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붉은 태동 (3)
아르잔 토후국의 성에서 머무른 지 며칠이 지나고, 그럭저럭 수습 작업도 끝이 났다.
점령 부대로서 당장 현장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들은 다 해결하였으니, 이제는 제대로 된 행정 인력을 파견하여 본격적이고 전문적인 관리를 해줘야 할 때.
요컨대 이제는 나의 작고 귀여운 니카로스 남작령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왕이면 나의 크고 멋있는 니카로스 거대공작령 정도면 더 좋겠지만 말이야.'
그건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잘 하느냐에 달려있겠지.
승리와 정복.
쉽지 않은 일이었고, 동시에 보람찬 일이기도 했다.
특히나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힘든 일이 더 많았지.
그렇지만 나는 또다시 해냈고 살아남았다.
생존이란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여러모로 배운 점도 많다.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훌륭한 나 자신에게 상으로 휴식과 휴가를 주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좀 어려울 거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순간도 멈춰설 수 없으니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
원정군은 마침내 니카로스 남작령으로 복귀했다.
거친 변경의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여정이었지만, 다행히도 위풍당당하게 행군하는 우리 군대를 막을 정도로 멍청한 녀석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즐거운 나의 성에 도착하자마자.
"영주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실로 대단한 위업입니다! 위대한 솔레오 곁에 계실 전대 영주님들께서도 분명히 오늘의 승리를 보고 기뻐하실 겁니다!"
"전부 집사장님께서 든든하게 우리 후방과 영지를 지켜주신 덕분이지요. 집사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이라뇨! 영주님에 비하면 저의 고생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집사장 아저씨가 거의 버선발로 튀어나오다시피 하며 격하게 반겨주기 시작했다.
'지난번 원정 때하고는 반응이 180도 다르시네.'
그때도 이렇게 직접 나와서 기뻐하고 축하해주시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지.
'무엇보다 내가 복귀하자마자 전쟁 한 번 더 할 거라고 선언해버려서 바로 냉전 분위기가 됐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집사장 아저씨의 모습을 보니 정말로 순수한 기쁨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나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잔뜩 기분이 좋아진 집사장 아저씨를 어찌어찌 떼어놓은 뒤, 나는 곧장 집무실로 쏙 들어와 버렸다.
도무지 마음 놓고 쉴 시간이 없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당장 또 다른 정복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연이은 두 번의 원정과 점령.
어떻게든 기세로 밀고 나간 끝에 훌륭한 결과를 얻긴 했지만, 뒤돌아보면 중간중간 무리한 일도 많이 벌였다.
'행정적인 측면, 군사적인 측면, 어떻게 생각해봐도 지금은 잠시 숨을 돌리며 쉬어갈 때지.'
그러니까 지금은 열심히 전력을 다해 쉬면서.
전쟁 외의 다른 일을 해야 한다.
'평화 시에는 평화 시에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그것도 몹시 잔뜩.
일 더미가 나를 반긴다.
열심히 일만 할 생각에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심각하게 기뻐지는걸.
"그럼 남작님! 저희는 이만 에우스페나 돌아가 보겠습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다시 불러주십시오!"
일단은 부대 해산부터.
푸른이리 용병대의 대장, 안티모스는 웃는 얼굴로 그렇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만약 안티모스 씨와 다른 용병분들이 안 계셨다면 훨씬 힘든 싸움이 됐겠지요. 부디 에우스페나까지 조심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하하! 역시 남작님은 마지막까지 친절하십니다! 저도 남작님 덕분에 정말 즐거운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지요!"
즐거운 경험이라.
우리가 한 건 전쟁밖에 없는데.
딱히 객관적인 감상은 아닌 것 같지만, 어쨌거나 당사자는 만족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적당히 훈훈하게 작별 인사가 끝날 무렵, 안티모스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그래서... 다음은 언제입니까, 남작님?"
"...."
으쓱거리는 눈썹.
치켜 올라간 눈동자.
음흉한 미소.
그의 질문은 누가 봐도 의미심장한 의미를 가득 담고 있었고.
"...다음이라. 어떤 다음을 말씀하시는지요?"
나는 다 알면서도 일단 시치미를 떼며 되물었다.
그러나 안티모스 이 녀석은 투박한 생김새와 다르게 묘하게 집요하고 예리했다.
"하하! 다 아시면서! 저한테는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오히려 숨기면 서운하지요!"
거기까지 말한 그는 마치 은밀하게 귓속말을 하듯 나의 귓가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작님은 결코 이 정도 승리로 만족하실 위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기쁨과 기대가 가득한 소곤거림.
나는 그 말을 듣고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누가 칼밥 먹고 사는 친구 아니랄까 봐 표현이 조금 자극적이시네.'
누가 들으면 나를 아주 피에 굶주린 전쟁광으로 오해하겠어.
하지만 슬프게도 안티모스는 이런 나의 여린 속마음을 전혀 읽지 못한 듯, 당당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물론 며칠 전에 남작님께서 한동안 내정에 집중하실 계획이라는 것은 직접 들었습니다. 복수도 이미 훌륭하게 완수하셨으니 당연히 저도 그게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알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남작님께서 이미 거두신 승리만으로도 무척이나 놀랍고 훌륭한 업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는 것이 많은 안티모스의 눈동자 속에 언뜻 번뜩거리는 열망이 느껴졌다. 원래도 힘이 넘치는 친구였지만, 어째 오늘은 평소보다 더 심하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 그런가.
"그렇죠! 요즘 같은 암울한 시대에 더러운 월광교 놈들의 국가를 둘이나 박살 내고 제국의 위엄을 세우시다니, 실로 변경의 희망이라고 불리기 마땅합니다! 비록 헛된 평화에 찌든 중앙의 돼지 놈들은 아직 남작님의 위업에 주목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것도 금방입니다!"
이것 참.
아무리 자기애가 넘치는 나라도 대놓고 면전에서 이런 얘기를 들으니 조금 부끄럽다.
"솔직히 과찬의 말씀이신 것 같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주셨다니 무척 감사하군요."
"과찬이라뇨! 저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담백한 진실만 얘기하지요!"
퍽이나.
"그렇지만, 그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남작님은 아직 멈출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
"그러니 함께 사선을 넘나든 전우인 저에게만큼은 조금 귀띔을 주시지요. 저 입 무거운 아시지 않습니까?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니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안티모스는 다시 웃었다.
"...."
하여간.
진짜 여러모로 피곤한 녀석이야.
"...어쩔 수가 없네요."
그래, 어쨌거나 안티모스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해낸 결실만으로도 충분히 이변이라고 불릴 일이고.
이제 슬슬 중앙에서 나를 주목할 때가 되었으며.
나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맞아.
틀린 얘기는 없지.
물론 그 '만족'이라는 게 단순한 기분 문제가 아니라 나의 궁극적인 생존이 달린, 애당초 선택지가 없는 문제라는 차이점 정도는 있다.
그래도 크게 보면 어쨌거나 틀린 말은 아니다.
하여간.
이렇게나 날 잘 이해하고 있으니, 이 쓸데없이 날카로운 바보와는 생각보다 오래갈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언제냐고 물으셨죠."
그 질문의 의미는 분명.
'나의 다음 전쟁은 언제인가.'
따라서 나는 안티모스에게 이렇게 답해주었다.
"그건 제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아마 이번에 그 시기를 정하는 것은.
동쪽에 있는 월광교 군주들이겠지.
언제나처럼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아주 솔직하게 답해주었다.
***
존재 자체가 귀찮은 안티모스를 마침내 거지 같은 에우스페나로 보내 버리는 데 성공했지만, 애석하게도 아직도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았다.
"우선은... 영주님에게 급하게 보고드려야 할 사안은 세 가지입니다."
어느새 그럭저럭 흥분이 진정되어 다시 평소의 분위기로 돌아온 집사장 아저씨가 보고했다.
급한 게 세 가지나 된다니.
조그마한 영지치고는 좀 많은걸.
나 슬퍼.
"첫 번째 사안은 에우스페나 공작령의 페트로스 집사장이 보낸 답장입니다. 영주님께서 전쟁 전에 요청하신 행정 인력 지원 건을 수락하겠다고 답장이 왔습니다."
아, 이거.
확실히 이 안건은 중요하지.
점령할 영토를 다스릴 행정적 역량이 부족하다.
이것은 우리 니카로스가 처음부터 고질적으로 안고 있던 문제점 중 하나였다.
당연히 그런 만큼 나도 오랫동안 해결책을 연구해왔고, 아르잔 토후국 침공을 예정보다 일찍 시작하게 된 만큼 고려했던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가장 쉽고 빠른 해결책을 골랐다.
그리고 그 쉽고 빠른 해결책이 바로.
커다란 공작령이 에우스페나의 모든 내정을 꽉 쥐고 있는 페트로스 집사장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서신이 도착한 시기를 통해 추측해보건대, 아무래도 영주님의 승리 소식이 에우스페나까지 도착한 직후에 답장을 보낸 것 같습니다."
이것 참.
그러니까 나의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고 계속 간을 보다가, 마침내 내가 이겼다고 확정이 되고 나서야 부랴부랴 수락 서신을 보냈다는 건가.
이 얼굴값 못하는 좀생이 같으니라고.
"그거 기쁜 소식이로군요. 페트로스 집사장 쪽에서 따로 요구한 대가는 없었습니까?"
"네, 서신으로는 동맹이자 친우인 영주님에게 보내는 단순한 호의... 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호의라. 저 좀생이 능구렁이한테 듣기에는 그만큼 무서운 단어도 없는데 말이야.
안 그래도 제노비오스 집사장 아저씨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우려스럽다는 목소리로 자신의 걱정을 밝혔다.
"영주님, 주의하셔야 합니다. 페트로스 집사장은 이런 식으로 호의를 베풀 인간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가 보내는 인력이, 사실상 지원 인력의 탈을 쓴 간첩 무리일 수도 있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저도 비슷한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확실히 그럴듯한 이야기다.
나와 페트로스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동맹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는 일심동체의 파트너 관계는 결코 아니거든.
에우스페나의 총사령관인 아폴로니아와 대립 중인 페트로스 입장에서, 나의 힘과 세력이 커지는 것은 반길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경계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가 나에게 기대하던 역할은 어디까지나 권력의 균형을 자신 쪽으로 기울여줄 조커 카드였을 뿐이지, 자신과 동등한 플레이어 역할은 아니었거든.'
그런데 연이은 승리와 함께 나의 세력이 커지는 속도가 예상을 훨씬 웃도니 자연스레 이쪽도 견제하고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겠지.
하여간.
나처럼 정직하고 진솔한 사람과 동맹이면 그냥 적당히 덮어놓고 믿으면 될걸. 괜히 또 이렇게 긁어 부스럼을 만든단 말이야. 누가 욕심 많은 부패 관료 아니랄까 봐.
"...페트로스 집사장의 지원을 다시 한번 고려해보는 것은 어떠십니까? 그는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닙니다."
"확실히 그는 뱀 같은 인간이지요. 그렇지만 그만큼 그의 지원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 페트로스가 이런 인간이라는 것은 요청을 보내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지원이 품고 있는 위험성 역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나도 아르잔 토후국과의 전쟁이 당겨지지 않았다면 다른 안전하면서도 장기적인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미 게임에서 비슷한 상황은 수도 없이 겪어봤으니까.
그렇지만 그런데도 요청을 보냈다는 건.
전쟁을 앞두고 그만큼 빠르고 확실한 해결책이 없었기 때문이고.
'또 무엇보다 바로 그 위험성을 억제할 방법 역시 있기 때문이지.'
그래.
독이 든 사과가 있고, 그 독을 빼낼 방법도 있으면.
그냥 사과에서 독만 빼내서 맛있게 먹으면 되잖아?
역시 난 현명해.
"안전은 제가 최대한 확보해보겠습니다. 몇 가지 떠오르는 방책이 있으니 일단은 저를 믿고 맡겨주시지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집사장 아저씨는 더 묻지 않았다.
"그러면 다음 사안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두 개가 더 남았다고 하셨죠?"
"네, 두 번째 사안은 수도 카이룸에서 저의 딸 마르다가 보낸 서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안은 에우스페나의 가스파르가 보낸 서신입니다."
"...네? 마르다, 누구요?"
"네? 마르다 크세로스. 저의 외동딸 말입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영주님? 어리실 적에 몇 번 만나보셨던 것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 아니.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저 빙의하기 이전 티베리오스의 기억은 진짜 하나도 없는데요.
"...."
순수하게 의아함만이 가득 담긴 집사장 아저씨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식은땀만 잔뜩 흘릴 수밖에 없었다.
#051. 붉은 태동 (4)
"네? 마르다 크세로스. 저의 외동딸 말입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영주님? 어리실 적에 몇 번 만나보셨던 것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
쉽지 않은걸.
설마 인제 와서 이런 위기를 겪게 될 줄이야.
나는 내가 빙의하기 전 티베리오스의 기억이 없다.
갑작스럽게 이 세상에 떨어진 뒤 곧 그 사실을 깨달았고, 당연히 걱정도 많이 했다.
아무리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해도, 본래의 티베리오스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머지않아 내가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 테니까.
그렇지만 어쩌다 보니 단 둘뿐인 가족이었던 제논과 마누엘 모두 별다른 교류도 하지 못한 채 전사해버렸다.
슬픈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 덕에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 문제가 될 일은 이제 더 없을 줄 알았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치고 들어올 줄이야.'
완전히 허를 찔렸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역시 최고의 난적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제노비오스 집사장님.
'그래, 사실 알고 보면 이것도 다 니카로스가 역사가 짧은 약소 남작령이기 때문이지.'
기업으로 따지면 일종의 신생 벤처 기업이라고 할까.
아버지와 아들, 2대 세습의 역사는 다른 귀족 가문에 비하면 진짜 엄청나게 짧은 편이니까.
그 탓에 키로스 경부터 해서 집사장 아저씨까지.
생각해보면 무슨 영지에 영주 가족들 사생활까지 빠삭한 원로들밖에 없다.
도대체 나의 프라이버시는 어디로 간 걸까.
나는 집사장 아저씨한테 외동딸이 있다는 것 자체를 지금 처음 들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불공평한 일이다.
'...어쨌거나 불평은 여기까지 하고, 지금은 구렁이 담 넘듯 자연스럽게 넘기는 게 급선무야.'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내가 영주가 된 게 어디 하루 이틀 전 이야기도 아니고.
벌써 1년이나 넘게 지났는데 옛날 기억 좀 없다고 해서 딱히 큰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역시 할 수 있다면 괜한 의심은 아예 사지 않는 편이 낫다.
지금 이 영지가 나 한 명에게 의존하는 일들이 한둘이 아닌데, 영주의 기억이 오락가락한다는 소문 같은 게 돌아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나는 거짓을 모르는 진솔한 사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의 존재는 믿는 유연한 사고방식의 소유자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아주 뻔뻔하게 지껄였다.
"아, 그, 네, 기억났습니다. 하도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 저도 그만 순간적으로 헷갈리고 말았네요."
"하하, 그럴 수 있지요. 생각해보면 마르다 그 아이가 니카로스를 떠난 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니까요."
다행히도 집사장 아저씨는 나의 해명을 듣고 별달리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10년이나 얼굴도 못 봤다는데, 그러면 순간적으로 기억을 못 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계산해보니 당시의 이 몸 티베리오스는 겨우 초등학생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왜 10년 전에 영지를 떠났던 그 마르다라는 친구가 갑자기 나에게 편지를 보낸 걸까.
그리고 왜 그 사실이 페트로스나 가스파르 영감의 서신이랑 같이 묶일 정도로 중요한 보고라는 걸까.
그 징글징글한 노인네들이 우리 니카로스의 최대 협상 상대라는 걸 집사장 아저씨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아무리 자기 딸 소식이라지만, 설마 이 아저씨가 공사 구분도 못 할 리는 없고. 정말로 그 마르다라는 친구가 그 둘에 비견될 정도로 중요한 소식을 전한 걸까?
'아는 게 너무 없어 도저히 추측할 수가 없네.'
별수 없지.
나의 전매특허인 합리성과 유연성을 살려, 이번에는 진솔함과 함께 솔직히 물어보는 수밖에.
