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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 070-080

#070. 치킨 게임 (1)

바할리아 제국의 수도, 카이룸.

그 중심가에 자리 잡은 번듯한 건물.

그리고 그 건물에 떡하니 걸려 있는 간판.

다블레 상회.

원래 수도 카이룸이라는 도시 자체가 정신없고 쉴 새 없이 북적이는 곳이라지만, 이 다블레 상회의 사옥은 그 안에서도 유독 그런 경향이 강했다.

"야! 너는 도대체 대가리를 어디 두고 일하는 거니! 이따위 결과를 가져와 놓고 월급 받아먹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사무실을 울리며, 듣는 이의 마음을 갈가리 난도질하는 원색적 비난.

그 무시무시한 언어의 폭풍에 다른 직원들은 자연스레 불똥이 튀지 않게 숨을 죽으며 몸을 움츠렸지만, 놀랍게도 실시간으로 그 폭언을 듣고 있는 당사자인 수석 총관은 그 어떤 타격도 없다는 듯 그저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어차피 한두 번 들어본 욕도 아니다.

이런 거에 과하게 신경 써서는 결코 이 성질 더러운 상사를 모실 수 없다.

"회주님 또 시작이시네. 열심히 했지만 잘 안된 걸 어떻게 합니까? 다음에 더 잘하면 되죠. 꼬우면 그냥 자르세요."

"와, 이 녀석 말하는 본새 좀 봐. 진짜 내가 제 명에 못 살면 네 탓이 11.7%는 될 거다."

"...쓸데없이 수치가 세세한 건 둘째 치고, 생각보다는 제 비중이 작네요."

"내가 원래 이렇게 살잖니."

"아무리 봐도 대부분 자업자득이지만요."

영양가 없고 짧은 헛소리가 지나가고, 결국 회주라고 불린 여성은 자세를 바꾸며 조금 더 진지한 태도로 수석 총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정확히 뭐가 문제였는데? 뭐 때문에 그 우라질 것들한테 계약을 뺏긴 건데?"

"뭐, 달리 특별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냥 객관적으로 그쪽 조건이 너무 좋았어요. 비밀 유지도 반쯤 팽개칠 기세로, 간이고 쓸개도 다 내주면서 달려들던데요."

"망할."

도저히 더 토를 달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사유에 회주는 그냥 욕밖에 내뱉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 현자가 찾던 물건 중 하나 맞겠지?"

"그거야 물론 현자가 직접 까봐야 확실해지는 문제긴 한데. 지금까지 나온 후보 중에서는 제일 그럴듯하게 조건을 충족했던 건 맞죠. 그러니 히스타 상회에서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걸 테고."

"으으으, 하필이면 밀려도 제일 개 같은 놈들한테 밀렸어. 열 받아. 화나. 짜증 나. 분해. 빡쳐."

한없이 담백하게 진실만 늘어놓는 수석 총관의 보고에 회주는 머리를 두 손을 감싸 쥐며 책상 위로 머리를 고꾸라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수석 총관은 결국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아니, 사실 애초에 현자의 요구사항부터가 너무 터무니없던 것 아닙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그냥 똑바로 명시하지, 일단 그럴듯한 것들로 알아서 구해오면 확인해 보고 마땅한 대가를 지불하겠다니. 솔직히 장사 하는 처지로서 이런 악질은 또 처음이네요."

"어쩌겠니. 그 악질이 그냥 평범한 동네 진상이 아닌걸. 엿 같아도 아쉬운 쪽이 기어야지."

"...."

냉소적이고 현실적으로 내뱉는 회주의 말에 수석 총관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는지, 그저 쩝 입맛을 다시는 소리만 내었다.

"그러면 이제 어쩐담. 몰래 용병이라도 고용해서 히스타 상회를 급습해야 하나."

"그러다가 황실군에 걸리면 아주 그냥 작살이 날 테니 부디 조금 참아주셨으면 하네요."

"흥, 그 배부른 돼지 놈들이 범인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본인도 정말로 결행할 생각까지는 없었는지, 회주는 머릿속으로 계속 대책을 고민했다.

"...."

그리고 그런 회주를 보다 못한 수석 총관이 넌지시, 그러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이번에 뺏긴 계약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말입니다...."

"뭔데? 뭔데? 뭔데? 뭔가 남은 정보가 있어? 너는 정말 왜 그런 걸 왜 여태껏 숨기다가 이제야 말하니!"

"아니, 진정 좀 하세요! 아직 검증 안 된 겁니다! 이왕이면 저도 확인을 더 해보고 보고를 드리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예정보다 이르게 말을 꺼낸 것뿐이라고요!"

황급히 해명한 수석 총관은 과연 이걸 지금 얘기해도 될까 한 번 더 고민하며 망설였지만, 곧 마음을 굳혔는지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니카로스 남작령에서 우리 쪽으로 보낸 서안입니다."

"...언제 한 번 들어본 이름인 거 같긴 한데?"

이런 상황에서 고작 남작령이라니.

총관에게 건네받은 봉투를 주섬주섬 꺼내며 회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해답은 금방 떠올랐다.

"아, 맞아! 그 양반들이지? 그, 그, 그 에우스페나 밑에 있는, 요즘 동부에서 제법 잘 나간다는 거기?"

"굉장히 추상적이긴 하지만 내용은 다 맞습니다. 새롭게 젊은 영주가 즉위한 뒤로 이웃한 월광교 소왕국들을 정복하며 세를 키워나가고 있는 모양이군요."

"남작령치고는 썩 대단하긴 하네. 그래서 그 요즘 잘나가는 남작님께서 우리한테는 무슨 용건이래?"

"일단 그쪽에서 보낸 서안 자체는, 기본적으로 우리와의 사업 협력 제안서 양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묘한 표현이었다.

회주는 제안서를 휙휙 빠르게 훑어가다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기본적으로는?"

"마저 읽어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직접 한 번 보시는 편이 이해가 빠를 테니까요."

"괜히 궁금하게 하기는."

투덜거리면서도 성실하게 제안서를 넘기던 회주가 어느 순간 흠칫하며 몸을 굳혔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의구심 가득한 눈동자로 총관을 바라보았다.

"...이거, 진짜야? 진짜 처음 올 때부터 이렇게 적혀있었어?"

실제로 수석 총관의 말대로 서안 자체는 평범하게 잘 작성된 사업 협력 제안서였다.

고작 남작령에서 보냈다길래 처음에는 별달리 큰 기대를 안 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니카로스와 다블레 상회가 협력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서로의 이익 등이 상당히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이례적으로 딱 한 번 정도는.

남작령과의 계약을 체결하는 걸 아주 살짝 고민해보는 걸 고려해봐도 좋을 만큼.

하지만 이 순간 회주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그런 평범한 이점이 아니었다.

제안서 한 모퉁이에 적힌 아주 짧디짧은 내용.

- '자줏빛 현자가 찾는 물품' 제공 가능.

고작 한 문장 분량의 내용이었지만, 회주는 그 한 줄을 결코 쉬이 넘길 수 없었다.

"이 새끼들이 이걸 어떻게 알아?"

현자.

자줏빛 현자가 찾는 물품들.

그를 위한 제국 5대 상회와의 비밀스러운 거래.

도저히 답을 알 수 없는 그 물건들의 정체까지.

그 한 줄이 너무나도 많은 사실을 담고 있었으니까.

"그렇죠? 이상하죠? 설마 그 먼 동부까지 벌써 정보가 샜을 리는 없는데. 대체 이놈들이 뭘 어디까지 알고 이런 서신을 보낸 건지도 아직 확신이 잘 안 서서, 일단 뒷조사부터 먼저 진행해볼 생각이었습니다."

우리한테 여유가 충분했다면 말이죠.

수석 총관은 그렇게 덧붙였다.

"...그렇단 말이지."

자신과 비슷한 판단을 하고 있던 수석 총관의 정리에 회주는 잠시 입을 다물고 진지한 태도로 고민했다.

"...."

솔직히 쉬이 믿어지는 내용은 아니다.

5대 상회들조차 남들에게 파이를 뺏기지 않도록, 유출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진행 중인 사안을 변방의 남작이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현자조차도 자신이 뭘 찾고 있는지 아직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물품을 제공할 수 있다고 저렇게 확신을 담아 단정하는지.

의문스러운 게 한둘이 아녔다.

"좋아. 결정했어."

하지만 비록 그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당장 니카로스 남작령으로 갈 채비를 하자고."

다블레 상회의 주인.

로밀리아 엘레그미티스는 그렇게 결정했다.

"진심이에요? 설마 회주님이 직접 가시게요?"

"물론이지.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봤어?"

제국 최고 권력의 일각.

수십 년째 하나의 옥좌를 섬겨온 황실 마법사.

마도(魔道)의 정점.

현자.

그와의 연줄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자신의 비원(悲願)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무리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걸어볼 가치가 있었으니까.

"잘나가는 거상의 느낌이 왔거든. 아무래도 내가 직접 듣고 판단해 봐야겠어."

동부의 신인이 도대체 뭘 알고 이런 말을 하는지.

니카로스 남작은 스스로 '현자가 찾는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 확실한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

칠색이랑 토벌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여느 때처럼 어슬렁어슬렁 나의 성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복도에서 한 남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아.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작님. 며칠 전 몬스터 토벌로 상당히 고생하셨다고 들었는데, 무탈한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는군요."

깔끔하게 정리한 금발의 머리와 동그란 안경.

"아니, 하하. 슬슬 백작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을까요? 어차피 머지않아 정말로 그렇게 불러야 할 텐데, 미리미리 연습해두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낯선 인물이지만 슬슬 익숙해져 가는,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이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벌써 그렇게 말씀하시면 부끄럽습니다. 아직 확정된 사안도 아닌걸요."

"겸손하시군요. 간악한 이교도들을 처단하여 우리 제국의 영광을 널리 퍼뜨린 남작님의 업적이 이토록 명확한데, 감히 반대할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과찬입니다."

그리고 나 또한 젊은 사내와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서로 가까이 마주 볼 수 있는 거리까지 도달하고, 나는 청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다니엘 님."

"네, 남작님."

다니엘, 다니엘 코투니오스.

에우스페나 공작령의 페트로스 집사장이 파견한 행정 지원 인력의 대표.

그리고 동시에 페트로스 집사장의 차남이자.

현 에우스페나 공작의 사촌.

코투니오스 공작 가문의 핏줄.

그래, 놀랍게도 페트로스 집사장은 우리 니카로스에 자기 아들을 보냈다.

심지어 영주인 나에게 미리 언질도 주지 않고 말이다.

'...진짜, 생각보다 독한 양반이란 말이야.'

에우스페나의 행정 지원 인력 파견.

겉으로는 그저 에우스페나 공작의 휘하 봉신이자 페트로스 집사장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나를 위해, 공작령에서 순수한 호의로 도움의 손길을 보내준 것일 뿐이다.

하지만 고작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이미 당사자들 모두가 뻔히 알고 있다.

이제는 그리 짧지 않은 인연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한 인간적 신뢰라고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나와 페트로스 사이의 동맹.

그리고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고 비약적으로 세력을 키워나가는 나의 성장 속도.

그렇기에 동맹임에도 슬슬 내가 자신을 위협할 수 있다고 걱정하는 페트로스.

'그런 걱정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나의 백작 승작 건과 유사시 지원군 파견을 명시하는 계약을 교환해 동맹을 더 끈끈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이 또한 미봉책일 뿐이지.'

아무리 철저하게 계약을 맺었다고 한들 교묘하게 계약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뒷주머니를 찰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걱정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파견은 그런 동맹 강화 이전에 결정된 사안.

따라서 이번 파견의 진정한 목적이, 나를 향한 감시와 견제에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하였다.

'그리고 그런 공작을 꾸미고 있는 만큼, 파견된 인력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것 또한 무척이나 당연한 사실이고,'

만약 우리의 동맹이 틀어지면, 파견 인력은 순식간에 나의 인질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임무에 자기 아들까지 투입해?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물론 대놓고 집어넣은 건 아니야. 페트로스 이 양반은 직접 나랑 만나서 얼굴 보고 얘기까지 나눴음에도 자기 아들 얘기는 단 한마디도 안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또 철저하게 숨긴 것도 아니다.

약간의 자연스러운 뒷조사만으로도 순식간에 알아차릴 수 있었고.

"하실 말씀이 있다면 얼마든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비록 임시일 뿐이지만, 지금의 저는 남작님의 가신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하하, 다니엘은 언제나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는 페트로스 집사장님의 아드님이신데, 제가 어찌 감히 아랫사람 대하듯 대할 수 있겠습니까?"

"아, 이게 곤란하군요. 남작님에게 부담을 드릴 생각은 없었는데요."

무엇보다 이렇게 언급해도 당사자도 전혀 숨기거나 부정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참으로 의아한 일이었다.

과연 저 부자의 속셈은 뭘까.

내 눈앞에 있는 이 젊은이는 과연 어디까지 알고 내 땅에 온 것일까.

그런 쉽게 답이 나오지 않은 의문을 품으면서도, 나는 태연하게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사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냥 멀리서 오신 분인데, 우리 니카로스에 잘 적응하고 계시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물론이지요. 사실 기대보다도 훨씬 더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뛰어난 인재들도 많고, 무엇보다 영지에 열정과 활기가 가득하더군요. 저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하하."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래, 우려되는 것들은 많지만, 그래도 사실 당면한 현황만 보면 눈앞의 이 청년에게 큰 불만은 없다.

어쨌거나 겉으로는 예의 바른 태도를 고수한다.

물론 드문드문 우리 변방의 니카로스를 업신여기는 기색이 묻어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대도시 출신의 도련님인 걸 고려하면 아예 이해 못 해줄 일까지는 아니다.

'무엇보다, 썩어도 준치라고 업무도 1인분 이상은 해주고 있고 말이야.'

그 부패 관료 페트로스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어릴 때부터 기본적인 교육은 받아왔을 귀족 출신이기도 하다.

이 낙후된 변방에서 그 정도면 정말로 귀하고 감지덕지한 인재지.

그렇기에 어느덧 생각을 정리한 나는 아주 약간의 진심을 담아서 그렇게 말했다.

"부디, 우리의 이 건설적인 관계가 아주 오래도록 무탈하게 지속했으면 좋겠군요."

그래, 페트로스의 모자란 인성과는 별개로 나는 우리의 동맹 관계를 상당히 이상적이라고 평가 중이다.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이 명확하고, 그 결핍을 서로가 대신 채워줄 수 있으니 이 이상 바랄 것이 없지.

그렇기에 그런 만큼, 우리의 이 관계가 끝까지 삐걱거리지 않고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고 말이야.

진심이다.

이건 정말.

그리고 이런 나의 진솔한 한마디에, 다니엘 역시 마주 웃으며 유창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남작님은 우리 에우스페나의 믿음직한 동지이고, 저 또한 그런 남작님의 충실한 아군이니까요.

하여간.

누구 아들 아니랄까 봐.

안경 너머의 두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게 이렇게 뻔히 보이는데,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태연하게 그렇게 대답하다니.

이 정도면 거의 재밌을 정도다.

그렇기에 나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래, 끝까지 지켜보면 결국 답이 나올 수밖에 없지.'

중요한 건 속내가 아닌 결과고.

여기는 나의 영지니까 말이야.

#071. 치킨 게임 (2)

늦은 오후임에도, 오늘 니카로스 성의 연병장은 제법 소란스러웠다.

공기를 강타하는 경쾌하면서도 사나운 떨림.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소리를 퍼뜨리고 있는 것은 단 두 사람이었다.

"아직 부족하다! 고작 그 정도가 네 한계더냐!"

반듯하게 뒤로 넘긴 회색빛 머리칼과 단단한 거구의 육체를 지닌 노인.

니카로스 남작령의 기사단장, 키로스 경.

"아닙니다...!"

덥수룩한 흑발 사이로 번쩍이는 금빛 눈동자의 소년.

초대 영주 제논의 사생아이자 현 영주 티베리오스의 이복동생, 레온.

두 사람이 벌이고 있는 것은 분명 훈련과 대련의 일환이었지만, 지금 보이는 광경은 그 사실을 미리 알고도 쉬이 수긍하기 어려울 만큼 치열하고 거칠었다.

"...!"

사실 엄밀히 따지면, 평범한 대련이라고 하기에는 그 흐름이 상당히 일방적이었다. 대부분의 공격은 오직 레온의 검을 통해 이뤄졌으니까.

소년의 검은 무척이나 매서웠다.

아직 어린 사춘기의 태를 완전히 벗지 못했음에도, 레온은 장검이라는 명명백백한 흉기를 벌써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준수한 기예도 눈앞의 노인에게 닿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부실하다! 허술하다! 공방의 균형을 맞춰라!"

견고하다.

분명 키로스 경은 사실상 온전히 방어에만 집중하고 있었음에도,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공세를 이어가는 레온을 역으로 궁지로 몰며 압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대련은 일방적이었다.

명명백백한 키로스 경의 우위로.

그리고 실제로 그 사실이 확고하다고 증명하듯.

"보아라! 공격에만 집중하다 보니 빈틈이 그만큼 늘어나지 않았느냐!"

키로스 경은 마치 자연스러운 순풍과 같은 움직임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나아가, 눈 깜짝할 사이에 레온의 복부를 깊이 걷어찼다.

"컥...!"

숨을 잠시 끊어 부수는, 자비 없는 발길질.

비록 기사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마력이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그저 순수하게 단련된 육체의 힘만으로도 인간의 몸 정도는 어렵지 않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레온은 그 단 한 번의 발길질에 거친 흙바닥을 무력하게 구르며 뒤로 날아갔다.

소년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의 몰골이 되었다.

"벌써 끝이냐!"

하지만 키로스 경은 레온의 고통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변치 않는 엄격한 목소리로 다그칠 뿐이었다.

"전장은 너 혼자 망나니처럼 날뛸 수 있는 놀이터가 아니다! 항상 시야를 넓게 가지고 맹목에 빠지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레온 또한 자신의 고통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일어나 다시 한번 키로스 경을 향해 달려들 뿐이었다.

훈련은 쉼을 모른다.

공격하고, 쓰러지고, 다시 달려들고.

두 사람은 그 일련의 과정을 무수히 반복했다.

그리고 키로스 경은 그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도 침착하게 생각했다.

'확실히 자질은 있군.'

어찌 보면 조금 새삼스러운 감상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이는 그저 자연스러운 감상이었다.

물론 초대 영주 제논의 오른팔 출신답게 키로스 경은 당연히 오래전부터 레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나아가 단순히 인지하는 걸 넘어 제노비오스 집사장과 함께 부모를 잃은 그의 성장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레온의 교육을 담당한 것은 단언컨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야 지금의 키로스 경이 모시는 주군은 어디까지나 티베리오스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레온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주군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사생아였으니까.

