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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0-010

#001. 숙련자의 행운(Master's Luck) (1)

깼다.

나도 모르게 절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평소 게임을 하면서 혼잣말 같은 걸 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예외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성취감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의 도전 과제 (1377 / 1377)

모니터 위에서 선명히 빛나는 이 짧은 글자.

요컨대, 한 게임의 모든 도전 과제 달성했다는 증거.

당장 두 눈에 담기는 것은 심심할 정도로 정적인 화면이 전부였지만 지금 나에게는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부족함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크으...."

만약 남들이 본다면 호들갑이 과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걸 자각하고 있음에도 자연스레 새어 나오는 감탄사.

그래, 달성한 도전 과제 개수가 천 개를 넘긴다는 일차원적인 사실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물론 그것도 만만치 않은 결과물인 건 맞지만, 이 업적의 진가는 고작 그런 숫자 따위에 있지 않으니까.

<마이트 앤 로열>.

한 마디로 설명해서.

중세풍 판타지 영지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

물론 이건 장르에 대한 짧고 간단한 설명일 뿐.

이 게임의 진정한 정수는 따로 있었다.

막대한 자유도.

<마이트 앤 로열>의 가장 큰 특징.

플레이어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만의 이야기와 역사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자유는, 경쟁작에는 없는 이 게임만의 가장 독창적인 매력이었다.

극소수의 네임드 캐릭터와 고유 이벤트를 제외하면 매 회차 모든 인물과 사건들이 난수에 따라 무작위로 만들어지고 전개되는 세상.

망해 가던 제국이 새롭게 전성기를 맞이해 세계를 정복하는 회차가 존재한다면, 그 제국이 결국 철저히 무너져 새로운 패권국의 양분이 되는 회차 역시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그런 세상 속에서 영주가 되어 시작하는 것이다.

강대국의 황제에서부터 촌구석 지방 토호까지. 당연히 이러한 초기 선택 또한 자유.

게다가 자유도가 장점인 시뮬레이션 게임인 만큼 당연히 정해진 목표 따위도 없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을 스스로 정해서 언제든 원하는 방식으로 영역을 꾸려나갈 수 있다.

그런 방대한 자유 속에서 만약 굳이 모두가 공유하는 절대적인 목표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단 하나뿐.

'생존.'

플레이어의 생존. 영지의 생존. 가문의 생존.

추구해야 할 것은 그게 전부.

'그리고 대부분 초보자는 그 가장 기본적인 목표 앞에서 좌절하고 말이야.'

자유도는 <마이트 앤 로열>의 가장 큰 매력인 동시에 진입 장벽이기도 했다.

무작위성 요소로 가득 찬 세상에 틀에 박힌 공략 따위는 구조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큰 얼개의 방향성이나 소소한 팁 정도야 있지만, 플레이어는 언제나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해야 한다.

자유는 플레이어만의 전유물이 아니니까.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 역심만이 가득한 신하들, 대대적인 전염병, 개인의 힘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천재지변, 사고만 치고 다녀 가문의 이름값을 시궁창에 처박는 혈육들....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악의적 이벤트는 언제든지 플레이어와 영지를 멸망으로 몰고 갈 수 있다.

그리고 이 게임의 도전 과제란.

단순한 생존 그 너머의 영역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혼란한 세상에서 미리 정해진 업적을 달성하는 것.

요컨대 돛단배 한 척으로 망망대해를 건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

그것이 총 1,377개.

출시된 지 벌써 6년.

고인물조차 방심할 수 없는 난이도와 자유도로 적지 않은 열성팬을 보유한 <마이트 앤 로열>이었지만, 그 태생적 어려움으로 인해 제작사의 변태적인 가학성이 듬뿍 담긴 이 도전 과제들을 전부 달성한 유저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지금까지'는 말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바로 최초다.

이게 방금 막 내가 달성한 업적의 진가다.

'이게 진짜 되긴 되네.'

웃음이 절로 나온다.

잠까지 줄여가며 황금연휴를 불태운 보람이 있다.

정말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았는데 자꾸만 삐끗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려버렸다.

특히나 마지막까지 남겨 놨던 최악의 도전 과제.

제국의 최변방 남작령으로 대륙을 통일하는 업적이 가장 지옥이었다.

차라리 아예 아무도 관심이 없는 대륙 구석 촌 동네로 시작했다면 몇 세대 동안 느긋하게 세력을 키워 은인자중만 해도 어느 정도 답이 보일 테지만, 약소 영지 주제에 무슨 적까지 사방에 이렇게 많은지. 처음부터 사람을 가만히 두질 않았다.

해당 도전 과제 달성률.

0.0%

사실상 모든 업적 달성의 마지막 관문.

진짜로 전 세계에 한 명도 없었는지, 아니면 극소수 있긴 있으나 0.1% 이하라 수치로 잡히지 않았던 것인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히 이 도전 과제를 깼다는 인증글이나 공략 같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관련 커뮤니티로 가면 이걸 깨라고 만든 게 맞냐고 제작사를 욕하는 글이 널려 있겠지.

사실 클리어한 나조차도 아직 제작사의 악의에 치가 떨리는 상태니 그들의 심정에 십분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나는 해냈지.'

그들과는 다르게.

중요한 건 그거다.

그렇기에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이 대망의 인증샷을 커뮤니티로 올릴 준비를 했고, 자연스레 나의 플레이 시간 쪽으로도 잠시 눈길을 주었다.

9999.3시간.

'...참 시간도 절묘하네.'

이건 의도한 게 아닌데.

거의 1만 시간.

대충 40분만 더 플레이하면 딱 1만 시간을 채우는 셈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당연히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벌써 밤이 늦었고, 내일은 마침내 연휴도 끝나 또다시 아침 일찍부터 출근해야 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딱 10,000시간도 채워서 같이 인증샷을 올리면 그림이 더 예쁘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딱 떨어지는 숫자에서 나오는 안정감이란 게 있잖아.

솔직히 당장 눈이 감길 만큼 피곤하긴 하지만 굳이 직접 플레이할 필요까지도 없다. 그냥 게임을 켜놓기만 해도 플레이 타임은 알아서 올라갈 테니까.

마침내 나는 결정을 내리고, 잠시 게임을 켜둔 채 턱을 괴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

그래, 아무리 졸려도 40분 정도야 충분히 버티겠지.

가만히 그러고 있으니 자연스레 지금까지 했던 플레이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재밌게 했지.'

분명히 나는 이 게임의 팬이었다.

정해진 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쌓아 간다는 게 너무 좋았으니까.

그러니까 딱히 처음부터 모든 도전 과제를 다 깨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냥 하다 보니까.

6년이란 시간 동안 즐겁게 하다 보니까 어느새 손을 한 번 뻗어 볼 만큼 코앞까지 도달한 것뿐이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두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그래, 일단 오늘은 도전 과제 달성 인증만 먼저 하자.

세부적인 플레이 내용은 나중에 따로 정리해서 올리고 마지막 도전 과제에 관한 공략도 그때 같이 게시하면 되겠지.

열렬히 불타오를 커뮤니티의 모습이 안 봐도 훤하다.

'물론, 공략 좀 본다고 따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다시 하라고 하면 당장 나부터 자신이 없는걸.

"...."

사실 생각해보면 정말 징글징글할 정도로 몰입해서 게임을 하긴 했다.

그 끝에 결국 도전 과제까지 다 깨버렸으니, 아마 질려서 한동안은 거들떠보지도 않겠지.

하지만 동시에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머지않아 다시 이 게임을 켜게 되리란 걸.

'그야.'

이 게임은, <마이트 앤 로열>은 재밌었으니까.

마치 구름처럼 서서히.

머리를 감싸는 여러 생각과 함께 눈이 조금씩 감겼고, 결국 나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책상에 스르륵 쓰러져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는 깨지 못했다.

***

'...정확히 말하면 깨긴 깼지.'

그래, 지금 내가 이렇게 멀쩡히 생각이란 걸 하는 걸 보면 확실히 잠에서 깨긴 깼다.

그저 원래 나의 몸이 아닌, 난생처음 보는 다른 사람의 몸으로 깨어났다는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을 뿐.

"허허! 도련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자다가 눈을 뜨면 천장이 보인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당연한 사실임에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여전히 잠에서 깨 천장을 볼 때마다 흠칫흠칫한다.

"...일어났습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사실 아직도 이 모든 게 다 꿈이 아닐까 싶다.

잠에서 깨면 다시 나의 집, 나의 방, 나의 침대에서 일어나 구가하던 일상으로 돌아갈 것만 같다.

'...내가 <마이트 앤 로열>의 세상에 빙의한 지 석 달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말이야.'

하지만 오늘도 돌아가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다.

그게 지금 나의 이름이다.

'분명히 엄청 재밌게 한 게임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 속에 직접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은 절대로 아니었는데.'

그래도 그나마 몸은 머리보다 빨리 적응했는지 일어나자마자 머릿속을 채우는 이런 시뿌연 생각과는 별개로 행동에는 막힘이 없었다.

곧장 간단히 세수하고 방문을 연다.

그리고 나를 깨우는 주인공을 맞이한다.

이 또한 근래 매일 반복되는 내 일상의 한 조각.

"좋은 아침입니다, 키로스 경."

"허허! 좋은 아침입니다, 작은 도련님! 지난밤도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한 남성이었다.

중년과 노년 사이에 있는 주름진 얼굴.

반듯하게 뒤로 넘긴 회색빛 머리카락.

그러나 그런 머리의 빛깔과는 달리 듬직하고 단단한 근육질 거구.

이 영감님은 바로 빙의한 이 육체의 아버지가 나를 위해 붙여준 기사, 키로스 경이었다.

"물론입니다. 잘 먹고 잘 자는 게 제 일이죠."

바람 빠지듯 힘없는 어조였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솔직히 일어날 때의 기분은 상당히 별로였지만 그래도 잠 자체는 아주 잘 잤으니까.

기절하듯 잠들었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그야.

저 할아버지 때문에 잘 잘 수밖에 없었거든.

"아주 훌륭합니다! 그러면 간단히 식사하시고 오늘도 바로 연무장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아침부터 땀을 조금 흘려주어야 상쾌한 하루가 시작되는 법이니까요!"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키로스 경은 호쾌하게 웃고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참 좋은 사람이다.

친절하고 유능하고 활기차고, 호의가 가득하고.

그렇지만.

참 좋은 어르신이지만.

'...그저 저 활기와 호의가 날 괴롭게 할 뿐.'

키로스 경이 떠나간 빈자리를 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리고 두 뺨을 양손으로 찰싹찰싹 쳤다.

자, 정신 차리자.

오늘도 처맞으러 갈 시간이다.

***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

단언컨대, 이 속담은 거짓이다.

"허억! 허억!"

"도련님, 아직 멀었습니다!"

키로스 경은 시종일관 싱글벙글 웃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만큼 약 오르는 게 없었으니까.

"허허! 느립니다, 느려! 도련님, 그렇게 해서는 제 몸에 검을 댈 수 없습니다!"

이렇게.

"더 빠르게, 더 빠르게! 손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체도 이용해서! 전신을 이용해서! 발이 멈춰서는 안 됩니다! 계속 스텝을 밟으면서!"

또는 이렇게.

"허허! 조금만 더 노력하시지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몸에 한 번이라도 검이 닿는다면 바로 훈련을 종료하겠다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리고 이렇게.

가르쳐주고 의욕을 북돋아 주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건 안다. 근데 그걸 알아도 약이 오른다.

특히 마지막 말이 제일.

'실력 차이가 압도적이라는 것을 본인이 제일 잘 알 텐데 뻔뻔하게...!'

악에 받쳐 내지른 나의 혼신의 일격은 이번에도 허망하고 간단하게 막혀버렸다.

이제 내가 공격당할 차례.

나도 모르게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누군가는 이 광경을 보며 나와 키로스 경이 목검으로 대련을 하고 있다고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나는 이렇게 표현한다.

'키로스 경에게 목검으로 흠씬 처맞는 시간이라고.'

- 훈련도 실전처럼!

키로스 경은 과연 좌우명대로 손속에 자비가 없었다.

덕분에 고작 석 달 만에 실력이 엄청나게 향상된 거 같기는 하다. 그 교육 솜씨는 나도 진짜 인정한다.

'그렇지만 너무 아픈걸...!'

저 영감님.

어딜 때려야 후유증이 안 남으면서도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해줄 수 있는지 몹시 과하게 잘 알고 있다.

그 고통의 수렁에 빠진 내가 결국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뿐.

그리고 이렇게 마구 검을 휘두르다 보면 자연스레 다른 생각 또한 많아진다.

'...설마 또 주마등인가.'

그것만은 아니길 빈다.

키로스 경.

아는 인물이다.

당연히 석 달 동안 봐왔기에 알고 있는 것도 있지만, 사실 그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저 아저씨... 네임드 캐릭터거든.

<마이트 앤 로열>의 극소수 고정 캐릭터.

그러니까 나는 다 알고 있다.

저 아저씨가 속한 영지가 어딘지.

저 아저씨가 모시는 주군 겸 내 아버지가 누군지.

그 영지가 어떤 나라에 속한 건지.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

바로 그게 문제다.

여기가 어떤 지옥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귓가로 키로스 경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오오! 방금 공격은 좋았습니다!"

이 땅의 이름은 '니카로스'.

니카로스 남작령이라고 불리는 제국의 영지.

"좋습니다! 이 기세로 계속!"

<마이트 앤 로열>의 시작 시점에 제국이라 불리고, 또 인정받는 곳은 오직 단 하나밖에 없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제국이라고 하면 한 나라만을 의미한다.

'바할리아 제국'.

세상의 중심이자, 원작 게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

그리고 이미 전성기가 끝나버린, 내부부터 곪아가는 대륙의 환자.

"허허! 이대로만 가면 머지않아 정식으로 기사 시험을 봐도 되겠습니다, 도련님!"

니카로스 남작령은 그런 제국의 동쪽 가장 변방에 자리 잡은 영지였다.

국경 넘어 종교적으로 대립하는 수많은 이교도 소왕국과 맞서 싸우는 최전선.

그리고 플레이어에게 있어 지옥이나 마찬가지인 땅.

"이런! 방금 공격은 조금 성급했습니다!"

그래, 니카로스 남작령은 유명했다.

'절대로 클리어할 수 없는 영지'로.

이 영지에는 정말로 많은 장점이 있었다.

워낙 변방이라 제국 중앙의 부패가 비교적 영향을 덜 미쳤고, 영주의 자율성이 보장되었다.

정확히는 여기까지 통제할 만한 여력이 황실에 없는 것에 더 가깝지만.

그리고 남작령 주제에 고정 네임드 캐릭터를 세 명이나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

보통 남작령 정도의 작은 땅은 대부분 무작위로 생성된 영주와 신하들로 가득 채워지는 것과 비교하면 극히 이례적인 경우.

게다가 단순히 고정 네임드 캐릭터들의 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각 인물의 능력도 상당히 뛰어났다.

수도에서나 볼 수 있는 제국 최고의 인재들과 비교하면 다소 평범하지만, 이곳 변방에서는 군계일학과 다름이 없는 수준.

마지막으로 언제나 약탈과 침략이 끊이지 않는 탓에 일개 남작령치고는 군사력도 무척 탄탄했다.

거의 모든 역량을 국방에 투자하는 셈이었으니까.

객관적으로, 널리고 널린 제국의 남작령 중 이만한 이점을 지닌 곳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니카로스 남작령보다 많은 단점을 지닌 곳은 정말 단 하나도 없고 말이야.'

변방의 지원 따위 잊은 황실, 봉신에게 무관심하고 무능력한 직속 주군, 척박한 대지, 부족한 인프라, 지역 차별, 내부 갈등, 사방에 넘쳐나는 도적 떼, 끝없는 약탈, 호시탐탐 제국을 넘보는 이교도, 내부투쟁에만 여념인 후방, 무엇보다 국경 넘어 동방에서 발호하는 고정 이벤트까지....

간단히 말해서 단점이 장점을 모조리 잡아먹고도 남아 있는 상황.

"성급한 공격은 곧바로 반격으로 돌아옵니다!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 모든 요소가 합쳐진 결과가 바로 이 땅이었다.

아무리 숙달된 플레이가 잡아도 십중팔구는 한 세대도 버티지 못하고 멸망하는 마의 영지.

그리고 고인물 중의 고인물인 나조차도 마지막의 마지막에야 겨우 달성한, <마이트 앤 로열> 도전 과제 올 클리어의 마지막 관문.

도전 과제

- 니카로스 남작령으로 시작하여 대륙을 정복하기.

전체 플레이어 대비 달성 비율 (0.0%)

'...그래.'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지금도 커뮤니티에서 깨라고 만든 게 맞냐고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는 그 땅.

"자!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조금 지치신 것 같군요, 도련님!"

그리고 나는 티베리오스 발란티스.

지금 니카로스 남작령을 다스리는 영주의 차남이다.

게임에서는 보지 못한, 내가 알지 못하는 차남.

아마 고정 네임드 캐릭터가 아닌, 수많은 무작위 생성 캐릭터 중 한 명이겠지.

회차마다 영주의 가족 중에 새로운 인물이 생성되는 것도 드문 경우는 아니다. 후계 계승에 플레이어가 예측할 수 없는 변수를 만들 수 있으니까.

나도 재미를 추구하는 한 사람의 게이머로서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된 지금은 아니다.

망할.

하필 게임 속에 빙의해도 꼭 이런 상황, 이런 캐릭터였어야 했냐. 이건 그냥 엑스트라나 마찬가지잖아.

"으아아!"

"허허! 오늘 훈련도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하루도 즐겁게 시작입니다!"

키로스 경은 훈련 종료를 선언하며 기운차게 인사했지만,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나는 연병장 한가운데 그대로 대자로 뻗어 누웠다.

"...."

푸른 하늘이 보인다. 구름 한 점 없다.