"그래서, 그 마르다... 양께서 저에게 보냈다는 서신은 어떤 내용입니까?"
"아, 그렇지요. 사실 그렇게까지 이례적인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과 안부 인사가 대부분이었는데, 마지막 몇 장이 영주님에게 따로 보내는 내용이더군요."
"저에게 따로 보내는 내용이 있었군요."
그렇게 서론을 끝마친 집사장 아저씨가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간단히 구두로 요약하자면... 이번 방학 때 니카로스로 한 번 돌아올 테니, 그때 영주님과 면담을 잠시 하길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와 면담이요?"
아직도 정확한 전말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새로운 정보는 하나 더 얻었다.
방학.
즉 마르다라는 친구는 학생이란 소리다.
'수도에서 머물고, 학생이라.'
음, 글쎄.
수도 카이룸에 교육 기관이 한두 개가 아닐 텐데.
뒷배 없는 변방 출신이 수도로 상경해 다닐 법한, 제법 그럴듯한 후보들이 어디가 있더라.
내가 이렇게 고민을 계속하는 사이, 집사장 아저씨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설레발일 수도 있지만, 이번이 마르다의 마지막 방학이지 않습니까? 그동안 학업에 집중한다고 니카로스로 돌아온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돌아온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는 점도 그렇고. 슬슬 그 아이도 우리 니카로스를 위해 일할 결심이 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주 태연하게.
고민 중이던 나에게 폭탄 발언을 하나 투척했다.
"제가 보기에는 아직 어린아이지만, 그래도 아카데미에서 오랜 시간 공부했으니 우리 영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아비로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하!"
"...네?"
순간적으로.
귀를 의심했다.
'아니.'
뭐라고?
아카데미?
내가 아는 그 아카데미?
"아니, 그 혹시 아카데미라고 하시면...?"
"네, 제국 황립 아카데미 말입니다. 하하, 그 어린아이가 자기는 꼭 커서 아카데미에 가겠다고 귀엽게 선언한 게 마치 어제 일 같은데, 벌써 졸업할 때가 다 되었군요. 정말 시간이 빠릅니다."
제노비오스 집사장이 흐뭇하게 웃으며 처음 보는 팔불출 아버지의 표정을 얼굴 가득 짓고 있었지만, 솔직히 나는 그의 표정 같은 건 전혀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어...."
그야, 너무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말문이 턱 막혀버렸으니까.
'저 아저씨 딸이,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었어?'
이건 진짜. 상상도 못 했다.
황립 아카데미.
바할리아 제국의 최고 교육 기관.
제국 전역의 천재들이 모이는 지식의 전당.
분야를 막론하고, 이 나라를 지탱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인재들만을 배출하는 양성소.
'...그 영향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이 곪아 썩어 빠진 제국이 그나마 아직 버티고 있는 이유 중 하나라고 불릴 정도지.'
솔직히 이 세상이 돌아가는 시뮬레이션을 여러 번 겪은 내가 생각해도, 딱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아카데미 졸업생들은 지금도 각계각층에서 뛰어난 인재와 지도자로서 활약하고 있고.
바할리아 제국이 지닌,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영토와 많은 인구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전부 고도로 체계화된 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이 있는 덕분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황립 아카데미는 부정부패가 만연한 현 제국에 극히 드물게 남은, 순수 실력주의를 표방하는 단체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물론 표방한다고만 했지, 실천한다고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제국이 이 모양 이 꼴인데 부조리나 폐해가 아예 없을 수는 없지.
하지만 적어도 무능한 녀석들이 알량한 권력이나 돈 따위를 가지고 떵떵거리며 간판만 딸 수는 없는 장소라는 것만큼은 여전하다.
그런데 그런 학교를.
집사장 아저씨의 딸이 다니고 있었다고?
변방 출신으로,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진짜 말이 안 나온다.
"...이런 말씀 드리기 새삼스럽지만, 그, 네, 정말로 대단한 따님을 두고 계시네요."
"하하, 과찬의 말씀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은 아이일 뿐입니다."
아니, 아저씨.
그렇게까지 겸양의 미덕을 보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진심으로 대단한 일이니까.
"그, 제가 아직 긴가민가해서 그런데 마르다 양이 정확히 어떤 분야를 공부하고 있었지요?"
"행정학을 전공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하, 부끄럽지만 아무래도 아비인 제가 하는 일이 조금이나마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제가 하는 업무에 곧잘 관심을 지니곤 했으니까요."
와.
심지어 행정이다.
지금 나와 니카로스에 가장 필요한 실력과 지식.
'너무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만 계속 이어지니까, 이제는 거의 몰래카메라인가 싶을 정돈데.'
함정인가?
도대체 저 아저씨는 왜 이 사실을 여태 숨긴 거지?
아니, 생각해보면 딱히 숨긴 건 아닌가?
당연히 내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 건가?
그래도 한 번이라도 더 언급해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러면 페트로스랑 거래할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아, 근데 졸업을 안 해서 미리 알아도 의미가 없었나?
무서울 정도로 반갑고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버린 나머지, 나도 모르게 머리가 뿌연 생각으로 가득 차버린다.
이마에 손을 올리고, 간신히 생각의 정리를 시작했다.
'...그래, 일단은 진정부터 하자.'
그 마르다라는 인재가 당장 니카로스에서, 내 밑에서 일하겠다고 확정된 것은 아니니까.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거기서 일한다는 보장도 없고 설레발은 좋지 못하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마르다 양이 영지로 돌아오는 대로 면담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비워놓겠습니다. 도착 예정일은 대략 언제쯤이지요?"
"감사합니다, 영주님. 약 보름 정도 뒤에 영지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보름, 보름이라.
그녀와 어떻게 면담할지 고민하기는 충분한 시작이다.
그래, 차분히 생각해보면 나쁜 일은 하나도 없다.
어차피 아직 그녀가 졸업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결국 페트로스의 행정 인력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겠지. 아르잔 토후국을 점령한 이상, 이건 더는 미룰 수가 없는 문제였으니까.
그리고 그 마르다라는 친구의 건은, 졸속으로 처리하기에는 너무나 섬세하고 귀중한 기회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이 정도 여유를 두고 알아낸 게 딱 적당할 정도지.'
좋아.
긍정적인 사고 겸 정리 완료다.
아주 교양인다웠어.
'내가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절로 굴러들어온 기회.'
이런 귀한 기회를 과연 어떻게 놓치지 않고 살릴 수 있을지, 이 또한 모두 영주인 나의 역량에 달린 일이다.
과연 마르다가 어떤 부류의 사람일지.
정확히 면담 때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조금 더 상세하게 알아보고 고려해봐야겠으니, 일단 이 얘기는 여기서 넘어가자고.
"좋습니다. 저도 보름 뒤로 알고 있겠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남은, 가스파르 영감님이 보냈다는 서신은 어떤 내용입니까?"
"음, 사실 영주님께서 자리를 비운 동안 제가 먼저 서신을 확인해도 된다고 하셔서 읽기는 읽었으나, 정확히 어떤 내용을 의미하는지까지는 제가 유추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은 아무래도 영주님과 가스파르 사이의 개인적인 거래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나와 가스파르 영감 사이의 개인적인 거래라.
사실 그 영감님이랑 거래한 게 한둘이 아니긴 한데.
그렇게 내가 머릿속으로 후보들을 추리고 있는 사이.
"서신의 내용은 이게 전부였습니다."
집사장 아저씨는 아주 짧게.
오직 그렇게만 전하였다.
- 네가 찾던 사람을 찾았다.
- 가능한 한 빠르게 에우스페나로 와라.
"아."
그리고 나는 그 짧은 전언에.
그만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마르다의 얘기를 들을 때보다도 더.
'역시.'
가스파르 영감님.
마침내 찾았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두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영주님?"
"아니,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나의 갑작스러운 웃음에 당황하는 집사장 아저씨를 안심시키며, 나는 재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가능한 한 빨리 오라는 가스파르의 전언.
보름 뒤 영지에 도착하는 마르다.
니카로스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닌 에우스페나.
그래, 역시.
"집사장님, 아무래도 당장 에우스페나로 갈 채비를 해야겠습니다."
"네? 당장, 말씀입니까...?"
네.
당장.
지금 바로.
"이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안이니까요."
나는 한 점의 의심과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확답했다.
그야 당연히.
마법사와 만나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걸.
#052. 붉은 태동 (5)
에우스페나로 간다.
원정에서 복귀하자마자 쉬지도 않고 바로.
무척이나 허겁지겁 준비해서.
영주인 내가 이런 상식 밖의 결단을 내리자 당연히도 온 가신단이 대경실색하여 만류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제 이 양반들도 슬슬 나에게 그런 만류가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되었다.
'특히나 이건 진짜 한시도 망설일 수 없는 사안인걸.'
그도 그럴 것이.
가스파르 영감님이 물어다 준 건 다름 아닌 마법사에 대한 정보니까 말이야.
그래, 마법사다.
마법사.
지난 에우스페나 방문 당시.
괴팍한 가스파르 할아버지와 우정의 도원결의를 맺음과 동시에, 나는 영감님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 그렇다면 영감님, 일단 친구로서 뭐 하나만 먼저 부탁합시다.
- 사람 하나만 찾아 주십시오.
이건 처음부터.
가스파르와 인연을 쌓기로 했을 때부터 함께 계획했던 의뢰이기도 했다.
이번 아르잔 토후국과의 전쟁에서도 새삼스레 다시 느꼈지만, 마법사가 있는지 없는지, 전장에서는 그 사실 하나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좌우한다.
그런 고로 당연히 나 역시.
연이은 전쟁과 생존을 위해서는 마법사가 있는 편이 유리하다고, 진작부터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판단했으니, 당연히 가만히 넋 놓고 있을 수 없었지.'
지금 내가 처한 주위의 환경.
빠삭하게 알고 있던 원작 게임에 대한 지식.
상대방에게 내걸 수 있는 조건과 그 한계.
이 시점에서 접촉할 수 있는 고정 네임드 캐릭터들.
그 모든 것들을 고려해서, 나는 그나마 가장 고용 가능성이 있는 원작의 마법사 캐릭터를 하나 골랐다.
그리고 영감님에게 그 사람의 소재를 파악해달라 의뢰를 한 것이다.
'그 결과가 마침내 지금 나온 거고 말이야.'
잘만 풀리면 마침내 우리도 영지 마법사를 보유할 수 있게 될 상황. 이런 상황에서 미적거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게다가 그냥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가스파르 할아버지가 일부러 눈치 좋게 타이밍까지 맞춘 것인지.
영감님이 나에게 가능하면 빠르게 에우스페나로 오라고 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찾던 마법사가 마침 지금 딱 그 근방에 있는 모양.
소재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은 그 마법사가 언제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할지 모르니, 망설일 여유는 없었다.
'이번 여정의 수행원은 또 누구로 해야 하지. 키로스 경은 마땅히 휴식이 필요할 테고... 역시 지난번에도 날 경호했던 아르센이 적임인가.'
그런 고로 이리저리 성을 바쁘게 쏘다니며 에우스페나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웬 궁상맞은 한 무리가 누구 한 명을 무참히 짓밟아주고 있는 광경을 목격해버리고 말았다.
'...내 성에서? 저런 일이?'
진짜 너무나도 뜬금없다.
대체 저게 무슨 일인지.
비번인 경비병들인가? 집단 따돌림의 현장?
"...."
나의 평화롭고 행복 가득한 성에서 일어날 거라곤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끔찍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스르륵 그쪽으로 몸을 향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집단 구타의 피해자는 바로.
'...제르만?'
우리의 합리적이고 협조적이고 현명한 친구.
전직 붉은바위 도적단의 부두목.
제르만 씨였다.
아니, 네가 왜 여기서 이렇게 처맞고 있니?
***
놀랍게도 제르만이라는 이름을 지닌.
전 부두목 겸 현 니카로스의 포로는 끝내 살아남았다.
"사, 살았다...!"
수없이 마법 폭격이 떨어지고 니카로스의 병사들이 죽어 나간 아르잔 토후국과의 전쟁, 그 선봉에서 말이다.
물론 놀라운 결과이긴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리 불가능한 이야기까지는 또 아니었다.
몇 번이나 강조했다시피 애초에 적이 발동했던 마법의 특성상 돌격 때의 위치가 생존율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가장 치열했던 백병전 때는 푸른이리 용병대를 위시한 정예병들이 앞장선 덕에 제르만과 도적 포로들은 후방으로 빠질 수 있었으니까.
"살았어! 하하! 난 살았다고!"
하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그의 생존이 별것도 아닌, 의미 없는 성과라는 이야기라는 뜻이라는 것도 아니었다.
제르만은 분명히 위험을 무릅썼고, 자신의 임무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게 사실상 강제였든, 아니든 말이다.
그렇기에 니카로스 남작,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는 약속을 지켰다.
포로 신분이었던 그를 해방해주고, 어디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
"저, 저, 정말입니까...?"
솔직히 제르만은 처음 그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그는 분명히 전투가 다 끝나면 젊은 영주가 입을 싹 닦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냥 당장 살아남기 위해 선봉에 섰던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영주의 해방 지시는 진실이었다.
그 지시를 전달해주는 간수의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오히려 신뢰성을 더욱 높여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니카로스 남작님 만세!"
제르만은 기쁨에 환호했고.
당장이라도 이 거지 같은 영지를 떠날 채비를 했다.
이제 도적질 같은 위험한 일은 지긋지긋하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일단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가서 적어도 목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찾을 것이다.
이왕이면 합법 불법 상관없으니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이면 더 좋고.
동쪽 변경 방향으로 침도 뱉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제르만은 밝고 희망찬 꿈을 가득 품고 니카로스의 성을 떠나려 했고.
"이 역겨운 박쥐 새끼가. 야, 우리가 설마 너를 이렇게 순순히 보내줄 것 같았어?"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불의의 습격을 당하고 말았다.
머리를 때리는.
뇌를 울리는 묵직한 충격.
제르만의 모든 의지를 무시하고 몸뚱이가 통제 불능 상태로 무너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새끼 밟아! 숨도 못 쉬게 만들어버려!"
"개 같은 놈! 개 같은 놈! 개 같은 놈!"
"동료들을 다 팔아넘기고 너 혼자 살아나가려고?"
거친 발길질이 그의 몸을 사정없어 덮쳤다.
"이...! 개...! 너희...! 뭐야...!"
제르만은 그 와중에도 최대한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바닥에 엎드린 상태로 최대한 고개를 돌려 습격자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리고 그 노력의 과실을 얻어.
마침내 그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너, 너희...?"
아는 얼굴이었다.
그것도 아주 잘.
그야 그들의 정체는 바로 어제까지 제르만이 직접 관리하던 도적단의 잔당들이었으니까.
거기까지 확인하자, 원래부터 머리가 잘 돌아가던 제르만은 모든 상황을 단박에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그래.
이 모든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태였다.
애초에 처음 니카로스 군에게 토벌당하고 간부로서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부터, 모든 기밀을 팔아넘겨 홀로 목숨을 구했을 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제르만은 사실상 포로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이 되었다.
물론 당장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포로 100명분의 악의가 아무리 쌓여있다고 한들, 그걸 방출할 힘이 없다면 의지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오히려 니카로스 남작은 곧 그에게 포로 대표 역할을 맡겼고, 영악했던 제르만은 그 지위를 십분 활용해 조금의 해코지도 당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물론 미움은 두 배 정도 더 받았지만.
어쨌거나 외상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르잔 토후국과의 전투에서 포로 부대를 선동하고 인솔하는 역할까지 맡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래.
제르만이 영리한 만큼, 정말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바로 오늘 이 순간까지는.
당연히 오늘 해방된 것은 제르만뿐만이 아니다.
지난 전투에서 살아남은 도적 포로들은 모두 공평하게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증오를 잊지 않았다.
적의 앞잡이가 되어서 자신들을 탄압한.
이제는 영주가 임명한 감투조차 없는.
제르만을 향한 증오를.
바로 그 증오가 결과가 바로 이 상황이다.
제르만은 흠씬 두들겨 맞으면서도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멍청하기는...!'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너무 방심해 버렸다.
제르만은 점점 더 혼미해지는 정신의 틈바구니에서 멍하니 생각했다.
이렇게?
이렇게 죽는 건가?
