대가, 니카로스 군에게 패했다고?"
바로 곁에서 똑같은 보고를 들은 바르토 토후국 장군의 표정이 곧바로 사색이 되었다. 그것을 보면 아무래도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지만, 그걸 알면서도 쉬이 믿기지 않았다. 그만큼 만신창이가 된 꼴로 달려온 전령의 보고는 충격적이었다.
반(反) 니카로스 연합군의 본대 패배.
총 2,800명이라는 막대한 병력을 자랑하던 연합군이었다. 그중 1,200명, 투나미르와 바르토 토후국의 병력을 압둘라흐 장군이 따로 분리하여 이끌고 왔다. 따라서 남아있던 본대는 1,600명.
반대로 니카로스 군은 총 1,900명의 병력을 몰고 왔다. 그리고 그중 700명 정도를 연합군 별동대의 저지를 위해 분리했다. 따라서 남은 병력은 1,200명.
1,600 대 1,200.
이 자체로도 적지 않은 격차였다.
또한, 단순한 숫자가 전부인 것도 아니었다.
'우리를 저지하러 온 것은, 니카로스의 최정예군이었단 말이다!'
그렇다.
놀랍게도 니카로스가 분리한 별동대는, 전원이 숙달된 용병대와 검은 매의 기사단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지금껏 니카로스가 승리만을 반복하게 만든 원동력이나 다름없는 존재. 아무리 에우스페나의 지원군이 있다고 한들, 본대에 남아있을 니카로스 군의 구성은 평소에 비하면 쭉정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졌다고?
이렇게나 빠르게?
밀려난 것도 아니고, 아예 패배?
결국,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압둘라흐 장군은.
"이스마트, 그 망할 애송이가, 결국 저질러버렸구나...!"
끝내 으르렁거리는 짐승 같은 분노를 육성으로 뱉어내고 말았다. 대놓고 연합군 총사령관인 이스마트를 모욕하는 발언이었지만, 이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파란 애송이 주제에, 마르딘 토후국과 에미르의 핏줄이라는 후광을 뒤에 업고 설치는 꼴이.
전쟁의 진정한 정수도 모르는 꼬마가 끝까지 이성적인 척, 합리적인 척 무게만 잡는 모습이.
그래놓고.
고작 빈 껍데기만 남은 니카로스 군에게 패배해?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자신의 분노는 정당하다.
압둘라흐 장군은 그리 느꼈다.
"어, 어찌하면 좋소, 압둘라흐 장군! 이대로는 곧 놈들의 본대가 우리를 포위하러 달려올 거요!"
"...."
압둘라흐 장군은 으드득 이를 악물면서도 고민했다.
분노가 정당한 건 정당한 거고,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만큼 일단은 서둘러 대책부터 마련해야 했다.
니카로스 땅을 약탈하겠다고 호기롭게 출발한 압둘라흐 장군과 그 친구들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니카로스 군의 재빠른 대응과 정예들만으로 이루어진 위협적인 추격에 여태껏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상대는 적군의 숙련도도 숙련도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이끄는 것이 다름 아닌 변방의 귀신 키로스였으니까.
그런 적을 상대로 약간의 수적 우위만 믿고 정면승부를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
다행이라고 할지, 그 키로스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전면전은 피했다. 그저 약탈을 저지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지부진한 대치만 반복했다.
어차피 전쟁 분위기의 확산이 근본적 목표였던 만큼, 당장은 이런 상황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연합군 본대가 털렸다고?
후방이 박살 났다고?
언제든 니카로스의 본대도 이쪽으로 향해 앞뒤로 포위당할 수 있다고?
최악의 상황이다.
이제는 승리가 아닌, 살아나가는 걸 고민해야 한다.
"니카로스 군의 피해는 어떻지?"
"...승패는 단 한 번의 정면 승부로 갈렸습니다. 니카로스 군도, 연합군도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본대는 이미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전면적인 항복 상태가 되어 그들의 도움을 기대하는 건...."
"...빌어먹을."
어떻게든 살 방도를 찾고 있으나, 들려오는 건 나쁜 소식뿐이다. 이 정도면 이스마트 그 망할 애송이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엿 먹이기 위해 이 상황을 만든 게 아니냐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물론 사실상의 연합군 총사령관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는 없지만.
그래서 더 괘씸했다.
"압둘라흐 장군...!"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바르토 토후국 대표의 절박한 부름.
"...."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으나, 이러나저러나 압둘라흐 장군은 이 1,200명 모두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나온 입장이었다.
책임은 그가 져야 했다.
그는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 후방으로 후퇴한다. 우리 투나미르 토후국의 경계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소.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아직 퇴각 불가능까지는 아니오."
압둘라흐 장군의 어조는 짐짓 단호했다.
마치 그 자신조차 속이듯.
"적 본대가 건재하다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분명 그만큼 더 승리에 취해 방심하고 있을 터. 허만 찌를 수 있다면, 기회는 있소."
마치 연기처럼 사라지는 중얼거림처럼, 압둘라흐 장군은 그렇게 이야기를 끝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모든 결단이 부대 전체로 하달되었다. 1,200명의 병사가 바짝 긴장한 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스마트, 그리고 니카로스 남작... 오늘의 굴욕은 언젠가 내 반드시...!'
군대가, 살아남기 위해 움직인다.
노장(老將)은 결단했다.
복수를 다짐했다.
그리고 이틀 뒤.
니카로스 군에게 앞뒤로 포위당한 압둘라흐 장군은 파죽지세로 방어선을 돌파당한 채, 그대로 키로스 경의 검에 의해 목을 베였다.
곧 그는 연합군 분열의 대역죄인이 되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
아주 순조롭고 어렵지 않게,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연합군의 별동대까지 박살 내고, 나는 진정 이번 전쟁의 종결을 선언하였다.
중간중간 불안하고 아슬아슬하던 순간도 제법 있었지만, 끝내 결과만 보면 무척이나 성공적이고 훌륭한 전쟁이었다.
우리 군보다 훨씬 머릿수가 많은 적군을 상대로, 최소한의 피해로 효율적으로 승리했을뿐더러.
"그러면, 나는 이만 돌아가 보겠소. 그대의 호의에 감사하겠소, 니카로스 백작."
미래를 위한 든든한 고기 방패....
아니, 동맹까지 얻었으니까.
아직은 그저 '예정'이긴 하지만, 그것도 금방이지.
그렇기에 나는 웃는 얼굴로 월광교 연합군 패잔병들과 떠날 채비를 마친 이스마트를 배웅했다.
"부디 조심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이스마트 공. 그리고 제가 드린 제안 또한 재삼 숙고하여 주시길."
"제안이라. 그래, 저 먼 동쪽 아르타 술탄국을 막기 위해 우리 연합과 니카로스가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는, 바로 그 제안 말이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어쩐지 그렇게 대답하는, 차가운 월광교 남자 이스마트의 입가에 약간의 웃음기가 있었다. 나는 자연스레 따라 웃으면서도 살짝 진지하게 표정을 고치며 덧붙였다.
"네, 바로 그 제안 맞습니다. 어떻게 그 먼 곳에 있는 아르타 술탄국의 왕이 우리들의 위협이 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셔야 합니다."
그래, 상대는 '동방의 정복자'다.
다른 자질구레한 수식어 다 빼도, 그것만으로 그냥 모든 설명이 된다.
"아, 오해하고 계신 듯하군. 나 역시 절대로 그 제안을 가벼이 여기지 않소. 진지하게 우려 중이지. 다만, 니카로스 백작 정도 되는 이가 그토록 경고하는 자라니... 그냥 무척이나 흥미로워서 말이요."
글쎄, 그래도 진지하게 생각해준다니 다행이지만, 그리고 대화 상대가 재밌다는 듯 웃어주니 나도 한 사람의 교양인으로서 기쁘긴 하다만.
막상 그 괴물이 현실이 되어 닥치면.
웃을 여유는 같은 건 없을걸?
"그래도 괜찮겠소? 나야 진지하게 생각한다지만, 연합의 다른 국가와 그 군주들 또한 그렇게 생각할지는 아직 미지수일 것 같은데. 그리고 나의 아버지, 에미르 또한 말이야."
그것참.
막상 동방의 정복자 얘기는 웃으면서 받으시던 분이, 무의미한 걱정을 또 하시네.
"다른 국가들의 입장 따위가 중요합니까? 어차피 연합의 실세는 마르딘 토후국이고, 그러니 전 이스마트 공만 설득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래, 이게 바로 담백한 진실인걸.
"하하, 그대는 언제나 파격적인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
이스마트는 유쾌하다는 듯, 그리고 동시에 시린 미소와 함께 웃으면서도 내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저 4개국 연합에서 가장 발언이 크고 강한 맹주, 마르딘 토후국.
그나마 마르딘의 반대파라고 할 만한 존재로 투나미르와 바르트 토후국이 있긴 했지만, 이제 그들의 주력군은 완전히 박살이 나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들의 저항 의지가 어떻든 간에, 이제 그들에게는 그 의지를 실현할 힘이 없다.
그러니 남은 난관은 오직 마르딘 토후국의 에미르뿐.
"다음에는 이스마트 '공'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게 더 마땅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그 에미르를 저 이스마트가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아무리 그래도 이번 패전의 가장 큰 책임은 사실상의 총사령관이던 이스마트 아니냐고?
현 에미르가 그의 친아버지라고?
이스마트는 그저 삼남에 불과하다고?
모두 무의미한 사실이다.
이미 불이 붙어버린 저 군왕의 씨앗에게는.
"그래도 그대에게는, 그저 '공'으로 충분할 듯하군."
실제로 마치 그 사실을 증명하듯, 이스마트는 내 뼈가 감긴 말에 그저 차갑고도 뜨겁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하긴. 그대의 제안을 믿든 안 믿든, 정면에서 제대로 참패한 연합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을 리가 없지. 심지어 영토 할양도 없이, 배상금과 연합 가입 허락만으로 넘어가 주겠다는데. 나의 활로도 이쪽에 있을 듯하군."
무서운 양반.
벌써 머릿속으로 계획을 차곡차곡 쌓고 계시는구먼.
"좋소. 패자의 신세지만, 어째서인지 나의 행운은 이미 찾아온 듯하군. 패지자 승자에게 하기에는 다소 우스운 말이지만, 백작, 그대에게도 행운이 함께하길."
"역시 신사시군요, 이스마트 공은."
"그런 의미에서 묻지, 순수하고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이제 그대의 행보는 무엇인가?
이스마트가 마지막으로 물었고.
그 질문에 나는 한없이 당당하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당연히 평화지요. 저는 언제나 평화를 사랑하는 평화주의자니까."
그리고.
그 대답이 끝나자마자.
"하하하! 평화? 평화라고? 그 대답은 정말, 정말 조금도 예상 못 했군!"
이스마트가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여태껏 웃음조차 조용하고 고요하게 만들어내던 저 차가운 인간이, 마치 진심으로 유쾌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처음으로 입까지 크게 열고 파안대소했다.
아니.
이게 왜 웃겨?
"...그 웃음은 뭡니까?"
"글쎄, 하하, 뻔한 걸 물어보는 건 재미가 없지."
저 무도한 이스마트는 끝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조차 피하며, 어느새 말머리를 돌려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덧붙였다.
"백작, 그대에게도 고귀한 마네스의 은혜가 함께하길."
그 뻔뻔한 언사에, 결국 나 또한 픽 웃을 수밖에 없다.
"네, 공께도 위대한 솔레오의 영광이 함께하길."
마지막 순간까지, 이스마트는 즐겁다는 듯 웃음을 남기며 떠나갔다. 연합군의 패잔병이 그 뒤를 따랐다.
2,000명을 넘기는 대군의 퇴각.
나름대로 장관이었다.
"...."
그들이 드넓은 대초원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나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두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또 하나의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는 뒤처리할 시간이지.
할 일이 정말 태산이다.
'평화, 얼마나 좋은 말이야.'
나는 진심으로 평화를 사랑한다.
전쟁이 끝나고 해야 할 일.
당연히 평화.
그런 이름을 지닌.
전쟁 준비.
#092. 올바른 방향 (3)
"영주님 또다시 승리하셨군요! 진심으로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언제나 영주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뵙는.
그리고 현재 우리 니카로스의 미래를 위해 개고생하고 계신.
끝내 이번 전쟁으로 인해 부랴부랴 대피 준비까지 하셨던.
우리의 신뢰 받는 원로.
제노비오스 집사장의 말이었다.
"하하, 말씀만으로 기쁘군요. 집사장님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큰일 생기지 않아서, 무사하셔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승전 뒤, 월광교 연합군의 시건방진 별동대까지 박살 내준 뒤, 우리 군은 본격적인 뒷수습을 위해 제노아 남작령, 옛 시하브 토후국의 성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 먼저 이쪽 지방으로 출장을 와있던 집사장 아저씨와 만났다.
'사실 언제나 그렇지만, 괜히 깐깐하게 온갖 걸 다 반대하던 그 집사장 아저씨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지지해줄 때마다 묘한 어색함을 느낀단 말이야.'
여전히 내 머릿속 제노비오스 집사장은 사사건건 반대 아저씨라는 이미지가 제일 크다.
과연 어떨까.
전대 영주던 제논은 이런 느낌을 안 받았을까?
제논은, 죽은 이 육체의 아버지는, 이런 집사장의 적극적인 찬성이, 언제나 당연히 보던 모습일 뿐일까?
'어쨌거나.'
고마워요, 아저씨.
진심으로 축하해줘서.
그런데 이 변경에는 한동안 더 계셔야 할 것 같아.
이번 침공으로 또 분위기 살짝 뒤숭숭해졌거든요.
이곳은 최전선.
우리가 침략을 무척이나 잘 막아냈긴 했지만, 애초에 민심 동요는 전쟁이 발발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전쟁은 나쁜 거니까.
대충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집사장 아저씨가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 이런 말씀 드리는 것도 다소 부끄러운 모습이지만, 그래도 패전국들의 영토를 빼앗아 오지 않고 배상금만으로 마무리하신 건 대단히 현명한 결단이었습니다, 영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어딘가 진지하면서도 진심 가득 담겨 간절한 말에, 나도 모르게 그만 웃음이 나왔다.
하긴, 내가 아는 걸 집사장님이 모를 리가 없지.
우리 영지의 역량이 이미 한계라는 걸.
정말로 이제는.
오랫동안 공들여 내실을 갖출 때다.
집사장 아저씨, 일복 터지셨네.
그렇게 생각하며 아저씨를 바라보자.
"아, 사실 그 모든 걸 다 제쳐두고, 가장 먼저 드려야 할 말씀을 안 드렸군요."
그 역시 주름진 얼굴로 밝게 웃었다.
"백작 승작, 축하드립니다. 하늘에 계신 제논 님과 마누엘 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아."
순간적으로 조금 말문이 막혔다.
그렇지.
나는 이제 백작이지.
사실 생각해보면 이미 몇 번이나 그 호칭을 들었음에도, 어째서인지 집사장에게 이 말을 듣고 난 뒤야 제대로 된 실감이 났다.
'뒤돌아보면, 확실히 고생 제법 했지.'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주 잘 해내기도 했고.
곧 나는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감사합니다, 집사장님. 분명히 그럴 겁니다."
***
당장 이곳, 제노아 남작령의 성에 모인 우리 수뇌부들 간의 사후 강평 시간은 상당히 화기애애했다.
"역시 영주님입니다. 그만한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직접 적의 수장을 사로잡으시다니! 저 키로스, 감탄과 탄복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하, 이번에도 손수 적의 방어진을 뚫고 적장을 목을 취하신 키로스 경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시니, 저야말로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허허!"
"호호."
서로를 향한 끝없는 칭찬세례와 금칠의 향연.
굉장히 뻔뻔한 광경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만큼 훌륭한 결과를 내놓기는 했다.
정예병들을 죄다 몰아주고도 알아서 남은 전략만으로 적 본대를 꺾은 나도.
나의 명령에 조금도 부족함 없이, 적 별동대에게 일체의 약탈도 허락하지 않은 키로스 경도.
모두 더할 나위 없었지.
그리고 저기 한 명 더.
승리의 주역께서 계시고 말이야.
"발레리아 씨, 이제 기분은 좀 괜찮으십니까?"
첫 전장에서부터 적 마법사를 압도한.
꺼지지 않은 불길로 적에게 무리한 돌격을 강요한.
