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친구와 적 (3)
"고생 많으셨습니다, 영주님."
마침내 모든 일정을 끝마치고.
길고 긴 여정 끝에 나의 성, 나의 니카로스 남작령으로 돌아오자 가장 먼저 키로스 경이 나를 반겼다.
"에우스페나 방문 일정은 잘 마무리되었습니까?"
키로스 경은 마치 이미 다 알겠다는 듯 웃으며 그렇게 물었고, 나 역시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제가 누구입니까? 아주 완벽하게 끝마치고 왔습니다."
"허허, 사실 들어오시는 영주님의 표정을 보고 그럴 거라 미리 짐작은 했습니다. 오늘의 개선장군은 영주님이시군요."
이것 참.
이걸 이렇게 들키네.
반사적으로 입가를 문지르니 확실히 평소보다 조금 과하게 올라가 있기는 하다.
진짜 엄청 의기양양하게 성으로 입장했나 보네.
자각하고 나니 묘하게 부끄럽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제의 개선장군은 역시 키로스 경이었겠군요. 키로스 경의 표정을 보니 저도 토벌이 잘 마무리된 걸 바로 알겠습니다."
사실 키로스 경도 딱히 남 말할 처지가 못 되는걸.
자세히 보면 저 영감님도 입가에 당당한 미소가 엄청 진하게 걸려있다.
"허허, 티가 났습니까?"
아쉽게도 키로스 경은 이런 회심의 반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겸허하면서도 순순히 자신의 공을 인정했다.
"영주님의 노고에 비하면 무척이나 부족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결과는 내었습니다."
하여간. 이 너구리 같은 할아버지.
말은 잘 해요.
그 당당한 모습에 나는 결국 픽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허허, 영주님의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가 에우스페나를 방문하는 동안 키로스 경은 니카로스에 남아서 저번에 우리를 습격했던 도적단의 잔당 토벌을 진두지휘했다.
그쪽도 일이 잘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야.
"자세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시는 게 어떻습니까? 먼 길 다녀오신 영주님의 휴식이 먼저입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직접 전장에 나선 키로스 경이 더 고생이셨죠. 바로 집무실로 이동할 생각이니, 가는 길에 간단히라도 먼저 보고해주세요."
키로스 경은 내가 바로 일하러 간다고 하니 잠시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곧 노련한 기사답게 완벽히 각 잡힌 태도로 보고를 했다.
"1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토벌을 진행했습니다. 산채에 남아 있는 인원 약 30명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200명 규모로 내 땅을 약탈하러 온 도적놈들의 본거지에 30명밖에 없었다, 라.
'...진짜 전력을 다해 날 털어먹으러 온 거였네.'
이 괘씸한 미친놈들.
"약탈을 떠난 두목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불길한 낌새를 느끼고 마침 도주를 준비하고 있더군요. 토벌을 서두른 보람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우왕좌왕하는 놈들을 큰 피해 없이 사로잡았으니까요."
과연.
역시 키로스 경을 남겨두고 가길 잘했다.
괜히 내가 모든 일을 다 직접 처리하겠다고 에우스페나 방문 뒤로 토벌을 미뤘으면, 쓸데없이 공들여서 허탕만 쳤겠네.
어휴, 상상만 해도 끔찍해.
그런데 그렇게 계속 순조로웠던 경과를 보고하던 키로스 경은, 잠시 내키지 않는 말을 꺼내려는 듯 우물거리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사실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길잡이가 된 그 부두목, 제르만의 공도 상당히 컸습니다."
아, 그런 녀석도 있었지.
포로로 잡히자마자 자진해서 모든 비밀을 분 덕분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도적단의 수뇌부.
그래,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서 키로스 경의 토벌군과 동행하게 했었다. 별로 믿음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명색에 2인자였으니 없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지만 없는 것보다 낫다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적지 않은 공까지 세웠다니. 이건 진짜 의외다.
'그냥 입만 산, 별 내실 없는 쭉정이 같은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번개 같은 속도로 동료를 팔아넘기는 걔 모습을 봤으면 아마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산에 익숙한 자들만 알고 있는 지름길로 앞장서서 안내하기도 했고, 심지어 현재 남은 잔당의 전력이나 상황 또한 예측해서 저희에게 공유해주기도 하더군요. 놀랍게도 그의 예측 대부분이 맞아떨어져, 효율적인 작전 진행에 제법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건 조금 의외로군요."
나는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말했다.
진짜 상상 이상으로 적극 협조했네.
"저 역시 비슷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완전히 줄을 갈아탈 속셈이 아닐지...?"
음, 일리가 있다.
살기 위해서 순식간에 판단을 내려 능동적으로 비밀을 팔아넘길 만큼 눈치가 빠른 녀석이니, 자신의 목숨줄이 여전히 간당간당한 것도 이미 알고 있겠지.
그러니 이왕 항복한 김에 최대한 우리에게 협조해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속셈.
확실히 이건 말이 된다.
과연 그게 줄을 갈아탄다고 표현할 만큼, 본인 뜻대로 쉽게 이루어질 희망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만큼 원래 생각했던 대로 포로들을 책임지는 중간 관리자 역할 정도는 잘 소화할 거 같기도 하고?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작전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고, 그렇게 붙잡은 포로는 기존의 포로와 함께 가둬두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시하브 토후국에서 대가로 보냈던 금품 역시 확인하고 회수했습니다."
"오."
그래, 핵심은 이거지.
사실 제르만 얘기가 당장 그리 중요한 건 아니거든.
불필요한 화근을 남길 필요는 없으니 잔당을 토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돈뭉치를 회수하는 일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그 돈은 시하브 토후국이 마누엘을 죽음을 사주했다는 증거 그 자체니까.'
나는 키로스 경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액수가 어느 정도 됩니까?"
왜.
가치에 상관없이 회수해야 하는 거긴 했지만, 그래도 클수록 좋잖아.
이제 우리 돈이라고.
"흠, 현물이 섞여 있어서 정확한 산정에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지만, 대략적인 결과는 나왔습니다. 여기 품목별로 정리해두었습니다."
키로스 경은 굳이 말로 길게 설명하지 않고 바로 정리된 보고서를 건넸다.
준비성도 좋으셔.
나는 찬찬히 서류 위에 가득한 숫자들을 읽어나갔고.
"생각보다 액수가 제법 되는군요."
금액을 보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전부 합쳐보니 생각해보다 제법 규모가 크다. 우리의 이번 대대적 정벌 전쟁의 군자금으로 보태 써도 유의미한 영향이 있을 정도로.
"그렇습니다. 영주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저희도 여러 번 다시 확인했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습니다. 오차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겁니다."
상대가 도적놈들이라 보수가 센 건가.
아니면 입 막은 비용까지 포함되는 건가.
하긴.
아마 둘 다겠지.
공개적으로 용병을 고용할 때는 어느 정도 기본이 되는 시세가 있고 기준이 있을 테지만 비밀리에 도적을 고용할 때는 그런 걸 전혀 기대할 수 없으니까.
자신들의 개입을 숨기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을 고려하면 이것도 그리 이상한 금액은 아니지.'
물론.
"이만한 돈을 쓰고도 비밀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에게 돈만 쥐여준 셈이 됐으니. 시하브 토후국 놈들 배 좀 아프겠습니다."
욕심이 과했던 도적단의 헛짓거리로 모든 게 파국이 됐지만 말이야.
키로스 경의 검에 목이 날아간, 그 멍청한 두목한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나.
"허허, 분명히 그럴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놈들이 우리 니카로스에 저지른 만행에 대한 업보라고 생각하면, 아직도 한참 부족하지요."
그래, 이건 키로스 경의 이야기가 맞지.
키로스 경은 평소처럼 넉살 좋게 웃으면서도, 또 동시에 조용히 분노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일이 잘 풀려서 시하브 토후국의 계획에 생각보다 커다란 재를 뿌려주긴 했지만, 그놈들이 했던 짓을 생각하면 이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키로스 경과 니카로스 남작령이 당한 일.
모시던 주군을 순식간에 두 명이나 잃고 만 것에는 분명히 비할 바가 못 되니까.
나는 그런 키로스 경의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키로스 경. 저도 절대로 이 정도로 만족하고 넘어갈 생각은 없으니까요."
"허허, 처음부터 걱정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항상 영주님을 믿고 있으니까요."
"이런,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부담되는데 말이죠."
"어이쿠, 저의 순수한 충심이 또 이렇게 왜곡 당하다니. 정말 슬픔의 눈물만 주룩주룩 나옵니다."
마치 과장된 연극의 한 장면처럼, 키로스 경이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어깨를 마구 들썩거린다.
하여간, 영감님.
괜히 나한테 더한 부담을 줄까 봐, 이렇게 또 후다닥 분노를 감추시다니. 나는 정말로 괜찮은데.
느껴진다.
저 웃음과 과장된 태도로 두껍게 포장되어 있지만, 그런데도 완전히 숨길 수는 없는 그런 진한 증오가.
아마 다른 가신들의 심정도 분명히 다르지 않겠지.
니카로스의 영주 된 몸으로서.
그런 가신들의 마음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지금 이 땅의 필요한 것은 철저한 복수뿐이다.
영지의 바람과 나의 필요성이 모두 일치한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 따위는 전혀 없지.
나의 영지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따라서 나는 가장 결정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화제를 바꿨다.
"이제 저의 이야기를 공유할 때인 것 같군요."
"영주님의 무용담 차례로군요."
음, 무용담이라고 할 정도는 못 되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을 수는 없잖아.
"에우스페나에서 여러 일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그거죠. 가스파르와 만나 군자금을 빌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오, 그 돈귀신을 설득하시다니."
어째 온종일 돈 이야기만 하는 것 같지만 별수 없다.
실제로 지금은 이게 제일 중요한 사인인걸.
가난하고 조그만 니카로스로서는, 어떻게든 외부에서 자금을 융통해올 필요가 있다. 원작 게임에서도 약소 영지들의 초반 탈출구는 이쪽에 있었으니까.
"용병대와 계약도 이미 마쳤습니다. 머지않아 우리 영지에 도착할 예정이니, 지금은 합동 훈련을 미리 준비하면 되겠지요."
출진 전에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의 주력인 검은 매의 기사단과 최소한의 합도 맞춰야 하고, 용병대가 보병대인 만큼 징집병들과 함께 운용할 계획도 필요하다.
'영지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부분의 주력은 용병이 부담하게 할 계획이지만, 그렇다고 주민들을 아예 징집하지 않을 수는 없지.'
남의 홈그라운드로 원정을 떠나는 만큼, 우리의 전력과 머릿수를 최대한 부풀릴 필요가 있으니까.
"굉장히 일의 진척이 빠르군요. 그렇다는 것은...?"
"네, 최대한 빠르게 시작하고 싶군요."
에우스페나에서 있던 일이 생각보다 더 잘 풀렸다.
모든 조건이 완벽하다.
"한 달. 길면 두 달."
시하브 토후국에 선전포고합니다.
이것이 이 대화의 최종 결론.
"...!"
최대한 빠르게.
놈들이 알고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게.
내가 가진 온갖 원작 지식으로 부풀린.
단 한때의 압도적인 힘으로.
순식간에.
"...예상보다 이르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놈들을 얕보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 내가 뭐라고 저들을 얕볼까.
시하브 토후국도 이 일대에서 비교적 약소국이라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런 국력을 지니고도 여태껏 살아남은 관록이 있는 국가다.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도적을 부린다는 과감한 꾀를 마련할 정도의 결단력도 있고.
'그저 이게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라는 걸 알 뿐.'
시간이 지날수록 방비가 단단해지는 것은 적들도 마찬가지. 그러니 이왕 외부의 힘을 가져오기로 결단했으면, 망설임 없이 단박에 휘둘러야 한다.
아주 명백한 이치일 뿐이지.
"저는 한낱 검으로서 영주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그렇게 나의 계획을 들은 키로스 경은 잠시 숨을 크게 삼키더니, 곧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니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키로스 경의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고.
동시에 나를 담았다.
#021. 친구와 적 (4)
니카로스 남작.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는 길었던 에우스페나 방문을 끝내고 성으로 복귀한 뒤, 곧장 가신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다소 갑작스러울 수 있으나, 무척이나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젊은 영주는 하나둘씩 이번 방문의 성과를 나열했다.
돈귀신 가스파르를 성공적으로 설득하여 군자금을 마련한 것, 에우스페나 공작령의 집사장인 페트로스와 동맹에 관해 논한 것....
영주가 꺼내는 이야기 모두가 영지의 향후 방침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막중한 사안들이었지만, 이번 회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따로 있었다.
"두 달 안에 시하브 토후국을 향한 전쟁을 선포할 계획입니다."
그 한 마디에 회의에 참석한 모든 가신이 웅성거렸다.
전쟁이 목표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너무 빠르다.
지금까지 전쟁이라는 것이 아예 어린 영주의 치기 어린 포부에 불과했다고 믿고 있던 자들도 있었던 만큼, 이처럼 구체적이고 급진적인 계획이 발표되자 모두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반사적으로 영지의 무력을 책임지는 기사단장인 키로스 경을 향해 시선을 돌렸으나.
"...."
그는 영주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치 바위처럼 묵직하게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모든 게 진심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갑작스럽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른 시일 내에 더 세부적인 일정을 공유할 시간을 가질 생각이고, 혹시 지금 당장이라도 의문점이 있으신 분들은 언제든 저의 집무실로 찾아오셔도 됩니다."
그런 모든 가신을 뒤로하고.
영주는 그런 말과 함께 회의를 파하였다.
"...."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쉽게 꺼낼 수 없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미리 대비되어 있지 않기도 했고, 영지의 무력을 책임지는 기사단장이 키로스 경이 이미 영주를 지지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적어도 상황을 더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가신들은 그런 생각과 함께 일단은 특별한 반발 없이 느릿느릿 해산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유독 한 남자가 다급하게 움직였다.
"이보게, 키로스! 잠시 나와 이야기 좀 하지!"
"무슨 일인데 그리 급하게 나를 부르나, 제노비오스?"
제노비오스.
제노비오스 크세로스.
니카로스 남작령의 집사장.
그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키로스를 붙잡았고.
평소답지 않은 그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주위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일단 자리를 좀 옮기지. 복도에서 대놓고 할 이야기는 아니니까."
"허,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당황하는 키로스의 손목을 붙잡고 반쯤 강제적으로 인적이 드문 성의 구석까지 데려간 집사장 제노비오스는, 주위에 듣는 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언성을 높였다.
"대체 영주님께서는 무슨 생각이신 건가! 그렇게 급하게 시하브 토후국 침공을 결정하시다니! 그리고 용병과 벌써 계약을 체결했다? 이래서는 계획을 물리기도 어렵잖나! 자네는 기사단장이면서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영주님을 안 말리고 도대체 뭘 한 건가!"
그는 열불을 내며 순식간에 이야기를 쏟아냈다.
너무 위험하다.
전 영주 마누엘의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전쟁을 준비하다니.
만약 이 전쟁까지 실패로 돌아간다면.
니카로스는 완전히 멸망 아닌가!
"...."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영주님을 말려야 하네. 용병 계약의 위약금 따위는 감수할 수 있어. 시하브 토후국이 우리의 숙적은 맞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좋지 못해. 자네도 알지 않는가! 지금은 숨죽이고 힘을 키울 때야!"
따라서 제노비오스는 진심으로 호소했다.
티베리오스가 영주가 된 것 자체에는 불만이 없다.
그 과정이 지나치게 갑작스럽긴 했지만, 그는 현재 살아남은 제논의 유일한 핏줄이니까. 그가 영주가 되는 것은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 영주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믿는 것은 또 아니었다.
'그야, 사실상 티베리오스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도련님 아닌가!'
지금의 상황은 아무리 봐도 가족을 모두 잃고 복수심에 눈이 돌아간 티베리오스가 니카로스 전부를 파멸로 몰고 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복수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제노비오스도 평생을 니카로스에 헌신한 만큼 두 영주의 죽음에 다른 누구보다 분한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마음만으로 영지를 운영할 수 없다.
영지를 돌아가게 만드는 동력은 이성이다.
"자네와 나, 기사단장과 집사장이 모두 한 마음으로 반대하면 영주님도 생각을 바꿀 거야. 당장이라도 함께 집무실로 찾아가야 해."
"...."
자신할 수 있다.
이럴 때 영지의 원로 가신으로서 영주를 말리는 게 진정한 충심이자 도리.
그렇기에 제노비오스는 자신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영지를 이끌어온 동료 키로스를 찾았다.
"이야기는 끝났나?"
그러나.
"미안하지만 나는 영주님의 계획에 찬성한다네."
"...뭐?"
키로스는 전혀 그의 생각에 공감하지 않았다.
"우리가 도적단을 토벌하고 모든 진실을 알았다는 것을 시하브 놈들도 분명히 눈치챘겠지. 이미 놈들도 전쟁을 대비할 게 틀림없어. 나아가 아예 선제적 침공을 단행할 수도 있고. 그러니 우리가 먼저 준비할 틈도 없이 선전포고하는 게 그렇게 틀린 이야기인가?"
"그건 전부 추측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다 패배라도 한다면...!"
"그렇게 따지면 놈들이 쳐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자네의 추측에 불과하지. 그리고 자네는 우리의 패배를 가정하는 게 아니라, 아예 확신하고 있는 것 같군."
"...."
키로스의 지적에 제노비오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당연히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으니까.
"...영주님은 아직 어려. 이 전쟁에 우리의 모든 게 달렸는데, 그분의 승리를 무작정 믿기만 하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그래, 제노비오스도 알고 있다.
복수는 이미 니카로스의 사명이 되었다는 것을.
전쟁에서 승리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키로스의 말이 전부 옳다는 것을.
'하지만 그건 그저 꿈 같은 이야기일 뿐이지 않은가!'
시하브 토후국은 니카로스보다도 크고 강대한 나라다.