도적단의 간부가 궤멸한 토벌전에서도 살아남았고, 마법사가 미친 듯이 마법을 쏘아대던 전장에서도 살아남았는데, 고작 여기서, 고작 이따위 습격 때문에 죽는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정말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삶에 대한 집착이 남들보다도 훨씬 강한 제르만이었기에 더욱더.
그래, 제르만은 생각했다.
이 사태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이해해줄 수 있다. 아마 반대의 처지였다면 자신 역시 비슷하게 복수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순순히 죽어주겠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다.
온갖 거지 같은 꼴은 다 본 끝에 겨우 건진 목숨을.
절대로 이따위로 날릴 수는 없었다.
제르만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쥐었고.
바닥에 널린 흙을 집었다.
"이 망할 놈들이!"
그리고 주먹에 가득한 흙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벌떡 일어나 습격자들의 시야를 가렸고.
"끄, 끄아아아악!"
"뭐, 뭐야! 이 새끼 미쳤어!"
그 끝에.
물었다.
한 놈의 어깻죽지를.
마치 짐승처럼.
가차 없이.
"떼어내! 어서 떼어내! 내 목 다 뜯긴다고!"
"이 새끼, 무슨 힘이...!"
어깨를 물린 습격자 중 한 명이 예상치 못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자, 다른 동료들은 당황하면서도 서둘러 제르만을 떼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
그러나 그는 절대로 순순히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무는 걸 멈추면 당장 죽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처절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돼, 됐다!"
결국,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어떻게든 힘으로 제르만을 떼어낼 수 있었지만.
"끄아아아아!"
제르만은 혼자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가 피범벅의 얼굴로 무언가 사정없이 질겅질겅 씹어내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살벌한 광경을 보고 잠시 습격자들이 넋을 잃는 동안.
퉤!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무언가를 거칠게 뱉어냈다.
흙바닥에 잔뜩 다져진 핏빛 살덩어리가 달라붙었다.
누가 봐도 그 살덩어리의 출처는 명확했다.
"이... 너, 절대로 쉽게 죽이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살덩어리의 주인이자, 어깻죽지를 조금 상실해버린 당사자가 마차 저주를 토해내듯 핏빛 눈깔로 으르렁거렸다. 그의 동료들 역시 이전보다 훨씬 더 기세가 사나워졌다.
하지만 피범벅의 제르만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적의가 다시 한번 충돌하기 직전.
바로 그 순간.
"지금 다들 뭐 하는 거냐?"
때마침 주위를 지나가던 니카로스 남작이 나타났다.
그렇게 모두가 굳어버렸다.
***
하여간, 진짜.
처음에는 도대체 이게 뭔 상황인지 이해가 안 갔는데, 막상 사태를 벌인 면면들을 보니 단박에 이해가 갔다.
그래, 제르만이 좀 많이 비호감이긴 했어.
반 정도는 내가 의도한 거긴 하지만, 나 아니었어도 이미 본인 스스로 쌓아놓은 업보부터가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얼마든지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설마.
포로 신분에서 풀어주자마자 곧장 내 앞마당에서 이렇게 치고받고 싸울 줄이야.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
조금 전까지 서로를 아예 죽여버릴 기세로 다투던 그들은 내 한숨 소리에 마치 합죽이라도 된 듯 모두 입을 다물어버렸다.
'내 개인적인 무력이 무서운 건지, 아니면 이 근방에 널려 있을 내 병사들이 무서운 건지.'
어쨌든 날 보면 뭔가 겁이 나는 게 있긴 한 모양이네.
하여간 나로서는 상당히 괘씸한 상황이다.
설마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내가 풀어주겠다고 선언한 놈들을 내 앞마당에서 자기들끼리 대놓고 조져놓은 셈이니까. 나를 무시했다고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아마 일반적인 귀족이라면 아무튼 소요를 일으킨 죄로 여기 모두를 잡아다가 박살을 내놨겠지.'
다시는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솔직히 지금 이 불쾌감을 생각하면 나라고 딱히 못 내릴 결정은 아닌 것 같지만.
"...."
어째서인지 그 결단을 내릴 생각보다는, 저 피투성이가 되어 숨을 헉헉거리는 제르만에게 더 신경이 쓰였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일단 여러모로 의외야.'
저 뺀질이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 거니까.
사실 이 바보들에게 말을 걸기 조금 전부터, 적당히 입 다물고 떨어져서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이 헛짓거리를 언제까지 할지 그만 궁금해져서.
그래서 그렇게 보다가.
자연스럽게 제르만의 최후의 대반격까지 봐버렸다.
그래, 사실 생각해 보면.
저 녀석 출신도 모를 도적치고는 묘하게 머리가 잘 돌아가긴 했지. 합리적인 판단도 잘 하고, 일 처리도 제법 빠릿빠릿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저 독기가 특히나 인상 깊었다.
'아주 반전 매력의 소유자였네, 이 녀석.'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혹시나 저 녀석?
써 먹어볼 수 있지 않을까?
저런 독기 품은 겁쟁이에게 딱 맞는 그런 역할로?
상당히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미 든 생각을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따라서 나는 짧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길게 설명하기도 귀찮군. 일단 너희들을 굳이 처벌하지는 않겠다. 다들 빨리 내 영지를 떠나라. 크게 다친 인원 하나만 원한다면 성에서 치료를 받고 가고."
"가, 감사합니다, 남작님...!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잊든 말든. 딱히 중요하지는 않다.
그냥 나처럼 모범적인 신사가, 풀어주겠다고 한 약속을 이런 식으로 어겨버리는 건 조금 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린 결정일 뿐이니까.
품위를 깎아서 필사적으로 이득을 챙기는 것도 상대가 격이 맞을 때나 어울리는 일이지.
"그리고 제르만 씨."
"네, 네...!"
어차피 메인 디시는 이쪽이다.
다친 탓인지 긴장한 탓인지, 제르만은 잔뜩 몸을 떨며 마치 기침을 토해내듯 대답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태연하게 제안했다.
"저랑 일 몇 가지 같이 해 볼 생각 없습니까?"
"네, 네...? 일, 말씀입니까...?"
응, 그래.
일. 업무. 임무. 어쨌거나 그런 거.
조금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잔뜩 당황한 제르만을 전혀 기다려주지 않고, 나는 바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일단은 저와 함께 에우스페나로 가는 것으로 첫 임무를 시작해보죠."
그래, 일단은 바로 옆에 붙여놓고 과연 싹수가 어떤지부터 확인해보자고.
"아니, 네? 그게 무슨...?"
물론 너에게 건네는 제안이긴 한데, 슬프게도 너에게 선택권은 없어.
그래도 치료는 가는 길에 확실히 제대로 해줄게.
이 정도면 너도 좋지?
#053. 붉은 태동 (6)
주황빛 머리에 녹색 눈동자.
전신을 뒤덮은 고급 가죽 갑옷.
놀랍게도 한 젊은 여성이 홀로 에우스페나의 으슥한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에우스페나가 제국 동부 최대의 도시이긴 하지만, 그 때깔만 좋은 위상과 반비례한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치안은 좋지 못한 곳이다. 이런 뒷골목을 젊은 여성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절대로 추천하지 않을 정도로.
"...하."
그러나 그녀는 바로 그 악명의 중심에 있음에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주위 환경에는 제대로 시선조차 주지 않고, 태연하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오직 답답함과 약간의 자조가 전부. 나쁜 치안에 대한 걱정 따위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 그저 자신의 처지가 스스로 우스웠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주 우수한 인재였다.
제국 어디를 가서도 최상위권의 자리 정도는 큰 공을 들이지 않고도 쟁취할 수 있을 만큼.
그것도, 항상.
그렇기에 당연히 이 넓디넓은 제국에서 그녀를 필요로 하는 곳은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그만큼 모두가 좋은 대우 또한 약속했다. 가서 잘할 자신 또한 있었다는 것은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였다.
그러나 주위의 예상을 뒤엎고 그녀는 그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거절하고 거절한 끝에 목적도 없이 비틀비틀 이 변방까지 흘러들어왔다.
"...."
참으로 재밌게도 발레리아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남들에게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아니, 남들뿐만이 자기 자신에게도 설명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의 문제인데도 어째선지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바로 그 점이 그녀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고는, 그냥 그 어떤 제안도 그녀의 뿌리 모를 갈증을 채워주지 못했다는 것뿐.
'바보 같긴.'
바로 그 사실이 우스웠기에 발레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키는 게 없는 이유라도 명확히 알았으면 이렇게 고민할 일도 없었을 텐데.
그렇기에 그녀는 막연히 이 변방까지 왔다.
수도에서는 도저히 찾지 못한 답을 어쩌면 여기에서는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그러나 결과는 암울했다.
동쪽 가장 변방에 있다는 에우스페나 공작령까지 와도 답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녀의 시선은 에우스페나보다 먼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대로 더 가면 아예 월광교 접경지대인데....'
그 시선에 담긴 망설임.
과연 거기까지 가면 답이 나올까.
그곳이라고 무언가 특별한 게 있을까.
그렇다.
그녀는.
발레리아 트리하스는.
제국의 황실 아카데미의 마법학과 졸업생은.
이 땅 어디를 가든 우대받고 환영받을 인재는.
정처 없이 변방을 떠돌고 있었다.
"발레리아 트리하스 씨 맞으십니까?"
어떤 한 사내가 그녀를 알아보고.
말을 걸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발레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뭐야?"
그곳에 있는 것은 한 흑발의 청년이었고.
그녀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서른은 넘었나...? 아니, 자세히 보니 훨씬 어린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눈앞 청년의 나잇대를 쉬이 유추할 수 없었다.
확실히 하나하나 이목구비를 자세히 뜯어 보면, 아직 성인이 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20대 초반의 티가 나긴 했다. 아카데미에서 많이 본 후배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첫눈에 들어오는 인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얼굴 곳곳에 남아 있는, 덜 아문 상처들.
옷 위로도 알 수 있는 건장하고 단단한 몸.
평소 자주 짓는 웃음이 그대로 흔적이 되어 남은 자신만만한 인상.
그리고 무엇보다.
마치 맹금류를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황금빛 눈동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는 단순히 어린 청년이 아니었다.
그녀가 여태껏 질리도록 본, 아카데미에 널려 있는 유약한 도련님들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다.
'...원래 변방 사람들은 죄다 저런가.'
무의식적으로 발레리아가 그렇게 생각하던 중.
어느샌가 남자와 그녀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잠시 시간을 내어줄 수 있으실까요?"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발레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전부를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확신에 가득 찬 남자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하자.
발레리아 트리하스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
발레리아와 흑발의 남자는 가까운 찻집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가운데에 놓고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다.
'확실히 여기가 동쪽은 동쪽이네.'
동부 최대 도시 에우스페나의 카페라 그런가.
가게는 서쪽에서는 보기 힘든, 대초원을 건너온 질 좋고 귀한 동방의 찻잎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물론 전반적인 수준 자체는 수도 카일룸에 미치지 못했지만, 이색적인 체험을 위해 한두 번 정도 방문할 가치는 있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한낱 카페의 수준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쪽이 인근 남작령의 영주시라고...."
발레리아는 나직한 목소리로 남자의 말을 정리했다.
가게에 도착한 뒤, 흑발의 남자는 자신의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혔다.
그는 자신이 니카로스라는 인근 영지를 다스리는 남작이며, 그녀를 영지 마법사로 고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발레리아의 입장에서.
솔직히 이성적으로 말하자면 실망이었다.
지혜로운 선배들과 마법이란 학문을 연구하는 것.
부유한 영지의 마법사가 되어 부를 추구하는 것.
황제의 군대로 이름 높은 '황실군'에 소속되어 명예를 쟁취하는 것.
마법사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제안이란 제안은 모두 받았고, 그조차도 전부 뿌리치고 온 발레리아다.
그런 그녀에게 고작 약소한 시골 영지의 마법사 자리라니. 내킬 리가 없었다.
그나마 좋게 봐줄 점이 있다고 한다면, 기껏해야 영주가 직접 찾아왔다는 정도?
수도의 부패 돼지들처럼 짜증 나게 생기지도 않았고.
적어도 얼굴은 제법 봐줄 만했다.
노골적으로 말해 평소 발레리아의 성정을 생각하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
그러나 발레리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건 이성이 아닌 본능의 판단에 더 가까웠다.
"일단 말은 편하게 할게. 괜찮지?"
그렇기에 발레리아는 우선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약소하다지만 상대는 귀족.
마법사의 오만함이야 이미 세간에 널리 퍼져있는 상식이나 마찬가지지만, 그걸 고려해도 귀족을 상대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무례한 말투였다.
귀족과 마법사.
속내야 어떻든, 겉으로는 상호 존대하는 관계니까.
사실 발레리아도 상대가 지나치게 건방지고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 존중과 예의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예외였다.
"네,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이렇게 강한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집어 삼켜질 것 같으니까.
'...그것도 머리부터 아주 잘근잘근.'
니카로스 남작은 웃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아는 그 모습마저 편하게 여길 수가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발레리아는 알 수 있었다.
'저 남작... 내 머리 꼭대기에 있어.'
그리고 그걸 대놓고 티 내고 있다.
그 사실을 이미 자각하면서도,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가 않아 그녀는 도리어 더 강하게 나갔다.
"어떻게 알고 온 건진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지나치게 주제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남작이 보통 영지 마법사를 고용할 수 있나? 심지어 나는 아카데미까지 나온 정통 마법사라고?"
몹시 노골적인 표현이지만, 틀린 이야기는 또 아니다.
세계에서 제일 발전된 제국도 견실한 백작령 정도는 되어야 마법사를 보유하니까.
남작 주제에 꿈이 지나치게 크다는 말을 들어도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그렇기에 니카로스 남작도 그 점은 겸허히 인정했다.
그는 머쓱하다는 듯 웃었다.
"하하, 틀린 말은 아니네요. 일단 근래 우리 니카로스가 월광교 소국 두 개를 정벌해서 규모가 제법 커지긴 했는데... 이것도 딱히 발레리아 씨께서 크게 흥미를 품을 이야기는 아니겠죠."
그러나 겸허히 인정하면서도 전혀 개의치는 않았다.
그는 그저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일개 남작이 소국 두 개를 정복했다는 이야기는, 그녀에게 있어서도 제법 놀라운 소식이긴 했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우리 니카로스에는 다른 영지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니카로스만의 유일한 장점이 있습니다."
또.
또 저 눈이다.
니카로스 남작이.
아까와 같은 눈으로 발레리아를 보고 있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바로 그 눈.
하지만 그 답을 절대로 쉽게 내어주지는 않겠다는 바로 그 눈.
"...그게 도대체 뭔데?"
지금 그녀가 간절히 답을 찾는 일종의 구도자였기에.
발레리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렇게 물어 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과 달리, 니카로스 남작은 무척이나 순순히 입을 열어 대답을 해주었다.
"끝없는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뭐?"
그러나 그 친절한 대답에도, 발레리아는 그런 멍청한 반문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어이가 없는 이야기지 않은가.
끝없는 전쟁이라니.
'...그게 어떻게 장점이야?'
단점 중의 단점이라면 몰라도.
지금 이 건방진 남작이 나에게 장난을 치는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어 버린 발레리아는 발끈했다.
"이봐, 너...! 설마 그딴 헛소리나 하려고 나를 부른 거야? 내가 우스워 보여?"
분노, 격양.
마치 그녀의 감정을 그대로 반영하듯, 어느새 발레리아의 손끝에서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주 선명하고 붉은 불꽃이.
난데없이 마법사에 의해 펼쳐진 그 위협적인 광경에 가게에 있던 다른 손님들이 모두 놀라 두려움에 떨었지만, 단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그 위협을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서 느끼고 있을 니카로스 남작은, 그저 이상하고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 얼굴 어디에도 경악과 공포 따위의 감정은 없었다.
그 얼굴을 보고 오히려 발레리아가 멈칫하며 먼저 손안에 담았던 불꽃을 꺼트렸다.
"...장난을 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해하셨다면 사과드리지요."
불이 꺼진 것을 본 니카로스 남작은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다면 뭐야?"
"하하, 생각해 보세요."
발레리아의 물음에 남작은 낮게 웃었다.
"그 전장 한가운데 있을 발레리아 씨의 모습을."