따라서 사실상 우리 승리의 핵심 전력이셨던.
화염 마법사, 발레리아 트리하스.
"으, 응? 기분? 내 기분이 왜? 난 처음부터 완전히 멀쩡했는데?"
"...."
전쟁은 무척 잘 하지만, 거짓말만큼은 참 못하는 바로 저 아가씨 말이야.
어쩐지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정신이 붕 뜬 듯, 한동안 계속 멍한 얼굴만 보이던 발레리아였지만, 지금은 그래도 상태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표정이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물론 상태가 좋아지자마자 하는 게 저런 뻔뻔한 거짓말인 건 조금 웃기긴 하지만 말이야.'
저 인간은 왜 저리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집착하는지.
나 같은 솔직담백한 교양인은 이해를 못 하겠어.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왠지 또 순순히 웃으며 넘어가니까 묘하게 기분이 나쁘네."
우리 마법사님께서 괜히 또 삐칠 기색을 보인다.
어차피 삐쳐봤자 3분도 채 안 가는 성격이면서.
이제 나도 다 안다.
어쨌거나.
이렇게 모두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와중.
"여기가 회의실이군. 조금 늦었다, 백작. 양해해라."
순수한 본인의 개인기만으로도 이 말랑말랑하던 분위기를 순식간에 싸늘하게 만드실 줄 아는, 초인적 능력자께서 나타나셨다.
"...."
과연 역시나 아폴로니아다.
등장부터 함께하는 저 뻔뻔하고 어처구니없는 언사를 좀 보라지.
그러나 그녀는 한없이 당당한 태도로 회의장에 입장하자마자 나와 키로스 경, 발레리아의 얼굴을 한 번씩 힐끔 보더니, 곧 자신의 자리로 조용히 가서 앉았다.
뭐, 그렇다.
사실 이렇게 습관처럼 가시 돋게 표현하긴 했어도, 그녀는 충분히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있다.
'놀라울 정도로 지원군의 역할에 충실히 임해주었지.'
전투 당시.
우리의 1차 방어선이 뚫린 상황에서, 곧바로 뒤를 맡아준 게 바로 아폴로니아가 이끌던 '동방개척자'였다.
썩어도 준치.
부자는 망해도 3년을 간다.
'에우스페나가 아무리 네 개의 제국 공작령 중 압도적인 최약체라고 해도, 일단은 역사와 근본 있는 영지이긴 하거든.'
그 관용적 표현을 그대로 증명이라도 하듯, 동방개척자는 에우스페나 제일의 부대라는 자존심과 함께 적의 공세를 굳세게 버텼다. 공세 종말점을 앞당겨올 만큼.
솔직히 그들이 없었다면 진작에 이스마트의 돌파를 허용해 내 목이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
무수한 수의 고만고만한 놈들끼리 혼란스럽게 뛰어노는 이 동쪽 변방에서는, 절대로 경시할 수 없는 전력이란 거지.
"승전 축하한다, 백작. 그대가 고용한 용병대들이 내일 먼저 에우스페나로 돌아간다지? 우리도 그때 곧바로 에우스페나로 퇴군할 계획이다."
어쨌거나.
그 성실하신 아폴로니아 경께서 또다시 아무런 두서도 없이 본론만 툭 테이블 위로 던져 놓으셨다.
"...바로 내일이요? 아무리 그래도 귀한 도움을 주신 분인데. 조금만 더 계시다가 우리 니카로스도 함께 들르시지요. 성대한 개선식도 이미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폴로니아 경께서 자리를 빛내주신다면 저희에게도 영광일 것입니다."
그래, 이건 나의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기본적인 예의와 경우의 문제다.
괜히 전쟁 다 끝난 채로 데리고 있어 봤자 실시간으로 돈만 나가는 용병과는 다르다. 공식적으로 나의 주군인 공작의 이름을 대신해서 아폴로니아가 지원을 와줬는데, 내가 이조차도 하지 않으면 결례가 된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게. 받을 마음도 없으니까. 우리 군은 내일 돌아간다. 이미 결정된 사안이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물론,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
저렇게까지 단호하고 노골적으로 말씀하신다면, 나도 더 할 말은 없다.
그래, 뭐.
그렇게까지 이 동쪽 땅이 극도로 혐오스럽다면 그럴 수도 있지.
따라서 간단히 그렇게 판단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려는데, 이야기를 끝내고도 계속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던 아폴로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나는 내일 간다. 그러니 오늘이 우리가 대화할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는 뜻이지."
그러니까.
더 할 말 없나, 백작?
"...."
그녀의 이상한 물음에, 나는 잠시 마땅한 대꾸를 잃고야 말았다.
"할 말이라니."
나에게 따로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다는 건가?
솔직히 거의 짐작도 안 가는데 말이야.
그렇게 내가 잠시 말을 고르자, 아폴로니아는 그 침묵을 그대로 답변이라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없는가? 그럴 수 있지. 그렇다면 내가 얘기하지."
그리고 홀로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이야기를 이었다.
"이번 협력, 생각보다 즐거웠다. 이상이다."
"...."
그리고 기껏 이은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이쯤 되니 결국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저도 생각보다 즐거웠습니다."
그래, 나도 즐거웠다.
생각보다 좋은 지원군이기도 했고.
협력자로서 불만 따위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됐다. 이제 나를 신경 쓸 필요 없다."
이 쓸데없이 말 잘 지키는 정치적 적대 관계 기사님은, 그 말을 그대로 수행하듯 마치 석상이라도 된 듯 입을 다물었다. 더는 우리 회의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너무나도 명백한 무언의 신호였다.
하여간.
진짜로 웃긴다.
"...그래요. 그렇다면 이제 슬슬."
어쨌거나 그런 그녀 덕분에 슬슬 본격적인 일 이야기를 할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다시 단란하게 떠드는 것도 무리겠지.
이렇게 된 거.
"중요한 논공행상 하나를 해볼까요."
해야 할 일들에 전념하는 게 옳을 듯하다.
그래, 공을 세웠으면 상을 줘야 한다.
이건 기본적인 인간의 이치다.
"논공행상 말씀입니까?"
그리고 키로스 경이나 발레리아나, 귀하신 수뇌부인 만큼 딱히 급하게 구체적인 포상을 챙겨주지 않아도 되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당장 이 성에 몇몇 존재한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친구 중.'
이번 전쟁 때 큰 공을 세운 꼬마도 하나 있지.
키로스 경에게 직접 사사 받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병사가 될 수 있었지만, 기사는 또 아니었기에 별동대가 아닌 본진에 그대로 남았던.
"레온을 이리로 불러와라."
레온.
나의 사생아 이복동생.
그리고 동시에 전투의 마지막 순간, 이스마트의 검을 막은 병사.
'그 아이에게만큼은, 이왕이면 빨리 구체적인 상을 내려줘야지.'
나를 위해서든.
걔를 위해서든.
어느 측면에서 봐도 말이야.
그리하여 곧바로 나의 분부대로, 레온이 우리가 있는 회의실로 불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영주님."
그리고 그 아이는 그저 그렇게 입을 열 뿐이었다.
여전히 제논을 그대로 떠올리게 만드는 흑발과 황금빛 눈동자. 체구는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커진 것 같기도 하다. 확실히 애들은 빨리 큰다.
"이 병사는...."
계속 회의실에서 석상처럼 입 다물고 앉아 있던 아폴로니아 역시 드물게 흥미롭다는 듯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러나 나는 일단은 웃으며 레온만을 바라봤다.
"지난 전투 때 네가 내 목숨을 한 번 구해준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먼저 고맙다는 말을 먼저 전하지."
"아닙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늘도 감정이 거의 비치지 않는 얼굴로 딱딱한 말만 골라서 하는 우리 레온.
참으로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마음가짐이지만.
"그렇다고 주군 된 몸으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 당연한 일에도 마땅히 그에 맞는 보상을 하는 게 바로 우리의 역할이니까."
"...."
그래, 위기 상황에는 목숨 바쳐 주군을 구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실제로 행하는 게 쉬운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거든.
'특히나, 나와 레온의 입장이라는 게 있으니까, 더욱.'
그러니 일찍부터 공식적으로 명확히 선언된, 그런 포상을 내려주겠다는 거다. 괜히 뒷말 나오지 않게.
따라서 나는 웃으며 말했다.
"혹시 개인적으로 원하는 게 있나? 부담 가지지 말고 말해도 좋다."
항상 원하는 게 뭐냐고 물을 때마다 묘한 대답만 하던 레온이다. 원하는 게 없다고 한 적도 있고, 나를 모시는 게 원하는 것이라고 대답한 적도 있다.
"...저는."
재미있는 내 동생.
이번에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
나는 그런 기대가 담긴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고.
"영주님을 더 가까이서 모시고 싶습니다."
과연.
소년은 나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
이미 모든 걸 아는 키로스 경도, 당연히 레온의 얼굴과 분위기만으로도 이게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 아폴로니아도.
주위에 있던 모두가 그저 침묵했다.
확실히 굉장히 묘한 대답이었다.
섣불리 반응하기 어려울 만큼.
하지만.
"좋다. 나의 근처에 자리를 하나 만들어주지. 일단 호위 기사인 아르센 경의 종자 정도라면 적당할까?"
나는 그저 미소와 함께 선선히 답했다.
"무한한 영광입니다, 영주님."
그래.
사내가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어느 쪽이든.
#093. 올바른 방향 (4)
다음 날.
지난날 이야기했던 대로 에우스페나의 지원군과 니카로스가 고용한 용병들은 제노아 남작령을 떠나 퇴군을 시작했다.
'...어째, 아무 일도 없었구먼.'
그리고 그 행렬 가운데 즈음에 있는 '강철기러기 용병대'의 대장, 루카스는 굉장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무 일 없이 너무나도 순탄하게 전쟁이 끝났다.
처음 행군 중에 했던 모든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그래, 모든 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아폴로니아는 아무런 수작도 부리지 않고 순순히 전투에 협력했다. 정적 관계인 니카로스 남작, 아니 이제 백작이지, 어쨌거나 그 인간과도 아무런 충돌이 없었다. 도리어 화기애애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였다.
'게다가 제일 중요한 전투도 싱겁게 종결됐고.'
본대 쪽은 그래도 제법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고 하지만, 용병대 전체가 포함된 별동대는 전쟁 대부분을 지지부진한 대치만 하다가 끝냈다.
막판에 적 별동대와 전투를 벌이긴 했지만, 그마저도 압도적 우위와 포위 작전을 통한 일방적인 압살로 끝냈다. 크게 할 일이 없었다.
'물론 돈도 안 떼먹히고 다 받았고, 큰일 없는 게 항상 최고긴 하다만은.'
아무래도 영 기분이 오묘하달까.
안티모스의 '푸른이리 용병대'처럼 명성을 더 쌓거나, 아폴로니아와 니카로스 백작 두 사람 사이의 정쟁에 새우 등 터지거나.
모 아니면 도라고 잔뜩 각오하고 전쟁에 임한 것에 비하면, 너무할 정도로 심심한 결말이었다.
'망했다. 내 감도 이제 다 녹슬었네, 녹슬었어.'
그래도 뭐, 목숨을 건졌으면 됐다.
그리고 그 상태로 돈도 벌었으면 됐다.
아직 안 죽은 게 신기할 수준인 선임병이든, 어리바리 새파란 풋내기든, 용병의 본질이란 본디 그런 것.
따라서 루카스가 그런 생각을 품으며 뚜벅뚜벅 에우스페나를 향해 돌아가고 있을 무렵.
"자네, 이름이 루카스라고 했나. 강철기러기 용병대를 이끌고 있다던."
검정 머리와 붉은 눈을 한 여성이.
그에게 다가왔다.
더없이 차갑고 냉혹한 얼굴로.
'...아.'
바로 그 순간.
루카스는 모든 걸 이해했다.
"네, 제가 바로 루카스입죠. 아폴로니아 경."
그리고 두 입꼬리를 활짝 올렸다.
역시.
역시였다.
'내 감, 역시 아직 안 녹슬었다니까.'
안티모스는 틀렸다.
이곳에 순수한 전쟁 따위는 없다.
루카스, 어째서 아직 죽지 않았는지 의문일 정도로 닳고 닳은 용병은, 그저 웃었다.
***
천천히, 그리고 동시에 빠르게.
니카로스의 승전 소식은 서쪽으로 퍼졌다.
가장 가까운 서쪽 대도시.
"그래, 니카로스 백작이 또다시 전쟁을 벌였고 승리를 거뒀다.... 이것 참. 아예 나에게 나쁜 소식이라고 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개 시골 남작에 불과하던 그 애송이의 위세가 너무 커진 건 아닐지 걱정이군. 내가 그쪽에 끌려갈 생각은 조금도 없는데 말이야."
공작령의 실질적인 두 지배자 중 하나.
집사장 페트로스.
"크크! 그 꼬마 녀석이 또 이겼단 말이지? 심지어 공식적인 백작 등극까지. 이건 확실히 파장이 크겠어. 더는 다른 머저리들도 땅에 머리를 처박고 부정하지 못할 거야. ...아무래도 늦지 않게 투자를 더 늘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제국 동부 암흑가의 거두.
돈귀신 가스파르.
"...아, 니카로스, 이제는 백작인가. 분명히 아폴로니아 경이 지원을 갔었지. 그래, 그랬어. 그 아폴로니아 경이. 그래."
제국의 단 넷뿐인 공작 중 하나.
나태공(懶怠公) 리칸도스 코투니오스.
그들이 사는, 에우스페나.
이미 니카로스의 소식의 익숙한 땅.
그곳은 물론.
더 나아가.
"...저 먼 동쪽 변방에서, 최근 한 귀족이 제법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 같군요. 분명히 이름이, 네, 발란티스 가문의 테베, 아니, 티베리오스, 그랬을 겁니다. 작위는 백작이고. 영지의 역사가 길지는 않지만, 근래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고."
"호오, 그것참 반가운 소식이로군요. 저 멀고 미개한 동방에서도 제국의 위명을 떨치는 귀족이 아직 남아있다니, 과연 사람들이 말하는 우리 바할리아의 미래영겁 천년의 번영이 마냥 꿈 같은 이야기는 아닌 모양입니다."
"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애초에 한낱 야만인 따위가 위대한 제국을 위협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소리지요."
"...."
바할리아 제국의 수도, 세상의 중심.
수도 카이룸까지도 도달했다.
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퍼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마치 눈먼 자들처럼 명백히 다가오는 숙명을 보지 못하고 그저 거짓된 평화에 취해 떠드는, 그리고 그 거짓된 평화를 차지하고자 서로 매일같이 죽여나가는, 제국 중앙의 귀족들에게 니카로스의 승전보는 제법 괜찮은 화젯거리였으니까.
지저분하고 머리 아픈 중앙 권력 다툼과는 달리 이교도 토벌이라는 화제는 무척이나 직관적이고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을뿐더러, 그 소문의 주인은 영지의 이름조차 처음 들어봤을 정도로 중앙의 권력과 전혀 연관이 없는 변방 귀족. 그야말로 이야깃거리가 되기에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하! 영원불멸할 바할리아의 영광을 위하여!"
"위하여!"
그렇기에 수도의 배부른 돼지들은 최근 몇 날 며칠을 부담 없이 먹고 마시며, 티베리오스와 니카로스의 이야기를 떠들었다.
그리고 그조차 결국 잠깐의 화제였을 뿐이다.
마치 담배 연기가 허망하게 필연을 따라 공기 중으로 흐려지는 것처럼 니카로스에 관한 소문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새로운 무의미한 소식에 자리를 내어주며.
적어도 골 빈 바보들에게는 그랬다.
"니카로스 백작이라."
하지만 수도라고 그런 이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 변방의 이야기에 가장 먼저 진지하게 접근한 자는, '다미아노스 드라콘토풀로스'라는 이름을 지닌, 한 젊은 청년이었다.
제국 시민치고도 상당히 복잡하고 기다란 이름.
다행스럽게도 그 젊은 청년 역시 본명으로는 잘 불리지 않았다. 훨씬 짧고 간결한 호칭이 있었다.
다만 그 이유가 순수하게 이름이 과하게 복잡하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 본명을 대신할 무척이나 적절한 호칭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크라테이아 공작'이라고 불렸다.
그렇다. 바로 그 사람이다.
제국 서부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서부 대수림 토벌과 억제의 의무를 짊어진 자, 그리고 언제나 더 많은 것을 꿈꾸는 젊은 야심가.