공기가 깨끗해서 그런지 원래 살던 현실 세계보다 하늘이 맑다.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든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아직도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 덕분에 체념은 할 수 있었다.

어째서 나냐고.

게임을 재밌게 했을 뿐인데 그게 빙의할 이유냐고.

게다가 하필 왜 이런 최악의 상황에 떨어뜨린 거냐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그런 원망만 잔뜩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럴 시기는 지났다.

돌아갈 길을 모르니, 일단은 살길을 찾아야 할 때다.

그러니까 그동안 계속 고민하고 생각했다.

이 몸에 빙의하고. 벌써 석 달이나.

'...그렇지만, 도무지 답이 없다.'

나의 마음가짐이랑 별개로 이 망할 땅에는 그냥 희망 자체가 없다.

'다른 위험 요소는 일단 다 무시해도, 도저히 내버려 둘 수 없는 위기가 다가오고 있으니까.'

이 게임 특유의 무작위성 때문에 정확한 기간은 나도 알지 못하지만, 경험을 토대로 추측 정도는 가능하다.

이제 길어야 3년이다.

짧으면 고작 반년 내일 수도 있다.

그 안에 '동방의 위대한 정복자'가 나타난다.

제국의 파괴자이자 신의 채찍이라고 불리는.

괴물 같은 고정 네임드 캐릭터가.

이 게임의 몇 안 되는 고정 이벤트.

정복자는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동방 이교도의 땅을 통일한 뒤 바할리아 제국을 향해 진격한다.

옛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이 흐름은 거의 필연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미 부패하고 타락한 바할리아 제국에게 저항할 힘 같은 건 없고 말이야.'

물론 이 게임에 '절대'라는 것은 없다.

저건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흐름일 뿐이다.

극히 희박할 확률로 정복자가 제국의 국경조차 돌파하지 못하고 처참히 몰락할 수도 있고, 도중에 병사(病死)할 수도 있고, 적대적인 세력에게 암살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도 한낱 불확실한 가능성일 뿐이야.'

플레이어의 개입이 아예 없다는 가정하에.

확률은 대략 8 대 2 정도.

물론 바할리아 제국이 멸망하는 쪽이 8이다.

그러니까 절대 그것만 믿고 안심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국이 이기든 지든 니카로스 남작령이 있는 동쪽 변방은 초토화되고 말거든.'

여기는 그야말로 최전선이니까.

'그렇다면 어차피 못 이길 싸움. 차라리 항복이라도 해서 목숨을 건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조차 여의치 않다.

'동방의 정복자는 절대 포로로 잡은 제국의 귀족을 살려두지 않으니까.'

일개 남작부터 황제까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그런 의미에서 동방의 정복자가 이끄는 침략은 니카로스 남작령의 영주로 게임을 진행하는 플레이어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치명적이고 위험한 이벤트다.

이 땅의 운명이 사실상 두 가지로 귀결될 정도로.

동방의 정복자에게 파괴되고 짓밟히느냐.

아니면 그때까지 버티지도 못하고 먼저 멸망하느냐.

'이런 땅으로 세계를 정복하라는 도전 과제를 주다니. 지금 생각해도 진짜 너무하네.'

하여간. 이러니까 제작사가 그렇게 욕을 먹지.

무수히 많은 플레이 후기가 올라오는 커뮤니티에서도 니카로스 남작령이 동방의 정복자 발흥 이후까지 살아남은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예외가 있다면 오직 하나.

나의 마지막 플레이뿐.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모니터 너머에 존재하는 게임 속의 이야기였지.'

석 달 동안 질릴 정도로 느끼고 깨달았다.

지금 내가 보고 느끼는 이 세상은 결코 한낱 가상의 게임 따위가 아니다.

모든 게 현실적이다.

도리어 여전히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니카로스 남작령으로 살아남기.

단순한 게임이어도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다시 시도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는데.

고작 게임의 경험만으로 내가 얼마나 해낼 수 있을까.

하다못해 당장 나에게 영주의 권한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후계자조차 아닌 차남일 뿐.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도저히 방도가 안 보인다.

'...그러니까 결국 결론은 그것뿐이야.'

도망.

그리고 탈주.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이것 말고는 답이 없다.

그냥 하루빨리 여기를 뜨는 게 최선이다.

차라리 동방의 정복자가 관심도 안 가지는 일개 평민이었으면 몰라. 영주의 아들 몸에 빙의해버린 만큼 이대로 남아 있다가는 빼도 박도 못하게 니카로스 남작령과 같이 잘근잘근 먼지가 되어 바스러질 뿐이다.

'일단 수도, 수도로 가자.'

바할리아 제국 전체가 썩어가는 만큼 거기도 그리 멀쩡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개 소시민의 처지라면 변방보다는 사정이 낫겠지.

운이 좋으면 변방에서 정복자를 막을 수 있는 거고, 그게 실패해도 최소한 시간을 더 벌 수 있다.

진짜 제국이 싹 쓸려나가는 최악의 경우, 어떻게든 신분을 세탁하고 평민인 척하는 방법도 있고 말이야.

'이것도 썩 안전한 방법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여기 남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생존 확률이 높지.'

일단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살아남기만 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원작 게임에 대한 지식을 활용해서 내 한 몸 정도는 건사할 수 있다.

아니, 고작 건사가 뭐냐.

평범하게 잘 먹고 살 사는 것을 넘어서, 호의호식하는 것도 꿈이 아니다.

할 수 있다, 나라면...!

***

"빌어먹을 시하브 토후국 놈들이 국경을 넘었다는구나. 아무리 봐도 우리를 약탈하기 위해 쳐들어온 게 분명하다."

누가 붙잡을세라 후다닥 방으로 돌아와 한창 짐을 싸던 나는, 머지않아 비상사태를 알리는 호출과 함께 회의실로 불려오고 말았다.

회의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고정 네임드 캐릭터.

니카로스 남작령의 주인.

발란티스 가문의 수장.

나, 티베리오스 발란티스의 아버지.

제논 발란티스.

"그래, 슬슬 다시 저 무도한 놈들에게 본보기를 보일 때도 되었지. 내가 직접 나서겠다. 당장 군대를 소집하도록. ...그리고 티베리오스."

그가 나를 보며 말한다.

"이번에는 너도 나와 함께 출진하자꾸나."

네?

저도요?

...네?

#002. 숙련자의 행운(Master's Luck) (2)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또 어디인가.

답답한 마음에 연신 속으로 되뇌고 있었지만,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명확하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난데없이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진 빙의자다.

그리고 니카로스 남작령의 토벌군과 함께 제국의 국경 지대로 향하고 있고.

지금 나의 곁에는 수백 명의 병사가 함께하고 있다.

요컨대 나는 군인이고, 여기는 전쟁이다.

지금 전장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

'...진짜 믿기질 않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왜 하필 오늘이냐. 왜 하필 이번이냐.

왜 하필 내가 석 달 만에 니카로스를 떠날 마음의 준비와 채비를 다 끝낸 그 순간에...!

"하...."

정말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억울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현실감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이 상황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고 도피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마음과는 별개로, 머리는 어느새 조금씩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 이번이 내가 겪은 첫 침공은 아니었다.

내가 빙의한 이후, 지난 석 달 동안 외적의 침공은 꾸준하게 발발해 왔다.

애초에 여기는 그야말로 제국 동부의 최전선이니까.

평화라는 단어 자체가 낯선 곳이니까.

이곳이 격전지가 된 이유는 간단하다.

이 땅에는 서로를 철천지원수라고 여기는 두 종교가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할리아 제국의 황금십자교(黃金十字敎).

그리고 동방의 성화월광교(星火月光敎).

제국 동쪽 국경 너머의 초원이 바로 그 '월광교'의 땅이다. 그 대지에는 월광교를 믿는 수십 개의 이교도 소왕국이 가득하며, 그들은 언제나 호시탐탐 비옥한 제국의 영토를 노리고 있다.

그러니 자연스레 제국의 국경 끝자락에 자리 잡은, 사실상 그 초원을 함께 공유하는 니카로스 남작령이 유독 더 잦은 침공을 당할 수밖에.

당연히 나도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전부 <마이트 앤 로열>에 나온 내용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언제든 월광교 놈들이 침공할 수 있다는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게 하필 오늘이라는 것도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다.

정확히는 '하필 오늘'이 아니라, '오늘도 또다시'인 셈이니까.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여전히 남아 있지.'

니카로스의 영주, 제논 발란티스.

당당하게 토벌군의 가장 선봉에서 말을 몰아 모든 병사를 이끄는 나의 아버지.

도대체 저 양반은 나를 왜 이 전장까지 데려왔을까?

내가 왜 이 침공에 정면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가?

내가 빙의한 이래 월광교의 침공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중 내가 직접 참전한 싸움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마 내가 빙의하기 전에도 없었을 것이다.

'그야 나는 정말로 전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이니까.'

애초에 차남인 나는 가문의 예비품 같은 존재다.

비상사태가 아닌 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집안의 백수 같은 존재.

그런데 영주인 제논은 하필 오늘 나를 불러 함께 출진하자고 했다.

확고부동한 후계자이자 차기 영주로 교육받는 형도 아닌, 영지에서 별다른 존재감도 없던 나에게.

차라리 형을 데리고 왔으면 후계자로서 공을 세우게 해줄 목적이라고 이해할 수라도 있지.

대체 나는 왜...?

'환장할 것 같은 타이밍이야.'

그동안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으면서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설마 내가 영지를 뜨려고 한 걸 눈치챈 걸까? 하지만 대체 뭘 근거로? 그동안 티를 낸 적도 없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긴 건 오늘 단 하루일 뿐인데? 그리고 그런 걸 들켰다고 사람을 다짜고짜 전쟁터로 데려오나? 역시 그냥 우연의 일치인가?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나? 아무래도 불가능하겠지? 일단 이 전투는 넘겨야 다음 기회가 오겠지?

자연스럽게 생각이 많아진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게 한창 생각에 잠긴 와중.

"생각이 많아 보이는구나, 티베리오스."

갑자기 바로 옆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 남자가 보였다.

여유롭게 말을 몰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제논이다.

내가 지금까지 계속 고민하던 원인 그 자체인 양반.

그 목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분명 저 멀리 선두에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가까이 왔대...?

"긴장했느냐?"

제논은 놀란 표정의 나를 보더니 씩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아.

긴장.

그래, 긴장 말이지.

'솔직히 많이 했지.'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이잖아, 전쟁.

피가 튀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현실에서는 단 한 번도 연이 없던... 그런 끔찍한 무언가.

심지어 나는 후방부대 출신이거든.

행정반에 앉아서 컴퓨터만 마구 두들긴 기억뿐이다.

그러니까 난데없이 전쟁터에 끌려가게 생겼는데 긴장을 하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지금까지 계속 다른 생각에 전념했던 것도, 어쩌면 현실 부정의 일환일지도 모르고.

"솔직히 부끄럽지만, 긴장되긴 합니다."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이미 다 알고 물어보는 것 같기도 하고, 억지로 부정해봤자 더 추해질 것만 같아서.

그러나 제논은 이런 대답에도 그저 호탕하게 웃을 뿐이었다.

"하하!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전쟁이란 원래 그렇지. 싸움이란 본디 두려운 것이다. 오히려 그 두려움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또 다른 용기고. 그러니 괜한 자책은 하지 말거라."

의외다.

한심한 겁쟁이라고 타박할 줄 알았는데.

나는 새삼 제논의 얼굴을 다시 바라봤다.

건장한 체격과 완고한 얼굴.

흔들림 없이 단단한 태도.

언제나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검.

군데군데 보이는 거친 흉터까지.

원작 게임에서 접한 익숙한 그 모습 그대로다.

무뚝뚝하고 고집 센 군인.

제논은 누가 봐도 그런 인상이었고, 정말로 그런 사람이기도 했다.

사람이 어찌나 삭막한지.

분명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음에도 딱히 가족 간의 대화와 소통 자체가 없었다.

무엇보다 직접 겪어봤으니 안다.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일주일에 서너 번 얼굴을 보면 많이 본 것일 정도니까.

물론 그런 점이 싫다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나도 '티베리오스'의 가족을 진짜 내 가족이라고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고, 가뜩이나 낯선 세계에 빙의한 것만으로도 힘들었으니까.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면 되었지.

갑자기 타인이 된 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몰렸는데, 가족이라는 사람이 우르르 몰려와 달라질 수밖에 없는 내 태도에 관심을 가지고 의심을 보였다면 더 견디기가 벅찼을 것이다.

"그러니까 과한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너는 그저 오늘 보게 될 광경을 두 눈에 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어째 오늘은 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평소보다 더 친근하고 생기가 가득해 보인다.

솔직히 가족 사이라는 걸 가끔 잊을 때도 있을 정도였는데, 웬일로 그가 선뜻 말을 걸어주고 있었다.

'...집보다 전쟁터에서 더 기운이 넘쳐 보인다니.'

진짜로 이상한 사람이다.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내가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데려왔다니. 그리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니.

이게 뭐 체험학습도 아니고.

여전히 이 아저씨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구나."

또다시 속마음을 읽혀 버렸다.

내 얼굴이 그렇게까지 티가 나나. 이건 문제인데.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불쾌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제논은 쓰게 웃었다.

"사실은 나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내가 원래 그렇다. 아비라고 하나 있는 게 표현이 영 서툴지. 갑자기 마음의 준비도 못 한 채 전쟁터에 끌려왔으니,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한다."

나는 진짜로.

이 남자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

그렇기에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항상 그랬듯이 아무튼 아들로서 적절하고 그럴듯한 대답을 해서 이 순간을 모면해보려 했지만, 그 어떤 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제논은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너도 올해로 스무 살. 영지를 물려받을 것도 아니니, 언제든지 자신의 길을 찾아 독립할 수 있을 때지. 물론 영지에 남아서 마누엘을 도와주는 것도 좋겠지만, 이 아비는 네가 어떤 길을 가든 응원할 것이다."

나 역시 나만의 길을 갔으니까.

그렇게 말한 그는 어느새 내가 아니라 저 멀리 전방을 보고 있었다.

푸른 하늘 아래 그 끝을 모르고 뻗어 나가는 초원에는 아직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차피 우리 군대가 향하고 있는 그 전방에 있을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너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고 싶지만, 쉽지가 않구나. 너도 알다시피 변방의 삶은 언제나 고되고, 나 역시 몰락 귀족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지방의 소영주일 뿐이니까. 금전적인 지원을 조금 해줄 수는 있겠지만, 넉넉하지는 않을 게다."

나는 몰랐다.

제논이 나에 대해서, 티베리오스라는 아들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얘기했어야 알지.'

솔직히 내 잘못은 아니다.

진짜로.

그렇기에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니카로스 남작령을 무작정 떠나기 전에 내가 조금 더 먼저 주도해서 이야기를 해봐도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고야 말았다.

한 사람의 아버지이자 나의 <마이트 앤 로열> 마지막 플레이를 함께한 고정 네임드 캐릭터, 제논 발란티스와 대화를 나눌 기회는 지금이 아니면 더 없었을 테니까.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에도 제논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네 길을 찾아 니카로스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이 제논 발란티스가 걸어온 길을 말이다.

어느새 그는 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몸뚱이, 네 머리, 네 심장. 그것만은 제대로 너에게 물려줬어. 너에게는 나의 피가 흐른다. 네 아비니까 알 수 있지. 그것만 깨닫고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뭘 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거다. 내 장담하마, 티베리오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심장 부근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이번 싸움을 보면 너도 그걸 느낄 수 있을 게다. 그걸 알려주기 위해 너를 데려왔다."

"...."

무슨 말인지, 이해는 했다.

터무니없는 논리였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이해할 수는 있었다.

'...전쟁 체험학습 맞았네.'

이런 게 이 세계의 상식이었나.

분명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고, 솔직히 내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만.'

어쩐지 미안하다는 생각까지 잠시 들어버렸다.

이 아저씨가 평소답지 않게 아들에게 이토록 진심이 담긴 이야기를 건넸지만, 나는 이 사람의 진짜 아들이 아니었으니까.

진정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할 아들의 영혼은 이 자리에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진짜 아들이 아닌 나라도 느껴지는 바는 분명히 있었다.

나는 이 남자에 대해서 여태껏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다른 원작의 플레이어들도 만약 지금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모두 비슷하게 생각했겠지.

그야 이미 알고 있던 캐릭터였으니까.

무작위 생성 캐릭터가 대부분이던 제국의 남작 중 보기 드문 고정 네임드 캐릭터였으니까.

이미 지옥의 도전 과제로 유명한 땅의 영주였으니까.

무엇보다 게임을 통해 여러 번 접하고, 실제로 플레이해 보기까지 했으니까.

니카로스의 남작.

<마이트 앤 로열>의 고정 네임드 캐릭터.

변방의 캐릭터치고는 준수한 성능의 보유자.

무뚝뚝한 군인.

자수성가한 귀족.

삭막한 아버지.

그렇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모든 것은 단지 단편적인 면모에 불과했다.

단순한 군인이 아닌.

차가운 아버지가 아닌.

그것보다 조금 더 뜨겁고 거칠고 원대한....

"자, 이제 슬슬 놈들이 보이는구나."

이어지는 제논의 말에, 나는 생각을 멈추었다.

정말로 저 멀리서 니카로스에 쳐들어온 시하브 토후국의 군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하브 토후국.

니카로스 남작령과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월광교 소왕국.

제논이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다퉈온 숙적.

그들이 이 땅을 약탈하기 위해 또다시 찾아왔다.

이제 정말로 전투와 전쟁이 다가왔다.

우리 군 모두가 그 사실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제논 발란티스는 그 광경을 보면서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정말로 즐겁다는 얼굴로.

더없이 사납게.

그리고 이어진 전투에서 제논은 전사(戰死)했다.

나는 어느새 검을 들고 있었다.

#003. 숙련자의 행운(Master's Luck) (3)

꿈을 꿨다.

눈앞에 제논 발란티스가 보였다.