그 태도는 여전히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한가운데서 발레리아 씨가 할 행동들을."
정말로 이상한 말뿐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남작의 말에는 호소력과 설득력이 있었다.
덕분에 발레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상상을 해 버리고 말았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전장이라는 세계를 상상 속에서 방문해 버리고 말았다.
"...."
사방에서 적이 몰려온다.
오직 그녀를 죽이기 위해.
당연한 일이겠지.
전장의 마법사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만큼 가장 먼저 표적이 되니까.
그래서 그것이 두려운가?
적을 저지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하는 게 무서운가?
'...아니.'
그녀는 스스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샌가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으니까.
여태껏 겪어 보지 못한 그런 두근거림이 그녀의 전신을 잔뜩 흔들었다.
몸의 주인인 발레리아 자신조차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게 발레리아 씨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런 걸 제가 제 입으로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겠죠. 물론 무례한 일이기도 하고요."
어느새 니카로스 남작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정말로 즐거운 일이라도 겪고 있는 것처럼.
이제 발레리아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어차피 발레리아 씨도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알고 있기에 여기까지 온 것 아닙니까? 그저 헛된 권세에만 집착하는 수도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일이니까."
저건 단순히 그녀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 표현으로는 모든 걸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발레리아 씨가 원하는 것은 저희 니카로스에 있습니다."
저건 동류를 보는 눈이다.
적어도 발레리아는 그렇게 판단했다.
저건.
공감인가...?
남작과 발레리아가 같은 부류의 인간이기 때문에.
남작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이다.
발레리아 스스로 모르고 있던 부분까지.
"저와 함께하시겠습니까?"
니카로스 남작이, 티베리오스 발란티스가 고했다.
한 글자씩 또박또박.
"작열(灼熱)의 발레리아."
그녀가 난생처음 듣는 별명과 함께.
마법사의 별명은 고유한 것이며 명예로운 것이다.
마법사로서 지니는 자신만의 고귀한 가치를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막 아카데미를 졸업한 발레리아는 아직 별명을 얻지 못했지만, 곧 남 부럽지 않을 별명을 쟁취할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붙여서 부르다니.
무례함에도 정도가 있다. 다른 마법사라면, 다른 상황이라면 당장 지팡이를 꺼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정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작열.
이글거리며 뜨겁게 타오른다.
무엇을 연료로 타오를지는 너무나 뻔했다.
전장에서 태울 것이라고는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
사람.
누구보다 우수한 화염 마법사.
발레리아는 찾아 헤매던 것을 마침내 깨달아 버렸다.
자신의 공허함을 채울 조각이 바로 저것이었다.
"...니카로스 남작, 티베리오스라고 했지?"
"네."
그래, 발레리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수도에서 찾지 못한 답이 바로 이 변경에 있었다.
"일단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
물론 그걸 저 시건방진 영주 앞에서 대놓고 인정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갑자기 모든 것이 드러나 버렸다.
난데없이 마치 발가벗겨진 기분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발레리아는 붉어진 얼굴로 그렇게만 대답했다.
#054. 사교의 장 (1)
니카로스 남작령의 영주 티베리오스와 마법사 발레리아가 대화를 위해 찻집에 들어간 뒤.
두 명의 사내가 가게 근처를 마구 서성거리고 있었다.
"...얌전히 좀 있어라. 누가 도적 나부랭이 출신 아니랄까 봐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군."
아니, 정확히는 한 명의 사내만이 서성거리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그 곁에서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네? 아, 아이고, 죄송합니다, 기사님. 제가 영 불안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하하하...."
지적받은 사내.
전 도적단의 부두목이자 어버버 하는 사이 갑자기 니카로스의 가신이 되어버린 남자, 제르만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이 새파랗게 어린놈이, 말본새 보소.'
사실 자신보다도 훨씬 어린 녀석에게 대놓고 지적을 당하는 게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제르만은 관대하게 속으로만 투덜거리는 것으로 그를 용서해주었다.
'...망할, 칼 든 기사만 아니었어도 확.'
지적한 사내.
티베리오스의 호위 기사 아르센의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해 보였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 사실 그냥 제르만은 겁먹은 것뿐이다.
제르만은 원래 그렇다.
"...."
아르센은 그런 제르만의 빈 껍데기 같은 사과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더 뭐라고 하지는 않고 곧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제르만이 본 대로, 지금 아르센은 그다지 기분이 좋지 못했다.
'대체 영주님께서 무슨 생각으로 저런 녀석을....'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아르센은 영주 티베리오스를 존경한다.
단순히 그의 직위에 대해 기계적인 충성을 바치는 게 아니라, 티베리오스라는 한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사실에 대해 스스로 개인적인 자부심 또한 가지고 있다.
애초에 영주의 명령 하나에 곧장 원로 중 한 명이던 제노비오스 집사장을 체포해서 대령할 정도였으니 그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수준.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며칠 전 영주가 내린 명령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 아르센 경, 이 자는 우리의 에우스페나 방문 일정 동안 동행할 제르만입니다. 앞으로 얼굴을 자주 보게 될지도 모르니 가능하면 사이좋게 지내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영주님께서 지금의 눈앞에 보이는 저 도적놈을 데려오셨지.'
사실 굳이 영주 티베리오스가 소개해주지 않았어도 아르센은 이미 제르만에 대해 알고 있었다.
검은 매의 기사단 소속인 아르센 역시 붉은바위 도적단 토벌에 직접 참전했었고, 도적단의 부두목이 모든 기밀과 간부 동료를 팔아넘기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는 니카로스 내에서도 제법 화제가 된 소식이었으니까.
'...한심한 녀석.'
그리고 아르센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제르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충성심을 가장 고귀한 가치라고 학습 받은 한 사람의 기사로서 애초에 그런 배신자 따위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영주님께서는 저 비루한 녀석을 어떻게든 활용해보실 계획인 듯하지만....'
기사 아르센은 이번 한 번만큼은 영주 티베리오스가 틀렸으리라고 예상했다.
저런 비열한 얼간이에게 쓸모 같은 게 남아있을 리가 없으니까.
'하루빨리 영주님께서 생각을 바꿔 주시면 좋겠군.'
이번 에우스페나 방문 일정을 끝마칠 때 즈음이 되면 분명 영주도 생각을 바꾸겠지.
기사 아르센은 묵묵히 그렇게 생각하며, 찻집으로 들어간 영주를 기다렸다.
***
'됐나?'
아닌가?
아직인가?
설레발인가?
다시 한번 판단해봐야 하나?
아니.
아니다.
'이건 됐다...!'
마침내 발레리아 트리하스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고 답변했다.
설마 오만한 마법사가 괜히 예의 같은 걸 차린답시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그러지는 않을 테고.
그러니까 이건 정말로 긍정적인 신호가 맞다.
"...!"
솔직히, 티는 안 내려고 엄청 노력했지만.
진심으로 긴장했었다.
까딱하면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나의 설득 계획이 죄다 박살 날 뻔했으니까.
그래.
나의 계획은 분명 매우 합리적이고 그럴듯했다.
적어도 내가 처음 생각했던 바로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무엇보다 나는 이미 발레리아 트리하스라는 인간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발레리아 트리하스.
원작 게임 <마이트 앤 로열>의 고정 네임드 캐릭터.
정확히는 지금보다 몇 년 정도 지난 시점부터 게임 속에서 고정적으로 나타나는 NPC.
그리고 나는 그 <마이트 앤 로열>을 수천 시간이나 플레이한 고인물이었으니,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작열(灼熱)의 발레리아.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천재 마법사.
그리고.
'...희대의 미치광이 방화광.'
내가 과장하는 게 아니다.
그냥 순수하게 담백한 진실이 그렇다.
사실 근본적으로 발레리아는 매우 우수하고 뛰어난 엘리트 마법사였다.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사실만으로 말을 다 할 정도로.
하지만 고작 그 정도 표현만으로는 결코 그녀를 온전히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아직 내가 사는 지금 이 세상에서는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지만, 놀랍게도 엘리트 마법사 발레리아는 졸업 직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잠적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나타난다.
'바로 제국의 용병 업계에서 말이야.'
그래, 우리의 바보 안티모스도 있던 거기 맞다.
이 일은 호사가 사이에서도 제법 오랫동안 화제가 됐을 정도로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아카데미까지 나온 정통 마법사가 용병 업계 따위에 투신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니까.
고위 귀족의 영지 마법사, 황실군, 연구소....
만약 그녀의 목적이 명예나 돈이었다면, 용병보다 훨씬 더 좋은 선택지는 널리고 널렸었다. 그런데도 용병을 선택했으니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던 것이다.
하지만 전말을 다 알고 난다면 이해할 수밖에 없다.
나처럼.
'애초에 그녀는 그런 걸 원한 게 아니거든.'
원작의 발레리아가 원했던 것은 오직 하나.
'사람을 태우는 즐거움.'
대체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즐거운 건지.
선량한 소시민인 나는 도저히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원작의 발레리아는 그런 걸 즐겼다. 그녀는 오직 그 즐거움만을 추구해서 용병이 되었다.
'사실 합리적이라면 합리적인 선택이긴 해.'
이미 싸우는 법 따위는 잊어버린 채 권력 다툼에만 집착하는 황실의 군대에서는 제대로 된 실전을 겪을 수 없었고, 그 대신 현 제국에서 가장 전투와 친밀한 것이 바로 용병이었으니까.
그러니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거다.
미치광이의 기준으로는.
발레리아 트리하스.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진짜배기 광인.
통제되지 않는 화염의 마법사.
하지만.
'도리어 그렇기에 내가 발레리아를 찾아다닌 거거든.'
굳이 욕심쟁이 가스파르 영감에게 부탁까지 할 정도로 간절하게 말이다.
잘 생각해 보자고.
발레리아가 원하는 모든 것, 나도 제공할 수 있잖아.
그것도 용병 업계보다 훨씬 더 막대하게.
'전쟁, 전장, 사투, 외적....'
그게 무엇이든.
아까 그녀가 말한 대로 일개 남작령이 영지 마법사를 고용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
그렇기에 당연히 나도 일반적이지 않은 맞춤형 전략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니카로스가 가진 거라곤 끝없는 전쟁뿐인데.
어라, 저기 저 마법사는 전장에 환장하네?
아직 원작에 등장도 안 하는 캐릭터라 노리는 사람도 나밖에 없네?
이 점을 잘 홍보하면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분명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물론 그런 방화광을 영지에 들이는 것에 대한 걱정은 있었다. 심지어 나는 그런 광인과는 180도 다른 영역에 있는, 선량하고 섬세한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그 정도로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마법사 지금의 니카로스에 올 이유는 전혀 없으니.'
슬픈 이야기긴 하지만 어쨌거나 현실이 그랬다.
따라서 나는 전력을 다해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다.
극악무도한 방화광과 함께할 각오 역시 했다.
하지만.
'이게 뭐지...? 지금 내 눈앞에 있어야 할 미친 방화광은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리고, 그냥 평범하게 까칠한 사회 초년생밖에 안 남아있는 거지...?'
이런 상황은 각오하지 못했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 끝없는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 ...뭐?
원래 계획대로 그녀에게 우리 영지에 전쟁이 잦을 거라고 자랑하자 발레리아는 농담하지 말라며 화를 냈다.
그것도 불꽃까지 마구 뿜어내며 엄청 살벌하게.
그 순간 내가 느꼈을 당혹감과 공포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깨닫고 말았다.
'아니, 왜 정상인이냐고...!'
지금 저 여자.
아직 방화광이 아니구나!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나는 당연히 발레리아의 저 방화광 성향이 천성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확신까지 한 건 아니다.
나 역시 지금 시점의 발레리아를 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하지만 그만큼 미친 취향이 하루아침에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이건 내가 억울해해도 된다.
나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홀로 부정한다고 한들 이미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 바뀌지는 않았다.
나는 결국 살아남기 위해 생각보다도 훨씬 더 필사적으로 입을 털 수밖에 없었다.
- 생각해 보세요.
- 그 전장 한가운데 있을 발레리아 씨의 모습을.
- 그 한가운데서 발레리아 씨가 할 행동들을.
- ....
다행히 최대한 여유로운 척하면서 털어준 보람이 있는지, 어떻게든 새까맣게 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녀를 솔깃하게 만드는 데도 성공한 것 같다.
그리고 간신히 그 상황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설마 이 시기의 발레리아는 본인의 기질을 아직 자각하지 못했을 줄이야.'
설정에 있는, 이맘때 즈음 몇 년 동안의 공백 기간은 바로 그 자각을 위한 자아 찾기 시간이었던 건가.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되긴 한다.
'...만약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생기면, 지금보다는 더 꼼꼼하게 준비해야겠지.'
자타공인 반성의 달인답게 나는 설득이 대충 끝나자마자, 3분 카레처럼 쉽고 빠르게 반성을 완료했다.
그래, 어쨌거나 진정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은 성공했다는 것이니까.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우수한 마법사가 나와 함께할 가능성이 생겼다.
심지어 덜 미쳐있다면 나에게 더 이득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간신히 안도한 나는 맞은편에 앉은 발레리아를 보며 빙긋 웃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신다니 굉장히 기쁘군요."
"...오해하지 마. 아직 확정한 건 아니야."
예상보다는 훨씬 정상인인 광인.
발레리아 양이 고개 숙인 채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나도 벌써 그 정도 김칫국을 벌컥벌컥 마시진 않아요.
"이해합니다. 지나치게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지요. 아무래도 발레리아 트리하스 씨도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듯하고."
그리고 여기서 대답을 재촉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고 말이야.
"그러니 이틀 뒤에 다시 만나는 게 어떠신지요?"
"어? 어, 굳이... 아, 그래, 조, 좋아. 그렇게 하자."
다음 약속을 잡은 것만으로 오늘은 대성공이다.
기쁘게도 발레리아는 순순히 승낙해주었다.
"그러면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길."
"...뭐야? 벌써 가려고?"
그렇기에 흐뭇하게 자화자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의외로 발레리아가 그런 나를 보며 의문스럽다는 듯 물었다. 어쩐지 조금 얼떨떨한 기색 같기도 했다.
하긴.
혼란스러울 만도 하지.
만약 나의 추측이 옳다면 아직 스스로 자각도 못 하던 기질에 대해, 나 때문에 조기에 감을 잡게 된 셈이니까 말이야.
물론 내가 없었어도 몇 년 안에 혼자만의 힘으로 알아서 자각해내긴 했을 테지만, 그래도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 나도 일말의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책임감 있는 어른답게, 그냥 친절하게 웃어만 주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
그래, 이 시점에서 타인의 백 마디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니.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정리할 시간뿐이다.
발레리아도 나의 말에 바르다고 판단했는지, 입만 잠시 우물거리고는 나를 더 붙잡지는 않았다.
"...."
어쩐지 대신 표정이 조금 더 뚱해진 것 같기는 하지만, 이 역시 그냥 혼란과 답답함의 일환이겠지.
원작의 그녀도 자존심이 센 캐릭터였으니까 말이야.
"그럼 안녕히."
그렇게 나는 오늘의 성공을 자축하며, 발레리아를 찻집에 남겨둔 채 룰루랄라 떠났다.
에우스페나까지 온 김에 다른 일도 좀 처리하다 보면 이틀이야 금방이지.
아이 신나.
#055. 사교의 장 (2)
발레리아와의 보람찬 만남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곧바로 사이좋게 서로 데면데면하고 있는 아르센과 제르만이 보였다.
'...딱 봐도 서로 엄청 껄끄러워하는 중인걸.'
사실 이럴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우리 영지를 침략했던 전직 도적 출신의 제르만과 영주를 지키는 게 핵심 업무인 호위 기사 아르센의 상성은 그냥 딱 봐도 엄청 최악이니까 말이야.
게다가 뺀질이 겸 겁쟁이 제르만과 군기 바짝 든 초원 출신 아르센의 개인 성격 차이도 있을 테고.
"영주님! 나오셨군요! 만남은 잘 끝나셨습니까!"
내가 두 사람을 볼 때 즈음 두 사람도 나를 발견했는지, 아르센이 밝은 웃음과 함께 성큼성큼 다가왔다.
'진짜 표정이 휙휙 바뀌네.'
근래 새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르센은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실 상당히 무뚝뚝하고 배타적인 편이었다.