요컨대, 현재 제국의 중앙 권력을 두고 현 제국의 대장군인 니코디모스 장군과 정쟁을 벌이는 자.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정쟁을 벌였던 자.
중앙 권력을 두고 시작된 두 사람은 다툼은 벌써 몇 달이나 지났다. 그렇기에 슬슬 승리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윤곽은 분명히 크라테이아 공작을 가리키고 있었다.
따라서 젊은 공작은 요즘 들어 한껏 여유로워진 태도로 소문을 입에 담았다.
"아, 그래. 기억났어. 분명히 동부의 그... 가스파르가 한 번 언급했던 이름이었지. 자신의 전폭적인 후원에 그 젊은 친구의 영향이 제법 있었다고.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남작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백작이 됐나? 확실히 걸물이라는 소문이 괜히 퍼진 건 아닌 모양이야."
크라테이아 공작은 기억하고 있었다.
니코디모스 장군과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아직 전세가 제대로 판명조차 나지 않은 초반 시점부터 거의 도박에 가깝다고 생각될 정도로 자신에게만 줄을 댄 인사가 몇 명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자신과 딱히 인연도 없던 동부 출신이었기에 유독 더 인상 깊었던 자가 한 명 있었다.
그게 바로 동부의 거물 정보상 가스파르였고, 그가 언급했던 인물이 니카로스 백작이었다.
그 이름을 이렇게 다시 듣게 듣다니, 경험 많은 크라테이아 공작에게도 상당히 신선한 느낌이었다.
"어떤가? 미리 유망한 친구에게 투자한다는 느낌으로, 우리도 살짝 접근해볼까?"
그렇기에 크라테이아 공작은 마치 농담처럼 그런 이야기를 측근들에게 넌지시 꺼냈지만.
"공작님,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런 우리 영지와 완전히 정반대에 있는 동쪽 변방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을 듯합니다."
"벌써 다 이긴 기분이 드시는 것도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만, 그래도 아직 축배를 들기에는 이릅니다. 그 끈질긴 니코디모스 장군이 최후까지 어떤 발악을 할지 모릅니다."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최측근들의 열화와 같은 저항에 부딪히고 말았다. 한 점 거리낌과 허울 없는.
"...도대체 누가 공작인 줄 모르겠군.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어."
"공작님."
"알겠네, 알겠어. 투자 건은 없던 일로 하지. 아니, 뒤로 미루지. 일단은 하던 일부터 마무리 짓자고."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그렇기에 크라테이아 공작은 수도 카이룸에서 가장 먼저 니카로스 백작을 향해 진지한 관심을 보인 인물이 되었음에도, 가장 크게 진지한 관심을 보인 인물은 되지 못했다.
그런 인간은, 그런 집단은 따로 있었다.
어찌 보면 의외지만, 지금 가장 니카로스 이야기를 활발하게 하는 곳은.
"참으로 은혜로운 소식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열등하고 미개한 월광교 우민들에게 제국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그야말로 솔레오의 가호입니다."
바로 '세계 총대주교청'.
황금십자교의 총본산이었다.
수도 한가운데 존재하는 호화롭고 웅장한 대성당.
규모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 섬세함만큼은 황궁에도 밀리지 않은 그곳에서 수십 명의 주교가, 고위 성직자들이 모두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진심 따위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 암울한 시대에도 아직 솔레오의 용기를 실천하는 자가 남아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런 의인들이 어서 늘어서, 하루빨리 저 역겨운 이교도들을 죄다 박멸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제국 영주의 승리를 기뻐하는 말도, 더 나아가 이교도들에게 원색적인 증오와 멸시를 표하는 말조차도, 전부가 진심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야.
그런 걸 담는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지금까지 한 말은 모두 다 의미 없고 형식적인 의례적 발언일 뿐이었다. 내가 이만큼 독실한 신자라고 주위에 과시하는 그런 말.
따라서 본론은 그다음에 나오는 발언부터였다.
"...그건 그렇고, 그 승리로 인해 그 변방의, 그, 아, 그래, 니카로스가 백작령이 되었다지요?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 교회 측에서도 마땅한 관심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비록 에우스페나에 이미 대교구가 있긴 하다지만...."
"네, 유감스럽게도, 음, 그곳 교구의 역량은 한계니까요. 니카로스 백작령의 영토 크기가 보통의 백작령보다 더 크다는 점도 있고, 현 주민 대다수가 이교도라는 특수성도 있고, 아무래도 역시 주교령을 새로 하나 신설할 필요성이 충분히 있지 않겠습니까?"
"과연. 새로운 주교령을."
새로운 주교령.
이 이야기의 진정한 핵심.
어찌 보면 황금십자교를 이끄는 고위 성직자들로서 당연히 논의해야 할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그러나 이곳 카이룸은 일반적인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책임자, 해당 주교령을 책임질 총대주교 대리는 누가?"
"하하, 신앙과 포교의 선봉이 되실 분이니 당연히 우리 중에서도 가장 독실하고 훌륭하실 분이 가야죠."
그들은 그저 이용할 뿐이다.
"저는 요안니스 주교를 추천합니다."
저 벽지 니카로스를 일종의 유배지로써.
정당하고 거부하지 못할 감옥으로써.
"하하! 과연 묘안입니다!"
"드디어 그 고지식한 분을 치워, 아니, 그분께 어울리는 자리를 마련해드릴 수 있겠군요!"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참석하지 못한 주교 한 명의 이름이 나오자 모두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다지 신앙인다운 표정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기뻐하고 만족할 뿐이었다.
그들의 부패와 타락을 방해하는, 불편한 양심 같은 치워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그렇다.
이게 바로 세계 총대주교청의 회의였다.
이게 바로 황금십자교의 지도자들이었다.
이게 바로 바할리아 제국이었다.
#094. 사람의 마음이란 것 (1)
니카로스 남작령.
이른바, 제국의 동쪽 최전선.
서쪽 제국 본토에서 이 땅으로 이주한, 스스로 개척자라고 자부하는 주민들은 주로 영주님이 거주하는 니카로스의 중심, 영주 성 근처에 모여 살았다.
그곳에서 전통적인 제국의 방식으로 건물을 올리고 길을 닦아 마을을 세웠다. 그게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었으니까. 어찌 보면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똑같이 참으로 당연하게도 이곳에는 그렇지 않은 주민들 또한 있었다. 다른 제국의 영지였다면 이례적인 일이었을 테지만, 이곳은 태생부터가 독특했으니까.
니카로스, 그 영토의 중심 아닌 외곽.
그곳에도 사람은, 주민은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원래부터 이 땅에서 살던 자들이었다.
제국의 복식과는 확연히 다른, 동물 가죽과 털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는 사내들이 초원을 돌아다녔다. 그들의 등 뒤로 저 멀리서 풀과 나무로 된 초가집들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가 말을 탄 채 양 떼를 몰았다. 마을의 가축에게 분주하게 먹이를 먹였다.
니카로스 원주민.
이것이 바로 수백 년 전부터 이 대지에서, 대초원에서 살고 있던 그들의 호칭이었다.
그들은 자연스레 자신들의 일상 모습을 통해 초원지대의 전형적인 유목민족의 삶을 보여주었다. 니카로스라는 제국의 영지가 세워지고 이제 겨우 20년 정도. 그 정도 세월로는 그들의 방식을 완전히 바꿀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건 아니었다.
초원 주민들 사이를 유독 눈에 띄는, 잘 무두질 된 가죽으로 만들어져 곳곳에 튼튼한 철로 덧대기까지 한, 제국의 갑옷을 입은 사내들이 지나다녔다. 그들의 갑옷 가슴팍에는 흑색 맹금류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
그들은 분명 특출난 존재였지만, 조금의 위화감이나 어색함도 없이 주민들 사이에 섞이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그 수준을 넘어 오히려 그들에게 먼저 고개 숙이고 경의를 표하는 주민들도 있었다.
이 또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야 이곳이 바로 그들의 고향이었으니까.
그렇게 '검은 매의 기사단'의 선임 간부 몇 명이 니카로스 초원 주민들의 장로가 사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동료들과 함께 양을 치던 한 젊은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곧 생각했다.
'오늘은 얼마나 오래 이야기를 나눌까.'
요즘 들어 평소보다 급격하게 검은 매의 기사단 선임 단원들이 이곳에, 그들의 고향에 잠시 들르는 일이 잦아졌다. 단원들은 곧장 장로의 집으로 들어와 원로들과만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떠나곤 했다.
고향을 떠나 주로 영지 중앙의 영주 성에 머무는 기사단의 일상을 생각하면 조금 의아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의아할지언정.
젊은이가 본격적인 궁금증까지 품지는 않았다.
'알아서 다들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겠지.'
원로와 장로는 주민들에게 존경받기에 그 자리에 오른 어르신들이고, 검은 매의 기사단은 그야말로 주민 모두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전사들이었으니까.
이건 일종의 상식이었다.
그렇기에 초원의 젊은이는 곧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제 일에 매진했다. 이 땅의 삶은 무척 거칠어 게으름 따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서서히 저물어갈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이제 떠나시는 건가?'
그때가 되어서야 검은 매의 기사단 선임 간부들이 장로의 집에서 나왔다. 그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말에 올라 떠날 채비를 했다.
그리고 또다시 그런 그들을 지켜보다, 우연히 눈이 마주치게 된 젊은이는 곧바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단원들 또한 손을 들어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래, 언제나 고생이 많다."
"아닙니다. 기사님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하, 글쎄다."
그렇게 묘한 헛웃음과 함께 한 차례 청년을 격려해준 기사들은 그대로 고향을 떠나기 시작했다.
드넓은 초원을 짓밟는 말의 말발굽 소리와 흙먼지만이 그 뒤에 남았다.
"...."
어째서인지 젊은이는 그들이 떠난 자리를 말없이 한참 동안 바라봤다.
당연히 언제나 이 일대가 모두 그렇듯.
그 자리 위에는 높고 커다란 하늘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늘은 초록색이었다.
초원은 바람이 불었다.
***
니카로스 백작령, 그리고 그곳의 중심이자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니카로스 남작령의 영주 성.
지금 그 땅에서.
코투니오스 가문의 청년.
에우스페나의 집사장 페트로스의 차남.
동시에 현 에우스페나 공작의 친사촌.
그리고 페트로스의 행정 인력 지원이라는 명목하에 니카로스로 오게 된.
좋게 말하면 귀한 파견 인력이고, 나쁘게 말하면 간첩 의심 1순위 객식구 신세인.
그런 다니엘 코투니오스는 평소처럼 복도를 걷다 누군가를 발견하고 반갑다는 듯 다가갔다.
"이게 누구십니까? 반갑습니다, 마르다 님."
그 누군가는 바로.
집사장이 떠난 지금 영주 성의 모든 대소사를 총괄하고 있는 특급 인재, 마르다였다.
기본적으로 니카로스의 가신들 모두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다니엘이었지만, 그나마 마르다는 그가 주도적으로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네는 몇 안 되는 상대 중 하나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그저 여기서 그녀만이 자신과 어느 정도 격이 맞는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마르다는 그 유명한 카이룸의 황립 아카데미 출신의 인재. 공작령인 에우스페나의 아카데미 출신은 극히 드무니, 그만큼 뛰어나고 희소한 지식인이라는 의미였다.
비록 최종적으로 졸업하지는 못했다지만, 사실상 모든 과정을 마치고 졸업까지 정말로 단 한 걸음만 남겨 놓고 있었다고. 그 사실은 다니엘도 이미 들었다.
'...솔직히 그 이유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지만.'
고향 니카로스에서 당장 일하고 싶어서 황립 아카데미 졸업장도 버리고 나왔다는 그 이유.
이해가 안 되긴 하지만, 반대로 솔직히 너무나 터무니없기에 오히려 더 진실 같긴 했다. 만약 거짓말을 할 생각이었다면, 저것보다는 훨씬 더 그럴듯한 것들이 잔뜩 있었을 테니까.
어쨌거나.
따라서 마르다는 다니엘이 그나마 인정하는 상대였고, 오늘은 평소와 달리 조금 더 특별한 이유도 따로 있었기에, 반갑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르다 역시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정중하게 인사를 받았다.
"반갑습니다, 다니엘."
"하하, 마르다 님께서는 오늘도 한결같으시군요."
"죄송합니다. 바쁜 업무가 있어, 특별한 용건이 없으시다면...."
"만약 특별한 용건이 있다면요?"
평소답지 않고 갑작스러운 다니엘의 발언.
마르다가 잠시 그대로 지나가려고 했던 몸을 우뚝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마치 냉온 동물처럼 눈동자만을 조금 움직여 다니엘을 응시했다.
그 크게 호의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을 마주하고, 다니엘은 잠시 쉽지 않아 보인다는 듯 입맛을 쩝 다셨다. 그러나 곧 굴하지 않고 조금씩 말을 이어나갔다.
"그다지 대단한 건 아니지만, 글쎄요, 음. 그냥 외지인으로서의 고민 상담? 네, 그런 걸 조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서 말이죠."
"저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응해드리겠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차가운 태도와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의 내용이 너무나 다르다.
다니엘 순간적으로 도대체 어느 쪽이 진실인지 의심이 들고야 말았지만, 어쨌든 허락은 받았다고 판단했다.
"그냥 뭐, 어찌 보면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외부인 출신으로서 느끼는 약간의 소외감, 또는 답답함 정도...."
"아무래도 저희가 다니엘 님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모양이군요. 다음 회의 때 안건으로 올리겠습니다."
"...아뇨,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잠시 헛기침을 하며 당황을 가라앉힌 다니엘은.
"저는 그저, 그런 김에 조금 더 친하게 지내보는 게 어떨까 하고 말씀만 드리고 싶었습니다."
곧 지금까지의 어설펐던 태도는 전부 연기였다는 듯.
"함께 영지에서 소외당하는 처치들끼리 말이죠."
마치 혀를 날름거리는 뱀처럼.
마르다를 똑바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된 다니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 이 복도에 저희 둘밖에 없으니, 저도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니카로스 오고 지난 몇 달 동안, 유심히, 제삼자의 관점에서, 나름대로 이것저것 지켜본 결과, 마르다 님으로서는 조금 서운할 수도 있을 점들이 살짝 보이더군요."
그는 마치 모든 말을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조심스러움을 과시하면서도 일말의 막힘도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니카로스 백작님께서 이런저런 중요한 일들을 마르다 님에게 맡기고 있기는 합니다. 지난 상단과의 협상 건도 그렇고, 영지의 전반적인 개발도 그렇고. 물론 저도 알지요. 다만, 가끔, 아주 가끔, 지켜보다 보면 종종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정작 진짜로 남작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안들은, 마르다 님과 공유나 논의를 하지 않는 건 아닌가?
"...."
"생각해 보면 그렇죠. 두말하면 아까울 정도의 공식적인 오른팔 키로스 경도 계시고, 또 비슷한 시기에 들어오신 발레리아 님도 계시고. 뭔가... 남작님의 관심사와 일치하는, 진짜로 중시하는 일들은 항상 그분들과만 논의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마르다는 계속 침묵했고.
다니엘은 계속 멈추지 않았다.
"물론, 남작님이 잘못됐다거나, 문제가 된다거나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절대로,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모두 남작님 고유의 권한이고 외부인인 제가 왈가왈부할 게 아니지요. 그런 오해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강조라도 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서론을 잔뜩 덧붙인 뒤.
"그래도 그냥. 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사람 마음이란 게 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쌓아두면 병이 난다. 그러니 여기 어찌 보면 비슷한 처지일 수도 있는, 공감이 가능한 제가 있으니, 평소에 더 마음 터놓고 친하게 지내자. 뭐,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기회가 된 김에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도 마르다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
마르다는 여전히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마냥 침묵을 유지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표정은 조금씩 미세하게나마 바뀌고 있었고, 그건 일종의 고민하는 기색처럼 보였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그렇게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한참 미소를 유지하고 있던 다니엘의 얼굴이 조금씩 흔들리던 시점에서.
"다니엘 님."
마침내 마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행위는 추천해 드리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 니카로스에 계신 동안만큼은요.
대답은 소비된 시간에 비해 참으로 간결했고, 다니엘은 그저 멍청한 반문밖에 내뱉지 못했다.
"...네?"
다행히도 마르다의 이야기가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었다.
"다니엘 님의 모든 발언이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적으로 다니엘 님을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그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한결같이 감정 없고 차가운 표정으로, 마르다는 순수한 진심을 담아 그렇게 이야기했다.