'우리는 마침내 적을 발견했지.'

제논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직접 선봉에 섰다.

가장 큰 위험을 부담하는 영주를 보고 가신들은 만류했지만, 아무도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나는 봤다.

선봉에서 군대를 이끄는 그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내가 배치된 곳은 예비대였다.

도망치게 될 패잔병을 추격하는 역할.

명목상 예비대의 최고 지휘관은 나였지만, 실제로 부대를 지휘하는 것은 휘하에 배속된 다른 기사들이었다.

사실상 직접적인 교전은 피하게 해주기 위한 제논의 배려였다.

준비는 끝났다.

남은 것은 충돌뿐.

비록 예비대가 분리되었지만, 여전히 전력은 아군이 우세했다. 적은 약탈을 목적으로 침공했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토벌을 위해 출병했으니까.

아군은 자신만만하게 전진했고.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다.

"나아가라, 니카로스의 용사들이여! 내가 그대들과 함께할 것이다! 감히 우리의 영토를 더럽힌, 저 무도한 적들을 한 명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 자비를 보이지 마라!"

확실히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제논은 노련하고 용감한 군인이었다.

수적 우위라는 아군의 이점을 철저히 활용하여 적을 압박했다.

가장 고귀한 귀족임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직접 병사들 사이에서 용맹하게 검을 휘둘렀다.

자연스럽게 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올랐고, 적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누가 봐도 승리는 우리의 것이었다.

'...분명히 그러리라 생각했지.'

아군 모두가.

그러나 망각했다.

아무리 뛰어난 군인이라도, 전장 속에서는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점을 말이다.

나도, 병사들도.

심지어 제논 본인조차.

이변은 한순간이었다.

파죽지세로 돌진해 시하브 토후국의 군대를 붕괴시키던 제논에게 한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그리고 그 한 발이, 모든 것을 끝냈다.

제논은 낙마해 땅으로 떨어졌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치솟는 사기를 뽐내던 아군 역시 그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영주의 죽음을 목격한 그들의 얼굴에 절망과 공포라는 감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머나먼 곳에 있던 패배가 다가온다.

'그리고.'

그 모든 전황이 내 머릿속에 새겨졌다.

그 어떤 장면도 놓치지 않고 선명하게.

당연히 살면서 지휘 같은 걸 해본 적은 없다.

그럴듯한 전략 게임을 해본 적은 많지만, 게임과 현실은 확연히 다르다.

그걸 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마치 번개가 치듯.

나는 검을 들었다.

"지금 바로 예비대를 이끌고 돌격합니다.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너, 너무 위험합니다! 도련님, 지금은 저희가...!"

갑작스러운 선언에 나를 보좌하던, 제논의 죽음을 보고 머리가 마비되었던 기사들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경악하며 나를 뜯어말렸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아니면 안 됩니다."

그래,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죽을지도 모른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이고.

스스로 놀라는 중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방법밖에 없다.

영주가 허무하게 죽어버린 지금, 그 빈 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우기 위해서는 아들인 내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멸이다.

나도 여기서 죽는다.

'...그래.'

절대로 이렇게 죽을 수는 없지.

머리가 사고를 끝마치기도 전에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전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몸을 가득 채우던 긴장과 두려움 따위는 지금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전군, 나를 따르라!"

나는 함성과 함께 질주했다.

"이런...! 전군, 도련님을 따르라!"

"작은 도련님께서 혼자 가시게 하지 마라!"

경악하던 기사들도 절대로 나를 혼자 보내지 않겠다는 듯 말에 박차를 가했다.

병사들이 우리의 뒤를 따랐다.

"...!"

질주와 함께, 드넓은 초원의 바람이 느껴졌다.

동부의 바람은 거세며 메마르고, 또 혹독했다.

하지만 고작 바람 따위는 나를 막지 못했다.

그 순간 내 눈은 오직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이 점점 가까워진다.

측면에서 덮쳐 오는 돌격을 뒤늦게 깨달은 적 병사들이 당황하는 얼굴이 보인다.

검을 더욱 꽉 쥔다.

그대로 충돌한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다.

***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니 며칠 전에도 봤던 천장이 나를 반겼다.

내 방이다.

영지를 떠나기 위해 짐을 싸던 바로 그 방.

그래, 나는 여전히 니카로스에 있다.

일어나자마자 나는 작게 한숨부터 내뱉었다.

밤새 꾼 꿈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야, 선명할 수밖에.'

그건 단순한 꿈이 아니니까.

내가 꾼 꿈은 며칠 전에 실제로 일어났던 현실이다.

제논은 죽었다.

니카로스의 영주이자, 빙의한 이 몸의 아버지는.

토벌을 위해 작정하고 준비한 병력, 경험이 많고 뛰어난 지휘관, 손수 선봉에 서 용맹하게 싸우는 영주....

분명 아군은 강했다. 승산이 차고 넘치도록 컸다.

제논이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삶을 보여준다며 나를 데리고 갈 정도로.

그러나 이기지 못했다.

한순간의 실수이자 사고로 군의 기둥이던 영주는 죽었고 병사는 무너졌다.

패배는 아니었다.

침략군을 몰아낸다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분명히 패배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승리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영주를 잃고 패잔병과 다르지 않은 꼴이 되어 성으로 돌아왔는데 이걸 어떻게 승리라고 부를까.

'...아니, 무슨 제논이 벌써 이렇게 죽냐.'

니카로스 남작령이 지옥 같은 조건과 환경으로 유명한 곳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발버둥을 시도할 카드 정도는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영주 제논이라는 고정 네임드 캐릭터의 존재였고.

근데 고작 시작 석 달 만에 허무하게 눈먼 화살을 맞고 전사하다니. 아무리 어떤 상황이든 펼쳐질 수 있는 <마이트 앤 로열>이라지만 이건 진짜 너무한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나는 속으로 잔뜩 투덜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지금 내가 성에서 갈 곳은 하나밖에 없었다.

제논의 장례식장.

지금 영지는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였다.

사실 발란티스 가문은 실제로 초상집이 맞긴 했지만, 단순히 우리 가족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니카로스 남작령의 모든 가신이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통곡하고 있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제논은 직접 니카로스라는 땅을 개척한 초대 영주.

그리고 대부분이 가신들이 초기부터 그와 함께한 동지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영주가 가벼운 마음으로 토벌에 나섰다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으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겠지.

그래서인지 장례식장에 다 도착하기도 전부터 벌써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는 목소리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아버지께서 전사하시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아버지! 아버지!"

마누엘 발란티스.

나의 형이자 제논의 장남, 니카로스의 차기 영주이자 장례식의 상주.

그리고 제논과 키로스 경을 이은, 이 영지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고정 네임드 캐릭터.

마누엘은 제논의 시신이 담긴 관을 끌어안고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그리고 나는 한 걸음 떨어져서, 그저 지켜보았다.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석 달이라는 시간으로는 진정으로 그들 사이에 끼는 것도, 완전히 외부인의 심정이 되는 것도, 어느 것 하나도 쉽지 않았으니까.

나는 모든 광경을 두 눈에 담으며 천천히 지난 전투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지난 전투.

제논이 죽은 전투.

그리고 내가 지휘권을 잡아 패배를 막은 전투.

건방진 소리 같지만, 객관적인 사실이기도 했다.

솔직히 엄청나게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다.

화려한 무용을 뽐낸 것도 아니고, 대단한 작전을 짠 것도 아니다.

'그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지.'

영주인 제논이 가장 앞에서, 가장 용맹하게 싸웠기에 아군은 적을 압도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런 상황에서 그가 죽어버렸으니 반동도 커질 수밖에.

따라서 나는 그 빈자리를 최대한 메꿨을 뿐이다.

제논의 아들로서, 똑같이 용맹하게, 전선에 서서.

애당초 우리의 열세는 기세의 문제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절대적인 전력 자체는 아군이 우세하였던 만큼, 병사들의 붕괴를 막는 것만으로 우리는 적을 몰아낼 수 있었다.

'뭐, 당연히 추격까지는 무리였지만.'

어떻게든 위기를 극복한 다음에는 우리 병력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거든.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순간 내가 어떻게 판단을 했는지.

내가 어떻게 해낼 수 있는지.

그저 뭘 해야 할지 알게 되어서, 했을 뿐이다.

지금 남아 있는 건 그런 흐릿한 감각뿐이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감도 안 잡힌다.

'...답은 역시 타고난 나의 천재성뿐인가. 두렵다, 이 힘이.'

그런고로.

내가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건 결국 이런 어처구니없는 헛소리가 전부.

어쨌거나 그 전투 때문에 하루빨리 영지를 떠나기로 한 내 계획 역시 기약도 없이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태산처럼 쌓여 가는 고민이 전부.

내가 아직도 여기에 있는 게 맞는지.

떠난다면 언제 떠나야 할지.

그런데 그 와중에 이해 못 할 일까지 일어났네?

'빙의한 이래로 이렇게 격동적인 하루를 보내는 건 정말 처음인걸.'

전혀 유쾌하지 못하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던 중, 제논의 관을 안고 있던 마누엘이 어느새 나의 방문을 알아차리고 다가왔다.

"...티베리오스."

"형님."

붉은 눈시울.

엉망진창이 된 그의 얼굴만 봐도 어떤 심정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삭막하기만 한 가족인 줄 알았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내가."

마누엘은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 곧장 의지를 피력했다.

"내가 직접 놈들에게 복수하겠다."

그건 일종의 성전 선포였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한.

그리고 그 말에 담긴 감정의 무게를 알았지만, 나는 이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형님께서 직접 출진하시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이건 아들의 도리이자 영주의 도리다."

그러나 마누엘은 그저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건...."

나는 더 말리기가 어려웠다.

아버지를 잃은 당사자가 그렇게까지 말했으니까.

그리고 그의 심정에 완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나의 만류가 공허할 뿐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스스로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괜찮다. 너와 함께했던 기사들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너는 이미 너의 역할을 충분히 했어."

그러나 마누엘은 나의 침묵을 다르게 이해했는지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피해를 최소화한 것도, 아버지의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네가 용맹하게 나선 덕분이다. 고맙다, 티베리오스."

뭐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뻔한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때가 온 것뿐이고."

"...."

이제는 그 뻔한 소리도 못 할 정도로 말문이 막혔다.

"내가 없는 동안 영지를 부탁하마."

따라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누엘은 장례식이 끝나는 대로 곧바로 병력을 소집하고 출병을 준비했고.

복수 원정의 시작이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나도 전력 차이는 알고 있어. 시하브 토후국이 강대국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니카로스보다는 큰 국가다. 무리한 짓은 안 해."

다행히 마누엘이 복수만으로 눈이 먼 것은 아니었다.

"국경 지대를 한바탕 휩쓸고 무력시위를 하는 것이 목표야.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슬슬 일대에 퍼졌을 거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많은 침공만 발생할 테지."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니카로스라는 작은 영지의 이름값 거의 절반은 검 한 자루로 자수성가한 제논의 명성에서 나왔으니까.

그런 기둥 중 하나가 무너진 셈이니 우리를 더 얕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니 억지로라도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마누엘의 시도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해서 불안함이 완전히 가시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저 삼켰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 따위는 없었으니까.

"승전보와 함께 돌아오마."

마침내 마누엘이 병사들과 함께 떠났고, 이제 나에게는 영주 대리라는 직함이 남았다.

당연히 나의 독립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하여간, 이럴 때만 나도 제논 아들이지.'

그저 영주의 피붙이라는 이유로 평소에는 별 존재감도 없던 나의 중요성이 너무 커져 버렸다.

무작정 야반도주하기에는 날 보는 시선도 너무 많고, 내가 공식적으로 독립하겠다는 의사를 조금이라도 밝히면 온 가신이 모여서 무진장 뜯어말릴 분위기.

징글징글하지만, 그만큼 니카로스가 비상사태긴 했다.

마누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라도 돕지 않으면 분명히 진짜 파국이겠지.

이성은 이야기한다.

어차피 망할 영지라고. 지금의 위기를 버텨봤자 미래 따위는 없다고. 이런 무의미한 도움 따위를 줄 바에 하루빨리 수도로 떠나는 게 조금이라도 더 이득이 된다고. 누가 붙잡든 말든 어떻게든 우격다짐으로 도망치라고.

물론 나도 저게 다 맞는 말이라는 건 안다.

그렇지만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았다.

잠시나마.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다.

'석 달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기사까지 붙여서 훈련도 시켜준 값을 치르는 거라고.'

어차피 망할 영지라고는 해도, 부친의 복수조차 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붕괴하는 것과 제국의 적이자 강대한 정복자에게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다 스러지는 것은 다르다고.

21세기 문명사회를 살다 온 교양인으로서.

그 정도 도리는 있다, 나도.

그리고 마누엘도 잘할 거다.

난데없이 이 세계에 끌려온 나와 달리 그는 여기 태생이고 제논의 진짜 아들이니까. 생긴 것만 봐도 딱 강골이고 후계 교육도 열심히 받았을 거다.

게다가 썩어도 준치라고, 아직 유망주에 가깝긴 하지만, 명색에 고정 네임드 캐릭터이기도 하고. 게임에서도 잠재력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직 본격적인 위기가 발흥한 건 아니니까 지금 사태 정도는 충분히 수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금방 수도로 떠날 수 있을 거고.

그래서 우선 열심히 맡은 일에 집중했다.

솔직히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거든.

명망 높던 영주가 갑자기 죽어버렸다.

당연히 영지는 엄청난 혼란 상태.

할 일은 정말 널리고 널려 있었다.

그렇게 마누엘이 출병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날.

"도련님! 도련님! 큰일입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함께 영지를 수습하는 데 여념이던 집사장이 어디선가 황급히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

'...어째 달려오는 집사장의 표정이 영 불길한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집사장님?"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일에 치여 요 며칠 잠잠하던 불안감이 다시 최대치로 올랐다.

머릿속에 마치 사이렌이 울리는 듯했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진 건가?

의도치 않은 큰 전투라도 발발했나?

피해가 큰가?

'내가 생각하는 그런 나쁜 뉴스가 아니겠지...?'

그러나 언제나 이 세상은 냉혹했다.

내 생각보다 더.

"마누엘 영주님께서...! 전사하셨다고 합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진짜로.

정말 내 상상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어떻게 된 일이지?

단순히 견제가 목적 아니었나?

어떻게 무력시위 중 사망을 할 수가 있지?

대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나의 독립은 언제까지 연기되는 거지?

'그리고, 이러면 이제 이 영지는 누가...?'

순간 거기서 생각이 멈췄다.

'...어?'

어어?

어느새 이 소식을 들은 영지의 모든 가신이 나만을 보고 있었다.

아직 마누엘의 남작 지위 승계에 대한 문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

나는 그렇게 니카로스의 영주가 되었다.

#004. 숙련자의 행운(Master's Luck) (4)

니카로스 남작령의 영주가 되었다.

아버지고 형이고 죄다 죽어 버려서, 물려받을 사람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승계식을... 미룬다고 하셨습니까?"

"네, 아무래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영주가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공표한다면, 혼란만 커질 것입니다. 안 그래도 연이은 외적의 침략으로 민심이 요동치는 상황이니까요."

정정한다.

정확히는 '임시 영주'다.

공식적인 승계와 발표는 아직 진행하지 않았거든.

"...알겠습니다. 영주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영지의 재정과 운영을 총괄하는 집사장은 어차피 후계자가 나 단 하나뿐인 상황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반대하지는 않았다.

지금 영지 사정이 좋지 않은 건 분명했으니까.

나는 속으로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일단은 이걸로 됐다.'

딱히 실질적인 의미는 없는 허례허식에 불과하지만, 가능하다면 공식적인 승계식만큼은 미루고 싶다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야, 정말로 공식적인 발표까지 하게 되면 절대로 도망치지 못할 것 같거든.

'멸망이 확정된 이 망할 영지에서 말이야.'

진짜 어떻게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는지.

게임 속에서도 가지각색의 이유로 멸망하는 니카로스 남작령이었지만, 이렇게 시작부터 연이어 영주들이 죽어 나가서 위기에 처하는 모습은 또 신선하다.

니카로스의 네임드 캐릭터 세 명.

제논 발란티스, 마누엘 발란티스, 키로스 경.

그중에서 벌써 66.6%가 증발해 버렸다.

그나마 남작령치고는 인재가 빵빵한 게 니카로스의 장점 중 하나였는데 그마저도 사라졌다.

'이게 게임이냐.'

사실 게임이 아니긴 해.

이제는 말이야.

지금 영지의 모든 가신은 나만을 주시하고 있다.

딱히 나라는 개인에게 대단한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들이 그 정도로 양심이 없진 않다.

'그저 저 양반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을 뿐이지.'

지금 니카로스가 바람 앞의 등불 신세라는 것을.

그리고 까딱 실수 한 번만 하면 그 불꽃이 아예 꺼져버린다는 것을.

그러니까 저들의 관심은 일종의 걱정에 가까웠다.

이 후계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차남 출신 영주가 어리석은 결단을 내리지는 않을까.

니카로스 남작령의 멸망에 쐐기를 박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

조금 전 나를 보던 집사장의 시선이 뜨뜻미지근한 것도 다 이런 맥락이다.

결국, 나의 판단력에 믿음이 안 간다 이거지.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어차피 나야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석 달밖에 안 된 빙의자다.

만약 지난 몇 년 동안 티베리오스라는 인간에게 후계 교육을 착실히 해두었어도, 어차피 내가 빙의한 시점에서는 기억이 전부 날아가 무의미한 일이 되었을 거다.

그러니까 괜히 교육 못 한 걸 후회할 필요도 없지.

하하.

"...."

유감스럽게도 긍정적인 사고 역시 별다른 도움은 되지 않아서, 나는 다시 아득바득 살 궁리나 하기로 했다.

여태껏 몇 번이고 했지만.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한 고민.

'진짜 도망쳐야 하나?'