문제가 될 정도로 예의가 없다거나 괜히 까칠한 수준까지는 아니다. 아르센은 깐깐한 우리 영지 원로들에게도 두루두루 인정받는 차세대 인재 중 한 명이니까.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 정도? 그냥 개인적인 성향이 그렇다는 거지.'
그나마 비슷한 또래의, 같은 초원 출신 기사단 동료들과는 친하게 지내는 듯하지만, 아무래도 그 조건을 만족하는 친구들의 머릿수가 그다지 많지는 않고.
'사실 어떻게 보면 나쁘지 않은 덕목이긴 해.'
기존 파벌과는 연이 없고 젊은 인재라는 건, 영주에게는 상당히 반가운 특징이거든.
특히 슬슬 영지의 체제를 다듬어볼까 하고 고민하는 나에게는 더더욱.
그렇기에 이렇게 갑작스러운 일정에도 종종 데리고 다니는 것이기도 하다.
나도 조금 더 지켜보고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아서.
'반면 이쪽의 바보 제르만은....'
나는 아르센의 옆쪽으로 쓱 눈을 돌렸다.
"어, 음, 고생하셨습니다, 영주님...?"
며칠 전에 보였던 그 치열한 독기는 모두 어딘가로 스르륵 증발해버리고 그냥 반쯤 얼만 빠져있는 모습.
에우스페나까지 오는 동안 치료도 성심성의껏 해주고 특별히 부하로 삼아주겠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줬는데도, 우리의 제르만 씨는 여전히 현실감을 못 찾고 있었다.
아, 참고로 그 치료는 당연히 아르센이 야전 방식으로 해줬다. 영주가 직접 그럴 걸 할 수는 없잖아.
"...."
어쨌거나 아무리 관대하고 마음씨 좋은 나라도 저런 제르만의 모습을 보면 살짝 답답해질 수밖에 없지만, 어쩔 수 없지. 인제 와서 말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일단은 아직 제르만도 일종의 신입 사원 같은 존재니 그럴 수 있다고 너그럽게 생각하며 나는 두 사람에게 대답했다.
"하하, 다행히도 일이 계획대로 잘 풀린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바깥에서 대기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이라뇨! 그게 바로 저의 소임입니다."
과연.
'저희'가 아니라, '저'의 소임이라.
어쨌거나 두 사람을 바깥에서 너무 하염없이 세워 둔 것 같아서, 나도 양심이 조금 따끔한 것은 진실이다.
'그래도 미친 방화광 마법사를 만나는데 굳이 우르르 몰려가서 괜히 더 자극하는 건 악수니까.'
결과적으로 지금의 발레리아는 생각보다 훨씬 더 정상이긴 했지만, 그 까칠한 성격이 어디로 간 건 또 아니었으니 여전히 나 혼자 간 게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다 잘 풀렸으면 됐지.
일이 하나 잘 풀렸으니, 이제는 다음 일을 할 차례다.
"음, 아르센 경?"
"네, 영주님!"
나는 잠시 고민한 뒤 아르센을 불렀다.
"이제 가스파르 씨를 만나고 올 생각인데... 아무래도 그분도 보통 까다로운 성격이 아니다 보니 아르센 경은 먼저 숙소로 돌아가시는 좋을 것 같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영주님."
어쩔 수 없다.
그 괴팍한 할아버지, 나랑 친하긴 한데 누가 귀족이랍시고 으스대는 건 또 별로 안 좋아하거든. 직업상 보안에도 굉장히 신경 쓰는 편이고.
괜히 귀족티 팍팍 내면서 호위 기사까지 줄줄이 데려갈 필요는 없다.
"그러면 분부대로 저는 먼저 숙소로 이동해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영주님."
"아, 그러면 저도 숙소로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 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영주님."
"아, 제르만 씨. 제르만 씨는 저랑 같이 갑시다."
"네...?"
제르만은 따라오라는 나의 짧은 말 한마디에 두 사람의 눈이 모두 토끼처럼 동그랗게 커진다.
"...!"
당혹감과 의아함으로 가득한 제르만의 충격도 만만치는 않지만, 아르센은 숫제 거의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아예 말까지 잇지 못한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반응하고 그래.
이건 진짜 어쩔 수 없어.
미안하지만.
처음부터 저 바보는 데려갈 계획이었거든.
***
그렇게 아르센과 눈물의 이별을 하고.
계획했던 대로 나와 제르만은 곧장 가스파르의 사무실에 방문했다.
"이번 일은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놀랐습니다. 이렇게나 빨리 찾아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나는 오랜만에 가스파르의 얼굴을 보자마자 감사의 인사부터 전했다.
"기껏해야 이름이랑 예상 연령대, 아카데미를 막 졸업한 화염 학파의 마법사라는 정보만 드렸을 뿐인데."
이 감탄은 진심이다.
물론 알아낼 거라고 믿고는 있었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 정보만으로 이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현 위치까지 파악해서, 실시간으로 나에게 전달해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다.
역시 제국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정보상.
성격이 배배 꼬여서 그렇지 능력 하나만큼은.
"흥, 뭘 이 정도로. 당연한 결과인데도 호들갑이 심하구나, 꼬마야."
역시 건방지다.
오만한 우리 가스파르 영감님.
자연스레 머릿속에 이런 감상이 떠올랐고.
"역시 능력만큼 오만하신 분. 존경합니다, 영감님."
"...뭐라고?"
생각해보니 이 감상이 굳이 숨길 것은 또 아닌 것 같아, 그냥 내 속마음을 그대로 표출했다.
영감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왜.
틀린 말도 아니잖아.
"감탄입니다, 절반은."
칭찬도 절반 섞였다고.
"진짜 이상한 녀석...."
잔뜩 삐뚤어진 영감님만 할까요.
"그건 그렇고 영감님은 저한테 감탄 안 하십니까? 제가 월광교 토후국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박살 내고 왔는데요? 영감님 처음에는 그다지 제 승리에 확신을 안 하셨지 않습니까?"
그래, 시하브 토후국 정복한 다음에 따서 갚겠다고 당당히 선언할 때도, 나를 영 미덥지 않은 눈으로 보던 사람이 바로 가스파르 영감님이다.
그런데 보란 듯이 그 두 배를 해내고 왔는데도 어째 별 반응이 없다.
내가 실실거리며 장난스럽게 묻자, 가스파르 할아버지는 또다시 잔뜩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허, 칭찬 같은 걸 바라느냐? 네가 약속한 거니 네가 어련히 다 알아서 하겠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했다고 칭찬받을 생각은 하지 마라. 진짜 꼬마도 아니고."
"...."
하여간.
어디서 말 밉살스럽게 하는 법 과외받고 오시나.
게다가 의심했던 주제에 인제 와서 마치 처음부터 다 알고 있던 듯이 잘난 체를 하다니.
정말 나 같이 겸손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다.
이런 내 심정이 그대로 눈빛으로 드러났는지, 갑자기 가스파르 영감님이 발끈했다.
"그리고 감탄을 해도 네가 해야지! 그 너희 멍청한 집사장이 사고 쳤을 때, 물증을 구해다 준 게 나라는 걸 벌써 까먹은 게냐! 하여간 이 뻔뻔한 녀석!"
이런. 순식간에 나의 약점을 공략하다니.
역시 악명 높은 동방의 돈귀신님.
"하하, 당연히 그 건에 관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을 언제나 품고 있지요. 저는 항상 영감님의 솜씨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그냥 넉살 좋게 웃으면서 넘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나는 현명하게 대처했다.
"하여간 말이라도 못하면...."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결국 영감님도 힘이 빠진다는 듯 화를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른 나라 털어먹은 거로 이자도 꼬박꼬박 보내 주고, 선물도 주기적으로 보내 주고, 서로 좋게좋게 상부상조하는 사이인데 너무 열 내지 맙시다, 할아버지.
우리 친구잖아요.
"...그래서 그건 그렇고, 오늘 널 따라온 저 놈팡이는 뭐 하는 놈이냐?"
잠시 숨을 돌린 영감님이 곧 나의 곁에서 멀뚱멀뚱 서 있던 제르만을 향해 시선을 향했다.
아, 드디어 발견하셨군.
"하하, 그냥 요즘 관심을 조금 두고 있는 부하입니다. 근본은 없지만, 자질은 제법 괜찮아 보여서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는 중입니다."
"그래? 근본이 없어도 너무 없어 보이는데?"
역시 예리하신 분.
하지만 그래도 오늘따라 유독 평소보다 조금 더 맛이 간 상황이라는 건 조금 참작해주세요.
"자, 제르만 씨도 인사하세요. 제국 전역에서 이름 높은 명사이신 가스파르 님입니다."
"어, 그, 처음 뵙겠습니다. 제르만이라고 합니다...!"
맛 간 제르만이 쭈뼛쭈뼛 인사를 건네자, 할아버지는 잠시 그를 유심히 살피더니 곧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굳이 네 이름까지 기억해 놓을 생각은 없다. 그냥 날 귀찮게만 하지 마라."
"음, 아무래도 영감님도 제르만 씨가 마음에 드신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제르만 씨."
"...네?"
"...제발 헛소리 좀 그만하거라, 꼬마야."
뭐, 맞잖아.
저 영감님 성격에 당장 썩 꺼지라고 안 했으면 대충 마음에 든 거나 마찬가지지.
그렇지만 영감님은 이런 깊은 내 생각도 몰라주고 그저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너만 만나면 힘이 다 빠지는구나. 가뜩이나 요즘 머리도 복잡한데."
뭘까.
손녀도 나았는데 이 영감님이 지금 머리 아플 일이 뭐가 있지?
"혹시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러면 저한테 말씀해 보시지요. 제가 또 자타공인 고민 해결의 전문가 아니겠습니까?"
"...네가?"
뭐야. 그 의심과 불신 가득한 표정은.
"손녀분 일도 제가 도와드렸는데, 혹시나 이번 일도 비슷하게 도와드릴 수 있을지 모르잖습니까?"
내가 손녀 이야기까지 꺼내자 가스파르의 눈빛이 바뀌었다.
"하긴...."
그래, 그 사건은 그만큼 특별하니까.
물론 단순히 가스파르 영감님이 아까는 손녀를 내가 구해줬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뛰어난 정보상이던 가스파르조차도 모르던 정보를 내가 알고 있었다는 의미도 만만치 않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렇기에 가스파르 할아버지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흠, 너도 일단 제국의 영주이니 알겠지만 지금 수도는 개판이다. 귀족들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치고받기 바쁘지. 황제는 그냥 왕관 걸이에 불과해."
오, 대놓고 황실 모독까지.
역시 제국 대표 반골 천칭교 이교도답다.
하지만 틀린 말은 또 전혀 아니긴 하지.
당연히 나도 아는 이야기다.
여기 변방이 개판인 것도, 어떻게 보면 전부 그게 근본적인 원인이니까.
"그리고 요즈음 특별히 더 화제가 되는 권력자가 두 사람이 있어."
니코디모스 장군.
그리고 크라테이아 공작.
영감님은 두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니, 슬슬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파악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도 저 둘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
그들 역시 <마이트 앤 로열> 고정 네임드 캐릭터다.
니코디모스 장군.
황실군과 중앙의 병권을 꽉 잡은 제국의 대장군.
현 황제의 외숙부.
명실상부한 제국의 실권자.
크라테이아 공작.
제국 서부의 실질적인 지배자.
서부 대수림의 몬스터 토벌로 단련된 강군의 주인.
중앙 진출을 노리고 있는 젊은 야심가.
나도 원작을 수천 시간 플레이해봤으니 안다.
'확실히 슬슬 두 사람이 충돌할 시기가 되었지.'
이건 딱히 <마이트 앤 로열>의 시스템 따위가 억지로 이끌고 가는 강제 이벤트 같은 게 아니다.
신구(新舊)의 대립.
그저 플레이 시작 시점의 정치적 구도로 인해 자연스럽게 펼쳐질 수밖에 없는 상황일 뿐이다.
"문제는 그 두 사람 모두 한 치의 양보가 없다는 것이지. 적당히 자기들끼리 합의를 봐서 나눠 먹던 한동안의 행태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정말로 사생결단을 볼 기세야."
이제 영감님의 고민이 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중앙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어느 한쪽의 줄을 잡긴 해야 할 텐데... 문제는 어느 쪽이 더 우세한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감을 못 잡겠단 말이야."
"흠, 확실히 그건 고민이겠군요."
결론적으로 가스파르 영감님이 꺼낸 고민은 생각보다 더 진지한 것이었다.
정말로 쉬운 문제는 아니네.
"그래서, 자칭 고민 해결의 전문가라고 했지? 너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느냐?"
어허, 자칭이라뇨.
자타공인이라니까.
어쨌거나 가스파르 영감님은 어느새 어려운 문제를 통해 나를 곤란하게 만든 것이 즐거워진 듯, 씩 웃으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여간.
저 괴팍한 성격을 어쩌면 좋아.
"...."
일단은 한결같은 영감님의 태도를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속으로 웃으며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문제가 쉽지는 않다지만, 사실 이런 상황에서 해답도 못 내놓고 물러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영감님이 조금 밉살스럽기도 하고, 나의 개인적인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영감님과 서로 돕고 돕는 친밀한 관계는 나에게도 큰 이득이 되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면피용 답변을 내놓는 것도 엄청나게 추한 일. 그런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어지간한 사람이었다면 곤란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진퇴양난의 상황.
'하지만.'
나는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거든.
나를 골려줄 생각에 실실 웃고 계신 가스파르 영감님을 마주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비슷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영감님, 정말 운 좋은 줄 아세요.
나 진짜 자타공인 고민 해결 전문가 맞으니까.
#056. 사교의 장 (3)
"제가 생각해도... 확실히 지금 시점에서 결론 내리기는 어려운 문제네요."
제국의 대장군.
니코디모스 장군.
서부의 지배자
크라테이아 공작.
중앙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곧 치열한 정쟁을 벌일 두 사람.
사실 둘 중 누가 이길 것인지 명확하게 한 명을 콕 집는 것은 나로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냥 무수한 가능성의 갈래를 꿰고 있을 뿐이지, 실시간으로 미래를 보고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직접 겪은 수십, 수백의 회차.
커뮤니티를 통해서 본 수천, 수만의 회차.
당연히 니코디모스 장군이 이기는 세계가 있으면 크라테이아 공작이 이기는 세계도 있었고.
반대로 크라테이아 공작이 이기는 세계가 있으면 니코디모스 장군이 이기는 세계도 있었다.
<마이트 앤 로열>의 본질은 시뮬레이션 게임.
모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그렇기에 내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가스파르 영감님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실실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끌끌. 그래, 쉽지가 않지? 그래서 그게 네 결론의 전부냐? 답을 내리기 어렵다는 게?"
어휴, 얄미워라.
어르신을 보면서 이런 기분 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참 여러모로 대단한 양반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번만큼은 크게 짜증 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야.
'지금부터는 나의 반격 타이밍이니까 말이야.'
그래, 힘든 문제는 맞다.
하지만.
'힘든 문제라는 건 힘을 들이기만 하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뜻이기도 하거든.'
나는 고민하느라 잠시 치워둔 미소를 다시 입가에 건 채, 아주 태연하고 느긋한 목소리로 혀를 놀렸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저라면 크라테이아 공작 쪽에 걸겠습니다."
"...뭐?"
내가 너무나도 당당하고 명확하게 이야기한 탓인지 가스파르 영감님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멍청해진다.
그래, 바로 저 표정이 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제가 킬킬거릴 차례인 듯하군요.
호호.
"설마 마땅한 이유도 없이 그냥 아무나 한 명 찍은 건 아니겠지...?"
"설마 제가 그럴 리가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나는 의심만이 가득한 영감님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래, 나도 물론 예언 같은 건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답을 내리지 못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수많은 경험과 데이터.
현재의 추세.
분석.
요컨대 전부.
확률과 통계라는 것입니다.
***
잠시 뒤, 모든 설명과 대화가 끝이 나고.
니카로스 남작 티베리오스가 떠난 자신의 사무실 속에서, 가스파르는 홀로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
티베리오스의 설명은 다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 반, 저번의 실적도 있으니 어디 들어나 보자 반, 이런 감각으로 가볍게 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티베리오스의 말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그가 명확한 정답을 알려준 것은 아니다.