"오히려 그렇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지 마세요.
"바로 다니엘 님의 안위를 위해서."
"...."
이번 침묵은 다니엘의 것이었다.
그는 웃고 있던 표정 그대로 굳어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않았다.
잠시 뒤 그의 목에서 나온 것은 그런 질문이었다.
"...그건 경고입니까?"
"저는 그보다는 진심이 담긴 조언이라는 표현이 더 마음에 드는군요."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대답을 끝으로 마르다는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자리를 떴다.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복도는 조금 전까지의 대화가 모두 한낱 꿈이라는 것처럼, 삽시간에 고요한 정적만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하."
결국, 홀로 남게 된 다니엘은 잠시 뒤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역시, 잘 안 되네."
그는 정말로 답답함을 느꼈고, 언제나 입가에 유지하고 있던 미소를 지워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그저 짙은 피로감뿐이었다.
다니엘은 그대로 벽에 몸을 기댄 채,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계속 그곳에 있었다.
계속.
"...."
그리고 그런 다니엘을.
은밀하고 조용하게 지켜보고 있는 자도 있었다.
#095. 사람의 마음이란 것 (2)
니카로스 백작의 호위 기사 아르센은.
최근 곤란함이라는 감정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원래 아르센은 깊은 고민을 그리 자주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지키라면 지키고, 베라면 베고, 그런 단순하고 직관적인 명령을 선호했다.
그것은 동쪽 유목민족으로 태어나 제국의 기사로서 자란, 아르센 나름의 인생 지침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리고 아르센과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 역시 비슷하게 써먹고 쏠쏠하게 도움을 받았던 처신법이기도 했다.
"...."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 연이어 펼쳐지는 상황 속에서, 그 인생 지침 겸 처신법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혹시 불편하신 점이 있으십니까, 아르센 경?"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아직 소년다운 앳됨이 조금 남아있는 목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질문.
그 질문에 아르센은 그만 반사적으로 '너'라고 대답할 뻔했지만, 다행히도 숙련된 기사다운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유혹을 이기고 참아낼 수 있었다.
큰일 날 뻔했다.
"...아니,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래.
지금 아르센에게는 대략 두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고, 그중 첫 번째가 바로 저 꼬마였다.
지금도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자신의 등 뒤를 졸졸 따라붙고 있는 저 꼬마 말이다.
'아니, 꼬마까지는 아닌가.'
생각해 보면 제국이면 몰라도 아르센의 고향인 초원사회 기준으로는 이미 한 사람 몫을 할 나이긴 하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지금 아르센은 저 녀석을 꼬마라고 부르고 싶었다.
꼬마.
저 녀석.
다른 말로는.
자신의 종자(從者), 레온.
지난 전쟁이 모두 끝나고 제노아 남작령에서 느긋하게 군을 정비하던 중, 그가 모시는 영주가 갑작스레 나타나 그런 말을 했다.
웃으며.
- 이 아이, 오늘부터 아르센 경의 종자입니다. 잘 단련시켜주세요. 개인적으로 부릴 일이 있으면 편하게 부리셔도 좋고요. 하하.
-네, 네?
생각지도 않던, 갑자기 생긴 종자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당황스러울 지경인데, 알고 보니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 종자의 정체.
'...아무리 보아도, 저 녀석.'
금발, 금빛 눈동자.
현 영주 티베리오스를, 돌아가신 전 영주 제논과 마누엘을 너무나 닮았다. 도저히 헷갈릴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 영지에 저런 특징적인 외모를 지닌 건 발란티스 가문뿐이었으니까.
'망할.'
생각하는 않는 걸 선호하는 것뿐이지, 아예 아르센도 생각을 못 하는 건 아니다. 굳이 하고자 하면 한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생각해 본 결과.
아무리 봐도 자신의 종자가 된 레온은 영주 가문의 핏줄이었다.
'공식적으로 발란티스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는 영주님뿐이다. 그러면 비공식적으로 생각해야지. 그리고 나잇대를 고려하면....'
결론.
제논의 사생아 겸 현 영주 티베리오스의 이복동생.
요컨대 아르센은 하루아침에 모시는 영주의 동생을 종자로 삼게 된 셈이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본인의 의향은 조금도 반영이 안 된 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러다 머리 터지겠는데.'
아르센은 뿌연 머리로 생각했다.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쟤는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사생아고, 영주님은 저 꼬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계시는가.
차라리 직접적인 어떤 정치적 언질이라도 주셨다면 그냥 그대로 따랐을 텐데, 영주님이 하신 말은 잘 키워라, 부릴 테면 부려라, 이 둘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의도이셨는지 알 수가 없다.
머리가 아팠다.
"...일단, 이 서류를 키로스 경에게 전달하고 와라."
"알겠습니다, 아르센 경."
물론 아르센은 티베리오스를 충직하게 따르는 모범적인 기사이기 때문에, 의도를 모르면서도 일단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긴 했다. 따라서 간단히 심부름 정도는 영주의 지시대로 거리낌 없이 시켰다.
서류를 건네주자, 레온 역시 뭔가 임무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방을 나섰다.
'...뭐, 그래.'
그 뒷모습을 보며, 일단 아르센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어찌 되었든, 이래저래 모든 배경을 다 생략하고 레온이라는 한 인간만 보면 종자로서 자질이 나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성실하고 강해지겠다는 집념이 있으니까.
첫 전장에서부터 병사로서 공도 세웠다지.
말이 지나치게 없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르센도 말이 지나치게 많은 것보단 차라리 그게 나았다.
'더 자세한 실력은 나중에 대련하면서 직접 확인해 보면 되고.'
그러니까 아르센은 일단 레온, 첫 번째 고민은 중단했다. 이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그리고.
사실 레온에 대한 고민은 고작 '따위'라고 치부할 수 있을 만한 진짜 문제, 두 번째 고민이 남아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고민이 절대로 기우가 아님을 증명하듯,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레온이 나갔던 문이 그대로 다시 열리며, 누군가 아르센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르센 경, 잠깐 시간 좀 있나?"
검은 매의 기사단 최고선임 중 한 명.
기사단 창설 때부터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경력을 쌓아온, 아르센의 대선배.
바흐만이었다.
"바흐만 경? 무슨 일이십니까? 물론 시간이야 있습니다만...."
아르센은 대선배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 워낙 급하게 일어나느라 자세가 다소 엉거주춤해졌다.
솔직히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그야 당연히 같은 기사단 동료인 만큼 얼굴이야 익숙하고 아예 모르는 사이도 또 아니지만, 친밀한 사이라고 말하는 건 그래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직 기사단에 입단한 지 얼마 안 되는 아르센과 선임 중에서도 선임, 바흐만이 얽힐 일 자체가 얼마 없었으니까.
'...그리고 개인적인 성향도 그다지.'
맞지 않는 느낌.
그렇기에 이렇게 바흐만이 아르센을 갑작스레 찾아온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똑같이 뻔히 다 알고 있을 바흐만은 그저 태연하고 뻔뻔하게 웃었다.
"하하, 내가 어디 무슨 특별한 일 같은 게 있을 때만 자네를 찾는 사람인가?"
"...그건 아니지요."
순간적으로 '그래'라고 답할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낸 아르센이었다. 오늘따라 솔직담백한 그를 괴롭히는 질문이 너무나 많았다.
"그냥 평범한 사담이나 나누고자 왔네. 잘 생각해 보니 내가 선배랍시고 무게만 잡고 다니고, 막상 후배들과 진솔하게 소통을 한 적은 얼마 없던 것 같아서 말이야."
"...말씀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합니다."
글쎄다.
아르센은 내심 생각했다.
아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평소의 바흐만을 아는 그로서는 잘 믿기지 않는 이야기기도 했다.
'항상 아래쪽보다는 위쪽을 보는 사람 같았는데.'
그게 굳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사적인 앙금 따위는 없다. 애초에 그만한 관계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그냥, 아르센 자신이 담백하게 그리 느꼈다는 것뿐이다.
어쨌거나 대선배가 저렇게까지 얘기하는데 후배 된 몸으로서 마냥 축객령을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르센은 그동안 아끼고 있던, 영주 티베리오스에게 직접 하사받은 동방의 찻잎을 조금 꺼내, 차를 우려 바흐만에게 대접해주었다.
"아,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잘 먹겠네."
바흐만은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말로 시작은 평범하고 흔한, 개인적인 이야기였다.
고향의 가족들 얘기, 동료들 얘기, 기사단 얘기, 취미나 요즘 하는 걱정거리 등.
덕분에 바짝 긴장하며 말을 조심하던 아르센도 조금씩 편안해진 기분으로 대꾸가 가능해졌을 즈음이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영주님의 호위 임무는 어떤가? 할만한가?"
그런 질문이 나왔다.
바흐만이 찻잔을 입가에 대며 그런 질문을 했다.
"호위 임무, 말씀입니까...?"
"그래, 사실 이것도 어마어마한 출세 아닌가? 이 집무실도 호위 업무 때문에 영주님 집무실 바로 옆으로 받은 것이고. 자네 동기 중에 성에서 개인 집무실까지 가지고 있는 친구가 어디 있다고. 슬슬 자네도 영주님의 측근 반열에 오른 게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
"...당치도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저 저는 영주님의 지시만 묵묵히 따를 뿐인데요."
아르센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그런 말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아르센도 알고 있다. 그리고 왜 그런 평판이 만들어졌는지 그 이유 또한 알고 있다. 그 역시 귀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이전보다도 더 처신을 조심히 하고자 하였다.
영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하, 역시 아르센 경이야. 모범적인 기사 그 자체로군. 그러니 영주님께서도 자네를 호위로 삼으신 거겠지."
"...."
아르센은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었지만, 바흐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르센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도 자네 또한 개인적인 생각 정도는 속내에 품고 있지 않나? 나는 그냥 그런 게 궁금한 것일세. 영주님의 이런 점은 역시 타의 모범이 된다, 이런 명령은 왜 내리신 건지 아직은 잘 이해가 안 간다... 이런 속마음 말이야."
"바흐만 경."
"부담 가지지 말게. 의미를 과하게 두지도 말고."
바흐만은 아르센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예를 들어 그런 것도 있지 않나."
갑자기 자네의 종자가 된.
레온이라는 소년은 대체 무엇인가.
그런 물음을 던졌다.
"...."
겉으로는 달라진 건 없었다.
아르센은 여전히 말을 아꼈고, 바흐만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게 없음에도 달라졌다.
급격하게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고 무거워졌다.
결국. 잠시 그대로 그런 침묵이 지나가고.
바흐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며 가벼운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네. 알겠어. 질문이 불쾌했다면 내 사과하지. 나쁜 뜻은 없었어.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주게."
"...용서할 일까지는 아닙니다. 다만 바흐만 경께서도 저의 입장을 조금 이해해주시면 좋겠군요."
"하하, 물론이지. 어차피 그 소년이 당장 중요한 것도 아니지 않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따로 있지."
"중요한 것이요?"
그 반문에 바흐만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그래, 정말로 중요한 것. 아마 자네도 짐작하고 있을 그런 것."
"...."
바흐만은 능숙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주제를 전환했다.
아르센은 그만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 슬슬 자네와도 직접 그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을 듯하긴 하군."
"...편히 말씀하시지요. 제가 대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솔직하니 좋군. 그렇다면...."
그렇게 바흐만이 잠시 크게 숨을 내쉬고, 그 '정말로 중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 시점.
"아르센 경, 방에 계십니까?"
아르센의 집무실 문을 누군가 똑똑 두드렸다.
아르센과 바흐만 두 사람이 모두 문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와 말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성에 상주하는 일반 병사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무슨 일이냐? 지금 손님을 응대하는 중이다."
"아, 그렇다면 이대로 빠르게 전언만 전하겠습니다."
전언(傳言).
전하는 말.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병사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검은 매의 기사단 부단장, 테베르 경께서 조금 전 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다소 갑작스럽다는 건 인지하고 있지만, 가능하면 지금 성에 계시는, 긴급한 임무가 없는 단원들은 모두 회의실로 모여달라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르센과 바흐만 두 사람 모두가 서로를 바라봤다.
그대로 바흐만은 중얼거렸다.
"회의? 이렇게 갑작스럽게, 예고도 없이?"
그렇다.
참석 가능한 검은 매의 기사단 단원 전원.
그렇다면 당연히 지금 아르센의 집무실에 와있는 바흐만 역시 그 소집의 대상이다.
확실히.
최고선임 중 한 명인 바흐만 역시 미리 들은 바가 없는지 상당히 놀라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
하지만 그 갑작스러운 순간에도 아르센은 볼 수 있었다.
"이것 참. 당황스럽군. 그렇지 않나, 아르센 경?"
마치 셈을 하듯, 오묘하게 뒤틀린 미소를 짓고 있는 바흐만의 모습을.
"...네. 당황스럽군요."
아르센은 그 순간 직감했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유독 길겠구나.
#096. 사람의 마음이란 것 (3)
그 날도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요컨대 나는 평소처럼 성실하고 열심히 업무에 전념했고, 유능한 마르다 양이 그런 나를 충실히 보좌해주는, 그런 평범한 하루였다는 뜻이다.
"지난번 체결한 계약을 다블레 상회에서 성실히 이행하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영주님께서 원정 중이신 동안 상단이 한 차례 더 방문하였으며, 현재는 니카로스와 에우스페나를 연결하는 도로 확장 사업에 전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행이네요. 확실히 뭐든 제대로 하려면 기반이 되는 도로는 필수적이죠."
내가 웃으며 대꾸하자, 언제나 한결같은 마르다 양의 건조하면서도 세심한 호응이 뒤를 따랐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 나는 항상 옳은 말만 하지.
그건 그렇고.
곱씹어 볼수록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저번에 칠색이랑 가죽을 빼앗으려, 정확히는 후려쳐서 받아가려다가 역으로 우리 니카로스에 코가 꿰이신 로밀리아 회주께서 이렇게 열심히 일해주고 있다니.
'일부러 촌구석 영지라고 관심 끄지 않도록 성심성의껏 역린을 긁어준 보람이 있네.'
아주 뿌듯해.
여전히 그때 기억이 생생할 정도다.
다블레 상회가 이 벽지까지 와서 받아간 것은, 현자가 찾는 물건 중 하나이던 '칠색이랑의 가죽'.
그걸 제공하는 대가로 우리가 얻게 된 것은, 니카로스를 향한 투자와 인프라 개발 지원.
그렇기에 한몫 단단히 잡은 우리가 상단 측에 요구한, 그 개발 사업의 첫걸음이 도로였다는 점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사실 일반적으로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니긴 하지만, 하필이면 이 유명한 격언의 소재가 '길'인 것처럼, 도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접근성이나 이동성, 경제 성장, 지역 연결을 통한 사회적 통합까지. 그야말로 발전을 위한 핵심 밑받침이나 다름없으니까.'
솔직히 지금까지 에우스페나랑만 겨우 어떻게 연결된, 딱 하나 있는 부실한 도로만으로 니카로스가 연명해왔다는 게 더 신기할 지경일 만큼.
'그러니까 그만큼 중요한 일을 다 상회의 돈으로 대신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이야?'
자연스레 미소가 절로 나왔다.
물론 이렇게만 표현하면 불쌍한 다블레 상회가 나에게 사기라도 당해서 어마어마한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마치 내가 나쁜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선량하고 양심적인 나는, 자신 있게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야, 칠색이랑의 가죽을 그 미치광이 자줏빛 현자한테 제대로 전달만 해도 본전은 뽑을 수 있을 테니까.'
여러모로 제정신이 아닌 현자지만 그렇다고 그 실력이랑 위세가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다. 솔직히 수도에 제대로 된 기반만 있었다면 그냥 팔아치우지 않고 내가 직접 전달하는 게 더 이득일 정도였다.
'게다가 결국 지금 이렇게 손수 우리 니카로스에 기반을 쌓아주는 게, 나중에 다 다블레 상회의 영향력으로 남을 테니까 더욱 그렇지.'
그래, 우리 니카로스.
다름 아닌 앞으로 계속 끊임없이 발전하고 성장할, 우리 니카로스에 말이야. 이건 일종의 저점매수라고.
'물론 발전 못 할 가능성이 아예 0%라고 절대적으로 단언할 수야 없지만.'