영주의 기사로서 그런 소년에게 검 따위를 가르칠 수는 없었으니까.

'...동정하는 마음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

부정한 탄생으로 치부되어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었던 레온의 출신.

심지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주군이자 전우였던 제논의 핏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주군을 모시는 기사로서 그런 마음 때문에 흔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사의 길.

수십 년간 꼿꼿이 그 길을 걸어온 키로스 경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절대로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레온이 영주 티베리오스의 허락을 받아 공식적으로 니카로스의 가신이 되고, 동시에 키로스 경 또한 영주에게 레온을 한 번 단련시켜 보라는 명령을 받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레온의 자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기사로서의 종합적인 자질을 전부 따지면 분명 돌아가신 제논 님이나 영주님에게 미치지 못한다.'

기사라는 존재는 단순히 누군가를 죽이는 일에만 전념하는 도살자가 아니다.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이끄는 자.

그런 의미에서 키로스 경이 보기에 현 영주 티베리오스는 분명 훌륭한 기사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레온은 아직 부족함이 많았다.

'다만 하나의 적만을 오롯이 물고 늘어지는 집념과 투지만큼은 뛰어나다.'

키로스 경은 레온의 움직임을 선명히 눈에 담았다.

마누엘과 티베리오스, 다른 이복형제들과는 달리 당장 허락된 길이 오직 검뿐이어서 그런 것인가.

레온은 집착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열정적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좋은 기사가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예리한 칼날이 될 자질 정도는 이미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저 그 칼날이 누굴 향하는지 그 방향일 뿐.'

어느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키로스 경은, 순간적으로 손을 놀려 레온의 검을 튕겨냈다.

챙-!

청량한 소리와 함께 소년의 검이 날아간다.

키로스 경은 그 기세 그대로 무방비 상태가 된 소년의 목을 향해 칼을 겨눴다.

"...."

그 상태 그대로.

짧은 침묵.

긴장할 만한 상황임에도, 레온의 눈동자에는 한 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잠시 그 눈을 똑바로 응시하던 키로스 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다."

"저는 아직 더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휴식 또한 훈련의 일부다. 불필요한 만용을 부리지 마라. 몸을 망칠 뿐이다."

단호한 키로스 경의 선언에 레온은 더는 거부하지 않고 조용히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신 그저 입만을 열어 질문 하나를 던졌다.

"혹시 제가 언제쯤 실전에 나갈 수 있을까요?"

그 당돌한 질문에 키로스 경은 잠시 침묵했다.

대답 자체가 궁한 질문은 아니었다.

수십 년간 기사로 살아온 키로스 경은 숙련된 교관이기도 했고, 어린 훈련생의 숙달 과정 정도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대답이 이미 있음에도 내뱉기는 쉽지 않았다.

"...."

솔직히, 이 아직 어린 소년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키로스 경조차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과거에는 그저 내성적이고 얌전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부조리한 출생부터가 이 아이를 그렇게 몰아갔고, 또 그대로 성장하는 게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결과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언제부터지.

그래,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티베리오스와 레온의 첫 만남.

자신을 섬겨볼 생각이 있냐는 티베리오스의 물음.

이 이야기는 이미 당시에 그 자리에 있던 제노비오스 집사장에게 들었다.

그리고 분명 그 일이 있던 시점부터, 레온이라는 소년은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째서 영주님은.'

이 아이에게 그런 제안을 했을까.

레온의 정치적인 입지를 모르지 않으셨을 텐데.

도대체 이 아이의 어떤 면모를 보고.

애석하게도 키로스 경은 아직 그 사실을 직접 깨닫고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저 티베리오스의 기사로서 숨김없는 진실만을 대답했다.

"정식으로 기사가 되기에는 아직 수행이 한참 부족하지만, 이대로만 계속 정진한다면 머지않아 한 사람의 병사 정도로는 충분히 활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레온은 그저 담담하게 감사를 표할 뿐이었다.

하지만 키로스 경은 봤다.

"...."

그 담담한 속에 희미한 기쁨과 미소가 분명히 함께하고 있다는 걸.

그렇기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너는...."

하지만 그 질문은 끝까지 완성되지는 않았다.

"키로스 경,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그보다도 전에, 그의 등 뒤를 보고 있던 레온이 무언가를 먼저 발견하고 알렸기 때문에.

키로스 경은 반사적으로 등을 돌려 니카로스 성의 입구 쪽을 바라봤다.

"저건."

확실히 레온의 말대로 낯선 이들이 성을 방문하고자 하고 있었다.

화려하고 값비싼 마차.

그에 대비되는 상당히 적은 일행들.

그리고 선명히 펄럭이는 깃발과.

'서로 교차하고 있는 두 마리 푸른 연어의 문양.'

거기까지 눈에 담은 키로스 경은 마침내 방문객의 정체를 깨달았다.

"영주님의 손님이 오셨군."

다블레 상회.

제국 5대 상회 중 하나가 영지를 찾아왔다.

***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네.'

다블레 상회의 행렬이 우리 니카로스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처음 떠오른 감상은 이거였다.

물론 며칠 전 칠색이랑의 가죽이라는 적당한 미끼를 주면서, 마르다 양에게 저 친구들이 우리 영지에 방문할 수 있게 좀 해보라고 임무를 주긴 했다.

그리고 그녀의 우수한 능력을 믿는 만큼 실제로 성공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기도 했지.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조금 과하게 빠르다.

제국 가장 동쪽 변방과 수도라는 물리적인 거리도 무시할 수 없었을 텐데. 이 정도면 거의 서안을 받자마자 바로 채비해서 온 건가?

그렇다면.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반길 일이지.'

거래에 앞서 상대가 적극적이라는 것만큼 기쁜 소식이 어딨겠어.

게다가 연이어 들려오는 소식이 그런 나의 달가움을 더 키워주었다.

"영주님, 확인 결과 저쪽 행렬의 대표는 다블레 상회의 회주입니다."

"오, 설마 회주가 직접 찾아온 것입니까?"

"네, 게다가 현장 실무를 담당하는 수석 총관까지 함께 찾아온 모양입니다."

갑작스러운 그들의 방문에 부랴부랴 대응과 협상을 준비하던 마르다 양이 그렇게 보고를 올렸다.

실질적인 실무자와 최고 결정자가 함께 왔다니.

이 정도면 어지간한 사안들을 현장에서 죄다 결정할 수도 있을 정도다.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조금 늦은 저녁에 방문한 것 정도야 관대하게 용서해줄 수 있지.'

그래, 어찌 보면 이 또한 그만큼 열정적으로 찾아왔다는 증거 아닐까? 그렇다면 봐주지 못할 이유도 없지.

"그거 아주 좋네요. 30분... 아니, 1시간만 기다려달라고 합시다. 우리도 준비는 필요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영주님."

저 양반들도 자기들이 사전에 언질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걸 아는 만큼, 이 정도는 충분히 기다리겠지.

"그러면 일단은 마르다 양이 저번에 작성해서 저쪽으로 보냈던 서안의 사본 하나를 저한테 보내주시고, 칠색이랑 가죽도 미리 꺼내둘 준비를 해놓도록 하죠. 보관에 차질은 없었겠죠?"

"물론입니다. 제가 모두 책임지고 진행해 놓겠습니다."

마르다 양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파트너까지 의욕 가득하니 그야말로 완벽하네.

"훌륭합니다. 그러면 저번에 논의된 대로 협상은 제가 먼저 주도적으로 나서기로 하고... 1시간 뒤에 응접실에서 뵙죠. 잘 부탁드립니다, 마르다 양."

"오히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호호.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르다 양.

저쪽도 저렇게 태도가 적극적인데 뭐 문제 될 일이 있겠습니까?

당연히 일사천리로 깔끔히 합의에 도달하겠죠.

이건 잘 풀린다면 우리 영지의 발전에 큰 도약이 될 수 있을 중요한 기회다. 모든 조건이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으니 절대로 놓칠 수는 없지.

그렇게 1시간 뒤.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친 나와 마르다가 응접실로 들어갔고.

"아, 드디어 오셨네. 반가워요, 니카로스 남작님. 나누고 싶은 얘기가 아주 많아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는 젊은 여성.

다블레 상회의 회주가 나를 보며 삐딱하게 인사를 건넸다.

"...."

뭔가.

내가 상상하던 분위기가 아닌데 말이야.

"대체 '현자가 찾는 물품'이 필요하다는 우리의 속사정을 어떻게 알고 있던 건지, 그게 제일 궁금한걸요?"

너 왜 말투가 그 모양이니.

#072. 치킨 게임 (3)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먼저 정리나 한번 해보자고.

굳이 하나하나 따져보자면.

사실 시작은 가스파르 영감님에게 중앙의 니코디모스 장군과 크라테이아 공작의 권력 다툼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였다.

제국의 대장군과 서부의 지배자 간에 벌어지는 정쟁.

그리고 팽팽히 다투는 두 사람 중 어느 쪽에 줄을 서야 할지에 대한 영감님의 고민.

우연히 그 사안에 듣게 된 순간, 나는 떠올렸다.

'아무래도 나도 슬슬 제국 중앙 정계에 조금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된 게 아닐까?'

물론 내가 고려한 건 어디까지나 정말로 소소한, 약간의 관심 수준이긴 했다. 근래 우리 니카로스가 쌓은 성과가 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여기 변방에서 탄탄한 기반부터 더 완성해야 했으니까.

다른 데까지 신경 쓸 여력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고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니까.'

요컨대 제국의 정세도 그만큼 바뀌고 있다는 뜻.

가지고 있는 정보와 미래 지식을 써먹기 위해서는, 나도 슬슬 중앙의 현황을 실시간으로 반영해줘야 했다.

그리고 당연히.

이왕 그 먼 곳까지 관심을 가지기로 마음먹었다면.

'아예 그쪽에 나의 영향력도 뻗치는 게 더 이득이고.'

그렇잖아?

솔직히 가능하기만 하다면 단순히 시류를 파악하는 걸 넘어서, 그 흐름에 직접 개입하는 게 더 유용하잖아?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딱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영감님이 언급한 장군과 공작, 두 권력가의 다툼에 직접 개입하는 건 지금의 나로서는 무리였다. 차기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정쟁인 만큼 변방 남작이 끼기에는 파이가 너무 컸다. 까딱하다간 새우등만 터진다.

따라서 그 안건은 그냥 유능한 돈귀신 영감님께 이길 확률이 더 높은 쪽을 알려줘, 마음의 빚을 더 쌓아두는 정도로만 만족했다.

'어차피 연줄을 마련을 마련할 방법이 그것뿐인 건 당연히 아니거든.'

바할리아 제국 중앙.

사람도 많고, 그만큼 고정 네임드 캐릭터도 많은 곳.

길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그렇게 나는 그중 어떤 선택지가 최선일지 고민했고.

'바로 그즈음 칠색이랑의 출몰 소식이 들려왔지.'

정확한 출몰 시기까지 미리 알 수는 없었지만, 원래부터 제국 동쪽 국경지대는 칠색이랑의 서식지. 그 녀석이 나타날 가능성은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마침 그 출몰 타이밍이 매우 적절했고.'

고려하던 사안들이 절묘하게 딱 맞물렸다.

나는 안다.

지금은 흔히 '자줏빛 현자'라고 불리는 황실 마법사가 특정한 물건들을 열렬히 수집하는 시기.

수많은 제국의 상회 중에서도 특출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5대 상회가, 비밀리에 현자의 의뢰를 받아 최선을 다해 그 물건들을 찾아주고 있는 시점이다.

'5대 상회도 필사적이지. 황실 마법사의 호의를 살 기회는 절대로 흔하지 않으니까.'

수십 년간 수십 개의 정권이 세워지고 무너지는 와중에도 오롯이 그 자리를 지킨 현자와의 인연은 분명 그만한 가치를 할 테니까.

그래, 여기까지 알면 그다음부터는 참 쉽다.

자줏빛 현자 역시 고정 네임드 캐릭터.

그리고 현자의 집착과도 다름없는 수집욕 또한 매 회차 변함없는 사실.

그렇기에 이 세계의 고인물이던 나는 당연히 그들 간의 은밀한 거래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아예 한발 더 나아가서 당사자인 그들보다도 조금 더 많은 것까지 알고 있었지.'

예를 들어, 칠색이랑의 가죽이 '현자가 찾는 물품' 중 하나라는 사실 같은 것까지도.

이쯤 되면 결론은 아주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

'칠색이랑을 토벌하고, 가죽을 5대 상회 중 한 곳에 아주 비싸게 팔아넘기고, 그걸 계기로 제국 중앙의 거물인 자줏빛 현자와의 연줄까지 만든다.'

이 얼마나 바람직한 결말인가.

가신들과 함께 이리저리 방도를 고민하던 예산 확보는 물론, 중앙 정계 진출의 교두보까지.

두 마리 토끼를 이토록 완벽하게 잡을 수 있다니.

따라서 나는 무척이나 즐거운 마음으로, 5대 상회 중 하나인 다블레 상회와 접촉했다.

현자가 찾는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알리면서.

'분명 다블레 상회도 기쁘게 후다닥 달려올 거야.'

당연히 비싸게 팔아먹긴 할 테지만 어지간해서는 돈으로도 구할 수 없는 것을 파는 셈이다. 그 쪽에게도 결코 손해는 아닐 터. 오히려 양측 모두 상부상조할 수 있는 이상적인 거래가 될 수도 있었다.

요컨대 이 자리는, 그런 수많은 합리적 계산과 고려가 어울려져 만들어진 달콤한 결실의 장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대체 현자가 찾는 물품이 필요하다는 우리의 속사정을 어떻게 알고 있던 건지, 그게 제일 궁금한걸요?"

막상 현실이 된 그 결실은.

다블레 상회의 회주가 협상 테이블에 앉자마자, 그리고 나는 앉기도 전에 보인 반응은 그저 이게 전부였다.

솔직히 상당히 당황스럽다.

'설마 처음부터 이리 날 선 반응을 보일 줄이야.'

물론 상인이라는 족속들이 원래부터 정보를 귀하게 여기는 만큼 그 출처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을 것 정도는 예상하긴 했다. 가스파르 영감님도 처음 그랬듯 그게 궁금하지 않으면 절대로 상인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솔직히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몹시, 이상하고 의외야.'

괜히 콧대만 높은 5대 상회 놈들에게 시건방진 구석이 많다는 것 정도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과하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정보의 출처보다도 물품부터 먼저 확보하는 게 맞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우선 마르다와 함께 천천히 다블레 상회의 사람들과 마주 보는 우리 측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래, 눈앞의 저 회주 아가씨가 초면부터 상당히 무례하고 싸가지 없게 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협상 자체가 완전히 파투 난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교양인이라면 대화를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되겠지.

따라서 나는 일단 전매특허인 친근하고 선량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제가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의문이 든다는 것은 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거야 자연스러운 반응이지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그렇죠. 어차피 저는 이미 알게 되었고, 이 사실은 물릴 수 없습니다. 시간을 되감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일단은 그 부분은 제쳐놓고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논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바로 사업 얘기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덧붙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

뻔뻔하다고 느껴도 어쩔 수 없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는 오히려 이게 더 현명하고 상식적인 반응일 테니까.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도 썩 변변치 않고, 설령 그런 게 있다고 한들 제국의 사정이 워낙 좋지 못해 제대로 집행되리라 기대할 수조차 없다.

그렇다면 각자 재주껏 능력껏 헤쳐 나가야지.

'까놓고 말해서 내가 당하는 처지가 되어도 아무도 동정하거나 하지 않을걸?'

나 같은 문명인에게는 참으로 슬픈 진실이지만, 별수 없다. 지금은 이런 시대다.

그리고 저쪽도 5대 상회의 한 주인쯤 되면 당연히 이런 사실을 알고 있겠지. 저들 또한 수없이 가해자가 되고, 또 종종 피해자도 되어 봤을 테니까.

'그러니 진정하고 일 얘기를 먼저 하는 건 어떨까요?'

나는 그렇게 판단하며 회주를 바라봤지만.

"글쎄요, 남작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본디 사업이라는 건 상호 신용이 바탕이 되어야 성사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유감스럽게도 이런 나의 성실한 기대는 철저히 박살 나고 말았다.

"아, 물론 도덕적인 신뢰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덧붙이는 말에도 은은히 묻어나오는 저 명백한 태도.

"...이해했습니다. 상대방의 능력과 계약 준수에 대한 신용은 물론 필수적이죠."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네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저희는 이번 사안에 대해 니카로스 남작령의 신용도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어서요."

거기까지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와 버렸다.

그러니까 요컨대.

"저희 다블레 상회는 '자줏빛 현자가 찾는 물건을 보유하고 있다'라는 니카로스 남작령의 주장에 대해 신뢰할 만한 근거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네.

그렇게 단언한 뒤, 다블레 상회의 회주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막말로 현자가 직접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진위도 가릴 수 없는데, 남작님만 말만 믿고 진행하기에는 저희의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않냐는 이야기죠."

저 어깨를 으쓱거리는 몸짓.

설마 대놓고 내가 했던 몸짓을 따라 하는 건가.

이것 참.

'어이가 없네.'

더 볼 필요도 없다.

이 정도면 그냥 일부러 화를 돋울 속셈으로 시비를 거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판단을 마치면서도 그래도 신사답게 끝으로 한 번 더 확답을 구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여기까지 직접 방문하신 이유는...."

"물론 남작님의 정보 출처를 직접 알아보기 위해서죠. 다른 뜻은 없습니다."

물론 그 또한 무의미한 호의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뭐, 물론 이렇게 회주인 제가 여기까지 방문한 김에, 남작님의 정보 출처를 들어보고 만약 그럴듯하다 싶으면 계약 체결을 재고해볼 수도 있지요.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이지만요."

그래.

이제야 저놈들이 뭔 속셈인 건지 알겠다.

어쩐지 처음부터 이상하기는 했다.

항상 이윤만을 최대의 가치로 여기는 상회 놈들이 평소답지 않게 다짜고짜 시작부터 판을 깰 기세로 어깃장을 놓고 있었으니까.

얘들.

나 호구 잡으러 온 거네.

설마 촌구석 남작이라고 얕보인 건가.

너무 노골적이라 웃음이 나올 정도다.

물론, 그 웃음에 즐거움 따위는 담겨 있지 않았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네, 그런 고로 남작님께서...."

어쨌거나 놈들이 뭔 속셈인지는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답도 당연히 정해진 셈이다.

따라서 나는 또박또박한 어조로 그렇게 대답했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듯하군요. 안녕히 가시길."

"...네?"

내 영역에서 당장 꺼져.

누가 너희 아니면 거래할 상대가 없는 줄 아니.

***

야심한 밤.

니카로스 성 근처의 널찍한 야영지.

"...회주님, 아무래도 저희 조진 것 같은데요."

"네 생각도 그러니...?"