자신이라면 크라테이아 공작 쪽에 걸겠다고 결론을 먼저 내리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확률은 대략 7할에서 8할 정도일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 또한 덧붙였다.
하지만.
'...그 정도만 돼도 터무니없이 높은 수치지.'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한 말뿐만이 아니었다.
충분히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 양측 세력 전체의 힘만 보면 니코디모스 장군 쪽이 살짝 더 우세하겠죠. 아무래도 중앙에 먼저 자리 잡고 있다는 이점을 무시할 수가 없으니까요. 사실상 황실군도 제 사병처럼 부릴 수 있고.
- 그렇지만 싸움이라는 게 단순히 머릿수로만 다 되는 건 아니거든요.
- 아, 물론 머릿수가 제일 중요한 건 맞습니다. 맞긴 맞는데, 뒤집을 요소 자체가 없는 건 또 아니란 거죠.
현재 수도와 황실의 정치적인 구도.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권력의 저울추.
-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장군은 집권 과정 중에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어요.
- 한 땀 한 땀 손수 서부를 규합해서 중앙까지 손을 뻗치는 공작과는 다르게 말이죠.
두 야심가조차 무시하기 힘든 기성 중앙 귀족 세력.
장군과 공작, 각자의 처지와 입장.
그리고 그 두 사람의 개인적 기질까지.
듣고 있던 가스파르가 직접 교차검증 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한 내용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내용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 모든 것을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확실히 그가 보기에도 티베리오스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 하하, 애초에 작금의 제국에서는 황제를 옹립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별다른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 놀랍게도 꼬마 녀석의 말만 믿고 곧장 편을 결정해도 좋을 만큼 말이야.'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동방의 거물, 가스파르의 생각을 더 깊어지게 만들었다.
즉위한 지 아직 몇 년 지나지도 않은.
가장 낙후된 변방의 영주.
- 여차하면 언제든 편을 갈아탈 중앙의 파벌이 최소 둘, 많으면 넷.
그런데 대체 이런 정보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경험이 부족함에도 판단력이 무척 뛰어나다... 그저 그 정도 수준이라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어. 태생적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도 세상에는 많으니까.'
그렇지만.
이건 고작 그 정도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정보라는 것은 더럽게 꼬여 있는 실타래와 거미줄 같은 물건이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파악하기 힘들지만, 그것들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아.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그러니 정보가 퍼지는 것도, 정보를 습득하는 것도, 모두가 흔적으로 남는 마땅한 인과 관계를 지닐 수밖에 없고 말이야.'
틀린 정보는 있을 수 있어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정보는 있을 수 없다. 언뜻 그렇게 보이는 것도 줄기를 잘 타고 올라가면 결국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제국 동부 최대의 정보상으로서.
바로 이 부동의 진리를 지침으로 삼았다.
그 덕에 가스파르는 지금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누구보다 잘 깨닫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
하지만 조금 전 눈앞을 지나간 그 애송이에게는 그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그게 너무나도 의문이었다.
당연히 손녀의 사건이 해결된 이후 가스파르는 티베리오스를 조사했다.
노골적으로 말해 뒤를 캤다고 표현해도 좋았다. 그저 자신조차 놓친 정보의 출처를 알고자 했다.
'그러나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지.'
지리적 특성상 니카로스 남작령이 동쪽 이교도들의 사정에는 제법 빠삭한 면모가 있기는 했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실타래를 드러나지 않는 심복이던 미르코의 소행과 연결할 수는 없었다.
의문은 여전했고.
의문은 오늘 또다시 새롭게 그 크기를 키워나갔다.
변방의 약소 영주는 결코 알 수 없을 정보의 출처.
도저히 밑바닥을 알 수 없는 티베리오스의 머릿속.
그리고 지금 친구를 자칭하는 그 남자가 진정 원하는 것과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얻게 될 이득과 혹시나 위험에 연루될 가능성까지.
의문이 풀린 건 결코 아니었지만, 가스파르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티베리오스가 여태까지 직접 보여준 결실은 명확하다.
그는 결코 재미있는 꼬마로 끝날 인간이 아니다. 그가 앞으로 보일 행보는 이 일대와 자신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사업을 일구는 상인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들 수밖에 없는 의문.
따라서 가스파르는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아직 나로서는 나쁠 게 없긴 하지. 어차피 이미 협력 관계도 맺었겠다, 득이 되는 한 빨대나 계속 꽂아놓자고.'
모르겠다.
그냥 내 이익이나 챙기자.
노회한 가스파르는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
"어떻습니까, 제르만 씨? 옆에서 견학은 잘하셨나요? 따로 느낀 점은 있습니까?"
"네, 네...? 느낀 점 말씀입니까, 영주님...?"
영주이자 고용주, 티베리오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제르만의 눈이 당황으로 동그랗게 커졌다.
느낀 점이라니.
대체 뭘 의미하는 것인지.
물론 티베리오스가 가스파르를 만나는 내내 아무 생각도 없이 딴생각에 빠져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곧 같은 공간 속에 있는 노인이 그 유명한 동방의 돈귀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거물과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대화하는 티베리오스가 놀랍기도 했다.
둘의 대화 주제가 공작과 대장군이 벌이는 제국 중앙의 권력 다툼이라는, 고작 시골의 도적 부두목에 불과하던 제르만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큰 규모라는 것을 깨닫고 아연실색하기도 했다.
"어, 그, 음, 그러니까 말이죠...."
그렇지만 다짜고짜 느낀 점이라니.
지켜보니 정말로 신기했습니다. 고작 이렇게만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제르만은 어떻게든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려 그럴듯한 대답을 뽑아내려고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티베리오스가 조금 더 빨랐다.
"당장 떠오르는 게 없다면 무리해서 대답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고작 시작일 뿐이니까요."
티베리오스는 성큼성큼 걸으며 앞서 나갔다.
그는 그저 느긋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럼 또 어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죠, 제르만 씨."
"다, 다음 장소요? 또 갈 곳이 남아 계십니까?"
"물론이죠. 제가 에우스페나까지 또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릅니다."
***
늦은 저녁.
가스파르와의 대면이 끝나자마자.
티베리오스와 제르만이 이동한 곳은 바로 에우스페나의 집사장, 페트로스 코투니오스의 자택이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남작님께서 시하브 토후국에 이어서 아르잔 토후국까지 정벌하여 변방에 제국의 위용을 한껏 떨쳤다지요? 안 그래도 이 놀라운 소식을 듣고 어떻게 축하를 드리면 좋을지 고민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저의 집까지 찾아와주셔서 무척이나 기쁩니다."
"하하, 오히려 제가 감사 인사를 드리러 오는 게 맞지요. 제가 최근 작은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사실 페트로스 집사장님께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시지 않았다면 모두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니까요."
"작은 승리라니! 겸손이 너무 과하십니다!"
티베리오스와 페트로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마주 보며 반갑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대화의 형식이지, 딱히 그 세부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미 서로가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내뱉는, 흔하디흔한 허례허식에 불과했으니까.
그들은 처음부터 이런 관계의 동맹이었다.
간단히 안부 인사를 건넨 페트로스는 곧 자세를 조금 바꾸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조금 시기가 조금 재밌게 됐습니다. 제가 바로 며칠 전에 남작님께 지원 인력을 보냈는데, 그들이 잘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전에 남작님께서 먼저 여기까지 방문해주실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거든요."
"물론 저도 출발하기 직전 그 이야기를 전달받기는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하루라도 빨리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단 마음이 앞서 버려, 이렇게 급하게 찾아뵙고 말았네요."
"허허, 그렇게까지는 않으셔도 되는데."
웃기고 있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페트로스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결코 티를 내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제가 '특별히 유능한 인재'를 직접 선정하여 파견했으니, 남작님에게도 큰 도움이 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페트로스는 의도적으로 묘한 웃음과 함께 특정 단어를 강조하며 상대방을 떠봤지만, 티베리오스는 그저 태연하게 맞장구칠 뿐이었다.
"물론 페트로스 님의 안목은 언제나 믿고 있지요.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협력 관계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협력 관계."
협력 관계.
분명 서로의 필요에 따라 맺은 동맹이긴 했으나, 페트로스는 오늘따라 그 이름을 밖으로 내뱉는 게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사실 안 그래도 가까운 시일 내에 남작님을 한번 뵙고 싶기는 했습니다. 논의하고 싶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는 잠시 맞은 편에 앉은 니카로스 남작을 천천히 응시했다.
아직 그다지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일이 잘못되고 있지는 않다.
"그냥 전혀 특별하지는 않고 그저 의례적이며 소소한, 우리의 더 끈끈한 번영을 위한 동맹 검토... 네, 대략 이런 논의 말입니다."
다만 그래도 문제가 하나 있다면.
니카로스 남작이 예상보다도 훨씬 더 큰 승리를 거두고 말았다는 것.
처음 니카로스 남작이 시하브 토후국과의 승리를 확신했을 때까지만 해도 페트로스는 반신반의했다.
젊은 영주치고 눈치가 빠르고 말이 잘 통하는 것은 제법 훌륭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점이 전장에서의 승리까지 보장하지는 않으니까.
'특히나 이렇게 암울한 시대에는.'
그렇지만.
놀랍게도 니카로스 남작은 그런 의심을 모두 정면에서 깨부숴버렸다. 시하브 토후국만이 아니라 그 동맹 아르잔 토후국까지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집어삼켜 버렸다.
이대로는 니카로스의 힘이 너무 커지게 된다.
정적이자 에우스페나의 총사령관 아폴로니아를 견제할 무력을 원하기는 하지만, 페트로스는 결코 그 이상을 원하지는 않았다.
까딱하다간 이대로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만다.
"하하,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군요."
그리고.
그런 페트로스의 심리를 분명히 간파하고 있을 니카로스 남작은 한없이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사실 저로서는 걱정하실 것이 전혀 없다고. 우리의 우정은 여전히 약간의 변함도 없다는 대답밖에 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곧 진실이니까.
"...."
그렇게 덧붙이는 남작의 말에 페트로스는 그저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확신과 보장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다행일지 불행일지.
아직 남작의 말을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제가 먼저 제안하고 싶은 바가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죠."
남작의 제안은 무엇일까.
적어도 남작이 품은 욕심을 알게 되면 또 다른 답이 보일지도 모른다.
페트로스 코투니오스는 그렇기에 선선히 수락했고.
"저의 백작 승작 건에 관한 지원을 받고 싶습니다."
"...!"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또한 선선히 대답했다.
#057. 사교의 장 (4)
백작 승작.
"...."
나의 입에서 직접 튀어나온 요청에 순간적으로 페트로스 집사장의 표정이 굳었지만, 그는 노회한 부패 관료답게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조금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내가 그리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니까 말이야.'
제논에게서 물려받은 니카로스 남작령.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정복한 시하브 토후국과 아르잔 토후국의 영토.
그 세 개의 땅을 전부 다 합치면 어지간한 제국의 백작령 정도는 어렵지 않게 넘길 수 있다.
물론 비록 단순히 면적으로만 앞설 뿐이므로 토지의 비옥함이나 영지의 개발 정도는 따로 계산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만한 크기의 체급과 향후 개발 잠재력 자체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또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결실이 백작을 자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
페트로스 역시 그 사실을 금방 깨달았겠지.
그렇기에 그는 지금 고민 중인 것이다.
완전히 허황한 소리라면 몰라.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요청은 결코 아니니까.
"...확실히 지금의 남작님이시라면 그 지위도 충분히 노려볼 만하지요."
짧은 고민 끝에.
그는 순순히 나의 요청을 인정하며 말을 이었다.
자신의 머리가 실시간으로 팽팽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숨기려고 하는 듯, 되려 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이다.
"그리고 저의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인지도 잘 알겠습니다."
페트로스는 자신의 두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다행이네.
눈빛에 욕심만 아주 그득그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말귀는 알아들어서 말이야.
그래, 이건 상당히 오래전부터 내가 고민하고 염두에 두었던 사안이다.
마법사 발레리아를 만나기 위해 에우스페나에 온 김에 다소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꺼내긴 했다. 하지만 이 승작 자체는 섬세하고 길었던 심사숙고의 산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변방 시골의 남작이라는 브랜드만으로는 도저히 큰일을 할 수가 없더라고.'
<마이트 앤 로열> 속 캐릭터에게 명성 수치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처럼, 여기 이 현실 세상에서도 사람의 대외적인 지위가 모든 관계 속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지금까지 정복한 나의 넓은 영토를 제대로 다 소화하고 앞으로 더 큰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는 슬슬 백작 정도의 타이틀은 보유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하, 저도 이래저래 고민을 오래 해봤지만, 아무래도 이런 부탁을 드릴 만한 분이 달리 안 계시더군요. 혹시나 곤란하게 만들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나는 잔뜩 고민하며 조심스러워서 하는 페트로스를 보며 넉살 좋게 웃었다.
남작이 백작으로 승작한다는 것.
사실 듣기에는 거창해 보이지만 의외로 특별한 방법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작위라는 개념은 영지에 따라붙는 것.
요컨대 공작이기 때문에 다스리는 영지가 많은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영지가 많아서 공작인 셈이다.
'역사와 전통이라는 요소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일단 이론적으로는 그렇지.'
그리고 나는 이미 그 최소한의 조건을 충분히 채웠다.
그러니까 막말로 내가 '지금부터 나는 백작이다!'라고 선언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물론 진짜로 그렇게 한다면 주위 모든 영주와의 관계가 파탄이 나겠지만.'
황제와 나의 직속 주군인 공작, 윗선 깡패들의 권위를 대놓고 무시하고 짓밟아 버렸다는 이유로 말이야.
그런고로 가능한 한 원활한 승작을 위해서는 에우스페나 공작의 승인이 있으면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에우스페나 공작을 좌지우지하는 사람 중 하나가 우리의 부패한 페트로스 집사장님이시고.'
이 얼굴값 못하고 부패한 욕심쟁이 아저씨에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바로 이것이지.
"...하하, 그런 말씀 마시지요. 이런 순간에 함께 돕고 이겨내는 게 동맹의 미덕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작님께서는 이미 자격이 충분하시니 당연히 제가 도와야지요."
페트로스는 나의 웃음을 보고는, 마치 질 수 없다는 듯 억지로 따라 미소지었다.
역시 말씀은 참 잘하셔서.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폴로니아 님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분명 그쪽에서 반대할 겁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아폴로니아는 에우스페나의 권력을 양분하고 있고, 나는 그 여자의 정적인 페트로스의 동맹이니까.
그 여자가 나를 방해할 능력도 이유도 아주 충분하다.
"물론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남작님께서 거두신 성과가 워낙 명확하기도 하고, 아폴로니아 그 여자도 지금 그다지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거든요."
페트로스는 마침내 완전히 생각을 정리한 듯, 묘하게 기분 나쁘게 웃으며 그렇게 말을 마쳤다.
"역시 집사장님은 대단하십니다."
"하하, 과찬의 말씀을. 남작님에 비하면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요."
한 차례 영혼 없는 칭찬의 말을 서로 주고받으며, 나는 이 부패 관료 아저씨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페트로스는 이 도시의 모든 예산을 지배하는 권력자.
최악의 상황이 펼쳐져 무력을 통한 정면승부를 한다면 당연히 아폴로니아가 이기겠지만, 평상시 정치적인 분쟁이라면 페트로스가 우위에 있다.
'그러니까 페트로스의 말은 그거지.'
- 불가능한 일은 아닌데.
- 확실히 어려운 일은 맞아.
- 내 정치적인 힘을 상당히 소모해야 하지.
- 그런데 또 내가 대놓고 널 막기에는 명분도 없고.
- 어쨌거나 동맹인 너의 힘이 세지는 게 나에게도 완전히 손해는 아니야.
- 그러니까 너도 내가 혹할 제안을 더 해줘야겠는걸?
'...그래, 이 정도는 당연히 예상했지.'
말 한마디 한마디에 노골적인 욕심이 대놓고 뚝뚝 떨어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못하겠다는 말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다.
그렇기에 나 역시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십니까?"
우리의 계약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확장해보는 건.
"계약 확장, 말씀입니까?"
그래, 계약 확장.