그런 가능성이 실현될 즈음이면 나는 이미 십중팔구 이미 죽었거나 곧 죽을 처지일 테니까, 굳이 귀찮게 그런 미래까지 고려할 필요는 없지. 나 스스로 생각해도 지극히 합리적인 논리다.
어쨌거나 따라서 결론은.
몇 달 전 우리와 다블레 상회와 맺은 계약은 서로에게 모두 이득인 상부상조 그 자체인 거래였다는 뜻.
'물론 이런 내 결론과는 별개로 또 다른 당사자 중 한 명인 지금의 로밀리아 회주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딴 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도로 정비가 끝나면 기초적인 교육 시설 개발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다블레 상회를 통해 전문적인 건축 기술자들을 고용할 수도 있고, 이번 전쟁으로 얻은 배상금도 있으니 건물을 세우는 작업은 다행히도 순조로울 듯합니다. 다만, 문제는 교육을 담당한 인력입니다."
지금 중요한 건 이런 거다.
도로 다음에는 역시 교육인걸.
언제까지 우리 니카로스도 제대로 공부한 인재가 없다고 발발거리며 발품 팔고 다닐 수는 없다. 그거 극복해보겠다고 페트로스 집사장에게 누가 봐도 간첩 그 자체인 다니엘 같은 녀석까지 빌려왔을 정도니까. 내가 여기서 하루 이틀 해 먹을 것도 아니니까, 멀리 보고 슬슬 자체적인 기틀을 다져둬야 한다.
'하지만 교육자라. 역시 이건 어렵네.'
물론 단순히 읽고 쓰는 것과 간단한 숫자 셈 정도를 가르칠 선생이라면, 가까운 에우스페나에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긴 할 거다. 몹시 무례하고 거지 같은 곳이었지만 일단 그래도 동부 최대의 대도시니까.
'하지만 기껏 큰돈까지 들여 탄탄히 기틀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 중인데,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하는 건 조금 아쉽거든.'
항상 첫 단추가 중요한 법이니까 말이야.
고민인걸.
"...으음, 교육 인력 문제는 제가 따로 방법을 더 찾아보겠습니다. 일단은 너무 걱정하시지 말고 시설 설립에만 집중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영주님.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뭐.
어떻게 보면 이것도 다 배부른 고민이다.
'내일 당장 멸망할까 걱정하면서 벌벌 떨던 시절에 비하면, 똑똑한 교육자는 어디서 구해오지... 이런 걱정하는 건 확실히 사치에 가까운 일이니까.'
분명 그런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길었다.
그렇기에 돌이켜보면 다소 감회가 새로울 정도였다.
그래도 사실, 그동안 제법 고생하긴 했으니 슬슬 여유를 즐기면서 차근차근 발전에 전념할 때가 된 게 맞기도 했다.
일대의 적대적인 토후국들은 대충 다 정리를 해줬고, 마침내 반(反) 니카로스 연합과 정전 협상까지 맺었으니 당분간은 크게 전투를 벌일 일도 없었다.
'게다가 이런 내정의 전문가이자 언제나 묵묵히 헌신해주는 고급 인재 마르다 양도 있으니, 그야말로 여유롭게 내부정리하기에 최적의 시점이지.'
하긴. 이런 시국도 있어야지.
그렇고말고.
"...."
하지만.
분명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음에도.
아주 묘하게도.
"...영주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걱정이라.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어째서인지.
'머리가 조금 지끈거리는걸.'
이유 없이 귀가 먹먹해지기도 하고.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전장 한 번 다녀왔다고 일시적으로 몸 상태가 나빠진 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닌데.'
전장은 사람의 건강 해치는 데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니까. 젊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떤 무언가의 나쁜 징조일지도.
그럴지도 몰랐다.
그냥 그런 생각도 조금 들었다.
게다가 더 중요한 건.
그 느낌의 근원이 무엇인지 아예 감이 잡히지 않는 건 또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슬슬.'
그럴 때가 되긴 했으니까.
평화로운 시국에는 평화로운 시국만의 문제가 존재하는 법.
요컨대.
걱정이다.
***
"너희가 꼴찌다."
아르센은 회의실로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그런 말을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아르센이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마치 속사포와 같은 질책이 추가로 더 이어졌다.
"짬 먹을 만큼 먹은 바흐만은 그렇다 치고. 아르센 이놈아, 네가 꼴찌인 게 말이 되냐? 하여간. 젊은 녀석이 벌써 빠져서 잘하는 짓이야. 나 때는 말이야 부단장님이 부르는데 늦는다? 이런 건 생각도 못 했어. 영주님 호위 기사 됐다고 괜히 어깨에 힘 들어가는 거, 나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지킬 건 지키자고. 응? 내 말 이해하지?"
그 모든 질책의 제조자는, 바로 이 회의를 소집한 당사자이자 검은 매의 기사단 부단장, 테베르였다.
그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 네, 테베르 경. 죄송...."
"하하, 테베르 경. 너무 그렇게 뭐라고 하지는 마시게. 아르센 경은 조금 전까지 나와 계속 함께하고 있었으니. 내가 늦장을 부린 탓에 아르센 경까지 늦은 셈이니까 내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만 너그러이 넘어가 달라고."
"바흐만, 자네랑?"
아르센의 사과를 끊고 들어오는, 바흐만의 목소리.
그 넉살 좋은 변론에 테베르 또한 뭐라고 더 불만을 표하기는 어려웠는지 잠시 쩝 소리만 낸 뒤 입을 다물었다. 비록 지위는 테베르가 더 높았지만, 두 사람의 거의 동등한 지위의 입단 동기였으니까.
"...뭐. 그렇다면야."
따라서 테베르는 괜히 헛기침만 한 번 하며, 불퉁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르센과 바흐만의 착석을 허락했다.
"허허."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흐만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아르센에게 윙크를 날렸다.
"...."
솔직히 아르센으로서는 이 또한 굉장히 부담스러운 호의였지만, 어쨌거나 이 상황에서 달리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그냥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르센의 묘한 곤혹스러움과 함께.
"...그래, 어쨌거나 올 사람은 이제 다 온 것 같으니 슬슬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야기라는 이름의 회의가 시작되었다.
부단장 테베르.
이곳에 모인 인원 중에서는 가장 상급자이자, 이 회의를 소집한 당사자, 단순히 기사단 차원을 넘어 니카로스의 초원 사회에서도 명성 높은 전사인 그가 자연스레 상황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의문을 표하는 자도 있었다.
잘 생각해보면 확실히 지금 상황은 이상했다.
"그, 부단장님, 아직 단장인 키로스 경께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렇게까지 대대적으로 검은 매의 기사단 단원이 모두 모였는데, 정적 단장이 없다는 건 너무나 이상하지 않나? 게다가 키로스 경이 이런 일에 늦을 사람도 아닌데. 그리고 테베르 경은 왜 키로스 경이 없다는 걸 신경 쓰지 않지?
하지만 그런 의문들은 곧 사그라들고 말았다.
"단장님은 오시지 않을 거다."
테베르가 바로 이렇게 대답했으니까.
"처음부터 부르지 않았으니까."
"...."
전례 없는 대답.
전례 없는 상황.
질문을 던졌던 단원조차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하나의 의문이 사그라든 동시에, 새로운 의문과 불안감이 솟아올라 다시 그 빈 자리를 대신했다.
처음부터 부르지 않았다, 라.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그와 곧이어.
대부분의 단원이 하나의 사실 또한 알아차렸다.
'단장인 키로스 경이 빠졌다면.'
지금 이 자리에는, 온전히 초원 주민 출신들만 모여있는 것이구나.
그렇다.
검은 매의 기사단의 본질은 전대 영주 제논과 키로스 경이 니카로스의 초원 원주민 기수들을 모아 만들어낸 기병대였으니까.
따라서 이 상상 못 한 상황에 젊은 단원들은 모두 흔들리는 담긴 눈동자로 부단장을 바라봤다.
"...."
그리고 바흐만을 비롯한 소수의 선임 간부들은 젊은 단원들과 언뜻 비슷하지만, 어딘가 확연히 다른 시선으로 침묵을 유지한 채 테베르를 바라봤고.
어째서 단장인 키로스 경까지 빼고 자신들만을 이렇게 대대적으로 호출한 것인가.
그리고 이런 구도를 만들어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인가.
그렇게, 의문, 불안, 의심, 그리고 기대까지.
그 모든 게 뒤섞인, 수십 명의 시선을 일제히 받은 테베르는.
"솔직히 말하마. 너희는 요즘 영주님에게 불만 없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런 말을 내뱉었다.
"...!"
회의실이 한순간에 싸늘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젊은 단원들은 제대로 된 말도 잇지 못한 채, 지금 자신들이 들은 게 맞냐는 듯한 시선으로 서로를 둘러보았다. 들어놓고도 쉽게 믿기지 않았다.
"굳이 다시 물어봐 줘야 하냐?"
하지만 당연히 그들이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너희, 영주님에게 불만 없냐고,"
충격적 발언의 당사자인 테베르 본인이 태연한 어조로 그 사실을 다시 증명해주고 있었으니까.
"...."
그렇게 다시 내뱉어진 그 질문만이.
침묵의 회의실을 가득 채우고 울렸다.
그 순간 속에서.
대부분이 당황하였고.
또 몇몇은 조용히 웃었다.
이곳은 니카로스였다.
#097. 사람의 마음이란 것 (4)
단장이지만 초원 주민 출신은 아닌 키로스 경만 빼고, 회의실에 모두 소집된 검은 매의 기사단 단원들.
그리고.
"너희는 요즘 영주님에게 불만 없냐?"
그런 단원들 앞에서 망설임 없이 이런 물음을 꺼낸 부단장 테베르.
연이어 펼쳐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부분의 젊은 단원이 따라가지 못하고, 그저 침묵만이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테베르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동요 없이 자신의 말을 먼저 이어나갔다.
"내가 먼저 솔직히 말하마."
그의 말은 명료했다.
"나는 사실 제법 불만이 있다."
다소 충격적일 만큼.
"물론 우리 티베리오스 영주님께서 즉위하신 이래 우리 니카로스가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건 나도 당연히 인정한다. 이번에 백작이 되신 것도 어마어마한 경사지. 나 역시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했어."
그는 단원들의 조용한 불안에도 내색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면서도 거침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런 위대한 성과와 경사가 만들어지는 동안, 우리 검은 매의 기사단은 무엇을 했지?"
그가 말하는 요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
"우리가 마지막으로 제대로 활약하고 공을 세운 게 언제인지 너희는 기억이라도 하느냐? 내가 기억하기로 수년 전 도적 떼 토벌이 마지막이었어. 마누엘 전 영주님을 시해한 그놈들 말이다."
대략 20년 전이다.
검은 매의 기사단이 창설된 건.
그리고 테베르는 창설과 동시에 기사단에 입단한, 최초의 단원 중 한 명이었다. 그에게는 그 사실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그 자부심만큼이나 또렷하게 지금까지 기사로서 겪은 수많은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하찮은 도적 떼에 불과했지만, 분명 영광스러운 싸움이기도 했지. 상대는 감히 마누엘 님을 시해한 쓰레기들이었으니까. 우리 기사단이 직접 처단할 가치가 있는 적이었다. 그렇지 않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한 젊은 단원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래.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몇 년, 우리가 한 것들은 뭐지?"
"...."
이번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테베르는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미끼 역할, 후방 교란, 본대에서 분리되어 적 별동대 견제... 여태껏 니카로스가 큰 전쟁을 수없이 겪었지만, 그 전쟁에서 우리가 한 일은 그게 전부였다."
젊은 단원들의 침묵은 여전히 이어졌지만.
분위기는 묘하게 달라졌다.
조금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우리가 쫓겨난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한낱 용병 놈들이었지."
지금 존재하는 침묵은.
무언의 공감이라는 이름을 지닌 침묵이었다.
"...."
젊은 단원들은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부단장의 표현이 다소 거칠긴 했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현 영주 티베리오스가 즉위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매일매일 외적에게 끔찍한 침략을 당한다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을 거친 땅이었다. 주민들은 외부의 그 어떠한 도움도 없이 스스로 모든 위기를 극복했어야 했다.
그게 바로 제국의 동쪽 최전선, 니카로스의 삶이었다.
그리고 20년의 세월 동안 그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우리.'
바로 검은 매의 기사단이었다.
그들의 분투가 이 땅을 존속시켰다.
그 사실이 곧 단원들의 긍지가 되었다.
하지만 어느새 모든 게 달라졌다.
티베리오스가 즉위하고 몇 년, 어느새 검은 매의 기사단은 마땅한 이유도 모른 채 전장의 변두리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대신 주인공이 된 건 에우스페나에서 고용된 용병들이었다.
"너희도 알고 있겠지? 이건 단순히 공을 빼앗겼다는 불만이 아니다. 내가 그 정도로 좀생이는 아니니까. 하지만 이건 우리 기사단의 뿌리 자체를 흔들 수 있는 일이니까 하는 말이다. 그렇지 않냐?"
"...맞습니다, 부단장님."
회의실에 모인 수십 명의 젊은 단원 중, 누군가가 작지만 선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확히 누가 대답한 건지는 그들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제 모두의 마음이 비슷해졌으니까.
애초에 검은 매의 기사단은.
단순한 무력 집단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약 20년 전, 에우스페나의 기사이던 제논 발란티스는, 월광교 세력을 일부 몰아내고 동방의 땅을 정복했다.
그리고 당시 제논의 주군이던 전대 에우스페나 공작에게 공을 인정받아 정복한 땅을 영지로 하사받았다.
그 땅을 기반으로.
에우스페나 공작의 봉신이 될 수 있었다.
새로운 남작령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몰락했던 가문을 재건하고 영주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제논은 제국 본토에서 주민들을 동쪽으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니카로스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어찌 생각하면 당연히, 그 땅에는 이주민 말고도 원래 살던 원주민들 또한 이미 존재했다.
동방 대초원의 인간들.
태생적 기수이자 전사 집단.
그들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전사가 모여 만들어진 게 바로 '검은 매의 기사단'이었다.
제논을 따라온 그의 오른팔 키로스 경이 스스로 단장이 되어 기사단을 창설했다. 모든 게 열악했던 니카로스지만, 기사단만큼은 그 와중에도 가장 훌륭하고 명예로운 대우를 받았다.
그런 역사로 인해, 검은 매의 기사단은 단순히 싸움만을 위한 조직이라고 할 수 없었다.
군대인 동시에 한 민족의 정수가 그대로 담긴 집합이기도 했고, 동시에 제국과 초원 원주민의 화합을 의미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니카로스라는 작은 세상에서 가장 명예롭던 자리.
그 자리는 분명 초원의 전사들 것이었다.
명예와 실리.
그것이 바로 니카로스의 기사단이 다른 동방 토후국들의 기병대보다 특별했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그리고 20년의 세월 동안 이주민과 원주민, 두 집단이 큰 갈등 없이 공존할 수 있었던 반석이기도 했다.
제국 본토 이주민은 지배계층이지만, 이 척박하고 위험한 땅에 대해 잘 하는 초원 주민들의 힘과 지혜가 절실했다.
초원 주민들은 복속 당한 피지배층이지만 오히려 인정과 찬사를 받으며 자신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지킬 수 있었다.
요컨대.
'강해지고 헌신할 이유가 있었다.'
그렇기에.
검은 매의 기사단은 실제로 강했고 헌신했다.
그런데 만약.
지금에 와서 그 구조가 깨지면 어떻게 될까.
지배계층인 이주민들이 더는 초원 주민들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면?
이제는 스스로 강해졌고, 20년 동안 배울 만큼 배웠다고 판단했다면?
부단장 테베르가 말하고 단원들이 무언의 공감을 하는 주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단장 키로스 경을 부르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따라서 이건 이미 기사단의 내부 회의이자.
초원 유목 사회 전사들의 회합이기도 했다.
"키로스 단장... 좋은 분이지. 대단하신 분이고. 나도 존경한다. 손수 우리 기사단을 창설하셔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분이니까. 당연히 감사의 마음도 품고 있어. 그분은 언제나 믿는다."
어느새 테베르는.
마치 혼자 중얼거리듯 이야기를 이었다.
"하지만 티베리오스 현 영주님은 어떨까. 그분도 분명 대단하신 분이고 니카로스의 번영을 가져올 호걸이지만, 애석하게도 그분에게는 지금의 '니카로스'가 당연한 존재야. 그분의 유소년기 때부터, 니카로스라는 영지는 존재했으니까. 그분은 이 영지가 없던 시절을 모르신다."