그곳에서 성에서 쫓겨난 다블레 상회의 회주와 수석 총관은 함께 멍하니 모닥불만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분명 일개 변방 남작이고 아직 영주치고 나이도 어리니까 우리가 세게 나오면 조금 움츠러드는 맛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 그녀에게는 분명 그럴듯한 전략이 있었다.

귀족 영주와 평민 회주라는 신분 차이가 있긴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절대로 꿇리지 않는다. 오히려 우세하다고 봐도 된다. 제국 5대 상회라는 위명은 평범한 남작령 정도는 압도적으로 찍어누를 수 있으니까.

그런 힘 차이를 이용한 일방적인 강압과 압박.

누군가는 이러한 전략을 보고 비열하다고 욕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효과적인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권위와 실력을 모두 갖춘 대귀족도 아닌데, 영지와 주민들의 삶을 책임지는 영주로서 5대 상회 중 하나를 대놓고 배척하고 적으로 돌린다는 선택을 쉽게 내릴 수 없을 테니까.

"...전혀 안 통하네?"

하지만 니카로스 남작은 그런 선택을 내렸다.

그것도 한 치의 망설임이나 고민도 없이.

사실 다블레 상회도 거래를 이렇게 파투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그들도 남작이 언급한 '자줏빛 현자가 찾는 물건'에 엄청난 관심이 있었기에 이 먼 벽지까지 온 것이니까.

"...."

하지만 이제는 그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고 다 끝나버렸다. 적당히 젊은 영주를 겁박해서 협상에 우위를 점하려던 속셈뿐이었던 다블레 상회로서는 실로 낭패라고 할 수 있었다.

결국, 시간이 지남과 함께 조금 정신을 차린 수석 총관이 벌떡 일어나며 회주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길래 왜 굳이 긁어 부스럼은 만든 겁니까!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니카로스 남작은 동부에서 나름대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신성이라고! 그런 걸물을 그냥 동네 애송이 대하듯 대하면 어떡합니까!"

"어, 어, 어? 왜 나한테만 그래! 내가 뭐 이걸 독단적으로 결정했니? 애초에 현자 본인도 자기가 뭘 찾는지 제대로 모르는데 남작이라고 물건에 대해 확신까지 하는 건 아닐 거다! 그러니까 오히려 우리가 세게 나가자! 미리 합의 다 끝내고 계획대로 진행한 것뿐이잖아! 설마 너 혼자 책임을 회피하려고!"

"아니, 그, 참, 그래도 명색에 회주님이면 얼굴 보자마자 딱 '아, 쟤 보통 아니구나. 좀 사릴까?'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혜안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게 뭔 개소리야!"

그렇게 주위에 가득한 다른 직원들의 망연한 시선에도 서로 언성을 높이던 두 사람은.

"...아니, 됐다. 지금 같을 때 이렇게 다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네...."

금세 또 정신을 차린 듯 함께 바람 빠지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은 이런 쓸데없는 다툼에 쓸 체력조차 아까웠다.

"아무래도 저쪽 반응 보면, 그 물건 진짜겠지?"

"...그렇겠죠. 저쪽도 뭔가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저렇게 세게 나오는 거겠죠. 물건만 진짜면, 우리 말고도 다른 상회랑 얼마든지 거래할 수 있을 테니까."

"으으으, 도대체 남작은 뭘 보고 확신 중인 거지. 괴로워... 내가 너무 멍청했어...."

"알면 다행이네요."

"너도 마찬가지야 인마!"

"으악."

회주는 버럭 소리 지르며 수석 총관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러나 사실 수석 총관도 이미 맞을 각오를 하고 내뱉은 소리라 타격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헛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일단 대책부터 세워보자. 우리가 저자세로 다시 들어가면 과연 남작이 받아줄까?"

"회주님이 원래 돈 앞에서는 자존심 하나 없는 비굴한 처세의 달인이 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지만...."

"어 칭찬 고맙다."

"별말씀을요. 어쨌거나 마지막에 본 남작의 태도를 보면 그래도 쉽지 않겠네요. 화 많이 난 것 같던데."

"하여간 젊은것들은 이게 문제야. 이윤 앞에 그깟 감정이 뭐라고."

"...."

수석 총관은 회주의 뻔뻔한 발언에 잠시 많은 생각을 하고 말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굳이 두 번 맞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면 뭐가 됐든 일단 남작 마음을 돌릴 소재가 있긴 있어야 할 텐데. 작은 거라도 좋으니 뭐 없나. 뭐 없나. 뭐 없나. 뭐 없나...."

그렇게 절망에 빠진 다블레 상회의 회주, 로밀리아 엘레그미티스가 정신을 놓은 것처럼 한창 중얼거리고 있을 무렵.

"응? 저기 누가 오네요?"

니카로스 성과는 반대 방향, 저 멀리 숲 방향에서 한 무리의 일행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다블레 상회 쪽이 아닌 성으로 향하는 중이었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목적지가 아닌, 정체.

"뭔데, 그냥 여기 현지 주민... 이겠지?"

대충 대꾸하고 고민을 계속하려던 로밀리아 회주는 점차 가까워지는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그것은, 숲에서 걸어 나온 한 무리의 일행이.

"응? 뭐야? 로밀리아 씨가 왜 이 동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거예요?"

바로 현지 사냥꾼들을 등 뒤에 달고 다니는, 니카로스 남작령의 영지 마법사 발레리아였기 때문이었다.

새까맣게 탄 토끼 두 마리를 어깨에 걸쳐 들고 있던 발레리아는 멍한 표정의 로밀리아 회주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그건 내가... 나는 그냥 일 때문에 왔는데. 발레리아 아가씨는 왜 이런 곳에...?"

사실 더 묻고 싶은 것은 바로 로밀리아 회주였다.

상회의 회주와 마법사.

언뜻 보기에는 딱히 특별한 관계가 없어 보이는 두 존재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 세상의 마법사는 전공에 따라 일종의 공학자가 되기도 하고 과학자가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마법사는 언제나 다양하고 많은 것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누굴까?

그야 당연히 수많은 제국의 상회밖에 없었다.

그리고 발레리아는 단순히 평범한 수준을 넘어, 제국 최고의 인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황립 아카데미 출신의 정통 마법사.

그녀의 향후 잠재력을 고려하면 거대 상회의 회주가 직접 안면을 트고 상대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녔다.

요컨대 다블레 상회의 단골이던 발레리아에게 로밀리아 회주는 무척이나 익숙한 지인이라는 것.

따라서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회주의 질문에 답했다.

"아, 이야기 못 들었겠구나. 저 얼마 전부터 여기 취직했거든요. 저 여기 영지 마법사예요."

"...!"

그리고 그 대수롭지 않은 대답은, 로밀리아 회주와 그녀의 다블레 상회에 한 줄기 빛이 되었다.

대답을 듣고, 로밀리아 회주는 단 1초의 망설임도 그렇게 소리치며 매달렸다.

"발레리아 아가씨! 제발 한 번만 저 도와줘요!"

"으, 응? 네? 뭘요?"

당연히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발레리아는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건방진 다블레 상회에 두 번째 기회가 걸어들어왔다.

#073. 치킨 게임 (4)

니카로스 성 바깥에 마치 비렁뱅이처럼 널브러져 있는 다블레 상회. 그리고 로밀리아 회주의 절박한 설명까지.

동행하던 사냥꾼들을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은, 똑똑한 발레리아는 그리 어렵지 않게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얘들 우리 영주 후려쳐서 털어먹으려다가 다 조졌구나.'

무슨 속셈이었는지, 더 설명을 듣지 않아도 대충 전부 짐작과 파악이 됐다.

황립 아카데미의 우수한 엘리트라는 배경 덕분에 발레리아 본인은 이들 거대 상회와 그럭저럭 합리적인 거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들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탐욕스러운 장사치다.

촌구석 애송이 남작이 거래한답시고 직접 판까지 열어줬는데 그 상황에서 호구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애초에 제대로 된 상인도 아닌 셈.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물론 머리로만 이해할 뿐.

'...하여간 바보들.'

한심하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특히 니카로스 남작 티베리오스에게 이래저래 충격받은 경험이 많은 발레리아였기에 더욱더.

'속에 구렁이 수십 마리는 숨기고 있을 우리 영주한테 저렇게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덤벼들었으니, 이런 결말이 되는 것도 당연하지.'

5대 상회라는 양반들이 이렇게 방심할 줄이야.

아니, 5대 상회라는 이름이 있기에 더 방심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발레리아는 자신의 다리에 거의 매달릴 기세인 로밀리아 회주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나 보고 구체적으로 뭘 도와달라는 건데요?"

"호, 호호. 우리의 인연이 그리 짧은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이렇게 된 거, 여기 니카로스의 영지 마법사이신 발레리아 아가씨께서 영주님께 말씀을 잘 드려서 다시 한번 협상의 자리를 마련해주시면 어떨까 하고... 조심스럽게 부탁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네요오."

"흐응."

어색하게 웃으며 부탁하는 로밀리아 회주의 모습에 발레리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로밀리아 회주의 표현과는 달리 딱히 그렇게까지 도와줄 의리는 없었다. 상회와는 어디까지나 한없이 건조한 거래 관계였을 뿐이었으니까.

'게다가 내가 평소 이런 영지 업무에 딱히 많이 관여하는 편도 아니었는걸.'

영지 마법사란 본디 그런 역할.

실제로는 워낙 존재감이 큰 탓에 이것저것 영지의 다양한 분야에 개입하는 영지 마법사들도 많긴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마법과 관련되고 마법이 필요한 영역에서만 나서도 충분하다.

그리고 발레리아는 황립 아카데미 우수 졸업생답게 누구보다도 원칙에 충실한 마법사였고.

실상은 다른 분야에는 그냥 관심 자체가 없었던 것뿐이지만, 어쨌거나.

그러니까 대충 거절하고 치워버려야겠다.

그렇게 결심하고 입을 열기 직전.

"아."

발레리아는 마치 무언가 새로 깨달았다는 듯 작게 탄성을 내뱉었고.

"...좋아요, 뭐. 이야기 정도는 한 번 전달해볼게요."

생각을 바꿔 회주의 부탁을 선선히 수락했다.

"꺅! 역시 발레리아 아가씨밖에 없어요!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이자까지 쳐서! 법정 이자율 안에서!"

"...그런 계산은 뭐 로밀리아 씨가 알아서 잘하시겠죠. 일단 가서 얘기부터 해볼 때니까 여기서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물론이죠! 어디 안 가고 얌전히 기다릴게요!"

호들갑이 가득한 로밀리아 회주의 대답에도 별 감흥이 없다는 듯 손을 휘저어 대답을 대신하고, 발레리아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곧바로 몸을 돌려 성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저... 혹시나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전에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다블레 상회의 수석 총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총관 아저씨? 뭔데요? 실례랄 게 있나. 물어봐요."

"음, 그러면 말이죠...."

그러나 발레리아의 선선한 수락을 받았음에도 수석 총관은 쉬이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사실 황립 아카데미의 우수한 졸업생인 그녀가 이런 낙후된 벽지에서 일하고 있는 것인지부터 시작해서, 궁금한 게 한둘이 아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당연한 궁금증보다 더 우선시 되는, 지금 이 순간 가장 의문스러운 점은 따로 있었다.

처음 발레리아와 이 니카로스에서 마주친 순간부터 그 질문을 던질 순간만을 노리고 있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런 짧은 망설임 끝에 결국 호기심이 머뭇거림을 이겨내고, 마침내 수석 총관은 질문을 던졌다.

"그 등에 멘 토끼는 뭡니까...?"

"아."

마법사라는 오만한 족속들의 생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발레리아의 바로 그 모습.

새까맣게 탄 토끼 두 마리를 어깨에 걸쳐 매고, 숲속에서 사냥꾼들과 함께 털레털레 걸어 나오던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바로 그 의문.

어째서 정통파 화염 학파의 마법사가 마치 직접 사냥이라도 한 듯한 모양새로 숲에서 걸어 나오는 것인가?

설마설마 그 고귀하고 까탈스러운 마법사가 자기 마법을 써서 사냥과 같은 범속한 행위를 했다고?

그것도 강대한 몬스터도 아닌 토끼 같은 한낱 미물을 상대로?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신이 마법사와 접촉한 경험이 적지 않은 5대 상회의 고위 간부이기에 더욱더.

그런 의문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이미 수석 총관과 같은 의문을 공유하고 있던, 주위의 모든 다블레 상회의 인원들이 발레리아를 바라봤고.

"...."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도 순간 자신의 현재 모습을 깜빡하고 말아버린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 물음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입은 다시 열릴 수 있었지만.

"...취미 생활?"

유감스럽게도 살짝 붉어진 두 뺨만은 숨길 수 없었다.

발레리아는 어느새 사냥이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

단호한 태도로 다블레 상회의 협상단을 쫓아내고.

나는 그대로 자리에 남아 천천히 상황을 복기해봤다.

-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듯하군요.

- 안녕히 가시길.

요컨대.

'내 영역에서 당장 꺼져.'

언뜻 보기에는 상당히 감정적인 대응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내 요약된 속마음까지 실제로 내뱉은 것도 아니니까.

그냥 간단히 말해서, 굉장히 단정적이긴 하지만, 결국 이것도 어디까지나 지극히 합리적인 응수의 범위란 것.

처음 다블레 상회 놈들과 얼굴을 마주했을 때부터 느낄 수 있었다.

아, 저놈들.

'날 얕보고 초장부터 흔들어 길들일 계획이구나.'

당연히 저런 시도 자체가 불쾌하지만 참지 못하겠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이가 적고 약소한 영주라고 무시당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저런 무례 또한 노회한 상인이라면 당연히 시도해 볼 법한 협상의 기교에 불과하다는 걸 나도 알고 있으니까.

'...뭐, 물론.'

내가 지금까지 만난 인간들이 대부분 협상의 여지도 없을 정도로 확고한 적대 관계거나, 속마음은 몰라도 최소한 겉으로는 예의를 갖추는 여우들뿐이었던 건 맞다.

그래서 저렇게 대놓고 날 등쳐먹을 티를 가득 뽐내는 놈들은 처음 봐서 조금 예상외였던 것도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내 기분이 상했단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이해심 넓은 교양인이니까.

응.

정말로.

'그저 이성적으로, 나도 똑같이 응대해줬을 뿐이지.'

시건방진 다블레 상회 놈들은 그걸 몰랐다.

저 녀석들이 날 흔들고 길들일 속셈이라면.

반대로 나 또한 똑같은 속셈을 품을 수 있다는 걸.

아니, 똑같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가.

'처음부터 협상의 주도권은 내가 쥐고 있었으니까. 같은 행위라도 그 무게감이 확연히 다르거든.'

그래. 멍청한 다블레 상회는 그렇게만 생각했겠지.

아직 확실한 것은 없다고. 제대로 된 물건일 가능성이 아직은 그저 아예 없지는 않은 수준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똑똑히 안다.

저게 '현자가 찾는 물건' 중 하나가 확실하다는 걸.

나에게 이건 추측이 아닌 지식의 영역이다.

즉, 압도적 정보의 격차.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 중인데 사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나 또한 세게 나갔을 뿐이다.

하여간. 바보가 따로 없다.

떠먹여 줘도 못 먹는 다블레 상회 놈들.

물론 강대강 구도 자체가 지극히 불안정하고 언제든 파투 날 위험성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말했지 않은가.

나의 선택지가 다블레 상회밖에 없는 건 아니라고.

'이번 협상을 내가 단호하게 결렬시켰다는 소문을 흘리면 다른 상회와의 협상은 조금 더 순조로워질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러니 이제 나는 느긋이 고민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

곧장 다른 상회와 접선을 시도할지, 아니면 다블레 상회 쪽의 반응을 기다려 볼지.

어느 쪽이든 크게 아쉬울 건 없다.

'사실 그래도 객관적인 조건만 따지면 역시 다블레 상회가 제일 적절하긴 해.'

상회 전체의 사업 방향성도 그렇고, 회주 개인의 성향과 특징을 고려해도 그렇고.

괜히 내가 첫 번째 후보로 접선한 게 아닌걸.

그런고로 다블레 상회가 떠난 협상장에 그대로 앉아, 과연 앞으로 어떻게 진행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던 도중.

"아무래도 저의 준비가 미흡했던 것 같습니다."

한동안 별다른 말을 하고 있지 않던 마르다 양이, 문득 그렇게 입을 열었다.

여전히 표정의 변화는 전혀 없다. 목소리의 어조도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 모습 그대로,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느낌은 달랐다.

"글쎄요. 딱히 저는 동의하기 어렵군요. 협상을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저 새끼들... 아니, 저쪽에서 먼저 고압적인 모습만 보인 것뿐이니까요. 기본적인 태도도 갖춰지지 않은 치들과 의견을 나눌 수 없는 법이죠."

그래, 시작하자마자 나랑 저쪽 회주랑 같이 신나게 손잡고 순식간에 파국까지 달려버렸는데. 최종 결정권자도 아니었던 마르다 양이 뭘 어쩔 수가 있었겠어.

그러나 그녀는 아직 다른 생각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상회 측에 협력 제안서를 작성하여 발송하고, 이 자리를 만든 것이 바로 저였습니다. 제가 지금보다 더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다면 저들이 우리 니카로스에 저토록 불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조리 있는 말투로 제 생각을 털어놓은 내내, 마르다의 두 눈은 또렷했다. 흔들리지 않고 어느 한 점을 향하고 있었다.

그쯤 되니 슬슬 나도 감이 잡혔다.

'저건, 분함인가.'

마르다가 만든 서안은 당연히 나도 봤다.

부족한 부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사업 협력 제안서 자체에는 그다지 기대를 걸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현자가 찾는 물품'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미끼가 우리에게 있는 이상 서안은 그저 형식적인 장식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결과물은 한낱 장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훌륭했다.

단순히 '현자가 찾는 물품'이라는 단발적인 건을 넘어, 정말로 동부의 최전선인 우리 니카로스와 다블레 상회 간의 장기적인 계약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을 상호 이익을 논리적으로 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충분히 완벽했다고 봐.'

그러니까 사실 노골적으로 말하면.

그저 이 모든 건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의 간판 문제였을 뿐이다.

제국 동쪽 가장 변방의 약소 영지.

니카로스의 정체성 그 자체이자 내가 슬슬 떼놓으려고 이것저것 수를 쓰고 있는 바로 그 타이틀.

까놓고 말해 그깟 이름값 하나 때문에 저놈들이 우릴 이토록 후려쳤던 것이지.

"...."

그리고 그 사실에도 불구하고.

마르다는 자기 자신에게 분함을 느꼈다.

그걸 몰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인지.

나는 잠시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봤다.

마르다 크세로스.

집사장 아저씨의 딸.

니카로스 제일의 수재.

황립 아카데미 졸업을 앞두고 있던 엘리트.