지금까지의 밍밍한 동맹으로는 도저히 네 의욕이 안 난다면 조미료를 좀 더 쳐줘야겠지.
나는 결코 페트로스가 잘못 듣지 않도록,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나의 제안을 명시했다.
"만약 집사장님과 아폴로니아 님 사이에 전면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면, 제가 최소 1,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지원하러 가겠습니다. 그걸 명시하고 약속하는 계약을 맺죠."
"...!"
내 제안을 전부 듣자 페트로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고, 나는 그런 그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믿음과 신뢰가 가득 담긴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 정도면 집사장님의 노고에 대한 보답이 될까요?"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여전히 그는 내 진의를 의심하며 그렇게 물었다.
'이것 참. 속고만 사셨나.'
그래, 이해는 한다.
사실 믿기 어려운 얘기긴 하지.
분명 지난 만남 때도 내가 이미 무력을 동원해 돕겠다는 이야기하기는 했다. 페트로스와의 우정을 대가로.
그러나 사실 그때는 오직 구두로 이야기만 오갔을 뿐,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에도 페트로스도 나의 정복과 승리를 의심했으니까.
그리고 1,000명 이상의 병력이라는 구체적인 숫자까지 언급하며 맺는 계약은, 단순히 이야기만 오가는 것과는 완전히 말의 무게가 다르다.
1,000명이라는 숫자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나에게는 국경을 지킨다는 책무 또한 있으니, 내가 현시점에서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이나 다름없다.
애초에 페트로스가 나와 동맹을 맺고자 한 이유가 바로 나의 무력적인 지원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더할 나위 없이 확실히 보장해준다면.
'솔깃할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그래서 더 의심이 가겠지.
그렇지만 나는 진심이다.
"물론입니다. 이런 일에 식언하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처음부터 내가 먼저 제안했던 거래다.
사실 더 명확해졌을 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페트로스는 에우스페나 정계에 내 편의를 봐준다.
나는 그에게 무력을 지원해 준다.
따라서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계약이 아까 페트로스 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동맹을 더 끈끈하고 신뢰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 않겠습니까? 하하, 우리의 관계를 결코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이런 믿음의 증명이 더해지기 딱 좋은 시기 같군요."
"...확실히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상상 이상의 제안을 들은 페트로스는 천천히 아주 긴 시간을 고민했다.
그래, 안 그래도 슬슬 나를 못 믿어서 행정 지원 인력이라는 이름의 간첩단까지 보내는 양반이다.
우리의 관계를 조금 더 순조롭고 길게 가져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것저것 보장을 해주는 편이 좋겠지.
정말.
내가 생각해도 나는 배려심이 너무 넘친다니까.
"그렇다면, '전면적인 무력 충돌'이라는 조건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계약 이행에 대한 확실한 보장책은?"
"하하, 그런 세부적인 조항은 함께 검토하고 신중하게 조율해보죠. 아직 밤은 기니까요."
"...."
그리고 나의 이런 선의가 보답 받은 듯.
"...좋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도 최선을 다해서 이번 승작 건을 통과시키겠습니다."
마침내 페트로스가 그렇게 대답했다.
"하하, 역시 집사장님이십니다."
협상 타결이다.
나와 페트로스는 손을 굳게 맞잡으며 악수했다.
그리고 나는 웃었다.
그래.
이런 약속 정도야 반드시,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걱정하지 마라.
만약 페트로스와 아폴로니아가 충돌하는 그런 날이 온다면, 나의 군대는 반드시 에우스페나로 향할 것이다.
그 계약은 절대로 어기지 않는다.
'하지만 대신 그곳에서 나의 군대가 무엇을 할지는.'
그 순간의 내가 정하게 되겠지.
내가 좋아했던 이 세상이 그렇듯.
항상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다.
어쨌거나 모두가 만족하는 거래가 성사됐으니, 당장은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지, 페트로스?
***
페트로스와의 만남까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내고.
"그래서 이번에는 어땠습니까, 제르만 씨? 뭔가 더 느낀 게 있나요?"
나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에우스페나의 거리를 걸으며 뒤따라 걷는 제르만을 보고 그렇게 물었다.
내가 페트로스와 하는 대화도 뒤에서 전부 지켜봤으니 이번에도 그래도 좀 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네, 네? 아, 그, 물론이죠, 물론! 이번에는 확실히 느낀 바가 있습니다!"
또다시 잔뜩 당황하는 저 목소리.
솔직히 아무리 들어도 신뢰감은 전혀 생기지 않았지만, 나는 일단 차분하게 저 모자란 녀석이 뱉을 대답을 기다려줬다.
어쨌거나 내 기대만큼 눈치는 없어도, 찾아보면 달리 유용하게 부려먹을 업무가 있을 테니까.
괜히 이런 일로 답답해하고 짜증 내면 나만 손해야.
그러나 이런 나의 속마음과는 달리.
"음, 그... 영주님께서 영지의 번영을 위해 남들이 모르는 곳에서 이래저래 수작을 부리고... 아니, 노력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점을 깨달았습니다."
오.
"그리고 돈귀신과 만날 때도 그렇고 여기 집사장과 만날 때도 그렇고, 영주님께서 가지신 정보나 우위를 바탕으로 매번 상대에게서 필요한 것을 빼먹는... 그러니까 얻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네. 네! 그래서 감탄했습니다...!"
상당히 놀라운걸.
나의 냉소적인 추측과는 다르게 제르만은 기대 이상으로 괜찮은 대답을 내놓았다.
불필요한 아부가 섞여 있기도 하고 괜히 중언부언하는 경향도 조금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이 정도면 합격점을 드려도 될 것 같군요."
"가, 감사합니다, 영주님!"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제르만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역동적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다가 조금 뒤 다시 빼꼼 고개를 들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어떤 합격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참 빨리도 묻는다.
재밌는 친구야.
그래도 마침 다행히 나는 매우 친절한 교양인이라 상세하게 설명해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오늘 직접 보셨다시피 제가 이런 거래와 만남을 종종 가집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과정 중에서 저만 가지고 있는 귀중한 정보 같은 걸 잘 활용하기도 하고요."
그래, 가진 게 쥐뿔도 없는 약소 영주인 내가 내세울 거라고는 원작 게임을 하며 얻은 지식밖에는 없거든.
그 덕에 어떻게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런 지식에도 한계는 있다.
내가 많은 것을 이루면 이룰수록 이 세상은 점점 더 예측하지 못할 미래로 나아갈 것이고 나의 지식은 쓸모가 없어질 테니까.
"그렇지만 이런 정보라는 게, 가만히 있는데도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그런 물건은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결코 지금 가진 것들만 믿고 안일하게 있을 수만은 없다는 얘기.
게임 속 세상이 현실이 되어 그 속에 떨어졌다면, 당연히 나도 이 세상의 방식 또한 따라야겠지.
"그런고로 주기적으로 이런 정보들을 수집해줄 믿음직한 친구가 필요한 상황인데, 어떠십니까, 제르만 씨?"
"네? 어떻다니, 무슨...?"
이제 슬슬 나도 백작도 되고 세력도 키워볼 건데, 언제까지 모든 걸 나 혼자서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할 수는 없잖아?
따라서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짓는 제르만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제르만 씨가 그 역할을 맡아줄 수 있을까요?"
"...네?"
어때, 제르만아.
네가 우리 영지의 정보 분야를 담당할 조직을 한 번 열심히 꾸려보지 않을래?
대답은 고민하고 천천히 해도 좋아.
물론 내가 원하는 대답으로 말이야.
#058. 이 반석 위에 (1)
첫 만남 이후 이틀 뒤.
"좋아. 네 밑에서 한 번 일해 볼게."
지난번에 이야기를 나눴던 찻집에서 다시 만난 마법사 발레리아는,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그렇게 말했다.
놀라울 정도로 시원시원하다.
아직 자세한 계약 조건은 논의도 안 했는데.
'자세히 보니 저번보다 눈가가 퀭해졌네.'
그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잔 건가.
'아주 판다가 따로 없어.'
어쨌거나 마침내 우리 영지로 오겠다는 발레리아의 확답에 속으로 기쁨의 춤을 마구 추려고 했으나, 딱 그 절묘한 타이밍에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근데 이건 반드시 알아둬. 네가 했던 헛소리 때문에 고용되는 건 절대 아니니까."
헛소리?
내가 언제 그런 걸 했나?
난 언제나 정론만 얘기하는데?
"제가 했던 헛소리라니.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순수하게 의구심만이 가득 담긴 질문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발레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콱 다물어버렸다.
"...그."
그리고 조금 지나고 나서야 우물쭈물 입을 열기 시작했다.
"너희 영지에 가면, 전쟁이 얼마든지 있을 거니까, 나도 즐거울 거라는, 그 헛소리 말이야."
"...."
음. 글쎄.
만약 그 말이 헛소리라면 나는 이틀 전에 헛소리만 잔뜩 하다가 간 셈인데.
'...그리고 발레리아는 헛소리만 잔뜩 한 인간이랑 계약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되는 거고.'
맘씨 좋고 너그러운 나조차도 쉽게 넘어가기 어려운 모순에 살짝 어이없다는 눈길을 보내자 발레리아가 슬금슬금 내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뭐 왜 뭐. 나는 그냥 원래부터 변방에서 한번 일 해보고 싶었을 뿐이야. 운 좋은 줄 알아. 그렇게만 알고 있으라고."
...과연. 그러셨군요.
요컨대 내가 했던 말을, 이제야 알게 된 자신의 숨겨진 성향을 굳이 부정하는 방향으로 가려는 건가.
이건 진짜 예상 못 했다.
'하긴 내 선입견을 다 빼고 생각하면 당연히 그럴 수 있긴 하지.'
스스로 자연스럽게 깨달은 것도 아니고, 어느 날 난데없이 타인에 의해서 자신이 사실 사람 태우는 걸 즐기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셈이니까 말이야.
엄청나게 충격적일 테니 부정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저 그 주인공이 <마이트 앤 로열> 속 희대의 방화광 발레리아라는 점 때문에 내가 홀로 당황스러울 뿐.
'사실상 이미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정도로밖에 안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굳이 더 지적할 일은 아닌 듯하다.
중요한 건 결과적으로 나의 설득 덕분에 발레리아가 니카로스로 올 생각이 들었다는 거니까.
"하하, 알겠습니다. 발레리아 씨께서 제국 변방의 안보에 이토록 관심이 많으셨다니. 저도 무척 기쁘네요."
그런고로 나도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사실 말해놓고 뒤늦게 생각하니 어째 놀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살짝 걱정했는데.
"물론이지...! 그러니까 더 고마워해...!"
다행히 그녀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자기도 조금 과하게 뻔뻔하다고 생각하는지 얼굴은 더 붉어졌지만 말이야.
어쨌거나 발레리아가 합류하겠다고 의사를 밝혔으니 남은 건 세부적인 조건을 조율하는 단계뿐이었다.
나도 어떻게든 최대한 고급 인력으로 대우해주기 위해 준비했고, 발레리아 역시 성의 있게 조건을 검토했다.
배울 만큼 배운, 고등 교육을 이수한 인재라 그런지 그녀는 이런 부분에서 매우 꼼꼼했다.
그리고 매우 감사하게도 발레리아는 최대한 합리적인 조건에 승낙해줬다. 남작령의 현실적인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는 객관적으로 조사를 미리 해온 모양이었다.
다행이야.
까딱하면 우리 영지 등골 빠질 뻔했지 뭐야.
"...뭐, 남작령이니까 나도 이 정도 조건으로 만족해야겠지. 정말, 내가 남작 밑에서 취직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그렇게 완성된 계약서를 보며 발레리아가 마치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그 심정 나도 대충 이해는 한다.
여태껏 아카데미까지 졸업해놓고 남작령에 취직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겠지.
그래도 너무 비관하지는 말아줘.
"곧 더 좋은 영지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
아직 백작 승작 건은 확정된 게 아닌 만큼 일단은 이 정도로만 얘기했다.
그녀는 반신반의했지만 대놓고 부정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나에게는 토후국 두 개를 그대로 흡수한 실적이 있으니 일단은 한 번 믿어보기로 한 듯하다.
이번에 에우스페나 온 뒤로 이 실적이 여러모로 많이 도움 된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얘기를 빼먹었네.
"참고로 말씀드리면 당분간 니카로스는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할 예정입니다."
"뭐? 싸운다며! 저번이랑 이야기가 다르잖아!"
이제 최종 서명만을 남겨둔 시점에서, 내가 지나가듯 말을 흘리자 발레리아는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지어 단순히 언성만 높인 게 아니라 어느새 그녀의 등 뒤에서 불까지 이글거리고 있었다.
환상이 아니다. 진짜 불이다.
이 막 나가는 여자가 또 진짜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틀 전에 이어 오늘도 주위의 손님들이 공포에 떨고, 이미 이 광경을 두 번이나 본 찻집의 사장은 거의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미안합니다, 사장님.
금방 진정시킬게요.
"발레리아 씨께서 아까 분명 전쟁 같은 건 신경 안 쓰신다고...."
"무, 물론 내가 딱히 그런 걸 반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말이 다른 걸 짚고 넘어가야지...!"
나의 합리적인 반박에 발레리아는 누가 봐도 잔뜩 당황해버렸지만, 굳이 그걸 지적하지는 않았다.
일단은.
그녀의 오해를 푸는 게 먼저였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래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 절대로 내가 속인 게 아니니까
부당 계약도 아니고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니까.
"전쟁은 분명 있을 테니까요."
전쟁은 있다.
'그저 내가 쳐들어가지 않을 뿐.'
나는 정말로 평화를 사랑하고 바라는 교양인이지만, 애석하게도 주위의 승냥이들이 더는 순순히 나의 성장을 바라보고만 있을 리가 없거든.
"우리는 그저 차분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확신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발레리아를 바라봤고.
"...."
발레리아의 붉은 불꽃 또한 나의 두 눈동자 속에 담겨 선명하게 반사되었다.
화르륵.
***
가스파르 영감님도 만나고.
페트로스와 추가 계약도 맺고
마법사 발레리아가 우리 니카로스에 합류하고.
마침내 에우스페나에서 할 일이 모두 끝났다.
따라서 이제 이 도시를 떠날 일만이 남았지만, 발레리아와 상세하게 계약을 검토하고 이것저것 돌아갈 채비도 하다 보니 시간이 어느새 스멀스멀 해가 저물고 있었다.
치안도 별로 안 좋은 이 변방에서 굳이 이런 시간에 무리하게 출발하는 것도 좋을 일은 없으니, 나와 일행들은 이 도시에서 하루를 더 묵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
그렇게 모두가 잠든 늦은 새벽.
나는 홀로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왔다.
딱히 뭔가 또 특별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건 아니다.
애초에 나는 그런 모략과는 거리가 먼, 선량한 소시민이니까.
그냥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래서 밤바람이라도 조금 쐴까 싶었을 뿐이다.
'보자. 니카로스에 다시 돌아가면 일단 페트로스가 이미 파견했다는 행정 인력들 얼굴부터 먼저 보고, 마르다라는 집사장 아저씨네 딸이랑도 면담을 한 번 해야 하고, 본격적으로 정복한 영토 안정화도 해야 하고, 내부 체제도 새로 다듬을 준비도 해야 하고....'
분명히 처음에는 머리를 식힐 생각이었는데 가만히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할 일들을 헤아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한숨만 새어 나오고 말았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일이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이번에 에우스페나까지 방문한 김에 조금 무리를 하면서까지 중요한 일들을 많이 처리했는데도, 어째 이놈의 일은 줄어들질 않는다.
바쁘다. 바빠.
원래 살던 세계보다 지금 여기가 더 바쁜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로 즐거운 일만 잔뜩 하면서 살고 싶은데 말이야.'
즐겨 하던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진 것치고는 굉장히 고달픈 인생을 사는 것 같다.
'그래도 뭐, 아예 나쁜 것만은 아니야.'
바빠서 좋은 점도 있지.
원래 세계 생각도 덜 나고.
또 보람도 있고.
이런저런 생각이 나의 머리를 가득 덮었고, 슬프게도 졸음은 점점 더 나의 몸을 떠나 달아나고 있었다.
큰일이네, 이거.
생활 리듬 깨지면 컨디션도 망가지는데.