"...그 말씀은."
"그러니 걱정된다는 거다. 여태껏 잘 맞물려 돌아가던 우리와 본토 이주민들의 관계가 깨지는 게. 현 영주님의 방침과 정책으로 인해서."
"...."
다시 한번 무거운 침묵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순간적인 충격과 싸늘함은 가셨지만, 그렇다고 이야기의 본질적인 막중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다 한 테베르 역시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고, 그렇기에 단원들은 몇 분간 그저 아무도 말하지 않고 서로의 눈치만 봤다.
심장을 조이는 듯한 시린 긴장감.
그런 침묵을 결국 참지 못하고.
마침내 누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입니까, 부단장님."
아르센이었다.
영주 티베리오스의 호위 기사.
그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테베르를 보며 물었다.
지금의 아르센은 마치 검집 속에 시리게 잠들어 있는, 한 자루의 검과도 같은 기운을 풍겼다.
테베르의 대답에 따라, 언제든 검집에서 뽑혀 나와 무엇이든 벨 수 있다는 듯.
하지만.
"글쎄. 무슨 결론을 말하는 거냐"
그런 아르센의 각오가 무색하게도, 부단장 테베르는 그저 그렇게만 대꾸할 뿐이었다.
"...그러니, 그런 불만이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겠다. 이런 대처 방안에 대해 논의해고자 우리 모두를 부르신 것 아닙니까? 저는 바로 그것을 묻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애석하게도 틀렸다."
"...네?"
이 모든 상황을 만들었음에도 부단장은 참으로 태연했다. 아직 테베르는 아르센이나 다른 젊은 단원들과 비슷한 심각함 따위를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그의 답은 바로.
"내가 제일 처음 묻지 않았느냐? 너희는 불만 없냐고, 그리고 나는 솔직히 말해 불만이 있다고. 그래서 이런저런 마음을 품고 있다고 다 얘기했지."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본론이고 결론이다."
이것이었기 때문에.
부단장 테베르는 허울 없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정말로 귀찮고 머리 아프다는 듯 내뱉었다.
"말했다시피, 나는 개인적으로 저런 불만을 품고 있기에 지금 상황이 바람직하지 못하고 위험하다고 본다. 그렇기에 너희의 의견도 한번 듣고 싶어서 이렇게 불렀다. 그게 전부다."
"그럼, 단장이신 키로스 경을 제외한 것은."
"우리끼리 진솔하게 얘기하려면 아무래도 단장님은 안 계신 편이 편할 테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분은 외부인이니 아무래도 너희가 얘기할 때 눈치가 더 보일 것 아니냐?"
"...그러면 굳이 이렇게 공개적인 시위라도 하듯 단원들을 한 번에 전부 소집한 것은?"
"시위? 그건 뭔 개소리냐? 오히려 내가 기사단원 수십 명을 몰래 하나씩 만나고 다니는 게 더 이상하고 수상한 일 아니냐?"
"...."
거기까지 이야기를 다 듣고.
아르센은 허무하다는 듯, 칼날 같던 기세를 전부 사그라뜨렸다.
'하긴, 생각해보면.'
부단장 테베르는 처음부터 저런 사람이었다.
현명함과 소탈함이 공존하는 기인 같은 기사.
그렇기에 전대 영주 제논과 키로스 경도 그를 신뢰하고 부단장, 사실상 초원 기수들의 대표와도 같은 자리에 임명한 것이겠지.
"이제 이해했냐? 그러니까 같잖은 추궁은 이제 그만하고, 제발 너희도 입 좀 열어봐라. 나만 떠드니? 그래, 잠깐 눈 돌아갔던 아르센, 너부터."
"저 먼저 말씀입니까...?"
"그래, 이 자식아. 하여간. 누가 영주님 최측근 아니랄까 봐. 방금 눈빛 장난 아니더라. 괜한 소리 같은 거 하면 부단장이고 동네 어르신이고 나발이고 죄다 씹어먹고 반 죽여놔서 영주님에게 직접 끌고 갈 기세였어."
"...아니, 그럴 리가요."
"봐, 저 자식. 거짓말 더럽게 못 해."
부단장 테베르의 평소 같은 실없는 모습. 그리고 뻔뻔한 부정과 함께 당황하는 동료 아르센의 모습.
마침내 회의실 속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조금씩 작은 웃음까지 튀어나왔다.
어떻게 보면 이번 상황의 심각성치고는 상당히 이상적인 마무리처럼도 보였다.
그렇기에.
아르센 또한 조금은 어깨에 힘을 빼고 진솔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부단장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이해했습니다. 전부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공감되는 점도 많았습니다. 저도 한 번 정도는 영주님 앞에서 직접 이 문제에 대해 문의하는 게 옳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의견 취합부터 먼저 해서 영주님께 말씀드리자. 이 얘기지?"
"네, 그렇습니다."
"좋아, 나랑 비슷하네. 다른 놈들도 비슷한 생각이냐? 이견 있으면 지금 미리 말해라. 나중에 다른 말 하지 말고."
테베르의 물음에 회의실 구석구석에서 하나둘씩, 젊은 단원들의 대답이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긍정의 뜻을 담고 있었다.
테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처음부터 그조차도 바라던 마무리였다.
"좋아. 그러면 내가 이렇게 의견을 모아서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에 영주님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그리고, 동시에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테베르 경, 이의가 있소."
한 박자 늦게, 그 말이 회의실 안을 울렸다.
"...아."
테베르는 그런 신음과도 같은 소리와 함께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치 전신으로 한숨이라도 쉬듯 피곤하다는 기색으로, 그 발언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모든 게 참으로 명확했다.
"그래. 바흐만. 역시."
"나중에 다른 말 하지 말고, 이의 있다면 미리 말하라 하셨지? 나도 부단장님 말씀을 제법 잘 듣는다고."
그 주인공은 바로.
어느새 비슷한 최고선임들을 곁에 둔 채, 회의실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있던, 바흐만이었으니까.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란 생각도 했다.
오히려 그렇기에 만든 자리였다.
#098. 사람의 마음이란 것 (5)
검은 매의 기사단 단원 대부분이 모였던.
부단장 테베르가 주관했던 회의가 있고 바로 다음 날.
테베르는 영주의 집무실에 앉아있게 되었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영주님."
영주 티베리오스가 직접 그를 불렀기 때문에.
예정에 없던 호출이었지만 테베르는 결코 당황하거나 불안함에 떨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자리가 만들어지길 바라며 어제의 그 회의를 소집했던 것이니까.
그렇기에 그의 자세와 태도는 이 와중에도 무척이나 기사답게 당당하고 꼿꼿했다.
그리고 동시에 눈앞의 티베리오스를 유심히 바라볼 여유도 있었다.
'솔직히 벌써 2년은 모셔온 주군이긴 하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익숙한 관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기사단 차원의 공적인 보고는 항상 단장이자 영주님의 오른팔인 키로스 경이 대표해서 하는 편이었고, 굳이 사적인 관계까지 추가해도 호위 기사인 아르센 정도만이 겨우 영주님의 인맥에 들어간다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악감정이 있다거나 그런 건 결코 아니고.'
그냥 담백한 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랜만에 집무실에 들어온 테베르는 계속 영주의 모습을 살펴나갔다.
'...확실히 제논 님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새까만 흑발과 황금빛 눈동자, 그런 특징적인 외모는 쏙 빼닮긴 했다. 사실 돌아가신 마누엘 님도 그렇고, 요즘 눈에 띄는 레온이라는 꼬마도 그렇고. 지금까지 그 핏줄 진한 발란티스 가문에 예외 같은 건 하나도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당장 보이는 일차원적인 특징을 빼고 생각하면....'
무뚝뚝하게 그저 적을 물리치고 영토를 지키는 것에만 관심을 두던, 그야말로 군인 그 자체이던 제논.
언제나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영지의 미래를 위해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젊은 티베리오스.
인상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무골 그 자체이던 마누엘과 딱 봐도 독종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레온까지 더해서 비교하면, 티베리오스 혼자 유독 발란티스 가문에서 눈에 띄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까지 다 알고도.
마냥 닮지 않았다고 단정 짓을 수 없는 건.
'...그, 묘한 느낌.'
그런 느낌 하나 때문일 뿐.
테베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무렵, 마침내 티베리오스가 대답했다.
"네, 제가 부단장님을 불렀습니다. 한 번 차분하고 진득하게,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을 듯하여."
여전히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영주 티베리오스. 그 태도를 보니 확실히 영주 역시 어제 있던 기사단 내부 회의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안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였다.
'정확히 출처가 어디인지 조금 하긴 하지만.'
이상한 일은 전혀 아니다.
예상하기도 한 일이고.
그렇기에 테베르는 떳떳하게 대꾸할 수 있었다.
"저도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하, 그거 잘 됐군요. 대화는 좋은 것이죠."
그리고 마치 그 떳떳함에 호응하듯.
티베리오스는 곧바로 물었다.
"지난 검은 매의 기사단 단원들을 모아서 벌였던 회의가,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군요."
"...."
무척이나 단도직입적으로.
솔직히 다 예상했음에도 순간적으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거침없는 질문이었기에, 테베르는 순간적으로 침묵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 그도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특별한 의미는 없었습니다. 그냥 동료들 간의 고민과 걱정을 털어놓는 자리였을 뿐이죠."
"단장인 키로스 경만 쏙 빼놓고요?"
"제가 그분을 존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분은 아무래도 저희와는 다소 처지가 다른지라."
"그 말인즉슨."
"네, 우리 대초원의 주민들과 관련된 이야기였습니다."
직접적인 발언은 없었지만, 숨기는 것도 없었다.
사실상 테베르는 지금 모든 걸 다 솔직하게 밝히고 있었다.
따라서 그런 테베르를 보고 결국, 티베리오스는 픽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솔직하다고 해야 할까요. 마음에 듭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솔직하신 분이라면 그냥 저에게 먼저 직접 찾아와서 말씀 주셔도 좋았을 텐데."
"...음,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 역시 다른 단원들의 생각을 직접 들어볼 필요는 있었고, 그렇다면 괜히 한 명씩 따로 조용히 만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대놓고 모이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과연.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해가 되는군요."
"이해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렇게 첫 충격에 비해 생각보다 잔잔했던 대화가 한 차례 지나가고, 티베리오스는 다시 물었다.
"검은 매의 기사단 단원들의 불만이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
그래, 애초에 진정한 질문은.
티베리오스가 테베르를 부른 이유는 이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질문에서만큼은 테베르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본인이 어느 정도 자초한 상황이었음에도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는 없다. 어렵다고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다.
결국, 테베르는 잠시 습관적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은 뒤, 조금씩 대답을 시작했다.
"영주님께서도... 아르센 경이 어떤 성격의 기사인지는 어느 정도 알고 계시지요?"
"네, 어느 정도는. 우리는 친한 사이니까요."
"아, 그거 반가운 소식이네요. 어쨌거나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면, 사실 젊은 단원들은 그렇게 심각한 수준의 불만은 품고 있지 않습니다. 딱 다들 아르센 경 같은 느낌이지요.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제나 영주님의 지시가 최우선이다. 대략 그런 속마음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믿음이네요."
"저도 무척 모범적인 기사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키로스 경께서 그 친구들을 어릴 적부터 잘 가르쳤어요."
충성이란 것에 대하여 말이죠.
"가슴 뭉클해지는 이야기네요."
그렇게 한 차례 훈훈한 이야기가 지나갔다.
그러나.
"그러나 애석하게도 테베르 경께서는 그 이야기를 '젊은' 단원들의 것이라고 명확히 선을 그으셨군요."
"...네."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테베르는 한숨과 함께 그 정말로 중요한 내용을 말하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사실 진정한 핵심은 기사단의 주요 선임들... 대략 10년 이상 복무한 최고선임들이죠. 그쪽은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다르다, 라."
테베르는 그 대답과 동시에 바로 어제 회의 때 있던 일을 떠올렸다.
-기사단 단원들의 의견을 모아서 영주님께 문의를 드린다... 나쁜 발상이라고까지 말하진 않겠지만,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서 너무 미적지근한 대처 아닙니까, 테베르 경?
-...그렇다면 자네는 어떤 대안을 논하고 싶은 건가, 바흐만?
여유인지, 아니면 오만인지.
기사단 최고선임 중 한 명은 바흐만은 기묘한 웃음과 함께 곧바로 그렇게 대답했다.
-나 역시 우리 부단장님이 제기한 문제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일세. 아니, 그 이상이라고 봐도 되겠지. 이대로 우리 기사단의 홀대와 거기서 비롯될 니카로스 내부 균열을 마냥 방임하기는 힘들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지. 단순히 우리 기사단의 이름을 넘어, 초원주민들 전체의 이름으로.
-그건....
거기까지 떠올리고, 테베르는 다시 대답을 이어갔다.
"사실 단순한 선임들의 차원보다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초원 사회 원로들의 전반적인 속내라고 여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사단의 선임들은 그저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대변자일 뿐이죠...."
"요컨대?"
테베르는 잠시 무례조차 잊고, 습관처럼 한숨을 한 번 내쉬며 끝내 대답했다.
"그, 일종의... 주민들의 자존심과 같던 기사단이 홀대받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본격적인 원주민 차별의 전조라고 느끼는 원로들도 있습니다. 고향 방문이라는 명분 탓에 저도 더 추궁하거나 캐묻기는 어려워 아직 자세히는 모르지만, 최근 들어 원로들과 기사단의 몇몇 선임들의 개인적인 회담 또한 잦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그런 여론이 약한 편은 아닙니다.
다소 조심스럽지만.
불온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그리고 어쩌면 무언가를 요구하며, 대대적인 집단 저항이 일어날 만큼."
그것이 테베르가 전부 털어놓으며.
마무리한 대답이었다.
"...."
그 대답의 무게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티베리오스 역시 잠시 고민에 빠진 듯 미소를 지우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테베르 또한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테베르도 먼저 젊은 단원들의 의견을 수집하며 공론화의 물꼬를 틀긴 했지만, 그건 일종의 이 불만을 연착륙시키기 위한 나름의 술책에 가까웠다.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원로들이라고 봐도 좋았다.
지금 기사단의 주축을 차지하는 단원들은 모두 어린 시절부터 니카로스라는 제국의 체제를 겪으며 자란 세대지만, 대초원 원주민 사회에서 아직 가장 입김이 센 원로들은 달랐다. 그들은 제국의 시민보다는 초원의 유목민이라는 정체성이 훨씬 강한 존재들이었다.
요컨대, 그들에게는 제국을 향한 충성과 복종이 상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티베리오스가 다시 입을 연 것은, 테베르가 침묵 속에서 그 사실을 다시 되뇌고 있던 즈음이었다.
"테베르 경의 개인적인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는 그것도 궁금하군요."
"...이것 참."
어느새 티베리오스의 입가에는 다시 미소와 올라와 있었고, 테베르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고작 조금 곤란한 정도로 영주님의 질문에 대답을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테베르는 기사였으니까.
"제 생각이라. 뭐, 정말로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불만이 다소 있긴 합니다. 불안감도 있고요. 아무래도 최근 몇 년간 있던 중요한 전쟁 때마다 우리 기사단이 큰 활약을 하지 못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죠."
"그렇습니까?"
"네. 하지만 그뿐입니다. 그게 제가 영주님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죠. 뭐, 이왕이면 이유라도 조금 속 시원하게 설명해주면 좋겠다 정도의 마음은 있지만, 딱 그 정도일 뿐입니다. 괜히 불평불만만 많은, 원로들과는 뜻이 상당히 다릅니다."
테베르는 기사였으니까.
기사 중의 기사, 키로스 경에게 직접 사사 받은.
결국, 그 솔직담백하고 거침없는 대답에 티베리오스는 소리까지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한 대답, 정말로 감사합니다. 확실히 저의 판단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네? 그렇습니까? 제가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만...."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일단 다행이라고 같이 기뻐해 주는 테베르의 대답에 티베리오스의 웃음이 더 커졌다.
"일단은, 네. 여러분의 의문과 불안부터 당장 해소해 드려야겠죠. 제가 차별 정책을 펼치기 위해 기사단을 의도적으로 홀대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까지 효율적인 승리를 위해 각 전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려고 하다 보니 우연히 그런 오해를 사고 만 것이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하하, 이 정도 대답으로는 부족합니까? 아무래도 저에 대한 신용이 그리 좋지는 못한 모양이군요."