동방의 정복자가 뜨기 전에, 지금이라도 영지고 귀족 신분이고 나발이고 죄다 버리고 수도로 튀어야 하나?

차라리 나에게 영주의 권한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생각만 하던 권한이 정말로 굴러들어왔다.

'...이게 이렇게 들어올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들어오긴 왔네.'

하지만 상황이 너무 나쁘다.

대체 석 달 만에 얼마나 조져 먹은 건지.

당장 문제가 되는 건 역시 제논의 죽음이다.

이 세계에 빙의한 뒤로 캐릭터의 능력치가 보이지는 않지만, 어차피 중요한 인물에 관한 데이터는 거의 다 내 머릿속에 있다. 그냥 엄청 하다 보니 알아서 다 외워졌다.

그리고 제논은 아직 덜 여문 유망주에 가까운 마누엘과는 달리, 분명히 이 변방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뛰어난 통솔 능력치를 갖춘 완성형 캐릭터였다.

영주임에도 위험을 감수하고 최전선에서 지휘관으로 굴리는 게 정석일 정도로 말이야.

당연히 나의 마지막 니카로스 도전 과제 공략 때도 초반 핵심으로 운용하던 캐릭터 중 하나였고.

그런데 이제 그 제논 발란티스가 없다.

'...대체 이 빈자리를 어떻게 메꿔야 할까.'

가뜩이나 인적 자원이 처참한 이 변방에서 말이야.

통솔 능력치 괜찮고 이 근방에서 등용할 수 있는 재야의 고정 네임드 캐릭터가 이 시기에 있던가.

'상황이 바뀌긴 했으니까, 어떻게 잘 수습하면 니카로스에 남는 것이 최선책이 될 수도 있긴 한데.'

어차피 수도로 도망간다고 뭐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저 시간만 조금 벌 뿐.

제국이 홀로 위기를 극복한다는 20%의 확률에 모든 것을 걸고 골방에 박혀 기도만 할 게 아니라면, 결국 내가 플레이어의 입장으로 대책을 세우긴 해야 한다.

나 말고 대처할 다른 사람이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도 진짜 막연한 희망일 뿐이지.

게다가 도망치는 대가가 결코 값싼 것도 아니다.

아무리 원작 지식이 있다지만 모든 기반을 버리고 낯선 땅에서 혈혈단신으로 자수성가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닐 테니까.

'그러니까 달리 생각하면 미약하지만 그래도 기틀이 잡힌 니카로스에 남는 게 최선일 수도 있다는 거지.'

물론, 어디까지나 멸망하지 않고 버틸 수만 있다면.

'괜히 위험을 감수하고 과욕을 부리다가 실패하면 빼도 박도 못하고 죽는 거거든.'

미친 동방의 정복자가 귀족이자 영주인 나를 살려둘 리가 없으니.

'...과연 이 세상에서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당연히 정답은 모른다.

내가 난데없이 <마이트 앤 로열>의 세계에 떨어진 이유조차 아직 모르고 있는데 그걸 알 리가.

혹시 현실로 다시 돌아가지는 않을까.

게임 속 사후 세계로 갈 수도 있을까.

아니면 죽어서 무(無)로 돌아갈까.

진정한 답은, 정말로 죽어봐야 알겠지.

일단 목숨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그럼 그 목숨을 과연 니카로스에 거는 게 맞을까.

섣불리 확신할 수 있는 게 없는 이상.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디.

'임시 영주'라는 말장난도 결국 그런 맥락.

'...그러니까 조금만.'

정말로 조금만 더 고민해보자.

아예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진작에 튀었겠지만, 우습게도 걸어볼 만한 여지가 조금은 있으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나는 잠시 허리춤에 찬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익숙해진 검.

이름 따위는 없다.

그저 평범하게 질이 괜찮은, 제국 기사가 흔히 쓰는 검일 뿐이다.

동시에 하지만 이 검은 내가 첫 전투에 나선 그날 사용했던 무기기도 했다.

나는 직접 이 검을 뽑아 들어 적을 베었고, 병사들을 호령했다. 그 순간 이후로 언제나 이 검을 차고 다녔다.

- 네 몸뚱이, 네 머리, 네 심장. 그것만은 제대로 너에게 물려줬어. 너에게는 나의 피가 흐른다.

그날 전투가 벌어지기 전, 제논이 해주었던 이야기.

나처럼 이성적이고 현명한 교양인이 절대로 이런 막연한 소리에 흔들릴 리는 없지만.

어쩐지 그냥.

적을 앞두고 사납게 미소 짓던 제논의 모습이 여전히 잊히지 않았다.

***

영주, 임시 영주가 된 뒤로 정말 눈코 뜰 사이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현재 가장 시급한 일은 영지를 수습하는 일입니다."

대책 회의와 논의로 가득 찬 시간.

지금 니카로스 남작령은 분명히 비상사태였다.

제논과 마누엘.

두 영주의 죽음으로 인한 사기 저하를 제외하고도, 당장 두 번의 패전으로 입은 영지의 경제적 손해 자체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특히나 손실된 병력 대부분이 징집병인 게 컸다.

요컨대 그냥 밭에서 일하던 주민들에게 대충 창만 쥐여주고 병사로 쓰다 피해를 봤으니, 결국 그 손실이 곧 영지 경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타격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작 남작령 따위가 대대적인 상비병을 꾸릴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입맛이 쓰네.'

유독 최고 지휘관들만 콕콕 죽어 나가서 사상자 자체가 엄청 많은 건 아니었지만, 니카로스 남작령처럼 약소한 영지에게는 이조차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치.

그러면 일단은 역시 그 수습부터 해야겠지.

"우선 키로스 경... 기사단장님께서는 먼저 부대를 재정비한 뒤, 다시금 철저히 영지의 방비를 강화하고 치안을 점검해 주시길 바랍니다. 언제 또 외적의 침략이 닥칠지 모르니 만반의 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영주님."

키로스 경.

나의 개인 검술 스승이었던 동시에, 그에 앞서 니카로스 남작령의 모든 기사 중 으뜸인 기사단장. 초대 영주 제논과 함께 처음부터 이 땅을 개척한, 영지의 최고 원로 중 한 명.

"그리고 집사장님께서는 이번 약탈과 전투로 인한 피해 규모를 상세히 산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그게 가장 급선무일 듯하군요."

"...알겠습니다."

제노비오스 크세로스.

니카로스 남작령의 집사장이자, 제논 사후 나와 함께 영지의 안정화를 도맡던 영지의 기둥.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이 땅의 기틀을 세운 최고 원로 중 한 명.

병권과 모든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기사단장.

재무와 관리, 개발 등 내치(內治)를 총괄하는 집사장.

그렇게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영지의 가장 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신에게 지시를 내리자, 머지않아 다른 가신들 역시 하나둘 위기 극복을 위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믿음직한 동맹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아직 영주님께서 혼인하시지 않은 만큼...."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굳이 우리 니카로스와 혼인 동맹을 맺을 영지가 어디 있겠소? 그보다는 에우스페나 공작님에게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동부의 수호자이자 영주님의 직속 주군인 만큼 그들에게도 이 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에우스페나의 상황도 썩... 아니면 황실에 탄원서를 보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변방의 위기가 곧 제국의 위기라는 점을 강조한다면...."

"...글쎄요. 현 황실이 과연 변방에 관심을 가질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걱정이 가득하긴 하지만, 적어도 가신들이 자포자기한 기색은 아니었다.

물론 가신들 사이에서도 여러모로 갑론을박이 나오는 만큼, 그 대책이 하나같이 쉽지 않다는 건 나 역시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당장 열정적으로 의견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그 열정이 내가 아니라 죽은 제논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건, 천천히 해결해야 숙제겠지만.'

지금 같은 시국에서는 이조차도 배부른 투정이겠지.

어쨌거나 일단은 이런 식으로 우선은 가신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지금은 게임과는 다른 눈높이에 내가 먼저 적응해야 할 시간이었으니까.

'쉽지가 않아, 정말.'

***

그렇게 어떻게든 오늘의 회의와 업무도 끝마치고.

"...."

녹초가 되어 침실로 돌아가던 중, 나는 잠시 발걸음을 돌려 홀로 성벽 위로 올랐다.

그냥 조용히 혼자 바람을 조금 쐬고 싶었다.

마침내 성벽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달이 한가운데 떠 있었다.

'달 보면서 퇴근하는 거, 썩 좋아하지는 않는데.'

일만 하다가 하루가 끝나면 너무 화가 나버리잖아.

가뜩이나 이 세계는 노동 환경도 열악한데.

그래도 누가 시골 아니랄까 봐, 하늘에 별 무리가 선명하고 가득한 것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 아래에 있으니, 마치 별들이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기에 더욱더.

'...아, 담배가 그립네.'

딱히 몸이 원하고 있는 건 아닌데, 정신이 원하는 듯한 이 느낌.

아마 이 세상에도 분명히 담뱃잎이 없진 않았을 텐데, 한 번 찾아봐야 하나?

담뱃잎은 제국 서부에서 주로 유통하니까, 과연 이 외진 동쪽 변방까지 수입이 될지 그게 관건이긴 한데.

'그런데 기껏 이렇게 젊고 탱탱한 육체를 다시 갖게 되었는데 또 폐를 조져버리는 것도 조금....'

그래, 솔직히 인정하겠다.

이 짓, 장난 아니게 부담된다.

이미 수백 번 플레이한 게임이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내렸을 명령조차도 쉽지가 않다. 여기는 게임이 아니니까. 사소한 지시를 하나 하면서도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자꾸만 의심이 든다.

그러니까.

'확신이.'

만약에 조금만 더 확신이 있다면.

그랬다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속마음을 토해내던 바로 그 순간.

"여기 계셨군요, 영주님."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뒤돌아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익숙한 목소리다.

"키로스 경."

하지만 표정까지 익숙하지는 못했다.

그곳에는 딱딱히 굳은 얼굴의 키로스 경이 서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활기차게 웃고 다니던 그조차도, 지금 같은 시국에는 침통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잠시 그의 얼굴을 살핀 뒤, 오히려 웃었다.

"여기는 저만의 비밀 공간인데. 이렇게 들킬 줄이야.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군요."

두려움 따위는 조금도 비치지 않는 나의 뻔뻔한 말에 키로스 경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함께 웃기 시작했다.

"허허, 죄송합니다. 감히 뒤를 밟은 건 아닙니다. 그저... 영주님이 여기 계실 것만 같았습니다."

그냥 알았다고?

어떻게? 아무한테도 알린 적은 없는데?

"영주님께서는 어릴 적부터 생각이 많아지시면 이곳으로 올라오셨죠. 제법 오래된 이야기지만, 다행히 아직 저의 기억력이 그리 감퇴하지는 않았나 봅니다."

분명 나를 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보다 먼 곳을 바라보며 키로스 경은 그렇게 대답했다.

"허...."

어릴 적부터 이곳까지 올라왔다, 라.

당연히 그런 기억은 없다.

그냥 예전에 성을 둘러보다가 인적이 드문 곳 같아서 기억해 둔 것뿐이고, 근래 머리 아픈 일이 제법 있다 보니 바람이나 쐬러 종종 머물렀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빙의하기 전 원래 티베리오스도 자주 올라왔었다니.

우연일 뿐이겠지만, 어째 기분이 상당히 묘했다.

그렇게 잠시 추억 속에 빠졌던 키로스 경은 곧 다시 눈빛을 바꾸었다.

무척이나 진지하고 무겁게.

"긴히 보고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으슥한 곳에서 말씀하시는 걸 보니, 회의 때 전달하기는 어려우셨던 내용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아직 확실하지는 않은 이야기라. 그렇지만 적어도 영주님께서는 먼저 알고 계셔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나 역시 자세를 고치고 똑바로 키로스 경을 바라봤다.

이 영감님이 괜한 이야기를 할 성격은 아니니까.

"돌아가신 마누엘 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말씀해주세요."

마누엘 발란티스.

죽은 나의 형.

갑작스럽긴 하지만,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키로스 경은 내가 영주가 된 이래로 계속 마누엘의 사인(死因)을 조사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마누엘은 원정을 나갔다가 전사했다.

그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 자세한 경위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중 하나였다.

내가 직접 들었으니 확실히 알고 있다.

마누엘의 원정은 분명 무력시위가 목적이었다.

니카로스 남작령이 건재하단 걸 일대에 알리는 것.

시하브 토후국을 견제하는 것.

본격적인 교전도 각오하긴 했지만, 절대로 그게 최우선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마누엘은 전사했다.

심지어 자세한 경위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제논과 달리, 마누엘은 니카로스 바깥에서 죽었을뿐더러 내가 그 순간을 직접 목격하지도 못했으니까.

같은 참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필요가 있었고, 그 조사의 책임자로 임명된 게 바로 기사단장 키로스 경이었다.

키로스 경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확실한 것은 야습에 당했다는 것입니다."

야습.

밤에 갑자기 덮쳐 공격함.

'확실히 야습만큼 허를 찌를 수 있는 계책도 없긴 해.'

하지만 그만큼 야습은 어려운 일이다.

칠흑 같은 밤에는 공격하는 쪽 역시 피아식별이 어렵고, 수비하는 쪽 역시 언제나 경계하고 있으니까.

마누엘 역시 능력치가 준수한 고정 네임드 캐릭터다.

'당연히 야습에 대한 대비 정도는 했을 텐데....'

아무래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직 키로스 경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세부적인 경위를 조사하는 단계지만... 후방에서 시하브 토후국 이외의 세력에게 기습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시하브 말고 또 다른 적이 있었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영주님. 정확히 어떤 세력인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생존자의 증언과 현장의 잔해를 분석한 결과, 제대로 무장하지 못한 비정규병의 소행으로 판단됩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회의 때 미리 말하지 않은 게 이해가 된다.

오히려 확실하지 않은 만큼 두려움을 자극하는 온갖 억측들이 튀어나올 수 있을 소식이니까.

하지만 객관적으로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변경 지대라는 단어는 사실상 무법 지대와 동의어로 사용되니까.

도적, 사교도, 흑마법사, 유랑민 등....

이 일대에는 십자교와 월광교, 제국과 소왕국들이라는 이분법만으로는 구분하지 못하는, 자잘한 군소 세력들이 헤아릴 수 없이 존재하고 있다.

거기에 흉악한 몬스터들은 또 덤이지.

그러니까 또 다른 세력이 개입한다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반대로 용의자가 너무 많아서 문제라고 할까.'

일반적으로는 전쟁 중이던 시하브 토후국의 사주일 가능성이 제일 크지만, 또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는 게 이 혼란스러운 변방의 실태. 명백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어쨌거나 외부 세력이 존재했다면 마누엘의 전사도 이해할 수 있다.

침착하려고 노력했어도 결국 아버지의 죽음에 눈이 돌아간 상황이었으니, 예상치 못한 후방의 공격에 더 취약했었을 수밖에. 아직 젊고 경험이 부족하기도 하고.

아, 정말.

쉽지가 않네.

'새로운 세력이 개입했다면 계산을 다시 할 수밖에 없잖아.'

가뜩이나 머리 아픈데 이러면 고민이 더 필요하겠어.

"...."

그렇지만 키로스 경은 이런 나의 침묵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다시 한번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영주님."

검을 배우는 제자로서 석 달이나 함께했음에도,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런 목소리.

온갖 감정이 섞여 휘몰아치는, 충심과 수치심이 함께하는 그런 목소리.

그 모든 걸 선명하게 느꼈기에.

"괜찮습니다, 키로스 경."

나는 아직 키로스 경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음에도 먼저 그렇게 대답했다.

옅은 웃음과 함께 나이 든 기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야, 굳이 직접 안 들어도 말할 내용이 뻔한걸.'

분명히 걱정하고, 위로하는 말을 해주려고 한 거겠지.

그냥 딱 그럴 분위기였다.

처음 여기 성벽 위로 올라왔을 때부터 나를 보는 키로스 경의 두 눈에서 죄책감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모를 수가 없다.

내가 순식간에 부모, 형제, 가족을 모두 잃어서.

사실상 난데없이 영주 자리를 떠맡긴 셈이 되어서.

영주에게 필요한 그 무엇도 알려주지 않았으면서.

그런데도 이제는 모든 가신이 내 입만을 바라봐서.

내가 그 사실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여서.

나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걸 알면서도 영지를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어서.

그 사실이 충성스러운 기사로서 부끄러워서.

그래서 사과하고자 했던 것일까?

'저 친절한 영감님이라면 그래도 이상하지가 않지.'

하지만 말이야.

나는 정말로 괜찮다.

"죄송하게도 제가 감히 키로스 경의 말씀을 지레 억측하고 말았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 이건 이 영감님이 미안할 일이 전혀 아니다.

'필요 이상으로 심각할 일도 아니고, 침통할 일도 아니지.'

나도 그냥 살기 위해 제일 나은 방법을 찾고 있을 뿐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일일 뿐이다.

'키로스 경을 비롯한 가신들이 나를 영주로 올려서, 어떻게든 니카로스 남작령의 존속할 수 있게 노력하는 것과 하등 다르지 않아.'

그저 순수한 생존 논리.

애초에 강제로 떠맡겨졌다고 표현할 일도 아니거든.

만약 정말로 일말의 희망도 없었다면, 솔직히 남들이 말리든 말든 내가 가장 먼저 도망갔을 건데 뭘.

그러니까.

"당장 각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일단은 그거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되물었고.

"...부족한 몸이지만, 영주님과 니카로스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키로스 경은 그저 그렇게 대답했다.

누가 봐도 진심으로.

진짜, 그렇게까지 하면 부담된다니까.

그래도 키로스 경의 마음은 확실히 알았다.

'...그래, 나도 조금만 더 확신이 있으면 돼.'

지금 필요한 건 그게 전부다.

그리고 알 수 있다.

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순간이 분명히 머지않았다.

열흘이 더 지났다.

적이 쳐들어왔다.

마침내.

#005. 증명의 필요성 (1)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우리 니카로스의 깃발을 든 병사가 가득하다.