그런 적을 상대로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전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하다못해 그 제논이 살아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번 전쟁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경험 없고 어린 영주다. 제노비오스의 판단은 자연스러웠다.
"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그리고 의외로 키로스 역시 그 말에 순순히 수긍했다.
"자네라면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동의하는 것은 여전히 아니었다.
"하긴. 자네는 옛날부터 너무 머리로는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
"...뭐?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하는 건가? 지금 날 모욕하는 건가?"
짧은 수긍 뒤, 곧바로 튀어나온 키로스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제노비오스는 순간 발끈하고 말았다.
"아니, 그게 왜 모욕인가. 자네 똑똑하다는 뜻인데."
키로스는 평소처럼 넉살 좋게 웃었지만, 이미 그와 수십 년을 알고 지낸 제노비오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당연히 내가 똑똑한 건 맞지만, 자네 같이 뇌까지 근육인 놈은 모욕의 의미로 말했을 테니까!"
"허, 이 사람 참. 뇌까지 근육이라니, 그 말도 참 오랜만에 듣는군."
잠시 오래된 그리움을 느낀 키로스는, 곧 다시 태도로 바꿔 진지하게 잔뜩 성이 난 제노비오스에게 말했다.
"기억을 잘 되살려보게. 돌아가신 제논 님이 뭘 하자고 할 때도 자네는 늘 이렇게 반대만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 결과가 다 어땠나?"
어떻게 보면 두 사람 모두에게 익숙한 상황이다.
니카로스 남작령의 시작부터 함께한,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두 사람의 이런 충돌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제노비오스는 그 옛날 어느 때보다도 강경했다.
"그거야 제논 님이 특별했던 거고! 그분 같은 호걸이 어디 세상에 흔한 줄 아는가!"
제노비오스는 제논 발란티스를 존경했다.
그에게 전력으로 충성을 바쳤다.
그 마음이 일말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기 때문에, 그는 현재 니카로스의 그 누구보다 깊은 불안함과 걱정에 휩싸였다.
"당연히 흔하지는 않겠지만, 그분의 아드님이신 현 영주님도 그런 기질을 물려받았다는 것도 그리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지."
하지만 그런 제노비오스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키로스는 자신 있게 그렇게 대답할 수 있다.
그는 분명히 함께하고 지켜본 몸이니까.
티베리오스 발란티스의 전쟁과 승리를.
"...그건 어디까지나 자네의 희망 사항에 불과해. 마누엘 님처럼 어린 시절부터 제논 님에게 후계자로 교육받으신 것도 아닌, 갑작스럽게 예정에도 없이 영주가 되어 버린 티베리오스 님이야.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영주님을 믿을 수 있나?"
그러나 그것이 말로 설명하기 더없이 어려운 사실이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키로스는 논리적이고 합당한 이유를 구하는 제노비오스의 말에, 그렇게밖에 대답하지 못했다.
"감."
"...내가 그런 대답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할지 자네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 짧고 간결한 대답에.
제노비오스는 허탈하다는 그렇게 되물었다.
"당연히 알고야 있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내 자네 성격도 모를까.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키로스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이건 직접 보고 느끼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사안이다.
아마 시간과 경험이, 이번에 있을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만이 지금 두 사람의 간극을 메꿔줄 수 있겠지.
"반대로 이번에는 내가 묻지. 티베리오스 님이 영주의 자리에 오른 지 벌써 몇 달이나 지났어. 도대체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영주님에게 전할 계획인가."
"...."
'그 아이'.
그 세 글자가 키로스의 입에서 나오자, 이번에는 반대로 제노비오스가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조금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처럼.
짧은 침묵이 지난 끝에야 제노비오스는 떠듬떠듬 대답을 이어나갔다.
"...지금 영주님은 바쁘셔. 전쟁 준비에 전념하시고 계신 분에게 굳이 당장 혼란스러울 이야기를 전해드릴 필요는 없지. 그분께서 정식으로 계승식을 치르시고, 전쟁 준비를 끝내시면 전할 생각이었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군."
괜히 지금 영주님을 심란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키로스도 공감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럴수록 자네만 의심을 산다는 걸 모를 리는 없겠지?"
"지금 나의 충심을 의심하는 건가...!"
으르렁대는 제노비오스를 보고도 키로스는 차분했다.
"당연히 나는 의심하지 않지. 하지만 영주님께서는 어떨까? 자네가 영주님에 대해 잘 모르는 만큼, 영주님도 자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 않나?"
"...."
제노비오스는 그 말에는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분명히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동안 영지 운영과는 완전히 떨어져 계셨던 분이다.
키로스는 그나마 검술 스승이라는 역할로 일찍부터 친분을 쌓았지만, 온전히 내정만을 담당하는 제노비오스는 티베리오스와 안면을 익힐 틈이 그리 많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당장 이런 대답밖에는 하지 못했다.
"...조언 고맙네. 그 점은 내가 유념하지."
"그래."
무미건조한 키로스의 대답.
그를 듣고 잠시 크게 한숨을 내쉰 제노비오스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자네 의견을 잘 알겠네. 아무래도 더 이상의 논의는 당장 필요하지 않겠어. 어디 한 번 두고 보자고."
"어째, 혀에 가시가 잔뜩 돋아있는구먼."
"자네 착각일세."
그렇게 일축한 제노비오스는 당장에라도 자리를 떠날 것처럼 등을 돌렸다.
그저 서로 생각의 차이만 잔뜩 확인했을 뿐이다.
더는 이야기를 나눠봤자 의미가 없겠지.
"제노비오스."
그런 제노비오스의 뒷모습을 보고.
키로스는 그저 그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게."
이미 영주님은 마음을 정하셨네.
수십 년의 우정이 담겨 있는 그 말에, 발을 떼려던 제노비오스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웃기는 소리를. 나는 어리석은 짓 따위를 하지 않아."
마치 그런 사람은 따로 있다는 듯한 대꾸.
그 말만을 남긴 채 제노비오스는 완전히 자리를 떴다.
"...."
키로스는 사라지는 그 뒷모습만을 조용히 바라봤다.
아주 오랫동안.
#022. 애송이 영주 (1)
성 앞에 영지의 모든 가신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나도 이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상 이 한 번의 원정에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의 모든 미래가 달려 있지 않은가.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녀오겠습니다."
하지만 그저 이해할 뿐이다.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이해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 또한 없다.
슬프게도 이 위험천만한 선택만이 니카로스와 나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돌파구니까.
그리고 오직 나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영주님의 승리를 기원하겠습니다."
가신단의 대표로 가장 앞에 선 집사장은 말 위에 탄 나를 잠시 딱딱히 굳은 얼굴로 올려다본 뒤, 곧 깊이 고개 숙이며 그렇게 말했다.
"...."
나는 말 없이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지막까지 이번 원정을 반대한 우리 집사장님.
과연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궁금하긴 하지만, 당장 고민할 것은 아니다.
거기서 생각을 끊은 나는, 마중 나온 모든 가신을 뒤로 한 채 등을 돌려 말을 몰아 나갔다.
목적지는 당연히 단 하나.
시하브 토후국.
그리고 이런 나의 주위로 1,000명이 넘는 병사들이 대열을 갖춰 행군을 시작했다.
출진.
처음부터 내가 의도하고, 내가 설계하고, 내가 주도하는 첫 전쟁이 이제 시작되었다.
누굴 탓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는 전쟁.
그렇기에 이제 물릴 수는 없다.
물릴 생각도 없다.
***
"하하! 드디어 시작이군요! 이번 원정에 저희를 고용하신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입니다, 남작님!"
시하브 토후국을 향해 진군하던 중, 한 사내가 바로 옆으로 바짝 말을 몰며 다가왔다.
"하물며 상대가 이교도 쓰레기 놈들이라니! 이야, 확실히 이 머나먼 동부까지 온 보람이 있군요."
금발 곱슬머리를 뒤로 넘긴, 자신만만한 표정의 청년.
'푸른 이리 용병대'의 단장인 안티모스였다.
그는 아주 만족스럽고 흐뭇하다는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안티모스 씨는 수도에서 오셨다지요?"
안티모스.
<마이트 앤 로열>의 고정 네임드 캐릭터.
'안다면 아는 인물이고, 모른다면 모르는 인물.'
분명히 기억에는 있는 이름이다.
원작 게임에서도 종종 수도 인근에서 고용 가능한 용병 목록에 고정적으로 이름을 올린 양반이거든.
그러나 그 비중은 어디까지나.
딱 '고정적으로 나온다', 이 정도.
특별한 서사나 성격, 배경 설정 같은 것은 전혀 묘사되지 않아서 사실상 이야기라는 측면에서는 무작위로 생성되는 엑스트라 캐릭터와 별 차이점이 없었다.
'...실제로는 이런 성격이었나.'
묘사가 안 되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요란스럽다.
"맞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저와 제 부하들은 수도에서 활동했지요."
하지만 적어도 실력만큼은 믿을 만했다.
서사는 없지만, 능력은 있다.
이래 봬도 고정 네임드 캐릭터 출신인 만큼 매 회차 변함없는 개인 능력치는 모두 나쁘지 않았고, 그가 이끄는 용병대의 성능 또한 평균 이상은 되었다.
이래저래 모르는 게 없는 가스파르 또한 현재 에우스페나에서 고용 가능한 용병대 중 제일 괜찮은 선택지라 보증도 했고 말이야. 중요한 일전을 앞둔 만큼 충분한 검증을 거쳐서 고용한 친구다.
비중은 없지만 애초에 원작에 변함없이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는 뜻.
"수도에서 이 변경까지 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궁금하네요. 혹시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수도에는 용병이 필요한 일이 없었다거나?"
이것도 인연.
어차피 원정은 길다.
나는 먼저 다가온 안티모스에게 궁금했던 걸 물었다.
"으음, 그렇게까지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만...."
내 질문에 안티모스는 잠시 고민했다.
무언가를 숨긴다기보다는 대답에 앞서 표현할 단어를 고민하는 것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냥 수도에 있으면 영 머리가 아파서 말이죠."
"머리가 아프다뇨?"
영 애매한 표현에 나는 되물었다.
"뭐, 말씀과는 달리 수도에 있으면 딱히 일거리가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제국에서 용병이 제일 넘쳐나는 곳 중 하나죠."
안티모스는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갔다.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하나, 오히려 그래서 더 문제라고 할까요? 사방에서 죽여달라는 놈은 너무나 많은데 제가 보기에 정말로 죽을 이유가 있는 양반들은 그렇게 많지 않단 말이죠?"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는 듯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게다가 임무를 마치고 며칠도 안 지나서 이전 고용주를 죽여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영 피곤한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즐거운 기억은 아니었겠군요."
간단히 서먹함을 깨기 위한 목적으로 물어본 질문이었는데, 생각보다 무거운 주제가 튀어나와 버렸다.
중앙이 개판인 건 이미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모니터 너머로 접한 머릿속 지식일 뿐.
그걸 생생히 체험하고 온 사람의 말을 직접 들으니 확실히 느껴지는 바가 다르네.
권세를 지닌 귀족들은 황실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사병을 이끌고, 서로를 향한 음모와 암살이 난무한다. 그런 마굴이니만큼 당연히 다들 무력이 절실할 테고, 따라서 용병의 수요도 넘쳐나겠지.
'하긴. 국경지대가 이 지경인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수도가 먼저 막장이 되었기 때문.'
그러니까 그쪽 사정이 여기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할 리는 없다.
"하하! 괜찮습니다! 제가 지금 수도에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예상보다 진지한 사정으로 인해 듣는 나까지 심각해지려고 하자 그는 순식간에 원래의 태도로 돌아왔다.
자신의 현재 만족감을 표현하기 위해 역동적인 손짓 몸짓을 섞어서 그런지 아까보다 훨씬 더 요란스러웠다.
그런 안티모스의 태도에 나는 피식 웃으며 떠보는 것처럼 물어봤다.
"그런데 제가 할 말도 아니지만, 이곳 동부도 그다지 멀쩡한 곳은 아닐 텐데요?"
그래, 여기가 수도보다는 낫다지만 그래도 결국 오십보백보잖아. 게다가 정치가 아닌 일반 평민들의 삶을 기준으로 삼으면 이쪽이 훨씬 더 처참하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여기에는 보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안티모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손까지 휘휘 가로저었다.
"위대한 태양신 솔레오를 위해! 신앙을 위해 싸웠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전장! 다른 고민할 것도 없이 눈앞의 이교도를 쳐부술 생각만 하면 되는 성전! 크, 저는 바로 이런 걸 원한 겁니다!"
마치 약주라도 한잔한 듯 주먹을 붕붕 흔들며 소리를 내는 안티모스를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어떻게 보면 재밌는 이야기였다.
무고한 이들을 죽이는 게 싫어서 이 변경까지 온 사내가, 이교도를 죽이는 것에는 열광하는 이야기.
'하긴. 원래 이런 세계, 이런 시대이긴 해.'
그저 상대가 이교도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것만으로 많은 것이 정당화된다.
자비롭다는 신의 이름을 팔아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면서도 어느 쪽도 자신의 확고부동한 정의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도덕이 다르고, 규범이 다르다.
정말, 나처럼 교양 있고 선량한 현대인에게 적합한 세상은 절대 아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남작님의 승리를 위해 우리 용병대 전체가 최선을 다해 싸울 테니!"
"감사합니다. 저도 솔레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싸움을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그런 세상의 최전선에 있다.
***
시하브 토후국은 아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며칠 전 이미 니카로스 남작령의 선전포고문이 도착했다. 예상보다는 조금 이른 전쟁이었지만, 그렇다고 멍하니 있을 수는 없었다.
"정말로 저질러 버렸군."
시하브 토후국의 에미르 말릭은 전달된 선전포고문을 다시 한번 읽으며 나직이 분노했다.
내용은 뻔했다.
이미 시하브 토후국이 도적단을 매수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아버지에 이어 형까지 더러운 수작으로 살해한 극악무도한 시하브 토후국을 신을 대신하여 심판하겠다.
그런, 읽을 가치도 없는 이야기.
시하브 토후국은 그 서신을 받은 동시에 미리 작성해놓은 반박문을 사방에 뿌렸으나, 어차피 중요한 것은 그런 형식적인 내용 따위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선전포고문이 도착했다는 사실 자체.
"허 참, 이 천둥벌거숭이 놈이 정말로 전쟁을 일으키다니. 말릭 님의 예측이 옳았군요."
분노가 섞인 말릭의 중얼거림을 다른 사내가 받았다.
말릭은 그 목소리가 나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팔짱을 낀 채 풍성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한 중년의 남자가 회의실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나스라딘 장군. 먼 길 고생하셨소."
말릭은 그 사내, 나스라딘 장군을 환영했다.
"하하! 고생이라뇨? 오직 고귀한 달의 신 마네스를 위해 역겨운 제국의 떨거지들을 도살하는 일인데, 저희 아르잔이 빠질 수야 있겠습니까!"
나스라딘 장군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에 맞춰 말릭도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내 아르잔 토후국과 그 주인이신 에미르 바샤르의 도움은 절대로 잊지 않겠소."
시하브 토후국과 이웃한, 비슷한 국력을 지닌 월광교 소국인 아르잔 토후국.
비록 일대에 강한 영향력을 투사하는 국가는 아니었지만, 그곳을 다스리는 에미르 바샤르만은 제법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지독한 광신도이자 철저한 월광교 근본주의자로.
에미르 바샤르는 시하브 토후국이 니카로스 남작령, 즉 바할리아 제국의 침공을 이유로 함께 신앙의 적과 함께 맞서 싸우자고 주장하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합류를 선언했다.
그 아르잔 군의 대표로 파견된 나스라딘을 보니, 아무래도 에미르 바샤르는 지원군을 이끄는 지휘관도 자신과 딱 맞는 성향을 지닌 장군으로 고른 것 같았다.
"그런데 도착한 것은 우리 아르잔 군뿐인가 봅니다?"
나스라딘은 주위를 둘러보며 그렇게 물었다.
"다들 아직 눈치를 보고 있나 보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가 승리를 거둔다면 다들 뒤늦게라도 제국의 살점을 뜯어먹으러 승냥이들처럼 몰려들 테니."
"허, 이 신앙심이 부족한 자들 같으니."
독실한 나스라딘은 한탄했지만, 말릭은 태연했다.
주위의 소왕국들이 애초부터 그런 놈들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단순히 성전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니카로스의 개인적인 명분이 너무 명백하기도 하고.
게다가 만약 이게 남 일이었다면 말릭도 비슷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오히려 제국이 상대라는 이유만으로 망설임 없이 병력을 보내준 아르잔 토후국이 특이한 경우겠지.
사실 본래의 계획은 니카로스 남작령이 공격해오기 전에 먼저 기습해서 애송이 영주를 짓밟아 버리고 일대의 시하브 토후국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일찍 놈이 선전포고하여 어쩔 수가 없었다.
만약 계획대로 됐다면 이미 실적을 냈으니 훨씬 순조롭게 동맹을 모을 수 있었을 텐데.
'불쾌할 정도로 쓸데없이 성질머리만 급해서는.'
그래도 이것도 아예 상정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다.
아예 먼저 침공을 당한 피해자의 입장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극적인 대반격이 일대에 더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말릭이 태연하게 굴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게다가 고작 니카로스 하나를 박살 내는 데 이 이상 병력을 동원하는 것도 다소 부끄러운 일이지."
"하하! 그것도 옳은 말씀입니다!"
과연 나스라딘도 그 말에는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시하브도 아르잔도, 단독으로도 충분히 니카로스 남작령보다는 강한 국가다.
니카로스도 나름대로 준비는 했겠지만, 두 개 국가가 힘을 합친 이상 가소로운 적에 불과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시하브 토후국의 작전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요?"
"특별한 내용은 없소.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지."
영격, 아니면 수성.