"아,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당황하는 테베르를 보며 티베리오스는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테베르 경께서 지금까지 다 솔직히 답해주셨으니 저도 솔직하게 몇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다만 그 미소가 마냥.
"애초에 이제는 제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 않습니까? 이미 그저 모든 게 정치적 문제가 되었을 뿐."
온화한 것은 아니었다.
"허...."
그 미소에는 가시가 있었다.
"사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검은 매의 기사단이 얼마나 니카로스에 중요한 존재인지, 그걸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고작 전장에 몇 번 덜 보냈다고, 초원주민 사회 전체가 불온한 낌새를 풍기며 저항하려고 하다니."
"그건."
"그러니 저는 이렇게밖에 생각을 못 하겠습니다."
애초에 기사단 홀대 문제는 하나의 핑계이자 명분일 뿐, 이미 확증편향과도 같은 걱정과 우려에 빠진 몇몇 초원 원로들의, 조직되고 계획된 정치적 시위라고.
슬슬 영지가 커지고 먹고 살 만해지고 안전해 보이니까, 다른 생각도 슬슬 머리에 드는 것이라고.
사람의 마음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테베르 경?"
"...."
그 노골적인 정리에.
테베르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솔직히 오늘 이 자리 자체를 그가 간접적으로 유발하고 유도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저 슬슬 좌시하기 어려운 초원 사회 내부 갈등을 해소하고 소통의 장을 만들 생각뿐이었다. 이런 말까지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그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하나 확실한 것은.
"...솔직히, 마냥 부정하기는 어렵군요."
영주 티베리오스의 주장에 분명한 일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테베르는 그 판단을 숨기지 않았다.
그 테베르의 또다시 진솔한 대답에, 티베리오스 역시 또다시 싱긋 미소 지었다.
참으로 다행이라는 듯.
마침내 티베리오스가.
영주가 이야기의 정리를 시작했다.
"테베르 경, 솔직히 저는 지금 하루빨리 영지의 발전에 집중해야 하는 시점에 이런 내부 문제로 오래 발목 잡히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엄청나게 골치가 아픈 상황이지요."
"...네, 이해합니다. 영주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가능한 한 빠르고 효율적인, 두 가지 대처 방안을 고려 중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티베리오스는 두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하나, 엄청나게 달콤하고 즐거운 당근."
그리고 한 손가락 접어 내렸다.
"둘, 그와 반대되는 채찍."
"여, 영주님."
오늘 티베리오스는 유독 여러 번 웃었다.
"둘 중 뭐가 사용될지는, 아무래도 테베르 경의 협조가 많이 관여할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의미로.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이신지...?"
아, 그래.
먼저 간단히만 말하자면.
"테베르 경, 영지에 관심 있으신지?"
"...네?"
테베르의 멍청한 반문이 집무실을 울렸다.
여전히 티베리오스의 두 귀는 먹먹했다.
#099. 당근과 채찍 (1)
테베르 경과의 면담이 있고 바로 다음 날.
대충 급하게 해야 할 금일의 업무들을 다 끝내고, 오랜만에 살짝 여유 시간이 생긴 나는 자연스레 니카로스 영주 성의 성벽 위로 올랐다.
굉장히 오랜만에 올라온 것이었지만 여기는 똑같았다. 여전히 시야가 확 트이고 바람이 시원하여 항상 기분 좋은 장소였었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마냥, 주위에 가득 펼쳐진 드넓은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자니,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영주야, 뭐하니? 청승?"
언제니 느끼는 거지만.
진짜 말도 안 되는 호칭과 말투다.
그냥 듣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허, 영주한테 청승이 뭡니까, 청승이?"
"청승이란 표현이 제일 적당한데 어쩌겠어. 그렇게 왜 평소답지 않은 짓 같은 걸 하고 있던 거야?"
"원래도 여기 올라오는 거 좋아했습니다. 바빠서 자주 못 왔을 뿐."
"그래?"
우리의 영지 마법사님, 발레리아는 그런 사소한 것 따위는 사실 크게 상관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옆에 서서.
같이 내가 보던 광경을 바라봤다.
"확실히 경치는 괜찮네. 여기 동부는 뭐든 진짜 평평하고 넓은 느낌이야. 그냥 막 아득해져."
"그렇죠? 괜히 대초원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니까."
그냥 보다 보면, 이유도 없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 막상 실제로 살아보면 거칠고 메마르고 불편한 것투성이지만, 그런데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마력이 있는 땅이다.
생각해보니 이제 벌써 슬슬 2년은 확실히 넘었다.
내가 이 세상에 떨어진 것도.
'시간이 정말로 빨라.'
미쳐 버릴 정도로.
그렇게 한동안 가만히 경치만 지켜봤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계속 이럴 수는 없었다.
"발레리아 씨, 하고 싶으신 말 있으면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딱 봐도 그녀에게는 다른 용건이 있어 보였으니까.
"으, 응? 무슨 말? 내가? 하고 싶은 말?"
저 상습적 거짓말쟁이 여성분께서 또 무의미한 부정을 하고 계시지만, 정말로 니카로스에서 저것만큼 의미 없는 행위는 없다고 나는 당당히 단정 지을 수 있었다.
따라서 내가 그저 웃긴다는 듯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결국 발레리아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뭐... 딱히 하고 싶은 말까지는 아니고. 그냥 안 그래도 궁금한 게 조금 있었는데 마침 잘 만났다는 것 정도...?"
궁금한 거라.
"사실 뭐 그것도 내가 엄청 궁금하다기보다는... 영지 전체가 궁금해하는 건데, 막상 딱히 아무도 선뜻 안 물어보려고 해서 결국 답답해서 내가 묻는다, 이런 느낌? 딱 그 정도 같은 거라...."
"네, 대충 이해했으니 편하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가만히 놔두다간 끝이 없겠어, 정말.
마침내 내가 직접적인 허락까지 하자, 발레리아는 나에게 그 모두가 궁금해한다는 질문을 밖으로 꺼냈다.
"그, 어제 기사단 부단장 아저씨랑 너랑 얘기한 뒤로, 부단장 아저씨가 거의 반쯤 넋이 나가서 나가던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야?"
그래, 지금 시점에서 궁금한 건.
역시 이거겠지.
예상하던 질문이 나왔기에 나는 그저 웃었다.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라고, 다들 가만히 눈치만 보고 계신 것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다들 뭔가 자신들만의 사정이 있는 게 아닐까?"
그래, 뭐 다들 사정이 있기는 있겠지.
그러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추측해 보자면, 아무래도 이 일이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라서 다들 더 조심스러워하는 거 아닐까 싶다.
'검은 매의 기사단의 창설자이자 단장인 키로스 경도, 니카로스 토박이 출신인 마르다 양도 말이야.'
그렇기에 외부인인 발레리아가 이런 질문을 부담 없이 하기에 제일 편한 입장일 수 있지. 이해가 안 가는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어쩌다 보니 나름대로 가신 대표로 뽑힌 발레리아 씨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뭐, 살짝 파격적이고 전례 없던 제안을 하나 드리긴 했죠."
"그렇게만 얘기하지 말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음, 테베르 경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서 큰 선물을 줬다고 짧게 요약할 수 있겠군요."
"개소리도 하지 말고."
개소리라니.
농담이긴 했지만, 아예 진실이 0%는 아니었는데.
실제로 테베르 경과의 대화가 기대보다도 훨씬 즐겁긴 했다. 요즘 안 그래도 하나 같이 속에 흉계만 잔뜩 있는 나쁜 인간들과의 대화가 잦았는데, 아주 오랜만에 솔직 담백하고 진솔하고 가식 없는 사람과의 대화였다.
'그리고 그런 것치고 정치적 구도에 완전히 무지하지도 않고.'
기사로서. 알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얼마나 모범적이야.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지.
요컨대.
사람 자체가 딱 적절하다.
"남작령을 하나 하사할 수 있겠다고 했습니다."
봉신으로 삼기에.
"정확히는 마누엘라 남작령을 하사하여 저의 휘하 남작으로 삼고, 영주로 만들어줄 수 있다고 했지요."
"응? 내가 영지 운영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긴 하지만, 그거 진짜 엄청난 제안 아니야...?"
"뭐, 그런 셈이죠. 말했잖아요. 파격적이고 전례 없는 제안을 했다고."
확실히 전례가 없긴 하다.
조그마한 남작령 하나였던 니카로스에서 떼줄 땅 같은 건 여태껏 없었으니까 말이야. 내가 처음 만들었다고.
"...진짜 생각도 못 했던 답이라 계산이 잘 안 되네."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다 그저 합리적 필요로 판단한 결론일 뿐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줄래요, 영주님?"
이미 답을 다 해주기로 했으니.
더 못 해줄 것도 없지.
게다가 영주님이라는 호칭도 오랜만에 들었겠다.
"아무래도 우리 백작령의 행정력 역량, 제가 직접 일일이 다 다스릴 수 있는 영토의 한계에 다다르기도 했고, 마누엘라 남작령 역시 옛 니카로스처럼 월광교 유목민족이 사는 곳이니까 말이죠. 출신이 비슷한 테베르 경이 직접 영주가 되어 다스린다면, 제법 괜찮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건 그럴듯하네."
"그리고 마누엘라 남작령은 돌아가신 저의 형님 이름이 붙은 영지이기도 하죠. 그리고 테베르 경은 그 형님의 복수를 행했던 검은 매의 기사단 부단장 출신이기도 하고."
"...그것도 중요한 거야?"
"물론이죠."
원래 대국적 운영이라는 것은, 다 포장지가 무척 중요한 법이거든. 이런 서사는 확실해 유의미해.
"...."
내 말을 차근차근 곱씹어보는지, 발레리아는 먼 곳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다시 물었다.
"근데 그게 이유 전부는 아니지?"
역시 이상할 정도로 예리해.
방화광의 동물적 본능 같은 건가.
그렇기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네, 정답입니다."
그렇지.
다른 이유도 있지.
'이제 더는 미룰 수가 없으니까.'
눈치채기 어렵지만, 오래전부터 삐걱거리고 있던 우리 니카로스의 내부 개혁을 말이야.
사실 이게 가장 큰 이유기도 하다.
나도 전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번 사태와 테베르 경과의 대화로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게 경종이 되어 내 머릿속을 윙 윙 울렸다.
'이미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우리 니카로스는 대략 20년 전에 처음 개척된 제국의 정복지다. 이곳에는 제국 본토의 이주민과 원래부터 수백 년 동안 이 땅에서 살던 원주민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중 전자의 대표가 우리 영주 일가인 발란티스 가문과 키로스 경, 제노비오스 집사장 등 수뇌부들이고, 후자의 대표가 초원 최고의 전사만 모은 검은 매의 기사단이지.'
이 쓸데없이 복잡한 구조.
물론 이런 구조에 분명 좋은 점도 있었다.
제국의 발전된 사회 시스템과 초원 원주민 특유의 강인하고 타고난 전투력을 동시에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 두 가지 장점이 합쳐진 결실 그 자체인 검은 매의 기사단은 20년 동안 이 거지 같은 땅에서 니카로스를 수호하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으니까.
하지만 모든 게 다 그렇듯.
장점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바로 그게 문제야.'
이번 테베르 경과의 대화에서 여실히 느꼈다. 그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그냥 자연스레 그의 모든 말에서 그런 인식이 묻어나왔다.
그렇다.
니카로스가 생기고 벌써 2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이주민은 이주민이고 원주민은 원주민이다. 서로서로 철저히 구분하고 있다. 그들에게 상대는 완벽한 타인이다. 동화가 전혀 되지 않았다.
'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생각보다 큰 문제거든.'
바로 그게 원인이기 때문에.
이 모든 사태가 일어났으니까.
간단하다.
일단은 안정화되고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 니카로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영지 내부의 파이. 그리고 당연히 인간으로서 그 이익이 탐날 수밖에 없는 주민들.
여기까지는 사실 문제없다.
모두 당연한 현상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주민이 하나의 '우리'가 아니었기에 초원 원주민들이 이주민들을 일종의 경쟁자로 봤다는 거야.'
그렇기에 지금의 이 집단 저항을 계획하는 것이다.
이주민들의 것을 빼앗아 자신들이 가지려고.
'이건 원주민의 문제가 아닌 구조 자체의 문제야.'
상황에 따라서는 반대로 이주민들이 빼앗으려는 쪽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어떤 집단 자체가 더 나쁘다고 할 일은 아니다.
'...그래, 이 땅이 항상 그렇지.'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의 갈등.
이 또한 니카로스만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고질병.
'다른 제국의 영지였다면 이런 문제는 거의 겪지도 않았을 텐데. 하여간. 새삼스레 거지 같은 땅이다.'
장점도 많지만, 그 이상으로 단점이 많은 지옥의 영지, 니카로스. 오랜만에 그 이름을 다시 또 체감한다.
그러니까.
초원의 원주민 출신인 테베르 경에게 이렇게 갑작스레 마누엘라 남작령을 하사하려는 것에는 이 상황을 타파해보고자 하는 노력도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핵심이다.
행정적 역량 문제와 동화 촉진이라는 이유도 물론 거짓은 아니지만, 굳이 지금 시점에 테베르 경을 대상으로 지정한 본질적인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일종의 과시.'
니카로스는 초원 원주민 출신도 절대로 차별하지 않는다. 공을 충분히 세우면 원주민들도 영주가, 귀족이 될 수 있다. 이주민과 원주민은 서로 다르지 않다.
'이 사실을 명백히 증명하는, 일종의 선전.'
나는 그걸 원했다.
나의 주민들이 하루라도 빨리 하나로 똘똘 뭉쳐서 내 뒷받침이 되어주길 원한다.
그야말로 합리적임 그 자체다.
"간단히 말해서 제가 테베르 경에게 영지를 내려주면, 초원주민들이 저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지 않을까? 뭐, 이런 발상도 있긴 합니다."
"...확실히 무슨 맥락의 선택인지는 대충 알겠는데, 그래도 조금 지나치게 과감했던 거 아니야? 딱히 누구를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큰 선물 하나 줬다고 관계가 영원히 순탄하리라고 믿는 건 섣부른 판단이잖아?"
게다가.
"너 그 부단장 아저씨랑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 왜 하필이면 그 아저씨야?"
그야말로 예리한 질문의 향연.
역시 발레리아, 똑똑해.
말도 상당히 예쁘게 하고.
본질이 미친 방화광이라서 그렇지, 황실 아카데미 출신의 엘리트라는 간판이 어디는 가지 않는 모양이야. 대단해.
"확실히 모두 합당한 지적들입니다."
"...어째 너 지금 눈빛이 맘에 안 들어. 이상한 생각 했지."
"오해입니다."
무언가 생각한 건 맞는데.
그게 이상한 생각은 아니니까.
어쨌거나.
"맞는 말씀입니다. 발레리아 씨, 저 역시 항상 모두가 사이좋게 행복한, 항구적 평화만을 원하거든요."
"그럴듯한 말 좀 한다고 칭찬해준 지 얼마 됐다고 바로 진짜 또 된 개소리하는 것 봐. 아주 악질이야, 너."
터무니없는 음해를 당하고 있다.
왜 진실은 통하지 않는 것인가.
그런 고로, 괜히 날 비방하는 발레리아의 말은 무시하고 나는 그저 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번 남작령 하사로 끝낼 수는 없지요."
이건 그저 인상 깊고 효과적인 물꼬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은.
점진적이고 끊임없는 동화 작업.
"또 뭔가 나쁘고 음흉한 계략을 꾸미고 있구나."
"선하고 견실한 구상입니다."
마치 먹물에 종이가 물드는 듯한, 그런 정책 말이야.
"어쨌거나 어째서 하필이면 테베르 경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도 똑같습니다."
그 출신, 그 지위, 그 행보, 그 성향.
그 전부를 보고 판단하여, 테베르야말로 이 모든 계획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선으로 판단됐으니까.
"그저 그뿐입니다. 애초에 이런 일에 사적인 친분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이상의 이유는 필요도 없고.
오히려 찾는 게 더 역효과야.
"그런 거야?"
"그런 겁니다."
따라서 나는 태연하고 당당하게 답할 수 있었다.
'뭐,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다, 당연히 테베르 경이 내 제안을 수락한 다음에야 진행할 수 있겠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자세한 건 그때 다시 논의하자고.
다른 가신들도 다 모아서.