모두가 나를 따르고 나의 명령을 듣는 이들.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역시 감회가 새롭다.

군대와 함께 진군하는 것은 이걸로 두 번째.

이번 전투의 총지휘관은 바로 나.

그래, 지난 출진과는 제법 많은 것이 달라졌다.

지난번 나는 말 그대로 억지로 끌려가는 처지였다.

그 어떤 각오도 하지 못했고, 그저 현실 도피에만 집중했으며, 안일한 마음으로 당장 처한 상황을 모면하는 데 급급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굉장히 잘 해냈긴 했어.'

처음 전장에 나섰음에도 전사한 총지휘관의 빈자리를 채우고 부대까지 수습했으면 말 다 했지.

하지만 적어도 시작이 엉망진창이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는 없다.

지금은 다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의도하고 작정했다.

이 지휘권은 오롯이 스스로 내린 선택의 결과물이다.

당연히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보고 드립니다! 북동쪽 국경 지대에서 미상의 부대가 나타났습니다...!"

"그 수는 대략 200명 정도입니다!"

"무장과 태세를 보아 도적 무리로 추정됩니다!"

"명백히 약탈을 목적으로 인근 마을을 향해 진군하고 있습니다!"

집무실에서 한창 서류 작업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헐레벌떡 문을 두드린 전령들이 가지고 온 다급한 보고.

"군을 소집하세요. 제가 직접 토벌하겠습니다."

나는 이 보고를 듣자마자 내가 직접 군을 이끌겠다고 선언하였고.

"절대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영주님!"

"차라리 제가 나서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곧장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는 가신들의 거센 반대와 마주하고 말았다.

뭐.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오겠지.

한 달 동안 영주가 두 명이나 지휘 중 골로 가버렸다.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나 역시 물러설 생각은 없다.

'물론 나도 다 알지.'

가신들이 합리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장에 나서는 게 더없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키로스 경에게 검을 좀 배웠다지만, 겨우 그것만 믿고 나처럼 여리여리하고 선량한 21세기 현대인이 설치기에는 전장이 그리 친절한 장소가 못 된다.

이미 체험해봤으니 모를 수가 없거든.

그렇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내가 내릴 선택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아버지께서도, 형님께서도, 단 한 번도 눈앞에 적을 두고 물러선 적이 없으셨습니다."

너무나도 슬프지만.

"그런데 우리의 땅이 연이어 무도한 자들에 의해 침탈당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제가 고작 도적 떼를 상대로 두려움에 떨며 몸을 숨긴다면 다른 이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니카로스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 병사들은 또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건 전부 담백한 필요에 따른 결단이니까 말이야.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기사 출신인 제논이 오직 검 한 자루 들고 직접 정복하고 세운 영지다.

제논은 영주가 된 뒤로도 결코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최전선에서 싸웠다.

그리고 그런 그의 무용은 곧 명성이 되어 일대에 니카로스 남작령의 존재감을 과시했고.

따라서 나의 주장이 다소 억지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곳 니카로스에서는.

이 난세에 니카로스처럼 작은 남작령이 여태껏 버틴 데에는 분명 제논이 쌓아 왔던 그런 무형의 자산 덕이 있었으니까.

따라서 그의 뒤를 이어받은 차기 영주에게는 그 명성을 최대한 유지할 암묵적인 책임이 있었다.

마치 마누엘이 그랬듯이.

"...."

덕분에 일단 명분은 그럭저럭 챙겼다.

가신들도 더는 쉽게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영주님께서는 영지의 기둥이십니다. 만에 하나라도 영주님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그 순간 우리 니카로스의 미래 또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고작 미천한 도적 떼 따위를 토벌하는 데 몸소 위험을 무릅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이 이상 반대의 이유로 댈 수 있는 것은 나의 안전 문제가 전부.

그래.

그건 물론 중요한 문제지.

애초에 무형의 자산이고 나발이고 영주가 또 죽으면 의미가 없을뿐더러, 나도 내 목숨이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거든.

고작 명분 때문에 목숨을 걸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예외야.'

명분을 넘어선 실질적 이유가 있으니까.

"우리의 니카로스가 위기인 상황에서 저의 안위 따위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뭐, 물론 이 말 자체는 전부 새빨간 거짓말.

사실상 그냥 하는 말이지.

당연히 나의 안위는 엄청 중요하다.

사실상 그게 내가 이 짓을 하는 전부인데.

하지만 적어도 그 안에 담긴 결의만큼은 진심이다.

이 망할 변방에 귀족으로 빙의한 이상 다른 방법은 없으니까.

절대로 나를 살려두지 않을 동방의 정복자를 상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쳐서 구석에서 벌벌 떨지, 아니면 이 망할 변방에 남아 직접 발버둥이라도 쳐볼지.

과연 어느 쪽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내가 더 살 확률이 높을지.

'그걸 알기 위해서는'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더 내가 직접 전장에 나가봐야 할 것 같거든.

"...."

물론 가신들이 이런 계산까지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나의 각오만큼은 쉽사리 부정할 수는 없었고.

"...영주님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마침내 직접 출진할 수 있었다.

"하하.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가 보면 내가 죽으러 가는 줄 알겠네.

지나치게 암울해진 회의실의 분위기를 보며, 나는 괜히 허세를 부리며 소리 내 웃었다.

그래, 어차피 계획은 진작에 이미 세워뒀다.

남은 것은 과연 내가 실천할 수 있을지.

그 증명뿐.

그리고 어차피 테스트를 해봐야 한다면.

'이왕이면 도적 떼를 상대로 하는 게 그나마 안전하고 만만하지 않을까?'

솔직히 이게 맞다.

***

니카로스 남작령을 습격한 대략 200명의 도적 떼.

'붉은바위 도적단'은 분명 자신만만했다.

"...두목, 너무 안쪽 깊숙이 들어온 거 아닙니까? 여긴 니카로스라고요. 이 새끼들 보통 집요하고 사나운 게 아닌 거 알지 않습니까?"

썩어도 준치라고 아무리 쇠락했다지만 제국은 제국이다. 소왕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행정 능력과 군사력을 보유한 대국.

따라서 보통 제국의 땅을 습격할 때는 소수의 인원으로 빠르게 외곽만 털고 빠지지는 게 일반적이었고, 이렇게 대규모 인원으로 깊숙하게 진입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200명이면 도적단의 거의 모든 인원이라고 봐도 무방. 당연히 일손도 많은 만큼 성공만 한다면 그만큼 많은 것을 챙길 수 있겠지만, 까딱 토벌군에게 걸려 패배라도 한다면 완전히 궤멸이었다.

너무 위험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과한 욕심이다.

발언권이 있는 간부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신중한 편인 부두목이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지만, 두목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거친 목소리로 벌끈 성을 냈다.

"이 모자란 놈아! 사나운 게 제논 그 새끼였지, 어디 이 쥐꼬리만 한 영지 그 자체였냐? 그 자식이 죽은 게 언제인데 아직도 그딴 소리야!"

친절한 어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두목이 하는 말이 완전히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니카로스.

약소한 남작령치고는 무척 사납고 공격적이라고 소문이 난 영지.

그러한 명성은 분명 니카로스 남작령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가 되었지만, 그 태반은 제논 발란티스라는 한 개인에게 의지하여 쌓인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제논은 이제 죽고 없다.

이미 일대의 모든 세력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도 조금 더 신중하게... 니카로스는 아직...."

"초 치는 소리 좀 작작해라! 게다가 알고 있잖냐! 이 새끼들 지금 보통 초상집이 아니라는 거!"

게다가 두목에게는 분명 그 이상의 확신이 있었다.

남들에게는 아직 없는, 곧 다른 세력 모두에게 퍼질 그런 확신이.

"지금이 아니면 안 돼! 곧 사방에서 승냥이들이 몰려올 텐데 그 전에 우리가 먼저 털어먹어야지!"

며칠 전 제논의 뒤를 이은 그의 장남 또한 전사했다. 아비의 복수를 하기 위해 원정을 감행하다 후방에서 기습당해서.

얼마 지나지 않은 사건이라 아직 소문이 퍼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붉은바위 도적단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세한 경위와 원인까지 전부.

그래, 절대로 모를 수가 없었다.

될 수 있다면 자신들만 알고 있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야생의 변방에 영원한 비밀 따위는 없다.

그러니까 지금이다.

남들이 알기 전에 가장 먼저 습격해야 제일 많은 것을 챙길 수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이야기는 이미 전해 들었다.

새롭게 영주가 된 차남은 풋내나고 배운 것도 없는 애송이일 뿐이라지.

이런 것도 못 털어먹으면 도적질 접어야 한다.

두목은 그렇게 자신했다.

"두목! 토벌군입니다! 니카로스 군이 나타났어요!"

"...뭐?"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나타난 니카로스의 토벌군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부하의 말을 들은 두목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정말로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한 무리의 군대가 스멀스멀 나타나고 있었다.

저 깃발, 저 방향, 그리고 저 흙먼지까지.

누가 봐도 니카로스의 토벌군이 확실했다.

그 광경을 보자 두목의 입에서 곧장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런 미친...! 저 새끼들이 벌써!"

"두목! 두목! 어떡합니까!"

"당장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연실색한 부하들이 죄다 두목에게 몰려와 아기 새처럼 짹짹거리기 시작했지만, 할 말을 잃은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예상보다도 너무 빠르다.

연이은 패전을 겪은 약소 영지가 위축될 거라고 예상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분명히 영주를 둘이나 잃고 완전히 넋이 나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대체 이 신속한 대응은 뭐냐.

"이런 빌어먹을...!"

낭패다. 위기다. 이해할 수가 없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믿고 싶지 않지만, 두목은 자신이 오판했음을 인정했다.

눈에 증거가 뻔히 있는데 그걸 대놓고 무시할 정도로 그가 어리석은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주위로 몰려든 부하들에게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 도움이 안 되는 것들.

"도망치기는 뭘 도망쳐! 이 머저리 같은 놈들아! 저 새끼들이 우리 눈에 보일 정도면 이미 한참 늦었다고! 튀어도 금세 잡혀!"

사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두목도 마찬가지였지만, 벌써 육안으로 볼 수 있을 거리까지 도달했다면 이미 때는 늦었다.

특히 상대가 다른 제국의 영지도 아닌 니카로스의 군대라면 더욱더.

규모가 제법 있다고 한들 결국 일개 도적 떼.

군율이랄 게 미비해 제대로 된 척후병을 운용할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억지로라도 시도해봤어야 했나. 조금이라도 더 일찍 토벌군을 발견했다면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두목은 입맛이 쓰다는 듯 침을 탁 뱉었다.

그러나 당장 급한 건 판단을 후회하는 일 따위가 아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 정도야 언제든 할 수 있다.

정말로 중요한 건 그 실수를 수습하는 일이다.

그 또한 우두머리의 역할.

잠깐의 실패 따위에 매몰되어 넋이 나가는 얼간이였다면, 이 거친 변방에서 진작에 도태되었다.

두목의 판단은 신속했다.

"모두 전투 준비! 전부 무기를 들어라, 이 망할 굼벵이들! 싸울 준비를 해!"

"두, 두목! 설마 싸우실 생각인가요?"

"이 생각 짧은 놈아! 그러면 도망치지 못하면 당연히 싸워야지! 겁먹지 마라! 충분히 이길 수 있어! 너희가 알던 니카로스 군은 이제 없다!"

사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은 두목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까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이 들개 무리만도 못한 도적단은 순식간에 무너질 테니까.

'그러면 진짜 다 죽는다.'

그리고 딱히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자신조차 믿지 않을 거짓을 말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저 드넓은 초원 끝자락 멀리서 보이는, 토벌군의 진군을 가리는 흙먼지의 규모.

수년 동안 이 초원을 굴러다닌 두목은, 그것만 봐도 남들보다 많은 것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저 녀석들 수가 그리 많지 않다.'

정확하게 산정할 수는 없지만, 딱 봐도 두목이 이끄는 대략 200명의 도적단보다도 훨씬 적다.

물론 토벌군인 만큼 단순히 머릿수만 채운 한낱 도적 떼와는 달리 제대로 편제를 갖춘 정규군이긴 하겠지. 그렇지만 어차피 고작 변방 약소 영지의 군대일 뿐이다.

제국군이라고 해서 다 같은 제국군이 아니다.

여전히 제논 발란티스는 죽고 없다.

영지를 다스리는 건 한낱 애송이, 혼란스러울 내부 사정, 연이은 패전으로 쌓인 군사적 손실, 그리고 분명히 충격과 두려움이 가득할 병사들까지.

'피해는 분명 크겠지만....'

그래도 승산이 있다.

그 등장이 갑작스러웠을 뿐, 결국 근본적인 전제 자체가 바뀌지는 않았다.

이길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자신들은 니카로스 군을 한 번 이겨봤지 않은가.

그래, 어차피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저 새끼들 다 조지고 넉넉히 털어먹을 몫만 생각하면 된다, 이 모자란 것들아."

두목은 씹어뱉듯 그렇게 말했다.

부하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붉은바위 도적단은 최선의 결단을 내렸다.

#006. 증명의 필요성 (2)

"영주님, 전방입니다."

도적 떼가 출몰했다는 곳까지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

함께 출진한 키로스 경이 문득 앞을 보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 역시 눈에 힘을 줘 전방에 집중했다.

언뜻 보기에는 여전히 광활한 지평선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니 확실히 저 멀리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조금씩 꾸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형체는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더 또렷해졌다.

"그렇군요. 저도 이제 보입니다."

영감님 눈도 좋으셔.

마침내 내 시야에도 그 모습이 선명히 담기기 시작했다. 거대한 것의 정체는 하나의 단일 개체가 아니었다.

수백의 인간이 모여 만들어진 군체, 집단, 무리, 군대.

적이다.

우리가 목표로 한, 나의 땅을 침략한 도적단.

"바글바글하기도 하지."

보고 받은 대로 정말 200명 정도 되는 것 같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무슨 비렁뱅이 도적놈들이 200명씩이나 우르르 몰려다니는지.'

원작을 해봤으니 몰랐던 사실은 아니지만, 새삼 이 경이로운 변방의 치안 상태에 절로 개탄이 나온다.

'정말 어지러울 정도로 대단한 땅이야.'

저런 놈들이 벌건 대낮부터 대놓고 설치다니.

"아무래도 도적놈들도 우리를 발견한 것 같군요."

어쨌거나 그런 개인적인 한탄은 한탄이고.

지금은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기에 나는 본 것을 그대로 키로스 경에게 전달했다.

놈들의 움직임이 급격히 부산스러워진다.

아직도 먼 거리지만 그래도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뻔히 알 수 있었다.

"맞습니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군요."

"저희가 그만큼 빠르게 달려오긴 했죠."

서두른 보람이 있네.

더 자세히 살펴보니 아직 본격적인 약탈이 시작된 것 같지도 않았다.

"시작이 좋습니다."

"허허, 모두 영주님께서 신속한 판단을 내려주신 덕분이지요."

하지만 좋은 것은 여기까지였다.

놈들은 분명 예상치 못한 사태에 기겁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리에서 이탈하거나 도망치는 녀석이 보이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통제가 잘 되고 있는걸.'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다.

저 녀석들 벌써 결단을 내렸다.

우리와 정면에서 싸울 생각이다.

"쯧, 예상보다 빠르게 교전을 준비하네요."

쉽게 갈 수는 없나.

아쉬운 마음에 나는 그렇게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제국 소속이고 놈들은 한낱 도적 떼에 불과한데, 겁을 좀 먹어줬으면 하는 게 그렇게 큰 욕심이었나.

대체 니카로스를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길래.

그리고 키로스 경은 이런 혼잣말에 가까운 투덜거림에도 친절하게 대꾸해주었다.

"음, 확실히 판단이 빠르군요. 저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도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여기서 도망쳐 봤자 금세 따라잡힌다는 것을."

아무래도 아주 어설픈 상대는 아닌 듯합니다.

키로스 경은 그렇게 분석했다.

거지 같다.

만만한 상대가 없다.

고작 도적에 불과한데도 이 정도라니.

'...아니, 됐다.'

쓸데없는 투정은 여기까지.

'어차피 내가 잘하기만 하면, 다 되는 거니까.'

그렇기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명령을 내렸다.

"군을 둘로 나누죠."

내가 데리고 온 병력.

총 80명.

그래.

당연히 나도 안다.

당장 눈앞의 적이 200인데 우리는 80이다.

단순히 머릿수만 계산해봐도 2배 이상.

적군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심지어 그걸 또 둘로 나누겠다니.

확실히 일반적인 판단은 아니지.

하지만 말이야.

"그러면 미리 계획했던 작전대로 1군과 2군, 깔끔하게 40명씩 절반으로 나누죠. 키로스 경께서 좌익의 2군을 맡아 주십시오. 우익의 1군은 제가 지휘하겠습니다."

그걸 전부 똑똑히 자각하고 있음에도, 이 명령을 물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게 바로 최대의 승리를 위한 최적의 방법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그래, 단순히 이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애초에 아무리 약소하다지만 그래도 제국의 영주가 고작 도적 떼 좀 토벌했다고 어깨를 으쓱거릴 수야 없지.

승리는 당연히 확보하고 가야 하는 상수에 불과하다.

'절대로 적을 얕보는 건 아니야.'

당연히 방심하는 것도 아니고.

게임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나 역시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지금도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인데 그런 상황에서 방심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로 담백하게.

당연히 해내야 하는 일일 뿐이다.

'이것도 못하면 그냥 죄다 내던지고 숨어 살아야지.'

내가 지금부터 머나먼 끝을 볼 때까지, 쉼 없이 시도하고 도전해야 하는 건 그만큼 터무니없는 짓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한 점의 의심 없이 키로스 경의 이름을 불렀고.

"허허. 늙고 병든 몸이지만 영주님을 실망하게 해드릴 수는 없지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키로스 경은.