나아가 맞서 싸우거나, 성에 몸을 숨겨 지키거나.
"뭐, 가장 안전한 것은 확실히 수성이겠지요."
말릭의 대답을 듣고, 나스라딘이 쩝 소리를 낸 뒤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공성전에서 방어자는 엄청난 이점을 지닌다.
공격 측이 정공법으로 큰 피해 없이 뚫어내기 위해서는 몇 배 이상의 병력을 끌고 와도 모자랄 정도. 따라서 방어하는 쪽인 시하브 토후국이 당연히 고려할 수 있는 선택지다.
"그렇지만 대국적인 측면에서 판단하면 되레 위험할 수도 있는 선택이오."
하지만 문제는 시하브와 아르잔 역시 전쟁이 길어져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과 시하브가 지켜야 하는 성이 바로 에미르가 머무는 수도라는 것.
병력을 소집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된다는 원론적인 이유를 떠나서도 곤란한 점이 제법 여러 가지였다.
시하브도 소국인 만큼 국경지대에 그럴듯한 요새를 몇 개나 가지고 있지는 않다.
작정하고 전력으로 쳐들어오는 니카로스를 막기 위해서는 견고하게 축성된 성채가 필요하고, 유감스럽게도 지금 그 조건을 만족하는 것은 수도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몇 달이 넘게 걸릴지 모를 공성전 동안 외부와의 모든 접속은 차단당한다.
시하브가 다스리는 여러 마을과 촌락들과도 전부.
즉, 설령 그곳에서 약탈이 일어나도 말릭은 막을 수가 없다는 의미다.
물론 끝내 이길 수야 있겠지.
니카로스는 반드시 파멸할 테고.
하지만 그렇게 공성전을 겨우 승리로 이끌고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시하브가 입을 경제적 손실이 얼마일지 말릭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어리석은 니카로스 남작령과 함께 공멸하는 것을 피하는 게 시하브 토후국의 최우선 목표였는데, 이래서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맞는 말씀입니다. 어차피 병력도 저희가 더 우위. 굳이 저 역겨운 종자들을 오래 살려둘 이유는 없지요."
영격, 성을 나가서 맞서 싸운다.
오직 이 방법뿐이다.
처음부터 이 동맹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한 수비가 아닌, 바할리아 제국을 향한 반격이었다.
고작 니카로스 남작령 따위에 시간을 오래 끌어서는 모든 게 흐지부지된다.
게다가 다른 무엇보다, 현재 병력의 우위 역시 시하브가 지니고 있다.
시하브 토후국의 총병력 900명.
아르잔 토후국의 지원군 500명.
연합국 총합 1,400명.
정면승부를 피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상대는 제대로 된 전쟁을 겪어본 적도 없는 애송이.
동맹인 아르잔 토후국의 장군인 나스라딘까지 동의했으니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스라딘 장군, 병력을 준비시켜주시오. 저 아둔한 이교도들에게 마네스의 철퇴를 휘둘러 줍시다."
"하하! 그 말씀만을 기다렸습니다!"
나스라딘은 희희낙락하며 곧 자신이 이끌고 온 부대로 향하며 회의실을 나갔고.
말릭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말릭은 지금까지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절대 눈앞에 작은 이익에 눈이 먼 오판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 반드시 승리하고 성공할 자신이 있다.
남은 것은 오직 마네스, 고귀한 달의 여신께서 점지하신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
말릭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023. 애송이 영주 (2)
제국과 맞닿은 시하브 토후국의 국경지대.
우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목표는 오직 한 곳.
에미르가 머무는 시하브 토후국의 수도.
"...."
하지만 메마른 바람이 연신 얼굴을 두들겨서 그런가.
분명 말머리는 똑바로 앞을 향하고 있었음에도, 나의 두 눈은 어째서인지 저 먼 곳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나는 행군 도중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의 마음을 아득하게 만드는, 푸르고 높은 하늘.
그 하늘 아래 끝을 모르고 펼쳐진, 광활한 대초원.
사방의 풍경 눈에 담긴다.
이 일대는 전반적으로 이런 느낌이었다.
'느긋하게 감상하기에는 나쁘지 않지만.'
막상 직접 살아보라고 하면, 아무래도 글쎄.
시원시원한 풍경과는 달리 이 땅은 인간에게 그리 친절한 곳이 아니었다.
비는 거의 내리지 않고 대기는 건조. 농사를 짓기에는 토양 역시 다소 척박한 편. 워낙 탁 트인 탓에 방어의 이점을 살릴 군사적 요충지도 전무.
그나마 경쟁력이 있는 산업이라면 목축 정도랄까.
'괜히 여기가 변방이 아니거든.'
물론 개성이 강한 만큼 특출난 장점이 아예 없는 토지는 아니지만, 그걸 살리는 게 너무나 어렵단 게 문제다. 특히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처럼 약소한 영지라면 더더욱 그렇고. 당장 살아남는 것도 급급한 처치니까.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곳에서 구르고 있는 건지.'
사람을 홀리는 초원의 마력이라고 할까.
점점 그런 생각이 절로 내 머리를 덮었다.
"...."
그래서 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먼저 차가운 공기를 내 폐 속 가득 채우고.
곧장 가슴을 텅 비우듯 전부 내뱉기.
그리고 다시 똑바로 전방만을 바라봤다.
맑은 공기만큼이나 내 시야도 또렷했다.
이제 된 것 같다.
'감수성 넘치는 시간은 이쯤 하자고.'
애초에 나처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성인에게는 그다지 어울리는 짓도 아니었는걸.
이 땅에, 니카로스 남작령에 남는 게 어렵다는 것 따위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 알면서도 스스로 이 길을 걷겠다고 선택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그런 일로 투덜댄다니, 솔직히 내가 봐도 조금 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미 전장에 나와 있으니까.'
그래.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전투만이 기다리고 있다.
선전포고문도 진작에 보냈다.
다른 일을 신경 쓸 여유 따위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승리를 위한 궁리뿐.
그리고 다행히 그게 영 답이 없는 문제는 아니었다.
'이 땅이 징글징글한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점이 아예 없지는 않으니까.'
몇 번이고 말했잖아.
단점이 너무 많아서 그렇지 니카로스 남작령은 장점도 많은 곳이라고.
'이점을 살리기 어렵다고 해서 시도조차 안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려운 것과 불가능한 것은 확연히 다르다.
그렇기에 나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사실 출발하기 전부터 내려뒀던 결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왕이면 저놈들이.'
정면 승부를 걸어주면 좋겠다, 라고.
"영주님! 전방에 시하브 군이 나타났습니다! 그 수는 대략 1,400! 앞으로 1시간 정도 뒤에 이곳까지 도달할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이렇게 말이야.
앞서 나가던 척후병 중 하나가 다급히 복귀하며 보고한다. 그 목소리에는 긴박감이 가득하다.
저 보고가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하나.
이제 곧 전투의 때가 다가온다.
'1,400명. 1,400명이라.'
나는 잠시 소리 없이 그 숫자를 중얼거렸다.
상상조차 못 한 수치는 아니지만.
"생각보다 적의 병력이 많군요.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렇지.
용병대장 안티모스가 마치 내 마음이라도 읽은 듯, 속으로 생각하던 바를 그대로 대신 표현해주었다.
진짜.
예상보다는 조금 많네.
우리가 대략 1,000명이니 과장 좀 보태서 1.5배다.
"그렇군요. 대략 1,400명이라. 시하브 토후국 홀로 그만한 병력을 동원할 수는 없을 텐데. 아무래도 타국에서 지원을 보낸 모양입니다."
아예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다.
월광교 소국들은 자기들끼리는 질리게 치고받고 싸우면서 남들이 그 판에 끼려고 하면 또 갑자기 똘똘 뭉치는 귀찮은 놈들이거든.
그래도 그렇지.
'아버지와 형의 복수가 목적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음에도 저렇게 끼어들다니.'
정말 경우라고는 없는 놈들이다.
'아니, 달리 생각하면 가족의 복수라고 선언한 덕분에 그나마 이 정도밖에 안 뭉친 건가.'
기껏 달랜 마음이 다시 투덜거리고 싶다고 바둥거리기 시작했지만 애써 눌렀다.
어쨌거나 이것도 결국 이미 벌어진 일.
원래 먼저 선전포고한 쪽은 이런 핸디캡도 다 감내해야 하는 법이다.
게다가 중요한 정보가 하나 더 남았으니까.
아직 낙담은 이르지.
"적 병력의 구성은 어떻지?"
바로 곁에서 나를 보좌 중인 키로스 경이 바로 그 중요한 정보에 관해 물었고, 노련한 척후는 침착하면서도 신속하게 대답했다.
"말을 타고 있는 병력이 대략 100명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는 대부분 열악한 무장의 징집병이었습니다."
1,400명 중 기병이 100명이라.
그리고 징집병이 1,300명이라.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반사적으로 내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며 안티모스가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남작님? 적군이 우리보다 제법 많군요."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그 긴장감이라곤 한 점도 없는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어이가 없어 픽 웃음이 튀어나왔다.
웃음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베테랑의 여유라는 건가.'
굉장히 기묘하고 이상한 구도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총지휘관이 되어서 밀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렇기에 나 역시 당당히 대꾸했다.
"오히려 잘 됐습니다. 여기서 전투를 준비하죠."
결정은 이미 한참 전에 내려뒀다.
'만용은 아니야. 방심도 아니고.'
그저 미리 이런 상황을 상정한 계획도 세워뒀고.
내심 바라던 상황이기도 하며.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 따위는 조금도 없기에 내리는.
'그런 전략적으로 마땅한 판단일 뿐이지.'
판단이 끝났기에,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안티모스에게 웃으며 물었다.
"대신 안티모스 씨와 푸른이리 용병대가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짊어주셔야 할 것 같군요. 괜찮겠습니까?"
우리 영지의 징집병 450명.
검은 매의 기사단 80명.
푸른이리 용병대 500명.
아군의 병력 모두 합쳐 총 1,030명.
그래, 단순히 머릿수로만 판단하면 우리가 적보다 열세이긴 하다. 이대로는 이기든 지든 이 상황에서는 큰 피해를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할 일이 태산인데, 벌써 그런 피해를 겪을 수는 없지.'
가장 이상적인 것은.
최소한의 손실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
'그러니까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야.'
이점을 살린다.
그리고 그걸 위해 안티모스의 도움이 필요하다.
따라서 나는 요청했고.
다행히도 이 이상한 친구는 당차게 대답해주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위대한 솔레오께서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고작 죽음 따위가 두렵겠습니까!"
용병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 자신감 하나는 진짜다.
더할 나위 없이 귀한 걸 안티모스는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나 역시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하하,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푸른 이리 용병대의 대장, 안티모스의 확답.
어느새 묵묵히 검을 뽑아 든 키로스 경.
그 뒤를 따르는 우리 검은 매의 기사단.
끝내 그 모든 걸 지탱하는 징집병, 나의 주민들까지.
준비는 이미 완벽하다.
처음부터 완벽했다.
그렇게 준비해서 왔다.
'요컨대.'
승산은 차고도 넘친다.
***
"적들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시하브와 아르잔 연합군 역시 비슷한 시점에 니카로스 군을 발견했다.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진군하던, 아르잔 토후국의 나스라딘 장군은 니카로스 군의 모습을 보고 살짝 얼굴을 굳혔다.
거의 1,000명.
생각보다는 병력의 수가 많다.
일개 남작령 하나가 동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게다가.
"...놈들의 반푼이 기사단이야 원래 꼴에 제법 명성을 떨쳤으니 당연히 나타날 걸 예상했지만, 기사단 외에도 기세가 심상치 않은 병사들이 많군. 용병인가."
"아무래도 쉽지 않겠소. 당장은 군을 물리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요."
나스라딘의 중얼거림을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시하브 토후국의 장군이 받았다. 그 역시 같은 광경을 보고 비슷하게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스라딘은 그 의견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럴 수는 없소. 여기서 물러난다면 결국 성에 틀어박히는 것밖에 방도가 없는데 그렇게 되면 시하브의 신민들만 더 고통받을 뿐이오."
"크흠, 옳은 말씀이오."
의견을 제시한 장군은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나스라딘의 말에 동의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지원군이 시하브 군보다 시하브의 백성을 더 신경 쓰는 기묘한 광경이었지만, 달리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용병은 곧 전투에 익숙한 숙련병.
그리고 숙련병의 가장 큰 장점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그런 숙련병을 상대로 승부를 건다면, 이기든 지든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는 건 필연이나 마찬가지다.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징집병을 데리고 온 시하브 군으로서는 꺼릴 수밖에 없는 상황.
'...수월한 낙승을 예상했지만, 아무래도 야전으로는 조금 어렵겠어.'
하지만 나스라딘의 말도 옳다.
이미 벌여놓은 판이 큰 시하브 토후국으로서는 공성전과 지구전이 되는 것이 곧 패배나 마찬가지.
이제 물러설 곳은 없다.
그렇다면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이기기만, 이기기만 하면 된다.'
에미르 말릭의 계획대로만 된다면 다소간 손해는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 시하브 군의 장군은 그렇게 되뇌며, 상황을 분석했다.
"전장은 넓은 개활지. 수적 우위를 살리는 게 역시 최선이겠군."
예상과는 다소 상황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기지 못할 상황은 결코 아니다.
여전히 병력은 연합군 쪽이 더 많고, 적의 총지휘관이 애송이 영주라는 사실 역시 바뀌지 않았다.
시하브 군의 장군은 그저 전투가 끝난 후 시하브 군이 감당해야 할 피해가 두려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피할 방법을 찾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한동안 조용히 고민하던 나스라딘이 다시 입을 열어 의견을 제시해주었다.
"동의하오. 놈들 기사단의 콧대가 제법 높긴 하지만, 결코 우리 기병대의 용맹도 밀리지 않소. 다행히 기병의 수 자체는 우리가 더 많으니, 놈들이 자랑하는 검은 매인가 뭔가 하는 새대가리 기사단 놈들도 감히 천방지축으로 날뛰지는 못하겠지."
"요컨대 우리 기병대가 놈들의 기사단을 묶어놓은 사이, 보병의 압도적 수적 우위로 짓뭉개자는 뜻이오?"
"정확하오. 비록 용병의 존재가 거슬리긴 하지만, 머릿수는 우리 보병대의 절반도 되지 않소. 애송이 영주가 이끌 제국의 개돼지 놈들만 빠르게 무너뜨리면 용병대 역시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하겠지."
"확실히... 그게 가장 합리적이겠구려."
나스라딘이 제시한 의견에 시하브의 장군 역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니카로스 군의 가장 큰 무기는, 그들이 자랑하는 '검은 매의 기사단'과 이번 전쟁을 위해 고용된 '푸른이리 용병대', 바로 이 둘.
연합군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대지만.
'반대로 말해, 상대적으로 소수인 그 둘만 제압할 수 있다면 나머지 니카로스 군은 허수아비로 전락한단 뜻이기도 하지.'
80명의 검은 매의 기사단은 100명의 연합군 기병대가 달려들어 발을 묶고.
그 사이 양군의 보병대가 정면충돌.
애송이 영주가 이끌 니카로스 군의 징집병을 집중적으로 압박하며 먼저 무너뜨린다.
그리고 남은 푸른이리 용병대는 두 배가 넘는 머릿수를 이용해서 사방에서 압박.
등을 지킬 벽조차 없는 개활지니 아무리 숙련병이라고 한들 버틸 수는 없다.
검은 매의 기사단은 그대로 사건의 방관자 행.
최소한의 손실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시하브의 장군이 보기에도 이 전략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특히 제국 본토 침공을 위해 최대한 병력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연합군의 처지를 고려하면 더더욱.
하지만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놈들에게 그 키로스가 있소, 귀신 키로스."
"...."
시하브 장군의 그 예리한 지적에는 나스라딘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니카로스의 키로스.
월광교의 적이자 제국의 도살자.
수십 년간 전장을 떠돌았음에도 여전히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는 노괴(老怪).
그 괴물이 이끄는 검은 매의 기사단이라면, 고작 20명 정도의 수적 우위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물론 이기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간만 끌면 된다지만, 그조차도 확신할 수 없게 만드는 게 바로 귀신 키로스의 저력.
만약 니카로스 군의 보병대를 채 다 무너뜨리기도 전에 키로스가 먼저 연합군의 후방을 친다면 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시하브의 장군은 바로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선봉에서 기병대를 직접 지휘하지. 최대한 그 늙은 귀신을 붙잡고 있겠소."
나스라딘 역시 그 점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귀신이라는 이름값 때문에 잠시 침묵했지만, 사실 각오는 진작부터 끝냈다.
그 확고한 대답에, 시하브의 장군은 숨을 삼켰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안다. 나스라딘도 우수한 지휘관이자 뛰어난 전사다.
만약 그가 제국의 기사였다면 하급 기사, 네오파이트의 지위 정도는 너끈히 따낼 수 있겠지.
그렇지만 그런 나스라딘이라고 해도 중급 기사, 아데프투스 키로스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 그렇기에 시하브의 장군은 마치 자살을 희망하는 인간을 보듯 나스라딘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런 시선에도.
"하하! 당연히 진심이지! 어찌 사내가 되어 한 입으로 두말을 하겠소!"
아르잔 토후국의 장군.
나스라딘은 그저 호탕하게 웃을 뿐이었다.
"사실 예전부터 내 손으로 직접 그 귀신의 숨통을 끊고 싶었지. 내 창끝에 놈의 목을 걸어올 작정이니, 장군께서는 아무 걱정하지 마시오."
"...."
마치 허세와도 같은 나스라딘의 포부.
말투는 가볍지만, 결코 그 안에 담긴 각오까지 가볍지는 않다. 시하브의 장군은 그것을 느꼈다.
"...감사하오. 우리 시하브 토후국의 결코 장군의 용기를 잊지 않을 것이오."