그리고 자기 고향을 위해 졸업이라는 영광까지 과감하게 내버리고 실천을 길을 걷는 나의 주민.

솔직히 마르다의 언행은 개인적으로 여전히 종잡을 수 없고, 또 가끔은 부담스러울 지경이기도 하지만.

'한 명의 영주로서는, 참 달갑고 모범적이라고 느껴지는 것도 분명한 진실이지.'

그렇잖아.

내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고향의 번영을 위해 이토록 열성적인데 내가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

그 열정과 능력에 비하면, 무례하거나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 평소의 언행 따위도 하찮은 요소에 불과한걸.

그래, 정말로.

가능하다면 영지의 모두가 본받았으면 할 정도로.

그렇기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그 말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그러면 저랑 내기를 하나 할까요, 마르다 양?"

아주 다블레 상회가 보였던 태도와 비슷한, 아주 시건방진 미소와 함께.

"내기 말씀입니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갑작스러운 나의 제안에 마르다가 되묻는다.

여태껏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던 그녀의 얼굴 위로 미세하게 당혹감이라는 감정이 떠오른다.

그래, 내기.

아주 간단한 내기.

"저 다블레 상회의 건방진 친구들이 바보짓을 깊이 후회하고 우리와 다시 협상할지 안 할지, 그냥 그걸로 내기하는 겁니다. 저는 다시 한다는 쪽에 걸죠."

만약 내가 맞힌다면 니카로스가 가난하고 한미한 영지라서 저놈들이 우리를 업신여겼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 있잖아?

덤으로 마르다의 서안에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도 증명되고, 녀석들이 고작 한낱 이름값 때문에 황금을 걷어찬 머저리들이었다는 것도 증명되고.

그치?

"...솔직히 그 내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전히 생각이 많은 듯했다.

"게다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재협상의 의사를 밝힌다면 우리 니카로스의 위신에 흠집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이 야무진 사회초년생 같으니.

누가 좋은 대학 나온 인재 아니랄까 봐, 논리적으로 조곤조곤 반박하는 것 좀 봐.

하지만 이런 건 원래 그냥 바로 와닿는 직감적인 느낌이 관건이라고.

원래 의미를 이래저래 당장 끼워 맞추려고 하다 보면 논리적 비약도 좀 할 수 있는 거야.

'물론 우리의 위신 문제도 있다는 마르다 양의 지적만큼은 상당히 일리가 있지만.'

이쪽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

"간접적으로 저들이 먼저 재협상을 추진할 수 있게 몰아가는 방법이랑 그냥 가만히 기다리는 방법... 대략 두 가지 방안이 있기는 한데, 제가 보기에는 두 방법 모두 그다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없다는 거지.

"그게 무슨...?"

유감스럽게도 마르다 양은 아직 내 추측에 수긍하지 못하는 기색이지만, 이 또한 괜찮다.

머릿속 이해보다도 현실의 상황이 먼저 우리를 찾아왔으니까 말이야.

"영주야, 내가 오다가 봤는데 다블레 상회 놈들 우리 성 밖에서 거지 같이 뒹굴고 있거든? 걔들이 어떻게든 다시 협상해볼 수 없겠냐는데 어떻게 할래?"

열린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러 소식을 전달하는 우리의 영지 마법사 발레리아.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웃으며 마르다 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봐, 내 말이 맞지?

"...."

그리고 당연히 나의 예상대로 그녀는 이미 말없이 놀랐다는 표정만을 얼굴 한가득 짓고 있었다.

무척이나 보기 드문.

아까보다도 훨씬 선명한 마르다 양의 표정이었다.

#074. 치킨 게임 (5)

착하고 넓은 마음씨를 지닌 방화광 발레리아 덕에 다시 우리 성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다블레 상회의 로밀리아 회주.

가차 없이 쫓겨난 경험이 무의미했던 건 아닌지, 그녀는 조금 전과는 확실히 다른 태도를 보여주었다.

"헤헤, 감사해요. 남작님의 너른 배려에 정말 정말로 감동의 눈물만 절절 나온답니다."

"...괜히 뒤끝 있어 보일 것 같아서 어지간하면 언급 안 하고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아까랑은 반응이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물론 기선제압을 목적으로 강경하게 대응하긴 했다지만, 그래도 이 정도 태세 변환까지 기대하진 않았는데.

그렇기에 나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물었지만, 회주는 일말의 부끄러움 없이 당당히 대답했다.

"호호, 시간이 뭐가 중요한가요. 진짜로 중요한 건 남작님께서 귀한 '상품'을 지니고 계신다는 것과 아까는 제가 바보같이 그걸 못 알아차렸다는 것뿐이죠. 그래도 뒤늦게라도 실수를 깨달았으니 염치불구하고 어서 허겁지겁 수습부터 해야 하지 않겠어요?"

"...."

나는 달리 더 대꾸하지 않고 입맛만 쩝 다셨다.

그래, 무슨 말인지는 대충 알겠다.

굳이 좋게 포장해주자면 자잘한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언제나 이윤만을 가장 우선시하는, 상인 본연의 태도라고 할 수도 있겠지. 제국 5대 상회 중 한 곳의 주인이라는 위치에 걸맞은 자세라고 봐도 되고.

'...그리고 반대로 그냥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징그러울 정도의 뻔뻔함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고 말이야.'

지독하고 집요한 가스파르 영감님과는 또 다른 유형의 돈벌레라고 칭해도 좋을 수준.

솔직히 나처럼 교양과 품위를 겸비한 신사와는 그다지 사적으로 궁합이 맞지 않는 인물상이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궁합 따위가 이 자리에서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렇지.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능력.

"뭐, 좋습니다. 회주님께서 이토록 협조적인 태도를 보여주시니 저로서도 사양할 이유가 없지요."

니카로스의 주인인 나의 능력과 제국 최대 상회의 일각을 이끄는 저 돈벌레 아가씨의 능력일 뿐인걸.

조금 많이 돌아오긴 했지만 어떻게든 합리적인 대화만 통한다면 나야 환영이다.

"역시 남작님! 변방의 젊은 호걸로 명성이 자자하신 분답게 배포가 넓으십니다! 그러면 일단 협력 제안서에 나와 있던, '현자가 찾는 물건'부터 먼저 확인해볼까요?"

물론 이번에는 진지하게, 제대로.

그렇게 덧붙이며 슬쩍 윙크를 보내는 로밀리아 회주를 보니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런 내심과는 별개로 나의 두 손은 부지런히 자신의 본분을 수행했다.

그래, 슬슬 기 싸움은 멈추고 제대로 해보자고.

"좋습니다. 제가 언급했던, 칠색이랑의 가죽입니다. 확인해보시죠."

"이게 바로...."

마침내 우리의 협상 테이블 위로, 일곱 빛깔로 빛나는 칠색이랑의 가죽이 올라왔다.

본격적인 논의의 시작이었다.

***

마침내 가죽의 실물이 등장하자 로밀리아 회주는 순식간에 푼수 같던 태도를 벗어던지고, 진지하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관찰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죽에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사실 저희도 사업 협력 제안서를 받고, 거기에 적혀 있던 칠색이랑이라는 몬스터에 대해 따로 조사를 해보긴 했어요."

"그렇군요."

무척이나 건조하고 삭막한 티베리오스의 대꾸.

그러나 그녀는 그런 반응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칠색이랑이 제국 동쪽 변방에서만 극히 드물게 목격담이 보고 되는, 진위조차 확실하지 않은 몬스터라는 것 또한 확인했고요."

그랬다.

다블레 상회가 어디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아무리 급히 출발했다지만 그래도 이 먼 변경까지 오는데 아무런 사전 조사도 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이번 거래의 핵심 소재.

자줏빛 현자가 찾는다는 물건 중 하나.

칠색이랑의 가죽.

'과연 그 신뢰성이 얼마나 될까.'

최근 그럭저럭 위명을 살짝 떨치고 있다지만, 그래 봤자 결국 가난한 촌구석 영지일 뿐인 니카로스 남작령.

존재조차 확실하지 않은 몬스터를 토벌하였다는, 쉽게 믿기 어려운 정황.

그리고 그런 몬스터의 가죽이 바로 현자가 찾는 물건이라고 단정 짓는 호언장담까지.

물론 이 먼 동부에서 현자와 제국 5대 상회 간의 은밀한 거래를 눈치채고 끼어든 수완이 놀랍긴 하다. 어찌나 솜씨가 은밀한지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샜는지 여전히 파악되지 않았기도 하고.

그러니 부족한 신용에도 불구하고 덮어놓고 허언이라 일축하지는 않았던 거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원래부터 제국 동부 시장 개척에 관심이 많던 로밀리아 회주였기 때문에 결국 그 모든 걸 종합적으로 판단해 이곳까지 직접 올 가치가 있다고 결론 내리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객관적인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왕 협상하는 거 시작을 조금 세게 나갔던 것뿐인데....'

하마터면 초장부터 문전박대당해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다시 수도까지 쫓겨날 뻔했다. 그녀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니카로스 남작령의 반응이 강경했으니까.

서로의 배짱을 겨루는 치킨 게임에서 이미 패배해버렸으니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의 잔재주는 안 통한다.

그리고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언행과 달리, 굳이 통하지도 않을 수작을 더 부릴 정도로 로밀리아 회주의 생각이 짧지도 않다.

따라서 지금 그녀가 내뱉는 말들은, 진심으로 모두 합리적인 거래를 위한 조율일 뿐이었다.

이미 전과가 있어 과연 남작이 순순히 믿어줄지는 의문이었지만, 어쨌거나 정말로.

"그런 관점에서 보아, 확실히 지금 제 눈앞에 보이는 이 가죽이 그 자체로도 무척 아름답고 질 좋은 상품이긴 하지만...."

"과연 정말로 현자가 찾는 물건이 맞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최대한 남작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회주가 머뭇거리며 꺼내는 말을 중간에 끊으며 티베리오스는 시원스러울 정도로 간단하게 이야기를 정리했다.

회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저의 무례했던 태도와는 별개로, 제대로 된 거래를 위해서는 객관적인 증거가 더 필요하다는 것도 분명 사실이긴 하니까 말이죠."

분명 티베리오스가 꺼내든 가죽은 한눈에 봐도 아름답고 희소한 상등품으로 보였다. 굳이 이번 거래가 아니더라도 상회의 입장에서 매입할 의향이 있을 정도로.

전설의 몬스터 토벌이라는 배경에 살만 잘 붙여서 시장에 내놓으면 수집가들이 적지 않게 관심을 보이겠지.

하지만 지금의 요점은 고작 그런 게 아니지 않은가.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이게 '현자가 찾는 물건'이 맞냐 아니냐, 그것뿐이었다.

이미 한 번 판이 뒤엎어진 전적이 있기에 로밀리아 회주의 어조는 조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쉽게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 이건 거래를 위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과정이었으니까.

"옳은 말씀이군요. 우리 니카로스와 다블레 상회 간의 장기적인 협력이 전부 이번 거래에 달려있으니, 당연히 검증 또한 철저하게 해야겠죠."

다행히도 회주의 조심스러운 우려가 무색하게도 티베리오스는 순순히 그녀의 말에 동의해주었다.

"이해해주시니 다행이네요."

"그런 의미에서 말이죠."

그리고 그렇기에 그는 마치 일상적인 안부 인사를 묻듯, 자연스레 이야기의 방향을 살짝 틀기 시작했다.

"현자가 물건을 찾아달라고 요청하며 덧붙인 말. 회주님은 정확히 기억하고 계십니까?"

"응? 네? ...그야, 그야 물론이죠."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질문에 회주는 잠시 당황했지만, 어떻게든 의식적으로 아주 짧게 대답할 수 있었다.

니카로스 남작이 현자와 제국 5대 상회 간의 거래 자체를 알고 있는 건 이미 확정된 사실이지만, 구체적으로 정확히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니까.

괜히 협상 중에 먼저 정보를 더 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티베리오스는 회주의 그런 사소한 판단과 기교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저 변함없는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대들이 가져올 것이 아이의 여린 손안에 담길 수 있을 만큼 작은 것이라도 좋고, 드넓은 호수와 끝없는 바다를 가득 채울 만큼 광대한 것이라도 무방하다. 그것이 흠 하나 없는 완전한 실체이든, 혹은 부서지고 깨어진 조각 하나에 불과하든 상관없다."

조건은 오직 단 하나.

- 그저 영원(永遠)과 불멸(不滅)의 정수를 머금은 것이라면, 나에게 가져오라.

그녀가 숨긴 것이 무색하게도, 단 한 토시도 다르지 않게 똑똑히 현자의 요청을 재연하는 티베리오스의 말.

따라서 회주는 그저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잘 알고 계시네요."

"하하, 설마 이런 것도 모르고 회주님을 이 먼 변경까지 불렀겠습니까?"

티베리오스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만 잠시 으쓱하며 본인의 감상을 토로했다.

"하여간 누가 현자 아니랄까 봐. 철 지난 옛날이야기 속 수수께끼도 아니고, 사실 이런 설명만으로 어떻게 물건을 찾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현자께서 말을 너무 모호하게 하셨어요. 곤란한 요청을 받은 상회들만 고생이죠. 그러니 지금 회주님의 걱정과... 의심, 저도 당연히 이해합니다."

"...."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제가 자신 있게 회주님을 이 먼 곳까지 모신 것이기도 하죠."

거기까지 말하고 티베리오스는 가죽을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른손을, 왼쪽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향해 뻗었다.

"남작님?"

갑작스러운 티베리오스의 행동에 회주는 의문스럽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만 대답했을 뿐이었다.

"역시 직접 눈으로 보는 게 제일 빠르지 않겠습니까?"

밖으로 내뱉어진 그 짧은 한 문장.

동시에 허공으로 내던져지는 칠색이랑의 가죽.

그리고 마지막으로.

순식간에 검집에서 뽑혀 나와 망설임 없이 가죽을 양단하는 티베리오스의 검.

정말로 모든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 무슨...!"

거래의 소재가.

다블레 상회가 이 벽지까지 찾아온 이유가.

'자줏빛 현자가 찾는 물건'이 갈라진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그 부정할 수 없는 광경에 로밀리아 회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티베리오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자연스레 당혹감 서린 목소리 역시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남작님?"

그러나 그런 회주의 모습에도 티베리오스는 그저 변함없이 태연할 뿐이었다.

"진정하시죠, 회주님."

"아니, 지금 어떻게 진정을...!"

"진정하시고, 먼저 가죽부터 다시 보세요."

반사적으로 테이블 위로 내려간 시선.

로밀리아 회주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칠색이랑의 가죽은 이런 물건입니다."

분명히 양단 당해 두 갈래로 갈라졌던 가죽이, 어느새 스멀스멀 다시 하나로 이어 붙고 있었다.

그 어떠한 외부의 개입도 없이, 스스로.

어느새 가죽은 처음 그 모습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마치 그 어떠한 일도 겪지 않았다는 듯.

불변(不變).

"...이건."

"사실 저도 원리까지는 잘 모릅니다. 그저 이런 현상이 관측된다는 것만 알고 있지요. 단순히 칼로 베는 걸 넘어 아예 불로 태워도 번개로 지져도 결과는 똑같을 겁니다. 당연히 갈가리 찢어 버려도 마찬가지죠."

로밀리아 회주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조용히 눈앞의 광경을 보고 판단을 시작했다.

그렇기에 육성으로 나오는 대꾸는 없었으나, 티베리오스는 마치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 유려하게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이렇게 볼 때 신기하기는 하지만, 사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그리 유용한 성질까지는 아닙니다. 저 비정상적인 복구 능력 때문에 그럴듯한 가공 자체가 안 되거든요. 그렇다고 저걸 통째로 몸에 두르고 갑옷처럼 쓰기에는 의외로 그리 질기고 단단하지도 않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냥 관리가 편한 장식품 정도가 최대의 활용일 겁니다."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전설 속 몬스터라고는 하지만 사실 워낙 목격담 자체가 희소해서 그리 불릴 뿐, 전설이라는 이름이 다소 아깝기도 하죠. 영원과 불멸이라는 다 담기에도 부족함은 있고. 애초에 일개 몬스터 하나의 가죽에 이 이상을 기대하는 것도 부조리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티베리오스는 그렇게 웃으며, 마침내 로밀리아 회주가 가장 원하던 결론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한낱 몬스터의 가죽이 바로 현자가 찾던 물건 중 하나가 맞습니다."

"...."

시원스러울 정도로 확고한 그 대답.

분명 회주가 원하던 답은 맞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쉽게 입을 열 수는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테이블 위 가죽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 남작이 제시한 저 칠색이랑의 가죽이 어떤 물건인지는 이제 잘 알았다.

그 특성과 현자가 내건 조건을 비교해보면, 남작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것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현자에게 들고 갈 만할 가치는 확실히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남작의 대답처럼 한 치의 의심 없이 확신할 정도인가.

회주는 아직 그 부분까지는 쉬이 수긍할 수 없었다.

'우리 5대 상회와 현자만의 비밀스러운 거래까지 간파하여 이 판에 끼어든 걸 보면 당연히 남작의 정보력도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저 늑대 가죽이 확실한 물건이라는 보증까지는 되지 못해....'

솔직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건 의뢰 당사자인 현자조차도 명확히 알지 못하는 거지 같은 난제니까.

따라서 거래를 아예 하지 않겠다는 건 결코 아니었다.

이미 니카로스까지 오기도 했고, 좋지 못한 첫 만남에도 불구하고 티베리오스는 성실하게 협상에 임해주었다.

가능한 한 입증도 충분히 해주었다.

그러니까 요컨대 이건.

대대적인 계약에 앞서 으레 따라붙는, 위험과 이득을 저울질하는 평범한 심사숙고의 과정일 뿐.

로밀리아 엘레그미티스는 습관처럼 셈을 했다.

언제나처럼, 상인답게.

"참고로, 저는 개인적으로."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이 자리의 주인이자 동쪽의 젊은 야심가, 니카로스 남작 티베리오스는 그 잠깐의 셈과 저울질조차 기다리고 싶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굳이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회주님께서 바로 승낙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어찌 보면 젊은이의 치기 어린, 뻔뻔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그런 재촉.

물론 회주도 이미 저지른 일이 있고 또 당장 아쉬운 처지이기 때문에 굳이 지적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재촉을 마냥 들어줄 수도 없었기에 조금 전처럼 둥글게 푼수처럼 웃으며 넘어가고자 했다.

그래.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티베리오스가 곧바로 먼저 덧붙이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 말은 한 치의 막힘도 없이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이렇게.

"어차피 로밀리아 회주께서도 중앙 황실과의 연이 간절하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회주님의 오랜 비원(悲願)과 복수를 위해서는 말이죠.

마치 흘리듯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는 소리.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들었다면 그저 무의미한 일상의 한 마디로만 판단했을 모를 그런 문장.