초대 영주 제논의 오른팔로서 함께 니카로스 남작령의 역사를 연, 이 땅에 남아 있는 마지막 고정 네임드 캐릭터는 잔뜩 너스레를 떨며 그렇게 대답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얼마 전까지 키로스 경에게 두들겨 맞은 게 아직도 기억에 선합니다."

"두들겨 맞다니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체계적이고 검증된 수련 방법일 뿐이었습니다."

하여간.

웃기는 할아버지.

그렇지만.

"좋습니다. 그렇다면 믿겠습니다."

동시에 확실히 믿고 맡길 수 있는 영감님이기도 했다.

나는 그걸 안다. 이미 한 번 이 세상의 끝을 본 나는.

게임이 아닌, 현실 속을 직접 살아 숨 쉬는 기사.

지금 이런 감정을 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솔직히 <마이트 앤 로열>의 팬으로서 기대가 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무척이나 익숙한 분위기로 검을 고쳐 쥐는 키로스 경의 모습이 눈에 담긴다.

준비는 충분하다.

계산도 전부 끝났다.

"자, 그러면 시작하죠."

그래, 벌써 너무 심각하게 마음먹지는 말자.

이건 그저 증명일 뿐이니까.

금방 답이 나올.

앞으로 벌어질 전투.

이길 방도.

압도적으로 승리할 길.

지금 내 머리는 오직 이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허허, 맡겨주십시오, 영주님!"

그렇기에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아서.

나는 살짝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

흙먼지가 날뛴다.

"두목! 놈들의 부대가 갈라집니다!"

니카로스 남작령의 토벌군을 발견한 직후.

선두에 있던 부하의 보고를 듣고, 도적단의 두목은 황급히 저 멀리 전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유심히 살펴보니 정말로 니카로스 남작령의 토벌군이 절반씩 두 갈래로 나뉘고 있었다.

'병력을 둘로 나눈다는 건....'

토벌군이 노리는 바는 뻔하다.

포위.

전장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 중 하나.

사방에서 둘러싸인 것만으로도 포위당한 쪽은 한 번에 더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해야 한다.

도망갈 곳이 없다는 심리적인 공포는 덤이고.

까딱하면 몰살이다.

그러니 부하들도 공포에 질려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이겠지.

그러나.

"어쩌죠, 두목? 그냥 지금이라도 도망...."

"아오! 좀 닥쳐 봐라! 생각 좀 하자, 이 머저리들아!"

아직도 겁에 질려서 발작하는 몇몇 간부들에게 일갈하고, 두목은 다시 생각을 계속했다.

그래,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성공할 경우의 이야기다.

단순히 상대를 둘러싸는 게 전부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포위 전술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포위당하는 상대라고 결코 가만히 있지만은 않는다.

분산된 부대가 사전에 협의한 대로 실수 없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대를 덮쳐야만 성공할 수 있는 전술.

게다가 설령 포위에 성공했다고 해도 충분한 수적 우위를 갖추지 못한다면 얇은 포위망이 순식간에 돌파당해 역으로 무너질 뿐이다.

부대를 나눈다는 것은 그만큼 각개격파 당할 위험도 커진다는 뜻.

그런데 가뜩이나 수적으로 열세한데.

거기서 또 군을 나눠 포위를 시도한다고?

'어설픈 시도일 뿐이다...!'

웃기지도 않는다.

정식으로 병법을 배운 적은 없지만, 이 정도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알 수 있다.

애송이가 새로 영주로 즉위했다더니 군대 전체가 가슴에 헛바람만 찬 것인가.

같잖은 수작이나 걸다니.

'과욕이 화를 부르는구나.'

두목은 그렇게 비웃었다.

"모두! 돌격 준비!"

그리고 마침내 모든 판단을 끝내고 소리쳤다.

이길 길이 보인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포위당할 뿐이야! 움직여라! 우리가 먼저 놈들을 친다! 목표는 놈들의 좌익이다! 모두 발에 땀 나도록 달려라!"

200명의 집단이 오직 한 사내의 의지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수는 우리가 두 배는 더 많다! 겁먹지 마라! 싸우면 이겨!"

재빠르게 진군하여 자리를 잡고, 우익이 전장에 도달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놈들의 좌익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곧장 남은 우익과 교전한다.

완벽하다.

조금 빠듯하긴 하지만, 이게 최선이다.

"가자, 이 쓰레기들아!"

"우오오오오오!"

도적은 일종의 경보병.

속도 하나는 자신 있다.

두목의 명령에 맞춰 붉은바위 도적단이 기세 좋게 돌진한다.

아무리 어설픈 약탈자라지만, 더 적은 수를 상대로도 겁을 먹을 정도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의욕을 더 불태웠다.

약자를 괄시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본질이니까.

양군이 서로를 향해 거리를 좁힌다.

점점 가까워진다.

어느새 도적들의 시야에도 니카로스 군의 모습이 똑똑히 담기기 시작한다.

쉴 새 없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창공 아래 드넓은 초원을 질주하는.

동쪽 가장 변방 니카로스 남작령의 상징과도 같은.

"니카로스의 용사들이여, 돌격하라!"

기병대.

가벼운 무장과 함께 마치 바람조차도 따돌리겠다는 기세로 40명의 기수가 도적단을 향해 달려든다.

"큭! 창 들어! 검 들어! 버텨라! 이 망할 새끼들아! 딱 한 번만 버티고 막아서기만 하면, 순식간에 사방에서 쌈 싸 먹을 수 있다! 버텨!"

살벌한 기세, 그리고 그들이 쌓아온 명성.

그래, 두목도 알고 있다.

토벌군이 처음 흙먼지와 함께 나타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니카로스 남작령을 습격하고자 마음먹었을 때부터 예상하였다.

니카로스 군은 반드시 자랑하는 기사단이자 기병대를 이끌고 나타나리란 것을.

하지만.

'바뀌는 건 없다!'

당연히 그걸 다 알고 있음에도 이 작전을 감행했다.

200명 대 40명이라는 구도는 여전하다.

5배에 달하는 압도적 수적 우위.

정규군과 도적, 기병과 보병.

이런 하찮은 요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질의 격차도, 병종의 상성도, 전부 근본적인 수의 폭력을 극복할 수는 없으니까.

'무엇보다 이미 한 번 꺾어본 놈들이다...!'

그렇기에 두목은, 도적단은 감히 승리를 예상했다.

제국의 땅을 정면에서 약탈해서 채울 수 있는, 욕망과 탐욕의 미래를 꿈꿨다.

아주 그럴듯하고 달콤하지만.

"한낱 도적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더러운 흙발로 감히 발을 들여놓느냐!"

끝내 의미 없는 한낱 망상으로 전락할 그런 꿈을.

"나는 니카로스의 기사단장, 키로스다!"

가장 선두에서 달리던 한 도적은 문득 그런 목소리를 들었다. 거칠고 자신만만한, 분노에 찬 목소리를.

"...어?"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도적의 머리가 몸에서 떨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그는 목이 잘려나가는 그 순간까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보이는 것은 그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시야 속에 담기는, 동료들의 얼굴이 전부.

그들 모두가 경악한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른다.

...아.

또 다른 도적 하나의 목이 한 합에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며, 그 순간 그는 모든 걸 이해해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세상은 역시 끊어졌다.

"으아, 으아아!"

그러나 그의 죽음 뒤로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고작 도적 하나의 죽음 따위는 전장에서 너무나 사소한 사건에 불과했다.

"키, 키로스다!"

"귀신 키로스가, 그, 그, 그 빌어먹을 영감이 여기에 있다고오오!"

죽지 않은, 아직은 살아있는 선두의 도적들이 절망을 토해낸다.

명백히 부대 전체의 사기를 꺾는 행위였지만, 말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말려야 할 간부들 역시 똑같이 절망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알고 있다.

이 세상, 제국에서는 기사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

가장 첫 번째 단계, 새로이 검의 길을 걷는 자.

네오파이트(Neophyte).

두 번째 단계, 검에 통달한 자.

아데프투스(Adeptus).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단계, 검의 끝에 닿은 자.

마지스터(Magister).

첫 단계, 고작 입문자라고 불린다고 우스워 보일 수 있지만, 네오파이트 역시 이미 1인분을 하는 실력이다.

만약 1인분도 못 한다면 애초에 기사라는 칭호조차 받지 못했을 테니까.

기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할 수 있어야 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아주 간혹 그조차 뛰어넘을 수 있을 수준으로.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기사는 초인이라고 불렸다.

아데프투스는 그에 더해 자신의 무기까지도 마력으로 강화할 수 있는 달인이자 구도자였다.

그들에게 무기란 이미 수족의 일부나 마찬가지.

재능과 노력.

둘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도달하기 힘든 경지.

따라서 아데프투스는 굉장히 드문 존재였다.

방대한 인재를 자랑하는 제국에서도, 수도가 아니라면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자비를 보이지 마라! 우리가 곧 니카로스의 분노다!"

그리고 키로스 경은.

니카로스 유일의 아데프투스였다.

기사단장 키로스.

영주 제논과 함께 변방을 지탱하던 두 기둥 중 하나.

이 동쪽 국경 지대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그는, 어느새 적들에게 귀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니카로스 남작령이 지닌 위명의 절반이 온전히 제논의 명성에서 비롯되었다면, 분명 나머지 절반은 키로스 경과 그가 이끄는 기사단이 만들어낸 것.

그렇기에 지금 그 사실을 몸소 증명하듯, 키로스 경과 2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적군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직후 벌어진 광경은 양 떼 속에서 늑대가 날뛰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왜, 왜 죽지 않는 건데!"

분명히 똑같이 검에 베이면 피를 흘리고 찔리면 죽을 사람일 텐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도적들은 쉽사리 키로스 경에게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 번 검이 번쩍일 때마다 목 하나가 잘려나간다.

누구보다 먼저, 가장 선두에서 수십 명의 적과 대치하고 있음에도 그에게 망설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도적들의 발을 묶었다.

그 사이에도 키로스 경은 쉬지 않고 적을 도살했다.

"키로스 경을 홀로 두지 마라! 고향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뒤처지지 마라!"

그리고 자랑스러운 니카로스의 기병대가 그 뒤를 따랐다. 단단한 말발굽이 인간의 살과 뼈를 깨부수며 기수에 창끝에 도적의 목이 무참히 꿰뚫리고 걸린다.

두목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아, 으아아!"

"도망, 도망쳐야 해! 이러다가는 다 죽어!"

막아서야 할 도적단이 마치 모래성처럼 허망하게 무너지고 물러나고 있기에.

약탈자의 피가 튀고 비명이 울려 퍼진다.

이 시점에 이르고 나서야 두목은 깨달을 수 있었다.

2군은 절대로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단독으로도 서서히 적을 압도하고 있다.

새로 즉위한 영주는 증명된 게 없는 애송에 불과하다.

연이은 패배로 토벌군의 사기는 처참할 것이다.

5배의 수적 우위로 적을 압도하면 된다.

분명 두목의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명망 있는 기병대라고 한들 이런 시국에 이만한 열세를 쉽게 뒤엎을 수는 없으니까.

"멈추지 말고 나아가라! 승리가 눈앞에 있다!"

하지만 상대는 그보다 더 멀리 내다봤다.

그저 그뿐일 결말이다.

"개, 개, 개 같은...!"

도적단의 모든 계획은 어그러졌다.

그저 무력하게 숨통이 끊어지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2군과 키로스 경에게만 모든 걸 맡길 수 없죠. 더 빠르게 돌격합니다."

이는 곧 반대로 누군가의 계획은 완벽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끝을 모르고 무너져가는 도적단의 후방에서, 마침내 니카로스의 1군이 나타났다.

결판이 났다.

#007. 증명의 필요성 (3)

"모두 돌격하라!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니카로스를 위하여!"

검을 뽑아 들고 외친다.

고작 두 번째일 뿐인데 어느새 이 짓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적은 무방비. 2군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후방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그렇기에 나의 구령에 맞춰, 크게 우회하여 도적놈들의 뒤를 노리던 우리 1군 또한 마침내 돌격을 개시했다.

바람을 가르는 진격.

침탈자를 향한 복수심.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승리를 향해 가해지는 힘찬 박차.

더할 나위 없이 사납고 날카로운 기세.

그곳에 좌절감과 절망 따위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그래, 물론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이 근래 연이어 끔찍한 참패를 겪은 것은 맞다. 그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도 맞고, 영주인 나 개인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 또한 맞다.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당연히 염려했지.'

수십 년간 영주를 모셔온 원로 가신들조차 침울하고 침통한 기색을 쉬이 감추지 못했는데 병사들이라고 다를 리가.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적어도 이 친구들만큼은 믿고 쓸 수 있다.

나는 자신 있게 그리 말할 수 있었다.

니카로스 남작령의 유일한 상비병.

키로스 경이 직접 창설하고 키운 기병대.

드넓은 초원에서 나고 자란 태생적 기수들의 집단.

'검은 매의 기사단.'

이 친구들만큼은.

다 설명하기에는 다소 긴 이야기가 되겠지만, 애초에 이곳 니카로스 남작령은 다른 제국의 영지에는 없는 독특한 특색을 여럿 보유한 지방이었다.

전통적인 바할리아 제국의 영토가 아닌 동쪽 이민족들의 영역을 오직 검 한 자루 들고 정복한 기사, 제논 발란티스.

그는 제국의 질서라는 명목 아래 원주민들을 복속시키고 제국의 주민들을 이주시켜 이 땅 위에 새로운 영지를 세운 뒤, 스스로 초대 영주로 등극했다.

그게 바로 니카로스 남작령의 첫 역사.

시작이 그러했기에 이 땅은 바할리아 제국의 일반적인 토지와는 많은 점이 달랐다.

풍부한 햇빛, 온화한 겨울, 농사에 적절한 강수량, 뚜렷한 사계절, 비옥한 토지....

바할리아 제국을 세계 제일의 대국으로 만들어준 그런 자연의 원동력을 유감스럽게도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은 보유하지 못했다.

그 대신이라고 할까.

가지고 있는 거라고는 오직 광활한 하늘과 건조한 대지, 극심한 일교차, 거센 바람, 잦은 가뭄, 부족한 자원으로 대표되는 드넓은 초원뿐.

'솔직히 인간에게 그리 친절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렇지만 그 대초원은, 반대로 그렇기에 자연스레 우수한 전마(戰馬)와 태생적 기수들을 길러낼 수 있었다.

그리고 초대 영주 제논과 그의 오른팔 키로스 경이 그 타고난 전사들을 모아 이 땅을 지키기 위한 만든 부대가 바로 이 '검은 매의 기사단'.

기사단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실제로 하급 기사의 작위, 네오파이트라 인정받은 구성원은 극히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이 사실이 이들의 위용을 평가절하할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남작령치고 준수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가 결코 허언은 아니거든.'

이전에 말했다시피 니카로스 남작령에는 무수한 강점들이 존재하니까 말이야.

'...그저 지옥의 영지라고 불릴 만큼, 그 강점을 덮는 약점이 너무 과하고 많을 뿐이라서 문제인 거지.'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이들의 저력 자체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

영지 유일의 중급 기사, 아데프투스 키로스 경이 손수 정성껏 담금질한 우리 검은 매의 기사단은 이런 암울한 시국에서도 꿋꿋이 자신들의 무용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병사들은 결코 바보가 아니니까.'

본인이 직접 뛰고 싸우는 전투다.

누가 이기고 있는지, 승기는 어디에 있는지, 살아갈 방도는 어디에 있는지, 병사들이야말로 그 사실을 여실히 느끼는 존재다.

그리고 지금 우리 병사들은 이미 승리를 확신했다.

도적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공포와 절망에 뒤덮여 도망칠 구멍만 찾고 있는 얼굴을 저들을 도저히 숨기지 못했다.

이길 이유만이 가득하다.

질 이유는 진작에 전부 뒤덮여 사라졌다.

그렇기에 우리 기사단은 누구보다 저돌적으로 도적단을 향해 돌진할 수 있었다.

이미 키로스 경과 2군의 무용에 흔들리고 있던 적들.

'그 상태에서 우리 1군의 공세까지 합쳐 친다면.'

결과야 안 봐도 뻔하지.

대붕괴의 시작이다.

"도망치지 마! 도망치면 다 죽어! 이길 수 있다고!"

"그, 그렇지만, 두목!"

두목으로 보이는 녀석이 어떻게든 부하들을 규합하기 위해 악을 쓰는 듯하지만, 이미 놈들은 무너지고 있다.

이건 절대로 홀로 막을 수 있는 흐름이 아니다.

그리고.

"...."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 모든 승리의 광경을 지켜보며 두 눈 속에 담았다.

놓쳐서는 안 되고, 놓칠 수도 없었으니까.

냉정하게 말해서 이번 토벌에 내가 특별히 대단한 역할을 한 건 아니다. 벌써 과대망상에 빠질 정도로 자아도취 하지는 않았다.

첫 충돌을 담당하는 2군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1군의 후방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저번처럼 무리한 돌격을 감행하지도 않았다. 직접 선봉에 서지도 않았다.

덕분에 항상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검은 여전히 핏방울 하나 묻지 않고 깨끗하다.

기껏해야 그럴듯하고 멋진 모양새를 위해 명령할 때만 잠시 꺼내든 게 전부니까.

따라서 오늘은 그저 토벌군의 편제를 짜고, 전투에 앞서 작전을 계획하고, 모든 전황을 주시하며 뒤에서 지휘했을 뿐이다.

'사실 계책이라는 것도 키로스 경의 개인 무력에 의존한 느낌도 적지 않게 있고 말이야.'

아무리 수가 많다고 한들 애초에 상대는 한낱 약탈자 무리에 불과하고, 기사라는 것은 저 도적 나부랭이들에게는 없는 비대칭 전력이나 마찬가지.

아마 키로스 경이 압도적인 개인 무력으로 선봉을 맡아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승기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부족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 필요한 것은 전부 얻었으니까.