그렇기에 시하브의 장군은 조용히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그 무거운 경의에 나스라딘은 도리어 한쪽 입꼬리를 거칠게 말아 올릴 뿐이었다.
"뭘. 이 또한 고귀한 마네스께서 인도하신 길일 뿐."
처음부터 죽을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저 나스라딘이라는 이름의 신실한 사내가 내린 결단일 뿐이다.
공명심, 호승심, 그리고 신앙심.
그 모든 것이 한 데 뒤섞여 내려진, 그런 결단.
'신의 이름 아래, 살아서, 이기고, 영광을 쟁취한다.'
나스라딘 역시 그걸 위해 산다.
이 땅의 모두가 그렇듯.
그렇게 그가 다시 마음을 다잡은 순간.
"장군, 놈들이 움직입니다."
마침내 니카로스 군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며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전진한다.
알 수 있다.
전부 두 눈에 담긴다.
충돌이 머지않았다.
나스라딘은 천천히 자신의 검을 꺼내 살폈다.
그리고 수십 수백의 이교도를 베어 넘기기에 부족함이 없는지 살폈다.
"...."
만족스럽다.
검은 날카롭다.
"부디 고고한 달빛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싸움이 되길."
따라서 신실한 나스라딘은 진심으로 그렇게 바랐다.
양측의 판단과 목표가 절묘하게 맞물리고.
그와 동시에.
양군이 서로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024. 애송이 영주 (3)
군대가 움직인다.
양측 합쳐 거의 2,500명.
총 5,000개의 발과 다리가 땅을 짓밟으며 모두의 심장을 뒤흔든다.
하지만 막상 직접 그 땅을 울리고 있는 병사들은, 어느 진영 할 것 없이 얼굴에 오직 긴장과 두려움만을 가득 품고 있었다.
사실 노골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이 전쟁과 그다지 관계가 없는 자들이었다.
그저 끌려왔을 뿐.
각 군의 간부들은 어째서 병사들이 싸워야 하는지, 이교도들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지 뇌리에 박히도록 연신 강조했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병사들과는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니카로스도, 시하브도, 아르잔도.
이 전장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그런 병사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결정하는 것은 고귀한 자들이다.
태생적으로 권위를 타고 난, 관계없는 자들을 자신의 투쟁에 끌고 올 수 있는 권리를 허락받은 자들.
병사들은 그 이유도 모른 채 싸우다 죽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전투 역시 세계에 널리고 널린.
그 사실에 대한 작은 증명이었다.
하지만.
"돌격! 돌격! 두려워하지 마라! 드높은 하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오직 그런 자들만이 전부인 것은 아니었다.
짐승들이 달린다.
아주 먼 과거부터 인간과 함께 전장을 질주하던, 뜨거운 심장을 지닌 전우들이 기수의 호령에 맞춰 돌격한다. 달아오르기 시작한 말의 체온이 기수의 허벅지를 타고 선명하게 몸을 데운다.
이곳은 초원.
말과 말을 타는 자들의 고향.
그 네 발 달린 짐승과 하나 되어, 매서운 바람 속에서 두려움을 잊는 전사들의 요람.
기사단과 기병대.
니카로스 남작령과 월광교 소왕국들 모두 똑같다. 그 기마병들이야말로 양 세력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가장 큰 전력이자 자부심이다.
비록 제논 발란티스가 창설한 검은 매의 기사단이 유독 유명하긴 하지만, 월광교 소왕국 역시 자신들이 만든 기병대의 저력을 믿었다. 자연이 길러낸 태생적 기수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멈추지 마라! 모두 창을 들어라! 내가 앞장서겠다!"
그렇기에 아르잔 토후국의 장군 나스라딘은 망설임 없이 연합군의 기병대를 이끌 수 있었다. 분명 귀신 키로스가 이끌고 있을 니카로스 군의 기사단을 상대로도 용감하게 달려들 수 있었다.
"승리를 위하여! 마네스를 위하여!"
일반적으로.
이 초원 속 전투의 주역은 오직 기병뿐이다.
시간을 버는 게 최우선 목표지만 고작 그것만으로 만족할 계획은 없다. 역겨운 제국의 도살자 키로스의 목을 벤다면 고귀한 달의 여신께서 기뻐하시겠지.
신실하고 독실한 나스라딘은 그렇게 맞은 편에서 달려오는 검의 매의 기사단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충돌이 머지않았고.
'첫 충돌만 버티면, 승산이 있다...!'
모든 건 한순간이었다.
예리한 창날이 서로를 찌르고 말이 고통스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몸부림친다. 선봉의 일부가 피를 흘리며 바닥을 구른다.
양측이 스쳐 지나가듯 한 차례 충돌하고 거리가 다시 잠시 벌어질 무렵, 용맹하게 한 명의 적병을 친히 자신의 창으로 꿰뚫어 죽인 나스라딘은 깨닫고야 말았다.
생각보다 할 만하다.
예상과는 달리 기사단 놈들이 상당히 소극적이다.
싸움이 조금 지지부진해지겠지만 괜찮다.
시간 벌이는 무리 없이 가능하겠다.
그렇다면 최소한 작전은 성공이다.
기사단의 위명 역시 결국 허명에 불과했나.
아니면 이 또한 새로 즉위한 애송이 영주의 영향인가.
뭐가 됐든 우리로서는 이득이다.
그런 모든 생각을 거쳐, 마침내.
'...그런데 그 귀신은 어디에 있지?'
귀신 키로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까지 깨달았다.
나스라딘이 당황하며 두리번거린다.
절대 물러나지는 않지만, 적극적인 교전을 시도하지도 않는 검은 매의 기사단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키로스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기사단장 키로스가 기사단을 지휘하지 않는다.
"...!"
나스라딘의 두 눈이 커진다.
경악이 그의 머리를 채운다.
그의 마지막 깨달음.
검은 매의 기사단 또한 똑같은 걸 노리고 있었다.
시간을 버는 건 자신들이 아니었다.
발을 묶인 게 오히려 자신들이었다.
오늘, 승부를 가를 진정한 전장은.
기병대가 아닌 보병대 쪽이다.
신앙심과 삶의 본능이 함께하는 천칭 속에서.
나스라딘은 머지않아 자신이 해야 할 결단을 내렸다.
***
기병대가 이미 한 차례의 충돌을 마쳤을 무렵.
양군의 보병들 역시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
연합군의 보병대를 이끄는 시하브 토후국의 장군에게는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선명히 보였다.
날붙이가 번쩍거리고.
사방으로 뜨거운 피가 튀겠지.
당연히 두렵지는 않다.
이미 수차례 겪은 상황이고, 그 상황을 이겨내 공적을 세워왔기에 장군이라는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으니까. 인제 와서 두려워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장군은 다만 그저 가능한 한, 그 흩날릴 피의 거의 전부를 니카로스 놈들의 것으로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맞은 편 니카로스 군을 노려보았다.
가장 경계하던 용병대는 우익에 조금 더 몰려있다.
좌익은 상대적으로 수가 적고 부실하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노출되고 돌출되기 쉬운 우측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은 전술의 기본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우익에 전력을 집중해, 놈들의 좌익을 먼저 무너뜨린다.'
장군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차피 아군의 수는 압도적.
그것이 바로 연합군의 가장 큰 우위인 만큼, 훨씬 더 여유롭게 전력을 집중할 수 있다.
'전략의 핵심은 포위다.'
나약한 니카로스 군 좌익의 징집병을 먼저 분쇄한다. 바로 이어서 압도적 수적 우위를 살려 용병대도 포위하여 무너뜨린다.
계획은 완벽.
상대는 고작 애송이 영주.
모든 건 그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그러나 그 각오 직후에 일어난 상황만큼은.
"뭣...!"
그의 예상, 그가 본 미래 바깥에 있었다.
니카로스 군의 우익에 가득하던 용병들이 좌익으로 일사불란하게 이동하여 집결한다.
남아있는 우익의 징집병들은 서서히 속도를 늦춘다.
뒤처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용병대가 합류한 좌익은 그대로 전진한다.
오히려 가속한다.
그렇게 우익이 서서히 뒤로 늘어진다.
니카로스 군의 진형이 점점 대각선의 형태로 변한다.
좌익만 유독 두터워지고 단단해진, 그런 대각선으로.
시하브의 장군은,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사선진(斜線陣)...!"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이다음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알 수 있었다.
시간차.
연합군의 우익과 니카로스의 좌익이 맞부딪힌다.
반대쪽보다 먼저.
'그 말인즉슨...!'
정예하고 상대적으로 수가 많은 적의 좌익이 먼저 교전을 시작한다는 뜻.
최소한 그쪽에서만큼은 아군의 압도적 수적 우위를 상실했다는 뜻.
이점을 상실한 곳에서 아군의 우익이 좌익보다 더 먼저, 더 오랜 시간 싸워야 한다는 뜻.
못해도 뒤늦게 교전에 들어갈 아군의 좌익이 적 우익을 분쇄할 때까지는 버텨야 한다는 뜻.
그렇지만.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연합군도 우익에 전력을 더 집중하긴 했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장군은 확신했다.
예상치 못하게 남들보다 먼저 싸우게 된 아군의 우익은 그저 징집병 무리일 뿐이니까.
적의 좌익은 단순히 수만 많은 것이 결코 아니니까.
저렇게 작정하고 한 곳에 집결한 용병대를 이겨낼 수는 없으니까.
그래.
저들 역시 특별한 존재니까.
그저 끌려온 자들이 대부분인 이 전장에서, 그들은 싸우는 이유를 알고 있는 자들. 스스로 전쟁터라는 연옥을 찾아온 족속들.
돈을 위해 검을 들고 자신의 목숨을 거는 놈들.
용병.
애초에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초원의 주민들과는 결이 다르지만,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용병들의 공세를 자산이 싸워야 할 이유조차 모르는 병사들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장군은 으드득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고작 애송이 따위가 어떻게 이런 전술을!'
허를 찔렸다.
물론 전술의 개념 자체는 어려운 게 아니다.
기초적이고 상식적인 원리를 이용했을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저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실제로 구현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용병대가 일사불란하게 진형을 바꾸는 것.
그들이 이동할 길을 터주는 것.
우익이 서서히 속도를 늦춰 대각선을 만드는 것.
족히 1,000명이 뒤섞여 엉키는 전장에서 그런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걸 해내다니.
비록 적의 태반이 용병이라고는 하나, 나머지 절반은 연합군과 똑같은 징집병 무리. 그런데도 그런 조잡한 무리를 데리고 해내다니.
장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면 필패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고작 이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장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래, 전장에서 돌발 상황은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
그것에 대처하는 것이 바로 지휘관의 역할.
그는 그 사실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교전이 시작된 것도 아니야.'
총병력의 수적 우위는 여전히 건재하다.
대책은 있다.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
아군 역시 지금이라도 신속하게 우익에 병력을 더 몰아주거나, 적의 우익이 늦춰진 만큼 좌익을 더 빨리 돌격시켜 한시라도 일찍 적을 분쇄하거나.
선택해야 한다.
고민할 시간은 길지 않다.
"...!"
고민 끝에.
장군은 말의 고삐를 굳게 다시 고쳐잡았다.
이대로 돌격한다.
아군의 대부분은 숙련도가 떨어지는 징집병.
게다가 출신과 소속조차 다른 연합군.
그런 병사들로 갑자기 계획을 바꾼다고 한들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다. 급하게 병력의 배치를 바꾸려고 하다가 괜히 동선만 꼬여 아군끼리 뒤엉키고 말겠지.
무리해서라도 본래 계획을 강행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믿었다.
"돌격! 더 속도를 낸다! 적들은 오합지졸이다! 빠르게 분쇄한다!"
장군이 직접 좌익으로 이동해 병사들을 독려한다.
병사들은 당황하면서도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연합군의 좌익에 속도가 붙는다.
한발 늦은 탓에 적의 좌익보다는 조금 늦겠지만, 아직 완전히 늦어버린 것은 아니다.
여전히 승산은 충분히 있다.
계획은 바뀌지 않았다.
아군의 좌익도 약하지는 않다.
그들이 무너지기 전에 적 좌익만 먼저 분쇄하면 된다.
그래, 시하브의 장군은 분명 최선의 선택을 했다.
그러나.
'왜, 저자가, 여기에...?'
애석하게도 최선의 선택과 최고의 결과가 언제나 함께하지는 않는 법이다.
예정에 없던 가속에 좌익의 진형이 무너진다.
근대 이전의 전장에서 백병전의 승패는 얼마나 충실히 진형을 갖추는지가 결정한다.
당황하는 병사들, 무너진 진형.
연합군의 무리한 돌격을 미리 대비하고 있던 니카로스 군의 좌익.
그리고 그 모든 사실에 마치 쐐기를 박아 끝내며 모습을 드러낸.
"내가 바로 니카로스의 검 키로스다! 감히 내가 대적할 자 누구냐!"
귀신 키로스.
마치 범의 아가리처럼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
"키, 키로스다!"
"귀신이, 귀신이 여기에 있다아아아!"
제국의 도살자를 알아본 연합군의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 소리친다. 마치 양 떼 속에 뛰어든 사자처럼 그 늙은 기사가 무참히 검을 휘두른다.
날붙이가 번쩍거린다.
사방으로 뜨거운 피가 튄다.
모든 게 장군의 예상대로다.
그러나 그가 바리던 미래와는 달리.
그것은 오직 연합군의 피다.
수적 우위는 대열이 무너지며 일시적으로 잃었다.
어째서인지 가장 경계하던 키로스 또한 이곳에 있다.
니카로스 군의 병사들이 용맹하게 달려든다.
그나마 용기를 내 가장 먼저 돌격하던 병사들은 그대로 추풍낙엽처럼 죽어 나간다.
누가 봐도 부정하지 못할 열세.
자연스레 뒤따르던 연합군의 병사들이 흔들린다.
"이, 무슨...!"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
시하브의 장군은 황급히 주위를 돌아봤다.
아군이 충격에 빠지긴 했지만, 한낱 징집병 무리인 것은 니카로스의 우익도 마찬가지. 분명히 이 상황을 뒤엎을 약점이 어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하브의 장군은 그걸 찾지 못했다.
"...!"
그가 발견한 것이라고는 그저 적의 중심에서, 말에 찬 채 당당한 모습으로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던 한 청년.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니카로스 남작이 전부.
'어째서 이 애송이가, 여기에.'
장군은 이해할 수 없던 동시에,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니카로스 군이 그렇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용맹하게 싸우는지.
놈들의 가장 고귀한 주인이 바로 이곳에.
전장 가장 위험한 한가운데 함께하고 있으니까!
그의 손이 떨린다.
이 순간에도 귀신은 검을 휘둘러 모든 걸 쓸어버린다. 길을 뚫는다. 점점 다가온다.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이건, 이건...!"
전장에서 가장 빠르게 전염되는 감정은 두 가지.
승리의 확신과 죽음의 공포.
지금 연합군의 병사들은.
그리고 그들의 장군은 명백히 후자였다.
어떻게든 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도저히 목소리가 목구멍을 넘어가지 못한다.
기세가 완전히 넘어간다.
연합군이 무너진다.
티베리오스도, 시하브의 장군도.
모두가 그 사실을 직감했다.
동시에 마침내 귀신이 돌파에 성공했다.
장군의 시야는 담았다.
티베리오스의, 귀신의 주인이 모든 걸 내려다보며 입가에 선명하게 미소를 걸고 있는 모습을.
바로 그것이 그가 귀신의 검에 목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025. 애송이 영주 (4)
'계획대로 됐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을 교란하는 것. 그리고 정예병을 한쪽 측면에 몰아넣고 시간차를 두어 투입하는 것.
그렇게 마치 포식자가 그 아가리를 다물 듯, 정예병을 축으로 적을 깎아 갈아내는 것.
그냥 말로 하면 간단해 보이지만, 전술과 대형의 개념조차 모르는 징집병과 함께 이런 작전을 펼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고생 참 많이 했지.'
그냥 게임이었다면 버튼을 몇 번 딸깍 클릭하는 것만으로도 익히고 펼칠 수 있는 기초적인 진법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여기는 현실 그 자체.
에우스페나에서 돌아와 선전포고한 시점까지.
사실 그사이의 시간 대부분은 전술에 숙달하기 위한 훈련만으로 채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병들을 개전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영지로 불러들이고, 징집병들도 일찍 소집하여 합을 맞춰서 최소한의 움직임 정도는 소화할 수 있게 훈련하고.
돈과 노동력.
정말 둘 다 장난 아니게 깨졌다.
'괜히 가스파르 영감님 돈에 집착한 게 아니라니까.'
게다가 사실 그렇게 미리 준비했음에도 원하던 수준까지 병사들의 수준을 전부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는데, 그런 예상보다도 현실은 훨씬 어렵더라고.
'진짜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단순히 모니터 너머로 느낀 거랑은 비교가 되지 않아.'
결국, 원활한 통제를 위해 이렇게 내가 직접 병사들의 한가운데에서 우익을 지휘해야만 했다.
당연히 우리 병사들은 모두 니카로스 남작령의 주민들이고, 나는 바로 그 니카로스 남작령의 주인이니까.
같은 명령이라도 내가 내리면 그 무게가 다르다.
애초에 이런 이유 같은 게 없었으면 나도 굳이 위험하게 최전선 한가운데까지 자진해서 들어오지 않았지.
'나는 언제나 평화를 사랑하는 지식인인걸.'
어쨌거나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계획이 성공했다.
중요한 건 그거다.
본래 진법이란, 병력이라는 이름의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원작 <마이트 앤 로열>에서도 그랬지만, 서로가 정예병을 보유하지 못한 변방 초반 전투에서는 이런 간단한 진법조차 극대화된 영향력을 발휘한다.
거기에 무시무시한 영감님 키로스 경과 베테랑 용병대까지 깔끔하게 더해주면.
'슬슬 적군이 무너지고 있군.'