하지만. 회주는 결코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

그 짧은 문장에 로밀리아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 성에 들어온 뒤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결코 그 어떤 순간도 지금 이 순간의 이 충격에 버금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아니, 그, 어떻게."

남작이 별것 아니라는 듯 흘린 그 말이,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알린 적이 없는 그녀만의 가장 깊은 비밀을 노골적으로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로밀리아 엘레그미티스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빠르게 돌아가고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면서도 또렷하게 남작을 담아낸다. 그 모든 과정은 마치 공포처럼도 보였고, 분노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반응에도,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비친 티베리오스는 여전히 태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너무 놀랄 것까지는 없습니다. 제가 원래 아는 게 조금 많거든요."

마치 그녀가 내심 의심하던 정보력에 쐐기라도 박듯.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블레 상회를 불렀다.

#075. 치킨 게임 (6)

두 번째 협상이 끝났다.

마침내 도출된 거래 체결이라는 결론.

두 조직의 대표이자 최종 결정권자인 나와 로밀리아 회주 모두가 큰 방향성에서 합의를 봤으니 이제 남은 것은 실무진들 간의 구체적이고 상세한 협의뿐이다.

그렇기에 여기서부터는 우리의 유능한 엘리트, 마르다 양에게 전적으로 맡겨두고, 나는 그저 보람과 뿌듯함만을 챙긴 채 집무실로 돌아와 쉬고 있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지만 그렇다고 마냥 새까만 흑색은 아니다. 하늘의 저 먼 끝에서부터 조금씩 짙은 푸른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러다가 곧 해 뜨는 거 보겠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가.

경우 없는 다블레 상회의 친구들이 우리 니카로스 성에 도착한 시간이 애초에 저녁. 그때부터 바로 시건방진 첫 번째 협상과 축객령, 지나가던 발레리아의 중개로 인한 두 번째 협상까지 연달아 쉬지 않고 이어졌으니 꼭두새벽이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사람의 인권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야근 지옥에 그만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참을 수는 있었다.

나는 의젓한 어른이고, 사실 내가 의도적으로 우리가 심리적 우세에 있을 때 상대를 몰아붙이고 싶어 일부러 내일로 협상을 미루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고생한 결실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협상 중.

나는 로밀리아 회주에게 그런 말을 하였다.

비원과 복수.

- ...지금 갑자기 그 말을 꺼낸 저의가 뭐죠?

- 저의라고까지 할 건 없습니다. 아무래도 아직 회주님께서 확신이 부족하여 판단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 것 같은데, 그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알려드리고자 했을 뿐입니다. 달리 더 원하거나 전하고 싶은 바는 없습니다.

그래,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정직한 위인인 만큼 정말로 그 이상의 뜻은 없었다.

물론 내가 로밀리아 엘레그미티스라는 한 인간에 대해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아는 것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녀 역시 <마이트 앤 로열>의 고정 네임드 캐릭터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녀에 대한 정보가 제국 5대 상회 중에서 다블레 상회를 첫 교섭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확고부동한 목표가 있는 사람이라면, 상대적으로 앞으로의 행보를 예측하기도 더 쉬우니까.'

곁에 둘 거라면 그런 사람을 곁에 둬야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뿐이다.

원활한 협상을 위한 상식적인 압박과 흔들기 이상으로, 당장 그 정보를 통해 뭔가 본격적인 꿍꿍이를 꾸밀 생각은 정말로 전혀 없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현자와의 연줄과 다블레 상회와의 장기적인 거래 관계 구축이거든.'

물론 지금이 아닌 미래의 일은 또 모르는 거지만.

어쨌거나.

따라서 나는 로밀리아 회주에 대해 더 입을 열지 않았고, 그녀 역시도 더 캐묻지 못했다.

내 입에서 나온 건 명시가 아닌 그저 암시일 뿐이었고, 제대로 준비조차 하지 못한 채 갑자기 비밀에 대해 추궁해봤자 손해를 보는 건 그녀 자신일 뿐일 테니까.

그렇기에 남은 것이라고는 결국 내 정보력에 대한 인정과 침묵, 그리고 거래 승낙의 끄덕거림뿐

요컨대, 참으로 이상적인 결말이었다.

'여기까지 판을 마련해놓았으니 이제 이다음부터 마르다 양 혼자서도 잘 할 거야.'

오히려 혼자가 더 편할지도 모른다.

나라는 아마추어가 빠진 만큼.

내가 마르다에게 언질을 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구체적인 거래 조건은 두 가지.

하나, 단순한 돈 대신에 도로나 설비 같은 인프라 구축을 대가로 받아낼 것.

둘, 정기적으로 니카로스로 상단을 보내게 할 것.

막대한 현금을 받아서 우리 마음대로 쓰는 것도 분명 즐거운 일일 테지만, 어차피 낙후된 우리 땅을 개발하려면 저런 시설 구축은 필수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왕 그렇다면 제국 5대 상회 같은 전문가들에게 아예 외주를 맡겨버리는 게 품질과 가성비 모두를 챙기는 방법이기도 하고.

안 그래도 슬슬 개발을 시작해야 하는 만큼 타이밍은 그야말로 최적.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니카로스가 대대적인 동방 무역의 허브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미리미리 거대 상회랑 지속적인 관계를 다져놓아야 하거든.'

그리고 그 상회가 지방 진출에 적극적인 제국 5대 상회 다블레 상회라면 그야말로 최고고.

그래, 이 또한 니카로스의 특성 중 하나다.

단점이 정말 질릴 정도로 많지만 그래도 장점도 적지 않게 있는, 전통적인 제국의 옥토를 보유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독창적인 이점을 보유 중인, 동쪽 구석 변방 니카로스의 특성.

현시대가 워낙 혼란스러운 난세라 전혀 부각 되지 않는 사실이지만, 동쪽 대초원 진출의 교두보라는 니카로스 남작령의 입지 자체에 가치가 있다.

그렇기에 조금만 투자하고 설계한다면 향후 제국에서 동쪽으로 넘어가는, 그리고 동쪽에서 제국으로 넘어가는 모든 사람이 우리 영지를 통과하고 지나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으려면, 남들이 대체하지 못할 독점 상품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잖아.'

그러니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거지.

물론 이 모든 게 지금은 그저 김칫국에 가까운, 미래의 구상일 뿐이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그리고 다블레 상회 쪽도 이런 귀찮은 조건들을 쉬이 수락할 만큼 우리를 신뢰하고 있지는 않고.'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고 넘어갈 일은 결코 아닌걸.

그 부분은 마르다의 수완을 전적으로 한 번 믿어본다.

'처음 다블레 상회 쪽에 보낸 사업 협력 제안서만 봐도 명확하니까. 마르다 양 역시 거대 상회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황립 아카데미 출신 엘리트의 능력을 시험해보기 딱 좋은 무대다.

그렇게 내가 기껏 일하다가 탈출해 와놓고는 또 혼자서 잔뜩 일 생각만 하고 있을 무렵.

똑똑똑.

나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간결하면서도 규칙적인, 매우 정석적인 문 두드림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정작 그 소리를 낸 주인공에게 방 주인인 나의 허락을 기다린다는 깔끔한 마침표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니카로스에서 저런 용감한 행위를 서슴없이 감행할 만한 사람은 오직 단 한 명뿐이다.

"역시 안 자고 있었네? 들어갈게?"

"이미 다 들어와 놓고 무슨 허락을 구하시는 겁니까?"

"어휴, 뭘 그런 것까지 따진대. 깐깐한 것 좀 봐."

영지 마법사, 발레리아 트리하스.

이 거침없는 불꽃 아가씨밖에 없지.

"무자비한 무단 침입을 당한 것에 이어서 깐깐하다는 터무니없는 비난까지 듣다니. 오늘은 그야말로 제 세상이 무너져내린 날입니다."

"...응, 생각보다 굉장히 쉽게 무너지는 세상을 가지고 있었구나."

그만큼 내가 여린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이지.

발레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냥 그대로 내 집무실 중앙의 손님용 소파까지 다가가더니 냅다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아, 맞다. 앉을게?"

"...."

이번에도 허락은 행위 뒤를 헐레벌떡 겨우 따라왔다.

나는 결국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구석의 찻장으로 다가가 찻잎을 우리기 시작했다.

어찌 됐든 내 방의 손님이니, 당연히 신사로서 대접은 해줘야지. 그게 저 들고양이 같은 마법사님이라도.

그렇기에 바스락거리는 찻잎 위로 조심스럽게 물을 부으며, 나는 떠올렸다.

딱히 영지 운영에 크게 유의미한 영향을 주는 장점은 아니지만, 니카로스는 저 동쪽 너머 머나먼 땅에서 나는 동방의 찻잎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아무래도 제국 내부에서는 그나마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다는 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물론 니카로스와 딱 붙어있는 동쪽 대초원이 혼란스러운 만큼 본격적인 사업을 해볼 만큼 대량의 찻잎이 유입되는 수준까지는 아니고. 여전히 찻잎은 비싼 사치품이다. 수도나 제국 서부보다는 상대적으로 싸게 구할 수 있는 데 의미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그래도 그 덕분에 서민들은 몰라도 적어도 영주인 나는 내 방에 찻잎을 상시 구비해 놓을 수 있었다.

약소 남작에게 이만한 사치는 확실히 드무니 유의미한 장점은 아니라도 아예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또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 얘기를 왜 떠올리냐면.'

사실 나는 차는 별로 안 좋아하거든.

원래부터 커피 애호가였어.

"...."

그리고 추가로 하나 더 떠올리자면.

수도 출신의 발레리아는 차를 엄청 좋아한다.

그런 고로, 내 집무실의 찻잎은 주기적으로 저 화염 마법사님에게 털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지금 내가 자연스럽게 차를 우려 대접하는 이 루틴 또한 그런 약탈의 일상이나 마찬가지.

그렇게 나는 두 잔의 차를 들고 발레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넸고.

"후후, 항상 고마워요, 영주님."

"이럴 때만 '영주님'이군요, 평소에는 그냥 '영주야'고. 그래서 이 시간에 제 방에는 무슨 일입니까? 저는 발레리아 씨가 진작에 주무시고 계시리라 생각했거든요."

처음 그녀가 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궁금하던 사실을 물어보았다.

그래, 나나 집사장 아저씨, 마르다 양이 밤을 새워가며 새벽까지 일하는 날은 드물지 않지만, 사실 발레리아가 그러는 일은 굉장히 희귀했다. 아니, 그냥 아예 없다고 봐도 좋았다.

'의외로 쟤, 상당한 바른 생활 어른이거든.'

한동안 같은 성에서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매일매일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는 발레리아가 이 시간까지 깨어있는 일 자체가 나에게는 신기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굳이 생활 습관만 그런 건 아니지.'

<마이트 앤 로열>의 미치광이 방화광이라는 선입견을 떼고 보면, 그리고 평소의 저 은근히 실없는 모습들도 떼고 보면, 발레리아는 거의 모범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올바른 태도들을 보여줘 왔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남작령의 영지 마법사 역할도 언제나 성실하게 수행하며, 임무가 한 번 주어지면 책임감을 가지고 반드시 완수하고, 오만하다고 소문난 마법사임에도 다른 가신들과의 협조도 전혀 개의치 않는.

그런 바람직한 아이.

"나도 가끔은 이 시간까지 깨어있을 수도 있지. 뭘 그렇게 신기하단 눈으로 본담. 그냥 다블레 상회랑 하던 협상 잘 마무리됐나 싶어서 그거 물어보려고 왔지."

"협상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그렇지만 회주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니, 아마 최종 결과도 기대해봐도 좋을 겁니다."

"호오, 그거 잘됐네."

"네, 잘된 일이죠. 근데 정말로 그거 물어보겠다고 이 시간까지 깨어계셨던 건 겁니까? 내일 아침에 물어봐도 되지 않습니까?"

그래, 늦은 새벽인 지금이나 자고 일어난 아침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었을 텐데.

"...아니, 나도 설마 이 시간에야 네가 협상장에야 나올 줄 알았나. 그냥 기다리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다블레 상회 애들 쫓겨난 거 다시 데려온 거나 마찬가지니까 궁금해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렇게 대답한 발레리아가 마치 머쓱하다는 듯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차를 한 잔 마신다.

"...."

그렇네.

이 일도 결국 발레리아의 모범적인 태도와 책임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 그러고 보니 그 상회들 부탁은 어쩌다가 들어주시게 된 겁니까? 원래 이런 일에 별로 개입하시지 않는 편이었잖아요?"

"...."

나는 정말로 잘 몰라서 물어본 것뿐이지만, 어째 머쓱하다는 듯한 발레리아의 기색이 더 진해진다.

"그냥 걔들 거지꼴로 있는 거 보다가 문득 생각해보니까... 네가 저런 단박에 쫓아낼 바보들은 애초에 성으로 부르지도 않았을 것 같아서. 일시적인 네 기선제압일 수도 있으니 내가 중간에서 물꼬를 틀어주는 것도 좋을 것 같고, 만약 그게 아니었어도 그냥 내 주선만 실패한 거니 딱히 문제 될 거 없고...."

어째 끝으로 갈수록 조금씩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은 확실히 다 알아들었다.

'...이것 참.'

설마 이렇게까지 그녀가 훌륭하게 내 의도를 파악하고 호흡을 맞춰줄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의외다.

그리고 그런 감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서.

"아니요, 딱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조를 더 가볍게 바꾸며.

짧은 감사와 함께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요즘 사냥은 잘 되십니까? 상당히 재밌는 취미를 새로 만드신 것 같던데."

발레리아는 놀랍게도 지난 칠색이랑 토벌의 경험이 나름대로 좋은 자극이 되었는지, 그 뒤로 종종 영지의 사냥꾼들과 사냥을 하러 다니고는 했다. 그녀가 그 날의 수확을 양손에 달고 신나게 성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나도 몇 번이나 봤다.

"...무슨 영주가 가신 취미 생활까지 신경 쓴대."

화제가 이쪽으로 넘어가자 발레리아는 내가 놀릴 속셈으로 얘기를 꺼냈다고 판단했는지, 찌릿 나를 째려봤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계속 내가 입에 미소를 걸고 있자, 그녀는 아주 작게 한숨을 폭 내쉬며 대답을 이어나가 주었다.

"그냥 나쁘지는 않아. 그럭저럭 저녁에 시간 날 때 잠깐 하기 괜찮더라고...."

"뭐가 되었든 소일거리 할 일이 생기면 심신에 도움이 되죠."

그래, 나도 놀릴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이쪽도 순수하게 진심으로 환영이다.

전쟁이라는 소재로 우리 영지에 꼬드겨 데려온 화염 마법사 발레리아.

그러나 절묘하게도 그녀가 오자마자 한동안 평화가 지속 중인 니카로스.

눈 가리고 아웅의 선수인 발레리아 본인이야 늘 신경 안 쓴다고 괜찮다고 하지만, 나는 언제나 묘한 걱정과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 속에서 발레리아가 전쟁 외에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단을 스스로 찾아내다니, 나로서는 정말로 환영이지.'

그렇기에 나는 아주 조금 등을 뒤로 젖혀, 살짝 더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전반적으로 요즘 우리 영지는 모든 게 순조롭고 평화롭다.

발레리아가 니카로스에 점점 잘 적응하고 있고.

페트로스가 파견한 관료 인력 덕분에 점령지 안정화에도 당장 문제가 없고.

마르다는 대대적인 정책들 도입에 앞서 순조롭게 호구 조사부터 진행 중이고.

멍청한 제르만의 정보 조직도 슬슬 임무에 익숙해졌는지 바보짓을 덜 하고 있고.

오늘은 다블레 상회와 긍정적인 협상도 했다.

위험요소는 있지만, 아직 드러나지는 않았지.

평범한 영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해야 하는 게 옳을 정도다.

이대로만 가면 니카로스의 발전에도 순풍이 불 거다.

그렇기에 나는 발레리아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무심코 그런 생각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이런 일상만 쭉 반복되어도 나쁘지 않겠는데.

그런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을 한 바로 다음 날 아침.

두 가지 소식이 거침없이 나에게 도달했다.

백작 승작 안건 통과.

그리고.

반(反) 니카로스 연합 결성.

#076. 승(昇) (1)

분명 오전까지만 해도 영지는 무척 평화로웠다.

"...그러면, 네, 계약은 합의안대로 진행할게요."

늦은 아침.

이미 니카로스를 떠날 준비를 거의 다 끝마친 다블레 상회의 앞에서, 로밀리아 회주는 하룻밤 새 몹시 피폐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굉장히 유익한 거래였다고 생각합니다. 선뜻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든 편한 마음으로 우리 니카로스를 다시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유익... 확실히 유익하긴 했죠.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는데도 환영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칠색이랑의 가죽은 다블레 상회가 챙겨가기로 했다.

새벽을 넘어 거의 해가 뜰 때까지 진행된 마라톤협상 끝에 그렇게 결정되었다. 다블레 상회로서도 그토록 간절하게 구하고 다니던 '현자가 찾는 물건'을 마침내 챙기게 되었으니 결코 손해 본 건 아니었다.

'그 대신 한동안 우리 영지에 코가 꿰이게 생겼지만.'

도로와 같은 설비 및 인프라 구축.

정기적인 상단 파견.

내가 마르다 양에게 최대한 얻어내라고 했던 우리 측 요구사항. 다행히도 전부 얻어낼 수 있었으니까.

흡사 첫 협상 때의 같잖던 기선제압과 무시를 모조리 갚아주겠다는 듯, 독기가 그득그득해진 마르다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다블레 상회를 뜯어먹었다.

나중에 따로 보고 받은 회의록을 보니 상회 측에서도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시도는 한 모양이었지만, 이래저래 회주가 심적으로 흔들리고 우위까지 빼앗긴 상황에서 압박을 이겨내기는 어려웠던 모양.

'하여간. 그러길래 애초에 개수작은 왜 부린 건지.'

물론, 나로서는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한 움큼 살점을 크게 떼어먹힌 탓인지, 어떻게든 원하던 것을 얻어냈음에도 회주의 표정이 그리 좋지는 못했다.

아니면 그것과는 아예 별개로.

'개인적인 이유 때문일 수도 있고.'

비원과 복수.

협상 중 내가 꺼낸 그 두 단어.

그 말을 입에 담은 직후부터, 로밀리아는 기존의 뻔뻔하고 요란스럽던 태도를 조금도 보이지 못했다. 그저 깊고 침잠한 눈동자로 내 눈치만 수차례 살폈을 뿐.

하지만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 모든 묵언의 시선을 튕겨내 버렸다.

여태까지 계속.

"원하던 것도 얻었으니 저희 다블레 상회는 이제 떠날 것입니다."

"안전한 여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제가 드리기에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곳 동부는 위험한 곳입니다."

"...뭐, 그게 사실 남작님의 잘못은 아니니까요. 신경 써주신 건 감사합니다."