누누이 말했다시피, 오늘은 그저 증명을 위한 날이다.

이미 한 번 게임을 통해 해내 봤으니 안다.

이 지옥 같은 영지 니카로스 남작령이 멸망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지옥 같은 시련에 걸맞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묘기의 행진을 이어나가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사방을 둘러싼 외적들을 상대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끝없이 전쟁하여 승리를 쟁취하고.

모든 것을 정복해 결국 압도적인 힘만으로 일대를 평정하는 길.

요컨대 패도(霸道).

그 끝을 모르고, 달리는 호랑이 등에 탄 채 검을 뽑아 들어 나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길을 걸어야만 한다.

'달리던 호랑이가 결국 먼저 지쳐 쓰러져, 내가 도리어 잡아먹을 수 있을 때까지.'

당연히 실패의 대가는 멸망과 죽음뿐이고.

그래, 나도 안다.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 들리는지.

최약체 영지 따위가 함부로 입에 담을 소리가 아니다.

'...이 정도면 제대로 된 공략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일개 망상에 가까울 정도지.'

괜히 내가 커뮤니티에 공략을 올린다 한들 과연 실천할 수 있는 다른 플레이어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던 게 아니다. 나의 메타 인지 능력은 아주 멀쩡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정말로 이게 단 하나밖에 없는 공략이 맞거든.'

나도 수없이 고민하고 연구했다.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에도, 떨어진 후에도.

하지만 다른 길 따위는 없었다.

'바로 나 자신이 직접 입증했으니까 말이야.'

10,000시간 끝에 이 세상의 끝을 본 내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당연히 그 판단이 정답이다.

'이게 증명하는 과정이라는 건 바로 그런 의미.'

과연 내가 이 말도 안 되는 공략을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도 해낼 수 있을지.

내가 게임에서 택하고 이뤄나갔던 전략을 이 세계에서 다시 구현할 수 있을지.

공략의 주역이던 영주, '제논 발란티스'라는 고정 네임드 캐릭터를 대신해서 과연 나에게 니카로스 남작령의 주인으로서 살아남을 능력이 있을지.

그 증명.

'그리고 웃기는 이야기지만.'

왠지 그 가능성이 완전히 0은 아닐 것 같았다.

실마리를 얻은 것은 분명 첫 전투 때였다.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고, 제논에게 거의 끌려간 것이나 다름없이 참전했던 바로 그 전투.

'더 정확히는, 제논이 죽은 직후 마치 뇌 속에서 번개가 치듯 눈앞이 번쩍이던 바로 그 순간.'

살아남기 위해서는, 승리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서야 한다고 깨달은 바로 그 느낌.

긴장감도 두려움도 모두 잊고 그저 승리를 위한 최적의 해답을 도출해 내는 바로 그 감각.

그 순간이 나에게 감히 가능성을 주었다.

'어쩌면 현실이 된 이 세계에서도 내가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니카로스 남작령으로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아 그 끝을 본다는, 오직 나만이 클리어한 그 도전 과제를.

나는 그저 살고자 할 뿐이다.

거짓말과 같은 소리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만 해도 게임과 현실의 차이점들을 여실히 느끼고 있는데 그때라고 다를 리가 없지. 게임을 한 경험만으로 모든 게 다 잘 풀릴 거라고는 절대로 낙관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고민했고, 그래서 더 증명이 필요했다.

단편적인 실마리만으로 자만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확신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의도치 않은 전투에 어정쩡하게 끌려가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경험이 아닌, 처음부터 의도하고 작정한 전장을 통해 얻은 확신이 말이야.'

그렇기에 이 전투를 기다렸고.

그걸 위해 이 전장의 처음부터 모든 걸 다 계획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고작 80명에 불과한 기사단만 데리고 출진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안전하게 징집병들도 소집한 뒤, 우월한 수적 우위를 갖추고 전투에 임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병사를 소집하는 그 시간조차 귀중했으니까.

도적 떼의 약탈을 허용할 수 없었으니까.

이미 연이은 패전으로 징집병의 손실이 컸으니까.

요컨대, 지금 니카로스 남작령과 나에게는.

'최소한의 손실로 최대의 결과를 내는 그런 도박과 다름없는 해결책이 필요했으니까.'

견실하지 못하다는 건 나도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애초에 끝없이 전쟁하고 승리하고 정복하기 위해서는 한 톨의 자원조차 허투루 쓸 수 없다. 비정상적인 효율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못하면 그냥 멸망뿐이니까.

비상한 시국에는 비상한 방식이 필요할 법.

그렇기에 소수 정예만으로 토벌을 감행했다.

뛰어난 기사인 키로스 경의 무력을 믿었다.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는 척했다.

적을 방심시켜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 끝에 상대를 역으로 격퇴해 무너뜨리고자 했다.

이 또한 내가 즐겨 사용하던 전략.

이점이 있다면 살려야 한다.

위험한 길을 걸어서라도 피해는 최소화해야 한다.

할 수 있는 최대한 적을 압도해야 한다.

니카로스의 위명을 사방에 떨쳐야 한다.

이 땅은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 순간 난 그 모든 걸 제대로 해냈다.

중요한 건 미시적 전략이 아닌 근원적 본질.

그렇기에 도적 떼가 상대였을 뿐이지만 가능성을 증명하기에 부족함 따위는 없었다.

이제 더는 망설임 따위 없다.

나는 미소 지었다.

분명 도망치려고 했다.

사지나 다름없는 이 변방을 벗어나, 번화한 수도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는 선택지는 분명히 매력적이었다.

'그것이 설령 있을지 없을지 확신조차 할 수 없는 희미한 길이었음에도 말이야.'

하지만 이제 더는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내렸으니까.

도망치는 것은 틀린 선택지다.

이게 최선이다.

이게 객관적으로 가장 생존 확률이 높은 길이다.

그래, 나는 정식으로 영주가 될 거다.

오직 이 변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증명이 끝났다.

#008. 당위적 첫걸음 (1)

정면에서부터 거침없이 깨부수는 키로스 경과 2군.

그리고 무방비한 후방을 사정없이 꿰뚫는 나와 1군.

아무리 머릿수가 많다고 한들 결국 오합지졸에 불과한 도적 떼가 이 구도를 감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두, 두목! 버틸 수가 없습니다!"

"어, 어떻게 해야...!"

그렇기에 결국 그 피해와 공포를 더는 이겨내지 못하고, 도적단은 마침내 그 끝에 다다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나마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항전과 분투를 외치던 도적단의 두목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이이이익...!"

더는 외면할 수 없는 명백한 패배의 광경.

그렇기에 두목은 다급한 움직임으로 잠시 이리저리 고개를 휙휙 돌려 주위를 살피더니.

"어디 가십니까! 두목! 두목!"

"서, 설마 지금...!"

"닥쳐, 이 머저리 새끼들아! 쫓아오지 마라! 계속 남아서 죽을 때까지 싸워!"

곧 황급히 등을 돌려 최대한 우리 군이 적은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허."

그리고 전장이 가장 잘 보이는 후방에서 모든 걸 주시하고 있던 나는 당연히 그 광경까지 목격했고 말이야.

'이제 정말 완전히 끝났네.'

두목까지 탈주를 감행한다면 정말로 끝이다.

이렇게 흐뭇한 광경은 절대로 나 혼자만 볼 수 없다.

따라서 나는 큰 소리로 우리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봐라! 도적놈들의 두목이 도망친다! 우리의 승리다! 감히 우리의 고향을 습격한 저 무도한 놈들을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자비란 없다!"

나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고, 우리 기사단은 더욱더 거세게 도적단을 몰아붙인다.

이제 병사들의 눈에도 승리가 선할 테지.

이를 더 부정할 자는 아군과 적군, 그 어디에도 없다.

"...."

나는 헐레벌떡 도망치는 도적단의 두목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패배가 뻔하니까 도망친다.

틀린 판단은 아니다.

'그래, 틀린 판단은 아니지만.'

유감스럽게도 원래 군대가 가장 큰 손실은 입는 순간은 바로 후퇴의 때다.

'애초에 살고자 한다면 이곳에 오면 안 됐어.'

이미 너무 늦었다.

"목숨이 아까워졌느냐! 이 겁쟁이 녀석!"

그리고 이런 내 생각을 증명하듯, 어느새 무너지는 적들 사이를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파하며 키로스 경이 도망치는 두목의 바로 뒤를 쫓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조금 무섭네.'

저 영감님이 내 편이라 정말 다행이야.

키로스 경.

니카로스의 두 기둥 중 하나.

실제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 괴물이 따로 없다.

단순히 모니터 너머 게임으로 본 거랑은 차원이 다르다. 왜 저 도적놈들이 키로스 경을 귀신이라고 부르며 벌벌 떠는지 이해가 갈 정도.

하긴.

어찌 보면 어느 정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언제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 불안한 영지가 그나마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제논과 키로스 경, 이 두 사람의 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영주였던 제논에 비해 명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은 절대 부족하지 않다.

이 낙후된 변방에서 중급 기사, 아데프투스라는 무력은 저항할 수 없는 재앙에 가깝다.

실제로 이번 전투도 키로스 경의 역할이 가장 컸지.

그의 개인적인 무용을 믿고 가뜩이나 수가 적었던 군을 과감하게 둘로 나눌 수 있었던 거니까. 덕분에 도적단이 더 방심해 주기도 했고.

'그리고 그렇게 선봉에서 적을 깨부숴준 거로도 모자라, 이제는 도적단의 수괴까지 직접 추적해 주시다니.'

진짜 엄청난 영감님이야.

역시 니카로스 남작령 초반 공략의 핵심 키답다.

게임에서든, 이곳 현실에서든.

정말, 저 영감님까지 없었으면 나 막막해서 엉엉 울어버렸을지도 몰라. 그랬으면 엄청 추했겠지.

전부 무의미한 가정이라 다행이다.

그렇게 내가 하찮은 생각에 몰두할 때쯤.

마침내 키로스 경이 두목의 뒤를 다 따라잡았다.

아, 저건 끝났다.

"이, 빌어먹을! 덤벼라, 이 늙은...!"

두목도 나름대로 투지 같은 게 남아있었는지, 결국 도망치는 것을 포기한 채 검을 들었지만.

"커, 커어어억...!"

"감히 우리 니카로스를 침범한 죄를, 지옥에서 영원히 후회하거라."

단 한 합.

단 한 합에 모가지가 반쯤 갈려, 끔찍한 소리와 함께 흙바닥을 뒹굴 뿐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솜씨.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결말.

그렇다면 남은 것은.

"놈들의 두목이 죽었다! 키로스 경이 목을 베었다! 우리의 승리다!"

승리를 선언하는 아군의 함성뿐.

병사들이 일제히 소리치기 시작했고.

우리의 포효와 함께 마침내 모든 도적단은 항복했다.

첫 단추가 아주 완벽하게 끼워졌다.

***

압도적인 승리.

승리의 전율을 느끼며 환호하는 우리 병사들.

전장에 널린 것은 대부분 도적의 시체였고, 아군의 피해는 미미했다.

이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광경에, 결국 남은 적들조차 저항을 포기하고 무기를 버리며 항복했다.

도망을 시도하는 자는 없었다.

'하긴. 사방이 모두 나의 영지니까.'

도망치기에는 너무 깊숙이 들어오긴 했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들어온 걸까?'

나도 전투에 앞서 다소 결과를 긴장하며 걱정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군의 피해에 대한 염려와 전황이 모두 내 계획대로 착착 풀릴지에 대한 긴장, 그리고 도적놈들이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약탈을 끝내고 도망쳤을 가능성에 대한 걱정이었을 뿐이다.

나의 승리 자체를 의심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요즘 니카로스 남작령의 형편이 유독 안 좋긴 해도, 자기 영역에서 고작 도적 떼한테 정면으로 밀릴 정도는 아니니까.'

물론 이런 습격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이곳은 만만하게 보이는 순간 바로 사방에서 득달같이 달려드는 마굴이니까.

'원정 실패와 마누엘의 죽음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어디서든 머지않아 침공을 감행하긴 했겠지.'

하지만 그런 나의 예상보다도 이 도적단의 행보는 훨씬 이르고 파격적이며 과격했다.

의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아."

그리고 나는 이쯤에서 잠시 고민을 멈췄다.

저 멀리서 1군과 함께 전투를 끝내고 키로스 경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점점 더 가까워지는 키로스 경의 모습.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처참한 모습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사실 대부분 적의 피를 뒤집어쓴 것뿐이었다.

'역시 초인의 영역에 닿은 기사... 게임이 아닌 실제로 보니 위세의 차원이 다르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으니 어느새 키로스 경은 나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평소에는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거구인데, 말 위에 타고 있으니 눈높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똑같이 마주 보며 말할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키로스 경. 무척이나 놀라운 솜씨였습니다.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진심 가득한, 순수한 감탄.

그러나 키로스 경은 나의 치하에 잠시 눈동자를 하늘로 돌리며 고민하더니, 곧 다짜고짜 그렇게 되물었다.

"허허, 어떤가요? 이 늙은이가 조금은 영주님의 기대를 충족시켜 드렸을까요?"

평소와 다름없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는 덤.

그 질문을 듣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물론입니다. 기대 이상이었는데요. 이 정도면 저를 두들겨 팬 것은 이제 용서해 드려도 되겠습니다."

"허허! 그거 정말 다행이군요! 영주님의 미움을 산 줄 알고, 제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르실 겁니다!"

나의 농담에 키로스 경이 호들갑을 떤다.

하여간.

이상한 영감님.

'그래도 멀쩡해 보이니 다행이네.'

이 세계의 기사는 분명 초인이지만, 그렇다고 무적은 또 아니다.

홀로 천 명의 군대를 썰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검에서 휘황찬란한 빔을 뽑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지독할 정도로 단련된 인간일 뿐.'

당연히 날붙이에 찔리면 몸에 구멍이 나고 피를 흘리며 죽는다. 그리고 아무리 상대에 한낱 도적 떼라지만, 눈먼 공격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 당장 그 대단하던 제논조차 그렇게 갔으니까.

'그러니까 오늘처럼 키로스 경의 개인 무력만 믿고 날로 먹는 건....'

...아니, 그러니까 최소한의 피해로 적을 압도하기 위해서 특출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활용하는 건 매우 조심스럽게 결정해야 하는 문제다.

각 인재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그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기지 않을 만한 선에서 최대의 효율을 올리는 게 가장 이상적이니까.

당연히 조금이라도 계산을 잘못하면 바로 사망.

'어떻게 보면 게임을 통해서 하던 일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이 세상에는 훨씬 더 많은 변수가 있고, 또 다음 회차도 없으니까 몇 배는 더 까다롭지.

그나마 키로스 경을 비롯한 고정 네임드 캐릭터들의 능력치가 이미 다 내 머릿속에 있어서 다행이다.

어쨌거나 요점은 앞으로도 매번 매번 이렇게 도적 떼를 토벌하듯 쉽게 갈 수는 없다는 것.

무엇보다 기사라는 예리한 비수를 보유하고 있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니까.

그래, 그러니까.

'키로스 경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런 얘기다.

그렇게 키로스 경이 무사한 것까지 확인했으니, 이제 딴생각은 그만하고 슬슬 할 일을 해야겠지.

지금 당장 할 일이야 이미 정해져 있다.

"포로가 예상보다 많이 잡혔군요. 이놈들을 다 처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겠습니다."

전투의 뒤처리.

원래 싸움이라는 게 그렇다.

막상 맞부딪히는 시간보다는, 사전에 준비하고 나중에 마무리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다.

'게다가 특히 오늘은 키로스 경이 순식간에 적 수괴의 목을 베는 대활약을 해서 그런지, 도적들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항복했단 말이지.'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가지도 못한 채, 결국 죽지 않고 살아남은 전부가 포로로 붙잡혔으니 그 머릿수가 물경 100명을 넘겼다.

이놈들을 도대체 어쩐담.

다행히도 이 분야에서 잔뼈가 굵고 친절한 키로스 경이 곧장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주긴 했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역시 전부 목을 치는 것이지요. 감히 영토를 침범한 죄가 작은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제법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

너무 명쾌해서 조금 문제일 뿐이지만.

무서운 영감님 같으니.

일단 틀린 말은 분명히 아니었다.

가뜩이나 연이은 패전으로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을 얕잡아 보는 세력이 늘어났을 텐데, 화끈하게 100명 정도 목을 베서 어디 걸어두면 다른 세력도 한 번쯤 우리를 공격할 생각을 재고해볼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좀....'

교양인답지 못한 선택이 아닐지.

사실 교양 운운하는 것은 농담이라고 해도, 무엇보다 100명이 넘는 이 인력이 아까운 게 제일 크다.

말했다시피 니카로스 남작령과 그 일대는 척박한 땅이다. 당연한 척박한 만큼 그만큼 인구도 적고.

'그런데 그런 영지에 건장한 성인 남성을 100명 넘게 공급할 수 있다면?'

당연히 어마어마한 이익.

'물론 태생이 도적놈들이다 보니 어지간하면 쉽게 동화되고 통제되지는 않겠지만....'

굳이 그렇게 자발적이고 유순하게 협력해주지 않아도, 써먹을 구석은 넘치도록 있다.

이렇게 생각을 전달하자 키로스 경도 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새로운 의견을 제시해주었다.

"그렇다면 포로들을 영지로 데려가되, 일단 간부를 비롯한 수뇌부들의 목은 쳐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최소한 놈들이 뭉칠 구심점만큼은 남겨두면 안 됩니다."

"...괜찮은 방법이군요."

확실히 이 정도면 수용할 수 있는 범위였다.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를 살릴 수 있다면 간부 놈들도 기쁜 마음으로 골로 가주지 않을까?

'그게 싫었으면 진작에 두목을 말렸어야지.'

이 정도면 무도한 침략자에게 베풀 만한 자비는 충분히 베풀어준 셈이다.

좋아.