이 정도 수적 열세는 충분히 뒤집을 수 있지.
자연스레 내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최대의 변수인 적의 기병대는 우리 검은 매의 기사단에게 발이 묶였고, 우리의 우익을 돌파하기 위해 달려온 적들은 무리한 돌격으로 되레 피해를 쌓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의 좌익에 배치된 푸른이리 용병대가 차근차근 적을 분쇄하고 있다.
이미 기세는 넘어왔다.
나의 호위와 지휘 보조를 위해 키로스 경이 배치되긴 했지만, 애초에 우리 쪽은 그저 버티기만 해도 되는 역할. 용병대장 안티모스가 저쪽을 마저 정리하기만 하면 포위망 완성이다.
'그러면 완전히 끝이지.'
물론.
"적장의 목을 베었다! 보아라, 이 나약한 침략자 놈의 최후를! 이게 바로 니카로스의 복수다! 병사들이여, 자비를 보이지 마라!"
반대로 우리 쪽이 이렇게 적을 압도하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결과고.
정말로 한순간이었다.
어느새 적을 거의 직선으로 돌파해버린 키로스 경이, 적 장군의 목을 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하여간.
설마설마 하긴 했는데.
'...진짜 괴물 같은 영감님이야.'
하지만 그만큼 믿음직스럽다는 것도 분명한 진실.
완벽하다.
단순히 버티기만 해도 되는 우리가 이렇게 적을 짓뭉개 버리면, 당연히 그만큼 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아군의 피해 역시 줄일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작은 탈력감과 함께 웃음을 뱉었다.
이제 진짜 전투의 끝이 보인다.
하지만.
"여, 영주님! 위험, 위험합니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다급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노, 놈들이 뒤쪽에서! 뒤쪽에서!"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봤다.
"영주님을 노린다! 막아라!"
그 비명과도 같은 외침 그대로였다.
'결사대'라고 불러야 할까.
분명 몇 필도 되지 않는 소수였지만, 확실히 말 몇 마리가 정확히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 위에는 당연하다시피 사람이 타고 있었다.
창을 꼬나 들고 나만을 노려보고 있는 사내들이.
그들이 오고 있는 방향은 바로 우리의 후방.
검의 매의 기사단이 적 기병대를 묶어놓고 있던 곳.
그렇다면 그들의 정체도 뻔했다.
'...적 기병대 중 일부가 우리 기사단을 따돌리고 빠져 나와서 나를 노리는 건가.'
놀랍게도 나머지 기병대는 전부 과감하게 시간 벌이를 위한 버린 패로 내던져 버리고.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가깝지 않은 거리였지만,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그들의 표정 변화가 하나하나 전부 보였다.
분노, 그리고 결심.
그들은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독 화려한 갑옷을 입고 선봉에서 날뛰는 자가 있었다.
'기병대를 이끌던 지휘관... 놈들의 장군.'
적의 장군이 사나운 기세로 달려든다.
우리 병사들이 놈들을 저지하기 위해 다급히 달려들지만 쉽지 않다. 그저 전부 치이고 베어 넘겨질 뿐이다.
어쩔 수 없는 일.
적은 소수지만 분명 제국 기사에 버금가는 솜씨를 지닌 전사들이기도 하다. 심지어 예상치 못한 후방의 기습이기도 하니 평범한 병사들이 막기는 어렵겠지.
'그래, 나를 노리고 있구나.'
어찌 보면 최선의 판단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합리적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미 기세가 넘어간 상황에서 역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두머리를 잡는 것뿐이니까.'
요컨대 그저 유일하게 남은 길을 택한 것뿐이니까.
그러나.
'너무 늦었다.'
이제 그들은 그 어떤 결과도 바꾸지 못한다.
물론 인정은 하겠다.
비록 적이지만 그 결사의 과감성과 각오만큼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 기세가 마치 사나운 맹수와 같다.
'그렇지만 고작 그뿐이야.'
애초부터 다른 선택지가 없기에 감행한 무리한 돌격.
기세만은 날카로웠지만, 결국 객관적이고 압도적인 열세는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 병사들의 창날에 꿰뚫려 낙마한다. 놈들이 하나둘씩 목숨을 잃어간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장 선봉에서 건 적의 장군만큼은 여전히 굳건했다.
그리고 그 끝에, 오직 그 장군 하나만 남았다.
자연스레 나의 모든 감각이 그에게 쏟아졌다.
"목을! 그 목을 내놔라, 마네스의 적이여!"
동시에 정말로 놈이 나의 코앞까지 도달한다.
적의 장군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다.
노리는 것은 단 한 번의 찌르기.
맹수가 사냥감을 한입에 집어삼키듯, 송곳니처럼 자신의 창을 높이 들어 겨눈다.
그리고 내지른다.
터엉-!
쇠와 쇠와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놈이 내지른 창은.
"...!"
어느새 다시 내 옆으로 돌아온 키로스 경의 검에 의해 막혔다.
적진 깊숙이 돌파하고도 다시 순식간에 본연의 자리로 복귀한 키로스 경. 그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나를 지키고 적 장군의 창을 받아냈다.
이걸로 놈의 돌파도 끝이 났다.
'그래, 녀석은 맹수와 같다.'
그러나 맹수는 결코 결집한 군대를 이기지 못한다.
"뭣들 하고 있나! 어서 창을 내질러라!"
분노가 가득 담긴 키로스 경의 일갈에 주위에 있던 우리 병사들이 황급히 적 장군에게 창을 내지른다.
창을 든 채로 키로스 경과 대치하고 있던 녀석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결국 무수한 창날이 그대로 놈의 몸을 찔러 들어간다.
완전히 고슴도치 신세.
끝났다.
놈의 저항도, 놈의 생명도.
"이, 더러운, 제국의...!"
그러나 녀석은 고통조차 잊고, 그 지경이 되도록 오직 나만을 똑바로 바라봤다.
분노와 증오를 가득 담아.
피눈물을 흘리며 붉게 충혈된 눈.
그 두 눈 속에 내 모습이 선명히 담겼다.
그렇기에 나는 무심코 묻고 말았다.
"이름이 뭐지?"
그래, 나는 이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도, 그 이름조차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고작 적군을 지휘하던 장군이라는 것.
그리고 월광교를 믿는 신자라는 것.
'겨우 그 정도.'
이 녀석도 아마 비슷하겠지.
나에 대해 아는 것은 그다지 없겠지.
"이교도, 따위에게...! 알려, 주, 줄, 이름은...!"
그러나 이 남자는 그저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맹목적이다.
지금 느껴지는 녀석의 모든 감정이.
심장조차 제대로 뛰지 않을 만큼.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두려움보다 증오를 먼저 발산하며, 그 이유로는 오직 내가 이교도라는 점만을 댈 뿐.
그저.
내가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에.
"...."
나는 그런 그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살고자 한다면 도망친다는 방법도 있었다.
지휘관이었기에 타인의 명령에 따를 필요도 없었다.
우리의 추격을 따돌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런 필사의 돌격보다는 훨씬 살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선택하여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 이렇게 죽는다.
"그래."
나는 검을 들었다.
많은 생각이 드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고찰이 아니다.
"적이지만 훌륭했다."
나는 아주 진부한 말을 입에 담았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면, 그에게는 이 진부한 말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이런 게 미덕이겠지.
이런 점이 필요하겠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증오해야겠지.
교양 있고 친절한 문명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지만.
별수 있나.
'이곳에서 나는 이방인인걸.'
배울 점은 배운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기에 나는 그대로 검을 휘둘러 놈의 목을 쳤다.
땅에 떨어진 녀석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
나는 그 모습을 잠시 가만히 지켜보다가 곧 주위를 둘러보며 나의 병사들에게 외쳤다.
"적장의 목을 모조리 참했다! 이 싸움은 이미 우리의 승리다! 전부 죽여버려라! 니카로스의, 발란티스의 원한을 잊지 마라!"
"영주님께서 친히 적장의 목을 베었다! 나아가 싸워라, 니카로스의 아들들이여! 위대한 솔레오 앞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마라!"
나의 외침을 그대로 곁에 있던 키로스 경이 받았다.
충분히 큰 목소리였다.
교전 중이던 적의 병사들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마, 말도 안 돼...."
기병대와 보병대, 두 지휘관 모두 죽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적군의 붕괴는 순식간이었다.
놈들이 동요한다.
서서히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다.
후퇴하려는 걸까.
확실히 아직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적의 우익을 중심으로 어떻게든 부대를 규합해 군을 물리는 움직임이 보인다.
"놈들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놓치면 안 됩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영주님."
그러나 쉽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적들의 체급과 국력이 우리보다 큰 만큼 한 번 승기를 잡았을 때 최대한 몰아쳐야 한다.
원래 전투에서 최대의 손실은 후퇴할 때 발생한다.
양쪽에서 우리 군이 적을 물어뜯고 있다.
혼비백산한 적병이 하나둘씩 죽어 나자빠지고 있다.
나의 압승이다.
***
성에서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던 시하브 토후국의 에미르 말릭이 들은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졌다고...? 사상자가 절반이 넘고, 나스라딘 장군까지 전사했다고...?"
말릭은 넋이 나가 보고 받은 내용을 그대로 되뇌었다.
전장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와, 말릭 앞에 무릎 꿇은 전령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대패(大敗).
보고 받은 내용은 명백했다.
연합군은 졌다.
"말도, 말도 안 되는 소리! 상대는 일개 남작령이야! 그런 놈들을 상대로 두 개의 나라가 힘을 합쳤다! 자그마치 1,4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단 말이다!"
말릭은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말릭은 최선을 다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고, 승리를 확신했다.
"주군, 니카로스 군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이곳까지 진군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런 개 같은...!"
그러나 결국 주어진 결과는 패배라는 것.
아무리 그가 부정한다고 한들 바뀌지 않을 사실이다.
그리고 어느새.
그 자신조차 그 사실을 마음속 깊이 깨닫고 있었다.
"아니, 아직이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그러나 그게 당장 포기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사절을 보내라. 당장 주위에 있는 모든 나라에 사절을 보내! 우리가 이대로 멸망한다면 이 일대의 균형이 깨진다. 더러운 제국의 촉수가 월광교의 영역에 뻗치게 된단 말이다! 이 사실을 설명하고 지원군을 요청해라!"
말릭은 다급한 목소리로 신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비록 홀로 적을 몰아낼 힘은 상실했지만, 일대에는 시하브 토후국과 니카로스 남작령만이 있는 게 아니다.
시하브 토후국이 수성으로 일관하며 버티는 사이 다른 나라의 지원군이 니카로스 군의 뒤를 치면 된다.
그에 호응해서 시하브 군의 잔존 병력이 니카로스 군을 공격하면 된다.
양쪽에서 포위하면 능히 이길 수 있다.
그렇다면 포위되기 전에 어서 사절을 보내야 한다.
말릭은 부하들을 재촉했다.
'니카로스 남작, 한낱 애송이가 아니었단 건가...!'
말릭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사절 무리가 다급히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니카로스 군이 도착했다.
말릭의 성은 순식간에 포위당했고.
"교활한 놈들...!"
니카로스 군은 절대로 무리하지 않았다.
전장의 변수 그 자체인 전쟁 마법사가 있는 것도 아니니, 공성전은 필연적으로 공격 측에 막대한 피해를 강요한다.
무리한 돌격을 감행한다면 작은 영지인 니카로스 남작령은 감당하기 힘든 부담을 지게 되겠지.
따라서 니카로스 군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시하브 토후국과 말릭은 그렇게 말라 죽어 갔다.
그러나 그 사실이 곧 말릭이 희망이 되기도 하였다.
말릭이 오래 버틸수록 다른 나라들이 고심 끝에 시하브 토후국을 도와주러 올 수 있는 시간도 길어지니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모두 버텨라!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곧 저 오만한 니카로스의 애송이에게 반격의 쓴맛을 보여줄 수 있다! 아직 기회는 있어!"
말릭은 직접 신하들을 독려했다.
반 정도는 자신에게 스스로 하는 말이기도 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굳건한 믿음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성안의 분위기는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병사들은 대부분 끔찍한 패배를 직접 경험하고 돌아온 자들이었고, 그중 상당수는 또 아예 아르잔 토후국에서 파견됐다가 타향인 이곳에 갇힌 자들이었다.
게다가 외부와의 소통도 끊겨 현재 사절이 당도해 도움을 약속한 나라가 얼마나 되는지, 존재하기는 하는지 전혀 알 방법조차 없었다.
"주군, 이제 곧 비축해 둔 식량이...."
그러던 어느 날.
한 신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렇게 말했으나.
"아껴라! 어떻게든 아껴서 버텨!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는 걸 왜 모르나!"
말릭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소리쳤다.
신하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이며 돌아갔다.
"우리가 힘들면 저들은 분명 더 힘들 것이다! 저들은 원정군이야! 저 침략자들도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치게 된다!"
신하는 이미 등을 돌리고 떠나가고 있었지만, 말릭은 개의치 않고 계속 소리쳤다.
듣는 사람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그 자신이 듣고 있었으니까.
이런 상황이 하루 이틀 그렇게 계속 흘러갔다.
성의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해졌다.
그렇게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주군! 큰일입니다! 적군의 일부가 북쪽 방벽을 넘었습니다!"
"뭐...?"
그러던 어느 날 한 신하가 달려와 소리쳤다.
말릭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수비군이 전력을 다해 막고 있지만, 저지가 쉽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 병사들의 사기가 너무...!"
그러나 신하의 보고는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함께 보고를 듣던 신하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말릭의 머리가 웅웅 울렸다.
"어서 북쪽 방벽으로 병사들을 더 보내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이제 남은 예비 병력이 없어요!"
"다른 방벽에서라도 데려와야지요!"
"그렇게 되면 적들이 다시 그쪽으로 몰려올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럼 그대로 북쪽 방벽이 뚫리는 걸 보고만 있자는 소립니까!"
신하들은 각자 의견을 주장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애초에 답이 없는 문제였다.
결국 하석상대(下石上臺).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모양새에 불과할 뿐.
말릭은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다, 결국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물었다.
"...우리가 포위된 지 얼마나 지났지?"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질문.
모든 신하가 우물쭈물하며 쉽게 답하지 못했다.
짧은 정적 끝에 결국 한 신하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47일이 지났습니다."
47일.
말릭은 천천히 그 시간을 입에 담았다.
긴 시간이다.
사절이 도착하고, 다급한 상황을 설명하고, 주위의 다른 나라가 시하브 토후국을 구원하기 위해 빠르게 달려오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어떤 나라도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이 정도 되면 더는 부정할 수도 없었다.
지원군은 없다.
그들은 말릭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하긴. 나였어도 그랬을 것이다."
말릭은 현실을 인정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항복을 준비하도록."
그렇기에 말릭은 담담히 말했다.
그 말을 내뱉는 게 생각만큼 괴롭지는 않았다.
지난 47일 동안 이미 충분히 괴로워해서 그런 것인가.
말릭은 알 수 없었다.
더는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시하브 토후국은.
말릭 이븐 바흐람은 그렇게 패배했다.
#026. 애송이 영주 (5)
나와 내가 지휘하는 니카로스 군은 시하브 토후국의 수도로 당도하자마자 포위진을 형성했다.
지금부터는 인내심 싸움이다.
먼저 선전포고하여 적의 땅으로 쳐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된 순간부터 공성전은 각오했다.
지겹고 괴로운 시간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는 없는 일.
그렇다면 결국 답은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뿐이다.
"영주님, 포위망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렇게 시하브의 성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
키로스 경이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보급에는 차질이 없겠죠?"
"허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정대로 수송대가 출발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훌륭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성전을 위한 철저한 준비.
보급 역시 그 일환이었다.
가스파르 영감에게 빌린 돈도 상당하고 도적단을 토벌하면서 얻은 금품도 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보다 더 규모가 큰 군을 운용할 수도 있었겠지.
그리고 그랬다면 전술이니 열세 극복이니 하면서 귀찮게 훈련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그냥 정면에서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버리면 되니까.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병력을 불리면 보급 소요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뿐이다. 소집하는 것만으로 막대한 부담이 되는 것이 군대인데, 공성전은 말 그대로 그런 군대를 하릴없이 성밖에 주둔시켜놓아야 하는 일이니까.
'그 끝이 언제가 될지도 모르고.'
니카로스 남작령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순히 이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필요한 것은 최소의 피해로 최대의 결과를 내는 것.'
요컨대 효율.
당연히 이건 공략이라는 측면에서 필요한 조건이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몇 번이나 되새겼던, 도전 과제 달성의 필수 요건 중 하나.
"..."
그렇지만 지금은 그저 그런 담백한 조건일 뿐이라 일축하고 넘기기 어려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무심코 어떤 한 장면도 더 떠올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떠오르는 것은 바로 어제의 일이다.
영광스럽고 기쁜 승리의 그 순간.
'나는 그 한가운데서.'
내가 이끌던 니카로스의 병사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흙바닥을 뒹굴고 있던 광경을 보았다.
압승을 거둔 만큼 그런 시체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아예 없지도 않았다. 그 광경이 쉬이 잊히지 않는다.
'물론 내가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게 객관적인 사실이기도 하고.
그런 생각은 이런 시국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그래, 애초에 우리 니카로스의 주민들은 나 하나가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고 한들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그들이 찾아가지 않아도 전란이 먼저 그들을 덮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많은 이가 죽고 다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저 변방의 필연이다.
'그러니까 나는 해야 할 일이자 나쁘지 않은 일을.'
선제적이고 효율적으로 아주 잘 수행했을 뿐이다.
스스로 그 사실을 명확히 자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걸 다 알면서도 떠오르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생각하고 있다.
"..."
그러니까, 그러자.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인 만큼 더 잘, 더 합리적으로, 최대한 우리 병사가 안 죽게끔, 그렇게 하자.
지금까지도 잘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더 잘하자.