그렇게 잠시 나와 의례적인 작별 인사를 나누던 로밀리아 회주는, 결국 더는 참지 못한 듯 다른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그래서 이제 떠날 건데, 더 하실 말씀은 없나요?"

"...."

내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회주는 작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바로 앞에 사람을 두고 보이기에는 다소 무례할 수도 있는 행동이었으나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이상 눈치만 보면서 돌려 표현하는 것도 지치는 일이니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죠. 저는 개인적으로 남작님께서 협상 중 말씀하신 내용을 지금 굉장히 신경 쓰고 있답니다."

애초에 내가 저렇게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대단한 이야기를 하신 건 아니에요. 짧은 언급에 불과했던 만큼 그냥 딱히 특정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게 아닌, 괜히 저를 떠보고 흔들려는 의도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아니, 냉정하게 생각하면 오로지 이 가능성밖에 없죠."

나는 이 순간, 다블레 상회와 만난 둘째 날이 되고 나서야 로밀리아 회주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살짝 붉은 빛이 감도는 짙은 갈색 머리칼이 유독 눈에 띄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약소 상단을 몇 년 만에 제국 5대 상회 중 일각이라 불릴 정도로 키워낸.

젊은 대상(大商).

우리 니카로스에 쳐들어온 뒤로 여태까지 내내 바보짓과 푼수짓만 반복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행실만 보고 그녀를 마냥 모자란 회주라고 일축하는 건 조금 섣부른 판단이다.

그야, 여기 와서 그런 못난 모습만 보인 건 역시 우리 영지가 과할 정도로 만만하게 보였다는 사실과.

'이 동쪽 변방, 수도에서 머나먼 지방에 대한 그녀의 개인적인 감정이 원인일 테니까.'

그렇기에 적어도 나만큼은 이해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는 그냥 그렇게 마음 편히 생각하고 넘어갈 수 없네요. 무언가 숨기고 있는 의도라기에는 다소 막연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찔러본다고 하기에는 분명한 확신이 담겨있었어요."

그녀에게는 충분히 능력이 있다.

따라서, 한낱 냉정한 가능성 따위는 모두 제쳐두고.

잘나가는 대상의 감이라고 할까.

그녀가 짐작한 대로.

"그래서 물어볼게요. 남작님이 저에 대해서 정확히 뭘 알고 계신 거죠? 그리고 그건 왜 언급하신 거죠?"

나는 당연히 다 알고서 불렀다.

로밀리아 엘레그미티스라는 한 인간에 대해.

그렇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라는 뻔한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네, 저는 확실히 무언가 알고 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그 이상으로 당장 더 드릴 말씀은 없는 듯하군요."

딱 여기까지만.

"...네?"

나의 천연덕스럽고 뻔뻔한 대꾸에 로밀리아 회주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 얼굴 위로 여실히 드러났다.

"혹시 지금 농담하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당당했다.

솔직담백을 실천하는 나는 언제나 진심이니까.

"불쾌하게 들릴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회주님의 의문을 해소해주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분명 보람찬 일이겠지만, 영주인 저는 그보다도 우리 니카로스의 이익을 더 중시해야만 하는 처지니까요."

"허."

그렇게 쓸데없이 장황한 나의 설명에 슬슬 그녀의 당황이 짜증으로 바뀌기 직전, 마침내 이야기를 정리했다.

"요컨대 전부 일부러 그랬다는 겁니다."

전부.

로밀리아 회주가 미심쩍다고 느낄 수 있게 민감한 화제를 굳이 뜬금없이 언급한 것도.

그렇게 먼저 언급해놓고 그다음 이야기는 전혀 이어나가지 않고 있는 것도.

모두 의도적인 일이라는 겁니다.

"회주님을 흔들려는 속셈이란 것도 완전히 틀린 추측은 아니죠. 실제로 협상 내내 불안한 모습을 누차 보여주신 덕분에 우리가 이득을 보기도 했으니까요."

그래.

나와 우리 니카로스의 정보력을 의심하던 로밀리아 회주,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에서 일반적으로는 절대로 알 수가 없을 정보를 알고 있다고 과시하고 위협하던 나.

그런 상황과 구도만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았지.

"그리고 당연히 그 이상의 꿍꿍이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회주님의 추측들이 다 맞는 거죠. 다만 말씀드렸다시피 그 꿍꿍이가 정확히 뭔지 숨기는 것 또한 저의 의도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이상 설명해드리긴 어려울 것 같군요. 너른 양해 바랍니다."

"...."

이상입니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자 로밀리아 회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아까보다도 더 노골적이고 진한 한숨을 천천히 내뱉고는, 마치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이걸 솔직하다고 표현해야 할지 뻔뻔하다고 표현해야 할지...."

"편하신 대로 생각해주셔도 됩니다."

"...일단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겠어요. 본인이 더 말할 마음이 없다는데 더 추궁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겠죠. 생각보다 훨씬 기분 나쁜 분이셨네요, 남작님."

본인의 감상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표출한 그녀는 그렇게 덧붙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남작님께서 솔직히 이야기해주셨으니, 그럼 저도 솔직하게 말씀해드리죠."

또박또박 선명하게.

"우리 다블레 상회는, 그리고 저는 한동안 남작님을 유심히 주시할 것입니다. 남작님이 이 동쪽 변방에서 무얼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무엇을 이뤄나가는지, 하나하나 전부 말이죠. 뒤를 캔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리고는 마치 나에게 질 수 없다는 듯, 도발적인 어조로 물었다.

"설마 이렇게 한다고 불쾌감을 느끼시지는 않겠죠?"

그 당돌한 질문.

그걸 듣고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누차 말했다시피.

정말로 순수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참으로 유익하고 만족스러운 거래였습니다."

나 역시 상부상조의 미덕을 알기에 더 만족스러웠다.

다블레 상회와 우리 모두 원하는 걸 얻었으니까.

현자가 찾는 물건, 칠색이랑의 가죽, 영지의 기본적인 인프라, 정기 상행....

'그리고 제국의 수도에서 우리 니카로스를 열성적으로 신경 쓰고 지켜봐 줄, 부유하고 성실한 친구들까지.'

그래.

초면부터 무례한 태도를 보이던 상회 녀석들에게 평소 나답지 않게 똑같이 강경한 태도로 대응한 것도, 협상 중 난데없이 회주의 역린을 언급해 그녀의 신경을 건들고 뒤흔든 것도, 헤어지는 이 순간까지도 의미심장한 태도를 고수해 그녀를 자극한 것도, 끝내 극도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켜 우리 니카로스를 주시하게 만든 것도.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의도한 결과물이었다.

'그야, 이제 가만히 원래 알고 있던 지식만으로 날로 먹을 수 있는 건 슬슬 한계일 테니까.'

이 세계에 떨어지고 어느새 근 2년.

세상은 마치 거센 강의 물결처럼 멈추지 않고 흐르며 뒤바뀌어 나가고 있다.

그렇기에 당연히 그 흐름에서 도태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시류와 정보를 실시간으로 갱신하는 것은 물론.

'한발 더 나아가 그 흐름을 내가 예측할 수 있는 방향으로 유도하기도 해야겠지.'

결국에는 그걸 위한 협상이었다는 것이다.

다블레 상회에 대한 정보도, 로밀리아 엘레그미티스라는 한 인간에 대한 정보도, 자줏빛 현자에 대한 정보도, 당장은 이 변방의 내가 유용하게 활용할 수 없다.

원작의 지식은 충실히 갖춰져 있지만, 내가 수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때까지 유용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까 일부러 자극하고 간섭한 거야.'

그들이 내가 모르는 방향으로 엇나가지 않게.

미래에도 내가 아는 그대로일 수 있도록.

다행히도, 첫 시도는 그럭저럭 성공적인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저 불퉁한 표정의 젊은 대상을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렴, 다블레 상회야.

부디 그 유한(有限)을 혐오하는 미치광이 현자와 유익한 연줄을 맺길 바라.

그리고 먼 훗날, 수도 카이룸에서 다시 보자고.

"...두고, 보자고요, 남작님."

그럴 때가 반드시 올 거야.

***

이처럼 우리 니카로스의 오전은 참으로 평화롭고 아늑한 순간만으로 가득했었다.

"여기에 계셨군요, 남작님."

그러나 슬프게도 오후까지 그렇지는 못했다.

마침내 영지를 떠나게 된 다블레 상회 친구들의 송별 인사를 모두 마치고, 한껏 가벼워진 마음으로 성안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던 나를 누군가 불러세웠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 근원지를 바라봤다.

아직 익숙하지는 않지만, 슬슬 익숙해져 가기는 하는 그 목소리.

"네, 저는 여기에 있었답니다."

"참으로 잘된 일이네요."

우리 니카로스의 객원 행정 지원 인력이자 에우스페나 공작령에서 파견 나온, 페트로스 집사장의 차남.

'그리고 나를 포함한 영지의 모든 중역에게 24시간 간첩이 아닐까 의심받고 계신.'

바로 그 양반.

"반갑습니다, 다니엘 님."

다니엘 코투니오스 씨였다.

"이렇게 복도에서 마주치는 것도 상당히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쩐 일이신가요? 혹시 특별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하하, 누가 들으면 제가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남작님께 말을 거는 줄 알겠습니다."

내가 웃으며 다가가자, 다니엘 역시 비슷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솔직히 대하기 그렇게 쉬운 친구는 아니다.

물론 먼저 필요에 따라 지원을 요청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실상 우리의 감시까지 동시에 할 요량으로 파견 나왔을 게 뻔한 만큼 다루기 껄끄러운 부분이 분명히 있다.

게다가 무력 충돌이 끊이질 않은 국경지대에서의 간첩 행위라는, 당사자에게는 위험할 수 있는 임무에 자기 피붙이를 투입한 페트로스의 저의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말이야.

그리고 현 에우스페나 공작의 사촌, 공작 가문의 일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다소 조심스럽기도 하고.

'사실 다 떠나서, 그냥 개인적으로 별로 마음에 안 들기도 해.'

다 큰 사내놈이 헤프게 웃음이나 흘리고 다니고, 장남도 아닌 차남 주제에 매일매일 뭔가 의미심장한 꿍꿍이라도 숨기고 있는 것처럼 여유로운 태도로 있어 보이는 척이나 하고.

좋아할 이유 자체가 없지.

물론 이런 나의 솔직한 속마음을 우리의 영지 마법사 발레리아 씨에게 슬쩍 내비쳤을 때, 그녀가 굉장히 미지근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보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냥 내 자연스러운 감정이 그런 건 별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감을 공적인 영역까지 끌고 오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한 일인 만큼 나는 태연하게 그의 말에 대꾸해주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다니엘 님께서 평소 시시하고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꺼내시는 분이 아니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런 기대를 하고 말았네요."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뭐, 물론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교육받아 왔을 명문가의 도련님인 만큼 업무 자체는 충분히 1인분을 한다.

게다가 내가 종종 쓰는, 민감한 주제를 때는 스리슬쩍 뭉뚱그려서 돌려 말하는, 특유의 비겁한 화법까지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니 편한 점도 있긴 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래서 더 별로야.'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분명 쟤도 알고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다니엘은 슬슬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특별한 일이 있는 건 맞습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아주 잠깐의 뜸이 있긴 했으나, 그리 길지는 않았다.

"...제 아버지, 페트로스 집사장님의 서안입니다."

백작 승작.

그 안건이 공작령 내부 회의를 통과했다고 합니다.

"...!"

그가 담백한 어조로 내뱉은 그 이야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래.

그렇구나.

이제.

그리고 곧 침착함을 되찾고, 서신을 받아들며 다니엘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걸 다니엘 님께서?"

"내부 회의를 통과하긴 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일정까지 전부 확정된 것은 아니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이왕이면 확정 전에 남작님의 의향을 먼저 듣고자, 그런데 대외적으로는 집사장님과 남작님 사이의 동맹이 비밀인 만큼, 저를 통한 비공식적 수단을 활용하신 것입니다."

"...과연."

확실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거래는 무척 은밀했고, 공식적으로 이번 백작 승작은 어디까지나 니카로스의 위업을 본 페트로스 집사장이 제국 안보에 대한 순수한 의도로 추진하는 것이니까.

물론 아무도 믿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우리끼리 미리 구체적인 승작 계획에 대한 서신을 주고받는 꼴을 보여서 좋을 것도 없다는 거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닐 테지만.'

이 서신을 전달한, 나를 보고 있는 다니엘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어쨌거나 납득은 했다.

그리고 나로서도 결코 꺼릴 일은 아니다.

변방 약소 남작령이라는 이름값 때문에 지금까지 불필요한 수모를 얼마나 겪었는지. 이제 그 족쇄에서도 해방이다. 대외적 명성만 얻는다면 더 적극적으로,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정말,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라는 거지.

그렇기에 나는 침착하고 빠르게 머릿속으로 셈을 시작했다. 현재 우리 니카로스의 사정, 외부의 정세, 월광교 국가들의 움직임, 그 모든 걸 고려해서 언제가 가장 적절할지.

그리고 어느 정도 계산을 대략 끝내고, 다시 눈앞의 다니엘을 향해 대답하려는 바로 그 순간.

"영주님, 비상사태입니다."

제노비오스 아저씨가 점령지로 자리를 비운 사이, 집사장 대리로 활동 중이던 마르다 양이 어디선가 빠른 걸음으로 나타나 그 흐름을 끊어주었다.

"마르다 양?"

표정은 평소와 그다지 다른 점이 없지만, 묘하게 긴장되고 초조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녀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보지만, 비상사태라는 표현도 그렇고 아무래도 예삿일은 아닌 것 같다.

어째, 사람은 다르지만.

언제 비슷한 광경을 본 것 같다.

그렇게 문득 생각이 들 무렵.

그녀는 곧바로 보고를 올렸다.

그 어조는 또렷하면서도 다급했다.

"마르딘, 우르드, 투나미르, 바르토, 네 토후국이 제국의 팽창주의적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연합을 결성한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미 그들의 연합군이 국경지대로 집결 중인 징후가 포착되었습니다."

"...."

그녀의 어조만큼이나 명백한 진실이 담겨있는 보고.

곁에 있다가 자연스레 함께 이야기를 들어버리고 당황하는 다니엘의 경악이 그대로 내 귀를 때린다.

"그 무슨...!"

하지만 마르다 양도, 그리고 나도.

그런 경악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나만을 똑바로 바라본 채 고했다.

"이는 명백히 우리 니카로스를 겨냥한 조치입니다."

아, 그래.

우리를 겨냥한 조치.

4국 연합.

연합군의 진군.

사실상 전쟁과도 다름없는 이 상황.

순식간에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나를 견제하기 위해.

주위의 토후국들이 뭉친 건가.

"하."

마침내.

#077. 승(昇) (2)

제국에 대항해서.

아니, 사실상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에 대항해서 무려 4개의 토후국이 한데 뭉쳐 연합을 형성한 뒤, 국경지대로 이동 중이라는 급보.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곧바로 영지의 모든 주요 가신들을 소집하여 긴급회의를 열었다.

"모두 모였군요."

그리고 나의 말대로, 머지않아 우리 니카로스의 가신들 회의실을 빼곡히 채워 앉았다.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기사단장이자 은근 좀생이인 영감님, 키로스 경.

영지 마법사이자 정신 나간 방화광, 발레리아.

집사장 대리이자 광기의 졸업 포기자, 마르다.

그리고 24시간 간첩으로 의심받고 있는 다니엘과 배타적 호위 무사 아르센, 이런 대대적인 회의가 처음이라 두리번두리번 어리바리하고 있는 제르만 등까지.

그 외에도 수많은 가신이 모이다 보니 회의실 내부가 북적북적했다. 사실상 제노아 남작령과 마누엘라 남작령으로 파견 나가 있는 집사장 아저씨 빼고는 모일 수 있는 전부가 모여있는 셈이었다.

나는 모두를 천천히 한 번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일단은 정확한 상황 파악부터 해보죠."

내가 들은 것이라고는 마르딘, 우르드, 투나미르, 바르토, 네 개 토후국이 연합을 결성했고 현재 우리와의 국경지대로 군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이 자리부터 마련했으니까.

나의 물음에 가장 먼저 대답한 것은 군부의 대표인 키로스 경이었다.

"놈들이 처음 연합 결성에 대한 사실을 공표한 것은 대략 32시간 전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천천히 연합군을 국경지대로 진군시키고 있지요. 아직은 추가 정보를 더 수집하는 단계지만, 현재까지 최전선의 제노비오스 집사장을 통해서 들어온 보고만 종합하면 그 병력 규모가 최소한 2,000은 훌쩍 넘기는 정도로 추정됩니다."

최소한 2,000 이상.

그 말에 회의실이 크게 웅성거렸다.

그리고 선명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공포라는 감정도 섞여 있었다.

'...뭐, 그럴 만도 하지.'

지난 시하브-아르잔 연합 때 놈들이 동원한 1,400명이란 숫자도 이 변방에서는 상당히 큰 규모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가 많다.

규모로만 따지면 니카로스 역대 최대의 위기라는 표현도 아깝지 않을 정도.

'사실 상대가 4국 연합인 이상 어쩔 수 없기도 해.'

내 빙의 직후 시점의 니카로스 남작령보다 약한 토후국은 이 일대에 없다.

각 나라당 500명씩만 동원해도 2,000은 가볍게 찍을 테니, 어떻게 보면 연합이라는 소식을 들었다면 당연히 뒤따라올 병력 규모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보다도 더 중요한, 내가 가장 궁금한 정보는 따로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연합이 공표한 것은 그게 전부입니까?"

요컨대.

공식적인 선전포고는 없었나?

"그렇습니다, 영주님. 오직 제국의 팽창주의적 행보에 대한 규탄과 자기방어 차원의 연합을 결성한다는 발표만 있었을 뿐, 그 어디에도 전쟁과 선전포고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담겨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허. 군대를 진군시키고 있는 주제에?"

나는 그 대답에 그만 헛웃음을 뱉고 말았다.

다소 어이가 없긴 했다.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는데 먼저 2,000명이나 모아서 다가오고 있으면서, 자기방어라니.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뭐 이런 논리인가.

'하긴. 아예 틀린 말은 또 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당하는 쪽이라 약간의 억울함도 느끼는 거지, 만약 명분과 기회만 있었다면 나도 똑같은 명목으로 언제든지 적들을 향해 쳐들어갔을 테니까.

하지만 결국 그것도 가정인걸.

지금의 나는 정말로 무고해.

그러니까 나쁜 건 저놈들이야.

그렇게 내가 속으로 거리낌 없이 놈들을 욕하고 있는 사이, 같이 키로스 경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던 마르다 양이 입을 열었다.

"직접적인 선전포고가 없었다지만 연합이 우리 니카로스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분명 그들의 목표는 우리입니다."