나는 결국 더 느긋한 마음을 가지기로 다짐하며 천천히 주위 광경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밤이지만 숙소 주위는 그렇게까지 어둡지 않았다.
여기는 상류층이 주로 거주하는, 에우스페나에서 그나마 치안이 괜찮은 곳이기도 했고 판타지 세계답게 마법과 공학의 기술이 모두 담겨 만들어진 가로등들도 드문드문 있었으니까.
"...."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나는 천천히 그 거리를 거닐기 시작했다.
거리는 깨끗했지만, 인적은 매우 드물었다.
어둑어둑한 가로등 빛 사이로 벌레 우는 소리만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자연스럽게 사색에 빠졌다.
'생각해 보니 근래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적은 없는 것 같네.'
영주라는 게 워낙 언제나 주위에 사람을 거느리고 다니는 존재다 보니까.
가끔은 의식적으로라도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게 좋을 듯하다.
'아, 근데 그러면 또 경호 문제가 대두되려나.'
귀찮아 죽겠어.
어쨌거나 그렇게 예상치 못한 선물 같던 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전방에서.
누군가 사람의 현상이 나타났다.
"...!"
나타난 것은 한 어린 소녀였다.
아니, 예쁘장한 소년인가.
사춘기도 안 온 중학생 미만의 나이로 보이는 아이인 탓에 구별이 잘 안되었다.
흔한 갈색 단발머리에 고동색 눈동자.
잡티 하나 없는, 뽀얗고 하얀 피부.
비단처럼 보이는 하늘하늘한 백색 원피스까지.
언뜻 보기에는 이 부자 동네에 사는, 평범한 어린아이처럼 보였지만.
"...."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올렸다.
이유.
굳이 내가 어린아이를 상대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야 당연히 설명하자면 많았다.
일단 이 치안이 끔찍한 도시에서 밤에 어린아이가 혼자 돌아다니는 것부터가 논리적으로 몹시 이상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그냥.
인기척을 전혀 못 느꼈다.
머무는 도시가 도시인 탓에 혹시나 야밤에 나를 노리는 습격이 있을까 봐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주위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저 아이는 기사에 버금가는 나의 감각을 뚫고 마치 유령처럼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그 사실이 나를 극도로 긴장되게 만들었다.
이건 흡사 본능과도 같았다.
"...."
하지만 그 아이는 이런 위협적인 모습에도 그저 나를 보며 싱긋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입을 열었다.
"티베리오스."
"...나를 아느냐?"
나를 알고 왔다.
가뜩이나 잔뜩 치솟은 경계심이 더욱 올라갔다.
나는 검을 더 꽉 쥐었다.
그러나 아이는 나의 태도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 질문을 무시한 채 그저 자신의 말만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물었다.
"지금 만족스러워?"
"...뭐?"
뜬금없는 말이었다.
나는 그저 어이없다는 듯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갑작스럽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나는 그 아이의 질문보다는 여전히 그 행동과 모습에 더 집중했다.
그러나 아이가 하는 다음 질문에서도 그러진 못했다.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갈래?"
"...!"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대체 뭐지?
저 아이,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빙의자라는 것을 아는 건가?
그걸 어떻게 알 수가 있지?
단순히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것뿐인가?
그저 내가 지레짐작하고 있는 것뿐인가?
그러면 저런 질문을 하는 저의는 뭐지?
그냥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이일 뿐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저 분위기와 태도가....'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면서도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그저 그 아이만을 노려봤다.
하지만 내 날카로운 시선에도 아이는 계속 웃었다.
"꼭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그럼 안녕."
찰나와 순간.
내가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그 잠깐 사이.
아이는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마치 연기처럼.
마치 환상처럼.
"...하."
나도 모르게 참았던 숨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귀신에 홀린 것인가. 헛것을 본 것인가.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냐니.
"...하하."
무척이나 웃겼다.
정말.
오늘 밤은 다 잤네.
#059. 이 반석 위에 (2)
기묘한 밤을 보내고, 바로 다음 날 아침.
"영주님, 지난밤 잠자리가 편안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늘따라 평소보다 굉장히 피곤해 보이십니다."
아르센이 무척이나 걱정스럽단 어조로 물었다.
'...바로 티가 나나 보네.'
그래, 실제로 잠을 제대로 못 자긴 했다.
이래저래 생각이 많았거든.
"하하, 괜찮습니다. 그냥 잠자리가 저랑 살짝 안 맞았나 보네요."
하지만 별것 아니라는 듯 그저 그렇게만 대답했다.
그렇게 잠까지 버려가며 열심히 생각했음에도, 결국 어젯밤 나에게 이상한 말을 잔뜩 하고 홀연히 사라진 그 정체 모를 아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내 호위 기사 말할 수는 없지.'
어젯밤, 내가 뭔가를 추가로 더 묻기도 전에 아이는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마치 연기처럼 스르륵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나 또한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이가 갔을 만한 곳을 살폈지만, 유감스럽게도 조금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응? 잠은 푹 자야지. 젊다고 대충대충 자면 나중에 나이 먹고 크게 후회한다."
"...옳으신 말씀이네요, 발레리아 씨."
전혀 예상치 못한 발레리아의 정론에 나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고야 말았다.
'자기도 어제 다크서클 가득한 판다 몰골로 나타났으면서....'
어쨌거나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 발레리아는 제쳐 두더라도, 말 자체는 맞는 말이다.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에만 매진해 컨디션을 해치는 게 좋은 일이 아니긴 하니까.
'나같이 바쁜 사람에게 체력은 그야말로 황금과 같으니까. 그 귀한 체력은 당장 해결할 수 있고 건설적인 일들에 사용해야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정말로 중요한 사실은 에우스페나에서 해야 할 모든 일정이 끝났다는 것이다.
요컨대 즐거운 나의 영지로 돌아갈 시간이란 뜻.
여기까지 올 때도 그랬지만, 돌아가는 길에도 우리 일행은 상당히 단출했다.
영주인 나, 친위 기사 아르센, 호위 겸 시종 역할의 병사 몇 명, 새롭게 등용한 발레리아.
그리고 그냥 남아도는 제르만 한 명까지.
영주의 행차라고 하기에는 살짝 초라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나로서는 이쪽이 더 좋았다.
무엇보다 이동 속도가 빨라지니까.
이 세상도, 마법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덕분에 그리 문명의 발달이 더딘 세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21세기 현대인인 나의 기대치에는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다.
그래서 가뜩이나 종종 원정을 나가거나 다른 지방으로 이동해야 할 때 자동차가 없다는 사실에 답답할 때가 많았는데, 여기에 머릿수까지 늘어나면 더 답도 없이 느려질 거 아니야.
어쨌거나 그렇게 한창 룰루랄라 영지로 돌아가던 중.
"영주야."
발레리아가 문득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음. '영주야'라니.
진짜 살면서 처음 들어 본 표현이다.
바로 내 곁에 있던 충직한 호위 기사 아르센이 이 해괴한 호칭에 순간적으로 표정을 잔뜩 굳혔지만, 다행히 나보다 먼저 뭐라고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게 맞지.
그녀에게 먼저 편하게 말하라고 한 게 나인데, 거기에 부하가 대놓고 토를 달면 모양새가 나쁘거든.
게다가 솔직히 나는 불쾌하다기보다는 웃긴 쪽이었다.
아니, 신선하다고 해야 하나.
'갑작스럽게 이 세계에 떨어져 티베리오스가 된 뒤로, 이렇게 허물없이 대하는 사람은 처음인걸.'
물론 키로스 경이 있긴 하지만 말이야.
음, 아닌가. 그분은 조금 다른 경우지.
아니, 조금이 아니라 진짜 많이.
어쨌거나 나처럼 권위라고는 모르는 소시민에게는 오히려 이런 태도가 더 달가울 수도 있다는 거다.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렇기에 나는 니카로스 남작령의 주인이자 지배자로서 무척이나 친절한 어조로 발레리아의 발언을 친히 허락해주었고.
"그, 뭐냐...."
발레리아가 우물쭈물 무언가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영주님! 전방에서!"
선두에 있던 아르센이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전방에서 다수의 무장한 인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보고를 듣고 나와 발레리아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전방을 확인했다.
"수는 서른 명 정도! 무장 상태를 보아 도적 떼로 판단됩니다!"
확실히 아르센의 말대로였다.
낡고 이가 나간 날붙이를 든 추레한 놈들이,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맞네.
누가 봐도 도적으로밖에 안 보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몇 발짝 뒤에서 나를 따라오던 제르만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네? 영주님? 그, 왜 갑자기 저를 그런 눈으로 보시는지요...? 저는 저놈들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아뇨, 그냥 제르만 씨도 동종업계 동사자 출신이시다 보니, 혹시나 아는 게 있나 해서 말이죠."
"오해입니다! 이 근방에 도적 떼가 얼마나 많은데! 저는 정말로 처음 보는 놈들입니다!"
우리의 제르만 씨는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듯 격정적으로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하긴. 이 일대에 도적들이 엄청 많긴 하지.
단순히 출신이 같다고 해서 제르만이 그 수많은 얼굴들을 다 알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제르만이 속해 있던 붉은바위 도적단은 그 수가 200명이 넘는 거대 도적단이었는데, 지금 저놈들은 고작 30명 정도밖에 안 되니까 말이야.
제르만이 모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면 그냥 겉보기에만 도적 같은 무리일 뿐, 사실은 이 근처를 바삐 지나가던 선량한 여행자들일 가능성도 0%는 아닌가....'
그렇게 내가 합리적이고 배부른 고민을 할 무렵.
저 멀리서 고래고래 외치는 도적단 두목(추정)의 걸걸하고 추잡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귀족과 여자만 빼고 전부 죽여라! 저놈들만 잡으면 너희들 팔자를 전부 고칠 수 있어!"
아.
저런.
'도적 확정이네.'
그렇게 일말의 확률조차 마치 바닷가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자, 나는 속으로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귀찮게. 하여간, 진짜 쓰레기 같은 페트로스.'
대체 영지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백주 대낮 대로에서 도적 떼들이 이렇게 버젓이 돌아다니는 거냐.
여기가 에우스페나 도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닌데. 정말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
"전원 전투 준비하세요."
하지만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침착한 어조로 아르센과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래.
무척이나 귀찮고 어이가 없어 그렇지, 딱히 위기 상황까지는 아니다.
물론 적의 머릿수는 우리보다 4배는 더 많다.
적도 수가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우리 인원이 워낙 단출한 탓에 그런 그림이 되었다.
'그러니까 저 녀석들도 신나서 저렇게 달려오겠지.'
하지만 고작 그뿐이다.
놈들의 무장은 변방 징집병보다도 못한 수준.
저런 잡병들 따위,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지금 우리의 전력을 감당할 수는 없다.
'불쌍한 것들.'
귀족이랑 기사도 못 알아보는 건가.
아니면 오히려 알아보고 욕심에 눈이 먼 것인가.
뭐가 되었든.
거기까지는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전부 죽여도 됩니다."
"네, 영주님! 놈들을 모두 죽여라!"
나의 명령에 곧장 아르센이 기세 좋게 대답한다.
지난 대대적인 토벌 작전 때처럼 포로만 100명 넘게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런 녀석들은 딱히 잡아도 쓸모가 없다. 우리 머릿수도 얼마 안 되어서 통제하기도 어렵고, 굳이 여기서부터 니카로스까지 밥 먹여가며 데려가는 것도 어렵지.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 나는 잠시 옆을 바라봤다.
수도 출신으로서 이런 일을 처음 겪어본 탓인지, 어느새 발레리아가 살짝 멍해진 표정으로 도적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본인이 직접 나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긴. 마법사가 나서기에는 너무 하찮은 일이야.'
저 정도 적들은 하급 기사인 아르센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하고 남는다. 그런 상황에서 고고한 마법사에게 굳이 나서달라고 명령하는 건 무례가 될 수도 있는 일일 정도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명확히 자각하면서도 나는 발레리아를 보며 물었다.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뭐?"
두서없는 질문에 발레리아가 반문한다.
따라서 나는 더 구체적으로 다시 물었다.
"마법으로 사람을 죽여본 적 있으신가요?"
"...."
발레리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만 봐도 대충 알 수 있었다.
'없구나.'
하긴 아무리 수도가 개판이라지만 아카데미 다니는 학생이 사람을 죽여볼 일이 있을 정도는 아니겠지.
생각해보면 기회 자체가 없었으니 여태껏 본인 성향을 자각 못 한 것도 이해가 간다.
그래, 뭐든지.
다 체험이 중요한 거니까.
그러면.
"한 번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해보면 되지.
물론 내가 절대 성격이 파탄 난 인간이라 이런 걸 권유하는 건 아니다.
나중에 치열한 전장이 첫 실전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럴 바에는 미리 연습해 보는 게 낫다 판단했을 뿐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발레리아는 조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영주한테 이런 표현 쓰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지금 진짜 또라이 같은 거 알아?"
어허.
아니라니까.
"그렇게 정중하게 사람 태워 보실래요, 라고 묻는 사람은 정말 처음 봤어...."
억울하다.
그 전설의 방화광(예정)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그러면 조금 덜 비정상 같게 포장을 해봐야 하나.
"그러면 이건 어떤가요? 자비롭고 위대한 마법사님께서 친히 우리를 구해준다고. 위기에 빠진 귀족과 그 부하를 살리기 위해 부득이하게 마법을 쓰고 말았다고."
이 정도면 그럴듯하지 않나.
충분히.
"이런 명분이 있다면 괜찮겠지요?"
그치?
나는 발레리아를 바라봤고.
그녀는 결국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진짜 이상한 영주... 내가 어쩌다 이런 영주가 있는 영지로 와버린 건지...."
그 한숨에 한탄은 가득했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야. 네 헛소리에 넘어가는 거."
그래도 거절의 뜻은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래, 그거면 됐지.'
과연 마지막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발레리아는 천천히 자신의 지팡이를 꺼내 도적 떼를 향해 겨눴다.
어느새 도적 녀석들이 제법 가까이 와있었다.
나는 곁에서 모든 걸 가만히 지켜만 보았고.
마침내.
그녀의 손이 조금씩 떨린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다.
망설이지도 않았다.
"...!"
마침내 지팡이 끝에서 거대한 화염이 뭉쳐 탄생하고, 적들을 향해 쏘아진다.
화염 학파의 하급 마법.
'샐러맨더의 홍옥(紅玉)'.
"마, 마법사다! 피해!"
그제야 도적놈들도 우리 마법사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경악하기 시작한다.
저 무지렁이들도 마법사 무서운 것은 아나 보지.
그러나 너무 늦었다.
발레리아가 만들어낸 불덩이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놈들의 한가운데 떨어졌다.
직격당한 녀석들이 불에 휩싸여 발버둥 친다.
고통 가득한 비명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아...."
발레리아는 지팡이를 든 자세 그대로 굳어서 그 광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마치 조금도 놓칠 수 없다는 듯, 모든 장면을 빠지지 않고 눈에 담았다.
솔직히 말해서 어째서 그렇게 넋을 놓고 보게 되는지, 정확히 어디가 즐거운 건지 잘 모르겠다.
그건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원래 사람이 타인에게 공감하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니까.'
굳이 내가 부정할 이유는 없지.
하고 싶은 걸, 적어도 이 세계의 상식에 따라서는, 정당한 방법으로 할 뿐인데.
남의 시선과 인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잠깐만 빌리지."
"어, 어... 네, 영주님!"
나는 옆에서 호위 중이던 병사가 쥐고 있는 쇠뇌를 빌려서 손에 들었다.
그리고 쇠뇌를 불타 고통받고 있는 도적에게 겨누고.
그대로 발사했다.
화살은 그대로 놈의 미간을 향해 날아갔고.
적중.
녀석은 숨이 끊어져 털썩 쓰러졌다.
"...!"
발레리아는 그제야 흠칫 정신을 차렸는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어땠습니까?"
나는 동그래진 발레리아의 눈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발레리아는 우물우물 잠시 입만 벌렸다 닫았다 하더니, 곧 말 한마디를 뱉어냈다.
"그냥, 끔찍하다고 못 해먹을 정도는 아니네...!"
"...."
어휴.
이 끈질긴 아가씨야,
그래, 인정하든 부정하든 마음대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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