요컨대 그런 별것 아닌 생각을 계속해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슬슬 그만할 생각이다.
'그치. 이 정도 했으면 과할 정도로 충분하지.'
더하면 스스로 진만 빠질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잖아.
"공성전만큼은, 가능한 한 빠르게 끝났으면 좋겠군요."
"허허. 그건 놈들의 헛된 저항을 얼마나 지속할지 거기에 달린 일 아니겠습니까, 영주님."
"애석하게도 옳은 말씀입니다."
어쨌거나 결론은 내가 준비성이 뛰어나고 현명한 사람인 덕분에 처음부터 공성전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남은 대출금 겸 군자금은 용병을 추가로 고용하는 데 쓰지 않고 보급 쪽에 돌렸지.
이러면 몇 달은 능히 버틸 수 있을 거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계획을 검토하던 중 아직 물러나지 않았던 키로스 경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나스라딘이라고 하더군요, 이름."
"아."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키로스 경도 그 순간을 옆에서 함께 지켜보았지.
검을 막은 것도 그였고.
'그 녀석의 이름이구나.'
적 기병대를 지휘하던 장군.
최후의 결사대를 이끈 장군.
나를 죽이기 위해 필사의 돌격을 감행하던 장군.
죽는 그 순간까지 맹목적인 증오만을 뿜어내던 장군.
나스라딘, 나스라딘, 나스라딘....
"이번에 시하브 토후국에 원군을 보낸 아르잔 토후국 쪽 장군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전투가 끝나자마자 워낙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감사 인사도 늦었군요. 제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키로스 경."
"허허, 감사라뇨. 영주님의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전투를 겪고도 키로스 경은 언제나처럼 허허 웃었다.
그 모습이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아서 나도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나스라딘.
나는 그 이름을 잠시 속으로 되뇌었다.
'무척이나 짧은 만남이었고 딱히 지금 내 마음속에 여유가 그리 많지도 않지만.'
그래도 내게 배울 점을 알려주었으니 잠깐 정도는 기억해도 괜찮겠지.
어차피 기억하지 않아도 될 때가 되면, 자연스레 잊게 될 테니까.
"아이고, 여기 다 모여 계셨습니까!"
그 순간 상념을 깨우는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호들갑스러운 목소리.
안티모스다.
"안티모스 씨, 쉬고 계셔도 되는데."
"하하!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 승리의 주역이신 분들이 이렇게 나와서 직접 나와 계시는데!"
지난 전투가 압도적인 대승으로 끝난 탓인지 안티모스의 기분이 평소보다 더 좋아 보였다.
"이야, 소문으로만 듣던 검은 매의 기사단, 역시 다들 훌륭한 솜씨더군요! 초원의 전사들이 측면과 후방을 지켜준 덕에 아주 든든했습니다! 게다가 키로스 경! 마지막에 적 장군의 검을 촥! 하고 막으시는데, 정말 감탄이 나오는 솜씨였습니다!"
"허허, 고맙군. 자네의 활약도 훌륭했다네."
안티모스는 아예 맨손으로 검을 쥐고 휘두르는 흉내까지 붕붕 내가며 감탄했고. 키로스 경은 그런 안티모스의 호들갑을 뻔히 보면서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그저 허허 웃었다.
하여간.
우리 영감님 보통이 아니야.
나는 그 둘의 광경을 보고 픽 웃으며 물었다.
"그 와중에 그 장면을 다 보셨습니까? 좌익도 굉장히 정신이 없었을 텐데."
"하하! 제가 누굽니까! 저희 푸른이리 용병대에 걸리면 그깟 이교도 잡병들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러더니 안티모스는 조금 더 내 옆으로 가까이 다가와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눈썹까지 으쓱거리며.
"게다가 저희 귀한 고용주이신 남작님에게서 한시라도 눈을 떼면 되겠습니까?"
얘도 진짜 보통 아니네.
나는 그저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마침 저도 안티모스 씨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네? 저에게 말씀입니까?"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딱히 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닌데.
"아니다. 지금 하기에는 조금 시기상조인 거 같군요."
벌써 입 밖으로 내면 너무 설레발일 것 같다.
그러자 안티모스가 펄쩍 뛰었다.
"아니! 너무하십니다, 남작님! 궁금하게만 하시고 이렇게 빼시면!"
안티모스는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가슴까지 쿵쿵 쳤다.
'진짜 쿵쿵 소리까지 나는데...?'
안 아픈가?
아플 텐데.
참고로 곁에 있던 키로스 경은 평소보다 훨씬 요란하게 흘러가는 나의 대화를 보고 잔뜩 흐뭇해하고 있었다.
이쪽은 또 이쪽대로 부담스럽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계약 연장을 조금 논의해 볼까 했습니다."
"아하, 그런 의미였군요."
안티모스가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계약 연장.
즉 다음 싸움의 준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사안인 건 맞지만, 지금 논하기에는 이른 것도 사실이다.
아직 이번 전쟁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니까.
지금은 그저 의향만 전달해 두는 것으로 충분하겠지.
"저야 용병으로서 새로운 일거리는 언제나 환영이지요.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이 정도면 됐다.
나머지는 이 전쟁이 끝나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리가 포위하고 있는 성을 바라봤다.
저 안에 시하브 토후국의 에미르가 있다.
그렇기에 저 성만 점령하면 이 전쟁은 끝이 난다.
나의 첫 전쟁의 결말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그때부터.
티베리오스 발란티스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겠지.
나는 머지않아 현실이 될 미래를 하나씩 그려나갔다.
***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우리의 포위는 굳건했고 나는 무리하지 않았다.
굳이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성벽을 넘으려 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포위만을 유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적들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는 적병들의 모습은 멀리서 봐도 매우 초췌했다. 그들은 야위고 두려움이 가득했다.
다행히도 영지에 남은 가신들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는지 우리의 보급에는 차질이 없었다.
우리 군의 척후들이 넓게 퍼져 혹시나 모를 적의 지원군을 경계했지만, 그 어떤 군대도 나타나지 않았다.
모든 게 훌륭하게 돌아갔다.
그렇기에 시간은 우리 편이었다.
가끔 휘하의 몇몇 부하들이 성 밖에 있는 시하브 토후국의 촌락들을, 이교도들의 마을을 약탈하자고 건의하긴 했지만 전부 거부했다.
승리한다면 이 땅은 내가 다스릴 영지가 될 터.
괜한 원한을 쌓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한 달 하고 보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명령을 내렸다.
"적들이 충분히 지친 것 같군요. 더는 저항할 힘이 없어 보입니다. 한 번 흔들어 보죠."
그 한마디와 함께 천 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결과는 예상대로.
적의 저항은 미미했고, 우리 병사들은 큰 피해 없이 성벽에 올랐다.
"영주님, 적의 성에서 백기가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곧 적이 항복했다.
나의 승리였다.
***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에미르의 알현실로 걸어갔다.
시하브 토후국의 에미르, 말릭 이븐 바흐람은 본인의 알현실에 묶여 있었다.
포위된 생활로 인해 몰골이 제법 엉망이었다.
그러나 눈빛은 차분했다.
공포는 담겨 있지 않았다.
"니카로스 남작...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반갑소, 말릭 이븐 바흐람."
나는 알현실을 그대로 가로질러 평소 말릭이 앉아 있었을 에미르의 의자에 앉았다.
경치가 제법 나쁘지 않았다.
말릭은 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패배자가 달리 남길 말은 없소. 나는 본래 그대 가문의 원수. 죽이시오."
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주위의 기사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그런 말릭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모두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죠. 에미르 말릭과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 싶습니다."
"영주님! 너무 위험합니다!"
"괜찮습니다. 이미 묶여 있지 않습니까? 우려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부탁이 아닌 명령입니다.
평소의 나답지 않은 단호한 어조에 기사들은 당황했지만 더는 반대할 수 없었다.
기사들이 하나둘 물러나고 곧 넓은 알현실에는 나와 말릭,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무슨 속셈이지?"
여전히 두려움은 없었지만, 경계심은 늘어났다.
말릭은 그렇게 물었다.
"달리 속셈 같은 건 없어."
보는 눈도 없었기에 나는 말을 편하게 했다.
"아무래도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보니, 조금 감상적으로 변한 것뿐이야."
정말 그게 전부였다.
그저 이 순간을.
내 승리가 확정된 순간을 조금 더 차분히 즐기고 싶을 뿐이었다.
"하, 가족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 우습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홀로 고문이라도 하다가 죽일 생각인가?"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긴 하지만, 유감스럽게 전적으로 말릭의 오해였다.
"아니,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
나는 친절하게 말릭의 오해를 정정해 줬다.
"딱히 너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거든."
"...뭐"
말릭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렇겠지.
아버지와 형을 죽인 자를 상대로 한 복수.
선전포고문에도 담긴 내용이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이 전쟁은 개인적인 감정이 가득 담긴 전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진실이다.
복수는 어디까지나 대외적으로 완벽한 명분이었을 뿐.
"딱히 내가 독실한 십자교 신자라 월광교를 증오했던 것도 아니었고. 정말로 너 개인에게 나쁜 감정은 없어."
잠시 말릭의 얼이 빠졌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 하하, 하하하!"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말릭이 곧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 같기도 했고, 정말 웃겨서 나오는 웃음 같기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한바탕 웃고 난 말릭이 다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미친놈, 정말이로군."
내 태도에서 진실을 읽은 것일까.
웃음이 끝나고 남은 것은 모든 걸 이해하겠다는 듯한 눈빛뿐이었다.
"그렇다면 이유가 뭐냐? 이유도 없이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을 텐데."
예상한 질문이었지만, 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니었다.
"글쎄."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그냥 시하브 토후국이 제일 적당했으니까. 완벽한 명분도 있고, 거리도 가깝고, 체급도 작정하면 붙어볼 만했으니까."
그래, 사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본질을 따지자면.
그저 가장 적당했을 뿐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싸우고 정복하고 계속 이겨나가야 하는데, 마침 네가 제일 적당했으니까."
진짜.
누누이 말했지만 정말로 이게 전부지.
제논과 마누엘이 죽은 게 안타깝기는 해도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그들의 복수를 할 관계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내가 그들과 함께한 건 기껏해야 석 달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까.
굳이 수천 명이 창칼을 들고 치고받는 전쟁까지 해가며 복수할 사이는 아니잖아.
"애송이 영주는 무슨."
그러니까 남은 이유는 그저 담백한 그 사실뿐.
"니카로스에서 괴물이 태어났구나."
말릭은 허탈하다는 듯이 한숨처럼 말을 토해냈다.
"괴물이라니."
나는 그저 순수하고 한없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야.
오해가 심하네.
그러나 그는 이런 나의 항변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자신 있느냐? 역사가 증명하고, 또 나의 말로가 증명하지. 약소한 영주가 야망 따위를 품어봤자 십중팔구는 그저 허망하게 바스러질 뿐이다. 우리가 멸망했으니 이제 인근의 모든 에미르가 너를 주목할 것이야."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검을 뽑은 채 그에게 다가갔다.
"단 한 번의 패배가 널 파멸시킬 수도 있다. 네 영지는 초토화되고 가족들은 전부 끌려가 개처럼 죽겠지."
그리고 말릭의 앞에 섰다.
"그 공포를 이겨낼 수 있겠느냐? 승리에 승리만을 거듭할 자신이 있느냐?"
나는 이 알현실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빙그레 웃었다.
"자신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않았어."
이게 가장 확률이 높은 방법이라 판단했고.
해볼 만한 것 같아서 시작한 거다.
그러니까 웃음이 나올 만큼 아주 뻔한 질문이지.
"...그래, 그렇겠지."
말릭은 여전히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검을 들고 있는 나를.
"이제 만족했느냐? 그렇다면 이제 죽여라. 내가 지옥에서 네놈의 아비와 형에게 안부를 전해주마."
"고마워. 잘 부탁하지."
그리고 나는 검을 휘둘렀다.
일격.
깔끔하게 말릭의 목이 떨어졌다.
그의 머리는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조금 지나치게 흥에 겨워 까분 것 같기도 했다.
만약 이게 버릇이 된다면 좋지 못한 버릇이 될 터.
처음이라 그런가 너무 감상적으로 행동했다.
앞으로는 더 자제해야겠지.
그래도 좋다.
나는 승리했다.
그리고 그 여운도 충분히 즐겼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이게 나의 첫 전쟁.
그렇다면 이제 다음을 준비할 뿐.
나는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027. 전쟁이 끝나고 해야 할 일 (1)
아무래도 반성이 필요할 듯하다.
시하브 토후국과 벌인 전쟁은 분명 성공리에 끝났다.
더할 나위 없이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지.
'하지만 그 결과랑 별개로 반성할 부분은 반성해야지.'
준비 과정이나 실제 전투, 이런 것들은 전반적으로 다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게 다 완벽하게 돌아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처음이란 걸 고려하면 굉장히 훌륭했지.
역시 나는 대단해.
'그렇지만 역시 마지막 마무리가 조금 아쉬웠달까.'
솔직히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과하게 자아도취 한 거 같기는 하다.
에미르 말릭과 마주한 마지막 순간이 특히.
굳이 할 필요는 없는 말을 잔뜩 한 느낌.
어떻게 보면 승자의 오만한 조롱이라고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딱히 하지 못할 말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자중할 수는 있었다.
나는 그저 살기 위해서 전쟁을 벌였을 뿐이고, 이미 원하던 목적은 달성한 상황이었으니까.
'자중할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아서 문제였지.'
확실히 이런 점은 반성하고 앞으로 신경 써야 한다.
이제 겨우 살얼음판 위의 첫발을 내디뎠을 뿐인데 벌써 이렇게 감정적으로 굴면 될 일도 안 된다.
'하여간. 따지고 보면 전부 이 세상이 나쁜 탓이야.'
야만적이고 잔인한 풍조가 가득하니까 나까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잖아.
그렇지 않고서야 나처럼 누구보다 교양 있고 친절한 현대인이 그런 망측한 짓거리를 할 리가 없지.
오히려 나 정도 되는 인격자니까 이런 세상에서도 이 수준의 양심을 유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맞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내가 특별히 못 할 짓을 벌인 건 또 아니고.'
어쨌거나 말릭은 아버지와 형을 죽인 가문의 원수다.
그런 그와 단둘만의 시간을 가진 뒤 내 손으로 직접 처형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고.
오히려 이 세계의 기준으로는 훌륭하고 바람직한 복수를 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지.
그래, 그러니까 난 나쁘지 않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합리적인 판단을 했을 뿐이야.
'역시 나만큼 착하고 바르고 선량한 사람은 또 없지.'
이상.
반성 및 자기합리화 끝.
적당히 영양가 없는 생각으로 긴장을 풀어줬으니 이제 일을 해야 할 시간이다.
이제 시하브 토후국의 영토는 나의 것이다.
그러니까 승자로서 수습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힘으로 깃발을 꽂고 땅을 점령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면 참 편하고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전쟁이 그렇게 쉽게 끝마칠 수 있는 일은 아니거든.
준비가 중요한 만큼, 마무리 역시 중요한 것이다.
"에미르의 죽음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근 주민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전후 행정 작업을 수행하던 키로스 경이 보고서를 훑고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전쟁은 당연히 주민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물며 이곳은 월광교를 믿던 이교도의 땅.
난데없이 종교가 다른 주인을 모시게 된 셈이니, 민심이 엄청나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일단은 잠시 시간을 두고 주민들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괜히 우리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아무래도 역효과만 날 듯하니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나마 믿고 다룰 수 있는 영지인 니카로스가 약소하고 작은 남작령에 불과한 만큼, 나에게는 든든한 기반이 될 땅이 더 필요하다.
아무리 밖에 나가서 잘 싸운다 한들 기반 자체가 무너지면 멸망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시하브 토후국의 영토도 잘 추슬러서 안정적으로 날 섬기게 해야지.'
원작 <마이트 앤 로열>에서도 그랬다.
영지가 얼마나 충실하게 영주를 모시는지에 따라서 산출량도 극명하게 차이가 났지.
아무리 게임과 다른 현실이라지만 그런 커다란 흐름까지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기서도 비슷한 방향성으로 운영해야겠지.
'...그저 버튼 하나만 딸깍 누르면 다 됐던 게임과는 다르게, 세부적인 정책까지 내가 직접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게 문제일 뿐이지만.'
막막하다, 막막해.
어쨌거나 장기적으로 보면 역시 유화책만이 답이다.
한탕 하고 빠질 것도 아니고, 동화가 목적이니 괜히 이교도랍시고 착취하고 학대할 이유 자체가 없다는 뜻.
일단 민심이 진정되면 이곳 주민들을 제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인 뒤, 크게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제국에 흡수시킬 계획이다.
쉽지 않은 계획인 만큼 선을 넘지 않게 조심스럽게 진행해야겠지.
물론 선을 넘으면 안 되는 건 주민들 또한 마찬가지.
"다만 불온한 낌새를 보이는 자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풀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 본보기가 필요하다면 망설이지 않도록 하죠."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영주님."
주민이 동요하는 이유의 태반 이상은 결국 종교 때문.
만약 절대로 이교도 따위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며 헛짓거리를 하는 놈들이 튀어나온다면, 내 친히 그들을 월광교의 주신 마네스 곁으로 보내줄 의향이 있다.
서로 지킬 것만 지키자.
그러면 터치 안 할게.
내 성격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물론 이런 단순한 안정화 작업을 넘어, 제대로 된 동화 정책도 머지않아 시행해야 하겠지만.'
일단은 욕심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가능한 일부터 먼저 해결해야겠지.
제일 급한 문제에 대한 방침은 정했다.
그렇다면 이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을 확인할 차례.
우리는 집무실에서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키로스 경이 앞장섰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시하브 토후국의 국고는 이곳입니다."
국고(國庫).
국가의 모든 자산이 쌓여있는 곳.