그래, 그것도 확실한 부분이지.

구 시하브 토후국, 현 제노아 남작령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마르딘 토후국과 우르드 토후국.

구 아르잔 토후국, 현 마누엘라 남작령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투나미르 토후국과 바르토 토후국.

네 곳의 월광교 토후국 모두 현재의 우리 니카로스와 곧바로 인접한 국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놈들이 명분으로 제시한 바할리아 제국의 팽창주의적 행보는 대놓고 우리를 저격하고 있는 것이고, 연합군은 우리 영토를 향해 진군 중이라는 의미.

이건 이견을 달 여지조차 없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치부하고 단박에 결론 내리기에는 영 이상하단 말이지.'

그래, 그렇잖아.

만약 정말로 우리와 제대로 된 사생결단을 내고 싶었다면 공식적 선전포고 따위를 망설일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혹은 아예 우리가 이런 보고를 듣기도 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기습 공격을 감행해 국경을 이미 쓸어버렸을 수도 있고.'

몹시 비열하고 지탄받아 마땅한 행위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것만큼 확실한 수단도 없지. 눈 딱 감고 결단 내리면 못 할 짓도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놈들이 저지른 것만으로 분명 과감한 도발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은 없지만, 그래도 어딘가 소극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마르딘, 우르드, 투나미르, 바르토.

그 4개국이 모인 연합에는 분명히.

'그 녀석'도 있을 텐데.

"...."

이거 어째.

상당히 묘하다.

하지만 그런 묘한 느낌도 어디까지도 느낌.

지금은 우선 당장 할 일을 먼저 하는 게 맞다.

"뭐가 되었든 월광교 세력의 군이 당장 우리 국경으로 향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겠죠. 우리도 당장 부대를 소집해서 대응해야 합니다."

나의 결단에 가신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거린다. 평소와 같은 선제적 침공도 아닌 우리가 먼저 위협당하고 있는 상황. 공포와 무관하게 반대 의견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즉시 소집 가능한 병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최대한 끌어모아도 600명 정도가 한계일 것입니다. 이 정도 규모로 연합군과 전면전은 무리인 만큼,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나마 모든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키로스 경이 심각한 어조로 입을 열긴 했으나, 이 또한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지적의 영역일 뿐이다.

현명한 리더라면, 전문가의 말은 응당 들어야지.

"확실히 시간을 벌 필요는 있겠군요. 가슴 아프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최전방 점령지는 내어줄 각오를 해야겠습니다. 여차하면 아예 국경지대의 수비군도 후방으로 물리고 니카로스 남작령을 기점으로 새로이 병력을 집결시키는 것으로. 제노비오스 집사장에게도 빠르게 이 계획을 전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영주님. 분부대로 군을 소집하고 전방으로 작전 계획을 하달하겠습니다."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선제공격을 당한 상황에서 모든 걸 지키고 시작할 수는 없다. 아직 제노아 남작령과 마누엘라 남작령 모두 충분히 방어진지를 갖추고 있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적어도 상대와 제대로 된 대치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전력을 다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 잠시 빼앗긴 영토는 나중에 다시 역습을 통해 돌려받으면 된다.

나는 거기까지 말한 뒤 잠시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전략적으로는 올바르지만, 적에게 내 것을 내어줄 각오를 한다는 건 인간적인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수비군을 물린다고 한들, 그래도 이런 선택에는 으레 버려지는 희생양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니까.

실제로 이미 영지의 모든 가신이, 수십 년 동안 전장을 휘저어온 베테랑들 또한 이 결단을 무게를 느끼고 굳은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2,000 이상의 적군이라는 분명히 전례 없는 위기에 긴장하고 있었다.

요컨대, 21세기 현대 문명 출신의 선량한 교양인인 나로서는 당연히 쉬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단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이상하게도.

어째선지 그 모든 일이 지금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나는 그리 매정한 인간이 아닌데.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 여기서 꼭 나 한 명만 그러고 있는 것은 또 아니었으니까.

"...."

실제로 나와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아계신 우리의 영지 마법사님이, 두 눈동자 속에서 뜨겁게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 한결같은 태도가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그래서 다시 진지한 태도로 가신들에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보죠."

그래, 고민할 게 한두 개가 아니니 일단 하던 것부터 마저 하자고.

지금 우리 니카로스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최대한 박박 긁어모아도 대략 1,000명이 조금 안 되는 수준.

이대로는 연합군의 전력의 절반도 안 된다.

물론 열세이던 상황이 여태 한두 번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 니카로스는 그 전력의 열세를 용병대의 쏠쏠한 도움을 통해 극복해왔다.

'정확히는 안티모스가 이끄는 푸른이리 용병대의 도움이라고 해야겠지.'

계약금이 상당히 비싸긴 했지만, 만약 그런 푸른이리 용병대의 전력도 없이 순수하게 우리의 힘만으로 싸웠다면 아마 더 큰 피해를 쌓아왔을 터다. 그러니까 할 수만 있다면 이번에도 당연히 고용하는 게 맞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촉박한 상황에서도 고용할 수 있을지, 그게 문제야.'

지난번 아르잔 토후국 정벌 때도 너무 갑작스럽게, 겨우 보름 만에 불렀다고 불평하던 안티모스다. 그런데 지금은 그 보름의 여유조차도 없다. 단순히 불평의 문제가 아니라, 이번에는 아예 가능 불가능의 문제다.

'나랑 안티모스랑 개인적인 친분이 조금 있긴 하지만, 녀석들의 본질은 프리랜서. 지금 당장 다른 일거리를 받아서 여력이 없을 수도 있거든.'

그렇다면 지금 당장 푸른이리 용병대를 불러올 수 없다면 다른 어떤 용병대와 계약을 맺어야 할지. 이렇게 갑작스레 고용할 수 있는 용병대가 과연 있을지. 만약 있다고 한들 그들의 실력을 믿을 수는 있을지.

급히 고려해야 할 점이 조금 많다. 그래서 곤란하다.

따라서 그렇게 한참을 우리 가신들과 함께 대책 마련에 몰두 중이었는데, 그러던 중 그동안 조용히 이야기만 듣고 다니엘 씨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남작님, 혹시 에우스페나의 지원은 고려해보셨는지요?"

그 질문에 나는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우리 공작 가문의 도련님, 다니엘 코투니오스 씨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최대한 열심히 태연한 척을 하려고 했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지금 몹시 긴장 중이라는 기색이 뻔히 드러나고 있었다.

알 수 있었다.

저건 본인의 의지와는 별개로 그저 경험이 부족하기에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감정이었다.

딱히 비웃을 만한 일까지는 아니다.

'하긴. 에우스페나 토박이 출신이라면 이 정도 규모의 군사적 충돌을 겪어보는 것도 처음이겠지.'

수십 년 동안 이곳 변방은 혼란스러웠지만, 그 전쟁의 불꽃이 에우스페나까지 덮치지는 못했다.

그나마 전대 공작은 확장 정책을 제법 펼쳤지만, 에우스페나의 입장에서 그건 국경지대의 봉신들을 방패로 내세운 일방적인 공격이었고, 현 공작은 그마저도 방임한 채 아예 국경의 사정에서 눈을 돌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제 겨우 20대의 에우스페나 도련님이 전쟁을 겪어봤을 리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리고 그 생각을 밖으로 티 내지는 않으며, 나는 담담한 어조로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공작령 쪽에는 이미 사정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놓았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니카로스가 겪었던 모든 군사적 충돌 때마다 비슷한 서신을 누차 보내왔지요."

그래, 늘 보냈어.

괜히, 왜 혼자 보고도 없이 마음대로 설쳤냐.

순수하게 이런 꼬투리 잡히지 않을 목적으로 말이야.

그러니까.

"하지만 다니엘 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아마도 지원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지원 요청에 그 이상의 용도는 없다는 거다.

에우스페나가 지원 따위를 보낼 리가 만무하니까.

너도 다 알잖아?

"...."

노골적으로 그런 의미가 담겨있는 대꾸에 다니엘은 달리 할 말을 더 찾지 못했는데 그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잠시 그를 조금 더 바라본 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딱히 다니엘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이건 근본적으로 나태공이라고 불릴 정도인 현 에우스페나 공작의 문제가 제일 크니까. 그리고 그의 걱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이해는 한다지만, 그래도 너무 그렇게 대놓고 걱정하지는 말자고.'

월광교 놈들의 연합.

어느 정도 각오했던 상황이기도 하다.

어차피 니카로스로 끝까지 살아남기로 다짐한 이상 열세라는 건 그냥 언제나 함께하는 필연과도 마찬가지다.

없으면 없는 대로 해야지.

못할 건 또 뭐야.

그렇게 그날 회의 내내.

나는 에우스페나의 지원이라는 경우의 수는 완전히 배제한 채 가신들과 작전을 논의하였고.

"...아니, 경께서 왜 여기에?"

며칠 뒤, 우리 군의 출진만을 앞두고 상황에서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손님을 맞이하고 말았다.

"아폴로니아 경...?"

"오랜만이군, 남작."

에우스페나 공작령의 총사령관이자 기사단장.

나의 아버지 제논 발란티스의 옛 전우.

집사장 페트로스의 정적.

그렇기에 자연스레 나와도 적대 관계가 된.

붉은 눈의 권력자, 그리고 기사.

아폴로니아 경.

바로 그 아폴로니아를 말이다.

#078. 승(昇) (3)

분주한 아침이었다.

분주할 수밖에 없는 아침이었다.

2,000명은 거뜬히 넘긴다는 게 밝혀진,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월광교 토후국 연합의 군대.

그리고 그 대군에 맞서기 위해 서둘러 병력을 소집하고 집결 중인 우리 니카로스.

휘하 가신들이 다들 열심히 노력해준 덕분에, 그리고 우리가 이미 근래 계속 전시 상황과 다름없는 삶을 보내고 있었기에, 매우 촉박한 일정이었음에도 영지 구석구석에서 총 900명의 징집병을 늦지 않게 모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현 니카로스의 총력이나 다름없는 수준.

그리고 여기에 에우스페나에서 급하게 고용한 몇몇 용병대까지 합류한다면 아군의 총 전력이 대략 1,500명은 되었다.

'불행하게도 안티모스의 푸른이리 용병대를 불러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최소한의 전력은 갖춘 셈이야.'

그래, 어떻게든 안티모스와 연락이 닿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미 다른 영지와 계약을 맺고 잠시 에우스페나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요란스러운 친구답게 내 서신을 받자마자 미련과 아쉬움이 뚝뚝 흘러넘치는 답장을 보내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없는 방법이 뚝딱 생기지는 않았다.

그런고로 그나마 당장 계약이 가능했던 다른 용병대들만 영지에 도착하는 대로 우리도 출진할 계획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그것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와야 할 사람들은 제대로 도착했다.

"오랜만이군, 남작."

"...."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간도 동행하고 말았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길게 기른 흑발, 그리고 진하고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붉은 눈동자. 감정을 읽어내기 어려운 철면(鐵面).

마치 불과 얼음이 동시에 공존하는 듯한.

에우스페나의 총사령관이자 기사단장 아폴로니아가 어느새 우리 니카로스의 땅을 밟고 있었다.

"...솔직히 아폴로니아 경께서 이곳까지 행차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아무런 언질도 없이 우리가 고용한 용병대와 함께 나타나 버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철갑을 두른 그녀를 보고 조금 굳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는 몹시나 한결같았다.

"그럴 수도 있지."

"...."

제대로 된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는 저 화법.

정말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주 한결같아.

나는 결국 상대방에게 맞춰 더 일차원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고로, 아폴로니아 경께서 이렇게 우리 니카로스로 찾아오신 연유가 궁금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답변은.

"남작이 먼저 우리 에우스페나에 지원 요청을 보내지 않았나."

무척이나 간결하고 명확했다.

"다른 이유는 굳이 필요가 없지. '우리'는 역겨운 야만인들의 침략에서 같은 제국의 동포, 니카로스를 돕기 위하여 온 것이야."

그저 쉬이 믿기지 않았을 뿐.

확실히 '우리'라는 표현대로 아폴로니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도착한 용병들을 제외하고도 적지 않은 일행이 존재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에우스페나 군.'

공작령의 상비병. 그중 일부.

대략 300명. 하나의 부대.

아폴로니아가 직접 이끄는 최정예 보병대.

에우스페나의 '동방개척자'.

그녀가 그들을 데리고 왔다.

수십 년간 도시를 단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이 엉덩이 몹시나 무거운 친구들을 말이다.

그러니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음에도, 그 믿음을 부정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내가 먼저 니카로스 남작의 이름으로 공식적인 지원 요청을 보낸 것도 맞았고, 이런 상황에서 주군이 휘하 봉신에게 군대를 파견할 이유도 오직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당연히 나도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

하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이곳은 결코 일반적인 땅이 아니다.

나태공, 현 공작이 즉위한 이래로 벌써 수년째.

여태 수십 수백 차례나 있었던 휘하 봉신들의 구원 요청을 모조리 무자비하게 무시해왔던 것이 바로 작금의 에우스페나 공작령이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항상 보내던 의례적인 요청 하나 보냈다고, 300명씩이나 지원군을 파견한다고?'

심지어 평범한 어중이떠중이도 아닌, 총사령관인 아폴로니아가 직접 이끌어서? 그것도 이름 붙은 정예병을?

이걸 어떻게 믿어.

아무리 봐도 수상하잖아.

오히려 내 뒤통수 칠 생각으로 왔다는 게 더 그럴듯하겠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폴로니아는 이런 내 의심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지극히 태연하고 변함없는 얼굴로 우리 니카로스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다가 한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이군."

키로스 경.

우리 니카로스의 기사단장이자 큰 어르신.

초대 영주 제논의 심복이자 전우.

"네, 오랜만입니다. 대략 20년 정도만인가요. 어째 아폴로니아 경께서는... 그때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허허."

그리고 제논과 마찬가지로 한때 에우스페나 소속의 기사였던, 아폴로니아의 옛 동료이기도 한 노병과 말이다.

키로스 경은 아폴로니아가 자신을 알아보자마자 곧 평소처럼 태연하게 너털웃음을 웃으며 회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경'이라. 옛날에는 나에게 그런 존대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과거에는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그리 많지가 않더군요.

키로스 경은 마치 농담처럼 그렇게 덧붙였고, 잠시 침묵하던 아폴로니아 역시 곧 말을 내뱉었다.

"그래, 변하지 않는 것은 거의 없지."

어찌 보면 냉소 같기도 한 그런 표정으로.

"...."

잠시 의심과 고민에 빠져있던 새, 어느새 은근슬쩍 구경꾼 비슷한 위치가 되어버린 나는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론 이것저것 이 세상에 대해 다방면으로 알고 있는 게 많은 나답게, 두 사람의 관계 역시도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대략 20년 전, 몰락 귀족이던 제논은 에우스페나의 기사였고 키로스 경은 초창기부터 그와 함께하던 기사단의 동료였다. 그리고 아폴로니아는 그 두 사람이 이미 베테랑이던 시절에 첫 전장을 경험한, 어린 수습 기사였고.

아마 아폴로니아가 입단하고 몇 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제논이 지금의 니카로스 땅을 손수 점령하고 남작으로서 독립했을 거다. 우리 키로스 경과 제노비오스 집사장도 함께.

'그러니까 아폴로니아와 제논, 그리고 아폴로니아와 키로스 경의 관계는 대충 몇 년짜리라는 거지.'

내가 정확히 아는 건 여기까지다.

보거나 들은 게 더 없지는 않지만, 이 이상은 공식이 아니라 관련 커뮤니티에서나 돌던 추측의 영역이니까.

그런 고로 지금까지 아폴로니아와 키로스 경의 관계가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꼭 그렇지만은 않았나 보네.'

하긴.

관계의 깊이가 꼭 기간에 비례하는 건 아니니까.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예상 밖의 일면을 보게 되니 상당히 궁금해지긴 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에는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난 것을 보고, 아폴로니아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공작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에우스페나의 지원을 기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그래, 저쪽에서 먼저 군사적 지원을 공식 명분으로 가져온 이상 우리가 달리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의심스럽더라도 그저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할 뿐.

"그렇다면 이제 에우스페나의 군을 대표하는 아폴로니아 경의 계획을 듣고 싶군요."

그리고 이왕 수용한다면.

당연히 유용하게 써먹는 게 옳고.

아무리 아폴로니아가 위세 높은 공작령을 대표해서 파견되긴 했다지만, 이번 전쟁의 우리 측 총지휘관은 명실상부 나다. 지원군의 규모가 300명인데 비해 우리 니카로스의 이름으로 모은 병력은 그 다섯 배에 달하는 1,500명이기도 하고.

따라서 주군인 공작이라도 직접 출두한 게 아닌 이상, 당연히 주도권은 내 쪽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에우스페나가 그렇게 상식적인 영지는 아니거든.'

그리고 아폴로니아가 사실상 공작을 대신하는 두 명의 실권자 중 한 명이기도 하고.

걱정될 수밖에 없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우리 에우스페나 군은 전적으로 남작의 지시에 따를 거다. 그러니 오히려 남작의 계획을 먼저 듣고 싶군."

무척이나 순순하고 선선히 그렇게 대답했다.

"...."

이것 참.

정말 의외의 연속이야.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건지.

"...그렇다면야."

그래, 그래도 일단은 좋다.

당장은 그런 확답을 들은 것만으로 충분하다.

'어디 실천을 얼마나 잘 하는지는 천천히 보자고.'

적어도 그렇다면.

"바로 출진을 시작하죠. 자세한 계획은 진군 중에 전달하겠습니다."

더는 뜸 들일 필요는 없을 테니까.

한시가 급한 만큼 전장으로 먼저 가자고.

어서.

빠르게.

***

언뜻 보아도 2,000명 이상.

거의 3,000명에 달하는 수준.

요컨대.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2,823명.

그들은 분명히 이곳 변방에서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군세였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위세만큼 내부까지도 견고하지는 못하였다.

"지금 다들 뭣들 하고 있소! 이만한 병력을 모아놓고 느릿느릿 뭉그적거리기나 하고!"

"그렇소! 어차피 놈들의 국경이라 한들 통제도 간신히 하는 점령지이지 않소! 부대를 나눠서 동시에 쓸어버린다면 놈들도 본토로 물러나지 않고는 못 배길 터인데!"

지휘관들이 모여 있는 야전 지휘소.

그 천막 내부를 크고 거친 목소리가 가득 채웠다.

그렇게 열변을 토해내는 이들은 바로 연합을 형성하는 4개국 중 둘. 투나미르 토후국과 바르토 토후국의 장군 겸 대표.

연합의 가장 극단적인 강경파인 두 사람은, 당장 그 이름값이라도 하겠다는 듯 누구보다 강경한 태도로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전면적인 공세.

그러나 그들에게는 불행하게도 그 주장을 듣는 상대방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못했다.