그러면 키로스 경의 의견을 수용해서 일단 간부만 먼저 처형하고 나머지 잡졸은 가둬 두는 방향으로....

그렇게 살려서 데려갈 녀석들과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한 친구들을 열심히 분류하고 있던 도중.

"자,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영주님! 제, 제가, 귀한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시면 바로...!"

불행한 친구로 구분된 간부 녀석 하나가 갑자기 나를 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뭐야, 얘는.

어차피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간부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생각이었다.

'귀중한 정보라니.'

어차피 살기 위해서 막 내뱉는 말이겠지.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가신 전 영주님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제발 한 번만 저의 이야기를...!"

나는 곧장 우뚝 발을 멈췄고.

"히이이이이익!"

"...네놈, 지금 그 발언에 거짓은 없겠지? 만일 고작 목숨 따위를 구하기 위해 망령되이 혀를 놀렸다면, 절대로 쉽게 죽이지 않겠다."

키로스 경은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며, 검을 뽑아 그 말을 내뱉은 녀석의 목에 가져다 댔다.

재밌네.

한번 말해봐.

#009. 당위적 첫걸음 (2)

목에 키로스 경의 검이 닿자, 전대 영주의 죽음에 대한 정보가 있다던 간부 녀석이 말 그대로 질겁을 한다.

조금 전까지의 느긋하던 태도가 마치 전부 거짓말이라는 듯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어 살기등등한 기세를 뿜어내는 키로스 경.

확실히 정면에서 그런 영감님의 모습을 직면하게 되면 바들바들 떨며 새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겠지.

사적으로는 그저 유쾌하고 친절한 할아버지지만, 공적인 일이라면 말이 다르다. 그 칼 같은 태도는 솔직히 내가 봐도 조금 무섭거든.

'게다가 이건 모시던 주군에 관한 이야기니까.'

그것도 다름 아닌, 지키지 못한 주군에 관한.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천천히 그 도적 간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단순히 돌아가신 전 영주라고 하면 제논과 마누엘, 두 사람 모두 해당한다.

하지만 굳이 '귀중한 정보'라고 표현한 걸 보면.

"돌아가신 전 영주님이라면, 마누엘 형님을 말하는 것이냐?"

"네, 네! 분명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현 영주님의 형님 되시는 분이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아직도 그 사인에 불명확한 부분이 많은 마누엘 쪽에 관한 얘기겠지.

사실 영 미덥지는 않다.

아무리 간부라지만 고작 비루한 도적 따위가 영주에 죽음에 관한 유의미한 정보를 알고 있는 건 이상하니까.

하지만 안 그래도 우리 역시 계속 사인을 조사하고 있던 마누엘의 존재를 콕 집어 언급했으니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면 어디 한번 말해 보아라."

"그, 그럼 저는 살려주시는...?"

"그건 그 귀중한 정보라는 것을 먼저 들어보고 판단하도록 하지."

"그, 그런!"

꼬우면 그냥 처형장으로 가든가.

단호한 대답에 한참을 꾸물거리던 간부 놈은, 결국 결단을 내린 건지 떠듬떠듬 정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상상 이상으로.

"며칠 전... 전 영주님이 지휘하던 니카로스 군을 습격한 것이 바로 저희입니다...!"

파격적인 이야기를 내뱉으며.

"...!"

고작 도적 따위가 말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고백.

나와 키로스 경, 우리 두 사람 모두 눈을 크게 뜨며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간부는 그런 우리의 눈치를 잠시 불안하게 살피더니, 곧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마치 변명처럼.

"저, 저도 자세한 것까지는 모릅니다! 모든 계약과 결정은 두목 홀로 했으니까요! 두목이 시하브 토후국에서 온 사람과 만나 협상을 진행했고, 시하브 군이 전방에서 대치하는 사이 저희가 니카로스 군의 후방을 기습하기로 했다. 대가는 이미 받았다. 저는 딱 거기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횡설수설 떠들긴 했지만, 적어도 요점은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아주 느릿느릿한 어조로 놈의 말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지난 원정 때 우리 니카로스 군의 후방을 공격한 게 바로 시하브 토후국의 사주를 받은 너희들이란 말이지. 그 기습으로 마누엘 형님이 전사하신 거고."

"그, 그 말이 맞습니다...!"

이것 참.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속에서부터 뭔가 끓어오르긴 하는데, 그게 뭔지 명확하게 표현하지는 못할 것 같다.

"...영주님."

충격적인 전말을 함께 듣고, 분노로 인해 딱딱히 굳은 키로스 경이 나를 보며 무어라 말을 건네려 했지만.

"잠시만... 생각을 조금 해보겠습니다, 키로스 경."

그보다 내가 먼저 손을 뻗어 양해를 구했다.

'일단 차분히 생각을 먼저 정리해보자고.'

마누엘의 죽음은 전부 시하브 토후국이 뒤에서 몰래 꾸민 음모의 결과였다.

사실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마누엘은 바로 그 시하브 토후국을 징벌하기 위해 출진했던 거니까.

워낙에 이 일대의 상황이 혼란스러운 만큼 의도치 않은 사고나 제삼 세력의 개입도 고려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 역시 시하브 토후국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여겼다.

'확실히 그놈들로서도 부담이 되긴 했겠지.'

복수심에 불타 전면전까지 불사하는 마누엘과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의 태도가 말이야.

그러니 자신들의 피를 흘리지 않고 저지할 수단이 있다면 당연히 썼을 테고.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단지 의외였던 부분이 있다면 그 수단일 뿐.

'설마 본인들의 정체를 숨긴 채, 도적단까지 끌어들여서 일을 벌이다니.'

도적이란 일종의 무법자. 그리고 무법자는 말 그대로 통제가 안 되니까 무법자인 거다.

그 녀석들의 약탈에 십자교와 월광교의 구분 따위 없다. 그저 약탈하기 쉬울 만큼 만만한가 아닌가만을 따질 뿐이고. 그러니 월광교 세력들에게도 도적 떼는 단지 토벌 대상에 불과하다.

'그런 만큼 당연히 그런 도적 떼와 계약 같은 걸 맺는 건 매우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지. 약속을 지킬 거란 신용이 전혀 없으니까'

막말로 말해서, 계약금만 먹고 튀면 어쩌려고?

'게다가 만에 하나 계약의 존재가 외부에 밝혀지면 위신에 손상이 가는 건 또 덤이고.'

토벌해야 할 도적들이랑 되레 비밀스러운 야합이나 하는 놈들은 아무래도 껄끄럽지.

이건 종교를 초월한 문제다.

그래서 마누엘의 죽음에 대해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면서도, 지금 같은 상황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건 극히 이례적인 경우니까.

'...그런데 그 이례적인 일이 실제로 벌어졌네?'

시하브 토후국 놈들이 영악할 정도로 판을 잘 짰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상황이 급하니 대충 저지르고 만 일에 잭팟이 터진 건지.

어느 쪽이든 어이가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당사자 중 한 명이 직접 자백한 만큼, 아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로 치부하고 넘길 수도 없다.

'...그리고 어이가 없다고 해서, 이성적으로 나에게 마냥 나쁘기만 한 경우라는 건 또 아니니까.'

적어도 이 간부 놈을 더 추궁해볼 가치는 있다.

"증거는?"

"증거 말입니까...?"

내 물음에 충격적인 경위를 모두 털어놓은 간부 놈이 화들짝 놀란다.

놀라기는. 말이 되는 건 되는 거고, 당연히 증거도 없이 너 같은 도적의 말을 덥석 믿을 수는 없잖아.

"그래, 증거. 뭐가 됐든 너희와 시하브 토후국 사이의 거래를 물리적으로 증명할 물건 말이다."

"제,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설령 계약서 같은 게 있다고 한들 이런 거래는 언제나 철저하게 두목 혼자서 관리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증거도 없이 떠든 거란 소리인가.

그러나 분위기가 안 좋아졌다는 걸 단박에 눈치챘는지 간부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 그렇지만 정황 증거는 있습니다! 저희가 오늘 니카로스를 습격한 것도 이미 전 영주님이 죽어... 아니, 돌아가신 걸 알고 있어서 그런 겁니다! 두목이 남들에게 소문이 퍼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습격해야 한다고...!"

확실히 이건 말이 된다.

안 그래도 이 녀석들이 왜 이렇게 유독 빠르고 과감하게 쳐들어온 건지 의문이긴 했는데, 이러면 그 이유가 설명되니까.

그러니까 내가 영주가 된 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영주 때문에 니카로스 남작령이 병신이 됐다고 판단하고 룰루랄라 쳐들어온 거다 이 얘기라는 거군.

"...."

그렇게 이야기를 정리하니 자연스럽게 저 간부 놈을 보며 나쁜 생각이 마구 떠올랐지만, 자기 명줄에 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눈치가 빠른 녀석이 또다시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저희 보, 본거지로 가시면 시하브 토후국에 대가로 받은 재화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두목이 이런 위험한 거래는 반드시 선불로 받아야 한다고 챙겨둔 겁니다! 그게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건 확실히 흥미로운 이야기네.

증거 채택 여부와 별개로 생각해도, 확보하면 확실히 우리 쪽의 이득이다.

정황 증거는 이 정도인가.

거기까지 듣고, 나는 턱에 손을 올린 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이 녀석이 한 말들이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만 되어도 확실히 쓸모가 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활용하느냐니까.'

귀중한 정보라는 말이 완전히 허언은 아닌 셈.

게다가 내가 고민하는 것을 본 키로스 경 또한 비슷한 의견을 말했다.

"확실히 더 검증해 볼 필요는 있겠지만, 앞뒤가 맞지 않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무엇보다 일개 도적 주제에 우리 니카로스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처음부터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어렵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누가 봐도 내면을 가득 채우는 검붉은 분노를 억지로 참는 표정이긴 했지만, 키로스 경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최대한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려주었다.

그래.

거짓말도 일종의 능력이고 재주다. 이런 상황에서 아예 없는 얘기를 말이 되게 꾸며낸다는 것도 어려운 일.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분명 어지간한 건 죽은 두목이 혼자서 처리했다고 말한 것치고는 너무 많이 알고 있다.

'뭐 하는 놈이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심문하자 녀석은 짧은 머뭇거림 끝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그, 사실, 제가... 부두목입니다."

아하.

이놈도 만만치 않은 개자식이었네.

'근데 이러면 생각보다 너무 거물인걸.'

구심점을 제거하려고 간부들만 따로 처리하는 중인데, 살려두면 괜히 포로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 하겠다고 까불지는 않을까.

그리고 이번에도 놈의 변명은 이런 나의 고민과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저, 저는 그래도 마지막까지 이번 습격을 반대했습니다! 너무 위험하다고! 심지어 항복까지 하자고 했어요! 전부 미친 두목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입니다! 사실 그냥 만만하다고, 귀찮은 일이나 대신하라고 부두목 자리에 올린 거지 저도 그냥 쫄따구랑 별다를 게 없었어요!"

"...."

눈치 하나는 빠른 녀석.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일단은 살려두지요. 조금 더 쓸모가 있을 겁니다."

그래, 그게 맞겠지.

그 본거지라는 도적 소굴에 가서 안내할 간부 출신도 한 명은 필요할 테니까.

나는 키로스 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우리의 말을 엿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녀석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너 이름이 뭐지?"

"저, 저, 저, 저 말입니까...?"

"그래. 너 말이다."

여기 너 말고 내가 이름 물을 사람이 누가 또 있니.

"제르만, 제르만입니다, 영주님...!"

***

꽁꽁 묶인 제르만과 도적 졸개들을 데리고 우리는 성으로 돌아왔다. 나름 위풍당당한 개선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이놈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가서 금은보화를 죄다 털어오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장 그만한 준비는 안 되어있었다.

걸어서 이틀은 가야 한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토벌군이라 당연히 왕복 나흘분의 보급까지는 생각 못 했지.

'말을 타고 가면 당연히 더 빠르긴 하겠지만, 반대로 수송 목적으로 파견하기에는 기병대라는 병종이 그리 적합하지 않기도 하고.'

게다가 우리 검은 매의 기사단 친구들은 니카로스 남작령 제일의 고급 자원들이라 이런 일에 쓰기 그렇다.

뭐가 되었든 복귀와 재정비가 한번 필요하다는 뜻.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영주님."

성에 도착하자, 곧바로 내정을 총괄하는 집사장이 가장 먼저 가신들을 이끌고 나와 우리를 반겼다.

"감사합니다. 집사장님이 성을 지켜주신 덕분에 안심하고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깊이 고개 숙이는 우리 집사장님.

간단한 인사만 마치고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바쁘신 와중에 죄송하지만, 중요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따라서 긴급하게 회의를 소집해야 할 것 같으니 준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한 시간 뒤에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늦지 않게 준비해놓겠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빠듯하게 소집을 부탁한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혹시나 제르만 녀석이 떠든 얘기를 누군가 주워듣고 내가 공표하는 것보다 먼저 퍼트리는 건 원치 않으니까.

그래, 많은 정보를 얻었고, 회의 때 하고 싶은 말도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적어도 이 소식만큼은 내가 제일 먼저 전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곁에 있던 키로스 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키로스 경께서는 굳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래도 오늘 고생하신 분들은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영주님. 지금 같은 회의에 제가 빠질 수는 없지요."

나의 진심과 배려가 담긴 제안에, 키로스 경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긴 이 영감님이라면 반드시 이렇게 대답하겠지.'

특히나 이번 회의 주제가 주제니까.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부대를 해산하고 간단한 정비만 마친 뒤, 나와 키로스 경은 곧장 회의실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하니 이미 가신들이 전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집사장 아저씨, 고생 좀 하셨겠는걸.

마침내 나 또한 영주의 좌석에 착석하자, 집사장이 가신들을 대표해 먼저 입을 열었다.

"모두 모였습니다, 영주님.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영주에 대한 배려가 담긴 어투.

평소라면 다소 신경 쓰였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신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다행히도 아직 가신 중 그 누구도 먼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지 않다.

따라서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신들이 충격받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돌아가신 마누엘 형님을 습격한 배후를 알아냈습니다. 이 또한 시하브 토후국의 소행이었습니다. 도적단을 사주해 형님이 이끌던 군에 야습을 감행했다는군요."

"...!"

그래야 이야기가 조금은 편해질 거 같으니까.

그리고 나의 바람대로,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신단 모두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 자리에서 입을 벌리지 않은 것은 이미 사정을 알고 있는 나와 키로스 경이 전부였다.

'그래, 시하브 토후국의 소행이 확정된 건 둘째 쳐도 가신들은 마누엘이 야습에 당해 전사했다는 이야기도 아직 듣지 못했었으니까.'

그렇다면 더욱더 놀랄 수밖에 없다.

"그, 그 사실은 어떻게...?"

한 가신이 말을 더듬으며 토해내는 질문에 나는 모든 사실을 숨김없이 전달했다.

포로로 잡힌 도적 중에 부두목이 있었다.

그 녀석이 살기 위해 모든 사실을 불었다.

시하브 토후국이 도적단에 사주했다.

금품을 대가로 도적단이 우리 군을 습격했다.

그 후방의 습격으로 인해 마누엘은 전사했다.

갑작스럽던 오늘의 침공도 이 녀석들이 마누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가신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붉으락푸르락 뒤바뀌었다.

"개 같은 이교도 놈들이!"

"이렇게 비열할 수가!"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감정은 결국 극심한 분노뿐.

그리고 그 속에서 집사장은 물었다.

"...증거는 있습니까?"

파르르 떨리는 두 팔을 보면 집사장도 분노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와 동시에 정보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었다.

합리적이다.

"물증은 없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녀석들의 본거지에 시하브 토후국에서 대가로 받은 금품이 아직 남아있다고 합니다. 병력 대부분이 이번 토벌로 소탕당했다고 하니, 준비되는 대로 본거지를 습격해 금품을 몰수하고 혹시나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 수색할 계획입니다."

"과연 훌륭한 대처입니다, 영주님."

그렇게 대답한 집사장처럼 다른 가신들도 나의 판단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이 아저씨들이 보기에도 이건 이견 없이 적절한 대처인가 보네.

'...하지만 말이야.'

과연 다음 말을 듣고도 그렇게 끄덕일 수 있을까.

진짜 본론은 이제부터인데.

그래, 이건.

이번 토벌을 떠나기 전부터 계획했고, 이번 토벌이 끝난 뒤 마침내 진심으로 결심한 그런 선택이다.

요컨대 영주가 되기로 마음먹은 나의 첫 번째 포부.

물릴 생각은 조금도 없는 그런 포부.

그렇게 나는.

"그리고 조만간 병력을 모아 시하브 토후국을 정벌할 계획입니다."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웅성거리는 가신들 사이로, 망설임 없이 두 번째 폭탄 발언을 투하했다.

"...!"

명명백백한 나의 한 마디.

다시 한번 회의실이 뒤집힌다.

경악과 고함이 뒤섞여 귀를 때린다.

가신들의 반대와 우려가 너무나 선명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제논과 마누엘의 죽음.

도적 떼와의 야합.

'시하브 토후국 녀석들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명분을 내주었는걸.'

영주가 되어서,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 한번 가신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많고 많은 이들 중에서도 유독 집사장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집사장은 거대한 웅성거림 속에서 가만히 입을 다문 채 두 눈만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내게서 한 치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 당연히 나도 전부 이해한다.

시하브 토후국으로 인해 영주가 둘이나 죽었는데, 심지어 마누엘은 똑같이 복수하러 떠났다가 죽었는데, 당연히 이런 나의 발언이 당위성을 떠나 충격적일 수밖에.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선택이 그랬듯이.

이 또한 담백한 필요 때문에 내린 선택일 뿐이니까.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복수 같은 그런 순수한 인간적인 감정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고.'

도끼로 이마를 찍든 식칼로 배를 쑤시든 고깃값을 번다, 뭐 그런 자본주의적인 개념으로 나가야 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나와 딱 맞는 말이다.

#010. 당위적 첫걸음 (3)