그 창고를 보니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시하브 토후국이라는 나라는 이제 존재하지 않으니, 이 안에 있는 자산은 명실상부 전부 나의 것이거든.
그걸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웃다,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곁에 있던 키로스 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직접 심문하신 것으로도 모자라 안내까지 해주시다니. 조금 더 쉬셔도 괜찮습니다, 키로스 경."
키로스 경은 성을 함락시킨 뒤 포로로 잡은 시하브의 가신들을 관리하고 심문하는 일까지 총괄하고 있었다.
국고의 위치 또한 그 과정에서 알아냈겠지.
새삼스럽지만 참 성실한 할아버지야.
당장 이 전쟁에서도 적지 않은 공도 세웠고, 이미 자타공인 누구나 인정하는 영지의 원로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으스대거나 태만할 수도 있는데 키로스 경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저 언제나처럼 허허 웃기만 할 뿐.
"허허, 그저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영주님께서도 쉬시질 않는데 제가 빈둥거릴 수는 없지요."
"그 말씀, 지금 저 때문에 쉬질 못한다고 푸념하시는 뜻은 아니겠지요?"
"어이쿠! 방금 말은 못 들으신 것으로 해주십시오."
키로스 경이 마치 화들짝 놀라는 것처럼 어깨를 과장되게 움츠러들인다.
하여간. 능구렁이 같은 영감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또 저렇게 농담으로 탈출하다니.
저건 이미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떻겠냐는 나의 제안을 키로스 경이 완곡하게 거절한 셈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권유는 도리어 실례가 될 수 있기에 나는 작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열겠습니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자 마침내 키로스 경이 열쇠로 국고의 문을 열었다.
안은 넓었다.
"우리가 직접 확인해 봐야 정확해지겠지만, 시하브 측에서 정리한 기록만 보면 예상치보다는 다소 적은 양의 재산만 남아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아쉽게도 그 넓은 공간이 다 차 있지는 않았다.
동행한 우리 가신들이 분주히 진입하며 창고 내부의 현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시하브 토후국의 재정 상태 역시 연이은 군사적 충돌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입은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특히 이번 전쟁에서 소요된 군비가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쩝, 역시 그런가.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다.
우리도 전력을 다해 영지의 모든 미래를 건 총력전을 걸었으니 당연히 시하브 역시 철저한 준비를 했겠지.
그리고 철저한 준비에는 당연히 막대한 비용이 들고.
그나마 위안이 있다면 시하브 토후국의 최근 지출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도적단에 보낸 금품은 이미 우리 손에 들어왔다는 것.
게다가 썩어도 준치라고, 예상보다 조금 적을 뿐 국고는 국고다. 남아있는 재산도 상당하다.
적어도 한동안 가스파르 영감님에게 상환해야 할 대출금 정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보고 있니, 우리 니카로스의 가신들.
역시 따서 갚기는 항상 옳아.
그러니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실 이번 시하브 코스의 메인 디시가 아직 남았거든.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창고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영주님?"
말없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나를 보며, 뒤에서 키로스 경이 의아하다는 듯 불렀지만, 나는 그저 미소만으로 회답했다.
지금부터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짓을 할 거니까, 그냥 웃어서 유야무야 넘겨야지.
<마이트 앤 로열>.
수많은 무작위성 요소와 극히 적은 고정 요소로 이루어진 판타지 세계.
'이 규칙이 비단 캐릭터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거든.'
아티팩트.
혹은 마도구(魔道具)나 아이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신기한 도구들이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뛰어난 현대의 마법사가 만들었든.
아니면 까마득한 과거의 고대 문명이 남긴 잔재이든.
종류에 따라 출처와 용도는 천차만별이지만 그래도 모든 아티팩트가 공유하는 유일한 공통점은 하나 있다.
'하나 같이 엄청나게 귀하고 유용하다는 것.'
당연히 그만큼 플레이에 막강한 파급력을 줄 수 있기에 대부분의 아티팩트는 플레이어가 쉽게 손에 넣지 못하게 매 회차 무작위로 생성되어 전 세계에 퍼진다.
그래.
대부분은 말이야.
캐릭터 중에서도 극소수의 고정 네임드 캐릭터가 있는 것처럼, 아티팩트 중에서도 등장 위치와 성능이 고정된 '고정 네임드 아티팩트'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이곳에 있지요.
시하브 토후국처럼 작은 국가에 왜 그렇게 희귀한 아티팩트가 잠들어 있는가?
당연히 품을 수 있는 의문이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 복잡한 이유는 없다.
애초에 국가의 체급과 고정 네임드 아티팩트의 가치가 반드시 비례하는 건 아니거든.
니카로스 남작령도 약소함 하나로는 뒤지지 않는 신생 영지인데도 제논과 키로스 경이라는 뛰어난 인재를 둘이나 보유하고 있었잖아. 유망주 마누엘과 우수한 기병대 검은 매의 기사단은 덤이고.
게다가 이렇게 니카로스의 영주로서 상대해서 시하브 토후국이 흔한 1라운드 보스처럼 보이는 것뿐이지, 원래 이 일대는 원작에서 최고의 생존 난이도를 자랑하는 마굴이다.
'아티팩트 하나둘 정도는 돌아다녀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라고.'
물론 시하브 토후국의 체급이 아예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는 없는 만큼, 그렇게 대단한 아티팩트는 아니다.
정확히 게임 내의 등급으로 치면 B급.
하지만 나 같은 비렁뱅이에게는 그 정도만 해도 아주 감지덕지다.
어차피 등급이 중요한 것도 아니거든.
아티팩트라는 것은 결국 사용자가 쓰기 나름이니까.
그렇게 나는 흔해 빠진 금화와 보물 따위가 보관되어있는 구역을 지나, 마침내 찾던 장소에 다다랐다.
"...."
국고 한구석에 조용히 놓여있는 작은 함.
화려하지는 않지만, 금빛 자수로 정성스럽게 장식된 그 보관함을 보자 나도 모르게 절로 미소가 나왔다.
처음부터 아티팩트를 노리고 벌인 전쟁은 아니다. 이런 게 없었어도 어차피 첫 목표는 무조건 시하브 토후국이었다.
누누이 말했지만, 시하브 토후국과의 전쟁은 이미 완벽한 명분이 갖춰졌기에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전쟁을 각오한 순간부터 항상 고려는 했지.'
나의 마지막 도전 과제.
하루살이 같던 그 초반부 플레이 때 이 녀석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다시 재회할 생각에 감동의 눈물까지 나올 심정이야.'
천천히 함을 열어 내부에 담겨 있던 물건을 꺼냈다.
모니터 너머로 봤던 그 아티팩트가 여전히 내 기억 속 그 모습 그대로 빛나고 있었다.
'나옐라의 수호 반지.'
게임 속에서 수십 번이나 내 목숨을 지켜주었던 그 작은 반지의 이름을, 나도 모르게 나직이 중얼거렸다.
#028. 전쟁이 끝나고 해야 할 일 (2)
나옐라의 수호 반지.
마침내 다시 만난 그 반지를 잠시 유심히 살펴보았다.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네.'
자잘한 흠집이 잔뜩 난 황동색 반지가 눈에 담긴다.
그 어떤 장식이나 보석도 없이 그저 투박한 몸체만을 뽐내는 게, 언뜻 보기에는 오히려 이 반지보다 반지를 지키고 있던 보관함이 더 귀한 물건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빛 좋은 개살구랑은 비교가 안 되지.'
이 반지는 그 단순한 외형만큼이나 직관적이면서도 유용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 하루에 한 번, 일정 위력 이하의 공격을 막아주는 마력 방벽을 펼쳐 사용자를 지켜준다.
얼마나 훌륭해.
이 간단한 설명만 봐도 절로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추억이 새록새록.
마지막 도전 과제를 깰 때도 이 녀석 덕분에 목숨을 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
대규모 포격이나 마법 폭격을 막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급소로 날아오는 화살 정도는 충분히 막고도 남는다.
이번 전쟁처럼 앞으로도 피치 못하게 전장에 설 일이 드물지 않을 텐데, 정말 나에게 딱 맞는 보물이지.
그야말로 일종의 여벌 목숨인 셈.
초반부터 이걸 얻어서 정말 다행이다.
게임으로 플레이할 때는 시하브 토후국이 첫 상대가 아니라서 획득 시기가 지금보다 늦었거든.
"오호, 그건 아티팩트입니까? 놀랍군요. 이 정도 물품이 창고 안에 있었다니."
한동안 구석에서 뚫어지게 반지만 들여다보고 있어서 그런가, 입구 근처에 있던 키로스 경이 어느새 바로 곁으로 다가왔다.
"그렇습니다. 여기 보관함에 설명이 적혀 있군요."
나야 당연히 얘가 어떤 아티팩트인지 달달 외우고 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은 외형만 보고 성능까지 알 수 없으니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보관함에 설명이 적혀 있다.
만약 보관함도 없이 우연히 아티팩트만 얻게 된다면, 감정 전문 마법사에게 가져가서 비싼 돈을 내고 맡기는 수밖에 없고.
보관을 참 잘했네, 에미르 말릭.
고마워.
"오오, 마력 방어막이라. 굉장히 유용한 아티팩트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물건을 왜 구석에 꼭꼭 숨겨만 두고 사용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확실히 그건 조금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아예 아귀가 맞지 않는 이야기는 또 아니었다.
"아마 일개 신하에게 빌려주는 게 아깝기도 했겠고 애초에 이런 보물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힘든 싸움이 될 거라고 예상하지도 않았겠지요."
에미르가 직접 전장에 나선 것도 아니니까.
그래, 앞뒤 정황과 생존 포로들의 증언을 모두 종합해 보면 확실하다.
시하브 토후국은 분명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뭐, 그럴 만도 하지.'
병력도 그쪽이 더 많았고.
상대인 나는 영락없는 애송이 그 자체였으니까.
아마 낙승을 예상하지 않았을까?
이것 참. 시하브 녀석들.
나름대로 준비는 철저히 한 것 같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안일한 면모를 보였어.
정말로 한낱 가정에 불과하지만.
만약 나스라딘 장군이 내 목을 노릴 때 이 반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반지의 힘으로 키로스 경의 공격을 막아내고 그대로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격했다면....'
어쩌면.
그랬다면 전쟁의 결과가 살짝 바뀌었을 수도.
하지만.
'만약 이 반지를 꺼내서 누군가에게 빌려줬다고 한들, 자기 휘하 장군 멀쩡히 놔두고 굳이 타국의 장군인 나스라딘에게 빌려줬을 가능성은 없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무의미한 가정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도 그렇겠군요. 그런데 영주님께서는 이 구석에 있던 이 아티팩트를 어떻게 발견하셨습니까?"
드디어 키로스 경이 이 질문을 한다.
그래, 계속 입구 근처에서 함께하던 영주가 갑자기 뭐에 홀린 것처럼 창고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서 대뜸 유물을 발견했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지.
그렇다고 솔직하게 원작 게임을 해서 알아요, 라고 대답할 수도 없고.
물론 질문을 예상한 만큼, 대답도 미리 준비했다.
"그냥 왠지 모르게 이 보관함이 멀리서도 눈에 띄더군요. 그래서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
뻔뻔한 대답에 키로스 경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런데 그러면 뭐 어쩔 거야.
그냥 당사자인 내가 그렇다는데.
이런 일로 영주한테 따질 거야?
아니잖아?
"마력이 담긴 아티팩트지 않습니까? 이런 신비한 이끌림이 있을 수도 있지요."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요."
키로스 경도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요.
우리 대답하기 곤란한 그런 질문은 묻지 않는 친절을 서로에게 베풀어 봐요.
그렇게 나는 흡족하게 웃고는, 반지를 꺼내 나의 손가락 주위로 가져갔다.
"직접 착용하실 생각입니까?"
"그렇습니다. 앗, 혹시 반대하시는지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티팩트를 영주가 갖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고, 혹시 이교도의 물건이라 그런가?
확실히 나옐라라는 이름이 월광교의 옛 마법사 이름이긴 한데, 이 정도면 종교적 색채도 거의 드러나지 않아서 괜찮을 텐데...?
"허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영주님의 안전이 더 든든하게 보장된다면 저 또한 대찬성입니다!"
어휴, 깜짝이야.
설마설마했네.
"하하, 설마 저를 지킨다는 키로스 경의 업무가 줄어들 것 같아서 대찬성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순수한 충심의 발로일 뿐입니다!"
내가 가볍게 놀리자 키로스 경이 화들짝 놀라며 당황하는 척을 한다.
역시 이런 농담은 영감님이 제일 잘 받아준다.
그렇게 잠시 웃음의 시간을 가진 뒤.
마침내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음, 역시 아주 딱 맞아.
정말 만족스럽다.
"허허,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나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아주 만족스러웠으니.
그렇다면 다시 또 일할 시간이다.
앞으로도 반지는 계속 나와 함께야.
"아, 혹시 창고에서 괜찮은 예술품이나 명품들이 발견되면 따로 정리해서 저에게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것들은 뇌물....
아니, 선물로 사용할 예정이다.
적당히 영향력 있는 몇몇 명사들에게 보내놓으면 내가 승리했다는 사실이 증명도 되고, 또 외부에 홍보도 되고 그러겠지.
보자.
가스파르 할아버지랑 페트로스한테는 당연히 보내놓고, 아폴로니아한테는 보내지 않는 게 낫겠고....
에우스페나 공작?
딱히 얘가 주도적으로 뭘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경우란 게 있으니 일단 얘한테도 보내야겠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정성껏 뇌물 리스트를 작성하던 중,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여기에 계셨군요, 남작님! 이야, 정말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굳이 고개를 안 돌리고 웃음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는 호들갑스러운 목소리.
푸른이리 용병대의 대장.
안티모스다.
"감사합니다, 안티모스 씨. 지난밤 푹 쉬셨습니까?"
"물론이죠! 남작님의 배려 덕분에 정말 기절하듯 잠들었지 뭡니까!"
과장이 과해 조금 경박할 지경이었지만 안티모스는 마땅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번 전쟁의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 중 한 명이니까.
만약 안티모스의 푸른이리 용병대가 없었다면 더 어려운 싸움을 해야 했겠지.
"잘 됐군요. 그러면 지금 달리 다른 계획은 혹시 있으신지?"
"하하! 용병에게 무슨 특별한 계획이 있겠습니까? 전쟁 한 번 치렀으니 잘 먹고 잘 자고 푹 쉬는 게 최고의 계획이죠!"
맞는 말이긴 하지.
실없는 대답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안티모스가 용병으로서 쌓은 관록이 느껴지는 대답이기도 했다.
일했으면 푹 쉬어줘야지.
그래야 또 일하지.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조금 이르긴 하지만, 지난번에 하던 이야기를 이어서 해도 되겠군요."
"지난번에 하던 얘기...? 아하! 그 이야기 말씀이군요! 그 말씀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 말에 잠시 의아해하던 안티모스는 곧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듯 반색하며 실실 웃었다.
역시 잊지 않은 모양이네.
"아직 가신들과 상의한 내용은 아니라 세부적인 사항이 바뀔 수는 있습니다만, 저는 이미 다음 원정을 조심스레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곁에 있던 키로스 경이 잠시 흠칫했지만, 말을 끊지는 않았다.
"목표는 당연히 아르잔 토후국. 감히 아버지와 형님을 위한 복수에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었으니 당연히 그 대가를 치러야지요."
명분이 저절로 굴러들어 왔다.
분명 이번 전쟁은.
대외적으로는 지극히 개인적인 복수극이었다.
그런데 그 전쟁에 아르잔 토후국이 개입했단 말이지.
'따라서 자연스럽게 아르잔 토후국은 나의 원수를 돕고 복수를 방해한 천하의 쓰레기가 되는 것이고.'
당연히 이것은 충분히 전쟁을 통해 정벌하고 단죄할 사유가 된다.
게다가 아르잔은 이번 전쟁에 수백 명에 달하는 원군을 보냈고, 그 전부가 궤멸당했다.
그 피해를 복구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겠지.
아르잔의 평상시 국력은 시하브와 비슷한 수준.
그렇기에 약해졌다면 승산이 있다.
"니카로스의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래도 실력 있는 용병대가 또 필요할 것 같은데. 함께하시겠습니까, 안티모스 씨?"
"음, 남작님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지요."
나는 그렇게 당당하게 권유했지만, 예상과 달리 안티모스는 바로 승낙이나 거절의 뜻을 밝히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어떤 말씀이었죠?"
"제가 보람을 찾아서 이 변방으로 찾아왔다는 얘기였습니다."
"아하. 네, 분명히 그랬습니다."
원정 중에 안티모스가 한 말이었다.
수도에서는 머리 아픈 일이 너무나 많다고.
그렇기에 위대한 솔레오와 신앙을 위해 싸웠다고 자랑할 수 있는 전장을 찾아 이곳까지 왔다고.
"이번 시하브와의 전쟁에서 제가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단순하게 눈앞의 이교도를 쳐부술 생각만 하면 되는 성전을 원한다고.
"저는 최고의 선택을 했다는 것."
안티모스는 호쾌하게 씩 웃었다.
사람 괜히 초조하게 만들다니.
그 웃음을 보고 나까지 자연스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교전하면서 딱 느꼈습니다. 이게 바로 내가 찾던 전장이라는 것을!"
안티모스의 말투가 다시 평소처럼 요란하게 변했다.
손과 주먹도 사방으로 붕붕 흔들기 시작했고.
"저를 그런 전장으로 초대해 주신 남작님의 제안을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다음 전쟁도 저희 푸른이리 용병대가 반드시 함께하겠습니다!"
안티모스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본인의 가슴을 과장하게 쾅쾅 쳤다.
정말.
아주 믿음직스러웠다.
"승낙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참, 그렇게까지 금칠해 주시다니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해야 할 것 같군요."
나는 일단 가장 중요한 용건부터 전달했다.