"...아예 말도 안 되는 방안이라고까지 평하지는 않겠지만, 너무 성급하고 섣부르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미리 분명하게 말해두겠지만, 우리 우르드 토후국은 전쟁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연합에 합류한 것입니다. 피하지 못할 싸움이라면 응당 물러섬 없이 맞서겠지만, 먼저 거대한 화마 속에 스스로 몸을 던질 생각은 없습니다."

말투는 완곡했지만, 그 안에 담긴 뜻만은 완고하다.

우르드 토후국 장군의 입에서 나온 분명한 반대 의견에 지휘소 내부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

그래, 거의 3,000명에 달하는 거대 연합군을 결성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이들을 진정 하나의 뜻으로 뭉친 집단이라고 부르기에 다소 어폐가 있었다.

마르딘, 우르드, 투나미르, 바르토.

현재 바할리아 제국, 즉 니카로스 남작령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네 개의 월광교 토후국.

최근 시하브 토후국과 아르잔 토후국을 집어삼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니카로스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이들 확실히 모두의 공통점이 맞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체감 중인 위협의 크기에서만큼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제노아 남작령과 마주한 마르딘과 우르드.

마누엘라 남작령과 마주한 투나미르와 바르토.

언뜻 보기에는 딱히 다른 점이 없어 보이지만, 제노아 남작령 동쪽에는 장대하고 폭이 넓은 강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강이 일종의 자연국경 역할을 하여 동쪽과 서쪽을 선명하게 가르고 있다.

군대가 강을 건너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마르딘과 우르드 토후국은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아무리 기세 좋은 니카로스라 할지라도 그 천혜의 요새를 쉬이 넘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투나미르와 바르토 토후국은 다르다.

그들과 니카로스 사이에는 이 일대에 널리고 널린, 드넓은 초원밖에 없다. 그리고 그 망할 평지는 약간의 장해물조차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두 국가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니카로스가 다음 표적을 고른다면 후보는 분명 그 둘밖에 없을 테니까.

"전쟁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라...! 말이야 상당히 그럴듯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겠소? 우리가 아무리 싸움을 피하고자 노력한다고 한들 저 미치광이 니카로스 놈들이 먼저 일을 저질러 버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짓이 되지 않소!"

"...글쎄.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을 하자 하시는 두 분의 의견을, 과연 우리 우르드 토후국이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거대한 연합군이 모인 김에 압도적인 힘으로 니카로스를 먼저 쓸어버려 화근을 아예 뿌리부터 제거해고자 하는 투나미르와 바르토.

그리고 연합과 무력시위를 통해 니카로스를 향해 경고하고 안정적인 현상 유지를 우선시하고자 하는 우르드.

두 의견 사이의 타협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대로는 양측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고, 며칠 전의 극적인 연합 결성 발표가 무색하게도, 모든 게 순식간에 공중분해 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모두 진정들 하시는 게 어떻소."

바로 당장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큼...."

"...이스마트 공께서 말씀하신다면."

그 남자가 있었으니까.

마르딘 토후국의 대표가 있었으니까.

아직 연합에는 확고부동한 중심이 있었으니까.

이스마트가 있었으니까.

그래, 아무리 목소리가 큰 구성국의 대표라고 할지라도 마르딘 토후국에서 파견된 이스마트의 말을 무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연합에서 마르딘이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도 크다. 그들은 원래부터 이 변경에서 최대의 국력을 보유하고 있던 국가였고, 가장 먼저 연합이라는 발상을 주위의 다른 토후국들과 공유한 입안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연합군에 단독으로 1,000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고 투입한 최고 전력이었다.

요컨대, 마르딘 토후국은 명실상부한 반(反) 니카로스 연합의 맹주였다.

이스마트는 그 권위의 대리인이었다.

따라서 이스마트가 차분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다른 국가의 대표들도 잠시 언쟁을 멈추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양측 모두 일리가 있는 주장이오. 우리는 분명 순수한 자기방어 차원에서 연합을 결성하였지만, 어리석은 망아지처럼 미쳐 날뛰는 저 니카로스가 어지간한 경고로는 멈추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니까."

"...."

무감정한 어조로 상황을 정리하는 이스마트의 말에 그 누구도 달리 더 토를 달거나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선은 놈들의 대응부터 먼저 확인해야 하오. 우리의 방침은 그다음에 정해도 늦지 않소."

하고픈 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삼켰다.

"함께하는 우리는 강하니까. 그리고 무도한 제국의 개들이 결코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할 테니까."

이스마트의 목소리에는 호소력이 담겨있었다.

그 호소력의 배경이 힘인지, 아니면 개인의 힘인지.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우리의 힘을 믿으십시오."

"...."

어차피 결과가 바뀌지는 않을 테니까.

이스마트.

연합의 명목상 지도자.

마르딘 토후국을 다스리는 에미르의 삼남.

그리고 니카로스 남작.

티베리오스 발란티스가 기다리고 있는 사내.

그의 존재와 함께.

연합은 아직 무너지지 않고.

오직 니카로스를 향해 전진 중이다.

아주.

천천히.

#079. 승(昇) (4)

반(反) 니카로스 연합의 결성.

그리고 그에 맞서 일대의 여러 용병대를 최대한 끌어모은 니카로스 남작령.

그렇게 고용된 용병대 중 하나인 '강철기러기 용병대'의 대장 루카스는, 뭔가 굉장히 오묘하다는 표정으로 진군 중인 군대의 선두를 바라봤다.

거칠고 막 나가는 하루살이 인생들이 태반이라 치부되는 용병이긴 하지만, 그리고 그게 대부분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루카스는 자기 정도면 이제 어느 정도 알 것을 다 알고 있는 수준이라고 자평했다.

밑바닥에서부터 이 업계에 뛰어들어 순수하게 자기 몸뚱이와 실력 하나만 믿고 지금까지 왔다. 수많은 동기와 후배, 선배들이 허망하게 죽어 나갈 때도 자신만큼은 살아남았다. 그렇게 살아남아서 어느새 이 일대에 제법 이름을 떨친, 300명이라는 적지 않은 규모를 자랑하는 강철기러기 용병대의 대장까지 도달하기도 했다.

그 정도면 이번에 니카로스 남작령이 고용한 전체 용병 중 절반을 단독으로 차지하고 있는 규모.

따라서 그런 휘하 병력 머릿수라는 배경으로 보거나, 개인의 경력으로 보거나, 그 어느 쪽으로 봐도 루카스는 지금 고용된 용병 중 가장 주요한 인물이라고 여겨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대우받고 있었다.

요컨대 이 모든 것은, 그런 만큼.

산도적 같은 외모와는 달리, 루카스라는 인물이 제국 동부와 에우스페나의 정치적 구도에 대해서도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

그리고 그런 그가 보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은 이상했다.

에우스페나의 총사령관.

아폴로니아.

루카스 역시 에우스페나에 기점을 두고 근방에서 용병 활동해온 만큼, 그녀에 대한 소문을 여태 무수하게 들었다. 간접적으로나마 실제로 접해본 적도 있다.

그렇기에 알고 있다.

그녀가 얼마나 끔찍한 괴물인지.

그저 그 끝을 모르고 더 높은 곳만을 추구하는.

오직 강철과 같이 차가운 탐욕으로 움직이는 권력자.

아폴로니아가 나태공의 방임 아래 현 정권의 실력자로 부상한 이래로 에우스페나의 모든 것이 처참하게 썩어가고 문드러져 갔다.

공작령의 위신, 이웃 영지들과의 관계, 국방, 치안, 경제, 군사력, 그리고 시민들 개개인의 삶까지 모조리.

물론 이런 몰락에는 권력을 양분 중인, 현 집사장이자 공작의 숙부인 페트로스의 영향도 적지 않게 있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아폴로니아의 영향도 절반 정도는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저 빌어먹을 쓰레기 기사님께서는, 그따위 것은 전혀 신경 쓰지도 않았단 말이지.'

권력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냉혈의 괴물.

루카스는 여태껏 아폴로니아에 대해 그렇게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믿음이 깨진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대체 뭐야?'

바로 오늘까지는.

계약을 맺고 에우스페나에서 출발하기 바로 직전.

자신도 니카로스로 향하는 중이라며 합류를 제안한 아폴로니아를 봤을 때부터 모든 게 믿기지 않았다.

'이 한심한 공작령이 근래 휘하 봉신의 위기에 관심을 가진 적이 어디 있던가?'

그런데 지원군이라니?

그게 '동방개척자'라니?

심지어 그 지휘관이 아폴로니아라니?

사실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게 후자였다.

아폴로니아가 실권을 잡은 이래로, 그녀는 단 한 번도 에우스페나를 떠난 적이 없었다.

기사 출신이라는 배경이 무색할 정도로 전장에서 멀리 떠나, 그저 들개처럼 정계 속만을 어슬렁거렸다.

'그야 당연히 그랬겠지. 저 권력에 미친 여자가 그 권력의 중심에서 떠날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곳이 어디인가?

이미 에우스페나에서 벗어난 지 한참.

그나마 제국의 본토에 가깝던 니카로스 남작령조차 이제 막 벗어나, 아예 얼마 전 니카로스 남작이 새로 정복한 점령지를 지나고 있다.

사실상 이교도의, 야만의 영역과 다르지 않은 곳.

아폴로니아가 그 제국의 최전선을 지나고 있다.

"...."

용병대장 루카스도 눈과 귀를 가지고 있다.

그것도 상당히 성능이 괜찮은 놈들로.

아폴로니아와 페트로스의 대립이야 이미 유명하다.

최근 변방에서 명성을 떨친 니카로스 남작에 대한 소문 또한 이제 알 사람들 사이에서는 익히 퍼져있다.

백작 승작이 그리 머지않았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리고 페트로스와 니카로스 남작의 협력.'

나아가 아폴로니아와 니카로스 남작의 충돌 또한 그리 대단한 비밀은 아니었다.

당연히 그 또한 암투의 연장선인 만큼 공식적인 발표 따위는 당연히 없었지만, 근래 에우스페나 정계가 돌아가는 상황만 봐도 그 정도 무리 없이 추측할 수 있었다.

'...이거, 굉장히 머리가 아픈데.'

그렇기에 진군 중인 군대의 선두를 주시하던.

더 정확히 말해 그곳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있던 아폴로니아와 니카로스 남작을 바라보고 있던 루카스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최근 거침없는 상승세만을 보여주던 니카로스다.

원래부터 그의 강철기러기 용병대보다 살짝 더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던 푸른이리 용병대 역시, 니카로스에 고용된 이래로 한층 더 능력을 인정받아 이름값을 한 단계 높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 니카로스가 대대적이면서도 급하게, 무척이나 후한 조건으로 용병들을 구한다길래 가벼운 마음으로 응했을 뿐이다.

이번 기회에 심상치 않은 성장세를 보이는 니카로스와 미리 연줄이라도 맺어 볼까, 하는 생각이 전부였다.

'...막상 니카로스까지 와보니 생각보다 적의 규모가 커서 몹시 당황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루카스는 그저 그런 편한 마음뿐이었고.

'아무래도 제대로 조진 것 같아.'

아폴로니아의 등장으로 모든 게 어그러졌다.

설마 저만한 권력자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정적(政敵)을 도우러 왔을 리는 없다.

분명히 무언가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증거 따위는 없고 어떤 음모인지는 아직 감이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것이다.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래서 본인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망할."

동종업계 종사자이자 어느 정도 안면은 있는, 속 편한 안티모스 녀석처럼 질척질척한 암투와 정쟁 따위에는 흥미가 없다고, 그저 용병으로서 순수하게 싸우고 싶을 뿐이라는 개소리를 할 생각은 없다.

돈만 된다면 그딴 일에도 얼마든지 어울릴 수 있다.

하지만 그냥 마음 편히 이교도 놈들이나 쳐죽이러 왔다가, 영문도 모른 채 권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무의미한 개죽음을 당하는 일만큼은 루카스 역시 사양이었다.

'뭘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싸울 거면 너희들끼리 얌전히 싸워라, 망할 권력자 놈들아.'

루카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바랐다.

아무래도 이번 전쟁은.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았다.

***

행군 중에도 전방의 보고는 계속 들려온다.

저 먼 곳에 있을 반(反) 니카로스 연합군의 움직임 또한 계속 신경 쓰고 있다.

놀랍게도,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의 예상과는 달리 적은 상당히 느리게 진군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늦지 않게 국경까지 도착할 수도 있을 정도로.

'설마 서둘러 국경을 넘을 생각조차 없던 걸까.'

다소 추측을 벗어나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아예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까지는 아니다.

'...괜히 국경 근처에 있던 집사장 아저씨한테 짐 다 빼서 뒤로 물러날 준비를 하라고 했나.'

헛고생시킨 건가.

포장 이사가 쉬운 일은 아닌데.

이건 좀 미안한걸.

물론 9할 이상은 농담이다.

사람 목숨이 대량으로 달린 문제인데, 헛고생 조금 해서 위기에 대비할 수 있다면 당연히 하는 게 맞지.

"...."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바로 곁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있는 아폴로니아를 힐끔 바라봤다.

전적으로 니카로스 군의 지휘에 따르겠다.

출진에 앞서 한 그 말이 완전한 허언까지는 아니었는지, 확실히 그녀는 본인의 드높은 지위가 무색할 정도로 여태까지 작전이나 계획에 대해서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말 자체가 아예 없었지.'

그래, 그녀는 정말로 여태껏 그 누구와 대화하지도 않고 입을 열지도 않았다. 키로스 경과도, 그녀가 이끌고 온 부하들과도.

"...."

그저 묵묵히 홀로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을 눈에 담고 있을 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나는 결국 먼저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 주위는 대체로 다 이런 분위기죠. 혹시 이전에 와보신 적 계십니까?"

딱히 오붓한 사담을 나눌 마음까지는 없다.

하지만 아직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아폴로니아의 속셈을 파악하지 못했으니, 뭐라도 이것저것 이야기하면서 최대한 단서를 찾아볼 생각일 뿐이다.

다행히 그녀도 아예 대답까지 거부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이 부근은 아니지만, 동쪽 변방으로 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

"그게 몇 년 전 일입니까?"

"아마 그것도 20년은 됐을 거다."

가끔 그런 묘한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 서른도 채 안 됐을 것 같은 여성이 20년 전이라는 말을 자꾸 할 때마다 말이다.

"그때 그렇다면 저의 아버지, 선대 영주님께서도 함께 계셨습니까?"

"그래, 제논도 함께 있었지."

거기까지 대답하고, 나와 그녀 모두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두 눈동자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침잠했다.

아폴로니아는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은 여전히 역겹고 구역질 나는군."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감정의 덩어리를 함께 내뱉으며.

나는 대꾸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남작, 나와 제논이 옛 전우였다는 사실을 그에게 직접 들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에게 그 이야기에 대해서도 들었나?"

"...어떤 이야기 말씀인지요?"

"나는 여기 동쪽 야만인들에게 가족을 잃었다."

어조는 담담했다.

막힘도 없었고, 망설임도 없었다.

여전히 표정 또한 없었다.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나에게 시선을 향하지도 않고 오직 주위 광경만을 계속 눈에 담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

물론 이것도, 알고야 있었다.

당연히 제논에게 들은 건 아니었지만.

아폴로니아는 어린 시절 동쪽 초원의 약탈자들에게 고향과 가족, 모든 것을 잃었다.

그녀가 살던 마을은 하룻밤 새 잿더미가 되었고, 그녀는 뒤늦게 도착한 공작령의 토벌군에게 구출 받은 극소수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다.

그렇게 에우스페나까지 흘러간 그녀는 곧 군에 입대해 군인이 되었다. 그리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고아 출신임에도 기사가 되었고, 악착같이 출세하고 위를 향해 올라가 끝내 공작령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자가 되었다.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야, 그런 그녀의 배경 이야기가, 원작 게임 <마이트 앤 로열>의 설정이 실제 플레이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았으니까.'

내가 직접 겪었던 <마이트 앤 로열>의 수백 수천 회차 동안, 아폴로니아는 그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딱히 동쪽의 약탈자들이나 월광교 국가를 향한 대대적 복수 따위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저 내부의 권력 다툼에만 매진했다.

죽을 때까지.

'그나마 티가 나고 영향을 미친 건 기껏해야 에우스페나 군 내부에 만연한 야만인 혐오 풍조 정도일까.'

우리 아르센 경에게 쓸데없이 불쾌한 경험을 하게 만든 그런 태도 말이다.

그러니까 알고도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본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궁금해지고야 말았다.

"여전히 동쪽 야만인들을 증오하십니까?"

"당연하지. 혐오스럽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그런 것치고는 달리 행동은 하시지 않는 것 같던데."

그녀는 내 질문에 무례하다며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마침내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선선하고 명료하게 대답해주었다.

"남작, 나는 증오 따위로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야."

그리 이해하기 쉬운 대답은 아니었다.

문장 자체가 난해한 건 아니었지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잘 와닿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이해가 채 끝나기 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내가 묻지. 이번 전쟁에서 우리 에우스페나 군은 남작의 지휘를 따른다. 그렇다면 남작이 가진 계획이 궁금하군."

나의 계획이라.

확실히 당장은 바쁘니 나중에 진군 중에 이야기해주겠다고 말해놓기도 했다. 게다가 묻는 양반께서 지원군의 총책임자이시기도 하니, 더는 대답을 미루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말이야.

사실 그리 거창한 건 애초부터 없었다.

"일단 저쪽 적의 정확한 목적부터 파악해야겠지요. 단순한 경고의 차원에서 모인 건지, 아니면 아예 사생결단을 내자는 것인지. 따라서 대화부터 해볼 생각입니다."

"대화...? 1,800명이 넘는 병력을 모아놓고?"

"그야 적어도 그만한 수는 모아야 상대도 대화할 생각이 들 테니까요."

그래, 사실 엄밀히 말해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

공식적인 선전포고도 없었다. 기습 공격도 없었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이라고는 연합 결성의 발표와 연합군이 우리의 국경 가까이 이동하고 있다는 것뿐. 그리고 우리도 그에 맞서 국경지대로 군을 보내고 있는 것뿐.

놀랍게도 아직 전쟁은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대화에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아폴로니아는 이런 나의 방침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아주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무른 대처 아닌가?"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지요."

나도 이해는 한다.

20년의 세월 동안 도시에만 처박힌 권력 중독 기사님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군 출신인 만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하지만 저는 평화주의자거든요."

평화주의자에게는 평화주의자만의 방법이 있는 법이거든요.

"...."

나의 대답에 순간 그 아폴로니아조차 말문이 막힌 듯 침묵했다. 그렇지만 나는 당당했다.

'평화. 얼마나 좋은 말이야.'

믿지 않으면 뭐 어쩔 거야

나는 언제나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는 걸 원한다.

정말로.

#080. 승(昇)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