'그래도 결국 잘 안 된다면.'
아주 오랜만에.
내가 조금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한 방법이고.
집단에는 죄가 없지만.
개인에게는 죄가 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발레리아 쪽을 똑바로 바라봤다.
"응? 갑자기 왜 봐?"
맑고 높은 하늘 중앙의 태양 빛을 그대로 받은 발레리아의 주황빛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이 이상한 마법사님을 보면 괜히 웃음이 나온다.
"그냥요."
"실없는 영주."
그리고 나도 이렇게 기회가 된 김에 궁금했던 점 하나를 그녀에게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요즘 정신 건강은 괜찮습니까?"
"...뭔 질문이 그따위야."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전투 때 발레리아 씨가 미쳐 날뛰기도 했고, 또 동시에 한동안은 큰 전투가 없을 것 같아서요.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미쳐 날뛴 적은 없어...."
그래, 질문이 우스워 보여도 나름대로 진지하게 걱정을 해주는 것이다. 그녀가 마법사로서 무척이나 우수한 인재인 만큼, 그녀의 멘탈 관리 또한 필수적이고 중요한 과정이니까. 이것도 원작 <마이트 앤 로열>을 하며 얻은 지혜이자 노하우니까.
하지만 의의로, 이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봤음에도 그녀는 그다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태도와 뻔뻔한 부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과거 본성을 언급했을 때에 비하면 지금은 거의 태연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그래서 내가 내심 의아해하고 있을 무렵.
그녀가 답했다.
"뭐, 문제 될 건 없을 것 같아. 저번에 네가 다음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 그냥 그러면 된 거지."
네 말은 어지간하면 믿거든, 영주야.
"...."
발레리아의 그 대답을 듣고.
오늘 처음으로 나의 말문이 막히고야 말았다.
진짜, 정말로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래서 잠깐의 침묵 끝에 그저 웃고야 말았다.
"뭔데, 왜 또 웃어?"
"하하, 아닙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생각해보면.
간접적이나마 이번이 처음 아닌가.
'그녀가 자기 본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 게.'
그저 태연하게.
정말 놀랍다.
<마이트 앤 로열>을 수천 시간 할 때도 이런 모습을 본 적은 없으니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야.'
그렇기에 나는 발레리아의 불퉁한 시선에도 그저 계속 웃을 뿐이었다. 초원이 거센 바람이 내 입속으로 들어왔다. 아주 건조했다.
그래, 다 잘 풀리겠지.
징조가 좋다. 나는 믿는다.
그리고 이틀 뒤, 테베르 경이 다시 날 찾아왔다.
그 날의 공기는 묘하게 습했다.
#100. 당근과 채찍 (2)
사흘 만에 다시 만난 테베르는 상당히 피폐하고 조금 앙상해져 있었다.
워낙 기본적으로 체구가 크고 튼튼하던 몸을 자랑하던지라 객관적으로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딱 봐도 그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잔 것이 뻔히 보였다.
"괜찮습니까, 테베르 경...?"
"...괜찮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주님."
음, 그 건장하던 사람이 저렇게 골골거리는 모습을 보니, 그리고 그 원인이 내가 건넨 제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양심의 가책에 가슴이 콕콕 따갑다. 굳이 저렇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제안이었나.
'...뭐, 사실 돌이켜보면 충격적인 제안이긴 했지'
다짜고짜 영지를 준다는 게 말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만큼 타당하고 필요한 제안이기도 했다고.
이게 다 모두의 이득과 행복을 위한 것이야.
나는 잘못이 없어.
좋아, 빠르게 합리화 끝.
"아무래도 제가 테베르 경에게 너무 큰 부담감을 준 듯하군요. 너무 무거운 짐을 지시게 한 건 아닐까,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합리화와 함께 입 밖으로 나온, 나의 다소 뻔뻔한 위로의 한 마디에 테베르는 오늘도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아니, 뭐. 사실 영지를 하사하시겠다는 제안도 조금 부담이긴 했지만, 그보다는... 당근이 안 되면 채찍을 쓸 거다, 그 채찍은 당근의 달콤함에 버금가는 채찍일 것이다. 이 말씀이 더 신경 쓰여서 말이죠. 당근이 영지인데 그렇다면 우리 기사단이랑 고향에 휘두를 채찍은 대체 뭘까.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잘 안 떠났습니다."
"...아."
세부적인 단어 선택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확실히 그런 말을 내가 하긴 했지. 당근이랑 채찍 중에서 뭐가 좋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이건, 나도 합리화가 조금 힘든걸.'
하지만 생각해보면 딱히 내가 나쁜 건 아닌 것 같아. 나도 이 사태에 골치 아픔을 겪은 피해자 중 한 명인걸.
역시.
이게 맞다.
"그래도 딱히 영주님께서 책임감을 느끼실 문제는 아닙니다. 저도 고작 잠을 설친 게 전부고, 영주님은 그저 군주로서 필요한 선택을 하신 것뿐이니까요. 그런 거죠."
거봐.
당사자인 테베르 경께서도 이렇게 옳다고 먼저 말씀하시잖아.
"그렇다면 마음 아팠던 건 저도 취소하지요."
"...그, 네."
그렇기에.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다시 저와의 만남을 청하신 건 이제 그 제안에 대한 고민이 끝났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괜찮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테베르 경은 잠시 크고 숨을 고르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새삼스레 이 산도적같이 생긴 아저씨가 맘에 들었다.
"그렇다면 그 고민의 결론은 무엇이지요?"
이번 대답에는 잠깐의 숨 고르기조차 없었다.
"영주님의 제안을, 무척이나 감사한 마음으로 수락하겠습니다."
제가 마누엘라 남작령의 영주가, 백작님의 봉신이 되겠습니다.
도저히 잘못 이해하려야 잘못 이해할 수가 없는, 그 명확한 대답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참으로 테베르 경다운 확고한 선언이었다.
따라서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농담처럼 말했다.
"하하, 다행이군요, 저도 나름대로 큰마음 먹고 남작령 하나 떼어주기로 제안한 건데, 테베르 경께서 무척이나 부담을 겪으며 고민하시는 모습을 보고, 혹시나 거절당하면 얼마나 무안할지 걱정이 되었거든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영주님의 관대함과 은혜가 하해와 같음을 저 또한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다만...."
다만, 이라고 말끝을 흐린 테베르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 턱과 입가를 매만지며 다시 말을 이었다.
"어쩐지 묘하게 자꾸... 독이 든 성배 같다는 생각도 자꾸 들어서...."
그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묘하게 쭈글쭈글한 대답을 들으니 이번에는 정말로 소리 내어 웃음이 나왔다.
설마 저런 표현까지 당사자 앞에서 솔직하게 털어놓을 줄이야.
물론 나는 항상 진솔함을 사랑하는 만큼.
그저 재밌고 마음에 들었다.
"그럴 리가요. 물론 마냥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분명히 테베르 경에게도 큰 기회가 될 것입니다. 아니, 이제 곧 테베르 남작님인가요?"
"이것 참. 남작이라니. 도저히 적응 안 될 것 같은 호칭이군요."
"막상 되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겁니다."
바로 내가 그 갑작스러운 적응의 체험자 중 한 명이니까, 순순히 믿어도 좋아요.
"그러면 영주님, 이제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신하고 영지를 다스리면 되겠습니까?"
"그 전에, 한번 묻고 싶군요. 테베르 경께서도 이리저리 스스로 고민을 해보셨을 텐데. 경께서 남작이 되면 어떤 일을 하시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저의 생각이라."
잠시 눈을 굴리며 고민하듯, 생각을 정리한 테베르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아무래도 저를 콕 집어 영지를 하사해주신 만큼, 영주님께서도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맡기실 의향일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지금 괜히 불온한 낌새를 보이는 우리 초원주민들이 더는 헛짓거리하지 못하게 단속하고, 영주님에게 차별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확실히 알려야겠지요."
역시.
행동거지만 조금 투박해서 그렇지. 생각이 부족하지 않은 양반이라니까.
"거의 정답입니다. 세부 사항만 조금 더 챙기면 되겠군요"
"지침을 주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일단 처음에는 가능한 한 유들유들하게 진행하죠. 굳이 강압적으로 억누를 필요 없이, 경께서 남작령을 하사받은 것이야말로 니카로스에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장 큰 증거다. 애초에 저항에는 명분조차 없었다. 이 사실을 똑똑히 인지시켜서 스스로 무너지도록."
"아... 이해했습니다."
이해가 빠르셔.
좋아.
하지만 이해도 중요하지만.
"어때요, 가능하시겠습니까?"
이해만큼 실천도 중요하지.
그렇기에 이렇게 물었다.
다행히도 테베르도 걱정하지 말라는 듯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애초에 저희 사이에서 검은 매의 기사단 부단장이라는 지위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으니까요. 아마 나이만 조금 더 먹으면 장로 자리도 확정이지 않을지, 내심 조심스레 혼자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로 저도 제법 명망이 괜찮습니다. 여기에 남작 작위까지 포함되면 발언권이 부족할 일은 없죠."
그리고 그는 농담처럼 덧붙였다.
"물론 이제 제가 장로가 될 미래는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하하."
장로가 아닌 영주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나도 농담으로 받았다.
"이런. 어쩌다 보니 제가 테베르 경의 미래 장로 자리를 훔쳐간 셈이 되었군요. 부디 남작 작위를 받고 관대하게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으하하! 농담도 잘 하십니다. 하여간 다른 젊은 기사단원 녀석들도 영주님만큼만 저의 농담을 받아주면 좋을 텐데. 다들 왜 이렇게 딱딱한지. 특히 아르센 그 녀석이 제일 심각합니다. 독보적으로 재미가 없어요."
글쎄.
상급자인 나와 부하들인 단원들의 입장은 상당히 다르지 않을까? 너무 과한 걸 바란다고 생각해, 테베르 경.
'물론 아르센이 호들갑만 심하지, 막상 실제로는 재미없고 딱딱한 거 나도 인정해.'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좋은 거야.
너도 그렇지?
그건 그렇고.
슬슬 다시 일 얘기로 돌아가자고.
"좋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인 인수인계 계획도 하나씩 세워보지요. 일단 지금은 큰 틀만 잡고, 나머지는 마르다 양과도 또 논의합시다."
"마르다 양... 제노비오스 집사장의 따님이죠. 항상 느끼는 거지만, 그런 아버지 밑에서 어떻게 그런 딸이 나왔는지...."
그건 나도 동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당사자들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좀 그렇잖아.
어쨌거나, 그런 가벼운 농담과 함께 우리는 구체적인 인수인계 계획을 세우고, 또 서로 알아야 할 정보들도 공유했다.
테베르의 결혼 관계, 자녀의 수, 친척 관계, 인척 관계, 당장 동원 가능한 인맥, 믿고 맡길 수 있는 측근들... 이런 내용까지 모두.
다소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원래 영지라는 건 이런 것들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정식으로 작위를 수여해도 한동안 행정 업무는 우리 백작령 차원에서 지원할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하하, 다행입니다. 솔직히 걱정 많이 하고 있었는데."
기사단 부단장 하던 아저씨한테 대뜸 남작령 하나를 쥐여줘 놓고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지. 가뜩이나 자체 지식인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 동쪽 변경 지대인데.
이건 기본적인 경우와 필요의 문제다.
"아, 그리고 이번 사태와는 다소 별개지만 따로 더 요청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응, 편하게 말할게.
테베르 경에게도 나쁜 얘기는 아닐 테니까.
"검은 매의 기사단의 규모를 늘리고 싶습니다."
거의 두 배가량.
"따라서 테베르 경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검은 매의 기사단을 두 배로, 말씀입니까...? 이건 조금 놀랍군요."
지금까지 검은 매의 기사단은 항상 80명 정도의 규모를 유지했다. 더 늘리지도 않고, 혹시나 손실이 생기면 새로 남은 초원주민 중 우수한 전사를 기사단으로 받아 인원을 보충하면서.
'그렇게 했던 것은 그게 제일 적절했기 때문이었지.'
원래 군대라는 건 가만히 숨만 쉬어도 돈을 빨아먹는 하마 같은 존재다. 심지어 검은 매의 기사단은 니카로스 유일의 상비병. 괜히 필요 이상으로 규모를 유지해봤자 재정에 구멍만 낸다.
그런데 내가 인제 와서 생각을 바꿨다는 건.
"160명... 그만한 규모의 기사단이 필요한 일이 생기는 겁니까?"
테베르 경.
역시 예리해.
'바로 그게 정답이야.'
따라서 나는 씩 웃었다.
"사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큰 전쟁에서 검은 매의 기사단을 의도적으로 밀어냈다고 오해하고 계셨지만, 말했다시피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오히려 진짜 큰 전쟁을 위해, 사소한 전쟁에서는 아끼고 있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허...."
물론 지금까지 내가 겪은 전쟁들이 정말로 사소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같이 위험하고, 목숨을 거는 순간들이었지. 나는 언제나 전력을 다했다.
'다만 그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겪은 전쟁은, 그저 '따위'로 치부할 수 있는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뿐이지.
심지어 두려울 정도로 명백하고 확정적으로.
중요한 그것이다.
그래서 나는 굳이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고 그저 웃음만으로 모든 걸 대체했다.
내가 2년도 전부터 저 머나먼 동방에서 찾아올 정복자를 경계하며 대비해왔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행보가 결국 전부 그것으로 귀결된다는 걸, 도저히 이 아저씨에게 설명할 자신은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다행히도 테베르는 이런 나의 묘한 내심을 어느 정도 짐작했는지, 곧 명확한 설명 없었음에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아무래도 그만한 이유가 있는 모양이군요. 확실히 기사단 규모가 커지는 것은 저에게도 기쁜 일입니다."
"그리고 기사단이 커지면, 괜히 필요 이상으로 나서던 선임들의 영향력까지 상대적으로 축소할 수 있겠지요."
"아, 과연. 그런 계산까지."
그렇지?
테베르 역시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에게 마누엘라 남작령을 하사하시며 그런 임무를 주신다는 건 역시?"
"네, 새로운 인원들은 마누엘라 남작령, 구 아르잔 토후국의 영역에서 모집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필요하시다면 제노아 남작령 쪽 주민 중에서도 모집해도 좋습니다. 제가 특별히 예외로 두고 허락하죠."
제노아 남작령과 마누엘라 남작령.
과거에는 시하브 토후국과 아르잔 토후국으로 불린 곳.
당연히 그곳 또한 동방 대초원 지대에 속한 만큼, 타고난 기수이자 전사인 유목 민족들이 살고 있다.
'실제로 두 국가 모두 기병대를 운영했지.'
사실상 이 일대에 기병대가 없는 세력은 없을 정도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의 '검은 매의 기사단'이 유독 특출나고 강했던 건, 다른 기병대에게는 없는 명예와 실리라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고.
내가 지금 요청하는 것은, 다른 두 남작령의 전사들에게도 그 강해질 이유를 심어달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단순한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고 깃발만 든다고 진정한 검은 매의 기사단이 되는 건 아니니까.
테베르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웃음과 함께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어찌 보면 재미있는 일이 되기도 하겠군요.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거기까지 확실히 이해했다면, 내가 더 할 말은 없지.
참으로 훌륭해.
따라서 나는, 그렇기에.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손을 뻗었다.
악수의 의미였다.
"그러면 나머지 추가 세부 사항은 나중에 차근차근 논하는 것으로 하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허, 그건 제가 드릴 말씀 같은데. 평생 생각하지도 못하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영주님이 주신 은혜와 기회 있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충분해.
너는 잘 할 거야.
'내가 직접 보고 고른 인선이니까.'
계획은 다 짰다.
이제 남은 건 정립과 실행뿐이었다.
나와 그의 두 손이 서로 맞잡았고.
나는 그 순간 만족스럽게 웃었다.
실패하지는 않겠지.
이상적이고 깔끔하게 끝나겠지.
누구 하나의 피도 흐르지 않고.
인간의 계획은 참으로 훌륭하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세상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
일을 꾸미는 건 사람이 하지만 이루어지는 건 하늘에 달려있다.
내가 모든 테베르와 모든 논의를 바로 마친 다음 날, 니카로스 전역에 토네이도 덮쳤다.
내가 그동안 보고 느낀 두통, 먹먹함, 기압의 변화, 습함, 초록빛 하늘까지.
그 모든 게 다 이 망할 바람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계획은 참으로 훌륭하지만.
결국, 인간의 계획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