"다만 저도 당장 출병을 시작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니카로스로 복귀해서 병력을 추스르고, 새로 점령한 영지도 안정시키고, 이것저것 정리를 해야 다시 원정을 준비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과정에는 아마 제법 긴 시간이 소요되겠지.
사실 당연한 일이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이겼다고 해도, 전쟁은 결국 전쟁.
우리도 피해가 전혀 없지는 않다.
약소한 영지의 전쟁이란 것은 결국 살림의 기둥뿌리를 뽑아 휘둘러 싸우는 것이니까.
연이은 전쟁은 주민들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
게다가 거기에 더해 점령한 시하브 토후국을 안정시키는 일도 급하니까.
명분이 있다고 바로 또 쌈박질을 시작할 수는 없지.
말했다시피 나도 최소한 지킬 도리는 지킨다.
"하하!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휴식을 취해야 하는 건 용병대도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말하며 안티모스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가까이 다가와, 마치 나에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전하듯 속삭였다.
"...그리고 애초에 용병들은 그렇게 성실한 종자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안티모스는 눈썹을 으쓱거리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아 물론, 남작님의 제안은 예외죠! 하하!"
하여간 웃긴 양반이다.
그래서 나도 안티모스를 보며 웃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자세한 일정 논의는 니카로스로 돌아가서 하죠. 아마 이틀 뒤에 출발할 것 같으니 그동안 푹 쉬고 계세요."
"넵! 남작님의 무한한 배려를 잊지 않으며 최고의 휴식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안티모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물러났다.
올 때나 갈 때나 똑같이 시끄럽네.
"역시 영주님께서 동년배와 유쾌하게 어울리니 보기 좋군요. 그만 감동의 눈물을 흘릴 뻔했습니다."
마침내 안티모스가 떠나자, 그제야 곁에서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키로스 경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나는 말을 아꼈다.
제일 처음 말하는 감상이 저런 것일 줄이야.
역시 새삼스레 만만치 않은 우리 영감님이다.
확실히 안티모스가 이십 대 중반 정도라고 했었나.
내가 곧 21살이니, 크게 보면 동년배가 맞지.
그리고 용병 대장으로 이래저래 경험도 많아서 그런지 은근히 어른스럽기도 하고.
확실히 같이 대화하면 재밌다.
하지만 유쾌하게 어울리다니....
으음, 그건 글쎄....
그래, 일단 이 얘기는 넘어가자고.
"어쨌거나 키로스 경도 이야기는 들었지요?"
"물론입니다, 영주님."
"혹시 달리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까?"
아르잔 토후국도 공격한다는 나의 계획이 어떠냐?
이 질문에 키로스 경은 잠시 신중하게 고민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허허, 영주님의 판단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승리는 우리 니카로스의 것이 될 것입니다."
키로스는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 눈빛 속에 단단한 믿음이 가득했다.
나는 그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
하나의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다음을 시작해야지.
한번 시작한 이상 멈출 수는 없고, 멈출 생각도 없다.
그저 안정적인 생존이라는 머나먼 종착지를 향해서 계속 나아갈 뿐.
하지만 막막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해야 할 일이라면, 하나밖에 없으니까.
전쟁 준비.
#029. 올바른 충성심 (1)
아쉽지만 이제 귀향의 시간이다.
당장 시하브 토후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냈다.
물론 점령한 영토를 벌써 완벽하게 수습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그냥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그저 지금은 잠시 시간이 필요한 때일 뿐.
시하브 토후국의 영토에 살던 주민들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괜히 우리가 새 주인이랍시고 설치면 역효과만 나니까.
아, 말실수.
이제 정확히는 (구) 시하브 토후국의 영토지.
어쨌거나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멍하니 여기서 죽치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는 거다.
가서 병사들 소집도 해제하고, 휴식도 취하게 해주고.
돌아가서도 할 일은 많지.
다만 우리가 모두 돌아가는 건 아니다.
"키로스 경께 너무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허허, 괜찮습니다. 이 또한 당연한 기사의 본분일 뿐이니 전혀 괘념치 마십시오, 영주님."
키로스 경은 이 땅에 남아 있기로 했거든.
점령지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주둔군과 현장에 남아 그 주둔군을 지휘할 책임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 니카로스에서 그만한 중책을 맡을 만한 인재는 키로스 경뿐이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같은 민심을 조율하고, 타지에 남아서 고생해야 할 병사들까지 달랠 관록을 지니고 사람은 극히 드무니까.
그런 아쉬움 속에서.
키로스 경은 떠날 채비를 한 나를 보며 당당하고 해맑게 웃었다.
"영주님께서 직접 점령하신, 새로운 제국의 영토! 그 어떠한 적도 침범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지키겠습니다!"
"...."
나는 잠시 말을 삼켜 침묵했다.
어떻게 보면 초보 영주의 든든한 후원자와 같던 영감님과 이렇게 떨어지는 게 다소 조심스럽긴 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영지 안에서 몇 안 되게 편하고 친근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과 떨어지니 슬프기도 하고.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달리 대안이 없으니까.
"영지로 돌아가는 대로 행정 인력을 증원해야겠습니다. 앞으로 일이 계속 늘어날 테니까요."
나는 무표정하게 키로스 경을 보며 말했다.
기존의 니카로스 남작령이 워낙 작은 영지였던 탓에 행정적 기반이 너무 부실하다.
당장은 어떻게든 있던 인원으로 감당할 수 있겠지만, 이 이상 영토가 커지면 분명 삐걱거리는 부분이 생긴다.
그리고 전문 관료가 늘어야 키로스 경도 마음 편하게 군사적 업무에만 전념하지.
"허허, 좋은 생각입니다. 니카로스로 돌아가신 다음 제노비오스 집사장과 상의하면 되겠군요."
키로스 경은 나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고 평소처럼 허허 웃었다. 쉽지 않은 영감님.
어쨌거나.
'음, 제노비오스 집사장이라.'
확실히 행정은 그 아저씨 소관이긴 하지.
이 전쟁을 마지막까지 반대하던 그 아저씨가 과연 승리라는 소식을 듣고 어찌 반응할까.
잠시 생각에 빠졌지만, 금방 다시 빠져나와 일단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는 일이니까.
곧 실제로 확인하면 되는걸.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그럼.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네, 영주님도 부디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담백한 작별 인사를 끝으로 나는 등을 돌렸다.
그래, 키로스 경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중요한 건 그거다.
그렇게 니카로스로 향했다.
나를 따르는 수백의 병사들과 함께.
"그러면 이제 귀향길은 저희 푸른이리 용병대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남작님!"
그리고 안티모스와 푸른이리 용병대와 함께.
"안티모스 씨와 용병대가 지켜주신다면 그야말로 안심이죠. 믿고 있겠습니다."
"하하! 그야말로 최고의 판단이십니다!"
한결같은 안티모스의 대답에 나는 살짝 웃었다.
"아."
그리고 자연스레 덧붙였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이렇게.
사례는 넉넉히 할 테니까.
***
도착하고 보니.
놀랍게도 니카로스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하긴. 당연한 일인가.'
우리보다 국력이 강한 국가를 상대로 압승했다.
심지어 막상 싸워보니 상대는 연합이었는데도.
그렇게 생각하면 환호할 수밖에 없는 일이긴 하다.
상대가 강대한 만큼, 그리고 처음부터 우려가 컸던 만큼, 승리했다는 기쁨의 크기도 그에 비례해 커지니까.
'게다가 이 승리를 통해 전사한 전 영주들의 복수까지 해냈다면 더더욱 그렇겠지.'
시하브 토후국은 나 개인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니카로스 전체의 철천지원수였으니까.
"축하드립니다, 영주님! 참으로 대단한 위업입니다! 분명 돌아가신 전대 영주님들께서도 오늘의 승리를 기뻐하실 겁니다!"
심지어 그 집사장까지 가신단의 가장 선두에서 밝은 미소로 나의 승리를 축하해주고 있었다.
'이건 정말 조금 의외인데.'
이 아저씨라면 오늘 같은 날에도 투덜투덜 나를 흘겨볼 줄 알았는데. 너무 편견이었나.
반성할 점이 늘었다.
"분명 영주님께서도 피로가 엄청나게 쌓였겠지요. 바로 성으로 들어가시죠. 남은 마무리는 저희가 끝내놓을 테니, 영주님께서는 오늘 하루 푹 쉬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일 바로 성대한 잔치를 열어서 승리를 기념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미 대부분의 준비는 승전보를 받은 즉시 끝내놓아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집사장 아저씨도 승리의 기쁨에 흥분했는지 평소보다 말이 빠르다.
그래도 그 와중에도 나에 대한 배려심은 확실히 느껴진다는 게 또 재밌고.
축하 잔치라.
좋네. 역시 승리했다면 그런 것도 있어 줘야지.
하지만.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일단은 휴식보다는 회의를 먼저 진행하면 좋겠습니다."
일단 휴식은 조금 미루자고요.
"회의, 말씀입니까...?"
갑작스러운 요청에 집사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하지만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네, 아무래도 사후 강평도 가능하면 빠르게 실시하면 좋을 듯하고."
무엇보다.
당장 중요하게 논의하고 싶은 주제가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나의 대답에 집사장은 딱딱히 굳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부대 소집 해제를 위한 최소한의 인력만을 남긴 채 곧바로 집사장의 주도 아래 모든 가신이 회의실로 모이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은 그들은 당혹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만을 뚫어지도록 바라봤다.
'그야 그렇겠지. 출장 갔다 온 영주가 갑자기 복귀하자마자 긴급회의부터 열었으니까.'
당혹스럽다는 것은 안다.
만약 입장이 반대였다면 나도 똑같은 심정이었을 것이고, 조금 더 차분하게 절차를 차근차근 지켜서 진행하는 게 더 배려심 넘치는 행위라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이야.'
지금 나에게는 바로 그 당혹감이 필요하다.
반대할 게 분명한.
쉽게 이해받지 못할 파격적인 안건을 제안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기세와 추진력은 있어야 하거든.
그렇게 압도적 승전보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서.
"아르잔 토후국 또한 정벌해야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그렇게 선언했다.
"...!"
당연히 온 가신이 웅성거린다.
전쟁 하나가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단 듯이 또 다른 전쟁을 예고한다니. 완전히 상식이 붕괴한다는 표정이다.
"여, 영주님 그게 무슨...?"
집사장은 아예 말까지 더듬으며 되묻길래, 나는 친절하게 미소를 곁들여 설명을 시작했다.
오해는 하지 말아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당장 그들을 공격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할 일이 한둘이 아닌데 어떻게 전쟁을 해.
점령한 영토를 제국에 동화시킬 정책도 고안해야 하고, 그 땅을 관리할 인력 수급도 빼놓을 수 없다.
전투로 입은 물질적 피해도 복구해야 하고, 주민들의 농번기도 고려해야 하지.
다만.
"무도한 아르잔 토후국이 감히 우리의 복수에 개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살아있는 이상 복수는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미리 알아두고, 결정하자는 것일 뿐.
누누이 말했지만, 명분은 중요하다.
그리고 또다시 그 명분이 제 발로 굴러들어왔다.
상대가 승부를 걸 엄두도 안 날 만큼 강대한 것도 아니니, 절대로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그러니 아르잔 토후국을 우리의 적으로 선포하고 서서히 전쟁을 준비합니다."
이것이 본론.
장기적인 목표인 만큼, 당연히 명확한 목적지를 미리 설정해 놓아야지 일이 순조롭게 흘러갈 거 아니야?
맞지?
"...무슨 말씀이신지, 그리고 어떤 분노를 품고 계시는지 모두 이해했습니다. 확실히 아르잔 토후국은 쉽게 용서해서는 안 될 적입니다."
거대한 웅성거림 속에서 집사장이 대표로 떠듬떠듬 입을 연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하지만 소신으로서는, 동시에 우려를 금치 못하겠습니다. 시하브도, 아르잔도 모두 우리보다 강한 국가입니다. 이번 승리는 그야말로 천운과도 같은 것. 그런데도 또다시 전쟁을 준비하신다는 영주님의 말씀은 너무나...."
그래, 당연히.
당연히 반대할 줄 알았다.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결과는 훌륭했지만, 과정은 힘들었다.
운이 좋았다.
니카로스의 미래가 걸린 아슬아슬한 투쟁이었다.
이겼다면 이제 그 승리를 즐기며, 숨을 죽일 때다.
또 다른 전쟁은 너무나 위험하다.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그래,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커다란 고비 한 번은 잘 넘겼지만, 그렇다고 우리 영지가 완전히 안정된 것도 아니니까.
'원래 이 땅은 수많은 위기가 도사리는 곳인걸.'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승리에도 불구하고, 노회한 가신들에게 나는 여전히 경험 부족한 애송이일 뿐이니까.
고작 한 번의 이변 정도로는 이 머리가 딱딱히 굳은 양반들의 생각을 바꿀 수 없었다는 거지.
그런 상황에서 나는.
다시 한번 전쟁을 선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지만, 오직 나만이 이게 유일한 살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심지어 항상 힘을 실어주던 키로스 경도 지금은 없다.
그렇기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반대파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하고, 나는 가장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상황에서 논의하기 위해.
"하하. 당연히 천운, 위대한 솔레오의 가호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만큼 우리의 철저한 준비도 큰 도움이 되었지 않습니까? 아르잔 토후국도 약해진 만큼, 우리는 또다시 승리할 겁니다."
"그것은 조금 더 심사숙고가 필요한 판단입니다! 이번 전쟁 때도 예상하지 못한 연합과 지원군이 나타났지 않습니까! 아르잔이 무력하게 당하기만 할 거라고 기대할 수만은 없습니다!"
확실히 그건 일리가 있어.
전장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그 어떤 상황도 일어날 수 있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위험하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다른 선택지가 없는, 그저 필요에 따른 결단입니다."
필요에 따른 결단.
가문의 복수, 혹은 생존을 위한.
과연 어떤 필요인지는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당연히 나에게는 후자다.
하지만 집사장은 아마 전자로 이해했겠지.
부모와 형제의 복수는 반드시 이뤄야 한다.
그 어떤 피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건 이 세상의 관념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렇기에 집사장은 쉽게 반대하지 못하면서도.
"...."
결코, 찬성의 의견을 내뱉지 않았다.
이것 참.
아저씨, 쇠고집이셔.
따라서 나는 결국 이 말을 내뱉고 말았다.
"여러분들은, 저를 믿지 못하고 계시는군요."
"...!"
모두 알고 있지만.
절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던 암묵적 진실.
그래, 만약 집사장과 다른 가신들이 정말 제논을 믿듯 나를 믿었다면 이렇게까지 반대할 리가 없다.
가족의 복수라는 명분이 얼마나 강한지.
그걸 완수하지 못한다는 게 이 세상에서 얼마나 심각한 약점인지 분명히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반대한다는 것은.
까놓고 말해,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하기 때문일 뿐.
그 말과 함께 회의실의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고, 모든 가신이 조용히 우리 두 사람의 눈치만 살폈다.
"...저희는 언제나 영주님과 니카로스에 충성을 바치고 있습니다."
집사장은 그저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래, 안다.
이 아저씨는 분명히 충성심을 지니고 있다.
나는 몰라도.
적어도 이 땅과 죽은 제논에게는.
그리고 어쩌면 그가 옳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아이처럼 억지만 부리고 있을 수도 있고.
만약 이대로 세상이 흘러간다면 위험한 싸움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니까.
그냥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한 약소한 영지로서,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안다.
그것은 그저 헛된 망상이다.
머지않아 동방의 정복자가 온다.
변방은 무너지고, 이들이 알던 세상도 붕괴한다.
그 날이 오면.
누가 옳았는지 확실히 깨닫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내 말 들읍시다, 여러분?
***
회의는 끝났다.
영주 티베리오스도, 집사장 제노비오스도.
그 누구도 한 치의 타협 없이 대립했기에 명확한 결론은 나오지 못했다.
남겨진 것은.
다음 회의 때 다시 논의하자는 미적지근한 유예뿐.
그렇게 회의가 끝나자마자 집사장은 잔뜩 붉어진 얼굴과 함께 자신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더는, 더는, 더는, 더는 안 돼...!'
제노비오스 집사장은 몇 번이고 생각했다.
'대체 언제쯤 만족할 것인가!'
분명 그는 진심으로 기뻤다.
나아가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제대로 후계 교육도 하지 못한 영주님이 어느새 직접 전장에 나서, 제논과 마누엘의 복수를 훌륭하게 해냈다.
화려한 승리라는 업적까지 쟁취해냈다.
이 사실을 듣고도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처음 승전보를 듣자마자, 제노비오스는 곧장 위대한 태양신 솔레오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릴 정도였다.
그렇기에 시하브 토후국과의 전쟁에 앞서 자신이 반대했던 것이 틀렸다는 사실까지 인정했다.
'그렇지만 또 전쟁을 벌이겠다니! 심지어 우리보다 강한 국가를 상대로! 이건 아니야!'
아르잔 토후국.
감히 우리의 정당한 복수를 방해한, 무도한 자들.
따라서 그들도 원수다.
명분이 나쁘지 않다는 건 안다.
영주님의 말이 옳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뿐이야!'
영주님은 여전히 젊고 경험이 부족하다.
천운만으로 영원히 승리할 수는 없다.
'이대로는 니카로스에 파멸밖에 남지 않는다.'
제노비오스 집사장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당장 편지지 하나를 가져와라!"
따라서 그는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길지는 않았지만, 한 자 한 자가 신중하게 적힌 그런 편지를.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원하던 내용을 모두 써 내린 집사장은, 몇 번씩이고 편지의 내용을 검토하더니 곧 자신의 믿음직한 심복을 조심스럽게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그렇게 다가온 심복에게.
니카로스의 집사장, 제노비오스 크세로스는.
"이것을, 에우스페나의 아폴로니아 경에게 전달해라."
아주 은밀하게 속삭였다.
#030. 올바른 충성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